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송평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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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칼럼니스트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97%
사설/칼럼3%
  • [횡설수설/송평인]官制 징검다리 휴일

    프랑스에서 예수승천일은 공휴일이다. 일요일인 부활절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어서 늘 목요일이 된다. 그래서 다음 날을 징검다리 휴일로 만들어 4일 연속 쉰다. 프랑스 근로자는 국경일 휴일과 징검다리 휴일을 합해 모두 8일을 쉴 수 있다. 올해는 주말과 겹치지 않은 국경일 휴일이 8회여서 징검다리 휴일은 정해진 유급 휴가일수에서 빼야 한다. ▷일본에는 4월 29일 쇼와의 날, 5월 3일 헌법기념일, 5월 4일 녹색의 날, 5월 5일 어린이날 등 공휴일이 이어진 골든위크가 있다. 올해는 중간에 낀 평일 이틀을 쉬면 열흘 연속 쉴 수 있다. 관공서는 징검다리 날에 쉬지 않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쉰다. 다만 근로자는 연차나 월차에서 쉰 날을 제해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내수 진작을 위해 금요일인 5월 6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다. 상의가 정부와 사전 협의 없이 건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8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면 어린이날부터 4일 연속 쉴 수 있다. 임시 공휴일이 되면 인건비는 그대로인데 생산일수는 줄어든다. 그러나 팔리지도 않는 상품을 생산만 하면 뭐 할 것인가. 다만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내수 진작’ 같은 기준으로 임시 공휴일을 만들면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겨우 1주일여 남겨 놓고 임시 공휴일이 되면 기업이나 학교가 부랴부랴 연초 계획을 변경하는 혼란은 어쩔 것인가. ▷공(公)휴일은 말 그대로 또 법적으로도 관(官)이 쉬는 날이다. 기업은 단체협약을 통해 공휴일을 유급 휴일로 삼을 뿐이다. 기업은 공휴일이 아니라도 근로자를 쉬게 할 수 있다. 노동절이 그렇다. 선진국에서 징검다리 휴일에 쉬는 것은 먼저 기업이 근로자에게 휴가를 주고 그런 관행을 학교와 관공서가 가능한 범위에서 따라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관공서가 쉬어야 기업들도 따라 쉰다는 생각이 뿌리 깊다. 기업들이 새 관행을 만들어 본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모처럼 4일 연휴를 맞게 될 근로자들의 즐거움을 훼방할 뜻은 없지만 따질 것은 따져보자는 이야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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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민주주의는 과반이다

    민주주의를 숫자로 표시한다면 1도 아니고 3분의 2도 아니고 5분의 3도 아니고 2분의 1이다. 언뜻 생각하면 만장일치, 즉 1이 가장 민주적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만장일치를 추구하다 보면 논의가 길어져 제때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또 그 결정으로 손해 보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 결정이 가져올 혜택보다 더 많은 비용이 필요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세상에는 애당초 합의 불가능한 일이 많다. 매사 만장일치는 천국이나 혹은 사이비 천국(공산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적시성과 효율성, 현실가능성을 고려해 따져갈 경우 민주주의의 숫자는 2분의 1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얼마 전 대선 결선투표를 제안했다. 결선투표는 과반의 민주주의를 위해 꼭 필요한 제도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이 어느 정도의 표를 얻어야 당선될 수 있는지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막연히 초등학교 교실에서 반장 뽑듯이 대통령 후보자 중 1위를 대통령으로 뽑고 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민주적 정당성 확보에 문제가 있다. 영국 독일 일본 등 의원내각제 국가는 총선에서 제1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면 연정을 통해 과반(過半)을 만들어 정부를 구성한다. 과반의 지지를 얻을 때에만 그 정부에 민주적 정당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프랑스 같은 대통령제 국가는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에게 과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1차 투표에서 1, 2위 득표를 한 후보자만 2차 투표에 진출해 최종 당선자를 가린다. 의원내각제 국가나 대통령제 국가나 실행 방식은 다르지만 사고방식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영어의 머조리티(majority)를 별생각 없이 다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머조리티는 정확히 말하자면 1위 다수가 아니라 과반을 의미한다. 머조리티의 반대쪽, 즉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마이노리티(minority)다. 민주주의는 머조리티의 지배, 즉 머조리티가 마이노리티에 부과하는 강제다. 반대로 마이노리티가 머조리티를 강제하면 그것은 왕정이거나 귀족정이거나 소수당의 독재다. 국회선진화법처럼 5분의 3의 합의를 요구하는 것은 5분의 2보다는 많지만 2분의 1에는 미치지 못하는 마이노리티가 머조리티를 강제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래서 5분의 3은 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反)민주적인 것이다. 미국 상원에는 합법적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 절차가 있고 이를 중지시키려면 3분의 2의 합의가 필요하다. 미국만의 독특한 제도다. 이것은 미국 상원이 민주적으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미국 와이오밍 주의 인구는 59만 명에 불과하고 캘리포니아 주의 인구는 3914만 명에 달해 약 67배 차이가 난다. 그러나 와이오밍 주도 캘리포니아 주도 상원의원은 똑같이 2명이다. 작은 주들이 연합해 과반을 만들어봐야 민주적인 과반이 아닐 수 있기 때문에 3분의 2를 요구한 것이다. 인구수에 따라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하원에는 이런 제도가 없다. 마찬가지로 민주적으로 구성되는 우리나라 국회에도 적용돼서는 안 된다. 우리 헌법은 간혹 3분의 2의 합의를 요구한다. 헌법 개정 같은 몇몇 경우가 있다. 3분의 1보다는 많지만 2분의 1에 미치지 못하는 마이노리티의 의사를 특별히 존중할 필요가 있는 경우 그렇게 한다. 국회선진화법은 헌법처럼 미리 정해진 어떤 특정한 사안에 가중(加重) 다수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어느 사안에나 두루 적용되는 일반 절차에서 가중 다수를 요구하기 때문에 반민주적이다. 헌법재판소가 이 부분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는 데 부정적이던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 원내대표가 전향적인 자세로 나왔다. 총선 결과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표를 합치면 과반이 된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정책 유사성도 높다. 더민주당이 국회선진화법으로 19대 국회 내내 국정의 발목을 잡아오다 여소야대(與小野大)가 되자 돌아서니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큰 손해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이 이 망국(亡國)의 법을 고칠 절호의 기회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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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 송평인]브로맨스의 남자 관계

