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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조선시대 무신 이기하(1646∼1718)의 묘지석(墓誌石·고인의 행적을 기록해 묘소에 묻는 돌판)을 지난달 자진 반환한 것을 계기로 국외로 반출된 묘지석을 환수하기 위한 협상이 본격화되고 있다. 최응천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해외 박물관들과 묘지석 환수 협상을 추진하고 있는데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며 “클리블랜드미술관의 반환 이후 윤리적 결정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박물관들이 속속 생기고 있다”고 17일 밝혔다. 재단에 따르면 유럽, 미국 등 해외 박물관들에 소장된 국내 묘지석은 최소 170여 점에 이른다. 미국 브루클린박물관이 55점으로 가장 많고 메트로폴리탄미술관 34점, 프랑스 세르뉘시미술관 21점, 영국 대영제국박물관 14점 등이다. 이 중 브루클린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시대 문인 박은(1475∼1504)의 묘지석에는 그가 생전에 쓴 한시가 적혀 있다. 1504년 갑자사화 당시 박은이 사형을 당한 후 행적과 사료가 남아 있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재단은 2013년부터 묘지석 반출과 기증 경로를 추적해 도굴 등 불법성이 입증될 경우 환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재단은 2017년 일본인 소장자로부터 조선 전기 고위관직에 오른 이선제(1390∼1453)의 묘지석을 환수했다. 이 묘지석이 무덤에서 도굴된 뒤 1998년 한국 고미술상에 의해 일본에 밀반출된 경로가 확인된 것. 재단 실무자가 일본인 소장자 도로키 다카시 씨를 찾아가 불법 반출 증거를 제시하며 환수를 설득했다. 묘지석은 인물의 생애를 통해 그 시대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어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문화재청은 환수 1년 만인 2018년 ‘이선제 묘지석’을 보물로 지정하면서 “해당 묘지석은 그동안 생몰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조선 전기 문인의 생애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 사료”라고 밝혔다. 문화재계에서는 서구 박물관들이 제국주의 시절 약탈한 문화재를 자진 반환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박을 받고 있는 것도 묘지석 반환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 로텐바움박물관은 19세기 나이지리아의 베닌 왕국에서 서구 열강이 약탈한 왕실 예술품 5000여 점의 출처를 밝히고, 올해부터 소장 유물 1000여 점을 나이지리아에 반환하기로 했다. 차미애 재단 실태조사부장은 “독일의 베닌 프로젝트가 해외 박물관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박물관의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추세가 이어져 해외에 밀반출된 국내 유물 환수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가상화폐 투자자 모임인 헤리티지 DAO(탈중앙화 자율조직)가 최근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으로부터 구입한 국보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의 소유권을 간송 측에 돌려주기로 했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은 16일 입장문을 내고 “헤리티지 DAO가 금동삼존불감의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51%의 지분을 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난달 23일 금동삼존불감의 소유주는 전 관장에서 헤리티지 DAO로 바뀌었다. 헤리티지 DAO에 투자한 금융업체 크레용의 레온김 대표는 최근 미국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국보를 활용한 대체불가토큰(NFT) 상품 지분을 확보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간송재단 관계자는 “헤리티지 DAO는 금동삼존불감을 활용한 NFT 상품화 등의 조건 없이 국보를 기증했다”며 이를 부인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의 후손인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이 올 1월 경매에 내놓았던 국보 금동삼존불감(金銅三尊佛龕)을 가상화폐 투자자모임 ‘헤리티지DAO(탈중앙화 자율조직·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가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가상화폐 투자자모임이 국보를 매입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15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헤리티지DAO의 외국계 법인은 전 관장이 소장하던 금동삼존불감을 사들인 뒤 소유자 변경 신고서를 접수했다. DAO란 가상화폐로 돈을 모아 미술품 등을 공동 구매하는 온라인 투자자 모임을 일컫는다. 앞서 1월 27일 전 관장은 간송미술재단의 재정난을 이유로 소장하던 국보를 케이옥션 경매에 내놨지만 유찰된 바 있다. 케이옥션은 지난달 중순부터 헤리티지DAO 측과 거래를 타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낙찰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금동삼존불감의 경매 시작가는 28억 원이었다. 금동삼존불감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켰던 간송이 생전 아꼈던 애장품으로도 손꼽힌다. 헤리티지DAO는 지난달 23일 문화재청에 소유자 변경 신고서를 제출하며 “간송재단에 해당 국보를 기탁한다”는 내용의 ‘관리자 선임 신고서’도 함께 제출했다. 소유자는 바뀌지만 국보 자체는 간송재단이 보관 및 관리해 나가기로 협의한 것. 더 나아가 헤리티지DAO는 최근 미국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간송의 국보를 일반 대중이 볼 수 있도록 기증하겠다”며 “다만 국보를 활용한 대체불가토큰(NFT) 상품의 지분을 확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케이옥션에 출품됐던 금동삼존불감은 서울 성북구에 있는 간송미술관이 현재 보관하고 있다. 간송재단 관계자는 15일 “DAO로부터 유물을 기탁받았으며 기증을 위한 협상은 아직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협상이 성사되면 국보의 실소유자인 헤리티지DAO는 국보를 활용한 NFT 상품 지분만 확보하고, 실제 국보는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나는 일제강점기 일본군 소속 연합군 포로감시원이었다. 그때 쓴 원고를 남기니 언젠가 한 번 읽어다오.” 다리가 서서히 썩어가는 폐색성 말초 혈관병을 앓던 외할아버지 최영우 씨(79)는 2002년 별세 직전 외손자 최양현 씨(43)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그의 기억 속 할아버지는 늘 원고지와 볼펜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킨 채 글만 써내려갔다. 할아버지는 200자 원고지 1000여 장에 이르는 육필원고를 남겼다. 언젠가 한 번쯤 누군가 자신의 삶을 들여다봐주기를 바라며.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2012년 최 씨는 자신의 자취방에 보관하던 원고 보따리를 풀었다. 영화 제작사를 세우고 이야깃거리를 찾던 때였다. 