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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본 아사히신문이 북한 청진 장마당의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시장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북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생존싸움을 벌이는 주민과 북한 지도층 간의 거리가 벌어질 수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전문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핵개발로 조성된 대외 제재 국면이 김정은 체제의 내구성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합니다.-차지현 연세대 경제학과 14학번(아산서원 14기)A. 북한 내부 소식통들의 전언에 따르면 2017년 8월부터 시작된 유엔 제재의 효과는 약 1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북한 내 부동산의 극적 하락입니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이미 집을 사고파는 세상이 된지 오랩니다. 그래서 북한 간부들을 포함한 권력층들은 축적한 돈을 집을 사놓는데 많이 썼습니다. 하지만 요즘 평양을 보면 자고 나면 집값이 뚝뚝 떨어집니다. 불과 반년 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2019년 2월 현재 몇 달 전 고점 대비 반값, 많게는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998년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을 연상케 해, 북한판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재작년 8월 북한의 3대 돈줄인 석탄·수산물 수출과 의류 임가공을 꽁꽁 틀어막는 유엔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시작된 뒤 1년 정도는 잘 버티는가 싶었는데 결국 터질 것이 터진 것입니다. 최근 몇 년간 가장 핫한 지역으로 부상하던 평양역 뒤편 평천구역의 150m²짜리 새 아파트의 호가는 1만5000달러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골조만 세우고 분양해도 순식간에 팔리던 아파트가 반년 만에 실내마감까지 끝내고도 3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습니다. 이런 상황의 주원인은 대북 제재입니다. 수출이 꽁꽁 막히자 달러도 씨가 말랐습니다. 북한 권력층의 최대 돈줄은 수출입 과정에서 이면계약을 통해 챙기는 달러입니다. 가령 석탄의 국제 시세가 t당 100달러면 수출시 장부에 70달러로 적어 보고하고 나머지 30달러를 숨기는 식입니다. 이를 통해 매년 국가 무역에서 증발한 수십억 달러가 평양의 부동산과 사치품 구매에 쓰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평양에 새 아파트가 많이 공급된 것도 가격 폭락을 부추겼습니다. 최근 수천 채씩 분양된 미래과학자거리나 여명거리는 새 발의 피입니다. 돈주들이 투자한 소규모 건축물이나 재개발 등을 통해 지어진 아파트는 훨씬 많습니다. 이처럼 공급은 늘어났는데 돈줄이 꽉 막히니 가격이 폭락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20년 동안 꾸준히 상승하던 평양 부동산은 한순간에 10년 이상의 상승 폭을 반납했습니다. 이 정도면 돈 냄새를 기막히게 맡는 ‘돈주’들이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헐값에 매물들을 사들일 만한데 지금은 그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권력층부터 부동산의 대폭락으로 주머니가 비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돈주는 곧 권력을 가진 간부들입니다. 요새 한국도 부동산 가격 하락과 거래 절벽으로 시끄러운데 만약 평양처럼 서울 집값이 반값이 된다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여론이 들끓고, 광화문은 시위대로 넘쳐날 가능성이 크겠죠. 하지만 아직 평양은 잠잠해 보입니다. 반항할 수 없는 북한 체제의 속성 때문으로 봅니다. 지방의 충격은 더 큽니다. 여기도 겉으론 평온해 보입니다. 마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초기 수십만 명이 굶어죽어도 밖에서 몰랐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북한 사람들이 집값 폭락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도 인생 최대의 목표가 집 한 채 마련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질 않을 뿐이죠. 여기에다 북한 당국이 새해가 밝자마자 세도와 관료주의를 없앤다고 간부들을 죄고 있는 것도 불만을 사고 있습니다. 이번 조치는 뇌물 받는 간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국가에서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북한에서 뇌물은 곧 월급이고, 승진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진다는 점입니다. 권력으로 달러와 부동산을 축적해 온 간부들 사이에서 “핵무기 집착으로 경제 망치고, 왜 우리 옆구리를 차냐”는 불만이 공공연하게 나돌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부동산 가격 폭락과 뇌물 근절 캠페인은 결과적으로 김정은 정권의 안정성을 크게 위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집값 폭락에 비례해 등을 돌리는 곳이 바로 북한 체제 수호의 핵심 보루인 평양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선 간부들의 주머니에 달러가 채워져야만 합니다. 부동산의 대폭락은 매우 심상치 않은 징조입니다. 올해 계속 가다가는 북한에서 큰 일이 터질지 모릅니다. 당연히 급격히 경제가 악화되면 북한의 내구성은 급격히 약화되고, 간부들부터 “김정은을 믿고 있다가 우리가 굶어죽게 생겼다”고 원망할 것입니다. 물론 사소한 반항도 처형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특성상 당장 봉기가 일어나긴 어렵겠지만, 인민의 마음 속에서 김정은에 대한 충실성은 곧 떠나게 될 것입니다. 집값이 순식간에 반값, 3분의 1로 주저앉으면, 다음 수순은 북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던 자영업자들이 망하고, 이들이 장악했던 소비, 유통, 물류가 스톱이 되게 됩니다. 지금처럼 대북제재가 계속되면 북한의 2019년은 매우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해가 됩니다. 다시 아사자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한국은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에서 돈이라도 빌려왔지만, 북한이 돈을 꿔올 만한 곳이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제재를 풀도록 만드는 것이겠죠.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막힌 돈줄을 풀겠다”고 내부에 던진 약속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현 상황에서 김정은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북미 회담의 성과를 추동하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이렇게 악화되고 있는 북한 내부 상황에서 나옵니다. 급격히 악화되는 민심을 하루빨리 달래야 하는 김정은은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반드시 성과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과거처럼 더 버티기 어렵고, 미국에 많은 양보를 해야 할 것으로 전망됩니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요즘 평양이 심상치 않다. 자고 나면 집값이 뚝뚝 떨어진다. 벌써 몇 달 전 고점 대비 반값, 많게는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1998년 한국의 외환위기 상황을 연상케 해, 북한판 외환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재작년 8월 북한의 3대 돈줄인 석탄·수산물 수출과 의류 임가공을 꽁꽁 틀어막는 유엔의 강력한 대북 제재가 시작된 뒤 1년 정도는 잘 버티는가 싶었는데 결국 터질 것이 터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가장 핫한 지역으로 부상하던 평양역 뒤편 평천구역의 150m²짜리 새 아파트의 호가는 1만5000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골조만 세우고 분양해도 순식간에 팔리던 아파트가 반년 만에 실내마감까지 끝내고도 3분의 1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런 상황의 주원인은 대북 제재다. 수출이 꽁꽁 막히자 달러도 씨가 말랐다. 북한 권력층의 최대 돈줄은 수출입 과정에서 이면계약을 통해 챙기는 달러다. 가령 석탄의 국제 시세가 t당 100달러면 수출시 장부에 70달러로 적어 보고하고 나머지 30달러를 숨기는 식이다. 이를 통해 매년 국가 무역에서 증발한 수십억 달러가 평양의 부동산과 사치품 구매에 쓰인다. 최근 몇 년 동안 평양에 새 아파트가 많이 공급된 것도 가격 폭락을 부추겼다. 최근 수천 채씩 분양된 미래과학자거리나 여명거리는 새 발의 피다. 돈주들이 투자한 소규모 건축물이나 재개발 등을 통해 지어진 아파트는 훨씬 많다. 이처럼 공급은 늘어났는데 돈줄이 꽉 막히니 가격이 폭락하는 건 당연하다. 20년 동안 꾸준히 상승하던 평양 부동산은 한순간에 10년 이상의 상승 폭을 반납했다. 이 정도면 돈 냄새를 기막히게 맡는 ‘돈주’들이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헐값에 매물들을 사들일 만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움직임도 없다. 주머니가 비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돈주는 곧 권력을 가진 간부들이다. 요새 한국도 부동산 가격 하락과 거래 절벽으로 시끄럽다. 만약 평양처럼 서울 집값이 반값이 된다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여론이 들끓고, 광화문은 시위대로 넘쳐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평양은 잠잠하다. 지방의 충격도 클 텐데, 겉으론 평온해 보인다. 마치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초기 수십만 명이 굶어죽어도 밖에서 몰랐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내가 살다 온 곳임에도 “북한이 저렇게 무서운 곳이었구나”를 새삼 느낀다. 그렇다고 북한 사람들이 집값 폭락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북한 사람들도 인생 최대의 목표가 집 한 채 마련인 경우가 많다. 다만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질 않을 뿐이다. 여기에다 북한 당국이 새해가 밝자마자 세도와 관료주의를 없앤다고 간부들을 죄고 있는 것도 불만을 사고 있다. 이번 조치는 뇌물 받는 간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문제는 국가에서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 북한에서 뇌물은 곧 월급이고, 승진에 대한 보상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권력으로 달러와 부동산을 축적해 온 간부들 사이에서 “핵무기 집착으로 경제 망치고, 왜 우리 옆구리를 차냐”는 불만이 공공연하게 나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부동산 가격 폭락과 뇌물 근절 캠페인은 결과적으로 김정은 정권의 안정성을 크게 위협할 수밖에 없다. 집값 폭락에 비례해 등을 돌리는 곳이 바로 북한 체제 수호의 핵심 보루인 평양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를 막기 위해선 간부들의 주머니에 달러가 채워져야만 한다. 문제는 북한이 돈을 꿔올 만한 곳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엔이 제재를 풀도록 만드는 것이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반드시 막힌 돈줄을 풀겠다”고 내부에 던진 약속이나 마찬가지다. 현 상황에서 김정은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급격히 악화되는 민심을 하루빨리 달래야 하는 김정은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지 벌써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 씨(53)를 쏜 북한 군인은 여성 해안포 부대 소속 열아홉 살 여군이었다. 입대 2년 차 초급병사였는데, 북한 병사의 7단계 계급 중 밑에서 두 번째인 신병이었다. 그는 잠복근무 중이던 오전 5시경 잠복지 인근에 접근한 박 씨에게 여러 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북한군 잠복근무 수칙은 실탄 발사까지 4단계를 거친다. 먼저 “섯, 누구얏!” 하고 소리치고 서지 않으면 “안 서면 쏜다”고 경고한다. 불응하면 공포탄을 먼저 쏘고, 그래도 서지 않으면 실탄을 발사한다. 박 씨는 첫 단계에서 뒤돌아 뛰기 시작했는데, 신참 여군은 4단계까지 빠르게 진행한 뒤 두 발을 명중시켰다. 후방이라면 잠복근무 때 실탄을 휴대하지 않지만 금강산 인근 해안은 종종 이곳을 경유해 탈북하는 사람들이 있어 경계가 엄중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사건 이후 남북은 서로 상대에게 잘못이 있으니 사과하라며 기싸움을 벌였다. 남측은 이틀 뒤인 13일 관광지구 내 인원을 모두 철수시켰고, 금강산 관광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많다. 당시 북한 대남일꾼들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북한군 총정치국 간부부 표창과에선 여군을 어떻게 포상할지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당시 중앙당에서 표창하라는 지시가 직접 내려왔던 것. 