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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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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관원이 숨긴 무기 찾아낸 이순신, 선조의 ‘수군 철폐령’ 거부

    “주사(舟師·전선)가 너무 적어 왜적과 맞설 수 없으니 경은 육전(陸戰)에 의탁하라.” 조선 조정의 선전관 박천봉이 이순신에게 들고 온 선조의 유지(有旨)였다. 1597년 8월 15일, 전남 보성군 열선루(列仙樓)에서 임금의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그날 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누대 위에서 술에 크게 취했다.(‘난중일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지시를 받은 이순신은 맨정신으로는 버텨내기가 어려웠다. 수군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지 12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1597년의 한가위는 조선 건국 이래 가장 슬픈 보름달을 맞이한 날이었다. 휘영청 달 밝은 그날, 전북 남원성에서는 1만 명의 백성과 조명(朝明) 연합군이 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죽어갔다.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에서도 조선 관군과 백성들이 전멸했다. 바로 이날, 수군 철폐령이 이순신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순신은 선전관에게 선조의 유지 작성 당시(8월 7일) 영의정 유성룡의 행방을 물었다. “영상(領相·영의정)은 경기 지방으로 나가 순행 중이십니다.”(‘난중일기’) 이순신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 유성룡이 조정에 있었다면 수군 철폐령이라는 어이없는 결정이 내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순신이 배도 없고 병사도 없이 수군을 재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육지의 관군들조차 공황 상태에 있었다. 7월 16일 칠천량 해전의 패전 소식이 알려지자 당상관급 무관들조차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달아나거나, 관직에 제수된 뒤 임지에 부임하지 않고 일부러 파직을 자처하는 등 몰염치한 행태를 보였다.(‘선조실록’) 그러니 이순신더러 육군에 참여해 기여하라는 거였다. 선조의 명령, 목숨 걸고 거부해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단했다. 순천의 낙안읍성에 들렀을 때 자신을 보기 위해 5리 근처까지 길을 가득 메운 백성들의 절절한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길가에 늘어서서 집에서 빚은 술을 다투어 바치던 마을 노인들의 눈물을 도저히 외면할 순 없었다.(‘난중일기초’)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할 자신감이 있었다. 8월 3일 통제사로 복직된 이후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순신이 8월 8일 순천읍성에 도착했을 때는 청야책(淸野策)에도 불구하고 소각되지 않은 관사의 병기(兵器)류를 대거 확보할 수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순천을 떠나면서(8월 6일) 이곳만은 청야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남원성 북문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이복남은 이순신이 반드시 순천을 찾을 걸로 예상해 무기를 남겨두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순신은 순천에서 획득한 장전(長箭)과 편전(片箭) 등 활과 화살, 화약 등을 군관에게 져 나르게 하고, 총통 등 운반하기 어려운 무기들은 훗날 쓰기 위해 깊이 묻어두었다.(‘난중일기’) 천운은 또 따랐다. 그의 처(상주 방씨)의 고향인 보성에서는 식량까지 확보했다. 보성 고내마을의 조양창에서 봉인을 한 채 온전히 남아 있는 군량미 600섬을 발견한 것이다. 장정 600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었다. 진주에서 15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이순신이 호남 지역에 들어가 병사들을 모아 나가면서 8월 9일 보성에 도착했을 때는 정예병만 12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과거 호남의 백성들은 한번 수군에 차출되면 죽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여겨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을 ‘귀신굴(鬼窟)’이라고 불렀다.(‘선조실록’) 전사한 수군 가족을 둔 백성들은 통제사 이순신을 원망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칠천량 해전 패전으로 호남이 쑥대밭이 되고, 왜군들의 무차별 살육 행위를 직접 당한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수군에 지원했다. 거기다 칠천량 해전에서 빠져나온 배설의 판옥선도 해상에서 인수하기로 날짜까지 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결국 이순신은 열선루에서 선조에게 보내는 장계를 올렸다. 명령 불복종을 싫어하는 선조의 노여움을 사 죽음을 부를 수도 있는 장계였다. “지금 수군을 전폐시키는 일이야말로 적에게 다행한 일입니다. 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매우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않아 적이 감히 저를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이분의 ‘충무공행록’)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며 피를 토하듯 수군 철폐령을 반대한 글이 바로 이 장계였다. 기자는 이순신이 이례적으로 9일간(1597년 8월 9∼17일) 머물렀던 보성의 열선루 흔적을 찾아보았으나,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원래는 보성군 객관 북쪽의 옛 취음정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뒤를 밟아온 왜군이 후에 이순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보성읍성과 열선루, 보성향교 등을 불태워 없애버린 것이다. 열선루는 전란이 끝난 뒤인 1610년 복원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같은 이유로 다시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이 들어서 있다. 몇 해 전 청사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발굴된 열선루의 주춧돌과 댓돌들이 현재 군청 앞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보성군은 보성읍 보성리 신흥동산 일원에 열선루를 중건할 계획이며 그때 이 돌들을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다. 이순신의 장인 방진이 머물렀던 옛 보성군수 관사 자리는 ‘방진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돼 있다. 이순신은 명궁(名弓)으로 이름난 방진(1530년경 보성군수) 밑에서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무과 시험을 준비했다. 보성은 이순신으로서는 각별한 애정이 있는 고장이었다. 8월 17일, 마침내 이순신은 결전지로 선택한 전라우수영 해역으로 출발했다. 그가 떠나는 날 보성의 백성들은 “이야(李爺·이순신을 존경해 부르는 초칭)! 이야! 어버이여!”를 연호하며 눈물로 응원했다. 이순신은 보성의 해안가 마을(군영구미)에서 지방민이 제공한 향선(鄕船) 10여 척에 식량과 무기를 싣고 바다로 나가 이튿날인 18일 장흥 회령포(회진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수군에 제일 중요한 판옥선을 인수받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빠져나온 배설의 판옥선과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이끄는 배 등 모두 13척의 배를 수습했다. 그제야 이순신은 “이제 됐다”고 한숨을 돌렸다. 8월 3일부터 8월 18일까지 16일간 300여 km의 육지 대장정은 여기서 마무리된다. 민심과 군심을 수습하다 사실 후대의 군사 전략가들은 한산대첩 등 혁혁한 승전보다도 13척의 배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기까지의 이순신 행보에 더 비상한 관심을 둔다. 불과 달포 남짓한 기간에 병력, 무기, 식량 등에서 전력 제로 상태의 수군을 어떻게 재기시켰는지가 연구 대상인 것이다. 더구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조선수군을 재건하려 한 이순신은 조정의 지원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혼자 힘으로 수군을 일으켜 세워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무엇보다도 민심을 얻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정식 병력 조달 체계가 무너진 가운데서 사방으로 흩어진 군사들과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려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과 신념을 주어야 했다. 이 점에서 전승(全勝) 신화를 기록해온 이순신은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백성들에게 각인돼 있었다는 게 주효했다. 피란민들은 향선에다 짐과 식량 등을 싣고서는 이순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순신이 “대적이 바다를 뒤덮고 있는데 너희들은 어쩌자고 여기에 있는가?”하고 묻자 피란민들은 “저희들은 다만 사또만 바라보고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하고 대답했다.(이분의 ‘충무공행록’) 피란민들은 이순신과 같이 있을 때가 제일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피란민들에게서 군사들을 먹일 식량과 옷 등을 제공받는 대신 피란민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했다. 전투를 치를 때는 피란민들을 먼저 대피시켰다. 이순신과 피란민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굳은 신뢰와 상생 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백성을 동요시키는 유언비어를 특히 엄격히 다루었다. 8월 25일 이순신이 어란포(전남 해남군 송지면)에 머물 당시 포작(鮑作·어업을 위주로 삼아 연안을 떠도는 유랑민)들이 “왜적이 왔다”고 허위 경보를 알렸다. 방목 상태의 소 두 마리를 훔쳐 잡아먹기 위해 사람들의 이목을 분산시키려 벌인 사기극이었다. 이순신은 즉시 포작 2명을 잡아들여 목을 베어 효시했다. 그제야 군중심리가 크게 안정됐다.(‘난중일기’) 이순신은 무너진 군 기강을 바로 세우는데도 역점을 두었다. 도피한 각 고을 수령들을 불러내 질책하면서 이들이 조선 수군의 후방 기지가 되도록 엄격히 관리했다. 장흥에서는 군량을 훔쳐가 관리들과 나누어 가지려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하급관리)를 붙잡아 중한 장형(杖刑)으로 다스렸다. 회령포만호가 사사로이 판옥선을 빌려주고 물건을 받자 곤장 20대로 치도곤을 먹였다. 휘하 부하가 명령을 잘 수행하지 못해도 가차 없는 곤장 세례가 이어졌다. 이순신은 군기와 군령에 있어서만큼은 지옥사자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왜군 “조선수군을 소탕하라” 이순신이 전투 준비를 끝낼 무렵,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군들도 포로 등을 통해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지휘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 일본 수군은 하동과 구례에 정박해 있던 배를 타고 해상에서 조선 수군을 완전 소탕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칠천량 해전의 승리가 일본 수군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왜장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임진왜란 당시 당포해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에게 목을 베인 형(구루시마 미치유키)의 복수를 위해 이순신을 잡겠다고 별렀다. 구루시마 형제는 일본 시코쿠(四國)의 이요(伊予) 지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해적왕 출신이었다. 이순신은 이진(해남군 북평면, 8월 20일), 어란포(해남군 송지면, 8월 24일), 장도(해남군 황산면, 8월 28일),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8월 29일) 등으로 끊임없이 이동했다. 수군 진영을 구축하고 왜군과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옥죄어오는 왜군을 교란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뒤를 바짝 쫓았다. 이순신이 3일간 토사곽란으로 심하게 아파 23일까지 머물렀던 이진에는 사흘 뒤인 26일 일본 수군이 들이닥쳤다. 일본 수군은 정찰선인 고바야를 한두 척에서 열 척이 넘는 규모로 편성해 끊임없이 이순신의 수군 능력을 확인하려고 했다. 때로는 야간 기습으로 조선 수군의 자체 붕괴를 노리기도 했다.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야간기습으로 제대로 싸우지 않고서도 조선 수군을 크게 이긴 경험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조선 수군은 야습까지 포함된 연속된 공격을 번번이 격퇴했다. 8월 28일 어란포에 8척의 일본 전선이 기습해오자, 이순신은 해남 땅끝 마을 앞바다까지 추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칠천량 패전 이후 처음으로 왜선을 물리친 ‘어란포 해전’이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면서 깃발로 진두지휘해 칠천량 패전 이후 겁을 먹은 조선 수군들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었다. 또 9월 7일 13척의 일본 정예 함선이 벽파진에서 야간 기습 공격을 해왔을 때는, 이순신이 대비하고 있다가 판옥선을 지휘해 지자포(地字砲) 포격으로 적선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물론 일본 수군 지휘부도 이순신의 판옥선이 불과 13척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는 수확이 있었다. 1000척이 넘는 전선을 보유한 왜군은 아무리 이순신이 있다 하더라도 전력 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인 조선군과 싸워서 이길 만한 싸움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1597년 9월 16일의 명량해전을 알리는 서전은 장식되고 있었다. 보성·순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QR코드로 지난 연재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동아닷컴() 홈페이지에서 ‘정유재란’이라는 검색어로도 가능합니다.}

    • 201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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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탯줄 보관과 신생아의 앞날

    이른바 ‘VIB(Very Important Baby)’ 시대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할 정도로 저출산이 심각한 상황이니 아기 탄생이 사회적으로 너무도 반가운 시대다. 신세대 부부들도 새 식구를 환영하는 데 지출을 아끼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만혼과 난산 등으로 어렵게 아기를 얻은 부부들은 다양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출산을 기념한다. 이들은 신생아의 탯줄부터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아이를 쏙 빼닮게 만든 수공예 인형 속에다 탯줄을 보관하는 ‘탯줄보관인형’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실내 인테리어를 염두에 둔 다양한 탯줄 보관용 도장, 액자 등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귀하게 얻은 아이인 만큼 탯줄을 남다르게 기념하고 싶은 마음일 게다. 탯줄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트렌드가 풍수인 입장에서는 반갑기도 하다. 병원에서 받아온 탯줄을 냉장고 속에 넣어두고 까맣게 잊고 지내거나, 버리기에는 찜찜해 처치 곤란한 대상쯤으로 여기는 것보다는 훨씬 바람직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탯줄은 기념품 보관 차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산모와 신생아를 연결하는 태(胎·탯줄)를 생명체 혹은 영성이 깃든 존재로 보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현명하고 우둔함(賢愚), 잘될지와 못 될지(盛衰)가 모두 태에 달려 있으므로 신중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풍수서 ‘태장경(胎藏經)’의 가르침이다. 탯줄을 어떻게 보관하느냐에 따라 신생아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태장경은 고려 때 국가공인 지관(地官)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 과목 중 하나일 정도로 중시됐다. 고려뿐만 아니다. 조선 왕조에서도 왕자와 공주 등 왕족의 탯줄을 보관할 때 태장경을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했다. 태장경은 구체적으로 탯줄을 명당 길지에 묻어서 보관하면 태주(胎主·탯줄 당사자)의 무병장수를 보장한다고 가르친다. 게다가 남아일 경우 총명해서 학문을 잘 닦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으며, 여아의 경우는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며 뭇사람의 존경을 받게 된다고 한다. 신체의 일부인 탯줄을 길한 곳에 묻으면, 그에 감응한 태주 역시 좋은 기운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다. 이를 풍수에서는 동기감응(同氣感應)이라고 한다. 탯줄을 적극적으로 관리한 조선 왕실은 왕자와 공주의 태실(胎室·탯줄을 묻어놓은 곳)을 ‘태봉(胎峯)’이라고 이름 붙이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금지했다. 심지어는 태실을 이장까지 했다. 임금이 즉위하면 세자나 왕자 시절 묻었던 태를 꺼내 더 좋은 명당을 골라 이장하는 것을 아예 예법으로 정해 놓기까지 했다. 14대 임금 선조는 세 차례에 걸쳐 좋은 터를 물색한 끝에 충청도의 임천에 자신의 태를 묻기도 했다. 조선의 사대부 사회에서도 탯줄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졌다. 태를 불에 태우거나 잘 말린 뒤 태항아리에 넣어 묻어두었다. 지방에 따라서는 집의 마당 혹은 정원의 나무 밑에다 고이 묻어두거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강물에 흘려보내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모두 탯줄을 신성시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탯줄을 묻는 행위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선조수정실록’에는 “태경(胎經·태장경)의 설이 시작된 것은 신라·고려 사이인데, 중국에서 있었던 일은 아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우리 고유의 풍습이자 풍수설이란 말이다. 실제로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태어난 충북 진천의 태령산(胎靈山) 정상에는 김유신태실(사적 제414호)도 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탯줄을 높은 산에 묻었는데, 지금(고려)도 그 산을 태령산이라 한다”고 기록했다. 우리 전통의 ‘탯줄 풍수’를 현대사회에서 그대로 따라 행하기란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산모의 태반을 통째로 내주지도 않거니와, 태실을 설치할 만한 장소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 대신 신생아의 배꼽에 달려 있던 손가락 크기만 한 탯줄이나마 아이의 미래를 위해 활용해 볼 여지는 있다. 아이의 정서적 뒷배가 될 수 있는 장소를 골라 탯줄을 묻어두는 방법이다. 지방의 선산도 좋고, 아이가 자라서 추억할 만한 명소도 좋다. 물론 태를 묻는 곳이 명혈(明穴)과 길지(吉地)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나, 최소한 수맥파나 살기만 피한 곳이라도 괜찮다. 태실이나 봉분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만 한 항아리나 도자기 속에 탯줄을 넣어 땅속에 묻어두므로 자연을 훼손할 일도 없다. 그렇게 태를 묻어둔 곳이 바로 아이의 고향이 된다. 병원에서 태어난 아이지만 자랐을 때 “너의 태는 어느 산에 묻혀 있다. 너는 그 산의 정기를 이어받고 있다”고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삶에서 자부심과 함께 자연과의 유대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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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직후 달라진 이순신, 선조 향해 망궐례 한차례도 안해

