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상

박훈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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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박훈상입니다.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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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사회는 선착순 달리기에 내몰린 것 같아”

    “쭉쭉 밀고 나가야 하는데, 내 발을 내가 걸고 넘어져요. 중간쯤 가다가 다시 쓰죠. 퇴고도 오래 해요.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과잉된 것을 빼고. 그 과정을 너무 많이 왕복하죠.” 소설가 이혜경 씨(54)는 과작(寡作) 작가로 불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최근 새 장편소설 ‘저녁이 깊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이 소설도 2009년 8월부터 계간 ‘문학과 사회’에 ‘사금파리’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소설을 4년 동안 다시 고쳐서 내놓은 작품이다. 그는 1982년 ‘세계의 문학’에 중편 ‘우리들의 떨켜’로 등단해 13년 만인 1995년 첫 장편 ‘길 위의 집’을 출간했다. 이후 소설집 4권을 출간했지만 장편만 따지면 이번 소설은 19년 만이다. 그는 벼리고 벼린 소설만 출간했다. 그렇게 발표하는 소설은 수상의 영광을 안아 오늘의작가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탔다. 22일 서울 국회도서관 앞에서 만난 이 씨는 “운이 좋았고 복이 많았다. 평론가들이 작품을 좋게 봐주었는데 그래도 보통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 씨는 소설에서 자신 또래의 평범한 사람을 그렸다. 1960년대 말 지방 소읍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동급생인 기주, 지표, 병묵, 형태는 점차 어른으로 커가며 세상에서 견디어 살아남거나 끝내 좌절한다. 그들의 삶 속에 한국 사회의 경쟁, 불평등, 부의 대물림, 사건 사고 같은 문제들을 생생히 녹였다. 그리고 ‘살고 싶었던 삶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그와 동떨어진 곳에서 일상을 견디는 사람’들을 위로했다. 소설의 출발은 ‘선착순 달리기’였다. 그는 선착순 달리기 벌을 받을 때면 숨이 턱에 닿게 뛰고 또 뛰는 그룹에 속했다. 소설 속에는 벌을 받는 아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를 따돌리고 달리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선착순 달리기는 잘한 사람을 상 주고 못하는 사람을 보듬어 함께 가기보다 힘 있는 사람이 앞서 나가면 그걸 기준 삼아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하니’ 질책해요. 그 속에 ‘하면 된다’는 시대의 구호가 압축돼 있어요. 우리 사회가 삶은 편리해졌지만 바닥에 흐르는 본질은 선착순 달리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서른한 살 직장인인 이 씨의 조카는 회사 모임에서 소설 한 구절을 동료들에게 읽어 주었다고 한다. “세상의 톱니와 내 톱니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게 선명해질 때가 있잖아.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그럭저럭 굴러가긴 했는데 한순간 꼼짝 안 하는 때. 모터를 꺼버리자니 해야 할 일이 남았고, 억지로 가동시키자니 치명적인 고장이 날 것 같고. 이제 어쩐담, 싶어지는 때.” 동료들은 “내 이야기 같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꼭 물어봐 달라”고 조카에게 말했다. 이 씨가 답했다. “그걸 안다면 소설을 쓰고 있을까요. 그냥 견디는 수밖에 없지요.” 이 씨는 미안한 듯 답했지만 그의 소설은 독자들을 보듬어 주고 있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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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양호수예술축제’ 27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려

    푸른 가을 하늘 아래 탁 트인 거리에서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열린다. 경기 고양시에서 국내외 70개 단체가 170회의 공연을 갖는 ‘제6회 고양호수예술축제’가 27일부터 다음 달 5일까지 호수공원과 라페스타 등에서 열린다. 특히 이번 축제는 고양시 인구 100만 명 돌파를 기념해 ‘100만의 꿈, 거리를 수놓다’라는 슬로건 아래 열린다. 눈에 띄는 공연은 스페인·아르헨티나 그룹 ‘푸하’의 ‘카오스모스: 우주의 탄생’. 우주 비행사 분장을 한 배우들이 구조물에 의지해 중력을 초월한 듯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상상을 뛰어넘는 그들의 공연은 저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는 평. 벨기에 거리무용단체 스튜디오 이클립스의 ‘경계에서’는 호수공원의 상징인 ‘물’을 활용해 펼치는 수중무용 공연이다. 호수공원의 명소 달맞이섬은 인형극장으로 변신해 다른 개성의 인형극들이 펼쳐진다. 스페인 인형극단 엘 파티오의 ‘손’은 테라코타를 활용해 장난감 가게에서 탈출을 꿈꾸는 장난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국내 극단 문(門)의 ‘제랄다와 거인’은 종이컵을 활용한 인형극으로 배우가 소주잔, 음료 컵, 팝콘 용기 등 다양한 종이컵으로 즉석에서 인형을 만들며 요리천재소녀 제랄다의 모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공연은 무료이며 홈페이지(www.gylaf.kr)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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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詩, 세계문학에 점화시킬 것”

    ‘날자. 한국의 시여. 세계의 문학에 점화를 하자.’ 최근 취임한 문정희 한국시인협회장(67·사진)이 23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시의 세계화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는 “세련되고 격조 있는 한국 시를 세계에 알려 세계 문학이 풍성해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시인협회는 국외 교류 사업으로 11월 말 중국 난징에서 열리는 한중 시인대회, 2016년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시낭송회, 한국-이탈리아 시인 시낭송회 등을 계획 중이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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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이란 강을 건너려면 용서의 징검다리 지나야”

