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서운 법은 ‘국민정서법’이고 가장 큰 죄는 ‘괘씸죄’, 더 큰 죄가 ‘들킨 죄’라는 말이 있다. 청와대가 2017년 박근혜 정부의 국가채무비율을 높이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기획재정부 전 사무관의 주장이 있었다. 사실이라면 개인 비리는 아니지만 수천억 내지 수조 원의 국민 세금과 관련됐으니 국가적으로는 더 심각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국채를 발행해 그 돈으로 경기를 살리거나 복지를 늘리는 데 사용하자는 논리에는 찬반이 엇갈릴 수 있다. 이런 정책적 판단보다 이전 정부의 실적에 미리 먹칠을 하자는 ‘정무적’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이라면 문제의 소지가 크다. 사무관의 주장대로라면 국장 이하 실무자들의 반대로 국채 발행이 결국 무산됐다고 하지만 김동연 경제부총리 등 고위 관료들의 ‘정무직 지시’가 한심하다. 김 부총리는 예산실에 오래 근무하면서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강조해온 재정기획 및 전략통이다. 나도 한 토론회에서 김 부총리 본인이 이전 정권에서 재정건전화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런 부총리가 국채 조기 상환을 막고 오히려 빚을 늘리는 지시를 했다면 어느 후배 관료라도 정책에 대한 부당함과 함께 인간적인 배신감도 느꼈을 것이다. 새로 임명된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정무적’ 성향은 전임자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김 전 부총리가 때로는 몸을 낮추면서도 때로는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과 부딪치는 강단도 보였다면 홍 부총리는 미리 알아서 상사에게 잘 맞춰주는 스타일이라는 말도 있다. 홍 부총리가 2기 경제팀장으로 정치적 압력에 대한 방패막이가 되는 한편 정통 관료들과 함께 경제 살리기 정책에 전력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대목이다. 그렇지 않아도 올해는 나라 안팎의 여건이 작년보다 더 안 좋다. 서울대 경제추격연구소가 실력 있는 집필자 34명과 함께 발간한 ‘2019년 한국경제대전망’은 올해 경제 키워드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꼽았다. 작년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다. 외화가 외환으로, 내빈이 내우로 바뀐 것이다. 세계 경기 자체가 가라앉는 추세로 돌아선 데다 미중 무역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고, 나라 안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이 고용절벽, 자영업 붕괴의 부작용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혁신성장의 효과는 보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더 많은 국민이 공감할 때까지 인내할 것”이라며 현재의 경제정책을 계속 밀고 갈 의사를 밝혔다.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예견한 대로 이제까지 긍정적 효과보다 부작용이 더 많이 속출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자영업자, 중소기업인, 청년들이 계속 같은 실험의 대상이 돼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정책의 발부리에 걸려 누군가 비명 소리를 낸다면 일단 멈춰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 정도가 아닌가 싶다. 혹여 정치적 우군의 눈치가 보여 대외적인 포기 선언이 어려웠다면 포용적 성장이라는 간판은 유지하면서도 경제 활력을 살리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책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올해는 돼지해다. 좋은 덕담도 많겠지만 우리 경제에는 덕담을 나눌 여유보다 비상한 각오가 필요한 해다. 2010년 방만한 재정운영으로 국가부도의 날에 직면해 ‘돼지들’이란 조롱을 받았던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전철을 따라가고 있는 건 아닌지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 올 상반기가 이 정부에서 적어도 선거를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않고 정책을 손볼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걸핏하면 무역전쟁이라고 하지만 무역은 전쟁이기 이전에 상호 이익을 보는 거래 행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가 역사상 유례없이 발전한 원동력을 꼽으라면 기술 혁신, 금융의 발전과 함께 자유무역의 확장을 들 수 있다. 그 자유무역 흐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나라가 한국이기도 하다. 경제 규모에서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한국은 작년 기준으로 68%로 미국 20%, 일본 28%, 중국 33%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자유무역협정(FTA)인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이 11개 가입국 가운데 일본 멕시코 호주 등 6개국을 시작으로 어제 출범했다. 미국 주도의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과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에 이어 3번째로 큰 경제권이다. 주도국은 일본이다. 앞으로 가면 갈수록 가입국끼리는 물론이고 경제권 사이에서도 관세장벽은 낮아지고 수입금지 품목이 사라질 것이다. CPTPP 발효는 글로벌 대세는 무역장벽이 아니라 여전히 자유무역 확대라는 걸 다시 한번 입증한 셈이다. ▷CPTPP의 모태는 2016년 체결된 ‘포괄적·점진적’이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경제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일 합작품으로 고안됐다. 하지만 작년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협정 비준 대신 탈퇴 문서에 서명했다. 중국 견제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일본 역시 미국 내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무역협상 대상국이라는 의미였다. 다자간 협상보다 1 대 1 상대방 압박을 선호하는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의 첫 신호탄이기도 했다. ▷당장은 한국이 곤란한 처지다. 다른 나라와는 대부분 이미 개별 FTA를 맺고 있어 큰 영향이 없다. 일본이 문제다. CPTPP에 서둘러 가입하자니 자동차 등 일본의 공산품이 낮은 관세로 한국에 밀려올 수 있다. 가입을 마냥 미루자니 동남아 시장에서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쳐다보고만 있어야 할 우려가 있다.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가 적절한 가입 타이밍을 고르는 게 정부 협상팀의 실력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광주형 일자리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달 17일 ‘2019년 경제정책방향’을 확정 짓는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확인했다.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성공 사례가 나타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조인식 하루 전날인 이달 5일 광주형 일자리는 사실상 물 건너간 것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광주시가 갑자기 노동계의 의견을 수용해 ‘누적 생산 35만 대 될 때까지 단체협약을 유예한다’는 조항을 없앤 수정안을 현대자동차에 제시했고 현대차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성사만 되면 노사정 대타협을 구현하는 이상적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기대보다 우려가 많다. 현 정부가 추진한 정책들과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현실보다 명분이 앞선다. 광주형 일자리 공장은 연간 10만 대 정도의 경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현대차로부터 배정받아 위탁 생산할 계획이다. 그런데 경차 생산은 2012년 20만 대에서 작년에 13만 대로 떨어졌다. 올해는 작년보다 10% 이상 줄었다. 경차뿐만 아니라 자동차 국내 생산 자체가 공급 과잉 상태다. 공장 신설은커녕 있는 설비도 줄여야 할 판이다. 