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충북 청주 고령신씨(高靈申氏) 가문의 장손 신모 씨의 자택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고문헌들이 살고 있다. 집안 서재 한 칸을 채우고도 넘쳐 더 이상 둘 곳 없는 고문헌들을 지키기 위해 회사의 자투리 공간을 빌릴 정도다. 28일 동아일보와 전화로 만난 신 씨는 “자료가 워낙 방대해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일일이 알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 이 문헌의 진가를 드러날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말했다. 고민이 커져가던 와중에, 9월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로부터 연락이 왔다. 문화재청이 종중(宗中)을 포함해 민간에서 보존해온 기록유산을 전수 조사하고 있다는 전화였다. 흔쾌히 조사에 응한 신 씨는 빛바랜 고문헌들이 가득한 ‘비밀의 방’ 문을 활짝 열었다. 문화재청에서 9월 28일부터 한 달간 고령신씨 가문의 고문헌 자료 실태를 전수 조사한 결과 2359건에 이르는 새로운 고문헌의 존재가 드러났다. 고문헌 가운데는 조선후기 문신 신좌모(1799~1877)가 1855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청나라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작성한 ‘연행일사(燕行日史)’ 유일본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외교문서를 기록하는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간 그가 남긴 일지에는 청나라 문인들과 나눈 대화와 시조가 빼곡했다. 조사에 참여한 김근태 고문헌과콘텐츠연구소 대표는 “당대 조·청 문인들의 문화교류사를 보여주는 핵심 사료”라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올해부터 민간 기록유산의 실태를 조사하고 이를 디지털화하는 ‘기록유산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일부 지역 대학 등에서 개별적으로 민간 기록물을 조사한 적은 있지만, 문화재청이 나서 전수 조사를 하고 일원화된 DB를 구축하는 건 처음이다. 올해 첫 사업에 나선 문화재청은 충청·전라·제주 지역에서 2만 건이 넘는 신규 고문헌 자료를 찾아냈다. 내년부터는 지역을 넓혀 2026년까지 전국에 흩어진 민간 기록유산을 전수 조사할 방침이다. 그간 민간에 보존해온 고문헌들은 조선왕실의 기록문화유산에 비해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비지정문화재’였다. 개인이나 지역 문인들이 남긴 사적인 기록물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근 역사 연구에서 한 시대의 생활문화상이 생생하게 담긴 미시사(微視史)의 중요성이 커지며 민간 기록유산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다. 정제규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전문위원은 “한 개인이 남긴 가장 사적인 역사는 거시적인 한국사의 공백을 채워줄 핵심 사료”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이번 전수 조사에서 충북 제천의 양승운 의병연구가가 수집해온 항일 의병 사료 가운데 독립지사 이범진 열사(1852~1911)가 남긴 유일한 시고(詩稿) 1건이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김근태 대표는 “주 러시아 초대 공사로 조국 독립을 위해 힘쓰다 1911년 경술국치에 항거하며 자결한 이 열사는 생전 기록이 거의 전해지고 있지 않다“며 ”이 시고는 그가 남긴 유일한 문학작품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양 연구가 소장 자료에서 1896년 경북 안동에서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한 권세연(1836~1899)의 격문도 발견됐다. 20세기 대표적인 문인 화가로 꼽히는 아산 조방원 화백(1926~2014)이 개인적으로 수집해온 고서 1만990건도 이번 조사에서 빛을 보게 됐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성리대전(性理大全)’ 목판본 919장이 대표적이다. 이아람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행정사무관은 “성리대전 목판본이 이렇게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발견된 것 역시 처음”이라며 “문화재청은 이 사료들을 미래의 국가지정문화재로 보고 후속 연구를 진행해 기록유산으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조선 밤하늘을 수놓은 별 1467개와 별자리 295개를 새긴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이 디지털 기술과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은 “디지털 실감영상 기술을 접목해 개편한 과학문화 상설전시실을 27일부터 공개한다”고 26일 밝혔다. 새 단장을 한 상설전시실의 핵심은 조선 태조(1335∼1408)가 1395년 제작한 가로 122.5cm, 세로 211cm의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을 디지털로 구현한 것이다. 박물관은 이 각석 위 천장에 밤하늘을 형상화한 둥근 스크린을 띄워 계절에 따라 바뀌는 조선 별자리를 볼 수 있게 했다. 또 각석 바로 위에도 유물에 새겨진 별자리 295개를 비추는 영상을 띄워 한눈에 관람할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1247년 제작된 중국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 상설전시실에서는 각석을 포함해 조선의 과학유물 45건을 선보인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가로 122.5㎝, 세로 211㎝, 두께 12㎝ 크기 거대한 돌판. 겉보기에 검은 돌덩어리와 같은 이 돌판의 표면 위로 1467개의 별과 295개의 별자리가 선명하게 빛을 밝히며 수놓는다. 조선의 밤하늘을 새겨 넣은 천문도 국보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가 디지털 실감영상 기술과 만나 새롭게 태어났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이 27일부터 새롭게 선보이는 과학문화 상설전시실에는 14세기 말 천문도에 21세기 디지털 실감영상 기술을 접목해 유물의 진가를 드러낸다.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1247년 만들어진 중국의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로,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1335~1408)가 1395년 제작했다. 이전에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왔지만 여태까지는 학계 전문가가 아니면 이 유물의 진가를 알기 어려웠다. 별자리를 새긴 각석의 표면이 흐릿해 육안으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최근 6개월간 전시실을 개편하며 이 유물 위에 조선 밤하늘을 형상화한 둥근 스크린을 띄웠다. 계절이 흐르며 변하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알기 쉽게 영상화했을 뿐 아니라 실제 유물의 표면 위에도 별자리를 비추는 실감 영상을 띄워 유물에 새겨진 295개의 별자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전시한 것이다. 새 단장을 마친 전시실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등 국보 3건과 ‘앙부일구’ 등 보물 6건을 포함해 조선시대 과학유물 총 45건을 선보인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제왕의 학문’이라고 불렸던 천문학에 주목했다. 농경사회에서 관상수시(觀象授時·천문을 관찰해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일)는 곧 국왕의 책무였다. 1782년 제작된 국보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측우기를 올려놓던 받침대)’에는 농사를 짓는 백성들을 위해 빗물의 양을 측정하고 알리려는 국왕의 마음이 담겼다. 높이 30.3㎝, 너비 45.5㎝ 크기 측우대에는 “그릇은 비록 작으나 성군께서 홍수와 가뭄을 다스리고자 힘쓴 뜻이 담겨 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의 걱정과 기쁨이 연결돼 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천문과학사를 보여주는 유물도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다. 1434년 처음 만들어진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 ‘앙부일구’뿐만 아니라 소현세자(1612~1645)가 청나라에서 조선에 처음 들여온 평면 해시계,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국보 ‘자격루(自擊漏)’등 시계의 변천사도 만나볼 수 있다. 이밖에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달력을 알려준 역법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등도 소개된다. 전시를 기획한 김재은 학예연구사는 “이 유물 속에는 농사를 짓는 백성을 이롭게 하려는 역대 국왕들의 애민 정신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어느 해라고 힘들지 않았겠습니까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 국내외에서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책에서 삶에 대한 위로와 공동체의 나아갈 길을 찾고픈 열망 때문일까요. 출판인, 학자 등 30명이 뽑은 ‘2022년 동아일보 올해의 책’은 소설과 시, 과학서, 평론집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고루 뽑혔습니다. 