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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연해주(프리모르스키)는 선사시대부터 옥저, 발해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영욕이 깃든 땅이다. 동아일보는 광복절을 맞아 연해주의 독립운동 흔적과 발해, 옥저 유적을 취재했다. 이번 취재에서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1888∼1963) 선생 기념비가 4년 전 훼손됐지만 담당 부처인 보훈처는 지금껏 이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산운은 연해주에 발해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제기한 사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였다.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그는 단재 신채호와 함께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광복 이후 단국대 학장 등을 지냈다. 정부는 산운에게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만난 알렉산드르 크루퍈코 러시아 극동연방대 발해연구소장은 “장도빈 기념비가 2013년 8월경 스프레이 페인트로 훼손된 뒤 시정부의 이전 결정이 내려졌다”며 “한국 민간단체인 고려학술문화재단과 협의해 2015년 10월 극동연방대 사범대로 기념비를 옮겼다”고 밝혔다. 앞서 이 재단과 극동연방대는 2012년 10월 연해주 우수리스크시 레르몬토프 거리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본보가 입수한 훼손 당시 사진을 보면 기념비 앞뒷면에 각각 러시아어로 “여기는 러시아 땅이다”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낙서가 붉은색과 초록색 스프레이로 진하게 칠해져 있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극단주의자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해외 독립운동 기념물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보훈처의 한 관계자는 “장도빈 기념비가 연해주에 있었는지 몰랐다”며 “민간기관이 세운 기념비를 일일이 관리하기는 힘들다”고 밝혔다. ▼ 정부 무관심 속… 이국 땅서 편히 쉬지 못하는 ‘독립투쟁의 혼’ ▼ “허, 분명 이 자리에 있었는데 또 사라졌네요….” 2일(현지 시간)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크라스노야르 성(城)터.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들어선 거대한 불상 앞에서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3년 전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불상 옆에 설치된 ‘산운 장도빈 선생 기념비’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우수리스크 시내 레르몬토프 공원에 설립된 기념비가 뜬금없이 정체불명의 불상 옆으로 옮겨져 있어서 당시에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 취재팀은 사라진 기념비의 행방을 쫓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우수리스크시와 극동연방대 관계자들을 잇달아 접촉한 끝에 기념비가 크라스노야르 성터에서 극동연방대 사범대 캠퍼스로 2년 전 다시 옮겨진 사실을 확인했다. 제막식을 한 지 불과 5년도 안 돼 기념비를 레르몬토프 공원→크라스노야르 성터→극동연방대로 계속 옮긴 셈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러시아 “연해주는 옛 한민족 땅” 시각 경계 같은 날 한적한 극동연방대 사범대 교정을 찾았다. 기념비는 잿빛 건물들로 둘러싸인 사각형 정원의 한쪽 가장자리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지나다니는 학생과 직원들에게 기념비가 언제 들어섰는지, 이곳에 자리 잡은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앞서 2012년 10월 기념비가 처음 들어선 우수리스크 레르몬토프 공원에서는 고대 사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발견됐다. 현재 기념비가 위치한 극동연방대 사범대는 산운의 독립운동 혹은 발해사 연구와 무관한 곳이다. 남은 의문을 풀기 위해 극동연방대 발해연구소로 향했다. 루스키섬에서 만난 알렉산드르 크루퍈코 발해연구소장이 전한 얘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2013년 8월 극단주의자로 추정되는 범인의 기념비 훼손 이후 시정부의 이전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일단 기념비를 안전한 장소에 보관하기 위해 불상 옆에 1년가량 두었다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러시아 측과 협의해 2015년 10월에야 사범대로 옮길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국내의 한 역사전공 교수는 1990년대 초반 학계 인사들과 연해주를 처음 찾았을 때의 분위기를 들려줬다. 당시 러시아 학자와 공직자로 구성된 대표단 관계자들이 만찬에서 “한국과의 역사 교류는 좋지만 연해주 땅을 다시 빼앗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간혹 발해나 옥저를 언급하며 “과거 연해주는 우리 땅”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 러시아 측의 거부 반응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연해주 ‘독립운동 기념비’ 훼손 잇달아 사실 러시아 일각의 이런 움직임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보훈처 등 관계당국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특히 안중근, 신채호 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던 연해주에 관련 기념비가 여럿 있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앞서 2013년에도 블라디보스토크 주립 의대에 설치된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무단으로 철거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에도 보훈처와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이 아무런 후속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1909년 2월 7일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안중근 의사 등 독립투사 13명이 왼손 무명지를 자르고 독립운동을 결의한 일을 기념해 2001년 10월 세운 ‘단지 동맹 기념비’도 방치된 채 훼손됐다. 누군가가 끌로 기념비를 파낸 흔적이 발견됐는데, 특히 ‘한국(Koreya)’이라는 단어가 집중적으로 훼손돼 있었다. 장도빈 기념비처럼 러시아 극단주의 세력이 훼손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보훈처는 민간기관이 해외에 세운 기념비를 관리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입장이다. 