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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추상미술 화가 김환기의 푸른색 전면 점화(사진)가 홍콩 경매에서 78억여 원에 판매됐다. 공개된 경매에 나온 한국 미술 작품 중 세 번째로 높은 가격이다. 26일 크리스티 홍콩 본사가 있는 더 헨더슨 빌딩 7층에서 열린 ‘20세기 및 21세기 이브닝 경매’에서 김환기의 1971년 작품 ‘9-XII-71 #216’이 4600만 홍콩달러(약 78억1940만 원·수수료 불포함)에 낙찰됐다. 수수료 포함가는 5603만5000홍콩달러(약 95억5564만 원). 이번 경매는 2022년 크리스티 뉴욕에서 폴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을 1억3800만 달러(약 1836억 원)에 낙찰시킨 경매사 아드리안 마이어가 맡았다. 김환기 작품은 6번의 경합 끝에 주인을 찾았지만 경매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이번에 낙찰된 작품은 약 77억5000만∼112억 원(4500만∼6500만 홍콩달러)에 출품돼 추정가 하단 수준에서 낙찰됐다. 이학준 크리스티코리아 대표는 “밝은 푸른 색조를 띠고 있으며 김환기가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선을 그린 뒤 점을 찍은 제작 과정을 볼 수 있어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번 경매 결과로 한국 회화 역대 경매가 순위 1∼10위를 모두 김환기 작품이 차지하게 됐다. 역대 최고가와 두 번째 작품은 2019년 11월 크리스티 홍콩에 나온 ‘우주’(05-IV-71 #200·약 123억 원)와 2018년 5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 나온 ‘3-II-72 #220’(약 85억3000만 원)이다.홍콩=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엄마를 도와 치매 할머니를 돌보던 손녀는 어느 날 할머니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 시작했다. 엄마와 집안일을 분담하며 간병하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보자고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어둡고 긴 터널을 걷는 듯한 절망에 가득 찼을 때였다. 할머니 간병이 너무 힘들어 펑펑 울고, 억울함과 갑갑함을 느꼈던 시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나 가능하겠다’란 생각은 ‘할머니는 언제 돌아가실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죄책감이 몰려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손녀는 유튜브 채널을 열고 할머니를 기록하기로 한 것이었다.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할머니가 카메라 앞에서 자기 소개를 하며 ‘슬프면 슬픈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살라고 한마디 건네는 모습을 보며 손녀는 깨달았다. 강인했던 할머니는 귀가 어두워지고 기억력도 나빠지면서 점점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해 외로움과 고립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억하고 싶은 할머니를 영상에 담기로 하고 매주 고민하자, 삼대의 일상은 불안과 걱정에서 애정과 칭찬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책은 14만 구독자의 사랑을 받는 유튜버 ‘롱롱TV’가 어떻게 할머니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는지 그 과정을 담은 에세이다. 삼대의 화목한 모습과 따뜻한 스토리에 구독자들은 사랑이 가득한 가족이라거나 동화 속에서 튀어 나온 사람들 같다고 부러워하지만, 글을 읽어 보면 실상 그 이면에는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풀지 못한 응어리 등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유튜브를 통해 할머니의 긍정적인 모습을 공유한 뒤로 할머니의 인지 능력도 조금씩 좋아지고 소원했던 친척들도 다시 할머니를 찾기 시작한다. 결국 애정 어린 따뜻한 관계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진심을 믿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노력한 끝에 얻어낼 수 있는 것임을, 저자는 본인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알려준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경기 용인시 호암미술관에서 어린이 관람객이 실수로 수억 원 상당의 미술작품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24일 호암미술관에 따르면 지난 추석 연휴 기간이던 18일 스위스 화가 니콜라스 파티의 개인전에서 한 어린아이가 휴대전화를 보면서 작품을 등지고 걷다가 좌대를 건드려 작품을 떨어뜨렸다. 해당 작품은 파티의 삼면화 작품인 ‘나무가 있는 세폭화’. 이달 초 열린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에서 비슷한 형태의 삼면화 작품이 35만 달러(약 4억6000만 원)에 팔린 바 있다. 바닥에 떨어졌던 해당 작품의 전시는 바로 중단됐다. 해당 작품은 아치형 화면 세 개로 이뤄진 것으로 높이 약 50cm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소형 제단화 형태다. 바닥에 떨어졌지만 그림 자체는 파손되지 않았고, 삼면화를 연결하는 경첩 나사 2개가 빠졌다. 미술관 측은 작가와 상의한 후 수리해 24일부터 다시 전시장에 내놓았다. 미술 시장의 인기 작가인 파티는 파스텔을 재료로 독특한 인물이나 풍경화를 주로 그린다. 한국 첫 개인전인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에 머물며 제작한 파스텔 벽화 5점과 신작 회화 20점을 포함해 총 48점의 작품을 선보인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줄무늬 슈트에 모자까지 갖춰 쓴 남자가 눈동자가 그려진 지팡이를 짚고 들어선다. “청바지를 입기엔 너무 나이가 많고, 스니커즈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 사람은 독일의 존경받는 화가 마르쿠스 뤼페르츠(사진). 한국에서 개인전을 여는 그를 최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뤼페르츠는 작업실 밖을 나설 때면 격식을 갖춰 입고,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쓰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간편하고 쉬운 것이 넘치는 시대에 규칙을 따르는 옷차림에 대해 그는 “그림 그릴 때와 작업실 밖의 나를 분리하기 위해”라고 설명했다. “작업실에서는 헐렁한 옷차림에 앞치마를 두르는데, 그림을 그리느라 옷이 항상 더러워집니다.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 같은 모습이라면 작업실 밖으로 나올 때는 깨끗한 모습으로 있으려고 하죠.”오래된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성향은 개념미술,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할 때 회화를 고집했던 예술 세계와도 연결된다. 뤼페르츠는 지금은 세계적 화가인 안젤름 키퍼,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함께 1980년대 ‘신표현주의’ 미술가로 불리며 회화를 다시 주목받게 했다. 그가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만든 회화 33점과 조각 8점이 대전 문화예술공간 ‘헤레디움’에서 열리는 개인전 ‘죄와 신화, 그리고 다른 질문들’에서 전시된다. 뤼페르츠는 ‘회화를 위한 회화, 열광적인 회화’라는 슬로건을 앞세운 ‘디티람브’ 회화 개념을 탄생시켰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서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찬가를 뜻하는 ‘디티람브’를 예술로 가져온 것으로, 그는 “아폴론보다 관능적이고 감정적인 디오니소스에게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회화를 주목한 배경에 대해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20세기 후반 미국 예술가가 유럽의 전통을 변형해 추상표현주의와 팝 아트를 탄생시켰는데, 어느 정도 양식화가 되며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잭슨 폴록의 물감 흩뿌리기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적 그림처럼. 그렇게 프랑스와 미국이 경쟁하는 가운데 독일은 조용히 회화에서 새 길을 찾았죠.” 전시작 중 그리스 신화에 뿌리를 두고 다른 형태로 뻗어가는 작품이 여럿 보인다. ‘푸생-페르시아 암살’(1990년)은 17세기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작품 일부를 넣고 그 옆으로 입체파 스타일의 정물이 펼쳐진다. 뤼페르츠는 “그림을 연극 무대처럼 작가가 설정했던 푸생의 그림이 최초의 추상화라 생각한다”며 “특유의 구도를 추상화로 확장해 재해석했다”고 말했다. 이 밖에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유토피아를 모티프로 한 ‘아르카디아’ 연작, 신화 속 캐릭터를 다룬 인물 연작, ‘일곱 가지 대죄와 세 가지 질문’을 주제로 한 정물 연작을 만날 수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가 임민욱은 한국 현대사를 주제로 대규모 퍼포먼스, 설치 등의 작품을 해왔다. 6·25전쟁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5·18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피해자 유족을 위로하는 퍼포먼스(2014년 광주비엔날레 ‘내비게이션 아이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모티프로 한 설치 작품(2015년 삼성미술관 플라토 개인전 ‘만일의 약속’) 등이다. 