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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을 위해선 ‘대형기 도입’이라는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22일 서울 강서구 티웨이항공 본사에서 만난 정홍근 티웨이항공 대표는 중장거리 항공기인 에어버스의 A330-300 도입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저비용항공사(LCC) 중에 티웨이가 3등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이걸 깨고 선두로 나가기 위해서 중대형기를 도입해 지각 변동을 일으켜보자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 도약을 위한 승부수 ‘A330-300’‘ 티웨이항공은 올해 초 A330-300항공기를 도입했다. 항속거리 약 1만 ㎞의 대형기로 싱가포르를 넘어 호주, 동유럽을 충분히 갈 수 있는 중장거리용 항공기다. 국내 LCC들의 주력 기종인 B737과 A321, A320 항공기들은 일본과 중국, 동남아 정도까지만 날 수 있다. 단거리 노선 시장은 포화상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다 보니 LCC들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지적도 있다. 티웨이항공도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카드’가 필요했고, 과감하게 대형기 도입을 선택한 것이다. 티웨이항공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한 편으로 기회였다. 경쟁자들이 긴축 경영을 할 때 티웨이항공은 오히려 A330 도입을 서둘렀다. 정 대표는 “A330 도입은 3~4년 전부터 고민했는데,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A330의 리스료가 매우 저렴해졌다. 매력적인 가격으로 내려갔고, 그 순간이 도입 적기라고 봐서 결정했다”고 말했다. 코로나 기간 항공기 리스료가 저렴해진 것을 역으로 이용해 위기의 순간에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던 것이다. A330 계열의 대표 모델은 A330-300과 A330-200 항공기다. 티웨이항공은 경제성을 볼 때 A330-300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정 대표는 “사실 A330-300이냐 200이냐를 두고 매우 망설였다. 그런데 A330-200은 좌석 수가 270석 정도였고, 화물을 싣는 공간도 크지 않았다. 반면 300은 좌석 수가 347석이었다”며 “노선별 경제성을 따져본 결과 A330-300이 훨씬 좋다고 봤다. 세계 시장에서도 300이 더 인기가 많았고, 도입 비용도 200과 300이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티웨이항공의 A330-300은 대형항공사들과는 다르게 기내 좌석에 달린 모니터(AVOD)를 없앴고, 경량화된 시트를 적용했다. 더 가벼워진 만큼 연료 효율성도 높아졌다. 모니터가 없는 대신 승객들에게 저렴한 운임 제공이 가능해졌다. 특히 자체 분석 결과 항공기 무게가 훨씬 가벼워지면서 로마와 이스탄불, 파리까지도 갈 수 있는 항속거리가 나온다는 게 티웨이항공의 설명이다. ● 12월 23일 인천~호주 노선 취항 티웨이항공은 23일 인천~호주 노선에 정식 취항하면서 A330-300을 투입했다. 싱가포르와 방콕에 A330-300을 투입한 바 있지만, 비행시간이 10시간 넘는 장거리 노선 운항에는 첫 발걸음을 뗀 것이다. 호주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해 호주의 콴타스 항공과 젯스타 등도 취항하고 있어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노선이다. 신생 취항 항공사인 티웨이항공은 대한항공과 콴타스, 아시아나항공 등의 견제와 그들이 구축해 놓은 보이지 않는 진입장벽을 이겨내야 한다. 티웨이항공은 호주의 로컬 항공사와의 협력을 추진하는 등의 방법으로 경쟁력을 갖춘다는 전략이다. 정 대표는 “호주의 버진오스트레일리아 항공사와 노선 협력을 할 계획이다. 호주 내에 있는 LCC들과 협력해 노선 네트워크를 넓혀갈 계획”이라며 “기존 대형 항공사들보다 운임을 저렴하게 하면서 주 4회 운항한다고 하니 호주 교민들과 유학생 등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고 말했다. 인천~시드니를 티웨이항공으로 가고, 시드니에서 호주 다른 도시 및 호주 인근 국가로의 여행은 호주 로컬 항공사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시드니의 경우엔 직항 노선과 이원 노선(시드니를 거쳐 가는 노선) 수요 비율이 65:35 정도라고 한다. 직항과 이원 수요를 적절하게 흡수한다면 연착륙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 2023년 티웨이항공 구독 서비스 오픈 특히 티웨이항공은 2023년 상반기(1~6월) 중 티웨이 멤버십을 운영할 계획이다. 일종의 구독 멤버십으로, 1년 동안 일정 금액을 내면 항공권 제공과 각종 서비스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 대표는 “구독비 이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확실한 충성 고객층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장기적으로 티웨이항공은 멤버십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 데이터 기반 마케팅을 강화할 계획이다. 티웨이항공은 장거리 운항을 위한 기본적인 준비와 서비스도 모두 마쳤다. 최근 A330의 스페어 엔진(예비 엔진)을 추가로 구입했다. 엔진 등에 문제가 생길 경우 빠른 대처가 가능해졌다. 정 대표는 “롤스로이스 엔진을 쓰는데, 롤스로이스 측과 토탈 케어 어그리먼트라는 계약을 맺었다. 문제가 생기면 빠르게 대처가 가능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라며 “요즘 고객들은 제공되는 기내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보지 않고, 본인들이 전자기기에 콘텐츠를 담아온다. 이런 고객 트렌드에 맞춰서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겠다”고 소개했다. 티웨이항공은 내년 하반기(7~12월) A330-300 항공기를 2대 더 들여올 예정이다. 항공기가 추가되는 만큼 승무원이 필요하다. 운항승무원은 선제적으로 올해 30여 명을 채용했다. 내년에는 객실 승무원 채용을 진행할 계획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올해 티웨이항공은 약 500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할 전망이다.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도(약 8000억 원)의 65% 수준이다. 정 대표는 “코로나 기간에 자금 경색이 심해서 매우 힘들었다. 유상증자와 금융권 등의 도움으로 자금을 조달했고, 9월부터는 여행 수요가 풀리면서 현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며 “내년에는 코로나 이전의 매출을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현대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누적 판매 1500만 대를 달성했다. 1986년 울산 공장에서 생산한 ‘엑셀’을 미국에 처음 수출한 후 36년 만의 성과다. 현대차 미국판매법인(HMA)은 최근 뉴욕주 윌리엄스빌에 있는 딜러숍 ‘웨스트 허 현대’에서 1500만 번째 신차를 고객에게 인도했다고 22일 밝혔다. 1500만 번째 차량은 현대차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이었다. 현대차는 1986년 1월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울산 공장에서 생산한 소형 세단 엑셀을 미국에 수출하면서다. 미국 진출 20년째인 2005년에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에 첫 현지 생산 공장을 완공했다. 현대차는 2007년 미국 누적 판매 500만 대를 달성했고, 2015년에는 누적 판매 1000만 대를 넘어섰다. 현대차 차량 중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은 ‘아반떼’(현지명 엘란트라)다. 1991년부터 현재까지 353만 대가 판매됐다. 이어 쏘나타(314만 대), 싼타페(191만 대), 엑센트(136만 대), 투싼(134만 대) 순이다. 미국 진출 초기엔 중·소형 세단 위주였다가 점차 부가가치가 높은 SUV 판매가 늘고 있는 추세다. 최근에는 전기차(EV)와 하이브리드차 등 친환경차 판매에 힘을 쏟고 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LG화학은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의 일환으로 환경과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공헌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최근 환경 및 기후 변화 대응을 중심으로 사회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새 사회공헌 비전인 ‘그린 커넥터(Green Connector)’를 선포했다. 생태계와 교육, 에너지, 경제 등 4가지 중점 분야에서 ESG 가치를 극대화하는 활동에 집중하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LG화학은 ‘그린 생태계’ 활동으로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에게 생물다양성의 중요성을 알리는 활동을 확대한다. 2018년 12월 서울시한강사업본부와 함께 마포대교 해넘이 전망대에 조성한 ‘밤섬생태체험관’을 환경 콘텐츠 중심으로 새롭게 개편해 많은 시민들에게 밤섬과 생물다양성 보전의 중요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미래 환경지킴이를 육성하는 온라인 멘토링 프로그램 ‘Like Green(라이크그린)’을 본격 시작하고 대학생 멘토와 청소년 멘티가 팀을 이뤄 온라인 멘토링 및 환경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대학생 멘토단과의 팀별 활동 등을 통해 환경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진로 및 학업에 대한 고민과 공감을 통해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학습한 내용은 그린 콘서트로 이어진다. 그린 콘서트는 녹색의 지구를 의미하는 G.R.E.E.N의 5개 영역에서 초등학생 및 중학생 팀별로 나누어 총 10개의 강의로 진행되며,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발표하는 환경교육 콘서트다. ‘그린 에너지(Green Energy)’는 기후변화 대응 위해 재생에너지 활용 확대를 주제로 한 사회공헌 활동이다. LG화학은 2015년부터 서울시-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그린파트너십’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통한 사회공헌활동을 시작했다.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통해 청소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활성화하는 ‘그린파트너십 프로젝트’는 ‘희망그린발전소’ 사업과 ‘그린리모델링’ 사업으로 구성돼 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GS그룹은 최근 연말 이웃사랑 성금 40억 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GS는 사회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2005년부터 연말 이웃사랑 성금을 기탁해 왔으며, 올해까지 기탁한 성금은 총 680억 원에 달한다. 