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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고 정신건강의학 전문 병원인 저희 병원으로 오신 할머니 환자가 있었어요. 알츠하이머 치매, 혈관성 치매 등 여러 유형 중 어떤 치매 진단을 받으셨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꽃 같은 치매’라고.” 10년 째 치매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장기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41)는 몇 년 전 이 환자를 처음 만난 날을 잊지 못한다. 할머니의 대답은 장 전문의가 치매라는 질병을 대하는 태도를 영원히 바꿔 놨다고 한다. 평생을 긍정적이고 유쾌한 태도로 살아온 환자의 지난 인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신의 질병이 꽃 같다는 할머니의 답이 이해가 갔다. 그는 “치매라는 진단 너머에 있는 할머니의 인생이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8일 출간한 에세이 ‘사라지고 있지만 사랑하고 있습니다’(웅진지식하우스)에 그간의 치매 환자 치료기를 담았다. 그를 22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치매의 증상을 흔히 ‘착한 치매’와 ‘나쁜 치매’로 분류하곤 합니다. 저희 정신의학과에서는 주로 나쁜 치매 증상을 보이는 환자를 착한 치매로 유도하는 것을 1차적 목표로 두죠.” 기억을 잃어갈 뿐 가족들이 돌볼 수 있는 수준의 치매를 착한 치매라고 한다면 망상과 우울로 주변인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를 나쁜 치매라고 부른다. 정신의학과는 적대적인 행동의 기저에 우울증, 불안증 등 정신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보고 이를 치료하는데 주력한다. 기억력 저하, 언어 능력 저하 등 인지 증상의 완화를 다루는 신경외과 외에 정신의학적 측면의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그는 “한국은 아직 치매 치료 선진국에 비해 정신의학적 접근이 더 활성화 돼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신적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환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사회가 보다 치매 친화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됐다. 그는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치매에 걸리면 그때부터는 그저 ‘치매 환자’가 된다. 이들을 모두 개별적인 인간으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은 “환자가 자꾸 집 밖을 나서 배회한다”는 토로를 하지만, 고민이 많거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산책을 나서는 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다. 문제는 배회가 아니라 환자의 심리적 불안감이라는 것. 이 불안감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치매와 사회의 화해가 시작된다. “치매국가책임제가 실시됐지만 아직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료 시스템 구축에서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치매 환자를 좀더 자주 마주칠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했으면 합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정해진 날짜와 장소에서만 읽을 수 있는 글이 서울 곳곳에 숨어 있다면 어떨까요? 서울이 표지가 되고, 글을 찾아 걷는 행위가 읽기 경험이 되는 거죠.” 출판인 모임 ‘편않’(편집자는 편집을 하지 않는다)의 정지윤 편집자(33)는 “종이책이 점점 덜 읽히는 시대에 출판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책이라는 매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편않은 기존 출판계 관행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장을 열어보자는 취지로 편집자 5명이 2016년 결성했다. 2018년 1월부터 반년마다 같은 이름의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무료로 배포하는 이 잡지는 출판계는 물론이고 일반 독자에게도 관심을 끌며 발행부수가 400부(1호)에서 900부(7호)대로 늘었다. 이들은 잡지의 인터뷰 내용을 갈무리한 단행본 ‘격자시공’을 펴내기도 했다. 정 씨와 지다율(활동명·36) 편집자, 기경란 디자이너(38)를 최근 서울 동대문구 편않 사무실에서 만났다. “편않이 제시하는 비전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희 잡지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균열이라고 생각해요. 잡지를 무료로 발행한 건 독자들이 활자를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느끼도록 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어요.”(지다율) 잡지 편않은 독자들이 “이렇게 공들인 게 왜 무료냐”고 물을 정도로 탄탄한 콘텐츠를 담고 있다. ‘편집자’(1호) ‘디자이너’(2호) 등 특정 출판직군을 비롯해 출판계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다룬 시리즈(4∼6호)를 내놓았다. 멤버들이 매달 갹출해 운영비를 대고 있다. 지 씨는 “단행본 출간에 돈이 많이 들어 최근에는 3차 추경까지 했다”며 웃었다. 외부 지원이 없다는 건 제작환경이 자유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 디자이너는 기존 책들과 차별화된 표지 디자인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번 단행본은 종이 질감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어 표지에 흔히들 하는 코팅 처리를 거치지 않고 비닐로 포장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찢고 붙이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오감만족의 책’을 꿈꾼다고 했다. 각자 소속된 출판사를 욕하다 결성된 모임이라는 농담 뒤에 숨은 이들의 진의는 무엇일까. 이들은 “출판계에 답답한 일들이 너무 많다”며 사비까지 털어 출판계를 위한 잡지를 만드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책을 사랑하는 제 모습에서 출판의 미래를 봅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요. 이 마음이 다할 때까지 새로운 독자들을 출판의 세계로 초대하기 위한 상상력과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국보 1호 서울 숭례문’이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표기가 바뀐다.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등록문화재를 표기할 때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19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에 부여됐던 지정번호는 쓰지 않는다. 