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송평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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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송평인 칼럼니스트입니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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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5~2025-12-05
칼럼97%
사설/칼럼3%
  • 알 바그다디 제거[횡설수설/송평인]

    9·11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된 지 8년 만에 이슬람국가(IS) 수장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가 제거됐다. 2011년 빈라덴 사살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똑같이 작전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다만 오바마는 백악관 상황실 정중앙 자리를 작전 지휘자인 육군 준장에게 양보한 채 점퍼 차림으로 구석 자리를 지킨 반면 트럼프는 정장 차림으로 정중앙에 황제처럼 앉아 있었다. 오바마는 빈라덴의 죽음이 확인되자 일요일 밤 12시 가까운 시간임에도 곧바로 이를 발표했으나 트럼프는 26일(현지 시간) 토요일 오후 9시경 중대 사건 발생이라며 궁금증만 자아내는 트윗을 날린 뒤 밤새 뜸을 들이다 일요일 아침에야 바그다디의 사망을 발표했다. ▷바그다디 제거 작전은 빈라덴 사살 작전의 속편을 보는 듯했다. 첨단기술과 정보력을 동원해 은신처를 찾아내고 특수부대가 무장헬기를 타고 적지를 날아 기습했다. 정확히는 빈라덴은 사살되고 바그다디는 도망치다 입고 있던 자살폭탄 조끼를 터뜨려 목숨을 끊었다. 트럼프는 자신의 업적이 오바마보다 크다고 자랑하지만 역시 본편만 한 속편은 없다. 빈라덴 사살 발표 때 백악관 앞을 휩쓸었던 성조기의 물결도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가 바그다디에 대해 개에 쫓겨 울며 도망치다 겁쟁이처럼 죽었다는 식의 발언을 반복하는 것은 바그다디의 자살이 지지자들에게 영웅시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선전전으로 보인다. 바그다디의 제거가 빈라덴의 사살처럼 대(對)테러전에서의 주요한 진전이긴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조직의 붕괴로 직접 이어지지는 않는다. 테러조직의 특성상 지도자는 유고시를 대비해 후계자를 선정해 놓기 마련이다. 바그다디는 미군 공습 때 입은 부상과 당뇨 고혈압 등 지병으로 일찌감치 일상적인 지휘에서는 손을 떼고 물러나 압둘라 카르다시를 후계자로 세워 조직을 운영케 했다고 한다. ▷오바마는 재선 출마를 앞두고 빈라덴을 사살하는 성과를 냈음에도 재선에 이용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자랑하고 다니지 않았다. 역시 재선 출마를 앞둔 트럼프에게는 그런 겸손이 보이지 않는다. 미군의 때 이른 시리아 철수계획이 바그다디 측의 보안태세에 빈틈을 초래했다면 바그다디 제거는 뒷걸음질치다 얻어걸린 행운일 수 있다. 빈라덴 사후 궤멸하듯 하던 알카에다가 IS로 살아나듯 바그다디 사후 IS가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트럼프가 자랑할 역량이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그 역량을 발휘해서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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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공수처, 이른바 ‘촛불혁명’의 보위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장(공수처장) 후보는 2명이 추천된다. 추천위원 7명 중 최소 6명의 찬성으로 추천된다. 추천위원 7명 중 2명이 야당 몫이므로 야당이 반대하면 추천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여권이 지지하는 후보 1명과 야권이 지지하는 후보 1명을 추천하는 타협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 경우 대통령이 누굴 지명할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기만적인 공수처장 임명 과정보다 더 큰 문제는 공수처 검사를 절반 이상 비(非)검사 출신으로 충원한다는 데 있다. 사실 공수처에 집착하지 않으면 검찰 개혁은 단순하다. 공수처 기능을 포괄하는 검찰의 수장을 공수처장 임명하듯 임명하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는 데에 공수처를 만드는 진짜 목적이 있다. 공수처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류로 채우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 중 코드 인사가 아닌 게 없지만 법 관련 인사가 특히 그렇다. 대통령이 임명한 두 사법부 수장과 대통령 몫의 헌법재판관 2명이 모두 우리법연구회나 그 후신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다.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려 했던 안경환과 실제 임명한 조국은 참여연대에서 활동한 법학자다. 전 법제처장은 민변 출신이다. 법무부의 비(非)검찰화를 추진하면서 뽑은 실·국장급 간부 4명 중 3명이 민변 출신이다. 공수처가 민변류로 채워지지 않으리라 예측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중요한 사실을 빠뜨릴 뻔했다. 대통령 자신이 전체 변호사의 5%도 안 되는 민변 출신이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도 9명의 구성원 중 위원장을 포함해 5명이 민변 출신이었다. 과거사위의 수사를 통해 민변 출신이 좌우하는 기구가 어떻게 수사할지에 대한 예고편을 볼 수 있었다. 김학의 사건에서는 추측에 불과한 내용을 확인된 사실인 양 언론에 공개했다가 피해자 검사들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장자연 사건에서는 책임질 말도 못 하는 윤지오 씨를 비행기표와 숙박비까지 제공하며 데려와 허무한 평지풍파만 일으켰다. 현 정권과 지지자들은 촛불시위를 우스울 정도로 진지하게 ‘촛불혁명’이라고 부른다. 사실은 정권교체, 그것도 임기 반 가까운 지금 와서 보면 무능한 정권으로의 교체였을 뿐인데 혁명이란 망상에 사로잡힌 자들은 윤석열 검찰의 조국 ‘신성(神聖)’ 가족에 대한 수사를 일종의 반(反)혁명 시도로 여겼다. 한 친여 신문은 군사쿠데타가 아니라 검찰쿠데타라고 칭했다. 그게 검찰쿠데타라면 공수처는 레닌이 반혁명 세력으로부터 혁명을 수호한다며 만든, 저 악명 높은 ‘체카(보위부)’다. 혁명 세력이 자신의 충견(忠犬) 역할을 해온 윤석열 검찰에 대해 한 상찬은 검찰이 박근혜나 이명박 전 대통령 수사하듯이 혁명의 노멘클라투라를 수사하자 분노로 돌변했다. 그들에게 ‘정무감각이 없거나’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검찰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촛불혁명 이전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덕목이다. 이제 검찰은 혁명의 정무감각을 가져야 하고, 우면하지 않아도 좌고는 해야 한다. 그런 미래의 검찰이 바로 민변 변호사들이 주도할 공수처라는 것이다. 국민의 뜻이 검찰개혁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대통령의 말을 반복해서 듣고 있어야 하는 쪽은 미칠 지경이다. 조국 사태 때 국민은 “그래, 검찰개혁 해야 한다. 그러나 그걸 왜 꼭 위선적인 조국이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대통령은 설득력 있는 답을 하지 못했고 조국은 물러났다. 조국 없는 조국 사태에서 국민은 다시 묻고 있다. “그래, 검찰개혁 해야 한다. 그러나 왜 꼭 공수처여야 하지?” 문 대통령은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수처 말고 무슨 대안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통령만 대안을 모르는 듯하다. 한 번 더 말하자면 대통령이 공수처장 임명 방식으로라도 검찰총장을 임명하면 된다. 그 다음은 대체로 조국 씨가 만든 검경 수사권 조정을 실행하면 된다. 그 경우 경찰 비대화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것까지 고려하면 개혁하지 못한다. 그 문제는 행정경찰과 사법경찰의 칸막이를 강화하고 전문수사청을 하나씩 분리하는 식으로 차차 해결할 일이다. 공수처는 전문수사청의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려 없이 제 기능을 할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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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경제학자[횡설수설/송평인]

