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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이번 주에 고른 사진은 1924년 4월 2일 동아일보 3면에 실린 투표장 사진입니다. 마침 다음 주에 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고, 이미 어제부터 사전투표가 시작된 만큼 시기에 딱 맞는 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0여 명의 남성들이 투표장으로 향하고 있는데 모두 뒷모습입니다. 설명에는 “쓸쓸한 학의 선거회장 –어제 수송보교에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올해 22대를 맞는 국회의원을 처음 뽑는 1대 국회의원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치러졌습니다. 1924년 찍힌 이 선거 사진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는 아닙니다. 무슨 선거인지 설명을 좀 보겠습니다. 세월 없는 학의선거상(學議選擧商)가가내 인수효가定數도 못된다고경성부 학교 평의회원의 선거는 예정과 같이 어제 수송동 공립보통학교에서 거행되여 수송동 골목은 전에 없던 혼잡을 이루었었고 운동장의 주위에는 종로거리의 야시장을 방불케하는 후보자들의 가가(假家)가 즐비(櫛比)하였다. 이 가가도 역시 보통 가가 모양으로 호떡 왜떡 비루 등 상품이 풍부하고 빈약(貧弱)함을 따라 혹은 손님들이 있어서 번창 한곳도 있고 혹은 그렇지 못하여 적적(寂寂)한 곳도 있었는데 이러한 가가의 주인은 물을 것도 없이 시대상도 모르고 그저 ‘점잖은 주의’를 실행하려는 분들이다. 그러나 가가를 내세운 분들이 경성부에서 지정한 수효보다 도로 적은 것을 보아 이 장사도 그다지 ‘횡수(橫數)가 생기는 장사’는 아닌 듯한 반면으로 그대지 머리를 싸고 경쟁할 필요도 없을 듯 싶었다. 그런데 오전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모여든 손님들의 총수는 1천2백 여명에 이르렀다고.▶ 제일 헷갈리는 내용은, 가가(假家)와 후보자의 관계입니다. 수송동(壽松洞)이면 서울 종로 조계사 부근에 있는 동네 이름입니다. 그곳 학교에 투표장이 설치되어 유권자들이 한 표를 행사하러 들어가는 모습니다. 학교 입구에 가가는 내용으로 봐선 천막으로 만든 임시 가게 같은 것을 말하는데 그 안에서는 호떡 왜떡 맥주 등을 준비해 놓았었네요. 간식과 술이 마련되어 있는 천막에는 사람이 붐비고 그렇지 않은 곳에는 손님이 없어 적적한 풍경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맥주를 ‘삐루’ ‘비루’라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100년 전에는 신문에서도 이 표현을 썼었군요. ‘beer’를 그렇게 읽었을테지요. 아무튼, 기사에 따르면 후보자들이 임시 가게를 열어 놓고 투표를 하러 오는 손님들에게 음식과 술을 제공하는 풍경이 펼쳐졌는데 일제가 할당한 인원수보다 입후보자가 적어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선출되는 상황입니다.게다가 아무리 봐도 사진 제목이나 기사 내용이 서늘합니다. 선거 참여를 독려하지도 않고 투표율이 낮은 것을 당연하다는 투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 가가의 주인은 시대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어떤 이념을 실행하겠다고 나온 사람들인 게 분명하다. 경성부에서 지정한 후보자 숫자보다 적은 후보자가 출마했으니 머리를 싸매고 경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크게 이번 선거가 인기가 없다” 정도의 뜻으로 읽으면 될 거 같습니다. 그 뒤에 오전 9시부터 2시간 반동안 총 1천 2백 명의 유권자가 투표했다는 표현은 그 뒤의 설명이 없이 마무리됩니다. 많다는 것인지 적다는 것인지에 대한 평가가 없습니다. 무슨 선거길래 이런 풍경이 펼쳐졌던 것일까요?▶ ‘學議’ 선거가 뭔지 검색을 해봤습니다. 학교평의회(학의)는 학교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기관 중 하나로 교사와 때때로 학생 대표가 참여하여 학교 운영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평의회 선거는 이러한 평의회의 구성원을 선출하기 위한 절차였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상황에서의 선거는 제한적이었고, 주로 일본인 관리자나 선출된 일부 조선인 교사들에 의해 지배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아, 조선인들이 다니는 학교의 운영에 관한 회의체이긴 한데 일본인이나 일본인의 의견을 잘 듣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회의체였었군요. 그래서 선거 참여 열기가 없었던 것이군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고 검색을 더 해봤습니다. 공주교육대학교 최병택 교수님의 2016년 논문 “1920년대 부 학교 평의회의 구성과 학교비(學校費) 논란 – 경성부 학교 평의회의 사례를 중심으로”을 발견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논문에 따르면, “학교평의회는 부(府)의 경우, 학교부과금 연액 5원 이상을 납부하는 25세 이상 남성을 유권자로 하는 학교평의회원 선거를 통해 구성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 정원은 6인 이상 20인 미만의 범위에서 정해졌다. 선거를 통해 구성된다는 특징이 있어서, 일제는 이를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내린 용단’이라고 선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유권자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는 데에다가 의결 기능은 전혀 없고 오직 자문 기능만 있기 때문에 민중의 의사를 대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조선인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오늘의 우리 선거 사진으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흔히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선거의 종류에는 4년에 한 번씩 있는 국회의원 선거와 5년마다 있는 대통령 선거 그리고 광역단체장과 교육감 및 기초의원 등을 뽑는 지방선거일까지 선거가 참 많습니다. 