둘째, 상대방은 생각 않고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현대차는 최근 몇 년째 국내외 매출 감소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소차 전기차 같은 미래형 자동차 혹은 수익성 높은 고급 대형차에 투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갓 출범한 정부가 대단한 의욕을 보이는 사업에 대놓고 반대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최저임금 피해에 대한 중소기업, 자영업자의 우려도 무시됐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세 번째인데 뒷감당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요즘 정부가 발표한 경제정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자영업자 대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임대료, 카드수수료 대책 외에 어제는 ‘자영업 성장·혁신 종합대책’을 또 내놓았다. 채무를 감면해주고 18조 원어치의 전용 상품권을 발행하겠다고 한다. 모두 뒷북 정책들이다. 광주형 일자리는 실물이 있는 프로젝트다. 일단 공장을 짓고 사람은 뽑고 보겠지만 생산된 차가 계획만큼 팔리지 않을 수도 있다. 광주시 재정자립도는 39.9%로 6대 광역시 가운데 최하위다. 뒷감당이 쉽지 않다. 이렇게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광주형 일자리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대차 노조의 횡포를 더 이상 보고 있기 어렵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기아 현대 르노삼성 쌍용 한국GM 등 한국 완성차 업체 5곳의 평균 연봉은 9072만 원이다. 일본 도요타는 8391만 원, 독일 폴크스바겐은 8303만 원이다. 매출 대비 인건비 비중은 한국 5사가 12.3%, 도요타가 5.8%, 폴크스바겐은 9.9%다. 그러면서도 현대차는 1987년 노조 설립 이후 5년을 빼고 매년 파업을 벌여 왔다. 도요타는 1962년 이후 56년째 무파업이다. 이번 광주형 일자리에서도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공급 과잉을 지적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값 연봉으로도 비슷한 품질의 차를 만들 수 있다는 사례를 우려하는 현대차노조 그리고 상급단체인 금속노조, 민노총이다. 광주형 일자리가 성공하려면 3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신뢰, 신뢰, 신뢰’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노동-회사, 정부-회사, 정부-노동 3자 관계 모두에서 신뢰가 절대 부족하다. 일단 자기가 생색내고 책임은 지지 않는 정치인들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 신뢰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그래도 정 추진하려면 강철 같은 구속력이 있는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추후 애물단지가 되면 결국 그 피해는 지역 주민 그리고 국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1991년 9월 30일, 경기 지역 분당, 일산, 중동, 평촌, 산본 등 5개 신도시 가운데 분당 시범단지에서 입주가 시작됐다. 첫 입주민은 시골에서 올라와 부부가 함께 우유 배달로 모아온 돈으로 2년 전 분양에 당첨된 40대였다. 역사상 첫 신도시, 첫 입주민 취재를 갔던 필자가 왜 이렇게 새벽에 이사를 왔느냐고 물었다. “처음으로 내 집을 갖는다니 마음이 설레서 우리 둘 다 밤새 한숨도 못 자다가 날이 밝자마자 왔다”고 대답한 그 부부의 감격 어린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1기 신도시 건설은 노태우 정부의 대선공약 ‘주택 200만 가구 공급’의 산물이다. 자고 나면 웬만한 샐러리맨의 연봉 정도가 오르던 서울 강남 집값은 당시에도 큰 사회문제였다. 정부는 서울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에 신도시를 만들어 주택을 대량 공급하기로 했다. 첫 사업이 5개 신도시에 지어진 30만 가구였다. 신도시 분양 직후 강남 집값은 오랫동안 안정세를 보였다. 그 대신 분당이 신도시의 쾌적함과 강남권의 접근성 등으로 ‘천당 아래 분당’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분당 시범단지 30평형대의 첫 평당 분양가는 156만 원. 그 우유 배달 부부가 분양받은 32평형은 5000만 원 정도였으니, 29년 만에 20배가량 오른 셈이다. 첫 분양 이후 10년 가까이 지나자 1기 신도시의 약발이 떨어졌다. 잠잠하던 서울 집값이 다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고, 노무현 정부는 다양한 수요억제 대책과 함께 판교, 광교, 동탄 등 12개 지역에 걸친 2기 신도시 건설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국토교통부가 9·13대책에서 내놓았던 3기 신도시 계획의 구체적인 지역, 규모 등을 이르면 이번 주에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유력한 후보지로 거론되던 과천, 고양 원흥 등은 계획 사전유출 사건으로 일단 제외됐다. 김포 고촌, 성남, 광명, 시흥, 하남 등이 또 거론되고 있다. 1, 2기와 마찬가지로 3기 신도시의 주 타깃 역시 서울 강남 집값이다. 당시와 다른 점은 서울 집값이 이미 내리막으로 꺾였고, 3기 신도시 예상 지역에는 아직 미분양이 많아 해당 지역과 인근 주민의 반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청와대가 최근 부쩍 힘을 실어주는 곳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정 대타협을 강조하며 1998년 노사정위원회를 발족시켰다. 민노총은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제 도입에 반대하면서 그 이듬해 탈퇴한 이후 20년째 복귀하지 않아 노사정위원회를 ‘반쪽 기구’로 전락시켰다. 사회적 대화를 강조하는 현 정부는 노사정위 후신인 경사노위에 노사관계는 물론이고 국민연금 개혁 등 경제 사회 문제 전반에 걸친 의제까지 다룰 수 있도록 해 이전보다 훨씬 높은 위상을 부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초청한 자리에서 여야정이 함께 탄력근로제 확대를 합의했는데도 문 대통령은 다시 경사노위의 결정을 기다려 달라고 할 정도로 이 기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런데도 민노총은 경사노위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다. 민노총을 복귀시키려는 현 정부의 노력은 애처로울 정도다. 대화와 타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균형감이 중요한데 위원장부터 노동계로 심하게 기울어졌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문성현 위원장은 서울대 출신의 노동운동가다. 졸업 후 프레스공, 선반공으로 노동 현장에 직접 들어가 노조 활동을 지휘하고 민노총 가운데 가장 강력한 금속노조 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노동계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낸 노동운동계의 레전드급 인사다. 문 위원장은 경사노위가 여러 계층이 함께 참여하는 조직인데도 이름에 특별히 ‘노동’이란 단어를 넣었고, 공식적 비전도 사회적 대화를 통한 ‘노동 존중 사회’라고 표방하고 있다. 민노총은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런 경사노위에 복귀하지 않고 있을까. 민노총 2대 위원장을 지낸 이갑용 민노총 지도위원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위원은 올해 1월 조합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여러 조직이 박근혜 투쟁에 함께하고 고생했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민주노총 정도는 안 된다”면서 “위원장도 구속되고 조직도 깨지고 수십억 수백억 원의 돈을 들이며 투쟁한 민주노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장 한상균 전 위원장을 풀어주고 촛불투쟁의 주역 민노총에 대한 합당한 대접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민노총의 안하무인 격인 행태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현 정부가 사회적 상생모델로 공을 들이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에 민노총이 정면으로 반대하면서 경사노위의 반쪽짜리 상태가 장기화될 조짐이다. 하지만 민노총이 지금 같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경사노위에 들어와도 문제다. 전직 동료가 위원장으로 있는 곳에 점령군처럼 들어와 타협보다는 자신들이 탄생시켰다고 생각하는 정권에 청구서부터 내밀 게 뻔하다. 