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환

정양환 부장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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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양환 기자입니다.

ray@donga.com

취재분야

2025-11-07~2025-12-07
칼럼64%
인사일반13%
미국/북미7%
국제일반7%
국제경제3%
국제인물3%
여행3%
  •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을까

    《 영국 영화 ‘꾸뻬 씨의 행복여행’은 달콤한 작품이다. 영국식 유머로 버무린 근사한 디저트를 앞에 둔 기분이 든다. 원작은 프랑스 정신과의사인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동명소설. 자신이 행복의 실체를 찾아 세계를 떠돈 실제 경험을 소설로 풀어냈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4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이 작품의 특징은 주인공이 체험하며 깨달은 행복에 관한 잠언이 곳곳에 등장한다는 점. 원작에선 모두 23개인데 영화엔 16개가 나온다. 국내 관객들은 꾸뻬(영화에선 런던 사는 헥터·사이먼 페그)가 전하는 어떤 메시지가 가장 가슴에 와 닿았을까. 10대부터 60대까지 평범한 우리네 이웃들에게 의견을 구해봤다. 》 △‘많은 이는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김모 양·17·S고 학생) “얼마 전에 시험이 끝났다. 언제나 시험만 끝나면 즐거울 것 같지만 후련하긴 해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험을 치러야 하는 건지. 선생님들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지만 지금이 불행하면 무슨 소용일까. 공부건 뭐건 진심으로 즐겨야 행복해지는 걸 텐데. 어른들에게 우리 학생들의 ‘현재’는 어때 보이는지 궁금하다.” △‘행복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것’(설모 씨·26·여·취업준비생) “친구들을 보면 어떻게든 자기 자신과 멀어지는 게 목표처럼 보일 때가 많다.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는 게 그렇다. 영어건 인턴이건 경쟁자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약점을 메우는 작업이다. 본인만의 장점은 잃고 천편일률적인 사람이 되어간다고나 할까. 남들에게 평가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건만. 헥터가 아프리카에서 갱단에 붙잡힌 뒤 깨달은 것처럼, 부족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행복은 일종의 부수적 효과다’(김모 씨·36·영상업체 종사) “행복은 쫓는다고 잡을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결국 행복도 좌우된다. 근데 사는 게 바빠서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할 겨를이 없긴 하다.” △‘행복이란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김윤섭 씨·41·S사 과장)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상가에 갈 일이 많다. 근데 요즘엔 비슷한 또래의 부고도 적지 않다. 허망하고 서글프다. 애들 생각하면 나도 문제없어야 하는데, 운동할 시간은 없고…. 한때 로또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그것도 아니다 싶었다. 행복이란 게 별 게 아니다. 그저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함께 밥 먹으면 그게 최고. 행복도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느끼는 거다.” △‘남과 비교하면 행복한 기분을 망친다’(유점열 씨·53·여·주부) “돌이켜보면 살면서 스스로를 주변과 많이도 비교했다. 남편의 월급봉투, 아이의 성적, 옆집 자동차까지…. 주위에서 가진 것들이 왜 그렇게 부러웠는지.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초라해졌는데 참 어리석은 짓이었다. 영화에서 헥터가 남들이 가진 지위나 돈을 부러워하지 않고 씩 웃는 걸 보았을 때 느끼는 게 많았다. 행복은 내 안에 있다. 지금이라도 그걸 깨달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마 스튜!(최모 씨·67·퇴직 교사) “영화는 안 봤지만, 이게 딱 맘에 든다. 못 먹어봤거든. 나이 들면 안정만 바란다고 착각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새로운 게 좋고, 도전하는 게 행복하다. 기회를 안 줘서 문제지. 할 수만 있다면 마누라도 자식 놈들도 싹 바꾸고 싶다. 근데 스튜는 수프나 국 같은 건가?”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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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악재즈, 유럽의 밤 홀리다

    대금이 슬프게 곡을 하니 베이스가 둥실 따라 울다 다독인다. 기타가 처연하게 가슴을 두드리자 해금이 끊어질 듯 아스라이 매만진다. 잦아들던 곡조가 순식간에 뒤바뀌며 장구와 드럼이 숨 가쁘게 얽히고설키자 객석에선 저도 모르게 찬탄이 터지고…. 한 곡이 채 매조지되지도 않았는데 박수가 터져 나오는 순간. 재즈인지 국악인지, 아니 국악도 재즈도 아닌 리듬과 선율이 관객과 뒤엉켰다. 1일(현지 시간) 독일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 있는 템포드롬 공연장. 이날부터 일주일 동안 한국의 재즈로 유럽의 밤공기를 적실 ‘재즈코리아 페스티벌 2014’는 350석 규모의 콘서트홀에서 뜨겁되 산뜻하게 문을 열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주독일한국문화원(원장 윤종석)이 개최하는 이 축제는 재즈 팬들이 많은 독일 7개 도시와 폴란드 바르샤바에 한국의 떠오르는 신진 재즈뮤지션을 소개하는 자리. 지난해 말 독일에서 개최해 큰 호응을 받은 데 힘입어 더욱 알찬 무대로 2회째 무대를 선보이게 됐다. 유석철 트리오와 이주미 콰르텟 등 7개 재즈밴드가 현지 뮤지션과 협력해 26회의 공연을 펼친다. 첫날 무대를 압도한 재즈 공연 팀은 ‘모자이크코리아’. 아시아 최고 재즈 축제로 평가받는 ‘자라섬 국제 재즈페스티벌’을 이끄는 인재진 총감독이 꾸린 프로젝트 그룹으로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을 포함한 국악인 5명과 정통 재즈뮤지션 4명으로 구성됐다. 문체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마련한 벨기에 헝가리 순회공연을 마치고 베를린에 합류해 이번 개막무대를 장식했다. 인 감독은 “재즈와 국악은 즉흥적 연주를 기반으로 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며 “동해안 별신굿을 재즈에 접목시킨 연주에 유럽 현지 반응이 엄청나다”고 전했다. 현지 외국인이 반 이상 차지한 객석의 반응은 임 감독의 말 그대로였다. 독일 남성 한스 에딩거 씨는 장구와 아쟁을 또박또박 발음하며 “처음 보는 악기 연주였지만 마스터피스(걸작)를 마주한 기분”이라며 “한국 전통음악과 재즈의 마리아주(결합)가 이렇게 근사할 줄 몰랐다”고 놀라워했다. 영국인 여대생 엘레나 씨는 “음계가 너무 독특해 재즈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리듬감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했다. 독일 북부의 주요 라디오채널인 ‘도이칠란트 라디오’가 관계자들을 스튜디오에 초대하는 등 언론도 관심을 보였다. 페스티벌 기획에 참여한 재즈 평론가 나빌 아타시 박사는 “변방이라 여겼던 한국의 신진 아티스트들이 지난해 수준 높은 실력을 선보여 올해 더욱 관심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이날 무대를 찾은 독일 유명 재즈레이블 ‘액트’의 지기 로크 대표도 “미국과 다른 독특함으로 무장한 한국 재즈는 큰 경쟁력을 지녔다”고 평했다. 문화원은 이 페스티벌을 연례행사로 정착시키고 국내에 유럽 현지 실력파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자리도 검토하고 있다. 현지 음반사와 협력해 앨범 제작도 한다. 지난해 축제에 참여한 색소포니스트 김지석의 앨범이 이달 독일에서 발매된다. 윤종석 원장은 “올해로 9회를 맞은 주영국 한국문화원의 ‘런던한국영화제’처럼 독일에선 재즈라는 무기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장을 다지겠다”고 말했다.베를린=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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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침없는 ‘인터스텔라’ 1000만클럽 입성할까

