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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화조자수 10폭 병풍’. 조선 왕실 궁녀들이 정성으로 수놓은 이 병풍은 어쩌다 이역만리로 건너갔을까. 한반도의 고단한 역사 탓에 짐짓 약탈문화재를 떠올리기 쉽지만 여기엔 아름다운 사연이 한 땀 한 땀 배어 있다. 호러스 알렌(1858∼1932)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 이후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민영익(1860∼1914)을 치료해 목숨을 구했다. 고종은 명성왕후의 조카인 민영익을 살려준 알렌에게 감사하는 뜻에서 이 병풍을 하사했다.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여정을 추적하는 대대적인 연구에 나선다. 재단 실태조사부는 “미 다트머스대,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학대학(SOAS)과 협업해 영국박물관과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보스턴미술관 등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에 대한 출처 연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2012년 설립돼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재단이 그간 국외 문화재 현황 파악 등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해왔다면, 이번 출처 연구는 본격적으로 문화재가 흘러간 역사를 짚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다.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한 고려청자 ‘청자상감국화문발(靑磁象嵌菊花文鉢)’은 고종이 조선의 미국수호통상사절단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1855∼1916)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조선 외교관이던 윤치호(1865∼1945)가 1884년 2월 20일 쓴 일기에는 ‘임금이 로웰 군에게 하사한 물건을 전하고 공사관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재단 측은 “과거 신문과 관료 일기, 왕실 문헌뿐 아니라 해외 경매 거래증서 등 국내외 사료를 꼼꼼히 확인해 우리 문화재의 반출 경로를 추적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출처연구는 문화교류사 파악은 물론이고 향후 일부 문화재를 반환 받을 수 있는 뼈대가 되어줄 수도 있다. 독일분실미술품재단은 2008년부터 10년에 걸쳐 나치 독재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 소유주에게 약탈한 문화재 1200여 점에 대한 출처 연구를 진행했다. 약 10%의 출처를 명확히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으며, 33점은 나치 약탈을 법적으로 입증해 원소유주에게 돌려주는 협상도 진행하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일단 개항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넘어간 문화재가 대상이나, 향후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로 연구 영역을 확장해 나가겠다”며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반출 경로를 데이터베이스(DB)로도 구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인류가 창조해낸 첫 번째 발명품은 뭘까. 영국 고고학자인 저자는 그건 ‘길’이라고 단언한다. 잉글랜드 북서부 산악지대에 있는 랭데일 바위에는 날카로운 돌로 새겨진 암각화가 있다. 약 5000년 전 신석기인들이 새겨 놓은 그림은 고대 채석장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길을 안내하는 표지였다. 깎아지른 협곡에 자리한 채석장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을 터. 먼저 그 길을 걸어본 이들은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바위마다 길을 새겼다. 암각화가 존재하기 전에는 그보다 원시적인 길도 있었다. 앞서 간 이들의 발자국이다. 제아무리 현대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일지라도 인간의 본성은 수만 년 전 인류의 습성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저자는 옛 인류에게 묻는다. 어째서 무리 지어 살아가며, 안락한 집을 짓고, 또 낯선 이방인을 기꺼이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지. 수만 년 전 무덤에 남겨진 유골과 발자국을 쫓아가 보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길이 열리리라 믿으며. 스코틀랜드 오크니 제도에 있는 신석기시대 마을 유적지 ‘스카라 브레’는 집의 기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물로 씻어 내리는 변소, 돌로 만든 침대, 찬장을 갖춘 집은 산 자들의 거처인 동시에 죽은 자의 무덤이었다. 돌침대 아래에서는 나란히 놓인 여성 유골 2구가 발견됐다. 차마 망자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가족들이 유해를 가장 가까운 곳에 간직하려 했던 흔적이다. 가족들은 어쩌면 한여름 시신에서 나는 악취마저도 떠난 이들의 유산이라 여기며 감내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들의 흔적에서 집의 의미를 되새긴다. 집값이라는 가치가 존재하기 전, 인류에게 집이란 함께 사는 이의 잔향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옛 인류에게서 낯선 이방인과 교류할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2002년 루마니아의 동굴 ‘페슈테라 쿠 오아세’에서 약 3만8000년 전 인간의 뼈가 발굴됐다.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는 놀랍게도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자가 섞여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호모사피엔스는 유럽 대륙에 도달한 뒤 오래전부터 그곳에 살아가던 네안데르탈인과 교류했다. 오래전부터 고고학계는 인류의 피부색과 생김새가 이토록 다양한 이유를 연구해 왔는데,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방인을 배척하지 않고 교류했던 현생 인류의 용기가 현대인의 다양성을 만든 것이다. 책에는 현생 인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생존법도 나온다. 바로 ‘공존’이다. 1950년대 이라크 북부 샤니다르 동굴에서 신체장애를 지닌 사람의 뼈가 발굴됐다. 팔꿈치 아래가 잘려나간 데다 관절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유골은 무리에서 40대까지 살아남았다. 이 정도면 그 시대에서 장수한 셈. 그의 무덤 주변에는 불을 피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 때문에 인류학자들은 그가 ‘불지기’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옛 인류는 다른 이만큼 제 몫을 하기 힘든 그를 내쫓기보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준 게 아닐까. 옛 인류가 남긴 공존의 흔적을 보며 저자는 ‘태초에 사랑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각박한 현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사랑은 생존을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어쩌면 사랑은 인류의 최초 발명품은 아닐지언정 최고의 발명품일지 모른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BTS(방탄소년단)의 음악 ‘Love Yourself’를 보면 노랫말이 지닌 선한 힘을 느낄 수 있어요. 예수님도 ‘너 자신을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어요. BTS는 음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거예요.” 소설 ‘연금술사’(1988년) 이래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사랑받아온 브라질 소설가 파울루 코엘류(75)가 방탄소년단의 음악을 극찬하고 나섰다. 