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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은 어디까지 난해해지는 걸까. 100년 전 예술가가 사인한 변기는 걸작이 됐고, 통조림에 담은 예술가의 배설물도 엄청난 가격의 작품이 됐다. 그렇다면 독설과 막말도 작품이 될 수 있을까? 자신들을 ‘살아있는 조각’이라고 주장하는 예술가들의 개인전이 서울 종로구 율곡로 리만머핀 갤러리에서 10일부터 열리고 있다. 결성 52년째를 맞는 길버트 앤드 조지(G&G)다.G&G는 이탈리아인 길버트 프루슈(75)와 영국인 조지 패스모어(77)가 결성했다. 이들은 수십 년간 영국 런던의 한 동네에 살며 그곳에서 마주친 이미지를 가공해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는 갖가지 기이한 형태의 수염을 담은 ‘수염 그림’ 연작 5점을 선보인다. 최근 이들과 e메일 인터뷰를 했다. 수염을 소재로 선택한 이유를 묻자 “턱수염부터 아래쪽의 수염까지 모든 수염을 사랑한다”는 거침없는 답이 왔다. 작품 속에는 수염과 뱀, 철조망, 폐허 등 여러 이미지가 합성되어 있다. 매일 산책하는 두 사람은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인 동네에 수염을 기른 사람이 많아진 걸 보고 새 작업의 영감을 얻었다. 종교적 이유로 수염을 기르는 무슬림, 유행을 따라가는 힙스터 등 수염 속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를 ‘살아있는 조각’이라 주장하는 건 작품뿐 아니라 사람도 살아있는 예술이라는 의미다.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도 “모든 사람이 예술가”라고 했다. 예술의 창조적 힘을 모든 이의 삶과 사회에 활용해야 한다고 본 보이스는 누구나 강의를 듣는 대학을 세우기도 했다. G&G도 자신들의 모든 행동을 예술이라 말한다. 이들에게 ‘살아있는 조각’의 의미를 묻자 “우리는 매일 눈뜰 때 보편성을 고심한다. 그 보편성은 ‘죽음, 희망, 삶, 공포, 섹스, 돈, 종교, 개 같은(Shitty), 벌거벗은, 인간과 세상’이다”라고 했다. 한데 이들의 말과 행동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독설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과거 인터뷰에서 “파시즘은 삶의 원동력(life-force)”이라고 해 충격을 줬다. 1987년에는 아시아인이 담긴 작품에 ‘파키(Paki·백인들이 파키스탄인을 경멸적으로 이르는 말)’라는 제목을 붙여 논란이 됐다. 최근에는 테이트 미술관이 작품을 걸어 주지 않는다며 ‘편협한 진보주의자’로 가득하다고 비난했다. 두 작가는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포착하기 위해 도덕적 측면을 제거한 것이냐는 질문에는 “우리 작품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것이고 도덕적 측면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성이란 혹시 백인 중심 사회를 그리워하는 보수적 영국인에게만 통용되는 건 아닐까. 인종차별이나 정치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위한 예술이 가능하냐고 물었지만 이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3월 16일까지.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임권택 감독의 영화 ‘짝코’(1980년·사진)가 다음 달 7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제69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클래식 부문은 최근 디지털로 복원된 세계 유수의 고전 영화를 상영하는 섹션. 덴마크의 카를 테오도르 드레위에르 감독이 연출한 ‘오레트’(1955년)와 헝가리 메사로시 마르터 감독의 ‘양지’(1975년) 등 총 6편을 상영한다. ‘짝코’는 6·25전쟁에서 빨치산과 토벌대장으로 만난 백공산(김희라)과 경찰 송기열(최윤석)의 30년에 걸친 악연을 추적한다. 한국의 어두운 근현대사를 냉철한 시선으로 포착한 영화로, 임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시대감각과 비판 정신이 치열한 작품으로 꼽힌다. 한국영상자료원은 1990년에 수집한 35mm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2K 디지털로 복원해 지난해 7월 블루레이로 출시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여러 명이 합심한 ‘협동조합’ 코미디. 주연 5명뿐 아니라 악역 신하균이나 오정세, 여기에 잠깐 한마디 하는 배우조차 다 재밌는, ‘코믹망’이 촘촘한 영화입니다.” 지난해 1월 ‘염력’ 이후 또 한번 코미디 영화로 돌아온 배우 류승룡(49). 그는 23일 개봉하는 영화 ‘극한직업’에서 경찰 마약반을 이끄는 ‘고 반장’ 역할을 맡았다. ‘극한직업’은 마약반 형사들이 거대 범죄조직을 잡기 위해 치킨 가게를 위장 창업했다가 ‘전국구 맛집’이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느끼한 듯 능청맞은 류승룡 특유의 ‘말맛’은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무기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심각하게 수사를 논의하다 주문전화가 걸려오면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라며 고정 홍보문구를 읊조리는 연기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역시 포인트는 류승룡이 목소리를 잔뜩 깔아 내뱉는 사뭇 진지한 악센트. 1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대본을 받자마자 읽었던 운율”이라며 “연습 때 이병헌 감독도 좋아해 그대로 이어진 ‘운명처럼 다가온 대사’다”라고 했다. 수사반 팀원인 배우 이하늬와 진선규, 이동휘, 공명과의 호흡도 최고였다고. 영화를 처음으로 함께 본 시사회 현장에서도 서로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넘쳤단다. “같이 촬영하지 않은 장면을 보며 ‘나 없을 때 저런 고생을 했구나’ 생각했죠. 상상하며 읽었던 장이 구현되고, 음악 선곡이나 교차 편집이 신선해서 무척 재밌었습니다.” 공명은 처음엔 류승룡을 보고 바짝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중엔 “형이라고 부를지, 선배님이라 부를지 고민”에 빠졌단다. 현장에서 서로 돈독해진 매개체는 뜻밖에도 마시는 ‘차’였다. 다도가 취미인 맏형 류승룡이 가져온 차를 나눠 마시면서 친해졌다. “차는 알고 마셔야 해요. 직접 강의도 들으며 배웠죠. ‘일상다반사’라는 말처럼 예전에는 밥과 차를 매일매일 마셨다는데, 일제강점기에 괜히 어려운 퍼포먼스와 예를 넣으면서 대중이 멀어지게 만들었어요.” 류승룡이 경남 하동군 등을 돌며 사온 차를 현장에서 공유하며 ‘차 전도사’를 자처한 덕분에 다른 배우들까지 차에 흠뻑 빠졌다. 이하늬도 하동에 가서 차를 구매했고, 진선규는 ‘차 문화대전’을 찾아갔을 정도다. 의외로 섬세한 취미는 다도뿐만이 아니다. 목공이나 트레킹 등 자연 친화적인 취미가 많다. 왠지 끈끈한 술자리가 더 어울려 보이지만, 이런 취미는 모두 그의 연기와도 맞닿아 있다. 배우는 “감정을 이성적으로 다듬어야 하는 ‘감정의 세공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래 제주 올레 길을 좋아했는데, 사람이 너무 몰려 정취가 예전만 못해요. 요즘엔 점점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울릉도도 해마다 가고 있고. 배우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또 배우면서, 민첩하게 세상을 담을 준비를 해야 하잖아요. 