김상운

김상운 기자

동아일보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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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단행본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을 냈고, 고고학 유튜브 채널 ‘발굴왕’을 제작했습니다.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sukim@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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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누가 알았을까, 판자촌 아래 금관가야의 魂이 잠들어 있을줄

    빼곡히 밀집된 주택가 한복판 풀 떼를 입은 거대한 구릉이 나타났다. 거북이 등처럼 야트막한 언덕들 사이로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들이 펼쳐져 있다. 정상부에 있는 대형 무덤은 길이가 7, 8m에 이른다. 21일 답사한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과 더불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묻힌 공동묘역으로 추정된다. 1980년 10월∼1981년 2월 이곳을 발굴한 김두철 부산대 교수(59)는 “6·25전쟁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던 동네에 금관가야의 거대한 고분이 잠들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600년 묵은 ‘처녀분’ 열리다 “철도레일 같은 게 바닥에 쭉 깔려 있다!” 1980년 11월 말 야심한 밤 복천동 22호 고분 발굴 현장. 무덤의 뚜껑돌(개석·蓋石)들 사이에 박힌 돌멩이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 뒤 손전등을 비춰 보던 김두철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행한 신경철 당시 부산대 조교(현 부산대 명예교수)와 조영제 부산대박물관 학예연구원(현 경상대 교수)도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구멍 아래로 가야의 대표적 교역품이자 화폐였던 덩이쇠(철정·鐵鋌)가 마치 레일처럼 무덤 바닥에 줄지어 깔려 있었다. 굽다리 접시(고배·高杯)와 그릇받침(기대·器臺) 등 각종 제의용 토기들도 잔뜩 쌓여 있었다. 김두철의 회고. “어둠 속에서 아릿하게 보이던 가야무덤은 그저 신비하단 말밖에는…. 잔영이 오래 남았는지 그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날 낮 발굴팀은 내부를 아주 잠깐 볼 수 있었다. 무덤 뚜껑돌을 덮고 있는 진흙을 꽃삽으로 긁어낼 때 돌멩이 하나가 툭 떨어지면서 살짝 구멍이 난 것. 주변 인부들을 의식해 발견 사실을 비밀로 해두고 조사원들만 야간에 따로 모인 것이다. 복천동 22호분과 11호분은 1600년 동안 한 번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이른바 ‘처녀분’임이 분명했다. 고고학자들에게 처녀분 발굴은 일생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다. 가야고분 특성상 무덤 깊이가 5m나 되는 데다 그 위에 주거지가 형성돼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 발굴팀이 더 놀란 건 무덤 내부에 물이나 흙이 차지 않아 매장 당시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고학에서 무덤 부장품의 정확한 위치는 출토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두근두근 ‘덮개돌’ 들어낸 순간 본격적인 유물 출토에 앞서 발굴팀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덤을 덮고 있는 거대한 덮개돌 4개를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들어내야 했다. 너비 1.4m, 길이 2.7m의 덮개돌 한 개는 무게가 3t에 달했지만 유구와 유물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현장에 밝은 한병삼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에게 SOS를 쳤다. 그의 소개로 경주에서 활동하는 석탑 드잡이공들을 불러들였다. 드잡이공은 인력용 도르래를 이용해 석탑을 해체, 조립하는 이들이다. 드디어 1980년 12월 4일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 고고학계 원로들과 언론사 취재진이 모인 가운데 뚜껑돌을 조금씩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거대한 뚜껑돌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아래 있는 고대 가야 유물들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조영제의 회고. “하루 종일 뚜껑돌 4개를 서서히 들어내는 동안 얼마나 긴장했던지…. 불상사라도 생기면 우리 발굴팀은 ‘민족의 죄인’이 되는 거였어요. 다행히 드잡이공들이 무게중심을 잘 잡아 일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뚜껑돌이 제거된 11호분 안에는 치아가 남아 있는 인골과 더불어 가야 금동관이 놓여 있었다. 11호분 바로 옆 부곽(10호분)에서는 판갑(板甲·상반신을 보호하는 쇠 갑옷)과 말투구(마주·馬胄)가 출토됐다. 말투구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었다.○ 임나일본부설 역사왜곡 극복 사람이 쓰는 판갑과 더불어 말투구가 함께 발견된 건 의미가 적지 않다. 왜가 4세기 가야를 점령했다는 일본 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깨지는 근거가 됐기 때문이다. 5세기 초반 이전 일본 고분에선 갑옷만 발견될 뿐 말갖춤(마구·馬具)이 나오지 않는다. 당시 일본에 보병만 있었고 기병은 없었다는 얘기다. 반면 4세기 말∼5세기 초 복천동 고분에서는 말투구와 마갑 등 각종 말갖춤이 출토됐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왜가 보병만으로 가야의 기병대를 제압했다는 얘기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조영제는 “복천동 고분 발굴은 가야를 둘러싼 역사왜곡을 바로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부산=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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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明末淸初 대도시의 화려한 일상 생생

