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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로(YOLO) 같은 생각을 가지면 절대 안 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어려움을 물려주지 않으려 노력한 걸 기억해 보세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73)이 ‘욜로족’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건넸다. 반 전 총장은 7일 오후 3시 고려대(총장 염재호) 백주년기념관 국제원격회의실에서 열린 특별 강연에서 청년들이 자신의 행복과 안위만 생각하는 걸 염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욜로는 삶의 어젠다가 될 수 없다. 미래 지향적인 어젠다를 가진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욜로는 ‘인생은 한 번뿐이다(you only live once)’의 영문 앞 글자를 딴 표현이다.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맞춰 소비하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이날 강연 주제는 ‘유엔과 글로벌 리더십’. 반 전 총장은 약 1시간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겪은 일화를 예로 들며 리더의 덕목을 설명했다. 그가 가장 강조한 덕목은 ‘경청’이었다. 그는 “말을 잘하는 건 지식의 원천이지만 잘 듣는 것은 지혜의 원천이다. 수많은 세계 지도자에게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라고 했지만 대부분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민의 말을 듣지 않으니 우리나라에서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 전 총장은 또 “머리는 구름에 두고 발은 땅에 디뎌야 한다. 이상을 가지고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길 때는 꿋꿋하게 밀고 나가야 하지만 현실 감각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2008년 독재 국가였던 미얀마가 사이클론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비판을 무릅쓰고 방문했던 일을 언급했다. 그는 “(독재 국가를 방문한다는) 서방 언론의 가혹한 비판이 있었지만 옳다고 생각한 일이기에 꿋꿋이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헛된 이상만을 가지면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며 현실적인 감각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다. 강연 후 “유엔 사무차장이 방북 중인데 북핵 해결에 유엔 개입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반 전 총장은 “북핵은 결국 한반도에서 한국과 북한, 미국과 중국이 깊이 협의해야 하는 문제다. 전문 상식을 갖고 외교에 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강연에는 염재호 총장과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자리가 부족해 바닥에 앉거나 서서 듣는 참가자도 있었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학생들이 몰리기도 했다. 한편 반 전 총장은 이날 강연 전 서울 중구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찾아 성금 1억 원을 전달했다. 그는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1676번째 회원이 됐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손인 이구(李玖·1931∼2005)의 전 부인인 줄리아 리(본명 줄리아 멀록)가 노환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94세. 이구의 9촌 조카인 이남주 전 성심여대 음악과 교수는 6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줄리아 리가 지난달 26일 미국 하와이 할레나니 요양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줄리아는 고종의 손자이자 영친왕 이은(1897∼1970)과 이방자 여사의 외아들인 이구의 전 부인이다. 황태손인 이구는 1950년 미국으로 건너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건축가로 활동하다 8세 연상의 줄리아를 만나 1958년 결혼했다. 둘은 영친왕의 요청으로 1963년 한국에 들어와 서울 창덕궁 낙선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손재주가 많았던 줄리아는 낙선재에 바느질방을 차리고, 장애인을 위한 기술 교육도 했다. 이 교수는 “당시 두 사람은 금실 좋은 부부의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시련의 시간이 찾아왔다. 한국에서 이구의 사업이 번번이 실패했다. 종친회는 외국인인 줄리아를 태손빈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종용하기도 했다. 결국 둘은 1977년 별거를 시작해 1982년 이혼했다. 이후 이구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줄리아는 한국에서 홀로 ‘줄리아 숍’이라는 의상실을 운영하다가 1995년 하와이에 정착했다. 2000년엔 한국에 잠시 돌아와 그동안 간직해 오던 조선 왕가의 유물과 사진 450여 점을 덕수궁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줄리아는 2005년 이구가 일본에서 숨진 채 발견된 후 서울에서 치러진 장례식장에 초대받지 못했다. 모자를 눌러쓴 채 휠체어에 앉아 먼발치에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이 교수는 “줄리아가 따로 이구를 위한 분향소를 마련해 추모 미사를 드리는 등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생전에 줄리아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 낙선재나 이구의 묘에 유골 일부를 뿌려 달라고 할 만큼 한국과 이구를 끝까지 그리워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사후에도 재회하지 못하게 됐다. 이구의 묘는 고종과 순종이 묻힌 경기 남양주 홍유릉 영역에 마련됐지만 줄리아의 유해는 딸이 홀로 수습하느라 화장한 뒤 태평양 바다에 뿌려졌다.유원모 onemore@donga.com·최지선 기자}

“오늘부터 실내에선 금연입니다.” 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스크린골프장에 “실내에서 정말 담배를 피울 수 없느냐”고 묻는 고객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매장 매니저 황모 씨(27)는 “금연구역 확대 소식을 듣고 흡연부스 제작을 맡겼는데 주문이 밀려 어제 오전에 설치했다”며 “3주 전부터 금연구역이라는 포스터를 붙였는데 흡연 관련 문의를 한 고객이 50명은 넘는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3일부터 실내 체육시설을 금연구역으로 지정하는 국민건강증진법 개정안이 본격 시행된다고 밝혔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전국 스크린골프장과 당구장 등 실내 체육시설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전자담배도 마찬가지다. 금연구역 안내 표지판이나 스티커를 부착하지 않으면 해당 시설 업주는 과태료 500만 원에 처한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과태료 10만 원을 내야 한다. 3일부터 3개월 동안 계도기간을 거쳐 내년 3월 3일부터 본격 시행한다. 이날 방문한 스크린골프장과 당구장 10곳은 모두 ‘이곳은 금연구역입니다. 흡연 시 과태료 10만 원 부과’라고 쓰인 금연 스티커를 붙여 놨다. 업주들은 울상이다. 종로구에서 60평 규모의 당구장을 운영하는 김모 씨(42)는 “담배 피우면서 당구를 치고 자장면을 시켜 먹는 재미로 오는 손님이 많다. 매출이 줄어들까 봐 걱정이다”고 말했다. 흡연 부스 설치 비용도 만만치 않다. 한 평 규모로 흡연 부스를 만들려면 70만∼100만 원이 든다. 서울 도봉구에 방 13개 규모의 스크린골프장을 운영하는 최모 씨(63·여)는 “흡연실 3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공사비용만 수백만 원이 들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용객들은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종로구 스크린골프장을 찾은 양동은 씨(34)는 “(스크린골프장이) 놀면서 담배를 피우는 최후의 보루였는데 아쉽다”면서도 “흡연 부스가 있어서 조금 번거로운 점만 감수하면 된다”고 말했다. 3개월의 계도기간에는 과태료가 부과되지 않아 마지막으로 담배를 마음껏 피우겠다는 이용객도 있었다. 이날 스크린골프장과 당구장 등에서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서울 양천구의 한 스크린골프장을 찾은 유모 씨(60)는 “실내에서 문 닫고 피우는 것까지 안 된다니 너무하다”며 “계도기간에는 종이컵을 재떨이 삼아 담배를 마음껏 피울 것”이라고 했다. 스크린골프장 주인 이용명 씨(43)는 “재떨이는 치웠지만 아직 과태료가 부과되지 않는 계도기간이라서 고객에게 밖으로 나가서 피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고귀하고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 태아는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로 독자적 생존능력이 있다.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지 않는다.’헌법재판소가 2012년 “낙태죄 합헌” 결정을 하며 제시한 근거입니다. 헌재의 결정대로 낙태 대신 출산을 선택한 여성들은 당시 판단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동아일보 취재팀은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는 비혼모(非婚母) 3명을 만났습니다. 세 명 모두 “아이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이 고귀한 만큼 태어난 이후의 생명도, 아이를 낳은 엄마의 인생도 중요한 것 아니냐”고 하소연합니다. 이들의 말처럼 아빠 없는 아이들과 비혼모의 척박한 삶을 외면한 채 생명의 고귀함만 강조하는 건 설득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내년 초 헌재는 6년 만에 낙태죄 위헌 여부를 다시 논의할 예정입니다. 비혼모 3명이 가상의 헌재 증언대에 섰습니다. 하루하루 맞닥뜨린 현실에서 우러난 이들의 증언을 함께 들어보시죠.○“고귀하고 존엄한 생명권을 침해할 수 없다.”존경하는 헌법재판관님. 5년 전 재판관님들께서는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태아를 함부로 할 수 없어 낙태죄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않으셨습니다. 3년 전 겨울까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2014년 12월, 눈에 보이지 않는 심장소리를 들었습니다. ‘쿵, 쿵.’ 제발 임신이 아니길 기도하며 병원에 들어갔던 저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무조건 낳아야겠다.’ 남자친구와는 아이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 내 안에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2015년 8월 희찬(가명·3)이를 낳았습니다.그런데 태어난 희찬이는 ‘고귀하고 존엄한’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무시 받고 천대 받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희찬이를 또래 아기들과 놀게 하면서 자연스레 엄마들과 친해졌습니다. 