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욱

변영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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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변영욱 기자입니다.

cut@donga.com

취재분야

2025-11-06~202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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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한강 다리에 설치된 ‘자살하지 마세요’ 표지판[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오늘은 1923년 6월 22일 자에 실린 사진을 골랐습니다.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는 사람을 막으려는 표지판 사진입니다. 사진의 구도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눈 높이에서 보이는 그대로 찍어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오른쪽 철교 기둥의 수직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 약간 기울어져 있는 상태입니다. 왼쪽 화면의 넓은 하늘 모습도 지금의 사진기자들이라면 피했을 ‘불필요한 여백’입니다. ▶100년 전에도 한강의 철교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나 봅니다. 한강 다리 위에 일본어와 한글로 ‘잠깐만 정지하시오’라는 쓰인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표지판 앞 인도에는 갓을 쓴 성인 두 명이 각각 앉아 있거나 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한강 다리를 건너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겠죠?▶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한강을 찾는 사람들이 100년 전에도 꽤 있었나 봅니다. 오늘날과 별로 다를 것 없는 모습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하고 신문 지면을 더 훑어보았더 이사진과 조금 떨어진 지면에 관련 기사가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철교 자살- 미수자 또 3명한강 철교에 빠져 죽으려 하는 사람을 재작 이십일에도 세 사람을 다행히 구하였다. 고양군 한지면 왕십리 임익수(49)는 신병을 견디지 못하여 고양군 룡강면 아현리 종지명(61)은 홀아비의 몸으로 어린 아들의 병 구원하기가 어려워 또 고양군 둑도면 신당리 한의소(61)는 자식의 구박을 못이기어 죽으려는 것을 소과인도교 파출소에서 발각하여 각각 간곡한 설유를 한 후 돌려보내었다더라. ▶1923년 6월 20일 하루 동안에만 자살하려고 한강 다리를 찾았다가 경찰에 발견된 사람이 무려 3명이나 있었습니다. 망설이며 한강 다리 위를 서성이던 40대 1명과 60대 2명 등 총 3명이 한강 근처 파출소 경찰관에 의해 발견되어 다행히 집으로 돌아갔다는 기사입니다. 병을 견디지 못해, 어린 아들의 병간호에 지쳐, 자식의 구박을 못이기어 자살하려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기사는 자살을 하려고 했던 3명의 이름과 주소, 나이를 모두 표시해 놓은 것이 눈에 띕니다. 지금과는 다른 보도 방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달라진 게 또 하나 있습니다. 요즘은 신문에서 자살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게다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보도 자체를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100년 전 보도처럼 실명을 밝히면서 그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직설 표현을 하는 것이 것인지, 익명의 사람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했다는 우회 표현이 나은 것인지 생각해봅니다. 당사자 뿐만 아니라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생명이 더 보호되고 존중되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사진과 함께 용어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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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디어 北발사체 인양 성공…신문에 美잠수함 사진을 함께 게재한 이유는?[청계천 옆 사진관]

    ▶드디어 북한 우주 발사체 잔해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습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을 이용해 발사한 ‘천리마 1형’ 발사체가 서해에 추락한 지 15일 만인 16일 인양돼 경기도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언론에 공개되었습니다. 11년 전 북한 로켓 ‘은하 3호’의 1단계 추진체 잔해의 언론 공개 행사를 취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2012년 12월 12일 북한을 출발한 ‘은하 3호’가 북한 발표에 따르면 성공적으로 역할을 한 후, 9분 만에 서해에 떨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이틀 만에 우리 군 당국이 잔해를 바다에서 육지로 인양했습니다. 그 때도 우리 군 당국이 평택시 해군 제2함대 사령부로 취재 희망하는 언론사를 초청해 북한 미사일 발사체를 촬영하도록 했었습니다. 부슬부슬보다는 많은 비가 내렸는데 배의 조타실 쪽에 올라가 아래 갑판에 놓여있는 ‘북한제 깡통’을 찍는데 왠지 마음이 착잡했었습니다. 역사적 현장이라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일상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북한의 행동을 로케트 잔해를 통해 직접 확인하는 현장이어서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이번에도 금방 뭍으로 올릴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보름이 걸렸습니다. 북한 스스로 실패라고 한 발사였기 때문에 이번에 인양한 발사체 ‘천리마 1형’은 ‘깡통’이 아니라 그 안에 북한이 우주로 쏘아 보내려고 있던 많은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 손상없이 물 위로 올리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으로 추측해 봅니다. ▶2023년 6월 17일자 전국 신문의 1면에는 북한 ‘천리마 1형’ 잔해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사진기자협회 소속 2개 신문사의 사진기자가 대표 취재(POOL 취재)한 사진에서 고른 사진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문에서 북한 발사체 사진과 함께 미국의 핵잠수함 사진을 나란히 실었습니다. 같은 날 부산항으로 입항한 미국 7함대 소속 핵추진 잠수함인 미시간호(SSGN 722)가 해군 부산 기지에 입항한 모습의 사진입니다. ▶모든 언론사의 단말기에 북한 추진체와 미국 핵잠수함 사진이 들어왔지만, 같은 사진을 어떻게 쓰는가는 각 언론사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서 최종 지면이 편집됩니다. 북한의 도발 흔적과 함께, 굳건한 한미 동맹의 상징을 보여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더 중요한 정보 전달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언론사도 있을 것이고, 뉴스의 강도가 ‘보름 만에 우리 눈앞에 나타난 북한 도발 흔적’을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언론사도 있을 것입니다. ▶ 서설이 좀 길었습니다. 다시 100년 전 신문 지면으로 돌아가 봅니다. 1923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서울에서 열린 각종 체육대회 중 재미있는 장면 2장을 아래위로 나란히 편집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신문에서는 지금도 2장의 사진을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어떤 행사가 벌어지면 화보 형식으로 여러 장을 보여주어 다양한 모습을 전달할 수도 있지만 지면이라는 게 제한이 있으니 보통 2장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 3장 정도의 사진을 게재합니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 때문에 2장을 사용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한 장의 이미지로 ‘임팩트’있게 지면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도 있고, ‘균형’있는 지면이 중요하다고 주장도 있습니다. 2장의 사진은 균형을 중시하는 의견이 우세할 때 게재됩니다. 여당 사진이 들어가면, 야당 사진도 들어가야 하고, 북한의 미사일 사진이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미사일 사진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꽤 많습니다. 과문해서 전 세계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기계적 균형의 정도는 우리나라 지면이 좀 높을 겁니다. ▶2장의 사진으로 균형을 맞추려는 사진편집의 경향이 100년 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여러분께 소개해드렸습니다. 서울에서 열린 체육대회 장면 중에서 위의 두 사진은 ‘장년층 행사’와 ‘유년층 행사’를 골라서 게재했습니다. 성별로 나눌 수도 있고, 종목 별로 나눌 수도 있는데 연령별로 나눠서 사진을 선택했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열린 각종 체육행사 중에서 딱 한 장의 사진만을 골라서 지면에 실어야 한다는 주문이 왔을 때 저라면 두 장의 사진 중 어떤 걸 골랐을까요? 고민을 좀 해봤는데 난제네요. 어렵습니다. 결국 두 장 정도 사진을 쓰는 방향으로 타협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사진을 고르셨을 거 같으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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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은 사진에 나타난 고도비만과 과로 흔적, 공개 의도는?

    2021년 10월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은 국가정보원(국정원) 보고를 토대로 기자들에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체중이 2019년 140㎏에 비해 약 20㎏ 감량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로부터 2년 남짓 지난 올해 5월, 이번에는 국회 정보위원회 간사인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이 김규현 국정원장의 보고를 토대로 “김 위원장의 체중이 140㎏대 중반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와 언론의 추정에 따르면 김 위원장(이하 호칭 생략)의 체중은 지난 10여 년간 80㎏에서 140㎏까지 늘었다(그래프 참조).북한 ‘1호 사진’ 공개 건수 급증국가기관이 북한 최고지도자의 체중을 분석하고 추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 최고지도자가 유고 또는 합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면 우리 국가 안보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사자가 밝히지 않는 체중을 외부 관찰자들이 어떻게 특정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 걸까. 김 의원과 유 의원에 따르면 국정원은 안면 분석과 체중 추적 모델, 초해상도 영상 분석 기법 등으로 체중을 추정한다고 한다. 이런 분석이 가능한 것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진, 즉 김정은의 ‘1호 사진’이 과거와는 다른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쇼잉’ 좋아하는 김정은우선 북한 내부 요소로는 ‘쇼잉(showing)’을 좋아하는 김정은의 특징을 들 수 있다. 아버지 김정일 때와 달리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 북한 정권은 그야말로 ‘사진의 시대’를 맞았다. 드론을 띄워 평양 시내 모습과 그 속의 김정은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김정은의 개인 활동을 홍보하기도 한다. 북한 ‘노동신문’ 지면을 기준으로 할아버지 김일성은 1주일에 평균 1.32번, 아버지 김정일은 3.92번 등장한 데 비해, 김정은(집권한 2012년 1월 1일부터 17개월간)은 평균 7.58회 등장했다. 빈도를 분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김정은의 사진은 북한 어느 시대보다 빈번하게 노출되고 있다. 전 세계 어떤 지도자와 비교해도 공개된 사진량이 많아 보인다.디지털 사진 원본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읽으면 촬영 시간과 장소 등 메타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북한은 해상도는 높되 촬영 정보를 가릴 수 있는 PDF 파일로 김정은 사진을 공개한다. 또한 아무나 김정은을 촬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3~5명 규모의 전속 사진가 그룹만 사진을 찍도록 통제하고 있다. 다만 사진 양 자체가 많기에 김정은 동향에 관심 있는 외국 정보기관은 충분한 분석 자료를 확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의 경우 클로즈업 촬영을 허용하고 군중으로부터 지도자가 분리되는 망원렌즈 촬영도 빈번하다. 사진 분석이 이전보다 훨씬 쉬워진 것이다.두 번째 변수는 인공지능(AI)이나 빅테이터 분석 능력 등 기술 발전이다. 북한이 제공하는 고해상도 사진을 토대로 일반인 평균치를 적용해 김정은의 체중을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촬영 각도가 동일한 사진을 골라 같은 골격에 붙은 살의 부피를 비교함으로써 연도별 변화를 추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얼굴의 점과 티눈까지 그대로 보일 만큼 높은 해상도의 컬러 사진을 북한 스스로 제공하고 있어 얼굴 색깔로도 건강 상태를 유추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북한은 최고지도자의 건강 상태에 대한 힌트를 줄 수 있는 다크서클, 긁은 흔적, 티눈, 뾰루지 등을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지워서 내보내지 않는 것일까. 북한은 얼마 전 미사일 부대 간부로 추정되는 인물을 김정은 사진에서 모자이크 처리해 배포한 적이 있다. 북한 측도 ‘뽀샵’을 전혀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북한에선 사진일지라도 김정은 얼굴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당신이 평양 시내 아파트 완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의 사진을 찍는 전속 사진가라고 상상해보자. 김정은은 전날 야근하고 오늘 일정을 소화하느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등받이에 기대어 잠을 잤는지 뒤쪽 머리가 가지런하지 않고 지저분한 모습이다. 찍은 사진을 골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사에 전송해야 한다. 어쩌면 당신이 고른 사진이 AP 평양지국을 통해 전 세계로 전달될 수도 있다. 당신은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뒷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할 것인가, 아니면 찍은 사진 중에서 그나마 ‘똘똘한’ 커트를 고를 것인가. 혹시 포토샵으로 사진을 건드렸다가는 고초를 겪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을 총괄하는 누군가가 세세하게 주문하지 않는 이상 건강과 관련된 작은 힌트들은 사진에 그대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마지막으로 생각해볼 문제는 북한 정권과 최고지도자의 동향을 분석하는 근거 자료가 사진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점이다. 20여 년간 북한 언론 속 ‘1호 사진’을 관심 있게 지켜봐 온 필자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이 공식적으로 공개하는 이미지는 유용한 정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북한 전문가라면 사진 분석에 머물지 않고 휴민트(인적 정보), 텍스트, 감청 등 다른 형태의 정보를 종합해 분석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정보당국도 이미 충분히 종합적인 정보 분석을 하고 있으리라 본다. 이 같은 종합적 정보에 덧붙여 사진을 본다면 그 이면에 숨은 북한 정권의 맥락과 동기를 더 깊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북한 최고지도자의 향후 행보도 예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北 ‘야간 사진’ 공개 늘어난 배경 눈길김정은은 쇼잉을 좋아하거나, 최소한 쇼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필자가 주목하는 사진 형식 중 하나가 김정은 시대 특히 늘어난 야간 사진이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축포가 자주 등장하고, 야간 군중집회를 내려다보는 김정은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기술적으로 필요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낮이 아닌 밤에 미사일 시험발사를 하는 것도 특이해 보인다. 밤은 감성의 시간이다. 검은 배경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미사일은 보는 사람의 감정을 격하게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기억에도 오래 남고 집중하게 된다. 밤 사진이 많다는 것은 야근이 많다는 의미다. 불규칙한 수면뿐 아니라 불규칙한 식사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밤에 먹는 간식이 나이 마흔 살이 코앞인 남성의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지금 서해에서는 북한이 쏘아 올린 군사위성 발사체의 잔해를 찾고 있다. 실패한 발사 현장이라 김정은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다. 성공했다면 사진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 북한은 공식 매체를 통해 고도비만 상태인 김정은 모습을 공개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김정은 사진의 촬영과 공개에서 우연은 없다는 점이다. 1호 사진가와 그 사진의 배포를 최종 허락하는 사람들의 경력은 외부 관찰자보다 길고, 사진 선택 과정은 훨씬 전략적이라는 얘기다. 건강 정보 유출이라는 손해보다 내외부 선전 효과가 크다고 보는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를 통해 북한 사진, 특히 김정은 사진을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이 기사는 에 실렸습니다]변영욱 동아일보 사진부장 cut@donga.com}

