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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2019년 재선 직후 수도 이전 계획을 발표할 때만 해도 그 실현 가능성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자바섬의 인구 1000만 수도 자카르타를 대신하는 새 수도 예정지로 선택된 곳은 보르네오섬 동칼리만탄의 정글지역. 현지인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오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의회가 최근 수도 이전 법안을 통과시켰다.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은 인도네시아 전체 면적의 7%에 불과하지만 인구(2억7500만 명)의 60%가 모여 산다. 대기오염은 물론이고 시내의 차량 평균 시속이 10km일 정도로 교통 체증도 심각하다. 장관들은 국무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한다. 자카르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가라앉는 도시다. 도시의 40%는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데 지금도 매년 지반이 25cm씩 내려앉고 있다. ▷새로운 수도가 들어설 곳은 자카르타에서 약 1200km 떨어진 열대 우림으로 오랑우탄과 긴코원숭이의 주요 서식지다. 새 수도 이름은 ‘열도’라는 뜻의 ‘누산타라’. 위도도 대통령이 80개의 후보명 가운데 선택했다. 올해 착공해 전기차와 드론 택시가 다니는 친환경 도시로 건설한 후 2024년 공공기관 이전을 시작으로 2045년 천도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이전 비용은 약 38조 원. 자카르타는 경제와 금융 중심지로 남게 된다. ▷정치적으로도 인도네시아의 수도 이전은 국부(國父)인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부터 품어온 숙원이었다. 네덜란드와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 수도였던 자카르타를 벗어나고 싶었고, 국가 경제활동의 절반이 자바섬으로 집중된 후로는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새로운 명분이 추가됐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이전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자카르타 기득권층의 반발도 거셌다. 역대 대통령 9명 중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자바인이다. 결국 가라앉는 도시를 더는 고집할 수 없게 되자 자바인이며 자카르타 주지사 출신인 위도도 대통령이 나서게 된 것이다. ▷20세기 이후 독립국 가운데 약 20개국이 수도를 이전했는데 인도네시아가 눈여겨보는 나라는 브라질 말레이시아 그리고 한국의 세종시다. 브라질은 해안가에 집중된 경제력을 분산하기 위해 196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내륙 지역인 브라질리아로, 말레이시아는 쿠알라룸푸르의 교통난 해소를 위해 1993년 푸트라자야를 새 행정수도로 지정했다. 인도네시아의 천도는 정부 기능을 분산시킨 말레이시아와 한국보다는 신수도를 건설한 브라질 모델에 가깝다. 그만큼 인도네시아의 천도가 완성돼 성공 여부를 평가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어린 시절 새집으로 이사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전에 살던 주인이 보일러에 기름을 가득 채워놓고 떠난 것이다. 덕분에 기분 좋게 출발해서인지 그 집에 사는 동안 좋은 일들이 많았다. 도시가스 난방이 드물던 시절엔 다들 그렇게 살았다. 보일러 가득 채워놓는 후한 인심은 드물었지만 남의 집 문간방살이를 하는 사람도 새로 들어오는 이가 냉골에서 고생하지 않도록 연탄불을 넣어두고 가는 걸 도리로 알았다. 새삼 옛날 일이 떠오른 건 넉 달 후 퇴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이사 에티켓’이 민망해서다. 방을 뺄 때가 되면 살면서 고장 낸 것은 없는지, 집을 험하게 써서 새로 이사 오는 사람이 불편해하지는 않을지 돌아봐야 하건만 문 대통령은 오히려 들고 갈 것은 없는지 끝까지 챙기는 모양새다. 취임식에서 “빈손으로 취임하고 빈손으로 퇴임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해놓고 잊어버렸나 보다. 문 정부만큼 곳간을 털어먹은 정부도 드물다. 온 국민이 열심히 운동하고 술 담배를 줄여가며 20조 원 넘게 쌓아둔 건강보험 적립금이 ‘문재인 케어’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노사가 10조 원 넘게 불려놓은 고용보험기금도 문 정부 4년 만에 마이너스가 됐다. 빚 무서운 줄 모르고 쓰다가 국가부채를 400조 원 넘게 늘려놓고도 또 빚을 내 사상 최대 규모인 607조 원 예산을 편성하더니 새해 시작부터 추경 얘기를 꺼낸다. 전구와 샤워기 꼭지까지 빼가는 것도 모자라 새로 들어올 사람 앞으로 외상 달아놓고 가는 격이다. 인사권도 그렇다. 임기 말에도 부지런히 알박기 인사를 하고 있다. 상대국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외교부 공관장 인사를 앞당겼다. 정권 말 인사를 자제하는 관례를 무시하다 보니 35개 공기업 중 32개는 사장이 다음 정부에서 임기를 절반 이상 보내게 됐다. 무리를 해서라도 잡아야 하는 인재들일까. 주경제협력개발기구(OECD)대표부 대사로 임명된 전 청와대 수석은 요소수 대란으로 경질설이 돌았던 인물이고, 대한석탄공사 사장과 감사 자리를 꿰찬 이들은 석탄의 ‘ㅅ’도 모르는 친여 인사들이다. 좋은 건 바리바리 싸가고 나쁜 건 죄다 버리고 간다. 전기요금과 도시가스요금을 두 자릿수로 인상하면서 시기는 4월 이후로 미뤘다. 서민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한 공은 챙기고, 서민물가 폭등이라는 과는 차기 정부로 떠넘긴 것이다. 올해 주택보유세 산정에 지난해 공시가격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데, 올해 보유세는 동결되겠지만 내년엔 그만큼 더 오르게 된다. 이 역시 정책 실패의 책임 떠넘기기다. 자동이체가 드물던 시절 우유 값, 신문 값 떼먹고 이사 가던 염치없는 전출자와 뭐가 다른가. 덕분에 차기 정부는 차디찬 냉골에서 새 살림을 시작해야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통 크게 쓰겠다고 벼르고 있지만 나랏빚은 1000조 원 넘게 쌓여 있고, 텅 빈 곳간을 채울 기업들은 임기 말까지 계속된 반(反)기업 입법으로 손발이 묶여 있다. 공상과학 수준의 탄소중립계획을 포함해 무리한 정책들이 들이밀 청구서에 연금개혁 노동개혁 폭탄까지 떠안다 보면 후임 대통령도 현 정부처럼 “저희가 물려받은 좋지 못했던 여건” 탓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안 하던 퇴임식까지 하고 갈 모양이다.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전세 들어왔다고 생각하겠다’고 했다. 퇴임식이야 어떻든 집주인에겐 다시는 들이고 싶지 않은 세입자로 기억될 것 같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35)의 호주오픈 참가 여부가 올해만큼 주목을 끌었던 적은 없다. 남자 테니스 역사상 첫 메이저 21회 우승에 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백신 회의주의자인 그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섬나라 호주의 방역패스를 통과할 수 있을지가 경기 결과에 앞서는 관심사였다. 결국 그는 입국을 거부당해 추방될 위기에 놓였다. ▷조코비치가 5일 호주 입국을 시도한 건 대회가 열리는 멜버른의 빅토리아 주정부가 접종 면제 허가를 내줬기 때문이다. 호주 방역규정에 따르면 최근 6개월 이내에 코로나에 걸렸다 나은 사람은 백신을 맞지 않아도 입국이 가능하다. 하지만 멜버른 국제공항에서는 서류 미비를 이유로 그의 비자를 취소했다. 비자 취소 무효 소송을 제기한 그는 인근 호텔에 억류된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조코비치의 모국인 세르비아 대통령은 베오그라드 주재 호주 대사를 초치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철회하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호주 총리는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순 없다”고 선을 그었다. 17일 개막하는 올해 호주오픈은 메이저 대회로는 처음으로 선수 팬 자원봉사자 전원의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 호주는 12세 이상 90%가 접종을 완료하고도 하루 평균 3만 명의 확진자가 나오는 상황이다. 조코비치에게 우승 트로피를 9개나 안겨준 나라지만 모든 특혜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테니스 연습시설이 있는 호텔로 옮겨 달라는 요구도 거절했고, 대회 일정을 감안해 신속히 판결해 달라는 요청도 “꼬리가 몸통을 흔들면 안 된다”며 일축했다. ▷특혜 시비를 빼면 이번 논란의 핵심은 개인의 자유와 공공이익의 충돌이다. 조코비치는 기(氣)치료에 빠져 있는 대체의학 신봉자다. “피라미드에서 영적 치유를 경험했다”는 그의 독특한 건강비법을 스타의 기벽쯤으로 여기던 팬들도 코로나 이후 그가 백신에 반대 목소리를 내자 “믿음의 자유가 타인의 건강을 해칠 권리는 없다”며 돌아섰다. 팬데믹 종식의 방해꾼으로 보는 것이다. ▷국내에선 학원과 독서실 등 교육시설의 방역패스 시행에 대해 법원이 최근 효력정지 결정을 내렸다. 