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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4~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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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 전쟁… ‘4세 고시’가 말이 되나

    영어유치원(영유) 마지막 해 10월이 되면 서울 강남 엄마들 사이에선 레벨테스트(레테) 전쟁이 치러진다. 흔히 ‘빅3’ ‘빅5’로 유명한 초등 영어학원들이 이때 레테를 통해 예비 초1 수강생을 모집해서다. 레테 수준은 미국 초등학교 5, 6학년에 버금간다. 일반적인 공부로는 따라갈 수 없어 영유 말고도 월 수백만 원의 과외를 받거나 프렙(준비) 학원까지 다녀야 할 판이다. 이 레테를 대치동에선 ‘7세 고시’로 부른다. ▷7세 고시를 위해선 영유 단계부터 ‘스파르타식’ 영어 교육을 받는 것이 기본이다. 영유 입학은 4, 5세가 일반적이다. 영유 수요가 워낙 많아 이 또한 레테를 치러야 한다. 영유의 레테는 영어 단어를 발음할 수 있는지, 단어에서 빠진 철자를 쓸 수 있는지 등을 본다. 유명 영유에 입학시키기 위해선 두세 달씩 원어민 강사까지 붙여 한나절 이상 공부시키기도 한다. 이 레테를 ‘7세 고시’에 빗대 ‘4세 고시’ 또는 ‘초시’라고 부른다. ▷4세 고시는 영어 실력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어린 나이여서 시험 자체를 치를 수 있게 준비하는 훈련이다. 기저귀를 떼고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 엄마 없이 20∼30분을 혼자 앉아 있는 훈련, 악력이 약해 제대로 글씨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어른이 같이 손목을 잡고 알파벳을 쓰는 연습 등이다. 아이 입장에서 보면 한계를 극복하라는 듯한 강도 높은 훈련의 연속인 셈이다. ▷4세까지 사교육 출발점이 내려간 데는 물론 두려움과 경쟁을 조장하는 사교육 마케팅이 한몫한다. “남들은 이만큼 앞서가는데 바라만 보실 건가요”라는 학원 관계자의 말이 부모로선 가장 무섭다. 전문가들이 유아기에 언어의 주입식 학습은 뇌 균형 발달을 저해한다고 경고해도 당장 눈앞에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보고 싶은 것이 부모 심리다. 보통 영유의 월 교습비가 기본 180만∼200만 원인데 과외 등 추가 비용을 합치면 300만 원 가까이 들어간다고 한다. 허리 휘는 부담에도 영유에 보내는 건 혼자만 경쟁의 급행열차에서 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욕심과 강요에 의해 사교육을 받다 보니 부모와 자식 사이가 틀어지기 쉽다. ‘엄마가 맨날 공부만 시킨다고 짜증 낸다’ ‘숙제를 계속 미루며 안 한다’ 등을 호소하는 글을 맘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이와 부모 모두 힘겹게 ‘4세 고시’ ‘7세 고시’를 통과해도 초3 때 의대 입시반이나 초교 졸업 전 학원 입학 등 끝이 잘 안 보이는 레테 경쟁이 이어진다. 지금 어린이들이 크면 만개할 인공지능(AI) 시대에 의대와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한 입시 경쟁이 과연 유효할지 의심스럽다. AI 번역기가 발전하면 영어 잘하는 한국인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인재가 필요할 텐데 말이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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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매 악화 막을 방법 찾았다”… ‘의사과학자’의 세계[인터뷰]

    《사람의 머리는 두개골-뇌수막-뇌의 순으로 돼 있다. 뇌를 감싸고 있는 뇌척수액은 뇌를 보호하고, 뇌의 대사로 만들어진 노폐물을 배출하는 역할을 한다. 뇌척수액의 양은 평균 150mL. 하루 450∼500mL가 새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450∼500mL는 매일 배출되는 셈인데, 150년간 어디로 나가는지 미궁에 빠져 있었다. 4년 전 고규영 기초과학연구원(IBS) 혈관연구단장 겸 KAIST 특훈교수 연구팀은 뇌 아래쪽 림프관을 통해 뇌척수액이 빠져나가는 걸 최초로 발견했다. 이른바 배수구인 셈이다. 나이가 먹으면 림프관의 배수능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뇌의 노폐물이 밖으로 나가지 못해 쌓이고, 결국 치매 등의 원인이 된다. 고 단장은 이 연구로 올해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을 5일 수상한다. 그를 4일 줌으로 인터뷰했다.》―뇌수막 림프관과 치매 관련 후속 연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4년 전 연구는 생쥐를 실험한 것이고, 올해부터 충북 오송의 국가영장류센터와 협력해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다. 림프관을 통한 뇌척수액의 이동 경로는 서로 비슷한 것으로 나왔다. 11월경에 이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 결과 등을 발표할 예정이다.” ―치매 관련 신약을 기대해도 좋은가. “치매는 대표적인 퇴행성 질환으로 베타 아밀로이드와 타우 등 독성 단백질이 천천히 쌓이면서 해마의 신경세포를 파괴해 생긴다. 독성 물질을 담은 뇌척수액의 배출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면 자연스럽게 증상 악화 방지와 예방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일종의 ‘뇌 청소’를 하는 것이다. 미국 바이오젠이 최근 개발한 치매 치료제 ‘레켐비’는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신속 승인을 받아 국내에도 들어올 예정인데 효과가 20% 정도라고 한다. 우리 방식으로 개발되는 향후 치료법과 병합하면 보완 효과를 이룰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과 연계해서 개발하나. “새로운 치료 개념이기 때문에 우선 연구원들이 특허를 갖고 스타트업 창업을 한 뒤 큰 기업과 협력하도록 할 생각이다.” ―목 주변을 마사지하면 치매 예방에 좋은 ‘꿀팁’이 있다고 하던데…. “뇌에서 나온 뇌척수액이 우리들이 발견한 뇌막 림프관을 통해 배출되고 목에 있는 200∼300여 개의 림프절에 모인 뒤 전신순환으로 들어간다. 턱 밑 목 부위를 마사지해주면 뇌척수액 흐름이 원활해진다. 아침저녁으로 10∼15분 손으로 턱 밑 목을 잡고 어루만지면 된다. 나중에 이를 도와주는 기기의 제품화도 검토 중이다.” 그는 30여 년 연구 경력의 대부분을 모세혈관과 림프관 연구에 매진했다. 인간의 전체 질환 중 혈관 관련 질환이 3분의 1이 넘는다. 초기에는 암에 주력했으나 암 치료율이 70%를 넘어가면서 치매 등 머리 관련 질환으로 방향을 바꿨다. 아직 치료율이 20∼30% 미만인 것들이다. 특히 눈 코 목 등의 혈관과 림프관 연구를 통해 다양한 가지치기 연구가 이뤄졌다. 코로나19 백신도 대표적인 사례다. ―코로나19 국내 유행 전에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트위터에 올린 것이 국내 전문가로선 처음이어서 화제가 됐다. “(중국의) 양상을 보니 비말로 인한 호흡기 감염이 확실해 보였다. 그러면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와 국민이 과학적 사실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전문가가 나서야 한다.” ―코로나 감염 경로에 대해서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고 하던데…. “2년 전 코로나바이러스가 콧속 섬모상피세포에 자리 잡고 증식한 뒤 다른 장기로 퍼져 나가는 걸 확인했다. 콧속 혈관과 림프관 연구가 돼 있어 가능했다. 올 4월엔 한 단계 높은 연구 결과를 네이처 심순환계 연구 표지 논문으로 냈다. 콧속 혈관과 림프관을 3차원(3D)으로 구현한 정밀지도를 통해 어떻게 약물이 흘러가는지 파악했기 때문에 감염 예방 방법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팬데믹이 다시 온다면 백신을 근육주사가 아닌 코 안에 뿌리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부작용이 적고 95%의 면역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가 코로나 백신 개발이 굉장히 늦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화이자의 경우 의사, 보건학자, 인공지능(AI) 기술자 등 전문가 100여 명이 팀을 구성해 집중적인 연구 끝에 빠르게 백신을 만들었다. 우리나라 기업 규모에선 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 기업 학계가 빠르게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전북대 의대를 나와 환자를 보는 임상의사의 길로 가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해 의사과학자가 됐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고교 때 원래 문과였는데 방학 때 전국 무전여행을 한 뒤 폐결핵을 앓아 1년간 휴학했다. 그때 결핵환자들의 불쌍한 모습에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의대에 와서 교수님이 ‘한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중요하지만 신약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라’고 조언한 것 때문에 방향을 바꿨다. 