    • 202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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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피사의 사탑…탑은 그대로인데 사진의 주인이 바뀌었다[청계천 옆 사진관]

    ▶100년 전 신문에서 피사의 사탑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세계 7대 경이로운 문화재’를 연속으로 소개하는 연재물 두 번째 기획기사에 소개된 사진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그냥 ‘사탑(斜塔)이라고 부르는데 그 시대에는 기울어졌다고 해서 ‘피사의 경사탑’이라고 표현했었네요. 문득 저 피사의 사탑 사진은 누가 찍었을까 생각해봤습니다.▶1923년 신문에 실린 피사의 사탑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오늘날과 달리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대였는지, 사진의 출처와 주인에 대한 표기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 사진을 찍기 위해 서울에서 사진기자가 이탈리아 현지로 출장을 가진 않았을 겁니다. 저 사진의 주인은 일반 시민이라기 보다는 사진 전문가가 찍었을 겁니다. 카메라가 비싼 물건이라 대중화 되기 이전이었으니까요. 카카오톡으로 챗GPT에게 “1923년 세계 인구가 얼마나 됐어요?”라고 물어봤습니다. “1923년 세계 인구는 약 1.93억 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근사치일 뿐이며, 과거의 인구 수는 정확한 데이터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는 추정치에 불과합니다”라고 답변을 해주네요. “그러면 그 당시 인구 중에 카메라를 소유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라고 다시 질문을 하니 “1923년에는 카메라를 소유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카메라는 고가의 럭셔리 제품으로,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계 인구 대비 카메라 보급율은 현재와 비교할 때 매우 낮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라고 답을 줍니다. ▶ 만약, 우리가 오늘 인터넷으로 ‘피사의 사탑’을 검색해서 이미지를 확인한다고 했을 때 나오는 사진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인공지능(AI)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피사의 사탑’ 사진이 인터넷에 떠 있습니다. 하나의 실물인 ‘피사의 사탑’이 무한 숫자의 사진으로 기록되어 떠돌아다니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지가 흔해지고, 사람과 사람의 소통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체로 이용된다고 해서 지금을 사진의 시대, 영상의 시대라고 표현하는 거 같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인류들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세계 각국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거나 표현하고 있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전문가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신문사 기자들만이 신기한 것을 찍어서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시대 말입니다. 지금은 사진의 주인이 무한 확장되는 시대입니다. 더 이상 권위적인 소스(source)에 의해서만 현실이 이미지로 재현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신문 제작과정에서 각자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의미로 “Post-protocol era”(Costas M. Constantinou, 2018)라는 표현을 쓰는 학자도 있습니다. ▶사진기자가 사건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도 아닙니다. 작년인가요,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는 사람들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활주로를 이륙하려는 군용 비행기에 올라타서라도 탈출하려는 절박한 사람들의 모습과, 이륙한 비행기에서 바닥으로 사람이 떨어지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충격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찍은 사람은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자도 현장에 없었지만 그 현장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그리고 아마 역사에서 한번 언급되지 않았던 아프가니스탄인이 SNS에 올린 동영상에서 결정적 장면을 기자들이 정지화면으로 캡쳐했습니다. 100년 전 피사의 사탑 사진처럼 사진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모르는 시대가 된 걸까요?▶여기서 쓸데없는 고민 한 가지를 해봅니다. 그럼 사진기자의 존재 이유는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건을 기록하고, 심지어 AI가 이미지를 생성해 주는 시대에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기자의 역할이 있을까요?역설적으로 SNS와 AI 시대에는 전문가 그룹으로서의 사진기자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신뢰성 높은 이미지를 제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의 오보는 그야말로 회사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힙니다. 사진이 계속 들어가야 하는 시대, 매번 포스팅에 들어갈 사진을 검증해야 한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이 찍은 사진이 확실하다고 할 때 그걸 프린트하거나 포스팅하는 게 전혀 두렵거나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게 사진기자의 존재 이유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요. ▶ 피사의 사탑은 어쩌면 그대로인데, 피사의 사탑 사진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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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은 곳에 올라가 찍는 사진 vs 눈앞에서 찍는 사진[청계천 옆 사진관]