코엘류는 14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에서 열린 ‘제3회 BTS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 연사로 등장했다. 5월 스위스 제네바 자택에서 촬영한 영상에서 작가는 “BTS의 춤과 음악은 세상의 악을 쫓아낸다”며 “지금까지 BTS 콘서트에 다섯 번이나 가봤다. BTS의 음악은 단순한 팬덤을 넘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BTS 국제학술대회는 한국외대 세미오시스 연구센터와 문화마케팅 그룹 머쉬룸 주최로 14일부터 사흘간 ‘포스트 팬데믹 시대, 새로운 휴머니티와의 조우’를 주제로 열린다. BTS와 이젠 BTS만큼 유명한 팬클럽 아미가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의 시대에 인간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토론한다. 2020년 영국 킹스턴대에서 시작된 BTS 국제학술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건 이번이 처음. 올해 대회는 25개국 학자 165명이 발표자로 참석한다. 코엘류는 더 나아가 BTS의 노랫말을 통해 팬덤이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도 살폈다. 작가는 “아미는 BTS의 노랫말에 영향을 받아 그들이 마음먹고 다짐한 것을 지켜낸다”고 짚었다. 그가 꼽은 대표적인 사례는 브라질에서 투표 독려 운동을 이끈 ‘아미 헬프 플래닛(Army help The Planet·AHTP)’. BTS의 브라질 아미에서 출발한 이 단체는 아마존 열대우림을 지키는 환경단체로 성장했다. 친환경 정책을 펼치는 정치인을 지지하며 투표권을 행사한다. 코엘류는 이에 대해 “BTS가 그들의 노랫말로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런 내적인 변혁”이라 했다. 아프리카 여성 대상 성범죄에 저항하는 비영리단체 ‘The Justice Desk(TJD)’의 대표 제시카 듀허스트도 이날 학술대회에 직접 참석해 “BTS는 아프리카의 많은 여성 청소년들에게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음을 일깨워준다”고 분석했다. 14일 학술대회에 직접 참석한 듀허스트 대표는 아프리카에서 끔찍한 성범죄 피해를 입었지만 BTS의 음악을 통해 상처를 치유했던 한 소녀의 영상을 소개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민화와 민속 유물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백성이 즐겼다는 것. 이를 이유로 민족의 그림 채색화는 사대부 문인화(文人畵)에 가려져 한국 미술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일반 백성이 사용하던 민속 유물 역시 왕실 유물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평범한 ‘민(民)’의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가 잇달아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그중 채색화와 민속유물을 주목한 두 전시를 살펴봤다.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채색화 첫 조명국립현대미술관 경기 과천관은 지난달 1일부터 한국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를 진행 중이다. 전시에는 19세기 조선 후기 민화 ‘책거리’뿐만 아니라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83)과 이종상(84), 이숙자(80), 강요배(70) 등 근현대 작가들의 채색화 80여 점을 선보인다. 민화, 궁중회화, 종교화를 아우르는 한국의 채색화는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길한 복을 불러들이는 부적과 같았다. 하지만 조선시대 흑과 백 수묵으로 그려진 문인화가 주류로 자리 잡으며 형형색색을 수놓은 채색화는 근·현대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채색화를 조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종상 화백의 ‘원형상 89117―흙에서’(1989년)가 1989년 개인전 이후 33년 만에 공개된다. 407개의 조각을 연결한 가로 12.3m, 세로 3.7m의 동판 위에 황토색 흙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다 마침내 산봉우리가 피어나는 형상을 담아냈다. 흙에서 산으로 태초에 태산이 만들어지는 형세를 그린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밖에도 성파 스님이 조선 후기 유행했던 민화 ‘대호도(大虎圖)’를 본떠 옻칠을 입혀 완성한 ‘수기맹호도’(2012년)를 비롯해 민족의 영산을 그려낸 채색화 ‘금강전도’ 등을 만나볼 수 있다. 하늘에서 백두산 천지의 설경을 내려다본 풍경을 그려낸 이숙자 작가의 ‘백두성산’(2016년)에선 혹한에도 굴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온 한국 채색화의 저력이 느껴진다. 9월 25일까지, 입장료 2000원. ○ 국립민속박물관, 전통 현대 잇는 민속유물 조명경기 파주시 국립민속박물관 개방형 수장고에서 열리는 ‘소소하게 반반하게’ 전시는 오랜 시간 수장고에 갇혀 있던 평범한 민속 유물에 빛을 밝혔다. 박물관 수장고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소반과 반닫이 등 민속유물 200여 점에 더해 류지안 작가 등 현대 공예작가 13명의 작품 49점을 함께 전시한 것. 낡고 오래된 18, 19세기 반닫이와 소반들 사이에 놓여 있는 류지안 작가의 자개 반닫이 ‘설중매(雪中梅)’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흰 빛깔 자개로 만든 그의 반닫이는 빛을 머금은 듯 고가구들이 한데 모인 수장고를 비춘다. 류 작가는 “옛것과 연결을 하면서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고 그 뿌리를 지키고 키워가려는 노력 또한 내 작업의 한 축”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는 작고 평범해서 때로는 하찮게 여겨졌던 민속 유물의 강한 생명력을 엿볼 수 있다. 일례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소반은 아직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 함께하는 살아 있는 민속 유물이다. 하지훈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로 투명하게 제작한 ‘투명 나주반(Ban Clear)’을 선보였다. 전라남도 나주지방에서 이어져온 전통 소반의 틀을 유지하되, 투명 소재를 활용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다음 달 31일까지, 무료.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형형색색의 그라피티가 새겨진 ‘힙(Hip)’한 휠체어….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 운영자인 뇌성마비 장애인 김지우 씨(21)에게 휠체어는 패션이다. 그는 지난해 9월부터 매달 한복, 웨딩드레스 등 다양한 의상을 입고 그에 알맞은 휠체어 디자인을 선보이는 화보 프로젝트 ‘이달의 휠체어’를 진행 중이다. 그가 거리에 나설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휠체어가 눈에 띌 정도로 개성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저의 휠체어가 타인의 시선을 받아내는 수동적인 존재였다면 이제는 타인의 눈길을 끄는 패션이 됐어요. 요즘은 그 시선을 즐깁니다.” 뇌성마비 장애인, 유튜버, 서울대생, 라디오 DJ, 모델, 연극배우….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 김 씨가 최근 에세이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휴머니스트)를 펴냈다. 12일 전화로 만난 김 씨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할 수 없을 거라고 여기는 일일수록 더욱 도전해보고 싶었다. 내가 못 갈 곳도, 못 할 일도 없다”고 말했다. 책에는 입시와 차별의 장벽을 넘었던 그의 학창 시절이 담겼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조차 “수련회에 안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지만 김 씨는 임원 수련회까지 포함해 6년간 꼬박 7번 수련회에 참석했다. 그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자 학교가 바뀌기 시작했다. 김 씨를 빼놓고 가는 것이 당연했던 학교가 먼저 장애인 보조 활동가를 섭외해 그와 함께 수련회를 떠날 채비를 하게 된 것. 그는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꿈을 꺾지 않았다. 