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송평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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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칼럼니스트입니다.

pisong@donga.com

취재분야

2025-11-05~2025-12-05
칼럼97%
사설/칼럼3%
  • [횡설수설/송평인]엄마 정유라와 아이

    미처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 엄마의 부재(不在)는 인간이 겪는 최초의 트라우마라고 한다. 프로이트에게는 태어난 지 1년 반 된 손자가 있었다. 그 아이는 줄이 매여 있는 나무 실패를 커튼이 쳐진 침대 너머로 던져 사라지게 했다가 다시 끌어당겨 찾는 놀이를 반복했다. 실패처럼 사라진 엄마를 다시 찾는 놀이로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해석했다. ▷2014년 11월 중국에서 마약을 들여온 혐의로 구속 기소된 30대 여성이 있었다.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은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고 구치소에서 출산까지 했다. 항소심에선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법정까지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여성에 게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판결 이유 중 하나는 아이가 관련된 조치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내려야 한다는 유엔아동권리협약이다. ▷법원이 그제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 대해 재청구된 영장을 다시 기각했다. 기각 사유는 새로 추가된 범죄수익은닉 혐의가 소명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최 씨가 이미 구속돼 있고 정 씨가 24개월 된 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 씨에 대한 영장 재청구는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임명되고 나서 사회적 관심을 끈 첫 사건이다. 수사는 불구속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고 한 사건에서 어머니를 구속하면 딸까지는 구속하지 않는다. 윤 지검장은 이런 관례를 깨고, 그것도 아이 엄마를 상대로 영장을 재청구했다. 송나라 문인 소동파 왈, “정의로움도 지나치면 잔인해진다”. ▷엄마가 무슨 일을 했든 아이는 아이로서 보호받아야 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이 강조한 것은 엄마가 죄인일 때조차도 아이를 먼저 고려하라는 것이다. 검찰은 정 씨에 대해 세 번째 영장을 청구할 수도 있다고 한다. 조국 대통령민정수석이 이전 정권은 인권 무시 정권이었던 양 새삼 인권을 강조하고 국가인권위원회 강화를 외친 것이 엊그제다. 인권위는 아이 엄마의 영장을 청구하고 또 청구하는 데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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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위원이 만난 사람/송평인]“무리한 기소 검사, 변협평가 강화로 불이익 줄 것”

    《 김현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시인 김규동의 아들이다. 김규동은 함경북도 종성 출신으로 1948년 김일성종합대에 다니다 월남해 ‘나비와 광장’ 등의 시를 남기고 2011년 타계했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문인 아버지의 기질은 김 협회장에게 이어졌다. 1977년 서울대 법대 재학 중 학내 시위로 유기정학을 당한 이력 때문에 1980년 행정고시도, 1982년 사법고시도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다 포기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은사인 송상현 교수가 신원 보증을 해줘 그 다음 해 사시 면접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 해 늦게 사시 합격자가 됐다. 하지만 그 때문에 판검사의 길은 포기하고 미국 코넬대와 워싱턴대 로스쿨을 나와 국내에 몇 안 되는 해상법 전문 변호사가 됐다. 》  민정수석과 가까운 법무장관 곤란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사퇴를 어떻게 보는가. “안 후보자는 문학에 관심이 많다. 제 아버지와 친했고 그런 연유로 저하고도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다. 안 후보자의 젊은 시절에는 혼인신고가 쉬웠다. 여성이 한번 결혼한 것이 되면 이혼이 쉽지 않다는 시대 상황을 이용해 젊은 날의 치기로 짝사랑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몰래 혼인신고하는 일들이 왕왕 있었다. 혼인신고 절차가 쉬워 벌어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런 논란을 떠나 대통령민정수석과 친한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 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업무로 보면 둘은 가까워서는 안 된다. 청와대와 법무부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민정수석은 법무부가 잘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어야 하고 법무부는 청와대 눈치를 안 보고 원칙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민정수석이 인사 검증을 해야 하나. “저도 늘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인사수석이 따로 있지 않나. 사실 청와대보다는 인사처 같은 데서 검찰이나 경찰에서 필요한 자료를 넘겨받아서 하는 것이 더 낫다. 인사처가 주도해 여·야당 의원까지 함께 참여하는 비밀 청문회를 여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사생활과 관련된 것은 이런 데서 철저히 거르고 국회의 공개 청문회에서는 정책에 대한 의견을 놓고 검증해야 한다.” ―안 후보자가 사퇴한 마당에 또 비(非)검찰 출신 법무부 장관이 와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 필요한 법무부 장관은 검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대한 검찰에 맞서서 개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 꼭 비검찰 출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제 경우 변호사를 30년 이상 하다 보니 워낙 아는 사람들이 많아 변협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개혁할 자신이 없다. 검찰 개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은 법무장관(Attorney General)이 사실상 연방 검찰총장인 셈이지만 우리나라나 일본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나뉘어 있다. 법무장관이 꼭 검찰 출신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다. 우리나라는 잘못된 관행이 많고 법무부 장관을 검찰 출신이 하는 것도 그런 관행이다. 국방부 장관도 민간인이 더 잘 할 수 있다. 대법원장도 판결보다는 행정 업무가 많기 때문에 판사 출신이 아니라 변호사 출신이 더 잘할 수도 있다.” ―법무부의 탈(脫)검찰화를 얘기하는데 어느 정도나 탈검찰화가 가능할까. “법무부에 약 90명의 검사가 근무하는 것으로 아는데, 일단 절반 정도인 40∼50명만 검사로 하고 나머지는 민간인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변협도 변호사들 중에서 적합한 후보를 추천할 것이다.” ―검찰총장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민정수석에 비법조인이 기용됐고 법무부 장관 후보로도 비법조인이 지명될 수 있는 상태에서 검찰총장까지 비검사 출신으로 임명한다면 검찰 조직의 동요가 심할 것이다. 안정과 개혁 사이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 ―검찰총장추천위원회의 추천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나. “소병철 김경수 오세인 등 현재 후보로 거론되는 검찰 출신들은 누가 되든 대체로 무난하다고 본다. 다만 추천위원회 구성은 바꿔야 한다. 추천위원 9명 중 법무부 측 당연직 2명과 법무부 장관이 임명하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사람 3인이 법무부 장관 편이다. 그러다 보니 5 대 4로 법무부 장관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조다. 학식과 덕망이 있는 3인을 2인으로 줄이고 남은 1인을 독립시켜 4 대 5의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검찰 인사, 총장 임명뒤 했어야 ―검찰총장추천위원회는 박근혜 정권에서 생겼다. 그러나 미국은 대통령이 연방검사 연방판사 다 임명한다. 민주적 정당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이 임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 아닌가. 추천위원은 무슨 민주적 정당성이 있나. “미국에는 권력 행사에서 정당성을 중시하는 전통이 형성돼 있고 강력한 야당이 있다. 우리나라는 승자독식 패자전멸의 풍토가 있다. 승자가 맘대로 하는 것을 나름대로 막는 장치가 추천위원회 제도다. 우리나라 풍토에서 추천위원회보다 더 좋은 제도를 현재로선 찾기 어렵다.” ―일본만 하더라도 검사총장에 대한 추천위원회 이런 것 없다. 일본은 도쿄고검장이 되면 차기 검사총장이 되는 걸로 안다. 일본 검찰은 국민 신뢰 1위다. 왜 비슷한 제도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는 일본과 다른가. “우리나라는 정권이 말 안 듣는 검사는 좌천시키고 말 잘 듣는 검사는 승진시키고 하면서 검사의 직업윤리가 생길 수 없는 구조가 돼 버렸다. 그렇게 된 것은 제왕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들에게 책임이 있다.” ―윤석렬 서울중앙지검장 임명과 ‘우병우 라인’으로 지목된 일선 고검장과 지검장 4인 등에 대한 문책성 좌천 인사가 있었다. 검사 인사는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법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하게 돼 있다. 이들의 인사 때는 검찰총장도 법무부 장관도 없었다. “새 정권이 조급했던 느낌이 든다. 빨리 검찰 개혁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한 것 같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조금 더 자제하고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이 임명된 다음에 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일본은 검찰이 기소하면 유죄 받을 확률이 99.9%라고 한다. 우리는 ‘아니면 말고’ 구속이 너무 많다. 이석채 전 KT 회장 수사처럼 하명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있지만 옥시 조명행 전 서울대 교수 사건처럼 여론의 눈치에서 비롯된 것도 있다. “무리한 기소를 하여 무죄율이 높거나 영장 기각률이 높은 검사는 인사에 불이익을 줄 필요가 있다. 변협의 검사 평가를 더욱 강화하여 무리한 기소를 한 검사에게 불이익을 줄 생각이다.” ―‘아니면 말고’ 구속도 문제지만 1심 판결이 항소심이나 상고심에서 뒤집히는 경우도 너무 많다. “법원이 사건을 검토하기에는 사건 수가 너무 많은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다 보니 대충 검토해 유죄를 선언해 버리고 대신 양형을 세게 하지 못한다. 확신 있는 유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5년간 유학하고 돌아와서 왜 우리나라는 양형이 이렇게 약한가 생각해 보니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았다.”대법관 제청권, 대법관회의에 줘야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무죄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양심적 병역 거부 처벌에 관한 위헌법률심판 결정을 미루고 있다. 법에는 명문으로 처벌하도록 돼 있고 대법원도 유죄라고 하는데 하급심에서 계속 무죄판결이 나오는 건 사법의 위기 아닌가. “헌재가 위헌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황에서 법관은 양심을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절충적 상황이라고 본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지난해 회원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1297명 중 964명(74.3%)이 ‘양심적 병역 거부의 자유가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포함된다’고 응답했다. 국회가 대체복무제 입법을 하거나 헌재가 결정을 내려줘야 한다.” ―전국판사회의가 19일 건국 후 세 번째로 열린다. 전국판사회의 상설화가 필요한가. “필요할 때 수시로 모이면 되는 것이지 상설화는 꼭 필요하지 않다고 본다.” ―법원 내 승진 제도를 아예 없애 선임 판사가 법원장을 하는 것은 어떤가. “판사들 간 평등한 관계를 지향해야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과 문화가 달라 하루아침에 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어느 조직이나 구성원이 다 평등하다고 하면 엉망이 된다. 법원의 승진 제도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새 열심히 하지 않는 판사들이 많다. 그런 판사들이 원하는 것은 일은 안 하면서 신분 보장은 최대한 해주고 정년까지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럼 골병드는 것은 국민들이다. 승진 제도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법원에서 지방법원 부장까지는 웬만하면 다 승진한다. 고등법원 부장 되는 게 어렵다. 고법 부장 승진하기 위해 윗선의 눈치를 본다고 한다. 고법 부장 승진 제도라도 없애면 어떤가. “고법 부장 승진 제도를 없애기보다 인사권이 대법원장 한 사람이 아니라 대법관회의나 대법원 인사위원회에 있으면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앞에서 법무부의 탈검찰화를 언급했는데 법원행정처의 탈법관화는 어떤가. “법원행정처의 판사를 40명에서 20명 정도로 줄이고 나머지를 변호사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다.” ―대법관추천위원회는 어떻게 바꿔야 할까. “추천위원 10명 중 법원 측 당연직 3명과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위원장, 언론인, 사회단체 출신 각각 1명 등 모두 6명은 대법원장 편이다. 언론인과 사회단체 출신을 합쳐 1명으로 만들고 법원 측 당연직 1명을 줄여 대법원장 영향 밖의 인사를 6명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 ―내년 개헌이 예정돼 있다. 개헌을 한다면 사법 분야의 가장 중요한 현안은 무엇인가.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대법관회의에 줘서 집단 지성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과 헌재가 경쟁하는 관계인데 대법원장이 3명의 헌법재판관 지명권을 갖는 것도 이상하다.” ―사시가 없어지고 사시 합격자의 사법연수원 2년 과정이 없어지면 변호사가 국가 혜택을 입은 게 없어진다. 이미 6년째 로스쿨에서 배출된 변호사 9000명은 국가 혜택을 받은 게 없다. 변호사 업계도 영리 위주로 변하는 게 아닌가. “변호사법 1조의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다. 나는 반대한다. 변호사가 보수를 받기는 하지만 많은 직업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중시해야 하는 직업이다.” ―신규 배출 변호사가 너무 많아서 변호사 업계가 어렵다는데 어떻게 줄일 수 있나. “현재 변호사 업계가 수용할 수 있는 신규 변호사는 매년 1000명 수준이다. 로스쿨 정원이 2000명이다. 우선 로스쿨에서 자퇴한 사람만큼 새로 뽑는 결원보충제를 중단하면 200명을 줄일 수 있다. 결원보충제는 한시적으로 5년만 허용된 것인데 교육부가 로스쿨의 압력에 밀려 연장하고 있다. 로스쿨이 2곳 이상 설치된 지방의 로스쿨을 통폐합하면 또 200명 정도를 줄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로스쿨 정원이 줄어들면 그에 맞춰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를 1500명에서 1000명으로 줄이면 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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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탓하리