사건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직접 “여군이 규정대로 한 것은 상을 줄 일이다”라고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표창과에선 포상 수준을 놓고 영웅 칭호와 김일성 청년영예상, 일반훈장 등을 검토하다 결국 국기훈장 1급으로 결정했다. 민간인을 죽였으니 영웅 칭호는 과하지만 노동당의 지시이니 낮은 포상을 할 수도 없었다. 국기훈장 1급은 수십 종의 북한 훈장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비교적 높은 레벨로, 열아홉 살짜리가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해당 여군은 이후 각급 부대로 순회강연도 했다. 이런 훈장을 받고 전군의 모범으로 강연까지 하면 대개 제대를 하지 못하고 군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 서른 살이 됐을 이 여군은 지금쯤 대대장 정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강원도 주둔 부대는 ‘알농(알짜 농민)’의 자식들만 간다고 알려졌다. 근무 환경이 제일 열악해 가난한 집 자식들만 간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대대장까지 진급했으면 ‘팔자를 고친 셈’이어서 다른 군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2019년에 금강산 관광이 재개된다면 제2의 한국 관광객 피살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박 씨 피살 사건은 햇볕정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이 사건은 북한 내부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제한된 지역에서만 이뤄지는 금강산 관광이 북한 주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연간 5000만 달러로 추정되는 관광 수익은 고스란히 노동당 자금으로 들어갔다. 금강산 관광에 이어 개성 관광까지 끊기게 되자 북한 당국은 다른 수익원을 고민해야 했고, 결국 그해 12월 이집트 통신회사 ‘오라스콤’을 끌어들여 휴대전화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100달러 미만의 싼 부품을 사다 조립한 휴대전화를 주민에게 300달러 이상에 팔았다. 2013년까지 휴대전화가 해마다 100만 대 이상씩 늘어나면서 북한 당국도 매년 2억 달러 이상 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가 단절된 와중에 북한 지도부의 든든한 돈줄이 됐다. 그 대신 북한 주민은 휴대전화를 쓰는 자유를 얻었다. 강력한 유엔의 대북제재로 돈줄이 막힌 지난해에도 북한 당국은 그동안 금지했던 외국영화 등을 주민에게 팔아 돈을 벌었다. 이는 대북제재의 한계와 효과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다. 대북제재로 돈줄을 말려 북한 지도부를 굴복시키긴 어렵다. 그들에겐 아직도 팔 것이 많다. 가령 주택의 사적 소유를 허가해 거래 수수료를 챙겨도 당분간 몇 년 동안은 해마다 수억 달러씩은 챙길 수 있다. 새해 들어 금강산 관광 재개가 다시금 화두가 되고 있다. 우리는 평화와 교류를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다시 돈이 들어가면 북한의 대내 통치가 어떻게 변할지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모르는 척해서는 안 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관광객 박왕자 씨(53)를 쏜 북한 군인은 여성 해안포 부대 소속 19살 여군이었다. 입대 2년차 초급병사였는데, 북한 병사의 7단계 계급 중 밑에서 두 번째인 신병이었다. 그는 잠복근무 중이던 오전 5시경 잠복지 인근에 접근한 박 씨에게 여러 발의 실탄을 발사했다. 북한군 잠복근무 수칙은 실탄 발사까지 4단계를 거친다. 먼저 “섯, 누구얏!”하고 소리치고 서지 않으면 “안서면 쏜다”고 경고한다. 불응하면 공포탄을 먼저 쏘고, 그래도 서지 않으면 실탄을 발사한다. 박 씨는 첫 단계에서 뒤돌아 뛰기 시작했는데, 신참 여군은 4단계까지 빠르게 진행한 뒤 두 발을 명중시켰다. 후방이라면 잠복근무 때 실탄을 휴대하지 않지만 금강산 인근 해안은 종종 이곳을 경유해 탈북하는 사람들이 있어 경계가 엄중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사건 이후 남북은 서로 상대에게 잘못이 있으니 사과하라며 기싸움을 벌였다. 남측은 이틀 뒤인 13일 관광지구 내 인원을 모두 철수시켰고, 금강산 관광은 그렇게 끝났다. 이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는 많다. 당시 북한 대남일꾼들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동안, 북한군 총정치국 간부부 표창과에선 여군을 어떻게 포상할지를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당시 중앙당에서 표창하라는 지시가 직접 내려왔던 것. 사건의 심각성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직접 “여군이 규정대로 한 것은 상을 줄 일이다”고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표창과에선 포상 수준을 놓고 영웅 칭호와 김일성 청년영예상, 일반훈장 등을 검토하다 결국 국기훈장 1급으로 결정했다. 민간인을 죽였으니 영웅 칭호는 과하지만 노동당의 지시이니 낮은 포상을 할 수도 없었다. 국기훈장 1급은 수십 종의 북한 훈장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비교적 높은 레벨로, 19살짜리가 받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해당 여군은 이후 각급 부대로 순회강연도 했다. 이런 훈장을 받고 전군의 모범으로 강연까지 하면 대개 제대를 하지 못하고 군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 30살이 됐을 이 여군은 지금쯤 대대장 정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에서 강원도 주둔 부대는 ‘알농(알짜 농민)’의 자식들만 간다고 알려졌다. 근무 환경이 제일 열악해 가난한 집 자식들만 간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대대장까지 진급했으면 ‘팔자를 고친 셈’이어서 다른 군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2019년에 금강산 관광이 재개된다면 제2의 한국 관광객 피살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박 씨 피살 사건은 햇볕정책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를 계기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 사건은 북한 내부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제한된 지역에서만 이뤄지는 금강산 관광이 북한주민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다. 대신 연간 5000만 달러로 추정되는 관광 수익은 고스란히 노동당 자금으로 들어갔다. 금강산 관광에 이어 개성 관광까지 끊기게 되자 북한 당국은 다른 수익원을 고민해야 했고, 결국 그해 12월 이집트 통신회사 ‘오라스콤’을 끌어들여 휴대전화 사업을 시작했다. 중국에서 100달러 미만의 싼 부품을 사다 조립한 휴대전화를 주민에게 300달러 이상에 팔았다. 2013년까지 휴대전화가 해마다 100만 대 이상씩 늘어나면서 북한 당국도 매년 2억 달러 이상 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으로 남북관계가 단절된 와중에 북한 지도부의 든든한 돈줄이 됐다. 대신 북한 주민은 휴대전화를 쓰는 자유를 얻었다. 강력한 유엔의 대북제재로 돈줄이 막힌 지난해에도 북한 당국은 그동안 금지했던 외국영화 등을 주민에게 팔아 돈을 벌었다. 이는 대북제재의 한계와 효과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다. 대북 제재로 돈줄을 말려 북한 지도부를 굴복시키긴 어렵다. 그들에겐 아직도 팔 것이 많다. 가령 주택의 사적 소유를 허가해 거래 수수료를 챙겨도 당분간 몇 년 동안은 해마다 수 억 달러씩은 챙길 수 있다. 새해 들어 금강산 관광 재개가 다시금 화두가 되고 있다. 우리는 평화와 교류를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다시 돈이 들어가면 북한의 대내 통치가 어떻게 변할지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모르는 척 해서는 안 된다.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연초부터 통일부 출입기자단 소속 기자 70여 명이 해킹을 당했다. 지난해 말에는 경북 하나센터에서 탈북민 997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이 담긴 명단이 해킹으로 유출됐다. 이들 해킹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정부 부처나 전문가를 사칭한 이메일에 악성코드를 심은 문서나 링크를 걸어놓는 ‘스피어 피싱(spear phishing)’에 당했다는 점이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국회의원, 국립외교원 교수 등 명망 있는 인사의 이메일 계정을 도용하거나 ‘국가안보실 비서관 강연 원고’, ‘북-중 관계 전망 관련 설문’ 등 받는 사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제목의 가짜 문서를 첨부해 해당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최근의 해킹 시도는 외교 안보 분야 당국자와 전문가들을 타깃으로 특히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소행이 유력해 보인다. 지난해 북한이 대북 제재에 따른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젊은 정보기술(IT) 인재들을 대거 중국에 파견하면서 해킹이 빈번해졌다는 점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해킹 담당 정찰총국의 실체 현재 북한에서 사이버전을 담당하는 부대는 두 곳이다. 하나는 정찰총국이고 다른 하나는 군 소속 적군와해공작국(적공국)이다. 과거에는 노동당 작전부도 해킹부대를 운영했지만, 2009년 초 노동당과 군에서 운영하던 대남·해외 공작 기구가 통합되면서 모두 정찰총국으로 넘어갔다. 해킹은 주로 정찰총국이 수행한다. 적공국은 정보자료 수집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심리전과 외화벌이에 주력한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정찰총국 소속 해커는 300명 수준, 적공국 소속은 100여 명으로 파악된다. 모두 합쳐 500명을 넘지 않기 때문에 국내 언론이 주장하는 규모(3000∼7000명)보다는 인원이 적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3년 군 간부들에게 “사이버전은 핵, 미사일과 함께 인민군대의 무자비한 타격 능력을 담보하는 만능의 보검”이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의 해킹 역량은 크게 강화됐다. 이때부터 정찰총국은 최고의 수재학교인 금성학원 컴퓨터반 출신들을 뽑아 김일성대와 김책공업대에서 2년 반 동안 공부시킨 뒤, 이 중 매년 10∼20명을 선발했다. 금성학원 컴퓨터반 졸업생은 한 해에 300∼400명 배출되는데, 이 중 5% 정도를 뽑은 셈이다. 금성학원 출신들은 어릴 때부터 코딩을 익혔고, 일반인에 비해 새로운 지식을 배우거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속도가 매우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찰총국은 한국과 미국의 국방 관련 분야 등에 설치된 고도의 보안 시스템을 뚫고 들어가 비밀을 탈취하는 것을 최우선 임무로 삼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찰총국은 인재난으로 고충을 겪고 있다. 북한의 뛰어난 IT 인재들이 열심히 해킹해도 돈을 벌 수 없다며 정찰총국을 기피하고 있어서다. 그 대신 이들은 돈벌이가 가능한 외화벌이 업체에 몰리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정찰총국에는 군 복무 경력과 노동당 입당을 목표로 하는 실력 수준이 낮은 인력이 태반이다. 다만 고난도의 해킹이라도 전문가 3, 4명이면 가능하기에 고급 인력이 적다고 해서 정찰총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게 IT 전문가들의 평가다. 최근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해킹 공격 방식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초식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샘에 모이길 기다렸다가 덮치는 맹수처럼 외교안보 관계자들이 자주 갈 만한 웹사이트에 악성코드를 심어놓고 방문자 PC를 감염시키는 ‘워터링 홀’(물웅덩이)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자 PC를 해킹해 프로그램 설계 때부터 악성 코드를 숨겨놓는 ‘서플라이 체인 어택’(공급망 공격)이 대표적이다. 문종현 이스트시큐리티 이사는 “2017년 탈북자나 대북단체 관계자들 앞으로 돈을 송금했다거나 수혈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메일이 발송됐는데, 첨부 파일이나 링크 없이 메일을 열기만 하면 바로 감염되는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XSS) 공격이었다”면서 “기존 스피어 피싱이 재래식 무기라면 XSS는 기존 보안 수칙으로는 막을 수 없는 핵무기급 공격”이라고 소개했다.○ 해커로 돌변 가능한 외화벌이 전사들 북한의 해킹 역량은 정찰총국 소속 인력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북한이 해외에 파견한 IT 인력들도 당국의 지시가 있거나, 돈을 벌 수 있다면 언제든 해커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소식통은 “디도스 공격이나 해킹 메일 작성은 고난도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 파견돼 있는 북한 IT 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9월 북한 IT 인력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된 중국 옌볜(延邊)의 ‘실버스타(은성)’의 정성화 대표(49)는 북한 IT 관련 외화벌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해외 파견 IT 인력의 최고 실세였다. 