    “관계가 힘이 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헨리 나우웬) 정호승 시인(64·사진)이 20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 배움에서 열린 기적의 책 캠페인 ‘책 읽는 미러클 맨’으로 참가해 독자들을 만났다. 그는 이날 영성가 헨리 나우웬의 책 ‘탕자의 귀향’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며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시작했다. 정 시인은 성경에 기록된 돌아온 탕자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며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용서를 못해 힘들게 산다. 인생이란 강을 건너려면 용서라는 징검다리를 꼭 건너야 한다. 용서를 하지 않으면 강 속에 빠져 죽고 만다”고 했다. 기적의 책 캠페인은 푸르메재단(이사장 김성수)과 교보문고(대표 허정도), 동아일보가 6월부터 함께 펼치고 있다. 매달 선정한 ‘기적의 책’ 20종을 교보문고 오프라인 14개 점포에서 구매할 때마다 권당 1000원이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짓고 있는 푸르메어린이재활병원에 자동 기부된다. 1억 원 모금이 목표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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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전철男-화장실女 ‘운명적 만남’

    매일 아침 전철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와 공중 화장실에서 일기 쓰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 프랑스 파리에 사는 주인공 길랭 비뇰(36)은 책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책 파쇄기 책임기사로 하루 수 t의 책을 파쇄해야 한다. 그는 파쇄기를 ‘그놈’ ‘집단학살자’로 부르며 증오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순 없다. 파쇄기에서 살아남은 낱장을 오전 6시 27분 전철 안에서 낭독하며 책을 위로하고 자신의 삶을 견딘다. 비뇰은 우연히 전철 안에서 휴대용저장장치인 USB메모리를 줍는다. USB 속에는 쇼핑센터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쥘리(28)의 일기가 담겨 있다. “나는 하루도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다.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마치 그날 하루를 살지 않는 것, 사람들이 나에게 강요하는 오줌-똥-토사물 청소 아줌마의 역할 속에 나 자신을 함몰시키는 것, 월급을 주며 떠맡긴 그 별 볼일 없는 기능만이 유일한 존재 이유인 시시한 여자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158쪽) 일기를 읽고 사랑에 빠진 비뇰은 전철에서 낱장 대신 일기를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일기 속 단서를 좇아 쥘리를 만나러 간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하트 뿅뿅. 차가운 도시남녀가 판치는 서울에서 엉뚱하고 순수한 매력을 가진 프랑스 남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따뜻한 온기가 돈다. 소설 속 공간인 전철, 화장실, 공장은 보통 무미건조한 장소로 여겨지지만 두 사람의 독특한 시각과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보니 소설적 상상력이 가득한 곳으로 바뀐다. 프랑스 영화 ‘아밀리에’ 속 오드리 토투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읽었다. 소설 속 조연들도 독특하다. 비뇰의 동료 주세페는 파쇄기 속에서 두 다리를 잃었다. 그는 그날 파쇄기에서 생산된 재생지로 만든 책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여기며 찾아다닌다. 공장 경비원 이봉은 늘 12음절 정형시로만 말하는 괴짜다. “소나기가 온다, 수상히, 갑자기/내 처소를 때려, 성마른 우박이.” 이 소설은 저자의 첫 장편소설이자 국내에 번역된 첫 책이다. 15년째 단편소설만 써 온 저자는 2010년 헤밍웨이상을 수상했다. 그는 프랑스 보 지역에 살며 통신회사 오랑주에서 일한다. 한 달 무급휴가를 얻어 떠난 프랑스 남부 카마르그 바닷가에서 이야기의 절반을 완성했다고 한다. 소설은 프랑스에서 출간되기도 전에 25개국에서 출판 계약을 했다. 저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글을 쓰는 건 신이 되는 것이고 신이 된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고 말했다. 참, 전철에 탄 사람들은 큰소리로 책을 읽는 비뇰에게 욕을 했을까. 소설에선 ‘엄마 젖을 충분히 먹은 갓난아기들처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이 책을 읽는 당신 표정도 아마 그럴 것이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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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회의 단면을 꿰뚫는 통찰

    “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서 좀 더 나아가야 한다.(중략)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 ‘퀴즈쇼’의 김영하 작가(46)가 신작 산문집 ‘보다’(문학동네·사진)를 출간했다. 총 4부인 이 산문집에는 그가 국내 잡지 등에 연재한 원고 26편이 담겼다. 김 작가는 대형사건이 속출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했다. 일부러 마감이 있는 잡지 연재를 통해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을 끊임없이 숙고하고, 정연하게 써내도록 자신을 강제했다고 한다. 산문집에는 사회적 불평등을 꼬집은 글이 많다. 김 작가는 뉴욕 고급 식당에서 테이블에 올려둔 각자의 휴대전화에 먼저 손을 대는 사람이 밥값을 내는 ‘폰 스택(Phone Stack)’ 게임을 소개했다. “더 오랜 시간 스마트폰에 무심할수록 더 힘이 강한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모두가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중략) 부자나 권력자와 달리 사회적 약자는 ‘중요한 전화’를 받지 않았을 때의 타격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14쪽) 김 작가는 ‘보다’에 이어 ‘읽다’, ‘말하다’도 석 달 간격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읽다’는 책과 독서에 대한 산문, ‘말하다’는 그의 강연을 풀어 쓴 글이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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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월호 참사후 빈사상태에 빠진 국내소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한국 신간 소설이 사라졌다. 17일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1∼8월) 소설 분야 누적판매량 10위 안에 든 한국 소설은 2편뿐. 하지만 올해 나온 신작이 아니라 지난해 7월 출간된 조정래의 ‘정글만리’(해냄)와 2011년 출간됐다가 최근 영화화되면서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이다.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비채)가 5월 출간돼 10위에 오른 점을 고려하면 올해 국내 소설의 성적표는 낙제 수준이다. 올해 한국 소설 부진 원인으로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가 꼽힌다. 은희경은 등단 20년을 맞아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를 3월 출간했다. 이 소설은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2위로 진입하면서 ‘정글만리’의 뒤를 이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세월호 사고 이후 20위 밖으로 밀렸다. 3월 말 출간된 이외수의 소설 ‘완전변태’(해냄)도 7주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지만 이후 밀려났다. 이진숙 해냄 편집장은 “국내 작가의 소설은 ‘독자와 대화’ 같은 스킨십 마케팅이 중요한데 세월호 사고로 행사를 모두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외수 작가 팬 중에도 새 소설이 나온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 여파는 오래갈 것으로 전망된다. 문학동네는 스타 작가인 김애란 ‘눈물의 과학’, 박민규 ‘매스게임 제너레이션’을 준비 중이지만 세월호 이후 출간 시점이 늦어져 확정되지 않고 있다. 복수의 출판사 관계자는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들이 세월호 사고로 작품 활동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월호 이후 한강의 ‘소년이 온다’(창비)가 5월에, 성석제의 ‘투명인간’(창비)이 7월에 나와 각각 2만, 4만 부가량 팔렸지만 출판계에 활기를 불어넣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파울루 코엘류의 ‘불륜’(9만 부),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4만 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14만 부) 등 세계적 작가들의 작품이 몰리면서 관심이 분산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 소설의 재미와 경쟁력이 떨어진 결과라는 평가도 있다. 최근 소설은 TV 영화에서 등장한 책이나 페이지터너(page turner·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인 장르소설이 그나마 인기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영상에 익숙한 독자들은 장르소설을 찾는데 그 분야에서 특히 국내 소설의 경쟁력이 약하다”고 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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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의 딸 바보’ 할아버지 최인호