    나는 1992년 한양대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의 자율과 상상의 사회학’이란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썼다. 논문 쓰는 법에 대해 따로 배운 적은 없다. 대학 교양국어 시간에 ‘ibid’ 같은 기본적인 각주 관련 용어를 조금 배운 기억만 있다. 인용한 것을 인용했다고 써야 한다는 건 누가 가르쳐줘야 아는 게 아니라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서울대 경영학과 박사학위 논문은 내가 석사논문을 쓰던 해에 제출됐다. 논문 제목은 ‘사회주의 기업의 자주관리적 노사관계 모형에 관한 연구: 페레스트로이카 하의 소련기업을 중심으로’이다. 이런 주제가 사회과학에나 어울리는 것이지, 과연 경영학과에 어울리는지 독자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시라고 긴 제목을 굳이 써봤다. 서울대는 “김 후보자는 박사논문에서 우리나라 문헌의 20곳, 일본 문헌의 24곳에서 출처 표시 없이 인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구부정행위가 아니라 연구부적절행위라고 규정하고 본조사도 하지 않고 예비조사로 끝내버렸다. 표절이지만 경미한 표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1992년 무렵 경영학 박사논문 작성 관례를 고려해야 한다’고도 했다. 경영학 박사논문은 차라리 박사논문이 아니라고 말해라. 40여 곳을 인용 없이 베낀 뻔한 잘못을 판단하는 데 무슨 당시 관례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인가. 김 후보자의 1982년 석사논문에는 130곳의 표절 의혹이 제기됐다. 서울대는 그의 석사논문은 아예 심사하지도 않았다. 표절을 검증하는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가 2006년 출범했기 때문에 2006년 이전 논문은 검증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라리 서울대 석사논문은 논문도 아니라고 말해라. 출처 없이 인용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규칙을 지키는 데 2006년 이전 양심이 따로 있고 2006년 이후 양심이 따로 있을 수 있나. 서울대는 김 후보자의 석사논문과는 달리 조국 민정수석의 석사논문은 1989년 통과된 것인데도 검증한 적이 있다. 서울대는 당시도 2006년 이전 것은 검증하지 않겠다고 2년여를 버티다가 자교(自校) 학위논문에는 사실상 시효 없는 검증을 하겠다고 방침을 정해 검증했다. 그것이 2015년 일이다. 그사이에 또 방침이 바뀌었나 보다. 조 수석의 석사논문 제목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법·형법 이론의 형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1917∼1938’이다. 김 후보자나 조 수석이나 소비에트에 관심이 많았고 표절 형태가 유사하다는 게 흥미롭다. 당시 서울대는 조 교수가 20곳에서 출처 표시 없이 인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989년에는 번역서의 재인용에 관한 기준이 정립되지 않았다”며 검증 대상자를 옹호하는 해명을 늘어놓았다. 자기들만 논문을 써본 줄 아는 모양이다. 번역서의 재인용도 그냥 인용일 뿐이지 무슨 다른 기준이 적용될 수 있나. 서울대는 조 교수의 경우도 연구부정행위가 아니라 연구부적절행위로 표절이 경미하다고 보고 예비조사로 끝내버렸다. 독일 문예비평가 발터 베냐민은 인용으로만 된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인문·사회과학의 논문은 인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책이나 논문의 수준은 참고문헌만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실수로 혹은 의도적일지라도 몇 군데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인용하는 정도는 눈감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수십 군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것이 중대하지 않으면 인문·사회과학에서 무슨 다른 중대한 표절이 있는가 묻고 싶다. 물론 그런 표절이 논문을 취소할 정도인지는 대학이 스스로의 책임으로 판단할 문제다. 그러나 그런 표절은 남이 보지 못하는 데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양심 불량의 싹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공직자가 될 자질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다. 내 논문에는 출처 없는 인용 따위는 한 군데도 없다고 자신한다. 자신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논문을 쓰는 수많은 학생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다. 인사 검증을 담당하는 조 수석의 눈에는 김 후보자의 논문 표절은 대수롭지 않게 보였나 보다. 자신이 똑같은 표절을 했으니까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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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도종환 시인의 사이비 사학

