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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용비어천가’가 장대한 국악선율과 전통무용으로 다시 태어난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정악 중 최초의 한글 노래인 용비어천가를 국악과 궁중무용으로 재해석한 ‘세종의 신악―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을 26, 27일 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 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이 출연하고 신선희 서울예술대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 국악원은 관중의 몰입을 돕기 위해 용비어천가 원문을 쉬운 우리말로 바꿔 합창으로 들려준다. 음악 구성은 수제천과 여민락, 정대업, 보태평, 수룡음 등 정악을 기본으로 하되 합창 중심으로 편곡했다. 용비어천가에 담긴 이미지를 시각화하기 위해 처용무와 몽금척 등 궁중무용 동작을 바탕으로 새로 기획한 안무를 선보인다. 26일 오후 8시, 27일 오후 3시. 1만∼3만 원. 02-580-3300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설의 사물놀이 거장들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이 열린다. 김덕수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이광수 명인, 최종실 서울예술단장, 남기문 명인이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평화의공원에서 열리는 ‘2017 전통연희 페스티벌’ 무대에 함께 선다. 김덕수(장고)와 이광수(북), 최종실(징)은 생전에 상쇠를 맡았던 고 김용배 명인과 더불어 1978년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사물놀이를 창시한 주역들이다. 이후 가만히 듣기만 해도 절로 흥에 겨운 사물놀이는 세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앞서 전통음악 전수와 후배 양성으로 각자의 길을 걸었던 원년 멤버들은 14년 만에 모여 200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30주년 공연을 벌였다. 내년 사물놀이 탄생 40주년을 앞두고 전통연희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명인들은 제자들과 나란히 공연에 나서 신구 세대 조합을 보여줄 예정이다. 이날 공연에서는 이광수의 비나리로 시작해 김덕수의 사물놀이 앉은반, 최종실의 소고놀이, 남기문의 판굿이 이어진다. 전통연희 페스티벌 주최자인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사장 손혜리)은 놀이판에서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지는 전통축제의 장을 선보일 계획이다. 민속놀이를 재현하는 프로그램을 비롯해 다양한 볼거리와 전통연희 종목도 함께 소개한다. 이와 함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전통공연과 창작 작품을 적절히 안배한 프로그램도 기획했다. 손혜리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은 “예술성과 대중성이 뛰어난 전통연희 작품과 놀이를 시대에 맞게 재해석해 관객 모두가 쉽게 참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전통문화 축제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물놀이 공연은 28일 오후 6시. 무료. 02-580-326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전북 남원시 실상사 조선 불상 안에서 고려시대 사경(寫經·불교 경전을 베껴 쓴 것)이 발견됐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실상사 극락전에 안치된 건칠불상(乾漆佛像)의 머리 안에서 고려시대 지은 상지은니대반야바라밀다경(桑紙銀泥大般若波羅密多經) 한 첩을 수습했다”고 24일 밝혔다. 불교 경전인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은가루(은니)로 적은 사경은 국내에 4점 전하는데, 이 중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불에서 수습한 사경 3첩은 보물 제959호로 지정돼 있다. 연구소는 불상의 보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3차원(3D) 컴퓨터단층촬영(CT)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사경을 발견했다. 사경은 뽕나무로 만든 종이 위에 은니로 글씨를 써 놓았다. 대반야바라밀다경의 600권 중 396권을 옮겨 적은 사경에는 “이장계(李長桂)와 그의 처 이씨(李氏)가 시주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연구소는 고려사 등 각종 문헌을 찾아봤지만 이장계 관련 기록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임석규 연구소 유적연구실장은 “내용상 선친의 명복을 빌고 집안의 재액(災厄)을 물리치기 위해 봉헌한 사경”이라고 분석했다. 사경이 나온 건칠불상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흙 표면에 옻칠을 한 삼베를 붙인 뒤 내부 흙을 제거해 완성했다. 고려∼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건칠불상은 약 20구가 남아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매장 직전 불로 의례를 행한 청동기시대 동굴무덤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연세대 박물관이 강원 정선군 매둔동굴에서 청동기시대 매장의례가 행해진 흔적을 확인했다”고 23일 밝혔다. 이곳에서는 시신을 안치하기 직전 불로 나무를 태운 흔적이 발견됐다. 국내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불로 매장의례가 행해진 흔적은 발견된 적이 없다. 연세대 박물관에 따르면 해당 유구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두께 18cm의 재층과 더불어 네 명의 인골과 돌화살촉이 발견됐다. 재층은 상부의 백색 층과 하부의 회색 층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인골 2구는 백색 재층 바로 위에 안치돼 있었고, 나머지 2구는 재층 안에서 흩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한창균 연세대 박물관장은 “불로 나무를 태우는 의례를 행한 뒤 인골을 재층 위에 안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회색 재층에서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청동기시대 돌화살촉이 함께 나왔다. 발굴단은 청동기인들이 동굴 안에서 불을 피우는 과정에서 신석기시대 지층에 있던 빗살무늬토기 조각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연세대 박물관은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통해 시신의 성별과 나이, 체질 특성 등을 파악할 계획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9일 경남 합천군 옥전서원(玉田書院) 옆 야산에 들어서자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무덤들이 나타났다.