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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협은 중요하다. 러시아 선박이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오려면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야 한다. 18, 19세기 남하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 프랑스 사이에 싸움이 거셌다. 이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나오려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야 한다. 과거 영국은 본토에 맞먹는 규모의 함대를 지브롤터에 두고 제해권을 장악했다. 지브롤터 해협 이외에 출구가 없던 지중해에 숨통을 틔워 준 것이 수에즈 운하다. 그 관할권을 둘러싸고도 1956년 프랑스 영국과 이집트 사이에 전쟁 위기까지 갔다. ▷페르시아만에서 원유를 실은 배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만만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간다. 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너비가 39km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이란과 오만이 절반씩 나눠 갖고 있다. 대부분의 배가 통과하는 오만 쪽 해역에는 들어오는 배와 나가는 배를 위한 각각 2마일 너비의 항로가 선박 간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 구역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 고작 4마일의 좁은 항로를 통해 전 세계 액화석유가스의 3분의 1, 원유의 5분의 1이 움직이는 것이다. ▷미국과 이란의 핵협상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호르무즈 인근 해역에서 유조선들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란을 배후로 지목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중동에서 석유를 수입하는 국가들은 스스로 유조선을 보호해야 한다”며 파병을 요구했다. 최근 사태는 제1차 세계대전 때 터키가 독일 편에 서서 항로를 폐쇄하자 연합국이 반발한 다르다넬스 해협 사태와 비슷해지고 있다. ▷일본은 파병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고 우리나라도 의사 타진 수준의 비공식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는 군인들의 인명 피해 우려와 함께 이란과 쌓아온 경제협력관계를 단번에 날려버릴 리스크가 있다. 하지만 원유의 75%를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수입하는 나라가 남 일처럼 ‘나 몰라라’ 하고 무임승차만 바라는 것은 무책임해 보인다. ▷진보 진영에 파병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상선들의 항해할 자유를 지키기 위한 파병은 대의(大義) 면에서 수긍할 만하다. 만약 일본이 파병하는데도 우리는 파병하지 않는 상황이 되면 미국의 눈에 양국에 대한 평가는 크게 대비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위해 이라크 파병까지도 결정했다. 우리로서는 일본의 경제보복 규제에 직면해 미국의 중재가 절실한 상황에서 파병은 거부하기 곤란한 요청이라는 점도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사망자 츠카이 콘스탄틴, 사망장소 에콰도르 ○○병원, 사망일시 2018년 12월 1일, 특이사항 연고자 없음…. 카자흐스탄에서 만든 가짜 신분이었기에 공식적으로는 연고자는 없었다. 하나 실제로는 아들 정한근 씨가 임종을 지켰다. 한근 씨는 입관 당시 아버지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검찰에 제출했다. 시신의 얼굴이 신문에 실리는 일은 드물지만 그 사진은 그의 죽음을 애도가 아니라 증명하기 위해서 신문에 실려야 했다. ▷정 씨는 에콰도르에서 1997년 한보 사태 당시 이미 도피한 아들 한근 씨와 함께 유전사업을 벌이고 생일파티 사진까지 남기는 등 꽤 안락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95세의 장수를 누렸다니 그가 특별히 건강한 것인지, 검찰이 쫓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한때 재계 서열 14위 그룹을 이끌었던 사람이 84세의 나이에 해외로 도피해 언제 붙잡혀 송환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보낸 11년은 그 자체로 창살 없는 감옥이었을 것이다. ▷정 씨의 입관 당시 모습이 신문에 실린 날 1980년대 2000억 원대 어음 사기 사건에 연루됐던 장영자 씨가 다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도 실렸다. 장 씨는 1982년부터 1993년까지 11년, 1994년에서 1998년까지 4년, 2001년에서 2015년까지 14년 등 29년을 사기죄로 감옥에서 보냈다. 지난해 다시 사기 혐의로 구속됐고 징역 4년이 확정된다면 2022년까지 총 3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숙대 메이퀸을 지낼 정도로 미모를 자랑했고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 씨와 함께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행세했던 장 씨가 처음 옥살이를 할 때의 나이가 38세였다. 어느덧 75세가 됐다. 한때 ‘대도(大盜)’로 불렸던 조세형이 늙어서도 좀도둑질을 계속하며 도둑질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듯이 장 씨 역시 나이가 들어서도 사기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 그녀의 진짜 불행인 듯하다. ▷정 씨의 뇌물은 통이 컸다. 뇌물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그라미 하나가 더 붙은 것에 놀랐다고 한다. 불법으로 쌓아올린 한보그룹이란 성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향하는 과정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장 씨가 ‘큰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안이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씨의 사돈 집안이라는 배경도 있었다. 돈으로 나라를 뒤흔들었던 두 사람의 노년이 한마디로 탐욕무상(貪慾無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국에서 미란다(Miranda) 원칙을 확립한 미란다 판결 이전에 ‘맵(Mapp)’ 판결이 있었다. 별건(別件) 수사를 통해 수집된 증거는 배제한다는 원칙을 확립한 판결이다. 1961년 경찰관 3명이 맵이란 여성의 집을 찾아 폭파사건 혐의자를 찾고 있다며 집을 수색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맵은 변호사와 통화를 한 뒤 수색을 거부했다. 경찰관은 맵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 집을 수색했다. 그러나 혐의자는 찾지 못했다. 그 대신 음란물을 발견하고 맵을 음란물 소지 혐의로 체포했다. 맵은 기소됐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고 맵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맵의 음란물 소지 혐의는 폭파사건 혐의자를 찾는 본건(本件)과는 상관없는 별건(別件) 수사의 결과라는 이유에서다.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적지 않은 별건 수사가 이뤄지는 가운데 최근 서울고등법원이 별건 수사로 수집된 증거를 명확히 부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위법 수집된 증거는 배제하라고 형사소송법에 나와 있지만 어디까지 구체적으로 위법으로 볼지는 법원에 달려 있다. 방위사업청 공무원들이 방위사업체로부터 뇌물을 받는다는 의혹으로 시작된 수사가 있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방위사업청 직원들의 법인 카드 사용 명세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사무실 컴퓨터 외장 하드와 업무 서류철을 통째로 압수해갔다. 압수된 컴퓨터 외장 하드에 직원들의 군사기밀 유출을 입증하는 자료가 있었던 모양이다. 기무사가 그 자료를 열람하고 직원들을 군사기밀 유출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이를 별건 수사로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일반인이라면 이 판결을 이상하게 볼 수도 있다. 경위야 어쨌든 군사기밀 유출이 있었고 그에 대한 처벌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증거가 있는데도 처벌할 수 없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식적 판단을 뒤집었기에 맵 판결은 충격적이었다. 수사의 경위야 어떻든 맵은 음란물을 소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법원은 수사의 경위를 문제 삼았다. 수사기관의 손쉬운 수사에의 유혹을 방치할 경우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과거 영장도 없이 아무 데나 뒤져 증거를 찾을 수 있던 시대에서 영장이 있어야 압수수색할 수 있는 시대로 넘어왔다. 영장의 범위를 벗어나는 압수수색을 인정하면 영장도 없이 증거를 찾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리적 사고가 법원의 판결에 깔려 있다. 