그 중 저와 성격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한 엄마에게 제가 비혼모라는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그 후 희찬이에게서 친구들이 사라졌습니다. 저를 빼고 다른 아기 엄마들끼리 시간을 맞춰 놀기 시작했습니다. 차마 화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죄 없는 희찬이가 제가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비슷한 처지의 선배 비혼모들에게 넌지시 물어봤습니다. 한 아이 엄마는 서울살이가 버거워 고향에 내려가려다 “시집도 안 간 게 애 놓은 게 뭐 자랑이라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오려고 하노”라는 숙모의 말에 귀촌을 포기했답니다. “가족들도 저렇게 생각하는데 남들은 어떻겠어.” 그 엄마가 덧붙였습니다. “누구한테 먼저 미혼모라는 이야기 하지 마, 자기와 아이만 상처받아.”심지어 저희 엄마, 희찬이의 외할머니는 제 아이의 존재 자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결혼하지 않을 남자와의 사이에 생긴 아기를 낳겠다는 이야기에 엄마의 첫마디는 “미쳤구나”였습니다. 엄마는 지금껏 제 아이를 한 번도 본 적도, 물은 적도 없으십니다. 제 엄마에게 희찬이는 ‘없었으면’ 하는 생명입니다.33년 동안 부모님께, 연인에게,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존중받는 사람이었던 저 역시 ‘더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10년 지기 친구에게 임신을 털어놨습니다.“야 그건 좀…미혼모는 사회 최하층 사람들이잖아.” 아기를 낳은 뒤 연락이 끊겼습니다. 친구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 희찬이의 발달이 약간 늦어 병원에 검진을 갔을 때 받은 눈빛. “사실 제가 미혼모라, 애기가 아빠랑 놀아본 적이 없거든요…”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고 타이핑을 치던 레지던트가 그 순간 절 쳐다봤습니다. 그 눈빛은 제가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게 무서워지자 집에 처박혀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자려고 누워 있으면 숨이 막히면서 땀이 뻘뻘 납니다. 사실 저는 저와 희찬이 모두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희찬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저희 모자는 어딘지 모르게 가깝게 하기 싫은, 불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와 제 아이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집에 갇혔습니다. ○ “태아는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로 독자적 생존능력이 있다”존경하는 재판관님. 2012년 낙태가 죄라고 결정 내려졌던 그 때 제 아이는 아홉 살이었습니다. 재판관께서는 “뱃속의 아기가 살기 위해서는 엄마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엄마와는 별개로 생존 능력이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낙태는 죄”라고 하셨죠. 하지만 제 아이는 태어났을 뿐, 태어난 뒤 9년 동안 아이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아빠도요.아이 아빠는 번듯한 직장에 집안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할머니 손에 자란 시골 여자인 저와 결혼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을 겁니다. 그는 만삭이 될 때까지 “낙태하면 너를 다시 만나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손 벌리지 않을게. 아이 데리고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게” 빌고 나서야 아이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출산하던 날에도 제 옆에 아이 아빠는 없었습니다.아이가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비혼모 시설을 전전했습니다. 제가 받은 돈은 기초수급비 32만 원 뿐. 아이를 위한 지원은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분유와 기저귀 물티슈 같은 아기 용품을 사고 나면 손에는 한 푼도 남지 않는 날이 많았습니다. 서울에는 친척이나 친구도 없어서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아이가 일곱 살 때는 일하던 공방에 돗자리와 이불을 깔아놓고 몰래 살았던 적도 있습니다. 불을 켜면 주인에게 들킬까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줬습니다. 아이의 시력이 나쁜 게 그 탓인가 아직도 자책합니다. 아이는 태어나기만 했을 뿐, 열세 살이 된 지금까지 저와 떨어져서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번호가 바뀌어 있었습니다.재판관님, 저는 홀로 아이 낳은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견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들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12주 된 태아의 생명은 소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세상에 나온 제 아들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이불 속에서 눈물지으며, 넉넉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묻고 싶습니다. 생명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그렇게 태어난 제 아이의 삶은 왜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는 것인가요? 그리고 저는 왜 이 아픔을 엄마라는 이유로 혼자 겪어야 하나요?○“임부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지 않는다.”재판관께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낙태죄로 인해 과도하게 제한되고 있지는 않다’면서 낙태를 허용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겨울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저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자기결정권’을 포기 당했습니다. 유진(가명·4개월)이를 낳은 건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눈을 찡긋하며 작은 손으로 제 손을 포갤 때가 숨통이 트이는 유일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은요? 일에 대한 성공도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희망도 어그러졌습니다.의류회사에서 원단 고르는 일을 했습니다. 승진을 앞두고 ‘임신 3주차’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년가량 만난 그 남자와는 결혼까지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임신한 저를 침대에서 밀어 떨어뜨리고 면전에서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전부터 폭언은 있었는데 그게 폭력으로 이어진 겁니다. 오만 정이 다 떨어진 저는 “아이는 지울 테니 헤어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아이를 지우면 낙태죄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더군요. 그러더니 “앞으로 만나는 남자마다 찾아가서 알릴 거다. 가장 비싼 변호사를 사서 널 괴롭힐 거다”라고 했습니다. 배는 점점 불러왔습니다. 5개월이 지나자 아이에겐 팔, 다리가 자라있었습니다. 수술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그 남자와 살거나 혼자 키워야 합니다. 어느 쪽이나 지옥 같았습니다. 그럴 바엔 죽어야겠다고 생각해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려고도 했습니다.회사에서는 민폐 끼치기 일쑤였습니다. 업무 집중도 안 되고 애꿎은 후배에게 화풀이도 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려 출산 휴가를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1년 넘게 입사를 준비했던 첫 직장이었습니다. 출산이 임박하자 남자는 태도를 바꿨습니다. “낳든지 죽이든지 네 맘대로 해라.” “애 핑계로 내 발목 잡을 셈이냐.” 저를 ‘꽃뱀’ 취급했습니다. 결국 비혼모 단체의 도움을 받아 홀로 유진이를 낳았습니다.출산 후 체중은 24kg이 늘고 부분 탈모까지 왔습니다. 젖 먹이느라 가슴은 처졌고 피부는 푸석해지고 기미가 올라옵니다. 열 달간 엄마가 될 몸과 마음의 준비를 못했기에 급격한 신체 변화에 우울증까지 왔습니다.재판관님, 아이를 낳고 4개월이 흘렀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된 저와 제 딸은 수급비 70만 원, 양육수당 15만 원으로 살아야 하는 극빈층입니다. 아이가 36개월이 넘으면 식비 지원이 끊긴다고 하더군요. 결혼도 안 하고 아이만 낳은 저를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까요? 재판관님, 제가 꿈꾸던 인생은 이런 게 아니었습니다.이지훈기자 easyhoon@donga.com김예윤기자 yeah@donga.com최지선기자 aurinko@dona.com}

《낙태란 어떤 경험일까요. 막연히 어두운 기억일 뿐일까요. 동아일보 취재팀은 낙태를 경험한 ‘남녀’에게 조심스럽게 그 때의 기억을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낙태는 합법과 불법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수술대에 누운 여성과 이를 지켜보는 남성 모두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내부자들, 낙태를 말하다’ 제3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낙태 남녀’의 이야기입니다.》1. ‘굴욕의자’에 앉자 눈앞에 분홍 커튼이… 냄비에 담긴 물에 미역을 넣고 가스불을 켜는 것으로 은정 씨(가명·24·여)는 ‘수술 준비’를 시작했다. 생전 먹지 않던 고등어조림도 만들었다. 인터넷에 나온 ‘산후조리에 좋은 음식’이었다. 밥솥에 김이 피어날 무렵 그는 자취방을 나섰다. 병원은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상가 건물 3층의 허름한 산부인과 앞에서 ‘전 남친’이 서성이고 있었다. 의사는 60대 남성이었다. 여의사이길 바랐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 남친’이 수소문해 겨우 찾아낸 ‘낙태 병원’이었다. “3주차여서 수술은 필요 없어. 주사나 서너 번 맞으면 돼.” 초음파 화면 속 ‘점’을 바라보던 20대 남녀에게 의사가 무심히 말했다. ‘점’이 태아였다. 비용은 45만 원. 반반씩 내기로 했다. 수술실 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정 씨는 ‘굴욕의자’라고 불리는 수술대에 앉았다. 양쪽 지지대에 종아리를 올리니 다리가 120도 각도로 벌어졌다. 상체는 뒤로 젖혀졌다. 배꼽 아래로는 분홍색 커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커튼 뒤에서 의사가 수술용 고무장갑을 끼는 듯 했다. 간호사는 주사기와 수술 도구를 만지작거렸다. 철과 철이 맞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살짝 따끔합니다.” 예리하고 차가운 금속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간호사가 쇠로 된 그릇에 뭔가를 떨어뜨리는지 ‘딸각’ ‘딸각’ 소리가 났다. 