그런 그가 최근 새롭게 시도한 회화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메멘토 모아레’가 서울 성북구 BB&M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무정형의 만다라’라고 부르는 새 연작은 테라코타 가루, 우레탄, 아크릴 물감을 재료로 추상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원형을 반복적으로 그려 우주의 원리를 담은 만다라와 비슷하지만, 임민욱의 작품에서는 원이 자유롭게 떠다니듯이 불규칙하게 놓여 있다. 전시 제목은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담은 상징)의 변형. ‘모아레’(무아레)는 직선 패턴이 여러 겹으로 겹칠 때 나타나는 물결무늬를 뜻한다. 여기서 작가가 인류의 다양한 문화에 등장하는 ‘만다라’의 원리를 겹쳐 자신만의 상징을 만들어내려 한 것임을 유추해 볼 수 있다.또 다른 연작 ‘Almost Too Calm’에서는 카메라를 목에 걸기 위해 쓰는 스트랩이나 블라인드 손잡이 등 일상에서 쓰이는 사물과 오징어 뼈, 해초를 놓고 우레탄으로 채운 모습을 볼 수 있다. 21세기에 우주의 원리를 담는 상징을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한 결과물로 보인다. 임민욱은 지난해 비무장지대(DMZ)에서 열린 현대미술 전시 ‘체크포인트’에서 병사들이 덮고 자던 군용 모포에 그림을 그린 작품 ‘커레히―홀로 서서’를 선보인 바 있다. 이때부터 평면 작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작가는 특정 역사 사건을 넘어 보편적인 상징에 대한 탐구를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10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도 델리의 아파트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요리를 하러 부엌에 갔을 때였어요. 스테인리스로 된 주방 도구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마치 나와 대화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죠.”인도의 저명한 현대 미술가인 수보드 굽타(사진)는 이때부터 철제 도시락, 우유 통, 팬부터 자전거까지 일상 속 사물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 인도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그는 작업을 이어갔고 2000년대부터 해외 미술관과 컬렉터가 대형 설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주목받았다. 그의 최근작이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 전시된다. 굽타가 10년 만에 선보이는 국내 개인전 ‘이너 가든’에서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지하 1층, 지상 1층과 3층에 걸쳐 회화 및 조각 15점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 공간에 맞춰 작은 규모의 설치 작품과 벽에 걸 수 있는 회화 작품이 주를 이룬다. 특히 1층에서 볼 수 있는 연작 ‘프루스트 매핑’은 납작하게 만든 헌 그릇을 배경으로 다양한 색채의 용기들이 배치된 부조 형태의 작품. 이 연작에는 내부가 진한 검은색으로 깊은 심연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노란색 그릇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굽타는 “인도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카비르가 그릇 속에 우주 만물이 들어 있다고 말한 시 구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헌 그릇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그 그릇을 사용했던 사람들, 그 사람과 얽힌 수많은 사람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관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카비르의 시는 지하 1층에서 볼 수 있는 작품 ‘이 질그릇 안에 일곱 개의 대양과 헤아릴 수 없는 별이 있다 I’으로도 이어진다. 작품 제목을 카비르의 시에서 차용한 이 작품은 그릇 하나를 반으로 쪼갠 뒤 입구가 서로 맞닿도록 위아래로 배치했다. 그냥 보면 종교적인 의식에 쓰이는 도구를 형상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일상적 그릇이며 그 내부를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도록 녹(파티나)을 입혔다. 이 밖에 석고로 스투파(불사리를 보관하는 탑을 의미하는 인도 불교의 전통 건축물) 형태를 만들어 그릇을 집어넣은 설치 작품 ‘스투파’와 회화 작품 ‘이너 가든’ 연작 등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회화 작품은 말린 꽃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 굽타는 “책장 사이에 꽃을 끼우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보존할 수 있고, 또 그것을 꺼내 보면 꽃이 가졌던 좋은 분위기와 감각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인도의 시장에서 파는 평범한 사물들에서 영감을 얻는 굽타는 이번에 한국에 와서 “남대문 시장도 가보았고 스릴을 느꼈다”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요리를 좋아했다는 그는 비빔밥과 김치도 인도에서 직접 만들어 먹었다고. “정관 스님이 출연한 요리 프로그램을 인상 깊게 봤어요. 다음에 한국에 오면 전통 방식으로 김치를 담그는 시골에 가서 ‘진짜 김치’를 꼭 먹어 보고 싶습니다.” 전시는 10월 12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백남준이 뉴욕에서 썼던 작업실 공간을 그대로 복원한 공간 ‘메모라빌리아’. 경기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볼 수 있는 이곳은 평소에는 관객이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런데 12일 관객 8명이 인솔자를 따라 브라운관 모니터가 쌓인 수장고는 물론이고 큐레이터의 사무실과 관장실까지 들어갔다. 이들이 아무나 볼 수 없었던 미술관의 숨은 공간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 미술가 우메다 테츠야의 퍼포먼스 작품 ‘물에 관한 산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우메다의 ‘물에 관한 산책’은 약 50분간 미술관 내외부를 둘러보며 진행된다. 곳곳에서 작가의 설치 작품을 보는 것은 물론이고, 연기자들이 말 대신 몸짓으로 미술관의 흥미로운 공간을 비추며 관객이 스스로 보기를 유도한다. 투어는 매주 금, 토요일 오후 2시부터 20분 간격으로 총 6회 진행된다. 시간차를 두고 출발했던 팀들이 서로 만나기도 한다. 백남준아트센터가 국내외 작가에게 의뢰한 신작을 선보이는 ‘NJP 커미션: 숨결 노래’전이 12일 개막했다. NJP 커미션은 백남준아트센터가 처음 선보이는 형식의 전시로 현대 미술의 중요 의제를 다루는 중견 작가들의 신작을 제작하고 심화한 예술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기획됐다. 우메다를 비롯해 앤 덕희 조던, 에글레 부드비티테, 최찬숙 작가가 참여했다. 큐레이팅 형식도 독특하다. 미술관 소속 큐레이터 2명과 외부 큐레이터 2명이 협력해 기획했다. 미술관의 이채영 학예연구팀장, 조권진 학예사와 독립 큐레이터 이성민, 최희승이 협업했는데 여러 차례 회의하며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토론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활동하는 조던은 백남준에게 영감을 얻은 신작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을 환영한다’를 선보인다. 작품은 발광다이오드(LED) 조명과 피아노 퍼포먼스 사운드가 삽입된 피아노, 구형 컴퓨터, 실리콘 손, 바닥에 물이 담긴 큰 수조로 구성된다. 관객이 다가오면 진자가 움직여 손이 피아노로 다가가 연주가 시작된다. 정교하게 설계된 센서로 작동되는 작품이지만, 사람이 참여함으로써 물에 비친 기계의 잔상이 흔들리고 기계의 언어를 해체한다는 은유를 담는다. 부드비티테(리투아니아)는 커다란 트램펄린 3개를 연결해 설치했다. 평소에는 관객이 앉아서 쉴 수 있다. 퍼포먼스 워크숍 ‘실려서 가고, 뒤에서 끌려가는’도 이곳에서 열린다. ‘끌기’라는 행위에 내포된 폭력은 물론이고 배려와 보살핌 같은 복합적인 의미를 탐구한다. 최찬숙은 미국 애리조나 지역을 횡단하며 만난 이라크전 참전 용사와 아메리카 원주민 공동체인 아파치 부족의 연대를 다룬 에세이 필름 ‘더 텀블 올 댓 폴’과 바람에 굴러다니며 씨앗을 퍼뜨리는 회전초의 삶을 그린 ‘더 텀블’을 공개한다. 전시 제목 ‘숨결 노래’는 작가 4명이 각기 다른 톤과 목소리로 만들어 낸 노래를 상상하고, 그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 불규칙한 리듬이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어우러지고 함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2월 15일까지.용인=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고대 문명부터 현대까지 5000년을 아우르는 소장품을 가진 미국 최대 미술관이자 한 해 500만 명이 찾는 ‘뉴욕의 루브르’, 메트로폴리탄미술관(메트) 정면에 한국 작가 이불의 조각이 12일(현지 시간) 공개됐다. 