선거 사진의 역사는 우리 민주주의의 발전 모습 그대로를 반영합니다. 동아일보 내부 데이터베이스에서 ‘선거’라는 키워드를 입력하니 7만 6천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투표하는 리승만 대통령 부부(1950년 5월 31일), 민주당 당사 앞 개표 속보판 앞에 발걸음을 멈춘 시민들(1956년 5월 17일), 시.읍.면장선거에 투표하는 유권자들(고양에서. 1960.12.26.) 朴正熙 共和黨大統領候補는 春川公設운동장에서 遊說. 『野黨의 公約은 사탕발림』이라고 비난했다. <宋鎬昶記者찍어空輸>(1967년 4월 26일), 1일 광주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신민당 유세에서 김대중대통령후보가 연설하고있다. 사진=최금영 기자(1970년 11월 2일), 봄비 속의 우산 행렬. ‘한표’를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 앞에서 유권자들이 촉촉이 내리는 봄비 속에 우산을 받쳐들고 기다리고 있다.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제3투표소(1981년 3월 25일). 제12대 총선 날짜를 공고한 중앙선관위는 공명을 위한 벽보 등 각종 홍보물을 전국 각지에 배포, 기권 방지와 공명풍토 조성의 계도에 나섰다(1985년 1월 23일), 民主黨의 金泳三총재가 집회장인 釜山 水營灣광장에 들어서면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하고 있다(1987년 10월 18일).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회원들이 공명선거캠페인 스티커 배포(1991년 3월 13일) 등 정말 다양한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선거는 사진기자들에게는 중요한 취재 영역입니다. 투표 당일 뿐만 아니라 후보자를 선정하는 과정과 선거 운동 그리고 당선자 인사 모습까지 말입니다. 옛날 사진들을 보니 지금과 비슷한 장면들도 있었고, 이제는 사라져버린 풍경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제 나흘 후면 선거 당일입니다. 사진기자들의 현장은 크게 오전과 오후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오전에는 선거 행렬과 특이한 유권자 모습을 찾아다닙니다. 배를 타고 투표하러 가야 하는 지역 유권자들, 청학골처럼 옛날 도포를 입고 있는 분들이 모여 있는 곳, 최근에 늘어난 특이한 사람들 가령 들면 러시아에서 영구귀국한 동포 후손들이 조국에 와서 첫 투표를 하는 장면, 군인들이 배 위에서 투표를 하는 곳 등을 예전에는 취재했었습니다. 올해는 그런 곳은 많지 않을 겁니다. 사진기자들이 제일 우선적으로 찾는 곳은 ‘장사진’을 이루는 투표소입니다. 긴 뱀처럼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위해 줄을 서 있는 곳 말입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유권자의 열망을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스크랩을 참고하거나, 최근 인구가 늘었지만 투표장은 많지 않아 병목현상을 보일 곳 같은 곳을 찾아갑니다. 불불복처럼 보이지만 꽤 꼼꼼하게 체크해서 갑니다. 사전선거가 활성화되면서 이런 곳을 찾는 곳은 점점 힘들어지긴 합니다. (혹시나 주변에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곳을 알고 계신다면 적극적으로 제보 부탁드립니다)저녁에는 선관위나 여야 당사 개표 상황실 취재를 하거나 격전지역에서 승리한 후보자들의 캠프로 가서 꽃다발 세리머니를 기다립니다. 올해는 비례대표 용지가 너무 길어 신형 투표지 분류기도 무용지물이 되고 100% 손으로 개표를 한다고 하죠? 사진기자 중에 몇몇은 밤을 새워 개표장과 당사 표정을 찍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어떤 모습이 가장 상징적일까요? 정치 혐오가 팽배한 만큼 썰렁한 투표장 모습일까요? 아니면 첨예하게 대립한 상대 세력을 심판하기 위해 민심이 들끓을까요? 세월이 지나 오늘의 선거는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지 궁금합니다. 이번 주에는 100년 전 서울에서 치러진 선거 풍경을 담은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예쁘게 칠해진 계단을 올라 한 노인이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초록 풀내음이 날 것만 같네요.―부산 흰여울마을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북한이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이라는 정부 통신기관을 통해 해외로 보내는 사진을 보면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옆에서 수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그 수첩에는 정말 메모가 되어 있을까 하는 점 말이다. ▶김정은 옆 간부들이 수첩을 들고 있는 모습은 그의 권력이 얼마나 큰지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2013년 7월 3일자 노동신문에 실렸던 사진이 대표적이다. 회의실이 아닌, 어떤 건물 복도에 김정은의 전용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테이블 위에는 재떨이가 놓여있다.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군 간부 모자를 쓴 8명이 서 있는데 이들 모두 손에 수첩을 든 채 김정은을 응시하거나 수첩을 보고 있다. 10년도 더 지난 사진이지만 그 사진 이후에도 김정은 옆에 있는 간부들은 ‘말씀 기록용’ 수첩과 볼펜을 꼭 들고 있다. 나는 2003년부터 북한 사진을 지켜보고 있다. 물론 김정은 이전 김정일 시대에도 수첩을 들고 있는 간부들의 사진은 있었지만 김정은 시대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들고 있는 느낌이다. 합법적으로 수첩을 들지 않아도 되는 측근은 딸과 부인 그리고 경호원 정도이다. 현지지도를 가거나 회의를 하면서 김정은이 하는 발언들은 북한 내부에서는 곧바로 역사가 되고 활동 지침이 된다. 