전교에서 손꼽히는 우등생이던 그는 “집에서 가까운 대학으로 진학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권유에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갈 수 있으니까요.”(웃음) 그 대신 휠체어가 갈 수 있는 길을 넓혀왔다. 김 씨는 지난해 4월 ‘서울대 배리어프리 보장을 위한 공동행동’을 결성해 현재까지 관악구 예산 지원으로 서울대 인근 식당 32곳에 경사로를 설치했다. 그는 “휠체어가 들어설 수 있는 ‘맛집’ 리스트를 늘려나가면 언젠가 내가 초대받을 공간 역시 늘어날 것이란 믿음에서 출발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2017년부터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것도 금단의 영역을 침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방송에도 장애인 패널은 나오지 않더라고요.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말하면 되죠. 저는 하고 싶은 말이 많거든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지난해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일대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32점 가운데 한글 활자는 600점.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오래된 한글 금속 활자를 비롯해 세종 재위 기간인 1434년에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 53점이 포함돼 주목받았다. 이는 1450년대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금속활자보다 최소 16년 앞선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로 꼽힌다. 이 한글 활자로 조선의 왕들은 어떤 책을 만들었을까. 국립고궁박물관이 13일 수도문물연구원과 공동 주최하는 ‘2021 인사동 발굴, 그 성과와 나아갈 길’ 학술대회에서 출토된 한글 활자로 어떤 책을 출간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한 논문이 공개된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고문헌관리학과 교수는 ‘인사동 출토 한글 금속활자 고찰’이라는 논문을 통해 지난해 출토된 한글 활자 중 일부가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능엄경(楞嚴經)’ 등 15, 16세기 출간된 을해자(乙亥字) 간행물 13권의 글씨체와 가깝다고 분석했다. 불설아미타경은 석가모니가 아미타불의 공덕이 장엄함을 설명한 불경으로, 불교 친화적이었던 세조 집권 시기인 1461년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학계에서는 현존하는 인쇄물에 드러난 글씨체의 변모 양상으로 갑인자(甲寅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경서자(經書字) 등 4가지로 활자를 분류해 왔는데, 지난해 조선 전기 한글 활자가 대거 출토되면서 실체가 확인됐다. 출토된 한글 활자 600점 가운데 386점을 차지하는 을해자는 1455년 조선 초기 문신 강희안(1417∼1464)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만든 금속활자다. 옥 교수는 조선 전기 간행물과 실제 출토된 한글 활자의 모양새를 비교 분석해 해당 활자로 불설아미타경 등 을해자본 13권을 펴낸 것으로 파악했다. 해당 한글 활자로 출간된 책 목록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일례로 지난해 출토된 을해자 활자 중 일부는 성종 때인 1482년 ‘분류두공부시(分類杜工部詩)’의 본문 글자와도 유사해 해당 책 출간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책은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한글로 풀어낸 국내 최초 국역 한시집이다. 한글 책을 출간해 백성에게 생활 지식을 전파하려 했던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중종 집권 시기인 1541년 출간된 수의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언해본 역시 지난해 출토된 을해자 한글 활자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소, 말, 양, 돼지 등 가축에서 발생하는 여러 전염병에 대한 치료법을 담고 있다. 당대 가축 3515마리가 폐사됐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해지자 중종이 나서서 대처 방안을 담은 한글 책을 출간해 백성에게 전하려 했다. 옥 교수는 “을해자 활자는 약 150년간 사용되는데 왕이 어떤 사상을 중시했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간행물이 제작됐다. 불교 친화적이었던 세조는 활자로 불경을 만들었고, 문예를 중시했던 성종은 시집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57·사진)가 2020년 내놓은 ‘인삼의 세계사’(휴머니스트)가 8일 영국 라우틀리지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돼 세계에 소개된다. 1836년 창립된 라우틀리지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장 폴 사르트르, 버트런드 러셀 등 최고 지성의 책을 펴낸 인문학 분야 세계 최대 규모 출판사다. 캐나다 역사학회가 ‘인삼의 세계사’를 서평 목록에 올리며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인삼의 세계사에 서구 학계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볼 수 없었던 문화교류사의 빈틈을 채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7, 18세기 서구에서 인삼은 무역과 의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품이었지만 그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 책은 17세기 후반 세계 교역 무대에서 ‘동양의 만병통치약’으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던 인삼의 역사를 복원한다. 1686년 태국 외교사절단은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에게 인삼을 진상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왕립과학원에서는 인삼 연구에 나섰으며 유럽 곳곳의 약초재배원에서 인삼 재배를 시도했을 정도로 인삼 열풍이 불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수익성이 좋다는 말에 인삼 재배에 나섰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이 지나며 인삼은 서구 역사에서 잊힌다. 설 교수는 책에서 서양이 인삼과 심마니에 덧씌운 미개한 이미지의 기원을 살핀다. 당시 서양 의학계가 인삼의 유효 성분 추출에 실패하자 동양의 추출 기술에 열등감을 갖고 인삼의 약성을 폄하했다는 분석이다. 주 교수는 “치밀한 사료 연구를 바탕으로 인삼에 대한 서구 학계의 편향적 시각에 반격을 가했다”고 분석했다. 국가 차원을 넘어 세계사를 조명했다는 점에서 최근 세계 사학계의 연구 추세와 맞닿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인삼이 1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일국사(一國史)를 탈피해 지구적 관점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국주의사 분야 세계 석학으로 알려진 존 매켄지 영국 랭커스터대 명예교수는 “인삼이 어떻게 서구 무역의 중심에 놓이게 됐는지 추적하며 경제, 문화, 의학사로 주제가 확장된다. 인삼이라는 작은 틈새로 모든 종류의 분야를 조명해냈다”고 평가했다. 설 교수는 ‘소비의 역사’ ‘지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여러 저서를 집필하며 문화사와 미시사(微視史)에 천착해왔다. 그는 “동양 여성으로 서양사를 연구하며 늘 소수자 감수성을 갖고 역사를 바라봤다”며 “앞으로도 서양사에서 가볍고 하찮다고 치부해왔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삶 깊숙이 녹아들었던 작은 것들의 역사를 탐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57·사진)가 2020년 저술한 ‘인삼의 세계사’(휴머니스트)가 8일 영국 루트리지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돼 세계로 진출한다. 루트리지는 1836년 창립한 이후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 장 폴 사르트르, 버트런드 러셀 등 최고 지성의 책을 펴낸 인문학 분야 세계 최대 규모 출판사다. 