    녹음이 우거진 도성 안팎으로 사람들의 활기찬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씨름과 공차기로 여가를 즐기는 한편 밭을 가는 농부, 나귀를 모는 짐꾼, 장터에서 생선을 파는 상인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수로를 따라 이어진 배와 수레는 풍부한 물산을 상징한다. 수많은 등장인물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옛 중국 도시로 돌아간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북송(北宋)의 장택단(張擇端)이 당시 수도였던 변경(卞京·현 카이펑)의 화려한 일상을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모티브로, 명나라 말∼청나라 초에 그려진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 가로 길이가 7.6m에 이르는 대작으로, 화정박물관의 ‘보나페티!(Bon Appetit!·맛있게 드세요)’ 특별전에서 지금 만나볼 수 있다. 청명상하도는 후대 작가들이 반복해 그린 단골 주제인데,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특별전에서도 명나라 말기 구영(仇英)이 그린 청명상하도가 전시됐다. 화정박물관의 이번 청명상하도 역시 구영 계통의 화풍을 이은 작품으로 분류된다. 옛 중국인들의 생산 활동과 식문화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봄날 밤 복숭아꽃과 자두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습을 묘사한 춘야연도리원도(春夜宴桃李園圖)가 선보인다. 이 밖에 갈색 유약을 입힌 ‘명나라 항아리’(흑갈유관·黑褐釉罐)와 아름다운 분홍색 국화꽃과 돌을 정교하게 그린 청나라 시대 ‘분채 접시’도 전시된다. 무소뿔로 만든 포도문양 잔(청나라 시기)의 독특한 외관도 눈길을 끈다. 박물관은 생생한 생활상을 보여 주기 위해 청나라 때 광둥 지역의 실내장식을 재현한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12월 31일까지. 관람료 1만 원. 02-2075-0124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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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민의 애환 서린 남대문시장 120년

    초립(草笠)이나 삿갓을 쓴 상인들이 좌판을 벌여놓고 각종 곡식을 팔고 있다. 짐꾼과 상인, 손님들이 뒤엉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뒤쪽으로는 쌀부대를 차곡차곡 쌓아둔 기와 건물이 살짝 보인다. 서울 남대문시장의 전신으로 조선 말기인 1897년 개설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심 상설시장 ‘선혜청(宣惠廳) 창내장(倉內場)’을 촬영한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 중심부에 자리 잡은 남대문시장은 늘 인파로 붐볐다. 현재 남대문시장의 하루 평균 이용객은 약 40만 명. 1만 개 점포에서 1700종의 상품을 팔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올해 남대문시장 개장 120주년을 맞아 남대문시장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한 특별전을 열고 있다. 창내장이 생기기 전 남대문(숭례문) 부근에선 아침시장(조시·朝市)과 도성 밖 칠패(七牌)시장이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상인들이 남대문시장을 인수한 중앙물산의 횡포에 맞서 상인연합회를 구성했다. 광복 이후에도 6·25전쟁과 잇단 화재로 남대문시장은 평탄치 않은 세월을 겪었다. 휴전 직후 남대문시장은 미군 군수품이 활발히 거래돼 ‘양키시장’ ‘도깨비시장’으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 들어 이른바 ‘남싸롱’ 또는 ‘남문패션’으로 불린 숙녀복이 핵심 품목으로 부상했다. 박물관은 1908년 조선시대 선혜청을 측량한 뒤 그린 선혜청건물지도(宣惠廳建物之圖) 등 유물 120건을 선보인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거래된 상품 120가지를 선별해 시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조선 상인들이 실제 사용한 주판과 되 등을 살펴볼 수 있다. 7월 2일까지. 02-724-0274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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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서구의 反유대주의는 지적 열등감에서 시작

    언제부턴가 철학책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자문하곤 했다. 정답부터 그리는 데 익숙한 업무의 조급함 때문일까. 그런데 이 책은 철학 전공 학자가 썼음에도 뭔가 달랐다. 장대한 철학 이론을 쾌도난마식으로 풀어 주는 ‘맛’이 있다. 강연록과 대담, 기고문을 엮은 책답게 호흡이 짧은 게 오히려 간명한 문체를 가능케 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비교적 부피가 얇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부터 대학의 역사까지 온갖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저자는 서구에서 대학의 역사를 장황하게 소개하면서 대학과 인문학이 본연적으로 적대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인문학 중흥의 사명이 강조되는 요즘 대학 분위기를 감안하면 다소 의외일 수 있다. 하지만 탄생부터 교권(敎權)과 유착돼 보수화된 중세 대학에서 진정한 학문의 자유와 발전은 투쟁에서 비롯됐다는 저자의 시각은 일리가 있다. 서구에서 학문 발전이 역사적으로 동양보다 결코 앞서지 못했으며, 고대 그리스를 전승한 12세기 이슬람 학문에 빚지고 있다는 견해도 흥미롭다. 이와 관련해 나치로 대표되는 서구의 반(反)유대주의가 사실은 이슬람과 유대인들에 대한 지적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한 역사왜곡이자 증오였음을 갈파하고 있다. 고대 한반도로부터 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이 도리어 임나일본부설로 고대사를 왜곡한 장면과 겹치는 지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셀러 소설 ‘1Q84’는 결국 옴진리교의 행위와 같은 메시지만 남겼을 뿐이라는 혹평도 눈길을 끈다. 사교(邪敎)에 맞서겠다는 하루키의 공언과 달리 소설 속 주인공 아오마메와 덴고의 성향은 죽음을 지향하고 심지어 예찬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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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이비행기]유럽계 유목문화, 한반도에 스며들었을까

    “언제부턴가 한국 사학계가 미시 연구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최근 만난 원로 고고학자는 토기 편년(제조 연대를 규명하는 것) 연구를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 연대가 확인되지 않는 발굴 현장에서 유물들의 세부 양식을 분류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유물이 가리키는 당대 사회의 시대상과 맞물린 동아시아 교류 양상을 파악하는 거시적 시각도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수장고에서 찾아낸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5세기 실크로드 ‘샤오허(小河) 무덤’ 출토 유물(사진)은 의미가 작지 않다. 실크로드 남로(南路)에 처음 진출한 유럽인들의 문화라는 점에서 선사시대 동서 교류의 흔적을 생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 경북 경주 계림로 보검(보물 제635호)이나 괘릉 무인석, 신라 처용가 등은 한반도에 끼친 아라비아의 영향을 증명한다. 어쩌면 샤오허 무덤을 만든 유럽계 유목 문화도 한반도 선사문화에 스며들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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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唐代 유행한 ‘胡風’의 생생한 모습

