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이진구 기자

동아일보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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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부터 ‘이진구 기자의 대화’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딱딱하고 가식적인 형식보다 친구와 카페에서 수다 떠는 듯한 편안한 인터뷰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sys1201@donga.com

취재분야

2024-05-19~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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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 현장칼럼/이진구]처벌과 교화 사이… 포기해선 안될 ‘우리의 믿음’을 보았다

    우리는 인간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얼마나 믿음을 갖고 있을까. 범죄에 대한 처벌은 어느 선까지가 타당한 것일까. 피해자를 대신해 속이 후련할 정도로 처벌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교화에 무게를 둬야 하는 걸까. 혹시나 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지난달 22, 23일 경기 수원구치소에서 교도관 체험을 했다. 그곳은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요즘 콩값 비싸서… ‘콩밥’ 못줘요” 구치소는 재판 중인 사람들이 형이 확정될 때까지 수감되는 곳이다. 하지만 수용 문제 때문에 구치소에도 기결수가 있고, 교도소에도 미결수가 있다. 지상 8, 9층짜리 2개 동으로 구성된 수원구치소에는 1700여 명이 수감돼 있다. 대부분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미결수들인데, 내란 선동 등의 혐의가 확정된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57)이 6년째 수감 중이고, 최근에는 마약 투약 혐의로 남양유업 창업주 외손녀 황하나 씨(31)가 들어왔다. 교도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마침 TV에 황 씨와 함께 마약 투약 혐의를 받고 있는 가수 겸 배우 박유천 씨(33)가 나왔다. “저분도 곧 여기 오나요?”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서 수사하니까… 아마도….”(박 씨는 3일 합류했다.) 경기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는 ‘범털’, 수원구치소는 ‘개털’이 주로 수감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어느 정도는 맞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다. 서울구치소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사건 피의자들이 수감되는데 서울지법에서 재벌, 정치인 등 중요 인물 사건을 많이 다루기 때문이다. 서울구치소에는 현재 박근혜 전 대통령이 수감돼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김경수 경남도지사 등도 이곳 동문들이다. 수감자들이 먹는 식사 그대로 저녁을 먹었는데 ‘콩밥’이 아닌 ‘찐밥’과 돈육제육볶음, 상추쌈이 나왔다. “저, 콩밥은 안 줍니까?” “요즘 콩이 비싸서… 못 줘요.”(올 1분기 콩값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1.4% 올랐다.) 수감자들은 자기 방에서 배식을 받아먹는다. 기상은 오전 6시 반이고, 오후 9시 반 이후는 취침. 미결수는 작업이 없기 때문에 방 안에서 TV나 책을 보며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 가수 정준영이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화책을 보며 지낸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모든 미결수에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19금 등의 문제만 없으면 만화책도 반입이 가능하다. 단, 공간이 좁아 1인당 약 30권 정도만 허용된다고 한다. 구치소에도 도서관이 있어 책을 빌려주는데 소설보다 ‘분배의 실패가 만든 한국의 불평등’ ‘한국의 소수자 운동과 인권정책’ ‘이중섭 평전’ 등 수준 있는 책이 더 많았다. ―수감자들이 이런 책을 본다고요? 전시용 아닙니까? “심심하니까요. 어려운 책 많이 봐요. 그래도 가장 많이 보는 책은 국어사전과 옥편이죠.” (왜요?) “법률 용어가 어렵잖아요. 재판 준비하느라….” ‘장첸’같은 미결수 7, 8명이 등뒤에 엄중 계호 수용동 순찰 시간. 일명 ‘징벌방’인데 수감 중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만 따로 모은 곳이다. ‘감방’에서 또 무슨 사고를 칠까 싶지만 워낙 다양한 인간들이 모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고 한다. 과거에는 요구르트 구입이 가능했는데 재소자들이 요구르트에 빵을 넣어 발효해 술을 만들어 마신 뒤로는 금지됐다. 알갱이가 600개라 콘택 600이다, 아니다를 놓고 싸워 징벌방에 들어온 경우도 있다. 내기를 걸고 셌는데 600개가 안 되자 진 쪽이 분해서 때렸다고 한다. 자살 기도는 물론이고 스스로 못이나 바늘을 삼키는 자해도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지나가는 교도관에게 침을 뱉거나, 수감자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징벌 차원에서 혼자 또는 2인으로 수감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면회는 물론 TV 시청도 금지된다. ‘감방’ 속의 ‘감방’인 셈인데, 다른 수감자들과 부대끼지 않아 선호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견디기 힘들어한다고 한다. 잠시 들어가 본 징벌방 벽에는 ‘×같다 징벌방, 다신 안 온다’ ‘3월 28일 징벌방 출소일. 부러워하지 마라 시간 금방 간다’는 등의 낙서가 가득 적혀 있었다. 나가 봐야 다시 원래 있던 감방으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나가기를 염원하다니…. 일반 수용자는 낮 동안은 면회, 재판 출석, 의료실 이용, 상담 등으로 이동이 많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영화 ‘범죄도시’의 장첸 같이 생긴 미결수 7, 8명이 안에 있었다. 왠지 뒤에서 누군가 머리를 내리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살인마 오원춘도 이곳을 거쳐 갔다고 한다. 재소자 관리는 마약범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이들은 ‘남한테 피해 준 것도 아니고 내 몸에 한 건데 뭐가 잘못이냐’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잘 안 한다는 것. 또 구치소에서는 약을 할 수가 없어 정신상태도 다소 불안하다고 한다. 황 씨는 어찌 지내고 있는지…. 여성 수감자들은 3, 4층에 있는데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징벌방을 담당하는 류주형 교위는 “폭력범들은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처럼 으스대는 자기 과시욕이 많고, 절도범들은 의외로 대범하다”며 “‘욱’ 해서 저지르는 범죄 유형일수록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도 잘한다”고 말했다. 수감되면 대부분 마음이 굉장히 좁아진다고 한다. 식사 시간에 고기 한 점 더 먹었다고 주먹다짐도 일어난다는 것. ‘설마’ 했는데 실제로 다음 날 기상 시간 직전에 ‘마약방’(마약 사범만 있는 방)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10분 더 남았는데 깨워서란다. 불안감도 특징인데 형이 확정되지 않은 탓도 있고, 밖에 있는 애인이나 아내가 변심할까 봐 걱정하는 것도 이유라고 한다. 그래서 거의 매일 편지를 쓰는 사람이 많은데, 겉봉에 무지개색으로 만화를 그리고, 우표로 꽃을 만들어 붙인 것도 있었다. 자신이 이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무심코 보고 있는데 등기로 신청한 편지 겉봉에 쓰인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만약 아무도 받지 않는다면, 대문 옆 ○○○에 놓아주세요.’ 의료실 이용도 잦은데, 교도관 말로는 수감자들은 자기 몸을 끔찍이 챙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작은 뾰루지지만 “혹시 잘못되는 것 아니냐”며 의료실 진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진찰을 받으려면 방에서 나올 수 있어 이것도 이유라고 한다. 국가마저 처벌로만 다룬다면… 상상하기 힘든 끔찍한 강력·흉악범죄가 빈번해지면서 이들에 대한 처벌과 사전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화와 인권을 위해 수용시설을 개선해야 한다고 하면 “범죄자가 죗값을 받아야지 무슨 처우개선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야간 순찰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 매일같이 범죄자를 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일지 궁금해 동행한 이희관 교위에게 물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강한 처벌과 열악한 처우로 죗값을 치르게 한다는 게 결국 복수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요.” ―피해자가 있는데…. 처벌에 복수의 개념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가둬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나올 사람들인데…. 가혹한 처벌만 받고 달라진 게 없다면….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온갖 범죄자를 보다 보니 그도 인간성에 회의를 느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눈물로 참회했던 사람이 출소 뒤 가족보다 더 옥바라지를 도운 지인을 돈 때문에 살해해 다시 들어오는 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강력·흉악범일수록 어릴 적부터 가족과 주변에서 버려지고 학대받은 경우가 많아요. 이런 사람들은 마음속에 늘 분노가 잠재돼 있고 언젠가 터져 나오지요. 가정 학교 사회에서 충분히 사랑받지 못해서 그런 건데, 가장 마지막 보루인 국가마저 처벌로만 다룬다면….” 철문을 나섰다. 담장 하나 차이인데 공기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매일 출퇴근하는 교도관들도 똑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현재 전국 교정시설에 수용된 기·미결수는 약 5만 명. 사람이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해선 안 되는 것은, ‘사람은 바뀔 수 있고,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배신당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수많은 전쟁과 범죄를 겪으면서도 거꾸로 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마음 때문이 아닐까. 많은 비용이 들어감에도 그들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은, 교화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이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는지.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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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김종수 본부장 “노벨상요? 솔직히 좀 기대하긴 합니다, 하하하”

    《지난달 10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블랙홀(M87 은하) 관측사진이 공개되면서 과학계가 흥분에 휩싸였다. 혹자는 달 착륙에 비견될 정도의 업적이라고도 한다. 전 세계 과학자 200여 명이 참여한 이번 블랙홀 관측 프로젝트에는 한국천문연구원 김종수 전파천문본부장 등 국내 연구진 8명이 참여했다. 김 본부장은 국내 연구진을 선발하고 연구에 참여시킨 주역이다.》  ―‘문송’합니다만 블랙홀 사진을 찍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요. “그동안 우리가 영화나 책에서 본 블랙홀 모습은 전부 그림이나 그래픽이거든요. 이론을 바탕으로 한 상상도지요. 블랙홀은 중력이 아주 강해 빛도 빨아들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어요. 그런 블랙홀을 관측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직접적인 증거를 통해 확인했다는 게 가장 큰 의의죠.” ―빛도 빨아들여서 볼 수 없는 블랙홀을 어떻게 찍은 겁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블랙홀을 찍은 게 아니고 ‘이벤트 호라이즌(Event Horizon)’을 찍은 거죠. 블랙홀은 볼 수가 없거든요.” (이벤트 호라이즌요?) “음… 블랙홀 주변은 바다의 소용돌이처럼 빛을 포함해 물질들이 회전을 하며 빨려 들어가는데, 아직 빨려 들어가지 않은 빛이 고리 모양으로 경계를 이룬 곳이죠. 이번에 관측된 것이 바로 이 ‘이벤트 호라이즌’이고, 블랙홀은 그 안에 있지요.” ※이벤트 호라이즌은 이번 블랙홀 관측 프로젝트 이름이기도 하다. 물리학에서는 ‘이벤트 호라이즌 안쪽=블랙홀’로 여긴다. ―빛도 중력에 의해 휘어지고 빨려 들어간다는 게 신기합니다. “어떤 빛이 태양을 지나 우리에게 보일 때 태양 중력의 영향이 없다면 직선으로 움직이겠죠. 그런데 1919년 영국의 물리학자 아서 에딩턴이 개기일식 때 태양 너머에서 온 빛이 태양의 중력 때문에 휘는 것을 발견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주 전체로 보면 태양은 약한 중력에 속하기 때문에 블랙홀처럼 아주 극단적인 강한 중력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는데 이번에 확인된 거죠.”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영향을 받는다면, 정말 블랙홀을 통한 시간여행도 가능한 겁니까?)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로 여행하는 사람의 시간은 이곳에 있는 사람의 시간보다 천천히 간다고는 했지만 시간여행을 말한 건 아니거든요. 아직까지는 시간여행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혹시 상사하고 술 먹으면 시간이 안 가는 것도 그런 현상입니까?) “그건, 절대 아니죠. 하하하.” ※강한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휜다는 게 191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이다. 이번에 관측된 M87 블랙홀은 태양 질량의 65억 배라고 한다.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습니까. “이번 연구에 미국 스페인 칠레 멕시코 남극 등에 있는 8개 전파망원경이 사용됐습니다. 그중 하와이에 있는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 망원경(JCMT)을 한국 일본 대만 중국 등 네 나라 주요 천문대가 모여 만든 동아시아관측소란 곳에서 운영을 하고 있지요. 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칠레 아타카마 밀리미터·서브밀리미터 전파간섭계(ALMA)도 우리가 2014년부터 운영비를 내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관측소 책임자인 폴 호 박사가 프로젝트 얘기를 듣고 연구자들을 모으면서 제게 참여를 권유해 시작됐지요. 국내 연구진은 제가 모았고요.” ―이번에 사용된 전파망원경이 지구 규모라고 하던데요. “망원경이 해상도를 높이려면 최대한 빛을 많이 받아야 해요. 천문대 망원경이 아주 큰 이유가 그 때문이고요. 그런데 이번에 관측한 M87 블랙홀은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블랙홀을 관측할 정도로 해상도를 높이려면 지구 정도 크기의 망원경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큰 망원경을 만들 수는 없지요. 대신 그만 한 크기의 망원경처럼 효과를 내도록 장비를 운용한 게 이번 프로젝트입니다.” (8대로 어떻게 그런 효과를 낼 수 있습니까?) “쉽게 말하면… 지구가 자전을 하기 때문에 우주에서 보면 한 대의 전파망원경 위치는 궤적을 그리게 됩니다. 이렇게 8대의 전파망원경에서 장기간 수신한 정보를 다 모아 듬성듬성한 모자이크를 맞췄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사진처럼 촬영했다’가 아니라 ‘정보를 합성했다’가 더 맞는 표현일 겁니다. 전 지구에 흩어져 있는 8대의 망원경 연구자들과 정보를 슈퍼컴퓨터로 분석해 이미지로 만들다 보니 연구자가 200여 명이나 참여하게 된 것이지요.” ―전파망원경을 서로 연결하는 게 어려운 일인가요. “여러 개의 전파망원경을 연결한다는 개념은 1974년에 나왔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크고 우수한 전파망원경이 별로 없었어요. JCMT도 1987년 운영을 시작했고요. 미국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센터의 셰퍼드 돌먼 박사가 이번 프로젝트의 총괄단장인데, 전 지구에 흩어져있는 망원경들을 다 섭외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7, 8년 전 미국 하와이, 애리조나, 멕시코에 있는 망원경 3개로 처음 시작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블랙홀 이미지를 얻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남극 망원경(SPT)과 칠레 망원경이 참여하면서 가능하게 됐지요. 특히 칠레 알마(ALMA) 망원경이 큰 역할을 했고요.” ―연구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하하하.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요. 고산병 대비는 좀 했지만….” (고산병요?) “칠레 알마 망원경이 해발 5000m에 있거든요. 3000m에 식당 숙소 같은 일종의 베이스캠프가 있는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하죠. 하지만 망원경 있는 곳까지 올라가려면 국내에서 고지대에 올라가도 이상 없는 상태인지 진단서를 떼 가야 하고, 현장에서도 혈압 측정 등 건강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못 올라가죠. 올라가는 날은 작은 산소통을 하나씩 주는데 4000m 정도부터는 계속 써야 해요. 올라가서는 달리기도 하면 안 되고요. 제 경우에는 머리가 좀 띵한 정도였지 별 문제는 없었어요. 하와이 맥스웰 망원경도 해발 4000m에 있지요.” ―전파망원경은 일반 망원경과 다를 것 같은데 높이에 영향을 받습니까. “전파망원경은 습기에 영향을 많이 받아요. 고지대일수록 습기가 적은데, 칠레 알마 전파망원경이 있는 아타카마사막이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 중 하나지요.” (에베레스트산에 만들면 가장 좋지 않습니까?) “건설하기도 어렵지만 항상 유지 보수를 해야 하는데 누가 그 장비를 짊어지고 가나요? 하하하.” ―이번 블랙홀 관측이 노벨상감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런 말도 있긴 한데… 하하하. 이번 관측이 왜 과학적으로 중요하냐면, M87 블랙홀처럼 엄청나게 중력이 강한 곳에서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죠. 블랙홀 이미지를 얻기까지의 국제적인 협력, 과정 등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고요. 블랙홀과 블랙홀이 충돌할 때 나오는 파장을 관측해 블랙홀의 존재를 실증한 연구는 노벨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좀 조심스럽지만 노벨상을 받을 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기대도 좀… 있지요.” ※2017년 라이너 바이스 미국 MIT 명예교수, 배리 배리시와 킵 손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명예교수 3인이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해 발생한 중력파를 관측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과학 자문을 맡은 사람이 킵 손 교수다. ―우주과학 분야가 참 매력 있는 분야인 것 같은데 우리 교육과정에서는 별로 가르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어렵기도 하고…. “우주에 관한 책으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가장 유명한데 두 가지 기록을 갖고 있지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장한 우주과학 책이라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안 가는 책이라는…. 하하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상대적으로 잘 풀어 쓴 책이죠. 그 책을 번역한 홍승수 교수님이 제 지도교수셨는데 얼마 전 뵀더니 그 책 인세가 치료비를 도와주고 있다고 웃으며 말하시더라고요.” (우주가 대폭발로 만들어졌다면 그 대폭발은 어디서 발생한 겁니까?) “모르지요. 하하하. 단지 대폭발(빅뱅)이론을 만들게 된 관측 증거는 있는데… 지구에서 보면 다른 은하들이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거든요. 우주가 이렇게 팽창하는 이유는 뭔가 최초의 폭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거죠. 최초 폭발 지점은… 찾고는 싶지만 못 찾으니까. 그거 찾으면 진짜 노벨상이겠죠. 하하하.” ※1988년 출판된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는 9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코스모스’를 번역한 홍승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는 지난달 15일 별세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뭔지는 모르겠는데 엄청나게 똑똑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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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잘린 김영철