    KBS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목숨을 건 작전마다 생사를 함께한 송중기(유시진 대위 역)와 진구(서대영 상사 역)의 관계를 ‘브로맨스’라고 부른다. 브로맨스는 브러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로, 통상적인 우정 관계를 뛰어넘은 남자들끼리의 관계를 말한다. 성적인 암시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와의 차이다. 이 말은 1990년대 미국 스케이트보드 전문 잡지에서 처음 쓰였다고 한다. 많은 시간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탄 남자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요즘은 정치 기사에도 이 말이 쓰인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015년 인도를 방문했을 때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의 관계가 언론에서 브로맨스로 표현됐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16일 미국 워싱턴 세계은행에서 김용 총재를 만나 “요즘 브로맨스라는 말이 있는데 저와 김 총재의 관계는 그보다 훨씬 깊고 넓다”라고 말했다. 서양인들에게 둘러싸인 국제기구에서 한국말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둘만의 각별한 사이를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브로맨스의 상대편에는 로맨스가 있다. 지금은 흔해 빠졌지만 로맨스가 문학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서양 중세의 영웅 문학은 물론이고 코르네유의 비극까지만 해도 로맨스는 영웅 스토리에 밀렸다. 라신의 시대에 와서야 로맨스가 승리했다. 19세기 ‘에르나니’에서 ‘시라노 드베르주라크’까지 낭만주의 문학에서 로맨스는 신성시됐다. 20세기에 와서 로맨스는 ‘천국의 아이들’에서 ‘타이타닉’까지 영화를 통해 더 넓은 무대를 차지했다. ▷브로맨스는 새로운 가치다. 과거 영웅들은 서로 싸우는 영웅들이었지 협력하는 영웅들이 아니었다. 우정은 사랑보다 어렵다. 남자들은 상대를 제거할 대상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상명하복의 관계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강하다. 새누리당은 서로를 향해 배신의 말을 퍼붓다 함께 망했다. 남자들끼리도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협력이 요구되는 시대다. 우정의 정치가 힘들다면 제대로 된 선의의 경쟁이라도 해야 살아남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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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맨부커 국제상 최종 후보 작가 ‘한강’

    한국 문학은 대개 영어를 잘 아는 한국인에 의해 영어로 번역된다. 반면 영문학은 영어를 잘 아는 한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다. 이런 비대칭성이 한국 문학을 외국에 소개하는 데 장애가 된 게 사실이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는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박사과정 학생인 데버러 스미스 씨가 한국어를 배워 직접 영어로 번역했다. 영어권 독자들에게 가 닿는 감동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한강이 ‘The Vegetarian(채식주의자)’으로 영국 맨부커 국제상의 최종 후보 6명에 들었다. 최종 후보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도 포함됐다. 맨부커 국제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불리는 맨부커상의 자매상이다. 맨부커상은 영연방 작가에게, 맨부커 국제상은 비(非)영연방 작가와 번역자에게 주어진다. 수상자는 다음 달 16일 발표된다. ▷평범한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된다. 아내는 구두조차 가죽 제품이라 해서 버릴 정도로 채식에 집착한다. 아내는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의해 비참하게 도살돼 자신도 강제로 먹어야 했던 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야수성을 감지한 그녀는 처벌의 한 형태로 자기파괴를 시작한다. 초식(草食)으로도 모자라 차라리 식물이 되기 원했던 아내가 병원에 실려가 (아마도 아내에 의해) 목덜미를 물어뜯긴 새를 쥐고 있는 장면은 인간의 근원적 야수성을 고발하듯 섬뜩하다. ▷2014년 5·18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온다’가 나왔을 때 한강의 작품을 처음 읽었다. 2011년 ‘희랍어시간’이 나왔을 때는 도입부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져 읽다 말았다. ‘채식주의자’는 훨씬 전인 2007년 나왔다. 읽지 않고 있다가 맨부커 국제상 후보에 올랐다고 해서 뒤늦게 읽었다. 이 작품의 가치를 진작 알아보고 고른 번역자의 안목이 놀랍다. 소설가 한승원의 딸로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작가가 좋은 번역자까지 만났으니 상복도 따랐으면 좋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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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오바마-옐런 회동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영향력이 큰 자리라는 말을 듣는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리면 세계 자본시장이 요동친다. 물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자리는 대통령이다. 11일 미국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경제대통령 재닛 앨런 연준 의장이 만났다. 두 사람은 2014년 옐런이 의장이 된 해에도 한번 만났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과 중앙은행장이 독대하는 경우는 없다. 오마바 대통령과 옐런 의장의 회동은 우리로서는 낯선 장면이다. ▷지금 세계 경제의 관심사는 연준이 기준금리 인상을 지속할지 여부다. 두 사람의 면담이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26∼27일)를 앞두고 이뤄졌다는 점에서 기준금리에 대한 언급이 오갔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러나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기준금리 거론은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연준 의장의 권한을 침해한다”며 “비록 비공개 면담이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했다. ▷만일 박근혜 대통령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민감한 시기에 만났다면 한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냐는 비판이 쏟아졌을 것이다. 미국 언론은 “두 사람이 미국의 중·단기 경제전망과 세계 경제의 잠재 위험요인에 대해 논의했다”는 백악관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눈치다. 미국 연준의 독립성에 대한 믿음은 확고한 반면 우리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는 그만큼 확고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연준과 한은은 법이 설정한 목표에 차이가 있다. 연준법에는 ‘최대 고용’과 ‘물가 안정’이라는 상반된 목표가 동시에 주어져있다. 한은법에서는 ‘물가 안정’이 최우선 목표로 돼 있다. 한은의 목표가 이렇게 협소해진 것은 1997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의 특수한 상황에서다. 물론 한은이 고용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법으로 명확히 목표가 주어져야 정부와의 갈등도 줄어들고 한은의 독립성도 높아진다. 그래야 미국처럼 대통령과 중앙은행장이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기회도 올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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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괴물’ 국회선진화법이 만든 희한한 총선

