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여자들의 사회적 위상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집에서는 맞고 사는 여자들이 폭증하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최근 발표한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2019년 가정폭력 건수는 하루 평균 138건으로 8년 전보다 7.3배로, 데이트폭력은 하루 27건으로 6년 전에 비해 36% 늘었다. 이는 경찰의 검거 건수를 집계한 수치로 가정폭력의 경찰 신고율이 3%가 안 되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두렵다. 폭력적인 남편이나 애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직자, 구청장, 일본검 소지자, 인명구조사 등 언론에 보도되는 가해자의 면면은 다양하다. 잘나가는 여자들을 향한 못난 남자들의 용심일까. 그보다는 더 이상 맞고는 못 살겠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유독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에서 ‘미투’가 드문 이유는 다들 짐작하는 대로다. 남편이고 애인이며 애들 아빠가 아닌가. ‘보복이 두려워서’ ‘창피하고 자존심 상해서’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 참기도 한다. 경찰도 미덥지 않다. 신고 전화를 하면 “제가 꼭 가야 되나요” 하고 되묻거나, 출동해서는 “형님, 술 깬 다음에 얘기하세요” “친정이나 찜질방에라도 가 계세요” 하며 발을 빼려 든다. 거리의 폭력과는 달리 ‘집안싸움’ ‘사랑다툼’인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는 사회적이다. 미국의 가정폭력 실태를 다룬 베스트셀러 ‘살릴 수 있었던 여자들’에 따르면 가정폭력으로 인한 의료비용이 매년 80억 달러(약 9조3000억 원)가 넘는다. 폭력의 후유증으로 인한 근로시간 상실 규모는 연간 800만 시간이다. 여성 노숙인의 절반 이상은 가정폭력으로 집을 나온 경우이고, 폭력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발달장애의 위험이 훨씬 높으며, 대규모 총격사건의 시작은 가정폭력인 경우가 많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을 공중보건의 문제로 간주한다. 이 공중보건의 문제가 코로나19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재택이 미덕인 시대지만 유엔에 따르면 “집은 여성에게 가장 위험한 곳”이다. 세계 각국은 집 안에 갇혀 신고 전화도 못 하고 있을 멍든 여성들을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봉쇄 상황에서도 문을 여는 약국과 슈퍼는 최적의 구조 장소다. 약을 사고 장을 보러 나온 피해 여성이 ‘마스크19’라고 암호를 말하면 직원이 알아듣고 대신 신고를 해준다. 슈퍼 안에는 간이 상담소가 있고, 구매 영수증 아래쪽엔 여성폭력 신고 전화번호가 자동으로 찍혀 나온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통씩 재난문자를 보내면서 그런 안내번호 한번 보내준 적이 없다. 참으로 무심한 행정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2018년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제정되고, ‘전처 살인사건’과 데이트폭력 살인사건이 터지자 줄줄이 종합대책이 나왔지만 대부분 발표에 그쳤다. 올해 가정폭력 관련 예산은 넓게 잡아도 427억 원으로, 신설된 군 장병 이발비(421억 원) 수준이다. 대선 주자들은 ‘펫 공약’은 경쟁적으로 내놓지만 가정폭력 대책을 얘기하는 이는 드물다. 허술한 정부 통계를 대신해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언론 보도를 토대로 ‘친밀한 관계 내 여성폭력’을 집계하는데 지난해 사망자가 115명이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지인들의 ‘테러’로 매년 100명 넘게 숨지는데 예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행정의 과실치사 아닌가.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낙태 허용 시기를 결정할 때 제기되는 질문이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생명은 잉태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낙태는 살인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선진국에선 태아가 모체 밖에서 생존 가능한 임신 22∼24주를 기준으로 조건부 낙태를 허용한다. 그런데 미국의 생명운동가들이 2013년 태아의 심장이 뛰는 순간부터 낙태를 금지하는 ‘태아 심장박동법’을 제안했다. ▷1일 미 텍사스주에서 발효된 심장박동법은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처벌한다. 의학적 긴급 상황만 제외하면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일 때도 낙태할 수 없다. 성폭력이나 근친상간은 사후 피임을 할 수 있고, “강간범 잘못인데 왜 태아를 처벌하느냐”는 논리에서다. 아칸소 조지아 앨라배마 등 보수 성향의 10여 개 주의회가 비슷한 법을 만들었는데 주 또는 연방 법원에 의해 효력이 중지되거나 폐지됐다. 연방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로 임신 22∼24주 이전의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임신을 알아채기 어려운 6주 이후 낙태 처벌은 사실상 전면 낙태 금지라며 반발한다. 초음파로 감지되는 태아의 심장 박동은 전기적 충격일 뿐 심장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로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적으로는 위헌이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루스 긴즈버그 연방대법관 사망 후 후임으로 에이미 배럿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대법원이 보수 우위로 재편된 것이 새로운 변수다. 배럿 대법관은 아이티에서 입양한 2명과 다운증후군 막내를 포함해 자녀 7명을 둔 가톨릭 신자다. 연방대법원은 텍사스주의 심장박동법 시행을 중단해달라는 긴급 신청을 기각했다. ▷국내에선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대체 입법 시한을 지난해 12월 31일로 정했지만 지금껏 보완 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임신 14주까지는 무조건, 15∼24주는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개정안을 냈지만 국회에서 제동이 걸린 상태다. 여성계는 낙태죄 전면 폐지를 주장한다. 대한신생아학회는 요즘은 22주 된 태아도 살릴 수 있다며 22주 미만으로 하자고 한다. 임신 11주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한국형 심장박동법도 발의됐다. ▷의료 현장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낙태 가능 주수와 비용이 병원마다 제각각이다. A병원은 22주까지만 된다고 하고, 7주 낙태에 B병원은 48만 원, C병원은 75만 원을 부른다. 경구용 낙태약 허가가 늦어지면서 온라인에선 불법 판매가 횡행한다. 입법 공백을 9개월째 방치하는 무책임한 국회 탓에 위험에 내몰리는 여성들만 늘어나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은 글로벌 유통기업의 무덤이다. 세계 1, 2위 할인점인 미국 월마트와 프랑스 카르푸가 한국에 진출한 지 8년, 11년 만인 2006년 나란히 짐 싸서 떠났다. 외신은 “세계 유통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이번엔 글로벌 이커머스 기업으론 처음으로 1위 업체인 미국의 아마존이 한국에 상륙한다. 아마존은 12개국에 진출해 있는데 현지 회사와 합작 형태로 시장 공략에 나서는 건 한국이 처음이다. ▷아마존은 국내 이커머스 4위 업체인 11번가와 손잡고 해외직구 서비스 ‘아마존 글로벌 스토어’를 31일 오픈한다.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수천만 개 상품을 11번가 앱과 웹에서 한국어로 주문할 수 있는 서비스다. 