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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나라당 시절부터 10년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에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등장한 것은 8번이었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박근혜 비대위, 2020년 총선 참패 뒤 꾸린 김종인 비대위 등이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2022년 이후 최근 3년은 더 자주 비대위가 등장했다. 22일 출범한 송언석 비대위는 그 3년간 7번째였다. 그사이 선출된 당 대표는 김기현, 한동훈 전 대표 등 2명뿐이었다. ▷김 전 대표가 9개월, 한 전 대표가 5개월을 했으니 당에 정식 대표가 있었던 기간은 1년 2개월에 불과하다. 민주화 이후 다섯 번 집권했고 원내 1, 2당을 오간 정당의 리더십이 붕괴 수준에 이른 것이다. 이런 혼란은 윤석열 전 대통령 집권 시기와 겹친다. 그 시작은 윤 전 대통령과 갈등했던 이준석 대표를 밀어낸 뒤 잇따라 들어선 주호영, 정진석 비대위였다. 훗날 윤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 된 친윤 정 위원장의 당시 일성은 무조건 대통령 뜻을 따르자는 “당정 일체”였다. ▷돌이켜 보면 친윤이 똘똘 뭉쳐 대통령을 싸고돈 것이 화의 근원이었다. 정 위원장 체제 때 경선 초반 지지율 꼴찌였던 김기현 의원은 친윤계의 조직적 지원 덕분에 대표가 됐다. 한동훈 비대위원장도 총선 때 김건희 여사 문제 등으로 윤 전 대통령과 충돌했지만 당초 한 위원장 추대로 분위기를 몬 것은 친윤계였다. 대선 후보 교체 시도 파동으로 물러난 친윤 권영세 위원장까지 대부분 지도부는 ‘윤심’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렵다. ▷49일의 짧은 임기를 마친 김용태 비대위원장이 물러나며 “기득권이 당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날 선 표현으로 친윤계를 겨냥한 배경이다. 당에 대한 절대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윤 전 대통령, 그에 영합해 당권을 차지하려 했던 친윤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당을 ‘용산출장소’로 전락시켰다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김 전 위원장은 ‘공천으로 충성을 강요하는 줄 세우기 정치’, ‘권력자에 기생하는 측근정치’ 등을 낡은 정치 폐습으로 꼽았는데, 모두 친윤계가 보였던 모습과 무관치 않다. ▷김 전 위원장은 그런 정치를 타파하고 기득권이 와해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친윤이 여전히 주류를 자처하는 국민의힘에 그런 동력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많다. 대선 때 ‘탄핵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안철수 의원이 어제 당 쇄신을 지휘할 혁신위원장에 내정됐다. 하지만 그 역시 김 전 위원장처럼 당내 세력이 약한 비주류다. 안 의원은 국민의힘이 사망 선고 직전의 코마(의식 불명) 상태에 놓여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가 ‘얼굴 마담’을 넘어 의사 출신답게 보수 재건의 진짜 메스를 들이댈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딸 주애가 처음 공식석상에 나타난 건 2022년 11월이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장에 흰색 패딩 점퍼에 빨간 구두를 신고 아빠 손을 잡은 채 등장했다. 북한은 “존귀하신 자제분”이라고 불렀는데 한국에선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국가정보원은 그 뒤로도 1년 가까이 후계자로 보지 않았다. 김정은은 2010년, 2013년, 2017년생으로 추정되는 세 자녀가 있고, 주애는 둘째인 데다 첫째가 아들이라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 사회인 북한에서 첫째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어린 딸을 ‘백두혈통’의 후계자로 점찍을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그 판단은 2023년 말부터 유력한 후계자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주애는 그해 하반기 김정은만 입고 쓰던 가죽코트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타났고, 후계자나 수령에게만 쓰는 ‘길을 인도하다’라는 뜻의 ‘향도’, ‘샛별 여장군’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국정원은 지금은 첫째가 아들인지 분명치 않다고 설명한다. ▷후계자 수업을 받는 듯한 행보로 존재감이 커진 주애는 그제 북한이 공개한 원산 갈마해안관광지구 준공식에도 등장했다. 열두 살 주애는 스위스 명품 까르띠에 제품으로 추정되는 시계를 찼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키가 170cm 정도인 김정은과 비슷할 정도로 훌쩍 자란 모습이었다. 부인 리설주가 1년 반 만에 나타나 주목됐는데, 더 눈길을 끈 건 김정은, 주애 부녀와의 거리였다. 나란히 걷는 부녀보다 3, 4m 처진 채 뒤따랐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오빠 뒤 멀찍이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피하려던 것과 비슷하다. ▷주애 곁에서 파안대소하는 김정은도 눈에 띄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은은 고령의 장성들에게 주눅 들지 않는 등 자신을 닮은 주애의 성격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한다. 미국에 망명한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은 김정은이 여덟 살 때 장성들을 무릎 꿇린 뒤 충성 맹세를 받았다고 했다. 주애가 김정은의 총애를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후계자로 확정된 건 아니다. 김정은도 스물여섯에 공식 후계자가 됐고 그 전엔 이복형제 김정남과 권력투쟁을 겪었다. ▷누굴 후계자로 하건 북한은 유례없는 3대 세습에 이어 4대 세습을 향해 가고 있다. 북한에는 후계자의 3대 조건이 있다고 한다. ‘다음 세대’, ‘비범하고 뛰어난 예지력’, ‘걸맞은 업적’이다. 세 번째를 위해 대미, 대남 문제든 군사, 경제든 주민들에게 선전해 먹힐 일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김정은은 2010년 서해상 연평도 포격 도발을 후계의 치적으로 선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으로 후계자의 입지 강화 시도가 우리를 겨냥한 도발일지, 깜짝 협상일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주애가 자주 등장하는 지금 평양의 후계 구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우리 외교의 위치를 시계 방향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미국이 3시라면 중국은 9시다. 미중이 서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면 미국에 가까우면서 중국과 아주 멀지 않은 1시나 1시 반으로 좌표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동맹인 호주와 일본은 2시 반과 2시, 미국 견제용 브릭스와 중국 견제용 쿼드에 참여하는 인도는 12시 반 정도로 봤다. 그가 방향과 함께 강조한 건 일관성이었다. 시침이 크게 왔다 갔다 하면 신뢰를 얻을 수 없고 너무 한쪽으로 기울면 반대 쪽을 설득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방향·일관성 다 불안정했던 韓 외교불행히도 우리 외교는 방향과 일관성 모두 불안정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시진핑, 푸틴과 함께 톈안먼 망루에 오른 것은 논쟁적이었다. 12시 방향에 가까웠다. 오래지 않아 한중 관계는 사드 배치로 악화 일로였다. 초장부터 우리 안보 문제라고 당당히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중국에 ‘뒤통수 맞았다’는 비난의 빌미를 줬다. 시침은 크게 흔들렸다.문재인 전 대통령은 임기 첫해 방중 때 중국에 저자세였다. 사드 갈등을 봉합했지만 미국에 친중 정권이라는 의심을 남겼다. 시침은 다시 12시를 바라봤다. 임기 말 한미 정상회담 성명에 대만, 남중국해 문제가 들어갔다. 중국 견제 동참으로 해석된 이 변화에 중국은 “불장난하지 말라”고 발끈했다. 시침은 다시 크게 흔들렸다.윤석열 전 대통령은 시침을 거의 2시까지 돌렸다. 미국의 중국 포위에 적극 동참했다. 그의 대만 문제 발언에 중국은 “불장난하면 반드시 타 죽는다”며 거칠게 반발했다. 자유 진영의 든든한 일원이 돼야 중국과 당당히 상대할 수 있다는 논리였는데, 정작 중국을 대화 상대로 설득할 전략은 보이지 않았다.이 10년은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시기였다. 그 한복판에서 외교 좌표를 설정해야 할 때였지만 정권마다 한쪽으로 경도되거나 오락가락하며 허약한 실력을 드러냈다. 그 결과는 미국의 의심이거나 압박이었고, 중국의 반발이거나 보복이었다. 미중 사이에 끼인 우리의 처지는 더욱 불안해졌다.우리도 ‘외교의 마지노선’을 갖자이재명 대통령이 미국 일본 중국 순으로 정상 통화를 했다. 한미일 협력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중국 때리기에 앞장서지는 않겠다는 방향이 엿보인다. 그런 이 대통령도 지난날 언행을 되짚어 보면 외교 시침이 크게 요동했다. ‘셰셰’ 발언, 한미일 협력 및 한일 관계에 대한 거친 비판은 그 지향이 12시를 향하는 것으로 비쳤다. 대선 과정에서 변침한 것은 그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것일 테지만 일관된 원칙이 될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동북아에서 각기 상대의 영향력을 밀어내려는 미중 대립의 강한 척력(斥力)은 한국을 각자의 방향으로 끌어당기려는 인력(引力)을 더욱 억세게 만들고 있다. 안미경중은 안 된다는 미국의 경고엔 한국에 안보와 경제 모두 중국 억제 전선에 적극 동참하라는 다그침이 깔렸다. “상호 핵심 이익과 중대한 우려를 존중하라”는 시진핑 발언엔 대만 문제 등 중국 때리기에서 벗어나라는 압박이 보인다.이럴수록 일관성이 중요하다. 1시든 1시 반이든 방향을 정했다면 진폭이 커선 안 된다. 미국 앞에선 미국에 부응하고, 중국 앞에선 중국에 영합하는 임기응변의 줄타기 외교는 불신을 자초한다. 시침을 크게 흔들지 않으려면 특히나 대만, 주한미군 등 민감한 현안마다 원칙을 정교하게 세워야 한다. 그 원칙에 디딘 유연한 외교가 반복될수록 무게감이 생기고, 우리도 ‘여기만큼은 넘지 말라’는 외교의 마지노선이란 걸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우리 결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존중받고 설득할 수 있다. 그 무대에서 대통령의 언사 하나하나가 대선 전과 달리 천금같이 무거워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1937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높은 인기를 업고 재선된 직후다. 대법원이 거듭 뉴딜 정책은 위헌이라 판결했다.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루스벨트 대통령은 법을 바꿔 대법관 수를 늘리려 했다. 여당이 상·하원 모두 압도적 다수이니 문제없어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 계획은 제동이 걸렸는데, 여당 의원들이 반대한 결과였다. 그들은 “대통령을 지지해도 대법원 재구성 계획은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 어떤 대통령도 사법기관을 입맛대로 바꾸려 하지 않은 절제의 규범을 루스벨트가 깨려 했기 때문이었다.“루스벨트 지지해도 그 계획은 반대”대통령이 잘못된 길에 들어설 때 집권 여당의 견제가 그 경로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에선 오히려 여당이 대통령 뜻대로만 움직이며 브레이크 없는 입법 독주로 내달린 적이 많았다. 문재인 정부 때 총선 승리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은 부동산 관련 법 등 논란의 법안들을 국회 절차를 무시하며 속전속결로 통과시켜 반발을 불렀다. 이는 이듬해 여당이 서울시장·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됐다.지금 민주당은 5년 전 민주당보다 더 사납게 달릴 태세다. 대통령 당선 시 형사재판 면제 법안, 허위사실공표자 대상 축소 법안 등 이른바 ‘이재명 방탄법’의 대선 직후 처리를 벼른다. 당선이 확실한 이재명 후보가 일극체제란 말이 나올 정도로 민주당을 장악한 것과 무관치 않다. 개딸로 대변되는 이재명 팬덤은 민주당이 아니라 이 후보에게 열렬하다.그런데 민주당은 이제 3년 만에 처음으로 이 후보 아닌 새 당 대표를 뽑아야 한다. 가장 쉬운 길은 ‘이재명당’일 때의 민주당이다. 새 대표가 누구든 대통령 뜻에 따라 독주를 불사하는 거여(巨與)에 강성 이재명 팬덤은 환호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민주당을 ‘국민의 다양한 의사를 수렴해 정책과 입법으로 실현하는 국정의 공동 책임자’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입법, 행정 권력이 한몸처럼 서로 견제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다시 위기에 빠진다. 