    유권자들은 광복 후 처음으로 어느 정당을 과반으로 만들어줘도 의미 없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직전 2012년 총선만 해도 유권자들은 한 정당에 과반 의석(150석)을 부여한다는 현실 가능한 목표를 위해 투표했다. 국회선진화법에서는 5분의 3 의석(180석)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한 정당이 180석을 차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권력 분점이 사실상 예정된 상황에서 어느 특정한 정당의 후보를 지지한다는 의미는 퇴색할 수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복지를 둘러싸고 벌였던 치열한 정책 대결 같은 것은 사라졌다. 국회선진화법에서는 내가 새누리당의 정책을 지지해 새누리당 후보를 뽑아준다고 해서 그 정책이 국회에서 반영된다는 보장이 없다. 내가 더불어민주당의 정책을 지지해 더민주당 후보를 뽑아준다고 해서 그 정책이 국회에서 통과된다는 보장도 없다. 각 당의 각기 다른 정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총선을 치르고 있다. 총선이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평가라는 것도 옛날 얘기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실의에 빠지고 서민들은 전월세가 치솟아 더 먼 교외로 밀려나는데도 야당의 ‘경제실패론’에는 별 반향이 없다. 국회선진화법은 정책 실패의 원인을 대통령과 집권당에 돌리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야당 때문에 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야당은 합의할 수 없는 법을 만들어와 그랬다고 주장한다. 유권자로서는 법을 시행해보지도 않았으니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책임정치 자체가 실종됐다. 의원은 세비 1억5000만 원 외에 보좌진 인건비 등을 포함해 연간 7억 원이 넘는 돈을 지원받는다. 의원이 되면 공항 귀빈석 이용 등 200여 개의 특전이 주어진다. 국회선진화법에서는 야당도 여당에 하등 뒤질 바 없는 영향력을 지닌다. 권한은 많고 국민에게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 친박이니 비박이니, 친노니 비노니 하면서 안면몰수하고 싸우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살다 살다 이런 막장 공천은 처음 본다고 말한다. 이런 총선에서 유권자는 의원을 뽑기 위해 동원되는 거수기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제 집으로 배달된 선거관리위원회의 후보자 관련 자료를 훑어보면서 의원들만 좋은 투표를 왜 해야 하는지 나 자신을 설득하기 힘들었다. 국회선진화법을 되돌리지 않고는 선거도 국회도 정상화할 수 없다.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을 얻어 국회선진화법을 고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가능한 한 이번 국회 임기가 끝나는 5월 말까지는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그러나 헌재에 너무 큰 기대를 걸지는 말자. 몇몇 새누리당 의원이 국회의장을 상대로 제기한 것은 헌법소원이나 위헌법률 심판이 아니라 권한쟁의 심판이다. 헌재는 권한쟁의 심판에서 위헌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 국회의장이 법률에 따라 거부한 직권상정을 국회의원에 대한 권한 침해로 결론 내리기도 어렵지만, 그런 결론을 내린다 하더라도 그 전제가 된 법률을 위헌이라 하기는 더 어렵다. 하지만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국민의당의 분당을 이끌어낸 것도, 국민의당이 더민주당과의 단일화를 거부하게 만든 것도 국회선진화법이다. 국회선진화법은 뜻밖에도 제3당이 제2당보다 더 중요한 정당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국민의당은 정확히 이런 길을 보고 창당됐다.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이 합해서 180석 이상을 차지할 경우 국민의당이 더민주당을 제치고 새누리당과 국회 권력을 분점하게 된다. 국회선진화법은 당분간 고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실패로 판명난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의 조합보다는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의 조합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어쩌면 국민의당과 필사적으로 야권의 주도권을 다투는 더민주당이 국민의당을 무력화할 방법으로 국회선진화법의 일부 개정에 찬성하는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새누리당으로서도 잠재적 대권 후보인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견제할 수 있어 좋다. 여러 전제가 충족돼야 할 얘기이지만 이번 총선에서 그래도 의미를 찾는다면 이런 희미한 가능성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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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유승민과 헌법 1조 1, 2항

    유승민 의원이 지난해 ‘국회법 파동’으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사퇴할 때 헌법 1조 1항을 들이대더니 그제 탈당 때는 헌법 1조 2항을 거론했다.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1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2항)로 구성된다. 2항은 국민이 대통령과 국회를 선출한다는 의미다. 유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향해 “국회의원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뽑는 것”이라며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기치를 들어 항의한 것이다. ▷헌법은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또 국민과 국회의원 사이에 반드시 정당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헌법에서 정당은 기본이 아니라 선택 사양이다. 정당은 프리미엄일 뿐이다. 대구 유권자들에게는 유 의원이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그를 뽑을 기회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라진 것은 유 의원이 지금까지 여당 텃밭에서 누렸던 다디단 프리미엄이다. ▷물론 프리미엄을 주거나 뺏는 것도 공정해야 한다. 유 의원이 지난해 원내대표 시절 대통령의 행정입법권을 제한하려고 한 것은 삼권분립을 훼손할 심각한 오류였다. 그렇다고 그의 정체성이 보수 정당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다고 보긴 힘들다. 그런 의원이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고 지역구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공천하는 것이 상식에 맞다. 정당은 연대다. 도저히 함께하지 못할 만큼의 이념 차이가 아니라면 가능한 한 ‘덧셈 정치’를 해야 한다. ▷그럼에도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거창한 구호는 후보가 부당하게 체포되거나 자택 연금되던 독재 시대에나 어울린다. 지금은 유권자가 후보를 뽑을 기회를 박탈당하거나, 후보가 유권자에게 뽑힐 기회를 박탈당하는 시대가 아니다. 유 의원이 떼놓은 당상(堂上)을 뺏긴 것인지도 견해가 엇갈리는 데다 툭하면 헌법 운운하는 것은 ‘꽃신 신고 꽃길만 걸어온’ 사람이 운동권 흉내 내는 것 같다. 2008년 공천에서 ‘학살’된 친박은 거친 들판으로 뛰쳐나가 프리미엄 없이 당선됐고 결국 권력을 접수했다. 억울해도 ‘얼라’가 아니라 어른이면 그렇게 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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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친노 하루 만의 돌변, 무섭다

    친노(친노무현)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20일 분노로 달아올랐다.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의 비례대표 2번 셀프 공천이 밝혀진 날이었다. 친문(친문재인)으로 불리는 신(新)실세 친노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날 페이스북 글에서 “법정관리인으로 초빙된 김종인이 ‘대표이사’가 됐다”고 비판했다. 그러던 그가 다음 날 오후 김 대표의 순번이 14번으로 조정된 지 몇 시간 뒤에는 돌변했다. 그는 “14번은 김 대표에게 모욕을 준 것”이라며 “순위는 그분에게 맡기는 것이 예의”라고 썼다. 원조 친노 문성근 씨도 마찬가지다. 그는 20일 김 대표의 “비례대표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과거 발언 기사를 링크하며 김 대표의 말 바꾸기를 비판했다. 이어 다음 날 오전 김 대표가 비대위 회의에 불참하는 등 당무를 거부하자 “후안무치도 유분수”라고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러더니 그날 밤에는 “우리에게는 승리가 목표다. 김 대표의 비례 2번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며 돌아섰다. SNS로 이런 드라마틱한 표변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는 건 드문 일이다. 마치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21일 밤 12시 가까운 두세 시간 사이에 김 대표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존중으로 바뀌었다. 사실 김 대표에게 비례 2번을 제안한 것은 문재인 전 대표였다. 김 대표는 1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 전 대표가 1월 자신을 영입하러 왔을 때 비례 2번을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문 전 대표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저라도 김 대표를 상위 순번에 모셨을 것”이라며 앞서 그런 제안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친노가 문 전 대표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을 따름이다. 원로 친노 함세웅 신부는 SNS로 의견을 바꾸지도 못하고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함 신부는 21일 오후 재야 원로들과 함께 이례적으로 기자회견까지 열어 더민주당 중앙위를 향해 “김 대표의 셀프 공천을 취소하고 당선 가능성의 경계선으로 추정되는 15번 아래로 내려 보내라”고 요구했다. 비대위가 김 대표의 순번을 14번으로 조정할 때만 해도 함 신부의 압박이 먹히는 듯했다. 그러나 재야의 친노도, 비대위도, 중앙위도 지도자의 뜻을 잘못 읽었을 뿐이다. 지도자의 뜻이 전해지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이 정도 되면 해방 정국에서 좌익이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 소식을 전해 듣고 반탁에 나섰다가 하루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과장된 연상이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당은 항상 옳다(Das Partei hat immer Recht). 칩거하고 있는 당 지도자이긴 하지만 당 지도자의 생각은 항상 옳다. ‘내’ 생각이 당 지도자와 달랐다면 ‘내’가 의견을 바꿔야 한다. 그래도 지식인이라면 최소한 자아비판이라도 하고 의견을 바꾼다. 그런 것도 없었다.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같은 일부 친노는 여전히 저항하고 있다. 친노의 판단 착오 덕분에 4·13총선 이후 더민주당에서 전개될 사태의 예고편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당이 상영을 원치 않았던 예고편이라는 점에서 스포일(spoil)의 성격이 짙다. 물론 스포일이라고 해봐야 다들 예상하고 있는 뻔한 시나리오다. 적절한 때가 되면 오너가 다시 등장해 바지사장을 몰아내고 당을 장악한 뒤 대권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반항의 친노가 고개를 숙이자 바지사장의 기세가 등등해졌고 영화가 예상보다 흥미롭게 전개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기승전‘문(재인)’이라는 기본 플롯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 장제스의 군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마오쩌둥의 군대는 옌안으로 대장정에 올라 살아남았다. 안철수 분당의 파장이 당을 침몰시키기 직전에 문 전 대표는 경남 양산으로 후퇴해 침몰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막말 정청래 의원 등 몇몇이 희생됐지만 큰 손실은 없었다. 이해찬 의원은 무소속으로 출마해도 살아 돌아올 것이다. 문희상 백군기 의원 등은 쳐내는 시늉만 하다가 복귀시켰다. 윤후덕 의원도 살아남았다. 공천도 다 끝나 간다. 끝내기 수순인데 형세 판단도 못 한 자들이 판을 망칠 뻔했다. 칩거하던 오너가 부랴부랴 올라왔고 바지사장을 간신히 설득해 봉합한 것이 지난 3일간의 해프닝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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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프랑스 파리의 K북

