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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전당’으로 불리는 대학의 진학률이 미국에서 최고점에 달했던 때는 2009년이었다.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이 속속 가세하면서 20년간 꾸준히 늘어온 입학생 수는 이때 1800만 명(진학률 70.1%)에 육박했다. 대학 졸업장은 중산층 이상의 삶을 보장하는 티켓으로 통했다. 하버드, 예일, 스탠퍼드, MIT…. 해마다 발표되는 ‘톱 100’ 대학의 입시 정보를 얻으려고 고교생과 학부모들은 애를 태웠다. ▷그랬던 미국 대학의 몸값이 예전 같지 않다. “인생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졸업장 한 장 받으려고 그 많은 등록금과 시간을 써야 하느냐”며 시큰둥해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안 그래도 하락세였던 진학률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더 가팔라지면서 지난해 62%까지 떨어졌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대학은 들이는 돈만큼의 가치가 없다’는 응답이 56%까지 치솟았다. 출산율 하락, 억대 학자금 대출 부담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학위 없이도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진 게 주된 이유로 꼽힌다. ▷팬데믹 기간에 심해진 미국 내 노동력 부족 현상은 인력의 수요와 임금을 동시에 밀어 올리는 결정적 요인이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 기조에 따라 대규모 생산시설이 들어서고 있는 지역들은 특히 블루칼라 일손 부족으로 아우성이다. 구글, 델타항공, IBM과 같은 기업들도 일부 분야에서 대졸 여부를 따지지 않는 채용을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은 “대졸자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 “대학을 거부하는 새 세대의 출현” 같은 제목의 분석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대학을 외면하는 청년들의 선택이 마냥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미국 경제학자들은 “대학 위기를 넘어 사회, 경제적으로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고졸자들의 연간 평균 수입은 대졸자보다 2만4900달러 적고, 실직 확률은 40% 높으며, 수명은 더 짧고 이혼율은 더 높다는 통계 수치들이 여전히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기술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청년들이 매년 4500만 명씩 대학에 들어가고 있다는 점도 미국을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 대학들은 “고등교육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며 해법을 고심 중이다. ▷문화, 인식, 교육, 경제 환경이 나라마다 다르니 미국 대학가의 변화가 당장 해외로도 확산될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학 간판보다는 능력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실용주의와 이들을 기꺼이 모셔가는 기업들의 선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를 가능케 하는 미국의 견고한 노동시장 또한 이런 유연한 접근에 바탕을 둔 기술, 경제 혁신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일 것이다. 너도나도 대학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이 깊이 들여다볼 움직임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대자연의 절경으로 떠나는 여름 힐링여행’, ‘놓치면 후회할 특가, 완판주의’…. 요즘 온·오프라인 매체를 통해 부쩍 노출이 늘어난 해외여행 광고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외국 관광지의 사진과 동영상은 당초 여행계획이 없던 이들까지 설레게 만든다. 올해 초 한 여행사가 내놓은 북유럽 여행 패키지 상품들은 홈쇼핑에서 한 달 동안 1000억 원 가까이 팔려 나갔다. ▷올해 1분기 해외로 나간 한국인 관광객은 498만 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000% 이상 많아졌다. 공항 이용객이 10배 늘었고, 관광객들이 면세점 등에서 쓰는 신용카드 결제액도 급증세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억눌렸던 ‘보복 여행’이 증가한 결과라지만 증가세가 예상보다 폭발적이다.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 관광객 수도 5배 늘어나기는 했지만(1분기 171만 명), 해외로 떠나는 여행객 증가 폭에는 못 미친다. 여행수지 적자 규모는 그만큼 확대되고 있다. 32억 달러를 넘어서며 3년 반 만에 최대를 기록했다. ▷국내 여행객들을 끌어들이는 주요 관광지는 단연 일본이다. 벌써 200만 명 넘는 한국인이 일본으로 향했다. 가까운 이동 거리와 부담이 적은 저비용항공 인프라, 엔저 효과까지 겹치면서 오사카와 후쿠오카 등지의 관광 명소는 최대 80%까지 한국인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과 태국, 필리핀도 인기 여행지다. 여름 휴가철에는 해외여행객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어 가을 상품으로는 북유럽과 캐나다의 단풍을 즐기는 상품들이 이미 광고를 타고 있다. ▷떠나는 이를 붙잡을 일은 아니지만 들어오는 이가 턱없이 적은 상황은 문제가 된다. 여행수지 적자가 서비스수지 적자를 키우면서 경상수지 악화 요인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다. 재정 당국의 근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의 주요 관광 손님이었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의 발을 묶어놓은 중국 정부의 조치는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다. 중국은 벌써 두 달 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40개 국가에 대한 단체관광 금지 조치를 풀면서도 한국은 쏙 빼놨다. 금지령이 풀린다고 해도 ‘애국소비’ 바람이 부는 중국에서 방한 여행객이 금방 늘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해외 관광객의 발걸음을 국내로 돌리자니 이미 치솟은 가격에 바가지 상술까지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이 가격이면 차라리 일본이나 동남아를 가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국내 대표 관광지 제주도는 울상이다. 한국의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강점을 키우지 못하는 사이 외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여행객들의 클릭 손길은 더 바빠지고 있다. 지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의 즐거움에 푹 빠지고픈 이들을 붙잡을 우리만의 매력을 더 찾아내야 할 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신도 있고 왕도 있지만 더 무서운 건 세금징수관이다.” 고대 수메르인의 격언 중 하나였다는 이 한 문장은 세금 납부가 얼마나 오래된 인류의 숙제였는지를 보여준다. 세금을 걷으려는 국가와 어떻게든 이를 피해 보려는 납세자들의 숨바꼭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다. 그 과정에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각종 ‘창의적 능력’이 발현됐다지만, 탈세가 처벌 대상인 범죄라는 사실 또한 역사적으로 예외가 없었다. ▷로또 1등에 당첨되고도 연체된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버티던 체납자가 최근 국세청에 적발됐다. 그는 20억 원이 넘는 당첨금을 받고도 내야 할 수억 원의 연체 세금을 처리하지 않았다. 대신 돈을 가족 계좌로 이체하거나 현금, 수표 등으로 인출하며 빼돌리려 했다고 한다. 이처럼 1등 혹은 2등 거액 로또에 당첨됐는데도 밀린 세금을 내지 않고 있다가 적발된 이는 36명에 달한다. 없던 돈이 하늘에서 떨어졌는데도 그걸로 세금은 내기 싫다는 심보다. ▷국내 세금 체납자는 현재 132만 명, 밀린 체납액은 100조 원이 넘는다. 내야 할 세금이 1억 원 이상 쌓여있는 사람만 16만 명에 달한다. 사업 실패 등 안타까운 사연도 없지는 않겠으나 체납자 중에는 고의로 재산을 은닉하고 호화 생활을 누리는 사람도 상당수다. 