은정 씨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시술 일주일 전이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보름쯤 된 날이었다. 할 때가 됐는데 며칠 째 생리를 하지 않았다. 불안했지만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밤마다 꿈을 꾸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생리를 하며 안심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고 시내 번화가에 있는 편의점에 갔다. 진열된 임신테스트기 중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 그날 밤 은정 씨는 새벽을 기다리며 뒤척였다. 인터넷에서 ‘아침 첫 소변으로 테스트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답변을 본 적이 있었다. 잠을 보채다 눈을 떠보니 오전 5시. 테스트기의 조그만 네모 속 ‘두 줄’은 더없이 선명했다. 수술대에 누운 은정 씨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오십 오십일 오십이….’ “다 됐습니다. 내려오세요.” “벌써요?” “아기집 떨어질 때까지는 몸살 난 것처럼 아플 수 있습니다.” 병원을 나서는데 ‘전 남친’이 말했다. “다음부턴 혼자 올 수 있지?” “….” 은정 씨는 버스에서 홀로 오한에 떨었다.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초에 한기가 밀려들었다. 엄마 생각이 간절했지만 연락하지 않았다. 교회 권사인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은정 씨는 자취방에 오자마자 보일러를 틀었다. 오리털 점퍼를 꺼내 입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까 끓여놓은 미역국은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냉기가 가시자 고열이 왔다. 얼굴이 너무 뜨겁게 달아올라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은정 씨는 일주일 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속옷을 다 벗고 시술용 긴 치마를 입은 채 수술대에 올랐다. ‘점’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며 주사를 놓던 60대 남자 의사가 갑자기 표정을 찌푸렸다. “무슨 상한 냄새가 나네. 소독약 넣어야겠다. 걱정 마 학생, 추가비용은 안 받을게.” 의사의 말에 은정 씨는 수치심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주먹으로 아랫배를 마구 때렸다. 2주가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 ‘점’이 원망스러웠다. 은정 씨는 2년 전 그 일 이후 아직 ‘솔로’로 지낸다. 성관계는 물론 남자를 사귀는 것조차 꺼리게 됐다. ‘낙태 커밍아웃’도 얼마 전 친구 1명에게만 했다고 한다. 기자에게 털어놓은 이유에 대해 “다신 안 볼 사이니까요”라고 했다.2. 낙태한 연인,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2년 사귄 27살 동갑내기 연인이었다. 같은 집에 살며 밥을 지어 먹었다. 밤새 농담을 주고받았다. 예전 연인 얘기도 스스럼없이 나눴다. 결혼을 한다면 이 사람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하루는 유난히 어지럽고 속이 울렁였다. 그 사람과 날짜를 손으로 꼽아보다 멈칫했다. “임신인가?”“아니야. 임신한다고 바로 입덧하고 그러진 않아.”“어떻게 알아?” 그에겐 낙태 경험이 있었다.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 2명이 낙태를 했다고 한다. “임신이 아닐 것”이라는 그의 위로에 안도감과 함께 마음이 복잡해졌다. ‘옛날 일이니까…’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하지만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임신 했다”는 말에 그는 의외로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낳자. 좋은 아빠가 될게.” 내가 운영하던 가게는 매달 적자였다. 그는 학생이었다. 출산은커녕 낙태 비용도 빌려서 내야할 판이었다. 낳을 자신도 없고 낳고 싶지도 않았다. 서둘러 수술을 받기로 했다. “피임을 잘 했어야죠.” 의사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임신은 둘의 책임이지만 수술대에 오른 건 나뿐이었다. 둘이라고 생각했는데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았다. 수술 후 그와 함께 살던 집은 살얼음판이 됐다. 나만 피해를 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사람만 낙태 사실을 알고 있어 다른 곳에 화풀이할 수도 없었다. 그는 낙태 이전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안 하던 밥을 짓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미역국을 끓였다. 그러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나를 집에 두고 학교에 갈 때면 그는 죄인이 됐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화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누워있어야 되는데 너는 왜 그리 늦게 다니는 거야?” “…” “지금은 내가 1순위여야 하는 거 아니야?” “…” 그는 예전 여자친구에 대해 “히스테리가 심해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 역시 맞장구를 치며 함께 그 여자 흉을 봤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그 여성처럼 되어있었다. ‘왜 나만 힘들지’ 하는 생각에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뒤 그에게 한계가 왔다. 그날도 그는 서툰 솜씨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렸다. 하지만 매일 끓여오던 미역국이 빠져있었다. “미역국 한 끼만 더 먹고 싶어.” 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적당히 좀 해.”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우리가 서로 뒷걸음치며 멀어져왔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둘 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 와 있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낙태하고 6개월 만이었다.3. 낙태를 지켜본 남자에게 벌어지는 일 “보호자시죠? 임신 7주차고요, 동의하시는 거죠?” “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회사원 김모 씨의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대기실에 앉았다. 소파에는 임산부로 보이는 여성이 여럿 있었다. 남성은 김 씨 뿐이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여성은 대전에서 올라와 자취를 하는 스물세 살 대학생이었다. 석 달 쯤 만난 뒤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사이였다. ‘자취방에서 혼자 몸조리는 잘 할 수 있을까.’ 김 씨는 예전에 엄마가 했던 “여자가 아이를 지우는 건 아이를 낳는 거나 똑같다”는 말을 떠올렸다. 수술실에서 나온 여성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차마 “고생했다”는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뭐라도 좀 먹을래?” “그냥 친구랑 먹고 싶어.” 그 말이 김 씨가 여성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여성을 낙태 시킨 기억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김 씨는 반년 쯤 지나 새 연애를 시작했다. 사이가 무르익자 함께 모텔에 갔지만 그 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일어나지 못했다.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지만 김 씨에겐 불가능했다. 김 씨는 비뇨기과와 신경정신과를 찾아다녔다. 의사의 조언대로 운동을 꾸준히 하고, 여자친구와 여행지로 떠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한 여성의 인생을 바꿔놓은 그날 밤에서 그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10년 전 수술을 마치고 헤어졌던 그날, 여성으로부터 날아든 단 한 줄의 문자메시지를 김 씨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여성은 김 씨에게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조용히 쉼 없이 김 씨를 밀어낼 뿐이었다. 여성의 문자는 김 씨의 죄책감을 수시로 소환해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며 여성을 안심시켰던 그날 밤 자신을 향한 환멸도. 올해 37세인 김 씨는 그 날의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동아일보 취재팀은 최근 5년간 낙태 관련 판결문 80건 전체를 입수했습니다. 분석 결과 법정에 선 피고인 10명 중 7명은 의사 등 의료진이었습니다.취재팀은 낙태수술 경험이 있는 산부인과 의사 3명을 만났습니다. 1980년대 정부 가족계획위원으로 합법적 ‘낙태의사’였다가 30대 여성 낙태수술 혐의로 처벌받은 이모 씨(78), 20년 넘게 한 낙태수술을 5년 전부터 중단한 김모 씨(57) 그리고 약물·알코올 중독 여성에게 낙태수술을 해준 혐의로 기소된 박모 씨(55·여)입니다.낙태에 관한 이들의 생각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래서 세 의사가 자신의 상담실에서 환자들과 나눴던 대화를 재구성했습니다. 법과 윤리 사이에서 고민하는 의사들의 딜레마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산부인과 원장 이 씨가 쇳물에 누렇게 물든 산부인과 간판 옆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허름한 유흥가 곳곳에 도박장과 당구장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로 한 여성이 서둘러 건물로 걸어 들어왔다. 쫓기는 듯 발걸음만 봐도 어떤 환자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이 씨는 차트와 여성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책상 모서리만 바라봤다. 차트에 적힌 여성의 주소지는 이 씨 병원에서 시외버스로 1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다. 보호자 칸은 비어있었다.“기혼이세요?” “…” “첫 임신인가요?”“…”“보호자 같이 왔어요?”“…”여성은 대답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이 씨는 더 묻지 않고 여성을 초음파실로 안내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정이 있음을 직감했다. 낙태를 말려도 다른 병원을 전전할게 불 보듯 뻔했다.시선을 계속 피하며 초음파실 침대에 눕는 여성을 보자 옛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1980년대 정부 지정 가족계획위원이었다. 인구가 너무 빨리 늘어나자 국가에서 낙태를 하도록 지원까지 했다.그 때는 여성들이 진료실에 죄인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12주 이전 임신부에게 “세포를 떼어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수술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인구가 줄자 낙태는 다시 범죄행위가 됐다.