김정일 시대에도 그랬고 김일성 시대에서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발간하는 수많은 ‘어록’에는 정말 세세한 지시까지 다 기록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에도 왕의 말씀을 기록하는 사관(史官)들이 있었고 왕조실록 편찬의 기초자료로 활용됐다. 일반적인 다른 국가에서도 최고지도자의 말은 기록되고 보존된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는 메모의 형식이 획일적이다. 수첩의 크기는 대체로 15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인다. 군대에서 나눠준 군인수첩이 연상된다. 표지 색깔은 초록색도 있고 갈색도 있는데 주로 갈색이 많이 보인다. 각 페이지의 오른쪽 위에는 “년 월 일”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궁금한 점은 정말 저 많은 사람들이 실제 필기를 하고 있을까 였다. 최근 북한이 배포한 사진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한 간부의 수첩에는 김정은의 발언을 키워드 중심으로 메모되어 있다. 우리의 메모 방식과 차이는 없다. 김정은의 국무위원장 최측근인 조용원 노동당 조직비서의 수첩도 보인다. 조용원의 수첩은 좀 더 간결하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조용원은 한 줄을 쓰고 한 줄을 띄우는 방식으로 메모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게 기록으로서의 역할을 하기엔 부족하다. 소위 풀 텍스트(full text)는 아니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 말고 김정은 ‘말씀’을 토시까지 기록하는 사람은 없는 것일까? 사진 앵글 밖에 기록 담당이 따로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사진을 좀 더 찾아보았다. 조용원(김정은 오른쪽 안경 낀 사람)의 수첩 밑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수첩 밑에 어떤 물체가 보인다(사진 3의 오른쪽이 조용원 조직비서의 손이다). 우리로 따지면 폴드 스마트폰 같은 물건을 수첩 아래에 들고 다니는데 다른 수행원들 손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최근 사진을 쭉 살펴보니 이런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모두들 메모하되 조용원은 스마트폰을 수첩 아래 녹음 모드로 든 채, 키워드 중심으로 메모하는 방식”인 것이다. 상상력을 덧붙이면, 조용원의 스마트폰에 녹음된 음성파일은 북한의 역사 담당자에게 전달될거고 그렇게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기자들은 취재원의 발언을 녹음한 후, AI프로그램의 도움으로 녹취를 푸는 경우가 많다. 북한의 김정은 발언 녹취 담당자가 어떤 방식으로 발언을 정리하는지 궁금하다. 보안을 생각한다면 일일이 타이핑을 할테고 효율을 생각한다면 기술에 의존할 텐데 말이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마트는 5∼7일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초저가에 판매하는 ‘랜더스 데이’ 행사를 진행한다. 한우를 최대 50% 할인하는 등 달걀, 딸기, 대게 등 다양한 품목을 할인 판매한다. 3일 서울 용산구 이마트 용산점에서 모델들이 행사를 알리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충돌 방지용 새가 그려진 유리 위에서 진짜 새들이 한가로이 쉬고 있어요. 마치 “우리도 유리 정도는 알아” 하는 듯해요. ―서울 영등포구 당산역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 지난 주 소개드렸던 ‘백년사진 No. 54-졸업식에서 학사모를 던지는 사진은 언제부터 찍기 시작했을까?’ 글에서 설명드렸듯이 100년 전 3월은 졸업시즌이었고 신문에는 각 학교의 우등생 얼굴 사진이 실렸습니다. 이번 주에도 많은 학교의 우수 졸업생 얼굴이 실렸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의 얼굴이 있어 소개합니다. 1924년 3월 28일 자 동아일보 지면입니다. ■ 학생의 기쁜 날제일고보졸업 – 우등생이 3명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식은 예정과 같이 26일 오후 1시경에 그 학교 강당 안에서 거행하였다. 다수의 내빈과 학부형이 참석 한 후 식을 열고 증서 수여와 교장의 훈사와 총독 대리로 남궁영씨의 고사와 졸업생 대표의 답사 등으로 식을 마치었는데 이번 졸업생은 도합 98명으로 그 중에 신교육령에 의한 졸업생이 38명이오 사범과 졸업생이 16명이오 보습과 졸업생이 11명이라 하며 우등생은 윤봉헌 유진오 허남하 등 세명이라더라. 가운데 유진오 학생은 이 사진이 찍힌 지 24년이 지난 1948년 헌법학자로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를 만들며 해방 후에는 신민당 당수까지 역임하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윤봉허 군과 허남하 군에 대해서는 제 수준에서는 검색이 잘 안되었습니다. 혹시 독자분들 중에 알고 계시는 내용이 있으시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사진을 하나 더 보시죠. 1924년 3월 27일자 신문입니다. 지금의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운영한 의학전문학교 졸업식이 있었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학생의 기쁜 날세부의학전문 졸업 – 졸업생이 6명남대문 밖에 있는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서는 재작 25일 오후 2시 30분에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순서를 따라 교수의 연설과 총독 축사 내빈 축사와 졸업생 김승렴 군의 답사로 식을 마치었다. 이 학교는 미국 선교사의 경영으로 조선의 학계에 공헌이 많았고 당국의 지정으로 이 학교를 졸업하면 자유로 개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며 금년에는 졸업생 여섯명을 내이었는데 일번은 리익수 군이라더라. 수원고등농림 – 조선인 우등생 두명정신여학교 – 우등생이 일곱 명 ▶ 당시 신문은 [학생의 기쁜 날]이라는 고정 코너를 만들어 각 학교 우등생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고 이끌고 갈 재목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저의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부분은 표정이었습니다. 