허태수 GS 회장은 평소에 “훌륭하고 지속 가능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정하고 투명한 경영을 기본으로 사회공헌, 동반성장을 위한 다양한 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GS그룹은 다양한 방식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먼저 GS칼텍스는 김장 나눔, 난방용품 및 생필품 지원 등 소외이웃을 위한 ‘연말 릴레이 봉사활동’을 2005년부터 18년째 진행해 오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연말에는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점자 구급함을 제작하여 시각장애인 300여 명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GS건설은 2009년부터 남촌재단과 함께 ‘사랑의 김장김치 나눔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13년부터는 미스코리아 본선 수상자들과 GS건설 임직원 및 임직원 가족이 동참했으며, 매년 나눔의 규모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GS리테일은 일상에서 함께하는 나눔 플랫폼이라는 사회공헌 방향성을 가지고 긴급 재해재난 지원, 사회소외계층 지원, 환경 정화 등의 ESG 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GS25, GS더프레시, GS샵 등 전국 각지의 사업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즉각적인 재해재난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GS리테일은 9월 역대급 태풍인 힌남노로 큰 피해를 입은 경북 포항지역 이재민에게 음료 및 에너지바 등으로 구성된 긴급 구호 물품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지원했다. 집중 폭우 피해나 산불 피해를 입은 주민들을 위한 긴급 물품 지원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아울러 GS리테일이 운영하는 GS샵도 7월 경기 이천, 군포에 위치한 물류센터를 통해 약 1억1000만 원 상당의 의류, 신발 등 잡화 상품 등을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했다. GS EPS는 충남 당진지역 문화진흥사업과 마을 행사를 후원하고 있으며, 장학금 및 교육기자재 지원을 통해 청소년의 교육 환경 개선에 기여하고 있다. 지역 환경 개선을 위해 발전소 인근 해안 가꾸기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GS스포츠는 서울 전역에서 운영 중인 FC서울 유소년 축구교실을 통해 다문화 가정 축구 꿈나무들을 위한 교육 활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한국기아대책이 진행하고 있는 ‘HOPE 컵’ 대회를 지원하는 등 축구를 통한 희망 전달 활동을 펼치고 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2025년 목적기반차량(PBV) 양산을 목표로 한 기아의 경기 화성 신공장을 둘러싸고 노사 간 갈등을 겪는 가운데 사측이 물량 확대와 고용 안정에 대해 진전된 안건을 제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노조 측이 “확실한 문구를 제시하라”며 일단 합의를 거부했다. 양측은 22일 협상을 재개할 예정이다.22일 자동차업계와 기아 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20일 고용소위 5차 본협의가 열렸다. 사측은 신공장 설립에 따른 생산 물량 등의 내용을 담은 3차 제시안을 노조에 전달했다. 사측은 “1단계 설비 능력 10만 대로 전개하되, 2단계 파생차 및 추가 차종 투입을 통해 20만 대 이상 생산할 수 있는 PBV 핵심 생산 거점을 조성하겠다”고 제안했다.기아의 단체 협약 등에 따라 공장을 새롭게 지으려면 노사는 물량과 생산 공정 등에 대해 합의를 해야 한다. 하지만 기아 노사는 노사 간 실무 10차, 본협의 6차가 진행되는 동안 물량에 대해 합의를 하지 못했다. 사측은 애초 PBV 10만대 생산을 기본으로 하고, 설비 능력 증대를 추진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노조는 20만 대까지 물량을 확대하고 모듈 공장과 플라스틱 및 차체 도어 공장 등의 사내 이전을 요구했다. 5차 본협의에서 사측은 노조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처음으로 20만 대 생산 계획을 밝힌 것이다.아울러 노조가 강하게 요구했던 모듈 공장 내부화에 대한 수용 의사도 내비쳤다. 모듈 공정과 관련해 “화성 공장 내 전동화 모듈 부품의 조립 생산을 추진하고, 전동화에 따른 전환 방향 등을 논의 하기 위해 중장기 발전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사측이 노조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노조 측은 일단 사측 제안을 거부했다. “기대를 충족하기엔 부족했다”는 것이다. 기아 화성지회 측은 “20만대 증설과 모듈, 플라스틱, 자체 도어공장과 관련해 확실한 문구를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만 대를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노사 합의 문구로 남겨달라는 것이다.이에 대해 사측은 “제시안의 문구에 대한 의미 해석을 잘 해달라”고 요청했다. 후속 차종을 개발해서 화성 공장에 투입할 계획이지만, 정확한 시기와 차종은 보안상 확답이 어렵기 때문에 이해의 폭을 넓혀 달라는 것이다. 사측은 PBV라는 차종이 세상에는 없던 차종이니 만큼, 판매량 추이를 봐서 생산량을 늘려가겠다는 입장이다. 업계에서는 사측이 상당히 진전된 안건을 제시했다고 보고 있다. 한 수입차 업체 임원은 “해외 업체들도 공장 신설을 할 땐 노사 협의를 하는데, 구체적인 숫자까지 합의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다만, 사측이 큰 틀에서 회사 미래상을 제시하면 노조가 대승적으로 합의를 하고, 추후에 물량이나 고용, 임금 등에 대해서 논의해 나간다”고 말했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아는 과거에 피인수된 경험이 있어 고용 불안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결국 사측과 노조가 전기차 전환에 따른 노동 인력 전환이나 미래차 시대의 인력 재교육 방안 등에 대해 구체적인 합의를 해야한다”고 말했다.기아 노사는 22일 6차 고용소위 본협의를 열고 추가 협의를 할 계획이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22일부터 근로자 300인 이상인 사업장에서 자동심장충격기(AED) 설치가 의무화되면서 일부 사업장에 비상이 걸렸다. 아예 법령을 모르고 있거나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AED 설치에 나서는 등 혼란을 겪고 있다.20일 질병관리청 등에 따르면 300인 이상 사업장은 의무적으로 AED를 설치해야 한다는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응급의료법) 개정안이 22일부터 시행된다. 심정지 환자의 골든타임 확보 등을 이유로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법이 개정됐다. 국내 일반인 심폐소생술 시행률은 2008년 1.9%에서 2020년 26.4%로 약 13.8배로 늘었지만 AED 사용률은 여전히 1% 미만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1년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22일부터는 AED를 설치하지 않을 경우 1차 적발 시 50만 원, 2차 적발 시 75만 원, 3차 이상 적발 시 매회 100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AED를 관리하지 않거나 설치 변경을 신고하지 않아도 과태료 부과 대상이다.이 법을 적용받는 사업장은 약 5000개다. 그러나 AED 의무 설치 법안을 아예 모르고 있거나 뒤늦게 인지한 사업장도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안성시에 있는 제조업체 A사 대표는 “지인으로부터 관련 법령을 전해 듣고 얼마전에 부랴부랴 AED 도입을 결정했다. 계약을 하고 제품 받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한 AED 제조업체 관계자는 “최근 들어 주문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설치비용이 150만~300만 원 정도고, 주기적으로 관리 및 보고를 해야 하다 보니 고민하는 업체들도 있다”고 말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미국의 항공사 델타항공에는 1983년 입사해 39년 동안 델타항공에서만 근무한 ‘전설’의 주인공이 있다. 밥 소머스 델타항공 글로벌 세일즈 시니어 부사장(62)이다. 최근 동아일보와 만난 소머스 부사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소회를 밝히면서 “9·11테러 이후 최고의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 이후 델타항공은 이익이 크게 줄어 2005년 미국의 파산기업 보호법인 ‘챕터11’의 지원을 받았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을 단행해 2년 뒤 챕터11을 졸업할 수 있었다. 소머스 부사장은 “9·11 당시 직원들이 하나로 뭉쳐 위기를 극복했던 문화가 이어져서 코로나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델타항공은 다른 항공사와 달리 코로나 기간 동안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임금 삭감에 합의하면서 직원 이탈을 최소화했다. 이로 인해 델타항공은 코로나 사태 이후 빠르게 증가하는 수요에도 큰 차질 없이 항공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 ○ “위기는 기회” 코로나 기간 공격적 투자 델타항공은 코로나 기간에 서비스 개발과 공항 리모델링, 항공기 도입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다. 소머스 부사장은 “코로나를 거치면서 고객들이 ‘위생과 경험’을 중시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델타항공은 100가지가 넘는 위생 및 안전 방침인 ‘델타 케어 스탠더드’라는 선도 규약을 도입했다. 항공사 최초로 가운데 좌석 띄워 앉기도 결정했다. 기내에서도 거리 두기를 할 수 있게 되자 여행객들이 조금은 안심하며 비행기를 이용했다는 설명이다. 기체 경쟁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5월에는 연료 효율성이 20% 더 높은 신형 A321neo를 도입했고, 7월엔 성능이 개선된 B737-10 100대와 A220-300 12대의 주문을 발표했다. 기내 와이파이 서비스 도입은 물론이고 스타벅스와의 제휴를 통해 마일리지 적립과 기내 스타벅스도 제공했다. 로스앤젤레스(LA)와 뉴욕 라가디아, 시애틀 등 델타항공의 허브공항도 리모델링했다. 앞으로 공항 개선을 위해 10여 년간 총 12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할 계획이다. 탑승권이나 신분증 없이 공항과 항공사를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ID’ 도입과 개인 바이오 정보를 활용한 서비스 개발, 체크인 및 수하물 추적, 비행 일정 변동 실시간 알림 등을 제공하는 ‘플라이 델타’ 앱 서비스 강화 등의 디지털 전환도 강화하고 있다. ○ 한국 시장 코로나 이전 110% 회복델타항공은 한국 시장에서 코로나 사태 이전 수준으로 여객 수를 회복한 유일한 항공사다. 18일 국토교통부의 항공 통계에 따르면 올해 11월 델타항공의 인천∼미국 탑승객 수는 6만1805명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1월(5만8713명)보다 승객 수가 더 늘었다. 