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길게 늘어선 20여 기의 봉분은 멀리서 보면 마치 낙타 혹 같다. ‘어딘가 눈에 익은 풍경인데….’ 지난 시리즈에서 취재한 발굴 유적 32곳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야트막한 구릉에 고총(高塚)들이 빽빽이 자리 잡은 모습이 부산 동래구 복천동이나 경남 김해시 대성동의 금관가야 고분을 닮았다. 답사에 나선 조영제 경상대 교수(64)가 심중을 읽은 듯 한마디 거들었다. “이곳 합천 옥전 고분군에 묻힌 다라국(多羅國) 지배층은 순수 토착세력이 아닙니다.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하자 김해 금관가야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죠.”○ 지중해산 로만글라스 발견 “이건 금관보다 더 귀한 거요….” 1991년 9월 옥전 고분군 M1호분(M은 봉분(Mound)을 뜻함) 발굴 현장. 발굴 지도위원으로 현장을 찾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로만글라스(Roman glass·로마와 속주에서 제작된 유리그릇) 출토품을 손에 쥐고 읊조렸다. 한국 고고학의 대가는 감격에 젖어 손마저 가늘게 떨었다. 혹여나 귀한 유물을 떨어뜨릴까 봐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로만글라스 아래로 손을 뻗었다. 현재는 고인이 된 고고학계 원로들이 당시 흥분했던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한반도에는 투명한 유리 재질의 로만글라스를 만드는 제조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멀리 지중해로부터 광활한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로만글라스는 서역과의 문물 교류를 보여주는 핵심 증거다. 당시 로만글라스는 경주 신라고분에서만 나왔는데, 경주 이외 지역에서 발견된 건 이것이 유일했다. 로만글라스의 출토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출토 1년여 전 인근 옥전서원 문중에서 “안산을 함부로 파헤칠 순 없다”며 발굴을 막았다. “국가사적으로 지정되면 오히려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고 설득해 1989년 4월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갔지만 그새 주곽(主槨) 일부가 도굴됐다. 크게 낙심했던 발굴팀이 시신 발치 쪽에 깔려 있던 갑옷을 노출하던 도중 로만글라스 조각을 찾아냈다. 다행히 마구 밑에서 나머지 조각들이 나와 로만글라스를 완전체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학계는 M1호분이 조성된 5세기 3분기(451∼475년)부터 옥전 고분에서 로만글라스와 창녕계 토기 등 신라 계통 유물이 나타나고, 거대한 봉분 무덤이 출현하는 데 주목한다. 5세기 신라에서도 높은 봉분의 적석목곽분이 유행했다. 다라국이 신라와 교역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분석된다. M1호분보다 시기가 앞서는 5세기 초 무덤에서 갑옷과 투구, 금장식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목곽묘 규모가 갑자기 커지는 양상도 눈길을 끈다. 조영제는 “이때 부장품은 김해 지역의 가야고분과 연관성이 깊다”며 “5세기 초 광개토대왕 남정을 계기로 금관가야 세력이 합천으로 옮겨온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황금빛 용과 봉황 함께 날다 ‘용띠 해에 합천에서 용이 승천했다.’ 1988년 초 옥전 고분군 M3호분에서 용봉무늬 둥근고리자루큰칼(龍鳳文環頭大刀·용봉문 환두대도) 4점이 한꺼번에 출토되자, 국내 언론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한껏 들뜬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언론 보도가 과장된 것만은 아니었다. 용이나 봉황 문양을 새긴 둥근고리자루큰칼이 한 무덤에서 4점이나 나온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화려한 장식의 둥근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된 곳은 무령왕릉과 천마총밖에 없었다. 더구나 옥전 고분 둥근고리자루큰칼은 금·은 장식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름이 21m에 이르는 M3호분은 다라국 전성기를 대표하는 거대 무덤이다. 이곳에서는 둥근고리자루큰칼뿐만 아니라 금귀고리, 금동장식 투구, 갑옷, 말 투구(馬胄), 쇠도끼 등 각종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제강점기 때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다행히 석곽 가운데가 아닌 측면의 돌무더기를 뚫는 바람에 대부분의 유물이 온전할 수 있었다. 역사학계는 옥전 고분군이 일본서기에 몇 줄만 언급된 다라국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열쇠라고 평가한다. 조영제의 설명. “5세기 말, 6세기 초 옥전 고분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다가 6세기 후반 백제계 유물이 주로 나옵니다. 이는 다라국이 대가야를 주축으로 한 가야연맹에 소속됐으며, 6세기 후반 신라에 맞서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합천=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14세기 초반 고려시대 불화(佛畵)인 ‘관음보살내영도(觀音菩薩來迎圖)’가 최초로 발견됐다. 아미타불(阿彌陀佛) 대신 관음보살이 등장하는 내영도는 지금껏 알려진 적이 없는 새로운 형식이다. 이 작품은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최근 국내 한 사립박물관장이 올 2월 우연히 구입했다. 불화를 감상한 학자들은 세계 불교 미술사를 새로 써야 하는 획기적인 발견이라고 평가한다.○ 왜 관음보살만 그렸을까 불교미술 권위자로 문화재위원을 지낸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77·한국미술사연구소장·사진)는 “해당 고려불화를 정밀 감정한 결과 1300∼1319년경 그려진 관음보살내영도로 확인됐다”고 21일 밝혔다. 그는 “고려시대 내영도는 우리나라와 일본, 유럽 등에 총 30점가량 남아 있는데 아미타불이 아닌 관음보살만 등장하는 그림은 이것이 유일하다”고 덧붙였다. 통상 관음보살의 보관(寶冠)에 그리는 화불(化佛)이 연꽃 위에 표현된 것도 전례가 없다는 설명이다. 내영도란 서방 정토(淨土)에 사는 아미타불이 죽은 사람을 극락으로 맞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한 불화다. 