캐나다 역사학회는 설 교수의 ‘인삼의 세계사’를 서평 목록에 올려놓았을 정도로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서구 학계가 가장 한국적인 인삼의 세계사에 주목한 이유는 뭘까.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이 책은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볼 수 없었던 문화교류사의 빈틈을 채웠다”고 평했다. 17, 18세기 서구에서 인삼은 무역과 의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품이지만 그간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설 교수는 이 책에서 인삼을 둘러싼 세계 교류사뿐 아니라 서양이 인삼과 심마니에 덧씌운 미개한 이미지의 기원을 살핀다. 18세기 후반 서양 의학계가 인삼의 유효 성분 추출에 실패하자 동양의 추출 기술에 열등감을 갖고 인삼의 약성을 폄하했다는 분석이다. 주 교수는 “치밀한 사료 연구를 바탕으로 세계사의 주변부에 놓였던 인삼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인삼에 대한 서구 학계의 편향적 시각에 반격을 가한 수작”이라고 분석했다. 일국사(一國史) 관점을 넘어 세계사를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최근 세계 사학계의 추세와도 맞닿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세계화를 거치며 최근 전 세계 학계에서는 여러 국가와 문화를 넘나들며 국가 간 연결망을 들여다보는 세계사적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며 “이 책은 한국 인삼이 1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지구적 관점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국주의사 분야 세계 석학으로 알려진 존 맥켄지 영국 랭커스터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 “한국의 한 식물인 인삼이 어떻게 서구 무역에 중심에 놓이게 됐는지를 추적하며 경제·문화·의학사로 주제가 확장된다. 인삼이라는 작은 틈새로 모든 종류의 분야를 조명해냈다”고 평했다. 인삼을 둘러싼 동서양의 무역사뿐만 아니라 동서양이 지적으로 교류한 본초학(本草學) 등 의학사까지 포괄해 학문적으로도 확장성을 지녔다는 평가다. ‘소비의 역사’ ‘그랜드 투어’ ‘지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문화사, 미시사(微視史)에 천착해온 설 교수는 “동양 여성으로 서양사를 연구하면서 늘 소수자 감수성을 갖고 역사를 바라봤다”며 “앞으로도 서양사에서 가볍고 하찮다고 치부해왔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삶 깊숙한 곳에 녹아 들었던 작은 것들의 역사를 탐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우리는 더 이상 항해사가 아닌 형을 선고받은 수감자들이었다.’ 해가 뜨지 않는 기나긴 남극의 겨울이 배를 덮쳤다. 귓속을 울리는 칼바람보다 겹겹의 해빙을 탈출할 길이 없다는 공포가 더 매서웠다. 1897년 8월 16일 출항한 벨기에의 남극 탐험선 ‘벨지카호’는 6개월여 뒤인 1898년 3월 2일, 그토록 갈망했던 남극해 한가운데 갇히고 만다. “지구 최남단에 벨기에 깃발을 세우겠다”는 애국심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옴짝달싹 못한 채 남극해의 얼음덩이에 갇혀 지내길 1년. 인류 최초로 남극해에 진출한 벨지카호의 생존 선원 일지에는 ‘우리는 지금 정신병원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미국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왕립 벨기에자연과학연구소에 보존된 선원들의 항해 일지와 회고록을 토대로 벨지카호가 1897년 8월 출항해 1899년 11월 벨기에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재구성했다. 노르웨이인 항해사 로알 아문센, 벨기에 사령관 아드리앵 드 제를라슈, 미국인 의사 프레더릭 쿡 등 널리 알려진 벨지카호 탐험가들이 남긴 일기에는 용맹스러운 영웅담이 아닌 생존자의 처절한 절규가 담겨 있었다. 항해는 시작부터 삐걱댔다. 이틀 만에 엔진이 고장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파도에 휩쓸려 선원 한 명을 잃었다. 살아남은 선원 18명이 1898년 2월 남극해에 이르렀을 때 이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지금이라도 철수할 것인가, 남극해의 겨울을 날 것인가. 선택의 순간 이들의 뇌리를 스친 건 명예였다. 남극에 닿지 못하더라도 남극해의 겨울을 버텨낸 최초의 인류로 남고 싶었던 것.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명예를 선택한 대가는 참혹했다. 모든 선원들은 비타민C 부족으로 온몸이 퉁퉁 붓는 괴혈병을 앓았다. 배 안에 갇힌 시간이 길어질수록 신경쇠약은 깊어졌다. 히스테리성 질환으로 언어 능력마저 상실한 선원도 있었다. 저자는 벨지카호가 이룬 생물학적 성과 이면에 자행된 생물 학살도 짚는다. 벨지카호에 승선한 박물학자 에밀 라코비처는 남극 탐험 내내 400종이 넘는 생물 표본을 수집했는데 그중 110여 종은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남극의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였지만 저자는 그보다 1년간 남극해에서 벌어진 학살에 주목한다. 생존자의 일지에는 연구나 식량 섭취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즐기기 위해 펭귄을 사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책은 남극해 탈출과 고국 귀환이라는 극적인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그보다 더 긴 생존 이후의 삶을 조명한다. 1899년 2월 배를 가로막은 거대한 얼음이 깨진 뒤 마침내 남극해를 탈출한 이들에게 남은 건 영광이 아닌 상처였다. 동틀 무렵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에 닻을 내린 선원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놀라고 만다. 군데군데 빠진 머리카락과 핼쑥해진 얼굴, 텅 빈 듯한 눈동자…. 남극해의 겨울을 이겨낸 첫 번째 인간이라는 자부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생존자 상당수는 생애 내내 정신질환을 앓았다. 인간의 밑바닥을 볼 수 있는 이 여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우주 탐사 전 벨지카호의 선원이 남긴 기록을 들여다본다고 한다. 벨지카호 선원들이 겪었던 정신질환은 가까운 미래 화성 탐험가들이 겪게 될 증상일지 모른다. 지구를 넘어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 인류에게 벨지카호의 진실은 고통스럽더라도 직면해야 하는 이야기인 셈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안숙선 명창(73)이 7일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 예고됐다. 안 명창은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해 원로단원으로 퇴직할 때까지 200편이 넘는 창극에서 춘향 역을 가장 많이 맡았다. 춘향과의 각별한 인연 때문일까. 안 명창은 지난해 초 문화재청에 국가무형문화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해 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문화재청은 “안 명창의 판소리 춘향가에 대한 전승능력과 전승환경, 전수활동 기여도가 탁월하다”고 밝혔다. 앞서 안 명창은 1997년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로 인정된 바 있다. 안 명창이 30일간의 인정 예고 기간 후 무형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인정되면 기존의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 자격은 해제된다. 문화재청은 무형문화 전승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두 분야를 중복해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안 명창은 1988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8개국 12개 도시에서 판소리 공연을 펼치며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1998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 한국인 최초로 초청받은 국악인이기도 하다. 당시 그의 공연을 본 프랑스 평단은 “천상의 목소리”라고 극찬했다. 