    신경림 시인은 ‘시인을 찾아서’란 책에서 ‘접시꽃 당신’으로 유명해진 도종환 시인에 대해 “대중적 인기에 가려 문학적 평가를 덜 받은 시인”이라고 썼다. 도종환에게는 안도현의 ‘연탄재’처럼 소박하면서도 감동적인 ‘담쟁이’란 시가 있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도종환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뒤 사이비 역사관으로 비난받고 있다. 2015년 50억 원을 들인 동북아역사지도사업과 10년 정도 진행된 하버드대 고대한국 프로젝트가 식민사학이라는 누명을 쓰고 무산된 일이 있다. 도 의원은 그 일을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별대책위 위원 시절 자신의 업적으로 자랑하고 다녔다.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낙랑군을 평양에 표기한 것은 잘못이고, 그런 식으로 고대사를 해외에 소개하는 프로젝트는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에는 시의 정신이 있고 산문에는 산문의 정신이 있다. 자유로운 시의 정신으로 위대한 상고사를 꿈꾸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러나 그런 정신으로 엄격한 산문의 영역에 개입하면 사고가 난다. 낙랑군 평양설은 역사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광복 이후 남북한 학자들의 활발한 연구로 지금까지 평양에서 2600여 개의 낙랑군 무덤이 발견됐다. 오로지 사이비 사학만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뜬금없이 가야사 연구를 들고나와 거기에 영호남 화합이라는 정치적 의미까지 부여했다. 그러자 도 의원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에서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했는데 임나를 가야라고 쓴 국내 역사학자들의 논문이 많다”고 호응하고 나섰다. 임나일본부를 인정하지 않아도 임나는 당시 가야의 별칭이었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 임나가 가야니까 임나일본부를 조작했을 수도 있다. 도 의원이 장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어쭙잖은 인식이 역사를 몽롱한 시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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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문재인 김이수 김선수, 그리고 통진당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된 김이수 헌법재판관은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에서 해산에 반대하는 유일한 소수의견을 냈다. 전체 결정문 346쪽 중 절반 이상인 180쪽에 이르는 그의 소수의견을 끝까지 읽어 보면 그가 위헌정당 해산 제도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실효성이란 측면에서 해산된 정당이 외견상 합헌적인 강령을 제정하고 활동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예상은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거니와 실제 전개와도 맞지 않다. 통진당이 해산된 후 후속 정당이 만들어졌지만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반면 이석기 문제를 둘러싸고 통진당과 갈라선 정의당은 종북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낸 진보정당으로 다른 정당 지지자들로부터도 따뜻한 반응을 얻고 있다. 통진당 해산은 실효성이 있었다. 더 문제가 많은 이유는 정당해산제는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율적 의사결정에 중대한 제약을 초래한다는 주장이다. 그 자체로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국민은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분단 상황을 고려해 정당해산제를 채택하는 결단을 내렸다. 헌법재판관은 법률 위에서 판단하지 헌법 위에서 판단하지 못한다. 헌법 조항 자체를 의문시하는 주장은 헌법 제정권자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있지만 헌법재판관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분단을 겪었던 독일은 통일된 지금도 정당해산제를 유지하고 있다. 김 재판관은 압도적인 강제 해산의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 정당 해산 결정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지만 압도적인 강제 해산의 필요성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가 통독 전 서독 연방헌법재판소의 공산당 해산까지 비판하는 것을 보면 그의 기준으로는 이 세상에 강제 해산할 정당은 없다. 김 재판관은 이석기 일당이 통진당 내에서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통진당을 해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통진당이 내세운 ‘진보적 민주주의’ 같은 강령이 반(反)민주적이기는커녕 민주주의 심화에 기여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유타 림바흐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라는 책에서 “위헌정당 심판은 전체 정치 상황에 대한 정확한 개관뿐만 아니라 정당의 음모에 대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위헌법률 심판이나 헌법소원 심판은 사법적 판단만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위헌정당 해산 심판은 사법적 판단을 뛰어넘는 정당의 음모에 대한 통찰까지 요구한다. 통진당은 북한의 전쟁 개시에 호응해 평택 석유비축기지, 혜화 전화국, 철도 시설을 파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이석기 일당이 부정 경선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도 막지 못했다.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그럴듯한 이념을 표방한 정당을 내세우고 지하에서 활동하다가 결정적 순간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개적인 자리로 솟아올라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식은 레닌주의 정당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정당의 음모를 가장 잘 알 만한 재판관이 다른 재판관들은 모두 알아차린 음모를 혼자만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순진한 것인지 순진한 척한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총리나 장관 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은 김 재판관이 가진 사고의 문제에 비하면 한가로운 얘기다. 김 재판관이 재판관으로 있으나 헌재소장으로 있으나 어차피 헌재 결정에서 한 표일 뿐이라는 생각은 안이하다. 통진당 해산 사건에서 통진당 측 변호인단의 단장을 맡은 김선수 변호사는 지금 대법관 후보로 추천돼 있다. 그는 문재인 정권에서 대법관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김 재판관의 헌재소장 임명은 김 변호사의 대법관 임명으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김 재판관은 2012년 문 대통령이 속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추천 몫으로 헌법재판관이 됐다. 김 변호사는 2005년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의 민정수석비서관이었을 당시 사법개혁비서관을 지냈다. 문 대통령은 “통진당 일부의 일탈이 통진당 해산 사유가 될 수 없다”며 이들과 동일한 논리를 펴왔다. 통진당 해산 결정의 정당성을 뒤집어야 자신의 면목이 서는 동질감이 형성돼 있다. 이런 동질감이 사법권력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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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부탄식 행복지수