볼펜으로 빽빽이 눌러 쓴 할아버지의 원고에는 전쟁의 기억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경기 파주시 효형출판사에서 15일 만난 최 씨는 “식민지 조선인이 겪은 비극의 역사가 뉴스에서만 보던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가족의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10년간 일본과 네덜란드의 국가기록물을 뒤져 할아버지 이름이 적힌 조선인 포로감시원 명단을 확보하고 할아버지의 생애를 재구성해 신간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효형출판)를 11일 펴냈다. “포로감시원으로 꿈과 젊음을 잃어버린 할아버지의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일제강점기 발명가를 꿈꾸던 20세 청년은 “군속(군대 소속 공무원)으로 자원하면 맏형과 막냇동생이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친지 얘기를 듣고 1942년 5월 군속에 지원했다. 일본군이 점령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에서 연합군 포로를 관리하는 감시원으로 발령이 났다. 이것이 그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안길 줄은 몰랐다. 무더운 날씨에 쓰러져가는 포로들을 바라보며 그는 ‘이곳은 죽음의 철도다, 나는 이곳에서 무얼 하는가’라고 썼다. 인도네시아의 일본군 위안소에서 조선인 여성들을 마주한 뒤 그는 ‘그들의 고통이 나의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기록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 직후 그에게는 전쟁범죄자 낙인이 찍혔다. 식민지 조선인이던 그가 일본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를 받게 된 것. 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 없이 싱가포르 창이수용소에 1년 6개월간 갇힌 그는 “나는 전쟁범죄자인가 아닌가”를 수없이 되뇌며 창살 너머 민가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 순간을 기록했다. 할아버지의 원고를 읊던 최 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고작 22, 23세 된 청년이 어떻게 홀로 견뎌냈을까요. 창살 밖 밥 냄새 나는 평범한 일상이 할아버지에게는 간절한 꿈이었어요.” 1947년 연합군으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고 귀향했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를 가족도 몰라봤다. 극도로 쇠약해져 가정을 꾸린 뒤에도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최 씨는 “펌프를 직접 만들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던 할아버지는 귀향 후 발명가라는 꿈을 포기한 채 말없이 살다 가셨다. 마음속 깊은 곳에 포로수용소 경험이 그늘로 자리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처절하게 기록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자식들이라도 당신의 응어리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요.” 원고에 담긴 고인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책을 가장 먼저 읽어본 외삼촌 최성두 씨(62)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전쟁이 인생을 바꿔놓기 전까지 아버지도 나처럼 꿈 많은 청년이셨어. 우리 아버지가 가슴 속에 이런 이야기를 끌어안고 사셨구나.”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 1901년 오스만 제국의 속주로, 에게해에 연접한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진다. 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총독은 페스트보다 이후 격변할 세상이 더 두렵다. 인구 8만 명의 자그마한 섬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반반씩 살아간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성전에 소독제를 뿌리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의 무지한 행태가 섬을 전멸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섬에는 빈민들만 남는다. 해묵은 종교분쟁을 피하려고 총독이 페스트를 방관하는 사이 전염병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거장 오르한 파묵(70)의 11번째 소설은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쓴 현실과 조응한다. 2020년 5년간의 집필을 끝낼 무렵 코로나가 확산됐다고 한다. “현실이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방역에 대한 불신이 횡행하는 소설 속 풍경은 현실과 닮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염병은 세계화 이후 이슬람 사회 깊숙이 퍼진 서구 문명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저자는 페스트로 위기에 빠진 민게르섬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유지할 것인지, 서구화로 회귀할 것인지 갈림길에 선 터키의 현실을 녹여냈다. 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분열이 퍼져 나가는 과정을 세밀히 그려낸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섬에 파견된 기독교인 의사 본코프스키 파샤는 방역 조치를 시행하기 하루 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배후로 이슬람 성직자 일가가 지목되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된다. 하루 사망자 수가 50명대로 늘자 제국은 섬을 봉쇄한다. 죽은 자와 죽을 자만 남은 섬….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종교를 떠나 무차별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섬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신 앞에서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며 방역에 불복한 이슬람 성직자마저 페스트로 목숨을 잃자, 무슬림 마을에서는 우리를 지키는 건 신이나 제국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믿음이 싹튼다. 페스트의 밤을 밝힌 건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게르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을 향해 “우리는 민게르인”이라고 외친다. 제국에 버림받고 절망하던 이들은 그의 한마디에 각성돼 방역 선을 구축하고 섬을 독립시킨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만들어낸 힘이다. 이후 페스트가 종식되기 전까지 정권 교체로 혼란을 겪지만 종교를 떠나 모두가 민게르인이라는 믿음은 이어진다.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서구화의 갈림길에 선 민중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주체적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로 나아간다. 저자가 소설의 화자로 민게르섬 출신의 여성 사학자 ‘미나 민게를리’를 택한 것도 뜻깊다. 그의 증조부모는 “교리를 어기고 살아남는 건 무의미하다”는 이슬람 성직자를 향해 “살아남아 미래를 지켜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이들이 끝내 살아남은 덕분에 사학자로 성장한 증손녀가 섬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함께 살아남았기에 삶과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메시지는 2년 넘게 ‘코로나의 밤’을 지나온 우리를 위로하는 듯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 도시에 결단코 전염병은 없소!” 1901년 오스만제국의 속주로, 에게 해에 연접한 가상의 섬 ‘민게르’에 페스트가 퍼진다. 