    서울대 경제학과에는 38명의 남성 교수가 있을 뿐 여성 교수는 없다. 지난해 정은이 미국 일리노이대 조교수의 채용이 확정됐지만 개인 사정으로 포기하면서 서울대 경제학과 사상 첫 여교수가 무산됐다. 서울대 경제학과가 유난한 경우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도 경제학에서 여교수의 낮은 비율은 논란이다. 2015년 하버드대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남성 경제학자가 정교수가 될 확률은 8%인 데 반해 여성 경제학자가 정교수가 될 확률은 2%에 불과하다. ▷애덤 스미스에서 근대 경제학이 태동했다. 리카도 맬서스 피구 세 마르크스 케인스까지 교과서에서 다루는 경제학자는 다 남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부터 시작된 노벨 경제학상의 지난해까지 수상자 81명을 봐도 폴 새뮤얼슨, 밀턴 프리드먼, 게리 베커, 로버트 루커스, 폴 크루그먼 등 80명이 남성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2009년 공동 수상자인 엘리너 오스트롬 당시 인디애나대 교수였다. 그리고 올해 에스테르 뒤플로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가 두 번째 여성 수상자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경제(economy)는 그리스어로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oikos)와 관리를 뜻하는 노미아(nomia)가 합쳐진 말이다. 그렇다면 살림하는 주부가 경제학을 가장 잘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여성이 경제학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19세기 말까지 여성은 기껏해야 상품의 소비를 관리하는 주체였지, 상품의 생산을 관리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여성이 취업하기 시작하고 참정권을 갖게 되면서 뒤늦게 여성에게 국가적 규모에서 경제를 생각해볼 여건이 주어졌다. ▷세계경제포럼(WEF)이 2015년 경제학의 세계를 변화시킨 13명의 여성을 꼽은 적이 있는데 이 중에는 ‘자본축적론’을 쓴 로자 룩셈부르크도 있고 포스트케인스주의의 선두주자인 조앤 로빈슨도 있다. 이들은 저명하지만 비주류라서 평가받지 못했다고 치자. 1960년대 프리드먼과 함께 ‘통화주의’를 연구했고 노벨상 공동수상자가 됐어도 충분한 애나 슈워츠라든가 1920년대 이미 시카고대 사회복지행정스쿨의 학장을 지낸 이디스 애벗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오스트롬은 첫 여성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긴 하지만 수상 분야가 정치 제도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순수한 경제학 분야라고 보기 어렵다. 뒤플로는 MIT에서 자신의 박사학위를 지도한 스승이자 나중에 남편이 된 아브히지트 바네르지 교수 등과 함께 수상했다. 순수한 경제학 분야에서 단독으로 수상하는 여성 경제학자도 조만간 나오리라 본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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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여론에서도 동원에서도 진 조국 수호

    장삼이사(張三李四)라도 “조국 논란에 왜 갑자기 검찰 개혁?”이라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사리를 분별한다. 그들은 “검찰 개혁은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왜 조국이 해야 하는 거지?”라고 묻고 있다. 누구라도 쉽게 알아들을 이 주장을 두고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검찰 개혁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딴소리를 하고 있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다.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조국 논란을 검찰 개혁 프레임으로 바꾸는 시동을 걸었다. 다음 날인 9월 28일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대규모 검찰 개혁 요구 집회가 열렸다. 자발적이란 주장은 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잘못 보내진 더불어민주당 조직국의 동원 메시지에 의해서도 거짓임이 드러났다. 기껏해야 몇만 명에 불과한 집회 참석자를 정권의 선전기관들이 100만 명이니 하며 부풀리자 “우릴 무슨 핫바지로 아느냐”며 화가 난 국민들이 10월 3일 광화문으로 몰려나왔다. 그것으로 대통령의 홍위병식 동원 정치는 실패로 끝났다. 광화문 집회에 맞서기 위해 10월 5일 서초동 집회가 조직됐으나 역부족을 드러냈다. 여론에서도 지고 대중 동원에서도 진 것이다. 난 9월 28일 서초동 집회 때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보느라 우연히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참석자 수가 턱없이 과장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월 3일 광화문 집회와 10월 5일 서초동 집회는 직접 가서 봤다. 10월 5일 서초동 집회는 9월 28일 서초동 집회보다 훨씬 커지긴 했으나 광화문 집회에 미치지 못했다. “당신이 세 봤냐”고 물어볼지 모르겠다. 그러나 세 보지 않아도 집회에 가서 그 사이를 누비고 다녀보면 안다. 광화문 집회 때는 광화문역에 지하철이 서지 못해 서대문역에서 내려 10분을 걸어갔다. 종각역 시청역에서도 걸어오고 있었다. 서초동 집회 때는 서초역에서 내려 올라갈 수 있었다. 광화문 집회에는 면적이 훨씬 넓은데도 참석자 상당수가 서 있었고 서초동 집회에는 참석자 대부분이 앉아 있었다. 화장실은 광화문 집회가 훨씬 불편했다. 광화문역 화장실에는 수십 m씩 뱀줄을 섰으나 서초역 인근에 마련된 임시화장실은 거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양이 아니라 질로 보면 일사불란한 서초동 집회가 일견 앞서는 듯했다. 서초역 사거리에서 사방으로 스크린이 설치되고, 동일한 화면에 따라 참석자들은 일제히 ‘조국 수호’ ‘검찰 개혁’을 외쳤다. 광화문 집회는 주최하는 쪽도 참가하는 쪽도 시위에 익숙하지 않았다. 함께 부를 노래조차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자유한국당 주최 집회 따로, 기독교인 중심 집회 따로, 우리공화당 집회 따로, 예비역 군인 중심의 원조 태극기 집회 따로였다. 그 어느 쪽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럼에도 조국이란 사람 때문에 한날한시에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분출된 에너지는 훨씬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서초동 집회에서는 검찰의 독립성 같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공준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사회자가 “대통령 말도 듣지 않는 검찰을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고 하자 참석자들은 “옳소”라고 외치며 팻말을 흔들었다.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의 독립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지만 현 대통령은 예외였다. 마오쩌둥이 하는 건 다 옳다는 홍위병의 범시론(凡是論)처럼 ‘이니’가 하는 것은 뭐든 옳은 것이다. 서초동 일대를 꽉 채운 대대적 조국 수호는 당성(黨性)만 좋으면 잘못까지도 눈감아주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회의 전조처럼 보였다. 유시민과 공지영 등의 ‘닥치고 조국 옹호’는 당파(黨派)를 넘어선 보편적 판단이 옳은 게 아니라, 자신들은 진리를 담지하고 있고 따라서 자신들은 당파적일 때 더 옳다는 위험한 ‘진리의 정치’를 드러냈다. 그것이 진중권 같은 이들에게 윤리적 패닉 상태를 초래했다. 대통령은 두 집회를 두고 대의 정치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할 때 국민이 직접 의사 표시를 하는 것은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민의를 반영할 주체가 누구보다 대통령 자신인데 국회 탓만 하고 있다. 대통령에게 조국 파면을 요구하는 광화문 집회는 민의도 아니란 말인가. 국회 탓이라면 왜 여의도가 아니라 서초동에서 모여 검찰 개혁을 외치는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아니 경험하고 싶지 않은 대통령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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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춘재의 魔性[횡설수설/송평인]

    2006년 경기 군포 안양 지역에서 컴퓨터 부품회사 영업사원 김윤철이 여성 3명을 연속해서 강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퇴근하다 젊은 여성 취객을 발견하고 자기 차에 태웠다가 범죄를 저질렀다. 한 달이 안 돼 취하지도 않은 젊은 여성을 퇴근길에 태워준다고 유인해서, 그러곤 또다시 한 달이 안 돼 이번엔 젊은 여성을 강제로 태워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범죄 연구자들과의 대화에서 처음에는 어찌하다 사람을 죽이게 됐는데 두 번째부터는 복종시키는 재미랄까 그런 것이 자꾸 떠올라서 저질렀다고 했다. 또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쉽게 죽는 데 놀랐으나 두 번째는 죽이려고 하니 이러면 죽는구나 알게 됐고, 세 번째는 죽이는 방법을 알고 달려들어 죽였다고 했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일어난 경기 화성 연쇄 살인 사건에서 첫 피해자인 71세 할머니에게는 성폭행 흔적이 없었으나 두 번째부터는 모두 있었다. 두 번째는 맞선 보고 돌아온 20대 여성, 세 번째는 갓 결혼한 20대 신부였다. 네 번째는 비 오는 날 20대 여성이었는데 이때부터는 신체에 가한 난행이 발견됐다. 다섯 번째는 10대 여고생, 여섯 번째는 봄밤 남편 마중 나간 29세 주부였다. 일곱 번째는 50대 여성이었는데 몸 안에서 복숭아 9조각이 발견됐고 여덟 번째 13세 여중생의 몸 안에서도 볼펜 숟가락 포크 등이 발견됐다. 범죄를 반복하면서 단순 살인에서 강간 살인으로, 다시 변태성 강간 살인으로 잔인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1994년 처제 강간 살인으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이춘재가 DNA 분석 결과 화성 연쇄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 데 이어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다른 미제 살인 사건 5건과 강간 사건 30여 건도 자백했다. 사실이라면 살인 피해자는 15명에 이른다. 하지만 자백에도 불구하고 그가 체포 전에 지은 모든 범죄의 공소시효는 지나버렸다. 자백은 진실을 밝히는 것 외에 형벌을 가중시키는 효과는 없다. 설혹 공소시효가 남아 있어 법원이 무기징역보다 높은 사형을 선고한다 해도 정부가 사형을 집행하지 않으니 결과는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것이 고작 살인자의 마성(魔性)을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는 군에서 제대한 직후 저지른 한두 차례의 강간 살인이 발각되지 않고 지나가자 그에 탐닉해 체포될 때까지 자력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 동네 누나와의 첫 성관계가 왜곡된 성 집착을 키웠다고 한다. 그가 출옥을 꿈꾸며 1급 모범수로 생활해 특사 심사 대상에 올랐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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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건국 70주년[횡설수설/송평인]