    “어이, 준장!” 1990년 9월∼1992년 9월 8차례에 걸쳐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다. 당시 군사분과위원회 북한 측 대표인 44세의 김영철 소장(73)은 우리 측 대표인 박용옥 준장에게 회담 내내 “준장이 뭐야? 그건 거의 장군이 아니잖아”라며 하대했다. 북한군 소장은 별 하나로 우리의 준장과 같지만, 용어 때문에 자신이 우리 군 소장급인 것처럼 행세한 것이다. 우리 정부는 김영철이 네 살이나 더 많은 박 준장을 “남쪽 준장”이라 부르며 계속 건방을 떨자 1992년 5월 7차 회담을 앞두고 박 준장을 소장으로 승진시켰다. 김영철은 별 두 개를 달고 등장한 박 소장을 보고 머쓱해했다고 한다. ▷2016년 북한의 대미·대남 업무를 총괄하는 통일전선부장에 김영철이 임명됐을 때 당시 공식적인 북한 내 서열 2위는 최룡해 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었지만 실제로는 김영철이 더 실세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영철은 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의 보좌역을 하는 등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이 밥투정을 할 때부터 지켜본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초급장교 시절부터 군사정전위 연락장교를 맡는 등 한미 군사훈련, 주한미군 문제 등을 체득할 기회가 많았다. ▷김영철이 최근 통전부장에서 해임됐다. 하노이 회담 노딜은 ‘무오류’여야 하는 김정은의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고 그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 새 통전부장인 장금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은 대남 민간교류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중-러 밀착과 남북 관계를 통해 미국에 맞서겠다는 김정은의 책략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장금철의 첫 작품으로 보이는 통전부 소속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25일 내놓은 대변인 담화는 ‘남조선 당국의 배신적 행위’ 운운하는 원색적인 비난으로 채워졌다. 통전부의 대남 비난 담화는 지난해 1월 23일 이후 처음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는 지난해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김영철은 정치군인에 불과하다. 북-미 외교와 남북 관계 총책이라는 자리는 분에 넘친다. 나중에 숙청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천안함 폭침의 배후인 김영철은 대북 전문가들 사이에서 ‘대남 정치꾼인’으로 불릴 만큼 협상 중에도 도발 등 뒤통수를 치며 골탕 먹이는 데 능란했다. 천안함 폭침 문제를 다룬 2014년 10월 남북군사회담에 수석대표로 나타나는 뻔뻔함을 지녔다.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돌아가는 길에 “이런 열차 여행을 또 해야 하냐”며 불쾌해했다고 한다. 김영철이 아직 당 부위원장과 국무위원은 유지하고 있지만 해임을 넘어 숙청까지 이어질지 관심거리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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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오토바이 타다 다쳤냐 묻기도 해요… 그렇게 잊혀지는 거겠죠”

    《올 1월 말, 2015년 8월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수색 작전 중 북한이 매설한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은 하재헌 전 중사(25)가 전역했다. 부사관인 그는 사고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패럴림픽 조정 금메달이란 더 큰 꿈에 도전하기 위해 보장된 군 생활을 포기했다. 17일 경기 하남시 미사리 조정카누경기장에서 만난 그는 내년 도쿄 패럴림픽을 향해 힘차게 노를 젓고 있었다.》  ―안정적인 군 생활이 보장됐는데, 주변에서 전역을 말리지 않던가요. “안 말리기는요. 3분의 2는 다 말렸지요. 선수 생활이 끝나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며…. 그래서 한 반년 정도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동시에 주변에 계신 분들에게도 거의 전부 다 물어보고 의견을 들었어요. 부모님을 설득하기는 했지만 저 자신도 고민을 많이 했지요. 이 길로 갔다가 만약 메달도 못 따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걱정하는 측면에서 보면 반대하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요.) “지지해준 분들도 꽤 있었어요. 이종명 의원님 같은 분들은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했지요. 육군참모총장님도 많이 챙겨주셨고…. 다행히 23일 SH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장애인 조정팀을 창단하는데 거기에도 들어가게 됐어요.” ※이종명 국회의원은 군인 출신으로 대령이던 2000년 6월 경기 파주 비무장지대에서 부하를 구하다 지뢰를 밟아 두 다리를 잃었다. 같은 부상을 입은 하 전 중사 병문안을 계기로 친해졌다고 한다. ―가슴을 자주 만지는데 몸이 좀 안 좋습니까. “훈련하다 부상을 좀 입었어요. 수요일 오후, 주말 오후만 제외하고는 매일 훈련을 하고 있거든요. 배를 탈 때 스트랩으로 가슴을 꽉 묶고 숙인 채 노를 젓다 보니 가슴이 계속 눌려서 약간 다친 것 같아요.” (다리는 좀 어떻습니까.) “환상통 때문에 진통제와 항생제를 먹고 있어요. 비장애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절단 부위가 아픈 신경계통 질환인데, 절단 환자들만 아는 통증이죠.” ※환상통은 절단된 부위가 가벼운 불편감부터 극도의 통증까지 느끼는 것. 절단부 통증과는 다르며 절단 환자 중 상당수가 겪는다고 한다. 그는 사고 후 약 1년간 입원하며 무려 21차례 수술을 받았다. ―재활 훈련은 했지만 의족을 차고 생활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의족을 차면 비장애인일 때 걷는 것보다 한 3배 이상 힘들어요. 쉽게 생각해서 나무 장대에 올라 걷는다고 생각하면 비슷하죠.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그렇지만 시선이나 무심코 던지는 말이 더 아쉬울 때가 많아요.” (말?) “모든 장애인이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어떻게 하다 다쳤느냐’고 물으면 좀 껄끄러워지는 경우가 많지요. 저도 좀 그렇고….” (왜 다쳤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까.) “하하하. 돌아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지금은 다 잊혀졌지요. 물어보면 말은 해줄 수 있는데…기분은 좀…. 꼭 한두 명씩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오토바이 타다 다쳤냐’고…. 근데 그게 꼭 ‘너 좀 놀았구나’ 하는 식으로 들려서…. 그런 뜻은 아니더라도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왜 다쳤냐고 묻는 건 실례가 아닌가 싶어요.” ―사고 당시를 묻는 질문도 여전히 많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지뢰에 대해 잘 몰라서 밟아도 발을 안 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경우가 많아요. 지뢰는 밟으면 압력 때문에 그 순간 그냥 터져요. 발을 뗐다고 터지는 게 아니라. 부비트랩도 건드려서 이미 ‘틱’ 하는 소리가 난 순간 안전핀이 뽑혀 바로 터지지요. 아슬아슬하게 줄만 건드리고 있는 그런 상태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거고…. 부사관 교육 때 지뢰 교육을 받는데, 불과 일주일밖에 교육을 안 받은 제가 훈련 때 지뢰를 묻어도 다른 사람들이 찾지 못했어요. 제가 밟은 목함지뢰는 상자가 나무로 만들어져 지뢰탐지기에도 잘 안 나타나고….” ―군 복무 중 사고를 당한 분들과 자원봉사 모임을 만들었다고 하던데요. “아직 정기적인 자원봉사 모임으로 발전한 건 아니고…친구들끼리 술 한잔하다가 찬호가 연탄배달 자원봉사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을 뿐인데 소문이 좀 크게 났어요.” (찬호요?) “2017년 8월 K-9자주포 폭발사고로 부상을 입은 이찬호 예비역 병장요. 찬호가 사고를 당했을 때 위로할 겸해서 병문안을 갔는데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친하게 지내기로 했어요. 다른 친구들도 다 군에서 부상을 입은 친구들이에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지인들에게 연탄배달 자원봉사 취지를 알렸더니 약 30명이 모였지요. 연탄배달 봉사는 처음이었는데 땀도 엄청 나고 많이 힘들더라고요. 저는 움직이기가 좀 힘들어서…. 차에서 연탄을 내려주는 일을 했고요. 너무 특별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죠. 그냥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을 한 걸로 봐주면 좋겠어요.” ―과거에 조정을 한 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사고 후 대한장애인조정연맹에 계신 분들이 병문안을 왔어요. 원래 알던 분들은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재활운동에 도움을 주려고 왔나 보다 생각했지요. 조정 선수들은 로잉머신으로 연습을 하는데, 달리기를 하기 어려운 절단 환자들에게는 유산소 운동으로 큰 도움이 되거든요. 그런데 퇴원 후 시간이 나서 한번 별생각 없이 타봤는데, 아∼ 이게 웬걸?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제 안에 있던 운동 본능이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고요.”(운동 본능요?) “중학교 때까지 투수로 야구 선수를 했으니까요. 보트를 타고 강 위에 혼자 떠 있는데 그 기분도 너무너무 좋았고요. 내친김에 경기에 나갔는데 생각도 못 한 금메달을 따 버렸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힘으로 탔는데… 하하하. 그 뒤로 이 길에서 승부를 봐야겠다고 결심했죠.” ※로잉머신(rowing machine)은 조정 선수들이 실내에서 노 젓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기구다. 그는 지금까지 5개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를 땄다. ―조정에도 여러 종목이 있던데요. “싱글스컬(Single Scull) PR1 종목에 출전하고 있는데, 싱글스컬은 쉽게 말해 혼자 노 두 개를 젓는 것이고, PR는 장애 등급이에요. PR1, 2, 3까지 있는데 제가 속한 PR1은 척추마비같이 허리 아래는 전혀 쓰지 못하고 거의 어깨와 팔로만 노를 젓는 가장 장애가 심한 상태를 말하지요.” (보트도 비장애인용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폭이 비장애인용보다 좀 더 넓고, 양옆에 배가 뒤집히는 것을 방지하는 기구가 달려 있어요. 비장애인은 노를 저을 때 몸이 앞뒤로 움직이는 슬라이딩 의자를 사용하지만, 장애인은 고정식 의자에 스트랩(strap)으로 몸을 묶고 타는 게 다르지요. 몸이 흔들려서 물에 빠지면 안 되니까요.” ―내년 도쿄 패럴림픽을 준비하고 있는데 전망은 어떻습니까. “최종 목표는 패럴림픽인데 지금은 일단 8월에 열리는 오스트리아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이 대회에서 7등 안에 들어야 올림픽 출전권이 나오거든요. 조정은 바람 같은 외부 요인의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에 기록은 큰 의미가 없고…, 그래서 지금으로선 좀 예상하기 어렵지요. 열심히 훈련할 뿐….” ※장애인조정에는 싱글스컬 외에도 두 명이 노 2개씩을 젓는 더블스컬, 두 명이 노 하나씩을 젓는 무타페어, 타수(舵手)와 선수 4명으로 구성된 유타페어가 있다. 조정 장비는 국내 생산 업체가 없어 무척 비싸다고 한다. 그가 타는 배만 약 2000만 원, 노 한 쌍에 200만 원 정도다. 이 때문에 개인이 구입하기는 어렵고 연맹이나 시도에서 지원해준다고 한다.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 선수가 많습니까. “개인전에 저와 저랑 같은 장애등급인 김세정 선수, 그리고 단체전 혼성팀 5명, 이렇게 7명이 현재 장애인 조정 국가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목에 나갈 정도로 선수가 많지는 않거든요.” ―지난해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하고, 성대한 행사를 치렀는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솔직히 저도 사람인데…, 좀 착잡한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국가적으로는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단지 (북한에 의해) 피해를 입은 쪽에도 상당한 관심을 쏟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면 좋겠는데….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비슷한 상황을 겪은 모든 사람이 그런 마음일 거예요.” (원망은 안 들었습니까.) “하하하. 안 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사람인데…. 하지만 최대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또 그렇게 살고 있고요.” 그의 사고를 계기로 최장 30일이던 군인의 민간병원 요양비 지급 기간이 일반 공무원 수준인 2년으로 바뀌었다. 또 복무 중 부상으로 인한 보상금도 대폭 올랐다. 국방 외에도 우리 사회가 그와, 그처럼 복무 중 사고를 당한 이들에게 진 빚이다. 그가 내년 도쿄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우리는 또 감동을 받고 삶의 용기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해줬을까.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과연 지키고 있는지….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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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배드 파더스

    지난해 이혼 후 자녀 양육을 맡은 사람 10명 중 7명이 전 배우자에게서 단 한 푼도 양육비를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육비 지급 판결을 받고도 “돈이 없다”며 ‘배 째라’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는 로또에 당첨되거나, 인터넷 방송 활동 등으로 재산이 수십억 원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살길이 막막한 한 어머니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배드 파더스(Bad Fathers)’에 도움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못 먹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하는 걸 보며 무서운 게 없어졌다. 고소를 당하든, 뭘 하든….” ▷배드 파더스는 장기간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전 배우자의 실명과 사진, 직업, 직장, 미지급 금액 등을 공개하는 사이트다. 아는 정보에 따라 거주지와 나이, 개명 전후 이름까지 공개하기도 한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이후 지금까지 약 600명이 의뢰했고 이 중 94건을 해결했다. 장기 미지급자 중에는 엄마도 있지만 80% 이상이 아빠라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현재 160여 명의 신상이 공개돼 있다. ▷미지급 양육비를 받으려면 개인이 소송을 하거나, 여성가족부 산하 양육비이행관리원을 통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 소송은 돈이 많이 들고, 양육비이행관리원은 처리에 평균 2년 정도가 걸린다. 소송 전에 재산 명의를 바꿔놓는 것은 나쁜 아빠들에게는 흔한 수법이다. ‘더 나쁜 아빠’들은 소송에 지면 두세 달 정도만 주고 다시 끊는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대방이 또 소송을 하기 어렵다는 점을 노려서다. 선진국에선 양육비 미지급을 아동학대 범죄로 간주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선다. 미국은 운전면허 정지 또는 취소와 함께 이행하지 않은 양육비를 계산해 세금 환급 시 강제 징수하거나 계좌 압류를 한다. 프랑스와 독일은 최장 2, 3년의 징역형에 처한다. 국가가 먼저 양육비를 지급하고 나중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대지급제를 시행하는 나라도 많다. ▷국가가 이렇게 나서 주니 선진국에선 배드 파더스 같은 사례는 찾기 어렵다. 배드 파더스의 신상공개는 물론 법 위반이다. 이 단체의 한 활동가는 9건의 명예훼손 고소를 당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법을 어기는 활동을 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전남편의 보복이 무서워 소송은 물론이고 정부에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들이 의지할 수단이 없다는 점은 딜레마다. 이런 사이트가 불필요한 사회가 되도록, 국가가 적극 나서서 ‘나쁜 아빠들’이 방기한 아이들의 생존권을 우선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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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젊음아, 말뚝에 묶인 코끼리가 돼선 안 돼!”