수십 명의 학생들 얼굴이 신문에 실리는데 표정이 이상합니다. 젊은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학생의 기쁜 날]이라는 제목과 어쩌면 어울리지 않습니다. 100년 전 이렇게 훌륭한 학생들의 사진에서 왜 웃음이 표현되지 않았던 것일까요?▶사진기자인 제가 요즈음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많이 하는 주문이 ‘웃어보세요, 웃어주세요’일 것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현실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즐거움과 긍정적인 순간들을 포착하고자 하고 싶어서 입니다. 무뚝뚝한 것보다는 웃는 표정이 훨씬 보기에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소개드리는 사진 속 인물들이 웃지 않고 있는 이유는, 우선 그 당시 사진기자들이 학생들에게 웃어보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혹시 기술의 문제는 아니었을까요? 카메라가 처음 나왔던 1800년대에는 지금처럼 빠른 스피드로 셔터를 끊으면 필름에 상이 맺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델들은 사진가의 요구에 따라 몇 초가량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우리가 X레이를 찍을 때 숨을 멈추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X레이의 셔터 스피드가 고속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웃는 상태로 정지하는 것보다는 무표정하게 정지해 있는 게 쉽습니다. 그래서 초창기 사진에서는 웃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방금 본 사진은 1924년도 사진이고 이때는 다른 지면에 실렸던 사진처럼(1924년 4월 2일), 이미 한강변에서 열렸던 경마 대회에서 번호표를 단 채 달리고 있는 말의 모습이 신문에 실리던시절이었습니다. 요즘 경마 사진을 찍을 때 사진기자가 세팅하는 셔터 스피드는 1/1000초 전후입니다. 1초를 1000개로 나눈 순간을 포착하겠다고 카메라에 지시하는 것이죠. 100년 전에 그 정도의 빠른 셔터 스피드를 지원하는 카메라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1초를 백 단위로 쪼갤 정도의 기술 수준은 있었습니다. 웃음을 포착하기에 충분한 속도인 것이죠. 게다가 1900년도에 코닥이 1$짜리(지금으로는 30$ 전후가 될 거 같습니다) 카메라를 출시하면서 내걸었던 광고 내용이 ‘사진이 기쁨과 행복을 포착하는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가볍게 스냅 촬영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죠. 물론 미국과 한국의 경제 상황이 달랐으니 한국 당시 조선에서 카메라가 대중화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일반인들이 살 수 있는 카메라에 비해 기능이 뛰어난 신문사 카메라로 미소의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치아 보건 상태가 현재보다 좋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것을 꺼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서 ‘김치’를 외치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기사가 있어 공유합니다. 재밌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치아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모든 학생들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다른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위 기사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제 상상력을 좀 덧붙여봅니다. 학생들이 웃지 않고 심각한 표정을 한 채로 등장하는 사진의 배경에는 문화나 사회 분위기 탓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공식적인 행사에서는 심각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무언의 공감대 같은 거 말입니다. 굳은 표정이 주는 점잖음과 신중함이 있지 않나요? 정중한 표정이 그 사회의 중요한 가치이고 예의일 수도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분위기라면 사진기자들도 기교를 부려 억지로 웃게 하는 것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찍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괜히 웃는 사진을 찍어봤자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힘들었을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식민지 시대라는 배경의 영향도 있었을 겁니다. 웃을 일이 별로 없던 시절이니 신문 속 얼굴도 그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수재들의 얼굴 사진에서 웃음이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술적 제약보다는, 당시의 사회적 에티켓이나 건강상태 정도의 영향을 받아 오늘과는 다른 사진이 정답으로 인식되었을 거라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졸업식이라는 중요하고 기쁜 순간에도 그들이 느끼는 책임감과 시대의 무게가 사진 속 표정에 드러난 것 같아 보는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특히 X레이의 셔터 속도에 대해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세요. 제가 알고 있기론 1/30초 정도인데 이게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백년사진]은 매주 토요일 1시경에 인터넷에 포스팅 될 거 같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시민들이 28일 서울 중구 문화역서울284(옛 서울역사)에서 열린 철도문화전을 관람하고 있다. 