    ▶백년 전 이번 주 7일치 신문에는 하루 1장 정도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 중 고른 사진은 1923년 6월 2일자 신문에 실린 학교 개교 기념식 사진입니다. 기사 본문의 잉크가 번져 pdf 파일 판독이 잘 안되는데다 사진과 직접 관계가 없는 행사에 대한 묘사가 많아 기사 전체를 여기에 옮기지는 않으려 합니다. 우선 사진과 함께 게재된 기사 본문을 보겠습니다.▶이화(梨花)냐 백합(白合)이냐 -깨끗하게 단장한 삼백의 학생 이번 놀이의 중심되는 정원극시내 정동 리화학당에서는 예보와 같이 재작 삼십일일 오후 4시부터 녹음이 우거진 동교 앞뜰 잔디밭에서 성대한 개교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정각전부터 모여든 내빈과 학부형은 거의 몇(?)백 여명에 이르러 입장을 사절하는 사정에까지 이르렀다. 내빈석에는 다수한 외국인과…. 곱게 차린 삼백 여명 학생은 만면에 기쁜 빛을 띄운 ‘아편설라’ 교장의 지도하에 입장식을 마치고 뒤를 이어 유치원 아해들의 단심주라는 유희와….만장의 박수 소리는 맑게 개인 하늘에 울려 넘치는 중에 순서는 차차 전개되어 보통과 3학년의 유희 체조 고등과 학생들의 세련받은 기계체조 보통과 아해들의 우승꺼리 체조가 있은 후 비로소 리화학당의 한자랑꺼리이며 조선에 하나이라 할만한 리화학당합창대의 고은 노래가 울려나왔다….▶지금도 서울 시내 명문여고로 명성 높은 이화학당의 개교 기념식을 촬영한 사진이네요. 5월 31일 오후 4시 이화학당의 잔디밭에서 수백 명의 내빈, 학부형,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 기념식이 열렸는데 행사장이 인파를 감당하지 못해 일부 학부형은 교내로 들어오지 못하기 까지 했다는 내용입니다. 사진의 오른쪽에 학부형들이 있고 가운데 계단을 내려온 왼쪽 아래쪽에 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왼쪽 위쪽 그러니까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한 곳에 교장선생님과 내빈들이 앉아 있을 겁니다. ▶머리를 길게 길러 땋은 여학생의 뒷모습이 이채롭습니다. 교복이라는 같은 복장을 하고 헤어스타일도 같은 모양을 한 일련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진찍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규칙이 있는 패턴을 좋아합니다. 화면이 정리되어 깔끔하게 표현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 사진의 특징은 행사가 열리는 잔디밭이라고 하는 지표면에 카메라가 있지 않고 건물이나 나무 위에 위치해 있다는 점입니다. 즉, 눈높이(eye-level)이 아니라 내려보기(high-level) 지점에서 촬영된 사진인 것이죠.▶ 피사체의 눈높이에서 찍으면 지금처럼 학생들 행렬의 뒤쪽에서 촬영하는 것 보다는 정면에서 표정을 찍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면, 당시의 독자들과 지금의 우리들은 저 현장에 있는 그당시 어린 여학생들 몇 명의 얼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겠지만, 사진기자는 얼굴 대신 행사의 전체 모습과 정리된 ‘패턴’을 택했습니다. ▶ 높은 곳에서 전체를 보여주면서 정리정돈된 행렬을 보여주는 사진은 한국 신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진입니다. 지금이야 어떤 행사나 인파가 모인 현장을 보여주는 뉴스를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앵글을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신문에 딱 1장 또는 2장의 사진을 게재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주로 전체를 다 보여주는 사진을 게재했고, 사진기자들도 그런 종류의 사진을 주로 촬영했습니다. 옛날 사진기자들이 다양하게 찍었을 수도 있습니다. 신문에 실린 사진 말고도 다양한 앵글로 현장을 기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들이 전경 스타일이 많다는 것은 사진기자들도 거기에 적응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찍어와 봐야 안 쓰니까 쓸 사진만 찍게 되었을 거라는 추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할까요? 한국 사진기자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걸 선호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진을 한국 기자들은 못찍었던 대표 사례가 있습니다. 영화 ‘1987’에서도 묘사된 고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아시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군사독재에 항거해 시위하던 연세대학교 학생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 말입니다. 이 사진을 제대로 찍은 사진기자는 정태원이라고 하는 로이터 통신 소속 사진기자였습니다. 쓰러지는 이한열 열사를 눈앞에서 찍은 유일한 기자였습니다. 현장에 있던 수십 명의 한국 신문사 소속 사진기자들은 연세대 정문을 조망할 수 있는 철길 위에 있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경찰과 시위대를 한 앵글에 넣고 촬영하고 있었던 거죠. 위에서 찍으면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찍힐 수 있습니다. 사건의 전체를 보여주는 촬영방식입니다. ▶한국 사진기자들이 시위 현장을 멀리 위에서 본 것은 시위현장의 돌멩이나 경찰의 곤봉이 무서워서가 아닐 겁니다. 그게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밑에서 찍으면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경찰의 곤봉을 맞아 피를 흘리는 학생이거나 학생의 쇠파이프를 피하며 공포스러워 하는 경찰의 모습 둘 중 하나를 말입니다. 경찰의 배치 상태 그리고 학생들의 규모를 사진 한 장으로 다 보여주는 것이 그나마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진이라고 판단했을 겁니다(물론 그런 보도 사진도 편향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 멀리서 찍는 전경 스타일의 사진이 정답이냐, 아니면 현장의 가장 다이내믹한 표정을 포착해 보여주는 사진이 정답이냐 하는 논쟁은 사진기자와 신문사 내부에서 수십 년째 이어지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클로즈업을 한다는 것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따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 디자인의 트렌드를 미니멀리즘, 단순화라고 볼 때 한국 사진이 세계 트렌드를 못 쫓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100년 전 신문에 실린 ‘질서 정연한 사진’에서 우리 신문 사진의 전통적인 형식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습니다.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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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얼짱 각도는 오른 뺨일까, 왼 뺨일까?[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한번 되돌아보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기 위해 지난 세기의 낡은 이미지를 발굴해 보고자 시작했습니다. 가능한 1주일에 한번씩 토요일에 포스팅하려 하고 있습니다. ▶ 100년 전 이번 주, 동아일보 사진부는 거의 개점휴업 상태였었네요. 지면 PDF를 아무리 뒤져봐도 눈에 띄는 사진이 없습니다. 인물 사진 3장 이외에 스케치성 사진 2장이 1주일 치 신문에 실린 사진의 전부였습니다. 사진이 뉴스를 시각화해서 독자에게 보여주고, 시선을 끌기 위한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인식이 별로 없었을테고, 또 인쇄 기술의 한계 때문에 지면에서는 아주 빈약한 위치였다는 걸 잘 보여주는 한 주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문에 게재되었던 3장의 인물 사진도 어쩌면 대단히 어려운 과정을 통해 촬영되거나 입수되어 인쇄되었을 거 같긴 합니다. 신문에 얼굴 사진이 실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한 뉴스 인물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구요. 오늘은 인물 사진 3장을 골랐습니다. 5월 23일자에 실린 사진을 보면 ‘새로 귀국한 허성씨’라고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체육을 연구하고 10년 만에 귀국했다는 기사내용이 있습니다. 좌측 얼굴 아래쪽에 카메라를 설치해 약간 우러러보는 느낌으로 촬영되었습니다. ▶5월 24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은 “영국의 새 수상으로 임명된 볼드원씨”라는 설명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923년 5월 23일부터 수상에 취임했고 이후에도, 두 번 또 총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저 멀리 영국에서 어제 발생한 뉴스의 인물 사진을 바로 다음 날 한국의 신문에 게재했다는 사실이 좀 놀랍습니다. 다만, 카메라가 피사체보다 높은 곳에서 ‘찍어 누르듯’ 촬영되어 권위적인 느낌보다는 오히려 왜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외국인이지만 중년의 남성이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어 부드러운 느낌은 아닙니다. ▶ 5월 24일자에 실린 ‘바이올린의 세계적 명수 크라이슬러’씨 사진은 앞의 두 사진과 달리 주인공의 직업을 보여주는 소품이 손에 들려 있습니다. 내한 공연을 한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를 소개하는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입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뉴스 인물을 표현할 때 악기를 비롯해 직업을 보여주는 소품이나 배경을 사진에 함께 넣고 찍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인물 사진을 ‘environmental portrait’라고 하고, 배경이나 소품없이 얼굴만 표현하는 인물 사진을 ‘mug shot‘이라고 합니다. ▶신문사 사진기자들은 불이 나거나, 열차가 탈선하거나, 정치인들이 싸우거나, 천연기념물이 발견되는 등 굵직한 사건사고를 찍으러 다닌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를 하려고 입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막상 하루 일정을 보면, 가장 많이 찍는 사진이 인물 사진입니다. 아마 사진기자 일의 50% 이상이 인물 사진 찍는 일일 겁니다. 그리고 일정이 많다보니 한 사람을 찍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간단한 인사말과 소소한 이야기로 어색한 분위기를 아이스브레이킹하고 사진을 찍기 때문에, 사진기자를 만난 사람들이 사진기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물론, 요즘은 인터넷으로 뉴스 인물과 그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지속해서 확인되기 때문에 사진기자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아지고는 있습니다. ▶ 인물 사진 얘기를 한 김에, 제가 예전에 어디선가 갈무리해놨던 노하우를 여러분과 공유하고자 합니다. 1. 사진에서 자신의 모습이 잘 나오게 하려면 3가지를 명심하라고 말했다. 정면을 보지 말고 비스듬히 포즈를 취하며, 턱을 내리고, 미소를 짓는 것이다(맨즈 헬스 잡지의 전속 모델 앤디 스피어).2. 카메라를 바로 앞에 대고 찍으면 얼굴의 특징이 왜곡될 수 있다. 2m 거리에서 찍으면 얼굴이 평평하고, 20㎝ 안의 거리로 바짝 대고 찍으면 코가 너무 커보이므로 40㎝에서 85㎝ 거리에서 찍으면 자연스러운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준다(영국 요크대학 심리학 교수 대니얼 베이커 박사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3. 우리나라 사람들은 왼쪽 뺨이 오른쪽 뺨을 찍은 사진보다 자연스럽고 자기를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초상화도 그렇다. 1천원, 5천원, 1만원 짜리 지폐에 그려진 이황 이이 세종대왕의 초상화는 왼쪽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보면 된다. 왜 왼쪽일까? 왼쪽 얼굴에 사람의 인상이 더 잘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의 뇌는 우뇌와 좌뇌로 이뤄지는데 우뇌는 감정 표현을, 좌뇌는 논리적 표현을 담당한다. 우뇌가 발달한 사람은 음악이나 미술을, 좌뇌가 발달한 사람은 수학이나 과학을 잘한다. 우뇌는 사람의 신체 왼쪽을, 좌뇌는 사람의 신체 오른쪽을 관장하는데 감정 표현이 풍부한 우뇌를 담당하는 왼쪽 얼굴의 인상이 훨씬 좋다.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 위의 몇 가지 팁처럼 도식화해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심리학의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공유해봤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 실린 3명의 인물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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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망원렌즈가 없던 시절, 야구 경기 장면을 어떻게 사진 찍었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 백 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한번 되돌아보고 K-이미지(한국의 사진)의 원형을 찾아 가보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고등학교 야구 대회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지난주 광화문에 있는 신문박물관에서 신문편집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고 해서 오랜 만에 가봤는데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전시물과 안내문이 보였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나 봅니다. 하나는 지난 주 토요일 [백년 사진 No. 18]에서 소개했던, ‘1천 명 어린이 얼굴 콜라주’ 지면이 예전부터 전시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고,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신문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진을 처리해 지면에 게재할 수 있는 ‘제판 기술’이 그 때부터 발달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백 년 전 인 1923년 신문의 pdf 파일을 전체 다 둘러봐도 1주일 치 신문에 실리는 사진의 개수는 총 10장을 넘지 않습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이번 주에 고른 신문 사진은 ‘야구 경기’ 모습입니다. 제가 속해 있는 동아일보사에서 지금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대회를 진행하고 있다고 해서 고른 사진은 아닙니다. 요행히 겹쳤습니다. 100년 전에도 이 맘 때 고교 야구 토너먼트가 있었다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목동야구장과 신월 야구장에서 이번 주 전국에서 모인 고등학교 야구팀들이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며 승부를 겨루고 있습니다. 저의 고교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는 1947년부터 동아일보사 주최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00년 전 고교 야구 경기 사진은 어떤 모습일까요? 카메라맨들은 선수들에게 얼마만큼 접근할 수 있었을까요? 기사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 (제가 읽기 쉽게 한자는 한글로, 옛날 말은 오늘 말로 최대한 고친 내용의 기사입니다)[제 4회 전(全) 조선 야구대회 제 2일오전 11시부터 두 시간 동안 배재와 휘문 간의 격렬한 싸움4대 0으로 휘문 대승]제 4회 전 조선 야구대회의 둘째 날인 작일 오전 11시부터 학생 예선전을 개시하였는데 벽두에 작년 우승단인 배재군(培材軍)과 강팀으로 이름이 있는 휘문군의 싸움이 열리게 되매, 두 학교에서는 각각 천여명의 학생을 전부 출장 응원케하여 기술의 정보다도 의기의 경정이 더욱 격렬하게 되었다. 전의용씨 심판 하에 배재 선공으로 개전이나 양편 응원군의 함성은 장내를 흔드는 듯하였으며 이번 싸움이 비록 학생단의 제 1회 예선전이나 관중은 임의 결승전과 같이 긴장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일회에 배재는 소득이 없고 휘문은 한점을 얻으니 원래 휘문은 작년에 분패한 복수전이라 더욱 힘을 다하여 싸운 결과 7회 초에 넉 점 알파 대령점으로 휘문이 대승하니 복수전에 성공한 군사들은 물론이고, 천여명 응원군의 광희하는 양은 실로 장관이었다.▶ 휘문고등학교와 배재고등학교는 100년 전에도 야구부가 있었군요. 바로 전년도에 배재고가 이겼는데 이 해에는 휘문이 크게 이겼네요. 고등학교 야구부의 대결인데 군대라는 표현을 쓴 점이 눈에 띕니다. 배재군(軍) vs 휘문군. 응원단도 응원군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수전에 성공한 군사들은 물론이고 응원군의 환호하는 모습도 장관이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동아일보는 지금은 황금사자기 전국 고교 야구를 합니다. 제가 다닌 고등학교도 이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입시를 앞둔 고 3 수험생이었지만, 지하철을 타고 전교생 전체와 함께 동대문야구장으로 응원을 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평일 일과 시간인데 동문 선배들 10여 명이 외야석에서 응원을 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었습니다. 학교의 이름과 깃발을 걸고 우승을 다투는 스포츠경기는 언제나 동문들에겐 가슴 떨리는 경험인 것 같습니다. 사진에는 표현되지 않지만 응원 온 학생과 시민들이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백 년 전에 천여 명의 관중이 경기를 관람했다고 하니 엄청난 이벤트였음에 틀림없습니다. ▶ 총 3장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위의 두 장은 관중석 모습이고 아래 동그랗게 오려서 편집한 사진이 경기 모습입니다. 경기 모습 설명을 보면, “구름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빼스(베이스)를 훔치는 광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자가 홈스틸 하는 것을 지금도 베이스를 훔친다고 표현하는데 거의 비슷하네요. 사진의 내용도 지금의 사진과 비슷합니다. 야구 경기를 신문에서 뉴스를 다룰 때 가장 많이 쓰는 장면이 ‘도루’ 장면입니다. 타자나 투수 등 그날의 MVP 선수의 경기 모습을 쓸 수도 있지만, 한 장의 사진만 쓰게 되는 신문 지면의 특성상 ‘외로워 보이거나’ ‘맥락이 없어 보이는’ 사진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도루 장면은 주자와 수비수 등 최소 2명이 부딪히는 장면이라 신문 편집자와 사진기자들이 선호하는 편입니다. 플레이트를 밟으려는 선수와 태그하는 선수의 경쟁이 보이는 순간이 뉴스 사진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걸 겁니다. 가끔 심판 모습 또는 타석의 선수까지 포함되면 경기 분위기를 훨씬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은 경기 중에 그라운드 안에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덕 아웃 또는 심판 쪽 그물 뒤에서 망원렌즈를 이용해 야구 사진을 찍습니다. 1920년대 망원렌즈가 없던 시절, 홈스틸 사진은 어떻게 찍었을까요? 망원렌즈도 없었지만 사진기자도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사진기자들이 경기장 안에 들어가서 심판 옆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 관행은 1970년대 사진기자들이 현장을 뛰던 시절까지 이어졌다고 선배들에게 들었습니다. 백 년 전 먼지를 일으키며 홈으로 쇄도하는 학생 선수의 모습 역시 심판 바로 옆에 서 있었던 사진기자에 의해 포착되었을 겁니다. ▶백 년 전 야구장 사진을 함께 봤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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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오뚜기 가족요리 페스티벌