    “그 책 어떻게 되고 있어.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지난해 9월 19일 병마와 사투를 벌이던 최인호 작가는 서울성모병원 병실로 찾아온 40년 지기 김성봉 여백출판사 대표에게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김 대표는 “형, 잘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 마. 작가의 말 쓸 준비나 해둬”라고 답했다. 최 작가는 비로소 안심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 병세가 급속히 악화됐고 엿새 뒤인 25일 별세했다. 고인이 임종 직전까지 챙기던 책, ‘나의 딸의 딸’(사진)이 1주기를 앞두고 16일 출간됐다. 고인이 평소 ‘위대한 유산’이라고 했던 딸 다혜 씨(42)와 외손녀 성정원 양(14)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원고는 1975년 9월부터 2010년까지 월간 샘터에 연재한 소설 ‘가족’ 중 딸과 외손녀 이야기를 따로 추린 것이다. 고인은 2008년경부터 이 책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다. 아내 황정숙 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남편이 제목까지 정해놓고 기다렸고 딸이 처음으로 아버지 책에 그림까지 그린,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책”이라고 말했다. ○ 딸 다혜 책 표지와 17장의 삽화는 모두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나온 화가 다혜 씨 작품이다. 생전에 고인은 “다혜가 그린 색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며 자랑하곤 했다. 김 대표는 “(딸이) 생전에 아버지와 함께 작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컸던 것 같다”며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순수한 바람에서 표지와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책 속에서 고인은 딸이 커가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대견하게 바라보면서도 철든 딸과의 갈등도 솔직하게 썼다. 딸이 자신을 ‘전형적인 구세대의 낡은 유물처럼 생각한다’고 섭섭해하면서도 딸의 성장을 인정했다. “다혜는 내 자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격을 지닌 자유인인 것이다. 나는 다만 아버지로서 그녀가 우리의 곁을 떠날 때까지 잠시 맡아 기르는 전당포 주인에 불과한 것.”○ 딸의 딸, 정원 고인은 유독 외손녀라는 말을 싫어했다. 대신 ‘딸의 딸’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 대표는 “최 작가가 평소 외손녀란 표현은 거리감이 느껴진다며 딸의 딸이란 말을 고집했다”며 “암 발병 이후 정원이 이야기를 더 열심히 썼다”고 전했다. 엄격했던 아버지는 딸의 딸 앞에선 철부지 할아버지로 변신한다. 한 번도 가족사진을 가지고 다니지 않던 그는 ‘정원교 토테미즘 맹신자’가 돼 처음으로 지갑에 정원이 사진을 넣었다. 책에는 고인이 딸의 딸에게 쓴 편지와 그림도 담겼다. 고인은 책 원고를 쓸 땐 악필로 유명했다. 심지어 자신이 쓴 글도 해독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딸의 딸에게는 마치 초등학생이 쓰듯 꾹꾹 정자체로 눌러 썼다. ‘사랑하는 정원에게. 할아버지는 정원이가 있어 이번 여름에 긴 병과 싸울 때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어. 정원아. 정말 고마워. 마치 수호천사가 있는 것 같았어. 정원이의 편지처럼 할아버지는 울지 않을게….’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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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면서 쓸데없는 걱정일랑 마세요”

    올해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작가로 ‘이 사람’이 꼽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의 데뷔작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수개월째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있고, 후속작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도 동시에 10위 안에 들었다.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 씨(53). 작품 속 100세 노인 알란은 현대사의 중요 순간마다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우연히 핵폭탄을 떠안은 남아공 빈민촌의 소녀 놈베코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좌충우돌하는 이들은 웃음을 넘어 카타르시스를 준다. e메일로 그를 인터뷰했다. ―알란과 놈베코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했나. “그저 모험을 계속할 수 있는 충분한 호기심과 정신력을 지니도록 했다. 그랬더니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더라. 처음 설정한 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모습이 바뀌었고 작품을 마무리하니 지금의 주인공들이 됐다.” ―주인공들이 무척 긍정적이다. “내가 일 때문에 급히 나와 닭장 문을 제대로 닫았는지 걱정하고 있으면 알란이 이렇게 묻는다. ‘요나손 씨, 당신이 닭장 문을 깜빡하고 안 닫았을 때 생길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은 뭘까?’ 나는 답한다. ‘여우가 와서 닭들을 잡아가겠지’라고. 그러면 알란은 ‘지금 닭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잖아.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라고 답한다. 하하. 사실 우리는 기차를 놓치건 말건 걱정할 이유가 없다. 걱정하든 말든, 기차를 놓치거나 혹은 제대로 탈 테니까.” ―과거에 기자, 사업가였다고 들었다. “기자로 꽤 오랫동안 일한 후 미디어 컨설팅 회사를 차렸다. 2명이던 직원이 몇 년 만에 100명까지 늘고 빠르게 성장했다. 음, 너무 빨랐던 것 같다. 병을 얻어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끔찍한 시기였다. 삶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해 일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치료의 일환이었다.” ―‘100세 노인’에는 김일성, 김정일도 등장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세계사의 일부다. 그들이 내가 쓰고자 했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것뿐이다.” ―한국 독자들이 당신 작품에 열광할 것을 예상했나. “내 소설은 스웨덴식 유머지만 프랑스식 유머이기도 하고, 한국식 유머이기도 하다. 그냥 나는 요나스 요나손식 유머를 대표한다.” ―다음 소설 주인공은? 100세 노인과 까막눈이를 능가할 엉뚱한 주인공은 없을 것 같은데…. “있을 수 있다. 아님 말고!”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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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시집의 지하실서 건진 눈물나는 詩”

