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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무사시(武藏)다. TV아사히가 최근 55주년 개국 특집극 ‘미야모토 무사시’를 방영했다. 무사시를 다룬 대하드라마가 NHK에서 방영된 것이 2003년이니 11년 만이다. 주연은 기무라 다쿠야가 맡았다. 유스케 산타마리아, 가가와 데루유키, 마쓰다 쇼타 등 보통 작품에서 주연을 도맡는 배우들이 조연은 물론 카메오에 가까운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의 무사시 사랑은 대단하다. 요시카와 에이지와 시바 료타로를 포함해 무수한 소설가가 이 전설적인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 무사시가 주인공인 ‘베가본드’가 만화 잡지에 연재 중이고 일본의 ‘국민 만화’라는 ‘원피스’에는 무사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와 연극도 한두 편이 아니다. 이번 드라마도 제작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여론이 들끓었다. 기무라 다쿠야의 캐스팅 뉴스가 비중 있게 보도됐고, 누리꾼들은 캐스팅이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를 놓고 갑론을박했다. 이 드라마는 새로운 해석을 가미하기보다 무사시의 일대기를 간추리는 데 머물렀다.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익숙한 초고속 촬영기법을 이용해 무사시가 검을 겨루는 액션 장면에 힘을 준 것 정도가 새로운 점이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는 공명심에 베고 썰고 찌르며 신나게 칼을 휘두르던 무사시는 순간 자신이 살인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검을 버린다. 농사를 지으며 칩거하던 무사시는 산적의 습격을 받은 마을 사람들을 구하며 사람을 구하는 검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무사시가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는 이유는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일본 최고의 사무라이인 데다 일본 최고의 병서인 ‘오륜서’를 남겼기 때문이다. 무사시가 살았던 시대는 일본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 막부가 시작되던 무렵으로, 전쟁이 없어 사무라이의 효용가치가 떨어진 때였다. 결국 무사도가 단순한 검술 수련이 아니라 내면을 수양하고 도를 닦는 데 있다고 서술하는 오륜서는 평화의 시대에 무사로 살아야 하는 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책이다. 사무라이가 휘두르는 검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준 책이기도 하다. 무사시는 4년간의 수련과 7년간의 칩거를 거쳐서야 최고의 검객으로, 또 무사도를 집대성한 인물로 재탄생했다. 1980년대 이후 30년 넘게 사회 전반의 침체 분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일본이 17세기의 무사에게서 재기의 실마리를 찾고 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사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첫 소설(요시카와 에이지 작품)이 193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던 제국주의 일본에서 나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여기 있는 너희들은 애완동물 가게의 강아지나 마찬가지다. 애완동물의 행복은 주인에 의해 결정된다. 주인은 애완동물을 어떻게 고르지? 귀여움을 보고 고르는 거야.” 지난주 종영한 일본 드라마 ‘내일, 엄마가 없어’의 첫 회. 지팡이를 짚고 보육원 ‘물오리의 집’ 아침식사 시간에 나타난 원장이 보육원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다. 원장은 아이들에게 재롱을 피워보라고 한 뒤, 여기서 합격한 아이들만 먼저 식사를 하도록 허락한다. 드라마 1, 2회에는 “이런 불경기에 주워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고맙게 생각해” “넌 귀여운 토이푸들이야. 손이라도 내밀어 봐” 같은 대사가 쏟아지고. 아이들은 서로를 ‘포스트’(우체통에 버려진 아이) ‘로커’(코인로커에 버려진 아이) 등으로 부른다. 이런 설정에 불편을 느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는지 일본에서는 드라마 시작 직후부터 비난 여론이 터져 나오면서 광고가 보류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2회부터는 드라마 말미에 ‘이 드라마는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계가 없다’는 안내가 붙더니 결국에는 줄거리가 적지 않게 수정됐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는 석연찮은 면이 많다. 극본을 감수한 노지마 신지는 드라마 초반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충격요법’을 쓴 뒤 극적인 반전을 통해 감동을 주는 작가로 유명하다. 일본에서 이런 식의 ‘독한 설정’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니다. 2010년 드라마 ‘마더’에서 추운 겨울에 친엄마가 쓰레기봉투에 아이를 넣어 집 밖에 버리는 장면이 나왔고, 2005년 ‘여왕의 교실’에선 초등학생들을 혹독하게 공부시키고 현실을 알라며 독설을 퍼붓는 담임교사가 등장했다. 하지만 당시엔 드라마 광고가 보류되고 줄거리가 수정되는 사태로까지 번지지 않았다. ‘내일, 엄마가 없어’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시설 아동의 현실이나 입양 시스템, 진정한 가족의 의미 등에 대해 꽤 괜찮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일단 보기 불편하니 눈앞에서 치우라’며 불편해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반론도 있었지만 비난 여론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런 일련의 소동은 일본 사회가 ‘불편함’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더 강퍅해졌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문득, 국가와 정부를 불편하게 하는 비밀 누설은 무엇이든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특정비밀보호법’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사실 그동안 미드를 좀 멀리했다. 국내에서 ‘24’나 ‘CSI’가 인기를 끈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화려한 액션이나 엄청난 스케일, 아니면 치밀한 추리나 과학적인 증거 분석 같은 ‘미드식 조미료’도 좀 질릴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다 미국 케이블채널 HBO에서 방영 중인 ‘트루 디텍티브’를 봤다. 최근 새로 시작한 미드 중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드라마다. 19세기 단편집 ‘더 킹 인 옐로’는 트루 디텍티브가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알려지자마자 아마존 베스트셀러 10위 목록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 드라마는 은퇴한 형사 마티(우디 해럴슨)와 러스트(매슈 매코너헤이)가 각자 후배들의 조사에 응하면서 시작한다. 둘은 파트너였지만 벌써 10년이 넘도록 연락이 끊긴 사이. 후배 형사들은 마티와 러스트에게 두 사람이 해결했던 한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물어보고, 둘은 과거를 회상하며 사건의 진실을 재구성해 나간다. 트루 디텍티브는 수사물이라기보다는 탐정물이고, 추리물이라기보다는 하드보일드에 호러를 뒤섞은 듯하다. 진득한 남부 사투리와 늪지대로 뒤덮인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시골 풍경이 버무려져 있는데, 좋게 말해 여백의 미가 있고 나쁘게 말하면 이러다 사건은 언제 해결하나 싶을 정도로 굼뜨다. 