대통령이 권력을 절제하지 못하거나 민의를 거스를 때 “아니요”라고 말한다면, 수적 우위를 앞세운 힘의 정치에서 벗어나 자제력을 보인다면 민주당은 한때 이재명 팬덤의 분노를 살지언정 국정 성공의 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여야 제 모습 찾아야 정당정치 회복민주당에 그 길이 쉽지 않은 만큼 3년 만에 소수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의힘이 정당의 제 모습을 찾는 길은 더욱 험난해 보인다. 국민의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독단을 막기는커녕 그 그늘에서 당권 투쟁의 패싸움을 벌이다가 스스로 무너졌다. 윤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당 지도부가 12차례 바뀌었다. 그 결과 국민의힘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정당이 돼버렸다.지금도 국민의힘은 당권 투쟁으로 바쁜 모습이다. 계파의 사익에 급급한 파당(派黨)은 공동체의 비전 대신 상대 진영에 대한 혐오를 택하기 마련이다. 대선 이후에도 대선 때처럼 반(反)이재명 구호만으로 수명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야당은 반대자이지만 입법 권력 없는 소수 야당은 보이콧 정치만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집권 세력과 경쟁하며 적대를 넘어서는 대안 세력이 돼야 국민의 다음 선택을 기대할 수 있다.민주당과 국민의힘은 제가끔 가시밭길에 섰다. 쉬운 길을 가겠다면 대선 전처럼 하면 된다. 어렵더라도 여당이 대통령을 견제하며 야당을 대화와 타협의 파트너로 삼고, 야당이 대통령과 여당을 집권 경쟁의 상대로 존중하는 정당정치 복원의 길로 가야 한다. 정당이 제 기능을 찾지 못하면 민주주의 회복의 대선 의미도 퇴색된다. 아무런 변화도 없으면 그저 또 한 번의 선거가 지나간 셈이 된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선거 때면 어김없이 집 앞 우편함에 선거관리위원회가 발송하는 후보들의 선거공보물이 도착한다. 하지만 우편함에 눈길을 주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6·3 대선을 불과 하루 앞둔 2일까지 ‘어떤 아파트와 오피스텔엔 우편함 절반 이상에 공보물 봉투가 그대로 꽂혀 있다’거나, ‘어떤 아파트에선 뜯지도 않은 공보물 봉투들이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줄줄이 발견됐다’는 보도들이 잇따른 배경이다. ▷막상 공보물을 열어봐도 빳빳한 종이에 화려하게 인쇄된 후보들의 공약엔 ‘어떻게’는 잘 보이지 않고 ‘뭘 하겠다’는 장밋빛 약속들만 나열돼 있을 때가 많다. 그 내용이 후보들의 TV토론회나 언론의 공약 분석, 유튜브 영상이나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들보다 더 친절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대선 땐 두 차례 공보물을 보낸다. 첫 공보물은 최대 16쪽까지 만들 수 있는 책자형이고 두 번째는 전단형이라고 부르는 1쪽짜리다. 전단형은 책자형을 요약한 수준이라 굳이 두 번 보내 돈을 낭비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러니 아예 공보물을 보지도 않고 버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실제 선관위가 지난달 유권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의식조사에 따르면 공보물·벽보로 후보 정보를 얻는다는 응답은 3.3%에 그쳤다. TV 대담·토론회 및 방송 연설(36.7%),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20.2%), 언론 보도(17.1%), 인터넷(14.2%)에 비해 한참 낮았다. 사실상 공보물로 후보를 선택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에도 선관위는 이번에 지난 대선보다 50억 원 늘어난 약 370억 원을 공보물 발송 예산으로 편성했다. 선관위가 이번 대선 기간 두 차례 우편으로 부친 공보물은 책자형과 전단형 각 2400만 부를 합쳐 약 4800만 부에 달한다. 이뿐 아니다. 지난 대선 기준으로 보면 각 정당이 두 차례 공보물을 제작하는 데 후보당 많게는 50억 원 가까이 들었다. 대선 득표율이 15%를 넘기면 선거가 끝난 뒤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으니 사실상 국민 세금으로 공보물을 만들고 보내는 것이다. 소각 등 버려진 공보물 처리에 드는 지자체 예산까지 감안하면 읽지도 않는 인쇄물에 수백억 원 혈세를 헛되이 쓴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고령층 등 디지털 접근성이 떨어지는 계층을 생각해 종이 공보물을 완전히 없애는 건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효용성도 불분명한 인쇄 공보물에 세금을 쏟아붓는 건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국회와 선관위에선 온라인 공보물 도입, 인쇄형 공보물 축소 방안 등이 거론된다. 은행이 고지서를 모바일이나 이메일로 받을지, 우편물로 수령할지 묻듯 유권자들이 선택하게 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성인의 98%가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는 모바일 시대에 공보물만 아날로그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윤석열 전 대통령의 시대착오적 12·3 비상계엄을 겪으며 유명해진 책이 하버드대 교수들이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난다.” 중남미 동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3년 전 대선 때 윤 전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이들 중에서도 그 선택에 회의를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48%대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계엄이 잘못됐다며 탄핵에 찬성한 여론이 60∼70%에 달했다. 이들에겐 민주주의가 투표장에서 무너진다는 말이 더 와닿을지 모르겠다.대통령 선출도 심판도 ‘국민의 의사’그러나 선거는 2년 뒤 또 있었다. 총선은 역대 최악의 여당 참패로 끝났다. 윤 전 대통령의 독단적 국정 운영과 불통은 대선에서 자신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을 돌려세웠고, 그 결과 심판받았다. 헌법재판소는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서 이렇게 짚었다. ‘피청구인은 2년 동안 자신이 국정을 주도할 수 있도록 국민을 설득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윤 전 대통령은 그리하지 않았고 민심과 멀어졌다. 헌재는 또 이렇게 지적했다. ‘총선 결과가 피청구인 의도에 부합하지 않았더라도 야당을 지지한 국민의 의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해선 안 됐다.’윤 전 대통령을 국정 최고 책임자에 오르게 한 것이 ‘국민의 의사’였듯, 윤 전 대통령을 심판한 것도 ‘국민의 의사’였다. 윤 전 대통령이 이를 무시하고 위헌적 계엄 폭주로 내달렸을 때, 국회가 이를 멈춰 세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외면한 ‘국민의 의사’가 국회를 야당 과반으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선거가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주권을 국민의 대표에게 위임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도무지 실감되지 않던 이들도 계엄의 밤엔 선거로 드러난 서릿발 같은 주권으로 지도자의 민주주의 파괴를 막을 수 있다는 증거를 목격한 셈이다. 민주주의가 투표장에서 붕괴한다는 하버드대 교수들의 지적은 적어도 이 대목에선 틀렸다.유권자는 ‘민주주의 경기장’의 심판물론 주권을 위임받았다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정작 선거가 끝난 뒤 공복이 아니라 주인처럼 행세하고 국가권력과 의회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때면, 시민들이 자유로운 건 오직 선거 때뿐이고 선거가 끝나는 순간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는 루소의 말이 현실과 더 가깝게 들릴지 모른다. 상대를 존중하는 관용, 권한을 남용하지 않으려는 절제, 대화와 타협이 사라진 지금의 정치를 보면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느 한쪽은 국정을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건지 비전이 흐릿하고, 어느 한쪽은 행여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독식할 걱정이 들면, 이들에게 과연 내 주권을 맡겨야 할지 선뜻 투표장에 갈 마음이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그러나 유권자들의 손엔 또 다른 카드가 있다. 선거는 한 번이 아니라 때마다 돌아온다. 유권자는 무한히 되풀이되는 민주주의 경기장의 심판이다. 룰을 어기거나 룰 안에서라도 온갖 꼼수를 동원하는 팀은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없도록 레드카드를 들 수 있다. 단 한 번의 경기만 있다면 선수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 여기겠지만 다음 경기에도 나오고 싶다면 심판의 휘슬에 곤두설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선택받더라도 국민의 뜻을 함부로 독점하면 다음엔 매섭게 심판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들도록 계속해서 투표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를 통해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는 주권자의 의사를 정치인들이 얕보지 못할 것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윤석열 전 대통령 집권 기간 국가안보실장이 세 번 바뀌는 내내 자리를 지켰다. 윤 전 대통령 해외 순방 브리핑 때마다 실장을 제쳐두고 브리핑을 도맡았다. 거침없는 행보에 실세라는 말이 들렸지만 일본의 과거사 사과에 대해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는 부적절한 발언 등 설화를 종종 일으켰다. 윤 전 대통령 탄핵과 파면 국면에서 잠잠했던 그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백악관 인사와 나란히 서 환하게 웃는 사진과 함께였다. ▷김 차장 옆 인물은 앨릭스 웡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이었는데 국가안보실은 두 사람이 지난달 25일 백악관에서 만났다고 했다. 두 사람이 협의했다는 내용은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역량이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협력 방안’과 ‘양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중심이 돼 정부 차원의 조선업 협력을 진전시켜 나가는 방안’이었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NSC 중심의 조선업 관련 워킹그룹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조선업은 다음 정부가 마무리하기로 한 한미 관세 협상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그런데 파면된 대통령을 보좌했던 김 차장이 난데없이 미국에 가 이 현안을 논의했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욱이 김 차장이 웡을 만난 시점은 최상목 경제부총리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에서 한미 2+2 관세 협상을 벌인 다음 날이었다. 정부 협상팀이 이미 조선업 협력의 비전을 밝히며 의제로 올린 현안을 대통령실이 지원도 아니라 중심이 돼 추진하겠다고 불쑥 발표해 버린 셈이다. 주한미군 문제 역시 미국이 그 역할을 중국 견제로 재조정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며 안보 틀을 크게 흔들 수 있는 이슈라 김 차장이 섣불리 의제로 꺼낼 주제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김 차장이 방미 전 다른 부처와 사전에 상의했는지도 불확실하다. 최 부총리는 어제 국회 상임위에서 김 차장의 방미에 대해 “언론에 보니까 그렇더라”고 했다. 가뜩이나 민감한 정부 교체기에 행여 미국에 잘못된 신호를 줄까 당국자들이 조심하는 판에, 김 차장은 안보부터 경제 통상까지 협상팀과 상의했는지도 불분명한 협의를 백악관과 했다니 ‘월권’ 논란은 물론이고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생긴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실이 미국의 보복관세 발표 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방미 여부를 논의했다거나 한국이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체코를 한 대행이 방문하는 걸 검토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 차장의 ‘오버’가 혹시 한 대행의 대선 출마용 업적을 쌓으려는 시도 아닐까 하는 의심은 그저 오해이길 바란다. 