이에 따라 ‘보물 1호 서울 흥인지문’은 ‘보물 서울 흥인지문’으로 표기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1962년 공포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지정된 순서에 따라 번호가 부여됐다. 하지만 지정번호는 지정 순서가 아닌 가치 순으로 오인돼 문화재 서열화 논란이 불거졌고, 문화재청은 지정번호를 삭제하기로 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CJ ENM이 영화 ‘라라랜드’ 제작사로 유명한 미국 할리우드 콘텐츠 제작사인 인데버 콘텐트(Endeavor Content)를 인수한다. CJ ENM은 19일 이사회를 열고 인데버 콘텐트의 지분 약 80%를 7억7500만 달러(약 9200억 원)에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하기로 의결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사진)이 최근 11년 만에 공식석상에 나서며 4대 미래성장 엔진을 중심으로 3년간 1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지 보름여 만에 내놓은 공격적인 투자행보다. 인데버 콘텐트는 글로벌 스포츠·엔터테인먼트 그룹인 인데버그룹홀딩스 산하의 제작 스튜디오로 영화 ‘라라랜드’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국 BBC 인기 드라마 ‘킬링 이브’ ‘더 나이트 매니저’ 등 작품성 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투자·제작·유통하는 걸로 유명하다. 세계 18개국에 거점을 두고 있다. 미디어업계는 CJ ENM이 이번 인수를 통해 글로벌 대중문화 중심지인 미국에 전초기지를 세우고 콘텐츠 기획·제작 역량은 물론 콘텐츠 유통 네트워크까지 단숨에 확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인수는 각국의 주요 플랫폼·미디어기업들 사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 회장이 4일 CJ그룹의 4대 미래성장 엔진으로 제시한 컬처(문화)와 플랫폼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CJ ENM이 SM엔터테인먼트 인수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CJ ENM이 영화와 드라마, K팝을 아우르는 글로벌 콘텐츠 제국으로 도약할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현재 인데버 콘텐트가 제작을 앞두거나 기획 중인 글로벌 프로젝트만 300건이 넘는다. CJ ENM의 디지털 플랫폼 티빙이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어서 향후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강호성 CJ ENM 대표는 “동서양 문화권을 포괄하는 글로벌 톱 스튜디오로 도약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인수가 한국 콘텐츠 경쟁력 강화로도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백인 일변도의 할리우드에 한국 콘텐츠를 많이 선보인다면 글로벌 관객들이 다채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 것”이라고 했다. 조정준 영화사 불 대표는 “봉준호 박찬욱 등 글로벌 시장에 이름을 알린 유명 감독들의 향후 작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전망했다.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 수명이 늘어났다’는 문장은 반쯤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실제로 늘어난 것은 ‘노년’이며, 이 때문에 전체 수명이 덩달아 늘어난 것뿐이기 때문이다. 생애주기의 특정 시절만 비약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은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요구했다. 이 책은 그리하여 등장한, 전에 없던 세대에 관한 이야기다. 신체적으로 건강하면서 나머지 인구보다 가진 것이 많은 ‘시니어’. 인생에도 클리셰가 있다. 청년은 도전적이야 하고 중년은 묵직해야 하며 노년은 지혜로워야 한다는 인식은 우리에게 몹시 익숙하다. 지상의 즐거움을 탐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명상에 몰두하고 지혜에서 우러나온 잠언을 생산하며 저승길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 노년에게 흔히 요구되는 ‘바람직하고 올바른’ 모습이다. 그러나 저자는 “행복한 노년의 비결은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태도에 있다”고 말한다. 길어진 노년을 버티기 위해서는 나이는 먹되 마음이 늙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영혼과 마음을 젊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욕망’이라는 것. 지금껏 노년의 욕망을 부정해 온 세상에 시니어들이 반기를 들기를 저자는 바란다. 낭만과 주름살의 화해가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액티브 시니어’라는 개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아서 저자의 이 같은 의견은 일견 진부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롭고 개방적인 프랑스인답게 그가 그리는 청사진은 우리의 상상력을 가뿐히 넘어선다. 그가 꿈꾸는 세상에서는 손주 볼 나이인 75세의 남성이 아이를 하나 더 갖고, 형제라 해도 첫째와 막내의 나이 차가 쉰 살이 날 수도 있다. 고모나 삼촌이 조카보다 마흔 살 어리고, 어머니가 자기 딸과 사위의 대리모가 되어 주는 것도 가능하다. 노인이면서 운동선수일 수 있고, 에베레스트에 도전할 수도 있다. 책의 첫 번째 챕터 제목은 전체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포기를 포기하라.” 다수의 철학자와 소설가들이 인생에 관해 남긴 말들이 현대적으로 잘 번역돼 녹아 있다는 점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프랑스 사상가 미셸 몽테뉴(1533∼1592)는 “철학은 죽음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이 생각을 “철학은 삶을 배우는 것, 특히 유한의 지평에서 다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말로 변주한다. 과거에 비해 죽음이 훨씬 더 미뤄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음을 염두에 둔 채 삶을 배우는, 보다 고차원적인 고뇌가 필요해졌다.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1835∼1902)가 남긴 “인생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를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그대로 되새겨도 무리가 없다. 인간은 끝끝내 완전히 숙련되거나 지혜로워지지 않으며, 그럼에도 인생이라는 협주곡은 무사히 완성된다. 늙은이가 어리석다고 해서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부모나 조부모의 얼굴에 문득 아이의 표정이 스치는 순간을 누구나 목격한 적이 있을 테다. 그래서 우리는 ‘50, 60, 70세가 넘어도 겉보기에나 진중할 뿐 알맹이는 그렇지 않다’는 저자의 고백이 허위가 아니라는 점을 안다. 나이에서 불필요한 부담이나 장식을 벗겨 내자. 