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신인 배우 A씨(27·여)는 올해 초 한 영화 오디션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일이 잊혀지지 않아 힘들다. 조연을 지원했는데 면접장에서 제작자가 “(옷을) 벗으면 주연을 시켜주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A씨는 가까스로 “그건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거절한 뒤 면접장을 뛰쳐나왔다. A씨는 “너무 두려워 지금까지도 면접을 보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신인 배우나 배우 지망생들은 이런 일은 흔하다고 입을 모은다. 10대 보이밴드 ‘더 이스트라이트’에 대한 프로듀서의 폭행 사실이 폭로되기도 되면서 출연료 미지급, 성추행, 폭행 등 문화계에 만연한 ‘을(乙)의 설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예술계의 불공정거래를 개선하기 위해 한국콘텐츠진흥원에 공정상생센터, 한국예술인복지재단에 예술인 신문고 제도 등이 운영되고 있지만 무용지물인 현실이다. 배우 민지혁은 영화 ‘임의 침묵’ 제작사가 오디션 배우들에게 면접비 1만 원을 요구했다고 지난달 폭로했다. 연출을 맡은 한명구 감독은 “오디션비는 관행이며 지원자들의 간식비로 다 쓰였다”고 반박했다. 배우 지망생들도 “면접비 요구는 종종 있었던 일”이라는 반응이다. 한 영화계 구인구직 온라인 사이트에는 여전히 1만 원선의 면접비를 요구하는 공고가 적지 않다. 신인 배우 김모 씨(25·여)는 “면접비 5000원을 준비하지 못해 면접장을 갔는데 ‘이 정도도 못 내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말했다. 제작사는 보안을 이유로 작품 제목, 감독, 촬영 일자 등을 공개하지 않아 어떤 역할에 캐스팅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면접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질적 문제인 출연료 미지급도 여전하다. 작품에 출연하는 것 자체를 ‘스펙’으로 인식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 B씨(25·여)는 “정당한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이 되어도 ‘사전에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제작사에서 화를 낸다”고 말했다. 배우들 사이에는 제작사가 계약서 작성을 거론하지 않으면 출연료를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을 정도다. 원로배우 이순재 씨도 “나도 몇 년 전 제작사로부터 출연료를 받지 못한 일이 있다”며 “우리 드라마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배우들은 돈을 받지 못한다.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교육을 명분으로 기획사에서 연습생에게 금전을 요구하는 악습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이 한국콘텐츠진흥원으로부터 받은 ‘대중문화예술 법률자문내역’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8월까지 163건의 상담 중 75건이 연습생에 대한 기획사의 무리한 금전 요구나 계약 불이행에 대한 고소·고발이다. 연습생들은 데뷔할 기회가 제한된데다 소속사 대표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수직적 구조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3년 간 아이돌 그룹 데뷔를 준비했던 C씨(23)는 “소속사 없이 연예인으로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폭언, 폭행은 당연히 참고 견뎌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부모가 나서 ‘조금만 참자’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2009년 공정거래위원회는 연예인을 위한 표준전속계약서를 마련해 적정 전속기간, 기본권 등을 명시했다. 하지만 이는 권고 사항에 불과해 실질적인 구속력이 없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관계자도 “해당 규정을 위반해도 이를 단속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를 제기해 신분이 드러나면 해당 분야에서 활동하기 어려운 현실도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문화계에서는 약자인 신고인이 권력을 쥐고 있는 피신고인과 얼굴을 맞대고 피해를 입증하고 합의해야 하는 절차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지운: 가난한 단역배우들, 면접비 챙겨주진 못할망정 오디션비 요구라니!규진: 벼룩의 간을 빼먹네.지운: ‘열정페이’가 제일 심한 곳이 문화계인 것 같아.규진: 연예인도 TV에선 화려해보이지만, 그들도 결국 을(乙)이지.지운: 그래서 내가 연예인 안 한 거야.규진: ;; (당황) ▼ “단역 배우들은 근로계약서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해요” ▼ 임금체불다큐 만든 배우 곽민석 “단역 배우들은 본인들이 근로계약서를 쓸 수 있다는 생각도 못 해요. 계약서 얘기 꺼냈다가 좁은 판에서 ‘건방진 애’로 찍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서니까요. 돈을 못 받아도 제작자가 ‘미안하다, 다음 작품 때 비중 있는 역할 챙겨줄게’ 하면 혹할 수밖에 없죠. 그만큼 일이 급하니까요.” 영화 ‘범죄의 재구성’, 드라마 ‘태양의 후예’ 등에 출연해 대중에게 낯익은 20년차 배우 곽민석 씨(48)가 배우들의 임금 미지급 문제를 고발하고 나섰다. 그는 2016년 출연한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 제작진의 문제점을 다룬 10분짜리 미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그를 26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웹드라마 ‘행복한 인질’ 촬영에 참여한 배우와 음향, 조명, 분장 스태프 등 40여 명은 일한 대가를 지급받지 못했다. 함께 일한 후배들의 수당을 자비로 미리 챙겨 준 스태프들은 빚더미에 나앉기까지 했다. 제작사 대표는 “지금은 돈이 없다. 해외에 판권이 팔리면 임금을 지급하겠다”며 버티다 잠적했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지만 대부분 근로계약서가 없다는 이유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단돈 5만원을 받더라도 계약서를 당연히 쓰는 문화가 정착돼야죠. 만약 불가피하게 계약서를 못 썼다면 당일 퇴근할 때 임금을 지급하는 게 맞고요. 또 제작현장에는 제작비 활용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프로덕션 수퍼바이저(PS)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인건비 지급에 문제가 없었는지, 부당한 대우는 없었는지를 감시해주면 어떨까 싶어요.” 곽 씨는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2008년 MBC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에 출연하고도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제작사는 출연료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 날 회사가 없어졌다. 해당 제작사 대표는 뻔뻔하게 새 회사를 차려 버젓이 영업을 계속했다. 그는 이와 비슷한 사례가 수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그 돈(출연료) 못 받아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차비조차 없어서 촬영장까지 걸어 다니는 많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선례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지운기자 easy@donga.com}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들꽃들을 모은 식물도감이다. 