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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내 사랑. 내일 만나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말 77년을 함께한 부인 로절린 여사를 먼저 보내며 이런 작별 인사를 했다. 당시 99세의 카터는 오랜 암 투병 끝에 1년 가까이 호스피스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내일 만나자’는 말처럼 카터 역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1년을 더 살았다. 100번째 생일까지 보내고 29일 부인의 뒤를 따랐다. 미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이다. ▷카터가 대통령에 오른 1976년은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장기화로 정부 불신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조지아주 주지사(민주당)로 중앙 정치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절대 거짓말하지 않겠다’는 공약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워싱턴 정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동 불안을 관리하지 못해 오일 쇼크가 생기며 심각한 인플레이션으로 번졌다. 취임 전 6%대이던 물가 상승률이 13%까지 올랐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세력이 미 대사관을 점령해 미국인 52명을 400일 넘게 억류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겹쳤다. 결국 로널드 레이건에게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무능한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았던 카터지만 퇴임 후엔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으로 불렸다. 프리랜서 외교관으로 쿠바, 보스니아 등 세계를 누비며 평화 중재자로 활약했다.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전쟁 위험이 고조되던 1994년 북한을 방문해 북핵 동결을 이끌어내는 등 분쟁 해결에 힘쓴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서민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탯 운동’에도 몸소 참여해 90대가 돼서도 공구를 들고 현장을 오갔다. 정치엔 실패했을지 몰라도 지도자로선 성공한 삶이었다. ▷미국인들은 카터에 대해 아무리 불리한 상황도 정직하게 해결하려 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지지율이 저조하던 집권 3년 차,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각 분야 전문가 150명을 초대해 10일 동안 조언을 듣는 ‘국내 정상회담’을 한 것도 그런 예다. 끝내 정국을 돌파하진 못했지만 최대한 귀를 열고 답을 찾으려 했던 노력만큼은 인정하는 것이다. 그의 퇴임 후 활동에 국민들이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을 거의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선 부러운 일이다. ▷현직은 짧고 여생은 길다. 카터의 대통령직은 4년 만에 끝났지만 이후 40년간 그는 보통 사람들의 롤 모델이었다. 록 음악을 사랑한 그는 밥 딜런 같은 록 스타 ‘절친’들과 자주 만났고, 종종 야구장을 찾아 고향 팀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경기를 즐겼다고 한다. ‘내가 이룬 모든 것에서 동등한 파트너였다’는 부인과는 70년 넘게 해로했다. 재선한 대통령들 중에도 존경받지 못하는 노후를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카터의 인생 2막은 삶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장(89·예비역 중장)은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군 투입 지시를 거부한 장군이다. 당시 최정예 특수부대를 지휘하는 특전사령관이었던 민 전 교장은 계엄령 예고와 함께 군 병력을 준비시키라는 대통령에게 명령 취소를 요청했다. 무력 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해야 할 특전사령관의 반대로 군 동원은 무산됐고 얼마 뒤 6·29 민주화 선언이 나왔다. 당시 독재 반대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지 않았던 데는 민 전 교장의 항명도 한몫을 했다.1989년 퇴역한 민 전 교장은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주택에서 52년째 살고 있다. 최근 그의 집을 방문해 신발을 벗고 발을 딛는데 바닥이 얼음장 같았다. 낡은 집이라 난방비 부담이 커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고 했다. 카디건 차림의 그는 코트를 벗으려는 기자에게 “괜찮다. 입고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기자는 코트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서재 바닥에 그와 마주 앉았다.―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를 어떻게 보나.“터무니없는 과잉 조치다. 계엄을 하려면 요건이 있다. 전시에 준할 정도로 나라가 위태로워야 하는데 그건 아니었잖나. 최고 권력자가 마음대로 계엄을 선포하는 건 독재국가에서나 하는 짓이다.”―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도 있었다.“정치적인 범죄다. 국회가 계엄에 반대하면 취소해야 한다고 헌법에 나와 있는데 그걸 피하려고 했던 거 아닌가. 검찰총장까지 했으면 그 정도는 알 텐데 무식한 사람이나 할 짓을 했다.”―대통령의 지시를 사령관들이 대체로 따랐다.“장군은 맹종하면 안 된다. 눈 밖에 안 나려고 계엄 관련 지시를 군소리 없이 따랐다면 그건 장군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군 통수권자 지시여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장군은 윗사람 지시가 아니라 헌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헌법 정신을 늘 체화하고 있어야 한다. 이번 계엄 지시는 당연히 따르지 말았어야 할 명령이다.”―그러다 항명죄로 처벌될 수 있지 않나.“그게 두렵다면 장군이 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이나 국방부 장관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장군이라면 ‘노’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투원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전략을 구사하는 장군은 다르다.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으로 군을 이용하려 들 수 있다. 장군은 거기에 놀아나지 않고 군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위법한 지시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그럴 때 정확히 판단하라고 참모가 있는 것이다. 법무장교들 있지 않나. 지휘관 혼자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으니 장군으로서 책임감 있게 결심하라고 참모 조직을 둔 것이다.”―이제 와서 책임을 위로 넘기려는 장군들이 있다.“(계엄 관련 지시가 부당하다는 걸) 알고 한 일 아닌가. 군소리 없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걸 피하려고 발버둥 치면 이중 삼중으로 자격 없는 사람들이다.”―현장 투입 장병들은 지시에 소극적으로 임했다.“원래 전투원은 명령에 따르는 게 원칙이다. 지시가 맞는지 갑론을박하면 작전이 실패해 더 큰 희생을 치를 수 있다. 다만 더 중요한 건 장군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점이다. 전투원은 명령을 따라야 하는 사람들인데 장군이 잘못된 상부 지시를 그대로 하달하는 건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짓이다.”대통령의 장군 승진 청탁도 거절민 전 교장은 1987년 6월 전 전 대통령으로부터 군 투입 지시를 받았을 때 특전사 정보장교들을 시위 현장에 보냈다. 그들은 “군이 진압한다고 진압될 것도 아니고 시위대의 주장이 사실 다 옳다”고 보고했다. 민 전 교장은 “1980년 5월에 이어, 또 유혈사태가 나면 엄청난 국가적 불행이 될 것 같아 군 동원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고 말했다.“전 전 대통령은 육사 선배이면서도 그가 1공수여단장 때 내가 그 밑에서 대대장을 한 적도 있어 오랜 인연이 있었다. 하지만 군 투입은 공적인 문제다. 더구나 당시 나는 무력 진압의 성패를 좌우하는 특전사령관이었다. 만약 대통령이 기어이 군을 투입시킨다면 그걸 저지할 계획도 짜놨다. 군이 궁극적으로 충성해야 할 대상은 대통령이 아닌 국민이지 않나.”그해 민 전 교장은 전 전 대통령의 승진 청탁을 거부하기도 했다. 준장(원스타) 진급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민 전 교장에게 ‘각하가 박○○ 대령을 진급시키고 싶어 한다’는 쪽지가 전해졌다. 그때만 해도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가 점찍은 대령들이 별을 다는 일이 흔했다. 민 전 교장은 그런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콕 집은 박 대령까지 탈락시켰다.“박 대령은 같이 근무를 해봤는데 능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파렴치한 짓을 했다. 지프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내고는 뺑소니를 쳤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잘못을 했으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맞는데 아무 일 없이 넘어간 점이다. 잘못을 무마시킬 능력이 있었던 거다. 그 능력으로 나쁜 짓도 능히 할 사람이란 얘기다. 이런 사람이 장군이 돼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아나.”이번 비상계엄 가담자 중에는 불명예 전역한 예비역 장성임에도 현역 장교들을 지휘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최측근인 그는 진급을 미끼로 이들을 계엄에 끌어들였다. 별을 달게 해주겠다는 제안에 여러 장교들이 넘어갔다.“승진 청탁은 그 자체도 나쁘지만 장군이 돼선 안 될 사람을 장군으로 만들어 주는 게 더 큰 문제다. 백(back)을 써서 별을 달면 신세 진 사람이 시키는 일에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다. ‘예스맨 장군’이 그렇게 나온다.” 