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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도 기사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정보 보고를 한다. 보고하는 정보는 기사화하기에는 설익은 단편적인 팩트일 수도 있고,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이어서 확인이 필요한 얘기일 수도 있다. 전해 들었으면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함께 보고해야 신뢰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세계일보가 청와대의 정윤회 씨 동향 보고 문건을 공개했다. 문건 중 정 씨가 2013년 송년 ‘십상시’ 모임에서 지시한 내용을 다뤘다는 두 문장은 각각 ‘한다 함’과 ‘하였다 함’이란 말로 끝난다. 보고자가 직접 확인한 게 아니라 전해 들었다는 얘기다. 보고자가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보고서에는 ‘제시하고 있음’처럼 직접 확인한 듯 끝맺은 내용도 없지 않다. 청와대는 그것까지 포함해서 “풍문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했다. 이 해명을 믿든 안 믿든 보고자가 직접 확인한 사항과 전문(傳聞)을 의식적으로 구별해 쓴 것은 분명하다. 다만 전문에 출처가 없어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그것이 다시 직접 확인한 것처럼 쓴 내용의 신빙성까지 떨어뜨린다. 보고서에서 정작 흥미로운 것은 그 속에 나타난 ‘찌라시’에 대한 인식이다. 정 씨의 지시 사항을 담은 두 문장이 모두 “정보지(속칭 찌라시) 관계자들을 만나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정보 유포’를 지시…” “정보지 및 일부 언론에서 ‘바람 잡기’를 할 수 있도록 유포를 지시…” 운운하고 있다. 내게 이것은 찌라시에 관한 액자(額子) 구조의 보고서로 읽힌다. 정 씨 관련 내용은 정 씨 모임의 성원을 ‘십상시’의 10명에 맞춰 현실을 역사적 사실에 끼워 넣은 듯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찌라시를 모아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찌라시적이라고 볼 만한 구석은 많다. 그 내용이란 것도 찌라시를 가지고 뭔가 해보겠다는 것으로, 이 경우는 찌라시로 여론을 조작해 VIP를 움직이겠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찌라시가 지배하는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진실은 찌라시에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결국 찌라시에 의해 움직입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만이 아니라 이제 엄밀해야 할 청와대의 보고서에조차 찌라시의 문체가 섞여들었다. 출처 표기 없이 ‘한다 함’이라고 쓴 ‘믿거나 말거나’ 문체 말이다. 언론도 찌라시에 의해 움직인다. 일본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전 지국장은 찌라시를 토대로 선데이서울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기사를 썼다. 그보다 앞서 찌라시에서 본 정 씨 소문을 무슨 대단한 것을 들은 양 쓴 한국 기자도 있었다. 찌라시는 매력적이다. 찌라시는 외딴 섬처럼 떨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단번에 연결하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물속의 숨겨진 연결고리를 찾아 들어가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물 밖에서 상상한 것과 다른 현실이 있다. 찌라시에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는 저항 언론의 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는 아니다. 찌라시는 다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찌라시에는 내가 몰랐던 내 회사 얘기도 종종 있었고 나중에 보면 그게 사실인 것도 있어서 놀란 적도 있다. 찌라시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다. 거짓은 진실이란 양념이 적절히 뿌려져 있을 때 더 효과적인 거짓으로 작동한다. 정보를 다루는 데는 맥시멀리즘(maximalism)적인 방식과 미니멀리즘(minimalism)적인 방식이 있다. 전자는 가능한 한 많이 믿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는 것만 빼는 것이고, 후자는 가능한 한 적게 믿고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는 것만 더하는 것이다. 전자는 신중하지 못해 보이고 후자는 한가해 보인다. 하지만 찌라시가 세상을 흔들수록 미니멀리즘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배심은 대(大)배심과 소(小)배심으로 나뉜다. 대배심은 기소 여부를 결정하고 소배심은 유무죄 평결을 내린다. 배심제는 영국에서 시작돼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로 퍼져나갔는데 오늘날은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다. 대배심으로 말하자면 영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지고 미국에만 남아있다. 미국 미주리 주 퍼거슨 시에서 비무장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게 대배심의 불기소 결정이 내려지면서 다시 폭동이 일어났다. ▷대배심은 소배심보다 중요해서 대배심이 아니다. 만장일치로 결정하는 소배심과는 달리 과반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배심원 숫자가 소배심보다 많아 대배심이다. 브라운 사건의 대배심은 백인 9명, 흑인 3명 등 12명으로 구성됐다. 흑백 구성만 보면 인종적 편견이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고 의심할 수 있지만 배심 자체는 선거인 명부에서 무작위로 선정된 것이어서 공정하지 않다고 말하기 어렵다. 검사 혼자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면 더 심각한 폭동이 일어났을 수 있다. 그나마 대배심 결정이라 이만한 정도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대배심은 없지만 검찰은 기소 여부 결정에 논란이 예상될 경우 대배심처럼 구성된 시민위원회에 의견을 묻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음란행위를 하다 여고생한테 들키는 바람에 붙잡힌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에 대해 최근 검찰이 시민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기소유예했다. 검찰의 제 식구 봐주기라는 비판이 없지 않지만 시민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한 덕분에 비판의 강도가 덜하다. ▷배심은 사법절차에 민주성을 강화한다. 우리나라 법원은 2008년 국민참여재판, 검찰은 2010년 시민위원회를 도입했다.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이든 시민위원회든 그 결정이 권고적 효력밖에 없어 소배심과 대배심에 이르지는 못한다. 시민위원회는 검사 요청이 있을 때만 열린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법원과 검찰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어 사실상 소배심과 대배심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시는 다음 달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여기에 동성애 차별 금지 조항이 들어간다고 해서 떠들썩하다. 논란을 떠나 이런 헌장은 왜 만드는 건지 궁금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로 불려 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자신의 주특기인 토건 분야의 청계천 공사로 일어선 것처럼 박 시장이 인권을 트레이드마크 삼아 대선 도전의 자락을 까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유엔에는 세계인권선언이 있고 유럽에는 유럽인권협약이 있다. 