여기에 마티는 위기의 중년이고 러스트는 염세주의에 정신 병력이 있다. 특히 러스트의 대사는 대체 이게 드라마 대사인가 싶을 정도로 현학적이다. 파트너끼리의 끈끈한 정 같은 것도 별로 없어서 둘은 서로 신경 긁기에 바쁘다. 다만 신세 한탄에 훈계가 뒤섞인 사건 해결 과정을 듣다 보면 시청자는 둘에 대해 필요 이상의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결국 두 형사가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사이 시청자들은 그들의 내면을 탐구하며 대체 어떤 인물인지 추리하게 된다. 드라마 안에 두 개의 미스터리가 존재하는 셈. 과연 둘은 제목대로 ‘진짜 탐정’일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두 미스터리는 하나로 서서히 합쳐진다. 각본을 쓴 닉 피졸라토는 소설가로도 데뷔한 인물로, 10대 시절엔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 대학 시절엔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드라마 역시 20세기 탐정소설과 공포소설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문학의 수혜 덕분인지 드라마는 좋은 소설처럼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빠져들면 내리 보고 또 한 번 보게 하는 매력을 지녔다. 전체 8화 중 7화가 지나갔으니 이제부터 보는 분들은 완결편까지 쭉 볼 수 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주인공 하마사키 미쓰오(에이타)는 ‘최악의 결혼’ 중이다. 아내 유카(오노 마치코)는 집을 어지르기나 하고 요리나 가사엔 젬병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하나하나 토 달고 열 받게 만들기 일쑤다. 아내도 할 말은 많다. 결벽증에, 지진이 나도 괜찮으냐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남편. 여기에 또 다른 커플이 끼어든다. 미쓰오와 사귄 적이 있는 아카리(마키 요코)와 아카리의 남편 료(아야노 고)다. 남편의 바람기에 힘들어하는 아카리에게 미쓰오는 급격히 끌린다. 미쓰오와 유카는 결국 이혼을 하지만, 한번 맺어진 인연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과연 최악의 결혼은 최고의 이혼이 될 수 있을까. 지난해 일본 드라마 중 최고를 물으면 주저 없이 꼽는 드라마, 바로 ‘최고의 이혼’이다. 마니아가 많은 데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시청률이 낮았는데도 방영 1년이 된 지난주 일본에서 스페셜 에피소드가 방영됐다. 줄거리만 보면 흔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폐부를 찌르는 대사에 캐릭터는 살아 있고 동시대 일본의 자화상을 진하게 녹여냈다. 미쓰오는 결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다. 동물원을 돌아다니며 귀여운 동물 사진을 찍고 일지를 기록하는 것이 취미. 집에서는 고양이와 선인장을 키우며,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다소 어색한 전형적인 ‘초식남’이다. 그런 그가 유카와 별안간 결혼하게 된 건 바로 동일본 대지진 때문이다. 지진이 난 날, 걸어서 귀가하던 중 우연히 유카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준 것이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유카와 동거를 시작하고 곧 결혼한다. 실제로도 대지진 직후 일본에선 젊은층의 결혼 건수가 늘었다고 한다. 독신에 만족하던 이들이 지진이라는 대재앙 앞에 안정감을 줄 동반자를 찾았다는 얘기다. 미쓰오가 유카와의 결혼에 의문을 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진 때문에 충동적으로 한 결혼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동시대의 사건을 끌어들인 것이다. 드라마는 초식남 미쓰오, 충동적인 유카, 바람을 피우는 료와 그런 그를 방치하는 아카리를 통해 결혼의, 나아가 인생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요즘 일본 애들’의 모습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스페셜 에피소드에는 이들이 1년 뒤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담았다. 아이를 원하는 유카와 겁부터 내는 미쓰오의 좌충우돌을 볼 수 있다. “결혼은 기나긴 고문이에요. 하와이에 갔더니 매일 비가 내리고 동물원에 갔더니 동물들이 모두 자고 있는 거랑 같은 거예요” 같은 차진 대사를 씹는 맛도 쏠쏠하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이제는 ‘매드멘’에 나오는 그런 식의 근무 방침을 폐기할 때입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미국 의회에서 새해 첫 연설(연두교서)을 하던 도중 이 말을 던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드라마길래 대통령 연설에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 없는 농담의 소재로까지 등장했을까. ‘매드멘(Mad Men)’은 1950, 60년대 미국 뉴욕 매디슨 가에 밀집해 있던 광고업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 AMC에서 시즌6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말버러맨’ 캠페인을 전개했던 전설적인 광고인 드레이퍼 대니얼스를 모델로 한 돈 드레이퍼(존 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서 승리한 뒤 경제적으로도 황금기를 구가하던 당대 미국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돈은 번뜩이는 영감으로 늘 광고주의 인정을 받는 인물. 교외에서 금발머리 미녀 아내, 토끼 같은 자식과 사는 완벽한 인생이다. 화려한 의상과 세련되고 부유한 라이프스타일은 21세기 못지않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하란 법은 없다. 돈은 어두운 과거를 은폐하려 애쓰는 인물로 그려진다. 드라마 역시 당대 미국의 이면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여전히 흑인은 웨이터나 벨보이 정도, (백인) 여성은 그보다 좀 더 나은 비서 역할이 커리어의 최대치다. 여자 직원이라면 직장에서 남자를 낚아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최종 목표로 여겨지고, 결혼하고도 일하는 건 불행한 인생으로 취급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모성보호 정책을 설명하면서 이 드라마를 언급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역시 민주당답게 이 드라마가 미국의 진보를 상징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드라마를 보며 사람들은 흔히 ‘좋은 시절’로 기억되는 당시 미국에 실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차별이 존재했는지 느낄 수 있다. 미국이 세계 1등 국가의 칭호를 얻고 난 뒤에도 부조리와 불합리를 깨고 끊임없이 진보해 왔으며,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미국 언론도 이 대목을 주목했는지 시사주간지 타임은 연두교서 발표 직후 매드멘 시대와 현재의 여권(女權) 수준을 비교하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여성은 남성이 임금 1달러를 받을 때 60센트를 받는 데 그쳤지만 현재는 남성 1달러당 77센트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문득 한국 상황이 궁금해서 기사를 좀 뒤져봤는데, 웬걸. 우리나라 여성의 임금 수준은 남성의 64% 수준이라고 한다. 1950년대가 아니고 2010년대 얘기다. 진보할 여지가 많아 좋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기무라 다쿠야. 일본의 국민배우이자 마흔이 넘도록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영원한 아이돌. 