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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씨(Mr. Trump), 사자의 꼬리를 갖고 놀지 말라. 그랬다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대(對)이란 1단계 경제 금융 제재 재개를 앞두고 있던 지난달 22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포문을 열었다. 조롱 섞인 훈계를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분노를 표출했다. 다음 날 모든 철자를 대문자로만 써서 “미국은 당신의 정신 나간 소리를 두고 볼 나라가 아니다. 조심하라”고 맞받았다. 지난해 9월 트럼프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이란을 ‘불량 국가’로 비난한 것을 시작으로 두 지도자 간 설전의 수위는 고조되고 있다. 미국은 ‘이란 핵협정’ 탈퇴에 따라 7일 1단계 대이란 제재를 재개한 데 이어 11월 5일부터 이란산 원유 거래 차단을 포함한 2단계 제재까지 예고해 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와 비핵화 협상을 두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로하니 대통령은 지구촌 안보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키맨’으로 떠올랐다. 특히 로하니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어떤 대미 공동보조를 취할지도 관심이다. 트럼프와 내부 강경파의 공세에 낀 로하니 대통령의 선택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외교의 달인’에서 설전 최전방으로 2013년 대통령에 당선된 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로하니 대통령에게는 ‘외교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성직자 출신의 이란 혁명 1세대로 외교 국방 요직을 두루 거친 데다 2003년 초대 핵협상 이란 측 수석대표로 활동한 경력 때문이다. 이어 2015년 7월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과 ‘이란 핵협정’을 타결했다. 반미 성향이 강한 이슬람 보수파가 득세하는 이란에서 로하니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미국과의 대화와 협상을 강조하는 온건한 실용주의자로 입지를 굳혀 왔다. 그가 2005년 ‘핵 민족주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전 대통령과 수차례 거친 논쟁 끝에 핵협상 수석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일은 유명하다. 당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서방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경 기조를 고집했다. 하지만 로하니는 “양보할 것은 양보하면서 서방 제재를 피해 핵개발을 지속하자”는 유화 노선으로 맞섰다. 2013년 대선에서 로하니 대통령은 국제사회 제재에 따른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서방과의 전면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 이란 언론은 그의 당선을 “경제 회생에 대한 이란인의 염원이 담긴 깜짝 승리”로 평가했다. 그런 로하니 대통령이 달라졌다. 최근 미국을 겨냥해 내놓는 말폭탄은 트럼프 대통령의 독설에 뒤지지 않는다. 8일 이란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어떤 의무도 약속도 지키지 않는, 믿을 수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미국에 보란 듯이 우방인 북한과의 ‘반미 공조’를 과시한 것이다. 지난달 말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제안에도 “칼로 다른 사람을 찌르고 난 뒤 대화를 하고 싶다면, 먼저 칼부터 빼라”고 일축했다. 미국을 향한 그의 적대적인 반응에는 이란의 복잡한 내부 사정도 반영됐다는 분석이 많다. 무엇보다 로하니 대통령을 당선시킨 민심이 돌아서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다. 핵협정이 체결되고 서방 제재가 풀리면 경제도 나아질 것이라는 그의 말이 ‘장밋빛’ 공약에 그치자 실망감이 커진 것이다. 이란의 경제성장률은 핵협정 직후인 2016년 12.5%로 반짝 치솟았지만 지난해 4%대로 주저앉았다. 트럼프가 핵협정을 파기하고 제재에 나서면서 경제는 악화 일로를 걸을 것으로 보인다. 테헤란 등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이를 파고든 강경 보수파의 공세도 거세다. 스콧 루커스 영국 버밍엄대 교수는 최근 미국 CNN 인터뷰에서 “로하니 대통령의 거친 발언은 미국에 맞대응하려는 의도보다 국내 보수파를 달래려는 제스처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 미-이란, 전면전과 재협상의 기로 안팎으로 궁지에 몰린 로하니 대통령은 이제 반미 기치를 더욱 높이 들어 핵 개발의 길로 다시 나설지 아니면 ‘외교적 출구’를 찾을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7일 미국의 1단계 제재가 공식 발효된 뒤 로하니 대통령은 대응 방향과 수위 조절에 고심하고 있다. 로하니 대통령은 독자적인 결단으로 북-미 관계를 급반전시킨 김정은 위원장과는 국내 정치적 입지가 다르다. 보수파의 강한 반발 때문에 대미 협상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이란 정부가 “우라늄을 더 높은 농도로 농축할 수 있는 준비가 됐다”며 미국을 겨냥해 ‘구두 시위’를 하며 사태 추이를 관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미 강경 무력 집단인 혁명수비대는 “이란은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호르무즈해협의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라며 로하니 대통령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로하니 정부가 미국과 물밑 접촉을 진행 중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로하니 대통령뿐만 아니라 11월 중간선거(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의 3분의 1을 뽑는 것으로,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도 북핵에 이어 이란 문제에서도 가시적 성과를 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달승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교수는 “미국과 이란 간 상호 공방은 국내 정치를 의식한 측면이 크다. 공방이 시끄러울수록 파국을 막기 위한 물밑 협상은 무르익고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북-미처럼 양국 간 전격적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스라엘 매체 마아리브 등은 유엔 본부의 서방 측 고위 외교관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과 로하니 대통령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만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중국은 미국 실리콘밸리 등에 수조 달러를 들고 침투해 미국이 보유한 첨단기술을 빼돌리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이 한층 격화되던 6월 19일.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 강경파로 대중 무역전쟁을 이끌고 있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 겸 국가무역위원회(ITC) 위원장은 폭스뉴스에 출연해 7분 넘게 열변을 토했다. 같은 날 백악관은 ‘중국의 경제적 침략’을 비판하는 35쪽짜리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중국 국가안전부가 배치한 4만 명 이상의 산업 스파이가 세계를 염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미국을 겨냥한 중국과 러시아의 첩보 활동은 냉전시대 스파이 전쟁을 방불케 한다. 과거에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였다면 ‘신(新)스파이 전쟁’은 첨단 산업 정보기술을 몰래 훔치는 것으로 임무의 초점을 바꿨다. 자연히 스파이들의 활동 지역도 세계 정치의 중심 워싱턴에서 세계 정보기술(IT) 허브로 통하는 실리콘밸리로 이동하고 있다. ○ 스파이의 새 거점, 실리콘밸리 냉전이 시작된 후 60여 년 동안 구소련 등 스파이들의 주요 무대는 미국 동부였다. 정부 기관과 각국 대사관이 밀집된 워싱턴이나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 등이다. 이제는 미국 서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 일대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중국, 러시아 스파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미국의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미 연방수사국(FBI)이 수사 또는 내사하는 산업 스파이 사건의 20%가 이 지역에서 발생했다. 실리콘밸리에는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페이스북 구글 등 글로벌 IT 기업의 본사가 밀집해 있다. 전 세계에서 창업이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스타트업 특유의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문화와 더불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인재들로 코스모폴리탄(범세계주의) 분위기가 넘쳐난다. 한 전직 미 정보기관 요원은 “보안 시스템을 두지 않고 직위에 상관없이 곳곳을 누빌 수 있게 하는 스타트업 문화가 스파이의 침투를 부르고 있다”고 말했다. 서부로 무대를 옮기면서 활동 양상도 달라졌다. 워싱턴이나 뉴욕에서 스파이들은 주로 외교 군사 기밀과 정가 소식을 염탐했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통상(通商) 기밀이나 첨단기술 정보를 ‘먹잇감’으로 삼는다. 과거 전형적인 정보요원들은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기반을 두고 신분을 위장해 활동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스파이들은 ‘전업 스파이’가 아니라 유학생이나 연구원, 방문교수 등 합법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본국의 연구소나 국영기업으로 산업기술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스파이 활동을 한다. 미국 비자를 가지고 있는 데다 첩보 활동이 일상생활에서 은밀히 이뤄져 사실상 눈에도 잘 안 띈다. 미 정부와 거래를 하는 실리콘밸리의 한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보안 담당 책임자는 “똑똑하고 양심적인 중국계 직원이 중국 정부와 엮여 있는 상황을 본 적 있다. 지금은 특정 프로젝트에 한해서는 미국 시민권자인 직원만 참여시킨다”고 말했다. ○ 중러 “테크 기업을 사냥하라” 냉전 시대 미국과 함께 첩보전의 양대 강자였던 러시아는 스파이 활동의 거점으로 벤처캐피털이나 투자회사를 활용하고 있다. 스타트업을 좌지우지하는 자금줄을 쥐고 민간과 군사 분야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노리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FBI에 체포된 러시아의 ‘미녀 스파이’ 마리야 부티나(29)가 러시아의 억만장자 콘스탄틴 니콜라예프에게 금전적 후원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니콜라예프는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등 미 IT 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인물이다. 러시아는 정부 소유 벤처캐피털의 현지 법인인 ‘루사노 USA’를 산업 스파이의 근거지로 활용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한 전직 미 정보기관 관료는 폴리티코에 “루사노 USA는 표면적으로는 벤처캐피털 회사로 활동하면서 은밀하게 정보 수집을 벌이고 러시아에 협조적인 인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이 회사를 실리콘밸리에서 인맥을 확장하는데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고전적 수법인 ‘미인계’로 테크 기업이나 벤처캐피털 회사의 임원을 공략하기도 한다. 