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배

안영배 기자

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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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안영배 기자입니다.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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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6~2024-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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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이 불 토하듯… 방화수류정 횃불, 수원 밤하늘 벌겋게 달궈

    《토요기획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기획은 3월 이후 14차례에 걸쳐 발생 배경, 각계각층의 움직임, 국내외 대응 등을 거시적 관점에서 조명했다. 15화부터는 국내외 각 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현장을 찾는다. 당시 어떻게 독립만세운동이 진행됐는지 독립운동가 유가족 및 관련자 면담 내용 등을 전한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만세운동이 후세에게 전하는 역사적 의미를 현장에서 찾아나간다.》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경기 수원 광교산 줄기가 뻗어 내려 자그마한 둔덕을 이룬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 횃불이 등장했다. 바로 옆 용연(龍淵)이라는 이름의 연못 수면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빛 가닥들로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일렁였다. 조선 정조가 지은 화성(華城)의 구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방화수류정이 수원 3·1독립운동의 발원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시작은 정자에서 700여 m 떨어진 화성 봉돈의 봉수대였다. 군사용 통신시설인 봉수대에서 밝혀진 횃불을 신호탄으로 방화수류정의 독립만세 함성은 조용하던 수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수십 명의 수원면(현 수원시의 일부) 사람들이 손에 든 횃불은 밤하늘까지 벌겋게 달구었다. 방화수류정의 횃불은 3·1항쟁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야간 ‘불꽃 시위’였다. 소규모로 시작한 횃불운동이 경기도를 가장 격렬한 3·1항쟁 현장으로 탈바꿈시킬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애초부터 횃불 시위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경성(서울)의 3·1독립선언서 발표 시각과 맞추어 이날 정오 수원면 삼일학당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방화수류정∼북문(장안문)∼종로 네거리∼남문(팔달문)까지 거리행진을 펼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수원경찰서의 일경에게 사전 탐지됐다는 첩보가 있어 밤의 횃불 시위로 급히 바뀌었다.(이제재, ‘수원의 옛문화’) 횃불은 짚을 한 발쯤 길게 이어 둘레를 새끼로 친친 돌려 감은 다음 끝부분에 석유를 묻혀 불을 붙인 것이었다. 밤하늘을 장엄하게 수놓는 횃불은 사람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시위대가 거리에 나서자 합세한 군중은 순식간에 종로를 거쳐 남문까지 진출했다. 독립만세 함성은 남문 밖(현재 중동 사거리와 영동시장 일대) 객줏집 거리를 휘돌아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경기도 각처에서 올라온 시골 상인들이 주로 묵던 객줏집은 각 지역으로 도회지 소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됐다. 만세운동 기획자들이 남문을 시위의 종착지로 정한 것도 객줏집에 머무는 상인들이 독립운동 소식을 시골 각지로 퍼뜨리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란 일경은 긴급 출동했다. 그러나 시위를 진압하기보다 수원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거류민 보호에 정신이 없었다. 일경은 새벽까지 이어지던 시위가 뜸해지는 틈을 타 화성 사대문을 봉쇄한 후 운동 주동자들을 색출했다. 시위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들이 속속 일경에 붙들려 갔다. 경성과 같은 날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수원군의 3월 1일 운동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됐다. ○ ‘기록엔 없는’ 최초의 횃불운동 3월 1일 수원 독립만세운동은 일제 공식 기록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워낙 기록이 부실해 수원의 만세운동 시작 날짜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 경성의 3·1운동보다 며칠 뒤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3·1항쟁의 생생한 현장을 기록으로 남긴 이병헌의 ‘3·1운동비사’(1959년 간행)에는 짤막하지만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3월 1일 (수원) 북문 안 용두각(방화수류정)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 경찰이 이곳에 무슨 일로 모였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군중은 이리저리 피하는 척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부르자 순사는 깜짝 놀라 경찰서로 달려가 버렸다. 만세 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이었다.’ 수원지역 독립운동을 연구해 온 한신대 김준혁 교수는 “독립운동가 가족 및 관련 인물 면담, 민간 기록 등을 연구한 결과 서울 이남 지역에서 수원이 유일하게 서울과 같은 날 3·1운동을 시작했으며 또 처음으로 횃불 만세운동도 등장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원 사람들은 수원을 서울과 같은 위상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강해 3월 1일 서울과 수원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수원 사람들은 정조가 한양을 대신하는 신도시를 구상하며 지은 화성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현재도 수원지역 원로들은 화성 안쪽을 ‘한양’이라고 부른다는 것. 기자는 올해 폭염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9월 초, 방화수류정의 거리 시위대가 마지막으로 집결한 남문(팔달문)부터 만세운동 현장을 역추적해 보았다. 당시 시장이 서고 객줏집으로 유명했던 남문 밖은 지금도 영동시장, 팔달문시장 등으로 번화가다. 수원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가게들은 평일이지만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저 멀리 광교산에서 발원한 수원천 길(수원천로)과 남문 남쪽으로 이어지는 대로(정조로)를 따라 상인들은 용인, 화성, 오산 등지로 수원의 독립운동 소식을 퍼뜨렸던 것으로 짐작됐다. 남문에서 화성의 동쪽 성벽인 봉돈의 봉수대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600m, 여기서 다시 북서쪽으로 700여 m 떨어진 곳에 방화수류정이 있었다. 수원 독립운동의 첫머리가 된 방화수류정의 지형지세를 살펴보았다. 산의 용맥(龍脈)이 꾸불텅꾸불텅 내려오다가 물을 만나는 지점에서 불끈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를 이룬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용두각(龍頭閣)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화성 건축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는 “이곳(방화수류정)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흘러 대천에 이르니 여기야말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라고 묘사하고 있다. 방화수류정이 경관 감상용 정자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화성의 동북방을 지키는 요새인 동북각루(東北角樓)로 불리는 이유다. 동북방은 주역 팔괘의 간(艮) 방위에 해당하고 ‘간’은 만물이 그치는 곳(終於艮)이자 새로 시작하는 곳(始於艮)을 의미한다. 만물이 새로 시작하는 터인 방화수류정에 서 보았다. 주역과 풍수지리에 해박한 정조가 이곳을 즐겨 찾아 새로운 나라를 구상한 것도, 1919년 3월 1일 수원 독립만세운동의 첫머리로 이곳이 선택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용두각(방화수류정, 동북각루)의 횃불 만세운동은 마치 머리를 든 용이 불을 토하듯 장엄함을 연출했고 이후 수원면에서는 상인들과 농민들의 만세운동이 잇따랐다. 또 봉돈의 봉수대가 용인과 화성 등 인근 지역 봉수대와 연결되듯 경기도 전역에서 연쇄적인 횃불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산상 횃불시위는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일제의 허를 찔렀다. 산에서 펼치는 게릴라식 횃불 만세운동은 일경을 당황케 했다. 일경이 허겁지겁 산으로 쫓아오면 사람들은 신속하게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횃불 시위는 시내와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칠 때 일제 군경의 무차별적 폭력 탄압으로 발생하는 희생을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하순부터 전국에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일제 조선군 참모부가 작성한 경성(서울)상황 보고서는 “(3월) 23일부터 경성 시내 및 부근 12개소에서 횃불을 올리고 200명에서 400명의 군중이 행동하였다”고 기록했다. 경기도의 경우 3월 23일부터 4월 14일까지 수원군 고양군 시흥군 광주군 부천군 개성군 강화군 장단군 파주군 김포군 양주군 진위군 이천군 여주군 등에서 산상 횃불시위가 이루어졌다.(김정인, ‘국내 3·1운동―중부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일제 지휘부는 “경성 부근의 소요는 지방에 미칠 영향이 크므로 절대적으로 진압할 필요가 있다”며 횃불시위를 심상찮게 보았다. 실제로 횃불시위는 독립만세운동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넓혀가는 위력을 발휘했다. 주로 낮에 이뤄지던 시위를 밤까지 확장하고, 평지에서 벌어지던 운동을 산상까지 넓혀갔다. 그 효과는 놀라웠다. 경기도 21개 부·군이 모두 참여해 3월과 4월에 걸쳐 225회 시위, 연인원 15만여 명 동원 등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이다.(이지원, ‘경기도지방의 3·1운동’) ○ ‘그 선생에 그 제자’ 3월 1일 방화수류정 시위로 수원경찰서에 체포된 이들은 수원지역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수원상업강습소의 김노적 박선태 등 교사들이 20세 안팎의 청년 학생들과 함께 이 운동을 주도했다.(이동근, ‘1910년대 수원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3·1운동의 전개과정’) 모두 수원면에 거주하던 이들은 미리 체포를 각오하고 있어 일경에 저항 없이 붙들려갔다. 취조 과정에서 처음부터 수원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한 인물이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당시 31세·1888∼1945)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수원면 삼일여학교 학감인 김세환은 학교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열정적인 교육운동가였다. 김세환은 경성 YMCA 간사였던 박희도와의 인연을 계기로 1919년 2월 10일경부터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해 왔다. 그는 충남과 수원지역 기독교 조직 책임자가 돼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모으는 중책을 맡았다. 김세환은 3월 1일 경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13일 체포됐다. 법정에 선 김세환은 민족대표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재판장이 “일·한 합방에 대해 어떠한 감상을 가졌나”라는 질문에 “아무리 세계대세로 합방이 됐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선 사람은 권리를 찾고, 일본 사람은 권리를 돌려보낼 시기가 올 줄 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어 “금후로도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짧고 명료하게 대답해 방청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김세환은 1년 반의 옥고를 치르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혹독한 수감생활 후유증으로 몸져누웠고 광복을 맞은 직후인 1945년 9월 16일 생을 마쳤다.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김세환이 수원상업강습소 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제자였던 김노적(1895∼1963), 박선태 교사(1901∼1938) 등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다. 수원 방화수류정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김노적은 ‘수괴’로 지목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수원경찰서에 끌려간 뒤 고등계 형사의 고문으로 갈비뼈 4개와 왼팔이 부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매질을 당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지형 씨(80·수원시 장안구 영화동)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고문을 당해 한쪽 머리가 푹 꺼지고 왼쪽 손목을 평생 사용하지 못했다. 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어린 내가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게 일상사였다. 살아계신 게 신기할 정도의 몸에도 아버지는 자나 깨나 나라를 걱정하셨다.” 김노적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같은 마을(수원면 산누리) 출신이자 후배인 박선태와 함께 구국민단(救國民團) 활동을 했다. 수원에 거주하면서 경성으로 통학하고 있는 학생들 중심으로 구성된 구국민단은 1920년 6월 결성된 뒤 상하이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배포, 수감된 독립운동가 가족 구조, 임시정부 자금 지원 활동 등을 했다. 구국민단은 그해 8월 일경에 발각돼 박선태를 비롯한 간부진(이득수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 등)은 징역형을 받았다.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간부직에 등재되지 않은 김노적은 중앙고보 학생 신분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김노적은 이후에도 항일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일제의 전쟁 광기가 극성을 부리던 1940년 성치 못한 몸을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을 맞이해 임시정부 주석 김구 일행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노적은 고향에 도착해 가족을 찾기에 앞서 수원의 상징인 팔달산(128m)에 올라가 시내를 굽어보더니 땅에 엎드려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쥔 채 대성통곡을 했다. 좌우에서 이를 지켜본 옛 3·1운동 동지들도 함께 따라 울었다.(이제재, ‘수원의 옛문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동안 가족 생계는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동냥을 다니며 어린 4남매를 키우셨다. 광복 후 집에 오신 아버지는 건강이 계속 악화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실 수 없었다. 그러다 6·25전쟁 중에 기진맥진한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막내 여동생을 보육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어렵게 생활했다.” 김지형 씨는 그때가 생각나는 듯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었다. 김노적은 1963년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있다가 수원 남수동 초가집에서 운명했다. 김노적은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가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수감 기록이나 독립운동 현장 사진 같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김지형 씨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노적처럼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숨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후세대들은 역사의 빚을 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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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중투쟁’ 한용운, 공포에 떠는 몇몇 대표에게 인분세례

    1919년 6월 초,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가 경성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서대문 밖 모화관(독립문의 옛 이름) 막바지 산등성이의 붉은색 벽돌집을 찾아갔다. 인왕산 자락 아래 두 길 남짓한 담장이 육중하게 둘러싸고 있는 서대문감옥(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기자는 간수장으로부터 “(3·1)소요사건 관계자로 현재 (수감된) 수효가 1860여 명에 달한다”는 말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경성과 각 지방에서 잡혀온 ‘소요범’ 가운데는 어린 여학생을 포함한 여성이 28명, 농민과 무직자 다수, 약 300명의 야소교(기독교) 신도와 적지 않은 천도교인 등 종교인도 있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매일신보는 6월 10일자에 ‘서대문 감옥의 소요 범인들이 온순하게 근신하고 있으며, 감옥의 친절한 대우에 매우 기꺼워하는 중’이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내걸고 탐방 기사를 실었다. 일제가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선동’ ‘소란’을 일으킨 소요범이라 부르며 의미를 축소한 것을 보여준다. 서대문감옥 중 중범죄자를 수감하는 미결감 독방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로 가득 찼다. 3월 1일 일경에 체포된 33인 민족대표 중 32명(기독교계 대표 김병조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이 이곳으로 이감됐다. 수감된 민족대표들에 대한 집요한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2선조직 17명도 잇따라 붙잡혀 왔다. 감옥은 한낮에도 어둡고 침침했다. 감옥 맨 구석 동 북쪽 첫 독방부터 순서대로 이명룡, 이갑성, 함태영, 최남선이 수감됐다. 맞은편으로는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이 나란히 한 방씩 차지하고 있었다.(서대문감옥 간수 권영준의 ‘형정반세기’) 친일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가 100년 전 찾았던 감옥이지만 이제는 역사 교육장으로 바뀐 그곳을 8월 21일 다시 찾아갔다. ‘민족대표 48인’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실제 생활하던 독방은 어떠했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사관 관계자는 “현재 멸실돼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역사관으로 재단장한 형무소는 원래 규모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이 수감됐던 독방들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다른 독방을 통해 민족대표들의 수감 생활을 헤아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민족대표들은 1평짜리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일반인과 학생들이 잡혀오고 감방마다 아침저녁으로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민중의 호응에 감동한 민족대표들은 의연하게 수감생활을 했다. 민족대표들은 아침저녁 점검 때 일본인 간수부장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해야 하는 감방규칙도 무시했다. 불교계 대표 한용운은 평소 정좌 자세로 참선을 하다가도 점검 때면 편한 자세로 바꿔 앉아 간수장을 빤히 치켜 올려다보곤 했다. 감방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던 이갑성은 한번 들어가면 1주일간 햇빛을 볼 수 없고 이부자리도 주지 않는 ‘벌감(罰監)’ 처분을 자주 당했다. 이갑성, 오화영 두 민족대표는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을 맞아 서대문감옥과 마포 경성감옥 수감자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는 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정오가 되자 공장에서 일하던 기결수는 모두 일손을 멈추었고 감방 안 미결수들은 만세를 외쳤다. 1700여 명이 부르는 만세 소리는 이웃 공덕동 일대에서도 들려 만세를 따라 부를 정도였다.(‘형정반세기’) ○ 민족대표, 내란죄로 몰려 감옥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일제 고등계 형사들은 감옥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가혹한 문초와 살기등등한 고문을 했다. 서대문감옥 본관 보안과 청사 지하에는 ‘취조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방이 있었다. 말이 취조실이지 고문이 자행되는 곳이었다. 전등 없이는 한낮에도 캄캄한 8평짜리 방은 무간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한쪽 벽에는 갖가지 고문 도구들이 걸려 있고, 천장 쇠고리에 달려 있는 올가미 밧줄은 사형장의 그것과 흡사했다. 현재도 이 모습은 그대로 재현돼 있어 창살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고등계 형사들은 이곳에서 온몸을 발가벗겨 놓고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기, 코에 고춧물 붓기,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리고 구둣발로 짓밟기, 손·발톱 찌르기와 뽑기 등 악랄한 고문을 했다. 어느 날부터 민족대표들이 극형에 처해진다는 얘기가 나돌아 감옥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중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제2장의 문구를 물고 늘어졌다. 폭동을 선동하는 문구로 보고 민족대표들에게 사형 선고가 가능한 내란죄로 옭아매려 했다.(손병희, 최린, 최남선, 한용운 등에 대한 신문조서) 고문에 못 이겨 일부 민족대표가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사장 이종일(당시 62세)은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듣건대 고문이 점차 극심해져서 그 정도가 이를 데 없이 가혹하다. 어떤 대표는 벌벌 떨면서 방성대곡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될 법한 일인가. 그래서 한용운이 공포에 떨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 인분(人糞)세례를 퍼부은 게 아닐까. 통곡하는 자 머리에 인분을 쏟아부었던 사실은 너무 유명한 일이다. 우리 민족대표가 공포에 떨거나 비열한 행동을 자행한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묵암비망록’) 그러나 손병희, 이승훈, 권동진, 오세창, 최린, 김창준, 홍기조, 양한묵, 신석구, 나인협, 정노식, 김도태, 박인호, 김원벽, 강기덕 등 대부분의 민족대표는 끝까지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종일은 일기에 그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며 “마음 든든하다”고 감회를 밝혔다. 49명의 민족대표가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째 되던 5월 26일, 비보가 날아들었다. 56세를 일기로 양한묵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시신을 인수한 양한묵의 아들은 인력거에 상여를 싣고 북촌 계동 집으로 가던 중 종로 사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미친 듯이 불렀다. 일경은 이를 간섭하지 않았고,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거리의 시민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양한묵의 자택에서 미국인 세브란스병원장을 불러 검시를 했다. 뇌일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박래원의 ‘내가 겪은 기미년 3월 1일’, 신인간 1975년 3월호)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양한묵 사망 직후 서대문감옥의 ‘소요’ 참가 수감자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날조 기사를 내보낸 것은 민심 폭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민족대표 48인’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체포돼 재판까지 받은 인물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양한묵은 수감 중 재판도 받기 전에 사망해 포함되지 못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그해 7월 12일 3면 ‘금일 대공판(今日 大公判)’이라는 기사에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을 모두 실었다. ○ 옥중의 항일 투쟁 48명 민족대표 중 서대문감옥에서 가장 주목을 끈 인물은 단연 만해 한용운(1879∼1944). 승려 한용운은 3·1독립운동 기획 초기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그는 일제 첩자라는 의심까지 받아가면서 독립운동 거사에 끼워달라고 간청했다.(‘서정주 문학전집·2’에 수록된 현상윤의 발언) 그의 진가는 옥중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받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이라는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정해 놓고 ‘최후의 일각’까지 실천했다. 한용운의 옥중 투쟁 중 1919년 7월 10일 검사 신문에 서면으로 답하는 ‘조선독립의 서’는 해외에까지 알려졌다. 비밀리에 바깥으로 흘러나온 서면 답변서는 자료 없이 쓴 한 편의 ‘논문’이었다. 1919년 11월 4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 제25호(부록)는 전문을 실었다. 최남선 대신 자신이 3·1독립 선언서를 쓰겠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한 한용운의 꿈은 이 글로 이루어졌다. 그의 옥중 투쟁은 동아일보 보도로 국내에도 널리 전파됐다. ‘한용운의 맹렬한 독립론, 국가의 흥망은 오로지 민족의 책임’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1920년 9월 25일)은 한 예에 불과하다. 그는 민족적 자존심의 대변자로 우뚝 섰다. ‘대쪽 소신’과 ‘강철 기개’로 일제에 굴하지 않은 한용운은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돼주었다. 한용운 외에도 대다수 민족대표는 일경의 고문과 고초를 끝까지 견뎌냈다. 1920년 10월 30일 결심 최종 공판에서 애초 내란죄로 극형에 처해질 뻔했던 민족대표들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등만 적용됐다. 최고 3년형을 받은 이들은 천도교계 대표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기독교계 대표 이승훈 함태영, 불교계 대표 한용운 등 모두 8명이었다. 3·1운동 기획 단계에 가담한 송진우, 현상윤 등은 ‘예비 음모’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무죄로 석방됐다. 그러나 모두들 이미 1년 7개월여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였다. 48명의 민족대표 중 손병희, 이종일, 박준승 등 고령 민족대표들은 감옥생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조선총독부가 민족대표들을 중형으로 처벌하지 못한 데는 그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중형을 선고할 경우 언제 폭발할지 모를 민심에 불을 지를 수 있다는 동향 분석 때문이었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무단(武斷)으로 한국인들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으며, 유화책을 펼치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 ‘일진회 첩자’ 오인받은 韓… 죽음 각오하고 교민대표 엄인섭 찾아가 ▼33인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연해주 방문한 한용운 발자취 따라가보니…8월 초 해외 무장독립운동 주요 거점 중의 한 곳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았다. 33인 민족대표로는 유일하게 연해주 지역을 방문한 한용운(사진)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는 19세기 중반부터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었고 독립투사들이 활동한 곳이다. 1905년 봄, 한용운이 해삼위(海參崴)로도 불린 이곳을 찾았을 때는 러일전쟁의 포성이 한창이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가 이곳 동포들이 만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선 동포들은 머리를 빡빡 깎아 일본인처럼 보이는 한용운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첩자로 오인했다. 심지어 한용운을 죽이려는 위협도 가해졌다.(고재석, ‘한용운과 그의 시대’) 경위는 이랬다. 첩자로 지목된 한용운은 죽기를 각오하고 해삼위 교민대표 엄인섭을 찾아가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대범함에 놀란 엄인섭은 자신의 명함을 주며 통행증으로 쓰라면서 귀국할 것을 권고했다. 한용운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부동항을 구경하려고 바닷가에 나왔다가 그만 조선인 청년들에게 붙들렸다. 엄인섭의 명함도 통하지 않았다. 바다에 수장당하기 직전 러시아 경관들에게 간신히 구조됐다. 한용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방성대곡을 했다.(‘한용운 전집’) 올해 초 한용운의 러시아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만해로드 대장정’ 탐방단을 이끌고 연해주를 찾은 동국대 고재석 교수(만해연구소 소장)는 “만해가 연해주행에 관해 쓴 글을 읽어보면 해삼위에서 국내외를 연계한 독립운동 가능성을 타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만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는 쪽에 희망을 걸고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기자는 한용운이 수장될 뻔한 바닷가 금각만(金角灣)을 찾아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포들로부터 버림받은 그의 참담함을 헤아려 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한용운은 안중근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의거를 듣고 엄인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용운에게 명함을 건네준 엄인섭이 바로 1907년 안중근과 결의형제를 하고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시로 안중근을 ‘만 석의 뜨거운 피와 열 말의 담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의거를 기렸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지만, 만일 엄인섭이 자신의 외삼촌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1858∼1920)과 한용운을 만나게 했다면 역사가 달리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해삼위 최고의 부호였던 최재형은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에 내놓았던 애국지사였고, 안중근의 의거를 위한 일체 자금을 댄 인물이다. 그런 최재형이 안중근 못지않게 투사 성향이 강한 한용운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는 한용운보다 뒤늦게 해삼위를 찾은 안중근에게 해외에서의 ‘대업’을 부여했다. 여비도 다 떨어진 한용운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크라스키노 등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걸어서 국내로 돌아온 후 3·1만세운동의 주역이자 48인 민족대표로 ‘꺼지지 않는’ 민족의 등불이 됐다. 고 교수는 “안중근의 단지동맹비가 있는 크라스키노에 만해의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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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대한제국 공사관이라면…” 총영사 당황하게 만든 학생들