더구나 약속으로는 안 되고 당장 실행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정도면 사용자, 정부 외에 청년 여성 비정규직 중견·중소기업 소상공인까지 모두 참여한다고 하지만 민노총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그래도 협상이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지 뛰쳐나올 수 있는 게 이제까지 보여준 민노총의 모습이다. 요즘처럼 빈부 이념 세대 간 갈등이 극심한 우리 사회에 타협과 대화만큼 절실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억지 결혼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처럼 모양새를 위한 억지 타협은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추후에 더 큰 부작용만 가져온다. 차라리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가 법을 만들고, 정부는 법에 따라 정책을 집행하고, 기업이나 노동자나 그 법을 엄격히 지키며 제 할 일을 하는 게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길일지도 모른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육체노동 가동연한(稼動年限)이란 몇 살까지 육체노동을 할 수 있는가를 뜻하는 법률용어다. 보통 기계에나 사용하지 농담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도 사람에게 가동연한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만 봐도 법이 속성상 얼마나 변하기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어쨌든 육체노동 가동연한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1989년 55세에서 60세로 바뀐 이후 강산이 3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있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2016년 기준으로 82.4세로 1989년보다 10세 이상 늘었다. 환갑잔치란 말은 사라진 지 오래고 칠순 잔치도 보기 드문 요즘이다. 60∼64세 고용률은 60%로 전체의 절반 넘는 사람이 현역으로 뛰고 있다. 택시 운전사의 경우를 보면 전국 약 27만 명 가운데 65세 이상이 7만2800명이나 된다. 현재 판례로도 의사는 65세, 변호사 목사는 70세까지 일해 돈을 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 육체노동자에게 적용하는 가동연한도 65세로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든 안전사고든 피해자에게 얼마만큼의 손해배상을 할 것인가는 사안별로 복잡하다. 직장인의 경우 정해진 봉급이 있으니 계산하기가 비교적 쉽다. 문제는 소득을 입증하기 어려운 일용직, 주부 같은 경우다. 현재 육체노동자의 일당(日當) 기준은 중소기업중앙회와 건설협회가 제시한 9만5000원. 만약 35세 전업주부나 일용직 근로자가 본인 과실 없이 사망했을 경우 한 달 근로일수 22일에 60세까지 남은 날짜를 곱해 2억7700만 원을 받는다. 가동연한이 65세로 늘면 3억200만 원 정도로 많아진다. ▷육체노동 가동연한 기준이 연장되면 각종 보험금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각종 민사 사건에서의 손해배상, 국가가 운영하는 연금제도의 운용에도 상당한 파급효과를 끼친다. 평균연령만 늘어난 게 아니라 연금 수급 연령이 높아졌다. 반면 실제로 일하는 일수(日數)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그동안 사회 경제적 여건이 엄청나게 바뀌었으니 이제 대법원이 가동연한을 손질할 때가 되긴 됐다. 그리고 이참에 가동연한이란 용어도 바꿨으면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한고조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의 쟁패 끝에 황제가 된 뒤에도 걸핏하면 전쟁터 의리를 앞세우고 바른말을 하는 유생(儒生)들의 관을 벗겨 오줌을 누곤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신하 육가(陸賈)가 “말 위에서 천하를 잡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인의(仁義)를 행했다면 폐하께서 어찌 나라를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충고했다. 한나라가 그 뒤로도 400년을 더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다음 장면 때문이다. 유방은 얼른 낯빛을 바꾸어 나라를 잘 다스릴 방도를 지어 올리라고 했다. 사기(史記) ‘역생·육가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창업의 논리와 수성의 논리가 다르다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현대에는 정치·사회 분야보다 경제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의 퇴임이 기정사실화된 듯하다. 차기 경제부총리로는 홍남기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장이 많이 거론된다. 홍 실장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주로 예산실에 있었고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근무 경력도 있는 무난한 경제 관료라는 게 중평이다. 사실 경제부총리는 아주 함량 미달 인사가 아닌 다음에는 누구든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떤 부총리는 과장, 국장 시절에는 동료들에게 밀려 한직으로 돌다가 정권이 바뀐 다음 정권 실세의 추천으로 부총리로 돌아온 뒤 대통령의 강력한 신임 아래 역대 최고의 부총리란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지난해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리더십연구센터에서 역대 경제부총리 11명의 심층 인터뷰를 정리해 발간한 ‘경제부총리의 역할 재조명’ 보고서를 보면 부총리 성공 조건이 “대통령 신임이 60이라면 부총리 개인의 업무능력은 30, 예산권은 10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차기 후임 인사의 포인트는 대통령정책실장이다. 차기 정책실장으로 김수현 대통령사회수석비서관도 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고 신임이 각별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김 수석은 젊어서 판잣집 철거 반대운동을 하는 등 사회 불평등 해소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경제정책의 경험은 서울 집값 잡으려는 것 외에는 별로 없다. 다시 말하면 김 수석은 경제전문가라기보다 사회운동가에 가깝다. 정책실장의 업무 대부분이 성장 고용 통상 금융 등 경제 문제다. 산적한 경제 난제들을 경제 논리보다 사회·정치 논리로 접근하겠다고 작정하지 않은 다음에는 생각하기 힘든 인사로 보인다. 경제 투 톱의 조합 역시 중요하다. 현대 경제학에서 가장 큰 두 흐름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는 시장의 역할을 중시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정부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다. 그렇다고 해도 대통령정책실장에 케인스, 경제부총리에 하이에크가 앉아 있다면 나라 경제가 잘 굴러갈 리가 없다. 과한 비유인 듯하지만 김&장 조합에 그런 측면이 있었다. 물론 잘못된 한 방향으로 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견제와 균형이 중요한 사회·정치적 사안과 달리 경제는 일관된 신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경제가 처한 사정이 경제 수장들이 의견 충돌로 마찰을 빚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가 않다.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선거에서도 자주 목격하듯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경제적 약자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희망찬 미래를 보장하는 구호를 얼마든지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집권 후 그걸 실천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이제 문재인 정부도 1년 반이 됐다. 이제는 불확실한 경제실험은 접고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진짜 프로들로 경제팀을 꾸리기 바란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올해 초 GM은 로봇택시 ‘크루즈AV’ 내부를 공개했다. 로봇택시는 우버 같은 차량공유서비스와 자율운행차를 결합한 개념이다. 일단은 안전규정 때문에 운전사가 함께 탑승하지만 머지않아 무인 완전자율주행시스템으로 발전될 것이다. 