육체뿐 아니라 마음도 악기라고 생각합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3층 출국장에 설치된 대형 모빌 작품으로 국내에도 친숙한 프랑스 설치조각가 그자비에 베양(56·사진)이 국내 상업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사진, 영상, 회화, 설치 등 여러 매체로 작업하는 베양은 세부적 묘사를 생략한 각진 형태의 인물 조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 성북구 313아트프로젝트에서 10일 개막한 베양의 개인전은 인물 조각과 대형 설치를 통해 선보였던 선(ray) 시리즈의 소품 등 20여 점으로 구성됐다.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 ‘스튜디오 베네치아’를 작은 사이즈로 기록한 작업도 볼 수 있다. 개막식에서 만난 베양은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갤러리 공간을 고려해 제작한 작품들”이라고 설명했다. 베양은 파리국립고등장식예술학교(EnsAD)를 졸업했으며 유명한 독일 작가 게오르크 바셀리츠의 아틀리에 출신이다. 베양의 작품은 개인적 표현을 배제하고 단순화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조각가 브랑쿠시처럼 20세기 예술가들이 찾으려 했던 새로운 보편성을 탐구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개인적 미학보다 보편성, 즉 보는 사람의 공감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디자인적 특성이 강하다. 강렬한 색감과 깔끔한 형태로 ‘포토제닉하다’는 평가도 받는다. 러시아 예술가 카지미르 말레비치를 오마주해 르코르뷔지에, 리처드 노이트라 등 모더니즘 건축가가 지은 집에 설치한 ‘아키텍톤’ 시리즈도 건축과 공간의 의미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프랑스의 유명 밴드 ‘에어’ 등 음악가와도 자주 협업한다. 2015년에는 유명 일렉트로닉 듀오 다프트펑크가 헬멧을 벗고 선글라스 낀 모습을 조각해 화제가 됐다. 당시 베양이 음악 제작 과정에서 가수에 비해 잘 드러나지 않는 프로듀서를 형상화하는 전시를 기획해 다프트펑크를 작품화하기로 했다. 이에 다프트펑크가 제작자로서 일상적 모습을 표현해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조각들은 작가의 지인이나 동료 작업자, 베네치아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2월 15일까지.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표지는 알록달록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저자는 욕망과 중독을 자양분으로 꽃피는 산업자본주의 체제를 마약산업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코카콜라의 출발도 코카인이다. 1886년 존 펨버턴이 처음 발명한 코카콜라는 L당 10g의 코카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펨버턴이 모르핀 중독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이디어를 인수한 아사 캔들러가 코카콜라를 천재적 상술로 포장해 히트 상품으로 만들었다. 1903년부터 코카콜라는 코카인이 아닌 코카잎 추출물이 들어간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은행을 버티게 만든 것도 코카인 밀거래다. 주택을 담보로 한 부실 대출로 은행이 무너져갈 때, 일반 투자자들은 돈을 빼갔지만 마약상만 유일하게 은행의 유동자산을 늘렸다. 마약 밀매로 얻은 수익을 세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세계 경제는 여전히 코카인의 추출 변형 매매로 만들어진 돈으로 돌아가고 지탱된다”고 주장한다. 영미권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통찰은 미셸 푸코 등을 배출한 프랑스 지식사회 특유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벨기에 브뤼셀브리예대학에서 법이론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철학자 질 들뢰즈와 법의 실천을 다룬 책은 물론 가미카제, 에로티시즘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차세대 지성인으로 꼽히고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조시를 처음 봤을 때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한국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하기에 ‘그럼 한국에 가지 왜 영국에 있나’ 싶었죠.” 구독자 300만 명이 넘는 유튜브 채널 ‘영국남자’의 올리 켄들(32)은 동료 조시 캐럿(30)의 첫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영국남자’는 2013년 시작해 영국인에게 한국 문화를 알리고, 한국어로 영국 문화를 알리는 영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CICI)에서 한국을 외국에 알린 인물에게 주는 ‘2019 한국이미지상’을 받은 두 사람을 10일 서울 강남구 인터컨티넨탈서울코엑스 호텔에서 만났다. 두 사람이 ‘영국남자’ 채널을 만든 건 조시의 어린 시절 덕분이다. 조시는 12세 때 중국으로 이사를 가면서 다닌 국제학교에서 한국인 친구들과 가깝게 지냈다. “당시 학생의 90%가 한국인이었는데, 저는 한국어를 못 해 친구가 없었어요. 그때 한국 친구들이 저를 위해 영어로 얘기해 주고, 집에도 초대해 주고, PC방에 가서 놀자고 했죠. 18세 때까지 한국 문화 속에서 자라 영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사람이 되었어요(웃음).” 조시는 영국 런던대 소아스(SOAS·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며 올리를 만났다. 조시의 영향으로 2008년 한국을 찾은 올리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면서 조시가 왜 그렇게 한국에 대해 많이 얘기했는지 알게 됐다”며 “숨겨진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이어 “한국 음식이 중국과 일본 음식만큼 유명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할리우드 영화배우들과 한식 먹방을 찍고, 영국인에게 수능 영어 문제를 풀어 보게 하는 등 한국 음식과 교육, 관광 명소, 최신 유행을 흥미로운 방법으로 소개한다. 해외의 한인타운을 방문해 외국에서 한국 문화가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도 알렸다. 조시와 올리가 꼽는 가장 기억에 남는 영상은 ‘불닭볶음면 도전’. 극도로 매운 볶음라면을 영국인이 먹는 모습을 담은 이 영상은 ‘영국남자’를 많은 사람에게 알렸다. 올리는 “팬들이 보내준 불닭볶음면으로 만든 영상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국 음식이 됐다”며 “미국 ‘버즈피드’에서 일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너희 불닭볶음면에 도전해 봤니?’라고 물어봐서 신기했다”고 말했다. 조시는 2016년 한국인 요리 연구가 국가비와 결혼해 런던에서 살고 있다. 조시에게 도전하고 싶은 과제를 묻자 사무실 화이트보드가 이미 아이디어로 꽉 찼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랑받아서 너무나 감동적인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재미있는 영상을 기대해 주세요.”(조시)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스크린을 가득 채운 사이보그 소녀 ‘알리타’의 얼굴. 