    1972년 당시 부탄 국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국민총행복(GNH)이 국민총생산(GNP)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현자 국왕의 말에 그 뒤 부탄의 국가 정책은 지속 가능한 개발, 문화의 보존과 진흥, 환경 보호, 좋은 통치 등 네 가지 기준에 초점을 맞췄다. 2008년 네 가지 분야에서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측정하기 위해 GNH 지수를 개발했다. 2015년 부탄 정부가 국민 7000여 명을 상대로 GNH 지수를 조사했을 때 91.2%가 행복하다고 답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도 안 되고, 화장실도 없어 아무 데서나 변을 보는 나라지만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부럽다. ▷매년 3월 20일은 유엔이 정한 ‘국제 행복의 날’이다. 유엔 산하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올해 ‘국제 행복의 날’에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에서 한국은 56위를 차지했다. 헬조선까지는 아니더라도 행복한 나라는 아니다. 유엔행복지수 최상위권은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란드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부탄은 97위다. 지난해 84위보다 13계단 떨어졌고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부탄의 GNH 지수에서는 심리적 행복감이 중요하다. 유엔행복지수도 경제력으로만 국가를 비교하는 데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응답보다는 행복감을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를 중시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여전히 행복의 토대다. 다만 이것으로는 모자라 복지 지원, 기대수명 같은 사회적 지표와 자유, 관용 같은 정치적 지표를 더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부탄을 참조한 한국식 행복지수 개발을 주문했다고 한다. 지난해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부탄을 방문해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인간은 가난해도, 독재 치하에서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다. 행복이라는 게 말 그대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지 지표를 보고 ‘아! 내가 행복하구나’ 깨닫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만들어 주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북유럽 국가 같은 더 좋은 모델도 있는데 왜 하필 부탄식일까 하는 의문은 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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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역대 처음 ‘임기초 개헌’ 공약 지키겠다는 文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취임 후 처음으로 개헌을 언급했다. 그는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빌려서 국회의 협력과 국민 여러분의 동의를 정중히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대선 후보 때인 지난달 12일 열린 국회 헌법개정특위에서 문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면 곧바로 개헌 작업에 착수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국회에서 내년 초까지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일정도 밝혔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여당 후보는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도 지키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취임한 지 열흘도 안 돼 개헌을 언급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할 만하다. 앞서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은 임명된 직후 정우택 자유한국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를 예방한 자리에서 “1년 뒤 개헌을 염두에 두고 정부조직법 개편을 최소화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청와대가 개헌을 준비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도 16일 국회에서 당별로 이해관계가 달라 단일 개헌안이 나오기 쉽지 않다는 이유로 “현실적으로는 대통령이 안(案)을 내는 게 쉬울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이 정한 개헌 절차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다. 국회가 직접 발의해 국민투표로 가는 경로와 대통령이 발의해 국회를 거쳐 국민투표로 가는 경로다. 국회 주도의 개헌에 대해서는 기득권 집단화한 국회의원들에게만 개헌을 맡길 수 있느냐는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어차피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 만큼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개헌안을 만드는 것이 효율적인 성과를 내는 길이 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의 개헌 공약에는 “새 헌법 전문에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항쟁의 정신을 새겨야 한다”는 내용이 4년 중임제 개헌이나 기본권 강화보다 앞서 첫머리에 나온다. 현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돼 있다. 3·1운동은 국가의 건립 근거를, 4·19혁명은 민주국가에의 지향을 밝힌 것이다.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항쟁은 모두 4·19 민주이념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한 항거이므로 4·19 민주이념 속에 포함된다. 그것을 하나하나 거론해서 무엇을 넣고, 넣지 않는다는 것은 괜한 논란을 부를 수 있다. 대통령이 주도하는 개헌이더라도 국민 의사를 더 잘 반영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문 대통령 자신도 대선 후보 때 “국론이 모아지면 제가 공약한 개헌 내용을 고집하지 않고 국민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확인된 최소한의 개헌 국론은 대통령의 제왕화를 막을 분권과 협치의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어제 청와대 관계자가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공약은 개헌 논의와 별도 트랙”이라고 밝힌 것은 현실감이 있다. 헌법 전문에 담을 내용을 놓고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해 또다시 개헌이 늦춰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2017-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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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강남역 살인사건 1년

    어제는 23세 여성이 새벽 서울 강남역 인근 노래방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살해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1년간 강남역 살인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놓고 두 가지 규정이 대립했다. 한쪽은 ‘조현병(정신분열증) 환자의 묻지 마 범죄’라고 규정했고 다른 쪽은 ‘여성 혐오 범죄’라고 규정했다. 수사와 재판에서는 조현병 환자의 범죄로 결론이 났지만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여성 혐오 범죄로 보려는 시각도 강력히 존재했다. ▷여성 혐오 범죄라는 시각은 범인이 체포된 직후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데서 비롯됐다. 여성들은 “그곳에 ‘내’가 없었을 뿐,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공포 앞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강남역에 추모의 포스트잇을 붙였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럽다. 그러나 곧 범인이 조현병 환자임이 밝혀졌음에도 여성 혐오 주장이 계속되고 1년이란 시간이 지나도록 수그러들지 않는 것은 예상 밖이다. ▷여성은 약자이고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에 반박을 삼가는 분위기가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원인이 무엇이든 여성 혐오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원인이 조현병일지라도 그 발현이 여성 혐오로 나타난 데는 사회에 잘못 구조화된 여성 인식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 혐오를 고집하는 수준을 넘어서 조현병 환자의 범죄로 보는 시각을 반동(反動)시하며 수사와 재판 결과를 비판하는 전도(顚倒)도 벌어졌다.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 앞에서 ‘여성 혐오 반대’라는 피켓을 든다고 강남역 살인사건을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적 충격을 준 조현병 환자의 살인 사건이 최근 또 발생했다. 지난달 조현병에 걸린 17세 소녀가 별다른 이유 없이 8세 여아를 끔찍하게 죽였다. 조현병 환자 관리는 한편으로는 사회를 조현병 환자 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하고 다른 한편 조현병 환자의 인권을 생각해야 하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사회가 관심을 모아 대책을 세워도 부족할 판에 더는 초점을 흐리지 말자.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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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조국, 독선부터 버려야

