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영

이진영 논설위원

논설위원실

구독 220

추천

안녕하세요. 이진영 논설위원입니다.

ecolee@donga.com

취재분야

2026-02-23~2026-03-25
칼럼100%
  • ‘무효’ 부르는 투표용지[횡설수설/이진영]

    이번 4·15총선에선 역대 가장 긴 투표용지가 등장한다. 비례대표 선거 참여 정당이 35개가 되면서 투표용지 길이는 48.1cm가 됐다. 투표지 길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기표란의 세로 폭이 1cm에 불과하고 기표란 사이 여백도 0.2cm로 좁아진다. 눈이 나쁘거나 손놀림이 둔하면 제대로 찍기가 어려울 것 같다. ▷2017년 19대 대선 때도 기표란이 좁아 고령자들을 중심으로 무효표가 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당시 15명의 후보가 출마하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기표란의 세로 폭을 1.5cm에서 1cm로 줄였다. 기표란의 세로 폭은 기표 도장의 외곽 지름보다도 작았다. 투표용지에 찍히는 동그란 문양은 기표란 안에 들어가는 크기였지만 고령자나 장애인들은 기표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찍느라 애를 먹었다. 실제로 당시 무효표는 13만5733표로 18대 대선(12만6838표) 때보다 많았고, 무효투표율이 높은 상위 10개 시군구의 65세 이상 고령비율(평균 28.1%)은 하위 10개 지역(15.2%)보다 높았다. ▷세계적으로 투표용지 디자인 논란이 뜨거웠던 선거는 10명의 후보가 경쟁한 2000년 미국 대선이다. 미국은 선거구마다 투표용지가 제각각인데 플로리다주 팜비치 카운티는 민주당 지지층인 유색인종이 낯설어하는 펀치식이었다. 더구나 민주당 후보 앨 고어의 이름과 펀치로 뚫는 구멍의 위치가 나란하지 않게 투표용지가 설계됐다. 구멍을 두 개 뚫어 무효 처리된 6만2000표 중 4만5000표가 고어 이름이 포함돼 있어 고어를 찍으려다 실수하자 다시 구멍을 뚫은 표로 추정됐다. 고어는 플로리다주에서 공화당 조지 W 부시에 537표 차로 지는 바람에 대권을 놓쳤다. ▷문맹률이 높은 나라에선 후보자의 얼굴 사진과 정당 로고가 들어간 커다란 투표용지를 쓰기도 한다. 얼굴 사진을 쓰면 외모가 훌륭한 후보, 젊은 후보가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014년 시도지사와 교육감 등 7개 단체장을 뽑는 6·4지방선거 땐 투표용지가 7장이었다. 선거별로 투표용지 색상을 달리했는데 적록(赤綠) 색맹의 경우 색상 구분이 불가능한 것으로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됐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투표장에 나와 한 표를 행사했는데 투표용지 탓에 무효표가 돼버리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 된다. 나이와 장애에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선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공정하고 섬세한 선거 정책이 필요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4-0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코로나 이긴 97세 할머니[횡설수설/이진영]

    97세 할머니가 코로나19 완치 판정을 받았다. 경북 청도군에 사는 황영주 할머니는 포항의료원에서 12일간 치료를 받고 완쾌돼 73세 아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집으로 25일 돌아왔다. 그는 국내 최고령 완치자인데 포항의료원에는 104세 할머니가 투병 중이다. 세계적으로는 중국 우한(武漢)에서 완치 판정을 받은 104세 할머니가 최고령 완치자로 알려져 있다. ▷고령자의 완치 소식이 반가운 이유는 노인들의 치명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국내의 경우 평균 치명률은 1.5%, 80세 이상은 15.2%다. 중국을 제치고 확진자 수 세계 1위가 된 미국에서는 ‘부머 리무버(boomer remover)’라는 신조어가 나돈다. ‘베이비부머 제거기’, 즉 코로나19가 고령의 베이비부머(1944∼1963년 출생)에 더 치명적이라는 뜻인데, 기성세대가 ‘꼰대 노릇’ 한다며 불만을 가진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서 ‘꼰대를 없애주는 감염병’ 정도로 통한다. ▷노인을 차별하는 건 일부 고약한 젊은이들만이 아니다. 테워드로스 거브러여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이달 초 “코로나19의 희생자가 대부분 노인이기 때문에 사태 초기 수습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나라들이 있다. 이건 도덕적 부패의 문제”라고 했다. 미국도 대처가 늦은 나라 중 하나인데 텍사스주 부지사는 얼마 전 각종 영업 중단 조치를 완화하자면서 “노인들은 경제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가 호된 비난을 샀다. ▷의료계의 노인 차별도 있다. 코로나19 환자의 절반 이상이 노인이지만 세계 주요 의학 저널엔 어린이 환자에 관한 연구는 있어도 노인과 코로나19를 다룬 논문은 거의 없다. 의료 자원이 부족한 이탈리아는 고령자 치료를 거부하면서 ‘생존 가능성’을 내세웠다. 윤리적으로도 문제지만 합리적이지도 않다. 미국 스탠퍼드대 경제정책연구소에 따르면 70세 남성이 1년 후 죽을 확률은 2%, 80세 여성이 1년 안에 죽을 확률은 4%에 불과하다. 노인은 나이가 들어갈 뿐, 죽어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황영주 할머니는 코로나19 ‘7976번 환자’였다. 27세에 남편을 여의고 아들 셋을 홀로 키웠는데 큰아들은 4년 전 먼저 떠났다. 둘째가 위암으로 위의 75%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자 공기 좋은 곳을 찾아 2002년 모자(母子)가 연고도 없는 청도로 이사했다. 어머니와의 ‘코로나 생이별’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아들, 그런 아들이 기다리는데 ‘코로나 할아비’라고 무서웠을까. 환자 번호와 치명률 수치엔 절절한 사연이 가려져 있다. 가볍게 차별의 언어를 입에 올릴 일이 아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3-2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누구를 먼저 구하나[횡설수설/이진영]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한 유럽의 이탈리아와 스웨덴이 ‘연령 차별’ 논란으로 시끄럽다. 이탈리아 의학계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환자부터 치료하라’는 권고안을 내놓았다. 사실상 중증 고령 환자에 대한 치료 거부를 정당화하는 내용이어서 ‘이탈리아판 고려장’이라는 비난이 나온다. 반면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선 고령자만 진단 검사를 하기로 해 젊은이들이 반발하고 있다. ▷의사에게는 정당한 이유 없이 진료를 거부할 권한이 없다. 그런데 전쟁이나 재난이 닥쳐 의료자원이 부족할 땐 어쩔 수 없이 ‘트리아주(triage)’, 즉 환자를 분류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트리아주는 커피 원두를 골라내는 것을 뜻하는 프랑스어. 나폴레옹(1769∼1821)의 군의관이 전쟁터에서 ‘부상자 선별’의 뜻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의 회고록에는 “치명적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계급이나 수훈과 무관하게 맨 먼저 처치를 받아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프랑스 혁명 정신인 ‘평등’ 사상을 구현한 트리아주다. ▷세계적으로 합의된 트리아주의 원칙은 없다. ‘급한 환자부터’라는 원칙이 있는가 하면 ‘최대 다수에게 최대 이익’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1846년 영국 해군은 가망 없는 환자에 대한 수술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쏟는 의료자원이면 다수의 경증 군인을 살릴 수 있다는 논리다. 급진적인 사람들은 ‘무작위’를 주장한다. 모든 사람의 생명은 소중하고, 누군가에게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결정할 권한을 주는 건 위험하기 때문이란다. ▷요즘 응급실에선 가장 위험한 환자가 우선이다. 그런데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침수 위기에 놓인 미국 뉴올리언스 메모리얼 병원의 구조 우선순위는 정반대였다. 병원은 환자를 3등급으로 분류해 스스로 걸을 수 있는 ‘1등급’을 맨 먼저 대피시키고, 다음은 부축이 필요한 ‘2등급’, 나머지 위중한 ‘3등급’을 마지막 순위로 두었다. ‘최대 다수에게 최대 이익’이 기준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자 주정부는 재난 시 환자 분류에 관한 지침을 만들어 인공호흡기 등 부족한 의료자원을 배분하는 원칙을 제시했다. ▷누구를 먼저 살리고 누구를 포기할까. 유럽의 선진국이 2차 대전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윤리적 고민에 빠질 정도로 코로나19의 기세가 무섭다. 한국도 병실을 기다리다 사망한 환자가 나오고 의료진의 피로도도 누적된 상태다. 코로나19에 집중하느라 다른 중증 응급 환자들이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유럽 의사들 같은 고민 없이 위기를 넘기려면 환자 증가세를 완전히 꺾어놓아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3-1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새내기 간호장교[횡설수설/이진영]