그리고 유독 ‘애도’를 다룬 책이 여럿 눈에 띕니다. 선정위원마다 3권씩 추천을 받아 그 가운데 상위 10권을 추려 소개합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출판학술팀》각계 전문가들이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책’은 김훈 작가(74)의 장편소설 ‘하얼빈’과 미국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교양과학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뽑혔다. 각각 6표를 얻었다. 독자에게 익숙한 한국 대표 작가와 생경한 해외 작가의 책이 동시에 선택됐다는 게 한국 출판시장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척도로 읽힌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저격하는 운명적인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안 의사가 거사를 실행하기 약 일주일 전인 1909년 10월 19일 무렵부터 이토를 저격한 26일 전후까지로 초점을 맞췄다. 안 의사와 이토가 각자 하얼빈으로 가는 행로와 과정을 3인칭으로 풀어내, 이순신 장군의 1인칭 시점으로 썼던 장편소설 ‘칼의 노래’(2001년·문학동네)보다 더욱 절제된 화법이 돋보인다. 출판인과 학자들은 고루 ‘하얼빈’을 역작이라 꼽았다. 안병현 교보문고 대표는 “위인 안중근에 대해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안중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신선하다”고 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안중근이 살아있는 인간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오히려 진정한 영웅으로 느껴진다”고 평했다. “2022년에 안중근의 삶을 김훈의 소설로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의 한국 사회와 겹쳐 마음을 괴롭게 했다”(김형보 어크로스 대표)는 의견도 있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밀러가 미국 어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나간 책이다. 교양과학서지만 인간 자체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인문에세이로도 볼 수 있다. 밀러는 ‘미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보디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지만 국내에선 비교적 낯선 편. 중소 출판사가 별다른 마케팅 없이 출간한 책이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점도 주목받았다. 주연선 은행나무 대표는 “베스트셀러의 상식을 뒤엎는 책이다. 우리가 자연에 선을 긋고 종(種), 과(科)로 나누고 가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며 편견일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한다”고 말했다. 정지혜 블러썸크리에이티브 IP사업팀장은 “관념은 뒤집힐 수도 있다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했다. “잔인한 혐오에 대한 명철한 질책,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뭉클한 탐사”(박상준 민음사 대표)라는 평가처럼 책이란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다.■H마트에서 울다미셸 자우너 지음·정혜윤 옮김·408쪽·1만6000원·문학동네“엄마와 딸, 음식과 정체성, 사랑과 애도에 대해 담담하고 섬세하게 풀어낸 멋진 에세이.”(권은희 까치글방 편집팀장) 미국 팝 밴드의 보컬로 활동 중인 한국계 미국인 저자가 쓴 자전적 에세이로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의 추천 도서로도 화제를 모았다. 다른 친구들의 엄마와 다른 자신의 한국인 엄마를 이해하기 힘들었던 저자는 엄마가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뒤 한국마트를 드나들며 추억을 되짚는다. “올해 본 책 가운데 가장 많이 울었던 책”(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이란 평처럼 섬세하고 감동적인 글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지음·268쪽·1만5000원·창비“2022년 한국 문학의 최대 수확. 우리도 이제 ‘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에 버금가는 작품을 갖게 됐다.”(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빨치산의 딸’(1990년)을 쓴 소설가가 32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사흘 동안 장례식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놀랍도록 흥미롭게 엮어냈다. 묵직한 현대사의 질곡을 짚어내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한 흐름을 잃지 않아 “오랜만에 만난 모든 것을 갖춘 소설”(김기중 더숲 대표)이란 극찬도 나왔다. MZ세대에게는 생경한 작가가 묵직한 시대적 배경을 다룬 소설임에도 소셜미디어에서 큰 화제를 모은 점도 눈길을 끌었다. ■녹스앤 카슨 지음·윤경희 옮김·192쪽·5만5000원·봄날의책캐나다 시인이자 번역가, 고전학자인 저자가 22년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헤어져 지내던 오빠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기 위해 만든 책. 고대 로마 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오빠의 부재에 대한 상념을 자신의 수첩에 쓰고 그리고 오리고 붙인 것을 책으로 완성했다. 국내판 역시 “원본의 고유성을 잘 유지한 물성의 예술품”(정은숙 마음산책 대표)으로서 소장 가치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흔적을 어루만지고 그의 손때와 온기, 사라짐까지 남기는 애잔한 틀로서의 비망록”(박상준 민음사 대표)이 이만한 결과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인간은 결국 홀로 떠나지만, 결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일깨운다. ■인생의 역사신형철 지음·328쪽·1만8000원·난다문학평론집이 이례적으로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저자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시 25편과 이에 얽힌 작품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낸 평론집. 10월 출간 일주일 만에 2만 부가 넘게 판매되며 저력을 과시했다. 문학평론집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와 에세이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등을 통해 탄탄한 독자층을 구축한 저자는 이번에도 “전통 시화를 21세기 문학 형식으로 되살린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다)’의 표본”(안대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을 선보였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진은영 지음·140쪽·1만2000원·문학과지성사“시집은 천천히 읽어야 좋겠지만 그의 시집은 하룻밤 새 다 읽어버렸다.”(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문제의식을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시인이 10년 만에 선보인 시집이다. 작품 활동의 공백기가 “시가 지녀야 할 사회적 역할을 돌아본 시간”이었다는 저자의 신작은 시집으로는 드물게 한 온라인 서점 종합순위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어쩌면 “아무도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미움의 시대에 비춰준 가느다란 빛”(황서현 휴머니스트 편집주간)처럼 와닿았기 때문일까. 2014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유예은 양(단원고 2년)을 위한 시 ‘그날 이후’도 함께 실렸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나다 도요시 지음·황미숙 옮김·232쪽·1만5500원·현대지성일본 영화전문지에서 일했던 독립 칼럼니스트가 영화를 영화관이 아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통해 관람하는 현 상황을 고찰했다. 저자는 특별한 공간에서 수동적으로 감상하던 영화를 이제 안방이나 카페에서 자유롭게 건너뛰며 보는 현상에 대해 “길고 어려운 콘텐츠 대신 짧고 이해하기 쉬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김홍민 북스피어 대표)라고 짚어낸다. 저자가 볼 때 이 같은 효율성의 극단은 결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 숨겨진 콘텐츠의 공급 과잉과 ‘가성비’ 지상주의가 만연한 시대상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 사회의 트렌드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훌륭한 통찰력을 제공”(안병현 교보문고 대표)한다. ■정상은 없다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정해영 옮김·600쪽·3만3000원·메멘토미국 조지워싱턴대 인류학과 교수인 저자가 역사적으로 정상이란 허구에서 비켜난 이들에게 인류사회가 어떻게 낙인을 찍어 왔는지를 짚었다. “올해 큰 화제를 모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신드롬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박성열 사이드웨이 대표)에게 추천한다는 평이 나왔다. 