육사 졸업식에 온 대통령 면전에서 비판민 전 교장이 군복을 벗은 건 육사 교장이던 1989년 육사 졸업식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참석했는데 졸업식사를 하러 단상에 오른 민 전 교장은 대통령에 대한 경례도 생략한 채 노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대북 유화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전임 교장들은 졸업식사에서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하곤 했는데 그런 건 없고 훈련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에 몸을 던진 고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대통령 면전에서 왜 그런 얘기를 했나.“남북한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건 군인들도 동의하지만 방법과 시기가 적절하지 않으면 혼란이 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당시 전방에서 고생하던 장병들은 우리의 적이 북한이 맞느냐고 혼란스러워했다.”―대통령은 항명으로 느꼈을 수 있겠다.“육사 졸업식에서 대통령은 손님일 뿐이다. 사관생도와 교관들이 주인공인 행사다. 사병을 지휘할 소위가 탄생하는 자리인데 대통령 체면 세워 주는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다. 군인은 교본을 보고 성장하는 게 아니다. 지휘관이나 선배의 모범을 보고 인격적으로 닮아가면서 성장한다. 나중에 장군이 될 생도도 있을 텐데 군인은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는 걸 배워 갔으면 했다.”민 전 교장이 20사단장을 할 때 육군참모총장 등 고위 장성들이 훈련 참관을 온 적이 있다. 그는 참모장이 장성들 점심으로 바비큐와 민간업소 도시락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크게 혼내면서 장병들이 먹는 전투식량을 똑같이 주라고 했다. 장성들은 전투식량 먹는 법을 몰라 당황해했다고 한다. 당시엔 선거 때마다 장병들이 여당에 투표하도록 하라는 지침이 내려오곤 했는데 사단장이던 그는 예하 부대에 ‘선거 부정에 협조하지 말라’고 지시해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품성 때문인지 군 시절 그의 별명은 ‘민따로’였다.“전쟁은 가장 불합리한 상황의 총집합이다. 지휘관은 평시에 가장 합리적으로 부대를 지휘해야만 가장 불합리한 전시 상황에서 부하들을 적진으로 뛰어들게 할 수 있다. 어느 조직이나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정확하게 평가하는 법이다. 상관에게 휘둘리고 명분을 잃어버린 지휘관을 부하는 다 알아본다. 지휘관의 명령이 옳으면 부하들은 목숨을 걸고 그 명령에 따른다.37년째 서재에 걸어놓은 군복 세 벌민 전 교장은 ‘졸업식 사건’ 한 달 뒤 35년간 입어 온 군복을 벗었다. 정치권과 기업에서 러브콜이 많았지만 응하지 않고 군인연금으로 생활해 왔다.―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을 것 같다.“공직을 떠나면 생활 수준이 당연히 떨어진다. 그 점을 늘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장군 시절에도 영관 장교처럼 살았다. 그만두면 연금이 영관 월급 정도 되니까. 최선의 노후 대비는 현역 때 검소하게 사는 것이다. 그 습관이 노후에 자기 생활이 된다. 현역 때 높고 좋은 자리에 있다고 화려하게 지내는 건 옷 벗고 나간 다음에 고통을 자처하는 거다.”―퇴임 후 삶에 만족하나.“행복이 뭔가. 걱정 없이 건강하게 사는 거 아닌가. 전역 이후 35년을 나는 그렇게 보내고 있다. 며칠 뒤면 90세인데 아직 크게 아픈 데가 없다. 50년, 60년 전 부하들을 지금도 만나는데 80세가 넘은 그 친구들이 나한테 소대장님, 중대장님이라고 부른다. 얼마나 다정하고 좋나.”민 전 교장과의 인터뷰는 20일 4시간, 26일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서재 바닥에 양반다리로 마주 앉았는데 다리를 폈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는 기자와 달리 그는 허리를 곧추 펴고 흐트러짐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겨울에 난방을 안 해도 괜찮냐고 물었더니 “야전에 있을 때부터 이러고 살아서 익숙하다”고 했다. 그는 휘문중 재학 시절 학도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왼팔에 총상을 입고도 몇 년 뒤 육사에 진학했다. 월남전에도 파병돼 무공훈장을 받았고 전투 부대 지휘관을 오래 했다.삼면이 책으로 둘러싸인 민 전 교장의 서재 한쪽 벽에는 군복 세 벌이 37년째 걸려 있다. 그가 특전사령관 때 입었던 중장(3성) 계급장이 달린 예복, 근무복, 전투복이다. 셋 중 맨 오른쪽에 있는 전투복에 특히 애착이 간다고 했다. “자식들한테 진작 유언을 해놨다. 나 죽으면 수의 필요 없고, 관속에 들어갈 때 저 전투복 입혀 달라고. 나는 군인으로 태어났고, 군인으로 죽고 싶다.”민병돈 전 육군사관학교장△ 1951년 휘문중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1959년 육군사관학교 졸업(15기)△ 1970년 베트남 파병 9사단 28연대 작전주임△ 1981년 육군 특전사 3공수여단장(준장)△ 1983년 20사단장(소장)△ 1987년 특전사령관(중장)△ 1988년 육사 교장(1989년 중장 예편)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첫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어서 그런지 윤석열 정부 안팎에는 유난히 법조인이 많았다. 검사 옷을 벗고 대통령실과 정부 부처로 옮긴 사례가 많아 검사 정권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취임 초에는 윤 대통령과 술자리를 했다며 사적 인연을 은근히 과시하는 법조인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형사사건 의뢰인들이 검찰의 선처를 기대하며 ‘친윤’으로 알려진 전관 변호사들에게 몰리기도 했다. 윤 대통령 지지율이 저조하던 4월 총선 때도 여당 후보로 나선 30여 명의 검사 출신들 중에 대통령과의 친분을 내세운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탄핵심판과 내란죄 수사로 벼랑 끝에 선 요즘, 그를 돕겠다는 법률가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건희 여사 사건 때마다 ‘윤 대통령 변호인단’이란 비아냥거림을 들었던 검찰마저 태세를 확 바꿔 대통령을 정조준하고 있다. 윤 대통령으로선 하루빨리 변호인단을 꾸려야 할 처지인데 구인난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가 탄핵과 수사에 불응하는 속사정이 변호인들을 아직 못 구하고 있기 때문이란 주장이 나올 정도다. ▷윤 대통령의 ‘40년 지기’ 석동현 변호사가 대변인 격으로 활동하고 있고, 김홍일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이 나선다고 하지만 정식 선임계는 아직 제출되지 않은 상태다. 무엇보다 방대한 기록 정리와 서면 작성 등 실무를 맡을 변호사들이 필요한데 다들 손사래를 친다고 한다. 일부 대형 로펌은 이번 계엄 사태 관련 피의자들에 대해선 일절 변호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웠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특검 수사와 탄핵심판이 진행되던 2016년 말 변호인단 구성에 애를 먹었다. 유영하 변호사가 사실상 유일했다. 그래도 얼마 되지 않아 이동흡 전 헌법재판관과 정기승 전 대법관 등 보수 성향의 전관 법조인들이 줄줄이 합류했다. 윤 대통령은 30년 가까이 법조인으로 일했고, 대통령이 돼선 수많은 법률가들을 거느렸지만 가장 절실히 우군이 필요한 지금 짐을 나눠 지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처지다. 세력이 강할 땐 아첨하며 따르고, 힘이 빠지면 외면하는 세상 인심을 뜻하는 염량세태(炎涼世態)를 떠올리게 한다. ▷씁쓸하긴 하지만 모두 윤 대통령이 자초한 일이다. 국가가 대혼란에 빠지고 헌정 질서가 유린된 사건이라 대통령 편에 서는 순간 ‘국민의 적’이자 ‘역사의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구도를 그가 만들었다. 법률가라면 이번 계엄의 불법성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기에 나서기가 더 망설여질 것이다. 윤 대통령이 지향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철학마저 계엄 선포로 스스로 부정해 버렸으니 도와줄 명분도 마땅치 않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선 그 많던 부나방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대통령 경호원들은 ‘다 죽어도 대통령이 살면 성공, 다 살아도 대통령이 죽으면 실패’라는 직업의식을 갖고 산다. 사람은 위험에 닥칠 때 자기부터 챙기기 마련인데 이 본능을 억제하고 대통령을 지키려 자신을 희생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게 경호원이다. 사적 감정에 흔들려서도 안 된다. 대통령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고 존경심이 없더라도 기꺼이 몸을 던져야 한다. 경호 대상이 적대국에서 보낸 특사일 때도 목숨 걸고 지키는 게 경호원의 직업정신이다.대통령 버리고 화장실로 숨었던 차지철 이 직업정신은 충성심과는 다르다. 충성스럽다고 경호를 잘하는 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은 10·26 사건 당시 총에 맞은 박 전 대통령을 버려두고 화장실로 도망쳤다. 그 사이 김재규가 박 전 대통령을 확인 사살했다. 경호는 충성심이 아닌 직업정신으로 하는 일이다. 경호원들은 ‘촉수(觸手) 거리’란 말을 자주 쓴다. 누군가 경호 대상을 공격해 올 때 막을 수 있는 거리란 뜻이다. 그만큼 경호 대상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 동시에,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충성심에 사로잡혀 경호 대상과 한 몸이 돼 버리면 주변 위협을 제대로 살피지 못해 경호 대상자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 넉 달 전까지 대통령경호처장이었던 김용현 전 국방장관은 왜곡된 충성심이 대통령에게 얼마나 해로울 수 있는지 보여준다. 국민들에게 충격적인 장면으로 각인된 KAIST 졸업식 입틀막 사건은 그의 지휘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R&D 예산을 복원하라는 이공계생의 합당한 주장을 틀어막는 경호원의 손은 윤석열 정부가 보여온 불통의 상징이 됐다. 윤 대통령이 ‘여론에 귀 기울이라’는 정치인들을 반국가세력으로 여기게 된 것도 참모들의 과잉 심기 경호가 한몫했을 것이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 이후 경호처의 행태를 보면 ‘김용현의 경호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경호처는 헌법재판소가 보낸 탄핵심판 서류를 받지 않고, 수사기관의 압수수색도 막고 있다. 그동안 청와대 압수수색이 실제 이뤄진 전례가 없긴 하지만 현 상황은 관례가 적용되기 어려운 사상 초유의 상황이다. 