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준

황형준 기자

동아일보 정치부

구독 418

추천

2007년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정치부를 거치며 경찰, 기획재정부, 정당, 법조, 청와대 등을 취재했습니다. 정치와 법, 권력구조 그리고 사람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취재분야

2025-11-14~2025-12-14
칼럼47%
선거17%
대통령13%
정치일반10%
남북한 관계7%
정당6%
  • 절에서 수행 중인 ‘독일 병정’ 박한철 전 소장… “어디서든 주인이 돼라”[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나는 훌륭한 헌법재판이란 직선과 곡선, 그리고 색채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음악과 같다고 생각한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국가와 사회의 지속성을 의미하는 직선, 공동체의 발전에 필요한 창의성을 뜻하는 곡선, 그리고 의견과 가치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색채가 어우러져 고된 현실에 부대끼는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희망을 주는 선율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박한철 전 헌법재판소 소장(70)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헌법재판의 의미와 가치를 이같이 표현했다. 박 전 소장은 역대 유일한 검찰 출신 헌재 소장이었다.2016년 12월 9일 국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키자 헌재는 국민적 혼란을 조기에 해소하기 위해 재판에 속도를 냈다. 헌재는 이듬해 3월 10일 파면 결정을 내릴 때까지 매주 1, 2차례 재판을 열었고 총 3회의 변론준비기일과 17회의 변론기일 등 무려 20차례 재판을 열었다. 그 수장이 박 전 소장이었다. 박 전 소장은 임기가 2017년 1월 31일 끝나면서 재판을 마무리 짓지 못했지만 언론으로부터 매일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퇴임식에서는 “우리 헌법 질서에 극단적 대립을 초래하는 제도적 구조적 문제가 있다면 지혜를 모아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고 개헌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때만큼 헌재가 국민적인 지지와 박수를 받고 그 역할과 위상이 높았던 때를 찾기 어렵다. 헌법의 최종 수호자인 헌재가 나서서 탄핵 심판을 마무리함으로써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고 대선을 통해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년 만에 높아졌던 헌재의 위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도 현 유남석 헌재 소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박 전 소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특수·기획 거친 ‘독일 병정’ 검사1953년 부산에서 태어난 박 전 소장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인천으로 올라와 중·고교를 졸업한 뒤 1975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81년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 13기로 수료한 뒤 1983년부터 검사로 재직했다.그는 검사 시절 특수통이자 기획통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검사 시절 요직인 법무부와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 청와대 파견 등을 거쳤다. 막스 플랑크 국제형사법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했고 헌재 파견, 인천지검 특수부장, 대검 기획과장,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삼성 비자금 특별수사·감찰본부장, 대검찰청 공안부장, 대구지검장, 서울동부지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검사였다. 검사장 시절 조회 때 한시와 영시를 인용하기도 하고 후배 검사들에게 시집을 선물하는 등 시와 고전을 즐겨 읽었다. 동양과 서양 역사는 물론 문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낭만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별명이 ‘독일 병정’이었다. 워낙 엄하고 철두철미한 업무 스타일 때문이었다. 박 전 소장 밑에서 일했던 검사 출신 A 변호사의 이야기다.“굉장히 꼼꼼하시고 일을 무지하게 열심히 하시는 분이니까 검사들이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재도 워낙 꼼꼼하게 하다 보니 차장 시절에 그 밑에 있던 부장들이 아무도 결재를 안 올리려고 했다. 결재를 할 때 기록에다가 본인이 수정한 부분을 접어놓는데 수십 개가 접혀 있어서 놀라고 그걸 밤늦게까지 부랴부랴 수정한 기억이 있다.” - 취재 메모 중 -그는 이원석 검찰총장의 초청으로 올해 2월 서울 서초구 대검 청사에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후배 검사들에게 공익 실현 기관으로서의 검찰은 정치적 중립이 필수적이며 균형감각 등을 통해 헌법 가치를 실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정치적 중립 의무는 헌법 가치를 실현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검찰 구성원, 총장으로부터 정문을 지키는 청원경찰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원들이 한마음으로 지혜를 짜내야 한다.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검찰이 담당하는 모든 사건은 크고 작은 걸 떠나서 전부 방정식으로 풀어야 한다. 특히 복잡한 사건은 8,9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데 고차방정식에 있어서는 국민 설득 문제가 가장 앞에 나온다. 국민이라는 건 언론이 가장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고, 언론을 설득하는 문제, 신뢰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그걸 풀어나가는 게 검찰의 중요한 숙제다.” - 2월 대검찰청 강연 중 - 수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지지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국 검찰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그는 언론 대응을 중시했다고 한다. 공보 역할을 맡을 때는 수사 상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어 선문답을 즐겼다.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로 있던 2005년 6월엔 기자단과의 티타임 도중에 “호연(浩然)한 기개 맑고 드높으며 선재(仙才) 뛰어나 속인은 알아보기 어렵네”라며 갑자기 한시를 읊기도 했다. 당시 불거진 ‘행담도 개발비리 의혹’을 둘러싸고 기자들이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이 맡게 되느냐”고 집요하게 묻자 중국 고사를 꺼낸 것이다. 당시 그는 이처럼 대답하기 난처하거나 보안이 필요한 질문에는 역사, 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설명하며 피해 갔다고 한다. 기자들도 원칙을 지키는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2005년 4월 초순이었던 것 같은데 봄이었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는데 봄이 온 거 같지가 않구나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엄청난 권력형 비리로 부각이 돼 있고 그게 궁금해하는 사항이니까 수사하는 데 여러분들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기사를 쓰지 말고 검찰 수사와 속도를 맞춰서 보도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중략) 언론과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렸다. ” - 2월 대검찰청 강연 중 - 그는 △오전 10시와 오후 2시 브리핑 △기자들이 취재해 오는 사항에 대한 확인 △기자들의 전화는 무조건 받을 것 등 기자단과의 약속을 몇 달간 지켰고 그 결과 언론과의 신뢰관계가 형성됐다고 한다. ● 고검장 승진 고배… ‘전화위복’으로 헌재 재판관 지명그런 그도 대검찰청 공안부장 시절인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집회를 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검장에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동부지검장으로 옷을 벗었다. 이후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중 반전이 찾아왔다. 헌재 파견 근무를 하던 시절 눈에 띄었던 덕분인지 법무부 차관을 지낸 검사 출신 김희옥 재판관 후임으로 2011년 2월 지명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다. 이어 재판관을 하면서도 당시 이강국 헌재 소장으로부터 “소장을 맡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그 자질을 인정받았다. 결국 2013년 헌재 소장으로 지명돼 헌법재판의 수장을 맡게 됐다. 또 다른 검찰 출신 B 변호사의 말이다.“대구지검장 시절에 대구 갓바위를 한 몇 달을 매일 올라가셨어. 불심이 깊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이 많으셔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결국 그 기도가 헌재 소장까지 만들어 주신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취재 메모 중 -그가 소장이던 시절 헌재는 역사에 남을 만한 결정을 많이 내렸다. 2014년 통합진보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사건에서 정당 해산 인용 결정을 내렸다. 정당 해산 심판에 대한 최초의 헌재 결정이었다. 당시 헌재는 “통진당이 추구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 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 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고 밝혔다. 또 2015년에는 간통죄에 대해 “간통 행위를 국가가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해 더 이상 국민의 인식이 일치한다고 보기 어렵게 됐다”며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타율적으로 강제할 수 없다”고 간통죄 조항을 위헌으로 판단했다. 박 전 소장은 헌재 재판관 임명 제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2013년 인사청문회부터 “9명의 재판관 중 대통령과 국회가 각각 3명씩 지명하는 것은 국민적 대표성이 있으나 대법원장이 3명을 지명하는 것은 국민적 대표성이 없다”며 “대통령과 국회의 합동 행위로 재판관 임명이 이어진다면 (이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소신 발언을 했다. 2016년 3월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선 “솔직히 자존심이 상한다”며 “(선출되지 않고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장은 국민의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상태다. 헌재가 이중으로 민주적 정당성이 희석돼 과연 권위를 가질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판사 출신 헌재 소장이었다면 하기 어려운 소신 발언이었다. 박 전 소장과 함께 일했던 한 전직 헌재 재판관은 “검사 출신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았고 바르고 훌륭한 분이었다”고 말했다.2017년 1월 말 은퇴한 뒤에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와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 등을 지냈고 지금은 동국대 법대 석좌교수로 지내며 인권법 강의를 학부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법의 정치화로 국민 신뢰 저하되고 헌법시스템 훼손” 박 전 소장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저서 ‘헌법의 자리’에서 헌법재판의 사회 통합 기능도 강조했다. 그는 “헌재는 보다 적극적인 헌법해석을 통해 우리 헌법이 구체적인 갈등 해결의 수단이자 목표로 작동하도록, 단계적 가치판단에 있어 헌법을 준거의 틀로 활용해야 한다”며 “동시에 정치와 권력기관에는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 지속적으로 제시해 밝은 미래를 향한 사회 통합의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문제의식도 담았다. 그는 “‘정치의 사법화’는 다시 사법을 특정 세력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그의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시키는 ‘사법의 정치화’로 나타나기도 한다”며 “그 결과 사법에 대한 국민 신뢰가 저하되고, 헌법 시스템의 약화와 훼손, 국가 공동체의 위기라는 악순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라고 썼다. 특히 “정치의 과도한 사법화는 사법기관에 대한 소위 코드 인사와 맞물릴 경우 헌법재판이나 사법이 헌법과 법치주의의 실현을 넘어 재판관 개인 또는 그가 대표하는 정치적, 사회적 세력의 특정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거나 추종하고자 하는 숨겨진 정치 행위로 전락할 위험성이나, 명백한 정치적 판단은 아니라 하더라도 헌법정신과 정치적 의도를 적당히 절충·조정하는 타협적 판결에 이르게 할 가능성을 갖는다”라고 코드 인사를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지금 헌재와 관련된 사법의 정치화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념적 지향성이 같은 재판관을 일방적으로 임명한 것과 무관치 않다.특히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했던 이른바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에 대한 헌재의 권한쟁의심판 결과를 두고 ‘사법의 정치화’라는 지적이 다시 나오고 있다. 헌재는 국민의힘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청구한 권한쟁의심판을 올해 3월 각하 또는 기각했는데 헌재 판단은 4 대 4로 극명하게 갈렸다. ‘우리법연구회’의 창립 멤버인 유 소장을 포함한 진보 성향 재판관과 중도보수 성향 재판관의 판단이 엇갈리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이미선 재판관이 결정권을 쥐게 됐다. 그의 결정에 따라 헌재는 입법 과정이 국민의힘 의원들의 표결권을 침해했다면서도 무효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렇다 보니 여당에선 “헌재가 아니라 정치재판소 같다”는 날선 반응을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올해 11월 퇴임하는 유 소장의 후임을 포함해 임기 중 재판관 3명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예정이고 이번 정부에서 헌재 구성원이 모두 교체된다. 헌재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사법의 정치화에 대한 박 전 소장의 지적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 부인과 사별한 뒤 절에서 기거… ‘아우라’ 있는 법조계 원로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는 2009년 서울 서초구 아파트를 불교재단에 기부한 뒤 당시 전세보증금 2억2000만 원에 월세 100만 원을 내고 그 아파트에 그대로 살았다. 여기에는 불자였던 부인의 뜻이 반영됐다고 한다. 자녀가 없는 그는 2019년 부인과 사별한 뒤 서울 종로구의 한 절에서 기거하며 주말에만 서초구 아파트에서 지낸다고 한다. 공수래공수거다. 검사 출신 A 변호사는 “간혹 대구지검장 시절 멤버들과 골프를 치시는데 그때 보니 가방이나 골프화, 골프채 등이 정말 오래됐다”며 “하나 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골프 가방을 하나 사드렸는데 여전히 안 쓰신다. 요즘 나오는 게 아무래도 화려해서 비교적 점잖은 걸 사드렸는데 또 안 쓰시더라”고 전했다. 또 다른 후배 검사는 “내가 검찰 선배 중에 유일하게 ‘아우라’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박 전 소장이다. 통상 장관이나 총장을 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달라진다”며 “하지만 박 전 소장은 그 아우라가 과거나 현재나 여전하다. 그분은 한결같고 사리사욕이 없는 분이라서 늘 존경하게 되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그는 ‘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의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주변에 자주 한다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 임재선사가 한 말씀이다. 그는 검사 시절은 검사로서, 헌재 재판관과 소장 시절에는 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지금은 교수로서 충실히 후학을 양성하며 만족해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법정모독 시리즈의 근간에는 정치와 법조의 영역이 구분되지 않고 수렴하고 있다는 현상이 담겨 있습니다. 최초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고, 국회의원 등 정치인의 주류 집단은 법조인입니다. 로스쿨 도입 이후 법조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정치와 법조의 화학적 결합은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요한 정치적 결정을 사법의 영역으로 미루는 일도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사법이 정치화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박 전 소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를 법정모독 [19화]의 주인공으로 쓰게 된 이유입니다.글을 쓰기 전에 그를 직접 만나서절에 가보고 싶었지만 책이 나온 뒤 한 번 인터뷰한 것을 빼곤 모두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다며 완곡히 거절하셨습니다. 본인을 내세우는 것도 세상에 근황을 전하는 것도 꺼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 법조인들이 현직에서 떠난 뒤 개업해 전관예우를 받아 부를 축적하는 상황과 달리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속세와 거리를 두며 검소하게 한결같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가 후배 법조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겠지요.다음 [20화]는 여권의 정치인을 다룰 예정입니다. 수식어가 많습니다. 언론인, 소설가, 야권 출신 중도 성향의 중량감 있는 정치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5-25
    • 좋아요
    • 코멘트
  • ‘한국의 바이든’ 꿈꾸는 ‘엉클 박’… 사라지지 않는 노병[황형준의 법정모독]