초음파 검사 결과 임신 8주였다. 여성은 까만 영상 속 아기집을 보고도 미동하지 않았다.“오늘 수술 할 건가요?”“…”여성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술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수술 후 문제가 없는지 봐야 되니 한 번 더 오세요.”회복실에 누운 여성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몇 달 뒤 이 씨를 찾아온 건 고소장이었다. 여성의 낙태를 도운 죄였다. 고소한 사람은 여성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이혼 소송을 앞두고 있었다. 이 씨가 여성의 목소리를 처음 제대로 들은 건 법정에서다.“남편이 동성애자인 것 같아요. 곧 이혼할 예정이고 성관계도 거의 없었습니다.”여성은 울먹이며 말했다. 법정에는 적막이 흘렀다.억울한 건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산부인과 경력 45년인 이 씨는 12주 미만의 태아는 생명체가 아니라고,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세포라고 생각했다. 이 씨는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가릴 수 있게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그에게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한 때 가족계획위원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던 그는 30년이 지나 범법자가 됐다.“그런 수술은 하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에 마주 앉은 여성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달 초 서울의 한 산부인과 상담실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선생님, 여기 해주는 병원이라고 하던데요.” 28년차 산부인과 의사 김 씨가 바로 맞받았다. “안 한지 꽤 됐습니다.” “여기 버스타고 오는데 1시간 반이 걸렸어요. 그냥 해주시면 안 돼요?”여성은 중소기업에 다니는 24세 직장인이었다. 애인과 이별한 직후였다. “안 만나주면 죽이겠다”는 남자친구를 겨우 떼어놓았을 때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선생님, 수술 안 하면 제 인생 망해요. 돈도 없고 집도 없어요. 무조건 지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5년 전까지만 해도 김 씨는 낙태수술을 했다. 일명 ‘낙태의사’였다. 한 달에 20~30명이 왔다. 사연 없는 여성은 없었다. 이날 찾아온 환자도 다르지 않았다. 김 씨가 상담실 모니터 화면을 보며 말했다.“5주차네요. (화면 속 동그란 점을 가리키며) 이게 아기예요.” “부탁이에요. 선생님. 지워주세요.”이 순간이면 김 씨는 늘 고민에 빠진다. 낙태수술 비용은 임신기간이 1주일 길어질 때마다 보통 10만 원씩 늘어난다. 5주차면 최소 50만 원, 10주차면 100만 원 이상 받는다. 출산 환자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무시하기 어렵다. 김 씨는 마주 앉은 여성에게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조금 더 생각해보세요. 엄마가 된 여성들은 후회하지 않아요.”5년 전, 양손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든 채 김 씨를 찾아온 여성이 있었다. 오래 전 낙태를 해주지 않고 돌려보낸 환자였다. 이혼을 앞두고 임신했던 이 여성도 처음 상담실에 왔을 땐 낙태하겠다는 뜻이 확고했다.“이혼은 이혼이고 아이의 생명은 별개”라는 김 씨의 말에 여성은 발길을 돌렸다. 두 달쯤 뒤 그는 김 씨를 다시 찾았다.“선생님, 이혼서류 접수했어요. 제발 수술해주세요.”“임신 13주가 넘어 위험합니다. 못 해줘요.” 다른 병원에서 얼마든 낙태할 수 있을 텐데 두 달 가까이 아이를 뱃속에 간직했다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이라고 김 씨는 생각했다.3년 후 김 씨를 다시 찾은 여성은 “그때 말려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여성은 이혼하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김 씨는 20년 넘게 낙태수술을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그는 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여성들을 보며 내가 정말 이 사람을 돕고 있는지 스스로 묻곤 했다. 김 씨가 수술을 거부하자 결국 출산한 뒤 아이를 입양 보낸 20대 초반의 한 산모는 “최소한 아이에게 살 기회를 줬다”며 위안 삼았다고 한다.이달 초 “생각해보라”며 돌려보냈던 24세 직장인은 2주 만에 김 씨의 상담실을 다시 찾았다. 여전히 단호했다. “더 커지기 전에 수술 받고 싶어요. 더 커지기 전에….”김 씨의 대답도 그대로였다.“아이 낳은 여성은 대부분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우면 두고두고 괴로울 거예요.”여성은 상담실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려다 고개를 돌려 물었다.“선생님은 따님이 있으세요?”“….” “따님이 저 같은 상황이면 어떻게 하시겠어요?”“피임 교육 잘 시킬 겁니다.”“저도 피임했는데 임신한 거예요. 선생님은 따님한테도 낳으라고 하실 건가요?”대답을 원하는 듯 잠시 기다리던 여성이 상담실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김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문밖에서 간호사가 환자를 호명했다. 상담실로 향하는 발자국 소리가 문 앞에서 멈춘 뒤 몇 초가 흐르도록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방에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28년 경력의 의사 박 씨는 상황을 직감했다. 상담실 문을 쉽게 열지 못하는 환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처지다.“어떻게 오셨어요?”앳돼 보이는 여학생 한 명이 상담실 의자에 앉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함께 들어온 중년 여성이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저희 애가 일주일 집에 안 들어온 적이 있어요. 그래도 돌아와서 다행인줄 알았는데….”여학생은 헐렁한 맨투맨 티셔츠 차림이었다. 배 부분이 동그란 모습이었다. 열일곱 살의 임신부였다. 엄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얘가 가출해서 친구 집에서 지낼 때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어요.”박 씨는 모녀가 병원에 온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이 수술 원래 불법인 건 아시죠? 근데 성폭행으로 확인되면 수술해도 법적으로 괜찮아요. 일단 경찰에 신고하시고….”“안 돼요, 선생님!”내내 울먹이던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막아섰다.“성폭행으로 확인 받으려면 수사 받고 뭐 하고 몇 달 걸리잖아요. 엊그제 갔던 병원에서 성폭행 판결문 없으면 수술 안 해준다고 해서 그냥 나왔어요.”여학생은 임신 18주차였다. 성폭행 피해를 알리기 두려워 임신 3개월이 지나서야 엄마에게 털어놨다. 수술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여러 산부인과를 전전하고 있었다. 여학생은 불안한 듯 쉬지 않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긁었다. 박 씨는 한숨이 나왔다.“올라가세요.”수술은 30분 만에 끝났다. 수술대에서 내려온 여학생은 몸을 휘청거리다 엄마에게 기댔다. 박 씨는 진료실을 나서는 모녀를 바라보며 대기실을 향해 말했다.“다음 분 들어오시라고 해요.”배가 볼록 나온 28세 여성이 상담실로 들어섰다. 한 눈에도 임신부였다.“6개월이 지났는데 이제와 중절수술을 받겠다고요? 지금까지 뭐 했어요?”“아이가 있으면 남친이 못 떠날 줄 알았는데 끝까지 저랑 헤어지겠대요.”“아가씨는 뱃속 아이가 어떤 존재에요? 남자친구 잡지 못한다고 버려도 되는 물건은 아니죠.”여성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하다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아빠가 없는데 어떻게 해요. 두 시간 걸려서 왔는데, 다른 곳도 모두 안 된다고만 하고….”여성은 인사 없이 상담실을 나갔다. 박 씨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른 병원을 가겠구나’라고 생각했다.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김예윤 기자 yeah@donga.com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신고만 해봐. 낙태죄로 고소할 거야.” 박모 씨(25)의 협박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김모 씨(24·여)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한때 캠퍼스 커플로 사랑하는 사이였다. 올해 초 두 사람 사이에 예상치 못한 아이가 생겼다. 김 씨는 “낙태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절반씩 비용을 부담해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이때만 해도 김 씨는 박 씨의 협박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이별했다. ‘전 남친’이 된 박 씨는 김 씨의 낙태 사실을 학교 친구들에게 말했다. 참다못한 김 씨는 지난달 박 씨를 찾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며 울먹였다. 그러자 박 씨는 “나야말로 낙태죄로 고소할 것”이라고 맞섰다. 결국 김 씨는 학기 중 휴학했다.○ 낙태 판결문에 담긴 천태만상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합헌 결정을 내렸다. 본보는 헌재 결정 후 이달까지 5년간 전국 법원에서 이뤄진 낙태 관련 판결 80건을 모두 입수해 분석했다. 낙태죄는 낙태를 한 여성 본인(자기낙태죄), 수술 등의 방법으로 낙태를 도운 의료진(업무상 촉탁 낙태죄), 낙태에 대한 명시적 동의 의사를 밝힌 남성(낙태 방조) 등을 처벌한다. 낙태는 강간에 의한 임신인 것으로 수사기관에서 확인되거나 부모가 유전적 장애가 있는 때 등 예외적 경우에만 허용된다. 판결문에는 남자친구 또는 남편의 신고로 법의 심판대에 선 여성이 다수 등장했다. 이혼 소송이나 양육권 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거나 이별을 요구하는 여자친구를 붙잡으려는 남성들에게 낙태죄가 악용되고 있었다. 지난해 낙태죄로 4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최모 씨(29·여). 그는 남편(32)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이혼을 결심한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위자료 액수를 두고 최 씨와 갈등을 빚던 남편은 최 씨와 낙태 수술을 해준 산부인과 의사를 경찰에 고소했다. 법원 관계자는 “낙태 사실은 당사자인 여성과 수술한 의사, 상대 남성 등 극소수만 알고 있어 셋 중 한 명이 고소하지 않는 한 드러나기 힘들다. 그래서 고소인은 대부분 상대 남성 또는 남성 측 가족”이라고 말했다. 낙태 사실이 발각되면 여성과 의사는 처벌을 받지만 남성은 수술에 동의했다는 명시적 증거가 없으면 처벌을 면한다. 여성들 사이에선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남자에게 낙태 사실 알리지 말라’는 게 암묵적인 요령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상대 남성의 동의 여부가 확인되지 않으면 수술을 거부하는 산부인과 의사가 많다. 법원도 같은 낙태 여성이라도 남성 측 동의를 받으면 선고유예 처분을 하지만 동의 없이 한 경우 벌금형으로 더 무겁게 처벌한다. 