지금도 ‘속았다’고 주변에 얘기한다(웃음).” ―의사과학자가 임상의사에 비해 수입이나 대우가 낮아 하려는 의대생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요즘 (대우가) 많이 나아졌다. 본인이 연구를 잘하면 여러 혜택이 있다. 의사과학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연간 4000명 배출되는 의사 중 1%인 40명만 의사과학자가 돼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신념이 필요하다. 항상 연구는 실패의 연속이고 연구비 걱정에 시달리는데 ‘내 연구로 많은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 ―그래도 파격적인 대우가 있어야 좋은 인재가 갈 것 아닌가. “파격적 대우라는 건 결국 좋은 치료제와 방법을 갖고 특허 출원, 회사 창업 등으로 크게 성공하는 것이다. 앞으로 그런 사례가 점점 나올 것으로 본다. 개개인에 대한 대우보단 연구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더 필요하다. 미국 보스턴 롱우드 거리의 바이오클러스터 같은 게 좋은 사례다. 우리의 국력이나 인재를 감안할 때 연구 중심 바이오메디컬단지의 형성이 늦은 감이 있다.” ―그동안 연구한 것 중에 사업화나 제품화된 것들이 있나. “대표적인 건 ‘앱타(Abtaa)’라는 항체다. 우리 연구 결과를 국내 기업이 손을 댔다 실패했고, 지금은 글로벌 회사와 협력해 임상 1상을 진행 중이다. 황반변성과 같은 망막 질환에 효과적일 것으로 기대한다.” ―KAIST가 연구 중심 의대를 만든다는 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대형 병원 빅5도 연구 중심을 강조하지만 환자가 많기 때문에 의사과학자도 다시 임상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제가 KAIST 첫 의사 출신 교수였는데 지금은 10여 명 된다. 현재 상황에선 연구 중심 의대와 병원을 별도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다.” ―초등학생들도 의대 준비반에 다니는 등 의사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 “전국 의사가 13만 명인데 그중 3만 명이 피부와 성형 분야라고 한다. 반면 흉부외과 전문의인 제 친구는 당직을 서다 숨지기도 했다. ‘공부 잘하면 적성 상관없이 의대 간다’는 쏠림 현상을 단기적으론 막을 방법이 없고 중장기적으로 정부가 잘 조정할 수밖엔 없다. 다만 지금 우수한 인재가 몰리는 만큼 의료산업을 활성화하기 좋다는 점을 거꾸로 활용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수명이 길어지면 ‘질 높은 삶을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를 뒷받침할 의료산업이 국가 부를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광받을 것이다.” ―국내 과학자 중 노벨상 후보군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노벨상은 어떤 분야의 첫 문을 획기적으로 열어젖힌 과학자들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국내에 그에 부합하는 쟁쟁한 분들이 많지만 뇌수막 림프관 논문은 인용횟수가 연 100회 이상이 넘을 정도로 이 분야에선 독보적이다. 후보에 낄 수 있다면 영광이다.” 고 교수의 아들인 고봉인 씨는 1997년 차이콥스키 국제청소년 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한 첼리스트이자 미국 하버드대 생물학과를 졸업한 의과학자다. 현재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아버지처럼 혈관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혹시 아들과 협업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고 교수는 “본인이 알아서 잘 성장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제자와 아들에겐 항상 이런 말을 해준다고 한다. “헝그리 정신으로 집중, 또 집중해라.”〈약력〉△전북대 의대△전북대 대학원 석·박사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선임연구원 △전북대 의대 교수 △포항공대 생명과학과 교수△KAIST 생명과학과 교수 △학술원 회원〈수상 이력〉△경암학술상 생명과학부문△아산의학상 △호암상 의학상△올해의 과학자상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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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아들에게 성·본 물려주는 ‘양주 박씨’ 베트남 엄마

    청양 오씨, 용인 라씨, 태국 태씨…. 낯선 느낌의 이들 성(姓)과 본(本)은 귀화한 외국인들이 새로 만든 것이다. 청양 오씨는 2020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출전한 케냐 출신 오주한 씨가 만들었다. 오주한은 오직 한국을 위해 달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용인 라씨 역시 2012년부터 한국 프로농구에서 뛰는 미국 출신 라건아가 만들었다. ▷양주 박씨의 시조인 박화연 씨도 같은 경우다. 베트남 출신으로 2017년 한국인 남편 박규정 씨와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아내 박 씨는 2021년 국적을 취득하면서 ‘양주 박씨’를 만들었다. 아들은 남편 성본을 물려받아 밀양 박씨였는데 이 부부가 아들의 성본을 양주 박씨로 바꿔 달라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성본 변경 허가 청구서에 “베트남 이주민의 한국인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하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편견도 이겨내고 싶다”고 썼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부부 협의 아래 엄마 성본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아빠 성본을 따랐다가 바꾸는 것은 이혼, 사별 등 제한적 경우에만 허용됐다. 법원은 최근 이 관례를 깨고 박 씨 부부의 청구를 허가했다. 가족 사이의 정서적 통합에 도움을 주고, 양성평등이라는 헌법상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주 여성의 자녀가 엄마의 성본으로 변경한 것은 처음이다. ▷현대 사회에서 혈통보다는 학교, 직장 등 사회적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본관의 의미가 많이 옅어지긴 했다. 2005년 동성동본 금혼이 없어지면서 법률적 의미보단 관습적 의미가 더 커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본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종중은 여전히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종중의 일원으로 여성을 포함시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는 등 종중의 실체나 개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있다. 귀화인들이 성본을 새로 만드는 건 한국 전통을 따름으로써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하겠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건너와 가락국 김수로왕과 혼인한 허황후의 후손이 만든 성본이 양천, 김해 허씨라고 한다. 이들 허씨가 인도계라면 양주 박씨는 베트남계가 된다. 이들의 성본은 부계가 아닌 모계에서 출발했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아버지의 성본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편견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이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세계적으로 저출산이 문제가 되면서 이민에 대해 문호를 활짝 여는 나라가 늘고 있다. 한국은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아직은 이민에 대해 문을 활짝 열기에는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개방성을 좀 더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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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미로 탈출하기보다 어려운 아마존 서비스 해지하기