    ‘여자는 서역 사람의 부인이 되려고 서역식 화장법을 배우고, 가무하는 여인은 서역 음악과 무용을 열심히 익히네.’ 중국 당나라 시인 원진(779∼831)이 지은 시에는 당대 중국인들 사이에서 유행한 호풍(胡風·이민족의 풍속을 흉내 내는 것)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다. 화장, 음악뿐만 아니라 북방과 서역 유목민들의 복식(호복·胡服)이나 남장을 한 채 말을 타는 여인들의 습속까지 따라했다. 최근 개막한 국립진주박물관의 ‘옛 중국인의 생활과 공예품 이야기’ 특별전은 당대 호풍의 생생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기회다. 남북조 시대에서 당나라에 이르는 옛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담은 공예품을 대거 선보인다. 1부에서는 진시황이 사수(泗水)에 빠진 솥을 건지려다 실패한 고사를 담은 무씨사(武氏祠) 화상석 탑본이 전시된다. 한나라 때 매년 섣달 황궁에서 행한 대나의례(大儺儀禮·역귀를 쫓는 신으로 분장해 액땜을 하는 의식)와 연회 장면을 그린 화상전((화,획)像塼)과 화상석((화,획)像石)도 선보인다. 2부에서는 악기를 연주하는 도용(陶俑·사람 모양으로 빚은 무덤 부장품)을 통해 당대 상장의례를 짐작할 수 있다. 3부에서는 호풍을 표현한 도용을 전시해 이민족의 문화를 포용하고 즐긴 당나라의 개방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여인들의 화장도구와 그릇은 4부에 전시됐다. 특별전과 연계한 전공 학자들의 강연도 마련됐다. 6월 18일까지. 055-740-0662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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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길을 나선 어린 판다는 숲에서 누굴 만났을까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지만 겁이 많은 아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동화책이다. 자연을 만끽하기 안성맞춤인 따뜻한 봄날 이 책을 갖고 집을 떠나보자. 귀엽지만 소심한 판다 바오바오는 어느 날 용기를 내 자기가 살던 대나무 숲을 과감히 떠난다. 주변 숲을 거쳐 바닷가까지 가는 여정에서 바오바오는 뱀과 코알라, 너구리, 곰 등 온갖 동물들을 만나는데…. 자신과는 생김새부터 너무도 다른 동물들을 보는 순간, 바오바오는 겁이 덜컥 났지만 점차 그들과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여러 번 소리 내 읽으면서 글을 고쳐 썼다고 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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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전국시대 사무라이는 꽃을 든 남자?

    ‘꽃을 든 남자’야 그렇다 쳐도 ‘꽃을 든 사무라이’는 왠지 낯설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벚꽃에 심취해 있었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평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만의 약초원을 지어 은거했다. 식물학 전공 교수인 저자는 수많은 사무라이가 점멸한 일본 전국시대 역사를 다양한 식물을 중심으로 솜씨 있게 엮어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유행하는 미시생활사 연구를 연상시킨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당장 내가 죽는 살벌한 시대, 식물도 총력전의 한 수단이 됐다. 일본 각지 성(城) 안에 심은 나무들은 농성전을 대비한 식량이자 연료원이었다. 예컨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선 구로다 나가마사는 후쿠오카 성에 특수한 무기창고를 하나 지었다. 유사시 활로 만들어 쓸 수 있는 대나무로 창고 벽을 지었는데, 이 대나무들을 엮는 데 ‘말린 고사리’를 사용한 것. 말린 고사리는 물에 불리면 전투식량이 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공한 가토 기요마사 역시 구마모토 성을 쌓으면서 다다미 심으로 짚 대신 토란 줄기를 썼다. 토란 줄기 역시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먹을거리였다. 성 주변을 둘러싼 방어용 해자엔 물에서 자라는 연근을 키웠다. 구마모토 성 자체가 거대한 구황식물 농장이었던 셈이다. 수분을 머금어 불에 잘 타지 않는 녹나무는 적의 화공(火攻)에 대비한 방화용 도구로 심었다. 때론 식물도 무기가 됐다. 닌자는 ‘호로쿠다마’라는 수류탄을 만들 때 쑥을 사용했다. 쑥에 소변을 뿌려 흙 속에 묻어 놓으면 중요한 화약원료인 질산칼륨이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식물이 일본 역사의 큰 흐름을 바꾸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저자의 시각이다. 예부터 물산이 풍부한 데다 고도(古都) 교토가 자리 잡은 간사이 지방을 벗어나 당시 변방이던 에도(지금의 도쿄)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도를 옮긴 이유다. 저자는 에도에 넓게 형성된 저습지를 개발하면 거대한 농지를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천도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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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3700년 전 ‘실크로드 유물’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다