미란다 원칙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에 대해 고지받지 않은 상태에서 혐의자의 자백은 강요에 의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강요에 의한 자백이 위법이라는 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노력하면 변호인접견권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자백도 위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변호인접견권에 대해 듣지 못했다고 해서 혐의자가 자백을 했는데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건 누가 봐도 당연한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 프랑스 신문 르몽드에서 퀴즈 문제를 하나 본 적이 있다. 미란다 원칙이 프랑스에도 적용되느냐 아니냐를 묻는 퀴즈였다. 정답은 ‘아니다’였다. 프랑스도 뒤늦게 미란다 원칙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부분적으로만 수용하고 있을 뿐이다.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도 비슷하다. 우리나라는 미란다 원칙을 형사소송의 대원칙처럼 받들고 있다. 형사소송 체계까지 할리우드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는 천박한 풍토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미란다 원칙과 같은 높은 수준의 원칙을 존중하는 나라에서 별건 수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는 심각한 불균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를 끝까지 추적해 정의를 세운다는 입장에서 보면 영장주의 자체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법치는 정의를 실현하는 기술(技術)이면서 정의의 추구를 제한하는 기술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자코뱅에서 20세기 공산주의자들까지 정의를 세우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정의를 유린한 역사가 적지 않기에 정의 추구에는 절제가 필요하다. 적폐청산 수사가 별건수사로 얼룩졌다 할지라도 재판만큼은 적폐청산의 대의(大義)에 가려진 수사의 위법을 가려내 형사소송 체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미일 안보조약은 1951년 체결된 후 일본에서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불만이 나와 이른바 안보투쟁의 원인이 됐다. 지금은 미국에서 오히려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26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로 향하기 전 “일본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은 그들을 위해 싸우지만 미국이 지원을 필요로 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소니 TV로 미국에 대한 공격을 지켜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패전국 일본은 자위대를 보유하고 개별적 자위권까지는 행사할 수 있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평화 조항이라고 불리는 일본 헌법 9조에 저촉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집단적 자위권은 자국의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하는 권리를 말한다. 집단적 자위권이 없이 서로 방어해 주는 동맹국이 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한국 필리핀 등은 미국과 상호방위(mutual defense)조약을 체결하고 있지만 일본은 이름부터 다른 안보(security)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5년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한 법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지만 여전히 헌법 9조에 저촉된다는 주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가 불만을 늘어놓는 게 아베에게 반드시 불리하지 않다. 헌법 9조를 개정해 위헌 논란 자체를 없애려는 아베의 시도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접국인 한국으로서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가질 경우 한반도 유사시 우리의 요청 없이도 위협받는 미군을 구실로 일본이 개입할 수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불만은 따지고 보면 돈과 연결돼 있다. 주둔군 수로 보면 주일미군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주독미군, 주한미군 순이다. 주일미군지위협정에 따르면 주일미군의 운영경비는 미국이 부담하도록 돼 있지만 1978년부터 일본은 그 비용을 분담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일 안보조약의 실질적 비대칭성을 거론하며 분담금을 더 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한국에도 주한미군 운영경비의 분담금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1991년부터 분담금을 내기 시작해 분담률이 아직 일본만큼 높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과 달리 베트남전 참전, 이라크 파병 등으로 피를 흘리면서까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동맹을 소중히 여기고 동맹의 의리를 지키되 부당할 정도의 분담금 증대 요구에는 당당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8일 재선 도전 출정식에서 민주당의 대선 후보 유력주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겨냥해 ‘졸린(sleepy) 조 바이든’ ‘미친(crazy) 버니 샌더스’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신대륙 정치가 구대륙의 이데올로기적 대결에 오염되지 않고 상호존중의 정신을 간직한 것을 미국의 축복으로 여겼으나 트럼프 이후 그런 말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미국 정치에서 말의 책임감이란 고전적 원칙이 사라지고 있다. 트럼프에게 말은 협상에 앞서 벼랑 끝까지 상대방을 몰고 가는 수단이다. 말의 내용보다 자극하거나 무마하는 말의 효과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하기 어렵고 하룻밤 사이에 말을 뒤집기도 한다. ▷미국인의 62%도 이런 트럼프가 불편하다고 여긴다. 경제 활황에도 불구하고 최근 폭스뉴스 조사에서는 민주당의 주요 도전자가 모두 트럼프를 이기고 특히 바이든은 10%포인트의 가장 큰 격차로 트럼프를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경제 활황이라도 좋은 일자리는 많이 늘지 않았을 수 있다. 최근 갤럽 조사에서 응답자의 40%만이 트럼프의 일자리 성과에 긍정적 반응을, 55%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게다가 경제는 활황을 끝내고 하락 조짐을 보여 트럼프가 점수를 얻을 여지가 줄고 있다. ▷세계는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미국을 겪고 있다. 친절한 엉클 샘은 더 이상 없다. 자기 이익이 최우선인 스크루지 아저씨가 있을 뿐이다. 민주당 도전자들은 이런 트럼프를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이고 종교차별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중하층 노동자는 멕시코와의 국경에 철의 장벽을 쌓고 중국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려는 트럼프의 보호주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대선 출정식 후 하루 만에 291억 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민주당의 주요 세 후보가 출마 선언 이후 모은 후원금을 합친 215억 원보다 많다. ▷미 대선까지는 아직 1년 4개월 넘게 남았다. 2016년 대선 6개월 전까지도 거의 아무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당시로는 미국인은 트럼프가 어떤 대통령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미국인들은 그때보다 트럼프를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좋은 식으로 그를 더 잘 알고 있지는 않다.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 중에는 트럼프에게 거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에서 재선에 나선 대통령은 대개 이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전 뒤집힌 예상이 이번에는 뒤집히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문무일 검찰총장은 윤석열이라는 실력자 위에서 고군분투한 총장이었다. 처음에는 힘만 들고 티도 안 나는 자리를 왜 맡나 했는데 끝까지 주눅 들지 않고 막판에는 흔들리는 옷만 아니라 흔드는 손도 보라며 권력에 일갈하는 기세로 나와 보기 좋았다. 문무일이 먼저 총장에 임명되고 총장의 의견을 들어 윤석열이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게 아니라 윤석열이 먼저 임명되고 그 뒤에 문 총장이 임명됐다. 청와대는 뒤바뀐 순서를 통해 검사들에게 검찰의 실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보여줬다. 직전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이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과 같이 밥을 먹고 관행대로 서로의 부하직원들에게 격려금을 준 일이 느닷없이 친정부 언론에 보도되고 다음 날로 이영렬이 경질됐다. 음습한 공작의 냄새가 풍겼다. 