    ‘당신은 아마존을 로그아웃할 수 있지만 떠날 순 없다.’ 노르웨이 소비자협의회(NCC)가 2021년 ‘아마존 프라임’ 이용 회원 1000명을 조사한 뒤 낸 보고서의 제목이다. 유료 서비스인 아마존 프라임에 가입한 뒤 해지하는 과정이 무척 어렵다는 의미다. 보고서는 “아마존을 떠나려면 수수께끼 풀듯 헷갈리는 선택과 반복되는 장애물을 통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아마존 프라임은 가입자가 2억 명으로 지난해 45조 원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한두 번 클릭으로 가능한 가입과는 달리 해지는 매우 까다로워 늘 비판의 대상이 됐다. 최근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다. FTC는 “아마존이 사용자를 기만했으며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게 했다”며 시애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FTC에 따르면 아마존 프라임을 해지하기 위해 4개의 화면 바뀜과 6번의 클릭, 15가지의 옵션 취소를 거쳐야 한다. 한 누리꾼은 본인의 해지 과정을 보여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수준”이라고 표현했다. ▷아마존은 “(혐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펄쩍 뛰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유출된 아마존 내부 문서에선 의도적으로 해지를 어렵게 만들어 해지율을 14% 감소시켰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내부에선 해지 과정을 ‘일리아드 흐름’이라고 불렀다. 장장 9년간의 트로이 전쟁을 다룬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처럼 구독 해지가 길고 힘겹다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FTC가 아마존 소송에 나선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정기구독이 급신장을 한 만큼 구독 해지와 관련된 불만도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연간 수만 건의 소비자 불만을 접수한 FTC는 아마존에 대한 소송 외에 통신사, 피트니스 업체 등도 조사 중이다. 지난해엔 한 인터넷 기반 전화 서비스 업체가 구독 해지를 방해했다며 이용자에게 1억 달러를 배상하도록 했다. 3월엔 가입과 동일한 방식으로 간편하게 해지할 수 있도록 하는 규제 방안도 내놓았다. 소비자의 시간과 비용을 절약해 주겠다는 것이다. ▷미로보다 복잡한 구독 해지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금이 결제돼 황당했던 경험은 온라인 서비스 이용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상거래 업체가 숨기고 비트는 설계로 고의적인 함정을 만들면 아마추어 이용자가 걸려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국내에서도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규제 움직임이 막 시작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4월 온라인 거래 시 어려운 해지나 사용자 동의 없는 유료 갱신 등 소비자를 기만하는 행위를 금지할 수 있도록 전자상거래법을 개정하겠다고 나섰다. 국회에도 관련 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빠른 법 개정으로 속는 줄도 모른 채 당했던 소비자들의 억울한 불이익을 해소해 주기 바란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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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고 수준 상속세율… 코리아 디스카운트 부른다[수요논점]

    《넥슨그룹의 지배구조는 NXC-넥슨재팬-넥슨코리아로 연결돼 있다. 비상장 지주회사인 NXC가 넥슨재팬 지분 47.15%를, 넥슨재팬이 비상장기업인 넥슨코리아 지분 100%를 보유하는 형태다. 정점에 있는 NXC는 고 김정주 회장(62.92%)과 부인 유정현 이사(34%)가 사실상 100%를 소유하고 있었다. 김 회장의 NXC 주식을 물려받은 가족들은 최근 상속세로 NXC 지분 29.3%를 물납했다. 평가가치 4조7000억 원의 주식을 세금으로 거둔 정부는 단번에 넥슨그룹의 2대 주주에 올랐다. 업계 관계자는 “유족이 현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주주총회 특별결의사항 요건인 3분의 2 지분을 넘는 나머지를 모두 낸 것”이라고 했다. 정확히 공개되지 않았지만 넥슨의 상속세액은 6조 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고액의 상속세로부터 기업의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을 택한 것이다.》● 대기업도 감당 어려운 상속세율앞서 삼성그룹 상속인들에게는 2020년 이건희 회장 사후 약 12조 원의 상속세가 부과됐다. 5년 동안 6회에 걸쳐 2조 원씩 나눠 내기로 했다. 2011∼2020년 10년간 한국의 연간 평균 상속세수 2조2500억 원에 육박하는 액수를 삼성그룹 상속인들이 내는 것이다. 이재용 회장 등 상속인들은 계열사 지분 매각, 보유주식 담보대출, 배당으로 상속 재원을 마련하고 있다. 구광모 ㈜LG 대표를 비롯한 LG그룹 상속인들도 9000억 원이 넘는 상속세를 주식담보대출 등을 통해 나눠 내고 있다. 재벌이라도 한 번에 감당하기 힘든 부담인 것이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상속증여세 부담이 가장 큰 나라 중 하나다. 과세 표준이 30억 원을 넘을 경우 세율은 50%, 기업 경영권까지 물려받으면 10%포인트가 할증돼 60%로 높아진다. 일본(55%), 프랑스(45%), 미국·영국(40%) 등도 상속세율이 높은 편이지만 공제 혜택이 커 실제로 내는 상속세율은 한국보다 낮다. 일본은 비상장 기업의 경우 세액 80%의 납부를 유예했다가 5년 뒤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면제해줘 실효세율은 11% 정도다. 프랑스와 영국의 가업 상속 실효세율도 각각 11.25%, 20%에 그친다. 미국에선 자녀가 부모로부터 2340만 달러(약 306억 원)까지 세금 없이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상속세 부담은 줄어드는 추세다. 상속세를 걷는 것보다 가업을 계속하도록 해 법인세를 더 내고, 일자리를 만드는 게 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슬로바키아(2004년), 스웨덴(2005년), 체코(2014년) 등이 2000년 이후 상속세를 폐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15개국에는 상속세가 없다. 스위스 등 5개국은 상속세가 있지만 자식에게 물려줄 때는 상속세를 물리지 않는다. 한때 상속세율이 70%에 달했던 스웨덴이 상속세를 없앤 데에는 제약회사 ‘아스트라’ 상속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1984년 아스트라 지분을 물려받은 자녀들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주식을 팔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결국 주식 대부분을 팔아도 상속세를 마련할 수 없었다. 이 회사는 나중에 영국의 제네카에 인수돼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아스트라제네카가 됐다. 상속세율이 높은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콘돔업체 유니더스, 밀폐용기업체 락앤락, 종자업체 농우바이오, 손톱깎이업체 쓰리세븐 등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경영권을 매각한 사례로 꼽힌다. 하나같이 해당 분야에서 국내외 1위를 달리던 업체들이었다. ● 부의 재분배 효과는?상속증여세는 부(富)를 바라보는 한 사회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광복 직후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이 90%였던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사회적 혼란을 틈타 형성된 재산을 정상으로 볼 수 없고,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을 것이란 판단이 반영됐던 것이다. 지금도 상속세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측의 가장 중요한 논거는 근로소득, 사업소득과 달리 ‘공짜로 얻은 재산’에 세금을 물려 부를 재분배하는 것이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상속세에 대한 문제가 최근 제기되는 것은 이런 효과에 비해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2020년 한국의 상속세수는 3조9000억 원으로 전체 국세의 1.4%로 비중이 크지 않았다. 삼성그룹 등 일시적인 세수 증가분을 빼고 보면 1% 안팎, 국내총생산(GDP) 대비 상속·증여세 비중도 0.5%에 그친다. 부의 재분배, 사회적 불평등 해소에 큰 도움이 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반면 경제 전반에 미치는 부정적 파급 효과는 증가하고 있다. 상속을 통해 오너 일가 지분이 줄어든 기업을 겨냥해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 등의 공격이 이뤄지면 기업은 배당을 늘려 이들을 달래게 된다. 상속인들이 세금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배당을 늘리는 일도 벌어진다. 기업 경쟁력 강화에 들어가야 할 돈이 경영권 방어, 세금 낼 돈으로 쓰이는 셈이다. 임동원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상속세 마련을 위한 과도한 배당은 기업에 부담이 되고, 주식 매각을 택하면 경영권 승계 및 방어가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중견·중소기업들이 가족 명의 자회사를 세워 일감을 몰아주는 편법승계 문제 역시 끊이지 않는다. 경제 수준이 비슷한 나라에 비해 한국 증시가 저평가됐다는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 중 하나로 과도한 상속세제가 꼽히기도 한다. 주가가 오르면 상속세 부담이 늘어나기 때문에 한국 기업의 오너들이 주가 높이기에 소극적이거나, 오히려 낮은 주가를 선호한다는 지적이다. 