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이진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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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colee@donga.com

취재분야

2025-11-23~2025-12-23
칼럼100%
  • 中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횡설수설/이진영]

    중국에 ‘원자바오(溫家寶)식 셈법’이라는 게 있다. 그가 총리 시절 한 얘기로 “아주 작은 문제도 13억(지금은 14억 명)을 곱하면 큰 사건이 되고, 반대로 아주 큰 일도 13억으로 나누면 사소한 일이 된다”는 내용이다. 중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수치를 인용할 때 편리한 대로 이 셈법을 동원해 왔다. 중국의 GDP는 13조 달러로 미국(20조 달러)에 이어 2위다. 반면 1인당 GDP는 59위다(통계청·2018년 기준). 중국 정부는 국내 정치용으로 위세를 과시할 때는 세계 2위인 국가 GDP를, 대외적으로 “우린 아직 후진국”이라고 엄살 부릴 땐 1인당 GDP를 내밀었다. ▷지난해 중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어선 것이 확실시된다고 외신이 전한다. 한국은 1995년 1만 달러를 넘었고, 외환위기 때 주저앉았다가 2002년 회복했다. GDP 1만 달러는 세계은행 기준으로 고소득 국가(1만2375달러)에 바짝 다가선 ‘중상위 소득 국가’ 수준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40여 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중국 공산당이 2021년까지 건설하기로 약속한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가 앞당겨 실현된 것 아니냐며 샴페인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양적 성장만큼 빈부격차도 커지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선언하며 내세웠던 선부론(先富論)대로 중국 동쪽의 특구와 해안지역이 먼저 부유해진 반면 서부와 내륙은 여전히 가난하다. 도농 간, 도시 내 계층 간 소득 차도 크다. 2017년 지니계수는 0.467이다. 0.4 이상이면 불평등 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은 0.345다. 부동산 가격도 폭등해 하우스푸어 ‘팡누(房奴)’들이 부동산 투기로 재미 본 아주머니 ‘다마(大마)’에게 적대감을 갖는다. 금수저, 흙수저와 비슷하게 푸얼다이(富二代), 핀얼다이(貧二代) 등 부와 빈곤의 대물림을 뜻하는 유행어가 돈다. ▷14억 인구 중국의 경제성장은 한국 경제에 거대한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의미한다. 중국은 이미 세계 상위 10% 소득자가 1억 명으로 미국보다 많다. 지난해 중국인 여행객은 1억6800만 명으로 세계 여행객 10명 중 1명꼴이다. 1명당 초코파이 하나씩만 팔아도 14억 개다. 하지만 인구 14억이면 경쟁자도 그만큼 많아지는 거다. 더구나 중국은 기술 강국이다. 1인당 GDP 3만 달러를 넘겼지만 여전히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퇴행적 리더십으로는 5G 서비스 상용화 개시에서 나아가 6G 시대를 준비하는 1만 달러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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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리 없는 암살자[횡설수설/이진영]

    평화로운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는 미국 대통령. 멀리서 벌 떼 비슷한 소리가 나더니 곧 까만 비행 물체가 떼 지어 날아온다. 킬러 드론이다. 드론 군단의 무차별 공격에 경호 인력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다….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엔젤 해즈 폴른’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드론 테러 장면으로 시작된다. ▷미군이 3일 이란의 2인자이자 군부 실세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하는 데 동원한 MQ-9 리퍼(Reaper)는 현존하는 가장 치명적인 요인 저격용 드론이다. 일명 ‘닌자 폭탄’을 탑재한 MQ-9은 미 본토에서 원격조종해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도로에 있던 솔레이마니의 차량을 정밀 타격했다. 소리를 거의 안 내고, 최고 시속 482km에 최대 작전 고도 약 1만5240m까지 상승 가능하다. 첨단 통신장비, 미사일까지 완전 무장한 채 14시간을 체공할 수 있다. 움직이는 차량의 운전자는 놔두고 조수석에 앉은 표적만 ‘핀셋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2007년 실전 배치됐으며 2015년 현재 미군에 93대가 있다. ▷드론의 강점은 ‘가성비’다. 대규모 병력이나 특수장비 없이도 적을 죽이거나 핵심 시설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소리 없는 암살자’ 그 자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드론 공격으로 사살된 알카에다 조직원은 3300명이 넘는다. 예멘 반군은 지난해 9월 드론 10대를 띄워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석유시설 두 곳을 파괴했다. 석유 부국의 촘촘한 레이더 감시망이 속수무책으로 뚫릴 만큼 드론 탐지는 어렵다. 대부분의 드론이 몸체가 작고 레이더를 피해 저공으로 고속 비행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최근 한국이 들여온 고고도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는 무려 20km 상공에서 40시간 넘게 체공할 수 있다. ▷전장을 벗어난 드론은 실종자를 찾고, 씨를 뿌리고, 산불을 진화하는 등 사람을 살리는 용도로 활용된다. 지난해 12월 대구소방본부는 드론을 띄워 이틀 만에 실종 노인을 구조했다. 같은 달 충남 금산군에서 산불이 났을 때 금산소방서는 드론으로 정확한 발화 지점을 찾아내 1시간 만에 진화했다. 드론을 이용한 택배 배달 시대도 성큼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공격용 드론이 인공지능(AI)과 결합될 경우엔 더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AI 드론은 스스로 표적을 탐지하고 인식하고 분류해 공격할 수 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전쟁 수행도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드론 공격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무인 자동차가 사고를 냈을 때 제기되는 법적·윤리적 책임보다 훨씬 무거운 질문을 무인기 드론이 던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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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청년들의 가난, 86세대 책임이다

    ‘88만 원 세대’라는 청년들의 자조를 들으면 저성장 시대를 만난 불운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청년 빈곤이 50대인 86세대 때문이라는 논문이 나왔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48)가 최근 ‘한국사회학’에 게재한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이다. 이 교수는 각종 통계자료를 활용해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세대가 권력과 부를 너무 많이, 오랫동안 쥐고 있는 바람에 젊은 세대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분석했다. 86세대가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새롭지 않다. 45세 미만 국회의원 비율은 6.33%로 150개국 가운데 143등이다(시민단체 ‘국회를 바꾸는 사람들’ 자료). 그래서 청년 공천 할당제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86세대가 여느 세대보다 근속 연수가 길고, 소득 상승률이 높으며, 오랫동안 최고소득을 점유해 다른 세대와의 격차를 벌렸다는 분석에는 눈길이 간다. 86세대의 경쟁력은 조직력이다. 산업화 세대가 학연 지연 혈연을 따지는 동안 86세대는 민주화란 목표 아래 학연 지연 혈연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뭉칠 줄 알았다. 민주화 이후 1990년대부터는 수만 개의 시민단체를 만들어 연대했는데 86세대의 1인당 가입 조직 수는 0.451개로 50년대 세대(0.209개)와 70년대(0.331개), 80년대(0.185개)보다 훨씬 많다(대졸자, 2010년 기준).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다져온 조직력은 뜻밖에도 정치권력은 물론 밥그릇을 챙기는 데도 밑천이 됐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 당시 30대였던 86세대는 살아남았다. 여기까진 운이다. 이후로는 특유의 전투력을 발휘해 노조 활동으로 정규직과 높은 임금상승률을 얻어냈다. 대가는 후배 세대가 치렀다. 기업들이 노동비용 상승에 생산시설 해외 이전, 비정규직 확대, 하청업체 단가 후려치기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100대 기업의 임원진 가운데 50대 비율은 대개 60% 선인데 2017년엔 70%가 넘었다. 이 교수는 “정치권력의 주류세력에 맞춰 기업도 줄을 대기 위해 비슷한 연배를 기용하기 때문”이라며 권력 불평등이 경제 불평등을 낳는다고 해석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평등 심화의 핵심은 세대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라고 진단했다. 김수정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86세대가 세대 간 경쟁의 승자라는 주장은 과장됐으며 부양 부담을 고려하면 86세대는 오히려 ‘낀 세대’”라고 했다. 부모 세대로부터 풍요로운 시장을 물려받고, 외환위기의 칼날을 피하고, 2000년대 닷컴 붐을 타는 등 운이 좋았을 뿐 세대 간 불평등을 의도한 게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86세대가 누리는 기회가 운 덕분이라면 불운한 세대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걸까. 요즘 청년들은 많이 배우고도 취업을 못 한다. 첫 직장을 갖는 데 실패하면 그 이후로는 더욱 험한 난관을 만나게 된다(상처효과·scarring effect). 혼인율과 출산율이 괜히 떨어지는 게 아니다. 청년수당이라며 돈 몇 푼 쥐여주는 일회성 정책보다는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공평하게 나눠 갖는 세대 간 연대가 필요하다. 산업화 세대를 대표하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황정민)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86세대는 “세대의 행운을 우리만 누린 게 미안하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교수 표현대로 “밥그릇 싸움 너무 잘해서 손주 못 보는 세대”로 전락할지 모른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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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수많은 ‘정준영’들,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

