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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과 1988년에 이어 24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제78회 국제 펜(PEN)대회. 10일 경북 경주시 현대호텔 컨벤션홀에서 개최된 이 ‘문학 올림픽’의 개회식을 앞두고 참가자들이 북적이던 대기실에서는 감동적인 재회가 이뤄졌다. 198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78)가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를 쓴 탈북시인 장진성을 알아보고 뜨겁게 포옹했다. 주위의 시선은 일제히 두 사람에게 쏠렸다. 두 시인의 각별한 인연은 3년 전 시작됐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소잉카는 장 시인의 작품을 읽고 “만나보고 싶다”며 한국 문인 단체에 장 시인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본디 남북문제와 탈북 문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한국에서 열린 세계평화시인대회에 참석해 금강산을 다녀온 그는 “북한 시인들이 참석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당시 첫 만남을 이루지 못한 두 사람은 올해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시 축제 ‘더 포이트리 파르나소스’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소잉카는 장 시인에게 “3년 하고도 6시간을 기다렸다”며 환하게 웃었다. ‘6시간’이란 3년 전 소잉카가 장 시인을 만나려고 일정을 늦추며 호텔에서 기다린 시간을 뜻한다. 두 시인은 호텔에서 맥주를 마시며 나이지리아와 북한 인권, 그리고 문학에 대해 밤늦도록 얘기를 나눴다. 당시 소잉카는 “북한은 인권 등이 매우 안 좋은 나라”라며 장 시인이 들려주는 북한 생활상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런던에서 헤어진 뒤 3개월여 만인 이날 경주에서 장 시인과 재회한 소잉카는 “다시 만나게 돼 반갑다”고 말했고, 장 시인은 “한국에서 뵈니 더 반갑다”고 화답했다. 국적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은 두 시인이지만 자유와 인권을 위해 독재정권에 항거했으며 이를 문학으로 승화해 널리 알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잉카는 1965년 나이지리아 선거 부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방송을 한 혐의로 체포됐고, 1967년 내전 발발 당시 투옥됐다. 사니 아바차 군사정권은 소잉카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04년 탈북한 장 시인은 미국과 일본에서 시집 ‘내 딸을…’을 출간해 북한의 인권 탄압 실상을 알렸다. 미국에 망명했던 소잉카는 민간 정권이 들어선 1999년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장 시인은 아직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문학, 미디어 그리고 인권’을 주제로 열린 이번 경주 펜대회에는 86개국 문인 212명이 방한했고, 국내 문인 700여 명이 참가했다. 소잉카는 개막식 기조강연에서 “권력은 구속을 좋아하지만 창조성은 구속의 반대말”이라며 “변화를 추구하는 지성(知性)에서 나오는 더욱 광범위하고 훨씬 원초적인 도전은 (권력에) 얼마나 위협적일까. 나는 창조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미디어의 이미지나 간단한 정보와는 반대로 문학은 시간과 문화를 융화하며 인간 생활을 초월하는 것을 창조한다.” 15일까지 열리는 펜대회에서는 시낭송 대회, 사인회, 뮤지컬 ‘요덕스토리’ 공연 등이 열린다. 14일 총회에서는 탈북 문인 28명으로 구성된 ‘망명 북한작가 펜센터(North Korean Writers in Exile PEN Center)’ 가입 승인안에 대한 표결이 진행된다. 국제펜에는 114개국 143개 센터가 가입돼 있으며, 북한 펜클럽이 가입하면 144개 센터로 늘어난다.경주=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추리소설 팬이라면 탐낼 만한 걸작선이다. ‘한국 추리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내성(1909∼1957)부터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신인 작가까지 추리소설가 44명의 대표작을 한 편씩 묶었다.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엄선한 ‘별’들의 무리이자 한국 추리소설 75년사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걸작선이다. 200자 원고지 5000장이 넘는 ‘백과사전’ 같은 선집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김내성의 ‘가상범인’. 1932년 일본 잡지 ‘프로필’에 실린 ‘탐정 소설가의 살인’을 개작해 1937년 다시 펴낸 것이다. 김내성 작품의 주인공인 탐정 유불란이 처음 등장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추리소설은 어떨까’라는 호기심에서 펼쳐본 이 소설을 읽다보면 여러 번 감탄하게 된다. 최근 추리소설 못지않은 치밀함과 속도감 있는 전개, 그리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두뇌게임까지. 마치 현대 작가가 당시 시대를 배경으로 쓴 추리소설 같다. 특히 구성이 기발하다. 사랑하는 연인 이몽란이 살해 피의자로 몰리자 유불란은 진범을 잡기 위해 당시 사건을 재구성한 연극을 펼치고, 다른 용의자도 배우로 등장한다. 연극이 이어지며 이것이 실제인지 연극인지 배우도 관객들도 헷갈리게 되고, 결국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범인이 자백하게 된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막이 내린 뒤에도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는 설정이 잠시도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국추리작가협회장을 지내고 부산에서 추리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는 김성종은 또 어떤가. 1970, 80년대 대표 추리작가인 그의 대표작인 ‘회색의 벼랑’은 호텔에서 자살한 한 의문의 여성의 사인을 쫓아가는 한 신문사 홍콩 특파원의 취재기를 속도감 있게 전하고 있다. 짜임새는 다소 헐겁지만 남북한 스파이 얘기를 홍콩을 배경으로 펼쳐놓은 것이 한 편의 박진감 넘치는 스파이 영화를 보는 듯 스케일이 크다. MBC 인기 형사드라마 ‘수사반장’ 극본을 7년간 썼던 김남의 ‘여자는 한 번 승부한다’도 눈에 띈다. 한 여성의 피살 사건을 둘러싼 부부의 음모와 배신을 그렸는데, 깔끔하고 강렬한 반전의 뒷맛이 매력적이다. 한국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현재훈의 ‘절벽’, 1965년 발표한 한국 최초의 장편 공상과학(SF) 소설인 ‘완전사회’의 문윤성이 쓴 ‘덴버에서 생긴 일’ 등 추리소설 팬이라면 입맛을 다실 만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한국 추리소설은 문단에서 장르 문학으로 평가절하돼 왔고, 추리소설 시장에서도 일본이나 미국 소설에 비해 기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에게도 수준급 추리 작가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국 추리물의 ‘매콤한 반전’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북한은 물리적 독재 외에도 ‘감성독재’를 통해 주민들을 통제해 왔습니다. 그러니 탈북 문인단체가 국제단체로 인정받을 경우 감성독재에 미칠 파급력을 우려하는 겁니다.” 북한이 탈북 문인 20여 명으로 구성된 ‘북한펜클럽’의 국제펜(PEN) 가입을 연일 맹비난하는 가운데 이 클럽 사무국장인 장진성 시인은 7일 “북한은 문학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잉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10일 경북 경주시에서 개막하는 제78차 국제펜대회는 국내외 700여 명의 문인이 참여하는 세계 최대 문인 행사. ‘북한펜클럽’은 이번 대회에서 144번째 센터로 국제펜에 가입하고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증언할 예정이다. 노동신문은 2일 “(남조선이) 국제펜대회를 계기로 반공화국 ‘인권’ 소동을 대대적으로 벌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고 있다”며 “무슨 ‘북한망명펜센터’라는 모략 단체를 국제펜에 가입시키는 놀음을 벌이려는가 하면 그들을 내세워 ‘작품’이오, ‘공연’이오 하면서 불순한 반공화국 광대극을 펴 놓으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도 5일 논평과 대담을 통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헐뜯는 악담들로 가득한 모략극, 날조극들을 국제대회에까지 내돌리려고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6월 영국 BBC방송과 인터뷰를 하면서 ‘왜 유럽에 아프리카나 중동의 인권 상황은 잘 알려져 있는데 북한은 그렇지 않으냐’고 따져 물었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유럽에는 아프리카나 중동의 망명 작가가 많이 있고 이들은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유럽인들은 그들을 통해 해당 국가의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제 정치가가 아니라 문호의 말을 신뢰하고 듣는다’라고요.” 