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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서울 로비에서 직원들이 10만 개의 레고 블록으로 만든 110년 전 조선호텔 모형 ‘헤리티지 조선호텔로 시간여행’을 소개하고 있다. 10월 말까지 서울 전시 후 부산과 제주에서 무료로 전시된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00년 전 한반도를 찾은 외국 유명인들은 어느 곳에서 잠을 잤을까? 1920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 3면에 그 힌트가 있다. “이탈리아 비행기 오늘 오전 출발”이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이태리에서 삼만삼천리를 공중으로 날아온 진객 ‘푸에라린’ 마세로 두 중위는 오래동안 날아온 피곤한 몸을 조선호텔의 백설같은 침대 위에서 쉬면서 이 곳 저곳의 환영회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은 후 오늘 28일 오전 7시에 경성을 떠나 대구로 향할텐데 경성부에서는 여의도 착륙장에서 간단한 다과의 접대가 있을 것이고 총독부의 중요 관원과 경성부의 중요 관리가 출석하여 여의도에서 전송한다더라.1914년 10월 10일 개관한 조선호텔이 올해로 110주년을 맞았다. 국내 최초 럭셔리 호텔의 시대를 알렸던 조선호텔은 ‘조선’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이어오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호텔로 성장해 왔다. 조선호텔앤리조트가 개관 110주년을 맞아 9월 30일 특별한 행사를 열었다. 1914년 개관 당시 조선호텔의 모습을 10만개의 레고 브릭으로 재현한 기획전시 ‘헤리티지 조선호텔로 시간 여행(Time Travel to Heritage Josun Hotel) 행사가 다음 달 말까지 열린다. 조선호텔앤리조트는11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도록 예전 건축 도면과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전 세계 레고 공인작가(LEGO® Certified Certified Professional) 중 한 명인 반트 김승유 작가와 협업하여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이번 전시에는 총10만개의 레고 브릭으로 당시 최대 규모의 럭셔리 호텔이었던 조선호텔의 전면과 후면, 그리고 주요 공간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했으며 국내외 고객들이 선진 문화를 향유했던 ‘콘서트룸’과 ‘연회장’, 국내 최초의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던 ‘팜 코트’와 스위트 객실 ‘201호’ 등 조선호텔 최초의 기록들이 담긴 공간들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 해당 전시는 9월30일(월) 웨스틴 조선 서울을 시작으로 11월에는 부산시 해운대구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부산에서, 12월에는 제주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그랜드 조선 제주의 호텔 로비에서 무료 전시로 만날 수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재난을 당한 피해자를 설득하고 그 피해자들을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도록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좋은 일은 남기고 싶지만 불행한 일은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여기 한 가족의 사진이 있습니다.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신문은 이미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피해자가 있다는 것이고 그 사실만이라도 기록해, 세상에 알리고 역사에 남기고자 했던 현장 기자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사진입니다. 이 기사와 사진이 실리기 한 달 보름 전인 8월 11일 밤, 평안북도 위원군 화창면 신흥동에서 무장한 괴한들이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여섯 집이 전멸하고, 스물 여덟 명의 가족이 한순간에 학살당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립군의 소행이라는 일제의 발표에 대해 독립군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이후에도 일제는 정확한 사건 개요와 가해자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신문사에서 무명회(일종의 공동 취재단) 소속 특파원을 현지로 보냈습니다. “전시 상황 이상의 긴장이 흐르는 국경 지역의 가련한 동포들을 생각하며 이 소식을 전한다”고 기사를 싣는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주민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보고 느낀 것을 기자에게 증언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그러면서도 기사는 ‘현장에서 일본인들이 주로 신는 버선이 다수 발견되었다’는 단서를 기사 끝부분에서 제시합니다. 판단은 하늘과 독자들이 해야할 것이라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공포가 사회를 감싸고 있었던,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역사 중 한 단락입니다. 서설이 길었습니다. 1924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당시 조선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조선일보는 사진설명에 “참화를 피한 사람 = 오른편 앉은 이는 불 속에서 살아나온 최홍주. 그 곁에 누운 아이는 총창에 찔린 그의 아들 최인국, 그 밖의 사람은 간호에 진력하는 친족들”이라고 썼습니다. 우선 사건 개요를 보겠습니다. ◇ 천통지곡(天痛地哭)할 國境大慘禍 事件(국경 대참화 사건)이라는 기사인데 너무 방대한 기사라 최대한 짧고 쉽게, 그리고 지금의 언어로 요약했습니다. 하늘이 울고 땅이 통곡할 국경의 대참사 사건- 벽촌 한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40여 명의 무장 부대가 지나가고, 마을 전체가 멸망하였다- 치솟는 불길에 무고한 주민들이 한순간에 처참하게 죽어가다- 6가구가 전소되었고, 28명이 불에 타 죽다- 잿더미 속에서 인간의 형체는 사라지고, 남은 것은 개와 닭의 잔해뿐. 