메리 배라 GM 회장은 로봇택시의 이익률이 20∼3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자동차 제조사인지 택시회사인지는 더 이상 GM의 관심사가 아니다.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가 사업의 판단 기준이다. ▷GM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2008년 파산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난 뒤 매출 세계 1위라는 목표는 완전히 버렸다. 배라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GM이 특정 시장에서 승리할 수 없다면 그 시장을 떠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것”이라고 했다. 철수 기준을 수익률 10%로 제시했다. 그 대신 로봇택시, 전기차 등 미래자동차에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다. 그 전략 아래 호주 폴란드 등 5개국 시장에서 철수했고 13개 공장의 문을 닫아 본사를 흑자로 돌려놓았다. ▷19일 한국GM이 GM 측 관계자들만 모인 가운데 주주총회를 열어 생산 법인과 연구개발(R&D) 법인을 분리하는 안건을 의결했다. 수익이 안 좋으면 연구개발 법인만 남기고 생산 법인은 폐업해 버리려는 사전 준비 아니냐는 의구심이 드는 결정이다. 2대 주주인 산업은행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들어갔다고 해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인천시는 GM에 임대 중인 청라주행시험장을 회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노조는 파업도 불사하며 총력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정부가 올 4월 한국GM에 8400억 원이나 투자하면서 포함한 지원 조건에는 10년간 한국 공장을 유지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GM이 2대 주주와도 충분한 상의 없이 법인 분리를 밀어붙인 것은 과연 이 조항을 지킬 것인가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수익 우선주의라는 본사의 글로벌 전략이나 2조 원이나 정부 보조금을 받다가 보조금이 끊어지자 곧바로 철수한 호주 사례에 비춰 보면 이번 법인 설립 강행은 GM이 ‘먹튀’ 의혹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 차원의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남의 배 아픈 것을 고치는데 내 배가 더 아프다는 걸 어떻게 하겠나. 10년간 논란을 빚어온 영리병원 사업이 우여곡절 끝에 사실상 무산됐다. 원희룡 제주지사가 국내 최초 영리병원으로 주목을 끌었던 제주 녹지국제병원에 대해 “공론조사위원회의 불허 권고를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공식회의 자리에서 8일 밝혔다. 첫 영리병원이 될 뻔한 녹지국제병원은 중앙정부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사업계획을 승인했고 제주도도 이를 받아들였고 중국 자본이 778억 원 투자됐다. 지난해 7월 서귀포 헬스케어타운 안에 병원 건물을 준공하고 의사 간호사까지 채용해 개업 허가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다. 올해 봄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원 지사가 이 사업을 공론에 부친다고 할 때 이미 개업허가는 물 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개는 공론화 혹은 여론조사로 의사결정을 하면 고급화, 차별화보다는 평준화 성향이 수적으로 우세한 경우가 많고 영리병원 역시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7월 열렸던 공개토론회에서 한 시민단체 대표는 “영리병원은 수익을 내야 해 진료 인력을 줄이고 진료시간도 짧아지기 때문에 가격이 비싼데도 의료의 질이 낮아진다”고 반대 논리를 폈다. 심각한 정신질환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환자가 이런 병원에 제 발로 찾아가겠으며 병원이 이익을 남길 수 있겠는가. 그래도 표가 달려 있는데 선거를 코앞에 둔 정치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모양이다. 영리병원이란 용어부터가 이상야릇한 이름이다. 무료 보건소를 빼고는 동네 병원에서 서울 강남 성형외과, 대형 대학병원에 이르기까지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병원이 별달리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돈 많은 사람이 자기 돈 많이 내고서라도 보건복지부로부터 일일이 간섭당하는 일반 병원에서는 받을 수 없는 고급 의료 서비스를 건강보험에 관계없이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것이 영리병원의 요체다. 이런 서비스 도입이 어려워졌으니 중국, 중동 지역 국가의 부유층들이 수준 높은 의료 서비스를 받기 위해 한국에 와서 돈을 쓰고 갈 일도 없게 됐다. 의료 서비스 수출 기회는 물론이고 투자 유치하고 사업승인까지 내주고도 마지막에 사업을 좌절시킨 한국은 해외 투자 업계에서 신뢰까지 상실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배 아픔 해소 정책’이 부동산정책이다. 집값 대책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정치·사회정책에 가깝다. 부동산정책 방향을 사실상 결정하는 인물이 대통령을 빼고는 김동연 경제부총리나 윤종원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아니라 김수현 사회수석으로 알려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다른 접근이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접근은 사회정의 차원에서 불의와 싸우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경제적 접근은 목표는 같을지라도 수요 공급의 불균형을 해소해 자연스럽게 집값 문제를 푸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엊그제 발표된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로머 뉴욕대 교수는 도시화와 집값 상승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주택 수요가 늘어나는데 공급이 증가하지 않으면 가격은 오르기 마련”이라면서 “그냥 시장에 맡기면 수요공급원칙에 따라 스스로 공급이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노벨상 수상자치고는 너무 단순하고 뻔한 말 같지만 경험적으로도 그만한 해답이 없다. 배고픈 것도 배 아픈 것도 동시에 모두 해소할 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 정책은 없다. 그렇지 않으니까 늘 문제다. 그럴 때는 미래 세대를 먼저 생각하고 정부의 신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이제 추석도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취업준비생들은 마음이 급해지고 기업 채용 팀의 손길도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졸업생들은 친척들에게 어디에, 언제 취직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여기서도 가벼운 질문 하나 던져 보자. 두 가지 선택이 있는데 당신이 연봉 1억1000만 원을 받고 대학 동기가 1억 원을 받는 A 경우와 당신이 1억2000만 원을 받고 동기가 1억3000만 원을 받는 B 경우가 있다면 무엇을 택하겠는가. 실제로 몇 년 전 미국 명문 경영대학원(MBA)이 졸업예정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다. 당연히 B를 택할 것 같은데 실제 답변에서는 3분의 2 정도가 A를 택하겠다고 했다. 자기가 좀 덜 받는 게 낫지, 동료가 나보다 더 받는 꼴은 못 보겠다는 심리다. 누구보다 계산 앞에서 냉철할 것 같은 미국 MBA 졸업생이 이 정도다. 이런 심리현상들을 전통 경제학과 접목한 게 요즘 각광받는 행동경제학이다. 한국에서 경제정책을 펴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게 관료들의 하소연이다. 원래부터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게 인간 본성이지만 한국 사람은 심하다는 것이다. 이론을 앞세우다가 과거 명성만 추락시키고 물러난 대선 캠프 출신 교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 장관 자리는 경제학 교수들의 허다한 무덤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정책은 없고, 다만 현실에 맞고 맞지 않는 정책이 있을 뿐이란 걸 몰랐기 때문이란다. 비슷한 차원에서 최근 발표된 주택공급방안 가운데 소셜믹스(Social Mix)라는 처방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셜믹스란 말을 처음 접한 것은 노무현 정부 당시 건설교통부 출입기자로 요즘처럼 정부가 한창 집값과의 전쟁을 벌일 때였다. 