    “첫 시집을 내기 전 작고한 김현 선생께 시를 보여드렸죠. 김 선생께서 ‘이만 하면 된다’며 몇 편 뽑아주고 시 방향을 제시해주셨어요. 그래서 첫 시집에서 빠진 시는 성적이거나 연애, 사랑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이번 시집은 첫 시집의 지하실이랄까요.” 이성복 시인(62)이 1976년부터 1985년까지 미발표 시를 묶은 시집 ‘어둠 속의 시’(열화당)를 출간했다. 이 시인은 1977년 ‘정든 유곽에서’로 계간지 ‘문학과 지성’에서 등단해 1980년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내놓았다. 이후 1986년 2집 등 시집 6권을 더 내놓았다. 그는 16일 경기 파주출판도시 열화당 건물에서 열린 출간기념회에서 “(출간 소회를 길게 밝히려니) 울 수도 있으니까 안 하겠다”며 직접 써온 글을 미리 돌렸다. “그 시절 저는 좋은 예술가가 되고 싶었답니다. 그 시절에는 열정과 고통과 꿈이 있었답니다. 저에게는 오직 그 시절만이 아름답습니다!” 슬픔을 빼고 그의 시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이 시인은 “서정시는 비정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가라면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비유를 바꿔치기해서 삶이 얼마나 달라 보일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이 시인은 시집에 수록된 시 150편 중 ‘첫사랑’, ‘병장 천재영의 사랑과 행복’, ‘병장 천재영과 그의 시대’를 가장 친근한 시로 꼽았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첫사랑’ 중) 이 장문의 시는 한 여인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노래한다. 하지만 이 시인은 “그런 여자가 있었나 생각도 안 난다. 난 만난 적이 없다”며 웃었다. 시집과 함께 1976년부터 최근까지 쓴 산문 21편을 묶은 ‘고백의 형식들’, 1983년부터 올해까지 이뤄진 대담 16편을 묶은 ‘끝나지 않은 대화’도 함께 출간했다.파주=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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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해학으로 질곡의 역사 비튼 ‘구라 3代’

    멀리 스웨덴에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알란 칼슨이 있다면 한국에는 한평생 ‘허풍’으로 불린 이풍이 있다. 주인공 이풍은 1930년 서쪽 바다 섬 중도에서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었다. 일본군에 강제징집당하고 6·25전쟁에 얼떨결에 참전했지만 타고난 ‘구라발’과 ‘운발’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다.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계기를 만든 사람도 풍, 1952년 거제도 포로 소요사건을 해결한 진짜 주인공도 풍, 심지어 가수 조용필의 노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만든 사람도 풍이다. “여하튼 실상은 이러했으나, 역사의 그 어디에도 풍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누구나 알다시피, 역사는 권력자들의 시선이 가는 곳에서만 기록되는 법이다.”(107쪽) 뻥인 걸 알면서도 풍의 입담이 워낙 탁월해서 석 장을 넘길 때마다 한 번 웃는 삼장일소(三張一笑)를 하게 된다. 100세 노인 알란 칼슨은 비록 거세당했지만 배짱과 긍정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다닌다’란 이름을 가진 풍은 아들 구와 손자 언(이들도 본명보다 허구, 허언으로 불린다)을 남겼지만 식민지와 분단국가인 우리 땅의 한계 때문인지 같은 마을 출신 ‘앞잡이’의 마수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 앞잡이는 일본, 미국, 독재 정권에 차례로 기생하며 풍을 계속 고난에 빠뜨린다. 소설 속에서 손자 언은 할아버지에게 배운 삶의 철학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짧건 길건 인생을 살아온 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지나온 삶을 퇴고하고 싶어 할지 모른다. 나는 그렇기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퇴고할 수 없기에, 다시 쓸 하루치의 원고지가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278쪽) 나는 어떤 이야기를 후대에 남길 수 있을까, 앞잡이의 손자였다면 이렇게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자문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문학계에서 ‘구라문학가’로 불리는 저자는 장편소설 ‘능력자’로 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 소설은 지난해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전재됐고 같은 해 11월부터 한 달 동안 라디오에서 낭독되기도 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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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압록강에서 열하까지’ 펴낸 이보근 씨