    “내가 아는 명리학자가 있는데 앞으로 7년간 운이 제일 좋다고 하더라. 원래 정치인이 고난을 겪는 사주여야지 대성한다. 나는 감방도 한번 갔다 왔고(웃음). 1942년생의 시대가 온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김정일 전 북한 노동당 총비서… 42년생 중에 국내에서 제일 유명한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은 죽었고 그다음 나다. 청와대에 잘 출입하고 있어라ㅎ” - 취재 메모 중 - 2021년 4월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를 포함한 기자들과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당시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자리는 다 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 끊임없이 권좌를 지향하는 게 그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노욕(老慾)에 끝이 없다”는 비난과 함께 “그래도 그만큼 열정적인 경험과 지혜가 많은 원로가 없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감탄할 정도로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과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때문에 호불호를 떠나 ‘대단한 정치인’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그의 왕성한 활동엔 권력욕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건강한지 모른다. 그에겐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라 ‘권력욕은 나의 힘’인 셈이다. 최근 그는 매주 10~12회의 방송 출연을 하며 현안에 대해 언급하고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한다. 그러면서도 올 2~4월에 전국 16개 광역자치단체를 방문해 30여 회 초청 강연을 했다. 그만큼 그의 정치평론을 듣고 싶어하고 그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호감을 갖는 ‘안티’도 많다. 누리꾼은 그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한다’는 의미로 ‘박쥐원’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하고, 노욕을 부린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는 방송이나 강연에서 “제가/ 그/ 유~명한/ 박지원입니다”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름부터 원래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과 같아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다 아는 이름이다. 게다가 그 역시 언론과 SNS에 끊임없이 매일 등장하니 삼척동자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17화]에 이어 노무현 정부 이후 그의 행적으로 돌아가 보자. ● 대북송금 사건으로 구속돼 징역 3년 살아박지원이 검찰에 구속돼 징역 3년의 유죄 판결을 받는 계기가 된 ‘대북송금 의혹’은 2002년 9월 국정감사장에서 처음 불거졌다.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 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산업은행에서 4900억 원, 당시 환율로 4억 달러를 긴급 대출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겨줬다고 주장하면서다. 이듬해 1월 말 감사원은 ‘4000억 원 중 1760억 원은 현대 계열사 운영자금으로 사용됐고, 나머지 2240억 원은 북한에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의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파문이 커지자 DJ도 퇴임을 앞둔 이듬해 2월 사실관계를 인정하며 “어떻게 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고 민족이 서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이 안심하고 살면서 통일에의 희망을 일궈나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하는 충정에서 행해진 것”이라며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대국민 사과를 했다. 결국 송두환 특별검사팀은 6월 김대중 정부와 현대그룹이 2000년 4월 8일 북한과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최종 합의하면서 정부와 현대가 각각 1억 달러, 4억 달러를 북한에 지급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을 파악해 이에 관여한 박지원을 직권남용 및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수감 중 녹내장 등 건강이 악화돼 구속집행정지와 형집행정지를 반복하다 석방됐고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의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당 대표 1번, 비대위원장 3번, 원내대표 3번 기록재기는 순탄하지 않았다. 박지원은 DJ의 ‘정치적 고향’이자 자신이 고등학교를 나온 전남 목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 했지만 공천심사위원회의 ‘금고 이상 형 확정자 배제’ 원칙에 따라 공천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목포시민의 평가를 받겠다”며 탈당한 뒤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의 지원 유세와 동교동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당선됐다. 이후 재선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2010년 5월 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2012년 민주당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지내는 등 의원 시절 동안 민주당에서만 원내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을 2번씩, 2016년 안철수 의원이 창당한 국민의당에서 원내대표와 비대위원장, 당 대표까지 지내는 정치사의 신기록을 세웠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선 정보력과 전문성을 중심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2009년 7월 당시 검찰총장 후보자였던 천성관 씨와 스폰서 박모 씨의 해외 골프 여행, 천 씨 부인의 면세점 쇼핑 명세 등을 폭로하며 후보자 사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를 포함해 원내대표로 청문회를 지휘하면서 7명의 청문 대상자를 낙마시켜 ‘청문회 낙마 7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여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도 거의 매주 지역구인 전남 목포를 방문할 정도로 지역에도 공을 들였다. 금요일 귀향해 지역구 업무를 보고 월요일 새벽 서울로 돌아오는 것을 뜻하는 ‘금귀월래(金歸月來)’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그 결과 18~20대 총선까지 목포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하지만 좋은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12년 ‘이해찬 대표-박지원 원내대표’로 친노(친노무현) 세력과 호남 세력이 결탁했다는 ‘이박 담합’ 논란도 불러왔고 구정치의 상징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잦은 SNS와 방송에서 가끔 근거 없는 의혹 제기나 말실수를 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적지 않다. 2014년 1월 당시 같은 당 중진 의원의 비판이다. “SNS에 글 올리기 좋아하는 X들은 먼저 생각을 안 하고 말이랑 행동이 앞서서 문제야. 너무 경망스러워.” - 취재 메모 중 -박 전 원장은 DJ 정신을 기리고 국민들에게 계속 알리는 걸 사명으로 생각하지만 일각에선 지나치게 DJ를 팔아 자기 정치를 하려 한다는 비난도 제기된다. ● 2015년 2·8 전당대회 낙마 이후 탈당-신당 합류까지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15년 2·8전당대회에선 2012년 대선에서 낙마한 뒤 당 대표 후보로 나선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고배를 마셨다. 당초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송금 특검법을 통과시키고 특별사면이 미뤄지는 등의 과정에서 친노·친문 세력과는 멀어진 그였다. 다음은 그가 2014년 12월 한 이야기다. “2년 전 문재인 낙선 직후 만났다. DJ의 길을 갈 거냐 이회창의 길을 갈 거냐 선택해야 한다며 설명해줬다. DJ는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DJ가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고 언젠가 DJ가 돌아오고 대통령을 만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DJ는 결국 돌아와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 보수우파인 김종필 전 총재(JP)를 영입해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느냐. 이회창의 길을 봐라. 대통령 선거에 실패하고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바로 복귀해서 손에 피를 묻히더라. 자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한 조순 총재를 쳐내고, 야당에서 여당으로 넘어온 이기택을 쳐내고 박근혜 당시 대표가 오겠다는 걸 쳐내버렸다. 피를 묻혀서 대통령 후보는 됐지만 대통령은 안 되더라. 그랬더니 그가 굉장히 좋은 얘기라고 참고하겠다더니…” - 취재 메모 중 - 대선 후보로서 정책 준비에 골몰해야지 당 대표로서 각종 논란에 휘말리면 안 되는 만큼 당 대표로 나서는 게 적합하지 않다는 취지였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당대회에서 낙마한 뒤에도 문 전 대통령과 각을 세우던 그는 2015년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민주당)에서 ‘친노패권주의’가 논란이 되며 안철수 의원이 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자 2016년 1월 탈당했다. 같은 해 3월 국민의당에 합류했고 4·13총선에서 국민의당이 38석을 얻는 기염을 토하며 박지원도 20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당선 직후 그가 사석에서 했던 말이다.“안 대표가 미래를 보는 안목이 있다. 탁월하다. 그런 정치 지도자가 얼마나 있냐. 깜짝 놀랐다. IT 강국, 신지식을 얘기했던 김대중 대통령에 이은 안목이다. 나도 통합론자였지만 결국 김한길 천정배 박지원이 틀리고 안철수가 맞았던 거 아니냐. 깔끔하게 인정하고 따라가야지.” - 취재 메모 중 -4월 총선 전에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야권연대와 후보 단일화 논의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안 의원이 이에 동조하지 않은 덕분에 국민의당이 ‘녹색 돌풍’을 일으켰다는 뜻이었다. 이후 그는 국민의당 원내대표로 추대됐고 안 의원을 DJ급으로 모시며 킹메이커 역할에 전념한다.● 안철수 대통령 만들기 총대 멨지만… ‘문모닝’ 별명만 남아그가 당 초선 의원들에게 한 ‘십계명’ 강의는 지금 봐도 정치인들이나 예비 정치인들이 배울 점이 있다. 필자가 썼던 기사다. ▶초선의 선생님 된 박지원 ‘깨알 강의’박지원은 제3당의 원내대표로서 법안 처리 등의 캐스팅보트를 쥔 3당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국회의 중심에 섰고 안 의원이 국민의당 총선 리베이트 사건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나자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8월 당시 국민의당 6선 의원이었던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은 사석에서 이렇게 평가했다.“박지원 대표가 잘하고 계신다. 어떤 분은 몇백 년 만에 한 번 나올 분이라고 하던데…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을 다 합친 것 같다.” - 취재 메모 중 -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 국면에서도 그는 “탄핵 열차는 출발했다” “개가 짖어도 ‘탄핵 열차’는 달린다” “법꾸라지 김기춘” 등 어록을 내놓으며 정국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정치 9단’인 그도 결국 틀렸다. 문 전 대통령 비판으로 하루를 시작해 ‘문모닝’이라는 별명도 얻었지만 점차 안 의원에게 실망했고 2017년 5월 대선은 문 전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국민의 선택은 안철수 후보는 물론 박지원과 국민의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 ‘winter is coming’ 2017년 대선 이후 찾아온 암흑기… 국정원장 지명 반전2017년 5월 대선 이후는 시련의 계절이었다. 2017년 10월 안 의원이 당시 탄핵 사태를 계기로 갈라져 나온 보수 정당인 유승민 전 의원의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면서다. 결국 안 의원을 비롯한 통합파와 박지원을 포함한 호남 의원이 결별하면서 이들은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분당됐다. 단독으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 위한 의석수(20석)가 모자랐던 민주평화당은 정의당과 공동교섭단체를 구성했지만 여야 관계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다. 대선과 그 이후 호남에서 문 전 대통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문 전 대통령이 DJ의 햇볕정책을 계승한 남북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자 박지원의 문 전 대통령에 대한 입장도 비판에서 지지로 선회하게 됐다. 2018년 2월 민평당이 창당된 이후 박지원의 입지도 쪼그라들었다. 민평당이 원내정당이긴 했지만 의정활동에서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고, 당 대표였던 정동영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주류와 비주류의 반목이 심해졌다. 결국 박지원을 포함한 광주·전남 의원 9명은 탈당해 2020년 1월 대안신당을 창당하고 이후 민생당으로 통합됐지만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원내 진출에 실패했다. 그도 전남 목포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원이 의원에게 패배하면서 2008년 이후 12년 만에 자유인이 됐다. 물론 그는 각종 방송에 출연 요청을 받으며 ‘과로사 직전의 백수’였다. 여의도 주변에선 총선에서 민주당이 180석을 얻으며 압도적 지지를 받은 만큼 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 등을 중용해 통합 인사를 하고 협치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내정하는 깜짝 인사를 발표했다. 그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않고 국정원 개혁에 힘을 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국회 인사청문회 서면 답변서에서 문모닝 행보에 대해 ‘후회나 반성을 하느냐’는 질의에 박 후보자는 “치열한 선거 유세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음을 양해해달라”고 답했다.그해 12월 사석에서 박지원이 한 이야기다.“내가 호가 단재(旦齋)야. 유명한 한학자 선생님이 지어주셨어. 주역을 만든 주공(周公)을 중국 사람들이 존경해서 ‘단(旦)’자를 이름에 잘 안 쓰는데 나에게 그 단자를 지어줘. 주공이 문왕에 이어서 무왕도 엄청 잘 모셔서 중국을 이끌었다. 당시 다 주공이 무왕을 치고 왕이 될 거라 했는데 오히려 무왕을 극진히 모셨다.” - 취재 메모 중 -당시 이에 대해 DJ에 이어 문 전 대통령, 두 왕을 모시는 것을 예견한 것이냐고 묻자 그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라고 답했다.● “정치는 생물… 다음은 나(next is me)”문 전 대통령이 박지원을 국정원장에 지명한 것은 그만큼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원이 임명된 이후에도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듬해 초부터 코로나19 위기가 찾아왔고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는 더욱 경색됐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 남북정상회담이 재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지만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 대통령의 승리로 끝났다. 박지원은 국정원 내부에서 여성 간부를 중용했다. 2020년 8월 사상 최초로 여성 차장이 임용됐고 여성 최초 선임 국장도 배출됐다. 정치개입 금지와 대공 수사권 이관을 골자로 하는 국정원법 개정안을 임기 중에 통과시켰고 국정원의 사이버보안 기능과 마약 등 해외 연계 범죄 대응 능력도 강화했다. 구설수도 여전했다. 그는 원장으로 재직하며 2021년 6월 창설 60주년을 계기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원훈을 바꾸고 원훈석을 교체했다. 그런데 원훈석에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의 손글씨를 본뜬 ‘신영복체’가 쓰였다는 점이 논란이 됐다. 신 교수는 과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년간 복역한 전력 등이 있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직접 써온 그가 원장 취임 뒤에도 미국을 방문해 자신의 동선을 노출해 논란이 됐다. 재직 당시 벌어진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과 관련해 사건 다음 날 국정원 직원들에게 관련 첩보와 보고서를 삭제하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현재 재판을 받고 있지만 그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2022년 5월 대선 이후 국정원장 임기를 마친 뒤에는 다시 방송 등에 출연하며 정치 현안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그해 12월 결국 복당해 약 7년 만에 민주당으로 돌아와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처럼 ‘정치는 생물’이다. 박지원이 앞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여의도 정치 현장에 복귀할지 아무도 모른다.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거나 2024년 총선에서 지역구였던 전남 목포나 고향인 전남 해남·완도·진도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고 총선에서 불출마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최종 목표는 ‘엉클 조’라는 친근한 별명이 있는, 동갑내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일 것이다. ‘다음은 나야(next is me)’라고 영어로 말하는 그를 보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물론 그의 ‘안티’들은 “제발 TV 방송 등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라고 할 테니 그냥 채널을 돌리는 게 사라지길 기다리기보다는 현명할 것이다. 박지원 전 원장은 술자리에서 건배를 할 때 현직 대통령을 붙여 ‘○○○ 대통령을 위하여’를 많이 외칩니다.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윤석열 대통령을 위하여’는 물론 국민의당 시절엔 안철수를 위하여까지 들어봤습니다. 그의 정치엔 기본적으로 나라 걱정과 충성심이 깔려 있습니다. 물론 DJ 서거 이후엔 그의 충성심도 누구를 향했는지 오락가락하긴 했지요.한 독자분께서 박 전 원장의 정치관(觀)에 대해 물어보셨습니다. 그는 과거에 “정치는 곱하기의 예술, 종합 예술이다. 정치가 제 역할만 해도 경제 사회 문화는 잘 돌아가고 정치가 0이면 나머지가 아무리 잘해도 0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정치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으로 오지 않는다. 타 당이 잘못하면 결국 정치권 전반으로 문제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런 인식이 그를 정치인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17화]의 댓글에 많은 누리꾼이 ‘산소 같은 남자’를 O₂가 아닌 tomb(무덤)으로 해석해주셨더군요. 정말 대단한, 대한민국의 저력입니다. 한국 정치에 산소인지 연탄가스인지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입니다. 앞서 서두에 썼던 명리학자가 2021년에 7년간 박 전 원장의 운이 좋다고 했으니 다음 대선까진 운이 좋을까요? 그분이 ‘건진법사’급인지는 다음 대선까지 지켜볼 일입니다. 다음 [19화]의 주인공을 누구로 할지는 미정입니다. 애초에 염두에 뒀던 법조계 원로가 등장하길 원하지 않고 있어 설득 중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5-18
    • 좋아요
    • 코멘트
  • DJ가 ‘산소 같은 남자’라 표현한 정치인은?… 상사맨에서 ‘정치 9단’까지[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방송에선 얘기를 못 하는데… 내가 돈을 많이 줘보기도 하고 받기도 해봤는데 돈 센다고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안 나와~(웃음)” - 취재 메모 중 - 올 3월 사석에서 만난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하 박지원)은 지난해 12월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체포동의안 통과를 요청하기 위한 국회 본회의 발언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당시 한 장관은 “구체적인 청탁을 주고받은 뒤 돈을 받으면서 ‘저번에 주셨는데 뭘 또 주냐’ ‘저번에 그거 제가 잘 쓰고 있는데’라고 말하는 노 의원의 목소리, 돈 봉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도 그대로 녹음돼 있다”고 했는데 이를 반박한 것이다. 박지원 이야기를 이 발언으로 시작하는 이유는 경험과 연륜, 정치 현상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분석력, 타고난 유머와 재치, 솔직하지만 노회한 정치인이라는 평가 등의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박지원은 현재까지 4선 의원과 문화관광부 장관, 대통령비서실장, 국정원장 등을 지냈다. (아직도 그의 이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전남 진도 출신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불리는 그는 81세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건재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최고수 중 하나로 꼽힌다. 자고로 일찍부터 그를 중용한 DJ는 그를 이같이 평가했다. 1996년 박 전 원장이 발간한 저서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발간 축사에서다. “‘지칠 줄 모르는 성실함. 놀라운 정치적 순발력.’ 박지원 대변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의 최고 덕목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생김새와 언변과 문필력, 판단력이 모두 잘 어우러지면 어느 분야에서든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법인데, 박 대변인이 그런 정치인이다…소신과 원칙에도 강한 박 대변인이다. 그러면서도 유연함과 해맑은 미소를 늘 잃지 않는다. 누가 박 대변인을 ‘산소 같은 남자’라고 해서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산소 같은 남자’란 1990년대 히트를 친 배우 이영애 씨가 나오는 아모레퍼시픽의 ‘산소 같은 여자’ TV 광고에서 따온 표현으로 보인다. ● 중학생 때부터 박지원의 꿈은 ‘야당 총무’ ‘진도 섬놈’ 박지원은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 박종식 선생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바다가 친구이자 놀이터였고 육지를 동경하는 섬 소년으로 자랐다. 늑막염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다.밀양 박씨 집안 어른 중에 국회의원이 있었고 가까이서 본 그는 정치의 꿈을 키웠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은 국회의원이었고 중학교 때부턴 ‘야당 총무’(현 야당 원내대표)였다고 한다.“고등학교 때 우리 반 친구 중 한 놈이 나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한 번은 그 친구가 내게 한 가지 내기를 제안했다. 누가 현직 국회의원의 이름을 더 많이 써내는지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그 친구는 100명 정도를 썼고, 나는 150명 정도를 써내 이긴 기억이 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박 전 원장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공부보다는 놀기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목포 문태고를 다니다 대입에서 떨어져 광주에서 재수를 했지만 당시엔 부인 이선자 씨를 만나면서 연애에 빠졌다. 단국대 경영대에 입학한 뒤로는 이전과 달리 아주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 후 군대를 다녀온 뒤 어려운 취업문을 뚫고 ‘LG그룹’ 계열사였던 당시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에 취직했다. 그는 맡은 바 임무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처리했고 성실성을 인정받아 미국지사로 발령받았다고 한다. 미국지사에서 근무하던 중 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친형이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형님이 회사 생활에 재미를 못 느끼고 있던 그에게 사업을 권유하며 사업자금을 대준 것이다. 뉴욕에 사무실을 내고 처음 가죽 수입을 시작했지만 돈만 날렸다. 대신 실패를 딛고 가발 수입을 시작했다. 새벽에 집을 나와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소변을 종이컵으로 받아둘 정도로 악착같이 일했다. 유행에 민감한 패션산업이었기에 유명 패션쇼나 헤어쇼, 그리고 뷰티숍을 두루 살펴보며 트렌드를 파악했다. 수요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사업에 성공해 날로 번창했다. 뉴욕 맨해튼에 건물 몇 채를 가질 정도였다고 한다.그러자 다른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오랜 꿈인 국회의원이었다. 미국에서 그냥 돈만 벌어 한국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당시 교민들은 미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한인회 일을 거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종의 정치 연습으로 뉴욕 한인회 활동을 열심히 했고 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됐다. 15대 뉴욕 한인회장에 출마했지만 낙마했고 2년 뒤 역대 최연소 회장이 됐다. 그 뒤 교민사회에서 뉴욕 한인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1981년 8월 미주 한인 총연합회에서 98개 한인회장의 만장일치로 총연합회 회장에 당선됐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과 DJ 사이… 뒤바뀐 박지원의 ‘운명’ 총연합회장을 맡던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와 가깝게 지냈다. 전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환영위원장을 맡았고 그 일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수많은 양심적인 인사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고 한다. 전 씨는 그의 정계 입문을 도와주려고 애썼고 여당인 민정당의 전국구 의원 입성을 도와주려 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해외 동포에겐 전국구를 줄 수 없다는 지시를 내리면서 무산됐다. 미안했던 전 씨는 엄청난 이권이 있는 사업을 제의했지만 바로 거절했다. 그가 그때 민정당 의원이 됐거나 사업을 챙겼더라면 아마 지금의 박지원은 없었을 것이다.“어쨌든 잘못된 행동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얼마 뒤 김대중 선생을 만나면서 심각한 인간적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중 - 박지원의 운명이 바뀐 건 뉴욕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던 김경재 전 의원의 소개로 망명 중이던 DJ를 만나면서부터다. 1983년 5월이었다.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돼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민주화가 온다”는 등 DJ의 말에 감명을 받은 박지원은 무릎을 꿇고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라고 참회했다. 첫 만남 이후 그는 김대중 사단의 말석에 자리 잡게 됐고 DJ가 하던 인권문제연구소 일을 돕고 국내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DJ의 메시지를 전하는 ‘밀사’역 등을 맡았다.이는 ‘일급비밀’이었다. DJ의 최측근인 권노갑 고문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1987년 평화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박지원은 고향인 전남 진도위원장을 맡았다. 권 고문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굴러온 돌”로 여기고 이를 반대했다. 미국에서 맺어진 DJ와 박지원의 관계를 모르던 권 전 의원의 입장에서 보면 옳은 진언이었다. 이후 권 고문이 처음 미국을 방문할 당시 미국에 있던 박지원을 만났다. 권 고문은 “이번에 미국 오기 전에 동교동에 들렀더니 사모님과 총재께서 미국 가면 꼭 박 회장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면서 그간 박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소”라며 손을 꽉 잡고 “전에 정말 미안했다”며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고 한다. “오십이 넘어야 관운이 풀린다”는 이야기를 사주가들에게 들었던 박지원은 실제 3수 끝에 전국구 의원이 됐다. 대입에서 재수한 것을 합쳐 “내 인생은 오수(五修)”라는 게 그의 말이다. 1984년엔 야당인 신민당에서 전국구(현 비례대표) 의원직을 제의받았으나 당선권 순번을 받기 어려울 것 같아 거절했다. 선거 결과는 당선권이었다. 첫 번째 실패였다. 미국에서 들어온 뒤 진도위원장과 총재 언론특보 등을 맡았지만 1988년엔 지역구가 통합되면서 출마가 좌절됐다. 전국구로 출마하기로 했지만 마지막에 DJ가 다른 인물에게 자신에게 주겠다던 전국구 순번을 줘 기회가 없었다. 다시 4년 뒤에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 21번으로 간신히 당선됐다. 그의 나이 만으로 50세였다. 1987년과 1992년 대선에서 DJ의 지근거리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특히 1992년에 그는 수석부대변인을 맡아 4월부터 12월까지 매일 오전 6시 10분이면 동교동에 도착해서 DJ와 함께 하루종일 선거운동을 했다. 기자들과 ‘떡’이 되도록 폭음을 한 이틀을 빼곤 하루도 그 시간에 도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대선을 열심히 뛰었지만 결과는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승리로 끝났고 DJ는 다음 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DJ 대통령을 만들려던 박지원에겐 눈앞이 깜깜한 순간이었다. ● 몸으로 때운 ‘독설’ 명대변인…“부활한 예수님, ‘기자들 왔냐’고 물을 것” “나는 본변인이 아닌 대변인이니 좀 봐주시오. 큰 정치 하는 분들이 그깟 대변인의 말에 신경을 써야 되겠느냐.”‘대변인 박지원’은 간혹 자신이 논평에서 비판한 당사자가 직접 전화를 해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항의하면 이같이 달랬다고 한다. 일부 논평에 인신공격성이나 조롱이 들어가는 등 센 논평을 낸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수준 이하”라거나 “보좌관이 쓴 것을 읽기만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대변인 명의 논평은 그가 직접 썼다고 한다. 그는 1992년 대선에선 YS가 재산을 공개했을 때 “머리부터 공개하라”며 공격했고 TV 토론을 거부하자 “연설 때 사용하는 원고를 가져와도 된다”고 비꼬았다. 항간에서 DJ에 비해 YS가 덜 총명하다는 지적을 겨냥한 것이었다. 또 1994년 당시 박찬종 신정치개혁당 대표가 DJ의 정계복귀론에 대해 비판하자 “연탄가스는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인체에 해만 주고 있는데 박 대표도 틈만 있으면 비집고 나와 야당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5년 11월엔 당시 민자당이 당명 개칭을 추진하자 “호적 이름을 바꿨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는다. 민자당은 이름을 바꾸어도 대통령이 되기 위해 야합했던 김 대통령과 민자당 그 이름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국민은 기억할 것이다”고 했다.그러면서 그는 “대변인 성명이 개떡 같더라도 기사는 찰떡같이 써 주시오”라고 기자들한테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당의 언론 정책이 맘에 들지 않을 때는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면, 가장 먼저 하실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자들 왔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부활한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다.그 시절부터 박지원을 오래 지켜본 한 인사의 말이다. “DJ가 여러 장점을 가진 지도자지만 기준이 높아 모시기 어려운 지도자다. 성실함과 집중력을 요구하고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은 곁에 안 둔다. 그 기준에 부합하는 게 박지원이고 내가 본 사람 중에 그만큼 순발력이 있고 성실하고 집중력이 있는 사람이 없다. 그 시절 낮밤으로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면서도 매일 아침 일찍 DJ가 있던 일산과 청와대로 출근했다.” - 취재 메모 중 -1996년 박지원은 부천 소사에 출마하며 재선에 도전했다. 상대는 신한국당 후보였던 김문수 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 저서도 1996년 총선을 앞두고 발간됐는데 이를 두고 ‘넥타이’ 공방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운동가 출신에서 여당 신한국당의 후보로 변신한 김 위원장이 먼저 ‘아직도 나는 넥타이가 어색하다’라는 책을 냈는데 이후 박지원이 이 같은 제목의 책을 내자 김 위원장 측에서 ‘저격용’이라고 반발한 것이다. 박지원은 전에도 “넥타이를 제법 잘 맨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반박했지만 김 위원장은 박지원을 저작권법 위반으로 고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고배를 마셨다. 당시 그를 향해 좌익이라고 공격하는 등 색깔논쟁, 용공몰이를 한 탓도 컸다. ●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대(代)통령’이라는 말까지 회자낙선한 뒤에도 박지원은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DJ의 특보 등을 맡았다. DJ는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DJP연합을 성사시키며 결국 대선에 성공한다. 박지원은 당선자 대변인,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치며 DJ를 대리해 대북특사를 다녀와 6·15 남북정상회담 성공에 기여했다.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오르며 명실상부한 DJ의 ‘2인자’로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DJ의 기존 가신그룹인 ‘동교동계’가 2선으로 물러나면서 그가 빈자리를 메우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동교동계는 1997년 대선 직전에 선출직을 제외한 임명직은 맡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고 2000년 12월 좌장인 권 고문은 정동영 당시 최고위원으로부터 2선 후퇴를 요구받고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DJ의 심복이지만 동교동계와는 약간 이질적인 그가 전면에 나서게 됐고 권력이 쏠리게 된 것이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이야기도 많았고 시기와 질투, 미움도 많이 받았다. 김창혁 전 동아일보 기자와 권 전 고문이 쓴 권노갑 회고록 ‘순명’에는 박지원에 대해 이 같은 비화가 나온다.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초, 전남 무안으로 향하는 권노갑의 승용차 안. DJ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의 선거를 돕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권노갑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DJ였다. “무안 가는 김에 목포도 좀 다녀오소.” 김홍업 지원 유세를 마친 다음 목포에 가서 박지원도 좀 도와주고 오라는 말이었다. “무안은 가겠지만 목포는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 권노갑 회고록 ‘순명’ 중 -DJ의 ‘외유 권유’를 물리치자 박지원이 DJ의 뜻을 직접 전한 것, 2002년 4월 ‘진승현 게이트’에 권 전 고문이 연루됐다는 보도가 나오자 권 전 고문은 박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 같은 내용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는데 알고 있었지만 이를 전달하지 않은 것 등 일련의 과정에서 권 전 고문도 적지 않은 서운함을 품었던 것이다.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내면서는 ‘대신할 대’자가 붙은 ‘대(代)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였다. 항상 처신에 유의하고 몸조심을 했지만 미움을 받았다. 언론사 인사에 개입하거나 언론사 세무조사를 그가 기획했다는 의구심과 논총을 받으면서 그의 전문 분야이자 동반자였던 언론들도 일부 등을 돌렸다. ‘태양에 가까우면 타죽을 수 있다’는 말처럼 권력에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박지원도 DJ 정부가 끝난 뒤 갖은 고초와 수난을 겪게 된다. 이 또한 그의 운명이었다. 기자 초년병 때인 2009년경 어딘가 술자리에서 들었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었습니다. 박지원 전 원장이 문화관광부 장관 시절, 여배우 C 씨와 염문설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박 전 원장에게 물었더니 “전혀 사실무근이다. C 씨는 본 적도 없다”며 웃었습니다. 근거가 없는 ‘찌라시’인지 유사한 사건이 와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박 전 원장이 현재까지 낸 책은 딱 두 권입니다. 2018년 10월 부인 고 이선자 여사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뒤 추모집으로 발간한 ‘고마워’가 가장 최신입니다. 책까지 낼 정도로 ‘사랑꾼’인 그에게 과거 저런 소문이 있었다는 게 신기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권은 1996년에 발간된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였습니다. 2019년 무렵 의원실에 부탁해서 복사본으로 구해 읽었던 책입니다. 이번 편의 상당 부분은 그 책에 의존했습니다. 저 역시 기자로서 그 시절을 직접 겪지 못했고, 27년 전 씌어진 데다 절판된 지 오래여서 독자분들도 새롭게 느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 전 원장에게 1996년 이후 자서전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DJ와 관계된 얘기를 안 쓸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매일 TV와 라디오, 유튜브 등에 매일 4번 안팎 출연해 일각에선 “DJ 장사를 그만 좀 해라”라는 말도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DJ에 누가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제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권력의 핵심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자리지만 원래 미움을 많이 받는 자리입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대(代)통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던 그도 영욕의 세월을 겪었습니다. 다음 [18화]에선 그의 노무현 정부 시절 이후를 다루겠습니다. 그가 산소 같은 남자인지 연탄가스(일산화탄소) 같은 남자인지는 후속을 보고 판단하시길 바랍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5-11
    • 좋아요
    • 코멘트
  • 워킹맘 A 검사가 겪은 검찰 안의 ‘파시즘’[광화문에서/황형준]

    몇 년 전 A 검사는 검찰 내에서 이른바 부서 말석(末席)이 맡는 ‘밥총무’였다. 매달 10만∼30만 원씩 직급에 맞는 돈을 걷은 뒤 매주 정해진 날 부원들의 식당 예약부터 돈 관리까지 하는 게 밥총무의 일이다. “초임검사는 아침에 밥총무 일밖에 안 한다. 가족 없이 지방에 온 검사들은 평소 혼자 밥먹으러 다니니까 점심을 먹을 때 맛있는 걸 먹고 싶어한다. 그런데 선배들마다 메뉴와 식당에 대한 요구사항이 다 다르다. ‘어제 술먹었으니 해장국집 가자’ ‘바쁘니 가까운 데서 먹자’ 등 아침마다 쪽지가 수십 개씩 온다. 이를 조율하다 보면 오전 시간이 다 간다.” 문제는 밥총무를 향한 ‘직장 내 갑질’을 동반했다는 점이다. ‘밥총무를 잘해야 기획도 잘한다’는 말은 갑질을 숨기기 위한 포장이었을 뿐이다. 말하는 사람보다는 지위가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 낮은 경우에 쓰는 ‘압존법’ 때문에 A 검사는 선배 B 검사로부터 수없이 많은 언어폭력을 당했다. “쪽지 때문에 매일 혼났다. 압존법이 틀렸다고 첫날 불려가 눈물이 쏙 빠지게 세 시간 동안 혼났다. 두 번째는 메신저의 글씨색이 분홍색이라고 또 혼났다. 세 번째는 ‘○○○ 선배 △△△ 선배’라고 써야 되는데 ‘○○○ △△△ 선배’라고 썼다고 ‘○○○가 네 친구냐’라고 혼났다. 기상천외한 이유로 계속 괴롭혀 머리가 다 빠졌다.” 압존법은 군대에서조차 2016년 폐지됐다. A 검사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했더니 B 검사는 “선배의 (수사)기록은 두껍고 너의 기록은 얇지 않느냐. 그 대신 너는 밥총무라는 임무가 있다”고 했다. “계속 시키면 회사를 나가겠다”는 말에는 “그 정신으로 나가서 뭐라도 될 거 같냐. 집에 가서 애나 보라”는 말이 돌아왔다. A, B검사가 모두 여성이어서 젠더 이슈로 번지진 않았다. 이는 2018년 1월 취재파일에 적어둔 내용이다. 2017년 9월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밥총무를 폐지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에도 계속된 것이다. 아직도 밥총무는 상당수 남아 있다고 한다. 이후 A 검사는 출산을 한 뒤 복직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날이면 육아 때문에 오후 7시면 퇴근을 한다. 일이 많으면 출근을 일찍 하거나 밤에 다시 청사로 나온다. 아이가 아프거나 일이 생겼을 때 조퇴를 하거나 연차를 쓰겠다는 A 검사에게 부장검사는 못마땅하다는 듯 “부모님은 뭐하시길래 아이를 돌봐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내 새끼를 내가 키워야지, 왜 어른들이 봐주셔야 되냐”고 반박했다고 한다. 시댁과 친정 어른들은 거주지가 멀고 지병을 앓고 있어 아이를 맡길 수 없다. 최근 만난 A 검사는 업무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지만 승진은 포기했고 진로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에 ‘아닌 건 아니다’라고 하고, 육아휴직을 쓰고, ‘칼퇴근’을 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A 검사의 사례가 특수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악습과 폐단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곰팡이처럼 계속 피어난다. 인권수호기관을 자처하는 검찰은 ‘우리 안의 파시즘’을, 그리고 내부에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속 ‘연진이’가 없는지 늘 경계해야 한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5-05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금태섭의 ‘잘못된 만남’…사람 보는 안목은 ‘정의의 여신’급[황형준의 법정모독]

