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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102명이 거주하는 독일의 ‘초미니 마을’이 주민의 7배 이상인 난민 750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생겼다. 뉴욕타임스는 독일이 유럽으로 유입되는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난민을 대거 수용하겠다고 밝힌 가운데 니더작센 주의 줌테 마을에 빠르면 이번 주부터 수백 명의 난민이 유입될 것이라고 31일 보도했다. 베를린에서 북서 방향으로 약 190km 떨어진 줌테는 인구보다 소가 더 많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크리스티안 파벨 줌테 시장은 지난달 초 지역정부로부터 “줌테에 난민 1000명이 수용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독일 연방정부가 겨울이 되기 전 난민 숙소 문제를 해결하려고 니더작센 등 16개 주의 인구, 경제력을 고려해 서둘러 난민 할당 규모를 결정한 것. 난민이 할당된 주들은 일단 주택, 체육관, 군 기지, 유휴 학교시설 등에 난민을 수용했다. 하지만 난민 규모를 고려할 때 이런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후 ‘빈 건물’을 찾아 난민 수용지로 결정했다. 옛 동독 지역이었던 줌테에는 빈 건물이 23동이나 있었고 대거 난민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줌테는 먼저 500명을 받아들인 뒤 750명까지 수용 규모를 늘릴 예정이다. 그나마 수용 인원은 처음 예정됐던 1000명에서 다소 줄었다. 학교, 경찰서, 가게 등이 아예 없을 정도로 사회기반시설이 매우 부족한 줌테는 대규모 난민 유입으로 혼란이 불가피하다. 태어나 계속 이 마을에 살아온 디르크 함메르 씨는 “기본적으로 난민에 대해 동정심을 느낀다”면서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오랜 지지자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백인 경찰이 학교 교실에서 흑인 여고생에게 퇴실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폭력을 휘둘러 인종차별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언론들은 경찰이 퇴실 명령을 듣지 않는 흑인 여학생을 교실 바닥에 내던져 제압한 뒤 체포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공권력 과잉 대응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고 27일 전했다. 동영상에는 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프링밸리고교에서 발생한 경찰의 과잉 제압 현장이 고스란히 담겼다. 한 백인 경찰이 의자에 앉아 있던 흑인 여학생 앞으로 다가가 팔을 잡으려고 했고 여학생은 반항했다. 화가 난 경찰은 여학생의 목을 팔로 감싸 뒤로 홱 잡아당겨 여학생이 바닥에 내던져졌다. 이후 경찰은 쓰러진 여학생을 질질 끌고 교실 앞으로 갔고 “손을 등 뒤로 해. 손을 내놓아”라는 명령을 연발하며 수갑을 채웠다. 비난 여론이 확산되자 문제의 경찰관이 소속된 리치랜드 카운티 경찰 측은 여학생이 먼저 경찰관의 가슴 부위를 주먹으로 때렸다고 해명했으나 과잉 대응이었다는 부정적 평가는 바뀌지 않고 있다. 동영상이 확산되자 비난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중 한 명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트위터에다 “학내 폭력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번 사건은 용납할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 미국 연방수사국(FBI), 법무부 인권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검찰과 경찰은 한꺼번에 수사에 착수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이슬람 시아파 종주국 이란에서 성형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수도 테헤란에서는 성형수술을 받은 뒤 얼굴을 붕대로 감싼 이란 여성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신호에서 서방 국가들과의 핵협상 타결로 대이란 경제 제재가 풀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란에서 코와 가슴을 줄이는 성형수술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인들은 일반적으로 서구인들보다도 코가 크다. 게다가 큰 코를 좋아하지 않는다. 테헤란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는 의사 알리 쉬라지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란인들은 유럽인들처럼 큰 코를 원하지 않는다. 훨씬 작은 코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특히 히잡과 차도르로 몸을 감춰야 하는 이란 여성들에게 코는 자신의 미모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때문에 비싼 성형수술비에도 불구하고 코 축소 수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코 수술비는 평균 2500달러 (약 280만 원)가량. 지난해 이란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약 5000달러(약 560만 원)라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비싼 편이다. 가슴 축소 수술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란 여성들 중에는 유전적으로 풍만한 가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요즘 이란 여성들은 이런 풍만한 가슴이 옷에 잘 맞지 않는다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서구화의 영향으로 이란에서도 날씬한 체형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브라질, 한국처럼 성형수술이 대중화된 국가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이란에서 성형 열풍은 불고 있는 것은 매우 놀랍다”고 전했다. 하지만 성형 열풍을 바라보는 이란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성형수술을 받은 배우들은 방송에 출연할 수 없으며 은행도 성형수술을 위한 대출은 해주지 않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란의 경제 제재가 본격적으로 풀리면 성형수술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이유종기자 pen@donga.com}
‘당시 전쟁 공포(war scare)는 실제였다.’ 1983년 9월 소련의 대한항공(KAL) 007기 격추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양측이 그해 말 핵전쟁 위기까지 갔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당시 소련 지도자들은 미국이 군사훈련을 빙자해 자국에 핵 기습공격을 가할 것을 심각하게 걱정했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4일 미국 정부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소련의 전쟁 공포’라는 제목이 붙은 109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이달 기밀문서에서 해제됐다. 대한항공 여객기가 격추된 1983년 가을은 냉전시대 중에서도 양국 관계가 가장 냉랭했던 시기 중 하나로 평가돼 왔는데, 이번 문서 공개를 통해 당시 소련 지도부가 느낀 위기감이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이와 관련해 결론 부분에서 “1983년 우리(미국)는 의도치 않게 소련과의 관계를 일촉즉발인 상황(on a hair trigger)으로 몰아넣었을 수 있다”고 밝혔다. 미소 핵전쟁 위기 고조는 그해 9월 269명이 탑승한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본격화됐다. 탑승자 전원이 모두 숨졌다. 미국은 대응책으로 격추 두 달 뒤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Ⅱ와 지상발사 순항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준비했다. 또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1월 초 군사훈련 ‘에이블 아처 83’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소련을 압박했다. 