유머와 멋으로 무장한 시니어들이 가득한 세상은 분명 훨씬 더 유쾌할 것 같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CJ ENM이 영화 ‘라라랜드’ 제작사로 유명한 미국 할리우드 콘텐츠 제작사인 인데버콘텐트(Endeavor Content)를 인수한다. CJ ENM은 19일 이사회를 열고 인데버콘텐트의 지분 약 80%를 7억7500만 달러(약 9200억 원)에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하기로 의결했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최근 11년 만에 공식석상에 나서며 4대 미래성장 엔진을 중심으로 3년간 1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지 보름여 만에 내놓은 공격적인 투자행보다. 인데버콘텐트는 글로벌 스포츠·엔터테인먼트 그룹인 인데버그룹홀딩스 산하의 제작 스튜디오로 영화 ‘라라랜드’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영국 BBC 인기 드라마 ‘킬링 이브’ ‘더 나이트 매니저’ 등 작품성 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투자·제작·유통하는 걸로 유명하다. 세계 18개국에 거점을 두고 있다. 미디어업계는 CJ ENM이 이번 인수를 통해 글로벌 대중문화 중심지인 미국에 전초기지 세우고 콘텐츠 기획·제작 역량은 물론 콘텐츠 유통 네트워크까지 단숨에 확보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번 인수는 각국의 주요 플랫폼·미디어기업들 사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이 회장이 4일 CJ그룹의 4대 미래성장 엔진으로 제시한 컬처(문화)와 플랫폼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CJ ENM이 SM엔터테인먼트 인수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향후 CJ ENM이 영화와 드라마, K팝을 아우르는 글로벌 콘텐츠 제국으로 도약할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데버콘텐트는 2017년 설립 후 HBO, BBC 등 주요 방송 채널과 넷플릭스 등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다양한 콘텐츠를 유통하면서 빠르게 성장해왔다. 현재 제작을 앞두거나 기획 중인 글로벌 프로젝트만 300건이 넘는다. CJ ENM의 디지털 플랫폼 티빙이 글로벌 OTT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어서 향후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강호성 CJ ENM 대표는 “동서양 문화권을 포괄하는 글로벌 톱 스튜디오로 도약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인수가 한국 콘텐츠 경쟁력 강화로도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백인 일변도의 할리우드에 한국 콘텐츠를 많이 선보인다면 글로벌 관객들이 다채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가 늘 것”이라고 했다. 조정준 영화사 불 대표는 “봉준호 박찬욱 등 글로벌 시장에 이름을 알린 유명 감독들의 향후 작품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성진 기자 psjin@donga.com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국보 1호 서울 숭례문’이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표기가 바뀐다. 문화재청은 국가지정·등록문화재를 표기할 때 지정번호를 사용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문화재보호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을 19일부터 시행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국보 보물 사적 천연기념물 등에 부여됐던 지정번호는 쓰지 않는다. 이에 따라 ‘보물 1호 서울 흥인지문’은 ‘보물 서울 흥인지문’으로 표기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1962년 공포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지정된 순서에 따라 번호가 부여됐다. 하지만 지정번호는 지정 순서가 아닌 가치 순으로 오인돼 문화재 서열화 논란이 불거졌고, 문화재청은 지정번호를 삭제하기로 했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2021 여초서예대전을 개최하는 인제군문화재단이 30일까지 출품작 접수를 한다. 이 대회는 인제군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여초서예관이 주관하며 동아일보사가 후원한다. 여초서예대전은 근현대 한국의 서예 대가인 여초(如初) 김응현(1927∼2007)의 서법 정신을 기리는 서화 예술경연대회다. 서예 연구단체 동방연서회와 동아일보사가 1961년 국내 최초 휘호(揮毫) 대회인 ‘전국 남녀 초중고등학교 학생휘호대회’를 개최한 게 시초다. 1966년 대학부가 증설돼 ‘전국학생휘호대회’로 자리 잡았다. 2000년 40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가 2015년 ‘여초선생 추모 전국휘호대회’를 신설한 여초서예관이 2018년 전국학생휘호대회를 부활시켜 해마다 대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제7회 여초전국휘호대회(성인부, 기로부), 제44회 전국학생휘호대회(학생부), 제1회 하늘내린 캘리그래피 휘호대회(성인부)까지 총 3개 세부 대회로 구성된다. 성인부는 20세 이상, 기로부는 70세 이상(성인부로도 지원 가능), 학생부는 8∼19세가 대상자다. 여초전국휘호대회와 전국학생휘호대회에는 한글 한문 문인화 전각을, 캘리그래피 휘호대회에는 캘리그래피를 출품하면 된다. 자유 주제로 작품을 내면 1차 심사로 본선 진출자를 선정하고, 본선 진출자는 추후 공지하는 대회장에 모여 주최 측이 제시하는 주제로 작품을 완성해 2차 심사를 받는다. 성인부 대상 500만 원을 비롯해 680여 명에게 총 3200만 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여초서예관으로 문의하면 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화창한 올 5월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 딸을 키우는 박미소 씨(38)는 아이를 등교시키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주방에서 술과 술잔을 꺼냈다. 시계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지각 있는 애주가’가 아닌 알코올중독자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박 씨는 그 길로 병원을 찾아 치료를 시작했다. 퇴직 이후 전업주부의 삶을 산 지 꼭 5년 만이었다. 최근 에세이 ‘취한 날도 이유는 있어서’(반비)에 자신의 알코올중독 극복기를 담은 그를 15일 만났다. “혼자 주방에서 홀짝홀짝 술을 마시는 주부를 ‘키친 드링커’라고 합니다. 육아와 가사노동에서 별다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자 저도 어느새 키친 드링커의 길로 빠지게 됐죠.” 박 씨는 10년간 잡지와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2016년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전업주부가 됐다. 직업 특성상 자주 술을 접했던 그는 일을 그만둔 뒤에도 스트레스를 술로 풀게 됐다. “자신의 알코올 의존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시간대로 가늠할 수 있어요. 저도 술을 야식에 곁들이는 수준에서 저녁 반주, 낮술, 급기야 아침에 술을 마시게 됐거든요.” 그는 한때 사회생활을 하다 전업주부가 된 경력 단절 여성들은 알코올중독의 유혹에 더욱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미디어에서 그려지는 소위 ‘능력 있는 여성’은 으레 남성 직원들을 능가하는 주당으로 그려지기 마련이어서 술은 잘 마시고 보는 게 미덕이라는 학습을 하게 되기 때문. 