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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삼청동 거리를 죽 따라 올라가다보면 서서히 눈에 들어서는 건물이 있다. 2000㎡ 크기에 달하는 이곳은 ‘뮤지엄한미’. 건물 한가운데에는 ‘물의 정원’이란 이름의 인공 연못이 있고, 이를 가운데로 3개 동이 교차한다. 뮤지엄한미는 한국 최초의 사진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마련한 곳이다. 국내 건축계의 거장 김수근(1931~1986)의 제자인 민헌식 건축가가 설계를 담당했다. 본래 서울 송파구에 위치했던 한미사진미술관은 사진 관련 도서관으로 활용하고, 전시는 접근성 등을 고려해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진행한다. 가장 달라진 것은 수장고다. 수장고 크기만 317.4㎡로, 이곳에는 약 2만 여점의 소장품이 보존된다. 최봉림 부관장은 “이전에는 전문적인 항온·항습이 갖춰지지 않은 창고에 보관됐다. 뮤지엄한미를 개관하며 5도에 달하는 국내 최저온 수준의 냉장 수장고를 구축했다”고 말했다. 미술관에 따르면 이 같은 항온, 항습 시스템은 소장품 수명 500년을 보장한다고 한다. 개관을 맞이해 미술관은 이달 21일부터 내년 4월 16일까지 한국사진사의 주요 연보를 재구성한 전시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를 연다. 1929년은 한국인 최초로 연 개인 사진 전람회인 정해창의 ‘예술사진 개인전람회’가 열렸던 때다. 1982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임응식 회고전’이 진행된 해로, 사진이 순수미술의 한 분야로 미술계에서 인정받았다는 의의가 있다. 전시에는 주명덕, 현일영, 이해선, 임응식 등 내로라하는 한국 사진가 42명의 빈티지 프린트, 디지털 프린트 작품 207점이 전시됐다. 저온 수장고에 보관된 작품중 일부는 ‘보이는 수장고’ 형식으로 관람객에게 공개한다. 주목할만한 건 국내 최초로 사진을 도입한 황철 작가의 ‘원각사지 10층 석탑’ 원본(1880년대)이 처음으로 선보여진다는 점이다. 또한 고종의 초상(1884년경)과 흥선대원군의 초상(1890년대) 원본도 10년 만에 전시된다. 미술관 측은 “한국사진사를 정립하는 것이 사진전문미술관으로 우선적 책무라고 생각해 이렇게 개관전을 마련했다”며 “앞으로는 국내외 사진은 물론 미디어아트까지 확대해 동시대미술을 아우를 예정”이라고 밝혔다. 개관전이 끝나는 내년 5월에는 올 9월 작고한 미국 태생의 프랑스 사진작가 윌리엄 클라인의 개인전이 예정돼있다. 그는 흔들리는 초점 등 정통 사진 기법을 거부하는 등 영상사진의 길을 개척한 인물이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우리는 몇 주가 될지 모를 오랜 시간 동안 단 하나뿐인 풍경이 보이는 집에서 격리될 텐데 지구 반대편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극심했던 2020년, 벨기에 그래픽디자이너 겸 사진작가인 엮은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해 3월 22일 페이스북에 그룹 ‘나의 창밖 풍경’을 개설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보이는 저녁 풍경 사진을 올렸다. 약 한 달 뒤, 이 그룹엔 무려 200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 100여 개 지역에서 올린 약 20만 개의 풍경 사진이 한데 모였다. ‘당신의 창밖은 안녕한가요’는 이들 게시물 가운데 258점을 골라 모은 사진집이다. 언뜻 보면 딱히 특별하지 않은 바깥 풍경을 찍었을 뿐이다. 하지만 코로나19를 함께 겪은 지구인이라면 이 사진들이 마냥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의료진을 응원하기 위해 불빛을 밝혀 놓은 고층빌딩, 인간이 보이지 않자 집 근처까지 찾아온 야생동물처럼 의미심장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누군가는 사진집을 “역사적인 한 시기에 대한 순간 포착”이라 불렀다. 인류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팬데믹은 그간 쉽게 지나쳐 왔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어떤 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앞집을 찍으며 항암치료를 받은 이웃 아주머니의 건강을 빌었다. 또 다른 이는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거리가 공허할 정도로 텅 빈 걸 보며 가끔씩 들려오는 짧은 소음이 위안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삶은 변해 버렸다. 하지만 어쩌면 이 사진들처럼 그 변화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당신의 창밖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풍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갈 수 없는 곳을 보여주고, 같은 것을 아주 다르게 보는 시각을 공유한다”는 엮은이의 말은 참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우리는 몇 주가 될지 모를 오랜 시간 동안 단 하나뿐인 풍경이 보이는 집에서 격리될 텐데 지구 반대편에서 보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극심했던 2020년, 벨기에 그래픽디자이너 겸 사진작가인 엮은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그해 3월 22일 페이스북에 그룹 ‘나의 창밖 풍경’을 개설하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보이는 저녁 풍경 사진을 올렸다. 약 한 달 뒤, 이 그룹엔 무려 200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 100여 개 지역에서 올린 약 20만 개의 풍경 사진이 한데 모였다.‘당신의…’는 이들 게시물 가운데 258점을 골라 모은 사진집이다. 언뜻 보면 딱히 특별하지 않은 바깥 풍경을 찍었을 뿐이다. 하지만 코로나19를 함께 겪은 지구인이라면 이 사진들은 마냥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의료진을 응원하기 위해 불빛을 밝혀놓은 고층빌딩, 인간이 보이지 않자 집 근처까지 찾아온 야생동물처럼 의미심장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누군가는 사진집을 “역사적인 한 시기에 대한 순간포착”이라 불렀다. 인류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팬데믹은 그간 쉽게 지나쳐왔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다. 어떤 이는 창밖으로 보이는 앞집을 찍으며 항암치료를 받은 이웃 아주머니의 건강을 빌었다. 또 다른 이는 언제나 시끌벅적했던 거리가 공허할 정도로 텅 빈 걸 보며 가끔씩 들려오는 짧은 소음이 위안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코로나19로 우리의 삶은 변해버렸다. 하지만 어쩌면 이 사진들처럼 그 변화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당신의 창밖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풍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금 갈 수 없는 곳을 보여주고, 같은 것을 아주 다르게 보는 시각을 공유한다”는 엮은이의 말은 참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벌거벗은 여성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딘가로 추락하고 있다. 그러나 긴박함이 없다. 오히려 편안해 보일 뿐. 독일 태생인 미국 작가 키키 스미스(68)의 판화 ‘자유낙하’(1994년)는 보고 있자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추락하는데 오히려 ‘깨달음’이 느껴지다니.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주의 작가인 스미스의 작품은 대체로 이렇다. 한계를 받아들일 때 더 자유롭다는 주제의식이 강렬하다. 해당 작품명을 부제로 올린 특별전 ‘키키 스미스-자유낙하’가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15일부터 열린다. 14일 화상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유낙하란 제목엔 믿음을 갖고 두려움 없이 살고 싶단 마음이 담겼다”며 “자신을 믿고 오랜 시간 예술 작업을 해온 동료 예술가들을 보며 나 또한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각과 판화, 사진 등 140여 점으로 구성된 전시는 그의 작업 세계를 두루 짚는다. 