방역당국은 백신의 의학적 효과를 간과한 결정이라며 항고했는데 법적으로도 의문이 남는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 다수가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는 게 옳은가. 개인의 기본권이 병에 걸리지 않을 권리보다 중요한가. 경제적 피해가 막심한 거리두기가 아니라면 방역패스 말고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당분간은 기본권 침해를 최소화한 과학적인 방역패스를 예외 없이 적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 대상이 조코비치라 할지라도.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방송가엔 3대 해결사가 있다. ‘요식업계 대부’ 백종원, ‘개통령’ 강형욱, 그리고 ‘육아의 신’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57)다. 오 박사는 채널A 육아예능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아이들의 이상 행동을 감쪽같이 바로잡는 ‘금쪽 처방’으로 떼쟁이 아이를 둔 부모들에겐 ‘영접’ 희망 1순위 인물이다.요즘엔 성인용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유명 인사들이 털어놓는 고민을 들어주며 국민 멘토로 부상하고 있다. 진지한 연애를 못 하는 남자, 사춘기 딸과 티격태격하는 싱글맘, 서로 사랑하지만 대화가 겉도는 난임 부부 등 출연자들은 수심 가득한 얼굴로 나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돌아간다. 좀 더 단단한 마음으로 새해를 살아낼 순 없을까. 이런 고민을 안고 오은영 아카데미 강남센터 사무실을 찾은 3일, 마침 대학생 30%가 ‘코로나 블루’를 경험했다는 통계자료가 공개됐다.》소통에 서툰 부모, 아이 탓만 해 ―코로나로 다들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비대면의 장기화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나 봅니다. “사람은 서로 마주치면서 힘을 얻어요. 복작대는 강남역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칠 때도 정신적 에너지를 교환합니다. 이런 접촉이 줄어드니 힘든 거죠. 특히 아이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과도 상호작용 해야 대뇌가 발달해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모래에서 뛸 때와 아스팔트에서 뛸 때가 다르다는 걸 체험하며 커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많이 줄어 걱정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2020년 우울증 같은 기분장애로 병원을 찾은 20대 환자가 전년 대비 21%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나이가 들수록 환자가 증가하는 노년의 병이었는데 이젠 청춘의 질병이 돼버린 걸까요. “억울한 마음이 큰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은 코로나에 감염돼도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왜 고령층 보호를 위해 우리까지 희생해야 하느냐는 억울함이죠. 자영업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성실함과 책임감에서 정부가 시키는 대로 방역수칙을 지켰는데 왜 우리만 피해를 보느냐는 억울함입니다. 코로나 이전부터도 억울함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가 된 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부모 세대가 요구한 대로 열심히 공부했는데 취업할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세대입니다. 부모 세대는 ‘우리 땐 더 힘들었는데 요즘 젊은이들 고생이 고생이냐’며 억울해하죠.” ―집단적 억울함을 해소하는 건 결국 정치의 영역인데요. “전 소통의 문제라고 봅니다. 상대가 억울하다는 걸 인정해야 풀어갈 수 있는데, ‘너보다 내가 더 억울하다’는 생각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죠. 우린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은 건방지다’ ‘노인네들은 꼰대스럽다’ 하면서 태도를 문제 삼죠. 수능을 망친 아이들은 신경질을 내거나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합니다. 견디기 힘든 마음을 분노로 표현하거나, 불안감을 잊기 위해 게임에라도 몰두하는 거죠. 그런데 부모는 그런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너 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뭘 잘했다고 밥도 안 먹고 게임이야’ 그래요.” ―그럴 때 모범 답안은 무엇인가요. “‘속상해도 밥은 먹어라. 네가 안 먹으면 엄마도 너무 속상하단다’ 해야죠. 그래도 ‘내버려둬’ 하면 ‘좀 생각해 보고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얘기해 보자’ 하는 거죠. 그런 언행을 하는 이유는 외면한 채 남 탓만 하면 대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뒤로 가게 돼요. 소통에 서툰 부모들을 위해 포털에 ‘오늘 육아 회화’라는 코너도 연재한 적이 있어요.” ―입학과 졸업의 계절입니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 입시와 취업 경쟁에서 좌절을 경험하는 때이죠. 입시에 실패한 아이들은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하나요. “한 수험생이 와서 ‘12년간 열심히 공부했는데 억울하다’고 해요. 그래서 얘기해 줬어요. 사람이 공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 보는 경험을 하는 거다. 그 과정에서 배운 많은 것들로 넌 앞으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럼 아이가 ‘그래도 당장 이 좌절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해요. 그 좌절감마저 잘 겪어내는 게 최선의 마침표라고 얘기해 주죠.” ―대학생들은 심리·정서 안정에 위협이 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취업 경쟁을 꼽습니다. “그런 청년들에겐 ‘네가 기대치를 조금 낮추면 갈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일단 일을 시작해 보라고 해요. 제가 의사 면허를 따고 인턴으로 했던 일 중에서 의사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은 10%도 안 됐어요. 나머지 90%는 허드렛일이었죠. 정말 자신과 맞지 않거나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는 일이 아니라면 실제로 해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경력이 쌓이는 거라고 생각해요.”아이에게 문제 해결할 시간 줘야 ―같은 시련도 잘 극복해 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외부의 자극을 막을 순 없지만 그 자극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어요. 외부 자극을 견디려면 내면의 힘이 필요합니다. 핵심 애착관계인 부모로부터 이해받고 공감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게 중요해요. 여기서부터 내면의 힘이 길러지죠. 내면의 힘은 자신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인데 이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배우는 겁니다. 아이가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닥치면 부모들은 직접 해결해 주기보다 아이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줘야 해요. 많은 부모들이 결과 중심적인 양육을 합니다. 이런 양육 방식으로 자란 아이는 중간 과정이 중요하고, 과정을 통해 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하게 될 수도 있어요. ‘너는 열심히 했지만 잘 안될 때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면서 자라야 해요. 그래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12개 TV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자 혹은 게스트로 나오고 3개 신문사에 칼럼을 기고하셨죠.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해내나요. “아기 때부터 잠이 적었어요. 요즘은 4, 5시간 자고 일합니다. 14년 전 크게 아픈 뒤로 제가 아주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열심히 살면 행복이 찾아와요 ―암 수술을 받으셨죠. “그날이 토요일이었어요.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담낭에 악성 종양이 있는 것 같다고 했어요. 월요일 정밀검사에선 담낭암일 가능성이 93%라고 했습니다. 대장암까지 발견됐으니 이틀 뒤 수술에서 담낭암이 확인되면 오래 못 살 수도 있다고요. 수술 전날까지 예약된 환자들 진료를 봤어요. 