모두 국가 단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유엔 세계인권선언은 우리나라가 승인한 국제법으로 이미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고 있다. 각 지역이나 국가는 여기에 더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담은 인권선언을 할 수도 있겠다. 유럽 지역의 유럽인권협약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가 국가를 뛰어넘어 인권선언이니 뭐니 한다는 건 어딘지 제격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박 시장은 군사독재 시절 정치적 피해자들의 인권 보장에 앞장섰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인권 보호에 관심을 기울였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시절 ‘친구사이’와 같은 동성애 단체에 많은 지원을 했다. 그가 얼마 전 미국 방문 중 샌프란시스코 지역 신문인 ‘이그재미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아시아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첫 번째 나라가 됐으면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연장선에서 나온 발언이다. ▷박 시장은 북한 인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인권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은 나라지만 북한 주민의 인권에 대해서만큼 많겠는가. ‘∼하는 만큼 ∼한다’는 말이 있다. 서울시민의 인권은 굳이 박 시장이 나서지 않아도 국가 전체와 보조를 맞춰 점진적인 진전이 이뤄지고 있다. 박 시장이 동성애 등 서울시민의 새로운 인권에 관심을 갖는 만큼 북한 인권에도 관심을 보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권 활동에 동조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힘깨나 쓰는 사람을 ‘주먹’이나 ‘어깨’라고 부르는 것은 신체의 한 부분을 통해 어느 사람을 가리키는 제유법(提喩法)적 표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깡패란 말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의 김두한은 어깨 혹은 일본어로 ‘가다’ 정도로 불렸다. 깡패는 광복 후 사회 혼란을 틈타 정치권력과 결탁해 폭력을 휘두르던 동대문파 ‘이정재’ 같은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처음 쓰였다. 깡패는 영어 갱스터(gangster)에서 온 깡과 한자어로 무리를 뜻하는 패(牌)를 결합한 말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의 어원은 늘 그렇듯이 정확하지는 않다. ▷양아치는 깡패와는 계보가 다르다. 양아치는 거지를 뜻하는 동냥아치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불쌍한 거지에 못된 거지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것은 19세기부터다.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일부 극빈자들이 장터에 떼로 몰려다니면서 장사를 방해하는 수법으로 먹을 것을 뜯어냈다. 떼거지란 말이 이때 생겼다. 근대화 이후에도 떼거지는 넝마주이 형태로 살아남았다. 이런 거지를 양아치라고 불렀고, 오늘날 체격으로나 뭐로나 깡패도 못되는 주제에 깡패 짓 하고 다니는 불량배를 양아치라고 부르게 됐다. ▷그제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조정소위에서 박근혜표 창조경제 예산의 한 항목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책상을 내리치며 “그만하세요”라고 언성을 높이자 새정치민주연합 강창일 의원이 “왜 얘기하는데 시비를 걸고 그래? 저 ×× 깡패야. 어디서 책상을 쳐. 저런 양아치 같은…”이라고 받아쳤다. ▷누가 시비의 원인을 제공했는지 따지자면 끝이 없다. 강 의원의 욕은 김 의원이 책상을 내리친 데서 비롯됐고, 김 의원이 책상을 내리친 것은 새정치연합 간사인 이춘석 의원이 불필요하게 정회를 요청하며 태업하는 태도를 보여서 그런 것이고, 이 의원은 새누리당이 무리한 예산을 요구해 그랬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 비교해볼 수 있겠지만 국민의 눈엔 누가 깡패고 누가 양아치냐 따지는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고3 문과생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지난주 치러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국어 영어 한국사 문제를 풀어봤다. 이들 과목에 대한 지식은 기자 직업을 수행하는 데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다만 32년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 직업 경험으로 봤을 때 수능이 측정하는 지식이 적절한가라는 관점에서 풀어봤다. 영어는 45개 문제 중 한 개만 틀려도 1등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출제됐다. 그렇다고 변별력을 높이기 위해 더 어렵게 낼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어 시험 시간 70분 중 50분은 읽기 평가 28개 문제에 할애된다. 2분도 안 되는 시간에 결코 짧지 않은 1개의 지문을 읽고 답해야 한다. 나 자신도 푸는 데 시간이 빠듯했다. 지문은 아주 까다롭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 시간에 그 정도 수준의 지문을 읽고 답할 수 있다면 내 경험상 원서를 읽는 데 무리 없는 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중학생만 돼도 학원에서 가르치는 영어 지문이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중학생에게 이런 지문이 어려운 것은 영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문 지식이 없어서다. 영어는 영어를 평가해야지 전문 지식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영어의 변별력을 더 높이려 한다면 읽기 평가의 수준을 더 높일 것이 아니라 듣기 평가의 수준을 높이거나 쓰기 평가를 새로 도입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국어는 어렵게 출제됐다. 1등급의 커트라인이 91점 이하로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내가 풀어본 느낌은 단지 어렵다는 점을 넘어 ‘그 어려움이라는 게 굳이 극복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있는 어려움인가’라는 회의가 들었다. 나 역시 기자로서 25년 가까이 글과 씨름해 왔지만 의미 자체가 애매모호한 문제를 여러 개 발견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보면 오리이고 또 어떻게 보면 토끼인 그림(오리 토끼)을 제시하고 이 그림을 통해 배운 바를 ‘비유를 활용해 한 단락으로 써보자’는 문제가 있다. 정답에는 비유법이 쓰여져 있다. 그렇다면 ‘비유법을 활용하라’고 써야 한다. 비유를 활용하라고 해서 나는 ‘오리 토끼’라는 비유를 꼭 거론하라는 뜻인가 오해했다. 문제 풀이는 어렵더라도 문제의 뜻은 명확해야 한다. 요즘 국어에는 문학 외에 비문학 문제도 나온다. 기자도 비문학에 해당하는 글은 많이 보고 쓰는 직업이다. 비문학 문제의 지문을 보면 고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는 지문인지 의문이 든다. 헤겔과 뒤르켐의 시민사회론을 비교하는 지문에 대해 말하자면 헤겔의 시민사회론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뒤르켐은 그 자신이 시민사회란 말을 쓰지 않았고 그의 이론을 시민사회론의 관점에서 보는 것도 생소하다. 칸트의 미감적 판단력을 설명하는 지문은 용어(주관적 보편성 등) 자체가 독일 관념 철학에 특수한 것이어서 비전공자는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정도는 몰라도 실천이성비판이나 판단력비판의 문제를 고3 수준에서 다루는 것은 무리다. 한국사는 20개 문제 중 14개가 근현대사, 그것도 개화 이후의 역사에서 출제됐다. 한국사 교과서 체제가 그렇다고 하지만 직업상 다른 직업보다는 근현대사를 더 많이 다루는 기자의 관점에서 봐도 근현대사의 비중은 지나치다. 근현대사 문제 중에서는 강한 경향성이 느껴지는 것도 적지 않았다. 