작가가 말한 열망은 그의 생애 전반에 켜켜이 쌓여 왔다. 1985년 신체를 아홉 조각으로 나눠 그린 판화 ‘가진 사람이 임자’부터 실크에 꽃 형상을 찍어낸 2022년 작 ‘천국’까지 40년 가까이 이어온 여정이 담겼다. 전시는 연대별, 주제별로 정리되지 않았다. 이보배 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작가는 정규 미술 수업을 받지 않고 조각가와 오페라 가수인 부모 밑에서 자란 영향을 크게 받았다”며 “조각이나 드로잉 등을 넘나들며 얽매이지 않았던 실험 정신을 이번 전시에도 살리려 했다”고 말했다. “예술이란 그런 거죠. 그냥 스스로 선언하면 되는 겁니다. 어느 날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이제부터 예술가로 살겠다’고 맘먹으면 됩니다. 다만 그 이후의 삶을 감당할 수 있어야겠죠.”(스미스) 다소 산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제의식은 오롯하다. 스미스의 핵심 소재인 ‘몸’을 따라가면 된다. 주철로 구부려 신체기관을 만든 ‘소화계’(1988년)처럼 그는 신체의 일부를 작품으로 자주 다뤘다. 이는 임신중절 등이 이슈가 됐던 198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개인사도 투영됐다. 그는 당시 아버지와 여동생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며 “생명의 취약함”을 온몸으로 느꼈다고 한다. 몸에 대한 관심은 여성주의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전시장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조각상 ‘메두사’(2004년)처럼 여성의 신체를 다룬 작품이 많다. 스미스가 직접 웅크리고 누워 테두리를 그린 ‘꿈’(1992년)과 늑대 배를 가르고 나오는 여성 조각 ‘황홀’(2001년)도 마찬가지다. 그런 여성들이 낙하하는 작품이 많은 건 왜일까. 이진숙 미술평론가는 “떨어짐을 받아들인다는 건 상승을 포기하고, 유한하고 취약한 몸을 인정한다는 뜻”이라며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계를 받아들인 스미스의 눈은 자연과 우주로 향하기도 한다. ‘의회’(2014년), ‘하늘’(2012년)에선 여성과 다양한 동식물이 함께 등장한다. 이 학예연구사는 “크고 작은 모든 걸 소재로 삼아 자유롭게 유랑하는 이야기에서 생동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한국은 제게 큰 의미가 있는 나라예요. 과거 한국은 종이를 바닥에 깔고 열이 나오는 ‘온돌’로 집을 지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종이의 물성을 이렇게도 다룰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게, 제 예술세계에 큰 충격을 줬거든요. 조만간 한국을 찾아 한지와 온돌 문화를 배우길 소망합니다.”(스미스) 내년 3월 12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작업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두려움 없이 살고 있구나.’1994년, 독일 출생의 미국 작가 키키 스미스(68)는 어느 날 오랜 활동을 해온 동료 예술가들을 보고 이런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때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든 작품이 ‘자유낙하’.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여성의 모습을 판화로 찍어낸 작품이다.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15일 개막하는 전시 ‘키키 스미스-자유낙하’는 담대하고 도전적인 작품을 만들어온 스미스의 작업세계를 두루 살핀다. 키키 스미스는 1980~1990년대 여성상과 신체를 다룬 조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가 아시아에서 처음 갖는 미술관 개인전인 이 전시에는 조각과 판화, 사진 등 140여 점이 소개된다. 1985년 신체를 9개의 조각으로 그려낸 판화 ‘가진 사람이 임자’, 해골 조각 작품 ‘무제’부터 실크에 꽃 형상을 찍어낸 올해 작품 ‘천국’까지 약 40년간에 걸친 키키 스미스의 여정을 살핀다. 전시는 연대별, 주제별로 섹션을 나누고 않아, 처음 볼 땐 다소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하지만 키키 스미스의 작업 자체가 한 눈에 봐도 자유롭다. 조각, 드로잉 등 방식에 얽매지 않고 여러 실험적 도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키키 스미스는 정규 미술수업을 받지 않았고, 미니멀리스트 조각가인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 어머니 밑에서 자란 영향을 크게 받았다. 14일 화상인터뷰에 응한 키키 스미스는 “예술은 스스로 선언하는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예술가로 살겠다고 하면 된다. 스스로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라고 했다. 키키 스미스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몸이다. 이번 전시에는 신체의 내부 기관을 주철이란 금속을 구부려 만든 ‘소화계’(1988년) 등 인체를 다룬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런 작업들은 에이즈나 임신중절 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던 1980년대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작가의 개인사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아버지의 별세와 에이즈에 걸린 여동생의 사망을 차례로 겪으며 생명의 취약함을 온몸으로 느낀 것이다. 몸에 대한 꾸준한 관심은 여성 전신상으로 자연스레 뻗어갔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나체 여성 조각상 ‘메두사(2004년)를 필두로 곳곳에는 여성의 몸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직접 웅크리고 누운 뒤 테두리를 따라 그린 작품 ’꿈‘(1992년), 늑대 배를 가르고 걸어 나오는 여성 형상의 청동 조각 ‘황홀’(2001년)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여성의 연약한 신체를 전면에 드러내면서 사실은 이런 연약함이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란 걸 알려준다. 몇몇 작품에서 여성들은 어딘가로 추락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폭포’(2013년)는 머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작가의 사진 위에 나무, 폭포수 등을 드로잉했다. 이진숙 미술사가는 “떨어짐을 받아들인다는 것, 상승을 포기한다는 것은 유한하고 취약한 몸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낙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키키 스미스는 인간과 신체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동물, 식물, 우주 등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한다. 그의 직물 공예 작품 ‘회합’(2014년), ‘하늘’(2012년) 등에 여성과 함께 사슴, 박쥐, 다람쥐, 새, 나무, 빛, 산 등이 두루 등장하는 이유다. 이보배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는 “자유롭게 유랑하는 듯한 도상과 인간을 넘어 자연과 우주 등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품에서 생동하는 에너지를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내년 3월 12일까지. 무료. 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