그가 해외에 데리고 나온 인력만 300명이 넘고 매년 북한에 송금하는 돈은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 그가 거느린 IT 팀들은 미국과 유럽, 호주,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주문을 받아 프로그램 제작이나 사이트 개설 및 관리, 제품 복제 등으로 돈을 번다. 북한 인력들은 저렴한 가격에 비해 실력이 좋고,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에 파견 나오는 팀을 북한에선 ‘대표단’이라고 부른다. 대표단은 소속 기관별로 1년씩 상주하는 팀도 있고, 몇 달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팀도 있다. 각 팀은 보통 5∼7명으로 꾸려지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작업에 몰두한다. 식료품 구입이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잠깐 밖에 나올 때도 도주를 막기 위해 2인조로 행동한다. 이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주문을 받으면 시간대를 그곳으로 맞춰놓고 잠도 자지 않고 작업한다. 이런 식으로 1인당 한 달에 1000∼5000달러씩 벌어들이는데, 작으면 5∼10%, 많으면 20% 정도를 개인이 받는다. 북한 소식통은 “북한 내에서 가장 고급 인력으로 인정받는 인도 유학생 출신의 IT 기술자들은 매달 2만∼4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이들은 주로 미국을 대상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IT 외화벌이의 전성시대 지난해 군수공업을 담당한 2경제위원회에 소속돼 313총국으로 명칭을 바꾼 조선컴퓨터센터(KCC)는 2017년 1000만 달러(약 112억 원)를 당 자금으로 바쳤다. 이에 고무된 김 위원장은 노동당과 무력부, 보안성, 보위성 등의 각급 내각 기관도 중국에 IT 인력을 파견해 돈을 벌어올 것을 요구했다. IT에 의한 외화벌이를 대북 제재를 뚫는 새로운 외화벌이 방식으로 채택한 셈이다. 그 결과 현재 중국에는 1000명이 넘는 북한 IT 인재들이 파견 나와 매년 수천만 달러씩 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IT 관련 외화벌이를 하다 탈북해 한국에 온 한 탈북자는 10일 “연락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니 지금 파견된 인력 규모가 10년 전에 비해 5∼6배 늘었다”고 말했다. 엄격한 대북 제재 속에서도 중국에 파견되는 인력 규모는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그는 “지금 북한은 IT를 통한 외화벌이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며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우선 IT 관련 외화벌이 사업의 노하우가 쌓였다. 어디서 주문을 따고 금액은 어느 정도 받아야 하는지 등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핀테크(fintech·금융과 정보기술의 결합) 혁명으로 사업 환경이 바뀐 것도 영향을 미쳤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IT 사업을 수주하려면 사업체가 있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현지인 명의의 통장을 확보하는 사전 조건을 갖춰야만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을 내세우지 않고는 사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핀테크 혁명으로 북한 인력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계약을 할 수 있다. 송금도 휴대전화로 쉽게 이뤄진다. 상대방에게 북한 인력임을 드러내지 않고도 원하는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 인력의 질적 향상을 꼽을 수 있다. 숙련된 IT 인력이 많아지고 사업이 계속되면서 노하우가 전수된 결과 전문 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가격이 싸고, 속도가 빠르며, 만든 제품의 품질이 좋기 때문에 이들은 전 세계에서 일감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고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오늘도 그들은 일감을 수주하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배회하고 있다.○ 외부의 지원이 북한 해킹 능력 키워 사실 북한의 IT 역량을 키운 결정적인 요인은 외부의 지원이다. 북한에서 해킹을 제일 먼저 시작한 부서는 노동당 작전부이다. 작전부는 1990년대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구소련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데려왔다. 이어 최고 수재 10명을 뽑아 평양 모란봉구역 소재의 모란대에서 교육시킨 게 북한 해킹 인력의 씨앗이 됐다. 북한 IT 인력의 해외 진출은 2000년 삼성전자가 대북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 설립한 KCC 지부에 10명의 소프트웨어 인력을 파견하면서 본격화됐다. 삼성전자는 2004년까지 300만 달러 이상을 북한 인력을 이용한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했고, 이때 해외에 나와 활동했던 인물들이 현재 북한 IT 관련 분야의 핵심 인력으로 활동 중이다. 북한 IT 업계의 거두 정성화 대표도 당시 삼성과 합작해 바둑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인물이다. 북한은 예전에는 IT 분야에서 금성학원 졸업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북이 2009년 공동으로 설립한 평양과학기술대 졸업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은 웹, 모바일, 데스크톱, 크랙(복사 방지나 등록기술 등이 적용된 상용 소프트웨어의 비밀을 풀어서 불법으로 복제하거나 파괴하는 것) 등 전문 분야를 갖고 연구와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2, 3년간 북한 내부의 인터넷 환경이 좋아진 것도 IT 역량의 급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현재 북한에는 정찰총국이나 적공국은 물론이고 노동당과 국무위원회, 보위성, 김일성대, 김책공대, 과학원 등에 수백 회선의 인터넷망이 깔려 있고 매년 회선이 빠르게 늘어난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 자료를 내려받는 속도가 중국보다 빠르다. 과거 북한에서 IT를 통한 외화벌이를 하려면 중국에 나와야만 가능했다. 또 중국에서도 같은 팀 중 몇 명만 인터넷 접속이 허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 IT 인력들에게 북한 내에서도 인터넷 접속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감시 프로그램을 깔아 어느 사이트에 접속했는지를 파악하기 때문에 한국 사이트 등 민감한 사이트엔 접속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북한 IT 인력은 가급적이면 해외에 나오려 애쓴다. 부업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소식통은 “정찰총국 해커들도 예외는 아니다”라며 “이들은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해킹 실적을 쌓은 뒤 나머지 시간엔 미국 유럽 등으로부터 IT 관련 사업을 수주해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고 전했다.주성하 zsh75@donga.com·신동진 기자}

연초부터 통일부 출입기자단 소속 기자 70여 명이 해킹을 당했다. 지난해 말에는 경북 하나센터에서 탈북민 997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등이 담긴 명단이 해킹으로 유출됐다. 이들 해킹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정부 부처나 전문가를 사칭한 이메일에 악성코드를 심은 문서나 링크를 걸어놓는 ‘스피어 피싱(spear phishing)’에 당했다는 점이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국회의원, 국립외교원 교수 등 명망 있는 인사의 이메일 계정을 도용하거나 ‘국가안보실 비서관 강연 원고’, ‘북-중 관계 전망 관련 설문’ 등 받는 사람이 관심을 가질 만한 제목의 가짜 문서를 첨부해 해당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최근의 해킹 시도는 외교 안보 분야 당국자와 전문가들을 타깃으로 특히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소행이 유력해 보인다. 지난해 북한이 대북 제재에 따른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젊은 정보기술(IT) 인재들을 대거 중국에 파견하면서 해킹이 빈번해졌다는 점도 이런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해킹 담당 정찰총국의 실체 현재 북한에서 사이버전을 담당하는 부대는 두 곳이다. 하나는 정찰총국이고 다른 하나는 군 소속 적군와해공작국(적공국)이다. 과거에는 노동당 작전부도 해킹부대를 운영했지만, 2009년 초 노동당과 군에서 운영하던 대남·해외 공작 기구가 통합되면서 모두 정찰총국으로 넘어갔다. 해킹은 주로 정찰총국이 수행한다. 적공국은 정보자료 수집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심리전과 외화벌이에 주력한다.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현재 정찰총국 소속 해커는 300명 수준, 적공국 소속은 100여 명으로 파악된다. 모두 합쳐 500명을 넘지 않기 때문에 국내 언론이 주장하는 규모(3000~7000명)보다는 인원이 적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3년 군 간부들에게 “사이버전은 핵, 미사일과 함께 인민군대의 무자비한 타격 능력을 담보하는 만능의 보검”이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의 해킹 역량은 크게 강화됐다. 이때부터 정찰총국은 최고의 수재학교인 금성학원 컴퓨터반 출신들을 뽑아 김일성대와 김책공업대학에서 2년 반 동안 공부시킨 뒤, 이 중 매년 10~20명을 선발했다. 금성학원 컴퓨터반 졸업생은 한 해에 300~400명 배출되는데, 이 중 5% 정도를 뽑은 셈이다. 금성학원 출신들은 어릴 때부터 코딩을 익혔고, 일반인에 비해 새로운 지식을 배우거나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속도가 매우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찰총국은 한국과 미국의 국방 관련 분야 등에 설치된 고도의 보안 시스템을 뚫고 들어가 비밀을 탈취하는 것을 최우선 임무로 삼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찰총국은 인재난으로 고충을 겪고 있다. 북한의 뛰어난 IT 인재들이 열심히 해킹해도 돈을 벌 수 없다며 정찰총국을 기피하고 있어서다. 그 대신 이들은 돈벌이가 가능한 외화벌이 업체에 몰리고 있다. 그 결과 현재 정찰총국에는 군 복무 경력과 노동당 입당을 목표로 하는 실력 수준이 낮은 인력이 태반이다. 다만 고난도의 해킹이라도 전문가 3, 4명이면 가능하기에 고급 인력이 적다고 해서 정찰총국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는 게 IT 전문가들의 평가다. 최근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해킹 공격 방식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초식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샘에 모이길 기다렸다가 덮치는 맹수처럼 외교안보 관계자들이 자주 갈 만한 웹사이트에 악성코드를 심어놓고 방문자 PC를 감염시키는 ‘워터링 홀’(물웅덩이)이나 소프트웨어 개발자 PC를 해킹해 프로그램 설계 때부터 악성 코드를 숨겨놓는 ‘서플라이 체인 어택’(공급망 공격)이 대표적이다. 문종현 이스트시큐리티 이사는 “2017년 탈북자나 대북단체 관계자들 앞으로 돈을 송금했다거나 수혈이 필요하다는 제목의 메일이 발송됐는데, 첨부 파일이나 링크 없이 메일을 열기만 하면 바로 감염되는 크로스 사이트 스크립팅(XSS) 공격이었다”면서 “기존 스피어 피싱이 재래식 무기라면 XSS는 기존 보안 수칙으로는 막을 수 없는 핵무기급 공격”이라고 소개했다.● 해커로 돌변 가능한 외화벌이 전사들 북한의 해킹 역량은 정찰총국 소속 인력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북한이 해외에 파견한 IT 인력들도 당국의 지시가 있거나, 돈을 벌 수 있다면 언제든 해커로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소식통은 “디도스 공격이나 해킹 메일 작성은 고난도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 파견돼 있는 북한 IT 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9월 북한 IT 인력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된 중국 옌볜(延邊)의 ‘실버스타(은성)’의 정성화 대표(49)는 북한 IT 관련 외화벌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는 해외 파견 IT 인력의 최고 실세였다. 그가 해외에 데리고 나온 인력만 300명이 넘고 매년 북한에 송금하는 돈은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 그가 거느린 IT 팀들은 미국과 유럽, 호주,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주문을 받아 프로그램 제작이나 사이트 개설 및 관리, 제품 복제 등으로 돈을 번다. 북한 인력들은 저렴한 가격에 비해 실력이 좋고, 빨리 결과물을 만들어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에 파견 나오는 팀을 북한에선 ‘대표단’이라고 부른다. 대표단은 소속 기관별로 1년씩 상주하는 팀도 있고, 몇 달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팀도 있다. 