실리콘밸리나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자리 잡은 초특급 호텔의 바가 주요 활동 무대로 꼽힌다. 러시아나 동유럽 출신의 고급 매춘부가 기업 임원들과 농밀한 대화를 나누는 데 동원된다. 전직 미 정보요원은 “스파이들이 더 이상 직접 기업 내부로 침투할 필요 없이 기밀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내부 인사를 포섭하면 된다”고 말했다. 중국도 실리콘밸리를 대미 첩보 활동의 전략 거점으로 삼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에 중국 국가안전부 산하 전담조직까지 두었다는 말도 있다. 중국은 스파이전에서도 특유의 ‘인해전술’ 전략을 편다.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중국 출신 기업인, 엔지니어, 유학생, 여행객 등을 두루 포섭해 정보 획득의 창구로 삼는다. 실제 중국 유학생과 화교가 산업 스파이로 활동하다 검거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지난달 7일 전직 애플 엔지니어 장샤오랑이 애플의 영업기밀을 몰래 빼낸 혐의로 출국 직전 FBI에 체포됐다. 장 씨는 25쪽에 이르는 애플의 자율주행차 회로기판 청사진을 자신의 노트북에 다운로드한 뒤 중국 자동차업체로 이직하려다 덜미를 잡혔다. 중국이 정보 수집을 위해 동원하는 자금도 막대하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2015∼2017년 미국에서 창업 초기 단계의 테크 기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의 16%가 중국 자본이었다. 자금 조달을 받기 위해 핵심 기술도 노출하는 미국 스타트업이야말로 중국 자본에 최적의 사냥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투자은행 엔플루언스의 파트너인 브루어 스톤은 FT에 “몇 년 전 중국 투자자들로부터 한 달에 서너 통씩 애플 협력사에 투자하고 싶다는 전화를 집중적으로 받았다. 별다른 계기도 없었는데 투자 의도가 의심스러웠다”고 털어놨다.○ 첩보전도 미중 양강으로 재편 세계 질서가 미중 주요 2개국(G2) 체제로 재편되면서 스파이 전쟁 구도도 과거 냉전 시절 미-러 대결에서 미중 대결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중국은 정보기관 역량이 미국과 러시아에 비해 떨어지지만 정부 차원에서 바짝 공을 들이고 있다. 철강, 콩 등을 둘러싼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백악관이 중국의 산업 스파이 활동을 낱낱이 기록한 보고서를 발표한 것이 중국의 정보전에 대한 미국의 위기감을 보여준다. 미 국가정보국 산하 국가정보보안센터가 7월 26일 내놓은 ‘2018년 사이버 공간에서의 외국 산업 스파이 실태’ 보고서도 단연 중국을 가장 위협적인 스파이 국가로 꼽았다. 보고서는 “중국은 벤처 합작, 공동연구, 인재 모집, 기업 인수 등 여러 루트를 총동원해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빼내왔다”고 밝혔다. 중국의 공세적인 정보전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 또한 첩보 예산을 크게 늘리고 있다. 미 하원은 연방정부 산하 17개 정보기관에 2018년과 2019년 회계연도 2년간 총 1700억 달러(약 190조4000억 원) 이상을 투입하도록 했다. 4차 산업혁명이 이끄는 ‘기술 전쟁’의 시대, 실리콘밸리의 세계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 지역에서 중국의 첩보전과 미국의 방첩전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전직 미 정보기관 요원은 “나방이 빛 주위로 모이는 것처럼 각국 스파이들은 실리콘밸리로 모여들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앞으로 미중 간 최강자를 가리는 전쟁의 한 단면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구글이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페이스북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존은 당신이 무엇을 구매하는지를 알고 있다.”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에 대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내린 평가다. 세계 3대 글로벌 인터넷 업체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아마존이 구축하고 있는 빅데이터의 역량을 표현한 것이다. 18일 특판 행사인 ‘프라임 데이’에 1억 개의 제품이 팔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아마존의 시가 총액은 9000억 달러(약 1017조 원)를 가뿐이 넘어섰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도 차례로 제쳤다. 이제 ‘꿈의 시가총액’인 1조 달러 첫 돌파를 위해 애플과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했다. 기업의 성장과 함께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자산도 최근 발표에서 MS의 빌 게이츠 등을 따돌리고 1500억 달러(약 169조 원)를 넘으며 세계 최고 부자에 올랐다. 1995년 7월 온라인 서점으로 처음 세상에 아마존이라는 이름을 알린 지 23년. ‘쇼핑 왕국’, ‘잡식성 공룡’ 등의 별칭이 따라붙는 아마존은 치열한 경쟁의 ‘아마존 정글’에서 무슨 일을 벌인 걸까.○ ‘에브리싱 스토어’에서 ‘에브리싱 컴퍼니’로 지난해 7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인터넷협회 연례 자선행사장. 사회자가 대담자로 초청된 베이조스에게 대뜸 “아마존은 도대체 무슨 기업이냐”고 물었다. 온라인 쇼핑몰로만 알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사업 영역이 물류, 클라우드 컴퓨팅,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등 전방위로 뻗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조스는 웃으며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아마존이 하는 모든 일에는 ‘고객 중심주의’라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독자가 찾는 모든 책을 신속하게 공급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 고객이 필요한 것이면 유형(제품)이든 무형(프로그램)이든 모든 것을 다루는 기업이라는 뜻이다.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작은 차고에서 출발했듯이 아마존도 베이조스의 차고에서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했다. 베이조스가 “주문받은 책을 우체국으로 직접 부치러 갔다”고 소개할 만큼 초라한 규모였다. 하지만 쇼핑몰에서 파는 첫 품목으로 책을 고른 데는 남다른 ‘촉’이 있었다. 책은 어디에서 사든 똑같은 형태라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은 고객도 안심하고 주문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베이조스의 판단은 옳았다. 영업한 지 불과 2년여 만인 1997년 ‘세계 최대 서점’으로 성장했다. 아마존은 현재 온라인에서만 4억 종이 넘는 상품을 팔며 ‘에브리싱 스토어’로 불린다. 최초의 상품이 책이었다면 최후의 상품은 채소, 과일 등 신선식품이다. 신선식품은 재고 부담이 더 크고 배달 과정에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한번 사면 다시 구매하거나 정기 구매하는 고객이 많아 온라인 쇼핑의 ‘마지막 블루오션’으로 꼽힌다. 베이조스는 지난해 6월 미국에 400여 개 매장을 둔 유기농 마켓 체인 홀푸드를 인수하며 돌파구를 찾았다. 아마존의 끝없는 사업 확장은 소매업에 그치지 않는다. 물류,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우주기술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다나카 미치야키 일본 릿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아마존은 ‘에브리싱 스토어’를 넘어 ‘에브리싱 컴퍼니’를 바라본다”고 말했다.(‘아마존 미래전략 2022’)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에서는 MS와 구글을 제치고 세계 최강 기업이다. 클라우드 서비스란 서버 등 컴퓨팅 자원을 필요한 만큼 빌려 주고 사용료를 받는 정보기술(IT) 서비스다. 올해 1분기(1∼3월) 기준 아마존의 클라우드 시스템 자회사 ‘아마존 웹서비스(AWS)’의 시장점유율은 40%에 이른다. AWS가 아마존 총영업이익의 73%를 창출했다. 아마존의 핵심 사업은 이미 유통에서 서비스로 넘어왔다.○ ‘잡식성 공룡’ 아마존에 기업들 ‘아마존 쇼크’ 아마존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전통 산업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잡식성 공룡’으로 불린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주력하는 것과 대비된다. 새로 진출하는 사업이 자신이 기존에 하고 있는 사업 영역의 기반을 일부 훼손하는 ‘자기 잠식’ 효과가 일어나도 주저하지 않는다. 베이조스가 온라인 도서 판매를 담당하던 임원을 전자책 단말기 킨들 부문으로 발령 내면서 “자네의 임무는 여태껏 쌓아올린 사업을 죽이는 것일세. 종이책을 파는 모든 이들을 실직자로 만들 것처럼 디지털 사업을 진행하게”라고 말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만큼 새로 진출하는 사업에 대한 강한 의욕과 도전 정신을 보여준다. 아마존의 끝없는 사업 확장과 기존 판을 뒤흔드는 포식자 전략에 ‘아마존 효과’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아마존의 경영 활동으로 관련 업계가 받는 쇼크를 말한다. 지난달 28일 아마존이 온라인 약국 필팩 인수를 발표하자 시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필팩은 미국 49개 주를 대상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약을 가정으로 배달하는 업체다. 미국 최대 드러그스토어 월그린과 CVS 주가는 각각 10%와 6% 급락했다. 3월에도 ‘장난감 왕국’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장난감 전문점 토이저러스가 끝내 미국 내 사업을 접었다. 2000년 아마존에 10년간 온라인 판매 독점권을 주는 계약을 맺었다가 온라인 판로를 개척할 시간을 놓친 탓이었다. 미국 투자정보회사 비스포크 인베스트먼트 그룹은 2012년 2월부터 ‘아마존 공포 종목(Death by Amazon) 지수’를 발표한다. 아마존의 수익 확대나 신규 사업 진출, 인수합병(M&A) 등으로 실적 악화가 예상되는 소매기업 54개로 지수가 구성된다. 아마존은 현재 한국에서 AWS코리아를 두고 클라우드 사업만 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유통업계도 아마존 효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아마존은 이달 5∼13일 90달러 이상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한국까지 무료배송 행사를 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평소 배송료 부담으로 쉽게 구매할 수 없었던 물품을 ‘직구(직접 구매)’한 이들의 인증이 잇따랐다. 적자를 감수한 아마존이 한국 진출을 위해 벌이는 탐색전에 관련 업계도 긴장하고 있다.○ ‘제2본사’ 유치 위해 “도시 이름 ‘아마존’으로 바꾸겠다” 아마존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고용 인원은 미국에 4700여 개의 매장을 둔 월마트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본사가 있는 시애틀에서만 4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마존이 지난해 9월 제2본사(HQ2)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후보지 공개 모집에 들어가자 북미 전역이 들썩거렸다. 제2본사 건설 비용으로 50억 달러(약 5조6500억 원)를 투자하고 5만 개 이상의 새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자 미국은 물론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 지역 238개 대도시가 입찰제안서를 냈다. 아마존 제2본사 프로젝트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연상케 한다. 최종 후보에 올라온 20개 도시가 벌이는 유치전은 연일 미디어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시 시장은 아마존닷컴에서 1000개의 상품을 선정해 별 다섯 개짜리 리뷰를 올렸다. 조지아주 스톤크레스트시는 도시 이름을 아예 아마존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아마존은 각 도시가 제출한 신청서를 통해 제2본사 후보지도 고르고 지역과 시민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고 있다. 