제국에서 파견된 무슬림 총독은 페스트보다 이후 격변할 세상이 더 두렵다. 인구 8만 명의 자그마한 섬에는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반반씩 살아간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페스트로 죽어가는 이웃을 보고도 성전에 소독제를 뿌리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여긴다.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의 무지한 행태가 섬을 전멸시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부자들이 모두 떠나버린 섬에는 빈민들만 남는다. 해묵은 종교분쟁을 피하려고 총독이 페스트를 방관하는 사이 전염병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의 거장 오르한 파묵(70)의 11번째 소설 ‘페스트의 밤’(민음사·1만9000원)은 코로나19가 세계를 휩쓴 현실과 조응한다. 2020년 5년간의 집필을 끝낼 무렵 코로나가 확산됐다고 한다. “현실이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방역에 대한 불신이 횡행하는 소설 속 풍경은 현실과 닮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염병은 세계화 이후 이슬람 사회 깊숙이 퍼진 서구 문명에 대한 공포를 상징한다. 저자는 페스트로 위기에 빠진 민게르섬을 통해 이슬람 근본주의를 유지할 것인지 서구화로 회귀할 것인지 갈림길에 선 터키의 현실을 녹여냈다. 책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신과 분열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세밀히 그려낸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섬에 파견된 기독교인 의사 본코프스키 파샤는 방역조치를 시행하기 하루 전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배후로 이슬람 성직자 일가가 지목되지만 진범이 아니었다. 전염병으로 인한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된다. 하루 사망자 수가 50명대로 늘자 제국은 섬을 봉쇄한다. 죽은 자와 죽을 자만 남은 섬….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종교를 떠나 무차별로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가 섬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신 앞에서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며 방역에 불복한 이슬람 성직자마저 페스트로 목숨을 잃자, 무슬림 마을에서는 우리를 지키는 건 신이나 제국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믿음이 싹튼다. 페스트의 밤을 밝힌 건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다. 민게르섬 출신 장교 콜아아스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눈 이들을 향해 “우리는 민게르인”이라고 외친다. 제국에 버림받고 절망하던 이들은 그의 한마디에 각성돼 방역 선을 구축하고 섬을 독립시킨다. 나고 자란 고향을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만들어낸 힘이다. 이후 페스트가 종식되기 전까지 정권교체로 혼란을 겪지만 종교를 떠나 모두가 민게르인이라는 믿음은 이어진다.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서구화의 갈림길에 선 민중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주체적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로 나아간다. 저자가 소설의 화자로 민게르섬 출신의 여성 사학자 ‘미나 민게를리’를 택한 것도 뜻 깊다. 그의 증조부모는 “교리를 어기고 살아남는 건 무의미하다”는 이슬람 성직자를 향해 “살아남아 미래를 지켜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이들이 끝내 살아남은 덕분에 사학자로 성장한 증손녀가 섬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함께 살아남았기에 삶과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메시지는 2년 넘게 ‘코로나의 밤’을 지나온 우리를 위로하는 듯 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충남 아산시 온양민속박물관은 ‘똥바가지’ 같은 화려하지 않은 민속유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주목받고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박물관에 다녀간 이들이 올린 사진이 줄을 잇는다. “소박한 민속유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참신하다”는 평이 나온다. 온양민속박물관은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거북 흉배(조선시대 관복의 가슴 부위에 새기는 자수)’를 비롯해 약 3만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44년 된 박물관의 변신을 이끈 이는 김은경 관장(68). 2006년 관장이 된 그는 계몽사 창립자인 아버지 고 김원대 관장의 뒤를 이었다. “값비싸고 아름다운 작품보다 닳고 사라질 것들을 지키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기 위해 그는 사진·공예작가들과 협업했다. 그는 “2018년부터 박물관 소장 유물과 함께 사진·공예작품을 한 공간에 전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9년에 작품 ‘달항아리’로 유명한 구본창 사진작가에게 박물관에 와서 똥바가지를 촬영해달라고 했어요.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유물을 찍어 달라고요. 낮은 이들이 쓰던 손때 묻은 물건이 지닌 소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충남도 지정문화재 22점이 있지만 김 관장은 이보다 ‘하찮아 보이는’ 유물들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2020년에는 놋그릇과 갓 등의 소장품을 촬영한 김경태 사진작가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는 시구처럼 낡고 오래된 놋그릇도 다르게 볼수록 아름답더라”고 했다. 김 관장은 옛 유물을 품은 박물관을 넘어 예술과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을 꿈꾼다. 2018년부터 봄, 가을마다 박물관 정원을 야간에 개장해 지역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달 17일 박물관 부지에 아산공예창작지원센터를 열어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공예 수업을 하고 있어요. 주변에 멀티플렉스 같은 게 별로 없어요. 그러니 저희 박물관이라도 즐길 거리를 드려야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종교계가 1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전한 첫 당부는 ‘통합’이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는 이날 ‘새 대통령에게 바랍니다’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통해 “국민이 선택한 새 대통령께서는 무엇보다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도 이날 “다양한 세대, 지역, 계층이 서로 소통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구심점이 돼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은 성명을 통해 “당선인은 국민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상처 난 국민의 마음을 속히 치유해 상생과 공존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진보 성향의 개신교계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이홍정 총무도 “보편적이고 공적인 가치의 토대 위에 국민 통합을 이루기 위해 힘쓰며 환골탈태의 심정으로 정치 혁신을 이루길 바란다”고 밝혔다. 