윤 대통령의 혐의인 내란죄는 외환죄와 더불어 대통령이라도 형사소추가 가능한 유일한 범죄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해 대통령이 더 이상 헌정 질서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신속히 수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경호처의 사법 방해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 직무 정지된 대통령을 대신해 경호처를 지휘해야 하는 한덕수 권한대행은 이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 이런 지휘 공백 속에 지금의 경호처는 ‘VIP 범죄 경호처’로 전락해 버렸다. 국민들이 경호처에 세금을 쓰는 데 동의한 이유는 대통령이 자신의 안녕보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도록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대통령 경호는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전제에서만 유지되는 제도인 것이다. 반헌법적 계엄 선포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대통령이 탄핵과 수사를 지연시키려 하는데 경호처가 이를 맹목적으로 보호한다면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된다.맹목적 ‘尹방탄’ 경호원 자부심 짓밟는 일 경호처는 조만간 큰 시험대에 놓일 전망이다. 윤 대통령이 지금처럼 수사기관의 소환 요구에 계속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이나 구속영장 집행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경내로 들어가야 하는 압수수색과 달리 법원 허가에 따른 대통령 신병 확보는 경호처가 이를 막을 어떠한 명분도, 법적 근거도 없다. 만일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데려가려는 수사관들을 물리력으로 막는 데 동원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들은 계엄이 선포되던 3일 밤 국회에 투입됐던 군인들과 똑같은 자괴감을 겪게 될 것이다. 경호처가 묵묵히 일해 온 경호원들의 직업적 자부심마저 짓밟아선 안 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사건은 1964년 5월 오후 8시경 벌어졌다. 당시 18세이던 최말자 씨는 뒤따라오던 낯선 남자의 공격에 넘어졌다. 남자는 도망치려는 최 씨를 두 번 더 넘어뜨린 끝에 배 위에 올라탔다. 그러곤 최 씨의 목을 졸라 입을 벌리게 한 뒤 강제로 키스했다. 최 씨가 고개를 흔들며 저항하다 남자의 혀를 깨물어 1.5cm가 절단됐다. 경찰은 최 씨의 정당방위를 인정했지만 검찰이 이를 뒤집었다. 최 씨를 중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남성의 강간미수는 무혐의 처분했다. ▷재판에선 공개적으로 2차 가해가 이뤄졌다. 상황을 재연한다며 현장 검증을 나갔는데 주민들이 최 씨에게 몰려와 “처녀 총각이 키스한 게 뭐 대단한 일이냐, 네 입술은 금덩어리냐”라고 했다. 재판부는 최 씨에 대한 순결성 감정에 이어 정신 감정을 의뢰했다. “미움과 사랑의 갈등에서 온 히스테리 반응”이라는 게 감정 결과였다. 재판부는 최 씨에게 남성과 결혼할 생각이 있느냐고도 물었다.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니 평생 책임지는 게 어떠냐는 취지였다. “차라리 벌을 받겠다”는 최 씨에게 법원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1995년 대법원이 발간한 법원 100년사에 ‘저명사건 판결’로 기록됐다. 1980년대 이후 성폭력에 저항하다 가해자 혀를 깨물어 절단시킨 행위를 정당방위로 본 판례가 잇따라 나오던 때였다. 2020년 부산에서 여성이 가해자의 혀 3cm를 절단시킨 사건에서도 남성만 강간치상으로 처벌됐다. 하지만 ‘감옥 살다 온 여자’로 손가락질받던 최 씨는 공장일과 노점상으로 홀로 아이를 키우며 50년 넘게 숨죽이다 2018년에야 재심을 청구했다. ▷“당시 시대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판결이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반세기 전 사건을 뒤집을 순 없다.” 1, 2심은 이런 이유로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최 씨는 “지금은 대한민국이고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닌 것이냐”며 울분을 토했다. 다행히 대법원은 달랐다. 최 씨의 재심 사유에 신빙성이 있다며 며칠 전 원심을 깨고 돌려보냈다. 사건 당시 18세였던 최 씨는 60년이 흘러 78세가 되어서야 다시 법원 판단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확정된 판결을 새로 재판하는 재심은 요건이 까다롭다. 원심의 증거가 허위로 판명되거나,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을 때, 재판에 참여한 판검사 등이 직무 관련 죄를 지었을 때 가능하다. 최 씨 사건은 재판에서의 2차 가해뿐 아니라 성폭력 저항 행위를 정당방위로 폭넓게 인정하는 판례들이 쌓이며 법원의 흑역사가 된 사건이다. 지금의 상식에 비춰 보면 당시 재판에 참여했던 판사들이 책임을 외면해선 안 될 일이다. 몇 달 뒤 재심이 시작될 텐데 형식적 법리에 매몰되기보단,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 법원의 과오를 반성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12·3 비상계엄 사태 주요 가담자 중에는 민간인이 한 명 끼어 있다. 6년 전 퇴역한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다. 포고령 초안 작성자로 알려진 그는 군에 선관위 장악을 지시하고 계엄 당일 탱크부대장을 호출하는 등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계엄 이틀 전 정보사령관과 대령 두 명을 롯데리아로 불러 모은 것도 노 전 사령관이다. 그는 이들과 햄버거를 먹은 뒤 “계엄이 있을 테니 준비하라”며 부정선거 증거 수집을 위해 중앙선관위 서버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민간인인 그가 군 간부들을 움직인 수단은 인사였다. 햄버거 회동 참석자인 정모 대령은 지난달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전역이 몇 년 남았냐. 다음엔 네가 여단장 하면 되겠다. 내가 많이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 말에 넘어가 부정선거 관련 유튜브 자료를 정리하는 등 요구에 따랐다. 노 전 사령관의 호출을 받고 계엄 당일 정보사로 온 제2기갑여단장(준장)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 노 전 사령관이 전부터 “(김용현) 장관님이 너한테 국방부 TF 임무를 맡기려 한다. 너를 정말 귀하게 여기신다”고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전직이 던진 ‘진급 미끼’에 현직들이 걸려든 것은 그가 김 전 장관과 절친한 비선 실세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폐쇄적이고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정보사는 현직과 ‘올드보이(OB)’들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정보사령관과 육군정보학교장 등 고위직을 거친 그는 이런 인맥의 중심에 있었다. 그와 가까운 대령급 간부가 김 전 장관 인사청문회 TF에 참여한 뒤 준장으로 진급하는 등 영향력이 드러난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은 6년 전 성추행으로 불명예 전역했다. 술자리에서 여군 교육생을 강제추행한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법원은 그가 이 사건으로 지위와 명예를 잃게 된 점을 양형에 반영했다고 했지만 그는 전역 후에도 군 정보라인의 막후 실력자로 활동했다. 여인형 방첩사령관마저 김 전 장관에게 “노상원을 멀리하라”고 만류했다고 하는데 김 전 장관으로선 은밀한 계엄 준비를 위해 민간인 신분의 비선 측근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노 전 사령관은 음지에서 움직이며 군인들의 약한 고리인 인사를 공략했다. 대령은 56세까지 준장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고 준장은 6년 내 진급을 못 하면 퇴역이다. 정보사 정 대령은 인맥이 없어 진급을 기대하지 못했는데 노 전 사령관의 제안에 욕심이 생겨 요구에 응했다고 한다. 국방부 장관은 성추행으로 물러난 예비역을 끌어들여 계엄을 기획하게 하고, 그 전직 장성은 후배들의 출세욕을 자극해 반헌법적 행위를 시킨 것이다. 군 인사가 정치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거래가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요즘 거리 집회에는 특이한 깃발들이 나부낀다. 흔히 보던 ‘○○노총 ○○지부’처럼 조직을 드러내기보단 개인 취향을 반영한 것들이 많다. ‘전국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연합’ ‘강아지발냄새연구회’ ‘OTT 뭐 볼지 못 고르는 사람들 연합회’ 같은 깃발들이다. ‘집에 누워있기 연합’ 깃발도 등장했는데 ‘제발 그냥 누워있게 해달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얼핏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이런 평범한 시민들까지 거리로 나서야 할 만큼 분노한 민심이 널리 퍼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집회 참가자 중에는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호흡하며 성장한 MZ세대가 특히 많다. 생애 첫 계엄 사태에 기성세대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고 정치적 의사 표현에도 거침이 없는 세대다. 이들이 주도하는 시위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촛불 대신 발광다이오드(LED) 응원봉이 필수 시위 아이템이 됐다. 엔시티, 세븐틴, 에스파 등 아이돌 팬들이 형형색색의 응원봉을 흔들며 ‘윤석열 탄핵’을 외친다. ▷집회 곡 플레이리스트도 세대교체가 한창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처럼 비장하고 결연한 민중가요 일색이던 과거와 달라졌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같은 댄스곡을 떼창하고 로제의 ‘아파트’, 에스파의 ‘위플래시’, 부석순의 ‘파이팅해야지’ 같은 K팝 곡을 이번 사태에 맞춰 개사해 부른다. ‘삐딱하게’를 부를 땐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대목에서 윤 대통령의 지금 상황과 맞아떨어져서인지 노랫소리가 더 커진다. 현장을 본 BBC 기자는 “K팝 페스티벌 같았다”고 보도했다. ▷기존 민중가요의 키워드가 저항과 투쟁이라면 최근 탄핵 플레이리스트의 메시지는 희망과 열정이다. 너무 무겁지 않아 공감대가 넓고, 더 많은 시민들을 집회로 불러 모으는 힘이 있다. 