신탁통치란 말은 한마디도 없이 미소공동위원회 개최로 임시정부 수립 전망이 밝았던 것처럼 묘사하고 그것이 반탁 운동 때문에 중단됐다는 암시를 준 문제와 김원봉의 레닌주의적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중점적으로 다룬 문제 등이 그렇다. 한국사 교과서의 근현대사 비중 문제와 경향성이 수능에도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는 느낌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전당포는 항구다.’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다. 문학의 비유(比喩)는 결합하는 두 관념의 거리가 멀수록(멀다고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긴장감이 커져 기억에 남는다. 뉴스도 문학의 비유와 비슷한 데가 있다. 어떤 일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 어떤 일을 했을 때 화제가 된다. 1997년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이진영 씨가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올해 수석 합격의 영광은 현직 경찰이 차지했다. 경찰대 출신의 김신호 경위는 “3년 4개월 동안 매일 오전 5시에 경찰서에 출근해 업무시작 전까지, 업무가 끝난 뒤 다음 날 오전 1시까지 하루 평균 9시간씩 책과 씨름했다”고 말했다. 경찰대 출신은 경위로 시작해 빠르면 4, 5년, 늦어도 7, 8년이면 경감으로 승진한다. 2002년 임용된 김 경위는 12년째 경위다. 사시 공부를 시작한 남모를 사연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법시험이 끝나면 훈훈한 화제의 인물이 나오곤 한다. 10년 전인 2004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장승수 씨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막노동판 일꾼 출신의 그는 1996년 서울대 법대에 수석 합격했다는 소식을 공사판에서 들었다. 장 씨는 합격 소감으로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고 말해 공부가 힘들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했다. 그는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사시에 합격했고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고시로 인생역전을 꿈꾸던 사람들이 모여들던 곳, 신림동 고시촌이 시들해졌다. 한때 한 해 1000명이 넘던 사시 합격자가 점점 줄어 올해는 204명이다. 2017년이 되면 사시 자체가 폐지된다. 2008년부터 신입생을 뽑지 않은 서울대 법대도 2017년 말 사라진다.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은 등록금이 비싸고 다른 일과 병행하기도 어렵다. 인생역전의 꿈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사시 존치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사시를 남겨 두려는 변호사시험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지만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기요틴은 프랑스 혁명 당시 죄수의 목을 자르던 형벌 기구다. 공포 정치의 상징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은 파리 의대의 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가 인도적인 처형을 위해 고안한 것이다. 오늘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잔인한 참수형을 떠올려보면 날카로운 칼날로 단번에 목을 자르는 사형이 당시 얼마나 인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음도 두렵지만 죽음에 이르는 고통도 두렵다. ▷현대 의학은 생명을 연장시켰으나 어떻게 살 것인가 외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새로운 숙제를 던진 것도 사실이다. 말기 암 환자가 가족이었던 사람들은 암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지 알고 있다. 고통이 증가함에 따라 모르핀 투여량은 늘어나고 환자는 비몽사몽 상태가 돼 지내다 어느 순간 인사불성이 되고 결국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을 놓아버린다. 이런 환자의 모습을 봤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대신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누구나 ‘존엄한 죽음’을 한 번쯤 생각해볼 것이다. ▷미국 여성 브리타니 메이너드(29)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예고한 날에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먹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다. 뇌종양으로 시한부 삶을 살던 메이너드는 증인 입회하에 수차례 안락사에 동의하고 복수의 의사 진단을 받아 극약을 처방받았다. 그는 ‘버킷 리스트’대로 그랜드캐니언 여행을 다녀온 뒤 잠시 상태가 호전돼 죽음을 연기할 생각도 있었으나 병세가 악화되자 예정대로 결행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죽음을 결심할 때, 또 침대에서 약을 삼키려 할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 ▷존엄사는 엄밀한 개념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 연명 조치를 하지 않는 소극적 안락사만 존엄사로 본다. 미국 캐나다의 일부 주와 네덜란드 등 몇몇 나라에서는 환자의 동의하에 환자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끊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자발적 안락사까지 존엄사에 포함시킨다. 우리나라도 존엄사의 범위를 좀 더 확대하는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취향이란 본래 사람마다 다 다른 것이다. 신해철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그에 대한 칭송이 아무리 죽음 직후라고 해도 어딘지 과도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 과도함에는 정치적 동기도 없지 않아 보인다. 신해철보다 4, 5년 윗세대인 나는 넥스트 시절의 프로그레시브 메탈 록을 한 신해철부터 기억이 난다. 내 또래는 음악적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중학교 시절을 유신 말기에 보냈다. 그때는 유신의 영향으로 트로트 고고라는 비정상적 장르가 유행했다. 한국 가요는 들을 게 없었다고 생각했다. ‘박원웅과 함께’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같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1960, 70년대 서구 록을 음악 공부하듯이 찾아 들었다. 그런 세대에게 이미 록의 시대가 가버린 1990년대 신해철이 들려주는 록은 음악적으로 뛰어났는지는 몰라도 전혀 프로그레시브하게 들리지 않았다. 넥스트(next)가 아니라 한물간 프리비어스(previous)의 철지난 모방이었다. 그가 2002년 뜻밖에 노무현 지지 연설에 등장했다. 그가 스스로 소개한 것처럼 정치에 거리를 두고 산 자신의 기존 가치를 버리고 나선 것이다. 민주화 시위가 벌어지고 전대협이 만들어진 1987년 서강대 철학과에 들어간 그는 1988년 강변가요제, 1989년 대학가요제에 잇따라 출전한 것으로 봐서 당시의 학생 대중과도, 종로 파고다의 메탈계와도 다른 정서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저항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성 체제의 사다리에 올라타려고 노력했던 이 음악가가 세상을 향해 “남을 밟고 일어서고, 내가 남을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히는 맹수 우리”라고 공격하며 노무현을 지지하니 어리둥절했다. 2009년 노무현 추모 콘서트의 신해철을 유튜브에서 봤다. 그가 관객을 향해 묻는다.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요?” 