마치 백골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잿더미 속에서 매미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어렴풋이 총성까지 울리다.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한 현장, 폐허만 남아 있다- 독립단은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경찰은 독립단의 소행이라며 책임을 미루다. 이 사건의 진실은 하늘과 독자가 판단할 것- 끔찍한 고문과 극형. “무장 부대가 우리 집에도 찾아와서…”라고 말한 피난 중인 15세 소녀 송씨의 증언- 창자를 끌어안고 맹렬한 불길 속에서 도망친 최씨의 이야기와 그 전후의 참혹한 광경- 잔혹한 악마는 누구인가? 청산도 말없이 주민들이 이 끔찍한 재앙을 피해 달아나니, 하늘과 땅에 물어볼 자가 없다. 남은 마당에는 ‘지카타비’ 자국만 남았다◇ 사건 개요: 8월 7일 오전 6시경, 그 마을에서 약 25리 떨어진 곳에 있는 화창면 주재소를 독립단이 습격하려다 중지하고, 약 25명이 신흥동으로 올라가 마을 사람들의 집에서 밥을 해 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 새벽, 일본 경찰이 마을로 들이닥쳤고, 피해를 당한 여섯 가구를 포위한 후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이 있느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사실대로 말하면 멸망할 것이 두려워 자백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끔찍한 고문을 시작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독립단이 밥을 해 먹고 간 일을 자백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9일에는 경찰이 일시에 그들을 석방하여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11일 밤, 주민들은 느닷없이 그와 같은 참사를 당하게 되었다.◇ 피해 상황:김응채(金應彩)의 집 - 8명이 불에 타 죽었다. 김응채와 그의 아내, 세 아들, 차남의 아내, 손자 2살 된 아이 등 8명의 가족이 불에 타 사망했다.전명길(全明吉)의 집 - 2명이 타 죽고, 전명길과 그의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이창섭(李昌涉)의 집 - 이창섭과 그의 아내, 아들 등 4명이 사망했다.최응규(崔應奎)의 집 - 6명이 사망했다. 최응규와 그의 아내, 그의 부모, 아들과 장모가 사망하고, 고용인 최흥주와 그의 아들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송지항(宋芝恒)의 집 - 4명이 사망했다. 송지항의 아내와 사위 등이 사망하고 송지항 본인과 딸만이 살아남았다.김창성(金昌盛)의 집 - 4명이 사망했다. 김창성과 그의 딸, 장남, 고용인 등이 사망했다. 집 여섯 채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가축과 곡식 또한 전부 타버려 물질적 피해는 수천 원에 달한다.◇ 사건 이후: 화재가 발생한 후, 마을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시시각각 자신들에게도 참화가 닥쳐올까 두려워했다. 주민들은 남부여대하고 피란을 떠나거나 산속으로 몸을 숨겼으며, 마을은 마치 유령 마을처럼 변해갔다. 남은 시신들은 부근의 공동묘지에 임시로 매장되었고, 며칠 후에야 경찰이 사건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생존자 이야기: 최흥주는 그날 밤 자신과 가족이 끔찍한 재앙을 당했던 일을 설명했다. 무장 부대가 찾아와 가족을 결박하고 방 안에 가둔 후 불을 질렀다고 한다.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의 아들은 배에 총을 맞아 창자가 나오는 상태에서 살아남았다.● 현장에서 발견된 일본군의 버선신문은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는 장황한 기사 뒤에 또 하나의 기사를 싣습니다. 제목은 “잔학한 악마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러면서 범인에 대한 판단은 하늘과 독자에게 맡긴다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 광경과 누구의 소행인지를 백방으로 탐문하였으나 그곳 사람들은 워낙 놀란 가슴이라 사람을 보기만 하면 뿔뿔이 피하여 달아나기만 하고 아무리 신문사 직원이라고 하여도 시종 독립단인지 경관인지 알지 못하여 의심하는 모습으로 분명 어떠한 사람들로부터 “그날 밤에는 화광이 층천한 바람에 비로소 무슨 일이 났나보다 생각하였으나 원체 위험한 까닭으로 가보지 못하고 그 이튿날 아침에 가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불만 여전히 탈 뿐이었는데 간혹 피해자의 문전에서는 “지까다비”(일본 버선)자리가 어지럽게 박혀 있을 뿐이더라“는 사람도 있는데 자기네들끼리 수군수군하는 눈치를 보아 이와 같은 참혹한 일을 한 사람이 누구인 것은 분명한 일이나 사람 죽이기를 물 마시듯 하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조사할 길이 없더라.● 오늘은 좀 복잡한 사건에 대한 사진을 소개해드렸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사진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이 세상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비극을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1920년대 이즈음부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난 주 백년사진 No.79 “26세의 일본 청년은 왜 히로히토 황태자를 총으로 쏘았을까?” 포스팅에 대해 일부 독자들께서 왜 황태자라는 표현을 썼느냐고 힐난하셨습니다. 필자로서 고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백년 전 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쓰되 띄어쓰기와 두음법칙 정도만 고치는 것이 기록에 대한 충실한 고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꽤 많은 분들이 읽고 공감을 표해주셨습니다. 100년 전 신문에서 그 기사를 다루었던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존경의 의미보다는 일본 내에서도 천황의 아들이 분노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문화정치라곤 하지만 식민 시대의 엄혹함을 고려한다면 쉽지 않은 기사 배치였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동아일보 사진에서 제일 유명한 사진은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다시 신문을 찍었던 사건에 등장하는 사진일 겁니다. 