직접 거리로 나서진 못하더라도 시위 참가자들이 따뜻한 커피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주변 카페에 선결제를 해놓는 릴레이가 확산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50, 60대 참가자들이 10, 20대들에게 응원봉 사용법을 배우고, 젊은층은 유튜브로 민중가요 영상을 찾아보는 세대 간 화합도 일어나고 있다. ▷MZ들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집회 문화는 과격한 구호나 폭력 없이도 얼마든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탄핵과 무관한 특정 진영의 편향적 발언이 나올 땐 “단상에서 내려오라”는 야유가 빗발친다. 정파를 초월한 이들의 응원봉은 1970, 80년대의 화염병보다 더 강할 수 있다. 아직 1970년대에 머물러 있는 윤 대통령은 반국가세력과 싸운다는 망상으로 무력을 동원했지만 그보다 한참 진화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요즘 청년들은 평화적으로 세상을 바로잡는 법을 알고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전두환이 전권을 휘둘러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가담 혐의로 법정에 섰던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과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이런 주장을 폈다. 실제 당시 공식 지휘계통이던 주영복-이희성은 사실상 허수아비였고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하나회 라인이 내란을 주도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두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징역 7년을 각각 선고했다. ‘다른 사람의 힘에 밀려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것은 하료(지위가 낮은 관리)의 일이고, 피고인들처럼 지위가 높고 책임이 막중한 공직자에겐 이런 변명이 용납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명령에 따랐을 뿐” 하급 관리나 할 변명 45년 만에 재연된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선 ‘명령에 따랐을 뿐이란 변명은 하급 관리나 할 소리’란 법원의 지적과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고위 장성과 장관들이 계엄의 들러리를 자처할 때 위법한 지시에 맞선 건 영관·위관급 장교들이었다. 국군방첩사령부 법무관 7명은 중앙선관위를 장악하라는 여인형 방첩사령관의 지시에 반발했고, 현장 지휘관들도 부대원 투입을 거부했다. 국회가 계엄 해제 의결을 못 하도록 국회의원들을 본회의장 밖으로 끌어내라는 명령도 특수부대 중간 간부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반면 4성, 3성 장군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지시를 현장에 내려보내기 바빴다.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계엄사령관에 임명돼 크게 당황했다고 주장하지만 포고령을 발표하고 경찰에 국회 통제를 요구하는 등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36만 육군을 통솔하는 지휘관으로서 국민과 장병들이 어떤 위험에 내몰릴지 조금이라도 고민했다면 결코 해선 안 될 짓이었다. 국회 군 투입 지시를 하달한 곽종근 특수전사령관 역시 명령에 따르는 시늉만 했다고 주장하지만 707특임단장에게 1, 2분 간격으로 30통 이상 전화를 걸어 지시를 전했다고 한다. 김 전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 때 계엄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군이 과연 따르겠나. 저라도 안 따를 것”이라고 했는데, 지시한 자도 통할 리 없다고 보는 명령에 군사령관들이 순종한 셈이 됐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계엄 발령에 앞뒤로 통제 장치를 뒀다. 국회 의결이 사후 통제라면, 사전 통제는 국무회의 심의다. 대통령이 오판할 땐 끝까지 설득해야 할 의무가 각료들에게 있는 것이다. 이 절차가 요식 행위가 돼 버린 건 대통령의 독단 못지않게 저항을 포기한 국무위원들의 책임이 크다.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을 제외한 9명 중 3명이 반대했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강하게 만류했을지 의문이고, 나머지 6명은 방조자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특히 대통령의 최고 법률 참모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계엄을 막았어야 할 박성재 법무부 장관은 “사전 상의가 없었다”는 변명만 하고 있다. 상명하복은 지시가 정당하고 합법적일 때만 유효하다. 위법한 지시에 따른 공직자는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처벌 대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명령에 따른 것이란 이유로 면책될 수 없다’는 원칙이 정립되면서 법을 뛰어넘는 상명하복이란 없다는 게 보편적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위법 지시 못 맞설 거면 공직 맡지 말아야 이번 비상계엄 사태는 고위 공직자의 무거운 책임을 재차 생각하게 한다. 지시의 위법성을 분별할 능력과 부당한 명령에 맞설 각오가 없다면 애당초 공직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위법하고 위헌적인 대통령의 계엄 의사를 확인하고도 자의든 타의든 허수아비가 돼 버렸다면 그 자체로 죄가 되는 자리가 장관과 사령관이다. 그런 공직자는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치는 선장을 멍하니 뒤따랐던 항해사, 기관사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도널드 트럼프를 10년 가까이 보좌해온 법률 고문 보리스 엡스타인(42)은 ‘트럼프의 투견’이라고 불린다. 트럼프의 대선 불복, 기밀 유출, 성추문 입막음 등 주요 사건의 소송과 여론전을 엡스타인이 주도했다. 변호사이자 정치전략가인 그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초기 공보 책임자였고 백악관에서 나온 뒤에도 막후 실세로 활약했다. 최근 트럼프 재선과 함께 검찰이 줄줄이 기소를 취소한 것도 그의 공이 컸다. 엡스타인은 취임 준비가 한창인 트럼프의 마러라고 사저에 가장 오래 머무는 문고리 권력으로 알려져 있다. ▷보스인 트럼프처럼 논란 일으키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엡스타인이지만 최근 2기 내각 인선을 두고 궁지에 몰렸다. 그가 장관을 희망하는 인사들에게 사적으로 연락해 발탁되도록 도와주는 대가로 10만 달러(약 1억4000만 원)를 요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최근 재무장관에 내정된 스콧 베센트도 몇 달 전 엡스타인으로부터 “트럼프에게 추천해줄 테니 컨설팅비로 매월 3만, 4만 달러를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인사 중에는 맷 게이츠 법무장관 후보자도 있다. 게이츠는 미성년자 성매수 의혹 등으로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에 부딪혔고, 상원 통과가 어려워 보이자 지명 8일 만에 사퇴했다. 엡스타인은 게이츠와도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란 의심을 받고 있다. 그는 정권 재창출의 일등 공신인 일론 머스크와도 갈등을 빚고 있는데 이런 부적격 인사 추천이 주된 이유라고 한다. ▷트럼프는 엡스타인의 매관매직 의혹을 조사하라고 캠프에 지시했지만 최측근인 그를 냉정하게 쳐낼 진 의문이다. 의혹을 입증할 증거가 발견됐다는 뉴욕타임스(NYT) 보도가 나오자마자 트럼프는 ‘오보’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미국에선 대선 캠프 고액 기부자를 고위직이나 대사로 앉히는 관행이 남아 있는데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여느 대통령보다 도가 지나쳤다. 1기 행정부 때 교육부 장관 등 고위직 38%가 고액 기부자들에게 돌아갔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으로 공석이 된 연방 상원의원 자리를 돈 받고 팔아넘기려 한 일리노이주지사를 사면한 것도 트럼프다. ▷정권 주변에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내세워 이득을 취하려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권력의 신임이 두터울수록 이들이 부르는 ‘가격’도 높아진다. 대통령이 이런 측근들을 단호히 내치지 않으면 충신의 입지는 좁아지고 한몫 챙기려는 간신들에게 둘러싸이게 된다. 이들이 득세하는 한 트럼프가 머스크 같은 기업인을 정부효율부 장관으로 중용한다고 한들 정부 효율이 좋아질 리 없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사람을 가까이에 뒀다가 낭패를 보고 정권마저 흔들리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모욕죄도 시류를 탄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한 시청 공무원이 부하 직원에게 “확찐자가 여기 있네”라고 말했다가 모욕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외부 활동 감소로 체중이 급격히 불어난 사람을 ‘확찐자’라고 부르곤 했는데 직장 상사가 사무실에서 이런 표현을 쓴 건 모욕감을 주기 충분하단 이유에서였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진행되던 2017년에는 회사 동료들끼리 다투다가 ‘네가 최순실이냐’ ‘최순실 같은 ×’이라고 말한 사람에게 모욕죄가 인정되기도 했다. ▷최근 대법원은 남의 얼굴에 두꺼비 사진을 합성한 유튜버에게 모욕죄 유죄 판결을 내렸다. 보험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그 유튜버는 경쟁 관계인 유튜버를 자신의 영상에 등장시키며 모자이크 처리 대신 두꺼비 사진을 덧입혔다. 그는 “일종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주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인정되지 않았다. 법원은 피고인이 단순히 사진을 합성한 것에 그치지 않고 “두꺼비처럼 생긴 그 ×× 있죠” “두꺼비는 원래 습하고 더러운 데 있다. 더러운 ×이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등 상대를 비하·조롱하려는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지난해에는 남의 얼굴을 개 모양으로 합성한 유튜버가 모욕죄로 재판에 넘겨진 일도 있었다. 이 사건에선 무죄 판결이 났다. 영상에 개 그림을 사용한 것 외에, 상대를 개라고 지칭하거나 모욕적인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참작된 결과였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무례한 방법을 쓰긴 했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다소 해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모욕죄는 타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훼손할 목적으로 경멸적인 감정이나 추상적인 판단을 공공연하게 표현하는 행위다.