관객석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등 갖가지 대답이 튀어나온다. “이명박? 한나라당?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적들을 탓하기 전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건지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씹××들 욕을 해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대 뒤로 움직이다가 갑자기 돌아서며 (아마 적들을 향해서겠지만) “개 × 같은 ××들”이라고 소리 지른다. 인텔리겐차 양아치, 그가 스스로를 규정한 말이다. 위대한 아티스트라는 칭송은 신중현과 김민기 같은 음악가를 위해 남겨둬야 한다. 신중현의 록은 지금 들어도 세련됐지만 어느 곡이나 ‘지금 여기’의 한국이 느껴진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악이라는 것, 결코 철학이 돼서는 안 된다. 무슨 철학이라도 하는 듯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는 것은 대중음악이 아니다”라는 그의 말은 모든 록 가수가 새겨들었어야 할 말이다. 김민기는 말로 저항적이지 않았다. 최고의 데모가였던 ‘늙은 군인의 노래’는 그가 군대 시절 전역하던 상사를 위해 만든 곡이고 ‘친구’는 물에 빠져 죽은 후배를 그리워하며 만든 곡이다. 다만 그 곡에 담긴 감정이 무엇과 연결해도 통하기 때문에 시대를 뛰어넘는 저항가요가 됐다. 신해철이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는 포도 품종으로 치면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사람이다. 보르도의 최고 등급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들어진다. 카베르네 소비뇽의 강력한 타닌 성분은 다루기는 힘들지만 잘 다루기만 하면 최고의 와인 맛을 선사한다. 아마도 신해철의 타닌은 너무 강해서 더 숙성이 돼야 가수로서 완성되는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50세 혹은 60세의 신해철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튤립 말고도 떠오르는 게 많다. 제방 구멍을 온몸으로 막아내 나라를 구했다는 동화 속 아이부터 철학자 에라스뮈스, 화가 렘브란트와 반 고흐를 거쳐 안네 프랑크, 헤이네컨(하이네켄) 맥주까지. 우리 역사에도 조선시대 박연이라 불린 벨테브레이와 하멜이 있었다. 둘 다 대양을 떠돌다가 표류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ander)’이었다.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든 히딩크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얀 뤼프 오헤르너 씨도 우리에겐 기억해둘 네덜란드인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서 태어났으나 그곳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 수용소에 끌려갔다. 2007년 미국 의회 사상 처음 열린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에게 첫 경험이 갖는 의미는 큽니다. 그 첫 경험이 성폭행, 그것도 군위안소에서의…. 내 인생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일본을 방문 중인 빌럼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이 아키히토 일왕 앞에서 “우리 민간인과 병사가 포로로 노동을 강제당하고 자부심에 상처받은 기억이 여러 사람의 생활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며 두 나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아픈 역사도 모두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해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가한 고통을 언급한 것이다. 그중 가장 큰 고통을 받은 사람이 오헤르너 씨 같은 여성일 것이다. ▷400년 전 일본에 근대 문명을 전해준 네덜란드는 일본인에게 최초의 서양인 교사나 다름없다. 네덜란드 국왕의 발언은 아픈 과거는 없었던 것으로 묻어버리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기억할 때 넘어설 수 있다는 의미다. 안네 프랑크는 정확히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다. 독일에서 박해를 피해 넘어왔으나 결국 나치에 잡혀 희생된 유대인 가족의 딸이었다. 나치에 유화적이었던 네덜란드는 이 일을 큰 수치로 여긴다. 수치를 아는 네덜란드가 수치를 모르는 일본에 한 훈계였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난 어릴 적 대구 근방에 살았기 때문에 삐라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을 서울 근처나 서울 이북에서 산 친구들 얘길 들어보면 삐라를 주워 파출소에 갖다 주면 경찰 아저씨가 기특하다고 연필도 한 자루씩 주고 그랬던 모양이다. 살을 에는 듯한 추운 겨울에도 아이들은 삐라를 줍는다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연필 한 자루가 귀하던 시절, 삐라를 보고 북한을 동경해 월북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다. ▷삐라를 신물 나게 본 것은 1980년대 후반 군 복무할 때다. 그때는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조작된 인물이라고 선전하는 삐라가 주로 뿌려졌다. 김현희의 사진과, 김현희가 어린 시절 자기 모습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진의 귀 모습을 비교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삐라만 보고 있으면 김현희가 가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3년 MBC PD수첩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남편 심재환 변호사를 출연시켜 김현희는 가짜라고 주장하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그 내용이 삐라에 나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삐라는 영어로 전단을 뜻하는 빌(bill)에서 나왔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뿌린 빌에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 말로 조각을 의미하는 히라(片)를 결합해 삐라라고 불렀다는 설이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삐라는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상대편의 무지를 이용해 선전 선동을 하는 데 쓰이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정보가 차단된 상대편에게 진실을 알리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 일본 주민에게 대피하라고 알린 빌이 그랬다. ▷북한은 이제 삐라를 뿌릴 필요도 없다.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남한 사회에서의 심리전이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은 온라인에서조차 외부와 차단돼 있다. 여기에 심리전에서 남북한의 비대칭이 발생한다. 북한이 우리 군도 아니고 민간단체가 살포하는 삐라에 대해 선전포고 행위라고 주장하고 총으로 위협한다. 과거 북한이 그렇게 뿌려대던 삐라는 다 무엇이었는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손석희 씨는 지난주 금요일 오후 8시 JTBC 뉴스를 다음과 같은 앵커 멘트로 시작했다. “경기도 성남 판교 테크노밸리에서 걸그룹 공연 도중 환풍구가 붕괴하면서 25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대부분이 안타깝게도 학생이었는데요.” 난 손석희 뉴스의 애청자는 아니다. 손석희 뉴스를 본방송으로 본 것은 아니고 트위터에서 “손석희 뉴스는 성남 참사 소식으로 1시간 반을 온통 채웠다…박근혜 소식으로 뉴스를 치장한 공중파보다 더 재난방송 같다”는 글을 읽고 관심이 가 스마트폰에서 ‘다시 보기’로 봤다. 손 씨가 뉴스를 시작한 오후 8시는 사상자 중 단 한 사람의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던 시간이다. 