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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외주업체 사장인 명모 씨(38)가 4일 오후 7시 45분경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중심 상업지구에 있는 칼턴센터빌딩에서 3인조 강도에게 여권과 1500달러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외교통상부가 5일 밝혔다. 외교부에 따르면 명 씨는 빌딩 내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범인들에게 목을 졸린 뒤 잠시 의식을 잃었으며 깨어난 뒤 여권과 소지품이 없어진 사실을 확인했다. 명 씨는 별다른 외상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관계자는 “남아공은 치안이 불안한 데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강도, 절도사건이 자주 일어난다”며 “월드컵 때 우리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러 남아공을 방문하는 국민들도 신변안전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월드컵 응원을 위해 남아공을 방문하는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한국팀 경기가 개최되는 도시마다 임시 영사사무소를 운영할 계획이다. 남아공 정부도 11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각국 대표팀이 속속 입국하면서 선수단 안전을 위해 경계를 대폭 강화했다. 그러나 일반 팬들에 대한 치안은 여전히 허술하다. ‘국제축구연맹(FIFA) 패밀리’로 분류된 취재진마저도 여기저기서 수난을 당했다. KBS, MBC, SBS 취재 및 PD팀은 잇달아 강도 및 신변 위협을 당했고, 한국일보 기자는 도둑을 맞았다. 남아공은 2008∼2009년 2년간 살인 1만8148건(하루 평균 49.7건), 강도 18만624건(하루 평균 494.9건), 절도 100만7081건(하루 평균 2759건), 성폭력 7만1500건(하루 평균 195.9건) 등 각종 강력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같은 기간 한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16.4배, 강도사건의 37.5배에 해당한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루스텐버그=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정부는 다음 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로 천안함 폭침사건을 조사한 민군 합동조사단의 윤덕용 공동단장(KAIST 명예교수) 등 합조단 관계자들을 보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에 조사결과를 설명할 계획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4일 천안함 사건을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는 서한을 안보리 의장국인 멕시코에 제출했다. 정부 소식통은 “윤 단장 등 합조단 관계자들이 다음 주쯤 유엔본부를 방문해 안보리 이사국 대표들을 상대로 천안함 사건의 조사결과를 설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인국 주유엔 대사는 4일 오전 11시(현지 시간) 안보리 의장국인 멕시코의 클라우드 헬러 유엔 주재 대사를 만나 천안함 사건을 안보리가 다뤄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정부는 이 서한에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임이 합조단 조사결과 명백히 드러났다”며 “북한의 무력공격이 국제 평화와 안전에 위협이 되고 있는 만큼 안보리가 이 사안을 논의해 북한의 군사적 도발에 엄중하게 대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부의 서한 제출은 ‘유엔 회원국은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사태에 관해서도 안보리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다’는 유엔헌장 35조에 근거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9차 아시아안보회의 기조연설에서 천안함 사건 안보리 회부 사실을 공표하고 “국제사회는 북한 지도부가 시간을 끌면서 핵무장을 하고 강성대국만 달성하면 살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을 확실히 버리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로써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의 안보리 외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국은 안보리 이사국들의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회의장 바깥에서 논의 내용을 청취하며 이사국들을 설득하는 장외 외교전을 벌일 계획이다. 합조단 파견 추진도 이런 과정에서 한국의 조사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한편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4일 조선중앙통신과의 문답에서 “미국과 그 추종세력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객관적 확인을 회피하고 일방적인 조사결과만 가지고 유엔 안보리 상정 논의를 강행한다면 그 목적의 불순성이 명백해질 것이며 우리가 지난 시기처럼 초강경 대응해도 미국과 유엔 안보리는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싱가포르=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천안함 폭침사건에 대한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검토하기 위한 러시아 대표단이 31일 입국해 국방부 군사지휘본부에서 조사단의 조사결과 브리핑을 청취했다. 이날 정부 관계자는 “러시아 해군의 잠수함, 어뢰 전문가들이 7일까지 머물며 조사결과를 검토한다”며 “천안함이 보존돼 있는 2함대사령부와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해상도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한국의 조사결과를 인정할 경우 아직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는 중국을 압박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영선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러시아 대표단이 우리 조사결과에 신뢰를 보여줄 경우 상황이 좀 더 분명하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천안함 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천영우 외교부 제2차관은 이날 미국을 방문했다. 천 차관은 워싱턴에서 제임스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 등을 만난 뒤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을 찾아 6월 안보리 의장국인 멕시코와 5개 상임이사국의 유엔 주재 대사들에게 협조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당국자는 “안보리 회부 시점은 이번 주 안에 최종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중국과도 협의를 계속할 계획이다. 다만 정부 당국자는 “한중 정상회담과 한일중 정상회의 등을 통해 초기에 북한 편을 들었던 중국이 ‘중간 스탠스’로 왔다고 본다”며 “앞으로는 중국을 직접 설득하기보다 다른 나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중국에 압력을 가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러시아와 달리 한국 정부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전문가그룹을 파견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2863’과 ‘1’. 오충현 한국국제협력단(KOICA) 보건의료연구관(35)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2863’ 대신 ‘1’을 골랐다. ‘2863’은 그의 이비인후과 전문의 자격증 번호. 한국의 2863번째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는 대신 의사 자격증을 가진 최초의 KOICA 보건의료연구관이 된 사연이다. 오 씨는 가톨릭의료원 부천성가병원의 레지던트 전공의 3년차인 2004년 병원 인근의 외국인 진료소를 찾았다. 의료보험이 없어 고통 받는 외국인 근로자를 1주일에 한 번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만난 환자로부터 페루에 KOICA 협력의사(대체복무)가 파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삶에 KOICA가 처음 다가온 순간이었다. 오 씨는 국내에서 편하게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를 포기한 채 2005년 페루로 떠났다. 페루 사막의 페루친선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를 돌볼 때 그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2007년 7월 15일 페루 수도 리마 남쪽 이카 시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강진. 현장에 도착한 뒤 대재앙의 참혹함보다 고통받는 주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절망했다. 그러나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놀랍도록 체계적인 긴급구호 시스템을 목격했다. 그들은 매뉴얼에 따라 치료와 영양관리, 식수 확보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우리 구호팀은 완전히 아마추어였어요. 부끄러웠습니다. ‘나도 저렇게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결심했습니다.”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다. 2008년 귀국하자 가톨릭의료원 임상교수 자리가 났다. KOICA 보건의료연구관의 월급은 그가 전문의로 개업해 벌 수 있는 돈의 7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내 삶의 목표는 가난한 나라 아이들의 건강 수준을 높이는 겁니다. 전문의로 아무리 많이 벌어도 10억 원을 모아 그들을 돕기 어려워요. 반면 보건의료연구관은 300만∼3000만 달러의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활용할 수 있죠. 내 꿈을 이루는 데는 보건의료연구관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재 KOICA에서 빈곤국의 의료현황과 ODA 의료프로그램의 타당성 조사, 지원 병원과 프로그램의 중간평가 업무를 담당한다. KOICA가 2008년 시작한 ‘가족계획 및 모자보건 사업’의 중간평가를 위해 지난달 에티오피아에 다녀온 얘기를 하면서 밝게 웃었다. “처음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 한 가정이 10명을 낳아 3명은 죽고 딸 4명은 생계를 위해 당나귀와 바꾸고 아들 1, 2명만 교육했어요. 아이를 신의 축복으로 생각하던 이들을 설득해 결국 아이를 적게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삶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이티 강진 때 긴급구호팀의 일원으로 파견된 그는 고통받는 이를 더 도와주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난다며 고개를 숙였다. 천생 다른 이들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자신이 봉사활동을 하는 숭고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부담스럽다는 얘기.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일로 항상 가슴 ‘콩콩’ 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dongA.com에 동영상▲ 동영상 = 동아닷컴 뉴스콘텐츠팀}