    서양이 동양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 산업혁명 이후부터다.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시대의 중국만 해도 세계 최강국이었다고 한다. 다만 서양과 실제 군사적으로 맞붙어 싸워보기 전이어서 그런 말이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19세기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시작되고 중국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1세기에 와서야 중국은 비로소 다시 세계 최강에 올라설 꿈을 꾸고 있으니 그것을 중국몽(中國夢)이라 부른다. ▷1969년 건국 20주년의 중국만 해도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희뿌연 먼지 속에 있었다. 1979년 건국 30주년의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으로 돌아선 지 겨우 한 해가 지났다. 1989년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 속에 맞이한 건국 40주년에 중국은 톈안먼(天安門) 학살로 개혁개방이 민주화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1999년 건국 50주년의 중국은 개혁개방이 성과를 내기 시작하면서 화려해졌다. 2009년 건국 60주년의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 경제의 구원자로 우뚝 섰다. ▷중국 건국 70주년을 앞두고는 미중 간에 격렬한 무역전쟁이 불거졌다. 세계 경제 규모 1, 2위 국가의 격차가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경제전쟁의 뒤에서는 군비증강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마오쩌둥이 꿈꾸던 ‘동풍이 서풍을 제압하는’ 날이 올 것인가. 기존 강국과 신흥 강국이 힘으로 충돌하는 ‘투키디데스 함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이 강력할 때 한국은 힘들었다. 동서고금에 강한 큰 나라 옆에서 괴롭지 않은 작은 나라는 없지만 중국 외에 의지할 다른 대국이 없던 중화권에서는 더 그랬다. 한나라 전성기 때 중국은 고조선에 4군을 설치했다. 당나라 때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지배하려다 나라가 기울기 시작하자 비로소 물러났다. 반면 문화적 수준은 높았으나 군사적으로 약한 송나라가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시달릴 때 중국과 한국은 평화롭게 지냈다. ▷장쩌민 이래 중국 지도자의 임기는 10년이다. 시진핑 주석은 2022년까지 집권한다. 그러나 직전 지도자가 차차기 지도자를 지정하는 관행이 깨지면서 시 주석의 후계자가 명확하지 않다. 집단지도체제를 사실상 무산시킨 시 주석이 2022년 후에도 계속 집권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건국일인 10월 1일이 국군의 날과 겹쳐서가 아니라 민주적이 되지 않고 경제적 군사적으로만 커지는 중국의 건국 70주년을 별생각 없이 축하하는 건 곤란하지 않나 싶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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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몰락한 北人 닮아가는 PK좌파

    군사정권 시절 민주 대 반(反)민주의 정치 구도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재편되는 과정에서 김영삼의 3당 합당이 일어났다. 그러나 3당 합당을 반민주 세력과의 야합(野合)이라고 비판하며 꼬마 민주당에 잔류했던 노무현을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나타났으니 그것을 김영삼 중심의 PK우파와 구별해 PK좌파라고 불러보자. PK좌파는 김대중을 지지한 호남세력과 결합해 노무현 문재인 두 정권을 만들어냈다. 첫 집권 이후 사실상 폐족(廢族)이 됐다가 안철수를 이용해 재기한 뒤 그를 버리고 운 좋게 박근혜 탄핵 사태를 만나 재집권했으나 다시 특유의 고집불통을 드러내며 국정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있다. 조국 사태는 PK좌파의 고집불통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새로운 가늠대다. 공론(公論)을 무시한 폭주란 면에서 조선 광해군 때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부추기다 정계에서 완벽하게 몰락한 경상우도(임금이 볼 때 낙동강 오른쪽의 경상도) 중심의 대북(大北) 세력은 PK좌파의 먼 선조 격이 될 만하다. 당시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대북세력의 영수인 정인홍은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깎아내린 회퇴변척(晦退辨斥)을 제기해 파란을 일으켰다. 남명이 퇴계와 동갑이고 훌륭한 유학자이긴 하나 남명 있고 퇴계 있는 게 아니라 퇴계 있고 남명 있다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공론이다. 남명의 또 다른 수제자인 정구마저 회퇴변척을 비판했으니 정인홍이 당시 공론에 얼마나 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인홍은 그나마 양식이 있었다. 그는 폐모살제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폐모살제를 밀어붙인 것은 그의 후계자인 이이첨이었다. 이이첨은 심복을 언관에 포진시키고 과거시험을 장악해 인척을 발탁하는 방식으로 당시 공론의 형성 과정 자체를 왜곡했다. 인조반정(反正)은 그런 왜곡을 더는 참지 못한 반(反)대북 세력의 광범위한 연대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만 해도 고집은 셌지만 토론을 해서 결론에 이르려는 열린 자세를 가졌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뜻에 반했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했다. 문 대통령에게는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발전적으로 바꾸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꼼수로 늘어난 일자리, 사실상 줄어든 소득 등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며 최초 생각을 고집한다. 지난주 금요일 저녁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정부 주도의 실패박람회를 지나가다 보게 됐다. 좌석은 텅 비고 부스는 휑했다. 실패박람회는 역발상이긴 하나 실패하는 실패박람회를 보는 기분은 착잡하다. 이 정권이 실패한 정책만 모아서 성공하겠다고 덤비다가 실패하는 꼴이다. 안 해본 일을 벌일 때는 자신이 틀리지는 않았나 삼가 조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다. 오히려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공론의 형성 과정을 왜곡하면서 외교 안보 경제를 총체적 혼란으로 몰고 가고 있으니 영락없는 이이첨 시대다. 문 대통령은 취임 초 경상우도가 가장 큰 수혜자인 가야사 연구를 강조하더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포섭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부마항쟁을 헌법 전문에 따로 넣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통영 출신 친북음악가 윤이상의 베를린 묘소 헌화는 논란이 일 것이 뻔하자 충분한 사전 예고 없이 해치워 버렸다. 일국(一國)의 대통령이 아니라 붕당(朋黨)의 지도자 같았다. 안경환 한인섭 조국은 서울대 법대의 PK좌파들이다. 안경환과 한인섭이 조국을 교수로 만드는 데 일조했고, 조국은 민정수석이 되자 안경환을 법무장관으로 모시려 했고, 한인섭을 법무·검찰개혁위원장과 형사정책연구원장으로 만들었다. 안경환은 장관 검증 과정에서 위조 혼인신고가 드러나 탈락했고, 한인섭은 조국 아들과 친구에게 인턴증명서를 부정 발급해준 혐의를 받고 있다. 되돌아보면 실력도 도덕성도 부족하고 끈만 있는 자들이 사법개혁을 말아먹으려 했다. 남명은 평생 교유하는 사람이 적었다. 정인홍도 잘 화합하지 못했다. 남명은 절(絶)과 의(義)를 강조한 유학자다. 정인홍 등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그것이 대북세력의 정치적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박문궁리(博文窮理)하지 않고 절과 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나워지고 결국 몰락을 자초했다. 그 정신이 DNA를 복제한 것처럼 닮았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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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크라이나 스캔들[횡설수설/송평인]