제주 출신의 유명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고 김수남(1949∼2006)의 회고전 ‘몰입’이 제주 제주시 산지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였던 고인은 1970년대부터 ‘한국의 굿’과 ‘아시아의 무속’을 주제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각 민족의 삶과 샤머니즘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국 곳곳은 물론 시베리아부터 적도까지 순례하듯 누비며 촬영한 작품은 토속 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인은 2007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작품을 비롯해 카메라, 메모 수첩 등을 두루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고인의 예술 세계 전반을 짚는다. 작품과 자료는 2017년 유족이 제주도에 기증했다. 정슬기 산지천갤러리 큐레이터는 “김수남 작가는 굿을 사진의 주제로 처음 인식한 작가로, 굿에 내재된 민중의 미의식을 발굴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갤러리는 고인의 유족에게 작품을 대거 기증받아 개관하게 됐다”며 “올해 개관 5주년을 맞아 기증품 전반을 선보이는 전시를 마련했다”고 덧붙였다. 산지천갤러리는 제주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이 운영한다. 전시는 크게 3개 소주제로 구성했다. 사진 작품은 47점으로, ‘여정旅程: 여행의 과정이나 일정’ 섹션에서 볼 수 있다.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제작해 총 20권으로 이뤄진 사진집 ‘한국의 굿’에 포함된 ‘수용포 수망굿: 경상북도 영일군 지행면 영암3기’(1981년), ‘제주도 잠수굿: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1985년), ‘청사포 별신굿: 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청사포’(1980년)가 대표적이다. 인간문화재와 제주 풍경을 담은 대표작들도 만날 수 있다. ‘의지意志: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에서는 고인이 작업을 위해 애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카메라와 취재 수첩 19점, 라이트박스 등이 전시돼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유산遺産: 앞 세대가 물려준 문화·업적·사물’은 고인이 남긴 책 30점과 기고문 50여 점으로 구성했다. 내년 3월 19일까지. 무료.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미술품 컬렉션에도 적용될까. 20여 년간 기업과 개인 컬렉션을 위한 어드바이저로 일한 저자는 수많은 컬렉터 중에서도 부부 컬렉터들이 눈에 띄었다고 한다. 한 팀을 이뤄 활동하는 부부 컬렉터의 경우 작품을 선택할 때 두 사람의 삶과 철학이 녹아 있다 보니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 그 이상의 여운을 갖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란 게 저자의 설명이다. 책은 열한 쌍의 부부 컬렉터를 소개하며 다양한 수집의 기쁨을 전한다. 흥미로운 건 이들 부부가 모두 엄청난 부호가 아니라는 점이다. 첫 사례로 실린 보겔 컬렉션이 대표적이다. 허버트 보겔과 도로시 보겔은 평범한 우체부와 도서관 사서였다. 미술을 독학했던 허버트는 도로시와 관심사를 공유했다. 부부는 결혼하고 두 달 후 처음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해 50년간 4782점을 모았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허버트의 연봉은 연간 2만5000달러(약 3000만 원)였다. 이들은 젊은 작가의 작품 혹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인 드로잉에 집중했다. 다만 작가 작업실을 방문해 작업 배경에 대한 충분한 대화를 즐겼기에 유명 작가들이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교류할 수 있었다. 중요한 원칙도 있었다. 이는 보겔 컬렉션의 특별함을 만들어줬다. ‘지하철이나 택시로 운반할 수 있는 크기일 것’ ‘아파트에 설치가 가능한 작품일 것’ 등 이들이 지켜온 원칙은 평범하지만 보겔 부부만의 색깔을 띤 컬렉션으로 거듭나게 했다. 이들 컬렉션은 현재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인 내셔널갤러리와 미국 내 50개 주 미술관에 기증돼 있다. 자연 속에 조각공원을 지은 부부도 있다. 미국 뉴욕 ‘벅혼 조각공원’에 대형 조각 및 설치 작품 70여 점을 놓은 조엘 멀린과 셰리 멀린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기준 없이 직관에 의존해 컬렉션한다”고 하지만 무용을 공부하며 선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던 셰리 덕분에 멀린 컬렉션은 조각 비중이 큰 편이다. 부부들의 철학, 컬렉션을 시작한 동기는 예비 컬렉터에게 유용한 정보가 되는 동시에 행복을 나눌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근대미술가 박래현(1920~1976)과 이중섭(1916~1956), 현대미술가 김순기(76)와 이미래(34), 양유연(37). 올 9월부터 내년 4월까지 미국 피츠버그에서 열리는 ‘제58회 카네기 인터내셔널’에 초청된 한국 작가 명단이다. 카네기 인터내셔널은 1896년 설립돼 4년마다 열리는 미국 미술계의 유명 국제전이다. 양유연 작가는 다른 참여 작가들과 달리, 국제전에 초청된 게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전통 종이인 장지에 그림을 그려온 양 작가는 이번에 자신의 기존 작품 8점과 신작 3점을 내놓았다. 해외 언론에서는 “컬트 영화감독이자 시각 예술가인 데이비드 린치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우울한 색의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양 작가는 이번 초청에 대해 “좋았어요”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기대가 크지 않아요. 성향 자체가 그래요. 늘 최악을 생각하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마이너”라고 말하는 작가 특유의 호젓함. 이런 분위기는 그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양 작가의 그림은 첫 인상은 일단 ‘어둡다.‘ 대부분 검거나 퍼렇거나 잿빛에 가까운 배경. 불투명하고 탁한 색감 덕에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본능적인 두려움과 고독감이 밀려온다. 양 작가는 “순식간에 동요되는 그림보다는 무엇인지 모르겠는 감정을 일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작품 속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작품에서 얼굴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려져도 그림자에 일부 가려져 있거나 표정이 없다. 그는 “내 그림은 빛과 어둠에 의해 교묘하게 숨겨지고 가려져 있다. 이러한 불확실한 이미지들이 주는 감정은 뒤돌았을 때 계속 생각이 난다”고 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기에 양 작가의 그림 또한 서늘하고 헛헛하면서도 마냥 싸늘하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관객에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정은 양 작가가 사회를 바라보는 불안정한 시선과 맞닿아있다. 그는 “그때그때의 내 삶이 그리기에 영향을 줬다”고 했다. 다만 구체적인 사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작가의 이야기가 아닌 작품 그 자체로 평가받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분명 결핍이 있었죠.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특별히 불우한 환경은 아니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별 거 아닌 작은 생채기일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가 거기서 느끼는 아픔의 감각은 클 수 있는 거거든요.” 이런 예민함은 작가의 외연을 넓히기에 충분했다. 양 작가의 초기작이 자기 상처에 집중했다면, 그는 점차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노동자 투쟁이 바탕이 된 ‘얼룩’(2017년)처럼 다소 직접적인 소재를 다루기도 했다. 누군가의 목덜미 뒤에 남겨진 상흔을 그린 ‘자국’(2020년)처럼 타인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기도. 모두 지나치기 쉬운 사람과 순간에 작가의 시선이 머물러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양 작가는 “그림 앞에 망설여지는 시간이 더 잦아진다”고 털어놨다. “그림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죄책감 같은 게 생겨요. ‘내가 함부로 그려도 될까?’ 하는 생각이죠. 그래도 그려요. 그려야 하니까요. 못 그리게 된다고 생각하면 공포감이 엄청나거든요.”김태언기자 beborn@donga.com}