지금 대통령실이 할 일은 인수위 없이 시작하는 다음 정부에 국정 현안을 차분히 인계하는 것이지 돌출 행동으로 불필요한 분란을 만드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국민의힘 윤한홍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윤핵관’ 3인방 중 한 명이었다. 대통령직인수위에서도 실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청와대 이전 TF팀장을 맡은 것은 물론 인수위 인사검증팀 구성에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 직을 맡지 않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 소통하며 권부 사정에 밝았다. 지난해 하반기에도 ‘누가 친윤 핵심이냐’는 질문에 친윤 의원들조차 윤 의원을 꼽을 정도였다.친윤 핵심에 공천·인사 청탁 의혹 그런 그가 무속인 ‘건진법사’ 전성배 씨 의혹의 주요 관련자로 이름이 오른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전 씨가 윤 의원에게 인사 청탁 문자를 보낸 건 2022년 인수위 출범 나흘 뒤였다. 자신이 인사를 3명 부탁했는데 1명은 들어갔고 2명은 확정이 안 됐다는 재촉성이었다. 그런데 전 씨가 인사를 부탁했다고 문자에 밝힌 의원은 윤 의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핵심 친윤 의원 2명의 이름이 함께 등장한다. 전 씨가 윤 전 대통령 집권 초부터 정권 핵심들에게 인사를 청탁해 1명은 성사될 정도의 위치였다는 셈인데, 이 말고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 씨는 그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윤 의원과 또 다른 친윤 핵심 의원에게 군수 후보 공천을 부탁하는 문자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해당 인사가 공천을 받았다. 전 씨 휴대전화엔 처남 몫으로 A 행정관이 대통령실에 들어갔다는 취지로 의심되는 문자도 있다. 전 씨 처남은 대선 후보 시절 윤 전 대통령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천은 물론 공공기관 임원, 검찰, 경찰 인사를 청탁받은 문자에 이력서까지 전 씨 휴대전화에 수두룩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전 씨가 도대체 어떤 위상이었기에 친윤 핵심들에게 접근하고 청탁이 쏟아졌는지 궁금해진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캠프를 찾은 자신의 어깨를 두드린 전 씨가 논란이 되자 그와 인사 정도 한 사이라고 해명한 바 있지만 최근 밝혀진 정황은 그 신빙성을 의심케 한다. 전 씨가 검찰 조사에서 윤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고 진술했고, 윤 전 대통령의 장모 최은순 씨는 지난해 9∼12월 10차례 전 씨와 통화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 씨에게 김건희 여사의 전시기획사 고문 명함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의문은 더 커진다. 윤 전 대통령 부부와의 관계를 과시하지 않고서야 무속인이 정치 브로커처럼 여기저기서 공천이며 인사 청탁을 받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청탁들이 성사됐다면 불법 공천·인사 개입이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돈이 오갔다면 불법 정치자금이 될 터인데, 검찰이 수사로 밝혀야 할 것이다.정권 수준 보여주는 법사폰·황금폰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 될지 모를 이런 내용들은 검찰이 전 씨의 이른바 ‘법사폰’을 포렌식으로 복원한 뒤 쏟아지고 있다. 뭔가 익숙한 광경이다. 명태균 씨 의혹도 명 씨의 ‘황금폰’이 열리자 분명한 정황과 사실들이 흐릿했던 의혹의 겉옷을 벗었다. 윤 전 대통령이 친분을 부인했지만 관계를 의심할 새 정황이 드러나는 것도, 각종 공천과 인사, 이권 개입 의혹이 잇따르는 것도 비슷하다. 명 씨 의혹에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줄줄이 거론된 것처럼 전 씨 의혹에 친윤 의원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정체가 무속인이든 정치 브로커든 진짜 얼굴이 무엇이든 권력 주변에 부나비처럼 달려들어 기생하며 그 곁불을 쬐려 했다는 본질은 차이가 없어 보인다. 권력 중심에 가까운 양 행세하며 잇속을 챙기려 한 듯한 의혹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여기저기 촉수를 뻗치며 버젓이 활개 친 정황은 이 정권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준다. 그들과 어떤 관계였든 그 관계를 분명히 끊어내지 못한 권력자의 책임이 가장 클 것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2008년 3월 열린 첫 국무회의에는 전임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됐던 행정자치부 장관 등 장관 4명이 참석했다. 헌법에 국무회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제외하고 최소 15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런데 당시 장관 후보자가 연달아 낙마해 15명을 채우지 못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전임 정부 장관들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된 현 내각에서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을 뺀 국무위원 수가 딱 15명이다. 국무위원 19명 중 국방부, 행정안전부, 고용노동부, 여성가족부 장관 등 4명이 사퇴해 공석이다. ▷어디서 장관을 꿔 올 수도 없는 현 정부는 한 명이라도 더 사퇴하면 헌법상 국무회의 구성 요건을 갖추지 못하는 위헌 상황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국무회의 효력 자체가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2·3 비상계엄 정국에서 가장 먼저 사퇴한 이는 ‘계엄 2인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면직 당일 열린 국회 긴급 현안 질의에 김 전 장관이 출석해 계엄 전말을 증언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나왔다. ▷김 전 장관과 함께 윤 전 대통령의 충암고 동문인 이상민 전 행안부 장관의 사퇴 경위도 비슷했다. 이 전 장관이 계엄 옹호 발언 등으로 자신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다음 날 사의를 밝히자마자 윤 전 대통령이 면직을 재가했다. 더군다나 당시는 윤 전 대통령이 국정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 상태에서 인사권을 행사한 것이라 의도가 더욱 의심됐다. 이후 이 전 장관은 계엄 당일 윤 전 대통령의 쪽지를 본 뒤 언론사 단전·단수를 지시한 의혹이 드러나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윤 전 대통령 파면 뒤 김문수 전 노동부 장관이 대선에 출마하며 사퇴해 한 명 더 줄었다. 여가부 장관 자리는 지난해 김현숙 전 장관이 잼버리 파행으로 물러난 뒤 윤 전 대통령이 어정쩡한 상태로 방치해 1년 넘게 비었다. 4명 공석 다 윤 전 대통령이 초래한 것인데, 남은 장관을 15명으로 유지해도 국무회의 참석자가 의사정족수 11명이 안 돼 회의조차 열 수 없는 상황을 정부가 우려할 지경이 됐다. 통상 화요일에 열리는 국무회의를 월요일인 14일로 앞당긴 것도 15일 장관들의 해외 출장과 국회 일정 등이 겹쳐 정족수를 채우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엄 직전 윤 전 대통령은 계엄 선포를 위해 반드시 심의를 거쳐야 할 국무회의를 열 생각이 없었다.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정족수 11명을 채우는 시늉을 했지만 정상적 회의 절차를 무시한 채 계엄을 강행해 국무회의를 무력화했다. 국무회의를 무시했던 윤 전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가 국정 기능이 자칫 마비될 수도 있는 작금의 위태로운 상황을 낳았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대선 날 당선됐다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국민의 뜻(people’s will)이 오직 대통령에게만 가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9일 3시간여의 인터뷰에서 우리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에 대해 던진 화두는 이 물음이었다. 그는 “선거로 국민의 뜻을 위임받았다고 해도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설사 99%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그 99% 내부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의견 차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자신만이 온전히 국민의 뜻을 체화했다며 독점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에 대통령 개인의 의지가 혼재되면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상대 당을 배격하는 것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계기로 드러난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세계 민주주의 위기를 연구해온 권 교수는 지난달 아시아 정치학자 중 처음으로 세계정치학회(IPSA)가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낸 학자에게 수여하는 ‘칼 도이치’ 상 수상자로 선정됐다.》―선거에서 다수 국민의 선택을 받아 승자가 되는 것 아닌가.“국민의 뜻은 선거 날 어떤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무언가가 아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는 답하는 유권자마다 다 다르다. 다수 득표로 당선됐다고 해도 그 대통령만이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 국민의 뜻을 독점하고 다른 진영의 의견은 다 틀린 것이라 배제하면 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선거로 당선됐던 베네수엘라의 독재자 우고 차베스가 스스로 ‘차베스, 너는 더 이상 차베스가 아니다. 너는 국민’이라고 말했던 걸 떠올려 보라.” ―선거로 선출된 지도자가 독재를 할 수 있다는 건가.“오늘날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는 군사쿠데타나 전복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의 뜻은 원래부터 명확히 존재하는 게 아니다.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이 경쟁적 논쟁을 통해 함께 ‘형성’해 가는 것이다. 이런 과정 없이 선거에서 이겼다고 자신만이 국민의 뜻을 알고 체현하고 있다고 믿으면 국민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권력을 남용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의 뜻을 앞세워 사법부를 장악하고 비상대권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정적을 제거하려 한다. 한국과 미국은 이에 더해 세계에서 정치적 양극화 문제까지 가장 심각한 나라들이다.” ―왜 한국과 미국인가.“한국과 미국의 정당은 정서적으로, 이념적으로 양극화돼 있다. 선거 이후 국민의 뜻을 독점하지 않으려면 대통령과 야당이 토론하고 서로 설득하며 국민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다원성을 전제로 한 대화를 우리 정치에서 전혀 찾을 수 없다. 이 파괴적 양극화가 사법부부터 시민사회까지 모두 ‘정치화’하고 분열시키고 있다.” ―우리 정치의 양극화가 왜 심각해졌다고 보나.“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정권이 서로 교체되는 과정에서 ‘내가 당한 만큼 너도 당해보라’며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보복의 정치가 이어져 왔다. 양당이 공유하는 가치가 거의 사라졌다. 오로지 다수 득표로 상대를 이기려는, 힘에 기댄 싸움만이 남았다. 선거를 보복의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유권자들의 성향도 정치처럼 양극화돼 있나.“그렇진 않다. 한국 유권자들의 성향 분포를 조사한 연구를 보면 여전히 중도층이 불룩한 단봉형이다. 좌우 양극단이 늘어나고 있지만 쌍봉형은 아니다. 유권자 지형에 비해 정치가 지나치게 극단화돼 있다. 우리 사회가 둘로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 건 양당 극단 지지층의 목소리가 과다 대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심해도 되나.“아니다. 