에이블 아처는 핵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을 연습하는 훈련으로 매년 실시돼 왔다. 하지만 1983년 훈련 때는 터키에서 영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미군 병력을 실제로 동원했고 새로운 통신기술을 시험하는 등 여느 때와 달랐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이에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훈련을 가장해 실제로 소련을 기습 공격할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이에 따라 동독과 폴란드에 배치된 소련 공군에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라고 명령하고 정찰 비행도 대폭 늘렸다. 창고에 보관된 핵무기를 항공기에 탑재하는 속도를 핵무기 1개당 25분 이내로 단축시키라는 명령이 하달되기도 했다. 또한 국가안보위원회(KGB)와 군 정보기관에는 유럽 내 미군기지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미국의 핵공격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신호들이 포착되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 보고서는 “미군의 훈련 중 소련이 미군의 행동을 실제 공격 준비로 오인했다면 상황이 극도로 위험해질 수 있었을 것”이라며 “미국은 당시 소련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이듬해 정보기관의 사후 분석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했다”고 지적했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저를 땅에 묻지 말아 주세요(Don’t bury me).” 미국 뉴스채널 CNN은 22일 예멘의 사진작가 아흐메드 바샤가 내전의 참혹상을 알리기 위해 찍은 한 소년의 동영상이 소셜미디어를 타고 누리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바샤는 예멘의 제3의 도시 타이즈에서 아홉 살 난 소년 파리드 샤우키가 파편 상처를 치료받는 장면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촬영해 17일 인터넷에 공개했다. 영상 속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채 침대에 누워 의료진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이 영상은 현재 15만 건 이상 조회됐다. 바샤는 영국 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 “13일 거리에 있다가 미사일 발사 소리를 듣고 미사일이 떨어진 방향으로 달려갔더니 집 밖에서 놀던 어린이가 5명 이상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며 “파리드가 가장 많이 다쳐 의식을 잃을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바샤가 공개한 동영상에는 파리드가 치료를 받는 모습이 담겼다. 소년은 의사가 상처를 치료하자 “저를 땅에 묻지 말아 주세요”라며 몇 차례 애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어린 나이에도 많은 사람이 숨지고 묻히는 모습을 지켜본 소년은 자신도 그렇게 될까 무서웠던 것이다. 동영상 속에서 의료진은 미소를 띤 채 파리드의 다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살고 싶다는 파리드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동영상 촬영 며칠 뒤 샤우키는 머리에 입은 상처로 숨졌고 결국 가족묘지에 묻혔다. 예멘의 유명한 반전 활동가들은 피를 흘려야 하는 내전이 종료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파리드가 말한 ‘#돈 베리 미(#dontburyme)’라는 해시태그를 전송하기 시작했다. 해시태그는 특정 단어 앞에 ‘#’ 기호를 붙여 특정 주제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나타내는 누리꾼들의 표현 방법이다. 해시태그는 초창기 아랍어로 쓰였으나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영문 해시태그를 퍼나르고 있다. 해시태그 전송량이 급증하면서 파리드는 반전을 상징하는 ‘예멘의 알란 쿠르디’로 불리기 시작했다. 알란 쿠르디는 터키 해변 휴양지 바닷가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 시리아의 세 살배기 난민 어린이다. 현재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이 지지하는 현 정부와 시아파 무장세력인 후티 반군이 치열하게 내전을 벌이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예멘 내전으로 5000명 이상이 숨졌으며 2만5000명 이상이 다쳤다. 바샤는 언론 인터뷰에서 “전쟁은 종식돼야 하고 분명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며 “아무 상관도 없는 어린이들이 다치거나 숨지고 있다”고 내전 종식을 호소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1948년 팔레스타인에 둥지를 튼 이스라엘은 줄기차게 군사적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4차례나 아랍 국가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동전쟁도 벌였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아랍 국가들은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들에 압력을 가해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지 못하도록 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무기를 개발해야 했다. 초창기엔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 이스라엘의 방위산업은 80% 이상을 수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2013년 74억 달러(약 8조3000억 원)의 무기를 해외에 팔아 방산 수출 국가 중 8위를 기록했다. 방위산업 수출액은 이스라엘 전체 수출액의 11.5%나 된다. 이런 성공을 가능케 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시작부터 눈을 해외로 돌린 것이었다. 이스라엘 방산 기업들은 제품 개발 단계부터 세계 시장을 목표로 세웠고 세계 3위 이내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아예 무기를 개발하지 않았다. 정부도 국내 방위산업을 보호하기보다는 경쟁으로 내몰았다. 군은 해외 업체의 무기 도입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또 선진국의 거대 방산 기업들과 정면승부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틈새시장을 공략했다. 레이더, 유도무기 등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강한 품목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윤이 크지만 소홀하기 쉬운 성능 개량 사업에도 매진했다. 전 세계 F-16 전투기가 격추한 전투기 67대 중 47대가 이스라엘에서 성능개량 작업이 이뤄진 전투기다. 신무기 개발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무장 정파인 하마스가 발사하는 로켓탄을 중간에 요격하는 ‘아이언돔(Iron Dome)’을 개발했다. 아이언돔은 지난해 7, 8월 하마스 로켓탄의 90% 이상을 맞혔다. 수출 대상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 전통적인 우방 국가들인 미국과 서유럽 이외에도 인도, 터키, 러시아, 카자흐스탄,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페루 등을 공략했다. 이슬람 국가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슬람 국가인 터키, 카자흐스탄까지 무기를 판매하는 장사 수완을 보인 것이다. 수출시장 다변화 정책은 최근 서유럽 국가들이 국방예산을 감축하는 상황에서도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줬다. 여기에 국산화 정책을 굳이 고수하지 않고 부품이 좋다 싶으면 사들였고 해외에서 무기를 구매할 때에도 반드시 경쟁 입찰을 거치도록 했다. 