황승연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보통 지정학적 리스크를 많이 얘기하지만, 중국 위협을 받는 대만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이 2.4배인데, 한국은 1.0배 수준”이라며 “한국 주식시장이 저평가된 데에는 상속세제 문제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 까다로운 가업승계 공제제도과도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기업의 수명이 끊어지는 걸 해결하기 위한 제도가 가업승계 공제제도다. 정부는 가업승계의 조건을 충족하기 어려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가업을 물려받은 후 가업을 영위하는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줄이고, 상속공제 및 증여세 과세 특례 대상도 연간 매출 5000억 원 미만의 중견기업까지 확대했다. 세금을 덜 걷더라도 기업의 영속성을 높이는 게 이 제도의 목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속인이 지켜야 할 사후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제대로 활용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기업들의 불만이 많은 건 업종 유지 조건이다. 욕실 자재를 제조하는 A사는 원래 플라스틱 자재를 주력으로 삼았으나 세라믹 양변기를 신사업 분야로 키우고 있는데, 업종 변경으로 판정받을까 봐 성장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A사의 S 대표는 “공제제도가 외려 발목을 잡으니 열심히 사업을 키울 의지가 꺾인다”고 말했다. 우리와 비슷한 공제제도를 운용하는 독일과 일본은 업종 변경에 대한 제한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6∼2021년 공제제도 이용 건수가 연평균 95건, 총 공제금액이 3000억 원으로 저조한 반면 독일의 경우 연평균 1만 건, 23조8000억 원에 이른다.● 상속세제 어떻게 바꿀 것인가기업의 역사가 선진국에 비해 짧은 한국에서 ‘100년 기업’을 늘리고 키워내기 위해서는 2000년 이후 과세표준, 세율을 23년째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상속세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일본을 제외한 G7 국가들처럼 상속세율을 소득세율보다 낮춰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세제 전문가인 김낙회 전 관세청장은 “지나치게 높은 세율은 조세 회피를 유발하는 만큼 50% 이상의 세금 부담을 지우는 것은 과하다”며 “소득세율과 같거나 낮게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또 상속세가 있는 OECD 회원국의 평균 최고 상속세율(27%)과 비슷하게 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상속세를 폐지한 선진국들처럼 기업 오너 일가의 지분을 다른 재산과 구분해 사업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자본’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업 대주주 지분을 물려받았을 때 세금을 물리지 않고, 이 지분을 처분해 이득을 챙길 때 ‘양도소득세’처럼 세금을 물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호주 캐나다 스웨덴 등 상속세를 폐지한 나라들은 이 같은 자본이득세 방식을 도입했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넥슨의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과도한 상속세율은 시장경제의 효과적 작동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물려받은 자본을 활용해 실제로 돈을 벌었을 때 세금을 물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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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수년간 코인 시장에 난무했던 투기와 사기의 결과가 나타난 것”

    《더불어민주당에서 탈당해 무소속이 된 김남국 의원은 최소 41개 종류의 코인을 거래했다. 이 중 15종은 돈 버는 게임(P2E) 코인으로 주요 투자 대상이었다. 게임사 위메이드가 만든 위믹스의 경우 2022년 1∼2월경 최대 127만 개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가치로는 최대 100억 원까지 본다. 넷마블의 마브렉스도 2022년 4월 21일부터 단기간에 10억 원 가깝게 매수했다. 금융위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가상자산을 10억 원 이상 보유한 투자자는 435만 명 중 900명(0.02%)이었다. 한 번에 수억∼수십억 원씩 투자하는 자산 규모나 거래 빈도로 보면 김 의원을 가상자산 투자업계의 ‘큰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다. 김 의원 코인 거래 의혹과 그가 주요 투자자산으로 삼은 P2E는 무엇인지, 문제점을 어떻게 규제해야 할지 짚어본다.》● 위믹스를 왜 쓰레기 코인으로 바꿨나김 의원이 자금 출처와 현금화 여부 등을 몇 차례 해명했지만 오히려 의혹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현재 명확한 것은 김 의원이 2022년 1∼3월에 가상화폐 거래소인 빗썸 지갑에서 업비트 지갑을 거쳐 카카오의 클립 지갑으로 100만 개 가까운 위믹스를 이체했다는 점이다. 이는 3월 25일 트래블 룰(실명거래 확인)이 실시되기에 앞서 큰손들이 빠져나가고 있던 시점이다. 갑작스러운 대량 거래가 의심스러웠던 업비트는 이를 금융정보분석원(FIU)에 통보했다. FIU는 검찰에 이첩했고 검찰은 두 차례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됐다. 김 의원은 처음에 가상자산을 현금화한 것은 400여만 원에 불과하다고 했다가 나중엔 전세자금 8억 원을 가상자산을 팔아 충당했다고 번복했다. 언제, 어떻게 현금화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의아한 건 지난해 2월 36억 원 상당인 위믹스 코인 51만여 개를 21억 원 상당의 클레이페이 59만 개로 교환한 것이다. 클레이페이는 당시 출시 한 달도 안 된 신생 코인. 현재 클레이페이 가격은 0.00005원 수준이어서 발행만 해놓고 손 뗀 ‘먹튀 코인’으로 의심받고 있다. 만약 이 거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김 의원은 단 한 번의 거래로 15억 원의 손해를 본 셈이다. 김 의원이 거짓 정보에 속아 수십억 원을 날렸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여당에선 자금세탁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국내 코인 중 잘나가던 위믹스를 이름도 없는 신생 코인과 맞바꾸는 거래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위믹스와 클레이페이를 교환해준 플랫폼 업체가 위믹스를 거래소에서 현금화하고 수수료를 제한 뒤 다시 현금으로 되돌려주는 방법을 쓴 것 아니냐는 것이다. 만약 김 의원이 이런 방식을 썼다면 최소한 10억 원 이상의 현금을 손에 쥐었을 수 있다는 의혹이다. 김 의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김 의원의 또 다른 의혹 거래로는 스타트업인 ‘멋있는사자처럼’의 메콩코인 거래다. 김 의원은 메콩코인 상장 나흘 전인 2022년 2월 16일 매수해 사흘 만에 153%가 올랐다. 상장만 하면 일단 가격이 급등하던 버블 시절인데 상장 직전 사들인 것이 내부 정보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김 의원은 이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하고 있지만 타이밍이 절묘해 석연치 않다는 의문은 남는다. ● P2E 합법화 로비 의혹이 이는 이유김 의원은 투자의 주력 상품으로 P2E 코인을 이용했다. P2E는 게임을 플레이하면 가상화폐나 대체불가토큰(NFT)을 보상으로 주는 게임이다. 2020년 발행한 위믹스의 경우 P2E용으로 출시한 ‘미르4: 글로벌’의 자원인 ‘흑철’을 모아 오면 위믹스로 바꿔 준다. 게이머는 이를 거래소 지갑으로 이체한 뒤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위믹스는 2021년 블록체인 생태계의 메타버스가 인기를 끌고 가상자산 시장이 활황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았다. 넷마블 컴투스 등 주요 업체들도 대거 뛰어들었다. 위믹스는 ‘미르4: 글로벌’이 동시 접속자 130만 명을 기록하는 등 인기를 끌자 200∼300원대를 오르내리던 가격이 2만8000원까지 100배 가까이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게임을 P2E 방식으로 서비스하는 것이 금지돼 있다. 게임산업법 32조에 따라 게임을 통한 유무형의 결과물을 현금으로 바꿀 수 없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게임업체들은 국내에선 일반 게임 버전으로 내놓고, P2E 버전은 글로벌 시장에만 출시했다. 코인 자체가 게임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국내에선 사행성 조장을 이유로 금지해놓은 것이다. 다만 거래소를 통하거나 개인 간에 사고팔 수는 있다. 