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알자지라는 처음 설립될 때부터 불만을 가진 세력들의 압박이 많았다.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한 이유 중 하나도 알자지라의 비판적 보도를 꼽고 있다. 하지만 단교로 인한 어려움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카타르 알자지라 미디어 네트워크의 모스테파 수아그 사장의 이 한마디 말 속에 알자지라가 1996년 설립된 이후 ‘중동의 CNN’이라는 명성을 유지하는 이유를 느끼게 했다. 알자지라는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한 뒤 주범으로 지목된 사우디 출신의 오사마 빈라덴을 단독 인터뷰해 중동에서는 압도적인 취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수아그 사장은 15일 카타르 도하 셰러턴 호텔에서 열린 ‘도하 포럼 2018’ 행사 중 동아일보, 르몽드, 포브스 기자와 만났으며 동아일보는 별도로 보충 인터뷰를 했다. 수아그 사장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먼저 지난해 6월 사우디 이집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UAE) 리비아 예멘 몰디브 등 7개국이 카타르와 국교를 끊고 육해공 왕래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물었다. ―단교 사태로 알자지라도 취재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무엇보다 단교를 주도한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뉴스 현장에 갈 수 없다는 게 큰 제약이다. 이 나라들은 중동에서 규모가 크고 취재 비중도 큰 중요한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자지라는 늘 어려움을 겪어 왔다. 비판적인 보도로 지국이 폐쇄당한 일도 여러 번 있었고, (서구에선) 아랍국 편을 든다는 오해도 받았다. 심지어 알자지라가 ‘테러를 촉진시킨다’고 표현한 미국 정치인도 있었다. 일부 나라에서는 지금도 우리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알제리 출신이지만 알제리는 아직 알자지라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알자지라는 글로벌 미디어로 성장했다. 그만큼 어려움 속에서 일하고, 성과를 내는 데 익숙하다.” ―단교를 주도한 나라들이 알자지라에 대한 불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단교 전후 언제든 알자지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다는 방침을 버린 적이 없다. 알자지라를 폐쇄하려는 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울을 부숴 버리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단교 전에도 알자지라의 취재를 막고 싶어 했다. 예전에는 알자지라 보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국 주재 카타르 대사에게 강하게 항의한 나라도 있다. 독립 언론사의 보도를 가지고 그 나라 대사한테 항의하는 건 적합한 조치가 아니지 않은가. 이런 행동은 자유 언론의 의미를 모르고, 언론사가 자국 정부에 유리한 보도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아그 사장은 “알자지라는 카타르 정부의 지원을 받지만 보도는 자유롭게 하는 독립 언론사”라고 말했다. 알자지라를 경영하는 이사회의 회장은 왕실 구성원 중 한 명이 맡고 있지만 회사 운영의 핵심인 보도와 제작은 독립돼 있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뒤 미국에서 반(反)아랍 정서가 강해졌다. 미국 정·관계 취재가 어려워졌나.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취재하는 게 특별히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 들어 펜타곤(미 국방부)에 알자지라가 출입하면서 취재할 수 있게 됐다. 알자지라 방송을 계속 본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알자지라에 대한 반감이나 편견이 적다. 아랍 국가들과 적대적인 이스라엘에서도 우리 기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알자지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매우 큰 지국들을 운영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특정 보도에 대해 화를 내고 비판한 적도 있지만, ‘알자지라가 잘못됐다’는 식으로는 말하진 않는다. 알자지라에 대해 강한 반감이 있거나, 아예 거부하는 이들일수록 우리 뉴스를 제대로 안 본 경우가 많다.” 알자지라는 이스라엘 수도인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수도인 라말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활동지역인 가자지구에서도 지국을 운영 중이다. ―앞으로 글로벌 미디어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 계획은…. “글로벌 미디어를 늘 지향한다. 그런 만큼 전 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게 목표다. 아시아도 매우 주목하는 시장이다. 이미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는 해당 국가의 언어로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근에도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앞으로 한국을 포함해 다른 아시아 나라에서도 더욱 영향력을 키우고 싶다. 특히 디지털 콘텐츠를 이용해 아시아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싶다.” 알자지라는 2006년 영어 방송(‘알자지라 잉글리시’)을 시작하며 글로벌 언론사로서의 본격적인 영향력 키우기에 나섰다. 2007년과 2011년에는 각각 다큐멘터리(알자지라 다큐멘터리)와 유럽의 발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채널(알자지라 발칸)도 설립했다. 현재 중동에서 22개, 비중동 지역에서 40개의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를 할 수 있는 나라가 아시아에 많지 않다. 가령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은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도 많다. 아시아 국가들, 특히 민주주의 체제인 나라들 중에서도 알자지라 보도가 비판적이고, 민감한 사안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나라는 우리 기자에게 방문 비자도 안 내줬다. 또 다른 나라는 비정치 이슈와 관련된 취재를 진행하려는 취재팀에 대해서도 당국이 계속 감시를 했다.” ―한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은 언론 환경이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4년 전 한국을 방문했고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민감한 이슈에 대해선 약간 언급을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 차원에서 앞으로 중점적으로 보도하려는 이슈가 있는지…. “알자지라는 인권에 관심이 많다. 자유인권센터란 조직을 운영하며 관련 뉴스를 발굴해 적극 보도하고 있다. 앞으로는 언론 자유와 기자 탄압에 대해서도 적극 보도할 계획이다. 언론 탄압이 전 세계적으로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자지라 기자인 마흐무드 후세인은 지금도 이집트에 2년째 붙잡혀 있다.” ―기자 채용이나 인력 운용에서 중시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현재 알자지라에는 96개 국적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카타르 도하 본사에도 50개국 이상에서 온 구성원들이 일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출신 국가, 종교, 사상에 대해 묻지 않고, 언론인으로서의 자질과 성과만 보는 문화가 잘 뿌리내려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분쟁과 사고 재난 현장에 대한 취재도 많다. 이 때문에 안전을 항상 강조한다. 현장 밀착 보도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안전부터 생각해야 한다. 기사는 오늘 보도 못 하면 내일 보도해도 된다. 하지만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카타르가 중동의 교육 문화 중심지가 되겠다는 비전을 마련한 직후 설립된 ‘알자지라 미디어 네트워크’는 이 나라의 대표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알자지라는 ‘카타르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해 카타르의 관광지에선 알자지라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와 머그잔 같은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다. 카타르와 단교한 국가들은 단교 해제 조건 중 하나로 알자지라 폐쇄를 내걸고 있다. 수아그 사장과 인터뷰하면서 복잡한 중동 정세가 알자지라의 취재 보도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하=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알자지라는 처음 설립될 때부터 불만을 가진 세력들의 압박이 많았다. 사우디아라비아 가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한 이유 중 하나도 알자지라의 비판적 보도를 꼽고 있다. 하지만 단교로 인한 어려움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카타르 알자지라 방송의 모스테파 수아그 사장의 이 한 마디 말 속에 알자지라가 1996년 설립 이후 ‘중동의 CNN’이라는 명성을 유지하는 이유를 느끼게 했다. 알 자지라는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뒤 주범으로 지목된 사우디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을 단독 인터뷰해 중동에서는 압도적인 취재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수아그 사장은 15일 카타르 도하 쉐라톤 호텔에서 열린 ‘도하 포럼 2018’ 행사 중 동아일보, 르몽드, 포브스 기자와 만났으며 동아일보는 별도로 보충 인터뷰를 했다. 알자지라 사장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먼저 지난해 6월 사우디 이집트 바레인 아랍에미리트(UAE) 리비아 예멘 몰디브 등 7개국이 카타르와 국교를 끊고 육해공 왕래를 차단하는 등의 조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 물었다. - 단교 사태로 알자지라도 취재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무엇보다 단교를 주도한 나라들에서 발생하는 뉴스 현장에 갈 수 없다는 게 큰 제약이다. 이 나라들은 중동에서 규모가 크고 취재 비중도 큰 중요한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자지라는 늘 어려움을 겪어왔다. 비판적인 보도로 지국이 폐쇄 당한 일도 여러 번 있었고, (서구에선) 아랍국 편을 든다는 오해도 받았다. 심지어 알자지라가 ‘테러를 촉진시킨다’고 표현한 미국 정치인도 있었다. 일부 나라에서는 지금도 우리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알제리 출신이지만 알제리는 아직 알자지라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알자지라는 글로벌 미디어로 성장했다. 그만큼 어려움 속에서 일하고, 성과를 내는 데 익숙하다.”- 단교를 주도한 나라들이 알자지라에 대한 불만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단교 전후 언제든 알자지라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한다는 방침을 버린 적이 없다. 알자지라를 폐쇄하려는 이들은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울을 부서 버리는 행동을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단교 전에도 알자지라 취재를 막고 싶어했다. 예전에는 알자지라 보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국 주재 카타르 대사에게 강하게 항의한 나라도 있다. 독립 언론사의 보도를 가지고 그 나라 대사한테 항의하는 건 적합한 조치가 아니지 않은가. 이런 행동은 자유 언론의 의미를 모르고, 언론사가 자국 정부에 유리한 보도만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아그 사장은 “알자지라는 카타르 정부의 지원을 받지만 보도는 자유롭게 하는 독립 언론사”라고 말했다. 알자지라를 경영하는 이사회의 회장은 왕실 구성원 중 한 명이 맡고 있지만 회사 운영의 핵심인 보도와 제작은 사장이 독립적으로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집권한 뒤 미국에서 반(反)아랍 정서가 강해졌다. 미국 정·관계 취재가 어려워졌나? “미국 정부 관계자들을 취재하는 게 특별히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 들어 펜타곤(미 국방부)에 알자지라가 출입하면서 취재할 수 있게 됐다. 알자지라 방송을 계속 본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알자지라에 대한 반감이나 편견이 적다. 아랍 국가들과 적대적인 이스라엘에서도 우리 기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다. 알자지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매우 큰 지국들을 운영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특정 보도에 대해 화를 내고 비판한 적도 있지만, ‘알자지라가 잘못됐다’는 식으로는 말하진 않는다. 알자지라에 대해 강한 반감이 있거나, 아예 거부하는 이들일수록 우리 뉴스를 제대로 안 본 경우가 많다.” 알자지라는 이스라엘 수도인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수도인 라말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활동지역인 가자지구에도 지국을 운영 중이다. - 앞으로 글로벌 미디어 시장에서의 영향력 확대 계획은? “우리는 설립 이후 들었던 ‘중동의 CNN’이란 닉네임에 만족하지 않는다. 글로벌 미디어를 늘 지향한다. 그런 만큼 전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게 목표다. 아시아도 매우 주목하는 시장이다. 이미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는 해당 국가의 언어로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최근에도 중국 출장을 다녀왔다. 앞으로 한국을 포함해 다른 아시아 나라에서도 더욱 영향력을 키우고 싶다. 특히 디지털 콘텐츠를 이용해 아시아 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싶다.” 알 자지라는 2006년 영어 방송(‘알자지라 잉글리시’)을 시작하며 글로벌 언론사로서의 본격적인 영향력 키우기에 나섰다. 2007년과 2011년에는 각각 다큐멘터리(알자지라 다큐멘터리)와 유럽의 발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채널(알자지라 발칸)도 설립했다. 현재 중동에서 22개, 비(非)중동 지역에서 40개의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 아시아 국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를 할 수 있는 나라가 아시아에 많지 않다. 가령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은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도 많다. 아시아 국가들, 특히 민주주의 체제인 나라들 중에서도 알자지라 보도가 비판적이고, 민감한 사안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나라는 우리 기자에 대해 방문 비자도 안 내줬다. 또 다른 나라는 비정치 이슈와 관련된 취재를 진행하려는 취재팀에 대해서도 당국이 계속 감시를 했다.”- 한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은 언론 환경이 자유로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4년 전 한국을 방문했고 기자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민감한 이슈에 대해선 약간 언급을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 차원에서 앞으로 중점적으로 보도하려는 이슈가 있는지? “알자지라는 인권에 관심이 많다. 자유인권센터란 조직을 운영하며 관련 뉴스를 발굴해 적극 보도하고 있다. 앞으로는 언론 자유와 기자들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도 적극 보도할 계획이다. 언론에 대한 탄압이 전세계적으로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알자지라 기자인 마후무드 후세인은 지금도 이집트에 2년째 붙잡혀 있다.”- 기자 채용이나 인력 운용에서 중시하는 것은? “다양성이다. 현재 알자지라에는 96개 국적의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 카타르 도하 본사에도 50개국 이상에서 온 구성원들이 일하고 있다. 내부적으로 출신 국가, 종교, 사상에 대해 묻지 않고, 언론인으로서의 자질과 성과만 보는 문화가 잘 뿌리내려 있다고 생각한다.”-기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분쟁과 사고 재난 현장에 대한 취재도 많다. 때문에 안전을 항상 강조한다. 현장 밀착 보도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안전부터 생각해야 한다. 기사는 오늘 보도 못 하면 내일 보도해도 된다. 하지만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카타르가 중동의 교육 문화 중심지가 되겠다는 비전을 마련한 직후 설립된 ‘알자지라 방송’은 이 나라의 대표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알자지라는 ‘카타르 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 카타르의 관광지에선 알자지라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와 머그컵 같은 기념품도 구입할 수 있다. 카타르와 단교한 국가들은 단교 해제 조건 중 하나로 알자지라 폐쇄를 내걸고 있다. 수아그 사장과 인터뷰하면서 복잡한 중동 정세가 알자지라의 취재 보도에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도하=이세형기자 turtle@donga.com}