그는 희생자를 학생으로 볼 어떤 근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희생자가 학생이라고 단정하면서 뉴스를 시작했다. 학생으로 추정된다도 아니었다. 그는 젊은 학생들이 희생됐다는 점을 이후에도 수차례 강조했다. 뉴스가 한 15분쯤 흐른 뒤 분당차병원에 나가 있던 기자가 35세 남성, 29세 여성, 40대로 추정되는 남성이 사망했다며 사망자의 인적 사항을 처음으로 전했다. 손 씨에게서 “사망자가 학생이 아니네요. 안타까운 죽음이 더 있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왔다. 학생이 대부분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망자도 있다니 안타까움이 더하다는 그런 반응이었다. 이후 일부 부상자 신원도 밝혀졌는데 10대는 없었다. 뉴스가 50분쯤 흐른 뒤 한 목격자가 전화를 했다. 목격자는 손 씨가 학생 피해를 중심으로 언급하는 게 불만이었던지 “학생들도 있긴 했지만 학생들보다 회사원들이 많았다”며 “수정해 주고 싶어 전화했다”고 말했다. 그 전에 환풍구 주위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어 퇴근길에 들른 직장인이 많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손 씨는 그제야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많다는 예단(豫斷)을 버린 것으로 보이는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사망자 16명과 부상자 11명의 신원은 사고 당일 밤 12시쯤 돼서야 다 밝혀졌다. 10대는 사망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중에도 없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많은 방송사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냈다. 그것이 수정되기까지는 약 20분이 걸렸다. 손 씨가 잘못된 예단을 수정하는 데는 40∼50분이 걸렸다. 전원 구조 오보는 경찰 교신과 경기도교육청의 문자메시지 내용이 근거라면 근거다. 손 씨의 예단에는 그런 근거도 없다. 난 집이 분당이다. 사고 당일 오후 7시가 조금 넘어 걸그룹 공연 중 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 걱정이 돼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히 집에 있었다. 포미닛이 온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고 했다. 혹시 카톡에 학교 친구들 중 다친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도는 건 없냐고 하니까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학생들이 공연에 간다면 몇 시간 전부터 가서 앞자리 차지하고 기다리지 환풍구 같은 데 올라가서 보지는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누구나 걸그룹 공연 중 사고가 났다면 학생들이 다쳤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기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예단을 갖고 현장에 접근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기자라면 예단은 머릿속에만 갖고 있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취재에 들어가 보면 예단을 뛰어넘는 일이 늘 있기 때문이다. 그날 희생자를 학생이라고 단정한 방송사는 손석희 뉴스가 유일하다. 아나운서 출신인 그가 취재를 해본 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다만 그는 뉴스 끝부분에 환풍구 붕괴 ‘사건’이라고 말했다. 분명 말실수다. 붕괴는 보통 사고이지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말실수에 숨은 진심이 드러나기도 한다. 사고를 사건으로 보고 싶었던 마음에 섣불리 예단을 말해버린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성경에 ‘남색(男色)하는 자’라는 말이 나온다. 동성애를 뜻하는 남색은 영어로는 소도미(sodomy)다. 이 단어의 기원은 성경에 나오는 타락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의 소돔에 있다. 성경에 동성애를 한 자는 ‘죽일지니라’라고 돼 있다. 사도 바울은 동성애를 타락의 극치로 봤다. 중세 가톨릭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도 동성애는 중죄로 취급했다.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뱅은 물론이고 계몽된 칸트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에서 동성애에 대한 관용은 20세기 들어와 개신교에서 시작됐다. 1916년 게이들을 위한 교회가 세계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생겼다. 게이를 처음 성직자로 임명한 것은 1964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교단이다. 레즈비언은 1977년 영국 성공회에 처음 성직자로 임명됐다. 미국 최대 교단인 미국장로회가 2007년 동성애자의 성직을 허용하자 일부 교회가 탈퇴했다. 개신교는 뜻이 다르면 갈라설 수 있다. 그것이 단점이자 강점이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회가 계속 늘겠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도 살아남을 것이다. ▷가톨릭은 개신교와 달리 하나의 보편 교회를 지향한다. 교황이 결정하면 모든 나라 모든 교구의 주교가 따라야 한다. 결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역사상 최초로 동성애 논의의 물꼬를 텄다. 아직 동거와 이혼도 허용하지 않은 가톨릭이 동거, 이혼과 함께 동성애까지 패키지로 다룬다는 것이 상당히 의외다. 일단 동거 이혼 동성애, 모두 포용하고 인정하자는 취지에서 논의가 시작된다고 한다. ▷가톨릭이 동성애를 인정한다면 동성애자에게 영세를 거부하는 제한부터 없애야 한다. 동성애자에게 영세를 줄 수 있다면 동성 간 혼례성사와 동성애자 신부 수품을 금지할 근거도 희박해진다.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된다. 가톨릭이 동성애자를 죄인 취급하지 않겠다는 정도의 극히 온건한 결론이 날 수도 있다. 그래도 진전이다. 성에 대해 과거와 달리 많은 것을 알게 된 오늘날, 교회도 천성적인 동성애와 천성과 무관한 동성애를 구별할 때가 됐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현대자동차가 올 하반기 입사(入社) 시험에 또 까다로운 역사 에세이를 출제했다. ‘로마제국과 몽골제국의 부흥 사례가 현대차에 시사하는 글로벌 전략 방향’과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조선시대 인물과 그 이유’라는 문제다. 명색이 신문사 논설위원인 나도 답하기 만만치 않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이나 몽골제국이 가는 곳마다 현지 문화 포용정책으로 성공한 제국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겠다. 두 번째 문제는 광해군처럼 군(君)으로 격하된 왕의 현실주의적 외교를 재평가 사례로 들어볼 수 있겠다. ▷그제 삼성 입사시험인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도 난도가 높은 역사 문제가 많이 출제됐다. ‘개화기 조선을 침략한 국가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을 고르시오’ ‘급진개화파 김옥균과 온건개화파 김홍집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같은 문제다. 삼성이 점점 더 이공계 출신을 선호한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런 문제는 이공계는 말할 것도 없고 문과 출신도 풀기가 쉽지 않아 상대적으로 문과 학생들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요새 회사 신입사원 중에는 “논개가 여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최근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역사를 모른다는 얘기다. 