배송기간은 6∼10일,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16만 개 상품을 엄선한 ‘특별 셀렉션’은 4∼6일이다. 배송비는 2만8000원 이상 구매하면 무료다. ▷아마존의 최대 강점은 ‘A부터 Z까지 모든 걸 판다’는 홍보 문구대로 상품 소싱이 어느 기업보다 광범위하고 촘촘하다는 것. 그동안 한국에선 구하기 어려운 주방용품, 운동화, 원서 등을 찾아 12개국 아마존을 뒤지거나, 미국 ‘블프’와 일본 아마존의 특가 찬스를 노리던 소비자들로선 아마존이 온다는 소식이 반갑기만 하다. 주문 결제 배송 반품 환불 등 모든 문의를 한국어로 할 수 있으니 온·오프라인에서 ‘아마존 주문 잘하시는 분’을 찾아 아쉬운 부탁을 할 필요도 없게 됐다. ▷하지만 아마존이 한국 시장에서도 강자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제액이 일정 액수를 넘어가면 관세와 부가세가 붙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진다. 배송 기간이 단축됐다고는 하나 국내 소비자들은 이미 로켓배송, 총알배송에 익숙해진 상태다. 아마존은 미국 시장 점유율이 40.4%, 일본 아마존은 52%다. 한국엔 절대 강자가 없다. 1위 네이버의 점유율이 17%, 2위 쿠팡이 14%에 불과하다. 어느 한 기업에 몰리지 않을 만큼 한국 소비자들의 입맛이 까다롭다는 뜻이다. ▷월마트와 카르푸의 실패 요인으로는 ‘현지화 전략 부재’가 꼽힌다. 한국인은 백화점 같은 쇼핑 환경을 좋아하는데 외국처럼 창고형 매장을 고집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로벌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한국 정착에 성공한 코스트코의 성공 비결도 현지화 전략 거부다. 한국 할인점과는 다른 창고형 매장에서 쇼핑하며 외국에 온 듯한 체험을 할 수 있어 좋아한다는 설명이다. 비슷한 상품과 서비스 사이에서 기어이 차이점을 찾아내고, 가격 서비스 편리함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는 ‘까탈스러운’ 한국 시장에서 아마존이 어떤 유통 역사를 쓰게 될지 궁금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양손이 없는데도 가장 빠르게 펜싱 칼을 휘두른다. 한쪽 다리가 없는 선수가 가장 멀리 뛴다.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없음을 감동으로 확인하는 이벤트가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이다. 2020 도쿄 패럴림픽이 24일 개막해 162개국 4400명의 선수들이 22개 종목의 메달 539개를 놓고 기량을 겨룬다. 개회식의 주제는 “우리는 날개를 가지고 있다”.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추락의 순간에도 희망의 날개가 돋는다. 육상 여자 100m와 200m에 출전하는 전민재(44)에겐 단단한 두 다리가 ‘날개’다. 5세에 뇌염을 앓고 뇌성마비 1급 장애인이 된 그는 “스무 살까지만 살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키가 149cm로 작은 편이지만 트랙에만 서면 폭발적 스퍼트로 100m를 14.70에 주파한다. 2012년 런던, 2016년 리우 100m와 200m에서 3개의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남자 휠체어 배드민턴 세계 랭킹 1위인 김정준(43)은 2005년 공장에서 일하다 절단기에 옷이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두 다리를 잃었다. 그 대신 굵게 단련한 두 팔로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누구보다 강한 스매싱을 날린다. 그는 도쿄 패럴림픽에서 처음 정식 종목이 된 배드민턴의 유력 우승 후보다. 이번 대회에선 해외 패럴림픽 사상 최다인 86명의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고 14개 종목에 출전해 종합 20위를 노린다. ▷패럴림픽과 함께 경기장의 감동을 장애인 차별 해소로 이어가기 위한 캠페인 ‘WeThe15’이 시작됐다. 전 세계 인구의 15%에 달하는 12억 장애인을 위한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 인권 운동으로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와 국제장애연합(IDA)이 주도한다. 19일엔 도쿄 스카이트리,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로마 콜로세움 등 30개국 120여 개 랜드마크에 일제히 이 캠페인의 상징색인 보라색 조명등을 켜는 홍보 행사를 가졌다. 도쿄 패럴림픽이 끝난 뒤에도 10년간 장애인의 사회 통합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스포츠는 신체 기능이 떨어지는 장애인에게 더욱 중요하다. 하지만 ‘2020 장애인 생활체육 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장애인 생활체육 참여율은 24.2%로 전체 국민 참여율(60.1%)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장애인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운동 장소는 ‘집 안’이었다. 장애인용 시설도 드물고, 있다 해도 승강기나 경사로가 없어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누구나 즐기는 스포츠를 장애인도 똑같이 즐기는 것, 국내 WeThe15 운동이 여기서부터 출발하길 기대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그들만의 믿음은 흔들리는 법이 없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실형을 살고 나온 한명숙 전 총리는 “사법 농단의 피해자”다.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는 드루킹 댓글 조작으로 대법원에서 2년형을 받았지만 “그의 진정성을 믿는다”고 한다. 조국 전 장관 아내 정경심 씨가 자녀 입시 비리와 사모펀드 불법 투자로 징역 4년을 선고받자 “조국은 십자가 진 예수”가 됐다. 자기기만은 꽤 쓸모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진실을 외면하는 이유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진실은 고통스럽다. 친노의 대모, 친문의 적자가 그럴 리 없다고, ‘꿈의 노무현’ ‘운명의 문재인’과 함께 성(聖) 삼위일체를 이루는 ‘사명의 조국’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속는 게 마음 편하다. 둘째, 적들로부터 우리를 구별 지으려면 보편적인 진실이 아닌 우리만의 믿음이 필요하다. 민주화의 주역, 촛불혁명의 도구로서 DNA부터 다른 우리는 적폐 세력 따위가 재단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셋째, 다들 아니라고 할 때 편들어줘야 충성심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충성의 대가는 달고 불충의 열매는 쓰다.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조국 전 장관에게 “젊은 세대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가 당내 경선 탈락과 징계라는 ‘이중 처벌’을 받았다. 반면 ‘조국 수호’를 위해 ‘개싸움’을 한 김남국 의원은 전략 공천으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가 진짜 조국 가족이 무죄라고 믿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권경애 변호사는 ‘무법의 시간’에서 정 씨 기소 후 김 의원(당시 변호사)이 이렇게 말했다고 썼다. “정 교수님 위조하신 거 같아요. 사모펀드도 관여하셨고. (조국) 후보 사퇴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제 스타일 구겨가면서까지 저리 해야 하느냐고?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럴수록 “자기 평판은 돌보지 않고 내 편을 들어주다니” 하며 보상하고픈 마음도 커진다. 독재국가 엘리트의 행태를 비교 분석한 영문 논문 ‘컬트 생산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충성 경쟁은 ‘아첨 인플레’를 낳는다. 중국 마오쩌둥 시절엔 다들 마오 배지를 달았는데 더 큰 배지 달기 경쟁을 벌이더니 급기야는 배지를 몸에 직접 다는 사람까지 나왔다. ‘조국을 안중근 의사에 빗대기’(추미애) “골고다 언덕길을 조국과 가족이…”(황교익) “조국 교수 보며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원한다는 노랫말이…”(김의겸) “조민은 제인 에어”(진혜원) 등은 살갗에 단 마오 배지 같은 것이다. 