    금태섭 전 국회의원(이하 금태섭)에게는 3인의 유명한 스승이 있었다. 한 명은 학문적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요, 나머지 두 명은 정치적 스승이렷다. 그중 누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과 같은 위대한 스승인지, 아니면 반면교사해야 할 대상인지, 정치인 금태섭의 행보를 보고 독자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어찌 보면 ‘잘못된 만남’이다. 금태섭 주변에선 “어떻게 10년 동안 안 되는 길만 골라 가나 싶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금태섭은 ‘개구리 왕자’처럼 눈이 크지만 사람 보는 안목은 장식품 수준이요,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급이다. 정의의 여신은 형상이 조금씩 다르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눈을 뜨고 저울과 법전을 든 형상인데 공교롭게 금태섭이 저서 ‘디케의 눈’ 책 표지에 인용한 사진은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든 형상이다. ● 정치권 입문 계기 된 안철수와의 결별첫 출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금태섭은 2007년 검찰을 나온 뒤 5년 만에 2012년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 안철수 의원(현 국민의힘)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기 전 ‘시골 의사’ 박경철 씨로부터 제안을 받았고 2012년 봄에서야 비공식 캠프인 ‘여의도 오피스텔’에 합류한 것이다. 금태섭은 안철수 캠프에 합류하게 된 배경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2012년 대선을 앞둔 우리 앞에 선택의 길은 그렇게 평면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문재인, 박원순, 안철수 등을 놓고 장점과 단점을 비교해가며 한 명을 고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때 나도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정권을 교체해서 판을 갈아보자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계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안철수 원장뿐이었다. (중략) 나는 그 노력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한 것이지 여러 정치인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2015년 8월 발간한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 중 -한마디로 얘기하면 정치는 시작해야겠고 딱히 안 의원을 ‘주군’으로 삼을 만큼 끌리진 않았지만 마침 제안이 들어왔으니 합류했다고 다소 솔직히 밝힌 것이다. (물론 이 책은 금태섭이 안 의원과 사실상 결별한 뒤 쓰여졌다.)그 뒤 그는 안 의원에 대한 언론과 야당 등의 검증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네거티브’ 대응을 맡았다. 박근혜 캠프의 정준길 변호사가 금태섭에게 전화를 걸어 이른바 ‘안철수 대선 불출마 종용’ 논란이 일었고 이 일로 어쨌든 유명해졌다.그해 11월 23일 당시 민주당과 단일화 협상을 진행하던 중 안 의원이 결국 후보 사퇴를 결심하면서 진심캠프도 해산됐다. 안 의원은 18대 대선 당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을 꺾으면서 당시 여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금태섭은 2013년 초 안 의원을 만나러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찾아갔다. 이와 관련된 두 시간 동안 금태섭이 진흙 길을 걷고 있는 데도 안 의원이 몰랐다는 에피소드는 법정모독 [8화]에서 다룬 적이 있다.이 내용이 언론에 주목을 받자 2015년 8월 안 의원 측 인사는 이같이 말했다. “금 변호사가 당시 미국에 온 게 결국 4월 재·보선 때 노원병에서 자신이 나가려고 한 것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은 쏙 뺐다.” - 취재 메모 중 - 당시 금태섭은 2013년 4월 24일 치러지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대선에서 패배한 지 몇 달 안 된 안 의원이 출마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대신 자신이 출마할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 의원은 귀국해 보궐선거에 직접 출마했고 금태섭은 노원병 선거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안 의원은 무소속으로 당선이 됐다.그 뒤 안 의원은 신당 창당 방침을 밝혔고 금태섭도 신당 창당기구의 대변인을 맡으며 활동했다. 그러던 중 그해 3월 2일 안 의원이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전격 합당을 발표하면서 새정치민주연합이 탄생했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합당 계획이 발표되고서야 알게 된 금태섭은 2012년 후보 사퇴에 이어 또 한 번 적지 않은 배신감을 느꼈다.합당 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금태섭은 7·30 재·보선에서 서울 동작을 출마를 선언했지만 출마는 좌절됐다. 당시 김한길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그를 수원병에 전략공천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동작을에 나가겠다고 한 사람이 다른 지역으로 출마할 수 없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대변인직에서 물러났고 안 의원과 결별했다. 그 뒤 안 의원이 새정치민주당을 탈당해 2016년 국민의당을 창당할 때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금태섭은 민주당에 그대로 남았다. 그해 1월 말 금태섭이 했던 이야기다. “지지난주에 안철수 의원을 만났다. 자기가 2015년에 왜 탈당했는지 말한 다음에 ‘금 변호사는 심지가 곧은 사람이고 오래 생각해서 한번 결정하면 안 바꾸는 사람이니까 내가 얘기해도 소용없겠지만 우리 당에 왔으면 좋겠다. 공천받고 출마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내가 ‘진심으로 잘하시길 바라지만, 이번에는 당에 있는 게 맞겠다’고 했고 안 의원은 ‘언제든 생각 바뀌면 이야기해라’고 했다.” - 취재 메모 중 -● 20대 국회 입성…촉망받는 초선으로 ‘신들린 발연기’까지 소화결국 금태섭은 민주당 후보로 서울 강서갑에 출마해 20대 국회의원이 됐다. ‘김종인 비대위’ 체제에서 대변인에 발탁됐고, 추미애 대표 시절엔 전략기획위원장을 맡는 등 초선 의원으로 당 요직을 맡았다.대선 직전엔 문재인 캠프의 정책홍보 사이트인 ‘문재인 1번가’를 홍보하기 위해 배우 정우성 장쯔이가 등장했던 ‘2% 부족할 때’ 음료의 과거 광고를 패러디해 추미애 당시 대표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나무위키에는 ‘신들린 발연기’였다고 표현돼 있다.)원내에선 법조인의 전문성을 살려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촉망받는 초선 중 한 명이었다. 초선으로선 이례적으로 2019년 백봉신사상 대상을 받았다. ● ‘지도교수’ 조국 전 장관 정면 비판… ‘조금박해’로 불려금태섭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각각 서울대 법대 86학번과 82학번이다. 네 학번 차이지만 조 전 장관이 학교를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는 두 살 차이다. 금태섭은 학교 다닐 때는 조 전 장관을 몰랐지만 대검찰청 연구관으로 근무하면서 그를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검사 시절 금태섭은 1년간 미국 연수를 통해 석사 학위를 땄지만 논문을 안 쓴 상태였다. 교수들이 논문 없는 석사를 탐탁지 않게 여겨서 박사 과정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안면이 있는 조 전 장관에게 부탁했고 그가 금태섭을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친하게 지냈다. 결국 금태섭은 논문을 쓸 여유가 없었고 박사 학위는 받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금태섭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조 전 장관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권유한 적도 있다. “나는 조국 교수가 그때부터 정치를 시작하더라도 18대 대선에서 야권의 후보로 나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후보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야권에 유리하게 조성된 서울시장 선거에 나간다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봤다. 그러면 야권은 설사 대권에서 패배하더라도 젊고 유력한 정치인을 서울시장으로 보유하게 되는데 여기엔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지자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었다.” -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 중에서 -그러나 조 전 장관은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었고 대신 박원순 변호사를 돕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조 전 장관은 초대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이 됐다. 이어 2019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박상기 전 장관의 후임으로 조 전 장관을 지명했고 자녀 입시비리 등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거세졌다.여기서 ‘그 일’이 벌어졌다. 법사위 소속이었던 금태섭은 조 전 장관이 기자간담회에서 ‘금수저는 진보를 지향하면 안 되냐’고 반박한 점을 언급하며 “사람이 이걸 묻는데 저걸 답변하면 화가 난다. 언행불일치 동문서답식 답변으로 상처를 깊게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냐”고 조 전 장관을 몰아세웠다. 이어 “진보적 삶을 살아왔다는 이유로 비판받는 게 아니다. 언행불일치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친문(친문재인) 진영의 미움을 샀다. 그 뒤 조 전 장관과의 관계도 사실상 끝났다. 또 금태섭은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검찰개혁 법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주장했고 검찰의 직접 수사는 줄이는 방향의 검경 수사권 조정에 회의적이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신설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결국 2019년 12월 공수처법 수정안을 민주당이 밀어붙이며 본회의에서 표결할 때 기권표를 던졌다. 금태섭은 쓴소리를 하던 당내 ‘비주류’ 조응천 박용진 김해영 당시 의원과 함께 ‘조금박해’로 몰리며 한 묶음으로 ‘빨간 점퍼’라는 비판을 받았다. 겉은 민주당 소속이지만 속은 국민의힘이라는 비아냥이었다.결국 그는 21대 총선 경선에서 탈락했다. 그 과정도 결과도 물밑에서 이뤄졌지만 그는 경선 결과 발표날 필자에게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다. 면목이 없다”고 패배를 인정했다. 심지어 그해 5월 말 당 윤리심판원은 공수처법 표결에서 기권을 했다는 이유로 금태섭에 대해 ‘경고 처분’을 내렸다. 다음은 당시 민주당 징계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한 필자의 칼럼이다.결국 금태섭은 같은 해 10월 “민주당은 예전의 유연함과 겸손함, 소통의 문화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며 “마지막 항의의 뜻으로 충정과 진심을 담아 탈당계를 낸다”고 밝혔다.‘내로남불’을 비판하며 소신 있고 합리적인 정치인으로 금태섭이 국민들에게 각인되는 장면이었다. 메시지에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파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당내 세력이 없는 혈혈단신 비주류 초선 의원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이듬해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며 인위적으로 체급을 올렸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안철수 의원과의 ‘제3지대 후보’ 단일화에서 패배했고 안 의원도 오세훈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 금태섭으로선 서울시장 출마로 인지도를 올렸을지 모르지만 별로 얻은 게 없는 선거였다. ● 금태섭의 ‘멘토’ 김종인의 빛과 그늘그 뒤 금태섭은 정치평론가로서 언론 기고와 방송 출연, 방송진행자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이달 18일 국회에서 연 ‘다른 미래를 위한 성찰과 모색’ 모임 토론회 발제문을 통해 양극화, 편 가르기식 정치, 양당제의 문제 등을 한국 정치의 문제점으로 꼽았다. 그는 “새롭게 출현할 세력은 기존 한국 정치의 문제들을 일소하는 합리성과 객관성을 갖추어야 하고 자기편에게 유리한 의제가 아닌 우리 사회에 진짜 중요한 문제를 찾아서 제기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며 “단순히 기존 정당들의 행태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반사체’가 되는 데서 존재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비전을 제시하는 ‘발광체’가 되어야 한다. 양 진영으로 나누어져 있는 현재의 정치 지형을 3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세력을 갈아치우겠다는 의지와 힘이 있어야 새로운 세력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선 “올해 9월 추석 전에 제3지대 깃발을 들어 올리겠다”고 했다.금태섭이 신당 창당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년 전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도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신당을 만들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토론회에선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좌장을 맡았고 신당 창당에 대해 “금 전 의원이 용기를 갖고 그런 시도를 하니까 도우려 한다”고 했다. 여야를 두루 경험하고 ‘킹 메이커’이자 영향력 있는 ‘스피커’ 원로인 김 전 위원장은 금태섭에겐 든든한 후원자다. 하지만 청년 신당 방침을 밝히는 자리에 노회한 정치인이 등장해 배후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지적도 있다.금태섭은 2016년 당시 민주당 비대위 대표였던 김 전 위원장으로부터 공천장을 받은 인연이 있다.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국 사태와 공수처법 반대 등 과정에서 금태섭이 소신 발언을 할 때마다 김 전 위원장으로부터 격려를 받았고 공천에 탈락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건 것도 김 전 위원장이었다고 한다.금태섭도 김 전 위원장에 대해 “양당을 다 경험했고 또 오래 정치를 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무슨 개인적인 욕심이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데 적어도 제가 겪어본 바로는 사심이 없는 분”이라며 “당신이 무엇을 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나보고 이런저런 걸 해보라고 조언하는 관계”라고 했다.김 전 위원장은 ‘경제민주화’ 조항을 헌법에 반영시켰고 박근혜 문재인 정부 탄생에 기여한 원로다. 하지만 대선에 직접 ‘플레이어’로 나섰다가 일주일 만에 철수한 적도 있다. 2017년에 민주당을 탈당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주목을 받지 못하자 출마를 접고 안철수 의원을 지지했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와도 가까운 그는 금태섭과 이준석 같은 인물을 통해 한국 정치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금태섭은 정치인 10여 년 동안 좌충우돌 ‘잘못된 만남’을 이어왔다. 그리고 결별을 거듭했다. 이제 그가 주도하는 제3지대 신당 창당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 전 위원장이 참스승으로 그의 길잡이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청출어람’이라는 말처럼 금태섭이 3인의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 성공 여부에 따라 정치인 금태섭의 미래도 달렸다. 금태섭 전 의원에겐 팬덤이 아직 없습니다. 정치 10년이면 팬클럽이라도 생길 만한데 없습니다. 임팩트가 약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는 “조직이 안 되어서 그러지 길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 나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밉지 않은 왕자병입니다.신당 창당 방침을 두고도 그 주변에서조차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 “대선 주자도 아닌데 함께 출마할 인물도, 조직도, 아직까진 콘텐츠도 뭔지 모르겠다”는 등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중심이 되는 ‘금태섭 신당’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양당으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하에 논의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낡은 잣대’로 바라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는 “과거 개인을 중심으로 한 창당은 모두 실패했다. 세력화보다는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답을 찾기 위해 논의하고 또 공부도 하고 전문가들 얘기도 듣고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더 이상 묻기가 어려워 혼자 그의 미래를 상상해 봅니다. 그래도 그의 ‘근자감’과 충만한 ‘똘끼’라면 좀더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다음 [17화]는 2주 뒤인 5월 11일까지 차분히 써볼 예정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야권의 ‘셀럽’이어서 삼척동자라도 알만한 분입니다. 그래서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친숙하지만 진면목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변에선 피아를 떠나 다들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탄하는 인물입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4-27
    • 좋아요
    • 코멘트
  • ‘민주당 돈봉투 의혹’ 강래구 구속영장 기각…급물살 타던 수사 제동

    더불어민주당의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사건에서 자금을 마련해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강래구 한국감사협회장이 21일 구속을 면했다. 12일 강제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이 사건의 ‘키맨’인 강 회장 구속영장을 청구하며 수사에 속도를 냈지만 신병 확보가 좌절되면서 제동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중앙지법 윤재남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21일 오후 11시 반경 강 회장에 대해 “현재까지 제출된 자료만으로는 피의자 등에 대한 압수수색 이후에 피의자가 직접 증거인멸을 시도하였다거나 다른 관련자들에게 증거인멸 및 허위사실 진술 등을 하도록 회유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윤 부장판사는 또 “현재까지 확보한 주요 증거와 향후 수집이 예상되는 증거들에 대해 피의자가 수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증거를 인멸하였다거나 장차 증거를 인멸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도망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앞서 검찰은 강 회장이 2021년 3∼5월 9400만 원이 담긴 돈봉투를 배포한 혐의(정당법 위반)와 함께 사업가 박모 씨로부터 2020년 9월 수자원공사 납품 청탁 명목으로 300만 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강 회장은 9400만 원의 돈봉투 중 8000만 원을 마련하고 나머지 1400만 원에 대해서도 자금 조성을 지시, 권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날 구속영장실질심사에서 강 회장 측은 “국회의원들에게 돈봉투가 전달됐다는 건 전혀 아니다”거나 일부 혐의에 대하선 “기억이 안 난다”고 부인했다. 그러면서도 그간 수사에 잘 협조를 해왔다며 증거인멸 우려 등이 없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맞서 검찰은 감시 사각지대에 있는 전당대회에서 금품이 살포됐고 이 과정에 관여한 혐의를 받는 윤관석 민주당 의원 등 송영길 캠프 인사들이 당내 요직을 차지하는 등 매관매직 정황이 뚜렷한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또 강 회장이 공범 등을 접촉해 회유한 정황이 다수 확인된 점 등을 들어 구속 필요성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영장 기각 사유 분석과 보강 수사를 거친 뒤 영장 재청구 여부를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장은지 기자 jej@donga.com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4-21
    • 좋아요
    • 코멘트
  • ‘이유 있는 반항아’ 금태섭을 키운 건 팔할이 징계…총장·대표에게 ‘경고’ 신기록[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먹고 노는 대학생’이라는 말이 있던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 시절, 대학에서 학사경고(학고)를 받은 형제자매가 8촌 일가친척 내에 꼭 한 명씩은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학고는 면한 모범생(?)이었다.사춘기가 늦게 온 것인지 10, 20대가 아닌 30, 40대에 들어 반항이 시작됐다. 한 번 받기도 힘든 ‘별’을 각각 두 개나 달았다. 한 번은 검찰총장에게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한 번은 소속된 정당 대표에게서 당론을 위배했다는 이유로 ‘경고’ 징계를 받은 것이다. 이 두 가지 징계를 잇달아 받은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일 것이다. 학고까지 받았다면 ‘트리플 크라운’으로 기네스북감일 텐데 아쉬울 뿐이다. 집에도 놀러 갈 정도로 친했던 4개 학번 선배이자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겐 “언행 불일치”라며 정면 비판을 했다. 항간에는 박사학위만 줬다면 그렇게 척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정도면 핍박받는 선구자인지 악동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소신이나 개똥철학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임스 딘의 ‘이유 없는 반항’과 달리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12년간 검사 생활을 했지만 검찰 출신 티가 나지 않는다. 변호사나 정치인 이미지가 더 강하다. 일도양단으로 유무죄를 가리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기 때문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손등에 찍었던 ‘무지개 도장’의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도 모른다.신언서판(身言書判)이 뛰어난 ‘서울깍쟁이’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이다. 백미는 해맑은 미소다. 눈가의 주름이 무색할 만큼 소년처럼 순수하게 웃는 게 트레이드마크다. 금태섭 전 국회의원(이하 금태섭)의 이야기다.● 어릴 적 꿈은 ‘탐정’…평검사 시절 특수-기획 분야에서 두각1967년생인 금태섭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판사 출신의 금병훈 변호사였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금 변호사는 박정희 정부의 유신시대에 판사를 하며 긴급조치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하거나 시국사범들에게 가벼운 형량을 내리면서 미움을 사 법원의 재임용 절차에서 탈락해 법복을 벗었다. 1973년 비슷한 이유로 수십 명의 판사들이 재임용에서 탈락한 이른바 ‘사법파동’ 때다. (여담이지만 이때 국민의힘 유승민 의원의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도 판사를 하다가 같은 이유로 법복을 벗었다고 한다. )금 변호사는 제11대 총선에서 경기 용인-이천-여주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그 뒤 다시 출마하지 않았다고 한다. 금태섭이 법조인과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물론 정의에 대한 원칙이 있는 것도 가풍을 이어받은 덕분이라는 게 주변인들의 분석이다. 변호사 아버지를 둔 덕에 금태섭은 유복하게 자랐다. 1986년 여의도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에도 그는 똑똑하고 매너 좋은 모범생이었다. 유머감각이 있었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다. 추리소설을 좋아했던 그의 어렸을 적 꿈은 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학생이 되던 때만 해도 1987년 민주화 되기 전이어서 검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래서 1992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에도 아버지를 따라 판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던 중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가 1년 먼저 검사가 된 걸 보고 검찰을 지망했고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사법연수원 24기를 수료한 뒤 1995년 검사로 임관했다.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검)과 창원지검 통영지청, 울산지검, 인천지검을 거치는 동안 특수부 수사를 많이 했다. 초임 검사 때부터 국가대표 볼링 선수들의 마약 사건과 가락시장 멸치 도매인 가격 담합 사건 등 수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2002년 대검찰청 중수부로 5개월간 파견을 나갔다. 특정 사건 수사를 뭉갰던 신승남 전 검찰총장에 대한 직권남용 의혹 수사팀의 막내로 근무했다. 금태섭을 제외하곤 신 전 총장과 함께 근무했던 인연이 있어서 쉬운 수사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를 기소했다. 문재인 정부 이후 잦아진 직권남용 수사 이전에 직권남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확정받은 사례는 거의 없지만 유죄를 이끈 성공한 수사였다. 수사 능력뿐만 아니라 평소 논리적이고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은 그는 2003년 1월부터 3년간 대검 기획조정부 검찰연구관으로 발탁됐다. 대검 중수부와 기조부를 합쳐 총 3년 반가량 대검 연구관으로 근무하며 ‘특수통’과 ‘기획통’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특히 그가 남긴 족적은 검찰 CI다. 5개의 대나무 모양에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 형상과 칼이 대나무 5개의 위쪽 라인과 가운데 대나무 칼 모양으로 형상화돼 있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것은 아니지만 실무자로서 업체를 골라 몇 개의 시안을 받은 뒤 총장에게 보고하는 등 CI를 관철시켰다. 또 검찰 재직 중 미국 코넬대 로스쿨에서 석사학위를 딴 그는 영어가 유창해 국제검사협회 서울총회 개최 준비를 맡아 무사히 임무를 마쳤다. ● 피의자 위해 ‘수사 제대로 받는 법’을 연재하려다 좌절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했던 그가 유명세를 탄 건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 검사 시절인 2006년 9월 한겨레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 연재를 시작하면서다. 연재를 위해 그는 신문에 기고하기 위한 제안서를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약자인 피의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행동 지침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는 변호인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이다. (중략)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행동하면 상처를 입는다. 가만히 있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다. 더구나 수사기관에는 피의자에게 유리한 사실까지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어떤 검사도 무고한 피의자를 기소했다가 무죄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다리고 또 기다려라. 스스로 만든 함정에 빠지는 것만은 피하라. 상황을 파악한 이후에도 수사에 대응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있다.” - 한겨레신문의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 중 -제목은 ‘섹시’하고 파격적이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현직 검사라도 못 할 이야기는 아니다. 수사를 피해 가는 묘수를 밝히는 것도, 수사 기법을 공개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서 벗어나야 검찰이 살 것이라는 취지에서 시작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장은 컸다. 금태섭은 검찰 지휘부로부터 질책을 받았고 당초 10회 분량으로 시작한 연재는 1회로 끝났다. 그는 다음 달 “검찰의 수사 현실을 왜곡하고, 검찰의 공익적 의무에 부합하지 않는 사견을 임의로 기고해 국민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것은 직무상 의무 위반과 품위 손상에 해당된다”며 총장 경고를 받았다.당시 검찰 내부에서는 “뜨고 싶어서 사고 친 것” “혼자 잘난 척한다”는 등의 비판도 나왔다. 수사를 하는 평검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도 낳았다고 한다. “검찰에서 계속 열심히 하고 싶어 했다기보다는 정치적 욕심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검찰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정치적으로 성장하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읽혀졌다. 공보지침을 위반하면서까지 하는 건 정치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봤다. 성급하게 가야 되는 상황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금태섭은) 되게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기조부 연구관을 맡을 정도로 글도 잘 쓰고 장래가 촉망되는 검사였는데… 본인은 시간이 없다고 느꼈는지 빨리 정계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 당시 대검 과장급으로 근무했던 A 변호사와의 통화 -반면 검사 금태섭을 잘 아는 또 다른 전관 변호사는 상반된 평가를 내놓았다. “나는 그가 대개 순수하다고 봤다. 형사사법 절차에 관심이 많았고 실력이 있고 자기 기준과 소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그 글을 쓴 이유는 시민의 권리를 검사가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게 검찰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그걸 약간 재밌게 쓰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글이 나왔을 때 참 좋은 글이고 검찰 이미지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착각이었다. 대로한 선배들도 있었다. 그만큼 당시 선배들이 너무 편협했다. 나는 금태섭이 이를 발판 삼아 그때부터 정치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이후에 정치인이 된 건 결과론적인 것이다. ” - 당시 대검 연구관으로 평검사였던 B 변호사와의 통화 -금태섭의 설명은 또 다르다.“나는 검사가 규정을 어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관행적으로야 그랬는지 모르지만 (언론 기고에) 상부의 승인을 받으라는 규정은 없었다. 그래서 공식 징계가 아닌 총장 구두 경고를 받았다. 나 때문에 공보지침이 생겼다. (중략)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로 검사들이 욕을 많이 먹었다. 그때 검사들의 항변이 ‘밤새워 일하는데 국민들이 몰라준다’였다. 나는 밤새워 일한다고 국민들의 신뢰가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글을 썼다. 나는 여러 경력을 희생할 각오를 하고 헌신적으로 한 것이지만 혼자 변화를 하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다는 걸 깨달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에 등장하는 인물마다 저마다 다른 얘기를 하듯 각자 다른 이야기다. 금태섭은 2008년 발간한 저서 ‘디케의 눈’에서 라쇼몽과 친구들의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제삼자로서는 서로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을 뿐 과연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 경우에, 과연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검사 금태섭’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몫이다. ● 11년 만에 ‘제3지대’ 조연에서 주연으로조직에서 징계를 받은 경험에서 ‘혼자 변화를 꾀하려 하면 실패한다’는 교훈을 얻은 그는 그 무렵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만약 정치를 하게 되더라도 당장 할 생각은 없었다. ‘수사 제대로 받는 법’ 기고로 워낙 큰 파문을 일으킨 데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금태섭이 정치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치권에 기웃거리면 ‘싸구려’로 보일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4, 5년 이상은 정치권은 쳐다도 안 보려했다. 이듬해인 2007년 1월 그는 인사를 앞두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며 사표를 냈다. 변호사로 변신한 그는 방송과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 등으로 활동하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실제 그의 뜻대로 5년 지난 뒤인 2012년 봄에서야 그는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현 국민의힘 의원)이 ‘안철수 현상’의 주인공으로 급부상하면서 캠프 상황실장 제안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무소속으로 시작한 정치인 금태섭은 안 의원과 함께 신당 창당을 준비하다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했다. 국민의당이 생길 때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강서갑에서 2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1대 총선 경선에서 떨어진 뒤 탈당해 다시 무소속으로 돌아왔다. 2021년 서울시장 후보로 나섰다가 2022년 대선에선 윤석열 캠프에 합류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엔 입당하지 않고 ‘제3지대’에 머물렀다. 이달 18일 그는 “새로운 세력이 출현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정치를 펴야 된다고 생각한다”며 신당 창당 가능성을 열어뒀다. 11년 만에 조연에서 주역으로 성장한 그의 반항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어느덧 그도 56세다. 안철수 의원이 결국 포기한 제3당 실험을 다시 시도하는 게 얄궂은 운명처럼 보인다. 금태섭이 든 깃발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2014년 당시 ‘안철수의 입’ 역할을 하던 금태섭 전 의원을 처음 만났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 의원의 측근’으로 표현된 기사에 대해 “내가 왜 누구의 측근이냐”며 그렇게 쓰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사석에선 솔직했습니다. 안 의원과 함께 정치를 시작했지만 안 의원에게는 물론 기자들에게도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다소 가감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2, 3년 정도 지난 뒤 서로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 느낄 때쯤 술자리에서 “앞으로 형님으로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왜 황 기자 형이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호형호제를 거절당한 건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까칠하다기보단 깍쟁이, 차도남 같았습니다. 윗선의 눈치를 보지 않는 언행과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가진 인물입니다. ‘검찰 전성시대’라지만 검찰 출신이라는 걸 내세우지 않습니다. 유머 코드가 ‘왕자병’이지만 아무리 자랑질을 해도 밉지는 않습니다.에는 정치인 금태섭과 그의 미래에 대해 좀더 다뤄보겠습니다. 법정모독이 회를 거듭해갈수록 ‘짠맛’이 없고 ‘단맛’만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필자로선 고민이 깊습니다. 그런데 권력이 없는 ‘미래 권력 호소인(?)’들에겐 회초리가 별로 소용은 없습니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보다는 낫지 않냐라고 항변해 봅니다. 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4-20
    • 좋아요
    • 코멘트
  • [광화문에서/황형준]이상한 변호사와 노쇼 변호사

