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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는 고대 훈족부터 게르만족 등 숱한 민족의 이동 경로에 자리 잡고 있었다. 5세기부터 약 1000년 동안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뿐 아니라 14세기 다시 등장했을 때도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간섭과 지배를 받으며 오랜 기간 혼돈의 역사를 겪어야 했다. 이런 루마니아에 최근 한 사이비 역사학자의 학설이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부상 중이다. 로마인의 피가 섞이기 전 고대 다뉴브강 하류에 살았던 다키아인에서 민족 정체성을 찾는 사관인데, 억측과 과장이 난무한다. ‘다키아가 로마를 지배했었다’거나 ‘다키아인은 기독교 탄생 전 이미 기독교를 믿었다’고 한다. 주변국에서 비난이 쏟아지지만 기성 역사학자들은 여론이 무서워 말을 아낀다. 반박했다간 무자비한 마녀사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반지성적 현상이지만 여기엔 사실 이 나라 과거의 더 깊은 상처가 연관돼 있다. 20세기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인에게 민족주의적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왜곡했던 비뚤어진 역사관이 낳은 후유증이기 때문이다. 독재 체제는 종말을 맞았지만 많은 국민은 유럽의 약소국이란 콤플렉스를 잠시나마 잊게 해줬던 그 환각에서 깨어날 준비가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운 새 역사 교과서에 야당은 “제국주의에 무릎 꿇었다”며 교과서를 불태우고 격렬한 폐지 시위를 벌였다. 사실 차우셰스쿠뿐만이 아니다. ‘아리안 신화’로 무자비한 인종 탄압과 독재를 정당화시켰던 히틀러, 로마 제국의 영광에 집착하며 파시즘을 정당화한 무솔리니처럼 우리가 익히 아는 독재자들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나 된 대중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그들의 전략은 폭로됐고 독재도 끝난 것 같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지성과 자유주의의 시대라는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이들의 망령이 어른대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관 출신으로 현재 유엔 인권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저자는 이렇게 최근 세계 주요 국가에서 부상하고 있는 정치적 갈등이 과거의 역사 왜곡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했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민족주의의 재부상이다. 역사적으로 권력이 가장 손쉽게 이용해온 정치적 무기는 민족주의였다. 이것이 미국에선 트럼프의 백인 민족주의 ‘트럼피즘(Trumpism)’, ‘미국 우선주의’로 변형돼 나타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의 ‘중국의 꿈’이란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미중 양강만 그런 게 아니다.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워 불합리한 신분제도는 물론이고 폭력, 탄압까지 정당화시키고 있는 인도나 서구화 실패의 피해의식을 과장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동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경우든 그 나라의 역사 속에는 기득권 계층이나 독재정권이 국민에게 심으려 한 ‘같은 기억’이 있다. 공산체제의 붕괴 위협 속에서 덩샤오핑이 택했던 애국주의가 현재 시진핑 체제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권력은 늘 강한 유혹에 빠진다. 지지층 결집에 방해가 되는 기억은 배제하고, 필요한 기억은 키우고 싶어 한다. 책은 해외 상황을 담고 있지만 우리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역사를 지배하려 했던 권력의 궤적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증오로 점철됐던 과거의 우를 다시 범하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세상이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뭔가가 또 달라져 있는 것만 같은 시대. 1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마을은 얼마나 많이 변하고 달라졌을까. 이 그림책은 프랑스의 한 마을이 100년 동안 어떤 일을 겪고 변해 왔는지를 함께 웃고 울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담아냈다. 푸른 들판이 가득한 농촌 마을에 집들이 생기고, 말편자를 만들던 아저씨는 자동차 정비사가 된다. 전쟁이 일어나기도, 고통과 상처를 극복하며 공동체를 회복해 가기도 한다. 아픔을 보듬으며 사계절을 지내고 한 해를 보내는 사람들의 일상이 선명한 색감의 그림 속에 녹아 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폭로를 담은 베스트셀러 ‘화염과 분노’(원제 ‘Fire and fury’·사진)가 국내에서 다음 달 말 출간된다. 18일 출판업계에 따르면 은행나무 출판사가 최근 미국 에이전시와 판권 계약을 마치고 번역에 들어가 2월 말을 목표로 출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달 5일 미국에서 출간된 ‘화염과 분노’는 트럼프 대통령 행정부의 전·현직 관계자 200여 명과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백악관에서 일어난 내밀한 사건을 폭로하고 트럼프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이 실려 출간 직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출간 즉시 아마존 도서 부문에서 하드커버 인쇄본, 전자책, 오디오북까지 일제히 베스트셀러 1∼3위에 올랐다. 일주일 만에 인쇄본 주문만 140만 부가 밀려들며 재고가 바닥났다. 저자인 언론인 마이클 울프가 벌어들일 인세만 740만 달러(약 79억1800만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해외에서 연일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만큼 국내 대형 출판사 여러 곳이 즉각 관심을 가졌지만 선인세가 높아지며 포기한 곳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해외에서 큰 이슈가 됐고 국내에서도 파급력이 있을 만한 작품은 선인세가 보통 5만∼10만 달러(약 5350만∼1억700만 원)에서 논의되는데 통상적인 수준보다 액수가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화염과 분노’는 현재 미국에서 계속 화제를 낳고 있고 국내 독자들의 관심도 높다. 원서 단독 예약 판매를 시작한 교보문고에 접수된 선주문 물량은 300여 권으로, 외국 책 치고는 판매 속도가 빠르다. 교보문고 측은 “미국판은 배송이 지연돼 영국판을 들여오고 있다. 책 주문이 이어져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관련 논란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연초 이렇다 할 대형 작품이 없던 국내 출판계에 ‘화염과 분노’가 반향을 일으킬지 주목된다. 시의성이 높은 책이어서 미국 측에서도 판권을 가급적 빨리 판매하기를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책이 국내에서도 화제가 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결국 시간 싸움인데 트럼프 관련 이슈가 몇 달 뒤까지 유지될지, 국내 독자들이 호감도가 낮은 해외 정치인 관련 구설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지는 불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런던을 여행하다 지갑을 통째로 도둑맞은 적이 있다. 다행히 신분증이나 카드는 없었지만, 산 지 얼마 안 되는 아끼는 지갑인 데다 쇼핑하기 위해 현금을 잔뜩 찾아둔 상태라 무척 충격이 컸다. 지갑을 도로 찾을 수도 없었을뿐더러 여행 기분을 완전히 잡쳐 버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발상을 이렇게 전환했으면 어땠을까. 