강가, 바닷가, 습지 등에서 자라는 습지식물 염생식물 사구식물부터 도시, 농경지 등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익숙한 식물까지 총망라했다. 모두 1140종에 이른다. 1999년부터 한반도를 누빈 노력의 흔적이 4600여 장의 사진에 담겨 있다. 남북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동서로는 백령도에서 독도까지다. 수목원이나 정원에 식재된 것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자생지에서 직접 촬영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작지 않다. 생육 환경의 정보와 현장감을 최대한 담기 위해서다. 책에 소개한 120종의 들꽃 사진들은 국내 도감에서 처음으로 선보인다. 국내 최초로 발견한 식물만 12종에 이른다. 종당 꽃과 열매, 잎 등 다양한 모습의 사진도 담았다. 보다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희귀식물이나 식별이 어려운 식물은 최대 9장의 사진으로 구성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세계적으로 학술적 연구가 명확히 이뤄지지 않은 식물들의 경우 저자들이 현장에서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의견을 달았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3년 전 전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중동을 다녀온 60대 남성에게서 지난달 발견됐다. 이렇게 전염성 질병은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 인간의 생사를 위협한다. 의학의 발전이 가속화돼도 미생물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어쨌든, 새롭거나 돌고 도는 감염병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감염외과 의사인 저자는 문학과 역사 속에 등장한 감염병과 이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의 곤경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냈다. 책을 뒤지며 전염병을 찾는 일은 매일 환자와 씨름하는 삶 속에서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은 인류 사회에 큰 상처를 입혔다. 14세기부터 유행했던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0∼40%를 희생시키고서야 진정됐다. 20세기 초 퍼진 스페인 독감은 2년 만에 전 세계 25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말살시켰다. “전쟁보다 무서운 게 전염병”이라는 말이 이해된다. 여러 문학에서도 전염병의 공포가 묻어 나온다. ‘닥터 지바고’에는 발진티푸스, ‘데카메론’에는 페스트, ‘서울, 1964년 겨울’에는 급성 뇌막염이 등장한다. 저자는 증상으로 전염병을 예측하기도 한다. ‘시황제의 임종’에서 진시황은 무릎이 구부러져 펼 수가 없고 목도 점점 굳어갔다. 저자는 ‘결핵성 수막염’ 증상이라고 단언한다. 이문열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 때 조조의 군대는 소화불량과 악성 독감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크다. 책을 읽다 보면 전염병의 종류가 이렇게 많나 싶을 정도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한국기원이 바둑계에서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결과 보고서를 재작성하겠다고 밝혔다. 유창혁 한국기원 사무총장은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가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는 방안을 논의하라고 했다”며 “법적 절차를 따져본 뒤 결정하겠다”고 말했다.(본보 10월 9일자 10면 참조) 이날 유 사무총장은 “김성룡 9단이 제명돼 재조사는 할 수 없지만 윤리위원회 원본에 대한 평가를 새로운 위원들에게 맡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유 사무총장은 또 한국기원이 ‘바둑TV’와 ‘K바둑’을 합병해 바둑채널이 아닌 종합레저채널로 변경하려 한다는 의혹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했다. 한국기원이 특정 회사 출신의 낙하산 인사들로 갈등을 빚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바둑TV 사업에 필요한 전문가를 총재사인 중앙일보에 요청해 모셔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한국기원의 일방적인 해명에 바둑팬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기원 앞에서 집행부 총사퇴를 요구하며 8일부터 시위를 하고 있는 ‘한국기원 바로세우기 운동본부’(한바세) 회원들은 이날도 집회를 열었다. 이갑용 씨(73)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도 한국기원은 팬들에게 사과문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며 “11월까지 집회를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한국기원은 올해 5월 인터넷 사업을 대행하던 사이버오로와의 계약을 이사회 의결도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해지해 바둑계의 반발을 샀다. 또한 한국기원은 4월 헝가리 출신의 여성 바둑기사가 “김 9단에게 9년 전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데 대한 조사 결과 김 9단을 제명했다. 그러나 윤리위원회 보고서에서는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는 김 9단의 진술이 더 믿을 만하다고 결론 내면서 논란이 일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아보카도는 쉽게 갈변돼요. 사진을 찍었을 때 잘 나오게 하려면 레몬즙을 뿌려야 해요.” ‘도시락족’이 된 지 두 달 남짓, 직장인 강지영 씨(31)가 익숙한 듯 말했다. 그는 점심 값으로 1만 원 이상 드는 것이 아까워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새 취미가 됐다. 계란 샐러드부터 불고기 볶음밥까지 메뉴도 매일 다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도시락그램’ ‘직장인도시락’ 등 해시태그(#)를 달아 사진을 올리며 팔로어들과 그날 도시락 레시피를 공유하는 것도 일상이 됐다. 강 씨처럼 최근 직장인 사이에서 1인 도시락 싸기 열풍이 불고 있다. 다이어트나 식비 절감을 넘어 건강과 취미 생활의 일환이다.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으로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직장인들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이들에겐 먹는 것 못지않게 도시락을 잘 꾸미는 것도 중요하다. 힘들여 만든 도시락인 만큼 SNS 팔로어나 회사 동료들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 만족도도 높다. ‘도시락족’에게 별, 원형 모양틀 등은 필수다. 최근 도시락 만들기에서 파프리카나 아보카도는 건강식이기도 하면서 색감을 다채롭게 하는 필수 아이템. 이영실 씨(29)는 “애플민트 이파리, 파슬리도 도시락 멋내기에서 ‘치트키’ 같은 존재”라며 “소시지 한 개를 먹어도 칼집을 내고 모양을 내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수준이나 구성도 크게 바뀌고 있다. 