    《 인터스텔라는 올여름 ‘명량’에 이어 국내 13번째로 ‘천만 영화 클럽’(관객 1000만 명 이상)에 가입할 수 있을까. 22일 기준 개봉 17일을 맞은 인터스텔라는 누적 관객 637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독주 체제를 굳히고 있다. 인기 시리즈 ‘헝거게임: 모킹제이’와 브래드 피트 주연의 ‘퓨리’ 같은 할리우드 대작이 20일 개봉했는데도 예매율은 여전히 큰 격차를 보인다. 현재 66.2%로 개봉 첫 주 88∼90%에 이르던 기세는 다소 꺾였으나 ‘헝거게임…’(12.4%)과 ‘퓨리’(8.7%)보다 최소 5배 이상 높다. 》 일단 인터스텔라는 국내에 선보인 놀런 감독 작품 가운데 가장 많은 관객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는 배트맨 3부작 가운데 마지막 편인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년)가 약 639만 명,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출연한 ‘인셉션’(2010년)이 약 590만 명으로 최고였다. 워너브러더스의 한국 개봉작의 역대 흥행 1∼3위도 모두 놀런 감독이 차지하게 됐다. 인터스텔라가 유독 한국과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미국 현지에선 박스오피스 1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덤 앤 더머2’에도 밀리지만 양국에선 반응이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른다. 12일 개봉한 중국에선 첫 주에만 4200만 달러(약 467억 원)를 벌어들여 인터스텔라 제작비의 약 4분의 1을 건졌다. 전문가들은 한중에서의 성공 요인으로 △우주와 천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과 △호접몽(胡蝶夢)이 떠오르는 동양적 서사를 꼽았다. 올해 유인우주선 발사 10주년을 맞은 중국은 최근 시진핑 국가주석이 “양탄일성(兩彈一星·인공위성과 원자·수소폭탄)과 유인우주선 개발 정신”을 여러 차례 강조해 관심이 크다. 국내에선 캠핑 붐을 타고 별자리 관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최근 수십만 원이 넘는 천체망원경이 불티나게 팔리며 국내 한 포털사이트의 아마추어 천문 동호회는 회원이 3만5000명을 넘어섰다. 서양인보다 동양인에게 편안한 이야기 구조도 힘을 발휘했다. 이 작품은 다소 어려운 과학 이론이 바탕이지만 웜홀과 블랙홀을 통해 시공간이 이어지는 설정이 윤회나 노장사상과 왠지 모르게 닮았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최첨단 우주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순환적 세계관에 익숙한 동양인들은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허나 현재로선 인터스텔라가 천만클럽에 들지는 의견이 분분한 상태. 영화 비수기인 11월에 개봉한 데다 연말엔 ‘빅매치’(27일 개봉)와 ‘국제시장’(다음 달 17일 개봉) ‘상의원’ 등 한국 영화 기대작이 즐비하다. 홍보대행사 ‘올댓시네마’의 김태주 실장은 “천만이란 수치가 욕심나긴 해도 현재 추이론 ‘800만+α’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가입 가능성을 높게 점치는 분위기도 상당하다. 일단 국내에서 천만 영화 수치라고 부르는 ‘재관람률’이 높다. 현재 3.8%로 명량(4.8%)보단 떨어지지만 ‘변호인’(3.4%) ‘겨울왕국’(3.95%)과 엇비슷하다. 초반엔 20대가 몰렸고 최근엔 40대 이상 관객이 많은 것도 천만클럽 스타일. 명량 때 역사공부 차원에서 자녀와 함께 극장을 찾은 40대 이상이 많았듯 과학 교육을 목적으로 한 가족 관객이 크게 늘고 있는 점도 긍정적 요인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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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방지축 껄떡껄떡… 나이 들어도 여전한 미국 바보

    바보들이 돌아왔다. 딱 20년 전 영화 ‘덤 앤 더머’(1994년)는 제대로 쇼킹했다. 멍청하기보단 정신병자 같았던 로이드(짐 캐리)와 해리(제프 대니얼스)의 만행(?)은 당시 둘을 덜떨어진 남성을 뜻하는 일반명사로 만들었다. 그 속편 ‘덤 앤 더머 2’가 27일 개봉한다. 한국 나이로 대니얼스는 예순, 캐리는 쉰셋. 여전히 유쾌하게 모자라고 추레하고 저질이다. 강산이 두 번 바뀐 뒤에도 돌아올 수 있었던 미국 바보들의 저력은 뭘까. 국내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한국 바보들과 비교해 보았다.○ 美 ‘성기 발랄’ vs 韓 ‘성적 거세’ 해리 한 번 속이려 식물인간 행세를 한 로이드는 20년 만에 “서프라이즈(놀랐지)”를 외치며 병상에서 일어난다. 해리는 로이드의 거기에 달린 소변 관을 마구 잡아당기며 화장실 유머로 포문을 연다. 성적 호기심 가득했던 두 바보는 2편에서도 러닝타임 109분 내내 불끈거린다. 성에 무지하지만 그래서 더 적나라한 미국 바보들에 비하면 한국 바보들은 갓난애 수준이다. ‘웰컴 투 동막골’(2005년)의 여일(강혜정)이나 ‘맨발의 기봉이’(2006년)에서 기봉(신현준)은 반려동물의 안타까운 ‘중성화수술’이라도 받은 듯 그쪽으론 관심도 없다. ‘바보’(2008년)의 승룡(차태현)은 지호(하지원)를 향한 큰 사랑을 품고, ‘7번방의 선물’(2012년) 용구(류승룡)는 딸까지 낳았는데도 별로 다르지 않다. 지능과 욕망은 별개임에도 한국의 바보들을 왜 거세 상태일까.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좋게 보면 순수의 상징, 나쁘게 보면 무능의 대상으로 사회와 떼어놓고 보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동네마다 있던 바보 ‘형아’들이 어느 순간 격리돼 사라진 것처럼, 사회가 그들에게 그런 자유를 부여하지 않는단 뜻이다. ‘바보는 순박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사회적 통념이 영화에도 반영된 셈이다. 옛날이 더 자유분방했다. 1982년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에 나온 깨철(안성기)은 전형적인 동네 바보지만 마을 아낙들의 성적 불만을 해소해주는 엄청난 활약을 했다. 새로 부임한 여교사를 보며 안광을 번득일 만큼 욕정에 솔직했다.○ 韓 ‘체제 순응’ vs 美 ‘일탈·전복’ 한국 바보들은 반항할 줄 모른다. 기봉이나 용구는 괴롭히고 때려도 다 받아준다. 이들이 속이 깊어서란 뉘앙스를 비치지만,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고착화하는 건 변함없다. 반면 해리와 로이드는 오히려 가해자다. 20년 전 그들에게 죽은 새를 샀던 이웃집 소년 빌리(브레이디 블룸)는 속편에서도 깜짝 출연해 괴롭힘을 당한다. ‘덤 앤 더머’들이 보기엔 타인과 세상이 멍청한 거다. 서구문화는 주류를 조소하고 까발리는 코미디 정서에 충실하다. 바보를 체제 부적응이 아닌 자의적 거부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두 바보가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무참히 비웃는 장면도 그런 맥락이다. 김 평론가는 “영국을 대표하는 바보 ‘미스터 빈’처럼 기존의 권력에 맞서고 풍자하는 배수구의 역할을 담당했다”고 분석했다. 로이드와 해리는 여전히 까불까불하지만 반항기는 묽어졌다. 전작에서 흥청망청 돈 쓰고 미녀들 가득한 버스에 올라탔던 젊은이들은 이제 지나가던 여성 넘어뜨리기 정도에 만족하는 아저씨(혹은 할아버지)가 됐다. 1990년대 바보조차 성공하던 호황기와 금융위기를 직격탄으로 맞고 루저의 정서가 지배하는 시대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덤 앤 더머는 이를 ‘웃프게’ 드러낸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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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주의 척결” 내세워 100만명 학살… 당시 집권층 지금도 영웅대접

