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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군 안면도 해수욕장에서 해병대 훈련을 모방한 극기 훈련 캠프에 참가했던 공주대사범대부설고 남학생 5명이 물에 빠져 숨졌다. 학생들이 90명씩 2개조로 래프팅 훈련을 받던 중 구명조끼를 훈련조에 벗어준 휴식조가 교관의 지시에 따라 물놀이를 하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파도에 휩쓸렸다. 당시 휴식조의 교관은 2명뿐이고 인솔교사는 없었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안전 불감증이 낳은 부끄러운 사고다. 사고를 낸 캠프는 ‘해병대 리더십교육센터’라는 이름을 내걸었지만 해병대와는 무관한 곳이다. 극기 훈련이 인기를 얻자 한 곳뿐인 진짜 해병대 캠프를 모방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짝퉁 해병대 캠프 중 하나다. 이런 캠프들은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만 하면 영업이 가능하다. 여성가족부가 청소년 체험활동 인증이라는 것을 내주기는 하지만 추천할 만한 곳이라는 의미밖에 없다. 지난해 7월에는 무인도 체험을 갔던 경남 김해의 대안학교 학생 2명도 실종됐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여름방학이 시작됐는데 자녀를 캠프에 보내는 학부모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교육부는 최근 청소년 캠프 사고가 잇따르자 학교에 인증 체험캠프를 이용하도록 당부해 왔다. 사고를 낸 태안의 캠프는 지난해 10월 등록을 마친 신생 업체로 인증은 받지 못했다. 교육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미(未)인증 업체를 선정한 학교 측도 책임이 크다. 사고가 난 곳은 물살이 세서 노를 이용한 보트훈련만 할 수 있고 수영은 할 수 없는 곳이다. 지역 주민은 평소 그곳에서 캠프 훈련을 하는 것을 걱정했다는데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태안해양경찰도 제 역할을 못했다. 청소년 캠프의 일탈은 심각한 수준이다. 어느 미등록 국토순례 행사 운영자는 2005년과 지난해 참가 학생들을 폭행 또는 성추행해 물의를 빚고도 올해 다시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사고는 어른들이 기본적인 안전수칙만 지켰어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더욱 안타깝다. 정부 지방자치단체 교육청 경찰은 난립한 캠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 더이상 생때같은 자식을 부모 가슴에 묻어서는 안 된다.}

우파 인터넷 논객 변희재 씨가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의 석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을 때 두 가지를 생각했다. 변 씨의 말은 맞는 게 반이고, 틀린 게 반이니까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는 것과 박사학위 논문은 몰라도 석사학위 논문까지 표절시비를 하는 것은 심하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직접 확인을 해봤고 이 표절은 좀 심각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 교수는 1989년 서울대 법대 대학원에 제출한 석사학위 논문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에서 학과 선배였던 김도균 씨(현 서울대 법대 교수)가 그 전해 한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에서 8문장 342자, 즉 논문 한 쪽의 절반 분량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베꼈다. 그런데도 조 교수는 각주(脚註)에 독일어 원서에서 직접 인용한 것처럼 쓰고 있다. 조 교수는 “인용된 문헌은 내가 직접 읽은 것이기에 (김 교수의) 논문을 재인용하지 않고 원문을 직접 번역했다. …정밀하게 비교해 보면 인용된 외국 문헌의 문장의 배치나 번역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해명했다. 해명대로 정밀하게 비교해 보니 논문 한 쪽의 절반 분량이 토씨 하나 차이 없이 똑같았다. 이런 식의 거짓말을 해명이라고 하다니 세상이 엄한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그 독일어 원서 ‘사회주의 법 입문(Einf¨uhrung in das sozialisti-sche Recht)’을 구해서 읽어 봤다. 김 교수의 번역은 직역이 아니라 상당히 자의적인 의역이다. 가령 첫 문장인 “스투치카는 소유관계 및 이로부터 파생되고 이와 연관되어 있는 교환관계를 법률관계로 보고 있다”만 봐도 원문의 상품교환(Warenaustausch)을 교환관계로, 법의 구체적 형식(konkrete Form des Rechtes)을 법률관계라고 번역했다. 조 교수가 직접 번역했다면 절대로 김 교수가 번역한 것과 똑같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책을 서울대 법대 도서관에서 구해 봤다. 책의 뒷장에는 낡은 열람자 명단 카드가 남아 있는데 조국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 조 교수가 논문을 쓰면서 1988년에 이 책을 빌린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책을 읽었다는 증거인가. 그렇지 않다. 책을 빌려놓고도 남의 번역을 갖다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독일어 원서를 혼자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가 자기 논문에서 독일어를 쓴 곳은 5곳에 불과하다. 몇 자 안 되는데도 자연사를 Naturgeschichte 대신 Naturgeschite로 쓰고, 법철학을 Rechtsphilosophie 대신 Rechtphisophie로 쓰는 등 2군데가 틀렸다. 독일어를 조금만 알아도 틀릴 수 없는 철자다. 반면 영어는 훨씬 많은 곳에 사용했는데도 틀린 걸 찾을 수 없었다. 꼼꼼하지 않아 일어난 실수가 아니라 그가 독일어에 서툴다는 증거다. 서울대는 조 교수의 표절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변 씨의 주장에 따르면 조 교수 석사학위 논문에는 일본어와 영어 원서의 재인용 표절 의혹이 훨씬 많다. 지켜보는 눈이 많다. 서울대는 원서와 번역서를 일일이 대조해 표절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밝혀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지는 모르겠으나 난 우리나라에서 석사학위 논문이란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전에 논문 쓰는 법을 한번 연습해 보는 과정 정도로 생각한다. 그래도 기본은 자기 의견을 전개하는 곳과 남의 글을 인용하는 곳을 구분하는 것이다. 또 남의 글도 원서에서 인용한 것인지, 번역서에서 인용한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 나도 석사학위 논문은 써봤다. 그래서 석사과정 학생들이 번역서에서 인용하면서 원서에서 인용한 것처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유혹에 빠져 실수를 했다면 솔직히 시인하고 반성하면 된다. 석사학위 논문이라면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고 본다. 공부가 업(業)이 아닌 연예인조차도 석사학위 논문 표절이 드러나면 사과하는데 조 교수는 반성은커녕 시인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역대 국정원장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개인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 그제 서울중앙지법 김우수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황보연 전 황보건설 대표로부터 청탁과 함께 1억6000여만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원 씨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998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국정원으로 바뀐 이후 원 씨 이전까지 8명의 원장 중 5명이 검찰 조사를 받거나 사법 처리됐지만 모두 불법감청 등 권한 남용 때문이었지 개인 비리는 아니었다. 