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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에 살면서 씨앗을 통해 자연의 뿌리를 상상한다. 싹을 틔우며 생명의 여정을 시작하는 씨앗은 끊임없이 순환하는, 잠재된 생명력으로서의 환상을 나에게 선사한다.” 식물을 모티프로 작업해 온 작가 최혜인의 개인전 ‘잠재된 덩어리’가 서울 종로구 갤러리도스 신관에서 열린다. 2년 만에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서는 특히 씨앗에 주목한 회화를 포함한 신작 23점을 공개한다. 작가는 식물이 씨앗을 품으면 본체는 죽게 되지만, 그 씨앗에서 새로운 생명이 시작하는 생성과 소멸에 흥미를 느꼈다. 육아와 가사 노동을 하며 마주친 채소에서 작가는 ‘인간사’를 공상하곤 했다. 이번에는 소박한 씨앗에서 찾은 무한한 잠재력과 관능적 생명을 화폭에 풀어놨다. 진주분, 백토, 금분 등 다양한 재료의 활용도 눈에 띈다. 1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심란하고 복잡하다. 벽지에는 양파, 마늘, 고추가 사방에서 쏟아지고 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광경이 어지럽게 혼합돼 있다. 그 가운데 샤먼이 사용할 법한 방울이 구의 형태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서울 종로구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양혜규(48) 개인전 ‘서기 2000년이 오면’의 풍경이다. 4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은 국내 미술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지난해 독일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하고,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과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작품이 소장·전시되는 등 국제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활동을 하는 작가에 대한 국내의 기대를 알기에 부담을 갖고 개인전을 준비했다”고 털어놨다. 블라인드를 활용한 대표작 ‘솔 르윗 동차’를 비롯해 방울을 활용한 ‘소리 나는 운동 지도’, 벽지 작업 ‘배양과 소진’ 등 전시는 작가의 최근 활동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 많은 요소가 결합돼 ‘이미지 폭격’이라 느껴질 정도로 공간의 밀도가 높다. 이렇게 정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전시장의 풍경은 양혜규의 작업 특징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특정한 카테고리로 분류되기를 끊임없이 거부한다. 이를테면 동그란 방울이나 짚풀은 토속적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작가는 이들 소재를 극도로 깔끔한 마감의 조형물로 만들어 토속성을 제거해 버린다. 그 결과 국적, 시대 불명의 독특하고 기이한 이미지가 탄생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고정관념을 깨며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결합하는 작업 방식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전시장 한쪽에 비치된 ‘융합과 분산의 연대기―뒤라스와 윤’은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의 연대기를 작가의 주관으로 교차 편집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란 무엇인지, 프랑스인이란 무엇인지 등 정해진 개념에 관한 끝없는 질문이 파생된다. 조형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국제 미술전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며 그 낯섦에 어리둥절했던 한국의 1990년대도 떠오른다. 당시 활발하게 논의됐던 포스트모더니즘의 난해한 언어도 감지된다. 작가 또한 1994년 독일로 이주하며 완전히 다른 시간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혼란 그 이후에 이어질 작가 양혜규의 다음 목소리가 궁금해진다. 11월 17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퍼포먼스, 영상 작품은 어떻게 유통하고 판매할 수 있을까?’ 작가들의 실질적 고민에서 출발한 ‘퍼폼’이 올해는 ‘예술 카페’로 문을 열었다. 지난달 27일부터 9월 4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2019 작가미술장터 ‘퍼폼 2019: 린킨아웃’은 관객이 원하는 작품을 도록 형태의 메뉴에서 선택하면 해당 작품을 테이블에 앉아 제공받을 수 있다. 참여 작가 78명은 관객의 경험에 초점을 두고 작품을 만들었다. 이 중에는 낯선 사람과 비밀 통화를 하거나 조각을 직접 만져보면서 조립하는 등 관객도 작품의 일부가 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더 깊숙이 작품에 접속(링크인)하고 나간다(링크아웃)는 의미에서 부제 ‘린킨아웃’이 붙었다. 작품을 판매할 뿐 아니라 일정 시간 체험해 보는 대가로 1000원에서 1만 원 사이의 대여료를 지불하는 대여권이나 상영권 등 대안적 판매 방식도 실험한다. 이번 전시는 특히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기 힘든 영상 작가들에게 흥미로운 형태다. 단순히 영상을 앉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상 속에 등장하는 오브제를 만져보면서 감상하는 등 관객이 몰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참여 작가 중 80%가 영상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다. ‘퍼폼’처럼 대안적인 형태로 작품의 전시·판매를 작가들이 직접 시도하는 ‘작가미술장터’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2015년부터 진행해 지난해까지 50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80만여 명이 관람했다. 올해에는 회화, 조각을 포함해 공예, 퍼포먼스, 비디오아트, 디자인 등 다양한 작가가 참여한 16개 장터가 총 10개 지역에서 열린다. 5개 작가미술장터는 이미 개최됐고, 나머지 11개 장터는 20일부터 10월 30일까지 서울, 경기 수원, 대구 등 전국적으로 열린다. 작가미술장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유니온아트페어’는 수원 경기상상캠퍼스 공간 1986에서 10월 8일부터 15일까지 열린다. 이 밖에 경남 김해 최초의 아트페어 ‘더스트 사우스 아트 페스티벌’, 광주 ‘미디어아트X페어’, 전북 전주 ‘아트 팝업스토어’ 등이 예정돼 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1928년 출간된 ‘푸 모퉁이에 있는 집’에는 ‘푸스틱(Poohstick)’ 놀이가 등장한다. 푸스틱은 곰돌이 푸와 친구들이 강물 위 다리에서 각자 막대기를 하나씩 던진 뒤, 반대편으로 뛰어가 누구의 막대기가 가장 먼저 나오는지 관찰하는 놀이다. 벤저민 호프가 쓴 책 ‘곰돌이 푸, 인생의 맛’에서는 이 ‘푸스틱’ 놀이를 도덕경의 ‘위무위(爲無爲)’로 설명한다. 서울 송파구 소마미술관에 가면 ‘푸스틱’ 놀이를 설치 작품과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다.》지난해 출판 시장을 흔들었던 ‘행복한 곰돌이’ 푸의 원화가 한국을 찾았다. 22일 개막한 ‘안녕, 푸’전은 2017년 영국 런던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기획으로 열린 뒤 미국과 일본을 거쳐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열린다. 