    2014년 프랑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정해졌을 때 일이다. 한국인 입양아 출신인 당시 플뢰르 펠르랭 프랑스 문화장관은 카날플뤼스 방송과의 인터뷰 도중 “모디아노의 소설 가운데 어떤 작품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펠르랭 장관은 모디아노의 소설을 하나도 읽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장관으로 일한 지난 2년간 너무 바빠 독서를 못했다”고 말했다가 문화장관이란 사람이 책도 안 읽는다고 해서 오랫동안 구설수에 올랐다. ▷프랑스 파리에는 동네서점이 아직도 남아있다. 파리 15구는 한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다. 그곳 콩방시옹 거리의 ‘르 디방(Le Divan)’이란 서점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서점 사서들이 신간을 직접 읽고 소감을 짧게 손으로 적은 쪽지를 신간에 꽂아놓는다는 사실이었다. 서양의 서점은 독서클럽으로 시작했다. 우리의 짧은 근대사에는 독서클럽이란 부분이 생략돼 있다. 그래서 서점을 책을 파는 곳으로만 여기지 책에 대한 느낌을 주고받는 곳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한 ‘2016 파리 도서전’이 17일부터 파리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열려 나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그제 막을 내렸다. 공식 개막 전날인 16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전시장을 방문해 3시간 가까이 머물면서 작가, 출판인들과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마뉘엘 발스 총리도 찾았다. 주무장관인 오드레 아줄레 문화장관은 두 번이나 왔다. 서울국제도서전에는 대통령은커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근 영국 최고의 맨부커상 후보에 한국 작가로는 최초로 한강이 올랐다. 한강은 파리 도서전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한국 작가였다. 우리나라 김종덕 문체부 장관에게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를 읽어봤느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다. 미국 시사문예지 ‘뉴요커’가 올 1월 “한국인은 책도 안 읽으면서 노벨문학상을 원한다”고 지적했을 때 정말 뜨끔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읽지 않으면 파리의 K북도 없고 세계의 K북도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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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알파고, 인공지능의 초파리되나

    페이자오는 프랑스에 사는 중국 여성이다. 그녀와 파리의 카페에서 바둑을 둔 적이 있다. 9점을 깔고도 졌다. 그녀는 바둑대회에 출전한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려놓기도 한다. 며칠 전 페이스북으로 구글 알파고에 진 판후이 2단을 아느냐고 물어보니 친구 사이라고 한다. 오늘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이 기대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바둑은 4000여 년 전 중국에서부터 시작됐으나 15세기 이후 일본에서 체계화했다. 알파고의 고(go)는 영어에서 바둑이란 뜻으로 일본어 이고(위碁)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중일이 바둑을 겨루기 시작한 1980년대 말 이후 챔피언은 대개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졌다. 이 9단이 최근 중국 커제 9단에게 지고 있지만 커제를 대세라 부르기는 이르다. 인류를 대표해 알파고를 상대하는 사람이 한국 기사라는 데 자부심도 느껴진다. 구글이나 일부 과학자들이 알파고가 이길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건 흥정을 붙여야 재미를 보는 측에서나 하는 소리다. 알파고와 판후이의 대국을 보면 알파고의 실력으로는 이 9단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이 바둑계의 중론이다. 바둑은 인간이 발명한 가장 복잡한 보드 게임이다. 바둑의 경우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많다고 한다. 체스와는 비교도 하지 말자. 19년 전 컴퓨터가 체스에서 인간 챔피언을 이겼지만 인공지능의 발달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인공지능이란 말을 만들어낸 미국 과학자 존 매카시는 “바둑이야말로 인공지능의 초파리”라고 말했다. 유전학의 초파리처럼 바둑은 인공지능이 여기서 가장 먼저 성과를 보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분야다. 알파고 소식은 갑작스러웠다. 알파고와 판후이의 대결은 지난해 10월 밀실에서 진행됐고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올 1월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프로 기사들은 그동안 컴퓨터에는 4점을 깔아주고 뒀다. 알파고는 호선(互先)으로 프로 기사를 이겼다. 전문가들은 인공신경망이 출현하고 인공신경망을 가동할 엄청난 컴퓨터 파워가 이용 가능해지면서 비약적 발전이 이뤄졌다고 본다. 알파고는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이라는 신기술을 통해 스스로 수를 익히고 형세 판단 능력을 키운다고 한다. 하지만 바둑의 세계는 학습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습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인간은 4000년 이상 바둑을 둬왔지만 여전히 바둑의 10%만을 알 뿐이라고 한다. 조훈현 9단이 최초의 한중일 통합챔피언이 된 1989년 응씨배에서 통상 기피되는 ‘빈삼각’을 두 번이나 둬 이겼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두기 전에는 그 수가 보이지 않았다. 수학자 가우스가 어린 시절 1부터 100까지의 더하기를 반으로 접어 50×101의 곱하기로 만들기 전에는 그 간단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던 것과 같다. 프로 기사라도 9단의 경지에 오르는 사람은 드물고 9단 중에서도 최고수의 자리는 몇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올라갈수록 결국은 미묘한 창의성 경쟁이다. 알파고가 이번에 이 9단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람도 알파고가 인간을 이기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체스에서 딥블루(Deep Blue)가 인간 챔피언에게 졌다가 디퍼블루(Deeper Blue)로 개량돼 몇 년 만에 이기는 식은 아닐 것이다. 무리하지 않는 포석과 행마에 상대방의 패착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면서 끝내기에서는 결코 실수하지 않는, 세계 바둑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프로 기사라고 알파고를 생각해 보자. 이 기사는 심리적 동요 같은 건 모르고 체력의 한계도 없다. 하지만 그도 최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열공’하는 것으론 부족하고 창의력을 보여줘야 한다. 물론 창의적인 수도 결국 경우의 수 중 하나일 뿐이다. 언젠가 알파고가 인간을 이긴다면 그날은 인공지능의 초파리 연구가 완성된 날로 기록될 만하다. 바둑의 운명은 그날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를 신이라고 정의해 보자. 알파고는 바둑의 신이 된다. 고대 그리스인이 신전에서 신탁을 구하듯이 사람들은 바둑의 다음 수를 알파고에게 묻게 될 것이다. 이미 인간이 컴퓨터에 패한 체스에서는 컴퓨터를 이용한 부정행위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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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해고 힘들어진 트럼프