    수능 만점 출신의 의대생이 자기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에선 동생이 죽은 형의 가슴을 세게 때리는 장면을 부모가 목격했다. 유일한 목격자지만 자폐를 겪고 있는 동생은 ‘죽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 사건에 대해 제대로 진술하지 못해 살인범으로 몰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기 캐릭터 ‘펭수’ 아이템을 장착할 정도로 ‘덕후’인 동생의 마음을 열기 위해 변호사는 ‘펭수 마이크’를 잡고 열창한다. 또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의대생 방을 찾아 자살을 암시한 일기를 발견한다. 그렇게 동생은 누명 위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자폐를 앓고 있는 천재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3회’에 나오는 이야기다. 우영우 같은 변호사가 드라마에만 있는 건 아니다. 재심 전문으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는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3∼6년 동안 옥살이를 한 ‘삼례 3인조’와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을 대리해 재심을 진행한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변호사들은 누구나 법과 지식이 부족한 의뢰인을 법정에서 대리하는 기본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승소를 위해 의뢰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현장을 조사하고 관련자를 만나고 법정 증언을 요청하는 것도 변호사의 중요한 업무다. 이런 변호사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실추시킨 인물이 항소심 ‘노쇼’로 논란이 된 권경애 변호사다. 권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2015년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고 박주원 양(당시 16세) 사건이다. 박 양의 어머니는 2016년 8월 권 변호사를 선임해 서울시교육청과 가해 학생 등 30여 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지난해 2월 1심은 피고 30여 명 중 1명에게만 “5억 원을 지급하라”며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박 양의 어머니는 항소했지만 권 변호사가 항소심 재판에 3회 출석하지 않아 지난해 11월 항소가 취하됐고 1심 결과도 패소로 변경됐다. 재심 청구는 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어렵고 권 변호사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가능하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유족 측은 13일 권 변호사 등을 상대로 2억 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소송을 냈다. 민사소송은 법원에서 변론기일 통지서를 보내고 이메일 또는 문자메시지로도 날짜를 알려준다. 권 변호사는 9000만 원 배상의 각서를 썼을 뿐 어떤 이유로 변론기일에 불출석했는지, 왜 유족에게 5개월 동안 항소심 결과를 알리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권 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이었지만 조국 사태를 계기로 민변을 탈퇴하며 이른바 ‘조국 흑서’를 집필해 주목받았다. 하지만 본업과 기본에 충실하지 못한 직업인은 사이비일 뿐이다. 권 변호사가 6년여 동안 이 사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을지도 의문이다. “드라마에 나온 우영우 같은 변호사가 있냐”는 박 양 어머니의 호소를 법조계는 무겁게 되새겨야 한다. 그들의 업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4-1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싸가지 없는 진보’는 틀렸다…반증해준 ‘재승박덕’ 이준석 [황형준의 법정모독]

    ‘재승박덕(才勝薄德)’기성 정치권을 몰아세우며 ‘따박따박’ 할 말을 하는 것이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장점이자 매력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 전 대표와 같은 정당에 몸담았던 한 유력 정치인은 그에 대해 한마디로 재주는 많지만 인덕이 없다는 의미로 이 같은 평가를 내놓았다고 한다.● 과도하게 자아가 강한 ‘재승박덕’ 스타일이 전 대표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정치권 인사들은 “한마디로 아주 잔머리 굴리는 데 도가 튼 ‘도사’인 데다 하나도 손해는 안 보려 하니 덕이 없다” “정치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애가 강하지만 이 전 대표는 에고(ego)가 강해도 너무 강하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내공은 없고 입만 살아 있다” “언론과 SNS에 자기 이름이 나오는지 매일 검색하는 데 중독된 ‘관종’” 등의 혹평도 있다.흔히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말이 있다. 17대 국회에 대거 진출한 당시 열린우리당 386운동권 출신 초선 의원들의 행태 이후부터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26세에 정치를 시작하고 보수를 표방한 이 전 대표도 기성 정치인들로부터 같은 평가를 받는다. 싸가지 없음이 진보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기원전 1700년 무렵 수메르 점토판에 “요즘 젊은 놈들은 버릇이 없다”고 써 있듯이 그저 세대 차이에 따른 갈등일 수 있다.이 전 대표도 도발적인 발언을 하다 보니 구설수에 자주 휘말렸다. 국정농단 사태가 논란이 됐던 2016년 11월엔 당시 이정현 대표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또 안철수계 국민의당과 유승민계 바른정당이 합당해 만든 바른미래당에선 2019년 4월 재·보궐선거 성적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손학규 당시 바른미래당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 전 대표가 비공개 회식 자리에서 안철수 의원을 향해 ‘병×’라는 비속어를 써서 논란이 된 일도 있다. 이 전 대표는 “사석에서 한 말이고 이것이 문제 될 발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사과하지 않았다. 안 의원 측의 문제 제기로 바른미래당 윤리위원회는 이 전 대표에 대한 징계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계파 간 갈등이 폭발하면서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탈당한 뒤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했다. 이후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다시 국민의힘으로 통합됐다.2021년 국민의힘 당 대표로 선출된 뒤에도 친윤 측과 갈등이 깊어졌다. 친윤 측에선 이 전 대표를 의도적으로 소외하거나 그를 깎아내리는 익명 인터뷰를 하는 등 견제구를 날리며 불화를 일으켰다. 이 전 대표도 ‘윤핵관’이라는 단어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여러 차례 충돌했다. 특히 이 전 대표는 자신이 연루된 성 접대 의혹을 수사하는 경찰의 배후에 윤핵관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도 폈다. 국민의힘 대표와 대선 후보 양측이 대선 앞에서 힘을 모아 일치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며 몇 차례 싸웠다 화해하는 꼴불견의 장면을 만들었다는 비판도 나온다.성 접대 의혹에도 휘말렸다. 2013년 7월 11일과 같은 해 8월 15일에 대전 유성구 소재의 모 호텔에서 김성진 당시 아이카이스트 대표이사의 주선으로 성매매 여성에게 두 차례 성 접대를 받았다는 것이다. 가로세로연구소가 2021년 말 의혹을 제기하면서 경찰 수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7월 당 윤리위원회가 그에 대해 당원권 6개월 정지 결정을 내리자 그는 불복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홍준표 대구시장은 ”바른미래당 시절 대선배이신 손학규 대표를 밀어내기 위해 그 얼마나 모진 말들을 쏟아냈느냐”며 “좀 더 성숙해져서 돌아와라”라며 업보이자 자업자득이라는 점을 꼬집기도 했다. 같은 해 9월 경찰은 2013년의 성 접대를 포함한 수수 행위에 대한 알선수재 혐의는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무혐의로 불송치 결정을 했다. 대신 이 전 대표가 의혹을 제기한 가세연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이에 가세연 측은 다시 이 전 대표를 무고 혐의로 고소했고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넘기면서 현재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 2024년 총선에선 무소속 출마도 불사이 전 대표는 추가 징계까지 받으면서 총 1년 6개월 당원권이 정지됐다. 그 뒤 한동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잠수를 탔다. 2024년 총선 직전인 1월에서야 당원권이 회복된다.지난달 치러진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천아용인’(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 후보의 약칭)을 지원했지만 당선자를 만들지 못했다. 무고 혐의에 대한 검찰 수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이 전 대표의 휴지기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신 지난달 10일 ‘이준석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를 출간하면서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기지개를 펴며 지지세를 다시 모으는 분위기다.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30%까지 추락하는 등 벌써부터 김기현 대표를 간판으로 총선을 치를 수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이 전 대표 측근은 “일단 당을 개혁하는 데 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했다.‘0선’ 꼬리표가 붙어 있는 이 전 대표에게 내년 총선 출마는 상수다. 그가 2016년부터 2018년 재·보선, 2020년 총선까지 3번 출마해 낙마했던 서울 노원병 지역구 출마가 기본이다. 비례대표 의원은 안 한다는 생각을 과거에도 여러 번 밝혔다.하지만 다른 험지 출마를 요구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만약 친윤 지도부가 이 전 대표에게 공천을 주지 않더라도 그는 무소속 출마도 강행할 분위기다. 지난달 8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친윤 진영이) 괴롭혀서 만약 출마 못 하게 하면 홍준표 시장은 징계받으면서도 대선도 나갔다”고 말한 바 있다.● ‘할배’ 김종인의 마지막 대선 프로젝트는 이준석과 ○○○?그는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을 꼽는다. 그는 2011년 한나라당 비대위원 시절 당시 금기처럼 여겨졌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정수장학회 문제에 대해 CBS 라디오에 출연해 “국민들이 아직 해소가 안 됐다고 생각한다”는 취지로 날을 세웠다. 그러자 그 뒤 김 전 위원장이 “용기 있네”라며 밥도 사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이 전 대표는 김 전 위원장을 10년 넘게 멘토로 삼았다. 지난달 이 전 대표가 사석에서 한 이야기다. “ 추천사를 받기 위해 김 전 위원장을 찾아갔다. 할배(그는 김 전 위원장을 사석에서 ‘할배’라고 부른다)가 말하길 ‘이 대표, 이제 이렇게 된 이상 대선 준비해. 내가 도와줄게. 살아 있으면….’ 진짜 이제 할배가 (킹 메이커에) 한을 품었구나 싶었다.” - 취재 메모 중 -마지막 “살아 있으면…”이라는 말이 이 전 대표에게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1940년생인 김 전 위원장은 올해 83세고 1985년생 이 전 대표는 38세다. 나이를 화투 게임의 일종인 ‘섰다’로 따지면 둘 다 최고 패인 ‘38광땡’이다. 4년 뒤에도 운이 계속 따를 것인가.또 그가 “그럼 대선 준비를 위해 누구를 만날까요”라고 했더니 김 전 위원장은 “○○○을 만나보라”고 했다고 한다.이 전 대표 MBTI는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형인 ESTP다. 이 유형은 ‘내기를 좋아한다’ ‘삶을 즐기며 산다’ ‘스릴을 좋아한다’는 등 평가가 있다. 이 전 대표 측은 “모험을 즐길 줄 안다. 전당대회에서 1등을 달리고 있는데도 ‘부자 몸조심’을 안 하고 대단히 공격적으로 베팅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 역시 승부사적 기질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추진한 것도 누군가는 정치적 야심이 컸기 때문에 다음 행보를 노리고 나섰다고 하지만, 시의회를 다수를 차지한 당에 빼앗긴 상태에서 시정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것이 경솔하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정치를 하면서 그런 큰 것을 대범하게 걸 줄 아는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 저서 중 -하지만 오 시장은 주민투표로 10년 가까이 정치적 암흑기를 거쳤고 도박이 그렇듯이 베팅을 잘못했다간 집안이 거덜날 수도 있다. 다행히 미혼인 그에게 아직 부양가족은 없다.● 오바마에게서 배워야 할 포용과 관용이 전 대표는 한국의 오바마를 꿈꾼다. 47세 나이로 ‘흑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통합과 개혁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 전 대표가 그를 벤치마킹하기 위해선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이 있어 보인다. 이 전 대표가 2021년 3월 국민의힘 대구 합동연설회에서 했던 말이다.“2004년 제가 공부하고 있던 보스턴에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출마한 존 케리 대선 후보의 선출을 위해 모인 사람 중 바람잡이 연설자로 흑인 상원 의원이 나섰습니다. (중략) 그는 ‘이라크전에 찬성하는 사람도 애국자요,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도 애국자다. 백인의 미국, 흑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미합중국이 있을 뿐이다.’ 이 말에 미국은 전율했습니다. (중략) 오바마가 외친 통합의 시발점은 바로 관대함입니다. 그리고 통합의 마지막 완성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다른 생각과 공존할 자신감이 있으십니까.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고 그 사람도 애국자라는 것을 입 밖으로 내어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국가 이전에 당 내부에서부터 ‘다른 생각과 공존할 자신감’ ‘통합’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자세 등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철부지’네 뭐네 비하하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는 사상 첫 30대 여당 대표 신화를 만든 유례없는 인물이다. 그의 미래가 곧 청년정치의 미래라고 하면 과언일까? 지난 가 나가자 하버드대 경제학과 복수전공에 대한 이준석 전 대표의 허위학력 의혹을 제기하는 독자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이 전 대표는 “이미 무혐의로 끝난 사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확하게는 하버드대에선 ‘joint concentration’이라는 용어를 쓰는데 한국식으로 복수전공에 가까워 보입니다. 다만 학위를 각각 부여하는 게 아닌 통합전공에 가까워서 이 차이 때문에 오해가 빚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성 접대 의혹에 대한 질문은 왜 하지 않았느냐고 저를 채근하는 댓글도 있었습니다. 물론 했습니다. 최태원 SK 회장이 자신의 사업을 도와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김성진 아이카이스트 전 대표가 최 회장의 사면을 자신에게 건의하기 위해 접대를 했다는 내용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자신이 갔던 유흥업소에 전직 장관과 유력 인사 등도 갔었는데 그러면 다 접대를 받은 것이냐고 경찰 조사에서 되물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팩트’는 신의 영역이고 이제 검경 수사는 무고 건만 남아 사법적 판단은 마무리 단계입니다. 정치적 판단과 평가는 국민들이 할 것입니다. 공교롭게 20일 공개될 <법정모독 15화>의 다음 주인공은 앞서 김종인 전 위원장이 이 전 대표에게 만나보라고 했다는 인물입니다. 그의 조언에도 아직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봐도 결이 다르고, 스타일 차이가 있는 분들입니다. 다음 주인공은 법정모독에는 처음 등장하는 ‘무소속’ 정치인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4-13
    • 좋아요
    • 코멘트
  • 여의도 ‘옴파탈’ 이준석… ‘3개월 임시직’에서 여당 대표까지[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대표님, 그 ○○랑 일해 본 적 있습니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해 A 씨를 당협위원장을 시킨 뒤 총선에 출마시키는 게 어떠냐고 묻자 윤석열 대통령은 이같이 답했다고 한다. 이 전 대표는 “왜요. A 씨만큼 스펙 좋고 멀쩡한 사람 없다고 했더니 윤 대통령은 ‘뭐~ 그 이 새끼는 일도 못 하고…’”라고 윤 대통령의 성대모사를 했다. 윤 대통령이 A 씨를 자주 데리고 다녀서 아끼는 줄 알고 의사를 떠본 것이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특징 중의 하나가 주변 사람들 욕을 굉장히 많이 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써본 사람만 믿고 쓰다 보니 주변에 검찰 출신과 ‘윤핵관’만 남아 있다는 취지로 들렸다. 머리가 명석하고 언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성대모사를 잘한다. 이 전 대표의 성대모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끊임없이 정확한 단어를 구사하며 쉼 없이 이야기를 했다. 지난달 2일 이 전 대표와의 첫 만남에서 느낀 인상은 “IQ가 높다”였다.●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0선 중진’ 이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 전 대표는 이문열 작가의 책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들고 약속된 시간보다 10여 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가 시간이 좀 걸렸다고 했다. 다음 날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여는 데 회견문을 위해 다시 한 번 읽어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회견문은 머릿속에 어느 정도 정리돼 있기 때문에 술자리가 끝난 뒤 집에 가서 쓸 거라고 했다. ‘일그러진 영웅’이 누구냐고 묻자 말을 아꼈다. 그는 다음 날인 지난달 3일 기자회견에서 “1987년 이문열 작가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통해 그려냈던 시골 학급의 모습은 최근 국민의힘의 모습과 닿아 있다”며 “분명히 잘못한 것은 엄석대인데 아이들은 한병태가 ‘내부 총질’을 했다며 찍어서 괴롭힌다”고 했다. 이어 “국민의힘에서 엄석대는 누구일까요? 엄석대 측 핵심 관계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라며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담임 선생님은 바로 국민이라는 것이다. 당원 여러분의 투표로 이 소설의 결말을 바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전당대회에서 이른바 친윤계 후보를 지원하는 윤 대통령과 ‘윤핵관’을 비판하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한 이준석계 ‘천아용인’(천하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 후보의 약칭) 후보 지지를 호소한 것이다.‘친윤(친윤석열)’계가 지원했던 김기현 대표에 대해 이 전 대표는 그날 이렇게 말했다. “김기현 대표가 마치 윤 대통령과 신뢰가 깊어서 당 대표 후보로 낙점된 걸로 아는데, 전혀 아니다. 약점이 많기 때문이다. 약점이 많아 용산(대통령실)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낙점된 것이다.” ―취재 메모 중―● 하버드 졸업생, 정치에 뛰어들다그는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뒤 하버드대 컴퓨터과학과와 경제학을 전공한 ‘엄친아’였다. 하버드는 지우개 유명 메이커로나 봤던 이름이었다. 내가 만난 하버드대생은 40여 년 생애 처음이었다. 2011년 12월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를 발탁하면서 만 26세의 나이에 당시 여당 지도부를 경험했다. 여의도 정치권의 나이로 따지면 그야말로 아이돌이었다. 그는 하버드대 재학 시절 방학 때면 귀국해 무료로 과외 봉사를 했고 졸업 후 저소득층 자녀들을 위해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었다.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벤처기업 클라세스튜디오도 세웠다.그는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대위가 출범하기 사흘 전 비대위원 제안을 받았다. 약 5년 전 봉사단체를 찾아온 적이 있는 박 전 대통령과 한 번 만난 게 전부였다. 당시 비대위에는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전 의원) 등이 참여했고, 비대위는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정권 실세 및 전직 당 대표 용퇴론 목소리가 나오는 등 쇄신이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이 전 대표는 개성을 발휘하며 청년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성 추문과 논문 표절 의혹을 받은 19대 총선 당선인에 대해 출당을 요구하는 등 입바른 소리를 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디도스(DDoS·분산서비스 거부) 공격 사건에 대한 ‘디도스 검찰수사 국민검증위’ 위원장을 맡아 주목을 받았다. 2014년 4월 발간한 저서 에 따르면 19대 총선 공천 과정에선 당시 민주당에서 김근태 전 대표의 부인인 인재근 여사의 도봉갑 출마가 유력하다는 소문을 듣고 무공천을 제안했다.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민정당 독재 정권하에서 가해진 고문에 대해 당 차원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유감을 표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럽다. 이번에 새누리당은 조금 더 과감한 공천을 통해 진정성을 보여야 했다.” ― 중―또 여성의 정치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해 비례대표 중 여성을 5 대 5가 아닌 8 대 2로 공천하자는 주장도 폈다. 40대가 되기 전에 미국에선 흔한 사립 과학고등학교를 세워 이사장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썼다. 자신이 받았던 평범하지 않았던 ‘교육의 기회’의 문을 넓혀 가정 등 환경 때문에 기회를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되돌려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지금 그 꿈은 실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9년 전 책 내용과 이 전 대표의 현재 모습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근본은 같다. 3개월 임시직 비대위원으로 인상을 남긴 이 전 대표는 방송패널 등으로 활동했고 2014년 6월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장’을 맡은 뒤 줄곧 정치인으로 살았다.● 능숙한 메시지 전달 능력과 톡톡 튀는 선거전략으로 급부상이 전 대표는 메시지 전달과 의사소통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 입문 초기부터 이미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 자기 목소리를 내며 논쟁에 뛰어들었다. 2019년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때 카카오 카풀 서비스 도입에 택시업계가 반발해 갈등이 빚어지자 갈등의 해법을 찾겠다며 택시 기사 자격증을 따고 법인 택시를 몰기도 했다. 이 전 대표와 가까운 인사는 “일단 대단히 명석하고 선거에 대한 이해도 높다. 오세훈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2021년 전당대회, 2022년 대선 등을 보면 선거에서 공략해야 할 타깃 지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고 있다. 그간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으로 양분된 진보-보수 진영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만큼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진영의 구분이 재편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어릴 적 싱가포르와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다소 서구화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는 “책임정치를 구현시키기 위해 기득권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 우리의 경우 (국회의원 임기) 4년은 너무 길다. 2년으로 단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일에 대해선 “통일의 방법이 체제 우위를 통한 흡수통일 외에 어떤 방법이 있을까 싶다. 통일 교육도 필요 없다. 통일 교육은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야 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2021년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 캠프 미디어본부장을 맡았다. 2030세대 청년들을 자신의 SNS에서 희망자를 모집해 후보 유세차에서 직접 발언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희망자들은 번갈아 가면서 보통 3~5분가량 발언을 했고 한 번에 40~50명씩 와서 정책 제안을 했다. 그 결과 재보선의 20대 지지율이 75%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당 대표로 선출된 2021년 국민의힘 전당대회 합동연설회에서 그의 장점이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는 지역마다 맞춤형 메시지를 내며 당원들의 마음을 샀다. 그는 그해 5월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호남 합동연설회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 속에서 (5·18은) 가장 상징적이고 처절했던 시민들의 저항”이라며 “저는 80년 광주에 대한 개인적인, 시대적인 죄책감을 뒤로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자유롭게 체득한 첫 세대”라고 강조했다. 이어 “전당대회를 앞두고 호남 당원이 우리 당원의 0.8%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이터가 공개됐다. 노력해야 한다”며 “(호남 당원은) 그동안 왜 배척받았나. 당내 큰 선거를 앞두고 일부 강경 보수층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두려워하며 그들이 주장하는 음모론과 지역 비하와 차별을 여과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며칠 뒤 대구 합동연설회에선 “박 전 대통령이 저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라면서도 “저는 제 손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박 전 대통령이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을 배척하지 못해 국정 농단에 이르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을 비판하고, 통치불능의 사태에 빠졌기 때문에 탄핵은 정당했다고 생각한다”고 소신 발언을 했다. 한국 정당사상 최초 30대 당 대표라는 기록을 남긴 이 전 대표는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뒤 2022년 지방선거에서 공천 자격시험을 도입했고 토론배틀로 당 대변인과 상근부대변인을 2명씩 선출하는 등 신선한 아이디어를 정치권에 접목했다. 이 전 대표는 또 전략가이기도 하다. 2030세대, 특히 2030 남성층과 국민의힘의 전통적 지지층인 60대 이상 노년층을 묶어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인 40, 50대 중장년층을 포위해 지지세를 압도하겠다는 ‘세대포위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는 2021년 서울시장 선거와 전당대회에서 성공한 전략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미 ‘내각 30% 여성할당제’ 폐지, 군가산점제 부활 등을 주장하며 안티 페미니스트로 자리잡으며 ‘이대남(20대 남성)’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세대포위론은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선출된 뒤 반문재인 세력을 결집해 정권교체를 이뤄내겠다는 윤석열 캠프의 선거전략과 충돌했다. 이 전 대표와 친윤 간 갈등의 출발점이었다.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이어서 멀리하고 싶은 ‘옴파탈’ 같다. 적이 많은 ‘트러블 메이커’라는 평가도 받는다.그가 닮고 싶어하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보다는 아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모습에 가까운지도 모른다.법정모독 14화에선 이준석 전 대표의 향후 정치적 행보와 정치인으로서 아쉬운 점에 대해 좀 더 다뤄볼 예정입니다. 이 전 대표는 늘 논란의 중심에 서 왔습니다. 논리정연하고 토론배틀에선 잘 지지 않기 때문에 싸움을 걸면 되로 받아치는 ‘쌈닭’입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이 전 대표가 반대편에서 토론배틀을 한다면 상당히 명장면이 될 것 같습니다. 그간 소통을 게을리 한 측면이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시거나 e메일을 주시면 이 전 대표에 대해 궁금한 점 등을 다음 화에 다뤄보겠습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4-06
    • 좋아요
    • 코멘트
  • ‘AI 검찰총장’ 이원석이 보이스피싱을? …‘똑부’는 괴로워[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지난달 7일 오후 7시경. 퇴근을 앞둔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와 형사정책담당관실 등 형사법제 관련 부서가 발칵 뒤집혔다. 오후 4시 38분경에 온라인에 뜬 기사 때문이었다.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을 법원이 발부하기 전에 피의자와 검사 등을 심문할 수 있도록 한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을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입법예고했다는 내용이었다. 검찰로선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수사의 밀행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등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 문제는 두 시간 넘게 온라인에 올라온 이 기사를 대검 간부와 실무진 누구도 체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1만 검찰’의 수장이 이 기사를 가장 먼저 본 것. 그 주인공인 이원석 검찰총장은 옛날 상사들처럼 불같이 화를 내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후배들에게 경어체와 존댓말을 사용하고 거의 말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아랫사람들로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질책하는 꾸짖음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아무도 모르고… 기사도 체크 안 할 수가 있습니까.”유관부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날 밤늦게까지 형사소송규칙 개정안이 미칠 영향과 대응 방안에 대한 보고서 등을 썼다는 슬픈 이야기. 이후 대검 각 과에선 언론 모니터링 담당자를 지정해 일종의 ‘당번’을 서게 하는 내부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전형적인 ‘똑부’… “혼자만 행복” 내부 불만도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은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지명한 다음 날 제주지검장이었던 이 총장을 대검 차장검사로 임명했다. 대선이 끝난 뒤 더불어민주당이 일명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입법을 밀어붙이면서 내부 반발이 거세진 상황에서 김오수 당시 총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시기였다. 그때부터 대검 간부들이 일이 너무 많아져 다음 인사만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의 스타일상 뭔가 생각나면 잊기 전에 그때그때 연락해 지시를 내리다 보니 간부들이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지시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랫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상사는 ‘똑게(똑똑하고 게으른)’형이다. 이 총장의 단점도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형 상사의 단점과 유사하다. 본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지시할 게 많고 후배 검사들이 못 미더워 보일 수밖에 없다. 잔소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총장은 취임 이후 사적인 자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몸가짐을 조심한다. 그 대신 점심엔 각계각층의 명사들을 대검으로 초청해 강연회를 열거나 오찬을 함께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검찰에 대한 시각 등을 경청하기 위해서다. 최근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 소장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고, 이달 15일엔 김훈 소설가를 초청해 비공개 오찬을 함께 했다. 외부 인사 초청 뒤엔 검찰 내부망에 사진과 함께 총장 동정이 올라온다. 최근 만난 한 검찰 간부는 “동정 사진에서 총장님의 웃는 모습을 보며 직원들이 ‘총장님 혼자 행복한 것 같다’는 말을 우스개로 하곤 한다”고 전했다. 총장의 바쁜 일정 때문에 일부 직원들이 고생을 하고 있다는 뼈 있는 말이다. 또 직원들이 몰라도 될 일정까지 굳이 공유된다는 지적도 있다. 다른 총장 때는 없었던 일이다.총장이 모든 기사를 다 볼 정도로 꼼꼼하게 읽고 언론에 민감해 직원들이 전임 총장 때에 비해 일이 많아졌다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매일 30분씩 직원들과 ‘칭찬 소통’… ‘부드러운 카리스마’그럼에도 대검 내부에선 이 총장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대부분이다. 한 대검 간부의 말이다. “총장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전형적인 똑부형 상사라 같이 일하기가 너무 힘들지만 배울 게 많다. 솔선수범하는 데다 맞는 방향으로 맞는 말만 하니 따르지 않을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이 총장이 업무 지시와 채찍질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매일 30분 정도 할애해 일선 검찰청에 전화를 하거나 단체 메시지방을 열어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보낸다. 검사뿐만 아니라 수사관, 실무관 등 모든 직원에게 해당된다. 우수 직원으로 뽑힌 직원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건강이 좋지 않거나 조사 등 힘든 일을 겪은 구성원에게는 따뜻한 말을 건넨다. 총장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없는 평검사나 수사관들이 처음에 연락을 받고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고 한다. 실제 그는 굉장히 자상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을 거쳐 검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그를 만난 사람들은 깍듯하게 예의를 갖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랫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조곤조곤하며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한다. 다정다감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특히 공권력을 사용하고 단죄하는 검찰인 만큼 늘 겸손과 경청, 소통 등을 강조한다. 그가 총장으로 취임하며 강조했던 말이다. “일하는 데 있어 최소한 법(法)에 맞게, 다음으로 세상의 이치(理致), 상식에 맞게, 마지막으로 사람 사는 인정(人情)까지도 헤아리는 겸허한 검찰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지난해 9월 16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제45대 총장 취임식에서 ● 민주화 항쟁·법복 보고 자란 ‘아인슈타인’ 1969년 광주에서 태어난 이 총장은 동네 수재였다. 광주 지산동에 위치한 동산초를 다니는 동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초교 동창인 더불어민주당 소속 김유정 전 의원은 “우리 어머니 기억에 IQ는 이 총장이 전교 1등이었고 내가 2등이었다고 하더라”며 “학생 때 피부가 하얗고 귀여운 외모여서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반장도 도맡아 하며 총명했다”고 전했다. (외모 얘기가 나온 김에… 그는 자신의 적은 머리숱을 ‘셀프 디스’하며 유머 소재로 삼는다. 이 총장은 대학생 때 ‘개구리 왕눈이’ ‘미키마우스’ 등 귀여운 별명을 갖고 있었다. 요즘 누리꾼들 사이에선 ‘미니언즈’라는 별칭도 붙었다고 한다.) 동산초는 광주지법과 광주지검 등이 있는 법조타운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사와 판사의 법복을 보고 자란 게 그가 공직자 중에서 법조인을 선택하게 된 배경 중 하나라는 게 지인들 전언이다. 동산초, 동성중을 졸업한 뒤 광주 동신고를 다니던 그는 고2 때 상경해 서울 중동고를 다녔다. ‘전라도 촌놈’이 서울 강남의 명문고에 들어온 것인데, 그는 전학하자마자 반에서 1등을 해 놀라움을 샀다고 한다. 당시 별명은 ‘아인슈타인’.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Einstein)의 이름이 하나의 돌(one stone)이라는 뜻이어서 ‘원석’과 같다는 것이다.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모르는 서울 친구들에게 피 흘리던 대학생을 숨겨준 일화 등에 대해 이야기해줄 정도로 정치적으로 조숙했다. 여느 호남 출신처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했다. 학생 시절부터 그는 이미 논어, 맹자, 장자, 한비자 등을 읽었다. 중국 역사와 한학(漢學)과 서예에 조예가 깊었다. 정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 유사어사전 등을 늘 꼼꼼히 읽었고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썼다고 한다. 마르크스와 칸트 등 독일 철학과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독일어를 잘했고 이런 영향으로 그는 평검사 시절 연수 기회가 주어지자 독일에서 연수를 했다. 그가 대학교 1학년이 된 1987년은 6월 민주항쟁이 있던 해였다. 중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87학번 동기로 단짝이었던 김동규 씨의 이야기다. “(원석이가) 대학 다닐 땐 운동권은 아니지만 PD(민중민주) 그룹 선후배들과 교류가 많았다. 1987년 때도 명동에서 열심히 돌도 던지고(웃음) 학내에서 집회가 있으면 꼬박꼬박 참석해서 토론하고 그랬다. 기본적으로 그 친구는 민주화에 관심이 많았고 나보다는 훨씬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 2학년까지는 거의 매일 정치 상황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남북통일, 국가와 정치의 존재 이유 등 정치·사회 분야에 대해 밥 먹으며 소주잔 기울이며 아침부터 밤까지 토론을 했다. 그러다 2학년을 마쳐가는 1988년 12월 원석이가 ‘이제 민주주의가 틀이 잡혀가는 것 같다. 나도 직업을 찾아봐야겠다. 사법시험 봐서 법조인이 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경북 상주에 있는 절에 같이 들어가지 않을래?’라고 했고 그래서 상주에 있는 절에 가서 두 달을 같이 지내며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 총장은 시험에 빨리 붙은 것도, 그렇다고 늦은 것도 아니었다. 중간에 군 복무를 하며 일명 ‘방위’로 상병 제대했고 군 복무 후 고시 공부에 집중해 1995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27기로 입소한 이 총장은 1996년 입소 후 학번은 5개, 나이는 네 살 어린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6반 A조에서 2년간 동고동락했다. 소년 급제한 한 장관이 17~20명이 있는 A조에서 막내였다고 한다. 두 사람을 가르쳤던 한 연수원 교수는 “그 시절부터 둘 다 총명하고 눈에 띄었다. 단 1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지도교수였던 조대현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이 총장에게 판사 임관을 권유했지만 그는 검사가 됐다. 다음은 이 총장과 한 장관에 대해 다룬 필자의 최근 칼럼.[광화문에서/황형준]‘족집게’ 이원석과 ‘독종’ 한동훈● “왼손은 거들 뿐… 거들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1998년 임관한 그는 서울지검 동부지청(현 서울동부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해 부산지검, 서울중앙지검, 수원지검, 법무부 등에서 근무했다. 그가 두각을 나타낸 것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에서 2005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을 맡으면서다. 한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이 사건 공소유지를 맡았는데도 혼자서 꼼꼼하게 추가 수사를 착착 진행해놨더라. 윗분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삼성 비자금 특별수사팀, 대검 연구관, 대검 수사지휘과장,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1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특수1부장 시절에는 2016년 법조 비리 의혹으로 번진 정운호 게이트를 수사했다. 당시 홍만표 전 검사장 등 전관 변호사들이 수사선상에 오르자 검찰 고위층에선 ‘가장 공정하게 수사할 수 있는 이원석에게 맡겨라’라고 했다고 한다. 2016년 10월 법조 비리 의혹 수사를 마친 뒤 한 달가량 현안 사건이 없을 무렵이었다. 당시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형사7부에서 하고 있었다. 여론이 좋지 않았다. “왜 특수부에서 수사를 하지 않느냐”고. 불안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고 하지 않든가. 결국 이영렬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그를 불러 수사를 나눠 맡겼다. 그가 후배 검사들을 불러 놓고 했다는 말이다. “과거 조선시대 등 옛날이면 이런 수사를 잘못하면 목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직으로 밀려나도 검사를 계속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리는 거들기만 하면 된다. 슬램덩크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우리는 농구에서 왼손이다. 거들기만 하면 된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진실의 힘이 무섭기 때문이다.” - 취재 메모 중 - 결국 이 총장은 2017년 3월 박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한 뒤 구속했다. 이후 그는 여주지청장과 대검 해외불법재산환수 합동조사단장을 지낸 뒤 윤 대통령이 총장 시절 기획조정부장으로 윤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운 뒤에는 수원고검 차장검사와 제주지검장 등 검사장 자리 중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곳으로 좌천됐다. 하지만 정권 교체 뒤 대검 차장검사를 거쳐 전임 총장보다 7기수 아래 총장으로 발탁됐다.● 비(非)법학 전공 첫 총장… 목계지덕의 고수민주화 이후 21대 이종남 검찰총장부터 45대 이 총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유일한 비법대 출신 총장이라는 특징도 있다. 25명 중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 18명, 고려대 법학과 출신이 6명, 그리고 유일하게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인 이 총장이 있다. 민주화 이전엔 서울대 법대의 전신인 경성제국대 법학과, 고려대 법대의 전신인 보성전문 법학과, 일본 대학 등의 출신이 많았다.이 총장은 정치학 전공자라는 이유로 검사가 되고 나선 선배 검사들에게 “나중에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전 총리는 이 총장과 경기도 ‘광주 이씨’로 같은 종친 할어버지뻘 되는 분이라고 한다. 이 전 총리가 대선 후보로 거론되던 2007년경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마당에서 우연히 이 전 총리 부부를 만나 인사를 하고 덕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이 전 총리가 “자네는 정치학 전공인데 왜 정치를 하지 않고 검사를 하고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총장은 이 전 총리에게 웃으며 “총리님은 법학 전공하셨는데 지금 정치를 하시지 않느냐”고 했다. 이 총장의 재치 있는 답변에 이 전 총리 부부는 활짝 웃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전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독서와 산책, 등산 등이 취미다. 매일 다독(多讀)한 뒤 걸으며 다상량(多商量)하는 스타일이다. 단벌 신사에 외모에는 관심이 없고 검소한 생활을 신념으로 여긴다. 실제 총장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이 총장 집에 가본 직원들이 다들 엄청 놀랐다고 한다. 집에 책이 많고 불필요해 보이는 물건이 하나도 없는 정갈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선비 집이 이랬을 것 같다. 미니멀리즘을 실현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장미같이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엄친아’ 이미지의 한동훈 장관과는 대조적으로 이 총장은 은은한 향기를 내는 난초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당초 실세 한 장관에게 휘둘려 조직 장악이 어려울 것이라거나 “총장의 공간이 없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엔 ‘검수완박’ 등 위기에 몰렸던 검찰 조직이 이 총장을 중심으로 안정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검찰 간부는 “이 총장은 장자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鷄之德)’처럼 나무로 만든 닭처럼 작은 일에 흔들림이 없고 교만함, 조급함 없이 완전히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목계지덕의 최고수 같다”고 평가했다.이 총장 스타일상 검찰총장까지 한 사람이 ‘초선’ 의원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다만 한 장관이 내년 총선에서 출마를 위해 법무부 장관에서 사퇴하거나 혹은 그 이후에라도 이 총장이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거나 감사원장 등 다른 공직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그가 검찰총장 임기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그 길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이원석 총장이 2017년 8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에서 여주지청장으로 발령이 난 뒤 어느 날, 당시 법조팀장이었던 선배와 함께 여주로 가서 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여주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찬을 한 뒤 그는 서울로 돌아가는 우리를 버스터미널에 차로 데려다줬습니다. 여기까지는 통상적인 배웅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돌아가는 버스터미널에 들어와 버스에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버스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극진한 예의를 차렸습니다. 차창 안에서 바라봤던 그의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1도’도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겸손하고 신중하고 중용의 미덕을 갖춘 그는 검찰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사람입니다. 청문회에서도 야당이 결점을 찾기 어려워 보좌관들이 “실화냐”고 했다는 후문입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등 야권을 향한 계속된 검찰 수사로 야당 탄압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검찰의 공정성과 중립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나마 이 총장이 있기에 ‘아니겠지…. 나오는 대로 수사하는 것이겠지’라며 이런 의구심을 덜 했던 형국입니다. 결과적으론 임기 1년 반 남은 이 총장이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검찰이 20일 국민의힘 하영제 의원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정부 출범 1년 만에 야권만 수사한다는 비판을 다소 덜 수 있게 됐습니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한비자의 문구 ‘법불아귀(法不阿貴·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는다) 승불요곡(繩不撓曲·먹줄은 굽은 것을 따라 휘지 않는다)’처럼 흔들리지 않는 검찰이 되길 바랍니다. 앞서 예고 없이 법정모독 <11화―번외편>을 쓰면서 ‘공정선거 지킴이’였던 윤석열 대통령의 어색한(?) 전당대회 개입 논란에 대해 썼습니다. <13화>는 ‘0선 중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여권 인사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톡톡 튀는 스타일이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정치인입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3-23
    • 좋아요
    • 코멘트
  • ‘공정선거 지킴이’ 尹의 전당대회 개입 논란[광화문에서/황형준]