삽화가 E H 셰퍼드가 그린 원화 드로잉과 작가 A A 밀른이 쓴 원고·편지, 셰퍼드와 밀른의 가족사진 및 초판본 등 230여 점이 공개된다. 원화를 비롯한 전시품은 전시가 끝나면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의 수장고에 10년 이상 보관될 예정이다. 전시회 동안 빛에 오래 노출된 만큼 훼손을 막기 위해서다. 아동문학인 푸의 성격에 맞춰 어린이가 즐겁게 뛰어놀 수 있는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전시장 초입에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이 설치됐다. 계단의 옆면에는 ‘바닥도, 꼭대기도 아닌 중간이 내가 항상 앉는 곳’이라고 한 밀른의 시 ‘계단 한가운데’가 적혀 있다. 계단을 지나면 1930년 테디 토이 컴퍼니에서 만든 ‘위니 더 푸’ 캐릭터 인형을 비롯해 세월의 흔적이 묻은 아카이브가 관객을 맞이한다. 전시는 영국의 건축사무소 RKF와 무대디자이너 톰 파이퍼의 디자인을 소마미술관에 맞게 변형했다. 디자인은 사이즈가 작은 원화 드로잉을 직접 감상하는 데 집중했다. 런던 전시에 비해 설치물의 규모가 작고, 조명의 활용도가 낮은 것은 아쉽다. 그러나 이요르의 집이나 미끄럼틀 등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는 구조물을 놓았다. 전시장은 총 5개 구역으로 나뉜다. 첫 전시장 ‘인기쟁이 곰’이 사람들이 가장 친숙한 푸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뒤이은 전시장 내용은 점점 심화된다. 두 번째 ‘우리가 소개되고’와 세 번째 ‘어떤 이야기일까?’가 ‘위니 더 푸’의 탄생 과정을 여러 설치물로 보여준다. 이어 ‘묘사의 기술’과 ‘푸 세상에 나오다’는 푸 원화 드로잉의 특징과 출판 과정을 설명한다. ‘묘사의 기술’ 코너에선 원화의 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눈이 쌓인 풍경은 수채물감의 일종인 ‘과슈’로, 휘몰아치는 눈보라는 칼을 이용해 표현했다. 또 잡지 전체 페이지를 하나의 디자인으로, 텍스트도 그림의 일부로 간주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밀른이 보낸 원고에는 어떤 분위기를 연출하면 좋을지 제안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사람처럼 다양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피글렛, 우울하고 비관적인 이요르, 자신감 넘치지만 어설픈 티커, 간섭하고 나서길 좋아하는 래빗은 결국 인간 세상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내년 1월 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간의 직감이 때로는 기계보다 정확하다. 비디오게임의 폭력성에 관한 논쟁을 보며 든 생각이다. 비록 가상현실이라도 유혈이 낭자한 폭력 상황이 미칠 좋은 영향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게임 속 구체적 상황을 활자로 만나니 그 잔인함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심각성은 게임 업계의 로비로 가려져 있다. ‘살인 세대’는 그 숨겨진 진실, 비디오게임과 폭력의 연관성을 사례와 통계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997년 미국 켄터키주 퍼두커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대학살’(저자는 총기난사 사건을 이렇게 불러 마땅하다고 주장한다)은 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열네 살 남학생이던 범인은 다섯 발은 피해자 머리에, 세 발은 상체에 명중했다. 명중률은 100%였다. 범인의 명중률이 충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타인을 죽이길 거부하는 본성을 지녔다. 그래서 직업 군인이나 경찰도 누군가를 사살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근접 전투에서 실제로 총기를 발포한 병사는 15∼20%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투 시뮬레이션’ 훈련이 도입되자 미군의 총기 발사 비율은 6·25전쟁에서 55%, 베트남전쟁에서 95%까지 상승했다. 살상을 꺼리는 인간 본성은, 미국 검경이 간주하는 보통 수준의 명중률이 50%에 그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그 어린 소년은 사건 며칠 전 훔친 총과 총알 두 세트로 사격 연습을 해본 것 외에는 총을 사용해본 적도 없었다. 그의 냉혹한 잔인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반적으로 총격에서 인간의 머리를 겨누는 건 극단적 원한일 경우가 아니라면 극히 드물다. 그런데 퍼두커 사건의 범인은 정확히 피해자의 머리를 겨눴다. 이는 비디오 사격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보상을 주는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1인칭 슈팅 비디오게임을 했던 이 소년은 사실상 매일 밤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인 습관’을 신경세포에 각인시키며 살인에 관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됐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퍼두커 ‘대학살’ 말고도 비디오게임이 폭력성을 붙잡아둘 고삐를 느슨하게 만든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독일 본대학에서 20, 30대 슈팅 게임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뇌 스캔 실험에서는, 사용자들이 실제 폭력적 이미지를 봤을 때도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 도호쿠 의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도한 컴퓨터게임을 한 아동은 행동을 조절하는 전두엽 발달 둔화 우려가 있었다. 물론 “비디오게임을 하고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다수”라는 반론을 저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소수일지언정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 심층 보도에 따르면 2015년 미국에선 총기 난사 사건으로 462명이 사망했고, 1314명이 다쳤다. 대표 저자인 데이브 그로스먼은 23년간 군에서 복무한 심리학자다. 그가 살인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저항감을 쓴 책 ‘살인의 심리학’은 40만 부 넘게 팔리고 미 군사기관의 필독서에 올랐다. 미디어 중독 치료 교육을 하는 공동 저자와 함께 강조하는 건 예방이다. 다행히 게임 중독자라고 해도 뇌가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물진 않는다고 한다. 게임 시간을 제한하는 등 실천 방법부터 부모가 활용 가능한 자료까지 함께 정리됐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인간의 직감이 때로는 기계보다 정확하다. 비디오게임의 폭력성에 관한 논쟁을 보며 든 생각이다. 비록 가상현실이라도 유혈이 낭자한 폭력 상황이 미칠 좋은 영향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게다가 게임 속 구체적 상황을 활자로 만나니 그 잔인함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심각성은 게임 업계의 로비로 가려져있다. ‘살인 세대’는 그 숨겨진 진실, 비디오게임과 폭력의 연관성을 사례와 통계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997년 미국 켄터키 주 퍼두커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대학살’(저자는 총기난사 사건을 이렇게 불러 마땅하다고 주장한다)은 8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열네 살 남학생이던 범인은 다섯 발은 피해자 머리에, 세 발은 상체에 명중했다. 