산하기관인 독립기념관은 연해주 독립운동 기념비들의 훼손 여부를 파악해 통보해주는 내용의 협약을 2010년 극동연방대 한국학연구소와 맺었지만 이번 훼손과 관련해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발해사를 연구하는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산운은 연해주에 발해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주장한 분으로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한국사 연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라며 “정부가 기념비 관리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출토 자료를 학계에 신속하게 공개하지 않으면 같은 실수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최근 경남 함안 성산산성 목간(사진)에 대한 컴퓨터 판독 결과, 당초 ‘왕자녕(王子寧)’으로 해석된 글자가 ‘임자년(壬子年·532년 혹은 592년에 해당)’일 가능성이 높은 걸로 나타나자 한 역사학자가 건넨 말이다. 출토 목간을 초기에 공개하지 않고 몇몇 학자에게만 해석을 맡긴 것이 판독 오류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실제로 올 3월 문화재청이 해당 목간을 뒤늦게 공개하자, 국문학자와 서체 연구자를 중심으로 꾸준히 반론이 제기됐다. 필획이나 문맥을 감안할 때 ‘임자년’으로 해석하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의 ‘모지조(MOJIZO)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반론이 옳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문헌 기록이 절대 부족한 고대사에서 1차 사료인 목간 내용은 역사 해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 실제 임자년 목간은 성산산성 축성 시점과 의도, 아라가야 멸망 시점에 대한 기존 통설을 흔들 것으로 보인다. 목간 글자 몇 개를 잘못 판독한 게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없는 이유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한성백제시대에 쌓은 토성(土城)이 호남 지역에서 처음 확인됐다. 전라문화유산연구원은 “전북 완주군 배매산성에서 한성백제시대 토성을 발견했다”고 7일 밝혔다. 배매산성은 마치 테두리를 두르듯 배매산 정상에 쌓은 성벽으로 올 6월부터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서쪽 성벽 조사 결과 흙과 모래, 돌을 섞어 성벽을 쌓은 사실이 확인됐으며 성벽 가장 아래층에서 나무기둥 구멍들이 나왔다. 성내 평탄한 지형에서는 돌로 만든 배수시설과 석렬, 건물 터, 굴뚝 시설 등이 발견됐다. 유구에서는 한성백제시대 굽다리접시와 삼족토기, 장란형(長卵形) 토기, 쇠도끼 등이 출토됐다. 학계는 한성도읍기 백제의 영향력이 호남 지방으로 확대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북-중 공동 발굴조사는 자칫 동북공정 같은 역사왜곡에 이용될 소지가 있습니다. 북한 유적에 대한 남한 고고학계의 참여를 서둘러야 하는 이유입니다.” 최종택 고려대 교수(53·고고학)는 최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자국(自國) 내 고구려, 발해 유적을 당나라식으로 복원한 사례들이 있다”며 “북한 유적에 대해서도 중국 문화의 역할을 실제보다 강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남북 문화 교류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한국고고학회는 ‘남북고고학협회’ 설립 추진을 최근 결정했다. 고구려 아차산 보루를 발굴한 중견학자로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는 최 교수는 협회 설립을 주도하고 있다. 앞서 남북 고고학계는 2004년 개성공단, 2005년 평양 고구려 유적, 2006년 평양 안학궁성을 함께 발굴했다. 이어 2007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개성 고려 궁성터(만월대) 공동 발굴을 진행했으나, 지난해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으로 중단됐다. 이에 따라 남측을 대신해 중국이 북한과 공동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중국 연변대가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2010∼2011년 평양 남사리 낙랑 벽돌무덤을 공동 발굴한 데 이어 2013년 평양 삼석구역 내 호남리 고구려 무덤을 함께 조사했다. 지난해에는 양측이 황해도 봉산군 천덕리에 있는 고구려 벽화무덤을 공동 발굴했다. 중국 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은 한반도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북한이 평양 낙랑 무덤을 중국과 공동 발굴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향후 북한이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과정에서 고고 유적이 파괴될 위험이 크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건물이나 도로, 다리 등을 짓기 전 유적 잔존 여부를 파악하고 보존 조치를 취하는 이른바 ‘구제 발굴’이 필요한데 남한 고고학계에서 이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 평양성 외곽 지역에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1000여 기에 달하는 낙랑 무덤이 한꺼번에 발견된 적이 있다. 최 교수는 “북한은 경제난이 심화되면서 발굴 인원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발굴 기관이 김일성종합대 고고학강좌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북한 고고 자료에 대한 연구 없이 한국 고고학이 제대로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문물 교류의 핵심 통로였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북한 고고학 자료는 거의 공백에 가깝다”며 “물질자료를 반드시 연구해야 하는 고고학으로선 치명타”라고 강조했다. 최 교수는 남북 고고학 교류의 첫 번째 대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벽화고분을 꼽았다. 그는 “평양과 남포, 황해도 일원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고구려 벽화고분이 상당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우리는 아시아의 가장 동쪽과 가장 서쪽에 떨어져 있지만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지난달 22일(현지 시간) 터키 현지에서 만난 무라트 귈야즈 네브셰히르 박물관장이 한국 답사단에 건넨 말이다. 터키는 6·25전쟁 당시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1만5000여 명을 파병해 3400명의 희생자를 냈다. 올해 양국 수교 60주년을 맞아 터키 문화관광부 초청으로 국내 역사·고고학자들이 터키 유적을 답사했다. 기원전 74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부터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를 거쳐 13세기 이후 오스만튀르크 유적까지 동서 문명을 아우르는 터키의 역사 현장을 다녀왔다.》 돌로 포장된 약 10m 너비의 도로를 가운데 두고 사람 키를 넘는 거대한 대리석 열주(列柱)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시리아길’로 불리는 이 대로는 거대한 고대도시를 격자형으로 구획하는 중심축이다. 900m 길이의 시리아길을 걷다 보면 42m 간격으로 갈라지는 중간 도로들을 볼 수 있다. 도심을 거미줄처럼 잇는 이 도로는 이미 폐허가 된 대형 신전과 아고라(광장), 원형극장을 촘촘히 연결한다. 지난달 19일 찾은 터키 데니즐리주(州) 라오디게아 유적은 터키를 “살아있는 인류 문명의 야외박물관”에 빗댄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실감케 했다. 