    신나은 신나미(23) 쌍둥이 자매는 3일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임관식에서 육군소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전투복을 입고 ‘전선(戰線)’으로 달려갔다. 임지는 코로나19 최전선인 대구. 자매는 동기 73명과 국군의료지원단에 소속돼 300병상 규모의 국군대구병원 등에 투입됐다. 새내기 간호장교 전원이 임관하자마자 임무 수행에 나선 건 이례적인 일. 문재인 대통령은 2일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학교를 찾아 ‘코로나19 종식’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간호장교는 간호사이면서 군인이다. 2학년이 되면 임상 실습에 앞서 나이팅게일 선서를, 졸업식 겸 임관식에서는 장교임관 선서를 한다. 간호사관생도들은 두 가지 역할 수행을 위해 4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며 181학점을 이수한다. 임상 실습 시간은 1080시간. 기초 군사훈련과 유격훈련에 야전간호, 전투외상간호, 재난응급간호 훈련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전쟁, 지진, 감염병 발병으로 한꺼번에 많은 환자가 발생했을 때 우선순위를 정해 제한된 자원을 배분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도 주요 교육 내용. 임관 후 의무복무 기간은 6년이다. ▷응급 상황에 최적화된 간호장교들은 이라크 레바논 남수단 같은 분쟁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에 투입된다. 2014년 에볼라 때는 시에라리온, 2013년엔 필리핀 태풍 피해 지역, 2011년엔 아이티 지진 현장을 누볐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때는 국내 곳곳의 병원에 급파돼 환자를 돌봤다. 메르스 당시 “우리는 알지 못하는 공포가 있을 때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다”는 간호장교의 말은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됐다. 현재 간호장교 835명 가운데 83명이 대구에 있다. 60기는 뺀 숫자다.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는 남자 7명을 포함해 모두 75명.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이자 6·25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에 임관해 각별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6·25전쟁 때는 간호장교 1257명이 변변한 의약품도 장비도 없이 노상에서 40만 명 넘는 부상자를 돌봤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대구로 초임 장교들을 보내며 국방부 장관은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앳된 장교들을 보는 국민들도 “학도병이 떠오른다” “어린 나이에 중책을” “전쟁터에 동생 조카 보내는 기분”이라며 먹먹해한다. 하지만 쌍둥이 자매를 포함해 새내기 장교들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을 복창했다. “간호장교로서 대구에 갈 수 있어 영광이다.”(동생 신나미 소위)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돌아오겠다.”(언니 신나은 소위)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3-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코로나 검사 비용[횡설수설/이진영]

    미국 마이애미에 사는 회사원 A 씨는 중국 출장에서 돌아와 열과 기침이 나자 혹시나 싶어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음성 판정이 나왔는데 2주 후 3270달러(약 397만 원)짜리 청구서가 날아왔다. 민간 의료보험 가입자인 그가 부담해야 하는 검사 비용은 약 1400달러다. ▷A 씨가 한국에 있었다면 무료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중국을 방문한 이력에 호흡기 질환 증상까지 있으니 100% 검사 대상이다. 요즘은 중국 방문 기록이 없어도 의사의 소견서만 있으면 된다. 무료 검사 대상이 아니면 16만 원을 내야 하지만 확진 판정을 받으면 전액 돌려받는다. 진료비도 정부가 부담한다. 외국인의 검사비와 진료비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본인 부담인 데다 검사 기준도 엄격하다. 중국을 다녀왔거나 감염자와 접촉 후 발열 등의 증상이 있어야 한다. 최근 캘리포니아에서 중국에 간 적이 없는 여성이 확진 판정을 받자 27일에야 중국에 더해 한국, 일본, 이탈리아, 이란을 방문한 사람으로 검사 대상을 확대했다. 일본도 무료 검사 기준이 까다롭다. 중국 등에 다녀온 사람과 밀접하게 접촉한 이력이 있거나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들 중 광역지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가능하다. 본인 부담 검사는 아예 없다. 일본 정부는 다음 달 초엔 본인 부담 검사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비용은 미정이다. ▷검사 기준의 차이는 검사 건수의 차이를 낳는다. 한국에선 28일까지 7만8830건을 검사해 2337명의 환자를 찾아냈다. 미국은 445건 검사에 14명 확진, 일본은 2058건 검사에 186명 확진이다(미일 모두 크루즈선 탑승자 제외). 확진율을 비교하면 한국이 2.96%로 가장 낮고 미국은 3.14%, 일본은 무려 9.03%다. 한국의 환자 수가 빠르게 늘어나는 것은 빠르게 찾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한국은 환자 수가 너무 많아 난리지만 미국과 일본은 너무 적다고 야단이다.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의식해 환자 수를 줄이려고 검사를 아예 틀어막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미국도 재선에 도전하는 대통령이 “감기보다 위험하지 않다”며 미온적으로 대처하다 지역사회 확산을 방치할까 봐 걱정이다. 환자 수 650명으로 ‘유럽의 우한’이 돼버린 이탈리아에서는 검사를 너무 열심히 해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한국의 환자 수 급증은 방역 실패의 증거인 동시에 진단 기술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은 사방에서 입국 제한을 당하는 신세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진단 기술만큼은 평가받을지 모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2-2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정치적 구호 강요로 학생 권리 침해 말라”[논설위원 현장 칼럼]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졸업 시즌이지만 서울 관악구 봉천동 인헌고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고교 재학생들이 교사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편향된 교육을 한다고 폭로하면서 시작된 ‘인헌고 사태’. 교육현장에서 초유의 사건이 벌어진 지 거의 4개월이 지난 현재 학교는 사제 간 송사(訟事)로 후유증을 앓고 있다. 교사 9명은 정치 편향 교육을 한다고 보수 성향의 학부모단체에 고발당했다. 인헌고 사태를 주도한 ‘인헌고 학생수호연합(학수연)’의 대변인인 최인호군은 학교폭력대책위에서 징계 처분을 받고 학교를 상대로 징계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징계 처분 효력을 정지시켰다. 인헌고 사태의 주인공들을 만났다. 김화랑 군은 학수연 대표로 최 군과 함께 기자회견, 시교육청 및 학교 앞 시위를 주도했다. 두 사람은 다음 달부터 각각 사회복지학과 정치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된다. 나승표 교장도 따로 만나 인터뷰했다.》  ―졸업식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다. 학수연의 문제 제기에 불만을 가진 학부모에게서 욕설을 들었다고…. ▽최인호=결국 경찰이 와서 소동이 끝났다. 사과도 받아냈다. 졸업식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좋게 마무리하려고 갔는데 심란했다. ▽김화랑=우리가 폭로했던 문제를 해결 못 하고 후배들에게 짐을 지우고 떠나 아쉽다. ―폭로하면 달라질 거라 기대했나. ▽최=학생들이 문제 제기하면 선생님들이 같이 얘기해 보자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우린 아예 그런 적 없다 하시니…. ▽김=학교가 우리를 나쁜 놈 만들 줄은 몰랐다. 편향 교육 이슈 대신 시위하니 시끄럽다, 학습권 침해다, 너희가 나쁜 거다, 이렇게 프레임 전환을 해버렸다. 환멸이 느껴진다. ―대학수학능력시험 한 달 전 폭로했는데 입시엔 지장이 없었나. ▽김=수능 최저를 맞추지 못해 목표했던 대학엔 떨어졌다. 정치적 편향 교육의 증거가 되는 영상이 입수돼 지난해 10월 18일 페이스북에 업로드했는데 파장이 컸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지난해 10월 17일 열린 인헌고 마라톤대회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반일(反日) 마라톤 구호 제창을 강요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시교육청 특별장학 결과 전교생 441명 가운데 97명이 마라톤 구호 제창, 21명은 반일 선언문 띠 제작에 강제성이 있었다고 답했다) ―교사들이 편향된 교육을 한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인가. ▽최=고1 때부터인데 결정적인 계기는 2018년 5월 혜화역 시위(‘몰카 성차별 수사’ 규탄 시위)다. 평소 선생님들이 페미니즘을 많이 강조하셨는데 극단적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6월 지방선거 땐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페미니스트 신지예 뽑고 왔다”며 강요하는 듯한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었다. ▽김=선생님들이 낙태 무조건 허용해야 한다, 책임감 없는 남자들이 많아서 여자들이 피해 본다고 하셨다. 솔직히 우리 세대는 남자라고 특권을 누린 기억이 없다. 그런데 남자는 지배자, 가해자, 죄인 취급하는 게 불편했다. ▽최=남녀 편을 갈라 적대감을 갖기보다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성평화 동아리를 만들었다. 회원의 절반이 여학생이었다. 자율동아리로 인정받으려면 지도교사가 필요해 A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그런데 워마드(여성 우월주의 사이트)가 우리 동아리 좌표를 찍어 공격했고 선생님도 지도교사를 맡을 수 없다고 거절하셨다. 반(反)사회적이지 않다면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인헌고는 A 교사가 지도교사 요청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이 동아리가 ‘남성성은 모험심으로, 여성성은 공감과 모성애로 정의하며 남녀 차별을 정당화’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시교육청은 교사들의 부적절한 발언은 있었지만 의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아 정치 편향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한두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신 선생님이 10분 정도 된다. 어떤 선생님은 ‘민주주의가 뭐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한 학생이 ‘노력한 만큼 얻어가는 사회’라 답했더니 “그런 쓰레기 같은 생각은 버려라”고 하셨다. 김정은 환영 단체 관계자가 와서 강의하는데 북한이 좋은 나라라고 미화한 적도 있다. ▽김=○○교과 선생님은 자유한국당을 엄청 싫어하셔서 그쪽 정치인은 다 사기꾼이고 독재자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나왔을 땐 김영삼 대통령 멍청한 사람이라고, 세계화가 문제라고 했다. ▽최=마라톤 대회에서 문제가 된 ‘아베 망해라’ 구호도 그렇다. 일본이 역사적으로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세계화 시대인데 감정만으로 풀어가기보다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어떤 선생님은 ‘집에 20억 원이 없으면 다 약자’라고 하셨다. 학생들을 약자로 포섭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거다.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은 지난해 11월 18일 ‘인헌고 논란을 통해 본 학교 민주시민교육’ 토론회에서 “혁신고교인 인헌고 학생이 문제를 제기한 건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한 것, 혁신교육의 성공 사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김=혁신교육 커리큘럼이 페미니즘, 성소수자, 반(反)원자력, 태양광 이런 걸로 짜여진 것 같다. 토론 위주의 수업을 하긴 하는데 기초학력 미달자가 많다 보니 토론 주제도 두발 자유 같은 단순한 것만 한다. ▽최=선생님들이 토론하게 한 뒤 자기가 지지하는 쪽 주장에 끼어들어 상대편을 어떻게 하려 들고, ‘얘들아 이게 맞는 거야’ 하고 끝내신다. ―고교 모의 선거교육, 민주시민교육이 논란이다. ▽최=선생님들이 여기 뽑아라, 이쪽은 잘하고 저쪽은 못하고 있다, 이런 말씀 하시면 대부분 학생들은 별로 관심도 없고 모르는 상태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김=어른들은 무서운 존재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른들 의도대로 놀아나게 될 거다. ―이상적인 교육이란 어떤 걸까. ▽김=정치적 구호 강요나 사상 주입은 학생 권리 침해다. 양쪽으로 갈라 한쪽은 좋은 점만, 다른 쪽에 대해선 나쁜 점만 가르치는 건 옳지 않다. 이쪽저쪽 모두 다양한 면을 알려주면 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최=다른 생각을 한다는 이유로 낙인찍고 차별하면 안 된다. 대학 가도 학수연 활동 계속 한다. 학교에서 사상 주입 교육한 것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 대책 약속할 때까지. 그리고 성평화가 오는 그날까지. 나 교장은 “학생들 주장에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했다. ―자체 진상 조사는 했나. “교사 52명 상대로 학교에서 자체 조사했고, 3년간 부적절한 발언이 23건 있었던 것으로 나왔다. 교사들의 정치 성향이 은연중에 튀어나온 것이지 의도적으로 말한 게 아니다.” ―학생들의 문제 제기를 학교 안에서 해결할 수는 없었나. 사회 문제가 돼버렸다. “(보수) 시민단체가 와서 시위해 수업을 할 수가 없다. 단체 회원들이 등굣길 하굣길 학생들에게 마구잡이로 욕한다. 아이들(김화랑, 최인호 군)이 사실을 왜곡시켜 많은 교사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변호사 비용도 걱정이다. 졸업 후엔 교사들이 어떤 법적 조치를 취할지 알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모의 선거교육을 하면 교실이 정치판이 되지 않을까. “이미 학교회장 선거 하고 있는데 특별히 모의 선거교육이 필요할까.” ―왜 인헌고 사태가 터졌다고 보나. “우리 땐 정의가 분명했다. 민주 대 반(反)민주, 독재 대 반독재.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각기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우린 신문이나 TV 뉴스를 봤지만 학생들이 뉴스를 접하는 채널은 유튜브 등 다양하다. 그리고 학교 밖 양극화된 진영논리가 학교 현장에도 이미 들어왔다. 조그만 해프닝이 큰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다. 정말 중립적 입장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 일은 계속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헌고 사태가 터지기 전 서울의 초중고교에선 몇 차례 경보음이 울렸다. 인헌고 사태 이전 3년간 시교육청에 ‘정치 편향’ 수업 민원이 13건 들어왔지만 1건을 제외하고는 감사도, 특별장학도 없이 ‘자체 종결’로 마무리됐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선거교육, 민주시민교육을 할 것인가. 이렇게 묻기 전에 먼저 자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을 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 인헌고 사태 ::지난해 10월 22일 인헌고 학생들이 ‘인헌고 학생수호연합’을 결성하고 서울시교육청에 ‘정치 편향 교사들을 감사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됐다. 시교육청은 11월 21일 “조국 뉴스는 가짜다” “너 일베냐”와 같은 일부 교사들의 문제 발언을 확인했다는 특별장학 결과를 발표하면서 “편향 교육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 반발을 샀다. 학생들은 인헌고와 시교육청이 중립적 교육을 받을 권리와 의사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한 상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2-19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코호트 격리[횡설수설/이진영]