미술관 방문객은 물론 뉴욕 시민과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까지 수백만 명의 눈길이 머무는 파사드(fa¤ade·건물 정면)에 놓이는 작품은 ‘롱 테일 헤일로’ 연작 4점. 한국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이 메트 파사드에 전시된 것은 처음이다. 이불은 1980년대 후반 ‘낙태’ 등의 퍼포먼스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생선을 이용한 작품 ‘장엄한 광채’(1997년)를 전시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미국 구겐하임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영국 런던 헤이워드갤러리 등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16일 동아일보와의 줌 인터뷰에서 2년 전 메트로부터 제안을 받고 작품을 공개하기까지의 과정을 전했다.● 모순이 만드는 수많은 연결고리 이불의 신작은 미술관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 2개씩 설치됐다. 정문 옆 작품은 여신상을 연상케 하는 모양이며, 가장자리 두 작품은 개가 무언가를 쏟아내는 형태다. 작품을 자세히 관찰하면 상·하 좌·우, 안·밖, 흑·백, 과거·미래 등 상반된 요소가 결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신상 형태 조각은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표면은 부드러운 고무인 에틸렌 비닐아세테이트(EVA)가 재료다. 표면을 갈거나 여러 효과를 주어 붓으로 칠한 회화 같은 느낌도 연출했다. 멀리서 보면 그리스 조각상 같지만 자세히 보면 ‘사이보그’ 연작도 떠오른다. 과거인지, 미래인지, 현재인지, 조각인지 회화인지 모호한 형태다. 맥스 홀라인 메트로폴리탄미술관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담은 파워풀한 조각”이라며 “인간 조건의 복잡함을 탐구한 훌륭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이불은 “최대한 다양한 연결고리를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메트의 초청을 받자마자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건물의 재료부터 오고 가는 사람들과 관계 등 공간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수개월을 썼죠. 미술관이 담은 거대한 문화는 물론 그 앞이 다양한 언어, 문화, 연령대의 불특정 다수가 오가는 공간임을 신경 썼어요.” 작가는 작품의 시각 언어를 특정 시대나 지역으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모순된 요소를 얽어 ‘열린 의미’를 갖도록 했다. 그 결과는 행인들이 스스로를 비춰 볼 수 있도록 한 ‘프리즘’에 가깝다. “가을볕이 만드는 음영, 겨울이 되면 조금 낮아지는 햇빛, 첫눈이 오거나 비가 내릴 때 등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과 보는 사람들에 따라 무수한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 왕지네에게 물리고도 작업에 몰두 메트는 현대자동차로부터 5년 후원 협약을 받고 올해부터 ‘더 제네시스 파사드 커미션’을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에 이불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근현대미술 큐레이터 레슬리 마는 “이불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각 언어로 지난 40년간 다양한 배경의 관객을 사로잡은 같은 세대의 앞서가는 미술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작품에서는 재료의 창의적 사용으로 각도나 시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이불은 “실외에서 잘 쓰지 않는 부드러운 재료를 외부에서 잘 견디도록 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거쳤다”며 “내부의 굉장히 강하고 복잡한 구조들이 작품을 지지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제작해 간단한 기계를 빼고 거의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했다. “내 재료를 쓰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모든 것을 직접 제작해야 했어요. 골조 위에 부드러운 표피를 씌우려면 수천 개 치수를 재야 했는데 중간에 전화라도 오면 몰입이 깨져 아주 곤란했죠.” 개막 일주일 전 작품을 완성해 뉴욕에 보냈을 만큼 제작 과정은 고강도였다. 이불은 “물리적 힘을 써야 하고, 숫자를 잊지 말아야 하니 매일 10시간씩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작업을 이어갔다”며 “시작한 직후 딱 한 번 후회했지만 돌이킬 수 없으니 그 뒤로 달리는 열차처럼 몰입했다”고 털어놨다. 그 과정에서 15cm 길이 왕지네에게 물리기도 했다고. “왼쪽 발꿈치를 새벽 2시에 물렸어요. 응급실에 가기도 어려워 검색을 해보니 엄청나게 아플 순 있지만 죽지는 않는다더군요. ‘아, 그럼 됐다’ 하고 한 달을 절뚝거리며 작업을 계속했죠. 그럼에도 몰두할 수 있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자란 뒤 198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저자. 이민자로 미국에 정착해 학자이자 작가로 일가를 이룬 그는 ‘기회의 땅’ 미국에 경외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심각한 불평등에 충격을 받았다. 신간은 미국이 ‘불평등의 땅’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경제학과 경제학자가 어떤 과오를 저질렀는지를 짚는다. 미 프린스턴대 공공국제정책대학원 명예교수인 저자는 2015년 소비, 빈곤, 복지에 대한 연구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현실 정책에 깊이 관여하는 경제 전문가의 특성상 미국이라는 나라가 돌아가는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책은 그가 25년간 영국 왕립경제학회에 기고한 원고들을 모아 편집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최저임금, 건강보험, 빈곤 측정 시스템, 통계, 소득과 자산 불평등, 은퇴, 연금, 주식시장 등 주요 이슈를 놓고 경제학계와 정치권이 벌인 논쟁을 다룬다. 다만 저자가 ‘이 책은 나 자신과 다른 경제학자에 대한 자서전적 성격이 강하다’고 쓴 것처럼 학술서라기보다는 회고록처럼 읽힌다. 예컨대 미국 건강보험과 의료 시스템 문제를 지적하는 장에서는 고관절 수술을 받으며 의료시장의 불투명성에 분노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한다. 최저임금 논쟁을 다룰 때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률을 떨어뜨린다는 통설을 엎기 위해 참신한 연구 방법을 도입한 동료 경제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노벨상과 노벨상 수상자를 다루는 장에서는 노벨 경제학상이 만들어진 계기나 자신이 경제학상을 수상했을 때의 경험 등을 썼다. 다양한 일화들을 통해 저자는 “우리는 정부와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더욱 현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경제학이 돈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사회학자, 철학자 등과 더 많은 교류를 하면서 인문학적 가치와 철학적 영역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피터 싱어, 퓰리처 수상 작가 매슈 데즈먼드 등이 이 책을 추천했으며, 2023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술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곤 합니다.테이트 미술관의 한 방을 가득 채운 ‘시그램 벽화’ 연작이나, 로스코 작품으로만 만들어진 예배당인 로스코 채플에 가면 막막한 벽 속에 가득 잠긴 기분이 느껴지죠.그런데 막상 작품이 주는 감정을 설명 하라면 ‘추상표현주의’나 ‘색면 추상’ 같은 미술사 용어 뒤로 숨어들곤 합니다.추상표현주의가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을 그리는 흐름을 뜻한다는 것, 또 색면 추상은 말 그대로 색으로 된 면을 넣은 추상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하면 로스코의 작품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데도 말입니다.로스코의 작품은 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킬까? 또 작가는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그렸을까?답은 관객이 찾아야겠지만,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로스코의 두 자녀, 케이트와 크리스토퍼 로스코입니다. ‘조응: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전이 개막하는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9월 3일 두 사람과 나눈 이야기를 소개합니다.그림 그릴 땐음악 외 모든 걸 차단했던,모차르트를 사랑한 화가아버지 작품을 보면, 캔버스 위에 직사각형을 던져 넣는게 아니라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 관계를 설정했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 세밀함이 모차르트의 음악과 닮아 있다고 느껴요.