    국제민간경제협의회(IPECK) 중국부장,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베이징사무소장을 지낸 중국전문가 이보근 씨(76)의 ‘압록강에서 열하까지’(전 2권·어드북스·사진)는 18세기 조선의 3대 연행록인 김창업의 ‘연행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발자취를 따라 걸은 답사기다. 이 씨는 2007년 여름 800쪽이 넘는 ‘을병연행록’을 읽고 무릎을 쳤다. 이 씨는 “18세기 베이징 모습을 세밀한 관찰력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담긴 방대한 기록으로 남긴 것이 놀라웠다. KIEP 시절 베이징에서 4년간 지냈지만 헛살았다는 느낌이 들어 부끄러웠다”고 했다. 연행록에 눈을 뜬 이 씨는 열하일기, 연행일기도 꼼꼼히 읽고 공부했다. 2007년 가을 “중국에서 보낸 시간을 더이상 초라하게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배낭을 싸고 집을 떠났다. 그는 그해부터 올 5월까지 매년 한 차례씩 비행기로 베이징과 선양(瀋陽)으로 날아가 모두 142일 동안 답사했다. 가까운 거리나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의 험난한 고갯길은 걷고, 먼 거리는 삼륜차, 택시, 버스를 이용해 대부분 완주했다. 그는 “중국이 급속도로 발전해 마을이 사라지거나 지명 자체가 바뀌어 길을 헤매다 고생도 했다. 그래도 갈 때마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성취감에 즐거웠다”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 김창업, 홍대용, 박지원이 앞장서고 이 씨가 옆에서 손을 잡고 함께 연행길을 걷는 듯하다. 책에서는 같은 사물, 지역도 세 사람이 각자 개성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묘사했는지 비교해서 보여준다. 여기에 이 씨가 답사한 현재 중국 풍경을 보충했다. 이들은 실제 문인이었지만 연행사에는 ‘군관’의 신분으로 따라갔다. 이 씨는 책에서 “그들이 품고 간 것은 칼이 아니라 부드러운 붓이었지만 그것들은 다 칼보다 날카로웠다”고 평했다. 이 씨는 “김창업은 문장만이 아니라 시에도 능했고 홍대용은 거문고를 즐겨 탔으며 중국어도 잘했다. 박지원은 시적인 표현을 뛰어넘는 자유로운 문필을 휘둘렀다”고 평했다. 이 씨는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을병연행록’에 ‘간졍동(乾淨洞)’으로 기록된 베이징 서남구역 간징후퉁(甘井胡同)을 추천했다. 이곳은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없던 시절 홍대용이 중국 선비들과 필담을 나누며 학문적 교류를 나눈 곳이다. 홍대용은 필담 내용을 ‘회우록’으로 엮어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씨는 을병연행록 기록을 좇아 간졍동의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최근 두 차례 한중 정상회담에서 매번 두 나라 간 ‘인문교류’ 강화를 강조했다. 한중 지식인 교류의 첫걸음을 내딛은 간졍동을 독자들에게 안내하고 싶다”고 했다. 이 씨는 16일 다시 중국으로 답사를 떠난다. 그는 “책을 냈다고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고 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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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철현 서울대 교수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젊은 인재 키울겁니다”

    “건명원(建明園)은 밝은 빛을 세우는 터전이란 뜻입니다.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안 다녀도 좋으니 삐딱하지만 사물을 직시할 수 있는 학생을 뽑아 가르칠 겁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사진)는 1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열린 건명원 창립 포럼에서 창립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건명원은 젊은 미래 세대를 위한 인문학 강의기관으로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회장이 전적으로 후원한다. 배 교수를 비롯해 설립 취지에 동감한 김개천 국민대 실내디자인학과, 김대식 KAIST 전기및전자공학과,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 등 7명이 강의한다. 이들은 학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40, 50대 젊은 교수다. 배 교수는 건명원 설립 취지 중 하나로 ‘사선(斜線)’을 강조했다. 그는 “건명원은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라며 “남들이 보는 식, 남들이 강요한 시각이 아닌 우리만의 목소리를 내야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입생은 내년 1월 15∼25세 학생 30여 명을 교수들의 면접으로 선발한다. 수강생들은 오 회장이 마련한 가회동 한옥에서 내년 3월부터 12월까지 매주 수요일 공부하게 된다. 배 교수는 “도덕경을 통째로 외우게 할 정도로 강도 높게 수업한다. 다들 낙오하고 단 한 명만 남아도 계속한다”고 했다. 수업 방식과 평가 방법은 교수들이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해외 유명 석학을 초청해 일반인 대상 공개 강연도 연다. 오 회장은 학기가 끝나면 우수한 학생을 선정해 한 달 동안 세계 일주 비용을 대줄 계획이다. 건명원은 인재상을 규격화하지 않을 방침이다. 배 교수는 “건명원 출신이 어떤 사람이 됐으면 한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스스로 행복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인재를 키우고 싶다”며 “한국 사회에 건명원 같은 곳이 많이 생기길 바란다”고 밝혔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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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내연녀 일기… 본처 일기… 뜨악한 반전

    여러모로 씹기 좋은 소설이다. 그냥 씹자. 결혼 8년차 주부인 주인공 모모코의 처지가 딱하다. 남편 마모루는 지고지순한 아내 몰래 열여섯 살 어린 내연녀 나오와 바람을 피운다. 당돌한 내연녀는 사랑이 빠진 결혼 생활에 집착하는 본처가 얼른 불륜을 눈치 채고 꺼져주길 바란다. 그런데 남편은 아내에게 자신의 아기를 임신한 내연녀와의 삼자대면을 요구하고, 본처가 정성껏 부양하는 시어머니는 남편과 남편의 씨만 챙기려 든다. TV 프로그램 ‘사랑과 전쟁’을 뺨치는 이 같은 상황을 신나게 씹으며 소설을 중반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뜨악한 반전이 기다린다. 곱씹어 보자. 소설은 소제목이 달린 20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고 각 장마다 내연녀 일기, 작가가 바라본 본처의 일상, 본처 일기로 구성돼 있다. 한 남자를 놓고 벌이는 두 여자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남편에게 섹스하는 여자가 있는 것과 육체관계는 없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릴 만큼 보고 싶어 하는 여자가 있는 것, 어느 쪽이 분할지.”(6쪽·내연녀 일기) “잠든 얼굴을 보면서 만약 이 사람이 바람을 피운다면, 하고 생각해보았다. 물론 여러 가지 생각과 말이 쏟아졌지만, 하룻밤 지난 지금 그걸 정리해보니 이 사람은 내 남편이다, 하는 한마디로 끝났다.”(47쪽·본처 일기) 뜨악한 반전과 함께 본처가 보인 이상 행동, 일기의 진짜 주인공에 얽힌 비밀이 하나씩 풀리면서 소설은 미스터리 요소까지 담은 매력적인 복합장르 소설로 읽힌다. 저자는 ‘퍼레이드’ ‘파크 라이프’ ‘악인’ 등을 쓰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작가로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신문에 연재됐던 소설을 단행본으로 묶으며 제목을 ‘사랑의 난폭(愛の亂暴)’에서 ‘사랑에 난폭(愛に亂暴)’으로 바꿨다. 인간에게 난폭하게 휘둘리는 사랑이 참….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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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이 책, 이 저자]‘날마다 하나씩 버리기’를 쓴 동화작가 선현경