고액 체납자이면서도 개인금고에 현금 4억 원을 숨겨놨거나, 배우자 명의로 재산을 돌려놓고 부촌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례가 이번 국세청 조사에서 줄줄이 나왔다. 하루 단위로 늘어나는 연체료 따위는 신경 안 써도 되는 부자들이 아니고서야 보이기 힘든 배짱이다. ▷‘유리지갑’ 직장인들이야 고민할 여지조차 없다지만 숨길 구멍이 있는 경우엔 절세와 탈세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올 초에는 유명 웹툰 작가와 프로게이머, 운동선수 등이 줄줄이 세무조사를 받았다. 법인 명의로 산 고가의 슈퍼카를 사적으로 굴리고, 친인척을 직원으로 등록해 허위 인건비를 지급하는 등 각종 수법이 총동원되다시피 했다. 헌법에 명시되고 교과서로 가르치는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를 우습게 본다. 탈세범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의 전례들은 이들을 더 대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최근엔 해외 암호화폐 시장 등을 이용해 조세당국의 추적을 빠져나가는 지능범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조세 정의가 무너지면 “성실한 사람들만 세금을 뜯긴다”는 반발이 커질 수밖에 없다. 혈세 징수에 앞서 효율적으로 투명하게 쓰이는지부터 입증하라는 항변은 정부도 한번 더 들여다볼 부분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점들이 악의적 체납이나 탈세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죽음과 세금’이라고 했던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누구도 세금을 회피하지 못하는 세상이 돼야 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이달 말 100세 생일을 맞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지금까지 중국 방문 횟수가 50회를 넘는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방중 성사를 위한 잠행 등 역사적 행보가 포함된 기록이다. 그는 마오쩌둥이 현안 질문에 대해 “나는 철학자여서 그런 주제는 안 다룬다”며 피하다가도 대만에 대해서는 단호한 화법을 구사하던 순간을 아직 기억한다. 저우언라이와 함께 ‘상하이 공동성명’의 마지막 한 줄을 놓고 밤을 꼴딱 새우며 끙끙대던 때도 잊지 않고 있다. ▷키신저는 최근 영국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며 강 대 강 충돌로 치닫는 미중 갈등을 진단했다. 3차 세계대전 가능성을 경고하며 “이를 막을 시한이 5∼10년에 불과하다”고 전망했다. 미국의 역대 최고령 내각 고위 인사로 한 세기 동안 미중 관계를 지켜봐온 그의 분석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쟁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것과는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역사의 산증인인 그가 1차 세계대전 상황을 근거로 대는 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키신저가 보는 미중 관계의 뇌관은 역시나 대만이다. 대만을 우크라이나처럼 다루다간 결국 전 세계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매섭다. 양국 간 충돌이 이르면 5년 안에 벌어질 수 있다고 보는 근거는 인공지능(AI)이다. 지리적, (타격)정확성 한계 등으로 적군을 궤멸할 능력이 없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AI가 모든 군사적 한계를 빠르게 없애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중 양국이 참여하는 ‘AI 군축’ 논의를 제언한다. 고령에도 ‘AI의 시대’라는 책을 쓰며 첨단기술 공부를 지속해온 키신저다. ▷미중 데탕트 시대를 주도했던 그답게 해법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우선’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중국 지도자들의 목표는 세계 지배라기보다는 자국의 이익 극대화로, 히틀러의 야욕과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유교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이해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신뢰 구축과 협력을 강조하는 접근법은 매파 일색인 미국 행정부, 의회와는 결이 다르다. ▷이번 인터뷰는 이틀에 걸쳐 총 8시간 동안 진행됐다고 한다. 키신저는 앞서 CBS방송과도 ‘100세 기념 인터뷰’를 하고 포럼 연사로 나서는 등 대외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중 충돌 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가져올 악영향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하고 있다. 이젠 거동이 불편하고 말조차 어눌하지만 시대와 영역을 넘나드는 그의 통찰은 울림이 있다. “파괴적 충돌을 막을 방법은 단호한 외교뿐”이라는 키신저의 고언에 백악관과 중난하이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G7은 죽었다. 현재와 같은 구성으로는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유럽의 한 싱크탱크는 2018년 내놓은 보고서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맹폭했다. “오늘날의 G7은 과거의 유물”이라며 더 대표성을 띤 새 멤버들의 가입을 촉구했다. 캐나다 샤를부아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보호무역주의와 관세장벽 등을 놓고 회원국 간 갈등이 여과 없이 노출된 직후였다. ▷기존의 G7에 한국과 인도, 호주, 러시아를 참여시켜 G11으로 키우는 방안이 거론되기 시작한 게 이때였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G7은 낡았다”며 새로 참여할 후보국으로 4개 나라를 콕 찍어 언급했다. 당시 그의 발언은 한때 G8 멤버였다가 2014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침공으로 퇴출당한 러시아를 복귀시키는 데 방점이 찍혀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다른 회원국들의 공개 반대로 G7 확대 논의는 흐지부지됐지만, 한국의 가입 가능성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G7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을 회원국으로 둔 비공식 국가 협의체다. 자유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를 공유하는 ‘선진국 클럽’으로 국제 경제 및 외교 규범을 논의하는 리더 그룹이라는 점에서 가입 시 그 상징성은 대단하다. 신흥 경제국들이 포함된 G20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듯 보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G20는 몸집이 비대하다는 지적과 함께 회원국인 러시아, 중국과의 갈등으로 한계에 봉착해 있다. 유엔마저 무력화한 상태에서 결국 서구 선진국들은 다시 G7 중심으로 뭉치는 분위기다. ▷급변하는 글로벌 지형을 반영해 G7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요구는 커지고 있다. 브라질까지 포함해 G12로 만들자는 식으로 다양한 조합과 후보 국가가 거론된다. 민주주의 국가 10개국을 모은 ‘D10(Democracy10)’ 창설이 대안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다만 소수 결속으로 국제사회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는 기존 회원국들의 벽은 여전히 공고하다. 한국의 G7 가입을 놓고는 특히 일본의 견제가 만만찮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아 유일 회원국으로서의 영향력이 약화할 것이라는 일본의 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은 19∼21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 옵서버 국가로 초청됐다. 한국 정상으로는 역대 네 번째 참석인 데다 한일 관계의 훈풍까지 더해져 G8로의 확대 기대감이 커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는 “회원국 변화와 관련한 어떤 논의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아직은 높은 국제사회의 문턱을 절감하는 순간이다. 보다 긴 호흡으로 준비 전략을 다시 다듬어야 할 때이기도 하다. 