지금의 정치적 양극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시민사회도 더욱 양분될 것이고, 그렇게 중간층이 없어지는 양극단의 쌍봉형으로 유권자 지형이 변하면 민주주의에 정말 큰 위기가 닥칠 것이다. 지금 정치인들이 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여기서 물꼬를 돌려야 한다.” ―어떻게 돌려야 하나.“파괴적 양극화로 민주주의가 부서지는 걸 막기 위해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싶다. 우선 정당 간 건전한 논쟁과 경쟁의 ‘정치화(politicization)’가 필요할수록 그에 비례하는 ‘탈정치화(depoliticization)’가 필요하다. 즉, 경쟁 당사자인 정당 간에 공유하는 중립적 규범과 가치를 두텁게 하고, 이를 건드리지 말고 존중하자는 것이다. 이런 신뢰의 버퍼존(완충지대)을 만들어 상호 믿음을 쌓아야 한다. 동네 축구로 비유해 보자. 무조건 승리하기 위해 양팀이 암묵적으로 공유해온 룰을 깨지 않는 것이 탈정치화다. 선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사례로 설명한다면….“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집권 당시 헌법에 대법관 숫자 관련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임명하는 대법관 수를 늘려 대법원을 자기편으로 바꾸려 시도했다. 미국 정치가 지켜야 할 관례, 규범을 깨려 했다. 바로 이런 행태가 정당 간 건전한 경쟁의 토대를 갉아먹는 원인이다. 트럼프 시대에 이런 토대가 무너지면서 파괴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임명도 그런 사례인가.“전례 없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치적 신뢰를 깼다는 점에서 그런 측면이 있다. 권한대행은 대통령이 아니고 현재는 권력 교체기다. 이런 시기엔 권력을 과도하게 행사하지 않는 게 관례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선의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나. “축구도 룰을 자꾸 깨면 심판이 필요하듯 두 번째 방안으로 정치가 법을 어기면 사법 판단이 필요할 수 있다. 다만 사법 의존은 최소화해야 한다. 특히 사법이 권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돼야 한다. 세 번째 방안으로 시민사회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비상계엄 이후 우리 사회는 진영에 따라 ‘너의 팩트는 나의 팩트와 다르다’며 갈라졌다.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가 당파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팩트부터 지향하는 가치까지 우리 사회가 존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중립지대의 범위를 넓히는 탈정치화가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가 극단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강제해야 한다.” 권 교수는 이 대목에서 “내가 민주주의자라 해도 나만이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파괴하고, 결국 나만 남으면 그것이 바로 독재라는 점을 우리 정치권이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권은 문제 해결 방안으로 개헌을 거론한다.“개헌엔 찬성한다. 그러나 개헌만으로 우리 민주주의가 처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은 잘못됐다. 현재 개헌 논의는 놓치는 게 많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됐다고 평가되는 1940∼1960년대 미국과 정치 양극화가 심각한 현재 미국의 차이가 헌법이 달라 일어난 게 아니다. 국민의 뜻을 형성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놓치고 있나.“대통령제가 문제이기 때문에 무조건 대통령의 힘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은 ‘심플 리액션’이다. 무엇을 하기 위한 민주주의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국가 공동체의 의사를 모아 결정을 내리고 집행하는 행정부 수반의 조정능력(coordination capability)이 취약한 민주주의는 무능한 민주주의다. 헌법을 아무리 잘 만들어봐야 그런 무능한 민주주의는 의미가 없다.” 권 교수는 대표적 사례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고 했다. 일본은 중대선거구제로 정치 파벌이 난립했고, 그 결과 집권당 당수인 총리의 리더십이 극도로 약화됐다. 권 교수는 “일본은 이를 해결하려 총리의 정책입안 능력과 조정 능력을 강화하는 ‘대통령화(presidentialization)’를 했다”고 말했다. ―일본만의 사례는 아닌지….“그렇지 않다. 유럽도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통령화’의 경향을 보인다. 나라마다 대처해야 할 문제가 복잡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정 능력이 필요한 시대다. 이런 능력이 없는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고, 그 결과 이를 극단적으로 해결하려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 출현한다. 트럼프 현상 역시 수십 년간 시민들의 불만과 요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미국 행정부 무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엔 어떻게 적용해야 하나.“개헌을 한다면 유능한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행정부 수반의 권한을 약화시킬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젠다 세팅, 국정 조정 권한은 강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5년 단임은 짧다. 4년이나 5년 중임을 통해 저출산, 지방소멸, 부동산 문제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구조개혁을 추진할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또 국회와 행정부 간 교착을 막기 위해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켜야 한다. 집권당의 정책 안정성을 위해 부통령제도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 권한 남용을 막을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절대 오해하지 말라. 모든 권한을 강화하자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정적을 제거하려 사법기관을 동원하는 것 등을 막아야 한다. 이를 위해 검찰, 감사원 등은 대통령 권한에 두면 안 된다. 국회나 중립적인 기구로 옮겨야 한다. 자기 입맛대로 검찰총장을 교체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제어해야 한다. 대통령의 자의적인 사면을 막기 위해 사면권을 제한해야 한다.” 권 교수의 언론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인터뷰를 망설였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모든 관심은 누가 대통령이 될지에 쏠려 있다. 하지만 새 대통령이 나온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민주주의가 회복될까. 한발 멈춰서서 우리가 어떤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지 본질적 문제를 성찰해야 위기를 넘을 수 있지 않을까.”권형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59)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비교정치, 정치이론, 정치경제학이다. 저서로는 ‘개방과 조정’(2024년), ‘경쟁을 통한 변화’(2021년) 등이 있다. 권 교수가 7월 수상하는 ‘칼 도이치’ 상은 세계적인 정치학자 칼 도이치 전 하버드대 교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유명 정치학자인 후안 린츠 예일대 명예교수, 로버트 퍼트넘 하버드대 명예교수 등이 수상했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선고 이틀 전 이른바 사설정보지(지라시)에 필자 이름이 등장했다. 그 자체도 놀랐지만 내용은 더 황당했다. 필자가 지인들에게 몇 대 몇으로 탄핵이 인용된다는 문자를 보내며 “선동 중”이라는 것이었다. 전혀 하지도 않은 일을 두고 사실이 맞느냐는 주변의 연락을 받고 보니 허위정보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실감됐다. 탄핵 정국에서 이런 음해성 허위정보의 가장 큰 피해자는 헌법재판관들일 것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4개월간 온·오프라인에서 퍼진 허위정보들엔 노골적 인신공격까지 함부로 담겼다. 그로 인해 재판관들은 테러 위협에 노출된 상태로 심리를 진행해야 했다. 일부 재판관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피부 발진도 겪었다는데 허위정보와 이를 근거로 한 겁박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주의 근간 흔드는 허위정보 허위정보로 인한 피해 범위는 개인을 넘어선다. 누가 누구 편이라느니, 각본대로 짜고 친다느니 하는 재판관들에 대한 허위정보는 탄핵 찬반 주장에 입맛대로 악용됐다. 탄핵 정국에서 우후죽순 사방으로 퍼져 나간 허위정보는 가뜩이나 심각한 혐오와 분열을 더욱 부추기는 트리거가 됐다. 온라인에서 퍼나르고 극단 성향 유튜브에서 증폭된 허위정보에, 누군가는 음모론의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상대 진영을 저주했고 누군가는 이를 이용해 돈을 벌었다. 급기야 허위정보는 음지에서 돌려 보고 유튜버가 떠들어 대는 차원을 넘어섰다. 국정 책임자라는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을 계엄 선포 이유로 내세웠다. 민의의 대변자라는 정당은 헌법재판관에 관련된 조작 사진이 사실인 양 논평을 냈다. 탄핵심판정에서 윤 전 대통령 변호인이 뱉어낸 ‘중국인들의 부정선거 자백’ 주장은 헛웃음을 짓게 했다. 이처럼 허위정보는 중상모략의 흑색선전을 넘어 우리 민주주의 근간을 오염시키는 바이러스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곳곳을 파고들었다. 실제 스웨덴의 한 연구소는 허위정보가 한국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진단을 최근 내놓았다. 예테보리대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보다 한 단계 아래 국가로 평가하며 독재가 진행 중인 국가로 분류했다. 그러면서 독재가 진행 중인 국가의 정부는 의도적으로 양극화를 조장하려 허위정보를 이용한다고 했다. 허위정보가 혐오를 부추기고, 혐오가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는 정치 양극화를 부추기는 연쇄 작용을 우리는 목격했다.양극단의 정치 깨야 근본 해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허위정보로 몸집을 키운 정치 양극화는 이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무엇이 진짜이고 허위인지 구별할 힘을 빼앗는 지경에 이르렀다. 팩트가 아니라 진영 논리에 기대 허위정보의 진실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한 연구가 있다. 지난해 동아시아연구원(EAI)이 진행한 여론조사를 윤성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분석해 보니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적대감이 높을수록 진보 진영이 주장했을 법한 허위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적대감이 강할수록 보수 진영이 주장했을 법한 허위정보를 진실로 수용했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상대 진영의 주장은 다 “가짜뉴스”가 된다. 정치 양극화의 토양이 된 허위정보가 이제 정치 양극화의 결과가 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짜뉴스 척결”을 주장하더니 정작 자신은 허위정보를 믿으며 반대 진영에 대한 적대를 부추긴 윤 전 대통령의 정치 실종이 남긴 불행한 유산이다. 허위정보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수준으론 근본 해결이 어렵다. 헌재가 윤 전 대통령의 퇴행을 사법 절차로 바로잡았다.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양극단 정치를 청산할 과제가 아직 남았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국내에서 전투기 오폭 사고는 드물다. 실전용 폭탄을 잘못 떨어뜨린 적은 아예 없었다. 2004년 F-5B 전투기가 충남 보령시 한 주차장에 폭탄을 잘못 투하해 차량이 훼손됐지만 폭발하지 않는 연습용 폭탄이었다. 이듬해엔 F-16 전투기가 전북 농가 비닐하우스에 연습탄 2발을 떨어뜨렸는데 인명 피해는 없었다. 6일 발생한 KF-16 전투기 오폭 사고가 충격을 주는 건 실전용 폭탄이 8발이나, 그것도 주민 700여 명이 사는 경기 포천시 한 마을을 덮쳤기 때문이다. ▷폭탄이 떨어진 시각은 오전 10시 4분이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느닷없이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건 전시(戰時)가 아니고선 상상하기 어렵다. 