각 팀은 보통 5~7명으로 꾸려지며,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고 작업에 몰두한다. 식료품 구입이나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잠깐 밖에 나올 때도 도주를 막기 위해 2인조로 행동한다. 이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주문을 받으면 시간대를 그곳으로 맞춰놓고 잠도 자지 않고 작업한다. 이런 식으로 1인당 한 달에 1000~5000달러씩 벌어들이는데, 작으면 5~10%, 많으면 20% 정도를 개인이 받는다. 북한 소식통은 “북한 내에서 가장 고급 인력으로 인정받는 인도 유학생 출신의 IT 기술자들은 매달 2만~4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이들은 주로 미국을 대상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IT 외화벌이의 전성시대 지난해 군수공업을 담당한 2경제위원회에 소속돼 313총국으로 명칭을 바꾼 조선컴퓨터센터(KCC)는 2017년 1000만 달러(약 112억 원)를 당 자금으로 바쳤다. 이에 고무된 김 위원장은 노동당과 무력부, 보안성, 보위성 등의 각급 내각 기관도 중국에 IT 인력을 파견해 돈을 벌어올 것을 요구했다. IT에 의한 외화벌이를 대북 제재를 뚫는 새로운 외화벌이 방식으로 채택한 셈이다. 그 결과 현재 중국에는 1000명이 넘는 북한 IT 인재들이 파견 나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에서 IT 관련 외화벌이를 하다 탈북해 한국에 온 한 탈북자는 10일 “연락되는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니 지금 파견된 인력 규모는 10년 전에 비해 5~6배 늘었다”고 말했다. 엄격한 대북 제재 속에서도 중국에 파견되는 인력 규모는 오히려 늘어난 것이다. 그는 “지금 북한은 IT를 통한 외화벌이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며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분석했다. 우선 IT 관련 외화벌이 사업의 노하우가 쌓였다. 어디서 주문을 따고 금액은 어느 정도 받아야 하는지 등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중국의 핀테크(fintech·금융과 정보기술의 결합) 혁명으로 사업 환경이 바뀐 것도 영향을 미쳤다. 10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IT 사업을 수주하려면 사업체가 있고, 계약서를 작성하고, 현지인 명의의 통장을 확보하는 사전 조건을 갖춰야만 가능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을 내세우지 않고는 사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핀테크 혁명으로 북한 인력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계약을 할 수 있다. 송금도 휴대전화로 쉽게 이뤄진다. 상대방에게 북한 인력임을 드러내지 않고도 원하는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북한 인력의 질적 향상을 꼽을 수 있다. 숙련된 IT 인력이 많아지고 사업이 계속되면서 노하우가 전수된 결과 전문 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가격이 싸고, 속도가 빠르며, 만든 제품의 품질이 좋기 때문에 이들은 전 세계에서 일감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고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오늘도 그들은 일감을 수주하기 위해 인터넷의 바다를 배회하고 있다.● 외부의 지원이 북한 해킹 능력 키워 사실 북한의 IT 역량을 키운 결정적인 요인은 외부의 지원이다. 북한에서 해킹을 제일 먼저 시작한 부서는 노동당 작전부이다. 작전부는 1990년대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구소련의 암호 해독 전문가들을 비밀리에 데려왔다. 이어 최고 수재 10명을 뽑아 평양 모란봉구역 소재의 모란대학에서 교육시킨 게 북한 해킹 인력의 씨앗이 됐다. 북한 IT 인력의 해외 진출은 2000년 삼성전자가 대북 사업의 일환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에 설립한 KCC 지부에 10명의 소프트웨어 인력을 파견하면서 본격화됐다. 삼성전자는 2004년까지 300만 달러 이상을 북한 인력을 이용한 소프트웨어 개발에 투자했고, 이때 해외에 나와 활동했던 인물들이 현재 북한 IT 관련 분야의 핵심 인력으로 활동 중이다. 북한 IT 업계의 거두 정성화 대표도 당시 삼성과 합작해 바둑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인물이다. 북한은 예전에는 IT 분야에서 금성학원 졸업생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북이 2009년 공동으로 설립한 평양과학기술대 졸업생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들은 웹, 모바일, 데스크톱, 크랙(복사 방지나 등록기술 등이 적용된 상용 소프트웨어의 비밀을 풀어서 불법으로 복제하거나 파괴하는 것) 등 전문 분야를 갖고 연구와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2, 3년간 북한 내부의 인터넷 환경이 좋아진 것도 IT 역량의 급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현재 북한에는 정찰총국이나 적공국은 물론이고 노동당과 국무위원회, 보위성, 김일성대, 김책공대, 과학원 등에 수백 회선의 인터넷망이 깔려 있고 매년 회선이 빠르게 늘어난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 자료를 내려받는 속도가 중국보다 빠르다. 과거 북한에서 IT를 통한 외화벌이를 하려면 중국에 나와야만 가능했다. 또 중국에서도 같은 팀 중 몇 명만 인터넷 접속이 허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 IT 인력들에게 북한 내에서도 인터넷 접속을 허용하고 있다. 다만 감시 프로그램을 깔아 어느 사이트에 접속했는지를 파악하기 때문에 한국 사이트 등 민감한 사이트엔 접속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북한 IT 인력은 가급적이면 해외에 나오려 애쓴다. 부업을 해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소식통은 “정찰총국 해커들도 예외는 아니다”라며 “이들은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해킹 실적을 쌓은 뒤 나머지 시간엔 IT 관련 사업을 수주해 자기 주머니를 채우고 있다”고 전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매년 1월 1일이면 북한 김정은의 신년사 분석이 언론의 톱뉴스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참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나도 김정은의 신년사는 1면에 나가고, 우리 대통령의 신년사는 박스 처리되는 상황에 적응된 것도 같다. 그런데 북한의 신년사를 30년 넘게 공부해 왔던 내 시각에서 볼 때, 이건 많은 품을 들여 분석할 필요가 전혀 없다. 원래 북한 신년사야 과장되고 거창한 문장과 추상적인 목표 제시로 가득 차 있는 것이고, 그해 말에 돌아보면 역시 말뿐이었음을 새삼 알 수 있다. 오히려 신년사와 그해 상황이 정반대로 전개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오랫동안 북한 신년사를 지켜봤던 경험으로 볼 때 굳이 이걸 분석하려면 쭉 훑어 내려가다 ‘이건 북한에서 김정은만 결정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몇 문장만 추려내면 된다. 그런 문장들은 아래에서 써서 올린 신년사를 읽어보다 김정은이 직접 추가해 넣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올해 신년사는 그 어느 때보다 김정은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것이 느껴진다. 가령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겠다는 것은 김정은의 결심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앞으로도 언제든 또다시 미국 대통령과 마주 앉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반드시 국제사회가 환영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라는 말도 김정은이 아니고선 넣을 수 없는 문장이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을 계속하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도 김정은의 고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쭉 보다 보니 결론적으로 올해 신년사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잔뜩 실린 것이 느껴진다. 사실 전문가들은 작년 신년사가 남북관계의 전환점이 됐다고 분석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면 김정은은 당장 몇 달 뒤부터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다 예측하지 못했다. 지난해 신년사에선 “남조선에서 열리는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에 우리는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고만 언급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북-미 관계는 예측하지 못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했고, 오히려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으며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는 것, 이는 결코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핵탄두들과 탄도로케트(로켓)들을 대량생산하여 실전배치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해 나가야 하며, 즉시적인 핵 반격 작전 태세를 항상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말은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가 됐다. 김정은이 직접 한 말도 지켜지지 않는 판에, 이번 신년사를 놓고 또 올해 상황이 어떨 것이라느니 하는 분석들도 별로 기대할 것은 못 된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지난해 신년사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견하겠다는 김정은의 말 한마디밖에 건질 것이 없다. 거기서 바로 격변의 2018년이 시작됐다. 올해 신년사에선 오히려 작년보다 건질 말이 없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는 북-미 관계가 진전되고, 제재가 풀리지 않고선 이뤄질 수 없다는 것쯤은 김정은도 알 것이다. 그러니 이건 그냥 던진 말이라고 보면 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다시 마주 앉으면 많이 양보하겠지만,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할 수 없이 약속을 깨겠다는 것도 당연한 말이다. 나는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의 고심을 보았다. 직접 추가해 넣은 문장마다 나가자니 자기 뜻만으로는 되지 않고, 돌아가자니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감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말로 한계가 있으니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북한 사상 처음으로 집무실 소파에 앉아 발표한 모습은 큰 파격도 감수하겠다는 결단을 드러냈다. 올해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지는 지금 신년사만 봐선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김정은은 지난해 보인 모습보다 올해 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할 결의가 서 있다는 것은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올해 역시 남북 관계는 긍정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된다. 다만 현재 공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 있다. 전진 패스를 할지, 뒤로 돌릴지, 아니면 슛을 할지는 그가 결심해야 한다. 천성적인 승부사 트럼프 대통령이 골 욕심을 내길 기대한다. 물론 그가 슛을 해도 골이 될지 헛발질이 될지 역시 지금은 알 수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5월 26일 판문점 북측 지역 판문각에서 가진 2차 남북 정상회담 때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북한 체제를 확실히 인정할 테니 안심하고 함께 교류와 협력을 하자는 명백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1차 남북 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인 판문점 도보다리 밀담에서도 문 대통령은 김정은의 불안감 해소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을 것 같다. 만약 방명록에 ‘평화와 번영’ 대신에 ‘통일’이란 단어를 썼다면, 매우 어색한 문장이 됐을 듯싶다. 왜냐하면 한반도 통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상과 체제가 다른 상황에서 통일은 이뤄질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북에 사상과 체제를 양보할 생각이 조금도 없고, 북한 역시 그렇다. 결국 통일은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궁극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 엄청난 열세인 김정은의 처지에선 통일은 죽음과 연관되는 단어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상대와 만나 공존과 상생을 약속했는데, 이를 담당할 주무부서의 이름이 통일부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공존과 통일은 반대의 뜻이다. 