환자들 중엔 지방에서 월차를 내고 온 사람, 절박한 마음으로 찾은 부모들이 있는 데다 제 고민이 당장 해결될 일도 아니었고요.” ―일상을 유지하는 게 시련을 견디는 힘이 된다는 말씀인가요. “인생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오늘 하루의 최선’을 다할 뿐인 거죠. 여기서 최선이란 내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일상을 살아내는 거예요. 내가 해낼 수 있는 선을 넘어 에너지를 끌어다 쓰면 건강도 나빠지고 오래 하지도 못해요. 만약 오늘 너무 힘들어서 하루 쉬었어요. 그럼 그게 오늘의 최선인 거예요. 아이가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 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내가 피곤하면 하루 건너뛰어도 됩니다. 인생은 꽤 긴 과정입니다.” ―박사님이 항상 웃으며 사는 비결은 뭡니까. “상처 없이 매끈한 인생이 있을까요. 꿰매어 가면서 너덜너덜한 채로 견뎌 내는 거죠.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순간의 감정이에요. 우울한 사람들은 행복의 순간을 감지하지 못합니다. 허리를 숙였다가 폈는데 하늘이 파래요. ‘와, 하늘 좀 봐’ 하며 행복해지죠. 아이 키우는 건 매우 힘든 일이지만 가끔씩 귀여운 짓을 하는 걸 보면 행복하잖아요. 한번은 강연을 끝내고 나오는데 어떤 엄마가 뒤따라 나오더니 작은 사탕 하나를 건네주었어요. 그날 그 사탕 하나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끝에 드물게 찾아오는 행복감, 이런 순간의 힘으로 사는 겁니다.” 오은영 박사는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연세대 의대 졸업 후 같은 학교에서 석사 학위, 고려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어린이와 성인의 심리 상담과 치료를 하는 ‘오은영 아카데미’ 원장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일본 사람들은 ‘해 넘기기 우동’을 먹는다. 삿포로의 한 우동 가게에도 12월 31일 늦은 밤 남루한 차림의 여인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1인분을 주문했다. 딱한 사정을 알아챈 주인은 몰래 1.5인분을 내어주고 세 모자는 맛있게 나눠먹는다. 구리 료헤이의 소설 ‘우동 한 그릇’의 줄거리인데 실제로 따뜻한 한 끼의 추억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 미국 뉴욕에 사는 A 씨도 그중 한 명이다. ▷A 씨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 겨울 밤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A 씨는 서울 신촌시장 뒷골목에서 홍합을 파는 리어카를 보았다. 배가 고팠던 그는 “홍합탕을 한 그릇 먹을 수 있겠느냐. 돈은 내일 드리겠다”고 했고, 아주머니는 선뜻 한 그릇을 내주었다. 그 다음 날이라고 없던 돈이 생겼을까. A 씨는 이후 이민을 떠났다. 홍합탕 값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A 씨는 50년이 지난 최근 이 같은 사연을 담은 손 편지와 1000달러짜리 수표 두 장을 서대문경찰서 신촌지구대로 보내왔다. 1만 원짜리 홍합탕을 200그릇 넘게 먹을 수 있는 돈이다. ▷식당들이 코로나 폐업 위기에 몰린 올해도 ‘홍합탕 한 그릇’의 사연이 줄을 이었다. 특히 “애들 굶는 건 절대 못 보겠다”는 식당들이 많았다. 홍대 앞 치킨집은 “동생이 치킨을 좋아하는데 5000원밖에 없다”는 소년 가장에게 세트 메뉴를 공짜로 주었다. 망원동 분식집은 결식아동 카드를 가진 아이는 물론 동반 1인에게도 식사를 준다. 혼자 먹기 부끄러워할까봐서다. ‘뭐든 먹고 싶은 거 얘기해줘. 눈치 보면 혼난다’라고 문 앞에 써 붙인 식당도 있다. 이렇게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가게가 전국에 3000개 가까이 된다. ▷홍합탕 한 그릇은 일방적 나눔이 아니다. 식당 주인들은 “아이들을 먹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다”고 한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 싶다가도 “사장님 덕분에 밥 잘 먹고 성인이 됐다”는 편지를 받으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영업난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파스타집 사장은 “‘1년간 매일같이 신세졌는데 눈치 안 보고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를 받고 수면제 없이 잘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소설 ‘우동 한 그릇’의 형제는 14년 후 의사와 은행원이 돼 노모와 함께 그 우동 집을 찾아 3인분을 시킨다. 그날 밤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열심히 살았다면서. A 씨는 편지에서 “50년간 친절하셨던 아주머니 덕으로 살아왔다”며 가장 어려운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를 제공해달라고 당부했다. 올 한 해 넉넉지 않은 이들 덕분에 ‘홍합탕 한 그릇’의 추억을 갖게 된 아이들도 나눔의 힘을 믿는 반듯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충남 논산의 임태호 씨는 스무 살 때 일제 징용에 니가타현 사도(佐渡)섬의 광산으로 끌려갔다. 매일 새벽 함바(노동자 숙소)로부터 험한 산길을 1시간 30분 걸어야 나오는 광산이었다. 직할 병원이 있었지만 온갖 부상에도 병원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결국 섬에서 도망쳐 사도광산 생존자로는 유일하게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겐 죽음의 노역장이던 이곳이 28일 일본 문화심의회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됐다. ▷1601년 발굴된 사도광산은 1989년까지 운영된 일본 최고(最古) 광산으로 에도 시대엔 도쿠가와 막부의 금고 역할을 했다. 니가타현은 이 시절의 금광임을 강조하지만 태평양전쟁 무렵엔 전쟁 물자를 확보하는 광산이었고 대부분 유적도 이와 관계된 시설물들이다. 얼마 전엔 최소 1141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노역했다는 일본 정부 문서가 공개됐다. 하지만 세계문화유산 추천서 요약본에는 조선인 강제노역 사실이 빠져 있어 군함도(端島·하시마)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때와 같이 역사 왜곡이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조선인 광부들은 형식적으론 청부업자를 통하거나 직접 고용됐지만 실제로는 강제노역이었다. 사도광업소 기록에는 1943년 6월 기준 조선인 광부 1005명이 들어와 이 중 148명(14.7%)이 ‘도주’한 것으로 나온다. ‘퇴사’가 아닌 ‘도주’로 집계했다는 건 강제노역임을 자인하는 증거다. 조선인 1인당 평균 월급은 80엔 안팎이었으나 각종 물품비와 보험료를 공제하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얼마 안 됐고 그나마 강제저축을 했다. 인플레이션 억제와 전비 충당, 그리고 도주를 막기 위해서였다.(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보고서)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로 판정한 218만여 명 중 사도광산 피해자는 148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73명이 진폐증과 폐질환 같은 후유증을 앓았다. 사망자는 9명(사망률 6%)으로 일본 전 지역 조선인 노무자 사망률(0.9%)보다 높다. 1945년 광복의 날 사도광산엔 조선인 244명이 남아 있었다. 사도광산은 긴급회의를 열었는데 안건은 이들의 귀국이 아니라 ‘패전으로 인한 가동률 저하 방지 방안’이었다. ▷일본은 1932년 강제노동을 금지한 국제노동기구(ILO) 노동협약 29호를 비준했다. 국내에선 올 2월에야 비준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니 일본이 89년 빨랐다. 그런데 군함도도 사도광산도 전쟁을 위해 스스로 비준한 국제협약을 위반하더니 이제는 그 사실마저 외면하려 한다. 근대화에선 앞서간 나라가 언제까지 후진적 역사 인식에 발목 잡혀 있을 건가. 강제노역의 역사를 뺀 사도광산은 세계유산의 자격이 없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동아일보가 각계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선정한 ‘올해의 책’은 브라이언 헤어의 공저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입니다. 진화인류학자가 쓴 이 책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 아니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고 주장합니다. 경쟁과 이기심이 아닌 협력과 연대의 관점에서 진화론을 재해석한 메시지는 어느 한 사람이 위험해지면 모두가 무사할 수 없는 감염병 시대여서 울림이 큽니다. 진화론은 오랫동안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이론으로 오독됐지만 찰스 다윈도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많은 후손을 남겼다”고 썼습니다(‘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인간은 내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이기적인 동물이어서가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감성지수(EQ) 높은 존재여서 번성했다는 것이죠. 