    헌터 바이든은 2014년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업인 부리스마의 임원이 됐다. 그는 내년 미국 대선의 유력한 민주당 후보 예상자인 조 바이든의 아들이다. 이듬해 빅토르 쇼킨이 우크라이나의 새 검찰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한 해 전부터 시작된 친러시아 정부 시절 유력자들의 부패 혐의 수사를 이어받았는데 부리스마 소유주에 대한 수사도 그중 하나였다. 여기에 헌터가 연루됐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우려를 표시했다. 당시 부통령이던 바이든은 쇼킨 총장이 물러나지 않으면 10억 달러 대출 보증을 철회하겠다는 압력을 넣었다. 쇼킨은 미국의 압력에 의한 것인지 부패수사를 제대로 못 한 탓인지 의회 탄핵으로 물러났다. 후임자인 유리 루첸코는 올 5월 바이든 아들이 연루된 혐의는 없다고 밝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 무렵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개인 변호인인 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은 새로 취임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부리스마 수사를 계속하라는 압력을 넣었다. 결국 트럼프가 직접 젤렌스키에게 전화를 걸기까지 했다. 미국 언론은 내부 고발자의 제보로 이런 사실을 보도할 수 있었다. 트럼프는 계속되는 언론 보도에 젤렌스키에게 전화한 사실을 22일 시인하면서 “미국 국민이 우크라이나에서 부패에 연루된 바이든과 그 아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전화로 압박할 당시 미국 의회가 승인한 2억5000만 달러어치의 군사 지원이 백악관에 의해 보류돼 있었다. 앞서의 ‘러시아 스캔들’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가 트럼프 당선을 위해 적극 개입한 혐의라면 ‘우크라이나 스캔들’은 러시아의 크림반도 무단 점령 이후 친서방적이 된 우크라이나 정부가 내년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사에서 손을 떼려 하자 그 수사를 계속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바이든도 오바마 행정부 당시 우크라이나에 수사 중단 압력을 넣은 모양새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이든 아들이 부패에 연루됐다고 해도 대선을 앞두고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까지 수사 압력을 넣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다워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가 왜 이렇게까지 돼 버렸는지 안타깝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을 포함한 민주당 후보 예상자 3명에게 모두 10%포인트 이상으로 뒤지고 있다. 겉으로는 재선 승리를 장담하고 있지만 내심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내년 재선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트럼프에게 북핵 협상을 맡기고 있는 우리에게도 남 일 같지 않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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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산비례벌금제[횡설수설/송평인]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핀란드발 뉴스가 있다. 최고 교통범칙금 기록을 경신했다는 뉴스다. 대개는 보도될 당시 경찰이 처음 부과한 액수보다는 나중에 확정된 액수가 줄어든다. 현재까지는 2000년 속도위반으로 한 인터넷 재벌이 8만 유로의 범칙금을 낸 것이 최고 기록이다. 8만 유로를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억 원이 넘는다. 핀란드는 세금을 누진적으로 매기듯이 벌금이나 범칙금도 누진적으로 매길 수 있다고 여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도 재산비례벌금제를 갖고 있다. 재산비례벌금제는 세금 등을 뺀 순수입을 한 달 30일로 나눈 일수(日收)를 하루 벌금 액수로 정하기 때문에 일수벌금제(day-fine)라고도 한다. 가령 순수입이 한 달 6000유로인 사람은 하루 200유로, 순수입이 한 달 600유로인 사람은 하루 20유로가 일수벌금이다. 법원은 범죄만 보고 며칠 치 벌금이라고 선고한다. 그러나 같은 5일 치라도 검찰이 받아내는 벌금은 각각 1000유로와 100유로로 차이가 난다. ▷수입에 관계없이 정해지는 벌금은 같은 액수라도 빈부의 차이에 따라 느껴지는 징벌의 강도가 다르다. 게다가 형법이 함부로 바꾸지 못하는 기본법인 까닭에 벌금 액수는 시대의 돈 가치를 따라잡지 못해 일부 가난한 사람을 빼고는 부담이 크지 않아 액수 자체로는 형벌의 의미를 상실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경제범죄에서는 벌금 액수가 범죄 수익에 비례해 커진다. 그러나 2014년 대주그룹 허재호 전 회장이 벌금 254억 원을 내지 않고 버티며 일당 5억 원짜리 황제 노역을 해 비난을 샀다. 이후 노역 기간을 함부로 줄이지 못하게 법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3년 이상 노역장 유치는 금지돼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일당 수억 원의 황제 노역이 발생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법무부가 어제 재산비례벌금제를 제안했다. 참신한 제안인 것처럼 내놓았으나 실은 해묵은 논란거리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채택을 심도 깊게 논의했으나 무산됐다. 개인 소득이 정확히 얼마인지 파악하기 어려워 투명하게 소득이 잡히는 봉급생활자만 벌금을 많이 내는 제도가 될 수 있고, 재산 전체가 아니라 소득만 가지고 따지는 것이 공정하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당정이 정말 현행 벌금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싶다면 개인의 자산과 소득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재산 상황은 수시로 바뀌고 죄를 범할 때마다 새로 재산 상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제안이 진정성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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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벽에 대고 말하는 시대

    조국 법무장관 임명에서 숨 막히는 기분이 든 것은 공론(公論)이 시행되지 않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왕이 주권을 갖고 있을 때조차도 공론은 천하의 원기(元氣)라고 여겼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권력은 법에 따라 단순히 행사하는 것을 넘어 최소한 부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공론정치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은 날것 그대로의 권력에 의해 강행한 것이다. 장관 검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민정부 이후 이 정도로 공론과 충돌한 인사가 또 있었나. 문재인 대통령은 “개혁성이 강한 인사일수록 임명에 반대가 많다”며 화살을 국민에게 돌렸다. 수사권이 검찰에 있든 경찰로 가든 일반 국민으로서는 조삼모사(朝三暮四)에 불과해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개혁에 반대하고 있다니, 숨 막히는 이유는 거기에도 있다. 인사에 대한 공론은 그 사람이 책임질 위법행위가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위법행위가 있으면 감옥에 가거나 말거나 할 일이지 임명하거나 안 하거나 할 일이 아니다. 인사에 대한 공론은 장관을 할 만한 사람이냐를 전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에서 결여해서는 안 되는 감각으로 꼽은 ‘눈대중(Augenmaß)’이란 말을 빌리자면 위법이냐 아니냐 일일이 자로 재듯 재는 것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국민 대다수가 함께 “그 사람은 안 돼”라고 하면 그것이 공론이다. 언론이 항상 공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사로운 의견이나 당론(黨論)을 공론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아마 문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급 후보자에 대한 많은 시비들 중에서는 공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시비들과 조 후보자를 둘러싼 시비는 그 수준이 질적으로 달랐다. “조국 씨는 안 돼”라는 의견은 완고한 진영 논리를 깨뜨릴 만큼 공론적이었다. 공론은 여론과는 다르다. 여론은 단순히 다수이냐 아니냐를 따지지만 공론은 합리적 이유를 들어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쇼비니즘(맹목적 민족주의)은 다수의 지지를 받더라도 합리적으로 그 주장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에 공론이 되지 못한다. 반면 “조국 씨는 안 돼”라는 주장은 공정성을 향한 강한 도덕적 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래서 ‘닥치고 비호’를 외친 패거리주의의 부도덕성이 더욱 선명해 보였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 반대는 여론상으로도 우세했다. 리얼미터 같은 여론조사기관에서조차 50%대를 기록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실제 체감할 수 있는 반대의 목소리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 샘플도 확정되지 않은 ‘전화 임의걸기’를 해서 500명을 채우는 리얼미터 식의 싸구려 조사 말고 외국에서처럼 응답자에게 돈을 주고 하는 제대로 된 조사를 해봤다면 최소한 10% 이상은 더 높았을 것이다. 법무장관은 장관 중에서도 특별한 장관이다. 프랑스에서는 법무장관을 ‘가르드 드 소(garde de sceau)’라고 해서 일반 장관(ministre)과는 달리 부른다. 영국에서도 법무장관은 로드 챈슬러(Lord Chancellor)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미국은 법무장관의 역할이 프랑스 영국 등과는 다소 다르지만 역시 일반 장관(Secretary)과는 달리 어토니 제너럴(Attorney General)이라 부른다. ‘가르드 드 소’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도장을 보관하는 사람이다. ‘가르드 드 소’는 왕의 결정이 담긴 문서에 도장을 찍어 집행력을 부여한다.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는 것은 아니었다. 왕의 결정이 정치적 전통을 침해한다고 여기면, 즉 공론에 반한다고 여기면 도장 찍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주제에서는 왕이 주권자이기 때문에 도장 찍기를 거부하는 그를 불러 도장을 찍으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 그 경우 그는 왕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대신 왕의 결정에 대한 책임을 면한다. 주권자가 왕 한 사람인 체제에서 공식적으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가르드 드 소’였던 것이다. 다른 장관도 아닌 이 특별한 법무장관의 임명 과정에서 공론이 철저히 무시됐다. 공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언론인데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이다.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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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듀스 101’ 조작 의혹[횡설수설/송평인]