    《시놉시스=황혼에도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까칠한 노배우 ‘신구’. 기삿거리를 찾지 못해 상사에게 늘 욕을 먹는 말년 말단 기자인 ‘나’. 해고 위기에 몰린 ‘나’는 기자 인생을 역전시킬 거물급 인터뷰를 하기 위해 노배우에게 접근하는데…. 세대를 초월한 교감과 위로, 까칠한 노배우가 젊은이들에게 애정을 담아 건네는 속 깊은 이야기. 출연=신구(83), 나 / 공연일=2019년 4월 8일 / 관람료=800원》  S#1 (F·I) 연극이 시작되기 전 무대 위. ‘신구’와 ‘나’가 소품으로 쓰이는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구=내 기사를 쓰겠다고? 할 얘기도 없는데…, 기자들 물어보는 게 다 비슷하더라고. 나=(당황해 우물쭈물하며) 저…, 그래도…. 몇…가지 좀…. 신구=알고 싶은 게 뭔데? 나=‘신구’가 예명인지는 몰랐습니다. 신구=원래 이름은 신순기인데, 1962년 남산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아카데미 1기생으로 들어갔을때 만들었어. 첫 작품을 앞두고 이름이 좀 촌스러운 것 같아서 극작가 동랑 유치진 선생께 예명을 부탁했더니 한 달 정도 후에 ‘이거 써봐’ 하시더라고. 그게 ‘久(오랠 구)’였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몰라. 안 가르쳐주시더라고. 어려워서 묻지도 못했고. 나=처음에는 아나운서를 지망하셨다고요. 신구=제대 후에 뭘 할까 고민하다 아나운서에 끌려서 당시 명동에 있던 시청각교육원을 다녔어. 그때 우연찮게 연극아카데미 모집 광고를 봤는데 기왕이면 배우가 더 나를 ‘맛있게’ 보여줄 수 있겠다 싶어서. 벌써 57년 전이구먼. 전무송 반효정 이호재 등이 우리 동기지. 나=수재들만 간다는 경기중고교를 나오셨더군요. 신구=그랬대. 하하하. 선생님 잘 만난 인연으로…. (선생님요?)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법대를 다니면서 교사를 하셨는데, 그 양반 눈에 내가 가난하지만 공부를 시키면 잘 할 것 같아 보였나 봐. 우리 반 세 놈을 골라 경기중학교 시험을 보게 했는데 두 명이 됐지. 내가 외우는 건 참 잘했어. 수학도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 외워 풀었으니까. 수학을 아주 싫어했거든. (외워서 풀었다고요?) 그러니까 (서울대) 떨어졌지. 두 번 떨어졌어. 허허허. ※그는 경기고 52회로 고건 전 국무총리,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이 동기다. 서울대 상대에 떨어진 뒤 성균관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중퇴했다고 한다. 나=주변에서 연극하는 걸 반대했을 것 같은데요. 신구=많이 반대했지. 하지만 내가 하고 싶었으니까…. 만약 연극을 안 했다면 아마 봉산탈춤 인간문화재가 됐을 거야. (봉산탈춤요?) 젊을 때 봉산탈춤을 배웠거든. 1968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서 1년간 탈춤도 소개하고 현대무용도 배우고 공연을 했지. (공연을 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셨나 봅니다) 음…, 단역인데 대사는 없는…. ※그는 봉산탈춤 예능보유자인 김진옥에게 전수받았다. 2013년 예능프로 ‘꽃보다 할배’에서 파리 개선문 위에서 이 춤을 춰 화제가 됐다. 나=허스키한 목소리가 특징인데 원래 목소리입니까. 신구=이게 연습해서 만들어진 건데…, 미성은 아니지만 관객이 듣기 좋게 갈고 닦고 연습해 만들어진 결과지. 한참 연기 배울 때 지금은 돌아가신 바리톤 이인영 선생님께 발성법을 배웠는데, 지금도 목이 잠기면 방문을 닫고 낼 수 있는 한계까지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고 있지. 나는 재주는 대부분의 사람이 거의 같다고 봐. 단지 누가 더 노력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재주만 믿고 노력하지 않아서 망한 사람 많이 봤다고. (F·O) S#2 (F·I) 젊을 적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씩 흥이 나기 시작한 노배우. 이제는 스스럼없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신구=지금 ‘앙리 할아버지와 나’란 연극을 하고 있는데…, 이 연극이 참 재밌어. 앙리는 까칠하고 괴팍하고 고집불통이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노인인데… 내게도 그런 면이 있는 것 같고. (젊을 때부터 아버지나 할아버지 역을 많이 하셨다고요) 주연을 맡을 조건이 아니니까. 나는 배역을 받는 쪽이지 선택하는 쪽도 아니고. (1969년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주연으로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을 수상했는데요) 그건…, 얼굴이 상관없는 배역이라…. 인상이 강해서 젊을 때는 간첩, 파계승, 인민위원장, 악당 같은 까맣고 빨간 역할이 죄다 내 차지였어. 햄릿이나 멜로 작품은 안 오고. (죄송한데 얼굴 때문에?) 죄송하긴 사실인데…. 불륜역도 얼굴이 돼야 하지. 나=50년이 넘게 연기를 해왔는데 아직도 아쉬운 점이 있습니까. 신구=날카롭게 조목조목 지적하는 비평이나 리뷰에 대한 갈증이 있어.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콕 집어서 이렇게 해달라는 말을 잘 안 합디다. (잘해서 아닌가요) 경험은 좀 있겠지만, 완벽할 수는 없는데…. 그런 지적이 있으면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을 텐데, 공연은 공동작업이니까 나이나 경험에 구애받지 않고 할 말은 하면서 작업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어떤 점이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항상 부족하지. 작품 속 모든 인물과 상황을 경험해본 게 아니니까. 재공연도 마찬가지고. 먼저 한 것과 똑같이 하면 의미가 없지 않겠소? 새로운 해석을 넣고, 더 살찌워서 풍부한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해야지. (그래서 파마를 하신 건가요) 어떻게 하면 괴팍한 프랑스 할아버지 느낌을 줄 수 있을까 해서…. 난 원래 파마를 해본 적이 없어. 작년이랑 올해 이 작품 때문에 했지. 하하하. 나=‘니들이 게 맛을 알아?’란 햄버거 광고 대사는 지금도 패러디되는 유행어인데 원래 유머 감각이 있으신가요. 신구=하하하. 광고는 히트 쳤는데 정작 햄버거는 망했다고 하더라고. 그 광고도 그렇고, 시트콤(‘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도 평소 나와는 좀 다른 연기였는데… 그 또한 내 안에 내재된 모습이 아닌가 싶어. 연기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녹아들 수밖에 없지. 특별히 과장된 역할이 아닌 한, 대부분 자신의 본래 모습을 바탕으로 캐릭터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TV에서 보여지는 모습도 내 인격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연기를 통해 보여진다고 믿고 있어. (F·O) ※‘니들이 게 맛을 알아?’는 2002년 공전의 히트를 친 롯데리아 크랩버거 CF 카피다. 광고가 워낙 유명해져 출시 한 달 만에 550만 개나 팔릴 정도로 인기였으나 기존 생선버거와 큰 차이가 없는 데다 가격도 비싸 오래가지 못하고 단종됐다. S#3 (F·I) 지그시 눈을 감는 노배우.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는지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나=무척 바쁘실 텐데도 매니저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신구=(눈을 뜨며) 응? 지금껏 한 번도 없었는데…. 젊었을 때부터 촬영 있으면 직접 의상 들고, 택시 타고 갔으니까. 지금은 이 분야가 다양해지면서 소속사도, 매니저도 생겼지만 난 처음부터 그렇게 훈련돼서 그런지 굳이 필요가 없었던 것 같아.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이 많을 것 같은데요) 없어. (네?) 하하하. 없어. 이거(‘앙리 할아버지와 나’)하고, ‘장수상회’(연극) 지방 공연을 다니고 있고, 얼마 전에 영화 ‘천문’을 찍었고, 드라마는 없고…. 광고도 광고주가 자주 틀어서 많아 보일 뿐이지 많이 찍은 건 아니야. 누구는 그 정도면 바쁜 거 아니냐고 하는데 몸에 배서 그런지 난 별로…. 나=실례지만 연세에도 불구하고 인스타그램을 하시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그런데 팔로어는 19만6000명이나 되는데 팔로는 왜 한 명도 없습니까. 신구=하하하, 작년에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회사에서 홍보해야 한다고 인스타 뭐라는 걸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게 뭐냐고 물으니까… 개인 사진 뭐 뭐라고…. 난 그게 뭔지도 몰랐어. 회사에서 만든 거지. 그러니까 팔로가 하나도 없는 거고. 하하하. 나=젊은이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신구어록’이 인터넷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신구=젊은이들이 실패할 걱정 때문에 도전도 못 하지는 않았으면 해. 이번 연극에서 떨어질까 봐 음악학교 지원을 주저하는 콘스탄스에게 앙리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어. ‘난 자네가 서커스단 코끼리 같아 보여. 그 큰 덩치로 어릴 때부터 말뚝에 묶여 꼼짝달싹 못하는 코끼리. 이제는 지 힘으로 뽑아버릴 수도 있는데 못 해. 왜 그런 것 같아? 그건 말이야,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이미 포기한 코끼리 자신의 생각 때문이야’라고. 어려워도 말뚝을 뽑는 젊은이들을 보면 부럽고 자랑스럽지. 잔소리지만… 삶이란 건, 성공이나 실패로 가를 수 있는 게 아니야. 중요한 건 얼마나 매사에 열심히 사랑했느냐, 그거지. 나=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 제게는 뭐 해주실 말이 없으신가요. 신구=이제 상사에게 혼나지 않아도 되지? 물끄러미 무대를 바라보는 신구. 조용히 문밖으로 사라진다. (F·O)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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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대변인의 靑테크

    2017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부동산 가격을 잡아주면 피자 한 판씩을 쏘겠다”고 말했다. 이후 정부는 8·2부동산대책을 발표했다. 이어 9·5, 10·24, 12·13 등 부동산 정책이 줄을 이었다. 넉 달여 후 기재부에는 청와대에서 보낸 피자 350판이 배달됐다.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은 이듬해 7월 2일, 재개발 예정지인 동작구 흑석동의 2층 상가건물을 25억7000만 원에 매입했다. 공교롭게도 며칠 후인 7월 10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용산·여의도 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부동산 시장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한 달 후인 8월 첫째 주 용산구와 영등포구의 아파트 값은 0.29%로 서울 전체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그 사이에 낀 동작구도 0.21%로 급등했다. 김 대변인은 같은 달 22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부동산 동향에 대해 김수현 사회수석을 중심으로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후 8·27, 9·13, 9·21대책이 연이어 발표됐다. ▷김 대변인은 흑석동 건물을 사면서 은행 대출 10억2000여만 원, 사인 간 채무 3억6000여만 원 등 16억4580만 원의 빚을 냈다. 지난해 2월 대변인 임명 때 신고 재산이 약 12억 원이었으니 재산보다 많은 빚을 내 건물을 산 것이다. 청와대 관사로 이주하면서 기존 거주 주택의 전세보증금(4억8000만 원)도 건물 매입비에 보탰다. 일반인들로선 엄두를 내기 힘든 과감한 투자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것은 주요 공직에 임명되면 있던 부동산도 처분하기 마련인데, 현직에 있으면서 새로 상가를 구입한 점이다. ▷원래 청와대 대변인에겐 관사가 제공되지 않았으나 문재인 정부 첫 대변인인 박수현 현 국회의장 비서실장 때부터 생겼다. 문 대통령이 민정수석 시절 서울 집값이 비싸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충남 공주 출신인 박 대변인에게 경호실에서 사용하던 빌라를 관사로 제공했다고 한다. 서울에 살던 후임 김 대변인이 가족과 함께 관사에 입주한 것이 적절한 처신이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 관사를 마련해준 취지가 전세보증금을 빼 더 큰 집을 사라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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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아직 인공강우로 미세먼지를 해결하기는 힘든데…”

    《미세먼지가 갈수록 심각해지면서 해결 방안으로 ‘인공강우’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서해상에서 중국과의 공동 인공강우 실험을 지시하면서 관심이 더 높아진 상태. 듣기에는 그럴듯한데 과연 인공강우로 미세먼지를 제거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나 효과가 있는 것일까. 국내 인공강우 실험을 총괄하는 주상원 국립기상과학원장은 “우리 인공강우 수준은 이제 막 자료를 축적하는 기초단계”라며 “지금 수준으로는 인공강우로 미세먼지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립기상과학원을 찾은 13일 제주 서귀포의 낮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모자가 날려갈 정도의 바람에 씻긴 탓인지,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도 체감으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자체 오염원이 적다 보니 내륙에서 미세먼지가 극심할 때도 제주는 절반 정도 수준이라고 한다. 과학원에 따르면 미세먼지가 극심했던 4∼10일 미세먼지(PM10) 주간 평균이 서울은 101μg(마이크로그램·1μg은 100만분의 1g)인 데 비해 제주는 58μg으로 절반 정도였다. 초미세먼지(PM2.5)도 서울은 주간 평균 69μg인데 제주는 38μg이었다. ―이달 초 미세먼지가 워낙 심하다 보니 ‘피미족’이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아무래도 제주는 미세먼지 피해가 적을 것 같은데…. “자동차 공장 등 자체 오염원이 별로 없으니까 미세먼지가 심하다는 느낌은 잘 못 받는다. 심한 날 한라산이 좀 뿌옇게 보이고 민감한 사람은 목이 좀 칼칼한 정도? 미세먼지가 심하면 육지는 온통 누렇게 되지만 여기는 수증기와 결합해 하얀색이다.”(중국에서 오는 미세먼지가 많은 편인가?) “중국과 그리 먼 거리는 아닌데 기류 탓인지 그렇게 심한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바람 탓에 흩어지니까 더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이날 오후 서귀포의 미세먼지는 43μg으로 보통 수준이었지만 바람 탓인지 체감으로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기자는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미세먼지에 민감한 편이다. ―주간 평균은 낮았지만 5일 하루는 118μg까지 올라갔는데…. “여기도 나쁠 땐 아주 안 좋은데, 바람이 세다 보니 오래가지는 않는다. 다음 날인 6일에는 바로 절반 수준인 49μg으로 떨어졌다. 올해 차량 2부제도 5일 하루밖에 안 했다. 비상저감조치도 없었고…. 생활할 때는 잘 못 느끼는데, 내륙에서 미세먼지가 심하면 제발 좀 줄여 달라는 민원 전화가 많이 오니까 그럴 때 실감하기는 한다. 개인적으로 여기서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써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미세먼지 농도는 좋음 0∼30, 보통 31∼80, 나쁨 81∼150, 매우 나쁨 151 이상(단위 μg), 초미세먼지 농도는 좋음 0∼15, 보통 16∼35, 나쁨 36∼75, 매우 나쁨 76 이상이다. ―미세먼지 피해가 갈수록 커지다 보니 인공강우가 해결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원래 인공강우는 가뭄 해소 대책으로 시작됐다. 그런데 미세먼지가 심해지면서 인터넷 언론 등에서 중국 태국에서는 인공강우 기술을 활용해 미세먼지를 제거한다고 언급했고, 그러면서 인공강우가 마치 미세먼지 해결책인 것처럼 인식됐다. 우리가 먼저 인공강우로 미세먼지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상학계 전문가들은 인공강우로 미세먼지를 줄이는 건 요원하다고 본다.” ―하지만 1월에 인공강우로 미세먼지 제거 실험을 하지 않았나. 당시 관심이 매우 높았다. “원래 1월 20∼25일 중에 인공강우 실험이 계획돼 있었다. 그런데 1월에 워낙 미세먼지가 심하다 보니 환경부와 얘기하면서 겸사겸사해서 같이 실험은 할 수 있다고 한 거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 인공강우가 성공하면 그로 인한 세정 효과도 측정할 수 있을 테니…. 그런 취지였다. 비가 내리지 않아 실패했지만….” (인공강우의 성공 실패 기준이 뭔가?) “실험 목표가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이면 내리면 성공이고 안 내리면 실패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단계가 아닌 아직 연구 단계다. 구름 속에 구름씨(요오드화은)를 살포한 뒤, 그 구름씨가 어떻게 성장해 물방울이 되는지 등을 관측해 데이터를 모으는 수준이다. 아직 성공, 실패를 말할 단계가 아닌데 갑자기 워낙 관심이 뜨거워지다 보니 성공 실패란 단어를 쓰게 됐다.” ―인공강우든 자연 상태든 어느 정도 비가 내려야 미세먼지가 제거되나. “실제 인공강우로 미세먼지 제거에 성공했다는 논문이나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다 시뮬레이션인데…. 천차만별이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10mm 이상 두 시간 정도는 세차게 내려야 효과가 있다는 것도 있고, 또 어디서는 1mm도 두 시간가량 내리면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비로 미세먼지를 제거하기가 쉽지 않은 게 우리나라에서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고기압으로 대기가 정체된 날이 많다. 고기압이면 구름이 별로 없다. 인공강우 조건에 잘 안 맞는 거다. 그래서 인공강우가 미세먼지의 주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보고하고 있다.” ―미세먼지 제거도 인공강우가 성공해야 가능한 것 아닌가. “우리는 보통 평균 1mm 정도 나오는데…. 작년에 처음 우리 비행기로 항공 실험을 했는데 12번 중 9번 성공했다. 2017년 6월 충북 충주에서 했을 때는 시간당 2mm 정도 내렸는데 가장 많이 나온 수치다. 적은 것 같지만 사실 굉장히 많은 양이다. 예를 들어 서울 여의도에 한 시간 동안 1mm가 내렸다면 물의 양은 약 450만 t에 달한다. 1월 서해에서 한 인공강우 실험도 대상 지역 넓이가 여의도의 약 180배였다. 넓은 지역에 흩어져 내리니까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지, 다 모으면 엄청나게 많은 양이다.” ―우리 비행기로 항공 실험을 한 게 지난해가 처음이라고? “지난해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샀으니까…. 13인승 크기다.” (그 전에는 기상청에 관측비행기가 없었나? 얼마나 비싸길래….) “조종사, 정비, 실험 등을 다 포함해 1년 운영비가 19억 원 정도 든다. 인공강우 실험만 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분야 실험도 함께 하는 공용이다. 태국 기상청은 인공강우 실험용으로만 31대, 중국은 소형은 뺀 중대형 비행기만 50대가 있다. 중국 기상청은 인공강우 실험을 위한 로켓도 5000대 이상 갖고 있다고 들었다.” (태국도 31대라고?) “거기도 건기에 가뭄이 드는 곳이 많다. 그래서 인공강우 연구가 활발하다.” ―한 대로는 충분한 실험이 어려울 것 같은데…. “다른 나라는 보통 두세 대가 함께 떠서 하나는 구름씨를 살포하고 나머지는 뒤따라가며 빗방울 형성 과정을 관측한다. 한 대로 하면 구름씨를 뿌린 뒤 다시 돌아오며 관측해야 하는데 지역이 넓은 데다 비행시간이 3∼4시간밖에 안 돼 제대로 관측하기가 어렵다.” (비행기를 사기 전에는 어떻게 했나?) “1, 2인용 경비행기를 임차했는데 비행기가 작아 관측 장비를 설치할 수가 없어서 구름씨만 뿌리고 관측은 지상에서 했다.” (구름 속 상황은 측정하지 못한 건가?) “못했다. 작년에 비행기를 사면서 구름 속을 분석한 게 처음이다.” (이제 걸음마인데 대통령이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것 같은데?) “하하하.” ―대통령이 중국과의 공조를 주문했는데 중국이 좀 우호적인가. “작년 11월에 중국 기상과학원 기상조절센터를 방문했는데 중국도 인공강우를 이용한 미세먼지 제거 실험을 하기는 했다고 했다. 하지만 분석이 아직 안 돼 자료는 줄 수 없다고 하더라.” (주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닌가?) “중국도 인공강우를 가뭄 대책으로 했지 미세먼지 제거 실험은 그게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처음 해서 성공하기는 어려우니까…. 앞으로 계속할지 여부도 말하지는 않았다.” ―중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기간 중 비가 예보되자 인공강우로 막았다던데…. “미리 비를 내려 맑게 한 게 아니라 올림픽 기간에 비가 오지 않도록 참게 만든 것이다.” (무슨 뜻인가?) “쉽게 말해 구름씨 하나에 수분 10개가 모여야 빗방울이 된다고 치면, 채 10개가 달라붙을 새가 없게 대량의 구름씨를 살포한 것이다. 그럼 빗방울 개수는 많아져도 일정 무게에 도달하지 않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 구름만 좀 커질 뿐…. 구름씨를 너무 많이 뿌려도 비가 안 오기 때문에 적당한 살포량을 찾는 것이 정말 어렵다.” ―미세먼지 제거에 비보다 바람이 더 효과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비는 단순히 물만 뿌리는 게 아니다. 비가 온다는 건 저기압이란 공기덩어리가 밀고 들어오는 거고, 그 공기덩어리의 움직임이 바람이다. 분리해서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알기는 아주 힘들다. 미세먼지를 기상 조절을 통해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미세먼지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배출되는 것이니까 결국 근본적으로는 배출원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인공강우 실험을 하는 데 아쉬운 점이 있나. “항공 실험은 날씨와 구름 생성 등 기상조건이 맞을 때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공강우 실험을 할 수 있는 체임버(Chamber) 건설을 추진 중이다. 인공적으로 구름을 만들어 강우 실험을 할 수 있는 일종의 커다란 방이다. 지금 어느 정도 규모로 하는 게 가장 좋은지 연구 중이고 내년에는 설계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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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크게 보면 살길이 있는데, 황 대표가 둘 수 있을지…”