    《 실크로드 기원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줄 3700년 전 중앙아시아 ‘샤오허(小河) 무덤’ 유물들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최근 새로 확인됐다. 스웨덴의 유명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이 1934년 같은 무덤을 발견한 시점보다 20여 년이나 앞서 처음 출토된 유물들로 조사됐다. 학계는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남로(南路)에 진출한 첫 유럽 계통 문화라는 점에서 선사시대 실크로드의 동서 문명 교류를 보여 주는 핵심 자료로 평가하고 있다.》 ○ 실크로드 선사유물 서울에 오기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은 “일본 오타니 탐험대의 수집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형목장구(人形木杖具) 2점과 펠트 모자 2점, 가죽 신발 1점이 중국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로프노르 지역의 샤오허 무덤에서 출토된 것임을 새로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박물관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5세기 청동기시대 유물로 1908∼12년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일대를 조사한 일본 오타니 탐험대가 수집했다. 이 탐험대는 부유층 출신으로 승려였던 오타니 고즈이(1876∼1948)에 의해 구성됐다.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온 실크로드 유물 1700여 점은 1916년 3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넘어갔다가 광복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 고스란히 인계됐다. 박물관이 샤오허 무덤의 청동기시대 유물을 최근에야 파악할 수 있었던 건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소장품 기록이 잘못돼 있었기 때문이다. 오타니 탐험대 일원이자 승려였던 다치바나 즈이초가 불교 유물을 찾는 데 골몰해 샤오허 선사 유물의 출토지 기록을 부정확하게 남긴 데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인형목장구 2점은 치코톤에서 발견된 무기로, 가죽신발은 투루판에서 발견된 걸로 기재돼 있다. 치코톤이나 투루판은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 지명이다. 그러나 박물관이 중국 신장문물고고연구소가 2000년대 들어 샤오허 무덤에서 꺼낸 유물들과 소장품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신장문물고고연구소는 2002∼2005년 샤오허 무덤 160여 기를 발굴했다. 비교 조사 결과, 소장품과 중국 측 출토품의 형태나 제작 기법이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예컨대 박물관 소장 가죽 신발의 경우 세 개의 가죽을 이어 붙이고 중앙에 붉은 선을 칠한 점, 신발 끈의 위치 등 전체적인 모습이 중국 측 출토품과 꼭 닮았다. 강건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펠트로 속을 채운 뒤 중간 부위에 족제비 가죽을 두르고 왼쪽에 깃털로 장식한 펠트 모자 제작 수법도 중국 측 유물과 흡사하다”고 설명했다.○ 샤오허 무덤에 묻힌 유럽인의 정체 흔히 실크로드라면 기원전 2세기 한(漢) 무제가 장건(?∼기원전 114년)을 보내 개척한 서역 길을 떠올린다. 이 시기 중국의 비단과 서역의 향신료를 실은 대상(隊商) 행렬이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길을 열었다. 고고학계에 따르면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는 한나라 때 갑자기 출현한 게 아니라 기원전 3000년부터 사막 오아시스들을 중심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박물관이 확인한 유물들은 실크로드 초창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7세기∼기원전 15세기 출토품이라 실크로드의 기원을 밝히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샤오허 무덤 주인공들은 중국 신장 지역에 진출한 첫 유럽 계통 유목문화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신장 지역 선사시대 인골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3종의 유럽 인종과 1종의 몽골 인종이 조사됐다. 중국 학계는 유럽계 인종이 몽골계 인종보다 신장지역에 먼저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중국 발굴팀이 샤오허 무덤에서 발견한 ‘풀로 만든 바구니’에서 우유 성분이 검출된 건 유목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무덤에서는 농경문화의 상징인 토기가 단 한 개도 발견되지 않았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고고학)는 “죽은 사람의 음식으로 우유를 봉헌하는 건 유제품을 신성시하는 이란 계통 유목민들의 전통”이라고 말했다. 고고학계 일각에서는 시베리아 남부의 아파나시예보 문화가 기원전 2000년경 알타이산맥을 넘어 신장지역으로 유입됐다고 추정한다. 강 교수는 “샤오허 무덤 유물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실크로드에서 동서 문명이 교류한 흔적을 생생히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 ‘주술사 부장품’ 인형목장구, 사람얼굴 새겨져 흥미로워 ▼  유물들 면면 살펴보니펠트모자-가죽신도 눈길 끌어… 박물관, 내달 23일부터 일반 공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번에 수장고에서 찾아낸 샤오허(小河) 무덤 유물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인형목장구다. 끝이 뾰족해 목검을 연상케 하는 이 유물은 주술사들의 무구(巫具)이자 부장품으로 추정된다. 고대 문화에서 영성이 있는 물질로 간주된 마황과 동물 뼈가 인형목장구에 장식돼 있기 때문이다. 중국 측 조사에 따르면 시신의 얼굴과 발 근처에 인형목장구가 1점씩 꽂혀 있었다. 강건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마황과 뼈를 주요 재질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주술사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형목장구 상단에 사람 얼굴을 표현한 조각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약 8cm의 인면조각에서 윗부분은 모자를, 아래는 얼굴을 각각 상징하는데 여기서 불쑥 튀어나온 부위는 코를 묘사한 것이다. 인면조각은 소의 뼈와 살, 힘줄을 끓여 만든 아교로 인형목장구에 접착됐다. 이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빠른 시기의 동물성 아교로 확인됐다. 이 밖에 펠트 모자와 가죽 신발은 샤오허 무덤 시신들이 몸에 착용한 상태로 발견된 유물들이다. 펠트 모자 2점은 높이 27∼29cm, 지름 23∼24cm로 전체적으로 둥글고 표면에 주황색 털실을 두른 모양새다. 가죽 신발은 높이 13.6cm, 바닥 길이 21.5cm로 바닥과 앞면, 뒤꿈치를 이루는 황색 가죽 세 개를 갈색 털실로 이어 붙였다. 김혜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가죽 신발의 출현은 목축업이 발달된 상황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인형목장구 등 새로 확인된 샤오허 무덤 유물들을 다음 달 23일부터 중앙아시아실에서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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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승희 춤 부활