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모욕감을 느낀 것만으론 부족하고 객관적인 잣대로 보더라도 모욕적이라고 판단될 때 적용된다. 누군가를 모욕할 방법은 다양하고, 시대와 문화권에 따라 달라진다. 말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비언어적·시각적 수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모욕을 줄 수 있다. 서구인이 동양인을 향해 눈을 옆으로 찢는 제스처를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모욕이다. ▷이번 ‘두꺼비 판결’은 최근 영상 편집과 합성 기술이 발전하면서 딥페이크 등 신종 범죄가 급증하는 세태에 대한 경고로 볼 수 있다. 이미지를 위변조해 타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엄격하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모욕죄가 되려면 해당 표현이 불특정 다수에게 전파될 수 있다는 공연성이 있어야 하는데 요즘처럼 SNS나 개인 방송이 활발한 환경에선 비방 게시물이 순식간에 번진다. 파급력이 강해 피해자가 느낄 모욕감도 예전보다 훨씬 크고 오래간다. 자기표현 수단이 많아진 만큼 타인에 대한 평가는 더욱 절제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앤디 김 미국 연방상원의원 당선자에게 4년 전인 2020년 11월은 경사가 겹친 달이었다. 김 의원은 하원의원 재선에 성공했고, 그가 속한 민주당의 조 바이든은 도널드 트럼프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상·하원 역시 둘 다 민주당이 다수당이 됐다. 당선자들의 축하연이 한창이던 때 김 의원은 자신을 뽑아준 지역구민들이 대선에선 트럼프를 더 지지한 점에 주목했다. 그냥 지나쳐선 안 될 민심이었다. 그는 파티 대신 미팅을 열어 주민들의 의견을 들었다.하원 재선 성공에 파티 대신 민심 청취 주민들은 그에게 기성 정치인에 대한 오랜 불신과 분노를 여과 없이 쏟아냈다. 민주당 역시 현상 유지를 원하는 낡은 정치세력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에 비해 ‘트럼프는 다르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트럼프의 성격과 정책이 우려스럽긴 하지만 기득권 정치에 대한 혐오를 뛰어넘진 못했다. 김 의원은 주민들 의견을 녹음해 반성문 형식으로 정리하며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기성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은 트럼프가 부활하는 데 산소를 공급해 줄 수 있다.’ 김 의원이 그때 쓴 반성문을 다시 꺼낸 건 그가 상원의원에 당선돼 축하 인사가 쏟아지던 지난 8일이었다. 그는 4년 전의 우려가 이번 대선에서 고스란히 현실화된 것에 대한 일종의 반성문을 자신의 X(옛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우리는 경각심을 가졌어야 합니다. 이제라도 오만함을 내려놓고, 우리가 답을 안다고 단정하지 말고 나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읍시다.’ 한국계 첫 연방 상원의원 탄생이란 쾌거 못지않게 눈길이 가는 대목은 이긴 선거에서도 놓친 민심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김 의원의 정치 습관이다. 2021년 1·6 의사당 폭동 때 그가 무릎을 꿇고 쓰레기를 치우던 모습도 이런 겸손함의 한 단면으로 보인다. 소수인종 출신 정치인이 주류 정치의 벽을 넘기 위해 나름대로 익힌 생존 전략일 수 있지만 낮은 자세로 민심을 살피는 그의 방식에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 있다. 선거 승리 후에도 유권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놓친 민심은 물론이고 자신이 선택받은 이유를 알게 되는 효과가 있다. 김 의원은 주민들과 만나며 기업의 선거 자금을 받지 않고 개혁과 부패 척결을 앞세운 것이 주효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소수인종에게 견고한 유리천장이던 상원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민심에서 얻은 자신감 덕분이다. 그가 당선된 뉴저지주는 당과 보스 정치인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지역이다. 당의 지지를 받고 그 후광으로 기업들 후원을 받으면 자동 당선이란 뜻의 ‘정치 기계(Political Machine)’란 말이 있을 정도다. 그렇게 3선을 하며 상원 외교위원장까지 오른 민주당 거물이 뉴저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뇌물 혐의로 기소되자 김 의원은 곧바로 사퇴 요구를 하며 상원 출마를 선언했다. 당의 불출마 권유와 ‘중진들의 허락이 먼저’라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김 의원이 과감히 결단할 수 있었던 건 기득권 정치를 거부하는 바닥 민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참패해도 반성문 제대로 안 쓰는 한국 우리 정치로 시선을 옮겨 보면 이긴 선거는 말할 것도 없고, 크게 진 선거에서마저 제대로 된 반성문을 쓴 사례를 찾기 어렵다.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 여당은 선거 후 200일이 지나서야 맹탕 백서를 내놨을 뿐이다. 야당 역시 과반이 넘는 의석수를 오롯이 자신들을 지지하는 민심으로 착각하는 행태를 보여 왔다. 실패해도 잘 되새기면 역전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고, 성공해도 승리에 취하면 실패의 조짐을 간과하게 된다. 이긴 선거에서도 반성문을 쓰는 앤디 김의 미 상원 입성은 좋은 정치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감독관을 했던 A 교사는 시험 다음 날 낯선 전화를 받았다. “나 변호사인데, 당신이 내 딸 인생을 망가뜨렸으니 당신 인생도 망가뜨리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A 교사는 전날 한 여학생이 시험 종료 벨이 울린 뒤에도 답안지를 마킹하는 부정행위를 하자 이를 제지했는데 그 학생 아버지가 걸어온 협박 전화였다. 며칠 뒤엔 수험생 어머니까지 학교로 찾아와 ‘A 교사 파면’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올해부터 수능 감독관들이 이름이 아닌 일련번호가 적힌 명찰을 차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매년 수능 후엔 수험생들 민원이 수백 건씩 쏟아진다. “감독관 잠바가 바스락거려 신경이 쓰였다”부터 “감독관이 한곳에 너무 오래 서 있어 방해가 됐다” “자꾸 돌아다녀서 집중이 안 됐다”는 상충되는 불만까지 가지각색이다. 극히 예민할 수밖에 없는 수험생들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니 교사들은 감독은 하되 ‘공기’처럼 존재하기 위해 기침도 참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다. ▷수능 감독관은 보통 3교시, 많게는 4교시를 들어간다. 한 교시마다 70∼100분이다. 시험 시간을 칼같이 못 맞추거나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소송을 당할 수 있고, 집단 커닝 같은 부정행위라도 벌어지면 징계를 받을 수 있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점심시간은 50분인데 앞 교시가 지연되고, 뒤 교시 시작 10분 전부터 대기하려면 20∼30분 안에 식사를 마쳐야 한다. 이러니 매년 11월 찾아오는 수능 감독 업무를 교사들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한다. 보통 저연차 순으로 차출되고, 고3 자녀를 둔 교사들은 감독관에서 제외돼 부러움을 산다. ▷올해 수능은 감독관 구인난이 여느 해보다 심했다. 고3 재학생이 지난해보다 많고, 의대 증원 영향으로 N수생도 늘어나 응시생은 전년 대비 1만8000명 증가한 반면 감독관은 7600명이 줄었다고 한다. 시험실 한 반에 배치되는 수험생 인원은 24명에서 28명으로 늘어나 감독관들 부담이 더 커졌다. ▷중고교 교사들은 대학이 학생을 뽑기 위해 치르는 수능에 왜 우리만 동원되느냐고 불만이다. 응시생의 35%가량이 N수생이니 대학 교직원들도 감독을 나눠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직원들은 그들대로 수시전형을 관리하느라 여력이 없다고 한다. 얼마 전 연세대에선 논술고사 감독관이 시험 시간을 착각해 문제지를 잘못 배포하는 바람에 시험 무효 소송과 경찰 수사로까지 번졌다. 무서워서 감독관 하겠느냐는 말이 나올 법하다. 시험 한 번에 청춘들 인생이 걸린 우리의 과열 입시가 감독관을 ‘극한 직업’으로 만들어버렸다. 수능일인 오늘(14일)은 52만 명 수험생 못지않게, 7만 명의 감독관에게도 고단한 하루가 될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명태균 씨가 최근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오며 기자들과 나눈 대화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의 특수관계를 한껏 과시하던 기존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대통령 부부와 언제까지 연락했는지를 묻는 질문에 “가십거리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그간의 발언에 대해 “너스레를 떤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하려 했다. 그러면서 대뜸 두산중공업을 비유로 들기도 했다. “제가 두산중공업에 다닌다고 해봐요. 집사람한테 ‘우리 회사는 나 없으면 안 돼’ ‘내가 만든 회사야’ 이런 얘기할 수 있잖아요.” ▷명 씨는 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이 제기된 초기만 해도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처럼 센 발언들을 했다. “김 여사와 대화, 최고 중요한 것만 까도 200개가 넘을 것” “아직 대선은 얘기도 안 했다. 입 열면 다 뒤집어진다” “김 여사가 나더러 인수위에 와서 사람들 면접 보라고 그랬다” 같은 말들이다. 그랬던 그가 검찰 조사를 받고 난 뒤엔 ‘톤 다운’을 하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듯한 그의 말에는 액셀과 브레이크가 있다. 한창 액셀을 밟을 땐 대통령 부부와 6개월간 매일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등 각별하게 상의하는 사이였다고 말하다가도, 더 파고드는 질문엔 “더 얘기하는 건 불손한 행위” “옆에서 조언해 준 사람일 뿐”이라고 브레이크를 밟는다. 함께 일했던 직원 강혜경 씨가 윤 대통령 부부의 공천 개입 의혹을 제기했을 땐 “식탁 밑 강아지가 떨어지는 것만 보고 혼자 상상하는 것”이라며 깎아내리기도 했다. 