    “총영사님께서 개항기 대한제국의 공사관이었다면 어떻게 활동하셨을까요?” “역사를 잊지는 말되 일본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한국 정부의 고려인에 대한 정책은 무엇인가요?” 지난 8월5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충남고교 1학년생들이 주블라디보스톡대한민국총영사관의 이석배 총영사에게 던진 질문들이다. 대개 ‘외교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월급은 얼마나 받나’ 등의 일상적인 질문을 하리라 예상했던 이 총영사는 일순 당황해 했다. 전문가들도 쉽게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었지만, 학생들의 ‘성숙한’ 질문에 적잖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이 총영사는 바쁜 영사 일정속에서 예정 시간을 훨씬 초과하면서까지 질문에 답변했다. 학생들은 충남도교육청(교육감 김지철) 소속 고등학교 1학년 학생 111명으로 구성된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단(총단장 서정문).’ 8·15광복절을 앞두고 여름방학을 이용해(7월 26일~8월6일) 압록강과 두만강을 따라 중국의 동북 3성, 내몽고,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찾아 민족의 역사를 체험하는 대장정에 오른 ‘어린 용사’들이었다. 충남교육청이 매년 실시하는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은 학생들에게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 산재해 있는 우리 민족의 지리, 문학, 역사 체험을 통해 동북아시아의 역사문제에 대응하고, 평화와 번영의 통일 한반도를 이끌어갈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이번 인문학기행단은 지난 4월에 발대식을 가졌으며, 이들은 각각 역사교류, 독립운동, 평화통일을 주제로 3개 기행단으로 편성하였고, 5~6월에 독서·토론·인문학 특강 등 사전활동과 1박2일 성장캠프 2회를 거쳤다. 역사교류단은 우리나라의 신석기,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와 관계가 깊은 요서, 내몽고 지역의 홍산문화, 요양 동경성, 집안 국내성, 발해의 상경용천부 등 역사교류와 관계 깊은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역사교류단에 참여한 김강이 학생은 “창의융합형 인문학기행은 시험을 보기 위해 역사를 암기하는 우리들에게 마음으로 역사를 느끼게 해준 특별한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임지혜 학생은 “조상들이 살던 역사적 현장에 와보니 중학교때 배운 역사와 고등학교 배운 역사가 달라 혼랍스럽다”며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다. 인문학기행 독립운동단은 대일항쟁기 연해주와 만주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유적지(봉오동, 청산리) 및 안중근 의사 행적(단지동맹비, 하얼빈역, 여순감옥)을 찾아 기행하는 동안 나라와 민족의 소중함을 직접 체험하는 일정을 소화했다. 독립운동 기행단 차민솔 학생은 “많은 독립 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에 분노하기도 하고, 독립투사들의 굳은 결의에 감동하고, 그분들을 향한 존경심과 역사의식을 키우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차민솔 학생은 또 “중국 현지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역사로 소개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 행태를 직접 목격한 후 친구들과 함께 분노하기도 하고 앞으로 우리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인문학기행 평화통일단은 한반도와 만주 국경(두만강, 백두산, 압록강)을 따라 탐방하면서 민족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화합을 논의했으며, 특히, 백산시 조선족학교를 찾아 민족교육의 실태를 알아보고, 학생들이 한 권 두권 모은 동화책 70여권을 기증했다. 평화교류단으로 참가한 배혜서 학생은 압록강 선상에서 북한 아이들을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당장이라도 물에 뛰어 들어가 헤엄쳐서 그들을 안고 싶었다. 이렇게 서로 멀리서 쳐다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슬펐습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서 그들을 가까이서 보고,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행사 실무을 맡은 충남교육청 임정규 장학사는 “이번 인문학 기행단은 중국 만주를 거쳐 육로로 러시아 연해주로 이어주는 코스로 짰는데,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의 자취을 직접 밟아본 학생들이 한국, 중국, 러시아가 함께 하는 중국 동북부 지역이 먼 외국이 아닌, 하나의 문화권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경험이 됐다”고 밝혔다. 학생들은 8월말 성장캠프를 통해 인문학기행 동안의 탐구한 주제에 대한 결과를 발표하고, 학생들의 생각을 모아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이번 행사를 준비한 김지철 교육감은 “평소 교과서에만 보았던 우리 조상과 민족의 역사를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번 기행을 통해 인문학적 감수성을 더욱 높이고 통일을 앞당기는 인재가 되어주길 당부한다.”고 밝혔다. 중국 옌지·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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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에 맞서 상점 철시-예금 인출… 민족대표 2선조직 가동

    1919년 3월 9일 경성 상인들이 일제히 상점 문을 닫아걸었다. 경성상민(京城商民) 대표자들이 작성한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공약서는 △9일 일체 폐점할 것 △시위에 가담할 것, 단 폭행은 하지 말 것 △위약한 상점은 용서 없이 처분(응징)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성 1000여 상점이 동시에 철시(撤市)하고 상인들이 시위에 가담하자 조선총독부는 당황했다. 조선왕조 이래 어용상인 밀집거리인 육주비전(六注比廛·육의전)의 전통을 계승한 종로 상인들까지 영업 중단 손실을 각오하면서 완전 철시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 3’) 상인 철시운동은 평양 인천 개성 등 지방으로 확산됐다. 경성의 노동자 파업과 동시에 전개된 상인 철시 운동은 착취와 수탈을 기본으로 하는 식민 지배 경영의 실핏줄을 마비시켜 일제에 타격을 줬다. 일본 정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하고 조선총독부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에게 조속히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총독부는 총칼로 무장한 군경을 동원해 철시운동을 막으려 했다. 상인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점포 문을 열도록 위협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잠시 문을 열었다가도 무장 군경이 돌아서기만 하면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총독부는 상인들을 회유하는 술책도 폈다.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경성상업회의소가 상인들에게 개점을 종용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3·1운동으로 구속된 한인(韓人)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나아가 삼엄한 경비 때문에 영업이 안 되므로 일경의 시가(市街) 경계를 풀 것 등을 조건으로 내세워 일제를 당혹케 했다.(‘매일신보’ 1919년 3월 11일) 한 달 넘게 이어지는 경성의 철시운동은 4월 중순 일단 멈추었다. 철시 운동과 함께 은행의 거액 인출 운동도 전개됐다. 이는 현금 유동성을 차단해 일본계 은행을 파산시키려는 의도였다. 중역과 주주 모두 친일파로 구성돼 ‘국적은행(國賊銀行)’이라 불리던 한성은행에서는 3월 9일과 10일 이틀 만에 무려 20만 원에서 25만 원의 거액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 ○ 민족대표 2선 조직 가동 상인들의 철시 및 일본계 은행에 대한 예금인출 운동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바로 3·1운동 2선 조직의 ‘숨은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체포된 직후 10여 명의 ‘2선 조직’이 곧장 가동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운동 전개를 위해 33인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서도 빠져 있었다. 상인들 철시운동 배후로 꼽히는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는 2선 조직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3월 1일 밤 송진우는 북촌 계동 중앙학교 뒷산의 비밀 연락 장소로 학생 대표들을 소집해 일인(日人)들의 본토 철수를 요구하는 운동, 일인과의 물품 매매를 거절하는 철시 운동, 총독부에 대한 납세 거부 운동, 한인 관공리(官公吏)들의 사직 운동, 일인들이 세운 공장에서의 동맹 파업 및 학생들의 동맹 휴학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제시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일제와의 ‘경제 독립전쟁’을 선포한 고하는 3월 5일 학생이 주체가 된 만세운동을 격려하기 위해 남대문역(서울역)까지 방문한 것을 끝으로 일경에 붙잡혀갔다. 고하의 손자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은 당시 고하는 일본인 형사에게 패륜적인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고하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놓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훈련된 경찰견으로 하여금 무차별적으로 물게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고하는 생식 능력을 잃어 다시는 자손을 가질 수 없게 됐다는 게 집안 내의 정설이다.”(송상현 회고록, 신동아 2018년 2월호) 송 회장은 고하의 양손자(養孫子)다. 일제가 잔인무도한 고문을 하면서 밝혀내려고 한 것은 인촌 김성수의 3·1운동 가담 여부였다. 그러나 고하는 “김성수는 그때 향리(鄕里)에 가 있었다”며 끝내 부인했다.(송진우에 대한 경찰조서). 일제 수사당국은 송진우와 현상윤이 중앙학교 교장 사택에서 3·1운동을 모의한 것을 알았지만, 인촌이 관련된 증거를 밝혀내지 못해 중앙학교를 폐쇄할 수 없었다.(‘중앙백년사’)○ 손병희의 삼전론 한편 3·1운동 이면에는 자금을 동원하려는 민족세력과 이를 차단하려는 일제와의 치열한 물밑 싸움도 있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종교단체들이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동원하는 거사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 지도자인 손병희는 철저한 준비와 돈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운동은 공염불에 그치기 쉽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을 목격하고 1894년 동학혁명을 직접 겪으면서 얻은 경험이었다.(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손병희의 실사구시형 리더십은 1902년 발표한 ‘삼전론(三戰論)’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앞으로 세계 대세는 세 가지 싸움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도전(道戰)은 국민의 정신을 계발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이며, 둘째 재전(財戰)은 국가의 산업을 개발해 자립할 수 있는 국력을 키워야 하며, 셋째 언전(言戰)은 외국의 사정에 밝아 외국과의 의사소통이 원활케 하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삼전’을 대입하면 ‘도전’은 독립운동의 당위이자 신념체계, ‘재전’은 독립운동의 돈줄, ‘언전’은 대내외 홍보전과 정보력을 의미한다. 손병희는 이러한 삼전론을 기조로 천도교를 운영해왔다. 당시 천도교는 전국에 35개 대교구와 193개 교구 조직을 갖추고 300만 교인(천도교 측 추산)을 가진 우리나라 최대 종단이었다. 매월 올라오는 성금으로 본부인 중앙총부의 경상비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재정난에 시달리는 20여 개 사립학교 및 언론출판 사업을 유지했다. 그렇게 하고서도 매월 수천 원씩 예금할 정도로 재정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 예금은 함부로 돌려쓸 수 없었다. 일제는 진작부터 천도교의 자금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종교계 헌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경성 북촌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는 매월 천도교의 재무 회계 내용을 보고받는 등 철저하게 감시했다.(천도교중앙총부 사회문화관, ‘손병희 선생과 3·1운동’) ○ 피눈물 묻은 독립자금 손병희는 3·1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계책을 썼다. 경운동에 새 중앙대교당과 중앙총부 건물을 짓는다는 명분으로 교호(敎戶)당 10원 이상씩 특별 건축 성금을 받기로 했다. 모금운동이 시작되자 전국 교인들이 한 푼이라도 더 보태려고 발 벗고 나섰다. 집안 패물은 물론 논과 밭, 황소까지 팔아 성금을 냈다. 손병희의 부인 주옥경(1894∼1982)은 “남자들은 짚신을 삼고 여자들은 삯바느질 품삯으로 모으고 모은 피눈물 나는 돈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부인들이 아랫배에 차고 오기도 하였고, 또는 허리띠에다 누벼오기도 하고, 여하튼 부인들의 활약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거두어서 독립자금에는 물쓰듯 했습니다마는, 우리는 한국(산) 좁쌀은 먹지 못하고 호(胡·중국산)좁쌀을 먹었습니다.”(주옥경, ‘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신인간 1969년 3월호) 천도교인들의 ‘수상한 헌금’에 대해 일제도 그냥 지켜보지는 않았다.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천도교 중앙총부가 한성은행, 상업은행, 한일은행 등에 예금해 놓았던 6만6600원(당시 쌀 한 가마 3원)을 지급 정지시켰다. 이미 받은 성금은 전액 교인들에게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헌금을 돌려받은 척 가짜영수증을 제출하거나 성금 액수를 10분의 1로 줄이는 등의 방법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했다. 이렇게 해서 약 100만 원이라는 거금이 모였다. 실제 건물 건축자금 27만여 원을 제외한 대부분 성금은 3·1독립운동과 독립군의 군자금에 사용됐다.(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 약사’) 천도교 측은 당시 3·1운동 전후로 독립운동 자금으로 최소 500만 원을 쓴 것으로 추정했다.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여 경비로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원 김철을 통해 3만 원을 보낸 것(이광수의 증언)을 비롯해 상하이 임시정부와 만주로 보낸 군자금만도 수십만 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좌담회’, 신인간 1969년 3월호) 천도교는 이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3·1운동 총본부인 중앙총부는 쑥대밭이 됐다. 용산의 일본군 1개 대대가 10여 일간 점령하면서 종단 업무가 마비됐다. 손병희 이후 천도교를 이끌어갈 대도주 박인호를 비롯해 기독교 측에 3·1운동자금으로 5000원을 지불했던 금융관장 노헌용, 경성대교구장 장기렴, 보성사 인쇄소 감독 김홍규 등 중견 간부가 모조리 체포됐다. 중앙총부가 별도로 보관하던 120만 원의 거금은 모두 압수당했다. 성금도 4분의 1로 크게 줄어 중앙총부 직원들의 급료마저 지불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도 운영하기 어려워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천도교약사’) 게다가 3·1운동에 연루된 교인들이 살상당하고 가택이 다수 소실되는 등 신변까지 위협받자 탈교(脫敎)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동학(천도교)을 하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이자 3·1운동의 핵심 기획자인 최린의 일화도 천도교 내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3·1운동이 마무리된 뒤 조선총독부는 손병희 사후 천도교 내 실질적 지도자인 최린을 협박했다. “일본에 협조하면 천도교를 살려둘 것이요, 협조하지 않으면 3·1운동의 주범인 천도교단을 말살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최린은 일본의 협박을 교단 원로들에게 설명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최린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일본에 협조하면 내가 죽고, 협조하지 않으면 교단이 죽을 것이니, 내가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김혁태의 ‘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의 구국정신’) 최린은 1929년 천도교 도령(최고 지도자)에 취임하면서 그 자신이 ‘죽는’ 친일(親日)의 길을 걸어갔다. 일제를 상대로 천도교가 치른 재전(財戰)은 천도교의 쇠퇴로 이어졌지만 민중의 마음속에 자주독립과 민족주체 정신을 깊게 새겨놓았다. 그 결과 일제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비무장 독립전쟁은 일화불매(日貨不買)운동, 물산장려 운동 등 경제 민족주의 운동으로 확산됐다.(김영호의 ‘3·1운동에 나타난 경제적 민족주의’,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3·1운동을 성공한 운동으로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천도교, 민족대표들 가족 생활비까지 지원… 김성수-안희제-윤황후도 ‘숨은 자금원’▼막대한 자금 필요했던 3·1 독립운동, 돈줄은…3·1운동은 자금 면에서는 천도교가 운동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병희는 33인 민족대표들의 옥바라지는 물론이고 남겨진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달 1인당 10원씩 생활비를 지원했다.(이종일의 ‘묵암비망록’) 목숨을 걸고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내민 민족대표들의 의기(義氣)에 대한 보답이었다. 천도교가 3·1운동의 종가(宗家)로 자부하는 것도 3·1운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졌기 때문이다. 3·1운동에는 천도교 외에 ‘숨은’ 자금원도 여럿 있다. 준비 단계에서는 인촌 김성수가 꼽힌다. 48인 민족대표 중 한 명인 김도태는 “(기독교계 대표인) 이승훈 씨의 관서 방면 공작비로 김성수 씨가 2000원인지 3000원인지를 내놓았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 안희제(1885∼1943)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활동비로 2000원을 쾌척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던 안희제는 장덕수를 통해 상하이의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기꺼이 거금을 내놓았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조선 황족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는 친오빠 윤홍섭의 부탁을 받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줬다. “황실을 부흥하기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돈을 융통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윤황후는 자신이 쓸 내탕금에서 10만 원을 융통해 만들어 줬다. 윤홍섭은 이 돈을 해공 신익희에게 넘겨주었고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사용됐다.(유광렬의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2일) 한편 3·1운동 과정에서 자금을 떼먹은 사람들도 있었으나 끝이 좋지 않았다. 천도교 간부들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경성의 객줏집 주인들에게 거금을 맡겨두곤 했다. 그런데 한게찬이라는 장사치는 만세운동이 끝난 후 일경에 신고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돈을 가로챘다. 그는 자가용까지 사서 거들먹거리며 살았으나 가게가 폭삭 망했다.(‘독립선언 반세기의 회고 좌담회’)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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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학생들 나흘만에 ‘2차 3·1운동’ 결행… 독립열망 다시 폭발

    1919년 3월 5일 오전 9시경, 경성 남대문역(서울역) 앞 광장. 이틀 전 고종의 국장(國葬) 행사를 참관한 뒤 귀향하는 사람들로 역 앞은 평소보다 더 북적거렸다. 일제 군경의 삼엄한 경계 외엔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도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듯했다. 그러나 3·1만세운동의 거대한 태풍이 휘몰고 간 후의 팽팽한 긴장감을 안으로 품은 고요였다. 정적은 곧 깨졌다. 느닷없이 젊은 남녀 학생들이 집단으로 나타나더니 삽시간에 광장은 수천 명으로 불어난 학생들로 가득 메워졌다. 이른 새벽부터 역 부근 창고 뒤나 작은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학생들이 무리를 이루어 바로 광장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뒤이어 군중 속에서 인력거 한 채가 나타나더니 턱 멈추었다. 이어 짙은 고동색 한복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이 내리지도 않고 인력거 위로 올라섰다. 그는 품속에서 커다랗게 ‘조선독립’이라고 쓴 기를 꺼내 높이 들더니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영웅처럼 나타난 한 청년의 말에 군중의 가슴이 다시 울렁거렸다. 그간 경성에서는 3월 1일 독립만세운동 이후 사흘간 이렇다 할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33인의 민족대표 모두 붙잡혀 가 만세운동도 일과성 사건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다 이날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3·1운동이 군중의 가슴에 다시 한 번 불꽃을 터뜨린 것이다. 의기충천한 군중은 청년을 앞세우고 한꺼번에 만세를 불렀다. 어린 여학생들도 “만세!”를 연호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려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또 다른 한 채의 인력거가 등장하자 분위기는 더욱 격앙됐다. 이번에는 흰 한복 두루마기를 걸친 청년이 ‘조선독립’이라고 쓴 커다란 기를 휘두르며 군중을 선도했다.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번쩍 올리고, 어린 중학생들은 껑충껑충 뛰면서 독립만세를 환호했다.(최은희의 ‘조국을 찾기까지’,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처음 나타난 청년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전신) 대표인 3학년 김원벽(1894∼1928), 뒤이어 나타난 청년은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고려대 전신) 대표인 3학년 강기덕(1886∼?)이었다. 경성 학생들 사이에 신망이 높던 김원벽과 강기덕은 3월 1일 탑동(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의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했다. 33인의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체포된 이후부터는 이들 학생대표단이 남은 ‘짐’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학생대표단은 4일 오전 각 전문학교 대표, 고등보통학교 및 중등학교 대표들을 소집해 학생 주최의 대규모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5일 남대문역 봉기도 3월 1일의 경험을 토대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결행한 것이다. 남대문역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역 광장에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다시 전개해 귀향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북돋우고 철로를 따라 만세운동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가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명지대 김두얼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1919년 당시 전국 220개 군 가운데 철도가 지나가는 군(60개 정도)은 그렇지 않은 군보다 평균 7일 정도 시위가 빨랐고 참여한 군중 수도 더 많았다. 시위 선동을 맡은 학생 ‘만세꾼’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중앙학교 3학년 생도 이재근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장정들에게 돈을 주고 싸움판을 벌이게 한 후 구경하러 모여드는 군중을 이끌어 만세를 부르게 했다(‘중앙백년사’). 일제 조선군사령관 보고서는 남대문역 시위 규모를 1만 명가량으로 잡았으나, 만세꾼이 동원한 경성의 부민(府民·시민)까지 합쳐 실제로는 수만 명(각 학교 학생단 사건에 대한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서)에 이르렀다. ○ 도쿄의 여성 유학생 학생들은 독립을 고취하는 내용의 각종 인쇄물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가행진을 했다. 강기덕과 김원벽이 이끄는 두 갈래 시위대는 종로 보신각으로 향했다. 그런데 시위대가 남대문에 이르자 일경이 기습해 주모자인 강기덕을 체포했다. 김원벽의 시위대는 남대문 안쪽 덕수궁 대한문까지 진출했다. 일경이 또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일경이 선두에 선 시위대를 마구 구타하면서 검거하면 또 다른 사람들이 열을 지어 돌진했다. 마침내 일경의 제지를 뚫은 시위대는 종로 보신각 앞까지 진출해 집결했으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산을 당했다. 일경은 연약한 여학생들에게까지 대검을 빼 휘두르고 총을 쏘는 등 폭압적인 방법을 다 동원했다. 수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일경은 주모자 김원벽을 잡기 위해 사정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이때 쇄골이 부러진 김원벽은 사망할 때까지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학생들이 주도한 제2차 독립만세운동에서는 여학생들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남대문역에서 종로 보신각으로 이어지는 시위에서 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가세해 군중을 선도했다. 덕수궁에서 아수라처럼 날뛰는 일경의 경비망을 뚫은 것도 여학생들의 용감한 행동 덕분이었다. 게다가 중등학교 이하 어린 여생도들까지 만세운동에 나서는 것을 보고 외면할 수 없어 시위에 참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3·1운동에서 일경에 체포된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중고 전신) 최은희는 “이때 검거된 시위대 100여 명 중에는 많은 여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최은희 ‘조국을 찾기까지’) 한편 여학생들은 일본 도쿄의 2·8독립선언 이후 귀국한 여성 유학생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당시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장으로 활동하던 김마리아(1892∼1944)와 동경의학교 유학생 황애시덕(1892∼1971) 등이 국내 여학생들의 운동 참여를 주도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14’) 김마리아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열린 2·8독립선언 행사에도 직접 참여한 여성이다. 그는 2·8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에 여성이 배제된 것에 대해 불만을 터뜨릴 정도로 열혈 여성투사였다. 김마리아는 도쿄 독립선언 이후 기모노 차림의 허리띠에 2·8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국내로 들어와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소식을 각지에 전파하면서 국내 독립운동을 호소했다. 그는 경성에서 여학생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하다가 3월 6일 모교인 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일경은 어린 여학생들의 만세운동 가담 배후 인물로 그녀를 지목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김마리아는 코에 물과 고춧가루가 부어지고, 가마니에 말려 몽둥이로 온몸을 맞는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고문으로 그녀는 귀와 코에 고름이 차는 병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이들이 경성의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은 일제 기록에도 나타난다. 경성 학생들과 도쿄 유학생 등 63명이 3월 5일 거사 이후의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합동 모임을 열다가 일경에 체포됐다(3월 6일자 경무국 보고). 3월 5일 학생 운동에 일본 유학생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증거다. 한편 일제 정보망에 의하면 학생 시위대 중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도 상당수 있었다. 200명의 평양 학생들이 경성의 학생운동이 부진하다고 보고 급히 상경해 합류했고, 각 도에서도 결사대를 조직한 뒤 서울 학생을 격려해 대대적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보고도 있다.(조선헌병사령관 보고 전문) 서북지역 학생들이 그렇게 움직일 만도 했다. 3월 1일 경성과 동시에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은 평양, 선천, 의주, 원산, 정주 등 이북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는 3월 1일 거사 이후에도 거의 매일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면 경성에서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너무 잠잠했다. 이에 불만을 느낀 평양 학생들이 응원을 하러 상경했던 것. 다른 한편으로 경성의 학생대표단이 평양을 비롯해 각 지방 학생들과 사전에 지원 문제를 협의했을 것으로도 추정된다. 당시 학생대표단은 서북학생친목회 출신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데다가 특히 김원벽은 평양 숭실학교를 다닌 이력이 있기 때문이다. ○ 학생에서 노동자로 경성의 제2차 학생운동은 민족독립의 갈망을 재집결하여 폭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중앙에서 대규모로 독립운동이 계속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국 각지에 전해져 3·1운동을 확산시키는 촉매제가 됐다.(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서울항일독립운동사’) 그 대신 학생들은 큰 대가를 치렀다. 3월 5일 만세 시위로 충격을 받은 일제는 대대적인 시위 주동자 색출 작업을 전개했다. 학생들이 머물 만한 모든 여관과 하숙집은 일경의 검색 대상이 됐다. 마치 경성에 계엄령이 선포된 듯했다. 수많은 학생이 일경에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했다. 이후 학생 단체가 주도하는 대규모 독립운동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살벌한 일경의 총검과 밀정(密偵)의 감시 속에서도 학생들은 꺾이지 않았다. 체포되지 않은 학생 간부들은 몇 사람씩 짝을 지어 소규모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지하신문을 제작하거나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하는 등으로 노동자와 상인 등 각계각층으로 파고들었다. 이에 따라 시위를 단속하는 일경은 한숨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각종 격문이 전차 안과 가로변에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박노영 등은 3월 6일 조선독립단이라는 단체 명의로 ‘동포여 일어서라’라는 격문을 살포했다. 총독부의 엄포와 거짓말에 굴하지 말고 겨레가 총궐기하자는 내용이었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8일 경성에서 최초로 노동자 시위가 일어났다. 조선총독부 용산인쇄국의 직공 200여 명이 야간작업 중 길가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시위는 일제의 무력 통치 상징인 조선군사령부가 있는 용산, 그것도 조선총독부 직할 공장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이후의 노동자 파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1919년 3월 8일, 경무국 보고) 용산인쇄소 직공 독립운동 다음 날인 9일 경성전기회사 한인(韓人) 전차 운전사와 차장 120명이 파업을 단행해 전차 운행이 중지됐다. 정오에는 담배 생산 공장인 동아연초공장(종로4가 사거리)에서 유년공(幼年工·나이 어린 직공) 5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후 각 회사 노동자의 출근율이 감소하는 등 노동자 파업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동자 독립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용산인쇄국(소) 자리는 서울역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용산구 원효로3가 ‘KT 원효지사’ 터다. 최근 기자가 가본 현장에서는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용산인쇄국은 1923년 조선인쇄주식회사로 민영화됐다. 이 일대는 ‘인새국전(印刷局前)’이라는 전차 정거장까지 설치될 정도로 인쇄 거리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세 상가와 소규모 건물로 꽉 들어차 있을 뿐이다. 그 어디서도 그날 노동자들의 독립운동을 기억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진 듯했다. 3·1운동 이후 노동자층이 자발적으로 첫 독립만세를 외친 역사의 현장은 결코 의미가 작지 않다. 일제의 표현처럼 ‘무지한 조센진’에서 ‘각성한 한국인’으로 스스로 깨어난 민중이야말로 3·1운동의 진정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주요 등장인물 김원벽: 1894년 황해도 은율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았다.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1년간 수학하다가 경성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 3·1운동 학생대표로 활동하다가 체포돼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후 교육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했다. 1928년 사망 직전까지 조선총독부의 소운송업 통합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강기덕: 1886년 함남 원산 출생. 3·1운동 민족대표단과 연계해 학생 조직을 이끌었다. 3월 5일 시위로 옥고를 치른 후 1927년 함남기자대회를 이끌다 다시 금고형을 살았다. 1930년대에는 신간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 후 건국대 전신인 조선정치학관 초대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됐다. 김마리아: 1892년 황해도 장연 출생.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귀국 후 3·1운동의 여학생 시위 배후 인물로 지목돼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여성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또 체포됐다. 이후 해외로 망명해 미국에서 황애시덕, 박인덕 등과 함께 여성운동단체 ‘근화회’를 조직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해 매진했다. 1935년 귀국 후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광복 1년을 앞둔 1944년 사망했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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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칼에 끝까지 맨손으로 맞서… ‘일제 철옹성’에 균열 일으켜