    전설의 무용수 최승희의 작품을 재연한 공연이 16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펼쳐진다. 이번 공연에서는 생전에 최승희로부터 춤사위를 배운 원로 무용가 김영순이 안무 고증을 맡았고, 석예빈이 춤을 춘다. 앞서 석예빈은 2년 전 국립극장 무대에서 최승희의 춤을 재연하며 3차원(3D) 홀로그램을 곁들여 관객의 열띤 호응을 받았다. 2003년 탈북한 김영순은 북한의 문화예술 분야 명문인 평양종합예술학교 출신으로 김정남의 생모인 성혜림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석예빈에게 최승희 춤을 전수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초립동’ ‘보살춤’ 등 최승희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특히 ‘진주무희’는 1950년 북한에서 초연된 뒤 독무(獨舞)로는 남한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다. 화창한 봄날 물동이를 인 처녀를 담은 ‘물동이춤’도 주목할 만하다. 최승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보살춤’도 이어진다. 이 작품은 불상에서 얻은 영감을 춤으로 승화한 작품으로 후광을 표현한 무대 연출이 보살의 환상적인 이미지를 더한다. 양손만을 움직여 연화대좌(蓮花臺座)에 선 보살의 모습을 표현했다. 이날 공연에서 김미래는 조선 여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그린 ‘도라지’를 무대에 올린다. 이 작품은 최승희 작품들 가운데 최고 난도의 무용 동작으로 구성돼 있다. 소리꾼 장사익의 가락에 맞춰 새롭게 재해석한 ‘아리랑’도 눈길을 끈다. 02-541-0772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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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증도가자’ 문화재 지정 결국 부결… 7년논란 마침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거론된 ‘증도가자(證道歌字)’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약칭 증도가)’를 인쇄한 활자로 볼 수 없다고 문화재위원회가 결론을 내렸다. 증도가자는 증도가를 인쇄한 금속활자를 가리키는 말로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7년)보다 138년 이상 앞선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문화재위원회는 13일 “서체 비교, 주조, 조판 등 과학적 조사 결과 증도가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못 박았다. 이로써 증도가자를 둘러싸고 7년 동안 이어진 국가문화재 지정 논란은 마침표를 찍게 됐다. 문화재청은 이날 “문화재위원회(동산문화재분과)가 증도가자에 대한 국가문화재 지정 심의 결과 부결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앞서 증도가자 재검증을 진행한 ‘고려금속활자 지정조사단’이 ‘지정 보류’ 의견을 냈지만 문화재위원들이 부결을 전격 결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지정 보류가 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문화재위원들이 부결을 결정한 건 증도가자 진위 논란이 7년을 끌고 있는 데다 2013년에도 문화재위에서 보류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문화재위 관계자는 “1년 반이나 재검증을 거치고도 또다시 보류 결정을 내는 건 무책임하다는 의견이 내부에서 제기됐다”고 전했다. 앞서 지정조사단은 재검증에 나섰지만 증도가자의 진위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 조사기관들의 검증 결과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이 지난해 말 공개한 재검증 결과에 따르면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다보성고미술이 소장한 101개 금속활자에 대해 3차원(3D) 컴퓨터단층촬영(CT) 등을 실시한 결과 인위적인 조작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면 국과수는 “금속활자와 증도가 목판 번각본(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목판 위에 놓고 똑같이 다시 새긴 것)의 서체 비교 결과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수 개발한 소프트웨어로 비교한 결과 금속활자와 증도가의 서체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사기관마다 의견이 엇갈렸음에도 문화재위가 부결을 결정한 것은 증도가자의 출처와 구입 경로가 불확실한 게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위 관계자는 “한 국가를 상징하는 국보, 보물이라면 위조나 도난품 의혹이 없도록 출처가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일본에서 증도가자를 구입했다”는 소장자 측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추가로 받았지만 중간에 활자를 보유했다는 소유자들이 사망해 입증에 한계가 있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은 데다 명문(銘文)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출처를 명확히 규명하기가 힘든 상태”라고 말했다. 2013년 소장자가 증도가자와 함께 발견된 고려 유물이라고 주장한 청동초두와 청동수반의 소재가 불분명한 것도 부결에 영향을 끼쳤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 활자가 고려 금속활자일 가능성은 있다”며 “이를 증빙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면 국가문화재 지정조사를 다시 추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해당 활자는 ‘증도가자’가 아닌 ‘고려 금속활자’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출처에 관한 명확한 규명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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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오백년 견딘 신라 목간 308점, 석성의 진짜 주인 밝히다