초기엔 비교적 만들기 쉬운 볶음밥 위주였다. 하지만 최근엔 상당한 내공을 요구하는 장어구이 덮밥이나 초밥을 만드는 이도 적지 않다. 한 취업정보업체가 최근 직장인 35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가운데 20.1%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고 답했다. 사실 한국 직장 사회에서 ‘도시락족’의 식사 환경은 척박하기만 하다. 이들이 주로 식사를 하는 곳은 구내식당이나 야외 벤치. 먹을 곳이 마땅히 없는 경우 사무실에 앉아 해결할 때도 많다. 신유진 씨(30)는 “(직장인 사이에도) 식비를 아끼거나 다이어트를 이유로 도시락을 싼다는 고정관념이 있다”며 “도시락을 싸가기 시작하니 동료들이 먼저 걱정부터 하더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들은 “차라리 ‘혼밥’이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루 8시간 이상을 보내는 회사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2년 차 직장인 김지민 씨(28)는 “동료들과 먹으면 점심에도 업무, 상사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 “점심만이라도 일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혼밥’을 택했다”고 말했다. 도시락 열풍은 주 52시간 근로로 도시락에 공을 들일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게 크게 작용했다. 도시락족들은 “저녁 시간에 숨통이 트이며 SNS에 올라온 다양한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유영 씨(33)는 요즘 퇴근 뒤 항상 마트에 들러 다음 날 점심 재료를 산다. 그는 “야근이 줄어 저녁에 장을 보고 미리 재료를 손질한다. 회식도 줄다 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을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도시락 SNS 스타’까지 생겼다. SNS에 꾸준히 올린 도시락 레시피 덕분에 유명 ‘인플루언서(Influencer)’와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지난해 2월부터 자신의 도시락 사진을 업로드한 양정미 씨(40)는 “초기엔 주부들의 ‘남편 도시락’ 관련 문의가 많았는데, 요즘은 직장인들의 레시피 요청이 늘어났다”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적으로 ‘워라밸’을 중시하는 문화가 만들어 낸 직장인 신풍속도”라며 “굳이 개인주의 잣대로 볼 게 아니라 자아 실현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도시락그램’ ‘#직장인도시락’ 직장인 강지영 씨(31)는 평일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해시태그(#)를 달아 도시락 사진을 올린다. 아보카도 샐러드부터 불고기 볶음밥까지 메뉴도 언제나 다르다. 그는 SNS 팔로워들과 레시피를 공유하기도 한다. 강 씨는 “점심 값으로 1만 원 이상이 드는 것이 아까워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취미가 됐다”고 했다. 최근 직장인들 사이에서 ‘개성있는 도시락 싸기’ 열풍이 불고 있다. 다이어트나 식비 절감을 넘어 건강과 취미 생활의 일환이다. 특히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뒤 직장인들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도 번지는 모양새다. 그간 한국 직장 사회에서 ‘도시락 족’의 식사 환경은 척박하기만 했다. 이들이 주로 식사를 하는 곳은 구내식당이나 야외 벤치. 주변 사람들 시선에 움츠러들기도 한다. 먹을 곳이 마땅히 없어 사무실에 앉아 해결할 때도 적지 않다. 직장 상사에게 ‘왜 유난 떠느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신유진 씨(30)는 “(직장인 사이에도) 식비를 아끼거나 다이어트를 이유로 도시락을 싼다는 고정관념이 있다”며 “도시락을 싸가기 시작하니 동료들이 먼저 걱정부터 하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도 ‘혼밥’이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루 8시간 이상 함께 보내는 조직에서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2년차 직장인 김지민 씨(28)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 아무래도 업무, 상사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며 “잠깐이라도 일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혼밥’을 택했다”고 말했다. 뭣보다 짬을 내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모 씨(32)는 “식당, 커피숍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합하면 1시간도 부족하다”며 “도시락을 먹으면 길어야 15분이다. 나머지는 일찍 사무실에 돌아가 낮잠도 잘 수 있다”고 했다. 한 취업정보업체가 최근 직장인 35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0.1%가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다고 답했다. 도시락을 싸오는 이유는 22%가 ‘점심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여기에 SNS는 도시락의 또 다른 ‘진화’를 이끌었다. 먹는 것 못지않게 잘 꾸미는 게 중요해졌다. 기왕 공들인 거 SNS 팔로워나 회사 동료에게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 만족도도 높다. 때문에 ‘도시락 족’에게 별, 원형 모양 틀 등이 최근 인기. 이영실 씨(29)는 “소시지 한 개라도 칼집을 내고 모양을 내야한다”며 “한 끼 식사에 사진을 20장 넘게 찍은 적도 있다”고 했다. 주 52시간 근로는 도시락에 공을 들일 시간적 여유까지 제공했다. 도시락 족들은 “저녁 시간에 숨통이 트이며 SNS에 올라온 다양한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유영 씨(33)는 요즘 퇴근 뒤 항상 마트를 들려 다음날 점심재료를 산다. 그는 “야근이 줄어 저녁에 장을 보고 미리 재료를 손질한다. 회식도 줄다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음식을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도시락 SNS 스타’까지 생겼다. SNS에 꾸준히 올린 도시락 레시피 덕분에 유명 ‘인플루언서(Influencer)’와 비슷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지난해 2월부터 자신의 도시락을 업로드한 양정미 씨(40)는 “초기엔 주부들의 ‘남편 도시락’ 관련 문의가 많았는데, 요즘은 직장인들의 레시피 요청이 늘어났다”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적으로 워라밸을 중시하는 문화가 만들어 낸 직장인 신풍속도”라며 “굳이 개인주의 잣대로 볼 게 아니라 자아실현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세계 최강을 자랑하며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한국 바둑계가 흔들리고 있다. 1954년 출범한 한국기원은 최근 정보기술(IT) 사업을 추진하며 자회사에 인터넷 업무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해 논란이 일고 있다. 4월 바둑계 ‘미투’ 폭로에 대해 한국기원이 진상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며 프로기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참다못한 바둑팬들은 8일 집행부 사퇴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내홍에 휩싸인 바둑계 논란을 정리했다.》 “평생 좋아했던 바둑이 한국기원의 아집으로 품격을 잃고 있다.” 40년 바둑팬 신윤철 씨(59)는 8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앞에서 집행부의 총사퇴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성토했다. 택시 운전사인 신 씨는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전날 대구에서 상경했다. 집회에는 일부 바둑팬이 만든 ‘한국기원 바로세우기 운동본부(한바세)’ 회원 10여 명이 참여했다. 이날 정부세종청사 앞에서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면담을 요구하는 바둑팬들의 시위가 열렸다. ○ 내우외환에 빠진 한국기원 한국기원은 총재의 ‘낙하산 인사’를 둘러싼 갈등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다. 헝가리 여성 바둑기사가 한국인 프로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바둑계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비판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기원 상임이사이자 바둑계 원로기사인 노영하 9단은 1일 홍석현 한국기원 총재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며 사태 해결을 촉구했다. 노 9단은 최근 바둑계 상황에 대해 “기사로서의 자존심은 크게 상처가 났고 기원은 바둑계의 신망을 잃은 채 갈 곳 없이 표류하고 있다”며 “집행부가 균형적인 발전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의 이득만을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 9단은 2015년 한국기원이 CJ E&M(현 CJ ENM)으로부터 80억 원에 인수한 바둑TV와 최근 한국기원의 인터넷 사업을 대행하던 사이버오로와의 계약 해지 등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한국기원 송필호 부총재는 바둑TV와 K바둑, 사이버오로 등 방송과 인터넷 사업을 통합하겠다는 생각을 대의원들과의 면담에서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기원이 인수한 후 바둑TV는 2016년 바둑리그 생중계가 정전으로 5시간가량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지난해에는 고교바둑대회 16강전 경기 중 일부 녹화분을 분실해 중계에 차질을 빚는 등 방송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바둑계 인사들은 한국기원이 사이버오로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과정에서 집행부의 전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한국기원 집행부가 5월 정관에 규정된 이사회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이버오로와의 바둑 콘텐츠 온라인 사업 대행 계약을 자의적으로 해지했다는 것. 노 9단도 “기원 재산 가치를 하락시킨 업무상 배임 행위”라고 비판했다. 18년 동안 바둑 온라인 중계 등을 대행하다 졸지에 도산 위기에 놓인 이 업체는 이달 말 한국기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낼 예정이다. 바둑계에서는 “한국기원 집행부가 사이버오로 대표를 중앙일보 출신 인사로 교체하려다 실패한 것도 하나의 이유”라는 뒷얘기가 흘러나왔다. 중앙일보 회장 출신으로 이사회 추대로 2014년 취임한 홍 총재가 중앙일보와 그 계열사 출신들을 한국기원 핵심 부서에 앉혔다는 건 바둑계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실권을 쥐고 있는 송 부총재는 중앙일보 부회장 출신이고, 기원 실장급 고위간부 4명 중 3명은 중앙일보 계열 출신이다.○ 허술한 ‘미투’ 대처, 갈등 키워 한국기원은 올해 ‘미투’ 열풍이 바둑계를 강타할 때도 집행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해 2차 피해를 키웠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사건은 헝가리 출신의 한 여성 바둑기사가 “9년 전 김모 9단의 자택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올해 4월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진상조사에 나선 한국기원이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는 취지의 김 9단 진술이 더 일관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결론 내면서 안팎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한국기원은 홍보이사였던 김 9단을 해임한 데 이어 제명했지만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김승준 9단은 기존 윤리위원회 보고서에 왜곡이 많다며 재조사를 촉구하는 프로바둑기사 223명의 서명서를 지난달 14일 한국기원에 냈다. 전체 기사 350명 중 64%가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바둑계에서 유례없는 일이다. 김승준 9단은 “증인 5명의 진술서와 피해자가 사건 직후 친오빠에게 보낸 e메일 등을 제출했지만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며 “한국기원은 사과문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프로기사들의 재조사 요구는 2일 열린 한국기원 정기이사회에서 부결됐다. 5일 박지연 신임 여자기사회장은 윤리위원회 부회장직을 맡은 손근기 기사회장이 기사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았다며 불신임안 상정을 요구했다. 한국기원은 “일부 인사들의 개인적인 주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겠다는 게 기원 방침”이라며 취재를 거부했다.신규진 newjin@donga.com·조동주 기자}

“배두나 씨와 어떤 ‘케미’를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하더라고요. 아내가 그의 팬이기도 하고요. 하하.” 서울 영등포구 타임스퀘어에서 5일 열린 KBS 2TV 드라마 ‘최고의 이혼’ 간담회에서 배우 차태현(42)이 말했다. 그는 주부 역할을 맡은 배두나(39)와 부부로 호흡을 맞춘다. 8일부터 방영되는 ‘최고의…’는 사랑, 결혼에 대한 남녀의 생각 차이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2013년 일본에서 인기를 끈 동명의 드라마를 리메이크했다. 제작을 맡은 유현기 PD는 “한국과 일본의 정서 차이를 줄이고 캐릭터에 입체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두 배우에게 드라마 촬영은 꽤나 반가운 일이다. 차태현은 올해 영화 ‘신과 함께―인과 연’, KBS 예능 ‘거기가 어딘데??’ 등 여러 장르를 종횡무진했다. MBC 예능 ‘라디오스타’의 고정 멤버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없었다. 그는 “(영화, 예능에서 보여준) 성실하고 바른 남편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며 “(이번 드라마에서) 까칠하고 냉소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게 돼 기대가 된다”고 했다. 배두나는 2011년 MBC 드라마 ‘글로리아’ 이후 7년 만에 지상파 드라마를 찍었다. 그는 “원작이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망설였지만 대본을 보니 현지화가 잘된 것 같아 도전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년), ‘주피터 어센딩’(2015년) 등을 통해 할리우드 제작 시스템을 경험했다. 