만약 그 지갑을 훔쳐간 사람이 정말 가난해 생계가 막막했던 누군가였을 거라고. 내 지갑이 그들 인생의 분기점이 될 만큼 중요한 도움이 됐을 거라고. 그렇다면, 뭐 기꺼운 마음이 든다. 작가 롤프 도벨리는 ‘불행 피하기 기술’에서 발상을 간단히 전환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행복해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뜻하지 않게 주차위반 딱지를 떼이거나 속도위반 과태료 납부 통지서가 날아와도, 세금이 갈수록 높아져도, 비행기가 연착되고 접촉사고가 나도 짜증을 낼 이유가 없다. 어차피 사건은 일어났고, 중요한 건 해석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위안부 문제를 다룬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한 명’은 2년 전 출간됐지만 책을 찾는 독자가 꾸준히 늘며 현재 8쇄까지 찍었다. 보통 출간 직후 판매가 집중됐다 꺾이는 것과 달리 기복이 없다. 현대문학의 윤희영 문학팀장은 “지금껏 한국 문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른 작품이 없었던 데다 직접 취재한 르포르타주 느낌 등으로 주목받는 것 같다”며 “이런 판매 추이를 보이는 작품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주물공장 근로자 출신인 김동식 작가가 누리꾼과 소통하면서 엮어낸 소설집 ‘회색인간’도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는 중이다. 온라인 게시판에 올린 단편들이 알려지며 데뷔한 무명작가인데도 출간 보름 만에 3쇄에 들어갔다. 노동으로 질식당하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려낸 단편들엔 실제 체험한 노동의 감각이 잘 묻어난다는 평이 많다. 성수동 아연 주물공장에서 일한 작가의 이력까지 더해지며 독자들의 관심이 뜨겁다. 최근 한국 문학은 이렇게 ‘이슈 파이팅’ 작품들의 선전이 뚜렷하다. 비정규직, 양극화, 여성 문제, 정치·외교 이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이슈나 부조리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의 한국 문학이 주로 가족이나 개인의 내면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던 것과 뚜렷이 구별되는 현상이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이른바 ‘개저씨’ 혐오 현상 등 사회 이슈와 맞물리며 증폭됐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한국 문학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50만 부 이상 판매된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 여성으로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양성평등에 대한 관심이 사회 이슈로 부각되면서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가졌다. 데이트 폭력 문제를 다룬 강화길 작가의 ‘다른 사람’ 역시 1만 부 이상 판매되며 주목받고 있다.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등 30, 40대 여성 작가들은 지난해 말 여성 문제를 다룬 단편집 ‘현남 오빠에게’를 내며 문단 내 ‘영페미니스트’의 부상을 알렸다. 최근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인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 역시 기성세대, 권위주의에 맞선 젊은 세대들의 반격을 그려냈다. 제목에 ‘서른’을 못 박음으로써 ‘82년생 김지영’처럼 세대성과 메시지를 숨기지 않는다. 소설가 장강명 씨도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우리의 소원은 전쟁’ 등 시사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작품들이 부상하는 것은 극심한 취업난, 성 차별과 이념 갈등 등 ‘진짜 우리 문제’를 본격적으로 대변해주는 문학에 독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강유정 문학평론가는 “기존 작가들이 동시대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매우 내성적인 방식으로 문학성 극대화에 주력해 왔다”며 “하지만 최근 소설들은 사회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적극성, 외향성을 띠며 문학뿐 아니라 출판계의 활력으로 이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세대성, 소재주의에 함몰될 위험은 한계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의 큰 흐름이 ‘이슈 파이팅’ 문학으로 넘어왔다는 분석도 나온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1990년대에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시대의 패러다임이 바뀌며 여성의 내면을 치열하게 그린 작품들이 그야말로 사회적 작품들이었다”며 “하지만 지금 독자들이 원하는 건 내향적 문학이 아니라 다시 사회로 나가 그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대변해주는 문학”이라고 말했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국내 문단에선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나 출판계를 휩쓴 베스트셀러를 혹평하는 문학평론가를 쉽게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 오래다. 그런 면에서 최근 출간된 전성욱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조교수(41·사진)의 비평집 ‘문학의 역사(들)’(갈무리)은 남다르다. ‘한계에 도달한 근대문학 이후의 새로운 모색’이란 주제로 국내 주요 소설을 비평한 이 책은 자기 감각에 충실하다. 표절 사태를 빚었던 신경숙 작가에 대해선 “한 작가(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의 치열한 미학적 대결을 얽어낼 재간이 없었던” 점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성차에 대한 통념을 답습하는 인식론적 안이함”을 보인다고 평한다. 전 교수는 17일 전화 인터뷰에서 “포스트 근대로의 문턱을 넘어가는 한국 문학의 분투, 혹은 여전히 걸리고 있는 근대적 덫을 다루려 했다”고 설명했다. 그 ‘덫’에 대한 평가가, 참 거침없다. ―문단 주류 작가나 유명 작품에 거침없는 비평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비평집은 보통 청탁받아 썼던 글을 묶어 낸다. 아무래도 일관성도 떨어지고 편집위원의 의도나 지면의 성격, 출판사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기 쉽다. 이 책은 나름 일관성을 갖고 따로 쓴 비평만 모았다. 부산에서 글 쓰는 ‘반주변부적’ 위치도 영향을 미쳤다. 중심부에선 안 보이는 게 여기선 보이기도 한다.”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이 젠더정치의 복잡성을 극히 단순화하고 고루한 통념을 강화할 뿐이라고 혹평했다.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던 사회적 흐름을 잘 탄 작품이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여성들의 불합리한 삶을 통속적인 수준에서 다루는 데 그치고 있다. 오히려 여성 문제를 이분법적 시각에서 단순화할 위험을 갖고 있다. 그걸 지적하는 게 비평가들의 몫이다.” ―신경숙 작가가 미시마 작가의 ‘우국’에 담긴 근대성에 대한 치열한 고민 대신 문장 스타일만 베꼈다고 지적하며 “우리는 모두 신경숙이다”라고 했다. “표절보다 무서운 게 무분별한 인용이다. 한국 근대화 과정은 결국 서구의 근대를 받아들이고 번역, 인용하는 과정이었다. 과연 이 과정이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이뤄졌나. 개인을 비난할 게 아니라 우리의 일천한 근대화부터 반성해야 한다.” ―‘반주변부적 비평가’로 활동할 때의 고충은…. “문학 자체도 왜소화됐고 비평은 더 심각하다. 예전에는 일반 독자도 백낙청, 김현의 비평을 읽었지만 비평의 언어와 개념이 난해해지며 독자에게서 스스로 멀어졌다. 쓰기 위해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립된 데다 시스템 밖에 있다는 외로움도 더해진다.” ―어떻게 해야 비평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시대와 매체는 빠르게 변하는데 아직 비평 관행이나 유통은 예전과 같다. 