그런 공작의 결과 윤석열이 먼저 서울중앙지검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청와대는 그를 앉히기 위해 고검장급이던 서울중앙지검장 자리를 검사장급으로 낮추는 위인설급(爲人設級)의 일까지 벌였다. 어느 고등법원 부장판사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 법조인의 상갓집에 갔는데 먼저 와 있던 윤석열이 뒤늦게 온 문 총장을 보고 일어서지도 않더란다. 윤석열 주변에 그가 거느리고 온 검사들은 다 일어서서 예의를 갖췄으나 그만이 일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 총장은 문상을 한 뒤 함께 온 대검 참모들과 따로 상을 차렸다고 한다. 직접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사실일까 아직도 의문을 갖고 있다. 나이 든 늦깎이들은 대체로 더 깍듯한 법이다. 그 부장판사가 허튼소리 할 사람은 아니지만 상갓집에서 본 일에 대한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 얘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법조계가 검찰 내 권력구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문 총장은 내가 검찰에 출입하며 상대한 평검사들 중 마지막 남은 검사다. 그 아래 기수로는 거의 안면이 없다. 윤석열을 알지 못하나 그에 대해서는 그가 중앙수사부 검사이던 시절 함께 식사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다. 윤석열이 “죄 없는 사람 데려다 죄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곳이 중수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중수부 검사 출신으로 대법관을 지낸 분에게 윤석열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이 사람 발끈했다. 내가 중수부를 모욕한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다른 기회에 검찰총장을 지낸 분에게 윤석열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하자 이분은 “처음부터 죄 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며 담백하게 받아넘겼다. 좋게 말하면 그런 뜻이었을 게다. 죄 없는 사람을 죄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면 못된 수사 기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검찰에서 가족같이 지낸 사람의 잘못을 불어놓고 재판에 증인으로 나오길 주저할 때는 법이 금지하는 유죄협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환부만 도려내는 외과 수술식 수사’에 대한 강조는 사라지고 곳곳에서 저인망식 별건(別件) 수사가 벌어지고 있다. 수사관이 표적 기업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자료를 뒤진다. 기업에는 걸면 걸리는 혐의가 많다. 그런 혐의를 피하기 위해 자료를 감추면 이번에는 증거인멸을 했다고 팬다. 그런 것으로도 안 되면 오랜 관행을 비리로 둔갑시키면 된다. 그렇게 모으고 모아서 당사자조차 놀랄 정도의 많은 혐의와 두꺼운 공소장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윤석열과 그 키즈(Kids)’의 수사방식이다. 덩치 큰 사람들이 오히려 성격이 여리다고, 윤석열이 독한 게 아니라 그 밑에 과거 노무현 청와대에서 일해 청와대와의 교감에 능한 정치참모 역할의 검사 하나와 누구의 말처럼 ‘한 편의 소설’같이 공소장을 제작하는 데 능한 수사기계 역할의 검사 하나가 있다는 얘기도 있다. 윤석열은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와 관련해 윗사람을 치받고 성공한 전력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거부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렇게 떠밀리듯 지금의 자리에 와 있다는 평가도 있다. 문무일 검찰은 실은 제1기 윤석열 검찰이었다. 앞으로 시작되는 것은 제2기 윤석열 검찰일 뿐이다. 윤석열이 양날의 칼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 혹은 기대는 접으시라. 문재인-윤석열은 한 배를 탔다. 그들은 적폐청산 수사로 인해 운명 공동체로 엮였다. 흥해도 같이 흥하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 권력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은 사치스러운 말이 되고 지금은 씨알도 먹힐 여지가 없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20년대 상하이, 1950년대 홍콩은 중국 현대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도시들이다. 1920년대 상하이는 당시 ‘동양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이어서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정부도 그 속에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홍콩을 만든 것은 1950년대 공산화된 중국을 피해 온 난민들이다. 그들이 홍콩의 개방성 속에 어우러져 서구에 필적할 아시아의 첫 대중문화의 시대를 열었다. ▷홍콩은 예나 지금이나 관광의 홍콩이지 정치의 홍콩은 아니다. 그러나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로는 정치의 홍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홍콩은 중국에 속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홍콩의 정부 수반인 행정장관만 해도 정부에 의해 임명되지 않고 선거로 선출된다. 그러나 주민들의 직접 선거가 아니라 대의원의 간접 선거로 선출되기 때문에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홍콩 행정장관이었던 둥젠화(董建華), 도널드 창, 렁춘잉(梁振英)과 현 캐리 람 장관은 모두 강경 친중파다. 여론조사에서는 민주파 후보의 지지도가 높아 주민의 의사와 간선제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았다. 2014년 홍콩 주민들은 행정장관의 직선을 요구하며 50만 명이 참가한 ‘우산 혁명’ 시위를 벌였다. 중국 정부는 마지못해 2017년 직선제에 동의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 직선제가 중국 인민대표회의가 사전에 뽑은 2, 3명의 후보를 놓고 직접 투표하는 무늬만 직선제여서 홍콩 주민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9일 홍콩에서 반환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중국과의 범죄인 인도 협정 개정 반대 시위에 100만 명이 운집했다. 시위대는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것을 우려했다. 시위는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켜 미국 캐나다 독일 일본 등에서도 연대 지지 집회가 열렸다. ▷이번 시위는 닷새 지연돼 주말에 맞춰 열린 6·4 톈안먼 사태 30주년 추모 시위라고도 볼 수 있다. 홍콩이 정치 개혁을 요구하다가 희생된 6·4 톈안먼 시위대를 끊임없이 추모하는 것은 중국의 정치 개혁 없이 홍콩의 정치 개혁도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우산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부에게 징역형이 선고되는 것을 목격한 지금, 그것은 단순한 추모 이상이다. 지금의 홍콩 주민들에게 30년 전 톈안먼 시위대의 요구는, 그것 없이는 정치적 자유는 물론이고 치솟는 집값 등 민생 문제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실한 현재진행형의 요구가 되고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대 법대는 형법 쪽이 유독 약하다. 민법 쪽만 하더라도 곽윤직 교수라는 큰 산이 있었고 그 계보가 양창수 교수(전 대법관), 김재형 교수(현 대법관)로 면면히 이어졌다. 반면 형법 쪽은 유기천 교수가 유신 시절 미국으로 망명해 버린 후 지금까지도 변변한 교수가 없다. 1984년 촉망받던 강구진 교수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사망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강 교수는 이수성 교수와 연배가 비슷하다. 이 교수는 나중에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냈지만 형법 교수로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그가 강 교수의 빈자리에서 선후대를 잇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서울대에는 단독으로 형법 교과서조차 써본 교수도 하나 없다. 그런 그가 ‘낳은’ 사람 중 하나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인 조국 교수다. 조 교수가 대학원 시절 쓴 석사논문은 소련 법학자들의 사상을 다루고 있다. 심사위원장은 이 교수였다. 손꼽히는 마당발인 이 교수는 ‘형님, 아우’ 하는 인맥 관리에는 능했지만 소련 법학은 말할 것도 없고 법학 자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조 수석은 안경환 교수의 권유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로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그의 박사논문 심사위원장이 필립 존슨이라는 교수이며 특이하게도 ‘지적 설계(Intellectual Design)’라는 사이비과학 운동의 주도자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관심이 딴 데 가 있는 ‘구멍들’을 잘도 찾아내서 학위를 받았다. 민정수석이 된 조 교수가 지난해 내놓은 문재인 정부의 헌법 개정안은 욕심이 커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갈피를 못 잡은 학부생의 리포트처럼 낯 뜨거운 수준이었다. 