애초에 입을 안 열면 될 것을 냄새만 한껏 풍겨 놓고 물러서는 걸 보면 윤 대통령 부부를 향해 “센 것을 쥐고 있는데 어떻게 나오는지 보겠다”며 거래를 시도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엊그제 명 씨가 검찰 조사 직후 보인 태도 변화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조사 이틀 전 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공천에 관여한 바 없고 명 씨와 부적절한 일도 없었다”고 한 것에 호응이라도 하듯 기자들에게 “언론이 거짓의 산을 만들었다”고 했다. 정치자금법(정자법) 위반 사건인데 왜 허위보도에 대한 조사를 받아야 하느냐고도 했다. 국정농단과 공천 개입이 의심되는 본인 발언이나 녹음된 음성에 대해선 ‘너스레’ ‘가십’이라면서 명 씨 개인 비리에 한정되는 정자법 위반 여부에만 수사가 집중돼야 한다는 얘기다. ▷명 씨가 꼬리를 내리기까지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으로선 검찰이 엄정하게 의혹을 수사하는지 지켜봐야 할 때다. 마침 명 씨가 윤 대통령에게 취임 전날 ‘우리 김영선 의원 꼭 좀 부탁한다’고 보낸 여러 건의 문자메시지가 확보됐다고 한다. 명 씨의 말만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기 쉽다. 증거와 팩트를 따라가며 정치 브로커에게 국정이 농락당한 게 맞는지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서울대 공대 출신인 30대 A 씨는 대치동 일타 수학강사다. 그 역시 공대생 시절 ‘의대 반수’를 했다.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오랜 수능 공부 경험을 살려 대치동 학원가에 입성했다. 요즘 그의 강의실에는 의대 반수생들이 부쩍 늘었다. 서울대 공대생들도 여럿 있다. 그 후배들이 가끔 면담을 청해오면 A 씨는 이런 말로 격려한다고 한다. “나처럼 개고생 안 하려면 열심히 해서 의대 꼭 붙자.”A 씨는 명문 공대생들의 의대 도전이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했다. 의대 정원이 단번에 1500명이나 늘어난 건 이들에겐 ‘입학 때 성적만 나와도 의대에 갈 수 있다’는 청신호이기 때문이다. 하던 대로만 해도 합격 확률이 높은데 안 할 이유가 있겠냐는 것이다. 더구나 내후년부턴 의대 증원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이공계생들이 많다고 한다.공대 출신 일타강사의 씁쓸한 요즘“공대생은 잘해 봐야 대기업 월급쟁이인데 의대생은 꼴찌 해도 연 2억, 3억은 벌잖아요.”반수생들이 이런 말을 해올 때면 한때 공대 자부심이 있었던 A 씨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이들이 공대에 오기까지 창의와 도전을 중시하는 ‘공대적인’ 삶의 방식을 장려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두 문제만 삐끗해도 갈 수 있는 대학이 달라지는 세상에 적응하며 ‘전문직이 최고’란 말을 듣고 자란 학생들이 대학생이 됐다고 진취적으로 바뀌긴 어렵다.현실과 계산에 밝아야만 적자생존 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국가의 미래가 이공계에 달려 있다는 말은 이들이 살아온 관성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요즘 많은 의대생들이 전공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개업해 돈 되는 미용의료에 나서는 것도 우리가 우대해 온 인재들이 그런 효율을 추구하는 데 비교우위인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정년 이후가 다들 불안하고, 워라밸도 챙겨야 하니 공부 수재들은 의사라는 모범 답안을 영리하게 찾아내는 것이다.그럼에도 이공계가 완전히 죽은 건 아니다. 수학 과학에 남다른 열정과 재능이 있고, 정해진 탄탄대로 대신 판을 흔드는 창업을 꿈꾸는 인재들도 적지 않다. 석박사를 마칠 때까진 시간이 걸리고 연구실에선 늘 시행착오와 씨름하지만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과학기술 지원만큼은 굳건할 것이란 믿음이 이들을 지탱했다.윤석열 정부가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않았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감행한 것은 그런 점에서 뼈아픈 실책이다. 연구 과제가 사라져 수입이 끊기고 뒤늦게 진로를 고민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적지 않은 공대생들이 ‘역시 믿을 건 자격증뿐’이란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그렇게 이공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정부가 뒤이어 꺼내든 게 의대 대폭 증원이었으니 공대생들에겐 ‘이참에 의대로 갈아타라’는 정책적 신호인 것이나 다름없다.인재의 의대 쏠림은 의사에겐 과잉 보상하고 엔지니어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울어진 인센티브 체계가 만든 현상이다. 최근 서울대 공대와 KAIST에서 휴학·자퇴가 늘어나는 건 정부가 이 뿌리 깊은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지 않은 탓이 크다. 지금은 의정 갈등에 가려져 있지만 공대의 붕괴는 두고두고 국가의 기술 근간을 흔들 것이다. 안 그래도 상당수 공대생들이 전문직이 되거나, 더 큰 기회를 찾아 해외 연구소나 빅테크 기업으로 떠나는데 이런 정책 실패까지 겹치면 국내 산업을 이끌 엔지니어들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공학도들, 공대 안에서 빛나게 해줘야A 씨에겐 공대 시절 친했던 동기 5명이 있다. 이 중 전공을 살린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한 명뿐이다. 의사가 2명,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가 된 친구가 2명이다. 공대 경력을 내세워 대형 로펌에 들어간 두 친구는 지식재산권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공대 밖으로 나가면 이공계 출신인 게 브랜드가 되는데 정작 공대 안에선 답을 찾기 어려운 게 요즘의 현실이다. 이대로 뒀다간 공대가 ‘사(士)자 직업’으로 가는 환승역이 돼버릴 수도 있다. 공학 인재들이 공대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되살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미국에서 인종과 성별 상관없이 투표권이 보장된 1960년대 이후 백인 여성들이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준 건 딱 한 번이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1996년 재선에 나섰을 때가 유일하다. 그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출마한 2016년 대선 때도 ‘첫 여성 대통령’ 도전자보다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더 지지했다. 2020년 대선에서도 조 바이든 후보를 찍은 백인 여성은 46%에 그쳐 트럼프(53%)보다 적었다.▷성별에선 약자지만 인종적으론 강자인 게 미국의 백인 여성들이다. 평균 임금을 보더라도 백인 여성은 백인 남성 대비 83% 정도지만 흑인 여성(70%), 히스패닉 여성(65%)보다는 많이 번다. 백인 여성들은 노예제 폐지나 흑인 인권운동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1960년대까지도 백인 여성들은 직업 선택에 제약이 많았고 남성의 서명 없이는 대출이나 신용카드 발급이 어려웠다. 이런 성차별은 여성과 유색 인종이 힘을 합쳐 각종 차별 반대 투쟁을 벌인 끝에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투표장의 백인 여성들은 사회적 약자보단 주류적 인종 집단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보여왔다.▷주로 공화당을 지지해온 백인 여성들이지만 이번 대선에선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백인 여성의 51%가 해리스에게 투표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대학 학위가 없는 여성들은 공화당 지지가 여전히 강하지만 대졸 이상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높게 나타났다. 민주당은 2016년 클린턴 후보가 패했을 때 ‘샤이(shy) 트럼프’의 영향이 컸듯, 초박빙인 이번 대선에선 민주당 지지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 ‘샤이 해리스’ 백인 여성들이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백인 여성은 미 유권자의 30%를 차지하는 최대 투표 집단이다.▷할리우드 여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참여한 해리스 지지 광고는 백인 여성들을 정면 공략한다. 그는 “남편 모르게 해리스에게 투표하자”면서 “투표소에서 있었던 일은 밖에선 아무도 모른다”고 속삭인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의 딸 바버라 부시, 부시 행정부 때 부통령이던 딕 체니의 딸 리즈 체니도 해리스 지지 유세에 나서며 백인 여성 표심을 자극하고 있다.▷백인 여성들의 변심 가능성이 높아진 주요인은 50년 만에 무력화된 낙태권이다. 이런 변화를 만든 장본인이 ‘낙태 반대’ 대법관 3명을 임명한 트럼프여서 해리스에 반사 효과가 생길 수 있다. 백인 여성들의 핵심 관심사는 경제(29%)에 이어 낙태(24%)가 두 번째로 높다. 게다가 이번 대선에선 애리조나 등 경합주를 포함한 10개 주에서 낙태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함께 진행된다. 하지만 ‘샤이’라는 말 자체가 주변에 속마음을 숨긴다는 뜻이다. 낙태의 영향이 얼마나 될지는 투표함을 열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속임수를 쓰고, 복수심 가득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세계가 위험에 빠질 것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이런 사설을 썼다. 그런 우려가 현실화한 ‘트럼프 4년’을 겪은 뒤 2020년 대선에선 “트럼프는 현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며 더욱 절실한 어조로 조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다. 그 후 트럼프의 대선 불복으로 빚어진 1·6 의사당 폭동을 가장 앞장서 비판한 언론 역시 워싱턴포스트다. ▷2013년 이 신문을 인수한 아마존 창업주 제프 베이조스는 트럼프 집권 이듬해인 2017년 신문 1면 맨 위 ‘워싱턴포스트’ 제호 밑에 이런 문구를 새겼다.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어간다(Democracy Dies in Darkness).’ 