명중률은 100%였다. 범인의 명중률이 충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타인을 죽이길 거부하는 본성을 지녔다. 때문에 직업 군인이나 경찰도 누군가를 사살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2차 세계 대전에서도 근접 전투에서 실제로 총기를 발포한 병사는 15~20%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투 시뮬레이션’ 훈련이 도입되자 미군의 총기 발사 비율은 6·25전쟁에서 55%, 베트남전쟁에서 95%까지 상승했다. 살상을 꺼려하는 인간 본성은, 미국 검경이 간주하는 보통 수준의 명중률이 50%에 그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런데 그 어린 소년은 사건 며칠 전 훔친 총과 총알 두 세트로 사격 연습을 해본 것 외에는 총을 사용해본 적도 없었다. 그의 냉혹한 잔인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일반적으로 총격에서 인간의 머리를 겨누는 건 극단적 원한일 경우가 아니라면 극히 드물다. 그런데 퍼두커 사건의 범인은 정확히 피해자의 머리를 겨눴다. 이는 비디오 사격게임이 플레이어에게 보상을 주는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한다. 일인칭 슈팅 비디오게임을 했던 이 소년은 사실상 매일 밤 사격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인 습관’을 신경세포에 각인시키며 살인에 관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됐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퍼두커 ‘대학살’ 말고도 비디오게임이 폭력성을 붙잡아둘 고삐를 느슨하게 만든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독일 본 대학에서 20, 30대 슈팅 게임 사용자를 대상으로 한 뇌 스캔 실험에서는, 사용자들이 실제 폭력적 이미지를 봤을 때도 감정 조절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 도호쿠 의과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도한 컴퓨터게임을 한 아동은 행동을 조절하는 전두엽 발달 둔화 우려가 있었다. 물론 “비디오게임을 하고도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다수”라는 반론을 저자도 인정한다. 문제는 소수일지언정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뉴욕타임스 심층 보도에 따르면 2015년 미국에선 총기 난사 사건으로 462명이 사망했고, 1314명이 다쳤다. 대표 저자 그로스먼은 23년간 군에서 복무한 심리학자다. 그가 살인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저항감을 쓴 책 ‘살인의 심리학’은 40만 부 넘게 팔리고 미 군사기관의 필독서에 올랐다. 미디어 중독 치료 교육을 하는 공동 저자와 함께 강조하는 건 예방이다. 다행히 게임 중독자라고 해도 뇌가 영원히 그 상태로 머물진 않는다고 한다. 게임 시간을 제한하는 등 실천 방법부터 부모가 활용 가능한 자료까지도 함께 정리됐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스마트폰이 바꾼 세상의 여러 모습 가운데 하나라면 단연 ‘셀피(셀프카메라)’를 꼽을 수 있다. 지금도 인스타그램에서 ‘#selfie’를 검색하면 세계적으로 4억300만 개 이상의 게시물이 쏟아진다. 이 거대한 셀피의 물결에 최근 미국 출신 사진작가 신디 셔먼(65)도 동참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셔먼의 사진은 보통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셀피와는 좀 다르다. 각종 필터를 활용해 우스꽝스럽고 왜곡된 모습을 만들었다. 이런 그의 다양한 셀피들이 서울 강남구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국제 기획전 ‘아무튼, 젊음’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는 고령사회에서 역설적으로 강조되는 ‘젊음’을 주제로 한다. 국내외 작가 13팀의 사진, 설치, 영상 등 21점을 전시했다. 이 작품들은 모든 사람이 어려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시류를 꼬집거나 현대사회에서 나이 듦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되돌아본다. 셔먼의 인스타그램 셀피는 전시장 한쪽 방에 아이패드와 벽면 프린트로 전시했다. 사실 셔먼이 1980년대 선보였던 작업은 ‘셀피’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너무나 유명해진 그의 첫 시리즈 ‘무제 영화 스틸’(1977∼80년)은 앨프리드 히치콕 영화에 등장할 법한 여성 캐릭터로 분장한 셔먼의 여러 가지 모습을 담았다. 머리색이나 옷을 다르게 연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줬다. 이후에도 ‘센터폴즈’ ‘섹스 픽처스’ 등의 시리즈를 통해 천변만화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묘사한 그는, 대중 매체 속 여성의 이미지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변화무쌍한 여성의 욕망을 그리며 전설적 사진가로 발돋움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시장에서 보이는 그의 ‘망가진’ 모습들은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장난이 아니다. 오히려 일시적 화려함만 좇는 SNS에 대한 저항으로 읽힌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는 군중들의 민낯을 도리어 까발리고 있는 게 아닐까. 셔먼의 셀피는 그가 하나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은 아니다. 다만 전시의 주제와 기획 의도를 SNS 메시지로 전달받은 작가가 전시를 허락했다. 그의 셀피를 전시장에서 공개하는 것은 중국 이후 두 번째라고 한다. 11월 9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화가 신부’로 잘 알려진 조광호 신부(72)의 유리화 작품을 선보이는 ‘조광호의 Art Glass 작품전’이 경기 양평군 갤러리 카포레에서 열린다. 색이 다른 유리로 모자이크처럼 형태를 표현하는 기존 스테인드글라스와 달리 ‘아트 글라스’는 유리 위에 유약으로 직접 그림을 그린다. ‘아키텍추럴 아트 글라스’라고도 불리는 이 기술은 조 신부가 독일에서 처음 국내로 들여와 선보였다.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 순교성지 기념탑이나 문화역서울 284(옛 서울역) 로비 천장화 등 기존 작업이 대규모로 이뤄졌던 반면 이번에는 카페로 운영하는 갤러리 공간에 맞춰 중형 사이즈 작품 40여 점을 선보인다. 컴퓨터그래픽으로 먼저 작업한 그림을 유리 위에 그대로 입혀, 흔히 생각하는 스테인드글라스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1979년 성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사제품을 받은 조 신부는 1985년 독일 뉘른베르크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5년 동안 예술을 배웠다. 이때 독일의 아트 글라스 기술을 배워 한국에 가져와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일 공방으로 보내 제작하다가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12년 전 인천에 직접 공방을 만들었다. 