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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가 간행한 독립신문(獨立新聞) 중 국내외 유일본 5개호가 28일부터 다음 달 29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다. 올해 3·1운동 103주년을 맞아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24년 10월부터 1926년 10월 사이에 발간된 독립신문 177∼180호와 195호를 선보인다. 이 중 항일 독립운동단체 정의부의 선언서 전문을 소개한 1925년 1월 1일자(제180호·사진) 지면이 눈길을 끈다. 해당 일자 신문 4면 전면에 걸쳐 정의부 선언서와 선서문이 실려 있다. 선언서에는 “인류 평등의 정의를 천명하며 민족 생영(生榮)의 정신을 주창하고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 보급을 실시하겠다”고 적혀 있다. 독립신문 주필로 활동한 백암 박은식(1859∼1925)의 논설도 처음 공개된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 기관지로 1919년 8월 21일 창간돼 1926년 11월까지 발행됐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백제 왕릉인 충남 부여군 부여왕릉원 4호분 입구 근처 묘도(墓道·외부에서 무덤에 이르는 길)에서 돌을 얹은 토기 2점이 발굴됐다. 이 무덤은 사비백제(538∼660년) 시대에 지어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다. 백제 고분 가운데 묘도에서 의도적으로 묻은 토기가 발견된 건 처음이다. 학계에서는 백제시대 왕실 장례문화를 밝힐 수 있는 단서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12월 부여왕릉원 4호분(서상총) 발굴조사 중 묘도 바닥 양쪽에서 똑바로 세워진 채 묻힌 완형 토기 2점이 발견됐다”고 23일 밝혔다. 총 11.6m에 이르는 묘도 중 현실(玄室·시신을 안치하는 방)로 들어가는 입구로부터 5m가량 떨어진 곳에서 토기가 나왔다. 묘도 양 끝에 파인 구덩이에 납작한 돌로 입구를 막은 토기 2점을 묻어놓은 것. 두 토기는 49cm 높이로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고고학)는 “무덤 축조 당시부터 토기를 묻는 시설을 기획한 것으로 보인다”며 “발견된 토기는 시신 옆에 놓는 부장품이 아닌, 정교하게 짜여진 당대 장례문화”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삼국시대 사찰 등에서 발견되는 진단구(鎭壇具) 성격이 짙다는 추측도 나온다. 진단구란 건물을 세울 때 악한 기운을 막기 위해 기단 하부에 공양하는 매장품을 말한다. 김환희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땅의 신에게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고 시신을 보호해 달라는 의례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토기 안에서 나온 흙에 대해 유기물 분석을 진행 중이다. 결과가 나오면 토기에 음식을 담아 묻었는지가 밝혀질 것으로 전망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순직한 군인 46명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곳에는 살아남은 58명의 군인도 있었다.” 신간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난다)를 최근 펴낸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43)는 19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피격 사건 후 생존 장병들의 삶을 담은 이 책은 내가 이들과 맺은 인연에 대한 응답”이라고 했다. 그는 2018년 생존 장병들에게 “천안함에서 살아남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e메일을 보냈다. 지난해 4월에는 국방부 앞에서 팻말 시위를 하는 이들의 곁을 지켰다. 2020년 11월 천안함 생존 장병이 그에게 보낸 메일 한 통이 집필에 들어간 결정적 계기였다. “상이연금을 받기 위한 행정절차를 진행 중인데 내 상태를 증빙할 자료가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는 “천안함을 둘러싼 정치공방에 휩싸여 정작 재난 이후의 삶을 이어가야 할 생존자의 고통에 무심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봤다”고 말했다. “제가 만난 생존 장병들은 여전히 천안함의 자장 안에 있더군요. 현실에서 ‘패잔병’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녔기 때문이죠.”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생존 장병의 삶에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한 생존 장병은 “상사가 내게 ‘천안함 출신이라 싫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2018년 실시한 설문조사에 응한 생존자 22명 중 13명(59%)이 ‘천안함 생존자라는 이유로 함께 있기 꺼림칙하다는 말을 부대 동료로부터 들었다’고 답했다. 몸이 아파도 혼자서 끙끙 앓았다. 설문에 응한 생존자 19명 중 13명(68%)은 ‘진료를 위해 부대에서 시간을 주지 않아서’ 혹은 ‘관심병사로 분류될 것 같아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 결국 상당수 생존자가 군을 떠났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생존자 58명 가운데 44명이 직업군인이었는데, 이 중 20명이 제대했다. “한국사회와 군은 임무 수행 중 트라우마를 겪은 생존자들에게 ‘너희를 품어줄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 달라’고 말할 기회를 놓친 겁니다. 직업군인으로서 소명을 가지고 천안함에 오른 이들을 군대가 지켜내지 못했으니까요.” 책 제목에 담긴 바람처럼 미래에 같은 피해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그는 천안함 폭침 사건을 산업재해 관점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진영 논리를 떠나 생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을 돌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 그는 “산업재해 관점에서 보면 천안함 생존자들이 겪은 고통과 질병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패잔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힌 이들에게 ‘생존 장병’이라는 이름을 찾아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생존 장병들의 삶이 더 이상 모욕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책을 썼다”고도 했다. 출간 후 최원일 전 천안함장으로부터 “여태 나온 천안함 책들 가운데 최고”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이 책이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북-중이 역사 문제에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민족 감정으로 인한 문제가 생겼다.”