내영도는 아미타불이 혼자 등장하거나 관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함께 나타나는 삼존도(三尊圖) 혹은 25보살이 함께 서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관음보살만 홀로 그린 내영도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문 명예교수는 “6세기 삼국시대에 시작된 관음신앙이 고려시대에도 유행하면서 아미타불 대신 관음보살만 독존(獨尊)으로 그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지상으로 내려온 ‘금빛 관음’ 금실로 수놓은 화려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며 관음보살이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 천의를 휘감은 투명한 비단도 바람에 나풀거린다. 극락으로 들어가길 갈구하는 중생의 염원이 전해졌을까. 아직 지상에 닿지도 않았는데 관음의 오른손은 이미 죽은 이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자(死者)를 맞아들이는 관음이 속삭이는 듯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네. 이제 편히 쉬시게.” 이번에 확인된 관음보살내영도는 가로 34.5cm, 세로 83cm 크기의 비단에 관음이 구름(飛雲)을 타고 극락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장면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마치 귀부인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얼굴의 관음은 오른손을 내밀어 왕생자를 인도하는 동시에 왼손으로 붉은색 연꽃을 받쳐 들고 있다. 연꽃 위로 앙증맞게 그려진 아미타 화불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김창균 동국대 교수(불화 전공)는 “고려불화 가운데 보관이 아닌 연꽃 위에 화불이 그려진 전례가 없다”며 “매우 특이한 도상(圖像)”이라고 말했다. 관음이 머리에 쓴 보관을 비롯해 목걸이, 팔찌, 옷자락 등을 화려하게 물들인 금빛도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끈다. 특히 천의를 장식하고 있는 세밀한 식물무늬는 금 선묘(線描)의 진수를 보여준다. 관음의 옷자락에 연꽃과 당초(唐草), 보상화, 모란 잎의 4가지 무늬가 한꺼번에 그려진 것이 독특하다. 문 명예교수는 “하나의 옷자락에 4가지 식물무늬를 함께 묘사한 고려불화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일본서 고국으로 돌아온 관음 관음보살내영도의 제작 시기는 치밀한 금 선묘와 전체적으로 역동적인 도상, 독특한 ‘모란 잎’ 표현기법을 감안할 때 14세기 초로 추정된다. 고려불화는 말기로 갈수록 아미타불의 동적인 느낌이 점차 사라지고 정제된 도상으로 바뀐다. 이 그림에서는 관음이 딛고 있는 구름이 비스듬히 날고 있는 데다 앞부분이 용머리 형상으로 표현돼 역동성을 극대화했다. 문 명예교수는 “옷자락에 그려진 모란 잎이 세 갈래로 갈라진 뫼산(山) 형태에 줄기가 좌우 대칭을 이루는데, 이는 1300년 전후 고려불화에서 주로 나타나는 표현기법”이라고 설명했다. 관음보살내영도는 비단 테두리를 일본식으로 배접한 흔적이 남아 있어 과거 어떤 시점에 일본으로 유출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화기(畵記)가 없어 유출 시점을 알 순 없지만 고려불화들은 고려 말 왜구들에 의해 약탈됐거나 일제강점기 때 빼돌려진 게 대부분이다. 문 명예교수는 관음보살내영도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논문을 다음 달 15일 학술지(강좌미술사 48호)에 게재할 예정이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마키노는 지금 이 삶의 ‘사실성’에 발이 묶여 있었다. 현재는 이미 각자 충실한 것이 되어 버렸고 그 생활에 따르는 감정 또한 싹터 버렸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여주인공 미아가 재즈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의 연주를 우연히 듣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슬프고도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이 끝나자 둘은 아무런 말없이 눈빛만 교환하고 헤어진다.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이별로 기억하는 건 이 책 저자의 말마따나 삶의 사실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이리라. 일본의 차세대 거장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이 책은 마흔에 접어든 기타리스트(마키노 사토시)와 여성 저널리스트(고미네 요코)의 담담한 사랑 이야기다. 중세 유럽 수도사를 그린 데뷔작 ‘일식’부터 최근작인 SF소설 ‘던’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온 저자가 독특한 로맨스 소설을 써냈다. 폭넓은 지적 편력을 보여준 소설가답게 로맨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부터 발칸 지역 역사,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참고문헌 목록이 달렸다. 마키노는 자신의 데뷔 20주년 공연에서 프랑스 언론사에서 일하는 요코를 알게 된다. 둘을 이은 강력한 끈은 마치 ‘라라랜드’의 남녀 주인공처럼 예술이다. 요코는 마키노의 오랜 팬이며, 마키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영화감독의 딸이 바로 요코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 서로 깊이 빠져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지만, 요코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둘은 이내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예기치 않은 시련을 겪는다. 완벽주의자 마키노는 깊은 슬럼프에 빠져 음악을 향한 열정을 잃고, 요코는 취재 현장에서 테러를 겪은 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걸린 것. 이들에게 들이닥친 삶의 고통은 강렬했던 첫 만남을 떠올려 서로를 찾게 된다. 서두에 라라랜드를 인용한 이유를 이해한 독자라면 마키노와 요코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벌써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장면이 결코 식상하지 않은 게 이 책의 매력. 어쩌면 요코와 마지막 만남이 될 공연에서 마키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1번’을 철저한 고독으로 묘사한 저자의 문학적 표현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마치 픽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다. 동화치곤 그림이 매우 사실적이고 스토리 라인도 탄탄하다. 