코레일이 KTX 개통 20주년을 맞아 마련한 이번 전시는 다음 달 21일까지 이어진다. 관람료는 무료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상가 엘리베이터에 누군가 우산 잊지 말고 챙겨가라는 안내문을 붙여 놓았네요. 세심한 배려에 미소 짓게 됩니다.―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오늘 소개드릴 사진은 1924년 3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4명의 여성들이 졸업 가운과 학사모를 쓴 채 정면 사진기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진 맨 오른쪽 여성은 선글라스라고 해도 될 만큼 검은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졸업식 사진은 분명한데 무슨 내용인지 설명을 살펴보겠습니다. ◇梨花의 大學科졸업생 4명시내 정동에 있는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식은 20일 오후 7시 반에 정동 예배당에서 열었는데 내빈과 관객이 천여명이며 눈같은 옷에 사각모를 쓴 김로다 양 외 3명에게 졸업증서를 주고 졸업생 김종준 양 김로다 양의 졸업 연설이 있고 기쁨과 비애가 섞인 졸업가로 식을 마치었는데 금년 졸업생은 4명이다. /1924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 ▶ 서울 시내 정동에 있는 이화학당의 대학과 졸업식이 있었군요. 저녁 7시 30분에 졸업식을 했다는 게 특이합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내빈과 학부모들이 졸업식에 참석하려면 일과가 끝난 시간이 편했을 것 같긴 합니다. 졸업생은 4명인데, 축하객은 무려 1천 명에 달한 것으로 보아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한 궁금증이 커집니다.▶ 요즘은 졸업식은 2월 말, 입학식은 3월 초이지만 100년 전에는 한 달씩 늦었습니다. 신문을 보면 3월에 졸업, 신학기 시작은 4월 1일 이런 패턴이 보입니다. 졸업 시즌을 맞은 3월치 신문에는 각 학교 우수 졸업생들의 증명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동아일보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도 같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신문사별로 사진이 다른 것으로 보아, 학교 측에서 제공한 사진이 아니라 신문사에서 사진기자들이 각 학교로 가서 학생들을 직접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수 졸업생들은 그날 꽤 바쁜 일정이었겠습니다. 신문사 별로 와서 사진을 찍자고 했을 테니까 말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화여대 단과대학 최우수 졸업생의 얼굴을 신문에 싣는 거니 ‘이상한’ 보도입니다.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생의 나이가 17세~20세 정도 되니 이들이 사회생활을 20년 정도 하고 나면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1920년대 신문에 실렸던 얼굴들은 20년이 지나 1945년 우리나라 건국 당시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셨을 테지요. 그래서였을까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인물의 탄생을 놓치지 않고 소개하려고 했던 신문의 집착이 보입니다. ▶학사모를 사각모라고 표현을 했네요. 요즘 대학 졸업식에서 쓰는 학사모와 모양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사진이 너무 심심하지 않으신가요?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4명의 모습을 지금 신문에 쓴다면 독자들이 의아해할 거 같습니다. 지금의 사진과는 느낌 차이가 큽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찍고 보는 사진이 지나치게 포장되고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심심한 사진을 보다 보니,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던지는 사진은 언제부터 나왔을까 궁금해집니다. 신문에도 가끔 실리기도 하고, 인터넷 기사에도 많이 첨부되는 모습 말입니다. 어쩌면 독자 여러분도 한 번씩 찍어보셨을 수도 있는 사진입니다. 언제부터 이런 종류의 사진을 찍었던 걸까요? 동아일보 사진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봤더니 생각보다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2000년 5월 4일에 찍은 사진이 가장 오래된 사진입니다. 사진 설명은 이렇습니다. “벌써부터 졸업 기분 –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4일 연세대 본관 앞에서 졸업앨범 사진을 찍고 있는 인문학부 학생들. 사진사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학사모를 공중에 던지며 환호하고 있다. 2000년 5월 4일.” ▶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서 학위복을 처음 입은 것은 1908년 최초의 현대식 고등교육기관이자 의(醫) 학교인 제중원의 졸업식이었다고 합니다. 미국 유학생들의 경험을 토대로 검은 가운을 입었고, 검은색 술이 달린 검은 사각모를 썼다고 합니다. 학사모를 하늘로 던지는 퍼포먼스의 시작도 미국 해군사관학교 임관식이라는 기사도 여기저기 검색이 됩니다. 계급장이 달린 장교 모자를 지급 받으면서 학생 신분을 상징하는 학사모를 공중으로 던져서 새로운 시작을 자축했을거라는 설명도 함께 있습니다. 아일랜드 목동들이 울타리 안에서 사고가 제한되는 것을 우려해 모자 던지기 시합을 통해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다는 설(設)도 있습니다. 정확한 역사적 고증은 제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 수도 있으니 이쯤 하겠습니다. 