(1963년 4월 23일 안즈민의 일기)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한중 역사 갈등이 1960년대 이미 시작됐다는 사실이 중국 고고학자 안즈민(安志敏·1924∼2005)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 1963∼1965년 북한과 중국이 공동 조직한 조·중고고발굴대에서 중국 측 연구대장을 맡았던 그의 일기에는 고조선사를 놓고 북-중이 벌인 신경전이 담겼다. 2020년 중국에서 출간된 안즈민의 일기가 국내에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18일 경희대 한국고대사고고학연구소와 고조선부여사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안즈민의 일기를 통해 북-중 고대사 갈등의 기원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출신인 안즈민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발굴을 주도한 중국 고고학의 초기 세대를 대표한다. 1963년 공동 발굴대를 조직하는 데 뜻을 모았던 양국은 왜 틀어졌을까. 강 교수는 북한 측 사학자 리지린(李址麟·1915∼?)이 고조선 성터를 찾아 나서며 갈등이 시작됐다고 봤다. 1963년 9월 리지린은 중국 랴오둥(遼東) 지역 하이청(海城) 성터를 조사하면서 해당 지역을 고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이라고 주장했다. 중국 측이 “명나라 성터”라며 맞섰으나 북한은 고조선 성터를 찾으려는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이후에도 북측은 랴오둥뿐 아니라 몽골까지를 고조선 영토로 상정하려 했다. 이러한 정황은 안즈민의 일기에 기록됐다. 1963년 9월 27일 안즈민의 일기에는 북측 학자들이 “중국이 낙랑군의 소재를 알고도 숨기는 거 아니겠느냐”며 중국 측과 논쟁한 정황도 담겼다.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의 한무제(漢武帝)가 설치한 군으로, 낙랑군의 위치는 고조선 강역을 규명할 핵심 열쇠였다. 북한이 고조선 강역을 규명하기 위해 발굴대를 조직했다는 의중이 명확히 드러난 셈이다. 북한의 의중을 알아차린 중국은 통역원을 정보원으로 두고 감시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낙랑군의 위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신경전의 중심에는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양보할 수 없는 양국 갈등이 존재했다. 북한이 고조선사에 집중하게 된 건 1956년 소련이 출판한 ‘세계통사’ 때문이다. 이 책에는 중국에서 온 낙랑군이 한반도에 유입돼 한반도 역사가 시작됐다는 일제식민사관 서술이 그대로 담겼다. 북한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역사 인식이 북한의 자주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이에 북한은 고조선 도성이 평양에 있다는 당대 일부 북한 학계의 주장에서 벗어나 왕검성이 중국 랴오둥 지역에 있었음을 입증해 민족사의 자주성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중국은 랴오둥 지역에 고조선의 흔적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은 발굴대가 랴오둥에서 발굴한 고조선 유물 ‘비파형 동검’을 만주 청동기 시대 유물로 규정했다.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 유물이라는 사실조차 합의하지 못한 채 양국은 1965년 공동 보고서도 내지 않고 갈라섰다. 이후 중국은 랴오둥 지역에서 발굴된 고조선 유물의 존재를 은폐하기 위해 조·중고고발굴대를 역사에서 지워버린다. 고조선 강역을 둘러싼 한중 고대사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강 교수는 “변방을 다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족 문명의 역사가 확산된 곳으로 규정하는 중국의 팽창적 역사관은 60년 전 북한과 고조선사를 둘러싼 분쟁의 반작용에서 본격화됐다”며 “조·중고고발굴대는 한중 고대사 분쟁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현대사의 세 거두가 1945년 2월 러시아 크림반도 얄타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의 운명을 결정할 때 세 여성이 함께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 애나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딸 세라, 소련 주재 미국대사 애버럴 해리먼의 딸 캐슬린이다. 아버지가 일군 거대한 역사에서 조역으로 활동한 세 딸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세 여성이 얄타회담 전후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1945년 2월 1∼11일의 일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이들이 남긴 글에는 회담장 안 아버지가 보지 못한 역사의 단면이 담겨 있다. 저자는 플래시백 기법처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서술로 세 여성의 일상과 얄타회담 전후 세계사를 촘촘히 엮어낸다. 루스벨트의 딸 애나는 당시 급성 심부전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건강 상태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회담 일정을 조율하는 비서 역할을 맡았다. 일간지 종군기자였던 캐슬린은 격무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대신해 틈틈이 배운 러시아어로 건배사를 외친 의전 담당관이었다. 영국 공군 소속의 세라는 군사기밀을 다룬 전문가이자 처칠이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상담자였다. 이들은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회담을 지켜보며 얄타회담에 대해 송곳 평가를 내린다. 1945년 2월 11일 공동선언문에 합의한 세 거목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회담장을 걸어 나왔지만, 애나는 남편에게 쓴 편지에서 “화려한 수사로 가득 찬 일반론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딸들이 남긴 회담장 분위기는 얄타회담이 가져올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세라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스탈린은 공동선언문 작성을 마치자마자 지니의 요정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국 대표단마저 얄타를 떠나고 홀로 남은 처칠은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끝났다”고 소리치며 돌연 짐을 챙겼다. 예정일보다 하루 앞당겨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 처칠은 딸에게 “내 마음에서 불안이 떠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소련이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급속도로 멀어져 가고 있음을 직감한 것. 처칠의 예감대로 나치와 맞서 싸운 동지들은 곧 갈라선다. 미영소 3국이 패전국 독일을 분할 통치하기로 합의한 얄타회담은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로 이어진다. 세계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분열시킨 냉전의 서막이 열린 것. 훗날 얄타회담은 동유럽을 소련의 손아귀에 던져준 실패한 외교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세 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은 마냥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1945년 2월 6일 정상들이 회담장에서 격론을 벌일 때 세 딸은 독일군 공습으로 폐허가 된 항구도시 세바스토폴로 향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도시에도 삶은 이어졌다. 천장 없이 벽만 남은 성당에는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비극을 겪고도 꿋꿋이 생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세라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두운 성당 안의 그들도 꿈을 가지고 있어요.” 