부지 선정을 총괄하는 홀리 설리번 씨는 “우리는 미래 인프라 투자와 고용 창출을 위한 장소를 물색할 때 매우 값지게 쓰일 새로운 도시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됐다”고 인정했다. 제2본사 건설까지도 사업 기회로 활용하는 아마존의 치밀한 전략을 보여준다.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구글이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페이스북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면 아마존은 당신이 무엇을 구매하는지를 알고 있다.” 세계적인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에 대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내린 평가다. 세계 3대 글로벌 인터넷 업체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아마존이 구축하고 있는 빅데이터의 역량을 표현한 것이다. 18일 특판 행사인 ‘프라임 데이’에 1억 개의 제품이 팔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아마존의 시가 총액은 9000억 달러(약 1017조 원)를 가뿐이 넘어섰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을 차례로 제쳤다. 이제 ‘꿈의 시가총액’인 1조 달러 첫 돌파를 위해 애플과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했다. 기업의 성장과 함께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의 자산도 최근 발표에서 MS의 빌 게이츠 등을 따돌리고 1500억 달러(약 169조 원)를 넘으며 세계 최고 부자에 올랐다. 1995년 7월 온라인 서점으로 처음 세상에 아마존이라는 이름을 알린 지 23년. ‘쇼핑 왕국’, ‘잡식성 공룡’ 등의 별칭이 따라붙는 아마존은 치열한 경쟁의 ‘아마존 정글’에서 무슨 일을 벌인 걸까. ● ‘에브리싱 스토어’에서 ‘에브리싱 컴퍼니’로 지난해 7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인터넷협회 연례 자선행사장. 사회자가 대담자로 초청된 베이조스에게 대뜸 “아마존은 도대체 무슨 기업이냐”고 물었다. 온라인 쇼핑몰로만 알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사업 영역이 물류, 클라우드 컴퓨팅,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등 전방위로 뻗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조스는 웃으며 “다소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아마존이 하는 모든 일에는 ‘고객 중심주의’라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독자가 찾는 모든 책을 신속하게 공급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 고객이 필요한 것이면 유형(제품)이든 무형(프로그램)이든 모든 것을 다루는 기업이라는 뜻이다. 애플이 스티브 잡스의 작은 차고에서 출발했듯이 아마존도 베이조스의 차고에서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했다. 베이조스가 “우체국으로 주문받은 책을 직접 부치러 갔다”고 소개할 만큼 초라한 규모였다. 하지만 쇼핑몰에서 파는 첫 품목으로 책을 고른데는 남다른 ‘촉’이 있었다. 책은 어디에서 사든 똑같은 형태라 온라인 쇼핑에 익숙하지 않고 “받아보면 어떤 물건이 올 지 알아!”라고 의심하는 고객도 안심하고 주문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베이조스의 판단은 옳았다. 영업한 지 불과 2년여 만인 1997년 ‘세계 최대 서점’으로 성장했다. 아마존은 현재 온라인에서만 4억 종이 넘는 상품을 팔며 ‘에브리싱 스토어’로 불린다. 최초의 상품이 책이었다면 최후의 상품은 채소, 과일 등 신선식품이다. 신선 식품은 재고 부담이 더 크고 배달 과정에 세심한 관리가 필요하지만 한 번 사면 다시 구매하거나 정기 구매하는 고객이 많아 온라인 쇼핑의 ‘마지막 블루오션’으로 꼽힌다. 아마존의 끝없는 사업 확장은 소매업에 그치지 않는다. 물류,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 우주기술까지 사업 영역까지 넓혀지고 있다. 다나카 미치야키 일본 릿쿄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아마존은 ‘에브리싱 스토어’를 넘어 ‘에브리싱 컴퍼니’를 바라본다”고 말했다.(‘아마존 미래전략 2022’) 클라우드 서비스 시장에서는 MS와 구글을 제치고 세계 최강 기업이다. 클라우드 서비스란 서버 등 컴퓨팅 자원을 필요한 만큼 빌려 주고 사용료를 받는 정보기술(IT) 서비스다. 올해 1분기(1~3월) 기준 아마존의 클라우드 시스템 자회사 ‘아마존 웹서비스(AWS)’의 시장점유율은 40%에 이른다. AWS이 아마존 총 영업이익의 73%를 창출했다. 아마존의 핵심사업은 이미 유통에서 서비스로 넘어왔다. ● ‘잡식성 공룡’ 아마존에 기업들 ‘아마존 쇼크’ 아마존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전통 산업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잡식성 공룡’이 눈총도 받고 있다.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주력하는 것과 대비된다. 새로 진출하는 사업이 자신이 기존에 하고 있는 사업 영역의 기반을 일부 훼손하는 ‘자기 잠식’ 효과가 일어나도 주저하지 않는다. 베이조스가 온라인 도서 판매를 담당하던 임원을 전자책 단말기 킨들 부문으로 발령내면서 “자네의 임무는 여태껏 쌓아올린 사업을 죽이는 것일세. 종이책을 파는 모든 이들을 실직자로 만들 것처럼 디지털 사업을 진행하게”라고 말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만큼 새로 진출하는 사업에 대한 강한 의욕과 도전 정신을 보여준다. 아마존의 끝없는 사업 확장과 기존 판을 뒤흔드는 포식자 전략에 ‘아마존 효과’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아마존의 경영 활동으로 관련 업계가 받는 쇼크를 말한다. 지난달 28일 아마존이 온라인 약국 필팩 인수를 발표하자 시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필팩은 미국 49개 주를 대상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약을 가정으로 배달하는 업체다. 미국 최대 드러그스토어 월그린과 CVS 주가는 각각 10%와 6% 급락했다. 3월에도 ‘장난감 왕국’으로 불리는 세계 최대 장난감 전문점 토이저러스가 끝내 미국내 사업을 접었다. 2000년 아마존에 10년 간 온라인 판매 독점권을 주는 계약을 맺었다가 온라인 판로를 개척할 시간을 놓친 탓이었다. 미국 투자정보회사 비스포크 인베스트먼트 그룹은 2012년 2월부터 ‘아마존 공포 종목 지수(Death by Amazone)’를 발표한다. 아마존의 수익 확대나 신규사업 진출, 인수합병(M&A) 등으로 실적 악화가 예상되는 소매기업 54개로 지수가 구성된다. 아마존은 현재 한국에서 AWS코리아를 두고 클라우드 사업만 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유통업계도 아마존 효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아마존은 이달 5~13일 90달러 이상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한국까지 무료배송 행사를 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평소 배송료 부담으로 쉽게 구매할 수 없었던 물품을 ‘직구(직접 구매)’한 이들의 인증이 잇따랐다. 적자를 감수한 아마존의이 한국 진출을 위해 벌이는 탐색전에 관련 업계도 긴장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 ‘제 2본사’ 유치 위해 도시 이름도 ‘아마존’으로 바꾸겠다 아마존이 미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고용 인원은 미국에 4700여 개의 매장을 둔 월마트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본사가 있는 시애틀에서만 4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마존이 지난해 9월 제 2본사(HQ2) 건설 계획을 발표하며 후보지 공개 모집에 들어가자 북미 전역이 들썩거렸다. 제 2본사 건설비용으로 50억 달러(약 5조6500억 원)를 투자하고 5만 개 이상의 새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자 미국은 물론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 지역 238개 대도시가 입찰제안서를 냈다. 아마존 제2본사 프로젝트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연상케 한다. 최종 후보에 올라온 20개 도시가 벌이는 유치전은 연일 미디어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시 시장은 아마존닷컴에서 1000개의 상품을 선정해 별 다섯 개짜리 리뷰를 올렸다. 조지아주 스톤그레스트시는 도시 이름을 아예 아마존으로 바꾸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아마존은 각 도시가 제출한 신청서를 통해 제2본사 후보지도 고르고 각 지역과 시민에 관한 생생한 정보를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고 있다. 부지 선정을 총괄하는 홀리 설리번 씨는 “우리는 미래 인프라 투자와 고용 창출을 위한 장소를 물색할 때 매우 값지게 쓰일 새로운 도시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됐다”고 인정했다. 제2본사 건설까지도 사업 기회로 활용하는 아마존의 치밀한 전략을 보여준다.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국회사무처 5급 공채인 입법고시 출신들의 주요 무대는 국회 상임위원회다. 각 상임위에 배속된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과 전문위원, 입법조사관은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한 축이자 ‘숨은 일꾼’들이다. 여야 간, 국회와 정부 간 기 싸움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고 있지만 입법부의 ‘숨은 권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렇다고 ‘장밋빛 인생’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정기국회 등 일이 몰릴 때면 집에도 못 가는 등 애로도 많다. 각 상임위 수석전문위원은 입법고시 출신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펼칠 수 있어 ‘꽃보직’으로 꼽힌다. 법안 심사는 각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전문위원으로부터 법안의 제정·개정 이유와 수정 의견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의원들이 각 분야 법안의 세부내용을 모두 파악하는 데 물리적 한계가 있어 맥을 짚어주는 게 이들의 주요 임무다. 그러다 보니 전문위원이 정한 방향성이 의원의 판단에 영향을 줄 때가 많다. 자유한국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전에 다뤄봤던 문제가 아니면 다른 의원이 낸 법안을 깊이 알기 힘들다. 법안이 필요한지 판단할 때 전문위원의 검토 의견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수 출신의 한 전직 의원은 “적지 않은 의원이 소위원회에 제출된 법안에 대한 별다른 배경 지식 없이 참석한다. 여야 간 이해가 엇갈리는 일부 쟁점 법안을 제외하면 전문위원이 낸 의견에 동조하는 식”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회가 ‘통법부(通法府)’ 노릇을 한 권위주의 시절과 달리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는 이제 역전됐다. 입법고시 출신들의 영향력도 커졌다. 중앙부처 관료를 지낸 한 의원은 “의원은 낙선하면 국회를 떠나지만 입법고시 출신들은 국회 터줏대감이다. 각 부처 공무원들이 국회에서 의원들 못지않게 이들 전문위원을 부쩍 챙기는 이유”라고 말했다. 전문위원의 힘은 ‘검토 보고서’에서 나온다. 국회법은 법안을 상임위에 상정하기 48시간 전 의원들에게 검토 보고서를 배부하도록 하고 있다. 의원들은 대개 법안보다 전문위원의 의견이 담긴 검토 보고서를 먼저 접한다. 한 보좌관은 “검토 보고서를 토대로 회의를 진행하니 보고서가 입법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변수”라고 말했다.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막아야 하는 의원과 부처 공무원, 이해관계자들은 검토 보고서에 담기는 문구 하나에 목숨을 건다. 