인류보다 앞서 생쥐가 달에 첫발을 내디뎠으며 나중에 생쥐의 우주선 설계도를 인간들이 베꼈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비밀을 유지하려고 인간들이 생쥐의 별명을 암스트롱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도 재밌다. 1950년대 미국에 살던 생쥐 한 마리가 왕성한 지적 호기심에 사로잡혀 달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동료들에게 달의 모습을 설명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어느 날 하늘을 날았던 선조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생쥐가 달 탐사의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는 얘기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해금과 한국 현대음악이 만나는 새로운 실험이 펼쳐진다. 26, 27일 서울 종로구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이승희의 현대음악’ 공연이 열린다.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와 일반부 금상 수상자인 해금 연주자 이승희(사진)는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했고 국악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번 공연에서 서양음악 작곡가인 이건용의 ‘해금가락 Ⅱ’가 첫 번째로 연주된다. 기존 국악에서 사용하지 않은 음계를 적용해 눈길을 끈 ‘해금가락Ⅰ’(1993년)을 확장한 곡으로, 해금 특유의 흐느적거리는 음색을 강조했다. 해금 창작곡 가운데 연주하기 어려운 곡으로 꼽히는 강준일 작곡 ‘마른 비나리’가 이어진다. 비나리는 예부터 고사를 지낼 때 소원을 빌면서 부르는 노래다. 비나리꾼에 의해 구전된 전통 비나리와 달리 마른 비나리는 가사 없이 기악곡으로만 연주된다. 공연은 26일 오후 7시 30분, 27일 오후 3시. 02-3210-7001.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5세기 신라인들이 성벽을 쌓으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친 흔적이 경주 월성(月城)에서 최초로 확인됐다. 건축물을 세우는 과정에 인신공양을 시도한 고고학 증거가 국내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4, 5세기 마립간 시대 신라인들이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에 순장(殉葬)을 시행한 동시에 왕궁 성벽에도 사람을 제물로 묻은 셈이다.16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월성 서쪽 성벽의 서문 터 근처 발굴현장에서 성인 인골 2구가 발견됐다. 이들은 1.5m 높이로 쌓아올린 성벽의 기초부 상단에 묻혀 있었다. 키 165.9cm의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골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성별 미상의 유골(키 159.3cm)은 옆으로 살짝 기울어 상대방을 바라보는 자세다.발굴단이 이들을 인신공양으로 보는 근거는 팔다리가 곧게 펴진 데다 성벽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인골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발치 끝에서 제기(祭器)로 보이는 신라시대 토기 4점이 함께 발견됐다. 중국 상나라 은허 유적에서 확인된 인신공양 시신들이 머리가 잘린 것과 달리 월성 유골에는 외상이 거의 없었다. 박윤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독약 등으로 목숨을 끊은 뒤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유골 밑에는 돗자리처럼 풀로 직조(織造)한 흔적이 나왔고, 얼굴과 몸에서 나무껍질이 여러 점 발견됐다. 특히 상대방을 바라보는 인골의 한쪽 어깨가 갈비뼈 위로 살짝 들려 있어 붕대로 꽁꽁 싸맨 것처럼 보인다. 김재현 동아대 교수(고인골 전공)는 “땅바닥에 돗자리를 깐 뒤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은 것 같다”며 “얇은 나무껍질로 수의처럼 온몸을 칭칭 감았다”고 설명했다. 옆으로 살짝 기운 유골의 발목에서 가죽신으로 보이는 단백질 성분도 검출됐다. 무엇보다 성벽에서 인골들이 발견된 위치가 눈길을 끈다. 월성 인골은 서문 터 근처에서 나왔다. 예로부터 성문은 적군이나 질병 같은 재앙이 드나드는 통로로 인식돼 제의가 빈번하게 행해졌다. 백제시대 주술용 남근(男根) 목간도 부여 나성(羅城)의 동문 근처에서 출토됐다. 월성 인골의 경우 높이 10.5m 성벽의 기초부에 묻혀 있어 건축물 하단에 묻는 진단구(鎭壇具·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공양물)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2000년 국립경주박물관 경내 통일신라시대 우물에서 발견된 10세 안팎의 어린아이 유골도 일종의 인신공양 사례로 추정된다. 당시 우물에서는 각종 동물 뼈와 토기들도 나왔다. 학계는 경주박물관의 경우 건물을 세우는 과정과 무관하게 우물을 폐기하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고 있다. 월성 인골과 비교하면 제의 목적이나 성격이 다른 셈이다.한편 이번 발굴에서는 간지(干支·연도)가 적힌 목간이 월성에서 처음 출토됐다. 해당 목간에서는 ‘병오년(丙午年)’ 묵서가 확인됐는데, 이는 법흥왕 13년(526년) 혹은 진평왕 8년(586년)에 해당한다. 만약 법흥왕 13년으로 확인되면 성산산성 출토 목간보다 앞서는 삼국시대 최고(最古) 목간으로 기록될 것으로 전망된다.이와 함께 터번을 둘러 이란계 소그드인으로 보이는 6세기대 토우(土偶·흙으로 빚은 인형)도 발견됐다. 괘릉 무인상과 경주 용강동 고분 등에서 서역인을 닮은 조각상이 나왔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이미 삼국 통일 전 신라인들이 서역과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신라 금귀고리를 보는 듯 심엽형(心葉形·하트 모양) 무늬가 문의 위아래를 장식하고 있다. 그 위로 꾸란 구절을 인용한 아랍어 문장이 세 줄에 걸쳐 이어진다. 높이 3.4m, 폭 1.8m에 이르는 거대한 나무판에 은장식을 붙여 호화로움을 더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아라비아의 길―사우디아라비아의 역사와 문화’ 특별전에 전시된 이 문은 이슬람 신앙의 중심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바 신전에 1947년까지 약 300년 동안 붙어 있었다. 전 세계 무슬림들은 늘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데, 이곳 카바 신전을 방문한 신도만큼은 아무 방향을 향해도 상관없다. 이곳이 메카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전시된 카바 신전의 문은 터키 오스만 제국 술탄이던 무라드 4세(1623∼1640년 재위)가 1635년경 헌납한 것이다. 17세기 당시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진출한 강대국이었다. 이번 특별전은 아라비아 반도의 선사∼현대시대 역사 문화를 조망한 전시로, 사우디아라비아 13개 박물관의 주요 소장품 466건을 선보인다. 기원전 4000년 만들어진 석상과 각종 석기들은 아라비아에서 인류가 정착한 과정을 보여준다. 8월 27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6000원, 유아 및 만 65세 이상 3000원.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목만큼이나 기묘하고 발칙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팩트와 동화 사이를 오가는 환상(?)