    격리란 전염을 예방하는 모든 방법을 뜻한다. 특정 공간에 환자를 가두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장소를 통째 봉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14세기 베네치아에서는 흑사병이 돌자 40일간 모든 선박들의 정박을 금지했다. 영어로 격리를 뜻하는 ‘quarantine’은 여기서 유래했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던 시절엔 역병이 돌면 외딴섬에 환자들을 가두어 감염을 차단했다. 190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을 땐 차이나타운이 봉쇄됐다. 중국계 이민자들이 “바로 맞은편 백인 거주지역은 왜 그냥 놔두냐”고 항의하자 일부 의사들은 “페스트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만 걸린다”는 황당한 해명을 내놓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다양한 스케일의 격리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23일 발원지인 인구 1100만 도시 우한(武漢)을 통째 봉쇄시켜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격리 조치라는 기록을 세웠다. 일본은 대만과 홍콩 등지를 경유하고 3일 요코하마로 돌아온 크루즈선에서 확진환자 10명이 나오자 37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 전원을 14일간 선상에 격리하기로 했다. ▷국내에선 신종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병원 폐쇄 사례가 나왔다. 태국에서 입국한 ‘16번’ 확진환자가 다녀간 광주 21세기병원이 4일 ‘코호트 격리’됐다가 다음 날 부분 격리로 수위가 낮아진 것. 코호트 격리는 환자와 의료진을 동일 집단(코호트·cohort)으로 간주하고 병원을 폐쇄하는 방법이다. 의사와 환자 70여 명은 출입문 손잡이가 밧줄로 묶인 병원에 갇혀 경찰 기동대가 감시하는 가운데 하룻밤을 보냈다. ▷2015년 메르스 유행 때는 대전 대청병원을 시작으로 전국 10여 개 병원이 코호트 격리됐다. 병원 폐쇄에 따른 손실의 일부는 정부가 보상해준다. 하지만 격리 해제 후에도 한동안 내원 환자가 줄어 경영상 어려움을 겪게 된다. 창원SK병원은 의료진과 환자 85명이 2주간의 격리를 자청해 추가 감염을 막아냈지만 결국 경영난으로 폐업했다. ▷메르스로 코호트 격리됐던 을지대병원 수간호사는 진료일기를 남겼다. 결혼식을 연기한 신부, 젖먹이를 둔 엄마 간호사들은 30분만 입고 있어도 흠뻑 젖는 방호복 차림으로 환자를 돌봤다. 격리가 웬 말이냐며 소란을 피우는 환자도, 간식과 엽서로 응원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2주간의 격리가 끝나고 바깥 공기를 마시게 된 그는 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전염병 발생 시점부터 종료까지의 관리법을 경험하고 2차 감염을 막은 간호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됐다. 14박 15일의 긴 MT를 잊지 못할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2-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9일 춘제 연휴 끝나고 중국인 일상 복귀할 때가 최대고비”[논설위원 파워 인터뷰]