    정준영 동영상 스캔들이 터지자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이렇게 논평했다. “사회 곳곳에 여성과의 성관계 경험을 과시하는 수많은 ‘정준영’들이 존재한다. 그가 공인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은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갔을 것이다.” 연간 불법 촬영 범죄 증가율은 두 자릿수다.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인데 5명 중 1명은 연인이나 친구 같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다(경찰청 자료). 그래서 정준영 기사엔 이런 댓글들이 달린다. “우리 오빤 아니겠지?” “몰카 무서워서 못하겠네.” 사실 몰카가 아니어도 선진국의 남녀 간 잠자리 횟수는 줄어들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가 그렇다. 진 트웬기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1990년대 미국 성인은 월 5.2회 성관계를 했지만 2014년엔 4.5회로 줄었다. 밀레니얼 세대 중 15%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성경험이 없었는데 이는 X세대(1970∼80년생)의 2.5배다. 영국은 16∼44세 남녀의 성관계 횟수가 2001년 월 6회에서 2012년 5회로, 같은 시기 호주는 월 7.2회에서 5.6회로 줄었다. ‘초식남’의 나라 일본은 18∼34세 미혼 남녀 가운데 성경험이 없는 비율이 2005년 33%에서 2015년 43%로 늘었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은 스웨덴도 성관계 빈도가 줄어 출산율에 영향을 줄까 걱정하고 있다.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은 이러한 추세를 ‘섹스 불황’으로 규정하고 젊은이들이 잠자리를 피하는 원인을 분석했다(2018년 12월호). 우선 학업과 취업 부담 때문에 깊게 사귈 여유가 없다. 젠더 감수성이 발달하면서 여자들은 데이트가 성폭력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남자는 오해받을까 봐 머뭇거린다. 소셜미디어의 비현실적인 비주얼에 스스로 주눅이 든 젊은이들도 있다. 데이팅 앱 덕분에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오히려 딱 한 사람을 고르기는 더 힘들어졌다. ‘선택의 역설’이다. 경제 불황과 달리 섹스 불황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여성이 원치 않을 때 ‘노’라고 얘기할 수 있고, 남성은 이를 배려하게 됐기 때문이니 빈도가 줄어든 건 섹스 불황이 아니라 건강한 ‘섹스 다이어트’라는 것이다. 댄 칼슨 미국 유타대 교수(가족소비자학)는 “성관계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은 빈도가 아니라 평등한 성역할”이라고 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가부장적인 커플이 자주 하지만 만족도는 평등한 부부 쪽이 높았다. 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성생활에 관한 믿을 만한 통계는 없지만 미국이나 일본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 이솜과 안재홍이 주연한 영화 ‘소공녀’(2017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가난한 젊은 남녀가 한겨울 난방이 안 되는 자취방에서 사랑을 나누려다 너무 추워서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봄에 하자”면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섹스의 진화’에서 인간의 성적 습성은 다른 동물들과 공통점을 찾기 힘든,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라고 했다. 남이 안 보는 데서 사랑을 나누고, 생식이 아닌 쾌락을 위해 관계하며,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한 파트너와 오래 만나는 종은 인간 말고는 없다. 원만한 성생활이 행복감을 준다는 연구는 너무나 많다. 그런 걸 취업이 걱정돼 못하고, 추워서 못하고, 봄이 와도 몰카가 무서워 못한다면 그건 개인 사정이 아니라 사회 문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페미니즘의 슬로건이다. “몇 번 하느냐” “하면 좋으냐”는 질문도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정치적인 질문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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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김정은 위원장, 고향 가게 해 주세요”

    하노이 ‘빈손’ 회담 소식에 신은하 씨(32·여)는 힘이 빠졌다. 1998년 가족과 북한을 탈출해 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을 거쳐 2003년 서울에 정착한 그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일요일 오후 11시 방영) 북-미 정상회담 특집을 위해 하노이를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행사장 주변을 바쁘게 오가는 그에게 어머니는 “곧 집에 갈 수 있게 되는 거냐”는 기대 어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서울 생활 17년째지만 어머니에게 ‘집’은 여전히 부모의 산소가 있는 함경북도 무산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귀국 짐을 싸는 그를 숙소인 호텔에서 만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고 있는 멜리아 호텔과는 차로 20분 거리다. ―김 위원장과 사흘간 같은 도시에 있었네요. “북한에서도 못 보던 사람을 이곳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죠.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평양에는 간 적이 없어요. 제게 김씨 일가는 별나라에 사는 딴 세상 사람이었어요.” ―김 위원장은 열차를 타고 중국을 종단해 하노이에 도착했어요. 은하 씨 가족이 목숨을 걸었던 탈북 루트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그가 하노이까지 66시간이나 걸렸다고 놀라지만 저는 고작 66시간밖에 안 되나 놀랐어요. 우리 가족은 하노이까지 오는 데 5년이 걸렸거든요. 눈을 피해 길이 아닌 곳으로 걷다 보니 구르고 넘어지고 늪에도 빠졌어요. 베트남 국경경비대에 붙잡혀 감옥에 가고 브로커에게 속아 돈만 털리기도 하고요.” ―김 위원장이 가까이 있고 북한 사람도 많은데 무섭진 않은가요. “북한대사관을 지나칠 땐 소름이 돋았어요. 하지만 제겐 대한민국 여권이 있잖아요. ‘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을 잘 보호해 달라’는 문구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지금도 가장 고마운 게 여권이에요. 담배 한 보루 찔러준 적도 없는데 신청한 지 일주일 만에 나오는 여권이 정말 신기했어요.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김 위원장을 태운 차량을 향해 울면서 “고향 가게 해 주세요” 하고 외치는 모습이 외신에 보도돼 주목받았죠. “마음이 복잡했어요. 돌이라도 던지고 싶고, 고향 사람이라 반갑기도 하고. 북한이야말로 ‘헬조선’이지만 탈북민들에겐 고향이잖아요. 김정은은 밉지만 그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16년 만에 다시 찾은 하노이, 많이 변했죠. “오토바이밖에 없던 도로에 차가 많이 다녀요. 고층빌딩이 많은데 여기저기서 또 짓고 있어 활기가 느껴져요. 북한도 베트남처럼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 때 먹은 소금, 자식 때 물 들이켠다’는 베트남 속담이 있다고 해요. 권력 분산과 개혁개방이냐, 폐쇄적인 세습체제냐, 같은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선대의 다른 선택이 오늘의 활기찬 베트남과 가난한 북한을 만들었죠.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묻는 질문에 ‘내 자식들은 핵을 이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죠. 전 이 뉴스를 보고 화가 났어요. 4대 세습을 생각하나 싶어서요.” ―독재자란 잠자리에 들 때 다음 날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 못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습이 아니면, 핵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탈북’이 필요할 듯하네요. “‘이밥에 고깃국, 그리고 비단옷’이라는 김일성의 꿈을 이뤄준다면, 그래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핵이 없어도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을까요. 북한이 잘살고 자유롭게 고향에도 갈 수 있게 되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받은 고통에 한해서는요.” ― 하노이에서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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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헬리콥터 맘에 관한 불편한 진실