한국의 방산 수출액은 지난해 최고치인 36억 달러(약 4조 원)를 기록했다. 1970년대 탄약에서 시작한 방산 품목은 2010년대 T-50 고등훈련기, 209급 잠수함, 군수 지원함 등으로 확대됐지만 수출 규모는 여전히 생산량의 12.8%에 불과하다. 전 세계 방산시장은 5000억 달러(약 560조 원)로 추산된다. 국내 방산 기업들은 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성장 속도가 매우 더디다. 연줄을 바탕으로 안일하게 국내 시장에만 몰입한 결과다. 고질적인 비리도 끊이지 않는다. 연줄과 비리가 판치는 방위 산업에서 진정한 안보가 나올 수 있을까.이유종 국제부 기자 pen@donga.com}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사진)도 자식 문제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6일 출간하는 ‘마거릿 대처 공인전기 2권: 그가 원한 모든 것’에 대처 전 총리가 아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일화가 담겨 있다고 4일 보도했다. 두 번째 전기는 전기 작가 찰스 무어가 썼다. 대처 전 총리는 1980년 11월 비서진 몰래 아들 마크(당시 27세)에게 당시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자필 서한을 건네줬다.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이 힘을 써준 덕분에 마크는 아부다비의 한 회사에 취직했고 이후 이 문제로 논란이 불거졌다. 마크는 어머니와 가까웠던 일간지 익스프레스의 빅터 매슈 회장의 도움을 받아 컨설팅 용역도 수주했다. 아랍에미리트 대통령의 추천으로 오만 국왕을 만날 수 있었고 대학 건설 프로젝트도 따냈다. 대처 전 총리가 1981년 해외 순방 일정으로 오만 수도 무스카트 등에 머무르자 마크는 아무런 자격이 없으면서도 인맥을 쌓으려는 욕심에서 총리의 파티 행사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대처 전 총리의 외교담당 비서관인 마이클 알렉산더는 마크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 대처 전 총리에게 보고했으나 대처 전 총리가 아들을 감싸서 얼굴만 붉히고 말았다. 대처 전 총리의 수석 비서관은 “마크가 어머니의 이름을 팔고 있다. 그는 욕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대처 전 총리도 아들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크가 어릴 때 많은 시간을 아들에게 할애해주지 못했고 여기에서 쌓인 죄책감 등으로 아들의 부적격한 행실을 알면서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폴크스바겐 스캔들은 디젤 기술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차세대 기술로 움직일 때가 왔다.” 글로벌 자동차업계가 폴크스바겐의 배기가스 배출량 조작 스캔들로 떠들썩하던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미국의 전기차업체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는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형 전기차인 ‘모델X’를 공개했다. 폴크스바겐이 친환경차로 포장했던 클린 디젤 엔진의 신화가 무너지는 순간, 전기차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을 선언한 셈이다. 폴크스바겐이 이번 사태로 최대 86조 원 이상의 손실을 입을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글로벌 자동차시장의 지각변동도 본격화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의 디젤 엔진을 대체할 미래 친환경차 및 연료소비효율 개선 기술과 이 시장을 주도할 자동차업체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 자동차시장 지각변동 예고 1일 자동차업계와 증권업계 등에 따르면 2005년 폴크스바겐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7.8%였지만 클린 디젤 엔진을 앞세워 판매량을 늘리면서 지난해 시장 점유율은 11.3%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이번 배기가스 조작 파문으로 폴크스바겐의 추락은 명약관화하다. 독일 일간 빌트는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독일 자동차산업 전문가들을 인용해 폴크스바겐이 리콜 비용과 벌금 등으로 최대 650억 유로(약 86조4500억 원)가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해 영업이익인 127억 유로의 5배가 넘는 규모다. 독일 일간 디벨트는 이와 별도로 주주들이 이번 사건으로 급락한 주가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폴크스바겐은 이미 차량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보고 독일 잘츠기터 엔진공장의 특별근무 제도를 없앴다. 자동차금융서비스 부문도 연말까지 신규 채용을 중단했다. 이제 글로벌 자동차업계의 관심은 폴크스바겐의 디젤 엔진을 대체할 친환경차 기술과 이로 인해 수혜를 볼 업계로 쏠려 있다. 서성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사태로 결국 전기차 기술을 앞세운 미국과 유럽, 일본 업체 간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 친환경·연비 패러다임 급속히 변화 폴크스바겐 사태로 전 세계 자동차산업의 친환경 패러다임은 디젤에서 전기차로 급속히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자동차 전문가인 토니 세바 스탠퍼드대 겸임교수는 저서 ‘에너지혁명 2030’에서 “리튬이온 배터리가 kW당 200달러까지 떨어지면 3만 달러에 ‘포르셰911 카레라’의 성능을 가진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며 “미국 내 평균가격이 2만2418달러인 현대·기아자동차 역시 경쟁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기존 대기업 중심의 자동차업계도 재편되면서 소규모 형태의 전문화한 자동차기업도 주목받고 있다. 테슬라의 매출은 포드의 1%에 불과하지만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4분의 1에 근접할 정도로 향후 성장성을 높게 평가받는다. 미국 로컬모터스는 3차원(3D) 프린터로 맞춤형 전기차를 생산하고 있다. 애플, 구글은 이미 자동차산업 진출을 선언했고 삼성그룹과 LG그룹, 일본의 파나소닉 역시 전기차 배터리를 포함한 자동차부품 산업을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글로벌 자동차시장은 폴크스바겐 사태를 계기로 기술뿐만 아니라 시장, 경쟁관계, 수요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급속한 변화를 맞을 것”이라며 “한국 정부와 완성차업계도 이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디젤 수입차 불안감에 국산차 판매량은 늘어 독일 뮌헨에 본부를 둔 독일자동차연맹(ADAC)이 유엔이 개발해 실제 주행 상황을 반영한 방식으로 배기가스를 측정한 결과 상당수 디젤 차량이 유럽연합(EU) 기준보다 10배 이상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보도했다. 이번에 조사한 총 79종 가운데 기준치를 가장 많이 초과한 차량은 닛산의 X-트레일 1.6으로 질소산화물이 허용기준치의 14배에 달했고 현대차의 i-20도 최소 6배가 많았다. 한편 지난달 국내 5개 완성차업체는 신차 효과와 개별소비세 인하, 디젤 수입차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영향을 끼치면서 내수 판매량이 지난해 9월보다 증가했다. 시장조사업체인 컨슈머인사이트가 국내 소비자 243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구매하고 싶은 자동차 유형’을 묻는 질문에 7월에는 디젤차를 택한 응답자가 40%에 이르렀지만 이번 사태 이후 20%로 낮아졌다. 반면 하이브리드는 같은 기간 10%에서 33%로 높아졌다.정세진 mint4a@donga.com·이유종·김성규 기자}