어쩌면 세 딸이 목격한 폐허 위 성당의 불빛은 아버지가 남긴 얄타회담의 유산보다 더 빛나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격변하는 세상사 속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을 품으며 삶을 지켜 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서경덕 성신여대 교양학부 교수가 14일 안중근 의사(1879∼1910) 사형 선고일을 맞아 안 의사 여동생 안성녀 여사(1889∼1954)를 알리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독립운동사의 숨은 영웅을 조명하자는 취지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을사늑약 체결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다. 이에 1910년 2월 14일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안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서 교수는 이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독립운동가 안성녀를 아시나요?’라는 제목의 카드 뉴스(사진) 6장을 올리고, 1910년부터 광복까지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전달한 그의 행적을 소개했다. 1889년생인 그는 중국 하얼빈에서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운영해 번 수익으로 독립군을 남몰래 지원했다. 1920년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거처를 옮겨 주요 문서나 군자금을 독립군에게 전달했다. 광복 후 부산에 터를 잡은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1954년 별세했다. 고인이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흘렀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아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서 교수는 “안 의사의 사형 선고일은 밸런타인데이와 날짜가 같아 대중의 관심을 덜 받아온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앞서 서 교수는 매년 안 의사의 사형 선고일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안 의사 가문을 소개하는 카드 뉴스를 만들어 올렸다. 올해는 웹툰 작가 기안84(본명 김희민)와 개그우먼 박나래가 각자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카드 뉴스를 공유하며 힘을 보탰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4세기 금관가야 왕궁이 서민 거주지에선 보이지 않는 해발 30m의 고지대에 지어진 사실이 지리정보시스템(GIS) 연구로 확인됐다. 지배층의 위계를 공간에 구현한 것으로, 비슷한 시기 신라왕궁인 경북 경주 월성(月城)도 서민 거주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에 조성됐다. 강동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은 경남 김해 봉황동 왕궁 추정 유적과 대성동 고분을 3차원(3D) GIS로 분석한 논문(‘GIS를 이용한 고대 경관의 재구성’)을 10일 서울대 국사학과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GIS는 고지도나 고서, 고고자료 등을 토대로 옛 지리정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한 것이다. 텍스트 중심의 사료를 시각화해 당대 공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배경을 파악하는데 용이한 연구기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논문에서 강 실장은 김해 봉황동과 대성동 일대 금관가야 유적 48곳을 왕궁과 서민 거주지, 농경지 등으로 분류했다. 이어 4세기 당시 지표면을 기준으로 해발고도를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해발 약 2∼7m에 산재된 서민 거주지에서는 해발 30m 구릉 정상에 조성된 왕궁 내부를 볼 수 없었다는 게 확인됐다. 왕릉인 대성동 고분도 상대적으로 높은 해발 약 20m 지대에 있었다. 반면 왕성으로 진입하는 수로인 김해 해반천 유역에서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왕궁을 볼 수 있었다. 외국 사신 등 외부인에게 왕성의 위용을 과시한 것. 강 실장은 “백성의 시야로부터 왕궁을 차단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위계를 구조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읽힌다”며 “해상 교통로로 금관가야를 출입하는 외부인에게는 정치권력의 위상을 과시하는 랜드마크로 왕궁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연구한 결과, 경주시내 구릉 정상에 지은 신라 월성과 평지에 조성된 서민 거주지의 고도 차이도 약 20m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강 실장은 “신라도 금관가야처럼 지배층이 조망 권력을 확보했다”고 말했다. GIS로 18세기 조선의 지방 교통망을 분석한 연구결과도 나왔다. 엄기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은 1757년(영조 33년) 295개 읍을 수록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1770년 문신 신경준이 전국 육로와 수로를 기록한 지리서 도로고(道路考)를 바탕으로 18세기 황해도의 도로망을 재현했다. 이를 20세기 초에 제작된 지형도 위에 재구성한 결과 황해도내 145개 구간에 걸쳐 총 2613.44km에 이르는 도로망이 깔린 것으로 나타났다. 황해도내 23개 군현이 도로를 통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었다. 반면 황해도에서 수도 한양에 이르는 외부 도로망은 파주에서 합쳐지는 네 갈래 길로 비교적 단순했다. 이처럼 외부 도로망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보니 황해도의 경우 조선 전기까지 바닷길로 조세를 거두는 조운이 이뤄졌다. 영조 때부터는 곡물 대신 동전으로 세금을 거두는 작전제(作錢制)가 시행됐다. 해운의 경우 풍랑에 따른 곡물 유실 위험이 적지 않아서다. 엄기석 연구원은 “외부 교통망이 내부 교통망에 비해 발달하지 않은 사실이 조세 수취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된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특급 호텔 지하에는 음향, 음식, 조명을 도맡아 행사를 돕는 후방 부서 ‘백 오피스(Back Office)’가 있다. 화려한 행사가 열리는 호텔 라운지에서는 보이지 않는 땀 냄새 나는 일터. 이곳에서 세 여성이 만난다. 육아휴직으로 승진 경쟁에서 밀린 호텔지배인 혜원과 소규모 행사기획사에서 일하는 강이, 대형 행사를 발주하는 대기업 대리 지영. 소속은 다르지만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이들은 에너지 대기업 ‘태형’의 행사를 개최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 행사 계약금만 10억 원. 이를 따내기 위해 호텔업계와 기획사는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다. 경쟁업체 직원을 비밀리에 스카우트하는 권모술수가 오가는 전장에서도 세 여성은 페어플레이를 고수한다. 