문제는 착각의 보상으로 저들끼리 권력의 꿀을 빨면서 그 대가는 온 국민이 치르게 한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두 쪽 나 내전을 치르며 겪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상상속 믿음은 현실로 침입해 정책마저 왜곡한다. 조국 자녀 입시 비리가 드러나자 “제도 탓”이라며 입시 정책을 뒤집었다. 조국 수사를 강행하는 검찰 힘을 검찰개혁이라며 무리하게 빼놓는 바람에 한국토지주택공사(LH) 부동산 투기 의혹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 조국 수사 와중에 추진한 수사유출 금지 규정, 권력의 무오류 신화를 위협하는 언론 입막음용 법안으로 국민의 알 권리는 묵살당할 위기다. 여권 거물들이 잇달아 유죄 판결을 받자 이제는 사법개혁을 하겠다고 나섰다. 누구나 나만의 의견과 믿음을 가질 수 있지만 나만의 사실을 주장할 권리는 없다. 나만의 사실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이 174석 거대 범여권만 믿는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명장면은 헬리콥터 신이다. 1975년 베트콩에 함락된 사이공의 미국대사관에서 미국인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탈출하는 장면으로 미국의 패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비극적 ‘사이공 모멘트’가 46년이 흐른 15일 탈레반의 입성을 앞둔 아프가니스탄 카불 미대사관에서 재현됐다. 사이공 모멘트의 속편이라는 ‘카불 모멘트’다. ▷베트남전과 아프간전은 닮은꼴이다. 베트남전은 초강대국 미국이 ‘별 볼 일 없고 하찮은 작은 나라’(린든 존슨 대통령)에 무릎 꿇은 사건이다. 아프간전쟁은 미국이 830억 달러(약 97조 원)를 쏟아붓고 2400명이 넘는 미군을 희생시켜 가며 지원한 30만 아프간 정규군이 마약 밀매 등에 의존해 버텨온 6만∼7만5000명 탈레반에 백기 투항한, 미국에 베트남전보다 더한 치욕을 안긴 전쟁이다. ▷미국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현지 민심 오독(誤讀)이다. 미국에 베트남전은 자유와 공산 진영 간 대결이었지만 베트남인들에겐 ‘식민 지배에 맞선 민족해방투쟁’(토머스 프리드먼)이었다. 미국과 아프간의 악연도 미국의 냉전 프레임에서 비롯됐다. 1979년 옛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자 미국은 소련에 맞서 싸우는 반군에 무기를 지원했다. 그중엔 무하마드 오마르가 있었는데 그는 탈레반의 최고 지도자가 돼 1996년 정권 탈취 후 공포정치를 개시한다. 미국의 지원으로 아프간은 ‘소련의 베트남’이 됐고, 미국이 키운 탈레반에 의해 아프간은 미국에 ‘제2의 베트남’이 됐다. ▷2001년 9·11테러 후 미국은 아프간을 침공, 75일 만에 알카에다 지원 세력인 탈레반을 쫓아냈다. 미국엔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선 전쟁이었지만, 아프간엔 부족 간 전쟁에 가까웠다. 탈레반을 포함해 아프간인의 48%는 영국과 러시아 제국을 무찌른 파슈툰족이다.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는 내각과 군부의 요직은 파슈툰족의 숙적인 타지크족이 차지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을 파슈툰족 부활 운동과 뒤섞었다. ‘무솔리니(이탈리아 독재자)는 기차를 정시에 달리게 했다’는 말이 있듯 납치와 부패가 횡행하는 무법천지 아프간에 최소한의 질서를 제공한 건 탈레반 정권이었다. 정부의 통치역량이 무장세력 탈레반보다 못했던 것이다. ▷탈레반은 이슬람 신정국가 건설이 목표다. 의회도 선거도 없이 성직자 물라들이 통치하는 나라다. 20년 전과 달리 여성의 사회 참여율이 높고, 소셜미디어가 발달해 시민사회가 커졌다고 하지만 탈레반의 반인권적 억압 통치를 견디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카불 모멘트의 비극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유색인종의 백신 접종률이 저조한 이유는 의료 체계에 대한 오랜 불신 탓이다. 20세기 초반 유색인종을 대상으로 약물 효능 실험에 강제 불임 시술까지 비밀리에 시행한 사실이 알려진 것. 불임 시술의 흑역사는 출산율이 높은 유색인종들에 밀려 백인이 멸종할지 모른다는 극단적 피해 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백인들의 불안감을 더 자극할지도 모를 인구조사 결과가 곧 발표된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2일(현지 시간) 공개되는 2020 인구조사에서 백인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해 그 비율이 60%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집계됐다. 히스패닉은 20%, 흑인은 12.5%, 아시아계 비율은 6%다. 18세 미만에서는 백인이 절반이 안 된다. 2045년에는 백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 미만으로 쪼그라들어 주류 인종의 지위를 잃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백인이 소수화하는 이유는 이민 인구가 늘어난 데다 유색인종의 출산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2019년 미국의 인종별 출산율은 히스패닉이 1.94로 가장 높고 이어 흑인(1.77) 원주민(1.611) 백인(1.610) 아시아계(1.51) 순이다. 사회의 주류였던 백인 베이비 부머가 은퇴하면서 미국은 노인 복지 예산과 유색인종을 위한 영어교육비 중 어느 쪽을 늘려야 하는지 저울질하고 있다. 흑인들이 자유를 찾아 북쪽으로 대거 이동했던 20세기와 달리 최근엔 유색인종들이 일자리를 찾아 남하하면서 정치 지형도 바꿔놓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애리조나주에서 승리한 요인 중 하나는 이 지역의 유색인종 유입이었다. ▷백인 사회엔 유색인종이 소수자로서 우대혜택을 받더니 이젠 주류가 돼 미국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 같은 피해의식은 ‘피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비백인(one-drop rule)’으로 분류했던 과거의 경직된 이분법에 근거한 주장이라는 반박이 나온다. 인종적 결합이 활발한 지금은 백인과 비백인을 가르는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40%는 혼혈이다. 아시아계 10명 중 3명, 히스패닉 4명 중 1명, 흑인 5명 중 1명이 다른 인종과 결혼하는데 이 중 4분의 3이 백인과 한다. 이런 가정의 아이들은 백인과 같은 혜택을 받으며 주류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난다. ▷미국의 인종 구성 변화는 백인의 소수화일까, 인종적 결합의 확대일까. 백인의 불안감을 악용해 인종적 갈라치기를 시도하는 포퓰리즘 정치에 굴복하느냐, 인종적 결합의 힘을 믿고 통합의 길을 가느냐에 다인종국가 미국의 성패가 달려 있을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요즘은 아들보다 딸이란다. ‘딸은 예쁜 도둑, 며느리는 좀도둑, 아들은 큰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아들 가진 부모가 자식에게 들어가는 돈이 많아 은퇴도 못 하고 오래 일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나중에 늙어서 돌려받지도 못하니 ‘큰도둑’이란 표현이 크게 틀리지 않는 셈이다. ▷1935∼1950년대에 출생한 부모들을 대상으로 자녀 성별 및 숫자가 부모의 은퇴와 근로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딸보다 아들을 둔 부모가 더 오래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들이 한 명 늘어날 때마다 아버지의 주당 근로시간은 16.8% 증가하고 은퇴 확률은 5.5∼6%포인트 줄어들었다. 영문 학술지 ‘고령화 경제학저널’ 최신호에 게재된 ‘한국의 가족 내 재산 양도, 남아 선호, 은퇴 시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식에게 들인 비용은 돌려받지 못해 그만큼 노년의 가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이 연구엔 김경국 경제부총리 비서관이 제1저자로 참여했다. ▷연구에 따르면 아들 키우느라 허리가 휘는 이유는 주거비용 탓이다. 