클로즈업한 화면에는 피부의 미세한 주름과 솜털, 모공까지 생생히 보여 실물을 촬영한 영상 같다. 그러나 ‘알리타’는 컴퓨터그래픽(CG)을 통해 창조된 가상 이미지.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그렸고, 눈동자는 ‘반지의 제왕’ 골룸보다 320배 자세히 표현했다. 영화의 CG를 책임진 웨타디지털의 김기범 CG감독(41)은 “배우의 치아와 잇몸까지 모든 데이터를 담아내 구현했다”고 말했다.》 다음 달 개봉하는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은 26세기 기억을 잃어버린 사이보그 소녀의 성장기를 그렸다. 일본 만화 ‘총몽’이 원작으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아바타’를 만들기 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다. 기술이 부족해 제작을 미루다 ‘씬 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시나리오를 받았다. 캐머런은 제작자로 참여한다.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7일 만난 김 감독은 ‘알리타’의 구현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캐릭터의 피부와 근육을 완벽히 구현했는데도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CG가 사람과 어설프게 닮을수록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현상이었다. “사람은 평생 타인을 관찰하기에 미세한 구조만 달라도 어색함을 느낍니다. 여러 고민 끝에 ‘알리타’를 연기한 배우 신체의 해부학 데이터를 삽입해 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했죠.” 김 감독이 참여한 작품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아이언맨 2’, ‘혹성탈출: 종의 전쟁’ 등으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국내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스타워즈’를 보고 CG 기술자의 꿈을 키웠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묻자 뜻밖에도 심형래 감독의 ‘디 워’라고 답했다. “촬영 소품도 직접 만들고, 동료와 단둘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관광객인 척 도로 한복판에서 영상도 찍었어요. ‘포졸’ 역할로 엑스트라 출연도 했죠. 이렇게 ‘맨땅에 헤딩’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안 되는 걸 되게 만들어야만 했던 경험은 이후 작업에 원동력이 됐다. 이방인이지만 능력을 바탕으로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감독의 자리에 오르자 다시 서양인들의 일하는 방식을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한국인 특유의 ‘눈치’로 인정받았지만 관리자가 되니 불리했어요. 직원들이 알아서 일할 줄 알았는데, 일일이 소통을 해야 하더군요. 그때부터 한국과 서양의 문화를 나름대로 융합하려 노력했습니다.” 국내 영화의 CG에 대한 의견이 궁금했다. 그는 “영화 ‘신과 함께’의 작업자와 작업 과정을 잘 알고 있다”며 “한정된 여건과 기간, 예산에 비해 나온 결과물은 수준급으로, 대단함을 넘어 경이롭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한국과 외국의 비교가 무의미하도록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이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국내 소프트웨어를 외국 제품으로 다 교체하면 될까? 외국 사람을 데려오면 될까?’ 만약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 비주얼이펙트 부문 후보가 된다면 한국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법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국 CG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꼭 이루어내고 싶습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스크린을 가득 채운 사이보그 소녀 ‘알리타’의 얼굴. 클로즈업한 화면에는 피부의 미세한 주름과 솜털, 모공까지 생생히 보여 직접 촬영한 영상 같다. 그러나 ‘알리타’는 컴퓨터그래픽(CG)을 통해 창조된 가상 이미지.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그렸고, 눈동자는 ‘반지의 제왕’ 골룸보다 320배 자세히 표현했다. 영화의 CG를 책임진 웨타디지털의 김기범 CG감독(41)은 “배우의 치아와 잇몸까지 모든 데이터를 담아내 구현했다”고 말했다. 다음달 개봉하는 영화 ‘알리타’는 26세기 기억을 잃어버린 사이보그 소녀의 성장기를 그렸다. 일본 만화 ‘총몽’이 원작으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아바타’를 만들기 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다. 기술이 부족해 제작을 미루다 ‘씬 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시나리오를 받았다. 캐머런은 제작자로 참여한다.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서 7일 만난 김 감독은 ‘알리타’의 구현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캐릭터의 피부와 근육을 완벽히 구현했는데도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CG가 사람과 어설프게 닮을수록 불쾌한 기분이 들게 하는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 현상이었다. “사람은 평생 타인을 관찰하기에, 미세한 구조만 달라도 어색함을 느낍니다. 여러 고민 끝에 ‘알리타’를 연기한 배우 신체의 해부학 데이터를 삽입해 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했죠.” 김 감독이 참여한 작품은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아이언맨 2’, ‘혹성탈출: 종의전쟁’ 등으로 화려한 이력을 자랑한다. 국내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지만, ‘스타워즈’를 보고 CG 기술자의 꿈을 키웠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를 묻자 뜻밖에도 심형래 감독의 ‘디 워’라고 답했다. “촬영 소품도 직접 만들고, 동료와 단 둘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관광객인 척 도로 한복판에서 영상도 찍었어요. ‘포졸’ 역할로 엑스트라 출연도 했죠. 이렇게 ‘맨 땅에 헤딩’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안 되는 걸 되게 만들어야만 했던 경험은 이후 작업에 원동력이 됐다. 이방인이지만 능력을 바탕으로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감독의 자리에 오르자 다시 서양인들의 일하는 방식을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한국인 특유의 ‘눈치’로 인정받았지만, 관리자가 되니 불리했어요. 직원들이 알아서 일할 줄 알았는데, 일일이 소통을 해야 하더군요. 그 때부터 한국과 서양의 문화를 나름대로 융합하려 노력했습니다.” 국내 영화의 CG에 대한 의견이 궁금했다. 그는 “영화 ‘신과 함께’의 작업자와 작업 과정을 잘 알고 있다”며 “한정된 여건과 기간, 예산에 비해 나온 결과물은 수준급으로, 대단함을 넘어 경이롭다”고 말했다. 