일본 대중문화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이름이다. 일본에서 그의 위상은 기록이 말해 준다. 일본 드라마 역대 평균시청률 1위에서 5위까지가 모조리 그가 주연을 한 작품인데, 이 기록은 10년이 넘도록 깨지지 않고 있다. 그의 필모그래피만 따라가도 웬만한 유명 일본 드라마는 다 섭렵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명성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가 지난 분기 주연을 맡은 ‘안드로이드-A.I. 노스 러브?’는 19.2%라는 높은 시청률로 출발했지만 곧 10%대 초반으로 폭락하다 결국 평균시청률 12.8%로 마무리됐다. 과거 히트작 ‘굿럭’에서 함께 연기했던 여배우 시바사키 고와 다시 만나 화제를 모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시청률이 떨어지는 굴욕을 겪은 것이다. 물론 일본에는 시청률 10%를 넘지 못하는 드라마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황금시간대에 조연까지 유명 배우로 캐스팅한 결과가 이 정도이니 ‘초라하다’고 표현할 만하다. 더 큰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0년 ‘달의 연인’ 이후 출연작마다 평균 시청률이 20%를 넘기지 못했고, 대부분 첫 회 시청률은 높았다가 급락하는 추세를 보였다. 시청자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예전에는 일본의 전체 TV 시청률이 떨어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이라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한자와 나오키’ ‘가정부 미타’ ‘아마짱’ 등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작품이 연달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흘러간 세월을 탓할 수밖에 없는 걸까. 출세작인 1996년 ‘롱 베이케이션’에서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는 피아니스트를 연기한 이후 기무라 다쿠야는 줄곧 신세대의 표상이었다. 미용사, 회사원, 검사, 레이서, 파일럿, 하키 선수, 연쇄 살인범, 심지어 총리를 연기할 때도 그는 어딘가 결핍이 있고 ‘쿨’한 신세대다운 모습이었다. 현실과 공명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이 변해 이 캐릭터가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되자, 그는 천재 과학자나 안드로이드 같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 캐릭터나 과거의 인물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건 그의 외모가 여전히 아름답다는 점이다. 데뷔 당시처럼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미모는 아니지만 세월이 깃든 뒤에도 여전히 ‘미중년’의 선두 주자다. 꾸준한 외모만큼이나 다양한 역할을 그 나름대로 소화하며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인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지금의 하락세가 기무라 다쿠야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모색의 시기가 되길 바라는 이유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모두가 ‘해피 뉴 이어!’를 외칠 때 ‘해피 뉴 셜록!’을 외친 이들이 있다. BBC 드라마 ‘셜록’의 팬들이다. 현지 시간으로 1월 1일, 시즌3의 첫 번째 에피소드 ‘빈 영구차’가 베일을 벗었다. 지난 시즌 이후 팬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셜록(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었다. 시즌2 마지막회가 악역 짐 모리아티(앤드루 스콧)의 계략으로 셜록이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동안 △셜록이 존 왓슨(마틴 프리먼)과의 마지막 전화 통화에서 ‘이건 마술일 뿐이야’라고 말했고 △왓슨이 자전거와 부딪혀 넘어지느라 셜록이 땅에 추락하는 순간은 보지 못한 점을 근거로 수십 개의 가설을 제시하며 셜록이 어떤 속임수로 살아남았는지를 추리해 왔다. 시즌3의 1회를 본 팬들이라면 ‘이게 뭐야’ 하고 허탈해했을 법하다. 팬들이 세운 몇 가지 가설이 극 중에 이용되고, 셜록 스스로 속임수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게 정답’이라고 명쾌하게 말해 주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팬들은 ‘팬들이 얘기했던 기존 가설과 셜록의 가설이 너무 비슷하다’ ‘셜록이 이렇게 쉽게 사실대로 말해줄 리가 없다’며 다른 뭔가가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셜록이 살아남은 비결에 대해 뾰족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은 제작진은 한술 더 떠 셜록의 행적을 추적하는 ‘빈 영구차 모임’을 극 중에 등장시켰다. 셜록과 모리아티가 실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상상을 펼치는 여성 팬이나, 셜록에게 집착하다 직장까지 잃고 반미치광이가 된 전직 경찰관 등이 멤버다. 셜록에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것이다. 2년 동안 기다려준 팬들을 위한, 오만한 천재인 셜록다운 배려라고나 할까. 하지만 너무 억울해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 에피소드 ‘세 사람’은 따뜻하고 감동적인 내용으로 팬들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셜록은 왓슨의 결혼(!)을 앞두고 말 그대로 ‘멘붕’에 빠지지만 결국 모두의 눈시울을 적시는 감동적인 결혼식 축하 연설을 한다. 시즌3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은 ‘마지막 서약’이다. 원작소설에서도 시간상 가장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마지막 인사’에서 따온 제목인데 ‘마지막’이라는 표현 때문에 이번 시즌으로 셜록이 종영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모리아티가 살아 돌아올지도 관심거리다. 마지막까지 팬들과의 ‘밀당’을 멈추지 않는 ‘셜록’ 시즌3. 영국 현지 시간으로 12일 밤이면 셜록이 마지막으로 어떤 서약을 할지 확인할 수 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KBS 월화드라마 ‘총리와 나’는 2008년 방영된 일본 드라마 ‘체인지’와 닮은꼴이다. 일단 주인공이 총리인데, 둘 다 강직한 원칙주의자에 젊고 잘생겨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 정계를 드라마의 본격적인 무대로 삼았다는 점도, 여자와의 스캔들로 위기에 처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두 드라마가 정반대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체인지’는 시골 초등학교 교사였던 주인공 아사쿠라 게이토(기무라 다쿠야)가 국민 눈높이에서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애물을 돌파해가며 정치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수석비서관인 미야마 리카(후카쓰 에리)와의 염문설도 그런 장애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정치드라마에 연애로 양념을 친 작품이다. 반대로 ‘총리와 나’는 재벌 2세가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와 다를 게 없다. 국무총리 권율(이범수)은 그동안 봐왔던 백마 탄 왕자님이고, 연예정보지 기자인 남다정(윤아)은 어려운 가정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전형적인 캔디형 여주인공이다. 