다른 동식물 사례는 생략하고 인류만 비교해 보겠습니다. 개인의 역량으로 치면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힘도 세고 뇌도 15%나 더 큽니다. 하지만 네안데르탈인이 10∼15명의 무리만 짓는 동안 호모사피엔스는 그 이상의 규모로 연대할 줄 알았습니다. 네덜란드 사상가 륏허르 브레흐만의 표현을 빌리면 네안데르탈인은 초고속 컴퓨터이고 인간은 구식 PC지만 와이파이를 이용할 줄 아는 종입니다. 인간이 협력적 의사소통으로 살아남은 진화의 흔적은 신체에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얼굴 붉힐 줄 아는 유일종입니다. 타인의 생각에 반응한다는 뜻이죠. 흰 눈자위를 지닌 유일한 영장류이기도 합니다. 눈빛만 보고도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다정한 만큼 우리를 위협하는 ‘그들’에겐 잔인해질 수 있습니다. ‘다정한…’은 엄마 곰이 아기 곰과 함께 있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예로 설명합니다. 누구라도 아기 곰을 해치려 들면 엄마 곰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는 종교적 유혈 분쟁이, 증오의 언어를 주고받는 사생결단식 정치 문화가 다정함의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사람은 잔인한 표변을 비인간화로 정당화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털북숭이 짐승이거나 뿔 달린 악마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에겐 잔혹해지는 다정함의 한계도 ‘인간화’로 극복할 수 있을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인 수천 명이 목숨 걸고 유대인을 구해주었습니다. 대단한 영웅심도, 종교적 신념 때문도 아닙니다. 전쟁 전 유대인 이웃이나 직장 동료와 친하게 지낸 경험이 있었을 뿐입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조지 오웰은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잡고 도망치는 적을 보고 이렇게 썼습니다. ‘파시스트가 아니라 분명 나와 같이 생긴 인간… 그에게 총 쏘고 싶지 않았다.’ 새해에도 코로나 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체 줄넘기를 해야 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넘어지거나 뛰지 않으면 모두가 넘어지는 게임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지구상에 존재했던 99.9%의 종이 멸종하는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장의 무기가 있습니다. 다정함입니다. 참호전이 한창이던 1차대전 때도 영국군과 독일군은 참호 밖을 나와 함께 캐럴을 부르고 담뱃불을 교환하는 성탄절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차별과 혐오의 참호에서 빠져나와 서로 눈 맞춤하며 고통을 나누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다정한 새해가 됐으면 합니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계 최장수 국가는 일본이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인의 기대수명은 84.2세로 한국(82.7세)보다 1.5세 더 오래 산다(2018년 기준). 일본인의 생선 사랑과 저지방 식단이 비결로 꼽힌다. 그런데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최장수 국가가 된다는 전망이 나왔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0∼2025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84.1세로 일본(84세)을 근소한 차이로 앞지를 전망이다. 2065∼2070년이면 기대수명은 90.9세(남자 89.5세, 여자 92.8세)로 늘어나 일본(89.3세)과의 격차는 더 벌어진다. 2위와 3위는 노르웨이(90.2세)와 핀란드(89.4세)다. 통곡물과 채소, 오메가3 지방산 함량이 높은 생선 위주의 ‘노르딕 식단’으로 주목받는 북유럽 국가들이다. ▷한국이 세계 1위의 장수 국가가 된다는 전망은 영국 과학계에서 먼저 나왔다. 영국 임피리얼칼리지 런던 연구진은 2017년 의학저널 랜싯에 게재한 논문에서 2030년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여성 90.82세, 남성 84.07세로 최장수 국가가 된다고 예측했다. 연구진은 건강보험제도와 의료기술의 발달, 높은 수준의 교육과 어린이 영양을 비결로 꼽았다. BBC를 비롯한 외신이 주목한 건 김치로 대표되는 발효음식 문화와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달려가는 건강염려증이다. ▷실제로 한국인 가운데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낮다. 한국인보다 평균수명이 짧은 미국(87.9%)이나 독일(65.5%)의 절반도 안 된다. 건강염려증을 감당해주는 건 가성비 뛰어난 의료 인프라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병원 방문 횟수(16.6회)는 OECD(평균 7.1회)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예방접종률, 건강검진율 등 의료 접근성을 나타내는 지표와 위암 유방암 대장암 같은 중증질환 생존율 모두 OECD 평균보다 높다. 반면 1인당 연간 진료비(3192달러)는 OECD 평균(3992달러)보다 싸다. ▷세계 1위 장수 국가 기록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은 저출산이다. 영아 사망이 드물다 보니 기대수명이 길어지는 것이다. 지금 같은 저출산 기조가 이어지면 생산연령인구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인구가 2020년 38.7명에서 2070년이면 116.8명으로 급증한다. 유엔은 한국 인구가 2024년경 정점에 이른 뒤 2100년이면 2900만 명까지 줄어든다고 전망했다. 1966년 인구 규모다. 전후 폐허를 딛고 최장수 국가로 발돋움한 나라가 후손을 보지 못해 전후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니 서글프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대학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어둡다. 24년 전 미래학자 피터 드러커는 “30년 후 대학 캠퍼스는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토머스 프레이는 “2030년 대학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대의 변화에 대비하라는 뜻에서 던진 충격 발언이었는데 국내에선 실제로 25년 내 대학의 절반이 소멸된다는 예측이 나왔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5일 주최한 ‘미래전망 전문가 포럼’에서 저출산으로 학령인구가 줄면서 2042∼2046년 국내 대학 수가 190개가 될 것이라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현재 대학이 385개이니 25년 후엔 절반만 남게 되는 셈이다. 전국 17개 시도 가운데 대학 생존율이 75% 이상인 곳은 서울(81.5%)과 세종(75%)뿐이다. 경남(21.7%) 울산(20%) 전남(19%)은 5개 중 4개가 사라질 전망이다. ▷지난해 입시부터 학생수가 입학 정원을 밑돌면서 지방대들은 소멸의 위기를 체감하고 있다. 지방 수재들이 가던 국립대 수학과를 수학 8등급 학생이 가고, 지원자 전원이 합격하는 학과들도 속출했다. 속이 타는 대학들은 ‘원서만 내면 100% 합격’이라고 모집 공고를 내거나 ‘1년 학비 면제+토익 수강비 지원’ 같은 유인책을 제시한다. 성적과 무관하게 들어온 학생들에게 고교 수학 과학을 가르치려고 사교육업체와 계약을 맺는 대학도 있다. ▷대학의 소멸은 지역 경제의 위기다. 대학생 1명의 월 경제유발 효과가 100만 원이라고 한다. 2018년 서남대 폐교 전후 6년간 전북 남원시의 연간 소득 감소액은 260억∼344억 원으로 추산된다. 2017년 남원시 총예산의 4.5∼6%다. 2010년부터 8년 연속 부실 대학 지정으로 학생수가 꾸준히 줄지 않았다면 폐교의 충격은 더했을 것이다(국토지리학회지 논문). 가야대와 단국대 캠퍼스가 2003년과 2007년 빠져나간 후 경북 고령군과 서울 용산구의 서비스업 고용은 약 6% 줄었다(KDI 보고서). 대학이 지역 문화의 구심점임을 감안하면 폐교로 지역 사회가 입는 손실은 더욱 커진다. ▷학생수 급감이 아니라도 지금의 교육 방식으로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래학자 프레이는 “앞으로는 평생 10개 직업을 바꿔가며 일하게 될 것”이라며 평생교육 수요에 대비하라고 제안했다. 코로나로 미국을 포함해 대부분 나라에서 유학생이 줄어든 데 비해 한국은 한류 덕에 올해 외국인 유학생 수가 12만 명으로 2019년보다 19.8% 늘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시야를 넓혀 새로운 교육 수요를 찾아내는 것이 대학 소멸을 막는 방법이 될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전임 시장 시절 시민단체 지원 사업을 감사하고 지원 예산을 삭감하자 전국 1090개 단체가 ‘퇴행적인 오세훈 서울시정 정상화를 위한 시민행동’을 결성했다. 서울시의 ‘예산 차별 편성’이 ‘재량권 남용’이라며 감사원에 공익감사를 청구한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출신인 박원순 시장 집권기에 시민단체들은 황금기를 누렸다. 