그는 “나 역시도 술자리에서 여성이 술을 거절하면 ‘여자라 안 마시고 뺀다’는 비난이 날아오는 환경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젊은 여성 알코올중독자’에 대한 곱지 않은 사회적 시선은 키친 드링커들로 하여금 술을 숨어서 마시게 한다. 그리고 이는 중독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을 지체시킨다. 박 씨는 알코올중독은 우울증 증세의 하나인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우울증이 부끄러운 병이 아니라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되는 질병인 것처럼 알코올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에 술을 몇 번 마시냐’는 건강 검진 문진표의 질문이 양심에 찔리시나요? 그때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시작해야 할 시기입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와, 여기 책장 안에서도 책 볼 수 있어!” “나랑 젠가 할 사람?” 11일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개관한 ‘금성면 작은도서관’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학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하나둘 이곳을 찾아 들어온 것. 아이들의 발길이 향한 곳은 출입문을 열자마자 맞은편에 보이는 ‘키즈존’이었다. 편하고 아늑하게 책을 볼 수 있도록 빈백 소파와 책장 속 독서 공간이 마련된 이곳에서 아이들은 책을 읽고 보드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도서관은 지역 주민도 이용할 수 있는 금성면의 유일한 도서관이다. 학교 도서관 외에는 도서관이 없어서 그동안 주민들은 책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면 금성면 이외의 지역으로 책을 사러 나가든지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해야 했다. 도서관을 찾은 조명희 씨(62·여)는 “금성면은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도 3, 4일이 걸린다. 도서관 덕에 책과 훨씬 친해질 수 있겠다”고 했다. 우준범 군(10)은 “마을에 도서관이 생긴 게 진짜 신기하다. 도서관이 학교보다도 더 가까워서 자주 놀러 올 것 같다”고 말했다. 금성면 작은도서관은 사단법인 작은도서관만드는사람들(대표 김수연 목사)과 의성군이 주관하고 KB국민은행과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했다. 과거 금성면 농업경영인협회 사무실로 사용하던 공간을 협회가 이전하며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연면적 114m²(약 34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금성면 중심에 자리해 접근성이 뛰어나다. 이금란 씨(60·여)는 “주민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 도서관이 생겨서 오며 가며 자주 들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도서관에는 벌써 2582권의 책이 채워졌다. 도서관이 주안점을 둔 독자는 어린이와 어르신이다. 사서 김정미 씨는 “어린이 인구가 많지 않지만 금성면에 어린이를 위한 복합 문화 공간이 없어서 동화책과 그림책을 마련하고 어린이 공간을 조성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설명했다. 박지우 양(11)은 “처음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 ‘와!’ 하는 탄성이 나왔다. 무엇보다 친구들이랑 같이 엎드린 채 얘기하며 책을 읽을 수 있어 좋다”며 웃었다. 금성면은 노인 인구가 많은 편에 속해 어르신을 위해 큰 글씨 책을 꽂은 책장도 마련했다. 전체 책의 20∼30%가 큰 글씨 책으로, 이는 다른 도서관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비율이다. 주민들이 오래 도서관을 잘 사용할 수 있게 고급 목재로 책장과 책상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60년 이상 살았다는 신원호 씨(72)는 “금성면에 사는 동안 도서관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 도서관이 우리 지역의 문화 수준을 올려줄 것 같다. 종종 들러 시집을 빌려다 볼 생각이다”고 말했다. 의성=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사용자 경험 개선, 데이터 분석, 타 사이트, 앱, 뉴스레터 등에서 맞춤형 광고를 제공하기 위해 쿠키를 설치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불쑥불쑥 뜨는 이 문구에 많은 이들이 ‘동의’ 메뉴를 클릭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보가 제공되는지 알 수 없어도 해당 웹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이에 동의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그러나 무심결에 응한 선택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이 책에 따르면 뉴욕타임스 홈페이지에 접속한 이용자가 동의를 선택한 순간 추적기 소프트웨어 21개가 일제히 실행된다. 추적기란 이용자가 어떤 웹사이트에 방문하고 어떤 콘텐츠를 소비하는지를 감시하는 컴퓨터 코드를 말한다. CNN 사이트의 추적기는 28개, 영국 타블로이드 매체 더선을 통해 깔리는 추적기는 35개에 달한다. 추적기가 수집한 이용자 데이터는 수천 개의 광고회사로 팔려나간다. 이에 따라 이용자는 호기심에 한두 번 검색해 본 신발이나 옷 광고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른 웹사이트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의 호기심이 소비로 이어지면 동의 버튼에서 비롯된 추적기 임무는 성공한 셈이다. 인터넷 이용자들의 개인정보를 활용한 사업규모는 어마어마하다. 구글 모기업 알파벳은 2018년 4분기에 393억 달러(약 46조 원)의 매출을 올렸는데, 이 중 이용자 정보를 통한 광고수입이 326억 달러(약 83%)를 차지했다. 페이스북도 2018년 4분기 매출액 169억 달러 중 166억 달러(약 98%)를 광고로 벌어들였다. 저자는 “21세기는 아마존이 신용카드이고 페이스북이 신분증인 시대”라고 지적한다. 인터넷 시대에 한발 앞서 진출한 사업자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저자는 “인터넷 이용자가 실제로 어느 회사에 어떤 개인정보가 넘어가는지도 모르고 동의 메뉴를 선택하는 걸 거대 인터넷 기업과 광고회사도 알고 있다. 이는 기만”이라고 비판한다. 이용자가 정보제공에 동의하는 순간 자신의 집 주소까지 수천 군데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활발한 정보수집이 이뤄질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이는 거대 인터넷 기업의 독점이라는 폐해로 이어진다. 수십억 명의 이용자 데이터를 확보한 거대 기업들은 이를 무기로 다른 기업들의 시장 진입을 막고 기존 산업 생태계를 파괴한다. 국내에서도 최근 카카오, 네이버, 쿠팡 등 플랫폼 기업들의 무차별적 시장 진출이 논란이 되고 있다. 택시, 대리운전, 꽃배달 서비스 등에 이어 온갖 업종과 상권을 플랫폼 기업들이 장악할 여지가 커지고 있다는 것. 인터넷 사회에 도사린 독점과 감시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캠핑 떠날 때 도마와 접시를 각각 챙기지 않아요. 