    “내가 정말…. 죄를 지은 건가요?” 20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은 적나라해서 난감한 영화다. 미국인인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40)이 연출한 이 작품은 1965년경 인도네시아 학살을 자행한 당사자들이 주인공. 그들이 공적을 자랑할 마음에 흔쾌히 당시를 재연하는 충격적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관객상을 비롯해 세계 70여 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국내엔 다소 낯선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소병국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의 도움을 얻어 짚어봤다.― 영화에 나오는 대로 당시 100만 명이나 학살당한 것이 사실인가. 그렇다. 학계의 공식 통계는 50만 명 안팎. 대략 확인된 수치가 그럴 뿐, 정황상 훨씬 많다. ‘공산주의 척결’을 내세웠으나 일반 양민도 마구잡이로 사살했다. 이 비극은 1965년 ‘9·30사태’가 발단이었다. 당시 군부와 대척하던 공산세력이 군부 장성 6명을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킨 것. 훗날 대통령에 오르는 수하르토가 중심이 된 군부가 이를 응징하며 피의 참극이 벌어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패러밀리터리(paramilitary·불법무장단체)’의 학살 주도도 사실이다. 군부가 조직폭력배 같던 이들에게 민방위군 권한을 부여해 전위대로 이용했다. 주인공인 안와르 콩고와 밀접한 ‘판차실라 청년단’도 대표적 패러밀리터리다. ―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조차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 있긴 했지만 극소수였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98년까지 30년 넘게 철권 통치했다. 집권 내내 과거의 치부를 ‘국가를 위한 정당방위’로 윤색해 선전했다. 학살주도 세력이 줄곧 나라를 지배해 희생자 유가족들은 침묵해야 했다. 특수한 종교적 상황도 작용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5000여만 명이 대부분 종교를 가지고 있다.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는 척도는 신앙”이라고 말할 정도다. 종교와 대척점에 선 공산사상에 대한 혐오가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는 고유한 민족성보다는 제도의 영향이 컸다. 1965년 정부는 6개 종교만 공인하고 이를 장려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정치가 국민 사상을 인위적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종교적 신념은 ‘반(反)공산당’ 정서를 정당화하는 무기가 됐다. ― 그렇다 해도 학살 당사자들이 너무 당당하다. 죄라는 의식조차 없었을 것이다. 지금껏 사회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는다. 영화에선 공영방송 토크쇼에 나가 “인도적으로 잘 죽였다”며 서로 격려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끝내 물러났지만, 군부 중심 집권층은 다져놓은 세력이 탄탄해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판차실라 청년단은 지금도 300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앞으로는 달라질지 모른다. 올해 7월 서민 개혁파인 조코 위도도가 수하르토의 사위인 수비안토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인도네시아의 오바마’라 불리는 그가 어떤 개혁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희생자 복권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영화에서 학살 당시를 재연하다 자책감이 든 행동대장 안와르는 후반부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이냐”며 고통스럽게 구역질한다. 올바른 진상 규명은 그 어떤 처벌보다 묵직한 힘을 지닌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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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어둠은 생명의 쉼표

    어둠이란 참 오묘한 존재다. 흔히 밤경치가 근사하다고들 하지만, 막상 칠흑같이 검은 밤을 맞닥뜨리면 그만큼 두려운 게 없다. 인류의 진화라는 것도 불(혹은 빛)을 발견해 어둠과 맞설 무기를 획득하며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그만큼 미지의 영역이었던 밤을 정복하는 일은 인간의 숙명과 직결된 역사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환경 전문 작가인 저자가 볼 때, 너무 정도가 지나쳤던 ‘밤의 추방’은 결국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지구를 생채기내고 있다. 낮이 가면 밤이 오는 게 순리일진대, 이를 억지로 몰아내며 잃은 게 너무 많다. “어떤 면에서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이제야 알기 시작했지만, 밤의 자연스러운 어둠은 우리의 건강은 물론이고 자연계의 건강에도 늘 소중한 요소이기에 어둠이 사라지면 모든 생명이 고통을 받는다.” ‘잃어버린…’의 애절한(?) 여행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밤을 말살한 빛 공해는 지금 어느 지경까지 와 있는가. 도대체 밤이 사라지면 뭐가 나쁘다는 건가.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려 저자는 가장 밤낮이 구분 안 가는 곳부터 완전히 어둠이 지배하는 세계까지 차례차례 가보기로 했다. 다만 미국인답게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둠에 집중한다’는 취지에서 여정은 북미와 서유럽에 집중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존 보틀이란 천문학자의 척도를 따라가는 것. 이 학자는 어두운 밤하늘을 1∼9등급으로 구분했다. 대도시의 불야성을 9라고 하면, 인위적 불빛 없이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수준은 1이라는 식이다. 책은 9에 해당하는 곳부터 반대로 짚어가는 방식으로 구성했다. 차례에서 챕터 순서가 9에서 1로 거꾸로 된 건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양반, 글 풀어내는 솜씨가 보통 아니다. 아니 내공이 요즘 말로 ‘만렙(게임에서 최고 레벨에 오른 경지)’이다. 밤과 관련해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았나 싶어 책장을 넘길수록 입이 쩍 벌어진다. 딱히 여행서나 과학책, 역사나 철학책이라고도 규정할 수 없게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별빛 찬란한 밤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예를 들어, 9, 8등급 장에선 휘황찬란한 카지노의 도시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같은 대도시를 찾았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에선 빛 공해로 인한 피해와 그 속에서 별빛을 찾는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더니, 런던에 넘어가선 지금도 남아있는 가스등을 통해 근대 조명의 역사를 되짚는다. 그리고 훌쩍 파리로 향하더니 도시의 불빛이 문화와 조우하는 가치에 대해 설명한다. 다음 장에선 또 분위기가 다르다. 도심을 벗어나 주택거주지역을 돌며 야간조명의 효용성에 대해 거론한다. 사실 대다수 사회에선 ‘안전과 치안’을 명목으로 밤을 밝히는 작업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런데 실제 연구에 따르면 가로등과 범죄율은 별 상관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지나친 불빛이 시력마비와 은폐 공간 증가를 야기해 문제를 키웠다. 이 때문에 최근 서구사회는 오히려 밤 불빛을 줄이는 작업에 나선 곳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인공의 빛이 사라진 땅에 우주가 내려준 황홀한 빛의 향연이 펼쳐지는 광경을 근사하게 그려낸다. 물론 이미 21세기도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밤을 다시 ‘깜깜하게’ 되돌리기란 요원한 일이다. 밤을 낮 삼아 일하는 수많은 ‘미생’들에겐 저녁이 있는 삶조차도 버거운 꿈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밤하늘에 빛나는 별은 동화책에서나 배우는 세상이 될지 모른다. “수많은 빛을 들고 다니느라 어둠 또한 꽃피고 노래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게 올바른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밤의 가치를 고민해봐야 할 때가 됐다. 밤은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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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전 방불케 하는 전투신… 피트의 존재감이 가장 큰 무기

    “영화 ‘퓨리’는 전쟁이 지닌 끔찍함과 흉측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내면 또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죠.” 쉰 넘은 아저씨가 어찌 이리 태(態)가 나는지. 13일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영화 ‘퓨리’ 기자회견에 나선 브래드 피트(51)는 아들 또래의 로건 러먼(22)과 함께 서도 밀리지 않았다. 물론 2011년과 지난해에 이어 세 번째 방한해 옆집 아저씨처럼 친숙해지긴 했지만. 퓨리에서 드러낸 상체를 보면 ‘델마와 루이스’(1991년) 시절 ‘간고등어’ 근육도 여전했다. 20일 개봉하는 영화는 피트의 말마따나 꽤나 참혹한 작품이다. 때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워 대디(war daddy·전쟁 아빠)라 불리는 콜리어 부사관(브래드 피트)은 독일 전선에서 ‘퓨리(fury·분노)’란 별명이 붙은 미국 탱크를 이끄는 지휘관. 보이드 스완(샤이아 러버프)을 비롯해 개성 넘치는 부하들과 생사를 넘나든 그에게 입대한 지 8주 된 햇병아리 신병 노먼 앨리슨(로건 러먼)이 배치된다. 곧장 전장에 투입된 앨리슨이 정체성 혼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퓨리는 사단 전체의 명운이 걸린 전투에 나서게 되는데…. “워 대디는 많은 걸 짊어진 존재입니다. 그가 실수하면 소대가 몰살당하죠. 하루는 줄곧 싸우고 죽이다가 다음엔 웃고 떠들며 함께 밥 먹는 게 전쟁이잖아요. 부하들을 옥죄고 풀어주는 걸 잘해야 하다 보니, 책임감과 스트레스도 엄청납니다. 파탄 난 가정을 이끄는 가장과 흡사한 위치랄까. (아이 여섯을 둔) 아버지로서의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됐어요.” 영화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신도 볼만하지만, 부대원의 미묘한 감정을 따라가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특히 미국 병사라고 해서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걸 여러 대목에서 부각시켜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결을 달리한다. 하지만 전쟁터라기엔 지나치게 굼뜬 흐름이나 첨부터 대충 결말이 짐작되는 단선적 구조는 상당히 아쉽다. 어느 작품에서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피트의 존재감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 “너희 모두 살려서 고향에 보내는 게 내 일이야”라고 외치는 콜리어는 어느 순간 가족을 등 뒤로 숨기고 철컥 장총을 뽑아든 서부영화의 존 웨인과 겹쳐 보인다. 피트는 “지난 20여 년간 많은 훌륭한 영화인들과 함께 작업한 게 성공의 원동력이었다”며 “영화를 사랑했던 한 시골 청년이 영화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젠 내가 받은 것을 영화 안팎으로 돌려줄 때가 됐다”라고 했다. 피트와 함께 온 러먼은 2011년 영화 ‘삼총사 3D’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뒤 두 번째 방한이다. 그는 “퓨리를 통해 좋은 배우들이 카메라 바깥에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깨달았다”며 “특히 근면 성실한 피트가 인상적이었다. 연기하며 상대를 얼마나 잘 때릴 수 있는지도 배웠다”고 농담했다. 소주와 불고기, 김치볶음밥을 사랑한다는 그는 “오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식당도 미리 알아봤다”며 기대를 드러냈다. “최근에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 ‘명량’의 전투 장면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우리 영화와 닮은 점도 있을 것 같은데 꼭 보고 싶습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좋아합니다. 한국 영화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많이 배출해 관객으로서 기대가 큽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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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온 브래드 피트, 장총 든 존 웨인과 겹쳐보이는 이유는?