해안가를 따라 마천루들이 밀집해 있는 카타르 수도 도하의 중심지 코니시 로드. 이곳의 남쪽 끝에는 모래색의 디스크(원반)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우주에서 날아온 비행접시들이 사막에 불시착해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내년 3월 준공을 앞두고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카타르 국립박물관(NMoQ·National Museum of Qatar)이다. 이 건물의 디자인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이 ‘사막 장미(Sand Rose)’를 모티브로 설계했다. 사막장미는 사막에서 모래들이 오랜 기간 뜨거운 태양열과 지열에 노출되면서 뭉쳐진 울퉁불퉁한 덩어리로, 장미 모양을 연상케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직 정식으로 문을 열지 않았지만 이 건물은 ‘카타리(Qatari·카타르인)’들 사이에선 이미 국가 상징물로 통한다. 국적 항공사인 카타르항공의 기내 홍보영상을 비롯해 ‘2022 월드컵’과 각종 관광 자료에도 카타르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소개되고 있다. 이 건물의 시공을 한국의 국가대표 건설사 현대건설이 맡고 있다. ○ 곡선으로 채워진 비정형 건물 17일 오후 4시(현지 시간) 찾아간 NMoQ 현장. 지하 1층∼지상 5층, 연면적 4만6596m² 규모의 박물관을 짓는 곳이지만 일반적인 건축물 현장과는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든 게 곡선으로 이어진 기하학적 형태의 건물 모습이었다. 316개에 이르는 대형 디스크들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디스크들은 총 7만6000여 장의 섬유보강콘크리트(FRC·Fiber Reinforced Concrete) 패널들을 일일이 붙여서 만들었다. FRC 판들에는 서로 연결되는 무늬와 색깔이 있어 마구잡이로 붙일 수도 없게 돼 있다. 설계 때부터 ‘시공 자체가 위대한 도전’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다. 실제로 공사가 한창일 때 현장에서 근무하던 엔지니어와 근로자들은 “거대하고 복잡한 퍼즐 맞추기 작업 같다”며 공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상복 현장소장은 “처음 설계도를 받았을 땐 ‘실제 구현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와 두려움이 컸다”며 웃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건설은 디자인 전문가를 대거 투입했다. 이 소장은 “한창 공사가 진행될 때는 100여 명의 본사 엔지니어가 투입됐는데 이 중 50명 정도가 디자인 관련 업무를 담당했을 만큼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비정형 건축물을 짓는 프로젝트인 만큼 첨단 공법도 대거 도입됐다. 최첨단 3차원(3D) 빌딩정보시스템(BIM)을 활용해 공사의 전 공정을 관리해 나갔다. 3D BIM을 이용하면 가상의 공사 환경에서 설계 도면의 오류 등을 미리 파악할 수 있고, 실제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도 예방할 수 있다. 시공 오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본공사 착수 전 실제 건축물의 30%가량을 사전건축물(Mock-Up)로 제작한 뒤 각종 품질 검사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소장은 “이런 과정에서 일반적인 모양의 건축물을 짓는 것보다 4, 5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개성 넘치는 건축물로 승부수를 띄운다 카타르는 자국의 주요 인프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크기’ ‘숫자’ 같은 하드웨어적 요소보다 ‘디자인’ ‘개성’ 같은 소프트웨어 경쟁력을 강조한다. 국토 면적이 한국의 경기도만 하고 인구도 약 260만 명(자국민은 약 32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규모의 경쟁력만 키워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침은 주요 공공기관의 건물 공사 계획에 반영됐다. 국제 교육·연구특구인 ‘에듀케이션시티’에 진출한 미국과 유럽 대학들, ‘이슬람예술박물관(MIA)’,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건물은 모두 개성 넘치는 디자인으로 화제가 됐다. 현대건설이 전체 4개 건물 중 3개의 시공을 맡았던 현지 최대 국립병원 ‘하마드 메디컬시티’(2016년 완공)도 최첨단의 느낌을 살린 외관과 호텔을 연상케 하는 내부 인테리어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카타르 공보부 관계자는 “주요 인프라 건설에서 고급스럽고 독특한 디자인 못지않게 카타르 고유의 전통미와 현대적인 느낌을 적절히 융합시키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런 분위기를 집대성한 게 NMoQ이다. 그만큼 카타르 정부는 NMoQ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 카타르 국왕의 여동생이자 세계 미술 시장의 ‘큰손’으로 꼽히는 셰이카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 빈 알 사니가 카타르 박물관청을 이끌며 건설 프로젝트 전반을 관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왕실 구성원인 셰이카 암나 빈트 압둘아지즈 알 사니가 NMoQ의 관장을 맡고 있다. 공사가 끝나기 전 타밈 국왕과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전 국왕(타밈 국왕의 아버지로 2013년 왕위를 물려줌)이 현장을 찾았을 정도다. 당초 2011년 9월∼2014년 6월로 예정돼 있던 공사 기간이 2011년 9월부터 내년 3월까지로 대폭 늦춰진 것도 카타르 측의 계속된 설계 수정 보완 요구 때문이다.○ 한국 건설업체들의 위상 높아질 것 NMoQ는 건물 모양 못지않게 전시관 구성도 특이하다. 단순히 역사적 유물을 전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12개의 테마로 이뤄진 갤러리에서 카타르의 자연, 원유와 천연가스, 어업 등이 소개될 예정이다. NMoQ가 1913∼1949년 카타르를 다스린 셰이크 압둘라 빈 자심 알 사니의 궁궐을 둘러싼 형태로 조성된 것도 특징이다. 전통과 첨단, 과거와 현대가 만나는 공간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NMoQ가 완공되면 한국 건설사들은 큰 ‘반사이익’을 누릴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카타르 건설 시장에서 꾸준히 성과를 냈지만, 국가 상징 건물을 한국 기업이 시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으로 예정된 각종 공사 입찰에서 이 공사가 호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락곤 KOTRA 도하무역관장은 “카타르는 월드컵 개최와 국가비전 2030 목표 달성을 위해 앞으로도 사회 기반시설, 대규모 상업시설, 도심 재개발, 의료·교육 인프라 등과 관련한 프로젝트들을 대거 진행할 예정”이라며 “국내 건설업체들이 이런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하=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중동의 작은 반도 국가 카타르는 1990년대 중반 세계의 교육 지식 허브가 되겠다는 야심 찬 국가 발전 전략을 수립했다. 세계 3위 천연가스 보유국인 카타르는 ‘가스 머니’를 교육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이 같은 교육을 통한 세계 허브 전략을 이끄는 카타르재단(QF)은 비영리재단으로 현 국왕의 어머니 무자 빈트 나시르 왕대비가 QF의 이사장을 맡고 있어 카타르가 QF에 얼마만큼의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 칼리파 알 쿠바이시 QF 홍보팀장은 “이미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에선 카타르란 나라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교육을 가장 많이 떠올린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 허브 카타르’라는 국가 브랜드가 더욱 강하게 형성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미국과 유럽 명문대 8개 유치 고층 건물이 가득한 카타르 수도 도하 도심 서쪽의 교육·연구 특구인 ‘에듀케이션시티(Education City)’는 카타르의 교육, 특히 대학 교육에 대한 관심과 비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로 꼽힌다. 당장 눈에 보이는 ‘부(富)’를 생산하기보다 국격을 높이고 고급 인재를 길러내는 ‘미래의 성장 동력’이다. 14일 찾은 에듀케이션시티에는 QF 본부 건물을 중심으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갈색, 흰색 벽돌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다. 건물들 사이로는 넓은 잔디밭과 공원도 조성돼 있었다. 중동의 사막 국가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미국과 유럽의 한 대학에 온 듯한 분위기였다. 에듀케이션시티는 20년 만에 미국과 유럽 명문대 8개 캠퍼스를 유치했다. 카타르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대학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1998년 에듀케이션시티에 버지니아 커먼웰스대(디자인, 미술, 예술사)가 처음으로 들어온 뒤 조지타운대(국제관계학), 노스웨스턴대(언론학), 카네기멜런대(경영학, 컴퓨터과학, 생명과학, 정보시스템학), 코넬대(의학), 텍사스A&M대(화학공학, 기계공학, 전기컴퓨터공학, 석유공학)까지 미국 대학 6개가 자리 잡고 있다. 유럽에선 프랑스 파리고등상업학교(HEC파리) 경영대학원과 영국 런던대(UCL) 대학원(도서관학, 박물관학)이 이곳에 진출했다. 카타르의 종합대학인 하마드 빈 칼리파대(HBKU)도 2010년 이곳에 설립됐다. QF 측은 미국과 유럽의 명문대, 특히 이들 대학을 대표하는 전공 과정의 캠퍼스를 유치한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 없다고 강조한다. 카타르 정부의 ‘세계 교육 허브’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파격적인 지원이 사막을 세계의 교육 도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동 지역 우수 인재를 선점하겠다는 각 대학의 의지도 작용했다. ‘세계 교육 허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에듀케이션시티 내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국적은 66개다.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 학생도 늘고 있다. 이곳에서 카네기멜런대 생명과학과를 졸업한 강민경 씨는 “에듀케이션시티의 대학 졸업생들은 카타르 정부와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다양한 글로벌 기업, 언론사,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 등으로 진출하고 있다”며 “학생들 사이에선 ‘우리가 중동의 최고 엘리트다’란 자부심이 강하다”고 말했다. ○ 대학 통해 중장기 산업구조 다변화도 모색 최근에는 대표 국립대인 카타르대가 있는 도하 도심 북쪽도 또 다른 대학 교육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카타르대가 지속적으로 시설 확장에 나서는 데다 중동 지역의 유명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대학원 과정을 운영하는 도하인스티튜트(DI) 등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ACRPS는 중동 이슈 분석 보고서와 함께 아랍국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여론조사 결과인 ‘아랍여론지수’를 2011년부터 매년 발표하고 있다. 이 같은 활동 덕분에 에듀케이션시티와 더불어 카타르의 지식 허브 이미지를 키우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데이나 엘 쿠르드 ACRPS 연구위원은 “아랍여론지수는 중동지역 내 연구기관이 직접 개발해 진행하는 여론조사 중 가장 큰 규모”라며 “아랍권의 정책 결정자들과 국제기구의 전문가들이 중요한 정책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타르는 중동 국가로는 드물게 해외와 자국 대학들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이 향후 산업구조를 다양하게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가 경제에서 가스와 석유 의존도는 낮추고, 과학기술과 지식산업 비중은 높이는 데 대학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카타르 정부와 QF가 대학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뿐 아니라 연구 실적 향상과 기술 개발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2009년 문을 연 연구개발 및 창업 기관인 ‘카타르 과학기술 파크(QSTP)’는 중동 산유국에서는 드물게 청년층의 기술 기반 창업을 지원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삼고 있다. QSTP에는 약 8억 달러가 투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도하=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16일 북유럽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처음으로 만난다. 이번 회담은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러시아와의 내통’ 의혹을 받아 특별검사의 조사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이뤄지는 데다 한반도 비핵화도 주요 의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북-미 싱가포르 회담 이후 또 하나의 빅 이벤트를 왜 제3국에서 열까. 이유와 배경은 달랐지만 과거에도 주요국 정상회담이 제3국에서 열린 사례가 적지 않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기도 했다.○ ‘헬싱키, 미-러 고민 때 여러 차례 만난 곳’ 미-러가 헬싱키를 ‘제3국 정상회담’ 장소로 선택한 것은 여러 차례 있었다. 1975년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곳에서 ‘냉전을 녹인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는 ‘헬싱키 협약’을 만들어냈다. 포드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설정된 유럽의 국경선을 인정하는 대신 소련에 인간 이동의 자유, 사상의 자유, 정치수용소 폐지, 이산가족 재회 등 몇 가지 인권 조항을 인정하도록 했다. 협약 체결 후 미국 내에서는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보다 많은 실리를 챙겼다며 포드 대통령이 실패한 회담을 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두 정상도 이 협약의 ‘인권 조항’이 1990년대 초 동구권의 ‘탈소련’ 도미노가 이어질 때 진가를 발휘할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소련의 개입과 강제 진압을 막는 견제 장치로 작용하면서 냉전을 녹이는 불쏘시개가 됐다. 1990년 조지 부시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헬싱키에서 만나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쿠웨이트 침공 사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1997년에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구소련 국가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 문제를 다뤘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헬싱키는 미-러 양국 간 주요 현안을 해결하는 역사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정상회담 장소로 적합하다”고 전했다. 핀란드가 미-러 양국의 제3국 정상회담 장소로 여러 차례 선택된 것은 양측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핀란드의 ‘중간국 중립국 외교’도 한 요인이다. 핀란드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자 유럽의 단일 화폐 유로를 사용하는 등 ‘서방 클럽’에 속하면서도 나토에는 참여하지 않아 러시아도 거부감이 없다. 러시아는 19세기 핀란드를 자국 영토에 편입하고 2차대전 당시 침공하는 등 양국 간에는 역사적 감정이 남아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핀란드는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이 위기 탈출에 큰 버팀목이 되는 등 양국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치적 중립, 개최국 정치적 안정은 기본’ 지구촌에는 역사적인 제3국 정상회담이 진행된 곳이 몇 곳 있다. 핀란드가 미-러 양국과 모두 원만한 관계를 갖고 ‘중립국’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적 중립 이미지’는 필수다. 서로 갈등하는 국가의 정상이 만날 때 만나는 장소를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고려 요소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났던 싱가포르는 양국 모두와 국교를 맺고 있다. 2015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당시 대만 총통이 ‘양안 분단’ 이후 66년 만에 처음 만난 곳도 싱가포르다. 유영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싱가포르는 정치적으로 어느 진영에도 기울어져 있지 않고, 동남아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상징성이 있다”며 “앞으로도 미국과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돼 있는 이슈를 다루기에 가장 좋은 나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중립국 이미지가 강한 나라 중 단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세계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곳들도 있다.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가 대표적이다.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도 가장 분쟁이 심각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첫 평화 협정이 1993년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체결됐다. 