상업적 출판시장 아래 대형 출판사들은 고유 특색을 잃었고 소수 작가와 비평가들만 돌고 돈다. 비평이 새롭게 읽히고 그 나름대로 의미를 갖게 되려면, 비평관행, 매체 환경이 갱신돼야 한다. 신경숙 사태가 그런 계기가 되길 기대했지만, 여전히 크게 달라진 게 없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1997년 외환위기 여파에 미술시장도 별 수 없었다. 주요 화랑이 반값까지 할인된 가격에 작품을 내놨고 김환기, 장욱진 같은 거장의 그림도 시중가 20% 선에서 경매가 이뤄졌다. 정권이 교체된 이듬해까지 미술계 역시 혹독한 구조조정과 세대교체를 거쳤다. 대표적인 것이 보수적이던 동양화의 세대교체였다. 다변화된 매체와 만화적 구성 등 자유로운 스타일로 동양화를 실험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손동현처럼 대중문화 캐릭터를 동양화에 입히며 전통을 현대적으로 전유한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김현정, 육심원 등 여성 작가들은 동양미술이 방치한 대중의 기대치를 읽어냄으로써 인지도와 상업적 성공까지 얻어냈다. 얼짱, 개인주의 문화 바람이 몰아쳤던 2003년 미술에선 팝아트 열풍이 시작됐고 2004년에는 미디어 아트가 주요 미술상과 공모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2000년 전후로 미디어 아티스트 수는 부쩍 늘었다. 실생활에 깊이 관여한 뉴미디어 문화와 디지털 환경으로 인해 미디어를 손쉬운 창작 도구로 인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내게 뷁스러운 일들’(2006년) 등의 작품으로 떠오르는 신예가 됐던 진기종 등을 꼽을 수 있다. 저자는 이렇듯 압축적인 성장을 함께 경험한 한국 미술사를 시대별로 정리했다. 전공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손쉽게 동시대 한국 미술을 조감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작품 사진과 해설을 곁들여 가독성을 높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저 친구가 코를 파요. 토마스는 이불을 안 덮고 자고요, 케일은 팔을 긁어요….” 똑똑하고 마음씨도 착한 마일즈. 하지만 날마다 고자질을 하는 고자질 대장이다. 마일즈가 고자질을 하는 건, 나빠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어른들에게 말해야 하고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 헷갈려서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고자질하지 않기 대회를 제안하는데, 마일즈가 속한 조는 마일즈 때문에 꼴찌에 처할 위기에 놓인다. 친구들도 점점 마일즈에게 등을 돌리는데, 마일즈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까. 일관성 있는 규칙을 정해 아이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주는 게 중요함을 알려준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이맘때면 어김없이 ‘신춘문예 당선집’들이 눈에 띈다. 정초 각 일간지에 발표했던 당선작들이 슬슬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오는 시기다. 어떤 작품들이 영예를 안았는지, 문학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고민과 질문은 무엇인지 한눈에 훑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당선작 자체도 좋지만 당선소감을 즐겨 읽는 편이다. 작품과는 또 다른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등단 소식을 들은 건, 서점 화장실에서였다. 그만 맨바닥에 널브러졌다. 오래 달린 사람처럼, 다리가 무거웠다”(동아일보 시 부문 당선자 변선우)는 시인. “사방에 달린 물음표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정말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지는 않을까 기대감도 갖게 된다. 겁과 기대 사이에서 꾸준히 쓰겠다”(동아일보 소설 부문 당선자 강석희)는 소설가. 이런 소감문이 감동적인 건 단지 당선자가 수백 대 1의 경쟁을 뚫고 대단한 행운을 거머쥐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는 건, 로또 당첨처럼 벼락같은 행운을 일시불로 수령하며 끝나는 게 아니다. 등단은 이제 겨우 출발일 뿐이다. 당선소감이 정말 빛이 나는 이유는 불확실성과 회의감, 낙담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골방에서 치열하게 습작했던 그들의 숨은 이야기가 마침내 드러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공연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지난해 말 런던 출장 중 크라이테리언 극장에서 ‘은행 강도에 관한 코미디’란 연극을 봤다. 언어유희가 정신없이 펼쳐지는 희극이었고 배우들은 일인다역을 물 흐르듯 소화했다. 커튼콜 시간, 공연이 끝난 뒤 내려졌던 막이 다시 올랐다. 무대의 조명이 다시 환하게 켜지며, 관객의 박수갈채가 터졌다.무대위 누군가의 삶 대신, 직업이 배우일 뿐인 ‘런던의 누군가’로 돌아온 그들은 안도감과 성취감에 벅찬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모든 공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그런 표정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만 지을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뿌듯한 미소는 그들만의 당선소감인 셈이다. 물론 우리는 작가도, 배우도 아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이런 소회를 밝힐 일은 드물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나름의 꿈이 있다. 9급 공무원이나 중등교사, 항공사 승무원이 꿈인 사람도 있고 자기만의 작은 가게나 스타트업 기업을 시작하는 게 꿈인 사람도 있다. 분명한 건, 분야가 뭐든 간에 골방에서 저마다의 무대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는 것이다. 새해를 맞은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다들 각오를 다졌겠지만 쉽지는 않다. 이렇게 애를 쓰는 게 투입 대비 효과가 있는 일인지 따지며 슬슬 타협한다.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워서 목표”라며 내심 포기하고 있을수도 있다. 그럴 때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일독해 보시길 권한다. 이들의 뜨거운 기록은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묻는다. 한 해가 끝난 뒤 올라가야 할 커튼콜 무대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관객의 환호보다 중요한 건, 거기에 대한 자신만의 대답일 것이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이 방법밖엔 없는 건가. 사실 가끔 궁금했다. 언제부터인가 여럿이 밥 먹으러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람 수대로 냅킨을 뽑는 일이 됐다. 수저 밑에 깔기 위해서다. 서로 깔아주고 전달도 해주며 일사분란하다. 물론 휴지에서 형광물질이 나와 오히려 안 좋단 얘기도 있던데 그래도 그냥 두자니 찝찝하다.이 현상에 대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사진)의 분석은 흥미롭다. 음식인문학자인 그는 “냅킨깔기는 부대물품을 간소화한 업주들의 수익성 추구와 손님들의 ‘기분 위생학’이 어우러진 결과”란 의견을 제시한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 행주로 대충 훔친 식탁은 못미덥다. 석유화학공업이 꽃을 피운 1970년대 초반 이후 냅킨은 좋은 대안이 됐다. 화학적 처리가 된 생산품은 위생적일 것이란 한국인의 근대적 계몽정신이 더해지며 냅킨 깔기는 일종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 주 교수는 최근 출간한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에서 너무 일상적이라 의식하지 못했던 21세기 한국인의 식사방식을 사회사적으로 고찰한다. 식탁은 책상으로 쓰고 밥은 교자상에 차려 먹는 이유, 한상에 밥 국 반찬이 한꺼번에 나오는 ‘공간전개형 상차림’을 고집하는 이유, 회식 명당자리가 따로 있는 이유 등이다. 