    《당대의 국수(國手)도 정치라는 바둑판에서는 어리둥절하기가 다반사였다. 자칭 고수라는 사람들이 19급도 안 둘 수를 둬 자멸하기 일쑤였으니…. 그가 속한 당도 약간의 반사이익을 얻다가 잇단 망언으로 다시 수렁에 빠졌다. 최근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당 대표에 선출하고 재기를 모색하고 있지만 미래는 아직 불투명하다. 조훈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달 27일 인터뷰에서 “황 대표가 큰 바둑을 두고 싶다면 돌 몇 점 잡는 데 연연해하면 안 된다”며 “탄핵, 5·18 망언 등에 대한 처리도 대국적으로 보면 답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뭘 좀 해보려면 잇따라 터지는 악재들. 얼마나 더 내려가야 바닥이 보일까. 빈삼각을 둘 수 있어야 고수라지만, 빈삼각만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지난 3년간 비상대책위만 3번이 들어섰는데 당이 좀 나아졌다고 보나.○솔직히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잘한 것 같지는 않다. 당 안에서야 이런저런 사람이 바뀌는 부침이 있었지만 막장공천, 탄핵 이후보다 나아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내부 싸움을 멈춰야 하는데…. (안에서 여전히 싸움이 많나?) 아직도 갈라져 있으니까…. 황 대표가 내·외부 통합을 잘해야 하는데…. 일단 5·18 망언 의원 처리와 탄핵에 대한 입장 표명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황 대표는 탄핵에 대한 입장이 애매한 것 같은데….○탄핵은 그에게 평생 꼬리표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잘 정리하지 않으면 꼬리표가 떨어지지도 않고, (자신은 물론 당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온 국민의 70∼80%가 인정하는데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가. 솔직히 말해 정치가 국민의 뜻대로 가야 하는 거지 우리 뜻대로 하는 것인가.●일반적인 생각은 그런데 전대 과정에서도 보듯 한국당 내부는 많이 다르다.○그래서 새 당 대표의 과제가 무겁다. 또 언론에서 언급하듯 본인이 정말로 대선을 생각한다면 (당의) 좌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는 분명한 것이다. 지금 한국당 지지층의 표만 받아서는 될 수가 없지 않나. 전체 국민을 봐야지. 물론 개중에는 내 편이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것 따지면 글렀다고 본다.●특정 세력의 입장이나 이익에 매몰되지 말라는 건가.○돌 몇 개 잡는 거보다 대국을 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선수를 잡아야지 몇 점 따려고 국지전에 매달리면 이길 수가 없다. 목표가 오직 당 대표라면 자기편만 자리 주고, 지지층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꿈이 있다면 크게 봐야 한다. 탄핵도, 박근혜 전 대통령 문제도 그 안에 다 포함된다. 그에게도 자신만의 바둑이 있겠지. 어떻게 둘지는 모르겠지만….●황 대표 지지층 중에는 복당파를 배신자라고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난 무조건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한 사람이라도 내 편을 만들고 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래서 떼고, 저래서 버리면 누구와 함께하나. (유승민 의원도 마찬가지인가.) 온다고 하면 다 받아줘야지. 생각이 좀 달라서 간 건데 적군한테 간 것도 아니지 않나. (들어오고 싶으면 석고대죄하고 오라는 사람도 있지 않나.) 치졸하게… 그거 하라고 하면 누가 들어오겠나.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지. 그래 놓고 또 ‘나는 막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냥 조건 없이 받아야 한다.●스스로 정치는 하수라고 했지만 정치에 묘수가 필요한가. 상식이 묘수 아닌가.○그게 안 되는 세상이 여기더라. 이미 흑백논리가 정해져 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상대방 것은 일단 아웃시켜야 되는 걸로 보는 거지. 물론 모든 게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단 아웃이다. 처음에는 ‘왜 이러나…’ 싶었는데, 지금은 이유를 조금 알게는 됐다. (왜 그러나?) 이상한 사람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아주 괜찮은 사람들이다. 양식 있고 무모하지 않고 대화도 되고…. 그런데 상임위 등에서 정치적인 대립 상황이 생기면 돌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사람들이 안 따른다. ‘귀신보다 무섭다’는 자충수. 가까이서 보면 괜찮은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 정치가 사람을 변하게 한 걸까. 혹시 나도 변하지 않았을까.●잠시 반사이익을 얻었는데 5·18 망언으로 다시 자멸했다.○망언 맞지. 망언 맞다. 괴물 집단이니, 세금 도둑이니 하는 말은 너무 험한 거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표현은 잘못됐는데… 5·18민주화운동 자체를 부정한 건 아니고 잘못 선정된 유공자가 있으니 가려야 한다는 말이 좀 과격해진 게 아닌가 싶다. 따질 건 따져 보고 사과할 게 있으면 하면 되지 않을까. (지만원 씨는 북한군이 개입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영웅이라고 한다.) 그건 진짜 아니고…, 6명도 아니고 북한군 600명이 어떻게 들어오나. 나도 안 믿는다. 그게 사실이면 국방이 뚫린 건데 국가가 먼저 사과하고 책임을 졌어야 하는 거 아닌가? (북한군 개입설은) 인정할 수 없다.●망언도 문제지만 징계 유보 등 사후 처리도 문제 아닌가. ○당 윤리위가 한 사람은 최대 수위인 제명을 의결했고, 둘은 전당대회 때문에 징계를 유예했는데, 당규가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징계하려면 당규를 고쳐야 하는데 그럴 시간은 없고…. 이후가 문제다. 한 사람은 떨어졌지만 다른 한 사람은 최고위원에 당선됐으니…. 골치 아프긴 하지만 규정대로 하면 되지 않나 싶다.※한국당은 당 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 규정에서 ‘후보자는 후보 등록이 끝난 때부터 당선인 공고 시까지 윤리위 회부 및 징계의 유예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지도부 대응이 늦어지면서 김진태, 김순례 의원은 지난달 12일 후보 등록을 했고, 당 윤리위는 다음 날인 13일 소집됐다. 이종명 의원에 대한 윤리위 제명 의결이 확정되려면 의원총회에서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의총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고향이 전남 영암이라 이런 경우에는 좀 팔이 안으로 굽을 만도 한데 안 그런 것 같다. ○나는 좀 크게 봤으면 좋겠다. 이 작은 나라에서 남북이 갈리고, 또 영호남으로 가르면 너무 웃기지 않나. 고향을 위하는 건 좋지만 각자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갈라 갈등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건 안 했으면 좋겠다. 참 웃기는 게 같은 사람이 여기 가서는 ○○의 아들이라고 하고, 저기 가서는 ○○의 사위라고 하는데… 그거 다 합치면 결국 전국구가 되지 않나. 그냥 대한민국의 아들, 딸이라고 하면 안 되나? (고향 사람들이 뭐라고 안 하던가.) 지인들이 아끼는 마음에 5·18 거기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더라. 광주 사람들이 지금 감정이 안 좋으니까 세미나고 뭐고 근처에 가지 말라고…, 하하하.●말이 난 김에… 전 전 대통령이 가끔 바둑 두자고 불렀다고 하던데….○그가 바둑을 좋아했다. 하루는 연희동이라며 비서인 듯한 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전 전 대통령이 지도를 받고 싶어 한다고 와 달라는 거다. 재임 시절에 KBS 바둑대축제(1983∼1992년)도 만들어주고 해서 갔는데, 아마 초단 또는 2단 정도는 됐다. 처음에 9점 놨는데 내가 안 되더라고…. 7점 놓으니까 비슷했다. 한 번 두고 다 알 수는 없지만 엄청 싸움 바둑이었다. 수비고 뭐고 그런 거 별로 없고 아주 공격적인…. 대통령 재임 중에 함께 둔 기억은 없고, 퇴임 후였다. (혹시 대국료 주던가? 받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에 0이 하나 더 붙을 정도로 통이 아주 크다고 하던데….) 보통 그런 분들을 만나면 주는데…, 그때가 마침 ‘전 재산이 통장에 29만 원밖에 없다’고 법정에서 말해 화제가 됐던 때였다. 미안하다면서 그래서 줄 수가 없다고 하더라. 하하하. 만약 주면 돈이 더 있다는 증거가 되니까…. 대신 뭐 조그만 선물을 주면서 좀 지나면 보자고 했는데, 그 뒤로는 못 봤다. 하하하.※전 전 대통령은 1997년 추징금 2200억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거의 안 내 2003년 4월 다시 법정에 불려갔고, 이때 “내 전 재산은 통장에 29만1000원뿐”이라고 말했다. 조 의원과의 대국은 이 발언 이후였다. ●통합돼야 한다는 말은 많이 하지만, 통합의 실체가 뭔가? 없어지란다고 계파가 없어지나.○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한들 그게 되겠나. 애들도 아니고…. 계파가 무슨 동호회처럼 탈퇴서를 내면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통합의 실체는, 안에서 피 터지게 싸우더라도 일단 결정되면 다 같이 승복하고 밀어 주자는 거다. 화해하라는 게 아니라. 지도자도 마찬가지다. 일단 뽑혔으면 인정해 주자는 거다. 나는 찍지 않았다고 끝까지 몽니 부리지 말고.●구성원들이 밀어 주는 것도 필요하지만, 반대로 그런 승복을 이끌어내는 게 리더 아닌가. 황 대표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나.○그게 앞으로 본인이 해야 할 일이다. 포용해서 품고 가든지, 굴복시켜 따라오게 하든지 방법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어떤 방법을 쓰든 구성원들이 따라와야 내부가 단단해지고 그래야 당도 산다. 특정 세력에 치우친 판단과 행보를 하면 전체 구성원들이 따를 리가 없지 않은가. 답은 나와 있다. 하기 나름이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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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세종대왕 동상 옮기면 흉물 돼… 차라리 없애 달라”