    도널드 트럼프는 부동산 재벌이지만 미국 NBC 방송의 비즈니스 리얼리티쇼를 진행하면서 “넌 해고야”라는 말로 ‘비호감’의 인기를 끌었다. 그가 1일 미국 12개 주에서 동시에 벌어진 ‘슈퍼 화요일 경선’에서 승리했다. 공화당은 이제 트럼프를 ‘해고’하기 힘들어졌다. 트럼프가 대선 후보가 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그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지지와 티파티 운동으로 분출했던 공화당 내 밑바닥 정서가 더 과격하게 분출한 것이다. ▷트럼프 하면 독설이다. 무슬림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멕시코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국경 장벽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권자는 그를 싫어하든가 좋아하든가 둘 중 하나지만 트럼프는 모두에게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그가 슈퍼 화요일의 승자로 결정되자 돌변했다. 평소의 공격적 발언이 사라졌다. 미국 CNN 방송이 “우리가 본 저 사람이 트럼프 맞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가 강경 이민정책을 뒤집는 발언을 한 오프 더 레코드 인터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경쟁 후보들은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라고 야단이다. 그러나 평소 ‘믿거나 말거나’인 트럼프가 인터뷰 내용이 공개된다고 해서 큰 타격을 입을 것 같지 않다. 독설은 전략에 따른 연기였는지 모른다. 다만 독설은 ‘넌 해고야’처럼 트럼프의 성격에 딱 맞는 리얼리티 연기였다. 엔터테이너 기질이 좀 있다고 해서 성격에도 안 맞는 통합주의자(unifier)의 캐릭터까지 잘 연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민주당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승세다. 트럼프가 본선에서 클린턴과 맞붙는다면 지는 것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는 보호무역주의로 미국을 불황으로 몰아넣고, 외교적 고립주의로 아시아 재균형 정책에서 후퇴해 중국을 신나게 해줄 수도 있다. 한국에 대한 ‘쥐꼬리만 한 방위비용 분담금’이란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우리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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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디캐프리오와 아카데미상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관심사는 작품상도 감독상도 아니고 영화 ‘레버넌트’에서 열연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남우주연상 수상 여부였다. 디캐프리오는 ‘너무 유명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출연을 후회했다’는 ‘타이타닉’에서 연기한 게 19년 전이고 숱한 화제작에 출연했지만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다. 팬들은 시상식에 앞서 그의 수상 탈락을 기원하는 희한한 캠페인을 벌였다. 영화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디캐프리오의 모습을 그의 수상을 늦춰서라도 가능한 한 더 많이 보고 싶다는 애정 어린 마음에서였다. ▷레버넌트(revenant)는 라틴어 다시(re)와 오다(veno)에서 온 말로 몸은 무덤에 두고 돌아온 혼, 즉 유령을 뜻한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예술에서 주체는 현전하는 것도 아니고 현전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난해한 이론을 펼치면서 팬텀이 아닌 이 고풍스러운 단어를 사용했다. 영화 속 디캐프리오는 유령은 아니지만 죽음에서 돌아온 자다. 치명적 부상을 입고 무덤에 버려졌으나 살아 돌아와 복수하는 사냥꾼으로 등장한다. ▷사진작가 애니 리버비츠가 찍은 디캐프리오의 흑백 사진이 있다. 사진 속에서 디캐프리오는 죽어가는 백조의 긴 목을 자신의 목에 두른 채 안고 있다. 어릴 적 꿈이 해양생물학자였던 디캐프리오는 2000년 영화 ‘비치’를 찍으면서 환경주의자가 됐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레버넌트는 인간과 자연의 호흡을 그린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촬영한 2015년은 역사상 가장 더운 해였다. 온난화로부터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자”고 역설해 공감을 끌어냈다. ▷디캐프리오는 1996년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연 출연으로 일약 1990년대 청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그러나 그는 아이돌이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2002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과 ‘갱스 오브 뉴욕’으로 호흡을 맞춘 이후 2013년 ‘위대한 개츠비’에 이르기까지 갱단두목 밀수꾼 증권브로커 등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다. 팬들은 꽃미남 디캐프리오를 잃는 대신 시대를 넘어 기억될 한 배우를 얻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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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부르튼 입술의 한국 정치

    TV에 매일 등장하는 장관이나 정치인은 아무래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그들이 하는 말이나 글, 그 속에 담긴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역시 눈에 보이는 모습이 우선이다. 이런 장관이나 정치인이 입술이 부르트거나 얼굴에 염증이 생기면 곤란해진다. 이 정도로 공개석상에 등장하지 않을 수도 없고 등장하자니 위엄이 안 선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고군분투한다는 인상을 줘 오히려 좋은 점수를 얻기도 한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 폐쇄 발표를 하면서 코 밑에서 오른쪽 입술 사이가 크게 부르튼 모습으로 나타났다. 설 직전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시험을 강행한 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다. 본래 약해 보이는 인상인 데다 염증이 나자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한 신문은 홍 장관이 개성공단 폐쇄 결정 과정에서 청와대에서 엄청 깨진 것처럼 보도했다. 거기에 홍 장관 사진을 붙여놓으니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럴듯해 보였다. ▷최근에는 체구도 건장하고 혈색도 좋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왼쪽 윗입술이 터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국회는 공전을 거듭하고 당내에서는 친박(친박근혜)과 비박(비박근혜)의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친박계로 분류되는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공천 업무를 시작하자 심한 압박을 받는 듯하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도 얼마 전 왼쪽 아랫입술이 부르텄다. 신당 창당 이후 정점을 쳤다가 끝없이 하락하는 당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강행군을 하느라 피로가 첩첩이 쌓이는 모양이다. ▷“난 사람의 얼굴만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영화 ‘관상’에 관상쟁이로 등장하는 주인공 송강호가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이 아니라 시대로 눈을 돌려보면 지금 입술이 부르튼 건 우리 정치다.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는다고 밤낮으로 필리버스터를 하느라 피곤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하다 하다 못해 필리버스터까지 하며 법안 통과를 막는 국회 모습에 책상을 10차례나 내려칠 정도로 화가 난다. 뾰족한 처방전도 없으니 더 답답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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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박근혜는 속고, 시진핑은 웃은 3년