경제부처에서 웬 뜬금없는 사회정책인가 했더니 서울 강남 요지의 대형 평수 분양아파트에 임대주택을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 섞어 짓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있는 집과 없는 집, 그리고 그 자녀들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공존 사회를 지향한다고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날로 치솟던 강남 아파트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식으로 가격을 떨어뜨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여기에는 청년시절 판자촌철거반대운동을 맹렬히 벌였던 김수현 당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의 견해가 많이 반영됐다는 게 건교부 공무원들의 귀띔이었다. 지하철 3, 5호선 환승역이 코앞인 옛 성동구치소 터에 분양·임대아파트가 함께 들어서는 소셜믹스 형식으로 주택을 공급한다는 발표가 나자 동네 전체가 발칵 뒤집어진 모양이다. 연일 집값 하락 대책 심야회의가 열리는가 하면 ‘절대 반대’ 플래카드도 내걸렸다. 기존 소셜믹스형 아파트 단지 내 임대동(棟)과 분양동 사이에 담벼락이 세워지고 주민 간 갈등과 위화감이 심각한 수준이란 사례도 거론됐다고 한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성공한 소셜믹스 일부 사례가 있다. 현 거주민과 지방자치단체가 개발단계에서부터 몇 년에 걸쳐 수백 번 만나 논의하고 구체적이고 세심한 갈등 해소방안을 마련해 조심스럽게 추진한 결과다. 그런 것도 없이 덜컥 집값 잡기 발표용에 동원되는 소셜믹스는 원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이상과 현실의 짬뽕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한둘이 아니란 점이다. 현 정부 간판정책이면서 아직도 강한 집착을 보이는 소득주도성장 실험도 같은 범주다. 이념을 현실에 강제하거나 이상과 본성을 혼동하는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고 그 대가는 일반 국민이 치르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애플이 스마트워치 ‘애플워치4’를 이번 주 세계 시장에 내놓는다. 핵심은 심전도 체크 기능이다. 사용자가 시계 버튼 부분에 손을 대면 시계가 심장의 전기신호를 추적한다. 30초쯤 지나면 심장박동의 규칙적 리듬과 불규칙 리듬 분류가 이뤄진다. 심장질환 모니터링에 필수적인 이 정보는 의사와 공유돼 원격진료에 활용될 수도 있다. 미국식품의약국(FDA) 승인까지 받은 정밀 의료기기가 됐다는 게 애플의 설명이다. 이로써 애플은 헬스케어 회사로 성큼 다가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애플이 자랑하는 심전도 체크 기능은 이미 3년 전 국내의 한 벤처기업이 개발한 기술이다. 한국 기업들은 정부 규제에 막혀 이 기술을 스마트워치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칸막이 규제가 없었다면 세계 최초의 스마트워치 개발사인 삼성전자의 ‘갤럭시워치’ 시리즈에 가장 먼저 탑재됐을지 모른다. 더 답답한 현실은 한국의 원격의료 규정이 워낙 까다로워 애플워치4의 심전도 체크 기능마저 한국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교육 자선사업에 매진하겠다며 얼마 전 은퇴 선언을 한 중국 최대 쇼핑몰 알리바바의 창업주 마윈은 공산당 고위 간부와 정부 관료들이 줄줄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중국 당국의 규제 행태를 맹비난했다. 17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2018 세계 인공지능 콘퍼런스(WAIC)’ 기조연설에서다. “(정부가) 뒤처지는 세력을 과도하게 보호하는 것이 혁신을 망치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중국 정부의 규제가 미래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중국은 한국에 비하면 나은 편이다. 중국에서는 기업가치가 60조 원에 이르는 공유차량 서비스 회사가 등장해 해외로까지 진출했다. 한국에서 공유차량 서비스는 출퇴근시간에만 가능하다. 이마저도 서울시는 불법 영업이라며 사업주를 수사 의뢰했다. 사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디지털혁명의 핵심인 공유경제를 보나 미래 유망산업인 헬스케어 산업을 보나 마윈의 쓴소리는 중국 공산당 간부나 관료보다 한국의 여당 간부나 공무원들이 먼저 들어야 할 것 같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검찰 수사로 밝혀진 공정거래위원회 퇴직자의 민간기업 재취업 행태를 보면 ‘공정’이란 단어가 민망할 정도다. ‘1년 차 연봉 1억9000만 원, 2년 차 2억9000만 원, 3년 차 2억4000만 원, 업무추진비 500만 원’식으로 3년 치 연봉을 스스로 정하거나 골프회원권에 비서, 월 500만 원씩 쓸 수 있는 법인카드, 건강검진까지 요구했다. 출근 안 해도 되는 조건으로 2억 원을 보장받고 고문으로 취업하는가 하면 대기업에 자녀 채용을 요구한 간부도 있다. ▷특이한 점은 취업된 당사자들 누구도 입건조차 되지 않고 조사도 참고인 자격으로 받았다는 사실이다. 공정위가 특정 기업과의 업무 연관성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예비 퇴직자에 대해 ‘경력 세탁’을 해준 덕분에 인사혁신처의 재취업 심사를 교묘하게 통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취업 대상은 주로 대기업과 유통회사다. 지배구조나 인수합병에서 광고, 소비자문제까지 걸면 걸릴 게 많다는 약점을 이용했다. 기업의 ‘갑질’을 막아야 할 공정위가 기업의 약한 고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전문성’을 이용해 제대로 갑질을 한 셈이다. ▷공정위 일각에선 “다른 부처와 달리 산하 기관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기업에 재취업을 시키게 된 것”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어디 산하 기관뿐이겠는가. 민간기업에는 정부 부처가 모두 상전이다. 국세청은 말할 것도 없고, 은행처럼 인허가 규정이 많은 금융회사들에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제일 무섭다. 건설회사, 항공사에는 국토교통부 공무원들의 말 한마디에 회사 운명이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검찰, 경찰 등 힘 있는 기관들은 언제라도 칼을 들이댈 수 있어 재취업은 물론이고 어떤 요청이든 함부로 흘려들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현대판 관존민비(官尊民卑)의 특징은 기업을 괴롭힐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일수록 낙하산 일자리도 많다는 점이다. 그 수단은 늘 법령 같은 규제의 탈을 쓰고 있다. 규제가 공무원의 밥이요, 재취업 수단인 셈이다. 규제혁파가 경제를 살리는 대책이자 공무원과 기업 사이의 악성 먹이사슬을 끊는 획기적 방안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최근 문재인 정부가 혁신성장을 위한 규제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터넷전문은행 도입, 입국장 면세점 도입 등 오랫동안 묵혀 왔던 규제 사슬을 앞장서 풀고 있다. 원래 탈규제(Deregulation)는 민영화, 감세 등과 함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같은 우파 정권의 간판 메뉴다. 요즘 정부 인사들은 ‘소득주도성장’ 대신 시장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는 ‘포용적 성장’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문 대통령의 경제정책 방향 선회를 두고 전통적 지지 세력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들의 불편한 심정이 드러난 것은 좌파 경제학자들이 주축을 이뤄 323명이 동참해 지난달 18일 발표한 선언문이다. 요점은 최저임금 인상을 할 때만 해도 기대가 컸는데 이제는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최저임금 인상·근로시간 단축은 임금 산입범위 조정, 처벌유예 같은 예외조항으로 효과가 크게 반감됐고, 재벌개혁은 미적거리고, 부자증세는 너무 보잘것없다는 내용 등이 포함됐다. 그러면서 정부와 청와대 핵심 부서에 구태에 젖은 경제 관료 대신 개혁을 추진할 인물을 포진시킬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선언문 발표 이후 열흘도 안 돼 오히려 소득주도성장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홍장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경질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대신 그 자리에 ‘구태에 젖은 경제 관료’인 윤종원이 앉았다. 