사그런데 그 당시 기자들이 남긴 유산은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살펴본 사진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큰 용기와 고뇌의 끝에 ‘겨우’ 남긴 기록들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주 100년 전 신문에는 좀 더 가벼운 사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한때 최신 첨단기기였던 휴대용 브라운관 TV가 골동품 가게에 쌓여 있네요. 가끔 저 작고 흐릿하던 화면이 그리운데 말이죠.―인천 중구 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내내 집만 지킬 수 있나요? 가끔 바깥 구경하면서 쉬어야죠. 귀까지 쫑긋 세운 걸 보니 엄청 재밌는 일인가 봐요. ―인천 중구 유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3일 서울 지하철 7호선 이수역 인근 마을버스 전용 정류장에서 승객들이 내리고 있다. 지난달 동작구는 마을버스만 정차하는 정류소 15곳에 노선 및 도착 시간 등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정보안내단말기를 설치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전국 대부분 지역에 비가 그치고 날씨가 가을로 접어든 22일 서울 중구 덕수궁 돌담길이 ‘차 없는 거리’로 변했다. 시민들이 산책을 즐기는 가운데 어린이들이 바닥에 그려진 사방치기 그림 위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이번 주 백년사진에서는 정치인을 노린 총격 사건 현장 사진을 한 장 소개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일본 제국의 황태자인 히로히토를 노린 총격 사건이 벌어졌는데 현장 사진을 뒤늦게 신문에 게재하면서 사건의 개요를 상사하게 설명하는 기사입니다. 섭정궁(攝政宮)은 일본 제국에서 섭정이 거주하는 궁전을 의미합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섭정궁 전하”는 일본 제국의 섭정인 히로히토 천황(일본 제국의 124대 천황)을 가리킵니다. 건강이 나쁜 부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1921년에서 1926년까지 섭정(攝政)을 하였습니다. 1926년 12월 25일 지병 악화로 다이쇼 천황이 죽은 후 히로히토 황태자가 천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히로히토가 정식 천황이 되기 전 (육혈포) 총격으로 사망할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1924년 9월 16일 동아일보 기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호문 대역사건(虎門大逆事件)오는 10월 1일에 공판 시작, 범인은 대의사 아들 탄파대조작년 12월 27일 오전 10시 45분에 섭정궁(攝政宮) 전하께서 제국의회 개원식에 행차하시는 중, 호지문(虎之門) 부근에서 전하의 자동차를 향해 육혈포를 발사한 자가 있었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고, 그 사건은 황실(皇室)에 대한 위해죄(危害罪)로, 형사소송법 제 310조 2항에 따라 대심원의 특별 권한에 속하는 사건이 되었다. 검사총장이 그 수사의 임무를 맡아 사건을 조사한 결과, 범인은 산구현(山口縣) 웅모군(熊毛郡) 주방촌(周防村) 출신이며 전직 대의사였던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넷째 아들인 대조(大助, 26세)로 밝혀졌다. 사건은 10월 1일에 공판에 부쳐졌다. 재판장은 횡전국신(橫田國臣) 씨이며, 배석판사는 풍도직통(豊島直通), 극행차랑(磯谷幸次郎), 송강의신(松岡義信), 서천일남(西川一男) 씨 등이다. 검사는 소산송길(小山松吉) 씨이고, 변호인은 화정탁장(花井卓藏), 암전주조(岩田宙造), 금촌력삼랑(今村力三郎) 씨 등이다.또한, 황실에 대한 위해죄는 형법 제 73조에 규정되어 있으며, 이 법에 따르면 천황, 태황, 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또는 황태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번 사건은 대심원의 특별 권한에 속하는 만큼 1심에서 확정되며, 공소나 상고는 허용되지 않는다.▽사건 발생 전후의 상황범인은 현장에서 곧바로 체포되었다. 12월 27일 오전 10시 40분, 섭정궁 전하께서 의회 개원식에 행차하시던 중 호지문 부근에서 전하가 탄 자동차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 자가 있었다. 범인은 즉시 포박되었으며, 전하께서는 다행히 무사하셨다. 사건 당시 전하의 자동차가 지구금평정(芝區琴平町) 1번지에 도달했을 때, 호지문 공원과 교구신조(橋口新助) 씨의 집 사이 거리에서 연령이 25~26세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나 권총을 발사했다. 발사와 동시에 큰 소동이 일어났으며, 경찰들이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고 경시청으로 호송했다.▽철야 수색사건이 발생하자 검사국에서는 검사총장과 각 판검사가 출동했고, 경시청 전 부서가 총출동하여 현장을 조사했다. 현장에서 총을 압수하고 범인을 엄중하게 취조한 결과, 범인은 산구현 웅모군 주방촌 출신이며, 전직 대의사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넷째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날 밤, 경찰들은 추가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철야 수색을 진행했으나, 별다른 연루자는 발견되지 않았다.▽예언(豫言)의 서신이번 사건의 범인 탄파대조(灘波大助)는 사건 발생 전, 형 정태랑(正太郞)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사회를 전율하게 할 대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다. 내용은 자기는 세상에서 버림받을 일서생이나 이번에 사랑에 지나는 힘으로 사회가 전율할 만한 대사건을 단행할 터이니 주목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그 편지는 12월 27일 오후 2시에 경찰에 의해 압수되었으며, 범인은 이번 사건을 계획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 드러났다.▽범인의 가족범인은 전직 대의사 탄파작지진(灘波作之進)의 다섯째 아들이며, 부모가 다 있고 고향에서는 다소 명망이 있는 집이었고 그의 형들은 모두 실업계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부친은 과거에 정치계에 몸담았으나, 이번 사건으로 인해 대의사직을 내려놓고 근신 중이다. 