언젠가는 한국과 외국의 비교가 무의미하도록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스스로 이런 질문을 많이 했어요. ‘국내 소프트웨어를 외국 제품으로 다 교체하면 될까? 외국 사람을 데려오면 될까?’ 만약 우리 영화가 아카데미 비주얼이펙트 부문 후보가 된다면 한국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어떤 방법이 될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한국 CG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꼭 이루어내고 싶습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디지털’ ‘몰입형 미디어’ 같은 전시로는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눈을 가까이 갖다 댔을 때 보이는 화면의 질감과 세세한 표현은 원화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프랑스 파리의 화려한 시절에 활약한 화가들의 유화를 직접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파리시립근대미술관 소장품 90여 점을 소개하는 ‘피카소와 큐비즘’전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06년 시작된 입체파 시대 110주년을 기념해 3년 전 기획됐다. 시기별로 구성된 전시는 폴 세잔의 풍경화 두 점으로 시작한다. 서양화의 전통적 원근법을 무시하고 해체하듯 그린 세잔의 풍경은 후대 화가들에게 충격을 줬다. 세잔 회고전을 본 피카소와 브라크도 그의 영향으로 한 그림에 여러 시점을 넣은 ‘입체파’ 그림을 그린다. 입체파의 기원을 소개하는 첫 번째 전시관은 피카소는 물론이고 앙드레 드랭, 라울 뒤피 등 그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피카소는 “세잔은 우리 화가들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전시 총감독인 서순주 박사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꼽은 두 번째 전시관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 회화를 만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두 화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입체파 회화를 연구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서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화풍이 비슷하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감에 모래를 섞거나 신문지를 오려 붙이는 등 그 나름의 실험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뒤로 이어지는 전시관은 후대 입체파 화가들의 경향을 보여준다. 마르셀 뒤샹의 맏형인 자크 비용, ‘입체파’ 책을 쓴 알베르 글레이즈와 장 메챙제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 입체파의 영향 아래 각 작가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마지막에 전시된 로베르 들로네, 소니아 들로네 부부의 대형 회화 4점은 80년 만에 파리시립근대미술관 밖으로 나온 작품들이다. 거대한 규모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어 지게차를 동원했고, 설치를 위해 보존 전문가 2명이 투입됐다고 한다. 이 그림들은 1938년 튈르리 살롱전 조각실을 장식하기 위해 전시 조직위원회가 의뢰한 것들로, 이듬해 파리시에 기증돼 파리시립근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피카소 작품보다는 입체파의 다양한 면면을 알고 싶은 관객에게 적합한 전시다. 3월 31일까지. 1만∼1만5000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디지털’, ‘몰입형 미디어’ 같은 전시로는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눈을 가까이 갖다댔을 때 보이는 화면의 질감과 세세한 표현은 원화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프랑스 파리의 화려한 시절 활약한 화가들의 유화를 직접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파리시립근대미술관 소장품 90여 점을 소개하는 ‘피카소와 큐비즘’ 전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06년 시작된 입체파 시대 110주년을 기념해 3년 전 기획됐다. 시기별로 구성된 전시는 폴 세잔의 풍경화 두 점으로 시작한다. 서양화의 전통적 원근법을 무시하고 해체하듯 그린 세잔의 풍경은 후대 화가들에게 충격을 줬다. 세잔 회고전을 본 피카소와 브라크도 그의 영향으로 한 그림에 여러 시점을 넣은 ‘입체파’ 그림을 그린다. 입체파의 기원을 소개하는 첫 번째 전시관은 피카소는 물론 앙드레 드렝, 라울 뒤피 등 그의 영향이 뚜렷이 보이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피카소는 “세잔은 우리 화가들의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전시 총감독인 서순주 박사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으로 꼽은 두 번째 전시관은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파 회화를 만날 수 있다. 이 때만해도 두 화가는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입체파 회화를 연구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서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화풍이 비슷하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감에 모래를 섞거나 신문지를 오려 붙이는 등 나름의 실험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뒤로 이어지는 전시관은 후대 입체파 화가들의 경향을 보여준다. 마르셀 뒤샹의 맏형인 자크 비용, ‘입체파’ 책을 쓴 알베르 글레즈와 장 메챙제의 작품 등을 선보인다. 입체파의 영향 아래 각 작가들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다. 마지막에 전시된 로베르 들로네, 소니아 들로네 부부의 대형 회화 4점은 80년 만에 파리시립근대미술관 밖으로 나온 작품들이다. 거대한 규모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사용할 수 없어 지게차를 동원했고, 설치를 위해 보존 전문가 2명이 투입됐다고 한다. 이들 그림은 1938년 튈르리 살롱전 조각실을 장식하기 위해 전시 조직위원회가 의뢰한 것들로, 이듬해 파리시에 기증돼 파리시립근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피카소 작품보다는 입체파의 다양한 면면을 알고 싶은 관객에 적합한 전시다. 3월 31일까지.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는 피아니스트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의 펜트하우스에 살며 포크와 나이프 없이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그의 운전사 토니 발렐롱가(비고 모텐슨)는 가진 것이라곤 허풍과 주먹뿐. 운전할 때 한 손으론 프라이드치킨을 뜯어먹고 남은 뼈는 창문 밖으로 휙 던져 버린다. 