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재

이호재 기자

동아일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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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숨소리까지 살아 숨쉬는 생생한 내러티브 기사가 넷플릭스 영상보다 가치 있는 컨텐츠라 믿는다.

hoho@donga.com

취재분야

2025-11-17~2025-12-17
문화 일반51%
인사일반20%
문학/출판10%
기획7%
무용3%
사고3%
칼럼3%
기타3%
  • 방통위, 서기석 KBS 이사 추천… 차기환 방문진 이사 임명

    방송통신위원회는 9일 전체회의를 열고 서기석 전 헌법재판관(70)을 KBS 이사회 이사로 추천하고, 차기환 변호사(60)를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로 임명했다.KBS 이사 후보로 추천된 서 전 재판관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서 전 재판관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21회에 합격했다. 서울중앙지법원장을 거쳐 2013~2019년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서 전 재판관은 2020년 TV조선 재승인 심사 점수 변경 문제에 연루돼 지난달 해임된 윤석년 전 KBS 이사의 후임이다.차 변호사는 바로 방문진 이사로 임명된다. 차 변호사는 최근 자진해서 사퇴한 임정환 전 방문진 이사의 후임이다. 차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 27회에 합격했다.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2009~2015년 방문진 이사와 2015년 KBS 이사를 역임했다.KBS 이사회는 11명이다. 해임청문을 앞둔 남영진 이사장까지 해임되고 이 자리도 여권 인사가 채우면 여야 6대 5로 정치적 구도가 뒤집힌다. 방문진 이사회는 9명인데, 최근 임 이사 사퇴로 여 2 대 야 6이 됐다가 차 변호사의 임명으로 다시 3대 6이 됐다. 해임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야권 권태선 이사장과 김기중 이사가 해임되고 이 자리를 여권 인사가 채우면 여 5 대 야 4 구도로 바뀐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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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전에 내 민낯을” 15년만에 만난 故이청준

    “평전을 써서 내 거짓을 벗겨다오.”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은 2007년 7월 폐암 판정을 받고 몇 달 뒤 이윤옥 문학평론가(65)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평론가는 ‘청사모’(청준을 사랑하는 사람 모임)에서 1년에 서너 번 이 소설가를 만나며 연을 이어왔지만 독대한 적은 없던 사이였다. 술 잘하는 이 소설가와 달리 커피밖에 못 마시는 이 평론가는 술자리에 끼지도 못했다. 이 소설가가 그런 이 평론가에게 평전을 부탁한 건 ‘객관성’을 위해서였다. 이 소설가는 평론을 위해 인터뷰하면서도 이 평론가에게 “부디 네 상상력이 내 상상력을 이겨서 내가 꾀한 모든 자기합리화를 벗겨 달라. 내 맨얼굴을 보여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2008년 7월 이 소설가는 타계했고, 15년이 지나 평전이 완성됐다. 지난달 31일 출간된 ‘이청준 평전’(문학과지성사·사진)이다. 이 평론가는 7일 전화 인터뷰에서 “이 소설가는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외경(畏敬)에 찬 눈으로 좇던 사람”이라고 담담히 말했다. “대상의 민낯을 응시하는 평전을 쓸 수 있겠냐고 스스로 자문하느라 출간이 늦어졌어요. 삼인칭으로 쓴 평론을 2년 전에 완고했다가 다 갈아엎고 일인칭으로 다시 썼죠.” 이 평론가는 이 소설가의 작품은 물론 메모, 일기, 편지 같은 사적인 기록도 들여다봤다. 또 동료 소설가와 문학평론가를 인터뷰해 이 소설가의 삶을 촘촘히 복원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건 이 소설가의 흠을 들춘 부분이다. 이 소설가는 신춘문예에 7번 낙방하다가 1965년 단편소설 ‘퇴원’으로 등단했다고 했지만, 사실 ‘퇴원’이 첫 작품이었을 정도로 악의 없는 거짓말도 종종 했다. 이 평론가는 “이 소설가는 소설에선 허구가 가능하지만, 현실에선 거짓이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평소 자기 잘못에 대해 지나칠 만큼 견디기 어려워한 사람이라 정확하게 쓰려 했다”고 말했다. 이 소설가가 유년 시절 동경했던 여성들에 대한 서술도 흥미롭다. 평전은 이 소설가의 국민학교(초등학교) 담임교사, 이 소설가가 고등학생 때 가정교사로 입주해 만난 부잣집 딸에 대해 이 소설가가 지닌 열망과 좌절이 작품에 녹아들었다고 분석한다. 이 평론가는 “이 소설가는 작품에서 ‘엄마’가 아닌 다른 여성을 납작하고 밋밋하게 그릴 뿐 제대로 형상화하지 못했다”며 “이 소설가의 인생 궤적과 작품을 연관지어 이해하려 했다”고 했다. 이 소설가가 암으로 투병하며 몸을 가누기 어려운 순간에도 남이 자신을 부축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혼자 꼿꼿이 걸으려고 했다는 등 말년의 모습도 평전에 담겼다. “이 소설가가 이 평론을 좋아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죽고 나면 하늘에서 이 소설가를 만나 묻고 싶네요. 냉정해야 하는 이 일을 왜 내게 맡겼냐고요.”(이 평론가)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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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 진영논리 벗어나자”… KBS ‘MZ 노조’ 출범

    KBS의 네 번째 노동조합 ‘KBS같이노동조합’이 7일 공식 출범했다. 새 노조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새 노조는 정치 논리에서 벗어나 노조 본연의 역할을 다하자는 취지로 설립됐다. 강령으로 정치세력화를 추구하지 않으며 좌우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사안별로 합리적인 판단을 지향한다고 정했다. 조합원은 프로듀서, 기자, 아나운서, 촬영기자, 방송기술, 방송경영 직군 등을 포함해 100여 명이다. KBS같이노조 외에도 KBS에는 민주노총 산하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KBS노동조합, KBS공영노조가 있다.새 노조는 창립 선언문에서 “외부의 힘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회사를 바꿔야 한다”며 “불필요한 성명, 다른 노조에 대한 공격, 상급단체 가입, 비대한 상근 조직 운영은 지양하겠다”고 했다. 또 “수신료 분리징수가 권력의 의지로 휘몰아치듯 진행됐지만, KBS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며 “안팎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우리 스스로 회사를 바꿔나갈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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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낭만과 야만이 넘치던 20년前 그 시대, 날것 그대로 그렸죠”