라오디게아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기원전 3세기 중엽 세워져 기원전 133년 로마에 복속됐다. 기원후 7세기 초 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붕괴될 때까지 직물 교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에서 가장 큰 스타디움을 비롯해 극장 2개와 목욕탕 4개, 아고라 5개, 분수대, 시의회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 이번 답사에서는 초기 기독교 7대 교회 중 하나로 4세기 초에 건설된 ‘라오디게아 교회’가 처음 공개됐다. 이곳은 서기 363년 ‘라오디게아 공의회’가 열려 초기 교회제도를 규정한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은 이 교회에 대해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덥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기록했다. 부유한 자들의 열정이 식었음을 책망한 것이리라. 시리아길에서 북쪽 극장으로 가는 중간 도로변에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는 2003년 터키 파묵칼레대에 의해 발굴된 이후 4년에 걸쳐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교회 유적은 가로 40m, 세로 37m 규모로 천장 없이 출입구와 기둥, 바닥, 벽체만 남아 있었다.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거대한 철제 구조물로 덮은 상태였다. 교회 입구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문이 나란히 설치됐는데, 벽돌로 만든 아치 기둥 좌우로 돌에 새긴 십자가 장식이 선명했다. 교회 북동쪽 가장자리에 웅덩이를 파고 석재를 돌린 세례당(洗禮堂·baptistery)은 정확히 십자가 모양을 띠고 있다. 예배당 바닥을 치장한 기하학 무늬의 채색 모자이크도 비교적 생생했다. 이 중 하트 3개를 연달아 그린 모자이크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 젤랄 심셰크 파묵칼레대 교수(발굴단장)는 “교회 기둥 중 절반 이상이 근처 로마신전에서 가져온 것들”이라며 “기독교 공인 이후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의 변화가 잘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이즈미르주(州) ‘크즐 아블루(붉은 대성당)’ 유적도 고대 로마와 비잔틴, 이슬람 문명까지 가세한 터키의 독특한 문화적 색채를 보여준다. 실제로 붉은 벽돌로 지은 거대한 성당 앞에는 복원한 이집트 여신인 세크메트상이 서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은 2세기 이집트 신을 섬기는 로마신전으로 지어진 뒤 5세기 비잔틴 성당으로 쓰였다가 오스만튀르크 시대 이후 모스크로 사용됐다. 답사단을 이끈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오리엔트와 헬레니즘, 이슬람 문명이 뒤섞인 진귀한 풍경”이라고 말했다. ▼축구장 넓이의 종자 창고… 대제국의 저력을 엿보다▼ 오리엔트 최강 히타이트 왕국 야즐르카야 유적엔 ‘바위 부조’ 생생독특한 구조의 차탈회위크 유적… 공동 생활 하던 당시 주거지 보여줘대제국을 호령한 위대한 왕들도 죽음 앞에선 한없이 소박했을까. 지난달 23일(현지 시간) 터키 초룸주(州) 하투샤의 야즐르카야 유적. 하투샤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로, 기원전 13세기 조성된 야즐르카야는 봄 축제나 왕의 즉위식을 거행한 국가 성소(聖所)였다. 세계 최초로 철기문명을 발명하고 기원전 16세기 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킨 오리엔트 최강국 히타이트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곳에서 여지없이 깨졌다. 주변 평원에 세워진 거대한 성벽과 도시, 신전들과 비교할 때 별다른 인공물 없이 바위로만 둘러싸여 천장조차 없는 야즐르카야는 아늑하기까지 했다. 인간의 손이 닿은 흔적은 신들과 왕의 모습을 바위에 새긴 부조(浮彫)가 전부였다. 이희수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히타이트인들의 정신적 본향이 원시 자연주의 신앙이었음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특히 눈길을 끈 건 커다란 바위틈 사이로 협곡처럼 좁은 통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는 60m² 남짓한 공간이었다. 왕의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암벽을 굴착한 벽감(壁龕) 건너편으로 사람 키만 한 두 개의 부조가 선명했다. 벽감과 가까운 부조는 히타이트 최고(最高) 신인 테숩의 아들 ‘샤루마’가 왕을 팔로 감싼 채 앞으로 걸어가는 장면이다. 어디로 가는 걸까. 정답은 바로 옆 부조에 있다. 포효하는 사자 네 마리를 두 손으로 거꾸로 매단 채 큰 칼을 휘두르는 죽음의 신 ‘네르갈’의 모습이 담겼다. 12년 동안 이곳을 연구한 독일 고고학자 안드레아스 샤흐너 발굴단장은 “샤루마가 무덤에서 깨어난 왕을 보호해 네르갈에게 인도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기원전 1274년 히타이트는 초강대국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카데시(현재의 시리아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다. 16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세계 최초의 성문 평화협정인 ‘카데시 조약’으로 이어졌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카데시 조약 점토판은 가로 13.8cm, 세로 17.6cm 크기에 수많은 쐐기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교수는 “전쟁 재발 방지부터 포로교환 인도주의 조치까지 적시돼 현재의 국제법과 비교해도 손색없다”고 말했다. 척박한 땅에서 히타이트가 대제국을 이룬 저력은 무엇일까. 샤흐너 발굴단장은 식량과 치수(治水) 정책을 꼽았다. 부근에서 축구장 넓이의 거대한 창고를 발굴했는데, 놀랍게도 오랜 가뭄을 대비한 ‘종자 보관소’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는 “10∼12년 단위로 큰 가뭄이 들어 생태시스템이 붕괴될 때를 대비한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터키 아나톨리아반도에는 세계 고고학계를 흥분시킨 선사유적이 여럿 있다. 지난달 21일 찾아간 코니아주(州) 차탈회위크 신석기 유적은 거대한 철제 돔 안에 기원전 7000년 무렵 지은 주거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흥미롭게도 흙으로 지은 집들은 마치 거대한 개미굴처럼 서로 벽체를 접한 상태였다. 25년 동안 차탈회위크 유적을 발굴한 이언 호더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이곳엔 거리가 없었고 사람들은 벽을 뚫은 구멍이나 지붕 위로 왕래했다”며 “이들에겐 현대적 개념의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인골에 대한 유전자 분석 결과, 한 주거지 내 무덤에서 직계 혈연관계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사실도 주목된다. 호더 교수는 “사유 재산 없이 수확물을 똑같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육아마저 혈연과 상관없이 공동으로 책임진 것으로 분석된다”고 덧붙였다.