소머스 부사장은 “인천∼미니애폴리스 노선이 신규 취항하고 인천∼미주 노선의 경우 연말까지 코로나19 이전의 110% 수준으로 여객이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델타항공은 13일부터 인천∼시애틀 직항 노선을 주 3회 추가 운영하고 있다. 시애틀 노선 추가로 델타항공의 한국 노선 규모는 코로나 이전인 2019년보다 10% 증가하게 됐다. 소머스 부사장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비즈니스 여행이 처음으로 프리미엄 레저 여행을 앞지르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기업 고객 증가에 따른 매출 증가로 올해 3분기(7∼9월) 델타항공의 매출은 역대 분기 최대 매출 기록을 갈아 치웠다. 그는 “수하물을 처리하는 일을 시작으로 39년 동안 델타항공에서 배운 점은 직원과 고객을 만족시키면 고객은 다시 델타항공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라며 “나는 이런 선순환을 믿는다”고 말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미국의 항공사 델타항공에는 1983년 입사해 39년 동안 쭉 델타항공에서만 근무한 ‘살아있는 전설‘과 같은 인물이 있다. 밥 소머즈(Bob Somers) 델타항공 글로벌 세일즈 시니어 부사장(62)이다. 전 세계 항공업계에서 한 항공사에 이만큼 오래 있었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코로나는 9·11테러 이후 최대 위기”소머즈 부사장은 최근 동아일보의 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먼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소회를 밝히면서 “9·11테러 이후 최고의 위기였고, 너무 힘든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세계무역센터 테러 사건은 글로벌 항공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꼽힌다. 테러 발생 직전인 2001년 8월 전 세계 공급력은 2억5800만 석으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러 발생 직후 월 공급력 1000만 석 이상 감소했다. 세계 2차대전 이후 공급력을 2년 연속 줄이기도 했다. 여객 성장률 마이너스는 물론 항공사들의 순 이익 감소로 돌아섰고, 영업 마진은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테러 이전의 공급력을 회복하는데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델타항공 최악의 부진에 시달렸고, 결국 2005년 미국의 파산기업 보호법인 ‘챕터11’ 지원을 받았다. 이후 델타항공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에 나섰고 2년 뒤 챕터11을 졸업할 수 있었다. 소머즈 사장은 “9·11 당시에 직원들이 하나로 뭉쳐서 위기를 극복했다. 당시에 배운 회복 능력이 오늘날에도 델타의 문화로 이어져서, 코로나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특히 델타항공은 다른 항공사와 공항들이 코로나 기간 직원 해고 등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을 때도, 고심 끝에 해고 대신 임금 삭감에 합의하면서 직원 이탈을 최소화했다. 그는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았다. 이익보다 사람들을 우선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수요가 회복되면 전문성 있는 직원들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코로나 방역 및 입국 제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항공 수요는 빠르게 증가했다. 이에 일부 공항과 항공사들은 여객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서 수하물 및 발권 처리 마비, 항공기 운항 취소 등의 운영 차질을 빚었다. 코로나 기간 직원들을 대량 해고하면서 일할 사람이 부족했던 탓이다. ●“위기는 기회” 코로나 기간 공격적 투자 나서 특히 델타항공은 코로나 기간 서비스 개발과 공항 리모델링, 항공기 도입 등에 공격적으로 투자를 했다.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에서다. 소머즈 부사장은 “코로나 기간 고객들의 니즈(요구)가 크게 변했다. 여행의 모든 과정에서 ‘경험’을 매우 중시하더라. 보다 개인화되면서도 프리미엄 여행을 즐기고자 했다. 이런 고객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비전을 갖춰야만 생존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델타항공은 ‘청결과 위생’을 중시하는 고객들을 위해 ‘델타 캐어 스탠다스’라는 이름의 선도 규약을 도입했다. 100가지가 넘는 방침을 만들어서 고객과 직원들에게 안전한 경험을 선사하겠다는 것이다. 소머즈 부사장은 “코로나 기간 델타항공은 항공사 최초로 이른바 ‘스페이스 블락’ 이라고 불리는 좌석 띄워 앉기를 결정했다. 매우 중요하면서도 공격적인 결정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맞는 결정이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기내에서도 거리두기를 하자, 여행객들이 조금은 안심하고 항공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항공사 입장에서는 항공기 정원의 절반을 못 태우게 될 수도 있는 결정이었지만, 손해를 보더라도 안전을 앞세워 지속적인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이다. 또한 기체 경쟁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올해 7월 기존 항공기보다 연료 효율이 뛰어난 B737-10 100대와 에어버스 A220-300 12대 주문을 발표했다. 5월에는 연료 효율성이 20% 더 높은 최신 항공기 A321neo를 도입했다. 또한 인천발 항공기뿐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 항공기 내에 기내 와이파이 서비스를 도입했다. 스타벅스와 제휴를 맺고 마일리지 적립 서비스는 물론 기내에서도 스타벅스를 즐길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강화했다. 소머즈 부사장은 “여행 계획부터 공항 이용, 탑승과 착륙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고객들에겐 경험이다. 매끄럽고 편리하고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고객들에게 선택받을 수 없다. 반대로 좋은 경험을 심어주면 다시 델타항공을 선택하게 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공항 투자 및 디지털 전환 가속화 특히 미국 내 델타항공의 허브공항에 대한 투자도 강화했다. LA(LAX)와 뉴욕 라과디아(LGA), 시애틀(SEA) 공항의 대규모 리모델링을 했고, 앞으로도 10여년간 총 12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해 델타항공의 허브 공항 개선 작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디지털 전환도 강화하고 있다. 디지털 전환은 항공사 수익 향상은 물론 고객들의 편리한 경험을 향상시키는데 필수다. 델타항공은 고객들이 물리적인 탑승권이나 신분증 없이 공항과 항공사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ID‘ 도입에 투자하고 있다. 바이오메트릭(개인 바이오 정보) 기술 강화에도 집중하고 있다. 체크인 및 수하물 추적, 공항 길 찾기, 비행 일정 변동 실시간 알림 등을 위한 플라이 델타 앱도 디지털 전환에 대표적인 노력이다. 특히 디트로이트 공항에는 ’평행현실‘ 이라고 하는 최신 기술을 적용했다. 이는 탑승객의 얼굴과 몸의 형태 등을 인식한 뒤, 승객들이 대형 스크린 앞에 서면 승객의 비행 정보 및 탑승 시간, 라운지 정보 등 맞춤형 정보를 스크린에 보여주는 기술이다. 승객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스크린 각도가 조절되기 때문에, 스크린 앞에 수십 명이 서 있어도 다른 사람들은 내 정보를 전혀 볼 수 없다. 델타항공은 9·11 테러에 따른 경영 위기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공격적인 투자와 체질 개선을 단행했다. 델타항공은 다른 항공사와의 합병 및 아에로멕시코와 버진애틀랜틱 등의 지분을 매입하면서 제휴를 늘렸다. 비행기 운임을 결정하는 내부 모델도 바꿨고, 예약 시스템을 외주를 주지 않고 회사 안으로 가져와서 예약 데이터를 직접 관리하는 미국 내 유일한 항공사가 됐다. 여기에 정유공장도 인수하면서 유류비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내부 구조도 갖췄다. 특히, 임직원에 대한 성과급 체계도 개편했다. 직원들과 이익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매년 세전 수익의 10%를 임직원들에게 지급했는데, 경영자들에 대한 보상은 임직원에 대한 보상이 지급된 뒤에야 실시했다고 한다. ●한국 시장은 코로나 이전보다 100% 회복델타항공은 2018년 대한항공과 조인트벤처를 맺으면서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가속화 했다. 조인트벤처는 서로의 이익까지도 공유하는 항공업계 최고 수준의 협력이다. 델타항공이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서 한국 시장에서의 성과도 확대되고 있다. 18일 국토교통부의 항공통계에 따르면 올해 11월 델타항공의 인천~미국 탑승객 숫자는 6만1805명 으로, 코로나 이전인 2019년 11월(5만8713명) 보다 승객 수가 더 늘었다. 올해 9~11월 기준 델타항공을 타고 인천에서 미국으로 간 탑승객 수는 8만5694명으로, 2019년 같은 기간 (8만5059명) 수치를 넘어섰다. 한국에 취항하는 외국 항공사 중 코로나 이전 수준을 이미 뛰어넘은 첫 항공사다. 소머즈 부사장은 “연말까지 가면 인천~미주 노선의 경우 코로나 이전의 110% 수준으로 여객이 오히려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인천~미니애폴리스 노선을 새롭게 열었는데, 미니애폴리스는 델타의 주요 미국 허브 공항 중 하나다. 미국에 도착해도 어디든 갈 수 있고, 반대로 인천에 와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는 접근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이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의 각종 방역 규제가 완화됐다. 여기에 대한항공과의 조인트벤처를 통해서 다양한 스케줄을 제공하고 최고의 태평양 횡단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공급이 계속 늘고 노선이 확대되면 수요도 덩달아 증가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델타항공은 12월 13일부터 인천국제공항과 시애틀 국제 공항 (SEA-TAC) 간의 직항 노선을 주 3회 추가 운영하기 시작했다. 시애틀 직항 노선을 추가 운영하면서 델타항공의 한 노선 규모도 코로나 이전인 2019년보다 10% 증가하게 됐다. 이 밖에도 델타항공은 한국 고객들을 위해 9월부터 프리미엄 이코노미석인 델타 프리미엄 셀렉트에 제육볶음 메뉴를 추가했다. 