“미술은 작가의 고뇌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가 아닙니다. 아트딜러, 컬렉터, 작가가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게임이 미술시장에 존재하죠. 미술이 자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면 성숙한 미술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사진)가 2013년 펴낸 ‘그림값의 비밀’ 개정판(창비)을 지난달 18일 내놨다. 개정판에는 최신 데이터와 ‘미술 투자를 위한 Q&A 섹션’ 등을 새로 담았다. 미술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미술 투자의 원칙을 짚는다. 지난달 28일 전화 인터뷰에서 양 교수는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 2013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미술은 장기전”이라고 강조했다. 개정판에 추가된 ‘미술시장의 블루칩, 인상주의’ 섹션에서는 미술계의 조롱을 받던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가 화상과 가족의 도움으로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과정을 좇는다. 양 교수는 “현대미술은 인상파와 닮아있다. 지금 대개의 현대미술도 괴팍하고 난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상파가 시장에 안착하기까지의 20∼30년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미술을 보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재평가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는 가치 있는 작품을 발굴하고 판매하는 아트딜러다. 양 교수는 이들을 “제2의 창작자”라고 불렀다. 그는 “아트딜러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작가를 발굴하는 화랑은 전체의 10%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기존에 거래된) 중고품을 거래할 뿐”이라고 했다. 양 교수는 단적인 장면으로 올해 9월 동시 개최된 ‘프리즈 서울’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를 꼽았다. “프리즈는 취향을 팔았죠. 확실히 화랑별로 색이 뚜렷했어요. 그런데 키아프는요? 대동소이했습니다.” 양 교수는 “작가에 대한 평가는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며 “10∼20년 후 평가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고 했다. 미술시장에서 필요한 것은 “취향, 안목, 용기”다. 이는 아트딜러뿐만 아니라 컬렉터도 마찬가지다. “국내 컬렉터층이 두껍다거나 이들이 연속성을 갖고 작가들을 후원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밀레니얼세대가 컬렉터층으로 급부상한 건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전문 지식보다는 자신의 취향을 중요시하는 이들이 앞으로 미술시장을 이끌 주역이기 때문입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미술은 작가의 고뇌에 의해 만들어진 신화가 아니다. 아트딜러, 컬렉터, 작가가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게임이 있다. 미술이 자본과 어떻게 매개되어갔는지를 알면 성숙한 미술시장과 자본주의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의 책 ‘그림값의 비밀’(창비)이 18일 다시 나온 이유다. 28일 전화로 만난 양 교수는 2013년 처음 출간 때를 회상하며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고 했다. 책은 최신 데이터를 추가하고 ‘미술 투자를 위한 Q&A 섹션’ 등을 넣어 새로이 내놨다. 미술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며 미술 투자에 대한 변치 않는 사실들을 짚어나간다.우선되는 건 “미술은 장기전”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책에 추가된 ‘미술시장의 블루칩, 인상주의’ 섹션에서는 미술계의 조롱을 받던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반 고흐가 화상과 가족의 도움으로 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과정을 쫓는다. 양 교수는 “현대미술이 인상파와 닮아있다. 지금 대개의 현대미술도 괴팍하고 난해한 것으로 평가된다. 인상파가 시장에 안착하기까지의 20~30년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미술을 보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재평가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작품을 발굴하고 판매하는 아트딜러다. 양 교수는 이들을 “제2의 창작자”라고 칭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 미술시장에 대입해보면 현실은 막막하다. 양 교수는 “지금 한국의 1차 시장, 즉 작가를 발굴하는 화랑은 전체 화랑 중 10%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중고품을 거래할 뿐”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태를 보여준 단적인 장면이 올 9월 동시 개최한 ‘프리즈 서울’과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라고 했다. “프리즈는 취향을 팔았죠. 확실히 화랑별로 색이 뚜렷했어요. 그런데 키아프는요? 대동소이했습니다.”최근 미술계의 우려는 한 발 더 나아간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는 이달 ‘2022년 3분기 미술시장 분석보고서’를 내놓으며 “초현대작가군(1975년 이후 출생한 작가들)이 경매에 바로 유입되어 블루칩으로 등극할 때까지의 시간이 단축됐다”고 했다. 이에 양 교수는 “작가에 대한 평가는 결코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10~20년 이후 평가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장 친화적이면 시장 맞춤형 작품 그 이상을 뛰어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이처럼 혼잡한 미술시장에서 필요한 것은 “취향, 안목, 용기”다. 이는 아트딜러뿐만 아니라 컬렉터에게도 필요한 요건이다. 양 교수는 “현재 국내 컬렉터층이 두텁다거나 이들이 연속성을 갖고 작가들을 후원한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가 컬렉터층으로 급부상한 것은 긍정적이다. 전문 지식보다는 자기 취향이 앞서가는 이들이 향후 미술시장을 이끌 주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미술 전시에서 ‘오브제’를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감상법이다. 오브제란 예술품, 객체, 상징물 등 여러 뜻을 지녔지만 미술에선 주로 소재나 재료를 일컫는다. 작가가 어떤 소재를 쓰는지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이기봉 작가(65)의 개인전을 비롯해 가나 태생 작가 엘 아나추이(78), 미국 작가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2008)의 개인전은 모두 독특한 오브제를 선보여 눈길을 끈다. 