데니즐리·이즈미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울산박물관은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이집트 보물전―이집트 미라 한국에 오다’ 특별전과 연계된 영화 관람과 교육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다음 달 27일까지 열리는 이집트 보물전은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대 이집트 미라와 관(棺), 조각, 석물, 보석을 비롯해 고양이, 매, 따오기를 담은 동물미라 등 총 229점의 유물을 전시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믿음을 반영한 미라를 직접 관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올 4월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이집트 보물전에는 총 34만3547명(하루 평균 3123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박물관은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차원에서 영화 ‘미이라’ 시리즈를 상영할 계획이다. 다음 달 1일 ‘미이라’를 시작으로 8일 ‘미이라 2’, 22일 ‘미이라 3’를 선착순 220명에 한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이집트전 관련 교육·체험 프로그램도 눈여겨볼 만하다. 각각 토요일과 일요일에 열리는 ‘사후세계의 공간, 피라미드 만들기 체험’과 ‘향기로운 이집트인들의 부적 만들기 체험’을 통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장례문화를 배울 수 있다. 평일 교육 프로그램인 ‘이집트 신화 속 동물이야기’에선 신화 속 동물들의 의미를 알아보고 동물 부조를 만들어볼 수 있다. 이 밖에 전시 내용을 퀴즈로 풀어보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와 고대 이집트인들이 즐긴 ‘세네트 게임’, 증강현실을 통해 미라 제작 과정 등을 경험할 수 있는 ‘살아있는 이집트 문명’ 코너도 마련됐다. 일반 관람료는 성인 1만3000원, 초등학생 8000원. 자세한 내용은 전화(1688-9891)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문화계 블랙리스트 여파로 지난해 폐지된 ‘특성화 극장 지원사업’이 올해 복원된 가운데 30스튜디오와 학전블루, 포스트극장 등 26개 공연장이 지원대상에 선정됐다. 이윤택 연출가와 김민기 학전 대표 등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던 개인이나 단체가 정부 지원을 받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특성화극장 지원사업과 창작 활성화 지원사업 선정 결과를 14일 발표했다. 특성화극장 지원은 공연예술 활성화 차원에서 공연장 운영비용과 프로그램 개발비 일부를 국고로 보조하는 사업이다. 2004년부터 시작됐으나 지난해 폐지된 뒤 올해 다시 복원됐다. 창작 활성화 지원사업은 공연장 대관료 일부를 보조해준다. 앞서 문체부는 올 3월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블랙리스트)로 피해를 입은 창작 현장을 지원하기 위해 부당하게 폐지되거나 변칙적으로 개편된 사업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특성화극장 지원사업과 공연장 대관료 지원사업, 우수 문예지 발간 지원사업이 올해 복원돼 체육기금을 끌어 쓰기로 했다. 문체부 관계자는 “복원된 사업을 통해 약 350개 작품과 공연장, 문예지가 지원을 받을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문예기금에서 예산이 편성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구글의 첨단 가상현실(VR) 기술은 피자에서 나왔답니다.” 11일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 만난 로랑 가보 구글 아트앤드컬처 연구소장(41)은 “구글 카드보드의 탄생 비화를 들려주겠다”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카드보드는 별도의 기계 없이도 스마트폰을 끼워 VR 영상을 즐길 수 있는 골판지 상자.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VR 기기를 고민하던 개발자 두 명이 어느 날 연구소에서 피자를 주문했다. 이들은 피자가 담긴 배달 박스를 보고 “값싼 골판지를 사용해 VR 기기를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퍼뜩 얻었다는 것이다. 구글은 2014년 카드보드 제작법을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구글과 손잡고 11일 개막한 ‘구글과 함께하는 반짝 박물관’(다음 달 27일까지)에서는 카드보드를 비롯해 3차원(3D) 가상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틸트 브러시’,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는 수준까지 그림을 확대할 수 있는 ‘기가 픽셀’, 관람객이 무작위로 선정한 그림들 사이에서 유사점을 분석해 연관된 작품을 보여주는 ‘인공지능’ 기술 등이 대거 사용됐다. 구글이 자체 개발한 VR 기술을 오프라인 전시로 선보이는 건 아시아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처음이다. 가보 소장은 “한국은 교육과 기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나라여서 국립중앙박물관과 작업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구글 아트앤드컬처는 박물관뿐 아니라 미술, 공연, 패션, 거리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예술을 정보기술(IT)과 접목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70개국에 걸쳐 총 600만 건의 예술작품을 온라인으로 선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구글 연구소 소속 개발자들이 예술가나 큐레이터들을 수시로 만나 공동작업을 벌인다. 가보 소장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와 예술가, 큐레이터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지만 업무 성격이 창의적이고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욕구가 크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파리정치대를 졸업하고 음악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유니버설뮤직을 거쳐 베르사유궁전 박물관에서 IT 담당 부관장으로 일했다. 실제 전시에서 IT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역할은 어느 수준이 적정할까. 세계 최대 IT 기업에 몸담았지만 그의 답변은 솔직했다. “디지털 이미지가 예술작품보다 크면 보기가 좋지 않아요. 예술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고 균형을 깬다고 할까요. 디지털은 보완재 역할에 머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국립김해박물관은 ‘나무 이야기’ 특별전을 박물관 숲과 구지봉 일대에서 선보이고 있다. 김해 금관가야 설화의 배경이 된 구지봉 나무의 유래와 역사, 문학, 예술을 조명한 전시다. 박물관은 산책로 주변에 나무 팻말 100여 개를 세워 야외전시를 기획했다. 계절에 따른 나무와 숲의 변화를 포착한 사진과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목제(木製) 유물 30여 점도 전시한다. 목제 유물 전시는 나무가 인간에게 어떻게 사용되다가 폐기되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소나무와 참나무 등 국내 주요 수종을 소개하고 전통적인 가공 방법과 도구를 설명한다. 이어 목제 유물 발굴과 보존처리, 수종(樹種) 분석 등을 소개한다. 특히 경남 김해와 창원, 함안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각종 목제 유물을 엄선했다. 