헌법의 헌(憲)은 큰 틀을 의미한다. 큰 틀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골격의 체계성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헌법 사안과 법률 사안도 구별하지 못해 법률로 규정할 사안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례도 적지 않았다. 조 수석이 틀을 만든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대해서는 권한이 검찰로 가느냐, 경찰로 가느냐를 떠나 수사 실무를 알기나 하고 만들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에 대한 보완수사 요구, 검찰의 2차 수사권 등 핵심 항목에 대해 경찰도 검찰도 일치된 개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소재(所在) 수사 지휘 등 세세한 부분을 망라해서 고려하지도 못했다. 이런 법안을 국회가 섣불리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바람에 결정의 순간 앞에서는 이도 저도 못하는 ‘브렉시트’ 꼴이 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의 박사논문을 꼼꼼히 읽은 적이 있다. 독일어 표기는 실수가 많았고 독일 문헌을 읽지도 않고 인용했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 적지 않았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능력의 80% 정도를 발휘해 할 수 있는 일이다. 개헌도, 검경 수사권 조정도 그의 능력에 부치는 일이다. 젊었을 때부터 자신을 향한 과분한 기대에 부응해 능력에 부치는 일을 해오다 보니 습관이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고향 말로 이제 ‘고마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넘겨줬으면 한다. 대통령의 행정부 인사권은 기본적으로 재량에 속한다고 보기 때문에 인사검증 실패에는 크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다만 국정의 중재자로서 하는 사법부 인사는 다르다. 김명수 대법원장, 그리고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문형배 이미선 헌법재판관 등 대통령 몫으로 임명된 헌재 구성원이 과거 정권의 편파성을 극복하기는커녕 더 노골적으로 편파적인 구성이 된 데는 교수 시절 입만 열면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한 조 수석의 책임이 크다. 조 수석은 파슈카니스 등 소련 법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에 가담했다. 파슈카니스는 공산주의에서는 ‘계획’이 법을 대체한다고 보면서 법학의 괴물이 돼갔다. 지금 애매모호한 ‘촛불정신’이 법을 대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정적과 대기업에는 터무니없이 가혹하고 내 편과 민노총에는 터무니없이 관대한 법 적용이 검찰과 법원에 스며들고 있다. 청와대가 무고하게 이영렬을 쫓아내고 거의 탈법적으로 임명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의 수사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법무비서관들에 의한 법원의 배후 공작을 통해 이런 일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오래전 사노맹 일로 그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한마디는 해주고 싶다. ‘일 못해도 좋으니 괴물은 되지 마라.’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1989년 6월 4일 새벽 4시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광장의 불이 꺼졌다. 확성기로 시위대에 대한 소개(疏開)가 시작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팔짱을 꼈다. 학생들 10m 앞에 기관총과 소총을 지닌 군인들이, 그 뒤에 탱크와 장갑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진압 시작. 당시 시위대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차이링(53)은 “오랜 시위에 지쳐 천막 안에서 깊이 잠든 학생들을 탱크가 짓밟았다”고 증언했다. ▷중국 정부가 1991년 밝힌 톈안먼 시위 진압의 공식 사망자 수는 241명이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과 인근 병원의 진료기록을 집계하면 적어도 478명이 사망하고 920명이 부상했다는 주장이 있다. 국제사면기구(AI)는 사망자가 1000명까지도 이를 수 있다고 본다. 지난해 비밀해제된 영국의 한 외교기밀문서는 사망자가 1만 명을 넘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살아남은 톈안먼 사태 관련자는 수감되거나 추방됐다. 당시 시위대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왕단(50)은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병보석으로 석방돼 치료 목적의 망명을 인정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지식인 대표였던 류샤오보는 망명을 거부하고 중국에 남아 수감과 연금 생활을 이어가다가 201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2010년 노벨평화상 수상은 중국이 출국을 막아 빈 의자에서 이뤄졌다. ▷중국 우주물리학자 팡리즈가 1986년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귀국했다. 그는 중국의 빈곤이 전제적 정치체제와 경직된 통제경제의 산물이라고 봤다. 그의 호소에 학생들이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후야오방 총서기와 자오쯔양 총리는 시위에 유화적이었으나 실권자인 덩샤오핑은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세 사람은 마오쩌둥에 같이 저항했으나 그 문제로 갈라섰다. ▷톈안먼 시위는 신해혁명-5·4운동-중화인민공화국 수립-문화혁명-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진 중국 현대사의 단절점(斷絶點)이자 그 이후의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다. 덩샤오핑의 의도가 반영된 1989년 4월 26일자 런민(人民)일보 사설은 “20만 명이 죽는다 해도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톈안먼 사태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 체제가 경제적으로 개방을 추구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독재임을 분명히 했다. 한때 중국 경제가 개방되면 정치적 민주화도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기대가 있었으나 시진핑에 이르러서 거꾸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회귀하면서 그런 기대도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경찰 내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전국 경찰서의 형사과와 수사과 사건을 총괄하는 또 하나의 괴물이 될 수 있다. 수사의 주도권이 검찰에 있든, 국수본에 있든 국민에게는 조삼모사(朝三暮四)다. 수사권 조정은 대통령의 검경 인사권을 견제할 수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고쳐야 할 단순한 핵심을 빼놓으니까 얘기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복잡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미국은 수사권이 경찰에 있다. 경찰관은 수사를 하고 나면 검사를 찾아가 이대로 기소하면 판사에게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는지 의견을 구한다. 검사는 경찰관의 자문에 응하는 일종의 국가 변호사(attorney)일 뿐이다. 기소장에 서명도 검사가 아닌 경찰관이 한다. 이런 방식은 경찰이 주민 자치의 기관으로 생겨나고, 그래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고 있는 나라에서 가능하다. 이런 전통이 없는데도 무늬만 자치인 자치경찰을 하겠다고 하면서 경찰에 미국처럼 수사의 전권을 주려는 것이 검경 수사권 조정의 핵심 내용이다. 우리나라 경찰은 미국 경찰과 달리 국민의 경찰이 아니라 국가의 경찰로 출발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경찰의 전횡을 통제할 필요가 생겼고 검사의 수사지휘권이 태어났다. 검사는 법률의 전문가이지, 수사의 전문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부여한 것은 인권 보호 때문이다. 수사지휘권 혹은 최소한 수사종결권에 대한 검찰의 요구는 일리가 있다. 다만 검사에게 수사지휘권을 주기 위해서는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정권으로부터 검사의 독립이다. 독일처럼 검찰권이 연방과 주로 나뉜 국가는 별도로 하고 우리나라처럼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에는 ‘사법평의회’라는 기구가 있어 판검사 인사권을 행사한다. 사법평의회에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참여하긴 하지만 합의체이기 때문에 전횡을 휘두를 수 없다. 이들 나라에서는 판검사를 ‘사법관(magistrat)’으로 통칭하고 검사에 대해서도 판사에 준하는 방식으로 인사의 독립성을 보장한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검찰 인사에 사실상 전횡을 휘두를 수 있게 돼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든 단 하나의 요인을 꼽아보라면 검찰 인사권이라고 말하겠다. 수사권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와 국수본으로 옮겨가면 두 기관의 구성원에 대한 인사권이 대통령을 제왕적으로 만들 것이다. 