    동화작가 선현경, 만화가 이우일 씨 부부와 고등학생 딸이 함께 사는 서울 연희동 집에 들어서면 눈이 즐겁다. 이 집 지하실부터 2층까지 놓인 장식장에는 부부가 20년 넘게 모아온 수만 개의 장난감이 가득해 눈을 돌리며 감탄하기 바쁘다. 책장에는 라면 상자 100개에서 풀었다는 책도 빽빽이 꽂혀 있다. ‘아무것도 못 버리는 여자’였던 선 씨가 365일간 ‘1일 1폐(一日一廢)’를 실천한 기록을 담은 ‘날마다 하나씩 버리기’(예담)를 출간했다. 그는 하나씩 버릴 때마다 물건을 그림으로 그리고 여기에 얽힌 추억이나 버릴 때 심정을 일기로 남겼다. 소소한 일기장인데 소비 사회에 주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어떻게 버리기로 결심했나. “물건을 즉흥적으로 사고, 아무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었다. 지난해 4월 친구가 저장강박증을 다룬 다큐멘터리 ‘죽어도 못 버리는 사람들, 호더(Hoarder)’를 소개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니 집 안의 살림살이, 장난감, 옷, 책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이러다간 물건에 깔려 죽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일주일은 양말만 버렸던데…. “일단 쉽게 버릴 수 있는 것부터 버려 보자는 마음이었다. 선물 받은 것은 절대 못 버리는데 물건을 그리고 일기를 쓰는 과정 속에서 떠나보낼 수 있었다. 이게 나에겐 ‘마법의 노트’인 셈이다. 20년간 간직했던 캐나다 유학시절 가방도 일기를 쓰면서 비로소 작별할 수 있었다. 물건에 대한 동지애를 그림으로만 간직한 것이다.” ―버리는 노하우를 알려준다면…. “일기 쓰기가 어렵다면 버릴 물건을 스마트폰으로 찍고 간단하게 메모해도 된다. 버리기 아까운 물건은 사진으로 찍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원하면 준다. 물건을 하나씩 버리고 나눠주면서 우리 가족이 변했다. 무조건 싸다고 사지 않고 물건의 쓰임새를 살핀다. 예전보다 물건을 사는 양이 확 줄었다.” 지하실에는 새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이 가득했다. “죽을 때 함께 묻을 장난감”은 따로 모셔뒀다는데도 이렇게나 많다니 놀라웠다. 높이 40cm 크기의 스파이더맨 피겨가 욕심이 났다. 선 씨는 넉넉하게 웃으며 가져가라고 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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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달에 만나는 詩]몸으로 몸을 일으키는 오뚝이처럼… 슬픈 인생이여!