권율의 적수인 기획재정부 장관 박준기(류진)조차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권율의 전 부인인 여동생이 불의의 사고로 행방불명됐는데 권율이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사적인 이유에서 복수심을 불태운다. ‘총리와 나’의 제작진은 ‘연애드라마에 정치로 양념을 친’ 쪽이 그 반대보다 더 인기를 끌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정반대다. ‘체인지’는 방영 당시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사쿠라가 20분 넘게 롱테이크로 TV 연설을 하며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주길 호소하는 마지막회 장면은 지금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반면 ‘총리와 나’는 한 자릿수 시청률로 동시간대 꼴찌다. 정계가 배경이라고 꼭 정치 얘기만 하란 법은 없다. 하지만 ‘총리와 나’에서 국무총리가 하는 일은 대통령 만나고 현장 시찰 나가는 정도에 그친다. 남녀 주인공의 손이 순간접착제로 붙어버리는 따위의 억지스러운 상황에 묻혀 정치는 피상적으로 다뤄지거나 남녀 주인공을 엮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된다. 총리공관에서 할 일이 연애 밖에 없는 건 아닐 테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어 ‘책임총리제’ 얘기까지 나오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풍자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국무총리 권율에게 좀더 많은 업무를 주는 편이 좋을 듯하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2014년 1월 1일. 대부분 사람들에겐 새해의 시작이겠지만 셜로키언(‘셜록’의 팬)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다. BBC ‘셜록’의 3번째 시즌 첫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날이다! 2012년 1월 시즌2가 나왔으니 2년 만이다. 지난달 29일 셜록의 각본가이자 극 중 셜록 홈스의 형 마이크로프트로 출연하는 마크 게이티스는 트위터에 “친지와 가족들이 ‘살아있는 추억’과 함께 그리워하는 컨설팅 탐정 셜록 홈스, 2014년 1월 1일!”이라고 올렸다. 방영 날짜를 슬쩍 흘리면서 지난 시즌 막바지에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던 셜록이 실은 살아있다는 사실까지 상기시킨 것이다. 동시에 런던에선 ‘셜록 01 01 14’라고 적은 빈 영구차가 시내를 돌아다니는 장면이 목격됐다. 시즌3 첫 에피소드 제목이 ‘빈 영구차’라는 점을 빗댄 이벤트였다. 떠들썩한 제작발표회나 예고편 대신에 트위터와 빈 영구차로 방영일을 알리는 방식은 고전 탐정소설 ‘셜록 홈스’를 블로그와 스마트폰을 쓰는 21세기 탐정으로 되살린 ‘셜록’ 제작진다운 선택이었다. 19세기에 창조된 가상인물일 뿐인 셜록이 마치 지금 현재 런던의 베이커 스트리트 221B에 살고 있는 것처럼 눙치는 솜씨가 일품이다. 제작진은 시즌1부터 셜록이 실재 인물로 보이도록 정성을 기울였다. 셜록과 왓슨이 극 중 운영하는 블로그는 실제로 존재한다. 셜록의 블로그 ‘추론의 과학’엔 “제발 재미있는 사건만 상담해 달라”는 셜록다운 주문이 떡하니 걸려 있다. 시즌1에서 상담사에게 개인 블로그를 운영해보라는 조언을 받았던 왓슨의 블로그도 재미있다. 최근 업데이트된 글엔 셜록이 죽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하는 왓슨의 심경이 적혀 있고, 극 중 등장인물이 셜록을 애도하고 왓슨을 위로하는 댓글이 달려 있다. 시즌1에서 살해당한 방송 진행자 코니 프린스의 블로그에는 ‘프린스 양이 세상을 떠나 더이상 새 회원은 받지 않는다’는 공지가 떠 있다. 시즌마다 달랑 3편만 방영하면서도 셜록이 잊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시즌이 쉬는 동안에도 팬들은 블로그와 트위터를 지켜보며 마치 자기도 드라마 속 등장인물인 것처럼 댓글을 달고 글을 남긴다. 수수께끼처럼 올라오는 셜록과 왓슨의 글을 보며 다음 시즌의 향방을 ‘추론’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셜록은 성탄절에 특별 미니 에피소드를 공개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아직 못 본 사람들은 시즌1부터 시작하기 딱 좋은 때다. 이렇게 빠져들다 보면 셜록과 왓슨의 블로그를 뒤지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이 드라마는 고려 말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으며 일부 가상의 인물과 허구의 사건을 다뤘습니다. 실제 역사와 다름을 밝혀드립니다.’ MBC 드라마 ‘기황후’ 도입부에 삽입된 문구다. 제작진은 방영 전부터 역사 왜곡 논란이 일자 이 문구를 넣고 주인공 중 한 명인 충혜왕을 가상의 인물 왕유로 변경했다. 사극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은 이젠 그저 한 번쯤 거치는 식상한 얘깃거리가 돼버린 느낌이다. 외국도 그럴까. 해외에서도 역사물을 자주 방영하지만 철저한 역사적 고증은 제작의 기본 중 기본이다. 특히 이런 고증 작업을 극의 설득력을 높이는 핵심으로 여긴다. 최근 히트한 영국 드라마 ‘다운턴 애비’는 타이타닉호 침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역사 속 사건·사고와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실제 역사를 정확히 그려냄으로써 드라마 속 가상의 삶과 실제 역사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쾌감을 준다. 물론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처럼 실존 인물이 여러 차례 드라마화되는 경우 야사가 정사처럼 그려지거나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고증을 통해 설득력을 높인다는 원칙엔 변함이 없다. 한국처럼 고려 말 궁중에 뜬금없이 조선시대의 ‘내훈’이 나오거나 이미 멸망한 돌궐이 부활해 원나라와 전쟁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억지로 선악 대립 구도를 만드느라 역사를 훼손하는 일도 없다.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시즌2 방영을 앞둔 ‘보보경심’(사진)은 강희제 시기의 황위 계승 다툼을 다루고 있다. 선악 구도로 다루기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보보경심’은 타임슬립 드라마임에도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역사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역사 왜곡 논란이 일 때마다 한국의 제작진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발뺌한다. 하지만 그럴 바엔 한 편의 판타지 드라마를 만들면 될 일이다. 역사 속에서 마음에 드는 소재만 쏙 뽑아내 그에 맞춰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내는 역사 드라마에 과연 시청자들이 계속 호응해줄까. 게으름은 둘째 치고 비겁하기까지 한 이런 사극에 미래가 있을지 의문이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SBS 수목 드라마 ‘상속자들’은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한국판이다. 배경이나 인물 설정부터가 그렇다.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는 제국고의 알바 소녀 차은상(박신혜)은 뉴욕 맨해튼의 사립고에 다니는 브루클린 소년 댄을, 집안 사정상 미국으로 쫓겨났다 돌아온 김탄(이민호)은 사고치고 도망쳤던 세레나를, 그리고 김탄을 원수 보듯 하는 예전 절친 최영도(김우빈)는 악녀 블레어를 닮았다. 결혼을 전략적 제휴로 취급하는 유라헬(김지원)의 엄마는 세레나의 엄마 릴리를 연상시키고, 아들에게도 가차 없는 최영도의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는 최영도의 모습은 ‘가십걸’ 속 척의 모습과도 겹친다. 그런데 ‘상속자들’을 보면 김이 확 빠진다. 한국 지상파 드라마에서 ‘가십걸’처럼 마약이나 총기가 등장하길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가십걸’은 사건 사고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등장인물들이 그렇게까지 진흙탕 싸움을 벌이며 서로 증오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속자들’의 에피소드는 유치원생에게 사이즈 안 맞는 명품 구두를 신겨 놓은 것처럼 유치하기만 하다. 