    "영화 '퓨리'는 전쟁이 지닌 끔찍함과 흉측함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로 인해 인간의 내면 또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죠."쉰 넘은 아저씨가 어찌 이리 태(態)가 나는지. 13일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영화 '퓨리' 기자회견에 나선 브래드 피트(51)는 조카 뻘 나이의 로건 레먼(22)과 함께 서도 밀리지 않았다. 물론 2011년과 지난해에 이어 세 번째 방한해 옆집 아저씨마냥 친숙해지긴 했지만. 퓨리에서 드러낸 상체를 보면 '델마와 루이스'(1991년) 시절 간고등어 근육도 여전했다.20일 개봉하는 영화는 피트의 말마따나 꽤나 참혹한 작품이다. 때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워 대디(war daddy·전쟁 아빠)라 불리는 콜리어 부사관(브래드 피트)은 독일 전선에서 '퓨리(fury·분노)'란 별명이 붙은 미국 탱크를 이끄는 지휘관. 보이드 스완(샤이아 라포브)을 비롯해 개성 넘치는 부하들과 생사를 넘나든 그에게 입대한지 8주 된 햇병아리 신병 노먼 앨리슨(로건 레먼)이 배치된다. 곧장 전장에 투입된 앨리슨이 정체성 혼란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퓨리는 사단 전체의 명운이 걸린 전투에 나서게 되는데…."워 대디는 많은 걸 짊어진 존재입니다. 그가 실수하면 소대가 몰살당하죠. 하루는 줄곧 싸우고 죽이다가 다음엔 웃고 떠들며 함께 밥 먹는 게 전쟁이잖아요. 부하들을 옥죄고 풀어주는 걸 잘 해야하다보니, 책임감과 스트레스도 엄청납니다. 파탄 난 가정을 이끄는 가장과 흡사한 위치랄까. (아이 여섯을 둔) 아버지로서의 경험이 연기에 도움이 됐어요."영화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신도 볼만하지만, 부대원의 미묘한 감정을 따라가는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특히 미국 병사라고 해서 정의롭지만은 않다는 걸 여러 대목에서 부각시켜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와 결을 달리 한다. 하지만 전쟁터라기엔 지나치게 굼뜬 흐름이나 첨부터 대충 결말이 짐작되는 단선적 구조는 상당히 아쉽다.어느 작품에서나 강한 인상을 남기는 피트의 존재감은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무기. "너희 모두 살려서 고향에 보내는 게 내 일이야"라고 외치는 콜리어는 어느 순간 가족을 등 뒤로 몰고 철컥 장총을 뽑아든 서부영화의 존 웨인과 겹쳐 보인다. 피트는 "지난 20여 년간 많은 훌륭한 영화인들과 함께 작업한 게 성공의 원동력이었다"며 "영화를 사랑했던 한 시골 청년이 영화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젠 내가 받은 것을 영화 안팎으로 돌려줄 때가 됐다"라고 했다.피트와 함께 방한한 레먼은 2011년 영화 '삼총사 3D'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뒤 두 번째 방한이다. 그는 "퓨리를 통해 좋은 배우들이 카메라 바깥에서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깨달았다"며 "특히 근면 성실한 피트가 인상적이었다. 연기하며 상대를 얼마나 잘 때릴 수 있는지도 배웠다"고 농담했다. 소주와 불고기, 김치볶음밥을 사랑한다는 그는 "오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식당도 미리 알아봤다"며 기대를 드러냈다."최근에 한국에서 흥행한 영화 '명량'의 전투 장면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요. 우리 영화와 닮은 점도 있을 것 같은데 꼭 보고 싶습니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영화도 좋아합니다. 한국영화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많이 배출해 관객으로서 기대가 큽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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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기 좋고 풍광도 좋고… 해외영화제서 먼저 찜

    1969년 경북 포항. 흑백TV에서 정치 뉴스가 쏟아지던 시절. 허나 그곳은 한가로워 보일 정도로 잔잔하다. 조각가로 이름 날리던 준구(박용우)는 병을 얻어 삶의 의욕도 잃고 낙향한 상태. 지고지순으로 남편을 돌보던 정숙(김서형)은 우연히 마주친 애기엄마 민경(이유영)에게 남편의 누드모델이 되어주길 부탁하는데…. 손사래 치던 민경은 상이용사 동거남(주영호)과의 각박한 살림살이를 벗어나 보려 결국 준구의 집으로 향한다. 20일 개봉하는 조근현 감독의 ‘봄’은 해외영화제에서 먼저 알아본 영화다. 미국 애리조나영화제와 댈러스영화제, 이탈리아 밀라노영화제, 스페인 마드리드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밀라노에선 김서형, 마드리드에선 이유영이 여우주연상도 수상했다. 한국영화 가운데 주연 여배우 둘 다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건 처음이라 한다. 상까지 받았다는 얘길 들어서인가. 배우들의 연기는 굉장히 있어 보인다. 특히 김서형은 ‘놀랄 노’자다. 막장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선보인 광란의 연기가 새긴 오랜 잔상을 시원하게 떨쳐낸다. 물론 확 돌변하지 않을까 기대감(?)도 내심 가졌지만, 살랑살랑 술잔을 딱 채운 듯 차분하되 흔들리는 감정을 잘금잘금 쌓아간다. 이유영도 만만치 않다. 과감한 노출이야 신인이라 그렇다 치자. 스물다섯(1989년생) 어린 처자가 어찌 그리 삶에 지친 곤궁함을 순수한 듯 무심하게 얼굴에 담는지. 대사 전달력은 아쉽지만 처연한 머리칼과 어우러진 눈빛은 여운이 길다. 여배우들에 비해 덜 주목받긴 했지만 박용우도 중심을 잘 잡았고, 주영호 역시 전형적인 역할을 깔끔하니 소화했다. 영화의 또 다른 볼거리는 풍광이다. 조 감독은 현대사의 그림자가 짙었던 전작 ‘26년’(2012년)과 달리 시대적 배경을 최대한 덜어내고 등장인물에만 집중했다. 자칫 단조로울 법했던 구성은 파르라니 펼쳐진 밭과 눈부신 황톳길, 호숫가가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서울대 서양화과를 나온 감독의 강점을 제대로 살린 셈. 아스라이 젖어드는 수채화처럼 억지스럽지 않게 매조지하는 극의 흐름도 ‘문예영화’로서의 미덕을 잘 살렸다. 18세 이상.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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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업하는 그들은 바로 우리 이웃”