    “모든 성공적인 혁명은 썩은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불확실성의 시대’) 부패한 사회체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진다는 의미다. 미국 경제학자 갤브레이스(1908∼2006)가 내건 성공적 혁명의 조건으로 보면 3·1운동은 무모한 행동이자 실패로 가는 길이었다. 1919년 일제의 식민지배 체제는 ‘썩은 문’이기는커녕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전승국의 일원이자 세계 5위권 군사강국이었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는 그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수단으로 ‘비폭력’을 선택했다. 3·1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은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오인(吾人)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고 비폭력 평화 원칙을 강조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민족대표들은 내란죄로 몰려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유언처럼’ 재차 비폭력을 당부했다. “조선 민족대표 제씨(諸氏)는 최후의 일언(一言)으로 동지에게 고하기를, 우리는 조선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노니 우리 신성한 형제는 우리의 본래 뜻을 관철하여 몇 년 며칠까지든지 우리 이천만 민족 최후의 한 사람이 남더라도 결단코 난폭한 행동이나 파괴적 행동을 하지 말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난폭하고 파괴적 행동을 하면 이는 천고에 구제할 수 없는 조선을 만들 것이니 천만 주의하고 보중(保重)할지어다.”(조선독립신문 제1호, 1919년 3월 1일자) 평화적 비폭력 운동은 일제에 탄압 빌미를 주지 않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경성(서울)에서는 십수만 명의 군중이 움직였어도 폭력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시위 도중 일본인을 구타하거나 그들의 물품을 파괴 또는 약탈하는 행위 역시 발생하지 않았다. 개성군수 야마사키는 개성의 호수돈 여고보(女高普) 여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나는 일찍이 어린 여학생들이 자기 조국을 위해 이처럼 열렬히 앞장섰다는 사실을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본 적이 없다”며 감격했다. 평화 시위는 일본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일경의 첫 발포 경성(서울)의 비폭력 지침은 평안북도 서해안에 위치한 선천에도 전달됐다. 그러나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졌다. “3월 1일 오후 2시 20분경, 보성여학교 학생 60여 명과 신성학교 학생 수백 명이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가 군청 앞에 도달하였을 때 일본 수비대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백은 최재화 목사의 생애’) 일본군 수비대와 기마(騎馬) 경찰이 달려와 군청과 경찰서 앞을 질서 있게 행진하는 시위 군중을 상대로 총질을 한 것이다. 시위대의 기수(旗手)인 신성학교 교사 강신혁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때 모두 12명(일본 측 기록)의 사상자가 발생했다.(‘한민족독립운동사’ 3권 3·1운동) 일제가 소읍(小邑) 선천에서 맨손인 군중을 상대로 무차별 총질을 한 데는 그 배경이 있다. 일제는 1911년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 회원을 무더기로 체포한 뒤 최종적으로 105명을 유죄로 조작해 기소했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다. 일제는 조사 과정에서 4명이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사망하고 3명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일 정도로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105인 사건’에서는 특히 평안북도 사람들이 희생을 크게 치렀다. ‘전체 피검자 105명 중 정주 출신이 44명(41.9%)으로 가장 많았고, 선천 23명(21.9%)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아픈 유산은 이곳 주민들의 뇌리 속에 오랜 응어리로 전승되어 오고 있었다.’(선우훈의 ‘민족의 수난: 105인 사건의 진상’) 선천 사람들은 한 집만 건너도 친지이자 지인이 되는 이들이 부당하고도 가혹하게 탄압을 받았던 사실을 기억에서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로부터 9년 후, 3·1운동은 그들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던 저항의 심지에 불꽃을 댕겼다.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목사 양전백이 대표적인 인물. 선천의 기독교계 지도자인 그는 105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후 또다시 3·1운동에 깊숙이 개입했다. 일제는 선천의 이 같은 정서를 모르지 않았다. 항상 요시찰 대상 지역으로 주목해 왔다. 선천 일대(강계, 의주 포함)에 대대 규모의 정규군을 배치하는 동시에 헌병경찰, 압록강 연변의 국경수비대, 필요하면 소방대까지 동원하곤 했다. 정규군이 아닌 이들은 소요 사건이 생기면 진화용 갈고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개 일본 본토에서 넘어온 가고시마(鹿兒島) 출신 불량배들이었다.(강덕상의 ‘현대사 자료·조선 3·1운동’ 편) 가고시마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악연이 깊은 땅이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인들의 코를 무자비하게 칼로 베어 가고, 부녀자들을 노예로 붙잡아 가고, 도공을 납치하는 등 온갖 악행을 자행한 왜군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근거지였다.(안영배,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일제가 3·1운동이 선천에서 전개되자마자 총칼부터 앞세워 진압하려 했던 데는 이런 배경도 이유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체포된 이들에 대해 잔인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신성학교 학생 10명은 온갖 악형을 받은 끝에 병원에 실려 갔는데, 매질에 의한 장독(杖毒)이 이미 배 속으로 들어가 치료 7일 만에 3명이 죽고 6명은 폐인이 됐다.(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러나 일제의 강경책은 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3월 1일 이후 평안북도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 중 선천이 가장 격렬했고 지속적이었으며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고종의 인산일(조선시대 왕과 왕비, 왕세자 등의 장례일)인 3월 3일 천도교도와 기독교도의 선도로 1500여 명이 봉기한 데 이어, 선천읍 장날인 3월 4일에는 무려 1만 명(일본 측 기록 6000명)이 들고일어나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군이 총검으로 찔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 5일 신미도 운종면에서는 도민이 총궐기해 대대적인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다음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접수해 20일 동안이나 독립 자치행정을 실시했다.(이병헌의 ‘3·1운동비사’) ○ 일제의 기만 술책 일제가 평화적 독립만세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폭력을 조장한 일도 있었다. 3·1운동 첫날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직접 목격한 것을 비밀리에 보고서로 작성해 놓았다. 서양인 선교사들의 ‘3·1운동 발발보고서(Korean Independence Outbreak Beginning March 1st, 1919)’에 의하면, 평양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처음에는 평화롭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숭덕학교 운동장은 3000명(실제 1000여 명 추정)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종황제 붕어 추념식(봉도회)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 장로파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만세운동에서 지켜야 할 점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행사를 염탐하러 온 일제의 사복 차림 형사들도 듣고 있었다. 만세 삼창을 끝으로 행사를 마치고 거리 시위에 들어갔다. 숭덕학교와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종이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구속되어 1000년을 살기보다 자유를 얻어 100년을 살아가는 것이 낫다”는 김선두 목사의 연설에 열광한 군중은 가두로 나섰다. 이때 남산현교회에서 출발한 감리파 시위대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 시위대가 합류했다. 세 갈래로 나뉘어 시내를 행진하는 시가 행렬은 태극기 물결로 장관을 이뤘다. 평양의 만세운동은 한국인들의 감동적인 잔치무대였다. 시위대가 숭덕학교를 출발해 서문 거리를 지나 형무소 쪽으로 방향을 돌릴 때, 숭실전문학교의 악대가 애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백은 최재화 목사의 생애’) 장엄한 애국가와 벅찬 태극기 물결 속에서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일본인이 직접 관리하고 가르친 보통학교 생도(학생)들도 거리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 한 일본인 교사가 “우리가 오리 새끼를 키워 물에 놓아주었구나. 10년간의 노력이 하루아침에 허사로 돌아갔다”고 탄식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 그런데 일경은 시위대 기세가 거세지자 태도를 바꾸었다. 마구잡이로 잡아가 경찰서에 가두기 시작했다. 여학생을 비롯해 여염집 부녀자들도 두들겨 맞은 뒤 기절한 상태로 끌려갔다. 격분한 시위대가 경찰서를 포위하고 경찰 관리들을 꾸짖으며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그러지 않을 거면 시위대 모두를 잡아 가두라고 소리쳤다. 일경은 아랑곳없이 소방대까지 동원해 소방용 호스로 군중에게 물을 뿌렸다. 일부 한국인 경찰들은 호스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오히려 경찰복을 벗어 던진 채 군중에 합세까지 했다.(‘3·1운동 발발보고서’) 당황한 일경은 기만 술책까지 동원했다. 일본인들에게 한복을 입혀 변장시킨 뒤 시위대에 섞여 들어가도록 했다. 경찰서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린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를 핑계로 무력 진압에 나섰다. 수십 차례 총을 발포해 수많은 군중이 부상당했다. 밤이 되자 일경은 더욱 악독하게 나왔다. 소방대로 하여금 무차별적으로 쇠갈고리를 휘두르게 하여 거리에서 사람들을 난자했다. 3월 1일 시위가 마무리된 이후 평양의 시위 지도부들은 모조리 일경에 붙잡혀 갔다. 3·1운동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비폭력 평화 운동이었다. 3·1운동 초기, 만세운동에 참여한 한국인들은 민족대표들의 당부를 끝까지 지키려 애썼다. 반면 일제는 일본인을 한국인으로 가장하는 기만책을 통해 한국인이 폭력 사건을 일으킨 것처럼 꾸며 총칼로 진압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일제의 3·1운동 탄압은 외국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되고 만다. 3·1운동은 무장 투쟁이 아닌 비폭력 저항이었기 때문에 그 정당성을 전 세계인들에게 더욱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3·1운동으로 일제의 단단한 철옹성은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 北 “김형직, 조선국민회 주도” 주장하나 “주역 장일환” 증언 많아 ▼북한 김일성家는 3·1운동에 참여했나북한은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이 키워낸 애국지사와 청년 학생들이 3·1 봉기에 앞장섰다고 주장한다. 김형직이 3·1운동의 실제 주역이자 배후이며 김일성도 여덟 살에 평양 보통문 반일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북한은 김형직을 3·1운동의 배후 주역으로 내세우는 근거로 ‘조선국민회’라는 국내 비밀 결사단체를 제시한다.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평양에서 결성된 뒤 1918년 2월 일제에 의해 해체돼 1년이 채 안 되게 존속했다. 북한은 김형직이 이 단체를 주도적으로 결성했고 이 단체의 중요 인물들이 평양 등지에서 3·1운동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지난해에는 인민문화궁전에서 결성 100돌 기념행사도 가졌다. 사실은 어떠할까. 조선국민회는 20, 30대의 평양 숭실학교 출신 청년들이 주도해 결성한 결사단체임은 분명하다. 권총을 의미하는 ‘돼지다리’라는 암호를 사용해가며 무기를 구입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 하와이의 박용만 조직과 연계해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일도 했다.(강영심의 ‘조선국민회 연구’) 그런데 조선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가 김형직이라는 증거는 안 보이고 다른 이가 주역이었다는 증언이 많다. 조선국민회의 핵심 간부였던 배민수는 “숭실고 건물에 모여 ‘대한국민회 조선지부’를 조직했다. 나의 친구 장일환이 회장이었고 백세빈은 외국통신원, 나(배민수)는 서기와 통신부장을 겸했다. 조직원은 30명으로 모두 믿을 만한 숭실학교 친구들이었다”고 회고했다.(‘배민수 자서전’) 장일환이 실제적 지도자였다는 것은 일제의 평안남도 경무부장이 회원 25명을 체포한 후 작성한 조사자료(秘密結社發見處分件, 秘受3725號)에도 나온다. 이 문건에서 언급한 중요 인물 순서에서 김형직은 장일환, 백세빈, 배민수에 이어 네 번째로 등장한다. 강영심 연구원(이화사학연구소)에 따르면, 김형직은 조선국민회 사건 이후 중강진으로 이사한 뒤 1925년 중국 지린(吉林)성으로 옮겨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正義府)계 백산무사단과 연계해 활동하다 이듬해 사망했다. 북한은 3·1운동에 김형직, 김일성 부자가 참여했다고 주장하면서도 3·1운동은 혁명에 실패한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33인 민족대표가 주도한 성공적인 비폭력 평화 운동으로 보고 있다. 남북의 시각이 완전히 엇갈린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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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보도통제 뚫고… ‘한국 독립운동 소식’ 마침내 전세계 타전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만세운동이 기습적으로 전개되자 일제는 당황했다. 일경(日警)은 군중의 열광적인 만세 함성에 기가 눌렸다. 1910년 한반도를 강제 병탄한 이후 경성(서울)에서 처음 겪는 대규모 거리 시위였다. 일경은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거리 좌우에서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현상윤의 ‘3·1운동 발발의 개략’) 일본인들은 그간 한국인들을 얕잡아보았다. ‘게으른 조센진’, ‘비겁한 조센진’이라는 욕설로 한국인들을 억압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방심했다.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3·1운동 발발 수개월 전 일본 국왕 다이쇼(大正)에게 한국의 정황을 보고했다. ‘민중은 일제히 제국(일본)의 위세를 신뢰하여 업(業)에 힘쓰고 산(産)을 다스려 전도(全道) 의연(依然) 극히 정밀함.’(‘齋藤實文書’ 문서번호 423-1) 조선총독부가 한국인들을 잘 다스리고 있어서 조선이 매우 평온하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에서 완벽한 식민통치체제를 구축해놓았다고 본국에 자랑했다. 그렇게 판단할 만도 했다. 일제는 105인사건(1911년) 등을 통해 국내의 독립운동 조직을 거의 괴멸시키다시피 했다. 이어 무소불위의 헌병경찰을 내세워 한국인들을 물샐틈없이 감시하고 통제했다. 국외는 어떨지 몰라도 국내의 한국인들만큼은 총독부 위력에 모두 굴복해 다시는 감히 민족운동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고 과신하고 있었다.(윤병석의 ‘3·1운동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책’,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3·1운동은 바로 그런 일제의 확신을 무너뜨렸다. 일본 헌병과 경찰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이던 ‘순한’ 한국인들은 온데간데없었다. 3·1운동의 한국인들은 일경 앞에서 대놓고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만세운동 시위대가 시내 곳곳을 누비는 동안 삽시간에 그 수가 십수만 명으로 불어난 것도 일제에는 충격이었다. 당시 경성은 이틀 후인 3월 3일 예정된 고종황제의 인산(因山) 참관차 모여든 사람들로 인해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경성행 임시열차가 속속 도착했고, 남대문역(서울역) 출구로는 인파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미 200여 개의 경성 여관들은 초만원이었다. 숙소를 잡지 못한 지방 사람들은 연줄이 닿는 친지나 하숙집을 찾았고, 대부분의 경성 사람들은 손님 접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마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예 도로에서 노숙까지 했다.(이희승의 ‘내가 겪은 3·1운동’, ‘3·1운동50주년기념논집’) 바로 이들 한국인이 탑동공원(탑골공원, 종로2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학생 시위대가 거리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합세했던 것이다. 게다가 만세운동은 적절히 절제되고 조직적이기까지 했다. 시위 선동 역할을 맡은 ‘만세꾼’들은 현장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학생들이 주축을 이룬 만세꾼들의 주도로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단은 각국 영사관과 조선의 궁궐인 경복궁과 창덕궁 등지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고, 다른 일단은 일본 군경의 저지선을 뚫고 총독부와 조선보병사령부까지 진출하려고 했다. 헌병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덕수궁 대한문 안까지 들어간 시위대도 있었다. 이들은 고종의 빈전에 조례(弔禮)를 표했다. 그리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백성들에게 많은 한(恨)을 안겨준 황제였지만 역시 많은 한을 안고 가는 그의 최후를 빌어주었다. 시위대를 지지하거나 응원하는 열기도 뜨거웠다. 3·1운동 기획 단계부터 참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은 이 역사적 현장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탑골공원에서부터 만세성(萬歲聲)이 일어나는데 순식간에 장안을 뒤집어놓은 것같이 천지를 진동했다. 시내 전체가 문자 그대로 홍진만장(紅塵萬丈)이 되었다. 거리를 다녀보니 시가는 전부 철시(撤市)했고, 가가호호에서는 납세 거절을 부르짖었으며, 각 가정에서는 관공리(官公吏)들이 사표를 쓰느라고 바빴으며, 학교 등에서는 앞을 다투어 스트라이크(파업)를 일으켰다.”(‘왕년의 투사들 회고담’,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 당황한 총독부 상황이 여기까지 치닫자 일본 경찰과 헌병들조차 처음에는 국제적인 성원으로 한국이 진정으로 독립되었는지도 모른다는 듯한 태도까지 보였다. 그러나 자기네 본국에 알아보고 국제적인 정보도 받아보았음인지 오후 늦게부터는 태도가 달라졌다. 우선 거리에 일본 군대의 행렬이 나타났다. 용산 방면에서 와서 시중의 큰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군중과 충돌할 의사는 없었고, 다만 시위에 지나지 않는 처사같이 보였다.(이희승의 ‘내가 겪은 3·1운동’) 실제로 엄청난 규모의 시위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일제는 정규군까지 동원했다. 조선에서 2개 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는 조선총독부 고지마 소지로(兒島摠次郞) 경무총장의 다급한 요청을 받고 용산에 주둔 중인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면서 그는 본국의 일본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긴급 전보를 쳤다. ‘경성의 학생 이삼천 명이 오늘 (3월)1일 오후 3시경 대한문 앞에 집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으며, 일부는 궁 안에 침입하려 했으나 이를 제지하였다. 위와 같이 형세가 다소 불온하므로 경무총장의 청구에 의해 보병(步兵) 3개 중대, 기병(騎兵) 1개 소대를 파견해 원조했다. 또 선천에서도 독립운동이 있어 그 지역 철도 원호대는 경찰관을 원조하여 이를 해산시켰다고 하는데 아직 상세한 보고는 접하지 못했다.’(‘경성 선천 지역의 시위운동 및 파병 상황’) 당황한 조선총독부가 만세운동 전모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임기응변으로 대처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보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일부 ‘불령자(不逞者·독립운동가)’들이 일시적으로 대중을 선동한 시위이기 때문에, 주동자만 체포해 처벌하면 진압될 것으로 보았다. 일제는 3·1운동을 ‘가벼운 소요’ 정도로 파악하고, 해가 진 무렵부터 130여 명의 만세운동 주동자를 체포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은희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진고개(현 충무로) 골목에서 헌병들에게 붙들려가던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물샐틈없는 좁은 골목이라서 본정 2정목에 이르러서부터는 몽땅 체포되기 시작했다. 일제 상가(진고개 상점가의 일본 상인들)가 모두 떨쳐 나와 협력했다. … 수갑이나 포승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다. 헌병들이 양편 손에 한 사람씩 손을 잡고 남산 밑에 있는 경무총감부로 연행해갔다.”(최은희의 ‘조국을 찾기까지’) 그러나 한국인들은 헌병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길에서도 힘차게 만세를 불렀다. 경무총감부 마당에 꿇어앉은 사람들도 새 사람이 잡혀올 때마다 마주 바라보며 만세를 불렀다. 아무리 붙들리고 붙들려도 독립만세의 함성은 멈춰지지 않았다. ○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건?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국제 여론을 가장 두려워했다. 특히 그해 1월 28일부터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가 거론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파리평화회의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주창으로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가 된 나라를 독립시키는 안건을 주요 의제로 다루는 회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와 세계 지도를 그리는 중차대한 회의였다. 일제는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물론 한국에 대한 동정 여론조차 원천 봉쇄하려 했다. 일본에서 발행하는 영자 신문인 ‘저팬 크로니클(The Japan Chronicle)’이 3·1운동 관련 기사를 모아 펴낸 책에서는 당시 일본 수뇌부의 인식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조(李朝)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고종의 인산일을 이틀 앞둔 3월 1일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소요의 기미가 있는데, 설사 독립운동과 같은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더라도 이에 대해 일체의 보도를 하지 말라는 경시청장의 통고문을 접수한 것은 이보다 앞선 1월 28일의 일이었다. 2월 14일에도 한국인의 선언문(도쿄의 2·8독립선언서)에 대한 보도 금지를 요구하는 명령이 내려졌다.…’(‘The Independence Movement in Korea’ 서문) 일제는 프랑스에서 파리평화회의가 개최되는 바로 그날인 1월 28일부터 일본 본토의 자국 신문은 물론 외국계 신문에까지 엄격한 보도 통제령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속사정 때문에 일제는 3·1운동 첫날 시위 주동자를 체포하는 외에 한국인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이나 살상으로 문제를 확산시키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3·1만세운동은 일제의 예상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뜨거워지고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결국 일제는 야만적이고 이중적인 본성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일본 총리 하라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보낸 긴급 전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번 소요 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엄중한 조치를 취해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국인이 가장 주목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하기 바란다.’(하라 내각총리대신이 하세가와 총독에게 보낸 지급 친전 전보, 1919년 3월 11일자) 일본 총리는 외국인의 주목과 비판을 피해 가면서 한국인들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 한일 국제외교 전쟁 한편으로 파리평화회의에서의 한국 문제 거론은 3·1운동의 민족대표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목표이자 과제였다. 1919년 2월 1일 한국을 대표한 김규식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가는 선상에서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는 한국이 독립이나 된 듯이 열광했다. 그러나 파리로 달려가는 바쁜 마음과는 달리 배는 3월 13일에 파리의 항구에 도착했다.(이정식의 ‘한국민족주의의 정치학’) 김규식이 파리로 향하는 사이 민족대표들은 3·1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을 하루속히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 대표단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3·1운동 거사의 주된 목적이 거족적인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호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3·1운동 하루 전인 2월 28일, 국내 민족대표들은 김지환을 중국으로 파견했다. 민족대표 48인중 한 명인 김지환은 기독교 측 대표 함태영으로부터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의 문서를 전달받은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 김지환은 3·1운동 당일 기차로 신의주까지 도착했으나 일경의 감시가 워낙 삼엄해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안동현(현 중국 단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서 상하이에서 대기 중인 현순 목사 앞으로 우편물로 발송한 후 귀국하다가 결국 일본 헌병에게 검거됐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 독립운동 조직(동제사의 청년조직인 신한청년당으로 추정)의 보호 속에 있던 현순은 3·1운동이 전개되는 순간, 전 세계에 이를 알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영어는 물론 중국어와 일본어에 능통한 현순은 김지환으로부터 전달받은 독립선언서 등을 영어와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 작업에는 2·8독립선언서 작성의 주역인 이광수와 비밀독립결사 단체인 동제사 요원이자 신한청년당원 조동호(중화신보 기자)가 함께 참여했다.(피터 현의 ‘만세!’) 1919년 3월 4일, 드디어 한국의 독립운동 봉기 소식이 상하이 영문 대륙보에 게재됐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3·1운동이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알려지는 순간 상하이의 독립운동 지사들은 흥분과 감격에 휩싸였다. 현순 등은 상하이 주재 세계 통신사 및 중국계 신문사에 독립선언서를 발송한 뒤, 외국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독립 선언과 독립 의지를 밝혔다.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단과 미국 대통령 윌슨 앞으로도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등을 영문 전보로 보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경성에 남아 있던 현순의 아내(이성녀)는 일제로부터 남편의 소재를 밝히라며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1968년 사망할 때까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데이빗 현의 ‘현순목사와 대한독립운동’) 또 외국 혹은 외국인과 접촉한 혐의가 짙은 민족대표들은 감옥에서 더욱 심한 고문을 감수해야 했다.:: 105인 사건이란 ::일제가 1911년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단체인 신민회를 붕괴시키기 위해 일으킨 희대의 조작사건이다. 일제는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을 모의했다는 날조한 이유를 들어 신민회 인사 중 105인에 대해 실형을 선고했다. ‘105인 사건’이라는 날조극으로 인해 조사 과정에서만 무려 7명이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33인의 민족대표 중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선생이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 주요 등장인물 이희승: 1896년 경기 광주 출생. 1918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지하신문을 제작, 배포하는 등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한글학자 주시경의 영향을 받아 조선어연구회 등 우리말 사용 운동을 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 서울대 교수, 동아일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1989년 사망. 현순: 1878년 경기 양주 출생. 기독교 목회 활동을 하다가 3·1운동의 민족대표 자격으로 중국 상하이에 밀파돼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활동 등으로 임시정부 설립에 기여했고 임시정부 외무차장, 내무차장 등을 역임했다. 1920년 이승만이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했다. 1968년 사망.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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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릿집’ 태화관이 3·1독립선언 장소로 낙점된 까닭은?