이 작가의 개인전 ‘당신이 서 있는 곳’에서 중요한 오브제는 ‘막(幕)’이다. 뭔가를 가리는 걸 뜻하는데, 전시에 소개된 신작 36점 가운데 설치작 1점을 제외하면 모두 막을 씌웠다. 방식은 이렇다. ‘안개화 화가’로 불리는 이 작가는 이번에 선보인 안개화 35점을 먼저 캔버스에 그린다. 그 후 캔버스 위에 1cm 정도 간격을 두고 얇은 아크릴 판이나 폴리에스테르 섬유로 막을 만든다. 여기에도 일부분의 그림을 그려 3차원(3D) 영화처럼 겹쳐 보이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 작가는 “중요한 건 그림과 막 사이의 1cm라는 빈틈”이라며 “이 간격에 하나의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는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책 ‘논리철학 논고’에서 막에 대한 단초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30년 넘게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인간은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언어나 감각 같은 일종의 막을 통해 어렴풋이 인식한다’는 메시지가 있다”고 했다. 유일한 설치작인 ‘A Thousand Pages’(2022년)가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펼쳐 놓은 형태인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겼다. 다음 달 31일까지. 종로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아나추이의 ‘부유하는 빛’에선 ‘병뚜껑’이 핵심 오브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가는 이번 전시에 병뚜껑으로 만든 작품 3개를 선보였다. ‘New World Symphony’(2022년)는 가로 8m, 세로 6m인 대형작품으로, 모두 병뚜껑을 평평하게 편 다음 하나하나 잘라서 이어 붙였다. 아나추이에게 병뚜껑은 아프리카 식민 역사를 상징한다. 작가는 노예상들이 노예를 럼주와 물물 교환한 참혹한 역사에서 이런 개념을 떠올렸다. 이에 1990년대 후반부터 쓰레기장에서 모은 술병의 뚜껑을 자신의 작업에 적극 사용해왔다. 이화령 바라캇 컨템포러리 디렉터는 “그의 작품들은 쉽게 지나치는 작은 오브제도 예술적 가능성이 깃들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고 했다. 내년 1월 29일까지. 1964년 미국 작가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았던 라우센버그는 ‘구리’로 만든 캔버스로 유명하다. 용산구 타데우스 로팍에서 열리고 있는 ‘코퍼헤드 1985/1989’ 역시 그의 구리 캔버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이번 전시에도 구리 캔버스 작품 11점이 관객을 맞이한다. 이 작품들은 노동자, 거리의 간판, 그라피티, 동물 등 칠레의 일상 풍경을 담아냈다. 작가는 구리 캔버스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사진을 찍어낸 뒤 아크릴 물감과 변색 약품을 바르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라우센버그는 1984∼1991년 현지 예술가나 노동자와 협업했던 ‘라우센버그 해외문화교류 프로젝트’ 때부터 구리에 관심을 가졌다. 첫 국가였던 칠레에서 구리 산업은 나라의 주요 경제 기반임과 동시에 심각한 노동착취가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이를 본 작가는 구리를 이용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다음 달 23일까지.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양종훈 사진작가(상명대 디지털이미지학과 교수)의 개인전 ‘블랙 마더 김혜심’이 서울 종로구 갤러리1에서 다음 달 1일부터 내년 1월 31일까지 열린다. 이 전시는 아프리카 에스와티니에서 20여 년간 에이즈 환자를 돌본 김혜심 원불교 교무의 삶을 다룬 사진집 ‘블랙 마더 김혜심’(윤진)을 양 작가가 지난해 12월 출간한 것을 계기로 마련됐다. 양 작가는 2005년 김 교무를 처음 만났다. 전시는 사진집에 실린 작품 116장 중 에스와티니 현지인의 삶과 김 교무의 활동을 담은 20여 장으로 구성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올해 1월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40년 만에 ‘뒤늦은 부고’를 냈다.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1951∼1982)이다. 부산 출생인 차학경은 12세에 하와이로 간 뒤 미국 본토로 이주했다. 서른한 살에 요절한 탓에 남긴 작품은 50여 점에 그치지만 비디오, 퍼포먼스, 아트북 등에는 이민자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그의 사유가 두루 담겼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다음 달 18일까지 상영 중인 프로그램 ‘영화로, 영화를 쓰다’에서는 차학경과 이란의 포루그 파로흐자드, 베트남계 프랑스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국의 수전 손택까지 여성 예술가 네 명의 작품을 다룬다. ‘영화로, 영화를 쓰다’의 부속 강연인 ‘테레사 학경 차의 경계의 예술’도 열렸다. 강연을 맡은 김현주 추계예술대 미술대 교수는 2001년 미국 버클리미술관 기획순회전 도록 ‘관객의 꿈: 차학경 1951-1982’(2003년)를 번역해 국내에 처음 차학경 전작을 알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김 교수를 최근 만났다. 그는 “NYT 기사를 보고 지금 왜 차학경에게 주목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한 결과 성, 국적에 대한 정체성에 주목하는 이 시점에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으로서 차학경의 삶과 예술은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했다. 차학경의 미완성 유작 ‘몽고에서 온 하얀 먼지’(1980년)는 중국 만주로 망명한 실어증 여성의 일대기를 소설과 영화로 만들다 중단된 작품이다. 조선 말 일제의 침략을 피해 만주로 건너간 차학경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토대로 만들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어느 시대나 있었지만 지금은 주변부의 목소리가 나올 통로가 보다 다양해졌습니다. 변방이라 여겨지던 데 존재했던 이의 삶과 작품에 관심을 갖는 시대 분위기가 차학경을 불러냈다고 봅니다.” 김 교수는 차학경을 통해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고 제안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을 돌아보면 자신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죠. 차학경의 삶은 우리에게 자신과 타인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게 만드는 힘을 지녔습니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올 1월 뉴욕타임스가 사망 40년 만에 ‘뒤늦은 부고’를 내놨다. 부고의 주인은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1951~1982). 그의 2001년 미국 버클리미술관 기획순회전 도록 ‘관객의 꿈: 차학경 1951-1982’(2003년)를 번역해 국내에 처음으로 차학경 전작을 알린 김현주 추계예술대 미술대 교수는 “지금 차학경? 왜?”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18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김 교수는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지금,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으로서의 자전적 내용이 독창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었다”고 답을 내렸다. 부산 출생인 차학경은 12살 때 하와이로 간 뒤 미국으로 이주했다. 요절한 탓에 작품은 50여점에 그치지만 비디오, 퍼포먼스, 아트북 등 그의 작품은 이민자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사유가 두루 담겼다.