올해는 넷플릭스가 제작한 미국 드라마 ‘센스8’에 출연 중이다. 그는 “한국의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촬영하는 것이 정말 좋다. 돈과 상관없이 인력에서 오는 힘이 있다”며 웃었다. KBS 드라마 ‘러블리 호러블리’가 2∼3%대의 낮은 시청률로 2일 종영돼 후속작을 맡은 이들이 느끼는 부담이 작지 않다. 차태현은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으면 주연배우가 아니다”라며 “시청률 낮은 드라마, 예능을 해봐서 괜찮은데 스태프들이 힘을 잃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배두나 역시 “부담은 되지만 배우들의 케미가 굉장히 좋고 소재가 신선해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누군가에겐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단호함을 넘어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불편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북한 귀순병사 오청성 씨(24)의 수술을 집도했던 지난해 11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식당에서 기자와 만난 이국종 교수(49)는 집에 못 간 지 보름이 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란색 수술 모자에 흰 의사 가운 차림이었다. 그의 시간은 철저히 환자에게 맞춰져 있었다. 중증외상 의료계의 산증인인 그는 메스 대신 틈틈이 펜을 잡고 5년간 글을 썼다. ‘골든아워’를 보자마자 그와 짧은 시간 대면했던 소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한 한 의사의 비망록이자 국내 중증외상 의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보고서다. “커튼 밖으로 나와 중환자실 복판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방이 생사를 오가는 침상으로 가득했다. 그 발치마다 도사린 사신(死神)들이 환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주변이 온통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제목 그대로 ‘골든아워’는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평균 이송 시간은 245분”이라며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내쳐지고 있다.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고 썼다. 2002년 외상외과에 발을 들인 그는 국제 표준의 중증외상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긴 싸움을 계속해 왔다. 마침내 2012년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전국 거점 지역에 정부 지원을 받는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됐다. 무조건 환자를 살려야 하는 중증외상 치료는 늘 적자에 시달렸고 비용과 효율성을 따지는 병원과 정부의 압박도 거셌다. 생사의 현장에서 그는 냉철하게 순간을 묘사했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에게 총탄을 맞은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66) 옆에도,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석 선장을 구하기 위해 오만으로 떠난 이 교수는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고 당시 중압감을 회상했다. 세월호 침몰 소식에 구조 헬기를 타고 현장 접근을 시도했지만 정부의 제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그는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2011년 석해균 선장이 복지부 캐비닛에 처박혔던 중증외상센터 정책을 끌어내더니, 북한군 병사가 죽어가던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을 건져낸 셈이었다.” 지난해 북한 귀순병사 오 씨가 기적적으로 소생하며 중증외상 의료 현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일었다. 정치권도 주목했다. 그간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해도 만나기조차 어려웠던 정치인들이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석 선장을 수술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원을 약속해줄 것 같았던 정·관계와 언론이 흩뿌리던 모든 말잔치의 결과물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業)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문장도 그를 닮았다. 글에는 좌절을 넘어 분노가 서려 있다. 허무한 감정과 비장함을 담은 문장이 언뜻 김훈 작가(70)의 그것을 닮았다. 그는 실제로 김 작가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그는 “‘칼의 노래’를 등뼈 삼아 글을 정리해보려 애썼다”고 적었다.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누군가에겐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단호함을 넘어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이 없었다. 북한 귀순병사 오청성 씨(24)의 수술을 집도했던 지난해 11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식당에서 기자와 만난 이국종 교수(49)는 집에 못 간지 보름이 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파란색 수술 모자에 흰 의사 가운 차림이었다. 그의 시간은 철저히 환자에게 맞춰져 있었다. 중증외상 의료계의 산증인인 그는 메스 대신 틈틈이 펜을 잡고 5년간 글을 썼다. ‘골든아워’를 보자마자 그와 짧은 시간 대면했던 소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한 한 의사의 비망록이자 국내 중증외상 의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보고서다.“커튼 밖으로 나와 중환자실 복판에 서서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방이 생사를 오가는 침상으로 가득했다. 그 발치마다 도사린 사신(死神)들이 환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주변이 온통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제목 그대로 ‘골든아워’는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평균 이송 시간은 245분”이라며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내쳐지고 있다. 선진국 기준으로 모두 ‘예방 가능한 사망’이었다”고 썼다. 2002년 외상외과에 발을 들인 그는 국제 표준의 중증외상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긴 싸움을 계속해왔다. 마침내 2012년 응급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전국 거점 지역에 정부지원을 받는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됐다. 무조건 환자를 살려야 하는 중증외상 치료는 늘 적자에 시달렸고 비용과 효율성을 따지는 병원과 정부의 압박도 거셌다. 생사의 현장에서 그는 냉철하게 순간을 묘사했다. 2011년 소말리아 해적에게 총탄을 맞은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66) 옆에도, 2014년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그가 있었다. 