자본주의와 전쟁, 의료화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신질환과 장애에 대한 낙인의 역학을 탐구한 책은 문화인류학적 고찰을 통해 낙인이란 한계를 극복하려는 진정성이 묻어난다.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에 대한 상식을 뒤엎는, 성숙한 한국 사회를 위한 모두의 필독서.”(주연선 은행나무 대표) ■차이나 쇼크, 한국의 선택한청훤 지음·304쪽·1만7000원·사이드웨이패권적인 ‘제국의 길’을 선택한 중국이 왜 세계 여러 나라와 마찰을 거듭하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10년 넘게 중국 산업현장에서 일한 저자는 중국과 관련된 다양한 현안을 다뤘다. “학문적 중국 전문가는 적지 않으나 중국 관련 비즈니스에 종사하며 중국의 겉과 속을 정확하게 풀어낸”(표정훈 출판평론가) 글이기에 더욱 시사하는 바가 컸다. 산업 굴기와 첨단산업 및 반도체 기술, 미국과의 패권 경쟁, 농촌 문제와 정치 리스크 등 중국이 당면한 주요 현안을 여러 각도에서 분석한다. 진지한 통찰력이 돋보이면서도 “쉽고 설득력 있으며, 경험을 밑천으로 필력까지 갖춰”(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더 흥미롭게 읽힌다. 다양한 장르 사랑받은 한 해… 애도 속 ‘그리움’ 담은 시집 눈길 그 외 눈여겨볼 책들12위는 없었다. 올해는 1표씩을 받은 책 51권이 함께 ‘공동 11위’를 차지했다. 소설과 에세이, 교양서뿐 아니라 시집과 각본까지…. 올해의 책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두루 사랑받은 ‘거의 올해의 책’이 유난히 많았다. 특히 유난히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시집들이 눈길을 끌었다. 올해의 책에 포함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진은영 지음·문학과지성사) 외에도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고명재 지음·문학동네) ‘파울 첼란 전집 1∼5’(문학동네) ‘슬픔이 택배로 왔다’(정호승 지음·창비) 등 시집의 약진이 눈부셨다. 시집이 올해의 책에 든 것도 최근 10년 만에 처음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로 멍든 가슴이 여전히 시퍼렇게 남아 있어서일까. 루마니아 시인 ‘파울 첼란 전집’을 추천한 김민정 난다 대표는 “참사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 ‘눈물자국의 가장자리에서 배우렴/ 사는 것을’이란 구절이 눈에 밟혔다.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눈물과 자국과 가장자리와 삶이란 단어를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고세규 김영사 대표도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를 추천하며 “그저 허무에 머무르지 않고 구원의 길을 찾아 우리를 위로해주는 시인의 맑은 마음”을 주목했다. 과학책은 5권이 공동 11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 가운데 해리 클리프 영국 케임브리지대 물리학과 교수가 펴낸 ‘다정한 물리학’(다산사이언스)에 대해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는 “이야기를 쫓아가다 보면 어려운 이론물리학의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며 추천했다.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닐 슈빈 지음·부키)와 ‘과학은 어떻게 세상을 구했는가’(그레고리 주커만 지음·브론스테인) ‘빙하여 안녕’(제마 워덤 지음·문학수첩) ‘내 생의 중력에 맞서’(정인경 지음·한겨레출판사)도 비슷한 공통점을 지녔다. 과학정보는 물론이고 인문학적 사색도 담아 ‘과포자’(과학포기자)도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책들 덕분에 우리는 과학이라는 일상을 더욱 다채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신지혜 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는 평처럼 진입장벽을 낮추고 편안하게 다가온 교양과학서가 내년에도 많아지길 기대해본다.올해의 책 선정위원(30명·가나다순) 강성민(글항아리 대표) 강인욱(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세규(김영사 대표) 권은희(까치글방 편집팀장) 김기중(더숲 대표) 김민정(난다 대표) 김영민(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형보(어크로스 대표)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김효형(눌와 대표) 박상준(민음사 대표) 박성열(사이드웨이 대표) 박윤우(부키 대표) 박정재(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백지숙(서울시립미술관장) 신지혜(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안병현(교보문고 대표) 안지미(알마 대표) 윤범모(국립현대미술관장) 이구용(KL매니지먼트 대표) 이기진(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병훈(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장은수(출판평론가)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정지혜(블러썸크리에이티브 IP사업팀장) 조성웅(유유출판사 대표) 주연선(은행나무 대표) 표정훈(출판평론가) 황서현(휴머니스트 편집주간)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최훈진 기자 choigiza@donga.com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당산나무 할아버지’가 됐다고 해서 별로 달라진 건 없어요. 늘 해오던 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내 자식처럼 나무를 지킬 뿐입니다.” 경남 창원시 북부리 동부마을. 주민 60여 명인 이 마을의 이장인 윤종한 씨(60)는 올해 10월 또 다른 중책을 맡게 됐다. 바로 ‘당산나무 할아버지’다. 당산나무 할아버지는 문화재청이 전국 천연기념물 가운데 노거수(老巨樹) 179그루를 선정해 올해 3월부터 주변 마을에서 이를 지킬 담당자를 임명한 공식 직함이다. 현재까지 윤 씨를 포함해 전국에서 85명이 뽑혔다. 물론 당산나무 할머니도 여럿 있다. 문화재청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무의 상태를 살피고,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나무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윤 씨가 맡은 천연기념물은 ‘창원 북부리 팽나무’. 올해 화제의 드라마였던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왔던 나무다. 윤 씨와 함께 16일 수령 500년가량의 팽나무를 찾았다, 극심한 한파에도 이 나무를 보기 위해 30여 명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윤 씨는 “최근까지 매일 1000명 이상, 차량만 쳐도 500대가 넘게 마을을 방문했다”고 했다. “그 바람에 최근 몇 달은 생업인 농사도 뒷전이었어요. 나무 보러 오는 인파를 관리하느라 주차요원도 됐다가 청소부도 됐다가…. 나무를 사랑해줘서 고맙긴 한데, 너무 많이 찾아와서 팽나무가 스트레스 받지 않을까 걱정되긴 해요.” 한파로 인파가 다소 줄었지만 당산나무 할아버지는 여전히 바빴다. 주변 쓰레기를 치우고, 나무에 생채기는 없는지 꼼꼼히 살폈다. 윤 씨는 “하루에 쓰레기가 50L짜리로 8포대가 나올 정도로 몰려들기도 했다”며 “바쁠 땐 화장실 갈 틈도 없다”며 웃었다. ‘당산나무 할아버지’는 문화재청 공식 직함이지만 임금이나 수고비는 없다. 하지만 윤 씨는 “집이 나무에서 걸어서 1분 거리라 당연히 내가 맡아야 할 일”이라며 “사실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고 했다. 10월이면 함께 당산제를 지내는 팽나무를 동부마을 주민 모두가 정성스레 돌봐왔다고 한다. “평생 농사만 지어서 자식들한테 변변한 아파트 한 채 물려주기 어려워요. 하지만 마을을 지켜준 500년 팽나무는 돌보고 지켜줄 수 있죠. 미래 아이들에게 훌륭한 자연유산을 물려준다는 마음으로 돌보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이 당산나무 할아버지 제도를 만든 것도 이런 마을 주민들의 선의를 믿기 때문이었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이원호 학예연구관은 “전문가는 아니어도 오랫동안 나무를 돌보고 지켜봐온 주민들이야말로 나무를 제일 잘 아는 보호자들”이라며 “이번에 임명된 당산나무 할아버지 가운데 화마에서 천연기념물을 지켜내신 분도 있다”고 귀띔했다. 주인공은 3월 2일 경북 ‘울진 화성리 향나무’의 당산나무 할아버지로 임명된 이재욱 씨(59). 임명된 지 사흘 만인 5일에 난 울진 화재 때 집도 내팽개친 채 소방대원들과 향나무를 지켰다. 16일 통화한 이 씨는 “당시 농기구가 가득했던 60평 창고가 다 탔다”며 “창고야 다시 지으면 되지만 천연기념물은 한번 잃으면 끝이지 않느냐”고 했다. “마지막 불씨 하나가 잡힐 때까지 나무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재산 피해가 4억 원 났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당산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란 뜻이에요. 대대로 이어진 전통을 불에 타 사라지게 할 순 없잖아요. 고민할 게 뭐 있어요. 나무를 지켜야지.”창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30년대부터 20년간 한국 문화재를 거래한 외국인 명단을 기록한 장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연구 등에 필요하다면 가져가도 좋습니다.” 1958년부터 미군 군무원으로 30여 년간 한국에 살았던 로버트 마티엘리 씨(97)는 올해 초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연락했다. 