    어린이집 10곳 중 1곳이 문을 닫았다. 헌혈 급감으로 응급 환자를 위한 혈액 보유량이 3일 치도 남지 않았다. 중국산 부품 공급이 끊겨 자동차 생산 라인이 멈췄다. 간병인, 3D업종 근로자, 관광객으로 환영받던 중국인들과 눈을 마주치기 꺼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지난달 20일 국내 첫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신종 코로나) 확진 환자가 나온 이후 한국 사회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다. 정부는 3일 감염병 위기 경보는 ‘경계’ 수준이나 실제 대응은 최고 수준인‘심각’ 단계에 준해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모란 대한예방의학회 신종코로나바이러스위원장(55)은 4일 “방역 당국이 예상하지 못한 환자가 나왔다.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상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 암관리학과 교수인 그는 2015년 메르스 사태 때 학회의 메르스위원장을 맡아 예방의학 전공의들과 민간역학조사관으로 방역 일선에서 뛰었다. 지금은 국내외 방역 동향을 정리 분석해 정부와 국회의 자문에 응하고 있다. ―4일 감염 경로가 불투명한 16번째 확진 환자가 나왔다. “그동안에는 방역당국의 감시망에서 환자가 나왔다. 그런데 4일 광주에서 발생한 16번째 확진 환자는 정부가 예상하지 못한 경우다. 따라서 감염병 위기 경보를 지역사회 전파 시 발령하는 ‘심각’으로 상향해야 한다.” ―이날 시작된 중국 후베이(湖北)성 외국인 입국 금지에 대해 대한의사협회가 대상 지역을 중국 전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후베이성 외국인 입국 금지 이후 그곳에서 들어오는 내국인(한국인)을 14일간 자가 격리 조치하고 있다. 입국 금지 지역을 확대하면 그만큼 자가 격리 대상이 되는 내국인 수도 폭증한다. 요즘도 중국에서 하루 1만6000명이 들어온다고 한다. 이 중 절반가량이 내국인인데 하루 8000명씩 생기는 사람들을 보건소에서 1 대 1로 감시하는 게 가능할까. 상황이 악화되면 단계적으로 입국 금지 지역을 확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 교류가 많은 나라가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그러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중국 체류 외국인 입국을 금지한 나라가 미국 호주 이탈리아를 포함해 17개국이 넘는다. 사스나 메르스 때도 없던 초유의 일인데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 아닌가. “몇 개국만 입국을 금지하면 금지하지 않는 나라로 몰릴 가능성이 있으니 도미노 식으로 외국인 입국 금지 국가가 늘어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30일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도 교역 제한을 권고하지 않았다. WHO 사무총장이 기여금을 많이 내는 중국에 휘둘린다는 비난도 들린다. “국제기구는 돈 많이 내는 나라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WHO가 교역 제한을 권고한 적은 없다. 교역을 제한하면 통제망에서 벗어난 우회로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나 환자 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 ―정부는 3일 “앞으로 7∼10일이 고비”라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 춘제(春節·중국 설) 연휴로 전국에 흩어진 사람을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9일까지 연장해놓은 연휴가 끝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엄청나게 섞일 것이다. 중국 환자 수는 아직 피크에 가지도 않은 듯한데 9일 이후 급증할까 그게 가장 큰 걱정이다.” ―3월 개학을 앞두고 중국 유학생들이 대거 입국한다. 국내 중국 유학생 수가 7만 명이 넘는다. “중국인 유학생들은 중국의 출국 검역과 한국 쪽 입국 검역을 통과해야 하고 14일간 자가 격리를 하게 돼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유증상자를 내보내진 않는다. 혹시라도 한국에 들어온 유증상자가 확진 판정을 받게 되면 감염환자를 국경 밖으로 못 내보내도록 규정한 WHO 규약 위반이 된다. 위반해도 제재를 받진 않지만 중국이 자기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셈이 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신중하던 미국 언론이 대유행(팬데믹) 가능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중국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지역사회 확산 단계인 나라는 없다. 환자를 발견한 나라들은 진단검사 수준이 되는 나라들이다.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의외로 조용한 것이 이상하다. 정말 환자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못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신종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는 대부분 중국인이고 필리핀과 홍콩에서 1명씩 사망자가 나왔다. 우리는 안심해도 되나. “중국은 발병한 지 오래됐고 환자가 2만 명이 넘어 병원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받기 힘들다. 우리는 확진환자들이 각 병원에 흩어져 있는데 의료진이 총력을 기울여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확진환자가 나온 지 보름밖에 안 됐으니 안심하기는 이르다.” ―신종 코로나는 사촌 격인 사스나 메르스와 달리 잠복기 전염에 회복기 전염 가능성까지 제기돼 불안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호흡기와 소화기 질환 바이러스의 중간적 특성을 띤다. 대체로 호흡기질환은 증상이 나타나기 전부터 바이러스가 퍼지고, 소화기질환은 증상이 시작된 이후에 나오는데 증상이 사라진 뒤에도 바이러스가 나올 수 있다. 사스나 메르스는 호흡기 증상을 주로 보이지만 증상이 나타난 다음부터 전파돼 관리가 쉬웠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는 두 질환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듯하다. 신종 코로나 환자는 완치 후 24시간 간격으로 바이러스 검사를 해 두 번 음성이 나와야 퇴원시키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회복기 전염 가능성은 걱정 안 해도 된다. 문제는 잠복기 전염인데 증상이 나타나기 전부터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면 방역이 정말 힘들어진다. 손 씻고 마스크 쓰고 환기 잘하고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고, 이런 기본적인 위생수칙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2003년 사스 때는 국내에서 확진환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아 WHO가 ‘사스 예방 모범국’으로 평가했다. 2015년 메르스 때는 38명이 사망했다. 사스 때는 ‘행정의 달인’ 고건 총리가 있어 방역에 성공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던데 진짜 행정력의 차이가 피해의 차이를 가져온 것인가. “사스 때 너무 쉽게 넘어간 것이 독이 됐다. 그땐 중국과의 교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커 개인들도 자가 격리를 철저히 했다. 그때 환자가 몇 명이라도 생겼더라면 낙후된 보건의료시스템을 점검해 제대로 고쳤을 텐데 위기를 넘기고 나니 한국 수준이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것도 안 하다 메르스가 터진 것이다.” ―중국은 사스 때 본토에서만 349명이 죽었지만 이번에도 대처를 잘 못했다. “중국은 사스를 겪은 뒤 보건의료시스템을 많이 고쳐 우리보다 좋았다. 미국 질병관리센터 같은 조직을 정비하고 역학조사관 제도를 만들고 우한(武漢)에 바이러스연구소까지 뒀다. 그런데 사스 이후 17년간 아무 일이 없다 보니 경계심이 약해진 거다. 2015년 한국 메르스 환자가 중국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몇 명이라도 환자가 나왔더라면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이번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방역은 전쟁과 비슷하다. 평화가 길어지면 해이해지고,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군인들은 실전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태평성대 기간이 길어지면 군대가 왜 필요하냐는 얘기들을 한다. 지금은 방역 인력이 태부족이라고 말하지만, 전염병이 돌지 않으면 보건소에 노는 사람이 왜 이리 많으냐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은 메르스 때보다 방역 수준이 나아졌나. 확진환자의 99%가 병원에서 감염됐던 메르스 방역 인프라가 지역사회 확산형인 신종 코로나에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메르스 방역의 실패 이후 역학조사관제도를 정착시키고, 음압격리병상 수를 늘리고, 응급실에 선별진료소를 만들고, 감염에 취약한 응급실 문화를 개선했다. 접촉자로 분류돼 격리된 사람들, 문 닫은 의료기관에 예산을 지원하는 제도도 메르스를 계기로 생겼다. 신종 코로나에 이만큼이라도 대응할 수 있게 된 건 그때 시스템을 개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는 메르스와 달리 외국에서 감염된 환자들이 들어와 지역사회로 전파시키고 있다. 지역사회와 해외 유입 감염 관리에 대한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 선진국들은 전염병 발생국가에 지원 명목으로 미리 나가서 바이러스나 치료정보, 방역시스템 등에 관한 정보를 가져간다. 전염병 유행이 끝나고 나면 제약회사들이 백신 치료제 진단키트 제조 경쟁을 벌이는데 그런 정보를 이용하는 거다. 세계가 무섭게 돌아가고 있다.” ―신종 코로나 유행은 언제 끝날까. “사스는 2003년 유행 후 17년간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메르스는 2012년 발병 후 지금도 중동 지역에 남아 있다. 신종 코로나가 사스의 길을 갈지, 제2의 메르스가 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항생제와 백신으로도 전염병은 정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항생제는 내성이, 백신은 효과가 완벽하지도 않을뿐더러 새로운 감염병이 계속 나오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역병은 사라진 게 아니고 책갈피와 방구석에 숨어 우리가 방심하길 기다리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2-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우한 폐렴 경보[횡설수설/이진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인 우한 폐렴이 확산 일로다. 지난해 12월 31일 중국 후베이(湖北)성 성도(省都)인 우한(武漢)에서 발생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미국 1명을 포함해 6개국에서 확진 환자 641명이 발생했다. 이 중 사망자는 17명으로 모두 중국인이다. 한국도 인천공항에서 감염자로 의심돼 격리된 중국인 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교통 요충지로 ‘중국의 배꼽’이라 불리는 인구 1100만 도시 우한은 23일 오전 10시부터 도시로 들어가고 나가는 모든 대중교통 운행이 중단됐다. 중국 역사상 성도 봉쇄는 처음이다. ▷우한 폐렴의 숙주는 박쥐나 뱀으로 알려져 있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는 박쥐와 사향고양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는 낙타였다. 우한 폐렴 발원지인 수산물시장에서는 온갖 야생동물이 불법으로 거래돼 왔는데 두 번째 사망자도 수산물시장 가게 주인이었다. 잠복기는 짧게는 2, 3일, 길면 10∼12일이다. 증세는 감기나 독감과 비슷하고 치료제나 백신은 없다. 감염자의 침이나 콧물로 전파되므로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땐 마스크를 써야 한다. 마스크에 바이러스가 묻을 수 있으므로 한 번 쓰고는 버리는 것이 좋다. ▷홍콩 전문가들은 우한 폐렴이 2003년 사스 때처럼 대유행할 조짐이 있다고 경고한다. 전염병 확산은 동물에서 인간→인간 간 전염→환자 가족과 의료진에 전염→대규모 발병 단계로 진행되는데 우한 폐렴은 마지막 단계 진입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정보 통제와 뒷북 대응이 바이러스 확산을 가속화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우한은 봉쇄됐지만 이미 수백만 우한 시민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뉴욕타임스는 중국이 언론과 시민사회를 통제하고 정부가 정보를 독점하다 사태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우한 봉쇄 소식에 중국 주가지수가 폭락했다. 세계 경제가 입을 피해 규모도 2003년 사스 때를 능가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3년 8.7%에서 올해는 20%로 커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회복 기미를 보이던 한국 경제도 연초부터 악재를 만났다. 5년 전 메르스 때처럼 소비가 얼어붙어 성장률 반등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다. ▷오늘 시작되는 설 연휴가 1차 고비다. 이동이 많고 사람이 모여 감염 우려가 높지만 대다수 병원은 문을 닫는다. 중국인 관광객 14만 명도 몰려들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당국은 24시간 비상방역체계를 가동하고, 개인은 관련 정보에 귀를 열어둔 채 손 소독과 마스크 쓰기를 비롯한 전염병 예방행동수칙을 따라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2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중국發 폐렴 공포[횡설수설/이진영]