장 시인은 이를 계기로 북한 인권 운동도 이념이 아닌 문화적 차원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귀국 후 북한펜클럽 설립에 앞장서게 됐다. 시인은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노동당 통일전선부에서 일하다 2004년 탈북했다. 그의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는 미국과 일본에서도 출간됐고 5월에는 영국 옥스퍼드 워덤 칼리지가 주는 ‘렉스 워너상’을 받았다. 6월에는 영국 런던에서 열린 시 축제 ‘더 포이트리 파르나소스’에도 초대돼 다녀왔다. 일본 분게이슌주(文藝春秋)는 11월 그의 수기를 출간할 예정이다. 캐나다를 포함해 6개국에서도 문학 행사 초대장을 보내 왔다. “해외에 가면 남한 작가인 줄 알아요. 제가 ‘유럽에서 태양이 침몰한 날(타이타닉호 침몰 날), 동양에서는 태양이 솟았다(김일성 주석 생일)’고 북한에서 찬양한다고 말하면 그제야 경악하며 큰 관심을 갖죠.” 북한펜클럽은 서울에서 북한 인권 행사를 열 계획이다. 158개 나라 문인들의 방한 승낙도 받았다. “행사비 5억 원 마련이 힘들지만 일단 추진 중입니다. 캐치프레이즈도 정했습니다. ‘북한에는 자유를, 남한에는 평화를, 한반도에는 통일을.’”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집 앞에 낡은 버스 한 대가 있다. 외부 페인트칠은 벗겨졌고 안에는 빈 깡통과 병, 그리고 잡다한 쓰레기가 한가득 들어있는 고물 버스다. 삭막한 도시의 도로변에 서 있는 버스는 흉물 그 자체지만 꼬마 소녀 스텔라는 이렇게 말한다. “엄마, 저 낡은 버스는 바닷가에서 떠밀려 온 고래처럼 슬퍼 보여요.” 이 책은 한 소녀의 순진한 동심이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가슴이 뭉클하게 그려낸다. 자칫 폐차될지 모르는 버스는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스텔라 집 옆 마당에 옮겨진다. 소녀와 마을 사람들은 버스를 닦고 쓸고 깨끗이 청소한 뒤 내부에 소파를 들여놓고, 책과 어항도 갖다 놓는다. 동네 청년들은 버스 바깥에 멋진 그림을 그렸다. 볼품없던 버스는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얘기도 나누고 음식도 나눠 먹는 동네 사랑방으로 변했다. 하지만 작가는 마냥 동화 같은 얘기만 펼치지는 않는다. 이 버스가 불법 주정차된 것을 적발한 견인회사가 폐차장으로 끌고 가 버린 것. 스텔라와 마을 사람들은 골칫거리에서 소중한 공간으로 변신한 버스를 되찾기 위해 폐차장으로 몰려간다. 결국 견인회사 대표와 스텔라는 버스를 두고 담판을 짓게 되는데…. 저자는 호주 출신의 유명 그림책 작가. 2000년 영국 ‘스마티즈 북 상’, 2002년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 그리고 호주 최고의 아동문학상인 ‘올해의 호주 아동문학상’을 네 차례나 받았다. 이 책은 2012년 ‘올해의 호주 아동문학상’ 수상작이다. 관록이 있는 작가답게 저자는 어린이의 동심에 대한 관찰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텔라의 순수한 마음으로 변화된 버스의 이름은 ‘천국’. 이름에 걸맞게 인종과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마을 사람들이 동등하게 소통하고 즐기는 곳이다. 버려지고 방치된 버스가 여러 사람의 관심을 통해 소중한 공간으로 변모되는 과정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천국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 곁에 있으며, 마음 먹기에 따라 그곳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글과 어울려 단순하고 간결하게 곁들인 그림들은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천국’은 사람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풀과 새들이 함께 쉬는 공간으로도 그려져 아이들에게 자연과 공존하는 생활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책을 읽고 아이들과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우리 곁의 천국을 찾아보면 어떨까.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먼지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아요(윤순창 글·소복이 그림·웅진주니어)=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는 장거리 여행자. 몽골 사막에서 만들어진 먼지는 편서풍을 타고 우리나라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간다. 산업화 이후 너무 많아진 먼지는 지구의 건강을 위협한다. 작지만 큰 재미를 주는 먼지 이야기. 9000원 한눈에 반한 민화 미술관(장세현 지음·사계절)=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 선물했던 ‘일로연과도’, 새해 첫날 악귀를 쫓는 데 쓰였던 ‘문배도’ 등 다양한 민화와 그에 얽힌 얘기를 묶었다. 한 권에 담은 ‘작은 민화 미술관’. 1만5500원 앗! 모기다(정미라 글·김이랑 그림·비룡소)=모기가 애완곤충? 저자가 두 아들과 함께 집에서 모기를 키우며 쓴 ‘모기 생태 보고서’. 발상도 특이하지만 익살스러운 그림들이 곳곳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1만 원 미술관에서 생긴 일(막달레나 기라오 쥘리앙 글·엘사 위에 그림·개암나무)=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소년은 그림 속에서 나온 소녀를 따라 그림 속 세계로 들어간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짜릿한 모험이 가득한 책. 8500원}

한국 현대시 100년을 꿰뚫는 시선(詩選)이 나왔다. 윤동주 한용운 김소월 등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시인부터 최근 문단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작가들까지 한국 시사 100년을 100권의 시집으로 묶는 ‘한국대표 명시선 100’(시인생각)이다. 1차분으로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용운 ‘님의 침묵’, 김남조 ‘가슴들아 쉬자’, 신달자 ‘너를 위한 노래’, 도종환의 ‘담쟁이’ 등 5권이 나왔다. 김소월 서정주 정지용 노천명 박재삼 천상병 정진규 오세영 김영랑 등의 시선집이 이달 중 출간되며, 앞으로 1년 안에 나머지 시집들이 나온다. 시집 한 권에는 50편이 넘는 시가 실리는데 작고 문인의 경우 출판사가 작품을 선별했다. 생존 시인은 시인이 직접 대표시들을 골랐다. 더 폭넓은 한국 시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 시단의 한 축인 시조 시인(정인보 이은상 이호우 김상옥 등)의 작품도 추가한다. 이 시선에는 한 가지 이채로운 점이 있다. 시선에 응당 붙어야 할 시집 일련번호가 빠져있는 것. 시선의 ‘얼굴’격인 1호를 포함해 번호 선정을 놓고 출판사는 많은 고민을 했다. 현대시 100년을 조명하는 시선의 1호가 ‘1등’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단 경력이 빠른 순으로 번호를 매기자’는 대안도 제시됐다. 이렇게 따지면 1908년 잡지 ‘소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은 육당 최남선이 1호가 된다. 하지만 등단 순으로 번호를 매기면 문제가 생긴다. 채택된 문인 100명 가운데 작고 문인만 40명이 넘어 현재 활동하는 문인들은 내년에나 차례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결국 시선 초반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작고 문인과 생존 문인들을 섞어서 펴내게 됐고, 일련번호 없이 ‘무순’으로 나오게 됐다. 하지만 번호가 없다면 시집이 쌓일수록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출판사는 100권의 출간을 완료한 뒤 일련번호를 매길 예정이다. 이근배 시인생각 주간은 “101권부터는 출간 순서로 번호가 정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출판사의 경우엔 어떻게 시집 번호를 매길까. 시선을 펴내는 문학과지성사, 창비, 실천문학사 등은 신작 시집을 다루므로 자연스럽게 출간 순으로 번호를 매긴다. 100호, 200호 등 끊어지는 특별한 호수는 기념 시집으로 꾸린다. 문학과지성사 이근혜 편집부장은 “출판사나 시인들이 시집 번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다만 101호 등 새 100번대를 시작하거나 199호 등으로 마침표를 찍는 책들은 시선의 줄기에 맞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집으로 정한다”고 설명했다. 최동호 서정시학 주간은 “일부 시인들은 백팔번뇌를 뜻하는 108호 등 특정 번호를 선호한다”고 귀띔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소설가 김중혁(사진)이 제13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단편 ‘요요’. 상금은 2000만 원. 시상식은 다음 달 6일 오후 3시 강원 평창군 봉평면 이효석문학관에서 열린다.}