    조국 씨는 교수보다는 민정수석이, 그보다는 차라리 정치인이 잘 어울릴 사람이다. 그는 1989년 옛 소련 법학자 파슈카니스를 다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국문)에서 김도균 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한 해 전 쓴 논문 속의 8개 문장을 연속해서 통째로 베꼈다. 내가 2013년 이 문제를 지적했을 때 그는 ‘쿨’하게 인정했다. ‘석사논문 정도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표절한 부분은 김 교수가 ‘사회주의 법 입문’이라는 제목의 독일어 원서를 번역한 것이다. 서울대 법학도서관에 소장된 같은 원서에는 조 수석이 논문을 쓰기 한 해 전 책을 빌린 기록이 남아 있다. 빌려놓고도 남의 번역을 갖다 쓴 것은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한 번 하고 마는 표절은 없다. 석사논문에서 표절한 사람은 대개 박사논문에도 표절한다. 그가 1997년 미국 일본 독일 영국의 ‘형사소송 증거배제 규칙’에 대해 쓴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 박사논문(영문)에서 독일편을 주의 깊게 읽었다. 독일편은 논문 전체 266쪽 중 40쪽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미국 인디애나대 크레이그 브래들리 교수가 쓴 논문 ‘독일에서의 증거배제 규칙’이 네 군데나 출처 표시 없이 베껴져 있다. 이 부분은 모두 브래들리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결정문을 번역한 것이다. 표절의 형태가 석사논문과 똑같다. 이번에는 통째로는 베끼지 않고 한두 단어씩을 바꿔 놓았다. 그는 이번에는 ‘쿨’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베낀 부분은 독일 헌재 사건의 사실관계를 요약한 것으로 지도교수가 각주를 달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달지 않았다고 내게 해명했다. 이런 해명이 학문공동체에서 통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해명은 논문 자체에서 반박되고 있다. 그는 독일어 번역과 상관없는 곳에서는 브래들리의 논문임을 밝히고 인용한다. 이 논문에는 표절 이상의 문제가 있다. 버클리대의 부실 심사다. 독일편에서 인용된 독일어 논문은 모두 12편이다. 논문을 인용하면 논문의 몇 쪽에서 인용하는지 밝혀줘야 하는데 12편 중 9편이 쪽수 표시 없이 통째로 인용돼 있다. 그는 영어 논문을 인용할 때는 몇 쪽에서 인용하는지 밝혀준다. 간혹 쪽수가 표시된 독일어 문헌을 찾아보면 관련 내용이 없는 것도 있다. 그가 독일어 문헌을 실제로는 읽지 않았다는 것, 정확히는 읽을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독일이나 일본의 대학에서라면 이런 논문이 심사를 통과하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미국 로스쿨이 미국에서 변호사나 교수를 하기 어려운 아시아계 학생에게 변호사시험 응시 자격이나 학위를 줄 때 세심한 심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미국 교수에게 들은 적이 있다. 표절 의혹이 부실 심사와 깊이 연루된 이상 표절 조사는 버클리대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서울대가 직접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러나 서울대는 버클리대 박사과정 책임자인 존 유 교수가 보낸 ‘문제없다’는 메모랜덤을 토대로 표절 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 메모랜덤은 2013년 7월 버클리대에 접수된 다른 표절 신고에 대한 응답이다. 서울대는 그로부터 4개월 뒤 처음 제기된 독일편의 표절 의혹까지 함께 덮고 넘어갔다. 논문이 형편없어도 민정수석은 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석사논문에서 다룬 파슈카니스라는 법학자는 ‘마르크시즘의 나치 사상가’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파슈카니스에게 법이란 공산당의 이념을 실천하는 도구다. 공산당은 역사에서 진리의 유일한 담지자이고, ‘법 앞의 평등’ 같은 원칙도 공산당의 이념을 펴는 데 방해가 된다면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의 정치’라고 불리는 위험한 사상이 담겨 있다. 그는 파슈카니스를 비판하는 관점이라기보다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접근했다. 그가 석사논문을 쓰던 해 출범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에서의 활동이 어떤 동기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여전히 파슈카니스에 동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의 언행을 보면 여전히 ‘우리 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고, 다른 편이 하는 것은 무조건 틀리다’는 당파적 진리관이 엿보인다. 내가 잘못한 건 다 실수이고, 남이 최선을 다한 것도 적폐라고 여기면 그는 또다시 젊은 시절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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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나폴레옹 닮은 마크롱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당선자는 1804년 황제 대관식을 올릴 당시 35세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후 가장 젊은 프랑스 지도자다. 마크롱은 1977년 12월 21일생이다. 태어난 연도만을 따지는 우리나라 언론의 계산법으로는 40세이지만 월일까지 따지는 서구식으로 계산하면 아직 생일이 되지 않아 한 살을 더 깎기 때문에 39세다. 마크롱은 서구식으로는 아직 30대다. ▷마크롱의 부인 브리지트 트로뇌는 63세로 마크롱보다 24세 연상이다. 트로뇌는 마크롱의 고교 시절 연극 선생이었다. 트로뇌가 전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자녀 셋 가운데 한 명은 마크롱보다 나이가 많고 한 명은 동갑이다. 나폴레옹이 황제로 취임하던 1804년 당시 부인은 조제핀으로 나폴레옹보다 7세 연상이었다. 잠도 잘 자지 않고 새벽 2시에도 자주 텔레그램에 메시지를 띄우는 마크롱의 부지런함도 나폴레옹을 닮았다. 기록에 따르면 나폴레옹은 하루에 3∼4시간 이상 자지 않고 부족한 잠은 말 위에서 틈틈이 자는 것으로 보충했다고 한다. ▷마크롱이 대선에서 극우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후보를 누른 것은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가를 복원하려는 왕당파의 반(反)혁명 시도를 물리친 것에 비유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의 이념에 동조하면서도 실용적 중도주의로 자코뱅식 좌파 급진 정치에 시달린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듯이 사회당 정부의 각료였던 마크롱의 시장친화적 노선도 노동시장을 옥죈 좌파 경제민주화에 숨 막혔던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다. 마크롱의 신생 정당 ‘앙마르슈’는 전진(前進)을 뜻하는데 어딘지 나폴레옹 군대의 행진 구호 같은 느낌이 난다. ▷새 대통령이 추구하는 노선은 미국의 빌 클린턴, 영국의 토니 블레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따랐던 제3의 길의 프랑스판이라고 할 수 있다. 39세라는 나이는 프랑스의 케네디로 포장하기에도 충분한 매력적인 나이다. 나폴레옹과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젊은 지도자가 과연 비관적인 분위기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 위기의 나라를 구할 새 나폴레옹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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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뜨는 권력과 언론

    2일 SBS 8시 뉴스의 ‘세월호 인양 지연에 차기 정권과 거래한 의혹이 있다’는 보도는 해양수산부 공보관실에 근무하는 7급 공무원의 발언을 인용한 것으로 어제 밝혀졌다. 이 보도가 믿을 만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정작 보도보다 더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3일 사과 방송이다. 1분 30초짜리 보도에 대한 사과방송이 무려 5분 30초간 이어졌다. 방송사상 더한 오보도 많았을 텐데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측 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으로 방송기자 출신인 박광온 의원의 말에 따르면 5분 30초 사과는 언론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방송을 하다 보면 의도치 않은 오보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사과방송 어디에서도 오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방송사상 최장시간의 사과를 한다는 건 비례가 맞지 않는다. 사과방송은 취재 기자에겐 잘못이 없다고 옹호하고 단지 게이트키핑이 부실했다고 주장했다. 박정훈 SBS 사장은 어제 사과담화문에서 “함량 미달의 보도가 전파를 탔다”면서도 “이 보도를 취재한 부서나 특정 개인을 비난할 의도는 없다”고 밝혔다. ▷뜨는 권력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다. 문 후보 측이 SBS에 압력도 가하지 않고 그저 항의만 했다는데도 SBS는 오보도 아닌 단지 함량 미달의 기사에 최장시간 사과방송을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제 사장 담화문을 통해 재차 사과했다. 이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SBS가 진짜 방송을 하고 가짜 뉴스라고 사과했다”며 “SBS 사장과 보도본부장의 목을 다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 전 ‘내가 집권하면 종편 4개 중 2개를 없애버리겠다’고 한 말과 겹쳐 들린다. ▷민주화 이후 정치인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언론사를 업신여기는 발언을 한 적이 없다. 제1당의 문 후보를 봐도, 제2당의 홍 후보를 봐도 언론의 앞날이 걱정된다. 권위주의 독재 시절에도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언론이 권력과 당당히 맞서려면 방법은 하나다. 최선을 다한 진실 보도만이 펜을 검보다 강하게 만든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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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여론조사 대신 구글 트렌드

    빅데이터가 어떤 식으로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지 명쾌하게 보여준 것이 구글 검색 빈도를 통한 독감 발병 예측이다. 구글은 사람들이 독감에 걸렸을 때 온라인에서 검색하는 대표적인 키워드 40개를 뽑은 뒤 검색 빈도를 추적해 독감 발병을 예측하는 ‘독감 트렌드’ 서비스를 2008년 개발했다.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이듬해 구글 검색에서 독감과 관련된 질문의 빈도와 독감에 걸린 환자들이 병원을 찾는 빈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논문을 실었다. ▷지난해 미국 대선의 승자는 빅데이터라는 말이 있다. 미국 주요 언론들이 대부분 힐러리 클린턴의 승리를 예측한 가운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인터넷, 모바일 검색량을 토대로 도널트 트럼프의 승리를 예측한 수치가 실제 결과와 가장 비슷한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빅데이터 분석은 각종 여론조사의 예측을 빗나가게 하는 ‘샤이(shy) 유권자’의 표심까지 읽을 수 있는 수단으로도 여겨지고 있다. ▷빅데이터 분석에 가장 쉽게 이용되는 것이 구글 트렌드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측은 그제 ‘구글 트렌드 검색량에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문 후보를 앞선다’는 안 후보 측의 주장은 거짓이라고 반박했다. 안 후보가 지난달 4∼18일 문 후보를 앞선 것은 사실이지만 18일 이후부터는 다시 문 후보가 앞섰다는 것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도 어제 질 수 없다며 가세했다. 이달 들어 문재인과 홍준표가 거의 같은 수준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3일부터 여론조사 결과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공표되지 않는다. 아쉬운 대로 구글 트렌드라도 이용해볼 수밖에 없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선 빅데이터 조사가 여론조사에 해당하지 않아 공표에 제한이 없지만 왜곡 가능성이 있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그러나 구글 트렌드는 여론조사와 달리 누구라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문재인’을 치고 비교란에서 안철수나 홍준표를 차례로 입력해 보라. 비교 수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래프가 뜬다. 다만 한국인은 구글 검색을 많이 하지 않아 정확도는 영어권 검색보다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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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봐라