대통령에게 공수처장 후보를 2명 추천하는 방식에서는 그중 1명은 대통령 입맛에 맞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공수처 검사 인사위원회’는 과반이 친여 몫이어서 대통령은 자기 뜻에 맞는 사람들로 공수처 검사를 뽑을 수 있다. 국수본부장은 검찰총장보다 더 쉽게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뽑을 수 있다. 우리나라 형사사법제도의 틀을 만든 것은 일본이다. 그럼에도 두 나라의 제도는 오늘날 크게 달라졌다. 일본은 패전 이후 점령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주도로 자치경찰제를 통한 대대적 분권화를 시행한 후 경찰에 사실상 독립된 수사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이뤄냈다. 구속영장만 해도 법적으로는 검찰이 독점하지만 실제로는 경찰이 신청한 영장을 검찰이 단 한 번도 반려하지 않음으로써 경찰 수사를 존중하는 관행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검찰은 정권에는 피학적(被虐的)이고 경찰에는 가학적(加虐的)이다. 그래야 대통령이 검찰을 지배하고 검찰이 경찰을 지배하는 구조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설설 기면서 경찰에는 상전 노릇 하려는 검찰을 떠올리면 검찰의 힘을 빼버려야 한다는 격한 기분이 들면서도 우리와 유사한 다른 나라의 경험을 봤을 때 경찰을 획기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함부로 없애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청와대가 지난해 내놓았던 누더기 같은 헌법개정안을 떠올려보라. 검경 개혁의 틀도 딱 그 수준이다. 대통령 권한을 내려놓은 대신 4년 중임제를 실시하겠다는 개헌안에 검찰 등 권력기관에 대한 인사권을 어떻게 하겠다는 언급은 한마디도 없었다. 현재 대통령의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임명은 국회의 동의조차 요하지 않는다. 개헌이 아니라 법 개정으로 가능한 그것마저도 고칠 생각이 없다.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니까 권한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변죽만 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근대 과학은 실험을 중시한다. 실험을 위해서는 측정과 비교가 필요하다.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는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측우기(測雨器)가 ‘모셔져’ 있다. 측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과학철학자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한 TV 강연에서 이 측우기를 ‘깡통에다 자 하나 대 놓은 것’이라고 표현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측우기의 소박함을 폄훼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의 양을 측정한다는 생각, 나아가 똑같은 자로 전국에 내린 비의 양을 비교한다는 생각이고 그것이 과학 정신임을 강조한 것이다. ▷실험 과학의 면모가 갖춰진 17, 18세기에 이르러 과학자들은 도량형의 세계적 통일을 모색했다. 그 결과로 미터법을 토대로 한 길이와 무게의 기준이 만들어졌다. 길이의 기준인 1m는 파리를 지나는 지구 자오선 길이의 4000만분의 1로 정해졌다. 길이의 기준이 만들어지자 무게의 기준도 만들 수 있게 됐다. 1kg은 1000cm³의 물이 밀도가 가장 높은 섭씨 4도에서 지닌 무게로 정해졌다. 1799년 표준이 되는 미터 원기(原器)와 킬로그램 원기가 백금으로 만들어져 파리 ‘공화국 문서보관소’에 보관됐다. ▷백금이 단단하다고 하지만 온도와 습기에 따라 미세한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후에 국제미터협약을 거쳐 1889년 보다 정확히 만들어진 새 원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레이저 기술 등이 발달하면서 더 정확한 길이와 무게의 측정이 가능해졌다. m는 1983년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빛이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진공 속에서 진행한 거리로 새로이 정의됐다. kg에 대해서는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교환된다는 원리를 이용한 복잡한 계산 방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늦어져 지난해 국제도량형총회에서 비로소 새로운 정의가 채택됐다. ▷오늘은 세계측정의 날이다. 우리나라는 오늘부터 새로운 kg 기준을 적용한다. kg의 기준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체중이 변할 것을 우려하거나 기대할 필요는 없다. 1889년 국제 킬로그램 원기는 그사이 최대 100만분의 1g이 줄어들었다. 새로 채택된 kg의 정의에 따라 무게를 환원한다 해도 고작 최대 100만분의 1g이 늘 뿐이다. 마블 시리즈의 앤트맨에게라면 몰라도 우리에게 이 정도 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양자 역학을 다루는 과학이나 나노 기술을 다루는 산업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정의다. 다만 일반인으로서는 더 이상 이해하기도 쉽지 않게 된 kg의 정의가 아쉬울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국내 최초의 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다. 지도를 펼쳐보면 팔미도는 인천으로 들어가는 광활한 해역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왕조는 1903년 팔미도에 높이 약 8m의 등탑을 세웠다. 개화 이후 일본 등과의 해상교역이 점차 늘던 시기의 산물이다. 팔미도 등대는 1950년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인 유격대 KLO부대가 상륙작전에 앞서 팔미도를 탈환해 등대를 켜 상륙하는 전함들을 인도했다. ▷캄캄한 밤의 외로운 불빛은 단지 시인이 낭만을 노래하는 소재나 귀선(歸船)의 피로를 풀어주는 표지만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임을 실감한 때가 있다. 1996년 동해 강릉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을 취재할 때 등명낙가사라는 절의 주지로부터 들은 얘기다. “한밤중에 절로 돌아가다가 잠수함이 좌초한 곳에 인접한 해안 절벽에서 바다 쪽으로 전조등을 비춰주는 자동차를 봤다.” 그의 말이 맞다면 좌초한 잠수함의 무장간첩들은 고정간첩이 켜준 전조등을 등대 삼아 해안 절벽을 기어올라 산으로 도망친 것이 된다. ▷서해 대(大)연평도에는 조기잡이 어선의 바닷길을 비추는 등대가 1960년에 세워졌다. 북한 간첩 침투에 이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1974년 소등됐다. 이후에도 바다에 안개가 많이 낄 때 이곳에서 소리 신호는 보냈는데 그마저도 1987년 중단됐다. 정부는 17일 45년 만에 연평도 등대의 불을 다시 켜기로 했다. 이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조성하고 향후 남쪽의 인천항과 북쪽의 해주·남포항을 잇는 해로가 개설될 때에 대비한 것이라고 한다. ▷대연평도에는 두 개의 등대가 있다. 마을이 있는 남쪽 선창에는 불을 밝힌 다른 등대가 있어 주민들의 야간 귀선에 어려움이 없다. 이번에 불을 켜는 등대는 마을 북쪽 해발 105m 언덕 등대공원에 있다. 등대의 빛은 40km 넘게 뻗어나가 먼바다를 비추는 용도로 쓰인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같은 항법장치의 발전으로 등대는 점차 없어지는 추세다. 그래도 육안으로 볼 수 있으면 항해에 나쁠 건 없다. 다만 군사적 부담을 감수하고 등대를 가동할 필요가 있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북한 해안 방사포는 등대 불빛을 보고 쏘는 것이 아니라 좌표를 찍어 쏘는 것이어서 달라질 게 없지만 공기부양정 등이 야간 침투할 경우 등대 불빛은 유용한 지표가 된다. 주민에게 당장 등대가 시급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평화가 정착됐다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군사적 보완책을 강구한 뒤에 점등을 논의해도 늦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했을 때다. 어느 기자가 장관이나 수석비서관도 대면보고한 적이 드물다는 점에 대해 물으니 대통령은 충분히 많은 서면보고를 받고 의문이 있으면 수시로 전화로 묻는다고 답한 뒤 배석한 장관들을 돌아보면서 “대면보고가 꼭 필요하세요”라고 물었다. 그 말에 장관들도 웃고 참모들도 웃고 기자들도 웃고 말았지만 그것은 고쳐지지 않을 불통을 깨닫는 허탈함의 웃음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얼마 전 사회원로 초청 자리에서 “적폐 수사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수도 없고 통제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통제하지 않았다’도 아니고 ‘통제할 수 없다’는 유체이탈적 화법은 뭔가. 민정수석이 검찰에 전화도 하지 않는데 무슨 통제냐는 생각은 밤늦도록 줄을 쳐가며 보고서를 읽고 있는데 대면보고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짧고 허망하다. 결국 법원에서 무죄가 난 돈 봉투 사건으로 서울중앙지검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5년 차나 아래 기수를 법무부 장관도 검찰총장도 없는 틈을 타 내리꽂아 적폐 수사의 틀을 만든 것이 대통령 자신이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던지 죄가 되는지 의심스러운 사건에는 꼭 개입했다. 박찬주 전 육군 대장의 공관병 갑질 의혹이 불거지자 ‘뿌리를 뽑으라’고 지시했다. 