한국에선 결혼할 때 ‘남자는 집, 여자는 살림’이라는 인식이 있어 아들에게 집을 해주느라 은퇴할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2∼2019년 결혼한 1779가구를 조사한 자료에서도 신혼집 마련에 쓴 비용은 1억9500만 원이고, 남녀 기여도는 8 대 2이며, 이 중 40%를 부모가 지원해준 것으로 나타났다. KB리브부동산에 따르면 서울의 평균 전셋값이 6억3000만 원이니 아들이 하나인 집과 둘인 집의 부담은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요즘 결혼시장에선 외동아들이면 가산점을 받는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집값이 뛰면서 남녀 간 기여도 차이는 줄어드는 추세다. 웨딩컨설팅회사 듀오웨드는 매년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혼비용 보고서를 발표한다. 2017년과 올해 자료를 비교해보니 결혼비용 가운데 신혼집 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71%에서 82%로 커졌고, 남녀 기여도는 65 대 35에서 61 대 39로 격차가 줄었다. 딸 가진 부모의 부담은 그만큼 커지고 있는 셈이다. ▷결혼비용 부담에서 남녀는 평등해지고 있지만 부모 의존도는 높아지고 있다. 앞서 듀오웨드 조사에서 ‘부모 도움 없이 결혼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2017년엔 74%였는데 올해는 45%로 확 줄었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신혼집 마련 여부가 결정되고 평수가 달라질 경우 세대 내 불평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성실한 남녀가 제 힘만으론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다간 ‘딸이건 아들이건 자식은 모두 큰도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지 모른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장갑을 끼고 일하느라 꺼풀이 벗겨져 너덜너덜한 손, 고글에 짓무른 자리마다 반창고를 붙인 얼굴, 환자 침상 밑에서 쪼그려 앉은 채 잠든 모습…. 코로나19 일선에서 간호사들의 헌신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최근엔 또 한 장의 사진이 트위터에 공개돼 화제다.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가 환자복을 입은 할머니와 마주 앉아 화투 패를 들여다보는 장면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삼육서울병원 음압격리병동의 이수련 간호사(29)와 박모 할머니(93). 할머니는 중증 치매 환자로 유독 격리병실 생활을 힘들어했다. 할머니의 외로움과 공포감을 달래주기 위해 화투 놀이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사진은 지난해 8월 동료 간호사가 찍어 올해 대한간호협회 사진전에 출품하면서 뒤늦게 알려지게 됐다. 누리꾼들은 “백의의 천사가 아니라 화투 패 든 천사”라며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사는 치료하고 간호사는 돌본다. 특히 의료진 외 출입이 통제되는 음압병동에서 간호사의 돌봄은 환자의 모든 일상과 함께한다. 식사를 챙기고, 씻기고, 대소변을 받아내고, 병실과 화장실 청소를 한다. 이 모든 일을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레벨D 방호복을 입고 해낸다. 김이 서린 고글로 가려진 시야에 두세 겹 장갑을 낀 둔한 손으로 혈관을 찾고 주사를 놓는다. 두통과 메스꺼움을 달고 살고 24시간 가동되는 음압기 소음 탓에 이명에 시달린다. 업무량이 많다 보니 병실 안에서만 오가는데도 하루에 1만5000보를 걷는다고 한다. ▷감염 우려 때문에 가족 얼굴 한 번 못 보고 떠나는 환자의 마지막 손을 잡아주는 이도 간호사다.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가족이 보내온 편지를 환자에게 읽어주고, 환자가 남긴 말을 가족에게 전해줄 때는 다 같이 운다. “우리 형제들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엄마 사랑해요.” “나도… 많이 사랑해.” 미국에선 코로나 이후 간호사 직업의 신뢰도가 89%로 7년 전(82%)보다 높아졌다. 의사(69→77%)보다 높다(갤럽). ▷코로나 초기엔 환자가 필요로 하는 곳마다 간호사들이 달려갔다. 암 진단을 받고도 한달음에 달려간 간호사,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자원한 부부 간호사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떠나고 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올 6월 전국 102개 의료기관을 조사한 결과 간호사 퇴사율이 20%가 넘는 병원이 13곳이나 됐다. 퇴사율이 45%가 넘는 병원도 있다. 격무와 열악한 처우 때문이라고 한다. 남은 ‘방호복 천사’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래도 환자들 앞에선 웃는다. “우린 절대 환자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함께 힘을 내주세요.”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더불어민주당이 27일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 의무를 부과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을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통과시켰다. 언론의 허위 보도에 피해액의 5배까지 배상금을 물리고, 배상액의 하한선을 둔 법안이다.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감시 기능을 위협하는 이런 법을 둔 민주주의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 법안을 다음 달 25일 소속 상임위원장 자리를 넘겨주기 전에 처리하겠다며 야당엔 세부 내용도 알려주지 않고 쫓기듯 밀어붙였다. 법안의 내용과 처리 방식 모두 상식이나 법리로 따지려 드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여당이 주장하는 언론개혁의 기원과 연결지어야 하는데 마침 권경애 변호사가 저서 ‘무법의 시간’에서 새삼 그걸 일깨워준다. 참여연대와 민변에서 활동하며 문재인 정부를 지지했던 권 변호사는 조국 사태를 계기로 두 단체에서 탈퇴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쓴 ‘문재인의 운명’에서 “검찰과 언론이 한통속이 돼 벌이는 마녀사냥” 구절을 인용한 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가족과 측근의 부패 때문이 아니라 검찰과 언론 때문이라는 프로파간다에 성공했다”고 썼다. 여당의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시작점이 어디든 개혁이 제대로 된다면 누가 뭐라 할까. 하지만 검찰개혁이 ‘정권 수사 힘 빼기’였듯 언론개혁도 개혁이 아니다. 언론개혁의 지향점은 권 변호사가 ‘친노 친문 지지자의 행동 강령’이라고 소개한 ‘왕따의 정치학’에 적나라하게 나온다. 노 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지낸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가 현 정부 초기에 낸 책이다. 조 교수는 ‘왜 진보 언론조차 노무현 문재인을 공격하는가’라고 노골적으로 묻는다. ‘문재인의 운명’에 나오는 “무엇보다도 아팠던 것은 진보라는 언론들”과 일치한다. 조 교수는 우리 편 옹호는 언론의 사명 위반이라 여기는 ‘진보 언론의 결벽증’을 이유 중 하나로 든다. 나아가 언론인의 사회적 책임 강화를 위해 시민징계 리스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정권이 무슨 일을 하건 눈감아 주는 어용 언론이 되라는 주문이다. 당시 “누가 좀 말려야 한다”는 말이 진보 진영에서 나왔는데 독재 국가에서나 들어볼 법한 황당한 언론관을 기어이 징벌적 손배제로 실현하려 들 줄 누가 알았겠나. 현 정부 출범 후 한국기자협회가 선정한 한국기자상 수상작들은 ‘라임 펀드, 美 폰지 사기에 돈 다 날렸다’(한국경제신문) ‘형제복지원 절규의 기록’(부산일보) ‘인보사, 종양 유발 위험… 허가 과정 의혹’(SBS) ‘조국 법무부 장관 딸의 의학논문 제1저자 등재 과정 추적’(동아일보) 등이다. 