    가파른 경사를 헐떡이며 15분쯤 올라갔을까. 약 3∼5m 높이의 흙벽이 사방을 두른 넓은 풀밭이 펼쳐졌다. 고원에 자리 잡은 아늑한 분지를 연상시켰다. 풀때 입은 흙벽을 자세히 살펴보니 온통 돌무더기. 자연석이 아닌 축성을 위해 인위적으로 다듬은 돌들이었다. 10일 박종익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56), 조희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연구원(58), 정인태 학예연구사(38)와 경남 함안군 성산산성 북동쪽 성벽에 오르자 옆으로 길게 늘어선 원형 봉분 수십 기가 내려다보였다. 아라가야 왕릉인 ‘말이산 고분군’(사적 제515호)이었다. 발굴 전 학계에서 이곳을 아라가야의 산성으로 본 이유다. 하지만 26년 전 박종익이 이끈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발굴팀은 성산산성이 가야가 아닌 신라 석성임을 규명하게 된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전체 목간의 절반에 육박하는 308점의 신라 목간이 성산산성에서 무더기로 출토됐다.○ 밝혀진 석성의 정체 “성벽 옆에 또 다른 성벽이 있다!” 1991년 11월 말 성산산성 발굴 현장에 수수께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문 터 동쪽 성벽 아래 쌓인 돌무더기를 제거하자, 삼각형 단면의 석축이 나타난 것이다. 석축은 마치 성벽을 뒤에서 떠받치듯 외벽에 바싹 붙어 있었다. ‘이중 성벽인가? 아니면 다른 구조물?’ 박종익이 새로운 유구의 정체를 놓고 한참 고민할 때, 1970년대부터 경주 발굴 현장에서 산전수전 겪은 조희경의 입에서 결정적인 힌트가 흘러나왔다. “예전 경주 명활산성 발굴 때 본 거랑 비슷한데….” 부리나케 명활산성 발굴 자료를 찾아보니 돌 재질은 달랐지만 성산산성과 흡사한 삼각형 단면의 석축 사진이 있었다. 신라 석성에서만 보이는 이른바 ‘외벽(外壁) 보축(補築)’이 분명했다. 신라인들은 산성의 몸체에 해당하는 체성벽(體城壁)을 수직으로 쌓아올린 뒤 무너질 것을 대비해 옆에서 볼 때 이등변 삼각형 모양인 보축을 성벽 아래 붙여 세웠다. 이것은 신라식 귀면와, 막새기와 등과 더불어 성산산성이 신라 석성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학계는 출토된 신라목간 내용과 일본서기 기록 등을 감안해 6세기 중엽 신라가 성산산성을 세운 걸로 보고 있다. 다음은 박종익의 회고. “1991년 발굴에서 외벽 보축의 시작점을 발견했습니다. 문지(門址)를 따라 시작되는 보축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건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목간의 보고(寶庫) 성산산성 이듬해인 1992년 6월 초 박종익은 진귀한 ‘첫 경험’을 했다. 발굴 인생에서 처음으로 묵서(墨書)가 적힌 목간을 발견한 것이다. 목간은 동문 터 부근 지하 2m에 깔린 부엽(敷葉·배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나뭇잎이나 가지를 깔고 흙을 쌓은 것)층에서 나왔다. 부엽층은 외부 공기가 차단된 채 습기를 머금고 있어 나뭇조각 같은 유기물질이 1000년 넘게 보존될 수 있는 특수한 환경을 제공한다. 박종익이 발견한 목간에는 한자로 ‘上彡者村(상삼자촌)’이라는 지명과 ‘波婁(파루)’라는 인명이 함께 적혀 있었다. 신라 지방민이 성산산성으로 물자를 보내면서 꼬리표로 붙인 것이었다. “물에 닿은 목간 묵서가 천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선명해서 놀랐습니다. 성산산성 발굴에서 가장 흥분되는 순간이었죠. 당시엔 이곳에서 목간이 수백 점이나 쏟아져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습니다.” 묵서 판독을 위한 적외선 카메라가 연구소에 도입돼 출토 목간 26점을 분석한 발굴보고서가 1998년 발간되자 학계는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현존하는 1차 사료가 없는 삼국시대 연구에서 명문은 역사를 새로 쓸 수도 있는 핵심 자료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1999년 11월 한중일 3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목간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목간과 관련한 국제학술회의는 국내 최초였다. 학술회의에서 이성시 와세다대 교수(현 한국목간학회장) 등 일본 학계는 “성산산성 목간은 일본 고대 목간의 원류를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한일 고대 교류사 연구에서도 성산산성 목간 발굴은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한일 학자들이 성산산성 목간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결과 현재의 경남, 경북, 충북 지역에서 피와 보리, 쌀, 철 등 각종 물품을 산성으로 운송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 교수는 ‘한국 목간과 한국사 연구’ 논문에서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지방지배 체제와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썼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함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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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독]“北-中 관계, 동상이몽 된지 오래”

    “외교 전략 차원에서 중국과 북한은 정치적 일치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양국 관계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 된 지 오래다.” 선즈화(沈志華) 화둥사범대 교수(사진)가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 학술지에 최근 기고한 논문 ‘북중 불신의 역사적 뿌리’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6·25전쟁과 중소(中蘇) 관계, 한중 관계를 연구해온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특히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논문은 10일 발간되는 ‘성균차이나브리프’ 4월호에 게재된다. 앞서 그는 지난달 19일 다롄(大連)외국어대 강연에서 “사드 보복은 한국의 국민 여론을 돌아서게 해 한국을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밀어넣고 있다”며 “나는 중국의 사드 대응에 매우 반감을 갖고 있다”고 공개 비판해 주목받았다. 정부 방침에 반대 목소리를 내기 힘든 중국 학계에서 사드 보복을 비판한 학자는 지금껏 선 교수와 자칭궈(賈慶國)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장이 전부다. 선 교수는 이 논문에서 6·25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오쩌둥(毛澤東)과 김일성의 미묘한 관계를 집중 분석했다. 기존 북-중 관계가 일반적인 국제관계와 달리 사회주의 시스템 특유의 ‘당 대 당’ 혹은 수뇌부 간 교류에 크게 의존했다는 것이다. 6·25전쟁 내내 양국 수뇌부가 불협화음 속에 있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전쟁 발발 직후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전시작전권 요구에 대해 김일성은 시종일관 부정적이었다. 이후에도 김일성은 38선을 뚫고 계속 남진할 것을 촉구했지만, 마오쩌둥은 “진격을 멈추고 휴식을 가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선 교수는 “전쟁 기간 ‘입술과 이와 같은’ 우호관계 뒤로 양국 지도부의 끊임없는 갈등이 지속됐다”고 분석했다. 냉전과 개혁개방 시기에도 양국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종전 직후 독재체제 구축에 나선 김일성은 중국의 지지를 받던 연안파 세력을 대거 숙청했다. 이어 1960년대 중소 분쟁이 격화되자, 북한은 친중(親中)과 친소(親蘇)를 오가며 실리를 추구했다. 1989년 톈안먼 사태를 계기로 서방의 제재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이 단행한 한중 수교는 북-중 관계에 치명타로 작용했다. 특히 선 교수는 마오쩌둥과 김일성 갈등의 원인을 대립적인 사상에서 찾고 있다. 중국 고대 사서에 심취했던 마오쩌둥은 대북 관계에서 중국 제왕들의 천조(天朝·천자의 조정) 의식을 투영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후국이 천조를 섬기듯,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자신의 정치 노선에 복종하기를 원했다. 이는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이른바 주체사상을 내세운 김일성의 외교 이념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컸다는 분석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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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양심적 우파 지식인들, 대한민국을 세우다