비교문화적 방법으로 분석하기 위해 문헌자료 수집에만 4년간 공을 들였다. 캐나다에서 안식년 중인 저자와 e메일로 인터뷰 했다. -음식인문학자이면서 정작 반찬을 밥그릇에 쟁여두고 팔을 식탁에 올리는 등 ‘거친 식사 태도’를 가진데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왜 이렇게 먹는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서문에 썼는데…. “하하!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최근 10년 간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았고 한국음식문화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다보니 식사 방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야겠다고 느꼈다. 이어령식으로 한국인 식사방식을 강조하거나 이규태 칼럼처럼 한국 식사방식의 위대성을 주장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문화적 방법을 도입했다. 다만, 이 주제는 북미, 서유럽, 일본의 음식문화사 학자들조차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라 자료 수집에 어려움이 많았다.”-의식하지 못했던 우리의 식사문화에 유교문화의 영향과 권위주의, 산업화의 폐해 등이 다 녹아 있다. 음식문화가 한 집단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좋은 소재인 이유는 무엇인가? “음식담론은 유행이나 취향이 아니라 역사이고 사회문화적 관습이다. 인간은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산다. 지역, 공동체에 따라 식재료, 생업방식, 가족관계, 사회구조가 다르다. 이게 한 사회의 독특한 요리와 식사방식을 만들어낸다. 최근 북미, 서유럽 인문사회과학자들은 그런 이유에서 매우 활발하게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한국인이 고집하는 식사방식 중 반드시 변화가 고려돼야하는 것을 하나 꼽는다면?“밥 국 반찬의 식사구조다. 밥은 적게 먹지만 여전히 국, 찌개, 반찬을 곁들여 먹는 습관을 유지하며 고염식 문제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한식세계화’를 추진하고 있을 게 아니라 20년 후 한국인의 식사구조를 어떻게 개편할지를 추진해야한다. 국민을 위한 ‘음식정치’가 필요하다.” -‘집단주의적 함께 식사’는 한국 문화 가운데 아주 뿌리 깊다. 요즘은 ‘혼밥족’ 등 변화가 나타는데 ‘함께 식사’의 의미와 한계를 짚어준다면? “‘함께 식사’는 매우 인간적인, 휴머니즘 발현 현장이다. 다만 강요된다는 게 문제다. 계급과 차별이 강조되는 이것이 바로 ‘집단주의적 함께 식사’다. 유교문화의 엄숙주의 영향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함께 식사’는 월1회 이상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한국인의 식사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역시 유교문화인가?”기본바탕은 유교문화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진행된 ‘맥도널드화’ 영향이 크다. 한국음식점 메뉴는 겉으로 보기엔 전통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장에서 만든 음식과 형식적 메뉴 구성에 머물고 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훈련받지 않은 서비스 종사자가 많다.“그는 효율성과 경제성만 추구하는 문화 때문에 식탁에서 도자기 식기나 놋그릇이 사라지고 대신 저렴한 멜라민 수지 식기와 스테인리스이 뒤섞인 ‘잡종적 양상’을 띄게 됐다고 지적한다. -책을 읽은 독자들의 음식문화와 식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는지?”역사적 근원과 변화상에 따른 우리의 모습과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마치 포르노처럼 대중매체를 가득 채운 ‘맛있는 음식들’에 너무 연연하지 말았으면 한다. 맛있는 음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어떤 그릇에 내고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배려인지, 식사순서를 어떻게 해야 식탁 위 대화가 풍성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다. 독자들이 주도해 가정, 직장, 학교, 또래집단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식사방식의 규칙을 만들어보려는 변화가 생긴다면 좋겠다.“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서점들이 요즘 책 추천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데이터를 분석해 만든 알고리즘을 통해 자동으로 이뤄진다. 책 추천은 까다로운 일이다. 책의 종류는 너무 많고 지적 수준, 최근 관심사, 성격, 취향은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과연 기계가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을까.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책 추천 서비스가 어디까지 왔는지 직접 체험해봤다. ○ 자녀 나이 족집게…어려운 질문엔 ‘침묵’ 교보문고는 지난해 말 추천 코너를 신설했다. 장기완 교보문고 모바일인터넷 마케팅팀 과장은 “기존에는 특정 책을 구매한 사람들이 함께 샀던 책을 보여주는 정도였다면 이 서비스는 개인의 구매 이력과 비슷한 성향의 구매자를 함께 분석해 책을 권한다”고 설명했다. 이 서점 회원인 기자가 홈페이지에서 로그인을 한 후 추천 코너에 들어가니 눈에 띄는 건 ‘5세 수학학습지’였다. 언젠가 구매했던 다른 책 정보를 바탕으로 계산한 듯했다. 실제로 기자의 아이는 올해 다섯 살이라 놀라웠다. 최근 즐겨 읽는 종교서적 추천도 흡족했다. 다른 서점에서 이미 산 책도 포함돼 있을 정도로 적중률이 높았다. 관심이 없는 ‘보고서 잘 쓰는 법’이 포함된 건 옥에 티였다. 인터파크 도서는 챗봇(Chatbot·대화형 로봇) ‘톡집사’가 책을 추천한다. 톡집사와 대화창을 열고 추천 테마 중 ‘책 읽는 겨울방학’을 선택했다. 광범위한 주제지만 4∼7세용 그림책이 주로 떴다. 톡집사도 아이 나이까지 얼추 맞힌 셈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상담을 하려고 하자 별도의 창이 뜨며 “원활한 답변은 평일 오전 9시∼오후 6시, 주말 오전 9시∼오후 1시까지 된다”는 안내가 나왔다. 로봇이 칼퇴라니. 서점에 문의하자 “가격이나 할인 정보 외 개별 취향에 따른 추천 문의는 상담원이 보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예스24는 장바구니 내역, 구매자의 리뷰, 평점을 분석해 책을 권한다. 하지만 책을 골랐을 때 관련성 높은 책이 상시 노출되는 기존 방식과 외형상 다른 점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이 서점은 현재 딥러닝을 기반으로 검색, 조회, 내용 유사도까지 분석한 개인화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강석민 예스24 디지털플랫폼개발팀장은 “올해 상반기에 콘텐츠 내용까지 분석한 추천 서비스를 전자책을 대상으로 먼저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 구매 끌어내는 인공지능의 취향저격 국내 책 추천 서비스는 아직 사람 손이 더 갔고 정확도도 아쉬웠다. 하지만 출판계에서는 서점과 인공지능의 결합이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한 해에 쏟아지는 출판물 양만 8만여 종이어서 신뢰할 만한 추천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것. 교보문고가 최근 고객 2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가장 신뢰하는 추천 정보는 뜻밖에도 고객 평점과 서평(29.3%), 시스템 추천(28.5%)이었다. 언론사 추천(10.1%), 베스트셀러 순위(14.4%), 지인 추천(17.7%)을 훨씬 앞지르는 수치다. 교보문고 측은 “추천 코너는 하루 2만∼3만 건의 페이지뷰를 올리고 있고 실제 구매로도 연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파크는 톡집사 이용 후 책을 사는 독자 수가 스스로 홈페이지에 접속해 책을 사는 경우보다 3배가량 많다고 밝혔다. AI 서비스는 24시간 추천과 상담이 가능하다. 