    “휴대폰 주인인데요. 어디세요?” 열여덟 살 충일이 아빠 박시후의 폴더폰을 열자 011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다. 네 살 때 충일을 버리고 떠난 아빠가 무연고자로 세상을 뜬 직후였다. 그때 충일 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진다. 눈앞에서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가 사라진 것. 그 대신 촌스러운 비니 모자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풍경이 나타난다. 당황한 충일 앞에 등장한 건 열여덟 살 시후다. 빨간색 아디다스 저지를 입은 시후의 모습은 충일이 사진으로 봤던 아빠의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달 21일 연재를 시작한 웹툰 ‘얼짱시대’는 2023년에 살던 충일이 2003년으로 돌아가 동갑내기 아빠를 만나는 타임슬립(시간여행) 이야기다. 웹툰을 총괄 기획한 건 박태준만화회사(법인명 더그림엔터테인먼트) 대표인 박태준 작가(39). 2일 서울 강남구 박태준만화회사 사옥에서 만난 박 작가는 왜 20년 전 이야기를 다뤘냐는 물음에 “낭만과 야만이 넘쳐나던, 사람들이 미쳐 있던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며 웃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라 온 국민이 하나가 됐었죠. 허세와 혼란이 가득한 2003년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쇼핑몰 대표와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박 작가는 2014년 내놓은 첫 웹툰 ‘외모지상주의’로 인기 작가가 됐다. 한국어, 영어 등 9개 언어로 연재된 이 작품은 누적 조회 수가 91억 회에 이른다. 그는 2017년 회사를 차린 뒤 2019년 ‘싸움독학’ ‘인생존망’ 같은 웹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150억 원이고, 현재 직원은 120명이다. 박 작가는 “데뷔했을 땐 ‘옷 팔던 애가 그림 그릴 줄이나 아느냐’고 무시당했다”며 “‘외모지상주의’가 10년 가까이 휴재 없이 버티며 인정받게 됐다”고 했다. 신작 제목은 박 작가가 2009년 출연한 케이블 방송 ‘얼짱시대’에서 따왔다. 사람들이 호프집에 몰려가고, PC방에서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열중하는 모습은 30, 40대 독자의 추억을 소환하기 충분하다. 그는 “2003년에 나 역시 당시 유행하던 사자머리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닌 흑(黑)역사가 있다”며 “내가 겪은 이야기를 충실히 재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추억을 파는 서사인가 싶지만 네이버웹툰 신작 순위 1위를 기록하며 10, 20대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독자들 사이에선 “롯데월드타워 자리에 포차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옛날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반응이 나온다. “제게 1980, 90년대 이야기가 신선했듯 MZ(밀레니얼+Z)세대에겐 2000년대 이야기가 새로웠나 봐요. 아들이 젊은 아빠를 이해한다는 서사도 젊은 독자의 시선을 끈 것 같습니다.” 박 작가는 상명대 만화학과를 다니다 학비 부담으로 1학년 때 그만뒀다. 학창 시절 가난했고 만화책 읽기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의 경험은 그의 여러 작품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폭력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는 “만화에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탈출구이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대리 만족적 성향이 있다”며 “수위를 스스로 정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일단 그리고, 네이버웹툰과 협의해 적절한 수위를 정한다”고 했다. “지금도 매일 10시간 이상 일한다”는 그는 “판타지물을 준비 중인데 이 작품 역시 10년 이상 그릴 것”이라며 “언젠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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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3년, 낭만과 야만의 시대 그리고 싶었다”… 박태준 작가 인터뷰

    “휴대폰 주인인데요. 어디세요?” 열여덟 살 충일이 아빠의 폴더폰을 열자 011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살 때 충일을 버리고 떠난 아빠는 무연고자로 세상을 뜬 직후였다. 그때 충일 앞에 이상한 광경이 펼쳐졌다. 눈앞에서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가 사라진 것이다. 대신 촌스러운 비니 모자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풍경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피어싱을 하고 있었다. 당황한 충일 앞에 등장한 건 열여덟 살 박시후다. 빨간색 아디다스 저지를 입은 시후의 모습은 충일이 사진으로 봤던 아빠의 젊은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지난달 21일 연재를 시작한 웹툰 ‘얼짱시대’는 2023년에서 살던 충일이 2003년으로 돌아가 동갑내기 아빠를 만나는 타임슬립(시간여행) 이야기다. 웹툰을 총괄 기획한 건 박태준만화회사(법인명 더그림엔터테인먼트) 대표인 박태준 작가(39)다. 2일 서울 강남구 박태준만화회사 사옥에서 만난 박 작가는 ‘만찢남’(만화책을 찢고 나온 남자)이란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지녔다. 그는 왜 20년 전 이야기를 다뤘냐는 질문에 “낭만과 야만이 넘쳐나던, 사람들이 미쳐있던 시대를 그리고 싶었다”며 웃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라 온 국민이 하나가 됐고, 허세와 혼란이 가득한 2003년 날 것 그대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죠.” 쇼핑몰 대표와 방송인으로 활동하던 박 작가는 2014년 내놓은 첫 웹툰 ‘외모지상주의’로 인기 웹툰 작가가 됐다. 이 작품은 9개 언어로 연재됐는데 누적 조회 수가 91억 회에 달한다. 2017년 박태준만화회사를 차린 뒤 2019년 ‘싸움독학’ ‘인생존망’ 같은 웹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박태준만화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150억 원에 달하고, 현재 직원이 120명이다. 그는 “처음 데뷔했을 때 옷이나 팔던 애가 그림이나 그릴 줄 아느냐고 무시당했다”며 “‘외모지상주의’가 10년 가까이 휴재 없이 버티며 인정받게 됐다”고 했다. 신작은 20년 전 모습을 충실히 그려낸다. 작품명은 박 작가가 2009년 출연한 케이블 방송 ‘얼짱시대’에서 따왔다. 사람들이 호프집 ‘쪼끼쪼끼’에 몰려가고, PC방에서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열중한 모습은 30, 40대 독자의 추억을 소환하기 충분하다. 그는 “2003년에 나 역시 당시 유행하던 사자머리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닌 흑역사가 있다”며 “내가 겪은 이야기를 충실히 재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추억을 파는 뻔한 서사인가 싶지만 네이버웹툰 신작 순위 1위를 기록하며 10, 20대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다. 독자들 사이에선 “롯데월드타워 자리에 포차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옛날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는 반응이 나온다. “제게 1980, 90년대 이야기가 신선했듯 MZ세대(밀레니얼+Z세대)에겐 2000년대 이야기가 새로웠나 봐요. 아들이 젊은 아빠를 이해한다는 보편적 서사를 넣은 것도 젊은 독자의 시선을 끈 것 같습니다.” 그는 상명대 만화학과에 다니다 학비 부담으로 1학년에 그만뒀다. 학창시절 가난했고 만화책 읽기가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의 경험은 그의 여러 작품에 녹아들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폭력적”이라는 비판적 평가도 받는다. 그는 “만화에는 일상의 스트레스를 푸는 탈출구이자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대리 만족적인 성향이 있다”며 “수위를 스스로 정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일단 그리고 네이버웹툰과 협의해 적절한 수위를 정한다”고 했다. “지금도 매일 10시간 이상 일한다”는 그의 다음 목표는 뭘까. “판타지물을 준비 중인데 이 작품 역시 10년 이상 그릴 겁니다. 언젠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만화가가 되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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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젖지 않는 책과 우중독서의 낭만[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내 컴퓨터에 전자책(e북)이 수천 권 있어도 안 읽게 되더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누가 온라인 서점 알라딘 e북 해킹 파일을 줬다는 지인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자신도 처음엔 호기심 반, 소장욕 반으로 e북 파일을 받았지만 결국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지인도 “사실 e북은 도서관 온라인 홈페이지에 가입한 뒤 무료로 빌려볼 수도 있다”며 “이번 e북 해킹 사건과 상관없이 책을 살 사람은 사고, 안 살 사람은 안 사는 것 같다”고 했다. 출판계 베스트셀러 등 e북 5000여 권이 알라딘 해킹으로 유출된 지 3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의외로(?) 파장이 크지 않다. 경찰 수사가 바로 시작된 덕도 있지만, 물성(物性)이 강한 책이란 상품이 지닌 특성 때문일 터다. e북이 유출돼도 종이책을 사거나 빌려 보는 사람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워터프루프북’이야말로 물성을 찾는 애독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책 아닐까. ‘나의 친구’는 물에 닿아도 젖지 않는 워터프루프북이다. 이 책은 물이 닿더라도 금세 보송보송하게 마른다. 스쿠버다이버들이 물속에서도 보도록 안내서를 인쇄하거나 군대에서 쓰는 공책을 만들 때 주로 쓰는 미네랄 페이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워터프루프북 시리즈가 나오기 시작한 건 2018년이다. 처음엔 정세랑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년·민음사),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2016년·민음사) 같은 기존 베스트셀러를 워터프루프북으로 다시 펴냈다. 이와 달리 ‘나의 친구’는 젊은 작가들의 에세이를 모아 새롭게 제작한 신간이다. 수영장, 해변, 계곡처럼 휴양지에서 읽는 만큼 가볍게 읽기 좋은 짧은 글을 넣었다. ‘나의 친구’에서 작가 8명은 에세이 16편을 통해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보영 시인은 친구의 일기를 읽으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고백한다. 권민경 시인은 외롭던 10대 시절 친구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김연덕 시인은 전혀 모르는 사람과 친해졌던 일을 들려준다. “(밤늦게) 내가 깨어 있는 이유는, 보통 누군가를 이유 없이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라는 김남숙 소설가의 문장은 새벽 물이 가득 채워진 욕조 안에서 읽어야 할 것처럼 촉촉하다. 민음사 편집부는 ‘나의 친구’ 서문에서 “습도 높은 바람을 맞고 있자면 ‘7월에는 매일매일 비가 내린대……’ 하는, 어디선가 들었던 소문을 떠올리게 된다. 비가 끊임없이 내릴 거라는 소문을 듣고 올해의 워터프루프북을 들고 걷는 사람을 상상해 본다”고 했다. 상상처럼 7월에는 정말 비가 많이 왔다. 기후변화로 한국이 아열대 기후가 된다면, 매일 아침 우산을 가지고 나갈지 말지 고민하는 날이 많아질 것이다. 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아침 보통 종이책과 워터프루프북 중 무엇을 들고 나갈지 고민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르겠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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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책]눈송이가 하얀 담요 되는 크리스마스를 상상해봐요