대통령부터 혁명적으로 규제혁신에 나서라고 다그치고,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대기업을 돌고 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문재인 정부에서 좌회전 깜빡이 켜고 우회전을 한 대표적인 사례로 규제완화가 꼽힐 것이다. 방향 전환의 이유는 간단하다. 소득주도성장이 정부 출범 1년이 지나도록 성과는커녕 고용 참사, 자영업자의 저항 같은 부작용만 잔뜩 불러왔기 때문이다. 경제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게 별것 아니다. 콩 나기를 기대하면 콩을 심어야 한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일자리 만드는 것은 기업이다. 기업이 뛰려면 발목 잡고 있는 규제가 없어져야 한다. 쉽고 간단한 이치다. 앞으로 자잘한 건수 채우기보다 의료·보건 서비스 규제 같은 덩어리를 통째로 풀거나 아예 규제방식 틀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규제혁신 쇼만 벌이다 말았다는 평가를 듣기 십상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좌회전 깜빡이, 우회전’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제주해군기지, 이라크 파병과 함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경제 관료나 경제계 인사들은 ‘반미(反美)면 어때’라던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 체결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회고한다. 올 4월 정부 측에서 나온 평가를 보면 FTA 이후 5년간 농수산 피해는 크지 않은 가운데 경제성장률은 0.31%, 일자리는 1만6000∼5만7000개 정도 생겼다. 오히려 미국 쪽에서 더 부정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한미 FTA를 ‘재앙’이라며 폐기까지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한미 FTA는 좌파 정부의 상당히 성공한 우회전 정책인 셈이다. 공화당 소속인 트럼프 대통령이 전통적으로 민주당 정책인 보호무역주의 칼을 꺼내 휘두르고 있는 중이다. 요즘 독일 프랑스 일본 가릴 것 없이 선진국들의 대세는 보수도, 진보도 아니고 ‘일자리만 생긴다면!’이다. 우리 역시 좌회전이든 우회전이든 일자리 생기는 곳이 정확한 방향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푹푹 찌는 폭염이 국립기상연구소 공식 통계로 3384명의 사망자를 낸 1994년 여름을 생각나게 한다. 그해 정부과천청사 모든 건물은 오후 6시가 되면 그나마 희미하게 나오던 중앙공급식 에어컨이 딱 끊겼다. 그러면 공무원들은 체면 불고하고 바지를 걷어 올리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한 손으로 연신 부채를 부치며 남은 저녁 일을 하곤 했다. 보다 못한 몇몇 기자들이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렇게 열을 받아가면서 일을 해서 어떻게 제대로 국가정책이 나오겠는가’라는 취지로 청사를 관리하던 당시 행정자치부를 비판하곤 했다. 그러면 행자부 담당 공무원들은 “우리가 이렇게 욕을 먹어가며 에너지 절약에 힘쓰고 있다”며 오히려 윗선에 생색을 낸다는 말이 들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국정감사나 대정부질문 때 ‘옆 지역은 4차선 도로인데 우리 지역만 2차선이다. 왜 안 늘리느냐’며 핏대를 세우는 지역구 의원들이 있다. 너무하다고 생각한 정치부 기자들이 ‘국회의원인가 시의원인가, 민망한 지역구 챙기기’라는 식으로 비판하면 오히려 그 의원으로부터 “기사 정말 고맙다”는 감사 전화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기사들을 싹 모아서 지역구에 내려가 “내가 이렇게 중앙에서 욕을 먹어가며 지역주민을 위해 뛰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막힌 의원님들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 비동맹 가리지 않고 곳곳에 관세 폭탄을 퍼부으며 좌충우돌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나머지 19개국의 성토장이었다. 세계무역 질서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의 지지층만 챙긴다는 비난이 미국 내에서조차 거세게 일고 있다. 그래도 트럼프는 ‘마이 웨이’다. 이러다가 정말 세계경제가 엉망이 되게 생겼다.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전국금융노련 출신으로 노동계에서는 비교적 유연하면서도 합리적인 인물이란 평가를 들으며 3선 의원까지 됐다. 그런데 최근 같은 노동계 출신인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부터 “청와대가 아무리 말을 해도 장관이 말을 안 듣는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최저임금 문제에서 김 장관이 노동계 입장만 생각하고 정부와 여당 전체 기조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현 정부에 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과거 어느 때보다 안하무인격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상대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노사정 대화를 복원하려면 노동계 입장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는 말 그대로 고용과 노동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 부서다. 목소리가 크고 힘 있는 대기업, 금융회사, 공기업 근로자의 대변기관이어서는 곤란하다. 중소기업 근로자, 실업자, 조만간 취업시장에 뛰어들어야 할 청년들까지 모두 고용노동부의 관할이다. ‘일자리 지키기’와 함께 ‘일자리 만들기’에도 그 이상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자리다. 더욱이 장관이란 자리는 국무위원으로 자기 부처를 넘어 국가 전체를 봐야 하는 자리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대기업만 생각해서도 안 되고 중소벤처기업부가 중소기업 사장들만 챙겨서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 사례를 봐도 거대 노조의 양보 또는 협조 없이는 일자리 정부로 성공하기 어렵다. 이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의 역할이 그만큼 막중하다. 조폭 영화나 TV 코미디를 보면 나와바리(縄張り)라는 일본말이 자주 등장한다. 보통 자기 구역, 관할 범위 정도의 의미로 쓰인다. 요즘 김영주 장관의 경우 이 ‘나와바리’ 정신이 너무 투철해서 탈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2003년 서유럽을 덮친 폭염은 세계적으로 최악의 자연재해로 꼽힌다. 연일 섭씨 40도를 오르내린 기온으로 선진국인 서유럽 전체에서 약 3만5000명이 사망했다. 프랑스에서만 1만48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1만 명 가까이가 바캉스 시즌에 도심에 홀로 남겨진 힘없는 노인들이었다. 우리 같으면 나라가 뒤집어졌을 일이다. 복지 선진국 프랑스의 어두운 단면이다. ▷한국에서도 태풍 홍수 산사태 대설 등 여러 자연재해 가운데 가장 큰 인명피해를 낸 재해는 폭염이다. 국립기상연구소에 따르면 1994년 대폭염으로 인한 탈진 열사병 등으로 3384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은 광복 전인 1936년 남북한을 통틀어 1104명이 사망한 태풍 3693호(당시에는 태풍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번호로 불렀다), 1959년 768명의 목숨을 앗아간 태풍 ‘사라’였다. 요즘 서울은 낮 최고기온이 36도, 대구는 38도를 넘어가고 있다. 올 들어서만 온열질환자가 전국에서 801명이 발생하고 이 중 8명이 사망했다. ▷행정안전부가 폭염을 혹한과 함께 새로 자연재난에 포함시킬 방침이라고 한다. 폭염 혹한은 계절적 변화에 따라 서서히 변하기 때문에 대비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재난에서 제외시켜 왔다. 그런데 이제는 지구온난화와 겹쳐 예상치 못할 정도로 기온이 올라가고 오랫동안 지속되는 데다 피해 범위가 넓다는 점이 고려됐다. 재난안전법상 자연재난이 되면 이를 대비하는 예산이나 피해 보상에서 이전과 차이가 난다. ▷기상이변은 하늘의 일이지만 이를 막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2003년 대폭염(canicule)을 경험한 프랑스는 그 이듬해까지 1년에 걸쳐 사고 원인, 책임 범위와 처리 결과는 물론이고 노인 보호 시스템 개선방안을 담은 방대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1995년 700여 명의 폭염 사망자가 발생한 시카고도 예방책을 마련한 결과 1999년에 비슷한 수준의 폭염이 다시 발생했을 때 사망자 수를 110명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일주일 만에 대책이 나오고 1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우리와는 대조적이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일자리가 이번 정부의 업무지시 1호이니 일자리를 갉아먹는 사람들은 공공의 적이라고 부를 만하다. 