창원 신방리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말뚝은 삼국시대 제방공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때 실생활에 사용된 나무못과 짚신골, 실패, 머리빗도 선보인다. 창녕 화왕산성 내 연못에서 출토된 인형목간(人形木簡·나무로 만든 인형)도 눈길을 끈다. 소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은 뒤 먹으로 ‘眞族(진족)’ ‘龍王(용왕)’ 글자를 썼다. 이 지역 지배층이 나무인형을 제물로 삼아 기우제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9월 24일까지. 055-320-6833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첨단 컴퓨터 기술을 활용해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목간(木簡·글자를 기록한 나무막대기)에서 연대(간지)를 최초로 확인했다. 이에 따라 6세기 신라가 대가야를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성산산성을 쌓았다는 학계의 기존 통설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일본 나라(奈良)문화재연구소 와타나베 아키히로 부소장이 올 3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를 방문해 ‘모지조(MOJIZO)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목간 판독을 실시했다. 판독 결과 ‘王子寧(왕자녕)’으로 해석된 21번 목간 글자가 사실은 ‘壬子年(임자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나라문화재연구소와 도쿄(東京)대 사료편찬소가 지난해 공동 개발한 모지조는 일본의 고대 목간 화상 3만 건을 모은 데이터베이스(DB)를 바탕으로 목간 글씨를 판독하는 소프트웨어다. 목간 이미지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아이폰)으로 업로드 하면 이를 정자체로 풀어서 보여준다. 약 40만 점에 달하는 출토 목간을 보유한 일본학계에서 모지조의 신뢰성은 높은 편이다. 앞서 올 초 일부 학자들이 해당 목간을 ‘왕자녕’으로 판독한 결과가 공개된 이후 권인한 성균관대 교수(국문학)와 서체 연구자인 손환일 대전대 서화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중심으로 반론이 제기됐다. 필획이나 앞뒤 문맥을 고려할 때 ‘임자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지금껏 성산산성에서 1991년부터 17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뤄져 국내 출토 목간의 절반에 육박하는 총 308점의 목간이 발견됐으나, 연대가 확인된 건 처음이다. 목간 연구자인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후 문맥을 봐도 ‘왕자녕’은 오독(誤讀)이 분명하며 ‘임자년’이 99% 맞다”고 말했다. 일본 목간 연구 권위자로 해당 목간을 관찰한 와타나베 부소장도 “‘임자년’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중국 쪽 목간 연구자도 같은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임자년 목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산산성에서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감안할 때 임자년 간지의 연대는 532년, 592년, 652년 중 하나에 해당된다. 주목할 점은 해당 목간이 성을 쌓기 전 나뭇가지 등 폐기물로 땅을 다지는 부엽층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목간 연대가 성산산성의 축조 시점을 알려주는 중요한 열쇠인 셈이다. 학계는 삼국시대 당시 정황을 감안하면 임자년은 532년 혹은 592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만약 592년으로 본다면 대가야는 이미 562년에 멸망했으므로 성산산성 축성 의도는 백제나 왜(倭)를 겨냥한 걸로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6세기 말∼7세기 초 백제는 왜와 손잡고 신라에 맞서는 형국이었다. 백제 무왕이 602년 왜와 동맹을 맺고 전북 남원 일대의 신라 영토를 공격한 ‘아막성 전투’가 대표적인 예다. 임자년을 532년으로 봐도 새로운 역사해석이 가능하다. 함안은 신라가 점령하기 직전까지 아라가야의 영토였는데, 학계는 아라가야가 550년 무렵까지 존속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성산산성이 신라에 의해 532년에 세워졌다면 아라가야 멸망 시점은 통설보다 앞당겨질 수밖에 없다.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성산산성에서 7세기 전반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걸 보면 임자년 목간은 592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며 “성산산성의 역사적 성격을 새롭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야트막한 구릉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봉긋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봉분들이 지평선까지 죽 이어져 있다. 그 뒤로 펑퍼짐한 능선에 자리 잡은 성산산성(城山山城)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1400여 년 전 아라가야를 점령한 신라군의 위세가 멀리서도 느껴진다. 3일 찾은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은 고령 대가야와 더불어 위세를 떨친 아라가야의 왕릉답게 5∼10m 높이의 고총들이 장관을 이뤘다. 신라, 왜(倭)로 가는 길목에 있던 아라가야는 주변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유 문화를 지키며 수백 년 동안 생존했다. 1992∼1996년 말이산 고분을 발굴한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54)은 “함안군 주민들 덕분에 아라가야 고분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신문배달 소년이 살린 가야 무덤 “박 선생, 이리 빨리 좀 와주이소.” 1992년 6월 6일 오전. 함안 성산산성을 한창 발굴 중이던 박종익 당시 학예연구사(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장)가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일간지 지국장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배달소년이 인근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요상한’ 물건을 주워 왔다는 것이다. “암만 봐도 문화재 같다”는 사학과 출신 지국장의 말에 박종익은 꽃삽을 내려놓고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주워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 넣은 쇳조각을 본 순간 그는 ‘말 갑옷(馬甲·마갑)’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조영제 경상대 교수와 경남 합천군 옥전 고분을 발굴할 당시 비슷하게 생긴 말 갑옷 조각을 본 적이 있었다. 소년이 발견한 조각은 황갈색 녹이 두껍게 낀 상태였고, 말에 두른 갑옷답게 길이는 10cm가 넘었다. 갑옷 조각은 굴착기로 배수로를 판 구덩이에서 발견됐는데 다른 조각들도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박종익은 즉시 도청에 전화해 공사를 중단시킨 뒤 성산산성 발굴현장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갑옷 수습 임무를 맡은 이주헌이 현장에 급파됐다. 1주일에 걸쳐 흙을 조심스레 제거하자 길이 8.9m, 너비 2.8m의 거대한 덧널무덤(목곽묘)과 함께 말 갑옷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을 모두 노출시키는 데 열흘이 더 걸렸다. 1500년이 흘러 부식이 심한 갑옷 표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무사히 들어내기 위해 6명이 달라붙어 오직 이쑤시개로 흙을 긁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길이 2.3m, 너비 48cm의 말 갑옷은 한 세트가 시신 좌우에 나란히 묻혀 있었다. 