케이트 로스코케이트와 크리스토퍼 로스코는 마크 로스코가 세상을 떠날 때 19세, 6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지금까지 로스코의 작품을 보존, 연구하며 알리고 있죠.케이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작품을 지키기 위해 소송까지 치러야 했고, 크리스토퍼는 로스코의 글을 모은 책을 편집하거나 전시 큐레이팅도 담당하는 로스코 전문 연구자입니다.두 사람에게 먼저 가까이서 본 아버지 로스코의 모습에 대해 물었습니다.- 아버지로서 로스코는 어떤 사람이었나요?케이트(케):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벌써 47세였으니 함께한 시간이 길진 않아요. 아버지는 인간적으로는 아주 따뜻한 사람이었죠.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나 젊은 작가들을 대할 때에도 그랬어요. 다만 작품에 관해서는 아버지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어요.크리스토퍼(크): 저도 아버지가 예순일 때 태어나서, 종종 저는 부모가 없고 조부모만 있다고 농담을 하는데요. 늦둥이가 가진 특권을 누나보다는 더 많이 누린 것 같습니다(웃음).그 중 하나는 음악이에요. 아버지가 정말 음악을 좋아하셔서 저와 늘 함께 음악을 듣고 누가 가장 훌륭한 작곡가인지에 대해 토론도 했어요. 그 때 경험 덕분에 지금은 전문적으로 음악 비평을 쓰고 노래도 합니다.-아버지는 어떤 음악을 좋아했나요?크: 모차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 슈베르트요(웃음). 아버지는 정말 모차르트를 사랑했어요.케: 아버지 작품을 보면, 캔버스 위에 직사각형을 던져 넣는게 아니라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 관계를 설정했다는 걸 느낄 수 있거든요. 그런 세밀함이 모차르트의 음악과 닮아 있다고 느껴요.(이 때 크리스토퍼가 누나 케이트를 향해 “그거 정말 좋은 표현이야. 나도 나중에 써야겠어”하고는 저에게 “저희 남매는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서로의 표현을 훔치곤 한답니다”라며 농담을 건넸습니다. 아버지의 예술 세계에 대한 진지한 애정을 서로 공유하는 남매 모먼트를 엿볼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크: 로스코는 20세기 현대 미술가이니 더 자유로운 음악을 들을 거라고 상상하잖아요? 잭슨 폴록이 재즈를 좋아했던 것처럼요.그런데 아버지는 시간을 뛰어 넘는 보편적인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하셨고 그래서 클래식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작업을 할 때에도 엄격하게, 주변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편이었나요?케: 네. 항상 음악을 틀어 놓고 작업했고 몰입한 상태가 깨지는 걸 싫어했어요. 작업실 전화벨이 울리는 데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집중해서 그림을 그린 적도 있어요.어릴 적 작업실에 갔을 때도 한 쪽 구석에 앉아 저는 조용히 제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또 작품이 어느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오롯이 혼자 집중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고향 유럽을 바라보던,미국인 보다는 뉴요커어떤 점에서 아버지는 항상 고향인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물론 이민자의 도시인 뉴욕에선 어느 정도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진정한 ‘뉴요커’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100% 미국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케이트 로스코로스코의 작품에서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지만 제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막막함입니다. 막다른 벽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심정.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눈물도 흘리죠.초기 작품에서는 불안한 도시의 모습이 초현실주의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혹시 그런 불안과 막막함이 이민자로서 겪는 감정은 아니었을지 궁금했습니다. (로스코는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10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초기 구상 작품에서는 도시 모습을 볼 때 불안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로스코는 유럽에서 이주한 이민자이기도 했는데, 그런 영향이 작품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크: 맞는 말이에요. 당시 작품에서 불안감을 느낄 수 있어요. 당시 뉴욕은 대공황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가난을 겪은 어려운 시기였어요.또 로스코는 이 때 아주 붐비는 지하철이나 도시 모습을 그렸는데, 그런 곳에서 인간성을 잃는 듯한 기분이 들잖아요. 거기서 오는 불안감도 있죠.게다가 이민자였으니 삶은 더 쉽지 않았죠. 물론 당시 뉴욕은 이민자가 아주 많았으니, 이민자로서 겪는 개인적인 감정보다 당시 뉴욕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런 불안한 분위기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케: 저도 아버지가 절대 완전한 ‘미국인’이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아버지는 항상 고향인 유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물론 이민자의 도시인 뉴욕에선 어느 정도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진정한 ‘뉴요커’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100% 미국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두 분은 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알리기 위해 전시나 강연도 활발히 하셨는데, 특히 추상표현주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크: 아버지가 사각형만 그렸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초기에는 구상이나 신화에 기반한 초현실주의적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때부터 아버지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문화에서 인간의 본질적 감정을 어떻게 표현 했는지에 관심을 가졌죠.그러니까 후기의 작품들도 결국은 이런 본질을 시각 언어로 담기 위한 끊임없는 고민이었습니다.케: 초현실주의 작품을 그리기 전인 1940년대에 아버지가 남긴 글이 있어요. 여기서 그는 단순한 시각 언어를 사용해 감각을 관객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했는데요. 그러니까 이 때부터 추상으로 나아가는 단계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로스코가 남긴 글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크: 1930년대 중간에 시작해서 1940년대 초반까지 로스코는 책을 썼어요. 완성하진 못했지만 그 속의 글은 예술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들이었죠.예술가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또 진실을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적었습니다. 그는 과거의 사제나 철학자가 하던 역할을 이제 예술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이 글은 제가 조금 다듬어서 20년 전 발간했는데, 최근 한글 번역본이 나왔습니다.(이 책은 ‘예술가의 창조적 진실’(마크 로스코 지음, 위즈덤하우스)입니다)“슬픈 그림보다,깊은 감정을 만나는 그림“몰입 속 대면하는 삶의 질문들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그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깊은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픈 감정을 억누르려 하잖아요. 그런 감정을 ‘오늘 뭐 먹지? 내일은 뭐 하지?’ 라는 생각으로 회피하죠. 그렇지만 그림 앞에서는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 뒤엔 무엇이있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하고 감정을 느끼도록 한 것이죠.크리스토퍼 로스코-로스코를 비롯해 아실 고르키, 잭슨 폴록 등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그 영향인지 작품에서 슬픔을 느낀다고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크: 아버지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깊은 감정을 느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통해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 했고요. 우리는 왜 여기에 있고,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같은 질문이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불안도 있고, 슬픔도 있죠.