을 경험했다. 분명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 중 허구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온갖 정보의 파편들을 절묘하게 요리해낸 작가의 발군의 구성력 덕이다. 게다가 ‘돼지꼬리 땡’이 난삽하게 적힌 학창시절 개인노트를 들춰보는 것 같은 필기체 활자와 화려한 삽화들도 눈을 즐겁게 한다. 독자들은 묵직한 내용임에도 책장을 술술 넘기는 지적 유희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하면 이 책의 주제는 날씨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이다. 이를테면 저자는 벼락을 맞고도 살아난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가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고, 과학자들의 입을 통해 벼락이 발생하는 메커니즘과 벼락 맞은 사람들의 신체 변화를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또 ‘추위’를 다룬 챕터에서는 북극과 가까운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섬에 사는 태국 여성이 백야를 이용해 실내에서 식물을 키우는 얘기를 들려준다. 그가 고국에서 다양한 식물종자를 가져와 힘들게 키우는 건 오직 북극에서 태국 음식을 먹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추위로 인해 경작조차 불가능한 이 얼음 땅이 전 세계 식량자원의 마지막 보고(寶庫)라는 사실이다. 천연 냉동상태를 이용해 다양한 종자를 영구 보관하는 ‘국제종자저장고’가 여기에 설립됐다. 저장고에는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보낸 농업용 식물종자들이 보관돼 있는데, 이 중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이 보내온 옥수수와 쌀도 들어 있다. 얼핏 관련 없어 보이는 날씨와 정치의 연관성도 흥미롭게 그렸다. 13세기 몽골군의 일본 침략을 좌절시킨 태풍은 일본인들에게 ‘신의 바람(神風·가미카제)’으로 불리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된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직후 기상현상을 놓고 최고통치자의 신성을 부각하는 데 활용한 북한 언론의 보도 역시 우습지만 21세기에 일어난 실화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내에서 처음 발굴돼 올 3월 동아일보 보도로 존재가 알려진 전북 군산시 선제리 ‘검파형(劍把形·칼자루 모양) 동기(銅器)’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검파형 동기란 청동으로 만든 제의(祭儀)용 도구로 초기 철기시대에 사용됐다. 고분에 묻힌 검파형 동기가 정식 발굴을 거쳐 출토된 건 처음이다. 앞서 대전 괴정동과 충남 아산시 남성리, 예산군 동서리에서 확인된 검파형 동기는 발굴이 아닌 주민 신고로 수습된 유물이다. 국립광주박물관은 ‘흙 속에서 발견한 역사의 조각들―2015∼2016 호남·제주고고학의 성과’ 특별전을 최근 개최했다. 호남과 제주지역에서 최근 2년간 진행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주요 유물을 소개하는 전시다. 이 중 1부 ‘선사시대―기록 이전의 과거’는 검파형 동기와 거울 모양 동기, 화천 등 희귀한 초기철기시대 유물을 선보인다. 이어 2부 ‘역사시대―만들고 사용하다’에서는 광주 하남 3지구 유적과 나주 읍성을 중심으로 취락 변화 과정을 살펴본다. 무덤과 산성, 수리시설에 적용된 고대 토목기술도 알아본다. 3부 ‘역사시대―내세와 안녕을 기원하다’에선 무덤과 사찰 발굴조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화순 천덕리 회덕 고분과 장수 노하리 가야 고분군을 중심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엿보이는 외래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7월 9일까지. 062-570-7052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여긴 사방 어디서도 전체를 볼 수 없는 무한(無限)의 공간이오.” 8일 경북 경주시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안압지)’를 함께 찾은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70)이 건넨 선문답 같은 말이다. 과연 그러했다. 천년왕성 월성(月城) 동문 터와 맞보고 있는 월지 남쪽에 들어서자, 연못을 중심으로 복원된 건물들과 인공섬 대도(大島), 소도(小島)가 한눈에 들어왔다. 월지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는 지점이다. 그러나 연못의 북서쪽 방면에 자리 잡은 중도(中島) 일대는 볼 수 없었다. 42년 전 윤 전 소장과 함께 월지를 발굴한 조유전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안압지 발굴조사와 복원’ 글에서 “월지는 무한한 바다를 좁은 공간에 표현했다”고 썼다. 월지는 경복궁 경회루처럼 통일신라시대 연회를 베풀던 경치 좋은 연못과 정원이다. 삼국사기는 월지에 대해 “서기 674년(문무왕 14년)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기록했다. 삼국통일 직후 왕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문무왕이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월지에 집약한 게 아닐까. 나중에 그가 바닷속 수중왕릉에 묻힌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선생님, 방금 이런 게 나왔는데 뭔지 아시겠어요?” “음, 모양이 딱 그건데….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1975년 5월 29일 월지 북쪽 기슭 발굴현장. 최정혜 당시 조사원이 바닥 개흙층에서 발견한 17.5cm 길이의 기다란 나무 조각을 한 남성 조사원에게 내밀었다. 조각을 뒤덮은 진흙을 닦아낸 남성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챘지만 대답을 머뭇거렸다. 남녀유별이 남아 있던 1970년대엔 그럴 만도 했다. 그것은 전형적인 남성의 심벌 모양이었다. 왕궁 연못에서 느닷없이 남근(男根)이라니.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 이쪽으로 쏠렸다. 윤근일의 회고. “최규하 총리를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가 현장에 와서 목제(木製) 남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들이 워낙 많이 찾다보니 최태환 당시 작업반장이 남근에 실을 살짝 묶어놓았어요. 약품 보존처리 중이던 목제 유물들에 둘러싸인 남근을 손쉽게 찾으려고 한 거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근의 용도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학계에서는 예부터 바닷가 해신당(海神堂)에서 남근을 세워놓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제의용이라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됐다. 