지난해 말 기준 서울의 시민단체는 2295개로 9년 전보다 80% 증가했다. 이 중 절반가량인 1250개 단체가 올해 민간보조와 민간위탁 명목으로 서울시에서 1694억 원을 지원받았다. 2012년 지원액의 5배가 넘는다. 10년간 총 1조318억 원이다. 마을, 청년, 도시재생, 주민자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서울시의회에선 “서울시 예산을 받으려면 시민단체를 만들라는 얘기가 있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이 막대한 예산의 집행 실태가 서울시의 분야별 감사와 평가로 드러나고 있는데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시민단체 출신이 임기제 공무원으로 채용돼 단체 지원 업무를 맡는다. 이해충돌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둘째는 서울시가 단체에 직접 예산을 주지 않고 ‘지원센터’라는 중간조직을 거치도록 한다는 점이다. 사무실 임차료나 인건비 모두 시민이 낸 세금에서 나가는 센터 역시 시민단체가 운영하는데, 유통 단계가 늘어나는 만큼 최종 수혜자인 시민에게 돌아가는 몫은 적어지지만 시민단체 일자리는 많아진다. 시민단체인 ‘마을’이 대표적인 사례다. ‘마을’은 박 시장이 취임한 지 6개월 후인 2012년 4월 박 시장 선거 캠프 출신이 설립해 그해 8월부터 10년간 마을공동체와 청년 지원 명목으로 600억 원이 넘는 사업을 독점 위탁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의원은 “조직이 만들어지고 몇 개월 만에 수탁받은 예는 거의 없다”며 특혜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데 해당 사업을 관리 감독하는 공무원으로 채용된 이들이 ‘마을’ 출신이다. 마을공동체 예산은 종합지원센터와 24개 마을자치센터라는 2단계 중간단계를 거쳐 지원된다. 그중 9개도 ‘마을’이나 관련 단체 출신이 운영한다. 누가 그 예산 집행을 공정하다고 보겠나. 오 시장의 정치적 감사로 몰아붙일 일만은 아니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들도 “시민단체가 권력화되기 시작하고, 서울시 집행부로 들어오고, 또 수탁을 받아 일하고, 공무원들은 그 사람들 눈치 보기 급급하다”고 비판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4월 ‘민간단체의 관변화 방지’를 위해 시민단체의 ‘자부담 확대’를 건의하는 보고서도 냈다. 서울시정을 감시해야 할 시민단체가 ‘민관 협치’라며 시와 한 몸이 돼 도시재생, 주민자치, 사회적 경제 실험에 몰두하는 동안 서울시민의 행복지수와 도시 경쟁력은 뒷걸음질쳤다. 더 충격적인 건 시민단체의 평판 추락이다. 한국행정연구원 조사에서 시민단체 신뢰도는 2013년 50.5%에서 지난해 46.7%로 하락했다. 시민단체의 주요 감시 대상인 정부(49.4%)나 대기업(50.4%)보다도 낮아졌다. 청렴도 역시 정부와 대기업에 뒤진다. 행정은 실패하면 시민들이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런데 시민단체가 행정에 개입해 실패하면 그 책임은 어떻게 묻나. 1090개 단체는 집단행동을 예고하면서 “오세훈 시장의 서울시 사유화를 멈추겠다”고 했지만 상당수 시민들은 ‘시민단체의 서울시 사유화’를 의심하고 있다. 행정의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비정부기구’라는 이름대로 정부지원금 의존증부터 버려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젊은 청년이 새벽길을 나선다. 인력사무소에서 100원짜리 믹스 커피를 마시고 현장에 도착하면 작업을 시작한다. 목재를 운반하고, 못질하고, 톱질하고, 새참으로 컵라면 먹고, 오후 4시쯤 일과를 마친 뒤 저녁은 따뜻한 순댓국밥으로 마무리한다. 건설 현장 청년 일꾼들의 일상을 담은 ‘노가더’ 콘텐츠가 감동을 주는 유튜브 장르로 뜨고 있다. ▷노가더는 막일꾼을 뜻하는 ‘노가다’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를 붙여 만든 신조어. 유튜브에서 ‘노가더’를 검색하면 ‘일당 13만 원 노가더의 하루’ ‘20대 노가더의 리얼 노가다’ ‘숙노(숙식 노가다)의 개솔직 후기’ 등이 줄줄이 뜬다. 고된 노동 현장을 담은 영상들엔 수십만 조회수 표시와 함께 “새벽부터 열심히 사는 모습 보고 힘을 얻습니다” “요행을 바라는 직업보다 훨씬 의미 있어 보여요” 등의 응원 글이 올라온다. “학위나 자격증을 따면 편하게 살 텐데”라는 댓글엔 이런 답이 달린다. “교과서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장르의 콘텐츠는 ‘노가다 종류와 일당’ ‘노가다 현장, 여긴 피해 가라’ ‘헝가리 숙식 노가다 가는 법’처럼 정보 전달형이 많다. 이 일을 막 시작하려는 ‘노린이’를 위해 “깔창은 필수템, 허리보호대 하면 덜 아픔” “마스크는 N95로 사고, 입술이 마르니까 립밤을 꼭 챙겨라” 등 깨알 같은 정보도 소개한다. 인력사무소의 갑질을 폭로하거나 건설 현장에 여성용 화장실이 없다는 고발성 콘텐츠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한다. ▷청년(15∼34세) 취업자 가운데 단순노무직은 2017년 7.3%에서 올해 9.5%로 증가했다. 인원으로는 59만9000명으로 4년 전보다 12만5000명 늘었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수년째 줄어든 데다 코로나로 알바마저 구하기 어려워진 탓이다. 창업자금 마련을 위해 작업복을 입는 청년들도 있다. MZ세대 10명 중 3명은 입사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퇴사한다고 한다(잡코리아). 개중에는 자신의 의지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사무직을 포기하고 폭염과 찬 바람 속 노동하는 삶을 택한 사람들도 있다. ▷19세 목수 이아진 씨도 대학에 입학하는 대신 목조주택 시공팀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 그는 “내 손으로 집을 짓는다는 희열이 있다”며 “생활에서 제일 필요한 게 집인데 노가다라는 단어로 건축이 낮아지는 게 싫다”고 했다. 청년들은 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고, 평생 일할 수 있으며, 노력한 만큼 기술이 늘어나는 재미를 노가더의 장점으로 꼽는다. 청년 일꾼들이 올겨울엔 덜 춥고 더 안전하게 ‘몸을 써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일의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문재인 대통령은 1일 유엔 기후총회 기조연설에서 “자연은 오래도록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이제 우리가 자연을 위해 행동하고 사랑해야 할 때”라며 “매우 도전적인” 온실가스 감축 계획을 천명했다. 세계 1·3·4위 배출국인 중국 인도 러시아가 못 줄이겠다며 꽁무니를 빼는데 우리가 앞장서겠다고 했으니 박수를 보내야 할까. 기후위기 대응은 시대적 당위지만 지구에 큰불이 났다고 모두가 똑같이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는 없다. 장비도 든든하고 기술도 있다면 뛰어드는 게 용감한 행동이다. 장비도 기술도 없으면 얼른 119에 신고하고 대피를 돕는 게 용기 있는 행동이다. 무턱대고 뛰어들다간 불도 못 끄고 다치기만 한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문 대통령의 탄소중립 계획(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 40% 감축)은 만용이다. 정부가 감당할 수 있다고 제시한 최대치(32%)보다도 목표가 높다. 2030년이면 9년밖에 안 남았는데 동원한다는 기술은 전문가들도 “50년이 걸릴지, 100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한다. 정부가 소요 비용을 공개 않는 사이 여기저기서 천문학적인 추산치들이 나온다. 2050년까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포함한 핵심 수출산업 6개 분야에서만 199조 원이 들고, 수입 수소를 액화·운송·저장하는 데만 66조 원이 든다는 것이다. 그런다고 지구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 탄소 배출량은 세계 배출량의 1.5%밖에 안 된다. 욕조에 물 한 컵 붓는 정도의 기여를 하겠다고 포스코 같은 기업 몇 개가 문을 닫는 피해를 감수하는 게 만용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만용의 반대가 비겁이다. 불이 났는데 못 본 체하는 경우다. 현 정부의 연금 정책은 비겁하다. 연금은 고갈이라는 화재 예방을 위해 주기적으로 더 내고 덜 받는 재설계를 해야 한다. 인기 없는 정책이지만 김영삼(공무원연금) 김대중(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노무현(국민연금) 이명박(공무원연금) 박근혜(공무원연금) 정부에선 빠짐없이 개혁을 관철시켰다. 현 정부만 유일하게 국회 180석을 갖고도 연금개혁엔 손도 대지 않아 2030세대는 내면서도 못 받을까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공무원·사학·군인연금 적자도 4년 후엔 지금의 2배(11조 원)로 불어난다. 비겁하거나 만용 부리는 대통령 탓에 고생한 걸 얘기하자면 끝이 없다.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는 호기의 끝은 다들 아는 대로다. 정부 구조조정은커녕 공무원 수를 역대급으로 늘려놓아 국민 부담이 커지고 민간 부문의 활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문재인 케어’ 생색내기로 건보재정은 거덜 나고 중소병원들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저성과자 해고와 성과연봉제 도입 등 이전 정부가 어렵게 해낸 노동개혁은 백지화하고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같은 만용을 부린 결과가 일자리 감소와 비정규직 청년 급증이다. 