수많은 주민들이 혼비백산하며 “전쟁 난 줄 알았다”고 울먹였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마을 곳곳에 폭발 굉음이 들리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를 때 이들이 느꼈을 공포는 형언하기 힘들 것이다. 한 여성은 어찌나 놀랐는지 남편에게 “여보, 어떻게 해…” 하며 말을 잇지 못하다 “우리 집이 날아갔어”라고 힘겹게 전하는 통화 내용이 언론에 공개됐다. ▷민가에 떨어진 MK-82 폭탄은 교량과 건물을 파괴하기 위한 대량 투하용으로 쓰인다. 폭발 때 직경 8m, 깊이 2.4m 구덩이를 만드는 건 물론 살상 반경이 축구장 1개 면적에 달한다. 낙탄 위치가 달랐다면 돌이킬 수 없는 대참사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폭탄은 유도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전투기에 표적 좌표를 정확히 입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좌표 숫자 1개라도 틀리면 몇 km씩 오차가 생기기 때문이다. ▷조종사가 출격에 앞서 바로 그 좌표 15개 숫자 중 위도 숫자 1개를 잘못 입력한 탓에 훈련장에서 8km 떨어진 민가가 오폭당했다는 게 군의 설명이다. 조종사는 좌표를 잘못 입력한 뒤 전투기 탑승 직후 지상에서 한 번, 공중에서 투하 직전까지 두 번 더 표적을 검증해 오류를 바로잡아야 했지만 세 번 기회 모두 지나쳤다. 그런데 애초 조종사만 좌표를 확인한다고 한다. 이번에도 혼자 타는 KF-16 조종사 본인 외에 아무도 좌표를 검증하지 않았다. 한 치 오차도 없어야 할 살상무기를 다루는 매뉴얼이 이리 허술하리라 예상한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군 수뇌부는 사고 30분이 지나도록 오폭 사실조차 몰랐다. 김명수 합참의장에게는 사고 36분 뒤, 국방부 장관 직무대행인 김선호 차관에게는 39분 뒤에야 보고됐다. 원래 폭탄을 투하했어야 할 포천 훈련장에선 사고 뒤에도 다른 훈련이 계속됐고 훈련을 참관한 김 의장과 한미연합군사령관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장병들과 대화도 나눴다고 한다. 합참이 사고를 파악한 시점 자체가 오폭 20분 뒤였다. 사고 1분 만에 구조에 착수한 소방 당국보다 19분 늦었다. 전쟁 때도 이렇게 한심하게 대처할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명태균 게이트’의 핵심 고리 중 하나는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2022년 김영선 전 의원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공천에 개입했는지다. 윤 대통령이 취임식 전날이자 김 전 의원 공천 확정 하루 전인 그해 5월 9일 명 씨와 통화에서 “내가 김영선이 경선 때부터 열심히 뛰었으니 좀 해줘라 그랬는데 당에서 말이 많네…”라고 얘기한 육성이 지난해 공개되자 파장이 컸던 이유다. 당시 공개된 분량은 윤 대통령의 이 발언과 명 씨의 “진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대목, 단 17초였다. ▷전체 맥락을 알 수 없으니 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했기에 명 씨가 감사하다 했는지 분명치 않았다. 공천 권한을 쥔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약속이지 않았겠느냐는 짐작이 가능할 뿐이었다. 당시 국민의힘 재·보선 공천관리위원장은 윤상현 의원이었다. 의혹이 커지자 육성 공개 일주일 만인 지난해 11월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저는 그 당시 공관위원장이 정진석 (현) 비서실장인 줄 알았다. 누구를 공천 주라 이런 이야기는 해본 적 없다”며 정면으로 부인했다. ▷25일 한 시사주간지가 공개한 윤 대통령과 명 씨 간 전체 통화 내용은 “정진석” 운운했던 해명이 사실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2분 30초간 이뤄진 통화에서 윤 대통령은 “김영선이 해줘라”에 이어 “내가 저기다 얘기했잖아. 상현이한테, 윤상현이한테도 하고”라고 말한다. 명 씨가 다시 공천을 부탁하자 윤 대통령은 “알았어요. 내가 하여튼 저, 상현이한테 내가 한 번 더 얘기할게. 걔가 공관위원장이니까”라고 했다. “은혜 잊지 않겠다”는 명 씨의 인사는 바로 이 발언 뒤에 이어진다. 공관위원장인지도 몰랐다던 윤 의원을 공관위원장이라 부르고 공천을 얘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하루 앞서 공개된 김건희 여사와 명 씨 간 통화 육성에도 관련 정황이 보인다. 윤 대통령과 명 씨의 통화 40여 분 뒤 김 여사가 명 씨에게 전화를 걸어 이뤄진 통화다. 통화 초반 김 여사 전화기 옆에서 윤 대통령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윤상현이한테…”라고 하는 말이 들린다. 김 여사는 “응, 응”이라고 답한 뒤 명 씨에게 “당선인이 지금 전화를 했는데 하여튼 당선인 이름 팔지 말고 그냥 밀으라고(밀라고) 했어요”라고 했다. ▷이는 공개 석상에서 윤 대통령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검찰이 포렌식을 끝낸 명 씨 ‘황금폰’ 3대와 USB엔 통화 파일은 물론 저장된 문자메시지 파일이 15만 개가 넘는다. 윤 대통령 부부에 대한 비공표 여론조사 무상 제공 의혹뿐 아니라 김 여사의 지난해 총선 공천 개입 의혹까지 실체 여부에 따라 하나하나 다 정국을 흔들 만한 내용들이다. 앞으로 윤 대통령이 묻어둔 진실들이 얼마나 더 드러날지 궁금해지는 이유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21일 국회 청문회장. 12·3 비상계엄 때 계엄사령관이었던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며 얼버무리고 있었다. 권영환 당시 합참 계엄과장(대령)이 증언대에 섰다. “군인복무기본법 22조 ‘정직의 의무’에 따라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권 대령은 국회의 계엄 해제 의결 직후 계엄법에 따라 계엄을 지체 없이 해제해야 한다고 박 총장에게 건의했다가 “일(계엄)이 되게끔 해야 하는데 일머리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13일 헌재 탄핵심판정.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대령)은 이진우 당시 수방사령관이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우리가 할 역할이 아니니 지시를 재검토해 달라 했다”고도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 측이 “의인처럼 행동한다”고 비꼬자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의인도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거짓말해도 부하들은 다 알기 때문에 일체 거짓말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제가 했던 역할을 진술할 뿐입니다.”위법 명령 거부 용기, 정직의 용기로두 사람이 ‘정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낸 용기가 ‘계엄의 밤’ 그날, 상관의 명령이 위법이라 여기고 따르지 않았던 용기와 연결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권 대령은 계엄을 즉시 해제하지 않는 사령관에게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조 대령은 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은 이후 후속 부대에 국회로 가는 길목인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그 지시를 들었던 군인 누구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이들을 비롯해 일부 일선 장교들이 계엄의 그날 부당한 지시와 양심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낸 용기는 불행히도 예외적 상황이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명령에 불응하면 항명죄”라고 위협했다. 계엄 수뇌부는 지금도 “맞고 틀리고를 떠나 군인은 명령에 따라야 한다” “위헌 위법인지 판단할 시간적 여유도 지식도 없었다”며 잘못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군은 상관이 곧 충성의 대상이고 어떤 명령이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맹목적 의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군인복무기본법은 군인이 어떤 가치에 충성해야 하는지, 위헌적 명령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지, 그럴 때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지 규정이 없다.‘위헌적 명령 불복종 가능’ 명시해야미국이나 독일은 다르다. 미국은 육군 리더십 교리에 제1 핵심 가치인 충성의 제1 대상으로 헌법을 명시했다. “헌법을 위반하는 자에게 충성하면서 헌법에 충성할 수 없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위헌적 명령에 불복종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한 마크 밀리 당시 합참의장은 2023년 전역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폭군이나 독재자,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또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다.” 독일은 연방군 복무규정에서 “군인은 제복 입은 민주시민이어야 한다”며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충성을 명문화했다. 상관 명령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계엄 수뇌부가 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지 궁금하다.윤 대통령 탄핵심판이 다음 달 마무리되면 군을 어떻게 개혁할지도 화두가 될 것이다. 계엄의 악몽에도 일부 양심 있는 지휘관들이 있었다고 다행이라 여길 때가 아니다. 군이 다시는 불법 계엄의 도구로 전락해 일선 장교, 사병들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개혁이 필요하다. 군이 충성하고 복종할 가치는 사람이나 정권이 아니라 오직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핵심인 헌법이며, 그에 반하는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법에 명시하는 것부터 시작하길 바란다. 그것이 계엄의 밤 일선 장교들이 어렵게 보인 용기를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일 것이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 마지막 대목을 주목해 보라.”김진욱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처장은 10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붉은색 표지의 ‘헌법재판소 판례집’을 가방에서 꺼냈다. 그는 판례집을 펼친 뒤 박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을 찾아 ‘주문’ 바로 윗부분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피청구인은 자신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에 대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대신 국민을 상대로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고 국민에게 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피청구인의 이런 언행을 보면 피청구인의 헌법 수호 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김 전 처장은 “바로 그다음 단락에서 헌재는 ‘이상과 같은 사정을 종합해보면 피청구인의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고 덧붙였다. “헌재가 여기서 바로 결론으로 간다는 점이 중요하다. ‘피청구인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다’는 내용이다.” ―왜 이 대목이 중요한가. “헌재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이 담화에서 국민에게 사과했지만 ‘그 내용 중 최순실이 국정에 개입한 기간과 내용 등은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진정성이 부족했다’고 명시했다. 에둘러 한 표현이지만 최 씨의 국정농단 기간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는 얘기다. 헌재는 또 박 전 대통령이 의혹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며 검찰과 특검 수사를 수용하겠다고 해놓고도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 압수수색을 거부했다는 점도 ‘국민 신임을 위배한 행위’ 사례로 적시했다.