현재 고교 1학년 이하로는 한국사가 대학수학능력시험 필수과목이 돼 역사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이들 입사하고 싶어 하는 삼성 현대차 같은 대기업에서 입사시험에 역사를 출제하면 역사를 배우지 않고 대학에 들어간 현재의 대학생들도 역사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당수 대기업이 최근 1, 2년 사이 입사시험에 역사 문항을 앞다퉈 도입했다. 대기업 회사원이 역사적 안목까지 갖추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이런 추세가 수능에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도입한 박근혜 정권의 구미에 맞추려고 몇 년간 하다 마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삼성은 내년 하반기부터 SSAT를 폐지하고 서류전형을 도입한다니 역사 문제가 나오는 것은 내년 상반기까지다. 현대차가 역사 에세이 문제를 박 대통령이 퇴임한 이후에도 계속 내는지 지켜볼 일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한다. 현재 한국사 검정교과서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도 고등학교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내 아이가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서 걱정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필수화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배우게 하고 싶지 않다. 교학사 교과서의 사실상 실패는 안타까운 일이다. 좌파 역사학계의 공격이 다양성 확보라는 검정체제의 취지를 거스르는 부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좌파 역사학계만 탓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교학사 교과서가 적지 않은 결함으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라도 최대한 결함이 적은 교과서를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가 앞뒤 재보지도 않고 덜컥 한국사를 필수화 해놓고 마땅한 교과서가 없으니까 이제 검정을 국정으로 바꾸려고 한다. 이 정부는 국정화를 하면 교학사 교과서 실패를 뛰어넘는 최종적 승리를 얻는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다음 정권이 그것을 뒤집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한 그 승리는 결코 승리가 될 수 없다. 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은 그람시식으로 말하자면 진지전이다. 단번에 승패를 결정짓는 섬멸전이 아니라 조금씩 영토를 넓혀가는 진지전이다. 한 사회는 군대와 경찰만이 아니라 체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어야 유지된다. 교과서는 그런 논리를 전파하는 주요한 수단 중의 하나다. 정당화는 설득으로 되는 것이다. 억지로 주입시킨다고 되지 않는다. 좌파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이런 진지전에 공을 들였다. 그들의 토대를 마련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이 민족정신을 강화한다며 국사를 필수화하면서 역사 전공자를 위한 많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런 자리가 나중에 야금야금 ‘해방전후사의 인식’류의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들 차지가 됐다. 오랜 기간에 걸쳐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아 오려면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과서를 둘러싼 싸움은 단기간만 내다봐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이 임기 내에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진지전의 승리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대통령 퇴임 후에도 필생의 임무로 여기고 할 생각이 있다면, 그렇다면 해보라. 내 책꽂이에는 1996년 김영삼 정부에서 발간된 한국사 국정교과서가 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이후로는 새로 나오지 않았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검정교과서로 바꾸는 결정은 김영삼 정부가 내렸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그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따랐을 뿐이다. 우파 정부가 채택한 정책이 좌파 정부에서 번복되지 않고 이어질 때, 또 좌파 정부가 채택한 정책이 우파 정부에서 번복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때 그런 것을 합의라고 부른다. 한국사 교과서 검정화는 교육정책에서 보기 드문 합의의 사례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은 2012년 새누리당 원내대표로서 국회선진화법을 주도한 사람이다. 그때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그 통과를 추인한 사람이 박 대통령이다. 그들은 합의의 정치를 위해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족보 없는 합의 정치를 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합의나 잘 지키라고 말해주고 싶다. 민주주의 사회에 하나의 올바른 역사는 없다. 하나의 올바른 역사, 즉 정사(正史)는 엄격히 말해 왕조시대에나 가능하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긍정하는 한국사 교과서가 사실상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국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검정체제의 합의를 통해 이룩한 진보를 되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여배우 김부선은 영화 ‘애마부인’으로 이름을 얻었다. 애마부인은 1982년 야간 통행금지가 없어진 해의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져 전 시대와 다른 과감한 성 표현을 시도한 영화다. 영화 1000만 명 동원 운운하는 오늘날에는 우습게 보일지 모르지만 개봉 당시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애마부인은 인기에 힘입어 시리즈로 제작됐고 김부선은 ‘애마부인 3’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왕년의 애마부인이 최근 같은 아파트 주민과 주먹을 주고받으며 싸우는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동영상이 공개됐다. 단순 폭행 사건인 줄 알았더니 아파트 관리비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해당구청이 이 아파트의 겨울철 난방비 부과내용을 조사했는데 난방비가 제로(0)인 경우가 300건이나 있었다. 경찰은 상당수 가구가 열량계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단서를 확보하고 조사 중이다. ▷김부선은 2008년 총선 당시 홍세화 진중권 등과 함께 진보신당의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그가 진보신당과 인연을 맺은 건 대마초 때문이다. 전인권이 대마초 흡연으로 구속돼 있을 때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 의원만이 응답을 해왔다고 한다. 김부선 자신이 대마초로 2번 구속된 바 있고 대마초 금지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낸 적도 있다. 대마초로 수감생활을 하면서 재소자와 전과자의 권리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여배우여서 성 상납 제의를 받은 적도 있다. 그가 정치에 눈을 뜬 계기라고 한다. ▷그는 지금은 배우직을 생계수단으로 해서 살아가며 겨울철이면 자기 집만 많이 나와 보이는 난방비에 속이 상하는 소시민이다. 방송에서 제 성격을 참지 못해 마구 쏟아내는 말 때문에 아빠 없이 키운 딸마저 창피하다며 집을 나가버려 혼자 사는 불쌍한 엄마다. 그러나 그는 아파트 경비원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을 나눠주면서 느낀 행복감을 페이스북에 글로 올리는 사람이기도 하다. 