남성 동의를 받지 않거나 병원 기록에 남지 않게 수술을 받으려는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고위험 고비용’의 수술대를 찾는다. ‘낙태 브로커’를 통해 음성적으로 병원을 소개받아야 한다. 수술비뿐 아니라 100만 원 안팎의 추가 비용이 든다. 낙태 브로커로 일했던 대학생 김모 씨(28)는 “인터넷에 ‘낙태 가능 병원 상담 문의’ 등의 글을 올리면 연락이 쏟아진다. 산부인과에 무작위로 전화를 돌려 예약해 주는 대가로 건당 10만∼30만 원씩 받았다”고 털어놨다.○ ‘식물형법’이 된 낙태죄 5년간 80건의 낙태 판결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단 1건이다. 낙태 시술을 받던 여성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집행유예 형을 받은 조산사가 20대 여성을 또다시 낙태한 혐의로 2012년 부산고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사례가 유일하다. 나머지 피고인은 선고유예(51.3%)와 집행유예(36.3%) 등의 처분을 받았다. 27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연간 약 17만 건의 낙태수술이 이뤄진다. 기소는 연간 10여 건에 불과하다. 사실상 낙태죄가 사문화돼 ‘식물형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피고인 80명 중 56명(70%)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하루 평균 낙태수술 건수는 3000여 건으로 추정된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현실에 대한 판사의 고민이 엿보인다. 대전의 한 산부인과에서 일하는 의사 3명은 2008년부터 3년간 각각 60명, 120명, 140명의 여성에게 낙태수술을 해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은 이들 의사 모두에 대해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재판부는 “낙태가 사실상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의사들에게만 무거운 책임을 묻기 어렵고 낙태를 한 임부들에게 각자 납득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29년 경력의 산부인과 의사 성모 씨(55)는 “낙태하러 온 여성들은 아는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대부분 거주지에서 1, 2시간 정도 떨어진 병원으로 찾아온다. 여성들이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낙태를 부탁하면 불법이라고 그대로 돌려보내기 어려워 괴롭다”고 말했다.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낙태죄를 손보지 않는다면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내모는 셈이다. 낙태죄는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입법 취지에서 벗어나 어른들이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는 수단이 됐다”고 지적했다.이지훈 easyhoon@donga.com·김예윤·최지선 기자}
북한 귀순 병사 오청성 씨(25)가 미음과 물김치를 먹기 시작하는 등 24일 일반병실로 옮긴 뒤 상태가 빠르게 낫고 있다. 26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등에 따르면 오 씨는 현재 묽은 미음(쌀죽)과 물김치 국물을 먹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 씨는 19일 의식을 찾은 뒤 최근까지 물만 섭취했다. 병원 관계자는 “오 씨가 조만간 두부 같은 부드러운 고체 음식을 먹을 정도로 몸 상태가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의료진과의 대화도 더욱 원활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에 있을 때 자신의 건강상태 등을 설명하는 등 의료진과 활발히 대화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북한에 있을 때 앓았던 질환이 있는지, 기초적인 검사 등을 실시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로 의식이 또렷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오 씨가 일반병실로 옮겨진 뒤 병원과 군 당국은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등 보안을 강화했다. 오 씨가 머물고 있는 일반병실 특실은 이중 출입문 구조다. 병실 앞은 군 관계자들이 24시간 지키고 있다. 또 해당 병동을 담당하는 병원 관계자들도 출입하는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다. 정부는 오 씨의 상태가 더 좋아지면 군병원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국종 교수는 정기적으로 회진을 돌며 오 씨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아주대병원 측은 군 당국과 협의해 1개월 안에 군병원으로 이송할 계획이다. 수원=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어금니 아빠’ 이영학(35·구속기소)이 아내 최모 씨(32)에게 성매매를 강요하고 후원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다. 다만 이영학이 아내의 죽음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24일 이 씨와 관련된 의혹을 조사한 결과 성매매 알선과 강요, 상해, 후원금 불법 모집 등 혐의 10개를 추가로 확인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추가 송치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이영학은 2005년부터 후원금(12억 원)과 기초생활수급비 등 각종 지원금 총 19억 원을 받았다. 그 중 딸 수술비로 쓴 돈은 700만 원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딸 수술비로 4150만 원이 들었는데 대부분 건강보험공단과 구청 지원금 등으로 충당됐다. 이영학은 나머지 후원금으로 호화생활을 이어갔다. 2005년부터 12년간 차량 20대를 구매해 사용하고 튜닝한 뒤 되팔았다. 이 비용으로 약 3억3000만 원을 썼다. 생활비는 월 1000만 원에 달했다. 주로 마트나 음식점 등에서 사용했지만 카드 사용 내역을 추적한 결과 친구에게 휴대전화를 사주는 등 비상식적인 소비도 있었다. 이 기간동안 이영학은 기초생활수급비를 신청해 총 1억2000만 원을 지원받았다. 금융재산 조회를 피하기 위해 후원금이 모이면 현금으로 인출하거나 누나 명의 계좌로 이체했다. 경찰은 이영학이 서울 강남구에 오피스텔을 얻고 아내에게 성매매를 강요한 혐의도 새로 추가했다. 이영학은 최근 2, 3년간 후원금이 잘 모이지 않자 경제적인 이유로 아내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고 진술했다. 성매수 남성 12명을 조사한 결과 “최 씨가 성매매 도중 짜증을 내는 등 자발적인 것 같지 않았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다만 최 씨의 사망에는 이영학이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이영학의 딸은 구속된 이후 심경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 일절 협조하지 않던 이 양(14·구속 기소)은 “아빠가 한달에 2, 3회 엄마를 때렸다. 엄마는 아빠 때문에 죽은 것 같다”고 진술했다. 서울북부지검은 이 양을 22일 미성년자 유인 및 사체 유기 혐의로 기소했다. 최지선 기자aurinko@donga.com}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 김동선 씨(28)에게 폭행당한 변호사들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김 씨의 폭행 사실은 인정했지만 처벌은 원하지 않았다. 23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따르면 한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2명은 22일 오후 4시부터 약 9시간에 걸친 조사에서 “폭행당한 건 맞지만 다치지는 않았다. 김 씨의 사과를 받아들였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진술했다. 상해 피해가 없는 단순폭행죄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다. 다른 혐의가 발견되지 않으면 이번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다. 이에 앞서 김 씨는 9월 말 서울 종로구의 한 칵테일 바에서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 10여 명이 참석한 회식에 동석했다. 이날 술자리는 1시간 30분가량 이어졌고 만취한 김 씨는 잠이 들었다. 술자리가 끝날 무렵 한 남성 변호사가 “일어나시라”며 김 씨를 깨웠다. 순간 김 씨는 화를 내며 뺨을 때리고 여성 변호사의 머리채를 잡았다. 경찰은 단순폭행 외에 해당 업소에 대한 업무방해죄 등 다른 혐의 여부도 수사할 방침이다. 업무방해죄는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처벌 대상이다. 경찰은 폐쇄회로(CC)TV 자료를 분석하고 다른 손님을 대상으로 증언을 확보할 예정이다. 김 씨가 다른 변호사에게도 막말을 한 것으로 파악돼 동석자 모두를 불러 조사할 계획이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촛불시위 이후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지만 그것이 대안은 아니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74)는 23일 고려대 우당교양관 602호 대강당에서 열린 고려대-연세대 합동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와 촛불집회가 맞물리면서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보다 우월한 듯 여기는 게 유행처럼 퍼지고 있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얗게 센 머리에 까만 뿔테 안경을 쓴 노교수의 열강에 학생 400여 명의 눈빛은 반짝였다.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부작용으로 청와대 국민청원제도를 든 최 교수는 “‘소년범을 무겁게 처벌하라’ ‘여성도 군대 보내라’ 등 깊은 논의가 필요한 이슈를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며 “(이는 여론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고 가 차분한 숙의 과정을 건너뛰게 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의 보완재에 그쳐야지 대안 체제가 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직접민주주의로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문제와 갈등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치밀하고 지속적인 리더십, 그리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최 교수와 함께 강의에 나선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66·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는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로 한반도 정세를 강의했다. 문 교수는 학자로서의 시각이라고 전제하며 “북한은 악마적 국가 체계인 건 분명하다”면서도 “북한을 지나치게 악마화시키지 말고 적당한 수준에서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 와서 북한을 악마처럼 묘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평소 가치보다 이익을 강조하는데 갑자기 북한 인권을 강조했다”며 “북핵 문제 하나만으로도 해결이 어려운데 인권 등을 다 같이 집어넣으면 해결되겠나”라고 말했다. 