대표적인 예가 최영도다. 극 중에서 갈등의 시발점이자 긴장감을 높여야 할 그가 하는 반항이란 왕따를 만들어 폭력을 행사하고 불법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게 전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 역시 아버지의 약혼녀와 가족사진을 찍을 때 아버지의 불륜녀를 불러 훼방을 놓는 정도다. 아버지와 회사 경영권을 놓고 목숨을 건 다툼을 벌이는 척이나, 뒤에선 음모를 꾸미고 겉으론 착한 척하는 데 도가 튼 블레어와는 수준 차이가 나도 너무 난다. 사실 ‘가십걸’에서 모든 갈등의 시작은 ‘내가 여기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다. 세레나가 도망친 이유도, 엄마 릴리가 결혼을 반복하는 이유도, 척과 블레어가 음모를 꾸미는 이유도 현재의 부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가십걸’ 속 2세들은 모두 자신의 평판 유지와 존재 증명을 위해 대학입시 같은 현실적인 관문을 포함한 각종 난관을 통과해 생존해야 했다. 이들의 뒷얘기를 폭로하는 블로그 ‘가십걸’은 이 위기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다. 하지만 ‘상속자들’ 속 2세들은 의무나 책임은 없이 그저 ‘부모가 날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서 힘들다’며 투정을 부릴 뿐이다. 드라마의 원래 제목은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상속자들’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왕관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로맨스도 갈등도 다 밋밋해졌다. 멋진 배우와 화려한 배경, 김은숙 작가 특유의 맛깔 나는 애정 신으로도 그 모자란 무게가 채워지지 않는 듯하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벌써 몇 타석 연속 점수를 내는 건지 모르겠다. ‘국민 배우’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다. 지난달 22일 40%가 넘는 시청률로 종영한 ‘한자와 나오키’의 주인공 사카이 마사토(40) 얘기다. 다음 타석인 ‘리갈 하이’ 시즌2에서도 첫 회가 20%를 넘더니 계속해서 10%대 후반의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배우 나이 마흔에 찾아온 이 인기가 우연이 아니라는 건 수많은 연속 히트가 증명한다. 2008년 ‘아쓰히메’에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 역할을 맡아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하더니 ‘관료들의 여름’ ‘조커, 용서받지 못할 수사관’에서도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2010년엔 영화 ‘골든 슬럼버’의 주연을 맡아 일본 영화계에 새 동력을 불어넣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 ‘리갈 하이’ 시즌1에 이어 올해 ‘한자와 나오키’까지, 게다가 올해 초엔 인기 여배우 간노 미호와 결혼까지 했으니 공사 양면에서 홈런을 친 격이다. ‘리갈 하이’에서 사카이는 성격 파탄자인 변호사 고미카도 겐스케로 나온다. 드라마는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믿으며 승소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미카도 변호사와 신참 열혈 변호사 마유즈미 마치코(아라가키 유이)의 좌충우돌을 그린다. 드라마를 이끄는 건 단연 사카이의 연기다. 고미카도 변호사는 집게손가락을 치켜드는 특유의 포즈로 지적질을 일삼는 인물. 8 대 2 가르마와 새치름하게 빠진 구레나룻이 인상적이다. 사카이는 다소 무겁고 느끼했던 전작의 캐릭터를 털어내듯 속사포 같은 대사로 산뜻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인다. 전작과 공통점이 있다면 그가 악인도 선인도 아닌 경계의 인물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조커’에선 낮엔 온화하고 성실한 형사지만 밤에는 법망을 벗어난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심판자로 활약하는 이중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이런 흑도 백도 아닌 회색의 역할을 계속 맡는 이유는 아마도 그 특유의 표정 덕분일 것이다. 얼핏 보면 늘 웃는 듯 착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혹은 우는 건지 알기 힘든 오묘한 표정이다. 실제로도 이끼를 키우는 초식남의 면모와 연기를 하겠다며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가족과 7년 가까이 절연하는 강단 있는 모습을 함께 갖췄으니 그야말로 복잡다단한 매력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벌써부터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당신은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비밀스러운 시스템을 갖고 있죠. ‘기계’가 매일 매시간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 원래는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기계’는 모든 것을 보게 됐습니다.” 드라마 속 상상은 현실이 돼 버렸다. 미국 CBS가 방영하는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Person of Interest·요주의 인물)’ 시즌3는 매 에피소드를 이 같은 대사로 시작하는데, 올 6월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전방위로 인터넷 감시활동을 펼쳐 왔다는 영국 가디언의 보도와 무서울 정도로 닮았다.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백만장자인 해럴드 핀치(마이클 에머슨)는 e메일 휴대전화 폐쇄회로(CC)TV SNS 기록 등 세상의 모든 디지털 정보를 수집해 테러를 예측하는 ‘기계’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기계가 일반 범죄까지 예측하는 능력을 갖게 되면서 테러 정보에만 관심을 갖는 정부 대신 핀치 자신이 직접 전직 중앙정보국(CIA) 요원이자 군인 출신인 존 리스(제임스 카비젤)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나선다. 화려한 액션과 반전이 돋보이는 핀치와 리스의 작전은 사생활 침해 작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CCTV를 해킹해 요주의 인물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보고, 휴대전화를 복제해 도청하는 것은 물론 e메일이나 공문서도 제 손금 읽듯 한다. 둘의 무모한 작전 뒤엔 9·11테러로 인한 상처가 있다. 시즌1 첫 회에서 핀치는 자신이 이윤을 내는 데 몰두하느라 당일 저녁까지도 테러 사실을 몰랐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기계를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군인이었던 리스는 테러로 연인과의 행복한 삶을 잃었다. 테러의 트라우마는 둘을 무모한 작전으로 내몰고, 범죄를 막기 위해 또 다른 범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기계’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불리는 시스템은 진짜 CIA 요원 출신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프리즘’이란 정보 수집 도구로 현실화됐음이 드러났다. NSA가 온갖 개인정보를 수집해 축적해 왔다는 스노든의 주장은 핀치 같은 인물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섬뜩함을 안겨 준다. 