단독 드리블보다는 다른 후보국들과 연대해 ‘G 멤버’ 가입의 문을 넓히는 식으로 전략을 다양화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교수들의 상당수는 ‘A 폭격기’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A 학점을 후하게 뿌려주는 교수나 강사의 과목은 늘 수강 신청이 쇄도한다. 학점에 한 단계 높은 플러스(+)를 몰아주는 ‘쁠몰’ 강의는 학생들의 평가에서 상위권에 올라 있다. 이런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은 새벽부터 인터넷 수강신청 시스템에서 ‘광클 전쟁’을 벌인다. “점수가 사해보다 짜다”는 불만을 듣는 교수들은 설 자리를 찾기도 힘들 정도다. ▷성적표에서 ‘A’의 몸값이 예전 같지 않다. 교육부 대학알리미 등에 따르면 이른바 SKY로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서 지난해 2학기 전공과목 A 학점을 받은 학생의 비율은 57∼59%에 달했다. 재학생 5000명 이상 4년제 대학을 기준으로 A 학점이 가장 많은 이화여대의 경우 그 비율이 60.8%였다. 10명 중 6명 가까이 A 학점을 받은 것이니 융단폭격 수준이다. 온라인 비대면 수업이 이뤄진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평가 시스템이 기존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뀐 영향이 컸다. ▷학점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지적에 교수들은 난감한 표정이다. 학점이 장학금과 편입, 취직 등에 직결되는 현실에서 평가의 엄정성만 외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평가 이의신청 기간이면 “내 인생 책임져 주실 거냐”는 학생부터 장학금이 얼마나 절실한지 읍소하는 학생들의 방문과 이메일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0.1점이라도 더 받으려고 신입생들도 고3처럼 공부하는 게 요즘 대학가 풍경이기도 하다. 치열해지는 경쟁이 학점 부풀리기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학점에 민감해지는 건 해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국 뉴욕대에서는 화학 분야의 저명한 노교수가 “강의가 어렵고 학점도 낮게 준다”는 수강생들의 집단 항의로 학교에서 해고된 일도 있었다. 당시 350명의 수강생 중 80여 명이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가 학생들의 배움과 행복을 저해한다”는 내용의 탄원서에 서명했다. 평가 기준과 학점의 문제를 떠나 팬데믹 기간 저하된 교육의 질 문제에서 Z세대를 교육하는 방식까지 간단치 않은 고민거리들을 대학가에 던졌다. ▷평가는 결국 변별력의 문제다. A 학점으로 도배된 성적표만으로 인재 감별이 어려워진 구인 기업이나 기관들은 결국 다른 기준을 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학생들은 이미 공모전과 자격증, 각종 대외활동 등 또 다른 스펙 쌓기에 한창이다. 성적 줄 세우기를 넘어 활동 분야를 다양화하는 장점이 있다지만 이 또한 경쟁 부담이 작을 리 없다. 상아탑에서 학문 연구에 몰입해보는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모든 인플레이션이 그렇듯 학점 또한 결과적으로는 더 큰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외로움,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저서 ‘고립의 시대’에서 외로움을 ‘몸과 마음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질병’으로 정의한다. 고독함은 만성적 염증과 같아서 몸의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회복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영미권 의학계에서는 알약 형태의 외로움 치료제를 개발하려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감정 상태인 외로움을 병리적 차원에서 연구, 개선하려는 시도다. ▷미국 공중보건서비스단이 최근 “외로움이 하루 담배 15개비만큼 해롭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따르면 외로움과 고립에 시달리는 이들은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29% 더 높고, 뇌졸중은 32%, 치매는 50% 더 크다. 보고서 작성을 주도한 비벡 머시 단장은 외로움의 문제를 공중보건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주치의’로 불리는 그는 현장에서 다뤄 온 여러 질병의 공통 요인이 외로움이라는 점을 발견한 뒤 심각성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내면의 배고픔이라는 외로움은 특히 육체적으로 노쇠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고령층을 쉽게 무너뜨린다. 고령층을 10년 이상 추적 관찰한 조사에서 외로운 사람들은 노화 속도가 1년 8개월 더 빨랐다. 인지능력은 20% 더 빨리 저하됐다. 하루 종일 찾아오는 이 없이 우두커니 하루를 보내면서 삶의 자극을 찾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일본에서는 2주 동안 한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노인이 15%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말동무가 돼 줄 AI 로봇이 개발됐다지만 기계음에는 온기가 없다. ▷‘21세기의 감염병’인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정부와 기업, 의료계, 미디어, 시민단체 등이 모두 함께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번에 나온 미국 보고서에도 6개 분야별 권고 사항이 빼곡히 담겼다. 머시 단장은 개인의 노력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루 15분씩 전화하라. 캘린더에 적어 놓고 하라”고 조언한다. 자신도 1년 넘게 지독한 고립감에 고통받던 시절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준 부모와 여동생, 정기적으로 연락해준 2명의 친구 덕분에 이를 극복해냈다고 한다. ▷급속한 도시화와 1인 가구의 증가, 저출산, 고령화, 노인 빈곤 등의 문제가 총체적으로 얽혀 있는 한국에도 외로움은 사회적 숙제다. 지금도 누군가는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하는 절절한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럴수록 함께하는 따뜻한 밥 한 끼, 서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한마디 안부가 강력한 치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내 옆의 가족과 친구에게 연락 한 번 더 해보는 건 어떨까. 늘 “괜찮다”고만 하는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가정의 달 5월은 손을 내밀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대법원을 모욕하고 격하시키는 인사다. 미국을 르완다처럼 만들려는 것인가.”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인 터커 칼슨이 지난해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대법관 임명을 두고 내놓은 논평이다. 성 차별주의자, 인종주의자라는 비판에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첫 무슬림 여성 하원의원이 탄생했을 때는 “(민주당) 이민 정책이 국가에 위험이 된다는 증거”라고 했고, 불법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미국을 불결하게 오염시키는 이들”이라고 했다. ▷케이블 뉴스 채널의 후발주자였던 폭스뉴스의 시청률을 끌어올린 것은 보수층을 집중 공략하는 극단적 편향성이었다. 거친 입담의 앵커들이 선봉에 섰다. ‘터커 칼슨 투나이트’는 매일 평균 320만 명이 시청하는 간판 프로그램이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7년간 승승장구했던 그를 무너뜨린 것도 본인의 입이었다. 폭스뉴스는 24일 그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2020년 대선 결과가 조작됐다는 가짜뉴스를 퍼뜨렸다가 1조 원대 배상금을 물어주기로 합의한 지 6일 만이다. ▷같은 날 폭스뉴스와 정반대 진영인 CNN의 간판 앵커 돈 레몬도 해고 통보를 받았다. “여성은 잘해야 40대까지가 전성기”라는 최근 발언이 문제가 됐지만 그는 이전에도 남녀 스포츠 선수의 연봉 격차를 당연하게 해석하는 등 수차례 여성 비하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전력이 있다. 