아무튼 100년 전에는 없던, 학사모 던지는 풍습이 외국에서 들어와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혹시 2000년도 이전에 학사모 던지는 사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그런 사진을 알고 계시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왜 학사모를 던지는 걸까요? 사진기자인 저도 지난 2월 서울 시내에서 열린 졸업식을 몇 번 취재하러 갔습니다. 졸업식의 엄숙한 모습을 신문에 쓰기엔 좀 어색해서 이것저것 특별한 장면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별로 특별한 장면을 못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경우 몇몇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학사모를 하늘로 던지라고 부탁을 합니다. 연출 사진인거죠. 사진기자들이 연출을 해도 되냐고 물으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 기준으로는, ‘누군가에게 피해가 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불가피할 경우 연출을 합니다. 밋밋한 사진을 찍기 싫어 학사모를 던지는 모습을 연출하는 게 하나의 이유일 겁니다. 입시를 위해 고달프게 보낸 고등학교 3년과 사회 진출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대학 4년의 힘든 시간을 훌훌 털어낸다는 의미를 담으려고도 하는 것 같구요. 그들의 앞길엔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희망도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진의 배경은 흐린 하늘보다는 파란 하늘이 어울립니다. 그런데 이런 사진도 이제는 신문에 많이 실리지는 않습니다.그러고 보니 졸업식의 특별한 장면도 유행이 있습니다. 디지털카메라가 처음 대중화되던 때는 상업 사진사분들이 손님을 기다리는 장면이 신문에 꽤 자주 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전에는 사각모를 부모님이나 배우자에게 씌워 드리고 공부 뒷바라지를 감사해하는 사진을 찍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이화학당의 졸업식에서 사각모를 쓴 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4명의 졸업생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학사모 던지는 사진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귀국 직후 인천국제공항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한 뒤 이동하고 있다.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고 외압 의혹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를 받는 이 대사는 25일 방산 관련 재외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귀국했다. 이 대사는 “체류하는 동안 공수처와 일정 조율이 잘되어서 조사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인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를 받는 이종섭 주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같은 날 해병대 채모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이첩 관련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은 중앙지역 군사법원에서 열린 3차 공판에 출석했다.이 대사는 이날 출국 11일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싱가포르를 경유한 항공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이 대사는 공항 관계자들의 경호를 받으며 입국장 게이트를 통과했다. 곧바로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이 대사는 “임시 귀국한 것은 방산 협력과 관련한 주요국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라며 “체류하는 동안 공수처와 일정이 조율이 잘 되어서 조사받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한편 박정훈 대령은 이날 오전 10시에 열린 용산 중앙지역 군사법원 3차 공판에 출석했다. 변호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박 대령은 군사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에는 해병대 군복과 빨간 복장을 한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원들도 함께했다.박 대령의 법률대리인 김정민 변호사는 “우리가 계속 주장했듯이 이종섭 전 장관은 피의자”라며 “지금 죄 없는 사람은 법정에 재판받으며 고생하고 있는데 피의자는 국민 세금으로 비행기 타고 바다 건너 왔다 갔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대사의 공수처 수사와 관련해서는 “공수처 수사에 응하겠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라며 “피의자를 중요 국가 대사로 임명한 인사권 남용이야말로 이 사건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도심 빌딩에 줄줄이 달린 보일러 연통이 마치 대포 같습니다. 때늦은 추위를 조준 사격해 물리쳐 주면 좋겠네요.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산공원에서 한 주민(오른쪽)이 영등포구보건소가 개최한 결핵 예방 캠페인 퀴즈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 결핵 발생률은 매년 감소하는 추세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결핵 신규 환자 발생률은 두 번째로 높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넘쳐나는 오늘을 살면서,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한 장씩 살펴봅니다. 독자들의 댓글을 통해 우리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로 합니다.