    가정의 달을 맞아 (주)오뚜기가 13일 과천 서울랜드 피크닉장에서  ‘스위트홈 제 26회 오뚜기 가족요리 페스티벌’을 열었다. 총 3천 여 가족, 약 1만2천여 명이 참가해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등 요리 경연을 펼쳤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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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사로 들어온 사진은 돌려 드리지 않습니다 - 어린이 1000명 얼굴 사진 모으기 프로젝트[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이미지의 원형 모습을 찾아가보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좀 특별한 사진을 하나 골랐습니다. 소위 콤보(combo) 사진, 조(組)사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23년 5월 7일자 동아일보에 흥미로운 안내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어린이 사진을 구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기사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본지 1천호 기념호에 게재코자 – 아동 1천명의 사진을 모집돈 들지 않고… 재미있는 계획… 영구한 기념>오는 25일에 발행되는 동아일보는 제 일천호가 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야 ‘일천호 기념호’를 발행하기로 방금 준비중인데 이 기념호를 장식하며 겸하여 독자여러분의 가정에 한 즐거움을 돕고자 우리 동아일보 독자의 가정에 길리우는 어린이의 사진을 일천명위한 하고 널리 모아서 당일 발행하는 신문지에 게재하는 것은 다만 일시에 자미가 있을 뿐 아니라 후일에 또한 영구히 좋은 기념이 될것이니 다수히 사진을 보내여서 흥미있는 이 계획을 원조하야 주시기를 바랍니다. 1. 보내실 아이의 사진은 아무쪼록 12~13세 이내 되는 것이 좋으며1. 사진은 어떠한 종류이든지 무방하며, 여럿이 박힌 것이라도 관계치 않고, 1. 보내는 방법은 2전 짜리 우표를 붙이고 반드시 [경성 화동 동아일보사 사진부행]이라고 피봉에 해자로 기록하여야 하며1. 금월 십오일까지 도달하도록 보내시되 기한 전이라도 일천명이 되면 소용이 없을 터이니 아무쪼록 초생안으로 속히 보내시는 것이 좋으며1.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는 데는 한푼도 돈은 받지 아니하며 보내신 사진은 다시 보내 드리지 않습니다. ▶ 동아일보가 창간된 게 1920년 4월 1일이었고 1923년 5월 23일에 천 번째 신문을 만들게 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천 명의 어린이 얼굴 사진을 지면에 싣겠다는 안내 기사입니다. 단순한 재미를 뛰어넘어, 영원히 기록되는 프로젝트이니 많은 참여 바란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13세 미만의 어린이 얼굴이면 좋겠고, 독사진도 좋고 단체 사진도 좋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5월 15일까지 동아일보 사진부로 우편 발송하되 천 명이 확보되면 먼저 도착한 사진으로 작업을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또한 신문사로 온 사진은 되돌려주지 않겠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아진 천 명의 어린이 얼굴은 정말 신문 지면에 실릴 수 있었을까요? 말이 천 명이지, 당시의 기술로 그 많은 얼굴을 조합해서 지면에 프린트 할 수 있었을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안내 기사에서 약속했던 1923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확인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지면에 대략 천 명의 얼굴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각각 작지 않은 크기의 얼굴이어서 본인과 가족들은 다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해상도입니다. 1923년에 10대였던 이들은 30대 중반에 해방과 한국 전쟁을 겪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겠죠. ▶ 사진기자 하면서 마음에 걸렸던 숙제 2가지가 있었는데, 모두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부담이 덜어졌습니다. 첫째, 필름을 사용하던 2000년 대 초반까지 화학작업 과정에서 나오는 오염물질 문제였습니다. 촬영한 필름을 사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상과 인화라는 화학 처리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폐수가 나왔습니다. 폐수에 포함된 은을 추출해서 수익을 발생시킨다는 폐기물 업체에서 걷어 갈 수 있도록 사무실에 드럼통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무실에서 폐수가 하나도 안나온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직원들 호흡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하수도로 조금씩은 흘러가기도 해서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런 과정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즈음 신문사에서 필름이 사라지고 디지털 카메라로 세대교체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두 번째 마음에 걸렸던 문제가, 사진을 돌려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었습니다. 신문에 쓰기 위해 제보자 또는 뉴스인물로부터 사진을 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습니다. 사진부 기자와 사회부 기자가 구해 온 사진은 편집기자에게, 이미지 리터치 팀원에게 그리고 데이터베이스 팀원으로 연속해서 전달됩니다. 사진기자인 제 손으로 다시 돌아와 사진 주인에게 돌려주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고, 어느 프로세스에서 사라졌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사진의 원본을 신문사가 가져다 지면을 만드는 부담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100년 전, 천명의 어린이 사진을 구하면서 돌려줄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을 보며 제가 놓쳤던 몇 번의 숙제가 다시 떠오릅니다. 완벽하게 반환되지 않았을 자료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백년 후의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천 명의 어린이 사진에서 여러분은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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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 초상권은 어떻게 허락 받아야할까[청계천 옆 사진관]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으로 요즘 사진에 대해 생각해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봐왔던 이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이미지의 원형 모습을 찾아가보는 코너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어린이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22년입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23년 5월 1일에 소파 방정환 선생과 소년운동협회가 ‘어린이 해방 선언’을 하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올해 2023년 5월 1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어린이 해방 선언’ 100주년 행사가 열렸습니다. 제가 속해 있는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들도 행사를 촬영해 5월 2일자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어린이 해방 선언’이라는 역사가 수미쌍관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니 뭔가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기사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5월1일’의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야 소년운동협회의 주최로 시내 3군데에서 열린 연설회와 연예회의 광경은 어떠하였는가. 연설이나 연예나 모두 ‘우리의 가시밭에서 길리어 오든 어린이를 해방하라’하는 소년운동의 처음일임으로 그 주장이 정당하고 그 계획이 새로운 것만큼 일반의 환영을 받아서 예상이상의 성화를 이루었다더라. ▶사진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편집되어 지면에 배치되어 있네요. 연단 아래 청중의 모습 사진과 함께 한 여성이 어린이 대표로부터 선언문을 받는 장면, 이렇게 두 장의 사진이 함께 게재되어 있습니다. ▶신문에 어린이의 얼굴을 게재하는 것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2009년 경험 이후 특히 어린이 사진에 대해 조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프랑스 마을’이 있습니다. 그 전까지 몇 년 동안 프랑스 국적의 어린이들과 마을주민 100여명이 어울려 한국 전통 추석 문화를 체험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한복을 입은 프랑스 국적의 어린이들이 송편빚기, 윷놀이, 제기차기, 떡메치기 등을 직접 체험합니다. 당시 구청에서 보도자료를 언론사로 보냈고, ‘볼거리’이기도 하고 ‘사진거리’기도 해서 사진을 찍으러 갔습니다. 몇 년째 당연하게 사진 찍고 지면에 사진을 게재하던 행사였는데 그 해에는 어떤 프랑스인 부모가 문제 제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이 한국 문화 체험 행사를 하는 것과, 얼굴이 신문방송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취지였습니다. 그 때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내린 결론은, “어린이들의 초상권이 확보되지 않았고, 미성년자이므로 집에 있는 보호자들의 촬영 허락을 받아야 보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함부로 어린이들의 얼굴을 신문에 낼 수 없으며, 필요할 경우 미성년자인 어린이에게 허락 받는 게 아니라 보호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 설령 부모가 허락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성인이 된 어린이 본인이 다른 판단을 하는 경우 잊혀질 권리 또는 초상 사용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례는 아니지만 2021년 8월 미국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알몸 사진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록그룹 너바나(Nirvana)의 ‘네버마인드(Nevermind)’ 앨범 표지 사진에서 알몸으로 수영을 하는 스펜서 엘든씨가 자신의 동의 없이 앨범 표지 사진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엘든씨 부모가 촬영 당시 촬영의 댓가로 돈을 받았다는 점과, 엘든씨 본인이 그동안 스스로 이 사진을 자랑삼아 이야기했었다는 점 때문에 기각 판결을 받았지만, 부모가 아이의 초상권에 대해 권한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린이 사진이 많은 편입니다. 현실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상징하기 때문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할 뿐 정답은 없습니다. 외국 정상이 한국을 방문할 때 서울 시내의 초등학생 수십 명이 거리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꽃다발을 주는 장면을 우리는 어색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외국 신문에서도 어린이가 등장하는 사진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정치와 외교 현장에 어린이가 많이 출현하지는 않는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나마 시위 현장에서 구호가 쓰인 피켓을 들고 있는 어린이 사진은 가능한 한 피하자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어린이의 정치적 입장과 부모의 정치적 입장이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고 시위 현장에서 생길 수도 있는 안전문제 때문입니다. ▶정치와 사회 이슈 현장에 등장하는 어린이 모습 이외에 주의가 필요한 것이 SNS입니다. 올해 어린이날인 5일 보건복지부 산하 아동권리보장원은 온라인 콘텐츠 속 아동권리 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했습니다. 골자를 보면, 아동·청소년 출연자의 주체적 사고를 인정하고 의견을 존중한다, 제작자는 아동·청소년과 그 보호자에게 촬영과 출연으로 발생할 수 있는 초상권과 정서 문제 등 위험요소를 충분히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하며 구체 내용과 범위, 기간 등을 계약서에 명시해야 한다, 성적 유희 대상으로 묘사하거나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정도로 신체를 노출하는 행위는 안된다 등입니다. ▶어린이 사진에 대해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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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경궁 꽃 사진-신문 사진에 사람이 꼭 들어가는 이유 [청계천 옆 사진관]

    ▶ 나뭇가지 10여 개에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그 아래 봄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1923년 4월 28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꽃의 모양은 벚꽃 같은데 설명에는 정확한 표현이 없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사진의 원본을 확대해보면 좀 더 분명하게 꽃의 종류를 알 수 있을 텐데 사진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신문 지면만 존재하니 설명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백년 사진’을 연재하면서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100년 전 사진을 소개하면서 신문 지면에 실린 사진만 보여 드리고, 원본 사진을 못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원본 사진을 구할 수 없는 이유는, 한국 전쟁 때문입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 때 서울에 있던 신문사 본사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윤전기와 자료는 거의 서울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신문사는 북한군의 타겟이 되었고, 자료는 모두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이 가정과 관청에 배달된 신문이 있어서 신문사 직원 또는 독자에 의해 모두 수집 정리되어 1920년 창간호부터 현재까지 모두 디지털 파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주 소개할 사진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식민지를 해방하라’는 일본 도쿄 노동절 행사 기사 옆에 창경원 봄꽃 사진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다분히 의도를 가진 편집으로 보입니다. 빼앗긴 고궁에 봄소식이 왔다는 편집자의 애상(哀傷)이 느껴집니다. 이런 정치적인 해석 말고 오늘 생각해 본 얘기꺼리는 ‘왜 신문 사진에는 꼭 사람이 들어갈까?’입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봄꽃 아래 사람이 있기 때문에 찍은 게 아니라 봄꽃 옆에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서 찍었거나 사람이 있는 가지를 찾아서 찍었을 겁니다.  정답은 아니지만 신문에 실리는 사진에는 거의 모든 경우, 사람이 들어가 있습니다. 물론 예외가 있지만, 기본은 그렇다는 뜻입니다. 작품 활동을 하는 사진작가의 경우 사람을 빼고 사진 찍는 경우가 흔하지만 신문에 사진을 게재하는 사진기자들은 유별나게 사진을 찍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찍을 때도, 안내문을 소개할 때도, 기념주화가 출시되었다는 것을 알릴 때도 배경 또는 주변에 사람이라는 소재가 포함되게 찍습니다. ▶사진기자들은 자기가 찍어 온 사진을 마감했을 때 동료나 선배가 ‘작가냐?’라고 물으면  긴장합니다.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주로 달력에 나오는 사진처럼 풍경 그 자체만을 찍어 왔을 때 그런 반응이 많습니다. 제가 사진기자 생활을 시작했던 25년 전에는 분명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신문 사진의 기본에는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고 도제식으로  배웠습니다. ‘왜 작가들은 그냥 꽃만 찍기도 하는데 사진기자들을 사람을 넣어야 하는 걸라고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진가는 현장에 있기 때문에 사진의 소재인 건물이나 풍경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그 크기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사무실이나 집에서 보고 있는 독자들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 소재가 미니어쳐 일지도 모른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우리에게 익숙한 사람의 신체 크기와 대비해 피사체의 크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진의 진실성을 강화시켜주는 요소로 사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3D나 일러스트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그린 가상의 건물 투시도와 사진을 확실하게 구분시키는 요소가 사람이기도 합니다.▶그 다음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면 환경과 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들어간 풍경사진과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은 풍경 사진을 생각해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잘 설명하는 책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오정호 교수가 기획해 펴낸 [대중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입니다. 2015년 7월 일본 나가사키 앞 하시마(군함도)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강제노역과 무자비한 폭력이 이뤄진 공간이어서 우리 정부는 하시마의 등재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일본 근대화 산업기지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이유로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지하탄광에서 강제노역으로 죽은 일본과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 역사에서 빠진 것이죠.  “많은 억울한 영혼이 떠도는 공간이지만 인터넷상에서 존재하는 하시마의 이미지들은 폐허의 공간이 지니는 아름다움과 공포의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군함도 사진에는 사람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사람이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이런 숭고미가 가미된 이미지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도 빨리 전달된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가’라는 간단한 질문에서 이곳에 관광 오고 싶다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하시마가 강제노력의 지옥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뒤로 밀린다. ”(오정호, [대중유혹의 기술] 179쪽)▶ 만약 창경원 봄꽃 사진에서 사진 아래 흰 한복을 입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없다면 그냥 아름다운 꽃 사진으로 100년 후의 독자인 저도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지만 예닐곱의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함께 보임으로써, 당시의 일상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들이 겪었을 봄의 환희와 함께, 누군가에 의해 새로운 질서를 강요받고 불안해했던 식민시대의 아픔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신문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는 거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편안한 주말되세요.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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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에 딸린 기자의 이름 그리고 보상[청계천 옆 사진관]