    농부 아저씨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저씨는 크리스마스가 다 됐는데 눈이 안 온다고 투덜거리다 깜빡 잠이 든다. 꿈에서 눈은 펑펑 내린다. 눈송이가 하얀 담요가 돼 아저씨는 물론이고 농장 동물들까지 모두 포근하게 덮어 준다. 아저씨가 꿈에서 깨니 창밖에 진짜 눈이 와 있다. 서둘러 옷을 입고 상자와 자루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아저씨는 “깜박 잊을 뻔했어”라고 외치며 헛간의 동물들을 깨운다. 흰 수염에 붉은 옷을 입고 선물 자루를 메고 가는 아저씨의 모습은 ‘누군가’와 닮았다. 아저씨는 헛간 옆 작은 나무에 알록달록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선물을 내려놓는다. 행복한 얼굴로 인사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책엔 눈송이가 인쇄된 투명한 필름이 들어 있다. 선물을 배달하는 아저씨 그림 위에 필름을 올려놓으면 진짜 눈이 내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지막 장에 있는 빨간 동그라미 버튼을 누르면 크리스마스캐럴도 들린다. 한여름이지만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온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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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닿을 듯 어긋나고 부서져버리는 너와 나

    “대학원 가고 싶어서요.” 여자 대학생인 희원은 자신이 존경하는 젊은 여자 강사와의 저녁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정규직으로 은행에서 일하다가 스물일곱 살에야 뒤늦게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한 건 대학원 진학까지 생각해서라는 것이다. 강사는 “공부는 대학원이 아닌 곳에서도 할 수 있다”며 은근히 만류했다. 상처받은 희원은 자신도 모르게 강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뱉었다. 강의에서 꼬투리를 잡던 다른 학생들을 언급하다 “선생님이 젊은 여자 강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다. 선생님이 정교수였다고 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강사는 희원의 말에 크게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희원은 대학원에 진학했고 비정규직 여자 강사가 됐다. 현실에 치여 사느라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가끔 자신이 존경하던 그 여자 강사가 떠오른다. 강사 평가서를 읽으며 좌절할 때, 무례한 학생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후회할 때, 성과를 위해 억지로 논문을 쓸 때. 표제작인 단편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내용이다. 7편의 작품을 모은 소설집은 관계의 시작과 부서짐을 섬세하게 그린다. 특히 여성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약자라는 연대감을 바탕으로 진한 우정을 맺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서로를 이해하기도 한다. ‘일 년’은 정규직 사원과 계약직 인턴인 동갑내기 여성의 우정을 다룬다. 둘은 함께 차를 타고 출퇴근하며 친해지지만 사소한 말 한마디에 멀어진다. 8년이 지나 우연히 만난 둘은 가면을 쓰며 친한 척하기보단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길을 선택한다. 언니와 멀어지게 된 여동생이 편지를 쓰며 화해를 모색하는 ‘답신’, 60대 여성이 딸을 만나기 위해 홍콩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자신을 아끼면서도 엄격하던 이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 담긴 ‘이모에게’처럼 가족 간의 애증도 다뤘다. 등장인물들은 항상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사랑을 하는 일에도 받는 일에도 재주가 없었지만 언제나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는 작가의 말처럼 상처 역시 사랑했기에 생기는 추억일 것이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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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체부, 서울도서전 수익금 관련 출협회장 등 수사의뢰