    13일 개봉하는 영화 ‘카트’는 처음엔 기존 상업영화와는 다른 측면에서 주목받았다. 일단 2007년 이랜드 홈에버 비정규직 파업을 소재로 했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한편에선 아이돌 그룹 ‘엑소’의 도경수(디오)의 출연이 10대들에게 화제였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카트 야외상영관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카트’는 단순히 사회 고발이나 팬덤의 측면에서만 고려될 작품이 아니다. 영화 내내 스크린에서 마주하는 건 바로 매일 마주치는 이웃, 아니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부지영 감독(43)도 “이 땅에서 보편적 정서를 갖고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을 담으려 했다”고 말했다. 손님 직원 할 것 없이 누구나 돌려쓰니 모두의 손때가 묻는 대형마트의 카트처럼. ―주로 다큐멘터리가 다뤘던 파업이란 소재를 극영화로 만들었다. “육하원칙 관점에서 보자면 ‘무엇을’보다 ‘누가’를 얘기하고 싶었다. 대중은 수많은 파업을 언론매체를 통해 접한다. 하지만 그건 정보로서 사건만 다룰 뿐이다. 거기엔 다양하게 관련된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들의 사정이나 속내가 뭔지 알 수 없다. 영화에서 파업 참가자들은 대다수가 평범한 가정주부다. 우리와 똑같이 살림하고 애 키우는 엄마들이다. 그런 인물들의 속내가 무엇인지 들려주고 싶었다.” ―실제 현장보단 영화가 순하던데…. 집회에서 민중가요 대신 트로트를 부르더라. “같은 맥락에서, ‘어떻게’보다 ‘왜’에 집중하려 했다. 마트 여성 노동자들은 평소 자기 목소리도 낼 줄 모르는 캐릭터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 처했기에 그런 선택을 했는지가 중요했다. 영화를 전·후반부로 나누면, 주로 쓴 카메라 렌즈가 달랐다. 앞쪽엔 사물을 넓게 잡는 광각렌즈를 많이 썼는데, 파업 이전에 그들이 처한 환경을 부각시켰다. 나중엔 클로즈업에 용이한 망원렌즈로 표정에 담긴 감정에 초점을 맞췄다. 트로트는 노동법도 잘 몰랐던 아줌마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행동에 나섰음을 부각시키는 장치였다.”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배우들의 공이 크다. 고교생 아들 태영(도경수)의 엄마 선희(염정아)부터 싱글맘(문정희), 할머니 청소원 순례(김영애), 20대 미진(천우희)까지 모두 훌륭했다. 스타들인데도 촬영이 진행될수록 무리에 녹아들더라. 염정아가 아닌 그냥 선희로 보였다. 천우희는 촬영 전엔 출연작 ‘한공주’를 못 봤다. 그냥 ‘얘, 왜 이렇게 연기 잘해’ 했는데, 작품 보고 ‘이렇게 존재감 큰 배우를 막 대했구나’ 했다, 하하. 도경수는 화려한 무대 모습과 달리 얼굴에 그늘을 드리울 줄 알더라.” ―영화를 보다 보면 누구도 비난하기가 어렵다. “맞다. 이 작품엔 악인이 없다. 파업에 반대하는 직원들도 나름 사정이 있다. 위쪽 지시로 할 수 없이 나서는 이도 있을 테고. 파업 현장에 투입된 공권력을 무표정하게 그린 것도 그래서였다. 명령을 따랐을 뿐, 스스로 이성적 판단에 따라 그러는 게 아니잖나. 파업은 사회적 문제다. 전체적인 시스템에서 해결점을 찾아야지, 개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없다.” ―선희와 태영처럼 처음엔 부딪치다 나중에 화합하는 관계가 많더라.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한 게 바로 소통이다. 같이 사는 가족이라고, 회사 동료라고 서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대방을 이해하려 귀 기울이고, 그 처지를 공감할 때 비로소 진짜 유대가 형성된다. 사춘기 아들은 엄마가 파업하며 가정에 소홀한 것 같아 서운하다. 하지만 편의점 알바로 사회를 겪으며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마트 직원이 파업하면 손님은 당연히 불편해서 싫어한다. 하지만 공감대를 형성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을까. 마음과 마음을 잇는 다리가 필요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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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혈낭자 천방지축… 그러나 한결 순해진 ‘소노 시온標 코믹물’

    장면1하얀 레이스 치마를 입은 소녀가 깡충깡충 들어온다. 그런데 집안엔 시체들이 널려 있고, 바닥은 온통 핏빛. 소녀는 미끄러지며 킬러 앞에 넘어지는데…. 사내가 위로를 건네자, 아이의 한마디. “바닥 꼴이 이게 뭐야. 다 치우고 가!”장면2 도쿄를 장악한 조직 세력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단 소문에 완전무장하고 밤거리를 나선 무리들이 맞닥뜨린다. 부릅뜬 눈빛에 부드득 이를 갈던 폭력배. 갑작스레 쏟아낸 말은 힙합 리듬에 맞춘 랩 배틀? 일본 감독 소노 시온(53·사진)의 영화는 원래 불편했다. 유혈 낭자, 사지 절단은 기본. 성과 폭력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자살클럽’(2002년) ‘기묘한 서커스’(2005년) ‘차가운 열대어’(2010년)는 물론이고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두더지’(2011년) ‘희망의 나라’(2012년)도 그랬다. 때깔 좋고 이음새 근사하고 에너지는 넘치지만 대번에 반색하긴 머뭇거려졌다. 하지만 13일 개봉하는 ‘지옥이 뭐가 나빠’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도쿄 트라이브’는 ‘강추’다. 여전히 잔혹은 한가득이나 ‘병맛’(병신 같은 맛이란 인터넷 용어) 코드 휘날리는 웃음이 자극을 한층 순화시켰다. 둘 다 B급 코믹 액션 활극이다. ‘지옥이…’는 126분 내내 정신없이 돌아간다. 앙칼진 딸 미츠코(니카이도 후미)를 영화에 데뷔시키려는 야쿠자 무토(구니무라 준) 패거리와 꿈만 야무진 영화감독 지망생 히라타(하세가와 히로키) 일당을 얼개로 자질구레한 사건들이 꼬리를 문다. 결국 히라타와 친구들이 무토의 제안으로 영화를 찍는데, 실제와 연기가 뒤엉키며 한판 굿이 벌어진다. 이 작품엔 언제나 ‘돌+아이’ 같던 감독의 ‘영화에 바치는 헌사’가 배였다. 걸작 하나만 찍으면 죽어도 좋다는 히라타는 그의 분신. “돈 보고 찍은 영화가 일본 영화계를 망친다”는 대사는 자기 속내일 터. 히라타가 이끄는 팀 ‘퍽 바머스(Fuck Bomers)’도 젊은 시절 꾸렸던 영화제작집단 이름이다. 야쿠자 영화의 거장인 후카사쿠 긴지 감독(1930∼2003)과 리샤오룽(1940∼1973)에 대한 오마주가 가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도쿄 트라이브’는 더 난장판이다. 가까운 미래, 도쿄의 밤거리는 공권력의 손을 떠났다. 각자 영역을 차지한 트라이브(tribe·집단 혹은 부족)들이 날을 곧추세운 상황에서, 조직 ‘부쿠로’의 메라(스즈키 료헤이)와 ‘무사시노’에 소속된 카이(영 다이스)가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인다. 얘기가 뻔해 보인다고? 감독은 여지없이 뒤튼다. 대사 대부분을 힙합 음악에 맞춰 랩으로 바꿔 버린 것. 속사포 같은 랩 배틀은 왁자지껄한 액션과 궁합이 절묘하다. 질펀한 농담과 과장된 피범벅이, 힙합의 ‘앙꼬’인 디스(diss·비난)와 버무려지며 짜릿함을 선사한다. 번잡한 구성인데도 쫀쫀하고 미끈하다. 두 편이 구현한 엉망진창 세상은 감독이 품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뭔가가 꼬여 버린 요즘 일본의 현실을 오라지게 까댄다. 감독은 시큼한 조소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화두를 꺼내고 싶은 것일지도.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소노 감독은 ‘두더지’부터 동일본 대지진 이후 뒤틀린 일본 사회의 정체성을 도마에 올려왔다”며 “최근엔 극단적 면모를 덜어내고 대중적 화법으로 다가서려는 전향(?)도 엿보인다”고 평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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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용한 서울의 주막서 한국 술 한잔 마시고 싶어”

    “인생에서 가족의 유대는 뭣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소외계층의 가정을 들여다보면 여러 외부 요인에 휩쓸리며 서로에게 상처 입히고 때론 무너지기도 하죠. 그 현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건 어느 사회에서나 필요한 작업이 아닐까요.” 4일 서울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만난 스웨덴 영화 ‘노바디 오운즈 미’의 셸오케 안데르손 감독(65)은 친근한 동네 어르신 같은 생김새와 달리 달변가였다. 5일부터 열린 스웨덴영화제(주한스웨덴대사관·영화사 백두대간 주최)에 개막작으로 뽑혀 이날 입국한 그는 “김기덕 감독의 나라에 와 기쁘다. 조용한 주막에서 한국 술 한잔 마시고 싶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노바디…’는 1970년대 엄마가 떠난 뒤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가는 아빠(미카엘 페르스브란트)와 다섯 살 된 딸의 결여된 삶을 그린 영화. 올해 스웨덴 최고의 영화제 굴드바게 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스토리에 비해 카메라의 시선은 담담했다. “원래 삶이 그렇다. 대단한 게 있을 것 같지만 일상이 쌓여 세월이 된다. 딸과 둘만 남게 된 아빠는 자식에겐 희망을 되뇌면서도 자긴 절망에 빠져든다. 딸은 그런 아빠를 안타까워도 미워도 하지만 어느새 닮아가는 걸 깨닫는다. 가족이란 알면 알수록 오묘한 관계다.” ―페르스브란트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진짜 알코올중독에 빠진 노동자 같더라. “감독 입장에서도 고맙고 놀라웠다. 무용가 출신이라 온몸으로 언어를 내뿜는다. 작은 전율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어부로 살다 알코올중독에 빠진 친척이 있어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배우에게 자세히 지시하기보단 맡겨두는 편이다.” ―‘노바디…’처럼 아이의 시선에서 평범한 가족을 들여다보는 작품이 많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인지 사회적 관계에 관심이 크다. 빈곤층 가족이 겪는 고통을 그들만의 책임으로 돌려선 안 된다. 특히 그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받는 상처는 사회가 다독여야 한다. 또 하나 어린이의 시선이 가진 장점은 균형감이다. 어떤 상황도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바라본다. 억지스럽지 않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때 울림은 더 크다.” ―스웨덴 하면 복지국가 이미지가 강한데…. “사회 시스템이 잘 갖춰진 건 맞지만 고통받는 이가 없을까. 현재 유럽은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바닥이다. 영화가 다룬 1970년대는 그나마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힘들어도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며 사회의 균형을 잡아줬다. 요즘 세상은 자본의 논리만 우선시되며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크다. 이 영화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가치를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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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8회 이주민영화제 8∼10일 열려