    교육열이라면 중국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스카이캐슬 맘’이 맹활약하는 동안 중국에선 타이거 맘을 체험하는 게임 ‘중국 부모’가 대박을 냈다. 젖먹이 아이를 키워 피아노 수영 코딩 학원에 보내고 성적을 관리해 대학 입시를 치르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을 즐기는 10, 20대들은 타이거 맘이라면 질색일 텐데 막상 부모 입장이 돼 보고선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다. 자녀 주변을 빙빙 도는 헬리콥터 맘이나 무섭게 닦달하는 타이거 맘은 모두 비교육적인 양육법으로 지탄받는다. 하지만 효과는 있다는 경제학자의 책이 나왔다. 미국 예일대와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쓴 ‘사랑, 돈, 양육: 양육법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이다. 뉴욕타임스는 ‘헬리콥터 양육에 관한 나쁜 뉴스’라며 책 내용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선진국 15세 학생들의 2012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와 부모의 양육 방식을 분석한 결과 ‘빡센(intensive)’ 양육법으로 길러진 아이들의 성적이 더 좋았다. 학력 수준이 비슷한 부모들만 놓고 분석해도 결과는 같았다. 대학을 나오든 아니든 월급 차이가 크지 않았던 1970년대는 방임형 부모가 많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임금 격차가 커지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했다. 어린 시절 자유롭게 자라난 미국의 중산층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에겐 이전 세대보다 매주 12시간을 더 쓰기 시작했다. 저자들은 빡센 부모를 다시 독재적인(authoritarian) 유형과 권위 있는(authoritative) 유형으로 구분하고 후자가 더 효과적이라고 썼다. 독재적인 부모는 지시하고 매도 든다. 권위 있는 부모는 아이가 옳은 방향으로 가도록 설득한다. 권위 있는 부모의 자녀는 대학이나 대학원 진학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자존감이 높고 마약이나 술 담배를 하는 비율도 낮았다. 한국 전문가들의 견해도 비슷하다. 본보는 2016년 초등학교 고학년을 둔 부모들의 양육법에 관한 특집을 보도했다. 학자들은 ‘서울 의대’라는 목표치를 제시하고 닦달하는 헬리콥터 맘도 나쁘지만 기대치를 표현하지 않고 무조건 아이의 자율에 맡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에겐 인정 욕구가 있고 100% 내부의 동기만으로 공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김희정 한국교원대 교수). 특히 성취욕구가 강한 알파걸은 “스카이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에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 있다(이윤주 영남대 교수). 이제 효과가 입증됐으니 다들 헬리콥터 맘, 아니 권위 있는 부모가 되는 일만 남은 걸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부모 되기가 어디 쉬운가. 넘치게 주고 싶어도 가난해서 모자라게 주고 미안해하는 부모들은 더 많다. 헬리콥터 맘들은 대학입시가 끝나도 끼리끼리 계속 만난다. 입시를 치르며 싹튼 전우애 때문이지만 만나다 보면 인턴이나 취업에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게 되고 아이들에게 더욱 튼튼한 사다리를 놓아주게 된다. 헬리콥터 맘이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헬리콥터 부모의 실패로 끝났다. 게임 ‘중국 부모’는 현실적이다. 아이가 대학입시를 치르면 게임은 끝나는데 새로운 게임은 이전의 자녀가 따놓은 점수에서 시작한다. 첫 세대의 입시 성적이 엉망이면 다음 세대는 점수 따기가 더 힘들어지고, 반대로 베이징대 합격 점수를 따놓고 끝나면 다음 세대부턴 수월해진다. 이 게임으로 여덟 세대를 키워본 게이머가 말했다. “단거리 달리기인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는 계주임을 깨달았다.” 헬리콥터 양육법이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불편한 이유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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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보이지 않아도 달린다

    김미순 씨(58)는 마라토너다. 15년간 동아마라톤을 포함해 공식 대회 풀코스 340회, 100km가 넘는 울트라 마라톤 75∼80회를 달렸다. 국내 울트라 마라톤 그랜드 슬램(강화∼강릉 308km, 부산∼임진각 537km, 해남∼고성 622km)을 2회 달성했는데 여성으로는 처음이고, 시각장애인으로도 처음 세운 기록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김 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손잡고 달린다. 채널A ‘뉴스A라이브’의 새해 첫 인터뷰 주인공으로 화제가 된 그를 만나러 부부가 운영하는 인천의 카센터를 찾았다. 김 씨는 따뜻한 차를 끓여냈다. ―오늘도 산을 넘어 출근하셨나요. “네. 매일 남편과 손잡고 5.5km를 걸어 청량산을 넘어와요. 남편이 차를 수리할 때 저는 2시간 동안 스트레칭하고, 윗몸일으키기 120회 하고, 아령으로 근력 운동을 해요. 언제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만드는 거죠. 공부는 몰라도 운동엔 벼락치기가 없어요.” ―마흔이 넘어서 마라톤을 시작하셨죠. “출산 후 희귀 질환인 베체트병에 걸려 마흔에 전맹(全盲)이 됐어요.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헬스장에서 운동하다 마라톤을 시작했죠. 어둠 속에 갇혀 지내다 밖으로 나오니 살 것 같았어요.” ―부부가 늘 손잡고 뛰던데요. “시각장애인은 가이드 러너가 있어야 해요. 남편이 저를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거죠. 뛰다 보면 서로 알아요. 남편은 제 얼굴 보고 알고 저는 남편 손 감촉으로 알고요. 아 이 사람이 힘들구나, 싶으면 서로 속도를 늦춰주고 다독이며 함께 달리죠.” ―마라톤 풀코스도 어려운데 울트라 마라톤까지…. “부산∼임진각 종단 코스 537km를 107시간53분에 완주하고는 둘이 안고 펑펑 울었어요. 손잡고 뛰다 보니 속도가 느려 5일간 길에서 쪽잠 자고 달렸어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이 먼 거리를 달려왔다니 너무나 신기했죠. 찌그러져 지내다 느끼는 자신감과 충만함이란…. 풀코스는 기록이 중요하니 다들 앞만 보고 뛰어요. 반면 울트라는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뛰죠. 다리에 쥐가 난 사람을 보면 주물러주고, 목말라하면 한 모금 남은 물병을 내줘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되죠.” ―다양한 코스의 차이를 느낄 수 있나요. “그럼요. 공기와 냄새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남편이 다 말해줘요. 여긴 진달래가 피었네, 앞에 달리는 사람은 무슨 색 옷을 입었네, 방금 지나친 나무는 무엇이고, 이제 곧 바다다, 계단이 시작된다, 끝이다…. 코스를 떠올리면 눈앞에 다 그려져요.” ―가톨릭 신자이시죠. 왜 실명이라는 시련을 주셨을까요. “교만하지 말라는 뜻 아닐까요. 희귀병 진단을 받고 10년 안에 실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납득할 수 없었어요.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왜? 하늘이 정하면 거부할 수 없고, 모든 노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10년이 걸렸죠. 내 자존심 걱정, 남 시선 걱정하느라 그 시간을 허비한 게 후회돼요.” ―소설가이자 마라토너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마라톤에 관한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맞아요. 달리기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만 이대로 주저앉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만 뛰고 싶다’는 유혹이 끝없이 밀려와요. 이걸 참아내면 가는 거고, 못 참으면 신발 벗는 거죠. 전 계속 달리기로 했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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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오빠 페미니스트’ 유시민의 ‘축구론’

    이번엔 20대 남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은 최근 특강에서 20대 남성의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이유에 대해 정부의 여성 우대 정책과 양심적 병역 거부 합헌 결정, 미투 운동 등 일련의 사회 움직임을 들었다. 그러면서 20대 남자들이 화낼 만도 하다며 “여자들이 훨씬 유리하다. 남자들은 축구도 봐야 하고 게임도 해야 하고 모든 면에서 불리하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 남성 비하 발언으로 해석돼 불을 질렀다. 유시민은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반기지 않는다. 진보논객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저서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에 따르면 유시민은 ‘오빠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을 이론으로만 알면서 “오빠가 설명해줄게” 하며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 오빠가 허락할 수 없는 수준의 페미니즘은 반대하는 사람을 뜻한다. 유시민은 ‘조개론’으로 일찌감치 여성계의 미움을 샀다. 2002년 대선 당시 개혁국민정당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 공론화 움직임이 일자 대표집행위원이었던 그가 “해일 몰려오는데 조개 줍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 2006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여성 의원이 “저열한 성의식을 갖고 있다”며 조개론을 비판하자, 그는 “당내의 작은 일로 회의 시간이 소모되는 것에 대해 ‘해변에서 조개껍질 들고 놀고 있는 아이와 같다’고 했는데 왜곡됐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강준만 교수는 책에서 “그 후로도 유시민 계열의 진보주의자들이 페미니스트를 탄압한 사건이 있었지만 조개론의 원조 유시민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조개론을 추인했다”고 반박했다. 또 자기 진영을 비판하기보다 감싸겠다는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론’이 조개론을 포함하고 있다며 “개혁과 진보를 원한다면서도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는 내부 총질이기에 집중 공격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유시민의 ‘축구론’과 조개론은 묘하게 닮았다. 그는 문제의 강연에서 “20대 남녀 성별로 지지율 격차가 크게 나는 것은 대통령이 이성적인 관점에서 올바른 방향으로 정부의 권한을 행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정부가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진보 성향의 남성 커뮤니티에선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너희가 희생 좀 해라’ 이런 식이네”라는 반응이 나왔다. 조개론에 대해 여성계가 “대의를 위해 일상의 차별에 눈감으라는 논리”라고 반발한 것과 비슷하다. 그의 강연에서 20대 남성들을 건드린 또 다른 대목은 “정치인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대중의 욕망을 이용하는 자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성직자의 자세로 일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문 대통령은 정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이 20대 남성들의 욕망에 위배되면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뜻”으로 해석됐고, “진보 세력의 고질적인 문제인 선민의식과 계몽주의를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조개론도 ‘우리 편은 항상 옳으니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비민주적 진영 논리라고 비판받았다. 인터넷 독립저널을 운영하는 김아현 씨(23)는 올 4월 본보 기획기사 ‘이제는 386세대가 적폐…진영 논리 거부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반격’에서 “거악이 사라지고 정의가 실현되면 개인도 행복할 거라는 꼰대식 생각은 먹히지 않는다. 정책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지금은 거대담론보다 나의 작은 권리가 소중하고,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은 다양한 정체성 정치의 시대다. 조개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비슷한 축구론을 다시 꺼내든 것, 이것이 여권의 정신적 지주 유시민이 양쪽에서 뺨맞는 이유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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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文 지지율 끌어내린 ‘오늘밤 김제동’