토지문화재단(이사장 김영주)은 18일까지 전국 청소년 백일장 예심 신청을 받는다. ‘풀’(草)을 소재 또는 주제로 한 작품은 모두 신청 가능하다. 백일장은 시와 산문 분야에서 초등 중등 고등 부문으로 나눠 펼쳐진다. 예심 통과자 120명은 다음 달 20일 강원 원주시 단구동 박경리문학공원에서 열리는 본심에 참가할 수 있다. 대상(강원도지사상)은 장학금 100만 원을 받는다. 토지문화관 홈페이지(www.tojicul.or.kr) 참조. 033-762-1382, 033-766-5544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어디 근처에 먹을 만한 식당 없나?” 길거리를 가다가 배가 고프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럼 ‘식당(食堂)’이란 말은 어디서 왔을까. 이 책은 그 기원을 초기 불교에서 찾는다.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을 원형에 가깝게 기록한 초기 불교경전 ‘아함경(阿含經)’이 한자로 번역되면서 식당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붓다가 설법자로 등장하는 부문에 ‘집차식당(集此食堂)’, 즉 ‘이 식당에 모여라’란 글귀가 나오는 것. 불교의 신앙공간인 절은 7가지 요소를 갖춰야 하는데 바로 금당(金堂), 경당(經堂), 승당(僧堂), 종당(鐘堂), 탑(S), 강당(講堂), 식당(食堂)이다. 탑도 예전에는 하나의 독립된 건물인 경우가 많아 당(堂)으로 봤다. 7가지를 갖춘 절은 칠당가람(七堂伽藍)으로도 불렀다. 세월이 흘러 식당은 길거리 음식점을 뜻하게 됐다. 한국의 절에선 ‘공양간’이란 단어가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건물의 입구를 뜻하는 현관(玄關)도 불교의 선종에서 나왔다. 현관은 차원이 다른 두 세계의 경계에 있는 관문이란 뜻이었고, 점차 선종 사찰 건물의 정문을 의미하다가 속세로 퍼져 일반화됐다. 익숙한 단어들의 변천으로 보는 생활사가 흥미롭다. 장로(長老), 천당(天堂) 등 기독교에서 많이 쓰는 단어들이 불교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설명도 이채롭다. 불자들뿐만 아니라 상식 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책이다. ‘번뇌’ ‘삼보일배’ ‘윤회’ 등 오늘날 일상화된 불교 용어의 어원도 깊이 있게 살펴볼 수 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초등학생에게 이런 문제를 내보면 어떨까. 우리나라의 대통령, 일본의 총리,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럼 대통령, 총리, 왕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굴까? 고개를 갸웃할 법도 하다. 흔히 신문과 방송에서 듣는 말이지만 막상 차이를 설명하자면 어른들에게도 쉽지 않다. 이 시리즈의 1권인 ‘왕, 총리, 대통령 중 누가 가장 높을까’는 이런 알쏭달쏭한 문제들을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쉽게 풀어낸다. 우리나라 같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인 동시에 국가 원수다. 영국 같은 의원내각제 나라에서는 총리는 행정부의 수반만 되고 영국 여왕이 국가 원수가 된다. 다만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과 아이슬란드는 대통령이 있고 이들이 국가 원수를 맡는다는 차이점도 설명한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설명으로 나라별 지도 체제의 차이점을 조목조목 짚어줘 이해하기 쉽다. 또 우리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되기 위한 조건, 후보가 된 뒤 펴내는 공약의 의미, 당선자의 역할, 그리고 대통령이 된 뒤 역할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제도를 설명한다. 나아가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등 세계 정치제도의 변천사도 짚어본다. 대통령이란 하나의 키워드로 국내외 정치 상황과 역사를 유기적으로 설명했다. 쉽게 풀어내기는 했지만 초등학생들에게 만만치 않은 내용들이다. 각 장마다 주요 용어들을 풀이한 ‘알쏭달쏭 궁금한 낱말 풀이’, 그리고 배운 것을 문답을 통해 복습할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쉬운 퀴즈’를 넣어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다. 시리즈의 2권 ‘처음 세상이 생겨났을 때’는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각종 신화를 정리했다. 미륵신화 단군신화 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김수로신화 등이 만화와 함께 그려진다. 정치를 다뤘던 1권이 ‘교과서’에 가까웠다면 2권은 ‘동화책’처럼 쉽고 재미있다. 3권 ‘모두 우리나라야!’는 현재 대한민국으로 시작해 일제강점기, 조선시대 등을 거슬러 올라가 고조선까지 다루는 ‘거꾸로 읽는 한국사’. 역대 왕을 중심으로 당시 시대상과 서민생활을 친절히 설명한 게 눈에 띈다. “옛날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아이와 함께 읽기 좋다. 시리즈의 각 권은 주제도 다를 뿐 아니라 글과 그림을 맡은 사람도 달라 별도의 책으로 봐도 무방하다. 당연히 읽는 순서도 상관이 없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내 똥으로 길렀어요!(양혜원 글·박지훈 그림·미래아이)=산골에서 농사짓는 할아버지가 쓰러지신 후 아버지는 친환경농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더럽다고 느껴지는 똥이, 사람도 자연도 살리는 고마운 존재라는 것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동화책. 순박하고 친근한 그림들도 글과 잘 어울린다. 1만 원. 우주비행(홍명진 지음·사계절)=“지금 여긴 별이 없어도 되겠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밤이, 밝다.” 목숨을 걸고 탈북한 승규는 남한의 밤하늘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남과 북의 경계에 놓인 한 탈북 청소년의 혼란스러운 심리를 날카롭게 그렸다. 제10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1만 원. 왕자가 태어나던 날 궁궐사람들은 무얼 했을까(김경화 글·구세진 그림·살림어린이)=조선시대 왕자가 태어난 하루의 궁궐 풍경을 확대해 들여다본 발상이 독특하다. 궁궐 수리와 청소를 맡은 전연사, 궁중음식 관련 관청인 사옹원 등의 바쁜 하루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1만800원. 장수탕 선녀님(백희나 지음·책읽는곰)=동네 목욕탕에 엄마를 따라나선 꼬마소녀 ‘덕지’. 냉탕에서 놀다가 선녀 모습을 한 이상한 할머니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데. 과연 선녀가 목욕탕에 강림한 것일까. 1만1000원.}

두 개의 ‘노래’가 엇갈려 하나의 장엄한 진혼곡으로 태어난 장편소설. 독립된 이야기 두 개가 대위법으로 엇갈려 펼쳐지다가 하나의 점으로 귀결된다. 부당한 권력에 피해를 보고 자유와 행복을 잃은 약자들, 그 처연한 사연이 합일점이다. 1960∼1980년대 혼란했던 사회 속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그린 소설은 많다. 이 작가는 과거 참혹했던 현실에 대한 고발을 신화적 종교적으로 풀어내 색다른 맛을 준다. 형이상학적인 소설 쓰기를 즐겨하는 작가의 색깔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서해가 보이는 궁벽한 산 정상에 수도원이 있다. ‘천산 수도원’ ‘헤브론 성’으로 불리는 이곳은 세상과 단절한 채 신앙생활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 작품은 이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사연을 얽는데, ‘후’와 ‘한정효’의 얘기로 압축할 수 있다. 10대 소년이었던 ‘후’는 그의 사촌누나와 사귀다 차버린 박 중위에게 격분해 상해를 입힌 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들어가고 ‘영성’을 접한다. 우여곡절 끝에 사촌누나를 찾지만 그는 다시 권력자의 아내와 정분이 났다는 이유로 모든 걸 잃게 된다. 한정효는 ‘장군’을 받들어 정권 창출에 기여했지만 ‘억압 통치’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했다가 퇴출당한 뒤 수도원에 감금된다. 시간이 흘러 다시 정권을 잡은 또 다른 장군은 수도원 파괴를 명령하는데…. 고결한 종교나 사랑이 크고 작은 권력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는 과정을 이 작품은 세밀하게 보여준다. 작중 인물들의 고뇌와 번민이 성경 구절들과 맞물리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특히 ‘후’의 고민이 사무엘하 13장, 자기 친동생을 겁탈한 이복형제 암논을 살해한 ‘압살롬’과 연결되는 점은 압권이다. 누이에 대한 복수가 결국은 누이에 대한 남모를 연정에서 나왔다는 것. 이는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에까지 확장된다. 종교와 인간 본성에 관한 고민들이 깊게 배어 있지만 지루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수도원을 둘러싼 비밀을 캐나가는 추리물에 가깝다. 특히 수도원 지하 72개 방에 새겨진 벽서(壁書), 그리고 형체도 없이 사라진 수도사 수십 명의 행적을 쫓는 과정은 마지막까지 흡입력을 잃지 않는다. 다만 모든 미스터리를 풀어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구구절절 설명하는 듯한 기술방식에는 맥이 풀린다. 종교적 환상적 색채가 짙었던 작품의 연무(煙霧)가 순식간에 걷히는 바람에 책의 여운까지 옅어진다. 