미국 오리건주에 사는 그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재단 연구원들을 자택으로 초대했다. 자신이 그동안 모은 한국 문화재 1946점을 조사 연구하도록 한 것이다.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던 6월. 재단 실태조사부의 김륜용 선임(36)이 마티엘리 씨의 자택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 마티엘리 씨는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는 것인데 보여줄 게 있다”며 노트 하나를 꺼내 들었다. 1936∼1958년 서울 중구 태평로에서 영업했던 ‘사무엘 리 고미술상’ 고객 장부로, 당시 거래된 우리 문화재 품목과 거래자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보자마자 보통 물건이 아님을 직감했어요.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재들이 언제 어떻게 유출됐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였습니다. 마티엘리 씨에게 ‘국외 문화재를 추적할 중요한 사료’라고 했더니 곧장 한국에 기증하겠다고 했습니다.”(김 선임) 재단은 이 고객 장부를 포함해 마티엘리 씨가 소장하던 당대 문화재 관련 사료 60점을 기증받았다고 19일 밝혔다. 고미술상을 운영한 사무엘 리가 그에게 남긴 장부에는 670건이 넘는 한국 문화재 거래 목록이 자세하게 담겨 있다. 김 선임은 “거래 장부를 연구하면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의 유출 경로를 파악해 연구 및 환수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엘 리 장부에는 눈에 띄는 인물도 있다. 장애를 극복한 세계적인 사회복지사업가 헬렌 켈러(1880∼1968)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7월 강연 및 연설을 위해 방한했던 그는 고미술상에서 조선시대 서안(書案·책을 읽는 좌상)을 구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국 문화재에 애정이 깊은 마티엘리 씨는 1725년 제작된 조선 불화 ‘오불도’를 2016년 국내에 반환하기도 했다. 1970년 서울 종로구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한 작품으로, 2014년 미 포틀랜드박물관에 기탁하는 과정에서 전남 순천 송광사 소유였다가 도난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티엘리 씨는 불법 반출된 문화재란 소식을 듣고 “이제라도 진실을 알게 돼 다행이다”라며 대한불교조계종에 이를 기증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당산나무 할아버지’가 됐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어요. 늘 해오던 대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내 자식처럼 나무를 지켜볼 뿐입니다.” 주민 60여 명이 도란도란 모여 사는 경남 창원 북부리. 이 작은 마을의 이장 윤종한 씨(60)는 올 10월 또 하나의 중책을 맡았다. 문화재청이 10월 이 마을의 보호수 ‘창원 북부리 팽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서 그를 ‘당산나무 할아버지’로 임명했다. 문화재청은 올 3월부터 전국에 있는 천연기념물 노거수 179그루가 뿌리 내린 마을마다 나무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킬 당산나무 할아버지를 임명하고 있다. 현재까지 윤 씨를 포함해 전국에 총 85명.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직원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나무의 상태를 알리고, 산불이나 수해와 같은 자연재해 때 ‘비상대기조’로 나무 곁을 지키는 가장 가까운 이웃 안전망이다. 특히 ‘창원 북부리 팽나무’는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던 바로 그 나무다. 수령이 500년가량 되는 이 나무는 영하를 맴도는 한파가 찾아온 16일에도 관광객 수십 명이 나무를 보러 왔다. 드라마가 한창 인기를 끌던 7, 8월부터 올 가을까지는 매일 1000여 명, 500대가 넘는 차량이 마을을 찾았다고 한다. 이날 동아일보와 만난 윤 씨는 두 눈이 붉게 충혈 될 정도로 바쁜 농번기에도 나무 주변 언덕에 올라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분리수거하고 있었다. 나무 주변을 크게 한바퀴 돌면서 땅에 떨어진 쓰레기는 없는지, 혹여 나뭇가지에 생채기가 나지는 않았는지 들여다봤다. 그는 “최근 3, 4개월 동안은 생업을 뒷전으로 미뤄 두고 매일 이 나무를 보러 오는 인파를 관리하기 위해 주차 요원도 됐다가 청소부도 됐다가 안전관리 요원 노릇도 하고 있다”며 웃었다. “혹시라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나무가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내 자식처럼 돌봤어요. 하루가 지나면 4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8포대가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으니까요. 바쁠 땐 화장실 갈 틈도 없었어요.” 돈 한 푼 받지 않는 가욋일…. 하지만 그는 “이미 30년 전부터 해오던 일이라 이전과 달라진 건 없다”고 말했다. 윤 씨는 “이 마을에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한 해 두 번씩 나무 주변에 자라난 잡초를 제거하고 10월이면 십시일반 돈을 걷어 당산제를 지내왔다”고 했다. 실제 그의 집은 나무가 심어진 언덕에서 도보로 1분 거리에 떨어져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사는데 나보다 오래 이 마을에서 살아온 나무를 나 몰라라 하고 살 수는 없다”는 얘기다.“농촌에서 나고 자란 제가 자식들에게 아파트나 빌딩은 물려주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500년을 살아온 저 나무 한 그루는 지켜줄 수 있습니다. 농촌에서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자산은 저 나무와 같은 자연유산 아닐까요.” 대대손손 물려줄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화마가 덮친 새벽 집 대신 나무 곁을 지킨 이도 있다. 올 3월 경북 울진 화재 때 ‘당산나무 할아버지’ 이재욱 씨(59)는 집 창고가 전부 불에 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고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천연기념물 ‘울진 화성리 향나무’가 있는 자리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농기구 30여 대를 보관하고 있는 60평 창고를 잃어 4억 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그는 “창고는 다시 지으면 그만”이라며 웃었다. “저와 문화재청 직원, 소방대원들이 마지막 불씨를 잡을 때까지 일주일 넘게 나무 곁을 지켰어요. 그 바람에 정작 제 집 창고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불길에 무너진 마을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이 나무는 불에 타면 영영 사라지는 거잖아요. 고민할 게 뭐 있어요. 나무를 지켜야죠.”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여정(가명·32) 씨는 “아픈 몸으로도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17세 때 소화기관 여러 부위에서 만성염증을 일으키는 크론병 진단을 받은 그는 평생 이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대장과 소장 일부를 절제해 몸무게가 32kg까지 빠지기도 했다.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지만 꿈을 포기하진 않았다. 26세 때 다시 공부를 시작해 어렵사리 간호사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일터에서 찾아왔다. 수시로 복통이 왔지만 ‘민폐’가 될까 봐 아프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병원 진료를 받으려고 연차를 쓸 때마다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여정 씨는 꿈을 이룬 지 6개월 만에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골골한 청년들’은 비영리법인 연구기관인 사회건강연구소가 허리디스크와 식도염, 소뇌염 등 여정 씨처럼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청년 7명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스스로를 “부도난 수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부르며 자책하는 이들의 삶에는 만성질환자를 배척해 온 사회의 민낯이 담겨 있다. “아프면 쉬어라.” 이 청년들에게 이는 너무나 가혹한 말이었다. 만성질환자 홍이(가명) 씨는 “아픈 사람은 회복돼야만 일할 수 있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어쩌면 선의로 했을 수도 있는 말이, 누군가에겐 차별이 될 수 있단 얘기다. 만성질환자는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일일까. 유럽에선 2000년대 초반부터 만성질환자 실태를 조사하고, 이들이 일터에서 차별받지 않는 ‘환자 친화적 일터’를 마련해 왔다. 회사는 만성질환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교육도 시행한다. 더 나아가 이들이 원할 때는 아프더라도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 애쓴다.