원 씨는 2009∼2010년 홈플러스의 인천 무의도 연수원 인허가 과정에서 황 전 대표를 위해 산림청에 청탁을 해주고 대가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연수원이 들어선 무의도 땅은 산림청 소유의 국유지였다. 산림청은 국유림과 자연경관 훼손 우려 등을 이유로 허가를 반대했으나 9개월 만에 의견을 바꿔 찬성했다. 이승한 홈플러스 총괄회장은 당시 정광수 산림청장에게 연수원 설립에 대해 직접 공사개요를 설명했다. 검찰은 이 과정에 원 씨가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首長)이 건설업자의 청탁을 들어주고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것은 국정원 전체의 불명예다. 원 씨는 이미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다. 국회에서 국정조사도 받아야 한다. 원 씨의 구속 사유인 개인 비리는 국정원 댓글 사건과는 별개다. 야당 일각의 주장처럼 수십 건의 정치적 댓글로 대선 판도를 바꿀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국정원장과 국정원이 어디까지 정치에 개입했는지 개인 비리와는 별개로 국민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원 씨는 황 전 대표와 서울시 공무원 시절 알게 돼 10년 넘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할 정도로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국정원장 시절에도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다니고 골프도 쳤다고 하니 누가 봐도 떳떳하지 않은 처신이다. 국정원 댓글 사건도 정보 분야의 아마추어인 원 씨가 국가 안보와 정권 수호를 구분하지 못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만으로 국정원을 운영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도 있다. 국정원이 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원 전 원장과 그를 임명한 이 전 대통령이 누구보다 먼저 통렬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시인 신경림은 ‘시인을 찾아서 2’란 책의 안도현 편에서 그의 시가 읽히는 이유를 ‘작고 하찮은 것에 대한 애착’이라고 요약했다. 그런 시인이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돼 마치 불우국비시(不憂國非詩),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자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안도현이 최근 트위터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도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는 글을 올렸다. 황당한 절필 선언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인 것과 자신이 시를 쓰고 안 쓰는 게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고,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도’는 ‘나 같은 시인 하나 시 안 써서’로 딱 한 자만 고쳐주고 싶다. ‘다만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는 대목은 나이 오십을 넘긴 시인이 아이들처럼 두고보자는 것 같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공지영이 이런 데 빠지면 공지영이 아니다. 그는 “박정희 전두환 때도 시를 썼던 안도현 그때도 검찰에는 끌려가진 않았다. 이제 검찰 다녀온 시인의 시를 잃는다. 너무 아프다”는 트윗을 올렸다. 그러나 안도현은 시를 써서 검찰에 불려간 게 아니다.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시절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의 유묵을 훔쳤다는 뉘앙스의 글을 17차례나 올려 허위비방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시인도 시인이기 전에 법을 지켜야 하는 공민(公民)이다. ▷대선 기간 안도현에게 시인의 언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허위비방 트윗에는 ‘박근혜 후보님, 혹시라도 이 기회에 국가에 돌려주실 생각은 없는지요’ ‘박근혜 후보는 본 적도 없다고 잡아떼면 끝인가요’ 등의 글을 올렸다. 다른 정치인들에게 ‘뻘짓 그만하시고’ ‘개콘(개그콘서트)보다 못한 찌질이’라는 표현도 썼다. 시심(詩心)이란 게 순정(純情)과 비슷해서 잃으면 되찾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정치 참여를 걱정했던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펑유란(馮友蘭)이 1934년 완성한 ‘중국철학사’는 중국인이 쓴 최초의 중국 철학사다. 그는 1948년 미국 대학의 방문교수로 있으면서 강의 교재로 쓰기 위해 영어로 된 ‘A Short History of Chinese Philosophy’라는 책을 새로 펴냈다. 내가 대학 교양과정에서 중국철학을 배울 때 교재도 이 영어책이었다. 그의 ‘중국철학사’는 1983년 영어로 완역돼 중국 철학사의 표준서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7년 5월 ‘월간에세이’에 기고한 ‘내 삶의 등대가 되었던 동양철학과의 만남’이라는 글에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던 시절 내 삶의 한 구석에 들어와 인생의 큰 스승으로 남은 것이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라며 “논리와 논증을 중시하는 서양철학과는 달리 동양철학에는 바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도리와 어지러운 세상을 헤쳐 나갈 지혜의 가르침이 녹아 있었다”고 썼다. 박 대통령의 방중에 앞서 중국에서 출판된 책 ‘박근혜 일기’에 이런 내용이 실리면서 중국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장즈쥔(張志君) 중국 국무원 대만판공실 주임이 올 1월 박 대통령 당선 축하 특사로 왔을 때 꺼낸 첫말이 “펑유란은 제 스승입니다”였다. 장 주임이 베이징(北京)대학을 다닌 1970년대 펑유란은 교수로 있었다. 펑유란은 1949년 장제스(蔣介石)가 대만으로 도망가면서 함께 가자고 요청했지만 뿌리쳤다. 그 대신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과거 봉건철학을 강의하고 국민당을 도왔다. 현재 나는 사상을 개조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는 편지를 썼다. 마오쩌둥은 그를 베이징대에 복귀시켰다. ▷박 대통령은 수첩공주란 별명답게 ‘중국철학사’에서 맘에 드는 글귀들도 기록해뒀던 모양이다. 그는 얼마 전 기자 간담회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니 ‘이거 내가 실천하고 있는 거잖아’라고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 글귀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깊은 방안에 앉아 있더라도 마음은 네거리를 다니듯 조심하고, 작은 뜻을 베풀더라도 여섯 필의 말을 부리듯 조심하면 모든 허물을 면할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민의 알 권리를 외쳐 온 사람들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에 대해선 유독 국민의 모를 의무를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입만 열면 국가안보에 ‘명백하고 현존한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한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사람이다. 그런 이들이 지금 ‘국익 훼손’이라는 명백하지도 현존하지도 않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를 부인하고 있다. 국가의 일은 개인의 일과 달리 공개가 원칙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알 권리라는 측면에서 공공기록물관리법과 달리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NLL 대화록은 공공 기록물로도, 대통령 기록물로도 볼 수 있다. 두 가지로 다 볼 여지가 있을 경우 알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공공 기록물로 볼 것이고, 국민이 아는 게 두려운 사람은 대통령 기록물로 볼 것이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한번 어떤 자료를 비공개로 지정하면 이를 열람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만들어놓았다. 