복잡한 스토리라인 때문인지 책의 말미에 새 장을 시작하며 앞선 줄거리들을 소개했는데 ‘과도한 친절’로 읽힌다. 작품의 진지한 메시지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드라마의 ‘전편 보기’를 보는 듯한 인상이 든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문학 시간 속으로(강인섭 지음·범우)=언론인 출신으로 국회의원, 관훈클럽 총무를 지낸 저자는 등단한 지 54년째를 맞은 시인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관조와 인생에 대한 진솔한 고백을 66편의 시편에 담았다. 1만2000원 다시 만난 어린 왕자(장 피에르 다비트 지음·사람사는세상)=한 여행자가 만난 어린 왕자 이야기가 새롭게 펼쳐진다. ‘어린 왕자, 그 후’랄까. 생텍쥐페리의 순수한 어린 왕자를 가슴 속에 담고 사는 어른들에게 신선한 선물이 될 듯. 1만800원 ○ 인문·교양 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잭 웨더포드 지음·책과함께)=기록과 현지조사를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칭기즈 칸의 딸들 이야기를 복원했다. 칭기즈 칸이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제국을 다스린 것은 그의 딸들이었다는 설명. 1만8000원 전복의 정치학(안토니오 네그리 지음·인간사랑)=저자가 1986년 파리의 학생운동을 목격하고 자신의 자율주의 사유와 운동이 옳았음을 선언한 책.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을 알리고 신자유주의의 빈곤화 전략을 폭로했다. 2만 원 ○ 학술 형이상학 서설(임마누엘 칸트 지음·아카넷)=칸트의 비판철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책.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은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내용을 칸트 스스로 쉽게 간추려 썼다. 2만7000원 오늘날의 토테미즘(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문학과지성사)=인류학의 대가인 저자가 “토테미즘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담았다. 토테미즘은 원시 부족의 것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사고 경향이라는 것. 1만2000원 ○ 실용·기타 Dog: 사람과 개가 함께 나눈 시간들(이강원 외 지음·이담북스)=애견, 수렵견, 양치기 개, 썰매 개, 우리나라 토종견 등 다양한 종류의 개에 대한 정보와 사진을 담았다. 1만2000원 베이징 특파원 중국 CEO를 말하다(홍순도 외 지음·서교출판사)=베이징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 13명이 중국 경제를 움직이는 최고경영자(CEO)들을 심층 취재했다. 1만8500원 한국인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가(박홍관 지음·티웰)=차를 즐겨 마시는 160명을 설문조사해 차 문화를 집중 탐구한다. 2만8000원 코리아 브랜드, 세계를 매혹시키다(김지윤 지음·명인문화사)=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교수, 한식전도사 비빔밥유랑단 등 한국의 전통과 문화가 담긴 국가브랜드를 세계에 알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1만6000원}

《 한국의 ‘토지’가 세계를 품는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의 문학 정신과 업적을 기려 지난해 제정된 ‘박경리 문학상’이 올해 수상 문호를 세계 문인들에게 넓혔다.지난해 5월 구성된 제2회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회는 그동안 각계 추천을 받아국내외 문인들의 작품을 검토했고, 최종 후보를 압축했다.박경리 문학상은 개별 작품이 아닌 작가에게 주는 상이다. 이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작품성뿐 아니라 작가의 인성이나 행적도 주요 심사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해에는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초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수상자에게는 국내 문학상 최고액인 1억5000만 원이 수여된다. 이 상은 재단법인 토지문화재단과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강원도와 원주시, 협성문화재단이 후원한다. 국내 최초의 세계문학상으로 거듭난 제2회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는 다음 달 말 발표될 예정이다. 시상식은 ‘박경리 문학제’ 기간인 10월 27일 오후 3시 강원 원주시 무실동 백운아트홀에서 열린다. 최종심에 오른 후보들 가운데 첫 번째로 러시아의 여류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69)를 소개한다. 울리츠카야는 32개국에 작품이 번역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국내에선 아직 단행본이 나오지 않아 낯선 작가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해설을 도왔다. 》 개혁을 뜻하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1985년 시행된 이후 러시아 문학은 거대 담론의 소멸과 상업화의 위기를 맞는다. 자본주의 제도 도입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명제로 문학과 예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 왔던 러시아로서는 불편한 변화였다. 울리츠카야는 현대 러시아 문학의 희망으로 꼽힌다. 일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 현대인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 풍자와 익살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함께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년 러시아 권위 문학상의 단골 후보이기도 하다. 러시아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는데, 울리츠카야는 그 선두에 섰다. 울리츠카야는 1943년 2월 23일 러시아 중부에 위치한 바슈키라야에서 태어났지만 곧 모스크바로 이주해 성장했다. 아버지는 농기계 전문 기술자였으며 어머니는 생물학자였다. 울리츠카야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유전공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1970년 돌연 해고된다. 국가가 금지하고 있는 ‘불온서적’을 갖고 있다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더이상 정부 기관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1979∼1982년 ‘유럽 실내음악극장’의 문예감독으로 일한다. 이 시기에 그는 어린이 희극, 인형극, 라디오 방송 대본, 희곡 평론 등을 썼다. ‘나는 현대 러시아 작가다’(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2012년)에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독서광이라 할 만한 꼬마였다. 나의 친할아버지, 그리고 작은할아버지는 평생을 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았고, 그들은 엄청난 양의 책을 소유하고 있었다. 책 대부분은 혁명 전에 출간된 작품들이었다. 그때 나는 세르반테스, 오 헨리,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 등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다.” 울리츠카야는 1983년 첫 단편소설 ‘100개의 단추’를 발표했지만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1992년 러시아의 저명한 문예지 ‘노보이 미르’(신세계)에 실린 중편 ‘소네치카’가 주목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이 작품은 ‘소네치카’(‘소냐’의 애칭)란 이름의 여성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생활사적인 증언을 펼쳤고, 한없는 인내와 관용을 미덕으로 하는 러시아 여성상을 보였다. 이 작품은 러시아 최고 문학상으로 꼽히는 ‘러시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이탈리아 주세페 아체르비상, 프랑스 메디치상을 받았다. 울리츠카야는 2001년 장편 ‘쿠코츠키의 경우’로 ‘러시아 부커상’을 여성 작가 최초로 수상했고, 2006년 ‘번역가 다니엘 슈타인’으로 ‘러시아 대작상’을 받았다. ‘번역가 다이엘 슈타인’이 100만 부를 넘기는 등 상업적 성공도 거뒀다. 울리츠카야의 작품에 나타나는 대주제로는 가족과 여성성, 관용과 희생의 휴머니즘, 제도권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천착하는 주제인 ‘가족의 복원’에 대해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간의 성장은 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뤄진다. 소비에트 시대에 그와 같은 가족 개념은 붕괴되었고, 가정의 일상은 국가적 이념에 종속되어야 했다. 