    “맑음. 이른 아침에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가져왔다. 유지 내용은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삼가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은 진양(진주)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의 사랑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았다. 그해 4월 1일 한양의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을 한 지 꼭 4개월 만의 복직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전멸당했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선조와 대신들은 이순신 복귀 외에 대안이 없었다. 이순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선조는 유서에서 “근자에 경을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고 죄를 지은 채 종군하도록 처벌한 것은 사람(선조)의 꾀가 두텁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패배의 욕됨에 이르렀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를 반복했다. 특히 선조는 “특별히 경을 상중(喪中)임에도 일으켜 세운다”고 강조했다. 이순신이 모친상을 이유로 직첩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조선의 관리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벼슬을 내려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이는 관례이자 원칙처럼 준수됐다. 임금이 관직 제수 명령을 내려도 신하가 떳떳하게 거부할 수 있었고, 임금도 어쩌지 못했다. 당시 이순신은 어머니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백의종군 중이었다. 전라좌수영(여수)에 머물던 어머니 변씨가 옥중의 아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83세의 노구를 이끌고 배편으로 아산으로 올라오다가 병이 들어 선상에서 숨진 게 4월 13일이다. 이순신이 고향 아산집에 어머니의 시신을 남긴 채 금오랑(金吾郞·의금부 도사)의 독촉에 못 이겨 남쪽으로 길을 떠난 건 4월 19일의 일이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다가 이미 죄가 여기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어버이 또한 돌아가셨구나.”(이분의 ‘충무공행록’) 대성통곡하며 길을 나선 이순신은 공주-여산-전주-임실-남원-운봉-구례-순천-하동을 거쳐 합천에 당도했다. 오늘날 서울에서 출발하는 전라선과 엇비슷한 노선인 1600리(640km) 길이었다. 그렇게 ‘백의종군의 길’을 나선 지 3개월 만인 7월 18일 새벽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참패 소식을 들었다. 감옥에서 상했던 몸이 덧날 정도로 큰 충격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수군이 전멸한 상황에서 왜적의 총칼로부터 더 이상 조선을 지켜낼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날 낮 이순신이 머물던 민가로 권율이 찾아왔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쩌겠소.”(‘난중일기’) 권율은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 결국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이순신은 “내가 직접 연해 지방에 가서 듣고 본 뒤에 결정하겠다”(‘난중일기’)며 송대립, 이희남 등 전라좌수군 출신의 군관 9명과 병사 6명만 데리고 길을 떠났다. 권율의 비공식 참모 자격으로 남쪽 연해안으로 달려가 피해 상황을 확인하며 대책을 모색했다. 그러던 중인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은 것이다. 상중과 조선수군 궤멸이라는 상황 속에서 이뤄진 이순신의 복귀는 정유재란의 흐름을 180도 바꿔놓는 결정적 전환점이 된다. 당시는 왜군이 칠천량 해전 승리 이후 영호남 내륙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상황이었다. 세계전쟁 사상 비근한 예를 찾기 힘들 잔혹한 양민 학살이 시작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결국 그 후 이순신은 전사(戰死)하는 날까지 16개월에 걸쳐 불꽃같은 삶을 살며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던 조선의 운명을 건져 올린다. 최근 일각에서는 이순신이 과대 포장됐다는 주장을 편다. 1960년대 군사 정권이 이순신을 의도적으로 영웅화시켜 권력 강화에 이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 공방의 결론을 미리 내리기보다는 이순신을 역사적 사실 그 자체로만 파고들어가 보면 대답은 분명하게 나올 것이다.간발의 차이로 이순신을 놓친 왜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수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선 호남에서 병력과 전선(戰船)의 확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순신은 진주 손경례의 집에서 출발해 밤을 새워가며 호남 쪽으로 달려갔다. 당시 전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미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선인 섬진강변은 왜선들로 가득 찼다. 8월 2일 왜선들은 섬진강 입구에 도착해 있었고(‘조선일일기’), 8월 6일에는 왜선들이 북상해 하동 악양까지 올라와 정박해 있었다. 남해 바다로부터 50∼60리 사이에 왜선이 가득 차서 마치 바다가 물이 없는 듯했다.(‘난중잡록’) 게다가 육로로도 일본 육군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이순신이 진주에서 삼도수군통제사 교서를 받던 8월 3일, 진주 인근의 밀양, 김해, 진해, 거제의 길은 왜군들로 인해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순신이 교서를 받드느라 진주에서 하루이틀 더 머물렀다면 꼼짝없이 시마즈 요시히로 군에게 포위당할 뻔했다. 왜군 중에서 가장 부대 이동이 빠르기로 소문난 시마즈 군이 5일 진주와 섬진까지 진격해왔기 때문이다.(‘난중잡록’) 이순신은 밤을 새워가며 말을 달려 8월 4일 날 샐 무렵 하동 두치(현재 두곡마을)의 섬진강변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을 건너 바로 호남의 순천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왜군 구로다 나가마사 군이 하동과 순천 사이의 광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었던 듯하다. 이순신은 대신 북상해 석주관을 거쳐 8월 4일 저녁 나절에 구례현에 도착했다. 구례는 텅 비어 있었다. 일본군이 몰려온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미리 산속 등지로 도피해버렸다. 이순신은 구례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5일 더 북상해 곡성으로 향했다. 바로 그 이틀 뒤인 7일 왜군은 이순신이 북상했던 길을 그대로 밟아 구례까지 들어와 점령했다. 구례현 안팎이 모두 폐허로 변했다. 왜군들은 이순신의 존재를 모른 채 이순신의 뒤를 쫓는 ‘기묘한’ 행보를 했던 셈이다. 당시 왜군들은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고 판단해 수군과 이순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게 천만다행이라고나 할까. 이순신을 따라나선 백성들 이순신이 도착한 곡성 역시 관사와 마을이 비어 있었다. 곡식과 물자를 모두 파기해버리는 조선 조정의 청야책(淸野策)이 이순신을 곤혹스럽게 했다. 군량미와 무기 등 물자를 확보할 수 없었다. 6일 곡성 옆의 옥과에 이르니 피란민이 길에 가득했다. 순천과 낙안, 구례에서 왜군을 피해 온 백성들은 길에 쓰러진 이들을 서로 부축해가며 걷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우리들은 이제 살았습니다.”(‘난중일기’) 이순신을 알아 본 피란민들이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했다. 회화나무 정자(大槐亭) 앞에 피란민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이순신은 피란민 사이를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옥과현청으로 향했다. 그의 종사관이었던 정사준과 호위군관 출신의 정사립 형제가 마중 나왔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함께 해전을 누비며 한산대첩 당시 거북선 돌격장을 맡았던 이기남도 순천에서 찾아왔다. 조응복, 양동립 등도 합류했다. 피란민 가운데 젊은 장정들도 수군에 들어오겠다며 자발적으로 찾아왔다. 장정들은 처자에게 “대감이 오셨으니, 이제 너희는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감을 따라가겠다”며 결의를 다졌다.(이분의 ‘충무공행록’) 이순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군관 9명과 병사 6명으로 시작한 이순신의 군대는 옥과를 떠나 순천에 도착할 무렵에는 60여 명의 장졸로 불어났다. 이순신의 얼굴에서 모처럼 여유와 자신감이 묻어났다. 이제는 무기와 전선 확보가 문제였다.이순신이 진정으로 섬긴 대상은? 이순신이 자신을 하옥시키고 죽음 직전까지 내몬 선조의 복직 명령을 순순히 받들고, 이미 전멸상태인 수군 재건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근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임금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음이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순신은 의금부 감옥에 갇힌 이후 편견과 의심으로 가득한 선조에 대해 예전과 달리 생각했다는 게 ‘난중일기’에서 엿보인다.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후 1596년 12월까지 매달 초하루 아니면 보름에 망궐례(望闕禮)를 그르지 않고 행해 왔고 이를 일기에 반드시 남겼다. 망궐례는 외직에 있는 신하가 새벽에 일어나 임금이 있는 궁궐 방향을 향해 절을 하는 행사였다. 일종의 충성을 다짐하는 의례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통제사로 복직한 이후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사망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망궐례를 치렀다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 전 임금의 제삿날은 일기에서 챙기면서도(‘난중일기’ 1597년 7월 1일 인종의 제삿날), 현 임금에게 충성을 다지는 행위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순신이 역심(逆心)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순신은 중국 역사서인 ‘송사(宋史)’를 읽고 “신하가 몸을 던져 임금을 섬겨야 하는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독후감을 남겼다.(‘난중일기’ 1597년 10월 8일) 무신이면서 문신 성향이 강했던 이순신은 틈날 때마다 역사서를 읽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읽어보니 개탄스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난중일기’ 1596년 5월 25일)고 했다. 또 다른 기록도 있다. “새벽에 진을 한산도(韓山島) 망하응포(통영 하포리)로 옮겼다.”(‘난중일기’) 이순신은 1593년 6월 21일, 전라좌수영 진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이 특별한 날, 그는 일기에서 한산도를 ‘韓山島’라고 표기했다. 이순신은 평소 한산도를 ‘閑山島’ 혹은 ‘閒山島’로 표기했지만, 초서로 기록한 이 날짜 일기에서는 ‘한’을 ‘韓’으로 명기했다. 이를 단순한 오기로 볼 수 있다(노승석의 ‘교감완역 난중일기’). 그러나 이를 의도적인 표현으로 보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연구가인 일본 학자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는 “이순신이 ‘韓’으로 기록한 것은 삼한(三韓)을 가리키는 의미”(‘豊臣秀吉の朝鮮侵略’)라고 해석했다. 이 같은 이순신의 역사 인식은 조선 개국 이래 면면히 내려온 ‘삼한 수토(搜討)의 정신’과도 맥을 같이한다. 수토는 ‘찾아서 구하다’ ‘탐구하여 연구하다’ ‘뒤져서 정벌하다’ 등 여러 의미가 중첩된 표현이다. 요약하면 내 땅을 지키고 수호하는 행위다. 조선의 식자층은 선대의 유적지, 신비로운 기운이 서려 있는 길지(吉地), 바다의 수호신인 섬 등을 살피고 지키는 행위를 “수토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대단한 영예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조국의 영토는 왜구나 오랑캐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신성하고도 신령한 것,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谷)의 땅이었다. 지리적 개념을 넘어서는 차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해상 전투를 도왔던 어영담은 “영남 바다를 샅샅이 ‘수토’해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의 험하고 수월함 등을 가슴 속에 그릴 정도였다”고 썼다.(‘난중잡록’) 수토의 전통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각지의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왜군은 관군이 아닌 민간인들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에도 수토 전통은 유림들 사이에서 면면히 계승됐다. 1693년 안용복이 민간인 신분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침범한 왜구들을 격퇴한 것도 이 같은 전통의 맥락이다. 이후 조선 조정은 수토사(搜討使)라는 관리를 임명해 울릉도와 독도를 정식으로 지키도록 했다. 진주·곡성=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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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조선인 돈된다”… 아이-여자까지 새끼줄로 목 묶어 끌고가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牛馬)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행태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때였다. 조선은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이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으로 사람 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특히 사람 장사는 최고의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이었다. 전쟁 이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 가 평생토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전쟁 도시인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은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조선인 노예들의 고혈로 흥청거린 군사도시 기자는 지난주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의 나고야성(아이치 현의 나고야성과 구별해 히젠나고야성이라고도 함)을 찾았다. 가라쓰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인 ‘당(唐)’으로 가는 ‘나루(津)’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대륙을 오가는 항구였다.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해로로 278km 남짓이다. 왜군의 출병 거점지이자 전선 사령부인 나고야성이 세워진 배경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불과 5개월 만에 이 성을 완성했다. 면적은 약 17만 m². 히데요시가 평생의 역작으로 지은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크기였다. 그는 전쟁 초기에 나고야성 천수각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렸다. 성 주변의 반경 3km 내는 일본 각지에서 차출된 다이묘(大名·영주)들의 진영으로 북적거렸다. 다이묘들은 이곳에서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치러 가고, 이곳으로 귀환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20만 병력이 나고야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 터에는 성벽과 토루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나고야성에서 나고야포(만)로 이어지는 바다까지의 들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인구 10만을 넘어서는 군사도시가 형성됐다. 조선에서 비참한 살육과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황금다실(黃金茶室)에서 금으로 된 찻잔에 따른 차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 성내에서는 일본 전통의 가면극 노(能)와 노래 렌가(連歌)가 공연되는 등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까지 개입한 국제 노예거래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 데는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했다.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부러 현지에 인매선(人買船·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이다.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돼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이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돈이 되는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나의 세계 일주기’)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그림 속 모델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등 여러 이설도 있다).동포를 상대로 총칼을 들어야했던 조선 청년들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끌려간 민간인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사로잡힘을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군은 피로인을 병력 보충용으로도 이용했다. 주로 남자아이나 젊은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모국의 군사들과 싸울 정예병으로 길러졌다. “임진·계사(壬辰·癸巳·1592-1593년)에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가 돼 정용(情勇)하고 강한(强悍)하기가 본시 일본군보다 나은데, 정유(丁酉·1597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 온 자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본국(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적고 적국(일본)으로 도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남자로서 전후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月峯海上錄’) 1597년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탐정(探偵)한 사명대사는 “가토의 진영에 15∼16세 되는 나이 젊고 정예한 자는 조선 사람으로 군세가 종전에 온 적과는 다르다”고 하며 “일본 대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정유재란 시기에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 이성현(李聖賢·우계이씨 족보에는 慶寶로 표기)의 경우다. 이성현은 당시 7세의 나이에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후 그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로 개명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리노이에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조선이씨(朝鮮李氏)로 불리면서 이복남의 혈통을 이어갔다.(‘羽溪李氏 族譜’) 일본 아사히신문 출판국장과 아사히학생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1998년 작고) 씨가 바로 리노이에 가문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찾던 그는 1982년 한국을 찾아 선조들의 사적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에 이용돼 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주로 투입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1617년 경상도겸사복(慶尙道兼司僕) 정신도가 피로인 전이생(全以生)의 서한을 소개하는 상소문에서는 “전이생과 같은 처지로 사쓰마(薩摩)에 잡혀 있는 피로인이 3만700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산 지 장차 24년이 되어간다”(‘광해군일기(정초본)’)고 기록되어 있다. 전이생이 밝힌 숫자가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한 지역에만도 3만 명이 넘는 피로인이 있다는 기록은 당시 피랍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피로인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수는 공식적으로 5000∼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가 적은 이유는 일본 측의 비협조, 조선 조정의 어정쩡한 피로인 대우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피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죄인처럼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천민 출신은 돌아온 뒤에도 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귀환한 양반들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자체를 절의(節義)를 잃은 것으로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기자는 나고야 성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봤다. 멀리 만을 낀 바다가 펼쳐졌다. 7주갑(周甲·1갑은 60년으로 420년) 전 조선에서 침탈해온 노예들과 재물을 깔고 앉아 흥청거렸을 도시는 들판으로 변해 한가로워 보였고, 잔잔한 바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나고야 성터에 있는 나고야성박물관은 공식 안내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잘못된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고한 양민의 코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듯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포획해 노예로 팔아넘긴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극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한 표현이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본 내 몇 안 되는 전시 기관 중 한 곳이다. 사가현(일본)=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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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동지 日出 터로 통일기운 끌어 쓴 신라왕은?

    서양의 로마제국과 동양의 신라는 공통점이 있다. 나라를 건국한 후 수도를 단 한 차례도 옮기지 않고 천년간 국가를 경영했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8세기경 로물루스가 7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로마에서 도시국가를 건설한 이후 기원후 395년 동·서 로마로 분열되기까지 1000년 이상 수도가 바뀌지 않았다. 동양의 신라 역시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에서 나라를 세운 이후 935년 고려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1000년간(정확히는 992년간) 한 곳을 지켜왔다. 로마와 경주 모두 풍수적으로 ‘천년 경영’이 가능한 대명당이란 의미다.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풍수 설화가 등장한다. ‘삼국유사’는 지리술에 밝은 탈해가 토함산 정상에 올라갔다가 초승달 모양의 땅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차지했다고 전한다. 탈해가 지목한 터가 현재 경주의 월성(月城)이다. 탈해는 터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신라 4대 왕이 됐고, 반월성(半月城)으로도 불리는 월성은 5대 파사왕 때부터 왕궁으로 사용됐다. 흥미롭게도 신라를 포함한 고대 삼국은 초승달 모양의 터를 길하게 여겼다. 신라의 월성, 고구려의 평양성, 백제의 사비성은 그 지세가 모두 초승달 형국이었다. 초승달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크기가 자라나 보름달로 완성된다. 마찬가지로 초승달의 땅 기운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융성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풍수의 형세파(形勢派) 이론에서는 초월형(初月形) 혹은 신월형(新月形)의 땅에 거주지나 묘를 쓰면 후손 대대로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는다고 여긴다. 반면 보름달 형국은 이제 기우는 일만 남았다고 보아 별로 길하게 여기지 않는다. ‘삼국유사’는 중국 당나라의 도사들이 고구려 보장왕을 도교술(道敎術)로 현혹시킨 뒤 초승달 모양의 평양성을 보름달 모양으로 바꾸게 했다고 전한다. 16년간 나라의 국력을 온통 성을 개축하는 데 쏟아붓다 보니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에 망하고 말았다. 백제 역시 반월형 터의 기운을 누리지 못한 채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말았다. 당시 제일 약체였던 신라가 결국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가둬놓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러나 풍수적 견해에서 볼 때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만했다. 삼국 중 가장 완벽한 반월형의 터를 이루고 있던 곳이 경주의 월성이었다. 신라인들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월형 기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태양의 기운도 끌어들였다. 신라는 태양의 힘이 가장 미약한 동지(冬至) 때 해가 떠오르는 동남방의 기운을 귀하게 여겼다. 초승달처럼 자라나는 기운을 선호한 것이다. 경주 월성을 기준으로 동지 때 해가 뜨는 동남방(방위각 118도)으로는 경주 낭산(狼山)과 더 멀리 토함산이 자리하고 있다. 직선으로 그으면 동지일출선(冬至日出線)이 된다. 경주의 이른 시기 고분에서 대부분 동지일출선인 동남방에 시신을 안치한 관이 놓여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경주의 고분군 중 한국이 독자적으로 처음 발굴 조사한 천마총은 목관(木棺) 주인공의 머리가 동남방(107도)을 향하고 있다. 천마총과 유사한 구조인 황남대총 북분 역시 동남방(106도)으로 관이 놓여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어설프게 발굴한 금관총 역시 유사한 구조로 관이 설치돼 있었다. 모두 신라 초기 왕릉급 무덤들이다. 신라 역대 통치자 중 동지일출선 기운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은 제27대 선덕여왕이다. 신라인들은 성품이 어질며 총명한 선덕여왕을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불렀다. 예지력까지 갖춘 선덕여왕은 첨성대(국보 제31호)를 동지일출선상에 세우도록 했다. 풍수적 시각에서 보자면 첨성대는 천문관측 시설일 뿐만 아니라 신라의 융성을 비는 점성대(占星臺)이자 제의 장소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덕여왕은 또 모년 모일에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지하면서, 낭산 산정에다 자신의 묘를 세우라고 명했다. 낭산은 월성의 주산(主山)이자 신라 오악(五嶽) 중 가장 중심인 중악(中嶽)이기도 했다. 18대 실성왕이 “선령(仙靈)이 내려와서 노는 곳이니 복된 땅”이라고 규정할 만큼 신성한 산이었다. 그런 낭산에 조성된 선덕여왕의 묘 또한 정확히 동지일출선상에 놓여 있다. 선덕여왕은 낭산의 기운을 자신의 주검으로 끌어당겼고, 그것을 월성에 ‘선물한’ 셈이다. 결국 선덕여왕 사후 20여 년 만에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뤄냈다. 선덕여왕을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진 여왕으로 평가하는 사학계의 관점은 풍수에서도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현재 월성은 정부 지원으로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2025년 완성을 목표로 한 복원작업을 지켜보면서, 월성의 통일 기운도 함께 되살아나 우리 국운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요즘이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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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조선인 코 베어오면 ‘영수증’… 왜장들 “포상 근거”소중히 보관