문 교수는 한반도 비핵화를 처음부터 전제하고 들이밀면 북핵 문제를 놓고 협상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선 핵 동결을 협상하고 이후 핵시설 검증과 폐기, 핵무기 폐기 순으로 이뤄지는 게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아침 먹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당연히 첫 끼죠.” 이국종 교수가 식탁 앞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16일 낮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구내식당. 전날 북한 귀순병사의 2차 수술을 집도한 이 교수는 여전히 파란색 수술 모자를 그대로 쓰고 있었다. 가운 왼쪽 주머니에는 진찰용 막대와 청진기, 펜이, 오른쪽 주머니에는 논문자료 몇 장이 구겨진 채 꽂혀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주로 고기와 계란 프라이에 손이 갔다. 함께 식사하던 간호사가 “체력을 보충하려면 (단백질 중심으로) 먹어야 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왼쪽 손목에 전자시계를 차고 있었다. 검은색 전자시계 끝부분에 흰 의료용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민감한 외과수술에 방해될까 시곗줄 끝을 고정한 것이다. 그때 한 간호사가 달려와 귓속말을 하자 이 교수는 숟가락을 놓고 일어섰다. 절반 넘게 밥이 남아 있었다. 이 교수는 이날 아주대병원 별관에서 열린 ‘아주외상학술대회’를 주재하면서도 수시로 자리를 떴다. 병실을 드나들며 환자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다. 그는 “행사 도중 환자 병실에 갈 일이 많아 굳이 외부에서 행사를 열지 않는다”고 말했다. 13일 북한 병사가 후송되고 22일 공식 브리핑 전까지 이 교수는 2차례 기자들에게 환자 상태를 설명한 것 외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외상센터 내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이어갔다. 평소 이 교수의 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병원 안팎의 사람들 눈에는 그저 늘 지켜봤던 이 교수였다. “아이고, 내 아들 방이 이 모양이면 그냥 안 놔두지…. 침대가 환자 것보다 못해요.” 19일 외상센터 5층. 10㎡ 남짓한 이 교수 사무실을 청소하고 나오던 권모 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권 씨가 본 이 교수 책상 위에는 의학서적과 논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책상 옆 간이침대에는 여름용 얇은 홑이불이 깔려 있었다. 아주대병원 지하 1층 세탁실. 이 교수의 가운이 걸려 있었다. 한 세탁실 직원이 떨어진 단추를 달고 있었다. 그는 “(교수님이) 완벽해 보이지만 수건 얻으러 올 때는 멋쩍어한다. 인상은 날카로운데 말끝마다 ‘부탁합니다’를 붙여 존댓말을 한다”고 말했다. 시설물을 관리하는 한 직원은 이 교수에 대해 “수시로 엘리베이터를 세우는 지독한 원칙주의자”라고 말했다. 외상센터 설립 초기 헬기로 이송한 환자를 응급실로 옮기는 훈련을 해야 한다며 이 교수는 2대뿐인 화물용 엘리베이터 중 1대를 계속 정지시켰다고 한다. 21일 외상센터 5층 화장실에서 이 교수를 다시 만났다. 그는 같은 층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 때문에 잠시 수술실 바깥으로 나왔다. 이 교수는 기자를 보자마자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 다른 사람 눈에 안 띄게 나가라”며 기자에게 ‘퇴로’를 알려줬다. 평소 기자들 질문에 답변을 피하지 않는 그지만 북한 병사가 이송된 이후 병원, 군, 정보당국에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교수와 외상센터 설립을 위해 14년 전부터 합심해온 허윤정 교수(아주대 의대)는 “집이 유복한 것도 아니고,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닌 이 교수가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인 외상외과 교수가 된 건 우연이자 숙명이었던 것 같다”며 “언어도, 사람 관계에도 거칠지만 환자에게는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는 의사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에도 이 교수는 헬기를 타고 충남 서산을 다녀왔다. 50대 교통사고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서다. 헬기 조종간을 잡았던 이세형 기장은 “파일럿 생활 20년 동안 이런 의사는 처음 본다”고 말했다. 이 기장은 “심정지 상태의 환자를 태우면 이 교수가 헬기 안에서 환자 가슴을 열고 심장 마사지를 한다. 의료진 손이 느리면 버럭 소리를 지른다.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집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 기장은 연평도 포격 직후 헬기에 탔던 이 교수의 말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전쟁 나서 병사 구하러 나갔다 죽으면 어디 작은 비석 하나 세워지면 그만이죠.”수원=최지선 aurinko@donga.com·신규진 기자}

눈은 충혈됐고 파란 수술복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환자를 돌보다 짬을 내 식당에 앉은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48)은 “언제 집에 다녀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귀순 중 총상을 입은 북한군 오모 씨의 2차 수술을 마친 다음 날(16일)이었다. 수술에 방해가 되지 않게 테이프로 칭칭 감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숟가락을 놓고 일어났다. 다시 환자에게 돌아갈 시간이었다. 오 씨가 병원에 도착한 뒤부터 의식을 되찾기까지 일주일간 이 교수와 동료들은 ‘또 다른 전쟁’을 치렀다. 13일 오후 4시 14분, 이 교수는 “중증외상 환자가 실려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40분 뒤 미군 항공의무후송팀 ‘더스트오프’의 헬기가 외상센터 앞마당에 내려앉았다. 이때만 해도 이 교수는 환자가 미군인 줄 알았다. 이 교수가 수술실로 들어간 것은 오후 5시 23분. 피로 흥건한 수술실 바닥에서 발걸음을 뗄 때마다 ‘찰박’ 소리가 났다. 혈액형을 검사할 시간이 없이 O형 혈액 4유닛(약 1.5L)을 수혈하고 복부를 열었다. 길이 27cm의 기생충이 발견된 것은 이때였다. 의료진 사이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부러진 오른쪽 골반까지 맞추고 첫 수술을 끝낸 것은 오후 11시 5분. 몸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지 못했지만 일단 환자의 숨을 붙여놓은 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했다.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에서 해적의 총에 맞은 석해균 선장을 치료할 때도 상처 부위를 열었다가 덮기를 4차례 반복했다. 오 씨의 몸에서 총알을 꺼낸 건 15일 오전 9시 40분부터 시작된 2차 수술 때였다. 오 씨는 수술 사흘 뒤부터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이 교수는 “수술방 안에는 삶과 죽음만 있다. 무승부는 없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왼쪽 눈의 망막혈관이 파열돼 실명 직전인 상태인데도 “환자를 포기할 수 없다”며 메스를 놓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세상이 그를 응원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 씨의 몸에서 기생충을 발견한 사실을 공개하자 일각에서 “인격 테러”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최근엔 문재인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의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적폐세력’으로 매도되기도 했다. 2012년엔 아주대병원이 권역외상센터 지정에서 탈락했다. 이 교수는 당시 경쟁 병원 의사들이 “이 교수가 쉽게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두고 쇼를 한다”는 내용이 담긴 e메일을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공무원들에게 돌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는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Any Given Sunday)’를 좋아한다. 미식축구 감독 역할을 맡은 알 파치노는 마지막 게임을 3분 앞두고 선수들을 모아 “인생은 1인치의 게임이고, 우리는 한 번에 1인치씩 끝까지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바꿀 수 없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면 서서히 바뀐다”고 말했다.조건희 becom@donga.com·최지선 기자}
20일 오전 7시. 교사 양승진 씨, 학생 박영인 남현철 군의 영정 사진을 든 유족이 경기 안산시 단원고에 도착했다. 이들은 영정 사진을 들고 양 씨가 근무하던 2층 교무실을 지나 두 학생이 공부하던 3층 2학년 6반 교실을 천천히 돌았다. 유족들은 고인들의 흔적을 더듬었다. 양 씨 부인 유백형 씨는 교무실 의자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을 너무 좋아했다…”며 흐느꼈다. 발인은 앞서 오전 6시 안산 제일장례식장에서 치러졌다. 새벽부터 빈소에는 유족, 고인의 제자, 지인 등 100여 명이 모였다. 단원고로 가는 길 경기도교육청 안산교육지원청에 마련된 ‘단원고 4·16 기억교실’ 입구에는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전광판 문구가 빛났다. 교무실과 교실을 돌고 영정 사진들이 1층 현관 앞으로 오자 정광윤 교장이 맞이했다. 정 교장은 학교 운동장 흙을 담은 주먹만 한 흰색 꾸러미를 1개씩 유족들에게 건넸다. 고인의 유품 등을 담는 납골함에 이 흙을 넣겠다고 유족들이 요청했다고 한다. 납골함에는 세월호가 가라앉았던 전남 진도 맹골수도 펄도 들어간다. 유족들은 끝내 오열했다. 양 씨 모친 남상옥 씨(83)는 영정 사진을 부둥켜안고 5분 넘게 오열했다. 남 씨는 소리쳤다. “엄마 가슴에 피가 내린다. 아들아, 다시 만날 그날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아들아’라는 한마디에 두 학생 부모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뒤따르던 사람들까지 눈시울을 붉히며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경기 수원시의 화장장에 도착한 남 군의 부모 남경원, 박상미 씨는 운구차에서 남 군의 관을 보다 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시신 대신 유품을 담은 이들의 관은 화장하는 데 1시간 반가량 걸렸다. 박 군의 모친 김선화 씨는 아들의 유품 등이 담긴 납골함을 보며 “내 아들을 찾아 달라. 믿기지 않는다”며 오열했다. 경기 평택시 서호추모공원에 도착한 유족들은 납골함을 얼굴처럼 쓰다듬으며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이곳에는 세월호 참사에서 숨진 다른 단원고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 비슷한 시간 인천 부평구 인천가족공원에는 고 권재근, 부인 한윤지 씨와 아들 혁규 군의 납골함이 나란히 안치됐다. 한 씨의 시신은 세월호 참사 이후 얼마 안 돼 수습됐다. 이들 가족의 홀로 남은 딸 권모 양(8)도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한참을 영정 사진 속 아빠, 엄마, 오빠를 바라봤다. 납골함이 안치되고 나서 권 양은 친척들과 함께 절을 올렸다. 이날 세월호 미수습자 5인의 장례가 끝나면서 세월호 희생자 304명 전원의 장례가 마무리됐다. 세월호 참사 1314일 만이다. 장례는 끝났지만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과 추모공원 건립 문제 등이 남아 있다. 세월호 관련 단체인 4·16가족협의회 관계자는 “희생자들의 뜻을 기리며 남은 활동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평택=김배중 wanted@donga.com / 인천=최지선 기자}