경쟁자의 치명적 약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누설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과정 역시 중요하다는 걸 백 오피스에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갑과 을의 관계를 떠나 ‘우리’가 되어 계약을 따낸 이들은 실수로 잘못 배송된 물품을 놓고 서로를 탓하는 대신 함께 해법을 찾는다. 하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해 찾은 해법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행사 당일 우려했던 사고가 터진다. 아수라장이 된 행사장에서 이들은 서로의 곁을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원군이 되어준다. 첫 인사를 나누던 날 “나를 좀 도와 달라”며 악수를 건넨 지영의 손을 맞잡으며 혜원이 남긴 말처럼. “우리는 나보다 힘이 센 법이니까.” 세 여성의 도전은 끝내 실패하지만 그 끝이 쓸쓸하지만은 않다. 귀빈들이 모두 떠난 연회장에서 이들은 홀로 남겨져 있지 않다. 담담하게 ‘우리의 실패’를 함께 겪어낸다.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으면서.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등단한 최유안의 첫 장편소설이다. 38세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회사원으로 일했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여러 동료와 함께 일궈냈던 작가의 경험이 책 속에 녹아 있다. 마지막 장에 ‘이 소설은 자기 일을 매 순간 조금씩 해 나가는 사람들을 위한 진심의 응원’이라는 작가의 말이 담겼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53년 제3차 한일회담을 결렬시킨 이른바 ‘구보타 망언’은 한미관계 균열을 이용한 일본 정부의 의도적 전략이었음이 확인됐다.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이 일본 외교문서를 묶어 펴낸 ‘한일회담 일본외교문서 상세목록집’에 따르면 1953년 6월 21일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는 “3차 한일회담을 고의로 지연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을 작성했다. 실제로 문서 작성 후인 그해 10월 한일회담에서 구보타는 “일본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망언을 쏟아내 한일회담은 이후 5년간 중단됐다. 16장 분량의 휴회안 문서에서 구보타는 이승만의 1953년 거제도 반공포로 석방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수세에 몰렸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승만 정부의 북조선 포로 2만5000명 석방으로 한국은 유엔에 반역하는 태도를 취하게 됐다.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으로 지탄을 받아 머지않아 물러나게 될 것”이라며 “곧 몰락할 이승만과의 회담 속행은 재고해야 한다”고 썼다. 이승만 정부는 1953년 6월 18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풀어줘 한미관계가 삐걱댔다. 일본 정부가 이를 빌미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2007년부터 10년간 공개한 한일회담 외교문서 약 6만 장 중 일부다. 2007년 첫 공개 당시 일본 정부는 문서의 핵심 부분을 먹칠한 채 제공했으나, 일본 시민단체의 지속적인 정보공개재판 청구 끝에 원본 일부가 추가로 공개됐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구보타 망언이 사견이라고 했으나 이번 문서를 통해 결렬 책임을 한국에 떠넘겨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었음이 밝혀졌다”며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드디어 윤리적 결실을 맺었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에서 학예연구사로 근무하고 있는 임수아 씨(47·사진)가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그는 미술관이 소장 중인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1646∼1718)의 묘지석(墓誌石·고인의 행적을 기록해 묘소에 묻는 돌판) 18점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2년 동안 현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후손들을 위해 윤리적 결단을 내려달라”는 임 씨의 설득에 묘지석은 분실된 지 28년 만인 8일 국내로 환수됐다. 해외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도난품이 아닌 한국 문화재를 대가 없이 돌려준 건 처음이다. 10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백토 위에 청화 안료로 글씨를 쓰고 불에 구운 이기하 묘지석은 영조 10년(1734년)에 제작됐다. 묘지석에는 고인이 생전 훈련대장과 공조판서를 역임했다는 행적이 담겨 있다. 이조좌랑을 지낸 문신 이덕수(1673∼1744)가 글씨를 썼다. 묘지석에는 조선시대 도자기술과 서체의 역사가 담겨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기하 묘지석은 1994년 한산 이씨 문중이 이기하의 묘를 이장한 후 관리하는 과정에서 분실됐다. 재단은 2015년부터 2년에 걸쳐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묘지석을 찾아냈다. 그때부터 미술관에서 한국문화재 연구를 담당한 임 씨와의 물밑 접촉이 시작됐다. 그와 재단이 주고받은 e메일만 수백 통. 묘지석의 원소유자가 한산 이씨 문중임을 파악한 재단은 임 씨를 통해 미술관 측에 이를 알렸다. 미술관은 1998년 한 미국인으로부터 묘지석을 무상 기증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넘게 클리블랜드미술관에 소장된 유물을 반환받기까지 임 씨의 역할이 컸다. 묘지석을 잃어버린 후손들을 위해 윤리적 결정을 내리자는 그의 논리가 한몫했다. 윌리엄 그리스워드 클리블랜드미술관장은 “우리는 한국 동료들과 함께 오랜 시간 협력해왔고 재단이 이 사안을 우리에게 알렸을 때 모두가 함께 올바른 결과를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임 씨는 홍익대에서 미술사학 석사과정을 밟은 뒤 미국으로 건너 가 캔자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8년 만에 묘지석을 돌려받은 후손 이한석 씨(77)는 “미술관 역사의 일부가 된 묘지석을 돌려주기로 한 결정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 씨는 이기하의 묘소가 충남 예산군에 있는 점을 고려해 충청남도역사박물관에 묘지석을 기증하기로 했다. 이기하 묘지석은 올해 4월 초 기증행사와 특별전시회를 통해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53년 3차 한일회담을 결렬시킨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은 반공 포로 석방 문제로 악화된 한미관계를 이용해 한일회담을 무기 휴회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된 전략이었음이 확인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1953년 6월 21일 구보타가 작성한 극비 외교문서 ‘일한회담 무기 휴회안’을 분석한 결과 3차 회담 결렬 배경이 된 ‘구보타 망언’은 한일회담을 고의적으로 연기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이었다”고 10일 밝혔다. 구보타는 1953년 10월 열린 3차 한일회담에서 “일본의 통치는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망언을 했고, 이후 한일회담은 약 5년간 중단됐다. 