당시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평화 공존 지향’과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출범’에 합의했다. 양측이 오슬로를 택한 것은 비밀 협상을 진행할 수 있는 보안 유지 필요성이 주요 요소였다. 성일광 건국대 중동연구소 연구원은 “양측 고위 인사들이 변방 이미지가 강하고, 휴양지에 가듯 움직일 수 있는 오슬로를 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며 “노르웨이 정부도 비밀 협상이 이뤄지도록 적극 협력했다”고 말했다. 당시 회담에 대해 이스라엘과 아랍 모두 보수 진영에서 평화 협정에 대한 반발이 커 보안 유지가 중요했다. 아이슬란드는 1986년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으로 ‘냉전 붕괴 및 평화’의 이정표가 됐다. 이곳에서 탈냉전기 주요 군축 논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다른 국가 정상들의 회담 장소로 활용된 적도 있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 회의가 대표적이다. 지미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만났다. 이때 체결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의 첫 번째 평화 협정으로 사다트와 베긴은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국제정치사 전문가들은 제3국 정상회담이 열리는 국가의 특징 혹은 조건으로 중립국 이미지는 필수이고 안전, 우수한 교통 통신 인프라, 영어 사용 역량 등을 꼽는다. 주성재 경희대 지리학과 교수는 “경호, 언어, 인프라의 편의성은 정상회담에 있어 가장 현실적인 요소”라며 “제3국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은 자국이 아닌 장소라 안전, 통신, 이동 편리성 등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히 따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보 효과 큰 정상회담 유치전도 싱가포르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숙소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133억 원을 ‘쾌척’했지만 6000억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거뒀다는 분석이 나왔다. 주요 정상회담 유치는 자국 국가 브랜드를 국제사회에서 높여 물밑 유치전도 뜨겁다. 외교부 관계자는 “규모가 작은 나라에 정상회담 유치는 가장 쉽게 국제사회에서 긍정적인 존재감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라며 “회담 과정에서의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 중재나 조율 업무도 담당할 수 있는 등 외교 역량을 키우는 계기로도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광산업 활성화 같은 경제적 효과도 있다. 이훈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거쳐 간 모든 곳은 앞으로 많은 스토리텔링이 이뤄지는 장소가 될 것”이라며 “싱가포르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강조할 수 있는 홍보 소재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정상회담 유치에 좋은 조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한국도 앞으로 제3의 정상회담 장소가 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아픔 속에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고,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치안이 좋고 정보기술(IT), 교통, 숙박, 회의 인프라가 뛰어난 것도 장점이다. 특히 ‘마지막 냉전’의 상징인 판문점은 남북한 사이에 평화가 정착되고, 나아가 통일이 될 경우 세계적인 정상회담 장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평가도 많다. 전쟁과 분단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현장으로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보다 훨씬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분석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두 차례나 만나 평화와 공존을 모색한 장소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 중인 미국과 중국 모두와 우호적인 것도 미중 등 국가의 정상회담 장소로 떠오를 수 있는 이유로 꼽힌다. 최재헌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는 “중국과 러시아로 대표되는 대륙 세력과 미국이 주도하는 해양 세력이 만나는 지점이란 지정학적 특성도 한국에서 향후 정상회담 등 다양한 국가 간 회의가 열릴 수 있는 요소”라고 말했다. 경제성장에 관심이 많은 개발도상국의 정상들이 참여하는 국제회의 혹은 정상회담을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여는 것도 의미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개도국의 외교관은 “한국의 발전 경험이 개도국들에 많이 알려져 있는 만큼 한국이 개도국 경제와 관련된 정상회담을 적극 유치하면 국제사회에서 더욱 화제가 되고, 위상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주요 강대국 회담도 한반도가 아닌 ‘제3국’에서 열렸다. 1943년 11월과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화민국 3국 간 카이로 회담은 일본이 패전한 뒤에는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을 선언했다. 당시 참가한 정상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 등 3명이다. 카이로가 회담 장소로 선정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반기 미영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을 밀어내고 승리한 것과 관련이 있다. 유영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전시 때 중요한 회담은 전선에서 너무 멀어서도 안 되며 동시에 승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1945년 2월 크림반도 얄타에서 열린 루스벨트 대통령, 처칠 총리,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등이 참석한 얄타 회담에선 미소 간 한반도 분할 점령이 합의돼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얄타 회담은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치며 독일로 진군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많다. 스탈린이 자국의 통제력이 있는 지역을 강력히 희망한 것도 얄타가 장소로 선정된 이유로 꼽힌다. 스탈린이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루스벨트를 배려해 기후가 온화한 휴양지 얄타를 골랐다는 해석도 있다. 올해 6월 1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지구촌 마지막 냉전 지대인 한반도의 분단 구조를 해체하는 단초가 될지 주목된다.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룬 1980년대 이후에는 한국이 직접 참여하거나 주도한 정상회담이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소련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다. 노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은 페어먼트 호텔에서 만나 환하게 웃었다. 이날 회담 이후 그해 9월 한국은 소련과 수교해 북방외교의 돌파구를 마련했고 2년 후 중국과 수교하는 징검다리가 됐다.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햇볕 정책’을 널리 알리면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회담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현대적인 느낌의 고층 건물이 밀집한 서울 광화문 주변에는 작지만 독특한 모양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있다. 도심보다는 대학 캠퍼스에 더 어울릴 법한 모양의 건물들로 이국적인 정취를 담고 있다. 이 중에는 야트막한 돌담 너머에 있어 전체 모습을 보기 어려워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인에게는 제한적으로 개방돼 방문이 쉽지 않다는 특징도 있다. 바로 대사관들이다. 대사관 건물은 한 나라의 외교를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로 여겨진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외교관은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만 있지 대사관 건물을 국가 홍보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로 생각한다”며 “대사관을 꾸밀 때는 자국과 주재국의 역사적 관계와 문화 교류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요소들을 적극 반영하려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도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올라가고, 아시아는 물론이고 북미와 유럽에서도 ‘한류 열풍’이 거세지면서 각국이 대사관을 활용한 ‘자국 알리기’에 더욱 공을 들이는 추세다.자연보호 가치관, 열린 공간 지향하는 캐나다대사관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거리, 도심 직장인들의 산책 코스로 유명한 서울 중구 정동길에는 멀리서 보면 연한 갈색의 커다란 나무가 연상되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 앞에는 높이 17m, 지름 5.2m의 520년 된 회화나무(서울시 지정보호수)가 서 있어 묘한 조화를 이룬다. 건물 주변에는 화강암 벤치와 분수대도 있어 날씨가 좋을 때는 편안히 커피를 마시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 주말에는 이 건물과 나무를 배경으로 웨딩 촬영을 하는 이들도 종종 있다. 바로 주한 캐나다대사관이다. 자작나무 숲과 산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된 캐나다대사관은 고즈넉한 건물이 많은 정동길에서도 눈길이 가는 외관을 자랑한다. 캐나다는 가장 적극적으로 대사관을 개방하는 나라로 꼽히기도 한다.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는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지하 1층을 일반인에게도 개방한다. 간단한 보안 검색 절차만 밟으면 누구나 이곳을 찾을 수 있다. 이 공간의 정식 명칭은 ‘캐나다 정보센터’. 대사관 직원과 방문자들 사이에선 ‘작은 캐나다 도서관’으로 불린다. 캐나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보유하고 있다. 캐나다 관련 영상 자료도 찾아볼 수 있다. 대사관 측에 따르면 월 150∼200명이 이곳을 찾는다. 정보센터는 원래 캐나다 방문 때 필요한 비자 심사가 이뤄지던 곳이었다. 하지만 비자 관련 업무가 모두 인터넷을 기반으로 진행되면서 캐나다대사관이 도서관으로 용도를 바꾼 것이다. 고미진 캐나다대사관 공보관은 “국내에 캐나다 관련 자료를 한 장소에 이렇게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은 없을 것”이라며 “캐나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찾아와서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건물 로비에도 소소한 볼거리가 있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동물인 대형 무스(말코손바닥사슴) 인형 ‘무철이’와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국가대표 아이스하키팀 유니폼이 전시돼 있다. 로비를 작은 캐나다 홍보 공간으로 꾸며 누구나 손쉽게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민족대표 33인을 도왔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1889∼1970년) 박사의 얼굴을 담은 동판도 눈길이 갈 만하다. 통상 공공기관들은 반듯하고 넓은 느낌을 주도록 건물 로비를 만든다. 캐나다대사관의 경우 로비가 다소 구불구불하고, 전체적인 건물 크기에 비해선 협소한 편이다. 건물을 지을 때 회화나무의 뿌리를 최대한 건들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다. 대사관 측은 “자연 경관이 뛰어나고 환경 보호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는 캐나다의 가치관을 대사관 건물을 지으면서도 적용했다”고 강조한다.고 김중업 선생 작품… 전문가들에게 더 유명한 프랑스대사관 서울 서대문구의 주한 프랑스대사관과 대사관저(대사의 생활 및 연회 공간으로 이뤄짐)는 야트막한 담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건물로 꼽힌다. 한국 근대 건축의 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 김중업 선생(1922∼1988년)이 설계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대사관저는 1962년 지어졌을 때부터 한국과 프랑스의 정서를 조화롭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한국 전통의 선과 프랑스 특유의 품위를 잘 살렸다는 분석이 많다.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지붕은 건축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화제다. 한국뿐 아니라 프랑스 건축계에서도 뛰어난 디자인을 자랑하는 건물로 인정받고 있다. 대사관저의 전반적인 인테리어는 모던 스타일이다. 거실과 식당 같은 주요 장소가 한국과 프랑스의 조화란 콘셉트 아래 꾸며져 있다는 게 특징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가구 및 소품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배치돼 있다. 가령 프랑스 대사가 3∼5명 정도의 소규모 그룹과 담소를 나눌 때 선호하는 장소로 꼽히는 ‘작은 노랑 응접실’의 소파, 테이블, 커튼, 쿠션 등은 모두 프랑스 스타일이다. 그러나 이곳에 장식으로 놓인 가구는 과거 한의원에서 한약 재료를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던 약장이다. 프랑스와 한국산 도자기도 같이 놓여 있다. 미리암 생피에르 주한 프랑스대사관 공보관은 “두 나라 모두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문화강국인 만큼 다양한 소재를 조화롭게 꾸미려고 늘 노력한다”며 “이런 방침은 대사관저 건물이 처음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은 노랑 응접실은 소파와 커튼 같은 주요 소품이 모두 노란색 계통이다. 가을에는 창밖으로 노란색 단풍잎까지 보인다. 대사관저를 방문했던 사람 중 많은 이들이 ‘가장 아늑하고 편안한 장소’로 꼽는다. 대사관저는 평소에는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건물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는 많다. 프랑스대사관과 프랑스문화원이 주최하는 ‘합동의 밤’ 행사 때다. 프랑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프랑스인 예술가, 작가, 전문가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 자리는 매월 한 차례씩 대사관저 메인 응접실에서 열린다. 통상 행사가 열리기 2, 3주 전 프랑스대사관 홈페이지를 통해 공지가 나가고, 이곳에서 신청을 하는 이들에게 참석 기회를 준다. 7월 11일에는 ‘600년 역사의 한국 요리 문학’이란 주제로 서울 서초구의 프랑스 음식점 ‘르 쉐프 블루’ 로랑 달레 셰프와 전설적인 왕실 요리장인 기욤 티렐의 저서 ‘타유방의 요리서’를 한국어로 옮긴 황종욱 번역가가 대담할 예정이다. 장미의 향과 정원, 시간이 멈춘 듯한 영국대사관 서울 중구 덕수궁 근처에 있는 주한 영국대사관은 ‘비밀의 정원’ 같은 느낌이다. 주변에 담이 쳐져 있고 나무와 꽃이 무성한 정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작은 수영장도 있다. 봄철 대사관 정원에는 영국을 상징하는 꽃인 장미가 만발한다. 최근에는 앵두나무에 앵두가 잔뜩 열렸다. 농약을 치지 않고 정원을 가꿔 이곳에서 열리는 앵두는 가볍게 물로 씻어서 먹어도 된다. 대사관 직원의 권유에 따라 맛본 앵두는 다소 시었지만 신선함은 느껴졌다. 영국대사관 안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소는 1890년에 세워진 영국대사관저다. 사무동 뒤편의 널찍한 정원 뒤편에 세워진 대사관저는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 그 자체다. 보고만 있어도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붉은색 벽돌에는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다. 아주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은은함과 품위는 충분히 느껴진다. 대사관저 내부 역시 고풍스러운 느낌이다. 영국 대사가 주최하는 연회, 콘퍼런스, 기자회견 같은 ‘대외행사’가 주로 열리는 1층은 영국식 디자인을 담아낸 공간이다. 한눈에 봐도 벽난로, 심플한 소파와 테이블, 은은한 조명이 갖춰진 응접실은 영화에서 본 전통적인 영국 저택의 인테리어와 유사하다. 창틀도 오래된 느낌이 나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건물의 역사가 깊고, 모양도 독특하다 보니 방송 프로그램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지난해에는 인기 방송 프로그램인 ‘1박2일’의 서울 미래 유산 투어편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 1박2일은 서울에서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됐고 대사관저가 여기에 포함됐었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사진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미국 피츠버그와 덴마크 오덴세는 각각 북미와 북유럽에 있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로봇 산업 도시가 되는 과정에서 지역 내 대학이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스웨덴 룬드 역시 대학으로 인해 달라진 도시다. 