남북관계의 전면 단절을 선언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의 25일 담화는 여러 측면에서 2008년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행한 ‘12·1조치’와 비슷하다. 북한은 2008년 12월 1일 군사분계선 육로 통행 및 개성공단의 체류를 제한하고 개성공단 내 남북 경제협력협의사무소를 폐쇄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판문점 적십자연락대표부를 폐쇄하고 북한 측 대표를 철수시키며 판문점을 경유하는 모든 남북 직통전화 통로를 단절한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도 “조평통 대변인 담화의 조치는 2008년 ‘12·1조치’ 때와 닮았다”고 말했다. 북한이 “판문점 적십자 연락대표의 사업을 완전 중지한다”고 밝힌 것은 남북 판문점 적십자 연락사무소 간 직통전화를 끊겠다는 의미다. 판문점 연락 채널은 지난해 8월 북한의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을 계기로 임시 재개통한 뒤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 논의 과정에서 같은 해 8월 말 정상화됐었다. 판문점 적십자대표부는 남북회담이 시작된 1971년 처음 설치된 이후 39년 만에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12·1조치’와 다른 점은 판문점 채널에 머물지 않고 “모든 통신연계를 단절한다”고 밝힌 점이다. 이는 남북 간 모든 대화 채널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12·1조치’ 때는 판문점을 경유하지 않는 경의선, 동해선 군 통신과 남북 해역의 선박 운항과 관련한 해사 통신망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달리 북한의 이번 조평통 담화는 경의선·동해선 군 통신망과 해사 통신망까지 끊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군 통신망은 남측 인력의 개성공단 및 금강산관광지구 통행을 북측에 통보하고 있어 개성공단의 향후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북한이 ‘12·1조치’ 때처럼 육로통행 횟수와 개성공단 체류 인원을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 해사 통신망의 경우 우리 정부가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을 금지한 만큼 북한으로서도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개성공업지구에 위치해 남북 경협 기업들의 주문을 중개하는 등 경제 분야의 당국간 채널 역할을 해온 경제협력협의사무소(경협사무소)도 동결, 철폐하겠다고 밝혔다. 경협사무소는 2008년 12월 1일 폐쇄됐다가 지난해 9월 7일 다시 복구됐다. 현재 남측 인력 13명이 사무소에 있다. 정부 당국자는 “조평통 담화가 실제 조치로 이어질지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장교 - 사병 구분 없다“귀족이라고 장교돼야 하나”1953년 통신병으로 격전치러한국문화 전도사부상 치료중 한국음식에 매료은퇴후 ‘코리아 알리기’ 활동《1952년 7월 4일. 19세의 젊은 귀족 시몽피에르 노통브 씨는 벨기에 국방부를 찾았다. 그날은 그의 생일이자 ‘성인이 되는 날’이었다. 노통브 씨는 6·25전쟁 참전 신청서에 서명했다. 장교가 아닌 일반 사병 자격이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귀족 남자의 이상적인 모습은 장교지 사병이 아니야!” 집에 돌아와 참전 사실을 알리는 노통브 씨에게 아버지 피에르 노통브 남작이 역정을 냈다. 벨기에 상원 외교위원장인 아버지는 “귀족은 장교로 참전해야 격에 맞는다”며 강하게 아들을 말렸다. 나이가 어린 점도 반대 이유였다. 노통브 씨의 형들은 벨기에 왕립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다.》 ○ 참전: 사병 자격으로 전쟁터에 “많은 귀족이 먼 나라 한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네. 설상가상으로 귀족이 사병으로 참전하겠다는 것은 ‘스캔들’이나 다름없었지.” 그러나 벨기에의 명예를 걸고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에 장교와 사병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젊은 노통브 씨를 자극한 것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모로 드 믈랑 상원의원(2002년 작고)의 참전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믈랑 의원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 지원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더욱이 그는 1951년 48세의 나이에 통신장교(소령)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를 위해 당시 상원의원의 해외 참전을 금지한 법률이 개정되기까지 했다. 믈랑 씨는 1988년 펴낸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벨기에도 한국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소국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했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전쟁 한가운데서 전우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물이다”라고 썼다. “믈랑 씨의 참전을 보고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명감이 생겼네.” 1952년 말 노통브 씨는 통신병으로 한국행 배에 올라탔다. 벨기에는 1951∼1955년 한국에 모두 3171명을 파병했다. 이 중 귀족 출신은 22명이었다.○ 부상: 중공군 수류탄에 다리 다쳐 노통브 씨는 1953년 2월 벨기에대대가 중공군 70사단을 맞아 치열한 방어전을 벌인 잣골전투(강원 철원군)에 배치됐다. 3월 중공군이 또다시 기습을 시작했다. 적을 향해 정신없이 사격하던 노통브 씨 주변에 수류탄이 떨어졌다. “쾅!” 사격에 집중한 나머지 다친 줄도 몰랐다. 사격을 계속했다. 의무병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네. 그때서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어.” 의무병은 알코올을 병째로 먹였다. 후송차로 이동해야 했다. 다른 전우가 그를 업었다. 알고 보니 그 병사는 눈을 다쳤다. “내가 그의 눈이 되고 그가 내 다리가 돼 전장에서 벗어났네.” 벨기에 신문에는 노통브 남작의 아들이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났다.○ 후송: 한국음식에 매료되다 노통브 씨는 부산의 스웨덴병원으로 후송됐다. 미세한 수류탄 파편 25개가 왼쪽 다리에 집중적으로 박혀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노통브 씨는 스웨덴병원에서 6주를 보내면서 한국과 한국인의 진정한 면모를 알게 됐다. 그는 특히 어느 10대 자매와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그는 유독 명랑했던 자매와 금세 친해졌다. “언니가 열여덟 살이었지. 동생은 나이가 생각나지 않는군. 자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네. 전쟁 뒤에 삶을 일으키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고 말했어. 그 모습이 파라다이스와도 같았지.” 그는 자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자매는 병원 식당에서 한국음식을 손수 만들어줬다. “김치와 잡채, 비빔밥…. 기름기 많은 서양식 전투식량에 질린 나로서는 담백한 한국음식에 완전히 매료됐네. 중독이었지.” 자매의 어머니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한국이 일제강점기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한국의 역사를 설명해줬다. 노통브 씨는 차분하고 지적이었던 그녀를 통해 한국을 알아갔다. 6주 뒤 그는 다시 전선에 배치됐다. 보통 연합군과 한국군 병사는 배식을 따로 받았고 연합군은 한국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가 한국군 배식 줄에 서서 김치를 달라고 부탁하자 모두 놀랐다.○ 전후: 유럽에 한국을 알리다 1954년 귀국한 그는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했다. 1992∼1998년에는 유럽연합(EU) 경제사회이사회 사무총장도 지냈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한국을 잊지 못했다. 1998년 노통브 씨는 은퇴와 함께 ‘유로파코리아’를 만들었다. 유로파코리아는 애초 벨기에에 입양된 한국 젊은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됐다. 점차 문화행사가 많아지고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과도 함께 행사를 열며 유로파코리아는 벨기에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통로로 확대됐다. 노통브 씨는 특히 한국음식의 매력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한국문화는 미국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네. 특히 음식문화가 그렇지. 그 점이 존경스러워.” 노통브 씨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물었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어. 사소한 예지만 지위 높은 한국인들은 전부 외제차를 타더군. 한국에 그 지위에 걸맞은 좋은 차가 그토록 많은데 말이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모국 사랑에서 출발해. 전쟁을 극복하고 지금의 모습을 이룩해낸 용기에 왜 자부심을 갖지 않는지….” 노통브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그는 ‘살인자의 건강법’ 등으로 한국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아멜리 노통브 씨의 삼촌이다. ▼“하룻밤 포탄 3500발 비오듯… 매일 죽음의 공포”▼■ 참전용사의 잣골전투 회고벨기에참전용사회 회장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1953년 강원 철원군 최전선에서 벌어진 잣골전투에서 보병중대를 이끌었다. 잣골전투는 중공군과 가장 치열하게 치른 전투 중 하나다. “하룻밤에 35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소. 본국 귀대 하루 전 포탄에 맞아 전사한 중대원도 있었지. 중공군의 공격 징후를 알자마자 쏟아지는 포탄들이 정말 지긋지긋했어. 반격을 위해 포를 조준하면 이미 중공군은 사라지고 없었지.” 포탄 소리의 끔찍함에 대해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철로에 묶인 채 전력질주하는 기차 아래 누워 기차 소음을 밤새 듣는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정말 두려웠네. 매일 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 포탄에 파묻혀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와 싸워야 했지. 잠을 자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어.” 전장에 즐비한 시체들도 그를 괴롭혔다.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시체가 너무 많아 부대가 이동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시체를 길 양쪽으로 치워야 했지. 그 쌓여가는 시체들….” 그는 그 충격 때문에 전투식량으로 지급된 고기를 먹지 못할 정도였다. 