돈 셜리는 흑인, 토니는 백인이다. 1962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린 북’은 돈 셜리가 남부로 투어를 떠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시 미국 남부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길에서 얻어맞는 곳이었다. 위험한 상황에도 투어를 결심한 돈 셜리는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두 사람의 여정은 고정관념의 정반대 그 자체다. 토니는 흑인 밑에서 일하는 게 어색하고, 돈 셜리도 토니를 의심하긴 마찬가지다. 토니가 기념품 가게의 물건을 슬쩍하다가 발각되는가 하면,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영어를 쓰다가 돈 셜리에게 지적을 받는다. “연주회에서 함께 소개할 때 그런 억양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흑인의 억양이 교정 대상이다. 토니는 도로에서 화장실을 찾는 돈 셜리에게 “그냥 길에서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토니는 돈 셜리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점차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공연장에서는 귀족이지만 길거리에서는 ‘깜둥이’에 불과한 혼란스러운 삶 속에 놓인 돈 셜리의 외로움도 보이기 시작한다. 흑인인데 치킨도 안 먹고, 재즈도 연주하지 않는 희한했던 돈 셜리는 사실 백인 사회에도 흑인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두 인물의 인간적 우정을 그린 수작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 역할을 맡았던 모텐슨의 완벽한 연기 변신도 돋보인다. 발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쓱쓱 닦고 침대에 눕는 생활 연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알리는 돈 셜리의 귀족 같은 외양 안에 숨겨진 고독을 절제된 연기로 보여줘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린 북’은 각본상, 영화-뮤지컬코미디 부문 작품상까지 받으며 골든글로브 3관왕에 올랐다. 9일 개봉. ★★★★(★ 다섯 개 만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한국계 배우 샌드라 오(48)가 아시아계 최초로 진행을 맡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새 역사를 썼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6일(현지 시간) 열린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샌드라 오는 BBC 아메리카 TV드라마 ‘킬링 이브’에서 맡은 이브 폴라스트리 역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06년 ‘그레이 아나토미’의 닥터 양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데 이어 두 번째다. 아시아계 배우가 처음으로 골든글로브 트로피를 두 번이나 거머쥐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날 코미디언 앤디 샘버그와 함께 사회를 맡은 샌드라 오는 시상식을 시작하며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려웠지만, 여러분과 만나고 변화의 순간을 목격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변화란 ‘블랙팬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블랙클랜스맨’ 등 유색인 연출자와 배우가 대거 참여한 작품이 여러 부문에서 후보에 오른 것을 말한다. 그가 언급한 변화의 순간은 곧바로 현실이 됐다.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샌드라 오가 호명되자 아버지 오준수 씨가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샌드라 오는 감격한 듯 “오 아버지!”라고 외치며 제작진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어 “이 자리에 와 계신 어머니 아버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후 한국어로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시아계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1981년 NBC ‘쇼군’의 배우 요코 시마다 이후 38년 만이다. 샌드라 오는 캐나다 이민 1세대인 한국인 부부 오준수 씨와 오영남 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한국 이름은 ‘오미주’다. 샌드라 오의 부모는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연기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록 밴드 ‘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영화-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해 2관왕에 올랐다. 프로듀서 그레이엄 킹은 “진정한 자아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의 용기에 감사를 표한다”고 밝혔다. 프레디 머큐리를 연기한 배우 라미 말렉은 “너무 감동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며 “평생 기억할 만한 스릴을 경험하게 해준 머큐리에게 감사한다”고 밝혔다. 시상식에서 퀸의 브라이언 메이도 말렉의 옆자리에 앉았다. 일각에서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성폭력 혐의로 하차한 ‘보헤미안…’의 수상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넷플릭스의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콘텐츠 ‘블랙미러: 밴더스내치’가 최근 공개돼 화제다. 1984년이 배경인 ‘밴더스내치’는 주인공인 프로그래머가 동명 소설을 토대로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은 정해진 시간 내에 비디오게임을 만들어 납품해야 하지만 여러 장애물을 만나고,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결말을 맞는다. 영국 가디언은 “미래형 드라마가 등장했다”며 별점 4개를 줬고, 넷플릭스는 “스토리까지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시청 선택권을 넓혔다”고 주장한다. 정말 이야기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지 따져봤다.● 내용보다 매력적인 형식 ‘밴더스내치’는 선택 방법을 알려주는 화면으로 시작된다. 영상 아래쪽 자막이 양쪽에 등장하고, 사용자는 두 선택지 중 하나를 10초 내에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아침 식사를 위해 테이블에 앉으면 시리얼 ‘슈거 퍼프’와 ‘프로스티’ 가운데 선택하는 화면이 등장한다. 이 선택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초반에 나오는 시리얼 선택이나 버스에서 음악을 선택하는 장면은 큰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선택에 따라 주인공의 행동이 바뀌는 재미가 몰입감을 높인다. 만약 게임기와 연결해 콘텐츠를 감상한다면 컨트롤러에서 진동까지 전해진다. 극 중 주인공은 점점 누군가가 자신을 조종한다는 의심에 휩싸이고 “대체 누가 나를 조종하는 거야!”