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만성질환자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만성질환자가 될 수 있다.” 2016년 ‘유럽 삶의 질 조사’에 따르면 유럽인의 약 28%가 만성적이고 장기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 우리 역시 소수의 일로 치부할 게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이 사안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할아버지가 이렇게 뜻깊은 일에 참여하셨다는 걸 가족도 몰랐어요. 가업의 뿌리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충북 괴산군에서 3대째 ‘대성사 양조장’을 운영하는 유기옥 씨(64)는 할아버지가 1931년 6월 동아일보가 주도한 ‘충무공 유적 보존 민족 성금’에 5원을 기탁했다는 걸 10월에 처음 알게 됐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가 올해 현충사 중건 90주년을 맞아 6월부터 당시 충무공 위토(位土·묘소 관리비 조달용 토지)를 지키는 성금을 냈던 선열의 후손 찾기에 나서며 이런 사실이 밝혀졌다. 현충사관리소는 16일 오후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서 민족성금 기탁자 후손 초청행사를 열고 유 씨를 포함해 지금까지 찾은 성금 기탁자 후손(개인 31명, 단체 21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유 씨는 “할아버지가 민족이 어려울 때 선뜻 기부한 정신을 가풍으로 이어 가겠다”며 “할아버지가 일군 양조장에 감사패를 소중히 진열할 계획”이라고 했다. 충무공 유적 보존 모금운동은 1931년 5월 13일 동아일보가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 묘소 위토’라는 제목의 특종 기사를 쓰며 촉발됐다. 동아일보는 “민족 은인 이충무공의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보도는 민족의 정신을 일깨웠다. 동아일보가 주도한 ‘이충무공 유적 보존위원회’에 1932년 6월까지 약 2만 명, 400여 단체가 보낸 1만6021원30전(현재 10억 원 상당)이 모였다. 결국 보존위원회는 충무공 위토를 되찾았고 남은 돈으로는 1932년 충무공 고택 옆에 현충사를 중건했다. 문화재청은 올 8월 당시 성금 편지와 지출장 등 사료 4254점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여정 씨(32·가명)는 “아픈 몸으로도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17세 때 소화기관 여러 부위에서 만성 염증을 일으키는 크론병 진단을 받은 그는 평생 이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대장과 소장 일부를 절제해 몸무게가 32㎏까지 빠지기도 했다. 결국 고등학교를 자퇴했지만 꿈을 포기하진 않았다. 26세 때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해 어렵사리 간호사의 꿈을 이뤘다. 하지만 또 다른 고통이 일터에서 찾아왔다. 수시로 복통이 왔지만 ‘민폐’가 될까봐 아프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병원 진료를 받으려고 연차를 쓸 때마다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결국 여정 씨는 꿈을 이룬 지 6개월 만에 퇴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골골한 청년들’은 비영리법인 연구기관인 사회건강연구소가 허리디스크와 식도염, 소뇌염 등 여정 씨처럼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청년 7명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스스로를 “부도난 수표”,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라 부르며 자책하는 이들의 삶에는 만성질환자를 배척해온 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담겨 있다. “아프면 쉬어라.” 이 청년들에게 이는 너무나 가혹한 말이었다. 만성질환자 홍이 씨(가명)는 “아픈 사람은 회복돼야만 일할 수 있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어쩌면 선의로 했을 수도 있는 말이, 누군가에겐 차별이 될 수 있단 얘기다. 실제 해외 연구 결과를 보면 만성질환자들은 질병으로 겪는 고통만큼이나 사회적 경제적 불안 때문에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성질환자는 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일일까. 유럽에선 2000년대 초반부터 만성질환자 실태를 조사하고, 이들이 일터에서 차별받지 않는 ‘환자 친화적 일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회사는 만성질환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교육프로그램도 시행한다. 더 나아가 이들이 원할 때는 아프더라도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 애쓴다.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만성질환자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만성질환자가 될 수 있다.” 2016년 ‘유럽 삶의 질 조사’에 따르면 유럽인의 약 28%가 만성적이고 장기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 노동인구가 고령화할수록 만성질환자도 늘어난다. 우리 역시 소수의 일로 치부할 게 아니라 우리의 문제로 이 사안에 적극 대처해야 한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고대 이집트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기원전 722년∼기원전 655년경 고대 이집트 테베의 신관(神官)이던 호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영생을 바라며 생전 자신의 목관을 직접 주문 제작했다. 길이 199cm, 폭 72cm, 높이 38cm인 목관에는 사자(死者)의 심장과 선행을 상징하는 깃털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후세계로 향하는 최후의 관문에서 깃털보다 무거운 악행을 저지른 이는 소멸한다고 한다. 과연 호르는 이 관문을 통과했을까. 고대 이집트 문명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특별전 ‘이집트 미라전: 부활을 위한 여정’이 15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개최됐다. 2만5000점이 넘는 이집트 컬렉션을 소장한 네덜란드 국립 고고학박물관의 유물 중에서 미라 관 15점과 사람 미라 5구 등 엄선된 유물 250여 점이 한국에 왔다. 컴퓨터단층촬영(CT)으로 미라의 내부 미스터리를 푼 연구 성과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4부로 구성된 전시에서 1, 2부는 고대 이집트 무덤에서 출토된 다채로운 유물을 소개한다. ‘쿠와 그의 가족의 석비’는 놓치면 안 된다. 기원전 1878년∼기원전 1843년경 만들어진 이 석비에는 3줄의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첫 번째 줄은 ‘현세의 왕이 저승의 왕에게 공물을 바친다’라고 적혀 있으며, 두 번째 줄에는 ‘사자 쿠는 지역 감독관’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곽민수 한국이집트학연구소장은 “석비의 주인과 그의 직업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글귀”라며 “고대 이집트에선 왕이나 신관 같은 고위 계급만 제사를 지내는 권한을 가졌다”라고 했다. 베일에 싸인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을 형상화한 ‘투탕카멘의 좌상’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투탕카멘은 대중적으로는 유명하지만, 18세에 숨져 사료가 많지 않고 후대 왕들이 관련 유물을 훼손해 여전히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투탕카멘의 좌상’ 역시 목이 잘려 있어 후대에서 훼손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 3부는 고대 이집트의 사후세계관에 초점을 맞췄다. ‘아멘호테프의 관’을 포함해 고대 이집트 고위층의 목관 10점이 둥근 원을 그리며 세워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후세계로 가는 관문에서 망자가 난관을 극복하는 주술을 적은 파피루스 ‘사자의 서’ 6점과 시신이 훼손되지 않길 바라며 만든 ‘제드 기둥 부적’은 고대 이집트인이 사후세계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보여준다. 곽 소장은 “함께 묻힌 일꾼 조각상 샤브티도 눈여겨봐야 한다”며 “사후세계에 입성한 이가 편히 쉬도록 400점이 넘는 샤브티를 묻는 관습이 있었다”고 했다. 4부에선 이집트 유물과 현대 기술이 만난다. 네덜란드 국립 고고학박물관은 1850년대부터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다리며 미라를 보존해 왔다. 헬베르테인 크뤼도프 학예연구사는 “유물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한 과거의 결단 덕에 미라의 붕대를 풀지 않고도 오늘날 CT로 여러 비밀을 풀 수 있었다”며 “이번 전시에서 사람 미라 5구를 2018년 촬영한 자료를 공개했다”고 밝혔다. 사후세계에서 영생을 갈망했던 고대 이집트인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 이제는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도 바뀌었다. 크뤼도프 학예연구사는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고 강조했다. “가슴 한구석에 선악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둔 사람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지 않을까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가 지금 좋은 삶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보길 바랍니다.” 