석 선장을 구하기 위해 오만으로 떠난 이 교수는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않는 법이다. 석 선장은 무겁게 떨어지는 칼날이었다”고 당시 중압감을 회상했다. 세월호 침몰 소식에 구조 헬기를 타고 현장 접근을 시도했지만 정부의 제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그는 배가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2011년 석해균 선장이 복지부 캐비닛에 처박혔던 중증외상센터 정책을 끌어내더니, 북한군 병사가 죽어가던 중증외상 의료시스템을 건져낸 셈이었다.” 지난해 북한 귀순병사 오 씨가 기적적으로 소생하며 중증외상 의료 현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일었다. 정치권도 주목했다. 그간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해 노력해도 만나기조차 어려웠던 정치인들이 그를 찾았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석 선장을 수술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지원을 약속해줄 것 같았던 정·관계와 언론이 흩뿌리던 모든 말잔치의 결과물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냉혹한 한국 사회 현실에서 업(業)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흔적이다.” 문장도 그를 닮았다. 글에는 좌절을 넘어 분노가 서려있다. 허무한 감정과 비장함을 담은 문장이 언뜻 김훈 작가(70)의 그것을 닮았다. 그는 실제로 김 작가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 그는 “‘칼의 노래’를 등뼈 삼아 글을 정리해보려 애썼다”고 적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20년 전 마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이후 초자연적인 기괴한 범죄들이 계속된다. ‘손’은 사람에게 빙의해 살인을 저지르는 ‘큰 귀신’으로 영매, 사제, 형사는 각기 다른 이유로 그를 쫓는다. 지난달 12일부터 방영 중인 OCN ‘손 the guest’는 엑소시즘(퇴마)과 샤머니즘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줄거리를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 장르물의 특성상 진입 장벽도 꽤나 높다. 영화로 말하면 ‘곡성’과 ‘검은 사제들’을 뒤섞어 놓은 셈이다. 1회 1.6%(닐슨코리아)의 시청률은 회를 거듭할수록 3%대로 상승하고 있다. 시청자들 사이에선 “한 번 보면 멈출 수 없다”는 찬사가 쏟아진다. 덩달아 다소 생소한 엑소시즘과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드라마와 현실 속 모습을 비교해 들어봤다. 드라마에서는 별신굿(마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굿), 눌림굿(신의 기운을 억제시키는 굿) 등 다양한 굿판이 벌어진다. 극 중 한 무당은 귀신이 들린 영매 윤화평(김동욱 역)을 위한 눌림굿을 하며 돼지 생고기를 물고 입에 피를 묻힌다. 징그럽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현실에선 찾을 수 없는 모습이다. 무당으로 실제 드라마 제작에 자문해왔던 김혜경 씨(56·여)는 “돼지의 피를 이용해 굿을 하기도 하지만 생고기를 직접 물지는 않는다”며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한 드라마적 요소”라고 했다. 실제 무당들에게도 ‘손…’은 무서운 드라마로 통한다. 김 씨는 “무당들끼리도 드라마가 화제”라며 “밤에 무서워서 못 보겠다는 이들이 많다”며 웃었다. 종교를 초월한 협업도 이어진다. 박수무당 육광(이원종 역)과 구마사제 최윤(김재욱 역)은 ‘손’을 추적하기 위해 굿과 구마의식을 연이어 선보인다. 실제 천주교와 샤머니즘의 교류도 활발하다고 한다. 물론 문화 교류 차원이다. 김 씨는 “신부님들을 모아 무형문화재로서 굿과 관련된 강의, 공연 등이 빈번하게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한 천주교 관계자는 “한국의 독특한 종교 현상인 샤머니즘을 연구하는 신부도 적지 않다”고 했다. 강동원, 김재욱 등이 열연한 구마사제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지만 그들의 일상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모든 신부가 구마의식을 할 수 없을뿐더러 교구장 주교의 승인을 받아야 정식 구마사제로 활동이 가능하다. 권효섭 신부(56)는 “초자연적인 현상이기에 일반인에게 퍼졌을 때 그 본질의 왜곡을 우려해 구마사제의 현황 및 신분도 철저히 비밀”이라고 했다. 생소한 소재인 만큼 디테일이 생명이다. 빙의 행동을 연구하는 전문가를 섭외해 배우들에게 교육하기도 한다. 연출을 맡은 김홍선 감독(49)은 “존재가 불확실한 초자연적인 대상이 주는 공포감, 위압감을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배우 김윤진(45)에게 한국 드라마 촬영은 이제 꽤나 낯선 일이다. 1999년 KBS 드라마 ‘유정’ 이후 처음이기 때문이다. 6일 방영하는 SBS ‘미스 마, 복수의 여신’으로 그는 19년 만에 한국 안방극장에 복귀한다. 하지만 설렐 틈도 없었다. 촬영에 들어간 뒤 직접 빨래를 해본 적이 없다. 설거지를 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하루 스무 신이 넘는 촬영이 기본이라 정신이 없었다. 최근 서울 양천구 SBS사옥에서 만난 그는 “10년 넘게 미국에서 드라마를 찍었는데 많아야 하루에 아홉 신이 전부였다”며 웃었다.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어 보니 한 번 찍고 ‘오케이’ 사인이 나더군요. 빠른 연출과 섬세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 스태프들이 전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나마 남편의 ‘내조’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김윤진은 이번 드라마에서 딸을 죽였다는 누명을 쓴 ‘미스 마’ 역할을 맡았다. ‘미스 마’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살인 누명을 쓰고 치료 감호소에 갇히지만 복수를 위해 9년 만에 탈옥해 진범을 추적해 나간다. ‘미스 마…’는 영국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의 1930∼70년대 ‘미스 마플’ 시리즈가 원작. 그는 “노년의 ‘미스 마플’에 비해 주인공의 개인사가 들어갔고 나이도 어려졌다”며 “멋모르고 살아온 한 기업의 외동딸이 억울한 일을 겪은 뒤 변화해 나가는 성장 이야기”라고 했다. 김윤진은 그간 주체적으로 삶을 결정하는 여성 캐릭터에 항상 끌려왔다. 2007년 영화 ‘세븐 데이즈’에서는 납치된 딸을 구해야 하는 엄마, 2010년 영화 ‘하모니’에서는 교도소에서 딸을 낳는 수감자 등을 연기했다. 유사한 이미지가 반복된다는 지적을 받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특별히 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며 “남성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하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여성 캐릭터에 거부감이 있다”고 했다. 1996년 MBC 드라마 ‘화려한 휴가’로 데뷔한 김윤진은 1999년 영화 ‘쉬리’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04년 미국 드라마 ‘로스트’, 2013년 ‘미스트리스’ 등을 통해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그간 한국 드라마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지만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시즌제인 미국 드라마 특성상 촬영 기간이 길어 한국 미니시리즈를 촬영할 4개월을 빼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올해도 미국에서 드라마와 연극 출연이 예정돼 스케줄이 빡빡했지만, ‘미스 마…’는 대본을 읽은 뒤 단박에 결정했다. “대본을 받은 그 자리에서 4회까지 단숨에 읽었어요. 