대리운전기사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호통치며 갑질 하는 입만 살아 있는 진보들은 김부선의 생활진보에서 배워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나는 2년 전 국회선진화법 통과 직후 헌법학자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 김철수 명지대 석좌교수와 정종섭 서울대 교수에게 전화한 적이 있다. 김 교수는 이 법을 마뜩지 않아 하는 게 확연히 느껴졌으나 “제자가 주도한 법”이라며 답변을 피했다. 정 교수는 그 문제라면 대답하기 곤란하니 끊었으면 좋겠다는 기색이 말은 안 해도 역력히 전해졌다. 그러고 나서 보니 김 교수는 국회선진화법 통과를 주도한 황우여 교육부 장관, 즉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서울대 법대 은사이면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까지 지도했다. 정 교수는 황 원내대표의 서울대 법대 후배가 되면서 그 얼마 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황 원내대표 체제에서 새누리당 공천심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김 교수는 올 들어 국회의장 직속 헌법개정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나서야 “자문위에서 국회선진화법이 헌법이나 다수결의 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다”고 말했다. 우회적이지만 본인의 생각도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 교수는 사실상 침묵했다. 그가 신문에 누구 못지않게 많은 기고를 한 사람이었기에 그 침묵은 기이했다. 그런 그가 지난주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국회가 마비된 상황에서 안전행정부 장관으로서 논평을 부탁받고 입을 열었다. “헌법이론적으로 봤을 때 국회선진화법은 긍정적이다. 다수결이 아닌 합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한 것이다. 다만 부분적인 기제만 합의적이라 작동을 안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의원)내각제 같으면 국회 해산이다. 내각제는 합의제, 대통령제는 다수결제에 기반한다. 국회 처리 과정에 합의제 모델만 집어넣고 반드시 있어야 할 국회 해산 제도가 없어서 그렇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느닷없이 국회 해산을 끌어들여서가 아니다. 총명했던 헌법학자가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합의제가 예외적으로 다수결제를 보완하는 경우는 있지만 원칙은 다수결이다. 게다가 내각제야말로 다수결에 기반한다. 내각제에서 제1당은 독자적으로든, 연정을 통하든 과반을 확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내각제에서의 국회 해산은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서이지 합의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가 헌법이론적으로 긍정 운운한 합의적 민주주의가 실제 어떻게 반(反)민주적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데 19대 국회보다 더 좋은 실례는 없다. 야당이 과반의 지지도 얻지 못하는 법을 ‘법안 연계 처리’라는 방식으로 통과시키는 것을 보라. 이것은 다수의 지배가 아니라 소수의 지배다. 이렇게 처리된 법안까지 합산해서 ‘식물국회가 동물국회보다 낫다’고 말하는 한심한 언론인도 있다. 국회선진화법은 되돌아올 다리를 불살라버린 법이다. 이 법의 통과는 과반으로 이뤄졌으나 되돌리려면 5분의 3의 동의가 필요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어떤 정당도 5분의 3의 의석을 가져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법은 이론적으로는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것이 이 법의 진짜 고약한 점이다. 차라리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위헌이면 낫겠다. 그러면 헌법재판소에 제소해서 무효화하는 길이라도 있지 않은가. 국회선진화법으로 국회 마비는 만성이 되고 국회가 국가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할지도 확신할 수 없게 돼버렸다. 정 교수는 박근혜-황우여 조(組)의 근접거리에 있던 인연으로 장관까지 됐다. 그가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그들의 귀에 대고 국회선진화법은 문제없으니 통과시키라고 속삭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그 법을 제지하지도 않고 또 비판하지도 않음으로써 헌법학자가 꼭 필요할 때 제대로 경고음을 울리지 못한것은 틀림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스마트폰으로는 미국 NBC 뉴스가 보기 편하다. 어제 출근하다 NBC 뉴스를 보니 앵커 브라이언이 테러집단 이슬람국가(IS)의 두 번째 미국 기자 참수 소식을 전했다. 담당 특파원은 스티븐 소틀로프 기자가 참수당했다는 짧은 리드를 전한 직후 부연 설명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브라이언, 이 말을 꼭 해야겠다. 그는 끝까지 매우 용감했다.” ‘용감했다’는 말 뒤에 소틀로프가 견뎌야 했던 참수의 공포가 더 생생히 전해지는 듯했다. ▷소틀로프의 나이 겨우 31세. 타임지 등을 위해 활동했던 프리랜서 기자로 시리아에서 취재 중 1년 전에 실종됐다. 그의 처형은 2주 전 미국 프리랜서 사진기자 제임스 폴리가 참수될 때 예고됐다. 지난주 소틀로프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언론을 통해 IS에 간청했지만 소용없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역겹고(disgusting) 야비한(despicable) 행위”라고 비난했다. ▷미국 언론인보호위원회(CPJ) 집계에 따르면 1992년 이후 현재까지 취재 중 피살된 기자의 수는 1073명. 가장 최근 피살된 기자가 2주 전에 참수된 폴리다. 소틀로프가 곧 명단에 오르면 그 수는 1074명이 될 것이다. 피살되는 기자는 대부분 분쟁지역에서 취재하다 죽는다. 우리나라 기자들은 분쟁지역 취재를 잘 가지 않아 1074명 중에 우리나라 기자는 한 명도 없다. 일본인 기자는 6명이 포함돼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부끄럽다고 해야 할까. ▷외신 뉴스를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최근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영역을 넓히는 IS처럼 극악무도한 테러집단을 보지 못했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도 잔인하지만 그들은 민간인에게 저지른 만행을 최대한 외부 세계에 숨기려 한다. 반면 IS는 민간인을 집단으로 총살하는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한다. 그리고 게임하듯 잔인함의 강도를 높여간다. 지금도 곳곳에서 제네바협정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전례 없이 악랄해지고 국가만큼 강력해지는 테러집단을 상대하는 기자들에게 존경과 위로를 보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얼마 전 여름휴가 때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회고록 ‘여정’을 읽었다. 영국 노동당을 현대화한 그가 교육에서도 노동당의 평준화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영국 런던 첼시에 ‘런던 오러토리 스쿨’이라는 학교가 있다. 요새 말로 런던에서 가장 핫한 학교 중 하나다. 사립학교(public school)도 아니고, 시험 쳐서 들어가는 그래머스쿨(grammer school)도 아니고, 평준화 학교인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인데도 그렇다. 특색이 있다면 가톨릭계 학교라는 점이다. 영세를 받은 학생에게 우선적으로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가톨릭계 학교는 정부 예산만 아니라 지역 가톨릭 공동체로부터 기부를 받기 때문에 일반 종합학교보다 예산이 풍족하다. 일반 종합학교와는 달리 엄격한 교육 전통이 살아있어 학습 분위기도 좋다. 무엇보다 예술 체육 교육이 충실하다. 