브뤼셀지회 부회장인 르네 베르 씨는 1951년 4월 임진강에서 중공군 제188사단과 치른 전투를 떠올렸다. “전투를 치른 지 2개월 뒤 격전지에 돌아와 보니 민간인과 군인들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지. 그 와중에 군복과 전투화 등 ‘살아 있는 자’를 위해 쓸 만한 것들을 찾는 내가 비참해졌지. 그만큼 참혹했어.” 마르셀 샤네 씨는 1953년 4월 잣골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오전 2시경 포격에 막사가 무너지며 팔이 깔린 것이다. 눈앞에서 전우 3명이 전사했다. 그는 “비로소 내가 전쟁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았다.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제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참전했지만 최전선은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군인으로서 진정한 전쟁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참전용사회 부회장인 마르셀 와트 씨는 “2003년 한국에 갔을 때 한 택시운전사는 우리가 참전용사라는 말에 택시를 세운 뒤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참전을 잊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당시 참전부대 건물에 ‘임진’ ‘잣골’ 등 이름 붙여부대 안에 ‘6·25 박물관’도 참전용사 3171명 명단 기록▼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안트베르펜(영어명 앤트워프) 지역 티엘렌 시에 있는 6·25 참전부대인 제3공수대대 건물들에는 ‘임진’ ‘학당리’ ‘잣골’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벨기에 대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들이다. 이 부대는 1952년 6·25전쟁에서 전사한 피에르 가일리 대령의 이름을 따 ‘가일리 대대’로도 불린다. 벨기에의 왕위계승자인 필리프 왕세자가 군복무를 한 곳이기도 하다. 부대 안에 6·25전쟁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 포탄 모양의 이정표에 ‘한국박물관’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니 참전용사 3171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이 부대에는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후손이 많이 복무하고 있다. 박물관에 따라 들어온 파트리크 비넨페닌츠크 대위(30)가 이 명단에서 한 명을 가리켰다.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힘든 전쟁이었다며 6·25전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진 않으셨지만 항상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한국과 한국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죠.” 그는 “사관학교 필수과목인 군 역사에 6·25전쟁이 포함돼 있고 특히 임진강 학당리 잣골전투는 자세히 배운다”고 말했다. 박물관 입구에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써놓았다. 한국박물관 관리위원인 참전용사 코르 페이트 씨(81)에게 참전이 잊혀지고 있는지 물었다. 페이트 씨가 웃으며 출구를 보라고 했다. 출구엔 ‘더는 잊지 않는다(Forgotten No More)’고 씌어 있었다.글·사진 브뤼셀·티엘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은 21일 “천안함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조치는 도발의 주체인 북한 군부에 직접 타격이 가는 것이어야 한다”며 “천안함 사태의 책임자 처벌을 북한에 요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이날 김 이사장은 천안함 침몰사건 조사 결과 발표를 계기로 동아일보가 마련한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와의 대담에서 “일시적으로 긴장이 높아질 수 있지만 그래야 장기적 평화가 가능하다”며 이같이 말했다.김 교수는 “지금은 원칙과 신뢰에 입각한 남북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산고(産苦)의 과정”이라며 “이번 사건을 북한의 도발을 방지하면서 새로운 남북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이날 대담은 오전 11시부터 1시간 반 동안 동아미디어센터 11층 회의실에서 진행됐다.―천안함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김 이사장=북한은 군사도발을 대남정책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정도를 넘어서 다양한 비대칭 전력을 활용해 지상테러를 포함한 대규모 군사도발을 자행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치명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되고 한미연합사령부가 해체되면 이런 도발은 빈번해지고 극렬해질 것이다. 북한이 천안함 사태 이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군 승진 인사를 단행한 것은 한국에 대한 경멸과 모욕으로 해석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도발이다. 천안함 사태는 북한 도발에 위협받는 한반도의 실상과 북한의 실체를 다시금 국제사회에 확인시켜 줬다. 북한은 전술적 성공이라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전략적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한국도 햇볕정책 시기에 왜곡된 국가안보의 문제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김 교수=이번 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가장 심각한 북한의 군사도발이다. 10년 동안의 햇볕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 재확인됐다. ‘한국판 9·11테러’다. 글로벌 코리아를 외치는 한국이 북한의 재래식 공격과 비대칭적 위협에 취약성을 드러냈다. 아울러 북한 정권의 야만적 폭력성이 드러났다. 21세기에도 개방과 개혁을 거부하고 3대 세습을 하고 있는 정권이 원칙과 신뢰에 바탕을 둔 남북관계를 원하는 대한민국의 군에 야만적 폭력성으로 대응한 것은 문명사적으로 시대착오적이다.―이번 사건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 북한 내부의 상태는….▽김 이사장=북한은 김정일 중심의 전쟁 체제다. 그는 통치하되 책임지지 않는다. 선군(先軍)정치하에서 북측 인사들은 북한의 주인은 김 위원장이며 인민무력부를 포함한 군대는 김정일의 옹위세력이고 내각은 지원부서 정도로 생각한다. 모든 국가 의사결정이 군사적 고려 위주다. 천안함 사태도 이런 통치 상황에서 자행됐다. 합리적 지도자라면 지금 도발할 수 없다. 국내 친북좌익 세력은 ‘북한 지도부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지금 시점에서 천안함을 공격하겠느냐’고 하는데 이는 합리적 사고력이 결여된 북한 군사위주 지도체제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북한은 어뢰 추진체 등 결정적 증거가 발견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20일 정부의 조사 결과 발표가 끝나기도 전에 북한이 국방위 성명을 발표하며 반발한 것은 우리 정부가 결정적 증거를 찾은 것에 당황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김 교수=김정일은 지금 삼각 딜레마에 빠져 있다. 건강이 나쁘다. 후계체제 구축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 선군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핵을 포기하기 힘든 구조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후계체제 완성을 위해 군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김정일이 대청해전에 대한 보복으로 대남공격을 결정했거나 묵인했을 수 있다. 개혁과 개방, 비핵화를 통해 삼각 딜레마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호전적인 군부 입장을 강화시키는 데서 해법을 찾은 것이라면 북한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 지도부의 군부 의존도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북한체제의 안정성 측면에서도 결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어리고, 경험도 없고, 후계자 수업도 김정일에 비하면 일천한 3남 김정은에게 세습이 이뤄졌을 때 세습과정이 안정적일지 의문이다. 북한에서는 화폐개혁이 실패한 이후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정권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고 한다. 김정일의 삼각 딜레마와 정권-인민 간 괴리 현상이 부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북한 체제가 하드랜딩(경착륙)할 가능성에 대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를 잡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정부와 민간은 이번 사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김 교수=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북한의 미래에 관해 여러 가능성을 제기하고 시나리오별 대책을 마련하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원칙과 신뢰에 입각한 남북관계 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북한이 급변사태를 맞이했을 경우 통일로 연결할 수 있는 방안도 강구해야 한다. 통일 과정에서 외세라는 변수를 간과하면 안 된다. 주변국들이 통일한국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염두에 둬야 한다. 통일한국이 등장해도 주변국의 이해관계에 플러스가 된다는 모습을 한국 정부가 보여줘야 한다. 정부는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처음부터 예단하지 않고 차분하고 과학적인 조사와 국제공조를 통해 ‘스모킹 건’을 찾아냈다. 단순히 천안함 사태 처리의 차원을 넘어 지금 우리 정부의 대응 모습을 통해 주변국들은 통일한국의 미래를 유추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김 이사장=체제 유지의 한계 상황에 다다른 북한이 핵 위협과 군사도발을 반복하면서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외통수로 몰아가고 있다. 통일을 위해 남북관계의 주도권 확보가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현 정부가 북한에 잘해주지 않아 북한이 화가 난 것이니 적당히 퍼주고 북한 요구를 만족시켜 긴장을 완화하자”고 한다. 그러나 아군 군함이 폭침된 상황에서 긴장 고조를 우려하는 것은 난센스다. 북한은 천안함 사태로 현 정부를 휘둘러보고자 했다. 우리가 화해와 긴장 완화를 구걸하면 미래를 잃는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해 주도하려면 이겨내야 할 싸움이다. 위기 극복이 기회가 된다. 오늘의 전술적 손실을 통일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계기로 삼기 위해 단합된 의지와 국민적 용기가 필요하다. 역사는 용기 있고 지혜로운 자의 것이다.▽김 교수=미국에서는 9·11테러 이후 초당적인 조사위원회가 3년간 활동해 두꺼운 리포트를 냈다. 결론은 두 가지였다. 