    “시에서 말하는 자는 ‘저녁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낮의 소란과 소동이 사라진 저녁에 노동에서 놓여난 ‘빈손’을 문득 들여다보면, 혹은 버려진 듯한 ‘두 손’을 모으면, 무엇인가 간절해지고 슬퍼지고 적막해지고 그리워지는 기분에 감싸이는, 그런 저녁을 가진 인간의 초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이달에 만나는 시’ 9월 추천작은 김행숙 시인(44·사진)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다. 1999년 등단해 올해 등단 15년 차를 맞은 시인이 내놓은 네 번째 시집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에 실렸다. 강남대 국어국문과 교수인 김 시인은 비슷한 시기에 첫 시집을 출간한 황병승 김경주 김민정 시인 등과 함께 미래파로 불리며 한국 현대 시 변화를 주도한 인물로 꼽힌다. 추천에는 김요일 신용목 이건청 이원 장석주 시인이 참여했다. 김 시인은 오뚝이를 떠올리며 시를 썼다. 그는 “문득, 마냥 끄덕끄덕하기만 하는 오뚝이에게는 팔도 없고 손도 없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다. 손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몸을 일으키고 넘어지는구나, 그런 생각”이라고 했다. 오뚝이는 어린아이의 장난감이다. “우리가 모두 연약한 어린아이였다는 사실, 그 모든 기억들이 어느 날 저녁의 풍경 속으로 들어왔어요. 빈손을 가슴에 묻고, 가슴에 모은 존재들의 그 무력한 기도를 밤의 침묵 속에서 들은 것 같았어요. 그렇게 손을 모으는 저녁이 있었어요.” 장석주 시인은 “김행숙의 시들은 항상 낯설다. 이 낯섦은 시에 대한 친숙함의 기대를 배반하고, 독자를 시 바깥으로 튕겨나가게 한다. 그 낯섦에 흠칫 놀라지만, 우리는 그 눈부심에 다시 이끌린다. 김행숙의 낯섦은 세계의 다양한 존재들이 내는 목소리에도 또렷하다. 시인은 이 낯섦 속에, 혹은 낯섦의 방식 속에 자신의 초상과 당대의 초상을 겹쳐놓는다”며 추천했다. 이원 시인은 “감각으로 세계를 직조하는 김행숙이 ‘인간의 시간’에 닿았다. 투시라기보다는 돌파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김행숙 시의 터닝포인트다”고 했다. 신용목 시인은 “한 개인의 정면으로 화살처럼 날아오는 세계의 이물감을 가장 물컹한 육체의 방패로 견디고 있는 시”라며 추천했다. 김요일 시인은 김이듬 시집 ‘히스테리아’(문학과지성사)를 추천하며 “김이듬의 시 세계는 불경스럽고 음탕하며 불안하다. ‘히스테리아’ 속에 등장하는 ‘비정상·보균자·변태·병신’의 찌그러진 신음들이 대위법처럼 교차하며 아프게 아름다운 몽환의 서정을 그려낸다”고 했다. 이건청 시인은 최금진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창비)을 꼽았다. “이 시집은 특이한 개성을 보여준다. 정제되지 않은 것 같은 이미저리(Imagery)들이 그의 시 속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고, 상호 투사를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시도가 상상의 외연을 넓히고 있고, 낯선 광채를 지닌 문체를 만든다. 시인이 자신의 문체를 이뤄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최금진의 시에서 시의 빛과 힘을 본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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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진수 작가 “기괴한 캐릭터는 안면인식장애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가 범인을 쫓을 때 몽타주를 그리듯 만화 캐릭터의 핵심은 얼굴이다. 얼굴 생김새가 만화 캐릭터의 매력을 결정한다. 까치, 손오공, 독고탁 같은 인기 캐릭터도 얼굴은 생생히 기억하지만 몸매까지는 생생하지 않다. 배진수 작가(36)의 공포 웹툰 ‘금요일’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눈 코 입이 흘러내린 듯한 기괴한 얼굴을 갖고 있다. 배 작가는 사람의 얼굴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를 앓고 있다. 고교시절 같은 반 친구 얼굴도 외우지 못해 쩔쩔맸다. 대학 때는 친한 후배 얼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을 때는 구별하는데, 돌아서면 기억이 사라진다. 집중적으로 오래 만난 사람 얼굴만 겨우 기억한다”고 했다. 캐릭터의 얼굴이 비슷한 건 장애 때문일까, 부족한 그림 실력 때문일까. 그는 “하루 수십 번씩 사람 얼굴을 그렸는데도 도통 손에 익지 않았다. 등장인물을 억지로 다르게 그리다 보니 얼굴이 더 기괴해졌다”고 말했다. 경북대를 나온 그가 처음 택한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제약회사 영업사원. 그는 “의사들은 명찰을 달고 있어 얼굴을 인식하지 못해도 큰 불편이 없었다”며 웃었다. 문득 다니기 싫어져 곧 관두고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옮기다가 아예 웹툰으로 무대를 옮겼다. 그는 머릿속으로 상상한 기괴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금요일’은 공포 웹툰이지만 귀신이나 좀비, 심령 현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익숙한 주제를 비틀고 낯설게 만들어 섬뜩한 공포를 준다. 독자들에게 많이 회자되는 56회 ‘메시지’ 편에선 얼핏 평화로운 일상을 그린 초등학생의 그림일기가 등장한다. 그는 일기 속에 아동 성폭력과 아동 살해를 암시하는 장치를 숨겨 놓아 마지막 스크롤을 내린 독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는 “1990년대 PC통신 시절 ‘하이텔’에 글을 쓸 때 인기투표에서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퇴마록’ 이우혁 작가와 함께 득표율이 높았던 사람이었다”며 “한 가지를 골똘하게 생각하면 스토리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지능지수(IQ) 156인 그는 상위 2%의 IQ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국제 멘사 회원이기도 하다. ‘금요일’은 5일 100회를 맞는다. 매번 예측하지 못한 결말에 대한 찬사나 다양한 해석을 담은 댓글이 달린다. 최근엔 결말의 반전을 예상한 똑똑한 댓글도 늘고 있다. 독자와의 두뇌 싸움에서 계속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홀로 수십만 명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겠어요. 최대한 도망가려고 노력해야죠.” 그의 머릿속은 100회 특집판 소재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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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이구씨 “어린이는 부족하다는 편견의 ‘해묵은 동시’ 버려야”

    동시 하면, 오글거리는 간지럽고 귀여운 유아 말투와 아기별, 은하수 같은 뻔하고 식상한 단어가 떠오른다. 그만큼 우리 동시는 반복적이고 정체돼 있었다. 2007년 여름 ‘창비어린이’에 발표된 글 한 편이 조용한 동시 동네에 균열을 냈다. 창비 상임기획위원인 김이구 문학평론가(56)는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란 글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거들떠보지도 않는 ‘동시 동네’를 강하게 비판하며 “동시단이 해묵은 관습을 버리지 않는다면 동호인의 자기만족을 위한 마당으로만 남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003년 ‘창비어린이’ 창간 편집위원을 맡은 후 기성 작가들의 동시를 읽으며 느낀 갑갑함을 참지 못해 쓴 글이었다. 김 평론가는 글에서 우리 동시단의 4무(無)를 지적했다. 바로 △시적 모험이 없다 △자기 작품을 보는 눈이 없다 △비평다운 비평이 없다 △타자와의 소통이 없다 등이다. “평가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 동시 보는 눈이 없다”는 반박과 김 평론가의 재반박이 이어지며 그해 동시 토론회, 심포지엄까지 열렸다. 그는 물러나지 않고 7년간 꾸준히 쓴 동시 비평글을 묶어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창비)를 이달 출간했다. 동시 문학계에선 평론가도 평론집도 귀하다. 11일 만난 김 평론가는 우리 동시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낡은 어린이관’을 뽑았다. 어린이를 어른에 못 미치는 존재로 바라보는 편견이 동시를 낡은 울타리 속에 가뒀다는 주장이다. 그는 “어린이가 처한 현실에 다가가 공감하고 상상하고 표출해야 한다”며 “어린이의 삶에도 고통이 있음을 피부에 와닿게 다룰 때 좋은 동시가 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가 직접 동시를 쓴다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김 평론가는 “동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이라며 “동시를 읽고 써본 어린이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동시단을 강하게 비판했지만 좋은 시인을 추천하는 일에는 적극적이다. 그는 어린이의 삶을 잘 담아내는 남호섭, 어린이의 마음을 잘 읽어내는 정유경, 상상력이 탁월한 김륭 시인을 추천했다. 김 평론가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많은 시들이 있는데 동시는 빠져 있다. 지하철을 타는 어린이는 물론이고 어른도 동시를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손가인 인턴기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