굴착기 삽날로 일부가 훼손된 걸 제외하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발견돼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앞서 부산 복천동과 경남 합천군에서 말 갑옷이 출토됐지만 완형이 아닌 조각들이라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당시 암 투병 중이던 고고학 대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직접 현장을 방문해 유물을 본 뒤 감탄사를 연발할 정도였다. 5세기 중엽 아라가야 때 조성된 이 무덤은 출토 유물의 이름을 따서 ‘마갑총(馬甲塚)’으로 명명됐다. 말 갑옷은 7년의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고구려·백제와 교류 흔적 고고학계는 말이산 고분이 아라가야와 주변국의 문물 교류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마갑총 출토 말 갑옷은 고구려 쌍영총이나 동수묘 벽화에 묘사된 기마병의 말 갑옷과 매우 흡사한 형태다. 이에 따라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한반도 남부를 공략할 때 가야로 유입된 고구려 갑옷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마갑총 조성 시점을 430년 이후로 보면 쇠를 다루는 데 능했던 가야인들이 고구려 갑옷의 영향을 받아 자체 생산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말이산 고분의 묘제가 시대에 따라 널무덤(목관묘)과 덧널무덤, 구덩식 돌덧널무덤(수혈식 석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으로 다양하게 변화된 것도 주변국 영향이 컸다. 이 중 6세기 전반에 나타난 굴식돌방무덤은 백제의 무덤양식을 들여온 것으로 분석된다. 당시 강성해진 신라의 서진(西進)에 위협을 느낀 아라가야는 백제, 대가야와 연맹을 맺은 상태였다. 이주헌은 “마갑총에서 나온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도 백제 중앙과 아라가야의 긴밀한 교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유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함안=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칭기즈칸(1162∼1227)과 종교는 서로 어울리는 주제인가. 잔인한 정복자 이미지가 강한 칭기즈칸에게서 종교적 영성을 찾는 것이 어쩌면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책은 일견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요소를 중심으로, 그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다른 칭기즈칸 평전들과 차별화된다. 세계 20개국에 출간된 베스트셀러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2005년)를 쓴 저자는 20년 동안 몽골제국 연구에 천착한 이 분야 권위자다. 이 책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건 칭기즈칸이 신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며 점령지의 부패한 종교 권력을 징벌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언뜻 현대 제국주의 지배를 연상하며 강한 혐오감부터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통합의 핵심이던 중세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몽골이 세계 공략에 나선 13세기는 유럽의 가톨릭, 중동의 이슬람, 아시아의 불교·도교·유교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했다. 민중들을 착취하는 부패한 종교 권력을 그대로 두고선 광활한 영토의 수많은 민족들을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다. 부패하지 않은 정상적인 종교들에 대해선 광범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그는 전장에 나가서도 밤이면 다양한 종교의 성직자들을 불러 강론을 청해 들었다. 저자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칭기즈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규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몽골군이 각국의 종교 중심지를 공략하는 데 힘을 기울인 것은 화려한 보물을 약탈하려는 목적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정적인 군사 자원을 동원해 종교적 상징물을 철저히 파괴했다. 그 대신 점령지 내 치안을 확립한 뒤 도로, 항구 등 인프라를 깔고 세금을 낮췄다. 저자는 “몽골은 (점령지에서) 광신적 종교의 족쇄를 쳐부숨으로써 전례 없는 글로벌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고 썼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제33회 동아국악콩쿠르에서 최잔디 씨(29·한예종 전문사)가 판소리 부문 일반부 금상을, 박정수 양(17·국악고 3년)이 판소리 부문 학생부 금상을 받았다. 동아일보사와 국립국악원이 공동 주최하고 롯데그룹이 협찬한 동아국악콩쿠르 시상식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는 일반부 9개 부문(작곡 판소리 정가 가야금 거문고 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병창·민요)에 258명이, 학생부 7개 부문(작곡 가야금병창·민요 제외)에 267명이 참가해 열띤 경쟁을 벌였다. 본선 진출자 80명 가운데 일반부 9명, 학생부 7명의 금상 수상자를 포함해 입상자 46명이 나왔다. 상금은 일반부가 금상 100만 원, 은상 70만 원, 동상 50만 원이고 학생부는 금상 70만 원, 은상 50만 원, 동상 30만 원이다. 안숙선 명창과 제자들의 기탁금으로 마련된 ‘향사 박귀희상’은 가야금병창 부문 수석을 차지한 김지애 씨(29·중앙대 대학원 졸)가, 작곡 부문 수석에게 시상하는 ‘전인평 국악 작곡상’은 장민석 씨(22·중앙대 3년)가 차지했다. 민속국악기사가 제공하는 거문고를 부상으로 받는 ‘민속국악기상’은 박진희 씨(22·서울대 2년), 송아정 양(17·국악고 3년)에게 돌아갔다. 동아닷컴()은 동아국악콩쿠르 16개 부문의 본선 실황을 동영상으로 제작해 24일부터 유료로 서비스한다. 심사 결과는 3일부터 동아닷컴에서 확인할 수 있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 부문별 수상자<작곡> ▽일반부 △금상 장민석(22·중앙대 3년) △은상 이아로(22·한양대 3년) △동상 김주리(25·한양대 졸) <판소리> ▽일반부 △금상 최잔디(29·한예종 전문사) △은상 없음 △동상 김주리(25·중앙대 대학원) 정희나(21·서울대 4년) ▽학생부 △금상 박정수(17·국악고 3년) △은상 이승훈(16·전통예고 2년) △동상 없음 <정가> ▽일반부 △금상 없음 △은상 없음 △동상 김재민(18·한양대 1년) ▽학생부 △금상 정선영(17·국악고 3년) △은상 홍선호(17·창덕여고 3년) △동상 조예진(16·국악고 2년) <가야금> ▽일반부 △금상 함지호(20·한양대 1년) △은상 한민지(20·서울대 3년) △동상 장원영(21·한예종 4년) ▽학생부 △금상 이유림(17·국악고 3년) △은상 이승준(17·계원예고 3년) 임영범(17·국악고 3년) △동상 없음 <거문고> ▽일반부 △금상 강태훈(19·한예종 2년) 박진희(22·서울대 2년) △은상 없음 △동상 최수정(21·한예종 3년) ▽학생부 △금상 송아정(17·국악고 3년) △은상 이지수(17·국악고 3년) △동상 황지민(17·국악고 3년) 이루리(16·국악고 2년) <피리> ▽일반부 △금상 윤휘수(20·한예종 2년) △은상 변우림(20·한예종 1년) △동상 오초롱(27·한예종 졸) ▽학생부 △금상 이준섭(17·국악고 3년) △은상 김석언(16·국악고 2년) △동상 김현승(16·국악고 2년) <대금> ▽일반부 △금상 강병하(18·한예종 1년) △은상 박수현(19·이화여대 2년) △동상 전성원(23·한양대 대학원) ▽학생부 △금상 고수연(17·전통예고 2년) △은상 유수빈(17·국악고 2년) △동상 이채현(17·국악고 3년) 이의철(17·전통예고 3년) <해금> ▽일반부 △금상 이예희(22·한예종 1년) △은상 변주현(22·서울대 4년) △동상 김솔림(19·한양대 2년) ▽학생부 △금상 강서연(17·국악고 3년) △은상 이지현(17·국악고 3년) 정혜원(16·국악고 2년) △동상 없음 <가야금병창·민요> ▽일반부 △금상 전병훈(22·한예종 전문사) △은상 김지애(29·중앙대 대학원 졸) △동상 없음}