    박근혜 대통령은 내일 취임 3주년을 맞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일 뒤 취임 3주년을 맞는다. 북한은 3년 전 두 정상이 취임하기 직전 3차 핵실험을 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북한의 핵실험을 결연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 2094호’의 통과에 찬성했다. 올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 중국 외교부는 “북한의 핵실험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유엔안보리 제재가 논의되고 있다. 중국은 뒷문을 열어놓고 결국 찬성할 것이다. 완벽한 기시감(旣視感)이 3년이란 시간차를 잊게 한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 중국이 변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중국이 변했다고 주장한 이들은 중국의 본심을 드러낸 작지만 중요한 해프닝 하나를 간과했다. 중국 공산당교 기관지 ‘쉐시(學習)시보’의 덩위원(鄧聿文) 부편집장이 ‘중국은 북한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글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기고했다가 직위에서 해제됐다. 이번에는 덩위원같이 주장하는 사람도 없다. 시진핑 집권 3년 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다면 이것이 변화다. 한중 수교와 북핵의 역사는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한국은 1992년 중국과 수교했고 북한은 이듬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한국은 한중 수교 이후 굴곡이 있었지만 대체로 중국과 관계를 강화하는 길을 걸어왔다. 지난해 중국 전승 70주년에 서방 지도자들의 불참 속에 박근혜 대통령이 천안문 망루에 선 것은 한중 관계의 정점이었다. 한국의 보수 정권마저 한미 관계의 균열을 감수하더라도 중국과 협력하겠다는 사인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중국으로서는 북핵이 아니라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가 걱정거리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급작스러운 붕괴는 중국만큼이나 한국도 바라지 않는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대가로 한국이 북한의 발전을 지원하면서 통일을 향해 나아간다는 발상은, 그것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중국에도 한국에도 유익한 것이다. 시진핑은 이미 손안에 쥔 확실한 것(북한)을 놓으면서까지 새 것(미국에도 중국에도 치우치지 않은 통일 한국)을 추구할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다. 중국을 세운 마오쩌둥은 잔인했지만 ‘사기’와 ‘자치통감’을 끼고 살 만큼 역사적 안목이 깊었다. 프랑스 파리 유학파인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의 통찰력으로 공산주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걸어갔다. 시진핑에게는 그런 역사적 안목이나 통찰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시진핑은 태자당 출신이다. 자기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후광으로 칭화대에 들어갔다. 관료로서 승승장구한 것도 태자당의 인맥 덕분이다. 시진핑은 안보에 관해서는 아주 보수적이다. 칭화대 졸업 이후 국방장관 부관으로 3년 일한 이후 군 관련 일을 계속 해왔다. 중국의 ‘핵심 이익’, 즉 주권과 영토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단호하다. 시 주석이 집권 이후 센카쿠 열도, 스프래틀리 군도, 파라셀 군도에서 강도를 높여온 도발을 상기해 보라. 한반도의 군사적 완충지대 북한을 쉽게 버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북한을 6·25전쟁에서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장쩌민 이래 중국 지도자의 임기는 10년이다. 시 주석은 2022년까지 집권한다. 그를 앞으로도 7년을 더 상대해야 한다. 7년은 북한이 핵미사일을 실전배치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난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 ‘중국 미몽(迷夢)에 잃어버린 20년’이란 칼럼을 통해 중국이 북한을 움직여 줄 것이라는 미몽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했다. 중국 지도자들의 노회한 페인트 모션에 속지 말라고도 당부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처럼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듣지 않았다. 그 결과 너무나 중요한 3년을 허비했다. 중국은 이번엔 평화협정을 들고 나왔다. 슬슬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할 태세다. 우리로서는 평화협정을 지금 논할 아무런 실익이 없는데도 평화협정에 호응하는 이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평화협정은 한미일 동맹으로 북한과 중국에 최대한의 압박을 가해본 뒤에도 북핵 저지에 실패하면 그때 가서 검토하되, 한국의 핵무장이라는 상반된 옵션과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검토할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 2016-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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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사회주의자 샌더스 돌풍

    작가 존 리드는 1917년 러시아 특파원으로 혁명을 목격하고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미국 사회주의자다. 이해 미국에서도 노동자 중 5분의 1이 파업에 참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미국에도 강한 사회주의적 흐름이 있었다. 1905년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을 창립한 사회주의 노동운동가 유진 데브스가 그 선구자다. ‘미국 민중사’를 쓴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나 버몬트 주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등 오늘날의 미국 사회주의자들에게 데브스의 고향 인디애나 주 테러호트를 다녀오는 것은 일종의 순례다. ▷‘자본주의는 고장났다.’ 샌더스는 유럽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보다 강력한 ‘민주적 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란 말로 자신의 이념을 표현한다. 그는 2010년 공화 민주 양당이 합의한 부자 감세 법안에 항의해 상원에서 8시간 35분에 걸친 의사진행 방해 연설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월가 점령 운동으로 표출된 민심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의 동력으로 삼았다. ▷샌더스는 두 번째 경선인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압승했다. 앞서 첫 경선인 아이오와 당원대회에서도 근소한 차로 지긴 했지만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샌더스가 정말 대세인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음 달 1일 13개 주 예비선거가 동시에 치러지는 슈퍼 화요일을 지켜봐야 한다. 미국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앞서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을 보는 날이 올지 모른다. ▷공화당에서는 막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본가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뉴햄프셔에서 압승했다. 샌더스는 민주당으로 나오긴 했지만 이전까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무소속으로 활동했다.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신대륙 정치가 구대륙의 이데올로기적 보혁(保革) 구도에 오염되지 않은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 시장은 미국 정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두 아웃사이더 중 하나가 대통령이 되는 건 두고 볼 수 없다며 링 밖에서 몸을 풀고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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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중국, 설득 아니라 압박할 나라