룬드대가 인문계에서 이공계 중심 대학으로 체질 개선을 시도하며 생명과학과 기초과학 연구가 활발한 ‘과학도시’가 됐다. 작은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와 카타르는 각각 자국 대학 경쟁력 강화와 해외 명문대 유치를 통해 인재 확보와 국제적인 교육 허브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국가 비전 중 하나로 삼고 있다. 중국 시안과 일본 기타큐슈에서도 대학이 지역균형발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업 못지않게 대학이 지역의 성장엔진 역할을 한다. 대학으로 살아나는 세계 각 지역의 모습은 한국의 지방대와 지방 도시들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동아일보가 ‘대학이 살린 도시, 현장을 가다’ 시리즈를 시작한 이유다.》 몰락한 철강도시 시절 피츠버그의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과거 제철소를 비롯해 대형 공장들이 있던 지역의 주택가에는 오랜 기간 빈 상태로 방치된 집들이 눈에 띄었다. 피츠버그 주민들 사이에서 도시 미관을 해치고 범죄도 많이 발생하는 동네로 여겨진다. ‘피츠버거(피츠버그 출신을 의미) 디아스포라’란 말도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제철소에서 일했다는 50대의 한 택시운전사는 “초등학교 다닐 때 다른 도시로 이사 간 친구가 거의 절반을 넘었는데 이런 경우는 미국에서 드물다”며 “미국 어디를 가도 어렵지 않게 피츠버거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 피츠버그가 변신하고 있다. 블루칼라 인력을 대거 키워내던 기술학교 건물들도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가 최근 창업과 연구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 첨단연구의 중심지 카네기멜런대와 피츠버그대 5월 23일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런대(CMU)의 게이츠힐먼관(컴퓨터과학대 건물) 지하와 1층은 여름방학이 막 시작됐는데도 학생과 교수들로 북적였다. 로봇 관련 연구시설이 밀집한 이곳은 로봇 연구로 명성이 높은 CMU의 경쟁력을 상징하는 곳이다. 하위 초셋 교수 연구팀은 붕괴된 건물이나 고대 건축물 내부같이 사람이 직접 들어가기 어려운 공간을 탐사하는 데 쓰이는 ‘뱀 로봇(Modular Snake Robot)’ 작동 실험을 하고 있었다. 옆의 연구실에선 또 다른 대학원생들이 휴머노이드 로봇을 가지고 작은 식료품 상자를 테이블 위에서 들었다 놓았다 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건물 한쪽에 마련된 대규모 제작실에선 대형 드론의 시험비행이 이뤄지고 있었다. CMU 컴퓨터과학대를 이끌고 있는 앤드루 무어 학장은 “최첨단 로봇 기술이 개발되고 있는 현장”이라며 “피츠버그가 실리콘밸리같이 세계적인 첨단기술의 중심지로 도약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CMU와 함께 이 지역의 또 다른 유명 대학인 피츠버그대에는 생명과학과 의학 관련 연구시설이 많다. 피츠버그 도심에는 이 대학의 부속병원 격인 피츠버그대의료원(UPMC) 시설이 밀집해 있다. UPMC는 미국에서 최초로 장기 이식 수술을 성공했을 만큼 의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다. 실제로 최근 피츠버그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구소 중 하나도 조직공학(Tissue Engineering) 연구를 진행하는 맥고언재생의학연구소(맥고언연구소)다. 조직공학은 생명과학·의학·공학의 융합 분야로 생체조직의 대용품을 만들어 이식하는 게 주목적이다. 맥고언연구소 윌리엄 와그너 소장은 “이 자리는 과거 피츠버그가 철강도시로 유명할 당시 제철소가 있던 곳”이라며 “지역경제의 변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대학은 도시의 성장엔진” 피츠버그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두고 다시 성장하고 있는 배경에는 CMU와 피츠버그대가 있다. 로봇(CMU)과 생명과학(피츠버그대) 분야에서 강점을 보여온 두 대학이 도시 전체의 희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택시운전사, 식당 종업원,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ED(Education의 약자·교육이란 뜻·CMU와 피츠버그대를 의미)와 MED(Medical의 약자·의료란 뜻·UPMC를 의미)가 피츠버그 경제의 핵심이다’란 말이 유행한다. 피츠버그에서 두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자선기관인 헨리힐먼재단이 지난해 브루킹스연구소에 지역발전 전략 컨설팅을 의뢰했을 때도 확인됐다. ‘글로벌 혁신 도시로 성장하는 피츠버그’란 최종 보고서의 내용을 가장 많이 참고하고 이행해야 할 기관으로 힐먼재단이 시 정부가 아닌 CMU와 피츠버그대를 선정한 것. 리베카 베글리 피츠버그대 부총장(경제협력부문)은 “‘시장과 시 정부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두 대학은 피츠버그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라는 게 힐먼재단의 논리였다”며 “지역사회에서 두 대학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로봇과 생명과학에 특화된 ‘실리콘밸리’를 꿈꾼다 CMU와 피츠버그대가 지역경제의 성장엔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건 창업 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5월 23일 피츠버그 노바플레이스에서 열린 ‘AI·로봇 벤처 전시회’에서는 최근 본격적인 투자 유치 및 시장 넓히기 작업에 공을 들이는 현지 스타트업 20여 개가 참여했다. 이들은 벤처캐피털 관계자들에게 기술과 경영계획을 설명하며 투자 유치와 정보 교환 작업을 펼쳤다. 현재 피츠버그 지역에서는 로봇과 인공지능(AI) 관련 기업이 70개 이상 활동하고 있다.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인력의 상당수가 CMU 출신이라는 것. ‘동문 기업’이 많은 만큼 각각 다른 배경을 갖춘 인력이 많은 실리콘밸리, 보스턴, 뉴욕, 시애틀 등의 벤처업계보다 네트워킹이 활발하고 협력 수준도 높다는 평가가 많다. 행사 참여 기업 중 하나인 카르타의 케빈 다울링 최고경영자(CEO)는 “실리콘밸리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CMU 출신의 엔지니어와 기업인 중 피츠버그로 돌아와 사업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하루가 다르게 지역의 벤처생태계가 성장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CMU는 올해 9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미국 대학 중 최초로 학부(컴퓨터과학대)에 AI 전공을 개설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로봇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대학답게 AI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잡는 게 목표다. 무어 학장은 “로봇은 물론이고 다른 미래 기술에서도 AI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전공 개설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피츠버그대에서는 생명과학 분야의 창업 활동도 활발하다. 최근 연간 20개 정도의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있다. 이 중 70%가 생명과학 관련 스타트업이다. 이 대학의 창업 및 기술상업화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이노베이션연구소의 에번 파셔 수석디렉터는 “다소 적어 보이지만 정식으로 스핀오프(분사)까지 한 스타트업들만 집계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며 “최근 5년간 스핀오프한 스타트업 중 90%가 생존해 있을 만큼 경쟁력이 우수하다”고 말했다. 피츠버그대는 CMU처럼 컴퓨터과학 전공을 단과대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안팎에서는 피츠버그대가 로봇과 AI 분야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평가가 많다. 또 피츠버그대는 대학의 연구와 창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버려졌던 공장 건물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피츠버그의 변화를 보고 최근 우버, 구글, 바이엘, 필립스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연구개발(R&D) 시설을 늘리고 있다. 특히 우버는 무인자동차 주행 관련 기술을 피츠버그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미국 국방부로부터 연간 8000만 달러, 민간 부문에서 5년간 1억7300만 달러의 자금 지원을 받는 로봇 제조 전문 컨소시엄인 ARM도 지난해 피츠버그에 자리를 잡았다.피츠버그=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한동대 초대 총장을 지낸 김영길 유엔아카데믹임팩트(UNAI) 한국협의회 회장(79)은 대학가에서 교육 철학이 남다른 인물로 꼽힌다. 또 학생교육, 특히 진로교육에 대한 관심이 특별했던 대학 총장으로 인식된다. 한국 대학들이 국내외 평가기관과 언론사의 대학평가를 중시하며 대학의 ‘교수 연구’(통상 대학평가에서 가장 비중이 큰 항목)를 핵심 경쟁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중반 김 회장은 한동대 설립(1995년 개교)을 준비하며 학생교육(대학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 특히 학생들이 한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데 필요한 역량을 길러주는 것을 대학교육의 핵심 덕목으로 삼았다. 한동대가 개교 때부터 학부 중심 대학을 표방하며 △인성 △국제화 △융합전공 관련 교육을 강조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 회장은 2014년 2월 한동대 총장에서 물러난 뒤로도 진로교육을 포함한 대학교육 전반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에도 자신의 교육 철학과 경험을 담은 ‘공부해서 남 주자’란 책을 냈다. 김 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새로운 기술을 강조하는 대학의 진로교육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최근 서울 강남구 UNAI 한국협의회 사무실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변화의 속도와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대학들이 지나치게 기술에 초점을 맞춰 진로교육을 진행하는 것 같다”며 “리더십, 도덕성, 국제 이슈에 대한 이해 같은 펀더멘털(근본적인)한 역량을 종합적으로 키우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말했다.―대학의 진로교육에서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코딩 같은 새로운 첨단기술 관련 역량이 강조되고 있는 현재 분위기와는 너무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4차 산업혁명으로 큰 변화가 오고, 수많은 난제가 발생할 것이란 점뿐이다. 어떤 기술이 얼마나 오랜 기간 파급력을 지닐지는 잘 모른다. 이로 인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새롭게 각광받는 특정 기술에 대한 공부도 중요하지만, 어느 조직, 사회, 상황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펀더멘털한 역량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본다.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인성과 능력을 동시에 지닌 인재가 환영받는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지 않나.”―펀더멘털한 역량을 강조하는 진로교육은 어떤 것인가. “21세기는 국경 없는 시대다. 그런 점에서 글로벌 감각과 지식은 필수다. 하지만 ‘영어 능력=국제화 수준’으로 보는 단순 접근법은 버려야 한다. 외국어는 기본이고, △경제 △환경 △정치 △문화 등의 분야에서 국제사회가 미래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내가 속한 나라(한국)와 주변(동북아)을 넘어서서 생각하고, 활동할 수 있는 마인드와 역량을 길러야 한다. 이제 한국에서도 ‘G2(주요 2개국·미국과 중국)’는 물론이고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중남미 같은 개발도상국의 주요 이슈와 관련한 지식을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교육을 받는다면 △정부 △글로벌 기업 △국제기구 △비정부기구(NGO) 중 어디에 진출해도, 또 세계 어느 지역에 나가서도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추는 것이다. 그동안 대학교육에선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인성교육, 즉 △정직성 △책임감 △리더십 등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도 고민해야 한다.”―대학에서 인성교육에 공을 들인다는 게 약간 어색하다. “2008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던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보라. 탐욕에 눈이 먼 글로벌 금융 엘리트들이 초래한 재앙 아닌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비롯한 많은 경영대학원도 이 부분에 대해 반성하고 윤리교육을 강화하는 추세다. 갈수록 사람보다 기술에 더 관심을 가지고 지나치게 성과 위주의 사고를 하는 분위기도 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성교육을 대학에서도 신경 써야 한다. 내가 엔지니어와 공대 교수로 활동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술이 중요하지만 근본 혹은 핵심 역량은 아니다. 특히 국제적으로, 또 리더로 활동하겠다는 목표를 지닌 인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주장하는 방향의 진로교육을 추진하려면 대학교육이 정말 크게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맞다.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매사추세츠공대(MIT) 같은 세계 최고의 대학들도 자체 연구와 평가를 통해 학부교육이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용어와 표현은 다소 다르지만 그들도 펀더멘털한 역량을 강조하고,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나. “한동대 총장으로 활동할 때부터 지금 언급한 내용들을 이른바 ‘세계시민교육’이란 명칭 아래 강조해 왔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한동대가 가장 일찍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할 만하다. 그동안 꾸준히 관련 교양과목을 운영해 왔고, 2019년 3월부터는 아예 세계시민교육을 부전공으로 정식 개설할 예정이다. 또 베트남과 캄보디아같이 한동대가 개교했을 때부터 지원해온 개도국 대학들에도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전수할 계획이다. 한동대 내에 정식 조직으로 내년에 문을 열 예정인 ‘반기문 UNAI 글로벌 교육원(Ban Ki-moon Global Education Institute in Support of UNAI·BKM GEI)’에서 더욱 체계적으로 세계시민교육과 관련된 교육 및 연구를 진행해 나갈 것이다.”―반기문 글로벌교육원에 대해 좀더 설명해 달라. “세계시민교육을 대학 안팎에서 교육할 수 있는 문화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기관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명예원장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국제적인 감각, 실무능력,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갖춘 교수들을 뽑고,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원 과정도 만들 계획이다. 이를 통해 한동대는 물론이고 대학가 전반에 걸쳐 세계시민교육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다. 훗날, 한국에서 세계시민교육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싶다. 또 대학의 진로교육에서 중요한 가치를 제대로 짚었다는 평가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대학의 시스템 못지않게 진로교육을 바라보는 교수들의 관점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많은 대학에서 교수들이 진로교육 나아가 학생교육에 공을 들이기 힘든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각종 국제평가에서 순위를 높이려면 무엇보다 교수 연구를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은 교육기관이지 연구만 하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 교육 전반, 특히 학생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진로교육에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진로교육이 이뤄지려면 교수들이 전공교육은 물론이고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의 목표, 적성, 역량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필요한 조언과 지도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 전공 분야에서는 물론이고 인생에서도 ‘학생의 멘토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진 교수가 많아져야 하는 것이다. 한동대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대학에서 교수들이 열정적으로 학생교육과 진로교육에 나서는 문화를 만들려고 노력해 왔다.”―현직에 있을 때도 연구보다 학생교육에서 더 보람을 느꼈었나.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각각 엔지니어와 교수로 활동했다. 연구 성과도 많았고, 이로 인한 보람도 컸다. 하지만 돌이켜볼 때 역시 가장 보람이 컸을 때는 학생의 잠재력을 키워주고, 그 학생이 사회에 나가서 자기 몫을 하는 모습을 볼 때였다. 그래서 커리어 대부분을 연구 중심 기관에서 활동했음에도 한동대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는 연구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더 강조했던 것이다.”