    문화체육관광부가 서울국제도서전 회계 보고 과정에서 수익금을 누락했다며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 회장과 주일우 서울국제도서전 대표를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문체부는 “윤 회장과 주 대표를 보조금법 위반, 사문서 위변조, 업무 방해 등의 혐의로 2일 서울경찰청에 수사 의뢰했다”고 3일 밝혔다. 출협이 매년 주최하는 서울국제도서전은 한국출판산업진흥원이 국가 보조금을 지원한다. 출협은 도서전을 마치면 수익금인 관객 입장료와 출판사, 기관의 부스 참가 분담금 등에 대해 출판진흥원에 정산 및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 문체부의 입장이다. 최근 문체부는 자체 감사를 통해 2018∼2022년 도서전의 수익금 통장 사본 내역 중 상당수가 삭제되거나 보이지 않게 처리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원본 통장과 비교 대조한 결과 수익금 수억 원이 누락됐다고 판단했다. 반면 윤 회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해마다 정해진 양식에 따라 수익금 항목 등을 포함한 정산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그동안 문제 된 적이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어 “지난해 문체부가 수익금 반환 의무를 강제해 2억 원을 반납했다”며 “수익금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는 다툼의 여지가 많은데도 협의나 논의 없이 (문체부가) 그 범위를 일방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했다. 또 “보조금법상 관련자들의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첫 통장 제출 때) 블라인드 처리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문체부 감사에 블라인드를 제거한 원본 통장을 냈다”고 밝혔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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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형 출판사 도움없이 홀로 서고 싶었다”

    “저작권 침해를 겪은 작가가 대형 출판사의 도움 없이도 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손원평 작가(44)는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최근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장편소설 ‘아몬드’(다즐링)를 지난달 11일 1인 출판사에서 재출간한 건 작가의 독립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 손 작가는 “1990년대 인기 만화 ‘검정고무신’을 그린 이우영 작가가 올해 3월 캐릭터 업체와의 저작권 분쟁 도중 세상을 등진 사건을 보고 창작자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며 “내가 책을 다시 펴낸 과정이 창작자들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아몬드’는 2017년 창비에서 출간돼 100만 권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2020년 아시아 작품 중 처음으로 일본서점대상 번역소설 부문상을 받고, 30개 국가에 번역 출간될 정도로 해외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창비가 손 작가와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을 지난해 12월 제작해 논란이 됐다. 올해 3월 손 작가는 창비와 출간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고, 이후 서점에선 책을 살 수 없었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위해 ‘아몬드’를 구하는 모습을 봤어요. 독자에게 다시 책을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글만 쓰던 작가가 손수 책을 제작하는 건 어려웠다. 지인이 세운 1인 출판사를 등록하고, 책에 쓸 용지를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서점 MD를 만나 책을 홍보하는 일도 익숙하지 않았다. 2020년 영화 ‘침입자’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을 때 영화 제작과 홍보를 했던 그였지만, 출판의 전 과정을 경험하는 건 또 다른 도전이었다.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려 한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힘을 낸 건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출판인들의 따뜻함 덕분이었어요. 조언을 아끼지 않는 출판계 관계자들을 보며 힘을 얻었죠.” 재출간된 ‘아몬드’는 청소년판과 성인판 등 2종이다. 청소년판은 성인판보다 글씨를 크게 했다. 소년의 얼굴을 그린 기존 책 표지와 달리 둘 다 뒷모습을 넣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몸이 붉게 물든 한 남자가 뒤를 바라보는 성인판은 스페인판 표지를 사용한 것이다. 그는 “올해 4월 처음 만난 출판 작업자가 최근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을 보며 ‘아몬드’를 생각했다”며 “‘아몬드’가 힘든 과정을 거쳐 다시 태어난 만큼 독자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뭘까. “아이돌이 주인공인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출판사 이름(다즐링·Dazzling)처럼 눈부시고 반짝이는 작품으로 독자들과 만나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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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가 득세할수록 블록체인 필요성 더 커질 것”

    가상화폐 열풍이 여전히 뜨겁지만 가상화폐를 거래할 때 해킹을 막는 기술인 블록체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블록체인은 대체 무엇이고, 앞으로 어떻게 활용될까. 박종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62)는 최근 출간한 경제경영서 ‘크립토사피엔스와 변화하는 세상의 질서’(세종·2만2000원·사진)에서 블록체인에 대한 기본적 정보부터 새로운 기술이 몰고 오는 변화까지 다양한 측면을 다룬다. 박 변호사는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블록체인이 활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가상화폐뿐 아니라 디지털 인증, 화물 추적 시스템, 위조 화폐 방지, 전자투표 등에 블록체인이 쓰이고 있다는 것. 박 변호사는 “인공지능(AI)이 득세할수록 인간의 신뢰가 주요한 자원인 블록체인의 필요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강조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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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책 읽으니 잘 때 안 무서워요”… 피서지 찾아간 ‘책읽는 버스’[작은 도서관에 날개를]

    “우리 보물 찾아볼까요?” 29일 강원 강릉시 연곡해변솔향기캠핑장. 45인승 버스를 개조해 만든 노란색 이동식 도서관 ‘책 읽는 버스’ 앞에서 최혜경 마음놀이터 심리상담연구소장이 외치자 아이들 20여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땅을 파고, 나무 아래를 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찾았다”는 외침이 들렸고, 아이들의 손엔 간식 상품이 쓰여 있는 포스트잇이 들려 있었다. 서울에서 아빠, 엄마와 온 박지환 군(12)은 “책 읽는 것도 재밌고 다른 활동이 많아 신기하다”며 “스마트폰 게임보다 ‘책 읽는 버스’에서 노는 게 좋다”며 웃었다. ‘책 읽는 버스’는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이 운영하고, KB국민은행이 후원한다. 1987년 설립된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은 전국에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이동식 도서관으로 농어촌이나 지역 축제 현장을 찾아 책 읽기 문화를 확산시키고 있다. 책 대여는 물론이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책 읽는 버스’는 8월 6일까진 연곡해변솔향기캠핑장에 머문다. 29일 방문한 ‘책 읽는 버스’엔 책 1000여 권이 비치돼 있었다. 긴 의자에 에어컨도 있어 시원하고 편안하게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잠든 밤 악몽을 꾸는 아이에게 달님이 찾아와 위로하는 내용의 그림책 ‘달님이랑 꿈이랑’(2022년·사계절)을 읽던 박이서 양(12)은 “바다에서 튜브를 타고 놀다가 책 읽으러 왔다”며 “그림책을 읽으니 밤에 잘 때 안 무서울 것 같다”고 했다. 소나무가 가득한 캠핑장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날 야외에서 진행된 행사에도 아이들이 적극 참여했다. 아이들은 동화책 ‘임플란트 대작전’(2021년·좋은책어린이)의 지문 그림 작가가 그린 ‘책 읽는 버스’ 캐릭터를 활용해 배지를 만들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재해석한 그림책 ‘슈퍼 거북’(2014년·책읽는곰) 구연동화도 들었다. 서울에서 온 이준석(12), 준혁(9) 형제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과 함께 놀아서 더 신났다”며 “내년에도 ‘책 읽는 버스’에 오고 싶다”고 했다. 어른들도 책 읽는 버스를 반겼다. 한 방문자는 양육서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2017년·예담)를 읽고 “아이를 키우며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는데 책을 읽고 위로받았다”고 책 읽는 버스에 소감을 남겼다. 에세이 ‘아무튼, 여름’(2020년·제철소)을 읽은 다른 독자는 “예쁜 하늘 아래 바다에서 수영하고 독서한 이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소감을 썼다. 경기 성남시에서 여덟 살 딸과 함께 온 김지연 씨(40)는 “아이를 위해 도서관을 찾았는데 어른이 읽을 책도 많아 뜻깊은 독서 여행으로 남을 것 같다”고 했다. 이날 기자도 ‘책 읽는 버스’에서 에세이 ‘베르베르 씨, 오늘은 뭘 쓰세요?’(2023년·열린책들)를 빌린 뒤 소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 한 번 읽은 책이지만, 휴가지에서 여유롭게 다시 읽으니 새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수연 목사는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피서지에서 책 읽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진다”며 “내 나이가 77세고 최근 다리를 다쳐 몸이 힘들지만 죽을 때까지 ‘책 읽는 버스’를 운영하고 싶다”고 말했다.강릉=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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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프라하의 봄 마주한 후, 더는 KGB로 살 수 없었다”