    ▶ 요즘 신문에 실리는 기사나 사진에는 기자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바이라인(by-line) 또는 크레디트(credit)라고 합니다. 김규회·이재근의 책 《신문과 저작권》(서울: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저작권 위원회)에 따르면 “‘OOO 기자’라고 표시한 것은 기자가 업무상 작성한 것으로서, 그 자료의 출처와 신빙성 그리고 작성자의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업무분담 표시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는 기자의 이름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기사가 나열되고 사진이 실릴 뿐, 누가 기사를 썼는지 누가 찍은 사진인지 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기사와 사진에는 기자의 이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경상북도 포항에서 배 한 척이 전복되어 어부 한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파도에 찢겨진 배가 강가에 뒤집힌 채로 서 있습니다. 1923년 4월 21일자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포항에 우 복천선-19일 오전 풍랑으로 인하야 한 명이 빠져 죽고 다섯명 구원. 포항에서 특파원 설의식 발전>19일 오전 10시20분경에 포항면 학산동에 있는 대전조의 어부 5명과 그 동리 38번지 신상룡이가 종선을 타고 학산동으로부터 향도로 향하여 형산강의 어구를 건너갈 때에 풍랑이 심하여 배가 엎어져서 대전조의 5명은 구조되고 신상룡은 헤엄을 칠 줄 모름으로 마침내 빠져죽었는데 이 급보를 접한 경찰대는 수 척의 배를 타고 그물질을 하여 시체를 수색 중이나 아직 발견되지 못하였고 신상룡의 부모형제는 강변에 모여서 미칠 듯이 야단을 치는 광경은 이루 형언할 수 없으며 강물은 비로인하여 사오척이나 늘었고 폭풍으로 인하여 물살은 보통 때보다 석자나 높은데 형산강은 깊이가 삼십척 넓이가 삼십간 가량의 적은 강 이더라(19일 오후 포항에서 특파원 설의식 특전) ▶ 기사의 제목에서 특파원이 기사를 보냈다며 이름을 언급했는데 기사 끝 부분에서도 또 특파원의 이름을 표기했다는 점입니다. ‘발전’ 또는 ‘특전’ 모두 기사 또는 사진을 멀리서 서울로 보냈다는 표현입니다. 6명의 어부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 전복했는데 5명은 경찰에 의해 구조되고 1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인데, 당시로서는 아주 큰 뉴스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너무 크게 다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옆의 기사를 읽어보니 사진이 찍힌 19일 이전인 4월 15일에 포항에는 폭풍우로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해변가에 즐비한 시체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기자가 급히 내려간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대참사 현장 사진이 아닌 다른 사고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스 밸류는 며칠 전 일어난 대참사가 크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포항에서 일어난 재난이라 기자들이 사건 발생 시점에 도착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고 게다가 현장이 육지에서 떨어진 바다 한 복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다른 배가 육지 가까이서 난파되어 카메라로 기록할 수 있게 되어 신문에 실린 것으로 이해됩니다. 비록 대참사 현장을 기록한 사진은 아니지만, 이틀 전 발생한 사건을 48시간이 되지 않은 시간에 취재하고 사진촬영까지 해 지면에 실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지금의 기준 말고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로서는 대단히 많은 역량을 투입해 뉴스를 수집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한 것입니다. 교통편이 좋지도 않았던 시절, 서울에서 포항까지 기자들이 내려가 사진까지 서울로 올려 보냈다는 점에 주목해 볼 만합니다. 지금이야 사진을 찍는 순간 서울 본사에 있는 편집자들이 사진을 받아볼 수 있고, 바로 인터넷에 띄울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아주 힘든 과정이었을 겁니다. 사진 전송기가 있었을 리는 없으니 인편 또는 차편으로 서울로 필름을 올려보내 현상하고, 인화한 후에야 신문에 프린트할 수 있었을 겁니다. 19일에 일어난 일을 21일자 신문에 사진으로 실었다는 건 굉장히 빠르게 보도한 것이고 그만큼 현장에 대한 신문사 내부와 국민들의 관심이 높았다는 뜻일 겁니다. ▶100년 전 포항 사고 현장을 맡았던 기자는 누구일까요? 현장 취재를 맡은 기자의 이름은 설의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아일보 사사를 살펴보니 설의식 기자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편집주간을 지낸 소오 설의식은 1922년 동아일보에 입사, 일장기 말소사건과 1940년 강제폐간 시기를 제외하고 1947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청·장년기를 동아에 몸바친 ‘동아맨’이었다.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설의식은 2년7개월 만에 사회부장으로 승진하고, 이어서 동경특파원, 편집국장대리를 거쳐 1935년 편집국장에 오른다…(중략)이처럼 동아일보 사람으로서, 언론인으로서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한 그였지만 일장기말소사건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나게 된다. 편집국장 취임 1년 남짓만인 1936년 8월이었다. 언론계를 떠난 소오는 광산일에 종사하면서 단파라디오를 통해 얻은 일제의 전황과 시국변천 정보를 몰래 송진우에게 알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된 동아일보가 해방후 복간되자 설의식은 다시 주간겸 편집인으로 복귀했다. 9년만이었다. 1945년 12월1일자에 실린 중간사(重刊辭) ‘主旨를 宣明함’의 집필자는 막 복직한 ‘평생 동아맨’ 설의식이었다.”▶ 1922년에 기자가 되었으니 포항 사고 현장에 간 것은 2년차 때의 일이네요. 설의식 기자가 1900년생이라는 기록도 있고 1901년생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20대 초반의 신참 기자가 수천 명이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은 현장에 파견되어 취재를 했습니다. 재난 현장을 직접 보고 기록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트라우마가 생기기도 합니다. 100년 전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신문사에서는 그가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큰’ 지면으로 다뤄 독자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사랑하고 기자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았던 젊은 기자는 지면으로 보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누군가 인생을 걸었던 신문 지면을 또 다른 누군가 100년이 지난 후에 들춰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쇄매체의 장점과 함께 무거운 책임도 느낍니다. 영원히 남을 지면이기에 그 당시 그 분도 엄청 애를 쓰셨을 겁니다. ▶ 이 사진을 찍은 사람도 설의식 기자였을까요? 사진기자인 제가 볼 때는 아닐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사진기자라는 명칭도 없었고 사진을 기술의 영역으로 봤기 때문에 신문에 사진 찍은 사람의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글을 쓰다보니 자꾸 가능성만으로 얘기를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는 죄송합니다만 아직 정확한 고증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확실한 사실이 정리되면 꼭 공유드리겠습니다). 사진의 깔끔한 구도와 정확한 노출값 계산 등을 고려할 때 저 사진은 전문가가 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20대 초반의 취재기자가 저 정도의 사진 기술을 구사했다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취재기자의 바이라인은 명확하게 들어갔지만, 재난 현장을 촬영한 사진가의 이름은 지면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혹시 설의식 기자가 찍은 사진이라면 그는 글과 사진 모두 완벽한, 천재 기자라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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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라인 라운지] 신세계면세점, ‘폐지 수집 노인도 돕고, 장애 예술인도 돕고’

    신세계면세점이 지구의 날과 장애인의 날이 있는 4월을 맞아 임직원들이 직접 만든 ‘친환경 페이퍼 캔버스’를 장애예술단체에 기증한다. 이번 활동은 폐지수집 어르신의 자립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러블리페이퍼’와 함께했다. 임직원들은 재활용 폐지 키트(KIT)를 활용해 장애 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위한 캔버스를 만들었다.신세계면세점은 이 친환경 페이퍼 캔버스 총 500개를 밝은방, 세계예술치료협회(WATA), 밀알복지재단 등 3개 장애예술단체에 기부한다.특히 밝은방은 발달장애 및 정신장애 창작자들로 구성된 아티스트 그룹으로, 작년 12월 신세계면세점이 방송인 전현무와 함께 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기부금을 전달한 바 있다. 이외 세계예술치료협회는 장애인 예술가를 지원하고 있으며, 밀알복지재단은 발달장애인 예술단 ‘브릿지온 아르떼’를 운영하고 있다.신세계면세점 관계자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과, 22일 지구의날을 기념하며 임직원들이 직접 참여하여 더욱 뜻깊은 캔버스 제작을 진행했다.” 라며, “앞으로도 신세계면세점은 작은 노력이지만 소외계층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들을 계속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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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를 따라한 앵글일까? 몰래카메라였을까?[청계천 옆 사진관]

    ▶지난 주였던 4월 7일 토요일에 올렸던 포스팅 “첫 눈, 첫사랑, 첫 꽃, 첫 낙엽… 멋있어도 먼저 나와야 찍혀서 보도된다. [백년사진 No. 13]”에 달린 댓글 중에서 흥미로운 분석이 있어서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kore**** 아이디로 접속하신 분이 남기셨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진을 찍히면/영혼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해서 사진 찍히는걸 결사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초상권 정도가 아니라 영혼권 이었던 것이죠/요즘 초상귄세태에 대해서는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그런지 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얼마전만해도 신문이나 잡지에 본인사진이 실리면 주변에 은근히 자랑하는 분위기였는데/얼굴로 돈벌어먹고 사는 직업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까지 민감하게 반응해서 삭막한세상 만드는데 일조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되네요/살다보니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분간이 어렵네요/스마트해질수록 피곤해지는 세상입니다▶요즘 제가 제일 관심이 많고 회사를 그만 둘 때까지 해결하고 싶은 숙제처럼 생각하는 게 사실 초상권입니다. 검찰에 출두하는 피의자에 대한 인권보호차원에서 시작된 논의가 어느새 일반 시민 및 거리의 대중들에까지 확대되다보니 많은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됩니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에서 이제 시민들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의 얼굴만이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 되어가고 있는 거지요. 우리는 모르지만 한국의 신문 사진과 방송화면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갈라파고스 섬’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신 사진기자를 비롯해 외국 사진기자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모자이크를 할 수 있으며, 모자이크를 해야 하는 사유를 데스크들에게 보고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유를 데스크들에게 보고하고 세상에 사진을 보여줍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모자이크 사진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합의가 도출되어 기록과 인권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황금비율을 만들고 싶습니다. ▶1923년 4월 9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사진설명이 따로 없이 한 줄짜리 제목과 부제목만이 사진에 붙어 있습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빨래터가 있었나 봅니다. 봄비에 미뤄놨던 빨래감을 들고 나와 함께 빨래를 하는 모습을 찍을 사진입니다. 도시 풍경이라고 할 만한 내용입니다. 서울 장충동에 살지 않던 100년 전 시민들이나 시간이 지난 오늘날 독자들이 보면 재미있는 풍경입니다. 그러니 많지도 않은 신문 지면에 크게 자리 잡고 뉴스 대접을 받았겠지요.▶이 사진에는 주인공이 없습니다. 어쩌면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주인공이 없는, 아니면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주인공인 사진이 한국에는 꽤 많습니다. 단체사진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 사람이 줄을 맞춰 서 있는 사진에서, 맨 앞줄 맨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그 옆과 그 뒤, 그리고 화면의 맨 끝에 위치한 사람도 같은 크기와 같은 포즈로 서 있습니다. 아무도 배제하지 않고 아무도 아주 드러나지 않는 평등한 사진입니다. 저는 ‘봄비 개인 후의 장충단공원 빨래터’ 사진에서도 한국인들의 이런 정서가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빨래터에 모인 7~8명의 아낙네 중에는 가장 포토제닉하거나 표정이 살아 있는 인물이 있었을 겁니다. 그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나머지 인물들을 부수적인 배경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 촬영법도 있습니다. 굳이 예를 들어, 미국 신문이라면 아마 그렇게 촬영했을 겁니다. ▶한국의 사진이 서양의 사진과 여러 가지 차이가 있겠지만 앵글에서 보면 이런 측면 있습니다. 강약중강약이 덜 한, 평평한 원근법. 설명적이고 맥락이 잘 드러나는 구성 말입니다. 저는 이런 한국과 서양의 앵글 차이가 회화에서 존재하는 차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신문 사진도 한국 회화의 영향을 받아왔고, 한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도록 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문화란 아이디어, 가치, 신념, 관습의 체계를 일컫습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에서는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의존하게 됩니다. 리처드 니스벳(Richard E. Nisbett)은 그의 저서 [생각의 지도]에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동양인들은 고대의 동양인들처럼 세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전체 맥락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사건들 사이의 관계성을 파악하는데 익숙하며” 반대로 “현대의 서양인들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세상을 보다 분석적이고 원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물을 주변 환경과 떨어진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주인공을 부각시킬 필요도 없고, 맥락을 잘 보여줘야 하다보니 선택한 앵글이 ‘부감(俯瞰)’입니다. 사람도 잘 보이고,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환경도 한 장의 사진에 잘 보이도록 카메라가 피사체 위에 위치하는 앵글이죠. 이런 앵글은 한국의 그림에서도 많이 등장합니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박수근의 유명한 작품 ‘빨래터’에서도 저는 이 사진과 같은 앵글을 보았습니다. 카메라맨이나 화가가 이미지 속 인물과 같은 눈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또는 언덕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앵글 말입니다. ▶ 궁금한 점은, 사진 속 아낙네들은 카메라맨이 저 위 어딘가에서 촬영하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몰랐을까요? 저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촬영한 것이었을까요, 그러면 몰래카메라인가요? 아니면 연출 사진이었을까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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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눈, 첫사랑, 첫 꽃, 첫 낙엽… 멋있어도 먼저 나와야 찍힌다[청계천 옆 사진관]