    한국 역사에서 뿌리를 찾는 건 매우 논쟁적인 이슈다. 최근 ‘1948년 건국’을 둘러싼 학자들의 치열한 논란을 취재하면서 새삼 느낀 바다.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매개로 해방 이후 친일 청산과 연결된다. 해방 이후 우파(右派) 지성사의 흐름을 정리한 이 책도 친일 부역문제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동시에 공산주의를 배격한 진짜 우파들이 대한민국 발전을 이끌었다는 주장이다. 흔히 ‘우파=친일, 좌파=항일’이라는 이분법적 편견은 그릇된 것임을 보여준다. 저자가 양심적 우파로 특히 주목한 건 일제강점기 전장으로 끌려간 학도병(學徒兵) 출신 인텔리들이다. 제국대학이나 전문학교에서 교육받은 이들은 해방 이후 건국 과정에 필요한 기술과 학식을 갖췄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출생 시기다. 1920년 전후에 태어나 일본 고등교육의 세례를 받았지만, 친일 기득권 세력에 포섭되기엔 나이가 어렸다. 해방 직후 ‘친일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배 지식인들과 결정적으로 차별화된 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가 패망하기 전 일본군에서 탈출해 임시정부에 투신한 장준하와 김준엽은 더욱 돋보이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일찍부터 개신교 신앙을 받아들여 반공 이데올로기와 서구 지향의 가치관을 지닌 서북지역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광복군 복무시절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미국 전략정보처(OSS)가 지급한 미 군복을 입고 한반도 진입작전을 준비한 이들의 경험도 이후 미소 냉전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의 민족주의 항일 인식은 평생 소신이었다. 학계로 진출해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조항을 넣는 데 크게 기여했다. 김준엽과 장준하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면서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를 비판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저자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산업화 vs 민주화’ 세력의 각축으로 보는 이분법적 접근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군사독재에 반대한 양심적 우파 지식인들이 박정희 집권 전 이미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는 등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크게 공헌했다는 것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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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복슬복슬 멋진 털보다 덥수룩한 지금이 더 좋아

    타고난 것들 가운데 세상에 쓸모없는 건 없다. 전화위복의 교훈을 유쾌하고 서정적인 이야기로 푸는 솜씨가 대단한 동화책이다. 주인공 롤라는 매끈매끈하고 보들보들한 털을 자랑하는 멋쟁이 양이다. 어느 날 목장에서 털을 깎여 북슬북슬하고 너저분한 털을 갖게 돼 실의에 빠진 롤라. 하지만 아기 새에게 롤라의 새로운 털은 최적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이제 롤라는 더 이상 과거의 매끈한 털에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 살다 보면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걸 잃을 때도 있지만 잠시 생각을 바꿔 보자. 또 다른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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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런던의 클래식 무대 휘감는 ‘우리의 소리’

    국립국악원이 런던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영국 무대에 선다. 국립국악원은 “12일 오후(현지 시간) 영국 런던 클래식 공연장인 킹스플레이스(Kings Place)에서 봄을 주제로 한 ‘2017 코리안 사운드 시리즈’ 연주에 참여한다”고 4일 밝혔다. 국립국악원 정악단이 1부 공연을 맡고 이어 런던필하모닉이 2부 공연을 벌인다. ‘코리안 사운드 시리즈’는 주영 한국문화원이 영국인들에게 정통 국악을 소개하기 위해 기획한 정기 음악회 프로그램이다. 주영 한국문화원은 올해 ‘한영 상호교류의 해’를 맞아 국악과 클래식을 비교 감상할 수 있는 다양한 공연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이번 런던 공연에서 국악원 정악단은 풍류음악을 주제로 기악과 성악으로 구성된 6곡의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단소와 생황 합주로 꾸려질 ‘염양춘(艶陽春)’과 봄잠을 노래한 ‘춘면곡(春眠曲)’이 눈길을 끈다. ‘무르익은 봄의 따사로움’을 뜻하는 염양춘은 단소의 맑고 깨끗한 음색과 생황의 화려한 소리가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봄날 늦잠에서 깨어난 풍류객이 아름다운 봄 정취를 즐긴다는 내용의 춘면곡은 정교한 시김새가 곁들여진 성악곡이다. 2부 런던필하모닉 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정민 등이 가브리엘 포레의 4중주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봄을 연주한다. 김해숙 국립국악원장은 “이번 런던 공연을 통해 유럽 전역에 국악이 알려지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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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한 공예 정수’ 나주 정촌고분 금동신발 모사품 공개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가 2014년 말 전남 나주시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을 모사 복원해 3일 공개했다. 정촌고분 1호 돌방무덤에서 발견된 이 금동신발은 용머리 장식 등 화려한 외관이 고스란히 보존돼 큰 관심을 끌었다. 신발이 출토된 정촌 1호분은 5세기 말 마한 수장급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연구소는 1년 넘게 금동신발에 대한 보존 처리를 실시했으며, 3차원(3D) 스캐닝과 X선 분석 등을 통해 제작 기법을 규명했다. 분석 결과 금동신발은 두께 0.5mm의 구리판에 순도 99%의 금을 입힌 걸로 조사됐다. 바닥과 옆판에 새겨진 연꽃, 도깨비, 새 문양은 금속판을 도려내는 이른바 투조(透彫) 기법이 동원됐다. 연구소는 제작 기법 조사 결과를 토대로 전통 도금기술인 ‘수은 아말감 기법’(금가루를 수은에 섞어 금속 표면에 입히는 방식)으로 복원품을 만들었다. 연구소 전시실에서 복원품을 관람할 수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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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우리 삼촌은 ‘어흥’ 사자 친구들이 믿어줄까요?