불교계도 포용을 강조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은 “선거 기간 중에 표출된 국민의 다양한 요청에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해 부강하고 안정된 나라의 마중물이 되어 달라”고 했다.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도 “선거 기간 분열된 국론을 통합과 치유로 보듬어 다 같이 행복한 나라, 다함께 잘사는 국민이 되도록 앞장서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종교계가 1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게 전한 첫 당부는 ‘통합’이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는 이날 ‘새 대통령에게 바랍니다’라는 제목의 메시지를 통해 “국민이 선택한 새 대통령께서는 무엇보다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도 이날 “다양한 세대, 지역, 계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시고 그들이 서로 소통해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구심점이 돼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밝혔다. 개신교 최대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총연합은 성명을 통해 “당선인은 국민 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상처 난 국민의 마음을 속히 치유해 상생과 공존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어 “다음 세대가 희망을 품고 도전하는 더욱 부강한 나라를 이뤄 모두에게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진보 성향의 개신교계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이홍정 총무도 ‘당선인에게 바란다’는 메시지에서 “보편적이고 공적인 가치의 토대 위에 국민통합을 이루기 위해 힘쓰며 환골탈태의 심정으로 정치혁신을 이루길 바란다”고 밝혔다. 불교계도 포용을 강조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스님은 이날 축하메시지와 함께 “전쟁으로 인한 국제적 혼란과 민생의 어려움, 선거 기간 중에 표출된 국민의 다양한 요청에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해 부강하고 안정된 나라의 마중물이 되어 달라”고 했다. 원불교 나상호 교정원장도 “선거기간 분열된 국론을 통합과 치유로 보듬어 다 같이 행복한 나라, 다함께 잘 사는 국민이 되도록 앞장서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97년 봄 전북 임실군 중기사(中基寺) 법당. 최선주 당시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현 국립경주박물관장·59)가 휴일을 맞아 법당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옆방 문 틈새로 거대한 그림자를 봤다.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목에 금이 간 1.2m 높이의 비로자나(毘盧遮那) 불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 전라도 지역에 옛 비로자나불이 드문 데다 옷 주름까지 정교하게 표현된 만듦새도 일품이어서 예사 불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불상을 받치던 대좌(臺座)는 법당에 따로 보관돼 있었다. 앞서 대좌만 1977년 전북도문화재로 지정됐을 뿐 정작 불상은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다. 당시 3년 차 학예연구사였던 그는 불상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후 1년간 휴일마다 사찰을 찾아 현장조사를 벌인 끝에 불상이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 진구사(珍丘寺)에서 조성된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조사 결과를 논문으로 정리해 1998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제1회 동원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그 덕분에 불상은 2003년 전북도문화재로 추가 지정돼 보존 관리될 수 있었다. “소외된 유물에 빛을 밝혀주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던 청년은 어느덧 퇴임을 앞둔 박물관장이 됐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일 만난 그는 “지난해 비로자나불을 다시 찾아가 보니 대좌에 올라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왔더라. 큐레이터가 되길 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그는 1991년부터 큐레이터로 일한 경험을 담은 에세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주류성)를 3일 펴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지방 박물관을 거치며 굵직한 특별전을 기획한 그는 유물의 진가를 드러내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 연구기획부장으로 일하며 기획한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 특별전’도 그중 하나. 득도한 나한(羅漢·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성자) 500명을 형상화한 오백나한상은 2001년 강원 영월군 산속에서 농부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년에 걸쳐 나한상 317점을 발굴했다. 이들 상당수는 머리가 없거나 머리만 남은 상태였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칠고 소박한 나한상에 어떤 힘이 있기에…. 500년간 땅속에 묻혔지만 결국 빛을 봤어요. 유물이 가진 힘에 대해 고민했죠.”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부처의 가르침. 미술작가와 협업해 전시장에 스피커 740개를 탑처럼 쌓아올려 나한상을 사이사이에 설치했다. 스피커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세에서 벗어나 고요 속에서 자기 안의 소리를 성찰하는 시도였다. 전시가 끝난 2020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전시 요청이 들어왔다. 오백나한 특별전은 내년에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열린다. 퇴임사를 쓰듯 책을 썼다는 그는 “30년 가까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한 사람으로서 같은 길을 가려는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다르게 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바닥과 모서리를 보세요. 유물에 새로운 가치를 찾아 비추면 역사 한 장이 더해져요. 큐레이터는 유한한 직업이지만 이 발견은 유물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겁니다.”경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법당을 빠져나오는데 옆에 딸린 작은 방의 문 틈새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방 안으로 고개를 내민 순간 심장이 멎을 듯했다. 높이가 1.2m에 이르는 석조비로자나불상(石造毘盧遮那佛像)이 목에 금이 간 채 덩그러니 놓여있던 것. 법당에는 이 불상을 받치던 1m 높이의 대좌가 놓여있었다. 