군 검찰은 죄가 되지 않자 별건인 뇌물로 기소했으나 결국 무죄가 됐다. 계엄령 문건에는 대놓고 수사를 지시했고, 실행계획과는 거리가 멀자 계엄령 검토 자체가 불법이라는 억지를 부렸다. 청와대가 혐의의 입증이 곤란에 처한 순간마다 캐비닛 문건이란 걸 들고나온 사실을 일일이 말해야 할까. 문 대통령은 지난달 군 장성들을 만난 자리에서 “칼은 뽑았을 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칼집 속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고 말했다. 그 말은 칼집 속의 칼을 늘 더 예리한 것으로 준비하고 칼 쓰는 법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중요한 군사훈련을 모두 중단시켜 칼 쓰는 법마저 잊게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 문 대통령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나(I)’와 ‘남들이 생각하는 나(me)’ 사이의 간격이 커 보인다. 사람에 따라서는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처럼 ‘나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졸렬한 생각으로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 수도 있겠다. 그렇게 할지라도 최소한 자신이 칼을 버리고 있다는 자기 인식은 있어야 한다. 그런 자기 인식도 없이 태연하게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무섭다’고 말하는 사람과는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건축가 승효상 씨가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대화하던 두 사나이라고 불렀던 문 대통령과 김정은은 실은 딴생각을 하고 1년여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스스로를 북-미 관계의 중재자 혹은 촉진자로 여겼으나 김정은의 눈에는 오지랖 넓은 당사자였을 뿐이다. 지금 북한은 남쪽을 향해 “당신들의 처신이 핵무기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당사자의 자세인가”라고 위압적으로 묻고 있는 듯하다. 김정은과의 불통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중단된 군사훈련은 북한의 행동에 따라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다’는 미국 폭스뉴스 인터뷰 때의 ‘아니면 말고’ 발언에 담긴 착각이다. 한번 중단된 한미 연합훈련은 트럼프라는 고약한 미국 우선주의자에 의해 한국이 군사훈련비를 분담하지 않으면 재개될 수 없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의 눈에도 한국은 당사자인 것이다. 김정은도 트럼프도 아는 냉엄한 현실을 혼자만 몰랐다. 문 대통령은 올 신년사에서 경제기조와 관련해 “가보지 못한 길이어서 불안하지만 가겠다”고 말했다. 잘 아는 분야도 가보지 못한 길은 함부로 가서는 안 되는 법인데 문외한인 분야에서 대다수 경제학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길을 굳이 가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지 그 심리가 궁금하다. 문 대통령은 계급장 떼고 토론하기 좋아하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다른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에게 대화란 ‘진리’가 적폐의 소음을 참고 견디는 지루한 자리라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분에 넘치는 중요한 자리를 맡는 것은 자신의 미숙한 판단을 과신할 수 있어 꼭 좋은 일은 아니다. 최소한 안보와 경제에서만큼은 남 얘기도 좀 들으면서 갔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일부 방송사들은 “시청자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 있는 이미지가 포함돼 있다”는 자막을 내걸었다. 장갑차에 일부 시위대가 깔리는 장면은 흐릿하게 처리했다. 베네수엘라에서 지난달 30일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장갑차가 돌진하는 장면을 말한다. ▷사람들은 30년 전 중국 톈안먼 사태를 상기했을 듯하다. 1989년 6월 4일 오전 4시 인민해방군은 탱크를 동원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당시 시위대의 학생대표 중 한 명이었던 차이링(柴玲)은 “학생들은 지쳐 천막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인민해방군이 탱크로 짓밟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국 방송사들은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으나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아직도 모른다. 지난해 비밀 해제된 영국의 한 외교기밀문서는 총에 맞거나 탱크에 깔려 죽은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위의 운명은 종종 탱크 앞에서 갈린다. 1991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탱크 위에 올라가 공산당 쿠데타가 무효임을 선언하자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톈안먼 사태가 남긴 사진 중 하나가 탱크를 가로막고 선 탱크맨(Tank man)의 모습이다. 사진은 어둠 속의 ‘성공적인’ 진압 다음 날인 6월 5일 낮에 찍혔고 그는 다행히 탱크에 깔리지 않았다. 2017년 대만 중양(中央)통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중국에서 이름을 숨기고 생존해 있다. 그러나 그의 생사와는 관련 없이 사진은 탱크에 짓밟힌 민주화 시위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은 인민해방군의 시위 진압을 칭송하면서 “적에게는 1%의 용서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껏해야 돌이나 화염병을 든 시위대를 탱크로 깔아뭉개는 것은 아무리 시위대를 국민이 아니라 적으로 본다 해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잔혹한 행동이다. 반(反)인륜적 진압 그 자체다.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끈 덩샤오핑의 이중성이 엿보인다. ▷베네수엘라 사태를 탱크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톈안먼 사태에 비교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감이 없지 않다. 아직은 그런 지경까지 가지 않았다고 본다. 다만 올 초 야당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과도정부를 선언함으로써 고조되기 시작한 마두로 정권과 반정부 시위대의 갈등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시민을 향해 돌진하는 장갑차가 더 큰 비극의 전조가 아니었으면 한다. 군대는 모름지기 국민의 군대여야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지난해 6·13 지방선거는 여론조사의 정확도, 정확히는 부정확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는 자유한국당이 27.76%였다. 그러나 선거 전날과 전전날인 11, 12일의 리얼미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광역의원 비례대표 정당지지율은 한국당의 경우 18.7%로 실제 개표 결과와 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여론조사회사로서는 수치스럽게 느껴야 할 차이다. 광역자치단체장의 득표도 한국당 김문수 후보가 바른미래당 안철수 후보와 야당 표를 크게 나눠 가진 서울에서만 20%대의 지지율이 나왔을 뿐 광주 전남 전북을 뺀 거의 모든 지역에서 30∼40%에 이르는 득표를 했다. 선거 직전까지 리얼미터의 정당지지도 여론조사에서 한국당이 얻은 지지율에서 이런 득표율은 예측은커녕 상상도 할 수 없었다. 6·13 지방선거는 리얼미터의 여론조사에 비해서는 한국당이 압도적으로 잘 치른 선거였다. 리얼미터가 매주 발표하는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는 대부분 ARS를 통해 이뤄지며 응답률은 5% 안팎이다. 5%의 낮은 응답률은 표본이 대표성이 있고 표본의 크기가 크다면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리얼미터 조사는 표본 중의 한 전화번호로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받지 않을 경우 다른 번호로 대체해 전화하는 ‘대체 걸기’를 통해 목표한 표본 수를 맞춘다. 이것은 표본이 계속 바뀌어 표본의 대표성을 말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뜻한다. 표본의 대표성이 무너지는 상황에서의 낮은 응답률은 조사에 거부감이 적은 집단에 특유한 편향이 반영될 여지를 넓힌다. 나는 리얼미터의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의 수치가 국민들 사이의 실제 여론을 반영한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절대 수치와 달리 수치의 등락은 상대적인 것이다. 편향이 있는 수치라도 그 편향에 일관성이 있다면 여론의 변화를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절대 수치가 잘못된 체중계라도 체중의 상대적 변화는 잴 수 있다. 그래서 리얼미터 여론조사를 보기는 한다. 다만 잴 때마다 체중계는 같은 것을 사용한다는 조건하에서다. 리얼미터는 최근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와 관련해 2차례 여론조사를 해 발표하면서 다른 체중계를 사용했다. 부정적 여론이 압도했던 1차 조사 때와 부정적 여론이 간발의 차이로 앞선 2차 조사 때의 질문이 달랐다. 