    1985년 5월 18일.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대령은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KGB 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막 영국 런던 지부장으로 승진해 정식 임명장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길이었다. 그런데 마중 나오기로 한 KGB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KGB 장교들이 가족과 함께 사는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당황했다. 3개의 잠금장치 중 2개만 잠그고 모스크바를 떠났는데, 3개 모두 단단히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 “KGB가 나를 감시 중이다.” 소련과 영국 양국에서 이중간첩으로 살았던 고르디옙스키의 일대기를 다룬 논픽션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 기자가 고르디옙스키를 100시간 이상 인터뷰하고, 영국 비밀정보국(MI6) 전직 요원들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해 썼다. 이중간첩의 굴곡진 인생을 한 편의 첩보 소설처럼 그려냈다. 1938년 태어난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그의 아버지는 1936년 당에 저항하는 반역자를 솎아내는 숙청 작업에 깊이 관여한 KGB 요원이었다. 그의 형 역시 KGB에서 일했다. 1962년 KGB의 한 부서로 출근하게 된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거긴 KGB 같지 않아요. 정말로 정보와 외교 쪽 일을 해요.”그의 충성심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해외 생활을 경험하면서다. 1966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소련대사관에 부임한 그는 현대적인 코펜하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련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다른 나라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이 특히 결정적이었다. KGB 요원이었던 형이 관광객으로 위장한 뒤 체코에 침투해 체코의 학자, 언론인을 납치하는 걸 보고 그는 혐오를 느꼈다.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이 생긴 그에게 MI6 요원들이 다가왔다. 그는 고민 끝에 1974년 이중간첩이 되라는 MI6의 제안을 수락했다.고르디옙스키의 주 역할은 KGB의 정보를 MI6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에서 외교관이나 사업가 행세를 하던 KGB 스파이의 신원을 빼냈다. 영국은 이 정보로 KGB 요원들을 여러 번 추방할 수 있었다. 고르디옙스키가 서방 국가에선 냉전 종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하지만 1985년 5월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KGB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2개월 후인 1985년 7월 그는 결국 소련에서 탈출했다. 평소처럼 아침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 핀란드로 밀입국한 것이다. 그가 MI6의 도움을 받아 고속도로, 소련 국경, 핀란드 국경을 이동하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다. 책 곳곳엔 고르디옙스키의 고민이 녹아 있다. 소련 내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할 것인가, 정말 고국을 배신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옳은 것인가 등 이중간첩이 겪을 법한 혼란이 담겼다. 서방에선 “뛰어난 스파이”로, 러시아에선 “야비한 배신자”로 다른 평가를 받는 건 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요즘 영국에서 가명으로 사는 고르디옙스키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 “그는 지금도 이중 생활을 하고 있다. 높은 산울타리로 에워싸인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구부정한 턱수염 노인은 그냥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자 가장 고독한 사람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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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GB 런던 지국장은 왜 이중간첩이 되었나

    1985년 5월 18일.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소속 올레크 고르디옙스키 대령은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 KGB 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막 영국 런던 지부장으로 승진해 정식 임명장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로 돌아온 길이었다.그런데 마중 나오기로 한 KGB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KGB 장교들이 가족과 함께 사는 모스크바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당황했다. 3개의 잠금장치 중 2개만 잠그고 모스크바를 떠났는데, 3개 모두 단단히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생각했다. “KGB가 나를 감시 중이다.”소련과 영국 양국에서 이중간첩으로 살았던 고르디옙스키의 일대기를 다룬 논픽션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 기자인 저자가 고르디옙스키를 100시간 이상 인터뷰하고, 영국 비밀정보국(MI6) 전직 요원들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해 썼다. 이중간첩의 굴곡진 인생을 한 편의 첩보 소설처럼 그려냈다.1938년 태어난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그의 아버지는 1936년 당에 저항하는 반역자를 솎아내는 이들을 제거하는 숙청 작업에 깊이 관여한 KGB 요원이었다. 그의 형 역시 KGB에서 일했다. 1962년 KGB의 한 부서로 출근하게 된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거긴 KGB 같지 않아요. 정말로 정보와 외교 쪽 일을 해요.”그의 충성심이 무너지기 시작한 건 해외 생활을 경험하면서다. 1966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소련 대사관에 부임한 그는 현대적인 코펜하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련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다른 나라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이 특히 결정적이었다. KGB 요원이었던 형이 관광객으로 위장한 뒤 체코에 침투해 체코의 학자, 언론인을 납치하는 걸 보고 그는 혐오를 느꼈다. 소련 체제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이 생긴 그에게 MI6 요원들이 다가왔다. 그는 고민 끝에 1974년 이중간첩이 되라는 MI6의 제안을 수락했다.고르디옙스키의 주 역할은 KGB의 정보를 MI6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에서 외교관이나 사업가 행세를 하던 KGB 스파이의 신원을 빼냈다. 영국은 이 정보로 KGB 요원들을 여러 번 추방할 수 있었다. 고르디옙스키가 서방 국가에선 냉전 종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하지만 1985년 5월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는 KGB의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2개월 후인 1985년 7월 그는 결국 소련에서 탈출했다. 평소처럼 아침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가 핀란드로 밀입국한 것이다. 그가 MI6의 도움을 받아 고속도로, 소련 국경, 핀란드 국경을 이동하는 과정은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다.책 곳곳엔 고르디옙스키의 고민이 녹아 있다. 소련 내 탄탄대로의 삶을 포기할 것인가, 정말 고국을 배신할 것인가, 자본주의가 정말 옳은 것인가 등 이중간첩이 겪을 법한 혼란이 담겼다. 서방에선 “뛰어난 스파이”로, 러시아에선 “야비한 배신자”로 다른 평가를 받는 건 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요즘 영국에서 가명으로 사는 고르디옙스키의 삶을 이렇게 전한다.“그는 지금도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높은 산울타리로 에워싸인 집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구부정한 턱수염 노인은 그냥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그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용감한 사람이자 가장 고독한 사람이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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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이언맨, 천방지축 히어로라서 사람들이 끌리는 것”