확인해보니 대좌는 1977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됐으나 목이 잘린 불상은 뒷방으로 밀려난 신세였다.1997년 국립전주박물관의 3년차 큐레이터였던 최선주 국립경주박물관장(59)은 전북 임실군의 한 법당 뒷방에 방치된 불상을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1년간 조사한 결과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이 확실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열린 제1회 동원학술대회에서 불상의 존재를 알렸다. 그 덕에 해당 불상은 2003년 전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소외된 유물에 빛을 밝혀주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다”던 풋풋한 큐레이터는 어느덧 퇴임을 앞둔 박물관장이 됐다.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7일 만난 그는 “지난해 해당 불상을 다시 찾아가보니 이제야 대좌에 올라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큐레이터 되길 참 잘한 것 같다”며 웃었다. 최 관장은 1991년부터 큐레이터로 지낸 경험을 담은 에세이 ‘박물관 큐레이터로 살다’(주류성)를 3일 펴냈다. 국립전주박물관, 춘천박물관, 중앙박물관을 거치며 굵직한 특별전을 기획한 그는 유물의 진가를 드러내는 법을 고민해왔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구기획부장을 지내며 그가 기획한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 특별전’이 대표적. 득도한 500명의 성자 나한(羅漢)을 형상화한 오백나한상은 역사만으로 특별했다. 강원도 영월 깊은 산속에서 2001년 농부가 처음 발견했다. 이후 강원문화재연구소가 2년에 걸쳐 나한상 317점을 발굴했다. 상당수는 머리가 없거나 머리만 남은 채였다. “화강암으로 만든 거칠고 소박한 나한상에 어떤 힘이 있기에…. 500년간 땅속에 묻혔지만 결국 빛을 봤어요. 유물이 가진 힘에 대해 고민했죠.” 고민 끝에 찾은 해답은 부처의 말씀이었다. 미술작가와 협업해 전시장에 스피커 740개를 탑처럼 쌓아올려 사이사이 나한상을 설치했다. 스피커에서는 물소리와 함께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세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고요 속에서 자신 안의 소리를 성찰하라는 의도였다. 전시가 끝난 2020년 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의 큐레이터가 그를 찾아왔다. “뉴욕에서도 오백나한을 전시하고 싶다”는 것. 목이 잘린 채 땅속에 묻혀있던 나한상은 2023년 뉴욕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퇴임사를 쓰듯 책을 썼다는 그는 “30여 년간 박물관 큐레이터로 일한 내가 같은 길을 가려는 이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하나”라며 이렇게 말했다.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다르게 보자는 거예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바닥과 모서리를 보세요. 유물에 새로운 가치를 찾아 비춰주면 역사 한 장이 더해져요. 큐레이터는 유한한 직업이지만 이 발견은 유물의 역사에 영원히 빛날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교재 새롭게 다시 만듭시다.” 여든을 목전에 둔 지난해 봄, 현재 국내 유일의 국가무형문화재 침선장(針線匠·바느질로 의복을 짓는 장인) 보유자인 구혜자 씨(80)는 한국문화재재단 출판팀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01년 시어머니이자 초대 침선장인 고 정정완 선생에게 배운 손 기술을 모은 ‘구혜자의 침선노트’(문보재)를 출간했다. 기본 한복부터 백일 옷, 혼례복까지 치수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한 비법 노트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시어머니가 남긴 유산에 가까웠다. 그는 “내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난 뒤에야 시어머니에게 배웠던 기술이 완전히 내 것이 됐다. 이제는 내 것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봄 시작한 글쓰기는 겨울이 돼서야 끝났다. 그는 생과 사 모든 순간에 필요한 한복 짓는 법을 총망라한 ‘구혜자의 침선노트’ 개정증보판 1∼4권(문보재)를 최근 펴냈다. 새 교재에는 21년 전 담지 않았던 수의(壽衣) 제작법도 담았다. 서울 강남구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에서 1일 만난 그는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쓴 채 필기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52년 전 시어머니에게 처음 침선기술을 배울 때부터 그는 손에서 노트를 놓지 않았다. 구 씨는 “시어머니는 평소 한복을 입고 지내던 옛 어른이라 기록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려지지만 나는 아니다. 어머니의 작품을 분석해 옷깃의 치수까지 계량화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52년간 기록한 노트는 홀로 간직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개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걸 전부 전수해야 모두의 것으로 남는다”는 신념 때문이다. 2007년 시어머니의 뒤를 이어 침선장이 된 그는 30년 넘게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유별나기로 정평이 났다. 경쟁이 치열한 장인의 세계에서는 제자가 다른 장인에게 배우는 걸 용납하지 않는 법. 하지만 구 씨는 다르다. 그는 “제자들에게 ‘나보다 자수와 매듭을 더 잘 만드는 장인에게 배우고 오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최고의 것을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고 가르쳐요. 그게 내 철학입니다.” 아직 전해줄 비법이 남아 있는 그에게 지난해 병마가 찾아왔다. 암이었다. 두렵기보다는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고 한다. 직장인 제자들을 위해 마련했던 야간수업을 취소했기 때문이다. “몸부터 챙기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그는 가르침을 멈추지 않았다. 고민 끝에 자신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주말을 직장인 제자들에게 내어주기로 했다. “제자들을 놓아버리면 배움이 끊어지잖아요. 제가 살아있는 한 한복의 맥을 이어야죠.”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조선소가 우후죽순 들어서자 곳곳에서 근로자들이 몰렸다. 5년 새 인구가 5배 가까이 폭증하자 연방정부는 흑인과 백인 공영주택을 갈라놓는 주거 정책을 내놓았다. 흑인 공영주택은 일터에서 차량으로 1시간 넘게 떨어진 외곽에, 백인 공영주택은 도심 깊숙한 곳에 지어졌다. 그래도 살 곳이 부족하자 연방정부는 백인 가구에 ‘빈방 임차권’을 부여했다. 은행은 백인이 집을 개조할 수 있도록 융자를 제공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백인들이 자산을 불리는 동안 흑인들은 임차인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거 정책이 차별적으로 계획된 탓이었다. 저자는 미국에서 흑인을 대상으로 한 주거 분리 정책이 만들어지고 고착화된 과정을 살펴본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소 연구원이자 주거 정책 전문가인 그는 누구나 그럴 거라 짐작했던 주거 격차의 근원을 각종 법률과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드러낸다. 국가가 자행한 차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의회는 물론이고 은행과 부동산 업계, 교육당국도 흑백 주거 분리 정책에 공모했다. 1934년 미 의회가 설립한 ‘연방주택관리국(FHA)’은 백인에게는 주택 값의 80%에 이르는 담보대출을 내주고 20년간 분할 상환을 허락했지만 흑인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부동산 개발업자들 사이에서는 ‘흑인에게는 부동산을 팔지 않는다’는 암묵적 합의가 팽배했다. 