미국의 대통령기록물법(Presidential Records Act)은 비공개로 지정되더라도 의회나 현직 대통령이 요구할 경우 달리 그 내용을 알 방법이 없다면 관리책임자가 이를 볼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은 현직 대통령이 참고하려고 해도 아예 볼 수 없게 해놓고, 국회도 3분의 2의 정족수로 의결해야 볼 수 있게 해놓았다. 공개는 고사하고 열람하는 데만 헌법 개정 정족수가 필요하니 볼 생각조차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NLL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는 말을 했다. 표절 좀 하자면 대통령 지정 기록물이라는 것이 이상하게 생겨 가지고 무슨 괴물처럼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물건이 돼 있다. 비밀로 지정하는 것은 좋은데 필요할 때는 볼 수 있는 길도 열어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니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몹쓸 법인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NLL 대화록 논란에 먼저 ‘까자(공개하자)’고 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전임 대통령 스스로도 열람은 할 수 있지만 공개는 못하는 게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이다. 비밀 물신(物神)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밀은 사람이 정한다. 그런데도 원래부터 비밀이어서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비밀에 종속되는 현상을 물신주의라고 부른다. 정상회담 회의록이라고 영원한 비밀은 아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에 따라도 15년 뒤에는 공개된다. 물론 2007년 정상회담은 5년여가 지났을 뿐이지만 그 사이 회담 당사자인 노 전 대통령과 김정일이 사망했다. 앞으로 크게 달라질 상황은 없다. 그렇다면 15년에 집착하지 말고 유연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국가정보원은 NLL 대화록을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라 비밀에서 해제하고 공개했다. 국정원장은 이를 비밀에서 해제할 정당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정략적 의도도 없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 권리의 편에 서는 사람이라면 NLL 대화록의 공개 자체를 비판할 수 없다. 대선은 끝났고 국민은 대선 기간에 초관심사였던 NLL 대화록에 대해 되도록 많은 것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김만복 전 국정원장 등은 2007년 정상회담에서 NLL 관련 논의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공개된 대화록을 보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말처럼 NLL이 괴물이 돼서는 안 된다. 세계 역사에 땅을 주고 평화를 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사실상의 영토선으로 인식되고 있는 NLL을 무력화하려는 주장을 하려면 국민에게 동의를 얻었어야 한다. 솔직히 말해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은 대화록이 공개되지 않았어도 그간의 발언과 행적으로 다 미뤄 알고 있던 것이다. 그걸 굳이 비밀의 문 뒤에 애써 숨겨야 정치적으로 연명할 수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대통령은 그제 국무회의에서 “전직 대통령 추징금 문제는 과거 10년 이상 쌓여온 일인데도 역대 정부가 해결 못하고 이제야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에 대한 강력한 환수 의지를 밝힌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1672억 원의 추징 시효는 10월에 끝난다. 검찰이 추가로 추징해서 시효를 연장하지 못한다면 은닉 재산은 고스란히 전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의 몫이 된다. 검찰은 지난달 은닉 재산을 찾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전담팀까지 꾸렸으나 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발언까지 나왔으니 검찰과 국세청이 더 분발해야 할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의 장남인 전재국 씨는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고 아랍은행과 거래한 사실이 최근 드러났다. 역외(域外) 탈세 혐의 등에 관한 조사가 뒤따라야 한다. 그는 지난해 매출 440억 원을 올린 출판사를 보유하고 있다. 차남인 전재용 씨는 서울 서소문의 빌딩 5채를 200여억 원을 주고 매입해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재산을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쌓았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야당은 이른바 ‘전두환 추징법’을 추진하고 있다. 법안 가운데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노역형에 처한다’ ‘가족이 재산형성 과정을 입증하지 못하면 추징금을 내야 한다’ 등의 조항은 위헌의 소지가 있다. 다만 추징 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여야가 합의하게 되면 가능해 보인다. 대법원은 1997년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205억 원,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629억 원의 추징금을 확정했다. 이후 15년 동안 정부는 노 전 대통령 추징금에 대해서는 약 90% 수준까지 환수했으나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5% 정도밖에 환수하지 못했다. 전 전 대통령이 더 지능적으로 불법 재산을 숨겼기 때문이겠지만 과거 정권에서 검찰이 적극적으로 은닉 재산을 찾지 않은 탓도 있다. 박 대통령은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것은 난센스적인 일이다.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 발언은 박 대통령이 추징금 환수에서 역대 정권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때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정부를 상대로 책임을 떠넘기는 일에 불과하다. 누구도 부정한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을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도 두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을 끝까지 찾아내 환수해야 한다.}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정원법과 함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공직선거법 적용 여부는 수사 막바지에 관심을 끌었던 쟁점이다. 국정원 수사는 이제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됐지만 수사 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우선 검찰의 태도다. 국정원 수사는 채동욱 검찰총장 체제의 진로를 가늠해볼 수 있는 제1호 수사였다. 명예회복을 원하는 검찰은 원 전 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적용과 구속 기소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경우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에 흠집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권부와 여권으로부터 제기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권부와 여권이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유불리를 따져 검찰에 영향을 주려 한 것은 잘못이다. 