    현실에선 실현될 수 없는 상상력을 아이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따뜻한 동화다. 사자 삼촌이 있다는 주인공 솔이의 말을 같은 반 친구들은 믿어주지 않는다. ‘바보’라며 솔이를 놀리기만 할 뿐. 그러나 친구 진이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솔이네 집에 가서 사자 삼촌을 만나 즐겁게 논다. 결국 같은 반 아이들도 마음의 문을 열고 솔이의 사자 삼촌과 파티를 즐긴다는 얘기다. 세상엔 터무니없어 보여도 진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진이처럼 선입견을 버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마음이 때론 소중하다. 제23회 눈높이아동문학상 그림책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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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연개소문이 영웅? 대당 항전은 불가피한 선택”

    지금껏 본 고대사 책들 가운데 가장 과감하고 시원했다. 문헌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는 해석의 여지가 큰 만큼 논란도 많다. 문헌의 빈자리를 고고 유물에 대한 해석으로 메워야 할 때도 많다. 유독 고대사 분야에서 재야사학과 강단사학의 갈등이 불거지는 이유다. 제국주의 침탈 경험이 있는 한국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운 재야사학의 공세는 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한다. 최근 만난 한 고대사 연구자는 “논문을 쓸 때 괜히 식민사학 프레임에 걸려들어 오해를 살까 걱정할 때가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 책 저자들은 민족주의를 악용한 역사왜곡에 대해 과감히 비판한 동시에 학계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특히 한국사에서 자주성 논란과 관련해 회자되는 ‘연개소문’에 대한 입체적 해석은 주목할 만하다. 흔히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굴욕적인 대당 외교를 비판하고 민족자주를 추구한 영웅으로 종종 그려진다. 그러나 저자는 연개소문이 애초 당나라에 맞설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당 태종이 반역죄 징벌을 명분으로 내걸고 침략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분석한다. 그렇지 않아도 쿠데타로 권력을 독점해 지방귀족들의 반발을 사는 상황에서 당 태종의 선언은 연개소문의 정치적 입지를 뿌리째 뒤흔드는 고도의 ‘이간책’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의 대당 항전은 타의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영류왕의 굴욕적인 외교를 시정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일 수 있다. 여러 대에 걸쳐 고위직에 오른 연개소문 가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던 영류왕의 시도가 도화선이었다는 얘기다. 저자는 “연개소문의 정변은 자신과 가문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을 위해 결행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기상이 담겼다는 광개토왕릉비 해석도 눈길을 끈다. 앞서 일본학자들은 비석에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새겨진 이른바 신묘(辛卯)년 기사를 놓고 “왜(倭)가 백제와 신라를 정복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저자는 신묘년 기사는 광개토왕 때 형성된 고구려 중심의 천하(天下)관에 따라 만들어진 허구라고 봤다. 비석에 쓰인 구체적인 정복 활동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정복의 명분과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일부 기사에서 왜의 세력을 과장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 시기 왜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된 바 없다. 집권자를 빛내기 위한 역사왜곡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백제의 요서 진출도 도마에 올랐다. 백제 전성기인 근초고왕대 중국 요서지방은 물론 산동지방과 일본 규슈까지 진출했다는 학설은 교과서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저자는 요서 진출은 문헌기록과 정황에 비춰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산동이나 규슈 진출은 근거가 전혀 없는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관련해 “왜곡된 사실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린 것은 허구를 바로잡아야 할 학자들의 책임”이라고 썼다. 비류(온조의 형)가 세운 이른바 ‘비류 백제’가 일본 황실의 뿌리라는 학설은 오히려 식민사학의 덫에 빠질 수 있는 자충수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저자는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형제라는 일제강점기의 ‘일선동조론’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고 밝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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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일 가극 ‘아리랑’ 작가 한유한을 아십니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한중 공동의 항일투쟁사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해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19일 중국 톈진(天津) 난카이(南開)대에서 열린 ‘한중 관계의 역사와 현황’ 국제학술회의에서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항일투쟁사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원과 난카이대 한국연구중심은 이날 학술회의에서 고대사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유구한 교류사를 폭넓게 다뤘다. 이 중 우리나라 최초의 가극 ‘아리랑’을 만든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유한(본명 한형석·1910∼1996·사진)의 삶이 눈길을 끌었다. 한유한은 중국학자에 의해 1998년에야 뒤늦게 존재가 알려졌다. 양지선 단국대 연구교수는 ‘아리랑을 통해 본 한유한의 예술 구국투쟁’ 논문에서 한유한의 항일 예술이 한중 공동항전에 끼친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한유한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 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신화예술대와 국립음악원을 졸업했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중국희극학회에 들어가 전선에서 병사들을 상대로 항일연극을 공연했다. 한유한이 우리의 독립운동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38년 중국 시안(西安)을 근거지로 둔 한국청년전지공작대(1941년 광복군에 편입)에 가입하면서부터다. 그는 당시 중국 국민당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맡아 중국 측 지원을 이끌어냈다. 한유한은 동포들의 광복군 지원을 촉구하고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극 ‘아리랑’을 1940년 5월 시안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 음악과 연극이 결합된 ‘아리랑’은 목동과 촌녀 부부가 일본의 핍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유한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와 얼후, 징, 북 등 동양 악기 20여 개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웅장한 소리를 냈다. 당시 출연진과 악단에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 예술가가 대거 참여해 한중 공동항전의 의미를 살렸다. 극중 곡들은 군가풍이 많았는데 클라이맥스에서는 아리랑이 연주됐다. 한유한은 본래 작곡과 연출을 맡았지만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 배우가 마땅치 않아 남자 주인공 역까지 해냈다. 공연은 매회 매진을 거듭한 끝에 기간이 연장됐고 장제스(蔣介石) 등 국민당 수뇌부가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양 교수는 “가극 ‘아리랑’이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를 높여 한중 연대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당시 중국 측은 화북 지방에만 20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을 항일투쟁에 동원하고 싶었지만, 이들 가운데 친일세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일본어에 능하고 식민지 내부 사정에 밝은 한인들은 일본군 정탐 활동을 수행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양 교수는 “한인들 역시 일본에 침략을 당한 피압박 민족이며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울 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주는 데 가극 ‘아리랑’이 크게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톈진=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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