    《서울시가 지난달 21일 광화문광장 재조성안을 확정·발표했다. 이 안에 따르면 세종대왕 동상은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정부서울청사 옆으로 옮겨진다. 안이 공개되자 동상 이전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고, 서울시는 “확정된 게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이순신 동상은 존치하고, 세종대왕 동상은 이전하는 쪽으로 가는 분위기다. 동상을 옮기면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전 홍익대 미대학장(72)은 “장소가 바뀌면 세종대왕 동상은 흉물이 된다. 차라리 없애는 게 낫다”고 말했다.》  ―지금의 세종대왕 동상 위치는 어떻게 정해진 건가. “공모에 선정된 후 2주 동안 광화문을 답사했다. 그리고 북악산 정기가 경복궁과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까지 이어지는 역사의 축에 가장 위대한 인물을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순신 장군 동상과의 거리도 고려했다.” (이순신 동상과의 거리라니?) “두 동상이 너무 가까우면 시각적 공간 충돌이 생겨 보기가 부담스러워진다. 너무 떨어지면 무(武)를 상징하는 이순신 장군과 문(文)을 상징하는 세종대왕 간의 조화가 사라진다. 세종문화회관과 미국대사관이라는 거대한 건물이 동상에 미치는 시각적 요소도 고려했다. 주변의 모든 구조물이 시각적으로 서로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은 거다.” ―재조성안처럼 세종문화회관 옆으로 옮기면 이상해지나. “작품과 장소는 한 몸이다. 이전되면 지금처럼 광장의 주인, 역사의 축으로서의 상징성이 사라진다. 세종문화회관은 엄청나게 웅장한 건물이다. 그 옆에 동상이 놓이면 같은 크기라도 지금보다 훨씬 왜소하게 보인다. 세종문화회관에 딸린 장식물로 전락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동상이 지금처럼 남쪽(남대문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동쪽(미 대사관 방향)을 본다는 점이다.” ―얼굴이 동쪽을 보는 게 왜 문제가 되나. “조각은 빛의 예술이다. 어떻게 조명을 받느냐에 따라 작품이 살고 죽는다. 그래서 조각은, 특히 인체는 동향이나 서향으로 놓지 않는다. 지금은 햇빛이 얼굴 왼쪽에서 머리, 얼굴 오른쪽을 비추며 지난다. 이마, 코 등 때문에 얼굴에 적당한 음영이 지면서 양각이 살아나 어느 때, 어느 쪽에서 봐도 정상적인 사람 얼굴로 보인다. 그런데 이전 예정지에 놓이면 동상이 동쪽을 향한다. 해가 얼굴 정면을 비추며 뜬 뒤 뒤통수를 비추며 지는 것이다. 햇빛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면 음영이 하나도 안 생겨 인형처럼 멍청해 보인다. 반대로 오후에는 해가 뒤에서 비추기 때문에 얼굴이 시커멓게 된다. 그래서 옮길 바에는 차라리 없애 달라고 한 거다. 알 만한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니…. “공모전 심사위원장인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은 건축가다. 조경, 건축하는 사람들에게 공간에 대한 공부는 기본이다. 공간과 방향에 따라 동상이 어떻게 보인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이전을 하면 세종대왕 동상은 흉물처럼 보이게 된다. 시민들 사이에서 보기 안 좋다는 말이 나올 테고 그때 가서 자연스럽게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닌지….” ―서울시가 사전에 의견이나 양해를 구하지 않던가. “한마디도 말해 준 게 없다. 그래서 왜 옮기려고 하는지 모른다. 하도 답답해서 서울시 홈페이지에 질문을 올렸는데 답이 없다가 어제(11일) 오후 5시경에야 서울시 공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시는 이전을 말한 적이 없다면서 단지 당선작 설계자와의 만남은 주선해 줄 수 있다고 했다.” (설계자를 만난들 무슨 소용인가. 결정은 서울시가 하는 거 아닌가) “책임을 그쪽에 떠넘긴 거지.” (만났나?) “오늘 오후 2시경이라고 했는데 어디서 만나는지 아직도 연락이 없다.” (지금 오후 1시가 넘었는데?) “그러게 말이다.” ―이전이 불가피하다면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는 게 예의 아닌가. “서울 강남 포스코센터 앞에 현대미술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의 ‘아마벨’이란 작품이 있다. 비행기 잔해로 꽃을 형상화한 것인데 예술적 의미가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좀 흉하게 보일 수 있는 형상이다. 보기 싫다는 민원이 많아지니까 포스코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내가 그곳 작품심의위원이었는데 심의를 하면서 작가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했다. 안 그러면 큰 망신이나 아니면 엄청난 페널티를 물 수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노발대발해서 한 치라도 옮기면 소송을 하겠다고 펄펄 뛰더라. 결국 못 옮겼다. 작품과 장소는 한 몸이다.” ―세종대왕의 어떤 모습을 구현하고 싶었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초상화도 없고….” (어진이 없나?) “세종대왕은 어진이 없다. 지금 1만 원권 지폐에 있는 그림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것이다. 동상심사위원회가 운보 그림을 주면서 참고하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좀 유약해 보였다.” (유약하다니?) “세종대왕은 자애로운 분이지만 백성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늘 사대부들과 충돌했다. 훈민정음 창제는 그 절정이었고. 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는 목숨을 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 표준 영정에서는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태조 영조 고종 순종 어진을 참고하고 후덕한 얼굴인 고종을 많이 반영했다. 다행히 다들 세종대왕으로 여기더라. 하하하.” ―만드는 동안 고생을 많이 했나. “점토 작업만 3개월 반이 걸렸는데 그 사이에 5kg이나 빠졌다. 한여름에도 오한이 들어 점퍼를 입고 작업했으니까…. 불면증도 걸리고…. 너무 힘들어서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까짓것 위약금 물어주면 그만이지 하고….” (세종대왕 용안을 본 사람도 없는데…) “안 봤으니까 각자 느낌으로만 대할 것 아닌가. 더 힘들지. 더구나 광화문이라는 대한민국의 중심이 주는 중압감, 최고의 성군을 감히 나 같은 게 만든다는 부담이 너무 컸다. 나라 한복판에 자신의 작품이 있다는 건 대단한 영예지만 그만큼 큰 부담이다. 2009년 10월 9일 제막식만 가고 이후 1년 동안 광화문 근처는 얼씬도 안 했다. 너무 힘든 기억이 떠올라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만들었다가 곤욕을 치렀다고 하던데…. “2017년 박 전 대통령 추모 단체에서 서울 마포구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에 세울 동상 제작을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난 11월 14일을 기념해 전날 설치하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기념관 안에 텐트까지 치고 격렬하게 막았다. 충돌이 너무 커져서 결국 동상은 못 세우고 소유권을 기념관에 넘기는 서류 기증식만 했는데…, 기념관이 지역구인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도 와서 격렬하게 반대하더라. 그런데 나랑 눈이 마주치자 못 본 척 고개를 휙 돌렸다.” (손 의원은 홍대 미대를 나오고 산업미술대학원 교수를 하지 않았나) “그렇지….” (그 뒤에는 어떻게 됐나) “서울시가 허가를 안 해 아직도 설치를 못 하고 있다. 동상은 내가 보관하고 있고…. 인물에 대한 평가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박 전 대통령이 동상도 만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반대한다고 힘으로 막는 게 진보라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서울시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설치를 불허했다.” ―서울시가 왜 동상 설립을 불허하나. “기념관 부지가 시유지라 조형물을 세우려면 서울시 심의를 거쳐야 한다. 그런데 이게 심의할 만한 걸 해야지, 박정희 기념관에 박정희 동상 설치가 심의 대상이 되나. 견디다 못해 기념관에서 서울시에 정식으로 설치허가 요청서를 냈다. 그랬더니 마포구민 동의서를 받아 오라고 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허가를 지연하던 서울시는 이듬해인 2018년 2월 당초 없던 ‘근·현대 역사 인물 동상 건립 기준’을 신설하고 기념관 측에 역사자문기관 3곳 이상에서 인물 평가를 받아 와야 허가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기념관 측은 역사기관 평가 대신 박 전 대통령 관련 서적 12권을 제출했으나 서울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청남대에 세워진 역대 대통령 10명의 동상을 다 만들었다던데…. “충북도에서 청남대 길마다 역대 대통령 이름을 붙였는데 그 길에 하나씩 세워졌다.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대통령마다 표현하고 싶은 모습이 있었나) “YS는 결단성, DJ는 화합과 통합, 노무현 대통령은 권위주의 타파, MB는 부지런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누가 가장 만들기 어렵던가) “하하하. MB였다. 그분이 좀 얼굴이 왜소해서 양감이 잘 안 나온다. 또 눈 크기가 달라서…. 속된 말로 짝눈이라고 하는 건데…. 똑같이 만들면 얼굴이 엄청 이상하게 보인다. 약간 (눈을 키우는)가필을 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할 수 없이 눈도 그렇고 좀 가필을 했다. 하하하.”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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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김수현 정책실장은 꼭 중장기과제 고민할 짬을 냈으면…”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거세다. 이미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치소에 수감됐고 최근에는 전직 대법원장이 그 뒤를 따랐다. 누구든 죄가 있다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속에 서로에 대한 증오가 조금이라도 작용하고 있다면 정부가 바뀔 때마다 피바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정치에서 현 정부는 전임 정부를 존중하고, 전임 정부는 현 정부에 아낌없이 조언하는 모습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백용호 전 대통령정책실장(63·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은 “국가적 중장기 과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못 한 게 무척 아쉽다”며 “현 김수현 정책실장은 어떻게 해서든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조차 중장기 정책을 고민할 여력이 없다면 어디서 하나. “매일 당면하는 현안이 너무 많다 보니 늘 후순위가 되더라. 현안도 중요하지만 긴 호흡을 가진 정책을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나라가 그런 부분이 많이 약하다. 예를 들면 4차 산업혁명 시대나 저출산같이 긴 호흡이 필요한 문제를 어떻게 대비할 건지 같은….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다문화 가정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고 세계화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다문화 가정 문제를 전략적으로 잘 대응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 또 부모의 재력으로 인한 교육 격차 문제도 고민이 필요하고…. 큰 사건이 터지면 청와대 역량이 전부 거기로 쏠리니까 여력을 내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아마 지금 청와대도 비슷할 거다.” ―정책실 일이 그렇게 많은가. “공정거래위원장부터 시작해서 국세청장, 정책실장까지 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 결과겠지만, 나중에는 걷는데 도로가 눈앞으로 튀어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다. 기가 다 빠진 것인지 잇몸도 다 내려앉고, 머리도 다 빠지고…. 한의원에 갔는데 풍(風) 초기인 것 같다며 닭고기는 먹지 말라고 하더라. 하하하. 그래서 지금도 닭고기는 안 먹는다.” ―전임 정책실장으로서 현 정부 정책에 대해 말한다면…. “정책실장을 하면서 절실히 느꼈는데 정책 성공을 담보하는 건 명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명분과 정치적인 수사에 너무 매달리면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고,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애매한 이름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본다. 사안의 본질과 상관없이 검증된 이론이냐 아니냐는 소모적인 용어 논쟁에 빠졌으니까…. 그냥 분배를 개선한다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명박(MB) 정부가 끝난 뒤 ‘역사는 역시 반복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음…,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을 다 지킨 정부는 없을 거다. 다 해줄 수 있다, 또는 다 해줘야 한다고 너무 과신하는데 그게 모든 정부마다 반복된다. 그리고 못 지키고….” (정확하게 말하면 정부가 아니라 대통령 아닌가?) “허허허…, 뭐 그렇겠지. 이제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정부가 나왔으면 한다.” (예를 들면 어떤 건가) “동남권 신공항 같은 것…. 특정 정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모든 정부가 바뀔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또 하나는 권력자의 모습인데, 권력을 갖기 전에는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거절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권력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그걸 지키기가 아주 어렵다. 그런 절제가 없는 상태에서 평소 하던 행동을 하면 아주 불행한 결과가 오는 거지. 그런 경우가 지금 많지 않나.” ―MB 정부의 공과를 평가한다면…. “지금은 잊었겠지만 MB 정부 시절 대외 경제 여건이 무척 안 좋았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는 어쩌면 서방 국가들에는 대공황 이래 가장 큰 쇼크였는데 국민들이 피부로 위협을 못 느낄 정도로 성공적으로 대처했다. 한미 통화 스와프(swap)가 체결된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하면서 전 세계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한국도 정부가 환율 방어 등 갖은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외환위기 문턱에서 이 상황을 진정시킨 것이 한미 통화 스와프였다. 사실상 미국 중앙은행이 보증을 서면서 원화에 대한 신뢰가 회복된 것이다.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이 어려운 일이었나. “국제 규정상 통화 스와프를 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는데 우리는 그 기준에 모자랐다.” (어떻게 체결할 수 있었나) “일종의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한 건데…. 대통령은 물론이고 많은 공직자들이 노력했고.” (과는?) “국민들이 실망한 부분이 많으니까…. 그 부분은 5년간 MB 정부에서 일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참 착잡하고 무겁다.” ―MB 정부에서 국정홍보처를 폐지한 게 아쉬웠다고 했다. “정책 홍보를 전문 부처가 책임지고 하는 것과 부처 각자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더 아쉬웠던 건 아주 부드럽게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는 도구를 없앴다는 점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세일러의 ‘넛지효과(Nudge Effect)’인데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세금을 잘 낸다’는 사실만 알려도 탈세율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정부가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홍보만 잘해도 상당한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홍보처를 없앤 건 너무 성급했다. 물론 당시에는 홍보처가 기자실 폐쇄 등으로 원성을 너무 사긴 했지만….” ―보수가 지금 무척 어려운 상황이다. 보수의 경제관도 바뀌어야 한다고 했는데…. “보수 정치집단은 그동안 쉬운 길을 걸어왔다. 과거 경제성장 실적, 안보와 지역주의에 안주해 수십 년을 버텼다. 그러다 지금 부패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고…. 지금 위기는 시간만 지난다고 극복되는 게 아니다. 지키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 때문인데 이 담론을 진보의 영역에만 놔둬서는 안 된다.” (보수는 대개 보편적 복지에 각을 세우는데…) “도덕적 해이나 포퓰리즘, 재정 건전성 등을 걱정하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복지를 증진시키거나 경제적 불평등을 풀기 위한 과감한 조치들을 더 이상 진보의 영역으로 놔둬서는 (생존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우리 보수·진보 정당은 거의 이분법적으로 정책을 다룬다. “정책실장 때 친서민 정책을 제시했더니 내 편, 네 편 할 것 없이 ‘MB 정부가 무슨 친서민 정책이냐’며 비판하더라. 보수는 감세와 기업 규제 완화, 진보는 증세와 복지 증대 이런 식으로 아예 진영을 나누는 거지. 양극화가 심화되면 시장이 지속될 수 없다. 보수가 말하는 시장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친서민 정책을 펴야 한다고 설득했다. 마찬가지로 시장을 위험에 빠뜨릴 정도의 탐욕과 반칙에 대해서는 정부가 더 강력하게 개입해야 한다.” (MB 정부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사면해준 건 시장경제에 대한 반칙 아닌가. 이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를 선고받았고 당신은 당시 국세청장이었다) “음…, 그때 세 번째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도전할 때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국민의 열망도 컸지만 이미 두 번이나 유치 신청을 하다 보니 인프라 등 선행된 투자 금액이 굉장히 많았다. 없던 걸로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MB가 고민 끝에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모든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 성공하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던 이 회장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난을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었을 텐데…. “모를 수가 있나. 재벌 특혜다, 법치주의가 훼손됐다 등 상당한 비난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정치적 부담과 세 번째 도전에서는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미 들어간 엄청난 투자 금액 등의 사이에서 결정한 건데…, 굉장히 고민스러운 결정이었지만 다른 국가적 이익을 위해 (법치 훼손을) 용인한 건 사실이다.” ―정부가 각종 제재로 지나치게 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있다. “보수 진보를 떠나 기업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란 걸 모르는 정부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대기업 집단들은 그런 제재가 왜 나오는지 근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정치권은 국민의 마음을 읽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강하기 때문에 그런 제재들이 나오는 거다. 3세, 4세로 넘어가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는 행위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지 않나. 반기업 정서가 왜 생겼는지 재벌들이 고민하지 않으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대기업에 대한 제재 문제가 계속 거론될 거다. 상속도 그렇다. 경영에 관심이 없고 다른 걸 더 잘하는 자녀에게까지 굳이 무리하게 물려줄 필요는 없지 않나. 회사로도, 사회적으로도 너무 위험한 행동이다.” ―공과를 떠나 한 정부의 경제 정책 전반을 이끈 사람으로서 해줄 말이 있나. “정책을 한 사람으로서 후임자들이나 그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건 참 어렵다. 그 고충을 아니까…. 정책 결정 과정에 있는 사람은 굉장히 외롭다. 어떤 선택을 해도 반대가 있고,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정책이 성공을 해도 그 과정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영원히 기억한다. 그래서 굉장히 외롭고 역사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그런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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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인플루엔자와 환각

    23일 일본 도쿄의 한 전철역에서 인플루엔자(독감)에 걸린 30대 여성이 선로에 떨어진 뒤 열차에 치여 숨졌다. 심하게 기침을 하던 중 갑자기 비틀거리면서 추락했다고 한다. 바로 전날 사이타마현에서도 독감에 걸려 집에서 쉬던 초등학생이 아파트 3층에서 떨어져 다치는 일이 벌어졌다.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독감으로 인한 신경이상 증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염병 전문가들에 따르면 독감에 걸리면 뇌의 질병이나 신경합병증으로 인해 환각이나 이상행동이 발생할 수 있다. 이상증상에는 갑자기 달리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흥분해서 창을 열고 뛰어내리려 하거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모습도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이런 증상이 100여 건 보고됐다. 환자수가 200만 명을 넘어설 만큼 독감이 확산되는 데다 신경이상 증상 공포까지 겹쳐 일본인들의 일상생활까지 바뀌고 있다. 한 커플은 남자가 독감 진단을 받자 노트북 영상통화로 결혼식을 치렀고, 독감에 걸린 환자들에게 위로금을 보내주는 크라우드펀딩 앱도 등장했다. ▷국내에서는 지난달 말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복용한 여중생이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지면서 약의 부작용으로 인한 신경이상 증상이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다. 한 남성은 라디오 프로그램 건강상담에서 아들이 타미플루를 복용한 지 40∼50분이 지나면 어디론가 가곤 했는데 왜 그곳에 갔는지는 모르는 증상을 보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약과 이상증상의 관계는 연관 짓기 어렵다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전염병은 철저히 대비해야 하지만 과민 반응은 경계해야 한다. 국내에서도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발병 때 실제보다 사태를 더 키운 건 ‘공기로도 전염된다’는 식의 괴담, ‘낙타 고기와 낙타 우유는 먹지 말라’는 걸 예방법이라고 홍보한 정부의 안이한 대응, 무분별한 학교 폐쇄처럼 공포를 부추기는 과민·과잉대응이었다. 전염병 자체는 천재(天災)지만, 확산은 인재(人災)인 경우가 많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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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고종 훙서 100주기