그런데 해당 발언이 나오기 4개월 전 일본 외무성이 “이해득실을 검토한 결과 이번 회담은 무기 휴회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미 도출했다는 사실이 일본 외교문서를 통해 밝혀진 것. 16매 분량의 해당 문서에는 “이승만 정부가 북조선 포로 2만5000명을 독단 석방하는 문제가 일어나 한국은 UN에 반역하는 태도를 취하게 됐다. 이승만이 세계의 고아가 되려는 정책을 취하며 세계의 지탄을 받고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은퇴하게 될 것”이라며 “몰락하려는 이승만과의 회담 속행은 재고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이승만 정부가 1953년 6월 18일 거제수용소에 있던 반공 포로를 석방하며 한·미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는 전략을 세웠다는 분석이다. 해당 문서는 일본 정부가 2007년부터 10년간 공개해온 한일회담 일본 외교문서 6만여 장 가운데 일부다. 2007년 첫 공개 당시 일본 정부는 문서의 핵심 부분을 먹칠한 채 제공했으나, 일본 시민단체 ‘일한회담 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의 지속적인 정보공개재판 청구 끝에 대체로 원본이 일부 공개되면서 일본 정부의 전략을 살펴볼 토대가 마련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 외교문서를 주제별로 엮어 해제한 ‘한일회담 일본외교문서 상세목록집 1~5권’(동북아역사재단)을 펴내며 이 같은 전말을 밝혀냈다.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구보타 망언이 사견(私見)이라고 해명했으나, 결렬의 책임을 한국으로 전가시키면서 회담을 무기한 연기하려는 일본 정부의 전략에 따른 발언이었다”며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철저하게 이용했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진보 좌파는 한 발도 나아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퇴보했습니다.” 군부독재에 맞서 정치 민주화를 이뤄낸 직후인 1990년대.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63)는 진보 좌파에 내재한 ‘파시즘’을 들여다봤다. 그는 1999년 계간 학술지 당대비평에 ‘우리 안의 파시즘’을 발표하며 “자신만이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와 결을 같이한다”고 일갈했다. 그로부터 23년. 임 교수는 ‘우리 안의 파시즘 2.0’(휴머니스트)을 11일 펴낸다. 신간에서 그는 “586세대 중심의 여권이 운동권 내부의 파시즘을 성찰하지 않은 채 권력을 쥔 탓에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썼다. 서울 마포구 서강대 연구실에서 4일 만난 그는 “1990년대만 해도 영수회담을 통해 협치가 이뤄졌다면 현 586세대 중심의 여권은 상대를 박멸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적 제노사이드’를 자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학생운동 시절 반혁명주의자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한 스탈린식 행태를 체화한 이들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이들을 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 그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발간한 20여 년 전에 비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청와대 국민청원을 거론하며 “입법기관마저 ‘패싱’하고 청와대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고방식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고 말했다. 진보의 독선은 여권 유력 인사들의 ‘내로남불’ 행태로 가시화됐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그는 신간에서 “586세대가 조국 사태를 전후해 보여준 실망스러운 정치행태는 혁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개인적 일탈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낡은 변혁전략의 업보”라고 썼다. 진보의 독선이 더 심화된 이유는 무얼까. 1990년대 정치권력의 주변부에 머물던 386세대는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2000년대 이후 집권여당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선(善)이라는 행태를 고수해 독선이 심해졌다고 임 교수는 지적했다. 책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위생 독재’에 대한 경고도 담겼다. 그는 “팬데믹이 부른 의학적 비상사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위생 독재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동의를 만들어냈다”며 “여당은 공권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없이 ‘K방역’을 정치적 지렛대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정치적 전환기에 ‘우리 안의 파시즘 2.0’을 내놓은 그가 ‘3.0’을 쓸 날이 또 올까. 그는 “그때는 더 이상 진보 좌파를 겨냥하지 않고 현재의 불평등한 경제 구조에서 사회적 약자를 차별할 위험을 내재한 보수의 능력주의를 들여다볼 것”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왜냐하면 그때가 되면 진보는 자멸할 테니까요.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파시즘을 성찰하지 않은 그들 자신 때문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내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 복간본(사진)이 최근 출간됐다. 사민필지는 고종의 밀사이자 미국 언어학자였던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가 1889년에 쓴 책. 구한말 근대화에 뒤처졌던 조선인들이 세계정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지난달 26일 헐버트 박사 탄생 159주년을 맞아 사민필지 복간본 500부를 발간했다고 6일 밝혔다. 이번 복간본은 현존하는 영인본 중 가장 오래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본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헐버트 박사는 1886년 조선 왕실 초청으로 국내 첫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해 이 책을 썼다. 사민필지 머리말에는 ‘천하만국이 마치 한 집안과 같아졌다. 세계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7, 8세가 되면 각국의 지도를 가르치고 있으니 조선도 이와 같아야 외국과의 교류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책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 등이 포함된 세계지도 9장이 들어 있다. 한글로만 쓰여 관련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헐버트 박사는 23세 때 한반도에 와서 평생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정부는 1950년 외국인 중 처음으로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위기를 더 위기로 만드는 준비 안 된 후보.”(더불어민주당) “억지 궤변으로 일관한 얄팍한 언어유희.”(국민의힘) 4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측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측은 전날 열린 첫 TV토론을 두고 상대방을 직격했다. 