일례로 차학경의 미완성 유작 ‘몽고에서 온 하얀 먼지’(1980년)는 만주로 망명한 실어증 여성의 일대기를 소설과 영화로 구상한 작품이다. 구한말 식민통치를 피해 만주로 건너간 차학경의 외조모, 그의 딸인 차학경의 어머니 삶을 토대로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인 ‘딕테’(1982년)는 아트북 형태의 작품인데 잔 다르크, 유관순, 차학경, 차학경의 어머니 등 여러 여성들이 화자로 등장한다. 영어, 한국어, 중국어 등 혼합된 언어와 시, 사진, 지도 등이 뒤섞여 다언어와 다문화를 경험하는 이주여성의 계보와 서사를 드러낸다.“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어느 시대건 늘 있었죠. 하지만 그 고민이 주목을 받느냐 아니냐에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시기는 주변부 목소리가 나올 통로가 보다 다양합니다. 이전에는 주요 미술관·갤러리 전시에 포함돼야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표면화시킬 수 있는 매체와 커뮤니티가 많이 분화되어 있죠. 이런 시대가 차학경을 다시 불러낸 겁니다.”그렇다면 인간 차학경은 어떤 사람일까. 김 교수는 “삶을 즐겁고 단순하게 살아가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심오한 쪽에 가깝다. 진지하게 삶에 대한 철학을 예술로 통합하려 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런 차학경의 삶과 작품을 통해 지금 고민해볼 수 있는 것으로 ‘한국성’을 말한다.“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죠. 그렇다면 한국성이라는 개념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곧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 보자는 말입니다. 타자의 삶을 알아야 나라는 존재를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까요.”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서울 MMCA영상관에서 다음달 18일까지 ‘영화로, 영화를 쓰다’ 프로그램을 통해 차학경의 ‘비밀스런 유출’, ‘입에서 입으로’, ‘치환’, ‘비데오엠’, ‘다시 사라짐’을 상영한다. 차학경 외에도 이란의 포루그 파로흐자드, 베트남계 프랑스 예술가 마르그리트 뒤라스, 미국 수전 손택의 작품이 상영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2018년 미국 콜로라도주에서는 ‘평평한 지구 국제 학회’가 열렸다. 지구는 평평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 상층에는 거대한 돔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이곳에 보스턴대 철학과 과학사 센터 연구원인 저자도 참석했다. 약 20년간 과학 부정론자들과 소통하는 법을 연구한 저자가 문득 자신이 이들과 대면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모험을 시도했던 것이다. 책은 저자가 평평한 지구론자, 기후변화 부정론자, 백신 거부자 등 과학 부정론자들의 마음을 얻으려 고군분투한 과정을 따라간다. ‘평평한 지구 국제 학회’에서의 48시간은 지난했다. 저자는 회원들에게 “구체적인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증거를 토대로 한 과학적 논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저자는 이내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과학 부정론자들 대다수가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상적인 세계에서 소외받는 자신을 지키고자 사회의 순리나 이론을 부정하며 음모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그는 회원 중 어느 누구도 전향시키지 못했다. 그는 “당연한 결과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였어야 했다. 한 번 이상 만났어야 했고 더 많이 어울렸어야 했다”고 말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새로운 대화를 시도했다. 대상은 유전자변형식품(GMO)에 대해 반대 의견을 가진 40년 지기 테드였다. 테드와의 대화 또한 지지부진했다. 테드는 “GMO는 침입종이나 다름없다”며 윤리적인 이유와 장기적으로 안전성에 확신을 갖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유지했다. 저자는 집요하게 반론을 제기했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메시지 또한 놓지 않았다. 대화는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건 저자가 제자리걸음인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 하자 그때서야 테드가 “좋은 지적이었어.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저자는 공감과 존중, 경청이야말로 서로의 믿음을 바꿀 수 있는 길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의 신념은 사실관계의 판단으로만 형성되기보다 다양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배려가 가득한 자세로 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만이 의심이 가득한 시대에 서로를 구해줄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한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전북 익산시 춘포면에는 108년 된 옛 도정공장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춘포 일대 땅 등을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1883∼1970)가 세운 정미소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1998년 폐업했다. 그렇게 한동안 방치돼 있던 공장이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전시의 주인공은 ‘기억’을 소재로 사진, 회화 등을 작업해온 조덕현 작가(65)다. 조 작가는 지난해 7월 15일 출사를 나갔다가 공장을 발견했고 소유주인 서문근 씨와 논의해 전시를 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올해 4월 23일부터 개인전 ‘108 and: 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 기간은 내년 4월 22일까지 무려 1년이다. 총 54점이 놓인 전시장은 도정시설이 있었던 중앙 공간과 좌우에 각각 놓인 창고 세 칸과 공장 앞에 놓인 정원 등 4307m²(약 1300평) 규모의 공간을 모두 활용했다. 16일 만난 조 작가는 “이 공간은 격변의 세월을 지나며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대에 들어 잊혀진 공장의 공간성과 이 지역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인생 등을 주목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이춘기(1906∼1991)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춘포면에서 태어난 그는 1990년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춘포에서 살았다. 작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이춘기의 30년 치 일기 중 일부를 스캔해 삼각기둥에 붙여 설치물을 완성했다. 일기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 양육과 노동의 고단함, 아이들에 대한 애정 등 이춘기 개인사를 포함해 춘포 지역의 시대별 모습 등이 녹아 있다. 이춘기라는 무명인의 예술은 동시대 시인의 시로 이어진다. 조 작가는 김용택 시인(74)을 떠올리고 올 1월 연락을 취했다. 시인의 허락하에 작가는 미발표 시집 2권 중 28작을 10월부터 메인 전시장과 정원에 선보였다. 특이한 점은 투명 아크릴 판에 새겨져 가까이 가지 않으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김 시인은 “지금 시대의 시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보이고, 애써 찾아야 찾아지는 그런 시”라고 말했다. 