    “‘아이언맨’은 제가 낳은 아들입니다. 하하.” 26일 서울 용산구의 한 피규어 가게. 미국 만화가 밥 레이턴(70)이 손으로 성인 크기의 아이언맨 모형의 가슴을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올해 4월부터 아이언맨 팬들을 만나기 위해 그리스와 프랑스, 덴마크, 스페인 등을 여행 중인 레이턴은 이날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나와 달리 토니 스타크(아이언맨의 주인공)는 천재이자 부자인 완벽한 남자라 모두가 좋아한다”며 “아이언맨을 좋아하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거라 전혀 피곤하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언맨은 미국 만화인 마블코믹스에 등장하는 슈퍼히어로 캐릭터다. 억만장자 토니 스타크가 심장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뒤 강화 슈트를 착용한 아이언맨이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영화 ‘아이언맨’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2008년 1편 430만 명, 2010년 2편 440만 명, 2013년 3편 900만 명이 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이언맨은 국가나 대의보단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알코올 의존증에 여자 문제가 가득한 엉망진창의 삶을 살죠. 완벽한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불완전한 히어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끌리는 겁니다. 천방지축 영웅이 우리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기 때문이죠.” 1963년 처음 등장한 아이언맨은 반공 영웅 캐릭터였다. 주로 공산주의 요원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냉전 시대의 상징이었다. 등장 당시엔 인기를 끌었으나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며 생명력을 잃어 갔다. 그는 “여러 작가가 아이언맨 프로젝트에 참여했으나 뻔한 이야기만 담겨 점차 판매 부수가 줄었다”며 “아이언맨이 안 팔려서 곧 연재를 중단할지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애가 탔다”고 회상했다. “인기가 떨어진 아이언맨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는 마블의 요청에 레이턴은 1978년 아이언맨의 공동 작가이자 작화가가 됐다. 그가 1979년 내놓은 작품이 ‘병 속의 악마’(2016년·시공사)다. 그는 이 작품에서 아이언맨을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렸다. 토니 스타크가 내적 고민으로 몸부림치는 모습과 영웅으로서의 그의 고민을 담았다. 투박했던 슈트도 세련되게 바꿨다. 그는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롤링스톤스 같은 상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열한 살 때부터 집에서 혼자 아이언맨 이야기를 썼다”며 “사랑, 휴머니즘, 전쟁 등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아서왕 전설’을 읽으며 아이언맨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네 살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홀로 만화잡지를 팔았고, 1976년부터 만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기 시작해 2000년대까지 마블과 DC코믹스에서 일했다. 아이언맨의 동료인 ‘워 머신’, 개미를 모티프로 삼은 ‘스콧 랭’(앤트맨)도 그가 만든 마블 캐릭터다. 그는 “작가, 작화가, 편집자로 6400권의 만화책에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그는 “아홉 살 딸을 혼자 키울 때, 아홉 살 딸을 홀로 돌보는 스콧 랭 캐릭터를 만들었다. 내 모습이 투영됐기에 스콧 랭은 각별하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한국에 초청한 미국 만화·피규어 판매점 ‘DCC카페 다이스라떼’(서울 동대문구)에서 29, 30일 사인회를 여는 등 한국에 약 1개월 머문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본 후 한국 드라마에 빠졌다”는 그에게 한국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영화로만 아이언맨을 만난 분들이 많은데 원작 만화를 읽어 보세요. 진짜 아이언맨을 만날 수 있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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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역 중대형 서점들, 대형온라인서점에 밀려 줄폐업

    “빚이 8억 원 있습니다. 대출 이자는 오르고 매출은 떨어져 버티기 힘들었습니다.” 강원 춘천시 광장서적의 송규철 대표는 24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1999년 문을 연 광장서적은 경영 악화로 24년 만인 이달 3일 폐업했다. 광장서적은 지상 1, 2층 합쳐 430㎡ 규모로 춘천시 오프라인 도서 유통의 60%를 담당하는 지역 대형 서점이었다. 송 대표는 “그동안 경제적 어려움에도 작가와 독자의 만남 등 지역 사랑방 역할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서점을 운영했다. 하지만 저조한 매출이 나아지지 않아 고민 끝에 폐업했다”고 했다. 최근 지역 중대형 서점들이 연달아 문을 닫고 있다. 춘천시에선 올해 5월 춘천문고 만천점도 폐업했다. 춘천시에 남은 330㎡(약 100평) 이상 규모의 서점은 춘천문고 본점, 청년서점 단 2곳뿐이다. 1986년 문을 연 경기 수원시 교문서적은 아주대 학생들이 자주 찾는 대학가 서점이었지만 이달 30일 폐업한다. 1982년 문을 연 울산 남구 영광서림 역시 지난해 8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영난에 폐업했다. 1966년 문을 연 대전 중구 계룡문고 역시 임차료가 밀리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점 측은 “지난달 건물주로부터 임차료 인상을 통보받고 폐점 위기에 처했다”고 밝혔다. 대전은 앞서 대훈서적과 문경서적 등이 폐업해 지역 기반의 대형 서점으로 남은 것은 계룡문고뿐이다. 지역 서점의 잇따른 폐업은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전국 유통망을 가진 대형 온라인 서점과의 경쟁에서 뒤처진 탓으로 풀이된다. G마켓과 쿠팡 같은 유통업체가 올 들어 유료회원이 책을 1권만 사도 무료 배송해주는 정책을 시작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지역 화폐 발행 규모와 할인 혜택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코로나19가 극심할 때엔 오프라인 서점에서 지역 화폐로 책을 사면 최대 20%를 할인 또는 적립받을 수 있었다. 계룡문고의 이동선 대표는 “지역 화폐 지원 규모가 줄면서 손님도 줄었다. 코로나19가 심각할 때보다 오히려 매출이 떨어진 상황”이라고 했다. 각 지방자치단체와 출판계는 지역 서점 살리기에 나섰다. 경기도는 지역 서점 이용객이 지역 화폐로 결제할 경우 결제 금액의 10%를 환급해주는 제도를 지난달 시작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는 운영비 100만 원을 지원하는 ‘우리동네 문화서점’에 참가할 지역 서점을 이달 10일부터 모집하고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오프라인 서점만이 할 수 있는 특색 있는 프로그램으로 매력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원 속초시 동아서점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추천하는 책과 서점에서 연 행사 등을 올리며 독자들과 친밀도를 높여 인기를 끄는 것처럼 온라인 마케팅에도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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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든셋 어머니도 매일 시 필사…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어요”