국회에서 10년간 활동한 한 보좌관은 “발의한 법안에 대한 검토 보고서에 전문위원과 입법조사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담으면 (그 법안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검토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의원이 직접 전문위원을 찾아가 발의한 법안의 취지를 설명하거나 설명 자료를 전달하기도 한다. 부처 공무원들의 로비도 활발하다. 한 보좌관은 “부처 공무원들은 중점 처리 대상 법안에 대해 미리 작업을 한다. 검토 보고서에 쟁점을 모호하게 다루도록 읍소하거나 관련 자료를 전문위원이나 입법조사관에게 갖다 바친다”고 말했다. 온갖 노력을 했음에도 전문위원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부처는 고민한다. 한 경제부처 공무원은 “전문위원을 더 설득할지, 상임위 의원들을 상대로 설명할지, 아니면 법안 수정안을 낼지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상임위에 전문위원이 새로 임명되면 소관 부처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관계자들이 줄을 서서 업무보고를 하는 진풍경도 빚어진다. 18대 국회 이후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가 폭증해 검토 보고서 쓰기에도 허덕이기 일쑤다. 한 입법조사관은 “상임위 회의가 몰려 있는 정기국회 때는 며칠 동안 집에도 못 가거나 겨우 씻고만 나올 때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국회가 파행을 이어가다가 여야 간 극적 합의로 상임위 일정을 재개하는 일도 잦다. 이 때문에 끝도 없이 대기하면서 보좌진이나 기자들에게 “언제 타결될 것 같냐”고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한다. 여야 대립이 갈수록 격화되다 보니 합리적으로 정책 조언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줄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양비론’으로 흐르는 검토 보고서를 써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야당 정책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 당직자는 “쟁점 법안의 경우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면 다른 당 의원들이 호통을 치고 난리가 난다. 입법조사관들이 ‘취지는 좋으나 이런 점도 있고, 저런 점도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로 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에 비해 인사 적체가 심하지 않고 합격자 대부분이 큰 어려움 없이 고위직으로 승진했던 것도 옛말이 됐다. 입법고시는 1976년 처음 시작된 이후 2, 3년에 한 번꼴로 치러졌지만 2000년부터는 매년 실시되고 있다. 2000년 이후 합격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치열한 경쟁에 노출돼 있다. 한 입법고시 출신 국회 공무원은 “앞으로는 수석전문위원까지 승진을 못 하고 퇴직하는 사람이 절반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입법고시 출신 공무원은 국회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지만 아직까지 의원이 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부처 전직 관료들이 적지 않게 국회에 입성하는 것과도 대비된다.홍수영 gaea@donga.com·박효목 기자}

3월 2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열린 본청 508호. 소위원장인 자유한국당 이종배 의원이 지난해부터 심사가 밀린 법안 51건을 일괄 상정했다. 1호 안건으로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이 올라왔다. 취약 계층을 위한 ‘문화누리카드(문화이용권)’를 문화예술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여행과 체육 활동에도 쓸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전문위원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이 소위원장) “검토 의견을 말씀드리면 이미 실시되고 있는 이용 범위에 맞춰 법 규정을 정비한 것으로, 타당한 입법조치라고 봤습니다.”(조의섭 전문의원)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정부 의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이 소위원장) “전문위원 검토 보고처럼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용합니다.”(나종민 1차관) 이후 개정안 심사는 일사천리였다. 이 소위원장이 의원들을 둘러보며 “토론하실 위원님 안 계십니까”, “원안대로 의결하는데 이의 없으십니까”라고 차례로 물었다. 의원들의 별다른 대꾸가 없자 개정안은 불과 심사 몇 분 만에 소위를 통과했다. 이는 법안 처리의 첫 관문인 국회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쟁점이 없는 법안을 다룰 때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풍경이다. 국회사무처 공무원으로 각 상임위에 배속된 전문위원과 입법조사관은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한 축이자 ‘숨은 일꾼’들이다. 여야 간, 국회와 정부 간 기 싸움 속에 이들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고 있지만 높은 전문성으로 입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 입법부의 ‘숨은 권력’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 입법 과정의 ‘숨은 실세’ 법안 심사는 각 상임위 법안심사 소위에서 전문위원으로부터 법안의 제·개정 이유와 수정 의견 등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과 전문위원은 국회사무처 5급 공채인 입법고시 출신의 비율이 매우 높다. 의원들이 각 분야 법안의 세부내용을 모두 파악하는 데 물리적 한계가 있어 맥을 짚어주는 게 이들의 주요 임무다. 그러다 보니 전문위원이 정한 방향성이 의원의 판단에 영향을 줄 때가 많다. 한국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전에 다뤄봤던 문제가 아니면 다른 의원이 낸 법안을 깊이 알기 힘들다. 법안이 필요한 지 판단할 때 전문의원의 검토 의견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수 출신의 한 전직 의원은 “적지 않은 의원들이 소위원회에 제출된 법안에 대한 별다른 배경지식 없이 참석한다. 여야 간 이해가 엇갈리는 일부 쟁점 법안을 제외하면 전문위원이 낸 의견에 동조하는 식”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국회가 정부가 보내온 법을 통과시키기만 하는 것을 꼬집어 ‘통법부’ 역할을 한 권위주의 정부 시절과 달리 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는 이제 역전됐다. 자연스레 입법고시 출신들의 영향력도 커졌다. 중앙부처 관료를 지낸 한 의원은 “의원은 낙선하면 국회를 떠날 인물이지만 입법고시 출신 전문위원들은 국회 터줏대감이다. 각 부처 공무원들이 국회에서 의원들 못지 않게 이들 전문위원들을 부쩍 챙기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획재정부가 국회 본회의 전 ‘마지막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를 로비 창구로 활용해 문제로 지적된 것도 전문위원의 파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지난해 9월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기재부가 소관 상임위에서는 반대하지 않고 법사위 전문위원을 찾아가서 얘기하는 것이 점점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안 문구를 다루는 법사위에서 전문위원을 설득해 법안의 발목을 잡는 행태를 꼬집은 것이지만 전문위원의 입법 과정에서 실질적인 내용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검토보고서 잘 써 달라” 읍소 전문위원의 힘은 ‘검토 보고서’에서 나온다. 국회법은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전문위원의 검토 보고를 듣는다. 전문위원은 모든 법안을 미리 살펴본 뒤 보고서를 작성해 상임위 상정 48시간 전에 의원들에게 배부한다. 의원들은 대개 법안보다 전문의원의 의견이 담긴 검토보고서를 먼저 접한다. 한 보좌관은 “검토보고서를 토대로 회의를 진행하니 그 보고서야말로 입법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변수”라고 말했다.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막아야 하는 의원이나 부처 공무원, 이해관계자들은 검토보고서에 담기는 문구 하나에 목숨을 건다. 국회에서 10년을 활동한 보좌관은 “발의한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서에 전문위원과 이를 보좌하는 입법조사관이 부정적인 의견을 담으면 (그 법안은) 끝났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검토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의원이 직접 전문위원을 찾아가 발의한 법안의 취지를 설명하거나 설명 자료를 전달하기도 한다. 전문위원과 입법조사관을 상대로 한 부처 공무원들의 구애 작전도 활발하다. 한 보좌관은 “부처 공무원들은 중점 처리 대상 법안에 대해 미리 작업을 한다. 검토보고서에 쟁점을 모호하게 다루도록 읍소하거나 관련 자료를 전문위원이나 입법조사관에게 갖다 바친다”고 말했다. 온갖 노력을 했는데도 전문위원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부처는 고민한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전문위원을 더 설득할지, 상임위 의원들을 상대로 설명할지, 아니면 법안 수정안을 낼지 결정해야 한다. 전문위원이 국회의 숨은 실세”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상임위에 전문위원이 새로 임명되면 소관 부처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관계자들이 줄을 서서 업무보고를 하는 진풍경도 빚어진다. 한 경제부처 고위공무원은 “부처로서는 국회 공무원이 ‘갑’이다. 특히 예산안 검토보고서에 부정적인 의견이 담기면 그대로 예산이 삭감될 수 있어 평소에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고 말했다. ● 입법고시 출신들의 명암 입법고시 출신 국회 공무원들이 입법 과정에서 ‘숨은 권력’이라는 말까지 듣지만 그렇다고 ‘장미빛 인생’이기만 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하소연도 적지 않다. 18대 국회 이후 의원들의 법안 발의 건수가 폭증해 검토보고서 쓰는 것만도 허덕대기 일쑤다. 한 입법조사관은 “상임위 회의가 몰려 있는 정기국회 때는 몇날 며칠 집에도 못 가거나 겨우 씻고 나올 때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요즘은 여야가 파행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극적 합의로 상임위 일정을 재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끝도 없이 대기하면서 보좌진이나 기자들에게 “언제 합의가 될 것 같으냐”고 수소문하고 다니기도 한다. 여야가 갈수록 극한 대립을 반복하다 보니 합리적으로 정책 조언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줄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다보니 ‘양비론’으로 흐르는 검토보고서를 써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야당 정책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한 당직자는 “쟁점 법안의 경우 어느 한쪽으로 결론을 내면 다른 당 의원들이 호통을 치고 난리가 난다. 그러다보니 입법조사관들이 ‘취지는 좋으나 이런 점도 있고, 저런 점도 있다’는 식으로 두루뭉수리 쓸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 해 입법고시 선발 인원이 20명 안팎으로 소수인 데다 퇴직할 때까지 국회에서 같이 근무하는 ‘작은 사회’이다 보니 폐단도 있다. 지난해 8월 두 명의 수석전문위원이 각각 성추행과 출장비 상습 횡령으로 면직 처리됐다. 특히 여성 부하 직원 성추행 사건은 5개월가량 내부에서 쉬쉬하다가 언론 보도 이후에야 국회가 감사에 착수했다. 민주당 이훈 의원은 “(비위를 서로 묵인하는) ‘입법고시 카르텔’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외부감사관 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페이스북 ‘좋아요’ 버튼의 개발자 저스틴 로즌스타인은 요즘 학생들에게 “좋아요 버튼에 중독되지 말라”고 ‘반(反)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캠페인’ 중이다. 