    어제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는 약 19%,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는 약 15%의 지지를 얻었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약 40%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 앞에서 여전히 연대는 없다는 두 후보는 자신들의 눈에도 뻔한 패배의 길을 가고 있다. 안 후보는 지난 총선에서 양당 기득권 체제를 깨는 제3당을 만들었다고 자랑하지만 국민의당에서 그는 호남 의원들 위에 떠 있는 부초(浮草) 같은 존재다. 국민의당은 안철수라는 간판용 지도자와 중간의 호남 의원들, 바닥의 지지층의 생각이 각각 다르다. 안 후보가 이번 대선에 실패한다면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나고 호남 의원들은 민주당에 흡수되거나 소수 지역정당 소속으로 쪼그라들 것이다. 안 후보는 스스로를 보수도 아니고 중도도 아니고 진정한 진보라고 여기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착각일 뿐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의 등에 타 있는지 모른다. 지난 총선에서 안 후보를 지지하고 국민의당을 제3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보수에서 중도로 움직여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문 후보가 싫어서 반(反)문재인 영역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의당이 호남 지역정당을 극복하고 진정한 제3당으로 태어날 길은 안 후보가 대선에서 이기고 호남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시대 의원들과 결별하고 전국에서 이른바 중도를 지향하는 인물들로 판을 새로 짜는 길밖에 없다. 안 후보가 이번에도 실패하면 다시 그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고 본다. 정치는 연대다. 좋아하면 사랑을 하거나 우정을 나누지 연대를 하지 않는다. 연대란 싫어도 더 싫은 편 앞에서 차이를 뒤로 돌리고 하나인 척하는 것이다. 안 후보가 지난 대선에서 문 후보가 좋아서 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싫어도 더 싫은 상대인 박근혜를 이기기 위해 연대한 것이다. 프랑스 같은 결선투표도 없고, 미국 같은 플랫폼 양대 정당도 없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연대는 정치공학이 아니라 불가피하다. 역대 대선이 그걸 증명한다. 연대는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린 것이 아니라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 홍 후보는 선거에서 져도 잃을 게 없다. 이것이 모든 것을 잃는 안 후보와의 차이다. 홍 후보처럼 계산이 빠른 사람이 정말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선거에 나왔다고 보지 않는다. 며칠 후 안 후보를 골든크로스로 제친들 선거가 며칠 남지 않아 이길 수 없다는 걸 그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의 내심에는 문 후보가 집권하면 자신은 당권을 쥐고 적대적 공존으로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있는지 모른다. 떨어져도 잃는 게 없는 사람이 선거에 나와 있는 것만큼 선거를 맥 빠지게 하는 것도 없다. 그의 지지자들 중에는 정체성 투표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질 때 지더라도 탄핵 정국에서 쪼그라든 세를 과시하겠다는 것이다. 정의당이나 바른정당 같은 소수 정당이라면 정체성 투표를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100석 안팎의 거대 정당이 정체성 투표를 하겠다는 건 집권을 미리 포기한 소수 정당의 패배 의식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는 가능한 한 많은 유권자가 참여해야 의미가 있다. 그러나 압도적 1위 후보 지지자도, 그 밖의 후보 지지자도 반드시 투표하러 갈 이유가 없는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안 후보와 홍 후보가 엇비슷한 지지도를 얻는 지금은 2, 3위도 분명치 않아 전략적 투표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흡수될 염려 없이 대등하게 연대를 모색할 호기(好機)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에 잘난 척하는 육상선수가 있었다. 그가 로도스 섬에 다녀와 거기선 올림픽 선수를 뺨칠 기록이 나오더라고 자랑하며 제 땅을 욕하자 사람들이 말했다.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봐라.’ 안 후보도 홍 후보도 혼자 집권할 능력은 없다. ‘국민만 믿고 뚜벅뚜벅’ ‘삼분지계(三分之計)’ 같은 허황된 소리 하지 말고 현실적이 되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가 브렉시트를 뒤집겠다고 정계 복귀 선언을 하면서 “이제 다시 내 손을 더럽히려 한다”고 말했다. 독일 정치철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는 때로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악마로 보일지라도(실은 악마도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 정치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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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아니면 말고’ 구속

    검찰이 권력형 비리로 구속 기소한 사건 가운데 10.1%가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중앙선데이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와 2013년 중수부 폐지 이후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나 특별수사본부에서 구속 기소한 주요 권력형 비리사건 피의자 가운데 형이 확정된 119명의 대법원 판결 결과를 추적한 결과 이 중 12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같은 기간 일반 형사 합의사건 무죄율(2.3%)을 크게 웃돈다. 검사의 입증이 부족하거나 증거가 충분치 않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황기철 전 해군참모총장과 이철규 전 경기지방경찰청장(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적인 피해자다. 황 전 총장은 2009년 방위사업청 함정사업부장 재직 시 성능이 미달된 음파탐지기를 통영함에 납품하도록 업체의 시험평가 보고서 조작을 지시한 혐의로 2015년 구속 기소됐으나 1, 2심 무죄에 이어 지난해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이 전 청장은 2012년 제일저축은행 회장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됐으나 역시 2013년 대법원에서 1, 2심과 마찬가지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7년)에는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오인받아 체포된 주인공의 변호인이 “기소되면 유죄 판결을 받을 확률은 99.9%”라며 차라리 죄를 인정하고 벌금형을 받자고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99.9%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수치가 아니라 일본의 형사 기소사건의 실제 수치다. 구속 불구속 사건을 다 포함해서 이 정도이니 구속 사건에서 무죄가 나오는 경우는 0%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구속 기소한 사건의 무죄율이 10%가 넘는다는 것은 굳이 청구하지 않아도 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는 얘기다. 법원에서 유무죄를 다툴 소지가 큰데도 여론이나 정치적 외압에 휩쓸려 사전 처벌 개념으로 구속하거나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 등 구속 요건과 무관하게 검찰의 수사 편의로 구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찰의 구속=유죄’라는 도식은 버려야 한다. 법원도 구속영장 발부에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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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심상정의 ‘약진’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는 “남자친구 쫓아다니다가 운동권이 됐고, 구로공단에 ‘공활(공장활동)’ 갔다가 너무도 열악한 여성 노동자들의 생활을 보고 연민을 감당할 수 없어 노동운동가가 됐다”고 자신의 책 ‘심상정, 이상 혹은 현실’에 썼다.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던 그는 1980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의 배후 주모자로 지목돼 이후 9년 동안 지명수배자로 지내며 노동운동가의 운명적 삶을 살게 됐다. ▷어제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에서 심 후보의 지지율은 7%를 기록했다. 한 주 전보다 3%포인트 올랐다. 그는 TV토론의 최대 승자다. 응답자의 30%가 TV토론을 가장 잘한 후보로 그를 꼽았다. ‘돼지 흥분제’로 논란이 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세게 몰아붙여 여성의 관점을 확인시키고, 당내에서 단일화 압박을 받는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에게는 ‘굳세어라 유승민’으로 한 방 있는 응원을 보내고, 군 동성애와 동성혼 불가를 외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게는 동성애 차별 반대로 진짜 진보가 뭔지 보여줬다. ▷심 후보의 지지율 상승은 문 후보의 지지율이 압도적 선두에 서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진보좌파 유권자들 사이에 이제 문 후보를 찍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심리가 있다. 멀리 보면 정의당이 2012년 통합진보당과 결별함으로써 더 이상 종북(從北) 정당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게 된 것이 심 후보 지지율의 안정적 토대가 됐다. ▷심 후보를 직접 보면 노동운동가 출신이라고 하기에는 푸근한 아줌마의 인상과 여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적인 말투가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역대 진보정당 후보 중 최다 득표율은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은 3.9%였다. 심 후보의 애초 목표는 사퇴 압력을 잠재울 5%였는데 이런 추세라면 진보정당의 염원인 꿈의 10% 달성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심 후보의 약진은 우리나라에서도 진보정당이 노동 현장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도 뿌리를 내려가는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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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문빠’에 열 받은 전인권