그러니까 작품 자체가 슬픈 것이 아니라 깊은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슬픈 감정을 억누르려고 하잖아요. 대신 오늘 뭐 먹지? 내일은 뭐 하지? 라는 생각으로 회피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 뒤엔 무엇이있나.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감정을 느끼게 만드려고 한 것 이죠.케: 어떤 사람들은 말년의 작업이 더 어둡다고, 아버지의 삶이 점점 더 우울해졌다고 말해요. 그러나 로스코는 평생 인간 조건이나 감정 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파고 들었던 작가에요. 그러니까 초기 작품은 활기차고 아름답고 그 뒤로는 어둡고 슬퍼졌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죠.-로스코에 대해 ‘색면 추상’이라고 분류도 하는데, 그림 속에서 보이는 것은 색이 아니라 빛이라는 이야기도 예전 어느 강연에서 하셨는데,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케: 아버지는 본인이 ‘색채주의자’가 절대 아니라고 주장했을 거에요. 왜냐면 자신의 그림이 무언가를 표현하고 장식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또 어릴 때 아버지가 저를 미술관에 데려갔을 때, 몇 안되게 큰 소리로 무언가를 말한 순간은 빛에 대한 것이었어요.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를 보거나, 테이트 갤러리에서 터너를 볼 때 작품에서 빛에 사용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저에게 말해주곤 했어요. 그만큼 빛을 중요하게 생각한거죠. 크: 좋은 그림에서는 빛이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멋진사람에게서 빛은 그 내면에서 나오죠. 그래서 가장 어두운 그림이라고 해도 조금만 시간을 두고 바라보면 그 안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어요.전시장에 있는 검정과 회색 그림을 저는 매우 감명 깊게 봤습니다. 처음엔 어둡다고 느끼지만 조금만 보면 빛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 빛은 회색뿐 아니라 검정색에서도 나와요. 아주 부드럽고 미묘하게… 그것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죠. - 로스코가 세상을 떠나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남은 작품을 계속해서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들을 그렸을까.. 같은.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케: 저는 말년의 그림을 보며 자주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 그림들은 제가 자라면서 익숙하게 봐온 것이 아니거든요. 분명한 건 이 작품들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느낌은 전혀 없다는 거에요.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가 몰랐던 그림들, 특히 파스텔톤의 팔레트를 사용한 작품을 발견했는데. 아주 흥미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해요.크: 저는 아버지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전시 기획을 돕기도 하는데요. 그러다보면 로스코가 어떤 공식이나 패턴을 생각해내고 같은 그림을 수백 번 그렸다는 생각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림을 몇 분만 찬찬히 봐도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죠.그림을 보며 저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가 이 그림에서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까?’모든 그림은 새롭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답을 찾으려 헀는지 따라가 보는거죠. 어쩌면 이전 그림에서 해결 못한 문제를 이 그림에서 풀려고 했을 수도 있구요.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제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이거에요. 제가 글을 쓸 때 앉는 의자 맞은 편엔 항상 아버지의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많은 날들을 글 쓰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와 때로는 해외까지 가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지만(웃음). 글쓰기 의자는 저에게 가장 행복한 장소에요.기자님도 잘 아시겠지만 글쓰기는 정말 힘든 일이잖아요. 때로 글을 쓰다 막다른 곳에 다다르면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그림을 보곤 합니다. 그게 항상 저에게 자극을 줘요. 아마도 그림을 완성하려고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로스코가 인생의 문제를 대면하고 풀어내려 노력한 흔적들. 페이스갤러리에서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10월 26일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게오르크 바젤리츠, 바버라 크루거, 신디 셔먼, 소피 칼 등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들의 머리카락으로 붓을 만든 작품이 있다. 독일 미술가 로즈마리 트로켈이 1990년 만든 그림 그리는 기계(설치 작품으로 제목은 ‘무제’)다. 트로켈은 당시 동료 작가들에게 머리카락을 기증받아 56개 붓을 만들었고, 이들을 일렬로 매달아 종이 위로 지나가도록 한 다음 그 결과물로 회화 작품 7점을 만들었다. 여러 예술가의 머리카락 붓이 일렬로 지나가며 만들어진 그림은 때로 작품보다 작가의 이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예술계의 관행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작품을 비롯해 트로켈이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펼쳐 온 작업 세계를 볼 수 있는 전시가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성곡미술관에서 개막했다. ‘로즈마리 트로켈: 드로잉, 오브제, 비디오’전은 트로켈의 드로잉부터 회화·조각·사진·영상·설치 작품을 소개한다. 트로켈은 1980년대 남성 예술가 중심의 사회와 미술계를 경험하며 여성 작가로서의 문제의식을 키웠다. 이 무렵 독일계 화랑 스푸르스 마거스의 공동 창립자인 모니카 스푸르스를 비롯해 제니 홀저, 크루거, 루이스 부르주아, 셔먼 등 여성의 삶과 예술적 표현을 다루는 작가들과 교류했고 이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미술 잡지를 발간하며 여성 작가를 조명하는 예술 활동을 펼쳤다. ‘그림 그리는 기계’와 더불어 트로켈을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 ‘편물 회화’와 부엌에서 볼 수 있는 핫 플레이트(요리용 철판)를 이용한 개념 미술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핫 플레이트 작품은 멀리서 보면 4개의 점이 있는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 안 팬후이즌은 “트로켈은 1980년대에 핫플레이트를 전시장 바닥에 놓고 스위치를 켜서 빨갛게 달궈지도록 만들거나, 이렇게 벽에 걸기도 했다”며 “남성 중심의 미니멀리즘 예술을 비틀어 보며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편물 회화’는 기성 미술계에서 하찮은 재료로 여겼던 양모로 그린 그림이다. 작가는 유화 물감 대신 값싼 양모와 손 대신 기계로 짜낸 그림을 전시하며 작품의 가치 평가에 의문을 제기했다. ‘모델(BB)’ 연작에서는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와 독일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얼굴을 합성해 드로잉으로 그렸다. 대중문화의 아이콘과 문학의 아이콘을 합쳐 웃음을 유발한다. 미국의 유명 예술가와 그들을 지원한 비평가들의 이름과 얼굴을 나란히 배치한 작업도 작가의 반골 기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시는 10월 2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0년 전 갤러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바닥과 벽에 그림을 그려 ‘가출한 화가’로 불린 정복수 작가(67)가 이번엔 갤러리로 사람들을 초청해 초상화를 그린다. 작가는 공개 모집을 통해 신청한 5명을 서울 종로구 인사동 나무화랑에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관찰한 뒤 그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달 14일 개막한 전시 ‘생면부지 생면표지(生面不知 生面表識)’ 이야기다. 인사동 건물 4층 작은 갤러리로 들어서면 먼저 1970년대 작가가 그린 자화상과 신작 ‘자화상―길기도(吉氣圖)’(2023∼2024년)가 보인다. 정복수의 작품이라고 하면 흔히 내장이 보이거나 절단된 신체가 떠다니는 강렬한 그림을 떠올리지만, 초기 작품은 일반적 초상화에 가깝다. 갤러리에는 이런 형태의 신작과 초기 작품이 함께 전시되어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낯설고 때로는 기괴해 보이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됐는지 이해를 돕는다. 