    1일 일본 교토(京都) 시 히가시야마(東山) 구의 옛 대불사 터(대불전). 정유재란의 주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00m쯤 걸어가다보니 대로변에 경주의 중형급 규모 고분과 비슷한 크기의 무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무덤 위에는 돌로 된 석탑(오륜탑)이 있는데 마치 무덤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무덤 앞 입간판에는 ‘이총(耳塚·귀무덤)’이라는 제목 아래 ‘조선 군민 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들어왔다’고 써있다. 세계 전쟁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왜군의 ‘코베기’ 만행을 증언하는 현장이다.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뿐이니 코를 베어 한 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고, 각기 코를 한 되씩 채운 뒤에야 생포하는 것을 허락한다.”(‘난중잡록’, ‘간양록’) 1597년 2월 조선 재침을 명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해 6월 15일 내린 지시다. 임진왜란부터 이어지는 지루하고도 성과 없는 전쟁에 대한 반전(反戰) 분위기, 교토 일대를 재로 만든 대지진으로 인한 민심 이반 등으로 히데요시는 곤경에 몰려 있던 터였다. 이번 재침에서 확실한 성과를 보여줘야 정권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왜군들이 조선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도록 내몰기 위해 극단적인 살육을 강요했다. 사실 왜병들은 2월 조선에 재출병한 이후 7월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6개월간 이렇다할 전투 없이 조선 민간인들을 납치해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노예로 파는 등 ‘사람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히데요시의 지시로 그해 7월 칠천량 해전 이후부터 시작한 조선인 코베기는 매우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해 악명이 높았던 가토 기요마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일본인 한 사람당 조선인의 코가 세 개씩 할당됐다. 그 코를 고려(조선)에서 검사관이 검사한 뒤에 큰 통에 넣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보냈다.”(‘淸正高麗陣覺書’) 히데요시가 파견한 검사관은 소금에 절인 코의 숫자를 확인한 뒤 코를 베어온 부대장에게 청취장(請取狀)을 써줬다. 일종의 영수증이었다. 이 청취장은 후에 일본에서 포상으로 영지를 받거나, 조선 땅에서의 기득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였다. 왜군 장수들은 청취장을 소중하게 보관했고, 가문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기도 했다. 코는 큰 통에 담겨 히데요시에게 바로 보내졌다. 코를 보내온 장수에게 히데요시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본보기로 남원성 전투(8월 13∼16일)에서 승리한 장수들에게 일일이 ‘노고’를 치하하는 주인장(朱印狀·히데요시가 사인한 공문서)을 보냈다. ‘8월 16일 보낸 보고서를 보았소.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13일 그 성을 포위해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421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하였소. 수고했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풍신수길.’(1597년 9월13일 히데요시가 남원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보낸 문서) 히데요시의 주인장과 출전 왜군 장수들의 가문에서 보관한 기록 등에 의하면 남원성에서 자행된 코베기는 확인된 것만도 1596건에 달한다. 이는 예닐곱 명의 왜군 장수 가문에 남겨진 기록만 합쳐 계산한 것이다. 실제로 남원성 전투에 참가한 왜군 장수들이 모두 20여 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 숫자는 크게 늘어난다. 여성과 아이 코 가리지 않아 왜군 장수들 사이엔 코베기 실적 경쟁까지 벌어졌다. 왜군들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전사자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민간인들의 코까지 잘라갔다. 가져간 코가 병사의 것인지 민간인의 것인지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한 행위였다. 왜군의 코베기 현장을 직접 목격한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은 “(조선)사람만 보면 죽이든 안 죽이든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년간 본국(조선)의 길에서는 코 없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심지어 왜군들은 여성과 아이들의 코도 가리지 않고 베어갔다(‘秀吉の朝鮮侵略と歷史的告發’). 왜군들은 성인의 경우 죽인 후에 코를 베었지만, 어린아이들은 살려둔 채 코를 베어가기도 했다. 정유재란을 겪은 실학자 이수광은 “이때부터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코는 베어 없어도 목숨은 건져 코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지봉유설’)고 썼다. 이처럼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조선 조정은 왜군이 전라도를 장악한 그해 8월부터 두 달이 넘도록 호남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을 수령들이 대부분 달아나 관아는 텅 비었고, 파발과 봉화 등 통신망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다. 왜군의 코베기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비롯해 충청도까지 확대됐다. 8월 25일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 일본군은 좌·우군의 장수들이 전부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좌군은 남하해 전라도 전역을 완전 점령하는 것을 주 임무로 맡았고, 우군은 충청도 공주로 곧장 올라간 뒤 천안과 청주를 거쳐 계속 경기도까지 북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좌군 중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 일부는 충청도 서로(西路)인 부여까지 진격한 뒤 다시 전라 좌로(左路)를 따라 남하했는데 그 과정에서 충청도 사람들을 도륙했다. 9월 7일 서천의 성과 그 주변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버렸고, 그 이튿날인 8일에는 충청도 한산 부근에서 조선인 코 250개를 베었다(‘面高連長坊高麗日記’). 한편 청주와 천안을 거치면서 거칠 것 없이 북상하던 일본군 우군은 9월 7일 직산 부근에서 남하하는 명나라 군대와 맞부딪쳤다. 한양을 200여 리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쌍방간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명군의 주력부대는 일단 수원으로 후퇴했다. 왜군 역시 더 이상의 북진을 포기하고 경상도 방면으로 남하했다. 히데요시의 전략 목표가 전라도를 장악하는 데 있었으므로, 왜군은 충청도에서 불필요한 희생을 치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머잖아 겨울이 닥쳐올 시점이었다. 왜군은 임진왜란 때 혹한의 겨울 날씨로 추위와 굶주림에 떨었던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남하하던 우군 중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는 청주 부근에서 선조 임금의 매부와 그의 딸을 생포하기도 했다. 가토는 포로로 잡은 조선 백성 중 손기술이 있는 여성 세공사와 양가의 아이, 젊은 여성 등을 히데요시에게 진상하겠다는 편지를 작성했다(가토 기요마사의 1597년 10월 10일자 서신). 이렇게 경기도 이북을 제외한 전라, 경상, 충청 3도가 왜군의 분탕질로 만신창이가 됐다. “적은 3도를 유린했으며 천리에 걸쳐 창을 휘두르고 불을 질러 적이 지나간 자리는 거의 초토화됐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으면 그 코를 모두 베어 위세를 과시했다.”(‘징비록’) 이때 왜군이 얼마나 많은 코를 베어갔는지 정확한 집계는 없다. 다만 일본측 기록인 ‘조선물어(朝鮮物語)’에서는 정유재란 당시 조선 사람 코 18만5738개, 명군 코 2만9014개 등 모두 21만4752개의 코가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코무덤을 귀무덤으로 둔갑시킨 일본인들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보내온 코를 담은 통들을 마차에 싣고서 자신의 정치 근거지인 오사카와 교토 등지를 돌면서 일본인들에게 구경시켰다. 자신의 무위(武威)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각인시키려는 정치선전이었다. 그런 다음 1597년 9월 28일 대불전 서쪽에 코를 묻은 뒤 봉분을 조성하고 봉분 위에 오륜탑을 세웠다. 그러고는 교토5산의 승려 400명을 불러 공양하도록 했다. 코가 잘린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랜다는 명목이었으나 속내는 자신의 위엄을 높이고 전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정유재란때 포로로 붙잡혀간 학자이자 관리였던 강항은 “수길(히데요시)은 소금에 절인 채 보내진 코를 살펴본 뒤에 모아서 북쪽 들판 10리쯤에 있는 대불사의 곁에 묻었는데, 높이가 하나의 언덕을 이루었다 한다. 혈육의 참화는 이를 들어서 가히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간양록’) 히데요시가 코무덤을 만든 뒤에도 조선에서는 지속적으로 베어진 코들이 도착했다. 왜군 장수들이 일본 전역에서 차출됐으므로 코무덤 역시 일본 곳곳에 산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학자들이 대마도, 비젠, 후쿠오카 등지에서 코무덤으로 추정되는 이총들을 하나둘씩 찾아내고 있으나, 아직도 그 실체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와 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공동조사와 코무덤 복구를 일본에 요구해야 하는 시점이다. 히데요시 사후 일본인들은 코무덤 즉, 비총(鼻塚)을 귀무덤으로 둔갑시켰다. 코보다는 귀를 베어간 것으로 하는 게 후대에 상대적으로 덜 잔혹하게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조작의 주역은 에도 막부 시대(1603∼1868)의 유학자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라잔은 1642년 발간한 저서에서 “일본군 장수들이 관례적으로 군공(軍功)을 증명하기 위해 코 약간과 귀 약간을 보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대불전 근처에 묻어주고 이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풍臣秀吉譜’)고 기록했다. 출처불명의 말을 근거로 비총을 이총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조선인 코무덤과 조선통신사 연구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낸 일본인 나카오 히로시 교수(조선통신사유네스코기록유산 일본학술위원회 위원장)는 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총이 아닌 비총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대불전 앞의 무덤은 일본과 한국의 여러 문헌 자료를 살펴보면 비총임이 분명히 나타난다. 일본에서는 하야시 라잔의 책을 근거로 삼아 조선인 코무덤을 이비총(耳鼻塚)으로 부르다가, 라잔의 제자(黑川道佑)가 스승보다 40년 후 출판한 서책에서는 이비총을 삭제한 뒤 이총이라고 기록했고, 이후 이총으로 불리게 됐다. 이는 교토의 지지(地誌)에 분명히 수록돼 있다.” 역사적 사실을 교묘히 윤색하는 일본의 행태는 에도시대에도 별다를 바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2003년에 들어 교토 시가 이총이라는 단어 옆에 괄호로 비총이라고 병기한 게 진일보한 것이라고 할까. 히데요시는 1598년 8월 죽은 뒤 코무덤을 바로 아래로 굽어다보는 대불전 옆에 묻혔고, 지극히 화려하고 웅장한 황금전(黃金殿)을 지었다.(‘간양록’) 일본 승려 남화(南化)가 ‘크게 밝은 일본이여 한 세상 호기 떨쳐라(大明日本 振一世豪)/ 태평의 길 열어 놓아 바다 넓고 산 높도다(開太平路 海활山高)’라는 추모 글을 황금전 문에 새겼다. 이를 본 강항은 그 글씨 옆에다 히데요시의 부질없는 허영과 무모한 조선침략을 비꼬는 시를 먹으로 썼다. ‘반 세상의 경영이 남은 것은 한줌 흙뿐이고(半世經營土一배)/십층의 황금전은 부질없이 높다랗네(十層金殿만崔嵬)/ 조그마한 땅이 또한 다른 손에 떨어졌는데(彈丸亦落他人手)/무슨 일로 청구(조선)에 흙먼지를 날리며 온단 말인가(何事靑丘捲土來).’ 이후 대불전은 1868년 메이지 정부때 도요쿠니 신사로 재건됐다. 히데요시가 죽은 지 300년 되던 해인 1898년 메이지 정부는 코무덤을 대대적으로 개수하고, 예능인들을 동원해 히데요시의 업적을 기리는 가부키를 만들어 공연을 전국적으로 펼쳤다. 기자는 코무덤을 향해 묵념을 올린 뒤 오사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코무덤의 조선인 원혼들이 흘리는 눈물인 듯 가슴속까지 저려왔다. 교토(일본)=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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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다 죽이고 일본인 이주시켜라” 히데요시 지시로 호남 대학살