이와 관련해 고대 로마 폼페이 유적에서도 도시 곳곳에서 남근 조각과 그림들이 발견됐다. 일각에서는 월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데다 돌기까지 붙어 있어 여성의 자위 기구라는 설도 제기된다.○ 삼국시대 배 최초로 발견 둘레 1005m, 면적 1만5658m²에 이르는 월지를 제대로 즐기려면 유람선을 띄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75년 4월 16일 연못 한가운데에서 통일신라시대 나무배 한 척이 발견됐다. 그때까지 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선박이었다. 문제는 엎어진 채 모습을 드러낸 나무배를 안전하게 들어내는 것이었다. 부식이 쉽게 일어나는 유기물 특성상 1300년 묵은 나무는 스펀지처럼 취약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1960∼90년대 경주 발굴현장을 지킨 고 김기출 작업반장과 상의한 끝에 윤근일은 나무장대 여러 개를 나무배 아래로 밀어 넣은 뒤 마치 상여를 메듯 들어 올렸다. 길이 6.2m, 너비 1.1m의 나무배에 인부 30명이 달라붙었다. 경사로에서 나무배를 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균형이 맞지 않아 살짝 금이 갔지만, 거의 완형을 유지한 채 무사히 수습을 마칠 수 있었다. 발굴팀은 나무배를 즉시 약품에 담가 7년 동안 보존 처리를 진행했다.○ 예상보다 훨씬 넓었던 동궁 영역 “로프에 몸을 묶고 7m 깊이의 캄캄한 우물 안으로 들어간 기억이 생생하네요.” 이날 ‘동궁과 월지’ 동편지구 발굴현장에서 만난 장은혜 학예연구사(29)는 2년 전 통일신라시대 우물을 발굴한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동궁과 월지 발굴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월지 동편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를 2007년부터 이어가고 있다. 당초 동편지구는 별도의 왕경 유적으로 추정됐지만, 막상 땅을 파보니 이곳에서 확인된 건물 터와 유물은 월지에서 출토된 것들과 유사했다. 신라시대 동궁 영역이 현재 사적지로 지정된 범위보다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백전노장과 청년 고고학자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한다. “동궁과 인근 월성 발굴은 시간을 갖고 체계적으로 해야 합니다. 1970년대 발굴에서 확인하지 못한 월지 동편과 북편 경계를 파악하는 게 중요한 과제입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아버지 어머니께 ◇시를 잊은 그대에게/정재찬 지음/휴머니스트·2015년백일장 앞두고 가족 모두 모여 시와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어느새 추억이 됐습니다. 어렸을 때보다 작아 보이는 아버지 어머니 모습을 뵐 때면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채워드려야 할지 고민이 늘어납니다. ‘한 편의 시로부터 삶의 위로와 힘을 얻는다’고들 합니다. 시(詩)라는 새 가족을 맞이해보심은 어떨지요. 자주 접해 친숙할 시 46편에 저자의 해박하면서도 공감 가는 해설이 더해져 편안함을 안겨주는 책입니다. “시를 찾고, 노래를 하며, 누가 뭐래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라”는 저자의 외침에선 더욱 부모님이 생각나네요. 워킹맘인 나에게◇타임 푸어/브리짓 슐트 지음/더퀘스트·2015년“왜 이렇게 챙길 일이 많고, 늘 해야 할 일에 쫓기는 걸까?”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까지. 이번 달 내내 잇따른 행사를 치르다 보면 이런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올 거야. 엄마, 아내로서의 삶은 하루에 한 시간도 마음 편히 쉴 틈이 없는 게 현실이더라. 그래도 휴일에 잠시 짬을 내 이 책을 다시 읽어보길 권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능한 기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가 ‘일하는 여성들은 왜 이렇게 시간이 부족한지’ 예리한 시각으로 짚어나간 책이지. 전문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꼭 내 모습 같은 저자의 ‘워킹맘 좌충우돌기’도 함께 담겨 있어. 처음 읽었을 때, 정말 가슴을 치면서 후련하게 공감했잖아. 아내에게 ◇어른 없는 사회/우치다 타츠루 지음/민들레·2016년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동네에서는 어디에서 누구와 놀아도 동네 어른들의 시선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동네’라는 게 행정구역 이상의 의미가 없는 지금은 도시에서 어린아이 혼자 나가 놀라고 하기가 영 부담스럽네요. 이 책의 부제는 ‘사회수선론자가 말하는 각자도생 시대의 생존법’이에요. 성장을 대가로 전통적 공동체의 미덕을 희생시킨 사회, 모두가 소비의 주체가 돼 버린 사회는 성장 신화가 붕괴한 시대에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가 주제죠. 결국 “어른이 필요하다”고 하네요. 내가 버린 게 아니라도 발아래 떨어진 유리조각을 먼저 줍는 사람이, 어른인 거겠죠. 역사학도를 꿈꾸는 첫째에게 ◇하버드 중국사 남북조/마크에드워드루이스지음/너머북스·2016년아들아. 나는 네가 사료(史料)만 추종하는 역사학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가끔 아비는 역사책을 읽을 때 이른바 ‘사료 비판’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승자의 기록답게 사료엔 팩트 왜곡이 포함되기 일쑤지. 이것을 구별하려면 사료에 매몰되지 않고 거시적인 주변 연구를 통해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아비가 최근 읽은 이 책은 퍽 흥미로웠다. 저자는 단순히 역사뿐 아니라 도교, 불교 사상사와 시(詩) 부(賦) 등의 고대 문학, 가족 제도까지 포함한 다양한 시각으로 남북조시대를 조망하고 있어. 이 책의 독특한 접근 방식을 네가 배웠으면 한다. 어머니께 ◇마음의 소리 레전드 100/조석 지음/위즈덤하우스·2016년며칠 전 저녁식사 자리에서 못난 마음에 “좋은 날이 올까요?” 여쭙는 제게 말씀하셨죠. “늘 오늘뿐이다. 오늘을 살아갈 수 있으면 감사한 일이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가 가까운 이들에게 기쁨과 도움은커녕 슬픔과 어려움만 더하는 사람임을 뒤늦게 돌아보고 있습니다. 또 꾸짖음을 듣겠지만 어머니께 어떤 자식일지, 생각하기도 두렵습니다. 왁자지껄 웃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많습니다. 저 어릴 때 만화책만 본다고 야단하시던 어머니께 그래서 이 책을 드립니다. 잠시라도 시름 잊고 가볍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요. 조금이라도 웃겨드려야, 아버지께도 덜 혼날 듯하고요.유원모 기자·장선희 기자·조종엽 기자·김상운 기자·손택균 기자}