트럼프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베이조스는 트럼프 비리를 검증하는 기자 20명 규모의 특별취재팀을 출범시키며 “샅샅이 캐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워터게이트 특종의 주역 밥 우드워드 대기자까지 출격해 석연찮은 재산 형성 과정을 파헤쳤다. ▷그랬던 워싱턴포스트가 이번 대선부턴 지지 후보를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트럼프식 권위주의 회귀의 위험성을 지적해온 논설위원들이 최근 퓰리처상을 수상해 이를 자축하던 워싱턴포스트 기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지지하는 사설 초안까지 작성됐는데 베이조스가 게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오피니언 담당 편집인이 사표를 냈고, 논설위원들은 “비겁하고, 끔찍한 실수”라는 성명을 냈다. “트럼프의 위협에 대해 우리가 보도해온 압도적인 증거들을 무시한 것”(우드워드 대기자)이란 비판도 잇따랐다. ▷160년 넘게 지지 후보를 밝혀온 뉴욕타임스에 비해 워싱턴포스트는 지지 후보 공개의 역사가 비교적 짧다. 1976년 대선부터다. 사설에서 언론사의 정치적 지향점을 투명하게 밝히고 기사는 객관성을 지키는 게 미국 언론의 대체적인 전통이지만 그렇지 않은 언론도 있다. 베이조스는 입장문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지지 후보 공개는 우리가 편향됐다는 인식을 키울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선거가 임박한 가운데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수십 년간 이어온 전통을 뒤집은 것을 놓고 트럼프 눈치를 본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파장은 ‘허리케인급’이다. 벌써 20만 명이 디지털 구독을 취소했다고 한다. 종이신문을 포함해 유료 구독자 250만 명 중 8%가 빠져나간 것이다. 이에 따른 최대 수혜자는 트럼프가 될지도 모른다. 대통령 재임 시절 워싱턴포스트를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며 연방정부에 절독을 지시하는 등 비판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던 그가 이런 결과를 누구보다 바랄 듯하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재산이 196억 원인 문헌일 서울 구로구청장은 서울 구청장 중 두 번째 부자다. 구로구에서 중견 정보통신업체를 경영하며 부를 쌓았다. 여기엔 170억 원어치 회사 비상장주식이 포함돼 있다. 문 구청장은 최근 법원이 이 주식을 백지신탁하라고 판결하자 주식을 포기할 순 없다며 구청장직을 내놨다. 백지신탁은 고위 공직자의 이해 상충 문제를 막기 위해 2005년 도입된 제도다. 직무상 알게 된 정보로 주식 거래를 하거나 자기 주식의 가치가 오르도록 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목적이다.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은 당선 또는 임명 후 두 달 내에 팔거나 금융기관에 백지신탁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공직자는 재산상 손해를 보거나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다. 기업인의 공직 진출을 제약하는 제도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 공복이 되기로 결심한 선출직 공직자라면 그 정도 책임을 감수해야 하고, 자신이 없으면 공직에 나서지 말라는 게 대체적인 사회적 합의다. 공직자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익을 위해 악용하지 않을 것이란 신뢰 없이는 공직의 권위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두 차례 총선 출마 경험이 있는 문 구청장은 2년 전 구청장 선거에 나서며 주식 백지신탁 가능성을 따져봤을 것이다. 그는 제도의 허점을 노렸던 것 같다. 인사혁신처가 백지신탁 결정을 해도 공직자가 이에 불복해 소송을 내면 몇 년을 끌며 임기를 채울 수도 있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 했던 고위 공직자들 사례를 보며 그 역시 피해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법하다. ▷문 구청장이 불복 소송을 하며 버티는 동안 그의 주식 가치는 49억 원가량 올랐다. 대신 구민들은 공석이 된 구청장 보궐선거를 치르는 데 드는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처지가 됐다. 그에게 구청장직은 어떤 자리였을까. 문 구청장은 출마 당시 “기업을 운영해본 경험이 구정을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지를 호소해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이득이 안 되는 공직이라면 미련 없이 내던지는 모습으로 구민들에게 배신감을 안겼다. ▷문 구청장은 16일 퇴임식에서도 그의 그릇된 공직관을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그는 “백지신탁이라는 기업인 출신 구청장에게 가해진 불합리한 제재가 예정돼 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됐다”며 퇴임사를 시작했다. 이어 2년여 재임 기간 동안 받은 각종 표창 등 A4 종이에 써온 구정 성과를 10여 분간 읽으며 자화자찬했다. 그는 스스로를 불운의 공직자로 여기는 듯했다. 보다 못한 한 구민이 소리쳤다. “구로구 주민들에게 안 미안하십니까.” 이날 퇴임식이 끝날 때까지 구민들을 향한 사과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몸의 기억은 집요하다. 신체에 일시적 변화가 있더라도 원래대로 돌아오는 성질인 항상성도 몸의 기억이 잡아끄는 힘이다. 항상성은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지만, 반대로 만성 질환에서 벗어나는 걸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현대 의학의 난제 중 하나인 비만이 대표적인 사례다. 건강한 식단과 꾸준한 운동이 해법이란 걸 알면서도 비만을 부르는 몸의 기억에 이끌려 힘들게 뺀 살이 도로 찌는 게 다반사다. ▷15일 국내 출시되는 위고비가 ‘기적의 비만약’으로 불리는 이유는 몸의 기억을 속이는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위고비를 투약하면 배고픔을 느끼게 하는 신경을 억제해 조금만 먹어도 금방 포만감이 들게 하고 식욕도 떨어뜨린다. 예전 같으면 야밤에 그렇게 당기던 치킨이 덜 생각나고, 막상 시켜 먹어도 몇 조각 못 먹게 되는 식이다. 위고비는 자기 몸에 주사만 한 방 놓으면 이런 효과가 1주일이나 지속되고, 1년 4개월간 꾸준히 맞으면 체중을 평균 15%가량 감량할 수 있다고 한다. ▷위고비는 2021년 미국에서 처음 출시됐을 때부터 뜨거운 인기에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주사기 1대 값이 약 45만 원, 한 달이면 180만 원이 들 정도로 비싸지만 주문이 폭주했다. 특히 일론 머스크, 킴 카다시안 등 유명인들이 위고비로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부자들 사이에선 ‘살 빠지는 비타민’이란 별칭으로 불리며 급속히 확산됐다. 이후 전 세계적 물량 부족 사태로 원래 지난해 하반기 예정이던 국내 출시도 1년가량 미뤄졌다. ▷하지만 위고비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약을 끊는 순간 ‘요요’가 시작된다. 안경을 쓴다고 눈이 좋아지진 않는 것과 같다. 몸을 잠깐은 속일 수 있지만 끝까지 속이진 못하는 것이다. 투약 기간 동안 건강한 생활 습관을 정립하지 않은 채로 약을 멈추면 그동안 눌러놓은 체중이 용수철 튀어 오르듯 금세 회복된다고 한다. 게다가 빠질 땐 근육과 지방이 같이 빠지지만 다시 찔 땐 지방이 급격히 늘어 전보다 악성 비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거액을 들여 장기간 투약하더라도 살 안 찌는 습관을 몸에 각인시키지 않으면 ‘꿈의 비만약’이라는 위고비도 무용지물이다. 또 비만 환자에게만 효과가 있을 뿐 일반인이 몸매 관리용으로 쓰다간 탈모, 췌장염 같은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다이어트에는 지름길이 없고, 오래 걸리더라도 정도로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비만약 시장은 향후 10년간 연평균 27%씩 급성장할 전망이라고 한다. 위고비를 만든 덴마크 제약사 노보노디스크의 주가도 급등해 지난해 시가총액이 루이뷔통을 제치고 유럽 1위로 올라섰다. 살 빼는 정답이 뭔지 뻔히 알지만 당장의 쉬운 길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걸 시장은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을 영문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는 “번역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했다. 작품 배경이 된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을 전달하면서도 영어권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둬야 해 쉽지 않았다는 취지다. 그는 이런 줄타기 과정에서 한강 작가와 계속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소주를 ‘코리안 보드카’라고 하는 식으로 영어권 표현을 차용해 오는 걸 자제하고, 등장인물의 이름 대신 ‘처제의 남편’ ‘지우 어머니’처럼 관계 중심으로 칭한 것도 그런 소통의 결과였다. ▷한국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는 해외에 우리 문학을 전해 온 번역가들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 문학의 번역 역사를 돌이켜 보면 초기엔 한국인 번역자들 위주로 진행되다가 외국인-한국인 공동 번역을 거쳐, 현재는 한국어와 외국어에 능통하고 양국 문화에 이해가 깊은 원어민 번역자가 많아지면서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 문학 작품 번역은 양쪽 문화권에서 쓰는 관용적 표현이나 단어 너머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포착해야 하고, 원작자가 의도한 은유와 문체, 분위기를 창의적인 언어로 옮겨야 하는 고도의 문학적 작업이다. ▷챗GPT 등 생성형 인공지능(AI)의 발달로 번역 업계가 위협받고 있지만 문학 작품 번역만큼은 대체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AI는 일상어의 경우 입력과 동시에 여러 언어로 유창하게 번역하지만 예술적 완성도가 중요한 문학에선 그런 식의 효율과 정확성만으로 독자에게 감동을 주긴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AI는 자신이 가진 데이터로 해석되지 않는 문장은 아예 건너뛰거나, 비슷한 단어의 조합으로 그럴싸하게 엮어내려 해 예술 작품 번역에 오류가 많다. ▷전문가들이 AI 번역 실험을 한 결과만 봐도 그렇다. 영화 ‘기생충’ 속 대사 ‘김칫국 마시다’를 챗GPT로 번역했더니 ‘We’re drinking kimchi soup(우리는 김치 수프를 마십니다)’로 직역해 섣부른 기대를 한다는 뉘앙스를 살리지 못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구글 번역기를 통해 한국어로 옮겼을 때도 인간 번역과 비교해 정확도가 30∼40%에 그쳤다고 한다. ▷AI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문학 작품 번역은 문화 상품 수출을 위한 주요 공급망이다. 