그해 안 명창은 한국 전통예술인 가운데 최초로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국내외에 국악을 널리 알린 공로로 1999년 옥관문화훈장에 이어 지난해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안 명창은 9세 때 이모인 가야금 명인 강순영 선생 등의 권유로 국악에 입문했다. 19세에 상경해 스승 박귀희 명창(1921∼1993) 등 당대 최고의 명창들로부터 판소리 다섯마당과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한편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보유자로 이동규 씨(75)를, 한국 전통 활과 화살을 만드는 ‘궁시장(弓矢匠)’ 보유자로 김성락 씨(53), 김윤경 씨(51), 유세현 씨(58)를 각각 인정 예고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금강산의 절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가로 54.3cm, 세로 33cm 화폭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산봉우리가 겹겹으로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이 환갑 무렵 그린 진경산수화 ‘금강내산전도’다. 1925년 한국을 찾은 독일의 성 오틸리엔 수도원 노르베르트 베버 대원장이 이 작품이 포함된 ‘겸재정선화첩’을 수집해 반출했다. 2005년 성 오틸리엔 수도원이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화첩을 영구대여하는 방식으로 한국에 반환하면서 ‘금강내산전도’는 8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예레미아스 슈뢰더 신부는 반환 의사를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겸재정선화첩이 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있기를 바랍니다.” 국립고궁박물관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재단 창립 1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7일부터 9월 25일까지 해외로 반출됐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문화재를 소개하는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겸재정선화첩을 포함해 환수 문화재 40점을 선보인다. 2012년 창립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현재까지 6개국에서 784점(기증 680점, 매입 103점, 영구대여 1점)에 이르는 우리 문화재를 환수했다.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에는 한국사의 풍파가 녹아 있다. 전시는 1∼3부로 나눠 진행되는데 1부 ‘나라 밖 우리 문화재’에선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며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의 역사를 소개한다. 1913년 일본 도쿄제국대학(현 도쿄대)으로 불법 반출됐다 93년 만인 2006년 되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이 대표적이다. 조선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472년간 역대 왕의 행적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761책 전부가 일본에 반출됐는데 관동대지진으로 상당수를 잃고 남은 47책만 정부의 노력 끝에 반환됐다. 종묘에 봉안된 왕실문화유산인 고종의 국새 ‘황제지보’ 역시 6·25전쟁 때 도난당해 미국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한미 공조 수사와 외교적인 노력으로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2부 ‘다시 돌아오기까지’에서는 하나의 문화재를 원래 자리로 반환하기 위한 재단과 정부의 보이지 않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7년 프랑스 경매 시장에 출품된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 책봉 죽책’을 매입해 국내로 반환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1819년 신정왕후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며 제작한 이 죽책은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었으나 어느 순간 행방이 묘연해졌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돼왔던 왕실 유물이 경매에 출품된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재단 관계자들은 프랑스로 가 경매에 참여했다. 김계식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사무총장은 “문화재 환수를 위해 직원들이 10년간 세계 곳곳을 누빈 거리는 지구 160바퀴에 달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최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과 미국에서 환수한 문화재 3점이 처음 공개된다. ‘나전매화, 새, 대나무무늬 상자’는 정방형 상자 표면에 매화, 대나무, 모란 넝쿨무늬가 조합된 18, 19세기 자개 상자로 지난해 일본 개인 소장자에게서 직접 매입했다. 1722년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를 수록한 ‘열성어필(列聖御筆)’과 조선 후기 도자기 ‘백자동채통형병’은 올 3월 미국 경매에서 사들였다. 현재까지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대륙 등 나라 밖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21만4208점에 이른다. 무료.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07년 캘리 로먼이라는 여성은 갓 태어난 딸아이에게 모유 수유하는 모습을 촬영해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다. 며칠 뒤 페이스북은 그의 동의 없이 사진을 삭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여성의 가슴이 드러난 외설물이라고 판단한 것. 유해 표현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한다는 소셜미디어의 방침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다. 디지털 시대 검열의 주체가 바뀌었다. 15년 넘게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등 플랫폼 기업의 검열 실태를 연구해온 저자는 과거에는 정부가 불온 표현물을 통제해왔다면 이제는 그 역할을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 기업이 대신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2011년부터 디지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비영리기구 전자프런티어재단에서 활동한 저자는 플랫폼 권력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백인 남성 중심에 기독교 가치관이 지배하는 실리콘밸리에서 태동한 플랫폼 기업들이 규정한 검열 원칙에는 인종, 젠더, 종교 편향성이 내재돼 있다는 지적이다. 플랫폼 기업은 유해물로부터 사용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보호는 편향적으로 이뤄졌다. 2014년 이스라엘 법무장관이 팔레스타인인을 향해 “그들은 죽어 마땅하다. 그래야 더는 테러리스트들을 출산하지 못할 테니까”라는 혐오 표현물을 올렸지만, 페이스북은 ‘테러리스트는 혐오 발언 금지 조항에서 보호하는 집단이 아니다’라며 해당 글을 삭제하지 않았다. 3년 뒤 2017년 영국 가디언이 입수한 페이스북 내부 파일에 따르면 페이스북은 ‘외국인’ ‘노숙자’와 함께 ‘시온주의자’를 국제·지역적으로 취약한 집단으로 상정해 보호한 반면 ‘흑인 아동’과 ‘팔레스타인인’은 보호 대상에 포함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저자는 플랫폼 기업이 정부와 결탁해 검열 카르텔을 구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국가에서 세속화를 방지하기 위해 소셜미디어에 대한 접근 권한을 제한하자 거대 플랫폼 기업은 시장을 지키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튀르키예(터키)처럼 인구 8400여만 명에 이르는 거대 시장을 놓치는 건 손해였기 때문이다. 결국 구글은 정부의 콘텐츠 삭제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2009년 구글이 발표한 투명성 보고서에 따르면 6개월간 세계 각국 정부로부터 1000개 이상의 콘텐츠 삭제 요청을 받았다. 