    제8회 이주민영화제가 8∼10일 서울 성북구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에서 열린다. 이주민방송 MWTV가 주최하는 영화제는 고려인의 이주 역사와 현실을 담은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김정 감독)를 개막작으로 선정했다. 다양한 이주민의 실상을 다룬 ‘굿바이’(섹 알 마문 감독) ‘모래언덕의 소년’(바르스 볼드 감독) 등의 단편영화도 선보인다. 02-776-0416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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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회 런던한국영화제 6일 개막… ‘군도’등 55편 선봬

    제9회 런던한국영화제가 6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 레스터스퀘어에서 막을 올린다. 개막작인 윤종빈 감독의 ‘군도: 민란의 시대’와 폐막작인 임권택 감독의 ‘화장’을 비롯해 한국 영화 55편을 선보인다. 스페셜 섹션으로 ‘김기덕 감독 포커스’와 ‘정우성 배우 포커스’가 마련됐다.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김 감독의 최신작들과 최근 감독으로도 영역을 넓힌 정우성의 주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배우 안성기 정우성 강동원 이동해 등이 현지 행사에 참석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지원하는 런던한국영화제는 주영한국문화원이 매년 11월 개최한다. 21일까지. 문의 주영한국문화원(www.kccuk.org.uk), 영화제 홈페이지(www.koreanfilm.co.uk).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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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심男과 활달女의 ‘썸’타기

    “아,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지난달 30일 함께 개봉한 ‘모모세 여기를 봐’와 ‘깨끗하고 연약한’은 멀지 않은 친척을 연달아 만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일본 영화다. 둘 다 달곰쌉쌀한 첫사랑을 다뤄서겠지만, 이런 기시감이 꼭 두 작품에 한정된 건 아니다. ‘10대 학원 로맨스’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상당한 지분을 확보한 장르. 영화 역시 ‘러브레터’(1995년),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년), ‘하나미즈키’(2010년) 등 끊이질 않았다. ‘모모세…’와 ‘깨끗하고…’를 중심으로 일본 청소년 멜로물의 첫사랑 공식을 짚어봤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답답한 줄타기 ‘모모세…’의 노보루(다케우치 다로)는 평범하고 소심한 남학생. 속 터지게 만드는 이런 캐릭터는 일본 10대 로맨스물에서 빠지지 않는 존재다. 끙끙 앓다가 고백조차 흐지부지. 도대체 얘들은 신선이야 뭐야. 일본 특유의 민족성이 반영된 건가. 활달한 척하는 모모세(하야미 아카리) 역시 짝사랑 곁을 맴돌 뿐이다. ‘깨끗하고…’의 칸나(나가사와 마사미)와 하루타(고라 겐고)도 오십보백보다. 오랜 소꿉친구인데 속내는 드러낼 줄 모른다. 키스까지 해놓고 우정인지 사랑인지 헷갈려한다. “어떤 고등학생이 의리로 입 맞추냐”고 뒤통수 한 대 치고 싶다. 서로 애정을 확인하기까지 밀고 당기는 이른바 ‘썸’타는 장면은 빛을 과다 노출시켜 화면이 뽀얗다. 나중에야 감정을 터뜨리는 전개도 닮았다. 참다 참다 봇물처럼 쏟아내니 극적이긴 하다. 근데 그마저도 딱 부러지진 않는다. 노보루가 끝내 외친 한마디는 “모모세, 여기를 봐.” 뭐, 어쩌라고. 하루타가 칸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겨우 “지금 간다”다. 첫사랑 여학생의 생김새도 박제 수준이다. 칸나는 ‘러브레터’의 10대 후지이(사카이 미키)의 환생인가. 긴 생머리에 쌍꺼풀 짙은 눈, 똑똑한 모범생인데 사랑 앞에선 ‘아무 것도 몰라요’ 표정. ‘모모세…’에선 조연인 간바야시(이시바시 안나)가 이렇다. 활달한 여학생은 모모세처럼 꼭 짧은 커트머리에 입을 삐죽거린다.○ 아날로그 감성을 건드리는 자전거 어김없이 등장하는 소품이 자전거다. 자전거는 첫사랑의 아날로그 감성을 대변한다. 그들이 청정 무공해 운송수단을 타던 동네는 현재 거주하는 교통지옥 대도시가 아니다. 노보루가 15년 만에, 칸나가 8년 만에 찾는 소도시 혹은 촌마을은 향취마저 변함없다. ‘첫사랑=고향=자전거’ 등식은 마음을 따끈하게 데우는 그때 그 시절을 일깨운다. 작품마다 어른이 된 주인공이 시골에 돌아가 당시를 떠올리는 액자구조를 반복하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종종 첫사랑 스토리는 ‘부재(不在)의 미학’으로 이어진다. ‘러브레터’ ‘세상의 중심에서…’처럼 ‘깨끗하고…’는 상실의 상처가 여진을 남긴다. 가슴속 응어리로 남았다가, 그걸 받아들여야만 다음 한 발을 내딛는다. 러브레터의 “오겐키데스카(잘 지내나요)”는 21세기에도 여전하다. 이런 작법은 일본 영화산업의 마케팅 전략이 반영된 결과다. 잘나가는 청춘스타를 출연시켜 10, 20대를 잡고 자극 없는 첫사랑 코드로 중장년층까지 끌어당긴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이런 장르는 대개 대형 방송사 자본으로 제작된다”며 “TV드라마처럼 폭넓은 연령대의 관객을 타깃으로 잡는 일본의 전형적인 청춘멜로 화법”이라고 말했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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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찬란한 우주 환상곡

    영화도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던가. 우주는, 슬펐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메멘토’(2000년)부터 배트맨 시리즈와 ‘인셉션’(2010년)까지 그는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그리고 신작 ‘인터스텔라(Interstellar·다음 달 5일 개봉)’를 통해 다시 손을 내민다. 도시와 꿈을 떠나 이제 하늘로 가자고.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언제나 감독은 한계를 몰랐다. 함께 각본을 쓴 동생 조너선은 4년이나 상대성이론을 배웠단다.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킵 손이 자문을 맡았다. 그 공력을 끌어다 상상을 펼쳐낼 공간으로 지구는 비좁았다. 카메라는 태양계를 벗어나 다른 차원의 우주로 넘나든다. 때는 머지않은 미래. 지구를 덮친 환경 재앙. 세계 식량 시스템은 파탄 났다. 정부와 경제 역시 유명무실. 과학자보다 농부가 더 요긴한 세상이 됐다. 우주조종사였던 쿠퍼(매슈 매코너헤이)도 옥수수농장 일꾼 신세. 허나 불가사의한 일을 겪다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연이 닿고…. 가족의 만류에도 인류가 이주할 행성을 찾는 프로젝트에 뛰어든 쿠퍼. 브랜드 박사(앤 해서웨이) 등과 함께 토성 근처 웜홀(다른 시공간을 잇는 우주구멍)로 향한다. 상영시간 169분에 이르는 영화는 압도적이다. 거창한 액션이나 분주한 전개가 거의 없는데도 몰입하게 된다. 물론 웜홀이나 블랙홀과 연관된 과학용어는 낯설다. 이를 얼개로 마련한 시공간 개념도 녹록지 않다. 그러나 고요하되 찬란한 우주 환상곡 앞에 멍하니 이성을 놓아버린다. 뭣보다 놀런 감독 특유의 ‘묵시론적 세상에 뿌리는 희망 한 움큼’은 은하계에서도 여전하다. 세상이 등져도 자신은 고담을 놓지 않는 다크나이트처럼. 소수의 인류는 희생을 심어 미래를 싹틔운다. 하지만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도 인간이었다.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보는 소신공양(燒身供養·자기 몸을 불태워 공양을 바침)은, 때로 덫이 되고 지뢰가 된다. 우주로 간들 인성(人性)은 변함이 없다. 그런 인류의 부족함을 상쇄시켜 주는 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밋밋하다고? 원래 정답은 그 모양이다. 사람들이 뻔한 길을 두고 돌아갈 뿐. 쿠퍼의 딸(매켄지 포이)에 대한 애정, 딸의 아빠를 향한 그리움은 순수하기에 에너지가 넘친다. 수만 광년이 떨어져도 코끝에 맞닿은 숨결. 희망을 희망으로 버티는 이유는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참혹한 게 또 있을까. 목숨 같은 자식을 지키려 이별을 택하고, 다시 못 볼 줄 알면서도 손을 흔든다. 인류의 생존? 온기 없는 우주에 내던져진 이에게 제아무리 대의명분을 외친들. ‘별들 사이에서(인터스텔라)’ 인간은 떠도는 부초인 것을. 그래도 떠나야 했던 건 각인처럼 잔인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제 알겠다. 영화가 왜 이리도 슬펐는지. 예전엔 푸른 별밤이 황홀한 줄 알았다. 허나 아버지가 떠나버린 저 창공이 딸에게도 아름다울까. 우리 곁을 떠난 그들은 어디쯤 가고 있을지. 기약 없이 갔을지언정 먼지로라도 안부를 전해주면 좋으련만. 하나둘씩 별이 진다. 사금파리 세월 한 줌만 남긴 채.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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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촬영 내내 목 메어도 참 행복했소”