문 대통령 재임 기간에 나랏빚이 400조 원 늘어 내년엔 1000조 원을 넘기게 됐다. 그런데도 차기 대권 주자들은 오늘만 살 것처럼 “1인당 지원금 50만 원씩” “자영업자 50조 원 지원”을 외친다. 표 떨어지는 증세나 연금개혁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 징후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대통령, 해서는 안 될 일 안 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내는 용기 있는 대통령을 갖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지지율 떨어질까 의무는 외면하면서 위임받은 권한으로 지지층만 바라보며 만용이나 부리는 대통령 뒤치다꺼리는 그만하고 싶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현재 코로나19 환자에게는 항체 치료제를 쓴다. 코로나를 앓은 사람의 혈액에서 감염을 막는 항체를 선별해 만든 약물이다. 고위험군의 입원과 사망 확률을 70% 줄여주지만 비싸고 병원에서 정맥으로 주사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그런데 집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알약 형태의 ‘항바이러스’ 치료제가 잇따라 개발됐다. ▷미국 제약사인 머크사의 항바이러스제 ‘몰누피라비르’가 4일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사용 승인을 받았다. 세계 2위의 백신 제조사인 머크사는 백신 개발 실패의 수모를 먹는 치료제 개발로 만회하게 됐다. 5일엔 미 화이자가 개발한 ‘팍스로비드’의 약효가 머크사를 능가한다는 임상시험 결과가 나왔다. 화이자는 이달 중 미 식품의약국(FDA)에 긴급 사용 승인 신청을 할 계획이다. 화학성분을 합성해 만드는 항바이러스제는 효능과 안전성 평가에 시간이 걸리지만 대량 생산이 쉽고 약효도 오래 지속돼 ‘게임 체인저’로 통한다. ▷머크사의 치료제는 바이러스의 유전 암호에 오류를 유도해 복제를 막는다. 화이자는 바이러스 복제에 이용되는 효소의 활동을 방해함으로써 복제를 막는데, 치료제의 약효를 더해주는 HIV 치료제와 섞어 먹는 방식이다. 두 치료제 모두 60세 이상 고령자와 기저질환자용으로 개발됐다. 임상시험에 따르면 화이자는 증상 발현 3일 이내에 먹으면 입원과 사망 확률이 89%, 5일 안에 먹으면 85%까지 감소했다. 머크사의 알약은 증상 발현 5일 안에 먹으면 입원·사망 확률이 50% 줄었다. 화이자는 젊고 기저질환이 없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약의 안전성과 관련해 머크사는 치료제 복용자의 12%가 가벼운 부작용을, 화이자는 20%가 가벼운 부작용, 1.7%가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는 머크사 치료제 사용을 승인하며 임신부, 수유 중인 여성, 치료 후 4일까지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은 먹지 말라고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머크사 치료제 20만 명분을 구매 계약했고 화이자와 7만 명분의 선구매 약관을 체결한 상태다. ▷2009년 온 국민을 떨게 했던 신종플루는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서 단순 독감이 됐다. 코로나도 먹는 치료제까지 나왔으니 일상 회복의 시기가 더욱 당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치료제는 백신의 대체재가 아니다. “내년 1월 미국에서 코로나가 끝날 수 있다”는 스콧 고틀리브 전 미 FDA 국장의 5일 발언도 100인 이상 기업의 백신 접종 의무화를 전제로 나온 것이다. 당분간은 백신을 주기적으로 맞아야 한다. 치료제는 중증으로 악화할 위험을 줄여줄 뿐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초중고교에서 최대 분쟁거리 중 하나가 휴대전화 사용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는 2016년부터 관련 진정이 약 45건 접수됐는데 ‘전면 금지는 인권 침해’라는 것이 일관된 판단이다. 최근엔 대구 A고교에 대해 비슷한 결정이 나왔다. ▷A고 교칙에 따르면 학교에선 휴대전화 전원을 꺼놔야 한다.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사용하다 들키면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벌점을 먹는다. 세 번 걸리면 5일간 아침 청소를 해야 한다. 학교 측은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조치로 헌법에도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관련 교칙이 통신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기본권 제한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권고했다. ▷교내 휴대전화 규제 완화에 힘을 실어준 건 진보 교육감들이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가 2018년 교내 휴대전화 자유화를 주장하며 교육부에 관련 규정 개정을 제안했다. 초중등 교사들 97%가 “다른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고 생활지도 체계가 붕괴된다”며 반대했지만(한국교총 설문조사), 교육부는 2020년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학교규칙에 담을 수 있는 내용 중 ‘두발 복장 등 용모’와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사용’을 삭제했다. 시도교육청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허용하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면 학교 차원에서 시행령에 근거도 없는 규제 교칙을 만들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해외에선 10대들의 스마트폰 이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청소년기 저널’ 최신호에 따르면 스마트폰이 보급된 후 37개국 중 36개국에서 외로움을 호소하는 15세 학생이 50∼100% 늘었다. 특히 여학생들이 정신건강에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영국에선 휴대전화 사용이 학생들의 정서와 학업 성적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모든 학교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따라 2018년 15세 이하의 교내 휴대전화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 ▷국내 10대들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0%가 넘는다. 코로나19로 스마트폰 이용 시간이 길어지면서 지난해 10대 청소년 중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은 35.8%로 전년보다 5.6%포인트 증가했다. 서구 전문가들은 학교에서만큼은 사용을 전면 중단하고, 소셜미디어는 가급적 늦은 나이에 시작하도록 지도하라고 한다. 스티브 잡스는 자녀의 아이폰 사용을, 페이스북 임원들은 자녀들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 스마트폰의 폐해에 관한 연구들이 속속 발표되는 만큼 10대의 건강한 기기 사용을 돕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얀센은 한 번만 맞으면 된다더니….” “화이자 2차까지 맞았는데 부스터샷 예약하라는 문자 받았어요.” 코로나19 백신 접종 완료율이 70%를 돌파하자 이번엔 추가접종(부스터샷) 준비로 분주하다. 이달 12일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시작된 부스터샷이 다음 달부터는 얀센 접종자와 50대 이상, 18∼49세 기저질환자로 확대된다. ▷부스터샷을 하는 이유는 백신의 약발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접종 후 3∼6개월이 지나면 중증화 예방 효과는 여전해도 감염을 막는 효과는 줄어든다. 미국에선 델타변이가 우세종이 된 후 백신 감염 예방 효과가 91%에서 66%로 급락했다. 올 2월 말부터 백신을 맞은 요양시설에서는 돌파감염이 속출하고 있다. 경남 창원의 한 병원에서는 돌파감염으로 추정되는 100여 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얀센의 돌파감염률(0.267%)이 가장 높고 모더나(0.005%)가 가장 낮다. 얀센 접종자 전원을 대상으로 부스터샷을 하는 이유도 ‘물백신’이라 불릴 정도로 돌파감염률이 높아서다. ▷부스터샷은 대개 1, 2차 접종 때와 같은 백신을 쓰지만 교차접종도 효과와 안전성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접종 후 이상 반응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경우 1차보다는 강도가 강하고 2차보다는 약했다. 18∼25세 남성은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mRNA 백신 접종 후 심근염, 18∼49세 여성은 얀센 접종 후 혈전증을 앓는 사례가 있지만 극히 드물다. 방역 당국은 mRNA를 기본으로 하되 백신 종류가 2종을 넘지 않도록 할 계획이다. 얀센 접종자는 mRNA 백신과 얀센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얀센 접종자는 부스터샷으로 모더나를 맞을 때 항체 수준이 76배, 화이자는 35배 높아졌고, 같은 얀센으로 맞으면 4배 증가하는 데 그쳤다. ▷부스터샷을 하는 나라는 40개국이 넘는다. 