내년 3월 26일까지. 1만3000∼2만 원.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청와대에서 한국 근·현대문학 특별전 ‘이상, 염상섭, 현진건, 윤동주, 청와대를 거닐다’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2일부터 내년 1월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와대 춘추관에서 전시를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전시의 주인공은 종로 일대에서 활동하던 문인과 화가들이다. 소설가 염상섭(1897∼1963)과 현진건(1900∼1943), 이상(1910∼1937)과 시인 윤동주(1917∼1945) 등 근·현대 문인의 대표작 표지 91점과 초상, 삽화 등 총 97점을 선보인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 표지(사진)도 볼 수 있다. 염상섭이 1924년 발표한 ‘해바라기’부터 대표작 ‘삼대’의 초판본 표지를 비롯해 그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친분을 쌓은 여성 시인이자 화가 나혜석(1896∼1948)이 그린 ‘견우화’의 표지도 선보인다. 예술가들 간의 교감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시인 구상(1919∼2004)을 위해 그려준 ‘초토의 시’ 표지와 여성 화가 천경자(1924∼2015)가 직접 그린 ‘여류문학’ 창간호 표지도 전시된다. 문체부가 국립한국문학관과 삼성출판박물관, 영인문학관과 함께 마련한 이번 특별전은 올해 9월 장애예술인 작품전에 이어 개방된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리는 두 번째 전시다. 전시를 기획한 무료이며 별도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다. 평일 4회, 주말 6∼7회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6, 7일간 지독한 추위에 좁은 차 속에서 고생했단 말을 다 어찌 적으리오. 그러나 괴로운 사색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일가가 1910년 12월 중국 옌볜(延邊) 지역의 서쪽인 서간도로 망명하던 밤. 그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이은숙 여사(1889∼1979·사진)는 이런 글을 적으며 각오를 다졌다. 서울 중구의 이회영기념관은 11일 여사의 43주기를 맞아 1966년 그가 쓴 독립운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를 12일 전자책으로 처음 공개했다. 기념관은 17일부터 내년 10월 31일까지 회고록을 바탕으로 여사의 생애를 돌아보는 특별전 ‘나는 이은숙이다’도 개최한다. ‘서간도 시종기’에는 우당의 부인이자 독립지사 이규창(1913∼2005)의 어머니로, 그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이은숙 여사의 일생이 담겼다. 여사에게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 여사는 1932년 우당이 일제에 붙잡혀 고문 끝에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뒤 궁핍한 생활에도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원고에는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은 겨우 20원가량 되니, 그마저도 받으면 그 즉시로 (베이징에) 부쳤다’는 내용이 있다. 홀로 삯바느질로 오남매를 키우면서도 돈이 생기면 독립군에게 보낸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서해성 예술감독은 “원고에는 역경에도 굴하지 않은 굳은 의지가 깊이 배어 있다”며 “전시를 통해 이 여사가 주체적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6, 7일간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했단 말을 다 어찌 적으리오. 그러나 괴로운 사색은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일가가 1910년 12월 중국 옌볜(延邊) 지역의 서쪽인 서간도로 망명하던 밤. 그의 부인인 독립운동가 이은숙 여사(1889~1979)는 이런 글을 적으며 각오를 다졌다. 서울 중구 이회영기념관은 11일 이 여사의 43주기를 맞아 1966년 그가 직접 쓴 독립운동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를 12일 전자책 형태로 처음 공개했다. 기념관은 17일부터 내년 10월 31일까지 해당 회고록을 바탕으로 이 여사의 생애를 돌아보는 특별전 ‘나는 이은숙이다’도 개최한다. ‘서간도 시종기’에는 우당의 부인이자 독립지사 이규창(1913~2005)의 어머니로, 그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이은숙 여사의 일생이 담겨 있다. 이 여사에게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전시는 힘겨운 삶에도 꿋꿋히 독립의 길을 걸었던 이 여사의 생애를 고스란히 비춘다. 이 여사는 1932년 우당이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문 끝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뒤 궁핍한 생활에도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원고에는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은 겨우 20원 가량 되니, 그마저도 받으면 그 즉시로 (베이징에) 부쳤다’는 내용이 있다. 삯바느질로 연명하며 홀로 오남매를 키우면서도 돈이 생기면 독립군에게 보낸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서해성 예술감독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이 여사가 써내려간 원고에는 역경에도 굴하지 않은 굳은 의지가 깊이 배어 있다”며 “이번 전시를 통해 이 여사가 누군가의 부인이나 어머니가 아닌 주체적 여성 독립운동가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했다.이소연기자 always99@donga.com}

“지푸라기 한 가닥은 별 힘이 없죠. 하지만 여러 가닥을 엮으면 많은 이가 달려들어도 끊어지지 않는 엄청난 힘을 발휘합니다.” 국가무형문화재 ‘기지시줄다리기’ 보유자인 구자동 씨(79)에게 ‘줄다리기’는 단순한 전통놀이가 아니다. 국립무형유산원이 지난달 펴낸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 자서전―기지시줄다리기 구자동’에 자신의 생애를 담은 그는 12일 전화 인터뷰에서 “내가 지켜온 건 줄다리기에 담겨 있는 화합의 정신”이라고 했다. 줄다리기는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진다. 그중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건 경남 창녕군 영산면의 ‘영산줄다리기’와 충남 당진시 송악읍 기지시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지시줄다리기’뿐이다. 기지시줄다리기는 100m 넘는 지네 모양을 형상화한 줄이 특징이다. 구 보유자는 10대 때 수천 명이 맞붙는 줄다리기의 에너지에 매료돼 당시 1대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였던 고 이우영 선생(1928∼2000)을 사사했다. 그는 “힘만 들고 돈 안 되는 일을 왜 하느냐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가 하나 되는 줄다리기가 좋아 60년 넘게 전통을 지켜왔다”고 했다. “수백 년 이어온 줄다리기 전통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적도 있어요. 1972년 미신 타파라며 줄다리기 존폐 논란이 일었죠. 큰일 났다 싶어 지역 원로들의 증언을 채록해 1973년 충남 민속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1982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죠.” 그는 2015년 ‘한국의 줄다리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을 때를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는다. 제자 30여 명과 부둥켜안고 목 놓아 만세를 불렀다. 그는 “우리가 지킨 가치를 세계에서 인정받아 뿌듯했다”며 웃었다. “모든 겨루기는 상대에게 쳐들어가 정복하는 방식인데, 줄다리기는 상대를 내 편으로 끌어와 동화시킨다는 뜻이 있어요. 함께 하나 된 판을 만드는 것이 줄다리기의 참모습이죠.”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19세기 조선 왕실에서 밤잔치 때 사용하던 ‘사각유리등’이 다시 서울의 밤을 밝힌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 왕실에서 쓰던 사각유리등을 재현한 가로등을 종로구와 함께 개발했다”며 “효자로와 청와대로, 삼청로 등에 350개를 설치했다”고 12일 밝혔다. 이날 오후 6시경 경복궁 신무문 앞에서 기념 점등 행사도 개최했다. 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사각유리등은 순조 때인 1829년 왕실의 밤잔치에서 첫선을 보였다. 기존의 왕실 잔치는 주로 오전에 열렸지만 당시 효명세자(1809∼1830)가 사각유리등을 도입해 밤잔치를 주최했다. 사각유리등은 옻칠한 나무로 사각 틀을 짠 뒤 꽃 그림 등으로 장식한 유리로 만들었으며 바닥 부분에 등잔이나 초를 꽂았다. 고궁박물관은 2020년부터 박물관 인근에 사각유리등 가로등을 시범 설치해 운영해오다 최근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등 왕실 문화유산이 밀집한 종로구에 본격적으로 설치하기로 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난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이 말을 한 이가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인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실행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있는 ‘시드볼트’다. 