언론에 나쁜 일로 오르내리는 이들은 이렇게 권력을 쥐고 약자에게 피해를 주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언론에 징벌적 손배제가 도입되면 제 발 저린 사람들이 언론의 입을 틀어막고 보는 ‘전략적 봉쇄’ 소송이 남발할 것이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가짜 뉴스로 인한 국민들의 피해 구제”를 입법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속내는 민주당에서 탈당한 이상직 무소속 의원의 국회 발언에 더 가까워 보인다. 회삿돈 555억 원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기 전 이 의원은 2월 문체위에서 “징벌적 손배제는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가짜 뉴스와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장치”라고 주장했다. 유엔이 인정한 선진국에서 왜 국회에 앉아 있는 분들 같은 힘 있는 사람들만 재미 보는 언론 악법을 밀어붙여야 하나.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케이팝은 국내외 학자들의 주요 연구 대상이다. 전쟁이나 제국주의 도움 없이 한 나라의 문화가 이렇게 빠르게 세계로 확산된 사례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 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며 케이팝 시장 규모를 1조2000억 원(2018년 기준), 세계 9위로 키워놓은 아이돌 산업의 경쟁력은 철저한 영재 교육과 글로벌한 기획에서 나온다. ▷아이돌이 되려면 ‘아이돌 고시’를 통과해야 한다. 동아일보 기획 ‘99℃ 한국산 아이돌’에 따르면 아이돌 지망생들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기획사 연습생 시험을 위한 영재 교육을 받는다. 연습생이 되면 합숙 생활을 하며 하루 14시간씩 춤과 노래 연습을 하고 월말 평가를 치른다. 탈락자는 짐 싸서 집에 가야 하는 살 떨리는 시험이다. 기획사에선 연습생들의 3∼7년 후 외모와 목소리까지 시뮬레이션해 가며 데뷔 멤버를 고른다. ▷교육 시스템은 한국적이지만 데뷔 후 작업 방식은 글로벌하다. 북유럽 작곡가가 쓰고 미국 아티스트가 안무를 짜며 해외로 진출할 땐 현지 작사가가 재가공하는 식이다. BTS의 ‘버터’는 미국 캐나다 스페인 등 다국적 아티스트 14명이 작사 작곡에 참여했다. SM은 1990년대부터 세계 각국에서 매달 400여 개의 데모곡을 받아 10곡을 추려 집중 검토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롭고도 익숙한 멜로디, 어느 문화권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안전한 가사가 만들어진다. ▷데뷔를 해도 3년 안에 결판이 나는 세계다. 데뷔에 10억 원, 손익분기점인 3년까지 100억 원이 든다. 고려대 경영대 연구팀이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2019년 데뷔한 핑크레이디까지 365개 아이돌 그룹을 분석한 결과 데뷔 후 3년, 재계약 시점인 8년까지 살아남는 데 영향을 주는 주요 변수는 경쟁자의 수였다. 3년 차까지는 경쟁 그룹이 많으면 생존율이 높아졌는데, 시장 자체가 커 성장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반대로 8년까지 생존하는 데는 경쟁 그룹이 방해가 됐다. 신인 그룹과의 경쟁은 불리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일반인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아이돌은 은퇴를 생각한다. 블랙핑크의 태국인 멤버 리사(24)는 넷플릭스 다큐에서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내준다고 해도 괜찮다. 우리가 얼마나 빛났는지 기억해 준다면”이라고 했다. 14세에 한국에 와 19세에 데뷔하고 5년 활동한 후 벌써 잊혀질 준비를 하는 눈빛이 짠했다. 지금도 “팝은 방탄소년단 보유국에서 제대로 배워야 한다”며 전 세계에서 아이돌 고시를 보러 온다. 세계적인 문화상품 케이팝은 10대들의 땀과 숱한 실패의 토대 위에 있음을 새삼 절감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정년 연장에 고용 연장 얘기까지 나오지만 인위적 퇴직 시기는 빨라지고 있다. ‘사오정’ ‘오륙도’는 옛말이고, 이제는 30대 대리도 희망퇴직을 한다. 이른바 ‘체온 퇴직’이다. 체감 정년이 평균 체온(36.5세) 수준으로 낮아졌다는 뜻이다. ▷디지털 전환을 위해 대대적인 군살빼기에 들어간 금융권이 희망퇴직 대상을 30, 40대로 확대했다. KB손해보험은 1983년 이전에 출생한 대리급까지 퇴직 신청을 받았다. 38세까지 조기 퇴직 대상에 오른 것이다. 요즘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나가자”며 손드는 자발적 은퇴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만하면 나도 나가겠다”는 말이 나올 만큼 퇴직 조건이 좋기 때문이다. ▷요즘 금융권 희망퇴직은 ‘칼바람’이 아니라 ‘돈 잔치’에 가깝다. 24∼36개월 치 급여를 특별퇴직금으로 주고 자녀학자금, 건강검진비, 재취업·창업지원금도 얹어준다. 많게는 10억 원까지 챙겨 나올 수 있다. 핀테크 기업들의 구인난도 30대 퇴직을 부추긴다. 카카오뱅크는 수시 충원 중이고, 토스뱅크도 9월 출범 전까지 2000명을 목표로 사람을 뽑고 있다.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이나 늦기 전에 핀테크 기업으로 옮기려는 남녀 직원들이 퇴직금으로 대출금 갚고 인생 2막을 준비한다. ▷금융권처럼 돈 잔치는 못 하지만 다른 업종에도 30대 퇴직자들이 있다. 기업들이 장기 불확실성에 대비해 희망퇴직을 상시화하는 추세다. 30대 직장인 10명 중 6, 7명이 퇴직 압박을 받았다는 조사도 있다. 두둑한 퇴직금을 못 받는 이들은 스스로 은퇴 자금을 마련한다. 이른바 파이어(FIRE·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 젊을 때 바짝 모아 경제적 자립을 한 뒤 일찍 은퇴하는 이들이다. NH투자증권 조사에 따르면 조기 은퇴를 꿈꾸는 MZ세대의 목표 자산은 13억7000만 원. 신한카드 3년 차에 주식과 비트코인으로 35억 원을 벌어 퇴사한 파이어족이 성공 사례로 회자된다. 하지만 급하게 고수익만 좇다 조기 은퇴는커녕 더 오래 일해야 할 수도 있다. 증시 호황이 언제까지 갈지도 불확실하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쉽게 포기하는 일은 금물이다. ▷70세가 정년인 일본에선 40대 정년론이 나온다. 관리직 승진 시기인 40세에 중간평가를 통해 회사와 맞지 않는 사람들에겐 재교육을 통해 다른 일자리를 찾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한국도 재취업과 창업을 돕는 정책이 필요하다. 정년 연장에도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퇴직당하는 시기가 빨라지는 역설을 막으려면 연공서열형 임금체계도 손봐야 한다. 저성장 고령화 시대엔 정책도 기업도 개인도 유연해져야 살아남는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8일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축구 종가’ 잉글랜드가 돌풍의 덴마크를 꺾고 처음으로 2020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결승에 오른 이날 달아오른 경기장을 시원하게 식혀준 노래는 BTS의 ‘버터’였다. 수억 명이 지켜보는 61년 전통의 세계적 스포츠 이벤트에서 분위기를 띄울 노래 중 하나로 한국 가수의 곡이 선택된 것이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열리는 웸블리에서 틀어줄 노래를 뽑는 투표를 2∼6일 트위터에서 진행했다. 팝음악 4곡을 대상으로 개시한 투표는 초반부터 ‘버터’와 ‘킬 마이 마인드’의 양자대결로 좁혀졌다. ‘킬 마이…’는 영국 인기 아이돌 그룹 원디렉션의 리더 루이 톰린슨의 노래. 톰린슨은 막강한 팬덤을 거느린 ‘홈팀’ 가수인 데다 축구팀 구단주를 지낸 축구 광팬이다. 