내 소설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가족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소설은) 가족과 가정에 대한 나의 진혼곡이라 할 수 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는 30일 인촌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26회째를 맞은 올해 인촌상은 교육, 산업기술, 인문사회문학, 자연과학, 공공봉사 등 5개 부문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사와 학교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는 부문별로 권위 있는 대학교수 등 외부 전문가 4명씩이 참여해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두 달 동안 진행됐다. 수상자들의 소감과 공적을 소개한다. 》 ■ 교육 부문-서울과학고등학교국제올림피아드 3년간 金30개… “혁신에 혁신 거듭한 결과”“사회 일각의 편견과 오해 속에서도 서울과학고는 국제과학올림피아드와 각종 연구대회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모든 면에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한 덕분입니다.” 서울과학고 최병수 교장이 밝히는 학교 발전의 비법이다. 1989년 개교한 서울과학고는 수많은 과학 인재를 배출해왔다. 1993년에는 서울대 전원 합격 신화도 썼다. 위기도 있었다. 과학고 특혜 시비가 나오면서 2000년대 초반 소위 ‘자퇴파동’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핵심 과학인재를 육성해야겠다는 신념으로 버텨내며 위기는 오히려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특히 과학영재학교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학생선발, 교육과정, 인사, 시설, 예산 등 교육 활동 전 부문에 걸쳐 개편을 추진했다. 결과는 눈부셨다. 세계 청소년의 두뇌 올림픽인 국제과학올림피아드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 수학과 물리 분야의 대표가 모두 서울과학고에서 나왔고, 특히 물리에선 대표 5명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올해는 수학 대표 6명 가운데 5명, 물리 대표 5명 가운데 4명이 서울과학고 학생이었다. 수학에선 사상 처음으로 종합 1위까지 차지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학생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해주는 수업 분위기 덕분이죠.” 올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 전체 참가자 가운데 2위를 차지한 김동률 군(15·서울과학고 1학년)이 꼽은 실력 향상의 비결이다. 올해 2월까지 서울과학고를 졸업한 3105명 중 박사 학위 취득자는 522명이다. 이 중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인 졸업생은 131명이다. 개교 이래 국제과학올림피아드 대표로 참가한 서울과학고 학생 수는 240명으로 한국 대표의 44%를 차지한다. 학생의 연구 활동을 강조하는 교육과정도 눈에 띈다. 과학영재학교로 전환된 후 연구 활동과 관련된 이수 학점은 30학점에 이른다. 창의력을 기르는 연구 활동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나타났다. 2009년 이후 매년 국내외 학술지에 10여 편의 논문을 게재하고 있다. 최 교장은 “서울과학고는 단순히 공부만 잘하는 학생을 기르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서울과학고 학생들은 집짓기 봉사활동 등 학년별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졸업생이 중심이 된 교육봉사활동 단체도 왕성한 외부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공적 ▼23년의 짧은 역사에도 탁월한 교육과정 운영과 체계적인 학생지도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과학인재들을 배출했다. 과학 부문의 특수목적고등학교로 시작해 2009년 과학영재학교로 전환했다. 국제과학올림피아드에서 거둔 성과는 단일 고교로는 세계 최고 수준. 최근 3년 동안 금메달만 30개를 따냈다. 무학년 졸업학점제, 연구 중심의 교육과정, 기초학력을 높이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 등은 교육과정을 선도하는 서울과학고만의 특별한 작품들이다. 1999년과 2003년에는 전국과학전람회 대통령상을, 지난해에는 삼성휴먼테크 논문대상 특별상을 각각 수상했다.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 산업기술 부문-권오현 씨 (삼성전자 부회장)한국 반도체산업 성장 주역… “이젠 창의적 혁신으로 리드”“뜻깊은 상을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반도체산업이 국가 기반산업으로 성장해 세계 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는 것은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분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60·사진)은 수상의 기쁨을 반도체업계 전체와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정책을 통해 발전의 토대를 만들어 준 정부와 각 기관에도 감사의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권 부회장은 1977년 이래 줄곧 반도체 산업에 몸담았고, 한국은 그동안 전자산업과 정보기술(IT) 분야의 세계 최대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는 “‘산업의 쌀’이라고 불리는 반도체의 발전이 한국 전자산업을 성장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경쟁력 있는 반도체 기술 확보가 가전제품, 휴대전화 완제품 부문의 성과를 이끌었다”고 말했다.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1992년 메모리 개발팀장으로 64메가D램을 처음 개발한 이후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도 세계 최고 자리를 유지하려면 창의성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두를 추격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업계의 리더로서 창의적인 혁신으로 시장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워크 스마트(work smart)’ 업무 환경을 만들고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권 부회장은 경영 방침을 묻자 “어려울수록 미래를 준비하고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낸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경영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불황기일수록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권 부회장은 세계적인 경기 침체와 경쟁 회사들의 극심한 견제 속에서도 선두 자리를 더욱 굳건히 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도 어려운 환경이 계속될 것입니다. 진정한 글로벌 톱 기업이 되려면 쉼 없는 도전과 혁신이 필요하죠. 지속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켜 경쟁력을 높이고 시장 변화를 파악하는 마켓 센싱(market sensing) 역량을 높여 정면으로 돌파하겠습니다.”▼ 공적 ▼1977년 전자기술연구소(현 전자통신연구원) 반도체 설계실 연구원을 시작으로 35년 동안 한국 반도체산업을 이끌어 왔다.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후 64메가D램(1992년), 256메가D램(1994년), 1기가D램(1996년)의 세계 최초 개발을 주도했다. 1997년 시스템 LSI 제품기술실장을 맡아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고부가가치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를 비약적으로 성장시켰다. 또 2008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회장을 맡아 반도체산업이 2010년 단일 품목으로는 처음으로 수출 500억 달러를 돌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김용석 기자 nex@donga.com ■ 인문사회문학 부문-임형택 씨 (성균관대 명예교수)한문학 가치 재정립 한우물… “한국문학 바탕 한문학 연구”“권위있는 인촌상 수상자로 선정돼 감격했습니다. 제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외람스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인촌 선생은 우리가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언론과 교육 부문에 공적이 큰 분이죠. 당시 양심적인 학자들을 많이 도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훌륭한 분을 기리는 상을 받게 돼 더 뜻깊다고 생각됩니다.”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69·사진)는 한국 문학과 한문학 연구에서 문학이론뿐 아니라 문학사에 탁월한 연구 실적을 남긴 학자로 꼽힌다. 