전시된 자화상의 절반가량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작은 전시 공간 옆 흰 나무 벽을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 작가를 만날 수 있다. 작가는 이곳에 매일 출근하며 초상화를 그렸다. 처음에는 흰 캔버스로 가득했던 공간이 이제는 초상화와 자화상, 드로잉과 작업 과정을 담은 사진으로 채워져 제법 작업실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항암 치료를 받는 디자이너, 모델을 서기 위해 울산에서 서울까지 온 의사 부부, 문헌정보학과 교수 등이 이곳을 거쳤다. 10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지금까지는 보편적 인간상을 그렸는데 오래전부터 구체적인 사람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며 “그러던 중 전시 제안을 받아 모델을 모집하고 초상화를 그리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갤러리에 작업실까지 차린 이유는 뭘까? 작가는 “늘 머무르던 작업실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초상화에 대한 갈증이 작업실에서 ‘가출’하고 갤러리에 스스로를 ‘감금’시키게 만들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루치안 프로이트 같은 작가들도 초상화를 그리지만 서양 미술사 전통에서 내려온 인체 표현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저는 발톱까지, 지문까지, 겨드랑이까지, 예기치 못한 곳에서 그 사람의 전체를 볼 수 있는 그런 초상을 그리고 싶어요.” 결국 이번 전시는 새로운 연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한 달 동안 작가가 갤러리에 차린 ‘생각 실험실’인 셈이다. 전시장 곳곳에서 어린 시절 작가의 모습을 담은 사진부터 ‘나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나다’라고 혼잣말하듯 낙서처럼 남긴 글씨까지,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의 생생한 현장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14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사단법인 한국여성기자협회(회장 하임숙)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이사장 김효재)의 후원으로 10일 오후 2시 30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언론사 취업 희망자들을 위한 ‘2024 기자가 되는 길’ 워크숍을 개최한다. 1부에선 ‘이런 인재를 원한다’를 주제로 박민혁 채널A 보도본부장과 김영화 한국일보 뉴스룸국장이 각 언론사가 원하는 인재상과 기자 직업에 대해 강연한다. 2부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 순서에선 김병준(서울경제신문), 김예원(뉴스1), 김지원(조선일보), 박상연(서울신문), 원동희(KBS) 기자가 입사 과정에 얽힌 생생한 경험담을 들려준다. 올해로 33회째를 맞는 이 워크숍은 기자 지망생들에게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취업 정보를 제공하는 기회로 자리 잡아 왔으며 성별 무관하게 관심 있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사전질문등록은 한국여성기자협회 홈페이지 참고. 문의 02-313-3556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죽은 사람이 수영장 물에 떠 있는 모습의 베니스 비엔날레 설치 작품 ‘컬렉터의 죽음’(2009년), 사막 한복판에 프라다 매장을 세운 설치 작업 ‘프라다 마파’(2005년). 회화를 벽에 걸고 조각을 세워 전시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설치 작품으로 주목받은 북유럽 예술가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개인전 ‘스페이스(Spaces)’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3일 개막했다.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를 연 마이클 엘름그린과 잉아르 드라그셋은 “영화를 보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만 화면은 2차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이번 전시에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뛰어드는 기분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집, 수영장, 레스토랑, 식당, 작업실 등 5개의 거대한 공간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면 140㎡ 규모의 집이 등장하는데, 거실 주방 침실 화장실을 모두 갖췄다. 두 작가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 같은 분위기의 집”이라며 “집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집을 지나면 물이 빠진 수영장, 영상 통화 중인 여자가 앉아 있는 레스토랑, 실험실이 옆에 놓인 주방, 그리고 작가의 작업실이 이어진다. 이들 공간에서는 창밖을 쳐다보거나, 가상현실(VR) 기기를 쓰고 있는 소년, 책 위에 놓여 있는 달팽이 등 수수께끼 같은 여러 단서가 놓여 있다. 관객이 직접 돌아다니며 이들을 관찰하고 각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길 바란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다. 마지막 작가의 작업실 방에서는 거울 위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SLOW’라는 글자가 적힌 그림이 등장한다. 두 작가는 “다음에는 용산역 주변의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을 전부 천천히 걷도록 만드는 퍼포먼스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 2월 2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죽은 사람이 수영장 물에 떠 있는 모습의 베니스 비엔날레 설치작품 ‘컬렉터의 죽음’(2009), 사막 한복판에 프라다 매장을 세운 설치 작업 ‘프라다 마파’(2005). 회화를 벽에 걸고 조각을 세워 전시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는 느낌을 만들어내는 설치 작품으로 주목받은 북유럽 예술가 듀오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개인전 ‘스페이스(Spaces)’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3일 개막했다. 지난달 29일 기자간담회를 연 마이클 엘름그린과 잉가 드라그셋은 “영화를 보면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지만 화면은 2차원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이번 전시에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뛰어드는 기분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집, 수영장, 레스토랑, 식당, 작업실 등 5개의 거대한 공간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전시실에 들어서면 140㎡ 규모의 집이 등장하는데, 거실 주방 침실 화장실을 모두 갖췄다. 두 작가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 영화 같은 분위기의 집”이라며 “집 자체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영화 ‘기생충’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집을 지나면 물이 빠진 수영장, 영상 통화 중인 여자가 앉아 있는 레스토랑, 실험실이 옆에 놓인 주방, 그리고 작가의 작업실이 이어진다. 이들 공간에서는 창밖을 쳐다보거나, VR기기를 쓰고 있는 소년, 책 위에 놓여 있는 달팽이 등 수수께끼 같은 여러 단서가 놓여 있다. 관객이 직접 돌아다니며 이들을 관찰하고 각자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길 바란다는 것이 작가의 의도다. 마지막 작가의 작업실 방에서는 거울 위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SLOW’라는 글자가 적힌 그림이 등장한다. 두 작가는 “다음에는 용산역 주변의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을 전부 천천히 걷도록 만드는 퍼포먼스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 2월 23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필요했던 팬데믹을 지나며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조직해야 할까요?” 6일 광주 북구 광주비엔날레 거시기홀에서 제15회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을 맡은 니콜라 부리오가 말했다. 프랑스 출신 큐레이터로 파리 현대미술관인 ‘팔레 드 도쿄’ 초대 관장이자 ‘관계의 미학’ 등 저서로 잘 알려진 비평가인 그가 맡은 전시 ‘판소리, 모두의 울림’이 이날 언론에 공개됐다. 부리오는 “기후 변화로 인간이 살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줄어들고, 난민이나 국경 분쟁 등 정치, 사회적 공간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고 짚었다. 