오늘 고른 사진은 1924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길고 가지런하게 땋은 머리가 인상적인 여학생 4명이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더 많은 학생들이 무대에 올랐을 수도 있지만 사진에는 생략된 것 같습니다. 사진 왼쪽에 댕기만 살짝 보입니다. 사진기자가, 굳이 무대 전체를 다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많은 관객들이 이 장면을 보고 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관객 수가 3천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 관중 3천의 동덕 학예회 지난 12일 오후 4시부터 경운동 천도교 교당에서 동덕여학교의 제 16회 설립 기념회를 개최하엿었는데 학부형 자매가 3천명 가량이나 모여 만원의 성황을 이루었으며 김기환씨의 사회하에 위선교장 조동식씨의 간략한 예사(禮辭)가 있은 후 재미있는 어여쁜 아가씨네들의 재주보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보통과의 “글자 풀이” 어린이들의 “장갑이야기” 학교극 “초로인생”과 고등과 학생들의 “딴쓰”와 주산경기 등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고 8시 경에 대성황리에 마치었더라.사진설명을 보면, 종로구 경운동의 천도교 건물에서 동덕여학교의 16회 개교 기념회를 맞아 학예 발표회가 열렸습니다. 특별한 볼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이어서 였겠죠? 총 4시간에 걸쳐 진행된 그야말로 큰 축제의 날이었었군요.▶ 기사는 이날 진행된 모든 프로그램을 다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지면에 모든 것을 다 실을 수 없기 때문에 핵심적이고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들만 간략히 보도합니다.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4시간 동안 벌어지는 행사를 매 순간 다 기록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진기자들은 행사의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그림이 되는’ 프로그램에 주목하고 기다립니다. 가령, 주산 경기처럼 참가자의 실력에 감탄하는 현장 분위기가 있더라도 사진으로 표현되지 않는 종목은 사진기자에게는 관심 밖 행사입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그날 프로그램에는 교장 선생님 축사보통과 여학생들의 “글자풀이”“장갑이야기” “학교극” 고등과 여학생들의 “댄스 공연” “주산 경연” 등이 있었습니다. 이 중 신문사가 고른 사진 한 장은, 고등과 여학생들의 “댄스 공연”이었다. 가장 역동적이고 게다가 여럿이 똑같은 한복 저고리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어서 시선을 끌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 100년이 지난 올해, 한 여대의 입학식에서 비슷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장충체육관을 빌려 진행된 입학식에 요즘 핫한 걸그룹 ‘비비지’가 초대되었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총장님 인사말을 듣던 학생들의 표정은 진지하고 엄숙해 사진기자들로서는 사진 찍을 찍을 게 없는 모습이었지만, 비비지의 무대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핸드폰 플래시를 킨 채 환호했습니다. 이 날 입학식을 보도한 신문에는 이 순간의 학생들 모습이 실렸습니다. ▶ 사진이 모든 순간을 담는 건 아닙니다. 행사의 정점,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이 기록됩니다. 물론 꼭 한 장의 사진을 써야 하는 게 아니라면 다양한 순간이 기록될 수 있겠지만 말이죠.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진이 소통될 수 있으니 신문처럼 지면 제약이 없습니다. 무대도 첫 곡, 둘째 셋째 곡, 앵콜 곡 장면까지 다 찍어서 보여줄 수 있고, 메인 보컬 사진도 따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실제 이날 입학식 모습을 그 대학 블로그에 가서 보면 비비지 공연, 총장님 대담, 홍보 앰배서더 학생들 모습 등을 다 볼 수는 있습니다. ▶ 한 장 밖에 지면에 실을 수 없는 상황에서 100년 전 사진기자가 선택한 앵글은 무대 위 공연에 나선 여학생들의 뒤에서 관중들을 향해 찍는 사진이었습니다. 지금도 사진기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앵글입니다. ▶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무대 위에 유명인이 있다면 고민이 커집니다. 무대 위의 유명인도 보이면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관중들의 모습까지 같이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대통령 유세 장면에서 한국에서 개발된 앵글이 있습니다. 연단 위 사진기자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는 후보자의 모습입니다. 후보자 뒤로 유세장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의 모습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1980년대 말, 한국의 사진기자들과 정당의 홍보 담당자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연출 사진입니다. 그 때와 같은 대규모 군중 집회는 사라진 요즈음이지만 정치 현장에 가면 가끔 이런 앵글이 연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후보가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4·10 총선에 나설 각 당의 후보자들에 대한 공천이 이번 주 마무리 됩니다. 올 해는 어떤 형식의 사진이 개발될지 살펴봐야겠습니다. ▶ 오늘은 100년 전 서울 동덕여학교에서 열린 학예회에서 이뤄진 댄스 동아리 공연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시선을 느껴보고 싶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경칩 지나고 춘분이 다가오는데 쌀쌀한 날씨에 나무는 아직 옷을 벗지 못했네요. 