    • 201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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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문정씨 “동생들 위해 애쓰는 형님 꼬마들에게 박수를”

    일곱 살이 된 당찬이는 어린이집 ‘형님반’에서 제일 큰형이 됐다. 뭐든지 큰형답게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다. 동생들 앞에서 칫솔질 시범을 보이려다 치약을 너무 많이 짠 탓에 매워서 눈물을 흘리고, ‘형만 믿어’라며 동생의 종이접기를 도와주다가 오히려 망쳐버린다. 당찬이는 의젓한 큰형이 될 수 있을까.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자인 공문정 씨(32·사진)가 첫 책 ‘내가 제일 큰형이야!’(비룡소)를 출간했다.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공 씨는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만난 일곱 살 남자아이의 이야기를 옮겼다. 부담감을 이겨내고 진정한 형이 되려고 노력하는 형님 꼬마들에게 응원을 보낸다”고 말했다. 국문학이 전공인 공 씨는 부전공으로 아동학을 배웠다. 대학 졸업 후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며 동화를 쓰기 시작했다. 일 하는 틈틈이 어린이들의 평소 행동과 말투, 툭 튀어나오는 상상력 넘치는 말을 메모한다. 지난해 아들을 출산한 후 쉬고 있지만 다시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며 동화를 쓸 계획이다. 그는 “어린이집에서 일하면 요즘 어린이들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동화가 실제 어린이들의 생활과 동떨어지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했다. 다음 작품에서는 한글로 고민하는 어린이들을 위로할 생각이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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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향기]당신의 서재는 안녕하십니까

    이 책을 읽다 말고 2010년 10월 어느 날에 쓴 일기를 펼쳤다. “…카를로스 마리아 도망게스의 소설 ‘위험한 책’이 날 돌아버리게 만든다. 대강 줄거리는 이렇다. 대학 여교수가 길거리에서 시집을 몰입해서 읽다가 자동차에 치여 사망한다. 여교수와 한 침대를 쓴 주인공은 그녀 앞으로 도착한 소포 안에서 시멘트 부스러기가 묻은 책을 발견한다. 그는 호기심에 발송자인 카를로스 브라우어를 찾아 우루과이로 떠난다. 브라우어는 2만 권이 넘는 책을 가진 애서가다. 거실 복도 침실 모두 책에 내주고 욕조 속에 몸을 말아 넣고 산다. 그렇게 책에 미친 사람 이야기에 푹 빠졌는데 어느 순간 내 손바닥만 한 112쪽 분량의 소설이 내 방 안에서 사라졌다. 결론을 읽지 못하니 초조해진다. 내일부터 출근하면 책 읽을 시간도 없는데. 2만 권은커녕 고작 200권뿐인 내 책장을 샅샅이 뒤져도 없다. 출퇴근 가방 속에 손을 넣어 여러 번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다. ‘도망’게스란 이름에 걸맞게 도주한 것인가.”(내 유치한 일기는 그렇게 끝났다) 이후 책을 위험한 물건의 용의선상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서 책이, 장서가 확신범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장서 3만 권을 둔 저자는 일본 유명 서평가이자 헌책 문화 알리기 운동가다. 그는 일본 유명 문인과 장서가를 만나 취재하고 장서에 얽힌 문헌을 조사해 2010년 10월부터 2012년 9월까지 ‘장서술’을 연재했다. 연재 원고를 14장(章)으로 묶어낸 이 책은 한 장에 한 가지씩 장서에 관한 교훈을 들려준다. 첫 교훈은 이랬다. “책은 생각보다 무겁다. 2층에 너무 많이 쌓아두면 바닥을 뚫고 나가는 수가 있으니 주의하시길.” 그가 만난 도쿄 한 대학 교직원인 독신 남성 네시기 데쓰야(48)는 원래 목조건물 2층에 책과 함께 살았다. 1층에 살던 부모님은 “장서 때문에 천장에서 끼익끼익 소리가 난다. 이러다간 책이 날 죽이고 말거야”라고 했다. 일본의 목조건물과 지진을 생각하면 엄살이 아니다. 그는 작정하고 ‘책이 사는 집’을 지었다. 완성된 집 1층에는 부모님, 2, 3층에는 네시기가 산다. 그는 넓은 거실 천장을 뚫고 2, 3층 복층 벽을 맞춤제작 책장으로 뒤덮었다. 목욕탕 입구에는 ‘목욕 시 독서를 위한 책장’까지 마련했다. 1만5000권을 수납했지만 여전히 장서는 ‘벽을 먹는 벌레’처럼 왕성히 활동했고 헌책을 대량 처분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침실에는 책을 두지 않겠다는 결심이 흔들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책에는 해외토픽 수준의 재미난 이야기가 가득하다. 집에 책이 3만 권쯤 있는 줄 알았는데 실제 헤아려보니 13만 권이 나오고, 책이 산더미처럼 쌓인 탓에 집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기울어지고 심지어 바닥이 꺼지기도 한다. 애주가가 숙취의 괴로움을 토로하며 술자리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장서가도 괴로운 척하면서 장서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집착, 자랑에 푹 빠져 있다. 그렇다면 현명한 장서술은 뭘까. 저자는 책을 500권 정도로 엄선하라고 권한다. 500권은 언제든 필요한 책을 찾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수치이며, 이 규모 안에서 책 종류를 조금씩 바꿔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문학연구가 시노다 하지메의 입을 빌려 강조한다.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다.” 전자책 시대가 열리면 장서의 괴로움이 줄까. 저자의 대답은 확고하게 ‘아니다’이다. “책은 내용물만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종이 질부터 판형, 제본, 장정 그리고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촉감까지 제각각 다른 감각을 종합해 ‘책’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책을 덮는데 기분이 묘했다. 장서술을 배우고자 책을 읽었는데 결국 책장에 책이 한 권 더 쌓였다.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201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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