    록밴드 들국화의 일원이었던 가수 전인권은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덕분에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드라마에 나와 인기를 끈 이적의 노래 ‘걱정 말아요 그대’가 본래 전인권의 곡이다. 전인권은 박근혜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의 초청 가수가 돼 특유의 록 창법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도 세월을 이기진 못하고 있었지만 그의 노래는 1980년대 상극(相剋)이었던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의 록과 대학가 민중가요가 악수하는 듯한 훈훈함을 느끼게 해줬다. ▷전인권이 그제 공연 홍보 기자간담회에서 “안철수는 스티브 잡스처럼 완벽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얘기가 안 통할 수 있지만 나쁜 사람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새 대통령은 깨끗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가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적폐세력’으로 몰렸다. 문 후보 지지자들은 “전인권의 공연 예매를 취소하겠다”는 등의 글을 올리며 격렬히 비난했다. 전인권은 이 비난에 오히려 화가 난 듯 어제 안 후보를 만나 안 후보를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문 후보는 대선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하자 적폐청산 대신 국민통합을 외치고 있다. 그의 본심은 ‘(지지자들의) 문자폭탄은 양념’이란 말에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문 후보가 ‘내 편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식의 행태를 조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려스러운 것은 그가 조장도 하지 않지만 통제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문 후보 자신이 적폐청산을 외치는 홍위병 같은 지지자들 위에 떠있는 존재일 수 있다. ▷옛 동독은 록 가수까지도 감시하는 체제였다. 록은 자유와 저항의 상징이다. 록 가수마저 맘 놓고 발언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옛 동독 체제와 다를 바 없다. 공연기획자 측은 “평소보다 예매 취소 건수가 훨씬 많은 편”이라면서도 “취소 건수를 상쇄할 정도는 아니지만 신규 예매도 늘었다”고 전했다. 그의 자유를 응원해주는 기분으로 전인권의 공연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5월 6, 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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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어쩌다 592억 원이 된 박근혜 뇌물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받은 뇌물 액수가 592억 원으로 정해져 기소됐다. 592억 원이나 되는 뇌물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몰수 추징해야 할 돈은 없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특이한 뇌물이다. 검찰 기소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SK에 89억 원의 뇌물을 요구했으나 받지 못했다. 롯데로부터는 70억 원을 받았다가 돌려줬다. 이게 제왕적이라는 대통령의 수뢰 시도가 맞나 싶다. 어쨌든 여기 적용된 박 전 대통령의 정확한 혐의는 제3자 뇌물이다. 제3자는 최순실 씨가 아니라 미르·K스포츠 재단이다. 자신이 마음대로 돈을 꺼내 쓸 수 있는 재단을 만들고 그 재단에 돈을 넣도록 했다면 그것은 직접 받은 뇌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제3자 뇌물은 한 단계 더 복잡하다. 미르·K스포츠 재단은 박 전 대통령이 아니라 최 씨가 좌지우지했다. 따라서 제3자 뇌물이 성립하려면 박 전 대통령과 최 씨 사이에 경제공동체 관계가 성립하고, 최 씨가 재단의 돈을 개인 용도로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다는 두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하지만 경제공동체 관계는 말 자체가 생소하고 재단 출연금 중 실제 사용된 돈도 최 씨가 개인 용도로 마음대로 꺼내 썼다고 보기 어렵다. 검찰의 논리가 억지스럽다는 것은 다음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대기업들이 미르·K스포츠 재단에 낸 출연금은 모두 774억 원이다. 검찰은 이 중 삼성이 낸 출연금 204억 원만 뇌물로 보고 나머지 570억 원은 뇌물로 보지 않았다. 기업들이 각각의 재력에 비례해 다 같이 출연금을 냈는데 어떤 회사가 낸 돈은 뇌물이고 어떤 회사가 낸 돈은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건 누가 봐도 형평에 맞지 않는다. 검찰도 삼성의 출연금이 뇌물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앞선 특검의 공소 유지에 혼란을 끼치지 않기 위해 특검의 논리를 따랐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삼성의 출연금 204억 원과 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 16억 원에 SK와 롯데가 요구받은 추가 출연금 159억 원을 더하면 379억 원이 된다. 뇌물 총액 592억 원에서 이 379억 원을 빼면 213억 원이 남는다. 213억 원은 최 씨 딸 정유라를 위한 삼성과 코레스포츠의 후원계약 액수다. 그마저도 실제 지급된 돈은 77억 원이다. 삼성같이 돈 많은 회사가 대통령이 나서 그 회사로서는 가장 중요한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승계를 도와주겠다는데도 화끈하게 돈을 주지 못하고 이 부회장이 대통령에게 레이저까지 맞을 정도로 우물쭈물했다는 건 우리가 통상 떠올리는 뇌물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 돈은 미르·K스포츠 재단이 아니라 최 씨가 받은 돈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돈을 박 전 대통령이 최 씨로 하여금 받도록 한 제3자 뇌물이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이 받은 뇌물로 구성했다. 왜 그랬을까.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과 관련해 박 전 대통령과 최 씨를 이미 경제공동체로 봤는데 갑자기 최 씨를 제3자로 본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모든 뇌물 혐의는 그와 최 씨가 경제공동체임이 입증되지 않으면 다 무너지게 설계돼 있다. 경제공동체 관계가 입증된다 해도 뇌물이 성립하려면 대가가 있어야 한다. SK 회장의 사면은 그가 형기를 거의 다 채운 시점에 이뤄져 특혜라고 할 수도 없다. SK와 롯데 면세점 허가에 대해서는 5년이란 짧은 주기로 허가와 불허를 오가는 시스템이 불합리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국민연금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승인에 대해서도 여론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것도 대가라고 우기면 우길 수 있겠지만 최소한 뇌물을 받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준 것은 아니다. 정유라 승마를 비롯한 최 씨의 각종 민원에 해결사 역할을 한 박 전 대통령의 행동은 분노를 자아낸다. 강요 행위만으로도 그는 탄핵되고도 남는다. 다만 뇌물 혐의는 억지스러운 데가 많다. 국회는 탄핵소추에서 수사도 안 된 뇌물죄를 집어넣었다. 특검은 사후적으로 이를 보완하느라 경제공동체라는 말까지 만들어 뇌물 혐의를 쥐어짜냈다. 헌법재판소는 뇌물죄 판단을 유보하고 기업 재산권 침해라는 헌법 위반으로 결정했다. 검찰은 특검에서 인계받은 뇌물죄를 이어받지 않을 경우 거센 후폭풍을 맞을 것이 두려웠다. 이것이 592억 원 뇌물죄에 이른 경과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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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훈민정음 해례본의 값