    북한이 설 연휴 인공위성이라 주장하는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 북한 탄도미사일이 대기권 재진입 기술까지 갖췄는지 의문은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 핵탄두를 실은 탄도미사일을 실전배치할 때까지 시간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북핵 폐기를 위한, 이명박에서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 보수정권 8년 동안의 대중 설득 외교는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종적 판단을 유보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국이 대북 경제제재의 뒷문을 걸어 잠글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인지, 김정은이 중국 말도 듣지 않으니 중국도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유엔 안보리에서 중국의 태도를 보면 판가름 날 것이다. 중국이 뒷문을 잠그지 않아 대북 경제제재가 효과가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식이다. 북한이 핵과 탄도미사일을 가지려 하는 것은 북한의 내재적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중국이 대북 제재에 적극 나서도 북한은 아무 렇지도 않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북한의 내재적 논리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김정은이 중국 말을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 것이 합의된 연기(演技)가 아닌가 의심해본다. 우다웨이 중국 6자회담 대표가 북핵 협의를 위해 방북한 날 북한은 탄도미사일 발사 계획을 발표했고, 우다웨이의 만류에도 결국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북한의 태도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최소한의 외교적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어서 자연스럽지 못했다. 그 뒤에서 중국이 “봐라. 북한은 우리 말도 안 듣는다. 우리한테 책임을 미루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말을 안 들으면 말을 안 듣는다고 탓만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중국은 뒷문을 잠그길 주저함으로써 자기 말의 진정성을 행동으로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중국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날 한미 간 사드 배치 협의를 발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이틀 전 박 대통령이 한 달 전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그토록 고대하던 전화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뒤늦게 걸어왔다. 그것은 북핵이나 탄도미사일 실험에 대한 우려를 공유한다기보다는 한국의 사드 배치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막아보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제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한미일 동맹을 기반으로 경제·외교·군사적인 모든 조치를 강구하는 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중국은 태평양 쪽으로 일본이라는 강력한 나라가, 그것도 더 강력한 미국을 배경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는 예전보다 강력해진 북한을 이용해 방어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옛 소련이 중국의 핵 보유를 허용했듯이 중국도 북한의 핵 보유를 막지는 않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거부권을 가진 유엔 안보리 제재에 대한 기대는 애초 갖지 말았어야 한다. 물론 다음과 같은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김정은이 유엔 안보리 제재 논의 중에 또 다른 안보리 결의를 위반한 것은 한국의 분노를 촉발해 한중 관계에 균열을 초래하고 동북아를 냉전 구도로 돌려놓아 그 속에서 핵 보유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 것이다. 한국이 한미일 동맹을 더 강화하는 순간 바로 그 의도에 말려든다. 그럼에도 중국은 설득만으로는 안 되고 압박이 필요한 나라임이 분명해지고 있다. 사실 냉정한 국제관계에서 압박 없는 설득은 설득력도 없다. 2006년 이후 거듭된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국에 매달리기만 했지 중국을 압박해본 적이 없다. 사드 배치가 중국을 향한 최초의 압박이다. 중국은 넓다 해도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동북아와 동남아에서 포위되면 군사적으로 옹색한 처지에 놓인다. 한국만으로는 중국을 압박하기 힘들지만 한미일 동맹으로는 가능하다. 사드 배치에서 나아가 한미일 미사일방어(MD) 체제 구축 등으로 강도를 높여야 한다. 중국의 태도에 따라 철회될 수도 있다는 조건하에서 우리가 가진 옵션의 전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중국이 자극받게 해야 한다. 평화로운 북핵 폐기는 설득이든 압박이든 중국을 통한 길밖에 없다. 실패한다면 그때는 군사적으로 북핵 폐기에 나서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동북아의 평화를 깰 수 있는 군사적 북핵 폐기는 중국도 원하지 않으리라 믿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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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파4홀 앨버트로스 홀인원

    골프에서 파(par)보다 하나 적은 타수인 버디(birdie)는 버드(bird)에서 왔다. 미국 애틀랜타시티CC에는 1903년 버디란 말이 기원했다는 홀이 있다. A 스미스란 사람이 이곳 파4홀에서 거의 홀에 붙이는 세컨드 샷을 친 후 스스로 감탄해서 ‘a bird of shot’이라고 외쳤다. 여기서 버드는 당시 미국 속어로 그냥 ‘뛰어난 것’을 의미했지만 이 표현이 골퍼들에게는 새처럼 멋지게 날아가는 샷이란 의미로도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후 파보다 적은 타수에는 모두 새의 이름이 붙었다. 파보다 2타 적은 것은 이글, 파보다 3타 적은 것은 앨버트로스로 불렸다. 그냥 새보다는 이글이 보기 어렵고 이글보다는 앨버트로스가 보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이다. 파보다 4타 적은 것은 전설의 새 이름을 따 콘도르라고 한다. 파5홀에서 홀인원을 해야 콘도르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앨버트로스가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냥 홀인원이라고 하면 파3홀 홀인원, 즉 이글을 의미한다. 파4홀 홀인원은 앨버트로스다. 앨버트로스를 할 확률은 200만분의 1로 번개에 맞을 만큼 낮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파5홀의 세컨드 샷이나 파6홀의 서드 샷에서 이뤄진다. 파4홀 홀인원은 미국프로골프(PGA)에서는 2001년 앤드루 매기의 피닉스 오픈에서의 기록이 유일하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는 한국 선수 장하나가 지난달 31일 처음으로 바하마 클래식에서 기록했다. ▷운도 따랐다. 홀의 기준 타수는 그린에서의 퍼트 2회를 상정하고 정해진다. 미국골프협회는 여자 선수의 평균 티샷 거리를 210야드, 두 차례 샷의 평균 합계를 400야드로 보고 파4홀의 길이를 210∼400야드로 정해놓았다. 장하나가 기록을 세운 홀은 원래 310야드인데 이날은 218야드로 짧게 세팅됐다. 장타자 장하나는 드라이버보다 정교한 3번 우드를 잡았다. 그린 위에만 올려도 성공인데 그린 바로 앞에 떨어진 공은 몇 번 튕긴 뒤 홀 안으로 기적같이 빨려 들어갔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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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바둑, 인간 vs 컴퓨터

    바둑은 동양, 체스는 서양을 대표하는 보드게임이다. 바둑은 돌을 두는 착점이 361개다. 첫수를 주고받는 경우의 수만 12만9960가지다. 체스는 첫수를 주고받는 경우의 수가 400가지다. 바둑 한 판의 경우의 수는 수학적으로 단순히 계산해도 700자리 수가 되어 계산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바둑을 기록한 역사가 200년이지만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똑같은 바둑은 없었고 이전에도 그랬을 것이다. ▷체스에서는 오래전에 컴퓨터가 인간을 이겼다. 1997년 IBM 슈퍼컴퓨터 ‘디퍼 블루’가 러시아인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를 꺾었다.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이 탄생한 지 51년 만이다. 카스파로프는 당시만이 아니라 약 1500년 체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카스파로프는 2003년 업그레이드된 ‘딥 주니어’와의 대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으나 설욕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2005년 은퇴했다. ▷바둑에서는 프로 기사가 컴퓨터와 둘 때 최소한 4점을 깔아주고 둔다. 조훈현 9단은 지난해 낸 책 ‘고수의 생각법’에서 “이 네 점은 프로 기사의 창의성과 기풍의 차이이기 때문에 컴퓨터가 흉내 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썼다. 그러나 27일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맞바둑에서 프로 기사를 이겼다. 다만 상대는 유럽 바둑 챔피언인 중국계 판후이 2단이었다. 유럽 프로 바둑계의 실력은 바둑의 본고장인 한중일에 못 미친다. ▷바둑은 조 9단의 1989년 응씨배 제패 이래 한중일 중에서도 한국이 세계 최강이다. 이창호 9단에 이어 지금은 이세돌 9단이 10년째 최고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냈다. 3월 서울에서 사상 처음으로 컴퓨터와 인간 바둑 지존의 대결이 벌어진다. 바둑계에서는 알파고가 과거 수준보다 나아졌다 하더라도 이 9단과의 맞바둑은 무리이며 2, 3점 접바둑이 적절하다고 본다. 하지만 인간과 달리 심적 부담도 피곤함도 느끼지 않고 복잡한 계산을 해내는 컴퓨터와의 대결인지라 결과는 속단하기 어렵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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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이태원 살인사건 검사의 ‘뻘짓’