이것은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에 가깝다. 12일 조사에서는 “최근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후보자의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자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로 물었다. 이때는 부적격 응답이 54.6%로 적격 응답 28.8%에 비해 압도적으로 앞섰다. 그러나 17일 조사에서는 “여야 정치권이 이 후보자의 임명을 두고 대립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이 후보자에 대한 청문보고서를 국회에 다시 요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문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로 물었다. 이때는 임명 반대 응답이 44.2%로 임명 찬성 응답 43.3%에 비해 소폭 높게 나왔을 뿐이다. 2차 조사의 질문은 불필요하게 장황하다는 것만으로 질문으로서는 결격인 데다 바로 그 불필요하게 장황한 부분에서 문 대통령을 두 차례 등장시켜 문 대통령 지지자의 호응을 유도하고 있다. 특정한 한 시점에서의 이 후보자에 대한 여론이 아니라 두 시점에서의 여론 추세를 비교해볼 작정이었다면 질문을 통일시켰어야 한다. 여론조사 회사가 질문을 바꾸고도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논란을 예상하고도 질문을 바꾼 것이라면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리얼미터가 언제부터인가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를 할 때 그때그때 이슈가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질문을 하나 더 보태 조사하기도 한다. 정당지지도 및 국정지지도 조사는 약 2500개의 표본을 조사하지만 이슈 조사는 약 500개의 표본을 조사한다. 같은 응답률일 때 표본의 크기가 작으면 정확도는 떨어진다. 탈(脫)원전 같은 이슈는 전문가조차 일도양단(一刀兩斷)해서 대답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론조사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 정확도는 더 떨어지는데 여론조사에 적합하지 않은 것까지 조사하고 있으니 과감하다고 해야 할지 무식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 노트르담’은 영어권에서는 ‘노르트담의 꼽추’로 번역됐지만 책의 주인공은 꼽추 종지기 카지모도도 어느 다른 인물도 아니고 바로 성당 자체다. 19세기 프랑스 문학사가 귀스타브 랑송은 “이 책에서 개개의 인물보다 더 생생한 것은 군중이요, 그것보다 더 생생한 것은 파리라는 도시 자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생생한 것은 그 그림자가 파리를 덮고 있는 성당이다. 파리 노트르담은 이 소설에서 진정한 넋을 가진 유일한 개인”이라고 썼다. ▷위고는 ‘파리 노트르담’의 독립된 한 장을 아예 성당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 위고에 따르면 ‘최초의 돌을 놓은 샤를마뉴(742∼814)와 최후의 돌을 놓은 필리프 오귀스트(1165∼1223)’ 사이에 오랜 세월에 걸쳐 지어진 노트르담은 로마네스크 양식도 고딕 양식도 르네상스 양식도 아니고 세 양식이 모두 섞인 잡종이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양식보다 덜 귀중한 것은 아니다. 노트르담은 세월이 건축가가 돼 만들었으며 면 하나하나 돌 하나하나가 프랑스 역사의 한 페이지라고 위고는 썼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어제 노트르담 화재에 “우리 일부가 불탔다”고 말한 것과 상통한다. ▷가톨릭 성당은 입구를 중심으로 보면 서향(西向)이다. 성당은 동서 방향의 긴 축을 따라 서쪽에 입구가 있고 동쪽에 제단(祭壇)이 놓인다. 다행히 관광객들이 주로 보는 서쪽 입구의 쌍둥이 종탑과 외관은 온전했다. 성당은 동서 축과 남북의 짧은 축이 십자가 모양으로 만나는 곳에 제단이 놓이고 그 위에 첨탑이 선다. 그 첨탑에서 보수 공사를 하다 불이 나 지붕까지 태웠다. 3개 장미창 중 성모마리아(노트르담)가 그려진 남북 축의 북쪽 장미창이 첨탑에 가까웠음에도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위고가 보던 파리 노트르담은 화재 전까지 우리가 보던 파리 노트르담과 달랐다. 위고의 소설이 혁명을 겪으며 훼손된 성당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1844∼1864년의 대대적 복원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번에 불탄 첨탑만 해도 위고가 소설을 쓰던 시절에는 잘려 나가고 없었으나 당시 작업을 거쳐 복원됐다. 세계가 불타는 노트르담을 보며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했다. 위대한 문화 유적이 가진 보편적 호소력을 보여준다. 낙심할 것은 없다. 20세기만 해도 영국의 윈저성, 일본의 금각사(긴카쿠지·金閣寺) 등이 불에 탔다가 복원됐다. 명품 브랜드 구치의 모기업은 복원을 위해 1억 유로를 기부했다. 더 멋진 복원만이 화재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아름다운 벚꽃철이다. 벚꽃 하면 일본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벚나무 중 가장 화려한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제주도다. 그 사실을 처음 밝혀낸 것은 1902년 제주도에 파견된 프랑스 출신의 에밀 타케 신부다. 그가 일본에 있던 식물학자 친구 신부에게 왕벚나무의 존재를 알리고 그 대가로 온주 밀감 14그루를 선물받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주 감귤농업의 기반이 됐다. 프랑스 출신의 공안국(본명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는 미사주를 만드는 데 쓸 포도를 얻기 위해 1901년 경기도 안성 구포동 성당에 머스캣이라는 외국 품종의 포도나무를 심었다. 이후 주민들이 안성의 토질 기후 등이 포도 재배에 적합한 사실을 발견하고 포도를 대대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안성 포도의 출발점이다. ▷기독교는 책의 종교다.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보통 선교를 시작한다. 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주는 것과 빈곤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은 선교의 효과적인 수단이면서 선교 이전에 인륜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동이다.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짓는 것 외에 농축산업 기술을 전파하고 새 작물이나 산물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는 이유다. ▷전북 임실은 2010년 순천완주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는 자동차로 찾아가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1967년 임실 성당에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스테번스) 신부가 부임해 서양에서 산양 2마리를 들여왔다. 처음에는 산양유를 팔았는데 남아 버려지는 산양유의 처리를 고민하다 치즈를 만들었다. 그러나 산양유로 만드는 치즈가 향이 강해 시장에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자 나중에 산양유 대신 우유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피자 붐이 일어 치즈 수요가 늘어나면서 유명 브랜드로 성장했다. ▷김치가 어울리는 산골마을의 이국적인 치즈에는 특별한 사랑이 담겨 있다. 지 신부가 산양을 들여올 기발한 결심을 한 것은 가난한 주민들을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소박한 일념에서다. 벨기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 그였으나 치즈 만드는 법을 유럽까지 가서 배워오기를 수차례 거듭한 끝에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 주민들이 치즈 생산의 혜택을 볼 즈음에 그에게 불치병인 다발성 신경경화증이 찾아왔으나 굴하지 않고 “장애인이 됐으니 이제 그들의 고통과 재활에 동참하겠다”며 장애인 공동체를 설립했다. 그가 13일 88세로 선종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신부님, 고마웠습니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서울 광화문 정부청사와 교보생명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리는 10명의 그림 사진 작품이 주초부터 내걸렸다. 인물 선정은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했다고 한다. 있는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 때문에 눈길이 갔다. 이승만이 없다. 어른들이 애들만도 못한 치졸한 왕따 놀이를 하고 있다. 김구는 있다. 임정의 마지막 주석인 김구는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지만 김구와의 오랜 협력관계로 보나, 임정에서의 중요성으로 보나 김구 외에 한 사람 더 있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이승만이다. 안창호도 있고, 심지어는 인지도가 떨어지는 김규식까지 있는데 이승만은 없다. 왜 이승만이 있어야 하는지는 인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그날이 오면’ 전시에 가 보면 알 수 있다. 중앙 로비에 1921년 1월 1일 임정·임시의정원의 신년축하식 기념사진 확대판이 놓여 있다. 사진 정중앙에 임정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승만은 임정에서 탄핵됐다고 하지만 김구에 의해 다시 주미 외교위원장으로 임명됐고 해방정국에서도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받아들이기로 한 데까지는 서로 협력했다. 