    아이돌 연습생 오디션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제목을 읽는 데서부터 세대 차가 드러난다. 101은 영어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원 헌드러드 원’이나 ‘원 제로 원’으로 읽어서는 젊은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미국 사람처럼 ‘원 오우 원’, 혹은 대강 연음해 ‘워너원’으로 읽어야 한다. 물론 꼰대 취급 받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면 백일이나 일공일로 읽어도 상관없다. ▷101이란 숫자는 101명의 아이돌 연습생이 나와서 경쟁을 벌인다고 해서 붙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11명이 계약된 기간 동안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활동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큰 성공이다. 여자 연습생이 출연한 시즌 1에서는 ‘아이오아이(I.O.I)’라는 그룹이 만들어져 김세정 전소미 같은 스타가 나왔고, 남자 연습생이 출연한 시즌 2에서는 ‘워너원(Wanna One)’이라는 그룹이 만들어져 강다니엘 박지훈 같은 스타가 나왔다. ▷가장 최근인 올 7월 끝난 것이 ‘프로듀스X101’인데 투표 조작 의혹에 휘말렸다. 7월 19일 마지막 생방송 때 시청자 유료 문자투표에서 예상을 뒤집는 의외의 결과가 나오고 순위 득표수에서 이해하기 힘든 규칙성이 발견된 것이다. 방송 내내 화제를 모았던 두 후보가 탈락한 데다 1위와 2위, 3위와 4위, 6위와 7위, 10위와 11위의 표 차가 모두 정확히 2만9978표였다. 주최 측은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원인을 찾지 못하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필자가 중학생일 때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박원웅과 함께’를 열심히 들었는데 친구가 어느 곡을 순위에 올려야 한다고 해서 함께 수백 장의 엽서를 보냈던 적이 있다. 컴퓨터화된 세계에서는 타인의 아이디로도 투표할 수 있다. 시즌 1에서 이미 아이디 중복 투표가 드러나 논란이 됐다. 시즌 2에서는 중국에서 아이디를 사고파는 행위가 적발되기도 했다. 아예 해킹해 아이디를 가로채거나 생성할 수 있다면 순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경찰은 2일 투표 조작 의혹 수사를 시리즈 전체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정말 조작이 있었다면 누가 어떻게 조작할 수 있었는지, 이 프로그램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궁금할 만한 사건이다. 우리가 그 작동 과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 시스템 앞에서 느끼는 불안은 빅브러더로 표상되는 숨은 조작자에 대한 불안이다. 삶의 조작은 ‘트루먼 쇼’, 기억의 조작은 ‘인셉션’ 같은 영화에서나 있는 일인지 몰라도 투표의 조작 정도는 이미 현실인가.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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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콩 시위 과격화 우려[횡설수설/송평인]

    중국 덩샤오핑 체제에서 개혁파의 기수였던 후야오방 총서기의 사망을 추도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89년 4월 17일이다. 계엄령이 내려진 것은 33일이 지나서다. 그 후에도 예상외로 강한 시위대의 저항에 약 5만 명의 군인은 베이징 근교에 대기만 하고 있었다. 실제 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령 선포로부터 13일이 지나서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코앞에서 벌어진 시위를 무력 진압하는 데 나서기까지 47일이 걸렸다. ▷홍콩에서 송환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어제로 86일째를 맞았다. 홍콩 인근 선전에 중국 공안이 집결해 있어 무력 개입의 가능성이 언급되지만 아직 홍콩에 계엄령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시위대는 어제부터 총파업과 동맹휴학에 돌입하며 주말 중심의 시위를 일상의 저항으로 바꾸는 새 단계에 들어섰다. 홍콩도 13일이 추석이다. 시위대는 13일까지 송환법의 완전 철폐와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했다. 13일까지가 또 다른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콩 시위에는 두 흐름이 합류하고 있다. 일국양제(一國兩制)에서 민주주의의 확립을 요구하는 다수의 흐름과 독립 없이는 홍콩의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소수의 흐름이다. 지난주 홍콩 경찰에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시위 주도자 조슈아 웡 같은 이는 온건파다. 그가 이끄는 데모시스트당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대신 일국양제가 끝나는 2047년 투표로 홍콩의 미래를 결정하자는 입장이다. ▷시위에는 늘 다수의 의도를 벗어나는 과격한 흐름의 분출이 있게 마련이다. 지난 주말 중국 오성홍기를 끌어내려 불태우는 행위가 있었으나 실제 압박도 되지 못하면서 중국 본토인의 분노만 자아냈다. 친중(親中) 홍콩 정부가 프락치를 이용해 시위의 과격화를 유도한다는 의혹도 없지 않다. 허리에 권총을 찬 남성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그의 정체를 두고 시위대로 위장한 경찰인지 논란이 벌어졌다. ▷6·4 톈안먼 사태 당시 후야오방을 이은 자오쯔양 총서기는 5월 20일 리펑 등 보수파가 주도한 계엄령 발효를 앞두고 “여러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세요”라고 시위대에 눈물로 호소했다. 5월 24일에서 27일 사이 자오쯔양이 해임됐다. 5월 말 학생 지도부의 온건파 왕단과 우얼카이시가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들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냈으나 차이링 같은 강경파가 반대했다. 6월 3일 밤 잔혹한 진압이 시작됐다. 홍콩에서 같은 불행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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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제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는 심리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쏟아지는 의혹 속에서 정작 해명은 제대로 하지 않고 더 채찍질해 달라고 말하거나 엉뚱하게 정책 비전을 발표하는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건 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정신질환의 원인은 대개 수치심을 일으키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이다. 분석자가 그런 경험을 들춰내려 하면 피분석자는 말을 돌리거나 거짓이라며 화를 낸다. 이것을 저항이라고 한다. 조 후보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누구나 다 언행불일치가 있어 보통은 사돈 남 말 하듯 하지 못한다. 조 후보자는 자기가 한 말을 잊은 듯이 행동하거나 자기가 한 일을 잊은 듯이 비판할 때가 종종 있다. 특목고가 목적대로 운영되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자녀를 외고에 보내 의대까지 진학시키고, 장학금은 경제 중심으로 지급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자녀는 장학금을 연거푸 받도록 한다. 자신 속의 모순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다 보면 억압된 충동이 무의식으로 침잠해 있다가 타인에게서 같은 모순을 발견할 때 자신도 모르게 강한 반감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오프라인에서의 예의 바른 조국과 온라인에서 거친 말을 쏟아내는 조국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같이 괴리가 커 때로 두 명의 조국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를 실제 만나 보면 잘생긴 데다 너무 예의가 발라서 오히려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만들 정도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서는 학자적 비판이 필요한 대목에서 ‘구역질 난다’는 표현을 서슴없이 쓰고, 사과하는 사람을 향해 “파리가 앞발을 비빌 때는 이놈을 때려잡아야 할 때다. 퍽∼”이라며 가학 성향의 청소년 같은 발언을 쏟아놓는다. 조 후보자 역시 모든 자식들처럼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졌을 것이다. 건설업자의 생리를 갖고 있으면서 사학재단 이사장의 반듯한 면모를 유지해야 했던 아버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부친 살해’로 표상되는 아버지 극복으로 해결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자식이 거세 공포를 느끼고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조 후보자가 남에게 하는 말과 자신의 행동을 완벽히 분리해서 다루는 능력은 그런 환경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조 후보자에게는 일반적인 정신분석의 틀을 넘어서는 특수한 심리구조가 있다. 그는 사모펀드를 기부하고 사학재단에서 손을 떼겠다고 발표하고 자녀 문제에 대해서까지 사과하고 난 뒤 “저와 제 가족이 고통스럽다 해서 제가 짊어진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은 성경에서 예수가 한 기도를 상기시킨다. 예수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하나님께 십자가 처형의 쓴잔을 옮겨달라고 간청하면서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일견 조 후보자가 거의 성인(聖人)에 가까운 정신 상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민이 그에게 무슨 짐을 지운 적이 없다. 국민의 다수는 오히려 그에게 짐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다만 그 스스로 자신은 진리의 편에 있고 진리의 편이 자신에게 지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닌 편에 선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에게 가하는 고통을 참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진리의 편과 아닌 편을 구별하는 이분법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래 이른바 ‘진리의 정치’를 관통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과거 절대 종교와 싸우면서 내 편과 네 편 사이의 토론과 합의를 존중하는 전통을 세운 민주주의적 사고로부터 유사종교적 사고로 후퇴하는 일종의 퇴행이다. 조 후보자가 버틸 수 없을 지경에 왔다고 여겨지는데도 버티고 있는 것은 이런 의식의 퇴행이란 측면에서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공지영 안도현 이외수 등 그나마 문학을 했다는 자들이 보여주는 유아기적 패거리 의식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이념의 외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실은 자신이 이념의 외톨이일 가능성이 크다는 역설을 정신분석은 보여준다. 집안에서는 오이디푸스도 되지 못한 채 아버지의 구태를 반복하는 자들이 스스로도 혁신하지 못하면서 국가와 사회를 혁신하겠다고 나서 안보와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민주주의마저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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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 상속[횡설수설/송평인]