폴크스바겐의 디젤 차량 배출가스 조작과 관련해 영국 정부가 배출가스 재검사를 실시하고 미국 주(州) 정부들이 폴크스바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는 등 파문이 이어지고 있다.○ 잇따른 조사와 집단소송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4일(현지 시간) “영국 정부가 자국 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신모델 디젤 차량에 대해 배출가스 재검사를 할 뜻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문제가 된 폴크스바겐뿐만 아니라 다른 자동차 회사들도 배기가스 배출량 수치를 속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실험실 상황의 배기가스 배출량 수치와 실제 도로 주행 시 수치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미국 50개 주 법무장관협의체 대변인인 리사 매디건 일리노이 주 법무장관도 이날 “최소 29개 주에서 폴크스바겐 측의 설명을 듣기 위한 공조 조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그는 각 주 법무부가 폴크스바겐에 소환장을 보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집단소송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 법무법인 ‘헤이건스버먼’은 폴크스바겐 차주들을 대표해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4일 런던 법무법인에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고 전했다. ○ 세계 자동차 업계 판도에도 영향 블룸버그통신은 25일 폴크스바겐이 판매량 기준으로 세계 1위 자리를 도요타에 다시 내줄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폴크스바겐은 올해 상반기(1∼6월) 504만 대를 팔면서 지난해까지 1위를 지키던 도요타보다 2만 대를 더 팔았으나 하반기(7∼12월) 중국 수요 감소, 배출가스 조작 등으로 더는 자리를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내년 폴크스바겐의 판매량이 최대 40만 대 줄어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폴크스바겐 사태가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인 중국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폴크스바겐그룹의 1∼8월 중국 시장 점유율은 17.5%로 1위를 달리고 있다. 같은 기간 2위인 제너럴모터스(GM)는 점유율 16.8%로 뒤를 바짝 쫓고 있다. 3위인 현대자동차그룹(기아차 포함)의 시장 점유율은 7.9%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폴크스바겐 사태가 호재가 될 것으로 보고 공격적인 판매에 나설 계획이다. 이유종 pen@donga.com·이샘물 기자}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3일(현지 시간) 배출가스 데이터 조작은 세계 자동차 업계의 오랜 관행으로 포드, 크라이슬러 등 다른 자동차 업체도 과거 리콜 명령과 벌금 처분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가 시작되자 상당수의 자동차 업체가 연료소비효율 데이터를 조작해 규제를 피하고 당국을 속여 왔다는 것이다. 조스 딩스 유럽교통환경연맹 사무국장은 NYT와의 인터뷰에서 “폴크스바겐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으로 이런 상황이 폴크스바겐에만 해당된다고 보지 않는다”며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검사 결과 데이터를 보면 그들 역시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업계 관행이던 배출가스 데이터 조작과 관련해 유독 폴크스바겐만이 최근 집중 포화를 맞는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도하는 미국과 독일의 보이지 않는 헤게모니(패권) 전쟁이 시작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된다. 폴크스바겐이 소비자를 속였다는 점이 이번 사태의 본질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동차 강국들의 패권 다툼이 숨어 있다는 해석이다.○ 본질은 기만, 이면에는 패권 다툼 도요타는 2010년 미국에서 대규모 리콜 사태에 직면했다. 그 직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의 GM이 파산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자국의 자동차산업을 살리기 위해 미국 의회와 정부, 언론이 함께 나서 도요타의 문제점을 집요하게 부각시켰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레이 러후드 미 교통장관이 “리콜된 도요타 자동차를 운전하는 건 그만둬야 한다”고 발언하자 일본 내에서 “미국 정부가 구제금융을 받은 ‘빅3’(GM 포드 크라이슬러)의 차 판매를 늘리려고 ‘도요타 때리기’에 나섰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번 사태 역시 폴크스바겐이 최근 중국에서 급성장한 뒤 미국 공략에 나서면서 벌어졌다. 폴크스바겐은 지난해 중국에서 약 370만 대를 팔아치우면서 처음으로 전 세계에서 연간 1000만 대 이상을 판매했다. 마르틴 빈터코른 전 최고경영자(CEO)는 당초 2018년 세계 1위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올해 상반기(1∼6월)에만 504만 대를 팔아 도요타를 제쳤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폴크스바겐의 판매가 급증하자 미국 일각에서 견제 심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일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에서는 주요 업체 간의 치열한 물량 경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전 세계에서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정보기술(IT) 분야가 접목되면서 자동차 산업의 연구개발(R&D) 비용은 급증했지만 이를 가격 인상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팀장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물량을 늘려 규모의 경제를 이뤄내야 대당 원가를 낮출 수 있다”며 “결국 한정된 시장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000만 대 이상 판매된 중국에서도 토종 자동차 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외국계 합작 자동차 기업을 직간접으로 규제하고 있다. ○ “배출가스 조작 차량 유럽에서도 판매” 문제가 된 폴크스바겐의 디젤차량 배출가스 저감 장치가 유럽 시장에서 판매된 차량에도 장착된 것으로 확인됐다. 알렉산더 도브린트 독일 교통장관은 24일 기자들에게 “유럽에서 판매된 1.6L와 2.0L 엔진의 폴크스바겐 디젤차량도 배출가스 조작과 관련돼 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도브린트 장관은 이번 파문을 계기로 폴크스바겐 차량뿐 아니라 다른 브랜드의 차량에 대해서도 무작위로 조사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BMW의 X3 x드라이브(4륜구동) 디젤차량 모델이 유럽연합(EU) 허용 오염기준치의 11배에 달하는 배출가스를 내뿜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독일 주간지 아우토빌트가 보도하자 BMW 주가가 장중 10%가량 하락하기도 했다. 이에 BMW는 성명을 내고 “검사 통과를 위한 어떠한 조작이나 속임도 없었다”면서 “각국의 법적 기준을 준수하고 있다”고 반박했다.정세진 mint4a@donga.com·이유종·김성규 기자}

《 미국에서 경유차 배출가스 저감장치를 조작해 리콜 명령을 받은 ‘폴크스바겐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환경부는 23일 폴크스바겐 외 다른 수입 브랜드 경유차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국토교통부도 문제 차량의 연료소비효율 재검증에 나섰다. 영국에서는 문제의 ‘EA 189’ 엔진이 슈코다, 세아트 등 폴크스바겐 그룹 내 다른 브랜드 차량에도 장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등 글로벌 이슈가 되고 있다. 》 정부가 미국에서 배출가스 저감장치를 조작한 폴크스바겐과 아우디 차량에 대해 전방위적 조사에 나섰다. 해외에서는 폴크스바겐그룹 내 다른 브랜드 차량에도 배출가스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폴크스바겐 스캔들’이 확산되고 있다. 마르틴 빈터코른 폴크스바겐 최고경영자(CEO)는 23일(현지 시간)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밝혔다. 환경부는 23일 미국에서 리콜 명령을 받은 차량 중 국내 인증을 받은 폴크스바겐 ‘골프’와 ‘제타’ ‘비틀’, 아우디 ‘A3’ 등 4종에 대한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여부 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결과에 따라 리콜 명령, 인증 취소, 과징금 부과 등 제재가 내려질 수 있다. 