충북 충주시 탄금대에서 백제시대 제철유적이 지난해에 이어 무더기로 발견됐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탄금대 남쪽 경사면에서 제련로(製鍊爐·철광석을 녹여 철을 만드는 가마) 8기와 철광석을 쪼개기 위해 불을 땐 흔적이 있는 유구 1기를 발견했다”고 28일 밝혔다. 앞서 연구소는 지난해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제련로 3기와 불 땐 흔적의 유구 9기를 발견했다. 불에 탄 나뭇조각을 갖고 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해당 유적은 모두 4세기에 만들어진 걸로 조사됐다. 예부터 철이 많이 나는 곳답게 200m² 면적에서만 원형 제련로 8기가 한꺼번에 발견됐다. 한지선 연구소 학예연구사는 “지금껏 발굴된 제철유적 가운데 면적당 밀집도가 가장 높다”며 “백제인들이 철을 집약적으로 생산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와 올해 발굴된 제련로 총 11기는 3개 층위에서 각각 나왔다. 쓰던 제련로를 폐기한 뒤 그 위에 흙을 덮고 새로운 제련로를 만드는 행위를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전 제련로의 하부구조 등을 재활용해 효용성을 높인 흔적도 발견된다. 4세기 내내 최소 100년에 걸쳐 충주 탄금대 일대에서 철을 만든 것은 이곳이 철광석 주요 산지인 데다 남한강 수운(水運)을 통해 철을 실어 나를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코트디부아르 무용수 아만은 공연차 한국에 들어왔다가 2002년 조국이 내전에 휩싸이는 바람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독일로 떠난 동료들은 모두 난민 인정을 받았지만 아만 부부는 16년째 한국 정부의 난민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그사이 나날이 커가는 그의 자녀들은 희망 없는 무국적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에 걸맞은 국제적 의무를 다하고 있는가. 여성 인권 전문가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58)이 내전과 기아, 종교적 박해를 피해 국내로 들어온 난민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실태를 파악한 신간 ‘우리 곁의 난민―한국의 난민 여성 이야기’(서울연구원·사진)를 펴냈다. 우리나라 난민 신청자는 지난해 말 기준 2만2792명에 달하지만 이 중 672명만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전쟁을 피해 한국에 들어온 시리아인(약 1200명) 가운데 난민으로 인정받은 인원은 4명에 불과하다. 세계 난민 인정 비율 38%에 현격히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지은이는 세계 난민의 역사와 현황, 한국에서 난민들의 삶을 소개하며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 난민들의 고충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6·25전쟁 당시 600만 명의 한국인 피란민을 구호하는 데 미얀마와 라이베리아, 이라크, 스리랑카, 시리아 등도 힘을 보탠 사실도 강조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임나가 가야의 일국(一國)임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14일 만난 고대사학자 김현구 고려대 명예교수(73)는 “임나를 가야로 보는 한국 사학계의 시각을 식민사학으로 몰아붙이는 재야사학 쪽 주장은 역사왜곡”이라며 “나는 왜(倭)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에 평생 맞선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가야사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김 명예교수는 재야사학계의 주장을 반박한 저서 ‘식민사학의 카르텔’을 이르면 다음 달 말 발간한다. 김 명예교수에 따르면 임나가 가야의 일국임을 보여주는 역사 기록은 여럿이다. 삼국사기 강수전에 “신은 본래 임나가라 사람입니다(臣本任那加良人)”라는 내용, 고구려 광개토대왕릉 비문에 “바야흐로 관군(官軍·고구려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급히 추격해 임나가라 종발성에 이르렀다”는 기록, 신라 진경대사탑비에 기록된 “선조(先祖)는 임나 왕족이고 원조(遠祖)는 흥무대왕(興武大王·김유신)”이라는 문장 등을 들 수 있다. 단, 임나의 위치에 대해선 고령(대가야)과 김해(금관가야), 함안(아라가야)으로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언급된 한반도 남부에서의 왜의 존재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김 명예교수를 비롯한 한국 사학계는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1949년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한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허구로 본다. 임나는 이미 5∼6세기부터 기록에 등장하는데, 정작 일본(日本)이라는 명칭은 7세기 중엽 이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김 명예교수는 “백제 호족인 목 씨가 임나를 경영했으며 이때 임나에 소속된 왜인들은 백제의 용병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사학계 일각에선 임나가 백제와 왜 사이의 교역을 중개한 기관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2004년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한일 고대사학자들이 토론을 벌일 때에도 임나 주체가 누구였는지가 논란이 됐다. 당시 왜가 임나 대신 백제와 주로 사신을 교류한 데 대해 사토 마코토 도쿄대 교수는 “왜가 임나를 직접 지배했기 때문에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명예교수는 “왜가 임나에 통보할 내용도 백제를 통한 사실을 고려하면 임나는 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게 맞다”고 반박했다. 김 명예교수는 이번 책을 출간한 목적에 대해 “임나를 가야로 보거나 낙랑 위치를 평양으로 본다고 식민사학으로 규정하는 재야사학계의 행태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며칠 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을 둘러봤다. 공들인 전시였겠지만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다룬 제1전시실의 전시 유물 수가 다른 전시실에 비해 적었고, 문헌기록을 나열하는 방식 위주였기 때문이다. 