특히 1960, 70년대만 해도 한국 문학에서 철저히 소외된 분야였던 한문학을 체계적인 학문 영역으로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1970년대 한국고전문학연구회와 한국한문학연구회, 1990년대 민족문학사연구소 설립을 이끌며 한문학의 가치 재정립에 평생을 바쳤다. “한문학에는 우리의 엄청난 문화유산이 산적해 있어요. ‘누가 해도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한문학을 따로 특화시키는 것은 바라지 않아요. 한국 문학, 한국 문화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 한문학을 연구해나가는 게 맞습니다.” 임 교수는 한문 단편 소설을 발굴해 소개한 ‘이조한문단편집’(1973년), 한문 서사시의 실체를 발굴한 ‘이조시대서사시’(1994년), 새 가사문학들을 찾아낸 ‘옛 노래 옛 사람들의 내면풍경’(2005년) 등의 저작을 통해 한문학의 살을 찌웠다. 전통적인 실사구시의 학풍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한국학의 질적 수준을 높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학자로서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소설사 부문을 더 정리하고 싶습니다. 또 동아시아 문제를 담론이 아니라 학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임 교수는 최근 영토 문제로 한중일 3국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과 관련해 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했다. “한중일 정치인들의 역할이 크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학자들이 좀더 적극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학자들이 자국주의적인, 혹은 일국(一國)주의적인 입장에서 봐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라는 큰 틀에서 사안을 바라보고 참다운 이성적 대화를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적 ▼서울대 국문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친 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계명대 한문교육과, 성균관대 한문교육과에서 40년 가까이 후학을 양성했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장, 한국실학학회장, 연세대 용재 석좌교수, 한국고전번역원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성균관대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이조한문단편집’ 등 다수의 한문학 저서를 집필했으며 특히 ‘실사구시 한국학’은 ‘동아시아 근대 고전 100선’에 꼽히기도 했다. 도남문학상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만해문학상 다산학술대상 단재학술상 등을 수상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자연과학 부문-김은준 씨 (KAIST 석좌교수)뇌 신경세포 세계적 권위자… “정신질환 연구 진일보 최선”“수상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보다 훌륭한 연구자들이 많은데 제가 수상하게 돼 죄송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잘하라고 주신 상으로 알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김은준 KAIST 석좌교수(48·사진)는 정신질환의 원인을 밝히는 데 있어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뇌 신경세포가 아니라 신경세포의 다리 역할을 하는 ‘시냅스’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1995년 하버드대 연구원 시절에 시냅스를 구성하는 특정 단백질을 최초로 발견해 유명 과학저널인 ‘네이처’에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20여 개의 시냅스 단백질을 추가로 발견해 관련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됐다. 사람의 뇌에는 100조 개가 넘는 시냅스가 있다. 이는 시냅스 단백질을 만드는 유전자 1000여 개의 통제를 받는다. 그는 유전자가 하나라도 잘못되면 신경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뇌 기능에 이상이 생기고 이것이 다양한 정신질환으로 연결되는 인과관계를 알아냈다. 지난해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일으키는 시냅스 유전자를 밝혀내 주목받았다. 올해 6월에는 자폐증을 일으키는 시냅스 유전자를 처음으로 밝혀내 치료제 개발 가능성을 높였다. 자폐증은 세계적으로 7000만 명이 앓고 있지만 발병 원인이 규명되지 않아 근본적 치료가 아닌 증상을 줄이는 약만 나와 있다. 그는 수많은 시냅스 유전자들이 각각 어떤 정신질환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지를 찾고 있다. 만약 여러 정신질환에 연관된 핵심 유전자를 찾는다면 정신질환에 획기적인 치료제 개발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5월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연구단장에 선정됐다. IBS는 10년에 걸쳐 1000억 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그는 “인류가 뇌와 신경과학에 대해 아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며 “국내 다른 연구단과 협력해 신경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그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공적 ▼신경과학 분야 주요 주제인 ‘시냅스’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부산대 약대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부산대 교수를 거쳐 2000년부터 KAIST 교수로 재직하면서 2003년 창의연구단장을 맡았고, 지난해에는 40대 나이로 KAIST 석좌교수에 임명됐다. 5월에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내에 설치되는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단장에 임명됐다. 2004년 ‘젊은 과학자상’과 2005년 ‘생명약학회 우수논문상’을 받았으며 지난해에는 KAIST ‘학술대상’을 수상했다.이재웅 동아사이언스 기자 ilju2@donga.com ■ 공공봉사 부문-이길여 씨 (가천길재단 회장)이웃과 세상을 품는 여의사… “쥐고 있는 것 내려놓았을뿐”“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면 마음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봉사한 것뿐인데 큰 상을 받게 돼 영광입니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사진)의 수상 소감에는 평소 그의 봉사에 대한 철학이 묻어났다. 이 회장은 1959년부터 통통배에 간호사와 미용사를 태우고 서해 낙도를 돌며 의료 미용 봉사를 시작했다. 6·25전쟁의 상흔을 극복하느라 봉사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그가 일찌감치 봉사에 눈을 뜬 것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 전북 군산의 부농이었던 고향집에는 늘 거지들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소반에 밥과 국, 반찬을 정성스럽게 차려 어린 이 회장이 나르게 했다. “거지라도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은 소홀히 대접할 수 없다”는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1968년부터 여성을 위한 자궁암 무료검진을 시작하며 체계적인 의료봉사에 나섰다. 또 건강보험이 없던 시절 환자들이 치료비를 떼먹고 달아날 경우에 대비해 당시 병원들이 받았던 보증금을 없앴다. 그는 “환자들이 치료비 대신 놓고 간 생선과 나물이 병원 마당에 수북하게 쌓였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1982년과 1988년 오지와 다름없던 경기 양평군과 강원 철원군에 양평길병원과 철원길병원을 개원했다. 두 병원 모두 수지를 맞추기 힘들었지만 주민들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 1995년에는 적자에 시달리던 백령도의 적십자병원을 떠맡아 2001년까지 백령길병원을 운영했다. 이 회장의 봉사는 국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991년부터는 해외 어린이 심장병 환자를 무료로 수술하고 있으며, 베트남 꾸이년 시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직업훈련센터를 설립해 자활을 돕고 있다. 