시는 정원으로까지 이어진다. 정원 곳곳 풀밭 위에 마치 화분 같아 보이는 그릇 바닥에 시가 새겨져 있는 작품 ‘시분(詩盆)’이 놓여 있다. 작품 안에 고인 빗물 위로는 낙엽, 꽃잎이 떠다니고 그 사이로 시가 보인다. 김 시인은 “여린 시들이 자연에 묻히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시 옆 잎 하나, 꽃 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다. 역시 예술은 죽어 있는 것들을 살리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작품 중 약 30점은 전북 완주시 오스갤러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5000∼1만 원.익산=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전북 익산시 춘포면에는 108년 된 폐공장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춘포 일대를 소유했던 일본인 대지주 호소카와 모리다치(1883~1970)가 세운 정미소다.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1998년 폐업했다. 그렇게 한동안 방치돼있던 공장이 이제 전시장으로 탈바꿈하고 관객을 맞이한다. 그 주인공은 ‘기억’을 소재로 사진, 회화 등을 작업해온 조덕현 작가(65). 조 작가는 지난해 7월 15일 출사를 나갔다가 차 사고가 나 방황하던 중 공장을 발견했다. 소유주인 서문근 씨와 논의해 전시를 열기로 했다. 올해 4월 열린 개인전이 ‘108 and: 어둠과 빛, 바람과 비의 서사’다. 총 54점이 놓인 전시장은 도정시설이 있었던 중앙 공간과 좌우에 각각 놓인 창고 세 칸, 공장 앞에 놓인 정원 등을 모두 활용했다. 16일 만난 조 작가는 “이 공간은 격변의 세월을 지나오며 막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대에 들어 잊힌 공장의 공간성과 그에 관한 기억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전시의 실마리는 이춘기(1906~1991)라는 인물을 찾으면서 풀렸다. 춘포면에서 태어난 그는 1990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춘포에서 살았다. 이춘기는 춘포교회를 앞에 모인 지역민들의 초상화 ‘&memoir’(2022년)에 등장한다. 조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보관돼있는 이춘기의 30여년 치 일기 중 일부를 스캔해 삼각기둥에 붙였다. ‘&diary’(2022년) 속 글과 낙서 같은 그림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 양육과 노동의 고단함,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겼다. 이춘기라는 무명인의 예술은 동시대 시인의 시로 이어진다. 조 작가는 “그렇게 예술적인 몸부림을 치며 도달하고자 했던 분”으로 김용택 시인(74)을 떠올리고 올해 1월 연락을 취했다. 시인의 허락 하에 작가는 미발표 시집 2권 중 28 작품을 10월부터 메인 전시장과 정원에 선보였다. 특이한 점은 투명 아크릴 판에 새겨져 가까이 가지 않으면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김 시인은 “지금 시대의 시는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극적으로 보려고 해야 보이고, 애써 찾아야 찾아지는 그런 시”라고 말했다. 시는 정원으로까지 이어진다. ‘시분(詩盆)’이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그릇 바닥에 시가 쓰여 있어 낙엽, 꽃잎이 떠다니는 빗물 사이로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김 시인은 “여린 시들이 자연에 묻히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시 옆 잎 하나, 꽃 하나가 살아있는 것 같다. 역시 예술은 죽어있는 것들을 살리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전용 전시장이 아니기에 작품과 공간을 관리하는 것도 조 작가 몫이다. 개인전은 내년 4월 22일에 끝나는 장기 전시다. 작가는 “1년간 정원사처럼 전시장 내·외부 작품과 공간을 수시로 손본다. 버려진 창고와 화장실, 돌멩이 하나까지 다 예술로 살아나는 이 공간의 장소성과 시간성을 느끼는 실험적 프로젝트”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에 올 때는 이곳의 개망초와 풀, 나무가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궁금하다”고 말한다. 작품 중 약 30점은 전북 완주시 오스갤러리에서도 만날 수 있다. 춘포도정공장 전시 입장료는 5000~1만 원.익산=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전시작품이다. 더불어 공간을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이해도나 만족도는 크게 달라진다. 최근 미술계에선 벽과 조명, 음향 등 전시공간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동아일보는 전시공간 전문가 5명에게 올해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열린 전시 중 공간디자인이 인상적인 전시를 선정해 달라고 했다. 전시 규모와 관람객 수를 고려해 공공 전시를 대상으로 했다.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운영디자인기획관, 김성태 리움미술관 수석디자이너, 이대형 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 전시디자인회사 ‘시공테크’의 오서현 선임디자이너, 공간디자인스튜디오 ‘논스탠다드’의 이세영 대표가 공간디자인이 빼어난 전시를 각각 3개씩 꼽았다. ‘문신: 우주를 향하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내년 1월 29일까지)가 3명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공간디자인이 뛰어난 전시로 꼽혔다. ‘대지의 시간’(국립현대비술관 과천)과 ‘사유의 방’(국립중앙박물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서울시립미술관)도 각각 2표씩 받았다. 올해 탄생 100주년인 조각가 문신(1922∼1995)의 개인전은 “공원을 산책하듯 작품을 여러 방향에서 감상할 수 있는 편안한 디자인”(김용주 기획관)인 데다 작품과 작가를 고루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성태 디자이너는 “작품과 진열장 재질을 적절하게 맞춰 문신 조각의 특징인 물성을 잘 강조했다”고 말했다. 오서현 디자이너는 “곡선형 디자인을 통해 작품이 우주에서 피어난 강인한 생명처럼 보이게 했다”며 “평생 우주를 탐구한 작가의 세계관을 함께 사유하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올해 3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단체기획전 ‘대지의 시간’은 생태라는 주제를 잘 살린 독창적인 기획이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이대형 전 감독은 “공간디자인을 통해 생태학적 가치를 말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며 “폐기물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벽을 없앴고,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연출이 돋보였다”고 했다. 다만 가벽 대신 놓은 구형의 반사체에 대해선 호불호가 엇갈렸다. 오서현 디자이너는 “공간과 작품, 관람객을 한데 비춰 관람객 또한 생태담론의 주체란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이세영 대표는 “조형물이 작품보다 압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점의 상설전시관을 재개편한 ‘사유의 방’은 작품과 공간디자인의 일체감이 뛰어난 사례로 꼽혔다. 김용주 기획관은 “긴 진입로와 흙을 사용한 벽의 재질과 색감, 미세하게 기울어진 바닥을 통해 관람객이 작품과 자연스레 마주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끝난 서울시립미술관의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도 주목받았다.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회고전으로 “과거로 돌아간 듯한 상상을 펼치게 만들었다. 