―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은 학생 혹은 자식을 국제적으로 키우고 싶은 학부모들에게 조언을 하다면… “여름방학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학원과 해외 영어캠프에 간다. 또 세계적인 관광지와 휴양지로도 여행을 다닌다. 하지만 기회와 여건이 된다면 개도국에 대한 관심을 키우고, 여행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개도국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미국, 중국, 유럽, 일본 같은 선진국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감각과 지식은 이제 한국에서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개도국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체험을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키우고, 책임감, 겸손함,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덕목을 기르는 데는 개도국 여행과 공부가 더 의미 있다고 본다. 한국도 이제 국제사회에 기여해야 할 때가 됐고, 개도국도 한국에 관심이 많지 않은가. 바꿔 말하면, 글로벌 무대에 진출하는 우리 인재들이 새로운 것을 얻기도 쉽고, 또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 주기도 좋은 곳이 개도국이란 뜻이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예멘 내전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는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3·사진)가 꼽힌다. 이른바 ‘MbS’로 불리는 무함마드 왕세자는 국방장관 시절이던 2015년 3월 예멘 내전 개입을 결정한 인물이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사우디 정부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사우디 안팎에선 ‘예멘 내전에서 사우디가 얻은 성과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는 예멘 내전에 여전히 강경한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4월 28일부터 이달 13일까지 외부 행사에 나타나지 않고, 현지 언론에서도 모습이 사라져 일각에선 ‘궁중 쿠데타’ 혹은 ‘암살’ 의혹도 제기됐다. 사우디의 보수 기득권층에선 무함마드 왕세자가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대규모 반대파 숙청 작업으로 인해 불만이 큰 상태. 그러나 무함마드 왕세자는 14일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전(러시아-사우디 경기)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경기를 관람해 의혹을 불식시켰다. 연로한 아버지로부터 조만간 왕권을 승계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예멘 내전을 비롯해 카타르 단교 사태와 대(對)이란 강경 조치 같은 외교 현안은 상당한 부담이다. 자신이 직접 결정한 사안들이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도 없고, 해결책도 마땅치 않기 때문. 여성 운전 참여 허용, 탈석유화 산업 정책, 대규모 국토 개발, 국가 브랜드 강화 같은 경제·사회 개혁 정책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젊고 혈기왕성한 성향이 사우디 내부의 개혁 엔진을 가동하는 데는 긍정적이지만, 신중함과 안정성이 핵심 덕목인 외교안보 이슈를 처리하는 데는 계속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도 많다. 현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도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국왕은 국정 운영을 사실상 무함마드 왕세자에게 모두 맡겨 놓은 상태”라며 “결국 무함마드 왕세자가 전략을 수정하기 전에는 (예멘 내전 등 외교 현안에서) 특별한 변화가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제주 지역 예멘 난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한 가운데 ‘세계 난민의 날’인 20일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인 배우 정우성이 인스타그램에 “난민과 함께해 달라”는 글을 올리자 누리꾼들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일부 누리꾼은 “난민 받고 이제 북한까지 떠안아야 하는데 그 돈 다 어디서 나오느냐” “네가 데리고 살아라”라고 공격했다. 약 1000명의 무슬림 난민에 의한 ‘2016년 독일 쾰른 집단 성폭력·강도 사건’ 관련 글을 퍼 나르기도 했다. 이에 “우리도 6·25전쟁 겪고 엄청 지원받았다. 올챙이 시절을 모르느냐”는 반박이 나오는 등 논란이 이어졌다. 법무부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 따르면 올 들어 제주 지역에 무사증(무비자)으로 입국한 예멘인은 모두 561명. 이 가운데 54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이 중 일부는 귀국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나갔으며 현재 486명이 제주에 체류하고 있다. 한국과는 별 연결고리가 없는 중동의 먼 나라가 어쩌다 난민 문제로 우리와 얽히게 됐을까? ○ 생지옥으로 변한 ‘예멘의 비극’ 예멘 내전은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아랍국가 국민들의 독재 반대 움직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33년간 예멘을 이끌던 알리 압둘라 살레 전 대통령(물러난 뒤 후티 반군과 손을 잡았다 내부 분열로 지난해 12월 살해됨)이 2012년 2월 권좌에서 내려온 뒤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예멘 국토는 △이슬람교 수니파인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 △자이드파(시아파의 분파)인 후티 반군 △수니파 급진주의 무장단체인 알카에다 추종 세력이 각각 장악한 지역으로 국토가 ‘3등분’됐다. 특히 예멘 내전은 2014년 8월 후티 반군이 수니파인 정부군과 대대적으로 충돌하고, 이듬해 1월 반군이 수도 사나의 대통령궁을 점령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또 본격적인 ‘국제전’ 내지 ‘대리전’ 양상도 띠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 간 충돌이 내전의 중요 축이지만, 중동의 패권 경쟁국인 사우디아라비아(정부군 지원)와 이란(반군 지원)의 개입이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2015년 3월부터 공군력을 대거 동원해 반군 점령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에 나서고 있다. 또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수단 같은 수니파 동맹국들과 함께 ‘아랍연합군’을 구성해 이들 나라의 지상군 투입도 독려하고 있다. 반면 이란은 무기와 자금을 대규모로 반군에 지원하는 형태로 맞서고 있다. 내전의 골이 깊어지며 원시림, 오아시스, 사막, 바다 등을 모두 갖추고 있어 아라비아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나라로 꼽혔던 예멘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유엔 등은 2015년 3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예멘 내전으로 최대 1만3600여 명이 사망했고, 약 19만 명이 예멘을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에는 콜레라 창궐로 약 90만 명이 감염됐고, 2800만여 명의 인구 중 약 70%인 2000만 명에게 긴급 식량 지원이 필요하다는 분석도 나왔다. 최근에는 아랍연합군이 국제 구호물자와 수입품의 70∼80%가 들어오는 호데이다항을 탈환하고, 이 지역에 대한 통제와 공습을 강화하고 있다. 이로 인해 후티 반군은 물론이고 일반 예멘인들에 대한 식량과 의약품 공급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참상에 비해 예멘의 비극은 국제사회에 덜 알려진 편이다. 정부군, 반군,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 등 ‘3개 정파’로 나뉘어 전 국토가 역시 전쟁터로 변했던 시리아의 경우 국민들이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유럽 지역으로 이동하는 게 용이해 참상이 쉽게 알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예멘은 사우디와 오만의 사막 지역과 바다(아덴만과 홍해)로 둘러싸여 있어 ‘탈출’ 자체가 어렵다. 예멘과 인접한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들과 예멘인들이 배를 타고 이동한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의 난민 보호 의지도 유럽에 비해 약하다. 서울에 주재하는 한 중동 외교관은 “제주에 온 예멘 난민들은 유럽, 중동, 동남아 어디에도 머무를 수 없어 온 이들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사우디와 이란 모두 포기하기 힘든 예멘 “현재로선 사태 해결 방법이 딱히 안 보인다.” 중동 전문가들과 외교가 관계자들은 예멘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사우디와 이란 모두 예멘 내전 개입을 포기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수니파의 맹주이며 동시에 아랍권 대표주자 격인 사우디와 페르시아의 후예로 시아파의 대표국인 이란은 오랜 기간 동안 중동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해 왔다. 두 나라는 주변국에서 각각 자신의 종파를 믿는 정치 혹은 무장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키워 왔다. 특히 최근에는 이란의 적극적인 영향력 확대 움직임이 눈에 띈다. 이란은 중동에 대한 과감한 개입을 지양했던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같이 시아파 인구가 다수거나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인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정세가 불안한 이 나라들의 정권 혹은 시아파나 친이란계 무장단체와 정치단체에 자금, 자원, 무기 등을 공급했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선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IS를 퇴치하기 위해 자금과 무기 공급은 물론이고 직접 군대를 보내고 현지 민병대 등을 지원해 대규모 군사 작전까지 벌였다. 레바논에선 남부 지역을 거점으로 대(對)이스라엘 무장 투쟁을 펼치는 시아파계 무장정파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다. 그 결과 중동 외교가에선 ‘이란이 시아파 초승달 벨트(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이란 중심의 동맹 체제)를 상당히 진전시켰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우디 입장에서는 북동쪽으로 직접 국경이 맞닿아 있는 이라크와 소국(小國) 요르단을 넘어 북쪽에 위치해 있는 시리아와 레바논에서 이란의 입김이 커진 데 이어, 남쪽의 예멘에서도 이란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자국 내 원유와 담수화 관련 시설이 밀집해 있고 이란과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동부 지역에 전통적으로 시아파 인구가 많다는 것도 사우디에는 큰 부담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예멘에서도 이란의 영향력이 커지면 사우디는 유사 사태가 발생할 경우 사실상 봉쇄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사우디로선 예멘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고, 국제사회의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강경한 조치를 취해 자국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부티,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같은 동아프리카의 관문 격인 국가들과 인접해 있다는 것도 이란과 사우디가 예멘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다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오바마 전 대통령 시절 체결된 이란과의 핵 합의를 깨고, 이란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건 변수다. 이런 상황에선 이란이 예멘 내전을 비롯한 지역 영향력 확대 움직임에 공을 들이는 게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 무기 문제도 불거지나 예멘 내전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무기 수출 문제도 부각될 수 있다. 이란과 긴밀한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해 온 북한의 무기와 관련 기술이 후티 반군에 흘러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2월 미국의소리(VOA)는 후티 반군이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단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늘렸고, 이를 사우디 본토를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유엔 안보리 산하 ‘2140 예멘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은 지난해 7월 북한산 미사일과 기관총의 반군 유입도 주장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반군들은 북한의 ‘73식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다. 또 ‘화성 5호 미사일’의 복제본인 ‘스커드-B 미사일’도 최소 90기가 공급됐다. 후티 반군은 지난해부터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국제공항 등 주요 시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늘리고 있다. 향후 UAE 등 사우디의 주요 동맹국의 원전과 원유 생산시설 등을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이 북한과 핵, 미사일 개발 문제 해결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한산 무기의 이란 등 중동지역 공급에 대해서도 지적할 수 있다”며 “북한이 핵과 미사일 문제를 원활히 해결하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한 의지를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이세형 turtle@donga.com / 제주=임재영 기자}

《“즈드라스트 비체.” 러시아어로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이 말은 2018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14일 오후 서울 중구 광희동(서울 지하철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8번 출구 근처) 골목길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였다. 러시아와 이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중앙아시아 국가(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출신들이 운영하는 음식점, 슈퍼마켓, 상점 등이 밀집해 있는 이곳은 ‘서울 안의 실크로드’ 혹은 ‘동대문 실크로드’로 불린다. 현재 이 지역은 한국에 살거나 관광 온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인들이 ‘고향의 맛’을 느끼기 위해 찾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와 우사단로 한국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 일대의 ‘아랍거리’만큼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장소는 아니다. 광희동에서 러시아식 빵집 겸 식료품점인 ‘메도비크’를 운영하는 조차관 사장은 “최근 가게를 찾는 한국 손님들이 늘었고, 방문 문의 전화도 많이 온다”며 “러시아 월드컵을 계기로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 같다”고 말했다. 러시아 교육문화센터인 ‘뿌쉬낀하우스’를 운영하는 김선명 원장은 “문학, 음악, 과학 같은 분야에서 러시아의 위상이 높고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너무 부족했다”며 “서울 안에도 러시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장소가 꽤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일반인들도 비교적 쉽게 러시아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 안의 ‘러시아 거리’ 광희동 광희동은 서울에서 가장 쉽고, 생동감 있게 러시아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꼽힌다. 또 가장 평범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날 빵집과 음식점 안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러시아 월드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메도비크에서 러시아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는 둥근 빵인 ‘리표스카’와 양고기와 소고기를 넣어 만든 빵인 ‘삼사’를 산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세바라 씨는 “고향에서 가까운 러시아에서 월드컵이 열리니 평소보다 더욱 관심이 가는 게 사실”이라며 “러시아와 한국 모두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골목길 안쪽 식당에서는 직접 화덕에서 리표스카와 삼사를 굽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 때는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골목길 안에 확 퍼진다. 