반면 1960∼80년대 경제성장을 다룬 제3전시실은 새마을운동 설명 코너에 찰흙 인형으로 만든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설치했다. 국산 자동차 1호 포니 실물을 비롯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입안된 사무실을 알리는 기념판도 있었다. 전시를 보는 동안 2년 전 재개관 당시 둘러본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전시실이 떠올랐다. 임정 전시실은 1층에 회의실과 부엌, 2층에 백범 집무실과 침실을 고스란히 복원해 현장감을 살렸다. 문헌기록 중심의 익숙한 스타일보다 모형과 소품, 영상 등 다양한 자료를 곁들이는 게 요즘 전시의 ‘대세’이자 관객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이다. 임정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박물관이라면 임정과 독립운동사 조명에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주요 불교 문화재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다. 국립대구박물관은 불교조각과 불경, 불화 등을 선보이는 ‘깨달음을 찾는 소리, 소리로 찾은 진리’ 특별전을 최근 개최했다. 국보 2건과 보물 4건 등 약 100건의 유물을 모았다.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만든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국보 제106호)과 고려 우왕 3년(1377년) 죽은 어머니의 명복과 아버지의 장수를 빌기 위해 지은 ‘백지묵서묘법연화경’(국보 제211호)이 특히 눈길을 끈다. 비석 모양 조각상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은 1960년 충남 연기군 비암사(碑岩寺)에서 발견됐다. 국왕과 대신(大臣),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해 불상을 봉헌한다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신라와 백제 관직명이 나와 삼국통일 직후 백제 유민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감은사지 서쪽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366호)와 백지금니금강 및 보문발원(보물 제1303호), 대구 보성선원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복장유물(보물 제1801호)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 제목에서 짐작되듯 대웅전 처마 끝 풍경 소리나 새벽에 울리는 범종 소리, 염불 소리 등 사찰에서 녹음한 생생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음 달 30일까지. 053-768-6051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만 3년 동안 책의 향기 회의에 참석하면서 ‘나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신간을 처음 받으면 책날개를 뒤적이며 저자 경력과 출판사 이름부터 확인하는 습관이다. 처음엔 책에 대한 선입관을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조심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어느새인가 책날개부터 먼저 들춰봤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짧은 시간 안에 책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데 유용한 정보라고 여겼다. 투자자가 금융상품을 결정할 때 이른바 ‘트랙 레코드’(투자 실적)를 따져보는 것에 비교하면 너무 과할까. 하지만 문화는 결코 효용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임을 깨달았다. 이쯤에서 짧은 반성문을 하나 써 보자. 이달 초 리뷰 기사를 쓴 ‘반 고흐의 귀’(버나뎃 머피 지음)는 저자에 대한 편견 때문에 자칫 놓칠 뻔한 명작이었다. 전문 미술사학자가 아닌 데다 요양하면서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려고 고흐의 귀 절단 사건을 추적하기로 했다는 저자의 말에 그저 ‘가벼운’ 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넘기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퍼즐을 맞추듯 고흐가 자해한 1888년 12월 23일의 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했다. 1880년대 당시 고흐의 이웃 주민 1만5000명의 신상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저인망(底引網)식 조사가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돌이켜보면 저자가 오히려 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성과 아니었을까. 만약 전문 미술사학자였다면 고흐 주변 예술가나 작품들에 집중하느라고 다른 걸 살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상식을 깨는 발칙한 책은 화려한 이력의 전문가들만 쓸 수 있는 건 아닐 거다. ‘전문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올 3월 나는 중국 베이징 칭화(淸華)대 근처 아파트 단지에 꼼짝없이 갇혔다. 칭화대 내부를 둘러본 뒤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한 유명 서점으로 서둘러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큰길을 버리고 구글 맵을 켠 채 골목으로 들어갔다. 맵에 뜬 행선지까지 최단거리를 따라 아파트 단지를 종단했는데, 아뿔싸 입주민만 통과할 수 있는 거대한 벽이 정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국 아파트의 개별 동(桐) 출입문에 익숙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거대한 단지를 한참 걸어온 터라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분명 아파트 정문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다니는 대로에 접해 있었다. 현지에 사는 지인은 “중국의 오랜 폐쇄적 주거구조는 현대 아파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둘러본 경험을 에세이로 정리한 이 책을 보는 내내 베이징에서 겪은 일이 떠올랐다. 제목에 등장한 ‘시끄러운 중국인’의 기원도 폐쇄적인 주거 공간에서 연유한 거라는 저자의 설명 때문이다. 건축가인 그에 따르면 중국은 예부터 거대한 성벽을 두른 도성(都城) 내부를 높은 담장으로 구획하는 방식을 따랐다. 곳곳에 설치된 담장이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다 보니 소통을 위해 고함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독특한 도시 구조가 중국인들의 속성을 결정한 셈이다. 지은이 역시 중국 아파트의 특이한 구조를 인상 깊게 본 듯하다.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근현대 아파트 단지 역시 옛 습성을 유지한다. 불친절하게 닫혀 있어 외부인을 위축되게 한다”고 썼다. 당나라 수도였던 시안(西安)을 여행하며 동시대 신라의 경주, 일본의 헤이안쿄(平安京·현 교토)를 비교한 대목도 인상적이다. 평지에 자리 잡아 네모반듯한 궁성과 바둑판식 시가지를 갖춘 시안, 헤이안쿄와 달리 사방이 산으로 막힌 경주는 자연 곡선을 살렸을 거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반달처럼 휘어진 모양의 경주 월성(月城)을 떠올리면 상당히 일리 있는 얘기일 수 있을 것 같다.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