    ▶저의 고향은 아니지만 만약 시골에 가서 살아야 한다면 살고 싶은 곳이 한 곳 있습니다. 그곳에는 역사 유적지도 있고, 봄이면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고 겨울에는 순백의 고니들이 떼로 몰려와 월동을 합니다. 녹차밭도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깨끗한 들판에서 나오는 쌀로 만든 흰밥과 각종 해산물과 육고기를 재료로 내놓는 한정식도 가성비가 높습니다. 공기도 좋고 산책을 할 수 있도록 바닷가에 데크도 잘 깔아놨습니다. 이곳은 신문과 방송에 가끔 소개되기도 하지만 제가 가서 본 풍경에 비해서는 빈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기자들이 문제였습니다. 처음 나온 거나 가장 많은 것만을 보도하는 습성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첫 눈, 첫 꽃, 첫 낙엽을 사랑하는 거 같습니다. 두 번째라도 보도되려면 폭설이거나 흐드러진 꽃밭, 산을 가득 채운 낙엽이어야 관심을 갖습니다. 중간쯤 되는 풍경에는 시선과 지면을 잘 안 주는 거죠. 새로운 거나 가장 큰 것만 좋아하는 습성이 인생 살아가는데 좋은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기자들이 저렇게 멋진 장소에 끊임없이 주목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기자들이 생활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KTX가 직행하지 않아 버스나 자가용을 타고 가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 곳입니다. 기자들 근처의 사소한 축제는 신문에 실릴 수 있어도 지방의 큰 축제가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도 이런 매커니즘 때문일 겁니다. 다행히 요즘은 SNS로 그 지역을 다녀온 관광객과 시청 홍보팀이 많은 사진과 포스팅을 올려서 세상의 주목도 늘어나곤 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새 학기 첫 등교 사진입니다. 1923년 4월 3일 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희망에 넘치는 신학기> 새 학기가 되었다. 희망에 넘치는 새 학기가 되었다. 경성 시내에서는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를 물론하고 어제 2일에 일제히 시업식을 거행하였다. 인생의 가장 좋은 대는 소년시절이오 이때에는 아무 것보다도 배호는 것이 가장 큰 일이다. 배호기 곳하면 희망이 많고 배호지 아니하면 남과 같이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격심한 입학난의 싸움에 승리를 얻어 더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입학이 된 학생제군은 배워야 할 때이다. 열심으로 공부하여야 될 이 때이다. 사진은 어제 오전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 정문에서)▶새학기 등교 사진을 설명하는 글에서 ‘배우다’는 표현을 ‘배호다’고 썼었네요.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이 소년기이고 이 때는 배우는 일이 가장 큰 일이며, 배워야 남들과 함께 살아 갈 수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사진은 100년 전 4월 2일 서울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속 보통학교 개학에 맞춰 그날 오전 학교로 들어가는 여학생들의 뒷모습입니다. 검정저고리와 고무신을 신은 여학생들이 학교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일제 시대 신학기의 시작은 지금과 달리 4월이었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4월에 학기가 시작됩니다. 이날 전국에서 수많은 학교들이 개학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딱 한군데의 학교 개학식 풍경이 지면에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학교 중 하나였을 겁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가장 접근하기 좋은 서울에 있었을 것이구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08년 4월 1일 조선 순종황제 칙령에 의해 현재 종로구 도렴동에서 개교한 ‘관립한성고등여학교’가 1911년 이름이 바뀌었으며 1951년 경기여자중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주목한 또 하나의 포인트는 사진 속 학생들 중 누구도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요즘 제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초상권에 대한 답이 100년 전 사진에 있었습니다. 굳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도 활기차고 당당한 발걸음에서 신학기의 시작과 희망이 느껴집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과는 사진 촬영 접근법이 다르네요. 지금은 너무 많이 학생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다 보니 인권문제와 충돌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학교에서 기자들이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 우리는 학생들의 얼굴을 앞에서 찍고 모자이크를 하는 걸까요? 학생들의 얼굴은 언제부터 신문에 실렸을까요? 앞으로 유심히 자료를 한번 들춰볼 생각입니다. 새로운 프로토콜이 필요한 시대니까요. 과거 사진에서 한 수 배웠습니다.▶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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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3B-여성, 아기, 애완동물[청계천 옆 사진관]

    ▶수능 시험이 끝나고 신문을 만든 다음날이면 언론 비평 매체나 독자들이 보낸 메일에서 ‘왜 여학생들 모습의 사진만 쓰냐’는 핀잔을 듣습니다. 그러게요. 왜 남학생들 모습보다는 여학생 모습이 신문에 더 많이 띄는 걸까요? 현장을 취재한 사진기자들이 남학생과 여학생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반씩 촬영했는데 그걸 사무실의 편집자들이 여학생들의 모습만 골랐다고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아마 포커스가 여학생에게 맞은 사진이 남학생에게 맞은 모습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분들도 잠시 눈을 감고 머릿 속으로 상상을 한번 해보시죠. 여러분이 신문을 제작하는 편집기자입니다. 기사를 고르고 사진을 골라서 지면에 배치하는 역할이죠. 인터넷과 달리 신문 지면에는 딱 한 장의 사진을 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두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한 장의 사진에는 수능을 마친 남학생이 지친 표정으로 부모님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입니다. 또 한 장의 사진에는 마찬가지로 수능을 마친 여학생이 지친 표정으로 부모님을 향해 걸어오고 있습니다.어느 사진을 고르실 거 같으신가요? 다음날 아침 신문에 실린 사진 중에 어떤 사진이 시선을 더 끌까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정치인들의 사진에 어린 아이들이 가끔 등장합니다. 본인들의 손자손녀도 아닌데 정겹게 안아주고 있는 모습이죠. 가끔 시위현장에도 주최측 부모들이 데려온 아이들이 카메라맨들의 눈길을 끌어 사진에 찍힙니다. 무의식적이지만, 사진에 어린이가 등장하면 여러분도 그 사진에 주목하게 되지 않으시던가요? 여러분이 주목했다면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이나 그 사진이 찍히길 원했던 사람들은 시선을 끄는데 ‘성공’한 게 됩니다.요즘처럼 볼거리도 많고, 자기 일도 바쁜 시대에 대중들의 시선과 관심을 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고업계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의 시선과 심리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중 하나로, ‘3B가 시선을 끌어당긴다’는 명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3B 요소로 Beauty(미인), Baby(아이), Beast(애완동물)를 꼽습니다. ▶광고업계에서 발견한 ‘3B의 원칙’은 신문 사진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 특히 경제와 관련된 사진에 여성의 모습이 많이 등장하고, 정치인들 사진에 아이들이 등장하는 사례를 들 수 있습니다. ▶100년 전 사진으로 가보겠습니다. 1923년 3월 26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춘계석전대전경학원에서는 어제 오전 9시부터 문묘춘계석전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는데 고례(古禮)을 쫓아 악의 장엄한 소리를 따라 참배자 일동이 자리에 나아가 사배(四拜)를 마치고 전폐례 초현아헌종헌 분헌례를 행한 뒤에 음복례를 마치고 총독 이외 일반 참가자가 차례로 첨향례를 마치고 오전 10시 반 경에 폐식하였더라. ▶ 문묘,전폐례, 초현아, 헌종헌, 분헌례, 음복례, 첨향례. 생소한 단어들의 나열입니다. 뭔가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 예식을 진행하고 그 단계별로 용어가 있다는 정도만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문묘는 유교의 성인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검색이 되네요. 그러니까 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봄철에 이뤄지는 행사라는 의미네요. 경학원이라는 장소는 검색해보니 지금의 성균관을 일제가 개칭한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춘계석전이라는 행사는 지금도 전국 각지의 향교에서 매년 봄마다 이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봄에 공자에게 예를 갖춰 행사를 여는 것을 춘계석전, 가을에 하는 행사를 추계석전이라고 합니다. 신문에 실린 행사 모습은 사실 지금도 전국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유학자와 유교도들이 도포를 입고 모여 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 말입니다. 석전대제 또는 춘계석전, 추계석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중년과 노년의 남성들로만 이뤄진 이 행사는 이제 신문 지면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행사는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사진기자들이 더 이상 촬영하지도 않고 지면에도 싣지 않는 것이죠. 대신 화려한 공연 모습이 신문에 실립니다. ▶ 신문 사진의 목적은 현장에 가지 않는 독자들을 대신해서 현장을 보여주는 역할일 겁니다. 그런데 신문기자들과 신문 독자들이 전통 행사에 시선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최측에서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최근 10년 아니 20년 간 신문에 실리는 춘계석전대제 기사에는 행사 시작 전 열리는 팔일무 공연 사진이 게재됩니다. 전통 아악에 맞추어 악생 64명이 한 줄에 여덟 명씨 여덟 줄로 정렬하여 추는 춤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악생(樂生)은 국악 또는 무용을 전공하는 여학생들입니다. 빨간 옷을 입고 추는 팔일무는 시선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100년 전 춘계석전에서도 학생들이 참관하고 일무 공연이 펼쳐졌다곤 하는데 사진은 중노년의 유생들의 실제 행사 장면을 골랐던 것 같습니다. 형식보다는 본질에 집중해서 사진을 찍고 골랐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사진 속 장면은 지금도 봄과 가을에 열리는 석전대제 현장에 가면 볼 수 있고 사진으로 찍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신문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독자들이 좋아할까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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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부 잘하는 학생들 얼굴을 신문에 싣던 시절[청계천 옆 사진관]

    ▶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는 백년사진 11번째 이야기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고른 사진은 “공부 잘했던 학생들 얼굴”입니다. 서울시내 유명 고등학교(배제보통, 진명여고)와 전문학교(경성의전, 세브란스) 졸업식에서 우수상을 받은 학생들에 대한 기사입니다. 1923년 3월 23일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지금과 달리 100년 전에는 졸업식이 3월 말, 입학식은 4월 초였습니다. ▶먼저 제일 오른쪽 위에 있는 기사를 읽어보겠습니다. 최대한 원문 그대로를 옮겼는데 영 어색한 부분은 지금의 구어체로 바꿨습니다. <영광을 식하는 졸업장 -다정한 학창을 뒤로 두고 사회로 나오는 새 사람들 - 어제 거행한 4개 학교 졸업식>시내 정동에 있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는 그제(재작일) 오후 2시부터 배재학당의 졸업식까지 겸하여 성대한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순서를 따라 여러가지 절차를 지내고 그 학교 교장 ‘아펜젤러’씨의 뜻깊은 훈사를 비롯하여 감독관의 고사와 내빈 측 축사를 마친 뒤에 졸업생 대표의 답사 등이 있었는데 금년도 졸업생은 고등보통학교에 44명과 배재학당의 7명을 합하여 모두 51명인데 우등생은 다음과 갔다더라. ▲고등보통 李時雄 ▲배재학당 金賢植 ▲배재우승생 리시웅군(좌편). 전현식 군(우편)▶ 이어서 두 번째 줄 왼쪽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대학로에 있던 경성의대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의대 졸업식 기사입니다. <경성의전의 졸업 우등생은 세명> 시내 연건동에 있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는 그제 오후 2시부터 그 학교 안에서 제 7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지하교장(志賀校長)의 정중한 훈시와 내빈의 간곡한 축사로 순서를 따라 성대한 가운데 식을 마쳤는데 금년도 졸업생은 본과 34명과 구본과 23명을 합하여 모두 57명이라는데 우등생은 아래와 같다더라. ▲白道爕 ▲平良文雄, 武藤忠次 ◇의학전문 우등생- 우편으로부터 무등충차량, 백도섭군, 평량문웅군▶맨 아래쪽 사진은 진명여자고등학교 졸업식 소식입니다. <진면교문의 환희 - 부속보통교와 여학원의 졸업식까지 거행>시내 창성동에 있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그저께 오후 2시부터 그 학교 안에서 부속 보통학교와 경성여자학원의 졸업식까지 겹쳐서 거행하였는데 식장의 기분이 일종 가벼웁고도 침잠한 가운데서 순서를 따라 여러 가지 절차를 지낸 뒤에 교장 엄준원 씨의 고사와 총독대리로 대내(大內)씨와 도지사 대리로 좌등(佐藤) 양 씨의 훈사와 내빈의 축사를 마친 후 장차 가정으로 학교로 실 사회로 닦은 지식을 시험하러 나가는 졸업생의 답사가 있었는데 스승의 은혜를 기리며 새로운 희망을 살외는 뜻은 실로 일동에게 기쁘고도 애처로운 감상을 주었으며 마지막으로 청아한 졸업가로써 마치었는데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은 모두 열한 명이며 경성학원은 2명이라는데 우등생은 아래와 같다더라. ▲吉奉順 ▲方正先▲朴英熙 ▲朴俊植 ▲方点順 ◇진명의 우등생 - 우편으로부터 김봉순양, 방한선양, 박연희양, 박우식양, 방적순양▶ 맨 아래 쪽은 학사모를 쓰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새로 의사가 되었다는 졸업생들 이야기입니다. <신의사가 5명 - 승격 후 제 1회로 세브란스 졸업식>시내 남대문 밖에 있는 ‘세부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는 재작일 오후 3시 반부터 남대문예배당 안에서 승격된 이후로 제 1회의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학교 교장 ‘어비신’씨 이하 교원 일동과 다수한 내빈이 모여 매우 성대하였다는데 이번 졸업생은 다음과 같다더라. 우편으로부터 오한영군, 김나흥군, 송태근군, 박선이군, 조인모군. ▶ 지금의 신문에서도 여러 명의 얼굴이 등장할 때, 왼쪽부터 누구누구 오른쪽부터 누구누구 하듯이 ‘우편으로부터’라고 써서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맞추어놨습니다. 사진 하나하나마다 해당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입해서 헷갈리지 않도록 해놓았습니다. 나머지는 다 한자로 병기되어 있는데 연세대 세브란스 졸업생들의 경우는 한자 없이 한글만 써 있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진명여고의 우등 졸업생의 경우 한자 이름과 한글 이름이 서로 다릅니다. 뭔가 표기법의 차이인지 아니면 편집자가 잘못된 한자를 쓴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제가 해결할 수도 없는 과제라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내가 사는 동네 사람 말고 저 멀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것을 우리 민족은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효도의 방법이고 성공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유교 문화권이 대부분 그럴 겁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은 업적을 이뤄 널리 이름을 떨친다는 의미일 텐데 옛날에는 이름을 알리는 것만 가능했지만, 신문이 생기고 사진이 등장하면서 얼굴도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문에 졸업 우등생의 얼굴이 게재된 것도 그런 의미일겁니다. 옛날로 따지면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저 학생들의 사진은 어디서 난 것일까요? 먹고 살기 힘든 시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집안이 부유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데 각자 사진을 찍어 갖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이야 사진이 흔하고 18세 고3정도 되는 학생 개인의 사진이 수천, 수만 장 있을 테지만 예전에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 자체가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이라 사치의 영역이었습니다. 누가 찍었을까요? 저 사진들은 신문사 사람들이 가서 찍은걸까요? 아니면 학교측에서 제공한 사진이었을까요?상태가 균일한 걸로 봐선 신문사에서 직접 가서 찍었을 거 같습니다. 제공사진이라고 하기에는 품질이 너무 비슷하지 않나요?▶ 뉴욕타임즈의 100년 전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창간 100주년을 맞아 독자들에게 100년 전 사진을 판매한다는 광고였습니다. 서부 개척시대의 결기 넘치던 미국 초창기의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인디언 추장이 말을 타고 가다 카메라맨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100년 전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같은 방식으로 촬영되고 현상되고 인화되어 인쇄되지만 카메라 앞의 피사체의 모습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100년 전 조선, 우리 사회가 가장 자랑스러워하거나 남기고 싶었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람’ 그 자체 아니었을까요? 지금은 어렵지만 언젠가 세상을 구하고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갈 인재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요? 한정된 지면에 고등학교와 초급대학 우수졸업생의 모습을 기록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고 보니 2000년대 초반까지 학력고사 전국 1등을 인문계, 자연계, 남학생, 여학생 이렇게 나눠서 신문에 실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관학교 수석 합격자들 사진도 있었구요. 하지만 요즈음에는 수석 합격자의 얼굴을 신문에 쓰는 관행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입시 공부가 전부가 아니고, 다양한 성공의 방식이 있다는 사회 분위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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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사진기자들은 하늘과 들판을 찍는 걸까?[청계천 옆 사진관]