    ‘검사 윤석열’을 키운 것은 팔 할이 선거개입 의혹 수사였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을 맡았다가 상부 외압을 폭로하며 ‘국민 검사’가 됐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 개입해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을 위반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에 처해졌다. 당초 선거법 위반 사건은 공소시효가 6개월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2014년 2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됐거나 지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10년이 되도록 선거법이 개정됐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선 ‘윤석열법’이란 말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인 2018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관련된 총선개입 의혹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현기환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등과 공모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친박(친박근혜) 인사들을 대거 당선시키려고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한편 선거 및 경선 전략을 수립해 이를 당 공천관리위원회에 반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직 대통령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첫 사례였다. 1심 재판부는 2018년 7월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며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남용한 것으로 헌법의 근본가치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당의 자율성을 무력화시키는 행위”라고 질타했고 2심에서 그대로 형이 확정됐다. 그러던 윤 대통령이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노골적으로 ‘친윤’ 후보를 지원 사격했다는 말이 나온다. 대통령실이 나경원 전 의원의 출마를 주저앉힌 것이나, 윤 대통령 자신이 안철수 의원이 사용한 ‘윤-안 연대’에 대해 “실체 없는 표현으로 이득 보려는 사람은 국정 운영의 방해꾼이자 적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언급한 것 등을 두고 나오는 평가다. 대통령실이 전당대회에 개입했다면 국회에 자기 편을 입성시켜 국정을 원만히 이끌겠다는, 이른바 ‘당정 일체’를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박근혜 정부 청와대가 공천에 개입한 동기와 같다. 차이가 있다면 윤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처럼 공천에 대놓고 개입하지 않기 위해 이심전심이 되는 당 대표 후보를 만들려 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전대 개입 논란에 대해 대통령실은 “선거 개입이라면 공직선거법에 따른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 전대는 당 행사이지 선관위가 주관하는 선거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 말대로 선거법은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의 경선 및 본선거에만 적용된다. 전당대회와 관련해 공무원이 선거에 관여할 수 없다는 조항은 정당법에도 없다. 하지만 대통령실 해명은 선관위가 주관하지 않는 초등학교 반장, 회장 선거 등 다른 선거에선 중립적이어야 할 공직자가 개입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민주주의 선거에선 공정이 생명이고, 공직자에게는 선거 중립이 기대된다. ‘공정선거 지킴이’였던 윤 대통령이 법망을 피해 당내 선거에 개입한 것처럼 비치는 건 무척 아이러니하다. 이번 전대가 정당의 자율성과 후보자 간 공정한 경쟁을 보장했는지를 판단하는 건 결국 국민들의 몫이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3-16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공정선거 지킴이’ 尹대통령의 아이러니한 전당대회 개입 논란[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검사 윤석열’을 키운 것은 팔할이 선거 개입 의혹 수사였다. 2013년 10월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으로 있으면서 상부 보고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국정원 직원들을 체포하고 주거지를 압수수색했다가 직무 배제됐다. 며칠 뒤 국정감사장에서 상부의 외압을 폭로했고 그는 좌천의 길을 걸었지만 ‘국민 검사’가 됐다. 결국 2012년 총선과 대선에 개입해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을 위반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이 사건으로 징역 4년에 처해졌다. ● 공무원의 선거 관여 10년으로 공소시효 늘어나 당초 선거법 위반 사건은 공소시효가 6개월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 2014년 2월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됐거나 지위를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10년이 되도록 선거법이 개정됐다. 가히 ‘윤석열법’이라 부를 만했다. §공직선거법제85조(공무원 등의 선거 관여 등 금지) ① 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신설 2014. 2. 13.>제268조(공소시효) ③ 공무원이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범한 이 법에 규정된 죄의 공소시효는 해당 선거일 후 10년(선거일 후에 행하여진 범죄는 그 행위가 있는 날부터 10년)을 경과함으로써 완성된다. <신설 2014. 2. 13.>윤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장 시절인 2018년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의 총선 개입 의혹 수사를 진두지휘했다. 박근혜 정부 국정원 특수활동비 상납 의혹 수사를 벌이던 특별수사3부가 특활비 일부가 총선 여론조사에 쓰인 정황을 발견하면서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당시 수사를 책임진 3차장검사였고 특수3부장은 현 양석조 서울남부지검장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현기환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과 공모해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친박계 인사들을 대거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하고 선거 및 경선 전략을 수립해 이를 당 공천관리위원회에 반영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직 대통령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가 적용된 것도 사상 처음이었다.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임하며 공천권을 쥐던 시절에는 청와대가 여론조사를 돌리고 선거 기획, 판세 분석 등을 하더라도 죄가 안 됐다. 노무현 정부 이후에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이고 권력 분산 등을 위해 당정분리가 이뤄진 뒤에 바뀌었을 뿐이다.(노 전 대통령도 나중에 당정분리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2018년 7월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며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을 함부로 남용한 것으로서 헌법의 근본 가치인 대의제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정당의 자율성을 무력화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다”라며 “피고인의 행위로 인해 20대 총선에서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고 선거의 자유와 공정이 심각하게 훼손될 위험이 초래되었다”고 질타했다. 2심 재판부도 “피고인의 이러한 행위는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 및 ‘선거의 공정한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지위’에 정면으로 반한다”며 “정당과 후보자들에 대한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 형성 과정에 개입하여 이를 왜곡시켰다”고 지적했다.● 중앙지검장 시절 경찰 정보관의 총선 개입 의혹도 수사 이와 함께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경찰 정보관의 선거 정보 수집 의혹도 수사해 현 전 수석과 그의 지시를 받아 이행한 강신명 전 경찰청장, 이철성 전 경찰청장 등을 공직선거법 위반과 직권남용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당시에도 윤 대통령이 지검장이었고 2차장검사는 박찬호 전 광주지검장, 공안2부장은 김성훈 안양지청장이었다) 현 전 수석은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 강조 사항 등을 확인한 뒤 치안비서관실을 통해 경찰에 ‘친박’ 후보를 위한 정보 활동을 지시한 혐의였다. 이에 당시 경찰청 정보국은 정당, 검찰, 법원, 각 정부 부처와 주요 기관에 파견된 정보경찰에 전국 판세 분석 및 선거 대책, 지역별 선거 동향 등을 작성해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해 10월 1심 재판부는 “국가기관이 공적 지위를 이용해 선거운동의 기획에 참여하는 등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로서 결코 허용될 수 없다”며 강신명 전 청장에게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했다. 다만 현 전 정무수석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이미 징역형이 확정됐다는 이유로 면소(기소 면제) 판결했다.● 공정선거, 공작정치 척결에 앞장섰던 尹 이처럼 윤 대통령은 공정선거에 대한 강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 관련 수사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같은 해 5월 기자와 독대한 티타임에서 경찰 정보관의 선거정보 수집 의혹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거 기획, 판세 분석 등 이런 거 해주면 선거 영향 미치는 행위로 하면 공무원은 시효가 다 10년이야. 원래 6개월이잖아. 그런데 공무원의 선거 기획,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등은 다 10년이다. 우리가 국정원 수사하면서 법이 개정됐다. 그 수사 때문에 법이 생겨서 선거법 위반에 해당하게 된 것이다.” “정보기관이나 공무원이 선거 영향 미치는 행위는 못 하게 못을 박아야지. 이 정부도 다음 정부도. 이거 한 놈들은 어느 직급 이상은 다 책임지게 만들고, 특히 고위직은 출세하려고만 하면 안 되고 조심해야지…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인이나 저명인사 사찰, 찌라시 마타도어 돌리고, 이야기 지어내고, 그런 짓거리 하지 말라는 거지.” - 취재 메모 중 - 그런 소신에서인지 윤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당선인 신분으로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에서 사정, 정보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현 정부에서 아직까지 국가기관이 동향 정보 등을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국가기관의 공작정치를 척결하려는 의지에 박수 쳐 줄 일이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논란 4년 가까이 지난 뒤, 윤 대통령은 최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노골적으로 ‘친윤(친윤석열)’ 후보를 지원 사격했다. 나경원 전 의원의 당 대표 출마를 주저앉힌 것이나 안철수 의원이 사용한 ‘윤-안 연대’에 대해 “실체 없는 표현으로 이득 보려는 사람은 국정 운영의 방해꾼이자 적으로 인식될 것”이라고 언급한 게 대표적이다. 현 대통령실이 전당대회에, 박근혜 청와대가 공천에 개입한 동기는 둘 다 국회에 자기 사람을 입성시켜 국정을 원만히 이끌기 위한 ‘당정 일체’가 목표였다. 다만 윤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을 반면교사로 삼아 공천에 대놓고 개입하지 않기 위해 이심전심이 되는 당 대표 후보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이른바 ‘비박’계인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등이 박 전 대통령의 뜻을 반영해주지 않을 것을 우려해 공천에 개입하려 했기 때문이다. 전대 개입 논란이 일자 대통령실은 지난달 “선거 개입이라면 공직선거법에 따른 것이어야 하는데, 지금 전대는 당 행사이지 선관위가 주관하는 선거가 아니다”고 “선거 개입이 명백히 아니다”고 해명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원이 당무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지 않으냐”며 “윤 대통령은 한 달에 300만 원, 1년에 3600만 원을 당비로 내고 있다. 당원으로서 대통령은 할 말이 없을까”라고도 했다. 실제 선거법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지방선거에서 경선과 본선거에만 적용된다. 전당대회와 관련해선 정당법에 제49~52조에 ‘당 대표경선 등의 자유방해죄’ ‘당 대표경선 등의 허위사실공표죄’ 등이 규정돼 있지만 공무원의 선거관여 금지 조항은 없다. 하지만 대통령실 해명대로라면 선관위가 주관하지 않는 학교 행사인 초등학교 반장, 회장 선거 등 다른 선거는 교원 등 공무원이 개입해도 된다는 것인가. 누구나 아는 것처럼 민주주의 선거에선 공정이 생명이고, 공무원은 선거에 중립적이어야 한다. 1년에 3600만 원 당비를 내는 엄연한 당원이라는 대목에선 ‘차라리 대통령 급여를 반납하고 공무원 신분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통령 말 한마디의 무게를 모르는 듯한 대통령실의 해명이었다. 특히 ‘공정선거 지킴이’이자 ‘공정선거의 상징’이었던 윤 대통령이 법망을 피해 당내 선거에 개입한 것처럼 비춰지는 것은 참 이율배반적(아이러니)이다. 결국 대통령실의 바람대로 이른바 ‘윤심’을 아는 김기현 대표가 선출됐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박 전 대통령 선거법 위반 사건의 1·2심 판사의 지적처럼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법치와 준법의 상징적 존재’,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 및 ‘선거의 공정한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지위’에 부합했는지, 당의 자율성을 존중했는지, 후보자의 공정한 경쟁을 보장했는지 국민들은 이미 판단했을 것이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3-16
    • 좋아요
    • 코멘트
  • 한 놈만 팬다…‘무대포’ 박영선의 타깃은 이재명, 다음은 한동훈?[황형준의 법정모독]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정치권만큼 이 말이 잘 들어맞는 곳이 없다. 고성이 오가며 싸우다가도 ‘하하~호호~’ 웃으며 손잡고 사진을 찍는 게 여의도다. 인간관계보다 어쩌면 이해관계가 더 중요한 곳이다. 그런데도 배신자 프레임은 잘 먹힌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독고다이’형이다. (독고다이는 특공대(特攻隊)의 일본어지만 특공대와는 어감이 좀 다르다) 계파에 속해 수장의 리더십을 따르며 수장의 지원사격으로 성장하는 기존 정치의 문법을 벗어나 있다. ● “당내 계파에 얽매이지 않아” vs “기회주의적 행태” 박 전 장관은 MBC 선배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DY)의 삼고초려로 영입된 대표적인 DY계였다. 하지만 정 전 의장이 2007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2009년 3월 탈당하면서 사실상 DY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원내대표이던 시절 2010년 김태호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 등에서 호흡을 맞추며 박선숙 전 의원과 함께 세 사람은 ‘박남매’로 불렸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내 경선에서 1위를 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통합경선에서 결국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뒤처졌다. 손학규 대표 시절 정책위의장을 맡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선 일찌감치 경희대 선배이자 유력 주자였던 문재인 의원을 도왔다. 어느 계파 소속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2015년 2·8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전대 출마를 밀었다. 문재인 박지원 등보다 젊은 사람들이 나서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전 총리는 출마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지원 전 원장과도 당시 이상 기류가 흘렀다. 2015년 1월 당시 박지원 전 원장의 이야기다. “지난해 9월 박영선 탈당 기사를 썼던 CBS 김○○ 기자가 ‘형님’ 하며 전화가 왔다. ‘박영선 탈당하면 당내에서 같이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을까.’ 그렇게 얘기를 해서 ‘박영선이 탈당하면 129 대 1이 될 것이다. 한 명도 따라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근데 그걸 기사로 썼잖아. 그걸 박영선이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어.” - 취재 메모 중 -반면 당시 박지원 전 원장은 박 전 장관이 자신의 전당대회 출마를 돕기는커녕 ‘김부겸을 적극 돕겠다’고 선언하자 상당히 섭섭해했다고 한다. 그러다 2016년 안철수 의원이 다시 국민의당을 만들면서 박 전 장관은 고심 끝에 민주당에 잔류했다. 탈당한 뒤 국민의당에 합류한 박지원 전 원장과 다른 길을 걸은 것.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경선 과정에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캠프에 참여했지만 같은 해 4월 문재인 후보가 대선 후보가 되자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2019년 3월 중기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무엇보다 추진력과 성과를 낼 줄 안다는 평가 덕분이었다. 2021년 1월까지 중기부 장관 시절은 정책을 추진하며 그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시기였다. 자신을 원내대표에서 몰아냈다고 여겼던 정세균 전 총리와의 악연도 국무총리와 장관으로 다시 만나면서 관계가 다시 개선됐다. 박지원 전 원장이 문재인 정부에서 국정원장에 임명되고 민주당으로 복당하면서 두 사람은 다시 찰떡궁합을 보이고 있다. 이런 행보에 대해 계파에 얽매이지 않는 소신이 있다는 평가도 있지만 정체성이 불분명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제기됐다. ● 시련의 계절 맞았던 2014년 여름… ‘논개 전략’으로 되치기박 전 장관이 계파정치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계파 청산”을 외쳤던 것은 2014년 원내대표 당시 경험과 무관치 않다. 그는 2014년 5월 투표함을 까보기 전까지는 예상하기 어렵다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첫 원내대표로 당선되며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야당이 패배하면서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는 다음 날 바로 사퇴했다. 원내대표였던 박 전 장관이 비상대책위원장을 잠시 겸임하게 되면서 내분이 시작됐다. 발로는 박 전 장관이 당내 의견수렴 없이 여당인 새누리당(현 국민의힘)과 세월호 참사 특별법에 합의하면서다. 당시는 여야가 특별법 처리를 두고 기싸움을 이어가 장기간 식물국회라는 비판을 받던 시기다. 야당으로선 특조위와 특검 구성 방식 등에 있어서 유가족 등에 보다 유리한 법안을 밀어붙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내 주류였던 친노(친노무현) 강경파 의원들이 의원총회에서 박 전 장관의 특별법 합의안을 거부하며 혼란이 벌어졌다. 당시 의원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유족이 반대하는 특별법은 반대한다”는 취지로 합의안 반대 목소리를 냈고 급기야 세월호 참사 유족인 김영오 씨의 단식에 동참했다. 박 전 장관은 의원들 설득에 나섰지만 여야 재합의안도 야당 내부에서 반대하면서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급기야 비대위원장을 내려놓았지만 친노 강경파들은 원내대표직 사퇴를 요구했다. 그때 박 전 장관은 참 많이 울었다. 당시 박 전 장관의 옆에 있던 한 당직자의 말이다.“회의를 하는 동안 바로 옆에서 의원들이 번갈아 면전에서 박 전 장관을 조졌어. 얼마나 굴욕적이었겠어. 그런데도 박 전 장관은 그 의원들 앞에서 20~30분 꿋꿋하게 버티더라. 그러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내실로 들어가 결국 소리 내서 울더라고. 분에 못 이겨서….”비대위원장을 놓고도 조국 당시 서울대 교수, 이상돈 중앙대 교수 등이 거론됐다가 우여곡절 끝에 불발되면서 ‘문희상 비대위’ 체제로 넘어갔다. 당권을 노렸던 문재인 정세균 박지원 의원도 모두 비대위원으로 합류했다. 거듭된 원내대표직 사퇴 요구에 탈당까지 시사했던 그는 선출 5개월 만에 10월 초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이 마련되자 원내대표직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사퇴의 변’을 의원들과 언론에 보냈다.“직업적 당 대표를 위해서라면 그 배의 평형수라도 빼버릴 것 같은 움직임과 일부 극단적 주장이 요동치고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범친노계의 수장이자 ‘직업적 당 대표’로 지목된 정세균 전 총리는 당시 “‘박영선’ 스러운 사퇴문”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미 당 대표를 3번 했는데도 또 욕심을 내냐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이었다. 직격탄을 맞은 정 전 총리는 결국 이듬해 전당대회에 출마하지 않았다.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일종의 ‘논개 전략’이었던 셈이다.● ‘무대포’처럼 센 놈만 골라 패… ‘안티’ 많은 외골수1999년 영화 에서 등장인물 ‘무대포’(배우 유오성)는 “난 한 놈만 패!”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전쟁터에서든 학교에서든 장수의 목을 가져오거나 ‘짱’의 코피를 터뜨리면 싸움이 승리로 끝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일종의 선택과 집중인 셈이다.박 전 장관은 때론 ‘무대포’와 닮았다. 박 전 장관은 싸울 때 가장 센 놈만 골라 팬다. 박 전 장관은 ‘재벌 저격수’로 이름을 날릴 때 1등 기업인 삼성을 겨냥했고 2007년 대선 당시엔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주가조작 의혹을 집중 공략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 전 총리에겐 ‘직업적 당 대표’라는 오명을 붙였다. 중기부 장관 때는 부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대전 지역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세종시 청사 이전을 밀어붙였다. 화법도 직설적이고 단호하다. 한 우물만 파는 외골수여서 때론 자기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싸우는 일도 많았다. 전투력이 센 만큼 당 안팎에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꼽혔다. 대화가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를 피하거나 ‘안티’가 됐다. 감정이 ‘언스테이블(unstable)’ 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에 이 같은 점은 지도자로서의 단점으로 꼽히곤 했다. 2014년 8월 한 당직자의 이야기다.“지도자는 조지는 것보다는 문제 해결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박영선이 아직 적응 중인 거 같다. 아랫사람은 싸워도 본인은 싸우지 말아야 한다.” - 취재 메모 중 -● 이재명 사법 리스크·디지털 정당에 꽂힌 박영선박 전 장관은 요즘 이재명 대표를 겨냥해 쓴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6월부터 그가 전당대회에 출마할 경우의 분당 가능성을 거론하며 경고했다. 현재 미국에 체류하면서도 라디오 등을 통해 “이 대표가 공천권을 내려놓는다면 사법 리스크에서 탈출할 수 있고,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공천 혁신 없이 총선 승리가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 공천권을 당원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블록체인 기술로 탈중앙화된 자율 조직, 이른바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를 정당에 접목시킨 ‘DAO 정당’, ‘디지털 정당’ 도입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친명(친이재명)계와 당원들, 기존 안티 세력들은 “누릴 건 다 누려왔으면서 합심해야 할 때 이재명 지도부를 흔든다”, “총구를 내부로 돌리며 분탕질을 하지 말라”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 반면 박 전 장관을 옹호하는 측에선 그가 18대 의원 시절부터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법안을 제출하는 등 일관된 목소리를 내온 만큼 소신 행보라고 평가하고 있다.박 전 장관은 연말까지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공부할 예정이지만 국내 정치 상황과 당내 리더십의 변화에 따라 중도 귀국할 가능성도 있다.그가 계파 청산과 ‘새 물결’을 외쳤던 2015년처럼 당내 갈등도 다시 데자뷔처럼 재연되고 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을 계기로 친명계와 비명계가 대립하는 가운데 그가 과연 혁신의 아이콘이 될지, 분탕질의 낙인이 찍힐지 관전 포인트다. 내년 총선에서 박 전 장관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궁금해진다.박영선 전 장관을 다룬 <9화>에서 많은 독자들이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당시 논란이 됐던 도쿄 아파트에 대해 비난 댓글을 달았습니다. 당시 박 전 장관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BBK 주가조작 의혹을 적극 제기했던 본인 때문에) 2008년 회사에서 쫓겨난 남편이 일본에서 직장을 구해 거주한 것”이라는 취지로 투기용이 아닌 실거주용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리고 즉각 해당 아파트를 처분했습니다만 여전히 그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모양새입니다. 산업계에선 피터팬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아이로 남아 있는 네버랜드 속 피터팬처럼 대기업 대신 중소기업으로 남고 싶어 하는 회사를 뜻하지요. 박 전 장관은 어찌 보면 2014년 원내대표에서 중도 낙마한 뒤 그 세계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장통을 겪고 있던 것일까요? 다른 이들이 체급을 올릴 동안 ‘정치 인생이 역전당한 것’이지요. (박 전 장관이 2007년 정동영 대선 후보의 총괄지원실장이었던 자신 밑에 이재명 대표가 부실장으로 있었다는 것에 대해 언론 인터뷰에서 한 표현입니다.)중기부 장관을 지내며 그 트라우마는 상당히 극복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어진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대선주자급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하지만 부동산 대란에 이어 민주당이 보궐선거 사유 제공 시 무공천하겠다고 한 약속을 뒤집으면서 이미 민심은 기운 상태였습니다. “신은 진실을 알지만 때를 기다린다.” 박 전 장관이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지금은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박 전 장관은 국회 법사위원장 출신으로 한 때 ‘검찰 저격수’로 불렸습니다. 그만큼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검사(檢事) 출신 여권 인사들에게 맞서 민주당이 박 전 장관을 ‘자객 공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력이었지만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에 맞서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을 임명했듯 총선에서 빅 매치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법정모독 1~10화에선 한동훈 윤석열 이낙연 안철수 박영선 등 법조인과 여야 정치인을 번갈아 다뤘습니다. <11화>에선 법조계 인사로 넘어갑니다. 가끔 조선시대 대사헌(大司憲)을 AI(인공지능)로 구현해 놓으면 이분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11화는 2주 뒤인 23일 공개됩니다. 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3-09
    • 좋아요
    • 코멘트
  • 檢, 상자 가져와 현금전달 시연…김용 “투망식 기소” 혐의 부인