    중국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집단 발병한 폐렴이 중국 최대 명절인 춘제(春節)의 인구 대이동을 계기로 확산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우한 폐렴은 원인이 사스나 메르스와 같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다. ▷우한시는 17일 하루 동안 17명이 확진돼 누적 환자가 62명으로 늘었다고 19일 발표했다. 일부 환자는 폐렴 발원지인 수산물 도매시장에 간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이 강조해 온 동물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사람 간 전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태국과 일본에서도 각각 2명과 1명의 확진 환자가 나왔다. 폐렴 바이러스가 이미 국경을 넘은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사스나 메르스와 달리 사람 간 지속적인 전염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경계심은 높아지고 있다. 영국 BBC는 우한 폐렴 감염자 수가 1723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발표한 62명과는 차이가 너무 큰 데다 중국 당국이 구체적인 감염 경로와 우한 이외 지역의 의심 환자 수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환자 수를 축소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중국은 2002년 사스 사태 때도 피해 사실을 숨기다 양심적인 중국 의사의 은폐 사실 폭로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거세진 후에야 사스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후 사스 바이러스 전파자를 사형에 처하는 엄벌 규정까지 두면서 사스 확산 방지와 퇴치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뒷북 대처로 37개국 774명의 사망자를 냈다. 중국은 사스 사태로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가장 큰 이미지 손상을 입었다. ▷춘제 연휴에 해외를 찾는 여행객은 약 4억5000만 명이다. 태국은 중국인 80만 명, 특히 우한에서만도 하루 2000명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하고 공항과 병원에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베트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같은 아세안 국가들은 물론 미국도 뉴욕을 비롯해 3개 공항에서 우한발 항공기 승객에 대한 발열 검사를 시작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춘제 연휴(1월 27일∼2월 2일)에 한국을 찾는 중국인이 14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구 1100만 도시 우한에는 한국 교민이 1000명 넘게 산다. 인천과 우한을 잇는 직항 비행기만 주 8편으로 입국 인원이 하루 200명이다. 2015년 38명의 희생자를 낸 메르스 바이러스는 중동발이었다. 우한은 비행기로 2시간 반이면 닿는 거리다. 국경 없는 감염병에는 국가 간 정보 공유와 공조가 필수적이다. 우한 폐렴이 우환(憂患)이 되지 않도록 2015년 메르스 초기 대응 실패에서 배운 지혜를 총동원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2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학대 부모에 또 맡기다니[횡설수설/이진영]

    스위스는 어린이집이 비싸기로 유명하다. 18개월 미만인 아이를 하루 맡기는 데 많게는 약 16만 원이 든다. 어린이집 종일반 비용이 가구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13%인데 스위스는 17%다. 한국은 4%. 국민소득이 세계 2위인 부자 나라 스위스에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무료다. 왜 유독 어린이집만 비싸게 받는 걸까. 스위스인들은 만 3세까지는 부모가 직접 키우라는 취지로 해석한다. ▷아이는 부모 손에 커야 좋다는 건 상식이다.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은 아이에게 최선의 양육환경이 친부모가 있는 ‘원(原)가정’임을 전제로 한다. 한국 아동복지법도 ‘원가정 보호’가 원칙이다. 하지만 부모와 사는 집은 아동 학대가 가장 많이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12일엔 장애를 가진 9세 아들을 찬물이 담긴 욕조에 방치해 숨지게 한 30대 계모가 구속됐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아이가 2016년에도 두 차례 학대 신고가 접수돼 부모와 격리됐다가 2018년 2월 친부의 요청으로 부모에게 인계됐다는 점이다. 아이는 학대당했던 집으로 돌아간 지 2년이 되지 않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아동학대 2만2367건 가운데 76%가 부모에 의한 학대였다. 10명 중 1명은 재학대를 당했는데 부모가 가해자인 경우가 95%나 됐다. 다시 학대당할 게 뻔한데 집으로 돌려보내다니, 아이가 상습 학대를 받도록 사회가 손놓고 있는 것 아닌가.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원가정 보호 원칙은 지켜져야 하지만 학대당한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놓는 동안 원가정을 회복시키는 노력을 해야 하고, 원가정이 준비가 됐는지 따져본 후 아이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18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인 영화 ‘가버나움’에는 쓰레기통을 뒤져 먹고사는 시리아 난민 소년이 “스웨덴에선 아이들이 병에 걸려야만 죽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부모의 방치 혹은 학대 속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아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꼬집은 대사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12위인 나라에서 아이가 부모 손에 죽는 일이 벌어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부모가 자격이 안 된다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피해 아동과 가해 부모에 대한 사후관리를 강제화하는 법은 몇 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영·유아 건강검진을 의무화하고 검진 항목에 학대 관련 지표만 추가해도 학대 위험에 놓인 아이들을 늦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적어도 재학대만은 막을 수 있어야 그게 나라다운 나라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14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조금 먼저 온 미래”[횡설수설/이진영]

    꿈의 초등학교가 있다. 전교생이 해마다 무료로 어학연수를 간다. 입학하면 집도 주고 부모 일자리까지 알아봐 준다. 경남 함양군에 있는 전교생 14명의 서하초교 얘기다. 학생 수가 줄면서 문 닫을 위기에 처한 시골 학교의 적극적 자구 노력 사례다. ▷1000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에서도 학생 수가 모자라 문을 닫는 첫 공립 초등학교가 나왔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 염강(鹽江)초교에서 10일 마지막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생은 38명. ‘소금처럼 세상을 맛깔나게, 강물처럼 어떤 걸림돌에도 거침없이 큰 바다로 흘러가는 인재 육성’을 목표로 세웠지만 ‘학생 절벽’이라는 걸림돌에 걸려 개교 26년 만에 문을 닫게 됐다. 학교 측은 졸업식에 ‘조금 먼저 온 미래’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시 학교의 폐교는 저출산 고령화 때문이다.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로 어른들은 몰려들지만 학령인구는 줄고 있다. 2018년엔 서울 은평구의 은혜초교가 사립 초교로는 처음으로 문을 닫았다. 지방에선 폐교가 오래된 고민거리다. 전교생이 10명 남짓밖에 안 돼 축구 경기를 못하고, 한 학년에 학생이 달랑 2명이어서 학급 회장과 부회장을 번갈아 맡는 곳도 있다. 학생 부족으로 폐교된 학교는 초중고교 합쳐 3000개. 대부분 시골 학교다. 경남 진주 지수초교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구인회 LG그룹 회장,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을 배출한 명문이지만 2009년 문을 닫았다. ▷지금 추세면 10년 후엔 초등학교 6064곳 중 1791곳(29.5%)이 폐교 상황에 처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역 주민과 동문, 공무원들은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 학교 살리기에 나서고 있다. 충북 괴산군 백봉초교는 입학생과 전학생에게 새 집을 빌려준다. 그 덕분에 2018년엔 유치원생까지 합쳐 26명이었던 전교생 수가 1년 만에 37명으로 늘었다. 전남 고흥 영주고는 중졸 학력의 60대 만학도들을 신입생으로 받아들여 폐교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2018년 빈 교실을 활용해 국공립 어린이집을 짓자는 제안을 했다. 땅값 비싼 서울에 어린이집을 지으려면 부지 매입에만 20억∼30억 원이 드는데 빈 교실을 리모델링하면 7억 원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 정부도 이에 호응해 2018년 2월 학교 안 어린이집 및 돌봄교실 설치 방안을 확정했지만 관련 법인 영유아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빈 교실에 든든한 어린이집을 지을 수 있으면 출산율이 높아지고 학생 수도 늘어날 것이다. 염강초교 폐교 소식이 마음 아프다면 국회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처박혀 있을 관련 법안부터 챙겨보길 바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이란의 현실주의[횡설수설/이진영]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한 만큼 똑같이 돌려주는 게 이슬람의 형벌원칙이다. 이란이 미국과의 무력 충돌에서 이슬람식 ‘비례적 대응’을 내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란은 군 실세 솔레이마니가 사살되자 ‘피의 보복’을 예고하더니 실제로 8일 이라크 내 미군기지 2곳에 미사일을 퍼부었다. 공격 시간까지 솔레이마니 사망 시각인 오전 1시 20분에 맞췄다. ▷그런데 보복 공격이 ‘비례적 대응’이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제기된다. 이란은 공격 1시간 전에 이라크에 군사 계획을 미리 알려줬다. 미국 쪽으로 정보가 넘어갈 걸 알면서 그랬다. 미사일 22발을 퍼부었지만 미국 측 사상자가 없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엄청난 후과를 우려해 복수의 수위 조절을 한 것이다. ▷현실적 힘의 우열을 고려한 그 같은 고육책은 어쩌면 치밀한 계산과 냉정한 자제력의 결과물일 수 있다. 이란 전문가 스티븐 하인츠 록펠러 브러더스 펀드 대표는 양국의 무력 충돌에 대해 “미국이 골프 치고, 이란은 체스를 뒀다. 미국이 스윙 한 번 하는 동안 이란은 말을 세 번 움직였다”고 논평했다. 이란으로선 ①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②성난 국내 여론을 달래고 ③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체면까지 세웠다. 하메네이는 “미국의 뺨을 때려줬다”며 우쭐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타국에서의 무력 사용으로 국제법을 위반하고, 탄핵과 재선을 의식한 무모한 무력 사용으로 갈라진 이란을 ‘반미’로 똘똘 뭉치게 했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로저 코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이란은 오래된 문명을 가진 나라로 아마추어가 아니다”라고 했다. 대개는 1979년 친미 왕조를 몰아내고 지금의 이란이슬람공화국을 세운 호메이니 때문에 과격한 근본주의 이슬람 국가라는 인상을 갖는다. 북한과의 군사 밀거래도 이미지를 더욱 나쁘게 만든다. 하지만 과거 페르시아는 유대인을 정복한 후 종교와 자치를 허용할 정도로 유연했다. ▷특히 외교정책은 매우 현실주의적이다. 2015년 오바마 정부 시절 미국과의 핵합의도,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지지도 이런 현실주의적 접근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포린어페어스지는 이란이 국가 안보에 관해서는 한 몸처럼 움직이며, 의사결정은 냉철한 계산을 토대로 일관성과 안정성을 유지한다고 평가했다. 세계 군사력 1위의 미국, 더구나 트럼프라는 예측 불가능한 상대에게 맞서 ‘비례적 대응’을 호언장담한 이란의 ‘반격 퍼포먼스’는 명분과 자존심, 현실을 다층적으로 배합할 수밖에 없었던 고민의 산물인 것 같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1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中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횡설수설/이진영]