    1597년 8월 호남의 관문 남원성마저 함락되자 조선과 명나라의 민심이 요동쳤다. 남원성 전투에서 3000명의 병력을 순식간에 잃은 명나라는 조선 못지않게 충격이 컸다. 전황을 전해들은 저장(浙江), 푸젠(福建), 광둥(廣東) 성 등 중국 동남부 연해안 지역의 중국인들은 피란을 걱정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왜구의 피해를 겪어오면서 왜인들의 야만스러운 행동에 치를 떨곤 했다. 얼마 전 난징(南京)에서는 일본 간첩까지 체포됐던 터였다. 당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 신부는 이렇게 기록했다. “난징에 도착하니 민심이 불안했다. 지나(China)가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돕고 있지만 일본의 공세를 막아 내리라는 희망은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이 만약 지나 본토를 직접 공격한다면 지나는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본토를 방어하기에도 힘겨울 것이다.”(‘利瑪竇中國傳敎史’) 명나라 조정도 당혹감과 위기를 느꼈다. 남원성 전투는 임진왜란 이후 명군이 가장 큰 희생을 치른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파견한 천병(天兵)이라는 대국 이미지가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뿐 아니라 당장 국토의 안위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명나라 조정은 전라도를 중국 수도권과 연결되는 중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의 지리 관념으로는 산둥(山東)반도와 바로 마주한 대안(對岸)이 전라도였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전라도를 지켜야 하고, 그 관문인 남원을 사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經略複國要編’) 그런데 왜군이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성까지 무혈입성함으로써 서해와 호남을 장악한 것이다. 히데요시가 지시만 내리면 왜군이 전라도에서 서해를 건너 산둥반도 혹은 베이징(北京)으로 바로 쳐들어올 수도 있는 전황이었다. 이 때문에 명나라는 남원성 전투 이후 왜군과의 전쟁을 조선 구원 전쟁이 아니라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국토 방어 전쟁의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명나라는 제독 동일원과 유정, 도독 진린 등 육군과 수군의 장군들을 대거 차출해 조선에 급파하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파병 규모도 당초 계획한 8만 명에서 14만3700명으로 대거 늘렸다. 정유재란은 그야말로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조선도 전라도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라도가 없으면, 비록 다른 도가 있어도 나라의 근본을 삼을 데 없다. 이 때문에 왜적은 기어이 빼앗으려 하고, 우리는 꼭 지키려 하는 것이다.”(‘선조실록’)비겁한 임금, 도망갈 궁리부터 그런 전라도를 장악한 왜군이 북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양도성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피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선조는 내전(內殿·왕비)과 세자 등 자신의 가족부터 피란시킬 방책을 마련하라고 신하들을 채근했다. 선조는 자신의 행동이 비난을 사는 것임을 모르진 않았다. “늘 나를 겁쟁이로 여기지만 서둘러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선조실록’) 왕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선조의 도피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한양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피하면서 백성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다. 정유재란 발발 전후에도 왜군의 수상쩍은 움직임만 보이면 도주하려 했다. 1596년 11월 명과 일본의 강화협상이 깨진 후 히데요시가 다시 군사를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는, 황해도 해주 행궁(行宮)에 묻어놓은 왕자의 탯줄(藏胎)을 살펴본다는 명분으로 한양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 신하들에게 제지당했었다. 1597년 6월 일본에서 대군이 건너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도피하려 했다. 또 7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패전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도 선조는 왕비와 왕자 등을 피신시키려고 했다. 그때마다 조정 대신들은 말리느라 곤욕을 치렀다. 하도 신하들이 말리자 선조는 버럭 화를 냈다. “듣건대 조관(朝官)의 가속(家屬)들이 대부분 도성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내전을 떠나지 못하게 강요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까지 하니,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러는 것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충성이란 말인가?”(‘선조실록’) 선조로서는 신하된 자들이 자기 가속은 챙기면서 임금 가족을 챙겨주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그러나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가 합동으로 냉엄하게 간언했다. “성상(선조)께서는 주야로 궁궐 권속들을 피란시키는 데에만 서두르고 계시니, 천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과연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중국군만 서둘러 군사를 철수하여 귀국할 뿐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환란이 이로 인하여 꼭 닥쳐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어찌 크게 근심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하가 아침에 후궁을 내보내시면 저녁에는 도성이 텅 비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인데 어찌하여 이다지도 생각을 못하시는 것입니까. 더욱 깊이 생각하시어 후궁과 왕자를 먼저 피란시키라는 명을 속히 거두도록 하소서.”(‘선조실록’, 1597년 8월 15일) 왕부터 그러니 현장의 벼슬아치들 행태도 별다를 바 없었다. 사헌부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남원이 패몰된 후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의 백성은 왜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붕괴돼 흩어집니다. 또 열읍(列邑)의 수령들이 곳곳에서 도망가거나 숨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직로(直路)의 수백 리가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 충청감사의 장계를 보건대 공주(公州)ㆍ이산(尼山)ㆍ은진(恩津) 세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도망하여 거처를 알 수 없다 하는데, 이처럼 위급한 때에 한 고을을 지키는 신하로서 관직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리는 생각지도 않고 먼저 도망하여 백성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매우 통분할 일입니다. 속히 나국(拿鞫)하여 정죄(定罪)할 것을 명하소서.”(‘선조실록’)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려면 먼저 민심을 수습한 후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러나 각 고을의 수령들이 먼저 도망쳐 버렸으니 민심을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호남인의 씨를 말려라” 죽어나가는 건 조선 백성뿐이었다. 왜군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임진왜란 때의 왜군과 정유재란 때의 왜군은 확연히 그 행태가 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는 ‘고려국금제(高麗國禁制)’라는 주인장(朱印狀·붉은 도장으로 사인한 명령서)에서 군사들의 약탈, 난폭, 방화 등 불법적 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래서 임진왜란 초기에는 조선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납치 등을 하면서도 무자비한 학살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물론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왜군들은 이를 잘 지키지 않았고 히데요시도 이를 묵인했었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히데요시는 대놓고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일본 서도(西道)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난중잡록’) 히데요시가 자신의 처조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조선 재침략의 왜군 총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지시한 말이다. 히데요시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기 자식이 대를 이어서 조선을 굴복시킬 것이니, 장기전을 펼치라고 왜군 장수들에게 주문했다. 히데요시가 조선의 빈 땅에다 일본 서도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겠다는 말은 괜한 엄포가 아니었다. 조선군에게 붙잡힌 왜장 후쿠다 간스케(福田勘介)는 상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여라.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할 것이다.”(‘선조실록’) 조선인을 잡아다 일본에서 노동력 착취 등으로 부려먹고, 대신 일본의 일반인들을 병력으로 차출하겠다는 뜻이었다. 히데요시가 집요하게 사람들을 죽이거나 붙잡아가 빈 땅을 만들겠다고 지목한 곳이 바로 호남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 지금까지 버틴 것은 조선 수군의 버팀목이자 곡창지대인 호남의 힘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호남을 철저하게 짓밟으면 조선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왜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이긴 후 조선 땅에 상륙하자마자 호남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분탕질을 쳤다. 1597년 8월 보름 남원성에서 조선인 백성 6000여 명을 도륙하기 이전인 8월 3일 왜군은 섬진강 하구의 하동과 구례에 도착하면서부터 살육, 약탈, 방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 좌군(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을 따라 함께 움직인 종군 의승 케이넨(慶念)은 자신의 일기(‘朝鮮日日記’)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왜군들이)신속히 선박에서 내려 너도나도 뒤질세라 재물이 있는 사람을 죽이며, 서로 빼앗는 모습은 제대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잘못도 없는 사람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구름처럼 몰려들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모양새였다.”(1597년 8월 4일 기록)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칼로 베고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쇠사슬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부모는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다.”(1597년 8월 6일 기록) “조선 아이들을 잡아서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다시는 만날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와 자식이 서로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저승사자의 고문과도 같았다. 애처로운 모자의 이별이 이런 것인가.”(1597년 8월 8일 기록) 왜군은 남원성으로 진격해오는 도중에도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해쳤던 것이다. 케이넨은 그 스스로가 일본군을 따라온 종군승이면서도 악귀처럼 사람을 잡아 죽이고, 들과 산을 불 지르는데 혈안인 된 일본 무사들을 보면서 아수라장 같다고 표현했다. 돈 받고 목숨 살려준 왜군 왜군은 군인이 아니라 강도떼에 가까웠다. 이 역시 히데요시가 부추긴 결과였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가하기를 기피하는 왜군들에게 전쟁은 출세와 돈을 벌 수 있는 호기라고 선동했다. 히데요시는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선물’을 약속했다. 점령지에서의 포로 사냥, 재물과 식량 약탈, 부녀자 겁탈 등을 무제한 허용했다. 병사들이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히데요시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도 뺏어가지 못한다고 보증까지 섰다. 왜병들은 백성을 도륙하면서 목숨 가격을 흥정하기도 했다. “조선 사람을 사로잡아 남자에게는 쌀 5두(斗)를 걷고, 부인에게는 쌀 3두를 걷은 후에 면사첩(免死帖)을 주었다.”(‘선조실록’) 케이넨 역시 왜군의 일부 병사가 돈을 받고 목숨을 살려주는 광경을 목격했다.(1597년 8월 16일 기록) 왜군은 전주를 거쳐 공주와 청주, 천안 등지로 북상하는 동안에도 사람 사냥과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그해 겨울, 부제학 신식이 전라도를 돌아본 뒤 그 실정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본도(전라도)는 병화(兵禍)가 더욱 혹심했던 탓으로 읍리(邑里)는 폐허가 되어 사람 사는 흔적이 없고, 곡식은 들판에 가득해도 수확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간간이 살아남은 백성이 흙집 속에 있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보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곡식을 가져다가 근근이 입에 풀칠만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에게 잡혀 머리를 깎였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들로 또한 상복(喪服)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상심되고 참담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선조실록’)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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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산성 버리고 남원성” 明장수 하책에… ‘피의 살육’ 막지못해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게 대승을 거둔 왜군은 호남 내륙 유린을 본격화했다. 그해 8월 한가위 무렵, 진주와 구례를 분탕질한 일본 좌군(左軍)은 섬진강을 거슬러온 수군과 연합해 남원성으로 진격했다. 일본 우군(右軍)이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백성들을 도륙하던 시기였다. 현재 전북 남원시 외곽에 있는 KTX 남원역이 아닌 구(舊) 남원역이 바로 420년 전 정유재란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혈투가 벌어졌던 남원성 북문자리였다. 남원성은 둘레 2.5km, 높이 4m의 돌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었다. 네모반듯한 형태의 평지성으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중국식 읍성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남원성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공격으로 성의 상당 부분이 훼손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성벽과 유적마저 수백 년 후 왜군의 후손들에 의해 또 파괴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그들에게 불리하거나 좋지 않은 기억을 남겨준 조선의 유물과 유적을 철저히 파괴하거나 은폐했다. 일제는 남원성 북쪽과 서쪽 성벽을 관통하는 철도인 전라선을 설치하면서 북쪽 성벽의 북문에 남원역을 건설했다. 조선군과 조선 백성들이 왜군에게 대항하다 처절하게 몰살당한 북문 자리에다 남원역을 세움으로써, 기차의 쇠바퀴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역사의 현장이 짓밟히도록 했다는 게 남원 향토사학계의 주장이다. 그도 모자랐던지, 일제는 북문의 조선인 순국 현장과 그 바로 인근에 조성해놓은 만인의총(萬人義塚) 묘역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도록 했다. 둘 사이에 역사와 플랫폼을 건설하는 방법으로 교묘히 차단시킨 것. 만인의총은 남원성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성민(城民)들이 북문 옆 큰 구덩이에 시신들을 묻어 조성한 ‘1만 명의 의로운 무덤’이었다. 일제는 이 묘역을 의도적으로 훼손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역사 뒤쪽으로 놓이게 했다고 한다. 1964년 만인의총은 남원성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사당인 충렬사와 함께 왕봉산 기슭으로 이전됐다. 그래서 원래의 만인의총은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없으며 흔적만 남아 있다. 일제는 왜 420년 전 자신들의 조상이 승리한 남원성 전투 현장을 그토록 가리려고 했을까. 조선을 무시한 명나라 장군 “너희 나라(조선) 사람들은 본래 겁이 많아서 적군만 보면 도망해 흩어지기에 여념이 없다. 후일에도 만일 다시 이런다면 내가 직접 그들의 목을 벨 것이다.”(‘선조실록’) 일본의 정유년 재침이 시작된 지 석 달 정도 지난 1597년 5월, 일착으로 조선에 도착한 명나라 파병군의 부총병(副摠兵) 양원이 조선 대신들에게 거침없이 퍼부었다. 대신들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외국 장군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의 명나라 장군 앞에서 선조 임금 역시 쩔쩔 맸다. 양원은 선조 앞에서 남원성을 굳게 지켜 “전라도 하나는 금성탕지(金城湯池·끓는 못에 둘러싸인 무쇠 성)의 견고함이 있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선조실록’) 남원은 경상 전라 충청의 3개 도를 잇는 교통 요충지여서 아군이나 적군 모두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 거점지였다. 조선에 파병된 명군이 제일 먼저 남원성으로 달려간 것도, 남원을 뺏기면 전라도와 충청도는 물론 경기도까지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그해 6월 남원성에 도착한 양원은 성내 용성관(龍城館)에 본부를 설치한 뒤 공성전을 준비했다. 양원은 성벽을 한 길(丈) 이상 더 높이 쌓아 올리고, 성문마다 대포 두세 대씩을 설치했다. 성을 두르는 해자(城壕)도 더 깊게 파놓는 한편으로, 성벽과 해자 사이에 또 다른 방어시설인 양마장(羊馬墻·흙과 돌 등으로 쌓은 울타리)을 신설해 총혈(銃穴·총구멍)과 포혈(砲穴·포 구멍)까지 뚫어 놓았다. 이중삼중으로 성을 보호하는 전형적인 중국식 방어 기술이었다. 조선은 원래 평지성인 남원성보다는 산성인 교룡산성에서 왜군과 싸우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적이 점령지에서 군량, 무기, 식수, 시설물 등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미리 없애버려 적을 지치게 하는 청야전법(淸野戰法)이었다. 대신 군량과 물자 등을 산성에 옮겨놓고 농성전을 벌이는 것이다. 적은 수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도 산성이 평지성보다 효과적이었다. 함양의 황석산성은 성을 완전히 보수하기도 전에 왜군이 들이닥쳐 함락됐지만, 교룡산성은 지형이 험준하고 성벽도 이미 튼튼하게 증축돼 있었다. 그러나 양원은 남원성을 고집했다. 양원은 조선 관료와 장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교룡산성에 비축해둔 무기와 식량 등을 모두 남원성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이 때문에 남원의 민심이 동요돼 성을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조선인들은 양원의 전략을 미덥게 보지 않았다. 그래도 양원은 “나의 계획을 변경시키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까지 선언했다.(‘선조실록’) 길가에 모래알처럼 널린 백성들의 시신 1597년 8월 한가위 무렵, 육군 5만 명과 수군 8000명으로 구성된 일본 좌군은 남원성을 두 겹 세 겹으로 에워쌌다. 이에 비해 남원성의 조명연합군은 성을 지키기에 턱없이 부족한 병력이었다. 명군은 양원이 이끄는 요동군(遼東軍) 3000명이 전부였다. 게다가 요동군은 단검과 곤봉(몽둥이) 등 근거리 육박전에 익숙한 부대로, 왜군의 조총과 화포 앞에서는 별 힘을 발휘하기 힘든 군대였다. 왜군과의 전투 경험도 없었다. 조선군 사정은 명군보다 더 열악했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여기에 비전투인력인 조선 백성 6000여 명을 합쳐봐야 1만 명 수준이었다. 8월 13일부터 전투가 시작됐다. 양원의 총지휘 아래 남원성의 4개 성문을 장수들이 하나씩 맡았다. 동문은 이신방, 서문은 모승선, 남문은 장표 등 명나라 장수들이 맡고, 북문은 전라병사 이복남이 방어했다. ‘징비록’은 남원성 최후의 치열했던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8월 15일, 성 위에서 내려다보니 왜적들이 잡초와 벼를 베어 큰 다발을 수없이 만들어 담벼락 사이에 쌓아놓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밤이 되자 갑자기 적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일제히 포 사격을 시작했다. 성 위로는 탄환이 우박 떨어지듯 쏟아졌다. 성 위 군사들은 모두 목을 움츠리고 쳐다보지도 못했다.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조용해져서 성밖을 쳐다보니 묶어 놓았던 풀다발들로 해자(호)가 다 메워진 후였다. 또 양마장 안팎에도 풀다발이 무더기로 쌓여 이미 성과 비슷한 높이에 이르고 있었다. 적들이 이것을 이용해 성을 넘어오자 성안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졌다. 이미 성안 곳곳에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말을 탄 명나라 군사들이 한꺼번에 성문을 나가려고 했으나 굳게 닫혀 있는 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자 한꺼번에 쏟아져 나갔다, 그러나 밖에서는 왜적들이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싼 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명나라 군사들은 고개를 내어 칼을 받는 꼴이 되고 말았으며 달까지 밝아 적의 칼을 피해 달아난 사람은 불과 몇 되지 않았다.” 남문 밖 양마장을 지키던 김효의가 겨우 빠져나와 유성룡에게 생생하게 보고한 말이었다. 사나흘에 걸친 전투의 결과는 참혹했다. 명나라 장수 이신방, 장표, 모승선 등이 모두 전사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간신히 몸을 피했다. 양원이 탈출한 뒤 수행 인원을 조사해보니 117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사했다. 명나라 군대가 지키던 성문이 모두 무너지자 북문을 지키던 조선군과 조선 백성은 성 안팎으로 포위돼 버렸다. 결국 전라병사 이복남이 단안을 내렸다. “이제 우리의 갈 길을 갑시다.” 이복남과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구례현감 이원춘은 기름을 부은 시초(柴草) 더미 위에 올라서더니 불화살을 쏘도록 했다. 바람이 불어 불길이 맹렬한데, 네 사람의 장수는 불길 속에서 태연하게 순국했다. 피 묻은 대검에 7색 무지개가 찬란할 정도였다. 군기고를 지키고 있던 감관 박기화는 “성중의 군기(軍器)를 어찌 적에게 넘겨줄 수 있는가”하고 무기를 화약고 속으로 운반한 뒤 불태우면서 자신도 그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호남절의록’) 이런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일시에 통곡하면서 적중으로 뛰어 들어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남원 부사 임현, 당장(唐將·명군 장수) 접반사 정기원,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도 순절했다.(‘정유재란사지’) 당시 순절한 이들은 후에 8충신으로 선정돼 국가의 추모를 받았다. 가장 큰 희생은 백성들의 몫이었다. 이 전투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종군 의승(醫僧) 케이넨(慶念)은 “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1597년 8월 16일 기록)” “날이 밝아 남원성 주위를 보니 길가에는 죽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널려 있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1597년 8월 18일 기록)”며 남원성의 참상을 일기로 남겼다.(‘朝鮮日日記’)도망간 명군 지휘자들 한편 양원이 살아난 것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양원은 남원성 서문을 공략하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밀약을 맺어 성을 비워주는 대신 자신의 죽음만은 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유성룡도 “왜적들이 양원인 줄 알면서 짐짓 달아나게 했다”는 전언(傳言)을 ‘징비록’에 남겼다. 그 때문인지 명나라 조정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참수한 뒤 머리를 조선에 보냈다. 조선이 알아서 처분하라는 조치였다. 조선 조정은 양원이 임진왜란 때 평양성에서의 공적이 있다는 점을 평가해 그의 혼을 위로하고 제사를 지내 주었다. 비록 용렬한 작전을 세운 바람에 조선과 명나라의 수많은 목숨을 잃게 한 양원이었지만, 그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양원은 남원성이 고립되자 인근에 구원병을 여러 차례 요청했었다. 명나라 제독 마귀가 유격장 진우충에게 병력 2000명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키다가 유사시 남원성을 도우라고 지시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진우충은 양원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진우충은 남원성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전혀 움직이지 않다가, 왜군이 전주성으로 쳐들어올 때 도망가 버렸다. 진우충은 이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는 ‘입공자효(立功自效)’의 가벼운 문책만 받았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양원보다 진우충의 죄가 더 크다고 보아 불만을 표했다.(‘선조실록’) 기자는 남원성의 남아 있는 성벽을 살펴본 후 남원성에서 서북쪽으로 2km쯤 떨어진 교룡산성을 찾았다. 교룡산성은 교룡산(518m) 중턱에 세워져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황석산성 못지않게 산세가 험했다. 교룡산성 동문은 경사진 언덕에 견고한 옹성이 둘러져 있고, 그 안쪽에 홍예문이 세워져 있었다. 지형적으로도 아군이 왜군을 맞서기에 유리한 곳이라고 판단됐다. 만일 4000여 명의 조명 연합군이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왜군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외부의 지원군이 오면 성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남원성에서 스러져간 1만여 생명의 참혹한 죽음을 피하고 호남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420년 전 남원 땅에서 벌어진 비극 앞에서 안타까움이 꼬리를 물었다.남원=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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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지안의 고구려 무덤은 왜 백두산을 바라볼까

    중국 지안(集安)의 장군분(장군총)을 답사하다 보면 한국인 단체 관광팀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장군총에 모신 왕과 왕비는 머리가 백두산을 향하도록 누워 있었다”는 관광 가이드의 설명도 들을 수 있다. 백두산은 1500여 년 전 고구려 사람들에게도 성지였기 때문에 왕족과 귀족층은 사후에 백두산 방향으로 시신을 안치했다는 거다. 고구려의 감춰진 역사를 다룬 소설 ‘왕도의 비밀’의 작가 최인호(작고)가 이렇게 주장한 이후 한국에서는 정설처럼 굳어졌다. 장군분은 일찌감치 도굴돼 유해는 물론이고 유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높은 공중의 혈(穴)자리에 조성된 무덤방(墓室)에서 부부 합장으로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석관이 발견됐을 뿐이다. 이 석관 구조로 시신의 머리 부위가 동북방(방위각 55도)을 향해 배치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직선으로 거리를 더 확장하면 백두산 천지를 만나게 된다. 장군분이 백두산을 향한다는 것은 위치상으로 볼 때 틀린 말은 아니다. 장군분뿐만 아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인 태왕릉 구조도 비슷하다. 서남방(256도)에 있는 묘문(墓門)을 들어서면 무덤방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데, 무덤방 내 석관은 시신의 머리를 두는 두향(頭向)이 동북방으로 배치돼 있다. 대체로 묘문과 두향은 일직선상에서 서로 정반대 방향이게 마련이다. 왕릉급 무덤은 물론이고 씨름 벽화로 유명한 각저총, 아름다운 춤 벽화가 있는 무용총 등 지안의 고구려 벽화 고분들도 대부분 묘문은 서남방, 두향은 그 맞은편인 동북방 구조다. 풍수에서는 시신의 두향을 중요하게 본다. 특히 패철(나침반)로 상징되는 ‘이기파(理氣派) 풍수’에서는 방위를 철저히 따진다. 이들은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길흉화복이 달라진다고 본다. 이기파 풍수, 즉 방위 풍수는 중국 송(宋)나라 때 이론 체계가 갖춰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니 훨씬 이전 시기에 활동했던 고구려 사람들이 풍수의 방위상 길흉을 따져 두향을 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안의 고구려인들이 백두산을 신성시해서 머리를 동북방으로 누이게 했다는 주장도 허점이 있다. 백두산 일대가 고구려 강역이긴 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사료에서 고구려인들이 백두산을 직접 언급한 기록이나 신성시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필자는 고구려 무덤들의 독특한 두향 배치를 고구려인들의 천문관에서 찾는다. 고구려인들은 뛰어난 천문 관측가들이었다. 그들이 고분 벽화에 남긴 별자리 그림들은 중국 별자리 그림들을 압도할 정도로 수준이 높고, 개수도 많으며, 차별화돼 있다. 고구려인들이 독자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다는 뜻이다. 고구려인들은 삼족오(三足烏)로 상징되는 태양에 대한 제사도 꼼꼼히 챙겼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해가 가장 긴 날인 하지(양력 6월 21일경)와 해가 가장 짧은 날인 동지(12월 22일경)에 돼지를 바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냥 돼지가 아니라 북두칠성의 화신(化身)인 제사용 돼지(郊豕·교시)였다.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위나암성으로 도읍지를 이전할 때 이용한 바로 그 돼지다. 특히 고구려인들은 터잡기를 할 때는 하지 때 해가 떠오르는 방위를 중요하게 여긴 것 같다. 하지는 태양의 기운이 가장 극성할 때다. 가장 양기가 충만한 날, 해가 처음으로 떠오르는 곳인 동북방은 의미가 깊을 수밖에 없다. 이를 하지일출선(夏至日出線)이라고 한다. 지안에서는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지에 해가 떠오르는 방위각은 정확히 60도로 동북방이다. 이 하지일출선을 따라 고구려 고분의 피장자들이 양의 극성한 기운을 받도록 두향을 정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는 고구려인들의 강건한 기상과 이미지가 서로 연결된다. 두향뿐만 아니다. 지안 국내성의 기운을 지켜주는 주산(主山)인 룽산(龍山)도 동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 때 해가 룽산 위로 떠오른다. 지안에서 직선거리로 180여 km 떨어진 백두산은 지안의 주산이 되기는 어렵다. 보통 주산은 도읍지에서 가시권에 있는 산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고구려의 또 다른 도읍지였던 환런(桓仁)현의 고구려인들이 동북방에 위치한 오녀산성을 신성시한 이유도 설명된다. 북한 평양성과 대성산성이 있는 대성산도 그런 관계다. 하지일출선상에 놓인 고구려 도읍지의 주산과 고분의 두향은 천문과 지상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고구려 고유의 풍수 문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상과 지하의 세계에 집중한 중국의 풍수문화보다 격이 높았던 고구려의 ‘천문 풍수’가 자랑스럽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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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구차히 살아 무엇하리”… 황석산 피로 물들인 민초들의 순국