일부 식당에서는 전통 의상을 입은 채 빵을 굽고, 음식을 하는 셰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더욱 이국적인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갓 구운 빵을 사려고 빵집과 식당을 찾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동네 식당에서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식 양꼬치인 ‘샤실리크’와 물만두 같은 음식인 ‘펠메니’도 쉽게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 14년간 거주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토히로프 샤리요르 사장은 “월드컵 기간이라 러시아 사람은 물론이고 우즈베키스탄 같은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더욱 많이 식당을 찾아 식사 또는 술을 즐기며 축구를 볼 것 같다”며 “월드컵 기간 중에는 평소보다 빵을 더 많이 구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관광 온 러시아인인 율리야 스타셴코 씨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러시아의 맛을 접할 수 있는 식당과 빵집들이 꽤 많다는 게 신기하다”면서 “일본 도쿄를 여행했을 때는 러시아 음식점과 빵집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며 웃었다. 러시아 빵과 음식을 처음 접하는 한국인들 중에서는 ‘향신료 냄새가 다소 강하게 난다’ 혹은 ‘느끼하다’는 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다. 샤리요르 사장은 “처음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접하는 한국인들도 콜라나 맥주를 곁들이면 대부분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인다”며 “갈수록 한국인 고객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덕수궁과 정동의 러시아 건축물 러시아와 관련된 오래된 건축물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다. 서울 도심의 나들이 혹은 데이트 코스 중 하나로 꼽히는 덕수궁이 바로 그곳. 조선 고종 황제가 다과회를 열고 음악을 감상했던 휴식처인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은 러시아 건축가인 세르진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졌다(많은 역사와 건축 전문가들이 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보지만 실제 이를 증명해 주는 물증이 없는 상태). 1900년 지어진 정관헌은 궁궐 내 세워진 첫 서양식 건물이다. 또 정면과 좌우 측면에 화려한 느낌이 나는 발코니를 만들었고, 붉은색 벽돌을 사용해 지금 봐도 이국적인 느낌을 듬뿍 담고 있다. 그러나 난간과 기둥머리 부분의 문양에는 한국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김 원장은 “사바틴은 뛰어난 건축가이기 이전에 고종의 큰 신임을 받은 인물이라 조선 황실의 중요한 건물들을 설계했을 것으로 보인다”며 “사바틴 자신도 조선에 대한 애착과 관심이 컸던 인물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광화문 일대 직장인들의 가벼운 산책 및 휴식 코스로 인기가 있는 정동근린공원도 러시아와 관련이 있다. 명성황후 시해 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조선의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흔적이 남아 있다. 6·25전쟁 때 건물에 폭탄이 떨어져 지금은 러시아 공사관 건물의 일부만 남아 있다. 그래도 러시아풍의 건물 양식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조선 황제의 서재로 지어진 중명전(重明殿) 역시 사바틴과 연관이 있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서울 중구 정동극장 뒤편에 있는 중명전은 붉은색 벽돌, 발코니, 기둥이 어우러져 있는 서양식 건물이다. 중명전은 1899년 1층 건물로 세워졌고, 미국인 건축가인 J H 다이가 설계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화재 후 2층 건물로 새로 지어질 때 사바틴이 설계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고종은 1904년부터 1907년 강제 퇴위당할 때까지 중명전에서 살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과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같은 역사적 사건도 이 건물에서 이뤄졌다.○ 푸시킨과 차이콥스키 동상 러시아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있다면 러시아에서 국민시인으로 인정받는 푸시킨과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표트르 차이콥스키 동상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서울 중구 롯데호텔 앞에 있는 푸시킨 동상은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산학 협의체인 한러대화가 주도해 2013년 설치했다. 현재 이 동상은 두 나라의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꼽힌다. 실제로 그해 11월에 열린 제막식에는 당시 한국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참석했을 만큼 러시아에서 관심이 높았다. 푸시킨 동상은 현재도 한국을 방문하는 러시아인들이 자주 들르는 장소 중 하나로 꼽힌다. 동상 앞에는 생화를 가져다 놓는 ‘러시아식’ 추모와 기념 모습도 볼 수 있다. 한러대화는 지난해 한국의 대표 문학가인 고 박경리 선생의 동상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세웠다. 러시아 측은 푸시킨 동상이 한국에 세워졌을 때처럼 공식 제막식은 문재인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달 21∼23일)에 맞춰 열 예정이다. 제막식에는 한국 정부를 대표해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참석한다. 차이콥스키 동상은 서울 강북구 서울사이버대 캠퍼스에 있다. ‘예술의전당’과 ‘국립발레단’ 이사장을 지낸 이세웅 서울사이버대 명예이사장은 러시아 문화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다. 이 동상은 차이콥스키의 실물 크기 동상 중 아시아에서는 처음 세워졌다. 러시아 국립 차이콥스키음악원에 있는 동상과 동일한 형태이며 서울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박상규 공간미술 대표가 제작을 맡았다. 국립과천과학관에서도 러시아의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여행을 한 유리 가가린 흉상이 전시돼 있다. 이 흉상은 올해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설치됐다. 올해는 한국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 씨가 러시아의 우주인 프로그램을 통해 우주를 다녀온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 2020년은 수교 30주년 일각에선 러시아 월드컵과 수교 30주년(2020년)이 연달아 다가오는 것을 계기로 좀 더 체계적인 ‘러시아 알기’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 중 하나인 러시아는 한국과 오랜 역사적 관계를 맺어왔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나름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로 꼽힌다. 하지만 한국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먼 나라다. 지난해 일본과 중국을 찾은 한국인 관광객 수는 각각 714만여 명과 452만여 명에 이르지만 러시아는 21만여 명(3분기까지)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이미지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한반도 북부(북한)의 공산화, 아관파천, 냉전 등 한국사의 어두운 페이지에 러시아가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이유다. 김 원장은 “러시아는 여러 면에서 한국이 제대로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라며 “한-러 합작 영화 제작이나 한국과 관련 있는 러시아 인물 탐구 등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프로젝트들이 수교 30주년을 계기로 추진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앞두고 자기 계발이나 취미 생활을 준비 중인 직장인이 늘어나고 있다. 일시적으로 주어진 여유가 아니라 법적으로 보장된 여유인 만큼 자신이 확실히 좋아하는 활동에 계획적으로 시간을 투자하려는 것이다. 반면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급여 축소로 여가를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것이라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여기에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란 정부 예측과 달리 신규 고용을 검토 중인 기업은 많지 않아 산업 경쟁력만 훼손시킬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여유 시간을 발전의 계기로 정보기술(IT) 관련 대기업에 다니는 최인제 씨(41)는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식으로 시작되면 ‘북한 스터디 모임’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다. 평소에도 북한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데다 최근 남북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면서 체계적으로 북한 관련 공부를 해둘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최 씨는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는 비슷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며 “현 시스템대로라면 주말에만 모임이 가능하겠지만 앞으로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 평일에도 모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김석철 씨(55)는 은퇴 후를 고려해 공인중개사 자격시험 강의를 듣고 있다. 김 씨는 “회사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지만 근로시간이 줄어들면 퇴근 후 공부할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며 “7월 이후 학원에 다니려고 알아보는 동료가 많다”고 전했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늘어난 여가 시간을 자기 계발용으로 활용하는 직장인이 늘어나면서 외국어나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학원, 헬스클럽, 백화점 문화센터 등은 ‘특수(特需)’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다. 특히 학원시장은 직장인 수강생이 대거 몰리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하고 온라인 강좌를 강화하는 등 대응책 마련에 부산한 모습이다. 자격증 시험 전문학원 에듀윌 측은 “올해 들어 학원 야간반과 온라인 수강 문의가 지난해에 비해 약 30% 늘었다”며 “향후 근로시간 단축이 확대되면 이 시장은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취미-봉사활동 활발해질 듯” 건설회사 관리업무팀에서 근무하는 윤모 씨(40)는 최근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프라모델 판매 온라인 사이트를 검색한다. 프라모델 도색용 페인트는 이미 구입했다. 또 자유롭게 미술·공작 활동을 할 수 있는 공방에도 등록했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 ‘저녁 있는 삶’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윤 씨는 “대략 일주일에 두 차례 정도 퇴근 뒤 두세 시간씩 공방에서 프라모델을 조립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사회봉사 활동을 계획하는 직장인도 늘고 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백모 씨(42)는 일주일에 한 차례 저소득층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영어 공부 도우미 역할을 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 백 씨는 “어려운 여건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해외여행도 못 가고, 학교 밖에서는 제대로 영어 공부를 하기 어렵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다”며 “나이가 들면 꼭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봉사활동을 하려고 했는데, 지금이 시작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 이른바 직장인들 사이에서 ‘소확행’ 현상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작지만 분명한 자기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취미와 사회봉사 활동에 나서는 직장인이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지적도 일부 직장인은 주 52시간 근로제가 오히려 근무 환경을 더 열악하게 바꿀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공식적인 근무시간은 짧아지지만 업무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시각도 많다. 제약사에 근무하는 회사원 이모 씨(39)는 “회사가 파격적으로 인원을 더 채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업무 부담은 더 커질 것”이라며 “퇴근한 뒤 집에서 숙제하듯 일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직장인들 사이에선 근무시간 단축으로 임금이 줄어들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투잡(two job)족’이 늘어날 수 있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이세형 turtle@donga.com·황태훈 기자}

《“북한에 매장된 광물자원의 잠재가치는 3000조 원이 넘을 것이다.” “북한 비핵화(통일) 비용으로 2100조 원이 들 것이다.” 6월 12일로 예고된 ‘핵 담판’을 앞두고 북-미 간 힘겨루기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국민 사이에선 ‘금단의 땅’이 열리면 각종 희귀광물 개발, 부동산 투자, 관광시장 개방 등 노다지를 캘 수 있을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와 북한의 핵 포기 대가로 국제사회와 더불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만 할 것이라는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이런 수치들은 어떻게 나왔는지, 구체적인 근거는 있는지 다각도로 짚어본다.》 ● 北에 매장된 지하자원 가치는?“北광물자원 3200조원”… 품질-발굴비용 미지수“아름다운 조합이다. 남쪽(한국)은 기술, 노하우, 제조 능력을 가지고 있고 북쪽(북한)은 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흥국 투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투자전문가 마크 모비우스는 15일(현지 시간) 미국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할 수만 있다면 북한에 돈을 투입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북한 광물자원의 잠재가치(전체적인 광물자원 규모에 시가를 대입해 나온 금액)가 약 3200조 원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었다. 한국광물자원공사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 때 더불어민주당 어기구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다. 이게 맞는다면 한국의 14배 정도 되는 수준이다. 통계청의 ‘2017년 주요 광물자원 현황’에 따르면 북한에는 △무연탄 45억 t(한국 3억8000만 t) △금 2000t(한국 44.8t) △마그네사이트 60억 t(한국 없음) △철광석 50억 t(한국 4000만 t) △동 290만 t(한국 5만800t) △아연 2110만 t(한국 46만900t)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한국이 10대 중점 확보 희소금속으로 지정한 텅스텐, 몰리브덴, 희토류도 다량 매장돼 있다는 것이 광물업계에서 나오는 얘기다. 마그네사이트의 경우 세계 1∼3위권, 철광석 금 동 아연 등은 세계 10위권 이내에 들 정도라는 것이다. 강천구 전 한국광물자원공사 개발지원본부장은 “석유와 가스 매장설도 꾸준히 나오고 제대로 파악이 안 된 광물자원까지 감안할 경우 잠재가치는 더 커질 수 있다”며 “세계적으로 광물자원 확보 전략을 펼치는 중국의 개발업체가 80개 이상 북한에 들어가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 광물자원 시장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 반박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현재 나온 수치가 북한 광물자원의 품질과 발굴·가공·유통 비용 등을 제대로 측정하지 않았다는 것. 무턱대고 투자와 개발에만 ‘올인’할 경우 제2, 3의 해외자원 개발 실패 사례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최경수 북한자원연구소장은 “광물자원의 질, 광산 개발과 유통에 들어가는 비용 등을 정확히 산출한 ‘경제가치’를 측정하기 전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북한의 교통과 산업 인프라가 워낙 뒤떨어져 있고 지형도 험한 산악이 많은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석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평지에서 쉽게 채굴(채취)할 수 있는 지형과 이미 오래전부터 체계적인 인프라를 갖춘 기존의 광물자원 수출 강국과 북한이 경쟁하는 건 쉽지 않다”며 “광물자원이 북한 경제를 일으키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은 되겠지만 지속 가능한 동력이 되는 건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 광물자원의 경제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부터 체계적으로 추진해야 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남북 간 광물자원 관련 협력이 일부 추진됐지만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이른바 ‘5·24조치’가 취해졌고, 그 뒤에는 사실상 모든 협력이 중단됐다. 