    대장동 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수감 중)이 7일 법정에 처음 출석해 “말도 안 되는 기소”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반면 검찰은 그간 공개되지 않은 물증을 재판에서 공개하며 “대장동 개발 매개 유착관계 뿌리인 사건”이라고 반박했다. ● 김용 “투망식 기소” 혐의 전면 부인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판사 조병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 출석한 김 전 부원장은 “10억 원, 20억 원 등 억대의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고, 수수하거나 공모한 적도 없다”며 이 같이 밝혔다.검찰은 대장동 민간사업자들과 수년간 유착관계 유지하던 김 전 부원장이 이 대표의 대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천화동인 4호 소유주 남욱 변호사로부터 유동규 성남도시개발공사 사장 직무대리 등을 거쳐 8억4700만 원(실수령 6억 원)을 수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검찰은 남 변호사의 측근 이모 씨가 정민용 변호사에 전달한 금액의 규모와 일정 등을 적은 수기 메모도 처음 증거로 공개했다. ‘Lee list(Golf)’라는 제목의 메모에는 ‘4/25 1’ ‘5/31 5’ ‘6 1’ ‘8/2 143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어 검찰은 2021년 4~8월 정치자금이 전달된 것으로 판단했다. 반면 김 전 부원장 측은 “하나만 걸리라는 식의 투망식 기소”라며 “공소사실의 구체성이 떨어지고 증거도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돈을 받은 날짜가 특정되지 않아 방어할 수도 없고, 김 전 부원장이 돈을 받았다는 증거도 사실상 유 전 직무대리의 증언 뿐이라는 것이다. 이어 “대선을 앞두고 돈을 요구하는 게 얼마나 부도덕하고 어리석으며 있어선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며 “돈을 달라는 얘기조차 꺼낸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檢, 쇼핑백·상자 등 현금 전달 방법 공개검찰은 이날 정 변호사가 유 전 직무대리에게 돈을 전달할 때 사용했다는 골판지 상자를 직접 법정에 가져와 시연했다. 박스가 예상보다 부피가 크지 않고 현금 5억 원을 전달할 수 있다는 취지로 버스정류장 앞, 도로 근처 등에서 돈이 오갔다는 검찰 주장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김 전 부원장 측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검찰은 ‘상자 5개를 담은 나이키 가방’ ‘발렌티노 상자’ ‘타이틀리스트 쇼핑백’ 등 돈이 오간 구체적 정황을 밝히기도 했다. 김 전 부원장이 2021년 9월 이후 대장동 일당 중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은 정 변호사를 3차례 만났고 당시 둘이 공중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은 정황도 공개됐다. 검찰은 “두 사람이 첩보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연락을 주고받았다”며 “김용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지 않았다면 대선 기간에 공범인 정민용을 만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했다. 한편 김 전 부원장은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올해 1월 서울구치소를 찾아 자신을 ‘장소변경 접견’ 방식으로 면회한 게 언론에 공개된 것을 문제삼았다. 그는 “구치소에서 규정에 따라 교도관이 입회한 가운데 저와 친분이 있는 국회의원이 찾아와 위로 몇 마디를 한 것을 검찰의 책임 있는 분이 ‘증거인멸’이라며 언론에 흘렸다”며 “이게 대한민국 검찰의 현주소”라고 비판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3-07
    • 좋아요
    • 코멘트
  • 여성 신화 써온 ‘눈물 많은 센 언니’ 박영선[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 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은 시인인 도종환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그의 시를 따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63)에게 붙여 준 별명이라고 한다. 부드러움과 곧음, 철과 여인. 모두 정반대의 성질을 띠고 있어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박 전 장관은 부드러우면서도 올곧고 카리스마가 있었다. ‘엘레강스’한 공주과인 듯하면서도 억척스러운 무수리과다. 외강내강이면서도 외유내강인 듯하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군주의 자질로 언급한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용맹함이 있다. 둘 다 가지기 어려운, 양립불가능한 품성이 동시에 내재된 듯한 미묘하고 복합적인 ‘멋’과 ‘맛’이 있다. 마침 이같이 모순적인 표현을 취재 메모에서 발견했다. 같은 당 중진 A 의원이 2014년 1월에 했던 이야기다. “박영선이 성질은 ○○워도 외국인투자촉진법안을 소신껏 저지하는 모습은 아름답잖아. 나는 다행히 박영선한테 아직 안 찍혔어.” - 취재 메모 중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었던 박 전 장관은 2013년 12월 31일 여야 지도부가 처리하기로 합의한 외국인투자촉진법 개정안을 ‘재벌 특혜법’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며 심야까지 버텼다. 이에 따라 ‘2014년 예산안’은 해를 넘겨 처리가 지연됐고 당시 여당으로부터 “몽니를 부렸다”는 지적도 받았다. 하지만 직언직설하고 소신이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자신의 강성 이미지를 의식한 듯 박 전 장관은 그해 5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선거 당일 정견발표에서 이같이 호소했다.“제가 그렇게 센 여자가 아닙니다. 저도 눈물 많은 여자입니다. 저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의원님들께 그렇게 다가가겠습니다.”그는 결국 국회사상 최초로 첫 여성 원내대표에 선출됐다. 두 달 뒤 당시 한 재선 의원은 또 이렇게 평가했다. “박영선 원내대표가 된 것은 참 잘됐어. 일단 당이 참 조용해. 다른 사람이 원내대표가 됐으면 당이 난리 났을 것이다. 이미 탄핵당했었을 것이다. 지금은 의총 때도 발언 신청자가 없다(웃음).” - 취재 메모 중 -의원들을 휘어잡은 박 전 장관의 카리스마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박영선을 읽는 첫 번째 코드는 ‘여성’… 남성 주류 사회에 ‘도장깨기’ “여자의 뉴스 진행 솜씨가 남자를 따를 수 있겠느냐는 우려도 있어요. 그러나 최선을 다해 여성도 단독 앵커를 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일 겁니다. 한국의 바버라 월터스가 되겠습니다.” - 1983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 -40년 전인 1983년 3월 동아일보에 처음 등장하는 23세 박 전 장관의 인터뷰 기사다. 당시 그는 밤 11시 50분에 방영되는 MBC TV 마감뉴스의 단독 앵커를 맡아 화제가 됐다. 대학을 졸업한 뒤 아나운서로 1981년 KBS 춘천지국에 입사한 뒤 1982년 MBC에 입사한 그 직후 기자 직군으로 옮겨 입사 5개월 만에 ‘수습 여기자’ 신분으로 단독 앵커를 맡았다.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 여성 앵커를 꿈꿨던, 청초했던 20대 청년(靑年)은 MBC의 첫 여성 특파원, 여성 첫 경제부장 등의 꿈을 이룬 뒤 여성 첫 대변인, 첫 정책위의장, 첫 법제사법위원장, 첫 원내대표 등을 지내며 대표적인 여성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에서 ‘도장깨기’(유명한 무술 도장을 찾아가 그곳의 유명한 강자들을 꺾는다는 의미)한 결과다. 박 전 장관이 2012년 낸 저서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라>에 따르면 그는 MBC LA특파원이던 시절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가 됐던 페라로 여사를 인터뷰했을 당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남보다 두 배 더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성이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서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여성이라는 것이 왜 콤플렉스가 돼야 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극복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남성도 콤플렉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화려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박 전 장관은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를 뽐내면서도 물길질을 끊임없이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편견 섞인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업무에 빈틈없이 하려고 보다 노력했다. 소신을 지키면서 노력을 통해 실력을 키우고 기회를 만들었다.박 전 장관은 어린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데 안타까워하는 ‘워킹맘’이기도 했다. 엄마로서의 미안함과 반성 차원에서 똑같은 교재를 두 권 사서 보며 전화로 하루 30분씩 통화하며 아이에게 수학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국회의원을 하면서도 수학 책을 들고 다녀 놀림도 받았다고 한다. ● 스타 여성앵커 1세대… 겉은 ‘백조’ 속은 ‘악바리’ 박 전 장관은 어린 시절부터 위인전과 고전, 시 등을 읽는 ‘독서광’이었다. 한 아나운서를 보고 방송의 꿈을 키웠다. 고교 2학년 때 방송반에 들어갔고 방과 후에 방송실에 남아 음악을 듣거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몰입하다 보니 성적이 계속 떨어져 1, 2학년 때 갈 수 있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대학에서 그는 남들이 잘 하지 않던 토플시험을 준비했다. 1학년 때부터 4년간 꾸준히 영어공부를 하면서 향후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는 데 기반이 됐다. 유학을 다녀온 뒤 대학교수가 되라는 부모님의 희망과 방송국을 놓고 진로를 고민했지만 결국 방송국을 선택해 스타 앵커로 성장했다. 박 전 장관은 MBC에서 이름을 떨친 여성 스타 앵커 1세대다. 169cm의 큰 키와 수려한 외모, 또박또박한 발음과 고유의 음색. 박 전 장관이 이후 백지연 김은혜 김주하 등 후배들이 전성기를 이어갔다. MBC 마감뉴스 앵커 시절부터 ‘악바리’였다. 그는 욕심이 많다는 평가를 들었다고 한다. 당시 군사정권인 전두환 정부 시절 9시 메인뉴스 ‘뉴스데스크’에는 기사 삭제 등 문화공보부의 제재를 많이 받았다. 당시 동료였던 인사의 전언이다. “마감뉴스가 뉴스데스크보다 시끌벅적했어. 뉴스데스크에 못 나간 리포트를 방영하고 장관들 출연시키고 인터뷰도 하고. 감시의 눈이 덜하니까. 자기가 맡은 프로그램을 빛나게 해야 된다는 일념과 욕심…지금도 비슷한 거 같은데? 그런 열정 때문에 지금까지 온 거야.” 당시 11시 50분에 시작하는 마감뉴스 ‘뉴스데이트’는 15분짜리 방송이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이 여러 정치적 이유로 ‘킬’된 여러 리포트를 편성하면서 방송시간이 15분을 훌쩍 넘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문공부에서 “빨리 방송을 끝내라”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박 전 장관은 조명에도 민감하다. 방송에선 조명의 성능과 위치 등에 따라 화면에 얼굴이 다르게 나오기 때문이다. 한번은 미국 방송국 관계자까지 불러 2000만 원 안팎의 예산을 들여 조명기기를 손봤다고 한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당시 박 전 장관이 주재하는 원내대책회의 등 회의실에도 조명기기가 설치됐다) 이런 열정으로 박 전 장관은 기자 시절 발로 뛰며 많은 유명인사를 직접 인터뷰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등 해외 인사는 물론 김영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정주영 정몽준 부자와 아티스트 백남준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 “깨끗한 정치로 나라를 바꾸겠다”는 정동영 설득에 정치 입문MBC 기자 시절 박 전 장관은 한 번도 정치인을 꿈꾸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권에 많이 진출했던 정치부 기자는 한 번도 하지 않고 경제부와 문화부, 국제부 등에서 근무했다. 정치부 청와대 출입을 하면서 영부인 관련 보도를 담당하라는 요구도 있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경제부 기자 출신으로 오히려 한 우물을 판 게 국회의원으로서 도움이 됐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국회 재경위(현 기재위)에서 재벌개혁을 외치며 ‘재벌 저격수’, ‘삼성 저격수’라는 별명도 얻었다. MBC 선배인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당 대표격)의 적극적인 권유로 그는 2004년 당 대변인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정 전 의장은 지인인 이원조 국제변호사를 박 전 장관에게 소개시켜 줬던 사이다. (두 사람은 1997년 3월 LA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박 전 장관의 나이는 37세였고 이 변호사의 나이는 43세로 여섯 살 차이다) 박 전 장관이 2015년 발간한 저서 에는 박 전 장관이 정 전 의장의 제안을 수락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2004년 1월 11일 열린우리당 전당대회가 열리던 날 오후 4시경 정 전 의장이 전화를 걸어 저녁에 남편과 함께 보자고 했다.“중요한 부탁이 있어서 이렇게 보자고 했소. 깨끗한 정치를 국민께 전달하려면 그 이미지에 걸맞은 당 대변인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꼭 맡아주시오. 당선 축하 모임에도 가지 못하고 여기로 왔습니다. 당 의장이 돼서 처음하는 간절한 부탁이니 맡아주시오.” 예상하지 못한 제의였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정치하는 것은 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며, 정 의장을 당 공식 축하모임에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중에서 -사실 그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은 것은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쪽으로 제안이 들어왔지만 딱 잘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의외로 남편은 “대한민국 사회는 좀 더 깨끗해질 필요가 있고, 정 의장이 그런 정치를 하겠다고 하니 가서 한번 도와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라고 찬성했다. 이틀 뒤 아침 정 의장은 깨끗한 정치로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거듭 설득했고 “남편을 중매해 줬으니 그 빚을 갚으라”는 말까지 하자 박 전 장관은 그날로 MBC에 사표를 내고 당 대변인직을 수락했다.● 3번의 서울시장 낙마… 축적과 변신의 기회로 정치인으로 변신해 2004년부터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박 전 장관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치권 입문을 이끌었던 정 전 의장은 17대 대선에서 후보로 나섰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패배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 등으로 2007년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이명박 대선 후보의 BBK 주가조작 의혹 제기에 앞장섰지만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됐다. 가족과 주변인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된 게 그에겐 큰 상처였다.2008년 3월 검찰로부터 출석요구서가 날아와 검사와 직접 통화를 했는데 그 검사는 “혹시 이번 선거에 출마 안 하십니까. 출마하시면 소환을 조금 뒤로 미룰 수 있을 것 같아서…”라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고 한다. 그 말을 계기로 재선 출마 결심을 굳힌 박 전 장관은 서울 구로을 지역구에서 출마해 당선된다. 박 전 장관은 그해 5월 말 검찰 조사를 받았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한국에서 근무하기 힘들어진 남편은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가족이 흩어진 건 평생 회한이 됐고 울화가 쌓인 계기가 됐다. 비례대표에 이어 서울 구로을 지역구 선거에서 3번 당선됐지만 서울시장 선거에선 경선을 포함해 3번이나 실패했다. 3번 중 2번은 모두 당의 뜻에 따라 떠밀려 나간 선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꿀 줄 알았다. 재선 의원이 되면서 그는 상임위를 법무검찰을 담당하는 법사위로 바꾸며 ‘검찰 개혁’의 선봉에 섰고 3선 의원 때는 법사위원장을 맡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박 전 장관은 점점 강인해지고 ‘철의 여인’이 되고 있었다.<8화> 커튼콜에서 박영선 전 장관에 대해 ‘부드러운 직선’과 ‘철의 여인’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댓글을 단 독자 중에 정확히 맞히는 분도 계셨지만 지인 중에선 박근혜 전 대통령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을 언급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지만 박 전 장관은 보다 미래지향적이고 섬세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선구자적인 면모가 있다는 게 개인적인 평가입니다.언젠가 박 전 장관의 대중적인 인지도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어렴풋이 앵커 시절 박 전 장관을 TV 브라운관에서 본 것 같지만 제 기억 속엔 정치인의 모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뒤늦게 그가 20대 방송기자 시절부터 ‘스타’였음을 실감했습니다. 이 같은 대중성은 다른 여성 정치인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그의 자산입니다.박 전 장관은 올해 초부터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낙마한 뒤 9월부터 3개월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수석고문으로 활동하며 미국 내 기업, 연구소, 대학 등 최첨단 산업기지를 둘러본 데 이어 두 번째 미국행입니다. 박 전 장관은 자신의 SNS에 저명한 교수들의 수업 내용을 공유하며 국제정치와 미국 지도자들의 전략 등을 배우며 한국의 외교안보전략을 고민 중입니다. 그 내용을 엮어 책으로 출간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눈길을 끄는 것은 두 차례 유학의 주제가 ‘서울시장 그 이상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언론, 경제, 법조, 산업, 외교안보 등 전문분야들을 하나하나씩 ‘도장깨기’하며 폭넓게 고민하고 천착해 왔습니다.이번 글에선 박 전 장관 인생의 전반전을 주로 다뤘습니다. SNS와 유튜브를 즐겨 보는 세대에게 좀 더 그의 과거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이 글에 담겼습니다. 다음 주 9일 공개되는 <10화>에선 인생 후반전에 해당하는 ‘정치인 박영선’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그가 지금 목소리를 내고 있는 디지털정당과 공천개혁, 그의 강점과 약점, 그리고 향후 행보에 대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 2023-03-02
    • 좋아요
    • 코멘트
  • ‘국민 금쪽이’ 안철수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황형준의 법정모독]