    지난주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을 취재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저려옴을 느꼈다. 황석산(1190m)의 능선을 따라 설치된 산성을 찾아 오르는 길에 만난 ‘피바위’ 때문이었다. 성의 남문지(南門址) 근처 널따란 암석지대를 설명하는 입간판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입간판은 피바위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그 혈흔(血痕)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피바위 위로는 족히 수십 m쯤 되는 가파른 벼랑이 산성으로 이어졌다. 420년 전 이맘때 숱한 아녀자들까지 비장한 죽음으로 내몬 왜군의 수괴는 가토 기요마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력제로 바치겠다며 조선 호랑이를 마구 사냥해 ‘호랑이 가토’로 불린 그는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학살자로 더 악명을 떨쳤다. 사명대사가 가토와의 대담에서 “조선 제일의 보배는 그대(가토)의 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조선의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가토는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이 승리하자, 곧바로 일본군 우군의 선봉을 맡아 육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왜군 총대장 고바야가와 히데아키는 좌군(4만9000여 명)과 우군(6만4000여 명)의 2개 군으로 재편성해 호남정벌 작전을 펼쳤다. 좌군은 진주와 구례를 거쳐 수군과 합세해 남원성을 공략한 뒤 전주성으로 가고, 우군은 밀양과 합천 등을 경유해 거창, 안의(안음) 등을 공략한 뒤 전주성에서 좌군과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우군 중 약 3만 명의 주력부대를 이끈 가토는 의병장 곽재우가 지키고 있는 화왕산성(창녕)을 포기하고, 대신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황석산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성을 지킨 백성과 도망간 순왜(順倭) 1597년 8월 15일, 가토가 이끄는 왜군이 겹겹이 포위한 황석산성은 전쟁의 살기(殺氣)가 성 안팎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모처럼의 풍년이 들어 성 안에는 곡식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왜군은 전쟁을 치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 성을 탈취해야 했다. 왜군은 철포대를 배치하고, 둘레가 약 3km에 달하는 산성 주위 여러 산봉우리에 화포를 갖춘 진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왜군이 철포와 화포를 아무리 쏘아대도 성안의 조선 관군 500명과 백성 수천 명은 결사적으로 성을 방어했다(7000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예상 외의 저항에 부닥치자 당황한 왜군은 심리전을 펼쳤다. 왜군의 통사(通事·통역관)가 성 안 사람들에게 들리게 조선말로 소리쳤다. “개산(介山)아. 네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아라.” 개산은 김해 사람이었다. 김해는 임진왜란 이후 일찌감치 왜군의 수중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순왜(順倭·왜군에 협력하는 자)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개산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초부터 왜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일을 도왔다.(‘난중잡록’) 왜군이 김해 출신 성안 사람들을 겨냥한 심리전을 펼친다고 판단한 김해부사 겸 출전장(出戰將) 백사림은 본보기로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무장(武將)이기도 한 백사림은 자신의 관할 지역인 김해 사람들을 이끌고 황석산성에 합류해 동문과 북문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100명의 개산을 죽인다 한들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하고 비웃었다. 다음날인 8월 16일, 통사가 또 와서 최후 통첩을 했다. “성을 비워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난중잡록’) 그날 밤 왜군은 총 야간 공격을 펼쳤다. 성안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왜군과 맞섰다. 병사들은 활과 칼을 쓰며 왜군에게 대항했고,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낫과 죽창을 들었다. 부녀자들은 냇가의 돌을 실어 나르고 끓는 물을 이용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과 맞섰다. 황석산성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성벽 주변에는 성내 계곡의 냇가에서 행주치마로 운반해온 듯한 주먹만 한 크기의 몽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부녀자들이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던진 난석(蘭石)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정예화된 왜군의 병력과 막강한 화력 앞에서 중과부족이었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김필동이 김해 사람 20여 명을 인솔해 몰래 동문을 열고 성을 빠져나가 왜적에게 투항해 버렸다. 성문을 지키던 백사림도 밧줄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들을 먼저 탈출시킨 뒤, 왜군 복장으로 변복을 한 채 탈출했다(왜적에게 붙은 김해부의 아전과 백성들의 꼬임에 넘어가 백사림이 성을 넘어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다). 산성내 조선 관군의 총지휘관인 백사림이 달아나자 군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성은 결국 무너졌다. “당초 백사림은 ‘내가 비록 죽을지언정 성중(城中)에 앉아 있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했었다. 백성들은 그 약속을 금석(金石)처럼 믿고 성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온 성중 사람들이 그 기미도 모르고 모조리 왜적의 손에 함몰되게 하였으므로, 사로잡힌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선조실록’)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투는 이튿날인 8월 17일까지 이어졌다. 백사림이 달아난 것도 모른 채 성의 남문을 지키던 수성장(守城將) 곽준(안음현감)은 끝까지 성안 사람들과 함께했다. 성내로 침입한 왜군들이 사람들을 마구 도륙했다. 곽준의 아들과 사위들이 울면서 빨리 피신책을 세울 것을 청했다. 곽준은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하고 웃으며 말했다. 곽준은 왜군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해 무기고와 식량 창고를 불태우도록 한 뒤, 호상(胡床)에 태연하게 걸터앉아 왜군의 칼을 받았다. 왜군은 곽준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다.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가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여버렸다. 가까스로 성을 빠져나온 곽준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마저 왜적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다.(‘선조수정실록’)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을 보수하다가 병을 얻어 벼슬을 내려놓은 조종도(전 함양군수) 역시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종도는 “성이 위태롭고 소임이 교체됐으니 떠나도 된다”고 사람들이 권했지만 듣지 않고 성내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평상시 벗에게 죽기로 약속해도 배반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국가를 위해 성을 지키자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적병이 이미 움직였는데 새 군수는 도착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곧장 떠날 수 있겠는가.”(‘대소헌행장’) 조종도는 성안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들을 설득해 함께 성을 지켰다. 그는 성으로 들어가기 전 ‘공동산 밖에서 사는 것도 즐겁지만(공동山外生猶喜), 장순과 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이네(巡遠城中死亦榮)’라는 시를 남겼고, 그 시처럼 황석산성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그의 부인과 아들도 절명했다.(‘징비록’) 피신을 권유받던 군무장 유명개(거창좌수) 또한 “구차히 살아서 무엇을 하리. 너희들은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한 뒤 순절했다. 그의 부인은 자결했다. 두 아들은 이미 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유명개는 황석산성을 보수할 때 많은 재산을 희사하고 가노까지 동원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인물이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 순절한 여성도 있었다. 거창현감 한형이 군병을 모집하는 일로 밖에 나가 있던 참에 아내 이 씨는 성 안에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았다. 이 씨는 남편이 군병 모집을 핑계로 도망쳤다는 오해를 살까봐, 성 밖으로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다. 결국 이 씨는 성이 함락되자 그의 딸 한 씨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시비(侍婢) 한 사람도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선조실록’) 황석산성 전투는 이처럼 조선 지도층의 강건한 선비정신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보여준 숭고한 역사로 평가된다. 8월 17일 왜군은 산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천 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다. 성안에 남아 있던 곡물들은 모두 왜군들에게 약탈당했다. 가토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주인장(朱印狀)’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밤에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김해상관의 목을 베고(곽준을 백사림으로 오인), 성 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1597년 8월 17일 작성)숭고한 희생의 중심이었던 백성들 조선 관군과 백성이 거의 몰살됐다는 뜻이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도망쳐 나온 백사림은 이후 투옥돼 심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로도 산성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가 10여년간 끊이지 않았다. 황석산성 전투 결과를 당대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죽음이 뻔한 상황에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백사림이 몰래 도망간 것은 잘한 일’이라고 비호하거나 ‘곽준이 성을 지킨 것은 헛된 죽음’이라고 곽준의 죽음을 폄훼하는 세력도 있었다.(‘대암집’)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공직자인 백사림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420년 전의 백사림은 살아남았지만, 42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오욕(汚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자는 황석산성에 이어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의 황암사를 찾았다. 황암사는 정유재란이 끝난 지 100여 년 후인 1714년 숙종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직접 제관(祭官)들을 파견해 제향을 올렸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불태워 없애버렸는데, 2001년 지역 민간인들이 힘을 합해 재건했다. 사당 뒤에는 당시 사망한 3500여 명의 백성들을 기리는 호국의총도 새로 조성됐다. 매년 황석산성이 함락되던 날을 추념하는 제사 때만 공개되는 사당문을 안의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열고 들어가 보았다. 사당은 중앙에 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 각각 3위와 4위의 신위가 배치돼 있었다. 놀랍게도 사당 중앙의 신위 3위 중 한가운데는 ‘황석산성순국선열제위’라는 이름의 신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좌우로 조선의 선비정신을 실천한 곽준(왼쪽)과 조종도(오른쪽)의 신위가 모셔졌다. 민초와 관리 구분없이 황석산성에서 산화한 모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배치였다. 다른 배향 시설에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당 한쪽 곁에 새겨진 충혼비 비문이 잊혀지지 않는다. 2001년 황암사를 중건하면서 시인 구상(작고)이 남긴 글이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싸움에서 이런 충의와 충용과 충절에 빛나는 호국의 충혼을 찾을 것인가.”함양=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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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졸장 실책에 조선수군 오합지졸… 호남 피 부른 ‘칠천량의 눈물’

    1597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처럼 큰 웃음을 터뜨렸다. 정식으로 조선 재침공을 명령한 지 5개월여 만이다. 히데요시는 측실인 요도 도노가 머무는 교토의 고하타산(木幡山) 기슭 후시미(伏見)성에서 칠천량 해전 승전 보고를 받았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 5명의 왜군 장수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연서장(連署狀·1597년 7월 16일자·‘정한록’)이었다. 히데요시는 그간 조선수군 때문에 당한 망신과 분노를 한꺼번에 해소하는 통쾌감을 맛보았다. 수군 장수 도도 다카도라, 가토 요시아키 등에게 1만 섬(1섬은 어른 한 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 이상의 영지를 상으로 내렸다. 히데요시가 그렇게 좋아할 만도 했다. 칠천량 해전은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참패한 조선은 물론이고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지휘 수뇌부도 예상 밖의 해전 결과에 전쟁 전략을 새롭게 짰다. 왜군의 조선 내륙 유린이 본격화했다. 정유재란의 처절한 고통은 사실상 칠천량 해전부터 시작됐다는 평가도 이런 이유에서다. 칠천량은 거제도 본섬과 칠천도 사이의 조그마한 해협이다. 칠천대교(길이 425m)를 통해 두 섬을 건너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수로가 좁다. 한산도 해전의 견내량(거제대교 740m),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이 벌어진 명량해협(진도대교 484m)과 노량해협(남해대교 660m)보다 폭이 좁다 보니 바닷속 물길이 매우 거세다. 이 위험한 해협에서 전투를 지휘한 수군 총사령관이 원균이다.왜장의 간계에 또 넘어간 조선 조정 1597년 2월 선조는 임금을 무시하고 속인 죄, 적을 치지 않아 나라를 저버린 죄 등의 죄목으로 이순신을 투옥했다. 원균이 이순신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은 이순신이 비축해둔 군량미 9914섬, 화약 4000근, 총통 300자루 등을 인계받았다. 실전 지휘관들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경상우수사 배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를 비롯해 통제영 소속의 조방장 배흥립과 김완, 순천부사 우치적 등 중군장과 중위장들은 대부분 남해안 일대를 호령하며 왜군들을 떨게 하던 용장들이었다. 그런 즈음 조선 조정의 내분을 이용한 간계로 이순신을 쫓아내는데 성공한 간자(間者) 요시라가 또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찾아왔다. “정유년(1597년) 6월 그믐께나 7월 초에 일본의 대병(大兵)이 일시에 바다를 건널 것”이라고 정보를 흘렸다.(‘선조실록’) 조선 수군을 부산포로 유인해 옭아매려는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술책이었다. 고니시는 부산포 앞바다가 조선 수군에게 불리한 여건임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식사 및 휴식을 위해 정박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고, 움직임이 그대로 노출돼 앞뒤로 일본 수군에게 포위당할 경우 꼼짝없이 당할 수 있는 해역인 것이다. 당시 조선은 육군 장군으로만 알려진 고니시가 수로와 바닷길에도 일가견이 있는 장수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로마 교황청에 보내는 문서(1584년)에서 고니시를 일본 세토(瀨戶) 내해(內海)의 해상로를 장악한 ‘바다 사령관’이라고 소개했었다. 고니시가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에 서서 대한해협을 일착으로 건너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고니시는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대응하라”고 조선 조정에 일침까지 놓았다. 조선 조정은 마음이 급했다. 일전에 고니시가 알려준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 상륙 정보가 맞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고니시가 조선을 위하는 마음으로 정보를 준 것이라 믿었다.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부산포 앞바다로 나가 왜군들이 상륙하지 못하게 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원균은 한동안 출병을 거부했다. 앞서 2월 이순신이 체포되기 직전 벌인 부산포 진공 작전은 왜군이 겁을 내는 이순신이기에 그나마 가능한 전투였음을 원균은 알고 있었다. 원균은 부산포 앞바다로 수군이 곧장 진격하면 위험하니, 안골포와 가덕도 등에 있는 왜군들을 조선 육군 쪽에서 먼저 쳐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출병을 미뤘다. 조정의 압력은 거세졌다. 선조도, 하삼도(下三道·전라 경상 충청)의 군정 책임자인 도체찰사 이원익도,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 권율도 한결같이 원균이 부산포 앞바다로 나가서 싸우길 강력하게 요구했다. 조선 수군의 배가 부산포 앞에서 왔다 갔다라도 해야 대마도에서 출발한 왜군들이 바다를 쉽게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를 댔다. 결국 원균은 7월 14일 수군의 본영인 한산도 통제영에서 부산포로 진격했다.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는 주력 전함인 판옥선 150척 내외, 판옥선마다 한 척씩 딸린 사후선, 소형 전투선인 협선, 탐망선과 연락선 등을 합치면 족히 300척이 넘는 대함대였다. 수군만도 1만3000여 명이었다. 왜군은 1000여 척에 이르는 전선을 안골포, 가덕도, 웅포 등에 집결시킨 채 대비하고 있었다. 육지의 왜군들도 언제든지 출격할 수 있는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원균은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조선 판옥선들은 적진을 향해 부지런히 노를 저어갔다. 그러나 왜군들은 판옥선보다 가볍고 날렵한 세키부네 함선으로, 빠르게 접근해 왔다가 달아나기를 반복하는 수법으로 조선 수군을 지치게 했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불고 파도가 거세지면서 12척의 판옥선이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고 말았다. 원균은 함대를 겨우 수습해 가덕도로 회항했다. 탈진한 조선군은 가덕도에 닿자마자 마실 물부터 찾았다. 군사들이 허둥지둥 물을 찾아다니는 순간 갑자기 섬에서 왜적들이 나타나 덮쳤다. 왜군의 매복공격으로 결국 400여 군사를 잃고 원균은 칠천도로 갔다.(‘징비록’) 막강 무력을 자랑하던 조선 수군이 갑자기 오합지졸이 돼버렸다. 이는 판옥선의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원균의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판옥선은 튼튼하고 우수한 선체 구조와 뛰어난 화포를 장착한 전함이지만 속력이 느리다는 단점이 있었다. 당시 판옥선의 속도는 평균 6노트 정도였다. 이 때문에 판옥선보다 작고 가벼운 일본의 전선들이 전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치고 빠지는 전술로 판옥선의 기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적장이 귀띔한 해상 전술 이용도 못해 기상도 조선 수군 편은 아니었다. 부산포에서 패퇴한 조선 수군은 7월 15일 오후, 앞을 가늠하기조차 힘든 거센 비바람을 뚫고 칠천량에 모였다. 칠천량은 좁은 바다여서 자칫 잘못하면 적에게 앞뒤로 포위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있던 왜군은 1000여 척의 전선으로 칠천량 일대를 겹겹이 포위했다. 그리고 인근 섬과 육지에 육군을 배치해 매복 작전을 펼쳤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일본 육군은 가덕도에서 출발해 거제도에 도착한 뒤 육로를 이용해 조선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틀 동안 계속된 악천후 속의 항해로 피로와 기갈이 겹쳤던 조선군은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포위당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왜군의 척후선이 판옥선 4척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우왕좌왕하는 조선군들을 지켜본 왜군들은 16일 새벽 4시경 전면 공격을 했다. 이 전투에 원균과 함께 행동한 선전관 김식은 이렇게 묘사했다. “15일 밤 이경(二更·21∼23시)에 왜선 5, 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전선 4척이 전소하여 침몰되자 제장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선이 몰려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여러 섬에도 가득 깔렸습니다.”(‘선조실록’) 새벽이 되면서 칠천량 해협에서 탈출하려는 조선 함대와 이를 막으려는 일본 함대의 격전이 전개됐다. 판옥선이 여기저기서 불타며 침몰했고, 조선 수군은 배에 오른 왜군의 칼날에 목이 베여 나갔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는 현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오른 조선 수군은 탈출로를 찾아 헤매다가 매복해 있던 왜군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또 당했다. 이날 전투로 조선군의 크고 작은 배 160여 척이 빼앗기거나 파괴되고, 조선 수군 수천 명이 참획당했다.(‘정한록’) 왜군의 이러한 작전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임진왜란 강화협상 과정에서 조선 측과의 협상 파트너였던 야나가와 시게노부는 조선 측 역관 이언서에게 왜군의 전술을 은근슬쩍 알려주기도 했다. “조선의 수군이 차츰 수전(水戰)을 익히고 선박도 견고하니 피차가 맞서서 싸운다면 이기기가 어렵지만, 만약 어두운 밤에 몰래 나가서 습격하되 조선의 큰 배 한 척에 일본은 작은 배 5, 6척 내지 7, 8척으로 대적하고,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일시에 붙어 싸운다면 조선 수군도 격파할 수 있다.”(‘선조실록’ 1596년 12월 21일자 기사) 그러나 원균은 왜군이 노출한 전술을 활용하기는커녕 작전 지휘가 어려울 정도로 혼미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현장 전투에 참여해 왜군에 잡혀가기도 했던 김완은 ‘용사일록’에서 원균이 술에 취한 채 대장선에 누워 호령만 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원균은 가까스로 고성 춘원포에 당도한 뒤 대장선을 버리고 뭍에 올랐다. 원균은 산길을 따라 도망치다가 소나무 밑에서 쉬는 사이 추격해온 왜적에게 최후를 맞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탈출해 고향에 숨어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권율이 조정에 보고한 바에 의하면 권율의 군관 최영길이 사지(死地)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는 원균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선조실록’) 경상우수사 배설은 용케 칠천량을 빠져나왔다. 그가 이때 챙긴 판옥선들이 뒷날 이순신의 수군 재건에 밑천이 된다. 바로 ‘소신(이순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바로 그 배들이다. 왜군은 칠천량의 판옥선은 물론 연안의 진포마다 남겨진 조선의 배들을 죄다 탈취하거나 불태워버렸다. 조선 수군의 전 재산이 이때 다 털렸다. 무엇보다도 인명 손실이 컸다. 당시 판옥선 한 척에는 130여 명의 수군이 타고 있었고, 그중 약 62%인 80여 명이 노를 젓는 격군이었다고 한다.(‘한국선박사연구’) 판옥선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 적정한 사거리에서 대형 화포를 쏘기 쉽도록 전후좌우 선회 등 배의 기동력 확보가 중요했다. 이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격군이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하면 배 아래쪽에 있던 격군들은 대부분 수장되기 일쑤였다. 선조 때 대신 이항복은 “충청수영에 있을 당시 한산도로 출격한 판옥선이 침몰해 83명이 떼죽음을 당해 한 마을이 온통 그 가족들의 통곡소리로 진동했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사력을 다해 격군이 되기를 회피하려 한다”고 말했다.(‘선조실록’) 당시 격군들은 전라도 연해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차출돼 큰 희생을 치렀다. 격군이 되면 반드시 죽는 것으로 여겨 미리부터 통곡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고된 노역과 희생을 치르는 것은 격군뿐만 아니었다. 배에서 화살을 쏘는 사부(射夫), 포를 쏘는 포수(砲手) 등 다른 수군들도 일단 수군에 편입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군역을 피해 서울로 도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군 부족 때문에 노비 등 천민들을 수군으로 모집할 정도였다. 기자는 지난주 해전 현장을 답사하다가 칠천량해전공원 전시관에서 본 영상물이 잊혀지지 않는다. 수군을 지원하면 관노(官奴)에서 면천해준다는 말에 판옥선 사부가 된 ‘도치’가 왜군의 조총을 맞아 바닷속에 수장되는 장면이었다. 도치는 자식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전쟁에 나섰건만,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그 시절 조선의 바다를 지켰던 백성들의 삶은 다 그랬을 것이다. 그뿐이랴. 칠천량 해전의 패전은 그 후 내륙, 특히 호남의 수많은 백성들을 처참한 살육의 아비규환으로 내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고통은 임진왜란보다 몇 곱절 처절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時事)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거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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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왜군 허위공작에 넘어간 선조, 아비규환 참패 자초