    30일 개봉하는 영화 ‘소리굽쇠’는 여러모로 ‘커다란’ 영화다. 규모만 따지면 제작비 3억8000만 원에 불과한 작은 영화지만 담긴 뜻이 크다. 국내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첫 번째 극영화로, 추상록 감독(배우 고 추송웅 씨의 아들)과 배우 조안 김민상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가 노 개런티로 참여했다. 김원동 아시아홈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사재 3억 원을 털었으며, 수익금은 모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쓰인다. 23일 영화에서 위안부 피해자인 귀임 할머니 역을 맡은 조선족 배우 이옥희 씨(56)를 서울 왕십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인터뷰 내용과 영화 소개를 그의 말투를 살려 재구성했다. 배우 이옥희라 함다. 한국 동포들은 내를 잘 모를 검다. 중국서 1978년 데뷔해 연극 공연과 TV 출연을 마이 했소. 2005년에 공적을 인정받아 ‘1급 배우’ 직함을 받았슴다. 우리(중국) 정부 국무원서 대중예술 종사자에게 내리는 거오. 주요 국가행사에 참가하고, 은퇴하면 연금도 나옴다. 조선족 동포들에겐 ‘수이러우(水肉·물고기)’란 별명으로 더 친숙함다. 40년 가찹게 연길 해왔지만, 영화 출연은 ‘소리굽쇠’가 처음임다. 솔직히 현장에서 너무 영어를 써 내 마이 힘이 들었소. 첨엔 ‘액션’ 말곤 당최 알아듣질 못했지. 게다가 영화는 표현이나 동선이 연극과 하도 달라 한참 애를 먹었소. 허나 이리 좋은 영화에 출연을 마다하겠슴까. 시나리오를 탁 보는 순간, 눈물이 멈출 새가 없었는데. ‘소리굽쇠’는 조선족 귀임 할머니와 손녀 향옥(조안)에 대한 얘기임다. 귀임은 일제강점기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단 말에 혹해 중국까지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가 됐슴다. 해방이 되고도 조국에 오질 못해 조선족으로 남았소. 애통한 생애지만서도 유일한 피붙이인 향옥이 삶의 낙이 되어줌다. 근데 할머니를 고향에 모시겠노라 한국에 간 손녀도 운명의 장난에 휘말리고 마오. 마치 하나가 울리면 공명하는 소리굽쇠처럼 기구한 삶이 이어지는 거오. 이까지만 들어봐도 왜 (돈도 안 받고) 출연했는지 알지 않겠슴까. 아직도 가슴에 피멍이 맺혔을 이들에게 우리 세대, 우리 후손들이 어찌 고개 돌릴 수가 있겠소. 그저 한 걱정이라곤 내 부족해 제대로 담지 못할까봐…. 그래도 연극하며 노년 역을 마이 했고, 조선족이니 말투는 살리겠다 싶었슴다. 다만 80대 역할이라 특수 분장을 매일 4시간씩 하는데, 그건 정말 다신 아니 하겠소. 연기하다 목이 메어도 물 한 모금 먹기도 쉽지 않고…. 그래도 촬영 내내 참으로 행복했슴다. 물론 베이징서 차로 3시간 떨어진 과거 일본군 막사로 쓰였던 민가서 찍는데 몸 고생은 말로 못 함다. 근데 한국 사람들 원래 그런지 좋은 일 하는 이들이라 그런지, 왜들 그리 친절하오. 추위에 달달 떨어도 가슴은 따뜻했소. 촬영 마지막 날이 마침 생일이었는데, 내도 까먹은 걸 한 맘으로 축하하는데 그런 정은 처음 느꼈슴다. 소리굽쇠는 그렇게 정이 뭉쳐서 만든 영화임다. 내외 동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할 얘기요. 뭣보다 (위안부) 할머니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글고 좀만 더 욕심내자면, 향옥처럼 한국 와서 고생한 조선족 70만 동포에게도 위로가 되길 바라오. 지금은 처지가 마이 나아졌지만, 한때 가슴에 응어리 맺혀 돌아온 이들이 적지 않슴다. 극중에 향옥이 “한국에선 짱깨, 중국에서는 가오리방쯔(高麗棒子·한국인 비하하는 호칭)”라 되뇌는 장면이 있소. 열악한 처지에도 열심히 사는 동포들, 한국이 마이 감싸주오. 내 그것 이상 바라는 게 없슴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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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실용서]세계 대도시 22곳서 만난 ‘장사의 고수’

    한국 자영업자 인구는 600만∼700만 명. 인구 대비 자영업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배란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생계형 창업이 80% 이상. 허나 보통 3∼4년 버티다 문 닫기 일쑤다. 서울디지털대 경영학부 겸임교수를 지냈던 저자는 유통 현장에서 30여 년을 일한 전문가. 뉴욕 런던 도쿄 상하이 등 세계의 소비 흐름을 주도하는 도시 22곳에서 발품을 팔며 ‘장사의 트렌드’를 살폈다. 하루가 다르게 유행이 바뀌는 대도시에서 오랫동안 가게를 꾸리는 이들의 장사 수완과 전략에 집중했다. 특히 시장이나 뒷골목 점포까지 일일이 찾아가 생생한 현장을 담았다. 성공 노하우를 찾아다니다 보니 책은 아무래도 선진국 위주로 초점을 맞췄다. 그나마 신흥시장 중국에도 많은 할애를 했지만 인도나 남미 같은 제3세계 현장이 없는 건 아쉽다. 게다가 저자 말마따나 그들의 비법을 그대로 따른다고 꼭 국내에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니. 이래저래 머리 싸맬 일만 늘어나는 거 아닌가 싶긴 해도,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다양한 사례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꽤나 참고할 내용이 풍부하다.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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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벌이도 못할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오네요”