국내 우수한 기술로 가마부터 컴퓨터 시스템까지 세계적인 시설을 갖춰 작업하고 있다. 전시는 9월 15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예술을 문화적 자산을 넘어 경제적 자산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그 가치를 평가하는 감정에 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24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이화신세계관에서 열린 공개 라운드테이블 ‘근현대미술 가치평가의 새로운 과제들’에 참석한 앤 마리 리처드 소더비 인스티튜트 디렉터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예경)와 소더비 인스티튜트(SIA·Sothebys Institute of Art)가 진행한 ‘미술품의 가치와 시가감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는 미술 관계자를 비롯해 일반인 등 120여 명이 참석했다. ‘미술품의 가치와 시가감정’ 프로그램은 최근 예술작품 가격 산정에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예경과 SIA가 국내 처음으로 공동 기획해 많은 관심을 모았다. SIA는 경매사 소더비가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소더비와 별개로 운영되며 향후 경매사에서 일하게 될 인력을 양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 철저한 비공개 진행… 반응은 엇갈려 2주간 진행된 ‘미술품의 가치와 시가감정’ 프로그램은 한국 근현대 미술품 감정 인력 육성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예경은 2015년부터 미술품 감정기반 구축 사업을 해왔고, 감정 인력 차원에서 미국감정협회(AAA)나 네덜란드 AiA와도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프로그램이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된 것도 특징이다. 수강생에게는 교재가 제공되지 않았고 녹음이나 동영상 촬영도 금지됐다. 리처드 SIA 디렉터의 강연을 중심으로 보존, 과학분석 전문가 니카 구트만 리에피 리센아트(RECENART) 대표, 온라인 미술품 거래 서비스인 아트시의 스타스 존슨치지코브 디렉터 등 초청 연사의 강연이 진행됐다. 또 현장학습 프로그램으로는 엄미술관, Art C&R 미술품보존연구소 방문 등도 이뤄졌다. 모든 코스에 참석한 수강생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당초 ‘심화과정’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실무적인 기초에 집중해 프로그램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수강자들은 기대에 못 미쳤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해외 경험이 없거나 입문자에 속했던 수강자는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경 관계자는 “국내 감정시장의 전문 인력이 극소수이기 때문에,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강의 내용을 좀 더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에 맞췄다”고 설명했다. 한 참석자는 “사실 작품의 가격에서 미술사적 가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부분은 해외 교육기관을 통해 배우는 데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도 했다. ○ ‘백남준 엔지니어’ 이정성 강연 눈길 24일 공개로 열린 라운드테이블에서는 고 백남준 작가의 엔지니어였던 이정성 씨(75)의 강연이 눈길을 끌었다. ‘내가 경험한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주제로 발표한 이 씨는 백남준 작품이 전자기기를 이용해 고장이 나고 수리하는 것은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품을 켤 때 전기 스위치를 한 번에 켜거나 24시간 켜두는 것은 가장 빨리 작품이 손상되게 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또 백남준의 국내 컬렉터가 소프트웨어와 기록(아카이브)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이 씨는 “생전 백남준은 소프트웨어를 관객과 소통하는 통로로 보고 밤새워 편집하고 테스트했는데, 작품을 수리하다 보면 원래 레이저디스크였던 것을 임의로 변환하거나 소프트웨어 이름도 없이 트는 경우가 있다”며 “원본과 그에 관한 기록을 보존하는 것이 작품 가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서울 용산구 이태원 번화가 밖 ‘모스크’(한국이슬람교 서울중앙성원)가 있는 언덕길. 평범한 상점이 늘어선 골목 가운데 세탁소가 있다. 그런데 그 맞은편 1.5평 공간에 ‘가짜 세탁소’가 등장했다. 세탁소보다 좁은 공간 탓에 간판이 싹둑 잘린 것만 빼면, 재봉틀은 물론 머리 위에 걸린 옷가지, 파란 쓰레기통, 무심코 놓인 리모컨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똑같은 두 공간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진짜’ 세탁소를 찾은 고객들이 “상도덕도 없이 바로 맞은편에 세탁소를 차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단다. 사실 이 ‘가짜 세탁소’는 남다현 작가(24)의 설치 작품이다. 세탁소 주소를 제목으로 한 그의 개인전 ‘#21(서울특별시 용산구 우사단로 10길 85-1)’이 룬트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남 작가는 과거에도 자신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일본어 서적을 필사하고, 그림책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베끼는 작업을 해왔다. 그는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텍스트도 이미지처럼 복사했다”며 “이를 통해 언어의 구조나 상징의 무용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만든 ‘가짜 세탁소’에서도 관객은 진짜와 가짜, 이미지를 마음대로 복사하지 못하는 ‘저작권’의 의미, 혹은 물질적인 현실세계를 접하지 않고도 사이버공간에서 많은 경험을 하는 세태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우는 아이에게 거울을 보여주면 울음을 멈추듯, 있는 그대로 현실의 모습이 그 이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31일까지.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예술가 겸 저술가인 저자는 최근 세계 미술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는 작가 중 하나다. 미술시장보다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작품을 선보여 온 그는, 이미지와 영상이 갖는 힘과 그 뒤에서 작용하는 왜곡과 통제 메커니즘을 설치나 영상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는 그는 작품만큼이나 명쾌한 비평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독일 특유의 날카롭고 건조한 시각으로 미술계나 경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던진다. 