지금까지도 이집트, 리비아 등에서는 이슬람교와 정부를 비판하는 표현물이 게시되는 순간 검열 받는다. 저자는 민중이 플랫폼 검열 권력의 최종 감시자가 되는 것이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2008년 페이스북에서 열린 ‘엄마들의 국제 모유 수유 캠페인’이 대표적이다. 1만1000여 명에 이르는 엄마들은 자신의 프로필을 모유 수유 사진으로 바꾸며 “모유 수유는 외설적이지 않다”고 저항했다. 페이스북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5년 모유 수유 이미지는 외설적이지 않다고 자사 규정에 명시했다. 민중이 소셜미디어의 힘을 역이용해 민간기업의 규정을 바꾼 것. 민중이 뭉친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검열 카르텔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는 사례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 왕실에서 태어난 이의 탯줄이 봉안된 태실(胎室) 풍경을 그린 ‘태봉도(胎封圖)’ 3점이 보물로 지정된다. 문화재청은 사도세자의 태실이 있는 산봉우리를 담은 ‘장조 태봉도’를 포함해 ‘순조 태봉도’, ‘헌종 태봉도’를 30일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장조 태봉도는 1785년 사도세자의 태실이 있는 경북 예천군 명봉사(鳴鳳寺)의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장조의 태실은 산봉우리가 겹겹으로 에워싼 산 중심에 세워져 있어 마치 장엄한 산의 보호를 받는 듯하다. 순조 태봉도는 순조가 1800년 즉위한 지 6년이 된 1806년 그의 태실을 간직한 충북 보은군 산내리의 풍경을 담았다. 헌종 즉위 13년인 1847년 그려진 헌종 태봉도에는 헌종의 태실이 자리한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산봉우리가 그려져 있다. 문화재청은 “조선 왕실의 장태(藏胎·왕자녀의 탯줄을 봉안하는 것)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태실의 모습을 그린 태봉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역사성이 있는 희소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아이를 출산하면 남아의 태는 출생 5개월이 되는 날, 여아의 태는 3개월 되는 날 길지(吉地)에 묻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일제가 1929년 태실 54기를 전부 경기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로 옮겨 원형을 잃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식량안보지수’에서 지난해 한국은 32위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일본이 매년 10위권을 웃도는 반면 한국은 2017년 24위에서 2019년 29위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인구 증가나 재해, 전쟁 등 식량위기 상황을 대비해 적정량의 식량을 비축하는 전략이 없는 데다 식량안보를 전담하는 주무 부처조차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신간 ‘식량위기 대한민국’(웨일북)을 20일 출간한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54)은 29일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유럽, 중국, 일본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기후변화에 따를 식량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우고 있는 반면 한국에선 식량안보라는 의제 자체가 생소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식량위기는 더 이상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이 겪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닙니다. 곡물자급률이 20% 미만인 한국이 10년 안에 겪게 될 문제일 수 있어요.” 밀 자급률이 0.7%에 불과한 한국은 연간 소비하는 350만 t의 밀을 미국, 호주, 우크라이나 등에서 수입해 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이어진 가뭄으로 미국의 곡물 생산량이 40%가량 감소한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며 식탁 물가가 폭등했다. 호주는 3∼5년마다 흉년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남 소장은 “가뭄과 산불, 전쟁 등 글로벌 위기가 겹겹으로 발생한다면 식탁 물가는 언제든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해결책은 식량자급률을 끌어올리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국내 농경지는 매년 1∼2%가량 감소하는 추세다. 남 소장은 가장 큰 난관으로 지방소멸을 꼽는다. 그는 “2020년 기준 농가의 70%는 농업으로 얻는 소득이 1000만 원 미만이다”라며 “농경지뿐 아니라 농촌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식량자급률은 지금 수준의 저지선을 구축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이 때문에 글로벌 곡물 공급망을 다변화해 식량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세계 각국의 향후 5∼10년 식량 생산량을 미리 예측해 선제적 계약을 체결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남 소장은 “진정한 위기는 우리가 타 국가의 식량 생산량과 비축량을 전혀 알지 못할 때 발생한다”고 경고했다. 세계 각국은 향후 100년을 내다보며 식량안보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미국은 항공우주국(NASA)이 농업 관련 인공위성을 활용해 세계 주요 작물의 재배 면적을 추정해 생산 현황을 분석해 왔다. 중국은 2017년 국영 화학 기업 켐차이나를 통해 스위스 다국적 종자 기업 신젠타를 430억 달러에 인수하며 발 빠르게 대응했다. 한국은 2025년에야 농림업에 활용할 중형 과학위성을 쏘아 올린다. 남 소장은 “더 늦기 전에 식량안보를 국가적 어젠다로 격상시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시대 식량위기는 농림축산식품부뿐만 아니라 외교부와 기획재정부가 참여해 해결해야 하는 범정부 차원의 문제입니다. 여러 부처를 아우르는 식량안보기구를 구성하는 것이 식량위기에 대비하는 첫걸음이 될 겁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시대 전기 왕실 건축물의 지붕을 장식하던 용머리 장식기와(鷲頭·취두)의 완전한 형태가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2019년 9월 충남 태안군 청포대 갯벌에서 지역민이 조개를 캐다가 하부 취두 1점을 발견하며 시작된 3년간의 발굴조사 끝에 장식기와의 완전한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9일 “지난달 충남 태안군 청포대 갯벌 발굴조사 과정에서 용머리 장식기와 취두 상부와 그 위에 부착하는 칼자루 모양의 장식품인 검파(劍把)가 추가로 출토됐다”고 밝혔다. 길이 40.5cm, 폭 16cm, 두께 7cm인 검파는 앞면과 뒷면에 구름무늬가 새겨진 칼자루 모양으로, 취두 위에 꽂아 빗물이 기와 내부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상부와 하부를 모두 합한 취두의 전체 높이는 103cm, 가로 길이는 83cm다. 이번에 발굴된 취두는 숭례문에 사용된 취두와 유사해 경복궁 창건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숭례문과 경복궁은 14세기에 창건됐다. 해당 유물이 태안군의 갯벌에서 출토된 경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연구가 진행 중이다. 학계에서는 과거 한양의 와서(조선 왕실용 기와나 벽돌을 만드는 관아)에서 제작된 취두를 전주 경기전 등의 건물에 사용하고자 옮기던 중 운반선이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014년 8월 세계 고고학계를 뒤흔든 발굴조사 보고서가 발표됐다.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가 이끄는 발굴조사단이 터키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괴베클리테페에서 1만2000년 전 신전도시 유적을 확인한 것. 