스노든의 폭로에 반역죄를 들이밀고 스노든의 신병을 인도하라고 타국 정부를 종용하는 미국의 모습에 드라마 속 두 인물의 트라우마가 겹쳐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드라마에는 기계를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려는 악역인 천재 프로그래머 루트(에이미 애커)가 등장해 선의로 시작한 정보 수집 활동이 언제든 악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기계가, 그리고 핀치와 리스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되건 그 결말엔 미국의 현재가 투영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올해만큼 다양한 좀비물이 쏟아진 적이 있을까. 좀비가 연애를 하고(‘웜 바디스’) 세계를 뒤덮더니(‘월드워Z’) 급기야는 아이돌 그룹이 좀비가 됐다(샤이니 ‘와이 쏘 시리어스’). 드라마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해 4월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 시즌3는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달 중순 새 시즌 방영을 앞두고 있다. 올해 봄 방영된 영국 드라마 ‘인 더 플레시’도 좀비물인데 정확히 말하면 ‘부분적 사망 증후군 환자’가 나온다. ‘덜 죽는 증상’에 시달리는 이들이다. 갑자기 좀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 지 수년, 정부는 하루에 한 번 뒤통수에 주사하면 신경계가 재생성돼 감정과 윤리의식, 특히 죄책감을 갖게 해주는 백신을 개발한다. 정부는 수용소에서 좀비들에게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한 뒤 차도를 보이는 좀비, 아니 부분적 사망 증후군 환자를 세상으로 내보낸다. 의회에서 ‘부분적 사망 증후군 환자 차별금지법’이 통과되고 정부가 포스터와 홍보물을 돌리며 캠페인을 벌이지만 좀비와 치른 전쟁의 상처가 쉽게 치유될 리 없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키어런(루크 뉴베리)이 좀비 치료를 받고 돌아간 시골 마을 로튼은 좀비에 대적하기 위한 ‘인간의용군’이 가장 먼저 조직됐을 정도로 보수적인 곳. 종교적 광기를 양분삼아 마을을 좌지우지하는 오디 목사와 의용군 대장 빌, 의용군의 일원이 된 키어런의 여동생 젬까지 마을 사람들은 환자 키어런을 차별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공격한다.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잘 죽지 않으며 늙지도 않는다. 썩은 피부와 허연 눈동자는 비비크림과 컬러렌즈가 있어야 가려진다. 하지만 이런 점만 제외하면 이들이 인간과 다른 점은 거의 없다. 이쯤 되면 부분적 사망 증후군 환자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예의바른 단어가 무엇을 은유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는 묻는다. 과거의 노예, 여성, 유색인종, 동성애자와 이 좀비들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과연 누가 진짜 인간인가. 부분적 사망 증후군 환자는 모두 죽음의 고통과 좀비 시절 타인을 살해한 죄책감을 기억하는 이들이다. 약을 주사할 때마다 되살아나는 과거의 기억은 이들을 평생 괴롭히는 트라우마다. 그렇다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를 어떻게 용서하고 또 자신이 죽인 이에게는 어떻게 용서를 빌 것인가. 갑자기 죽었던 가족이 괴물이 돼 돌아왔을 때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인 더 플레시’는 살과 피를 튀기며 우악스레 달려드는 대신 이렇게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르며 섬세하게 다가온다. 시즌2 제작도 확정돼 내년 중 방영될 예정이다. 주의사항 하나. 시즌1은 딱 3편뿐이니 천천히 곱씹으며 보길 권한다. 금단증상에 시달리다 ‘부분적 사망’에 이를 수 있으니.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먹방’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지도 꽤 됐다. ‘먹는 방송’의 줄임말로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 그런 모습을 담은 방송 프로그램을 가리키는 단어다. ‘먹방’은 일본에서 먼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오래 전부터 음식 프로그램을 통칭해 ‘구루메 반구미’라고 부를 정도로 먹방의 천국이다. ‘구루메’는 미식가를 뜻하는 영어 ‘gourmet’의 일본식 발음이고, 반구미는 프로그램의 일본말이다. 일본에선 음식 드라마가 분기마다 나온다. 식당에서 연애하거나 복수하는 이야기만 다루는 한국 음식 드라마와 달리 카메라가 사람이 아닌 음식을 샅샅이 훑는, 말 그대로 음식이 주인공인 드라마다. 이번 분기 시즌3까지 방송된 ‘고독한 미식가’는 먹는 장면만 계속 나오는 ‘먹방의 레전드’급 드라마다. 드라마의 기승전결은 오로지 ‘일한다, 허기를 느낀다, 찾는다, 먹는다, 만족한다’ 이 다섯 단계에만 의존한다. 주인공은 외근을 많이 하는 1인 사업가 이노가시라 고로(마쓰시게 유타카). 그는 거래처와의 업무가 끝나면 늘 “배가 고파졌다”고 외치며 점심 먹을 곳을 찾아 헤맨다. 음식을 통한 타인과의 소통 같은 건 없다. 오히려 식당 주인이 말을 걸면 귀찮아하는 편이다. 주인공의 독백이 대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데 그 독백이라는 것도 “오오오” “좋다” “맛있군!”이 대부분이다. 먹는 모습만 줄곧 보여 주는 지루한 구성이지만 허름한 가게에서 입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 이 중년 신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옆 테이블에 앉아 나도 주문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된다. 이번 분기에 방송된 음식 드라마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도 볼 만하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주인공 아키코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하던 식당을 물려받아 빵과 수프를 파는 작은 식당으로 바꾼다. 음식영화 ‘가모메 식당’의 주인공 고바야시 사토미가 주인공이라 마치 핀란드에 있던 가모메 식당이 일본으로 옮겨온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햄과 치즈 치커리 샌드’ ‘시금치 소테 스크램블 에그 샌드’ 같은 군침 도는 샌드위치를 눈으로 먹을 수 있는 드라마다. 남이 뭘 먹는 모습을 보는 데만 30분에서 1시간을 써 버리다니. 하지만 사람들이 먹방에 열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아직 그 매력을 모르는 이들에게 ‘고독한 미식가’ 오프닝에 등장하는 대사를 읊어 주고 싶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며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포상의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전 세계 SF 팬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열두 번째 ‘닥터’가 발표됐다. 바로 피터 캐펄디. 올해 방송 50주년을 맞은 ‘닥터후’의 방송사인 영국 BBC는 일요일인 4일 저녁(현지 시간) 프라임 타임에 가짜 퀴즈쇼를 편성해 깜짝 생방송으로 뉴 닥터를 발표했다. 올해 55세인 피터 캐펄디(사진)는 점점 젊어지던 닥터의 나이를 확 높여 클래식 시리즈의 향수를 되새기게 한다. 가장 오래 방영되는 SF 드라마이자 가장 성공한 SF 드라마인 ‘닥터후’는 1963년부터 1996년까지 26개 시즌이 방영됐다. 여기까지가 이른바 ‘클래식 시리즈’다. 이후 2005년 부활해 올해까지 7개 시즌이 방영됐는데, 이것이 ‘뉴 시리즈’다. BBC는 50주년을 맞아 올 하반기 뉴 시리즈 닥터 3명이 함께 등장하는 특별편과 ‘닥터후’ 제작 뒷얘기를 다룬 다큐 드라마를 제작했다. 새로운 닥터 피터 캐펄디가 등장하는 시즌 8는 내년에 방영할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클래식과 뉴 시리즈가 방영된 적이 있다. 닥터는 타임머신 타디스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타임로드 종족의 마지막 생존자다. 자신을 닥터라고만 지칭하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닥터 누구(Dr. Who)?’