치열한 지지율 선두 다툼을 벌이는 두 후보가 처음 맞붙은 대결은 역대 대선 TV토론 사상 두 번째로 높은 39%의 시청률을 찍었다. 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누가 유능한 리더인지, 누가 준비된 대통령인지 여실히 보여준 토론이었다”고 자평했다. 이어 “그저 남이 이야기해주는 대로만 읊어대는, 벼락출세 후보가 맡을 수 있는 대통령 자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윤호중 원내대표도 윤 후보를 겨냥해 “새로울 것 하나 없이 네거티브에 집중했다”며 날을 세웠다. 반면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는 이날 CBS라디오에서 “기세 싸움에 있어서 확실히 검찰총장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줬다”며 “(이 후보는) 대장동으로 (토론이 흘러) 가면서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위축된 자세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김기현 원내대표도 이 후보를 두고 “답변을 회피하고 지도자다운 의연함 없이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지상파 방송 3사가 생중계한 TV토론 시청률 합계는 39%(전국 기준)로 집계됐다. 1997년 김대중·이인제·이회창 후보가 맞붙은 TV토론(55.7%)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대선 TV토론 시청률을 기록한 것. 시청률 전문 조사기관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채널별 시청률은 KBS 1TV 19.5%, MBC 11.1%, SBS 8.4%였다. 한 미디어분석가는 “통상 월드컵 한국전이 열릴 때 지상파 3사 합계 시청률이 30%를 조금 넘는다”며 “올해 대선후보 토론은 이번이 처음인 데다 개최를 둘러싸고 진통이 커 오히려 언론 보도를 통해 방송 날짜와 시간이 널리 알려진 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미디어업계에서는 휴대전화, 컴퓨터를 이용하거나 다시 보기, 유튜브 등을 통해 본 이들까지 합산하면 실제 토론 시청자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산했다. 후속 TV토론에 대한 관심도 커지는 가운데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두 번째 토론이 이르면 8일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와 윤 후보는 물론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도 일단 기자협회 주관 토론에 참석 의사를 밝혔다. 2차 토론에서 이 후보 측은 민생, 경제 정책을 앞세워 ‘유능 대 무능’의 구도를 이어간다는 전략이다. 윤 후보 측은 안정적 국정 운영 능력을 전략 포인트로 잡았다. 여기에 대장동 의혹에 이어 성남 FC 후원금 의혹, 이 후보의 부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불법 유용 의혹 등 검증에 화력을 집중할 계획이다.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두려워 말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일어서십시오.” 1376년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보낸 이는 사제나 수도사가 아닌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의 29세 수녀 카타리나. 교황권이 몰락해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 지 67년째, 카타리나는 로마로 귀환하기를 주저하는 교황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이에 교황은 이듬해 ‘아비뇽 유폐’를 끝내고 로마로 귀환을 단행한다. 카타리나는 33세에 세상을 떠난 뒤 성녀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제단화에 그려졌다. 하지만 저자는 그녀가 성녀라기보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를 뛰어넘는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말한다. 중세 미술사학자인 저자는 남성 중심 세계관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낸 중세 여성 3인의 생애를 조명한다. 이들은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체험한 ‘신비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글과 그림을 남겼다. 저자는 “종교의 틀을 거두고 보면 하느님의 계시라는 건 결국 통찰력이 뛰어난 당대 여성 자신의 발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들이 남긴 글에는 여성의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독일 중서부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힐데가르트(1098∼1179)는 꿈에서 체험한 신의 계시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 3권을 남겼다. 이 중 ‘쉬비아스(Scivias)’에서 그는 아담과 이브의 타락을 여성 관점에서 풀어냈다. 아담이 타락한 원인을 이브의 유혹이 아닌 아담 스스로의 결함 때문으로 본 것. 회화 ‘교회의 세 위계’에서는 왕관을 쓴 거대한 여성이 인간 세상을 품은 모습을 그렸다. 성스러운 교회를 여성에 빗댄 것이다. 시에나 출신 안젤라(1248∼1309)는 요즘으로 치면 행위예술가였다. 42세 늦은 나이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예수의 시신을 관에 넣는 미사극을 보다 자신도 관에 들어가 시신 옆에 누워 입을 맞췄다. 혹자는 광인이라 일컬었지만 저자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심을 표현한 주체적 여성으로 그를 해석한다. 책은 남성 중심의 중세가 만들어낸 그늘도 보여준다. 카타리나가 33세에 세상을 떠난 건 금식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당대 성직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따라 스스로 고행을 했다. 카타리나는 죽음에 이르는 가학적 금식을 견디며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데 대한 사회적 비난을 잠재웠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교황청은 연약한 성녀의 이미지 속에 그를 가뒀다. 제단화 속 카타리나는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다. 숨지기 두 달 전 출판을 위해 “내가 쓴 글을 모아 달라”고 당부한 당찬 여성은 사라졌다. 저자는 성녀라는 장막을 벗겨낸 후 이들이 세상에 남긴 메시지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힐데가르트는 44세에 첫 책 ‘쉬비아스’ 서문을 쓰며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하늘에서 내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소리 높여 말하라 그리고 그것을 써라.” 어쩌면 그 음성은 자유롭게 뜻을 펼치고 싶었던 자신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더는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국가가 이제 그만큼 했으면 쉬어도 된다고 인정해준 것 같아 고맙습니다.” 설을 앞둔 지난달 30일 전북 고창군 자택에서 만난 윤도장(輪圖匠·나침반 장인) 김종대 씨(88)는 “돈보다는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한평생을 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앞서 문화재청은 중요무형문화재 110호였던 그를 지난달 28일 명예보유자로 지정했다. 