보고서에 따르면 유적지에서 50t이 넘는 돌기둥 20여 개가 확인됐고, 돌기둥에는 멧돼지를 비롯한 동물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세계 4대 문명이 꽃핀 시기보다 무려 6000년 앞선 수렵·채집 시기에 문화예술사적으로 뛰어난 문명이 존재했다는 증거였다. 1983년 터키 이스탄불대 대학원에서 역사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터키 일대 아나톨리아 문명에 눈뜬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69)는 발굴조사 보고서가 나온 직후 곧장 현장으로 날아갔다. “이 정도 규모의 신전을 지으려면 최대 1만 명에 이르는 노동력이 필요해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부에 위치한 아나톨리아가 인류사의 뿌리였던 겁니다.” 이 교수는 27일 4대 문명의 모태(母胎)인 아나톨리아 문명을 조명한 신간 ‘인류본사’(휴머니스트)를 출간했다. 본보와 전화 인터뷰가 진행된 21일에도 그는 터키 히타이트 유적지에 머물고 있었다. 진실은 현장에 있다고 믿는 그는 “인류사의 뿌리를 찾기 위해 1983년 이스탄불대 대학원에 진학한 이후로 수십 곳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유적지를 찾아다녔다. 신간에는 지난 40년간 나의 발품과 고민이 담겼다”고 말했다. 책에는 생생한 현장이 빼곡하다. 이 교수는 고대부터 오스만제국에 이르는 중동사를 서술했을 뿐 아니라 괴베클리테페, 실크로드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유적지 등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탐방기를 함께 실었다. “괴베클리테페 유적지에서 제 키의 3배 가까이 되는 신전 기둥을 보고 나서야 당대 문명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몸소 깨달았어요. 독자들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현장을 느끼길 바랐습니다.” 최근에도 터키 곳곳에서 1만 년 전 대규모 주거지 터가 잇달아 발굴됐다. 이에 따라 아나톨리아 문명이 남하해 메소포타미아·이집트 문명으로 이어졌을 거라는 학계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왜 우리나라 국회는 몸싸움을 벌이는 ‘동물 국회’가 되거나 아예 일하기를 멈추는 ‘식물 국회’가 되곤 할까. 건축가인 저자는 사람이 아닌 공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영국 하원의사당은 테이블을 중앙에 놓고 양당이 마주 본 채 다닥다닥 붙어 앉는 비좁은 구조라 마이크 없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페라극장을 닮은 프랑스 국회의사당은 계단식 의자가 설치돼 앞사람이 하는 일을 뒷사람이 볼 수 있다. 한국 국회의사당은 정반대다. 의원 수 대비 1인당 면적이 3.16m²로 프랑스 국회의사당(0.94m²)보다 훨씬 넓은 데다 의자마저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상호 감시체계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느슨하고, 상대방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를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한 저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공간의 비밀을 풀어낸다. “우리는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우리를 만든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빌려 도시공간이 우리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한 덕에 파리 등 대도시와 한국 도시공간을 비교분석한 사례가 풍부하게 담겼다. 도시구조는 한 사람은 물론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 무수히 많은 한국 운전자들은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차량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까. 성격 급한 한국인의 특성 탓으로 접근하면 바뀌는 건 없다. 저자는 다른 데에서 해답을 찾는다. 많은 이들이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문제이지 않을까. 유럽에서는 차량 신호등이 정지선 바로 앞에 설치돼 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가면 차량 신호를 볼 수 없기에 법을 지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횡단보도 너머에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 횡단보도를 침범해도 교통신호를 확인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운전자 처벌수준을 강화하는 것보다 차량 신호등 위치를 바꾸는 게 사고를 줄이는 근본 해법인 셈이다. 도시공간은 때로 삶의 방식을 바꾼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건축가 우대성이 2013년 부산 서구에 지은 보육시설 수국마을 사례를 풀어낸다. 요양병원처럼 생긴 복도식 건물에서 살던 100명의 아이들은 규율에 따라 살아갈 뿐, 제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새 보육시설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우대성은 오랜 고민 끝에 옛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그 위에 조그마한 집 여러 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지었다. 공간이 바뀌자 아이들의 일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집과 마을의 주인이 된 아이들이 스스로 집안일을 분담하고 집을 가꾸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터득해 나간 것이다.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저자의 건축 철학도 눈길을 끈다. 그는 시민을 도시의 주인으로 만드는 변화는 아주 작은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1923년 파리 시당국은 튈르리 정원에 고정된 벤치를 놓는 대신 누구나 손쉽게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녹색 철제 의자 수백 개를 마련했다. 제각각 다른 방향, 다른 위치에 놓여 멀리서 보면 무질서해 보이지만 의자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은 제 집처럼 편안해 보인다. 어쩌면 의자 하나, 신호등 하나, 건물 하나에 깃든 건축가의 철학이 도시의 풍경을 이처럼 새롭게 바꿔왔는지도 모르겠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왜 우리나라 국회는 몸싸움을 벌이는 ‘동물 국회’가 되거나 아예 일하기를 멈추는 ‘식물 국회’가 되곤 할까. 건축가인 저자는 신간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사람이 아닌 공간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영국 하원의사당은 테이블을 중앙에 놓고 양당이 마주본 채 다닥다닥 붙어 앉는 비좁은 구조라 마이크 없이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페라극장을 닮은 프랑스 국회의사당은 계단식 의자가 설치돼 앞 사람이 하는 일을 뒷사람이 볼 수 있다. 한국 국회의사당은 정반대다. 의원 수 대비 1인당 면적이 3.16㎡로 프랑스 국회의사당(0.94㎡)보다 훨씬 넓은데다 의자마저 띄엄띄엄 떨어져있다. 상호 감시체계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느슨하고, 상대방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가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이화여대 캠퍼스 복합단지(ECC)를 설계한 건축가로 유명한 저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공간의 비밀을 풀어낸다. “우리는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우리를 만든다”는 윈스턴 처칠의 말을 빌려 도시공간이 우리 삶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유럽 여러 도시를 여행한 덕에 파리 등 대도시와 한국 도시공간을 비교분석한 사례가 풍부하게 담겼다. 도시구조는 한 사람은 물론 공동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왜 무수히 많은 한국 운전자들은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차량 정지선을 지키지 않을까. 성격 급한 한국인의 특성 탓으로 접근하면 바뀌는 건 없다. 저자는 다른 데에서 해답을 찾는다. 많은 이들이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문제이지 않을까. 