    상속을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보고 상속 재산을 국가나 사회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상주의자도 있다. 그렇지 않고 상속을 인정한다고 해도 재산이 플러스일 때만 물려받고 빚이 있을 때는 물려받지 않는다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부모 잘 만나 부자가 되는 것은 막지 못해도 부모 잘못 만나 빚쟁이가 되는 것만은 막아주자는 데 상속 포기나 한정 상속(상속한정승인) 제도가 생긴 이유가 있다. ▷상속 포기를 하면 빚이 후순위 상속자에게 넘어가 그가 피해를 볼 수 있다. 한정 상속을 하면 자기 순위에서 상속이 멈추고 상속받은 재산의 범위에서 빚을 갚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자기 회사가 부도가 나도 가족들 앞으로 돌려놓은 돈이 많아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이 있듯, 부모의 빚잔치 덕분에 잘 먹고 잘살아 놓고는 부모 빚을 상속하지 않는 데 상속 포기나 한정 상속을 악용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의 부친이 사망했을 때 가족에게 남긴 재산은 정리해보니 고작 21원이었다. 가족은 부친의 빚이 또 얼마나 있을지 몰라 한정 상속을 신청해 뒀다. 그 결과 나중에 법원이 조 후보자 모친에게 18억 원, 조 후보자 형제에게 각각 12억 원을 캠코에 지급하라고 판결했을 때 세 사람은 한 푼도 물지 않았다. 56억 원대의 재산가인 조 후보자도 한 푼도 물지 않았다. 아무런 절차적 하자는 없다. 다만 캠코가 못 받은 42억 원이란 돈은 결국 국민의 몫이 될 수 있다. ▷조 후보자 가족은 모두 부친의 빚을 상속하지 않았지만 모친과 동생은 부친과 동생이 각각 운영한 건설회사의 연대보증인으로, 두 회사가 모두 부도가 나면서 기술보증기금 등에 별도로 약 50억 원의 빚을 지게 됐다. 모친이야 자식에 기대 채권자에게 빼앗길 돈 없이 무일푼으로 살면 그만이지만 동생은 그럴 수 없었다. 배우자도 있고 어린 자식도 있는 상황에서 채권자에게 쫓기게 되면 서류상 이혼을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조 후보자의 동생은 빚도 많지만 부친이 이사장으로 있던 사학재단에 공사대금 채권 52억 원도 갖고 있다. 그는 논란이 일자 채권을 기술보증기금에 진 빚을 갚는 데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 채권은 사학재단에 가용할 자금이 있어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당장의 현금화는 쉽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한정 상속으로 부친이 생전에 진 빚은 모두 탕감받으면서 부친 사학재단에 대한 채권은 언젠가라도 행사하겠다는 것이 양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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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 미사일 폭발 공포[횡설수설/송평인]

    유럽 쪽 러시아 북부에 백해(白海·White Sea)라는 내해(內海)가 있다. 백해 연안에는 세베로드빈스크라는 도시가 있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13일 러시아 군이 실험 중이던 신형 미사일 엔진이 폭발했다. 방사능 수치가 일시적으로 평소의 16배까지 올라갔지만 러시아 정부는 방사능 유출을 부인했다. 폭발 현장 인근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라는 권고를 들었지만 왜 떠나라는 건지 이유는 듣지 못했다. ▷이런 괴이한 상황이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드물지 않다. 2000년 핵추진 잠수함 쿠르스크의 침몰로 탑승자 118명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도움을 주겠다는 영국 해군의 제안을 거절하고 유족을 대상으로 선원 전원이 생존해 있다는 등의 거짓 브리핑으로 일관했다. 지난달만 해도 스파이 활동을 하던 최첨단 핵추진 잠수함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14명의 승무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으나 러시아 정부는 여전히 심해 탐사 잠수정이 폭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은폐는 독재의 뒷면이다.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세르게이 스크리팔 등 망명한 러시아 정보기관 요원들은 독극물 살해를 당하고, 푸틴의 정적인 보리스 베레좁스키와 측근의 자살은 의문사로 남아 있다. 안나 폴릿콥스카야 같은 비판적 언론인도 암살을 당했다. 올 5월에는 반(反)푸틴 언론인 아르카디 밥첸코가 암살을 모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경찰과 협조해 살해당한 것으로 가장했다가 다시 등장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푸틴은 이 모든 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최근에도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방문해 ‘밤의 늑대들’이라는 바이크 동호회의 건장한 회원들과 함께 바이크를 타며 실효적 지배를 과시했다. 웃통을 벗고 말을 타고 총으로 호랑이를 잡는가 하면 투명유리의 심해 잠수정을 직접 운전하며 바다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때마다 ‘21세기 차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전 세계에 뿌린다. ▷이번 사고는 낮은 고도로 날아 대륙을 건너가는 ‘9M730 미사일’의 시제품과 관련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푸틴이 ‘지구 어디든 도달할 수 있다’고 자랑한 이 신무기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더 진전된 비슷한 기술을 갖고 있다”고 맞받았다. 최근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의 파기는 미국 러시아 중국이 새로운 군비 경쟁에 돌입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 하늘에서 방사능 수치가 올라가고 ‘제2의 체르노빌’이 언급되는 상황이 불행한 사태의 전조가 아니었으면 한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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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조국 씨의 박사논문 표절에 대해