검찰도 그런 분위기에 흔들려 법리 검토를 구실로 원 전 원장의 사법 처리를 미룸으로써 권위와 신뢰에 상처를 입었다. 검찰이 공직선거법을 적용하되 불구속하기로 한 것은 청와대와 여야의 눈치를 본 타협안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검찰은 지난달 가수 은지원 씨가 박 대통령과 고 최태민 목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허위 사실을 자신의 트위터에 10여 차례 올린 혐의로 나모 씨를 구속 기소한 바 있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검찰의 수사대로 국정원장 같은 권력기관장이 여당 후보를 당선시킬 목적으로 선거 과정에 개입했다면 나 씨보다는 무겁게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불구속 기소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검찰이 법리 검토를 정확히 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원 전 원장이 선거법 위반을 의식하고 그로 인한 사법 처리까지 감수하면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힘을 쓸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원 전 원장 측은 변호사를 통해 검찰의 선거법 적용에 대해 “전혀 사실과 다르다”며 즉각 반발했다.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 과정에서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말라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수사지휘권을 행사했다느니, 곽상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검찰에 전화를 했다느니 하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들도 흘러나왔다. 민주당은 이를 근거로 검찰을 압박했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검찰이 적용 혐의와 기소 여부를 밝히기도 전에 황 장관 해임 결의안을 제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황 장관의 수사 개입을 문제 삼는 민주당이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순이다.}
법원이 위증죄에 대해 잇달아 징역형을 선고했다. 어제 서울북부지법은 폭행사건에서 손님에게 맥주잔에 맞고도 법정에서 맞은 적이 없다고 한 유흥업소 종업원 이모 씨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법원은 이 씨가 턱뼈가 부러진 피해자이지만 위증으로 법원 판단을 왜곡하려 한 점을 엄벌 이유로 들었다. 지난달 부산지법은 구치소에서 함께 복역했던 박모 씨에게 “내 절도죄를 뒤집어쓰면 2000만 원을 주겠다”며 거짓 증언을 부탁한 양모 씨에게 위증교사죄로 징역 10개월을, 박 씨에게는 위증죄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법정에서 위증이 만연하는 것은 위증은 큰 죄가 아니라는 인식이 강해서다. 미국 법원은 위증을 중죄(felony)로 다룬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 도청을 사주한 것도 문제였지만 위증 때문에 더 궁지에 몰렸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성추문 사건에서 위증한 탓에 변론이 가능한 변호사 명단에서 제외됐다. 리크게이트에 연루된 루이스 리비 전 딕 체니 부통령비서실장은 진실을 감추려는 몇 마디 말 때문에 징역 30개월을 선고받았다. 위증에 대한 처벌 수위도 높여야 한다. 일본은 위증을 하면 3개월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벌금형은 아예 없다. 우리나라는 벌금형 혹은 징역 5년형까지 처벌하도록 되어 있지만 위증죄 사건의 1심 선고 결과는 집행유예 이하 선고율이 80% 안팎이다. 처벌이 가벼우니 부탁이나 대가를 받고 위증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법정 진술을 바탕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수사기관에서 인정된 사실이 법원에서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고도 재판은 과거처럼 느슨하게 진행하면 피고인과 증인이 입을 맞춰 위증할 여지가 커진다. 집중 심리제를 강화해 위증과 위증의 유혹을 차단해야 한다. 위증은 반드시 처벌되며 냉혹한 결과가 기다린다는 인식이 정착돼야 사법 정의가 바로 선다.}

미국 하와이대에서 열린 미래학 워크숍에 3주간 참여했다. 3일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날은 와이키키 해변의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에서 거리 쪽으로 난 로비 발코니의 흔들의자에 앉아 보냈다. 로비 안쪽으로부터는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호텔은 측면에서 중앙으로 접근하도록 되어 있어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내 앞으로 지나다녔다. 책을 읽다가 사람 구경을 하다가 졸다가 그렇게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이틀 전 워크숍 졸업 만찬 때 존 스위니 카피올라니대 교수의 얘기로는 그의 부모님이 1970년대 이곳에 왔을 때 와이키키 해변에 핑크색 로열 하와이언 호텔과 흰색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 2개만 있었다고 한다. 와이키키의 모든 호텔은 외부인에게 개방돼 있다. 하지만 개방성에는 차이가 있어 로열 하와이언 호텔은 외부인이 지나다니기에 불편하다. 이후 지어진 셰러턴 와이키키, 힐턴 하와이언 등도 이 호텔을 모방해 외부인이 지나다니기에 불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모아나 서프라이더 호텔만이 거리의 활기를 그대로 호텔로 끌어들여 해변으로 전달하는 진정한 개방적 구조를 갖고 있다. 이 호텔에선 투숙객도 아닌 사람이 로비 발코니의 몇 안 되는 흔들의자 중 하나를 차지하고 반나절을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10달러(팁 포함 12달러)면 와인도 한잔 시켜 먹을 수 있다. 로비에서 재즈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지나다니는 여성들에게 장난스러운 추파를 보내고 등 뒤의 층계를 오르는 투숙객들에게는 얼굴을 돌려 어디서 왔느냐고 일일이 물어보기를 잊지 않는다. 와이키키의 옛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다. 사람 구경하기엔 여기보다 좋은 곳은 없을 듯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초혼 연령이 높아지는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신혼부부도 꽤 많고 은퇴한 연령의 노부부, 젊은 남녀 서퍼, ‘맘마미아’처럼 자기들끼리만 놀러온 듯한 중년 여성 그룹 등 다양하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서양인만큼이나 많은 아시아인 관광객이 드나든다는 점이다. 관광객만 아시아인이 많은 게 아니다. 하와이 주민도 아시아계가 38.6%로, 백인 24.7%보다 많다. 백인에 흑인과 히스패닉을 다 합쳐야 아시아계와 비슷해진다. 혼혈도 23.6%나 된다. 하와이는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 서양인과 아시아인 중 누가 주류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이다. 어디서나 아시아계가 넘쳐난다. 정계나 재계도 아시아계의 힘이 크다. 상점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다. 동서양의 상이한 요소들이 창의적으로 섞이고 있다. 일본 벤또에서 유래한 도시락에는 모든 음식이 담겨져 상점에서 팔린다. 한국의 갈비(LA 갈비)는 식당에서 스테이크나 로코모코(하와이식 햄버거스테이크 덮밥)와 나란히 메뉴판을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계 여성들은 서양 여성들만큼이나 활동적이다. 자기 키보다 큰 서핑보드를 들고 나와 깊은 바다로 홀로 헤엄쳐 가는 젊은 여성들과 해변에서 트라이애슬론 수영 연습을 하는 중년 여성들도 드물지 않다. 프랑스에서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백인과 북아프리카계 간의 갈등을 지켜봤다. 북아프리카계는 자긍심을 갖지 못하고 그 열패감을 폭력으로 표출했다. 