우선 최저임금을 시간당 1000원 남짓 올렸다고 아르바이트생 잘라버리는 편의점 주인이나 치킨집 사장님이 해당된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 인건비 때문에 고민이었는데 최저임금까지 고속으로 오른다니 이참에 아예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겨버리겠다는 전방, 경방 같은 제조업 사장님들도 일자리의 적이다. 고속도로 요금소를 완전 무인화하겠다는 발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갇혀 하루 8시간씩 꼼짝없이 화장실도 못 가고 하루 2000명씩 별별 사람들을 다 상대하며 애들 학원비라도 벌어보려는데 그 자리마저도 없애려고 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들 기계 팔아먹겠다고 남의 일자리를 걷어차는 그 무인화 기계회사 사장과 직원들, 그걸 도입하겠다는 공무원들은 공공의 적이란 말로도 모자란다. 서울시 지하철을 무인 운행하자는 사람들도 같은 계열이다. 근로시간 단축 이후 요즘 큰 기업들 회사 근처 삼겹살집, 호프집에 저녁 손님이 없어 주인과 그 종업원의 일자리가 간당간당한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초과근로수당이 줄어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만큼 저녁이 있는 삶을 집에서 보내겠다는 직원들이나 일찍 퇴근하라고 채근하는 대기업 사장님들은 정부 시책에 열심히 따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일자리 공공의 적에 포함되는 경우다. 반대로 일거에 무인화 사업을 백지화시켜 버리는 도로공사, 국민의 안전도 지키고 자신의 일자리도 지키는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서울지하철 노조는 그런 일자리의 적들과 싸우는 전사들이다. 은행지점 폐쇄에 대한 모범규준을 만들어 점포 폐쇄에 따른 소비자 불편은 물론이고 일자리 감소까지 엄격히 감시하겠다는 금융감독원, 경쟁력을 잃어버려 10조 원의 세금으로 지탱되고 있지만 구조조정을 완강히 거부하고 이제는 임금 인상을 위해 파업도 불사하는 대우조선해양 노조도 일자리 지키기의 선봉장이라 할 만하다. 이렇게 일자리 정부라고 자처한 대통령 이하 공무원들이 앞장서고 여당이 입법으로 지원사격하고 일자리를 위해 머리띠를 싸매는 거대 노조들이 있으니 앞으로 대한민국 고용의 미래는 창창할까. 멀리는 마부들 일자리를 보호해주기 위해 첨단 발명품이던 자동차의 속도가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가 독일에 자동차산업과 일자리를 통째로 뺏겨버린 1860년대 영국을 참조하거나, 가까이는 드론산업에 온갖 규제를 갖다 붙였다가 중국의 드론공장 일자리만 왕창 만들어준 우리나라 사례를 참고하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이와 반대로 공무원 수를 줄이고, 해고하기 쉽도록 제도를 고친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의 노동개혁은 언뜻 보면 일자리의 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자리를 늘리는 결과를 낳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자리에 대한 진짜 적은 정책에 내몰려 직원들을 줄이거나 공장을 옮기는 자영업자 중소기업 사장이 아니라 갖가지 명분을 갖다 붙여 기술 발전을 거부하거나, 표의 논리에 굴복하는 엉터리 정책들이다. 일자리는 기본적으로 경제 문제다. 정치논리에 입각한 복지정책과 유사한 일자리 대책으로는 복지는 좋아질지 모르나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는다. 올해 상반기 경우를 보면 오히려 일자리가 왕창 줄었다. 일자리 만들기 전투에서 지금은 ‘돌격 앞으로’라는 용맹함보다 사이비 아군과 진짜 적을 구분할 줄 아는 현명함이 절실한 시기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최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규제혁신점검회의가 열리려다가 연기됐다. 당정청 고위 인사가 총출동하는 회의가 불과 3시간 전에 취소된 유례없는 일이다. 그 이유가 천재지변이나 전쟁 같은 급변사태가 아니고 회의 준비 부족이었다고 한다. 회의 연기를 건의한 이낙연 국무총리도, 이를 받아들인 문 대통령도 그동안의 규제혁신 성과에 대해 “답답하다”고 했다. 소득주도성장은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 규제혁신을 핵심으로 하는 혁신성장은 김동연 경제부총리로 역할 분담이 돼 있다. 이 때문에 김 부총리가 엄청난 질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규제혁신이 지지부진한 걸 김 부총리 혼자 다 뒤집어써야 하는 일인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앞으로 김 부총리가 더 분발하면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가 나올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어림없는 일이다. 누구나 규제개혁을 말하지만 답답할 정도로 안 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이해관계의 조정, 쉽게 말하면 ‘밥그릇 지키기’라는 정치·사회적 문제다. 기존의 규제를 풀다 보면 그 규제의 혜택을 잃는 측이 생기기 마련이다. 원격의료의 경우 의사들이고, 차량공유 서비스의 경우 택시 운전사와 기존 사업자들이다. 새로 2개를 가지면서 느끼는 만족감보다 기왕 가지고 있는 것 1개를 뺏기는 데 더 큰 분노를 느낀다는 게 행동경제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손실회피편향’이란 보편적 인간 심리다. 규제 푸는 작업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신규 첨단 산업은 기존 사업자가 적으니 반대가 덜하다고 하지만 그 대신 관료집단이 버티고 있다. 관료들에게는 기존이든 신규든 규제가 또 다른 ‘밥그릇’이다. 사고가 터졌을 때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미리 사소한 규제까지 만들어 두려는 공무원 특유의 노파심도 크게 작용한다. 규제혁신이 없으면 혁신성장도 없고,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컨트롤타워 교체다. 정부예산 짜고, 세금제도 고치고, 금융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부총리에게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판에 집단적 이해관계 조정은 턱도 없는 일이다. 말이 좋아 경제팀장이지 청와대 말도 안 듣는다는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이다. 많은 규제가 걸려 있는 행정안전부의 김부겸 장관은 여당 대표급이고, 보건복지부 박능후 장관은 대선캠프 출신이다. 기존 산업은 물론이고 드론, 자율운행차 등 첨단 산업들에 관련된 규제의 상당 부분이 지방자치단체 관할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부하 공무원들을 제쳐두고 김 부총리 말을 들을 리가 없다. 규제 상당수가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여야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소득주도성장은 관련 정책수단이 많은 경제부총리에게 맡기고 이해집단을 혁파하는 규제혁신을 대통령과 한 지붕 아래서 근무하는 정책실장이 맡도록 업무 교체를 하는 게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다. 다음 총선이 있는 2020년 4월까지 1년 10개월 동안 선거가 없다.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고공 행진하는 지금이 이해관계 집단을 설득하고, 때로는 무시하거나, 관료들의 반발을 무마해 가면서 조정능력을 발휘해 ‘국민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는 규제혁신’을 밀어붙일 적기(適期)다. 그러지 않고 이대로 간다면 규제개혁이 말잔치, 기껏해야 건수 채우기로 끝날 게 너무도 뻔하다. 규제개혁에 대한 무능이거나 진정성 부족 두 가지 중 하나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뭘 안 주면 안 줬다고 패고, 주면 줬다고 패고 기업이 중간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이 참담하기 그지없다.” 지난해 1월 한국경영자총협회 김영배 상임부회장이 한 모임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을 앞에 두고 한 말이다. 그는 TV토론회나 성명서를 통해 경총의 강경 논리를 앞장서 대변해온 ‘경총맨’이었다. 1970년 발족한 경총은 원래 태생부터가 전투조직에 가까웠다. 투쟁적 노사관계라는 시대 상황으로 인해 한편에서는 양대 노총과 맞짱을 뜨고 한편에서는 정부 정책에 대해 재계 단체들 가운데서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했다. ▷이런 성격은 친노동 정부라는 현 정부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작년 5월 김 부회장은 “획일적인 정규직 전환은 갈등만 키우고 전체 일자리를 줄일 가능성이 높다”고 정면으로 반발했다. 