영화, 음악 등 콘텐츠 강국인 한국은 이제 문학에서도 해외 바이어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될 텐데 번역 인프라가 따라가지 못하면 노벨 문학상 효과는 오래가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 문학 수출을 위한 정부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한국문학번역원의 올해 예산은 전년보다 14% 삭감됐다. 번역 출판 지원사업 예산도 올해 20억 원에 불과하다. 문학 작품 번역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작업이라는 인식 없이는, 한국 문화콘텐츠의 세계화가 언젠가 큰 벽에 부딪힐 수도 있다.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93세의 할머니는 밤에 화장실에 다녀오며 거실에서 길을 잃곤 한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전기세 아끼는 습관은 그대로여서 가족들이 일부러 켜놓은 거실 불을 꺼버리는 탓이다. 어두워도 방을 찾아갈 수 있게 바닥에 형광 테이프를 붙여놨지만 소용없을 때가 많다. 할머니는 보행기를 끌고 가다가 벽에 부딪히거나, 좌식 테이블에 앉으려다가 넘어질 뻔한 적도 있다. 가끔 들려오는 ‘따다다닥’은 할머니가 저녁 먹은 것을 잊고 가스 불을 켜는 소리다. 옆방의 손녀 김영롱 씨(36)는 할머니 소리에 신경 쓰느라 잘 때도 귀는 잠들지 못한다.》할머니는 치매 중기 판정을 받은 지 올해로 5년째다. 영롱 씨는 할머니 정신이 맑아지는 오후가 되면 귀에다 대고 힘찬 목소리로 묻는다. 5분 전 일도 잊어버리는 할머니지만 이때만큼은 척척 답한다.“할머니 이름이 뭐야?” “뭐긴 뭐여. 노병래!”“할머니 고향이 어디야?” “충남 서천군 기산면!”영롱 씨가 기특해하며 볼에 뽀뽀를 하면 할머니는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지랄허네.”영롱 씨는 아기 때부터 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혼란스러울 때도 할머니는 변함없이 손녀 곁을 지켰다. 영롱 씨는 “따뜻한 화로처럼 제 주변을 덥혀주는 존재였다”고 했다. 동네 아이들이 괴롭히기라도 하면 “우리 영롱이 울리는 놈은 망태 할아버지한테 던져버릴 거니께 그런 줄 알어!”라며 혼내줬다고 한다.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영롱 씨는 온라인 의류 쇼핑몰을 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가 갓 30대가 된 2019년 할머니는 치매 진단을 받았다. “그땐 무덤덤했어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지내다가 가끔씩 도와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정도로요. 치매에 너무 무지했죠.”● 서툰 간병에 표정을 잃어간 4년처음 몇 달간 할머니 간병은 영롱 씨 어머니의 몫이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영롱 씨는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목욕처럼 힘쓰는 일을 맡게 됐고, 어느덧 치매 증상이 휩쓸고 간 자리를 수습하는 게 일상이 됐다.“소변 자국을 닦아내고, 변이 묻은 옷과 이불을 매일같이 빨았어요. 할머니는 계속 잊어버리니까 방금 전 했던 질문을 반복하는데 귀도 안 들리셔서 매번 할머니 방으로 가 귀에다 크게 말해야 했어요. 지칠 땐 할머니 목소리를 백색 소음처럼 여기고 대꾸도 안 했죠. 제가 외출한 날엔 저녁 9시만 돼도 이웃에 다 들리게 ‘영롱이 바람났는가 보다’라고 소리를 지르셔서 일찍 귀가해야 했어요. 감옥에 갇힌 듯했죠.”할머니는 종일 거실 소파에 앉아 TV 홈쇼핑 채널을 무음으로 해놓고 멍하니 바라봤다. 귀는 안 들리고 자막도 읽지 못하니 그나마 볼 수 있는 건 상품이 계속 바뀌는 홈쇼핑뿐이었다. 영롱 씨는 “할머니가 외딴섬처럼 외로워 보였다”고 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나며 영롱 씨 가족은 표정을 잃어갔다. ‘기저귀 갈자’, ‘밥 먹자’, ‘씻자’, ‘누워’ 이 네 마디가 대화의 전부였다. 영롱 씨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죄책감에 시달렸다.하루는 영롱 씨가 기저귀 실수를 한 할머니를 욕실에서 씻기다가 “너무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평소 영롱 씨가 대소변을 수습할 때 벽만 보고 서 있던 할머니가 이날은 달랐다. 몸을 돌려 비누 거품이 묻은 손으로 손녀의 젖은 눈가를 닦아줬다. “할무이가 미안혀.” 할머니는 이 말을 계속 하며 눈물을 쏟았다.영롱 씨는 할머니도 미안함을 느낀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고 했다. 미안함은 앞서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있어야 느끼는 줄 알았는데 손녀가 힘들어서 운다는 것 자체에 미안해하는 듯했다. “전후 상황을 잘 모르더라도 저에 대한 사랑이 기억의 공백을 채워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유튜브 찍으며 발견한 할머니의 진면목영롱 씨는 이런 할머니를 보며 오랜 계획을 실행해볼 용기를 냈다. 할머니와의 일상을 유튜브로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뭔가에 노력해서 성과를 내면 성취감이 들어야 하는데 간병은 그런 게 없어요. 칭찬을 기대할 수도, 힘든 걸 드러내기도 어려워요. 근데 유튜브 영상을 만들면 할머니와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어 고단함이 덜할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저희 가족은 웃음에 너무 목말랐어요.”영롱 씨는 지난해 초 첫 영상을 올렸다. 할머니는 영상에서 이런 첫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당신네들도 그냥 살으믄 오래 살아요.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좋으믄 좋은 대로 살고, 그냥 돌아오는 대로 살으믄 되는 거여.”지난 4년간 할머니와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해봤던 영롱 씨는 거침없이 말하는 할머니가 놀라웠다. 기회가 없었을 뿐, 무대가 열리자 속마음을 술술 풀어놨다. 이후 ‘할머니 MBTI 검사’ ‘할머니 레시피로 나박김치 만들기’ ‘회춘 네일 받기’ ‘할머니의 고민상담소’ 같은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외향적 성격인 할머니는 촬영을 위해 뭔가에 도전해보는 걸 즐겼다. 기억을 잃어가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는 듯했다. 영롱 씨에겐 “테레비 찍고 있냐”고 수시로 물었다. 할머니의 입담도 되살아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땐 “호사방구(호사스럽게 잘 먹고 나서 뀌는 방귀) 쫙 갈긴다”며 들떠 하고, 영롱 씨가 간병하느라 밤잠을 설치면 “노인네 데리고 살려면 골치 아픈 거여”라며 어깨를 두드려줬다. 할머니는 손녀와 이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활기를 되찾았다.“나는 못 배운 게 한이여.”(할머니)“할머니가 내 딸로 태어나면 잘 교육시켜줄게.”(영롱)“너는 나이도 많고 신랑도 없어서 이미 글렀다.”(할머니)“요새는 정자기증을 받아서 혼자서도 낳을 수 있어.”(영롱)“아빠도 없고 고생이 뻔한 집에서 내가 뭐 하러 태어나.”(할머니)할머니가 한창 화투를 칠 때 외치곤 했던 “에라이, 못 먹어도 고다”란 표현도 자주 나왔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영롱 씨 역시 치매 간병 유튜브를 누가 재밌어할까 걱정이 됐을 때도 ‘못 먹어도 고’ 정신으로 저질렀다고 한다. 영롱 씨의 채널(롱롱TV)은 1년 반 만에 구독자가 14만 명을 넘어섰다.―유튜브를 하면서 할머니 증상이 좋아졌나.“웃는 일이 많아지면서 배변 실수가 많이 줄었다. 의사 선생님도 ‘치매 환자가 자존감이 올라가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겨 우울감이 낮아지면 인지 능력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자꾸 잊어버리는 할머니와 산다는 건 어떤 건가.“금방 잊기 때문에 즐거운 순간을 매번 새로 경험하게 된다. 잠자기 전 할머니와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는데 할머니는 언제나 보를 내기 때문에 저랑 엄마는 일부러 주먹을 낸다. 할머니로선 늘 처음 이기는 거라 아주 기뻐한다. 구독자가 10만 명이 넘어 유튜브 ‘실버버튼’을 받은 것도 ‘내가 손녀 덕분에 뜨는구먼’ 이러면서 매일 좋아하신다.”―우리는 아무리 좋은 것에도 쉽게 무뎌지는데….“불필요한 기억은 날아가고 소중한 기억은 더 고이 간직되는 것 같다. 할머니는 저를 키우던 시절이 행복하셨는지 그때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퐁당퐁당 동요를 불러주면 제가 박자에 맞춰 할머니 등을 두드렸단 말을 자주 하신다. 20대 때 군복무 중 세상을 뜬 외삼촌도 자주 찾으신다. 마음 깊이 묻은 자식이라 더 생각나시는 것 같다.”―치매가 영혼까지는 침범하지 못하는 것 같다.“사랑의 감정은 끝까지 보존되는 것 같다. 애정 표현도 솔직해졌다. 이리저리 재지 않으니 쑥스러워서 못 하던 걸 이젠 거침없이 한다. 예전엔 ‘영롱이 시집보내야 하는디…’ 하셨는데 요즘엔 ‘너 없인 못 산다’고 하신다. 엄마와도 수십 년 된 앙금이 있었는데 치매를 겪게 된 뒤에야 먼저 사과를 하셨다.”―유튜브 댓글에 ‘치매 환자가 저렇게 멀쩡할 리 없다’ ‘집에서 돌볼 형편이 안 되는 가족들에겐 이상적인 얘기”란 반응도 있더라.“충분히 이해가 간다. 저는 엄마와 교대로 돌볼 수 있고 간병을 부담스러워할 배우자도 없다. 다만 치매 환자도 잃는 것 보다 간직하는 게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치매 하면 말기 모습만 떠올리기 쉬운데 초기와 중기엔 해볼 수 있는 게 많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저도 할머니를 치매 환자로만 대하다가 ‘사람 노병래’를 놓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할머니 떠난 뒤 상상하는 내가 안 미워”지난달 영롱 씨는 지난 5년의 기록을 책으로 냈다. 제목은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로 지었다. 영롱 씨는 할머니 영상을 찍고 편집하면서, 어머니는 조회 수 올려준다고 영상을 만날 돌려보면서, 할머니는 늘 새로운 소식을 들고 다가오는 딸과 손녀를 맞이하면서 서로 따뜻하게 봐왔기 때문이다.할머니는 영롱 씨가 유튜브에 올라온 응원 댓글을 읽어줄 때면 “우리 영롱이가 내 눈이여”라고 말한다. 영롱 씨는 거동이 힘들어진 할머니의 다리가 되어주기 위해 1년 전부턴 근력 운동을 해왔다. 단독주택 2층에 사는 할머니가 산책을 나가려면 영롱 씨가 계단을 통해 업고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영롱 씨는 “40kg 정도 바벨은 거뜬히 드는 편이라 곧 할머니를 업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할머니가 없는 집은 어떨까 가끔 떠올려 봐요. 할머니 소리에 늘 예민해서 그런지 적막함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줬던 할머니의 빈자리가 크겠지만 즐거운 기억을 많이 쌓고 있어서 두렵진 않네요. 이젠 할머니가 떠난 뒤 뭘 할지 상상하는 제가 밉지 않아요.”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