    서울 이태원 살인사건 피의자 아서 패터슨에 대한 선고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선고에 앞서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19년 전 처음 사건을 맡았던 당시 박모 검사다. 그는 미군 수사대도 한국 경찰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던 패터슨 대신 에드워드 리를 기소했다. 그가 철로를 잘못 바꾸면서 이 사건은 긴 세월을 허비하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의 순간 앞에 섰다. 1997년 4월 3일 밤 미군 헌병 당직 사관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태원의 버거킹 햄버거 가게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은 패터슨이라는 제보였다. 미군 범죄수사대(CID)가 수사에 착수했다. 패터슨의 행적을 추적하는 한편 햄버거 가게에 함께 간 친구들로부터 패터슨이 의심 간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패터슨이 미 8군 영내 배수구에 숨긴 흉기도 포클레인까지 동원해 찾아냈다. CID가 패터슨을 체포하려 영내 고등학교를 찾았을 때 그는 두 달 전 한 친구를 심하게 때린 일로 무기정학 상태였다. 그는 친구를 때린 사실이 부대에 알려질까 봐 그 친구에게 병원비를 쥐여주며 한국 병원에 가라고 할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그의 손등엔 갱단 표시 문신도 있었다. CID는 사건 3일 만에 패터슨을 체포하고 서울 용산경찰서에 넘겼다. 이 사건은 단순하다. 리 아니면 패터슨이 범인이다. 살인 현장인 비좁은 화장실에는 피해자 외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리는 국적은 미국이지만 부모 모두 한국인이다. 패터슨은 어머니는 한국인이지만 아버지는 미국인인 데다 미군 군무원이다. CID가 리를 보호하기 위해 패터슨을 대신 넘길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한국 경찰도 패터슨이 범인이라고 여겼다. 박 검사만 이상하게도 리를 고집했다. 패터슨은 여러 차례 진술에서 무의식적으로 진실을 드러냈다. 한 가지만 들자면 패터슨은 “리가 피해자의 오른쪽 목을 3번, 왼쪽 목을 4번, 가슴을 2번 찌르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피해자의 상처 부위와 정확히 일치한다. 반면 리는 전혀 상세한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범죄학자들은 예상치 못한 살인을 보고 놀란 목격자라면 리가 정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수사의 전문성도 없는 검사가 수사를 지휘하는 구조로 돼 있다. 지금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니다. 수사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순리를 따르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결론에 오직 박 검사만 도달하지 못했다. 미국이 한 것은 못 믿겠다는 맹목적인 반감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렵다. 2009년 제작된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은 박 검사를 정의감에 불타 고뇌하면서 진실을 추구하는 검사로 묘사하고 있다. 현실의 박 검사는 1999년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공소권이 없다고 했다가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한 날 부끄러워 울었다”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됐다. 자기가 속한 조직이 한 일이 부끄러워 울 정도라면 자신이 기소한 리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더 부끄러워하며 울었어야 했다. 그는 반성도 없이 이듬해 “동양철학을 공부할 계획”이라며 사표를 냈다. 지금은 변호사로서 채식주의의 전도사가 돼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19일 서울중앙지법 대법정에서 미 국방부 과학수사관리관 데이비드 젤리프 씨의 증언을 들었다. 그는 19년 전 CID 초동수사를 지휘한 수사관이었다. 오후 11시까지 이어진 증언 뒤에 젤리프 씨와 피해자의 어머니가 만났다. 어머니는 “내 아들 죽인 미국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에서부터 증언하러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젤리프 씨는 “나도 하나뿐인 아들이 당신 아들만 한 나이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어 그 맘을 잘 안다”고 위로했다. 무슨 꿍꿍이는 없다. 이 사건은 미국인이 한국인을 죽인 사건이고 그 미국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1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미국의 태도다. 이 사건은 한 선량한 대학생이 봄날 밤 여자친구와 함께 이태원에 놀러갔다가 시비가 붙은 것도 아닌데 만용(蠻勇)을 보이던 생면부지의 미국 청소년의 칼에 9차례나 잔혹하게 찔려 희생된 사건이다. 패터슨에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19년간 지연된 정의의 실현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새삼 검사 자리 하나가 참으로 중요한 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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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몰카와 포르노

    영어에 업스커트 포토(upskirt photo)라는 말이 있다. 스커트 아래에서 위로 올려 찍는 사진을 말하지만 스마트폰으로 몰래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찍은 사진을 일반화해서 이렇게 지칭한다. 이런 사진을 불법으로 볼지 확립된 기준은 아직 없다. 미국 텍사스 주와 오리건 주, 워싱턴에선 설혹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그런 사진을 찍었더라도 불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만 지난해부터 불법으로 취급했다.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훨씬 엄격해서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촬영 행위를 처벌한다. 업스커트 포토는 말할 것도 없고 여름철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의 여성을 찍었다가 처벌받을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다만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해서 무조건 처벌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신체 부위의 노출 정도나 부각 여부, 촬영 각도나 거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제3자의 관점으로 판단한다. ▷최근 대법원은 호감을 느낀 여성을 엘리베이터까지 쫓아가 몰래 얼굴 없는 상반신을 찍은 한 남성에게 벌금 1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재판을 다시 하도록 돌려보냈다. 피해 여성은 수치심과 공포를 느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촬영한 가슴 부위가 노출은커녕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아 객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정도가 아니라고 봤다. 애초 이 정도 사진을 몰카의 범위에 넣은 것이 무리였다. 다만 생면부지의 남성이 엘리베이터까지 쫓아온 행동에 여성이 공포를 느꼈다면 달리라도 처벌할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남성이 섹시한 여성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것은 아내나 여자친구로부터 힐난을 받을 수 있어도 법적으로는 문제없다. 그렇다면 공개된 장소에서 통상적인 앵글로 찍은 사진은 눈으로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런 사진 중의 일부가 불법이라면 왜 불법이고 어디서부터 불법인가. ‘포르노를 정의할 수 없지만 보면 안다’는 말처럼 몰카도 보면 아는 것인가. 스마트폰이 법의 영역에 던지는 새로운 고민거리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6-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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