이 학교에 자녀를 보내려고 자녀가 유아일 때 영세를 줘놓고 대비하는 학부모도 적지 않다는 가디언지(紙)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블레어는 1994년 노동당 당수가 되던 해 첫째 아들을 이 학교에 보냈다. 당시 노동당원들은 자녀를 일반 종합학교에 보내는 것이 의무처럼 돼 있었다. 1960년대 학교 선택제를 폐지하고 종합학교를 도입한 것이 바로 노동당이었다. 블레어는 “가톨릭계 종합학교일 뿐”이라고 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머스쿨은 보수당 교육구에만 남아있는데 오러토리는 노동당 교육구의 그래머스쿨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블레어는 위선적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블레어는 “나는 아이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음에도 교육수준이 낮거나 보통인 일반 종합학교에 보내는 것은 너무도 무책임한 일”이라며 결국 오러토리에 보냈다. 블레어가 이 일로 난처했을 때 그의 섀도 내각에서 장관직을 맡은 해리엇 하먼은 한수 더 떠 둘째 아이를 그래머스쿨에 보냈다. 해리엇은 이미 첫째 아이를 오러토리에 보냈다. 블레어는 “그래머스쿨에 보내기로 한 것은 부모로서 그녀가 선택할 일”이라고 변호했다. 블레어는 후에 둘째와 셋째 아이도 오러토리에 보냈다. 영국은 독일 프랑스에 비해서도 교육 평준화를 강력히 추진한 나라다. 그런데도 노동당 지도부에서조차 이런 균열을 막지 못했다. 독일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대학에 갈 능력이 있는 아이와 직업교육을 받아야 할 아이를 나누는 나라다. 사회민주당은 대학준비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과 직업학교를 통합한 게잠트슐레(Gesamtschule)를 도입했지만 사실상 실패했다. 프랑스는 공립학교 일색일 것 같지만 반(半)공립 반사립(priv´e sous contrat)학교가 의외로 많다. 좋은 반공립 반사립학교는 상당한 학비를 받는다. 교육열이 있는 학부모들은 자녀를 좋은 반공립 반사립학교에 보내려고 애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박정희 대통령에 비판적인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박정희의 평준화 정책만은 높이 사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정희를 칭찬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말이라도 박정희식 평준화 정책을 들먹이다니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 교육감은 자녀를 외국어고에 보냈다. 블레어나 조 교육감이나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냈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블레어는 자기가 보내고 나서 그 학교를 없애거나 하지 않았다. 조 교육감은 자사고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자사고는 외고가 아니다’라고 변명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교육관이 일관성 있어 보이는 것은 아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안익태의 애국가는 본래 가(A)장조다. 가장조 애국가의 최고음은 높은 미(E)다. 높은 미만 돼도 따라 부르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성대가 채 발달하지 않았고, 중고교생들은 대개 변성기여서 더욱 그렇다. 서울시교육청이 애국가를 장3도 낮춰 바(F)장조로 보급하고 있다. 바장조 곡의 최고음은 높은 도(C)가 된다. 높은 도는 웬만하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다. ▷애국가의 고음부가 내려오는 것은 좋은데 저음부도 같이 내려온다는 게 문제다. 가장조에서는 최저음이 도(C)#인데 바장조로 낮추면 낮은 라(A)까지 내려온다. 적지 않은 음들이 낮은 음계에서 움직여 곡이 처진다. 어느 음악가가 “원곡의 기백이 사라진 맥 빠진 애국가가 됐다”면서 “애국가를 운동권 노래보다 아래에 두려는 음모가 깔려 있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애국가 낮춰 부르기가 조희연 현 서울 교육감이 아니라 문용린 전 교육감 시절에 추진된 것으로 드러나 그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음모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애국가 낮춰 부르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꽤 있다. 애국가 선율은 안익태의 ‘코리아 환타지’에 들어 있다. 작곡가가 곡을 가장조로 썼으니 그 조로 연주해야 곡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꼭 가장조를 고집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코리아 환타지 속의 애국가는 현대적인 기악곡 속에 들어있는 합창곡이다. 그런 곡을 일반인에게 음높이까지 그대로 따라 부르라는 것은 교조적 태도다. ▷애국가를 불러본 사람이면 대부분 낮춰 부를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서울시교육청이 굳이 두 음을 낮췄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한 음만 낮춰 사(G)장조로 불러도 애국가는 수월하게 부를 수 있다. 이 경우 최고음은 높은 레(D), 최저음은 낮은 시(B)가 된다. 사람들이 가장 부르기 좋은 음역이다. 시중에 돌아다니는 애국가 악보에는 사장조 악보가 많다. 불러보면 바장조처럼 처지지 않으면서도 가장조의 밝은 느낌이 살아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기 안산 단원고 고(故)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 씨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을 때 자신과 세월호 유가족의 편지를 전하고 꼭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편지에는 ‘이혼 이후 두 딸을 어렵게 키우던 유민 아빠’라는 말이 나온다. 일반 국민들은 유민 아빠가 이혼하고 직접 키우던 두 딸 중 하나를 잃은 줄 알았다. 교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 씨가 얼마 전 단식을 하다 병원에 실려 갈 때 마음이 얼마나 아프면 저렇게까지 할까 모두 동정했다. 그런데 이혼 이후 두 딸을 키운 것은 유민 아빠가 아니라 유민 엄마라는 사실이 유민 엄마 남동생의 폭로를 통해 뒤늦게 드러났다. 김 씨는 자신이 가난해서 양육비는 매달 보내지 못하고 몇 달에 한 번씩 보낼 때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10년간 보낸 양육비가 고작 수백만 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다. 이래서야 ‘이혼 이후 두 딸을 어렵게 키우던 아빠’라고 하기는 어렵다. ▷김 씨가 교황을 만날 때 보여준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그는 교황과 대화하던 중 갑자기 교황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더니 삐뚤어진 세월호 추모 리본을 바로잡아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단식 중 여러 대중 행사에서 보여준 주눅 들지 않는 태도를 보면 직장 일이나 가정밖에 모르는 순진한 아빠는 아닌 듯했다. 그가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의 조합원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김 씨가 보상금을 노리고 단식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월호에서 “기다리라”는 말만 믿다가 죽어간 학생들을 생각하면 생면부지의 사람도 눈물이 난다. 1년에 한두 번 보는 게 고작이었다고는 하지만 딸 잃은 아빠의 마음이 왜 아프지 않겠는가. 평소 딸에게 잘 못해준 것이 생각나 더 마음 아팠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생전에 아빠 역할을 잘 못한 사람이 사후에 아빠 역할 제대로 하겠다고 나서니 순순히 믿어지지 않는다. 유민 엄마 남동생의 말처럼 “다른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하면 이해하겠지만 김 씨 당신이 이러면 이해 못하지”의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