흑인 성소수자 앵커로 민주당 정부의 진보 정책을 노골적으로 옹호해 온 그는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생방송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 그의 프로그램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늘면서 CNN은 출연자 섭외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고 한다.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막말이 사회 분열을 부추기고, 이는 다시 미디어를 양극단으로 몰아가는 악순환이 되풀이돼 온 게 미국의 현실이다. 인종과 여성, 낙태, 총기 규제 등 양쪽 진영의 지지층을 각각 결집할 첨예한 사회 이슈들도 늘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촉발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레몬이 격분하는 사이 칼슨은 “플로이드는 경찰의 과잉 진압 때문에 사망한 게 아니다”는 허위 주장을 버젓이 반복했다. 트럼프 열성 지지자들의 난입으로 의회가 쑥대밭이 돼 있을 때는 “온순하고 정돈된 의회 관광객들”이라고 옹호했다. ▷‘폭스 효과(Fox effect)’란 표현은 매체의 편향성이 언론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뜻하는 부정적 표현이다. 자극적 주장에는 가짜뉴스나 음모론이 따라붙는다. 막말이 판치는 환경은 팩트를 지루하고 유약한 것으로 왜곡시켜 버리기 십상이다. 정치권 인사부터 1인 미디어 유튜버까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이 국내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 대가를 결국 어떻게 치르게 되는지를 추락한 간판 앵커들이 보여주고 있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테슬라 전기차는 ‘바퀴 달린 컴퓨터’로 불린다. 전 세계에서 운행 중인 테슬라 차량을 통해 도로, 교통, 지리 정보를 모으고 축적하는 시스템의 경쟁력은 특히 압도적이다. 1시간에 최대 25GB(기가바이트)의 정보를 수집하는 카메라와 센서, 인공지능(AI) 반도체와 첨단 소프트웨어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테슬라는 무선으로 상시 업데이트되는 이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율주행 체계인 ‘오토파일럿’을 완성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테슬라 모델X의 경우 모니터링을 위해 중앙과 뒤, 양옆에 모두 8대의 소형 카메라가 장착돼 있다. 주행정보 수집 외에 사고 시 증거자료 확보, 차량 절도 방지 등에 다목적으로 활용된다. 유용하지만 함정이 있다. 촬영된 영상의 유출이나 무단 공유, 이로 인한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다. 이 위험성이 현실화한 것으로 우려되는 외신 보도가 나왔다. 테슬라 직원들이 2019∼2022년 고객 차량의 카메라에 찍힌 영상들을 내부 메신저로 함께 돌려 봤다는 것이다. ▷로이터통신이 전한 전직 테슬라 직원 9명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이 채팅방에서 공유한 영상에는 알몸으로 차량에 접근하는 남성, 자전거를 타던 어린이가 테슬라 차량에 치여 튕겨져 나가는 영상 등이 포함돼 있다. 은밀한 사생활이나 자극적인 장면을 담은 영상들이다. 심지어 시동을 끈 상태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도 있다고 한다. 이를 본 직원들끼리 “나라면 테슬라를 안 사겠다”는 농담을 주고받았다니 노출된 개인정보 수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언론은 보도가 사실이라면 ‘스파이 행위’라고 지적한다. 테슬라는 “고객의 동의를 받아 데이터를 공유받으며, 이 데이터들은 개인 계정이나 차량번호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영상을 보면 대략적인 위치나 장소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적잖다. 테슬라의 영상 수집은 중국과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도 문제가 됐다. 지나가는 행인까지 상시 촬영하는 기능을 놓고 “사생활 침해”라며 시민단체들이 소송을 냈다. 중국에서 논란이 됐을 때는 일론 머스크 CEO가 “테슬라가 스파이 활동에 이용된다면 우리는 문을 닫겠다”는 약속까지 내놔야 했다. ▷테크기업들의 영상과 이미지 공유, 활용 과정에서 제기되는 프라이버시 문제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테슬라뿐일까. 아마존의 AI 음성인식 서비스인 ‘알렉사’는 성능 향상을 위해 제품 주변의 소리를 녹음해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상 곳곳에 포진한 카메라와 센서, 음향 장치들이 언제라도 감시 장비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해킹 위험도 상존한다. 안전을 위해 설치한 장비들이 사생활을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니…. 첨단 IT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이건 하이틴 로맨스 같은 게 아니다.” 존 커비 미국 백악관 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묻는 언론의 질문을 냉랭하게 받아쳤다. OPEC+가 지난해 10월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 감산을 결정한 것을 놓고 이를 주도한 사우디와 미국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던 때였다. 미국 중간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사우디가 조 바이든 행정부의 “면전에 일격을 가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워싱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OPEC+가 그제 추가 감산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사우디가 주도한 것으로, 하루 116만 배럴 규모다. 미국이 애써 시도해온 인플레이션 대응을 보란 듯이 무력화시키는 결정이다. 그새 러시아, 중국과 더 밀착한 사우디는 미국의 에너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태세다. 사우디는 가스프롬을 비롯한 러시아의 주요 국영기업들에 5억 달러를 투자했고, 중국과는 상하이협력기구(SCO) 준회원 가입과 ‘룽성 석유화학’ 투자 등을 통해 접점을 늘려가고 있다. ▷오랜 동맹인 미-사우디의 밀월관계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이 셰일오일, 셰일가스 개발로 대(對)중동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상황에서 이란과의 핵협상에 나선 것을 사우디는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피살 사건을 놓고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는 ‘왕따(pariah)’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면서 양국은 인권 문제로도 충돌했다. 미국 의회가 사우디에 대한 군사지원 중단 논의에 나섰을 때는 ‘미국 국채 매각’ 카드로 맞섰다. 사우디가 국부펀드(PIF) 등을 통해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채는 1200억 달러가 넘는다. ▷사우디를 향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발끈했던 미국은 현재까지 마땅한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OPEC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의 ‘오일 파워’를 무시할 수 없는 탓이다. 미국의 강경 대응이 사우디와 중국, 러시아와의 연대만 되레 강화해 줄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후 중동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진 미국으로서는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와의 협력 또한 절실하다. 경제와 군사, 외교 변수들이 뒤엉켜 있는 국면이다. ▷미국과 사우디의 갈등으로 기름값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환율 변동 폭이 커지고 인플레이션도 재차 심화할 조짐이다. 사우디가 원유 대금의 위안화 결제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외신 보도도 나온다. 원유 거래가 달러만으로 이뤄져 온 ‘페트로 달러’ 체제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새 전선 짜기에 바쁜 사우디의 행보에 미국도 손대지 못하는 사이 글로벌 금융 시스템에 안보 지형까지 바뀌는 판이다. 