이와 함께 조사 대상을 다른 수입 디젤차로 확대하기로 했다. 국토교통부도 이날 아우디 ‘A3’와 ‘A7’에 대해 연료소비효율(연비) 재검증을 조만간 진행하기로 했다. 두 차종은 올해 국토부 연비 검증을 통과했으나 소비자들의 염려를 불식하려는 차원에서다. ○ 전 세계로 번지는 ‘폴크스바겐 파문’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22일(현지 시간) 배출가스 조작 차량에 장착된 ‘EA 189’ 엔진이 슈코다, 세아트 등 다른 브랜드 모델에도 장착됐다고 보도했다. 미국 외에 한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 스웨덴, 체코, 네덜란드 등도 수사 방침을 발표한 가운데 미국은 포르셰 ‘카이엔’과 아우디 ‘Q6’ ‘A7’ 등 그룹 내 다른 차량으로 조사를 확대한다고 밝혔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유럽연합(EU) 차원의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미국과 독일에선 폴크스바겐을 대상으로 한 집단소송도 진행 중이다. 폴크스바겐은 문제가 된 1100만 대에 대한 충당금을 3분기(7∼9월) 65억 유로(약 8조6000억 원) 적립했다. 22일(현지 시간) 독일 증시에서 폴크스바겐 주가는 전날보다 19.82% 급락한 106유로에 마감했다. 전날에도 18.60% 폭락했다. 이틀간 시가총액 250억 유로(약 33조1200억 원)가 사라졌다. 다임러(―7.16%), BMW(―6.22%), 르노(―7.12%), 푸조(―8.79%) 등 경유차를 주로 생산하는 유럽 자동차업체들의 주가도 함께 빠졌다.○ ‘안전’보다 ‘신뢰’의 문제 배출가스 저감장치를 끈다고 해서 안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비자 입장에선 출력과 연비가 상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스캔들이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킨 것은 ‘기술의 독일 차’라던 소비자의 신뢰에 금이 갔기 때문이다. 지난해 빈터코른 CEO가 “2018년까지 친환경차 연구개발에 100억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취지가 무색해졌다. 앞서 도요타와 제너럴모터스(GM)도 대규모 리콜 과정에서 신뢰를 잃고 위기에 봉착했다. 2009년 렉서스 ‘ES’ 급발진으로 사망 사고가 발생하자 도요타는 소비자의 잘못된 운전, 협력업체의 품질 관리에 책임을 돌렸다. 결국 도요타는 1000만 대 리콜을 실시했고, 미국 점유율은 2009년 12월 18.3%에서 2010년 2월 12.9%로 내려앉았다. GM은 점화 스위치 불량으로 운행 중 엔진 시동이 꺼지는 결함을 2001년 발견했으면서도 은폐해 지난해 리콜 비용으로만 13억 달러를 지불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폴크스바겐 등 유럽 브랜드들이 디젤엔진 기술을 주도해온 가운데 50만 대 규모의 리콜 사태가 터진 것은 유럽 디젤차 전체에 대한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진단했다.강유현 yhkang@donga.com·이유종·이정은 기자}

1993년 11월 취임한 장 크레티앵 캐나다 20대 총리는 곧 위기를 예감했다. 당시 캐나다는 현재 그리스와 매우 닮았다. 국가 채무가 과도했다. 1980년 29%에 불과하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1993년 67%에 달했다. 무디스 등 국제신용평가 기관들은 캐나다의 신용등급을 낮추기에 바빴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주요 7개국(G7) 국가인 캐나다를 “제3세계의 명예회원”이라며 비아냥거렸다. 1970년대 초만 해도 캐나다는 엄격하게 재정 수입과 지출을 맞춰 예산 균형을 꾀했다. 하지만 그런 균형이 슬며시 깨졌다. 복지 등 각종 경직성 지출을 늘리면서 국가 채무가 가파르게 증가한 것이다. 이전 정부들도 채무 증가에 따른 경고음을 들었지만 철저히 외면했다. 예산을 줄이면 다음 총선에서 패할 게 뻔했다. 크레티앵 총리는 자신이 속한 중도 좌파의 자유당이 다음 총선에서 지더라도 경제 정상화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세금을 늘려 재정 적자를 막기보다는 예산을 줄이는 근본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증세를 통한 예산 증액은 미봉책으로, 건전한 성장을 막는다고 봤다. 크레티앵 총리는 ‘작지만 현명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정치적 라이벌인 폴 마틴을 재무장관에 기용했다. 내각은 회의적이었다. 크레티앵 총리는 각료회의에서 “예산 증액을 요구하면 해당 부처 예산의 20%를 줄이겠다”며 경고했다. 그런 다음 실업급여 수급자를 줄였다. 국방과 해외원조 예산도 깎았다. 산업부가 54개의 사업을 제안했으나 11개만 허가를 받았다. 부처별로 5∼65%의 예산이 삭감됐다. 공공 부문의 인력도 14% 줄였다. 정치권의 불가침 영역이던 연금과 복지 정책까지 손을 댔다. 1993년부터 2000년 사이 복지 수혜자가 100만 명 이상 줄었다. 이런 노력으로 캐나다는 1998년 27년 만에 처음으로 균형 예산을 달성했다.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2009년 29%까지 줄었다. 공공 분야에서 체력이 회복되자 경제도 성장세로 돌아섰다. 1997∼2007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3.3%로, G7 국가 중 최고치였다. 건강한 경제 체력은 위기에도 강했다. 2007년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 침체도 9개월 만에 탈출했다. 경기 회복 이후 고용도 늘었다. 한국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올해 38.5%, 내년 40.1%로 전망된다. 외환위기를 겪던 1997년에도 12.3%에 불과했다. 정부는 순채권국이라 재무건전성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채무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이제 예산 다이어트도 고려할 때다. 크레티앵 총리는 단기 성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미봉책보다는 근본 해결책을 선택했다. 신념이 확고해졌을 때는 국민과 의회를 상대로 노련한 리더십도 보여줬다. 다음 총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숙한 캐나다의 유권자는 그의 진정성을 꿰뚫어봤다. 크레티앵 총리는 1993년 이후 2번의 총선에서 승리했고 10년 동안 총리 자리를 지켰다.이유종 국제부 기자 pen@donga.com}
미국에서 무기수가 탈옥해 붙잡히지 않고 살다가 숨진 뒤에야 정체가 밝혀진,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다. 18일 AP통신에 따르면 1958년 미국 오하이오 주 해밀턴의 한 병원에서 잡역부로 근무하던 셜리 캠벨(당시 20세)은 간호실습생을 성폭행한 뒤 죽인 혐의로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캠벨은 당시 강도죄로 가석방된 상태라 가중 처벌됐다. 그는 14년 동안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72년 교화 농장에서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다. 이후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에드워드 데이비드’라는 인물로 신분을 세탁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뉴멕시코 주로 이주했다. 캠벨은 이웃들에게 자신은 베트남 참전 용사로 아내와 두 딸을 화재로 잃었다고 거짓으로 소개했다. 이스턴뉴멕시코대 사회학과에 진학해 학사 학위를 받았고 뉴멕시코 주 노동부에서 노동자문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가정을 꾸려 딸까지 낳았고 66세이던 2004년 뉴멕시코 주 로즈웰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탈옥 이후 32년 동안 다른 사람으로 살아온 셈이다. 캠벨의 실체는 사후 11년이 지나서야 드러났다. 연방보안관실 미제사건팀은 올 4월 캠벨의 탈주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바꾼 용의자를 6명까지 추려냈으며 최근 지역신문에서 캠벨의 옛 부고 기사를 발견해 그의 실체를 확인했다. 미제사건팀은 캠벨의 아내에게 남편이 탈주범이라고 밝혔으나 아내는 끝까지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미제사건팀의 담당 경찰 데이비드 실러는 “새로운 삶을 산 그는 뛰어난 연기자이자, 희대의 탈주범”이라고 말했다. 