    100년 전인 1919년 오늘,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 황제가 67세로 훙서(薨逝)했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평소 건강하던 고종이 이날 새벽 식혜 등 음료수를 마시고 갑자기 쓰러졌고, 시체가 심하게 부풀어 올랐다는 점 등 때문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분노한 민심은 2·8독립선언의 동력이 됐고, 고종의 인산일(因山日·3월 3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모인 백성들은 3·1만세운동에 대거 합류했다. 수많은 청년들이 시위 도중 영전이 있는 경운궁에 몰려가 울부짖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특히 일제는 장례행렬 선두에 일본 전통 제례 복장을 입은 사람들을 세웠는데 조선왕조 전통 의례가 아닌 일본식으로 왜곡된 장례식도 민심에 불을 지른 요인이었다. ▷고종의 훙서는 제국(帝國)을 마감하고 민국(民國)을 탄생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2·8독립선언, 3·1독립선언으로 이어진 정신을 잇기 위해 그해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더 이상 ‘왕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망국의 군주라는 한계 속에서도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고 의병을 지원하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데 실패한 군주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차가웠다.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홍릉에 묻혔다. 고종보다 24년 전에 일본인 자객에게 살해된 뒤 서울 청량리 근처의 천장산에 묻혔던 부인 명성황후(1851∼1895)도 그곳에 합장됐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서울 덕수궁 인근에 ‘고종의 길’을 조성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일제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도피한 길이다. 대구 중구에는 고종의 아들인 순종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순행을 하며 일본 건국신화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를 안치한 황대신궁을 참배한 길(순종황제남순행로)이 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자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고 하지만 진정한 다크투어리즘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일제에 의해 무력한 지도자로 색칠돼온 고종에 관한 진실을 다시 세우고 아픈 시대의 교훈을 새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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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이 터져라 땅이 꺼져라 ‘대한독립만세’… 천지가 진동하는 듯”

    《‘신명의 딸은 3·1운동의 첫 횃불을 올렸다. 영남의 하늘에, 순정의 기름에 불을 붙여, 적의 총칼 앞에서 높이 치켜든 그 휘황한 횃불. 큰 의로움을 위해서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 담대성 그 헌신성. 그 정신을 이어받아 참되게 살기를 다짐하는 소녀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여기 돌을 세운다.’(개교 65주년 기념 1972년 10월 23일 재학생 일동 세움) 대구 중구 신명고등학교·성명여자중학교에는 1919년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이 학교(당시 신명여학교) 교사들과 재학생 졸업생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3·1운동 기념탑을 교내에 세운 학교는 전국에서 신명고등학교가 처음이다.》○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 신명여학교는 1902년 5월 선교사 마사 스콧 브루언 여사가 대구에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한 것이 모태가 됐다. 신명여자소학교는 대구지역 최초의 여학교였다. 1907년 신명여자중학교가 설립된 뒤 1912년 신명여자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1944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대구남산고등여학교로 개명됐다. 광복 후 1951년 신명여고와 신명여중으로 환원됐다. 이후 재단 분규와 여고의 남녀공학 전환 등으로 교명은 신명고등학교와 성명여중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명여학교는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이후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큰 활약을 펼쳤다. 대구에서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시작됐다. 이때 신명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가 교사 임봉선(당시 22세·6회 졸업생)과 이재인(31세), 이선애(22세)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일제의 압제에 있는 우리나라를 자주독립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급선무요 우리의 살길이니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며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또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춘 뒤 이날 낮 전교생 5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 밖에 모였다. 주도적 역할을 한 임봉선(1897∼1923)은 3·1운동 전해인 1918년 21세의 나이로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임봉선은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내려온 평양숭실학교 학생 김무생(1898∼?)과 김천교회 전도사 박제원으로부터 서울과 평양의 만세운동 상황을 듣는다. 또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고 만세운동 참여를 결심한다. 경북 경산 출생인 김무생은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고, 대구에서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주모자로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3월 8일 오후 만세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행진을 시작했다. 이때 임봉선은 머리에 수건을 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50여 명의 신명여학교 학생들을 이끌었다. 당시 시위대는 만세운동이 시작된 큰 시장에서 동산교, 대구경찰서, 경정통, 남성정, 중앙파출소를 거쳐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앞까지 진출했다. 이곳에선 일본군 80연대가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또 기마경찰이 시위대로 뛰어들어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임봉선도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신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체포됐다. 당시 여학생들은 나이가 어린 점이 참작돼 석방됐지만 임봉선 등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임봉선과 이재인은 각각 징역 1년 형, 이선애는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임봉선은 이 과정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1923년 26세의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신명여학교 10회 졸업생으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고 김학진 할머니(당시 14세·2002년 97세로 작고)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학생들은 기숙사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천을 구해 태극기와 만세운동에 입고 나갈 옷을 만들었다. 태극기는 크게 만들어 옷가슴에 매달았다. 또 치마는 끈이 어깨에 걸쳐지도록 제작했다. 달리면서 만세를 부르기에도 편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당할 경우 당할 악형과 모욕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3월 8일 약속의 날이 오자 학생들은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약속한 장소까지 가는 것이 큰일이었지만 대야에 세수수건을 담아 빨래하러가는 것처럼 꾸며 학교를 벗어났다. 학생들은 교문 밖 개천에 이르러서 대야를 바닥에 던져버리고 약속장소를 향해 뛰어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 행렬 속으로 뛰어들어가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인근 주민,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장엄한 행렬이 됐고, 얼마 후 대구경찰서에 당도했다. 모인 사람들은 행렬을 멈추고 있는 힘을 다해서 경찰서가 떠나가라는 듯이, 땅이 꺼져라,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러댔다. 김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이후 시위대가 동성로를 지날 때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기마헌병들이 시위대 가운데로 뛰어들며 행렬을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진압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이뤄졌다. 어린 소녀들이 당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기마헌병들은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채 내동댕이쳤고, 쓰러진 소녀들의 몸 위를 마구 짓밟았다. 특히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선애 임봉선 등은 전신이 피범벅이 될 정도로 가혹행위를 당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체포된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약 20여 명. 상당수 청년들은 일본 군경이 체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손을 들고 자진해서 묶여갔다. 김 할머니는 “만세운동에 나왔을 때는 체포돼 감옥에 들어갈 것을 각오하고 나왔는데 너무 어려 보였는지 일본 군경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며 “잡아가지도 않아 어떻게 할지 모르고 서 있는데 상급생 언니가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보호해줬다”고 기록했다. 김 할머니는 “만세운동 이후 검문검색이 심해서 외출도 못했는데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많은 동포들이 체포돼 감옥에 들어갔다는 굉장한 소식을 들었다”며 “우리 학교 선생님과 학생들도 다수가 잡혀 들어가 학교는 휴교됐고 기숙사는 텅 비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또 “할머니와 어머니는 어린 것이 그 인파 속에서 밟혀죽지 않고 살아왔으니 감사하다고 반가워하셨으나, 아버님께서는 후에 말씀하시길 감옥에 안 들어가고 왜 피해왔느냐고 꾸지람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나 자신도 생각하면 더욱 용기를 내 손을 쳐들고 자원해서라도 잡혀가서 나라를 위해 옥고도 좀 겪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때때로 일었다”며 당시 심정을 기록했다. 이 같은 신명여학교의 3·1만세 운동은 국권 회복과 여권 신장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애국부인회(회장 김마리아)와 조선여자기독청년회(회장 김활란)의 활동을 통해 계승·발전됐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신명여학교 교사 출신인 유인경과 1회 졸업생인 이금례 등이 주축이 돼 독립운동 자금모집, 독립운동원의 보호, 독립운동 유가족의 생계보조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발각돼 조직원 전원이 체포되는 아픔을 겪는다. 조선여자기독청년회는 1회 졸업생 임성례, 7회 졸업생 추애경, 9회 졸업생 이영현 등이 주축이 됐는데 여권신장운동, 농촌계몽운동, 절제 운동 등을 위주로 활동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3·1기념탑 이런 신명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져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교 안에 3·1운동 기념탑을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신명 3·1운동 기념탑 건립은 1972년 3월 민족 주체사상을 고취하고 애국정신을 함양하며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용돈을 절약해 1인당 60원씩 갹출해 건립비용에 보탰다. 탑 모양 설계는 미술교사이던 김익수 선생이 만든 2개 모델 가운데 하나를 전교생의 투표로 선정했다. 탑에 새겨질 명문(銘文)은 당대의 시인 박목월이, 글씨는 서예가 강선동 선생이 맡았다. 또 당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갑성 옹이 축전을 보내고 향나무 한 그루를 기증했다. 기공식도 건립 취지에 맞춰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거행됐다. 건립비 모금에는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도 손을 거들었다. 박 여사는 이 학교 졸업생으로 학생들의 편지를 받고 직접 내려와 20만 원을 찬조했다. 십시일반으로 모두가 힘을 모은 신명 3·1운동 기념탑은 같은 해 10월 23일 제막식을 갖고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명여학교 출신 항일운동가 차보석-백신애 ▼차보석, 상하이서 미국으로 가 독립운동 지원 헌신백신애, 여성단체-문학 활동 통해 치열한 저항의 삶 신명여학교 출신의 독립운동가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동암 차리석(1881∼1945)의 여동생 차보석(1892∼1932)이다.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가사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차보석은 1910년 신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차보석은 23세 때 신명여학교를 떠나 평양으로 가서 오빠 차리석과 교육사업을 펼치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는 흥사단에 참여하고, 1921년에는 재상해유일학생회에서 활약했다. 이후 30세인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5년 대한여자애국단 샌프란시스코 단장을 거쳐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1926∼1928년)을 역임했다. 그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어학교 교사를 했는데 학생들에게 한국 혼을 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 모금에도 노력했다. 1931년에는 대한인국민회에 들어가 3·1절 기념식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1932년 3월 21일 불과 40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다. 정부는 2016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항일 여성 운동가이자 여류 작가인 백신애 선생(1908∼1939·신명여학교 중퇴)도 신명여학교 출신이다. 그는 부친이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껴안는 저항의 삶을 살았다. 그는 영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드러나 교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두 단체 활동을 멈추지 않으며 상하이와 시베리아를 넘나들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작품에서 농촌의 궁핍한 삶과 여성에게 침묵과 순종만을 요구하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및 조혼의 폐단 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나의 어머니’ ‘꺼래이(일제강점기 러시아인들이 조선인을 비하해 부르던 말)’ ‘복선이’ ‘호도’ 등 소설 23편과 산문 38편을 남겼다. 그는 31세인 1939년 췌장암이 악화돼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현재 백신애기념사업회가 ‘백신애문학상’을 매년 시상하고 있다.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9-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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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논설위원의 對話]“나 사는 거 보고 애국할 사람 줄면 안 되는데…”

    《“…희생과 공헌의 정도에 상응하여 국가유공자와 유족의 영예로운 생활이 유지·보장되도록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2조 ‘예우의 기본이념’) 한 노인이 있다. 증조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수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 선생. 조부(이준형)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 자결했고, 역시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이대용)는 6·25전쟁 중 46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불령선인의 자식으로 낙인찍힌 그의 형들은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울분 속에 살다가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 그렇게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노인과 그의 여동생은 한때 보육원에서 살아야 했다. 야간 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80세인 지금 자기 집 없이 전세를 살고 있다.》  ―올해가 3·1독립만세운동 100주년입니다. 석주 선생 등 독립운동가 39인이 만주에서 발표하신 무오독립선언이 3·1만세 운동의 기폭제가 됐다고 하던데요. “증조부는 종택(宗宅·종갓집)인 임청각(보물 제182호) 등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한 뒤 온 가족을 이끌고 만주에 망명했고,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 39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1919년 2월 1일)을 발표했고, 이 무오독립선언이 도쿄 2·8독립선언, 3·1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지요.” ―조부와 부친의 독립운동 활동상은 어떠셨는지요. “조부와 부친은 증조부와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증조부가 돌아가신 1932년에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하며 얻은 병이 깊어지고, 일제의 회유와 압박이 심해지자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살면 하루의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라며 자결하셨지요. 부친도 평안북도 청성진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하셨고 이 때문에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1990년 조부는 애국장, 부친은 독립장에 추서됐고, 제 어머니(허은 여사)도 지난해 애족장에 추서됐지요.” ―자결까지 할 정도로 압박이 심했습니까. “증조부의 반혼제(返魂祭·죽은 사람의 혼을 집으로 불러들일 때 지내는 제사)에서 손님은 물론이고, 제문까지 검열했답니다. 산속으로 숨었더니 거기까지 순사들이 들이닥치고, 아들인 제 부친을 잡아넣기도 했고요. 그런 상태에서 당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니까 독립이 희박해졌다는 절망에 그러신 것 같아요. 결국 생신날인 1942년 9월 2일 자결하셨지요. 부친께는 ‘내가 자결하는 것은 참된 도리를 알게 하려는 뜻이니 나의 마음을 헤아려 과도하게 슬퍼하지 말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시고요.” ―국가보훈처에 석주 선생의 서훈 등급 조정을 요청하셨다고요. “건국훈장에는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 5등급이 있는데 증조부가 받은 독립장은 3등급입니다. 1962년 서훈 당시 친일파들이 심사하다 보니 제대로 심사가 안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별로 조정할 생각이 없는 것 같더군요.” ―명백한 이유가 있으면 당연히 조정되는 것 아닙니까. “현행 상훈법은 서훈의 추천, 확정, 취소에 대한 규정만 있지 훈격을 조정할 수 있는 규정이 없어요. 저평가나 과대평가가 확인돼도 등급을 조정할 수가 없는 거죠. 옛날에는 자료 조사가 부실해서 엉성하게 평가한 경우가 많았어요. 가짜 국가유공자도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민원을 우려해 안 하는 거죠.” (민원 우려라니요?) “건국훈장 수훈자가 1만5000명(건국포장, 대통령 표창 포함) 정도 됩니다. 등급 조정 신청을 받으면 상당수가 우리 할아버지 등급을 더 올려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내려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우리 할아버지가 쟤네 할아버지보다 못한 게 뭐냐는 시비가 날 수도 있고…. 그래도 해야지요. 그런데 법 개정안을 심사도 하지 않고 있으니….” ―유관순 열사조차 여전히 3등급 독립장으로 남아있는 이유가 그 때문인가요? “그렇지요. 훈격 조정 규정을 신설하자는 건데 2017년 9월에 발의됐지만 뭐 쟁점 법안이라며 심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어요. 아까 말한 이유로….” ―한때 보육원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월사금을 못 내서 중학교에서 맨날 쫓겨났지요.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형들이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웠고…. 1956년인가? 당시에는 보육원에 있으면 정부에서 야간 고등학교라도 보내줬어요. 여동생이 보육원에 간 것도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지요. 전 그나마 졸업 때까지 있지 못했어요. 만 18세가 넘으면 나와야 하니까. 낮에는 학교에서 소사 일도 하고, 페인트칠도 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지요.” ―조부와 부친께서 일제 치하에서 끝까지 호적 등록을 거부하셨다고요. “증조부, 조부, 부모님이 다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증조부는 99칸 대저택인 안동 임청각에 살 정도로 대부호였죠. 노비만 수백 명이었으니…. 증조부가 상당수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지만 그래도 남은 재산이 좀 있었는데 조부와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느라 잘 관리를 못 하니까 그 사이에 문중의 다른 집에서 야금야금 빼갔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부친이 자기에게 판 거라며 매매계약서를 내미는데 1974년에 판 걸로 돼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1952년에 돌아가셨는데…. 조부와 부친은 고성 이씨 종손인데 일제 치하에서 호적 등록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중에서는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집안의 여러 구성원 명의로 등기를 했고, 수십 년이 지나면서 소유권이 불분명해졌지요. 형님들은 불령선인 자식이라고 학교도 못 다니고…. 그렇게 어려워진 거죠.” ―불령선인 자식이라 학교를 못 다녔다고요? “증조부, 조부, 부친 모두 조선총독부의 불령선인 명부에 올랐지요. 여기 오른 사람 자식들은 초등학교는 몰라도 중학교는 입학이 안 됐어요. 큰형님, 둘째형님이 그래서 중학교를 못 갔고…. 큰형님은 광복 후 친일파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잡혀갔다가 풀려난 지 며칠 후에 돌아가시고, 둘째형님은 6·25 때 행방불명되고…, 셋째 넷째형님들도 돈이 없어 진학을 못 하다가 한 분은 열차 사고로, 한 분은 그런 스트레스로 술을 너무 드시다가 일찍 돌아가셨지요.” ―생활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대하고 안동에 내려왔는데 옆집에 촌수는 멀지만 300여 년간 이웃하며 살던 문중 집안이 있었어요. 그 집 어르신이 탤런트 이서진 씨의 할아버지인데 그분이 조흥은행에 취직시켜 줘서 30년을 일했지요.” (당시에 은행원이면 괜찮은 직업 아닌가요?)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고…. 아버지 없는 조카가 9명이나 되다 보니 큰 도움은 아니어도 아이들이 정착하는 데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었어요. 집에서 인터뷰를 못 한 것도 (집이) 좀 그래서….” ―안동 임청각 사당에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가 없다고 들었습니다만…. “증조부가 종손인데 만주로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 제사를 지내면서 ‘나라가 망했는데 가문이 무슨 소용이냐’며 땅에 묻으셨다고 해요. 원래 돌아가신 날에 각각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지금은 매년 8월 15일 오전 11시에 합동으로 지내고 있지요.” ―선조께서 그 많은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썼는데 혹시 ‘안 그랬으면…’ 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어렸을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나 봐요. 난 기억이 없는데 어머니께서 그게 한이 됐는지 회고록에 적어두셨더라고요. 그 많은 전답을 팔아 독립운동을 했는데 정작 먹을 게 없어 굶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셨나 봅니다. 어릴 적에는 이런저런 생각도 했지요. 학교도 못 다니고 했으니까…. 그러다가 증조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 간부로 추대됐는데 2대 독자이다 보니 증조부와 조부를 모셔야 한다고 고사했대요. 그러자 증조부가 제 부친을 부르더니 ‘나라 찾겠다는 사람이 집 걱정을 해서야 되겠느냐’며 혼내셨답니다.” ―인터뷰를 잘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할까 싶어서…. 잘사는 애국지사 후손들이 (언론에) 나와야 사람들이 ‘나라 위하니까 국가가 보호해주는구나’ 하고 애국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인데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어요. 무오독립선언, 2·8독립선언에서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진 그 정신을 우리 모두가 잊지 말아야 해요.”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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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샌드라 오