상상력이 부족했고 점과 점을 연결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정보 차원에서 점과 점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군과 국가정보원, 경찰 등이 정보 수집을 위해 노력하지만 정보라는 점을 연결하는 시스템이 작동하는지 의문이다. 만에 하나 다른 형태의 좋지 않은 사건이 날 수도 있다. 시스템 확립에 더해 상상력을 확보해야 한다. 북한의 어떤 도발과 테러가 추가로 가능할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대비해야 한다. 햇볕정책 10년 동안 퍼진 ‘안보를 강조하면 경제에 안 좋은 영향이 온다’는 명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저한 안보의식으로 무장해야 경제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정비례 관계에 있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언론이 (북한의 도발과 정부의 대응 과정을)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보도하면 국민들이 안보의식을 높이는 과정 속에서 경제가 악화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천안함 대응을 위한 국제사회와의 공조, 향후 군 안보태세 확립은 어떻게 해야 하나.▽김 이사장=9·11테러 때 미국사회는 하나로 뭉치고 분노로 끓어올랐다. 우리는 거꾸로 자중지란이다. 폭발하는 분노가 없는 슬픔뿐이다. 과거 전쟁을 선포해도 됐을 북한의 도발에 적절하게 응징하지 않아 도발의 반복을 낳았다. 국가안보태세를 재정비해야 한다. 오늘날은 총괄안보, 통합안보의 시대다. 외교 국방 통일 등 많은 안보기능 요소에 총체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대비해 군과 경찰의 정보기능을 통합한 시스템도 필요하다. 한미연합사령부의 해체를 재검토해야 한다. 2012년으로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 연기되면 북한이 아플 것이다. 한미연합사를 축으로 한 한미 군사동맹은 북한 핵과 전면전에 대한 핵심 억지력이다. 최근 중국군 고위 관계자에게 중국이 아시아 유일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것은 강대국으로서 책임 이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이 자꾸 그런 문제를 제기해야 중국이 변한다.▽김 교수=6·25전쟁 이후 수많은 도발이 있었지만 그중 북한이 유감이나 사과를 표명한 경우는 1976년 판문점도끼만행 사건과 1996년 잠수함 침투사건 두 차례밖에 없었다. 북한이 유감 표명한 사례를 보면 핵심은 철저한 한미 공조다. 한국이 취하는 행동에 대해 미국이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이 앞장서 나가고 미국이 마지못해 지지한다는 인상이 있을 때 북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중국이 보이는 반응에 섭섭해한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전략적 인내’를 해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설득하면 중국도 국제규범과 표준에 입각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질 때까지 전시작권권 전환 연기가 불가피하지만 독자적 작전능력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신석호 기자 kyle@donga.com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민간위원―전 청와대 국방보좌관, 국방대 총장, 국가비상기획위원장―육사 24기, 예비역 육군 중장,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 위원, 대통령 외교안보자문단 위원 ―전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미국 텍사스대 정치학 박사▲ 동영상 = 北어뢰 파편 공개…천안함 침몰 결정적 증거 ▲ 동영상 = 처참한 천안함 절단면…北 중어뢰 공격으로 침몰}
정부는 그동안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계속하겠다”고 밝혀 온 인도적 대북 지원사업을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잠정 중단할 방침인 것으로 19일 알려졌다. 여기에는 정부 차원의 옥수수 1만 t 지원, 통일부가 올해 주요 업무과제로 추진해 온 북한지역 산림녹화 사업, 민간 차원의 인도물자 지원이 포함될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의 대북 제재는 남북 경제협력(무역과 투자)과 사회문화교류 사업, 인도적 지원의 잠정 중단 등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 교류를 중단하는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정부와 민간의 대북 인도적 지원 규모는 5400만 달러 수준이었다. 정부가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교역을 중단할 경우 북한은 연간 2억 달러 이상의 무역 수입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에서 북한이 임금으로 벌어들이는 연간 5000만 달러의 4배가 넘는다. KOTRA에 따르면 한국이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율(2008년 기준)은 32.3%로 중국(49.5%)에 이어 2위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해 남북 전체 교역 규모는 인도적 지원을 포함해 16억7908만 달러(반입 9억3425만 달러, 반출 7억4483만 달러)였다. 이 중 일반 상업교역의 규모는 2억5600만 달러였으며 수송비와 중개수수료 등 부대비용을 제외한 돈이 북한에 지급됐다. 또 위탁가공교역 규모는 4억1000만 달러로 이 중 10∼15%(4100만∼6150달러)가 북한 근로자의 임금 명목으로 북한에 흘러들어갔다. 개성공단 교역액은 9억4000만 달러다. 한편으로 정부의 교역 중단에 따라 남측 교역업체들의 손실도 우려된다. 현재 대북 일반교역 업체가 580곳, 위탁가공업체가 200여 곳이지만 대북 물자의 반·출입 제한 때 손실 보전을 받을 수 있는 교역보험과 경협보험에 가입한 업체는 각각 세 곳과 한 곳에 불과하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정부가 천안함 침몰사건 최종 조사 결과 발표(20일)를 앞두고 북한에 체류 중인 한국인에게 신변안전을 이유로 철수를 권고함에 따라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측 인력이 잇달아 북한을 빠져나오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18일 “개성 고려궁성(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사업을 진행 중인 남측 발굴단 11명 전원이 오늘 남측으로 귀환했다”며 “본래 6월 10일까지 발굴이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예상보다 빨리 진행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발굴단이 자발적으로 철수한 것이 아니라 통일부가 14일 발굴단의 철수를 권고했기 때문이며 유물 실측 등 일부 발굴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통일부는 북한 해주와 고성에서 모래를 채취하던 선박 9척(선원 64명)도 16일 모두 철수했다고 밝혔다. 금강산에서 샘물사업을 하는 기업도 정부의 요청에 따라 체류 중인 기술진을 지난주 철수시켰다. 평양에 진출해 있는 평화자동차 관계자 1명도 19일 남측으로 철수할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로써 19일 이후 북한에는 개성공단 입주 기업 관계자들(18일 기준 1000명)과 금강산관광지구 내 현대아산 관계자 14명만 남을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경협사업에 이어 사회문화교류사업도 중단 위기에 놓였다. 개성 고려궁성 발굴사업과 함께 남북 사회문화 교류사업의 양대 축으로 꼽혀온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도 올해 상반기 열려야 할 두 차례 남북 공동회의가 모두 무산됐으며 이를 위한 남북협력기금 28억 원 중 절반이 집행되지 않아 사실상 보류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천안함 사건 조사 결과 발표 이후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 교류의 전면 중단까지 염두에 두고 강도 높은 대북 제재 조치를 취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풀이된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북한이 다음 달 7일 최고인민회의를 소집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한 지 불과 2개월 만이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1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3차 회의를 6월 7일 평양에서 소집한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이번 회의 개최의 이유와 안건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은 지난달 9일 형식상 입법권을 행사하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2차 회의를 열어 사회주의헌법 일부 조항을 수정했다. 제1차 회의는 지난해 4월 열려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을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한 바 있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체제가 시작된 이후 북한은 같은 회기의 최고인민회의를 같은 해에 두 차례 연 적이 없다. 통일부 당국자는 “2003년 최고인민회의가 2차례 열렸으나 제10기 마지막 회의와 제11기 첫 회의가 열려 회기가 달랐다”고 말했다. 다른 당국자도 “이번 회의는 이례적”이라며 “후계체제 구축, 천안함 사태 관련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최고인민회의 소집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이 지난달 김 위원장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북-중 경제협력 합의를 법률적으로 승인하기 위한 조치일 가능성이 있다고 관측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의 방중 결과를 토대로 기존에 채택한 경제법령을 승인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김 위원장의 3남 김정은의 후계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개발협력센터 소장은 “후계체제와 관련한 조직, 인사개편을 위한 회의일 가능성이 높다”며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포함해 위원들이 전면 교체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1988년 이근모 정무원 총리가 해임될 때에도 같은 해, 같은 회기에 최고인민회의가 긴급 소집된 사례가 있다. 정 연구위원도 “14일 모든 직무에서 해임된 김일철 국방위원 자리에 김정은의 측근을 임명해 비공식적으로 김정은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거나 내각을 교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일철의 해임은 이번 최고인민회의를 열기 위한 대외적 명분이었다는 것이다. 반면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지금 후계 문제를 공식화하는 것은 김 위원장의 권력 누수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번 최고인민회의의 안건은 후계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전망했다. 천안함 사태와 관련한 한국의 대북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최고인민회의가 긴급 소집됐을 가능성도 있다. 