이번 전시는 30개국에서 온 작가 72명이 이러한 동시대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소개한다. ‘판소리’전은 광주 북구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남구 양림동 일대 8곳에서 펼쳐진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꾸려진 본 전시는 △부딪침 소리(feedback effect, 1·2전시실) △겹침 소리(polyphony, 3전시실) △처음 소리(Primordial sound, 4·5전시실)로 구성됐다. 먼저 첫 번째 섹션은 수많은 구성원이 좁은 공간에 몰려 발생하는 불협화음을 다룬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도시의 소음이 흘러나오는 에메카 오그보의 사운드 작품, 천장이 무너지려는 듯한 사무실 공간을 조성한 설치 작품(신시아 마르셀), 거대한 산업 쓰레기를 연상케 하는 조각 작품(피터 부겐후트)이 보인다. 산업화, 도시화와 환경 오염으로 낡고 비좁아진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다음 ‘겹침 소리’에서는 동물, 식물은 물론 기계의 관점까지 다층적 세계관에 주목하는 작가들의 작업이 등장한다. 필립 자흐의 ‘부드러운 폐허’는 거미줄과 인간의 물물교환 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설치 작품이다. 해리슨 피어스는 풍선 모양의 실리콘이 소리에 따라 진동하며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이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었다. 전시장 가장 깊은 곳에서 등장하는 맥스 후퍼 슈나이더의 ‘용해의 들판’은 인간이 남겨 놓은 잔재 위에 새로운 생명체가 등장하는 기이한 미래 풍경을 그린다. 관객이 흥미롭게 감상할 만한 곳은 ‘처음 소리’ 섹션이다. 넓은 공간에 대형 설치 작품들이 여유롭게 전시됐는데 이산화탄소, 바이러스, 호르몬 등 분자와 우주를 다룬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비앙카 봉디의 ‘길고 어두운 헤엄’은 흰 소금 사막 위에 연못과 식물, 전화기를 배치해 인간이 사라지고 소금으로 뒤덮인 자연을 상상하게 만든다.마르게리트 위모의 ‘*휘젓다’는 여러 개의 행성이 떠 있는 듯한 조명들 가운데 바위 모양의 실크 조각을 배치했다. 이 조각에 놓인 접시에는 여러 미생물로 이뤄진 생태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인간이 만든 폐허 속에서 동물과 식물, 바이러스와 미생물, 혹은 기계의 관점에서 본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공상과학적인 미학이 ‘판소리’전을 관통하는 주제다. 외부 전시는 양림동의 포도나무 아트스페이스, 한부철 갤러리, 한희원 미술관, 양림쌀롱, 옛 파출소 건물, 빈집,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양림문화샘터에서 소리 프로젝트와 관객 참여에 기반한 작가 12명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또 2018년부터 시작된 별도 전시인 ‘파빌리온’은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등 22개국과 한-아세안센터, 아메리카, CDA홀른, 광주 등 9개 기관 및 도시가 참가해 31개의 전시를 꾸렸다. 광주비엔날레는 12월 1일까지 이어진다. 광주=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미간에 주름이 질 만큼 인상을 찌푸리고 촘촘한 치아를 드러낸 사람의 얼굴. 멀리서 보면 공격적이고 험악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주름과 치아는 나무를 칼로 파내 만들어 낸 흔적이다. 부정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누군가의 혐오와 폭력이 결국은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닌지 떠올리게 하는 작품, 미리암 칸의 ‘나무 생명체’(Baumwesen)다. 4일 ‘소장품의 초상: 피노 컬렉션 선별작’전이 공개된 서울 강남구 송은(구 송은 아트 스페이스) 2층 전시장에서는 칸은 물론 마를렌 뒤마, 뤼크 튀망, 피터 도이그 등 주목받는 현대 미술가들의 인물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나무 생명체’를 비롯한 칸의 작품 7점과 도이그 작품 2점이 있는 방의 맞은편으로 들어가자 뒤마의 흐르는 듯 강렬한 초상화가 펼쳐졌다. 아이를 배어 불뚝한 배를 한 여자의 초상은 새빨간 배경으로 동물적 생명력을 뿜어냈다. 맞은편 남자의 초상은 깊고 푸른색이 냉정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가는 각각 ‘탄생’(Birth)과 ‘이방인’(Alie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카롤린 부르주아 피노 컬렉션 수석 큐레이터는 “인간의 다른 얼굴을 현대 미술가들은 어떻게 보는지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케어링 그룹 설립자이자 크리스티 소유주인 프랑수아 피노의 소장품이 한국을 찾은 것은 2011년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고통과 환희’전 이후 13년 만이다. 이번 전시는 회화는 물론 비디오, 설치, 조각, 드로잉 등 현대 미술 작품 60점을 선보인다. 베트남 출신 덴마크 작가인 얀 보의 설치 작품은 1층에서 관객을 맞았다. 베트남 전쟁 직후 유럽으로 이주한 ‘보트피플’인 작가는 청동기 시대 도끼날, 15세기 성모자상과 현대의 재료를 섞어 역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3층에는 줄리 머레투, 루돌프 스팅겔의 추상 회화가 전시됐다. 부르주아 큐레이터는 “전시를 크게 세 가지, ‘얼굴’, ‘추상’과 ‘세계와의 관계’라는 테마로 나눠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와의 관계’는 기후 위기나 생태 등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 세계를 보는 시각을 말한다. 한국계 미국 작가인 아니카 이가 인공지능으로 만든 풍경, 브라질 작가 루카스 아루다가 기후 위기로 연약해진 자연을 그린 회화 등이 전시됐다. 문어의 관점에서 세상을 본 한국 작가 염지혜의 ‘AI 옥토퍼스(Octopus)’도 볼 수 있다. 송은 관계자는 “최근 송은문화재단이 피노 컬렉션에 기증해 소장품이 된 작품”이라고 밝혔다. 11월 23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작품 사이즈는 더 작게, 낯선 작가보다는 익숙하고 편한 작가로.’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VIP 프리뷰로 공개된 글로벌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랬다. 최근 경기 둔화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미술 시장도 얼어붙었다. 화랑가에서는 ‘컬렉터들이 프리즈 서울만 기다리고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올해 3회차를 맞은 ‘프리즈 서울’에는 32개국에서 112개 갤러리가 참여해 작년보다 규모가 약간 줄었다. 특히 전체 갤러리의 63%가 아시아권 갤러리이고 이 중 31개는 한국에서 운영하는 갤러리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새롭게 참가한 갤러리는 23곳인데, 아시아 밖의 갤러리 중 불경기와 중동 전쟁으로 인해 급등한 운송료 때문에 참가를 포기한 곳이 다수 생겼다는 후문이다. 프리즈 서울 1회에는 국내 시장에서 보기 힘든 해외 미술사 거장이나 동시대 핫한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어 관람객이 대거 몰렸었다면, 올해는 실제 판매가 보장되는 익숙한 작가들이 좀 더 눈에 띄었다. 지난달 22일 기자간담회에서 패트릭 리 프리즈 서울 디렉터는 “참여 갤러리들은 시장마다 다른 취향을 고려해 출품작을 선정한다”며 “아트페어는 결국 매출과 판매 부분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갤러리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유럽 갤러리가 한국 작가 작품을 소개하는 모습도 자주 발견됐다. 올해 초 독일 갤러리 에스터시퍼와 전속 계약을 맺은 전현선의 작품은 갤러리를롱 부스에도 출품됐다. 갤러리를롱은 프랑스에서 1945년 시작해 호안 미로, 프랜시스 베이컨,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을 소개했던 역사적 화랑이다. 갤러리를롱 관계자는 “최근 우리 갤러리는 데이비드 호크니는 물론이고 동시대 젊은 작가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내년 파리에서 전현선의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프랑스 갤러리인 알민레시도 ‘달동네 그림’으로 국내에서 인기인 정영주 작가의 회화를 출품했다. 알민레시 관계자는 “하종현, 김창열, 이우환 등 한국 작가를 오래전부터 소개하고 있었지만 정영주 작가는 최근 함께하게 됐고 11월 영국 런던에서도 개인전을 개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스트리아 갤러리인 타데우스 로팍도 3일 이강소 작가와 전속 계약을 맺고 내년 봄 서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고 밝혔다. 올해로 23회째를 맞는 한국화랑협회 주최의 ‘키아프(KIAF·한국국제아트페어) 서울’에는 22개국 206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전시 공간을 지난해보다 약 2640m²(약 800평) 넓히고 건축가 장유진과 협업해 동선과 부스 배치를 새롭게 디자인했다. 