지역 교육정책위원회는 흑인과 백인 거주 지역에 각기 다른 학교를 세웠다. 주거 격차가 빈부의 대물림은 물론이고 교육 격차로도 이어지게 된 것. 저자는 ‘흑백 통합 주거지원 프로그램’ 등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이미 벌어진 격차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주거 차별은 노골적으로 벌어진다. 예컨대 같은 아파트 단지인데도 임대주택은 상대적으로 외진 곳에 지어진다.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한 아파트 단지가 둘로 쪼개져 학교 배정에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흑백 주거 분리로 초래된 부작용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저자의 고백을 우리도 새겨들어야 하는 이유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무작정 대학병원 로비와 동주민센터, 보건소, 치매 안심센터를 찾아 헤맸다. 혹시 나처럼 청소년 시절 아픈 부모를 간병하는 친구들을 마주치지 않을까. 병원 로비에 앉아 있는 또래를 마주치면 심장이 뛰었다.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명함을 팠다. 이름과 연락처 아래 간단한 문구를 하나 새겼다. ‘저처럼 아픈 부모를 돌보는 청년을 찾고 있습니다.’ 명함을 숱하게 돌려봤지만 연락은 없었다. “정말 나밖에 없을까. 그러면 나라도 말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어린 나이에 부모를 돌보느라 대학도 직업도 선택하지 못한 채 길을 잃어버린 청년이 있다고.” 열아홉 대학에 갈 나이부터 10년 넘게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고 있는 조기현 씨(31)가 2019년 에세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이매진)를 펴낸 이유다. 뜻밖에도 출간기념 강연에서 그토록 찾아 헤맨 친구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그들이 먼저 다가왔다. “저희 엄마도 아파요.” “아빠가 3개월 전 쓰러졌어요.” “중학생부터 제 또래까지 다양했죠. 반가운 마음에 어디 사느냐고 물었더니 한 친구는 저랑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어요.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던 거예요.” 그가 첫 책을 낸 후 3년 만에 가족을 돌보는 청장년 7명의 이야기를 담은 신간 ‘새파란 돌봄’(이매진)을 최근 펴냈다. 서울 영등포구 카페에서 2일 만난 그는 “3년 전 출간기념 강연에서 중학생 희준(가명) 군을 만난 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로부터 많은 e메일과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받았다”며 “이 책은 나 혼자만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라고 했다. 그가 만난 이들은 1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청소년 시절부터 가족을 간병해왔다. 20대 여성 푸른(가명)은 12세부터 11년간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봤다.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했고 아빠는 공사장을 전전했다. 하루에 다섯 번씩 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두 살 어린 동생의 끼니를 챙기는 건 그의 몫. 20대 남성 형수(가명)는 알코올 중독자 동생을 8년간 돌보며 더는 자신의 미래를 꿈꾸지 않게 됐다.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는 동생 곁을 지키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것.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홀로 눈물을 삼켜야 했던 이들은 서로를 만나 버텨낼 힘을 얻었다. 10대 때부터 10년 넘게 조현병과 알츠하이머를 동시에 앓은 어머니를 간병한 청년은 조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거리 한복판에서 엄마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 구경하듯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아. 견딜 만해졌어. 더는 혼자가 아니니까.” 조 씨는 위로를 넘어 변화를 꿈꾼다. 2020년 6월 만난 한 사회복지사의 고백에서 답을 찾았다. 10년 전 단정치 못한 모습의 중학생이 사는 집을 방문했을 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홀로 돌보는 걸 보고 “너 보기와 다르게 효자구나”라는 말만 남긴 채 집을 나섰다는 얘기였다. “당신의 책을 읽고 나서야 그때 그 아이가 위기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칭찬이 아니라 도움을 줬어야 했다”는 사회복지사의 반성에서 작은 변화를 보았다. “선생님이 학생을 면담하거나 사회복지사가 가정을 방문하고 보고서에 ‘아이가 가족을 돌보고 있음’이라는 한 줄을 쓰는 데서 변화는 시작될 거예요. 복지체계에 ‘가족 돌봄 청년’이라는 항목이 생기면 지원책도 따라올 테니까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채널A와 샌드박스 네트워크는 대체불가토큰(NFT) 및 메타버스와 관련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채널A는 “샌드박스 네트워크와 손잡고 본사 인기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NFT 제작 등을 하고 크리에이터와 협업도 진행하기로 했다”고 1일 밝혔다. 최근 채널A 프로그램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달 22일 처음 방송된 밀리터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강철부대2’(사진)는 시청률 4.7%(닐슨코리아 수도권 기준)를 기록했다. 시청자들은 뜨거운 관심을 보였고, 출연자와 출연 부대들도 큰 화제가 됐다. 육아예능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는 국민 힐링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했다.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는 가슴속 깊은 상처를 어루만져 출연자와 시청자에게서 열렬한 호응을 얻고 있다. 4월부터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인 ‘청춘스타’가 방송될 예정이다. 리얼리티 예능 ‘하트시그널’ 제작진이 만들었다. 샌드박스 네트워크는 국내 1위 멀티채널네트워크(MCN·1인 미디어 창작자 기획사)로, 유명 유튜브 크리에이터 도티를 비롯해 유병재, 조나단 등 450여 팀의 크리에이터가 소속돼 있다. 두 회사는 최근 NFT 분야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채널A는 지난달 26일 예능 프로그램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의 IP를 활용해 국내 첫 ‘제너러티브 아트’ 예능 NFT를 발행했고 1, 2차 판매에서 각각 29초와 1분 만에 완판됐다. 제너러티브 아트는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작품을 자체 생성하는 예술이다. 샌드박스 네트워크도 지난달 12, 13일 NFT 프로젝트인 ‘메타 토이 드래곤즈’를 완판했다. 채널A는 “탄탄한 콘텐츠와 크리에이터 자원을 적극 활용해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NFT 및 메타버스의 새로운 가치를 보여 줄 것”이라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크라이나 국민 여러분,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배우 이영애(51·사진)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주한 우크라이나대사관에 1억 원을 기부하며 위로의 편지를 전했다.