고유가의 유탄을 맞는 비산유국들의 주름살도 늘어간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이것은 국가에 대한 공격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형사 기소 결정이 나오자 소셜미디어와 성명을 통해 분노를 쏟아냈다. “극좌파 괴물과 폭력배들이 유력 대선 주자에게 사상 초유의 공격을 감행했다”며 미국이 정치적 박해를 일삼는 제3세계 권위주의 후진국처럼 됐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기소 뉴스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이어 “싸울 준비가 됐다”며 방어 총력전에 들어간 상태라고 측근들은 전한다. ▷트럼프의 지지율은 계속 오르는 중이다. 폭스뉴스 조사에 따르면 그는 기소 직전 공화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2위와의 격차를 한 달 전의 두 배로 벌렸다. 그를 지지한다는 응답이 54%로,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주 주지사(24%)를 30%포인트 따돌렸다. 기소 당일에는 하루 만에 400만 달러(약 52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했다. “금액은 상관없으니 마녀사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2024년 백악관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트럼프 명의의 이메일이 뿌려진 뒤였다. 여전히 건재한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결과다. ▷트럼프 측에서는 기소 결정이 오히려 “정치적 황금”이라는 말도 나온다. 대선에 최대한 활용하자는 전략이 공공연하게 거론된다. 정치 탄압에 맞서는 ‘투사’이자 ‘순교자’ 이미지를 극대화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겠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머그샷(범인 식별용 사진)을 공개하지 않고, 수갑을 채우지 않기로 한 검찰의 결정은 상징적 장면을 연출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를 막겠다는 의도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기소 국면을 내년 말까지 끌고 가기 위해 변호인단이 재판 지연 작전을 반복할 것이라는 관측도 파다하다. ▷트럼프 기소를 주도한 앨빈 브래그 맨해튼 지검장은 집중 공격의 타깃이 됐다. 살해 협박 편지와 백색가루 봉투가 배달됐다. 그가 진보 진영의 큰손 후원자인 조지 소로스로부터 검은돈을 받았다는 식의 음모론도 난무한다. 트럼프 본인이 브래그 검사장을 ‘타락한 사이코패스’로 부르며 “기소 시 죽음과 파멸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브래그 검사장은 “근거 없는 선동적 공격이자 부당한 수사 개입”이라고 맞서고 있다. 친(親)트럼프 대 반(反)트럼프의 충돌 가능성으로 미국 사회는 일촉즉발 분위기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처벌을 자제해온 미국의 금기는 깨졌다. 정치적 보복의 악순환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기소 결정은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뉴욕타임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소 사례를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함께 소환하며 “가장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도 전직 대통령 기소를 피해 가지 않았다”고 했다. 첫 전직 대통령 기소가 야기할 혼란과 분열을 얼마나 빨리, 어떻게 극복할지가 미국 민주주의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우리가 국가의 산업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국뽕’에 취해 살았던 시절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근무하는 20년 차 공무원 A 씨는 초임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정책 프로젝트가 떨어지면 밥 먹듯이 야근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라 살림살이부터 일자리, 복지, 안보 등 부처별로 대한민국을 끌고 간다는 긍지와 사명감이 각 부처 공무원들에겐 넘쳤다. ▷요즘 관가 분위기는 달라졌다. 18개 중앙부처 소속 일반직 공무원 중 사표를 던지는 이가 한 해 3000명에 육박한다. 인사혁신처와 국회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일을 그만둔 공무원이 2995명으로 2017년에 비해 57% 늘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순으로 많았다. 과기정통부는 산하 우정사업본부의 우정직, 법무부는 교정직 공무원들이 그만둔 사례가 상대적으로 많다. 그외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사표 행렬도 부쩍 늘고 있는 추세다. ▷중앙부처의 허리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장급 이상의 탈(脫)공직이 특히 눈에 띈다. 국토교통부는 2021년 한 해에만 3급과 4급 공무원 26명이, 산업통상자원부는 21명이 사표를 쓰고 기업, 연구소 등으로 옮겼다. 민간 분야의 인력 수요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로운 기회를 붙잡자’는 분위기가 강해졌다고 한다. 공직이 과거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보상 등 유인책도 떨어진다며 공무원들은 한숨이다. 고위공무원단으로 승진해 봤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 인사’에 휘둘리거나 인사 유탄을 맞을 것이란 불안감도 적지 않다. ▷스스로 떠나는 공무원들 앞에서 ‘철밥통’은 옛말이다. MZ세대를 비롯한 청년 공무원들의 조기 퇴직도 두드러진다. 연공서열을 비롯한 구시대적 조직문화와 낮은 처우, 미래에 대한 회의감과 비전 부재 등 문제들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탓이다. 외무직 공무원 중에서는 시험에 수석 합격했던 30대 외교관이 구글로 가겠다며 돌연 사표를 냈다. “시험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면서도 이에 매달리지는 않는 게 요즘 젊은이들이다. 공무원시험 응시율도 계속 떨어져 9급 공무원 경쟁률은 31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공직사회의 인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해외에서는 인공지능(AI) 도입, 자동화 등을 통한 시스템 효율화 작업을 시도하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딜로이트컨설팅은 공무에 AI 기술을 도입할 경우 미국에서만 연간 업무시간은 12억 시간, 예산은 411억 달러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을 내놓기도 했다. 기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게 국민을 위하는 공복(公僕)들의 헌신과 피땀이다. 이런 인재 양성에 많은 국가 예산과 노력이 투입된다. 한 명씩 떠날 때마다 국가적 손실이 쌓여간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한국에도 꽤 알려진 일본 작가 다카기 나오코의 책 ‘서로 40대에 결혼’은 출판 당시 화제가 됐다. ‘혼자 살아보니 괜찮아’, ‘독신의 날들’ 같은 책을 연달아 냈던 그의 갑작스러운 결혼에 “배신감을 느꼈다”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안 해 봤다고 후회할 것 같으면 일단 저질러 보자!”며 결혼에 이어 임신, 출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세계적 현상이라는 만혼(晩婚) 트렌드가 보수적인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국내 40대 초반 여성의 지난해 혼인 건수가 20대 초반 여성보다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혼인 통계 작성이 시작된 1990년 이후 처음으로 40대 초 혼인이 20대 초를 추월한 2021년부터 2년째다. 40대 여성의 혼인 건수는 해마다 늘어나는 반면 20대 여성의 혼인은 줄어든 결과다. 한국에서도 여성들의 결혼이 그만큼 늦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40대 결혼은 절반 이상이 초혼이다. 여성이 연상인 부부 비중 또한 역대 가장 높다. ‘누난 내 여자니까∼’라는 노래 가사가 낯설지 않은 시대다. ▷‘노처녀, 노총각 히스테리’라는 말은 사라지는 분위기다. 이제는 늦은 나이까지 싱글 라이프를 여유롭게 즐기는 사례가 더 많다. 초혼 연령은 남성(33.7세)과 여성(31.3세) 모두 역대 최고다. 주택 마련의 어려움 등 주변 여건 탓도 있지만 결혼을 ‘필수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인식의 확산도 영향을 미쳤다. 