미국에선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이 나서 SNS의 역기능을 경고하는 ‘인도적 기술센터’ 단체가 생겼다면 우리나라에선 ‘자발적 SNS 난민’이 적지 않다. 시어머니, 장인, 직장상사 등 불편한 사람을 피하려고 SNS를 탈퇴하거나 공개용 계정을 따로 만드는 것이다. 집안 어른들의 친구 신청을 받고는 이전에 올린 맛집, 여행 사진을 일일이 지운 뒤 이후엔 업데이트하지 않는다는 이들도 꽤 있다. 네트워킹을 위한 SNS가 되레 관계의 부담을 주는 패러독스다. ▷무섭게 질주하던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 기업들에 태클이 걸렸다. 현재의 위기는 플랫폼 자체에 대한 신뢰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최근 글로벌 홍보회사 에델만이 미국 중국 프랑스 등 9개 국가 9000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6명은 SNS 콘텐츠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SNS를 통한 개인정보 유출, 가짜뉴스와 혐오 표현 확산이 심각하다는 인식에서다. ▷SNS 이용률 전 세계 공동 3위를 자랑하는 한국에서도 심상치 않다. 광고 플랫폼 전문기업 DMC미디어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SNS 이용 시간이 지난해 하루 평균 42.9분에서 올해 35.5분으로, 처음 줄었다. 특히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로 SNS를 하는 이들의 감소 폭(8.2분)이 PC(3분)에서보다 더 컸다. 모바일 기기를 주로 쓰는 젊은층의 SNS 이탈이 본격화되는 신호로도 볼 수 있다. ▷그간 SNS 피로감은 대개 중독이나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호소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무분별하게 노출되는 주객전도 광고 때문에 SNS를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페이스북을 열어 보니 관심도 없는 ‘창업&프랜차이즈 박람회’와 ‘주방용 수도꼭지’ 광고가 추천 게시물로 떠 있어 도로 창을 닫았다. ‘맞춤형 콘텐츠’를 찾아준다는 알고리즘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거나 SNS 기업들이 지나친 돈 욕심을 부리고 있거나.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영원한 2인자’, ‘풍운아’.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8시 15분경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르고 충남 부여의 가족묘에 안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 영결식은 27일 수요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영결식장, 발인은 오전 9시. JP에게 1961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당시 JP는 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육군사관학교(8기)를 졸업한 35살의 육군 중령이었다. 그 해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쿠데타에 가담해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뒤바뀐다. 이후 JP는 한국 정치사에서 때로는 화려한 2인자로, 때로는 불운의 정치인으로 숱한 정치 역정을 겪었다. 3공화국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으로 ‘권력 2인자’에 오른 그는 1963년 국회에 처음 진출했다. 같은 해 집권 민주공화당의 의장까지 맡았으나 박 전 대통령과 혁명동기들의 견제가 만만찮았다. JP는 1964년 ‘6·3사태’의 희생양이 돼 당의장직을 사임하고 외유(外遊)길에 올랐다. 당시 섭섭한 심경을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말로 애써 감췄다. JP는 1967년 7대 국회로 재입성에 성공했다. 4년 뒤에는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라는 국무총리로 다시 2인자에 화려하게 컴백해 만 4년6개월 동안 직을 수행했다. 1979년 10·26 직후 공화당 총재를 맡았지만 신군부에 의해 ‘부패 정치인’으로 낙인 찍혀 낭인 생활을 해야 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JP는 김대중(DJ) 전 대통령,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함께 정치활동 규제에 묶여 11, 12대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가 정치활동을 재개한 것은 민주화 요구가 거셌던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하면서다. 이어 1988년 13대 총선 때 신민주공화당으로 충청권을 석권하며 정치 전면에 복귀했다.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민주당 총재이던 YS와 3당 합당에 참여해 1992년 대선에서 YS 당선에 기여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초 YS 진영으로부터 “정치생명이 다했다”며 2선 후퇴 압력을 받았다. 다시 위기를 맞게 되자 같은 해 3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 창당으로 정면승부를 건다. JP의 자민련은 그해 6월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휩쓸고, 96년 15대 총선에서도 충청권에서 24석을 포함해 총 50석을 얻으면서 위력을 발휘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P 연합’으로 공동정권을 탄생시켜 김대중 정부 초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하지만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의석수는 17석으로 쪼그라들었다.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한 JP에 대해 DJ는 민주당 의원 4명을 자민련으로 꿔주는 유례없는 ‘의원 임대’ 파동까지 빚으며 공조 유지를 시도하기도 했다. DJ와의 결별은 2001년 ‘햇볕정책 전도사인’인 임동원 통일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다. JP가 DJ와의 연대 시 담보로 요구한 것은 내각제였다. 내각제 개헌이 무산된 뒤 DJP 연합이 흔들리던 와중에 JP가 해임건의안을 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주며 공동정권은 결국 파경에 이르렀다. 이후 2002년 16대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못한 채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으로 내건 노무현 대선후보와 민주당에 충청권을 대거 잠식당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며 재기를 향한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총선 직전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공동추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뒤늦게 가담했다가 역풍을 맞아 4석으로 쪼그라든다.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조차 낙선하면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총선 패배 직후인 2004년 4월 19일 그는 “패전의 장수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국민의 선택은 조건 없이 수용해야 한다”며 총재직 사퇴 및 정계은퇴를 전격 선언했다. 5·16쿠데타로 한국 정치사에 등장한 그가 43년간의 정치인생을 접은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4·19혁명 44주년 기념일이었다. 그는 자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말을 빌려 “유권자는 사육사가 잠시 한 눈을 팔면 물어뜯는 맹수와 같다”고 말했다. 17대 총선은 ‘보수 원조’를 자임해온 JP가 변화된 유권자들의 성난 민심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늦었음을 일깨워준 충격적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 마포당사에서 당직자들에게 “43년간 정계에 몸담아 왔고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며 “노병은 죽진 않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JP는 YS, 박준규 전 국회의장과 공동으로 9선이라는 최다선 의원의 기록을 남겼다.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 명예고문이 된 JP는 “이명박 후보야말로 우리나라를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끌고 개인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 적임자”라며 지원 유세를 했지만, 대선 이후엔 약속대로 다시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그간 얻은 별명도 많다. ‘부패원조’는 5·16쿠데타 이후 공화당 창당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4대 의혹사건’을 시작으로 “신악(5·16세력)이 구악(이승만 정권)을 뺨친다”는 평가를 받으며 생겼고, ‘정치9단’은 노회한 정치리더인 3김(DJ·YS·JP) 모두에게 붙은 수식어였다. ‘낭만의 정객’은 수세에 몰릴 때 화려한 수사로 위기를 넘겨온 그를 잘 표현한다. JP는 한학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고사성어를 잘 활용했다. 공주중(5년제) 시절에는 밤새 책 한 권씩 읽고 다 못 마치면 학교수업도 가지 않는다는 ‘일야일권 독파주의’로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저서, 세계문학전집 등을 모두 읽었다. 3만 권의 책을 소장했다는 ‘독서광’ DJ보다 장서가 많다고 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좌우명대로 정치 인생의 갈림길마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고비를 넘겼던 JP. 그는 2017년 19대 대선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인생을 오래 유지했지만 ‘3김 시대’로 상징되는 한국 현대정치사의 다른 거목인 YS, DJ과 달리 1인자가 되지 못하고 ‘영원한 2인자’요, ‘킹 메이커’에 머물렀다. JP는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몇 마일이 남아있다’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구를 즐겨 인용했다. 의미를 물으면 “잠들기 전이란, 죽기 전이나 정계를 떠나기 전으로 해석하면 된다. 내가 제일 보기 싫은 것은 타나 남은 나무조각”이라고 말했다. JP는 명분보다 실리를 좇은 정치인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꿈꾼 인생은 “완전 연소돼 재가 되는” 불같은 삶이었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트로피 와이프’라는 신조어가 있다. 돈 많은 나이 든 남자가 새로 맞아들이는 젊은 미모의 반려자를 지칭하는 비하적 표현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부인 멜라니아 여사를 두고도 그렇게 수군대는 소리들이 있었다. 슬로베니아 출신 모델인 멜라니아는 35세 때인 2005년 당시 59세이던 트럼프의 세 번째 부인이 됐다. 백악관 입성 후 트럼프의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이방카에게 밀려 멜라니아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존재감이 적었다. ▷멜라니아가 17일 남편의 반(反)이민정책 중 ‘부모-자녀 격리 지침’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미성년 자녀와 함께 밀입국하다 적발되면 부모는 처벌하고 자녀는 창고나 텐트촌에 격리해 수용하는 무관용정책에 대해서다. 최근 6주 동안 2000여 명의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아동인권 논란으로 비화됐다. 멜라니아는 “이 나라가 법을 준수해야 하지만 가슴으로 다스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멜라니아의 쓴소리는 즉각 비판여론에 힘을 실어줬고 전직 퍼스트레이디들이 호응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부인 로라 여사는 워싱턴포스트에 ‘국경에서 부모-자녀 격리 조치로 가슴이 찢어진다’는 글을 기고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부인 미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도 이 글을 리트윗했다. 