    기미년 3월 1일 토요일, 그날이 밝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청명했다. 33인의 민족대표는 ‘먼 길’을 떠나는 채비를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는 하루 전인 2월 28일 종단을 이끌 후계자를 정한 유시문(諭示文)을 발표한 데 이어, 이른 새벽 천도교 청년들을 소집해 마지막 훈시를 했다. “나는 지금 독립의 종자(種子)를 심으러 간다. 너희들은 3개 원칙(비폭력, 대중화, 일원화)을 끝까지 지켜라. 오늘의 동지가 내일 배신해 해를 끼칠 자도 있으니 매사를 성실히 참고 견뎌라. 우리 국권 회복에 대해서는 차후 세계 지도의 색채가 바꾸어질 때 각 열국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시킬 날이 올 것이다.…”(이병헌, ‘내가 본 3·1운동의 일단면·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기독교 감리파 대표 이필주(1869∼1942)도 덕수궁 옆 정동교회 사택에서 영문을 모르는 식구들을 위해 마지막 가족 예배를 올렸다. 서울 중앙교회 전도사인 김창준(1890∼1959) 역시 거사의 길을 나섰다. 결혼한 지 1년밖에 안되는 어린 아내와 노부모의 생계가 걱정됐지만 ‘가정보다는 조국’이라는 불타는 애국심이 먼저였다.(‘김창준 회고록’) 이들 민족대표는 가족이 일제의 보복을 당할까 봐 3·1운동 참여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3만5000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새벽에 저절로 눈이 떠지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오늘의 거사가 반드시 성공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이종일은 홀로 남겨질 어린 손녀(이장옥) 생각에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사(聖師·손병희)가 전날 민족대표들과의 최종 회합에서 “가족 생활비로 1인당 매월 10원씩 지불할 것”이라고 약속한 말로 위안을 삼았다.(이종일의 일기 ‘묵암비망록’) 종로구 경운동에서 이종일이 기도를 올리던 그 시각, 인근 북촌 계동의 중앙학교 운동장은 바닥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여기저기 전단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일찌감치 등교하던 학생들은 한 장씩 주워보고는 아연 긴장했다. 조선의 독립을 선포하는 독립선언서였다. 그때 교장 송진우가 숙직실에서 내려와 학생들이 서성대는 곳에 다가왔다. 전단 한 장을 주워 보더니만 빙그레 웃으면서 “너희들 공부 잘하라”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넓은 운동장을 횡단해서는 쏜살같이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숙의 ‘죽사회고록’) 송진우는 독립선언서를 처음 보는 척 시치미를 뗐으나, 이숙 등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은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한 ‘교장 선생님’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은 진작에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주익 등을 통해 경성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행동대 조직을 구축하도록 지도했다.(‘고하 송진우전기’, 현상윤의 ‘3·1운동 발발의 개요’) 학생조직은 후에 기독교 측 박희도, 이갑성 등이 가세해 중등학교 대표들까지 포함하는 조직으로 확대됐다.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학생대표들은 승동교회 예배당에서 최종적으로 독립선언서 살포, 거리 시위 등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3월 1일 새벽 경성에서는 중앙학교뿐 아니라 10여 개의 공·사립중학교와 네댓의 전문학교 등지에 격문(檄文)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시내 곳곳의 집집에도 배포됐다. 오전, 중앙학교 학생들은 평상시와 같이 수업을 했다. 상급생들은 오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술렁거렸고, 영문을 모르는 하급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현상윤이 가르치는 수업시간. 그런데 현상윤은 수업 내용과 관계가 없는 제1차 세계대전, 파리평화회의 전망, 민족자결주의 등등의 얘기로 한 시간을 채웠다. 그는 수업을 마치면서 영어로 “굿 찬스, 굿 찬스(good chance·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의미심장한 힌트를 주었다.(이희승, ‘내가 겪은 3·1운동·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팔각정과 태화관 독립운동의 ‘굿 찬스’ 시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독립선언서 배포와 군중 동원 행동대 역할을 한 학생대표들은 각기 맡은 반의 급장을 통해 탑동공원(탑골공원)으로 집결하도록 밀통했다. 낮 12시 정오를 알리는 남산의 오포(午砲) 소리가 집결 신호였다. 보안을 철저히 했던 때문일까, 경성 시내는 평소처럼 조용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이윽고 종로2가의 탑동공원은 꾸역꾸역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학생들로 삽시간에 가득 차기 시작했다. 중앙학교는 상급생에서 하급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교가 텅 빈 바람에 이날로 예정된 졸업식은 취소됐다. 탑동공원의 팔각정을 중심으로 삼밭에 심 박히듯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1897년 조성된 탑동공원은 이전부터 크고 작은 집회와 행사가 열린 곳이자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한민족에게는 의미가 남다른 공간이기도 했다. 경기대 건축학과 안창모 교수에 의하면 대한제국 시기인 1902년에 건축된 팔각정은 고종 황제가 천자국(天子國)임을 선포하는 제사를 지낸 환구단의 황궁우를 쏙 빼닮도록 지은 구조물이었다. 또 대한제국의 군악대가 공원 서편에, 대한자강회를 잇는 대한협회가 공원 동편에 자리 잡은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1969년 3월 발행된 한국은행권 오십 원 지폐 앞면에 팔각정 모습이 그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처럼 탑동공원은 조선이 당당한 자주국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선언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오후 1시 30분경. 약속 시간이 다 돼 가는 데도 민족대표인 듯한 사람들은 탑동공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각, 민족대표들은 탑동공원에서 불과 300여 m 거리의 태화관(서울 인사동)에 모였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민족대표들이 일경(日警)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탑동공원의 흥분한 학생·군중과 경찰의 충돌을 우려해 장소를 변경한 때문이다. 민족대표들은 무엇보다도 ‘비폭력’을 중요시했다. 요릿집 태화관을 민족대표들의 회합 장소로 선택한 데도 까닭이 있었다. 장안의 명물인 조선음식점 명월관의 지점인 태화관은 원래 조선왕조의 순화궁(順和宮) 터였고, 이후 이완용이 별장으로 사용하던 집이었다. 1905년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밀의, 1907년 7월 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 1910년 강제 병탄 조약 준비 등 대한제국을 능멸하고 없애는 행위가 모두 이 집에서 벌어졌다. 바로 여기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함으로써 매국적인 모든 조약을 무효화한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신석호, ‘(개설) 3·1운동의 전개·3·1운동 70주년 기념논집’) 태화관 주인 안순환 역시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원래 궁내부(宮內府) 주임관(奏任官) 및 전선사장(典膳司長), 즉 궁중 연회의 최고 주방장을 지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벼슬을 사퇴한 그는 명월관과 태화관을 차린 배일(排日)사상가였다.(‘고하 송진우전기’) 태화관 산정별실(山亭別室)에 자리 잡은 민족대표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이종일이 인쇄해온 독립선언서 100여 장을 훑어보며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등 기독교 측 대표 3인은 지방 행사에 갔다가 경성에 늦게 도착해 이날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병조는 상해로 건너가 불참한 대신,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지 않고 2선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기로 한 함태영이 참석했다. 이때 독립선언서 제1순위에 기재된 손병희가 천도교 청년 이병헌을 불러 탑동공원으로 가서 학생들을 무마하도록 당부했다. 이병헌은 태화관에서 탑동공원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오더니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이 흥분한 나머지 태화관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민족대표들이 요정에 앉아 있다는 말에 학생들이 격분했다는 것이다. 이윽고 강기덕(보성전문학교 대표), 김원벽(연희전문학교 대표) 등 학생대표 10여 명이 몰려왔다. “선생님들, 무슨 일로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한다고 해놓으시고 이곳에 와계십니까. 우리는 선생님들이 오시기를 고대했는데 이렇게 되니 일이 낭패를 본 것이 아닙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말입니다. 지금 공원에는 수천 명의 남녀학생과 온 장안의 시민이 기대에 찬 눈으로 선생님들의 선도를 바라고 있습니다. 속히 그리로 가셔서 민중시위 운동을 인도해 주십시오.”(‘묵암비망록’) 그러자 손병희와 최린은 젊은이들이 완력으로 소요를 일으킨다고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면서 간곡히 타일렀다. 물러난 학생대표들은 학생들대로 따로 거사를 추진키로 했다. ○ 10년 만에 등장한 태극기 오후 2시. 간략하지만 장엄한 행사가 시작됐다. 일제의 잔인한 무단통치 10년 만에 숨죽여 지내오던 한민족이 세계만방에 자주독립을 선언하는 엄숙한 시간이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남측의 정자(태화정) 동쪽 처마에 걸린 태극기를 향해 근엄한 자세로 경례했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내건 깃발이었다. 한용운이 신명을 바쳐 최후의 1인까지 독립 쟁취를 위해 투쟁하자는 취지로 인사말을 한 후, 민족대표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하고 축배를 들었다. 이미 일제의 정사복 경관과 헌병 수십 명이 태화관을 둘러싸고 있었다. 최린이 태화관 주인 안순환에게 일본 경무총감부에 미리 알리도록 말해두었던 것이다. 이윽고 일경이 인력거를 가지고 와서 민족대표들을 체포해 가려고 했다. 그러나 최린 등 민족대표들은 태연자약한 자세로 이들의 무례함을 꾸짖고 자동차를 가지고 오라고 호령했다. 민족대표들이 서너 명씩 자동차에 분승해 남산 왜성대(현 예장동)의 경무총감부에 끌려갈 무렵, 탑동공원 중앙단상에도 1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태극기가 나타났다.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서 독립선언서를 두 손으로 높이 들고 엄숙하면서도 떨리는 목청으로 읽어 내려갔다. 숨을 죽이고 듣던 학생들은 낭독이 끝나자마자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한국독립만세 등 만세 명칭도 여러 가지였다. 감격에 겨운 만세 소리는 마치 우는 소리인 듯했다. 남녀 구별 없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남학생들은 흥분해 “우와! 우와!” 고함을 지르며 주먹을 휘두르고 모자를 공중으로 날렸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모자들로 인해 하늘이 까마귀 떼로 덮인 듯했다. 일경이 현장에 출동해 있었으나 이들을 막지 못했다. 태화관에서 붙잡혀가던 민족대표들도 군중의 만세 소리를 들었다. 나용환, 이갑성, 최린, 김창준 등은 체포돼 갈 때 자동차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수백 장씩 군중에게 던져 주었다. 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을 향해 목멘 소리로 더욱 만세를 크게 외쳤다. 민족대표들은 “우리의 목표는 달성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잡혀가지만 효과는 거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기뻐해 마지않았다.(‘묵암비망록’) 팔각정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거리로 몰려나왔다. 독립운동본부의 전위부대로 내정된 학생들이 주도했다. 중앙학교 대표 중 한 명인 최현은 애장(愛杖·밤낮 들고 다니는 지팡이)을 높이 들고 공원 정문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전진했다. 그 뒤를 따라 학생들은 종로통으로 물밀듯이 빠져나갔다.(‘죽사회고록’)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났다. 3월 3일 고종황제의 인산(因山·국장)을 보러 상경한 군중까지 가세했다. 이들은 독립이 된 줄 알고 전부 길로 뛰어나왔다. 길은 흰옷 입은 사람들로 꽉 찼다. 앳돼 보이는 여학생들과 부엌 살림하는 아낙, 상투 꽂은 노인 등도 끼여 있었다. 서울서 가장 넓은 육조(六曹)거리(현 세종로)도 만세군중으로 뒤덮였다. 마침 그때 이 만세군중을 비집으며 일본인 경기도지사가 인력거를 타고 퇴근하다 경을 치르기도 했다. 군중들이 그에게 모자를 벗어들고 만세를 부르라고 호통을 치자, 도지사는 혼비백산해 고분고분 만세를 부르고 빠져나갔다. 이날 만세의 불길이 오른 것은 경성뿐만이 아니었다. 서북지역의 개성,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와 동북지역의 원산, 함흥 등에서 경성과 첫 거사를 같이했다. 3·1운동 현장에 있었던 유광렬(언론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3·1독립운동은 장엄 바로 그것이었다. 진지했던 그 모습, 혼연일체가 된 단결력, 그 어느 것 하나 다시 찾아볼 수 없는 감격적인 것이었다. 언제 다시 우리 민족이 그렇게 단결할 수 있을는지….”(‘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1일자):: 주요 등장인물 ::이필주: 1869년 서울 출생. 22세 때 구(舊)한국군 군인으로 근무하다가 1903년 군복을 벗고 선교와 교육 사업에 종사함. 신학교를 졸업하고 정동교회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름. 출옥 후 수원 남양교회에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항거하다가 1942년 병사. 이갑성: 1889년 대구 출생.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함.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학생시위운동 및 전단 살포 등 중책을 맡음. 1924년 세브란스병원 의약 지배인을 거쳐 1933년 신간회 사건으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 광복 후 의회 의원, 광복회장 등을 역임함.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가 1981년 사망함.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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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선언서 인쇄 현장 덮친 악질 조선인 형사… 거금 주고 무마