말 그대로 ‘씨앗(Seed) 금고(Vault)’인 이곳은 인류가 최악의 재난 상황을 맞을 경우에 대비해 최후의 순간까지 식물 종자를 안전하게 간직하려는 일종의 ‘노아의 방주’인 셈이다.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는 세계에 딱 두 곳밖에 없다. 노르웨이와 한국이다. 종자 보존이야 많은 나라가 하고는 있지만, 지하 60m에 최첨단 시설을 갖춰 ‘금고’의 성격을 지닌 시설은 두 나라뿐이다.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글로벌 시드볼트’가 주로 작물종자를 저장하는 걸 감안하면, 야생식물종자를 영구 보존하는 시설은 우리나라의 시드볼트가 유일하다.시드볼트는 올해 또 다른 ‘세계 유일’ 타이틀을 달게 됐다. 그간 과학적 관점에서 야생식물종자를 보존해오던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천연기념물 종자도 보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과 시드볼트는 올해 4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의 종자를 영구 보존하는 협약을 맺었다. 기자는 7일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있는 시드볼트운영센터를 찾아 ‘시드볼트 천연기념물 보존 프로젝트’를 살펴봤다. 지상에 있는 시드볼트운영센터는 외부에 제한적으로 개방하지만 지하 시설은 관계자 외에는 접근할 수 없다.》○ “위기 처한 천연기념물 종자 지켜야”시드볼트는 지하 깊숙한 터널에 3중 철판 구조로 지었다. 전기와 통신이 모두 끊겨도 실내기온이 10∼15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평상시엔 영하 20도를 유지해 종자가 발아하거나 썩지 않는다. 기온 변화에 취약한 지상의 종자보존시설들보다 훨씬 안전하다. 2019년 국가보안시설로 지정된 시트볼트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에도 잡히지 않는다. 이동경로 데이터를 자동 수집하는 테슬라 차량은 진입이 금지돼 있다. 2015년 12월 완공돼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시드볼트에는 현재 4900여 종, 17만8000여 점이 저장돼 있다. 보안을 위해 1년에 4번, 분기별로 한 번씩만 종자를 입고할 정도로 경계도 삼엄하다. 시드볼트운영센터 1층에 있는 종자건조실에는 베이지색 냉장고처럼 생긴 기기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종자 저장 업무를 담당하는 김진기 대리는 “‘경북 울진 행곡리 처진소나무’ 등 천연기념물인 노거수(老巨樹·수령이 많은 대형 나무) 종자 20여 점이 이달 말까지 들어갈 것”이라며 “시드볼트에 보존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부터 5년 동안 천연기념물 노거수 전체의 종자 179점 모두를 시드볼트에 저장할 계획이다. 한반도의 희귀 야생식물종자 등을 보존하는 데 집중했던 시드볼트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천연기념물 종자 보존에 문을 연 것이다. “사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은 야생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귀종은 아닙니다. 179그루 가운데 은행나무가 25그루로 가장 많고 느티나무(19그루), 소나무(15그루)가 그 뒤를 잇습니다. 국내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죠. 희귀성이 보존 기준이 된다면,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우선순위가 절대 높지 않아요.”(배기화 시드볼트운영센터장) 하지만 최근 산불과 태풍 등 자연재해로 소실되는 천연기념물이 늘자 인식이 바뀌었다. 하루빨리 종자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2019년 태풍 링링으로 완전히 부러진 경북 합천 ‘해인사 전나무’가 대표적이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이 해인사를 지나다 꽂은 지팡이가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나무의 후계목으로, 1757년경 심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수령이 250년이 넘은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올해까지 최근 5년간 해인사 전나무 등 천연기념물 노거수 두 그루가 태풍 피해로 부러져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됐다”고 밝혔다. 게다가 지난해 초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에는 천연기념물인 강릉 오죽헌의 매화나무 ‘율곡매(栗谷梅)’가 고사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한바탕 난리가 났다.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율곡매는 1400년경에 심어져 수령 600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온 상승 등으로 2017년부터 꽃이 줄어들고 가지가 마르더니 결국 봄철에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줄기는 살아있지만 언제까지 버텨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이에 시드볼트와 문화재청은 천연기념물 노거수는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어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자연유산이라는 점에 공감했다. 이원호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학예연구관은 “전국의 천연기념물 노거수 179건은 대부분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역할도 해왔다. 한반도의 공동체를 지탱해 온 문화유산을 시드볼트에 영구 보존해 후대에 전하자는 게 프로젝트의 목적”이라고 했다. ○ 인공종자 배양 세계 최초 시도프로젝트는 초기에 꽤나 난항을 겪었다. 종자 자체가 열리지 않는 천연기념물도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성균관에 있는 ‘서울 문묘 은행나무’가 대표적이다. 현재 수나무만 있어 더 이상 종자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 문묘 은행나무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사라졌던 문묘를 다시 세울 때 함께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수령이 최소 400년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 높이 21m, 가슴 높이 둘레 7.3m인 나무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역사가 깊을 뿐 아니라 한국의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나무를 후대에 전할 방법은 없는 걸까. 현재 시드볼트와 문화재청은 해당 나무를 대상으로 체세포 배아 캡슐을 이용해 ‘인공 종자’를 만들기 위해 협의하고 있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시드볼트에 연구용역비를 지원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종자 인공배양 연구에 나설 계획이다. 이 연구관은 “천연기념물 종자를 인공 배양해 시드볼트에 영구 보존하는 최초의 사례”라며 “앞으로 종자가 열리지 않아 보존이 어려웠던 천연기념물을 보존할 새로운 길이 열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목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음 목표는 숲 전체의 보존이다. 노거수뿐 아니라 ‘경북 울릉군 성인봉 원시림’과 같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림(樹林) 24곳의 나무 종자들도 시드볼트에 보존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배 센터장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림은 단 한 번의 화재로도 숲 전체를 잃을 수 있다”며 “5년간 노거수 179건의 종자를 보존한 뒤엔 수림 종자를 보전하는 것을 새로운 5년 과제로 수립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반도의 숲은 잦은 산불 피해로 위기에 처해 있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재해예측·분석센터에 따르면 올해 10, 11월 발생한 산불 건수는 총 70건으로 과거 10년 같은 기간 평균(34건)의 2배가 넘는다. 연중 산불 피해가 가장 많은 1∼4월 역시 올해는 477건으로, 지난 10년 같은 기간 평균(320건)보다 급증했다. “산불 발생 위험과 상관성이 높은 기후 인자인 해수면 온도가 올해는 예년보다 더 높아졌어요. 상대 습도는 낮아졌고요. 불이 더 자주 나는 상태가 된 거죠. 지구온난화가 잦은 산불로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예요. 한반도의 야생식물들이 지구온난화로 살아갈 터전을 잃고 있는 거죠. 이들을 더 잃기 전에 종자 보존을 서둘러야 합니다.”(배 센터장)○ “세계 미래세대 위한 ‘노아의 방주’ 되길” 시드볼트에서 일하는 이들은 “더 이상 여유 부릴 시간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김 대리는 “한 해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씨앗 하나를 얻는 데만 최소 4, 5개월이 걸려 자칫하면 멸종위기를 막기 위한 보존 시기를 놓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야생식물자원의 종자가 열리는 철마다 현장을 찾아가 직접 종자를 딴다. 과일나무라면 과육을 제거한 뒤 시드볼트운영센터 1층 건조실에서 최소 3, 4개월간 씨앗을 건조시킨다. 엑스레이실이 눈에 들어왔다. 