델타항공은 한국 여행사들과 협력을 넓히고, 고객들의 효율성이나 만족 등을 높일 수 있는 고객 서비스 개발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할 계획이다. ●코로나 이후 달라진 고객 트렌드에 집중해야 소머즈 부사장은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고객 트렌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객의 1순위는 안전과 청결성이다. 청결에 대한 기대 수준은 계속 높아질 것”이라며 “최근에 느낀 건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즈니스 여행이 처음으로 프리미엄 레저 여행을 앞지르는 추세더라. 기업들은 이미 95% 이상 출장을 재개했다. 미국의 경우 비즈니스 여행은 9월 첫 주 미국 노동절 이후 꾸준히 늘고 있다. 기업 고객 매출과 기업들의 국제선 수요가 늘면서, 3분기(7~9월) 델타항공의 매출은 분기 기준 역대 최대 매출이었던 2019년 3분기보다 오히려 3%다 더 늘었다”고 말했다. 개인 여행의 경우도 큰 도시들 보다는 개방된 야외 공간이 많은 산이나 바다 등을 많이 선택했다고 한다. 소머즈 부사장은 “39년 전 수하물을 처리하는 일을 시작으로 오랜 기간 델타항공에 있으면서 배운 점은 결국 직원과 고객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야말로, 고객들이 델타항공을 또 선택하게 하는데 중요하다는 점이다. 나는 이런 선순환을 믿는다”며 “고객들과 직원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전달하고,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즐겁다”고 밝혔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2025년 전기차 양산을 목표로 한 기아의 경기 화성 신공장이 노사 간 합의점을 찾지 못해 표류하는 가운데 ‘노노 갈등’까지 불거졌다. 27년여 만의 기아 국내 공장 건설이 첫 삽을 뜨기 전부터 교착 상태에 빠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14일 자동차업계와 기아 노동조합 등에 따르면 전날 예정됐던 신공장 관련 고용소위 5차 본협의가 일부 대의원들의 교섭장 입구 봉쇄로 열리지 못했다. 이들은 “외주화 없는 신공장을 건설하라”고 주장하면서 교섭장 입구를 막아섰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기아지부 화성지회장 등 노조 측 교섭대표들은 “조합원 1만3000명의 고용 안정 쟁취 원칙을 갖고 있다. 교섭을 위해 길을 열어 달라”고 요구했지만 대의원들은 끝내 길을 열지 않았다. 먼저 교섭을 통해 입장 차를 좁혀 보겠다는 노조 측과 달리 일부 강성파는 대화에 앞서 기존 생산 물량에 대한 확답부터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며 대화를 막아선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조 내부 계파들 간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아 화성 신공장은 목적기반차량(PBV) 및 픽업트럭 부품 생산을 위해 기아가 27년 만에 신설하는 국내 완성차 공장이다. 투자 규모는 약 1조 원으로, 픽업트럭 부품은 2024년 말, PBV는 2025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노사 간 교섭의 핵심 쟁점은 결국 고용 안정과 직결돼 있다. 사 측은 1차로 연간 10만 대를 생산하고, 추후 15만 대까지 생산량을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이에 반해 20만 대까지 물량을 확대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듈 공장과 플라스틱 및 차체 도어 공장 등의 사내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물량도 충분히 확보하고 각종 부품들을 화성 신공장에서 직접 생산해 노조원들의 고용 불안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 측은 미래 자동차시장 환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턱대고 생산 물량을 과도하게 잡기는 힘들다고 보고 있다. 이런 입장 차이 때문에 신공장 관련 노사 교섭은 실무 10차, 본협의 4차가 진행되는 동안 별다른 진전 없이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 측은 “노사 간 교섭을 통해 내년 상반기 PBV 공장 착공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화성에는 현재 1∼3공장이 가동되고 있다. 신공장에서 전기차 생산이 시작될 경우 1공장의 K3와 모하비의 단기 생산 중단이 이뤄질 수도 있다. 기존 생산 직원들의 일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일부 강성파들은 본격적인 교섭을 하기 전 사 측으로부터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섭을 해야 물량 확보도 가능하다”는 노조 대표단 측과 노노 갈등을 불사하면서까지 강하게 맞부딪치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미래차 시장을 위한 선제 투자는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만큼 지금과 같은 갈등 상황은 치명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사 측으로서는 해외 시장 변동성이 너무 커 무턱대고 생산만 많이 하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결국 사 측과 노조 모두 전기차 전환에 따른 노동 인력 전환이나 미래차 시대의 인력 재교육 방안 등에 대해 구체적인 합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입자동차 업체의 한 임원은 “유럽 완성차 업체들도 신공장 건설을 할 때 노조 협의를 다 거치지만 사 측이 미래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노조도 현실적인 문제들을 수용한다”며 “공장 설립은 생존의 문제로, ‘강 대 강’으로 가봐야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한재희 기자 hee@donga.com}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철엔 차량 예열과 배터리 관리, 실내 공기 관리 등 차량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14일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가 밝힌 겨울철 차량 관리 팁에 따르면 먼저 겨울철엔 시동을 걸고 예열을 한 뒤에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열 시간은 차종과 기온에 따라 다르지만 1, 2분 정도면 된다. 예열을 잘한 차는 그렇지 않은 차에 비해 진동과 소음이 적다. 특히 자동차 배터리 확인도 중요하다. 겨울철엔 헤드라이트와 히터, 열선시트, 열선 핸들 등 각종 전기장치를 자주 사용해서 전력 소모가 많아진다. 동파 방지의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부동액 확인도 중요하다. 정비소 등을 방문해 부동액이 새는 부위는 없는지, 호스의 고무 부위 탄성이 떨어져 딱딱해진 부분은 없는지를 확인하면 좋다. 자동차 기본 소모품 점검인 엔진오일 등 각종 오일류는 교환 시기가 어느 정도 남았더라도 조금 앞당겨 미리 교환하는 것이 좋다. 브레이크 디스크, 패드 등의 부분도 성능 저하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겨울철 정기 점검이 필요하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BMW코리아가 새로운 고객 서비스 브랜드 캠페인 ‘WHATEVERHAPPENS(어떤 일이 일어나든)’를 시작한다고 14일 밝혔다. 새로운 서비스 브랜드 캠페인은 ‘고객에게 난처한 상황이 생겨도 언제든 최적의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BMW의 다짐이 담겨 있다. ‘WHATEVERHAPPENS’ 캠페인은 2023년 한 해에 걸쳐 진행된다. BMW코리아만의 우수한 고객 서비스를 유쾌하게 풀어 낸 총 4편의 캠페인 영상과 함께 BMW 서비스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도 제공할 예정이다. 캠페인 정보 및 영상은 BMW코리아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BMW코리아 공식 소셜 채널, BMW 전용 앱에서 확인할 수 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기온이 내려가는 겨울철엔 차량 예열과 배터리 관리, 실내 공기 관리 등 차량 관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14일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가 밝힌 겨울철 차량 관리 팁에 따르면 먼저 겨울철엔 시동을 걸고 예열을 한 뒤에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열 시간은 차종과 기온에 따라 다르지만 1~2분 정도면 된다. 차종에 따라 원격시동 기능이 있다면 이를 활용해도 좋다. 예열을 잘한 차는 그렇지 않은 차에 비해 진동과 소음이 적기 때문에, 중고차 시장에서 잘 관리된 차로 인정받을 수 있다.●배터리 확인특히 자동차 배터리 확인도 중요하다. 겨울철엔 헤드라이트와 히터, 열선시트, 열선 핸들 등 각종 전기장치를 자주 사용해서 전력 소모가 많아진다. 계기판 경고등 혹은 블랙박스 액정을 통해 전압을 확인할 수 있다. 주행 중에 14볼트 안팎을 나타내면 정상이라고 한다. 배터리 점검창을 통해 충전상태(녹색 정상)를 확인하거나, 가까운 정비소에서 전압 확인을 통해 조언을 얻는 방법도 좋다. 3~4년, 6만 km의 주기가 되었다면 교환을 고려해야 한다. 기온이 낮고 블랙박스가 작동하면서 장시간 주차해 둘 경우 배터리 방전이 되기도 한다. 방전이 되면 보험회사 등의 긴급 출동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방전이 반복되면 배터리 수명이 줄어든다.●부동액 확인 필수 동파 방지의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부동액 확인도 중요하다. 여름철 냉각수가 부족해 물만 보충했던 경우라면, 부동액 비중이 작아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정비소를 방문했을 때 부동액의 비중 점검을 해보고 비중이 작으면 부동액 원액을 보충하거나 교환하는 등의 조언을 얻는 것이 좋다. 또한 냉각수가 순환하는 히터 호스와 라디에이터 호스를 확인해야 한다. 부동액이 새는 부위는 없는지, 호스의 고무 부위 탄성이 떨어져 딱딱해진 부분은 없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 통상적인 부동액 교환 주기는 2년에 4만 km인데, 최근에 출고된 차들은 사계절용으로 5년 10만 km까지 사용이 가능하다. 설명서를 보거나 제조사에 문의해 확인해보는 것이 좋다. ●타이어 점검타이어의 마모 상태 점검도 중요하다. 눈이나 비가 올 경우 타이어의 마모 상태가 심할수록 미끄러지는 현상이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 요즘 도심 주행 시에는 스노우 체인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후륜 구동 차의 경우 스노우타이어 교체나 사계절용 타이어를 추천한다. 많은 타이어 전문점에서 스노우타이어 교체 시 기존 타이어를 겨울철에 보관해주는 서비스를 하고 있다. ●와이퍼와 워셔액 점검겨울철에는 눈과 성에 낀 유리에 와이퍼 블레이드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작동 시 소음과 유리의 손상도 초래할 수 있다. 시동 후 예열을 하는 것처럼 와이퍼 작동도 앞 유리로 히터를 켜거나, 차종에 따라 앞 유리 열선 등을 활용해 최대한 따뜻하게 녹이고 작동하는 것이 좋다. 워셔액도 마찬가지다. 워셔액이 얼어 작동하지 않고 와이퍼 모터의 고장도 초래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에 겨울철에 덜 딱딱해지는 실리콘 재질의 와이퍼를 고려해보는 것이 좋다. ●오일, 브레이크 등 점검 자동차 기본 소모품 점검인 엔진오일 등 각종 오일류는 오래 사용하게 되면 점도와 윤활 성능이 떨어진다. 교환 시기가 어느 정도 남았더라도 조금 앞당겨 미리 교환하는 것이 좋다. 브레이크 디스크, 패드 등의 부분도 성능 저하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겨울철 정기 점검이 필요하다. ●히터 점검, 실내 공기 관리겨울철 운전의 필수인 히터 점검을 통해 운전자뿐만 아니라 동승자에 대한 배려도 할 수 있다. 간혹 따뜻한 바람이 잘 나오지 않거나 불쾌한 냄새를 경험했을 텐데, 대체로 훈증기와 에어컨 필터의 교환만으로도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방향제로 악취를 덮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며, 실내 클리닝 에바 클리닝 라디에이터 등의 청소도 추천한다.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 관계자는 “실내 클리닝은 실내 세차보다 실내 시트를 뜯어내고 말 그대로 우리가 옷을 세탁소에 맡기듯 세척하는 방법이다. 작은 비용이 아니므로 인터넷으로 후기 등을 잘 살펴본 후 시공하는 것이 좋다”며 “실내 청소를 자주 해주는 습관도 중요하다. 겨울철엔 변수가 많기 때문에 차량의 상태를 지속해서 확인하고, 미리 점검받아서 차량 상태를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변종국기자 bjk@donga.com}