그 고향에서는 촌장까지 나서서 전촌이 근신하는 분위기라고 전해진다.▽학력은 어떠한가범인 탄파대조는 산구현 웅모군 주방촌 출신으로, 덕산(德山)중학교에서 4년급까지 마치고 산구(山口)에 있는 흥성(鴻城)중학교에 입학하여 2학기까지 다녔다. 이후 여러 번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진 뒤, 동경으로 올라와 조도(早稻田) 고등학원에 다니며, 중학교 시절부터 정치와 시사에 흥미를 가졌다. 그는 동경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했고, 메이데이 시위에도 선두에서 참가했다. 동경에는 작년 9월 1일 대지진이 일어나던 날 정오경 자기 고향으로부터 도착한 것이라는데 그는 애탕(愛宕)경찰서 령목(鈴木)경부보에게 체포되였다더라.▽내각 총사직범인이 잡힌 이후로 일본 상하는 모두 경동하여 당시 산본(山本)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직을 하고 산리(山梨) 경비 사령관과 탕천(湯淺) 경시 총감은 즉시 후등(後藤) 내무 대신에게 사표를 제출하였으며 그때 백상(白上) 관방 주사(官房主事), 정력(正力) 경무부와 소활 경찰서까지 경시 총감에게 사표를 제출하였고 호등 내무 대신은 즉시 근신하는 뜻을 보였으나 적화 방지(赤化防止) 단원이 후등 내무 대신 집에 뛰어드는 등 대소동이 있었더라 (동경 전보).● 사건의 요약1923년 12월 27일 발생한 일본의 사건으로,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려던 히로히토 황세자를 겨냥해 권총이 발사되었는데 범인은 의사의 다섯째 아들인 26세의 탄파 대조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사건 직후 체포되었고 철야 수사 결과 추가 용의자는 없는 단독 범행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대조는 사건 전 자신의 형에게 ‘내가 큰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한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총을 쏜 이유는 명확하게 취재되지는 않았지만 청년이 평소에 노동운동과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는 정황만 있을 뿐입니다. 사건으로 인해 당시 일본 내각이 총사퇴하였고 국민들이 크게 동요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공판은 이 기사가 나간 후 보름 후인 1924년 10월 1일이 시작된다는 내용의 기사입니다. ●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10월 1일에 시작된 재판의 결과는 한 달 보름 만인 1924년 11월 13일 끝이 납니다. 사형이 집행되었으리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기사를 한번 보겠습니다. 일본대역범 사형(日本大逆犯死刑)긴 시일을 두고 심리 중에 있던 호지문(虎之門)사건의 범인 탄파대조(灘波大助)에 대한판결언도는 마참내 작 십삼일 횡전(橫田)대심원장 소산(小山) 검사총장의 담임으로 대심원내 특별 법정에서 열리었는데 방청석은 물론 입추의 여지없이 만원이었고 그 외에도 사십 여명의 판검사가 립회하여 장내의 공기는 말할 수 없이 긴장되었다. 정각 오전 10시 27분 횡전 재판장은 정엄한 어조로 판결 이유서를 낭독한 후 바로 언도에 들어가 “피고 탄파대조를 사형에 처한다”는 무거운 소리가 떨어지자 탄파대조는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높이 들고 법정이 떠나갈 듯이 무엇이라고 크게 부르짖은 후 청동(靑銅)같은 얼굴빛으로 법정을 나왔다는데 특별한 사정이 없기 전에는 일 주간 이내로 사형을 집행하리라고 하더라. (동경 전)게재지 동아일보게재일 1924-11-14● 트럼프 총격 사진과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우리는 최근에 미국 트럼프 후보가 괴한이 쏜 총탄에 스쳐 맞는 순간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그 사진에 비해 100년 전 일본 황태자의 피격 사진은 총격 현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흐릿한 흑백사진이기 때문이거나 순간 포착을 할 수 있는 카메라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트럼프의 사진은 주인공이 주변의 인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였기 때문에 극적인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그건 미국의 정치 현장이 ‘무대’와 ‘관객’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촬영하기 좋게 세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나 연설, 정치적 의사 결정을 보여주는 장면은 일반적으로 무대 위에서 이뤄지며, 사진 기자들은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멀리서 망원렌즈를 준비하거나 가까이서 광각렌즈를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사진기자와 중요 인물 사이에는 카메라를 가릴 만한 요소가 없습니다. 그게 정치인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사전에 준비해 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완벽한 촬영 조건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순간이 희극이건 비극이건 제대로 카메라에 포착되어 역사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구요. 오늘은 100년 전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 현장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눈에 띄시던가요?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세요. 참, 지난주 백년 사진에서 제가 보름달 아래에 있는 식물을 수수라고 표현했는데 수수가 아니라 갈대 또는 억새라는 댓글 의견이 있었습니다. 독자분들의 해석이 맞는 것 같아 정정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다른 사진으로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 액세서리를 걸고 다니면 서로 짝을 찾기도 좀 쉬워질까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명절마다 할머니 집 벽에는 몇 달 새 훌쩍 큰 손주들의 키가 새겨집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경기 부천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익어가는 수숫대 위로 걸린 둥근 보름달 사진보름달 아래 수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저 수숫대 어딘가에서 메뚜기나 귀뚜라미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기자는 풀 위에 배를 깔고 누웠을 것입니다. 1미터가 채 안되는 수수 너머 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을 함께 찍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었을 테니까요. 