19일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의 세월호 미수습자 권재근 씨와 아들 혁규 군의 빈소. 권 씨의 딸 권모 양(8)은 천진했다. 노란 티셔츠에 까만 바지를 입고 상장(喪章) 대신 머리에 하얀 리본을 했다. 밝은 목소리로 “전화기 놀이 해야지”라고 외치며 조문객 사이를 뛰어다녔다. 오징어채를 간식 삼아 먹고, 테이블에 누워 휴대전화를 가지고 놀았다. 전날 전남 목포신항에서 열린 합동추모식에서 주변의 어른들이 오열하자 “아빠” “오빠”를 부르며 따라 울었던 것과는 달랐다. 친척들은 말없이 권 양의 등을 쓰다듬었다. 권 양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에서 네 식구 가운데 혼자 살아남았다. 빈소의 영정 하나에 아빠와 함께 담긴 엄마 한윤지 씨와 많이 닮았다. 한 씨 시신은 참사 직후 수습됐지만 그동안 장례를 미뤘다. 한 친척은 “아빠와 오빠 시신까지 수습하면 말해주려고 가족끼리 입단속을 했다”면서 “○○이(권 양)는 자기가 처한 상황을 정확히 모른다”며 착잡해했다. 권 양은 참사 당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이후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놀림’을 받아 지금은 개명했다. 18일 오전 목포신항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미수습자 5명의 합동추모식을 마친 뒤 이날 오후 빈소가 차려졌다. 안산 단원고 교사 양승진 씨와 학생 박영인, 남현철 군의 빈소는 경기 안산시 제일장례식장에, 권 양의 아빠와 오빠 빈소는 아산병원에 마련됐다. 이들의 관에는 시신 대신 고인들의 옷, 가족들이 보내는 편지 등이 담겼다. 양 씨의 아내 유백형 씨(56)는 양 씨의 손때가 묻은 ‘정치’와 ‘경제’ 교과서 2권을 넣었다. 두 빈소는 다소 쓸쓸했다. 19일 제일장례식장 1층 합동분향소 방명록에 적힌 이름은 300여 명으로 이들의 가족, 친척, 지인이 대부분이었다. 이낙연 국무총리, 남경필 경기도지사,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조문했을 뿐이다. 유족을 돕던 자원봉사자는 “일반 시민 발길이 점점 뜸해졌는데 이제는 정말 잊혀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 군과 초등학교 동창인 원동혁 씨(20)는 이날 오후 군복 차림으로 남 군의 빈소를 찾았다. 원 씨는 “나와 성격이 비슷한 현철이도 살아 있었다면 해병대에 함께 입대했을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박일도 제일장례식장 대표(62)는 “장례식 수익금 등 3000만 원을 안산지역 학생 교복비 지원 등에 기부하겠다”는 말로 이들의 마지막 길을 추모했다. 미수습자 5인의 가족들이 목포신항을 떠나면서 3년 전 4월 참사 직후 광주시와 전남도가 각각 설치한 희생자 합동분향소도 철거된다. 광주시는 20일 오전 시청 1층 시민홀에서 합동분향식을 열고 오후 6시 분향소 철거에 들어간다. 그동안 약 4만1000명이 분향했다. 전남도는 무안 도청 1층 분향소를 21일 오후 7시 치운다. 안산시 정부합동분향소를 제외하면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던 분향소는 광주와 전남이 마지막이었다. 세월호 유족 일부는 목포신항 컨테이너에서 계속 생활하며 선체 수색과 조사 과정을 지켜볼 예정이다. 이들은 매일 수색 진척 상황을 점검하고 영상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연말까지 이어질 선체 수색이 끝나야 이들도 컨테이너 생활을 마칠 것으로 보인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남쪽 끝에 설치된 세월호 천막은 당장 철거될 확률은 낮다. 천막을 친 4·16가족협의회와 4·16연대 등 세월호 관련 단체는 아직도 ‘진상 규명’을 주장한다. 서울시 관계자는 “세월호와 관련한 여러 논의가 산적해 있어 정부에서 총체적으로 논의를 하면 거기에 따라서 (철거나 이동 등을) 논의하겠다”라고 말했다. 다만 불법 점용한 천막과 시설물에 대한 변상금은 계속 부과할 방침이다. 24일 2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구성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표결에 부쳐진다. 세월호 관련 단체들은 현재 특별법안에서 위원 추천 규정(야당 6명, 여당 3명)을 수정하고 조사원 수를 120명에서 150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4·16연대 관계자는 “법안 통과 전까지 천막 철거는 논의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최지선 aurinko@donga.com / 안산=김배중 / 목포=이형주 기자}
“피해자는 사망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죄를 갚는다는 거죠?” 17일 오전 11시 서울북부지법 702호 법정. 형사합의11부 이성호 부장판사는 ‘어금니 아빠’ 이영학(35·구속)의 반성문을 읽다가 되물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죄를 꼭 갚으며 살겠다’는 대목에서다. 이영학은 “어떻게든…”이라고 말하며 흐느꼈다. 이날 첫 공판에 연두색 수의 차림의 이영학은 절뚝거리며 등장했다. 검거 당시보다 수척해 보였다. 피고인석에 선 이영학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에는 세로로 접은 하얀색 종이 2장이 들려 있었다. 변호인 조언에 따라 발언 기회가 주어지면 읽을 수 있게 미리 쓴 글이다. 그러나 재판 끝까지 이영학이 이 글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이영학은 법정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아내 최모 씨(32)가 숨진 뒤 최 씨를 대신할 목적으로 딸의 친구인 김모 양(14)을 유인, 성추행했고 살해해 시체를 유기한 혐의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그렇다”고 큰 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살해할 의도가 없는 우발 범행이라는 점,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았고 다량의 약물 복용으로 인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점 등을 들어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딸’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흐느꼈다. 재판부가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에 ‘딸을 위해서라도 아내 제사를 지내고 싶으니 무기징역만은 면해 달라’고 썼다. 주로 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말하자 “1분 1초라도 (출소해 딸을 볼 수 있다는) 목표 없이 살기 싫다”고 대답하며 눈가를 훔쳤다. 이영학은 변호인 접견 때도 주로 딸 걱정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날 재판부가 자신의 딸을 증인으로 채택하자 이영학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변호인이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살필 정도였다. 이영학은 “딸을 여기(법정)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 죄는 제가 다 받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영학 딸 조사를 이달 안에 끝내고 병합 기소를 검토하기로 했다. 다음 재판은 12월 8일 열린다.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피해자는 사망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구하고 죄를 갚는다는 거죠?” 17일 오전 11시 서울북부지법 702호 법정. 형사합의11부 이성호 부장판사는 ‘어금니 아빠’ 이영학(35·구속)의 반성문을 읽다가 되물었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한다. 죄를 꼭 갚으며 살겠다’는 대목에서다. 이영학은 “어떻게든…”이라고 말하며 흐느꼈다. 이날 첫 공판에 연두색 수의 차림의 이영학은 절뚝거리며 등장했다. 검거 당시보다 수척해 보였다. 피고인석에 선 이영학은 고개를 푹 숙였다. 손에는 세로로 접은 하얀색 종이 2장이 들려 있었다. 변호인 조언에 따라 발언기회가 주어지면 읽을 수 있게 미리 쓴 글이다. 그러나 재판 끝까지 이영학이 이 글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이영학은 법정에서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아내 최모 씨(32)가 숨진 뒤 최 씨를 대신할 목적으로 딸의 친구인 김모 양(14)을 유인, 성추행했고 살해해 사체를 유기한 혐의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그렇다”고 큰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살해할 의도가 없는 우발범행이라는 점,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았고 다량의 약물 복용으로 인해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점 등을 들어 선처를 호소했다. 그는 ‘딸’ 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흐느꼈다. 재판부가 “법원에 제출한 반성문에 ‘딸을 위해서라도 아내 제사를 지내고 싶으니 무기징역만은 면해 달라’고 썼다. 주로 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고 말하자 “1분 1초라도 (출소해 딸을 볼 수 있다는) 목표 없이 살기 싫다”고 대답하며 눈가를 훔쳤다. 이영학은 변호인 접견 때도 주로 딸 걱정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이날 재판부가 자신의 딸을 증인으로 채택하자 이영학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변호인이 고개를 돌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살필 정도였다. 이영학은 “딸을 여기(법정)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 죄는 제가 다 받겠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영학 딸 조사를 이달 안에 끝내고 병합 기소를 검토하기로 했다. 다음 재판은 12월 8일 열린다.최지선 기자aurinko@donga.com}