1922년 12월 10일, 경성 하늘로 ‘금강호’라는 이름의 1인승 단발 쌍엽기 한 대가 떠올랐다. 조종사의 이름은 안창남(1901∼1930).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비행한 순간이었다. 동아일보가 후원해 열린 이날의 비행은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만인 최초의 비행사인 사문달(셰원다·謝文達·1901∼1983·사진)이 친구 안창남을 회상했던 기록이 공개되면서 그의 삶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은 10월 27∼28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서울호텔에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사문달의 손녀인 셰안이 씨(69)도 초청됐다. 본보는 13일 셰안이 씨가 가져온 대만 다큐멘터리 ‘尋조(심조)1920’과 사문달의 아들 셰둥한 씨(92) 인터뷰 자료를 입수해 안창남의 일생을 되돌아봤다. 안창남은 1920년 8월 일본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사문달을 만난 것도 이곳에서다. 둘은 각종 비행대회에 참가하면서 비행을 익히고 우정을 나눈다. 안창남은 일본에서 열린 각종 비행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일본인들로부터 “타고난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다. 1922년 고국 방문 비행 후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셰둥한 씨는 “아버지와 안창남은 금방 친해져 술도 자주 마셨다”면서 “안창남은 매우 검소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안창남이 돈을 모아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썼다고 기억한다”고 했다. 안창남은 실제 비행사 양성 등 항공 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1924년경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산시성 옌시산 휘하 군벌에 들어가 후학 양성에 힘쓴다. 셰 씨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안창남과의 이별을 다음처럼 기억했다. “1928년쯤 아버지는 ‘높이 나는 새들은 그에 걸맞은 나무를 골라야 한다’면서 자신이 있던 장제스(대만 초대 총통) 산하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하지만 안창남은 자신을 거둬준 사람들을 배신할 수 없다며 의리를 지켰죠.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안창남과 사문달은 1930년쯤 하늘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사문달이 정찰 비행을 하던 중 적군으로 보이는 비행기와 마주쳤는데 안창남의 비행 패턴과 비슷했다고 한다. 셰 씨는 “안창남과 아버지는 평소 술을 마실 때 가위바위보처럼 하던 손 제스처가 있었다”면서 “아버지가 그 제스처를 하니 안창남도 손짓으로 응답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어 “적군이었지만 고글을 벗어 경례하고 비행기 날개를 흔들며 몇 분간 같이 비행한 것이 둘의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새 비행기를 시험 비행하던 중 추락 사고로 사망한다. 셰 씨는 “어머니가 어느 날 펑펑 울고 계시던 아버지께 왜 우냐고 물으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안창남이 죽었다’고 말했다고 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는 걸 그때 처음 봤다고 한다”고 했다. 안창남이 중국에서 활동한 기록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사망한 후 유해를 수습해 묘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안창남은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대신 받을 후손이 없어 훈장과 증서가 아직 국가보훈처에 있다. 이진형 국립항공박물관 학예사는 “안창남의 활약을 다룬 기록이 많이 없는데, 사문달의 증언은 매우 귀하다. 일본과 중국 등에도 자료가 더러 있을 텐데 앞으로 많은 이야기가 발굴되면 좋겠다”고 말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

1922년 12월 10일, 경성 하늘로 ‘금강호’라는 이름의 1인승 단발 쌍엽기 한대가 떠올랐다. 조종사의 이름은 안창남(1901~1930).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비행한 순간이었다. 동아일보가 후원해 열린 이날의 비행은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만인 최초의 비행사인 사문달(1901~1983)이 친구 안창남을 회상했던 기록이 공개되면서 그의 삶도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은 10월 27~28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서울호텔에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사문달의 손녀인 사안이 씨(69)도 초청됐다. 본보는 13일 사안이 씨가 가져온 대만 다큐멘터리 ‘尋找(심조)1920’과 사문달의 아들 사동한 씨(92) 인터뷰 자료를 입수해 안창남의 일생을 되돌아봤다. 안창남은 1920년 8월 일본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사문달을 만난 것도 이 곳에서다. 둘은 각종 비행대회에 참석하면서 비행을 익히고 우정을 나눈다. 안창남은 일본에서 열린 각종 비행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일본인들로부터 “타고난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다. 1922년 고국 방문 비행 후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사동한 씨는 “아버지와 안창남은 금방 친해져 술도 자주 마셨다”면서 “안창남은 매우 검소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안창남이 돈을 모아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썼다고 기억한다”고 했다. 안창남은 실제 비행사 양성 등 항공독립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1924년경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 산시군 옌시산 군벌에 들어가 후학 양성에 힘쓴다. 사동한 씨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안창남과의 이별을 다음처럼 기억했다. “1928년 쯤 아버지는 ‘높이 나는 새들은 그에 걸맞은 나무를 골라야 한다’면서 자신이 있던 장제스(대만 초대 총통) 산하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어요. 하지만 안창남은 자신을 거둬준 사람들을 배신할 수 없다며 의리를 지켰죠. 둘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안창남과 사문달은 1930년 쯤 하늘에서 운명처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사문달이 정찰 비행을 하던 중 적군으로 보이는 비행기와 마주쳤는데 안창남의 비행 패턴과 비슷했다고 한다. 사동한 씨는 “안창남과 아버지는 평소 술을 마실 때 가위바위보처럼 하던 손 제스처가 있었다”면서 “아버지가 그 제스처를 하니 안창남도 손짓으로 응답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어 “적군이었지만 서로를 알아보고서 몇 분간 같이 비행한 것이 둘의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새 비행기를 시험 비행하던 중 추락사고로 사망한다. 사동한 씨는 “어머니가 어느 날 펑펑 울고 계시던 아버지께 왜 우냐고 물으니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안창남이 죽었다’고 말했다고 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우는 걸 그 때 처음 봤다고 한다”고 했다. 안창남이 중국에서 활동한 기록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사망한 후 유해를 수습해 묘를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는데, 안창남에겐 이를 대신 받을 후손이 없다. 훈장과 증서가 아직 국가보훈처에 있다. 이진형 국립항공박물관 학예사는 “안창남의 활약을 다룬 기록이 많이 없는데, 사문달의 증언은 매우 귀하다. 일본과 중국 등에도 자료가 더러 있을 텐데 앞으로 많은 이야기가 발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1922년 12월 10일 낮 12시. 한강의 매서운 칼바람에도 5만 명 구경꾼들이 여의도 비행장에 모여들었습니다. 구경꾼들의 눈을 일제히 몸체 양쪽에 조선 13도 지도가 그려진 1인승 단발 쌍엽기로 향했습니다. 이름은 ‘금강호’.12시 22분 우렁찬 비행기 프로펠러 소리가 울려 퍼졌고, 금강호는 활주로를 내달리며 경성(京城)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한반도 하늘을 조선인이 최초로 비행한 순간이었죠. 환희와 감동에 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고, 복받치는 감정을 참다못해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5만 관중(당시 경성 인구의 6분의 1)은 목이 터져라! 조종사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은 안창남(1901∼1930). 한국 비행사(史)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의 한 장면입니다. 