    ▶나른한 봄기운에 잎을 터뜨리기 시작한 버드나무 숲 앞에서 짙은 색의 황소 두 마리가 각자의 수레를 끌고 갑니다. 짐칸은 비어 보이는데 힘없는 모습입니다. 뒷모습이어서 더욱 무기력해보입니다. “버드나무 숲에 아지랑이”라는 간단한 제목과 어제 청량리에서 촬영했다는 정보만 있습니다. 딸려있는 기사도 없고 사진에 대한 설명도 더는 없습니다. 성큼 다가온 봄을 전하는 것 같지만 묘한 느낌의 사진입니다. 1923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도시화가 완전히 진행된 지금이야 서울 청량리에서 버드나무 숲과 들판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만 100년 전에는 완전 농촌이었었군요. 하기야 동대문 서대문 등 4대문 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던 시절이라 청량리만 하더라도 도시와는 거리가 먼 풍경이 펼쳐졌었을 겁니다. 사진하는 사람들이라면 탁 트인 농촌 풍경을 좋아합니다. 지금도 사진작가들은 이런 풍경을 찾아가 사진을 찍습니다. ▶이런 사진을 한국 사진기자들은 ‘스케치 사진’이라고 분류합니다. 물론 100년 전 사진하던 분들이 이런 사진을 스케치 사진이라고 불렀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지금의 사진기자들이 그렇게 부른다는 뜻입니다. “SKETCH.” 스케치북을 펼쳐서 눈앞의 풍경을 그리듯이 카메라로 풍경을 ‘툭’하고 포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진기술이라는 게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것이 아닌, 외래 문물이고 사진의 표현법도 분명 처음에는 외국의 사진을 본 따는 방법으로 시작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스케치 사진은 상당히 한국적인 표현 방식으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포토저널리즘 교과서에는 스케치 사진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인물사진, 사건사고사진, 천체 사진, 생태사진, 천체사진 등등 우리의 사진 분류에 해당하는 용어가 있지만 우리의 사진 분류인 ‘스케치 사진’은 영어로 표현되지 않습니다.▶서양에서는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지 않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도시 풍경이나 날씨 사진을 ‘Daily life’ 또는 ‘Feature‘ 사진 정도로 가볍게 촬영하는 것 같습니다. 대신 그들은 뉴스와 스포츠 사진 등에서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사진기자들은 스케치 사진을 많이 찍습니다. 저도 산과 들판, 바닷가 등을 돌며 스케치 사진을 참 많이 찍었고, 봄꽃이 피는 순서를 복수초, 동백,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이렇게 외우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한국 사진기자들이 지금 촬영해 신문에 쓰는 스케치 사진을 외국 사진기자들은 거의 엄두도 못낼 겁니다. 소재를 발견하고 그림처럼 완벽한 구도에 피사체를 배치하고 시선까지 고려한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진기자의 스케치 사진은 최첨단의 앵글이라고 생각합니다.한겨레신문의 이정용 기자와 동아일보의 서영수 기자의 석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스케치 사진은 일본 강점기에 태동했다는 분석이 타당해보입니다. 일본 강점기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었고, 처음에는 일본식 제작 및 취재시스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죠. 실제로 일본 신문에도 한국의 스케치 사진과 유사한 형식의 사진이 아직 게재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많지는 않습니다. ▶스케치 사진의 역사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게다가 원조일 가능성이 높은 일본에서도 빈도가 낮은 사진이 왜 우리 사회에는 많았던 걸까요? 일제의 강압적 통치 상황에서 그나마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경이라도 보여주려 했던 신문 제작자들의 의도가 있었을 거라는 가정이 가능합니다.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압제에 대한 반항이나 항쟁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책잡히지 않을 애매한 표현으로 글을 쓰듯이, 메시지가 애매한 풍경이나 날씨 사진으로 시대를 표현했을 가능성을 위의 두 석사 논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공감합니다.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 시절, 한국 신문에서 스케치 사진이 더욱 빈번하게 게재되고 앵글이 첨단으로 발전했던 것 역시 사진이 억압적 권력 앞에서 어떻게 버텨 가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면 과한 걸까요? 군사독재시절 현장 사진으로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울 때 피 끓고 의욕 넘치는 포토그래퍼들이 에너지를 집중한 것이 날씨 스케치 사진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정치 상황이 변했는데도 왜 아직 스케치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는 걸까요? 저는 한국의 사진기자들에게 세상이 아니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신문사의 구성원들과 독자들이 원하는 역할에 아직 ‘풍경의 전달자’ 역할이 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관성이란 게 무서워서 아직 달려오던 속도를 한꺼번에 줄이지 못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아직은 신문 독자가 농촌과 자연 속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낸 세대이기 때문에 일종의 향수 같은 것도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에서도 스케치 사진은 최근 10년 사이에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문에 실리던 ‘조롱박 풍경’이나 ‘논두렁 물꼬트기’ 사진이 이제는 거의 실리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량리 들판에 100년 전 등장한 소달구지 사진을 보면서 눈에 띈 게 하나 있습니다. 농부인지 상인인지 모를 소달구지의 주인은 왜 달구지를 타고 가지 않고 걸어가는 걸까요? 소설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1960년대 한국에 왔을 때 일화가 있습니다. 황혼녘 경주의 시골길을 지나고 있는데, 한 농부가 소달구지에는 가벼운 짚단이 조금 실려 있었지만 자기 지게에도 따로 짚단을 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지게에 짐을 따로 지고 갈 게 아니라 달구지에 짐을 싣고 농부도 타고 가면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 펄벅은 농부에게 “왜 소달구지에 짐을 싣지 않고 힘들게 지고 갑니까?”라고 물었답니다. 농부는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저도 일을 했지만, 소도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했으니 짐을 서로 나누어져야지요”라고 답을 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는 펄벅 여사는 감탄하며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저 장면 하나로 한국에서 보고 싶은 걸 다 보았습니다. 농부가 소의 짐을 거들어주는 모습만으로도 한국의 위대함을 충분히 느꼈습니다.”▶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봄입니다. 황소처럼 힘차게 살아보시죠. 같이.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20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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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오늘, 나라 잃은 설움에 ‘국산품 애용합시다’ 절규 그리고 사진 합성[청계천 옆 사진관]

    ▶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도 같은 의미 일겁니다. 아무리 얘기하는 것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 확실한 증명이고, 주장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진기자와 편집기자들이 많습니다.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들이 하는 역할이기도 하구요. 그런데 요즘 한국 정치에서는 사진이 정말 진실을 얘기하긴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사진과 영상이 현장을 증명해도, 정치인들이 “맥락을 좀 더 봐야 한다”며 사진과 영상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로서 이런 상황을 건너기 위해 무얼 더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도 됩니다. 아무튼, 이번 주 ‘백년사진’의 옛날 신문에서는 사진보다 기사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규(熱叫). 국어사전에는 나오지만 현대의 우리들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입니다. 절규보다 더 강한 표현으로 다가옵니다. 네이버 사전은 ‘있는 힘을 다하여 절절하고 애타게 부르짖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흰색 저고리를 입은 중년의 여인은 대중 앞에서 무엇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걸까요?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 고른 사진은 1923년 3월 6일자 신문에 실린, 강연하는 여성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합성 사진입니다. 왜 신문에 합성 사진을 실었던 걸까요? ▶토산 부인의 열규 - 청중 2500명에 달한 성황을 다한 아낙네 강연토산애용부인회 주최의 강연회는 예정과 같이 지난 4일 오후 7시 반경에 시내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리었는데 원래 이 강연회에는 우리도 남과 같이 살기 위하여 우리 물건을 입고 쓰자는 강연회이라 이에 많은 열정을 가진 일반 민중은 정각 전부터 사면으로 모여들어 천도교당이 넘치고 터질 듯이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그 수효가 무려 2500명에 달하엿으며 먼저 홍옥경 여사의 정중한 개회사가 있은 후 최영아 여사는 내 살림 내 것으로, 박영자 여사는 자작자급이라는 문제로 김건우 여사는 실지로 행하자는 문제로 김계송 여사는 토산애용에 대한 여자의 책임이라는 문제로 각각 조선사람으로 조선물건을 입고 쓰고 하여야 할 것을 가장 재미있고 열렬하게 말하여 일반 청중에게 많은 감상을 주고 10시 경에 무사히 폐회하였더라. 사진= 성황을 이룬 부인 강연회 (기사 참조)▶토산애용부인회(土産愛用婦人會)는 말 그대로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운동을 하는 여성단체입니다. 종로구에 있는 천도교 회관에서 일과가 끝난 오후 7시 30분 강연회가 열렸고, 우리 물건을 쓰자는 취지에 공감한 일반 시민 2500명이 모여 연단을 향해 눈과 귀를 모으고 있는 모습입니다. 앞줄 오른쪽 3열과 4열을 중심으로 무릎에 아이를 앉힌 여성들도 보입니다. 집에서 아이를 돌 볼 시간, 시내에서 열린 ‘깨어있는 신여성’의 모임에 동참한 것이겠지요. 홍옥경 여사의 개회사가 끝난 후, 최영아, 박영자, 김건우, 김계송 여사가 “조선 사람은 조선 물건을 입고 쓰자”는 열변을 토했다고 합니다. 2시간 30분이 지난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관중들의 시선이 불규칙합니다. 화면 왼쪽 1/2의 사람들은 왼쪽을 보고 있고 화면 오른쪽 1/2사람들은 오른쪽 정면을 보고 있습니다. 연설장의 일반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연단이 두 개라는 의미가 되는데 주최측이 그런 식으로 배치를 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사진은 두 장의 사진을 합성한 것 같습니다. 연사쪽에서 찍은 사진을 오른쪽에 붙이고 관중석 앞에서 찍은 사진을 왼쪽에 붙인 거죠. 지금이야 두 장의 사진을 각각 사용해서 설명을 따로 붙이는 방법으로 편집하면 되는데 그 당시에는 그 방식보다는 사진을 붙여서 현장을 표현하는 게 낫다고 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왼쪽 한가운데 연사보다 더 큰 두 명의 얼굴이 이 사진이 합성일 가능성을 더 높여줍니다. 카메라는 두 사람 얼굴 가까운 곳에서 셔터가 한번 눌러졌고, 연사 옆에서 셔터가 한번 더 눌러진 것이라는 게 제 판단입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사진 촬영의 기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다른 가능성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2500명이라는 대규모 군중이 모여, 성황을 이룬 ‘국산품 애용 캠페인’ 현장을 표현하기엔 당시 사진촬영장비는 부족함이 많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산품을 이용하자는 호소의 자리를 ‘열규’로 표현하고자 했던 당시 편집국의 분위기를 상상해 봅니다. 세상의 어떤 언어로 연사의 열변과 관중들의 뜨거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찾던 중 ‘열규’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나라잃은 설움의 감정을 이 행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진을 담당하던 기자들과 직원들 쪽에서는 ‘합성’ 또는 ‘콜라쥬’의 형식을 택해, 현장의 규모를 최대한 크게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현장을 보여주기 위해 사진에 손을 대는 행위를 우리는 사진조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역사 속에서 사진에 손을 대는 행위가 한쪽에서는 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말살한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폐간을 당하고 관련자들은 구속되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일장기 말살 사건은 사진의 효용성과 기능을 통해서 일제에 저항하고 도전하는 한편 저항정신이 사라져가던 민중의 혼을 일깨웠다는데 큰 뜻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이명동. 1977년 9월 신동아 “신낙균 저 ‘사진학 개설’의 복간” 기사에서)▶정치권에서나 사회적 갈등이 심한 이슈에서 인파(人波)나 군중을 찍는 사진은 항상 논쟁거리가 됩니다. 주최측은 사람이 너무 적게 표현됐다고 하고 반대의견을 가진 측에서는 과장에서 표현했다고 주장합니다. 1980년대와 90년대 민주화 이후 대통령 선거 유세에 나선 후보들이 군중들을 등 뒤에 둔 채 사진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한 이유도 자신을 지지하기 위해 모인 인파가 사진에 담기기 위해 스스로 연출을 한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고도화된 연출 능력을 가진 정치인들과 사회 단체들이 만든 미쟝센 앞에서 기계적 중립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게 최소한 지금의 포토저널리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년 전 서울에서 벌어진 ‘토산애용부인회’ 행사를 주최측은 최대한 규모를 많이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신문의 편집자들은 그 의도에 맞춰 사진을 붙여 만들어 게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으로 우리는 당시의 열기를 간접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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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 전 오늘, 이집트 투탕카멘 무덤이 한국에 처음 소개되다 [청계천 옆 사진관]