    KBS1 TV 시사토크쇼 ‘오늘밤 김제동’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회복에 악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나왔다. 10일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이달 첫째 주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답방 뉴스로 주중 50%대를 회복한 지지율은 ‘오늘밤 김제동’의 ‘김정은 위인맞이 환영단’ 단장 인터뷰가 논란이 된 7일 48.7%로 떨어졌다. 청와대 특별감찰반 비위와 조국 민정수석 거취 공방이 거셌던 4, 5일에도 회복세가 꺾이지 않던 지지율이었다. ‘오늘밤 김제동’은 억울할 것이다. 9월 10일 첫 방송부터 지금까지 ‘오늘밤 청와대’라 착각할 만큼 대통령 홍보에 열을 올려왔기 때문이다. 첫 회부터 9회까지는 ‘D-7 3차 남북정상회담 평양행’ ‘D-5…평양행’ ‘3차 남북정상회담 DAY1’ ‘짐 로저스가 말하는 남북경협’ 등 하루도 거르지 않고 회담 분위기를 띄웠다. 그 절정은 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했던 9월 27일 9회 방송이다. 이날 아이템 3개가 모두 대통령 관련 뉴스였다. 먼저 이 프로 담당인 이윤정 PD가 나와 “3차 남북 정상회담에 동행한 대한민국 유일의 PD”라며 대통령의 능라도 경기장 연설 등 평양 취재기를 들려줬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지낸 강원국 씨를 초대해 “아이들 작문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문 대통령의 연설문을 해설했다. 마지막으로는 “문 대통령 연설에 대한 현지 반응을 안 들어볼 수 없다”며 뉴욕 PD특파원을 연결해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전했다. 찬반이 나뉘는 이슈를 다룰 땐 일방적으로 정권 편을 든다. 평양공동선언 비준 문제가 논란이 되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장이 나와 “문제없다”고 정리했다. ‘남북철도 도로 연결 사업은 퍼주기’라는 비판이 제기됐을 땐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차관급)이 출연해 “가짜뉴스”라고 했고, 9·13 부동산대책 발표 후 ‘종부세 인상은 세금 폭탄’이라는 불만이 나오자 박영선 민주당 의원이 “실체 없는 가짜뉴스”라고 일축했다. 지난달 21일엔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이 출연해 탄력근로제 확대를 반대하는 이유를 길게 설명했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날 문 대통령은 여야정 상설협의체에서 약속했던 합의(탄력근로제 확대 연내 처리)를 뒤집었다. 편파 논란, 품질 시비에도 ‘오늘밤 김제동’은 24년간 방송된 ‘뉴스라인’을 밀어내고 3일부터 밤 11시로 시작시간을 30분 앞당기고 방송시간도 40분으로 10분 늘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시사쇼 형식을 빌려 편파 방송하는 ‘생방송 시사투나잇’이 있었다. 그래도 그땐 상업적인 채널인 KBS2 TV였고 시간대도 자정 이후였다. 왜 KBS는 형평성 균형성 공정성이라는 기본적인 방송 원칙도 무시하는 시사쇼를 전진 배치하기 위해, 공정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정통 뉴스 프로를 폐지하는 무리수를 뒀을까. 김정숙 여사는 2012년 출간한 ‘정숙씨 세상과 바람나다’에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 때 몇몇 방송인에게 사회를 부탁했는데 전부 거절했다. 그때 망설임 없이 나서준 제동 씨”라며 “이 일로 제동 씨가 방송 일을 하는 데 차질을 빚어 저나 남편이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대통령 부부의 이런 마음을 KBS가 헤아려 ‘오늘밤 김제동’을 편성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정권에 쓴소리 한마디 못 하는 방송은 대통령에게 독이고, 가짜뉴스로 어지러운 시대에 정통 뉴스를 줄인 국가 기간방송에는 부끄러움이며, 강제로 수신료 내고 편파방송을 보아야 하는 시청자들에겐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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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기자와 말싸움하는 대통령이 부럽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수보회의)를 3주째 열지 않았다. 참모진의 보고 참사와 기강 해이에 대통령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수보회의는 문 대통령이 소통을 강조하며 취임 초부터 공들인 회의체다. 대통령의 수보회의 모두발언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돼 주요 현안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창구 역할도 해왔다. 그런데 참모들과 소통하는 수보회의 휴업보다 심각한 게 있다. 국민과의 소통 기회인 기자회견 휴업이다. 문 대통령의 공식 기자회견은 취임 후 모두 5회로 월평균 0.26회다. 미국, 프랑스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을 포함한 숫자다. 간간이 ‘위안부 태스크포스(TF) 조사결과에 대한 대통령 입장문’ ‘김기식 금융감독원장 관련 대통령 입장문’ 등 일방적인 의견 표명은 했지만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도 없었다. 같은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대통령의 중요한 의무다. 기자를 싫어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지난해 1월 취임 후 공식 기자회견을 38회 가졌다. 대부분 공동 기자회견이지만 어쨌든 월평균 1.65회다. CNN 기자와 삿대질하며 말싸움을 벌였던 7일 기자회견이 가장 최근 행사였다. 중간선거 후 열린 이날 회견은 1시간 27분간 진행돼 66쪽 분량의 녹취록으로 남았다. CNN 기자와의 설전이 두드러지긴 했지만 비좁은 브리핑룸에서, 배석한 참모들도 없이, 혼자서 100개가 넘는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내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모든 현안을 꿰고 국정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비공식 기자간담회도 취임 후 20회 넘게 했다. 정상회담 시작 전이나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할 때도 있고, 외부 행사장에서 기자들이 질문하면 “망해가는 신문사가…” 하고 험한 말을 하면서도 피하지는 않는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녹취록은 모두 백악관 홈페이지에 올라온다. 공식 기자회견조차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은 빼고 준비된 모두발언만 업로드하는 청와대와는 대조적이다.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1913년 윌슨 대통령 시절에 시작돼 1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이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함으로써 대통령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에 화내고 웃는지, 리더십은 어떤지 국민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매월 6회 안팎의 기자회견을 했다. 1955년 아이젠하워 대통령부터 기자회견이 TV로 방송되면서 부담이 되자 월평균 2회 안팎으로 줄였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스캔들, 클린턴 대통령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만신창이가 됐을 때도 생방송 기자회견을 거르지 않았다. 관훈저널은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논란이 일었던 2015년 봄호 특집기사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 기자회견 변천사’에서 문민정부 출범 이후에도 한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나아지긴 했지만 달라지진 않았다’고 혹평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매달 정례 기자회견을 한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유일했는데 그마저도 1999년 옷 로비 사건이 터지면서 빈도를 줄였다. “대통령이 한 달에 한 번만이라도 기자회견을 했더라면 국민이 궁금해하거나 답답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귀찮아했고 비서진은 기자회견을 두려워했다. 호가호위하는 비서진의 인의 장막에 의하여 대통령이 국민과 고절되어 있을 때 정치가 잘될 리가 만무하다.” 동아일보가 박정희 대통령 취임 이듬해인 1964년 2월 17일 게재한 사설이다. 사설 속 대통령은 ‘이승만’인데 ‘문재인’으로 바꿔 읽어도 무리가 없으니 답답하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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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남학생 수능 성적, 여학생만큼 올리는 법