조 소장은 “20일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 이후 이뤄질 대북제재 움직임의 부당성을 알리고 핵실험과 미사일 위협, 개성공단과 경제협력 중단 등의 조치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하필이면 여행 직전 심장에 이상이 왔다. 요제프 바그너 씨의 나이는 이미 85세였다. 급히 수술을 마친 의사는 여행이 힘들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바그너 씨에겐 반드시 가야 하는 여행이었다. 2008년 10월 23일 아침. 바그너 씨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는 게 아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룩셈부르크 한국전쟁 참전용사회’의 모자를 챙겼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딸을 뒤로한 채 바그너 씨가 탄 비행기가 룩셈부르크 공항을 이륙했다. 캐나다 토론토, 미국 뉴욕, 캐나다 밴쿠버 섬으로 이어질 17일간의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6·25전쟁 참전 뒤 룩셈부르크를 떠난 전우들을 만나기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 모를 여행. 바그너 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소위로 참전했던 바그너씨, 美-加 방문 옛전우들 만나 금굴산 전투등 ‘그날’ 회상17일간 여행, 다큐로 제작… “한국 발전상 자부심 느껴”○ 그날의 기억 1951년 4월 22일 바그너 소위가 이끄는 룩셈부르크 소대가 배치된 미군 3사단은 임진강 북쪽 금굴산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다.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 188사단이 임진강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이대로 무너지면 경기 전곡리, 연천군, 철원군을 잇는 도로가 차단돼 다른 연합군까지 위기에 빠질 급박한 상황이었다. 적의 수와 위치, 행동반경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절실했다. 바그너 소위의 룩셈부르크 소대가 정찰을 자원했다. 적진 10km 깊숙이 숨어들었다. 적의 화염에 무방비로 노출됐지만 바그너 소위는 단 한 명의 소대원도 잃지 않았다. 중공군은 금굴산을 완전히 포위했지만 바그너 소위를 비롯한 연합군은 다른 연합군 부대가 안전하게 철수할 때까지 금굴산을 포기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 소대가 얻어낸 정보가 방어에 큰 힘이 됐다. ○ 옛 전우들과의 만남 첫 도착지인 토론토에서 바그너 씨는 6·25전쟁 당시 소대원으로 생사고락을 같이했고 이후 캐나다로 이주한 레옹 무아얭 씨(79)와 포옹했다. 무아얭 씨는 1952년 5월 김포전투에서 수류탄 파편에 다리를 다쳐 일본의 미군 병원으로 후송됐다. 의사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했지만 무아얭 씨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전우들을 놔두고 집으로 갈 수 없다”며 전장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무아얭 씨의 전우애는 시공간을 뛰어넘었다. 무아얭 씨는 6·25전쟁 당시 부상했던 미군 참전용사 제임스 허버트 씨를 2002년에 만났다. 무아얭 씨는 그에게 미군이 전투 중 다친 장병에게 주는 훈장인 퍼플하트를 나무로 만들어 선물했다. 이때부터 무아얭 씨가 나무 퍼플하트를 만들면 허버트 씨가 이를 미국 워싱턴의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한 이라크전쟁 부상자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시작됐다. 미군들의 감사 편지가 이어졌다. 무아얭 씨가 바그너 씨의 여행에 합류했다. 뉴욕에서 노르베르트 에데르트 씨(76)를 만났다. 60년 전 앳된 얼굴의 젊은이는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세 사람은 술집으로 향했다. “적의 포화 속에서 헌신적이고 용감하게 고지의 통신선을 지켜내….” 옛 전우들을 만난 에데르트 씨는 큰 소리로 수십 년 전 무공훈장의 상훈을 달달 외웠다.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었던 듯 상기된 얼굴로 맥주를 들이켰다. 이어 캐나다 밴쿠버 섬에서 안드레이 네이 씨(76)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결연했다. “당시 스탈린이 히틀러처럼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나는 결심했소. ‘내가 그것을 막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걸 해야 한다!’고 말이오.” 네이 씨는 1953년 잣골전투에서 중공군의 포격으로 머리를 크게 다쳤다. “얼굴이 심하게 부어오르고 왼쪽 눈이 끔찍할 정도로 튀어나왔소. 살아남은 게 기적이라고들 했지.” 전쟁은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무아얭 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2년간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눈을 감기만 하면 보고 싶지 않은 걸 봐야 했다. 낮보다 밤에 담배를 더 많이 피웠다. “아내가 그걸 어떻게 견뎠는지….” ○ 필름에 담은 전우애 바그너 씨는 이 특별한 여행에서 자부심과 노스탤지어와 상처를 함께 느꼈다. 이 여행은 다큐멘터리 영화 ‘참전(Tour of Duty)’으로 제작됐다. 지난해 10월 22일 룩셈부르크 시내의 가장 큰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시사회가 열렸다. 300석을 꽉 메웠고 서서 보는 관객도 많았다. 지난달 9일 룩셈부르크 시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바그너 씨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힘겹게 하나하나 토해냈다. 안경을 벗고 눈을 치켜떴다. 손은 떨렸다. 기억이 혼란스러울 때면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전쟁 때 만난 한국 아이들 얘기에 갑자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60년 전 강직하고 남자다웠던 바그너 소위. 그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한참 뒤 그는 “2005년 한국을 찾았다. 세계로 진출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자신감이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군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다시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그에게 2008년의 여행은 또 하나의 ‘참전’이었다. “60년이 지났지만 흩어져 있는 전우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군인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의무라고 생각했네.” ○ 에필로그 다음 날 그는 기자를 룩셈부르크 시에서 차로 40분가량 떨어진 자신의 고향마을 에히터나흐로 초대했다. 만나는 마을 사람마다 “한국에서 참전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동아일보 기자가 왔다”고 소개했다. 기자는 마을에서 바그너 씨가 털어놓지 않았던 젊은 시절의 상흔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18세 때인 1943년 독일 나치군에 강제 징용됐다가 1944년 탈영해 13개월 동안 좁은 농가에 숨어 지냈다. 그는 해방 뒤 룩셈부르크군이 창설되자마다 입대했다. 기자가 물었다. “나치즘에서 탈출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전하셨는데, 나치 치하에서 룩셈부르크가 받은 고통을 한국이 공산주의로부터 받아서는 안 된다고 직감하신 건가요?” 바그너 씨는 그윽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룩셈부르크 참전 개요:룩셈부르크군은 1951년 1∼8월, 1952년 3월∼1953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벨기에 대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참전했다. 89명이 참전해 2명이 전사하고 15명이 부상했다. 참전 규모는 작았지만 임진강과 철의 삼각지대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했다. ▼ 한국선 잊혀진 용사, 룩셈부르크선 영웅 ▼현지 참전비에 자국 영웅과 함께 ‘강윤섭’ 이름 새겨 1953년 4월 7일 밤 중부전선 철의 삼각지대에 있는 강원 철원군 잣골. 중공군 70사단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됐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포탄과 총알에 연합군은 누구도 진지(벙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기세라면 룩셈부르크 소대가 속한 미군 제3사단뿐 아니라 후방의 그리스군까지 꼼짝없이 당할 판이었다. 레몽 베랭제 당시 상병(2006년 별세)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기관총을 들고 진지 위로 뛰쳐나왔다. 무수히 많은 총알과 포탄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했다. 베랭제 씨의 용기에 자극받은 연합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49년 뒤인 2002년 미군 제3사단이 룩셈부르크를 찾아 베랭제 씨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한국전참전용사협회 사무총장인 길베르트 하이펠스 씨(77)는 “그의 영웅적 용기 덕분에 철의 삼각지대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룩셈부르크 시에서 40km 떨어진 디키르슈에 있는 국립 군역사박물관 내 한국전쟁 코너도 베랭제 씨의 노력으로 탄생했다. 그가 당시 사용한 기관총도 전시돼 있다. 그러나 베랭제 씨와 함께 진지 위로 뛰어올라 적에게 기관총을 난사한 또 다른 영웅이 있었다. 하이펠스 씨가 그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Kang Yun Soup(강윤섭).’ 베랭제 씨는 6·25전쟁 이후 40년간 전우 강 씨를 찾았다. 주한 룩셈부르크대사관을 통해 마침내 강 씨의 소재를 알았고 룩셈부르크 참전용사협회는 1993년 강 씨를 룩셈부르크로 초청해 훈장을 수여했다. 하이펠스 씨는 “전쟁 당시 부대에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던 그는 매우 성실한 전우였지만 40년 만에 만난 그는 참전에 대한 자부심보다 가난에 찌든 초췌한 모습이었다.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강 씨의 이름이 룩셈부르크 참전기념비에 추가됐다. 하이펠스 씨는 “한국 사람들은 강 씨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잊혀진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 다큐 ‘참전’ 감독 그로츠씨 “용병 편견 깨… 자유 지킨 용사로 기억될 것” 프렝크 그로츠 감독(32·사진)은 60년 전의 비극을 대면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참전’을 촬영하며 편견과 싸워야 했다. “학창 시절 두꺼운 역사책의 한 페이지나 차지했을까요?” 