    과거 조국 서울대 교수의 박사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그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철저한 검증 차원에서 이를 정리해줄 책임감을 느낀다. 조 후보자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 박사논문 표절 의혹을 처음 제기한 곳은 인터넷매체 미디어워치다. 영국 옥스퍼드대 D J 갤리건 교수의 논문에서 다수 문장을 베꼈다는 내용이었다. 미디어워치가 제기한 박원순 서울시장 아들의 엑스레이 사진이나 JTBC의 태블릿PC에 대한 의혹 등에 한 번도 동조한 적이 없다. 그러나 논문 표절은 다르다. 수십 단어가 연속해서 일치하는 문장들을 보면 의심하고 말고 할 게 없다. 조 후보자가 베낀 이유까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는 갤리건 교수의 논문에서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책을 요약한 부분을 베꼈다. 벤담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단어는 평범해 보여도 한 페이지를 읽는 것이 쉽지 않은 대단히 어려운 영어다. 벤담의 책은 벤담 자체에 대한 논문을 쓰지 않는 한 2차 문헌을 통해 인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는 벤담의 책을 직접 읽은 것처럼 써야 폼이 난다고 여긴 듯하다. 이 일을 계기로 조 후보자의 박사논문을 직접 읽어보기로 했다. 논문은 버클리대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꼼꼼히 읽은 곳은 독일어 문헌을 인용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택한 이유는 조 후보자가 서울대 석사논문에서 독일어 문헌 표절을 시인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표절의 제1공리인즉 표절하는 사람이 한 번 표절하고 마는 경우는 없다. 같은 패턴의 표절을 10군데 가까이 발견했다. 이번에는 미국 인디애나대 로스쿨 크레이그 브래들리 교수의 논문이다. 베낀 곳은 브래들리 교수가 독일어 판결문을 요약한 부분이다. 여기서도 독일어 판결문을 직접 읽은 것처럼 써야 폼이 난다고 여긴 듯하다. 미디어워치는 이후 더 작업을 진행해 모두 6개 논문에서 약 50군데에 이르는 표절을 발견했다. 시각적으로도 금방 알 수 있는 표절이 그 정도라는 것이지 꼼꼼히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인용부정이 발견된다. 가령 독일어 논문을 12개 인용하는데 페이지 표시도 없는 하나마나한 인용이 무려 9개 논문에 이르고, 페이지가 표시된 것도 찾아 들어가 보면 본문의 내용이 나와 있지 않는 황당한 인용들이 있다. 그러나 버클리대 로스쿨은 미디어워치의 제소에 따라 표절 심사를 한 뒤 표절이 아니라고 했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표절 조사를 했다고 단정하고 그 경우 같은 문헌에서 인용한 것이 양쪽에 다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버클리대 로스쿨 측이 제소 내용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는 조 후보자가 다른 저자의 아이디어를 베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법학 논문에 건축 설계 같은 대단한 창의성이 있을 리 없지만 그마저도 정직성이 확보되고 나서의 문제다. 버클리대의 표절 기준에는 ‘타인의 저작으로부터 구절을 다수 베끼는 것(wholesale copying of passages from works of others)’이 명확히 들어 있다. 당시 버클리대 로스쿨에서 표절 심사를 담당한 사람은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고문 메모’로 세계적 악명을 떨친 한국계 존 유 학장이다. 버클리대 로스쿨에는 ‘한국법 센터’가 있고 서울대와 교류를 하고 있다. 교류의 파트너가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 중인 조 후보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버클리대로서는 이 논문을 표절이라 판단하면 학교가 창피해지는 데다 서울대 측의 주요 파트너를 잃게 된다. 그래서 나는 서울대가 이 논문을 한번 직접 조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위원회가 직접 받은 공문도 아니고 조 후보자 앞으로 온 존 유 학장의 편지를 근거로 심사를 거부했다. 편지는 존 유 학장이 표절 조사를 한 뒤 대학 본부 앞으로 보낸 내부 메모랜덤(memorandum)을 첨부한 것이다. 표절이 아니라면 조 후보자 앞으로 보낼 필요도 없는 것이므로 조 후보자의 요청에 의해 보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연구진실성위원회 위원장은 진보 편향의 이준구 전 경제학과 교수가 맡고 있었다. 이것이 조 후보자가 ‘무혐의로 결론 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내막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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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F 폐기와 미사일 배치[횡설수설/송평인]

    냉전 해체라고 하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먼저 떠올리지만 그 근저에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의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회담,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같은 합의가 자리 잡고 있다. INF 조약은 1986년 10월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논의가 시작돼 수차례 회담 끝에 1987년 12월 체결됐다. ▷미소 간에 직접 위협이 되는 핵 운반체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불리는 장거리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다. 이를 전략무기라고 한다. 사거리 500∼5500km의 중거리 핵 운반체는 주로 미국 본토에서 떨어진 서유럽과 소련의 동유럽 위성국 사이의 위협이었다. 그래서 전략무기와 구별해 다뤘다. 미소에 위협이 덜 직접적인 중거리핵전력 폐기를 우선 확정하고 전략무기 감축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탈(脫)냉전 시대로 들어가는 문턱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북한이 쏴대는 미사일을 ‘작은 것’이라며 별것 아닌 듯이 취급했다. 690km까지 날아간 이스칸데르급 미사일도 있으니 다 ‘작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로서는 500km 미만 날아간 것도 제주도를 뺀 남한 전역에 위협이 되므로 미국 중심의 기준을 적용해 안보를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에는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국 우선주의자인 트럼프에겐 별것 아닐 수 있다. ▷미국은 지난해 10월 이미 INF 조약 탈퇴를 예고했다. 그 전해 러시아가 9M729라는 미사일을 배치함으로 사실상 INF 조약을 위배했다는 것이 이유다. 러시아는 그 미사일은 사거리가 490km로 INF 조약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미국은 최대 1500km까지 날아가는 이스칸데르K 미사일로 보고 있다. 게다가 INF 조약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조약으로, 새로 군사강국으로 굴기하는 중국이 그 조약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결정적 맹점이 있다. ▷냉전 해체의 상징이던 INF의 파기는 신(新)냉전의 시작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INF 조약 탈퇴 하루 만인 3일 “아시아 지역에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중국은 관영매체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미국 아시아 정책의 총알받이가 돼선 안 된다”고 발끈했다. 냉전시대 소련은 SS-20, 미국은 퍼싱-2 배치를 놓고 유럽에서 맞붙었다. 이제 중거리미사일 배치의 전장(戰場)이 아시아로 확대될 모양이다. 동북아에는 냉전시대보다 더한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셈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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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안보와 경제 양면에 국정파탄의 그림자 짙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적인 한반도 평화 정착마저 기만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북한 핵협상은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했다. 북한에 시간만 벌어주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북한이 그 사이 핵탄두를 12개나 늘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보도의 근거를 따져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김정은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고 미국이 죽음의 백조로 불리는 B1B 폭격기를 북한 동해 상공 깊숙한 곳까지 출격시킨 것이 문재인 정부 출범 몇 개월이 지나서다. 그 무렵 한 청와대 참모가 저녁 자리에서 한반도가 불바다가 될지도 모른다고 거품을 물며 북한보다 미국을 성토하길래 그에게 “트럼프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전쟁을 하지 못할 자”라고 일갈한 적이 있다. 모든 방면에서 더 강한 압박을 유지해야 할 순간에 압박을 푼 것이 이 정부다. 우리가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고 남북군사합의로 스스로를 무장해제하는 동안 북한은 우리 군이 궤도조차 추적하지 못하는 신형 미사일을 개발하고 3000t급 잠수함의 건조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능력의 진전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군사훈련 중단한 것,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다”며 별거 아닌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제 한미 군사훈련은 우리 측이 재개를 요구해도 훈련비를 내지 않으면 트럼프는 응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전방과 해안에서 경계실패의 소식이 들려온다. 급기야 먼 하늘에서는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군용기에 의해 영공이 침범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터키는 군사력에서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는데도 2015년 11월 자국 영공으로 4km 정도 들어와 17초 정도 머문 러시아 전폭기를 격추시켰다. 우리는 러시아 조기경보기가 9km까지 들어오고 7분간 휘젓고 다녔는데도 조용조용 처리하고 있다. 트럼프처럼 거친 말을 할 때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정말 싸울 의사가 있으면 몽둥이를 뒤에 숨긴 채 부드러운 말을 할 것이다. 실전 같은 훈련을 하고 철통같은 경계를 하는 것은 전쟁을 원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의 역설적인 측면을 알지 못하고 겉으로 보이는 대로 위기와 평화를 판별하는 지도자를 둔 것이 우리의 불행이다. 지난달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한국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전망치를 2.5%에서 2.0%로 낮춘 데 이어 이달 들어 S&P도 2.4%에서 2.0%로 낮췄다. 국내에서는 29일 처음으로 하나금융투자가 2.0%의 전망치를 내놓았다. 2.0%는 차마 1%대를 언급하지 못하는 예의일 수 있다. 노무라 ING처럼 1%대 전망치를 내놓은 외국 증권사도 있다. 한국의 성장률은 2011년 이후 지난해까지 3% 안팎에서 오락가락하며 연평균 3%의 성장을 했으나 올해 처음 1%대 성장률로 추락할 가능성이 커졌다. 케인스의 유효수요이론만 해도 투자를 늘려 투자수요와 소득수요를 동시에 끌어올리자는 것이지, 소득만 올려 수요를 끌어올리자는 것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은 꼬리가 몸통을 움직이겠다는 무모한 이론이다. 더 큰 문제는 소주성이 빚은 참혹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유턴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올해는 그나마 2% 성장이 희망으로는 남아 있지만 내년부터는 1%대 성장이 고착화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나오고 있다. 한일 갈등이 안보와 경제 양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갈등의 근저에는 관제 민족주의가 깔려 있다. 그 민족주의는 심지어 편파적이기까지 해서 중국에 대해서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압박에 물러서고 미세먼지까지 내 탓을 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만사 네 탓이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재단을 해체하고 징용 배상 문제를 방치했을 때 무슨 복안이 있었던가. 대책 없이 스스로 불러일으킨 관제 민족주의의 관성으로 여기까지 왔다. 후대의 사가(史家)들은 이번 사태를 해방 이후 역사의 가장 어리석은 대목 중 하나로 꼽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12척은 귀양 갔다가 와보니 남은 배였다. 그 많은 배를 스스로 고물로 만들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국정농단을 우습게 보이게 만들 국정파탄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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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리스 존슨[횡설수설/송평인]