도마도 접시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최근 에세이 ‘작은 캠핑, 다녀오겠습니다’(휴머니스트)를 펴낸 이수현 여행작가(36)는 지난달 19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등이 배기지 말라고 들어있는 배낭용 등판매트는 추운 캠핑장에서는 훌륭한 방석이 될 수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경우 캠핑에 빠져들수록 짐은 점점 줄었다고 한다. 9년 전 캠핑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배낭에 짐을 잔뜩 챙긴 백 패킹(캠핑 장비를 넣고 다니며 숙박과 음식을 해결하는 것)을 즐겼다. 그때는 가방을 싸는 데만 3시간이 걸렸지만 요즘은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는 그동안 익힌 ‘작은 캠핑’의 노하우를 신간에 담았다. “캠핑의 목적이 휴식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짐을 싸고 푸는 시간, 캠핑장에서 세팅하고 철수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자연 속에서 쉬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어요.” 요즘도 주말마다 곳곳으로 캠핑을 떠나는 그는 캠핑을 막 다니기 시작한 이들이 어마어마한 용품에 질리는 상황이 안타까웠단다. 캠핑용품이 많아지면 이를 늘어놓거나 다시 챙기는 데 드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캠핑장에 가보면 우리 부부가 짐을 모두 풀고 한참 쉬고 있을 때까지 장비를 세팅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물론 어떤 캠핑용품은 꼭 필요하고 어떤 건 버려야 한다는 식의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그는 캠핑족들의 선택지를 늘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는 “대개 텐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해먹이나 그늘막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음식 재료도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면 짐이다. 그는 캠핑 요리도 가볍고 손이 덜 가는 게 최선이라고 말한다. 산속에서 즐기는 바비큐 파티도 좋지만 작은 프라이팬에 재료를 올리고 가열만 하면 되는 미니 피자나 브리치즈 구이를 최고로 친다. 그는 “일상에서 벗어난 경험을 하는 게 캠핑의 묘미다. 김치찌개나 삼겹살을 먹는 것보다는, 간단하지만 이색적인 메뉴를 해먹는 게 더 즐겁더라”며 웃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저는 캠핑을 떠날 때 도마와 접시를 따로 챙기지 않아요. 도마도 접시의 기능을 할 수 있거든요. 등이 베기지 말라고 들어 있는 배낭 등판의 푹신한 매트는 추운 캠핑장에서 훌륭한 방석이 될 수 있답니다.” 여행작가 이수현 씨(36)가 캠핑을 떠나기 위해 싸는 짐은 그가 캠핑을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더 가벼워졌다. 그는 9년 전 처음 캠핑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도 배낭 안에 모든 짐을 넣어 떠나는 백패킹(배낭안에 캠핑에 필요한 장비를 넣고 다니며 숙박 및 음식을 해결하는 캠핑 방식)을 즐겼다. 초보 시절엔 가방 싸는 데만 3시간이 걸렸다면 지금은 30분이면 컴팩트한 배낭 완성이다. 이 씨는 최근 출간한 에세이 ‘작은 캠핑, 다녀오겠습니다’(휴머니스트)에 그 동안 쌓인 ‘작은 캠핑’ 노하우를 꾹꾹 눌러 담았다. 19일 그를 전화로 인터뷰 했다. “캠핑의 목적이 휴식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짐을 싸고 푸는 시간, 캠핑장에서 세팅하고 철수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자연 속에서 쉬는 시간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어요.” 요즘도 매주 주말마다 이곳저곳으로 캠핑을 떠나는 이 씨는 막 캠핑을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캠핑 용품 탓에 쉽게 질려버리는 상황이 안타까웠다고 한다. 캠핑 용품이 많아지면 자연스레 세팅과 철수 시간도 길어진다. 이 씨는 “캠핑장에 가 보면 저희 부부가 짐을 다 풀고 한참 쉬고 있을 때까지 세팅하고 있는 분도 많다”고 했다. 물론 어떤 용품은 꼭 필요하고, 어떤 용품은 버려야 한다는 등 정답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씨는 선택지를 늘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텐트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해먹이나 그늘막으로 대체할 수도 있다. 침낭도 이불로 대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음식 재료도 많아지면 짐이다. 이 씨는 캠핑 요리도 무엇보다 가볍고 손이 덜 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산속에서 즐기는 바비큐 파티도 좋지만 작은 프라이팬에 재료를 올리고 가열만 하면 되는 미니피자나 브리 치즈 구이 등이 이 씨가 꼽은 가장 사랑하는 메뉴다. 그는 “일상을 벗어나 비일상적인 경험을 한다는 점 또한 캠핑의 묘미다. 김치찌개나 삼겹살을 먹는 것보다는 간단하지만 이색적인 메뉴를 먹는 게 경험 상 더 즐거웠다”며 웃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평생 유일하게 계속해온 것은 책읽기뿐입니다.” 30년 가까이 법관으로 살아온, 그래서 여성 최초의 대법관과 국민권익위원장이 된 김영란 전 대법관(65). 이런 타이틀 너머로 만난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독서광’이었다. 몸에 밴 특유의 독서 습관이 있다는 것부터 스마트폰이나 넷플릭스에 책 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데 슬픔을 느끼는 것까지 독서 애호가들의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 자신의 삶을 구성했던 독서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시절의 독서’(창비)를 최근 펴낸 그를 지난달 28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을 초등학교 때 읽었어요. 그때는 책이 귀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닥치는 대로 읽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읽느라 노는 것도 잊을 정도였어요.” 김 전 대법관의 책에 대한 사랑은 판사 시절에도 사그라지지 않아 주변의 의아함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는 “너는 판사인데 왜 소설을 읽느냐”는 동료 판사들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길 판사가 재판하는 건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작업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이번 책에서 그는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의 ‘금색공책’ ‘생존자의 회고록’ 등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여성주의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힌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성’을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암울한 예측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영상 매체를 통해 남이 상상한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지만 책을 통해 나만의 상상력을 펼쳐보는 것도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 줄 겁니다.”