    “몰라∼, 그리고 난 한국 사람이거든!” 2005년 시작돼 현재 시즌 15가 방영되고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끈 미국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이 작품에서 주연인 외과 인턴 크리스티나 양(샌드라 오 분)은 동기 인턴인 이지가 중국인 환자를 데려오며 “중국에서는 그러지 않니?”라고 인종 차별적인 말을 하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 당시만 해도 아직 국내에는 낯설었던 샌드라 오(한국명 오미주·48·시즌 1∼10 출연)가 미드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이 ‘사이다’ 대사가 계기가 됐다. ▷6일(현지 시간)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TV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샌드라 오는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이날 시상식 사회도 봤다. 그는 사회를 시작하며 “두렵고 떨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선 건 여기 모인 청중과 함께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골든글로브 시상식에는 그가 출연한 ‘킬링 이브’는 물론이고 ‘블랙팬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등 비(非)백인 연출자와 배우들의 작품이 대거 후보에 올랐다. 그의 말은 모든 배우가 인종차별의 벽을 넘어 실력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왔다는 뜻이다. ▷1960년대 캐나다로 이민을 간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캐나다도 아닌 미국, 그것도 인종차별이 공공연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배우, 드라마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에 따르면 샌드라 오는 “미국은 배우로서 캐나다보다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곳이지만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와 희생이 뒤따른다. 주류 사회에서 배역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고 술회했다. ▷그는 그레이 아나토미 출연 당시 중국계 입양아인 여자아이에게서 ‘저도 찢어진 작은 눈인데 TV에 나온 언니도 저랑 같네요. 참 예뻐요’라고 적힌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답장에 “너희 같은 아시안 친구들이 오랫동안 연기를 꿈꿀 수 있도록 꼭 롤 모델이 되겠다. 그것이 내가 더 열심히 연기하는 이유”라고 썼다. 변화를 꿈꾸고 이루려 노력하는 그가 참 아름답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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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째서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日警 향한 혜성단의 일갈

    “피고 (김)수길을 징역 2년 6개월에, 피고 (이)종식을 징역 2년에, 피고 (이)영옥, 동 (이)명건, 동 (허)성도, 동 (이)기명, 동 (이)종헌, 동 (최)재화, 동 (이)수건 및 동 (이)덕생을 각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1919년 7월 19일 혜성단원 김수길 등 11명에 대한 당시 대구지방법원 판결) 경북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대구였다. 1919년 3월 8일 시작된 대구 만세운동은 3월 말까지 이어졌다.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등의 학생들이 주축이 됐다. 하지만 일제의 강경 진압과 친일 단체의 준동으로 만세운동은 쉽지 않았다. 이때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가 ‘혜성단(慧星團)’이다. 당시 재판부는 혜성단원인 김수길(당시 19세·계성학교 4학년) 등에 대해 ‘비밀결사를 조직해 대구에 본부를 두고 경성, 상주 기타 각지에 지부를 설치해 동지를 규합하고, 경고인쇄물을 각 관공서장 앞으로 보낸 죄’로 이같이 판결했다. ○ 일제의 자제단 결성 1919년 조선총독부는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이를 억누르기 위해 ‘자제단(自制團)’이란 친일단체를 조직했다. 당시 전북도 장관을 지냈던 친일파 이진호(후에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총독부 학무국장을 지냄)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 총독에게 ‘민간 유지자(維持者)들이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진정할 방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만세운동을) 유혹하는 자를 검거할 것을 서약하게 만들자’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보냈다. 친일파들이 ‘독립운동을 자제하자’며 스스로 자제단을 만든 것이다. 자제단은 지역에 따라 ‘자성회(自省會)’라고도 불렸다. 주로 남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조직됐다. 설립 목적은 3·1만세운동 참가자 검거, 관련 정보 수집 및 대민(對民) 설득을 통해 민중들을 만세운동에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유로 자제단 단원들은 모두 밀고 의무가 있었다. 1919년 4월 6일 결성된 대구 자제단 규약(제3조)은 ‘만세(운동)에 부화뇌동하지 말도록 부민(府民)을 굳게 타이르고, 만일 불온한 행위를 감행하는 자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당장 경무 관헌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대구 자제단 발기인 67명 가운데 신원이 파악된 27명 대부분이 지주, 관리, 자본가 등 친일인사들이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은 다시 자신의 노비와 소작농,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켰다. 또 이들을 이용해 만세운동 참가자와 조직을 색출했다. 자제단 조직은 1919년 7월까지 울산, 전북, 수원 등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일본 경찰 대신 만세운동을 진압하거나 시위 참여자를 귀가시키는 일을 했다. 초기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만세운동에 당황했던 일제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데는 이들 자제단의 역할이 있었다. 자제단 지도부는 기회주의적인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을 종교처럼 신봉한 골수 친일파들이었다. 특히 자제단을 조직했던 박중양(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라고 적을 정도로 골수 친일파였다. 그는 자제단 설립으로 훈장을 받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냈다. ○ “어째서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자제단에 맞서기 위해 1919년 4월 17일 김수길, 이기명 등 대구 계성학교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만든 비밀결사 단체가 혜성단이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대구에서는 학생들이 주축이 돼 3월 8일과 10일 2차례의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일제는 대구고보 신명여학교 계성학교 등에는 휴교령을 내렸다. 시내에는 일본군 보병 80연대를 출동시켰다. 이런 삼엄한 분위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는 혜성단이 있었다. 혜성단은 당시 대구경찰서장인 시라이 요시사부로(白井義三郞) 앞으로 “어째서 너는 3월 8일 한국독립만세를 부른 무고한 동포를 검거했느냐. 너는 생사 어느 쪽을 원하느냐. 너희들 같은 사람은 경무부장과 함께 암살할 기회가 있을 것이니 각오해야 한다”는 내용의 협박 편지를 보냈다. 또 자제회 설립에 앞장서던 박중양에게 “시세에 적응하기 위한 자제회를 설립하고, 다수의 사람을 강제 권유하여 입회하게 함은 조선민족으로서 유서(宥恕·너그럽게 용서함)해서는 안 되는 놈들이기 때문에 암살해야 한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냈다. 혜성단은 대구에 본부를 두고 경성과 만주에도 지부를 설치했다. 인쇄책으로는 최재화 김수길, 인쇄물 배달책으로는 허성도 이덕생 이종식 이종헌 이기명이 각각 활약했다. 자금 출납책은 이수건, 만주 출장책은 이영옥 등이었다. 혜성단의 목표는 유인물 배포를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자산가들에게 독립운동 자금 헌금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일반 민중에게는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을 요구했다. 상인들에게는 철시 및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를 호소했다. 또 궁극적으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내외가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과의 연결도 모색했다. 혜성단원을 만주에 파견해 항일투쟁을 이어가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혜성단의 활동은 당연히 일본 군경의 눈엣가시였다. 결국 결성 한 달여 만인 5월 중순까지 주축 인물들이 차례로 검거되는 아픔을 맞는다.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지낸 이여성(1901∼월북)도 혜성단원 출신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혜성단을 조직하고 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체포돼 3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후에 일본 릿쿄(立敎)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32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조사부장을 맡았다. 조사부장 재직 시절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열악한 실상을 숫자로 표현한 ‘숫자 조선연구’(전 5권)를 출간해 식민치하의 아픔을 고발하기도 했다. 신문사 퇴직 후에는 조선역사화 제작과 복식사 연구에 매진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을 맡다가 1948년 월북했다.○ 파리회의에 알리고자 철시투쟁도 이끌어 혜성단은 기존 만세운동과 함께 시장 상인들을 설득해 철시투쟁도 이끌어냈다.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기대감에서였다. 당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은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해 국내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이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돌려주고,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켰다. 또 불가리아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에 영토의 일부를 돌려줬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이 회의에 대한 기대가 컸다. 혜성단 또한 당시 대구에 와 있던 서양 신문기자들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대구는 물론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혜성단원이던 이종식은 그해 4월 7일경 자신의 집에서 ‘서양 신문기자가 시내를 순찰하는데 우리들이 독립자유를 원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해 내일 8일은 아침 일찍부터 철시(撤市)하고 폐점하라’는 내용의 유인물 300통을 작성해 배포했다. 이종식은 유인물에서 ‘(철시 및 폐점 상황이) 신문기자들 손에서 프랑스 파리 열국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고, 다시 구미 각국 신문에 게재되면 우리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인들은 일본 상인과 금전 및 물품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 이번 신문지상에 전해진 총독부의 유고(諭告·타일러 훈계함), 기타 경찰관의 전달 등은 어느 쪽이나 모두 허구의 사실로 이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사실 혜성단과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전승국들의 축제 잔치인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이긴 연합국 쪽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조국에서의 자발적 만세운동이 세계 여론을 움직이는 데 보탬이 된다는 신념으로 죽음을 각오한 항쟁을 전개한 것이다. ▼ 3·1운동 대구 확산 주도… 숱한 항일투사 배출 ‘독립운동 요람’ ▼혜성단의 주축 ‘계성학교’기소된 단원 13명 중 9명이 동문, 대부분 학생-교사 만세운동 참여휴교 조치 당했다가 이듬해야 풀려혜성단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계성학교’다. 혜성단원으로 활동하거나 협조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모두 13명. 이 중 김수길 허성도 이기명 이영식 등 9명이 계성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이다. 지금 대구에 있는 계성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바로 이 계성학교다. 계성학교 출신들의 항일운동은 혜성단이나 대구 지역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의 3·1운동이 대구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계성학교 출신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19년 3월 8일, 대구 큰장(서문시장) 장날이던 이날 학생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복을 입거나 장사꾼 차림으로 변복하고 시장 안으로 숨어들어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만세운동으로 계성학교는 휴교 처분을 받았고, 대부분의 교사와 학생이 체포, 투옥됐다.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가 기록한 ‘조선소요사건 상황―경상북도 편’에는 이 같은 상황이 잘 기술돼 있다. 조선헌병대사령부는 ‘사립학교 중 소요로 인하여 아직까지 휴학하고 있는 곳은 안동군 사립협동학교 및 대구 기독교부속 계성학교 2개교이며, 그 밖에 청도군 사립문명학교, 문경군 금룡사 지방학림, 달성군 동화사 지방학림은 20일 내지 1개월간 휴교하기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모두 개교하였다’고 밝혔다. 계성학교는 이듬해인 1920년 4월에야 개교할 수 있었다. 또 ‘독립운동사 자료집 3·1운동 재판기록―경상남북도 편’에 따르면 1919년 만세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형을 받은 76명 가운데 44명이 계성학교 출신이었다. 계성학교 100년사에 따르면 대구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19년 3월 7일 계성학교 전교생이 46명이란 것을 고려할 때 이들의 참여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잘 알 수 있다. 계성학교 출신들의 항일운동은 3·1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그 뒤로도 이어졌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계성학교 출신인 이원우 조활용 등은 농림학교 김을용, 경북여자고보 곽진숙 권유진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항일운동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이들은 소속 학교 학생들을 달성공원까지 동원할 것과 만세시위운동의 행진 순서 등을 포함한 세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일제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개인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5학년이던 권성우는 경북 의성군의 의성 장날 궐기하려다 발각돼 대구형무소로 압송됐다. 그는 6개월 형에 3년 집행유예 처분을 받았는데 이후에도 요인 암살을 기도하다 동료들은 죽고 자신은 만주로 망명한 뒤 광복단원으로 활동했다. 졸업생인 박재현도 1919년 3월 8일과 10일 두 차례 만세운동에 참여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는 출옥 후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는데 재학 중 평안남도 도청 폭파 혐의자로 체포됐으며, 이후 밀양 집성 사랑학교에 재직하면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에 협조하다 다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대구=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9-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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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이진구]한국식 나이

    새해를 맞으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만 나이로 바꿔주세요’ ‘한국 나이 폐지해주세요’란 청원이 상당수 올라오고 있다. 갓 태어난 아이를 0세가 아닌 1세로 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12월 31일 태어난 아이가 다음 날인 이듬해 1월 1일이면 우리 나이로는 벌써 두 살이 된다. 나이 먹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은 데다 우리식 나이와 만 나이에 연 나이까지 혼용되다 보니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연 나이는 금년에서 태어난 해를 뺀 것으로 관공서에서 징병검사 나이 등을 따지는 데 사용한다. ▷나이 세는 방식의 차이는 외국인 친구를 만나면 실감한다. 2000년생의 경우 올해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만으로는 18세, 연 나이로는 19세, 우리 나이로는 20세가 된다. 늘 스무 살이라고 하다가 외국 사람을 만나면 18세라고 말하려니 어색하다.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식 나이를 ‘코리안 에이지(Korean Age)’라고 부르고, 유튜브 등에는 그 계산법을 설명하는 동영상도 있다. ▷중국 일본 베트남 등도 과거에는 우리와 같은 나이 계산법을 썼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만 나이로 통일했다. 일본은 1902년 만 나이를 공식적으로 채택했으나 이후에도 전통식 나이 계산법이 계속 통용되자 다시 1950년 법률을 제정하면서까지 만 나이로 통일시켰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난 곧 17세가 될 16세(I‘m sixteen going on seventeen)’라는 노래가사는 나이를 따질 때 개월 수까지 계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몇 살이냐’고 묻지만 서양인들은 ‘얼마나 오래됐냐(How old)’고 묻는다. ‘몇 살이냐’는 질문과 달리 ‘얼마나 오래됐냐’는 질문은 개월 수에 열려 있다. 같은 해에 속하면 하루가 지나도 1년, 365일이 지나도 1년으로 치는 것은 현대적 시간 감각에 어울리지 않는다. 뻐기듯 손윗사람 행세하고 싶어 한 살이라도 부풀리고 싶어 하는 젊은 한때를 제외하곤 나이가 어려지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 같다.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9-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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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을 하겠지”