특히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로 대표되는 인터넷 환경의 상호 감시, 진실과 허구의 모호한 경계 등의 문제를 드러내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국내에도 2016년 ‘스크린의 추방자들’이 김실비 작가의 번역으로 출간돼 미술계에서 호응을 얻었고 지난해 개정판도 나왔다. 이번에는 2008년 출간한 독일어 저서인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을 안규철 작가가 번역했다. 책은 다큐멘터리의 형식과 표현에 초점을 둔다. 슈타이얼이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쓴 박사 논문이 바탕이 됐다. 그의 중요한 저작인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보이는 통찰의 전조를 ‘진실의 색’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흔히 진실을 고발한다고 여겼던 다큐멘터리 영상이 실은 진실과 허구 사이의 불확실성을 오가며 그 자체로 힘을 발휘한다는 통찰이 돋보인다. 다큐멘터리는 100% 진실이거나 허구가 아니고,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리다는 불확실함 때문에 영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서두에 이어 11개의 챕터에서 인터뷰, 기록, 영화, 다큐멘터리의 표현 등에 관해 여러 사례를 통해 서술을 이어나간다. 이들 챕터는 인과관계로 이어진다기보다, 하나의 사안을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보며 다층적인 이미지를 쌓아나가는 과정에 가깝다. 절대적인 진실도 허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서술 방식 자체도 흥미롭게 다가온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서울 마포구의 평범한 베이커리 ‘베이크 앤 메이크’에는 장미셸 바스키아(1960∼1988)의 작품 ‘Now‘s the Time’이 걸려 있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 뉴욕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아 ‘검은 피카소’란 상찬을 받은 작가. 작품은 찰리 파커의 동명 곡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28세에 요절한 바스키아의 작품은 별로 많지 않아 원화의 경우 수천억 원까지 호가한다. 그런데 이 베이커리에 걸린 그림은 10만 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짜는 아니다. 작가 재단으로부터 정식 라이선스를 취득한 인쇄물, ‘아트 프린트’이기 때문이다. 최근 고가의 예술 작품을 직접 소장하는 대신 ‘아트 프린트’나 ‘포스터’를 수집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베이크 앤 메이크를 운영하는 이홍기 씨(31)는 지난해 2월 카페를 오픈하면서 지인으로부터 ‘열정’의 의미를 담은 바스키아의 아트 프린트를 선물로 받았다. 이 씨는 평소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2년 전부터 아트 프린트와 포스터를 모으고 있다. “저렴한 가격에 좋아하는 작품을 소장할 수 있어 매력적이에요. 저에게 좋은 추억과 의미가 있는 작품을 사거나, 지인에게 그 사람의 분위기에 맞는 그림을 선물해요. 예술 작품에 정해진 답이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내 눈에 보이는 대로 즐기는 거죠.” 국내에서 아트 프린트를 판매하는 ‘오픈 에디션’은 2017년 서비스를 시작한 후 매출이 5배 이상 늘었다. 주로 20대보다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30대 중반 이상이나 신혼부부가 인테리어를 위해 찾는다. 앙리 마티스, 마크 로스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인기 있다. 최근 ‘데이비드 호크니’전에 전시된 대표작 ‘더 큰 첨벙’도 10만 원대에 구매할 수 있다. 서울 중구 시청역 지하상가의 작은 갤러리인 ‘스페이스mm’에서는 포스터만 전시하는 ‘포스터 모더니즘’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기획사를 운영하는 강욱 CCOC 대표(51)가 2013년부터 수집한 포스터 중 20여 점을 전시한다. 김태수 스페이스mm 대표(55)는 “예술 작품보다 대중적 반응은 더 좋다”며 “쇤베르크, 칸딘스키, 청기사파 전시 포스터나 러시아 디자이너 알렉산드르 로드첸코의 포스터를 지나가던 행인이 알아보고 구매했다”고 말했다. 전시 중인 포스터 가격은 1만∼20만 원 선이다. 강 대표는 “해외에서는 이미 디자인적 가치가 있는 포스터가 활발히 거래된다”고 말했다. 인기 전시는 판매 당시보다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2013년 영국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에서 열린 ‘David Bowie Is’전의 포스터는 당시 3파운드(약 4000원)에 판매됐지만 현재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는 260달러(약 31만 원)에 매물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포스터와 프린트 대부분은 투자보다 소장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유림 독립큐레이터는 “최근 경제적 여유는 없어도 작품 자체를 즐기는 경향을 두고 투자가 아니라 ‘아트 소비’라고 부른다”며 “역사적 가치가 있는 포스터는 투자가치가 있지만 대부분은 좋아하는 작품을 소장하는 데 만족하는 쪽”이라고 했다. 소은진 오픈에디션 대표(35)는 “원작자의 허락 없이 출력된 작품은 불법”이라며 “정식 라이선스를 거친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 원작을 최대한 가깝게 느낄 수 있으며, 원작자를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노마디즘 예술가’ 김주영(71)은 평생 떠돌아 다녔다. 1986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갔고, 1988년에는 인도, 몽골, 티베트, 일본과 유럽 곳곳에서 퍼포먼스와 설치 등 현장 작업을 했다. 이런 그가 충북 청주시립미술관에 4m 높이 흙집(사진)을 지었다. 황영자 작가와 함께한 여성 작가 2인전 ‘놓아라!’(9월 15일까지)에 내놓은 신작 가운데 하나다. 이 흙집은 충북 음성의 ‘전국 흙집 짓기 운동본부’와 협력해 만들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여행하다 고려인의 흙집을 보고 받은 감동이 계기가 됐다. 문에는 ‘그땐 그랬지’라는 팻말이, 안에는 가마솥과 쌀 한 줌이 놓여 있다. 작가는 “파리에서 배고픈 시절 아꼈던 쌀이 내겐 가장 신성하다”고 했다. 그를 길 위로 내몰았던 데에는 아버지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야 했던 혼란이 자리 잡고 있다. 6·25전쟁 때 아버지가 사회주의자였기에 어머니는 딸이 피해를 볼까 봐 이름과 생일을 모두 바꿨다. 성인이 돼 내막을 알게 된 그는 교수직도 박차고 해외로 떠돌아 다녔다. 무전여행 중 캄캄한 밤 낯선 마을에 도착해 느낀 막막함과 희망은 20m 길이의 작품 ‘밤의 미로’에 구구절절 녹아 있다. 사람들과 손으로 흙을 문지르며 이제야 따뜻함과 ‘함께’의 의미를 느낀다는 그는 “현대미술은 액자에 넣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작가도 관객도 공간 속에 뛰어 드는 것”이라고 했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성공한 사람들은 아침에 침대를 정리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귀가 쫑긋한다. “나는 게을러서 틀렸어”라거나, “부지런한 사람이 되자”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고 당장 매일 아침 침대를 정리한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닌데. 