수원=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책을 읽을 때 줄을 칠 연필이 없으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이 볼펜으로 줄을 치면 틀림없이 후회가 밀려오지요. 읽은 책을 다시 보면 다른 곳에 밑줄을 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볼펜은 수정할 수가 없으니까요” 대법관이나 권익위원장의 타이틀이 아닌 김영란 전 대법관(65)의 모습은 영락없는 ‘독서광’이었다. 몸에 벤 특유의 독서 습관이 있다는 것부터 스마트폰이나 넷플릭스에 책 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데 슬픔을 느끼는 것까지 독서 애호가들의 마음과 꼭 닮아 있었다. 김 전 대법관은 21일 자신의 삶을 구성한 독서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 ‘시절의 독서’(창비)를 펴냈다. 그를 28일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에 있는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이방인’을 초등학교 때 읽었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는 책이 귀해서 집집마다 책이 꽂혀 있지 않았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닥치는 대로 읽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김 전 대법관은 30년 가까이 한국사회의 최전선에서 법률가로 살아왔으면서도 평생 유일하게 계속해온 것이 책읽기뿐이라고 말할 정도로 열정적인 애독가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가도 책장에 꽂힌 세계문학전집을 읽느라 노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책에 대한 사랑은 판사 생활을 할 때도 사그라들지 않아 선후배들의 의아함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는 “너는 판사인데 왜 소설을 읽느냐”는 동료 판사들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길 판사가 재판하는 건 독자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 재판 당사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작업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이번 책에서 그는 영국 소설가 도리스 레싱(1919~2013)의 ‘금색공책’, ‘생존자의 회고록’ 등의 소설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여성주의적 시선을 엿볼 수 있었다고 밝힌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성’은 관료주의 세계에 대한 암울한 예측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이전 세대의 문인이 남긴 글들 중 여전히 의미 있는 고전들에 대해 김 전 대법관은 “여러 작품 중에서도 보편적인 인간 삶의 단계를 호소하는 작품들이 생명이 긴 것 같다”고 말했다. 영상 매체와 인터넷이 스토리텔링과 정보 제공의 영역까지 모두 장악한 시대. 어린 시절엔 책을 읽다 잠에 드는 게 일상이었던 그 역시도 요새는 저녁에 스마트폰으로 메신저와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날이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책이라는 매체만이 줄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을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에 가는 것과 같습니다. 영상 매체를 통해 남이 상상한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지만 책을 통해 나만의 상상력을 펼쳐보는 것도 충분히 짜릿한 경험을 선사해 줄 겁니다.”수원=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반들반들한 금속 몸체에 뻥 뚫린 눈, 상·하체를 잇는 전기배선.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를 본 사람이라면 이 인상적인 로봇 C-3PO를 기억할 테다. 스타워즈의 모든 시리즈에 등장하는 C-3PO는 스카이워커의 충직한 집사로, 어설픈 외양과 달리 비범한 능력을 갖췄다. 예민하면서도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1977년 첫 시리즈 개봉 당시 일부 관객들은 로봇의 움직임이 너무도 기계적이어서 제작진이 최첨단 기술로 정교한 로봇을 개발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30대의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앤서니 대니얼스(75).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C-3PO를 사람이 연기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실적인 연기를 펼쳤다. 관객이 C-3PO를 진짜 로봇으로 생각하는 게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제작사는 4번째 시리즈 크레디트에서 그의 이름을 빼버렸다. 이 책은 이런 사연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슈퍼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은 대니얼스의 자서전이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 대니얼스가 아닌 C-3PO로 통한 그는 당시 느낀 설움을 조심스레 풀어놓는다. 이를테면 대본이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와 C-3PO’로 표기되는 등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걸 볼 때마다 그는 약간의 좌절감을 느꼈단다. 당시 그는 ‘내 존재가 이렇게까지 지워지다니, 혹시 촬영 때 프로답지 못한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종종 빠지곤 했다. 하지만 천재 감독으로 칭송 받던 조지 루커스와의 작업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C-3PO는 스타워즈 전 시리즈에 등장하는 유일한 캐릭터다. 현장에서의 설움과는 별개로 저자는 C-3PO와 스타워즈 시리즈를 깊이 사랑했다. 원작 소설의 애독자였던 그는 자신이 열 살 때 C-3PO를 책에서 처음 만난 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제작 뒷얘기가 궁금한 ‘찐팬’들이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웹 드라마인 줄 알고 재생한 영상에서 걸그룹 소녀시대의 수영이 배우 최태준과 함께 예능 프로그램 홍보 포스터를 촬영하고 있다. 여느 촬영 현장과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노골적인 냉기류가 흐른다. 예능 프로그램 제목은 ‘그래서 나는 안티 팬과 결혼했다’. 동명의 웹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상 TV 프로그램이다. 