만약에 규제 완화를 명목으로 합법화된다면 P2E 코인의 가치는 날개 돋친 듯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P2E 합법화를 위해 게임업체들이 정치권에 로비를 하지 않았겠느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김 의원이 지난해 2월 대선 캠프에서 선거대책위원회 온라인소통단장을 맡아 ‘NFT를 활용한 이재명 펀드를 출시하겠다’고 나섰다. 이때 위믹스 가격이 일시 반등하기도 했다. 게임업체들의 로비를 주장해 온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은 “P2E 합법론자들이 게임을 블록체인 등 첨단 기술과 결합시킨다고 하지만 게임사가 가상자산 발행에 골몰하는 것은 결국 게임머니의 현금화”라며 “‘게임머니-코인-현금화’ 전환이 가능해지면 발행사인 게임업체가 손쉽게 이득을 보게 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투명하고 합법적 거래를 했다” “게임업체로부터 코인을 받은 적이 없다”며 로비 의혹을 부인하고 있고, 위메이드는 사실무근이라며 위 협회장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 투전판 같은 투기 막을 규제 필요 지난 몇 년간 국내 코인 시장은 정부의 방치와 무규제 속에서 사기와 투기가 난무하는 혼돈을 겪어 왔다. 동국대 박선영 경제학과 교수는 “트래블 룰이 시행되기 전인 2021년, 2022년 초까지 이미 해먹을 사람은 다 해먹고 튀었다고 보면 된다”며 “지금 논란이 된 것이 무엇이든 그때 저질러진 혼돈과 사기의 일부가 이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최근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이 국회 정무위를 통과해 입법을 앞두고 있다. 가상자산을 포괄하는 법안이 아니라는 점에선 한계가 많다. 하지만 이 법이라도 제정돼야 현재 코인 시장에서 횡행하는 시세 조종, 미공개정보 이용 등 불법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주요 내용은 불공정거래를 하면 1년 이상 징역형, 이익 또는 손실회피액의 3∼5배인 벌금을 물리는 것 등이다. 유럽연합(EU)은 최근 가상자산을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암호자산시장법’을 만들어 2026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가상화폐 업체는 허가를 받아야 영업할 수 있고, 자격을 취득해야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자금세탁 의혹이 생기면 정부가 거래 추적을 하고 거래 원천 차단도 할 수 있다. 테라 루나처럼 달러 등 법정화폐와 일대일 비율로 교환할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은 발행 자산의 100% 이상을 준비금으로 보유해야 한다. 발행부터 유통까지 촘촘하게 규제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가상자산 거래에서의 시장 기능 회복이다. 지금의 가격과 거래량이 과연 정상적인 수요와 공급에 기반해 매겨지는지 의문이다. 투자자는 단기적 투기 목적으로 깜깜이 투자를 하고 있다. 발행사도 코인을 내놓기만 하고 프로젝트를 발전시키는 대신 내부 정보를 이용한 시세 조종에 몰입한다. 최근 강남 납치살인 사건을 불렀던 퓨리에버 코인 사건도 매집을 통해 시세를 조종하려 했다가 탈이 난 것이다. 거래소는 수수료 수입을 챙기느라 코인의 거래 적합성 등을 외면하고 있다. 한 거래소의 경우 직원이 뒷돈을 받고 상장 편의를 봐준 혐의로 지난달 구속되기도 했다. 현재 정무위를 통과한 법은 사후 대처일 뿐이다. 건전한 시장으로 발전하려면 유럽 수준의 엄격한 잣대로 발행과 유통을 규제해 투자자들이 정보의 비대칭으로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난해 하반기 기준 하루 거래대금이 3조 원에 달하는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거대한 투전판이 되기 십상이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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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효자도 무조건 상속… 헌재 심판대 오른 유류분 제도[횡설수설/서정보]

    민법상 재산 상속에 있어 ‘유류분’ 제도의 존재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것은 2019년 구하라 씨 사건이었을 것이다. 당시 구 씨가 숨지자 20여 년 전 가출했던 친모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상속분을 달라며 소송을 걸었다. 자식을 버리고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던 친모가 염치없게 재산을 요구한다며 대중은 공분했지만 법적으론 어쩔 수 없었다. 소송 끝에 구 씨가 남긴 재산의 40%는 친모의 몫이 됐다. 유류분을 요청할 수 있는 상속인을 제한하는 ‘구하라법’은 20대 국회에서 자동 폐기됐고, 21대 국회에선 아직 계류 중이다. ▷유류분은 상속인인 배우자와 자녀, 부모, 형제자매에게 법정상속분의 2분의 1∼3분의 1을 보장해주는 제도다. 고인 생전에 상속 포기 각서를 썼더라도 유류분은 인정될 만큼 강력한 제도다. 그러나 재산 형성 기여도, 부양 여부 등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으로 적용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최소한 구 씨의 친모 같은 사례나 불효자는 제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유류분 소송이 급증하는 추세 속에서 현행 법조항만으로 판결 내리는 건 부당하다며 수십 건의 위헌심판제청과 헌법소원이 헌법재판소에 들어가 있다. 헌재는 17일 유류분 관련 첫 공개변론을 갖는다. ▷1977년 생긴 유류분 제도는 유산이 아들, 특히 장남 위주로 분배되는 것을 막고 부인과 딸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여성 권리 향상을 위한 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산업화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당초 법의 취지와 어긋난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우선 여성이 상속에서 소외되는 일이 많이 사라졌다. 평균수명이 길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부모가 숨질 때 자녀가 한창 일할 40∼50대여서 생계 보장용 유산 상속의 필요성이 많이 줄었다. 결혼 안 한 1인 가구 문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혼자 생계를 꾸리는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형제자매가 상속을 받는데, 생계가 독립된 형제자매에게 유류분을 줘야 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서류상 가족이란 이유로 고인과 불화했거나 연락이 없던 이에게 상속이 이뤄지면 가족관계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 공익 목적으로 사회에 유산을 남기고 싶어도 유류분 때문에 온전한 기부가 힘들어지는 것도 폐해다. 영국과 미국은 유류분 없이 유언대로 집행한다. 유류분을 인정하는 나라도 미성년자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속인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유류분은 한때 시대를 앞서갔으나 이젠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일정 부분 맞지 않는 제도가 됐다. 지금처럼 획일적 비율로 나눠 주지 말고 부양과 양육 기여도, 경제 상황에 따라 합리적으로 분배돼 가족을 나 몰라라 한 불효자가 횡재하는 경우는 없었으면 한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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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네북’된 네이버가 안쓰럽지 않은 이유 [오늘과 내일/서정보]

    “권력에 취해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는 ‘괴물’이 돼 가고 있다.” 여권 고위 관계자들이 올 들어 네이버를 상대로 쏟아낸 말들이다. 하나같이 날이 서 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취임 1주년을 맞은 윤석열 대통령 관련 기사와 관련해 “(윤석열을 키워드로) 네이버 뉴스를 검색하면 비판과 비난 기사 일색”이라며 “네이버가 알고리즘으로 배열한다고 하는데 이건 ‘속이고리즘’”이라고 했다. 나아가 윤두현 의원은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가 기사로 발생한 손익 자료를 제출하도록 하는 신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도 뉴스 포털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알고리즘 투명성 확보 및 뉴스 공급자와의 공정한 환경 조성 등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네이버 약관에 문제가 없는지 들여다보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가히 여당과 정부의 이례적인 파상공세라고 할 만하다. 네이버도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30%대 중반을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1주년에 비판 기사가 많이 나왔다 해도 알고리즘 탓만 할 순 없다. 