일각에선 북한 광물자원을 주로 개발하고 수입하는 중국이 향후 채굴권을 모두 장악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강 전 본부장은 “과거 북한과 자원개발 협력을 놓고 접촉했을 때도 이 문제를 논의했다”며 “당시 북한 측에선 ‘중국에 모든 것을 주지 않았고 언제든 개발권을 회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 평화-비핵화에 드는 돈은?50조∼4822조원까지… 통일비용 추산 편차 커2100조 원, 2316조∼4822조 원, 50조∼670조 원…. 통일 비용 혹은 북한 비핵화 비용을 놓고 난무하는 숫자들이다. 워낙 액수가 어마어마하면서도 편차가 커 각각 어떤 근거로 산출된 것인지, 의미 있는 분석인지를 놓고 논란도 분분하다. 논란에 불을 지핀 건 최근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의 보도다. 블룸버그를 그대로 인용한 이 기사의 제목은 ‘Peace in North Korea Could Cost 2Trillion Dollar If History Is a Guide’. 북한 비핵화에 따른 한반도 평화 비용은 10년간 2조 달러(약 2100조 원) 정도 될 것으로 추산된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블룸버그는 영국 투자회사 ‘유라이즌SLJ캐피털(유라이즌)’의 분석을 인용해 이같이 전했다. 유라이즌은 독일 통일 당시 비용의 현재 가치(1조7000억 유로), 북한의 인구 규모와 개발 단계 등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또 이를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등이 분담할 경우 한국의 향후 10년간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18.3%로 추산된다는 것. 이 기사는 “통일을 가정한 분석”이라고도 했지만 △평화 유지 △비핵화 △통일 등 비용이 들어가는 상황을 혼재해 사용했다. 유라이즌도 “핵무기를 가지고 한 위협을 고려해 볼 때 김정은은 비핵화의 대가로 세계에 큰 경제적 지원을 요구할 위치에 있다”면서도 “우리는 북한이 이런 대규모 경제 지원을 요구한다거나, 요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고 했다. 유라이즌의 주 사업 분야는 자산관리와 투자자문 등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번 논란을 놓고 “북한 핵 포기 비용, 궁극적으로 통일 비용 산출이 얼마나 어렵고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는 평가가 나온다. 장형수 한양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북한 경제는 워낙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수치에 일희일비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실제 2015년 국회예산정책처가 발표한 통일 비용 산출만 해도 상황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예산정책처는 당시 기준으로 북한이 전면 개방을 선택하고, 한국과 국제사회가 대대적으로 북한에 투자해 2026년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의 소득 수준이 한국의 66% 정도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리고 그해부터 2060년까지 2316조 원(연평균 68조 원)의 통일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했다. 반면 남북 교류가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 2026년 통일이 되면 2076년까지 4822조 원(연평균 96조 원)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미 랜드연구소도 2005년 한국의 통일 비용을 최소 50조 원, 최대 670조 원으로 전망했을 만큼 편차가 크다. 실제 북한의 인프라 조성만 놓고 보더라도 자금 조달 방식에 따라 국민 부담이 달라질 수 있다. 가령 금융위원회는 2014년 북한의 철도·도로·통신·전력·항만 인프라 개발에 약 150조 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중 회수 가능성이 없는 ‘비용’과 직·간접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투자 성격의 돈이 얼마인지를 나눠봐야 한다는 것.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통일 비용 관련 연구에서 비용과 투자를 구분하는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북한 경제의 장기적인 로드맵을 그리고, 재정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강화하려면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최근 남북, 북-미 관계가 개선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집짓기 활동을 꼭 진행해보고 싶습니다.”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집 지어주기 활동을 펼치는 비영리단체인 국제해비타트의 론 터윌리거 명예이사장(77·사진)은 14일 서울 용산구 그랜드하얏트서울에서 가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미국의 부동산 기업인 ‘트래멀 크로’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터윌리거 명예이사장은 국제해비타트 역사상 가장 많은 돈(1억 달러·약 1080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최근 아시아 지역 개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터윌리거 명예이사장은 “해비타트의 집짓기 활동은 북한의 주거 수준을 크게 개선시킬 수 있고,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며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북한에서 집짓기 활동을 진행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사람이 이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터윌리거 명예이사장은 유명 자선사업가 중 유독 ‘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인물로 꼽힌다. 부동산 전문가라는 직업과 어린 시절의 경험 덕분이다. 그는 “많은 자선 활동이 교육과 보건의료 분야 지원에 너무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쉽다”며 “부동산 사업을 하며 집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 경제적 안정성을 주는지 늘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해비타트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 자신도 어린 시절에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따뜻하고 안전한 집이 있었기 때문에 가족 모두 화목하게 살며 꿈을 키울 수 있었다”며 “자선 사업에 관심이 많은 실리콘밸리와 월스트리트의 기업인들에게도 기회가 되면 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국 등 비교적 최근에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부자들의 재산 상속’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터윌리거 명예이사장은 “자식들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에 대한 배려와 나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며 “내 재산의 약 8분의 1만 가족에게 주고, 나머지는 모두 기부하기로 했고, 가족도 모두 동의한 상태”라고 말했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친인척 보좌관·직원 채용 제한’, ‘국회의원 민방위 편성 대상 포함’…. 제20대 국회의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활동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일부 항목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국민들의 지탄을 많이 받아온 국회의원들의 친인척 채용을 제한하는 조치는 비교적 체계적인 규정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개정된 ‘국회의원 수당 등에 관한 법률’과 ‘국회의원 윤리실천 규범’에 따르면 보좌관과 직원을 채용할 때 국회의원의 4촌 이내 혈족과 인척에 대해선 임용을 제한하기로 했다. 5∼8촌 친인척에 대해선 임용 시 신고하도록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국회의원에 대한 징계와 채용된 친인척의 퇴직도 의무화했다. 여당 중진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가뜩이나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한 사회 현실에서 친척 잘 둔 덕분에 좋은 직장인 국회에 들어오게 되는 것을 국민 여론이 용납하겠느냐”며 “앞으로는 스펙과 능력을 갖춘 5∼8촌 친인척 채용도 쉽지 않을 것이란 분위기가 강하다”고 말했다. 국회의원들에게 주어지는 크고 작은 ‘생활 혜택’도 일부 폐지됐다. 대표적인 예로는 민방위 훈련을 면제해 주고, 군 골프장을 이용할 때 회원 대우를 해줬던 게 꼽힌다. 국회의원들의 해외 방문 의전의 경우 일단 ‘국회의원 공무 국외여행 시 재외공관 업무 협조지침’에서 공항 마중, 환송, 안내, 교통, 편의 제공 등의 의무 규정 내용을 삭제했다. 그러나 국회 관계자는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방탄 국회’ 논란을 자주 불러온 국회의원들의 과도한 불체포 특권을 줄이는 조치도 시행됐다. ‘국회법’을 개정해 국회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본회의 보고 뒤 72시간 이내에 표결되지 않을 경우, 이를 다음에 개최하는 첫 본회의에선 상정·표결토록 했다. 국회 본회의장 및 예결특위 회의장의 ‘의원 출입문’을 ‘정문’으로, ‘의원식당’이란 명칭이 붙은 식당명에서 ‘의원’을 뺀 것도 소소한 특권 줄이기로 여겨진다. 일각에선 국회가 특권 내려놓기와 관련해 여론을 의식해 ‘보여주기식’ 항목을 일부 성과로 과도하게 포장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의원의 특권으로 분류하기조차 민망한 ‘보좌직원 보수 유용 금지’와 ‘의원실 인턴의 기본급 인상’ 같은 항목을 특권 내려놓기의 성과로 분류한 것이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1 한국 국회의원들의 봉급(세비)은 1인당 국민소득의 5.18배 정도(2013년 기준) 된다. 주요 국가 중 이탈리아(9.34배)와 일본(6.57배) 다음으로 많은 수준. 미국(3.99배), 프랑스(3.62배), 독일(3.35배) 등 이른바 ‘선진국’에 비해서도 높다. 하지만 국회의원 봉급에서 과세 항목인 ‘보수’는 늘리고, 비과세 대상인 ‘수당’은 줄여 국회의원들의 세후소득을 약 15% 줄이려는 ‘국회의원의 보수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제정은 국회에서 심사 중이다.#2 국회의원들이 막말, 명예훼손, 허위 사실 유포 등을 했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한 ‘모욕행위에 대한 국회 내부 윤리심사 강화 및 명확하고 구체적인 윤리심사 기준 마련’ 작업도 여전히 국회에서 심사 중이다. 국회의원의 과도한 ‘면책 특권 남용’을 막고 책임의식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 우세하지만 이를 제도화하려는 국회의 노력은 뜨뜻미지근한 것이다. 국회의원은 ‘선출된 귀족’으로 불린다. 세습 귀족 못지않게 특권이 많다. 그러나 20대 국회가 임기(2016년 5월 30일∼2020년 5월 29일) 시작 때부터 강조해 온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작업은 임기 전반기 종료(2018년 5월 30일)를 앞둔 11일 현재 크게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임기 시작 직후인 2016년 7∼10월 의장 직속으로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추진위원회’(위원장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까지 구성해 구체적인 특권 관련 항목과 개선 방안을 연구했다. 특히 위원회는 국회의원들의 높은 임금 등 ‘돈’과 관련된 특권 줄이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회 사무처의 최근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대 국회가 특권으로 분류해 이른바 ‘내려놓기’를 추진한 항목은 총 29건. 이 중 조금이라도 개선이 이뤄진 건 절반에도 못 미치는 14건에 불과했다(표 참조). 분과위원으로 참여했던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정치학)는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클 때는 국회도 특권을 줄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결국 스스로 자기 개혁에 나서는 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말했다.○ 속도 안 나는 ‘돈’ 관련 특권 줄이기 국회의원들의 특권 줄이기와 관련해서 개선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항목에는 ‘돈’과 관련된 게 적지 않다. 국회의원들의 주머니에 들어가는 돈을 줄이거나, 투명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회의원 보수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 제정 못지않게 개선이 안 되고 있는 사항 중 하나로는 ‘특수활동비 축소 및 개선’이 꼽힌다. 국회 교섭단체, 위원회, 의원외교 등 이른바 특수 의정활동을 지원하는 용도로 지급되는 특수활동비는 국회 예산 중 정확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대표적인 항목이다. 사용 명세를 증빙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국회의 ‘2018년도 세입세출예산 각목명세서’에 따르면 올해 배정된 특수활동비는 약 62억7200만 원이다. 세부 항목별로는 △입법활동 지원 15억5200만 원 △국정감사 및 조사 4억7630만 원 △위원회 운영지원 15억4972만 원 △특별위 운영지원 6억6694만 원 △의원외교 5억5337만 원 등이다. 국회의장, 교섭단체 원내대표, 상임위원장 등이 나눠 쓰는 쌈짓돈이라는 지적이 끊이질 않지만 마이동풍(馬耳東風)이다. 실제로 2015년 참여연대는 국회의 관련 정보공개 청구 거부 방침에 소송을 냈고, 대법원은 이달 3일 ‘특수활동비 내역을 공개해야 한다’고 최종 결정했다. 국회의 불투명한 특수활동비 운용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동안 ‘특수활동비 명세를 공개하면 국회 고도의 정치적 행위가 노출돼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다’ ‘행정부 감시 업무를 담당하는 수행자, 방법, 시기 등에 관한 정보가 노출되면 국회의 행정부 감시 역할이 위축된다’며 거부했던 국회는 어떤 방식으로 명세를 공개할지 뒤늦게 고심하고 있다. 시민단체 ‘비례민주주의연대’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하승수 변호사는 “원래 특수활동비는 기밀 유지가 극도로 필요한 정보와 수사 관련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용도로 마련된 성격이 강하다”며 “국회는 정보와 수사 기관이 아닌 만큼 특수활동비는 없애고, 영수증 제출은 필요하지만 공개는 안 되는 돈인 특정업무경비도 최대한 투명한 구조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불투명한 정치자금이 오가고, 국회의원과 이해관계가 얽힌 인사와 기관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출판기념회 관련 제도 개선 방안도 지지부진하다. 출판기념회에서 금품 모금과 제공을 금지하고, 행사 개최 여부를 의무적으로 신고하게 하는 ‘국회의원 출판기념회 관련 제도 개선’ 내용을 담은 정치자금법 개정안 역시 처리되지 않고 있다.○ ‘상징적 특권’ 내려놓기도 지지부진 국회의원의 ‘상징적 특권’을 줄이는 작업 중에서도 속도가 안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국회의원 배지 폐지’가 꼽힌다. 현재 국회의원들은 99%의 도금된 금배지(단가 3만5000원 정도)를 달고 다닌다. 국회의원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지만 오랜 기간 국회의원들의 권위를 지나치게 내세우는 심리적 특권의 상징물이란 비판도 받았다. 이에 따라 배지 대신 국회의원 신분증을 마련해 신분 표시 및 확인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국회 관계자는 “국민의 대표에게 배지 정도는 허용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고, 배지를 없앨 경우 각종 행사에서 의전 효율성 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고 설명했다. 국회 내 ‘의원동산’ 같은 시설의 명칭에서 ‘의원’이란 단어를 삭제하는 비교적 간단한 특권 내려놓기 역시 여전히 심사 중인 항목이다. 국민의 기관이며 누구나 방문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취지에서 추진되는 특권 내려놓기다.○ 진짜 특권은 따로 있다? 한 전직 의원은 “국회의원들의 진짜 특권은 잠재적 경쟁자에 비해 몇 바퀴 앞선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다는 점”이라고 했다. 현행법은 각 선거구에 정당 사무실을 둘 수 없도록 하고 있지만 국회의원은 지역구 민원 청취 명분으로 자기 이름을 내걸고 사무실을 차릴 수 있다. 또 일상적으로 후원금도 모금할 수 있다. 또 국회 보좌진 일부를 편법으로 지역구 챙기기에 활용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당선되자마자 4년 임기 내내 사실상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적절성에 대한 논의조차 안 되는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는 결국 법과 제도를 만들거나 바꿔야 하는 문제고, 이를 담당하는 기관이 국회라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많다.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법이나 제도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기대하는 건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독립적인 국회 관리·감독 조직을 만들어 국회의원 특권 줄이기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가령, 영국 국회의원들의 봉급을 결정하는 독립기구인 의회윤리청(Independent Parliamentary Standards Authority·IPSA) 같은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IPSA는 2009년 영국 국회의원들의 대규모 공금 유용 스캔들이 터지며 설립된 기관이다. 