    차기 영국 총리로 유력한 보리스 존슨(55)은 1964년 아버지가 미국에 유학 중일 때 뉴욕에서 태어났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외교관 자녀를 위한 유러피안스쿨에 다녀 프랑스어까지 유창하다. 영국으로 돌아와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대를 다녔다. 게으르고 괴팍하기는 하나 인기 있는 학생이었고 두 학교에서 다 토론클럽 회장과 학생신문 편집장을 지냈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53) 등과 같은 세대로 영국 보수당을 이끄는 옥스퍼드 그룹에 속한다. ▷첫 직업은 기자였다. 1987년 ‘더타임스’에서 수습기자를 할 때 인용을 조작했다가 해고됐다. 그 뒤 ‘데일리 텔레그래프’에서 자리를 잡고 브뤼셀 특파원과 정치칼럼니스트로 13년간 일했다. 브뤼셀 특파원 때 영국 내 유럽연합(EU) 회의론을 조장하기 위해 ‘EU가 콘돔 사이즈를 16cm로 통일하려 한다’는 등 과장된 기사를 쓴 것으로 비판받는다. 기사의 진실성은 간혹 논란을 빚었지만 풍부한 지식과 재기는 널리 인정받고 있다. ▷2001년 하원의원이 된 그가 외국에서까지 눈길을 끈 것은 2008년 런던시장에 당선되면서다. 반대하는 유권자조차 그가 웃겨서 그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그는 따분한 걸 참지 못하는 유형이다. 쾌활하고 유머가 넘친다. 그러나 그 유머는 윈스턴 처칠처럼 고전적이지 않고 스스로 망가지면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는 4차원적일 때가 많다. 다른 한편 엘리트주의에 젖어 있고 때로 여성차별적이거나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악동(惡童)’ 이미지의 존슨은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기도 한다. 유난히 밝은 금발, 유복한 가정환경, 난잡한 사생활, 무원칙주의 등이 비슷하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케인스주의의 잔재와 싸운 대서양 양쪽의 ‘정치적 연인(戀人)’이었다면 트럼프와 존슨은 68혁명의 유산인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 싸우는 대서양 양쪽의 ‘정치적 형제’쯤 된다. 다만 악동이라도 트럼프는 무식해 보이고 군대식인 데 비해 존슨은 지적이고 록(rock)풍이다. ▷토론과 타협을 중시하는 ‘영미식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 언어의 신중함이 사라지고 있다. 트럼프와 존슨은 트위터를 통해 즉흥적으로 말하길 좋아하고, 거짓말도 수시로 하고, 해야 할 대답은 끝까지 피한다. 트럼프와 존슨이 영미식 민주주의 파산의 전조인지, 위선을 거부하고 직접성을 강화하는 새 민주주의로 가는 혼돈스러운 국면인지 지켜볼 일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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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평인 칼럼]관제 민족주의 넘어 관제 쇼비니즘

    지난해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년이 되는 해였다. 그 전쟁에 대해 당시 외신들은 전문 사가(史家)들을 인용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일어난 전쟁’으로 평가했다. 근시안적인 정치가들이 쇼비니즘, 즉 맹목적 애국주의에 이끌려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전쟁이 역사상 최대의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저격했다.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동맹이긴 하지만 황태자 부부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는 후계자였다. 게다가 독일이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세르비아 등 슬라브족의 후견자인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러시아의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한 국익이 없는데도 독일 지식인과 언론은 게르만족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전쟁을 선동했다. 쇼비니즘이란 말은 본래 프랑스에서 왔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한때 교과서에도 소개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도 쇼비니즘적이라는 냉정한 평가가 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쇼비니즘이 기승을 부렸지만 의회를 통해 제도적으로 여과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제주의 체제인 독일에서는 황제가 대중 여론의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독일 대중에게 외교는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give and take)’ 타협이 아니라 ‘이기느냐 지느냐’의 치킨게임이었다. 최장집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의 올 3·1절 기념사를 놓고 관제(官製) 민족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조장해 온 관제 민족주의에서 국내적으로든 국외적으로든 어떤 생산적 이익이 기대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맹목적이었다. 결국 그것이 발단이 돼 한일(韓日) 간 경제 갈등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한일 양국에서 쇼비니즘의 기운이 강하게 일고 있어 우려된다. “한국이 미국에 울며 매달리고 있다” 식의 글로 한국을 조롱하는 산케이신문의 논조는 더러운 쇼비니즘이다. 하지만 청와대 참모가 전쟁도 아닌데 동학혁명 죽창가 운운한 것 역시 해로운 관제 쇼비니즘일 뿐이다. 쇼비니즘에 쇼비니즘으로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악순환의 고리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짓이다. 일본이 문 대통령을 비난하니 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는 한국이 아베 총리 비난하니 아베 총리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논리처럼 졸렬하다. 과거사 문제가 경제 갈등이 되도록 방치한 쪽도, 과거사 문제를 경제 갈등으로 몰아간 쪽도 잘못이라면 서로 상대편 정부를 비판해 상대편을 자극하기보다는 자국 정부를 비판해 실용적 방향으로 견인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다. 청와대는 어제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제3국 중재로 가자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일본의 요구대로 중재로 가기로 합의한다면 일본의 수출 규제는 부당해지는 모양새가 되고 일단 격화하는 갈등을 잠재울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사라졌다. 제3국 중재로 가자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중재에 승산이 있다고 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설혹 중재에 지더라도 한국 정부는 ‘중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배상한다’는 퇴로를 얻게 된다. 중재가 성립하지 않아 국제사법재판소(ICJ)까지 가서 패소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한국 정부가 배상할 액수가 적지 않겠지만 무역 갈등으로 초래될 막대한 손해와 비교하면 별게 아닐 수 있다. 물론 최선책은 제3국 중재나 ICJ로 가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법률가들도 없지 않지만 그 반대가 대부분이다. 지게 되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수치를 당하고 한일 관계에서 수세에 몰릴 수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적 청구권이 남아 있다는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대법관들 다수가 외교적 청구권에 대해 말을 얼버무려서 그렇지, 일본 기업만이 아니라 한국 정부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 의미를 문재인 청와대가 알아듣지 못한 척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왔다. 무역 갈등은 커져 가는데 국제 중재나 재판도 안 되고 우리 정부가 전향적인 배상안을 내놓을 의지도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 기업에 배상을 강제할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가능한 로드맵조차 보이지 않으니 암담할 뿐이다.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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