    1919년 3·1운동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밤, 보성학교 교내에 자리 잡은 인쇄소 보성사(현 종로구 조계사 대웅전 앞). 30평 남짓한 규모의 푸른색 벽돌 2층 건물 안은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졌다. 비밀 항일결사체인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 요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천도구국단장이자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1858∼1925)의 지휘 아래 부단장 김홍규(보성사 공장감독), 총무 장효근, 직공 신영구 등 단원들은 3·1독립선언서를 신속하게 찍어내고 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해 보성사 비밀 창고에는 장총 10여 정과 수백 발의 실탄 등도 은닉돼 있었다. 보성사는 인쇄소이자 독립운동 조직의 아지트였다.(이종일의 ‘묵암비망록’ 참고) 대량의 선언서를 인쇄하는 만큼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선언서가 한 장이라도 사전에 발각되면 독립운동 자체가 무위로 돌아가는 살얼음판이었다. 일경(日警)의 요시찰 대상인 이종일은 미리 자신의 씨족인 성주이씨 족보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막을 쳐놓았다. 실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주이씨들은 족보를 새로 만든다는 소식에 집안의 가계보(家系譜)를 들고서는 보성사 문턱을 분주히 넘나들었다. 이종일은 족보를 만드는 틈을 타 감시의 눈을 피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있었다.(이종일의 손녀 이장옥의 생전 회고와 ‘묵암비망록’) 천도교가 운영하는 보성사는 최남선이 경영하는 신문관과 함께 한국의 출판 인쇄문화를 대표했다. 독립선언서를 제작하는 데도 두 인쇄소가 분담했다. 신문관에서는 활자로 인쇄판을 짜는 조판(組版) 작업을 담당했고, 보성사는 조판된 독립선언서를 종이로 찍어냈다. 민족대표 33인(천도교 15명, 기독교 감리파 9명과 장로파 7명, 불교 2명)의 이름이 명기된 독립선언서는 두 차례에 걸쳐 인쇄됐다. 1차는 2월 20일부터 서서히 인쇄에 들어가 25일에는 이미 2만5000장을 찍어놓은 상태였다. 이 인쇄물은 신축 중인 천도교중앙대교당(종로구 경운동) 내 이종일의 임시 거처로 옮겨진 후, 수천 장 단위로 천도교 지방교구에 우선적으로 배포됐다. 3월 1일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에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한 사전 조치였다.(‘묵암비망록’) 실제로 3·1운동이 서울 탑동공원(지금의 탑골공원, 종로2가)에서부터 시작할 때 평양,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같은 날 독립선언서가 뿌려지고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 당시 이종일과 함께 생활했던 손녀 이장옥(당시 16세·1994년 작고)은 이렇게 회고했다. “보성사로부터 은밀히 운반된 독립선언문 인쇄물이 집 안에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때부터 여러 사람들이 드나들며 할아버지(이종일)로부터 몇백 장 혹은 몇천 장씩 선언문을 받아가지고 나갔다. 할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내가 책임지고 독립선언문을 내주었다. 그때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는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고 믿었다. 집에 드나드는 청년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묵암기념사업회, ‘손녀 이장옥 여사가 말하는 조부’) 그렇게 1차로 인쇄한 독립선언서가 동날 무렵인 27일, 이종일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와 협의해 긴급히 1만 장을 추가로 찍어내는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천도교중앙총부 교서편찬위원회, ‘천도교약사’) 흥미롭게도 1차와 2차의 독립선언서는 조금 달랐다. 2차로 찍어내는 독립선언서는 1차 때의 오류를 고친 판쇄로 인쇄했다. 이장옥은 이를 뚜렷이 기억했다. 생전에 어머니 이장옥 여사의 증언을 들은 3남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이장옥)는 경운동으로 옮겨진 독립선언서를 보관하면서, 할아버지(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에서 오자가 발견돼 고쳤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하셨다. 처음 찍어낸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비밀리에 채자(採字) 작업을 서두르느라 국호인 ‘조선(朝鮮)’이 ‘선조(鮮朝)’로 거꾸로 조판된 채 인쇄됐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수정 전과 후의 독립선언서를 모두 간직하고 있었는데 6·25전쟁 통에 잃어버려 무척 안타까워하셨다.”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3·1독립선언서는 1차로 찍어냈을 때의 바로 그 원문이다. 그 첫 문장은 이렇게 표기돼 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鮮朝(선조)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 문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의 독립선언서보다 더 잘 지었다”고 격찬할 정도로 명문이었다. 독립선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육당(최남선)을 다시 보아야겠다”며 칭찬이 자자했다.(유광렬의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4년 3월 5일자) ○ 두 차례의 발각 위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이종일의 은밀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독립선언서가 발각돼 3·1운동이 무산될 뻔도 했다. 28일로 날짜가 바뀌기 직전인 늦은 밤, 인적이 드문 곳에서 돌아가는 인쇄기계 소리는 유난히 컸다. 보성사를 관할하는 종로경찰서의 한국인 형사 신철(다른 이름 신승희)이 근처를 지나다가 창문까지 굳게 닫힌 인쇄소의 기계 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붙잡아 감옥에 보낸 악질 형사로 소문난 신철은 낌새를 눈치 챘다. 그는 곧장 인쇄소 안으로 들이닥쳤다. 족보를 찍는 중이라는 이종일의 변명을 들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는 독립선언서가 쥐여졌다. 선언서를 읽어보는 신철의 손조차 떨렸다. 상황을 파악한 그에게 육척장구(六尺長軀)의 이종일이 그대로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것만은 안 되오. 이 일은 멈출 수 없는 일이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 선생님(손병희)한테 갑시다.”(이하 ‘천도교약사’ ‘묵암비망록’, 이종일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보훈처 발표(1995년 3월 1일) 참고) 이종일이 애원했다. 뜻밖에도 신철은 “당신이 갔다 오시오”하고 말했다. 이종일은 북촌 손병희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위급을 고했다. 사태를 파악한 손병희는 선뜻 5000원의 거금을 신문지에 싸서 내주었다. 평생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 돈을 받아 쥔 신철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면서 겸연쩍게 웃더니 사라졌다. 그의 웃음에는 일말의 민족적 양심이 담겨 있는 듯도 했다. 그렇게 간신히 위기를 넘긴 이종일은 인쇄를 마친 후 이병헌, 신숙, 인종익 등을 시켜 독립선언서를 자신의 임시 숙소로 재빨리 옮기도록 했다. 보성사에서 직선거리로 400m 거리의 경운동 천도교 중앙대교당으로 가려면 파출소 앞을 지나쳐야 했다. 이들은 손수레 깊숙한 곳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그 위로는 성주이씨 족보로 덮었다. 으슥한 밤길에 손수레에 싣고 가는 물건은 일경(日警)의 눈에 띄었다. 불심검문을 당했다.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일경은 성주이씨 족보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손수레에 실린 종이 뭉치를 죄다 검색하려고 했다. 족보를 다 들어내고 마지막으로 독립선언서가 나오려는 순간, 일대에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다. 가로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렸다. 일경이 등잔을 가지러 파출소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파출소 상급자가 귀찮은 듯 “그만두라”고 지시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경운동 숙소로 들어오는 이종일은 온 몸이 땀으로 범벅돼 있었다. 긴장으로 흘린 식은땀이었다. 그를 맞이하는 손녀 이장옥에게 “큰일 날 뻔했다”고 말했다. 한편 고등계 형사 신철은 들통날 것을 우려해 동거녀까지 내팽개치고 만주로 도주했다가 1919년 5월 일제 헌병대에 체포됐다. 그는 경성으로 압송돼오다가 개성역 인근에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한다. 3·1운동의 준비 과정은 서슬 퍼런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숱한 발각 위험을 기적처럼 피해간 모험이었다. 3·1운동 모의부터 깊숙이 관여했던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은 3·1운동 전개 과정에 대해 “소름 돋을 만큼 계획이 소루(疏漏)하고 개방적이었다”고 회고했다.(현상윤, ‘3·1운동의 의의’, 동아일보 1948년 2월 29일자)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수일 전부터 인쇄한 선언서를 수백 장 수천 장 단위로 국내 각지로 발송하고, 서울에서는 남녀 각 학교 대표자 수천 명을 불러놓고 수십 장씩 선언서를 분배하고, 3월 1일 행할 시위운동의 노선 순서와 담당 부서를 정하고, 또 각 학교 대표들은 자기 학교에 돌아가 각반 대표들에게 동일한 지시를 하는 과정에서 의아할 정도로 아무 탈 없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민족대표인 김도태 역시 “완전한 모험이었다”고 하면서 “전국적이고도 거족적 대과업이 끝까지 비밀이 누설되지 않고 완수되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애국정신에 불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굶어서 사망한 독립운동가 일제는 3·1운동 후 ‘악질적인 항일 행위자’로 지목한 이종일에 대해 가혹하게 다루는 한편으로 독립선언서를 찍어낸 보성사를 즉각 폐쇄했다. 나중에는 일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방화로 인해 보성사가 완전히 소실돼 버렸다. 그러나 이종일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1921년 12월 3년의 형을 치르고 출옥하자마자 천도구국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제2의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이듬해인 1922년 2월 스스로 ‘자주독립선언문’을 작성해 3·1운동 3주년이 되는 1922년 3월 1일 거사를 계획했다가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종일은 다시 외부와 격리된 채 일제의 극심한 통제를 받았다. 그는 밤낮으로 일경이 감시하는 상태에서 오막살이(당시 竹添町 1丁目 31·현 강북삼성병원 터)에서 일기를 쓰다가 숨진 채 발견됐다. 1925년 8월 31일의 일이었다. 이튿날(9월 1일) 동아일보는 68세의 나이로 서거한 이종일에 대해 ‘기미운동(己未運動)의 선구(先驅) 이종일씨 장서(長逝)’라는 큰 제목으로 “영양 부족으로 작일(昨日) 정오에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이종일의 친척인 이종린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한 가지도 없고 국가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일해 왔다”면서 “영양 부족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는 조선 사람의 생각이 어떠할는지요? 장사 지낼 비용도 한푼 없습니다”고 안타까워했다. 지금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숨진 그 자리는 흔한 기념 푯말마저 세워져 있지 않다. 3·1운동 후 이종일의 손녀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장옥은 독립선언서 배포에 주동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경에게 붙들려가 5개월간 호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장옥이 키가 작은 데다 실제 나이(16세)와는 달리 호적 기록으로는 13세의 미성년자여서 범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이장옥은 광복 후 독립운동 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이종일)를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스스로 사양했다. 조손(祖孫) 2대에 걸친 독립운동 가족사다. ▼ 3·1운동 전개 상황 신속보도… 독립운동 전국 확산 기폭제 역할 ▼이종일이 만든 최초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1919년 3월 1일 경성의 독립운동 현장에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또 다른 유인물이 등장했다. 일반 신문의 호외판 크기로 ‘조선독립신문’이란 제호가 새겨진 신문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최초의 지하신문이자 민족 언론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이는 이종일이었다. ‘제국신문’을 경영한 언론인 출신인 그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는 한편으로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 1만 부를 따로 발행했다. 자신은 33인의 민족대표로 체포돼 수감될 것이기 때문에 보성상업전문학교 교장 윤익선을 신문사 사장으로 내세웠다.(윤익선에 대한 1차 경찰신문조서) ‘조선건국(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자로 창간된 이 신문은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 민족에게 알리고, 3·1운동의 전개 상황을 신속 보도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려는 목적으로 배포됐다. 신문은 3월 1일 당일 탑동공원에서 약 4000부가 뿌려졌고, 천도교 청년들과 각 학교 학생들을 통해 일반 가정에도 배달됐다. 제2호(3월 2일자)에서는 “근일(近日) 중에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임시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도 전했다. 신문은 주로 구금된 민족대표자들의 소식, 전국에 걸쳐 일어난 독립운동 상황, 운동을 지지하는 해외 소식, 일경의 잔인한 행패 등을 게재했다. 신문은 일제의 그악스러운 탄압 속에서도 그해 4월 말 27호가 발간되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 5월 이후 8월 사이에도 발행인을 밝히지 않는 등 부정기적으로 10호가 추가 발행됐다. 민족 언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조선독립신문’의 출현을 계기로 국내외 곳곳에서 지하신문들이 등장했다. 그해, 중국 상하이에서는 이광수가 8월 21일 사장을 맡아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10월 28일에는 신채호가 주도한 ‘신대한’이 창간됐다. 이들 신문도 국내로 유입됐다.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 외에 일체의 신문 발행을 원천 봉쇄해왔던 일제는 지하신문을 억누르려 했으나 곧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일제 총독부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해 신문발행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된 배경이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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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도교-기독교 힘 합칩시다”… 초유의 종교연대 운동 성사

    1919년 2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날, 경성 서촌(西村) 이완용의 집(종로구 옥인동). 쉰여덟 살의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1861∼1922)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세상에서 당신을 매국적이라고 하는데 흥국대신(興國大臣) 한번 될 생각은 없소?”(언론인 유광렬이 한국일보 1974년 3월 2일자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에서 친구이자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에게 직접 들었다고 밝힌 내용.) 추적추적 내리는 비 소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은 이완용(1858∼1926)에게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대신이 돼 보라는 권유였다. 손병희가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수괴로 지탄받던 이완용더러 독립운동의 민족대표로 나서라고 요구한 것이다. 1919년 3월 1일의 거사를 코앞에 두고, 이완용의 집 뜨락 정자에서 손병희는 독립운동의 명운이 걸린 큰 도박을 벌였다. 이완용은 비감한 표정을 지으며 “고맙소” 하고는 말했다. “내가 2000만 동포에게 매국적이라는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이오. 이제 새삼스러이 그런 운동에 가담할 수는 없소. 이번 운동이 성공해 독립이 되면, 먼 다른 동리 사람들을 기다릴 것 없이 우리 동네 이웃 사람에게 맞아 죽을 것이외다. 손 선생의 이번 운동이 성공해 내가 그렇게 맞아 죽게 된다면 다행한 일이올시다.”(‘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이완용은 거절했다. 대문을 나와 인력거에 몸을 싣는 손병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완용을 독립운동에 가담시키는 것은 독립운동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그가 일본인에게 누설하면 거사가 수포로 돌아갈 것”이라는 오세창 권동진 등 측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섰던 길이었다. 평소 호방한 성품으로 유명한 손병희는 “매국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완용까지 독립을 원한다면 온 민족이 다 독립을 원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강행했었다. 이완용은 3·1운동 발발 때까지 거사 계획을 고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완용은 3·1운동 발발 후 일제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만세운동을 망동(妄動)이라고 비난하며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경고문을 세 차례나 게재했다. ○ “독립운동을 중지합시다”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교섭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당시 상황이 매우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간 국내에서는 중앙학교가 있는 북촌을 중심으로 거족적인 독립선언운동이 치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최남선이 집필하는 독립선언서는 완성 단계에 있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독립선언서에 서명 및 날인하는 일만 남았다. 독립선언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일이었다. 민족 역량을 총집중하는 궐기인 만큼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의 명망가들을 참여시키는 게 중요했다. 자의든 타의든 일제의 비호를 받고 있기는 하나 인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독립선언서 대표자로 서명하면 천군만마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중앙학교의 송진우와 현상윤, 선언서 작성을 담당한 최남선, 천도교의 대외 창구이자 보성학교 교장 최린 등 4명이 그 실무를 맡았다. 이들은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윤용구 김윤식 등을 대상 인물로 꼽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계획이 어긋났다. 손병희와도 막역한 사이인 박영효를 비롯해 지목된 지도자들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독립선언서의 서명에 난색을 표했다. 사회적 존경을 받는 원로들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실무자들이 망연자실해하자 손병희가 이완용까지 직접 만나게 됐던 것이다. 1919년 2월 4, 5일경. 중앙학교 숙직실에 4명이 다시 모였다. 분위기는 침통했다. 최린이 비장하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노후(老朽)한 인물들이오. 독립운동은 민족의 제전이오. 신성한 제수(祭需)에는 늙은 소보다도 어린 양이 더 좋을 것이외다. 차라리 깨끗한 우리가 민족운동의 제물이 되면 어떻소.”(‘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최린은 민족대표를 원로들에게서 구할 것이 아니라 손병희를 독립운동의 영도자로 받들고 30, 40대의 젊은 실무진이 모두 민족대표로 참가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최남선이 “가업(家業) 관계로 직접 참가할 수는 없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최남선은 민족의 독립이라는 주의(主義)에는 찬동하나 민족대표로 정면에 나서는 정치운동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최남선에 대한 지방법원예심신문조서·1919년 5월 19일, 이하 3·1운동 후 일제의 검경 및 재판부 신문조서는 동국대 고재석 교수의 ‘3·1獨立運動(市川正明編)’ 일본어 번역본을 인용함.) 최린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최 선생(최남선)이 운동에 적극 참가 안 해 주신다면 나도 참가할 수 없는 일이오. 또 최 선생이나 송 선생(송진우)의 말씀과 같이 민족운동은 천도교만으로는 진행시킬 수도 없으니 차라리 이 운동을 중지합시다.”(‘의암 손병희선생 전기’) 거족적인 독립운동의 촛불이 힘없이 꺼져갔다. 최린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일은 이 자리에서 전부 취소하고 피차간에 아무 책임도 없기로 하자”며 중앙학교 숙직실을 박차고 일어났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최남선은 일본 유학파인 정노식을 통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국내에 들고 왔던 도쿄 유학생 송계백에게 전보(2월 6일자)를 치게 했다. 도쿄의 2월 8일 거사를 일단 중지하고, 시기를 보아 국내와 호응해 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자고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경성우편국에서 타전한 전보는 차출인의 이름이 불명(不明)으로 처리돼 송계백에게 전달되지 못했다.(정노식에 대한 경찰신문조서·1919년 4월 19일) 2월 8일 도쿄에서의 독립운동도 하마터면 무위로 돌아갈 뻔했다.○ 세 종교 합작 모든 게 백지로 돌아간 지 며칠이 지났다. 도쿄에서 “기미(期未)를 이팔(二八)에 판다”는 암호 전보가 날아왔다. 국내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도쿄 유학생들이 기미년 2월 8일에 독립선언서를 선포한 것이다. 더 이상 독립운동의 호기를 모른 체할 수도, 지체할 수도 없었다. 중앙학교 교사 현상윤이 다시 삼각정의 최남선 집을 찾았다. 현상윤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천도교와 기독교를 연결시키는 것이 어떻겠소?”(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최남선도 마냥 넋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독립선언서 초안은 이미 완성돼 있었다. 최남선은 현상윤의 제안에 “좋소. 그리합시다”라고 말했다. 기독교와의 연결은 최남선이 주선키로 했다. 2월 11일 북촌 김사용의 집(인촌 별택)에 검정 두루마기를 걸친 촌로 한 사람이 바쁜 걸음으로 찾아왔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1864∼1930)이었다. 최남선이 독립운동에 함께할 유력 인물로 지목한 기독교 측 인사였다. 실제로 이승훈은 관서(關西) 지역 기독교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이 자리를 함께했다. 최남선은 일제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나타나지 않았다. 중앙학교 팀은 그동안의 계획과 천도교의 동향을 설명한 뒤 기독교 측의 참가를 요청했다. 이승훈은 천도교와의 합동 거사를 즉석에서 수락했다.(‘인촌 김성수전’) 이승훈은 이미 상하이와 도쿄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던 터였다. 2개월 전인 1918년 12월, 이승훈은 상하이의 동제사 요원 선우혁을 만나 해외 독립운동 계획을 상세히 들었고 국내에서의 지원을 요청받았다. 이승훈은 집안의 논까지 팔아 선우혁에게 운동자금을 주며 하늘에 눈물의 기도를 올렸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이 불쌍한 백성에게 독립을 허하시렵니까, 허하지 않으시렵니까. 이번 기회에 어떻게 하시렵니까.”(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자나 깨나 민족의 독립을 꿈꾸던 이승훈의 시원시원한 말에 인촌 역시 자금 제공으로 응원했다. 이승훈과 동향이며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는 “이승훈 씨의 관서 방면 공작비로 김성수 씨가 2000원인지, 3000원인지를 내놓았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3원가량이었으므로 3000원은 쌀 1000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승훈은 그날 저녁 바로 관서 지방으로 떠났다. 이승훈의 행보는 질풍노도와도 같았다. 평안남북도를 오가며 기독교 장로파의 길선주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및 감리파의 신흥식 등과 만나 민족대표자 서명을 약속받았다. 이승훈은 이들의 인장(印章)을 가지고 신흥식과 동반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그러나 이승훈의 발 빠른 행보와 달리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계는 계속 지연됐다. 천도교 측과의 만남을 주선하겠다던 최남선 등의 태도가 모호했다. 이승훈은 천도교 측에서 거사 직전에 꽁무니를 뺀다고 의심했다. 사정은 있었다. 최린과 최남선 등 실무진이 계속 국내 원로들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알 리 없던 이승훈은 기독교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기독교 측의 단독 거사가 논의되고 있는 가운데 최남선이 소격동에 머물고 있던 이승훈을 찾아왔다. 2월 21일 마침내 최남선의 주선으로 이승훈과 최린이 만났다. 최린의 북촌 재동 집에서 이승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천도교 태도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오? 기독교만으로 독립운동을 단독으로 결행할 것이오.”(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에 관한 문제인 만큼 종교의 이동(異同)을 불문하고 합동하여 추진합시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최린은 원래 계획대로 천도교와 기독교 합동으로 일을 추진하자고 이승훈을 달래듯 말했다. 이에 이승훈이 운동자금으로 5000원 정도가 필요하니 천도교 측에서 조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손병희의 재가를 받은 최린이 쾌히 승낙했다. 사흘 후인 24일 이승훈은 함태영(1873∼1964)과 함께 기독교 공식 대표 자격으로 천도교 중앙총부(현 덕성여중 자리)의 손병희를 방문한 후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확정했다. 그제야 일이 일사천리로 전개됐다. 최린은 만해 한용운의 계동 집을 찾아갔다. 최린과 한용운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교류하던 친구 사이였다. 한용운은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신도 수가 많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승려였다.(한용운 경찰신문조서 제1회·1919년 3월 1일, ‘한용운전집’) 한용운은 즉시 불교계의 민족대표로 참여하는 것을 수락했고 한용운의 권유로 승려 백용성도 동참했다. 우여곡절 끝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루어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완성됐다. ‘민족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 역사상 초유의 이종교(異宗敎) 연대 운동이 한반도에서 성사된 것이다. ▼33인 순서는… 이승훈 “순서는 무슨, 이거 죽는 순서야” 교통정리▼민족대표 명단, 천도교 손병희-기독교 장로파 길선주-기독교 감리파 이필주-불교 백용성… 나머지는 가나다順3·1운동 이틀 전인 1919년 2월 27일 오후 1시 경성의 정동교회. 3·1운동의 기독교 측 대표자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하는 과정에서 그 순서를 놓고 논란이 벌어진 것. 보다 못한 이승훈이 큰 소리로 말했다. “순서가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죽는 순서.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김기석 ,‘위대한 한국인, 남강 이승훈’) 이승훈의 말 한마디에 참석자들은 곧 조용해졌다. 이에 따라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할 민족대표 33인의 순서가 정해졌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선두로 하고 기독교 장로파 목사인 길선주, 기독교 감리파 목사인 이필주, 불교 승려인 백용성의 순서로 이어졌다. 나머지는 가나다순으로 명기했다. 사실 3·1운동에서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합을 이끌어낸 데는 이승훈과 함태영의 역할이 컸다. 당시 기독교 일각에선 타 종교와의 연대에 고민이 적잖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석구 목사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과, 교리상 서로 용납하기 어려운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가”를 놓고 심적 고충이 많았다고 회고했다(‘은재 신석구 목사 자서전’). 원로급 지도자인 윤치호 등 일부 기독교도들 역시 천도교와의 제휴를 ‘죄악’이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를 극복하고 기독교계 대표들은 ‘민족’과 ‘독립’의 대의 아래 3·1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3·1운동이 세계 초유의 이종교 간 연합을 이끌어낸 역사적 사례라고 평가받는 이유다.:: 주요 등장인물 ::이승훈 1864년 평북 정주 출생.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 간부로 활동했다. 1907년 민족교육운동을 목적으로 오산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활동했고,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로 참여했고, 1924년 동아일보 제4대 사장을 지냈다. 함태영 1873년 함북 무산 출생. 대한제국 시기 법관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국권 피탈 후 법복을 벗었다. 3·1운동에 기독교 감리파를 참여시키는 데 주동적 역할을 했다.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문을 거쳐 1952년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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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풍수의 아우라를 AI가 앗아간다고?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감정 모자’가 최근 등장했다. 모자에 달린 무선 센서가 뇌파를 실시간으로 측정해 원거리의 컴퓨터에 전송하면 인공지능(AI)이 데이터를 분석해 감정 상태까지 읽어내는 기술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생산 현장에 적용하고 있다. 일부 공공기업에서 인공지능 모자를 착용한 근로자들의 감정 상태를 점검해 작업 속도나 업무량을 조절하는 등으로 생산성을 향상시켰다는 성과까지 나왔다. 국내의 한 인공지능 전문가는 “현재의 한국 기술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사생활 침해 등 노조의 반대로 도입을 보류한 기업도 있다”고 밝혔다. 필자는 이미 완성 단계에 있는 이 기술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 풍수의 과학화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 측정 모자를 쓰고 명당에 있다고 치자. 뇌파를 통해 감정 상태를 분석하면 긴장, 분노, 불안 등 부정적 감정지수는 제로에 가깝고 편안, 만족 등의 긍정적 지수는 상당히 높게 나올 것이다. 물론 좋지 않은 터라면 그 반대다. 이런 예측을 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 집이나 사무실의 터가 건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검증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좋은 터와 나쁜 터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생체 반응 실험을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 살기(殺氣)로 명명되는 좋지 않은 터와 생기(生氣)로 규정되는 좋은 터에서 사람들의 생체적 반응이 각기 달리 나타남을 확인했다. 그중 살기터와 생기터에서 전자현미경을 이용해 손가락에 흐르는 모세혈관의 혈류 변화를 측정, 비교해보는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살기터 중의 한 종류인 수맥터에서는 원활히 흐르지 못하던 피실험자의 혈류가 생기터에서는 급류가 흐르듯 빠른 속도로 흐르는 것이 육안으로 뚜렷이 관찰됐다. 실험에 참여한 여러 명이 같은 결과를 보였으니 객관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또 수맥파가 뇌의 지각 기능, 특히 정신 집중에 악영향을 주어 학습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연구 결과는 진작 발표된 바 있다(건국대 의대 정진상 교수팀의 ‘수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이 같은 현상은 근력이나 악력 테스트 같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 피실험자 스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살기터에서는 무기력해지던 근육의 힘이 생기터에서는 평소보다 힘이 더 세어짐을 누구나 체감할 수 있다. 터의 기운은 사람의 정신적 정서적 영역에도 영향을 준다. 살기터에 오랫동안 노출된 사람들일수록 불안감과 긴장감을 느끼거나 머리가 맑지 않고, 만성적인 피로감을 호소하며, 악몽 등으로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생기터에 사는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안정되거나 삶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이 충만하며, 스트레스에서 빨리 회복하고, 숙면을 취하는 등 공통점을 보인다. 필자가 오랜 기간에 걸쳐 극단적으로 기운이 엇갈리는 터에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개별 면담한 결과다. 다만 정서적이며 주관적인 터에 대한 인체 반응을 계량화할 수 있는 마땅한 수단을 찾지 못해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가뭄에 단비처럼 인공지능을 이용한 ‘감정 모자’ 출현 소식을 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신비로 포장된 풍수의 실체가 상당 부분 규명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간 풍수가마다 풍수를 대하는 시각이 다르고 명당의 기준 또한 제각각이다 보니 학계에서 풍수학을 의심하는 기류가 일 정도였다. 게다가 소수의 풍수인이 풍수를 지나치게 술수적 주술적으로 포장하는 바람에 일부 종교계에서 종교적 행위로 오해하거나 배척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필자는 인공지능 기술이 시중에 넘쳐나는 ‘풍수 도사’들의 실력까지 감별하고, 풍수가로 위장한 얼치기들을 퇴출시킬 단계로까지 진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와 더불어 인공지능을 통해 사람이 사는 터가 건강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는 점이 밝혀지면 풍수학은 실용성이 뛰어난 학문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 풍수를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선택이다. 그런데 풍수를 실생활에 응용함으로써 거두는 혜택은 상상외로 크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풍수의 유용성을 인공지능이 증명해주는 시대가 지금 막 펼쳐지고 있다. <끝>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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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학교 숙직실, 3·1운동 모의 기지로… 밤마다 비밀 회합