라고 묻는다. 타임로드 종족은 목숨이 여러 개라서 죽는 대신 몸이 바뀐다는 설정을 도입해 배우를 바꿔가며 새로운 시즌을 이어왔다. 닥터가 여행 때 데리고 다니며 결정적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기도 하는 동행자를 ‘컴패니언’이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 50여 명이 등장했다고 한다. 모든 행성의 모든 시간대를 여행할 수 있는 신에 가까운 능력의 소유자가 주인공인 만큼 ‘닥터후’의 세계는 거대하고 자유롭다. 깡통로봇을 연상시키는 달렉이나 사이버맨 같은 닥터의 적을 보면 처음엔 촌스러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키치한 맛에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십분 활용한 반전, 시즌마다 추가되는 기상천외한 설정의 행성과 닥터의 적들까지, 보다 보면 빠져들고 결국엔 닥터후 마니아, 이른바 ‘후비안’으로 거듭나게 된다. ‘닥터후’의 스핀오프 시리즈도 유명하다. 우선 시간여행자 캡틴 잭 하크니스가 주인공인 ‘토치우드’가 있다. 주인공은 잘생긴 양성애자이고 불사의 몸을 지녔다. 시원하게 쏘고 무너뜨리고 불 지르고 연애도 하는 성인용 시리즈다. 반면 ‘세라 제인 어드벤처’는 어린 자녀와 함께 보기에 좋다. 클래식 시리즈에서 닥터의 컴패니언이었던 세라 제인이 아들 루크, 로봇 강아지 K-9과 함께 지구를 지킨다는 내용이다. ‘닥터후’를 한번 보기 시작하면 방영이 쉴 땐 스핀오프를 보고, 다 봤으면 연말에 방영되는 특별 에피소드를 보고, 그것마저 다 봤으면 클래식 시리즈를 찾아 여기저기를 뒤지며 그 굴레에 빠지기 마련이다. 하반기에 방영되는 50주년 기념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서라도 뉴 시리즈부터 보는 건 어떨까. 국내에 DVD가 출시돼 있다. 이미 수많은 한국 후비안이 있긴 하지만, 나만 이 개미지옥에 빠져 허우적대기엔 억울하단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보스턴 폭탄 테러와 시기가 겹친 네 번째 에피소드는 아예 미국에서 결방됐다. 미국 유타 주는 잔혹하다는 이유로 시즌 도중 방영을 중단했다. 정신과 의사 한니발 렉터 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국 드라마 ‘한니발’ 얘기다. 렉터 박사는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해 이미 고전적 연쇄살인범 캐릭터로 꼽힌다. 드라마는 한니발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붙잡은 연방수사국(FBI)의 프로파일러 윌 그레이엄(휴 댄시)과 한니발(마스 미켈센)이 처음 만났던 시절의 이야기를 재창조했다. 원작 소설로 따지면 ‘레드 드래건’의 앞 이야기에 해당한다. 드라마에는 다종다양한 시체들이 등장한다. 그냥 총 맞고 칼에 찔리는 것은 약과다. 사슴뿔에 꿰인 채 오두막에 걸린 시체부터 토템처럼 탑을 쌓아올리거나 실제 연주가 가능한 악기로 변형된 시체까지 예술작품처럼 치밀하게 완성된 시체들이 등장한다. 이런 장면들은 매번 한니발이 심장이나 췌장, 간 같은 내장으로 요리하는 모습과 겹쳐지며 잔혹함을 더한다. 한니발을 다른 연쇄살인범 영화나 드라마와 구분 짓는 또 다른 요소는 수사관 윌이다. 윌은 병적일 정도의 공감력과 상상력을 지닌 인물. 범죄 현장을 보며 스스로 연쇄살인범으로 감정이입해 행동을 예측해 낸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윌은 점점 수사관으로서의 현실과 연쇄살인범으로서의 상상을 구분할 수 없어지고 결국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갇힌다. 지극히 정상이던 그가 한니발의 유도에 따라 연쇄살인범이 돼 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셈이다. 올해 8번째 시즌을 끝으로 종영하는 연쇄살인범 드라마 ‘덱스터’는 이와 정반대로 연쇄살인범 덱스터가 인간 덱스터로 변해 가는 내용이다. 주인공 덱스터는 어릴 적 충격으로 감정이 거세된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드라마는 감정 표현이 서툴고 사람과의 교감이 낯선, 어린애 같은 덱스터가 자신의 살인 충동을 다스리며 결혼해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돼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10여 년이 지나 착해진 덱스터는 가고, 구제불능의 살인마 한니발이 왔다. 덱스터가 그나마 ‘잔혹한 살인범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으로 시청자들의 도덕률을 지켜 줬다면, 한니발은 말 그대로 자기 멋대로 살인하고 식인까지 한다. 무엇보다도 연쇄살인범의 내면을 시청자에게 보여 준 덱스터를 넘어서 시청자 스스로가 연쇄살인범이 되는 유사체험을 하도록 유도한다. 덱스터에서 한니발까지, 이런 진화는 결국 ‘더 센 것’을 원하는 시청자들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조금 섬뜩해진다. 브라운관을 통해 이런 카타르시스라도 느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 모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죽이며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모두 잠재적인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인 것은 아닐까. 정상인보다 더 정상인 같은, 우아하고 지적인 한니발 렉터 박사가 그렇게 묻고 있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아침드라마에 아이돌이 나온다. 그런데 그 아이돌의 직업이 해녀다? 이런 독특한 설정의 NHK TV소설 ‘아마짱’은 올해 일본 드라마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힌다. 매회 시청률이 20%에 육박한다. 등장인물이 놀랄 때마다 외치는 사투리 ‘제제’는 유행어가 됐다. 드라마의 배경인 이와테 현은 아마짱을 본뜬 관광코스로 인기 관광지가 됐다. 이야기는 도쿄의 평범한 여고생 아키(노넨 레나)가 엄마를 따라 해녀인 외할머니가 사는 도호쿠(혼슈 동북부) 지역 어촌마을을 찾는 데서 시작한다. 물질하는 할머니 모습에 홀딱 반한 아키는 대를 이어 아마(해녀)가 되기로 결심한다. 여고생 해녀 아키는 우리나라 고추아가씨 격인 이른바 ‘지역 아이돌’로 스타가 돼 침체된 마을을 되살리는 원동력이 되고, 마침내는 도쿄에서 아이돌로 데뷔하게 된다. 원래 NHK TV소설은 평일 오전 8시 매회 15분만 방송하는데, 주로 1980년대 이전 일본을 배경으로 한 가족드라마를 방영해 중장년층을 공략한다. 하지만 천재 작가로 불리는 구도 간쿠로는 전후 일본을 살아온 세 세대의 이야기를 엮어 전 연령층에 파고드는 솜씨를 보여준다. 전후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녀가 돼 억척스레 돈을 벌었던 할머니 나쓰, 버블경제 호황기일 때 아이돌이 되겠다며 집을 박차고 나간 엄마 하루코, 그리고 긴 경기침체 끝에 꿈도 희망도 없어진 세대를 상징하는 딸 아키까지. 3대의 꿈은 아키를 통해 꽃을 피운다. 아키는 할머니의 대를 잇는 한편으로 엄마가 이루지 못한 아이돌의 꿈까지 이루며 밝고 희망찬 성격으로 바뀐다.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또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세 세대가 힘을 합쳐 조그만 어촌마을이 겪고 있던 경기침체와 무기력증을 떨치도록 한다는 이야기는 일본 사회 전체를 위한 동화로 읽힌다. 드라마는 이 동화의 ‘슈퍼히어로’로 여자 아이돌을 내세워 일본의 아이돌 문화사를 조망하는 재미도 더한다. 당시 가수의 실제 무대 영상을 드라마에 삽입해 엄마 하루코를 도쿄로 가도록 만들었던 1980년대 들썩거리는 분위기를 전한다. 하루코 역을 맡은 고이즈미 교코는 실제로 1980년대 아이돌 가수로 데뷔한 배우다. 극중 아키가 스카우트된 그룹 ‘GMT 47’은 일본 아이돌 그룹의 정점으로 불리는 ‘AKB 48’의 패러디다. 2008년 봄에서 출발한 아마짱의 시간적 배경은 이제 2010년으로 접어들고 있다. 중반을 지났으니 드라마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해까지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 드라마의 배경인 이와테 현은 대지진 당시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본 곳 중 하나. 