생각해 보니 한국의 TV 드라마 대표작이 없다는 점도 떠올라 더 욕심이 나더라고요. ‘미스 마…’가 제 대표작이 되길 바랍니다.”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3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갤러리 나우’ 전시장에서 현대사진전 ‘과거의 미래展 The Masterpiece―The Last Piece’가 열린다. 사진전문 ‘갤러리 나우’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최하고 한국화랑협회가 주관하는 ‘2018 코리아 갤러리 위켄드 K-ART 팸투어’ 참여 화랑으로 선정돼 기획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상우, 구본창, 김광수, 원성원, 이명호, 이정록, 이정진, 임창민, 최영돈 등 국내 유명 사진작가 9명의 대표작들을 선보인다. 복수 예술인 사진의 모든 에디션이 판매가 완료된 작품들로, 더 이상 구할 수 없거나 마지막 1점이 남은 희소성이 높은 국내 사진계의 ‘마스터피스’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한국화랑협회의 주관 아래 해외 미술계 초청인사들과 국내 화랑 및 유망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현대 사진작품을 해외에 소개하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행사도 열린다. 관람료는 무료.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사람의 생명에 관한 옥사(獄事)는 군현에서 항상 일어나고 목민관이 항상 마주치는 일인데도, 실상을 조사하는 것이 언제나 엉성하고 죄를 결정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흠흠신서’에 그가 적어 놓은 집필 동기다. ‘흠흠신서’는 중국과 조선에서 발생한 여러 살인 사건을 유형별로 분류하고 사건 처리 문제점과 비평 등을 덧붙인 법률서이자 형법, 수사학 지침서다. 그는 살인사건 등의 1차 조사 및 처리를 담당해야 할 지방관들의 무거운 책임을 일러주고자 했다. 이 책은 정치학, 철학, 과학, 경제 등 다양한 학문에 일생을 바쳐온 정약용의 법학자적 면모에 주목한다. 저자는 “다산이 가진 여러 면모 가운데 법학자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며 연구 활성화를 강조했다. 오늘날 법학과 유사한 ‘율학(律學)’은 조선 선비들에게 등한시됐다. 잡과시험에 율과가 있었지만 중인 이하 신분층이 주로 율학을 공부했다. 당시 사대부인 그는 어떻게 법학에 관심을 갖고 독보적인 법률 전문서적을 쓸 수 있었을까. 이 책은 그의 생애를 차분히 펼쳐놓는다. 28세 나이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암행어사에 임명돼 전·현직 수령들의 수많은 비위행위를 목도했다. 마지막 관직인 형조참의 시절에는 정조 재위기간에 벌어졌던 형사 사건에 관한 수사, 검시, 재판기록을 모아놓은 ‘상형고’를 열람했다. 법 집행 관리로서 백성들의 누명을 풀어준 적도 많았다. 저자는 이런 그의 경험이 “전무후무한 판례연구서 ‘흠흠신서’를 편찬하는 데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법관의 중립적인 태도도 강조했다. 그는 법관의 덕목으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고 옥사에 연루된 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뜻을 지닌 ‘흠휼(欽恤)’을 꼽았다. 또 철저한 진술 청취, 명쾌한 판단과 신속한 옥사 처리, 뇌물 수수 금지를 명심하라고 조언했다.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단순 여행기라고 치부하기엔 어딘가 특별하다. 85세인 저자가 찬란한 태양, 일 년 내내 춥지 않은 날씨, 꽃이 많이 피는 탓에 ‘천국의 땅’이라고 불리는 시칠리아를 여행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조용하고 느리다. 10대에 6·25전쟁을 겪은 저자는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다. 그래서 줄곧 이민자, 이웃나라의 침략에 고초를 겪은 시칠리아에 동질감을 느낀다. 반도국인 한국과 섬나라인 시칠리아를 지리적으로 분석하고 한국과의 유사성, 차이점을 찾는다. 정처 없이 시칠리아를 떠도는 그가 묘사하는 자연의 풍광도 읽는 재미가 있다. 노년의 여행인 만큼 준비 과정, 시행착오 등 현실적 어려움도 담겼다. 자신이 집을 비우는 동안 혼자 있을 남편(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에 대한 미안함, 집안일에 대한 걱정, 마음 같지 않은 건강이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자신의 마지막 방문이 될지 몰라서일까. 저자는 시칠리아에 도달하자마자 기적적으로 몸을 회복했다. “다시는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여행하는 시간들이 아주 귀하게 느껴졌다. 시칠리아는 자연이 더없이 아름다웠고, 도시마다 다양한 양식의 건물들이 있어 볼거리가 많았다.”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MBC 시사 프로그램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의 진행을 맡고 있는 주진우 기자(45·사진)의 회당 출연료가 600만 원가량인 것으로 밝혀졌다. 연간 3억 원이 넘는 액수로 MBC 사장 연봉과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MBC 공정방송노동조합은 27일 성명서를 내고 “개국 이래 최악의 경영난을 겪는 MBC가 주 기자에게 회당 600만 원의 출연료를 지급하고 있다”며 “이념적인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개편 프로그램에 MBC 직원들을 투입하라”고 했다. 올 2월부터 매주 일요일 방영 중인 ‘탐사기획…’은 시청률 2∼3%대에 머물러 있다. 공동 진행자인 영화배우 김의성도 회당 300만 원을 받는다고 노조 측은 덧붙였다. 지난달 종영한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의 김어준 씨(50) 출연료도 회당 500여만 원으로 알려졌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91세인 송해 씨가 30년째 진행 중인 KBS1 ‘전국노래자랑’의 회당 출연료는 300만 원이다. 이순임 MBC 공정방송노조위원장은 “최승호 사장 체제가 10개월째 접어들었지만 MBC는 일평균 시청률이 1%대에 머물러 있고 올해 1700억 원의 적자가 예상된다”며 “주 기자의 회당 출연료를 연 52주로 셈하면 3억1200만 원으로, 지방 MBC 사장 연봉보다 높고 최승호 사장 연봉과 맞먹는 고액을 지불하는 근거를 밝혀라”라고 지적했다. MBC 측은 “출연료는 스튜디오 촬영뿐 아니라 취재 활동까지 포함한 액수로 타 방송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금액이 아니다”라고 밝혔다.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한국인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지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불편하기만 하잖아요. 이웃이 모이는 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0일 경기 고양시 EBS 사옥에서 ‘조식포함 아파트’를 연출하는 최수진 PD(41·여)가 말했다. 11일 첫 방송을 한 ‘조식포함…’은 개그맨 박명수, 요리 연구가 이혜정,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몬디 등 출연진이 아파트를 방문해 주민들이 건넨 식재료를 모아 조식 뷔페를 차려주는 프로그램이다. 