그런 점에서 통일부도 명칭 변경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가령 남북교류협력부로 할 수도 있고, 남북관계부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점에서 필요한 일이다. 첫째는 시대정신에 맞기 때문이다. 통일은 김정은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남쪽에서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치던 세대가 사라져가고 있다. 그 대신 남북이 교류하고 협력하다가 나중에 여건이 되면 통일을 하자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기자 역시 통일은 소리쳐 외칠수록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굳이 상대를 자극하며 만날 필요는 없다. 통일부는 통일이 된 뒤 만들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통일부의 장기적 미래를 위해서이다. 통일부는 정부 부처라고 하기엔 인원과 예산이 너무 적다. 10년 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라질 뻔하기도 했는데, 보수 정권 10년 동안 크게 위축됐다. 지난해 예산은 정부 전체 예산 중 겨우 0.1% 정도인 약 4600억 원 수준. 서울의 여느 구청 예산보다도 적다.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2200억 원은 남북협력기금으로 쌓아둔 것이고, 424억 원은 인건비이다. 나머지 사업비 약 1900억 원 중에 70% 이상을 탈북자와 북한 인권 관련 항목에 지출했다. 탈북자 업무가 없었다면, 통일부는 돈 쓸 데도 거의 없다는 뜻이다. 통일부는 내년에 예산 1조 원 시대를 열려 하지만, 그래 봐야 내년 정부 예산 470조 원의 ‘몇백 분의 1’이다. 통일부가 돈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요즘 남북 협력 사업이 많아지고 있지만 통일부는 약방의 감초 역할을 주로 하는 것 같다. 지금처럼 가면 군사 관련은 국방부가, 철도 도로 연결은 국토교통부가 하는 식으로 주요 협력 사업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회담 지원 백업 부처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 조직을 새로 정비하고 남북 관계 주도권을 장기적으로 확보할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셋째는 탈북자와 북한 인권을 위해서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보수 정권 시절 탈북자 정착 및 북한 인권 업무는 통일부 존치를 좌우할 중요한 일이었지만, 요즘엔 짊어지고 있기엔 무거운 짐이 된 듯하다. 통일부가 북한하고 친해지면서 탈북자 정착과 북한 인권 개선까지 한다는 것은 심히 모순이다. 결국 하나는 버려야 하는데, 답은 정해져 있다. 올해 북한인권재단 예산이 108억 원에서 8억 원으로 준 것이 대표적 사례다. 탈북자도 통일부에 인질처럼 잡혀 있고 싶지 않다. 남북 교류협력 시대엔 탈북자와 북한 인권 업무는 행정안전부나 법무부 등 다른 부처로 분산시키는 것이 맞다. 통일부 이름을 바꾸면 명분이 생긴다. 통일부일 때는 탈북자와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것이 당연했지만, 교류협력부가 되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통일부의 북한 상대는 통일전선부다. 이 역시 매우 시대착오적인 이름이다. 다음 남북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정신에 맞춰 두 부처를 동시에 개명해 보자고 제안한다면 북한도 선뜻 찬성할 듯하다. 새 술이라면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6년 5월 북한 노동당 7차 대회 도중 평양 철도국장과 정치부장이 체포돼 처형됐다. 대회 기간에 음주 금지령을 어기고, 밤에 몰래 술을 마시고 숙소에서 주정한 것이 걸렸다. 다음 날 김정은이 회의장에서 이들을 거론하며 격노했고 두 사람은 대회장에서 직위 해제와 출당을 당한 뒤 체포됐다. 참가자들은 이들이 처형될 것임을 예감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술주정으로 처형시키긴 어려우니, 이들은 반동으로 둔갑했다. 사형 판결문엔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증기기관차는 전쟁 때 한몫 단단히 하니 전시 예비용으로 잘 보관 관리하라고 하셨는데, 이자들은 언제 이런 고물을 다시 쓰겠는가 하면서 수십 대를 파철(고철)로 팔아먹었다”고 적시됐다고 한다. 2009년 처형된 김용삼 철도상도 전시 예비용 증기기관차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이쯤 되면 요새 남쪽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장혁 북한 철도상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고물 증기기관차를 운행이 가능하게 보관하는 일에 목숨이 걸려 있다. 김일성 시대엔 전기가 끊겨도 석탄으로 달릴 수 있는 증기기관차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때는 폭격을 받아도 터널 안에 숨으면 안전했다. 하지만 스마트 폭탄이나 벙커버스터가 활용되는 요즘, 북한이 전시에 철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철도 간부들도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으니 증기기관차에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철도 노동자들은 보관 중인 증기기관차에서 구리와 알루미늄으로 된 부품을 훔쳐 중국에 팔았다. 김 철도상은 이를 막지 못해 죽었고, 평양 철도국 간부들은 쓰지도 못할 증기기관차가 눈에 거슬리니 고철로 중국에 팔다가 걸려 죽었다. 북한 당국도 이제는 증기기관차가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차를 잘 보관하라는 김일성의 유훈이 존재하니 시대착오적인 관리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이젠 그만 없애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유일하게 유훈을 수정할 수 있는 김정은은 아직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지금 북에 올라간 한국 조사단의 눈에는 낡은 노반과 레일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철도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한국이 새 철도를 깔아줘도 제대로 사용하긴 어렵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북한 철도의 일면이다. 김두얼 명지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발표한 글에서 “북한 철도 발전은 1970년대 이후 멈춰 있는 게 아니라 1945년 이후 거의 변화가 없다”며 “경제 발전보다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한 결과 철도 투자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옳은 말이다. 북한 지도부의 우선적 관심사에서 멀어진 철도는 인프라뿐만 아니라 인력까지 다 망가졌다. 요즘은 신체나 가정환경 때문에 군에 가지 못하면 할 수 없이 가는 곳이 철도다. 주는 것도 없는데 군대와 같은 규율을 세운다고 들볶으니 기피 1순위다. 지방 철도 종사자에겐 텃밭 가꾸기가 주업이고, 철도 일은 부업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관점을 확 바꾸지 못하면 새 철길을 만들어도 계속 사고만 터질 것이다. 요즘 한국에선 북한 철도를 개량하느냐, 새로 깔아야 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 철도 실태를 제대로 안다면 답은 간단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머물러 있는 북한 철도는 새로 건설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전까진 어차피 없어질 철도를 약간 보수해 쓰면 충분하다. 북한 신규 철도 건설비를 우리 기준으로 계산해 10조 원이 넘느니 마느니 하면서 떠들 필요도 없다. 요즘엔 철도 옆 북한군 주둔지 이전 토지보상비용까지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린 장비나 기술 보조만 하면 된다. 북한이 새 철길을 만들겠다면 부지는 그들이 해결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면 군 병력이라도 투입하는 성의 정도는 마땅히 보여야 한다. 이는 북한이 과거의 잘못된 철도관(鐵道觀)에서 벗어나려 하는지 판단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밥상을 같이 차릴 순 있지만 밥을 억지로 떠먹일 수는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2016년 5월 북한 노동당 7차 대회 도중 평양 철도국장과 정치부장이 체포돼 처형됐다. 대회 기간 음주 금지령을 어기고, 밤에 몰래 술을 마시고 숙소에서 주정한 것이 걸렸다. 다음날 김정은이 회의장에서 이들을 거론하며 격노했고 두 사람은 대회장에서 직위 해제와 출당을 당한 뒤 체포됐다. 참가자들은 이들이 처형될 것임을 예감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아무리 북한이라고 해도 술주정으로 처형시키긴 어려우니, 이들은 반동으로 둔갑했다. 사형 판결문엔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증기기관차는 전쟁 때 한몫 단단히 하니 전시 예비용으로 잘 보관 관리하라고 하셨는데, 이 자들은 언제 이런 고물을 다시 쓰겠는가 하면서 수십 대를 파철(고철)로 팔아먹었다”고 적시됐다고 한다. 2009년 처형된 김용삼 철도상도 전시 예비용 증기기관차들을 못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이쯤 되면 요새 남쪽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장혁 북한 철도상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고물 증기기관차를 운행이 가능하게 보관하는 일에 목숨이 걸려 있다. 김일성 시대엔 전기가 끊겨도 석탄으로 달릴 수 있는 증기기관차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때는 폭격을 받아도 터널 안에 숨으면 안전했다. 하지만 스마트 폭탄이나 벙커버스터가 활용되는 요즘 북한이 전시에 철도를 활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철도 간부들도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으니 증기기관차에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철도 노동자들은 보관 중인 증기기관차에서 구리와 알루미늄으로 된 부품을 훔쳐다 중국에 팔았다. 김 철도상은 이를 막지 못해 죽었고, 평양 철도국 간부들은 쓰지도 못할 증기기관차가 눈에 거슬리니 고철로 중국에 팔다가 걸려 죽었다. 북한 당국도 이제는 증기기관차가 필요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증기기관차를 잘 보관하라는 김일성의 유훈이 존재하니 시대착오적인 관리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이젠 그만 없애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유일하게 유훈을 수정할 수 있는 김정은은 아직 그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지금 북에 올라간 한국 조사단의 눈에는 낡은 노반과 레일만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철도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인식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한국이 새 철도를 깔아줘도 제대로 사용하긴 어렵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북한 철도의 일면이다. 김두얼 명지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발표한 글에서 “북한 철도 발전은 1970년대 이후 멈춰있는 게 아니라 1945년 이후 거의 변화가 없다”며 “경제 발전보다 정치적 목적을 우선시한 결과 철도 투자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옳은 말이다. 북한 지도부의 우선적 관심사에서 멀어진 철도는 인프라뿐만 아니라 인력까지 다 망가졌다. 요즘은 신체나 가정환경 때문에 군에 가지 못하면 할 수 없이 가는 곳이 철도다. 주는 것도 없는데 군대와 같은 규율을 세운다고 들볶으니 기피 1순위다. 지방 철도 종사자에겐 텃밭 가꾸기가 주업이고, 철도 일은 부업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관점을 확 바꾸지 못하면 새 철길을 만들어도 계속 사고만 터질 것이다. 요즘 한국에선 북한 철도를 개량하느냐 새로 깔아야 하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북한 철도 실태를 제대로 안다면 답은 간단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머물러 있는 북한 철도는 새로 건설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그전까진 어차피 없어질 철도를 약간 보수해 쓰면 충분하다. 북한 신규 철도 건설비를 우리 기준으로 계산해 10조 원이 넘느니 마느니 하면서 떠들 필요도 없다. 요즘엔 철도 옆 북한군 주둔지 이전 토지보상비용까지 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판인데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린 장비나 기술 보조만 하면 된다. 북한이 새 철길을 만들겠다면 부지는 그들이 해결해야 한다. 인력이 부족하면 군 병력이라도 투입하는 성의 정도는 마땅히 보여야 한다. 이는 북한이 과거의 잘못된 철도관(鐵道觀)에서 벗어나려 하는지 판단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밥상을 같이 차릴 수는 있지만 밥을 억지로 떠먹일 수는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시장경제의 진화를 보면 놀라운 일들이 정말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개인은행’의 진화다.