마음만큼은 알록달록 봄이기를.―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의 사진을 생각해보는 [백년사진]입니다. 오늘은 아주 짧은 글입니다. 1924년 3월 3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건물 앞에 두루마기와 흰 치마를 입은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카메라를 가리고 있는 다른 건물이 없는 거로 봐선 큰 대로변에 있는 건물입니다. 사진 속 사람들 시선의 방향이 모두 한쪽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 거로 보아 어떤 사람은 뭔가를 구경하는 거고 어떤 사람은 차를 기다리거나 뭔가 자기 일을 하러 나왔다가 사진에 찍힌 것 같습니다. 설명을 보니 서울 시내에 불이 났습니다. 어제 2일 오전 4시 20분경에 시내 황금정 이정목 중국인 부호 담정림 경영의 ‘미가도’자동차부에서 불이 나서 자동차 9대 가격 5만원 어치, 부속품 전부 가격 7500원 어치, 2층 벽돌집 한 채 2만원 어치, 도합 8만원 어치가 전소되고, 5시 4분에 출동한 시내 각 소방대의 진력으로 진화는 되었으나 휘발류가 많이 있는 자동차부라 화염은 걷잡을 새없이 붙어 올라 이층에서 자던 일곱 사람 중에서 일일 낮에 인천에서 다니러 왔다가 자게 되었든 인천 본정 인천자동차상회 운전수 리상호는 마침내 몸을 피할 틈이 없어서 참혹히 타죽고 말았다는 데 원인은 아직 불명이요 집과 자동차는 전부 화재보험에 붙이었음으로 불원(不遠)에 다시 회복되여 영업을 계속 하리라더라.▶ 황금정이면 지금의 을지로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담정림’이라는 이름의 중국인 부자가 운영하는 자동차 회사에 화재가 발생했네요. 불이 난 지 45분 만에 시내 여기저기서 출동한 소방관들이 진화했지만 자동차 9대, 부품, 건물 피해액이 8만원에 달하고,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2층에서 잠을 자던 7명 중에서 전날 인천에서 서울 본사로 출장을 왔던, 운전기사 이상호씨 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집과 자동차가 모두 화재보험에 들어 있어서 멀지 않은 시기에 영업을 재개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 저 사진의 1년 전인 1923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백년 사진]에서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지금의 충무로 일본인 상가 밀집 지역의 화재였는데 상가 30채가 전소되고 12채가 반소된 피해였습니다. 당시 피해 추산 액은 5만원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번사진 속 화재 현장은 중국인 사업가가 운영하는 양옥 건물인데, 2층 건물 한 채만 2만원의 수리비와 자동차와 부품 값이 6만원인 거로 봐선 꽤 큰 화재 사건이었습니다. ▶ 사진 설명을 통해 자동차 한 대 가격이 백 년 전에 약 5600원 정도 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기사나 광고를 보면 당시 단행본 책값이 1원, 독일제 수입 안경이 3원 정도했었습니다. 지금의 물가와 비교해보면 자동차의 품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값이 엄청나게 비싼 정도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가도’라는 브랜드에 대해서는 검색을 통해서도 더 이상 정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 흥미로운 점은, 이 당시에 화재보험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보험에 들어 있기 때문에 보상을 받을 수 있고 그러면 멀지 않은 시기에 영업을 재개한다고 신문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궁금해서 금융감독원 홈페이지와 손해보험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우리나라 보험 역사를 살펴보니, 1891.01월일본보험회사인 ‘제국생명’이 우리나라에 최초의 지점(부산지점) 개설1921.01월 우리나라 최초의 손해보험회사인 ‘조선화재해상보험㈜’ 설립1946. 08. 01조선손해보험협회 설립 (조선화재, 신동아화재, 대한화재, 서울화재)등의 연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궁금한 점이 또 있습니다. 저 당시 사망한 인천 운전기사에 대해서는 배상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인 사업가가 들었다는 보험의 배상 범위는 어디까지였을까요? 오늘은 100년 전 서울 을지로의 자동차 공장에 난 화재 사건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그 시대의 기록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사실을 제공해 줍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변영욱 기자 cut@donga.com}

5일 서울 성동구 뚝섬유수지 공영주차장 출입구에 칠해진 분홍색 주행유도선을 따라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성동구는 이달까지 관내 공영주차장 21곳에 운전자들이 헷갈리기 쉬운 입·출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분홍색과 연녹색의 주행유도선을 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4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1층 세종라운지에 도서가 진열돼 있는 모습. 과거 결혼식이나 출판기념회 등 행사장으로 쓰이다 지난해 2월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된 세종라운지는 통합매표소와 광화문책마당 세종문화회관점, 카페 등 편의시설을 갖췄다. 서울시에 따르면 세종라운지 조성 이후 1년간 약 64만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바닷바람이 돌탑을 비켜 가는지, 무너지지 않고 잘 서 있네요. 쌓은 이의 간절함이 바다에도 닿았나 봅니다.―부산 영도구 해변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