다윈의 진화론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갈라파고스 섬’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과학이 성립하려면 외부 변수를 철저히 통제한 실험집단이 필수인데, 대륙과 분리된 갈라파고스 생태계는 알맞은 여건을 제공했다. 운 좋게도 다윈은 최적의 ‘진화 실험장’을 찾아낸 것이다. 사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사회과학은 이런 행운을 얻기가 훨씬 어렵다. 사람을 외딴 데 가둬놓고 관찰하는 건 일단 윤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본토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동시에 오랜 기간 무인도였던 곳으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주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것도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무정부(無政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면 이만큼 사회과학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소재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초점을 맞춘 일본령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는 이 같은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도쿄에서 1000km나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는 2011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태곳적 생태계를 간직했을 뿐 19세기 초까지 사람이 살지 않았다. 16세기부터 점차 세계를 휩쓴 유럽식 근대 자본주의 자장(磁場)에서 오랫동안 벗어나 있었기에 오가사와라는 완전한 주변부의 관점에서 근대사를 재조명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됐다. 저자는 “작은 군도의 시점에서 근대 세계를 다시 파악하고자 했다”고 썼다. 오가사와라가 인류사에 등장한 건 근대 자본주의로 촉발된 인간의 ‘탐욕’ 때문이었다. 19세기 들어 유럽과 미국의 자본이 연료용 고래기름을 얻기 위해 대규모 포경선을 태평양에 띄웠는데, 가혹한 노동 착취에 시달린 선원들이 배를 탈출해 오가사와라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경험한 선원들은 새로운 낙원에서 계층과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일궈냈다. 글로벌 자본과 제국주의 침탈에서 벗어난 독특한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급격한 서구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 메이지 정부가 19세기 후반부터 오가사와라 제도를 식민화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메이지 정부는 선주민들에 대한 직접 통치에 이어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천혜의 자연을 무차별 개발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거점으로 군도(群島)를 활용했다. 태평양의 군도들은 종전 이후에도 일본 본토와 달리 끊임없는 수탈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오가사와라 제도와 이오 열도를 점령한 미군은 핵무기를 배치한 뒤 전쟁 당시 일본 본토로 소환된 주민들의 귀향을 막았다. 졸지에 타향살이에 내몰린 오가사와라 주민들은 본토에서 빈곤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냉전의 폐해를 고스란히 겪은 한반도 역사와 오버랩되는 지점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오가사와라로 대표되는 주변부의 관점을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에도 적용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전후 잠재적 핵무장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도호쿠 지방 같은 가난한 어촌에 원전을 세워 오가사와라처럼 국내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는 “태평양 섬들이 강요받은 난민화와 방사능 피폭 경험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이 초래한 난민화, 피폭 경험과 서로 연관돼 있다”고 강조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예부터 농경민족은 유목민과 자신을 구별 짓는 핵심 요소로 문자를 내세웠다. 복잡한 문법 체계를 갖춘 문자 없이 행정명령조차 구두에 의존한 유목제국을 중국인들은 야만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흉노 등 유목제국에 대한 여러 고고자료들이 쌓이면서 유목민족도 기본적인 문자생활을 영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 사서 사기(史記)는 “흉노인은 서면약속도 말로 한다”고 했고, 후한서(後漢書)도 “흉노는 죄인에 대한 송사(訟事)를 선우(單于)에게 구두로 보고하며 문서나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고 적었다. 대제국 흉노에 대한 역사기록이 절대 부족한 이유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고고학)가 최근 발표한 ‘흉노인의 문자, 그리고 유라시아 유목제국의 전개’ 논문은 흉노의 문자 사용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흉노는 문자를 갖지 못했다는 일반상식에 반하는 주장인 셈이다. 논문에 따르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100km 북쪽에 있는 흉노 무덤인 노용 올(노인울라)에서 글자가 새겨진 칠기(漆器)가 발견됐다. 중국제 칠기 바닥에선 한자와 더불어 흉노 특유의 ‘탐가’가 발견됐다. 탐가란 주인을 식별할 수 있도록 가축에 찍는 낙인처럼 유목민들이 사용하는 고유 기호들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흉노 귀족이 묻힌 골모드 고분 출토 주사위에도 비슷한 문양의 탐가가 확인됐다. 강 교수는 “흉노가 확산된 지역을 따라서 탐가 문양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이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형태로 왕을 상징화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기동력과 빠른 의사결정이 최대 강점인 유목제국 속성상 문자행정이 도리어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됐다. 예컨대 고대 실크로드에 진출한 한나라는 행정기록과 보관에 적지 않은 인력과 시간을 소모했다. 드넓은 사막지대에서 전략상 초소를 옮길 때마다 몇 수레 분량의 목간(木簡)을 일일이 실어 날라야만 했다. 반면 광대한 지역을 떠도는 유목민을 다스린 흉노는 단순화한 명령을 구두로 신속하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고분 부장품에 새긴 탐가처럼 각종 의례나 신분상징의 도구로만 글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흉노는 문자에 기반을 둔 행정조직과 관료제를 버린 덕분에 빠른 속도로 초원제국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말 위에 서서 한 발을 들고 피리를 분다. 