    미르재단에 쓰여 때를 타고 말았지만 용을 뜻하는 미르란 말이 한글로 처음 쓰인 곳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미리내 시나브로 쌈지 같은 다른 아름다운 우리말도 나온다. 한글 발음 설명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7월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견됐다. 문화재 수집가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을 팔려는 사람이 나타나 그가 구입비 8000원에 중개비 1000원을 주고 샀다고 전한다. 당시 1000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2008년 7월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경북 상주의 고서적 수집가 배익기 씨가 “집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왔다”고 쓴 글이 게시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문화재청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확인했더니 진품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배 씨는 골동품 수집가 조영훈 씨에 의해 절도 혐의로 고소됐다. 배 씨는 2014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소유권은 2011년 민사소송에서 이긴 조 씨에게 있었다. 조 씨는 수중에 없는 해례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했다. ▷10일 배 씨는 9년 만에 상주본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2015년 배 씨 집에 난 불로 책 아랫부분이 일부 탄 모습이었다. 그는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재선거에 상주본을 국보로 등재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무소속 출마했다. 간송본은 국보 70호로 등재돼 있다. 상주본은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간송본에는 없는 연구자의 주석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 씨는 국회의원 후보자 재산 등록을 하면서 상주본의 가치를 1조 원으로 등록하려 했으나 선거관리위원회가 거부했다. 배 씨는 2년 전 1000억 원을 받고 헌납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소유권이 국가에 있는데 돈 주고 구입할 이유가 없다”며 “배 씨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해 소유권을 가져가면 그때 가서 매매든 뭐든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소유권은 차치하고 귀중한 문화재를 간수도 못 하면서 꽉 움켜쥔 채 1000억 원, 1조 원을 부르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설 자격이나 있는지 의문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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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송평인]네거티브의 수준

    선거에서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는 게 네거티브 선거운동이다.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64년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린든 존슨 측은 들판에서 데이지 꽃잎을 하나 둘 세던 여자아이의 모습을 핵무기 발사 카운트다운과 교차 편집하면서 핵폭발과 함께 여자아이가 화면에서 사라지는 선거광고를 만들었다.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가 집권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과장된 공세였지만 존슨의 압도적 승리에 큰 보탬이 됐다. ▷‘안철수 찍으면 박지원이 상왕(上王) 된다’나 ‘문재인 찍으면 도로 노무현 정권 된다’는 언급은 관점에 관한 것이므로 할 수도 있는 네거티브다. ‘안철수 딸의 재산을 밝히라’든지 ‘문재인 아들의 원서를 내놓으라’는 주장은 검증이므로 의혹이 남지 않을 때까지 해야 한다. 다만 확인되지 않은 가짜 뉴스에 기초한 네거티브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것이 걱정이다. 그렇게 되면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무너뜨린 병풍(兵風) 공작 같은 흑색선전이 될 수 있다. ▷나쁜 효과라도 거두기는커녕 안 한 것만 못한 ‘찌질한’ 네거티브도 있다. 후보가 조직폭력배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공세가 그렇다. 정말 조폭인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치인은 잘 모르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기도 한다. 한쪽이 세월호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고 공격하고, 다른 한쪽이 너희도 같은 사진을 찍지 않았느냐고 역공세를 펼치는 것도 와 닿지 않는다. 이런 네거티브로 매일 아침을 여니 굿모닝 대신 ‘문모닝’이니 ‘안모닝’이니 조롱하는 말까지 들린다. ▷1963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은 윤보선은 간첩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러 내려왔다가 잡혔다는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이 네거티브는 박정희가 일찍 좌익 의혹을 불식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에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실을 알려줬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었다.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는 네거티브가 없으면 유권자는 후보가 전하고 싶은 정보만 얻게 될 것이다. 네거티브를 굳이 한다면 조금은 가치 있는 정보나 관점이 담긴 네거티브였으면 좋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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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연대는 ‘닮은 발가락 찾기’다

    독일어로 직접 인용되는 몇 안 되는 말 중에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란 말이 있다. 남의 불행(샤덴)은 나의 기쁨(프로이데)이라는 뜻이다. 고약하지만 인류사에서 정의(正義) 실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감정이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벌을 받을 때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정의는 성립할 수 없다는 뜻에서 이런 말이 쓰인다. 촛불시위 때 창살 달린 모형 감옥을 만들어 박근혜 전 대통령 구속 코스프레를 하던 사람들은 그의 수감에서 이런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찬성했건 반대했건 인간적 정리(情理)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호송차를 타고 구치소로 향할 때의 표정을 보면서 우울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이 우울함은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사 중 자살하지 않고 살아 부인과의 ‘경제공동체’ 관계로 엮여 뇌물 혐의로 구속됐다면 기뻤을까. 그를 지지했건 안 했건 우리 전체를 대표하던 대통령이 수감된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어제 국민의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안철수 전 대표는 얼마 전 ‘사면위원회’를 만들어 거기서 박 전 대통령의 사면을 논의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발언에 더불어민주당이 맹폭을 가했다. 안 후보의 강조점은 사면을 엄격히 한다는 데 있기 때문에 민주당의 비난은 트집 잡기에 가깝다. 박 전 대통령 사면 논의 언급은 ‘사면위원회’ 언급에 이어서 상식선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마저 두고 볼 수 없다는 쪽이야말로 단단히 비꼬인 것이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4년 워터게이트 도청 은폐 의혹으로 하원에서 탄핵소추되기 직전 사임했다. 미국 정부가 닉슨을 수사 단계에서 사면해 그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우리나라는 형이 확정돼야 사면이 가능하지 수사나 재판 단계에서 사면은 불가능하다. 사면 논의가 이른 것은 틀림없다. 게다가 사면은 해주겠다는 쪽보다 받아야 할 쪽의 법정 투쟁 고집으로 한참 뒤에나 가능한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사면이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의 수감에 샤덴프로이데를 느끼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정서적 차이다. 보수 진영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놓고는 확연히 갈라섰지만 얼마 전까지 대통령이었던 사람의 수감에 최소한 유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다. 호남 쪽 국민의당 의원들의 성향과는 상관없이 지난해 총선에서 국민의당을 제3당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유권자들은 대체로 보수에서 움직여간 사람들이다. 안 후보는 보수는커녕 중도라는 평가도 거부하고 자신이야말로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다른 진짜 진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의 자기 인식이 어떻든 그를 지탱하는 힘은 호남이라는 지역과 보수에서 옮겨간 유권자들이다. 연대를 위한 중요한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 ‘사면, 때가 되면 논의할 수 있다’는 측은 ‘사면, 말도 꺼내지 말라’는 측에 맞서 심리적 연대를 이룰 수 있다. 연대는 서로 다른 점을 감추고 서로 같은 점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 부각시키는 과정이다. ‘발가락이 닮았다’는 김동인 소설의 주인공처럼 닮은 발가락이라도 찾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안 후보의 사면 발언에 보수 진영을 넘보는 얼치기 좌파라고 공격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사드 배치 논란도 그렇다. 민주당은 당론으로 사드 배치 반대를 표명한 적이 없는데도 그 당의 의원들은 중국에 ‘조공(朝貢) 외교’를 펼치면서 사드 반대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국민의당은 당론으로 사드 배치를 반대하긴 했으나 말뿐이었고 안 후보는 사드 배치는 이미 한미(韓美) 간에 합의된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안 후보가 종착점을 잘 찾아왔으면 됐지, 오락가락한다는 식으로 공격하는 것은 연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는 결선투표가 없다는 맹점이 있다. 투표는 사실상 일대일 구도를 만들어 하는 것이 유권자의 사표(死票) 방지를 위해 바람직하다. 일대일 구도를 위해서는 최강자에 맞서 다른 후보들이 연대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연대는 단일화일 수도 있고 암묵적인 상호교감일 수도 있다. 자신이 역부족이다 싶으면 알아서 물러설 줄도 알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7-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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