김 대리는 “씨앗의 속이 꽉 찼는지 혹은 비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 검사를 하고 데이터를 기록한다”고 했다. 훗날 이 종자를 땅에 심을 후손에게 정확한 정보를 남기기 위해서다. 시드볼트는 종자가 싹을 틔우기에 가장 적합한 온도와 빛의 양을 찾는 데도 분주하다. 미래 인류에게 ‘발아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서다. 해당 연구를 하는 종자생리연구실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온도와 빛의 조건을 제각각 설정할 수 있는 장비인 ‘발아 체임버’에서 종자의 발아 상태를 실험하고 있었다. 발아 체임버 위에 붙은 종이에는 올해 2월부터 지난달 18일까지 진행한 연구 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지금은 ‘개구리발톱’과 ‘섬초롱꽃’ 등의 종자가 싹을 틔우는 환경을 찾고 있다. “데이터는 종자와 함께 시드볼트에 영구 저장되는 핵심 자료예요. 시드볼트에서 종자를 꺼내 심어야 할 때가 오면 이런 실험을 할 여유가 없을 거니까요. 아직 시간이 주어진 우리 세대가 미래 아이들을 위해 싹을 틔우는 비법까지 전수해줘야 하는 거죠.”(이하얀 시드볼트 총괄팀장) 한국의 시드볼트는 한반도 생태계 보존만을 위해 일하진 않는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세계 미래 세대를 위한 ‘노아의 방주’가 되는 것이다. 종자보관소에는 지하 깊숙한 시드볼트에 들어가기 전에 건조 등 사전 처리를 하는 종자들이 있다. 두 겹으로 된 육중한 문을 차례로 열고 들어가자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뒤덮었다. 시드볼트와 똑같은 영하 20도, 습도 40%를 유지하고 있는 것. 꽉 차 있는 큰 책장들에는 종자들이 보관돼 있었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블랙박스가 5개씩 쌓여 10줄로 늘어서 있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온 종자 박스 50개였다. 시드볼트가 중앙아시아 4개국과 종자 보존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박스별로 ‘우’ ‘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각 나라 이름의 첫 글자를 써 구분한 것이다. 시드볼트는 종자 200만 점을 넣을 수 있는 현재 공간이 다 찰 경우를 대비해 두 개의 지하터널을 더 뚫을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둔 채로 설계됐다. 김 대리는 “내가 퇴임할 때까지 새로운 터널을 뚫는 것이 목표”라며 웃었다. 이어 말했다. “저장된 종자는 어쩌면 우리 세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최근 100년간 지구를 병들게 한 책임은 인류 모두에게 있습니다. 시드볼트는 이런 현실을 만든 것에 책임을 지는 일이자 후손에게 물려줄 소중한 유산이 될 겁니다.”봉화=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독일 오틸리엔수도원에 있던 겸재 정선(1676∼1759)의 화첩을 2005년 고국으로 반환하는 데 기여한 선지훈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서울분원장(62)이 은관문화훈장을 받는다. 금강산의 절경을 그려낸 ‘금강내산전도’ 등이 포함된 화첩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문화재청은 선 서울분원장을 포함한 ‘2022년 문화유산보호 유공자 포상’ 대상자를 8일 발표했다. 문화훈장 5명, 대통령표창 6명(개인 4명, 단체 2건), 국무총리표창 1명이 선정됐다. 민속 유물 권위자인 신탁근 전 온양민속박물관장(75)은 전국 사립박물관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해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보관문화훈장은 자격루를 복원한 남문현 건국대 명예교수(80), 옹기를 전통 방식대로 복원한 김일만 국가무형문화재 옹기장 보유자(81)에게 돌아갔다. 옥관문화훈장은 김귀엽 부산시 무형문화재 구덕망깨소리 보유자가 받았다. 구덕망깨소리는 부산 지역에서 큰 건물을 다질 때 쓰던 ‘망께’로 땅을 두드리며 부르던 노동요다. 대통령표창은 한의학 사료를 보존해온 김쾌정 허준박물관장(75)과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 2점이 한국에 기증되도록 노력한 니시모리 시오조(西森潮三) 일본 고치현 일한친선협의회 명예회장(82), 정문길 경북 무형문화재 와장 보유자(79), 한복려 국가무형문화재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75)에게 돌아갔다. 대통령표창 단체 부문에는 ‘한국의 갯벌 세계유산등재 추진단’과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가 선정됐다. 국무총리 표창은 김포시 최고령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해온 김기송 문화관광해설사(89)가 받았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가 되도록 쉴 새 없이 일만 했어요. 밤이면 하늘에서 쏟아지는 공습 폭탄에 떨어야 했습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2006년 실시한 조사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14세에 야하타제철소에 끌려간 이천구 씨(당시 79세)가 남긴 증언이다. 조사에 참여한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62·사진)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야하타제철소의 강제 동원 역사를 담은 ‘조선인 강제동원 기업―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선인)를 지난달 펴낸 정 연구위원은 7일 전화 인터뷰에서 “생생한 증언이 존재하는데도 일본 정부는 피해자 명부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에 있던 야하타제철소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 철강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했다. 제철소에 끌려간 조선인은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정부는 야하타제철소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징용공의 규모만 공개했다. 일본 철강통제회 등 자료엔 1945년 일제 패망 당시 조선인 징용공이 2808명이라고 나와 있다. 정 연구위원은 “이 숫자는 빙산의 일각이며, 명단조차 제대로 없는 반쪽짜리 자료”라고 지적했다. “한국 국가기록원에 있는 ‘조선인 징용자에 관한 명부’ 등을 보면 3448∼3820명으로 나옵니다. 이것도 전체의 일부분이고, 야하타제철소의 하청업체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습니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강제동원 역사를 은폐하고 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야하타제철소를 포함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며 일본 정부에 ‘유산 소개 및 안내 등에 강제동원 역사를 가진 장소라는 점을 반영하라’고 했다. 일본은 이를 수용하기로 했지만 아직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현장 어디에도 피해자를 추모하는 공간은 없습니다. 이것이 세계유산의 영광 뒤에 가려진 야하타제철소의 민낯이에요. 역사에서 잊혀진 이름들을 기록하는 건 학자의 책무입니다. 생존자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어요. 잊히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한국 독자들에게 특히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가는 길이 맞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저희가 만든 빵과 맥주를 사랑해 주셔서 큰 힘을 얻었어요.”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복을 찾은 이들. 밀과 물, 천연발효균으로 순수한 자연 빵을 만드는 빵집 ‘다루마리’에 대한 책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더숲)로 화제를 모았던 부부 와타나베 이타루 씨(51)와 와타나베 마리코 씨(44)가 2일 한국을 찾았다. 이 책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2014년 국내에도 출간돼 6만 부 이상 팔렸다. 지난해 11월에는 ‘시골빵집에서 균의 소리를 듣다’를 국내 출간했다. 한국 독자들을 만나기 위해 방한한 와타나베 씨 부부는 5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게를 찾아온 독자들로 빵집 앞은 매일 아침 발 디딜 틈이 없었다”며 “특히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였지만 2014년 10월경 가게 문을 닫았어요. 천연 맥주를 만들겠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거든요. 빵집엔 맥주 설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어서, 애정이 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죠.”(이타루 씨) 신간에는 빵집을 닫은 뒤 새로운 마을에 정착해 수제 맥주를 만든 이야기가 담겼다. 맥주 공방 부지를 찾으려 발품을 팔던 부부에게 손을 내민 건 소멸 위기에 놓인 작은 시골마을. 일본 돗토리현 지즈정에서 옛 공공 보육원 자리를 내어줬다. 이타루 씨는 “우리는 천연 맥주와 빵을 만들 공간을 얻었고, 마을은 지역경제가 살아나 서로에게 긍정적인 선순환이 이뤄졌다”고 했다. 부부는 맥주 역시 ‘이윤 창출’이 목표가 아니라고 한다. 기존 맥주업계에서 꺼리는 유산균을 활용해 맥주를 숙성시킨다. 맥주는 숙성용 나무통에 반 년 이상 묵힌다. 이 기간엔 맥주를 팔 수 없어 손해지만, 돈보다 품질을 선택했다. 마리코 씨는 “세상엔 느리고 비효율적이어도 정성과 진심을 담은 먹거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