풀밭에 누워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이리저리 옮겨보며 앵글을 잡았을 겁니다. 지금의 카메라라면 카메라 뒤의 LDC 판을 꺽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손만 바닥에 내리면 되지만 그때는 그랬을 겁니다.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추석 스케치 사진입니다. 기사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추석은 금일◇더도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으라지요. 오늘이 바로 팔월 한가위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추석(秋夕)이라고 불으고 가배일(嘉俳日)이나 가배절(嘉排節)이라고도 씀니다 .추석은 한문 문자로 된 말이겠고 가배는 우리의 옛말을 한문으로 취음하여 쓴 것이겠습니다. 가배가 혹은 한가위란 가위의 와전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정월 보름날을 대보름이라고 하는 것 같이 예전 『신라』때는 팔월 보름날을 한가위라고 하얏든가 합니다.◇신라 때는 팔월 보름날이 대단히 중하게 알든 명절입니다, 수서(隨書)와 구당서(舊唐書)의 증거를 들지 않아도 이것은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니다. 근년에도 설、한식、추석、동지를 사(四)명절이라하야 집집이 산소차례까지 지냈었습니다. 지금 설과 동지에는 지내지 않는것이 보통이고 한식과 추석 중에는 추석이 더 성황입니다. 시골 농가에서는 추석을 설보담도 낫게 여깁니다. 지금은 쌀나무 찾으실 서울 양반이 없겠지요마는 혹 그런 양반이 있다하면 이 말을 곧이 듣지 않으실터이지요. 잡담 그만두고 신라 때 이야기나 적겠습니다.◇신라 유리왕(儒理王)때 륙부(六部)를 나누어 두 편을 만들고 두 왕녀가 각기 수두(首頭)가 되어 부내 여자들을 데리고 길삼내기를 하였답니다. 이 길삼내기는 칠월칠석날 (혹은 칠월 보름날이라고 합니다)부터 시작하야 팔월 추석날에 와서 서로 비교하는데 진 편이 음식을 장만하야 이긴 편을 대접하고 두 편이 춤추고 노래하고 한바탕 잘들 놀았답니다.● 여러분의 추석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요?요즘 신문에 수숫대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 사진을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자연 풍경보다는 추석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흥미를 끄는 요소이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지금은 서울역, 용산역,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포착되는 귀성객이나 역귀성객 사진이 실립니다. 아니면 긴 연휴를 이용해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시민들의 행렬이 신문에 실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올해 추석 풍경은 어떤 모습이신가요?궁금증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추석이나 설을 맞아 고향을 찾아가는 풍경을 만들었던 걸까요? 농촌에서 가족 친척들이 모여 살던 시절에는 명절이라고 하더라고 동네에서 어른의 댁에 모이는 정도였을 테니 혹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사온 사람들이 명절을 맞아 대규모로 서울에서 고향으로 가는 풍경을 만들게 된 걸까요? “귀성객”이라는 키워드로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1939년 12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새해 귀성객’이라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금년 분은 전부 매진금년도 앞으로 닷새를 남기고 턱앞에 박두하엿는데 년말의 려행객은 예년에보 지못하는 폭주를 뵈여 전조선 각역은 안비막개의 분주상(奔走相)을 보이고 있다.경부、경의 양국제간선은 기차마다 만원이여서 서서가는 승객이 태반이며 부정기 급행(不定期急行)과 임시급행(臨時急行)도 모다 초만원을 일우어 새해귀성객(歸省客)들로 역원들은 눈코를 못 뜨고 잇다.일제 강점기였던 1939년에 연말을 맞아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려는 귀성객들로 전국의 기차역에서 일하는 역무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기사내용입니다. 귀성객이라는 표현은 그 후에는 잘 안 쓴 모양입니다. 동아일보 DB에서는 그로부터 20여 년 남짓 지난 1957년 9월 8일에 다시 등장합니다. ◇ 오늘 추석 – 들끓는 귀성객(歸省客)해마다 찾아오는 명절이건만 이날을 맞아 즐기는 어린이들에게는 언제나 새롭고 즐거운「중추가절」이기도 하다. 이날 어른은 어른대로 선형을 찾아 성묘에 바쁘겠고 어린이는 또 그들대로 때때옷에 몸과 맘이 들뜬 채 하루를 즐기겠는데▼이날을 하루 앞둔 어제(음一四일)서울역은 추석맞이 귀향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매표구 개찰구에 들어선 장사진. 십여개씩 연결된 각선 여객차 내에 박혀있는 승객들은흡사 콩나물|▼서울역 집계에 의하면 지난 六일의 매표수만 해도 평일보다 약 三배나 됐다고▼들에는 어느새 五곡이 여물어가고 하늘도 드높고 푸른 이날 서민층의 명절「八월가위」를 맞는 전야 서울 장안은 살아난 듯 활기를 띠웠다.● 본격적인 귀성 행렬 사진은 1960년대부터기사에는 등장했던 ‘귀성객’ 사진이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1960년대 말 부터입니다. 지금은 잊혀진 풍경이지만, 기를 쓰고 고향을 가던 우리의 50년 전 풍경을 여러분께 공유합니다.