미국도 동부와 남부에서는 백인과 소수인종 간의 갈등이 여전히 크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캐나다 밴쿠버 등 북미 대륙의 서부로나 와야 그 간격은 줄어들기 시작한다. 바다 건너 하와이에 와서야 융합 비슷한 것이 눈에 보인다. 금세기는 무엇보다도 중국 때문에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다. 더 많은 서양인들이, 중앙아시아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이 중국이나 그 주변국가인 한국과 일본으로 몰려올 것이다. 우리도 한편으로 누구에게도 주눅들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도 깔보지 않으면서 자신을 열 준비가 돼 있는가. 미래를 연구하는 하와이 체류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종교개혁에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루터 칼뱅 츠빙글리 등 남성들의 이야기(history)로 넘쳐나는 16세기 종교개혁사의 기록에서 거의 무시되고 망각된 여성들의 이야기(herstory)를 발굴했다. 종교개혁 때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 성직자의 아내라는 것은 없었다. 사도 바울 이래 가톨릭 교부와 신부들은 모두 독신이었다. 수녀에서 루터의 아내가 된 카타리나 폰 보라는 성직자의 아내이자 자녀들의 어머니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상을 세웠다. 브란덴부르크 선거후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폰 브란덴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 귀족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폰 브라운슈바이크, 모녀관계인 두 여성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은 아내들이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큰 희생을 치르면서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으며 각자의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들의 영토인 브란덴부르크와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신앙의 합법화를 이뤄냈다. 칼뱅의 도시인 제네바 여성 마리 당티에르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칼뱅은 처음으로 여성들의 설교를 인정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런 칼뱅도 마리가 선술집과 길거리에서 공개적인 설교를 하는 데는 분노했다. 그러나 마리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교회 내의 여성 차별적 태도와 싸우고 여성 해방을 위한 성서적 기초를 쌓았다. 이탈리아의 올림피아 풀비아 모라타는 페라라 궁전의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고전학자로 교육받았고 나중에 종교개혁의 이념에 공감한 성서적 인문주의자였다. 그녀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을 택했고 탁월한 능력으로 남성들에게만 열려 있는 학문의 장에 들어섰다. 오늘날 하이델베르크에 그녀를 기념하는 ‘올림피아 모라타 프로그램’이 있다. 종교개혁이 20세기와 같은 의미의 페미니즘의 길을 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르주아 가정의 현모양처라는 상을 수립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여성들을 더 옥죄기도 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장기적 시각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그 주된 이념인 ‘만인사제주의’가 그 안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오늘날 여성 해방의 길을 여는 단초를 제공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복원된 숭례문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신응수 대목장 등 우리 시대 최고의 고수들이 지었으니 솜씨가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새것이어서 그럴까. 그런 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숭례문 성곽이 한쪽은 길고 한쪽은 짧아 균형감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직각 삼각형 모양의, 성벽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성벽의 흔적이 대칭적으로 받쳐주던 옛 숭례문이 미학적으로는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옛 한양 도성의 정문이 좌우로 날개를 펼치듯 성곽을 거느릴 때 모습을 상상하며 복원을 추진한 모양이다. 복원된 숭례문에서 남산 쪽으로 난 성곽은 길고 대한상공회의소 쪽으로 난 성곽은 짧다. 당초 숭례문 복원계획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쪽 도로에 차량통행이 가능한 아치 형태의 성곽을 만들어 대한상공회의소 앞까지 연장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균형은 맞았겠지만 서울이라는 초현대적 도시가 직면한 긴박한 도로 사정은 그런 ‘꿈’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한상공회의소와 올리버 타워 구간에 서울 성곽이 일부 복원돼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옆 길에도 판석이 2m 폭으로 쭉 깔려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도 옛 성곽이 서 있던 자리다. 숭례문과 대한상공회의소 사이의 도로에도 페인트로 성곽길이 있던 위치가 표시돼 있다. 제주 올레길처럼 서울 성곽길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성곽을 몽땅 복원해 현대 서울을 꽁꽁 둘러싸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숭례문에까지 그 성곽을 실물로 복원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건축가가 예전에 쓴 책을 보니 “옛 도성 사람들이 모두 들락거렸던 이 문 주위를 이제는 자동차들만 돌아다닌다”는 불만을 늘어놓았다. 숭례문이 남대문으로 불리던 시절엔 이 문 주위로 빙 둘러 로터리가 있었다. 차량만 씽씽 돌아가는 도로에 둘러싸여 외로운 섬이 돼 풀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남대문이 처량해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2005년 로터리의 남쪽 부분을 막고 숭례문 광장을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2008년 바로 이 광장을 통해 숭례문에 접근한 부랑자가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예나 지금이나 숭례문은 걸어가서 보는 사람보다 차를 타고 가면서 보는 사람이 훨씬 많다. 숭례문이 국보 1호라고 하지만 그 1호가 문화재적 가치로 따져 1호는 아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코앞에서 본다고 해서 감동이 전해오는 그런 건물은 아니라는 얘기다. 로터리가 있던 시절 차를 타고 빙 둘러가면서 파노라마식으로 볼 때 느껴지는 감동이 더 컸다. 그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은 볼 수 없었던 시각(視角)에서 얻어진 것이다. 지금은 숭례문 광장과 성벽 때문에 차를 타고 가며 숭례문을 볼 수 있는 각도가 제한돼 있어 그 위용을 느끼기 어렵다. 간혹 남산의 주한 독일문화원에 가느라 숭례문 앞을 지나간다. 광화문 부근이 사무실인데도 버스나 택시를 광화문에서 타지 않고 숭례문까지 걸어 가 남산 바로 아래서 탄다. 예전 같으면 로터리를 통해 바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 서울역으로 해서 돌아가도록 돼 있는 데다 그 우회길이 차가 막힐 때가 많아 차라리 걸어가는 게 낫기 때문이다. 가깝던 남산이 지금은 아주 멀리 느껴진다. 사라진 로터리가 이곳 도로 사정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었다. 문화재 복원은 문화재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둬서는 안 된다. 