48시간 동안 생존한 전직 퍼스트레이디 4명 전원이 호응해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미국에서도 대통령 부인은 종종 ‘입 다물기’를 요구받는다. 클린턴 전 장관은 남편의 복지개혁법에 반대했지만 지지하는 척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의 ‘영원한 야당’이 돼주기를 바란다. 멜라니아가 SNS에서 거친 표현을 남발하는 남편을 겨냥한 듯 지난달 “온라인에서 단어를 현명하게 선택하고, 서로 존중하며 사용하자”고 했을 때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면전에서 저런 훈계를 하고도 무사한 사람은 멜라니아뿐일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노(NO)’라고 못할 때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이 돋보인다.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2013년 독일을 방문한 블라미디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앞으로 상의를 벗은 여성 3명이 “독재자!”라고 외치며 달려들었다. 반라의 여성들을 끌어내야 하는 경호원들은 당황했다. 정치적 구호가 적힌 가슴을 노출하는 기습시위로 유명한 활동가 ‘페멘(FEMEN)’이다. ‘성 극단주의(sextremist)’를 표방한 이들은 세계 곳곳에서 논쟁적인 활동으로 종종 물의를 빚는다. 하지만 이들이 가슴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세상이 유심히 봐줬을까. ▷최근 20대 여성들을 중심으로 성적 대상화, 외모 평가 등 ‘불편한 현실’을 거부하는 행동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 회원들은 2일 반라 시위 사진을 음란물로 보고 삭제한 페이스북코리아에 항의해 상의 탈의 시위를 벌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탈코르셋’ 운동도 퍼지고 있다. 화장, 긴 머리, 다이어트 등을 사회가 강요한 ‘코르셋’이라며 색조화장품을 부수거나 쇼트커트로 자른 사진을 SNS에 올린다. ▷이른바 ‘꼴페미’(꼴통 페미니스트의 준말)만의 일이 아니다. 9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일대를 물들인 붉은 행렬을 보면 말이다. 홍익대 미대 수업에서 남성 모델의 나체를 몰래 찍어 유출한 여성이 구속된 사건을 두고 ‘편파 수사’라고 규정하는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2차 집회에는 1만5000명(경찰 추산)이 모였다. 지난달 19일 열린 1차 집회 때보다 참가자가 부쩍 늘었다. 여성의 분노를 보여준다며 빨간 옷을 입어 붉은 물결이다. ▷몰카 피해자가 남성이라 수사가 신속했다는 주장은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이 표출하는 집단 분노에는 절박함이 있다. 지금의 20대는 공부면 공부, 학급에선 반장 등 여러 측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알파걸’로 자랐다. 그런 여성들이 화장실 몰카, 취업 차별 등 여전히 후진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곤 페미니즘에서 해답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도 전보다 좋아지지 않았느냐”는 말은 마초 또는 꼰대의 변명일 뿐이다.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들의 액션은 계속될지 모른다.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홍콩에서는 정치색이 강한 책 등을 다루는 독립 서점을 ‘얼러우(二樓·2층) 서점’이라고 부른다.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금서(禁書)로 분류된 책이 홍콩에서 유통됐다. 얼러우 서점은 금서를 팔던 작은 서점들이 주로 건물 2층 이상에서 몰래 영업한 데서 유래했다. 최근 중국 당국이 홍콩 서점을 반중(反中) ‘불온서적’을 퍼뜨리는 소굴로 보고 유통망을 점령했다. 중국 정부기관인 홍콩특별행정구 연락판공실은 홍콩 내 대형서점 체인을 포함해 서점 53곳과 출판사 30곳을 거느린 홍콩 연합출판집단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홍콩판 분서갱유(焚書坑儒)에는 전조가 있었다. 2015년 일명 ‘서점 관계자 실종 미스터리’다. ‘시진핑의 연인들’ ‘시진핑 20년 집권의 꿈’ 등 중국 당국이 껄끄러워할 책을 팔던 얼러우 서점 ‘퉁뤄완(銅(나,라)灣)’의 점장과 직원 등 5명이 차례로 실종된 사건이다. 이들은 중국 공안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것으로 후일 드러났다.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 당시 중국이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1국가 2체제)’ 원칙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사회주의 중국과 자본주의 홍콩의 동거는 순항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중국의 경제가 급부상하며 위기에 직면했다. 홍콩에서는 언론, 출판, 표현의 자유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역행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이후 “근대화에 뒤처져 서구 열강에 영토마저 떼 줘야 했던 고난을 극복하고 중국몽(夢)을 실현할 때”라는 명분으로 간섭과 통제를 노골화하고 있다. ▷비단 홍콩에서만이 아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출판사가 운영하는 중국학 권위지 ‘차이나 쿼털리’는 지난해 8월 중국의 압박으로 웹사이트에서 톈안먼(天安門) 사태 등을 다룬 논문 300여 편을 삭제했다. 세계 각국 학자들의 청원에 결국 되살아났지만, 이는 중국 학계에 대한 이념 옥죄기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보여줬다. 갈수록 강화되는 중국의 국가 통제는 경제적 발전이 민주화와 정치적 자유를 불러올 것이라는 그간의 통념에 의문을 던진다.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키 병사 슐레이만에게 한국은 평생 애틋한 나라였다. 피보다 진한 정(情)을 나눈 다섯 살짜리 한국 소녀를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슐레이만은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소녀에게 터키어로 달을 뜻하는 ‘아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정성껏 보살폈다. 아일라도 그를 ‘바바’(아버지)라며 따랐다. 곧 개봉하는 한-터키 합작영화 ‘아일라’는 이들이 전쟁이 끝나며 헤어진 뒤 60년 만인 2010년 기적처럼 만난 사연을 담았다. ▷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른다. 한국전쟁에서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자연히 전쟁 후 최빈국이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 대한 관심도 높다. 한 달도 남지 않은 터키 대선 정국에서도 한국이 화제다. 제1야당 공화인민당의 무하렘 인제 후보가 ‘한국 모델’을 터키의 발전 모델로 제시한 데 따른 것이다. 그는 유세마다 “터키가 베네수엘라처럼 되려는가, 한국처럼 되려는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는 ‘한국 논쟁’으로 번졌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이끄는 친이슬람 성향의 정의개발당은 ‘한국 모델=미국 추종’으로 규정했다. 한 친여 매체는 “한국은 미국의 점령 아래 있는 나라”라며 그 근거로 서울의 중심에 미군기지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도 걸고넘어졌다. 다른 유력 일간지 칼럼니스트도 “째진 눈의 아시아인을 통해 팝송을 들려주는 게 서양의 전략”이라는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놨다. ▷이들의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한국에 대한 얄팍한 이해에 실소가 나올 따름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국의 사정을 국내 정치에 끌어들여 찧고 까부는 일이 먼 나라 얘기만도 아니다. 지난해 말 임종석 대통령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UAE) 특사 방문 이유를 놓고 탈원전 정책 불만 무마용, 왕가 비자금 마찰설 등 갖가지 ‘설(說)’이 쏟아진 게 대표적이다. 당시 한 UAE 교민이 필자에게 “한국 참 웃기는 동네”라는 현지 분위기를 이메일로 보내온 게 기억난다.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뭐야, 얘는 누군데 지금 1등이야?” 유튜브의 ‘1인 방송 진행자(유튜버)’인 ‘대도서관’(본명 나동현·40)은 지난달 자신의 방송에서 한 가수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을 내놨다. 음원 차트에서 갑자기 1위로 치솟은 가수를 겨냥한 말이었다. 이는 순식간에 화제가 됐다. 중장년층은 도대체 대도서관이 누군데 법석인지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채널 구독자 170만 명을 둔 ‘인플루언서(Influencer)’다. 매일 밤 그가 진행하는 유튜브 생방송에는 수만 명이 몰려들고 연간 수입은 17억 원에 육박한다. 그의 닉네임이 곧 브랜드다. ▷‘영향력 있는 인사’를 뜻하는 인플루언서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온라인상에서 1세대 인플루언서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소설가 이외수 등 유명인이었다. 오프라인상의 권위나 인기를 바탕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이슈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도서관을 비롯해 ‘보겸’, ‘포니’, ‘양띵’ 등 요즘 인플루언서는 그야말로 평범한 ‘슈퍼 개인’들이다. 화장만 잘해도, 입담만 좋아도 인플루언서가 될 수 있는 시대인 셈이다. ▷이들을 인플루언서로 만드는 힘은 대개 10, 20대에게서 나온다. 요즘 궁금할 때 검색하는 플랫폼은 세대를 구분하는 한 방법이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를 찾는다면 40대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10, 20대는 유튜브에서 ‘∼하는 법’ ‘같이 해요’ 등으로 동영상을 검색한다. 앱 분석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4월 기준 10대의 유튜브 사용 시간은 총 76억 분으로 카카오톡, 페이스북, 네이버 등 2∼6위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유튜브 스타들의 성공은 청년에게 새로운 희망이기도 하다. 기업들도 마케팅을 위해 ‘빅마우스’가 된 인플루언서 잡기에 나섰다. 개인의 독특한 재능과 취미가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2010년대 초반 파워블로거들이 기업으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은 뒤 우호적인 콘텐츠를 올리다 스스로 영향력을 상실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비가 내리던 12일 낮 제2서해안고속도로. 크레인 기사 한영탁 씨(46)는 자신의 투스카니 차량 가속페달을 밟았다. 1차로의 코란도 차량을 추월하더니 그 앞을 막아섰다. ‘쿵’ 소리와 함께 코란도에 들이받힌 투스카니는 2, 3m 밀려났다. 1.5km 전부터 차 옆부분이 중앙분리대에 닿은 채 벽을 긁듯이 서행하던 코란도도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한 씨는 자신의 차량 상태는 안중에 없이 곧장 코란도로 달려갔다. 운전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달리던 차량을 멈추려 낸 착한 교통사고였다. ▷도로에 못이나 철판 조각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다른 차 타이어에 펑크가 날까 봐 치우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자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데도 이타심을 발휘한다. 보통의 양심을 가진 이라면 “그쯤이야” 할 수 있다. 하지만 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대개 손익계산에 들어간다. 