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명절 귀성객들의 사진은 당시의 사회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시기는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대규모의 이농 현상이 벌어진 때였고,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도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하려 했고, 그로 인해 매년 명절마다 대규모 귀성 행렬이 펼쳐졌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단순히 행렬 수준이 아니라 ‘귀성 전쟁’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았습니다. 설날과 추석 같은 큰 명절이 다가오면 교통편은 턱없이 부족했고, 고향을 가려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귀성 전쟁을 치렀습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했던 걸까요? 열차의 출입문이나 지붕에 매달려 귀성길에 오르던 모습도 있습니다. 이처럼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변화시켰고, 고향으로 가는 길은 그저 이동의 과정이 아닌 고된 여정이었습니다.지금은 교통 인프라가 개선되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예전처럼 극적인 귀성 전쟁은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을 향한 귀성 행렬은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기차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고향으로 향하는 열차에 오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줄을 서고, 차표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은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그 시절 고향을 향한 간절한 마음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오늘은 100년 전 한가위 보름달 사진에서부터 1960, 70년대 귀성 풍경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당시의 고단했던 여정과 지금은 잊힌 귀성 전쟁의 모습을 떠올리며,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여러분께서는 그 시절 명절의 풍경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고향으로 향하던 긴 여정이나, 교통 수단이 부족했던 그 때의 이야기를 공유해 주실 분이 계신지 궁금합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앞으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겠죠? 꽃 받으신 분, 꽃처럼 예쁜 마음으로 어르신께 감사 전하셨기를요∼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북한은 9월 13일 노동신문 홈페이지를 통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현지 지도 사진 61장을 대거 공개했다. 공개된 사진들은 조선인민군 특수작전무력 훈련기지 시찰 사진 47장, 600mm 방사포 성능 시험 사격장 시찰 사진 9장, 그리고 핵무기연구소 및 무기급 핵물질 생산기지 현지 지도 사진 5장으로 나뉜다. 한편으로 사진의 개수도 놀랍지만, 하루에만 3군데의 현지 지도 모습을 한꺼번에 공개한 것 또한 이례적이다. 이로 인해 북한과 김정은이 내부적으로나 국제사회에 뭔가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특히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 연휴를 앞둔 한국의 언론사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뉴스거리가 등장한 셈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북한이 처음으로 공개한 핵무기연구소와 핵물질 생산시설을 둘러보는 김정은의 모습이었다.이 사진은 각 언론사에서 중요한 뉴스 이미지로 사용될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핵 능력을 강조하는 이 사진은 국제사회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그러나 필자가 가장 주목한 것은 김정은이 조선인민군 특수작전무력 훈련기지를 시찰하는 장면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정은 옆에 서 있는 중무장을 한 호위부대원들의 모습은 특히 인상 깊었다. 짙은 감색의 전투복에 방탄 헬멧을 착용한 이들은 실탄이 장전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총을 들고 있었다. 북한 특수부대의 위협적인 모습을 과시하기 위해 김정은이 그들과 함께 훈련 현장에 서 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사진 속 김정은의 표정은 단순한 지도자의 모습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긴장감과 위기 의식이 엿보인다. 김정은이 이러한 군사 훈련을 지도하며 느끼는 압박감은 단지 북한 내부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미국, 한국 등 외부 세력과의 끊임없는 긴장 상태 속에서 그가 감내하고 있는 정치적, 군사적 부담감의 표출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올 여름 수해로 북한 곳곳이 초토화된 상황에서 민심이 흉흉하다는 보도와도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2024년 여름, 김정은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의 목숨과 함께 자신의 사진이다. 김정은은 강력한 군사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사진으로 남기고, 이를 통해 자신이 권력을 잡고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북한이 공개한 사진들은 단순한 군사 훈련을 넘어 김정은의 정치적, 군사적 위기의식을 동시에 담고 있다.북한이 추석을 앞두고 한국과 국제 사회에 퍼부은 이 사진들은 그 자체로 협박의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이 느끼는 불안과 위기의 반영일 수도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삭막한 공사장 가림막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그림자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네요.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대파 배달인가요? 데리러 오신 할머니 짐을 대신 옮기는 중이라네요. 