올해 7월 가장 먼저 시작한 이스라엘은 12세 이상이 접종 대상인데 부스터샷을 맞지 않으면 공공장소 출입을 제한한다. 지난달부터 65세 이상 고령층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미국은 접종 대상을 40세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일본은 접종 완료 후 8개월이 지난 전원에게 부스터샷을 하기로 했다. ▷부스터샷의 효과는 화이자의 경우 감염 예방 효과는 11배, 중증화 예방 효과는 19.5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감염을 완벽히 막지는 못한다. 일찌감치 부스터샷을 개시한 영국과 독일에선 요즘도 하루 3만∼4만 명 안팎의 확진자가 쏟아지고 있다. 백신을 두 번 세 번 맞아도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 없이는 일상 회복이 어렵다는 뜻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세상을 떠난 역대 대통령은 7명인데 장례 형식은 네 가지였다. 이승만 윤보선 대통령은 가족장을 지냈고 최규하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장,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이 국장, 김영삼 대통령은 국가장을 치렀다. 26일 서거한 노태우 대통령 장례도 어제 국무회의에서 국가장으로 의결했다. ▷유족이 가족장을 원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현직 대통령은 국장, 전직은 국민장이 관례였다. 국장은 9일장에 영결식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전액 국고로 지원한다. 반면 국민장은 7일장이고 영결식은 공휴일이 아니며 비용도 일부만 지원해 국장보다는 예우의 수준이 낮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관례에 따라 국민장으로 치렀는데, 3개월 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는 같은 전직임에도 고인의 공로에 비추어 최고 예우가 필요하다는 유족의 요구를 수용해 전직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국장을 지냈다. ▷이후 국장과 국민장의 기준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2014년 법을 바꿔 국장과 국민장을 ‘국가장’으로 통일했다. 국가장은 최대 5일장이며 공휴일 지정은 없고 조문객의 식사비 노제 삼우제 비용 등을 제외한 전액을 국고에서 지원한다. 2015년 서거한 김영삼 대통령 장례가 국가장으로 엄수된 첫 사례다. 의회주의자였던 고인은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장례비용은 15억8864만2240원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내란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전직 대통령의 예우가 박탈된 상태이고 국립묘지 안장도 불가능하지만 국가장 결격 사유는 없다. 정부는 5·18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검소한 장례식을 당부하고 떠난 고인을 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5일간의 국가장으로 예우하기로 정했다. 여당 내에선 ‘전두환 국가장 배제법’을 발의하면서도 고인에 대해서는 ‘큰 과오와 작은 공’을 함께 인정하는 분위기다. 유족은 장지로 고인이 대통령 재임 시 조성한 통일동산이 있는 경기 파주를 원하고 있다. ▷미국에선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을 ‘고인과 국가의 마지막 대화’라고 한다. 역대 대통령들이 드물게 한자리에 모여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전현직 대통령들은 다양한 이유로 모이기 어렵고, 서로 마주쳐도 서먹한 인사를 주고받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임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영결식에 불참해 ‘대를 이은 불화 탓’이란 뒷말을 낳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을 5일장으로 예우하면서도 조문 가지는 않았다. 미국처럼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 고인과 국가의 마지막 대화가 되기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들이 많은 것 같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미국 대학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장학금 받기가 어렵다. 집 주소가 ‘캐슬’ ‘빌라’ 아니면 ‘팰리스’여서 거부의 자제들로 오해받기 때문이다. 엉터리 영어인 콩글리시라도 써야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허영심을 꼬집은 우스갯소리다. ▷콩글리시를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이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씨다. 그는 저서 ‘가짜 영어사전’(2000년)에서 콩글리시를 “반쪽짜리 영어, 쭉정이 영어”라고 했다. 콩글리시엔 일본식 영어(Japlish)인 ‘네고’ ‘아파트’ ‘스킨십’ ‘오토바이’와 한국에서 만든 ‘핸드폰’ ‘오피스텔’ ‘아이쇼핑’ ‘애프터서비스’가 섞여 있다. 우리끼린 통하지만 외국인은 모른다. ‘노마크 찬스’는 ‘빵점짜리 기회’, ‘샐러리맨’은 ‘셀러리 파는 사람’, ‘백댄서’는 ‘곱사춤’이라 이해한단다. ▷그렇다고 콩글리시를 피해가기는 쉽지 않다. ‘SNS’ ‘핸들’ ‘팬티’ ‘러닝머신’처럼 이미 입에 붙어버린 단어들이 너무 많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최근 한국의 콩글리시 문화를 조명한 기사에서 한국 정부가 한글날을 맞아 바른 우리말 사용을 촉구하면서도 정부 역시 ‘위드 코로나’ ‘언택트’ 같은 콩글리시를 많이 쓴다고 지적했다. ▷국내 전자회사가 ‘디지털 익사이팅’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가 콩글리시라고 비난받은 적이 있다. 문법적으로 ‘디지털리 익사이팅’이나 ‘디지털 익사이트먼트’라 해야 옳다는 것이다. 문법 파괴에 엄격한 우리와 달리 영어권에선 창의적 표현이라며 관대한 편이다. 애플이 ‘Think Differently’가 아니라 ‘Think Different’라고 했을 때 세상에 없는 걸 생각해내는 애플 정신을 구현한 슬로건이라는 호평이 나왔다. 앞서 소개한 더타임스도 콩글리시 같은 혁신이 언어의 성장과 발전의 필수 요소라는 전문가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소개했다. ▷언어는 유기적 존재다. 한때 웃음거리였던 콩글리시가 한류 덕에 영어권에서도 ‘쿨’한 표현으로 각광받는다. 영국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PC방’ ‘스킨십’ 같은 콩글리시와 함께 ‘콩글리시’도 등재됐다. 21년 전 안정효 씨가 싸움 거는 줄로 오해받는다며 ‘파이팅’이란 말을 쓰지 말라고 했는데 요즘은 외국인들이 웃으며 ‘파이팅’을 외친다. 엉터리 언어의 남용도 경계해야 하지만 유연할 필요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는 언어가 ‘브로큰 잉글리시(엉터리 영어)’라는 말이 있다. 현대 영어엔 앵글로색슨어에서 내려온 표현은 20%도 안 남아 있다. 영어의 풍부한 어휘는 중국의 칭글리시, 싱가포르의 싱글리시, 뉴질랜드의 키위 영어, 그리고 콩글리시까지 포용한 덕분이다.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석사논문 제목이 공교롭게도 ‘지방정치 부정부패의 극복 방안에 관한 연구’다. 성남시장 출마 전인 2005년 가천대에서 썼는데 “인용 표시를 다 하지 않아 표절이 맞다”고 자인했지만 ‘지방 영주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단체장은 부패 가능성이 높다’는 문제의식은 대장동 사태를 내다보기라도 한 듯 16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이 지사의 지적대로 기초자치단체는 특히 비리에 취약하다. 성남시장의 경우 한 해 3조4000억 원의 예산 집행과 3200명의 공무원 인사, 각종 인허가 권한을 독점한다. 권한은 막강한데 보는 눈은 적으니 탈이 날 가능성이 높다. 감사원이 2015∼2019년 자치단체 인허가 업무를 감사해 징계나 시정을 요구한 대상도 92%가 기초 시군이었다. 이 지사는 개발 사업과 관련된 부패 실태를 상세히 기술했는데 “당선 또는 재선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지방정치가와 부당한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 사이에서 부패가 발생한다”고 했다. 민관 합동 개발로 이익금 일부를 환수해 시장은 ‘성남시장 시절 최대 치적’이라는 정치적 스펙을 챙기고, 업자들은 부당한 떼돈을 벌어간 대장동 사업이 딱 들어맞는 사례다. 선거 공신의 인사 우대를 부패 행위로 규정한 점도 인상적이다. 그 자신도 성남시장 선거를 도운 유동규를 성남도시개발공사 본부장, 시의회에서 공사 설립 조례안을 통과시킨 뒤 2014년 선대위원장을 맡은 최윤길은 성남시체육회 부회장 자리에 앉혔다. 선거를 도운 폭력 전과자들이 시와 산하기관에 들어갔다는 보도도 나왔다. 백현동 개발 의혹의 핵심 인물로는 2006년 선대본부장 이름이 거론된다. 