올 4∼6월 32부작에 걸쳐 방영된 이 드라마는 웹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국내에선 네이버TV에서 회당 조회수가 50만 회를 넘겼다. 아이치이(iQIYI), 비키(VIKI), 아마존 프라임 재팬 등 해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세계 190개국에 소개됐다. 인기 아이돌 출신 배우와 참신한 이야기에 힘입어 올 6월까지 드라마 부문 아이치이 1위, 비키 2위에 각각 올랐다. 드라마는 K팝 톱스타인 주인공 ‘후준’과 한순간의 사고로 그의 안티 팬으로 알려지게 된 ‘근영’의 이야기다. 두 주인공이 가상 결혼 예능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뤘다. 드라마 제작사 가딘미디어의 전주예 기획이사는 “원작 웹 소설이 TV 프로그램을 소재로 삼다 보니 영상화하기에 좋았다”고 말했다. 제작사는 동명의 웹 소설이 처음 연재된 2008년부터 눈여겨보다 2018년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전 이사는 “톱스타나 그의 팬이 아닌 ‘안티 팬’을 주인공으로 앞세웠다는 점에서 스토리가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TV 예능 프로그램을 주된 소재로 다루는 만큼 ‘황금어장 무릎팍도사’(2012∼2013년)와 ‘비정상회담’(2014∼2017년)의 방송작가를 지낸 남지연 작가가 드라마 제작에 참여했다. 원작자인 김은정 작가도 영상매체의 문법에 맞게 각색에 참여했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캐릭터의 성격을 조정했다고 한다. 김 작가는 “소설은 주인공을 도도한 톱스타와 냉철한 기자 출신의 안티 팬으로 설정했다. 각색 과정에서 보다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듬기 위해 귀여운 매력을 갖춘 인물들로 다듬었다”고 설명했다. 전 이사는 “근영이 사귀던 남자친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는 장면이 원작에는 없는데 삽입했다. 인간적 면모를 부여해 근영의 캐릭터를 보다 입체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말했다. 웹 소설은 전개가 빠르면서도 한 회에서 하나의 작은 이야기가 일단락된다는 점에서 드라마와 호흡이 비슷하다. 이 때문에 ‘내 이름은 김삼순’(2005년) ‘커피프린스 1호점’(2007년) ‘해를 품은 달’(2012년) 등 웹 소설들이 드라마 제작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전 이사는 “웹 드라마 공개 후 반응이 좋아 연재가 끝난 웹 소설 일부 내용이 드라마 내용을 반영해 수정됐다. 이제는 영상 콘텐츠가 원작에 역으로 영향을 주는 시대”라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3남매 중 막내인 설지영 씨(33·여)에게는 아홉 살 터울의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중 3 때 조현병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부모는 이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설 씨는 오빠의 양육자로 10년 넘게 살았다. 오빠가 유일하게 그의 말만 들었기 때문. 폭력성을 보이거나 생떼를 쓰는 오빠를 다른 가족들은 안쓰러워만 할 때 설 씨는 “안돼! 하지 마!”를 외치며 막아섰다. 몇 년 전 오빠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부모와 언니가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 오빠를 받쳐 안고 마지막 호흡을 도운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는 오빠의 호흡이 끊긴 뒤에야 “사랑한다”는 말을 귓가에 속삭일 수 있었다. 이로써 그의 삶에서 장애와 관련된 것들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설 씨는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착한 동생’이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계속 시달렸다. 자폐성 장애를 앓는 형제를 둔 친구 이은아 씨(32·여)가 “비장애 형제를 돕는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설 씨가 선뜻 응한 이유다. 두 사람은 비장애 형제인 박혜연(29·여) 송서원 씨(27·여)와 2016년 정신장애인의 비장애 형제를 돕는 모임 ‘나는’을 만들었다. 이들에게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돕는 모임이 필요했던 이유는 이렇게 설명된다. “우리 사회에서 비장애 형제는 가족을 돕는 ‘천사 같은 아이’나 장애 형제를 부정하는 반항아 정도로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비장애 형제들은 정체성에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죠.”(박혜연). 이는 신체장애인 형제를 둔 이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다. ‘나는’은 매주 비장애 형제 5, 6명으로 구성된 소모임 3, 4개 팀을 운영한다. 궁극적인 목적은 비장애 형제들이 장애 형제를 비롯한 가족들로부터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미국의 알코올 의존증 환자 모임 ‘AA(Alcoholics Anonymous)’의 진행 형식을 빌려 각자의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고 아픔을 쓰다듬는다. 대부분의 비장애 형제들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도 ‘내가 이런 한가한 고민을 품어도 되나’ 하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나는’은 이런 고민은 당연하며 해결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최근 신간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한울림스페셜)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더 널리 알리고 있다. 비장애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문제점 중 하나는 ‘나’와 ‘비장애 형제’라는 두 자아 사이의 괴리다. 전자만 발달하면 장애 형제로부터 도망치고 싶게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신의 진로를 사회복지사나 특수교사로 한정짓는 등 삶 전체를 장애 형제를 위해 바치게 된다. 송 씨는 “나는 비장애 형제라는 자아로 오랜 세월을 살았다. 두 자아의 균형을 맞추고 궁극적으로는 일치시켜야 심리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은 장애 가정의 부모를 대상으로도 1년에 6, 7회씩 비정기 교육을 진행한다. 지친 부모들이 자신도 모르게 비장애 자녀에게 부담과 아픔을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등학생인 비장애 자녀에게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라며 기대기도 하고, 장애 자녀의 돌봄 역할을 맡기기 위해 동생을 낳는 경우도 있다. 이 씨는 “‘뭐든지 잘하는 고마운 자식’ 같은 말들도 비장애 형제에게는 짐”이라며 “비장애 자녀가 어려움을 호소할 때 귀를 기울여주기 바란다”고 말했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개와 고양이를 모두 길러 본 사람이라면 두 동물이 남긴 물그릇 주변이 서로 완전히 딴판이라는 사실을 알 테다. 얼핏 보면 비슷한 방식으로 물을 마시는 것 같지만 개의 물그릇 주변에는 물난리가 나는 한편 고양이 물그릇 주변은 물 한 방울 없이 깔끔하다. 