다음 날 문재인 대통령은 작심한 듯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경총은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라며 반성하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아마 이때 경총과 김 부회장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됐을 것이다. ▷올 4월 임기가 끝나고 연임을 고사한 박병원 회장과 함께 김 부회장도 물러났다. 그 뒤 영입된 인물이 송영중 전 노동부 기획조정실장이다. 아무리 알아서 엎드린다고 해도 관료가, 그것도 노동부 출신이 낙하산처럼 온 데 많은 회원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런데 최근 회장단이 송 부회장을 경질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발단은 최저임금 산입범위다. 경영계에서는 국회에서 처리하자고 했고, 노동계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처리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송 부회장이 최저임금위에서 처리하자고 주장해 회원사들을 당혹하게 했다. ▷송 부회장은 취임 이후 조직 내부에서 불화설이 끊이질 않더니 최근에는 재택근무로 구설에 올랐다. 송 부회장은 노동부 시절 원만한 성격에 합리적인 관료였다는 게 중평이다. 하지만 경총은 사용자들을 위한 이익단체이고 부회장은 그 조직을 이끄는 실무 책임자다. 이런 자리의 성격에 대해 착오가 있었다면 경질론이 나오기 전에 스스로 진퇴를 결정하는 게 옳지 않았나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긍정효과 90%’란 말 때문이었을까. 최근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청와대 회의 논란을 보면서 중국 현대사에 중요한 고비가 됐던 여산(廬山·루산)회의가 문득 떠올랐다. 중국 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은 수년 내 영국을 따라잡겠다며 1958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했다. 무리한 인민공사, 철강증산 정책으로 농촌은 피폐하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지방 간부들은 거짓 실적 보고만 올렸다. 처참한 농촌 현장을 둘러본 당시 제2인자 펑더화이(彭德懷)가 마오에게 부정적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그러자 마오는 “누구나 열 손가락이 있다. 우리는 그 가운데 아홉 손가락을 성취로, 한 손가락을 실패로 꼽을 수 있다”며 펑을 실각시켰다. 이후 대약진운동에 대한 비판은 완전히 사라졌고 최소 3000만 명이 대기근으로 사망했다. 1962년에 비로소 국무원장이었던 류사오치(劉少奇)가 “참사의 70%가 인재(人災), 30%가 천재(天災)”라며 대약진운동을 비판했다. 이것이 결국 문화대혁명이 촉발되는 계기가 됐다는 건 알려진 대로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대약진운동과 아주 다른 시대적, 정치·사회적, 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다. 프로젝트의 규모나 진행 절차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회의에서 여산회의가 연상되는 것은 현 정부의 간판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이 줄곧 70%가 넘는 대통령 국정지지율을 바탕으로 내부에서는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聖域)이 돼가는 듯한 조짐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 증가의 긍정적 효과를 충분히 자신 있게 설명해야 한다. 긍정적 효과가 90%다”고 한 발언은 누가 봐도 잘못된 보고에 의한 실언이다. 논란이 되자 청와대 대변인은 처음부터 전체 자영업자, 실업자를 포함한 것이 아니라 ‘고용된 근로자 임금’만 대상으로 한 발언이었다고 반박했다. 그렇다고 해도 공식 발표도 되지 않는 통계를 참모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꿰맞추기해서 보고했다는 지적은 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소통을 강조하는 이번 정부에서 최고위급 참모들이 초보자들도 하지 않을 실수를 한 걸까. 아마도 청와대 경제 참모와 지지자들 사이에 최저임금 속도조절론이 자칫 소득주도성장 자체에 대한 부정 혹은 후퇴로 비쳐서는 안 된다는 강박감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어떤 정책이나 이론이 일단 내부에서 비판 불가의 도그마로 자리 잡으면 속도조절 정도의 수정론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대통령은 회의 말미에 현 정부 경제정책의 두 수장 격인 ‘김&장’ 가운데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혁신성장,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은 소득주도성장 주도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혁신성장은 지난 정부의 창조경제만큼이나 실체가 막연하다. 실행 도구인 규제 개혁은 어느 정부에서나 외치던 립서비스용 구호다. 다시 말해 부총리는 힘이 쭉 빠졌다. 이런 결정타를 맞았는데 어떤 장관들이 말뿐인 경제팀장의 눈치를 보겠으며, 자유로운 비판이 나오겠는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득주도성장 이론도 마찬가지다. 안팎의 비판도 수용해 가며 실정에 맞게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정책의 당위가 소중하다면 그럴수록 통계 수치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오늘 저녁에라도 편의점에 들러 알바 학생에게 사정이 어떠냐고 물어보라. 동네 떡볶이집 주인아주머니와 이야기도 나눠보고, 중소기업 사장 친구가 있다면 허심탄회한 목소리도 직접 들어보기 바란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TV7’이라는 이탈리아 방송사가 올 3월 방송한 다큐멘터리 ‘한국의 재능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서 한국 기업에 다니는 한 이탈리아 직장인은 “한국 생활이 좋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되겠지만 당장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근래 이탈리아에서는 두뇌 유출이 사회적 이슈다. 방송에서도 “이들이 이탈리아의 가치를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다. 완전히 이탈리아를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현실에 불만이 많지만 이탈리아는 우리보다 더 심각한 모양이다. ▷엊그제 글로벌 금융시장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탈리아가 국민투표로 유로존 탈퇴를 결정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 주식시장에 퍼졌기 때문이다. 이탈렉시트(Italexit·Italy+Exit)다.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과 한국 일본 홍콩 등 아시아 증시도 곤두박질쳤다. 마침 스페인도 총리의 전임 보좌진 뇌물 수수 사건으로 정국이 혼돈에 빠져 있던 터였다. 이탈렉시트는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진정이 됐지만 남유럽발(發)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우려는 여전하다. ▷이탈리아 정치는 늘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탈세, 마피아 연관설, 미성년자 성매매 스캔들 등 추문을 달고 다니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아직도 가장 유력한 정치인 중 한 명이라면 말 다한 것이다. 3월 총선에서는 31세의 대학 중퇴 정치인 루이지 디마이오가 신생 정당 ‘오성운동’을 이끌며 혜성과 같이 나타나 최대 정당이 됐다. 반(反)이민, 유럽연합(EU) 탈퇴를 내세운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다. 여기서 추천한 경제장관이 친EU 성향의 대통령으로부터 임명 거부를 당한 것이 이번 이탈렉시트 소동의 직접적 계기다. ▷2010년 유럽 부채위기 당시 이탈리아는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한 국가로 찍혀 국제적 놀림감이 됐다. 그 이후에도 정치권은 경제 체질 개선은 뒷전이고 세금으로 선심성 정책만 펴다가 글로벌 경제위기의 단골 진원지가 됐다. 우리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만하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