옆에서 말을 타는 군사는 마치 자기 안방에 누운 양 안장 위에 엎드려 있다. 가만히 서 있는 말 위에서도 취하기 어려운 자세인데, 먹으로 그려진 말들은 분명 달리고 있는 모양새다. 1748년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해 선보인 마상재(馬上才·달리는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기예)의 한 장면이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글과 그림으로 설명한 일본 책인 ‘조선인대행렬기(朝鮮人大行列記)’에 들어간 삽화다. 이 책은 당시 조선통신사의 이국적인 문물을 구경하려는 일본인들을 위해 간행된 일종의 가이드북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알려진 마상재의 인기가 높아 막부 측 요청으로 1636년 병자사행 때부터 마상재를 시연할 수 있는 군인들이 조선통신사에 포함됐다. 마상재는 달리는 말 위에 서는 동작뿐만 아니라 말 등 넘나들기, 말 위에 거꾸로 서기, 뒤로 눕기 등 다양한 곡예들로 구성됐다. 1711년 조선통신사 부사였던 임수간(1665∼1721)은 자신의 사행록인 ‘동사일기(東사日記)’에 “도주가 마상재 보기를 원해 비장과 역관으로 하여금 보여줬더니 태수들이 모여 이를 보고 칭찬했다”고 썼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최근 일본실을 개편하면서 조선인대행렬기 등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 14점을 새로 전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통신사가 교토에서 에도(현 도쿄)까지 이동한 길인 도카이도(東海道)의 53개 역참을 조명했다. 특히 임수간이 동사일기에서 묘사한 도카이도의 주요 풍경을 일본 측 우키요에(목판화)와 나란히 비교했다. 예컨대 19세기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하코네를 그린 채색판화엔 임수간이 “험준한 산봉우리 위에 큰 호수가 있어 둘레가 수십 리나 된다”고 묘사한 ‘아시노코 호수’의 절경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8월 20일까지. 02-2077-9556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누구나 ‘인생의 책’이 있다. 나는 영국 물리학자 J D 버날(1901∼1971)이 쓴 ‘사회과학의 역사’(한울)를 읽고 사회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버날의 책이 마음에 들었던 건 사회과학의 매력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뼛속까지 자연과학자였던 버날은 사회과학을 수학이나 물리학보다 몇 수 아래로 봤다. 실험이나 검증이 힘들다는 이유 외에도 그가 주목한 건 사회과학이 지배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는 경제학의 숫자놀음을 이런 관점에서 혹독하게 비판했다. “숫자는 중립적 사실이라는 겉모습을 지니기 때문에 말보다 더욱 기만적이다.” 영국 경영학자 필립 로스코가 쓴 이 책을 읽으면서 20년 전 숙독한 버날의 책이 정확히 오버랩됐다. 두 사람은 영국인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전공도, 살아온 시대도 다르지만 경제학을 추종할 때 빠지는 함정을 똑같이 갈파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기계에 의해 창조된 세상 너머의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저자도 경제학에 의해 창조된 허구를 직시하라고 촉구한다. 저자가 보는 허구의 핵심은 주류 경제학의 지상명령이자 기본 전제인 합리적 인간의 ‘자기이익’ 추구다. 자기이익에 기반을 둔 경제학적 의사결정이 사회적 연대와 집단행동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회 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앞서 버날이 비판한 지배층에 봉사와 일맥상통한다. 이를테면 ‘죄수의 딜레마’에서 경제학적 합리성은 최소 리스크로 최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상호 배신’일 수밖에 없다. 각 독방의 죄수가 신의를 지키는 집단행동은 최상의 결과를 낳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선택지에서 배제된다. 특히 가정이 정확하지 않아도 반증할 수 있는 예견만 제시하면 경제이론으로 성립될 수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위험한 경제 모델이 잉태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누구도 정확히 검증할 수 없다는 상상 속 이론이 마침내 현실을 규정지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경제학자들조차 제대로 판독할 수 없는 금융수학으로 무장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금융 파생상품의 복잡한 수식은 힘없는 서민들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자기이익 원칙을 중심에 둔 각국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도 도마에 올랐다. 예컨대 영국 대처 정부는 노후화된 공공주택 관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서민들에게 소유권을 넘겼다. 자기 소유물에 대한 애착을 이용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차익 실현을 위한 부동산 투기를 부작용으로 남기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어류 생태계 보호 차원에서 노르웨이 정부가 추진한 ‘대구 어획 쿼터제(대구를 사유재산으로 보고 어획량 상한을 정하는 것)’는 본래 취지와 달리 어촌을 황폐화했다. 어부들이 할당받은 쿼터를 대형 선주에게 팔아넘기는 바람에 어부들 자체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결국 저자는 경제학에서 강조하는 자기이익 추구 혹은 비용-편익 분석은 세상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편일 뿐, 전부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이른바 ‘문제아’는 따로 정해져 있는 걸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말썽괴물’이 있다는 내용의 이 기발한 동화책을 읽는 순간, 문제아로 낙인찍는 어른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주인공 지유는 수업시간에 연필을 던지고 친구 그림을 구기는 등 줄곧 말썽을 부린다. 지유의 돌출 행동은 끈덕지게 달라붙어 말썽을 일으키는 스너치라는 괴물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미술시간에 지유는 스너치를 자세히 관찰한 뒤 그림을 그려 친구들에게 보여준다. 그러자 친구들은 스너치가 자신들 주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유를 이해하게 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