오랜 시간 전통장인으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로운 퇴직을 하게 된 것. 그의 아들 희수 씨(61)가 아버지를 이어 지난해 12월 윤도장 보유자로 지정됐다. 아들까지 4대째 가업을 잇게 됐다. 김 씨 집안은 국내 유일의 윤도장이다. 종대 씨는 서너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혔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아버지가 “가업을 이어 달라”고 유언을 남기자 23세 때 이를 받들기로 했다. 조선시대 때 제작된 윤도는 말 그대로 바퀴 모양처럼 생긴 풍수 나침반이다. 둥근 목판 위에 조각칼로 24방위(方位)와 음양오행(陰陽五行), 십이간지(十二干支)를 새겨 넣고 가운데 자침을 얹었다. 종대 씨가 나고 자란 고창 낙산마을에는 300년 전부터 윤도장들이 모여 살았다. 슬하에 다섯 남매를 둔 그는 가업만으로는 생계를 이을 수 없어 소 70여 마리를 길렀다. 그나마 1996년부터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에게 매달 지급되는 100만 원 안팎의 지원금이 보탬이 됐다. 대기업 차장을 지내며 고액 연봉을 받던 아들 희수 씨는 “이제 네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부름에 18년 전 귀향했다. 남들보다 늦은 40대에 윤도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웠지만 타고난 손재주로 대한민국전승공예 대전에서 수차례 입상했다. 종대 씨는 “둘째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수 있게 돼 뿌듯하다”며 웃었다. 가업은 이제 5대째로 향하고 있다. 희수 씨는 “아버지가 ‘윤도 배우러 오라’고 매일 제게 전화하신 것처럼 이제는 제 아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다”고 했다. 종대 씨의 둘째아버지는 조카에게 조각칼을 남겼고, 그는 아들 희수 씨에게 체계화된 기술을 물려줬다. 희수 씨는 “이제는 내가 아들을 위해 무언가를 남겨줘야 할 때”라며 기자를 창고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그의 아들도 충분히 쓸 만한 분량의 대추나무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가장 아래 있는 건 1000년 된 대추나무예요. 뒤늦게 윤도를 배울 아들을 위해 가장 좋은 재료를 미리 준비해뒀지요.”고창=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목은 휘고 등은 굽었지만 83세 노장(老將)의 시선은 꼿꼿했다.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2020년 봄이 시작될 무렵 들판에 책상을 놓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2019년부터 머문 프랑스 노르망디 시골마을 어귀에 심어진 겨울나무에 향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무를 매일 들여다봤다. 나무는 매일 달라져 있었다. 가늘고 작은 이파리가 자라고 하얀 꽃봉오리가 피었다. 그는 매 순간을 아이패드에 그렸다. 수개월간 봄을 주제로 드로잉 120점을 남겼다. 팬데믹이 봄을 앗아간 그해, 호크니는 우리가 놓친 봄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이 책은 호크니와 절친한 영국의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2019년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주고받은 대화와 그림을 엮었다. 호크니를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게이퍼드는 그의 말과 그림 속에서 호크니의 예술 철학을 풀어냈다. 게이퍼드는 “호크니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말한다. 호크니는 매일 새로운 순간을 발견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2020년 4월 호크니는 10분 동안 비를 맞으며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관찰했다. 다르게 보기 위해서다. 그 후 약 1년간 수백 점에 이르는 나무를 그리고 나서야 그는 “내년 겨울나무는 조금 다르게 그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과 드로잉 실력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낀 것이다. 사물은 다르게 보려는 자에게만 다르게 보이는 법. 어쩌면 매일 조금씩 나아지려는 태도가 그를 거장으로 만든 게 아닐까. 원제는 ‘Spring Cannot Be Cancelled(봄은 취소될 수 없다)’. 전염병이 전시는 취소시켰을지라도 예술에 대한 의지는 꺾을 수 없다. 백발 노장은 지금도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순간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설렘을 느낀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노장의 그림을 보며 어제와는 다른 오늘을 살아가려는 생의 의지를 배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무령왕릉 옆 백제 왕릉인 29호분에서 중국 남조(南朝) 장인의 제조 사실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됐다. 무령왕릉 등 백제 왕릉 조성 당시 중국 남조와 활발히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충남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의 29호분에서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건업 사람이 만들었다)’라고 쓰인 무덤 폐쇄용 벽돌을 확인했다고 27일 밝혔다. 글자는 반으로 잘려진 연꽃무늬 벽돌 옆면에 새겨져 있었다. 건업은 420∼589년까지 중국 남조(南朝)의 송·제·양·진나라의 도읍이었다. 무덤 조성시기를 감안할 때 양(梁)나라 장인이 새긴 것으로 분석된다. 앞서 1933년 발굴 당시 6호분 벽돌에서도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혹은 양선이위사의(梁宣以爲師矣)로 해석되는 글자가 발견됐다. 글자가 흐릿해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양나라 사람이 와서 만들었다’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이번 29호분과 6호분이 무령왕릉과 나란히 맞붙어 있고, 셋 모두 석실분이 아닌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으로 지어진 사실이 주목된다.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512년에 제작된 사실이 새겨진 벽돌이 나왔다. 이에 따라 세 고분 모두 남조 영향을 받아 6세기 전엽에 지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정재윤 공주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양나라 건업에서 온 기술자들이 벽돌을 제작하고 무덤을 축조한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 유물”이라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과 금동삼존불감(佛龕)이 27일 국보 중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유찰됐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지킨 국보를 후손이 매매하는 데 대한 비판 여론이 일면서 개인 소장자들이 응찰을 포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술품 경매업체 케이옥션은 이날 열린 경매에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소유의 국보 2점이 출품됐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매 시작가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32억 원, 금동삼존불감이 28억 원이었다. 