권진규라는 인물에 대한 내러티브가 돋보였다”(김성태 디자이너)는 평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내년 3월 1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오늘 본 것’,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 현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가면무도회’, 부산시립미술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도 좋은 전시디자인으로 언급됐다. 전문가들은 “전시디자인은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획 의도를 입체적, 철학적으로 잘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입을 모았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같은 작가의 작품을 다뤘더라도 어떤 전시는 깊게 작품을 이해했다는 느낌을 주고, 어떤 전시는 눈이 즐겁다는 감각에서 그치고 만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큐레이팅 등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전시 공간 디자인’도 큰 역할을 한다. 전시 공간 디자인이란 전시장 구도와 벽, 조명, 음향 등 모든 실내 구성 요소를 통칭한다. 동아일보는 전문가 5명에게 올해 국공립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진행된 전시 가운데 공간 디자인의 기능과 의미 측면에서 인상 깊었던 전시 3개를 꼽아달라고 요청했다. 참여자는 김용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운영디자인기획관과 김성태 리움미술관 수석디자이너, 이대형 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 전시디자인회사 시공테크의 오서현 선임디자이너, 공간디자인 스튜디오 Nonstandard의 이세영 대표. 전문가들은 좋은 전시 공간 디자인이란 “전시의 기획 의도를 관람객에게 입체적·철학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설문 결과, ‘문신: 우주를 향하여’(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가 3명에게 표를 받아 가장 많이 거론됐다. ‘대지의 시간’(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 ‘사유의 방’(국립중앙박물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서울시립미술관)도 각각 2표씩 받았다.●작품 질감과 작가 세계관 강조한 ‘문신: 우주를 향하여’▽김성태=문신 조각은 물성이 특징이다. 목조 작품의 좌대는 따로 디자인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혼합재 보드를, 브론즈 작품의 좌대는 철재를 사용하는 등 작품과 진열장의 재질이 비슷해 조각의 물성이 강조된 연출이었다.▽오서현=문신 작품은 대칭미와 매끈한 질감만 돋보이기 쉽다. 하지만 이 전시장은 곡선을 그리는 벽체와 좌대, 그 위에 조각을 올려놓음으로써 작품들이 우주의 거대한 흐름 위에 피어난 강인한 생명처럼 보인다. 관람객들이 작가가 천착했던 우주에 대한 사유를 함께 탐구하도록 유도했다.●평가 갈렸던 ‘대지의 시간’▽이대형=내용뿐 아니라 공간 디자인을 통해서도 생태학적 가치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전시. 폐기물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벽을 없앴으며, 그 결과 작품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듯 연출됐다.▽오서현=공간 설계부터 폐기까지 생태담론이란 취지를 생각한 전시. 특히 구형의 반사체는 전시 공간, 작품, 관람객을 한데 비춤으로써 관람객 또한 생태담론 주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세영=아쉬웠다. 구체들의 정체를 한참 고민했다. 디자인의 요소가 특정한 조형성을 갖고 작품보다 압도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과연 옳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작품과의 만남이 기다려지는 ‘사유의 방’▽김용주=작품을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계획한 우수 사례. 긴 진입로와 흙을 사용한 전시장 벽의 재질과 색감,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진 바닥 등을 통해 결국 작품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하게 했다. 공간이 작품 감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게 했다.▽이대형=오감을 전부 자극하는 공간이다. 미디어아트 작품의 소리, 천장과 벽의 색감과 질감, 공기 등 분위기를 만드는 디테일한 디자인을 통해 적합한 명상 공간을 만들어냈다. 공간 전체가 작품으로 인식되는 전시.●작가 삶이 녹아있는 ‘권진규-노실의 천사’▽김성태=권진규라는 인물의 내러티브가 돋보인 전시. 좌대 밑을 삼공블록과 벽돌이 받치고 있는데, 작가가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던 전시공간을 차용한 것이라 그의 삶을 상기시킨다.▽김용주=좌대에 사용된 삼공블록이 전시 이후 버려지지 않고 산업 현장으로 돌아가 제 기능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측면도 인상 깊다.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1899년 서울 경복궁 인근 북촌에 거주하는 여성들의 모임 ‘찬양회’가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한 지아비가 두 아내를 거느리는 것은 윤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덕의를 잃는 행위’라고 먹으로 쓴 흰 헝겊을 장대에 매단 뒤 덕수궁 인근에 세웠다. 그 옆에서는 30, 40대 여성 50여 명이 앉아 “상감(고종 황제)께서 먼저 후궁을 물리치라”고 외쳤다. 조선사회에는 처첩제도가 있었다. 당시 여성들은 직접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첩을 두는 것이 윤리에 어긋난 일이라며 공개 시위를 벌인 건 가부장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었다. 이 시위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주일 이상 이어졌다.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인 저자는 조선시대 상언(上言·백성이 글로 임금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과 근대 계몽기 신문 독자투고를 분석해 적극적으로 사회에 정론을 외쳐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명한다. 이는 ‘유교 가부장제 사회 속 수동적인 여성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자신의 처지에 주눅 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글을 썼다. 국정을 기록한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 재위 기간(1776∼1800)에 상언과 격쟁(擊錚·하소연할 사안이 있을 때 임금이 지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쳐서 하문을 기다리던 일)은 총 4427건에 달했다. 이 중 405건은 여성들이 제기했다. 이들의 출신은 양반, 평민, 기녀, 여종 등으로 다양했다. 내용도 재산, 가족, 후계 등 일상 속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근대 계몽기에는 신문이 여성들의 목소리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1898년 ‘북촌의 여중군자’라고 밝힌 이들이 쓴 ‘여학교 설시 통문’이 대표적이다. 여학교의 필요성과 여성 권리를 주장한 글은 같은 해 황성신문 별보와 독립신문에 게재됐다. 1899년에는 과부라 밝힌 한 여성이 재혼을 막는 관습을 비판하는 글을 제국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저자는 “침묵했던 목소리가 분출한 것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의 말을 되살리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