현재 연방 보안관실은 캠벨이 탈옥 이후 추가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조사하고 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16일 오후 7시 54분(현지 시간) 칠레에서 리히터 규모 8.3의 강진이 발생하자 18∼20일 독립기념일 연휴를 앞두고 수도 산티아고 도심에 몰려 있던 시민들은 건물 밖으로 급히 대피했다. 진앙과 가까운 통고이, 이야펠 등 중북부 해안가 주민들은 강진 이후 발생할 지진해일(쓰나미)을 피해 해안보다 높은 고지대로 이동했다. 칠레 당국은 10개 도시에서 주민 100만 명이 대피했다고 밝혔다. 17일 영국 일간 가디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통고이에서는 2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됐다. 진원지에서 46km 떨어진 이야펠에선 토담집이 무너져 20대 여성이 사망하고 20명이 다쳤다. 데니스 코르테스 이야펠 시장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전력이 끊겼다. 공황 상태”라고 말했다. 강진 발생 후 리히터 규모 6.0∼7.0의 여진만 5번 이상 발생했다. 해안에 해일이 몰려오면서 코킴보 시 주택가와 도로 곳곳이 침수됐고 일부 가옥이 파손됐다. 우아니우알리의 쇼핑몰에선 천장이 무너졌다. 라세레나에선 진도 7의 진동이 느껴져 상점에 진열된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졌다. 진도 7은 사람이 서 있기가 곤란한 정도로, 느슨한 적재물과 담장은 무너진다. 지진은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200km 떨어진 피칠레무 지역까지 전달됐다. 진원지에서 430km나 떨어진 곳이다. 이 지역에 체류하던 조너선 프랭클린 가디언 칠레특파원은 “꽤 오랫동안 지반이 흔들렸고 아이들은 소리를 질렀다”며 “갑자기 휴대전화가 먹통이 됐다”고 전했다. 현지 주민들은 “지진이 발생하고 30∼40분 동안 건물이 흔들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책상 위에 있는 컵이 떨어질 정도로 진동이 심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진원지에서 1300km 떨어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도 지진의 여파가 전달돼 시민들이 건물에서 빠져나와 대피했다. 지진 발생과 함께 즉각 쓰나미 경보가 내려지자 칠레 연안은 물론이고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 태평양을 건너 뉴질랜드와 하와이까지 쓰나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쓰나미경보센터에 따르면 실제로 지진 발생 1시간 30여 분 만인 16일 오후 9시 25분(현지 시간) 칠레 북부 코킴보 시 해안에서는 최대 4.8m의 파고가 관측됐다. 쓰나미는 태평양으로 확산돼 17일 오전 1시 53분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에 0.8m의 파고가 관측됐고 같은 날 하와이에도 도착했다.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PTWC)는 칠레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로 뉴질랜드와 인근 피지, 사모아 등에는 1m가량의 파고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뉴질랜드 국민안전부는 동부지역에 쓰나미 주의보를 내렸다. 페루와 오세아니아 국가들도 해안에 최대 3m 높이의 파도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주민들에게 해안 저지대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했다. 칠레는 환태평양 지진대인 일명 ‘불의 고리’에 속해 있어 강진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1960년 지진 관측 사상 가장 강도가 높은 리히터 규모 9.5의 지진이 발생해 5000명 이상이 숨졌다. 2010년 2월에는 규모 8.8의 지진이 강타해 525명이 사망했고 지난해 4월에도 북부 이키케 인근에서 규모 8.2의 지진으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칠레 정부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자 신축 빌딩을 지을 때 리히터 규모 9.0에도 견딜 수 있도록 강력한 내진 설계 기준을 적용했다. 그 결과 이번 지진에서는 피해가 비교적 적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진원지가 인구 밀도가 높은 수도 산티아고에서 228km 이상 떨어진 데다 진원이 깊었던 점도 피해가 크지 않은 요인으로 작용했다. 연휴였지만 경보를 들은 해안 도시의 주민들은 신속하게 대피했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칠레 강진으로 최대 10억 달러(약 1조1600억 원)의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USGS는 “경제적 손실은 칠레 국내총생산(GDP)의 1% 미만으로 추정된다. 이번 지진으로 1억∼10억 달러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할 확률이 52%”라고 예상했다.이유종 pen@donga.com·이설 기자}
칠레 수도 산티아고 북서쪽 해상에서 강진이 일어나 최소 8명이 숨지고 일본 동남부 해안, 미국 캘리포니아 주와 하와이, 뉴질랜드, 피지 등에도 지진해일(쓰나미) 주의보가 내려졌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 등은 해일이 18일 오전 한국 해상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USGS는 16일 오후 7시 54분(현지 시간) 칠레 산티아고에서 북서쪽으로 228km 떨어진 해상에서 리히터 규모 8.3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진원의 깊이는 12km로 추정된다. 첫 지진 발생 뒤 리히터 규모 6.0, 7.0을 포함하는 여진이 15차례 이상 발생했다. 칠레 내무부는 17일 오전 현재 사망자를 8명으로 집계했으며 해안 저지대를 포함한 10개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지진해일에 대비해 대피했다고 밝혔다. 칠레 국립재난관리청(ONEMI)은 자국 남부 푸에르토아이센에서 북부 아리카까지 3900km에 이르는 해안가 저지대에 사는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령을 내렸다. 칠레 정부는 17일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지진과 함께 칠레 해안 전역에 발령된 쓰나미 주의보는 17일 오전 해제됐다. 칠레에 한국 교민 2700명이 거주하고 있으나 17일 현재 사망자 등 피해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87)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에 출석해 위안부 소녀상 건립을 호소했다. 이 할머니는 15일 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전체회의에서 시의원들에게 위안부 기념물 건립 결의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이 할머니는 한국어로 “저는 피해자였지만 이제 세계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운동가”라며 “역사의 산증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위안부 기념물을 꼭 세워서 저의 한을 풀어 달라”고 말했다. 이 할머니의 발언은 한인단체인 가주한미포럼의 김현정 사무국장이 현장에서 통역했다. 에릭 마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등은 올해 7월 시의회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기념물을 설치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발의했다. 결의안은 현재 시의회의 공공안전 및 지역서비스 분과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분과위원회는 17일 회의를 거쳐 22일 시의회 전체회의에 결의안을 상정할지에 대해 결정할 예정이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