문화재, 특히 시설 문화재는 도시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얻는다. 이런 가치를 알아보는 눈은 도시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훨씬 밝다. 숭례문은 문의 기능을 잃어버린 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용적 기능을 상실한 랜드마크로서 더 아름다울 수 있다. 문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문 구실을 하게 만들겠다는 어설픈 발상, 성곽의 문이니 성곽까지 복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숭례문을 불편하고 어색하게 만든 측면이 없지 않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79년 MBC 대학가요제. ‘내가’란 곡이 대상을 차지한 가요제다. 이 가요제에서 은상을 받은 전남대생이 있었다. 그가 2년 뒤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씨다. 가사는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에서 따와 지었다. 황석영은 1981년 광주항쟁 1주년을 기념해 김 씨 등과 함께 시민군 윤상원을 주제로 한 노래극을 만들고 그 대미를 장식하는 곡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지었다. 황석영이 광주 자기 집에서 두꺼운 커튼으로 방음을 해가며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했고 이후 전국 대학가로 퍼졌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로 시작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부르다 보면 오른팔이 저절로 올라간다. 1980년대 이후 대학가 집회는 이 곡으로 시작해 이 곡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항쟁 이후 투쟁을 고취하는 노래들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초입에 만들어진 노래다. 그것은 1970년대 김민기의 ‘아침이슬’이라든가 ‘늙은 군인의 노래’가 운동과는 전혀 상관없이 만들어졌으나 저항 가요가 된 것과는 다르다. ▷국가보훈처는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처음 맞는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참석자 제창 순서에 넣지 않고 합창단이 부르도록 할 계획이다. 보수층 일부에서 익숙하지도, 그 내용에 동의하지도 않는 데모가를 부르는 데 불편함을 느끼고 있음을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5·18 기념 단체들은 이 곡을 제창하지 않으면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반발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침이슬’만 한 보편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곡은 여전히 운동권의 부정적 측면인 배타성을 강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은 당 행사에서 애국가 제창 대신 이 곡을 불렀다. 통진당도 그 전례를 따르다가 여론의 포화를 맞고서야 태도를 바꿨다. 그렇다고는 하나 부르지 말자는 것도 옹색하다. 보훈처가 4800만 원을 주고 기념곡을 공모한들 그런 곡을 누가 진정성을 갖고 부르겠는가. 그래도 한 곡을 고르자면 역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우리 옛 그림을 보다 보면 조선시대는 그래도 손에 잡힐 듯하다. 겸재의 그림, 추사의 글씨는 친근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고려시대로 가면 강한 이질감이 든다. 특히 고려 불화가 그렇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종교적 외양이 압도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선과 색이 너무 감각적이어서 모순된 결합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은 얼굴은 남성이지만 신체의 선과 옷은 대단히 여성적이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교수는 최근 낸 ‘수월관음의 탄생’이란 저서에서 수월관음을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 비교했다. 서양에서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라파엘로의 그림에 등장하는 성모는 중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진다. 그 성모는 나중에 비너스로 바뀌어 부르주아 가정에 걸린다. 성모가 숨겨진 비너스이듯이 수월관음을 통해 표현된 것도 실은 여성이다. ▷해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우리 문화재가 많지만 그중에서 유독 국내에서 보기 힘든 것이 고려 불화다. 고려 불화는 전 세계적으로 160점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이 가장 많이 갖고 있는데 고려말 왜구가 약탈해간 것이 많다. 국내 소장품은 주로 해외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사들인 것으로 지금도 15점 안팎에 불과하다. 국공립박물관에는 한 점도 없다. 이런 희귀성 때문에 고려 불화는 발견될 때마다 큰 주목을 받는다. ▷고려 불화의 최고 전문가인 정우택 동국대 교수가 최근 일본 후쿠오카 현 조텐(承天)사에서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 1점을 발견했다는 소식이다(4월 30일자 본보 A1면). 대부분의 수월관음도에서 관음은 비스듬히 옆으로 반가좌를 튼 자세를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관음이 정면을 향해 앉은 채 오른 무릎에 오른팔을 올리고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 윤왕좌(輪王坐)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윤왕좌 자세의 수월관음도는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귀중한 유산을 일본에 두고, 그것도 허락해줄 때만 간신히 봐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난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노래 한 곡 들려주는데 웬 사설이 그리 긴 지 짜증이 나서 볼 수가 없다. 악동뮤지션을 처음 본 것은 TV가 아니라 극장에서다. 영화 상영 전 나오는 광고 중 하나가 내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올아이피(AII IP)라며 노래하는 KT 광고였다. KT에 미안한 말이지만 올아이피가 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어쨌든 두꺼운 안경을 쓴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아이와 예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감은 넘치는 여자아이에게 빠져들었다. “쟤네들 뭐야?” 옆자리의 동석자에게 물었다. “요새 오디션에서 뜨는 애들이래.” 유튜브에서 처음 그들의 ‘다리 꼬지마’라는 노래를 찾아 듣고 곧 매료됐다. 악동뮤지션은 오빠 이찬혁(17)과 동생 이수현(14)으로 구성된 남매 듀오다. 2008년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몽골로 가기 전에 피아노 학원을 다닌 것 말고는 특별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다. 목사나 전도사도 아니면서 선교활동을 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그냥 듣기 좋으라고 부르는 말이 선교사다. 선교사 부부는 몽골에서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빡빡한 홈스쿨링을 시키다 아이들이 흥미를 잃자 사실상 방치했다. 아이들은 놀다가 그것도 지겨우면 오빠는 기타를 잡고 여동생은 피아노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거기서 이들의 노래가 탄생했다. 아이들은 내버려두면 스스로 배운다고 말한 루소가 들었다면 기뻐했을 일이다. 대형 연예기획사 소속의 걸그룹 보이그룹이 대세인 요즘 TV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기적의 아이들’이 탄생한 셈이다. 