한 서점 관계자는 “MD 추천보다는 AI 기반의 추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이를 위해 관련 전문 인력을 더 뽑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사람 대신 로봇 상담원이 책을 파는 것도 먼 미래 일만은 아닌 셈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이 방법밖엔 없는 건가. 사실 가끔 궁금했다. 언제부터인가 여럿이 밥 먹으러 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사람 수대로 냅킨을 뽑는 일이 됐다. 수저 밑에 깔기 위해서다. 서로 깔아주고 전달도 해주며 일사분란하다. 물론 휴지에서 형광물질이 나와 오히려 안 좋단 얘기도 있던데 그래도 그냥 두자니 찝찝하다. 이 현상에 대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사진)의 분석은 흥미롭다. 음식인문학자인 그는 “냅킨깔기는 부대물품을 간소화한 업주들의 수익성 추구와 손님들의 ‘기분 위생학’이 어우러진 결과”란 의견을 제시한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 행주로 대충 훔친 식탁은 못미덥다. 석유화학공업이 꽃을 피운 1970년대 초반 이후 냅킨은 좋은 대안이 됐다. 화학적 처리가 된 생산품은 위생적일 것이란 한국인의 근대적 계몽정신이 더해지며 냅킨 깔기는 일종의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 주 교수는 최근 출간한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에서 너무 일상적이라 의식하지 못했던 21세기 한국인의 식사방식을 사회사적으로 고찰한다. 식탁은 책상으로 쓰고 밥은 교자상에 차려 먹는 이유, 한상에 밥 국 반찬이 한꺼번에 나오는 ‘공간전개형 상차림’을 고집하는 이유, 회식 명당자리가 따로 있는 이유 등이다. 비교문화적 방법으로 분석하기 위해 문헌자료 수집에만 4년간 공을 들였다. 캐나다에서 안식년 중인 저자와 e메일로 인터뷰 했다. -음식인문학자이면서 정작 반찬을 밥그릇에 쟁여두고 팔을 식탁에 올리는 등 ‘거친 식사 태도’를 가진데 대한 반성적 성찰에서 ‘왜 이렇게 먹는가’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고 서문에 썼는데…. “하하!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최근 10년 간 외국에서 온 유학생이 많았고 한국음식문화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다보니 식사 방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야겠다고 느꼈다. 이어령식으로 한국인 식사방식을 강조하거나 이규태 칼럼처럼 한국 식사방식의 위대성을 주장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비교문화적 방법을 도입했다. 다만, 이 주제는 북미, 서유럽, 일본의 음식문화사 학자들조차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것이라 자료 수집에 어려움이 많았다.” -의식하지 못했던 우리의 식사문화에 유교문화의 영향과 권위주의, 산업화의 폐해 등이 다 녹아 있다. 음식문화가 한 집단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좋은 소재인 이유는 무엇인가? “음식담론은 유행이나 취향이 아니라 역사이고 사회문화적 관습이다. 인간은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산다. 지역, 공동체에 따라 식재료, 생업방식, 가족관계, 사회구조가 다르다. 이게 한 사회의 독특한 요리와 식사방식을 만들어낸다. 최근 북미, 서유럽 인문사회과학자들은 그런 이유에서 매우 활발하게 음식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한국인이 고집하는 식사방식 중 반드시 변화가 고려돼야하는 것을 하나 꼽는다면? “밥 국 반찬의 식사구조다. 밥은 적게 먹지만 여전히 국, 찌개, 반찬을 곁들여 먹는 습관을 유지하며 고염식 문제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한식세계화’를 추진하고 있을 게 아니라 20년 후 한국인의 식사구조를 어떻게 개편할지를 추진해야한다. 국민을 위한 ‘음식정치’가 필요하다.” -‘집단주의적 함께 식사’는 한국 문화 가운데 아주 뿌리 깊다. 요즘은 ‘혼밥족’ 등 변화가 나타는데 ‘함께 식사’의 의미와 한계를 짚어준다면? “‘함께 식사’는 매우 인간적인, 휴머니즘 발현 현장이다. 다만 강요된다는 게 문제다. 계급과 차별이 강조되는 이것이 바로 ‘집단주의적 함께 식사’다. 유교문화의 엄숙주의 영향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함께 식사’는 월1회 이상 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재 한국인의 식사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역시 유교문화인가? ”기본바탕은 유교문화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진행된 ‘맥도널드화’ 영향이 크다. 한국음식점 메뉴는 겉으로 보기엔 전통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장에서 만든 음식과 형식적 메뉴 구성에 머물고 있다.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훈련받지 않은 서비스 종사자가 많다.“ 그는 효율성과 경제성만 추구하는 문화 때문에 식탁에서 도자기 식기나 놋그릇이 사라지고 대신 저렴한 멜라민 수지 식기와 스테인리스이 뒤섞인 ‘잡종적 양상’을 띄게 됐다고 지적한다. -책을 읽은 독자들의 음식문화와 식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는지? ”역사적 근원과 변화상에 따른 우리의 모습과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 마치 포르노처럼 대중매체를 가득 채운 ‘맛있는 음식들’에 너무 연연하지 말았으면 한다. 맛있는 음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어떤 그릇에 내고 어떻게 배치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배려인지, 식사순서를 어떻게 해야 식탁 위 대화가 풍성할지 고민하는 게 먼저다. 독자들이 주도해 가정, 직장, 학교, 또래집단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식사방식의 규칙을 만들어보려는 변화가 생긴다면 좋겠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신앙심이 깊은 한 남자가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날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기도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낙담해 신에게 따졌다.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들어주지 않는 거죠?” 신이 대답했다. “얘야, 제발 복권부터 좀 사거라.”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다. 복권에 당첨되고 싶어 하면서, 정작 복권을 구매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남자라니. 정녕 그는 신조차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 우리의 모습이 있다. ‘변해야 돼’ ‘달라져야 돼’ 투덜대면서도 딱히 별것을 하지는 않는다. 때론 간절히 새로운 도전을 갈망하면서도 생각만 간절하고 몸은 무겁다. 원치 않는 일상에 짓눌려가던 영화의 주인공 리즈는 이 우화를 떠올린 뒤 이탈리아, 인도, 발리로 떠나는 세 장의 비행기표를 끊는다. 번민만 하는 대신에 일단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결과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건 뭐라도 시작해야 그걸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비행기 티켓을 쥔 리즈가 말한다. “오늘 나는 적어도 세 장의 복권을 산 셈이다.” 연초가 되면 다들 새로운 소망과 꿈을 가진다. 리즈가 산 복권은 비행기 티켓 세 장이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일주일째, 우리 손에 들린 꿈의 티켓은 뭔가.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조직에서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흔히 ‘미꾸라지’로 비유된다. 하지만 사실 미꾸라지는 흙탕물을 일으키는 훼방꾼이 아니라 산소를 공급해주는 꽤나 유익한 존재다. ‘과학적’ 관점에서 다시 풀이해 보자면, 미꾸라지 같은 존재들은 오히려 새로운 의견이나 활력을 공급해주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인 셈이다. 