이 밖에 그는 시민들이 낸 성금으로 생활형편이 어려운 환자를 돕는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1992년)와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1993년)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또 2010년부터는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와 함께 0∼3세 영아를 위한 육아공동체인 ‘세살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공적 ▼‘이웃과 세상을 품는 여의사’로 불리는 그는 195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인천에서 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한 뒤 반세기 넘게 의료봉사 활동을 계속해왔다. 자궁암 무료검진으로 12만여 명에 이르는 한국 여성들의 건강을 지켰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의료부조운동단체를 세워 4000명이 넘는 환자에게 수술비를 지원했다. 특히 무료 심장병 수술을 통해 세계 13개국 어린이 252명이 새 생명을 찾았다. 이런 공로로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지난해 미국 뉴스위크가 발표한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인’에 선정됐다.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 제26회 인촌상 심사위원▽교육 △위원장: 이돈희 전 교육부 장관 △위원: 권대봉 고려대 교수, 김헌규 동국대 명예교수, 이택휘 연세대 석좌교수▽산업기술 △위원장: 금동화 공학한림원 부회장 △위원: 권오경 한양대 부총장, 김이환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부회장, 이계형 단국대 산학협력 부총장▽인문사회문학 △위원장: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 △위원: 이성규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수 인제대 석좌교수, 홍정선 인하대 교수▽자연과학 △위원장: 백성기 포스텍 전 총장 △위원: 김정회 KAIST 교수, 윤경병 서강대 교수, 이철의 고려대 교수 ▽공공봉사 △위원장: 최성재 한양대 석좌교수 △위원: 김동배 연세대 교수, 양옥경 이화여대 교수, 전광현 서울신학대 교수▽언론출판 △위원장: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위원: 양승목 서울대 교수, 이기웅 도서출판 열화당 사장, 이종석 위암장지연기념회 회장 (가나다순)}

《시인 문정희(65)는 ‘물의 시인’이다. 20여 년 전부터 물에 비친, 물 속에 들어있는 원형적 심상을 시로 풀어내려고 고심했다. 1993년 발표한 박사논문도 ‘서정주의 시 연구-물의 심상과 상징체계를 중심으로’였다. 그가 물의 도시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갔다. 카포스카리대가 초청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한 작가 초청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난해 가을 무렵 3개월을 지냈다.》시인의 눈에 베네치아는 “관능적인 물의 도시이지만, 관광객에게 자신의 비루해진 늙은 몸을 보여주는 ‘창녀’ 같기도 했다”. 그가 베네치아의 습습한 고독과 자발적 유배의 시간을 담아 2년 만에 열두 번째 시집 ‘카르마의 바다’(문예중앙)를 펴냈다. 14년 만의 산문집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다산책방)도 함께 나왔다. 등단 43년째를 맞은 여류시인의 쉼 없는 문학적 정진의 원동력이 궁금해 지난 주말 그를 만났다. 시인은 물에 자신을 이입하고, 결국 물과 하나가 된다. 시를 읽는 독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물과 물이 만나면 결국 물이 되는 것처럼. “물의 원형적 심상은 생명, 정화, 갱생이에요. 물방울 하나에 사랑, 상처, 고통, 모험, 그리고 제 카르마(업보)가 들어있죠. 올림픽 양궁을 보면 화살이 10점 과녁에 들어가는 순간 화살과 과녁, 궁사가 전혀 다른 물질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 같아요. 제 시집을 통해서도 물과 물을 쓰는 저, 그리고 물을 읽는 독자가 하나가 되고 흠뻑 젖었으면 좋겠어요.” 물의 이미지는 ‘눈물’과 ‘바다’로 압축된다. 이들은 수동과 능동, 내향과 외향 등으로 대립되며 다채로운 변주를 이끌어낸다. ‘많은 바다를 건넜지만/눈물을 다 건너지는 못했다//(…)//나는 모르겠다/나는 아직도 눈물을 건너고 있다/눈물이 마르면 눈부시게 하얀 소금꽃이 필 것이다’(시 ‘소금꽃’ 일부) ‘살아 있다는 것은/파도처럼 끝없이 몸을 뒤집는 것이다/내가 나를 사랑하기 위해 몸을 뒤집을 때마다/악기처럼 리듬이 태어나는 것이다’(시 ‘살아 있다는 것은’ 일부) 문 시인은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성격이다. 하지만 “자신이 눈물과 바다 중 어디에 가깝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눈물”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이 저를 ‘바다’로 보지만 사실 ‘눈물’에 가까워요. 고독과 비감 속에서 시를 쓰는 에너지가 나옵니다. 가수 싸이가 ‘싸이와 박재상(싸이의 본명)이 다르다’고 하는 것처럼 시인 문정희와 인간 문정희가 다른 거지요.” 산문집에는 해외 체류 경험을 주로 적었지만 여행기라기보다는 시작노트에 가깝다. 인상 깊었던 순간을 적고, 그 느낌으로 썼던 시를 뒤에 덧붙였다. “제 시가 배태됐던 흙의 이야기를 모았어요. 잡다한 일상보다는 제 시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시인은 고교 때부터 문학 천재로 불리며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쉼 없이 시작 활동을 해온 그는 “저처럼 호기심 많은 사람이 40년 넘게 시만 ‘팠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시를 얻었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미당 선생은 제게 ‘조그만 재능으로 봉우리는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노력이 없으면 산맥은 만들 수 없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를 쓰는 손이 무르익어 숙수(熟手)가 된 것 같아요. 제게 허락된 남은 시간 동안 시를 여한 없이 쓰고 싶어요.”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출판계 사재기 감시기구인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는 소설가 겸 수필가 남인숙의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자음과모음)에 대해 ‘사재기 의심’ 결정을 내렸다. 센터가 서점들로부터 구매 기록을 받아 살펴본 결과 여러 사람이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이 책을 구매해 동일 주소지에서 받아본 것이 확인됐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이 책은 주요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다. 출판사는 “사재기는 없었다”고 강력히 부인했지만 곧 과태료 처분이 내려질 예정이다. 윤철호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 운영위원장은 “사재기를 부인한 출판사에 과태료를 부과한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도서 사재기는 출판사가 자신의 책을 다량으로 구입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림으로써 판매를 촉진하는 것으로,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과태료 최고 1000만 원이 부과되는 엄연한 불법 행위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재발하는 출판계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키 작으면’ 사재기했던 책?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는 2008년 9월 출범 이후 현재까지 총 8건의 사재기 의심 사례를 적발했고 이 중 5건에 과태료를 부과했다. 지난달 과태료 상한선이 1000만 원으로 인상되기 전에는 300만 원이 최고액이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일단 베스트셀러에 올라가면 최소 1만 부가 나가도 순이익이 2000만 원가량 되니 과태료는 ‘껌값’에 불과하다”고 말했다.본보는 출판사 대표, 영업부장들로부터 사재기 실태를 들어봤다.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대형 서점을 돌며 책을 한 권씩 구입하는 ‘방문 사재기’의 경우 한 사람이 딱 한 권만 산다. 서점들이 사재기를 막기 위해 한 명이 여러 권을 사도 판매 집계에는 한 권만 적용하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이렇게 사온 책들을 서점의 비표(도장)를 지워 다시 출고한다. 특수 약물을 써서 지우기도 하고 얼룩이 남으면 절삭기를 이용해 2∼3mm씩 잘라내기도 한다. 한 출판사 대표는 “서점에서 동일한 책들 가운데 살짝 ‘키가 작은’ 책은 사재기 후 다시 출고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 독서카페 서평 이벤트도 이용일부 인터넷 ‘독서카페’나 ‘서평카페’에서 열리는 서평 이벤트도 이용한다. 누리꾼들이 책을 산 뒤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출판사가 책값을 입금한다. 회원은 공짜 책을 얻고, 출판사는 매출을 올리면서 독자 서평까지 챙긴다. 이들을 연결해준 독서 카페 운영자들이 출판사로부터 수수료를 챙기기도 한다. 사인회도 마찬가지다. 독자 외에도 서점 직원들이 사인을 받는데 이는 출판사가 해당 서점에서 구매한 책들이다. 단속과 엄포에도 불구하고 왜 사재기가 근절되지 않을까. 한 출판사 관계자는 ‘최소비용 최대효과’를 이유로 꼽았다. 정가 1만 원짜리 책을 사재기할 때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입하면 10% 할인을 받아 9000원에 살 수 있고, 책은 다시 6000원을 받고 재출고할 수 있다. 결국 3000원만 쓰면 1만 원짜리 책 한 권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셈이다. 한 대형 서점 관계자는 “1분 단위로 판매량의 이상 증가를 살피는 등 여러 사재기 방지책을 내놓았지만 지능적으로 변하는 사재기를 미리 차단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