오늘 12월 10일은,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한 지 딱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떴다떴다변비행에서는 민족이 낳은 천재 파일럿 안창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민족의 천재 조종사 1913년 8월 29일 용산에서 열린 일제 해군 나라하라 산지의 곡예비행은 열두 살 안창남의 삶을 뒤바꿉니다. 한반도 상공을 난 최초의 인물이 일제 장교라는 사실에 억울하면서도, 그는 “저까짓 것 나도 배우면 저만큼은 넉넉히 할 것”이라며 혀를 찼겠지요.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었던 그에게 비행술은 일종의 삶의 구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행술에 빠져있던 안창남은 1917년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면서 본격적인 비행사로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는 휘문고(휘문의숙) 3학년 시절인 1919년 몰래 3000원 (현 가치 약 3억 원)을 들고 일본으로 갑니다. 당시의 비행기는 자동차와 구동 원리, 장비, 정비 등이 상당히 비슷했다고 합니다. 안창남은 일본에서 먼저 자동차 기술을 배웠습니다. 안창남은 비행기 정비와 조립 등을 스스로 할 줄 알았는데, 자동차 기술을 배웠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는 분석입니다. 1920년 8월 안창남은 일본 도쿄 오쿠리비행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3개월 만에 3등 비행사 면허를 딴 데 이어 1921년 5월엔 2등 비행사 면허증도 땁니다. 승승장구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안창남은 1921년 6월 일본에서 열린 민간항공대회에서 2등을 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한국인 최초로 무시험 1등 비행사 면허까지 딴 것을 넘어, 내로라하는 일본인들을 제친 그에 대해 일본에서도 “타고난 천재”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 소파 방정환 선생도 안창남과 인연이 깊습니다. 안창남과 초등학교 동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방정환 선생은 1920년 잡지 ‘개벽’의 일본 특파원으로 활동했다고 하는데요. 당시 안창남의 활약을 고국에 소개하기도 했죠. 안창남에 관한 이야기는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안창남은 고국에서도 큰 인기를 끕니다. ‘청춘가’라는 민요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라는 가사를 입힌 구전 노래가 유행할 정도였죠. 구전 민요들에 ‘안창남’ 이야기를 넣어 개사해 부르는 것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고국 비행이 있기 한 달 전인 1922년 11월 안창남은 또 한 번 천재적인 실력을 과시합니다. 일본 제국비행협회에서 시행한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했는데, 비행기를 구하지 못해서 몇 차례 참가를 철회해야 했죠. 가까스로 150마력 비행기를 빌렸는데, 이마저도 고장으로 방치돼 있던 비행기였습니다. 강나진 국립항공박물관 학예사는 “지인들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참가를 말렸다. 그런데 안창남은 ‘조선인으로서 내가 여기서 포기를 한다면 뭐가 되겠느냐. 나는 사내니까 한번 신청해보자’라고 해서 결국 대회에 참가했다”고 말했습니다. 우편 비행대회는 도쿄에서 오사카를 가는 대회였는데요, 한 번에 가는 것이 아니라 도쿄-시즈오카현 미시마-아이치현 도요하시-시가현 요카이치-오사카 등 5곳을 거쳐야만 성공으로 인정했습니다. 그가 빌린 비행기는 다른 참가자들의 것보다 성능이 크게 떨어졌지만, 안창남은 왕복 비행에 성공했고 최우수상을 받습니다. 1922년 동아일보는 그의 성공 소식과 사진을 대서특필하기도 했죠. 일약 스타로 떠올랐지만, 안창남의 가슴 속엔 “조선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의 고국 방문 비행을 주최했는데요. 그는 고국 방문 비행에 앞서 동아일보에 수기를 보내 비행의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남들보다 낫다는 신념을 두텁게 해주기 위해”고국을 사랑했던 청년 그런데 일제 또한 안창남의 고국 비행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일본 보수 단체 회원 1000여 명이 그의 귀국을 환영하기도 했죠. 일본계 언론도 비행 성공을 기원했고, 심지어 사이토 조선총독이 관저에서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일본 항공국은 물론 조선총독부, 군사령부, 평양항공대도 그의 비행을 지원했죠. 아이러니한 일본의 행동에는 속내가 따로 있었습니다. 일제는 안창남을 통해 그들의 항공 및 군사 기술을 홍보하고, 그를 앞세워 식민 통치를 미화하려 했던 것이죠. 그런데 안창남은 이를 간파라도 했던 것일까요? 그는 고국 방문 비행에서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을 남깁니다. 안창남은 1923년 1월 월간지 ‘개벽’에서 그날의 비행을 상세히 묘사했습니다. “경성의 한울! 비행장에서 1100m 이상 높직이 뜨니까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아들을 대문 열어노코 기다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가티 반가웠습니다.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 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었을는지. ‘어떠케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빼앗긴 하늘에서 조국을 내려다본 안창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는 여의도에서 이륙해 오늘날의 마포-공덕-서대문, 독립문-평동(안창남의 고향)-광화문-경복궁-창덕궁-동대문-종묘-남대문을 날았습니다. 그는 순종이 칩거하던 창덕궁 상공도 선회하며 예를 표하기도 했죠. 강나진 학예사는 “안창남 선생님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눈이 쌓인 초가집을 보고서 ‘무덤’과도 같아 보였다고 속상해했다”며 “당일에 15분~20분 정도 비행을 하고, 그다음에는 곡예비행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인천까지 비행하면서 총 3회에 걸쳐 고국 방문 비행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비행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안창남은 ‘세계에서 가장 앞서 비행기를 발명했던 선조의 피가 혈관에 흐르니 우리도 노력하면…’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뿌리기도 했죠. 이진형 국립항공박물관 학예관은 “5가지 색의 오색 전단을 3회에 걸쳐서 만 여장을 뿌렸다. 조선인도 뛰어나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려는 시도였다. 일본이 원했던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조선인들의 긍지가 커졌다. 안창남을 주제로한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만 봐도, 안창남이 퍼뜨린 영향력은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안창남은 일본의 술수에 부응하지 않았던 겁니다. 비행 기술을 선보인 것을 넘어 동포들의 가슴 속에 형언할 수 없는 ‘의지의 씨앗’을 심었던 것이죠. 원래 고국 방문 비행은 평양과 개성, 대구, 부산, 신의주 등에서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모두 취소가 됩니다. 비행기 상태가 좋지 않아서 비행이 취소됐다고 알려졌지만, 안창남의 심상치 않은 인기와 그가 전단을 뿌려가며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키워준 것을 본 일제의 뒤끝 때문 아니었느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길 부와 명예가 보장됐지만, 안창남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합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조선인 대 학살 사건을 보면서 독립 투쟁에 헌신하기로 한 것인데요. 일제의 눈을 피해 1924년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중국군에 들어가 비행사와 항공군 사령관으로 활동했고 항공대 비행학교 교관도 역임합니다. 사실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테러와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안창남이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퍼졌고, 조국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납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안창남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반인이 미쳐서 쓰러졌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망 소식은 오보로 판명됐고, 안창남은 그를 걱정하는 친누나를 보려고 고국을 방문하기도 하죠. 그런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데요.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던 겁니다. 그는 1928년엔 비밀결사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 조직을 주도했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록이 없기도 하거니와 독립운동은 철저히 비밀로 이뤄진 것이 많았고,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이죠. 1929년 대한독립공명단이 중국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수집을 위해 경성 우편 차량 습격 사건 주도한 일이 있었는데요. 당시 대한독립공명단장 이름이 안혁명(安革命)이라고 알려지는데, 학계에서는 안혁명이 안창남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의 활약은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다른 조선인 비행사들에게도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비행사관학교를 세워 여기서 배출되는 조종사들을 통해 독립 투쟁을 하고 싶어 했죠. 1927년엔 비행학교 건립을 위해 300여만 평의 땅을 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일본을 이기는 길은 비행술을 익히는 것이라는 게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죠. 그러던 1930년 4월 2일 안창남은 새로 도입한 비행기를 운전해 보려고 탑승합니다. 그런데, 비행 도중 엔진 문제로 산에 추락해 유명을 달리합니다. 이때 나이가 겨우 30세였습니다. 이진형 학예관은 “후학 교육을 위해서는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대만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새로운 기체가 하나 들어온다. 