    이변이 없는 한 올해도 여학생이 더 잘 볼 것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말이다. 지난해 수능에서 여학생은 국어와 수학 성적 모두 남학생을 앞질렀다. 절대평가로 바뀐 영어도 여학생의 1등급 비율이 남학생보다 높았다. 이과 수학에서 여학생이 남학생을 앞지른 것은 지난해가 처음이었다. “수능 수학이 쉬워져서”라는 분석이 나왔지만, 2015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여학생은 읽기 수학 과학 전 과목에서 남학생을 추월했다. 한국만이 아니다. 여성의 문맹률이 높은 나라를 제외하면 똘똘한 ‘알파걸’에게 치이는 ‘베타보이’를 걱정한 지가 10년이 넘는다. 원인은 여럿이다. 우선 절대 공부량이 다르다. 15세 학생이 매주 숙제하는 데 쓰는 시간이 여학생은 5시간 30분, 남학생은 4시간 30분이다. 반면 온라인 게임 시간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17% 길다(영국 이코노미스트 2015년). 듣고 쓰기 위주의 학교 교육이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는 남학생에게 불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캐나다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은 베스트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경쟁을 좋아하고 반항적인 남자아이는 순종을 가르치려고 설립된 학교에 맞지 않는다. 여자아이와 경쟁해 이겨도 칭찬받지 못하고 지면 망신당하는 분위기 속에서 위축된다”고 했다. 미국 시사전문 애틀랜틱은 9월 남학생이 공부를 못하는 이유는 책을 덜 읽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독서엔 공부를 위한 것과 즐거움을 위한 것(reading for pleasure)이 있는데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독서량에서 남학생이 뒤진다는 것이다. 한국도 남학생이 책을 덜 읽는다. 이과 수학마저 남학생이 뒤처졌던 지난해 고3들의 초중고교 시절 독서량을 추적해봤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남학생의 독서시간이 평일 56분, 주말엔 60분으로 여학생보다 매주 25분 덜 읽었다(2010년 국민독서실태조사 자료). 중3 땐 35.1분간 덜 읽었고(2013년), 고3 땐 여학생보다 1.5분 더 읽었다(2017년).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남학생은 ‘지식을 습득하려고’, 여학생은 ‘좋아서’라고 답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좋아서 하는 독서는 힘이 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6년 고교 2학년생 10만여 명을 조사한 결과 책을 많이 읽는 학생이 성적도 좋았다. 수학 성적도 그렇다. 영국 런던대 교육연구소는 2013년 영국의 16세 학생 6000명을 추적 조사했는데 10세 때부터 책과 신문을 즐겨 읽은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어휘력은 14.4%, 수학 성적은 9.9% 높았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학력수준보다 성적에 더 큰 영향을 주는 게 독서량이었다. 미국 텍사스주 고교생(2016년)과 오하이오주 고교생(2015년)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즐거움을 위한 독서가 수학 성적을 올려주는 것으로 확인됐다. 호주 멜버른대 몰리 맥그리거 교수(교육학)는 “언어능력 자체가 수학 문제를 푸는 능력으로 치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능력이 떨어지면 수학도 못한다. 언어와 수학 모두 상징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베타보이를 위해 남녀 간 신체 발달 차이를 감안한 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남자 교사를 늘리자는 제안이 나온다. 스포츠나 자동차에 관한 책을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고, 책 읽는 남자를 ‘쿨’하게 여기도록 롤 모델을 보여주자는 아이디어도 있다. 어떤 대책이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건 독서량에서 남녀 격차를 줄이지 못하면 성적 차이도 바뀌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언어뿐만이 아니다. 책을 안 읽으면 수학도 과학도 잘하기 힘들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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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이국종이 웃지 않는 이유

    다시 이국종이다. 2011년 석해균 선장을 살려내고, 2017년 총상으로 벌집이 된 북한 귀순 병사를 소생시킨 ‘국민 의사’ 이국종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과장(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장)이 새롭게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그의 비망록 ‘골든아워’는 출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1, 2권 판매 부수가 13만 부를 돌파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장엔 잠깐 참고인으로 나와 ‘신 스틸러’로 주목받았다. 바다 위 응급환자를 위해 헬기를 타고 출동하는 장면을 담은 KT 광고 영상은 “역시 갓국종”이라는 찬사와 함께 조회수 2000만 회를 훌쩍 넘겼다. 그는 방송사 섭외 1순위다. 6일에는 채널A 건강정보 프로그램 ‘몸신’ 200회 특집에 출연한다. 그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이국종과 맥주의 공통점은 드라이하다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화제의 영상 속 그의 표정은 드라이보다는 앵그리에 가깝다. 응급헬기 탑승 2분 전 고장 난 무전기를 집어던질 때도 그랬다. “안 된다니까, 이 거지 같은 거. 무전기 지원해 달라고 한 지가 8년이 지났어요.” 지난달 24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는 응급헬기 소음 민원 문제로 말소리가 떨렸다. “영국에선 경기장 근처에서 환자가 발생하면 경기 중단하고 경기장 잔디에 헬기가 내려앉습니다. 우린 관공서 잔디밭에 내려앉아도 안 좋은 소릴 합니다. … 누구도 안 된다는 사람 없는데 실제로는 전혀 안 되는, 오만 가지 핑계로 찍어 누릅니다.” 무전기가 고장 나 헬기 안에서 카톡을 하고, 응급환자를 향해 다급히 헬기를 몰고 가는 조종사가 “시끄럽다”는 민원 전화를 받는 초현실적인 열악함은 역설적이게도 ‘영웅 이국종’ 스토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가 싸워야 하는 적은 환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죽음의 사신만이 아니다. 중증 외상 환자는 대개 3D 업종에서 험한 일 하는 노동자들인데, 치료할수록 적자를 보는 이런 환자를 병원은 반가워하지 않는다. 석 선장 같은 ‘스타’ 환자가 발생해 여론이 들끓으면 ‘높은 분’들이 줄지어 다녀가고 장밋빛 지원을 약속하지만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별것 아닌 환자로 쇼 한다” “헬기가 이국종 개인택시냐”는 뒷말도 감수해야 한다. 3D 업종인 외상외과를 지원하는 의사가 있을 리 없다. 그 결과 한국의 환자 이송 시간은 평균 4시간 5분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수준이다. 적절한 의료 인력과 장비를 갖춘 곳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응급환자가 10명 중 3명이 넘는다(예방 가능 외상 사망률 30.5%·보건복지부 2015년 기준). 중증 외상 의료 시스템의 공백은 외상외과 의료진이 “내 목숨을 갈아 넣어” 메운다. 그는 왼쪽 눈이 멀고 어깨뼈는 주저앉았다. 에이즈 환자의 피를 뒤집어쓰며 수술한 적도 있다. 주 90시간을 일하는 간호사들은 응급헬기를 타다 유산한 동료를 보고도 임신한 몸으로 다시 헬기에 오른다. 그는 책에서 2007년 영국 외상센터 연수 시절이 좋았다고 했다. “제대로 된 시스템 속에서 할 일을 하고 그 자체로 인정받았다. 원흉도 돌연변이도 아니었다. 주말엔 펍에서 동료들과 맥주 마시고 클럽에서 새벽까지 음악을 들었다. 내가 삶에서 바란 것은 그 정도다.” 우리에게도 온갖 가학적인 환경을 기적처럼 이겨내는 의사가 필요한 게 아니다. 산에 오르다, 도로 위에서 교통사고로, 군대에서 훈련을 하다 중증 외상을 입었을 때 이국종이 아니어도 살 수 있는 든든한 시스템을 원한다. 그래서 ‘영웅 이국종’이 싫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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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감옥에 가기로 한 할머니들

    요양원에 사는 79세 할머니는 불만이다. 식사 시간엔 반조리 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대충 돌려주고 산책은 어쩌다 한 번이다. TV를 보니 교도소에서는 균형 잡힌 세 끼 식사에 매일 산책을 시켜주고 다양한 교양 수업도 들을 수 있단다.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겠어!” 할머니는 요양원 친구들과 5인조 노인 강도단을 만들어 범행을 모의한다…. 스웨덴 소설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의 줄거리다. 2권 ‘메르타 할머니 라스베이거스로 가다’, 3권 ‘메르타 할머니의 우아한 강도인생’까지 세계적으로 200만 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다. 노후 대책으로 재소자가 되는 할머니 이야기는 복지국가 스웨덴에서는 유쾌한 소설이지만 세계 최고령국 일본에서는 비참한 현실이다. 블룸버그는 올 3월 ‘일본 교도소는 여성 노인들의 천국’이라는 특집을 보도했다. 고령인구 증가로 노인 범죄율이 높아가고 있는데 특히 여성 노인들의 범죄율 증가세가 두드러진다는 내용이었다. 평생 착하게 살아온 여성들이 노년에 교도소 담장을 제 발로 넘게 된 사연에는 여러 가지 여성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남자보다 가난하고, 남자보다 수명이 길어 외롭게 혼자 사는 기간이 길며, 가부장적 문화에 따른 소외감에 힘들어한다. “여기서 나가면 혼자서 하루 1000엔으로 살아야 한다. 기댈 곳이 없다”(74세·3범·콜라와 주스 절도), “열심히 살았지만 늘 가난했고 아들 대학을 보내야 했다. 6년 전 쓰러진 남편 병 수발을 드느라 지쳤다. 여기가 편하고 여기선 내 삶을 살 수 있다”(80세·4범·프라이팬 훔쳐 2년 6개월 징역형), “늘 외로웠다. 13년 전 서점에서 소설책을 훔치다 걸렸는데 경찰이 얼마나 친절하던지, 내 푸념을 다 들어줬다.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다”(80세·3범·크로켓과 부채 훔쳐 3년 2개월). 한국도 여성 노인들의 범죄율 증가세가 뚜렷하다. 2016년 65세 이상 여성 범죄자는 2만1637명으로 2년 전보다 26.8% 늘었다(남성은 9만6585명, 23.6% 증가). 특히 같은 기간 71세 이상 여성 범죄자 증가 폭은 33.8%(6935명→9282명)다. 강력범이나 폭력범보다는 절도범이 많이 늘었는데, 71세 이상 여성 절도범은 859명에서 1848명으로 2년 새 두 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범행 이유를 알 순 없지만 가난하고 외로운 건 일본 할머니들과 같다. 65세 이상 여성의 연간 총소득은 632만 원. 남성(1417만 원)의 절반도 안 된다(통계청, 2014년 기준). 70세 이상 1인가구 비율은 여성이 29.3%, 남성이 7.9%(2018년 추계)다. 평균 기대수명이 남자보다 6년 길고 남녀 간 결혼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여성은 약 10년간을 혼자 살아야 한다. “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비율과 결혼생활 만족도는 남성이 높고, 스트레스와 우울감을 호소하는 비율은 여성이 높다(‘2018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메르타 할머니’ 시리즈의 노인 강도단은 어렵게 들어간 교도소 생활에 실망하고 출소 후엔 꿈의 요양원을 짓기 위해 카지노와 은행을 턴다. 현실 속 한국과 일본 할머니들의 재범 비율도 높다. 하지만 그건 소설처럼 ‘건설적’인 목표 때문이 아니다. 그저 다시 갇히고 싶어서다. 메르타 할머니 말대로 “황혼기를 맞은 노인들이 강도가 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그 사회는 분명 뭔가 잘못된 사회임에 틀림없다”. 배고픈 자유와 배부른 구속 사이에서 고민하는 노인이 없도록 외롭고 가난한 노인, 특히 더 외롭고 더욱 가난한 여성 노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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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사고 안 쳐도 걱정인 요즘 청소년들