간단한 명제들이 주문처럼 다가오곤 한다. 이 책도 첫눈에는 “성공한 소설가는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명제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저명 문학잡지인 ‘파리 리뷰’의 유명 작가 3030명 인터뷰에서 핵심 답변 919개를 추렸다. ‘어떻게 글을 쓰십니까?’에 대한 답변을 보면 많은 작가들이 정신이 맑은 아침에 작업했던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새벽 4시부터 대여섯 시간 일하고 오후에는 달리기나 수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럼 성공한 작가는 아침에 글을 썼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예외도 많다. 엘윈 브룩스 화이트는 “일을 미루는 것은 모든 작가의 본능”이라고 했다. 필립 로스는 한술 더 뜬다. “작가들이 작업 습관을 묻는 건 ‘과연 저 사람이 나만큼 미쳤나’를 알아보기 위해서죠.” 어니스트 헤밍웨이, 귄터 그라스, 존 스타인벡, 오르한 파무크…. 쟁쟁한 작가들이 솔직히 털어놓은 삶의 면면을 보며 인간사만큼이나 작가의 삶도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다. 부지런한가, 게으른가, 아침형인가, 저녁형인가는 중요치 않다.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의 여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때로는 정직하게, 때로는 감미롭게 풀어낸 글들이 감동을 안겨줬다. 편집자 니콜 러딕도 서문에서 “매우 다양한 생각이 담긴 것이 책의 핵심이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글을 쓰는 방법은 하나가 아님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다음 말을 인용했다. “완벽한 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일단 시를 쓰면 세상이 마무리해줄 것입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국 런던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의 작품 ‘레인 룸’이 15일 부산 사하구 부산현대미술관(MoCA)에서 선보였다. 2012년 런던 바비컨센터에서 처음 공개한 ‘레인 룸’은 전시장 속에 비가 내리지만, 관객이 지나가면 비를 맞지 않는 설치 작품이다. 영국 전시 첫날 1000명 이상이 몰리고,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중국 상하이 유즈미술관 등을 순회하며 세계적 관심을 받았다.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전시 마지막 날엔 관람 대기 시간만 8시간에 이르렀다고 한다.》 흥미로운 건 ‘레인 룸’처럼 올해 하반기 가장 많은 기대를 모은 전시 중 하나가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일반인에게 부산은 ‘미술’이라 했을 때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도시는 아니었다. 심지어 부산 출신인 작가 A 씨도 “제주도는 관광객이 미술관을 찾지만, 지금까지 부산은 불모지에 가까웠다”고 했다. 그런데 그 ‘불모지’인 부산에서 미술의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다.○ 개관 두 달 만에 28만 찾은 MoCA 랜덤 인터내셔널의 전시 ‘아웃 오브 컨트롤’에선 설치작품 ‘레인 룸’과 영상 작품 ‘Swarm Study’를 선보인다. ‘레인 룸’은 기술 특성상 한 번에 12명만 관람할 수 있어 10분 단위로 예매를 받는다. 전시 첫날 960명분의 티켓이 매진됐다. 지난해 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은 문을 열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부산시립미술관, 벡스코를 비롯해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밀집한 동부가 아닌 서부 을숙도에 위치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완공 뒤에도 밋밋한 외관 때문에 “대형마트처럼 보인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독립 기획자 김성연 씨(55)가 2017년 관장으로 취임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개관전에서 파트리크 블랑의 ‘수직정원’으로 외관을 장식하고,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토비아스 레베르거의 ‘토비아스 플레이스’를 설치해 미술관을 산뜻하게 바꿨다. 스위스 작가 치문의 ‘사운드 미니멀리즘’ 등 쉽고 유쾌한 작품 위주로 전시를 구성해 개관 두 달 만에 관객 28만 명이 몰렸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데이비드 호크니’전이 넉 달 동안 35만 명이 찾은 것을 비교하면, 지방에서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기획자가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선을 타는’ 것이 무척 어려운데 그 접점을 잘 찾았기에 관객이 반응했다”며 “제도권 밖에서 ‘야전사령관’처럼 전시를 지휘한 관장의 경험이 잘 녹아들었다”고 말했다. 부산 경남 지역사회가 그만큼 미술 분야에 대한 갈증이 컸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14일 부산 해운대에 개관한 미디어 전문 미술관 ‘뮤지엄 다’도 문을 연 지 이틀 만에 관객 2000명이 찾았다.○ 지역 미술 생태계의 회복이 주요 과제 사실 부산 미술계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갤러리와 대안공간이 적지 않았다. 국내 대표적인 중견 작가 중에도 부산 출신이 많다. 30대까지 부산에서 활동한 안창홍 작가(63)는 “당시만 해도 미술 잡지나 화보 등이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며 “유명한 평론가들도 부산에 와서 서적을 구입하는 등 지역 미술계가 활발했다”고 회상했다. 그 덕분에 부산만의 강렬하고 직설적인 시각 언어를 특징으로 하는 미술 경향도 생겨났다. 미광화랑의 김기봉 대표도 “6·25전쟁 때 타 지역 사람들을 품었던 부산은 다양성이 살아있는 도시”라며 “서울과 교류하지 않는 특유의 고집이 있고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 고유한 화풍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전후로 국내 미술계가 침체되면서 부산 지역의 미술 생태계도 축소됐다. 부산에 ‘큰손’ 컬렉터는 많지만, 대부분 서울 갤러리에서 작품을 구입하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부산의 잘 갖춰진 인프라와 시스템은 새로운 미술 거점으로 가능성이 충분하지만 콘텐츠를 채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 출신인 정복수 작가(62)는 “제도나 교육도 중요하지만 좋은 작가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지역을 기반으로 독창적인 작가가 나와서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했다.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제7회 동아옥션 경매’가 21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사옥 18층 동아옥션 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7회 경매에는 △근현대 발행도서 △근현대생활사 자료 △동서양미술품 △도자기/민속품 △고서화/고문서/간찰 등 총 236점의 예술품과 자료가 선보인다. 