본인 스스로 기체를 확인하고 첫 번째 비행을 했는데, 그 비행에서 안타깝게 하늘의 별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안창남의 유해를 아직도 수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사고 당시에 안창남을 수습했고 묘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안창남의 묘를 봤다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중국 타이위안시에 안창남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은 됩니다만, 문화대혁명 당시에 묘가 파괴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쉬운 것이 또 있습니다. 2001년 그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훈장과 애국 증서가 아직도 국가보훈처에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는 건데요. 국내법에 따라 후손들이 훈장과 애국 증서를 받아가야만 세상에 나올 수가 있는데, 안창남은 후손이 없어서 (친누나도 이후의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훈장과 증서를 아무도 받아 가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국립항공박물관이 훈장과 증서를 같은 모양으로 본떠 가지고 있어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올해는 그의 고국 방문 비행 1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안창남은 민족이 낳은 천재였고, 조국을 사랑했던 청년이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지극 히 평범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가르침을 하늘에 남긴 영웅이었죠. 국립항공박물관에서 12월 11일까지 안창남 특별전이 열립니다. 100주년에 맞춰서 기사를 쓰다 보니 특별전 날짜가 하루 밖에 남질 않았습니다. 주말을 이용해서 국립항공박물관에 가서 안창남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화물연대가 9일 집단 운송 거부(파업)를 철회하기로 했지만 산업계 곳곳에는 큰 상처가 남았다. 정부와 산업계 등에 따르면 이번 16일 간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산업계 피해 규모는 약 4조1400억 원에 이른다. 시멘트와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및 타이어 등의 업종에서 타격이 두드러졌다. 화물연대 파업은 건설 현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건설 작업에 필수적인 레미콘 운송이 멈추며 일부 현장에서는 중단 기간만큼 공사 기간이 연장되기도 했다. 레미콘은 건설 작업에 필수적인 타설(구조물에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의 핵심 재료이지만 제작 2∼3일 내로 굳어버리기 때문에 미리 물량을 비축해두기 어렵다. 시멘트 운송량은 한때 평시의 12% 수준인 2만2000t까지 떨어졌다. 레미콘 생산량도 18.7%인 9만4000m³까지 줄었다. 시멘트 업계는 약 1200억 원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비교적 이른 11월 29일 이루어지며 피해가 줄어들었다. 석유화학업계는 ‘품절 주유소’ 대란을 겪었다. 탱크로리(유조차) 운송기사들이 대거 파업에 참여하면서다. 품절 주유소는 한때 100곳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파업 철회가 결정된 후인 9일 오후 2시에는 49곳으로 줄었다. 석유화학업체가 몰려 있는 여수산업단지 석유화학업체의 반출량은 최근까지도 평시 대비 50∼60%까지 유지되고 있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파업 기간 출하 차질을 겪은 누적 물류 피해는 1조4000억 원으로 보고 있다. 정유업계도 6700억 원가량의 피해를 봤다. 제품 출하 차질을 겪은 산업계의 피해도 크다. 철강업계는 1조5000억 원 규모의 출하 차질을 겪었다. 자동차업계는 생산된 차량을 소비자에게 인도해주는 카캐리어의 운영이 중단되면서, 완성차를 직원들이 고객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이른바 ‘로드탁송’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하루에만 로드탁송 비용으로 5억 원 이상이 발생했다. 타이어업계의 경우엔 출하량이 평소 대비 절반가량으로 줄었고, 금호타이어는 감산을 결정하면서 평소 대비 30%가량만 생산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는 출하 및 생산, 물류 차질 등이 조만간 정상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먼저 업무개시명령이 내려진 시멘트산업은 현재 평시 수준으로 출하량이 회복됐다. 포항제철소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번 주 초반까지 하루 평균 도로 운송 출하량이 평시 대비 40%를 밑돌았다가 현재 절반 이상으로 회복됐다. 자동차업계도 로드 탁송 규모가 빠르게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고, 감산 결정을 내렸던 금호타이어도 이르면 10일부터 정상화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8일 2차로 업무개시명령이 내려진 철강재와 석유화학 제품 출하량은 정상으로 회복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산업통상자원부는 9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등을 방문해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피해 현황을 점검했다. 장영진 산업부 1차관은 “화물연대 불법 행위로 피해를 입은 부분에 대해선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필요한 부분은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달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기업과 정부 유관기관의 사전 대처로 그나마 파업 피해를 최소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6월 파업 당시엔 기업들이 파업 여파를 예상하지 못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부품 재고를 구비해 놓거나, 대체 운송 방안을 마련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했고, 공장이 멈추는 등의 생산 차질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한 기업 관계자는 “물류 및 보관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은 중소기업들의 피해가 있긴 했지만 파업을 하면서 기업들도 이른바 ‘맷집’이 생겼다”고 말했다. 경제단체들은 파업 철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분위기다. 장근무 대한상공회의소 유통물류진흥원장은 “국가 물류를 볼모로 하는 극단적인 집단행동은 더 이상 용납돼선 안 된다”며 “시장원리에 반하는 안전운임제는 일몰되는 게 마땅하며 합리적인 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김용춘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용정책팀장도 “지속적인 대화와 타협을 통해 우리 경제에 직면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세종=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화물연대가 9일 집단 운송 거부(파업)를 철회하기로 했지만, 산업계 곳곳에는 큰 상처가 남았다. 정부와 산업계 등에 따르면 이번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산업계 피해 규모는 약 4조1400억 원에 이른다. 시멘트와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및 타이어 등 업종에서 타격이 두드러졌다. 화물연대 파업은 건설 현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건설 작업에 필수적인 레미콘 운송이 멈추며 일부 현장에서는 중단 기간만큼 공사 기간이 연장되기도 했다. 레미콘은 건설 작업에 필수적인 타설(구조물에 콘크리트를 붓는 작업)의 핵심 재료이지만 제작 2~3일 내로 굳어버리기 때문에 미리 물량을 비축해두기 어렵다. 시멘트 운송량은 한때 평시의 12% 수준인 2만2000t까지 떨어졌다. 레미콘 생산량도 18.7%인 9만4000㎥까지 줄었다. 시멘트 업계는 약 1200억 원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비교적 이른 11월 29일 이루어지며 피해가 줄어들었다. 석유화학업계는 ‘품절 주유소’ 대란을 겪었다. 탱크로리(유조차) 운송기사들이 대거 파업에 참여하면서다. 품절 주유소는 한 때 100곳에 육박했을 정도였다. 파업 철회가 결정된 후인 9일 오후 2시에는 49곳으로 줄었다. 석유화학 업체가 몰려있는 여수산업단지 석유화학업체의 반출량은 최근까지도 평시 대비 50~60%까지 정도 유지되고 있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파업 기간 출하차질을 겪는 누적 물류 피해는 1조4000억 원으로 보고 있다. 정유 업계도 6700억 원가량의 피해를 봤다. 제품 출하 차질을 겪은 산업계의 피해도 크다. 철강업계는 1조5000억 원 규모 출하 차질을 겪었다. 자동차업계는 생산된 차량을 소비자에게 인도해주는 카캐리어가 운영 중단 되면서, 완성차를 직원들이 고객에게 직접 가져다주는 이른바 ‘로드탁송’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하루에만 로드탁송 비용으로만 5억 원 이상이 발생했다. 타이어 업계의 경우엔 출하량이 평소 대비 절반가량으로 줄었고, 금호타이어는 감산을 결정하면서 평소 대비 30% 가량만 생산을 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는 출하 및 생산, 물류 차질 등이 조만간 정상화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먼저 업무개시명령이 내려진 시멘트 산업은 현재 평시 수준으로 출하량이 회복됐다. 포항제철소는 지난달 24일부터 이번 주 초반까지 하루 평균 도로 운송 출하량이 평시 대비 40%를 밑돌았다가 현재 절반 이상으로 회복됐다. 자동차 업계도 로드 탁송 규모가 빠르게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고, 감산 결정을 내렸던 금호타이어도 이르면 10일부터 정상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8일 2차로 업무개시명령이 내려진 철강재와 석유화학 제품 출하량은 정상으로 회복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9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등을 방문해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한 피해 현황을 점검했다. 장영진 산업부 1차관은 “화물연대 불법 행위로 피해를 입은 부분에 대해선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하고 필요한 부분은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달라”고 했다. 일각에서는 기업과 정부 유관기관의 사전 대처로 그나마 파업 피해를 최소화 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6월 파업 당시엔 기업들이 파업 여파를 예상하지 못해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 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부품 재고를 구비해 놓거나, 대체 운송 방안을 마련하는 등 대비책을 강구했고, 공장이 멈추는 등의 생산 차질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한 기업 관계자는 “물류 및 보관 시스템이 잘 갖춰지지 않은 중소기업들의 피해가 있긴 했지만, 파업을 하면서 기업들도 이른바 ‘맷집’이 생겼다”고 말했다. 