    중국에 ‘원자바오(溫家寶)식 셈법’이라는 게 있다. 그가 총리 시절 한 얘기로 “아주 작은 문제도 13억(지금은 14억 명)을 곱하면 큰 사건이 되고, 반대로 아주 큰 일도 13억으로 나누면 사소한 일이 된다”는 내용이다. 중국 정부는 국내총생산(GDP) 수치를 인용할 때 편리한 대로 이 셈법을 동원해 왔다. 중국의 GDP는 13조 달러로 미국(20조 달러)에 이어 2위다. 반면 1인당 GDP는 59위다(통계청·2018년 기준). 중국 정부는 국내 정치용으로 위세를 과시할 때는 세계 2위인 국가 GDP를, 대외적으로 “우린 아직 후진국”이라고 엄살 부릴 땐 1인당 GDP를 내밀었다. ▷지난해 중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넘어선 것이 확실시된다고 외신이 전한다. 한국은 1995년 1만 달러를 넘었고, 외환위기 때 주저앉았다가 2002년 회복했다. GDP 1만 달러는 세계은행 기준으로 고소득 국가(1만2375달러)에 바짝 다가선 ‘중상위 소득 국가’ 수준이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40여 년 만에 이뤄낸 성과다. 중국 공산당이 2021년까지 건설하기로 약속한 샤오캉(小康·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림) 사회가 앞당겨 실현된 것 아니냐며 샴페인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양적 성장만큼 빈부격차도 커지고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선언하며 내세웠던 선부론(先富論)대로 중국 동쪽의 특구와 해안지역이 먼저 부유해진 반면 서부와 내륙은 여전히 가난하다. 도농 간, 도시 내 계층 간 소득 차도 크다. 2017년 지니계수는 0.467이다. 0.4 이상이면 불평등 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은 0.345다. 부동산 가격도 폭등해 하우스푸어 ‘팡누(房奴)’들이 부동산 투기로 재미 본 아주머니 ‘다마(大마)’에게 적대감을 갖는다. 금수저, 흙수저와 비슷하게 푸얼다이(富二代), 핀얼다이(貧二代) 등 부와 빈곤의 대물림을 뜻하는 유행어가 돈다. ▷14억 인구 중국의 경제성장은 한국 경제에 거대한 기회와 도전을 동시에 의미한다. 중국은 이미 세계 상위 10% 소득자가 1억 명으로 미국보다 많다. 지난해 중국인 여행객은 1억6800만 명으로 세계 여행객 10명 중 1명꼴이다. 1명당 초코파이 하나씩만 팔아도 14억 개다. 하지만 인구 14억이면 경쟁자도 그만큼 많아지는 거다. 더구나 중국은 기술 강국이다. 1인당 GDP 3만 달러를 넘겼지만 여전히 과거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퇴행적 리더십으로는 5G 서비스 상용화 개시에서 나아가 6G 시대를 준비하는 1만 달러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기 쉽지 않을 듯하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08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소리 없는 암살자[횡설수설/이진영]

    평화로운 호수에서 낚시를 즐기는 미국 대통령. 멀리서 벌 떼 비슷한 소리가 나더니 곧 까만 비행 물체가 떼 지어 날아온다. 킬러 드론이다. 드론 군단의 무차별 공격에 경호 인력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간다…. 지난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엔젤 해즈 폴른’은 이렇게 무시무시한 드론 테러 장면으로 시작된다. ▷미군이 3일 이란의 2인자이자 군부 실세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제거하는 데 동원한 MQ-9 리퍼(Reaper)는 현존하는 가장 치명적인 요인 저격용 드론이다. 일명 ‘닌자 폭탄’을 탑재한 MQ-9은 미 본토에서 원격조종해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도로에 있던 솔레이마니의 차량을 정밀 타격했다. 소리를 거의 안 내고, 최고 시속 482km에 최대 작전 고도 약 1만5240m까지 상승 가능하다. 첨단 통신장비, 미사일까지 완전 무장한 채 14시간을 체공할 수 있다. 움직이는 차량의 운전자는 놔두고 조수석에 앉은 표적만 ‘핀셋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2007년 실전 배치됐으며 2015년 현재 미군에 93대가 있다. ▷드론의 강점은 ‘가성비’다. 대규모 병력이나 특수장비 없이도 적을 죽이거나 핵심 시설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 ‘소리 없는 암살자’ 그 자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드론 공격으로 사살된 알카에다 조직원은 3300명이 넘는다. 예멘 반군은 지난해 9월 드론 10대를 띄워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석유시설 두 곳을 파괴했다. 석유 부국의 촘촘한 레이더 감시망이 속수무책으로 뚫릴 만큼 드론 탐지는 어렵다. 대부분의 드론이 몸체가 작고 레이더를 피해 저공으로 고속 비행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최근 한국이 들여온 고고도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는 무려 20km 상공에서 40시간 넘게 체공할 수 있다. ▷전장을 벗어난 드론은 실종자를 찾고, 씨를 뿌리고, 산불을 진화하는 등 사람을 살리는 용도로 활용된다. 지난해 12월 대구소방본부는 드론을 띄워 이틀 만에 실종 노인을 구조했다. 같은 달 충남 금산군에서 산불이 났을 때 금산소방서는 드론으로 정확한 발화 지점을 찾아내 1시간 만에 진화했다. 드론을 이용한 택배 배달 시대도 성큼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공격용 드론이 인공지능(AI)과 결합될 경우엔 더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AI 드론은 스스로 표적을 탐지하고 인식하고 분류해 공격할 수 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전쟁 수행도 가능하게 된다. 인간의 통제 능력을 벗어난 드론 공격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무인 자동차가 사고를 냈을 때 제기되는 법적·윤리적 책임보다 훨씬 무거운 질문을 무인기 드론이 던지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 2020-01-0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진영]청년들의 가난, 86세대 책임이다