빚내서 기부하는 사람이 드문 것도 같은 이치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는 프린스턴대 신학대생들에게 ‘착한 사마리아인’(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을 주제로 설교하는 과제를 주고 실험을 했다. 학생들이 예배당으로 가는 길에는 연기자에게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게 했다. 그 결과 선행의 결정적 변수는 시간의 압박이었다. 배정받은 설교 시간까지 여유가 있던 그룹은 63%가 행인을 구한 반면 이미 늦었다고 들은 그룹은 오직 10%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사마리아인의 선함을 설교하러 가면서도 자신이 급할 때는 정작 눈앞에 쓰러진 사람을 외면한 것이다. ▷12일 그 현장을 지나간 게 나였다면 어땠을까. 과연 내 차를 망가뜨리면서까지 사고차량을 세우려 했을까. 더구나 멈춰서면 2차 사고의 위험이 도사린 고속도로였다. 그날 수십 대의 차량이 코란도를 스쳐 갔다. 물론 경적을 울리며 코란도 운전자에게 경각심을 주거나 119에 전화한 이들도 있다. 마음이 급해도, 손해를 봐도 이타심에 순간적인 기지까지 발휘한 의인이 있기에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지하철에서 골프채를 팔려면?” “서해대교를 한강으로 옮기려면?” 2000년대 초반 은행 취업 면접에 뚱딴지같은 질문이 등장했다. 이제는 ‘고전’이 된 면접 문항들이지만 당시 금융권 취업준비생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업종 특성상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은행권의 면접으로는 튀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은행권은 1990년대 중반부터 채용 과정에서 모범생보다는 이자수익 이상을 창출할 ‘영업맨’을 골라내려고 씨름했다. ‘은행 고시’로 불린 필기시험도 이때 잇달아 폐지됐다. 영업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최근 10여 년간 ‘열린 공채’도 화두였다. 정권마다 이름은 달리 했지만 스펙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강조한 데다 은행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학력 전공 영어점수 같은 획일적인 기준으로는 금융환경의 변화에 부응할 인재를 뽑기 어려웠다. 자연히 은행 공채에서 법대, 상경대 출신의 공고한 벽도 무너졌다. 지난해 공채에서 신한은행은 200명 중 30%, 우리은행은 150명 중 20%를 이공계 출신으로 채웠다. ▷우리은행이 올 상반기 공채부터 필기시험을 부활시켰다. 실무·임원면접만으로 행원을 뽑겠다고 선언한 지 11년 만이다. 지난달 28일 5시간 동안 치러진 필기시험에서는 ‘경제 트릴레마(3중 딜레마)’ ‘외환보유 종류’ 등 전문지식을 묻는 문제들이 다수 출제됐다. 앞으로 은행 공채에서 이처럼 경제, 금융지식과 상식을 묻는 객관식 위주의 필기시험이 부활한다. 채용 비리로 몸살을 앓은 은행권의 고육책이다. 기존에는 KB국민, KEB하나, NH농협은행 등 일부만 필기시험을 치렀다. ▷공정사회의 표상처럼 여겨졌던 ‘블라인드 채용’이 되레 채용 비리의 핵으로 지목된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은행권은 일단 청탁 시비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 점수대로 줄 세우는 방안을 택했다. 달라진 채용 방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가뜩이나 ‘취직 바늘구멍’ 뚫기로 힘겨워하는 취준생들이 채용 비리 후폭풍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듯해 씁쓸하다.}

2011년 영국 프로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악동’ 웨인 루니가 트위터에 올린 글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비난 글을 남긴 팬에게 “10초 만에 기절시켜 줄 테니 겁쟁이 소리 듣기 싫으면 훈련장으로 오라”고 응대한 것이다. 당시 맨유 감독이었던 ‘전설의 거장’ 알렉스 퍼거슨 경은 기자회견에서 루니를 꾸짖었다. “트위터 아니라도 인생에서 할 일이 100만 가지가 더 있다. 차라리 도서관에서 책을 읽어라. 정말이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시간 낭비다.” ▷최근 애플 공동 설립자인 스티브 워즈니악, 배우 수전 서랜던 등 유명인들이 경쟁하듯 페이스북 계정 삭제를 알리고 있다. 페이스북 탈퇴 운동(#DeleteFacebook)이다. 페이스북 개인정보가 대량 유출된 뒤 미국 대선에 무단 활용된 ‘데이터 스캔들’이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4분기(10∼12월) 북미 지역 페이스북 이용자가 100만 명이나 줄어든 것을 보면 ‘SNS 탈출’은 정보유출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기업의 반발도 시작됐다. 영국 최대 펍 체인 JD웨더스푼은 16일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자사의 모든 SNS 계정을 폐쇄했다. 웨더스푼 회장은 “매장 매니저들이 계정 관리를 하느라 매장의 고객 서비스에 소홀했다”고 했다. SNS가 사업에 되레 골칫거리가 됐다는 얘기다. 미국 전기자동차 업체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회장도 “상품이 남느냐, 죽느냐는 그 상품의 가치에 달렸다”며 홍보용 페이스북 페이지를 삭제했다. ▷한국에서도 ‘SNS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7월 SNS 계정을 가진 2000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3명이 SNS 피로증후군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계정 삭제까지는 망설이게 된다. 그간 쌓아온 삶의 기록을 모두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지배하는 주객전도를 피하기 위해 때때로 접속을 끊어 보는 ‘SNS 휴가’는 어떨까.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유럽연합(EU)이 거대 인터넷 공룡들을 겨냥해 ‘디지털세(稅)’를 신설한다.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등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유럽에서 올린 매출의 3%를 세금으로 회수할 방침이다. 글로벌 매출이 연간 7억5000만 유로(약 9900억 원)를 넘고, 유럽에서 5000만 유로 이상을 벌어들이는 150개 기업이 대상이다. 이 가운데 절반 정도가 미국 IT 기업이어서 트럼프발(發) ‘글로벌 무역전쟁’에 대한 EU의 대항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세금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1784년 영국은 남자들의 모자에 부과하는 ‘모자세’를 도입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모자가 품위와 예의를 표현하려는 신사들의 필수품이었다. 부자일수록 모자를 많이 가지고 있는 점에 착안한 일종의 ‘부유세’였다. 그러나 모자 제조상들이 기존 모자와 다른 형태의 ‘쓸 것’을 만들어 파는 등 세금 저항이 심해 11년 만에 폐지됐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상통화 과세, 로봇 노동에 부과하는 소득세인 ‘로봇세’ 도입 논의가 시작됐다. ▷디지털세 도입도 달라진 경제 환경에 따른 것이다. 기존 법인세 체계는 국경을 넘나들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인터넷 공룡들에게는 코웃음거리다. 이들은 유럽에서 세율이 낮은 아일랜드나 룩셈부르크 등에 본부를 두고 실제 돈을 벌어들인 나라에는 세금을 거의 내지 않는다. 이런 ‘꼼수 영업’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구글은 지난해 한국에서 스마트폰 앱 판매를 통해 1조4600억 원 정도를 벌었다. 하지만 한국 매출의 상당수를 아시아본부가 있는 싱가포르로 돌려 세금을 회피하고 있다. ▷최근 10년 새 글로벌 시장 지형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10년 전 시가총액 기준 전 세계 상위 20개 기업 중 1개에 불과하던 인터넷 기업은 이제 9개로 늘었다. EU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이들에 대한 고강도 과세안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인터넷 공룡들은 왜 전 세계에서 ‘동네북’이 됐는지 돌아봐야 한다. 덩치가 커진 만큼 그에 걸맞은 기업의 경제·사회적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2016년 미국 대선 때 페이스북 사용자 5000만여 명의 개인정보가 선거운동에 유용됐다는 의혹으로 후폭풍이 거세다. 당시 데이터 분석회사인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는 페이스북 사용자들에게 ‘디스이스유어디지털라이프’라는 앱을 다운받도록 유도했다. 성격 검사 앱을 표방했지만 실상은 페이스북 활동에 근거해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캠프는 CA로부터 이 데이터를 넘겨받아 유권자별 ‘맞춤형 전략’을 마련했다. 미국 유권자 2억 명 중 4분의 1이 피해를 봤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누르는 ‘좋아요’는 개인에게는 흘려버리기 쉬운 흔적이다. 하지만 그 흔적들을 한데 모아 놓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국 비즈니스위크의 수석 편집자였던 스티븐 베이커는 2010년 펴낸 ‘뉴머러티’에서 미국 유권자를 동네와 성별, 인종, 자녀 유무, 애완동물 보유 등 SNS 정보를 통해 10개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우려가 현실이 됐다. ▷실제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캠프는 CA로부터 넘겨받은 데이터를 활용해 디지털 운영에 매달 7000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특히 투표를 일주일 앞두고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지지자를 타깃으로 페이스북 총력전을 펼쳤다. 힐러리에게 우호적이던 흑인 유권자들에게 “힐러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약탈자(Super Predators)라고 생각한다”는 게시물을 집중 노출시켰다. 당시 트럼프 캠프는 이런 ‘맞춤 선거운동’에 만족했다. ▷페이스북은 수습에 나섰지만 개인정보 유용의 위험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사방 천지에 남겨지는 인간의 ‘흔적’을 좇는 수많은 기업과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에 ‘계정 설정에서 공개 범위 확인하기’, ‘낯선 기업에 정보제공을 동의할 때 두 번 생각하기’ 등 ‘페이스북에서 당신을 지키는 7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SNS에서 ‘좋아요’를 누를 때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가.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 진실은 현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현장만으로는 진실을 다 파악할 수 없습니다. 생생함과 객관성의 보고(寶庫)인 현장에 통찰력과 분석력이 곁들여질 때 진실은 한 걸음 성큼 더 다가올 것입니다. 동아일보 논설위원들이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때론 날카롭게, 때론 따뜻하고 사려 깊게 현장을 보고 곱씹어서 깊이 있고 명쾌한 현장칼럼을 전달하겠습니다. 》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1993년 8월 24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통로에 전지 6장짜리 실명 대자보가 내걸렸다. ‘한 교수의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을 밝힌다’라는 제목이었다. 서울대 화학과 우○○ 조교는 담당 교수인 신○○ 교수를 지목해 “교육을 빙자해 팔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었다” “양팔을 내밀어 뒤에서 포옹하는 자세를 취했다” 등 성희롱 사실을 조목조목 폭로했다. 또 이를 거부해 자신이 해임됐다고 주장했다. 25년 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이른바 ‘우 조교 사건’)의 시작이었다. 한국의 1호 ‘미투(#MeToo·나도 말한다)’로 불리는 이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하지만 2018년 현재 한국을 강타한 미투의 폭풍 속에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민낯은, 어쩌면 성폭력에 관한 한 수면 아래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게 한다. 25년 전 현장에 있던 인물들을 만나보고, 재판 기록을 포함한 1858쪽에 이르는 사건 백서 등 관련 자료를 들여다봤다. 