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직접 시청한 김유빈 씨(29·여)는 “육성시뮬레이션 게임의 대표작인 ‘프린세스메이커’를 하는 기분으로 결말까지 봤다”며 “형식이 신선해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스토리 결정이라기엔 제한된 선택권 아쉽게도 선택의 재미는 오래가지 않는다. 정해진 선택을 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게임회사인 ‘터커소프트’로부터 사무실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는데, 제안을 받아들이면 다른 프로그래머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말하고 이야기는 초반으로 돌아간다. 선택권이 주어져 있지만, 이야기가 짜인 대로 선택하지 않으면 다음 내용을 볼 수 없는 셈이다. 박상용 씨(30)는 “처음 보는 스타일이라 신선했지만,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길 3번 반복한 뒤엔 그냥 꺼버렸다”고 했다. 물론 결말이 하나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제작진 공식 발표에 따르면 5가지 결말이 있다. 선택에 따라 러닝타임은 5시간까지 길어질 수 있다. 이 모든 게 할리우드의 영화 촬영이라는 ‘허망한’ 마무리도 있다. 게다가 내용의 재미를 떠나서 선택권 자체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중간중간 긴장감이 끊기는 한계도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밴더스내치’를 비롯해 다양한 체험형 콘텐츠가 영화나 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하는 현상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에서도 tvN ‘알함브라의 궁전’이나 영화 ‘PMC: 더 벙커’ 등의 콘텐츠는 체험과 몰입을 강조한 게임의 형태를 차용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아직 ‘대세 콘텐츠’로 보기는 어렵고, 일종의 테스트 성격이 강한 작품이 많다고 본다”며 “이번 작품에 대한 시청자 반응을 통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지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 kimmin@donga.com·신규진 기자}

“100년 전 오늘, 프랑스에 종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지만…오늘도 오래된 악령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파시즘은 애국주의에 대한 배신입니다.” 지난해 11월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행사. 단상에 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세계에 번지는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경고했다. 전 세계 85개국 지도자가 참여한 이 자리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참석했다. 마크롱의 연설을 중계하던 카메라는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얼굴을 번갈아 비췄다.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게 사실이라면 세계가 마주한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길 잃은 경제는 끝없는 불황을 예고하고, 극우파 정당의 부상은 극심한 충돌의 전조 같다. 100년 전 세계가 겪은 고통과 환멸을 기억하고, 냉정하게 그 원인을 따져야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탐미주의 문학가이자 난폭한 선동가였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1863∼1938)의 일생을 추적한다. 단눈치오는 이탈리아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휩싸이기 직전 등장한 인물이다. 당시 ‘미래파 선언’을 한 예술가 필리포 마리네티도 “쾌락을 주는 그의 재능은 가히 악마적”이라고 평했다. 저자는 이러한 단눈치오의 기록을 모아 새로운 서사를 창조한다. 수십 년을 오가며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인물의 여러 단면은 그가 단순한 악인이 아닌 치명적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지금도 누구나 그 덫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단눈치오가 선동가로 변하는 과정을 보면, 파시즘은 예외적인 광기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니체, 바그너 등 유럽의 지적·사회적 삶에 뿌리내린 경향에 대한 겹겹이 쌓인 오독이 유기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임을 깨닫게 된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일제강점기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냈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유지를 이어받은 간송미술관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특별전 ‘대한콜랙숀―대한의 미래를 위한 컬렉션’을 4일 개최한다.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간송이 일제에 대항해 모으고 지킨 최정상급 문화재를 한데 모았다. 친일파의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경성미술구락부 경매를 통해 지켜낸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 등 국보 및 보물 14점을 비롯해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추사 김정희 글씨 등 6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은 크게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첫 번째 공간 ‘알리다’는 무료로 공개하는데, 5년간 DDP에서 열렸던 간송미술관 전시를 갈무리한다. ‘전하다’는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보성고보를, ‘모으다’는 보화각(간송미술관의 전신)을 소개한다. 한만호 간송미술문화재단 실장은 “역사적 의미를 보여주는 ‘히스토리 텔링’에 집중해 문화재 실물은 물론 그 뒤에 얽힌 비화도 자세히 담았다”고 설명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영국 수집가 존 개즈비 컬렉션을 전시한 다섯 번째 공간 ‘되찾다’다. 일본 주재 변호사이자 도자기 수집가였던 개즈비가 모은 고려청자 20점을 만날 수 있다. 중국에서도 신비롭다며 ‘비색’이라고 불렸다는 옅은 초록색에 세련된 감각으로 장식된 고려시대 청자들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다. 고미술 수집가에게 꿈의 컬렉션이었던 개즈비 컬렉션을 간송은 대대로 내려온 충남 공주 일대 1만 마지기 땅을 팔아 인수했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축구장 하나가 대략 10마지기 정도다. 간송 측은 개즈비의 후손을 찾으려고 최근까지 노력했지만, 그의 행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간송 하면 떠오르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도 이번 전시에 모습을 드러낸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와 굽으로 이어지는 도자기의 유려한 곡선. 