유럽에서는 차량 신호등이 정지선 바로 앞에 설치돼 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가면 차량 신호를 볼 수 없기에 법을 지킬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한국은 횡단보도 너머에 신호등이 설치돼 있다. 운전자가 정지선을 넘어 횡단보도를 침범해도 교통신호를 확인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 운전자 처벌수준을 강화하는 것보다 차량 신호등 위치를 바꾸는 게 사고를 줄이는 근본 해법인 셈이다.도시공간은 때로 삶의 방식을 바꾼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건축가 우대성이 2013년 부산 서구에 지은 보육시설 수국마을 사례를 풀어낸다. 요양병원처럼 생긴 복도식 건물에서 살던 100명의 아이들은 규율에 따라 살아갈 뿐, 제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새 보육시설을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은 우대성은 오랜 고민 끝에 옛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그 위에 조그마한 집 여러 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을 지었다. 공간이 바뀌자 아이들의 일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집과 마을의 주인이 된 아이들이 스스로 집안일을 분담하고 집을 가꾸며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터득해나간 것이다. “시민이 도시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저자의 건축 철학도 눈길을 끈다. 그는 시민을 도시의 주인으로 만드는 변화는 아주 작은 데서 출발한다고 강조한다. 1923년 파리 시당국은 튈르리 정원에 고정된 벤치를 놓는 대신 누구나 손쉽게 위치를 바꿀 수 있는 녹색 철제 의자 수백 개를 마련했다. 제각각 다른 방향, 다른 위치에 놓여 멀리서 보면 무질서해 보이지만 의자 위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은 제 집처럼 편안해 보인다. 어쩌면 의자 하나, 신호등 하나, 건물 하나에 깃든 건축가의 철학이 도시의 풍경을 이처럼 새롭게 바꿔왔는지도 모르겠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그는 조선 독립을 뜻하는 사람에게 공경 받았으며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이후의 고생은 극도에 이르러 하루 한 끼를 먹지 못해 추위가 극에 다다른 가운데 세상을 마쳤다.’ 1922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의 부고 기사다. 그는 대한제국 대신 출신으로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다. 양반가에서 태어나 판사대신주일공사(辦事大臣駐日公使)로 활동했다. 국권 침탈 후에는 1919년 4월 항일 비밀결사단체 대동단(大同團)을 조직하고 같은 해 10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을 맡아 굶주리면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는 올해 김가진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23일 열었다. 기념사업회장인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는 개회사에서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 대신이었기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친일파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구한말 일본통 외교관이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선생을 재평가할 때”라고 말했다. 이날 이규수 일본 히토쓰바시대 한국학연구센터 교수는 ‘제국 일본의 동농 김가진 인식’ 논문에서 1919년 일제가 작성한 ‘상하이 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 조사보고서’를 입수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동농은 일제가 감시하는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11월 13일 일본 조선주둔군은 ‘김가진 부자가 11월 초 상하이에 와서 임정 사람과 협의하며 3만 청년을 규합하고 있다. 그들은 역정(逆政) 밑에서 노예생활을 보내기보다 독립군 깃발 아래 깨끗이 죽자는 선동적 언사를 일삼고 있다’는 내용의 문건을 총리대신에게 보고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김가진을 ‘종래 독립운동에 관계한 자’라고 지칭했다. 1920년 5월 작성된 ‘비밀결사 대동단원 검거 문건’에는 ‘대동단이 김가진을 두령(頭領)으로 갖가지 음모를 기획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 혈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선동적 기고문을 발표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독립운동가 최익환(1889∼1959), 박영효(1861∼1939) 등과 함께 조직한 대동단은 ‘일본이 한국을 독립시키지 않으면 혈전이라도 벌이자’는 포고문을 배포하며 국내외 독립 여론을 고취시킨 항일 운동단체다. 이 교수는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대동단 총재와 임정 고문을 지낸 경력은 동농의 항일운동 이력을 뒷받침한다”고 말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제국의 귀족이 임정에 몸담으며 일제에 치명타를 가했으며 구한말 백성이 대한민국 시민으로 거듭나는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했다. 장명국 기념사업회장이 선생의 일생을 조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석탑출판) 출판 기념회도 이날 함께 열렸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해외로 반출됐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16세기 조선 산수화 ‘독서당계회도(讀書堂契會圖)’가 22일 공개됐다. 문화재청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 3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매입한 독서당계회도를 이날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선보였다. 당시 경매 낙찰가는 69만3000달러(약 8억9700만 원). 가로 62.2cm, 세로 91.3cm의 화폭에 사가독서(賜暇讀書·관료들이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내리는 제도) 중인 관료들이 두모포(豆毛浦·현 서울 성동구 옥수동 일대 한강변)에 나룻배를 띄워놓고 풍류를 즐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강 건너 절벽 위로 이들이 모여 책을 읽던 독서당(讀書堂)이 보인다. 국내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독서당계회도 3점 중 하나로 실경(實景) 산수화 중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그림 하단에는 당시 계회(契會·친목 모임)에 참석한 관료 12명의 호와 이름, 본관, 과거급제 연도가 적혀 있어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있다. 학계는 참석자 품계와 관직으로 미뤄볼 때 이 그림이 중종대인 1531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계회 참석자 중에는 백운동서원을 세운 성리학자 주세붕(1495∼1537)이 포함돼 있다. 안휘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제작연도를 특정할 수 있는 데다 얇은 선과 점으로 그린 안견파 화풍을 반영하고 있어 회화사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독서당계회도가 국외로 반출된 경위는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애초 소장자였던 교토 국립미술관 초대 관장 간다 기이치로(神田喜一郞)가 사망한 뒤 유족이 다른 일본인에게 판 것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미국 뉴욕 경매시장에서 산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은 다음 달 7일부터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는 환수문화재 특별전을 통해 계회도를 전시할 예정이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