하지만 포털 배싱(bashing·때리기) 상황은 국내 검색 시장의 절대 강자인 네이버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네이버는 지난달로 예고했던 언론사의 아웃링크(포털에서 기사를 선택하면 해당 언론사 사이트로 이동) 선택제를 연기했다. 언론사 기사 속에 URL이나 QR코드를 넣지 못하게 했다. 또 네이버 계열사들이 언론사 동의 없이 기사를 연구 등에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 인공지능(AI) 학습 데이터를 공짜로 확보하겠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모두 언론사와의 사전 협의 없이 ‘약관’을 변경한 뒤 일방 통보했다. 네이버는 언론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최근 약관 개정을 철회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네이버가 언론사의 편집권에 해당하는 기사의 배치나 활용까지 세세하게 통제하려는 의도는 분명히 보여줬다. 네이버가 항상 뉴스와 관련해 언론계 정치권 등의 의심을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네이버는 언론사들을 가두리 그물 안에 가둬 놓고 관리하려고 한다. 그래서 언론사 규모나 평판 등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 기준으로 똑같이 재단하고 있다. 언론사가 아닌 네이버는 저널리즘적 가치보단 트래픽에 훨씬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트래픽 위주의 온라인 뉴스 유통 구조는 언론 환경을 악화시키고 있다. 최근 서울대 언론정보학부 윤석민 교수는 한국언론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20여 년간 온라인 뉴스 시장을 포털이 장악한 결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저(低)품질 뉴스→독자 수준 저하→자극적 뉴스와 낮은 보상’의 악순환이 형성됐다.” 일부 유력 매체들도 구독자 수와 조회 수를 늘리기 위해 자극적인 포털 납품용 기사를 따로 제작하는 실정이다. 이는 언론에 대한 신뢰도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 해외 포털에서 네이버 같은 뉴스 관리는 찾아보기 힘들다. 구글은 앞으로 뉴욕타임스 기사를 이용하는 대가로 3년간 1억 달러(약 1300억 원)를 주기로 했다. 그런 구글이 채택하고 있는 방식이 바로 아웃링크다. 포털에서 뉴스는 언론사가 알아서 운영하고 그에 따른 결과 역시 언론사가 책임지면 된다. 네이버가 “뉴스는 돈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뉴스를 놓지 않으려는 건 언론사의 콘텐츠로 2차 장사를 하는 현재의 뉴스 소비와 유통 구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네이버가 이를 고치지 않는다면 동네북 신세가 되더라도 안쓰러울 이유가 없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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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간호법 ‘13대1’ 다툼… 간호사 업무 명확해져야 해결 첫단추 끼운다

    《간호법을 둘러싼 대한의사협회(의협) 등 13개 단체의 보건복지의료연대와 대한간호협회(간협)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보건복지의료연대는 3일 연가투쟁에 이어 11일 2차 연가투쟁을 예고하고 있다. 만약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17일 전면 파업에 들어간다고 예고했다. 대한간호협회(간협)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단체행동을 할지에 대해 회원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 4일 정부로 이송된 간호법 제정안은 16일 국무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법안의 공포 혹은 재의 요구(거부권 행사) 시한은 19일이다. 그때까지 극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환자들이 의사나 간호사 둘 중 하나를 못 볼 가능성이 높다.》● 의사 vs 간호사 간호법은 31개 조문의 미니 법률이다. 이 중 새로운 조문은 7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의료법, 보건의료인력지원법 등에 있던 조항을 옮겨왔다. 논란이 됐던 내용은 국회의 법안 심사 과정에서 거의 빠지거나 기존 의료법 문구로 대체됐다. 또 간호사 처우 개선도 원론 수준에 그쳤다. 그럼에도 논란이 심한 것은 제1조에 있는 ‘지역사회’란 단어 때문이다. 의료기관에 한정됐던 간호사의 영역을 지역사회까지 넓힌 것이다. 고령화 추세에 따라 노인과 만성질환자가 느는데, 간호사가 환자 집에 방문하거나 사회복지시설 등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특히 의사와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방의 경우 방문 간호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간협이 ‘간호법=부모돌봄법’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의사들은 ‘지역사회’라는 문구를 바탕으로 간호사가 단독 개업을 할 수 있게 된다며 반대한다. 의사의 진단이나 처방 없이 치료가 이뤄지면 의료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현 간호법에는 없지만 시행령을 통하거나 차후 법 개정을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의사의 진료 보조를 하는 간호사가 단독 개원을 하는 것은 의료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현실적으론 어렵다. 하지만 치료 위주로 활동해온 의사보다는 간호사가 돌봄 분야에선 더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의사들은 그 가능성의 싹을 자르려 하는 것이란 얘기가 나온다. 결국 의사와 간호사의 다툼은 고령화에 따른 돌봄 시장의 확대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주도권 확보전이라는 시각이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21년 기준 65세 이상 환자의 진료비는 41조 원으로 전체 진료비의 43%에 달한다. 2070년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되면 돌봄 시장은 훨씬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 의사가 중심인 의료법에서 간호사가 나가면 다른 직역들의 탈출 요구도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한의사, 치과의사도 예전부터 별도의 법을 갖고 싶어 했다. 물리치료사의 경우 현재는 의료기관 내에서만 치료할 수 있는데 별도의 물리치료센터를 허가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경우 물리치료 처방만 의사가 하고 물리치료는 센터에 가서 받는다. 의사-약사와 같은 관계가 되는 셈이다. ● 간호사 vs 간호조무사 간호법을 둘러싼 의사-간호사의 대립 구도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대한간호조무사협회(간무협)다. 이들은 간호법을 반대하며 의사와 보조를 맞추고 있지만 이유는 다르다. 간무협의 요구는 간호법에서 고졸로 제한하고 있는 간무사 시험 응시 자격을 전문대졸 이상으로 확장해 달라는 것이다. 현재 간무사는 전국 59곳의 특성화고 졸업자나 고졸 학력이 인정되는 자가 600여 간호학원에서 1년 과정을 이수하면 응시할 수 있다. 간호법의 간무사 응시자격은 의료법 80조의 조항을 그대로 옮긴 것. 간호법으로 옮긴 뒤에야 문제를 제기한 것은 간호사와 간무사 간의 위계 차이와 차별을 학력에서는 극복해 보자는 취지다. 보건복지부와 여당은 중재안에 전문대의 간호조무학과 설치를 허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러자 특성화고와 간호학원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고교 직업 교육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간무사를 대학에서 배출하면 특성화고가 유명무실해진다는 것이다. 전국직업계고 간호교육교장협의회 정연 회장은 “간무사는 고졸 학력이면 충분한 보조 인력으로 대학에서 가르친다면 교육비 증가와 학력 인플레만 유발한다”며 “대졸자도 학원 등에서 소정의 과정만 밟으면 응시할 수 있어 학력 제한이 있다는 것도 잘못 됐다”고 주장했다. 대졸을 허용해 고졸 간무사에게 새로운 차별의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간호법에서 간호사의 보조 역할로 규정된 간무사들의 업무도 논란거리다. 그동안 지역사회 시설인 장기요양기관 등에서 간호사 없이도 촉탁의사의 지도 아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간무협은 간호법이 시행되면 이들 시설에 간호사가 없을 경우 간무사의 업무가 불법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시설들이 간호사를 채용하게 되는데 간무협은 1만5000여 명의 간무사가 실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동환 간무협 기획실장은 ‘지역사회’ 문구를 빼든가 “‘간호사 보조 업무’라는 규정을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또는 간호사 지도하의 업무’로 변경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간협은 간호법의 간무사 업무 조항은 의료법을 사실상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현재와 바뀌는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또 방문 간호 등이 확대되면 간무사 일자리도 같이 늘어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간호사 vs 임상병리사 응급구조사 등 간호법에 반대하는 건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요양보호사 응급구조사 등도 마찬가지다. 