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가 된 국정농단 이후 발생한 박 전 대통령의 언행도 탄핵 사유 중 하나가 됐다는 뜻이다.” ―국민 신임 위배가 왜 탄핵 사유인가. “국민이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게 부여한 정당성을 박탈해야 할 정도로 대통령이 신임을 중대하게 저버렸다면 임기 보장의 실익이 적을 수 있다. 그래서 파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 헌재가 제시한 탄핵의 두 가지 기준 중 하나이고 현재도 유효한 선례다. 탄핵은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민주적 제도다.”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 이후 책임을 부인하고 있는데…. “박 전 대통령의 탄핵 결정문은 대통령이 거짓말할 경우 파면 결정으로 직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 재판관들은 당연히 이 결정문을 검토했을 것이다. 거기에 비춰 보면 대통령이 사실과 다른 진술을 했다고 헌재 재판관들이 판단할 경우 국민이 보내줬던 신임을 회수하는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 ―국민 신임을 헌재가 판단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물론 사법기관인 헌재가 판결로 국민 신임을 재단할 수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미 헌재의 탄핵 결정문에 선례로 자리 잡았고, 실제 이 기준으로 박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 헌재 재판관들이 ‘우리는 국민 여론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우리가 다 알아서 할게’라는 독단에 빠지기보다는 국민의 뜻을 잘 헤아려 현명하게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헌법이 미국 탄핵 제도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미국에도 ‘신임 위배’ 사례가 있나. “우리가 1948년 제헌헌법을 제정하면서 미국식 대통령제와 탄핵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은 5번의 탄핵 사례가 있었는데 1974년 탄핵 전 사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경우 ‘국민의 신임을 위배했다’는 것이 탄핵의 중요한 사유였다.” 김 전 처장은 2021년까지 11년간 헌재 선임헌법연구관을 지내며 박 전 대통령 탄핵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 그때부터 대통령이 어떤 사유로 탄핵되고 파면될 수 있는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처장에서 물러난 뒤 그간 미뤘던 대통령 탄핵 사유를 주제로 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비상계엄이 터졌다. 그는 “우리 사회가 윤 대통령의 계엄이 탄핵·파면 사유가 되는지 냉철하게 지켜보기보다 탄핵 제도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보수, 진보로 갈라져 싸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 2번의 탄핵, 미국 5번의 탄핵 사례를 통해 탄핵 사유를 정리한 ‘대통령 탄핵 보고서’를 펴냈다. ―대통령 탄핵의 본질은 무엇인가. “헌정 수호를 위한 비상 대응 장치다. 대통령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돼 헌정 질서를 위협할 경우 파면해 절대 권력이 되는 걸 막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때 헌재가 제시한 또 다른 탄핵 기준 한 가지는 무엇인가. “탄핵 사유가 될 헌법·법률 위반은 사소한 위반이 아니라 중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와 정당, 선거제도로 구성되는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 존중과 권력 분립, 사법권 독립으로 대변되는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행위를 한 경우 탄핵 사유가 된다.” ―헌법 위반의 중대성은 추상적으로 들린다. “임기 중 대통령을 파면하면 국정 공백 등 국가에 큰 손실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탄핵하려면 사유가 중대해야 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헌법·법률 위반의 심각성, 광범성, 반복성, 위험성이라는 네 가지도 탄핵 파면의 기준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네 가지 중 어떤 기준이 탄핵 사유로 가장 중요한가. “위험성이라고 본다. 대통령이 직에 있는 것이 위험해 하루라도 그 자리에 둬서는 안 된다고 다수 국민이 판단하면 임기 중 파면이 정당화될 수 있다. 미국의 5번 탄핵 사례 중 2021년 1·6 의회 폭동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이 그에 해당한다. 국헌 문란의 목적으로 내란 폭동을 선동했고, 그 폭동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퇴임 뒤라 파면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빠져나간 것이지만 위험성으로 보면 가장 심각하다.” ―광범성은 무엇인가. “비상계엄을 예로 들어보자. 계엄 포고령에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계엄이 지속됐다면 자유를 제한해 모든 국민의 일상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유인 국정농단과는 광범성 면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내란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형법상 내란죄는 국헌 문란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을 때 적용된다. 그런데 내란범은 ‘위험범’이다. ‘침해범’이 아니다. 국가기관 무력화 등 내란의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시도로 그 위험이 발생하기만 하면 처벌할 수 있다. 내란이 성공하면 처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탄핵 재판은 형사 재판과 다르지 않나. “탄핵 심판은 헌재가 주도적 지위를 갖고 판단할 수 있는 직권주의다. 형사 재판에서 내란죄를 입증하려면 합리적 의심을 넘어 범죄 구성 요건에 해당하는지 엄격한 증명이 있어야 한다. 탄핵 심판은 그 정도의 증명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헌재는 내란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필요가 없지만 내란으로 볼 행위가 있었는지 팩트를 따질 필요가 있다.” ―헌재가 내란 관련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면 국헌 문란 시도에 해당하고 내란은 시도 자체만으로 위험성이 크기 때문에 중대한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 미국 역시 실패한 반역도 탄핵 사유로 본다. 그래서 실제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가 있었는지 헌재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당은 국회 측이 탄핵 사유에서 내란죄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비판한다. “일리가 있다. 물론 헌법 77조의 계엄 선포 요건에 해당하지 않음에도 계엄을 선포한 것 등에 대한 헌법·법률 위반 여부만으로 헌재가 결정문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내란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됐는데, 이를 쏙 빼놓고 결정문을 내면 설득력이 떨어지고 논란이 될 수 있다.” ―왜 탄핵 결정문의 설득력을 높여야 하나. “지금 국론이 심각하게 분열돼 있다. 탄핵 판단이 법관 등 ‘그들만의 리그’가 돼선 안 된다. 이런 때일수록 며칠 더 걸리더라도 탄핵 결정문의 완성도와 설득력을 높여야 한다. 파면을 결정했다고 해도 탄핵에 반대하는 이들이 헌재 결정문을 읽어 보고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내가 잘 몰랐던 부분을 이해했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긍이 간다’고 할 정도가 돼야 한다.” 김 전 처장은 “그래야 ‘한국에 민주주의,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구나. 한국이 위기에 처했었지만 다시 회복하고 있구나’라는 믿음을 국내외에 줄 수 있다. 장외 집회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탄핵 반대 집회는 여전히 격렬하고 ‘헌재 파괴’ 주장까지 나온다. “보수, 진보를 떠나 우려된다. 국가를 왜 만들었나. 사법 질서 없이 국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고 모두 피해자가 된다. 보수의 가치는 나라의 근간을 지키는 것이지 기본 질서를 전복,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적 위기에 정치 구호를 앞세우면 안 된다. 차분하게 탄핵 심판을 지켜볼 때다.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탄핵 심판정에서 가려질 것이다.”김진욱 초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처장△1966년 대구 출생△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법학 석사△1989년 사법시험 합격, 1992년 사법연수원 수료(21기)△서울지방법원 판사,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헌법재판소 선임 헌법연구관△2021∼2024년 초대 공수처장△저서: ‘공수처 아무도 가지 않은 길’(2024년)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2022년 ‘바이든-날리면’ 논란 때 실은 대통령실 내부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론이 제기됐다고 한다. 경위가 어떻든 부적절한 표현에는 사과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한때 사과 문안도 검토됐지만 묵살됐다는 게 당시 대통령실 인사의 얘기다. 당시 대통령실은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OOO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윤 대통령 발언의 OOO은 “바이든이 아니고 날리면”이고 우리 국회를 향해 한 얘기라고 주장했다. 내부에서 사과론이 나온 건 설사 국회라 해도 야당에 비속어를 쓴 셈이니 잘못이라는 상식적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는커녕 책임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 진실 흐리고 거짓 강변하며 남 탓 윤 대통령이 사과했다면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잘못을 덮으려는 의도에서인지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한 주장을 강변했다.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에 빠뜨리고 문제 제기 자체가 동맹 훼손이라는 논리를 만들어 진영 대결로 몰아갔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기자와 만나 윤 대통령의 ‘바이든-날리면’ 경험이 12·3 불법계엄으로 이어진 중요한 요소였을 거라고 짚었다. 자신의 일방적 주장이 사실이 되고 그에 따라 현실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신적 경험’에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당시 대통령실에 있었던 인사에게 이 얘기를 전했더니 정확히 봤다며 이후 대통령이 더욱 독선적으로 변해 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윤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바이든-날리면’의 공식이 놀라운 정도로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여러 관련자의 진술로 증명된 계엄의 실체를 교묘하게 흐리는 주장으로 사실관계를 흔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무슨 지시를 했는지는 슬며시 감춘다. 그 혼란이 다른 사람의 거짓 증언 때문이라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진영 간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시키는 식이다. “실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달 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문을 부수고서라도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복수의 진술이 있고 계엄군이 국회 본관 유리창을 깨부수고 들어간 멀쩡한 사실에도 애초 국회 해제 의결을 염두에 둔 평화적 계엄이었다는 주장으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하 탓, 야당 공작 탓으로 책임을 돌리고 있다. 