또 5, 6일에는 클래식 콘서트인 ‘키아프 프리미어 콘서트’를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개최하며 컬렉터 유치에 힘을 쓰고 있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장은 “기업뿐 아니라 음악 애호가를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을 키아프로 끌어들이기 위해 차별화된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느껴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프리즈 서울은 코엑스 C, D홀에서 7일까지, 키아프 서울은 코엑스 A, B홀과 그랜드볼룸, 2층 더플라츠에서 8일까지 열린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색면 추상’ ‘추상표현주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수식어입니다. 로스코 작품에서 감동을 느낀 사람은 많지만 이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추상’ ‘색면’처럼 비평가나 미술사가가 정해준 말 뒤로 숨기도 합니다. 로스코가 세상을 떠날 때 19세, 6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 후로 지금까지 작품을 보존, 연구하며 알리는 그의 자녀 케이트와 크리스토퍼 로스코를 3일 서울 용산구 페이스갤러리에서 만났습니다. 케이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작품을 지키기 위해 소송까지 치러야 했고, 크리스토퍼는 로스코의 글을 모은 책을 편집하거나 전시 큐레이팅을 담당하는 로스코 전문 연구자입니다. 두 사람에게 로스코에 대해 물었습니다.모차르트를 사랑한 화가 먼저 아버지로서 로스코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케이트는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나 젊은 작가를 대할 때도 따뜻했던 사람”이라며 “작품에 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로스코가 예순일 때 태어난 크리스토퍼는 “늦둥이의 특권을 누나보다는 더 누렸다”며 “체스와 음악을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늘 음악을 들었고 누가 훌륭한 작곡가인지 토론했어요. (어떤 음악을 좋아하셨나요?) 모차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 슈베르트요(웃음). 아버지는 정말 모차르트를 사랑했습니다.” “로스코는 캔버스 위에 직사각형을 그냥 던지는 게 아니라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관계를 설정해요. 그런 세밀함이 모차르트의 음악과 닮았죠.”(케이트) 그가 작업할 때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음악을 튼 채 완전히 그림에 몰입했다고 합니다. 케이트는 “작업실 전화벨이 오랫동안 울려도 무시하고 집중한 적도 있고, 작품이 어느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오롯이 혼자인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했습니다.유럽을 바라보던 뉴요커 로스코의 작품에서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지만 제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막막함입니다. 막다른 벽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심정.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눈물도 흘리죠. 초기 작품에서는 불안한 도시의 모습이 초현실주의적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혹시 그런 불안과 막막함이 이민자로서 겪는 감정은 아니었을지 궁금했습니다. (로스코는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나 10세 때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뉴욕은 대공황으로 많은 사람이 가난을 겪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로스코는 이때 아주 붐비는 지하철이나 도시를 그렸는데, 그런 곳에선 인간성을 잃는 듯한 기분이 들잖아요. 그런 불안감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건 맞아요.”(크리스토퍼) “저는 아버지가 ‘완전한 미국인’이 되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아버지는 항상 고향인 유럽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요. 물론 뉴욕은 이민자의 도시였으니 아버지를 ‘뉴요커’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100% 미국인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다만 케이트는 로스코의 작품이 말년으로 갈수록 어둡고 우울해졌다는 세간의 말은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로스코는 평생 인간의 조건과 감정 같은 본질적 문제를 파고들었던 작가입니다. 초기인 1940년대에 단순한 시각 언어로 관객에게 감정을 직접 전달하는 것을 고민해 글로 남기기도 했죠. 이때부터 그는 추상을 생각했습니다.”몰입 속 대면하는 삶의 질문들 로스코의 가족은 전시와 책, 강연을 통해 선입견을 걷어내고 그가 남긴 예술 세계의 풍부함을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선입견 중 하나는 로스코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따라서 작품이 슬프다는 인식입니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묻자 크리스토퍼는 “아버지는 보는 사람들이 깊은 감정을 느끼길 바란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고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나. 이런 삶의 진지한 질문을 그림으로 던지려 한 듯해요. 작품이 슬픈 게 아니라 그것을 봄으로써 깊은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죠. 우리는 평소 슬픔과 불안을 억누르려 하잖아요. ‘오늘 뭐 먹지? 내일 뭐 하지?’ 같은 생각으로 그것을 피하는데, 그렇게 깊이 눌렀던 감정들을 그림 앞에서 느꼈으면 한 것이죠.” 케이트는 갤러리에 전시된 회색과 검은색이 있는 작품 ‘무제’(1969년)를 보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느꼈다”며 “후기 작품들은 마지막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었다”고 했습니다. 크리스토퍼는 “로스코가 어떤 패턴을 생각해 내고 같은 그림을 몇백 개 그렸다는 생각이 있는데 몇 분만 그림을 직접 봐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그림을 보며 저는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이 그림에선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까? 어떤 질문을 했을까? 여기선 어떻게 풀려고 했을까?’ 제가 글을 쓸 때 앉는 의자 맞은편엔 늘 아버지 그림이 있는데요. 아버지가 해결해야 했을 문제들을 바라보며, 글쓰기가 막힐 때면 고개를 들어 그림을 보고 도움을 받습니다.” 로스코가 인생의 문제를 대면하고 풀어내려 노력한 흔적들. 페이스갤러리에서 이우환의 작품과 함께 10월 26일까지 만날 수 있습니다. ※뉴스레터 ‘영감 한 스푼’은 매주 목요일 오전 7시에 발송됩니다. QR코드를 통해 구독 신청을 하시면 e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거꾸로 뒤집힌 그림을 통해 오래된 가치관이 무너진 세상의 모습을 표현해온 독일 예술가 게오르크 바젤리츠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3일 서울 용산구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개막한 전시 ‘독수리’는 작가가 거꾸로 그린 독수리 유화와 드로잉을 소개한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온 이 작가의 뒤집힌 독수리 그림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집무실에 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수리는 독일을 상징하는 동물로 국가 문장에도 쓰이는데, 그런 독수리가 낙하하는 그림을 국가 수장이 집무실에 걸어둔 것. 한국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독일에서는 슈뢰더 총리의 과감함과 현대미술에 대한 애정으로 해석됐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은 모두 86세인 작가가 최근 그린 신작이다. 슈뢰더 전 총리 집무실에 걸렸던 그림이 낙하하고 있음에도 두껍게 올린 붓 터치로 파워풀한 이미지를 뿜어냈다면, 이번 작품들은 얇게 칠한 감각적 색채 위에 흐르는 듯한 선을 그려 서정성이 더 드러난다. 바젤리츠는 독수리뿐 아니라 인물화도 뒤집힌 모습으로 그린다. 특히 인물이 거꾸로 된 모습을 앞에서 마주하면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물리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폐허가 된 독일과 유럽의 분위기를 담아냈다. 바젤리츠는 안젤름 키퍼와 함께 198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신표현주의 사조의 작가로 꼽힌다. 신표현주의 작가들은 개념 미술이나 팝 아트로 회화가 등한시될 무렵, ‘회화의 본질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면서 거칠고 활력 넘치는 조형성으로 미술계가 다시 회화에 눈을 돌리게 했다. 2018년 80세 생일을 기념해 스위스 바젤 바이엘러 재단, 미국 허시혼 박물관, 프랑스 운터린덴 박물관에서 순회 회고전이 열렸고 2021∼2022년엔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는 등 최근까지도 미술관에서 활발하게 연구·전시되고 있다. 11월 9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