시진핑(習近平·사진) 중국 국가주석이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한다. 홍콩 일간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시 주석이 22일 시애틀 공식 일정을 시작으로 28일 뉴욕 유엔총회 연설로 마치는 방미 일정을 계획하고 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9일 보도했다. 시 주석 취임 이후 두 정상이 워싱턴에서 회담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2013년 6월에 있었던 시 주석의 첫 방미는 캘리포니아 휴양지에서 이뤄졌으며 국빈 방문이 아닌 실무 방문이었다. 시 주석은 23일 시애틀에서 애플, IBM,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의 대표적인 정보기술(IT) 기업 임원을 초청해 행사를 가진다. 이 자리에는 중국 전자상거래 기업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과 중국 최대 인터넷 검색엔진 바이두의 리옌훙(李彦宏) 회장 등이 참석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동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도 따로 만날 것으로 보인다. 24일 저녁에는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한다. 25일 오전에는 미중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9일 보도했다. 양국 정상은 남중국해 영유권 갈등, 중국의 미국 정부 및 기업 해킹, 중국 공안의 미국 내 망명자 조사 등 민감한 문제들을 폭넓게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7세기 일본을 통치했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고대뿐 아니라 일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 역사에서 태자만큼 여러 문헌에서 다뤄지고 오늘날까지 각광받는 고대 인물은 별로 없다. 태자는 고대 일본의 정치 체제를 확립한 것은 물론이고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통일까지 이룬 인물이다. 1930년 100엔 지폐를 시작으로 모두 일곱 차례나 지폐 도안 인물로 쓰일 정도였으니 일본 내 그의 위상이 어땠으리라 짐작이 간다.○ 어머니가 도래인 쇼토쿠 태자는 고대 한일 교류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의 피 속에 한반도 도래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574년 일본 31대 왕인 요메이(用明) 왕이지만 어머니가 백제계 후손으로 당시 야마토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였다. 숭불파를 이끌며 불교전쟁에서 승리한 소가노 우마코는 587년 왕(태자의 삼촌인 스슌 왕)을 옹립할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스슌 왕이 소가 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하자 아예 그를 암살해 버리고 스이코(재위 593∼628년) 여왕을 옹립한다. 스이코 여왕은 조카인 쇼토쿠 태자에게 정치를 맡기는데 이로써 사실상 태자의 섭정이 시작된다. 그의 통치 철학이나 사상은 오늘날 일본 정치체제와 문화를 이해하는 뿌리이기도 한데 관위 12계(冠位十二階)와 17조 헌법(十七條憲法)을 제정해 고대 국가로 가는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고구려 혜자 스님의 제자이기도 했던 태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남아 있는 대형 사찰을 지었다. 재위 기간은 30년으로 짧지 않았지만 스이코 여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622년) 바람에 끝내 왕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후에 태자를 개조(開祖)로 하는 불교 종파인 성덕종(聖德宗)이 만들어질 정도로 추앙받는다. 시미즈 아키히로(淸水昭博) 데즈카야마(帝塚山大)대 교수는 “신도의 전통이 강한 일본은 불교를 사상체계로서가 아니라 석가모니라는 ‘가미(神)’에 대한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며 “생전에 불교에 심취하며 종교적 삶을 살았던 쇼토쿠 태자에 대한 신앙은 세속의 왕자를 버리고 열반한 석가모니를 일본화한 인물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했다.○ 백제식 가람배치 쇼토쿠 태자는 불교전쟁을 치르면서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꼭 아름다운 사찰을 지어 부처님 은혜를 갚겠다고 서원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절이 바로 오사카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노지)이다. 왕실이 만든 일본의 첫 관영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성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사찰을 찾아간 날은 5월 초였다. 평지에 세운 사찰 경내는 확 트여 시원스러웠다. 멀리 금당(본당) 옆에 5층탑이 보였는데 규모도 컸지만 건축미도 뛰어났다. 한국 학계는 이 5층탑이 백제의 세 번째 왕도였던 부여 땅 군수리 절터와 건축 양식이 똑같다고 보고 있다. 이 절은 593년에 건립됐는데 곳곳에 고대 한반도와의 진한 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남대문-중문-오층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늘어서 있는 가람배치는 일본에서 ‘시텐노지 양식’이라는 고유명사가 된 가장 오래된 양식이다. 하지만 이 가람배치는 사찰 건립 26년 전인 567년에 창건된 부여 능산리 절터나 군수리 절터, 정림사 터와 동일한 양식이다. 게다가 사천왕사는 군수리 절터 탑과 금당 간의 거리를 비롯해 각 건물 비례까지 일치하고 있다. 기와도 똑같다. 이곳에서 만난 야마오카 부묘(山岡武明) 스님은 “모두 백제 건축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곳 건물들은 한눈에 봐도 한옥을 닮았다. 일본은 건축물을 지을 때 일반적으로 각이 진 서까래를 사용하는데 이곳 서까래는 한옥처럼 둥글었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 결을 짜서 맞춘 방식도 한옥과 비슷했다. 금당 안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상도 가부좌한 모습이나 옷 주름이 흘러내리는 모습, 온화한 미소가 우리나라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똑같았다.○ 백제 장인 유중광 그렇다면 이 사찰은 누가 지었을까. 다름 아닌 백제의 건축 명장 유중광(柳重光)이다. 그는 또 다른 2명의 백제 장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와 이 절을 지었다.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본 왕실은 그에게 ‘곤고(金剛)’라는 성까지 주어 정착하도록 한다. 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로 이름까지 바꿔 아예 일본에 정착하게 된 그는 이후 일본 고대 사찰의 건축 및 수리를 전담하는 회사까지 만들게 된다. 이게 바로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기록된 ‘곤고구미(金剛組)’다. 구미(組)는 일본어로 ‘모임’이라는 뜻으로 유중광이 후배들과 함께 만든 ‘건축 장인 집단’을 의미한다. 578년 세워진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건설업체였다. 23회에서 소개한 호류(法隆)사의 개축에도 참여했고 1583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오사카 성도 세웠다. 현대에 들어와 ‘곤고구미’가 유명해진 계기는 1995년 고베대지진 때였다. 당시 건물 16만 채가 파괴됐지만 곤고구미 회사가 지은 건물들은 별 손상 없이 견뎌내 큰 관심을 모았다.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곤고구미는 유중광 가문의 40대손까지 이어지며 무려 1400여 년에 걸친 역사로 세계 경영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위기도 많았다. 1930년대에는 중일전쟁으로 모든 공사가 중단되면서 부도 위기에 몰리자 37대 사장이 할복하는 곡절도 있었다. 그러다 태풍 피해를 입은 사천왕사 오중탑 복원 공사를 수주하면서 회생했지만 1980년대 버블경제 때 사들인 부동산 값이 폭락하면서 빚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06년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다카마쓰건설이 경영권을 인수하고 임직원 대부분을 승계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곤고구미 정신 기자는 일본으로 취재를 떠나기 전 주일본한국문화원과 오사카 시 관광국 등을 통해 곤고구미 회사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타진했지만 “해외 매체와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야마오카 스님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자 그가 앉은 자리에서 선뜻 “내가 주선해 보겠다”고 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이리저리 전화를 하던 그는 “유중광의 41대 후손이 곤고구미 영업사원인데 지금 외근 중이라 당장 만날 수는 없다고 한다. 