    “요즘 휴대전화로 주식 시세 들여다보듯 수시로 예매율만 쳐다봐요. 촬영 땐 (주연이란) 부담 없이 즐겁게 찍었는데…. 근데 막상 개봉일이 닥쳐오니 엄청 긴장됩니다.” 23일 개봉한 ‘우리는 형제입니다’(장진 감독)의 주인공 하연 역을 맡은 김성균(34)은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소심한 스몰 A형”이라면서도 웃음에 편안함이 묻어나는가 하면, “쓸데없이 잡생각이 많다”는데 얘기는 담박하니 잘도 풀어나갔다. 30년 전 헤어졌다 목사가 된 형(조진웅)과 상봉하자마자 어머니(김영애)를 잃어버리는 예측불허 코미디에서 경상도 박수무당을 소화해서일까. 22일 만난 김성균은 매끄러운 한판 굿처럼 은근슬쩍 사람을 홀렸다. ―조진웅과 함께 처음으로 영화 주연을 맡았다. “고마움과 불안함이 교차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응사)’ 이후 선택의 폭이 확실히 달라졌다. 어떤 위치에 올랐단 자만이 아니라 연기를 맘껏 할 수 있어 기쁘다. 악역을 하더라도 풍성하게 표현할 기회가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차기작 제의가 끊어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동료 배우들과의 호흡은 좋았나. “김영애 선생님이야 존경하는 선배니 말할 나위가 없다. 윤진이(여일 역)랑도 맛있는 거 많이 먹었다. 진웅이 형은, 처음엔 고민 좀 됐다. 사적으로 워낙 친해 몰입이 쉽지 않을까 봐. 근데 촬영 들어가면 형은 눈빛이 확 변한다. 난 발동 걸리려면 시간이 필요한 스타일인데, 형 덕분에 쑥 빨려 들어갔다. 호쾌한 성격이라 잘 이끌어준 점도 고마웠다.” ―영화가 코미디보단 감동 코드가 더 컸다. “목사와 무당 형제니 유머 코드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족에 대한 간절함에 치중한 흐름이다. 아쉬운 건 내 연기다. 좀 더 덜어냈어야 하는데, 왠지 지저분하게 많이 담으려고 했던 것 같다.” ―배우로서 입지가 달라졌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응사 때 반짝했지만 한 달 지나니 똑같더라, 하하. 그래도 덕분에 생활고를 덜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요즘 들어 가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다. 아내도 큰 의지가 되고. 아, 아들이 다섯 살, 세 살인데 길 가는 사람한테 ‘우리 아빠 삼천포예요’ 그랬단다(삼천포는 응사에서 김성균이 맡은 배역). 괜히 쑥스럽고 고맙더라. 한때 연기를 관둘까 고민했던 적도 있다. 근데 김상호 선배가 그랬다. ‘난 내가 밥벌이도 못할 줄 알았다’고. 고생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은 말이다. 나도 밥벌이 못할 줄 알았다고. 근데 이런 날이 오더라고.”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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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꼬고 또 꼬아도 보고 또 보고… 거부할 수 없는 막장의 유혹

    《 ‘보고 또 보고’(1998∼1999년)에서 ‘왔다! 장보리’(2014년)까지. 지난 15년은 한국 드라마 역사에서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시기다. 일명 ‘욕드(욕하며 보는 드라마)’라 불리는 저급한 통속극 ‘막장 드라마(막드)’ 얘기다. 갱도의 끝을 뜻하는 막장을 조소 가득한 수식어로 썼지만, 현재 막드는 시청률을 등에 업고 당당한 장르로 대접받는다. 개연성 제로인 드라마들이 어찌 이런 탄탄한 일국(一國)을 세웠을까. 이영미 성공회대 초빙교수 말마따나 “막드는 사라지지 않는 트로트”인가. 막드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니 욕먹어 가면서도 죽지 않는 비결이 있었다. 인정하든 안 하든, 끝없는 진화의 노력이다. 》○ 막드 1.0 그리고 2.0 막드란 ‘극단적 여성 인물 중심’ ‘주제의식(권선징악)의 반복’ ‘가족이란 사적 영역에 집중’이라는 기존 통속극의 얼개를 최대치로 밀어붙여 욕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장르다. 막드의 원조는 임성한 작가의 ‘보고 또 보고’다. 일일극 역대 1위인 시청률(57.3%)에 TV연기대상까지 휩쓸었지만 겹사돈이란 설정에 과도한 우연성으로 ‘꼬고 또 꼬고’라는 놀림을 받았다. 임 작가와 라이벌 서영명 작가는 ‘인어아가씨’(2002∼2003년) ‘금쪽같은 내 새끼’(2004∼2005년) ‘하늘이시여’(2005∼2006년)를 잇달아 내놓으며 “완성도와 상관없이 폭력에 가까운 자극”(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으로 시청률 지상주의에 편승했다. 막드는 2008년 전후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다. 앞선 두 작가와 함께 ‘막드 4대 천왕’으로 꼽히는 김순옥 작가의 ‘아내의 유혹’(2008∼2009년)과 문영남 작가의 ‘조강지처 클럽’(2007∼2008년)이 ‘막드 2.0’ 시대를 열었다. 40%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한 두 작품은 막드란 용어를 정착시킨 일등공신이다. 막드 2.0은 이전 막장극보다 전개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5, 6회를 찍을 내용을 1회 분량으로 압축시켜 눈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내용면에선 “극단의 일상화”(김헌식 평론가)가 절정을 이뤘다. 남편은 본처가 얼굴에 점만 찍어도 몰라보며, 악행은 정신병자나 범죄자 수준으로 올라섰다. 막드 2.0은 “지상파의 식상한 드라마 제작 행태에 시청자가 염증을 느끼는”(이 교수) 출발점이기도 했다.○ 종합선물세트 막드 3.0 최근 종영한 ‘…장보리’는 또 다른 세대의 막드다. 전문가들은 막장의 기본을 지키면서도 다양한 장르의 혼종교배가 이뤄진 점을 흥행의 원동력으로 꼽았다. 3.0의 새로운 경향, ‘막장의 고품격화’(김 평론가)다. ‘…장보리’의 시청률을 따라 막드 3.0의 특징을 짚어보자(시청률 조사회사 TNmS 자료). 드라마가 15%를 넘어선 건 20회(6월 15일·15.4%)로 주인공 장보리(오연서)의 출생 비밀이 드러난 시점이다. 라이벌 연민정(이유리)이 ‘우연히’ 이 사실을 알아채고, 여느 막장처럼 악녀가 비밀을 쥠으로써 갈등은 깊어진다. 한편에선 로맨틱코미디에서 차용한 장보리와 이재화(김지훈)의 러브라인을 주기적으로 반복해 막장의 외연을 넓혔다. 20%를 넘긴 28회(7월 13일·20.4%)와 25%를 돌파한 36회(8월 10일·27%)에선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누구라도 ‘대장금’을 떠올릴 법한 한복집 경연이 본격화한다. 여기에 주인공 친엄마(김혜옥)도 악당이 되는 ‘변형’과 대장금에서 주인공 이영애의 스승이던 배우 양미경을 장보리의 멘토로 세우는 이종교배가 이뤄진다. 30%마저 넘어선 40회(8월 24일·30.4%)에선 막드의 첫 번째 비책을 확실히 써먹었다. 악녀의 연기 폭발이다. 악녀가 욕먹을수록 시청률도 오르는 법. 연민정은 친엄마(황영희)와 몸싸움하고 양엄마(김혜옥)를 협박하며 갈 데까지 간다. 35.8%를 찍은 마지막 52회(10월 12일)에선 막드의 기본인 ‘권선징악’과 ‘가족의 화합’으로 돌아간다. 막드 3.0은 천인공노할 악질적 범죄까지 다루지만 가족끼리 치고받을 뿐 사회적 국가적 범주로 확대되진 않는다. 그런데 이 회엔 주목할 대목이 있다. 김 작가의 히트작 ‘아내의 유혹’을 오마주(혹은 패러디)한 ‘점만 찍은’ 민소희의 등장이다. 막장이 드디어 자기복제까지 한 셈이다. 막장은 묻는다. “그래, 욕하려면 해봐. 그렇다고 안 볼 거야?”○ 막드란 이름의 공룡 ‘…장보리’에서 보듯 막드 3.0의 경쟁력은 다변화 다각화다. ‘에덴의 동쪽’(2008∼2009년)에서 싹을 틔워 ‘제빵왕 김탁구’(2010년)를 거쳐 지난해 ‘야왕’까지 막드 3.0은 주부용 드라마라는 좁은 시장에서 벗어나 주류로 편입했다. 게다가 권상우 수애 송승헌 같은 특급스타들도 막장코드에 합류하며 ‘막장의 규모화’(정 평론가)를 이끌었다. 막드란 공룡은 언제까지 번성할까. “김순옥 임성한 작가가 건재해 당분간 흐름이 이어질 것”(김 평론가)이란 낙관과 “문화주도층이 케이블과 종편으로 넘어가며 동력을 잃었다”(정 평론가)는 비관이 엇갈린다. 이영미 교수는 막드의 생존력을 ‘뽕짝’에 빗댔다. “트로트도 한때 대중문화의 주류였죠. 이젠 밀렸지만 명맥이 끊어지진 않습니다. 가끔 대박도 나올 거고요. 하지만 시청률에 얽매여 동어 반복을 거듭하는 한 회복하긴 어렵겠죠. 막장의 자기 파괴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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