이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조성 연대(563년)가 새겨져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유력한 구매자로 꼽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39억7000만 원으로 책정된 유물구입비의 한계 등을 감안해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세 차례 내부 검토를 거친 결과 박물관이 책정한 금액보다 경매 시작가가 더 높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낙찰가의 10%대에 이르는 경매 수수료를 별도로 지불해야 하는 것도 부담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국비를 사용하는 국가기관이 경매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그 자체로 가격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개인 소장자들의 경우 국보를 처음 경매시장에 내놓은 간송미술관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부담감을 느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앞서 간송 측은 2018년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별세로 부과된 상속세를 해결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인건 관장 등이 물려받은 국보, 보물 등 46점은 비과세 대상이다. 이 밖에 비지정문화재 1만여 점은 개인에서 재단으로 소유권을 이전해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간송 후손이 상속세조차 내지 않고 소유한 국보를 세금을 들여 사들여야 하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한 고고미술사 전공 교수는 “후손들이 간송의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간송 측 관계자는 “재단이 재정난에 시달리다 2020년 케이옥션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대출금을 갚을 현금이 없어 보물 2점에 이어 국보 2점까지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경매가 유찰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2년 전 간송 측이 내놓은 보물 2점처럼 직거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매에 비해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수수료 부담도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20년 5월 경매에서 유찰된 간송 보물 2점을 당초 케이옥션이 추정한 경매 시작가보다 적은 30억 원 미만에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박물관이 직거래에 나선다면 예산 제약을 고려할 때 국보 2점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구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입상이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희소성이 있는 데다 ‘계미(癸未)년 11월에 제작됐다’는 명문이 새겨져 역사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癸未銘金銅三尊佛立像)과 금동삼존불감(佛龕)이 27일 국보 중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지만 유찰됐다. 일제강점기 간송 전형필(1906~1962)이 지킨 국보를 후손이 매매하는 데 대한 비판여론이 일면서 개인 소장자들이 응찰을 포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술품 경매업체 케이옥션은 이날 열린 경매에 전인건 간송미술관장 소유의 국보 2점이 출품됐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매 시작가는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32억 원, 금동삼존불감 28억 원이었다. 이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은 조성 연대(563년)가 새겨져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유력한 구매자로 꼽히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연간 39억7000만 원으로 책정된 유물구입비의 한계 등을 감안해 경매에 참여하지 않았다. 박물관에서 세 차례 내부 검토를 거친 결과 박물관이 책정한 금액보다 경매 시작가가 더 높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낙찰가의 10%대에 이르는 경매 수수료를 별도로 지불해야하는 것도 부담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국비를 사용하는 국가기관이 경매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 그 자체로 가격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개인 소장자들의 경우 국보를 처음 경매시장에 내놓은 간송미술관에 대한 비판 여론에 부담감을 느꼈다는 분석이다. 앞서 간송 측은 2018년 전성우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별세로 부과된 상속세를 해결할 방안이 마땅치 않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전인건 관장 등이 물려받은 국보, 보물 등 46점은 비과세 대상이다. 이밖에 비지정문화재 1만여 점은 개인에서 재단으로 소유권을 이전해 상속세가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계에서는 간송 후손이 상속세조차 내지 않고 소유한 국보를 세금을 들여 사들여야 하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한 고고미술사 전공 교수는 “후손들이 간송의 정신을 잃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간송 측 관계자는 “재단이 재정난에 시달리다 2020년 케이옥션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대출금을 갚을 현금이 없어 보물 2점에 이어 국보 2점까지 내놓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번 경매가 유찰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2년 전 간송 측이 내놓은 보물 2점처럼 직거래를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매에 비해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수수료 부담도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2020년 5월 경매에서 유찰된 간송 보물 2점을 당초 케이옥션이 추정한 경매 시작가보다 적은 30억 원 미만에 구입했다. 문화재계에서는 박물관이 직거래에 나선다면 예산제약을 고려할 때 국보 2점 중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구입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불입상이 국내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 희소성이 있는데다, ‘계미(癸未)년 11월에 제작됐다’는 명문이 새겨져 역사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