킥보드 길이랑 딱 맞아서 일부러 장식한 것 같아요. ―경기 광명시 광명동에서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이번주 백년 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4년 9월 2일자 동아일보 2면에 실린 사진입니다. 젊은 여성을 러시아에 팔았다는 인신매매범 남용석이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기사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함께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입니다.먼저 기사를 한번 보시죠. 북화태(北樺太)는 북사할린섬을 말합니다. 여자 매매의 악행 (1924.09.02)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자에게 끌려 눈보라 치는 북화태로 이미 팔린 여자가 4명아무리 먹고 입는 것에 백방으로 노력을 하는 인생이요 세상에는 죄악이 많이 행한다 하지마는, 우심(尤甚)한 것은 공공연하게 사람의 고기를 팔고 사는 악마의 계집 장사들이다. 이런 일이 비록 오늘에 새로이 생긴 일은 아니지마는 항상 현장에 팔려가는 불쌍한 여러 여성을 대할 때마다 현대 사회 제도의 결함을 절실히 느끼게 됨은 누구나 다 아는 바어니와 한 실례를 들건대, 본격을 함경남도 단천(端川)군 읍내에 두고 당시 북화태 (北樺太) 아항(호港: 편집자 주: 알렉산드라프스크)에서 소위 청부업 삼화조(請負業 三和組)라는 간판을 붙이고 한편으로는 그곳 서정(曙町)에 대복루(大福樓)라는 요리점을 두고 인육 시장(人肉市場)을 시설해 놓고 멀리 수륙 만리를 격한 고국으로부터 불쌍 한 어린 여성들을 이리저리 꾀어 사 들여다 놓고 그들의 피를 빨아 채우는 남용석(南龍錫)은, 지금으로부터 수일 전에 현금 5,000여원을 가지고 경성 시내에 들어와 북미장정 74번지 평양여관에 투숙하면서 각처로 몰려드는 뚜쟁이들과 연락을 취하여 가지고 사들인 계집이 벌써 4명이나 되는데, 그중에는 본적을 황해도 평산군 금천면에 두고 당시 구룡산에서 자기의 남편과 함께 어려운 살림을 하고 있던 신자금(申子今·20)이라 여자와 무교정에서 역시 구차한 살림을 하던 이옥순(李玉順)이라는 여자 2명은 모두 이제까지 집안 살림을 하다가 운명이 그만 뿐이든지 자기 남편과 최후로 이별을 하고 악마의 밥이 되었으며, 그 외에 2명은 대구부 달성정 233번지 김화원(金花園·19) 황해도 서흥군 서흥면 수파리 40번지 최익선(崔益善·19)이라는 두 여자인데 그들의 몸값은 최고 300원으로 최하 180원이며 팔려가는 기한은 4년 동안이라는데 그들은 멀지 아니하여 눈발이 날리고 찬 바람이 몸을 베이는 로령(露嶺) 북화태(北樺太)로 뜻 아닌 발길을 옮겨 놓을 터이며 남용석은 2주일 전에도 자기의 사무원 심주택(沈株澤)을 평양여관으로 내보내어 6명이나 사들여 갔으므로 지금 북화태에는 약 30여 명의 불쌍한 조선 여자가 악마의 밥이 되어 있는 중이며, 여관 주인 항봉찬(咸奉贊)도 여관 간판을 붙였으나 암밀(密)히 뚜쟁이 노릇을 하며 계집을 파고 사는데 구전(錢)으로 배를 채우는 모양이며, 사직동 225번지 방영자(方英子·20)라는 젊은 여자도 여학생으로 분장을 해가지고 그 집에 밤을 낮 삼아 드나들며 각처로 여자를 유인하여 들인다고 그 동리 부근 사람들은 비평이 자자한 모양인데, 아직도 앞으로 전기(前記) 남용석은 얼마나 많은 계집을 무역할는지. 그 집에는 뭇사람이 드나들며 수군거라는 모양이 매우 심상치 아니한 인신매매의 대 소굴인 모양이며 그 자는 서대문 경찰서 고등계에 호출을 받아 방금 취조를 받는 중이라더라.● 기사를 요약해보면,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의 남용석이라는 인물이 조선 여성들을 속여 러시아 북화태(지금의 북사할린)로 팔아넘긴 인신매매 사건을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남용석은 경성의 평양여관을 거점으로 하여 4명의 여성을 매수했고, 그들은 각각 180원에서 300원의 몸값으로 4년 동안 팔려가게 되었으며, 남용석의 사무원도 6명의 여성을 추가로 매수해 러시아로 넘겼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경찰에 의해 조사 중이며, 여관 주인과 유학생으로 위장한 여성도 인신매매에 연루되었습니다.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남용석이 인신매매를 저지르면서도 사진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지 않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남용석은 자신의 범죄를 알릴 수 있는 증거를 스스로 남겼다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냅니다.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는 여성들을 상품처럼 여기고, 거래의 일환으로 사진을 찍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 여성들의 외모를 잠재적 구매자들에게 보여주고, 이를 ‘광고’처럼 활용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사진이 여성들을 협박하고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진을 이용해 “도망갈 생각을 하지 마라”는 경고를 남기며 범죄를 은밀히 지속했을 수 있습니다.당시 조선 사회는 인권에 대한 개념이 크게 부족했으며, 여성들이 이러한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미흡했습니다.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잉어들이 놀던 수족관에 화려한 녀석이 나타났습니다. 관람객들의 인기를 차지한 빨간 물고기는 실은 로봇이라고 하네요. ―경기 광명시 광명동굴에서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일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 빌딩에 광화문글판 가을편이 걸렸다. 윤동주 시인의 시 ‘자화상’에서 가져온 문안으로 고단한 현실에 처해 있더라도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기회를 갖자는 의미를 담았다. 올해 가을편 디자인은 추계예술대 홍산하 씨의 작품이 선정됐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1924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 2면에 흥미로운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사진은 실제로 찍은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그려낸 일러스트레이션입니다. 이 이미지를 처음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백년사진’ 코너를 진행하면서 이렇게 헛웃음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는데, 본문을 현대의 언어로 번역하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함께 보시죠. 