경제단체들은 파업 철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분위기다. 장근무 대한상공회의소 유통물류진흥원장은 “국가 물류를 볼모로 하는 극단적인 집단행동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 안 된다”라며 “시장원리에 반하는 안전운임제는 일몰되는 게 마땅하며 합리적인 제도가 마련되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김용춘 전국경제인연합회 고용정책팀장도 “지속적인 대화와 타협을 통해 우리 경제에 직면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세종=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정부가 시멘트에 이어 철강과 석유화학업계 화물차 기사들에게 추가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달 29일 첫 업무개시명령 발동 이후 두 번째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 파업이 2주째 접어들며 산업계 피해 확산을 막고 화물연대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7일 대통령실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8일 오전 한덕수 국무총리 주재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열고 철강 및 석유화학 분야에 대한 추가 업무개시명령을 심의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현 상황이 국가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추가 업무개시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시멘트 운송량이 평시의 96%로 회복되고 항만 물동량도 평시 수준으로 되돌아왔지만 철강과 석유화학은 생산 차질이 우려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이날 석유화학 수출 물량은 평시 대비 5%, 내수 물량은 평시 대비 65%만 출하됐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산업계 피해가 4조 원 이상”이라고 추산했다. 화물연대 내부에서도 지휘부에 대한 불만이 쌓이며 파업 대오 이탈자들이 현장에 속속 복귀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이날 화물연대 조합원 3900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첫날인 지난달 24일(9600여 명)의 절반을 밑돈다. 정부는 7일 업무개시명령에 불응한 시멘트 화물차 기사 1명을 경찰에 고발하는 등 첫 제재에 착수했다. 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변종국 기자 bjk@donga.com세종=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

“화물차 기사 20명이 전원 파업에 참여했다가 지난 주말 모두 복귀했어요.” 경기 지역 운송업체 대표 A 씨가 7일 전한 말이다. A 씨는 “화물차 기사 한 명이 찾아와 ‘파업 끝났다’고 말하더라”며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수입이 크게 줄었는데, 명분도 없고 효과도 없는 파업에 실망감이 크다고 했다”고 전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의 집단 운송거부가 만 2주일이 되면서 파업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화물연대 지휘부를 향해 ‘명분도 실리도 없는 파업’이란 조합원들의 비판이 커졌기 때문이다. 화물연대 파업에 참여한 차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생계비 부족이다.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수입 감소가 불가피해서다.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주요 물류 지역 화물차주의 월 매출액은 1000만∼1500만 원이다. 여기에서 화물차 구매 할부금과 유류비, 각종 관리비를 제외해도 적어도 월 500만 원 이상의 수익이 발생한다고 한다. 파업에 2주일을 참여했다면 수백만 원의 생활비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차량 할부금조차 내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다. 6월 파업의 경우 일부 화물 차주는 정부로부터 수백만 원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소상공인 방역지원금’을 받았다. 화물 차주 B 씨는 “당시 돈을 받은 사람들은 한 달 월급 정도가 나오니까 파업에 계속 참여했다. 현장에서는 ‘정부가 파업 자금 대준 꼴’이란 말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정작 정부는 화물 차주 몇 명이, 지원금을 얼마씩 받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업종에서 피해가 누적되고 있지만 운송거부로 인한 효과가 당초 화물연대 측이 생각한 만큼에는 미치지 못한 것도 파업 지속 명분을 떨어뜨렸다는 분석도 있다. 경기 침체로 인해 하반기(7∼12월) 물동량 자체가 많이 줄어들어서다. 화물연대 파업이 생각보다 ‘무딘 칼’이었다는 뜻이다. 부산의 한 운송업체 임원 C 씨는 “6월엔 코로나19 제한이 막 풀리면서 장거리 운행 차량을 섭외하려면 웃돈을 줘야 할 정도로 물동량이 넘쳐났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6월 파업 기간(8일)보다 훨씬 길어지는데도 물류대란이 그때만큼 심하지 않은 이유다. 일부에서는 화물연대가 내세운 명분 자체가 강한 파업 추진력을 갖기 힘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전운임제는 컨테이너와 시멘트 차량에만 적용되고 있다. 화물연대는 6월 파업 당시 정부로부터 ‘안전운임제 일몰 3년 연장’ 약속을 받은 뒤 5개월 만에 다시 파업에 나섰다. 이번에도 ‘안전운임제 일몰 폐지’를 주장하자 다른 품목 화물 차주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화물 차주 D 씨는 “안전운임제 적용 품목 확대는 6월에도 무산됐고 이번이라고 다르겠느냐”면서 “결국 컨테이너 차주들만 좋지 나머지는 들러리를 선 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등 강경 대응 기조와 여론의 따가운 시선, 파업 미참여자에 대한 폭력 소식 등이 차주들의 현장 복귀를 앞당기고 있다는 것이다. 화물차들이 현장에 복귀하면서 이날 전국 12개 주요 항만의 컨테이너 반출입량은 평시 대비 115%로 상승했다. 전남 광양항의 컨테이너 반출입량은 평시 대비 114%로 올랐고, 부산항도 평시 대비 117%로 상승했다. 이날 시멘트 출하량은 평년 대비 96%, 레미콘 생산량은 평년 대비 71%로 올랐다.변종국 기자 bjk@donga.com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

“화물 기사 20명이 전원 파업에 참여했다가 지난 주말 모두 복귀했어요.” 경기 지역의 운송업체 대표 A 씨가 7일 전한 말이다. A 씨는 “어제 사무실에 기사 한 명이 찾아와 ‘파업 끝났다’고 말하더라”며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수입이 크게 줄었는데 명분도 없고, 효과도 없는 파업에 실망감이 크다고 했다”고 전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화물연대)의 집단운송거부가 만 2주일이 되면서 파업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화물연대 지휘부를 향해 ‘명분도 실리도 없는 파업’이라는 조합원들의 비판도 커지면서부터다. 화물연대 파업에 참여한 차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생계비 부족이다. 일을 하지 않는 동안 수입 감소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주요 물류 지역의 화물차주 월 매출액은 1000만~1500만 원 사이다. 여기에서 할부로 구매한 화물차의 월 납부액과 유류비, 각종 관리비를 제외하면 월 600만 원 이상의 수익이 발생한다고 한다. 파업에 2주일을 참여했다면 수백만 원의 생활비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 차량 할부금조차 내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다. 6월 파업의 경우 일부 화물 차주들은 정부로부터 수백만 원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소상공인 방역지원금’을 받았다. 화물차주 B 씨는 “당시 돈을 받은 사람들은 한달 월급 정도가 나오니까 파업에 계속 참여한 것”이라며 “현장에서는 ‘정부가 파업 자금 대준 꼴’ 이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말했다. 정작 정부는 화물 차주 몇 명이, 지원금 얼마씩을 받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업종에서 피해가 누적되고 있지만 운송거부로 인한 효과가 당초 화물연대 측이 생각한 만큼에는 미치지 못한 것도 파업 지속 명분을 떨어뜨렸다는 분석도 있다. 경기침체로 인해 하반기(7~12월) 물동량 자체가 많이 줄어들어서다. 화물연대 파업이 생각보다 ‘무딘 칼’이었다는 뜻이다. 부산의 한 운송업체 임원 C 씨는 “6월엔 코로나19 제한이 막 풀리면서 장거리 운행차량을 섭외하려면 웃돈을 줘야 할 정도로 물동량이 넘쳐났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6월 파업기간(8일)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는데도 물류대란이 그 때만큼 심하지 않은 이유다. 일부에서는 화물연대가 내세운 명분 자체가 강한 파업 추진력을 갖기 힘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전운임제는 컨테이너와 시멘트 차량에만 적용되고 있다. 화물연대는 6월 파업 당시 정부로부터 ‘안전운임제 일몰 3년 연장’ 약속을 받은 뒤 5개월 만에 다시 파업에 나섰다. 이번에도 ‘안전운임제 완전 폐지’를 주장하자 다른 품목 화물 차주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화물 차주 D 씨는 “안전운임제 적용 품목 확대는 6월에도 무산됐고 이번이라고 다르겠느냐”면서 “결국 컨테이너 차주들만 좋지 나머지는 들러리를 선 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운송사 대표 E 씨는 “화물연대 한 조합원이 ‘이번 파업은 망했다’고 말하더라”며 “정부가 업무개시명령을 하고 미 참여자에 대한 폭력 소식도 나오다보니 파업에 반기를 드는 조합원들이 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부의 강경 대응 기조와 여론의 따가운 시선이 화물차 기사들의 현장 복귀를 앞당기고 있다는 의미다. 화물차들이 현장에 투입되면서 전국 12개 주요 항만의 밤 시간대(오후 5시~오전 10시) 컨테이너 반출입량은 평시 대비 126%로 상승했다. 화물연대 총파업 이후 컨테이너 반출입이 마비됐던 전남 광양항의 컨테이너 반출입량은 평시 대비 111% 수준으로 올랐다. 부산항 컨테이너 반출입량도 평시 대비 129%로 상승했다. 전날 시멘트 출하량은 평년 대비 88%, 레미콘 생산량은 평년 대비 61%로 올랐다. 변종국 기자 bjk@donga.com최동수 기자 firefl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