16일 오후 경북 포항시 포항여고 후관. 4층과 3층 사이 외벽에 ‘一’자로 길고 선명하게 난 금이 보였다. 건물 내부도 4층 복도 천장의 패널 일부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4층에는 3학년 5개 반 교실이 있다. 후관 뒤편 담벼락은 3m가량 무너져 내렸다. 전날 규모 5.4 지진이 발생해 벌어진 일이다. 40여 년 전 3층으로 지은 후관은 2000년경 4층으로 증축했다. 최근 안전검사에서는 C등급을 받았다. 안전에 큰 무리는 없지만 보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진(耐震)설계는 돼 있지 않다. 후관 13개 교실은 대학수학능력시험장으로 예정돼 있다. 학교 관계자는 “다음 주 고3 학생들이 등교하면 다른 교실에서 수업할 계획”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포항 수능시험장 내진설계 4곳뿐 이날 동아일보 확인 결과 포항에서 수능시험장으로 지정된 14개 고교 건물 가운데 확인되지 않은 영덕고를 제외하면 내진설계가 된 곳은 4개교뿐이었다. 1988년부터 3층 이상이나 연면적 500m² 이상 건축물에는 내진설계를 적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멀게는 45년 전에 지은 건물이다 보니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전날 지진으로 이들 14개 고교 가운데 10개교 건물에 균열이 생겼다. 16일 찾은 포항시 포항고도 본관 건물에 군데군데 금이 갔다. 외벽 상당 부분이 갈라진 강당은 지진이 나자 출입을 통제했다. 1985년 지은 강당 역시 내진설계가 돼 있지 않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지진이 났을 때 강당이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강당에서 수능 안내를 받던 학생 수백 명이 운동장으로 황급히 대피했다. 내진설계가 된 학교는 피해가 적었다. 2004년 지어진 포항 장성고와 두호고 건물은 외벽 타일이나 복도 내벽에 잔금이 간 것 말고는 별 피해가 없었다. 두호고 관계자는 “다른 학교에 비해 피해가 크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경북도교육청은 이들 14개 고교에 대해 긴급 안전점검을 실시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지진을 계기로 내진설계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엉터리 내진설계로는 규모 7.0이 넘는 대형 지진을 견딜 수 없다는 얘기다. 홍갑표 연세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6층 이하 건물은 건축공학 지식이 부족한 건축사가 내진설계를 할 수 있다. 구조기술사가 내진설계와 시공에 참여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가시지 않는 불안감 포항에서는 지금이라도 수능시험장을 내진설계가 된 학교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날도 최대 규모 3.6의 여진이 계속돼 수험생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건물 안팎에 균열이 생긴 고사장에서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많다. 수능시험장인 한 고교 교감은 “도저히 우리 학교에서는 치를 수 없어 인근 내진설계 된 학교를 수소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도 “고사장 이전을 검토하라”고 말했다. 포항 지역 고교 교장과 학부모들은 이날 오후 경북도포항교육지원청을 찾아 시험장 이전 여부를 논의했다. 이르면 17일 결론을 내려 도교육청에 이전을 공식 건의하기로 했다. 전날 많은 수험생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대피소나 차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충격을 받아 밥을 제대로 못 먹거나 벌써부터 재수를 걱정하는 수험생도 있다. 일부 수험생은 대피소도 믿을 수 없다며 자동차 안에서 공부했다. 포항여고 3학년 김민정 양(18)은 “잠을 3시간도 못 잤다. 지진이 또 일어날까 무서워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포항=황성호 hsh0330@donga.com / 최지선 기자}
“책 챙겨 내려간 지 하루 만에 다시 올라왔어요.” 16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 재수학원 앞은 “일주일 더 공부해야 한다”며 캐리어를 끌고 재상경한 재수생들로 북적였다. 이날 대전에서 올라온 박모 군(19)은 “이틀 전 시험 직전에 책 몇 권만 챙겨 내려갔는데 일주일 동안 집에서 공부할 자신이 없었다. 오늘 아침 기차표 끊어 바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경북 포항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되자 서울의 기숙학원에서 공부하다 귀향했던 지방 재수생들의 ‘서울 귀환’이 이어졌다. 대구 출신 현모 양(19)은 “이왕 미뤄진 거, 마음잡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익숙한 곳이 나을 것 같아 아침 첫차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다시 ‘주차장’ 된 대치동 학원가 이날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한 유명 수학학원에서는 강사 2명이 걸려오는 전화에 응대하느라 쉴 새가 없었다. 강사들은 “없어요” “없습니다”를 반복했다. 연기된 수능일(23일)까지 “‘족집게’ 단기 특강이 열리느냐”는 수험생과 학부모의 질문이 쇄도했다. 강사 A 씨는 “1시간 동안 전화만 20통 넘게 받았다. 학생들도 계속 문자메시지를 보내 업무를 볼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학부모 김모 씨(50·여)는 “남은 일주일은 막판 스퍼트를 다시 한 번 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라고 했다. 이 학원은 특강 요청에 못 이겨 수능 대비 자료집을 만들어 배포할 계획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대치동 학원가는 순식간에 ‘주차장’이 됐다. 부모들이 학원 앞에 차를 대고 자녀들을 위해 담요와 도시락을 한가득 챙겨왔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학원 밖으로 수험생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부모들은 차에서 나오며 “아들” “딸” 하고 제각기 소리를 질렀다. 학원 정문 앞에서 도시락을 들고 자녀를 기다리던 학부모는 “오늘 학원에서 점심을 안 준다고 했다. 아이가 편의점에서 대충 사먹을까 봐 서둘러 싸왔다”고 말했다. 한 학원 관계자는 “보통 학원에서 점심, 저녁을 챙겨주는데 수능 날에 맞춰 급식을 중단해 불가피하게 제공하지 못하게 됐다. 부모들에게 안내 문자를 돌렸더니 많이들 도시락을 준비해 오셨다”고 말했다. 오후 3시경 이날 휴교를 하지 않은 학교의 고3 수험생들이 몰리자 학원 측은 자습실 마련에 비상이 걸렸다. 수능 관련 강의가 모두 끝나 강의실 배치를 바꿔놨는데 수험생들이 다시 오면서 임시 공간을 마련해야 했다. 서울 신촌의 입시학원은 “일반 강의실을 자습실로 급히 바꾸기 위해 책상과 의자 배치를 다시 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대형 서점도 북새통이었다. 당초 치러질 수능 전날 교과서와 참고서를 버린 학생들이 일주일 동안 공부할 새 교재를 사러 온 것이다. 서울 종로구 대형 서점 관계자는 “수능 문제집을 찾는 학생들이 갑자기 몰려 급하게 추가 주문을 넣었다”고 밝혔다.○ 특수 노린 성형외과 ‘울상’ 한의원·떡집 ‘반색’ 서울 강남 일대 성형외과들은 수능 직후로 잡혀 있던 수술 예약이 줄줄이 취소돼 당혹스러운 모습이었다. 한 유명 성형외과 관계자는 “수험생들의 사전 예약이 많아 수술방을 다 잡아놨는데 이달 남은 보름간 거의 수술을 못하게 됐다”며 “주말에 잡힌 상담 예약도 모두 취소됐다”고 말했다. 수술 예약을 취소한 수험생 이모 양(18)은 “이번 주 토요일 성형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12월에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입 면접 일정에 맞춰 얼굴 부기를 뺄 시간을 벌려고 수능 직후 예약한 건데…. 성형수술도 대학 가서나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떡집과 한의원은 “뜻밖으로 제2의 특수를 맞았다”며 반색했다. 서울 강남의 한 한의원은 “‘총명탕을 일주일 치만 더 타가겠다’는 부모들의 주문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한 떡집도 “이미 당초 예정된 수능날에 떡 주문이 많이 들어왔는데 일주일 뒤로 미뤄져 추가 주문이 계속 들어올 것”이라며 웃었다. 수능 고사장으로 지정된 학교는 이날 모두 휴교했다. 수능은 치러지지 않았지만 고사장 배치표 등 안내판은 그대로였다. 서울 송파구의 한 고교 관계자는 “내일 학생들이 정상 등교하는 대로 고사장 안내판이나 책상 배열을 원래 모습으로 바꿀 계획”이라고 말했다.김예윤 yeah@donga.com·김배중·최지선 기자}

“대한민국으로 넘어오고자 한 사람인데 가능하면 살리려고 하는 거죠. 다 같은 마음이잖아요.” 14일 오전 9시 반경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 경기남부권역외상센터 앞에서 이국종 교수(아주대 의대)가 말했다. 몸에 여러 군데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 치료를 맡은 지 16시간이 넘지 않은 시간이었다. 무테 안경 위로 파란색 수술 모자를 바짝 치켜 쓴 이 교수는 “장기가 외부로 노출돼 있어 (생명이)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구체적인 총상 및 총알 제거 상황에 대해서는 “환자를 살리면 그때 다 말씀드리겠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입은 의사 가운 왼쪽 주머니에는 청진기와 휴대전화가 뒤엉켜 있었다. 오른쪽 주머니에는 환자 상태와 관련된 종이 뭉치가 구겨져 있었다. 옷차림에서 긴박했던 16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교수는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 때 해적의 총을 맞고 사경을 헤매던 석해균 선장을 극적으로 살려내 주목받았다. 국내 총상 분야 권위자다. 이 때문에 총에 맞은 북한 병사의 생명이 위독하자 군에서는 서울의 유명 종합병원보다 이 교수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모든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이번 사건을 대하는 이 교수의 태도는 남다르다. 군(軍)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이 교수는 올 4월 ‘명예 해군소령’으로 임명됐다. 2015년 7월 해군홍보대사에 위촉되면서 ‘명예 해군대위’로 임명됐다. 이후 해군 장병 치료를 위해 위험한 현장 활동도 마다하지 않는 등 공로를 인정받아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 교수는 관련 학술 대회 때는 해군 정복을 입고 참석할 정도다. 이날도 오전 9시 40분경 안종성 군 의무사령관이 북한 병사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가자 이 교수는 안 사령관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이 교수 바람대로 팔 다리 복부 등에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 병사가 살아나는 데 최대 관건은 출혈과 감염을 최소화해 안정을 되찾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앞으로 열흘 동안은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다발성 외상 환자의 골든타임은 1시간이라고 말한다. 심한 외상을 입더라도 15분 이내에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면 대부분이 살고 30분이 지나면 50%가 사망한다. 1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병사는 사고가 발생하고 1시간 10분 뒤 병원에 도착했다. 살 수 있는 확률이 낮은 상태다. 다만 이 교수이기에 일말의 희망은 있다는 얘기다. 북한 병사는 복부 총상으로 내장이 찢겨 오염체가 배 부위에 전부 노출돼 온몸이 감염됐을 확률이 높다. 1차 수술에서 감염과 출혈을 우선적으로 줄였다. 앞으로는 남은 총알도 제거해야 된다. 보통 군에서 사용하는 총알은 일반 총알보다 회전력이 높아 몸을 관통하면서 발생한 조직 화상도 심각해 화상 치료가 동반돼야 한다. 내장을 제대로 연결해 봉합하는 과정도 남아 있다. 부산대병원 권역외상센터장인 조현민 흉부외과 교수는 “총상은 총알이 심장, 복부대동맥 등 소위 척추 중앙 부위에 관통하면 대개 즉사한다. 하지만 북한 병사가 병원에 살아서 도착한 것을 봐서는 주변부에 맞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 환자를 살려 놓고 장기가 손상된 부위를 하나씩 수술해야 되기 때문에 수많은 고비를 넘겨야 된다”고 전망했다.수원=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