과거 TV 오디션 프로그램은 주로 남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뽑았다. 그것은 사실상 ‘노래방 배틀(battle)의 TV 버전’이었다. 최근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악동뮤지션 같은 싱어송라이터가 자작곡을 불러 승자가 되는 것은 좋은 변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말한다. 쉽게 창의적 경제라든가 ‘Creative Economy’라고 하면 될 일이다. 천지창조에나 쓸 법한 거창한 말을 갖다 쓰니까 창의성을 어떻게 키울 것이냐는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창조가 무엇이냐는 서론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연예산업을 창의적으로 만들고 싶다면 악동뮤지션처럼 자신의 곡으로 자신의 감성을 노래하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세계에 한류의 물결을 몰고 온 케이팝과 아이돌 그룹이 다 그게 그것 같다는 얘기가 나온 지 꽤 됐다. 기획사 연습생을 거쳐 기획사 대표가 던져준 곡만 불러서는 한계가 있다. 악동뮤지션을 처음 알아본 사람은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었던 JYP의 박진영도, YG의 양현석도, SM의 보아(이수만 대리인)도 아니다. 프로튜어먼트라는 아마추어 기획사다. 악동뮤지션이 몽골의 자기 방에서 찍어 보낸 화면을 보고 금방 알아봤다. 악동뮤지션은 이곳에 초청돼 2만 원짜리 스티로폼으로 둘러싼 조악한 녹음실에서 최초의 곡 ‘갤럭시’를 녹음했다. 정보기술(IT)산업에만 인큐베이터가 있는 게 아니다. 인큐베이터 기획사가 신인 발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악동뮤지션은 이제 대형 기획사가 탐내는 인물이 됐다. 대형 기획사는 득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17세와 14세는 아직 어린 나이다. 이들이 그 나이에 순전히 노래의 힘만으로 불러일으킨 청중의 열광을 보면 한국의 비틀스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비틀스는 10대 후반에 만나 20대 초반 첫 히트곡을 낼 때까지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하노버의 클럽에서 수년간 연주하며 곡을 만들고 다듬었다. 그 곡들은 지금 들어도 좋다. 악동뮤지션에게도 음악과 인생의 경험을 좀더 쌓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그들을 그냥 놔둘지 모르겠지만.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가정보원 직원들의 대선 개입 의혹을 수사해온 경찰은 ‘국정원 직원들이 선거에 개입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 김모 씨와 이모 씨가 국정원법상 정치 관여 금지 규정을 위반한 혐의는 인정해 불구속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공무원으로서 국정원법은 위반했지만 이들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글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워 공직선거법은 적용할 수 없었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다. 경찰은 수사과정에서 민주통합당이 고소한 여직원 김 씨 외에 또 다른 직원 이 씨가 함께 활동한 사실을 밝혀냈다. 글 게시가 김 씨 개인의 일탈행위가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경찰은 두 직원의 상관인 국정원 심리정보국장은 출석요구에 불응해 조사하지 못하고 기소중지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들의 행위를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 대선 개입으로 보기에는 지금까지 드러난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국정원 직원들이 글을 올렸다는 인터넷 사이트에는 하루에도 수천 건의 잡다한 글이 올라온다. 문제의 직원들이 4개월간 간간이 올린 100여 개의 글이 특별히 누리꾼의 눈길을 끌었다고 볼 수 없다. 심리정보국은 종북 여론의 확산을 차단하는 일도 맡고 있다. 두 직원이 인터넷에서 종북 여론 확산을 차단하는 심리전을 전개하다 국정원 직원의 한계를 잊고 정치 관련 글을 올렸다고 볼 여지도 있다. 이제 공은 검찰로 넘어갔다. 검찰은 어제 경찰이 ‘국정원 댓글’ 사건을 송치함에 따라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검찰에는 이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이른바 ‘지시 사항’과 관련해 시민단체 등이 국정원을 정치 개입 혐의로 고발한 사건, 반대로 국정원이 비밀인 ‘지시 사항’을 누출한 전직 직원들을 고발한 사건 등 국정원 관련 사건만 10여 건이 계류돼 있다. 채동욱 씨를 새 수장으로 맞은 검찰은 이 모든 사건을 철저하고 신속하게 수사해 소모적인 논란을 끝내야 할 것이다. 남재준 신임 국정원장도 수사에 적극 협조해 국정원 쇄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종북 좌파의 사이버 선전 선동에 대처하는 것과 특정 정권 홍보를 혼동하는 국정원이 돼서는 안 된다. 또 원장 지시 같은 비밀사항이 정치권에 통째로 흘러가는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기강도 다잡아야 할 것이다.}

7급 공무원의 초봉은 2500만 원 내외다. 그래도 안정된 직장이라서 7급 공무원의 인기는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주원 최강희 등 인기 남녀 배우가 주연한 ‘7급 공무원’이라는 TV 드라마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올해 7급 중앙공무원 시험 경쟁률은 113.1 대 1이었다. 2007년 5만 명대이던 응시자 수가 지난해 6만 명대에 들어서더니 올해는 7만 명대로 올라섰다. ▷7급 공무원 인기는 올라가고 변호사 대우는 떨어지면서 올해는 변호사를 7급으로 채용하려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까지 나오고 있다. 부산시가 최근 7급 변호사 채용 공고를 냈다. 실제 변호사 7급 공채는 부산시가 처음이다. 경찰도 지난달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초급 간부인 경위(경찰서 반장급·행정부 7급 대우)로 채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했다. 과거 사법시험 합격자는 경위보다 두 계급 높은 경정(경찰서 과장급·5급) 채용이 관행이었다.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인천시 등에서 변호사를 6급으로 뽑았는데 7급 채용은 1년 만에 변호사 대우가 한 계단 더 낮아졌다는 뜻이다. 예전에 6급은 주사로, 7급은 주사보로 불렸다. 과거에는 집안 제사 때 쓰는 지방(紙榜)에 6급까지는 ‘학생(벼슬이 없다는 뜻)’이라고 쓰지만 5급은 ‘사무관’으로 썼다. 그만큼 5급과 6급의 차이는 크다. 고시에 합격해 공무원이 되면 처음부터 5급 대우를 받는다. 5급에서 6급으로 내려앉을 때 충격이 적지 않았는데 다시 7급이라니 변호사들의 자괴감이 클 만도 하다. ▷변호사에 대한 대우가 내려가는 것은 로스쿨생들이 대거 변호사 시장에 배출된 탓이다. 로스쿨생들은 지난해 처음으로 6급 채용 공고가 나자 이를 비난하고 보이콧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러나 정작 국가인권위 6급 공채에는 2명 채용에 56명이 지원했다. 부산시의 채용공고에도 로스쿨생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로스쿨생들의 인터넷 카페에서는 ‘신상 털기’를 통해 지원자들의 사진과 실명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부산시는 1명을 채용할 계획이다. 과연 몇 명의 변호사가 지원할지 벌써 궁금해진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대 비석에 새겨진 글, 즉 비문(碑文)은 고대인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다. 비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글은 있었으나 책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 얘기를 듣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이들과 통신하는 데는 버퍼링(buffering)도 발생한다. 