    경성(서울) 북촌의 계동 1번지 중앙학교. 수목이 울창한 삼청동 산비탈에 자리 잡은 2층 규모 붉은 벽돌집 학교는 장안의 명물로 부상했다. 1917년 11월 오로지 민족 자본만으로, 그리고 선생과 학생들이 직접 터를 닦고 돌을 나르는 등 한민족의 열정과 땀으로 완공한 새 교사(校舍)였다.(‘매일신보’ 1917년 12월 4일자) 학교 설립자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직접 고른 터였다. 뒤로는 북악산의 정기를 받고 앞으로는 경성 장안을 한눈에 굽어보면서 학생들의 호연지기를 기르려는 인촌의 의지가 실린 명당이었다. 선생과 학생은 모두 머리를 짧게 깎았다. 300명의 학생들은 해군장교 복장과 유사한 교복과 검은 천을 두른 교모를 착용했다. 일제에 대한 항거의 인상을 진하게 풍기는 두발과 제복이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중앙학교가 유명해지자 일본 관리들 사이에 “누가 중앙학교를 허가해 주었느냐”며 책임 문제가 불거질 정도였다.(‘고하 송진우 전기’) 교사들의 진용 또한 화려했다. 최규동 이중화 이광종 이규영 권덕규 등 당대의 대가들, 김성수 송진우 최두선 이강현 현상윤 나경석 등 일본 유학을 한 쟁쟁한 실력파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설립자 인촌은 직접 영어와 경제를 가르치는 평교사로 근무했고, 교장인 고하 송진우(1890∼1945)는 자신의 월급보다 더 후하게 교사들을 대우했다. 조선인 사회가 인촌과 중앙학교에 대해 기대를 크게 가질수록 일제 총독부의 감시와 경계는 강화됐다.(‘인촌 김성수전’) 사실 중앙학교는 교육광복(敎育光復), 민족갱생(民族更生)의 요람답게 민족 운동가들을 배출하는 양성소이자, 배일(排日) 독립의지를 키우는 근원지였다. 일제에 대한 테러로 일본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김두봉,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중앙학교 출신이었다.(‘중앙백년사’) 또 중앙학교 학생들은 3·1운동이 전개되자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때 일제에 검거돼 체형을 받은 중앙학교 학생들만도 확인된 범위에서 30여 명으로 알려졌을 정도다.(‘인촌 김성수전’) ○ 중앙학교 숙직실, 국내-해외 연결 거점으로 1919년 1월, 겨울의 삭풍 속에서도 ‘북촌의 명소’로 자리 잡은 중앙학교 교정은 미묘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중앙학교를 찾아온 이후부터는 3·1운동을 모의하는 책원본부(策源本部)로 변신한 것이다. 교실 앞 운동장 동남쪽에 자리한 중앙학교 숙직실(당시 교장 사택으로 활용)은 밤늦게까지 불이 밝혀져 있곤 했다. 설립자 인촌과 교장 고하, 교사인 기당 현상윤(1893∼?)이 함께 생활하며 민족의 미래를 설계했다. 또 외부에서 찾아온 지사들은 학생들이 바깥에서 일본 밀정의 미행을 감시하는 동안, 중앙학교 팀들과 함께 은밀하고도 활발히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인촌과 고하는 인근 김사용의 집(계동 130번지)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자연스럽게 인촌의 서울 거처 또한 식사를 빙자한 독립운동 회합 장소가 됐다. 해외 유학파들과 국내 지사들은 서울에 오면 으레 중앙학교와 인촌의 거처를 방문하곤 했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여운홍(여운형의 동생)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한 ‘독립청원 백만인 서명’을 받아오라는 밀명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뒤 곧장 찾은 곳도 인촌의 거처였다.(이경남, ‘설산 장덕수’). 여운홍 역시 중앙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북촌은 중앙학교를 중심으로 국내와 해외를 연결하는 거점이 됐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내는가 하는 점이었다.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 중앙학교 팀은 국내 독립운동은 그 성격상 어느 한두 개 종파나 단체의 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국내의 주된 민족세력이 모두 단결하여 거사를 하고, 국외에서 이에 성원을 보내는 활동이 가장 효과적이고 이상적인 운동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이들은 먼저 천도교에 손을 내밀기로 했다. 송계백이 들고 온 2·8독립선언서(초안)를 설득용 ‘무기’로 활용했다. 현상윤은 송계백을 데리고 최린(1878∼1958)을 찾아갔다. 천도교 산하 교육기관인 보성학교 교장 최린은 현상윤과 송계백의 보성학교 시절 스승이기도 했다. 최린은 송계백이 내민 독립선언서를 보고서는 깜짝 놀라 천도교 수장 손병희(1861∼1922)에게 즉각 보고했다. 손병희는 일찌감치 이종일이 이끄는 천도구국단 등에 의한 정보망과 단결된 조직력으로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참이었다. 손병희는 이 선언서를 접하고서는 국내외 세력과 연대를 통해 민족적 거사를 벌이기로 최종 결심했다. 손병희의 동참 발언을 확인한 송진우와 현상윤 등은 즉각 최린의 집 내실에 모여 축배를 겸한 비밀회합을 가졌다.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의견을 대리하는 최린은 중앙학교 팀들과 함께 독립운동 거사의 주역으로 동참했다. 이들은 밤 깊도록 독립운동의 실행에 대해 구체적 계획과 방법을 논의했다. 우선 민족대표자 명의로 조선독립을 선언한 후, 그 선언서를 인쇄해 전국에 배포하고, 국민이 총동원된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해 조선민족의 독립 열망을 내외에 알리는 순서로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론지었다.(현상윤, ‘3·1운동 발발의 개략’) 공교롭게도 최린과 손병희 또한 모두 북촌에 거주하고 있었다. 최린은 재동 68번지(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살고 있었고, 손병희는 가회동 170번지(현재 북촌박물관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만해 한용운이 운영하던 유심사(계동 43번지) 또한 북촌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래저래 조선조 이래 양반 집권층이 모여 살던 북촌은 3·1독립운동의 최전선 기지가 되었다. ○ 이광수의 문장에 자극받은 최남선 2·8독립선언서는 당대의 대문장가로 유명한 최남선(1890∼1957)의 동참까지 이끌어냈다. 당시 신문관(을지로2가 21번지)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최남선은 18세에 한국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문인으로 도쿄 유학생 출신인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東京三才)’로 불렸다. 또 국내외 독립선언운동에 직접 관여했던 세 사람은 이후 ‘동아일보’에 몸담았던 기연과 함께 ‘조선삼재(朝鮮三才)’로 불리기도 했다. 사실 인촌과 고하는 일찌감치 이들 삼재를 눈여겨봐 왔다. 송진우와 현상윤은 도쿄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 이전부터 최남선을 끌어들여 독립운동을 함께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나 그토록 공을 들였음에도 최남선은 “나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오” 하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송진우가 내민 회심의 카드가 바로 2·8독립선언서였다. 송진우가 때마침 중앙학교를 찾아온 최남선에게 선언서를 들이밀었다. 최남선은 도쿄 후배들의 거사 계획과 독립선언서를 보고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최남선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선언서를 읽는 손까지 떨었다. 게다가 이광수가 초안 작성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흥분한 목소리로 국내에 사용할 독립선언서는 자신이 직접 작성하겠다고까지 다짐했다.(‘고하 송진우 전기’)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비롯해 일본정부와 귀족원, 중의원 및 조선총독부에 보내는 통고서, 그리고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 열국 위원들에게 보내는 서한까지 도맡아 집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선언서를 맡기는 쪽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선언서가 발각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최남선은 한 해 전인 1918년 9월 천도교 측으로부터 독립선언서 집필을 의뢰받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묵암비망록’) 당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인 최남선은 자신의 집인 삼각정(중구 삼각동) 대신 초음정(初音町·현재 을지로5가 오장동) 근처 한 일본 여성(小澤) 집의 학생 공부방을 3주간 빌려 비밀리에 글을 짓고 있었다. 어느 날, 현상윤이 선언문 작성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러 최남선이 머무는 일인(日人) 집을 찾았다. 최남선이 집에 없다고 하기에 그대로 돌아 나오려는데, 일본 여성이 말했다.(이하 현상윤의 회고, 동아일보 1949년 3월 1일자) “현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여기를 왔는지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현상윤은 순간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알기는 무얼 아오? 나는 최 선생을 좀 만나보러 왔을 뿐이오”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녀는 크게 웃으면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들어와서 보고 가시지요” 하고 방으로 들어오기를 권했다. 일본 여성의 강권에 방에 들어간 현상윤은 기절초풍했다. 그녀가 자기 옷깃에서 독립선언서를 주섬주섬 꺼내 보여주는 것 아닌가. 현상윤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선언서를 읽고 있는 동안 그녀는 아들(일본인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21세 청년)까지 부르더니 그의 옷깃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통고서를 꺼내서는 또 보여주었다. 사실 일본 여성은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최남선과 함께 귀국한 임규(1867∼1948)의 부인이었다. 당시 임규는 중앙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최남선이 경영하던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고전적 간행 일을 맡고 있었다. 3·1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 등을 일본어로 주석·번역한 후 일본에 건너가 일본 내각과 중의원, 귀족원 등에 우편으로 통고한 인물이기도 하다. 뒤에 현상윤이 위험천만한 일을 벌인 최남선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최남선은 “우리 집이나 조선 사람에게 맡겨두는 것보다는 일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했다. 그럴듯한 비밀 조치이기는 했으나, 현상윤은 3·1운동이 일어나는 그날 그 순간까지 외나무다리를 타는 듯한 아슬아슬한 마음을 놓지 못했다. 현상윤은 “기미독립운동은 참말 천우신조였다”고도 회고했다. ▼‘3·1선언서’ 초안, 만주의 조소앙에게 전달… 세가지 독립선언서 ‘3각 연대’ 구축▼임정, 출범전 상하이서 국내조직과 연계… 독립운동 모의단계부터 개입최남선이 2월 상순경에 완성한 독립선언서 초안은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있던 조소앙에게도 전달됐다(조소앙, ‘자전’). 이때도 중앙학교 팀이 나섰다. 중앙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교사 나경석(1890∼1959)이 3·1독립선언서 초안을 비밀리에 휴대하고서 지린까지 들고 갔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의 친오빠이기도 한 나경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인 2월 28일에는 인쇄된 독립선언서 1000부를 만주의 손정도 목사에게 전달한 후 현지에서 총기 10정을 구입해 귀국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나영균, ‘일제시대, 우리 가족은’). 최남선이 작성한 3·1독립선언서는 남쪽 도쿄에서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 북쪽 만주에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와 함께 3각 연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세 가지 독립선언서는 서로를 참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이 조금씩 달랐다. 북쪽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가 육탄 혈전을 외치는 무장 투쟁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국내의 3·1운동은 평화주의에 근거한 독립운동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도쿄의 독립선언서는 그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진행 상황은 상하이로도 전달되고 있었다. 도쿄의 2·8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직접 상하이로 가 보고했고, 지린의 대한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의군부 조직을 통해 상하이로 전달됐다. 국내의 3·1독립선언서 또한 기독교 목사 현순을 통해 상하이로 전달됐다. 3·1운동 발발 일주일 전인 2월 22일, 현순은 폐쇄된 국경 압록강을 넘어 만주와 중국에 있는 한국인 비밀 조직의 안내로 중국 상하이의 안전지대인 프랑스 조계에 도착했다(‘현순목사와 대한독립운동’). 한편으로 임규가 일본 현지에서 일본 내각과 중의원 등에 보낸 독립선언서와 통고문의 임무 수행 과정을 적은 비밀 보고서 역시 본국의 인촌 집과 상하이로 전달됐다(‘중앙백년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기 전, 이미 상하이에서는 동제사와 그 전위조직인 신한청년당이 중앙학교 등 국내 조직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독립운동 모의 단계부터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방증이다. ● 주요 등장인물최린: 1878년 함남 함흥 출생. 1904년 대한제국 황실 파견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9년 메이지대 법학과를 졸업함. 1910년 천도교에 입교한 후 천도교 산하의 보성학교 교장, 천도교 도령 등을 역임했으며 1938년 매일신보 사장을 지냄. 현상윤: 1893년 평북 정주 출생. 1913년 보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가 1918년 와세다대 졸업. 귀국 후 중앙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3·1운동에 가담.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 교장을 거쳐 1946년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냄. 6·25전쟁 중 납북됨.임규: 1867년 전북 익산 출생. 1900년 일본 게이오의숙을 졸업한 뒤 1908년 최남선과 함께 귀국해 중앙학교 등에서 일본어를 가르침. 3·1운동 당시 48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 일본에 건너가 요로에 독립선언서 등을 발송.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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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이성계의 골칫거리 ‘호암산 호랑이’

    서울 금천구 호암산(虎巖山) 등산로엔 다소 우스꽝스럽게 생긴 동물 석상 1기가 있다. 관악산의 서쪽 끝 봉우리인 호암산 호압사(虎壓寺)를 기준으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석상은 한동안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끄기 위해 조성한 해치상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 석상과 관련한 기록과 유적이 발견돼 돌로 만든 개, 즉 석구상(石狗像)으로 결론이 났다. 석구상은 해치로 오인될 만큼 풍수적 향취를 진하게 풍기는 유물임은 분명하다. 나아가 석구상과 호압사를 품고 있는 호암산 자체가 조선 최고의 풍수 법술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하다. 사실 호암산은 조선 초기부터 통치자의 주목을 끌었다. 높이 393m에 불과한 암산(巖山)이지만 산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호암산 설화를 꼽을 수 있다.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짓고 있었는데, 완공 직전에 이르면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는 일이 반복됐다. 이성계가 목수들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목수들은 밤마다 호랑이 형상을 한 괴물이 나타나 사납게 날뛰며 궁궐을 부수는 꿈을 꾼다고 하소연했다. 어느 날 한 노인(혹은 무학대사)이 이성계에게 나타났다. 그는 한강 남쪽의 호암산을 가리키며 그곳 호랑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호암산은 조선의 대표적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됐다.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것 같고,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이를 호암(虎巖)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살기등등한 호랑이 기운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이성계는 “호랑이는 본시 꼬리를 밟히면 꼼짝하지 못하는 짐승이다. 그 꼬리 부분에 절을 지으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노인의 조언대로 호압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호암산 북쪽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고 불러 호랑이를 겨냥하는 활로 상징화했고, 다시 북쪽의 10리 지점에는 호랑이를 견제하는 사자암(獅子庵·동작구 상도동)까지 조성했다. 이중삼중으로 호랑이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호랑이를 배려하는 당근책도 잊지 않았다. 호랑이가 좋아하는 개, 즉 석구상을 배치했다. 호랑이 꼬리(호압사 지점) 아래(남쪽)에 석구상을 지음으로써, 호랑이가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유혹한 것이다. 또 석구상 인근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물웅덩이(한우물·사적 제343호)까지 마련돼 있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모두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비보(裨補)풍수이자 물형(物形)풍수적 논리다. 석구상이 정남 방위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는 것도 이유가 있다. 호랑이·말·개는 궁합이 잘 맞는다는 오행설의 삼합(三合) 이론을 취한 구조다. 즉 정남쪽의 오(午·말) 방위에 위치한 개(戌)는 호랑이(寅)와 삼합을 이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의미다. 석구상은 방위를 중시하는 이기(理氣)풍수까지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석구상은 공중에서 하강하는 기운인 천기(天氣)가 응결된 혈 터에 세워져 있다. 호랑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배어 있는 터다. 필자는 석구상이 바라보는 방향인 북쪽의 호압사를 찾아갔다. 만만치 않은 바윗길을 따라 도착한 호압사는 약사불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을 법당으로 삼고 있었다. 약사전은 호랑이 꼬리의 핵심 부분을 누르는 위치였다. 지세(地勢)로 보면 살기에 가까운 강기(剛氣), 즉 호랑이 기운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자리였다. 약사전 바로 앞에 서 있으면 호랑이 기운이 실제 느껴질 정도다. 기적(氣的) 세계관으로는 호암산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는 것이다. 호암산은 조선 풍수의 술법이 총동원된 현장일 뿐만 아니라, 호랑이 같은 강건한 기상을 꿈꾸는 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터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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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독살’ 정보에 격분한 이종일-손병희, 거국적 봉기 결의

    1918년 11월 20일 국내 비밀 항일결사체인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이끄는 이종일(1858∼1925)의 마음은 착잡했다. 단원으로부터 “(만주의) 중광단원(重光團員) 39명이 우리보다 앞서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 한다”는 첩보를 듣고 나서였다. 육척장구(六尺長軀)의 이종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우리는 무얼 했는가. 망설임으로 이같이 낭패지경이 된 것”이라며 장탄식을 했다.(이종일 ‘묵암비망록’) 중광단은 ‘만주의 전설’이자 독립군의 영웅인 서일(1881∼1921)이 이끄는 항일무장단체였다. 만주 지역 대종교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민족종교 조직이기도 했다. 이종일의 천도구국단 역시 무기와 군자금까지 비축해놓은 항일 결사단체였다. 단원들도 민족종교인 천도교 교인이 대다수였다. 활동 주무대가 국내와 해외의 차이가 있을 뿐, 두 단체는 선의의 경쟁의식도 없지 않았을 터다. 천도구국단장 이종일로서는 해외의 중광단에 독립선언의 선수를 뺏긴 것이 무엇보다도 가슴 아팠다. ○ 천도구국단 결성 천도구국단은 중광단에 비해 규모나 인원 면에서 다소 뒤처졌다. 그러나 국내 최대 종교단체인 천도교를 뒷배로 삼아 정보 수집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평가된다. 대종교의 중광단 세력이 주축을 이룬 대한독립의군부가 지린(吉林)에서 국외 민족지도자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독립선언서는 정작 1919년 2월에 발표됐지만 1918년(무오년)부터 준비됐기 때문에 후대에 ‘무오대한독립선언서’로도 불리게 됐다. 이는 전적으로 이종일이 남긴 일기체 형식의 ‘묵암비망록’에 의한 것이다. 이종일은 1910년 자신이 운영하던 순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이 폐간된 후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1861∼1922)를 기회만 되면 찾아갔다. 호걸풍의 손병희에게 “천도교가 선도해 제2의 동학혁명으로 독립을 되찾자”고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요청했다. 그는 1919년 2월 도쿄의 2·8독립선언서와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 훨씬 이전부터 국내에서 민중 봉기 등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창해온 것이다. 그가 1914년 8월 천도교 소속 인쇄소 보성사 내에 천도구국단을 결성한 것도 민족 봉기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이종일은 천도구국단의 명예총재에 손병희를 추대한 다음 자신은 단장으로 취임했다. 산하에 부단장(김홍규), 총무(장효근), 섭외(신영구), 행동대장(박영신) 등을 두고 단원 50여 명으로 조직을 꾸렸다. 자신이 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보성사의 사원들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보성사는 인쇄소로 위장한 비밀결사체로 변신했다. 후일 수만 장에 달하는 3·1독립선언서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보성사에서 무탈하게 인쇄, 배포될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이다. 천도구국단은 상하이의 비밀결사집단이자 국내외 정보수집기관 역할을 한 동제사와도 성격이 유사했다. 동제사 수장 신규식이 그랬던 것처럼, 단장 이종일은 천도구국단의 섭외부를 통해 지속적으로 국제 정세 수집과 분석 등에 심혈을 기울였다. 물론 이를 국내 독립운동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종일 자신이 정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숙지하고 이용할 줄 아는 정보맨이기도 했다. 그는 1882년 8월, 24세의 창창한 나이에 수신사 박영효의 사절단 일원이 돼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된 문화를 일찌감치 체험한 바 있다. 1898년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사장 겸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보를 직접 다뤄 본 경험도 있다. 게다가 여러 차례 일제에 의해 투옥되면서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그 예봉을 피하는 방도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묵암비망록’ 1917년 6월 1일) ○ 거사 택일과 좌절 마침내 천도구국단의 소원이 이뤄졌다. 1918년 9월 9일에 천도교가 주축으로 나서 독립시위 거사를 결행하기로 했다. 그간 시위로 인해 수많은 인명이 희생당할 것을 염려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던 지도자 손병희가 재가한 것이다. 단,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대중화’, 각 방면에서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 세력의 ‘일원화’, 그리고 ‘비폭력화’란 3대 원칙에 입각한 민중운동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묵암비망록’ 1918년 5월 6일) 1919년 3·1운동의 비폭력 평화주의는 여기서 잉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사 날짜는 천도구국단의 면밀한 정세 분석 끝에 택일(擇日)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자국 열도의 쌀 소동 사태를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일본 국내에서 쌀 도매업자들과 지주들의 매점매석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분노한 군중이 폭동을 일으켰던 것. 1917년 초에 15엔 하던 현미 1섬 가격이 이듬해인 1918년 7월엔 30엔으로, 8월에는 41엔까지 치솟자 견디지 못한 하층민들이 싸전을 부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소동을 일으켜 치안이 마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종일은 일제가 자국 문제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거사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천도구국단 단원들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적 대우로 분노가 쌓인 노동자, 농어민, 상인 등을 동참시키는 준비도 끝내뒀다. 위급할 경우를 대비해 무기와 군자금도 지속적으로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종일은 일제의 헌병경찰 통치를 벗어나는 길은 무력밖에 없다고 믿었다. ‘제국신문’ 시절부터 이종일과 호흡을 함께 해온 장효근, 신영구 등도 이에 뜻을 같이했다. “손의암(손병희)은 원칙적으로 무장세력 배양을 반대하지만 일단은 (무기를) 구입해 두든지 일본 헌병경찰 것을 절취해다가 은닉해 두는 방법도 있을 것이오. 겉으로는 항상 평온한 척하면서 일을 계속 진행시키시오.”(‘묵암비망록’ 1913년 11월 18일) 이종일의 지시에 따라 1916년 4월 보성사의 비밀창고에는 일본식 장총 10여 정, 실탄 200발, 군자금 600여 원이 비축돼 있었다. 낌새를 눈치챈 일본 형사들이 이종일의 집과 보성사 주위를 기웃거리고 미행을 붙였지만 발각되지 않았다. 이종일은 총 100정, 군자금 10만 원을 목표로 보성사 비밀창고를 계속 채워 나가고 있었다. 지도자 손병희의 지침대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전개할 것이나 여차하면 무력항쟁을 하리라는 게 정보맨 이종일의 속내였던 것이다. 훤칠한 키에 한복 차림을 즐기는 그는 선비이자 학자였지만 독립에 관한 일만큼은 열혈 투사였다. 그러나 이종일이 천도교 내부에서조차 과격파라는 낙인을 감수하면서까지 추진한 1918년 9월 9일의 거사는 좌절되고 말았다. 손병희 등의 주도로 구한국(舊韓國)의 고관(高官) 출신이거나 원로급 인사들에 대한 거사 동참을 교섭했으나 지연되고, 민중 동원력이 미숙했던 데다, 선언서를 쓰기로 한 최남선이 기간에 맞춰 글을 완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종일이 끝내 성공시키지 못한 거사에 아쉬워하던 참에, 만주에서 중광단의 독립선언 발표 얘기를 들었으니 그 좌절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앞서 이종일은 1916년에도 민중운동을 위해 사회 원로들을 규합하고자 했다. 당시 천도구국단 단원들은 원로급 인사인 한규설, 이상재, 윤용구, 김윤식, 박영효, 남정철 등을 일일이 찾아가 민중운동의 선봉에 나서달라고 부탁했다. 오직 이상재만이 협조 의사를 보였을 뿐, 나머지 원로들은 다 거절했다.(‘묵암비망록’ 1916년 3월 3일) ○ 고종 독살 사건으로 다시 일어서다 1919년 해가 바뀌었다. 실의에 빠졌던 이종일의 천도구국단이 다시 분주해졌다. “어제(1월 21일)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당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대한인(大韓人)의 울분을 터뜨리게 하는 일대 요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민중시위 구국운동은 이제 진정한 민중으로 성숙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몇몇 국민을 만나니 전부 고종 황제 독살 건으로 격분, 절치부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우리의 숙원이던 민족주의 민중운동은 본격화될 것이다. 이 운동에 아니 참여할 자 있겠는가.”(‘묵암비망록’ 1919년 1월 22일) 이종일은 고종의 사망을 처음부터 ‘독살’로 규정하고, 이는 민족운동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고종 독살 소식은 천도구국단의 정보망이 가동한 결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종 황제 사인(死因)에 대해선 일제 측에 의한 자연사 또는 뇌일혈사 설과 한국인들이 제기한 독살설 등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그런데 천도교 수장 손병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국민대회(國民大會) 소집을 포고하는 격고문(檄告文)을 즉시 발표했다. 1919년 1월 총 616자로 발표된 격고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 고종 황제의 서거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평소 건강하시옵고 또 병환의 소식이 없었는데 평일 밤 궁전에서 갑자기 서거하시니 이 어찌 상식적인 이치이겠습니까.…황제의 식사를 받드는 두 명의 궁녀에게 부탁해 밤에 황제가 드시는 식혜에 독약을 섞어 잡수시게 드리니 이를 드신 황제의 옥체가 갑자기 물과 같이 연하게 되고 뇌가 함께 파열하셨으며 구규(九竅·인체 내 9개의 구멍)에 피가 용솟음치더니 곧 세상을 떠나셨소이다. 곧 두 명의 궁녀도 위협하여 나머지 독약을 먹여 처참히 죽게 하고 입을 틀어막았으니 차마 저 왜적의 마음이 점점 더 우쭐해질 수 있겠습니까?” 격고문은 또 일제의 간계에 의해 고종이 독살됐다고 명시했다. 일제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민족은 일본의 어진 정치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여 갈라져서 따로 서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증명서를 제출하기 위해 고종에게 승인을 강요했으나,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죽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날은 세계가 개조하고 망한 나라가 부활하는 좋은 기회이므로 2000만 동포가 봉기하고 궐기하자고 독려했다. 이처럼 손병희는 일제 강점 치하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덕수궁 함녕전의 ‘구중궁궐 사건’을 마치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 내용은 천도교의 지하비밀신문 ‘조선독립신문’에도 소개됐다. 이는 대한제국의 궁궐 일에 대해 손병희가 항상 정보를 입수하고 그에 대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현희 ‘3·1혁명, 그 진실을 밝힌다’) 손병희는 천도교 내부의 비밀정보집단인 천도구국단 혹은 천도교 인맥을 통해 진상을 파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종일은 고종의 독살로 민중 사이에 봉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후 1919년 2월 15일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종일은 일본 도쿄에서 2월 8일 학생들의 독립선언 발표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손병희가 이종일에게 말했다. “어린 학생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월등하구려. 묵암(이종일)의 오래전부터의 민중시위 운동을 속히 결단하지 못했음이 민망할 뿐이오.” 손병희와 이종일은 다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국내 전반적인 분위기도 점점 고조돼 갔다. 국내 대표적 종교인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이 손을 맞잡고,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으로 크게 자극받은 국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하고, 중앙학교와 보성학교 등 교육계의 쟁쟁한 인사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주요 등장인물이종일: 1858년 충남 태안 생. 1898년 한글신문인 ‘제국신문’ 창간, 대한제국민력회 결성, 흥화학교 설립 등 민족교육 운동에 앞장섬. 1905년 천도교의 보성학교 초대 교장, 1910년 보성사 사장을 지내며 1914년에 천도구국단을 조직함. 1919년 3·1독립선언서를 인쇄했고, 민족대표 33인으로 일제에 체포됨. 1922년 출옥 후 제2차 독립선언서(자주독립선언문)를 발표하다가 일경에 압수당했고, 1925년 단식으로 순국했다. 향년 67세.손병희: 1861년 충북 청원 생. 1882년 동학에 입문해 1897년 동학 제3대 교주로 취임.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후 천도교 내 친일세력을 제거한 후 민족운동에 앞장섬. 1919년 3·1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1922년 병사함. 서일: 1881년 함북 경원 생. 1912년 중광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펼침. 1919년 3·1운동 후 중광단의 후신인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조직해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펼침. 북로군정서의 총재로 김좌진 등과 함께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둠.}