    ▶지난달 [백년사진 No. 7 - 장충동 부녀 살인 현장에 나타난 콧수염의 검은 망토들] 글에 달린 댓글 중에는 우물가서 숭늉을 찾는 독자? 분들의 글이 몇 개 있었습니다. 사건의 결론을 알려달라는 주문이셨죠.당일 신문에 난 내용은 ‘스트레이트 기사’였습니다.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도한 거지요. 다만 한 명의 여성이 사망한 사건을 두고 무려 3꼭지의 기사가 게재된 것으로봐선 당시에 기자들과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100년 전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 사건을 계속 추적했을까요? 후속 보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살인사건 현장검증 보도 1주일 후인 후인 1923년 3월 1일자 신문에 아래 내용의 후속 기사가 있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신문 원문을 제가 나름 읽기 쉽게 고치고 띄어서 재작성한 것입니다. <송정규는 원래 악한 - 자기 누나 동생까지 죽이고자, 시체의 김재유는 죽어서도 시집>지난 23일 오후 3시에 장충단 공원 남산장 뒤에서 자기의 본처 김재유를 무참히 찔러 죽인 송병우의 둘째아들 송정규(20)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엄중한 취조를 마치고 예심에 부쳤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거니와, 원수로 변한 남편의 독한 칼날에 무참히 세상을 버린 김재유의 시체는 그후 서소문통 전중환(田中丸) 병원에서 해부까지 한 후 지난 26일에 그의 시부되는 송병우가 익산으로 운구하여 장사를 하게 되었다. 이에 그 가해자의 평소의 지내던 행동을 다시 듣건데, 그는 겉으로보면 아무 탈이 없는 듯 하나 그 성품은 매우 음독하여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음해가 많을 뿐 아니라 죽이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두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누이와 아우들에 대하여도 칼로 찍어 죽이러 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였음으로 그 부모되는 자의 감독은 물론이오 비록 남매간이오 형제간이라도 그 아우와 그 형을 대할 때에는 매우 조심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피살된 김재유도 여러번 위험한 일을 당하여 오던 바, 작년 12월경에도 면도를 품에 품고 그 아내를 죽이려는 눈치가 있음으로 이 사실을 가해자의 아우되는 송석규가 짐작하고 비밀히 그 사유를 피살자의 가정에 통지하여 김재유의 친부되는 김희 씨는 말하되 ‘나는 음력 설 전에 시골집을 갔다가 어제야 이 소문을 듣고 오늘 나왔습니다. 가해자인 송정규로 말하자면, 그것이 무슨 인종이라 할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폐일언하고 간단히 말씀하자면, 평일 그와 같은 음독한 성질로 필경은 누구든지 죽이고 제 몸까지 망칠 줄을 짐작한 바인고로 지금 내 자식이 저와 같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도 그리 뜻밖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가해자의 품성이 갈수록 더욱더욱 못되어감으로 생각다 못해 그 친부되는 송병우를 작년 12월에 내 집 ’공평동 48번지‘으로 청하였다가 어찌하면 그 성품을 고치어 사람이 되게 할까하고 사돈간에 의논한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집을 별로히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내가 잠깐만 없더라도 만드시 소위 제 계집이라는 것을 불러내이어서 무수히 때리는 일이 많음으로 자연 이런 것을 막기 위하여 별로히 출입을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죽은 것도 내가 없었던 까닭이겠지요. 한편으로 생각하면 불쌍하나 한편으로 또 생각하면 남의 자식 원망할 것 무엇있겠소. 내 자식의 운명관계이니 도로 지금은 아무 일 없는 것 같소이다’하고 말하더라. ▶ 사건 발생 후 2달이 채 안되어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검찰은 징역 10년을 구형했고 변호사들은 집행유예를 주장했네요. 1923년 4월 20일 기사입니다. <송정규는 구형 10년>지난 3월 23일 오후 3시에 자기 아내를 장충단 공원에서 찔러 죽인 송정규에 대한 공판은 지난 19일 오전에 경성 지방법원에서 삼시(三矢)재판장과 산중(山中)검사가 입회하고 결심하였는데 입회하였던 산중 검사는 징역 10년에 처하는 것이 상당하다 구형을 하고 변호사 리종하(李琮夏) 송본정관(松本正寬) 두 사람은 송정규의 처는 근본부터 내외간에 함께 죽자는 상의가 있었고 또 그 아내가 칼로 찔러 죽일 때에 조금도 저항을 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살인이 아니라 그가 자살하려는 것을 도와준데 지나지 못하니 징역 2년에 처하여 집행유예를 시켜달라고 변론을 하였으며 판결기일은 오는 24일이라더라.▶동아일보 기자들은 최종 판결까지 사건을 따라갔었네요. 1923년 4월 25일자에 짧은 기사가 실렸는데 송정규는 실형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너무 우울한 100년 전 사건으로 여러분의 시간을 많이 뺏은 건 아닌가요? 다시 원래의 취지로 돌아와 신문을 뒤적입니다. 제가 옛날 사진을 뒤적이고 여러분에게 소개하는 것은 막연하지만 오늘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00년이라는 시간 너머에 있었던 이미지가 오늘 우리 눈 앞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거로 믿고 있습니다. ▶이번 주 신문에서는 “애급 고분에서 파낸 각종 보물” 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고분을 발굴했는데 거기서 많은 보물이 나왔다는 의미 같았습니다. 컴퓨터의 확대기를 이용해 기사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사실, 저는 농담반진담반으로 만약 사진기자가 되지 않았다면, 고고학자가 되었을거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무실이 있는 광화문 근처에서 조선시대 집터와 우물터를 발견했다고 하면 왠지 가슴이 뜨겁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외국 여행을 가면 그 나라 박물관을 가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애급(埃及)은 한자로 이집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100년 전 오늘 신문에 고대 이집트 왕의 무덤을 발굴하는 사진이 실렸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무덤의 주인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름은 아니겠죠?설마… 하는 마음에 기사를 읽어보니, OMG! 투탕카멘의 무덤 사진입니다. 작년 2022년, 발굴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와 세미나 그리고 전시회 및 출판 등으로 전 세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 투탕카멘 말입니다. 기사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923년 2월 26일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이집트 고분 발견. 46척 장신의 황금궤- 애급 고분에서 파내인 옛날 보물의 가지가지]지난 십구일 ‘애급(埃及)’ ‘룩솔’에서 고대 애급 왕릉을 파내이고 이를 다 기록할 수 없는 보물을 많이 꺼내었는데 그 안에 네자 높이 여섯자 길이 되는 황금 궤짝을 발견하였는데 그 궤짝 안에는 보석으로 꾸민 관곽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동상과 기명이 무수하고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도 여러 채를 발견하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한 보물을 다수히 캐내였다 하며 그 발굴 역사의 감독인 ‘칼터’씨의 말을 들어보면, 사진박고 검사하여 보관할 곳으로 보내는 시일이 적어도 2년간을 허비하겠다하며 이번에 그 구경을 갔던 사람 여러 천 명 중에 백이의 황족과 영국 귀족은 일부러 애급까지 갔다더라. ▶ 지난 19일 이집트 고대 왕릉을 파서 많은 보물을 꺼냈는데, 그 중에 네 자 높이, 여섯 자 길이의 황금 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각종 동상과 그릇, 황금 마차 등 희귀한 보물을 꺼냈다. 발굴을 지휘한 ‘칼터’씨에 따르면 보물을 일일이 사진찍고 보관창고로 보내는 데만 2년 이상 걸릴 정도로 양이 많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이집트로 몰려 온 수천 명의 외국인 중에는 벨기에의 황족과 영국의 귀족도 있다.▶과학계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굴된 것은 1922년 11월 26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3200년 만의 발굴이라는 어린이과학동아 2022년 11월호 [이달의 과학사-1922년 11월 26일 3200년 만에 발굴! 투탕카멘의 무덤]기사에 따르면“1922년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 약 320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투탕카멘은 기원전 1332년 9살에 이집트 왕이 된 뒤 18살에 사망했어요. 그동안 아무도 투탕카멘의 무덤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1922년 11월 4일 이 무덤을 발견했지요. 다른 왕들의 무덤과 달리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 왕의 매장 풍습을 알게 해 준 의미 있는 무덤입니다.”▶ 11월에 발견된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 모습이 한국 신문에 게재된 것은 그로부터 2달 반이 지난 시점이네요. 빛의 속도로 살고 있는 지금의 언론 상황에 비춰보면 너무 늦은 보도라고 해야할까요? 저는 백년 전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암흑기에 세계의 문화 유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뉴스를 전했던 사람들과 그 뉴스를 읽었던 독자들의 마음을 생각해봅니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 사진은 굴을 파고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10여명의 인부들과 땅 위에서 중절모를 쓴 채 현장을 감독하는 ‘칼터’씨 모습 뿐입니다. 황금마스크 사진을 볼 수는 없지만, 이 장면 만으로도 고대 역사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사진 왼쪽 위에 놓여있는 의자는 칼터씨가 현장을 지키기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었겠죠?▶ 우연치곤 좀 특별한데요, 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된지 100년이 지난 지금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이집트 미라전 -부활을 위한 여정”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3월 26일까지인데 저도 어제 금요일에 구경하고 왔습니다. 전시회에는 화강섬록암 재질의 투탕카멘의 좌상도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의 소개글을 옮기며 오늘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투탕카멘 왕 무덤의 발견 - ‘왕가의 계곡’에 있던 왕의 무덤들은 대부분 고대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1800년대 후반 ‘왕가의 계곡’에서 집중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이후 추가적인 발견은 더이상 없을 것이라 여겨졌지만, 영국의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 (Howard Carter, 1874~1939)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무덤이 있을 거라 믿었고, 부유한 카나본 경의 후원을 받아 조사를 지속했다.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여섯 시즌이 지나가자 카터는 카나본 경에게 한 시즌만 더 해보겠다고 애원했다. 결국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이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네 개의 방에서 발견된 5천 점이 넘는 부장품은 양적으로도 , 질적으로도 매우 훌륭했기 때문에 발견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미디어도 취재에 열을 올렸다. 어떤 저널리스트는 ‘파라오의 저주’라는 뉴스를 퍼뜨리며 무덤을 파헤치는 자들은 금방 죽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가고 17년이나 지난 후인 1939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0년 전 기사와 100년 후의 전시장 소개글이 비슷하지 않으세요? 여러분은 100년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 2023-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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