만혼의 장점을 앞세우는 이들은 역으로 ‘젊을 때 결혼하면 안 되는 10가지 이유’ 같은 논거를 들이대기도 한다. 결혼 실패 확률이 더 높고,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며, 아직 자기계발이 진행 중인 만큼 기회비용이 크고, 가족과 사회로부터의 압박이 더 심하다는 등의 이유다. ▷온라인 데이팅 앱의 발달로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서로의 관심사와 배경을 맞춰 만나기가 쉬워지고 있다. 고령화 추세 속에 짝을 찾을 수 있는 모집단 자체도 늘었다. 40, 50대의 만남은 웨딩 문화도 바꿔놓고 있다. 성숙미와 세련미를 강조한 ‘작은 결혼식’이 열리고, 순백이 아닌 다채로운 색깔과 무늬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등장한다. 꼭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늦결혼에 대비해 난자를 냉동하는 여성들도 많아졌다. ▷저출산 대책 마련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정부 관계자들은 만혼 현상에 한숨이 나올 법도 하다. 결혼이 늦어지는 만큼 출산을 늦추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적잖다. 그렇다고 100세 시대의 인생 반려자를 찾는 데 적령기를 따질 일은 아니다. 독신이었던 제임스 매티스 전 미국 국방장관은 72세였던 지난해 50대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으랴. “결혼, 미룬다고 아예 안 하는 게 아니다”라는 싱글들의 외침이 울린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더 이상 같이 못 살겠어요. 세끼 밥 챙기는 것도 힘든데 반찬 투정만 하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보기 싫고….” 코로나19가 발병한 2020년 이후 이혼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인 듯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이고 중국 등에서도 유사한 통계 변화가 나타났다. 전례 없는 격리 조치 속에 한집에 붙어 있게 된 부부간 충돌이 잦아진 탓이다. “부부야말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한탄 속에 ‘코비드(covid)’와 ‘이혼(divorce)’을 합친 ‘코비디보스(covidivorce)’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팬데믹 초기만 해도 유사한 그래프를 그리는 듯했던 한국의 이혼율은 다르다. 코로나 발병 이후 3년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는 1.8건으로 25년 만에 가장 적다. 전반적인 인구 감소 추세 속에 코로나 기간 결혼 자체가 감소한 것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게 통계청의 분석이다. 경기 불황으로 경제적 부담이 커지면서 이혼을 미루려는 경향 탓도 있다고 한다. 아파트값, 주가 급락 등으로 재산분할의 몫이 적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왔다. ▷감염병과 테러, 대형 재난 같은 외부 충격이 결혼 등 가족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양면적이다. 코로나의 경우 재택근무 등으로 부부가 붙어 있는 시간이 늘면서 관계가 되레 돈독해진 사례도 많았다. 피임약과 콘돔 주문량이 증가했고, 출산율이 높아지면서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코로나 베이비붐’이라는 말이 생겼다. 다만 이는 정부가 쏟아낸 대규모 실업급여 등 다른 상황 변수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다. 충격파를 받아내는 주변 환경이 어떤지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경제적 어려움 또한 과거에는 주로 이혼 사유였다. 실직과 파산, 빈곤 등으로 벼랑 끝에 선 이들이 극심한 불화 끝에 이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이혼율은 OECD 국가 중에 최상위권에 속했다. 최근의 경기 불황은 치솟는 물가 속에 생활고를 서서히 압박해 온다는 점에서 다르다. 주거와 생계 등 해결을 위해 힘든 결혼생활을 감내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60세 이상의 ‘황혼 이혼’이 눈에 띄는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게 또 다른 방증이다. ▷3년간 이어진 이혼율 하락세가 얼마나 더 갈지는 알 수 없다. 팬데믹 기간에 미뤄놨던 이혼 소송이 앞으로 본격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6만여 건의 이혼상담 사유 중에서는 ‘경제 갈등’과 ‘빚’의 비중이 전년보다 늘어났다. 가정을 꾸리기도, 유지하기도 점점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삶의 풍파를 단단한 가족 간 결속의 계기로 만들어 나가는 지혜와 노력이 더 절실해졌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링컨 대통령은 1860년대 농업 투자로 식량안보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1940년대에는 루스벨트와 트루먼 대통령이 핵 안보에 투자했고….” 미국 반도체과학법의 의미를 추켜세운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의 최근 조지타운대 연설은 거창했다. 역사적 지도자들의 업적을 하나씩 소환하며 반도체법을 동급으로 끌어올렸다. 그에 따르면 반도체법은 케네디 대통령의 인류 최초 달 탐사 프로젝트에 비견되는, 미국의 미래를 바꿀 업적이다. 반도체 제조업 부활을 통해 ‘신규 기술자 10만 명 양성’, ‘여성 100만 명 고용’ 같은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자는 구체적 주문들이 워싱턴에서 쏟아지고 있다.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은 사내 어린이집도 지어야 한다. 그냥 짓기만 하는 게 아니라 보육 전문가, 커뮤니티 지도자들과 협의해 양질의 운영 프로그램을 짜라는 식이다. “미국이 ‘무덤에서 요람까지’의 복지 부담을 반도체법으로 한꺼번에 해결하려 든다”는 말까지 나온다. 미국 정책의 초점이 국내 이슈에 맞춰지면서 외교는 어느 순간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안보 핵심 품목의 글로벌 공급망 확보를 위해 ‘반도체 동맹’으로 뭉치자”던 당국자들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390억 달러의 보조금을 화끈하게 쏠 것 같았던 반도체법은 세부 내용을 까면 깔수록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에 불리한 내용이 속출하고 있다. 상무부와 국무부, 백악관이 각자 딴소리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이미 한 차례 등에 칼이 꽂힌 한국 기업들은 뒤통수까지 얼얼할 지경이다. ‘중국 때리기’에 자국 이기주의가 결합한 정책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알 수 없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 대중 매파들은 이미 서슬이 시퍼렇다. “공화당보다 더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다. 기대했던 경제 효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규제의 빈도와 강도는 더 높아질 가능성도 높다. 반도체법이 시행되더라도 미국의 세계 점유율 증가가 1% 미만에 그칠 것이라는 골드만삭스의 분석이 이미 나와 있다. 국익 앞에서는 동맹도 친구도 없다는 명제는 새삼스럽다. 19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동맹인 일본을 주저앉힌 게 미국이다. 이번에는 중국인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맞는 유탄의 충격이 간단치 않다. 한국이 다음 타깃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런 흐름대로라면 ‘칩4’나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서 나올 논의 내용도 불안하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 같은 나라는 대외 경제통상 정책이 군사안보와 겹쳐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대응을 위해 때로 경제 이익까지 희생해야 하는 계산법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 미국을 상대로 한 경제안보 함수가 더 복잡하다는 말이다. 더구나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이미 “생큐”를 연발한 미국에 수십조 원대 반도체 투자를 약속한 상태다. 