옥처럼 깊은 청색의 몸체를 새하얀 학과 구름이 가득 채운 걸작 중의 걸작. 일제강점기 개성 근교에서 발견돼 총독부박물관도 탐을 냈지만, 당시 서른도 안 된 청년 간송이 거금 2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1935년 기와집 20채 가격이었다. 한편 이번 전시는 2014년부터 DDP에서 열린 간송미술관의 마지막 전시다.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이 문을 열기 전까지 소장품은 다시 볼 수 없다. 전인건 간송미술관장은 “대중을 위해 DDP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어느 정도 목표가 충족됐다고 본다. 가능하면 올가을부터 성북동에서 다시 관람객을 맞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3월 31일까지. 8000∼1만 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회화 작품도, 조각 작품도 없다. 커다란 베틀이 덩그러니 놓여 관객을 맞이할 뿐이다. 그 왼쪽에는 이 베틀로 천을 만든 공방 직원이 활짝 웃는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리고 있는 ‘애니 앨버스’ 회고전 전시장 입구의 독특한 풍경이다. 모더니즘 예술가 애니 앨버스(1899∼1994)의 전시장에 베틀이 등장한 이유는 그녀의 예술 재료가 바로 실과 천이기 때문이다. 남성 예술가가 물감으로 추상화를 그렸다면, 앨버스는 도안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베틀로 실을 엮으며 천으로 추상 예술을 했다. 전시장 입구를 지나자 액자 속 그림 대신 다양한 색깔과 패턴의 직물이 나타났다. 가방과 스카프, 카펫에서 볼 수 있는 패턴 있는 천을 액자에 넣어 벽에 세로로 걸자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보였다. 관객들은 리드미컬하게 배치된 색면과 실의 매듭으로 꼬불꼬불 그려진 선을 따라가며 새로운 추상화를 마주했다. 실로 엮은 이 천들이 어떻게 예술 작품이 된 걸까? 답은 20세기 유럽의 특수한 상황에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고대 문명의 발견, 다윈의 ‘종의 기원’ 발간 등으로 종교와 철학 전통이 흔들렸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은 환멸을 가져왔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과거와 결별하고 예술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따졌다. 예술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앨버스는 “실 자체의 형태를 찾겠다”며 ‘직조 회화(pictorial weaving)’를 만든다.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걸어놓고 보기 위해 만든 직물들은, 실과 천 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한 결과물이었다. 앨버스의 첫 영국 대규모 회고전인 이 전시는 여성 예술가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에서 비롯됐다. 앨버스는 최근까지 디자이너로 분류되거나 남편인 화가 조지프 앨버스와 함께 거론되곤 했다. 남성의 그늘에 가려진 그녀의 예술 세계는 300여 점의 작품을 통해 깊이를 드러냈다. 낯선 소재인 만큼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큐레이팅도 돋보인다. 전시장의 시작은 베틀로, 마지막에는 다양한 실을 만져볼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가장 붐볐던 이곳 전시관에서는 손으로 촉감을 경험하는 관객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일생에 걸친 앨버스의 탐구는 고대 페루의 화려한 카펫으로 이어졌다. 말년의 앨버스는 삶에서 뿜어 나온 고대인들의 강렬한 시각 언어에 탐닉했다. 그녀의 기하학적 천과 원시적 카펫의 대조는 결국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현대인의 몸부림을 드러내고 만다.런던=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생물일까, 외계에서 떨어진 괴물일까. 서울 관악구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여성의 일: Matters of Women’에서 공개된 장파 작가의 드로잉 연작 ‘Brutal Skins’. ‘뭘 봐’ 하는 눈초리로 노려보는 것 같은 그림 속 물체들은 도톨도톨한 돌기가 솟아 세포나 신체 기관을 생각나게 하고, 알록달록한 색채는 어린아이 장난감도 같다. 그림 앞에 선 작가에게 “도대체 뭘 그린 것이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난감한 듯 웃던 장 작가는 답했다. “여자로서 겪는 신체적 감정, 구체적으로는 생리할 때의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이 전시는 여성 작가 11명의 작품을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지난해부터 여성주의 운동이 격렬해진 가운데, 전시는 한 발짝 물러나 여성이 겪는 문제와 상황을 예술로 조망한다. 전시 제목의 ‘일’은 ‘work’가 아닌 전반적인 문제, ‘matter’를 일컫는다. 낯설고 기괴하지만, 찬찬히 보면 귀여운 정 작가의 작품은 사회가 얘기하지 않았던 것들을 발랄하게 나타낸다. 여성의 몸이 겪는 감각은 종종 은유적 단어 뒤로 숨겨지곤 한다. TV속 생리용품 광고에서 ‘그날’이나 ‘마법’ 등의 단어를 사용하듯 금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감각을 낱낱이 기록한 작품은 무심코 지나쳤지만 늘 겪고 있던 감정을 돌아보게 한다. 상징적이고 시적인 드로잉으로 주목받는 작가 ‘고등어’의 ‘엷은 밤’ 시리즈는 남성의 욕망을 관찰한 일기다. 연작 속 남자는 자신과 닮은 석상을 메고 다니다 환상을 마주하며 점점 소멸된다. 자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헛된 욕망을 좇는 남성을 향한 냉소적인 시각이 흥미롭다. 2000년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퍼포먼스의 흔적과 기록도 만날 수 있다. 여성 예술가 8인이 결성한 그룹 ‘입김’은 종묘를 ‘유교적 가부장주의의 상징’으로 규정하고 여성미술축제를 열지만 전주 이씨 종가의 반발로 행사 당일 출품작이 파손되고 철거됐다. 이후 3년간 이어졌던 법정 공방의 기록도 함께 전시된다. 윤동천 서울대미술관장은 “다양한 체감을 빚어낸 작품을 통해 여성의 삶을 고찰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다음 달 24일까지. 2000∼3000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평범한 대사도 생명력을 불어넣어 맛깔스럽게 살려 주는 배우.” 영화 ‘말모이’의 엄유나 감독은 배우 유해진을 이렇게 칭찬했다. 내년 1월 9일 개봉될 예정인 ‘말모이’는 영화 ‘택시운전사’ 각본을 썼던 엄 감독의 첫 연출 작품. 1940년대 경성이 배경으로 우리말 사용과 교육이 금지된 시절, ‘말모이’(우리말 사전 편찬 사업)를 했던 조선어학회를 그렸다. 유해진은 까막눈으로 살다가 조선어학회를 통해 글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김판수를 연기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김판수 캐릭터를 “기억에 큰 인상으로 남아있는 동네 아저씨를 모델로 했다”고 설명했다. “키는 165cm 정도에, 목이 굵고 땅땅한 체형이었죠. 