    “왜 있잖아. 전교 1등 하고 모범생이라 인기 많던 아들이 험한 동네로 전학을 간 다음에 동네 친구랑 형들한테 자꾸 얻어터지고 오는 거야. 성적도 떨어지고 맞고 다니니까 답답하고 ‘이사한 내 탓인가’ 싶어 속 터지는데 쳐다보고 있으면 선한 눈망울에 안타깝고 짠한… 그런 부모 심정 있잖아. ‘찰스’를 볼 때 딱 그 느낌이야.”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지지자였던 지인과의 대화 중에 나온 얘기다. 하지만 안 의원은 10년 정치인 생활을 하며 그 기대를 깎아 먹었다. 승률 30%. 10번의 주요 선거에서 7번 패배하거나 물러섰고 3번 승리했다. ‘국민 멘토’에서 이제는 ‘국민 금쪽이’(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에 나오는 아이들)로 불리며 짠한 마음을 갖게 한다. 안 의원 주변에선 위기 때마다 “안철수는 살려줘야 된다는 심리가 작동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왔다. 실제 언더도그(약자를 더 응원하고 지지하는 심리) 효과도 적지 않았다. 고전하고 있는 ‘안철수의 길’에 대해 혹자는 안 의원 개인의 문제(내부 요인)로, 혹자는 정치권의 속성, 그를 이용하는 주변인들의 문제(외부 요인)로 여기기도 한다. ● 안철수를 떠난 측근들 “사회성·공감능력 떨어져” 2014년 하반기에 사실상 결별했던 금태섭 전 의원. 그는 2015년 8월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화제가 됐던 내용 중 안 의원에 대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먼저 대선이 끝난 직후인 2013년 초, 그가 샌프란시스코로 안 의원을 찾아갔을 때의 두 가지 장면이다. 안 의원이 금 전 의원이 머무르는 호텔로 차를 몰고 왔는데 주차장이 길 건너편에 있었다. 호텔 입구라 차가 거의 없어 금 전 의원도 차도를 건너다녔었는데 그날 안 의원은 좁은 인도를 따라 앞마당을 빙 돌아서 오더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안 의원이 법과 규칙을 잘 지킨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금 전 의원은 “사소해 보이는 이 장면이 왜 많은 사람들이 안철수에게 열광하고 희망을 품었는지 알게 해주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고 썼다. 두 번째 장면은 이렇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사람은 안 후보의 차를 타고 대학 캠퍼스로 가 두 시간 정도 학교 뒤 언덕을 걸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시멘트로 포장된 산책길은 편도가 둘이 걷긴 비좁았다. 한 사람은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안 의원이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피하기 위해 오른쪽 가장자리 쪽으로 바짝 붙어서 걸었고 금 전 의원은 진흙길을 걸어야 했다. 다음은 원문.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오랜 기간은 아니라도 함께 대선을 치렀기 때문에 안 후보(안철수)의 성품을 어느 정도는 안다. 자신이 편하자고 일행에게 불편함을 강요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라도 누구를 괴롭히는 유형은 전혀 아니다. 내가 진흙길로 걷는다고 해서 안 후보가 더 편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알았다면 나보고 시멘트길로 걸으라고 권유했을지도 모른다. 안 후보는 단지 내가 불편한 길로 걷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란히 함께 걷는데 옆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눈치를 못 채는 것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 금태섭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 중 -그가 자신의 주변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는 의미다. 책이 나온 직후 이에 대한 안 의원의 반응이 기록에 남아 있었다. 취재원은 익명으로 처리한다. 누구의 말이 맞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안 의원이 금태섭 변호사가 낸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는 책과 관련해 ○○○에게 금태섭에 대한 서운함을 표시했다고. (중략) 안 의원은 “금 변호사가 흙길로 걷겠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며 뒤통수를 맞았다는 식으로 억울해했다.” - 취재 메모 중 -또 다른 일화도 있다. 한 다음 날이었다. 첫 일정이 국립서울현충원 참배였다. 행사를 마치고 그를 돕던 인사들과 중국집에 모여 점심식사를 했다. 노원병 출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시 열심히 하자”고 의기투합하는 자리였다. 안 의원이 먼저 나간 뒤 남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식당 주인이 불렀다. “여기 계산 안 하셨는데요.”당시 자리에 있던 한 인사는 “안 의원이 ‘덤터기’ 씌우려고 한 건 아니라는 걸 다 알면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며 “대선 때 고생하고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또 고생하겠다고 모인 건데…. 그 뒤 의원이 된 뒤로는 이날 얘기를 하진 않고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안 의원은 기억도 못 할 거다”고 했다. 안 의원의 옛 측근은 “안철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마이너스의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며 “기본적으로 사회성이 떨어진다. 정치는 플러스를 계속해야 되는데 주변 사람들을 자꾸 버리고 마이너스를 하는데 정치가 되겠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했다. 공통적으로 안 의원이 다른 정치인에 비해 무심하고 공감능력이 낮다는 평가인 것이다. 특히 선거 때 모든 걸 걸고 뛰어들었던 캠프 인사들은 안 의원과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서운해하거나 실망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 ‘마이너스(―)의 정치’ 130석→38석→30석→3석“별 하나에 박경철과 별 하나에 김한길과 별 하나에 박지원….”시인 윤동주의 ‘별헤는 밤’처럼 그를 떠나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봤다. 도저히 셀 수 없을 것 같아 숫자 세기를 포기했다. 그를 떠난 인사들과 안 의원이 이끌었던 정당의 의석수를 세보면 왜 ‘마이너스’, ‘뺄셈’의 정치를 한다는 평가를 받는지 자명하다. 2012년 진심캠프를 시작으로 안 의원을 따르던 많은 캠프 자원봉사자, 의원, 보좌진, 멘토 등이 그를 떠나거나 아예 정치권을 떠났다. 그가 이끌던 정당의 의석수는 2014년 130석에서 2020년 3석으로 줄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주인공이 나이를 거꾸로 먹듯.지금 그의 옆에 있는 주요 인물은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 캠프에서 처음 안 의원을 돕기 시작한 김영우 전 의원과 그의 핵심 브레인인 이태규 의원, 최측근인 김도식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 등 극소수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안타깝고 아쉬운 대목이다. 그가 정치권에 입문할 때 큰 역할을 했던 ‘시골의사 박경철’은 2014년경 이전 이미 관계가 끊겼고, 그를 야권으로 데려와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를 했던 김한길 전 대표도 여러 차례 실망한 채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을 도우며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대선 당시 국민의당 대표이자 호남의 맹주였던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안 의원의 발언을 계기로 결별했다. 그러자 박 전 원장은 전북 정읍 유세 현장에서 “(총리가 아니라)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초대 평양대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안 의원은 2017년 4월 대선 TV 토론회에서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등에게 공격을 받자 “그분의 말씀은 북한과 언제 관계가 개선되겠나,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래서 농담 삼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김대중 대통령비서실장 출신인 박 전 원장으로선 안 의원이 DJ의 철학과 이념, 햇볕정책 등을 부정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특히 그때 박 전 원장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매일 문재인 민주당 후보를 비판한다는 의미로 ‘문모닝’한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안 의원 당선에 전력을 다하던 때였다. 이처럼 주변인은 자신의 제안이나 정체성을 부정당하거나 안 의원이 말을 바꾸거나 자신을 안 챙기거나 할 때 그를 떠났다. 다음은 2017년 대선을 석 달 앞둔 2월 국민의당 한 의원이 했던 이야기다. “안철수가 대화를 해도 피상적인 얘기만 되지, 깊이 있는 대화가 안 된다. 솔직하게 자기 얘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대화를 할 수 없다. 광주에서 안철수 10번 넘게 만나고 돈도 1억 원 넘게 썼다는 지지자가 있는데, 안철수가 자기를 만나도 못 알아본다고 화냈다고 하더라. 권노갑 고문도 목포 행사에서 안철수 만났는데 다른 사람 악수하듯이 그냥 악수만 하고 지나가서 권노갑 측근들이 부글부글하더라고.” - 취재 메모 중-● 정대철 “사람들 마음을 얻으려면 돈을 좀 써야 된다고 했는데…”2000억 원에 육박하는 자산가인 안 의원에 대해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말이 계속 따라다녔다. 2015년 10월 들은 이야기다. “김한길 전 대표가 나에게 안철수 전 대표를 도와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안철수 짠데 어떡하냐’고 했다. 예전에 전당대회 때 점심을 시켜먹는데 전단지 2, 3개를 놓고 가장 싼 3800원짜리 짜장면을 시키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고 하더라.” - 취재 메모 중 -3800원짜리 짜장면을 먹는 건 안 의원이 검소하다는 증거다. 다만 문제는 주변 사람들한테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치인이 월급이 나오지 않는 선거캠프 식솔들을 위해 돈을 쓰지 않는다면 마음이라도 써야 한다. 부자인 안 의원이 돈도 마음도 쓰지 않았다고 느낀다면 그들은 서운하게 느낄 수 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선거 때 정해진 비용이 아니더라도 경조사를 포함해 밥값 등 사람에 투자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 선거 때마다 이는 반복됐다. 2017년 8월 국민의당 정대철 상임고문의 이야기다. “안철수가 전대 출마하기 전에 한번 만나자고 해서 고문단 몇몇이랑 만났어. 권노갑 상임고문한테 ‘같이 가자’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하더라고 그래서 권 고문은 안 왔지. 그날도 전당대회 나가면 안 된다고 말렸는데 듣기만 하고 알겠다고 하더니 자기 논리를 주장하더라고. 결국 말도 안 들어. 그 뒤론 전화도 한 번 안 와. ‘사람들한테 마음을 얻으려면 돈을 좀 써야 된다’고 했는데 고개만 숙이고 있더라. 결국 대선 때 우리가 쓴 교통비 밥값 등 3000만 원도 우리가 그냥 썼잖아. 달라졌다고 스스로 얘기하는데 하나도 안 바뀌었어….” - 취재 메모 중 -안 의원이 ‘짠돌이’가 된 데에는 부인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가 재정권을 쥐고 있는 탓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김 교수가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많다. 2017년 2월 서울 노원구의 한 극장에서 ‘안철수, 김미경과 함께하는 청춘데이트 행사’에서 나온 김 교수의 발언을 듣고 뜨악했다는 측근들도 있었다. “저희 집에는 아이가 4명이 있다. 첫 아이가 딸, 둘째가 안랩, 셋째가 동그라미 재단, 넷째가 국민의당이다. 넷째는 부모가 많다. 아이는 마을이 키운다는 말을 하지 않나. 국민의당은 전 국민이 키우고 계신다. 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잘 키워보는 게 저희 인생에 마지막 목표다. 내리사랑이라고 제일 막내라서 마음이 많이 쓰인다.”김 교수 스스로 안 의원의 창업부터 창당까지 같이 기여했다는 뜻이다. 동등한 부부관계를 강조한 것이지만 어떤 결정을 내릴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이 개입했다면 그게 비선이다. 그걸 공개적으로 내세운 것도 역시 문제다. ● 결승점 향해가는 마라톤이제 안철수의 마라톤도 결승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가 만약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도전에 성공해 총선 승리에 기여한다면 차기 유력 대선 주자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높다. 당 대표 도전에 실패하더라도 의미있는 패배를 하고 여권의 대안으로 가능성을 계속 보여준다면 그의 길이 또 있을 것이다. 산 정상을 여러 차례 등반했던 안 의원은 이제 사실상 다시 입구로 내려왔다. 그만큼 새로 시작해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3년 반 넘게 안 의원과 그 소속 정당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국회 의원회관 518호였던 그의 사무실과 지금은 사라진 옛 국민의당 당사를 문턱이 닳게 다녔습니다. 출입처가 바뀌었어도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안 의원의 ‘단맛’을 다룬 <7화>에 이어 ‘짠맛’을 예고한 이번 글에는 오랜 마크맨으로서 궁금했지만 그동안 직접 하지 못한 질문과 쓴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여러 번 지적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과거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만 여전히 “사람은 안 변한다”고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15일 TV조선에서 진행된 전당대회 토론회에서 ‘전 재산과 대통령 중 하나를 포기한다면’이라는 밸런스 게임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는 (재산보다) 우리나라를 아이들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며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안 의원은 지난해 대선후보 등록 당시 1979억 원의 재산을 신고했습니다. 그 돈을 모두 딸에게 상속하거나 세계적 부호들처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우주여행이나 장수·회춘 프로젝트에 돈을 쓸 것 아니라면 다른 좋은 일에 통 크게 쾌척할 일이 많지 않을까요. 물론 돈을 쓰고 욕먹는 경우가 제일 억울합니다. 그런데 △한 번 사주고 열 번 생색낼 때 △어떤 목적을 위해 돈을 쓸 때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 때 등의 경우에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1500억 원을 환원한 동그라미재단이 왜 존재감이 미미한지 등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시와 선거의 공통점은 계속 떨어져도 ‘한 번만 더 하면 될 거 같다’는 점입니다. ‘중꺾마’를 외치며 계속 매달려선 안 되는 영역입니다. 한국의 중요한 자산인 안 의원에게 2027년 대선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간 공교롭게 남성 법조·정치인만 다뤘습니다. 다음 달 공개되는 <9화>에선 야권의 여성 정치인으로 넘어갑니다. 스스로 ‘부드러운 직선’을 표방한 적이 있고 저도 ‘철의 여인’이라고 여기는 분입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2-23
    • 좋아요
    • 코멘트
  • [광화문에서/황형준]‘족집게’ 이원석과 ‘독종’ 한동훈

    “먼저 승리를 확보하고 전쟁에 임하라.” 손자병법에 나오고 이순신 장군이 자주 인용했던 ‘선승구전(先勝求戰)’의 뜻이다. 평소 이원석 검찰총장이 수사에 있어 중요하게 여기는 말이라고 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구속영장에 대해 이 총장이 이례적으로 직접 목소리를 냈다. 영장 청구 당일 “천문학적 개발이익을 부동산 개발업자와 브로커들이 나눠 가지도록 만든 지역 토착 비리로 극히 중대한 사안으로 본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이 총장의 자신감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대검 관계자는 “총장이 미진하다고 생각하는 건 법원에서 기각되고, 발부된다고 생각하는 건 다 영장이 발부되더라. 그래서 내부에선 총장이 ‘족집게’라고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2016∼2017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1부장 시절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구속시켰다. 당시 특수1부에서 영장을 청구한 21명 중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 1명을 제외하곤 기각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증거와 법리를 신중하고 꼼꼼히 따져 ‘이기는 싸움만 했다’는 의미다. 이 총장의 결재를 거친 이 대표 체포동의안은 이제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공이 넘어갔다. 한 장관은 지난해 12월 민주당 노웅래 의원 체포동의 요청 이유를 설명하며 “돈 봉투 부스럭거리는 소리까지 녹음돼 있다”는 등 공개되지 않았던 증거를 밝혔다. 27일 국회 본회의장에 이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예정되면서 이날 등판하는 한 장관에게 다시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검찰 안팎에선 현직 의원 구속과 관련된 한 장관 관련 일화도 다시 회자된다. 그는 2004년 1월 대검 중앙수사부 평검사 시절 김승연 한화 회장으로부터 10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서청원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을 구속시켰다. 그런데 10여 일 만에 한나라당 주도로 국회에서 석방요구결의안이 통과됐다. 한 달 뒤 국회 회기가 끝나자 검찰은 서 전 의원을 다시 재수감시키며 반격에 나섰다. 한 장관이 헌법 규정이 ‘회기 동안에만 석방’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찾아 재구속을 관철시킨 것이다. ‘독종’ 별명을 얻은 계기 중 하나다. 사법연수원 27기 동기인 한 장관과 이 총장은 1996년 입소 후 같은 반, 조에 배치돼 6반 A조에서 2년간 동고동락했다. 한 조는 17∼20명에 불과했다. 두 사람을 가르쳤던 연수원 교수는 “그 시절부터 둘 다 총명하고 눈에 띄었다. 단 1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명박 박근혜 등 전직 대통령이 구속될 때 이들을 향해 박수쳤던 민주당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이 대표 구속영장 청구서가 공개되자 민주당에선 “용두사미” “옹색한 범죄사실”이란 반응을 보이고 있다. 구속영장 청구서에 나온 이름이 이 대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더라도 민주당이 같은 반응을 보였을지 의문이다. 무혐의라는 자신이 있다면 당당히 구속영장실질심사에 응하면 된다. 불체포특권 뒤에 숨는 것은 옹색할 뿐이다. 사정·사법정국에 지친 국민들은 재판 전 법원의 1차 판단을 궁금해하고 있다.황형준 사회부 차장 constant25@donga.com}

    • 2023-02-23
    • 좋아요
    • 코멘트
    PDF지면보기
  • 좌우 넘나들며 ‘당 대표 3관왕’에 도전하는 ‘장수생’ 안철수[황형준의 법정모독]