왜 그런 걸까.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에서 과학적 호기심을 발동시킨 생활밀착형 과학책 2권이 출간됐다. ‘개와 고양이의 물 마시는 법’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온 동식물의 모습을 유체역학의 시각으로 살펴보고 알아두면 쓸 데 ‘있는’ 흥미로운 과학지식을 전달한다. 개와 고양이 물그릇의 비밀은 바로 이들의 ‘혀’에 있다. 개와 고양이 모두 혀를 물에 댔다 떼 표면장력으로 혀끝에 달라붙은 물을 마신다. 개는 혀를 말아서 국자 모양으로 만들어 물에 푹 담그는 반면 고양이는 혀를 세워 끝만 살짝 물에 대는 것이 차이점. 이 과정에서 개의 혀에 고였던 물은 대부분 다시 흘러나와 자연스레 물그릇 주변이 지저분해진다. 저자는 개와 고양이의 신체 특징 및 기본성격에서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다소 활발한 성향의 개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장구도 치지만 고양이는 물을 매우 싫어한다. 고양이 헤엄이나 개 세수가 없는 이유다. 이런 식의 관찰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실 인간은 동물의 생김새와 신체 활용 방식에서 수많은 발명품의 영감을 얻어 왔다. 복어의 한 종류인 거북복은 ‘상자 물고기’라는 별명을 가진 네모난 형태의 물고기다. 거북복이 뒤집히거나 흔들리는 일 없이 다른 물고기보다 더 안정적으로 수영하는 이유를 과학자들은 거북복의 독특한 체형이 주위에 발생시키는 물 소용돌이에서 찾았다. 이 발견은 초음속 여객기의 하나인 콩코드 여객기나 우주왕복선 같은 삼각 날개 항공기에 적용됐다. 식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를 로봇에 적용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오이 호박 포도 같은 덩굴식물은 줄기가 물체에 닿으면 그 반대편 세포의 생장 속도가 빨라져 곧게 자라지 않고 물체 쪽으로 휜다. 이탈리아 공학 연구소의 연구진은 최근 덩굴식물에서 영감을 얻어 유연한 소재로 만들어 잘 휘는 소프트 로봇을 개발했다. 덩굴손이 액체를 이용한 삼투 현상으로 세포 내 팽압을 조절한다는 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연구진은 탄소 전극에 이온을 흡착시키는 방식으로 이온 액체를 이동시켜 로봇의 작동을 구현했다. 이번엔 동식물 대신 사물로 눈을 돌려 보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휴대전화 케이스, 유리잔, 신발 밑창의 고무 등…. ‘소재, 인류와 만나다’의 저자는 우리 눈에 밟히는 다양한 물건의 소재에 집중해 해당 소재를 우리 인간이 언제부터 활용했고, 이것이 인간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친절하게 알려 준다. 20세기까지의 소재 역사는 돌부터 플라스틱까지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날카로운 것이 필요했던 최초의 인류는 돌을 깎음으로써 자연물을 ‘소재화’하는 법을 터득했고 금속, 콘크리트, 유리, 고무 등을 거쳐 20세기 기적의 신소재인 플라스틱까지 왔다. 저자는 인류가 풀어야 할 숙제도 함께 짚는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해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총 질량이 2020년을 기점으로 자연에서 만들어진 생명체의 총 질량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는 것.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생활 속 과학지식에 목마른 이들에게 두 책을 권한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에세이 ‘숨 쉬러 숲으로’(문학수첩)를 15일 출간한 장세이 씨(44)는 요새 제주 곶자왈과 오름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숲 덕후’인 장 씨는 20여 년간의 잡지 기자, 편집자 생활을 잠시 쉬기로 하고 지난해 12월 서울에서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한 해 살이 중이다. 어릴 때부터 숲을 좋아하던 그는 2014년 산림청의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종로구 창덕궁 옆에 생태 책방 겸 문화공간인 ‘산책아이’를 열어 생태 고전을 판매하고 각종 생태 관련 강좌를 기획하기도 했다. 숲의 무엇이 그를 이토록 매료시켰을까. 18일 그의 이야기를 전화인터뷰로 들어봤다. ―숲과 나무를 언제부터 좋아했나. “고향이 부산의 평야지대다. 어린 시절 살던 집 주변에는 논밭이 드넓게 깔려 있어서 땅의 얼굴을 보고 계절의 변화를 알았다. 모내기 풍경이 보이면 봄이었고 황금밭이 펼쳐지면 여지없이 가을이었다. 시장에서 채소나 과일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필요한 음식들은 대부분 우리 밭에 있었다.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20년 이상이 흐르자 다시 자연이 간절해졌다.” ―숲 해설가라는 직업은 아직 생소한데…. “나도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직업이다. 어느 날 정처 없이 종로를 걷다 빌딩숲이 너무 지겨워서 인터넷 창을 열고 자연을 배울 수 있는 강좌를 찾아봤다. 한 달짜리 입문 교육을 먼저 받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이 가르쳐서 마음에 쏙 들었다. 수종을 달달 외우게 하는 게 아니라 숲을 걸으며 배운 지식을 바로 접목할 수 있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소나무를 올려다보게 하고 하늘이 얼마나 보이느냐에 따라 아픈 나무인지 건강한 나무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는 식이다. 그래서 전문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숲 해설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숲 해설가는 추천하고픈 직업인가. “아직 안정적인 자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여파로 공원이나 숲에서 운영하던 숲 해설 프로그램도 많이 닫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자격증 교육 기관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이기는 하다.” ―산책아이에서는 어떤 활동들을 했나. “2015년 시작해 지난해 코로나 여파로 문을 닫기 전까지 한국의 좋은 생태 수필, 그림책을 수집해 판매하고 생태 강좌를 50∼60회 열었다. 나무나 풀 같은 일반적인 주제부터 박찬일 셰프에게 듣는 음식 재료로서의 풀, 성석제와 장석주 등 문학 작가들이 말하는 문학 속의 자연 등 한 분야에 특화된 주제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뤘다.” ―제주도에서는 어떻게 지내나. “휴식이 간절해서 제주도에서 한 해 살이 중이다. 남부지방이라 서울과는 식생이 달라 재미나다. 수종도 다양하고 서울과는 다른 지질과 기후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곳에서도 숲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답사 모임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 날씨에 자연의 정취를 느끼기 좋은 곳을 추천한다면…. “서울 종로구의 창경궁을 추천한다. 제주에 사는 남부 수종부터 북한의 국화(國花)인 함박꽃나무까지 별별 나무들이 다 있다. 창경궁이 아주 크지는 않아 위압적이지 않다는 점도 매력이다.”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