출품목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시인의 시집과 자료다. 만해 한용운의 ‘친필시고(親筆詩稿·출품번호 236)’, ‘정지용’의 시집 초판본(출품번호 26) 등이 경매에 나온다. 100부만 출간됐던 ‘장만영’의 첫 시집 ‘양(羊)’도 출품된다(출품번호 38). 조선시대 서적과 각종 자료도 다수 출품된다. 조선 영조 때와 순조 때 만들어진 돈유첩 총 2책(출품번호 213), 정조 때 편찬된 제중신편 8권 4책(출품번호 223)이 출품된다. ‘돈유’는 정승이나 유학자에게 노력을 권하는 임금의 말을 뜻한다. 제중신편은 1799년 편찬된 의서로 왕명에 의해 내의원 수의가 편술했다. 한글로 표기한 약물명이 수록되어 있다. 동서양 미술품도 다채롭게 채워진다. 스페인 화가 호안 미로의 작품 1점(출품번호 122),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작품 1점(출품번호 123)도 나온다. 권옥연 화백의 1979년 작품 ‘소녀’(출품번호 89)도 나왔다. 원색을 거부하면서 회색으로 대표되는 중간색조의 미묘한 변화를 추구한 권 화백의 작품세계가 그대로 투영된 그림이다. 동아옥션은 경매 일주일 전인 14일부터 21일까지 경매품 236점을 동아옥션갤러리에서 전시한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1937∼2011·사진)의 대표작인 제주 ‘포도호텔’은 게스트하우스 26채가 수평으로 연결된 낮은 건축이다. 수익을 추구했다면 고층 건물을 올렸겠지만, 나지막한 오름이 굽이치는 제주의 지형에 맞춰 겸허히 자리한다. 제주 민가가 자연 발생하듯, 이곳의 객실도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그 모습을 위에서 보면 알알이 맺힌 포도송이 같다. 주변의 자연환경을 양분으로 탄생하는 건축, 대지를 이기려 들지 않고 그곳에 살포시 안기는 건축을 이타미 준은 추구했다. 수풍석박물관(제주), 방주교회(〃), 구정아트센터(충남 아산시) 등 국내 곳곳에 아름다운 건축을 남겼지만, 여전히 ‘일본인 건축가’로 잘못 소개되기도 한다. 그런 그를 기억하기 위해 ‘이타미준건축문화재단’을 설립한 딸 유이화 ITM건축연구소장(45)을 2일 만났다. 이타미 준의 회화를 선보이는 ‘심해’전이 서울 종로구 웅갤러리에서 7일 개막해 9월 7일까지 열린다. 유 소장은 아버지에 대해 ”한국인으로 치열한 건축가의 삶을 살았다”고 했다. 이타미 준은 2005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을 수상했을 때도 “나를 외부인으로 보던 일본 건축계가 충격을 받았다. 날 뭐라 부르든 나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평생 귀화하지 않고 한국 여권을 들고 다닌 그는 대학 졸업 후 출판물에 기고를 하려다 이름 ‘유동룡’ 중 유(庾)의 활자가 없어 ‘이타미 준’이라는 필명을 짓고 활동했다.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한국 이름으로 학교를 다녀 차별도 많이 받았다. 유 소장은 “아버지가 학창 시절에 이지메(집단따돌림)를 당해 ‘복서의 마음’으로 살았다”고 했다. 이런 태도가 항상 치열하게 사는 자세를 만들었다. “외국인 관리 차원에서 5년마다 하는 손가락 지문도 찍었죠. 범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불쾌한 일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오기가 생겨 훌륭한 건축가가 되기로 다짐했다고 해요.” 각종 불이익에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은 건, “어렵게 살아도 한국인의 자긍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했던 부모의 교육 때문이었다. 장남인 그에게 부모는 “너는 유금필 장군의 후손이고 무송 유씨의 43대손이니 집에 불이 나도 족보는 챙겨라”고 늘 당부했다. 그런 그의 건축은 이우환으로 잘 알려진 ‘모노파’를 공간에서 구현한다. 인위를 배제하고 자연과 주변의 맥락, 재료의 물성을 있는 그대로 살리기 때문이다. 이는 재일 한국인 화가 곽인식(1919∼1988)을 스승처럼 따르며 받은 영향이다. 지난해 재단을 설립한 것은 그의 유언에서 시작했다. 그는 생전 입버릇처럼 “내가 죽으면 두 번째 서랍의 유언을 봐라”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떠나고, 가족들이 긴장한 마음으로 펼친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타미 건축문화재단과 건축상, 건축기념관을 만들어라.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내 그림을 팔아서 써라. 이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 5초간 정적이 흐른 뒤 온 가족이 웃으며 유 소장의 어깨를 토닥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통역사 역할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그가 맡아주길 바라던 마음이 담긴 유언이었다. 유 소장은 “제주 지역을 기반으로 어린이 건축학교나,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해 후배 양성과 건축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디지털이 범람하는 시대에 ‘손’의 힘도 일깨우고 싶다고 덧붙였다. “손의 감각과 신체에서 나오는 행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싶어요. 어떤 형태이든 이타미 준을 우상화하진 않을 겁니다. 그 정신만 전해지면 충분하죠. 아버지도 그걸 원하실 겁니다.”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책은 아름다운 소설을 읽다 보면 흔히 떠올리는 환상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그 소설을 써내려간 작가의 삶도 틀림없이 황홀하거나, 고상하고, 깊이 있을 거란 환상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피츠제럴드는 평생 아내와 앙숙처럼 싸우며 지냈다. 오죽했으면 헤밍웨이에게 스콧이 “내 사이즈 때문에 어떤 여자도 만족시켜 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 털어놨을까. 파리의 레스토랑에서 이 고민을 들은 헤밍웨이는 스콧을 화장실로 데려가 확인(?)한 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젤다(아내)가 미친 여자”라고 토닥여 줬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세련된 화려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다. 저널리스트인 두 저자는 전작 ‘소설기행’을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 이 책을 쓰게 됐다. 소설기행은 역사적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를 모은 책이다. 작가들과 얽힌 장소나 개인사를 추적하던 두 사람은 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연애와 결혼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 이야기들은 ‘사랑과 전쟁’ 못지않은 “지어낼 수도 없고, 지어내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삼각관계, 사각관계, 불륜은 물론이고 무려 55세 차이가 나는 연상연하 커플(아서 밀러)이 있는가 하면, 연인이 재능을 인정받는 것을 질투하고 방해하거나(헤밍웨이), 음담패설을 즐기는 고약한 취미(제임스 조이스)를 가진 작가도 있었다.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아는 ‘세계 3대 악처’로 꼽히지만, 그녀의 일기를 보면 가족을 조금도 부양하지 않으려는 남편의 태도에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록이 있다. 