서울시립과학관장이자 대중을 위해 쉽고 재미있게 과학을 풀어쓰기로 유명한 저자는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오해되거나 무시되는 과학적 진실들을 구체적인 실례를 바탕으로 풀어준다. 장내 세균, 늦잠, 감기 등 일상적인 소재에서부터 사이비 종교, 인공지능 등 사회 현안까지 모두 과학의 눈으로 재해석한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저자가 들고 있는 다양한 사례들을 보면 사실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과학적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데는 여전히 서툴다. 항생제에 대한 공포가 대표적이다. 많은 이들이 내성을 걱정해 전문가가 조제해준 약에서 일부러 항생제를 골라내서 버린다. 물론 항생제는 남용되면 안 되는 약이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 몸의 좋은 균을 죽이고 내성을 키워 병을 악화시키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균을 잡기 위해서는 항생제를 반드시 처방대로 복용해야 한다. 내성은 약을 오래 먹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근절되기 전 투약을 중단해서 생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고 말한다. 과학적 지식은 어느 때보다 축적된 시대지만, 아직 삶의 태도는 과거와 비슷하다. 면밀한 검토 없이 받아들이거나, 막연히 불안해하고, 근거 없이 자신한다. 이 책에서처럼 과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읽고, 해석하다 보면 어쩌면 좀 더 합리적인, 어쩌면 좀 더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위트 있는 글쓰기 덕분에 술술 잘 읽힌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클래식계 아이돌’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조성진(24)이 올해 전국 투어 공연을 시작한다. 국내에서 전국 순회 연주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4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조 씨는 “쇼팽 콩쿠르 첫 한국인 우승자라는 타이틀, 동양인 연주자라는 선입견, 특정 작곡가의 음악은 이러이러할 것이란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나만의 해석을 담은 연주를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새해 첫 공연을 한국에서 하게 돼 더욱 뜻깊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 데뷔했고 베를린 필과 협연하는 등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무대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피아니스트로서 보폭을 넓혀 가고 있다. 그는 “이런 무대들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한 것을 느낀다. 쇼팽을 넘어서 더 많은 레퍼토리를 연구하고 시도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7일 부산 공연을 시작으로 서울(10, 11일), 전주(13일), 대전(14일)으로 이어지는 4개 도시 투어에서 그는 쇼팽뿐 아니라 베토벤 소나타 3번과 40번, 드뷔시 작품 등을 연주한다. 베토벤의 초기와 후기 작품을 나란히 배치한 이유 역시 베토벤에 대한 선입견에 도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운명’처럼 운명에 맞서는 곡이 있다면 운명에 순응하는 베토벤의 작품도 있어요. 최대한 집중해서 곡마다 나만의 해석이 가미된 다른 느낌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국 투어 티켓은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단 몇 분 만에 매진돼 그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1994년생으로 올해 황금 개의 해를 맞은 그의 한국 공연 일정은 어느 때보다 풍성하다. 9월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듀오로 무대에 서고 11월에는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다. 12월에는 도이체그라모폰(DG) 120주년 기념 무대에 오른다. 이날 간담회에는 추첨을 통해 선발된 400여 명의 관객이 참석했다. 휴식을 취할 때 무엇을 하는지, 베를린에서의 일상은 어떤지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좋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혼자 있는 시간도 즐긴다”면서 “하루 4시간은 규칙적으로 연습하려고 하고 그 외 시간에는 쉬거나 친구들을 만나고 맥주도 즐겨 마신다”며 또래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밝혔다. 그는 2020년까지 공연 스케줄이 이미 다 짜여 있다. “대중의 관심이 사라진 후, 젊은 연주자도 아니고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에는 이른 30대의 애매한 나이가 됐을 때 어떤 활동을 할지 가끔 고민합니다. 더 연구하고 해석해서 30대쯤에는 브람스의 작품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이날 조 씨는 드뷔시 ‘영상’ 2집 중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2, 3악장을 연주해 팬들의 참석에 답례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버려진 김치 저온저장 창고나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된 물레방앗간…. 주민들의 일상과 문화가 녹아든 가장 평창다운 공간이지만, 개발과 변화로 점차 밀려나거나 잊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 인터랙티브 아트와 증강현실 게임 등 최첨단 기법들을 적용한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대거 몰려온다. 겨울올림픽 대회 개최를 계기로 평창군 6개 지역의 이색 공간에서 열리는 미디어아트 프로젝트 ‘平窓: peace over window’전은 예술을 매개로 지역을, 지역민을 재발견한다.》 ○ 지역을 재발견하다 씨감자를 보관하는 허름한 감자창고와 지역의 자랑거리인 광천동굴, 오일장 옆의 컨테이너와 물레방앗간…. 전시회가 열리는 장소는 일반적인 갤러리가 아니라 지역적 개성이 뚜렷한 이색 공간들이다. 예술을 통한 지역 재생의 대표적 사례가 된 일본 니가타현 에치고쓰마리 지역의 ‘에치고쓰마리 트리엔날레’에서 착안했다. 에치고쓰마리 트리엔날레는 광대한 자연을 무대 삼아 예술가와 지역민의 합동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전시공간을 정하는 데 지역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했다. 김준, 김창겸, 문준용, 장샤오타오 등 미디어아트를 이끄는 국내외 주요 작가 30여 명의 작품과 고려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5개 대학의 출품작들은 각 공간의 특성에 맞춰 배치했다. 어둡고 울림이 많은 광천동굴에는 라이트아트 작품을, 건조한 저온저장 창고에는 관람객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감지해야 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방식이다. 각 전시장까지는 10∼15분 정도 걸리는데 전시장을 순환하는 아트 투어 버스를 운영해 중간중간 들러 지역을 편하게 관광하도록 했다. ○ 축제의 주인공은 지역민 전시회는 미디어아트를 통해 지역 특색뿐 아니라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축제 뒤에 자칫 가려지기 쉬운 지역민들도 조명한다. 미래, 소통, 상호 교감 등 미디어아트의 핵심적인 면모들은 올림픽을 계기로 새로운 도약과 출발을 꿈꾸고 있는 평창의 희망과 통하는 점이 많다. 실제 프로젝트는 주민들을 작품의 주체이자 소재로 끌어안았다. 이재형 작가의 ‘평창의 얼굴’은 빅데이터 기반의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 작품이다. 평창 주민들이 꼽은 평창 관련 키워드들이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빈도를 집계해 작품에 반영한다. 