간호법에 이들과 관련된 규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간호사가 독립된 간호법을 통해 업무영역을 넓히면 자신들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응급구조사의 경우 간호법의 시행령 등으로 응급간호사 같은 것이 허용되면 응급구조사의 업무를 대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임상병리사 방사선사 요양보호사 등의 우려도 비슷하다. 임상병리사와 방사선사는 간호법을 통해 간호사들이 지역사회에서 검체 채취와 검사, X선 촬영 등의 업무를 잠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일부 병원에선 비용 부담과 인원 부족을 이유로 간호사나 간무사들이 의사 지시에 따라 임상병리사 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간협은 “직역을 침범하는 조항도 없고, 그럴 일도 없다”는 입장이다. 이 와중에 응급구조사와 임상병리사 사이에서도 직역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응급구조사가 병원 응급실에서도 채혈과 심전도 검사 등을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려고 하자 임상병리사들은 자신들의 영역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 ‘코로나 원팀’ 상호 의구심 해소의 길 현 상황은 의료법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간호사를 의사와 다른 보건의료인들이 막아서는 형국이다. 간호법 반대 논리들은 당장 현실화된 위협이나 불이익이 있다기보다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의구심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간호법에서 간호사들의 업무 영역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다른 직역들의 불안감도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의사도 마찬가지다. 의료법상 의사의 업무는 ‘의사는 의료와 보건지도를 임무로 한다’는 한 문장에 불과하다. 1960년대 의료법 체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한계다. 의료 현장에선 의사와 간호사 간의 업무 범위가 불명확한 부분도 있다. 간호사가 환자진료보조(PA) 명목으로 의사를 대신해 처치나 처방을 하는 경우다. PA간호사는 공식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대형병원 등에서 1만 명 정도가 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삼성서울병원이 공개적으로 PA간호사를 모집했다가 병원장이 의료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다. 미국 등은 PA간호사 면허를 도입해 공식 인정하고 전문성을 높이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별도의 규정이 없어 편법으로 운용하고 있다. 의사 정원은 17년째 동결인 상황에서 PA간호사를 인정할 것인지, 인정한다면 어떤 의료 업무를 맡길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답보 상태다. 간협과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간호사가 의사 업무 일부를 관행적으로 대신한 것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간호법으로 인한 의료 직역 간의 갈등을 줄이려면 각 직역 간 업무 범위를 명확히 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문가와 국민이 참여하는 위원회 형식이 논란이 가장 적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코로나 당시 원팀으로 일했던 의사와 간호사 및 보건의료인들이 환자를 도외시한 채 의료계 내부 갈등을 휴진과 파업으로 이어가서는 안 될 일이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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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년간 1만4천쌍에 결혼식… 무료라도 싸구려로 하지 않았다[횡설수설/서정보]

    그는 생전에 ‘오복을 누리다가 생을 마감한 호상이니 웃음꽃을 피우며 경사스럽게 맞이하라’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 경남 마산에 위치한 신신예식장 백낙삼 대표. 55년간 1만4000쌍에게 무료 결혼식을 선사한 그가 지난달 28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선 ‘생활은 즐겁게, 임무는 성실하게, 인생은 보람되게’라는 그의 인생 철학대로 살다가 갔다고 한다. ▷말이 1만4000쌍이지 오랜 세월 그가 사회에 끼친 선한 영향력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무료 예식장을 운영한 것에 대해 “나도 너무 가난해서 결혼식을 못 했다”고 했다. 집안이 망해 대학 졸업도 못 하고 길거리 사진사로 연명하던 그는 31세에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으나 식을 올리지 못했다. 뛰어난 사진 실력으로 재산을 모아 1967년 2층 건물을 매입했다. 여기에 신신예식장을 열고 사진 값만 받고 모든 것을 무료로 해줬다. 2019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은 뒤로는 “정부가 나를 채찍질한다 싶어” 사진값도 안 받았다. ▷무료라도 싸구려로 하지 않았다. 그는 신부 드레스와 신랑 턱시도, 화장, 폐백 등이 서울 예식장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신부가 화장하고 드레스 입고 나오면 신랑이 ‘내 신부 어디 갔냐’라고 한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예식에 정성을 쏟았다. 한때는 하루 17건의 식을 치를 정도로 인기였지만 근래엔 무료 예식을 찾는 이가 확실히 줄었다. 직원이 다 나가고 부인 최필순 씨와 함께 주례 사회 청소 들러리 하객까지 1인 다역을 맡아 왔다. 지난해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는 아들 백남문 씨가 그의 역할을 대신했다. ▷다른 사람의 결혼만 행복하게 출발시켜 준 것이 아니다. 그 스스로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했다. 매년 부부의 날과 결혼기념일에는 꼭 부인에게 손편지를 써 우편으로 부쳤다. 이들 부부의 얘기를 담은 책 ‘신신예식장’의 한승일 작가에 따르면 이들이 평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당신은 좀 쉬어요, 내가 할게요”였다. 백 씨는 사후 묻힐 곳도 부부가 함께 심은 꽃나무 아래로 정하고 자연수목장으로 해 달라고 했다. ▷그의 꿈은 100세까지 예식장을 운영한 뒤 결혼했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얼마나 잘 사는지 전국일주를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결혼시켜준 사람들의 행복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일 텐데 아쉽게도 희망사항에 그쳤다. 요즘 서울 강남의 호텔에서 결혼식을 하면 당일 예식 비용만 5000만 원이 훌쩍 넘어간다. 결혼 비용에 치이는 젊은이들이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세태다. 백 씨가 반세기 넘게 해온, ‘생애 잊지 못할 날’을 선사하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았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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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톨릭, 여성에 첫 투표권… 2000년 만에 깨진 유리천장[횡설수설/서정보]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달 재위 10주년을 맞았다. 10년 전 제266대 교황을 뽑기 위한 콘클라베(추기경단 선거회의)가 진행되던 중 성 베드로 광장에는 난데없이 분홍색 연기가 치솟았다. 원래 교황 선출에 실패하면 검은 연기, 성공하면 흰 연기를 굴뚝으로 내보낸다. 이것을 본떠 분홍색 연기를 피운 것은 여성 사제 임명 등을 요구하는 가톨릭 여성단체 회원들이었다. 여성의 상징 색깔을 활용해 곧 선출될 교황에게 가톨릭 내 여성 지위를 향상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시위였다. ▷로마 교황청은 26일(현지 시간) 프란치스코 교황의 승인을 얻어 깜짝 놀랄 만한 발표를 했다. 10월 열리는 시노드(주교회의)에서 여성과 평신도에게 최초로 투표권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300여 명이 참여하는 시노드에서 수도회 대표 10명 중 5명을 수녀 몫으로 할당했다. 또 주교는 아니지만 투표권을 갖는 위원 70명 중 절반(35명)을 여성으로 채우기로 했다. 