의원들의 봉급을 결정하는 과정과 업무를 국회 밖 독립기관이 담당하도록 해 독립성과 공정성 등을 최대한 강조해야 한다는 취지다. 하 변호사는 “우리 국회가 스스로 개혁에 나서는 건 여러모로 힘들다는 게 입증됐다”며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개혁을 하려면 결국 독립 기관의 힘을 쓰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1 “불은 냉면이라도 먹겠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달 초 청와대 내부 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같이 쐐기를 박았다. 당초 청와대 내에서는 “냉면 사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칫 불을 수가 있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평양냉면’이라는 상징성에 문 대통령이 힘을 주면서 메뉴 논의는 사실상 끝이 났다. #2 “북한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북한 평양을 방문했던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부장관은 일본에서 직접 도시락을 공수해갔다. 당시 두 나라는 일본인 납북 피해자 진상 규명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납북 일본인 13명 중 8명이 이미 사망했다는 소식이 정상회담 직전 전해져 일본 측은 경악했다. 일본이 준비해간 도시락은 북한에 대한 불쾌감과 강경함을 보여주는 아이템이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푸드 디플로머시(Food Diplomacy·음식외교란 뜻)’가 화제다. ‘세기의 만남’이 될 북-미 정상회담은 회담 일자, 장소, 배석자 등이 모두 베일에 싸여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마주앉아 식사를 할지, 한다면 무슨 메뉴를 올릴지 자체가 회담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상징적 메시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두 사람이 함께 햄버거를 먹는 장면이 연출될 것인가. ○ 음식은 메시지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평양냉면이 갑작스레 남북 화해의 상징으로 부상하자 유사한 사례로 미국과 프랑스 간 ‘감자튀김’ 사건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2005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미-프랑스 정상회담이 끝난 뒤 양국 정부는 “정상들(미국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프랑스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만찬 때 감자튀김을 즐겼다”고 강조했다. 물론 만찬에선 바닷가재가 들어간 리조토와 안심 스테이크 등이 메인 요리였고, 감자튀김은 사이드 요리에 불과했다. 미국과 프랑스가 유독 감자튀김을 강조한 데는 배경이 있다. 당시 프랑스는 사담 후세인이 이끌던 이라크 공격을 결정한 미국에 사사건건 반대했고, 약이 오른 미 정계에서는 노골적인 프랑스 거부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미 의회 식당에선 감자튀김의 통상적 명칭인 ‘프렌치 프라이즈’ 대신 ‘프리덤 프라이즈’로 바꿔 불러 국제적인 화제가 됐다. 프랑스 측은 ‘엉뚱한 화풀이를 하지 말라’며 미국을 비꼬기도 했다. 미-프랑스 정상회담 만찬에서 제공된 감자튀김은 두 나라 정상 간의 화해 의지를 담은 메시지였던 것이다. 유대교, 이슬람교 등 종교와 상대국 정상의 건강상태 등을 고려한 ‘배려음식’은 실타래처럼 꼬인 의제를 푸는 마스터키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신경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014년 미국은 ‘캐비아 좌파’라는 비난에 시달리던 프랑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캐비아 요리를 대접해 분위기가 싸늘해지기도 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햄버거’가 북핵 해법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할지, 식사를 함께할지, 한다면 누가 호스트가 돼 어떤 형식으로 진행할지 등 전혀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6월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 유세 때 “내가 김정은을 만나러 북한에 갈 생각은 없지만 (그가) 온다면 만나겠다. 국빈만찬이 아니라 회의 탁자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더 나은 핵협상을 하겠다”고 밝힌 게 두고두고 회자되면서 ‘햄버거 회동’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 햄버거 외교, 평양에 맥도널드 매장 오픈으로? 햄버거가 북-미 정상회담 음식으로 결정될 경우 전문가들은 ‘햄버거의 포지션’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한다. 두 정상이 간단히 식사를 한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말처럼 국빈만찬 대신 회의 탁자에서 햄버거를 먹는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일반적인 정상회담처럼 식사가 진행된다면 코스 요리 중 한 부분에서 햄버거가 특별 출연하는 모습이 연출될 수도 있다. 2008년 3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청와대에서 양식 요리를 담당했던 ENA호텔 한상훈 총주방장은 “정상회담 식사는 격식과 대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아주 파격적인 형식 파괴는 이뤄지기 어렵다”며 “만약 북-미 정상회담에서 햄버거가 식사 때 제공된다면 코스 요리 중 하나로 햄버거가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햄버거가 북-미 정상회담에 등장한다면 △쇠고기 패티의 크기와 익힘 정도 △야채 종류 △치즈의 양과 종류 △빵 등이 어떤 스타일일지도 관심사다. 트럼프 대통령이 즐기는 것으로 알려진 맥도널드의 ‘빅맥’이나 ‘쿼터파운더’와 비슷한 햄버거일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스타일의 햄버거일지에 시선이 집중된다는 뜻이다. 이를 두고는 햄버거광인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이 최대한 반영된 햄버거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많다. 북-미 정상회담이 파격적이고 특별한 만남인 만큼 기념의 의미를 담은 햄버거를 선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박기홍 우석대 외식산업조리학과 교수(2002년 4월∼2008년 8월 청와대 양식담당 요리사)는 “회담 결과가 좋아 정상회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특별한 재료나 소스 등을 첨가하고, ‘판문점 버거’ ‘평양 버거’ ‘코리아 버거’ 같은 이름이 붙는 햄버거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이 먹는 햄버거를 누가 만들지도 궁금한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정상회담 시에는 초청국이 모든 음식을 담당한다. 제3국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은 양측이 협의해 어느 나라가 담당할지를 결정한다. 최근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부각되는 판문점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상 방문하는 모습이니 북한이 음식을 준비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도 있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식 햄버거’를 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햄버거는 난도가 낮은 음식이고, 정상회담 전에는 양측 의전 관계자들이 실제 제공될 음식의 맛과 모양을 세밀하게 체크하는 과정이 있다”며 “북한 측에서 큰 어려움 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햄버거를 먹어본 적이 있는지는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스위스 유학 시절 햄버거의 존재를 경험했을 가능성은 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북-미 정상회담이 잘 풀릴 경우 조만간 평양에 맥도널드 매장이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세형 turtle@donga.com·이설 기자}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팔) 분쟁을 비롯한 중동의 갈등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일란 파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란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뿐이다.”(라파엘 이스라엘리) 3, 4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열리는 ‘제4차 한-유럽연합(EU) 중동문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일란 파페 영국 엑서터대 유럽·팔레스타인학연구소 교수(64·e메일 인터뷰)와 라파엘 이스라엘리 히브리대 중동·이슬람학과 명예교수(83·인터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도하는 주이스라엘 미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조치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중동문제 연구로 명성을 얻고 있는 두 교수는 모두 이스라엘 출신이다. 하지만 파페 교수는 친(親)팔레스타인, 이스라엘리 교수는 친이스라엘 성향이다. 둘은 4일 오전 열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이슈’ 세션에서도 열띤 토론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두 교수로부터 이·팔 분쟁을 중심으로 한 중동 정세 전망을 들어봤다.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보나. ▽파페=미국이 국제법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또 미국의 중재자 역할이 끝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팔 분쟁은 물론이고 시리아, 예멘, 리비아 같은 (분쟁) 국가에서 미국이 건설적인 역할을 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스라엘리=특별한 변화는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1949년부터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대사관 위치가 텔아비브에 있더라도) 이스라엘을 방문한 각국 정상들도 모두 예루살렘에서 회담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논란을 일으켜 가며 이런 결정을 한 배경이 궁금하다. ▽파페=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자 같은 지지자들을 겨냥한 조치일 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정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는 중동에서 미국의 개입을 줄이려고 하면서 동시에 강력한 모습도 나타내려고 한다. 이런 모순이 재앙을 불러오고 있다. ▽이스라엘리=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정책 덕분에 전 세계가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다’란 현실을 인식하게 할 것이다. 이번 조치가 지역 안정을 깬다는 비판도 있지만 70년간 존재해 온 사실을 부인할 순 없다.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 이뤄지면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의 반발이 거셀 것 같은데…. ▽파페=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많은 아랍 국가들의 정권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이 약하다. 반면 미국과의 관계 개선 의지는 강하다. 이를 위해선 (미국과 강한 동맹인) 이스라엘과의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이런 현실은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룰 때 아랍권의 반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 수 있다. ▽이스라엘리=반대 시위가 발생하고, 아랍 국가들도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아랍권은 이제 이스라엘의 존재가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 최근 화해 분위기가 뚜렷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랍권 대표 국가) 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나. ▽파페=두 나라의 우호적 관계는 비공식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사우디 의 관계 개선이 이·팔 간 평화 조성 문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리=두 나라 관계는 계속 긍정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공통의 적’인 이란에 대해 같이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앙숙’인 이란의 시리아 내 군사시설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파페=시리아는 러시아와 이란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지는 등 이미 ‘신냉전의 중심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개입하려는 건 위험하고 근시안적이다. 현재는 러시아가 이스라엘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고, 시리아도 대응할 여력이 없어 그냥 두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면 이스라엘도 공격을 받는 심각한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이스라엘리=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자국에 적대적이었던 이란이 시리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란보다 시리아에서 영향력이 더 큰 러시아는 이스라엘과의 충돌을 원치 않는다. 결국 심각한 충돌은 없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달 ‘이란 핵합의’에 대한 수정 혹은 폐기를 결정한다면…. ▽파페=미국이 맺은 약속을 취소하는 꼴이다. 중동 지역 전체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이란, 이스라엘, 시리아, 헤즈볼라(레바논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친이란 성향 무장단체)가 모두 얽힌 후폭풍을 만들 수 있다. ▽이스라엘리=이란 핵합의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지금 상태에서는 문제가 많고, 중동 전체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많은 전문가들이 600만 명의 소외된 어린이들을 돕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1000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국제 후원활동을 펼쳐 ‘중동의 대표 여성리더’로 불려온 셰이카 무자 빈트 나시르 카타르 왕대비(사진·타밈 빈 하마드 알사니 현 카타르 국왕의 어머니). 그녀는 지난달 27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공립도서관에서 안토니오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과 나나 아쿠포 아도 가나 대통령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행사를 열고 앞으로도 어려움에 처한 전 세계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 지원 사업을 진행하겠다며 이 같이 밝혔다. 그녀가 이끌고 있는 ‘에듀케이션어버브올(Education Above All·EAA·교육이 가장 우선이다란 의미) 재단’은 전쟁, 빈곤, 자연재해 등으로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전 세계 1000만 명의 소외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교육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2012년부터는 ‘어린이를 교육시키자(Educate A Child·EAC)’란 프로젝트에 18억 달러(약 1조9300억 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자 왕대비는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학교가 세워지는 모습과 나무 그늘 아래에서 수업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봤다”며 “배움에 대한 염원은 인간 본성의 가장 강한 부분이고 모든 어린이에게 내재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또 “우리의 노력이 각국 정부 부처, 공공기관, 개발은행,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국제기구와 민간 섹터와도 긴밀하게 협력하며 이뤄지고 있다”고 소개한 뒤 “앞으로 5년간 EAC를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무자 왕대비는 EAC를 포함해 카타르를 중동의 교육 허브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카타르 수도 도하 인근에 코넬대, 조지타운대, 노스웨스턴대, 카네기멜런대, 텍사스A&M대 등의 분교를 유치해 ‘에듀케이션시티(Education City)’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기획한 게 대표적이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