두 저자는 “더 분개할 만한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예술가 타입에게 이유 없이 관대하다는 것”이라고 꼬집는다. 그렇다고 문학가들의 방탕한 성 관념을 비판하거나 예술가에게 관대한 태도를 지적하는 선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담담하게 101명의 세계적 작가들과 그 연인의 삶, 사랑에 관한 사실만을 나열한다. 문학 작품에서 받은 감동을 깨뜨리지 않고 싶은 독자라면 마음을 굳게 먹고 책장을 넘겨야 할 듯하다.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영도, F1963, 40계단, 자갈치시장, 항구와 연결된 산업지대…. 짧은 기간이지만 부산의 여러 지역을 돌아보고 있어요. 항구에 정박한 배와 로프, 산업지대를 보니 ‘이주(migration)’의 분위기가 풍겨 흥미로웠죠.” 2020 부산 비엔날레 전시감독으로 선정된 야콥 파브리시우스(49·덴마크)는 부산의 다양한 이미지를 흡수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F1963은 복합문화공간이며 중구에 있는 40계단 주변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이 몰려 판자촌을 이뤘던 곳이다. 열흘 여정으로 부산을 찾은 그를 5일 초량동과 부산역이 내려다보이는 산복도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파브리시우스는 “도시의 공간과 그것이 촉발하는 감각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파브리시우스 감독은 국내외 약 50명(팀)이 지원한 공개 공모를 통해 선정됐다. 지원자 중에 국제적으로 저명한 큐레이터도 있었지만 지역과의 연결성이나 부산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탈락했다. 파브리시우스는 부산의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려는 강한 의지가 호평을 받았다. 그는 “부산을 다섯 번 방문했고, 세 번은 비엔날레를 보러 왔다. 도시의 아름다운 측면은 물론 어두운 부분까지, 캐릭터를 알아가는 데 흥미가 있다”고 했다. 내년 전시의 방향성도 ‘도시 공간’에 초점을 뒀다. 그는 “핵무기나 난민, 경계 등 특정 주제보다 다양한 배경의 예술가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벌써 부산에 머무는 동안 새로운 것이 보인다. 와인이 숙성되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전시의 주제도 무르익는 과정에서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파브리시우스는 현재 덴마크의 현대미술관 ‘쿤스탈 오르후스’의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공공장소에서 사회적 맥락에 대해 질문하고,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프로젝트로 호평받았다. 2017년에는 영국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질리언 웨어링과 TV쇼 ‘진짜 덴마크인 가족(The Real Danish Family)’을 진행했다. 덴마크 14개 마을에서 지원을 받아 오디션 형태로 가장 덴마크다운 가족을 뽑는 프로그램이었다. 한부모 가정, 아내 1명에 남편 2명이 아이 8명과 사는 가족, 농사를 짓는 노년의 게이 부부 등이 후보에 오른 끝에 최종 선정된 가족의 동상을 코펜하겐에 세웠다. 부부와 딸이 1명 있는 가족이었다. 그는 “코펜하겐에는 왕이나 정치인, 혹은 추상 조각이 대부분인데 가장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 된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한편 국내외 미술계에서 지적되는 ‘비엔날레 포화상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국내만 해도 10개가 넘는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마켓에 가면 다양한 상점이 있죠. 비슷해 보여도 내부는 조금씩 달라요. 누군가는 결국 한 곳을 고르게 되고요. 비엔날레도 주제, 예술가, 개최되는 도시 등 관심을 끄는 다양한 요소가 있어요. 이를 적절히 활용해 매력적 비엔날레를 만들고 싶습니다.” 부산=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형형색색의 촉수를 드리운 괴물, 이병찬(32)의 작품 ‘크리처’가 움직인다. 현란한 빛과 거대한 크기가 눈길을 끌지만, 가까이서 보면 라이터로 지져 이어 붙인 비닐봉지다. 손으로 쥐면 꺼져버리는 덧없는 형상. 소비 그 자체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 현대인의 기이한 모습을 대변하는 ‘예쁜 쓰레기’가 기괴한 형태의 괴물이 돼 돌아온 것만 같다. 이 작가의 개인전 ‘표준모형’이 10월 29일까지 열리고 있는 곳은 경기 부천시 ‘부천아트벙커 B39’. 1992년 지어진 쓰레기소각장을 개조했다. 부천 중동 신도시 건설로 하루 쓰레기 200t을 처리하다 다이옥신 파동이 일어나고 환경오염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2010년 폐쇄됐다. 버려진 공간은 지난해 6월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작품이 설치된 벙커는 깊이 39m의 사각형 공간으로, 쓰레기를 던지는 깊은 구덩이였다. 작가는 이곳을 “자본의 결과물인 상품이 쓰레기로 한데 모여 해체되는 공간”이라고 봤다. 크레인이 있던 곳에는 ‘크리처’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바닥에는 파이프 비계(건물을 지을 때 근로자들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도록 설치하는 가설물)와 흰 커튼으로 만든 설치 작품 ‘사라진 양말’이 자리한다. 소각장 전시를 제안 받은 그는 처음에 죽음을 다룰까도 생각했다. 그는 “작업은 물론 생활까지 모든 것을 혼자 하기에 내가 ‘고독사’할 거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죽음을 표현하기엔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자본과 질량과 시간을 이야기했다. ‘사라진 양말’은 작업실에서 빨래를 널 때마다, 불쾌하게도 ‘한 짝씩’ 사라지는 양말을 보며 빠져든 공상에서 출발했다. ‘싸구려라서 그 가격만큼 시공간을 사용하고 소멸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왜곡된 시간에서는 양말이 거대 질량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작품은 양말의 질량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공간 한쪽에 놓인 스피커에서 메트로놈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린다. 휘날리는 흰 커튼이 불안을 고조시키고, 쨍한 음색의 금관악기 소리가 엇갈린다. 다른 흐름들이 순간 일치되며 고조되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가짜와 진짜가 혼재된 정보가 쏟아지고, 그 가운데 이리저리 쏠리는 자본의 흐름, 주식 시장이나 비트코인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이 작가는 자본주의 도시 속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추적한 작업으로 최근 주목을 받았다. 신도시 개발 광풍이 부는 가운데 학교를 다닌 경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온 세대의 감정을 표현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자신이 끊임없이 만졌던 비닐봉지를 소재로 만든 ‘크리처’는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도 소개됐다. 부천=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