그 대신 마침 이곳에 직원 한 사람이 와 있다고 하니 이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30분 정도 기다리자 50대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건네준 명함에는 ‘곤고구미 영업개발부장 아베 도모미(阿部知己)’라고 적혀 있었다. 그에게 회사의 역사에 대해 묻자 “임직원 모두 우리 회사가 백제 장인이 세운 회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회사 경영진은 이런 사실을 수시로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우리는 창립 이후 백제 기술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곤고구미는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결을 이용해 조립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한 해 매출은 500억 원가량이며 130여 명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야마오카 스님은 “이곳 사천왕사 보수공사를 수주하려는 건설업체들이 상당히 많지만 우리는 항상 곤고구미에 맡기고 있다”며 “첨단 문명시대에도 이런 회사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높은 품질력과 예술성에 대한 직원들의 집착 때문이다. 곤고구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만남이었지만 고대 백제 장인들의 후손이 아직도 대를 이어 그 정신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일본인과 대화를 나눈 것 자체만으로도 옛 조상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오사카=이유종 기자 pen@donga.com}

보츠와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쪽에 있는 인구 215만 명의 내륙국이다. 지난해 1인당 국민소득이 7757달러였다. 아프리카 부국이라는 남아공(6477달러)보다 많다.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 따지면 무려 1만8825달러에 달한다. 아프리카에서 최상위권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지난해 12월 전 세계 175개국의 부패인식지수(CPI)를 조사한 결과 보츠와나는 100점 만점에 63점을 받아 31위를 기록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점수다. 55점을 받아 43위에 오른 한국보다 높다. 보츠와나가 1966년 영국에서 독립할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 1970년대 중반까지도 영국에서 원조를 받아야 예산 편성이 가능했다. 영국 유학생 출신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는 경제성장을 추진하려면 민주주의와 함께 공직자들의 청렴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검은 대륙의 많은 국가들은 대부분 자원이 풍부할수록 성장이 어려워지는 ‘자원의 저주’를 겪고 있었다. 석유와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독재자가 들어선 국가에선 부패가 만연했다. 카마 대통령은 ‘자원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기 위해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행동. 카마 대통령은 위반자에 대해 추호의 관용도 허락하지 않았다. 부패 사실이 발각되자 자살까지 하는 장관들이 나올 정도였다. 강력한 반부패 정책 덕분에 보츠와나는 독립 이후 30년 동안 연평균 10%에 가까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카마 대통령의 청렴정치는 다음 대통령까지 이어졌다. 2대 대통령인 퀘트 마시레 대통령은 1994년 9월 대통령실 직속으로 부패사범을 적발하는 부패와 경제범죄이사회(DCEC)를 설치했다. DCEC에 체포, 수사는 물론이고 영장 없이도 범법자를 잡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2000년 초에는 옴부즈맨실을 설치해 행정실책, 부정 등의 신고와 고발을 받았다. 2010년에는 돈세탁, 테러리즘, 불법 마약 운반 등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정보부서까지 설립했다. 한국 사회도 과거보다는 훨씬 깨끗해졌다. 하지만 모범을 보여야 할 공직자들의 비리는 여전하다. 철도부품업체에서 거액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새누리당 조현룡 의원은 최근 항소심에서도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새정치민주연합 출신 박기춘 의원은 지난해 6월 국회 국토교통위원장을 맡으며 순식간에 막대한 금품을 챙겼다가 현역 의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속됐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부패를 척결하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조언한다. 한국의 CPI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70점 정도만 돼도 연간 경제성장률을 최대 1.4%나 올릴 수 있다. 반부패만 추진해도 더 성장할 여지는 충분하다. 부패 척결은 보츠와나처럼 강력한 리더십에서 비롯된다. 아프리카의 반부패 선진국 보츠와나로부터 그런 노하우를 한 수 배워야 할 때다.이유종 국제부 기자 pen@donga.com}

국방부 영문 홈페이지 청사 약도에는 용산구청이 ‘영산고청(Youngsan-go Office)’으로 쓰여 있다. ‘Yongsan-gu Office’라고 써야 바른 표기다. 삼각지(Samgakji)는 ‘산각지(Sangakji)’로 잘못 적혀 있다. 정부 부처 및 공공기관의 홈페이지에 올려진 영문 오기(誤記)가 매우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동아일보가 ‘공공기관 영문 오기 파수꾼’으로 불리는 오용웅 부산시 영어 명예통역관(74)의 도움을 받아 국무총리 비서실, 국토교통부, 국방부, 문화재청 등의 홈페이지를 조사한 결과 거의 모든 기관의 영문 홈페이지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국가보훈처는 역대 국가보훈처장을 소개하면서 22대와 23대 보훈처장을 각각 ‘22th’와 ‘23th’라고 기록했다. 22번째를 뜻하는 영문은 ‘22nd’이고 23번째는 ‘23rd’라고 써야 제대로 된 표현이다. 문화재청은 2013년 8월 ‘문화재 명칭 영문표기 기준 규칙’을 마련해 문화재의 영문 표기를 통일시키겠다고 했다. 창경궁만 해도 ‘Changgyeong Palace’ ‘Changgyeonggung Palace’ ‘Changgyeonggung’ 등의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창경궁의 공식 영문 표기를 ‘Changgyeonggung Palace’로 정했다. 하지만 문화재청 소속 기관들조차 자신이 마련한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창경궁관리소와 창덕궁관리소는 홈페이지에 ‘Changgyeonggung Palace’ ‘Changdeokgung Palace’ 대신 ‘Changgyeonggung’과 ‘Changdeokgung’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런 사이트에서 영문 오류 표기가 무더기로 보인다면 해당 국가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을 브랜딩하라’의 저자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60)는 “완벽한 영문 홈페이지를 만든다고 해서 국격이 높아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결정적인 순간에 국가 이미지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며 “국격을 위해서 이런 작은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이유종 기자 pe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