하지만 BTS의 ‘아미’들은 맹렬한 선거전을 펼쳤고, 브라질 ‘아미’인 세계적 소설가 파울루 코엘류도 투표 인증샷을 올리며 지지를 독려했다. 418만 명 넘게 참가한 투표 결과는 47% 대 44%로 ‘버터’의 승리. ▷그런데 UEFA가 웸블리의 플레이리스트로 4곡을 모두 선정하면서 뒷말을 낳았다. ‘유로 2020에 아시아 가수 노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현지 팬들의 반발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아미들은 “4곡 다 틀 거면 애초에 투표는 왜 한 거냐”며 반발하고 있다. “중요한 건 BTS 노래가 웸블리 스타디움을 채우는 것”이라는 신중한 반응도 있다. ‘버터’는 7, 8일 준결승전에 이어 12일 결승전에서도 울려 퍼지게 된다. ▷웸블리 스타디움은 BTS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영국 최대의 경기장인 웸블리는 스포츠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비틀스, 마이클 잭슨 같은 세계적인 가수에게만 허락되는 꿈의 무대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하이라이트 장면에 나오는 1985년 자선 콘서트 ‘라이브 에이드’가 열린 곳이다. BTS는 2019년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콘서트를 열어 ‘비틀스보다 더 큰 성취’라는 외신의 평가를 받았다. ▷경쾌한 여름 노래 ‘버터’는 BTS가 ‘다이너마이트’에 이어 5월 발표한 두 번째 영어 싱글. 발매 첫 주에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인 ‘핫100’ 정상으로 직행한 후 6주 연속 1위를 지키고 있다. 1958년 ‘핫100’ 발표를 시작한 이후 이런 기록을 보유한 노래는 ‘버터’를 포함해 9곡뿐이다. ‘버터처럼 부드럽게’라는 노랫말대로 세계 대중음악 중심지를 녹인 데 이어 세계 축구팬들의 축제도 녹이고 있다. 케이팝의 새 길을 열어가는 7명의 청년이 팬데믹에 갇힌 마음에 시원한 숨통을 틔워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저출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분야 중 하나가 교육이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27만 명으로 대학 신입생 정원(50만 명)의 절반밖에 안 된다. 초중고교 50곳이 폐교됐고, 신입생 정원의 9.1%를 뽑지 못한 대학들은 도미노 폐교를 코앞에 두고 있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구조개혁이 한창이겠지만 정부는 대대적인 교원 및 대학 구조조정을 차기 정부로 떠넘겼다. 6∼8년 후 적자 전환이 예상되는 사학연금 개혁은 손도 대지 않았다. 교육개혁은 외면하던 정부가 임기 말에 교육 담당 정부조직을 두 개로 늘리는 엉뚱한 일을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문재인 대통령이 올 초 국가교육위원회의 연내 출범을 공언한 후 여당이 단독으로 상임위를 열어 관련 법안을 통과시킬 때만 해도 예의상 시늉만 할 뿐 이달 초 본회의에서 날치기 처리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문제가 많은 법이기 때문이다. 국가교육위는 중장기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조직으로 장관급 위원장과 차관급 상임위원 2명을 포함해 총 2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대통령 직속 합의제 행정기관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역할은 교육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장관급 교육위가 정책을 결정하면 부총리급 조직인 교육부는 집행하고 그 결과를 위원회에 보고해야 하는 이상한 구조다. 교육부를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국가교육위를 신설한 탓이다.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은 교육위가 지는가, 교육부가 지는가. 업무 중복에 따른 비효율과 행정비용 증가, 책임 전가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가교육위법은 국가의 주요 정책을 국무회의에서 심의하도록 규정한 헌법에 위배되고, 교육부를 교육의 주무 부처로 규정한 정부조직법과 충돌하며 위원회 설치 요건으로 ‘기존 행정기관과 업무가 중복되지 않을 것’을 요구한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법에도 맞지 않는다. 그동안 전문가들이 공청회와 논문에서 누누이 지적했던 사항들이다. 국가교육위는 초정권적 기구라는 주장과는 달리 대통령과 여당 추천 몫 위원 등을 감안하면 과반이 전교조를 포함해 친여 인사들로 채워지는 구조다. 출범은 내년 7월이지만 위원과 사무처 직원 인사는 그 전에 할 수 있도록 부칙도 달았다. 임기 3년의 위원들은 10년의 교육 계획 결정권을 갖는다. 정권이 바뀌어 교육부는 넘겨주더라도 국가교육위만 있으면 좌파 교육 권력은 10년간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셈이다. 국가교육위 사무처와 산하 상설 위원회들, 국가교육위가 지정권을 갖는 교육연구센터까지 ‘자리’도 대폭 늘어나 ‘전교조 복지법’(김종민 변호사)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지금도 대통령 자문기구로 국가교육위와 비슷한 국가교육회의가 있는데 친여 편향적 위원 구성에 무능한 일 처리로 “하는 일 없이 예산만 축낸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교육부는 수능 정시 비중과 교원 양성 규모 결정이라는 민감한 과제를 교육회의로 떠넘겼고, 교육회의는 특위, 공론화위, 시민참여단에 하청, 재하청을 주느라 예산과 시간을 낭비한 끝에 결론도 못 내리고 교육부로 다시 떠넘긴 흑역사가 있다. 교육회의의 실패에도 그보다 규모와 권한이 훨씬 강화된 국가교육위를 임기 말 정권이 알 박기 하듯 신설한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국가교육위가 교육부와 뒤엉켜 교육 현장에 초래할 혼란이 불 보듯 뻔하다. 이쯤에서 국가교육위 출범을 포기하고 내년도 예산안에 관련 예산을 한 푼도 편성해선 안 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학력에 따라 채용과 승진의 기회가 달라지는 건 공정한가. 학력차별을 금지하는 문제를 놓고 국회와 정부 사이에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되자 교육부가 “과도한 규제”라며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나이 인종 학력(學歷) 등을 이유로 고용 등에서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평등에 관한 법률안도 학력에 따라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두 법안 모두 악의적 차별에는 손해액의 5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물리는 규정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학력은 성 연령 국적 등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요소와 달리 개인의 노력에 따라 달라지고 △학력을 대신해 개인의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표준화된 지표가 없는 상황이라며 ‘학력’을 뺀 수정안을 냈다가 논란이 되자 “재검토하겠다”고 한 상태다. ▷학력차별을 없애자는 주장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제기돼 왔다. 학력은 가정환경의 영향을 받으므로 사회적 불평등이 대물림되고, 10대 때 얻은 학력이 평생을 좌우함에 따라 대학 간판을 위한 소모적 경쟁이 벌어지며, 중고교 교육마저 입시 위주로 왜곡된다는 논리였다. 서울대 폐지, 공공기관 학력규제 완화 등의 제안이 쏟아졌고,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5년엔 국가인권위원회법이 개정돼 학력차별 금지 조항이 처벌 규정 없이 들어갔다. ▷학력차별 금지가 진보정부만의 어젠다는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는 대학 진학률이 80%로 너무 높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학력차별금지법안을 냈다. 그때도 인재 채용은 기업 고유의 권한이고, 학력과 실력이 무관하다고 볼 수 없으며, 좋은 대학에 가려는 개인의 노력과 좋은 대학을 만들려는 대학들의 노력을 부정하는 법안이라는 비판이 제기돼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4년엔 고용정책기본법에 학력차별 금지 조항이 처벌 규정 없이 신설됐다. ▷현 정부 들어 공공기관들은 학력을 가리고 보는 블라인드 채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블라인드 채용 후에도 신입사원 중 이른바 ‘SKY’ 출신 비율엔 큰 변화가 없고, 단순 업무에 고학력자를 배치하는 기관과 입사자 간 미스매치로 신입사원 이직률만 높아졌다고 한다(한국조세재정연구원 6월 발표). 