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주한 우크라이나대사는 1일 트위터를 통해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한국 유명 배우 이영애의 편지와 기부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영애는 이날 수표 1억 원을 동봉한 편지를 대사관 측에 전달했다. 포노마렌코 대사는 “기부금은 러시아의 공격을 받은 피해자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영애는 편지에서 “전쟁을 겪은 참전용사의 가족으로서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국민 여러분께 작지만 소중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이영애의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다. 이영애는 2016년에도 “참전용사 자녀를 위해 써 달라”며 육군사관학교에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19년 3월 3일 정오 함경남도 함흥면 대화정 거리.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 사이로 열일곱 살 빡빡머리의 박하균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친구를 따라 나왔다”는 진술이 참작된 것. 평범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진 순간, 그는 고난의 길을 택했다. 감옥에서 고초를 겪는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해 4월 8일 박하균이 다시 거리에 나와 “조선독립 만세”를 외친 이유다. 이번에는 단순 가담자가 아닌 주동자로 낙인찍혔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은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이번에는 우리 목적을 멈출 수 있겠으나 고통받은 만큼 우리 민족은 이겨낸다. 정의를 위해 감옥에 갇히는 건 분하지 않다.” 3·1운동은 평범하게 살던 이들의 삶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따르면 일반시민이 주체가 된 만세운동이 전체의 65%(1286건)를 차지했다. 독립기념관의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TF(태스크포스)’는 4년의 조사 끝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벌인 장삼이사(張三李四) 1638명을 찾아냈다. 박하균은 3·1운동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26년 6월 10일 오전 9시 서울 종로구 관수교에서 순종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대한독립 만세’가 적힌 종이 1만 장을 뿌렸다. 이로 인해 1년간 징역을 살고 나온 그는 종로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1931년, 금지서적 판매 혐의로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인 1932년 수감생활 중 촬영된 그의 얼굴은 스물아홉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야위었다. 3·1운동 당시 31세로 함경남도 이원군에서 농사를 짓던 이창하는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오가는 독립운동 자금 모금책이 된다. 1929년 중국 간도에서 자금을 모으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석방된 게 그의 마지막 기록이다. 훗날 월남한 이원군민들이 엮은 글에는 이창하의 말년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자가 돼 갖은 천대를 받다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41세에 병사했다.’ 27세 이발사였던 최용주는 3·1운동에 참여했고, 2년 뒤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의 은신처로 내준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평안남도 강계군 고향에서 37세 간호사로 3·1운동에 나선 김관순은 3년 뒤 비밀결사를 조직하다 적발됐다. 그는 1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6년 동안 고향 주민에게 의료봉사를 했다. 김도희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은 “3·1운동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한 분들 덕분에 한국 독립운동사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사진)이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청구영언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28일 밝혔다. 청구영언은 고려 말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승된 노랫말 580수를 엮은 것으로,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조집으로 꼽힌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시대 성악곡 가곡(歌曲)의 원천 자료로 국문학사와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1993년 국보로 지정된 경북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腹藏) 유물(불상 안에 넣은 사리나 불경) 중 도난 뒤 되찾은 ‘백지금니 묘법연화경 권5-변상도’ 등 15세기 불화 2점도 국보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2007년, 2008년 고려시대 선박 태안선에서 발견된 ‘청자 사자형 뚜껑 향로’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이 시대를 대표하는 석학(碩學)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사진)이 26일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암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8세.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1956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같은 해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 비평문을 발표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33세에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1972년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해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을 맡아 냉전 종식을 호소하는 명문 ‘벽을 넘어서’를 만들었고, 굴렁쇠 소년을 기획해 평화의 가치를 세계에 고요하고도 강렬하게 알렸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다. ‘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 저서 300여 권을 낸 고인은 학문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통섭의 대가였다.