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돈이 유통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돈을 전달하는 곳은 은행이 아닌 ‘이관집’이라고 불리는 송금 전문 개인은행이다. 가령 내가 지방에 갔다가 갑자기 평양에 돈을 보낼 일이 생긴다면 은행을 찾지 말고 주변에 ‘이관집’이 어디냐고 수소문해야 한다. 이관집에는 전화를 할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갈 수도 있다. 전화로 하면 어디에서 보자고 연락이 온다. 직접 찾아가도 집에 절대 들여놓지 않는다. 대문 앞에서 현금을 확인한 뒤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집 안으로 사라진다. 조금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 “이송이 끝났으니 그 돈을 어디 가서 찾으라”며 평양의 전화번호를 넘겨준다. 그러면 나는 그 돈을 받아야 할 평양 사람에게 그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해당 전화번호로 연락해 돈을 찾는다. 빠르면 몇 시간 내로 송금 절차가 끝난다. 요즘 북한에서 공식 이관비는 1% 정도다. 100만 원을 보내면 1만 원을 수수료로 떼는 셈인데, 북한처럼 신용이 바닥인 사회에서 송금 수수료가 이 정도로 낮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1.5%로 뛰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이관집으로 보내면 사기당할 일이 거의 없다. 큰돈을 들고 며칠씩 오가는 기차를 탔다간 소매치기 당할 가능성이 높다. 돈을 갖고 이동할 수 있는 사람도 이관집을 통해 목적지로 먼저 돈을 부치기도 하는 이유다. 물론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고, 또 이용할 수 있는 조선중앙은행에도 송금 서비스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 찾으러 가면 “아직 돈이 없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는데, ‘써비’라고 불리는 뇌물을 주지 않으면 제풀에 지치기 십상이다. 뇌물을 주며 은행을 이용할 바에는 이관집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이관집은 한국의 은행처럼 전산망을 통해 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고정 거래하는 평양의 상대 이관집에게 “얼마를 받았으니 얼마를 전해 달라”고 전화로 말하면 끝이다. 평양 이관집은 또 지방에 돈을 보내야 할 때 같은 방식을 쓴다. 이렇게 돈이 오가다 한쪽으로 너무 몰리면 자기들끼리 네트워크를 사용해 돈을 적절히 분배한다. 이관집은 장마당 경제의 발달과 함께 2000년대 초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열차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사람이나 열차원, 자동차 운전사 등이 돈을 날라 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운반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지역 간 송금을 담당하는 이관집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이관집은 신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로 가족 단위로 운영되고 있다. 평양에 사는 언니와 원산에 사는 동생이, 또는 개성에 사는 딸과 신의주에 있는 친정 부모가 서로 연계를 가지는 방식이다. 지방의 이관집 중에는 특정 지역 구간에 전문으로 특화돼 한꺼번에 거액을 보낼 수 있는 곳도 적지 않다. 현재 북한에선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가 북한 화폐 못지않게 사용되기 때문에 외화를 다루지 않는 이관집은 거의 없다. 시장경제의 진화와 함께 이관집의 몸집도 점점 커지고 있는데, 수백만 달러씩 주무르는 이관집도 적지 않다. 이렇게 큰돈을 다루려면 권력과 공생이 필수다. 권력이 뒤를 봐주지 않는다면 ‘비사회주의 현상’과의 투쟁을 내건 각종 검열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북한의 이관집들을 보면 노동당, 사법기관 간부의 가족이 대다수이다. 간혹 무역 기관 일꾼이 이관집을 하기도 한다. 이관집이 없어진다면 북한 장마당은 당장 마비된다. 이관집은 시장경제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북한 당국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외화까지 신속 정확하게 전달하며, 신용과 비밀을 보장해 주는 이관집과의 경쟁에서 국영은행이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몸집을 키운 이관집들은 대부업까지 진출하고 있다. 북한에서 월 이자는 5∼10%에 이른다. 돈을 빌려주면서 사람이나 부동산 담보를 받는 개념도 이관집이 처음 도입했다. 북한의 개인금융이 앞으로 얼마나 더 비대해질지, 국영은행이 개인금융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시장경제의 진화를 보면 놀라운 일들이 정말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개인은행’의 진화다.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돈이 유통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돈을 전달하는 곳은 은행이 아닌 ‘이관집’이라고 불리는 송금 전문 개인은행이다. 가령 내가 지방에 갔다가 갑자기 평양에 돈을 보낼 일이 생긴다면 은행을 찾지 말고 주변에 ‘이관집’이 어디냐고 수소문해야 한다. 이관집에는 전화를 할 수도 있고, 직접 찾아갈 수도 있다. 전화로 하면 어디에서 보자고 연락이 온다. 직접 찾아가도 집에 절대 들여놓지 않는다. 대문 앞에서 현금을 확인한 뒤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집안으로 사라진다. 조금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 “이송이 끝났으니 그 돈을 어디 가서 찾으라”며 평양의 전화번호를 넘겨준다. 그러면 나는 그 돈을 받아야 할 평양 사람에게 그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해당 전화번호로 연락해 돈을 찾는다. 빠르면 몇 시간 내로 송금 절차가 끝난다. 요즘 북한에서 공식 이관비는 1% 정도다. 100만 원을 보내면 1만 원을 수수료로 떼는 셈인데, 북한처럼 신용이 바닥인 사회에서 송금 수수료가 이 정도로 낮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1.5%로 뛰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이관집으로 보내면 사기당할 일이 거의 없다. 큰돈을 들고 며칠씩 오가는 기차를 탔다간 소매치기 당할 가능성이 높다. 돈을 갖고 이동할 수 있는 사람도 이관집을 통해 목적지로 먼저 돈을 부치기도 하는 이유다. 물론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고, 또 이용할 수 있는 조선중앙은행에도 송금 서비스가 있긴 하다. 하지만 이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 찾으러 가면 “아직 돈이 없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는데, ‘써비’라고 불리는 뇌물을 주지 않으면 제풀에 지치기 십상이다. 뇌물을 주며 은행을 이용할 바에는 이관집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이관집은 한국의 은행처럼 전산망을 통해 돈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고정 거래하는 평양의 상대 이관집에게 “얼마를 받았으니 얼마를 전해 달라”고 전화로 말하면 끝이다. 평양 이관집은 또 지방에 돈을 보내야 할 때 같은 방식을 쓴다. 이렇게 돈이 오가다 한쪽으로 너무 돈이 몰리면 자기들끼리 네트워크를 사용해 돈을 적절히 분배한다. 이관집은 장마당 경제의 발달과 함께 2000년대 초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열차를 타고 출장을 다니는 사람이나 열차원, 자동차 운전사 등이 돈을 날라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운반하는 방식은 아무래도 사고가 잦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지역 간 송금을 담당하는 이관집이 등장한 것이다. 이런 이관집은 신용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로 가족 단위로 운영되고 있다. 평양에 사는 언니와 원산에 사는 동생이, 또는 개성에 사는 딸과 신의주에 있는 친정 부모가 서로 연계를 가지는 방식이다. 지방의 이관집들 중에는 특정 지역 구간을 전문으로 특화돼, 한꺼번에 거액을 이송할 수 있는 곳도 적지 않다. 현재 북한에선 미국 달러나 중국 위안화가 북한 화폐 못지않게 사용되기 때문에 외화를 다루지 않는 이관집들은 거의 없다. 시장경제의 진화와 함께 이관집들의 몸집도 점점 커지고 있는데, 수백만 달러씩 주무르는 이관집도 적지 않다. 이렇게 큰돈을 다루려면 권력과 공생이 필수다. 권력이 뒤를 봐주지 않는다면 ‘비사회주의 현상’과의 투쟁을 내건 각종 검열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북한의 이관집들을 보면 노동당, 사법기관 간부의 가족이 대다수이다. 간혹 무역 기관 일꾼도 이관집을 하기도 한다. 이관집이 없어진다면 북한 장마당은 당장 마비된다. 이관집은 시장경제의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이다. 북한 당국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 외화까지 신속·정확하게 전달하며, 신용과 비밀까지 보장해주는 이관집과의 경쟁에서 국영은행이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몸집을 키운 이관집들은 대부업까지 진출하고 있다. 북한에서 월 이자는 5~10%에 이른다. 돈을 빌려주면서 사람이나 부동산 담보를 받는 것도 이관집이 처음 개념을 도입했다. 북한의 개인금융이 앞으로 얼마나 더 비대해질지, 국영은행이 개인금융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해마다 6, 7월이면 황해도에서 ‘보리수송 전투’가 벌어진다. 이 보리는 유명한 대동강맥주의 주원료이고 황해남도 강령과 옹진에서 생산된다. 수송량이 많아 열차가 투입되곤 한다. 평양∼사리원∼해주∼개성을 연결하는 철도는 평소엔 기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침목도 빠진 곳이 너무 많아 시속 20km 이상 달리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언제 탈선해 목숨을 잃을지 몰라 기관사들이 온몸에 식은땀을 흘린다. 평양 이남 철도 수준은 일제가 용산∼신의주 철도(경의선)를 개통했던 1906년 이전으로 돌아가 있다. 사정이 이런데 이달 말에 남북 철도 연결 착공식을 한다니, 이는 이벤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긴 어렵다. 평양∼개성 철도는 아예 새로 깔아야 할 판이니 한반도 횡단 열차의 꿈은 언제 실현될지 요원하다. 그나마 북한에서 지금 쓸 만한 선로는 일제가 건설한 평양∼신의주, 평양∼나진 노선이다. 북한이 광복 후 70년 넘게 건설해 온 노선은 쓸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철로는 평양∼나진 구간이 평양∼신의주 구간보다 더 좋다고 한다. 김정은이 하룻밤 새 함경북도에서 평양까지 옮겨 가는 일이 빈번한 것을 보니 이 구간은 시속 80km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평양∼나진 구간에서 일반 열차들은 평소 시속 40km를 넘기기 힘든데, 그 이유는 기관차 때문이다. 북한은 전기기관차를 자체로 생산하는데, 전동기 개수에 따라 4축, 6축, 8축 기관차로 나눈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기관차들은 전동기 한 개를 돌리며 다니기 일쑤였는데, 전동기가 고개를 넘다 고장 나면 수백 명씩 사망하는 대형 참사로 연결됐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전동기 4개 이상 가동하는 기관차는 거의 없다고 한다. 평양∼나진 노선에서 마의 구간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를 나누는 북대봉산맥과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나누는 마천령산맥이다. 북대봉산맥을 넘어가기 전에 열차는 평남의 전역인 양덕역, 또는 함남의 전역인 거차역에서 멈춰 서서 하루 이틀 지체하곤 했다. 이를 북한 사람들은 거차대기 또는 양덕대기라고 한다. 이 산맥은 기관차 2대가 앞뒤에서 끌고 밀어야 통과하는데, 이를 북에선 ‘복기’ 운행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열차 우선 통과 순위는 여객열차보다 화력발전소로 향하는 석탄열차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덕에 도착하면 빨리 영(嶺)을 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 마천령에서도 일명 ‘여해진대기’를 거치다 보면 평양에서 나진까지 2, 3일 안에만 도착해도 만세를 외친다. 그런데 2015년 평양∼청진, 평양∼신의주, 평양∼원산 구간에 ‘써비열차’가 도입됐다. 북한에서 써비차란 돈벌이를 위해 운영되는 차를 말하는데, 공공영역인 철도에도 돈을 벌기 위한 열차가 도입된 것이다. 평양에서 청진까지 써비열차 운임 요금은 국정 가격의 100배 정도인 13만 원(한화 약 1만7000원)을 받았다. 일주일에 보통 한 대 편성되는 이 열차를 타면 평양에서 청진까지 하루 안에 도착했다. 평양∼신의주 구간은 써비열차가 매일 운행했다. 써비열차는 철도성이 전기기관차가 아니라 내연기관차를 도입했기에 가능했다. 철도성은 기름값과 정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싼 값을 받는다고 했다. 차표 값이 국정 가격의 100배라 해도 최단 시간 내에 운행되니 주민들의 만족도는 크게 높아졌다. 재미를 본 철도성은 최근 철도관광회사를 만들어 중국에서 수입한 침대차를 평양∼청진 구간부터 운행할 계획을 중앙에 올렸는데 아직 승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현재 평양∼신의주 사이 침대열차 운임 요금이 35달러인 점을 고려할 때, 평양∼청진 침대열차는 그 두 배는 될 것이다. 겉은 사회주의인데, 이제는 기차여행조차 지불한 달러 액수에 비례해 더 빠르거나 더 편안하게 되는 셈이다. 북한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레일과 침목 문제도 심각하다. 