학사·박사학위를 얻기까지 들인 노력과 비용과 시간이 같을 수 없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차별금지법은 ‘노력금지법’이 된다. 기회는 평등해야 하지만 결과가 같기를 바라는 건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대한정신분열병학회는 2007년 환자 가족 동호회로부터 건의서를 전달받았다. ‘정신분열(精神分裂)’, 즉 정신이 갈라지고 찢어진 병이라는 이름이 편견과 혐오를 조장한다며 병명을 바꿔달라는 주문이었다. 학회는 병명 개정에 뜻을 함께하는 단체들과 위원회를 구성해 논의한 끝에 2010년 ‘조현(調絃)병’으로 바꿔 부르기로 결정했고, 이듬해 명칭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학회 이름도 ‘대한조현병학회’가 됐다.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는 뜻이다. 마음이 엉켜 정신기능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의 은유적 병명이다. 개명 과정에서 “너무 어렵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그렇기 때문에 낙인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반론이 우세했다. 같은 이유로 간질은 뇌전증, 나병은 한센병으로 오래전부터 바꿔 부르고 있다. 환자의 인권을 위한 병명 개정은 치료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일본에선 2002년 정신분열병을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으로 바꾼 뒤 병명을 당당히 밝히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늘었다고 한다. ▷주로 20대에 증상이 나타나는 조현병과 달리 치매(癡呆)는 노년에 시작되는 뇌질환이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어리석은 미치광이’라는 뜻의 ‘치매’에 거부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3.8%였다. 대체 용어로는 ‘인지저하증’이 일순위로 꼽혔고 이어 ‘기억장애증’ ‘인지장애증’ ‘인지증후군’ ‘인지증’ 순이었다. 일본에선 2004년부터 인지증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병명이 바뀌면 교과서 질병분류표 관련법도 모두 바꿔야 하므로 개명엔 시간이 걸린다. 환자의 인권과 함께 병명의 활용도도 감안해야 한다. 복지부는 2014년에도 같은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용어 변경(21.5%)보다는 유지(27.7%)를 지지하는 비율이 높다. 널리 알려진 용어를 바꾸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45%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의견이다. ▷65세 이상 고령자 가운데 치매 환자는 75만 명으로 10명 중 1명꼴. 3년 후엔 100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치매란 단어를 쓸 일이 많아질 테니 ‘삶의 위엄을 내려놓아야 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 개명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 만하다. 얼마 전 치매를 일으키는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 치료제 ‘아두카누맙’이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앞서 FDA의 승인을 받은 4종과 달리 병의 근본적 원인인 인지능력 감소 속도를 늦추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1년 약값은 5만6000달러(약 6300만 원). 싸고 효과 좋은 치료제가 치매를 바꿔 부르기 전에라도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서울 마포구에 사는 주부 장모 씨(54)는 코로나19가 터진 후 오프라인 쇼핑을 줄였다. 그 대신 야채와 과일은 생협의 주간배송, 일반 장보기는 쓰레기 배출량이 적은 업체의 당일배송 서비스를 이용한다. 명절에는 부모님께 모바일 쇼핑 앱에서 홍삼과 화장품 선물세트를 골라 보내드렸다. 장 씨 같은 5060 베이비붐 세대가 ‘부머쇼퍼’로 불리며 온라인 시장의 큰손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해 한국인 6만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온라인 쇼핑 이용률은 69.8%로 전년도보다 5.8%포인트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50대(60.2%)와 60대(31.4%)의 이용률 증가폭이 16.1%포인트와 10.6%포인트로 두드러졌다. 동아일보 취재에 따르면 부머쇼퍼가 지난해 온라인에서 결제한 금액도 전년보다 29.6% 늘어났다. 같은 기간 2030세대의 온라인 지출액 증가율(15.4%)의 배가 되는 규모다. ▷부머쇼퍼는 전후 출산율이 급등할 때 태어나 인구비중(28%)이 높고, 고도성장기에 청장년기를 보내 자산을 가장 많이 축적한 세대다. 기대수명 연장으로 스스로를 3040세대로 여긴다. 그래서 자식이 쓰는 제품을 따라서 쓰는 ‘대올림’ 소비를 한다. 부머쇼퍼는 아날로그 세대지만 컴퓨터로 직장생활을 하고, PC통신으로 연애하며, 삐삐 시티폰 폴더폰 스마트폰을 두루 섭렵한 덕에 디지털 기술에도 익숙하다. 두둑한 지갑과 디지털 마인드가 코로나를 만나 홈쇼핑 고객에 머물던 부머쇼퍼를 온라인 시장의 주력부대로 밀어올린 것이다. ▷부머쇼퍼는 서른이 넘도록 독립하지 못하는 ‘캥거루족’ 자식을 품고 살고, 따로 사는 노부모를 ‘원격 부양’하는 낀세대다. 3년 전 조사이기는 하지만 5060 10가구 중 7가구가 성인 자녀와 함께 살고, 5가구 중 2가구 이상이 노부모에게 월평균 36만 원의 경제적 지원을 한다. 손주가 있는 5060의 절반은 황혼육아를 한 적이 있다(미래에셋 은퇴라이프트렌드 조사보고서). 다 큰 자식과 노부모를 동시에 건사하느라 씀씀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함께 사는 자녀가 온라인 최신 트렌드를 알려주는 ‘멘토’ 역할을 한 것도 부머쇼퍼의 이커머스 진입을 도왔다고 한다. ▷유통업계에선 부머쇼퍼가 저출산 저성장 기조의 장기화로 침체된 소비시장에 활력을 주리라 기대한다. 2030을 겨냥하던 업체들이 건강식품과 명품으로 품목을 늘리고, 모바일 앱의 글자를 키우고, 시니어 모델 대회를 개최하는 이유다. 나이 들어서도 대접받는 게 싫을 건 없겠지만 언제까지 부머들이 주역이 돼야 하나. 소비시장에도 세대교체가 필요하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마스크 없는 여름을 기대하던 코로나19 백신 접종 선진국들이 복병을 만났다. 코로나 변이 중 전파력이 가장 센 델타 변이 바이러스다. 지난해 말 인도에서 처음 발견된 델타 변이는 하루 6만∼7만 명을 감염시키며 인도를 초토화한 후 전 세계 80여 개국으로 번져 나가고 있다. 올가을 델타 변이가 북반구에서 또 한 차례 대유행을 일으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델타 변이는 지난달 중순 세계보건기구(WHO)의 ‘우려 변이’로 지정됐다. 알파(영국) 베타(남아공) 감마(브라질)에 이은 4번째 우려 변이다. 백신 접종을 가장 먼저 시작한 영국은 성인의 60%가 2차 접종까지 마쳤지만 델타 변이가 우세종이 되면서 일일 확진자 수가 1만 명대로 폭증했다. 영국 정부는 21일로 예정된 방역규제 전면 해제를 4주 연기했다. 중국 광저우는 델타 변이 확산으로 이달 초 봉쇄됐으며, 미국은 델타 환자 비중이 10%가 되자 15일 델타 변이를 미국 내 우려 변이로 지정했다. 한국은 변이 바이러스 감염자(1964명) 가운데 델타 환자가 155명으로 알파(1663명) 다음으로 많다. ▷델타 변이는 알파 변이보다 전파력이 30∼100% 강하고 중증도 이행률은 알파의 두 배다. 증상은 코로나보다는 독감에 가깝다. 백신 접종에서 제외된 학생들과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델타 변이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데 독감인 줄 알고 방심하다 피해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독일은 어린이 델타 변이 환자가 나오자 학교 부분 봉쇄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도 젊은층의 백신 접종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심 중이다. ▷델타 변이는 백신 1차 접종으로는 부족하고 2차까지 완료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 공중보건국에 따르면 화이자 2차 접종을 끝낸 경우 델타 변이에 감염될 확률은 79% 줄어들었다. 