    “저 바다로 무식한 칼잡이놈(가토 기요마사)이 곧 건너온단 말이지. 그냥 내버려둘 순 없다.” 1596년 12월 초, 조선 부산포(부산시 부산진역과 자성대 일대)의 왜성.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 지휘소인 천수각에서 부산포 앞바다를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과 경쟁 관계인 왜장(倭將) 가토를 말할 때 늘 ‘무식한 칼잡이’라고 호칭하는 고니시는 생각할수록 분했다. 고니시는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임진왜란 종전협상)을 깬 배후로 가토를 의심했다. 그해 9월 초,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년간 끌어오던 강화협상이 막 성공하려던 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명나라 책봉단이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는 책봉식을 끝내고 귀국길인 사카이(堺)에 도착한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남부 4개 도에 대한 영유 권리를 명나라로부터 보장받지 못했다며 협상을 깨버렸다(‘16·17세기 예수회일본보고집(イエズス會日本報告集)’ 第1期 第2卷). 협상 실패의 주범으로 몰려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난 고니시는 재침(정유재란)을 준비하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고니시는 이 모든 게 평소 자신이 주도하던 강화협상에 대해 비판적이던 가토가 개입되지 않고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고니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심복 요시라는 ‘주군이 이번 기회에 가토를 제거하려 마음먹었다’고 판단했다. 요시라는 쓰시마(對馬) 섬 출신의 왜인으로 원래 부산포를 왕래하던 장사꾼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말에 능하다는 이유로 고니시에게 발탁돼 통사(通事·통역관)로 활동해왔다. 조선군과 왜군 사이를 오가면서 이중 첩자 노릇도 했다. 조선 측에서도 요시라가 간자(間者·간첩)임을 알면서도 은자(銀子)를 제공하며 왜군 동향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1596년 12월 11일, 요시라가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영에 나타났다. “우리 장군(고니시)이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장군은 ‘이번에 강화가 깨진 것은 가토 때문이다. 나 또한 그를 제거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가 바다를 건너올 예정이라 합니다. 수전에 뛰어난 조선 군사가 나선다면 반드시 이를 격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징비록’) 요시라는 이후 고니시의 밀서를 김응서에게 건넸다. 밀서는 가토 군의 해상 이동 경로, 도착 예정 날짜, 그에 대한 조선 수군의 대비책까지 구체적으로 담고 있었다. 고니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이용해 가토의 조선 상륙을 방해하려고 계획했다. 가토는 히데요시에게 “이번 출격 한번으로 조선을 완전히 평정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병마(兵馬)를 요청했었다. 그런 가토가 조선 수군 때문에 바다를 건너지 못하면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선조실록’). 고니시는 주전파(主戰派)인 가토가 벌을 받으면 주화파(主和派)인 자신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니시에게는 또 다른 속셈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미리 대기한 조선 수군에게 가토가 겁을 먹고 물러나면 애초의 계획대로 성공한 셈이 된다. 반면 가토가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려다 공격을 당할 경우 부산포의 다른 아군(왜군)들이 지원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들이 연합해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일 경우, 막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에게 당하기만 했던 일본 측도 그간 조선 판옥선에 대응하기 위한 대형 함선인 아타케부네를 많이 만들었고, 조선 수군의 전술과 조선의 물길 등을 치밀하게 연구해 두었다. 고니시의 계책은 김응서를 통해 즉시 조선 조정에 보고됐다. 선조와 대신들은 고니시의 계략이 아닌가 하고 오랫동안 숙의했다. 결국 왜군 강경파인 가토를 제거하는 게 조선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해를 지나 1597년 1월 2일, 선조는 김응서와 이순신에게 동시 출병을 명령했다. 결과는 어찌 됐을까. 이순신은 왜장 고니시의 정보만을 믿고 출병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온 이순신이지만, 가토 출병에 대한 정보는 고니시와 요시라의 간계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조정이 간계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개적으로 이를 표현하진 못했다(이충무공 ‘행록’). 당시 조정은 서인(西人)들이 득세해 동인(東人)인 유성룡이 천거한 이순신을 비방하던 때였다. 이순신은 가토의 조선 출병 정보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부산포 일대에 여전히 주둔 중인 일본 육군과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가토의 대군이 수륙 양면으로 협공해 들어올 경우, 조선 수군도 승산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실제로 당시 왜군 2만여 명이 강화협상 중에도 부산포, 안골포, 가덕도, 죽도, 서생포 등지의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또 겨울에는 배의 노를 젓는 격군(노꾼)을 풀어주기 때문에 배를 움직일 수군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들었다. 격군은 한번 배에 오르면 교대가 잘 되지 않고, 고된 노역과 질병으로 최고의 병역 기피대상이었다. 이순신은 판옥선 한 척을 움직이는 데 격군이 평균 100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성적인 격군 부족에 시달렸다. 그래서 수군 활동이 거의 없는 겨울에는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모집하는 방식으로 격군을 운영했다. 치밀한 성격의 이순신은 적장이 시키는 대로 병력을 움직이는, 고금(古今)에 없는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전쟁에서는 지상담병(紙上談兵·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함)보다는 장수의 현장 경험과 판단을 존중해주는 게 관례이기도 했다. 동인과 서인 갈등 이용한 고니시 결국 가토의 군대는 해상에서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1597년 1월 12일에서 14일에 걸쳐 울산 서생포와 부산 다대포에 상륙했다. 이순신을 이용해 가토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실패한 고니시로서는 히데요시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전공(戰功)을 세우는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요시라, 조선의 대신들이 이순신을 좋아하는 쪽과 싫어하는 쪽으로 갈라져 있다지?” “예. 김응서 장군도 주군님의 정보를 거부한 이순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니시와 요시라는 ‘이순신 제거 작전’에 들어갔다. 요시라는 통사의 자격으로 조선 진영을 드나들면서 이순신을 헐뜯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청정(淸正·가토)이 단 한 척의 큰 배로 건너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작은 섬에 며칠 동안 정박하였는데, 내가 급히 통제사 이순신에게 통지하여도 통제사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오지 않아서 일을 그르쳤소.”(‘난중잡록’) 또 1월 23일에는 경상도위무사 황신과 김응서의 장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 조정에 올라왔다. 두 사람의 장계는 공통적으로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다”는 고니시의 말을 전하면서, “우리(조선)가 기회를 그르쳤으니 매우 통한스럽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이순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있던 선조는 장계를 본 후 공개적으로 이순신을 비난했다. “왜추(倭酋·고니시)는 손바닥을 보이듯이 가르쳐 주었는데, 우리는 해내지 못했으니 우리나라야말로 정말 천하에 용렬한 나라이다. 지금 장계를 보니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고 행장(行長·고니시) 역시 조롱까지 하였으니 우리나라는 행장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閑山島)의 장수(이순신을 가리킴)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었다.”(‘선조실록’) 선조의 말에 윤두수, 이산해 등 이순신을 고깝게 여기는 대신들도 맞장구쳤다. 마침내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 체포령을 내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순신은 2월 10일 전선을 이끌고 부산포로 진격해 사흘간 왜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왜군 본거지를 아예 쳐부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순신은 해안에 늘어선 왜의 전선들에 총포와 화포 등을 쏘아 불태워 없앴다. 이순신을 두려워한 왜군들은 전선을 이끌고 바다로 나올 생각을 못했다. 그저 육지에서 철포 등을 쏘며 대항할 뿐이었다. 이것이 절영도(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이순신의 알려지지 않은 부산포 진공 승첩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전선을 이끌고 한산도 본영으로 귀환하던 중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게 체포되고, 3월 4일 한양으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다. 결과적으로 고니시는 조선 조정의 내분을 부추겨 가토보다 더 두렵고 미운 이순신을 손쉽게 제거한 셈이다. 고니시와 요시라의 행적을 기록한 ‘난중잡록’의 저자 조경남은 “요적(要賊·요시라)이 전후에 행한 바가 모두 우리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나라는 알지 못하였으니 통탄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징비록’의 저자 유성룡도 고니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조선 조정과 고니시의 정보를 여과 없이 전달한 김응서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아비규환의 참패로 치닫는 원균의 수군 23일 기자는 고니시가 머물던 부산포왜성에서 코앞에 보이는 영도를 바라보며 이순신의 부산포 진공 작전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사실 이 전투는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빤히 보이는 영도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요새화된 왜군 진지를 공격했다. 자칫하면 역공을 당할 정도로 왜군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이순신이 탄 상선(통제사가 타는 판옥선)이 적진 가까이 다가가 썰물이 온 것도 모를 정도로 맹공을 하다가 배 밑창이 땅에 닿아 왜군에게 배를 뺏길 뻔한 적도 있었다.(‘선조실록’) 원균은 이 일을 가리켜 이순신이 왜적의 비웃음만 샀고, 별로 이익을 거두지 못했다고 모함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부산포 앞바다에서 무위(武威)를 과시함으로써 적들의 바닷길 통행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가토의 선단을 공격하라는 애당초의 명령은 따를 수 없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적들의 바닷길 통행을 막으라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한 작전을 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부산포 앞바다를 완전히 장악할 만큼 승리했다. 비록 조정은 승리한 전투로 인정해주지 않았지만…. 이튿날인 24일 새벽, 기자는 왜성이 들어섰던 가덕도를 거쳐 거제도의 칠천교에 도착했다. 칠천교는 칠천량 바다를 가로질러 거제도 본섬과 칠천도를 이어주는 다리다. 칠천량 바다는 이순신 대신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처참히 무너진 우리 역사의 아픈 현장이다. 420년 전인 1597년 7월에는 물론 다리가 없었다. 다리 아래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을 태운 150척 안팎의 판옥선이 물속으로 가라앉거나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칠천교 다리 위로 짙은 해무가 덮쳐 왔다. 잠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그마한 왜선 5, 6척에 조선의 거대 함선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게 앞을 가리는 이런 기상 때문이었을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 유일의 참패이면서, 조선을 다시 한번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만든 비극이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부산·거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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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고구려 왕들은 왜 공중에 묻혔을까?

    지난 몇 년간 해마다 한 차례 이상 중국 북방지역을 다녀왔다. 그때마다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에 있는 고구려왕릉을 찾았다. 후손으로서 당연한 예의이기도 하지만, 우리 고유의 풍수 원형을 지켜온 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필자는 고구려왕릉에서 한국 풍수문화의 특징을 발견한다. 현재 지안에는 고구려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8기 정도 있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무덤인 ‘태왕릉’을 중심으로 그 동쪽의 ‘임강묘’와 그 북쪽의 ‘장군분(장군총)’이 왕릉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지안시 서쪽의 ‘천추묘’와 ‘서대묘’, 칠성산고분군과 우산하고분군 중의 3기 등도 왕릉급 고분으로 꼽힌다. 대체로 6세기 이전 시기에 조성한 이 왕릉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한결같이 돌로 쌓아 올린 적석묘(積石墓) 형태이며 △같은 혈족의 왕릉이면서도 서로 멀리 떨어져 배치돼 있고 △시신을 안치한 무덤방(墓室)이 무덤마루, 즉 무덤 상단에 조성돼 있다는 점 등이다. 중국 북방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한 복기대 교수(인하대)는 “이런 구조는 만리장성 이남의 한족(漢族) 국가가 조성한 왕릉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무덤방의 위치다. 한족 국가가 세운 왕릉들의 무덤방은 대부분 지표 혹은 지하에 설치돼 있다. 반면 고구려 왕릉의 무덤방은 지표에서 상당히 떨어진 높은 위치에 설치돼 있다. 고구려의 옛 궁궐인 지안 시내 국내성(國內城) 터에서 동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태왕릉(전체 높이 14m)은 무덤방이 지표에서부터 수직으로 10m 높이에 있다.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4층 높이에 시신이 안치된 것이다. 또 ‘동방의 피라미드’로 유명한 장군분은 지상에서 7m 높이 정도에 돌로 만든 무덤방이 있다. 다른 왕릉급 무덤들도 마찬가지다. 아직까지 고구려왕릉의 무덤방이 왜 허공에 조성됐는지에 대한 국내외 연구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풍수의 눈으로 보면 의외로 간단하다. 고구려인들은 허공에서 에너지가 뭉쳐진 ‘공중혈(空中穴)’을 왕의 무덤방으로 설정한 뒤 그 위치에 맞게끔 돌로 쌓아올리면서 무덤을 꾸몄던 것이다. 대체로 공중에서 맺힌 혈은 하늘의 기운(天氣)이 아래로 하강하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천기형(天氣形) 혈이라고도 한다. 마치 까치가 천기 에너지가 맺힌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듯이, 고구려 사람들은 천기형 혈을 이용했다. 천기 에너지를 무덤에 사용하는 방식은 백제와 신라의 이른 시기 적석 무덤들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 무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이 같은 풍수관은 중국 풍수와 관계가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풍수학의 이론체계는 당나라(618∼907년) 때 비로소 갖춰졌다는 게 정설이다. 지안의 고구려왕릉은 중국의 풍수설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에 조성됐다. 게다가 중국의 풍수설은 철저히 땅 기운(地氣)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른바 장풍득수(藏風得水)설이다.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얻을 수 있는(혹은 물이 보이는) 지표나 땅속을 명당으로 보는 논리다. 여기에 한국풍수의 한 원형인 천기(天氣)가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다. 풍수설의 발달 과정을 보면 초기 풍수는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을 같이 중시했다. 풍수의 본디 말이 ‘감여(堪輿)’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감’은 하늘의 도(道)를, ‘여’는 땅의 도를 가리킨다. 사실 풍수란 말도 감여의 다른 표현이다. 감여학(풍수학)은 굳이 우선순위를 두자면 땅보다는 하늘 기운을 기준으로 삼았다. 바로 그 점을 우리에게 실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고구려왕릉이다.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비롯해 고조선, 발해가 중국내 지방자치정권이었으므로 중국 역사’라는 강변을 멈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고구려왕릉의 풍수학적 특징은 더욱 의미가 깊게 다가온다. 게다가 최근엔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이 고구려가 한국과는 별개의 존재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지지하고 나선 상황이다. “고구려인은 생활공간, 역사의식, 문화양식 등이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라 별개의 요동(遼東)공동체로 봐야 한다”는 국내 어느 학자의 10여 년 전 주장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오늘의 묘안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고구려가 우리 역사임을 보여주는 근거는 많다. 풍수학의 관점에서도 이는 분명하게 설명된다. 고약한 이웃이 우리 역사를 빼앗으려 하고 심지어 일부 자손들까지 자기 조상을 부정하는 세태 속에서 고구려왕릉을 찾는 마음은 황망하기 그지없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풍수학 박사}

    • 20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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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강진에 수만명 목숨 잃자… 탈출구 필요했던 히데요시 “재침”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의 최대 도시 오사카(大阪) 시를 상징하는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히데요시는 이 성에서 임진왜란을 기획하고, 또한 정유재란을 명령했다. 기자는 성의 중심부인 천수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봤다. 침략전쟁 지휘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이다. 히데요시 당시는 더 화려했다. 1585년 완성된 천수각은 일본 왕이 거주하던 교토(京都)의 고쇼(御所)보다 웅장하고 사치스러웠다. 천수각에서는 성 아래 마을과 저 멀리 요도가와 강까지 굽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오사카성은 히데요시의 작품은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가 지은 성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지었던 성을, 1930년대에 재현한 것이다. 그것도 원형대로가 아니라 콘크리트 재료로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공들여 지었던 5층짜리 천수각도 8층(높이 55m)으로 복원됐다. 다만 천수각 내에 전시된 조립식 황금다실(黃金茶室)은 히데요시가 만든 그대로 남아있다.‘무적 함대’에 보낸 협박 편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가을, 오사카성 천수각의 황금다실. “내가 탄생할 때에 천하를 통치할 신묘한 조짐이 있었다. 점술가들은 이 전조를 내가 열국을 다스릴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나는 장년이 된 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아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제 대명국(大明國)을 정복하려 하니 이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황금다실에서 히데요시가 흥겹게 읊어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데요시의 책사이자 외교문서 담당관인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가 빠른 손놀림으로 받아 적었다. 미천한 신분 출신인 히데요시는 자기를 과시하고 싶을 때는 늘 어머니의 태몽을 떠벌리곤 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모친의 가슴으로 들어와 그가 태어났다는 거다. 그는 조선 등 다른 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히데요시는 계속 읊었다. “당신의 나라는 아직 나에 대한 경의의 표시나 조공이 없었다. 내년 봄까지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에 와서 나에게 항복하라. 지체하면 정벌하러 군대를 보낼 것이다.” 스페인령 필리핀 제도장관(諸島長官, 마닐라 총독)에게 보내는 국서(1591년 9월 15일자)였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히데요시는 받아적은 걸 다시 읽어보라고 한 다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히데요시의 국서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뜻을 온 천하에 알리는 행위였다. 그는 진심으로 대륙 정복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도 여기에 협조하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다. 히데요시는 사이쇼에게 “수고했소. 차 한 잔 하시오” 하면서 순금으로 만든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황금다실은 차 도구 일체가 황금으로 제작된 것은 물론 사방이 온통 금박으로 덮인 히데요시의 개인 다실이었다. 히데요시는 극단의 사치를 부리는 걸 즐겨했다. 키가 작고 못생긴 용모로 ‘사루(猿·원숭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살아온 데 대한 보상심리였다.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은 필리핀령 루손 섬의 스페인 총독 고메스 페레스는 답신을 보냈다. “스페인은 세계의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스페인령 필리핀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총독은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일본과 거래를 트려고 했다. 그는 전쟁은 곧 큰돈을 버는 기회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부터 필리핀 루손 섬은 전쟁 물자를 대느라 바빴다. 조선을 침공하는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의 국제 무역항 나가사키를 통해 필리핀 루손 섬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구입했다. 일본에서 생산된 은과 밀을 루손 섬으로 가지고 가서 조총, 실탄, 화약 등으로 바꾸어 왔다. 스페인은 은과 밀을 다시 중국으로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가토 역시 무역을 통해 은이 돈이자 무기임을 알아차렸다. 가토는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의 철령을 넘어 함경도까지 달려갔다. 함경도 단천의 질좋은 은광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가토는 은을 캐 히데요시에게 진상하면서, 계속 은광을 개발해 전비에 보태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명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바람에 가토는 별 재미를 못보고 후퇴했다. 무역에 맛을 들인 그는 정유재란이 끝나고서도 베트남, 태국과의 교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한편 스페인 총독은 히데요시의 협박을 일본 진출의 지렛대로 삼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을 사신(使臣)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하는 등 은밀히 일본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정유재란 발발 불과 2개월 전인 1596년 12월, 결국 사달이 났다. 유럽 남만인(南蠻人)들이 종교적, 경제적 면에서 일본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본보기로 26명의 선교사(스페인 수사 및 포르투갈 신부)와 신자들을 처형했다. 무역항인 나가사키에 이들의 시신이 십자가에 걸렸다. 이 순교는 유럽에도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영국 등 후발 강국들이 동아시아에 이목을 집중하는 계기가 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했을 때 포르투갈이 조명(朝明)연합군 편에 서서 ‘해귀’라는 특수병까지 조선에 파견한 것도 이 사건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 종교와의 음험한 거래 조선 침공을 위해 유럽 열강을 끌어들이려는 히데요시의 책략은 훨씬 더 이전부터 시작됐다.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인 1586년 3월 16일, 벚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는 일단의 외국인 손님들을 맞이했다.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는 데 배가 필요하오. 성능이 뛰어난 포르투갈 나우선(Nau船) 2척과 항해사 2명을 주선해 주시오. 그렇게만 해주면 점령지에다 교회를 세우게 해주겠소.”(‘日本キリスト敎史’)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의 통역을 맡은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요시의 느닷없는 제안에 잠시 당황했다. 프로이스를 통해 이 제안을 들은 일본 예수회 선교 책임자 가스파르 코엘류는 일행들과 의논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좋습니다. 일본 규슈(九州) 교구의 기리시단(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모두 간파쿠(關白)님의 뜻을 받들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중국 원정에 나서면 포르투갈의 배와 무기를 구입하도록 주선하겠으며, 필요하면 포르투갈 군대도 동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キリツタソ史考’) 규슈 교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코엘류는 결국 히데요시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정치와 종교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졌다.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을 치기 위해 유럽을 이용하려 했다. 히데요시는 대군을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적재량 2000t 규모의 원양선을 원했으나 이뤄지지는 않았다. 대신 기리시단 다이묘와 병사들이 전쟁에 대거 동원됐다. 정유재란때 순천왜성을 지휘한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왜성을 지휘한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규슈의 대표적인 기리시단 장수들이었다. 1579년 기준으로 이미 10만 명을 넘어선 일본인 기리시단(발리나뇨 보고서) 중 상당수가 전쟁에 참전했다. 임진왜란 2년째인 1593년에는 오사카의 예수회 수도원장 세스페데스가 직접 조선까지 들어왔다. 스페인 출신인 그는 고니시의 진영인 웅천왜성(창원)을 근거지로 삼아 1년간 머물면서 왜군들과 조선인 포로들에 대한 진중(陣中) 포교에 힘썼다. 세스페데스는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로 기록된다. 그런 그가 420여 년이 지난 2017년 현재 경남 창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창원시가 지난해 2월 조성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 때문이다. “왜군을 위한 종군신부를 기리기 위해 공원까지 조성한 것은 지나치다”라는 주장과 “전쟁의 참상과 조선의 존재를 유럽에 최초로 알린 신부라는 점에서 기념할 만하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잘못된 만남이 4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지진으로 흉흉한 민심을 조선 침공으로 돌려라 “사루(원숭이)가 나라를 잘못 다스려 지진과 홍수가 그치지 않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이듬해인 1593년부터 4년간 끌어온 명나라와 일본과의 지루한 강화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1596년 여름, 오사카성의 민심은 흉흉했다. 그해 여름은 천재(天災)로 일본이 몸살을 앓았다. 윤 7월 18일 밤, 기나이(畿內) 일대에서 발생한 대지진(규모 7.0)은 일왕이 사는 교토는 물론 히데요시의 은거지인 후시미(伏見)성에 큰 피해를 남겼다. 오사카성도 무사하지 못했다. 지진은 열흘이나 계속돼 깔려 죽은 사람들이 수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대일록’). 시신을 화장하는 연기가 멈추지 않았다. 도난과 약탈마저 횡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에는 100년 만의 대홍수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잡아먹기까지 했다.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히데요시의 정치적 기반인 오사카와 교토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연재해를 그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지진은 앞으로 병란(兵亂)이 일어나 왕과 장수를 망하게 하는 징조’라거나 ‘히데요시의 목숨줄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참언까지 나돌았다. 당시 일본에 붙잡혀 있던 강항(姜沆)은 ‘간양록’에서 “적괴(賊魁·히데요시)의 흉악한 행위들이 차고 넘쳐 결국 천지의 괴기(乖氣)를 불러들였다”고 기록했다. 히데요시는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명과의 강화협상 결과 허울뿐인 일본 국왕 책봉식(1596년 9월 1일)을 오사카성에서 치르긴 했으나, 명으로부터 조선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에 남아 있는 왜군들을 무조건 철수시키라는 요구만 받았다. 히데요시는 성과없는 전쟁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도, 정권 유지마저 어렵게 하는 지진의 공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도 조선 땅이 필요했다. 조선에서 전쟁을 치른 부하들 말로는 조선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1596년 오사카성에 겨울이 왔다.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겨누는 비난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 재침을 결정했다. 자연재해라는 위기 상황이 히데요시가 명분도 없는 정유재란의 방아쇠를 당긴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豊臣政權期에 있어서 자연재해와 대외관계’). 학살과 약탈로 점철된 정유재란의 주범 히데요시는 결국 전쟁이 가장 치열한 국면으로 치닫던 1598년 8월 환갑을 갓 넘긴 나이에 사망했다. 지진 참언대로 그의 후계자(히데요리) 역시 오사카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오사카성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선인이 겪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오사카=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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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흑인 용병-타타르 거인 투입했지만… 사천왜성 혈전 참패