긍정적인 단어의 집계량이 많으면 작품 속 얼굴이 웃는 표정으로 바뀐다. 김창겸 작가는 평창군민 100명의 얼굴을 모은 비디오아트 ‘얼굴’을 선보인다. 이런 방식으로 총 200명의 군민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다. 증강현실 등 최첨단 기법을 적용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조세민 작가의 ‘판토맷 우주방’은 관람자가 3D 안경을 끼고 고개를 움직이면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축제를 360도 전 방향에서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예술감독을 맡은 김창겸 작가는 “미디어아트 분야가 망라된 작품을 통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며 올림픽을 계기로 꿈꾸는 미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다음 달 2∼28일 강원 평창군 봉평면 무이리 등 6곳에서 열린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한국 ‘보통 남자’들의 삶을 다룬 은희경의 장편소설 ‘마이너리그’와 지난해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화제작 ‘82년생 김지영’.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두 작품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개띠들의 이야기란 점이다. 전쟁이 남긴 상흔과 산업화를 동시에 겪어낸 1958년생 개띠들은 이제 환갑을 맞았고,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을 뚫고 사회 진출에 성공한 1982년생들은 내 집 마련, 육아 부담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한국 사회의 부침이 집약된 개띠들의 삶은 이렇게 각별하게 다뤄져 왔다. 그 뒤엔 때로는 작품으로, 때로는 행보 자체로 시대적 경험을 응축해서 보여주며 활동 반경을 넓혀온 문화예술인들이 있다. 현대사 격동의 중심에 섰던 개띠들은 문화계에서도 왕성한 활동으로 독특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금개띠 해에 활약이 더 기대되는 문화계 개띠 인맥을 세대별 특징을 중심으로 짚어봤다. ○ 현대사 부침 내면화, 한류 열풍 주도 베이비부머 핵심 세대인 1958년생들은 전쟁을 경험한 부모 아래에서 자라나며 산업화, 민주화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모두 관통했다. 자연히 이들은 문화계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순원 구효서 한비야 서정홍 등은 출판계에서 대표적인 중견 작가군을 형성하며 버팀목이 되고 있다. 황폐함 속에서 지낸 경험으로 유년시절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6·25전쟁을 겪었던 부모 세대와의 괴리감, 민주화 항쟁 당시의 시대적 아픔이 작품 속에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 특징이다. 1970년생들은 경제 부흥기에 태어났지만 사회 진출 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으며 풍요와 불안을 함께 맛봤다. 20대에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경험한 이들은 풍부한 감성을 바탕으로 문화계 각 분야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대표적이다. 한류 열풍의 토대를 다진 예술인 중에도 개띠가 많다.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를 비롯해 이병헌, 황정민, 김혜수, 차승원, 유해진 등 독보적 연기력을 지닌 스타들이 모두 70년생들이다. ○ 피 말리는 경쟁 뚫고 극대화된 스타성 1982년생들은 극심한 취업난 속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회에 진출했다. ‘삼포족’ ‘이태백’ 등으로 표현되는 고단한 삶 이면에 ‘욜로(YOLO)’ 문화가 공존하고 해외 문화에 개방적인 것이 특징이다. 한국 뮤지컬 배우로는 처음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 선 배우 홍광호와 뮤지컬 여제로 통하는 차지연은 82년 동갑내기로,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배우 송혜교 비 현빈 등 글로벌 시장으로 적극적으로 진출을 꾀한 스타도 많다. 1994년생 개띠 문화인들은 아이돌 그룹의 홍수 속 극한 경쟁에서 스타성이 극대화됐다. 특히 대중문화계에서 94년 개띠들은 ‘황금 라인’을 형성했다. 방탄소년단 리더 RM과 제이홉 수지 혜리 설현 등 스타성이 큰 아이돌이 모두 94년생. 설현의 소속사 FNC엔터테인먼트의 유순호 부장은 “2010년대 초반에 데뷔한 20대 개띠 아이돌은 연간 아이돌 그룹 100개 팀이 출현하는 피 말리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데다 소셜미디어의 힘까지 합쳐지며 스타성이 커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며 클래식계 아이돌로 입지를 굳힌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94년생이다. 박선희 teller@donga.com·임희윤 기자}

이효리의 컴백으로 가장 긴장한 사람들은 동료 가수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능업계의 라이벌들도 아니었다. TV 앞에서 제일 기가 죽은 건 아마도 요가 강사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효리가 오랜만에 예능에 나와 선보인 요가를 보며 ‘어랏, 우리 선생님도 저만큼 못 하던데…’라는 의구심을 품은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이효리는 인도 마이솔의 요가 지도자가 탄생시켰다는 ‘아쉬탕가 요가’를 일반인들에게까지 회자되게 한 장본인이다. 이효리가 하면 뭐든 유행이 되지만, 역으로 이효리는 늘 유행이 될 만한 걸 한다. 다이어트 요가에 질린 사람들이 슬슬 본토 요가로 관심을 돌리던 무렵, 그녀는 그런 수련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복귀해서도 “집착의 결집인 방송으로 얻은 괴로움을 요가로 내려놨다”며 프로 뺨치는 실력으로 전국의 요가 강사들에게 ‘의문의 일패’를 안겼고 말이다. 다 가진 이효리가, 요가까지 잘하다니. 그런데 이젠 대중이 그런 걸 원한다. 본업이 멋진 건 기본, 취미도 제대로 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시영이란 배우를 다시 봤던 것도, 복싱이란 취미 때문이었다. 프로 선수로까지 뛰었으니 본업이 뭔지 헷갈릴 정도로 잘했다.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다부지게 링 위에 선 여배우라니. 마치 인생은 원래 이렇게 뜨겁고 치열하게 사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그 배우의 아우라가 달라졌다. 제대로 해내는 취미엔 열정, 몰입, 끈기가 다 있기 마련이다.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며 자기만족적인 소비를 아끼지 않는 ‘욜로(YOLO)’나 일과 삶의 조화가 최우선이라는 ‘워라밸’이 대세가 되면서, 취미에 과감히 투자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늘고 있다. 얼마 전 함께 촬영 나갔던 카메라 기자는 전문 다이버였다. 중형차 한 대 값을 들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전문가 간지’를 위해 장비는 곧 죽어도 수중업계 최고 브랜드만 쓴다고 했다. 어쩐지 그 고집조차 소신으로 느껴질 만큼, 그는 행복해 보였다. 가디언 전 편집국장이 쓴 ‘다시, 피아노’란 책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어렵기로 유명한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를 완주하기까지의 기록이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편집국장이 쇼팽이라니, 과연 일은 제대로 했을까 싶지만 그는 위키리크스 외교문건 폭로 같은 특종을 지휘하고 가디언의 디지털화를 이끈 누구보다 유능한 리더였다. 그런 그가 매일 출근 전 20분, 하루를 견딜 힘을 얻기 위해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장면은 굉장한 울림을 준다. 