그는 이전까지 6·25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 용사들을 전쟁광이나 용병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2006년 6·25 참전 용사들의 진솔한 모습을 필름에 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촬영을 준비하며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전쟁 당시 인구 20만 명밖에 되지 않았던 룩셈부르크에서 군인 89명은 한결같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고국에 돌아올 때는 환영행사도 받지 못했지만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로츠 감독은 “가슴이 뜨거워졌고 그들을 존경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8년 참전용사 요제프 바그너 씨와 동행하며 촬영을 진행하면서 룩셈부르크인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이들의 참모습을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로츠 감독에게 영화 제작을 제안한 주인공은 생존 참전용사 22명 전원을 만나 연구해온 룩셈부르크 역사가 파트리크 모르만 씨(36)다. 6·25전쟁 영화를 찍은 사람도, 연구한 사람도 모두 30대 젊은이였다.룩셈부르크·디키르슈·에히터나흐=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12년 전 첫 길이 열렸을 때 금강산 관광은 현대아산의 ‘기대주’였다. 현대아산은 2008년엔 누적관광객 200만 명 돌파기념식까지 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해 ‘총성 한 발’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제 현대아산은 구조조정 위기에 몰리고 있다. 금강산 관광가이드와 건설 책임자로 현장을 누볐던 두 사람으로부터 금강산관광에 대한 소회를 들어봤다. ■ 지방선거 현장 패트롤 : 광화문광장 공방“한국의 대표적인 광장이라 해외에 널리 알려야 한다.” “이벤트성 행사만 개최하는 것은 광화문광장의 역사를 훼손하는 것이다.” 서울시장에 도전한 후보들이 광화문광장을 놓고 맞붙었다. 광화문광장을 둘러싼 여야 후보들의 열띤 논쟁을 살펴봤다. ■ 6·25 룩셈부르크 참전용사의 특별한 여행룩셈부르크의 6·25전쟁 참전용사 요제프 바그너 씨(사진)가 미국과 캐나다로 17일간의 여행을 떠났다. 그는 전쟁 이후 각자의 삶을 찾아 룩셈부르크를 떠난 전우들을 만나 무엇을 느꼈을까. 그의 특별한 여행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그 제목이 ‘참전(Tour of Duty)’인 이유를 알아봤다. ■ 中대양해군 분쟁해역서 실력행사중국 ‘대양 해군’이 드디어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영유권 분쟁을 빚는 남중국해에서 일방적으로 어로금지구역을 설정하고 불법 어로단속에 들어갔다. 어족 보호가 명분이지만 베트남 등은 영해로 편입하기 위한 사전조치라며 반발하고 있다. 중국의 국력 신장이 주변국과의 갈등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 조선 사대부 편지서 건진 일상어들전시(篆侍), 교침(喬沈), 누만(漏萬)….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힘든 한자 어휘지만 조선시대 편지글에는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다. 문집이나 관찬 사서와 달리 일상용어가 많이 들어 있는 옛 편지에서 낱말을 건져 올려 사전으로 엮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7년째 간찰낱말사전을 만들고 있는 가회고문서연구소 사람들. ■ 류머티즘 치료 패러다임이 바뀐다한 번 발병하면 오랫동안 지독한 통증에 시달려야 하는 류머티즘 관절염. 요즘은 젊은 여성도 많이 걸린다. 최근 대한류마티스학회 학술대회 참가차 내한한 에드워드 키스톤 토론토대 의대 교수는 “류머티즘 치료법이 처음부터 강한 약효의 치료제를 쓰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 자본금 45위 꼬마 증권사의 깜짝 실적자본금이 업계 45위인 ‘꼬마’ 리딩투자증권이 영업이익을 6배 넘게 거두면서 영업이익증가율 1위에 올랐다. 미래에셋과 같은 해 창업했지만 ‘무명’에 불과했던 리딩증권의 실적은 박철 회장의 지휘로 일취월장했다. 한국은행 부총재에서 민간경영인으로 변신한 그의 전략을 소개한다.}
북한의 ‘핵융합 성공’ 주장에 대한 정부 고위 당국자의 “터무니없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통일부의 비공개 보고서는 북한의 오랜 핵융합 연구 노력과 핵무기 전용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통일부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용역으로 발간한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 및 관심분야 분석’에 따르면 북한은 2008년 수립된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의 20개 중점과제 중 원자력 분야 중점과제로 ‘핵융합분열 혼성원자로’를 선정해 연구를 시작했다. 혼성원자로는 핵분열에 따라 사용된 연료를 핵융합으로 발생한 중성자를 이용해 재처리하는 원자로다. 특히 이 보고서는 북한의 혼성원자로 개발이 강화형 핵폭탄과 수소폭탄 제조 능력을 확보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5개년 계획이 끝나는 2012년(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 전에 어떻게든 중간성과를 발표해야 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 보고서는 “혼성원자로 같은 국방에 이용될 수 있는 분야는 관련 기관의 지원으로 비교적 풍부한 연구비를 사용한다. 대규모 인력과 설비, 연구비를 투입해 우수한 성과들이 도출되지만 비공개 원칙에 따라 학술지에 발표하는 논문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또 보고서는 “혼성원자로와 핵무기 등 국방에 응용되는 일부 특수분야는 북한이 남한과 대등하거나 앞서 있다”고 평가했다. 북한의 원자력 분야 연구 인력은 영변 지역을 중심으로 핵심 인력 200여 명 등 3000∼5000명이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이 최근 입수하거나 국내외 관계기관을 통해 입수한 북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됐다. 이는 북한 자료를 통해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을 파악한 최초의 보고서로 평가된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첨단 원자로 아닌 초보적 실험 수준일 것”이춘근 과학기술정책硏 글로컬협력센터 소장북한이 발표한 핵융합기술은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다. 핵융합분열 혼성원자로 개발이 3차 과학기술 발전계획(2008∼2012년)에 중점과제로 등장했지만 북한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핵융합기술 개발을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2030∼40년에 혼성 원자로를 가지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핵융합은 고온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핵융합을 지속시키기 위해선 첨단 대형 설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그런 첨단 설비를 보유하지 못한 북한이 안정적인 핵융합기술을 개발했을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북한이 성공했다는 핵융합반응은 첨단 원자로가 아니라 플라스마 발생장치나 레이저를 이용한 기초적인 실험에 성공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2012년까지 계획돼 있는 중점과제인 만큼 초보 단계라도 중간성과를 발표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핵융합은 성공적인 핵폭발기술이 있어야 가능하다. 현재까지 북한의 핵실험 수준으로 볼 때 핵융합을 통한 무기화(수소폭탄)가 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한편 북한이 1989년 상온에서 가능한 핵융합기술을 개발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성공했다는 핵융합반응이 상온 핵융합기술일 가능성은 없다. “핵융합 반응 量 안밝혀… 무기化 거리멀어”김웅채 국가핵융합硏 책임연구원 북한은 오랫동안 핵융합 관련 연구인력을 유지하면서 기본연구를 수행해왔다. 1980, 90년대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에서 극히 소규모의 실험장치를 들여와 초보적인 수준의 실험을 했다. 따라서 북한의 이번 발표 내용에는 기술적 정보가 전혀 없지만 핵융합반응 성공 발표 자체는 뜬금없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실제적인 실험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연구 수준으로 볼 때 기초적인 소규모 핵융합 실험을 했고 핵융합의 증거가 검출됐을 것으로 보인다. 실험장치는 핵융합 원리를 이해할 정도의 기초장치일 가능성이 크다. 핵융합반응의 양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양은 극히 미미한 수준일 것이다. 세계의 연구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핵융합분열 혼성원자로는 중국에서 수년 전부터 개발하겠다고 밝혀 왔다. 그러나 아직 ‘페이퍼’ 수준이고 실제 개발되지는 않았다. 핵융합 장치 그 자체로 수소폭탄을 만들 수는 없다. 수소폭탄이 핵융합 원리를 이용하지만 수소폭탄과 에너지 핵융합은 서로 교환 가능한 기술이 아니다. 핵융합 성공을 곧바로 수소폭탄과 연결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北의 속내 뭘까6자회담 소극적인 美 자극김정은 치적 포장해 내부결속성공 가능성은실체없는 실험을 부풀린 듯정부, 北 정치적 의도에 촉각북한이 12일 핵융합반응에 성공했다고 주장하자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사실 확인 작업에 착수했다. 정부는 북한이 무기 개발 등 위협적인 단계의 수준에는 올라서지 않았을 것으로 평가하지만 초기 단계의 핵융합 장치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는지 정밀 분석에 들어갔다. 한 외교 소식통은 “북한의 주장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천안함 국면으로 고립에 처한 북한이 뭔가 미국을 겨냥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핵융합반응 기술이 발전하면 강화형 핵폭탄 또는 수소폭탄 개발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쳐 미국의 관심을 끌겠다는 의도라는 얘기다. 이는 ‘선(先) 천안함, 후(後) 6자회담’이라는 한미공조의 틀을 깨려는 시도일 개연성도 있다. 북한은 그동안 북-미 접촉을 통한 6자회담 재개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서 숨통을 트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말미암아 기대하던 미국의 반응이 없자 초조함을 느껴 이번 주장으로 관심을 끌려는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각 당사국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지만 전례 없이 싸늘한 국제사회의 반응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북한 내부용 메시지라는 분석도 있다. 북한은 미국을 향한 대외 메시지를 던질 때 흔히 조선중앙통신을 활용하지만 이번에는 조선중앙통신이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을 인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국내외 모두를 향한 것이지만 1차적으로는 화폐개혁 실패로 고통 받는 주민 선전용일 소지가 크다는 얘기다. 