    20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페터 한트케의 희곡 ‘관객모독’. 십수 년 전에 본 이 연극을 떠올린 건 독자들과 소통하는 방법 때문입니다. 신성한 관객에게 물을 뿌리고 말을 걸어도, 그가 연극의 기존 문법과 질서에 저항했든, 허위를 깨려 했든, 모독(冒瀆)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법조팀장을 맡고 있는 필자는 정치부와 사회부에서 10년 넘게 국회와 청와대, 법원·검찰, 경찰 등을 취재했습니다. 이 코너의 문패에는 법조계(法)와 정치권(政)의 이야기를 모아(募) 맥락과 흐름을 읽어(讀)보겠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가끔 모독도 하겠습니다.“하루에 사람이 집중해서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이 보통 3시간밖에 안 된다. 공부도 하루 종일 하는데 3시간 집중해서 할 수 있는 학생은 드물다. 하루 3시간 1년이면 1000시간. 매일 3시간 집중해서 노력하면 10년 걸리는 거다. 집중해서 1만 시간 정도 하면 모든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2017년 6월 한 강연회에서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인용해 이같이 10년과 1만 시간의 법칙을 강조했다. 의사, 컴퓨터 프로그래머, 벤처기업가, 대학교수에 이어 정치인이란 5번째 직업을 가진 지 이제 10년 5개월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법시험 9수를 했지만 안 의원 역시 만만치 않은 ‘정치 장수생’인 셈이다.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혜성같이 등장해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던 안 의원. 기성 정치에 대한 실망과 새 정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담긴 ‘안철수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현실 정치는 녹록지 않았다. 2012년 9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출사표를 낸 뒤 10년 동안 대선을 3번 치르며 1번은 본선에서 패배했고 2번은 중도 하차했다. 창당만 3번 하는 등 산전수전을 겪었다. 그동안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었던 국민의당,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재창당한 국민의당 등 정당 대표직을 세 번 지냈다. 이제 네 번째로 보수 여당인 국민의힘 대표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가 좌우 진영을 넘나드는 당 대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할 것인지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당 대표에 당선되면 한국 정치사에서 전례 없는 기록이 된다.● 공익 활동에 관심… 2000년 출마 제의 받곤 “정치가 중요하다”안 의원은 단국대 의대 교수였던 1990년 처음 언론에 이름을 알렸다. 그의 나이 28세 때다. 국내 최초로 백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하며 ‘컴퓨터 의사’로 명성을 떨쳤다.그는 서울대 의대에 입학해 생리학을 전공했고, 의대 본과 2학년 때인 1983년 ‘애플’ 컴퓨터를 구입하면서 컴퓨터에 대해 알게 됐다. 의대 박사과정 시절인 1988년 자신이 갖고 있던 디스켓이 ‘브레인 바이러스’라는 국내 최초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연구를 시작해 치료용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7년간 새벽 3시에 일어나 오전 6시까지 하루 3시간씩 백신 개발에 매달리며 낮에는 의사, 밤에는 개발자의 이중생활을 했다. 1995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현 안랩)를 만들어 V3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신종 컴퓨터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백신 프로그램으로 맞서며 명성을 얻었다. 2000년대 들어 코스닥 상장을 하며 벤처기업가로 거듭났다. 자금난을 겪던 중 100억 원 매각 제안을 받았지만 국가 기간산업이라고 생각해 회사를 해외 자본에 팔지 않는 등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보폭도 넓어졌다. △1999년 국민은행 사외이사 △2000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컴퓨터수사자문위원 △2001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2003년 한국정보보호산업협회 회장 △2001년 김대중 정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 등 직함과 네트워크도 늘었다.그가 언제부터 정치에 뜻을 뒀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어느 정도 정치의 중요성과 현실 정치 참여에 대한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김대중 정부 청와대 출신 인사가 했던 이야기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인터넷, 전자민주주의 등을 주제로 한 태스크포스(TF)를 하며 안철수 의원과 처음 만났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안 의원과 (MBC 기자이자 앵커였던) 박영선 손석희 엄기영 씨 등이 영입 대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식으로 거절했는데 안 의원은 좀 달랐던 걸로 기억한다. ‘정치가 중요하다. 그런데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뉘앙스였다.” ―취재 메모 중그 뒤에도 노무현 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고,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등에도 참여했다. 그는 봉사 및 공익활동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 본과 2학년부터 4학년까지 3년 동안 서울 구로동과 지방 ‘무의촌’ 등에서 진료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사회가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1년 후배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를 만나 결혼했다. 안랩을 운영하면서도 아름다운재단 등과 함께 물품 등을 기부하고 기부문화 확산과 관련된 활동을 꾸준히 진행했다. 정치 입문에 앞선 2011년 11월엔 자신이 보유한 안랩 지분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동그라미재단이 설립돼 현금 722억 원과 안랩 발행 주식 총수의 약 10%에 해당하는 100만 주를 현물 기부했다. 이후 재단은 기술 연구개발과 창업 등에 20억 원 가까운 사업비를 지원하고 있다(다만, 동그라미재단은 ‘짠 내’가 나고 솔직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존재감이 없다. 빌 게이츠는 빌앤드멀린다게이츠재단에 한화 90조 원에 달하는 700억 달러를 기부하고 연간 8조 원에 달하는 60억 달러 이상 지출하고 있다).KAIST 석좌교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 교수로 활동하며 청년들과 함께 미래를 고민했다. ● 스스로 외유내강(外柔內剛)·대기만성(大器晩成)형으로 여겨2016년 6월 국민의당 대표 사퇴 당일 그의 태도에 대한 일화를 듣고는 외유내강형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당시 측근이 했던 얘기다. “사퇴한 날 취재기자들이랑 카메라기자들이 2층 대표실부터 엘리베이터, 1층 로비까지 계속 따라붙었잖아. 마지막에 차에 타기 전에 나랑 몇 마디 나눴다. 그때 나한테 한 말이 ‘오후 교문위(당시 상임위) 회의는 어떡하죠?’였어. 그래서 내가 ‘오늘은 좀, (회의에) 나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지. 하여튼 진짜 모범생이야.” ―취재 메모 중안 의원은 자신의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스스로 ‘외유내강’과 ‘대기만성’형이라고 했다. 그가 강연에서 자주 했던 얘기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권투에서 중요한 건 얼마나 강한 펀치를 날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강한 펀치를 맞고도 버티는가가 핵심이다. 그게 권투에서 이기는 비결이다. (중략) 시간이 흐르는 걸 x축이라고 하고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을 y축이라고 하자. 보통 열심히 노력하면 그래프로 따지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자기 실력도 (우상향으로) 올라간다. 그런데 주위 사람의 평가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처음에는 조금만 성취해도 주위 사람들이 과대평가한다. 언론에 나올 정도면 과대평가된다. 그러다가 좀 더 지나면 오히려 관심 없어지고 아주 과소평가되는 순간이 온다. 나는 좀 더 실력이 올라갔는데 주위의 평가가 낮아지는 그런 순간이 온다. 처음에 저보다 훨씬 더 능력 있고 인정받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낙마하는 거 봤다. 공통점을 보니까 외부 평가가 진짜 자기인 줄 착각하면서 교만해지는 것이다. 외부에서 아주 평가절하되고 과소평가될 때 그 실망감 때문에 너무 절망하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이다. 주위에서 비아냥거려도 그래도 나는 이 정도도 예전보다는 훨씬 더 발전했다고 자기중심을 잡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2016년 7월 ‘알파고와 우리의 미래’ 강연, 취재 메모 중이런 마인드로 무장한 그는 세간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실제 정치권에 샛별처럼 등장한 인물 중 윤석열 대통령을 제외하면 안 의원처럼 장거리를 뛰고 있는 인사도 없다. 고건 전 국무총리,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대표,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등 정치 신인은 모두 잠깐 빛나다 스러져 갔다. ● 소명 의식과 책임윤리 갖춘 전문가정치 입문 10년이 지났지만 그도 정치권에서 최고가 되진 못했다. 본격적인 정치 입문 전 2011년 서울시장 출마 양보, 2012년 대선 후보 단일화와 2014년 신당 추진 등 과정에서 잇따라 물러서면서 그는 ‘또 철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에도 2022년 대선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단일화하고 국민의힘에 입당을 하면서 중도개혁정당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안 의원도 1990년 3당 합당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정당에서라도 정치 변화를 이끌고 자신이 구상해온 정책을 만들겠다는 게 안 의원의 생각이라고 한다.그는 초지일관 정치권의 혁신을 촉구하는 ‘메기’ 역할을 해왔다. 여전히 안 의원은 기성 정치인에 비해 때가 덜 묻고 깨끗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 의원 측 관계자는 “여전히 다른 정치인에 비해 안 의원이 정의와 공정 가치에 걸맞다”라며 “인수위원장을 하면서도 일을 잘한다는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미 모든 검증을 다 거쳤다.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용의 정신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정치를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책임질 줄 알았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시절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김한길 당시 대표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26.7% 정당 득표율, 의석수 38석을 얻으며 원내 3당에 자리 잡았지만 국민의당 리베이트 사건이 터지고 주요 인물이 구속되자 “정치는 책임지는 것이다”라며 대표직을 던졌다. 2017년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아들과 관련된 제보 조작 사건이 불거지자 7월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최근 경기 성남시장 시절부터 최측근으로 꼽히던 민주당 정진상 전 대표실 정무조정실장,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의 구속 기소에도 사과조차 하지 않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는 다른 모습이다. 아래는 최근 썼던 칼럼이다.▶실종된 책임정치와 민주당의 선택 [광화문에서/황형준]● ‘미래’ 화두 제시하는 정치인안 의원은 모범생이다. 선한 인상에 정치인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말씨가 고와 오히려 단점이 될 정도다. 아재개그를 구사하며 활짝 웃는다. 특히 늘 배우는 자세로 공부하는 노력파다. 생리학 박사 출신에 정치인 이전에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를 마쳤고 정치적 휴지기에도 독일 막스플랑크 혁신과경쟁연구소 방문연구원, 미 스탠퍼드대 방문연구원 등을 다녀왔다. 책만 10권 넘게 썼다.대학 시절부터 영화 감상과 독서가 취미였고 바둑은 아마추어 2단이다. 연구소 대표 시절 마음이 답답할 때 사무실이 있는 서초역 인근에서 삼성역까지 걸었다던 그는 2017년 대선 패배 이후 독일에서 휴지기를 갖던 중 뒤늦게 마라톤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풀코스도 3번이나 완주했다. 2017년 대선 당시 배낭을 메고 걷던 ‘뚜벅이 유세’를 하더니 2020년 총선 기간엔 마라톤 유세를 벌이며 국토 종주를 했다. 정치권에서 유례없는 ‘신공(神功)’이다.반기문 전 총장의 불출마 등을 맞히며 한때 ‘안스트라다무스(안철수+노스트라다무스)’와 ‘안파고(안철수+알파고)’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도 자기 문제는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듯이 자기 미래와 운명은 제대로 예언하지 못했다. 다음 달 8일 치러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2027년 대선을 향한 그의 길에 첫 시험대가 될 것이다. 국민의힘 당원들은 친윤 후보를 선택하며 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것인가, 수도권 대표론을 내세운 안 의원을 사령관으로 뽑을 것인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안철수 마크맨’이던 2016년경 ‘주말에 무엇을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넷플릭스를 본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정보기술(IT) 문외한인 기자에게 안 의원이 ‘블라블라’ 설명은 했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한 이야기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필자는 공유파일 서비스 등에서 다운로드를 해 영화를 보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몇 년 뒤 넷플릭스는 이미 우리의 안방으로 들어왔고 저도 작년부터 스마트폰으로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습니다.그는 무엇보다 정치권에서 몇 안 되는 정책 전문가입니다. 특히 IT에 대한 전문성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라는 화두를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2016년 6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통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할 수 있게 교육과정이 바뀌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교육과 코딩 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정치권엔 낯선 문장이었지만 몇 년 전부터 초등학교에서부터 코딩 교육은 일반화됐습니다. 이렇게 그는 앞서갔습니다. ‘퍼스트 무버’이자 ‘트렌드 세터’였습니다. 그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다 밝게 만들어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메일 등을 보내주시면 궁금증을 풀어드리겠습니다.법정모독 1~6화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 윤석열 대통령, 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를 다루는 내내 첫 화는 장점을 주로 부각하고 두 번째는 단점을 지적하며 애정 어린 ‘쓴소리’를 했습니다. 당근과 채찍 스타일입니다. 한 지인은 ‘단짠단짠’(달면서 짠맛)의 반복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글은 단맛이 좀 강한가요? 23일 공개될 8화에서는 안 의원의 짠맛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짜 짭니다.황형준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2-16
    • 좋아요
    • 코멘트
  • 벤치로 밀려난 이낙연… ‘이재명 구하기’냐, ‘반명 전선 구축’이냐 갈림길[황형준의 법정모독]

    정치인과 연예인의 공통점이 있다. 잊혀지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본인의) 부고기사만 빼고 비판이든 미담이든 언론에 나오면 다 좋다”는 말이 있는 이유다.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하는(표를 얻어야 하는) 정치인의 사전에 ‘잊혀질 권리’란 없다. 대선에서 패배한 유력 대선 주자는 해외로 떠난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5개월 동안 영국 케임브리지대에 갔던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대표적 사례다. 귀국한 뒤 “정치 절대 않겠다”는 말까지 했던 그는 결국 말을 바꿨다는 비판을 받고도 15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됐다. 이후 많은 유력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패배한 뒤 연구와 견문 등을 목적으로 출국해 휴지기를 가졌다. 국민들이 다시 불러주기를, 돌아오는 공항 입국장에 환영인파로 가득 차길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DJ 이후 그렇게 ‘재기’에 성공한 이는 없다. 대부분 국민들에게 잊혀진 존재가 된다. 올해 6월 미국에서 귀국하는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 박지원, 이낙연에게 “당신이 DJ야?” “이 전 대표는 미국 간 것부터 잘못됐어. 그리고 그는 대통령후보로 낙선한 게 아니라 경선에서 패한 것이다. 대선 후보 코스프레하는 꼴이 됐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지난해 미국에 간다는 이 전 대표에게 “당신이 DJ야? 가지 마라”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DJ는 낙선을 해도 민주당과 호남에서 ‘우리 대통령 후보다’라는 생각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재기에 성공했다”며 “근데 이 전 대표는 당의 대선 후보가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에 미국에 안 가고 지금 현장에서 이재명 대표와 함께 투쟁을 해 나갔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이낙연이 사는 길은 확실하게 이재명을 도와야 된다. (미국에서라도) 관련 메시지를 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 수사를 ‘정치보복’ ‘검찰독재’ 등으로 규정하며 민주당은 6년 만에 장외투쟁까지 나섰다. ‘전장’을 떠나 있는 이 전 대표에게 민주당 지지자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실제 세계일보 의뢰로 한국갤럽이 지난달 26~27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6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정치 지도자로 누구를 선호하나’라는 질문에 이 전 대표를 꼽은 응답자는 2.1%에 불과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 24.6% △한동훈 법무부 장관 11.1%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 6.9% △홍준표 대구시장 4.9%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3.8% △오세훈 서울시장 2.7% 등 순이었다. 이는 이 전 대표가 문재인 정부 국무총리 시절 수개월 동안 대선 주자 1위를 달렸던 것과 천지 차이다. ‘에이스’의 위치에 있던 득점왕이 4년 만에 벤치로 밀려난 격이다. 미국 워싱턴 조지워싱턴대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내는 동안 잊혀진 탓도 있다. 그는 지난해 6월 미국으로 출국한 뒤 페이스북 등 SNS에 15개의 글을 썼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일본 아베 신조 총리 별세 등 이슈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메시지는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서훈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으로 구속되자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뒤집고 지우는 현 정부의 난폭한 처사를 깊게 우려한다”고 점잖게 비판했을 뿐이다. 이어 “전임 정부 각 부처가 판단하고 대통령이 승인한 안보적 결정을 아무 근거도 없이 번복하고 공직자를 구속했다.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의 대외신뢰는 추락하고, 공직사회는 신념으로 일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 호남-중도층-당심(黨心) 잃어… 이낙연계, 10명도 안 돼 그의 최대 기반이었던 호남도 흔들리고 있다. 앞선 세계일보 의뢰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전 대표에 대한 광주·전라 지역의 지지율은 2.1%에 그친 반면 이재명 대표에 대한 호남 지지율은 48.5%였다. 2021년 9월 대선 경선에서 지역 중 유일하게 이재명 대표보다 이 전 대표에게 표를 줬던 광주·전남 민심조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모양새다. 전남 영광군 출신으로 광주제일고를 졸업한 그의 지역 기반이 사실상 무너진 셈이다. 호남 지역에선 이 전 대표에 대해 “뒤에서 관망하며 기회만 엿보지 말고, 정권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여론이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총리 시절 중도층을 흡수하며 외연 확장을 이끌었던 이 전 대표는 대표 시절 여러 차례 실망감을 줬다. 2020년 11월 ‘당 소속 공직자가 중대 잘못으로 직위를 상실해 재보선을 실시할 경우, 해당 선거구에 후보자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을 전 당원투표로 고쳤다가 결국 이듬해 6월 서울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대선 경선 과정에선 강성 지지층에 호소하기 위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도 보였다. 흔히 계파라고 불리는 당직자와 의원 등 세력도 적다. 2012년 5월 당시 원내대표 선거에 출마했다가 박지원 유인태 전병헌 의원에게 밀려 4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당시 박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전남도지사 시절 ‘이 주사(6급 공무원)’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깐깐하고 엄격한 업무 스타일은 당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오히려 독이 됐다. 당직자는 물론 동료 의원들까지 이 전 대표에게 ‘깨진’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1년 1월 여권 고위 관계자가 했던 이 전 대표에 대한 평가다. “당의 힘을 하나로 묶어내야 되는데 전남도지사나 국무총리할 때야 상명하복이잖아. 근데 당은 상명하복이 아니잖아. 의원총회하면 초선이 당 대표한테 삿대질하고 물러나라 하고 난리인데….” - 취재 메모 중 - 그는 정책에서 대관소찰(大觀小察·크게 보고 작은 것도 살핀다)을 강조했지만 정작 당내 구성원들의 마음은 살피지 못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이 전 대표의 대선 경선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기가 아직도 총리인 줄 아는 ‘꼰대’ 같았다. 의원들과 스킨십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형식적으로 느껴졌다”며 “호남 후보로는 대선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당내 분위기도 있었다”고 전했다. 2020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당 대표로 있으면서도 ‘이낙연계’라고 불리는 의원은 현재 10명 수준에 불과하다. 설훈 박광온 전혜숙 윤영찬 양기대 이병훈 홍성국 오영환 의원 등과 오영훈 제주도지사 정도만 ‘찐이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비명(비이재명)계라고 해도 이 전 대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친이낙연계 의원이 적으니 향후 대선을 위해 이 전 대표를 지원하는 기초·광역의원은 물론 필요한 전국 조직 구성 등 조직력이 충분치 않은 상황이다. ● 대선 패배 책임론, ‘올드 보이’ 이미지도 장애 당내에서 이어지는 ‘대선 패배 책임론’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당내에선 경선 과정에서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을 이 전 대표 캠프에서 먼저 거론하면서 검찰 수사로 이어지게 됐고, 결과적으로 득표율 0.73%포인트 차로 정권을 내줬다고 보는 측면이 있어 거부감이 크다. 총리로서 존재감을 보여줬던 이 전 대표의 리더십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당 리더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통화한 한 민주당 중진 의원의 이야기다. “2022년 대선을 거치면서 윤석열 정부 탄생과 함께 요구되는 리더십이 완전히 바뀌었다. 현 정부를 극복하는 리더십은 이낙연처럼 디테일한 정책능력이나 갈등조정능력 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처럼 ‘전선적 지도력’이 필요하다. 민주 대 반민주, 검찰독재 대 민주공화정의 싸움 등 전선 대 전선으로 구도가 형성되기 때문에 호남을 기반으로 좋은 스펙과 디테일한 정책을 가진 인물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선명하면서도 그걸 뛰어넘는 지도력이 있어야 된다. 그런 면에서 이낙연은 이미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간 거지….” 1952년생으로 71세인 이 전 대표가 현 정치권을 주도하는 세대보다 고령으로 ‘올드 보이’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도 장애물이다. 2027년 대선 때는 75세다. 유승민 전 의원(65)과 김부겸 전 총리(65)를 제외하면 윤석열 대통령(63)은 물론 이재명 대표(59), 안철수 의원(61), 오세훈 서울시장(62) 등 예비 대선주자들은 모두 1960년대생이고, 한동훈 법무부 장관(50)은 1970년대생으로 보다 젊다.● ‘이재명 구하기’냐, ‘당 정상화’냐… 이낙연의 돌파구는? 차기를 노리는 이 전 대표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돌파할지 관심이다. 정치권 징크스 중 하나지만 아직까지 ‘2인자’인 총리 출신이 대선에 성공한 사례가 없다. 반면 이 전 대표 측 생각은 다르다. 지난달 중순 미국에서 이 전 대표를 만나고 온 민주당 윤영찬 의원의 말이다. “지금 국내 상황이 가변적이니까 뭘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고 하기보다는 본인은 당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당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으면 몸을 던져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재명 대표 개인과 측근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당 전체의 문제로 치환시켜 대응하고 있는 게 비정상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전 대표는 미국에서 외교·안보 관련 저서를 집필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21일(현지 시간)에는 연수 중인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주제로 한 초청 포럼에도 참석한다. 친이낙연계에선 2021년 대선 경선에서 이재명 대표에게 패배한 이유로 준비 기간이 짧았고 본인이 대권을 갖겠다는 권력 의지가 강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꼽고 있다. 진흙탕에 같이 뒹굴려고 하지 않고 선비 스타일을 고수하며 당 대표 시절에도 인사권 활용 등 당을 사당(私黨)화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한 게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또 언론인 20년, 정치인 20년, 총리와 당 대표를 거친 이 전 대표의 나이는 오히려 연륜과 안정감을 줄 수 있고, 귀국해 활동을 시작하면 지지율은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 게 측근 그룹의 생각이다. 다만 이 전 대표가 ‘반명(반이재명) 전선’의 선봉에 설 경우 단일대오를 강조하는 친명계와 개혁의 딸 등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적전 분열”이라는 강한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미 이 전 대표는 2021년 전직 대통령 사면 건의 논란을 거치면서 지지율이 폭락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결국 4개월 뒤 정치적 상황과 그가 귀국 후 어떤 어젠다(의제)를 들고 오는지,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사법 리스크’로 안갯속에 갇힌 민주당에서 ‘이재명 구하기’에 나설지, 이재명 대표와 각을 세우며 ‘반명’의 선봉에 설지 그의 선택이 2027년 대선을 향한 1차 관문이 될 것이다. 대선 시계는 이미 돌아가고 있다. 요즘 법조계와 정치권을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모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집니다. 개인 측근 비리에 대해 대표직 사퇴 등 책임지는 태도는 취하지 않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이재명 대표, 과거 대통령이 여당 총재를 겸직하던 시절로 시계를 돌리며 당대표 선출까지 사실상 오더를 내리는 여권. 여야는 모두 정당을 사당화하기 바쁩니다. 후지고 후진적입니다. 이 전 대표는 한때 국민들에게 청량감을 안겨 줬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장면은 총리 시절인 2019년 11월 강기정 정무수석이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나경원 원내대표를 향해 “우기는 게 뭐예요? 우기다가 뭐냐고?”라고 고성으로 항의해 논란이 됐을 때입니다. 그는 “정부에 몸담은 사람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국회 파행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것은 온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송구스럽다”며 사과했고 이에 당시 한국당 주광덕 의원은 “야당인 저도 감동이고 국민들이 정치권에서 이러한 총리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가장 아름답고 멋진 장면이 아닌가 한다”라며 이 총리를 치켜세웠습니다. 국민들은 지금도 그런 정치를 보고 싶어 합니다. 지금 한동훈 법무부 장관처럼 총리 시절 이 전 대표의 말과 글은 유튜브 등 영상으로도, 책으로도 출간되며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금방 잊혀지고 여야가 뒤바뀌는 게 정치권입니다. 그가 다시 에이스로 뛸 수 있을까요? 4개월 뒤 이 전 대표가 귀국하는 날 공항 입국장의 풍경이 궁금해집니다. 16일 공개될 <7화>에선 다시 여권 인사 ‘찰스’로 넘어갑니다. 요즘 모습이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 같습니다. 이미 미들급 경쟁자도 기권을 선언했는데 라이트급인 이분이 KO패를 면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2023-02-09
    • 좋아요
    • 코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