마땅한 대안도 없는 정부는 미국을 설득해 보겠다며 줄줄이 워싱턴행 비행기에 오르고 있다. 덜레스 공항 문턱이 닳아 없어질 판이다. 초격차 기술을 확보해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만이 살길임을 절감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 나라가 어디 한국뿐이겠는가. 일본과 네덜란드, 대만에서도 내부적으로는 볼멘소리가 커지는 형국이다. ‘동맹의 환상’을 깨뜨린 지독한 ‘현타’가 각자도생을 위한 플랜 B로 옮겨가지 말란 법 없다. 미국은 일각에서 제안이 나온 대로 우호국들과 정책을 조율할 ‘반도체 특사’라도 지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대외적으로 안보, 국내에서는 경제 부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면 대가가 따른다는 것은 미국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1000도의 열기 속 치솟는 화염과 매캐한 유독가스, 한 치 앞까지 가리는 시커먼 연기…. 언제 어디가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는 위험천만한 화재 현장으로 뛰어드는 이들이 소방 공무원이다. 남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아비규환 속을 정반대로 뚫고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말한다. 생사를 오가는 다급한 상황에서 본인의 안전 여부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6일 전북 김제의 주택 화재 현장에 출동한 성공일 소방교도 그랬다. “안에 할아버지가 있다”며 소매를 붙잡은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임용된 지 이제 겨우 10개월. 30세 새내기 소방관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4번의 도전 끝에 이룬 소방관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화마에 스러져간 젊은이의 희생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아빠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내 생일 16일인 거 알지. 같이 맛난 거 먹게 알아서 예약 좀 해줘요”였다고 한다. ▷소방관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각오하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다. 언제 출동 사이렌이 울릴지 몰라 야근조는 소방복을 입은 채 쪽잠을 잔다. 한 해 발생하는 화재 사건은 전국적으로 3만∼4만 건. 하루 평균 100건 정도의 화재가 발생한다. 지난해 경기 평택시 냉동물류창고 화재 사건에서는 소방관 3명이 순직했다. 한 해 평균 5명씩 순직하는 소방관 중에는 20대가 가장 많다. “살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은 물과 땀에 절어 돌아온 동료에게 전하는 서로의 인사이자 격려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관의 임무는 화마 대응에 국한되지 않는다. 물에 빠진 피서객을 구하다 급류에 휩쓸려 순직하고, 높은 곳에서 구조 활동을 하다 추락사하고, 현장에 접근하다 배나 자동차가 뒤집혀 목숨을 잃기도 한다. 부상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 10년간 보고된 크고 작은 부상은 7000건에 육박한다. 사지 마비나 3도 화상 같은 중증 부상을 극복하는 과정은 길고도 고통스럽다. 그래도 이들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한다. ▷119종합상황실에 걸려오는 신고 전화는 지난해 1250만 건을 넘어섰다. 2.6초에 한 번씩 울려대는 전화 속에 어떤 위험 상황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다. 복잡해지는 대도시의 구조와 기후변화 등으로 예측하기 어려운 신종 재해가 늘어나고 피해 규모도 커지는 추세다. 더 위태로워진 사선(死線)을 앞에 두고도 소방관들은 묵묵히 방수화와 장비를 챙기고 있다. 우리 모두를 숙연하게 만드는 살신성인의 실천자들이다. 아무리 예우를 다해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딱 2분만 보려고 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면 2시간이 지나 있다.” 짧은 동영상 ‘숏폼(short form)’에 중독된 것 같다는 한 사용자가 인터넷에 올린 하소연이다. 숏폼을 시청하다 며칠 연속 밤을 꼴딱 새웠다는 어느 대학생은 “귀신에 씐 것 같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또 반복하는 나 자신에게 충격을 받았다”, “집중력이 점점 짧아져 이젠 책 반 권도 못 읽어 낸다” 등의 고백이 이어진다. ▷숏폼은 10분 이내의 짧은 영상을 의미하지만 대다수 콘텐츠의 길이는 15∼60초에 불과하다. 툭툭 끊어지는 자투리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짧고 굵은’ 콘텐츠다. 화제가 된 드라마나 영화의 명장면부터 메이크업, 패션, 요리법 등이 요약 편집돼 있다. 빵 터지는 개그와 아이돌 스타, 반려동물은 빠지지 않는 킬러 콘텐츠다. 시청이 끝나면 자동으로 다음 영상이 연결되는데, 알고리즘이 관심 주제를 알아서 찾아주니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젊은 세대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휙휙 넘기는 손가락질로 무한 재생되는 숏폼은 ‘디지털 마약’ 같은 중독성을 발휘한다. 해외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숏폼이 어린이 발달에 미치는 영향’ 같은 유해성 관련 연구가 본격화하고 있다. 기억력과 집중력, 독서력 저하는 물론 강렬한 영상에 반복 노출된 이후 느끼는 일상의 지루함과 삶의 질 하락 같은 문제들에 대한 위기의식이 커진 결과다. ‘팝콘 브레인’ 증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두뇌가 즉각적인 자극에 반복 노출될 경우 팝콘이 터지듯 더 큰 자극만 계속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로벌 숏폼 플랫폼인 ‘틱톡’은 18세 미만 청소년의 사용 시간을 1시간으로 제한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1일 발표했다. 틱톡의 원조 국가인 중국은 ‘어린이들의 짧은 동영상 중독’ 방지를 위한 관리 강화 방침을 밝혔다. 서울아산병원 정희원 교수 같은 국내 전문가들은 “합성마약이나 다름없는 숏폼의 시청 시간을 줄이기는 어려울 테니 아예 끊어라”는 단호한 조언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중독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는 10, 20대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우려와 경계 속에서도 숏폼은 대세다. 페이스북이 ‘릴스’, 유튜브가 ‘쇼츠’를 선보였고 국내 SNS 업체들도 속속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쇼츠는 출시 1년도 되지 않아 일간 접속 수가 150억 뷰를 넘어섰다. 영상제작 강의가 넘쳐나고,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더 자극적인 영상들이 쏟아진다. 사용 시간을 정해두는 등의 자율적 규제가 병행되지 않으면 ‘디지털 좀비’가 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다. 숏폼이 주는 재미와 정보에는 결국 대가가 따른다는 말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읽지 않은 SNS 메시지 101개, 휴대전화 메시지 254개, 이메일은 4만6252개…. 이 중에서도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그룹 채팅방이다.” 영국의 방송 진행자이자 언론인인 시린 케일은 칼럼에서 와츠앱 같은 SNS의 단체 채팅방을 ‘독재’라고 비판한다. 원치 않는 채팅에 사람을 끌어들인 뒤 감정노동을 하게 만드는 시스템이란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관계의 부담을 지고 나가버릴 용기도 없다”는 고백도 한다. 한국인들이 받는 ‘단톡방 스트레스’가 해외에서도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카카오톡 단톡방을 조용히 나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다른 멤버들에게 알리지 않고 탈퇴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최대 2000만 원의 과태료를 내도록 규정해놨다. ‘이런 것까지 법으로 규제하려 하느냐’는 일부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발의 단계에서부터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부장님이 계시는 회사 단톡방’부터 시댁 단톡방까지 각자가 억지로 속해 있는 각종 단톡방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욕구가 그만큼 쌓여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단톡방에서 ‘조용히 떠날 권리’는 결국 SNS에서의 프라이버시 문제로 귀결된다. 