집권 내내 누적된 퇴행의 결과 즉, 윤 대통령의 지금 모습은 갑자기 불쑥 나온 게 아니라 ‘바이든-날리면’에서 시작돼 집권 내내 누적된 퇴행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때의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논리와도 닮았다. 언론이 백악관의 거짓말에 문제를 제기하자 백악관이 거짓말이 아니라 언론이 얘기하지 않는 대안적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고 한 데서 탄생한 궤변 말이다. ‘바이든-날리면’ 논란은 윤 대통령 출근길 도어스테핑 중단으로 이어졌다. 당장의 잘못을 모면하려 사실관계를 뭉갠 윤 대통령은 언론 비판에 귀를 닫기 시작했다. 그로 말미암은 독선이 계엄의 토양이 됐다는 점에서 ‘바이든-날리면’ 논란은 계엄이라는 파국으로 끝난 퇴행의 시작이다. 퇴행의 끝에서 윤 대통령은 또다시 스스로 자초한 처지를 벗어나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화적 계엄’이라는 형용모순의 거짓으로 ‘대안적 사실’을 쌓아가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를 믿고 분노를 폭력으로 발산하는 극렬 지지층에 쾌재를 부를지 모른다. 하지만 그 퇴행의 대가로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할 비용이 얼마나 클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북한이 한국을 핵무기로 공격했을 때 미국이 워싱턴, 뉴욕, 로스앤젤레스(LA)를 걸고 핵보복 공격을 해줄 것이라 믿는 미국인은 없다. 그런 약속은 거짓말(lie)이다.”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국방부 정책차관으로 지명된 엘브리지 콜비가 한국의 외교 소식통에게 했다는 말이다. 미국 본토가 공격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에 확장억제를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그러면서 콜비는 북한이 이미 핵 보유 국가가 됐다는 인식을 드러냈다고 한다. 다른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등 특별임무 담당 특사로 지명된 리처드 그리넬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서울을 구하기 위해 LA가 핵폭탄을 맞아도 된다고 할 미국인은 없고 자신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넬은 지난여름부터 “북핵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face reality)고 말해 왔다고 이 소식통은 전했다.대남 핵위협 해결 없는 북-미 대화 안 돼그리넬과 콜비 모두 트럼프 외교안보 라인의 최측근으로 꼽힌다. 취임 첫날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김정은은 이제 핵 국가(nuclear power)”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온 모든 시그널은 트럼프가 북핵 용인을 전제로 대북정책의 틀을 수립할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그 핵심은 북한 핵무기가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북-미 관계 개선을 제안하고 미국을 겨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를 요구하는 것이 트럼프의 우선 목표가 될 공산이 크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문제는 김정은이 대남 공격용 전술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한국 전역을 겨냥한 신형 미사일 대부분에 탑재가 가능한 전술핵탄두 ‘화산-31’을 개발했다. 지난해 처음 공개한 우라늄 농축시설은 대남 전술핵무기 제작용이라고 김정은 스스로 밝혔다.트럼프가 북한의 핵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고 자국 보호를 위한 ICBM 폐기로 협상 전략을 구체화하는 순간 한국을 타깃으로 한 김정은의 핵 공격 위협은 거래 대상에서 빠진다. 한국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다.한미 안보이익 충돌 ‘트럼프 모멘트’ 직면머지않아 북핵을 둘러싼 한미 간 국익이 충돌하는 ‘트럼프 모멘트’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러면 한국에서 핵무장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다.물론 콜비를 비롯한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은 ‘우호적 핵 확산’ 개념을 거론한다고 한다. 중국이 미국에 버금가는 핵 강국 야심을 숨기지 않고, 러시아는 핵 선제공격 위협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니 한국 핵무장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검토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중-러 견제라는 미국 이익을 고려한 핵무장을 한국이 선택하는 게 맞을까. 간단치 않은 문제다.무엇보다 우리는 북한의 핵위협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북핵 문제의 제1 당사자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 30여 년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고 북핵을 용인한다고 공식 선언할 경우 국론 분열을 감당하기 어렵다. 최악은 한국의 권력 공백기에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트럼프가 북한 비핵화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설득할 기회도 사라진다. 그런데 대통령 직무정지 중이라지만 국가안보실과 외교부는 따로 놀고 트럼프 행정부를 전방위로 설득하는 모습이 안 보인다. 극한 대립을 하는 여야도 이 문제에서 협력할 기미가 안 보인다. 이 와중에 트럼프 2기 첫 쿼드 외교장관회의 성명에 ‘한반도 비핵화’가 빠졌다. 트럼프의 새 대북정책 구체화까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증오에 휩싸인 편집증자. 박해 망상과 자기 맹신 성향이 있다. 망상을 뒤엎는 합리적 증거가 밝혀져도 증거 자체가 오염됐다고 믿는다. 자신이 위협받으며 부당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믿는다.” 2014년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펴낸 ‘음모론의 시대’에서 규정한 음모론자의 특징이다. 편집증은 상대에게 적의가 있다고 맹신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망상 장애를 뜻한다. 15일 오후 서강대 연구실에서 만난 전 교수는 “증거가 없는 부정선거 음모론을 여전히 12·3 비상계엄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강변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모습과 겹친다”고 말했다. 그는 “음모론자에 대한 이 정의는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1964년 저서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스타일’에서 제시한 내용”이라고 말했다. 호프스태터는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배리 골드워터를 주목했다. 골드워터는 미국이 온통 좌파의 음모로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으로 극우 세력의 지지를 얻었다. 호프스태터는 “거대한 음모가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며 이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십자군 전쟁’뿐이라고 주장하는 골드워터의 모습을 편집증적 스타일의 정치라고 지적했다. 15일은 윤 대통령이 체포된 날이었다. 전 교수는 11년 전 음모론 관련 책을 내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주변에서 “음모론을 믿는 거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고 여전히 음모론 연구가 척박한 수준이지만 윤 대통령이 현실의 극적 사례를 제공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음모론의 시대’ 후속으로 ‘대통령의 편집병’(가제)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윤 대통령에게서 보인 편집증적 정치 스타일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이 전능한 적과 대적하고 있다, 그 적으로부터 부당하게 피해와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며 대통령임에도 현 제도에 대한 불신을 보였다. 이런 인식이 불법을 포함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적)과 싸움을 벌여도 된다는 인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왜 하필 부정선거 음모론인가. “제도에 대한 음모론자의 불신은 두 가지 부류다. 하나는 제도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제도를 자의적으로 활용한 경험이 있어서 상대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윤 대통령은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맞춰 그 제도를 좌지우지한 경험이 있는 후자로 보인다. 검찰 수사에서 명태균 씨의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드러난 게 그 단서다. 윤 대통령 자신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 야당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부정선거의 증거가 없다고 아무리 밝혀도 오염된 증거라고 주장하며 부정선거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모든 정보가 집중되니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지 않나. “윤 대통령은 그런 선택보다 대부분의 정책에 카르텔이라는 적을 상정했다. 반국가세력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정책을 왜곡하고 방해하는 거대한 세력, 모든 사회 영역에서 가면을 쓰고 암약하는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고 자신을 고립된 피해자로 규정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가 성공하지 못해도 강력한 용과 대적했다’며 정책 실패를 정당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인식이 결국 계엄이라는 국가 범죄로 나타났다.” ―음모론의 공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인가. “정치적 음모론자들은 상대를 음모 세력으로 악마화해 자신에 대한 비판을 무력화한다. 자신을 희생자로 만든 뒤 악마를 없애야 한다면서 지지자들을 동원한다. 음모의 세상에는 두 진영만이 존재한다. 절대적으로 선한 ‘우리’와 절대악의 이분법이다. 상대에 대한 증오를 이용해 책임을 전가한다. 윤 대통령에게 음모론은 정치 전략이었고 지금도 의존하는 유일한 정치적 자산으로 보인다.” ―책에선 린든 존슨 전 미국 대통령 사례를 들었다.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으로 지지율이 높아졌다가 전쟁 참상 고발 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졌다. 언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정책을 수정하는 대신에 ‘미국의 거대한 음모 집단이 나를 망치려 이런 식으로 조작하고 있다’며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21세기 한국 정치에서 이런 음모론이 통하는 이유는…. “상대 진영에 대한 미움을 바탕으로 하는 ‘안티 팬덤’ 정치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정치는 누군가가 리더로 적합해 뽑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혐오해 그 사람을 비토하기 위해 리더를 택한다. 음모론의 가장 중요한 정치 전략은 정적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원수이자 악마로 본다. 타협과 대화가 불가능하다. 정치가 ‘저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한다’는 생사투가 돼 버린 것이다. 이는 음모론이 무럭무럭 자랄 최적의 토양이 됐다. 우리 편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적진 앞에서 분열하면 우리가 죽는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북돋아줘야 한다는 식이다.”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당시 한남동 관저에 계속 모여드는 이유를 묻자 전 교수는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 얘기를 꺼냈다. 페스팅거는 1950년대 이른바 ‘종말의 날’을 믿은 종교 집단을 연구했다. 그 결과로 펴낸 책이 ‘예언이 끝났을 때’다. 종말의 날에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자 어떻게 됐을까. 