비문은 긴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 풍화되거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돼 보이지 않거나 애매모호해진 글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날조와 왜곡의 여지가 생긴다. ▷고구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왕릉비의 비문 중에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白殘○○○羅以爲臣民’이라는 부분이 있다. 일본인들은 남연서(南淵書)라는 위조 고서를 만들어 능비사본전문이라는 것을 끼워 넣고 ○○○를 ‘脅降新’으로 못 박았다. 그럴 경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를 치고 신라를 힘으로 굴복시켜 신민으로 삼았다’는 뜻이 된다. 일본 학자들은 세 글자를 불명확하게 놔두는 지금도 역시 그런 식으로 해석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는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도해(渡海)의 주어를 왜가 아니라 문장 밖의 고구려로 본 뒤 ‘왜가 신묘년에 도래하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치고 신라를 구원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은 보기 드문 명문인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왔다면 ‘倭以辛卯年來渡海…’는 來가 빠진 ‘倭以辛卯年渡海…’가 돼야 옳은 문장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현에서 또 다른 고구려비가 발견됐다. 중국 측 공식 연구서는 광개토왕이 세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비라고 주장했다. 장수왕이 427년에 세웠음을 뜻하는 정묘(丁卯)라는 글자를 판독했다는 내부 반박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중국 측 공식 연구서를 작성한 학자들은 그런 글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안 고구려비가 중국 왕조와의 밀접한 영향 관계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했다. 일본인들의 광개토왕릉비문 날조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이 혹시 고구려비를 왜곡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중구(中區)가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차 불법 농성천막을 철거한 뒤 하루 만인 5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페이스북에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곳에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글을 올렸다. 중구가 천막을 철거한 자리에 화단을 만들고 꽃을 심은 것을 비꼰 것이다. 자신도 책임이 있는 일을 남의 일처럼 논평한 것이 우선 듣기에 거북하다. 농성장 철거가 잘못된 것이라면 서울시장은 이를 시정할 수 있다. 현행 도로법상 도로(인도 포함) 관리 권한은 시장이 국토교통부에서 위임받아 다시 구청장에게 재위임하는 것으로 돼 있다. 시장은 구청장의 명령이나 지시가 법령을 위반했거나 현저히 부당해 공익을 해친다고 판단하면 위임을 철회하거나 시정을 명할 수 있다. 그러나 박 시장은 농성천막이 설치된 이래 줄곧 뒤에서 철거 반대만 해왔다. 중구를 지지하자니 농성자들로부터 욕을 먹을 것이고, 중구에 반대하자니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난을 걱정했을 것이다. 시장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다. 중구의 철거에도 불구하고 농성자들이 다시 대한문 화단 앞을 점거했다. 서울시장도, 국토교통부 장관도, 대통령도 모른 체하는 사이 최창식 중구청장만이 법치를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판이다. 계고장도 몇 차례 보냈고, 강제 철거도 이번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도루묵이 됐다. 대한문 앞의 농성천막이 도로법을 위반한 불법 시설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서울 시민이 대한문 앞을 오가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농성천막 철거를 원할 만큼 속이 좁지는 않다. 하필 소중한 문화재이자 외국인도 많이 찾는 도심의 관광명소를 농성장으로 삼은 행태가 불만인 것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대한문 옆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지 1년이 다 돼 간다. 서울시장도 출퇴근길에 그 모습을 매일 보았을 것이다. 아이디어가 많다는 박 시장은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한다.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앞에는 농성을 위한 공간이 있다. 서울시가 어느 정도 유동인구와 상징성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불편도 주지 않을 공간을 마련해보면 어떨까. 박 시장의 말대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지만 법과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더 아름답다.}
1989년 부산 동의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숨진 경찰관과 전투경찰 7명에 대해 1인당 1억여 원의 정부 특별보상금이 지급됐다. 사건 발생 24년 만이다.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시위 학생들은 2004년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받아 보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폭력 시위 현장에서 법질서를 지키려다 희생된 경찰의 유가족들은 그로부터 9년의 세월이 더 지나서야 보상금을 받았다. 이번 보상금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한나라당 전여옥 이인기 전 의원 등이 발의한 ‘동의대 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른 것이다. 본보는 당시 일련의 보도를 통해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순직 경찰은 돈으로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숨을 바친 이들이다. 1억여 원의, 그것도 때늦은 금전적 보상이 그들이 바친 목숨의 가치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제라도 보상이 이뤄진 것을 다행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보상금 지급으로 순직 경찰의 명예가 온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다. 동의대 사건은 이 학교 도서관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화재가 발생해 진압하던 경찰과 전경 7명이 불에 타 죽거나 불을 피하려다 추락해 죽은 사건이다. 시위 학생들은 경찰관 5명을 납치해 학교 도서관에 감금하고 연행 학생 9명과의 교환을 요구하며 경찰과 대치하다 화염병을 던졌다. 김대중 정부는 1999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주화 보상위원회)를 설치해 동의대 사건 시위대 46명을 민주화 운동가로 만들었고 노무현 정부는 2004년 국민 세금으로 보상까지 해줬다. 1970년대 유럽과 일본의 극좌파식 폭력을 행사한 학생들이 민주화 유공자라면 순직 경찰관은 민주화 유공자 탄압에 앞장선 사람들이 된다. 순직 경찰 유족은 그래서 민주화 보상위원회 결정의 재심을 요구하고 있다. 이 위원회의 설치 근거가 된 법률에 재심 규정이 없는 것은 위헌이라는 소송을 내겠다는 것이다. 2005년 이들이 낸 비슷한 성격의 헌법소원이 각하된 적이 있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동의대 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은 금전적 보상만이 아니라 명예회복 조치도 강구하도록 하고 있다. 정부는 위령탑 건립을 비롯해 순직 경찰관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법을 더 찾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