    ‘88만 원 세대’라는 청년들의 자조를 들으면 저성장 시대를 만난 불운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청년 빈곤이 50대인 86세대 때문이라는 논문이 나왔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48)가 최근 ‘한국사회학’에 게재한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이다. 이 교수는 각종 통계자료를 활용해 19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86세대가 권력과 부를 너무 많이, 오랫동안 쥐고 있는 바람에 젊은 세대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분석했다. 86세대가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세대교체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은 새롭지 않다. 45세 미만 국회의원 비율은 6.33%로 150개국 가운데 143등이다(시민단체 ‘국회를 바꾸는 사람들’ 자료). 그래서 청년 공천 할당제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86세대가 여느 세대보다 근속 연수가 길고, 소득 상승률이 높으며, 오랫동안 최고소득을 점유해 다른 세대와의 격차를 벌렸다는 분석에는 눈길이 간다. 86세대의 경쟁력은 조직력이다. 산업화 세대가 학연 지연 혈연을 따지는 동안 86세대는 민주화란 목표 아래 학연 지연 혈연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뭉칠 줄 알았다. 민주화 이후 1990년대부터는 수만 개의 시민단체를 만들어 연대했는데 86세대의 1인당 가입 조직 수는 0.451개로 50년대 세대(0.209개)와 70년대(0.331개), 80년대(0.185개)보다 훨씬 많다(대졸자, 2010년 기준).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다져온 조직력은 뜻밖에도 정치권력은 물론 밥그릇을 챙기는 데도 밑천이 됐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 당시 30대였던 86세대는 살아남았다. 여기까진 운이다. 이후로는 특유의 전투력을 발휘해 노조 활동으로 정규직과 높은 임금상승률을 얻어냈다. 대가는 후배 세대가 치렀다. 기업들이 노동비용 상승에 생산시설 해외 이전, 비정규직 확대, 하청업체 단가 후려치기로 대응했기 때문이다. 100대 기업의 임원진 가운데 50대 비율은 대개 60% 선인데 2017년엔 70%가 넘었다. 이 교수는 “정치권력의 주류세력에 맞춰 기업도 줄을 대기 위해 비슷한 연배를 기용하기 때문”이라며 권력 불평등이 경제 불평등을 낳는다고 해석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평등 심화의 핵심은 세대 문제가 아니라 계급 문제”라고 진단했다. 김수정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86세대가 세대 간 경쟁의 승자라는 주장은 과장됐으며 부양 부담을 고려하면 86세대는 오히려 ‘낀 세대’”라고 했다. 부모 세대로부터 풍요로운 시장을 물려받고, 외환위기의 칼날을 피하고, 2000년대 닷컴 붐을 타는 등 운이 좋았을 뿐 세대 간 불평등을 의도한 게 아니라는 분석도 있다. 86세대가 누리는 기회가 운 덕분이라면 불운한 세대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걸까. 요즘 청년들은 많이 배우고도 취업을 못 한다. 첫 직장을 갖는 데 실패하면 그 이후로는 더욱 험한 난관을 만나게 된다(상처효과·scarring effect). 혼인율과 출산율이 괜히 떨어지는 게 아니다. 청년수당이라며 돈 몇 푼 쥐여주는 일회성 정책보다는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공평하게 나눠 갖는 세대 간 연대가 필요하다. 산업화 세대를 대표하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황정민)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다행”이라고 했다. 86세대는 “세대의 행운을 우리만 누린 게 미안하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교수 표현대로 “밥그릇 싸움 너무 잘해서 손주 못 보는 세대”로 전락할지 모른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3-30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진영]수많은 ‘정준영’들,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

    정준영 동영상 스캔들이 터지자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는 이렇게 논평했다. “사회 곳곳에 여성과의 성관계 경험을 과시하는 수많은 ‘정준영’들이 존재한다. 그가 공인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은 주목받지 못한 채 지나갔을 것이다.” 연간 불법 촬영 범죄 증가율은 두 자릿수다.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인데 5명 중 1명은 연인이나 친구 같은 알고 지내던 사람이다(경찰청 자료). 그래서 정준영 기사엔 이런 댓글들이 달린다. “우리 오빤 아니겠지?” “몰카 무서워서 못하겠네.” 사실 몰카가 아니어도 선진국의 남녀 간 잠자리 횟수는 줄어들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가 그렇다. 진 트웬기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 교수(심리학)에 따르면 1990년대 미국 성인은 월 5.2회 성관계를 했지만 2014년엔 4.5회로 줄었다. 밀레니얼 세대 중 15%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성경험이 없었는데 이는 X세대(1970∼80년생)의 2.5배다. 영국은 16∼44세 남녀의 성관계 횟수가 2001년 월 6회에서 2012년 5회로, 같은 시기 호주는 월 7.2회에서 5.6회로 줄었다. ‘초식남’의 나라 일본은 18∼34세 미혼 남녀 가운데 성경험이 없는 비율이 2005년 33%에서 2015년 43%로 늘었다. 유럽에서 출산율이 가장 높은 스웨덴도 성관계 빈도가 줄어 출산율에 영향을 줄까 걱정하고 있다. 미국 시사잡지 애틀랜틱은 이러한 추세를 ‘섹스 불황’으로 규정하고 젊은이들이 잠자리를 피하는 원인을 분석했다(2018년 12월호). 우선 학업과 취업 부담 때문에 깊게 사귈 여유가 없다. 젠더 감수성이 발달하면서 여자들은 데이트가 성폭력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하고, 남자는 오해받을까 봐 머뭇거린다. 소셜미디어의 비현실적인 비주얼에 스스로 주눅이 든 젊은이들도 있다. 데이팅 앱 덕분에 선택의 폭은 넓어졌지만 오히려 딱 한 사람을 고르기는 더 힘들어졌다. ‘선택의 역설’이다. 경제 불황과 달리 섹스 불황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여성이 원치 않을 때 ‘노’라고 얘기할 수 있고, 남성은 이를 배려하게 됐기 때문이니 빈도가 줄어든 건 섹스 불황이 아니라 건강한 ‘섹스 다이어트’라는 것이다. 댄 칼슨 미국 유타대 교수(가족소비자학)는 “성관계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은 빈도가 아니라 평등한 성역할”이라고 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가부장적인 커플이 자주 하지만 만족도는 평등한 부부 쪽이 높았다. 한국 밀레니얼 세대의 성생활에 관한 믿을 만한 통계는 없지만 미국이나 일본의 젊은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 이솜과 안재홍이 주연한 영화 ‘소공녀’(2017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가난한 젊은 남녀가 한겨울 난방이 안 되는 자취방에서 사랑을 나누려다 너무 추워서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봄에 하자”면서.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섹스의 진화’에서 인간의 성적 습성은 다른 동물들과 공통점을 찾기 힘든,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라고 했다. 남이 안 보는 데서 사랑을 나누고, 생식이 아닌 쾌락을 위해 관계하며,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한 파트너와 오래 만나는 종은 인간 말고는 없다. 원만한 성생활이 행복감을 준다는 연구는 너무나 많다. 그런 걸 취업이 걱정돼 못하고, 추워서 못하고, 봄이 와도 몰카가 무서워 못한다면 그건 개인 사정이 아니라 사회 문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는 페미니즘의 슬로건이다. “몇 번 하느냐” “하면 좋으냐”는 질문도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를 보장하라”는 정치적인 질문이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3-1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진영]“김정은 위원장, 고향 가게 해 주세요”

    하노이 ‘빈손’ 회담 소식에 신은하 씨(32·여)는 힘이 빠졌다. 1998년 가족과 북한을 탈출해 중국-베트남-캄보디아-태국을 거쳐 2003년 서울에 정착한 그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일요일 오후 11시 방영) 북-미 정상회담 특집을 위해 하노이를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행사장 주변을 바쁘게 오가는 그에게 어머니는 “곧 집에 갈 수 있게 되는 거냐”는 기대 어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서울 생활 17년째지만 어머니에게 ‘집’은 여전히 부모의 산소가 있는 함경북도 무산이다. 허탈한 마음으로 귀국 짐을 싸는 그를 숙소인 호텔에서 만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고 있는 멜리아 호텔과는 차로 20분 거리다. ―김 위원장과 사흘간 같은 도시에 있었네요. “북한에서도 못 보던 사람을 이곳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죠.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평양에는 간 적이 없어요. 제게 김씨 일가는 별나라에 사는 딴 세상 사람이었어요.” ―김 위원장은 열차를 타고 중국을 종단해 하노이에 도착했어요. 은하 씨 가족이 목숨을 걸었던 탈북 루트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그가 하노이까지 66시간이나 걸렸다고 놀라지만 저는 고작 66시간밖에 안 되나 놀랐어요. 우리 가족은 하노이까지 오는 데 5년이 걸렸거든요. 눈을 피해 길이 아닌 곳으로 걷다 보니 구르고 넘어지고 늪에도 빠졌어요. 베트남 국경경비대에 붙잡혀 감옥에 가고 브로커에게 속아 돈만 털리기도 하고요.” ―김 위원장이 가까이 있고 북한 사람도 많은데 무섭진 않은가요. “북한대사관을 지나칠 땐 소름이 돋았어요. 하지만 제겐 대한민국 여권이 있잖아요. ‘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을 잘 보호해 달라’는 문구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지금도 가장 고마운 게 여권이에요. 담배 한 보루 찔러준 적도 없는데 신청한 지 일주일 만에 나오는 여권이 정말 신기했어요. 그리고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정말 좋아해요.” ―김 위원장을 태운 차량을 향해 울면서 “고향 가게 해 주세요” 하고 외치는 모습이 외신에 보도돼 주목받았죠. “마음이 복잡했어요. 돌이라도 던지고 싶고, 고향 사람이라 반갑기도 하고. 북한이야말로 ‘헬조선’이지만 탈북민들에겐 고향이잖아요. 김정은은 밉지만 그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16년 만에 다시 찾은 하노이, 많이 변했죠. “오토바이밖에 없던 도로에 차가 많이 다녀요. 고층빌딩이 많은데 여기저기서 또 짓고 있어 활기가 느껴져요. 북한도 베트남처럼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 때 먹은 소금, 자식 때 물 들이켠다’는 베트남 속담이 있다고 해요. 권력 분산과 개혁개방이냐, 폐쇄적인 세습체제냐, 같은 공산주의 국가임에도 선대의 다른 선택이 오늘의 활기찬 베트남과 가난한 북한을 만들었죠. “김정은이 비핵화 의지를 묻는 질문에 ‘내 자식들은 핵을 이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죠. 전 이 뉴스를 보고 화가 났어요. 4대 세습을 생각하나 싶어서요.” ―독재자란 잠자리에 들 때 다음 날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 못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습이 아니면, 핵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정신적 ‘탈북’이 필요할 듯하네요. “‘이밥에 고깃국, 그리고 비단옷’이라는 김일성의 꿈을 이뤄준다면, 그래서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다면 핵이 없어도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을까요. 북한이 잘살고 자유롭게 고향에도 갈 수 있게 되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받은 고통에 한해서는요.” ― 하노이에서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3-02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진영]헬리콥터 맘에 관한 불편한 진실