    “시를 읽는 건 ‘자각’하는 과정이에요. 반복되는 삶에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죠.” 정은귀 한국외국어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54)는 시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문학소녀처럼 보였다.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21일 만난 정 교수는 “논문 쓰는 일만큼 시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글을 쓰는 일이 즐겁다”며 웃었다. 정 교수는 미국의 앤 섹스턴(1928∼1974), 영국의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 등 해외 여성 시인의 시를 국내에 소개한 문학 번역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미국 시인 어맨다 고먼(25)의 시집 ‘우리가 오르는 언덕’(은행나무·2021년),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은행나무·2022년)도 그가 번역했다. 정 교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여성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눈을 떴다”며 “한국 독자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영미 시인의 작품을 원한다는 걸 알아 번역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정 교수는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 최근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과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마음산책)이란 에세이 2편을 연달아 펴냈다. 신간에서 그는 여성 시인의 작품을 쉽고 친절하게 소개한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80)의 문장 “나는 말을 해요,/산산이 부서졌으니까요’(시 ‘꽃양귀비’ 중)를 소개하며 “말을 건네는 것은 부서진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평화란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 내는 것”(나희덕 시 ‘평화의 걸음걸이’ 중)이란 시구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외치고 나누는 평화가 얼마나 어설픈 일이었는지 실감한다”고 고백한다. 번역할 때는 원문의 표현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애쓴다. 위에 소개한 글릭의 시 원문은 “I speak/because I am shattered.” 정 교수는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꽃의 마음이 담긴 원문의 표현을 오랜 고민 끝에 우리말로 옮겼다”고 했다. 정 교수가 좋은 시를 소개하고 해설하는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2000년 그가 미국 뉴욕주립대(버펄로) 현대미국시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 위해 한국을 떠날 때 어머니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수필가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1952∼2009) 같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정 교수는 “23년 전 어머니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며 “83세인 어머니는 지금도 시를 매일 필사한다. 가끔 자신이 쓰신 시를 내게 보내오기도 한다”고 했다. 신간 ‘다시 시작하는…’에 2021년 서울시 시민대학에서 시민 여러 명이 함께 쓴 시 ‘엄마 이야기’를 소개한 것도 눈길이 간다. “엄마는 안전지대다/엄마는 선물이기도 아니기도 하다/엄마는 ‘하기 나름’이다/엄마는 핸폰이다”라는 시구에는 엄마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평범한 이들의 시각이 다양하게 담겼다. 정 교수는 “시를 쓰고 나누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기만의 엄마를 새롭게 만났다”며 “시를 만나는 일은 소중하지만 잊고 있던 존재들을 다시 품고 응시하는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그는 어머니가 쓴 시 ‘첫사랑’을 보여줬다. 정 교수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첫사랑으로 묘사했다. “삶에 짜들고 힘겨웠을 때/어머니는 나에게서 떠나가셨다”(시 ‘첫사랑’ 중) “한 편의 짧은 시에 인생이 들어 있어요. 하나의 시어, 한마디 구절을 읽을 때마다 경이로운 이유죠. 제 어머니처럼 누구나 시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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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보균 “출협, 서울도서전 수익 내역 누락” 출협 “사실 아냐, 박 장관 해임해야”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대한출판문화협회(출협)가 최근 5년간 서울국제도서전의 수익금 상세 내역을 누락했다며 실정법 위반 여부에 따라 수사 의뢰하겠다고 24일 밝혔다.박 장관은 이날 서울 용산구 문체부 서울사무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출협의 회계처리를 들여다본 결과 서울국제도서전의 수익금 상세 내역 누락 등 한심한 탈선 행태가 발견됐다”며 이같이 말했다.출판사들로 구성된 사단법인인 출협은 10억 원 안팎의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아 매년 서울국제도서전을 개최해왔다.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보조금 집행과 사용내역 등을 감독하고 있다.문체부는 “출협이 2018년부터 5년간 보조금 정산 과정에서 수익금의 상세 내역을 한 차례도 출판진흥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감독 기관인 출판진흥원이 확인 과정 없이 이를 그대로 추인해왔다”고 밝혔다. 올해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의 경우 10억원 가량의 보조금이 지원됐다. 문체부는 “출협은 도서전 기간 입장료와 출판사 등 참가 기관의 부스 사용료를 받아 수억 원대의 수익금을 얻었다. 하지만 감사 과정에서 출협이 입출금 내역 일부를 지우고 제출하는 등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밝혔다. 문체부는 제출한 수익금 내역에서 지워진 상당 부분이 해외 참가 기관으로부터 받은 참가비로 밝혀졌으며 출협은 감사 전까지 이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박 장관은 “이런 의혹 뒤에 출협과 출판진흥원의 묵시적인 담합이 있었는지, 이권 카르텔적 요인이 작동했는지를 면밀히 추적할 것”이라며 “조사 결과 보조금법 등 실정법 위반 혐의가 밝혀지면 출협 책임자에 대해 관계 당국에 수사를 의뢰하고, 출판진흥원에 대해서도 정산 업무 소홀에 대한 감독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윤철호 출협 회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반박했다. 윤 회장은 서울국제도서전의 수익금 상세내역 누락이 있다는 박 장관의 지적에 대해 “출협은 보조금 정산 규정에 따라 정산 완료 및 회계 검사를 통해 필요한 자료를 모두 제출했다. 정산 완료 확정 통보 공문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으로부터 수령했다”고 밝혔다.윤 회장은 또 “출협은 최근 십수 년간 서울국제도서전과 관련해 문체부와 한국출판산업진흥원의 승인 없이 정산을 마친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문체부의 출협 방문 감사 시에는 아예 관련된 모든 통장 자체를 공개했다”고 했다. 이어 “출협은 지원받고 있는 국고보조금의 사용내역과 관련하여 현재 박보균 장관이 문제 삼는 2018년부터 올해까지 그리고 그 이전에도 문체부의 담당자가 원하는 바에 따라, 공개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공개해왔다”며 “2018년과 2019년에는 수익금 상세 내역 제출 요청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박 장관이 출협이 비협조적이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 윤 회장은 “출협은 문체부의 산하 기관이 아니다”며 “통장 내역을 제출해달라고 요청에 응한다고 해서 출협의 다른 거래 내역까지 모두 밝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출협이 서울국제도서전 수익금의 초과 이익을 국고에 반납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박 장관이 비판한데 대해 윤 회장은 “서울국제도서전은 국가행사가 아닌 민간의 행사”라며 “행사에 일부 국고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수익금의 초과 이익은 국고에 반납하라는 의무’를 부과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윤 회장은 “공직자가 더 이상 대립과 갈등, 의혹의 증폭에 몰두하지 말고 문화발전의 본령에 집중하기를 바란다”며 “박 장관의 해임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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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영희 교수처럼 되라는 어머니 말씀, 나를 수필가로 만들었다”