함께 실린 기사의 제목은 “과학으로 본 화성: 화성에 사는 사람은 우리와는 다르다고”입니다.◇화성에 동식물(動植物)이 있느냐. 있고 말고. 우리 사람보다도 더 진보 발달된 인류(人類)가 있다. 운하(運河)인 듯한 검은 줄이 화성면에 일백 팔십여개나 보인다. 강렬한 전기(電氣)로 지구에 통신길을 열라고 하는 형적이 있다 이렇게 떠드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하라고 추측하는 검은 줄은 산맥인 것 같다고 하고 전기 통신은 『말코늬』의 시실 없는 말이라고 하여 화성에 인류가 산다는 것은 믿지 못할 말이라고 합니다. 화성에 공기 (空氣)나 수증기(水蒸氣) 있는 것은 학술상으로 증명이라도 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동식물 중에도 인류가 있으리라고 말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하여튼 화성에 인류 있다는 것은 한 의문(疑問)에 지나지 못하는 것인데 이번에 이 의문을 조금이라도 풀어보려고 장을 대는 사람이 많아서 『알프스』산『융그、푸라우』높은 봉에 올라가서 힘있는 전기로 통신을 해보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의문이 얼마나 이번에 풀릴는지 아직은 이 역시 의문입니다마는 화성이란 별이 여러 가지 의미로 보아서 우리 지구와 사이가 가까운 것은 사실입니다. 되둥대둥 적기 때문에 쓸 데 없이 지면만 허비하였습니다. 이것을 다 적고 나니 화성에 무선 전신으로 통신이 여기저기 왔다고 외국전보가 있으나 거연히 믿지 못할 일입니다. 사진은 화성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영국 문호 사진은 화성에 사는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영국문호『에취、지、웰스』가 화성에 사는 사람은 이러하리라고 한 것을 불란서 화가 『무류피아르』가 그린 것인데 거기 사는 사람은 이 땅에 사는 사람과 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머리가 몹시 크고 눈이 무서웁게 생겼으며 다리가 뱀의 꼬리 같이 여러개가 있어서 다닐 때네는 공중으로 슬슬 떠나니가가 않으면 우리 땅의 사람처럼 밥을 먹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자양될 것만 빨아 먹는데 소화기관(消化機關)은 없다 합니다. 언제든지 화성에 사는 사람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한바탕 큰 싸움을 할 날이 있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도 영악하지마는 그 별에 사는 사람은 아주 재주가 무섭다니까 그 놈들이 몰려와서 우리들의 피를 빨아 먹을 날이 있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 ● 영화 [우주전쟁]의 원작 소설에 나오는 화성인에 대한 묘사화성에 동식물이나 인류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화성 표면에 보이는 검은 줄무늬가 운하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화성에서 지구로 전기 신호를 보내는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사와 함께 실린 그림은, 영국 작가 H.G. 웰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으로, 화성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와 전혀 다르게 생겼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H.G.웰스의 소설 [우주전쟁]은 2005년 스필버그 감독과 톰크루즈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집니다) 이들은 큰 머리, 무서운 눈, 뱀처럼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공중을 떠다니며 영양분을 흡수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묘사됩니다. 또한, 언젠가 지구인과 화성인이 큰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상상까지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소설적인 상상일 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기사는 설명하고 있습니다.이 일러스트레이션은 100년 전 인류가 화성에 대해 갖고 있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잘 보여주는 역사 자료입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화성 탐사선과 로버를 통해 실제 화성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런 형태의 생명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화성에서의 생명체 존재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100년 전 그려진 외계인 모습, 오늘날의 이미지와 얼마나 닮았나그런데 저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화성인(火星人) 또는 외계인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몸에 비해 큰 머리, 가느다란 팔다리는 분명히 인간과는 다른 외형을 갖고 있지만 둥근 머리와 눈과 입은 인간을 닮았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그 때와 지금이 큰 차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100년 전 누군가 처음 상상해서 표현한 외계인의 모습이 일종의 교과서처럼 인용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20세기 초 대중 매체에서 그려진 화성인의 모습이 오랫동안 대중의 인식에 각인되면서 이후 영화, TV 프로그램, 만화 등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외계인은 이런 모습이다라고 생각이 고착화된 가능성은 없을까요? 심리학에서도 말하는 초두효과(primacy effect)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처음 접한 정보나 이미지가 그 다음번 인식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 현상 말입니다. 과학적 사실보다 문화적으로 전승된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과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외계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