항상 불만이 가득해 싸움을 붙이려 하고, 만날 침 뱉던 아저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해진이 김판수를 이런 인물로 그린 건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성격의 소유자기 때문이다. 전과자인 그는 극장에서 일하다가 소매치기와 공모한 것이 발각돼 해고당한다. 중학생 아들의 밀린 월사금을 구하려 도둑질까지 일삼는 그가 감옥소 동기로 만난 조선어학회 조갑윤 선생(김홍파)의 도움으로 학회 사환으로 취직한다. “참 이상한 놈”인데, 글을 몰라도 말은 또 청산유수다. “현장에서 대사에 쓸 ‘찰떡’같은 표현을 찾으려 많은 고민을 했어요. 예를 들어, 딸로 출연한 순이를 표현하자면 이렇게 생각해요. ‘솜사탕인가? 어유, 솜사탕은 너무 세련됐어. 그럼 인절미? 아, 콩고물은 어떨까?’ 하며 여러 단어 중 어울리는 말을 찾아가는 거죠.” 머리로든 몸으로든 납득이 될 때까지 ‘왜?’라고 묻는다는 그의 집요함은 연극 무대에서 시작했다고. 유해진은 “존경했던 선생님이 무대에 서기 전 ‘늘 스스로를 의심하라’고 했다”며 “내가 모르고 대충 하면 관객도 금방 눈치 채기 때문에 끝까지 질문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 덕분에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유해진 표 애드리브’를 적절하게 선보인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다지를 캐면 황소를 사고, 노다지를 캐면 술을 사먹자’고 흥얼거리는 노래도 직접 작사, 작곡했단다. “지문에는 ‘콧노래를 흥얼거린다’라고 나와 있었어요. 가만히 그 시절 분위기를 상상하니 ‘노다지’와 ‘소’가 떠올랐습니다. ‘재산이 있으니 소를 사고 남는 건 술을 사먹어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유해진은 최근 한 시사회 현장에서도 윤계상과 다시 연기한 소감을 “우리는 드립 커피 같은 관계”라고 표현해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는 “그냥 개그가 아니라 ‘아재 개그’라고 불러 좀 섭섭했다”며 웃었다. “신년 벽두를 아침이라 보면, 너무 자극적인 음식보다 ‘말모이’ 같은 순한 음식을 든든히 먹고 출발하는 게 나쁘지 않다”는 추천사도 덧붙였다. 2019년 새로운 해를 맞는 심경은 어떨까. 그는 “세월이 너무 빨라 삐쳤다. 나이 먹을수록 시간이 빨라진다는데 뭔가 문제가 있다. 아무래도 우주의 질서가 바뀐 것 같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열심히 살면 ‘아유∼, 오늘 하루 너무 길지 않았니?’라고들 하잖아요? 시간을 천천히 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계속 열심히 살겠습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코언 형제가 연출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년)는 첫 장면부터 충격이다. 주인공 안톤 시거가 우연히 들어간 가게 주인의 목숨을 걸고 동전 내기를 한다. 타인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사이코의 모습이지만, 한편으론 언제고 깨질 수 있는 규칙의 살얼음판에 있는 인생을 빗댄 냉소적 은유다. 신뢰의 본질을 들춰낸 이 책은 ‘노인을…’을 떠오르게 만든다. 연구를 통해 밝혀진 신뢰는 도덕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자원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이 신뢰를 만든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일수록 평균적 신뢰도가 낮다. 이미 많은 걸 갖고 있기에 신뢰와 협력을 잃어도 괜찮기 때문. 오랫동안 신뢰한 사람이 한순간에 등을 돌리는 것도 그 본질을 알면 덜 충격적이다. 저자는 신뢰가 상대방의 욕구를 가늠하고 던지는 도박과도 같다고 설명한다. 이런 신뢰의 속성을 잘 알아야 부패를 막을 수 있다는 조언은 이기주의와 국가주의가 전 세계에 퍼지는 지금 꼭 필요한 이야기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반항아(rebel), 그러나 전략을 가진 반항아.’ 22일 개막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마르셀 뒤샹’전의 큐레이터 매슈 애프런은 20세기 현대미술의 문을 연 마르셀 뒤샹(1887∼1968)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뒤샹의 작품과 기록, 사진 15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뒤샹 초기부터 말년 작품까지 시간 순서대로 구성된다. 일본 도쿄, 서울에 이어 호주 시드니를 순회하는 전시를 위해 뒤샹의 삶과 예술 전반을 보여주는 작품을 엄선했다. 초기 회화부터 ‘샘’, ‘병걸이’ 등 레디메이드와 후기 미니어처, 조각은 물론 최후의 작품인 ‘에탕 도네’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애프런 큐레이터를 만나 ‘뒤샹’전 관람 포인트를 짚어봤다. 그는 뒤샹이 규칙을 파괴하는 과정이 마치 체스 게임 같다고 설명했다. 뒤샹은 실제로도 프로 체스 선수였다. “뒤샹은 26세에 회화를 그만두고 ‘레디메이드’를 발명하죠. 체스 선수가 된 뒤엔 ‘에로즈 셀라비’라는 가명으로 예술을 합니다.” 이후 착시나 조각을 활용하는 전반적 과정이 매우 논리적이라고 했다. “한 수를 두고, 다음 무엇을 할지 가늠한 뒤 또 과감한 수를 두는 식이죠. 그래서 작품을 순서대로, 맥락 안에서 봐야 더 이해가 쉽습니다.” 뒤샹은 미술관에 변기를 갖다 놓고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인 파격성, 도발성으로 흔히 기억된다. 그러나 애프런은 그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전략가이자, 20세기의 중요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 사상가라고 설명했다. “파격은 당시 예술가가 즐겨 쓴 방법이에요. 입체파, 다다 예술 모두 충격으로 관객의 주목을 끌었죠. 이걸 누구보다 잘했던 게 뒤샹이지만, 충격뿐이었다면 그 의미가 지속될 수 없었을 겁니다.” 뒤샹이 던진 미학적 질문은 ‘손으로 만드는 예술’의 정의를 깨는 것, 아이디어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레디메이드 작품 대부분은 1950년대 그가 유명해진 뒤 다시 만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아닌 아이디어였기 때문이다. “뒤샹은 작품이 한곳에 모이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1940년대 미술관이 작품 소장을 시작할 때, 전시와 도록 디자인에도 직접 참여했습니다. 후원자인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작품 구입도 조언했죠. 작품 수가 적고, 맥락이 중요하기에 흩어지지 않아야 후대가 이해한다는 걸 잘 알았습니다.” 아렌스버그 부부는 1946년 작품 대부분을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 작품을 보러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관객이 필라델피아를 찾는다. 애프런은 작품 교체를 위해 갤러리를 닫을 때마다 아쉬워하는 외국인 관람객을 만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뒤샹이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을 찾게 된 것이 더욱 뜻깊다고 했다. “도록을 젊은 관객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저렴하게 만들었습니다. 뒤샹을 직접 만나고 싶다면 뒤편의 인터뷰를 먼저 보길 권합니다. 그리고 더 깊이 알고 싶다면, 꼭 필라델피아로 오세요!” 내년 4월 7일까지. 4000원.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