김구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받아들이기로 해놓고 갑자기 돌아선 이유는 김구가 해명해야 했다. 이후 김구의 해명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선정된 인물 중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눈길을 끌었다. 여운형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임정이 들어오기 전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임정을 말아먹으려 했던 사람이다. 1980년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전면에 내세운 사람이 여운형이다. 여운형의 건준, 건준을 이은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건립 시도가 성공했다면 자유로운 대한민국은 존재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언론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무정부주의자 신채호가 임정이 수립된 해인 1919년 창간한 ‘신대한(新大韓)’ 1, 2, 3호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주간지는 임정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임정을 폐지하려 했다. 신채호의 집요한 공격에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고 창조파, 개조파, 임정수호파로 나뉘어 싸우게 된다. 결국 김구가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켜 임정을 간신히 유지했으나 이후 임정은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여운형과 박헌영이 해방정국에서 임정의 적대자였다면 해방 이전 임정의 적대자는 신채호와 김원봉이었다. 김원봉은 1930년대 김구가 윤봉길 의거 이후 일본 경찰에 쫓겨 상하이를 떠나 유랑하는 사이 조선민족혁명당이란 이름으로 연합세력을 구축해 김구로부터 임정을 탈취하려 했다. 김구가 민첩히 대응해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이청천 세력과 조소앙 세력을 김원봉의 연합세력에서 끌어냄으로써 임정을 지켰다. 당시 임정이 김원봉에 의해 장악되고 해방정국의 건준과 연결됐다면 어찌 됐을지 아찔하다. 영화 ‘암살’에서 김구와 김원봉이 반갑게 만나는 장면은 거짓이다. 충칭에서 두 세력은 임정의 지원자인 장제스(蔣介石)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합작했지만 거주지까지 수십 리 떨어져 살 정도로 앙숙이었다. 임정 100주년이 임정을 지킨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임정을 없애거나 말아먹으려 한 사람들을 기리고 있으니 이런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없다. 굳이 신채호 김원봉 여운형을 기리고 싶다면 임정은 진즉 폐기됐어야 했는데 잘못 살아남아 해방 이후의 역사를 망쳤다고 먼저 말하는 것이 솔직한 태도다. 그러지 못하겠다면 최소한 임정 100주년은 피해서 기리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정부는 말로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라고 한다. 그것이 정말 위대한 역사로 느껴진다면 간디에게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이름을 지어준 타고르나 핀란드 민족의 시련과 극복을 그린 ‘핀란디아’를 작곡한 시벨리우스 같은 성취가 나올 법도 한데 그렇지 못하다. 임정을 폄훼하고 폭력투쟁만 치켜세우는 교육을 받은 젊은 예술가들은 비폭력적인 3·1운동이 왜 위대한지 느끼지 못하고 임정 100주년이 왜 위대한 100년의 시작인지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자가당착인지도 모르는 그림이나 생산하는 허수아비가 돼 관제(官製) 왕따 놀이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제대로 임정 100주년을 기념해야겠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프랑스에서 한국계 정치인인 세드리크 오(37)가 최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디지털 담당 장관으로 임명됐다. 디지털 담당은 우리 식으로는 정보통신기술(ICT) 담당이다. 담당 장관은 ‘Secr´etaire d‘Etat’라고 해서 장관인 ‘Ministre d’Etat’와는 구별하지만 장관급으로 분류된다. 직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때의 플뢰르 펠르랭 전 문화장관, 장뱅상 플라세 전 국가개혁 담당 장관에 이어 장관급 이상 한국계 정치인이 한 명 더 나왔다. ▷펠르랭과 플라세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다. 6·25전쟁이 끝난 1953년 한국이 최빈국 중 하나였을 때 한국에서 해외로의 입양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미국을 빼고 유럽 국가 중 한국인 입양아가 가장 많은 나라다. 그래서 한국인 입양아 출신 장관이 둘이나 배출된 것일 수 있다. 미국에서라면 한국계 정치인을 말할 때 주로 교포 2, 3세가 언급될 것이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프랑스는 이주민에 대한 체계적인 동화(同化) 정책으로 한편으로는 이주민을 프랑스 사회로 포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되는 것을 방해한다. 프랑스에서 한인 교포 사회가 미국처럼 크지 않은 이유다. ▷세드리크 오는 한국인 입양아 출신도 아니고 한인 교포 2, 3세도 아니다. 그는 국방연구원인 한국인 아버지와 교사인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실 그는 프랑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수많은 혼혈 중 한 명이다. 그가 한국계 장관이라면 아버지가 프랑스로 이주한 헝가리인인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헝가리계 대통령이 된다. 오늘날 프랑스는 조부모 때부터의 순혈 프랑스인도 찾기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혈 사회다. 물론 부모 중 한쪽이 아시아나 아프리카 출신인 경우는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달라 백인끼리의 혼혈과는 달리 취급받을 수 있지만 프랑스 사회는 혼혈화가 많이 진행돼 인종적인 면에서 상당히 개방적이다. ▷세드리크 오가 담당 장관이 되는 데는 그가 마크롱 대통령과 삼성전자 권오현 전 회장의 만남을 주선해 삼성전자 인공지능(AI)연구소를 파리 근교 불로뉴에 유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한몫했다고 한다. 한국은 과거 프랑스 등 해외로 입양을 보내던 나라에서 정보기술(IT) 강국의 이미지에다 한식과 케이팝으로도 프랑스인을 사로잡고 있다. 한국 전체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 한국인 입양아 출신이든, 한인 교포든, 부모 중 한쪽이 한국인인 사람이든 모두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 있는 듯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어제는 본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예정된 날이었으나 지나버렸다. 29일을 이틀 앞두고 테리사 메이 총리의 브렉시트안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의향 투표(indicative vote)가 하원에서 벌어졌다. 노딜 브렉시트, 제2차 국민투표 등 8가지 선택지 각각에 찬반 표시를 하는 투표였다. 그러나 어느 선택지도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 총리의 안에 찬성하지도 않으면서 노딜 브렉시트도 제2차 국민투표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영국이 결정 장애에 빠졌다. ▷브렉시트 의향 투표는 어느 선택지에 과반의 찬성이 나오면 새로운 발의안을 만들어 정식 투표에 부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원은 총리가 EU와 합의한 안을 연거푸 거부한 데 이어 스스로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도 실패했다. 의향 투표는 과반의 찬성을 얻는 선택지가 2개 이상 나와도 골칫거리인 비정상적 투표였으나 오죽 처지가 궁색하면 그런 투표까지 했겠나 싶다. ▷다행히 영국 하원이 브렉시트 의향 투표 전에 브렉시트 시한을 4월 12일로 연기하기로 결정해 노딜 브렉시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원은 다음 달 1일 다시 브렉시트 대안에 대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메이 총리는 하원의 의향 투표 직전 자신의 합의안이 통과되면 사임하겠다고 배수진을 치며 반격에 나섰다. 통상은 총리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사임하는 것이지만 관철돼도 사임하겠다는 것이다. 열흘 남짓한 날이 새로 주어졌다. 하원이 대안 마련에 실패하면 메이 총리의 합의안을 놓고 3차 투표를 할 수밖에 없다. ▷영국을 모범 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것은 19세기 영국의 유명한 헌법해설가 월터 배젓이 말한 대로 프랑스인에 비해 우둔할 정도로 신중한 국민성이다. 브렉시트를 결정해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신중함이 다 어디로 사라졌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좋은 정치제도가 아니라 인류가 고안한 가장 덜 나쁜 정치제도라는 말이 있다. 신중함을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에 휩쓸리기 쉽다. 영국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