    교육열이라면 중국도 뒤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스카이캐슬 맘’이 맹활약하는 동안 중국에선 타이거 맘을 체험하는 게임 ‘중국 부모’가 대박을 냈다. 젖먹이 아이를 키워 피아노 수영 코딩 학원에 보내고 성적을 관리해 대학 입시를 치르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을 즐기는 10, 20대들은 타이거 맘이라면 질색일 텐데 막상 부모 입장이 돼 보고선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고 한다. 자녀 주변을 빙빙 도는 헬리콥터 맘이나 무섭게 닦달하는 타이거 맘은 모두 비교육적인 양육법으로 지탄받는다. 하지만 효과는 있다는 경제학자의 책이 나왔다. 미국 예일대와 노스웨스턴대 교수가 쓴 ‘사랑, 돈, 양육: 양육법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이다. 뉴욕타임스는 ‘헬리콥터 양육에 관한 나쁜 뉴스’라며 책 내용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선진국 15세 학생들의 2012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와 부모의 양육 방식을 분석한 결과 ‘빡센(intensive)’ 양육법으로 길러진 아이들의 성적이 더 좋았다. 학력 수준이 비슷한 부모들만 놓고 분석해도 결과는 같았다. 대학을 나오든 아니든 월급 차이가 크지 않았던 1970년대는 방임형 부모가 많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임금 격차가 커지면서 헬리콥터 맘이 등장했다. 어린 시절 자유롭게 자라난 미국의 중산층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에겐 이전 세대보다 매주 12시간을 더 쓰기 시작했다. 저자들은 빡센 부모를 다시 독재적인(authoritarian) 유형과 권위 있는(authoritative) 유형으로 구분하고 후자가 더 효과적이라고 썼다. 독재적인 부모는 지시하고 매도 든다. 권위 있는 부모는 아이가 옳은 방향으로 가도록 설득한다. 권위 있는 부모의 자녀는 대학이나 대학원 진학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자존감이 높고 마약이나 술 담배를 하는 비율도 낮았다. 한국 전문가들의 견해도 비슷하다. 본보는 2016년 초등학교 고학년을 둔 부모들의 양육법에 관한 특집을 보도했다. 학자들은 ‘서울 의대’라는 목표치를 제시하고 닦달하는 헬리콥터 맘도 나쁘지만 기대치를 표현하지 않고 무조건 아이의 자율에 맡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아이들에겐 인정 욕구가 있고 100% 내부의 동기만으로 공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김희정 한국교원대 교수). 특히 성취욕구가 강한 알파걸은 “스카이가 아니어도 된다”는 말에 오히려 상처를 받을 수 있다(이윤주 영남대 교수). 이제 효과가 입증됐으니 다들 헬리콥터 맘, 아니 권위 있는 부모가 되는 일만 남은 걸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부모 되기가 어디 쉬운가. 넘치게 주고 싶어도 가난해서 모자라게 주고 미안해하는 부모들은 더 많다. 헬리콥터 맘들은 대학입시가 끝나도 끼리끼리 계속 만난다. 입시를 치르며 싹튼 전우애 때문이지만 만나다 보면 인턴이나 취업에 유용한 정보를 주고받게 되고 아이들에게 더욱 튼튼한 사다리를 놓아주게 된다. 헬리콥터 맘이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헬리콥터 부모의 실패로 끝났다. 게임 ‘중국 부모’는 현실적이다. 아이가 대학입시를 치르면 게임은 끝나는데 새로운 게임은 이전의 자녀가 따놓은 점수에서 시작한다. 첫 세대의 입시 성적이 엉망이면 다음 세대는 점수 따기가 더 힘들어지고, 반대로 베이징대 합격 점수를 따놓고 끝나면 다음 세대부턴 수월해진다. 이 게임으로 여덟 세대를 키워본 게이머가 말했다. “단거리 달리기인 줄 알았는데 끝나지 않는 계주임을 깨달았다.” 헬리콥터 양육법이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불편한 이유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2-1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오늘과 내일/이진영]보이지 않아도 달린다

    김미순 씨(58)는 마라토너다. 15년간 동아마라톤을 포함해 공식 대회 풀코스 340회, 100km가 넘는 울트라 마라톤 75∼80회를 달렸다. 국내 울트라 마라톤 그랜드 슬램(강화∼강릉 308km, 부산∼임진각 537km, 해남∼고성 622km)을 2회 달성했는데 여성으로는 처음이고, 시각장애인으로도 처음 세운 기록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김 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손잡고 달린다. 채널A ‘뉴스A라이브’의 새해 첫 인터뷰 주인공으로 화제가 된 그를 만나러 부부가 운영하는 인천의 카센터를 찾았다. 김 씨는 따뜻한 차를 끓여냈다. ―오늘도 산을 넘어 출근하셨나요. “네. 매일 남편과 손잡고 5.5km를 걸어 청량산을 넘어와요. 남편이 차를 수리할 때 저는 2시간 동안 스트레칭하고, 윗몸일으키기 120회 하고, 아령으로 근력 운동을 해요. 언제든 달릴 수 있도록 몸을 만드는 거죠. 공부는 몰라도 운동엔 벼락치기가 없어요.” ―마흔이 넘어서 마라톤을 시작하셨죠. “출산 후 희귀 질환인 베체트병에 걸려 마흔에 전맹(全盲)이 됐어요.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헬스장에서 운동하다 마라톤을 시작했죠. 어둠 속에 갇혀 지내다 밖으로 나오니 살 것 같았어요.” ―부부가 늘 손잡고 뛰던데요. “시각장애인은 가이드 러너가 있어야 해요. 남편이 저를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거죠. 뛰다 보면 서로 알아요. 남편은 제 얼굴 보고 알고 저는 남편 손 감촉으로 알고요. 아 이 사람이 힘들구나, 싶으면 서로 속도를 늦춰주고 다독이며 함께 달리죠.” ―마라톤 풀코스도 어려운데 울트라 마라톤까지…. “부산∼임진각 종단 코스 537km를 107시간53분에 완주하고는 둘이 안고 펑펑 울었어요. 손잡고 뛰다 보니 속도가 느려 5일간 길에서 쪽잠 자고 달렸어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이 먼 거리를 달려왔다니 너무나 신기했죠. 찌그러져 지내다 느끼는 자신감과 충만함이란…. 풀코스는 기록이 중요하니 다들 앞만 보고 뛰어요. 반면 울트라는 옆도 보고 뒤도 돌아보며 뛰죠. 다리에 쥐가 난 사람을 보면 주물러주고, 목말라하면 한 모금 남은 물병을 내줘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우게 되죠.” ―다양한 코스의 차이를 느낄 수 있나요. “그럼요. 공기와 냄새가 다르니까요. 그리고 남편이 다 말해줘요. 여긴 진달래가 피었네, 앞에 달리는 사람은 무슨 색 옷을 입었네, 방금 지나친 나무는 무엇이고, 이제 곧 바다다, 계단이 시작된다, 끝이다…. 코스를 떠올리면 눈앞에 다 그려져요.” ―가톨릭 신자이시죠. 왜 실명이라는 시련을 주셨을까요. “교만하지 말라는 뜻 아닐까요. 희귀병 진단을 받고 10년 안에 실명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납득할 수 없었어요. 성실하게 살아온 내가 왜? 하늘이 정하면 거부할 수 없고, 모든 노력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10년이 걸렸죠. 내 자존심 걱정, 남 시선 걱정하느라 그 시간을 허비한 게 후회돼요.” ―소설가이자 마라토너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마라톤에 관한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와요.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맞아요. 달리기는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만 이대로 주저앉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만 뛰고 싶다’는 유혹이 끝없이 밀려와요. 이걸 참아내면 가는 거고, 못 참으면 신발 벗는 거죠. 전 계속 달리기로 했습니다.”  이진영 채널A 심의실장 ecolee@donga.com}

    • 2019-01-11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