수많은 난관을 거쳐 성장해온 슈퍼히어로, 해녀 아이돌 아키는 그토록 좋아하던 고향 마을이 참혹하게 망가졌을 때도 ‘꿈과 희망을 준다’는 아이돌의 직분을 수행해낼 수 있을까. 아직 답은 알 수 없지만 ‘AKB 48’의 현재 모습에 힌트가 있을지 모른다. 멤버 간 서열을 정하는 총선거의 TV 생중계 시청률은 30%를 넘어섰고 각종 브랜드는 멤버들의 명성에 기대 협업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요미우리신문 같은 주요 일간지도 멤버들의 기고를 실으며 이 대열에 참여했다. 마치 ‘AKB 48만이 희망’이라고 말하는 듯한 지금 일본의 모습이 드라마 아마짱과 겹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고현정이라는 톱스타를 앞세운 MBC 수목드라마 ‘여왕의 교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시청률이 조금씩 오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한 자릿수다. 2005년 방영된 일본 원작은 방영 당시 마지막 회 시청률이 25%를 넘었고, 지금도 명작으로 꼽힌다. 검증된 원작에 화려한 캐스팅, 게다가 최근 어린이 출연 프로그램들이 실패한 사례가 없음에도 ‘여왕의 교실’이 지지부진한 이유는 뭘까. 먼저 주인공 마여진 선생으로 나오는 고현정과 일본 원작에서 아쿠쓰 마야 선생을 연기하는 아마미 유키의 연기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잿빛 얼굴에 쪽 찐 머리의 마야 선생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 아이들에게 ‘사이보그’라고 불린다. 하지만 마 선생은 표정이나 대사 톤이 훨씬 다양해 짜증이나 화 같은 감정이 대사에 묻어나버린다. 게다가 스타일도 좋아서, 하이힐을 신고 수업도 한다! 마 선생과 마야 선생이 아이들을 혼낼 때 사용하는 ‘결정적 대사’도 다르다. 마야 선생은 “이제 그만 눈을 뜨지 그래?”, 마 선생은 “찌질대지 마”라고 한다. 아이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청유형 문장을 사용하는 마야 선생과 아이들을 ‘찌질이’로 규정하며 명령조의 문장을 구사하는 마 선생. 대사 한 줄이지만 두 드라마가 ‘어린이’를 어떻게 다루는지 선명히 보여준다. 원작이 방영되기 1년 전인 2004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 현 사세보 시에선 초등학교 6학년생이 동급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초등학생을 ‘어린이’로 취급해야 하느냐는 논란이 일었고, 2007년 형법상 촉법소년(觸法少年·형사미성년자)의 기준이 14세 미만에서 12세 미만으로 낮아졌다. 그래서인지 원작은 마야 선생의 입을 빌려 “아이를 아이답게 보호하기만 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어차피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학교에서부터 그런 룰을 적용해 아이들이 강해지도록 교육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아이와 학부모, 교사 모두 아이들이 어리광 그만 부리고 최소한 자기 행동에 어떤 대가가 따르고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판 ‘여왕의 교실’은 이런 질문 대신 왕따나 촌지 같은 한국의 교육현실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고나리(이영유)는 심하나(김향기)를 점점 심하게 괴롭히고, 나리 엄마(변정수)의 치맛바람도 나날이 거세진다. 좀더 ‘센 장면’에 집착하고 이를 이용해 눈길을 끄는 데 머문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막장’스럽다. 지난주엔 김서현(김새론)의 아버지가 식물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신파까지 더했다. 그 사이 아이들이 스스로 마 선생에게 맞서며 성장해나간다는 원작의 줄거리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막장과 신파라는 센 양념이 더해지면서 시청률이 조금이나마 올랐다는 점이다. 결국 한국 시청자들이 원하는 건 현실에 눈을 뜨라는 꾸짖음이 아니라 ‘요즘 애들이 저래? 요즘 학교가 저래?’ 하며 드라마가 주는 자극에 경악하고, 또 한편으로 ‘현실은 저 정도는 아니지’ 하며 안심하는 것, 딱 그만큼이 아닐까. 한국의 어린이에게 어울리는 풍경은 ‘아빠 어디 가’의 목가적 가족 캠핑장이나 ‘여왕의 교실’의 비현실적 잔혹동화 중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장면 1 전국에서 선발된 고등학생들이 백악관을 견학하고 있는 동안, 테러 용의자가 백악관 직원으로 근무한다는 첩보가 입수된다. 건물은 폐쇄되고 학생들은 구내식당에 갇힌 신세가 된다. 한 학생이 견학생들을 안내하던 정무보좌관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모두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요?” 장면 2 한 대학 강연장. 강연자로 나선 뉴스 앵커 윌 매커보이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기로 유명한 인물. 강연 사회자는 집요하게 윌의 개인적 정치 성향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캐묻고, 윌은 폭발 직전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여학생이 윌에게 질문을 던진다.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요?” 장면 1은 백악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웨스트윙’ 시즌 3의 특별편에 나온다. 2001년 9·11테러 직후 방영된 시즌으로 여기서 말하는 ‘모두’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다. 백악관 보좌진과 학생들은 이 질문을 놓고 긴 토론을 벌이지만 결론은 교훈적이다. 드라마는 ‘끝판왕’ 대통령 제드 바틀렛을 등장시켜 “탄압과 전쟁으로 해결되는 것은 없다. 다원주의라는 우리(미국)의 가치를 지켜 나가면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라는 우아한 답을 내놓는다. 장면 2는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뉴스룸’ 첫 회에 나온다. 하지만 윌이 내놓은 답에 웨스트윙의 우아함은 없다. 윌은 짜증을 폭발시키며 답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가 아닙니다.” 재미있는 것은 10년의 시차를 둔 두 드라마가 한 사람, 바로 유명 작가이자 제작자인 에런 소킨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이라는 점이다.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승리를 확신하던 2001년의 미국이 2012년엔 결국 패배를 자인한 셈이다. 상처만 남은 테러와의 전쟁과 금융위기를 겪고 초라해진 미국의 위상이 그대로 담겼다. 두 주인공도 이런 추락을 그대로 보여준다. 웨스트윙의 대통령 제드 바틀렛은 말 그대로 완벽한 인물이다. 노벨상을 탄 뛰어난 학자이고, 늘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심지어 좋은 아빠, 남편이기까지 하다. 반면 뉴스룸의 앵커 윌은 결점투성이다. 재능은 있지만 시청률 때문에 쓰레기 같은 가십 보도도 불사하고, 바람둥이에 대마초를 피운 채 뉴스를 진행할 정도의 사고뭉치다. 뉴스룸은 이렇게 망가진 윌이 진정한 뉴스의 가치를 깨달으며 갱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윌의 프로그램은 특히 선거 때마다 튀어나오는 극단적인 공화당 강경파의 허점을 파고들어 비판하는 데 집중한다. 근본주의를 배격하고 ‘다양성과 자유’라는 미국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던 웨스트윙의 교훈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뉴스룸의 마지막 회에선 첫 회에 나왔던 여학생을 윌의 프로그램 인턴으로 재등장시킨다. 여학생을 본 윌은 “미국을 가장 위대한 국가로 만드는 건 바로 너 같은 사람들이다”라고 고쳐 말한다. 도덕적 개인에게 사회를 변혁할 힘을 기대하며 10년 전 교훈을 반복하는 이 드라마가 과연 21세기의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뉴스룸 시즌 2는 다음 달 방영된다.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