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만큼은 앞서 가야 한다며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명을 합친 ‘디지로그’ 개념을 제시하는 등 시대를 꿰뚫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집필을 이어간 고인은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한 진정한 거인이었다. [이어령 1934∼2022]웃으며 떠난 ‘시대의 석학’22세에 쓴 문단 비판 기고로 파란…‘문학사상’ 창간 ‘이상문학상’ 제정서울올림픽-한일월드컵 등 기획자…새 변화 탐구하며 미래학자 역할도항암치료 거부…친병생활하며 집필 26일 낮 12시 20분경 서울 종로구 자택에서 영면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은 끝까지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죽음이 다가온 순간에도 초롱초롱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그가 항상 강조하던 ‘메멘토 모리’(“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를 최후의 순간까지 실천하며 죽음 앞에서 의연했던 것.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돌아가시기 30분 전까지 가족을 향해 활짝 웃으시고 손을 흔들었다”며 “호기심에 가득 차서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끝까지 관찰하시는 듯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지난해 12월 22일 동아일보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집필) 시간이 없어 절박하다. 어쩌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한다”며 집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친병(親病)’ 생활을 한 이유도 글쓰기 때문이었다. 300여 종의 책을 낸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출간 계약한 책만 40권. ‘한국인 이야기’ 두 번째 책은 이르면 다음 달,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인 ‘젊은이는 늙고 늙은이는 죽어요’는 4월에 각각 출간될 예정이다. 윤재환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사무국장은 “별세 전날인 25일 오전까지 다음 주 일정을 확인하고 아이디어 회의를 열 정도로 생생한 아이디어가 넘쳤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세상에 이름을 알린 건 얼굴의 여드름도 채 가시지 않은 스물두 살 때였던 1956년. 한국일보에 기고한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당대 거장들을 ‘우상’으로 몰아붙이며 소수 원로 문인들에 좌지우지됐던 한국 문단의 권위주의와 위선을 아프게 꼬집었다. 고인은 1972년 월간 ‘문학사상’을 창간하고 주간을 맡아 한국의 대표 문학잡지로 키워냈다. 서울대 국문과 재학 시절 ‘이상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1977년 문학사상에서 ‘이상문학상’을 제정했다. 고인과 문학사상을 함께 창간한 이근배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고인은 당시 ‘천재 비평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문학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며 “문학 강연을 다닐 때면 줄을 서서 입장할 정도로 한국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문화 연구에도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1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어로 집필해 1982년 펴낸 일본 문화비평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일본인보다 일본인과 일본사회를 날카롭게 파악했다”는 현지의 찬사를 받으며 한일 양국에서 ‘이어령 신드롬’을 일으켰다. 동서양 문화와 한중일 3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심은 기호학회 창립과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개소로 이어졌다. 수많은 직함과 호칭 중 고인이 가장 좋아했던 건 ‘문화 창조자’였다. 고인은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식전행사 기획자,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2002년 한일 월드컵 총괄기획자 등 굵직한 직책을 맡았다. 방대한 활동을 펼친 데 대해 그는 “난 평생 지적 호기심으로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했다. 여러 대의 컴퓨터와 모니터를 두고 글을 쓸 정도로 늘 새로운 정보와 변화에 목말라 했던 고인.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엄청난 독서량과 예민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그는 시대를 관통하는 새 개념들을 제시한 미래학자이기도 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문명의 융합인 ‘디지로그’를 주창하며 이를 한국인이 주도해 나갈 첨단정보사회의 핵심으로 꼽았다. 말년엔 생명이 자본이 된다는 ‘생명자본주의 운동’에 큰 애착을 보이며 생명 가치를 중시했다. 고인은 지난해 10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 장남 이승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차남 이강무 백석대 교수가 있다. 장녀 이민아 목사는 2012년 위암으로 별세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반도의 곤충은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겨울에 죽는다. 생존을 위해 많은 알을 낳지만 100만 마리 중 단 1만 마리만 운 좋게 살아남는다. 그런데 겨울 평균 닷새 동안 지속되던 강추위가 나흘로 그치면 어떻게 될까. 단지 추운 날이 하루 줄었다는 이유로 알에서 깨어난 곤충이 전부 살아남는다면. 저자의 가정은 이미 현실이 됐다. 2020년 전국 곳곳에 매미나방이 들불처럼 번졌다. 1980년대보다 2020년 들어 겨울이 15일이나 줄었기 때문이다. 매미나방의 습격은 지구 생태계 전반을 파괴할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이걸로 지구가 망할 일은 없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삶을 갉아먹을 수는 있다. 과학자들은 1900년대부터 미세한 기후변화를 과학적으로 포착했다. 20세기 초 스웨덴의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공기 중 이산화탄소 양이 두 배로 높아지면 지구 평균기온은 약 6도 오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화학자 찰스 데이비드 컬링이 1958년부터 매달 공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한 결과 1960년 0.03%에서 2020년 0.04%를 넘어섰다. 현실로 다가온 기후변화는 당장 인류를 멸망시키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이들을 희생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세계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저자는 모든 사람이 냉방장치를 못 쓰도록 강제하는 건 반쪽짜리 대응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에 취약한 영유아와 고령층을 위해서는 오히려 공짜로 냉방장치를 쓰게 해줘야 한다는 것. 마찬가지로 개발도상국에 선진국 수준의 탄소 저감을 요구하는 건 불공정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기후변화 대응에 있어 공정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환경공학자로 ‘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요다) 등 여러 편의 공상과학(SF) 소설을 펴낸 저자는 이 책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을 선보인다. 나무 심기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부터 이산화탄소 저감 기술까지 개인과 기업, 국가 차원의 다양한 대응 방안을 고민하는 데 유용한 책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