    “전하, 소장이 얼굴이 색다른 신병(神兵)을 데리고 왔는데 소개하겠습니다.” 정유재란이 치열한 국면으로 치닫던 1598년 5월 26일. 선조 임금이 한양도성 인근에 주둔중인 명군 진영을 방문했다. 명군이 남해안 일대의 왜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한양에 머물면서 전열을 정비하던 때다. 명나라 파견군 장수 팽신고(彭信古)가 선조에게 자랑하듯 신병 소개를 자처하고 나섰다. “어느 지방 사람이오? 대체 무슨 기술을 가졌길래?”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波浪國·포르투갈) 사람입니다. 바다 셋을 건너야 호광에 이르는데, 조선과의 거리는 15만여 리나 됩니다. 그 사람은 조총을 잘 쏘고 여러 가지 무예를 지녔습니다.”(‘선조실록’) 선조는 중원 사람들도 보기가 어렵다는 신병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노르스름한 눈동자에 얼굴빛이 검고, 사지와 온몸도 모두 검었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은 곱슬에다, 검은색 양모(羊毛)처럼 짧게 꼬부라졌다. 팽신고는 신병은 칼 솜씨가 뛰어나고, 바다 밑에 잠수하여 적선을 공격할 수 있으며, 또 수일 동안 물속에 있으면서 수족(水族)을 잡아먹을 줄도 안다는 등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16세기의 포르투갈 특수병 해귀 조선에서는 신병을 해귀(海鬼)라고 불렀다. 선조가 본 해귀는 흑인이었다. 해귀는 요즘으로 치면 해군 UDT 같은 포르투갈계 특수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포르투갈은 해외에서 식민지 경영을 하면서 재주 좋은 외국인 용병들을 고용했다. 명은 마카오를 조차(租借)한 포르투갈로부터 무기와 탄약 등을 사들이면서 흑인 병사(혹은 용병)들을 데려와 정유재란에 참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해귀의 등장은 당시 조선사람들에게는 진귀한 전쟁 뉴스였다. 소문은 왜군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으로 번져갈 정도였다. 해귀를 비롯한 명나라의 다국적 파병군이 한양으로 속속 모여들고 명군을 따라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상인들과 유흥을 돋우는 장사꾼들도 나타났다. 말을 타고 놀리는 품새가 사람 못지않은 원숭이들(楚猿)과 사람인 듯 원숭이인 듯 헷갈리는 원병(猿兵), 낙타, 기이한 노루(生獐) 등 조선에서는 좀체 구경하기 힘든 짐승들도 등장했다(‘난중잡록’). 조선의 수도 한양은 생김새가 색다른 병사들과 이국(異國) 풍물로 국제도시처럼 시끌벅적했다. 해귀는 정유재란 발발 직후 갑작스럽게 조선의 여러 문헌에 등장한다. 그러나 팽신고가 해귀를 선보인 지 3개월 후인 1598년 8월, 전라도 남원의 명군 진영에서 해귀 4명의 모습이 보였다는 기록을 제외하고는 전투 행적은 찾을 길 없다. 다만 해귀를 데리고 온 팽신고의 이름이 그 2개월 후인 10월, 경상도 사천에서 등장한다. 팽신고는 명나라의 사로병진(동로군, 중로군, 서로군, 수로군) 전략에 의해 중로군 소속으로 사천왜성 전투에 참가했다. 기자는 팽신고의 흔적을 쫓아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바닷가에 있는 사천왜성을 찾았다. 이 왜성은 해귀 뿐만 아니라 또다른 이국(異國) 병사들이 활약했던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성 둘레가 약 1km 남짓한 사천왜성은 바닷가와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이 바다와 접한 구조였다. 육지와 연접한 동쪽의 성벽 밑으로는 해자를 설치했다. 지금은 남쪽과 북쪽 바다가 매립돼버려 원 지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천왜성 앞바다는 임진왜란 시기에 이순신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왜군을 격퇴한 사천해전의 현장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ㄷ자 모양의 건축 구조였던 사천왜성은 성곽과 동쪽의 성문이 복원돼 외형적으로는 옛 성의 정취를 어느 정도 느끼게 해준다. 그런데 성의 가장 중심지인 천수각 자리에 6·25때 전사한 공군 장병 위령탑이 세워져 있어서 다소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사천왜성은 일본인들에게 매우 각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천왜성은 일본군 전승지로 관리됐다. 사천왜성의 왜군들을 지휘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후손들이 당시 성터 일부를 사들여 공원으로 조성했다. 천수각 터에 사천신채전첩지비(泗川新寨戰捷之碑)라고 새긴 기념비도 세웠다. 1945년 광복 직후 이 지역 주민들이 없애버렸다. 거인(巨人)들의 전투 현장 사천왜성 “요상한 거인(巨人)들이 쇠막대기로 성문을 마구 부수고 있다고?” 1598년 10월1일, 사천왜성의 동쪽 성문을 지키던 초병(哨兵)의 보고에 왜장(倭將) 시마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만 명 규모의 중로군 연합군이 성벽을 겹으로 포위한 뒤 구간별로 분담해 공격해오는 통에 시마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공중으로는 연합군의 ‘불랑기포(佛狼機砲)’에서 쏘아대는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었다. 불랑기포는 모포(母砲·포신)와 자포(子砲)가 분리된 공성용 대형 대포였다. 포탄을 장전한 여러 개의 자포를 준비해두고 하나의 모포에 바꿔 끼워가는 방식이어서, 장전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잇단 포탄 세례를 맞은 성벽이 서서히 깨지고 허물어지던 중이었다. “예. 덩치가 엄청 큽니다. 눈이 양옆으로 찢어져 올라갔고요. 수염이 좌우로 나뉘어 얼굴을 덮고 있어서 무섭게 생겼습니다.” 초병은 키가 매우 큰 거구의 병사 6명이 돌격대로 나서서, 성문을 허물고 있다고 말했다. 1만 명도 채 안되는 병력으로 필사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던 시마즈는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시 저격병들을 불러라!” 시마즈는 사쓰마번(薩摩藩) 소속의 다네가시마(種子島) 사람들을 수배해 거인들을 저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네가시마 철포병(鐵砲兵, 조총병)들은 총을 매우 잘 다루었다. 100보 떨어진 곳의 나뭇잎도 정확히 맞추고, 날아가는 새도 쏘아 떨어뜨릴 정도로 명사수들이었다. 다네가시마는 포르투갈 사람이 일본에 처음으로 머스킷(Musket) 총을 선보인 곳이다. 그 때문에 다네가시마 사람들은 일찍부터 총 쏘는 기술을 익혀왔다. 거인들은 결국 저격수들의 철포에 맞아서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거인들을 제거한 다네가시마 철포병들은 계속 명군을 사살했다. 명군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진영을 뒤로 물리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명군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팽신고의 진영에서 불랑기포 화약궤에 불이 붙어 크게 번져나갔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뒤덮었다. 명군들이 놀라 피해 달아나자, 왜군들이 기습적으로 돌격해왔다. 명나라 기병(騎兵)들은 이리저리 뛰며 헤맸다. 보병도 덩달아 우왕좌왕하다가 속절없이 일본군의 총과 칼날에 쓰러졌다. 이렇게 죽은 연합군 전사자 숫자가 7000∼8000명에 이르렀다. 너무나 어이없는 조명 연합군의 패배였다. 일본측 자료에서는 이 전투에서 희생된 거인들을 타타르 사람들이라고 했다. 명나라가 속국 타타르에게 힘센 사람들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하자, 특별히 타타르가 선별해 보낸 사람들이라고 했다(‘음덕기(陰德記)’ 제81권). 한국측 자료에서도 거인들의 존재가 나타난다. ‘우지개(牛之介) 3명이 있는데, 키와 몸뚱이가 보통 사람의 10배나 된다(‘난중잡록’)’는 것이다. 한편 타타르의 거인과 함께 참전한 4명의 포르투갈 해귀에 대한 전투 기록은 보이지 않다가 1599년 전쟁이 끝난 후 등장한다. 조선화가 김수운(金守雲)이 철수하는 명군들을 그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에서 해귀 4명이 보인다. 사천왜성 전투에서 희생되지 않았던 것이다.다국적 연합군 중 누가 제일 센가 해귀는 포르투갈 특수병만 지칭하지는 않았다. 잠수 실력이 뛰어난 동남아시아 출신 해귀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중로군이 사천왜성 전투를 한창 치를 무렵, 서로군을 맡아 순천 왜교성 공략에 나선 명 제독 유정(劉綎)은 수십 종류의 해귀를 이끌고 나왔다(‘성호사설·경사문’). 유정은 중국 남쪽의 소수민족인 남만(南蠻)들을 정벌한 경험으로 동남아시아 출신들을 대거 사병(私兵)으로 삼아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정유재란 때도 그랬다. 그런 유정을 오랜 세월 따라다닌 수하 장수가 다국적 병사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달자(8子, 몽골 계통)는 상대하기 쉽고, 해귀(海鬼, 남만 계통)는 약간 강하고, 왜자(倭子, 일본군)가 가장 강하다. 순천 왜교성 싸움에서 적의 수급을 가장 많이 베어 온 군사는 모두 조선 사람으로서, 귀화하여 한군(漢軍)이 된 자들이었다. 제독이 매우 중히 여겨 조선군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따라간 자가 300명이었다.”(‘성호사설·인사문’) 실제로 유정은 명나라로 귀국할 때 용맹한 조선인들을 가정(家丁)으로 삼아 데리고 갔다. 조선 영·정조 시기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도 이때의 다국적군 기세를 설명하고 있다. “묘병(苗兵, 묘족 병사)은 귀병(鬼兵)이라고 해서 전투에 참가할 때 반드시 먼저 성에 올라가긴 했지만 왜구를 보면 지레 기가 꺾였다. 중국 군대는 더 그랬다. 그러나 조선인은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잘만 쓴다면 천하의 막강한 군대가 될 수 있다.” 조선의 군사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전투력이 강하기도, 약하기도 했다는 평가다. 결과적으로 다국적 연합군의 전쟁인 정유재란은 세계 각국 군사들의 전투력을 비교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유재란은 또 동원된 무기 면에서는 세계대전과 다를 바 없었다. 16세기의 최신형 무기인 일본의 철포(鐵砲)와 중국의 불랑기포는 당시 막강 무력을 자랑하던 포르투갈이 전수해준 것이다. 정유재란이 인적 물적 자원 모두에서 국제전 양상을 띤 것은 유럽의 힘을 이용하려 한 히데요시의 오랜 책략, 그리고 이에 편승한 유럽 열강의 동아시아 진출 욕구 등이 얽히고설킨 결과였다.사천=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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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순천 해안 8곳에 축성… 내성-외성 이중 방어구조

    왜성은 임진왜란(1592∼1596년)과 정유재란(1597∼1598년) 중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총 28개(시기가 불분명한 왜성 제외)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군은 부산포에서 웅천 사이의 20개 지역에 1차로 왜성을 쌓았다. 주로 해안지역에 산재한 이 성들은 일본 본토와 통하는 해상로를 확보하는 한편 조선 수군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정유재란 시기,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8개 지역에 2차로 왜성을 쌓았다. 울산왜성, 사천왜성, 순천왜성(왜교성) 등 대표적인 왜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이때 지은 왜성들은 성벽, 성터 등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데, 일본의 성 구조와 매우 유사해 연구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일본 성은 대체로 천수각이 있는 내성(內城)을 혼마루(本丸)라 하여 주로 지휘부가 머물렀다. 내성을 감싸는 외성(外城)은 니노마루, 산노마루라 하여 바깥 방향으로 겹으로 축성해 나갔다. 대체로 하나의 성벽만 갖춘 조선 성에 반해 일본 성들은 이중삼중의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데 애를 먹었다. 또 정유재란 시기의 왜성들은 장악한 지역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거점 기지 성격이 강했다. 실제로 고니시는 왜교성에 입성한 후 산으로 도망간 조선 백성들을 유인해 안전을 보장하는 민패(民牌)를 주고 쌀도 나누어 주었다. 또 일본군이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백성들을 회유하니 투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난중잡록’). 고니시는 점령지에서 실질적인 통치 행위를 했던 것이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 2017-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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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기획]기단만 남은 순천왜성 천수각… 그날의 참상 기억하는지