    요즘 애들이 얌전해졌다. 선진국 청소년들 얘기다. 술 담배를 하거나 성경험이 있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청소년이 확 줄었다. 영국 언론에 따르면 지난해 24세 이하 영국 청소년 흡연율(17.8%)과 음주율(48%)은 예전의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다. 소년 범죄자 수(10∼17세 7만4800명)는 10년 전의 5분의 1이다. 스웨덴은 술 담배 마약을 입에 대지 않는 청소년(31%)이 12년 전보다 3배로 늘었다. 미국도 마약 하는 아이들이 줄어들고 성경험 있는 고교생 비율도 최근 10년 새 48%에서 40%로 감소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의 ‘2018 청소년(9∼24세) 통계’를 보면 음주율은 2011년 20.6%에서 지난해 16.1%, 흡연율은 12.1%에서 6.4%로 뚝 떨어졌다. 18세 이하 소년 범죄자 수는 2016년 7만600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던 2008년 13만5000명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같은 기간 전체 음주율과 범죄 발생 건수는 오히려 늘었고, 흡연율만 약간 줄었다. 왜 그럴까? 전문가들이 꼽는 주요 변수는 가정생활의 변화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부모와의 대화가 편하다는 청소년도 많아졌다. 한국 청소년들도 가정생활에 만족한다고 답한 비율이 2011년 89.4%에서 지난해에는 95%로 늘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이용 시간의 증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집 밖에서 나쁜 짓 할 시간이 줄어든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술 담배 섹스의 쾌락을 접하는 나이가 늦춰졌을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랄 총량의 법칙’이다. 영국의 경우 금욕적인 무슬림 인구의 유입도 주요 변수로 꼽힌다. 어쨌든 건실하게 자라주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어른들 걱정은 끝이 없는 법. 성실한 자기 자식에겐 안심하면서도 집 밖의 ‘범생이’들에겐 패기 없는 애늙은이라고 혀를 찬다. 왜 금기에 도전할 생각을 못하나. 왜 사랑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않고 미지근하게 ‘썸’만 타느냐. 왜 배낭 하나 메고 ‘탐험’의 길을 떠나지 않고 숙박 앱과 맛집 블로그에 기대어 ‘관광’만 하려 드나. 고교생이 선호하는 직장이 국가기관(27.2%)-대기업(18.7%)-공기업(15.3%)순이라고? 왜 일자리를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남 밑에서 일할 생각만 하는가. 왜 바꾸려 하지 않고 적응하려고만 하나. 건실한 젊은이들은 답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우리 세대는 지도의 모든 빈 공간이 채워지고, 야생지대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마음껏 싸울 명예로운 전쟁이나 정착할 변경이 없는 이상한 시대에 태어났다. 내면의 야성을 펼칠 곳이 없다.”(미국 베스트셀러 ‘봉고차 월든’에서) 일탈도 제자리로 돌아올 자신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부모 세대가 이룬 풍요와 부모의 관리에 길들여진 세대는 계층 이동은커녕 이만큼 누리고 살기도 어려우리라는 미래에 일찍부터 주눅 든다. 경쟁은 치열하고 불안은 점증한다. 게다가 모든 실수가 기록되는 시대다. 미국의 심리학자 토리 히긴스에 따르면 사람을 움직이는 동기엔 좋은 것에 가까워지려는 ‘접근 동기’와 싫은 것에서 멀어지려는 ‘회피 동기’가 있다. 일을 칭찬받으려고 하는 건 접근 동기, 혼나지 않으려고 하는 건 회피 동기에서다. 접근 동기에 따라 재미있거나 즐거울 땐 기발한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하지만 최악을 모면하려는 회피 동기를 따를 땐 기존 틀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위험을 피하려는 동기로만 사는 젊은이들에게 젊은이다운 활력이나 창의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고 칠 땐 밉더니, 얌전해지니 걱정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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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3중고와 싸운 20대 농부들의 추석맞이

    세 친구는 ‘농부 어벤저스’로 불린다. 한국농수산대 10학번 동기들로 서로 품앗이 농사를 지으며 각자 1억 원 안팎의 연매출을 올리는 20대 청년들이다. 1년 전 채널A에 나왔던 이들을 기자는 ‘N포 세대와 달리 취업도 연애도 무엇도 포기하지 않은 모범 청춘’으로 칼럼에 소개한 적이 있다. 수확의 계절을 맞아 농부 어벤저스의 올해 작황이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다들 변덕스러운 날씨와 최저임금 인상으로 휘청거리는 한 해였다고 했다. ▽박상봉(26·강원 정선·곤드레)=연간 순익이 6000만∼7000만 원이었지만 올해는 많이 줄었어요. 곤드레는 5월 초에 서둘러 내놔야 하는데 봄 가뭄에 냉해까지 겹쳐 늦어졌죠. ▽정우진(27·경북 상주·곶감)=감은 날씨를 덜 타는 작물이에요. 올해는 폭염 때문에 크기가 조금 작습니다. 곶감은 90%가 설에 유통되는데 올 설에 완판을 해서 순익이 1000만 원 정도 늘었어요. ▽최동녘(27·강원 양구·유기농 사과)=우박에 냉해에 폭염까지 겹쳐 순익이 4000만 원으로 줄 것 같아요. 사과는 껍질이 얇고 빨간색을 내기가 어려워 유독 까탈스러운 과일이죠. ‘마움(마음에 움트다)’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국내외 병충해와 사과농사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배우고 있습니다. 올해 일본에만 다섯 차례 갔다 왔어요. ―최저임금이 많이 올랐습니다. ▽박=최저시급에 맞춰 일당을 7만 원에서 8만 원으로 올렸어요. 그래도 농촌에선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요. 외국인을 쓰려고 해도 다들 식당일을 하려고 하지 힘든 농사일은 싫어해요. ▽정=최저임금 인상엔 찬성하지만 감 값이 오르진 않으니 힘드네요. ▽최=날씨가 변덕을 부리고, 인건비는 오르는데 농산물 가격은 그대로예요. 셋 중 하나라도 내 편이 되면 좋겠어요. ―이상기후 현상은 계속되고, 농사는 더욱 힘들어지겠죠. ▽정=6년 차 농부인데 어렵지 않은 해가 없어요. 다행인 건 대처능력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거예요. 스트레스에도 무디어지고요. 버티는 거죠. ▽최=힘들어지는 만큼 점점 매력을 느껴요. 농사는 내가 주도하는 일이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작물의 영양 생식을 알아야 하고, 하우스 고치고 집도 지을 줄 알게 되죠. 종합적인 배움이랄까. 매년 성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35세까지는 돈 벌 생각 안 해요.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경험치로 쌓이겠죠. ―쇼트트랙의 심석희 선수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후회하지 마라.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박=늘 불안해요. 올해 1억 원 벌었다고 내년에도 그 돈을 번다는 보장이 없죠. 그래도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올해는 땅 1000평 더 샀고, 저온 창고도 지었어요. 조금씩 늘려가는 재미로 농사짓습니다. ▽정=올해 초 청년농업인단체(4-H연합회)의 상주시연합회장을 맡았어요. 멋지게 꾸려나가며 청년 농부들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보려고 해요. ―요즘 젊은이들은 명절에 취업이나 결혼 계획을 묻는 어른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죠. 세 분은 직업도 여자친구도 있는데 그래도 추석이 부담되나요. ▽박=농촌에 젊은 사람이 없어서 저는 명절 때 음식 장만하느라 바쁩니다. ▽정=‘결혼 언제 할 거냐’는 말은 부담돼요. 하고 싶지만 자본금 없이 농사를 시작하다 보니 아직…. 그래도 제가 농사지은 감으로 차례상을 차린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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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박원순 시장, 고건 시장에게 ‘3수’ 배워야