탁월한 일과 완벽한 취미,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는 그 사회의 저력과 품격까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쇼팽의 난곡(難曲)을 때려눕혀 버리는 편집국장이 가능한 ‘사회적 토양’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동경해 왔던 것들이다. 입시와 상관없는 취미는 뒷전인 교육, 오랫동안 일중독이 훈장이던 문화 속에선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도 달라지고 있다. 고난도 요가를 선보이는 가수나 링 위의 여배우처럼 삶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취미의 진가에 눈뜬 이들이 늘어나는 걸 보면 그렇다. 본업만큼 취미를, 물질만큼이나 여가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직 무르익어야 할 제도적 여건이 많지만 피아노 치는 편집국장도 더는 먼 꿈만은 아닌 시대. 오랜만에 요가 매트를 다시 펼쳐본다.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teller@donga.com}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들르면 항상 기념품을 사오는 편이다. 전시 자체보다 기념품 쇼핑이 더 즐겁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왕희지 서체 비닐파일이나 모네 그림이 그려진 마우스 패드 같은 것들을 신중히 고르다 보면, 전시실에서 받은 여러 가지 감흥을 저렴한 가격의 그 소품에 압축시켜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 캐릭터숍이나 잡화점에서 자질구레한 물건을 사 모으는 즐거움이 이에 못지않다. 생활용품을 사는 것일 뿐인데 기념품 숍에 들른 것처럼 들뜬다. 워낙 상품 종류가 다양해진 데다 가격도 저렴해 소비의 즐거움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판다 모양 세탁바구니와 화분, 장식용 리본과 여행용 목베개, 휴대용 아로마 오일. 잔뜩 담았는데도 1만 원 남짓밖에 하지 않는다. 꿀단지 숨겨놓은 것처럼 잡화점에 자꾸 가게 되는 이유다. 잡화 소비는 최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푼돈을 마구 쓴다는 점에서 ‘탕진잼’(탕진하는 재미)이라고도 불리고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고 ‘감성 값’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딱히 필요 없는 걸 소비한다는 점에서 ‘예쁜 쓰레기’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은 작은 소비로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다. 일상의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내 손끝에서 잘 꾸려지는 듯한 느낌과 아기자기한 위안을 준다. 지속적인 소비를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정이다. 잡화 소비가 대세가 되며 요즘 잡화점들은 다이소나 플라잉타이거, 코즈니처럼 브랜드화된 대규모 생활용품 매장으로 진화해 있다. 싸구려 제품을 망라해놓은 예전의 천원숍이 아니라, 유행하는 디자인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더해진 제품을 판다. 판매품목만 수만 개. 거의 모든 잡스러운 것들이 다 있다. 가용범위 내에서 소비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려다 보니, 갈 수 있는 곳은 결국 이런 곳들이 된다. 싸고 다양해서 충동적 소비도 양해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문을 여는 대형 쇼핑몰들도 소위 ‘라이프스타일 숍’으로 명명한 잡화 매장들을 필수적으로 유치하거나 강화하는 추세다. 그만큼 집객 효과가 높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경기 광명 이케아에 주말마다 미어터지는 인파에는 1000원대의 그릇과 몇천 원대 쿠션 같은 전략적 잡화 상품이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다. 대응 차원에서 국내 가구업체들도 자질구레한 생활용품 판매를 대폭 늘리고 있다. 장사가 된다 싶으니 의류, 화장품 업체들도 이 시장에 뛰어든다. 그야말로 잡화의 전성시대다. 안 그래도 사는 건 팍팍한데, 불황까지 겹치니 자잘한 소비로 소박한 몰입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수첩에 붙일 홀로그램 스티커나 캐릭터 칫솔걸이를 사면서 오늘 하루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는 느낌과 위안을 받는 것이다. 재밌는 건 덕분에 잡화시장 규모는 10조 원으로까지 성장했고 5년 뒤엔 18조 원으로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어느 때보다 작고 소소한 소비들이 모여서, 어느 때보다 거대한 잡화의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teller@donga.com}

첫아이의 출산을 앞두면 궁금해지는 게 많다. 특히 육아용품의 세계는 끝이 없다. 범보, 부스터, 바운서, 힙시터에 이르기까지 난생처음 들어보는 용품들이 쏟아진다. 각 제품의 정확한 차이점과 장단점, 주요 브랜드별 특성까지 정확히 알아야 구매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보통 여자들은 결혼을 앞두고 극심한 선택장애를 경험하게 되는데 육아는 그것의 두 배쯤은 되는 압박감을 준다. 내 아이가 쓰게 될 것이라 결코 실수하고 싶지 않아서다. 많은 엄마들은 집념의 검색 끝에 비교 분석을 똑소리 나게 마친다. 이런 정성으로 다른 걸 했다면 뭐가 돼도 됐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따져 봐도 꼭 한 번씩 ‘헛똑똑이’가 되는 일이 생긴다. 얼마 전, 출산을 앞두고 꼼꼼히 육아용품을 준비 중이던 친구가 ‘선배 맘’인 내게 특정 브랜드의 매트를 아냐고 물었다. 체온조절 효과가 있다는 신소재 ‘아웃라스트’로 만든 제품인데 유해성 논란에 휩싸였다는 거였다. 유아들의 태열, 아토피에 좋다더니 원인 불명의 잔사 현상(섬유에서 흰 가루가 떨어지는 것)에 알레르기성 두드러기, 심한 발진 유발까지 의심받고 있었다. 문제의 제품은 ‘국민 쿨매트’로까지 불렸다. 친구는 미리 사뒀던 제품을 모두 환불했다고 했다. 부랴부랴 찾아보니, 우리 집에도 이 회사에서 나온 유모차 매트와 담요가 여럿 있었다. 대부분의 쇼핑몰에서 상위권에 올라 있어 지나치기가 어려운 브랜드였다. 유모차에 탈 때마다 그 제품을 깔고 곤히 잠들었던 아이가 떠오르며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장 문제가 된 건 해당 소재가 들어간 제품들뿐이라 해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겐 이미 독성 화학용품 오용으로 인한 사회적 상처가 있다. 세슘 분유, 메탄올 물티슈 논란 등이 터질 때마다 ‘옥시 사태’의 그림자가 어른대 가슴이 철렁한다. 하지만 엄마들이 아무리 꼼꼼히 본들,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업체가 제공하는 정보 이상을 알기 어렵다. 못 믿을 천연·무독성 광고에도 속수무책이다. 성분을 제대로 표기하지 않은 생활화학용품도 많아 전문가인들 부작용을 알 수 없다. 그러니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이번에는 운 좋게 피해갔다는 안도, 다음번엔 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뭐가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교차할 뿐이다. 정부는 유해성 여부와 경위를 밝히기 위해 문제의 제품뿐 아니라 같은 소재가 적용된 다른 제품들까지 모두 안전성 검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업체도 문제가 커지자 사과문을 게재하고 문제 제품들은 리콜을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원인 모를 아이의 잦은 기침이나 기관지염도 이것 때문은 아니었는지 뒤늦게 의심을 품기 시작한 많은 엄마들에겐 어쨌거나 모두 뒷북일 뿐이다. 아이들은 얼룩덜룩 발진이 난 채로 잠들어 있다. 무책임한 기업과 매번 뒷북치는 정부에 화가 치민다. 하지만 잠든 아이를 토닥이며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엄마 때문이야’ ‘엄마가 미안해’밖에 없다. ‘무독성’이라고 홍보하는 제품들, ‘국민’자 붙여가며 마케팅 하는 제품들은 지금도 여전히 쏟아진다. 얼마나 더 똑똑해져야만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것인지, 또다시 ‘헛똑똑이’가 되고 만 엄마들은 걱정이 앞선다.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