멀리해야 할 사람들을 ‘가까운 사람’으로 쓴 인사 부패가 인허가 비리와 합쳐져 역대급 게이트가 된 것이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빤한 동네에선 직분에 맞는 거리 두기가 어렵다. 그만큼 단체장의 전횡에 쓴소리하기가 쉽지 않다. 단체장은 임기 4년에 3연임이 가능하다. 한번 눈 밖에 나면 10년 넘게 고생하니 내부고발은 언감생심이다. 외부 통제도 헐겁다. 논문에 따르면 지방의회는 ‘단체장의 시녀’이고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감시도 ‘부실’하다. “임명 권력은 선출 권력에 복종하는 게 민주주의 대원칙”이라는 단체장이 경찰이나 검찰이라고 무서울까. 이 지사는 탄핵 대상인 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달리 단체장은 징역형에 해당하는 죄만 아니면 징계할 수 없는 제도를 지방정치 부패의 요인으로 거듭 지적했다. 논문이 통과된 후인 2007년 주민소환제가 도입돼 단체장도 임기 전에 쫓아낼 수 있게 됐지만 주민투표까지 간 사례는 10건 정도다. 그것도 대부분 화장장 같은 혐오 시설 건립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면 시장이 무슨 나쁜 일을 하건 다들 무관심한 것이다. 지방의회가 부활한 때가 1991년, 단체장 직선제 시행이 1995년이다. 이 지사의 논문은 직선제 도입 10년 후 나왔다. 그는 “지방자치를 폐지해야 한다는 극언조차 나오는데 근저에 지방부패가 있다”고 했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형사 처벌로 임기를 못 채운 단체장이 20년간 100명이 넘는다. 개발이 활발한 경기 용인시의 민선 시장 6명은 죄다 뇌물수수나 인사 비리로 구속됐다. 논문에 “권력의 필연성만큼 통제의 필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30년간 자치 분권과 지방 이양만 말할 뿐 지방권력의 감시와 견제에 눈감은 대가를 크고 작은 대장동 사태들로 치르고 있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가문 간의 싸움이며 국민은 구경꾼일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키노 로하스 마르코스 등 소수의 정치 가문이 선출직 자리를 꿰차고 정치와 경제를 주무른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변방 민다나오섬 출신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76)이 2016년 당선되자 필리핀의 후진적 족벌정치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두테르테 일가가 필리핀의 새로운 정치 가문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던 두테르테 대통령이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차기 대선에서 대권에 재도전해 대통령 단임제 규정을 우회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여론이 나빠지자 부통령 도전을 포기한 것. 그 대신 후임 대통령으로는 장녀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43)이 거론된다. 필리핀 정가에선 두테르테가 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다시 그 자리를 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두테르테 부녀는 다바오 시장과 부시장 자리도 주거니 받거니 했었다. 아버지가 다바오 시장이던 2007년 딸은 부시장이었고, 2010년 아버지가 시장 3연임 제한 규정에 걸리자 딸이 시장, 아버지는 부시장 자리로 바꿔 앉았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딸은 시장 자리로 복귀하고 부시장 자리는 두테르테의 장남이 차지했다. 2019년 장남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로는 차남이 부시장 자리에 앉았다. ▷사라는 변호사 출신에 터프한 정치 스타일이 아버지를 닮았다.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경관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일화로 유명하다. 이혼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로는 영부인 역할을 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마약과의 전쟁에 미온적이고, 미중 전쟁에서 방관자론을 제안하며 아버지의 친중 노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대선 후보 1위 주자인데 최근엔 지지율이 28%에서 20%로 급락했다.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12%로 바짝 추격 중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앞세워 당선됐지만 그의 장남과 사위, 그러니까 사라의 남편은 마약 밀반입 연루 혐의를 받았다. 서민 대통령을 표방하며 대기업과 날을 세우면서도 친한 기업은 챙긴다는 뒷말이 나왔다. 최근엔 정부와 가까운 기업에서 방역 물품을 고가에 구매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엘리트 가문정치 청산을 공언하고도 이제는 딸까지 동원해 정권 연장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 한때 ‘피플 파워’로 아시아 민주화를 선도했던 나라에서 벌어지는 족벌정치 소동은 민주주의를 시작하기보다 지켜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보여준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대장동 특혜 의혹을 처음 보도한 곳은 비정규직 기자 5명이 꾸려가는 한 인터넷신문이다. 이 매체의 경기도청 출입기자는 제보를 받고 보완 취재를 거쳐 화천대유와 자회사들이 수천억 원의 개발 수익을 챙겼고 배후에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있다는 소문이 돈다고 8월 31일 보도했다. 정교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이를 계기로 대장동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화천대유는 보도가 나간 바로 다음 날 이 기자를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2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과 인터넷 게시금지 및 삭제 가처분신청도 냈다. 흔히 이런 형태의 소송을 후속 보도를 막기 위한 전략적 봉쇄 소송이라고 부른다. 기자로선 민형사 소송 뒷감당을 하느라 추가 보도를 할 여력을 잃게 된다. 더불어민주당이 염원하는 언론법 체제에선 대장동 같은 거물급 비리 의혹은 더욱 캐기 어렵다. 우선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돼 기자가 패소할 경우 물어야 하는 배상액은 몇 배로 뛴다. 1억 원으로 1200억 원을 벌어들이는 능력자들은 져도 그만이지만 회사에서 받는 급여로만 생활하는 기자라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고위공직자는 징벌적 손배 청구를 못 하도록 금지 규정을 두어도 이번처럼 화천대유가 대신 ‘이재명 후보는 관련이 없다’는 소송을 내면 된다. 대장동 의혹을 처음 보도한 매체는 네이버 뉴스 메뉴에 없다. 화천대유가 기사열람 차단 청구권을 행사하면 가뜩이나 널리 읽히기 힘든 지역 인터넷신문의 보도는 아예 묻혀버릴 수 있다. 지방 토호들의 비리는 현지 사정에 밝은 지역 언론이 먼저 포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당의 언론법은 이렇게 부패한 토호들에게 주류 언론의 추적 보도를 막는 든든한 방패가 되는 것이다. 대장동 의혹은 ‘단군 이래 최대 모범적 공익사업’에 참여한 민간업체가 어떻게 지분 투자로 3억5000만 원을 내고 배당금 4040억 원과 분양사업 이익 3000억 원의 돈벼락을 맞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업 설계와 인허가 서류를 공개하면 풀릴 의문이다. 민간 건설업체가 참여한 아파트의 공사 원가를 공개하고, 수술실 폐쇄회로(CC)TV도 경기도의료원에 가장 먼저 설치한 투명행정의 달인이 왜 온 국민이 궁금해하는 공공사업 자료는 감추는가. 검찰 공수처 국가수사본부가 늑장 수사로 이름값도 못 하는 동안 게이트가 닫히지 않도록 뛰어다니는 이는 계좌 추적권도, 압수수색 권한도 없는 기자들이다. ‘대장동 사람들’엔 기자들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에 참담함을 공유한 채 대장동 일대 등기부등본을 떼고, 관련 인물들을 찾아다니고, 각종 심사 보고서를 뒤져가며 사건의 전모를 드러내줄 퍼즐 조각들을 찾고 있다. ‘고위험 고수익’이라던 대장동 개발이 실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고, 국민의힘 인사도 연루돼 있으며, 대장동 사건은 부동산 게이트이자 권순일 전 대법관과 박영수 전 특검까지 만수산 드렁칡으로 얽힌 법조 게이트라는 사실이 이렇게 해서 밝혀졌다. 이쯤에서 묻고 싶다. 왜 여당은 ‘대장동이 게이트가 되도록 감시견 노릇도 않고 뭐 했느냐’며 언론을 질타하는 대신 ‘함부로 짖다간 다친다’는 식의 입법으로 입막음을 하려 드나. 의혹과 추측이 난무하는 공론장은 진상을 밝히려는 언론 탓인가, 감추려는 권력자들 때문인가. 국제사회까지 나서서 여당의 언론법에 반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짜 뉴스 없는 세상을 진심으로 바란다면 공적 관심사에 책임 있는 자들이 자료를 충분히 공개하고 설명할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하는 방법부터 고민해야 한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