    옥탑방 다음엔 휠체어 체험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일 서울청년의회에서 “하루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의 대중교통을 경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 청년 의원이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자 “이런 것은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며 이렇게 답했다. 휠체어와 지하철을 섭외하고 기자들에게 동선을 공개하는 이벤트로 장애인이 겪는 불편함을 절감할 수 있을까.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장애인 콜택시, “리프트가 고장 났다”며 장애인을 지나치는 저상버스, “당신 하나 때문에 연착됐다”는 눈총을 주는 지하철을 체험할 수 있을까. 장애인의 나들이 체험담은 이미 차고 넘친다. 어느 1급 장애인 부부는 휠체어를 타고 유럽 여행을 다녀와 책을 냈다(‘낯선 여행, 떠날 자유’). 한강 유람선도, 남산타워도, 경복궁도 엄두를 못 냈던 부부는 파리에서 바토무슈를 타고, 에펠탑을 구경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관광했다. 장애인용 대중교통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일반 택시나 버스를 휠체어로 이용하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던 덕분이다. 서울도 이런 걸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다. 시장이 체감하지 못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둔 것뿐이다. ‘체험 정치’에 맛들인 박 시장은 휠체어 다음엔 다시 금천구 옥탑방의 한파 체험을 예고했다. 강북구 옥탑방에 놀란 가슴, 금천구 옥탑방 보고 놀랄 일이다.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의 폭염 체험은 뜨거운 논란 끝에 지독한 화상을 남기고 마무리됐다. 전임 시장들의 개발 정책을 비판해온 박 시장은 옥탑방 입주 전후로는 돌연 ‘여의도·용산 통개발’로 요약되는 싱가포르 선언과 강북 발전 로드맵을 내놓았다. 정부의 서툰 부동산 정책으로 불난 집값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서민을 위한다던 옥탑방 체험이었지만 서민들은 “우린 그냥 옥탑방에서 계속 살라는 거냐”며 가슴을 쳤다. 박 시장이 여권의 차기 대선 후보 순위 1위라는 조사 결과에 “지금이라도 빨리 사놔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시장 본인도 “박 시장의 싱가포르 발언에서 삼양동 발언까지의 40일이 문재인 정부의 400일 부동산 정책을 뒤집었다”(한겨레)며 독박 쓰는 피해를 입었다. 박 시장은 최근 방송에 나와 “시장 반응을 몰랐다는 점은 쿨하게 인정하겠다”고 했다. 통개발 선언→옥탑방 체험→또 개발 발표라는 엉뚱한 조합의 시나리오도 황당하지만 대형 개발 계획을 공표하면서 시장 반응도 예상하지 못했다니, 그건 쿨하게 인정할 게 아니라 부끄럽게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정책 발표 탓에 정작 중요한 노후지역과 강북 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쑥 들어가 버렸다. 13일로 예정됐던 시정운영 4개년 계획 발표도 연기됐다. 집값 잡는다고 수요 억제에서 공급 확대로 선회한 정부와 여당이 서울의 그린벨트 해제를 압박해도 큰소리를 못 내는 처지다. 서울시장을 두 번 지낸 고건 전 총리는 행정을 하려면 최소한 세 수를 내다봐야 한다고 했다. 정책의 부작용이 뭐가 있을까, 그게 첫 수다. 부작용에 대한 해소책은 무엇일까, 그것이 두 번째 수. 마지막으로 해소책이 효과가 있을까, 바로 세 번째 수다. 박 시장은 ‘체험 위시리스트’를 버리고 옥탑방 정치의 실패를 복기한 후 인스타그램용 ‘그림’이 안 나오더라도 최소한 세 수를 내다보는 행정에 집중해주기 바란다. 시장은 체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책임지는 자리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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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안희정은 아직 무죄다

    안희정 무죄 판결 역풍이 거세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못 살겠다 박살내자.’ 이런 구호를 내세운 대규모 집회가 주말에 열렸다. 21일 국회 여성가족위 전체회의는 안희정에서 시작해 안희정으로 끝났다. 리얼미터는 20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최저치를 경신했다는 결과를 발표하며 ‘안희정 역풍’을 원인의 하나로 꼽았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김지은 성폭행 사건의 실체는 셋 중 하나다. 14일 나온 1심 판결대로 불륜이거나, 아니면 김 씨 주장대로 성폭력일 수 있다. 김봉수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김지은이 진실해도 안희정은 무죄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김 씨는 위력이라고 느꼈지만 안 전 지사는 위력을 사용하지도, 그에 대한 고의가 있지도 않았을 가능성이다. 김 교수는 “사건의 진실은 당사자도 정확하게 모를 수 있다”며 “각자 편견에 따라 당연히 성폭력이다, 불륜이다,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했다. 안 전 지사는 처음부터 유죄였다. 수행비서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인정했으니 도덕적으론 유죄 맞다. 하지만 판결이 확정되기도 전에 성범죄자로 단정하는 건 다른 문제다. 모든 형사 사건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헌법 27조 4항)이 적용되는데 유독 성폭력 사건은 여론재판에서 ‘유죄 추정의 원칙’을 따른다. “당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순간 끝난다. 재판을 받아볼 필요도 없다. ‘피해자’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쉽게 가려진다. 피해자를 우선해야 하고 성범죄자는 엄벌해야 맞지만 시작부터 가해자를 예단하고 몰아가면 뜻하지 않은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32년간 교편을 잡았던 전북의 중학교 교사는 지난해 8월 ‘여학생 성추행 교사’라는 누명을 쓰고 자살했다. 박진성 시인은 2016년 10월 익명의 허위 트위터 게시물 때문에 ‘미성년자 상습 성추행범’이 됐다. 그는 지난달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겼으나 “사회적 생명은 이미 끊겼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엔 비슷한 피해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성무고죄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청원이 이어지고 있다. 유죄 추정의 원칙은 마녀 사냥의 다른 이름이다. 덴마크 영화 ‘더 헌트’는 2012년 개봉작이지만 미투 운동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새삼 주목받고 있다.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의 유일한 남자 교사다. 어느 날 여자아이가 루카스에게 기습 뽀뽀를 하고 루카스는 “뽀뽀는 엄마 아빠하고만 하는 거야”라고 주의를 준다. 무안함에 화난 아이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한다. “루카스 선생님 싫어요. 고추도 달렸고요.” 원장은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며 루카스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단정하고, 다른 아이들도 어른들의 유도 질문에 “미투” 한다. 루카스는 경찰에서 혐의를 벗지만 낙인은 지워지지 않고 ‘사냥감’이 된다. 한국의 루카스, 제2의 시인 박진성이 계속 나온다면 용기 있는 여성들이 어렵게 불을 지핀 미투 운동이 지속될 수 있을까. 미투가 성폭력이 만연한 일상을 바꾸려면 성폭력 혐의자에게도 무죄 추정의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한 남자든 손버릇 나쁘기로 소문난 난봉꾼이든 마찬가지다. 잠시 숨을 고르고 ‘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단체 ‘휴먼연대’의 문제 제기를 들어보자. “언론을 통해 일거에 상대방을 매장시키는 미투 방식은 유효한가? 관련 언론의 책임은? 강력한 변호인단을 구성한 안 전 지사와 달리 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성범죄자라는 혐의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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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대한민국호’에 난민을 얼마나 태울까

    우리는 지금 구명보트를 타고 바다에 표류 중이다. 보트엔 50명이 있는데 10명을 더 태울 수 있다. 보트 밖에서 100명이 허우적거리며 구조를 애원한다. 보트에 있는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①가급적 모두 구조한다. ②10명만 구조한다. ③모두 외면한다. 대개는 ①과 ②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1985년 이 ‘구명보트 윤리’를 제시한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은 ③이 정답이라고 했다. 60명 정원인 보트에 150명이 타면 다 죽는다. 10명을 골라 태우는 것도 말이 안 된다. 만약을 대비해 여유분이 필요한 데다, 100명 중 10명을 어떻게 추리나. 훌륭한 사람? 절박한 사람? 아니면 선착순? 하딘은 구명보트 비유를 통해 “완벽한 정의는 완벽한 파국을 낳는다”며 인구 과잉에 따른 환경 파괴를 막으려면 후진국을 도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구명보트 윤리를 이용해 제주 예멘 난민 사태로 달아오른 난민 논쟁을 풀어보자. 먼저 위기에 처한 난민을 최대한 수용하는 게 인간의 도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은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고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한 난민 보호 선진국이다. 하지만 올해 6월까지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849명, 난민 인정률이 4%다. 미국 독일 영국 캐나다 등은 25∼45%다. 한국에만 가짜 난민들이 몰려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인정률이 최소한 두 자릿수는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난민 심사 절차를 강화하거나 난민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가뜩이나 취직이 안 되고 ‘송파 세 모녀’들도 많은데 난민들에게 일자리 뺏기고 복지 혜택 주고 범죄와 테러의 위협에까지 시달리다간 우리까지 죽는다는 논리다. 특히 20대와 여성들의 난민 반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데 그만큼 일자리와 안전 문제에 대한 공포감이 크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인가, 국민이 먼저인가. 대부분의 딜레마가 그러하듯 난민 딜레마도 양극단 사이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golden mean)’이다. 예를 들어 ‘만용’과 ‘비겁’의 양극단 사이에 ‘용기’가 자리한다. 그런데 중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건 용기, 그냥 지나치는 건 비겁이다. 하지만 수영은 못하고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이 물에 뛰어드는 건 만용이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건 비겁이며 구조를 요청하러 달려가는 것이 용기다. ‘한국호’를 타고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가난과 전쟁과 정치적 박해를 피해 도망 왔다며 손을 흔드는 이방인들이 있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그들을 외면하는 건 비겁한 거다. 이제 와서 난민법을 폐지하고 난민협약에서 탈퇴하며 뒷걸음질을 칠 수는 없다. 난민협약에 가입한 140여 개국 가운데 탈퇴한 나라는 없다. 그렇다고 능력 밖으로 수용하는 건 만용이다. 일손이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둔 일본도 난민 인정률은 0.2%밖에 안 된다. 그 대신 지원금을 많이 낸다(2017년 유엔난민기구 국가별 기부금 순위 4위). 한국갤럽이 최근 성인 남녀 1002명을 대상으로 제주도 예멘 난민 신청자에 대해 물었는데 ‘가능한 한 수용’(11%)하거나 ‘최소한으로 수용’(62%)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난민법 폐지 국민청원에 대한 정부의 답변 시한이 8월 13일이다. ‘비겁’도 ‘만용’도 아닌 ‘용기’ 있는 답을 내놓길 기대한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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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연애는 김현우, 결혼은 도성수