특히 최근 북한이 이룬 대부분의 성과를 김 위원장의 3남 김정은의 치적으로 포장하는 후계승계 작업 과정에서 핵융합 성공 주장이 나온 것은 이를 정은의 업적으로 홍보하려는 의도일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태양이 열과 빛을 내는 원리를 활용하기 때문에 ‘인공 태양’이라고 불리는 핵융합 장치를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 즈음에 개발했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3대 세습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핵융합 성공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구체적인 실체가 없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핵융합 발전은 국제원자력기구(IAEA) 산하 핵융합실험로(ITER)라는 국제기구에서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 유럽연합(EU) 등 세계 최고의 기술국들이 힘들게 추진 중인 사안”이라며 “프랑스 카다라슈 시에 들어설 시설 건설에만 51억 유로(약 7조3600억 원)가 소요되고 실험 성공 자체도 불확실하다”고 말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약 300편의 핵융합 및 플라스마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발표가 사실이라면 초기 단계의 핵융합 연구 장치를 만들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핵융합반응을 위한 플라스마를 만들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플라스마는 핵융합에 필요한 물질로, 국내에서는 1980, 90년대에 KAIST나 원자력연구원에서 토카막 등 초기 핵융합장치를 이용해 플라스마를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 국가핵융합연구소 전문가들도 북한이 실험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수소폭탄을 위한 핵융합 단계는 아닐 것이라고 평가했다. 수소폭탄을 실험하려면 거대한 장비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1874호가 금지한 핵 활동에 해당하느냐’는 질문에 “광의로 볼 때 해당되지만 북한의 기술수준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제재 위반 여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김상연 동아사이언스 기자 dream@donga.com}
북한의 대외 투자유치 총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는 박철수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총재가 1일 홍콩, 중국 투자가들과 함께 개성공단을 방문한 이유를 놓고 여러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북한이 지난달 금강산 내 남측 부동산을 몰수 또는 동결한 데 이어 개성공단에서도 같은 조치를 취한 뒤 중국계 기업을 유치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와 대북 소식통들은 대체로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지적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11일 “북한이 나선경제무역지대와 신의주, 평양 등에 대한 중국계 기업의 투자 유치를 위해 개성공단을 시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국의 투자가들에게 북한의 값싼 노동력과 중국 자본의 투자를 통해 북한의 다른 지역에서도 개성공단만큼의 성과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찰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이 소식통은 “다른 지역은 기업의 이윤을 보장할 만큼의 사회간접자본(SOC) 등 여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나진항 등 접경지대 개발 외에는 투자 성사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계 기업에 개성공단 입주를 타진하기 위한 시찰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개성공단에는 외국계 기업이 입주할 수 있는 부지(6필지)가 배정돼 있다. 다만 개성공단 토지는 한국토지공사가 50년 사용권을 갖고 있다. 따라서 토지공사(토지 사용)와 개성공단관리위원회(공장 설립)의 인가가 있어야 한다. 북한이 남측의 개성공단 철수를 염두에 두고 중국계 기업의 유치를 위해 개성공단을 시찰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소식통들은 평가했다. 당장 남측이 개성공단에서 철수할 경우 남측이 제공해 온 전력 등 SOC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이전에도 중국계 기업의 개성공단 시찰은 종종 있었다. 1일 시찰도 우리 정부에 미리 시찰 사실을 통보했고 그 시찰에 박 총재가 따라온 것이다. 박 총재의 개성공단 방문을 비중 있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한 소식통은 “박 총재와 중국계 투자가들은 평양을 경유해 개성공단에 왔다”며 “박 총재가 주도적으로 기업가들을 데리고 온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목숨걸고 지킨 325고지지형도 모르고 전선 투입중공군 나팔소리에 소름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네덜란드 첫 6·25박물관“자유수호한 전쟁 잊지말자”낡은 철모-식판-훈장 등전우들 유품모아 21일 개관《“Killed or captured but you take that hill(죽든, 포로로 잡히든 고지를 사수하라)!” 1951년 2월 15일 강원 원주 인근의 네덜란드 대대에 긴급명령이 하달됐다.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엄명이 내려진 곳은 325고지. 레인더르트 슈뢰더르스 중위(86·예비역 육군 대령)가 지휘하는 중대는 이곳을 놓고 중공군과 벌이는 처절한 전투에 투입됐다. 미군 제2사단 제38연대에 배속돼 있던 네덜란드 대대는 당시 극도의 패배감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불과 3일 전 횡성에서 한국군으로 위장한 중공군이 한밤중에 침투해 대대장인 M P 오우던 중령이 전사한 뒤 대대 지휘부의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였다.》325고지는 횡성에서 원주로 이어지는 중심 도로에 있었다. 고지를 사수하지 못하면 중공군의 2월 공세를 막아낼 길이 없었다. 슈뢰더르스 중대를 포함해 3개 중대가 325고지에 배수진을 쳤다. 병력은 사실상 2개 중대 수준이었다. 중공군에선 4개 연대가 밀려들었다.“솔직히 우리는 지형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상태였소. 더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함과 강인한 정신력만 있었지. 죽기 살기로 지키겠다는 각오가 가장 큰 무기였어.”네덜란드 대대는 참혹한 전투 끝에 325고지를 지켜냈다. 슈뢰더르스 씨는 “당시 중부전선 전세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325고지 전투에서 많은 부하를 잃었다. “네덜란드에 ‘어리석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속담이 있지. 내가 살아남은 건 운이 좋았기 때문이 아닐까….”○ “잊혀져선 안 되는 전쟁” 6·25전쟁 이후 오랫동안 네덜란드에서 참전용사들의 희생은 잊혀졌다. 네덜란드 파병 대대가 소속됐던 판 하우츠 연대에서 6·25전쟁 박물관 개관을 준비하던 판 에베이크 원사(45)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전쟁은 잊고 싶은 대상이었다”고 말했다.파병 병력 5282명 전원이 징집이 아니라 자원해 6·25전쟁에 참전했던 만큼 참전용사들에게 무관심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참전용사 요제프 미할스키 씨(83)는 “네덜란드로 돌아올 때 환영식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그는 가족에게도 전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장인 슈뢰더르스 씨를 비롯한 참전용사들은 40년 전부터 네덜란드군이 6·25전쟁에 바친 희생을 기억할 박물관 개관을 꿈꿔왔다.참전용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며 유족들이 판 하우츠 연대에 기증하는 유물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슈뢰더르스 씨 등 참전용사 4명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6·25전쟁 60주년인 올해 개관이 가능해졌다.○ 60년 가까이 트라우마로 남은 중공군 암스테르담에서 100여 km 떨어진 스하르스베르헌의 판 하우츠 연대에는 21일 최초의 네덜란드 6·25전쟁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슈뢰더르스 씨 등 박물관 개관에 기여도가 큰 참전용사 4명의 노력을 기리는 축포 4발이 연대 하늘에 울려 퍼졌다.개관을 1주일여 앞둔 13일 참전용사들이 박물관을 미리 찾았다. 박물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표창 깃발과 훈장, 낡은 식판, 노획한 북한군 모자와 노동당 당증, 네덜란드 병사가 공부하던 한국어 교본 등으로 가득했다. 네덜란드 대대가 마지막 전투를 치른 강원 철원군 김화읍의 340고지에서 발견된 철모와 화약통도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중공군 전투복과 장비를 입힌 마네킹 앞에 섰다. 할 말을 잊은 듯 한참 뚫어져라 응시했다. 침묵의 시간 끝에 기자가 “‘중공군’을 다시 보니 어떠냐”고 물었다. N 베임스터르 씨(82)는 “60년이 지난 일이다. 당신 심리학자냐”며 다소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극도로 기억하기 싫은 상대와 마주친 인상이었다. 중공군은 여전히 심신의 트라우마(외상·外傷)로 남아 있었다.C 스미트 씨(80)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저들을 무조건 쏴야 했어. 중공군들은 사계절 언제나 저 복장으로 우리를 괴롭혔지.” 중공군의 낡은 나팔을 발견하자 스미트 씨는 “중공군이 밀려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며 고개를 흔들었다.그 중공군들이 스미트 씨의 등 뒤에 총구를 겨눴다. 1953년 3월 경기 연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미트 씨는 엎드린 채 중공군을 향해 정신없이 사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1m 후방에서 중공군이 나타나 그의 등과 왼쪽 무릎, 엉덩이에 3발을 쐈다. 스미트 씨는 순간 정신을 잃었고 후송돼 사경을 헤맸다. 2주간 치료를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됐다. 네덜란드로 돌아가지 않고 전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천사가 돌봤다”고 회고했다.○ “우리가 죽어도 박물관은 남을 것”베임스터르 씨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내내 감격한 표정이었다. “다른 어떤 나라도 이렇게 박물관을 잘 꾸민 나라가 없을 거야. 우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만들어져서 참 다행이오.” 스하위테마커르 씨는 기자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에베이크 원사가 “네덜란드법에 박물관은 1주일에 최소 2일 이상을 개방하게 돼 있다. 일반인에게도 박물관을 공개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참전용사들이 도슨트(전시 설명 안내인)를 자청했다. 에베이크 원사는 “참전용사들이 떠나도 박물관은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선배들의 한국전 참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네덜란드군의 선구자”라며 “1950년에 내가 군인이었다면 당연히 한국에 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클라스 스하위테마커르 씨(82)가 헤어지는 기자의 손을 붙잡았다. “아이 앰 해피(I am happy)….”