아스트라제네카(AZ)의 감염 방지 효과는 60%였다. 잉글랜드 공중보건국이 델타 변이 환자 1만4000명을 대상으로 백신의 중증도 이행 방지 효과를 분석한 결과 화이자는 96%, AZ는 92%였다. 백신을 두 차례 다 맞은 사람은 델타 변이에 감염돼도 가볍게 앓고 지나간다는 뜻이다. ▷바이러스는 대개 전파력이 강하면 치명률은 떨어진다. 영국에서는 14일까지 델타 변이 사망자가 42명 나왔는데 이 중 23명은 백신 미접종자이고, 7명은 1차 접종자, 12명은 2회 접종까지 마친 사람이다. 사망자 수가 적은 데다 2차 접종을 마친 사람은 대부분 고위험군이어서 확대 해석은 무리다. 지금으로선 델타 변이가 따라잡기 전에 서둘러 2차 접종까지 마치는 수밖에 없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문재인 정부 최악의 정책으로 부동산이 꼽히지만 교육정책도 못지않다. 지난 4년간 집값만 급등한 게 아니라 기초학력 미달자 비율도 다락같이 올랐다. 중학생이 구구단을 못 외우고, 영어로 자기 이름 소개도 못 하는 수준이다. 내버려두면 다양한 삶의 기회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 정부는 코로나19 탓을 하고 싶겠지만 기초학력 붕괴는 코로나 이전부터 시작됐다. 최근 20년간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를 보면 중3 수포자(수학 기초학력 미달자) 비율은 노무현 정부 중반 급증하기 시작해 2008년엔 12.9%에 이른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3.5%(2012년)까지 줄였고, 박근혜 정부와 문 정부 정권 교체기인 2017년(9.9%) 증가세로 돌아서 지난해 13.4%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고2 수포자도 비슷한 그래프를 그리며 지난해 13.5%가 됐다. 국어와 영어도 비슷한 패턴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기초학력이 향상된 건 전국적으로 학업성취도를 평가하고, 학교별 성적을 공개하고, 성적이 나쁜 학교엔 예산을 대폭 지원해 보충학습을 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된 후로는 창의 교육을 명분으로 성적 공개도, 학력 부진 학교 지원도 흐지부지됐다. 초등학교 학업성취도 평가는 폐지됐고, 중학교 자유학기제가 시행되면서 초1부터 중1까지는 아예 시험이 사라졌다. 현 정부는 중고교마저 표집평가로 전환해 기초학력 붕괴 실상에 눈감은 상태다. 공교육이 제 역할을 못 하면 성적은 학생 개인의 ‘수저 색깔’이 좌우하게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회원국의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3년마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실시해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 등에 따른 평가 결과를 공개한다. 한국의 가정 배경 상위 10%인 학생의 읽기 과목 최하등급 비율은 2000년 2.1%에서 2018년 6.3%로 한 자릿수를 유지한 반면, 하위 10% 학생은 16.3%에서 29.3%로 급증했다. 10명 중 3명꼴이다. PISA의 읽기 과목 성적은 학생의 최종 학력보다 장래 소득을 더 정확히 예측하는 지표로 꼽힌다. 계층별 학력 격차가 벌어지는 추세는 계층별 사교육비 격차가 커지는 추세와 일치한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9년 소득 상위 10%의 학생 1인당 월 사교육비는 63만 원, 하위 10%는 9만 원이다. 자유학기제 시행 후 월 소득 600만 원 이상인 집은 학원비 지출을 늘리고, 나머지 가구는 줄였다는 조사도 있다. 고소득 가정에선 ‘내신 신경 안 쓰고 선행 진도 빼서 좋다’며 시험이 없는 자유학기제를 반긴다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한국 교육을 부러워한 적이 있지만 미국은 ‘낙오자 방지 정책’으로 한국과의 학력 격차를 좁히고 있다. 일본도 2009년 ‘유토리(여유) 교육’을 폐기하고 학습량을 늘린 데 힘입어 2015년부터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한국 초중고교 교사들은 우수한 인재들로 15년 차 교사의 급여와 학생 1인당 공교육비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그런데 왜 우리 아이들만 뒷걸음질치도록 내버려 두는가. 곧 여름방학이다. 방학이 끝난 후 교실 풍경은 수저 색깔에 따라 나뉜다고 한다. 있는 집 아이들은 키도 크고 성적도 올라서 오는데, 가난한 집 아이들은 얼굴도 까칠해지고 그나마 배운 것도 까먹는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교육정책의 대가를 왜 없는 집 아이들이 치러야 하나. 공정한 경쟁의 출발선에서 멀어져가는 아이들을 위해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여름방학 학습지원 대책부터 내놔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한국은 집단면역까지 2년 7개월이 걸릴 것이다.” 국내 코로나19 백신 접종자 수가 총 19만 명이던 4월 22일 미국 블룸버그가 내놓은 전망이다. 당시 하루 평균 접종 인구는 7만6000명. 그런데 백신 물량이 풀리고 일일 접종 인원이 수십만 명에 이르면서 블룸버그의 전망이 기분 좋게 빗나가게 됐다. ▷어제까지 1차 접종자는 1056만 명. 2월 26일 예방접종을 개시한 지 105일 만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추세라면 이달 말까지 목표치인 1300만 명보다 많은 인원이 1차 접종을 마치게 된다. 하루 100만 명 이상 접종이 가능한 든든한 의료 역량을 감안하면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4월 국회에서 공언한 대로 당초 목표보다 2개월 빠른 9월까지 3600만 명의 2차 접종도 기대해볼 수 있다.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낼 수 있었던 건 백신 리스크보다는 효과가 훨씬 크다는 과학을 신뢰한 성숙한 국민들 덕분이다. 우선 접종 대상인 고령층은 방역당국의 우려와는 달리 “손주와 자식들에게 피해 주지 않겠다”며 적극적으로 접종에 나서 첫 단추를 잘 끼웠다. 덕분에 코로나 치명률은 1.35%로 낮아졌고, 부모 세대의 성공적인 접종을 목격한 중장년층은 “가족과 회사 동료들의 안전을 위해” 잔여 백신 접종 대열에 합류했다.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가도 해야겠다 싶으면 무섭게 불이 붙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상반기 접종률 목표 25%를 초과 달성한다면 얀센 100만 명분의 기여가 적지 않다. 접종 대상의 특성상 ‘예비군과 민방위 한정판’ 백신으로 불리는 얀센은 1일 예약이 시작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완판’됐다. 1차 접종으로 끝나는 데다 “더운 여름 마스크 벗고 지내자”는 수요가 몰렸다. 얀센 접종 100만 명은 숫자는 적어도 방역에서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접종 대상이 이동량이 많은 젊은층이어서 감염 규모를 줄이는 효과가 크다. ▷일상 회복도 속도를 내고 있다. 14일부터는 야구장을 포함한 실외 경기장과 공연장의 입장인원 제한이 완화된다. 다음 달부터 1차 접종자들은 야외에서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 5인 이상 모임 금지와 식당 영업시간 제한도 풀릴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감염 규모가 다른 나라보다 적은 현실을 감안해도 마스크 규제 완화는 이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4월 가장 먼저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했을 때 접종률이 61%였다.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까지 마스크를 벗고 다닐 가능성도 있다. 자율에 맡긴 만큼 집단 면역에 이를 때까지는 마스크 쓰기에 정직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