세상을 뒤집은 “3000만 원 배상” 1993년 10월 서울민사지법에는 우 조교 측의 손해배상청구 소장이 접수됐다. 공동변론에 나선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미국에서 상원의원의 비서 성희롱이 이슈가 됐고, 일본에선 관련 판결도 있다. 해볼 만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건 공동대책위에서도 ‘sexual harassment’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만큼 성희롱은 낯선 개념이었다. 국내 첫 성희롱 재판이라 화제는 됐지만 승소를 내다보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우 조교에게 3000만 원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은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1994년 4월 18일 서울민사지법 526호 법정. 재판장인 박장우 부장판사는 “고소인 왔나요”라고 물었다. 우 조교를 일으켜 세운 뒤 박 판사는 20분 가까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근로자의 의사에 반해 성적 언동을 해 상대방이 성적 굴욕감을 느끼게 한 것은 성적 자유에 대한 침해일 뿐 아니라 고용과 근로에 있어서 성차별 금지 원칙에 위배되는 위법한 행위다.” 우 조교는 어깨를 떨며 눈물을 흘렸고, 법정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1심 판결 뒤 담당 재판부는 항의성 전화에 심한 후유증을 앓았다. “어깨 좀 쓰다듬고 손등 좀 만진 것 가지고 무슨 3000만 원이냐”고 반발하던 시절이었다. 반면 신 교수에게는 남성들로부터 위로와 격려 전화가 쇄도했다. 요즘 일부 남성 사이에 ‘미투 대처법’으로 거론되는 ‘펜스룰’은 이때도 등장했다. “시선을 여자의 눈 또는 몸에 두고 말하다 성희롱했다고 피소당할 수 있으니 대화할 때는 허공에 시선을 두라” “신입사원을 교육할 때는 예상치 못한 신체적 접촉을 할 수 있으니 연필 길이의 막대기를 지니고 다녀라” 등 황당한 대응책이 쏟아졌다. 펜스룰 식의 해법은 남녀 간 불필요한 오해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취지지만 또 다른 여성 차별 행위다. 감격은 짧았다. “우 조교가 조교직 연장 근무에 대한 강한 의사를 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성희롱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반격이 이어졌다. 일종의 ‘2차 가해’였다. 지난한 6년여간의 소송전 1995년 5월 23일 서울고법 405호 법정에서는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우 조교와 신 교수 측의 최후 변론이 이뤄졌다. “우 조교가 ‘소설을 썼다’는 건데 만약 그토록 황당무계한 거짓말이라면 탄로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실은 굉장히 단순하고 가까이에 있습니다.”(우 조교 측 박 변호사) “우 조교가 (성희롱이) 싫어서 여름에 두꺼운 재킷을 입었느니, 스웨터를 입었느니 그럽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몸을 좀 비틀든지, 뭣 하러 두꺼운 갑옷을 입습니까. 갑옷을 입으면서까지 그거를 감내할 그런 원고는 아닌 것 같습니다.”(신 교수 측 최모 변호사) 당시 사건 공동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최영애 여성인권을지원하는사람들 이사장은 “성폭력은 군대 내 폭력과 본질이 비슷하다. 누구도 막아주지 못하고, 문제 삼는 순간 ‘관심 병사’가 된다”며 “군대 폭력을 놓고는 ‘왜 피하지 않았느냐’ 하지 않잖느냐”고 지적했다.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우 조교는 1심 판결의 환호가 끝나기도 전 항소심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 가해자의 노골적인 성적 의도가 있어야만 성희롱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로부터 3년여 뒤 1996년 2월 대법원이 이를 파기환송했고, 그해 6월 “신 교수는 우 조교에게 500만 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판결이 나왔다. 변리사 시험을 준비했던 우 조교의 꿈은 6년여의 지난한 소송전 끝에 유예됐다. 당시 공동대책위에서 사건 실무를 맡았던 이수연 씨(현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조사과 여성인권팀장)는 “우 조교가 당시 심리적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현재 아이를 둔 엄마로서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우 조교는 당시 취직을 위해 몇 군데 입사지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당신이 그 우 조교냐”는 확인을 거쳐 불합격됐다고 한다. 이 팀장은 “요즘 성폭력 피해자들도 나쁜 꼬리표가 붙어 고용상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반면 신 교수는 2008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직했다. 피해자들이 성폭력 사실을 공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미투’ 하는 것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우 조교는 “저도 그냥 관두면 그만이었는데 누군가 또 당할지 모를 일에 대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우 조교를 공동변론했던 박 시장은 “우 조교는 주장이 강하고 까칠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말했다. 그후 25년, 무엇이 달라졌나 그로부터 25년. 16일 찾은 서울대 중앙도서관 통로에는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 ‘우리 안의 고은, 이윤택, 안태근을 몰아내자’ 등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한국에서 특히 들불처럼 번진 미투는 이제 대자보를 넘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공간을 확장했다.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거치며 성장한 한국 여성의 성평등 의식은 지금 미투 운동을 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이번에 우리 사회의 과제는 피해자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2차 가해를 막는 일이다. 미투는 성차별뿐 아니라 우리 안의 권위주의, 위계질서를 향해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다. 미투의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10∼20년 뒤 한국 사회의 모습을 결정할 수 있다. “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 원문보기: ▼▼“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 원문보기: “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 원문보기: ㅁ“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ㅁ“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판결 후 남성들로부터 격한 항의 받아” 원문보기: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의 1심 선고는 그간 친밀감의 표시라며 묵인해 온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해 피해자의 관점에서 철퇴를 내린 첫 판결이었다. 1심 재판장이었던 박장우 변호사(69)를 16일 서울 서초구 법무법인 미래 사무실에서 만났다. ―당시 주목을 받은 재판이라 판결까지 고심이 많았을 텐데…. “위법 여부를 따져 책임을 지우는 민사 사건으로만 생각했지 파장이 그렇게 클지 몰랐다. 첫 공판 때 우 조교 측 변호사 3명과 피고인 신모 교수, 서울대, 정부 측 변호사가 총출동했다. 혼잣말로 ‘중요한 사건도 아닌 것 같은데 전부들 오셨다’고 했다가 여성단체의 항의도 받았다.” ―신 교수에게 3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 취지는…. “신 교수 행위가 요즘 ‘미투’에 비하면 가볍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 조교에게 압박감과 불쾌감을 줬느냐에 중점을 두고 봤다. 또 위자료를 산정할 때 서울대 교수라는 게 피고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신성한 대학에서 그럴 수 있느냐는 거였다.” ―1심 판결 뒤 남성들 사이에는 저항도 있었는데…. “선고 다음 날 재판을 끝내고 나오는데 직원이 ‘부장님, 전화 왔다’고 해 법복도 못 벗고 전화부터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나는 ○○대 교수 ○○○인데, 네가 판사야?’ 하더라. 교수라는 분이 그렇게 거칠게 나오더라. 남성들의 반응이 상당히 격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신 교수의 성희롱에 대해 “다소 짓궂지만 호의적인 언동에 불과하다” “성적 접근의 의도가 있었다 해도 경미하다”며 우 조교의 청구를 기각했다.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이 뒤집혔을 때 어땠나. “1심 재판부가 망신당한 거였다. ‘우 조교 편만 들었다’고 남자들에게 비난 들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지속적으로 성희롱이 이뤄졌다. 우 조교도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부인이 될 사람인데 용납해선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성폭력 문제에선 현실 변화보다 법원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법대 신입생 시절 교수님께서 한 일본 판사의 퇴임사를 들려주셨다. ‘일평생 약자를 위해 노력한다고 했는데 돌아보니 강자를 위해 판결했더라’는 얘기였다. 강자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약자를 좀 더 배려해야 한다.”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되살아난 ‘사학 스캔들’에 휘청거리고 있다. 일본 재무성이 아베 총리 부부가 연루된 사학 스캔들을 무마하려 공문서 14건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그간 총리직이 걸린 9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아베 총리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자민당은 아베 총리의 장기 집권을 위해 당 총재를 3년씩 3연임할 수 있도록 당규까지 바꾼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내에서조차 쉽게 봉합되지 않을 분위기다. 아베를 향한 경쟁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사학 스캔들은 지난해 2월 처음 불거졌다. 학교법인 ‘모리토모학원’이 아베 총리 이름을 딴 초등학교 설립을 추진하며 국유지를 헐값에 사들인 게 시발점이었다. 아베 총리 부인인 아키에 여사가 명예교장으로 활동했고, 정권 핵심이 힘을 쓴 정황도 고구마 줄기처럼 나왔다. 사학 스캔들로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지난해 20%대까지 추락했다. 결국 그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승부수를 던졌고, ‘북풍(北風) 몰이’로 지난해 10월 총선에서 위기를 탈출했다. ▷그런데 이달 초 재무성이 공문을 조작한 사실까지 터져 나왔다. 학원 측이 재무성 회의에서 “아키에 여사가 ‘좋은 땅이니 잘 진행해 보라’고 했다”고 말한 대목 등이 공문에서 삭제됐다. 사학 스캔들이 개인 비리에 가깝다면 공문 조작은 국가의 기본을 흔드는 일이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사안이지만, 일본은 조용한 편이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국민성에다 아직도 국민들이 아베에 대해 ‘강한 일본을 건설할 리더’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사학 스캔들을 재점화한 것은 아사히신문이다. 아사히는 1년여간 집요하게 파고들어 2일 재무성의 공문 조작 의혹을 특종 보도했다. 보도 직후 재무성 관료 출신 인사는 “정권이든, 아사히든 어느 한쪽은 쓰러지는 궁극의 싸움”이라고 했다. 결국 재무성이 백기를 들며 아사히가 웃었다. 아베 총리는 북-일(北-日) 정상회담 카드로 탈출구를 찾고 있다. 아베 총리의 벼랑 끝 승부수가 이번에도 통할까. 홍수영 논설위원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