    기자는 지난달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왜교성(倭橋城·순천왜성)을 찾았다. 정유재란의 역사 현장을 살피기 위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다. 1597년 12월에 축성된 왜교성은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군사 1만4000여 명을 이끌고 주둔한 성이다. 1597년 2월 일본의 관백(關白·일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그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성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었음)는 명나라와 4년간에 걸친 강화협상이 깨지자 재침을 명령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진입한 후 충청도 직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막혀 다시 순천, 울산, 사천 등지로 후퇴한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의 전략 요충지에 왜성을 지은 후 장기 농성전에 들어간다. 정유재란의 중요 전투는 이들 왜성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특히 순천 왜교성이 정유재란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사상 최초로 조명(朝明)연합 육군과 해군 4만2000여 명이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펼친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중일 삼국을 대표하는 용장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지금의 지형은 420년 전의 그때와 많이 변했다. 섬이었던 장도(獐島)는 흙으로 메워져 육지처럼 변했다. 그래도 왜교성에서 보면 당시의 수륙 전투 장면을 실감할 수 있다. 왜교성 앞 바다 쪽의 장도에는 이순신(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와 진린(陳璘) 도독의 조명연합 수군이 버티고 있었고, 왜교성 뒤 육지 쪽의 검단산성에서는 권율(權慄) 도원수와 유정(劉綎) 제독의 조명연합 육군이 막고 있었다. 고니시의 왜교성(면적 18만8000여 m²)은 당시 일본의 축성 수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러나 이 성은 일본군이 세웠다는 이유로 복원 작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현재 성곽 외성(길이 2502m) 중 상당 부분이 훼손돼 있고, 왜교성을 상징하는 천수각(天守閣· 일본군 지휘부이자 망루대) 역시 기단(基壇) 일부만 남아 있다.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천수각 기단에 올라 서 보았다. 장도와 검단산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성 위의 고니시: “구리스토님! 살려주소서” 1598년 음력 9월 15일, 순천 왜교성의 천수각. 밤이 되면서 바람도 없다. 가을 하늘에 뜬 보름달은 여느 때보다 더 둥글고 커 보였다. 철썩철썩 뜸을 들이며 성벽 아래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달빛과 어울려 묘한 운치를 자아냈다. 그러나 폭풍전야의 평화로움이다. “아름다운 성이다. 무식한 칼잡이 놈이 지은 성보다 백번 낫다. 그렇지 않은가, 아리마!” 고니시가 만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옆에 서 있던 심복 아리마 하리노부(有馬晴信)가 “하이(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고니시는 울산성(울산왜성)을 짓고 주둔 중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무식한 칼잡이’라고 불렀고, 가토는 그런 고니시를 ‘미천한 장사꾼 아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둘의 갈등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심했다. 그걸 잘 아는 심복은 주군의 말씀이 무조건 옳다고 동의했다. 고니시가 조선인 노역자들을 강제 동원해 3개월 만에 완성한 왜교성은 천혜를 이용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유일하게 서북쪽만 뭍으로 이어진 지형을 섬처럼 만들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성 전체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해자(垓字)로 이용한 것이다. 동쪽 바닷가에는 500여 척의 전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선창까지 두었다. 왜군이 호남 지역에 지은 첫 성인 왜교성은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한 결과다.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임진왜란의 일본식 표현)’에서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 점을 주요 패인 중 하나로 꼽았다. 그래서 ‘게이초의 역(慶長の役·정유재란의 일본식 표현)’을 지시하면서 ‘전라도를 반드시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호남을 공략하는 전초기지가 왜교성인 것이다. 고니시는 자신의 건축 감각에 다시 한 번 뿌듯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이순신이 움직였다고?” 5층으로 꾸며진 천수각 꼭대기에서 바다 냄새를 음미하던 고니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매사에 빈틈이 없는 아리마는 “척병의 정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완도의 고금도에서 동쪽의 왜교성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육로로는 조명연합군이 남원을 거쳐 이미 순천 부유창까지 들어와 길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순신에 의해 바닷길마저 막혀 버리면 왜교성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고립무원 신세였다. “수륙병진(水陸竝進)이구나. 승산 없는 싸움이다.” 고니시는 항구도시인 사카이(堺)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성장했다. 상인의 아들답게 계산이 빨랐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자신과 부하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다윗의 자손 구리스토(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께 기도를 드려야겠다.” 고니시는 어릴 적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리시단(吉利支丹·크리스천)이 되었다. 규슈 히노에번(日野江藩)의 다이묘(大名·영주)이기도 한 아리마 역시 ‘돈 프로타지오’라는 세례명을 받은 기리시단이었다. 침실로 돌아온 고니시는 십자 성호를 그었다. “주의 종 아우구스티노와 저의 부하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기를!” 기도를 마친 고니시는 지난날을 곱씹어 보았다. 6년 전인 임진년 4월 주군(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을 침공할 때는 명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이라는 명분이나마 있었다. 고니시 개인적으로는 이교도(異敎徒)의 나라를 개종시키기 위해 성전(聖戰)을 치른다는 나름의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들이 이교도인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결한 전쟁’을 치렀듯이…. “우리는 성전을 치르는 군인이다!” 고니시의 군선에는 X자 모양의 군기(軍旗)가 펄럭였다. 원래는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 모양의 깃발을 사용했으나 히데요시가 크리스천 금교령을 내리자 십자가를 X자 모양으로 변형시켜 눈가림한 것이다. 휘하인 아리마의 군선에는 십자가 모양 깃발이 펄럭였고 부대원들도 규슈 출신의 기리시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리나 이번 ‘게이초의 역’에서는 아예 명분 따위를 찾을 수 없었다. 호남인들의 씨를 말리라는 관백의 지침이 유일한 명분이랄까. 의미도, 승산도 없는 전쟁! 하루속히 왜교성을 탈출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다. 1598년 9월의 보름달은 고니시에게 깊은 시름을 안겨주고 있었다.  ▼왜교성∼나로도∼고금도, 이순신의 ‘백리길 복수극’ 해상루트▼바다의 이순신: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기자는 왜교성 천수각에서 위성지도를 펼쳐 보았다. 왜교성에서 당시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던 고금도 진영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이 보였다. 왜교성에서 여수를 거쳐 중간 지점의 고흥 나로도를 지나 바로 서쪽의 고금도로 연결되는 100리 길 해상루트였다. 당시 군선들은 노(櫓)와 범(帆)으로 항해했으니, 수군이 이동하는 데 최소 사나흘은 걸릴 거리였다. 고니시가 고민에 빠진 바로 그날 아침, 이순신은 실제로 고금도에서 진영을 옮기고 있었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그의 행보를 추적해보자. 9월 15일 오전. 고금도의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출항에 좋은 날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의 수군과 함께 왜교성에서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른 아침, 이순신은 대장선으로 향했다. 조선 수군도 어느 정도 재건된 상태였다. 고금도에서 전선 40여 척을 새로 건조했고, 군사 8000여 명과 군량미 1만여 석도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랜 진중 생활로 53세의 나이에 이미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세버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이순신의 얼굴은 늙었다. 임금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투옥과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통제사로 복귀한 이후에도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고니시 군과의 일전을 앞두고서 이순신 역시 고뇌가 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이번이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임을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배를 타기 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척자점(擲字占)을 쳐본 결과에 마음이 쓰였다. 이순신은 일(一)에서 사(四)까지의 숫자가 4면에 차례대로 새겨진 윤목(輪木)을 던져 괘(卦)를 뽑는 방식으로 길흉을 점쳤다. 첫 번째는 여궁득전(如弓得箭·활이 화살을 얻는 것과 같음)의 괘를 얻었다. 이어 재점(再占)에서는 여착장어(如捉長魚·큰 물고기가 잡힌 것과 같음)의 괘를 얻었다. ‘첫 번째 괘는 길(吉)하다. 이전 전투에서도 이 괘가 나와 좋은 결과를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두 번째 괘는 흉(凶)하다. 적군을 무찌르는 게 길이라면 흉은 무엇인가? 그게 혹 나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순신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거나 날씨, 가족의 안위 등이 궁금할 때는 척자점을 쳐보곤 했다(‘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14차례 직접 점을 친 기록이 나온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판에서 조선의 관료와 장수들은 종종 주역점이나 척자점으로 길흉을 예측하곤 했다. “적군을 이길 수만 있다면 흉이 나에게 온들 무슨 대수랴.” 이순신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중간 기착지인 나로도로 가는 대장선 위에 올랐다. 소나무와 참나무로 건조된 판옥선들이 격군(노꾼)들의 우렁한 소리에 맞추어 이순신을 따랐다. 선상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백의종군하던 작년(1597년) 4월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여수 고음천에 있던 팔순의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든 몸을 이끌고 아산으로 오던 중에 배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10월에는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면을 왜병의 칼에 잃었다. 면이 나타나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꿈을 꾸고 나면(이순신의 ‘행록·行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조선인들을 도륙한 왜적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1598년 9월 보름의 순천 앞바다는 온갖 분탕질을 쳐놓고 내빼려는 자와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자의 대립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육지의 유정: “꼭 싸워서 이겨야만 하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제쳐두고 일방적으로 일본과 강화 협상을 하다가 깨지자, ‘천자의 나라’ 대명제국(大明帝國)도 자존심이 상했다.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하자, 명의 황제 신종(神宗)은 1597년 2월 즉시 재파병을 결정했다. 그리고 끝장을 보기 위해 1598년 7월 대공세를 펼치게 된다. 명군(明軍)의 경략(經略·지휘자) 형개(邢개)는 조선군과 합동해 사로병진(四路竝進)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 수로군의 4개 방면으로 군대를 나눠 각지의 일본군을 동시에 공격해 쓸어버리는 전략이었다. 이 중 서로군이 왜교성의 고니시를 맡기로 했다. 서로군 제독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포함해 2만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유정은 남의 나라 전쟁에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듯 뭉기적거렸다. 이순신이 고니시와 결전을 준비하던 즈음인 1598년 9월 초, 유정은 왜교성으로 진군해 순천부까지 도착했다. 거기서 일본 측 밀사를 통해 고니시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유정과 동행한 우의정 이덕형은 그가 고니시와 강화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해 선조에게 보고했다. “그의 마음이 의심스러우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선조실록’) 유정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3개월 내에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베어 황상(중국 황제)께 바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서둘지 마라. 내게 계책이 있다.” 유정은 애초 고니시와 만나는 척 유인해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휘하 장수들이 무모한 계획이라고 말려도 끝까지 우겼다. 그에겐 다른 속셈도 있었다. 고니시를 못 잡더라도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유정 외에 달리 손을 내밀 사람이 없었다. 고니시가 살려달라고 하면 적당히 봐줄 요량이었다. ‘일본군만 철수하면 목적은 달성되는 것 아닌가. 피 흘리지 않고 성공하면 그게 지장(智將)이지.’ 유정은 잇속 계산을 마친 뒤, 군막 안에서 중국 요양(遼陽)에서 데려온 기생과 술판을 벌이며 노닥거렸다. 유정의 부하들조차 군중에 여인을 데리고 온 유정의 행태에 분개했다. 유정은 9월 보름을 넘기고서야 왜교성에 얼굴을 비쳤다. 유정은 이후 전투를 시늉으로 치르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는 행태로 일관했다. 유정 군의 행보는 번번이 조선 육군과 이순신 수군의 발목을 잡게 된다. 왜교성 전투에 명군의 수군 책임자로 참여한 진린마저 유정의 군막을 찾아가 수자기(帥字旗)를 찢어버리며 거칠게 항의할 정도였다. 사실 유정의 행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조선에 파병된 명군 장수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자국 군사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군이 스스로 조선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양전음화(陽戰陰和)! 겉으로는 전쟁을 하고 뒤로는 협상하는 태도를 줄곧 유지했다. 세 나라 장수들의 동상이몽 속에서 왜교성 전투가 다가왔다. 1598년 9월 말에서 11월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는 한중일 삼국 병사들뿐만 아니라 신출귀몰해 귀병(鬼兵)이라고 불리는 묘족(苗族)을 비롯해 섬라(暹羅·태국), 도만(都蠻·티베트), 능국(楞國·스리랑카), 면국(緬國·미얀마) 등 범(汎)아시아 출신의 병사들이 중국 장수의 사병(私兵)으로 참전했다. 16세기 세계 최대의 국제대전이었던 것이다.순천·완도=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이 시리즈는 사료와 문헌, 전문가 고증 등에 근거해 당시 상황을 소설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 2017-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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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유재란’ 420년전의 교훈

    420년 전, 조선의 강토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명을 칠 테니 길을 내라(征明假道)” 했던 왜적의 임진년 1차 침공에 이은 2차 침략이었다. 남쪽 4도를 노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하늘을 찔렀다. 백성들은 귀를 잘리고 코를 베였다. 코 베는 왜적의 잔인무도함에 민초들은 치를 떨었다. 1597년 발발한 정유재란은 동아시아 3국이 싸운 당시로는 드문 국제 전쟁이다. 조-명 연합군과 왜군이 일진일퇴 혈투를 벌였다. 조선 민초와 병사들만 희생한 것이 아니다. 이국의 들판과 바다에서 명나라와 왜의 무명 병사들이 속절없이 스러져 갔다. 60년을 한 주기로 치는 갑(甲)이 일곱 번이나 반복된 7주갑(周甲)을 맞았건만 정유재란은 여전히 ‘잊혀진 전쟁’이다.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더 흐르면 관련 기록과 자료도 멸실될 것이다. 전적지 중 상당수는 개발의 삽질로 훼손됐다. 조선 수군이 탈환해 진지를 구축했던 순천왜성 앞 장도(獐島)가 대표적인 사례다. 더 늦기 전에 남해안 일대에 산재해 있는 전적지를 보존하고 재조명하는 데 정부와 광역·기초자치단체들의 적극적 관심이 요망된다. 정유재란의 현장들은 한중일의 미래세대가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평화와 선린을 실천하는 메카가 될 것이다. 2017년 현재, 한반도는 여전히 분쟁의 중심점에 놓여 있다. 동아일보는 ‘비극의 역사’이자 ‘숨겨진 역사’로 남은 정유재란을 재조명하는 장기 연재를 시작한다. 420년 전의 역사에서 한중일 3국의 문제를 풀어갈 교훈과 지혜를 찾기 위함이다.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안영배 전문기자}

    • 2017-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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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넘치는 땅의 기운, 심수관家 도예의 저력

    올해 정유재란 420주년(7주갑·60년 주기가 7번 반복된 해)을 맞아 일본 규슈(九州) 남단의 가고시마(鹿兒島)현 미야마(美山) 마을을 찾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 붙잡힌 40여 명의 조선 도공들이 끌려와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촌이다. 현재도 도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마을은 부드럽고도 둥그런 동산들이 펼쳐진 분지형 지대에 들어서 있었다. ‘아름다운 산’이라는 마을 지명과 썩 어울리는 터다. 풍수적으로는 주로 이런 터에서 예인(藝人)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본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본 도자 문화의 3대 도맥(陶脈) 중 하나인 ‘사쓰마야키(薩摩燒)’가 탄생했다. 조선 도공의 후손이자 마을의 터줏대감인 심수관요(沈壽官窯)에 의해서다. 심수관요는 사쓰마야키를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아들(15대 심수관)에게 습명(襲名·이름을 이음)한 뒤 현업에서 은퇴한 14대 심수관(91·대한민국 명예총영사)을 만났다. 그는 일본군에 붙잡혀 전라도 남원에서 끌려온 조선 도공 심당길의 직계 후손이다. 흙을 빚고 땔감으로 불을 지피고 유약을 바르느라 울끈불끈해진 그의 손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일본 아이들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유도를 배웠는데 고단자까지 됐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학창 시절 이유 없이 일본인에게 얻어맞고 차별받아 온 삶을 엊그제 일처럼 들려주었다. 미야마 마을에 정착한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대부분 메이지 유신과 일제의 한반도 침탈 등을 거치면서 모진 차별을 견디지 못해 일본 성(姓)으로 바꿨다. 심당길과 함께 붙잡혀온 박평의의 12대 후손 박수승은 도자기를 팔아 번 돈으로 도고(東鄕)라는 일본 성씨를 샀다. 태평양전쟁 당시 외상을 지낸 도고 시게노리(박무덕·1882∼1950)가 바로 박수승의 아들이다. 그러나 심수관 가문만은 무려 420년간 ‘청송 심씨’를 고집스레 지켜오고 있다. 14대 심수관은 “뿌리 교육을 지속적으로 받았다”고 짧게 이유를 댔다. 그 대가로 선조들과 그가 감내해야 했을 지난한 삶이 읽혀졌다. 심수관요는 아직도 조선식 오름가마를 고집하고 있었다. 1대부터 사용해 오던 가마를 조금씩 확장하면서 지금껏 유지해 오고 있다고 한다. 1873년 12대 심수관은 이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大花甁)를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이름을 떨쳤다. 이후 사쓰마야키를 전 세계로 수출하는 길을 터놓았다. 1964년 아버지(13대 심수관)로부터 습명을 받은 14대 심수관 역시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고향을 잊을 수가 없소이다’의 작품 속 주인공으로 소개될 정도로 명성을 얻었다. 필자는 심수관요의 오름가마 터에서 강렬히 치솟아 오르는 땅의 기운에 흠뻑 취했다. 지기(地氣) 에너지가 응집된 혈(穴)에 가마가 정확히 놓여 있었다. 도자기 전시실에 놓인 12대 심수관과 14대 심수관의 작품들에서 동일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를 그제야 알아챘다. 제작자만 다를 뿐 가마 터의 같은 땅기운을 쐬고 나온 도자기였기 때문이다. 흔히 도자기를 흙, 불, 나무, 물의 조화가 빚어내는 종합 예술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풍수인의 눈으로는 좋은 땅기운을 받을 수 있는 가마 터가 핵심이라고 본다. 심수관요는 명품 도자기는 명당 가마 터에서 나옴을 증명하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필자의 풍수 소감을 14대 심수관에게 전달했다. 그는 명당과 풍수지리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가마 터에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삶은 대를 이은 역사와의 고된 싸움이었소” 하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그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는 안팎으로 치열하게 역사와 싸워 왔다. 외적으로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러 왔다. 그런 한편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작품 세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내적인 전쟁을 벌여 왔다. 그의 ‘역사’라는 말이 필자에게도 대못처럼 박혀 들어왔다. 심수관요를 찾아갔을 때, 한국에서는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임명과 관련해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이라는 역사관 논쟁이 들끓고 있었다.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단군의 고조선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싸움이었다. 그런 역사관 논쟁이 저급한 정치 논리와 역사학계의 밥그릇 싸움으로 필자에겐 비쳤다. 1600년대에 지은 다마야마(玉山)신사에서 지금도 단군을 기리며 역사를 지켜오는 심수관 가문을 보면서 그저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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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주전소 터로 이사하는 한국은행의 앞날

    서울 태평로(중구 세종대로)의 옛 삼성본관 앞에 ‘한국은행’ 표지석이 최근 세워졌다. 한국은행이 지난 100여 년간의 소공동(중구 남대문로) 시대를 접고 이곳에서 태평로 시대를 연다는 표식이다. 한국은행은 6월 말까지 한은 총재와 금융통화위원을 비롯해 중요 부서들이 옛 삼성본관 건물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한은 본관 리모델링 및 별관 재건축 공사에 따라 3년간 이 건물을 임차하게 됐다는 거다. 공교롭게도 한국은행은 문재인 정부의 출범에 발맞추어 새 터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모양새다. 풍수인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라 할 만하다. 비록 한시적이긴 하지만 한국은행이 사상 처음으로 격(格)에 어울리는 터를 찾아가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새로 둥지를 튼 자리는 조선시대 때 화폐 발행을 하던 관아(전환국) 터다. 한양도성 내부를 묘사한 고지도에 의하면 전환국은 부영태평빌딩(옛 삼성생명 본사)과 옛 삼성본관, 그리고 이웃한 신한은행 본점 일대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세(地勢)로 보면 서울 서쪽 인왕산에서 남쪽 남산으로 이어지는 둔덕길이다. 이곳이 근대식 백동전을 찍어내던 주전소(鑄錢所)임을 알리는 표석도 세워져 있다. 조선 고종 때 13년간 운영된 전환국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의 화폐 발권 기능을 담당하는 한국은행 같은 기관이다. 고종은 나라의 돈줄을 쥔 관아인 만큼 심사숙고해 터를 선정했다. 실제로 그렇다. 이 일대는 풍요와 재물 운이 왕성한 지기형(地氣形) 명당에 해당한다. 이 일대에 들어선 기업들과 관련한 재운(財運) 풍수설도 유난히 많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았던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은 옛 삼성생명과 삼성본관 터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부영그룹의 이중근 회장이 삼성생명 빌딩을 매입하게 된 것도 ‘돈이 모이는 곳’이라는 풍수설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2006년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합병한 뒤 조흥은행 본점 자리를 통합본점으로 삼으려던 계획을 접고 이 자리에 눌러앉은 것도 풍수설을 따른 결과라고 알려졌다. 반면 일제강점기 일본이 세운 한국은행(당시 조선은행·현재 화폐박물관) 터는 어떠할까. 한국은행이 새 본관(1987년 완공)으로 이주할 때까지 사용한 화폐박물관은 한국 통화정책의 최고사령부 역할을 했다. 화강석으로 외벽을 마감한 유럽풍의 화폐박물관은 일본의 중앙은행인 도쿄의 일본은행 본점과 겉모습이 매우 유사하다. 두 건물 모두 동일한 일본인 건축가(다쓰노 긴코·辰野金吾)가 설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터의 기운도 일치한다. 두 건물은 천기형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천기형 터는 재운보다는 명예와 관운(官運)에 좋은 기운이다. 몇 해 전 도쿄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일본은행 본점 터를 보며 관(官) 주도의 금융시스템과 권위적인 조직 문화가 현재도 이어지고 있을 것으로 풍수적 소감을 밝혔다. 우리의 화폐박물관과 그 바로 뒷자리에 위치한 한국은행 본관 터 역시 일본은행 터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게 필자의 견해다. 역사적으로도 한국은행 본점 자리는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잠저였다. 인조가 반정(反正)으로 권력을 쟁취할 만큼 관운(官運)이 왕성한 천기형 터는 금융권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풍수에서는 재물, 즉 돈을 물에 비유한다. 돈은 흐르는 물처럼 유동성(流動性)을 지닐 때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돈(물)의 유동성을 활성화 및 최적화하는 기운이 바로 지기형 터다. 천기형이 강한 공격적 기운이라면, 지기형은 부드러운 타협적 기운이기 때문이다. 금융기관이 지기형 명당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제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다. 대표적인 곳이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건물(워싱턴)과 뉴욕연방준비은행 건물(맨해튼)이다. 필자는 뉴욕 맨해튼 현지에서 미국 연방은행은 물론이고 글로벌 규모의 은행들이 모두 지기형 터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터를 본능적으로 짚어내는 서구인들의 입지(立地) 감각이 놀라웠다. 필자는 천기형 터에서 지기형 명당 터로 임시 이전하는 한국은행의 미래를 밝게 본다. 한국은행 임직원들이 지기형 기운을 받으면서 물처럼 유연한 통화정책과 경제비상 사태에 대처하는 순발력을 키워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3년이라는 기간은 새로운 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데 충분한 시간이라는 게 필자의 풍수 경험이다.  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풍수학 박사}

    •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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