고장으로 가동이 중단된 원자력발전소가 생기면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 가동이 중단될 때마다 ‘원전의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으며 방사능 누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왔다. 세계 6번째의 원전 수출국인 우리나라의 기술력은 세계적인데, 국민들은 점점 불안해한다. 우리는 원자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1960년대에 벌써 ‘현대인이라면 원자력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광고가 있어 인상적이다. 학원사의 ‘원자력 교실’ 책 광고(동아일보 1960년 7월 16일)는 “원자력에 대한 지식은 현대인의 필수과목”이라며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썼다. 미국 브룩헤이번 연구소의 D J 휴스 박사의 ‘On Nuclear Energy’를 서울대의 조순탁(趙淳卓·1925∼1996) 교수가 번역한 책으로 국판 250쪽이었다. 광고에서 “원자력의 원리와 평화적 이용의 가능성을 설파한 쾌저!”라고 설명하며 초기의 원자로 형태를 제시한 점도 눈길을 끈다. 학생, 교사, 지식인이라면 원자력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원자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최근 명지대 연구팀은 원자력 안전 신뢰지수가 100점 만점에 51.67점이라고 발표했다. 동아일보 조사(2012년 3월 8일)에서는 65.9%가 원전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안전성에는 35.2%밖에 동의하지 않았다. 원자력 안전에 대해 신뢰하는 정도를 이성적·감성적 태도로 알아본 것이니 지식의 정도에 관계없이 평소 느낌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수원은 신뢰를 회복하고 소통하는 방안을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 “주인이 보기에는 반병밖에 안 남았네. 손님이 보기에는 반병이나 남았네.” 유명한 시바스리갈 광고 카피다. 반쯤 남은 술에 대한 생각도 입장에 따라 다르듯, “원전, 얼마나 안전해야 충분히 안전한가?”(제무성 한양대 교수)라는 원자력계의 오래된 화두 역시 견해차가 크다. 원자력 관련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선입견에 따라 부정적 편견을 갖는 분들도 있다. 모두가 원자력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겠지만 객관적인 가치 판단을 하려면 최소한의 공부는 해야 한다. 비판을 위해서라면 더욱더.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내달 9일부터 15일까지 경북 경주시에서 제78차 국제 펜(PEN)대회가 열린다. 한국에서 24년 만에 열리는 이번 행사에는 90여 개 나라 문인 250여 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개성 강한 예술인이 모이는 만큼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과정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나오고 있다. 아프리카 빈국의 한 펜 회원이 한국행 비자를 신청하자 현지 한국대사관은 펜클럽 한국본부에 ‘신원보증’을 요구해왔다. 펜대회 이후 한국에 불법 체류할 것을 의심해서다. 한국본부는 대사관에 초청장과 함께 신원 보증까지 해줬고, 결국 비자가 발급됐다. 펜클럽 한국본부는 대사관의 우려가 지나쳤다고 보기만은 힘들다고 밝혔다. 한 동남아 국가 회원들의 참가 접수과정에서도 불법체류가 의심됐기 때문. 이 나라 펜클럽에서는 회원 10명이 한국행을 신청했는데,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지 않은 사람이 2명 있었다. 한국본부는 해당 나라의 펜 회장에게 “한국에 들어온 뒤 회원들의 이탈을 막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유럽 일부 나라 회원들은 “유럽발 경제위기로 경비를 마련하기 어려우니 한국본부에서 경비를 지원해 달라”며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빠듯한 예산에 고민하던 한국본부는 지원이 어렵다며 양해를 구했고, 이 유럽 회원들은 이후 ‘자비로 오겠다’고 전해왔다. 한국본부 측은 “다른 나라도 문인들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한국 경제가 발전한 것을 알고 경비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펜대회 경비는 원칙적으로 회원이 자비로 부담해야 하지만 한국본부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39개 저소득 나라의 회원에게는 항공료를 지원하고 있다. 강대국 펜 회원들 위주로 대회가 치러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여유로운’ 초청자들도 있다. 프랑스의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나이지리아의 월레 소잉카,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 3명이다. 이들은 2만 달러(약 2270만 원) 이상의 기본 초청료에 비즈니스 좌석 이상의 왕복 항공권, 호텔 스위트룸을 보장받고 대회에 참석한다. 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동행하는 여자친구 경비까지 부담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한국본부가 난색을 표하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황인찬 기자 hic@donga.com}

현대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미래에 대한 불안들이 조금씩 현실로 드러나는 듯하다. 나라의 살림살이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데, 나의 삶은 윤택함을 잃어간다. 부모들은 노후 준비를 미루고 아이들에게 투자하지만, 아이들은 점점 치열해져 가는 경쟁 속에서 방황하기 일쑤다. 사회 밑바닥 깊이 드리운 불안과 공포, 강박…. 이 작가는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통해 다시금 우리를 찾아온 세기말적 징후를 짚어낸다. 표제작 ‘하루’는 너울처럼 울렁이며 차오르는 사회 불안의 한 점을 핀셋으로 딱 집어낸다. 절망 속에서 분별력을 잃고 스스로 파멸해가는 인간들을 현미경의 재물대에 올려놓고 확대한다. ‘사체’는 이렇다. 어느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여자가 아기를 차에 두고 급하게 은행 일을 보는 사이, 불법 주차됐던 차는 견인되고, 아이는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다. 해고 통보를 받은 회사원은 술을 마시고 자신의 집 아파트 뒷산에 올라간 뒤 이튿날 시신으로 발견된다. 우연한 사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여자의 남편이 숨진 남자에게 해고통보를 한 직장상사라는 점을 비롯해 인물과 사건들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하고 순환시킨다. 결국 우연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본인의 불행만을 생각하지만 시야를 넓히면 이런 불행들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더군다나 반복된다. 피와 눈물로 점철된 인류사가 결국 누군가가 보낸 불행한 하루의 집합이라는 시선이 날카롭다. 작가는 단편 ‘얼룩’에서 시간 개념을 잃고 심지어 은행계좌나 전화번호 등 각종 숫자까지 망각해가는 여자의 혼란을 통해 현대인의 강박을 짚어낸다. 단편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에서는 변두리 라이브 클럽의 여가수와 클럽 주인의 자살을 통해 ‘피아노의 검은색, 흰색 건반처럼 미치거나 혹은 죽는’ 절박한 선택에 놓인 사람들 얘기를 그린다. 이 단편들은 하나같이 죽은 자 곁에 있거나 스스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조명한다. 정상과 비정상, 굴복과 저항, 과학과 소설 등의 개념들을 대립시키며 독자로부터 끝없는 각성과 자성을 요구한다. 작가는 ‘동의 없이 태어나 허락 없이 불시착’한 현대인들의 방황과 절망을 그리지만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 모두를 아는 것’이라며 연대의 손길을 내밀기도 한다. 세상을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거대한 변화도 결국 ‘하루’에서 시작된다. 나의 하루를 바꾸고, 타인의 하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드는 책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