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한국어선 옮겨타 암호무전에 답신… 오폭막아” ▼■ 해군 통신병 모차헌 씨 전통적 해운 강국인 네덜란드는 6·25전쟁에 군함 6척을 파병했다. 1951년 4월 해군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CP 모차헌 씨(81)도 군함 ‘판 할런’을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현재 참전용사협회 총무를 맡고 있는 그는 “파병기간 1년 동안 한국 땅에 내린 적은 없지만 서해에서 한국인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당시 미군 군함들은 레이더에 잡힌 선박에 암호화된 전신을 보내 적인지 아군인지 확인했다. 1분 안에 암호에 맞는 답신이 없을 경우 바로 발포했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생계를 위해 바다에 나온 한국 어선들은 이런 통신을 몰라 미 군함의 발포로 침몰되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이 때문에 통신병인 모차헌 씨는 한국 어선에 옮겨 탄 뒤 새벽까지 아군 군함의 전신 신호를 받아 어선이 한국 배임을 알리는 임무를 수행했다. 밤마다 헬기를 타고 한국 어선에 옮겨 타 수행하는 일은 여간 고되지 않았다. 1분 안에 답신하지 못하면 모차헌 씨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웠다.“전투와 다른 방식으로 한국인들의 목숨을 보호했던 일이었지. 암호가 매일 바뀌어 두꺼운 암호책을 숙지하는 일이 힘들었어. 긴장 속에서도 한밤중에 주판 사용법을 가르쳐주려 하던 한국인이 생각나는군.”판 할런을 포함한 네덜란드 군함 3척은 1952년 원산항 봉쇄작전에도 참가했다. 군함 3척이 120도 간격으로 배치돼 원을 그리며 교대로 150mm 주포를 3일간 발사했다. 네덜란드 해군으로선 처음으로 전투기가 상공을 비행하며 표적을 지정한 뒤 군함이 포를 쏘는 ‘에어슈팅’ 전술을 시도했다고 그는 회고했다.그는 판 할런에서 먹은 건조한 음식 탓에 젊은 나이에 이가 상해 틀니를 해야 했다. 그런데도 지금 그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판 할런의 사진이 깔려 있다. 그는 “판 할런을 볼 때마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 있었다는 자부심이 든다”고 말했다.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아! 수원 삼일중학교…▼전방투입前 묵은 추억의 장소전우들 회비걷어 매년 장학금 1950년 10월 한국에 들어온 네덜란드 파병 대대는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되기 전인 그해 12월 4일 경기 수원시 삼일중학교(현 삼일공고)에 도착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이곳에서 22일까지 먹고 자며 적응 훈련과 미군 제2사단에 배속될 준비를 마쳤다.당시 중대장이던 레인더르트 슈뢰더르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장에게 삼일중 건물은 치열한 전투에 투입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낸 평화로운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1985년 한국을 찾은 슈뢰더르스 씨는 깜짝 놀랐다. 당시 삼일공고 교장으로부터 자신들이 머물렀던 건물이 재건축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슈뢰더르스 씨는 대뜸 “그것은 내 건물이오!”라고 소리쳤다. “전쟁 중 제대로 된 침실에서 잔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지. 삼일중 건물은 내게 6·25전쟁을 기억할 수 있는 매개체란 말이오.”슈뢰더르스 씨는 그 길로 담당 공무원을 만나 건물의 역사적 의미를 설득했고 결국 건물을 보존하기로 결정됐다고 한다.네덜란드 참전용사들은 추억을 간직해준 학교에 감사의 표시를 잊지 않았다. 네덜란드 참전용사협회는 1989년부터 매년 가정형편이 어려운 2, 3명의 삼일공고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매년 장학금 총액은 약 3000유로(약 440만 원).슈뢰더르스 씨는 여기에 매년 졸업하는 장학생에게 사비를 들여 100달러씩 추가로 주고 있다. 참전용사협회는 회원들의 회비(회원당 14유로), 참전용사 가족의 장례식 때마다 설치하는 ‘삼일공고 학생을 위한 장학금 모금함’을 통해 십시일반 장학금을 마련해 오고 있다.글·사진 암스테르담·스하르스베르헌=윤완준 기자 ▲ 동영상 = 6.25전쟁의 상처…폐허로 남은 옛 북한 노동당사}

민군 합동조사단은 25일 천안함 침몰 원인인 ‘비접촉 수중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에 대해 “어뢰나 기뢰가 가능하다. 정확히 얘기할 수 없지만 이런 공격에 용이한 무기체계가 무엇인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어뢰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도 2일 국회에서 “어뢰나 기뢰 두 가능성이 다 있지만 어뢰일 가능성이 좀 더 실질적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수중 폭발의 원인이 어뢰라면 천안함을 침몰시킨 공격 주체는 북한으로 좁혀진다. 군 당국은 북한이 스크루나 와류 등 함정에서 발산되는 음향을 뒤쫓아 근접 거리에서 폭발하는 수동음향어뢰인 ‘Yu(魚)-3G’와 ‘ET-80A’, 항적추적어뢰인 ‘53-65KE’, 함정을 직접 타격하는 직주어뢰인 ‘TYPE 53-59’와 ‘TYPE 53-56’ 등을 보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전문가들은 특히 중(重)어뢰인 Yu-3G일 개연성이 높다고 본다. Yu-3G의 탄두 무게(205kg)는 천안함 침몰 때 발생한 지진파 강도(TNT 환산 폭발력 170∼180kg)와 비슷하다. 소음이 심한 가스터빈실 좌측 아래에서 폭발이 있었다는 점도 음향어뢰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1980년대 중국에서 개발된 이 어뢰는 사거리가 13km, 항주속도 35노트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기장에 감응해 터지는 근접신관을 장착하는 등 능력을 개량했을 수도 있다.중어뢰인 53-65KE(탄두 무게 300kg)는 상어급 잠수함에 탑재되며 사거리가 18km, 항주속도는 45노트에 이른다. ET-80A는 탄두 무게가 400kg으로 1970년대 옛 소련에서 개발된 구식 어뢰에 속해 Yu-3G보다 가능성이 낮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북한이 기뢰를 설치했을 경우 수중폭발이 가능한 기뢰는 음향이나 자기에 반응하는 감응기뢰이지만 잠수함이 천안함 침몰 해역까지 접근해 부설해야 한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분석이다.잠수함이 해역에 접근하지 않고도 부설할 수 있는 기뢰는 어뢰처럼 목표를 추적해 공격할 수 있는 어뢰식 기뢰(사출형 기뢰)나 잠수함이 외해에서 자력으로 움직이는 기뢰를 원하는 곳으로 유도하는 자항식 기뢰가 있을 수 있다. 북한이 잠수함에서 자항식 기뢰를 유도하는 통제 체제를 보유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동영상 = 28일 만에 모습 드러낸 천안함 나머지 반쪽}
통일부는 22일 “개성 고려궁성(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조사사업의 2010년 사업계획을 남북 사회문화협력사업으로 승인하고 남북협력기금 2억8000여만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현 정부 들어 첫 번째 사회문화 분야의 남북협력사업 승인이다. 이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관계자들은 23일 방북해 개토제(開土祭)를 열고 80일간 발굴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이번 협력사업 승인은 북한이 금강산관광을 재개하지 않으면 남측 부동산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내려져 눈길을 끈다. 북한은 지난해 한미 연합군사연습 ‘키 리졸브’를 빌미로 개성 육로를 차단하면서 고려궁성 터 발굴조사를 막았다. 이에 정부도 지난해 고려궁성 터 발굴조사사업을 승인하지 않았다. 2008년 진행된 발굴조사는 현 정부 출범 이전에 승인됐다. 정부가 올해 고려궁성 터 발굴조사를 승인한 이유에 대해 정부의 한 관계자는 “장기적으로 고려궁성 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북한도 이번 발굴조사에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대북 민간단체들이 북한 내부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해 중국 접경지대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을 넘어 이제는 평양 등 북한 중심부에 위성전화까지 들여보내고 있다. 대북 라디오방송인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는 21일 “지난해 10월부터 평양 주변 주요 도시에 한국산 위성전화 3대를 몰래 들여보내 평양에서 나오는 북한 소식을 북-중 접경지역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해 듣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 당국자와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글로컬협력센터 소장은 “기술적으로 북한 전역에서 위성전화 사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탈북자를 중심으로 한 대북단체들은 그동안 북-중 국경지대에 들여보낸 휴대전화를 통해 북한 내부 정보를 입수해 왔다. 휴대전화는 북한의 화폐개혁 단행과 그 후유증, 신종 인플루엔자 발생 등 북한 내부 소식을 발 빠르게 입수하는 원천이었다. 통화뿐 아니라 문자메시지, 사진 전송 등 정보 전달방식도 다양해졌다. 일부 소식통은 중국으로 나와 e메일로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휴대전화는 중국산을 사용하기 때문에 전파가 잡히는 신의주, 혜산, 회령 등 두만강∼압록강 연안에서만 통화가 가능하다. 이 때문에 휴대전화를 통한 1차 정보는 북-중 접경지역에 한정된다. 최근 화폐개혁 이후 북한 사회가 겪는 후유증에 대해서도 접경지역의 휴대전화를 통해 정보를 파악한 대북 소식지들은 혼란상이 극심하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평양을 방문한 대북단체 관계자나 외국인들에 따르면 평양은 별다른 동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평양 등의 소식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북한 어디에서나 한국과 통화가 가능한 위성전화를 들여보냈다”며 “통신원들이 활동하는 지역은 안전을 위해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위성전화 가격(약 100만 원)은 중국산 휴대전화(5만∼10만 원)보다 비싸고 통신비도 5배 정도 더 나온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위성전화를 사용하는 것은 휴대전화보다 훨씬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김흥광 NK지식인연대 대표는 “국경지역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단속에 걸릴 경우 생계를 위한 것이라고 둘러댈 수 있지만 평양 인근의 주요 도시에서 위성전화를 사용하다 발각되면 바로 북파공작원으로 몰려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성민 대표는 “그런 위험을 감안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통신원을 운영하고 있다”며 “감청이나 도청 위험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위성전화로 확인한 북한 소식에는 어떤 게 있느냐’는 질문에 “안전을 위해 소개하기 힘들다”면서도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총살됐다는 소문이 평양에서 지방으로 퍼지고 있다는 소식은 위성전화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런 얘기를 기사화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도 그는 “괜찮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의 감시체제가 약화돼 이젠 주민 통제 능력을 잃었다는 판단인 듯했다.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