    “난 네가 연구자이자 수필가였던 장영희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1952∼2009) 같은 분이 됐으면 좋겠단다.” 정은귀 한국외대 영미문학·문화학과 교수(54)의 어머니는 2000년 정 교수가 미국 뉴욕주립대(버팔로) 현대미국시 박사 과정을 위해 한국을 떠날 때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가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에게 시를 소개하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한 것이다. 23년이 지나 정 교수는 15일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민음사), 20일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마음산책) 에세이를 2편 연달아 펴냈다. 지난해 4월 에세이 ‘딸기 따러 가자’(마음산책)를 펴낸지 1년 3개월 만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그는 시에 대한 순수한 믿음을 간직한 문학소녀였다. 그는 “23년 전 어머니의 말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며 “논문 쓰는 일만큼 시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글을 쓰는 일이 즐겁다”며 웃었다. “83세 어머니는 아직도 시를 매일 필사하세요. 가끔 자신이 쓰신 시를 제게 보내오기도 하고요. 호호.” 그는 미국의 앤 섹스턴(1928~1974), 영국의 크리스티나 로세티(1830~1894) 등 해외 여성 시인의 시를 국내에 소개한 문학 번역가로 유명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국 시인 어맨다 고먼(25)의 시집 ‘우리가 오르는 언덕’(2021년·은행나무), ‘불러줘 우리를, 우리 지닌 것으로(2022년·은행나무)를 번역한 것도 그다. 그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많은 여성 시인의 작품을 읽으며 눈을 떴다”며 “한국 독자들이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영미 시인의 작품을 원한다는 걸 알아 번역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고 했다.신간에서 그는 여성 시인의 작품을 쉽고 친절하게 소개한다. 20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80)의 문장 “나는 말을 해요,/산산이 부서졌으니까요’(시 ‘꽃양귀비’ 중)를 소개하며 “말을 건네는 것은 부서진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평화란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 내는 것”(나희덕 시 ‘평화의 걸음걸이’ 중)이란 시구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외치고 나누는 평화가 얼마나 어설픈 허투루 일이었는지 실감”한다고 고백한다. “시를 읽는 건 ‘자각’하는 과정이에요. 반복되는 삶에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한 것에 새롭게 눈을 뜨게 해주죠.”그가 2021년 서울시 시민대학에서 시민 여러 명이 함께 쓴 시 ‘엄마 이야기’를 소개한 것도 눈길 간다. “엄마는 안전지대다/엄마는 선물이기도 아니기도 하다/엄마는 ‘하기 나름’이다/ 엄마는 핸폰이다”라는 시구에는 엄마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평범한 이들의 시각이 다양하게 담겼다. 그는 “시를 쓰고 나누는 과정에서 모두가 자기만의 엄마를 새롭게 만났다”며 “시를 만나는 일은 소중하지만 잊고 있던 존재들을 다시 품고 응시하는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 그는 어머니가 쓴 시 ‘첫사랑’을 보여줬다. “삶에 짜들고 힘겨웠을 때/어머니는 나에게서 떠나가셨다”(시 ‘첫사랑’ 중)는 시구는 정 교수의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를 첫사랑으로 묘사한다. “한 편의 짧은 시에 인생이 들어있어요. 하나의 시어, 한마디 구절을 읽을 때마다 경이로운 이유죠. 제 어머니처럼 누구나 시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걸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습니다.”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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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벽주의 혹은 유머… 밀란 쿤데라의 추억[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대학생 때 처음 산 문학 전집은 12일 향년 94세로 세상을 떠난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2023) 전집이다. 15권짜리 전집엔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 에세이 ‘만남’ ‘커튼’ 등 한국 독자에게 낯선 작품이 포함돼 있다. 사실 이런 작품들은 대표작인 장편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처럼 잘 읽히진 않았다. 하지만 쿤데라의 다양한 작품을 읽는다는 괜한 동경 때문에 아직도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밀란 쿤데라 읽기’는 2013년 쿤데라 전집이 완간됐을 때 출간된 해설집이다. 작품 해설뿐 아니라 민음사 직원들이 쓴 출판 뒷이야기가 재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8년 송동준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번역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됐다. 송 교수가 번역한 제목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故) 박맹호 민음사 회장(1934∼2017)이 “첫머리에 ‘존재’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겁다”며 바꾸기를 제안했다. 출간 후 한동안 ‘참을 수 없는…’ 시리즈가 유행했을 정도니 박 회장의 선구안이 ‘쿤데라 신드롬’에 일조한 셈이다. 민음사에서 쿤데라 전집을 펴내기로 한 건 2011년이다. 전집을 만들 때 가장 공을 들인 건 표지다. 편집부가 고른 표지는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그림이었다. 마그리트의 ‘중산모자를 쓴 남자’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 사비나가 알몸인 채 중산모자만 쓰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장면이 떠오른다는 이유다. 뒤틀린 현실 속에서 삶의 본질을 보려는 쿤데라의 시선이 마그리트 그림과 어울린다는 판단도 있었다. 쿤데라는 전집 시안을 보고 “이전에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며 찬성했다. 작품에 담긴 여러 사실관계를 다시 확인할 때마다 쿤데라는 “내가 써 놓은 그대로 하면 된다”고 자신했다고 하는데 그의 완벽주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박성창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20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쿤데라를 직접 만난 기억을 꺼내놓은 대목도 눈길이 간다. 쿤데라는 당시 “작품 밖에서 작품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몹시도 거북하고 난처한 일”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비롯해 외부 노출을 극도로 꺼리며 살아온 그의 삶을 대변하는 말이다. 헤어질 때 사진을 찍자는 요청에 대해 쿤데라는 “사진 공포증이 있다”면서도 “대신 선물로 귤 하나를 들고 가라”며 장난을 친다.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작품이 삶 그 자체인 것처럼 느껴진다. 타계 소식을 듣고 그의 전집을 살까 했다가 망설이는 이들이라면 쿤데라가 한국 독자들을 위해 고른 책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웃음과 망각의 책’은 형식의 자유분방함이 두드러진 작품이죠. ‘삶은 다른 곳에’는 약간 어려울지도 모르겠고 ‘이별의 왈츠’는 반대로 쉬울지도 모르겠어요. 전자는 무거움이 가벼움과 결합되지 못했고 후자는 가벼움이 무거움을 만나지 못했어요.”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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