    • 2018-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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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윤동주 생가에 쇠말뚝 박은 日의 ‘만행’

    중국 만주 지역을 답사하던 중에 민족시인 윤동주(1917∼1945)의 고향을 찾았다.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 시내 인근의 공동묘지에 안치된 윤동주 묘를 둘러보았다. 새삼 윤동주의 비극적인 죽음이 떠올라 가슴이 아렸다. 지난해 여름 일본 규슈(九州)를 방문했을 때, 한 한일관계사 전문가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형무소가 아닌 규슈제국대학(현 규슈대) 의대 실험실에서 바닷물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사망했다는 말이 나돈다”고 필자에게 귀띔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1943년 일제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된 후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거기서 마루타(생체실험 대상자)로 지목됐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감성이 섬세한 스물여덟 살 시인은 정체 모를 실험실로 끌려가 동물처럼 학대받다가 목숨을 잃었다.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의 일이다. 그의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윤동주의 생가가 자리한 밍둥(明東)촌이 있었다. 룽징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벽촌이다. 장백산맥에서 분기한 산들이 멀리서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는 아늑한 터였다. 마을의 높은 지대에 자리한 윤동주의 집터는 그의 대표작 ‘서시’를 비롯해 100여 수의 시를 새긴 석물들로 꾸며져 있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윤동주는 ‘별의 시인(星的 詩人)’으로 유명했다. 윤동주 생가는 그의 시처럼 아름답고도 고아(古雅)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1985년 작고)는 큰 기와지붕에 솟을대문, 깊고 깊은 우물, 여러 과실수 등을 갖춘 집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었다. 만주에서 재현된 조선의 전형적인 부잣집 풍광이었다. 윤동주 생가는 풍수적으로도 훌륭한 ‘복(福) 명당’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안채에 서려 있는 지기(地氣)가 훌륭했다. 1900년 윤동주의 조부(윤하현)가 이 터에 자리를 잡은 후 커다란 부를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윤동주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1932년 윤동주의 아버지가 자식 교육을 위해 시내(龍井)로 이사 간 후 여기서 세를 살았던 16가구 역시 모두 부자가 됐다. 당시에도 명당이라고 소문이 났다.” 밍둥촌 촌장을 지낸 조선족 송길연 씨(64)의 증언이다. 송 씨는 윤동주 생가에서 바라보이는 앞산을 주렁봉이라고 했다. 복(福)이 주렁주렁 열린 산이라는 뜻일 게다. 송 씨는 또 “마을 이름인 명동(明東)의 ‘東’ 자는 동쪽이자 조선을 가리키는 것으로 ‘조선을 밝게 하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조선의 미래를 밝혀줄 인재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인물 명당’ 소문은 일제에도 흘러들어갔다. 송 씨는 일본 사람들이 밍둥촌의 지맥(地脈)을 끊기 위해 여기저기에 쇠막대를 박았다는 얘기를 마을 어른들로부터 듣고 자랐다. 필자는 윤동주 생가에 이어 룽징 시내로 이사 간 곳까지 찾아보았다. 두 집터를 비교해 본 결과 ‘양택(陽宅·집)은 음택(陰宅·무덤) 못지않게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풍수고전 ‘황제택경’의 글귀가 실감났다. 윤동주가 15세 때 룽징 시내로 가지 않고 밍둥촌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는 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시어(詩語)로 동포들의 아픔을 달래는 ‘영혼의 치료사’로서 평안하고도 복된 삶을 누렸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윤동주 생가는 그런 기운을 충분히 줄 수 있는 명당인 것이다. 반면 윤동주가 룽징 시내에서 중학교 시절을 보내며 살았다고 추정되는 집터는 일본에서의 그의 불행한 삶을 암시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집터 군데군데에 좋지 않은 땅 기운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길흉(吉凶)을 겪은 윤동주의 삶과 그가 살았던 터에서 필자는 양택 풍수의 명암을 진하게 체험했다.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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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肉彈血戰’ 외친 의군부 독립선언서, 抗日무력투쟁 불 댕겨

    1919년 2월 27일 중국 만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지린(吉林)성의 여준(1862∼1932) 집에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이하 의군부)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이름 그대로 무력을 행사하는 결사대였다. 의군부는 파리강화회의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계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급조한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그 위상은 만만찮았다. 만주 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이 모처럼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의군부를 대표하는 정령(正領·총재) 여준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으로 서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고 있는 선각자였다. 군무(軍務)를 책임진 김좌진(1889∼1930)은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광복회의 부사령(만주 지역 책임자)으로 활동하는 열혈 투사였다. 게다가 비밀독립단 동제사의 요원 조소앙, 박찬익, 정원택 등도 합세했다. 그만큼 결속력과 실천력이 강했다. 의군부는 즉시 만주 지역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키로 했다. 선언서 작성에는 대동단결선언의 주역인 조소앙이 기초(起草)를 하고, 정원택은 선언서의 인쇄 및 발송을 맡기로 했다.(정원택, ‘지산외유일지’) 마침내 대한독립선언서가 완성됐다. ‘단군기원 4252년(1919년) 2월 일’ 날짜가 명기되고, 모두 39인의 서명이 기재된 선언서였다. 세칭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이 선언서는 일본을 사기강박(詐欺强迫), 불법무도(不法無道), 무력폭행(武力暴行)을 일삼는 ‘악마적’ 존재로 규정했다. “슬프도다, 일본의 무뢰배여. 임진왜란 이래로 반도에 쌓은 악은 만세에 가리어 숨기지 못할지며, 갑오(甲午·1894년) 이후 대륙에서 지은 죄는 만국이 용납하지 못할지라. 전쟁을 좋아하는 저들의 악습은 자보(自保)니 자위(自衛)니 하는 구실을 만들더니 마침내 하늘에 반하고 인도에 거스리는 보호합병을 멋대로 하고, … 군경의 무단과 이주민의 암계(暗計)로 한족(韓族)을 멸하고 일인(日人)을 증식하려는 간흉을 실행한지라.”(대한독립선언서) 선언서는 강렬한 문구로 일본을 비난했다. 또 일본은 절대 함께하지 못할 동아시아의 적이자, 세계문화의 발전을 저지한 인류의 공동 적이라고 하면서 2000만 동포의 총궐기를 촉구했다.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고 인류의 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임을 명심하여, 황천(皇天·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일체의 사악한 굴레에서 해탈하는 건국임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 지어다!”○ 만주와 도쿄의 교감 대한독립선언서는 ‘육탄혈전’을 독립 쟁취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국내 3·1독립선언서가 평화주의를 주창한 것과 달리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는 처음부터 무력을 내세웠다. 일가(一家)를 희생하여 독립전쟁을 치르자는 대한독립선언서의 혈전주의(血戰主義)는 도쿄의 2·8독립선언서에도 이미 나타났다. 도쿄 유학생들은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하겠노라”고 선포했다. ‘혈전’이라는 용어에서 두 선언서의 작성 과정에 일정한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지산외유일지’의 저자이자 조소앙의 선언서 작업에 참여했던 정원택의 증언이 흥미롭다. 정원택은 “대한독립선언서 말미에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문구는 조소앙의 동생 조용주(1889∼1937)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고 증언했다.(김용국, ‘지산외유일기해제’) 조소앙보다 두 살 아래인 조용주는 형을 따라 일찌감치 상하이로 망명해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다. 조용주는 형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할 때도, 또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도 그림자처럼 보필했다. 그런 조용주가 대한독립선언서에 ‘혈전’이라는 용어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조용주가 도쿄의 2·8독립선언서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동제사의 밀명으로 도쿄의 독립선언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조용운’의 실체가 조용주(혹은 또 다른 동생인 조용원)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당시 일제는 조용운을 조소앙(본명 조용은)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등경찰요사’) 대한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도 도쿄와의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정원택은 1919년 3월 11일 선언서를 석판(石版)으로 4000부 인쇄한 뒤 일본, 미국, 러시아 등 해외 각지로 배포했다.(‘지산외유일지’) 그런데 이것이 일제의 감시망에도 포착됐다. “미령(美領·미국령) 및 노지령(露地領·러시아령)의 선인(鮮人·한국인)을 통해 이승만 이하 39명의 서명으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가 최근 노령에서 간도로 송부돼와 각지에 배부 중. 본 선언서는 조선 내지(內地) 및 도쿄(東京) 방면에도 송부된 형적이 있어 수배 중.”(일본외교사료관, ‘조선경무총장이 척식국장관에게 보낸 친전’, 1919년 4월 19일자) 그간 얘기로만 나돌던 도쿄에서의 대한독립선언서 배포가 사실이었음을 밝혀주는 일제 기록이다. 일제의 심장부 도쿄에 만주의 대한독립선언서가 나돌았다는 사실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한국 유학생들과의 연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이숙화, ‘대종교의 민족운동 연구’) ○ 엇갈리는 기억 이상은 정원택의 일기를 토대로 살펴본 대한독립선언서의 탄생 비화다. 정원택의 일기는 1910년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과 시대 상황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희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결정적 문제가 있다. 일기에 적어 놓은 대한독립선언서의 작성 날짜가 정작 선언서를 기초한 조소앙의 증언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정원택의 일기를 따르자면 의군부는 1919년 2월 말에 조직됐고, 선언서는 3월에 들어서서 완성 및 반포된 셈이다. 반면 조소앙은 이렇게 기억했다. “1919년 1월에 이르러 여준, 김좌진, 박남파(박찬익), 손일민 등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대한독립의군부를 창립했다. 여준은 정령(正領)이 되고 나는 부령(부총재)의 임무를 맡아 대한독립선언서를 손수 기초했다. 국내 대표(나경석)가 가져온 (3·1)독립선언서의 초고를 살펴보고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하였다.”(조소앙, ‘자전(自傳)’) 이 글은 1943년 4월 조소앙이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됐을 때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조소앙은 1월(양력으로는 2월)에 의군부가 조직됐고, 국내의 3·1독립선언서 초고를 받기 전에 이미 대한독립선언서를 완성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조소앙의 또 다른 회고(3·1운동과 나, ‘자유신문·1946년 2월 26일자’)를 보더라도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2월 중·하순의 일로 추정된다. 조소앙의 회고는 정원택의 기록과 사건 전개 과정은 기본적으로 일치하나, 날짜에서는 보름가량 차이가 난다. 이는 3대 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 중 어느 것이 먼저냐 하는 해묵은 논쟁의 불씨가 됐다. 그간 대한독립선언서의 날짜 표기인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을 1919년 양력 2월 1일로 보고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에 앞선 것으로 평가돼 왔다. 최근 정원택과 조소앙의 엇갈리는 기록을 최종 판가름해 줄 수 있는 자료를 입수했다. 대한독립의군부 조직과 국외 독립선언운동의 ‘배후’인 동제사의 수장 신규식이 1920년에 발간한 주보(週報) ‘진단(震壇)’에서 주요 독립선언서의 발표 순서를 명확히 나열한 것이다. “근년(近年) 이래로 중요한 선언으로는 공히 5차례가 있었다. 최초는 상해선포(上海宣布, 대동단결선언)이다. 그 두 번째는 동경선포(東京宣布, 2·8독립선언서), 세 번째는 길림선포(吉林宣布, 대한독립선언서), 네 번째는 한국 경성선포(京城宣布, 3·1독립선언서), 다섯 번째는 해삼위선포(海參威宣布, 연해주독립선언서)다.”(震壇 창간호, ‘國內外韓人之獨立宣言’ 8면 기사, 1920년 10월 10일자) ‘진단’은 3·1운동을 전후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독립선언서로 5개를 꼽았다. 여기서 ‘진단’은 1919년 2월 8일 도쿄의 독립선언서와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서 사이에 지린(吉林)의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된 것으로 ‘서열’을 매긴 것이다. 그것도 동제사 수뇌인 신규식과 박은식이 이름을 걸고 발행한 잡지인 만큼 기록에 대한 신뢰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국학연구소 김동환 연구원은 “이 자료는 그간의 해묵은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결정적 자료”라고 평가했다. 한편 대한독립선언서는 지린, 상하이, 서간도와 북간도, 미주, 노령 등 국외의 지도자급 운동가 39명이 서명했다. 이 중 민족종교인 대종교 지도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특징이다. 대한독립선언서 작성을 실제로 주도한 독립의군부의 중심 인물인 여준(정령), 박찬익(총무 겸 외무), 김좌진(군무), 황상규(재무), 정원택(서무) 등이 모두 대종교 교인이었다. 이승만, 김약연,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박용만, 안창호, 이대위 등은 기독교 지도자들로서 이 선언서에 참가했다. 조국 독립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기독교와 대종교는 무경계적 합심(合心)을 했다.○ 북만주 3·1운동의 현장 기자는 대한독립선언서가 작성된 지린시를 떠나 선언서가 선포된 곳으로 알려진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허룽(和龍)시를 찾아갔다. 대한독립선언서 서명자 중의 한 명인 윤세복(1881∼1960)이 허룽의 대종교총본사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포가 이뤄졌다고 회고한 기록을 따라서다.(신철호, ‘대종월보·제30호’, 1979년 기고문) 대종교총본사 터는 지린시에서 동남쪽 도로로 500여 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종교는 국내에서 일제에 의해 포교금지령(1915년 10월) 조치를 받은 후 같은 해 11월 허룽현의 중국 당국으로부터도 포교 금지령을 받았다. 따라서 독립선언서 선포도 비밀리에 이행됐다고 한다. 김동환 연구원은 대한독립선언서의 공식 발표가 드러나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현재 허룽시 청호(淸湖)마을로 불리는 이곳에서는 몇 가구의 촌락이 형성돼 있을 뿐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종교총본사 터에는 현대식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다만 청호마을을 굽어보는 청호종산의 낮은 구릉에 모신 ‘대종교 삼종사 묘역’만이 옛적 일을 회고하는 듯했다. 대종교를 이끈 홍암 나철(1863∼1916), 무원 김교헌(1868∼1923), 백포 서일(1881∼1921) 등 3인은 민족운동가이자 항일지사로 활약했다. 대종교총본사는 백두산 천지를 기준으로 동북쪽으로 100여 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년 6월 20일경 하지(夏至)에 해가 떠오르면 대종교총본사와 백두산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하지일출선(夏至日出線) 상의 배치다. 옛 고구려인들이 그랬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주산(主山)을 중심으로 하지일출선 방향에 중요한 건물과 왕의 무덤 등을 배치했다. 가장 왕성한 해의 기운을 받아들이려는 풍수적 의도였다. 민족종교 창시자인 나철이 백두산을 순례한 후 일찌감치 이곳 청호마을을 본사로 점찍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 선포 이후 독립 만세의 함성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로 울려 퍼졌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의 3·1운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한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옌볜조선족자치주의 룽징(龍井)의 장날인 3월 13일 옌지(延吉), 허룽, 투먼(圖們) 등지에서 3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룽징의 벌판(瑞甸大野)에 가득 모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악명 높은 간도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행진했다. 명동학교 학생 등이 태극기를 들고 앞장섰다. 그러나 시위 과정에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북간도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은 유혈로 낭자했다. 중국 지방 군벌인 맹부덕 부대와 일제 군경의 야만적인 진압 행위에 분노한 한국인들은 각 도시와 농촌에서 일제히 시위에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무장 투쟁론이 전면으로 부상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육탄혈전주의는 이후 만주 독립운동의 쾌거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로 이어진다. 룽징·허룽=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주요 등장인물여준: 1862년 경기 용인 출생. 1906년 북간도 룽징에서 이상설(헤이그 특사)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 학교 운영. 1913년 신흥무관학교 교장, 1915년 부민단 교육회장 등을 역임.김좌진: 1889년 충남 홍성 출생. 1910년 대한광복회 요원으로 군자금 모집 활약. 1919년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독립군 양성.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둠.나철: 1863년 전남 보성 출생. 1910년 민족종교 대종교를 창교해 독립운동에 투신.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

    • 2018-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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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裨補 풍수’ 아세요? 다완(茶碗) 감상도 하고, 복 기운도 흠뻑 받고