다들 집단을 떠났을 것이라 믿으면 오산이다. 상당수가 집단에 남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포교에 나섰다. ―왜 그런 건가.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때까지 자신들이 투자했던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 충성과 헌신이 아까웠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현실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고 믿음을 지키는 쪽으로 현실을 바꿨다. 이러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친해지고 자신의 믿음을 지지해주는 정보만 편식하게 된다. 망상의 세계에 빠졌다는 건 곧 자신의 잘못된 신념, 생각이 현실과 충돌할 때 현실을 믿음에 맞게 왜곡시켜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개념이 인지부조화다. 음모론자들은 인지부조화를 해결하려 음모론을 채용하는 것이다.” ―그런 음모론을 믿는 윤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비정상적인가.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을 미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데 기여한 미 공화당의 강경 보수파 ‘티파티(Tea Party)’가 있다. 한 연구자가 티파티 관계자에게 왜 음모론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사실은 음모론을 믿지 않지만 믿는다고 얘기함으로써 우리를 관통하는 공통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라는 취지로 답했다. 즉, 음모론을 믿지 않더라도 자신이 속한 신념의 공동체 또는 이익의 공동체가 믿는다고 하니 나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태도일 수 있다.” ―윤 대통령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라는 뜻인가. “지금 우리 정치는 정권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고 감옥에 간다는 식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내가 지지하는 대통령이 철퇴를 맞으면 자신이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상징이 사라진다는 생각에 상실감이 클 수 있다. 이런 사회는 선거를 통해 정권과 국회의원을 교체하는 민주주의의 윤활유,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재집권이 윤 대통령 지지자들을 더 과격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는 듯하다. “2020년 대선 결과를 부정한 음모론, 민주주의를 부정한 1·6 의회 난입 사태에도 결국 트럼프가 권력을 되찾았으니 ‘그런 성공의 경험을 우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커졌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 민주주의가 큰 위기를 맞았다는 말로 들린다. “음모론은 책임 전가와 회피의 장치다. 음모론 정치는 우리 사회에 ‘책임의 위기’와 ‘민주주의 파괴’라는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게 당연시되면 책임을 지지 않고 과실만 따먹으려는 정치 세력이 득세한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 무너지는 것이다.”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윤 대통령의 계엄은 정부와 군, 정치 등에 대한 공적 신뢰를 완전히 망가뜨렸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다른 누구의 얘기도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적 제도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면 사람들은 더욱더 음모론에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 치유가 힘든 깊은 병증에 빠졌다. 이 ‘윤석열의 유산’을 두고 우리 사회는 꽤 오랫동안 싸워야 할 것이다. 썩은 사과만 골라내자는 접근법은 음모론자들을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썩은 사과 박스 자체가 문제다. ‘안티 팬덤’의 우리 정치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음모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정부, 정치, 사법, 언론 등 공적 제도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63)서강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빌레펠트대에서 교육 불평등 문제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부터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사회학회 총무이사, 한국문화사회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음모론의 시대’ ‘세대 게임-세대 프레임을 넘어서’ 등의 저서를 펴냈다. 음모론, 세대 및 교육 문제 등의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백골단 10∼20명이 다가와 쓰러져 있는 우리를 U자형으로 에워싼 채 방패와 진압봉 구둣발로 구타했다. 전경의 욕설과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뒤범벅됐다. 머리카락을 잡혀 꼼짝없이 끌려가는 학생도 있었다.” 1991년 5월 25일. 경찰은 노태우 정권 퇴진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을 향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했다. 서울의 한 좁은 골목에 학생들이 뒤엉켜 쓰러졌다. 숨 쉬기조차 어려운 그때 백골단의 무차별 구타가 이어졌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의 한 학생이 엎드려 쓰러진 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누군가 “여학생이 죽었다”라고 외쳤다. ▷동아일보는 그해 스물다섯의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그 한 달 전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 구타에 목숨을 잃었다. 1996년 연세대 학생 노수석은 백골단의 ‘토끼몰이’ 진압 과정에서 숨을 거뒀다. 백골단은 하얀 헬멧에 청재킷 청바지를 입고 다리 보호대를 찼다. 몽둥이와 방패를 든 그들은 사과탄이라 부르는 최루탄을 던졌다. 방독면 뒤에 얼굴을 숨겼다. 1980∼1990년대 시위 진압을 위한 사복경찰 부대였던 그들은 군부 독재의 폭력적 공권력을 상징했다. ▷2000년대 들어 잊혔던 백골단 명칭이 그제 느닷없이 등장했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해온 40대 유튜버 김모 씨는 20∼30대 30여 명으로 구성된 백골단을 조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이 윤석열 대통령을 지키는 300명 민간 수비대의 핵심이자 훈련 조교라고 했다. 하얀 헬멧과 무릎보호대는 물론 ‘멸공봉’이라 부르는 붉은 경광봉을 갖췄고 방독면도 구비할 것이라고 했다. 왜 백골단이냐고 했더니 “국가비상사태에는 백골단처럼 강한 이미지도 나쁘지 않다”고 답했다고 한다. 자경단 역할을 한다고 했으니 여차하면 물리적 충돌도 불사하려 한 것이라 의심된다. ▷집권여당의 최고위원까지 지낸 김민전 의원은 ‘반공청년단’의 예하 부대로 활동한다는 이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들은 ‘백골(白骨)’을 연상시키는 하얀 헬멧을 쓴 채 회견장에 나타났다. 폭력적 공권력의 상징을 차용해 법을 무시하고 폭력을 써서라도 윤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일그러진 인식을 여당 국회의원이 나서서 부추긴 셈이다. ▷논란이 커지자 김 의원은 뒤늦게 “송구하다”며 기자회견을 주선한 사실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80년대 학번인 김 의원이 전두환 정권 시절 대학 캠퍼스에 수차례 진입한 백골단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철회 이유에 대해 백골단 명칭이 좌파에 공격 명분을 주는 표현이라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란 취지의 변명을 하기도 했다. 끔찍했던 백골단 악몽이 김 의원에겐 추억이었나.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그의 행태는 우리 사회가 맞닥뜨린 민주주의 퇴행의 쓰린 민낯이다.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

지난해 총선이 보름도 안 남은 3월 말. 윤석열 대통령은 여권의 한 인사에게 텔레그램을 보냈다. “한일관계 정상화, 화물연대 대응, 민노총 건폭 혁파, 노조회계 투명화, 사교육 카르텔 혁파, R&D 혁신 구조조정, 늘봄학교 추진….” 그는 자신이 성과라고 생각한 일곱 가지를 나열한 뒤 여덟 번째로 “의료개혁 의사 증원”을 거론했다. 그러고선 “모두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 국익과 국민만 보고 추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권 인사는 의대 정원 증원 문제는 선거 뒤 원칙대로 가는 방법도 있으니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취지로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런 식으로는 (선거) 못 이겨요. 신문 보지 말고 민심을 들으세요.” 돌아온 건 윤 대통령의 짜증 섞인 답글이었다. 놀란 그가 “죄송하다”고 했지만 윤 대통령은 그치지 않았다. “보수언론의 권력 지향 행각과 왜곡 선동이 도를 넘었지만 일반 민심을 봐야 한다”는 강변을 이어갔다.비판에 귀 닫은 시대착오적 언론관 윤 대통령은 이 발언으로 시대착오적 언론관을 그대로 드러냈다. 의대 정원 증원 규모를 2000명으로 못 박은 근거의 빈약함, 결정 과정의 절차적 문제, 교수도 시설도 확보하지 못한 여건을 조목조목 지적했던 언론의 비판이 왜 왜곡 선동인지 근거를 알 수 없다. 보수언론이라는 규정도 모호하지만 보수언론이라면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야 한다는 것인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언론마저 진영 대결과 정파적 이해관계의 셈법으로 적대시한 윤 대통령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합리적 비판에 귀를 닫은 채 정보를 독점하고 일방적으로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라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윤 대통령 임기 내내 참모들은 비판 기사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신경질적이고 적대적이었다. “당신들과 통화하다 감찰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이도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참모들의 행태는 왜곡된 윤 대통령 인식의 투영이었던 셈이다. 윤 대통령은 민심을 들으라 했다. 그가 말한 민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여권 인사에게 물었다. 그는 “극우 유튜브”라며 극우화는 예정된 코스였다고 했다. 지난해 초부터 극우 유튜버들의 영상 링크를 공유하며 자신의 생각과 정말 맞는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 관련 언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도 3월 말∼4월 초였다. 그의 이런 인식은 총선 직전 4월 초 담화로 그대로 이어졌다. 2000명 증원의 정당성을 강변한 그 담화의 초안은 훨씬 강경했다고 한다. 국민의힘마저 놀라게 한 그 담화는 김건희 여사 디올백 수수 의혹, 이종섭 주호주 대사 임명 논란과 함께 여당의 총선 참패를 가져온 오만과 불통의 대표 사례였다.극우의 좁은 대롱으로 만든 허상의 적 하지만 극우 유튜브라는 ‘좁은 대롱’으로 본 세상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윤 대통령은 참패가 자신 때문이 아니라 부정선거 탓이라는 망상에 빠졌다. 그 어떤 대통령보다 “가짜뉴스 척결”을 주장했지만 그 자신이 진짜이고 민심이라 믿은 그 내용이 음모론 수준의 가짜뉴스임은 깨닫지 못했다. 참패 책임을 돌리려 허상의 적을 만들었으니 실체가 불분명한 반국가 세력이고 중앙선관위였으며 언론이고 자신을 비판한 정치인들이었다. 극우라는 좁디좁은 세계로 걸어 들어간 그는 그 안에 스스로 갇히는 ‘자발적 유폐’를 택했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며 한남동 관저에 자신을 가둔 지금 상황과 오버랩된다. 대공황에 대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이제까지 내가 만든 적이 누구인지 보고 나를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만들어낸 허상의 적을 보고 우리가 그에 대해 내릴 평가는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하다. 윤완준 논설위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