원치 않은 정보나 논의 참여를 부담 없이 거부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채팅방을 나가면 된다지만 ‘○○○님이 나갔습니다’라는 알림이 남은 멤버들에게 불러일으킬 관심과 억측, 실망감, 불만은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기 십상이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와츠앱에 ‘조용히 나가기’ 기능을 도입하면서 ‘비대면 프라이버시를 대면에서와 같은 수준으로 보호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조용한 탈퇴’는 현재 국내에서는 유료 서비스에만 제공되고 있다. 오프라인과 마찬가지로 온라인에서도 보장돼야 할 ‘자유롭게 들고 날 권리’를 돈으로 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 프로그램에도 적용해 달라”는 사용자들의 요구에도 침묵하던 카카오톡은 법안까지 발의되고 나서야 뒤늦게 서비스 확대를 검토 중이다. 어물쩍대다 결국 법안에 등 떠밀리는 모양새가 됐다. ▷SNS를 이용하는 성인 5명 중 4명은 단톡방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카톡’ 알림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호소가 이어지고 있다. 단톡방에서 쏟아지는 정치적 주장이나 과도한 공격, 음담패설 등에 불편함을 느낀다는 이도 적지 않다. ‘카톡 감옥’, ‘카톡 지옥’으로 불리는 사이버 학교폭력도 문제다. 이런 단톡방의 횡포에서 자유롭게 탈출할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서는 ‘버리고 떠나는 자’라는 꼬리표부터 떼 줘야 한다. 이런 일에 국회까지 나서야 되겠는가.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바로 지금, 여기 우크라이나에서 국제질서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20일 대국민 방송연설은 비장하면서도 힘이 넘쳤다. 그는 그 국제질서가 ‘규범과 인간성, 예측 가능성’에 기반을 둬야 한다며 “필요한 것은 결의뿐”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 전투기 지원 등을 요청한 직후였다. ▷러시아가 침공 사흘 만에 끝날 것으로 믿었다던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곧 1년(24일)이 된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이 전쟁은 국제 정세의 판을 완전히 흔들어놨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과 유럽에 맞서 러시아와 중국이 밀착하는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 구도가 공고해졌다. 중-러의 밀착 속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는 아시아 안보 협의체인 쿼드(Quad), 오커스(AUKUS) 등과의 협력으로 태평양까지 연대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블록화를 바탕으로 전선(戰線) 재편이 급속히 진행 중이다. ▷세계 2위의 군사대국인 중국의 대러시아 무기 지원은 향후 판도를 뒤흔들 변수다. 중국은 부인하지만 미국은 관련 움직임을 일부 포착했다는 게 외신의 보도다. 중국의 군사 지원이 현실화할 경우 진영 대결은 이념 전선을 넘어 유혈 충돌로 번질 수도 있다. 자칫 대규모 국제전으로 비화할지도 모를 일이다. 전쟁 장기화의 피로감 속에 러시아가 핵무기를 꺼내 들 가능성도 다시 제기됐다. 종신집권을 노리는 푸틴 대통령이 내년 3월 대선 승리를 위해 무리수를 쓸 수 있다는 우려다. ▷에너지난과 식량난 같은 지리경제학적 리스크도 현실화하고 있다. 제재로 막혀버린 기존 시장과 공급망의 대안을 찾느라 각국이 분주하다. 그렇다고 모든 국가가 진영 싸움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로 불리는 제3국가들 중에는 선뜻 편을 들지 않은 채 전세를 봐가며 합종연횡을 모색하는 곳이 적지 않다. 이념보다는 각국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끝나고 다극체제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나온다. ▷양측 사망자 수 22만 명, 난민 등 인도적 지원 대상자 1800만 명, 물적 피해 1145억 달러(약 149조 원)…. 처참한 현실 앞에서도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의 ‘3월 대공습’을 앞두고 양측 모두 전방에 병력과 무기를 다시 집결시키고 있다. 이 파국적인 소모전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새 국제질서는 어떻게 정착될지, 그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를 비롯해 수많은 숙제가 던져질 것이다. 한국도 비켜 갈 수 없는 질문들이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
최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성장률 전망치에 가장 충격을 받은 나라 중 하나가 영국이다. 서방의 주요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전망치가 기존보다 하향 조정되면서 올해 ―0.6% 역성장이 예고됐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으로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보다도 낮았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3주년을 맞아 리시 수낵 총리가 “브렉시트로 얻은 자유 덕에 엄청난 진전을 이뤄냈다”고 자찬한 기념 성명은 빛이 바랬다. ▷‘정치적으로는 대혼란, 경제적으로는 참사.’ 영국 일간 가디언을 비롯한 언론의 평가는 냉혹하다. “브렉시트는 망상”, “국가적 자해” 같은 노골적 비판이 쏟아진다. 브렉시트를 후회한다(Brexit+regret)는 의미의 ‘브레그렛(Bregret)’이라는 신조어도 퍼졌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EU로 되돌아가기 위한 재투표 의향이 있다”는 답변이 57%로 절반을 넘었다. 영국 여론이 단순히 후회의 감정을 넘어 실제적인 복귀 요구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영국 중앙은행에 따르면 브렉시트 이후 영국과 EU의 무역거래 규모는 15% 줄었다. 각종 통관, 승인 절차 등 무역 장벽이 높아진 탓이다. 자동차 생산량부터 외국인 투자까지 각종 수치는 하락세다. 동유럽 노동자 행렬이 끊기면서 인력난이 심화했고, 물자 공급망 또한 적잖게 훼손됐다. 국가적 생산성 손실 규모는 290억 파운드(약 45조 원), 가구당으로 따지면 1000파운드(약 155만 원)에 이른다고 한다. 파업과 시위 횟수는 1970년대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영국이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됐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브렉시트를 결정한 것은 영국인들 본인이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51.9%로 반대(48.1%)보다 높게 나왔다. 관료적 EU의 통제와 100억 파운드가 넘는 분담금 부담, 몰려드는 불법 이민자 등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던 때다. 그러나 찬성표를 던졌던 이들조차 이제는 “정부에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낀다”고 토로한다. “돈이 많아질 거라고 했는데, 완전히 속았다”는 자영업자들의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국민투표 당시 EU의 작동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표를 던진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브렉시트를 외쳤던 정치인과 선동가들은 침묵하고 있다. 책임을 따져 물으면 “정부가 탈퇴 과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거나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세계 경제 5위의 대국이었던 자국의 추락 앞에 속수무책이다. 시행착오 과정이라는 항변을 받아주기엔 사회적, 경제적 손실이 막심하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결정을 변덕스러운 여론에 맡겼던 포퓰리즘 정치가 부른 결과일 것이다. 그 대가를 얼마나 더 오래, 더 크게 치러야 할지 모른다는 게 더 문제다.이정은 논설위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