    얼마 전 다완의 기운에 흠뻑 취했다. 경기여고 동창회인 경운회가 운영하는 경운박물관(서울 삼성로)에서 고려와 조선의 다완 29점을 감상했다. 다실에 어울리는 전통 서화작품들과 함께 배치된 다완들은 우리 선조들이 즐긴 다실 문화를 실감나게 재현한 듯했다. 전시회 이름은 ‘다선일미(茶禪一味).’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1168~1241년)가 차 반사발로 번민과 근심을 씻었고, 차 한사발로 참선을 시작했다는 데서 따온 듯한 제목이었다. 거기에 더해 다완 자체에서 분출돼 나오는 품격 높은 기운은 ‘다실 풍수’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었다. 풍수학을 전공한 필자는 다완을 비롯한 도자기의 풍수적 활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우리 선조들은 일찌감치 다완 등을 이용해 공간의 기운을 보충하는 ‘비보(裨補) 풍수’를 구사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양반집 사랑방과 안채 등에 장식한 청자나 백자는 단순한 감상용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도자기에서 배어나오는 기운이 실내의 당사자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점까지 고려한 풍수 조치이기도 했다. 어른이 사망했을 때 도기나 다기 등을 함께 매장한 것도 고인이 생전에 즐기던 것을 사후에도 이용하라는 배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기와 다기를 통해 좋은 기운을 받은 시신은 후손에게도 좋은 영향을 준다는 풍수적 믿음도 개입돼 있었다. 그래서 일부 양반가에서는 일부러 공개석상에서 도자기의 아가리 부분을 깨버린 채 묻어두기도 했다. 아가리가 깨진 도자기는 값어치가 없으므로 도굴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널리 알림으로써 묘를 보호하기 위한 행위였다. 서화작품도 마찬가지다. 동양에서 탄생한 산수화(山水畵)는 원래 자연의 기운(氣運)을 화폭에 담아 실내에서도 같은 기운을 느껴보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의 철학자이자 화가인 종병(宗炳·375~443년)은 산수화를 도(道)를 드러내는 신물(神物)로 해석했다. 아름다운 산천을 눈으로 감상하고, 자연에 깃든 신령스러움까지 마음으로 깨달아 화가가 화폭에 담아내면, 그 아름다움과 신령스러움을 그림에서 똑같이 취할 수 있다는 게 종병의 화론(畵論)이다. 그리고 그런 그림은 감상자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종병의 주장은 같은 기운은 서로 감응한다는 풍수의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과도 맥이 통한다. 원나라 때 산수화가로 명성을 떨친 황공망(黃公望·1269~1354년)은 노골적으로 “그림 속에 풍수가 존재한다”고 했고, 북송(北宋)의 화가 곽희(郭熙·1023~1085년)는 “산수화도 풍수처럼 발복(發福)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처럼 도자기나 산수화 등 예술품은 그에 상응한 기운이 배어 있다. 그래서 예술품을 가까이 두는 것은 자기 신분을 과시하는 치장품을 넘어선 풍수 인테리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평소 사진으로만 감상해오던 16세기 조선의 ‘이도다완(井戶茶碗)’도 공개됐다. 필자는 5년 전 이 다완을 처음 감상한 후 상당한 충격을 받은 바 있다. 그림에서는 풍수에서 중요시하는 생기(生氣)가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를 찾은 것도 사실 이도다완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필자만이 이런 기운을 느낀 건 아니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자 일본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센 리큐(1522~1591년)의 15대손인 센 겐시쓰(95) 대종장은 처음 이 다완을 보고 전율을 느끼면서 생애 처음으로 “다완이 살아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또 “센 리큐가 고려의 다완을 처음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 것”이라고 촌평했다. 기록에 의하면 센 리큐는 1578년 10월 25일 야부노우치(藪內) 종화회(宗和會)에서 처음으로 이도다완을 보았다고 한다. 이도다완이란 명칭이 일본에서 정식으로 통용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이도다완을 천하제일이라고 했던 센 리큐의 제자 야마노우에 소지(1544~1590년)는 다완의 형태만 좋으면 좋은 도구라고 했다. 당시 이도다완의 형태가 우선시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전시기획을 맡은 예술품 감정전문가 이동천 전 명지대 교수는 “이도다완의 안쪽이 마치 우물처럼 깊은 느낌을 줬기에 ‘이도(井戶)’라는 이름이 지어진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전시회에는 이도다완 외에도 일본인들이 숭상하는 기운 좋은 다완들이 군데군데 배치돼 있었다. 다완들마다 기운이 조금씩 달랐다. 풍요의 기운이 넘쳐나는 다완이 있는가 하면, 권력과 명예의 기운을 주는 다완, 건강운을 챙겨주는 다완도 있었다. 기운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권해볼 만한 ‘기 체험’ 명소라고나 할까. 사실 도자기의 기운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은 가마에서 깨지지 않고 변형된 채로 구워진 다완이 좋은 기운을 가졌다고 본다. 가마의 뜨거운 기운까지 버텨낸 다완은 그만큼 강력한 기운이 배어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도예가들이 일본인들의 수요에 맞춰 일부러 찌그러진 다완들을 많이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만들 때부터 찌그려서 구운 다완은 기운이 빠져 있기 십상이고 거기서 다완의 진정한 기운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상류사회의 일본인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오는 4월 19일에는 1350년쯤에 그려진 유일한 고려 수묵화인 ‘독화로사도’(獨畵鷺鷥圖)도 하루 동안 공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풍수도참사상을 신봉했던 고려의 정서에 맞게 군산 선유도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다. 망주봉은 권력의 기운이 강한 터로 왕권의 기운이 서린 터다. ‘동국여지승람’의 참고 지도인 ‘동여비고(東輿備攷)’를 보면 선유도에 큰 무덤을 그리고 ‘왕릉(王陵)’이라고 기록까지 해놓았을 정도다. 경운박물관 장경수 관장은 “이번 전시가 바쁜 현대인에게 차 문화의 정취와 삶의 여유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예술품의 다양한 기운을 감상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전시회는 무료이며 4월 21일까지 계속된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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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가 조작한 고려 북방 국경선…“서희 강동6주는 압록강 이남 아닌 이북”

    “고려의 서북방 국경선이 일제 시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조작된 후 지금까지 아무런 검증 없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올해로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고려사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고려의 서북방 국경선이 압록강 이남이라는 우리 학계의 정설은 일본 학자의 왜곡된 주장을 답습한 것으로, 지금까지 사실처럼 통용돼 온 데 대한 문제 제기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신편한국사’에 의하면 “고려는 북진정책을 편 결과 성종 초에 청천강을 넘어 평북의 박천, 영변, 운산 등을 거쳐 압록강 하류의 일부 지역에 이르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가 북진정책을 펴 최대한 넓힌 영토가 압록강 이남이라는 인식은 일제 시기 일본 역사학자인 쓰다 쏘우키치(津田左右吉)가 1913년에 발간된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에서 규정한 고려 시대 국경선을 그대로 수용한 결과다.그러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를 분석하는 연구 수행 과정에서 쓰다의 주장이 사실을 왜곡했음을 밝혀냈다. 쓰다는 고려 이전의 발해국 멸망 시기의 압록강(鴨¤江, 현재 요하)을 현재의 압록강(鴨綠江)으로 축소시키고, ‘고려사’, ‘요사’, ‘금사’의 국경 관련 기록과는 전혀 다르게 날조에 가까운 왜곡을 하여 ‘반도사관’을 만들었다는 것. 고려를 한반도에 가둬놓는 ‘반도고려’가 여기서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쓰다가 조작한 대표적인 사례가 서희가 개척한 강동6주 위치 문제다. 쓰다의 저서와 이를 답습한 일제의 ‘조선사’에서는 강동 6주가 현재의 압록강 동남쪽인 청천강 일대로 비정(추정)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윤한택 교수는 원 사료와 현장을 통해 검증한 결과 강동 6주는 현재 중국 랴오닝성 무순, 철령지역 부근임이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쓰다는 관련 사료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의로 왜곡해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설정했다는 게 윤 교수의 주장이다.고려 경제사의 권위자인 윤한택 교수는 “일제 시기 쓰다가 원 사료를 왜곡하고, 동북아시아 중세학계에서는 이 주장을 한 번도 검토하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 교수는 또 대부분의 국내 연구자들은 일본 학자들이 연구를 치밀하게 했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일부 학자를 제외하고는 이에 대한 특별한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던 그간의 학계 풍토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앞으로 더 깊은 연구가 진행돼야 하겠지만 윤 교수의 주장이 큰 틀에서 사실로 확인될 경우, 한국의 고려사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중세사 연구에도 큰 회오리바람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윤 교수의 연구 결과는 30일 오전 11시 고궁박물관 별관1층 강당 회의실에서 논문으로 발표된다. 인하대 고조선연구소가 주최하는 학술회의 ‘일본은 한국의 반도사관을 어떻게 만들었나?’에서 반도사관을 다루는 여러 주제 중의 한 파트로 소개될 예정이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 2018-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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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의 빠졌던 조소앙, 신규식 밀지 받고 다시 ‘大呼의 길’로

    《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 모의가 한창일 무렵, 중국 만주에도 동제사의 밀명이 전달됐다. 각자 영웅으로 할거하던 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에 절망하던 조소앙은 지린(吉林)에서 잠적 수도하고 있었는데….》1919년 1월 24일(음력 1918년 12월 23일), 상하이의 비밀결사조직 동제사(同濟社)의 수장 신규식으로부터 밀명을 받은 요원 정원택(1890∼1971)은 펑톈(奉天)을 떠나 지린(吉林)으로 잠입했다. 일본을 담당한 동제사 요원이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한창 2·8독립선언을 모의하느라 분주할 때였다. 정원택 역시 만주 지역 지린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그래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 등 한국 대표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동제사의 교육기관 박달학원 출신인 정원택은 지린성내 한 중국 객잔(客棧·중국의 숙박시설)에서 선배 동지 박찬익(1884∼1949)을 만났다. 정원택은 신규식의 밀지를 박찬익에게 보여주며 미주, 상하이, 일본, 국내 등 각 지역에서의 기밀(機密) 독립선언 활동을 언급했다. 신규식의 밀지를 본 박찬익은 까만색 선글라스에 카이저수염을 한 상하이의 ‘멋쟁이 형님’ 신규식이 그리웠다. 박찬익은 국내에서 관립 공업전습소에 다니던 시절 신규식과 만나 결의형제(結義兄弟)한 사이였다. 1909년 대한제국의 공업 발전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으로 창간한 잡지 ‘공업계’의 사장 겸 편집인이 신규식이었고, 발행인이 박찬익이었다. 박찬익과 정원택은 신규식의 밀명을 따라 서간도와 북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우선 정원택은 우편국의 우편상(郵便箱·우편함)을 이용한 암호로 조소앙(조용은·1887∼1958)과 연락을 취했다. 동제사 요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엽서에 기재한 뒤 통신 주소로 발송하는 방법이었다.(정원택의 일기인 ‘지산외유일지’·이하 등장하는 날짜는 음력 일기를 양력으로 환산한 것임) ○ 갈등하는 사상가 1월 26일 정원택은 지린성의 동문(東門) 밖 외딴곳의 도관(道館·도교 사원)에 머물고 있는 조소앙과 접선했다. 도관을 거처로 삼고 있는 것을 보니 과연 ‘소앙다웠다’. 유달리 큰 머리가 돋보이는 조소앙은 메이지(明治)대 법학과 졸업생답지 않게 종교가 혹은 사상가적 면모가 물씬 풍겼다. 춘원 이광수는 1913년 상하이에서 조소앙과 함께 지내던 시절 “그(조소앙)는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서 코란을 읽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눈을 반쯤 감고 몸을 좌우로 흔들흔들하고 있었다”고 묘사했다.(이광수 ‘나의 고백’) 당시 조소앙은 동제사가 운영하는 박달학원 교사로 활동하면서, 틈만 나면 이슬람교 등 세계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거나 명상을 즐겨하곤 했다. 1914년에는 독립운동 차원에서 단군을 필두로 동서양의 여섯 현자를 모시는 육성교(六聖敎)라는 독자 종교를 구상하고, ‘일신교령(一神敎令)’이라는 경문까지 작성했었다. 그러니 조소앙이 도교 도사들이 거주하는 도관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리 이상스럽지 않았다. 지린의 날씨는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두 사람은 따뜻한 인삼차를 달게 마시며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조소앙이 만주에서 거동이 수상한 자로 지목돼 중국 경찰에 붙잡혔을 때 정원택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 일도 있었다. 이런저런 신상 얘기를 나누며 차 한 잔을 다 마실 무렵, 정원택이 본론을 꺼냈다. “지금 예관 선생(신규식)의 통신(通信) 지시로 다소(多少) 서류를 휴대하고 만주의 동지를 규합하고 노령(露領·연해주)에 기밀을 상응코자 하니 남파(박찬익)와 소앙이 할 중책이오.” 정원택이 하루가 급하다며 속히 활동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동제사 요원 조소앙의 반응은 의외였다. “내 서간도로부터 여기 올 때에 결의한 바가 있었소. 앞으로는 도관에 잠적하여 세상사에 간섭하지 않으며 사람과 논쟁하지 않고, 다만 홀로 수양하기를 결심하였으니 나를 내버려두시오.” 조소앙이 담담하게 말했다. 뜻밖의 말에 정원택은 충격을 받았다. 일찍부터 신규식과 함께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해온 조소앙이 아닌가. 그의 형인 조용하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한 후 만주와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그의 동생 조용주 역시 형(조소앙)을 따라 망명한 후 독립운동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조용히 수양이나 하면서 은둔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조소앙은 고뇌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거두어갈 무렵, 재외 한인사회는 단결의 희망이 털끝만큼도 없었으며, 국내의 대중들 또한 고요하게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마음이 매우 초조하여 동북지역의 한인들을 규합할 결심을 하고 단신으로 그곳으로 갔다. 당시 한인 교포사회의 거물들은 제각기 영웅으로 자처하면서 할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의 희망이 없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지린성에서 칩거하면서 독서를 했다.”(조소앙 ‘자전·自傳’·1943년 발표) 그가 1946년 국내에 귀국한 뒤, 1919년 3·1운동 전후를 회고하는 글에는 또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저윽히 우리 민족의 단결성의 결여를 개탄하고 실망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조계(早計)이며 오산이었다. 그 기운이 농숙하고 그 시기를 포착하면 우리 민족보다 더 단결이 강한 민족도 다시없는 것을 나는 3·1운동에서 발견하고 교훈받았다.”(조소앙 ‘3·1운동과 나’·자유신문 1946년 2월 26일자) 조소앙은 국내에서 3·1혁명의 불꽃이 일 때까지는 같은 피를 나눈 민족끼리 단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넘어 거의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독립선언서의 원조, 대동단결선언 조소앙으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이 담긴 ‘대동단결의 선언’(대동단결선언)이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1917년 7월 조소앙은 상하이에서 동지들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작성해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들에 배포했다. 독립운동에는 무엇보다도 대동단결이 필요하다는 취지하에 국내외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무상법인(無上法人)’이라는 기구, 즉 정부를 조직하자는 선언서였다. 동제사의 주요 요인들이 선언서의 발기인으로 등재했다. 동제사 수장 신규식을 필두로 조소앙, 신석우, 박용만,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김규식, 윤세복 등 14명이었다.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명기된 선언서인 만큼 무게감도 작지 않았다. 특히 조소앙이 기초한 대동단결선언은 (대한제국) 황제의 주권이 국민에게 선양되었음을 공개적,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국의 독립 이후 건국할 국체(國體)는 왕정복고가 아니라 국민주권 국가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융희황제(순종)가 삼보(三寶·토지 인민 정치)를 포기한 경술년(1910년)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의 최초의 날이니, 무슨 까닭인가. 우리 대한은 무시(無始) 이래로 한인의 한이요 비(非)한인의 한이 아니니라. 한인 사이의 주권을 주고받는 것은 역사상 불문법의 국헌이오.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요, 한국의 국민성이 절대 불허하는 바이라.’(‘대동단결선언’) 이는 당시 침체돼 있던 독립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확실하게 제시하는 ‘혁명적’ 선언이기도 했다. 사실 대동단결선언이 발표되던 시점은 국내외 독립운동이 최악의 국면에 처해 있었다. 1911년 일제는 무단통치의 일환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해 안창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신민회 간부 등을 대거 체포했다. 서북지방의 항일 민족조직인 신민회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다. 이른바 ‘105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은 미국으로,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는 등 국내 거점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이어 국내 의병조직인 독립의군부(1912∼1914년)와 대한광복회(1915∼1918년)마저 잇따라 발각돼 의병운동도 와해됐다. 국외 사정도 녹록지 않았다. 1915년 이상설과 신규식 등이 중국에서 신한혁명당을 설립해 광무황제(고종)를 옹립하는 망명정부를 세우려고 했으나 이 역시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 그런 즈음에 대한제국 황제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방략인 보황주의(保皇主義) 노선을 완전히 종결하는 선언이 발표된 것이다.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한 조소앙은 삼보의 의무와 권리가 국민에게 있는 이상 이를 행사하는 주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국내 동포는 현재 일제에 구속돼 있으니 그 책임을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해외 각 지역 민족대표들이 회의를 열어 유일 최고기관을 수립하자고 제안했다.(조동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917년의 대동단결선언’) 이 선언은 후에 3·1운동의 독립선언서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가 됐다. 동제사 이사장 신규식과 총재 박은식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발행한 주간지 ‘진단’ 창간호에서 대동단결선언을 ‘제1차 상해선포(上海宣布)’라고 명명하며 최초의 독립선언서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작 선언서가 발표된 당시의 호응은 신통치 않았다. 선언서는 ‘신한민보’(북미주), ‘국민보’(하와이), ‘한인신보’(블라디보스토크), ‘청구신보’(우수리스크) 등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것이나, 이에 호응해오는 단체는 거의 없었다. 조소앙은 적잖이 실망했다. 조소앙은 이어 1918년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한인 교포사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도모하려고 했다. 이마저 실패했다. 그의 표현대로 각자 영웅으로 할거한 단체들이 하나도 호응해오지 않았다. 이는 동제사 요원 박찬익도 느끼고 있던 점이다. “독립운동에서 무력을 갖춘 군사 활동이 중요하다고 하여 저마다 무장 단체를 만들었다. 몇 사람의 부하를 가진 사람도 제가 독립군 대장이고, 100명, 1000명을 가진 사람도 저마다 독립군 대장이라고 뽐내는 지경이었다. 같은 길을 가면서도 저마다 이론을 내세우면서 하나가 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남파 박찬익 전기’)○ “다시 대호(大呼)할 기회가 왔소” 정원택은 정신 수양이나 하며 살겠다는 조소앙을 설득했다. “나나 선생(조소앙)이나 그 밖의 여러 동지들이 국치(國恥) 후에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만리절역(萬里絶域)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달게 받고 있음은 모두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말에 따라 시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었소. 이제 서방의 전우(戰雨)가 처음 개고 파리에서 평화가 열리게 되어 약소민족이 자결을 고창(高唱)하니, 일은 비록 미비하나 때는 왔소. 일의 성패를 계산하지 말고 한 번 궐기하여 대호(大呼)할 기회라. 이 기회를 놓치고 어느 때를 기다리리까. 잠적 수도는 늙어서도 늦지 않소.” 마침내 조소앙의 마음이 움직였다. 정원택과 조소앙은 박찬익이 머물고 있는 객잔에서 함께 만난 뒤 지린성 북문 바깥의 여준(1862∼1932)의 집에서 활동 방침을 토의했다. 1919년 2월 말 신흥무관학교 교장 출신인 여준의 집으로 서간도와 북간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비밀리에 모여들었다. 소문을 듣고 거사 자금을 쾌척하러 온 이들도 있었다. 평양 출신의 김모(金某)가 만주의 황무지 개간 사업차 지린에 왔다가 자금 중 6000원을 제공했다. 또 충남 사람 정명선이 1000원을 독립운동에 쓰라고 내놓았다. 드디어 2월 27일 여준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대한독립의군부가 조직됐다. 나이가 가장 많은 여준이 총재로 추대되고, 총무 겸 외무에 박찬익, 재무에 황상규, 군무에 김좌진, 서무에 정원택, 선전 겸 연락에 정운해 등이 피선됐다. 상하이에 파견할 지린 대표로는 조소앙이 선정됐다.(‘지산외유일지’) 대한독립의군부는 대일 무력투쟁 노선을 선택했다. 그 이듬해(1920년) ‘청산리 전투’로 명성을 떨친 김좌진이 무력에 필요한 마필과 무기 구입을 책임졌다. 또 대한독립의군부 주도로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도쿄의 2·8독립선언과는 달리 무력 사용을 독립운동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세칭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선언서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 날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음 호에서 살펴보기로 한다.)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주요 등장인물조소앙: 1887년 경기 파주 출생. 1917년 대동단결선언과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장 지냄. 삼균주의 주창.박찬익: 1884년 경기 파주 출생.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서명한 39인 일원. 1940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 지냄. 한국광복군 창설 주도.정원택: 1890년 충북 음성 출생. 1912년 동제사 요원으로 활약.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해 독립선언서 제작 및 배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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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하나?

    ‘부자가 3대 못 간다’거나 ‘독립운동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1대에서 시작한 사업 혹은 과업은 3대에 이르면 결론이 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번 돈을 손자가 까먹고 만다는 속설은 부의 대물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때문에 손자대까지 망한다는 속설이다. 우리 사회에서 망령처럼 떠돌고 있는 이 속설은 우리 국가관과 애국심마저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을 정도다. 조손(祖孫) 3대를 인과관계로 연결하는 식의 속설은 한국인의 풍수적 정서와도 무관치 않다. 이를테면 조부모의 음택(묘)은 손자대, 특히 유전적 친연성이 강한 자손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고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풍수 용어로는 동기감응(同氣感應·같은 기운은 서로 감응함)이라고 한다. 얼마 전 ‘4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라는 진기록을 보유한 독립운동 가문의 민영백 민설계 회장(76)을 만났다. 그는 가족사와 관련된 풍수적 체험을 얘기했다. 외증조부 신용우(구한말 의병장)-외할아버지 신규식(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아버지 민필호(김구 주석 판공실장)-매부 김준엽(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독립운동사는 비장하면서도 화려했다. 특히 예관 신규식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예관은 슬하에 외동딸(신명호)만 두고 1922년 상하이에서 절명했다. 예관을 모시던 민필호 선생이 예관의 외동딸과 결혼해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중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떠도느라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당시 해외의 독립운동가 자손들 대부분이 그랬다.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민 회장 역시 자수성가했다. 국내 1세대 건축 설계사로 성공했지만, 독립운동가 자손이라는 명예는 출세와 무관했다. 그 대신 “우리 형제자매들이 겪은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다”는 짤막한 말로 그때를 회고했다. 이후 민 회장은 집안 어른으로부터 ‘외손봉사(外孫奉祀·외손이 외조의 제사를 모시는 일)의 명’을 받아 외할아버지를 추념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고 한다. 그는 한중 수교가 이뤄진 이듬해인 1993년 8월,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 유해 5기를 국내로 봉환하는 일에 참여했다. 상하이 창닝(長寧)구 쑹칭링(宋慶齡) 능원에 안치된 외할아버지(신규식)의 유해를 모셔오기 위해서였다. 민 회장은 파묘한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유해가 모셔진 곳은 흙이 질척질척할 정도로 수맥에 노출돼 있었고 유해는 거무튀튀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를 만국공묘(万國公墓·쑹칭링 능원의 원래 이름)에 모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 아파하셨다. 외할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 현장에 계셨던 어머니는 묘 터가 물구덩이임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할아버지 유해 상태를 확인하고 보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나마 예관의 유해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다른 4기의 독립운동가들 유해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박은식, 김인전, 노백린, 안태국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는 정안사공묘(靜安寺公墓)의 외국인 묘지에 안치된 채 방치되다시피 했다. 1950년대 상하이의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정안사공묘가 교외로 이전하면서 이곳으로 이장됐다. 이 5기의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서울현충원의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치돼 있다(후에 3기의 유해가 추가로 봉환됨). 현재 중국 정부가 관리하는 쑹칭링 능원의 외국인 묘역(外籍人墓園)에는 모두 10여 기의 한국인 묘지가 있다. 임계호, 조상섭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사들의 묘지도 있다. 이미 국내로 봉환된 독립운동가의 경우 표석으로 그 매장돼 있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풍수로 볼 때 이 터의 땅기운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능원 북쪽의 외국인 묘지 중에서도 가장 윗자리에 있는 이곳은 수맥파는 물론이고 지기(地氣)가 교란돼 살기가 뻗치고 있었다. 일부 애국지사들이 바로 그런 곳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이국에서 한스러운 생을 마감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명당은커녕 변변찮은 터에 매장돼 있기 십상이다. 죽어서도 편안하게 영면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과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을 후손들을 위해 국가는 보상을 하는 게 책무일 것이다. 다행히 올해부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지원 범위를 확대해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더불어 해외 곳곳에서 방치된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찾아내 하루속히 국내에 안장하기를 촉구한다. 그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망령스러운 속설이 완전히 사라지는 풍수적 ‘비책’이라고 본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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