김정은 집권 이후부터 중량레일 생산을 국책과제로 정했지만, 코크스 수입 제재 때문에 성공 못 하고 있다. 중량레일은 1m에 50kg 이상인 레일을 말하는데, 북한이 자랑하는 무연탄 기반의 ‘주체철’로는 절대 중량레일을 만들 수가 없다. 부식을 막기 위한 기름 등이 부족해 침목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인데, 남북회담에 나선 북한 철도 담당자들이 남쪽에 무엇부터 요구할지가 궁금하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해마다 6,7월이면 황해도에서 ‘보리수송 전투’가 벌어진다. 이 보리는 유명한 대동강맥주의 주원료이고 황해남도 강령과 옹진에서 생산된다. 수송량이 많아 열차가 투입되곤 한다. 평양-사리원-해주-개성을 연결하는 철도는 평소엔 기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침목도 빠진 곳이 너무 많아 시속 20㎞ 이상 달리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언제 탈선해 목숨을 잃을지 몰라 기관사들이 온몸에 식은땀을 흘린다. 평양 이남 철도 수준은 일제가 용산-신의주 간 철도를 개통했던 1906년 이전으로 돌아가 있다. 사정이 이런데 이달 말에 남북 철도연결 착공식을 한다니, 이는 이벤트 이상의 의미를 지니긴 어렵다. 개성-평양 구간 철도는 아예 새로 깔아야 할 판이니 한반도 횡단 열차의 꿈은 언제 실현될지 요원하다. 그나마 북한에서 지금 쓸만한 선로는 일제가 건설한 평양-신의주, 평양-나진 노선이다. 북한이 해방 후 70년 넘게 건설해온 노선은 쓸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 철로는 평양-나진 구간이 평양-신의주 구간보다 더 좋다고 한다. 김정은이 하루 밤새 함경북도에서 평양까지 옮겨가는 일이 빈번한 것을 보니 이 구간은 시속 80㎞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평양-나진 구간에서 일반 열차들은 평소 시속 40㎞를 넘기기 힘든데, 그 이유는 기관차 때문이다. 북한은 전기기관차를 자체로 생산하는데, 전동기 개수에 따라 4축, 6축, 8축 기관차로 나눈다. 1990년대 말~2000년 초 기관차들은 전동기 한 개를 돌리며 다니기 일쑤였는데, 전동기가 고개를 넘다 고장 나면 수백 명씩 사망하는 대형 참사로 연결됐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전동기 4개 이상 가동하는 기관차는 거의 없다고 한다. 평양-나진 노선에서 마의 구간은 평안남도와 함경남도를 나누는 북대봉산맥과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를 나누는 마천령산맥이다. 북대봉산맥을 넘어가기 전에 열차는 평남의 전역인 양덕역, 또는 함남의 전역인 거차역에서 멈춰 서서 하루 이틀 지체하곤 했다. 이를 북한 사람들은 거차대기 또는 양덕대기라고 한다. 이 산맥은 기관차 2대가 앞뒤로 밀어야 통과하는데, 이를 북에선 ‘복기’ 운행이라고 한다. 북한에서 열차 우선 통과 순위는 여객열차보다 화력발전소로 향하는 석탄 열차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양덕에 도착하면 빨리 령을 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어야 한다. 마천령에서도 일명 ‘여해진대기’를 거치다 보면 평양에서 나진까지 2~3일 안에만 도착해도 만세를 외친다. 그런데 2015년 평양-청진, 평양-신의주, 평양-원산 구간에 ‘써비열차’가 도입됐다. 북한에서 써비차란 돈벌이를 위해 운영되는 차를 말하는데, 공공영역인 철도에도 돈을 벌기 위한 열차가 도입된 것이다. 평양에서 청진까지 써비열차 차표 값은 국정 가격의 100배 정도인 13만 원(한화 약 1만7000원)을 받았다. 일주일에 보통 한 대 편성되는 이 열차를 타면 평양에서 청진까지 하루 안에 도착했다. 평양-신의주 구간은 써비열차가 매일 운행했다. 써비열차는 철도성이 전기기관차가 아니라 내연기관차를 도입했기에 가능했다. 철도성은 기름값과 정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싼 값을 받는다고 했다. 차표 값이 국정 가격의 100배라 해도 최단 시간 내에 운행되니 주민들의 만족도는 크게 높아졌다. 재미를 본 철도성은 최근 철도관광회사를 만들어 중국에서 수입한 침대차를 평양-청진 구간부터 운행할 계획을 중앙에 올렸는데 아직 승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현재 평양-신의주 사이 침대열차값이 35달러인 점을 고려할 때, 평양-청진 침대열차값은 그 두 배는 될 것이다. 겉은 사회주의인데, 이제는 기차 여행조차 지불한 달러 액수에 비례해 더 빠르거나 더 편안하게 되는 셈이다. 북한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레일과 침목 문제도 심각하다. 김정은 집권 이후부터 중량레일 생산을 국책 과제로 정했지만, 코크스 수입 제재 때문에 성공 못하고 있다. 중량레일은 1m에 50㎏ 이상인 레일을 말하는데, 북한이 자랑하는 무연탄 기반의 ‘주체철’로는 절대 중량 레일을 만들 수가 없다. 부식을 막기 위한 기름 등이 부족해 침목도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인데, 남북 회담에 나선 북한 철도 담당자들이 남쪽에 무엇부터 요구할지가 궁금하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많은 사람이 북한에 전기세가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전기사용료라고 불리는 전기세가 있는 것은 물론,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누진세까지 존재한다. 국정전기를 다 쓰고 나면 시민들이 ‘야매전기’라고 부르는 누진세 구간에 돌입하는데, 200kW까지는 kW당 북한돈 500원, 200kW를 초과하면 1000원을 내야 한다. 한국은 1단계는 300kW까지 93.3원, 300∼500kW 사이 2단계는 187.9원, 500kW 이상은 280.6원을 낸다. 3단계 요금이 1단계의 3배 정도인데, 북한은 3단계 요금이 1단계의 29배나 되는 것이다. 한국은 300kW를 사용하면 2만7790원을 낸다. 북한은 300kW에 북한돈 17만6700원을 낸다. 이를 북한의 달러 환율 8300원으로 계산하면 21.3달러 정도 되는데, 한국 환율 1130원을 대입할 경우 한화 2만4000원 정도 된다. 전기세가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올해 7, 8월 한국전력의 한시적 누진제 완화 조치로 가구당 평균 19.5%의 전기요금이 절약됐음을 고려하면, 올해 평양의 전기세는 경우에 따라 한국보다 더 비쌌다. 한국은행 추산 2016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146만 원으로, 남한의 2016년 1인당 GNI 3212만 원의 22분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의 전기세가 얼마나 높은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평양 시민들은 고액 전기세를 내도 좋으니 전기만 계속 들어오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은 평양 가정에 에어컨 장만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했다. 당국도 올해 개인주택 에어컨 사용 금지령을 전격 해제했다. 북한에선 원래 김정은이 하사한 이른바 ‘선물주택’ 외엔 개인 집에 에어컨을 놓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 은하수악단이나 국립연극단 등 예술인 아파트나 평양시 중심부 봉화역 옆의 ‘선물아파트’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아파트는 에어컨이 설치돼 있다. 게다가 선물주택은 kW당 35원인 ‘국정전기’를 한 달에 300kW까지 공급해 주기 때문에 전기세 걱정이 크게 없다. 다른 일반 주택은 국정전기를 월 50kW까지만 쓸 수 있다. 그 이상 사용하면 전기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북한은 누진제를 지난해 말 전격 도입하면서 제대로 고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생각하고 겨울에 전기담요를 켜놓고 살던 가정들이 봄에 수십만 원, 심지어 100만 원 가까운 ‘전기세 폭탄’을 맞은 사례가 속출했다. 한국 같으면 촛불시위라도 일어날 상황이지만, 저기는 평양이니까 억울해도 방법이 없다. 전기세가 끔찍하게 높아졌지만, 올해 평양에선 에어컨이 없어서 팔지 못했다. 중국에서 밀수한 수백 위안 정도의 싸구려 에어컨도 500달러 이상에 팔렸다. 평양이 에어컨 사용을 허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올해 전기 사정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격인 북한 보위성은 지난해 중국에서 각각 20만 kW 능력의 화력 발전설비 2대를 밀수해 들여갔다고 한다. 서해를 통해 배로 들여갔는데, 제재를 피하려고 군사작전 같은 극비 운송이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1대는 올해 초 평양화력발전소에 설치했는데, 여기에서 현재 19만 kW가 생산된다고 한다. 기존 북한의 실제 전력생산량이 130만 kW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발전설비 1대를 설치해 15% 정도의 전력 증산이 이뤄진 셈이다. 나머지 1대 설치도 조만간 마무리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산된 전기는 평양에 공급되지만, 연쇄적으로 지방의 전력 사정까지 많이 좋아졌다. 북한은 평양시내 ‘숫자식 적산전력계’ 설치도 올해 완료했다. 적산전력계 설치는 10년 전부터 추진됐지만 많은 시민이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데다 공짜도 아니고 30달러씩 내야 설치해 주기 때문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올해는 각종 불이익을 준다는 역대 최강의 ‘협박’이 이뤄지면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황당한 사실은 서울보다 더 비싼 전기세를 받고 있고, 그 밖에도 각종 명목의 사용료가 존재하는 북한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금이 없는 나라’라고 외부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4월 1일은 ‘세금 제도 폐지의 날’이라는 북한 기념일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많은 사람이 북한에 전기세가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전기사용료라고 불리는 전기세가 있는 것은 물론,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드는 누진세까지 존재한다. 국정전기를 다 쓰고 나면 시민들이 ‘야매전기’라고 부르는 누진세 구간에 돌입하는데, 200kW까지는 1kW 당 북한돈 500원, 200kW를 초과하면 1000원을 내야 한다. 한국은 1단계는 300kW까지 93.3원, 300~500kW 사이 2단계는 187.9원, 500kW 이상은 280.6원을 낸다. 3단계 요금이 1단계의 3배 정도인데, 북한은 3단계 요금이 1단계의 29배나 되는 것이다. 한국은 300kW를 사용하면 2만7790원을 낸다. 북한은 300kW에 북한돈 17만6700원을 낸다. 이를 북한의 달러 환율 8300원으로 계산하면 21.3달러 정도 되는데, 한국 환율 1130원을 대입할 경우 한화 2만4000원 정도 된다. 전기세가 한국과 별 차이가 없다. 올해 7~8월 한국전력의 한시적 누진제 완화 조치로 가구당 평균 19.5%의 전기세가 절약됐음을 고려하면, 올해 평양의 전기세는 경우에 따라 한국보다 더 비쌌다. 한국은행 추산 2016년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146만 원으로, 남한의 2016년 1인당 GNI 3212만 원의 22분의 1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의 전기세가 얼마나 높은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평양 시민들은 고액 전기세를 내도 좋으니 전기만 계속 들어오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은 평양 가정에 에어컨 장만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했다. 당국도 올해 개인 주택 에어컨 사용 금지령을 전격 해제했다. 북한에선 원래 김정은이 하사한 이른바 ‘선물주택’ 외엔 개인 집에 에어컨을 놓는 것이 허가되지 않았다. 은하수악단이나 국립연극단 등 예술인 아파트나 평양 시 중심부 봉화역 옆의 선물 아파트 등이 대표적인데, 이런 아파트는 에어컨이 설치돼 있다. 게다가 선물주택은 1kW당 35원인 ‘국정전기’를 한 달에 300kW까지 공급해주기 때문에 전기세 걱정이 크게 없다. 다른 일반 주택은 국정전기를 월 50kW까지만 쓸 수 있다. 그 이상 사용하면 전기세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북한은 누진제를 지난해 말 전격 도입하면서 제대로 고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생각하고 겨울에 전기담요를 켜놓고 살던 가정들이 봄에 수십 만 원, 심지어 100만 원 가까운 ‘전기세 폭탄’을 맞은 사례가 속출했다. 한국 같으면 촛불시위라도 일어날 상황이지만, 저기는 평양이니까 억울해도 방법이 없다. 전기세가 끔찍하게 높아졌지만, 올해 평양에선 에어컨이 없어서 팔지 못했다. 중국에서 밀수한 수백 위안 정도의 싸구려 에어컨도 500달러 이상에 팔렸다. 평양이 에어컨 사용을 허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올해 전기 사정이 많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정보원 격인 북한 보위성은 지난해 중국에서 각각 20만kW 능력의 화력 발전설비 2대를 밀수해 들여갔다고 한다. 서해를 통해 배로 들여갔는데, 제재를 피하려고 군사작전 같은 극비 운송이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1대는 올해 초 평양화력발전소에 설치 완료했는데, 여기에서 현재 19만kW가 생산된다고 한다. 기존 북한의 실제 전력생산량이 130만kW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발전설비 1대를 설치해 15% 정도의 전력 증산이 이뤄진 셈이다. 나머지 1대 설치도 조만간 마무리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산된 전기는 평양에 공급되지만, 연쇄적으로 지방의 전력 사정까지 많이 좋아졌다. 북한은 평양 시내 ‘숫자식 적산전력계’ 설치도 올해 완료했다. 