    올 상반기 채널A 예능으로 뜬 일반인 남자가 둘 있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인 ‘하트시그널 시즌2’의 셰프 김현우(33), 육아예능 ‘아빠본색’에 출연한 도성수(46)다. ‘나쁜 남자’ 김현우가 긴가민가하는 헷갈림으로 애를 태우는 연애의 신이라면, 도성수는 안정감을 주는 외조의 왕이다. 뮤지컬 배우인 아내 홍지민에게 도시락을 싸주고, 젖먹이 딸의 애착인형을 바느질하고, 장인의 제사상을 차린다. ‘결혼 안 했으면 같이 살고 싶은 남자’를 꼽는 설문에 유명인도 아닌 그의 이름이 오르는 이유다. 공연과 앨범 준비로 바쁜 아내를 대신해 세 살, 돌쟁이 두 딸(도로시, 도로라)과 씨름 중인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독박 육아’로 입술이 부르텄다죠. “독박 육아는 아니에요. 로시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가게(짬뽕집 경영)에 나가 일하다 오후 5시 반에 로시를 데려와 저녁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다 재워요. 어머니가 많이 도와주세요. 매일 아침 식사와 로시 등원 준비는 아내가 합니다. 제가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면서 오롯이 저만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죠. 아내는 어쩌다 하루 쉬는 날에도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놀아주고 저에게 집중해줘요.” ―집중을 해준다고요? “음, 머리 염색을 해주거나 손잡고 입 맞추고 데이트하며 둘만의 시간을 갖는 그런 것…. 저희도 이혼 위기를 겪었고, 다행히 극복한 후엔 서로 맞춰주고 노력하며 삽니다.” ―최근 방송에서 아내의 앨범 녹음 현장에 나타나 스태프에게 일일이 간식을 만들어 돌리는 장면은 감동적이었어요. ‘우리 지민이 하고 싶은 거 다해’란 응원 문구를 보고 지민 씨가 울컥하며 “힘들 때마다 잡아줘서 고맙다”고 했죠. “아내가 아이 낳고 키우느라 9년을 기다려온 앨범이에요. 얼마나 하고 싶어 했는지 아니까 응원해주고 싶었죠. 아내도 제 기를 살려주려고 애씁니다. 제가 한 달에 한두 번 야구를 하는데, 함께 나눠 먹으라고 도시락을 싸줘요. 새벽에 술 마시다 ‘우리 집으로 2차 가자’ 하며 호기롭게 친구들을 데려와도 웃으며 술상을 차려내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군요. 지민 씨가 보채는 아이를 보며 “바쁜 엄마여서 미안해” “일 다 접고 (집에) 들어앉을까” 하던데,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아내는 무대에 섰을 때 가장 멋진 사람입니다. 힘들어하다가도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면 엄청 행복해해요. 훗날 딸들도 그런 엄마를 더 좋아할 거라고 믿어요.” ―집안의 대소사를 양가 어머니들과 함께 결정하고, 장인의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을 보며 양성 평등을 실천하는 모범 가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표현은 부담스럽습니다. 처가도 가족인데 처가 본가 따지지 않아요. 장인어른 제사는, 아내가 제 아버지 제사를 모시는 것처럼 당연한 거죠.”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에 많은 사람이 공감해요. 불평등한 결혼 생활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도 많죠. 로시와 로라가 커서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엄마 아빠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 자연스럽게 결혼하지 않을까요? 저는 유복자로 태어나 아버지나 남편 역할을 못 보고 자랐어요. 그래서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좋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될 자신이 없었죠. 그런 제가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빠도 된 겁니다. 그래서 아내가 고마워요. 아내와 딸들 곁에 오래 있어주고 싶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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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과 내일/이진영]장현수의 나비효과, 경제팀의 나비효과

    골게터 손흥민도 아니다. 골키퍼 조현우도 아니다. 러시아 월드컵 F조 조별리그 탈락의 위기에 놓인 한국 축구대표팀에서 가장 ‘뜨거운’ 선수는 중앙 수비수인 장현수다. 한국은 24일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 1-2로 졌는데 2점 모두 장현수의 태클로 실점했다. 장현수는 전반 24분 페널티 지역에서 멕시코 선수의 크로스를 막으려고 태클하다 공이 오른팔에 맞아 핸드볼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내줬다. 후반 21분 멕시코의 역습 상황에서는 상대 선수가 슈팅할 때 성급한 태클로 추가골을 허용했다. 온라인은 장현수를 비난하는 글로 들끓고 있다. 보다 못한 동료 선수는 “현수가 많이 노력했는데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돼 안타깝다”고 편들다가 “그럼 선수를 보이는 걸로 평가하지 내면을 보느냐”는 뭇매를 맞고 있다. 2패를 기록한 한국 축구대표팀의 수비수 기용을 둘러싼 논란은 실적 부진에 주전 선수들(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과 김동연 경제부총리) 간 불화설까지 도는 한국 경제팀의 상황과 닮은꼴이다. “경제 브레인들의 기초실력도 축구대표팀 수비수들처럼 부실하다”거나 “한국 축구는 장현수가, 한국 경제는 장하성이 말아먹고 있다”는 성토도 나온다. 표현은 거칠고 과장됐지만 스웨덴과의 1차전에서 장현수가 일으킨 ‘나비효과’는 선한 의도가 뜻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점에서 소득주도성장론의 ‘나비효과’와 닮았다. 장현수는 요령부득의 공중볼을 찼고→이 부정확한 패스를 박주호가 무리하게 받으려다 허벅지 근육을 다쳤으며→대타로 들어간 김민우가 태클로 페널티킥 결승골을 내주었다. 김민우의 이 태클도 장현수의 패스 실수가 발단이었다. 경제정책의 나비효과는 이렇다. 소득주도성장을 목표로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인상하자→인건비 부담이 늘어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직원을 해고해→실업률이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며→소득 양극화는 심해졌다.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과 “봄비가 많이 와서”라는 해석이 나왔지만 오심은 경기의 일부이고, 날씨도 경제환경의 일부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장현수 선수와 경제팀 교체를 요구하는 청원이 나란히 올라와 있다. 신태용 감독은 “수비 조직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선수 교체 없이 남은 경기를 치를 것임을 시사했다. 경제정책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는 정부도 청와대 조직개편과 정부부처 개각을 앞두고 “경제는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며 경제팀 교체 얘기는 하지 않는다. 1, 2차전의 태클 참사로 한국 축구대표팀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 ‘마지막 독일전에서 2점 차 이상 이기고 멕시코가 스웨덴을 이기거나 아니면…’ 등등 난수표 같은 시나리오를 기대하는 처지가 됐다. 설사 16강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축구는 ‘기분’의 문제다. 선수와 감독을 원망하고 4년을 기다리면 또 다른 월드컵이 온다. 하지만 경제는 ‘생존’이 달린 문제다. 가계소득 증가→소비 증가→내수 활성화라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지 않으면 선수와 감독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경제대표팀 선수들이 시야를 넓혀 상대 수비수를 확인하고 동료 선수들과 눈빛을 교환해가며 이기는 경기를 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하는 이유다. 발밑의 공만 보고 엉뚱한 방향으로 드리블하거나 어설픈 태클로 실점을 부른다면 교체를 검토해야 한다. 경제는 실패해도 4년 후를 도모할 수 있는 월드컵이 아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8-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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