4월 파일럿 방송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아 정규 편성이 됐다. 최 PD는 “기존 EBS 프로그램과 다르게 ‘예능스럽다’는 사내 비판도 있었지만 좋은 의미를 담을 수 있다면 포맷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파일럿 방송을 제작할 때만 해도 주민들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프로그램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금은 ‘아파트 신청 게시판’에 수백 개의 글이 올라온다. 주민들이 몰려 준비한 음식이 부족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일부 주민은 “도와주고 싶다”며 쌀과 밑반찬을 더 가져오기도 한다. 경기 수원시의 한 아파트에서 촬영할 때는 500명 넘게 몰려 주민들이 2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했다. 그는 “프로그램 주목도가 높아지니 식사를 제공하지 못해 죄송스러운 상황까지 생겼다”며 웃었다. 출연자 섭외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밑반찬을 받고, 조식을 제공하는 당일 오전 3시부터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등 체력적으로 힘든 일정이지만 박명수는 기획 의도를 듣고는 흔쾌히 촬영을 수락했다. 최 PD는 파일럿 방송보다 주민들과 소통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렸다. “윗집 아랫집이 ‘연락하고 지내자’며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껴요. ‘조식포함…’이 이웃 간 소통의 디딤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이 시대 며느리들의 고단한 노동 끝에 완성된 차례상을 떠올리면, 문득 종갓집 차례상의 화려함이 궁금해진다. 그러나 이는 종가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다. 퇴계 이황 종가에서는 밥, 국, 과일, 단술(식혜의 일종)을 포함한 12가지 음식으로 단출한 제사를 지낸다. 제사상에 올린 음식이 10가지도 되지 않는 종가도 부지기수다. 오히려 그릇의 높이는 낮고 음식량도 적다. 형편에 맞게 제사를 지내되, 조상을 기리고 전통을 계승하는 제사의 본질을 중시하는 것이다. 20년 동안 종가를 탐방한 저자에 따르면, 종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원형과 발자취를 간직한 ‘생활문화 박물관’이다. 각기 다른 예법, 복식, 자녀 교육법, 음식, 유적지, 유물 등이 전국에 산재된 100곳의 종가에 녹아 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고택을 감상하는 것도 이 책의 볼거리다. 구시대적이고 거추장스럽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종가 문화를 한평생 지켜온 이들의 노고는 전통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들에겐 육신의 고달픔보다 훌륭한 조상의 후예로 품위 있게 살겠다는 자긍심이 배어 있다. “이 혼서지(婚書紙·일종의 혼인 서약서)를 저승 갈 때 관에 넣어 가야 남편을 다시 만난답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댁의 종부가 되어 종부 노릇을 더 잘해보고 싶어요.”(김태문 종부·일선 김씨 문충공 김종직 종가) 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최고 시청률 5.3%(닐슨코리아)를 기록하며 숱한 기록을 남긴 ‘도시어부’ 알래스카 특별편을 이틀 연속 방영한다. 프로그램 부제인 ‘WILD WILD ALASKA’처럼 야생에서 낚시를 하며 고군분투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담겼다. 이덕화와 이경규, 마이크로닷, 게스트인 배우 장혁은 알래스카에서 연어, 홍어, 대구 등 낚시에 도전한다. 특히 장혁은 길이 82cm, 무게 10kg에 달하는 북태평양 최고급 어종 ‘옐로아이’를 낚아 화제가 됐다.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알래스카 자연의 모습도 압권이다. 불곰, 범고래, 바다표범, 해달 등 국내에서 보기 힘든 야생동물을 만날 수 있다. 온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 등 날것 그대로의 알래스카를 화면에 담았다. 특별편은 25일 오후 3시 20분에도 방영한다. 도시어부들과 장혁이 알래스카에서 만든 웃음과 감동의 이야기를 24일 오후 3시 반부터 230분간 확인해보자.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

결혼 28년 차 박준규 씨(54) 부부는 한가위를 맞아 10년 만에 처음 한복을 입었다. 경기 용인시 자택에서 18일 만난 그는 아내 진송아 씨(52)를 보며 “예쁘다. 젊었을 때 생각이 난다”고 운을 뗐다. 연신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꿀이 떨어졌다. 박 씨의 누나, 매형과 함께 이들 부부는 5일부터 방영된 채널A, 스카이티브이 예능 ‘식구일지’에 출연 중이다. 촬영을 마친 ‘식구일지’는 이들 부부에게도 어려운 도전이었다. 4인 가족이 정확히 오후 7시에 모여 30일 동안 저녁을 함께해야 상금 1000만 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 스케줄 탓에 저녁 시간을 잊거나 진수성찬을 준비했지만 ‘밥상 위 차려진 음식만 먹을 수 있다’는 프로그램 규정으로 밥 없이 3일 내내 반찬으로만 저녁을 해결한 적도 있다. 그래도 3년 전부터 백혈병을 앓고 있는 박 씨의 누나 선빈 씨 부부와 더 돈독해지는 계기가 됐다. 누나는 촬영 중에도 진 씨의 손을 잡고 “몸이 좋지 않았는데 엔돌핀을 돌게 해줘 고맙다”고 했다. 어릴 적 미모가 출중한 누나의 ‘보디가드’를 자처했던 박 씨도 함께했던 추억들을 곱씹을 수 있었다. 아직도 오후 7시가 되면 ‘누나와 매형이 밥을 먹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박 씨 가족은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함께하려 노력한다. 명절이나 새해는 무조건 가족과 같이 보내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여행을 가도 4명이 함께 간다. 그만큼 박 씨는 두 아들에게 친구 같은 아버지다. 아들 둘과 술을 마시며 연애 상담을 해주거나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등 신조어도 배운다. 무명시절이 길었던 박 씨는 배우를 지망하는 두 아들에게 “배우는 오래 기다리는 끈기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1960, 70년대 액션 배우로 활약했던 박노식 씨(1930∼1995)의 아들인 그는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아내가 연기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됐다”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결혼 후 내조를 위해 뮤지컬 배우의 꿈도 접은 진 씨는 “꿈을 포기했지만 덕분에 가정이 더 화목해졌다”며 미소 지었다. 이들 가족에게 추석은 어떤 의미일까. 박 씨는 “차례상에 올릴 만두를 먹는 날이다. 아내가 만두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며 웃었다. 진 씨는 “온종일 가족과 있는 시간이 흔치 않아 소중한 명절”이라고 했다. 군입대한 첫째 아들도 이번 추석 때 휴가를 나와 온 가족이 함께 만두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추석에 꼭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세요. ‘혼밥’이 대세인 요즘 가족과의 정이 싹틀 만한 시간이 없잖아요.”(박준규)용인=신규진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