    《해마다 섣달 그믐날 밤 12시이면 서울 종로 보신각(普信閣)에서는 보신각종을 33번 치는 ‘제야(除夜)의 종’ 행사가 열린다. 원래 1468년 제작된 보신각종(보물 제2호)을 쳤으나 균열이 생기는 등 타종이 어려워지자 새 보신각종을 제작해 1985년 8·15광복절 40주년 기념 타종 행사 때부터 사용해 오고 있다. 이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가 2016년 에밀레종(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복원에 성공한 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원광식 주종장(76·鑄鐘匠)이다. 하지만 정작 경내에 있는 내력비에 그의 이름은 없다.》 ―새 보신각종을 만든 이유와 사람을 기록한 비에 이름이 없더군요. “아, 그게 사람들하고 엄청 싸우고 옥신각신하다가 내 이름은 빼라고 했지요.” (싸우다니요?) “새 보신각종을 설계는 서울대 공대 생산기술연구소, 디자인은 서울대 미대에서 했는데 종에 넣을 무궁화 문양이 이상했어요. 뿌리에 꽃이 바로 달렸더라고? 디자인도 시원찮고…. 이상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추상이라고 하더라고. 종이란 게 한번 만들면 천년을 가는 건데 문양 그렇게 만드는 거 아니라고 대판 싸우고 보름간 일을 안 했지요. 그때가 1984년 이맘때인데 기흥 작업장으로 이종찬 씨가 갑자기 찾아오더군요.” ―국가정보원장을 했던 그 이종찬 씨를 말합니까? “네. 그땐 민정당에 있었고, 보신각종 중주위원회 운영위원인가를 했는데…, 윤보선 전 대통령이 위원장이었지요. 아, 글쎄 ‘각하가 광복 40주년에 맞춰 쳐야 하는데 왜 안 만드느냐’고 하더라고. 그때 내가 일을 안 하니까 용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작업장에 쫙 깔려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했어요. 그래서 ‘각하고 나발이고 대통령이 무서워서 작품 만드느냐. 돈 도로 줄 테니 딴 데서 만들어라’라고 들이받았지요.” (무사하셨나요? 멀쩡한 사람도 잡아가던 시절인데….) “전두환이 참석해서인지 광복 40주년 타종 행사를 엄청나게 큰 행사로 준비한 것 같더군요. KBS가 10달 동안 작업 과정을 모두 촬영했으니까. 근데 내가 일을 안 해 종 제작도, 촬영도 멈추게 되니까 급했나 봐요. 당시 서울신문사 사장이 서울 반포에 있는 팔래스호텔 14층 양주 코너로 부르더라고.” ―서울신문 사장이 관련이 있습니까? “그때 새 보신각종 제작비를 국민성금으로 모았는데 서울신문사가 모금 집행기관이었어요. 그 사장이 나랑 대판 싸운 교수랑 함께 왔더라고. 내가 정치인도 아니고 어떻게 하기 힘드니까 이종찬 씨가 모금 집행기관 사장을 찔러서 어떻게든 해결하라고 한거지요. 술 엄청 먹고 서로 풀고 다시 일은 했는데… 생각해 보니 여기에 내 이름을 넣을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그래서 ‘성종사 주종장 원광식’이라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름은 빼고 성종사만 넣으라고 했지요.” ―그렇더라도 첫 타종식에는 가셨겠지요. “안 갈 수야 없죠. 내가 만들었으니. 거기서 전두환을 봤는데…, ‘자네가 그렇게 고집이 세다면서?’ 하더라고. ‘웃기고 있네’라고 했지.” (대놓고 그랬단 말입니까?) “아니, 속으로. 하하하.” ―새 보신각종은 기존 보신각종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에밀레종을 모델로 했지요. 서울대 공대팀이 그렇게 설계를 했고, 복원 사업도 아니고 지금 시대의 종을 만드는데 굳이 과거의 것을 본뜰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2006년 당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새 보신각종의 울림이 길지 못해 새 종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 종소리 논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 보신각은 (소리)환경이 너무 안 좋아요. 도심 한복판에 있으니까. 수많은 인파 속에서 차가 그렇게 많이 다니는데 그런 소리가 종소리를 깎아먹어요. 제대로 들릴 수도 없고…. 또 어디는 땡, 어디는 쿵 하는 식으로 부위와 각도에 따라 소리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그냥 녹음하면 안 돼요. 조용할 때 산사에 있는 종은 정말 멀리 가지요. 아침 목탁 소리나 풍경 소리 같은 것도…. 공간이 소리에 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데…. 종소리가 뭔지 알긴 하는지….” ―우리 종은 ‘한국종’이라는 학명이 있을 정도인데 왜 함께 불교가 번성한 중국, 일본에서는 종이 발달하지 않았을까요. “잘 모르겠는데…, 별로 소리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고려 때는 불화가 더 발달했고, 종 크기도 작아졌지요. 조선 때는 다시 대형 종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신라 종과 달리 중국 영향을 받아서 당좌가 없는 것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 소리가 제멋대로 나기도 하고…. 일본은 100년 전 종을 지금도 그대로 만들고 있는데 소리가 안 좋아도 고칠 생각을 안 하더라고. 매일 그 소리만 들어서 뭐가 좋은지 몰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허허허.” ※당좌(撞座)란 종을 치는 나무(당목·撞木)가 종에 닿는 곳을 말한다. ―오른쪽 눈이 안 보이신다고 들었습니다만…. “17세 때 8촌 형님(고 원국진 선생)이 운영하는 종 만드는 회사(성종사)에 들어가 2년 정도 일했지요. 그때는 종에 대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고 일자리로…. 그리고 제대 후 다시 들어갔는데…, 그때 8촌 형님이 몸이 안 좋았는데 자식도 없었어요. 하루는 형수님이 부르더니 대를 이어 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그땐 정말 정신이 번쩍 들어서 본격적으로 배우며 일했는데… 27세 땐가? 쇳물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터지면서 쇳물이 눈에 튀어서 실명을 했지요. 그리고 쫓겨났고….” (친척이고 완전히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쫓겨나셨다고요?) “옛날에는 그런 거 없었어요. 하하하. 뭐, 한쪽 눈으로는 수평을 잘 못 보니까…. 근데 다 핑계지. 지금 같지 않아요. 그러고는 전등 갓(반사등) 만드는 일을 한 1년 했지요. 아주 잘됐어요.” ―잘됐는데 왜 다시 종을 만드시게 된 겁니까. “주문은 많이 들어왔는데, 전부 외상이라…. 나중에 돈 받을 때가 되니까 전부 사라지더라고요. 그때 지인이 종 만드는 회사를 동업으로 차리자고 했지요. 양심상 내게 기술을 가르쳐준 곳이 성종사인데 말도 없이 할 수는 없어서 승낙을 받으러 갔더니 8촌 형님이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시작한 게 충남 예산 수덕사 종이었는데…. 대웅전 구석에 작업장 차려 놓고 혼신의 힘을 쏟았지요. 이 종을 만들어야 내가 산다는 심정으로….” ―수덕사 종으로 재기하셨는데 그렇게 대단한 종이었습니까. “종을 한 번 치면 소리가 2분 30초를 가고, 30리에 퍼진다는 평을 받았지요. 되느라고 그런 건지 당시에 불국사에서도 범종을 만들었는데 수덕사와 경쟁이 붙었어요. 광복 이후 가장 큰 종을 누가 먼저 만드는가를 놓고. 수덕사 종이 약 4t인데 지금 보면 작은 거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죠. 내가 먼저 만드니까 그때 신문 방송에 며칠 동안 뉴스가 났는데 그러고는 전국에서 제작 의뢰가 쏟아졌어요.”※원 주종장은 이후 8촌 형님이 운영하던 성종사를 1973년 인수했다. ―에밀레종을 복원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워낙 유명한 소리니까…. 복원한 종이 그 소리를 따라잡지 못하면 난 죽는 거라고 생각했지요. 내 인생이 물거품이 되는 거니까…. 2년여간 고생했는데, 그래도 우연의 일치인지 99.9%는 맞았다고 생각해요. 마누라는 ‘당신하고 살면 쪽박 찬다’고 하지만…. 하하하.” (왜요?) “15억 원 받았는데 실제는 20억 원이 들었거든. 더 준다고 했지만 됐다고 했지요. 종만 제대로 만들면 나는 기쁘지요.” ―에밀레종을 치면 ‘에밀레∼’ 소리가 난다던데….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들을 수도 있죠. 우리나라 종소리에서는 몇 초 주기로 소리가 작아졌다 다시 커지는 ‘맥놀이’가 일어나는데 그 울림을 듣다 보면 ‘에밀레’로 들리기도 해요.” (녹음된 걸 아무리 들어도 그렇게 안 들리던데, 혹시 들리십니까?) “허허허, 난 뭐…, 음….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면 들린다니까. 하하하.” ※진동수가 거의 같은 두 소리가 중첩돼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는 현상을 맥박이 뛰는 것 같다고 해 ‘맥놀이’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종은 ‘우∼웅∼우∼웅’ 하며 소리가 크고 작아지기를 반복해 긴 여운을 남긴다.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스스로를 주철장(鑄鐵匠)이 아닌 주종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나는 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주철장은 틀에 쇳물을 부어 여러 물건을 만드는 장인(匠人)을 말하는 거고요. 나라에서도 주철장이라고 부르고 지금까지 모든 언론에서 주철장이라고 써 왔지만 난 주종장으로 불렸으면 해요.” ―좀 무식한 질문입니다만, 종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50여 년을 물고 늘어지며 만들었는데 아직도 모르겠는데…. 안 풀리는 수수께끼도 너무 많고…. 예를 들어 종의 모든 부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만들면 소리가 좋을 것 같지만 아니에요. 더 이상해. 공기 중의 수분에 의해서도, 마르는 과정에서도, 또 주물을 붓는 과정, 문양의 모양 등등에서 알게 모르게 종이 ‘짱구’가 지는데 그 비대칭 속에서 희한하게 좋은 소리가 나오니까. 아직도 모르겠어요. 과학 가지고 안 되는 분야가 이 분야지요. 그저 내 정성이 하늘에 닿으면, 종이 답한다고 여길 뿐….”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

    •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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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진구 기자의 對話]“혁신 없는 당 지지율 상승은 오히려 독”

    《 자유한국당이 과연 혁신될 수 있을까? 최근 당 지지율이 조금 오르고, 15일에는 조직강화특별위원회(조강특위)가 현역 의원 21명의 당협위원장 자격을 박탈하는 인적 쇄신을 발표했지만 아직은 미지수. 당내 혁신파인 김세연 의원(3선·부산 금정)은 “혁신 없는 지지율 상승은 독”이라며 “차기 당 대표 등 지도부가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6년 12월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한 의원 29명이 만든 개혁보수신당(바른정당)의 창당 멤버였으나 올 1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당에 복당했다. 올 7월에는 한국당 혁신비대위원장의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기도 했다. 》  ―당협위원장 자격은 박탈했지만 이들의 경선 참여를 막을 수는 없지 않나. 1년 남짓 된 새 당협위원장들이 이들 다선 중진의원을 이길 수 있을까? “그래서 다음 당 대표 등 지도부가 어떤 성격이냐에 따라 살든지 망하든지 결정될 것이다. 그 지도부가 퇴행적인 성격을 갖고 지금의 노력을 무위로 돌리면 정말 끝이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지도부라서 지금의 노력을 이어간다면 어느 정도 빛을 발할 것이고…. 총선과 먼 시점에 활동하는 비대위가 행사할 수 있는 권한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지금은 어떤 개혁을 해도 미완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한국당에 대해 쓴소리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좀 조용한 것 같다. “전에는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이었는데…. 비판만 한다고 나아질 게 없더라. 그래서 요즘은 비판할 시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뭘 하고 있나?) “당에서 기득권을 가진 분들이 잘해주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지금의 모습으로는 밝은 미래를 담보하기 어려운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폭주를 할 수 있는 데는 한쪽 날개인 우리가 부러져서 회복이 안 되고 있는 탓도 있다. 그래서 새로운 날개를 만들 수 있는 생각과 역량을 가진 분들이 모이고 연대할 틀을 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런 좋은 사람들이 지금 한국당에 들어올까. “다음 선거에서 한국당이 압승할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현역 의원 전부가 불출마 선언을 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을 공천하면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이 정도의 강도 높은 개혁을 해야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처럼 유명인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 의석 하나 건지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의 한국당 유전자(DNA)와는 완전히 다른 DNA를 가진 세대가 들어와야 한다. 한국당은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 상태가 됐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길을 택했어야 하는데 생즉필사(生則必死)의 길을 택해 현재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개혁보수 하겠다던 바른정당에서는 왜 그런 신선한 결의를 안 했나. “당시는 총선이 아닌 대선 국면이라 그런 말이 화두로 나올 때가 아니었다. 복기해 보면 개혁보수정당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내세워 대선을 치르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섞여 있다 보니 지향점이 달라 연대가 공고하지 못했다. 정말 의외인 분도 왔다 가고…. 차라리 (생각이 같은) 10여 명만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교섭단체를 구성해서 국회 운영의 키를 쥐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혁신은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데, 한국당이 잘못을 인정한 적이 있나. “짧은 사과성명과 논평이 나간 적은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직도 한국당이 제대로 된 반성과 사과를 했다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탄핵백서를 만들겠다는데….) “요즘 반사이익으로 지지율이 좀 오르다 보니 엉뚱한 방향의 말이 이렇게 나오는 것 같다. 혁신을 하면 보수가 갈라질 이유도 없다. 정답이 있는데….” (알면서 왜 그런 정치공학적 정치는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나?) “참 안타까운데…. 그런 말을 하면 그게 계기가 돼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난다. 지금은 내전을 일으킬 상황은 아닌 것 같고….” ―혁신 없는 지지율 상승은 독이라고 했다. “현실을 무시한 경제정책과 무리한 적폐몰이 수사, 자신들의 과오에는 내로남불, 여당 대표의 20년 집권론 등 정부 여당의 실정과 오만 때문에 반사이익을 조금 얻었는데 우리로서는 좋아할 일이 아니라 되레 더 큰 문제다. 더 망가져야 살기 위해서라도 혁신을 할 텐데 그럴 필요가 줄어드니까…. 폭주하는 정부, 오만한 여당, 혁신 없이 탄핵 이전으로 돌아간 제1야당이 나라를 운영하면 어떻게 되겠나.” ―당신이 비대위원장이나 당 대표라면 뭘 하고 싶은가. “당 해산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2012년 총선 때 새누리당 공약이 처음에는 경제민주화, 복지, 일자리 순이었다. 그해 대선에서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중도보수적인 말이라도 했다. 그런데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망가진 당의 대선 후보와 당 대표가 된 후에는 급속도로 극우 정당화가 돼갔다. 그런 기이한 지도부를 선출하는 당원 구성으로는 제대로 된 국민통합정당, 수권정당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중도 보수에 있는 사람들조차 적으로 몰았으니…. 지금도 당내에서 가장 오른쪽 끝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언동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그래서 정당이 과반 국민의 지지를 통해 안정적으로 집권하기 위해서는 보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인식과 행태를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한 번의 당 재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당내에서 탄핵 찬성을 사과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결국 탄핵을 부정하라는 말인가? 헌법재판소가 이미 파면했는데…. “그러니 보수 중 일부가 반(反)헌법 세력화가 돼 가고 있다는 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총선 공천 개입으로 2년형이 확정됐다. 그런데 그걸 당에서 수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당내에서도 별 조치가 없다. “그래서 20대 총선 공천 당시 상황을 담은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임 소재를 사후에라도 명명백백하게 가려야 하는데…. 그런데 공천이 끝나면 관련 자료를 모두 폐기하기 때문에 진상 규명도 쉽지 않을 거다. 이렇게 잘못된 게 한둘이 아니다. 비정상을 합리화해 주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후보들에 대한 여론조사 때 당연히 유무선 전화번호를 섞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올해 지방선거에서 우리 후보들이 대부분 지는 걸로 나오니까 당시 당 대표가 당 자체 여론조사에서 무선 전화 조사는 빼라는 지시를 했다고 들었다. 후보들 사기 떨어진다고….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는지 묘사할 말도 없다.” ―올 초 복당하면서 지방선거를 이유로 댔다. “나와 함께 바른정당으로 간 사람들이 있다. 바른정당에 남으면 기호 4번에 정당 지지율 5%로 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만 남고 다들 복당하면 한국당 당협위원장이 전부 공천에서 배제시킬 테고….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같이 가서 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그걸 대의가 아니라 작은 의리라고 하겠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한국당에 남아서 선거를 치를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나 때문에 정치적으로 죽도록 버려둘 수는 없었다.” ―지방선거가 있는 걸 모른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어려움도 없을 것 같았나.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할 때는 이 길이 옳기 때문에 바른정당이 보수의 주류 정당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녹록지 않은 현실에 부닥쳤고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봤던 것 같다.” ―개혁보수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뭔가? 말은 많았지만 본 적이 없는데…. “돌이켜보면 바른정당에 있을 때 비판만 했지 대안이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앞서 이제는 비판만 하기보다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게 있다고 했는데 대안을 찾는 것도 그중 하나다.” (예를 든다면?) “기계적으로 다른 정당들이 논평한 걸 보고 가운데 위치를 잡는 식으로 해서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우리가 지향하는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깊은 철학적 토대가 있어야 했는데 그게 약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하나씩 만들어 갔어야 했는데…. 만 18세 선거권만 해도 젊은이들이 많이 투표하면 우리한테 불리하다고 반대하면 어떻게 하나. 젊은이들이 지지하는 정당으로 변해서 그 표를 가져와야지. 19대 국회 때 만 18세 선거권 관련 법안을 발의했더니 본회의장에서 한 걸음 갈 때마다 붙잡혀 ‘왜 그러느냐’는 말을 들었다. 그냥 늘 그러했듯이 다음번 선거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해 무얼 할 것인가를 봐야 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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