적산전력계 설치는 10년 전부터 추진됐지만 많은 시민이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 데다 공짜도 아니고 30달러씩 내야 설치해 주기 때문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올해는 각종 불이익을 준다는 역대 최강의 ‘협박’이 이뤄지면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황당한 사실은 서울보다 더 비싼 전기세를 받고 있고, 그밖에도 각종 명목의 사용료가 존재하는 북한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금이 없는 나라’라고 외부에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4월 1일은 ‘세금 제도 폐지의 날’이라는 북한 기념일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에서 한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올해 평양 여성들은 인도 영화 ‘바후발리’의 남주인공 프라바스에게 푹 빠져버렸다. 남자들은 영화의 여주인공인 타만타 바티아와 아누슈카 셰티에게 열광한다. 올해는 한류가 아니라 인도 열풍이 평양을 강타한 해였다. 바후발리는 올해 1월 1일부터 평양 시내 ‘정보봉사소’들에서 일제히 판매됐다. CD 2장에 북한 돈 1만5000원(약 1.8달러). 고가임에도 처음 발매한 수만 장이 순식간에 다 팔려 다음 날 구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10월인 지금까지 평양 사람들은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까지도 그 영화를 보고 또 본다. 영화를 직접 보니 남녀 주인공이 미남, 미녀인 점도 이유가 됐겠지만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었던 영화의 화려한 영상미와 액션, 촬영기술 등이 열풍의 근원이라 생각된다. 평양에 가면 이 영화에 노래가 열몇 개 나오고, 춤 동작은 어떻고 하며 전부 외우고 있는 젊은이도 많다. 휴일에 모란봉에 가면 인도식 춤을 추는 남녀도 꽤 볼 수 있다. 영화는 형제끼리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을 그렸는데, 김정남 암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 영화 내용을 놓고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5월부터 일요일마다 두 개 부씩 방영된 중국 드라마 ‘붉은 수수밭’(60부)도 인기가 많았다. 북-중 관계가 경색됐을 때는 중국 드라마를 보는 것도 처벌 대상이었는데, 김정은 방중 이후인 4월 ‘모안영’이란 영화가 방영된 것을 계기로 중국 드라마가 조금씩 방영된다. 몇 달 전 ‘불순물’인 중국 드라마를 봤다고 평양에서 추방된 사람들은 너무 억울할 듯싶다. 그럼에도 ‘불순’ 녹화물이나 출판물에 대한 통제가 훨씬 강화돼 지금도 여전히 걸리면 무조건 노동교화형이고, 평양은 가족이 지방으로 추방된다. 그래서 평양 사람들은 이젠 한국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는다. 그 대신 북한은 인도 영화나 중국 드라마의 사례처럼 선택적으로 높게 세웠던 문화적 방화벽을 차츰 낮추고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TV에서 새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방영하기 전에 일단 국영 ‘목란비데오사’에서 제작한 CD부터 시중에 판매된다는 것이다. 새 중국 드라마의 경우 8개 부가 담긴 DVD가 북한 돈 8000원(약 1달러)에 팔린다. 또 휴대전화 게임이나 프로그램을 넣어주고 사진 인쇄, 일반 인쇄, ‘왁찐’(백신) 봉사 등을 하는 정보봉사소에서 돈을 받고 휴대전화에 드라마를 넣어준다. 드라마 1부 또는 중국 소설 1권당 보통 북한 돈 800원이다. 인증 번호를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파일을 주고받을 순 없다. 판매 이익금은 당국과 정보봉사소가 7 대 3의 비율로 나누어 가진다. 즉, 드라마 1개 부를 팔면 봉사소가 240원을 갖고, 나머지 560원은 상부에 바친다. 정보봉사소는 평양에 약 100개가 있는데 소속이 노동당 39호실이다. 39호실은 김정은 비자금 관리를 비롯해 노동당 자금을 관리하는 곳이다. 쉽게 말하면 노동당이 외국 드라마 장사를 시작한 셈이다. 불순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권한도 노동당에 있다. 바후발리도 몰래 보다가 잡히면 불순 영화를 봤다는 죄명으로 교화소에 갔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이 판매한 이상 더 이상 불순 영화가 아니다. 8월 20일부터 평양에서 ‘산과의사’라는 중국 소설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찾아보니 아닌 게 아니라 중국에 산과의사라는 의학 드라마도 있었다. 그럼 다음 수순은 뻔하다. 평양에서 곧 그 드라마 CD도 판매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TV로 방영될 것이다. 산과의사는 중국의 어느 성급 대학부속병원 산과의사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이 드라마 주인공들이 삼성 휴대전화를 무척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삼성 로고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궁금하다. 노동당이 대북 제재로 말라가는 돈줄을 보충할 기막힌 방법을 찾아낸 것인데 기를 쓰고 통제하던 외부 드라마를 들여다가 돈을 버는 아이디어는 나도 상상하지 못했다. 중국만 해도 매년 수백 편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니 이걸 들여다가 자막을 입혀 팔면 마를 줄 모르는 돈줄이 될 것이다. 이왕 재미를 본 김에 한국 역사물 드라마나 영화 장사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중국 드라마보다 10배 비싸게 불러도 엄청나게 잘 팔릴 것 같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 창업자인 마윈(馬雲·54) 회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밝혔던 ‘미국 내 일자리 100만 개 창출’ 약속을 19일 공식 철회했다. 마 회장은 지난해 1월 뉴욕 트럼프 타워에서 당시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미국의 중소기업들이 중국과 아시아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유통망을 제공해 향후 5년 동안 미국에서 일자리 100만 개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마 회장은 19일 신화통신과 인터뷰에서 “당시 약속은 중-미 파트너십과 합리적인 무역관계라는 전제조건을 기반으로 했다”며 “그런 전제조건은 오늘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트럼프 대통령과 한) 우리의 약속은 이뤄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중 관세 전쟁으로 양국 관계가 엉망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무역은 무기가 아니며, 전쟁을 시작하는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 (무역은) 평화를 위한 운전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직후부터 미국의 송금중개 업체인 ‘머니그램’ 인수를 추진했지만 1년 만인 올해 1월 인수를 포기하기도 했다. 알라바바는 이 회사를 인수하기 위해 12억 달러라는 거액을 제시했지만, 이 거래가 미국의 국가안보에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 인사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손을 떼야 했다. 마 회장은 전날인 18일 열린 알리바바 투자자 연례회의에서는 “미-중 무역전쟁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고, 매우 지저분해질 것”이라며 “20일이나 20개월이 아니라 아마도 20년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퇴임 여부와 상관없이 미-중 갈등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한 것이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지난달 22일 칼럼에서 북한 평양 시민 수만 명을 무더위 속에서 집단체조 훈련에 내모는 것을 비판했다. 칼럼이 나간 지 3일 뒤인 25일 오후 10시 김정은이 극비리에 몰래 집단체조 시연회에 나타났다. 워낙 비공개로 다녀가 집단체조 참가자들도 그날 왜 오전 3시까지 훈련해야 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가 다녀간 뒤 집단체조 내용이 대폭 수정됐다. 이번 공연엔 예전과 달리 ‘중국장’이라고 불리는 한 개 장이 특별히 추가됐다. 이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겨냥한 서비스였을 것이다. 8월 25일만 해도 김정은은 시 주석의 9월 9일 방북을 확신했던 것 같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틀 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방북을 전격 취소하며 중국 책임론을 거론하자 시 주석의 방중은 무산됐다. 결국 리잔수(栗戰書)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이 9일 공연을 대신 봤다. 김정은은 매우 아쉬울 것 같다. 김정은이 올해 3월부터 6월까지 세 차례나 중국을 찾아가자 북한 엘리트층에선 ‘굴욕적’이란 여론이 돌았다. 그래서 김정은은 이번엔 시 주석을 어떻게든 데려와야 체면이 선다고 타산했을 것이다. 김정은이 북-미 싱가포르 회담 이후 5년 전 중단된 집단체조 공연을 다시 시작하라고 지시한 것은 올해 중에 한미중 정상을 모두 평양에 불러올 수 있다고 봤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에서 이들 정상에게 집단체조만큼 확실히 자신 있게 보여줄 상품은 없다. 공연이란 장르를 통해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대의 정신까지 쏙 빼놓을 수 있다. 싱가포르 회담 뒤 김정은은 미국 중간선거 전에 트럼프 대통령을 평양 시민 수만 명의 떠나갈 듯한 환호 앞에 세울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비록 지난 몇 달 새 일이 좀 꼬였지만 만약 그 시나리오가 현실화됐다고 하면 시각적 메시지를 너무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며 트위터를 통해 얼마나 두고두고 자랑할 것인가. 김정은은 외교 성과뿐만 아니라 확실한 내부 선전 소재도 만들 수 있다. 지금 북한은 초급 당 비서 이상 당 간부들과 2급 이상 행정기관 책임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간부학습반 강연회에서 이런 선전을 하고 있다. “트럼프는 푸틴이나 시진핑과 만나서도 강력한 악력으로 상대의 손을 잡아당긴 뒤 그 사진을 내돌리며 자신이 세다고 시위하는 ‘악수 외교’의 선수다. 하지만 이번엔 (김정은) 원수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존경의 뜻을 표했다.” “원수님을 얼마나 흠모했던지 절대 비밀인 대통령 전용차 내부까지 다 보여주고 타보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초대국의 대통령도 이렇게 존경하는 분이 우리 원수님이다.” “트럼프는 원수님보다 두 배 넘는 거리를 달려왔다. 너무 떨려 방에 박혀 회담 준비에만 몰두했지만 원수님은 하루 늦게 도착하고도 여유 있게 시내 관광까지 했다.” 중앙당 강사들은 슬쩍 “동무들한테만 해주는 말인데…”라며 강연 자료에도 없는 이런 말을 한다고 한다. “회담 때 트럼프가 원수님에게 핵무기가 몇 개 있냐고 물었다. 원수님이 수령님 대에 수백 개, 장군님 대에 수백 개, 내가 만든 것까지 하면 1000개 정도 있다고 대답하자 그는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리고 핵 폐기가 아니라 서로 공존하는 방향으로 회담 의제를 돌렸다.” 북한은 공식 강연에서 차마 낯 뜨거워 하기 힘든 얘기는 추가로 소문을 만들어 퍼뜨린다. “트럼프는 비록 군수독점 재벌의 대변인에 불과하지만 오래전부터 원수님을 매우 존경했고, 꼭 만나보고 싶어 했다. 원수님을 가장 흠모하는 사람이 미국 대통령이 됐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원수님은 트럼프와 40분 넘게 영어로 단독 회담을 했다.” 싱가포르에서 몇 시간 만나고 이 정도니, 미중 정상이 평양에 가면 어떤 위대한 김정은을 만들어 낼까. 전 세계 강대국 지도자들이 앞다퉈 장군님을 흠모해 달려온다고 선전할 게 뻔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당연히 좋은 선전 소재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평양에 가지 말랄 수도 없고, 북한 보고 사기 치지 말랄 수도 없고…. 씁쓸하다. 북한은 저렇게 꿩 먹고, 알 먹고, 둥지 털어 불까지 때는데…. 그 대신 우리는 실리라도 확실히 챙겼으면 좋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 정권수립일(9·9절) 70주년 기념식에는 수백 명의 외국인이 방북해 북적였다. 노동신문 등 북한 매체가 7일부터 이틀간 소개한 방북 인사를 포함한 대표단은 거의 100개에 이른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 중 한 명은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70·사진). 40여 년 동안 17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한 드파르디외는 수많은 연기상을 휩쓸었던 왕년의 전설적 배우다. 그런 그가 무슨 인연으로 평양에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드파르디외의 팬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드파르디외는 2013년에 프랑수아 올랑드 당시 프랑스 정부의 부자 증세를 피하기 위해 러시아로 국적을 바꾼 바 있다. 그는 지난달 말 22세 여배우를 성폭행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중이라 북한에 망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일본의 대표적 친북파 인사인 프로레슬러 출신 안토니오 이노키 참의원 의원(75)도 평양을 방문했다. 아프리카 대륙 북서부에 있는 이슬람 국가인 모리타니의 무함마드 압델 아지즈 대통령은 이번에 평양에 간 유일한 외국 정상이다. 아지즈 대통령은 10년 전인 2008년 8월 대통령궁 보위부대 사령관으로 재직 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