전체의 10% 이상이 여성인 셈이다. 가톨릭 여성단체들은 “2000년 교회사의 역사적 순간”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에 균열이 생겼다”는 표현으로 환영의 뜻을 표했다. ▷시노드는 ‘함께 모이다’라는 그리스어로 1965년 가톨릭 개혁을 이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년 동안 전 세계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교회에 바라는 바를 모은다. 이 내용 가운데 시노드에서 토론과 투표로 최종안을 정해 교황에게 제출한다. 자문기구여서 교황이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자들의 여론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번 시노드를 위한 대륙별 준비 회의에선 교회 내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동안 가톨릭 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조치를 부단히 취해 왔다. 지난해 7월 전 세계 주교 선출을 심사하는 교황청 주교부 위원에 여성 3명을 포함시켰다. 이때도 “교황이 바티칸의 ‘올드 보이 네트워크’를 깨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 2021년에는 가톨릭 평신도라도 성별과 관계없이 교황청 행정조직을 이끄는 수장(장관)이 될 수 있다는 교회 헌법을 발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6년 사제를 보좌하는 부제(副祭)를 여성에게 허용할지를 연구하는 위원회도 만들었다. 만약 부제가 허용된다면 여성이 교회 내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사제’밖에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사제만큼은 여성에게 허용할 수 없다는 교리를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가톨릭 내 분위기를 보면 장담할 수는 없다. 교황청 내 추기경위원회의 장클로드 올러리슈 추기경은 지난달 “미래의 교황이 (사제를) 여성에게 허용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여성 사제라는 마지막 유리천장이 깨진다면 언젠가 여성 교황 목소리가 불거질지도 모른다. 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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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요논점]“비대면 진료 없어지면 한밤중 아이가 아플 때 어떡하죠…”

    《코로나19 거리 두기로 인해 수십 년간 풀지 못했던 의료계의 숙제가 단번에 시행된 것이 있다. 바로 비대면 진료다. 정부는 2020년 2월 코로나19 위기경보 단계가 ‘심각’이 되자 유무선 전화나 화상통화를 이용한 비대면 진료를 한시적으로 허용했다. 지난해 12월 까지 3661만 건, 1379만 명을 상대로 비대면 진료가 이뤄졌다.세계보건기구(WHO)는 조만간 ‘코로나19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 상태’를 해제할 예정이다. 여기에 발맞춰 우리 정부가 코로나19 단계를 ‘심각’에서 ‘경계’ 이하로 낮추면 비대면 진료의 법적 근거가 사라진다. 정부는 비대면 진료 제도화를 추진 중이고, 국회에도 5개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하지만 비대면 진료의 초진 허용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비대면 진료 자체는 허용 정부는 2월 대한의사협회와 의료현안 협의체에서 의원급 의료기관 중심의 비대면 진료 제도화 추진에 합의했다. 이런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3년 가까운 비대면 진료의 성과가 썩 괜찮았기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20년 전화로 진료를 받은 환자 및 가족 500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77.8%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87.8%는 ‘재이용 의향이 있다’고 했다. 비대면 진료에 따른 심각한 의료 사고는 확인되지 않았다. 처방 과정에서 누락, 실수 등 5건만 정부에 보고됐다. 또 전체 진료 건수의 86.2%는 의원급 의료기관이 담당했다. 이를 근거로 찬성 측에서는 비대면 진료의 효용성과 안전성이 검증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대면 진료는 2000년 시범사업을 처음 실시한 이래 역대 정부에서 대부분 추진했으나 의료계의 반대로 무산됐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뜻밖의 실험을 통해 “대형병원으로 환자가 몰려 동네의원 설 자리 없어진다” “심각한 의료 사고가 발생해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기존 논리의 설득력이 약해졌다. 이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비대면 진료가 계속 허용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국가 중 비대면 진료 자체를 금지한 국가는 우리나라 외에는 없다.● 초진 vs 재진 하지만 비대면 진료를 초진과 재진 중 언제부터 허용할 것인지를 놓고는 갈등이 심각하다. 정부-의협의 비대면 진료 합의는 재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현재 국회에 발의된 5개 법안 중 4개도 초진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비대면 진료 앱을 운영해온 스타트업 관련 업체들의 반발이 거세다. 스타트업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산하 원격의료산업협의회(원산협)는 그동안 초진이 99%에 달하는데 재진만 허용하는 건 말이 안 되고 기업들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14일부터 초진부터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자는 인터넷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김봉진 배달의민족 창업자, 박재욱 쏘카 대표, 이수진 야놀자 대표, 이승건 토스 대표, 이승재 오늘의집 대표 등 유명 스타트업 대표들이 잇따라 서명에 나섰다. 일주일 만에 10만 명을 넘었다. 이들은 비대면 진료가 정치권의 눈치 보기로 ‘제2의 타다’가 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는 “3000만 건이 넘는 비대면 진료가 이뤄지면서 플랫폼 사고가 없었는데도 허가제를 실시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라고 말했다. 반면 의료계는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간 비대면 진료는 전화를 통한 문진이 80%를 차지했다. 의료계는 촉진 청진 등으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할 수 없어 정확한 진단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주요 7개국(G7) 중 초진 비대면을 허용한 국가는 영국, 캐나다처럼 평소 의사를 대면하기 힘든 나라들이며 미국도 일부 공공의료 대상자에게 내년 말까지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봉식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은 “비대면 진료에서 환자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초진 불가, 재진 환자 위주’ 방식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산업 주도권 쟁탈전 서로 간에 진실 공방도 벌어지고 있다. 의료계는 원산협의 99% 초진 주장은 틀렸다고 한다. 의료계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인용해 코로나19 기간 비대면 초진은 18.5%, 재진은 81.5%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원산협은 이 자료에서 집계한 1832만 건 중 초·재진 구분이 불가능한 경우가 843만 건(46%)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비대면 의료 현장에선 초·재진 구분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정확한 숫자는 18.5∼99% 사이에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는 ‘국민 건강’, 산업계는 ‘국민 편익’을 내세우지만 서로 물러설 수 없는 건 비대면 진료가 의료산업의 주도권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료계는 초진을 허용할 경우, 플랫폼이 환자들의 의료기관 선택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꺼린다. 환자가 비대면 의료기관을 검색할 때 플랫폼이 ‘가장 가까운 곳’ ‘가장 평가가 좋은 곳’ 등 조건을 달아 보여줄 수 있다. 또 ‘프리미엄 서비스’ 같은 이름으로 광고료를 낸 병·의원부터 소개할 가능성이 높다. 가맹 병·의원이 많아질수록 플랫폼의 시장 장악력도 커져 병·의원이 플랫폼에 종속될 수 있다. 반대로 재진만 허용할 경우 환자의 병·의원 선택은 대부분 ‘초진한 병·의원’으로 한정된다. 비대면 플랫폼으로선 확실한 수익 구조를 만들기 어려워진다.● 다음 달 중단되면 환자 불편 예상 당장 우려가 되는 건 초·재진 갈등으로 다음 달경 한시적 비대면 진료가 아무 후속 조치 없이 끝나는 것이다. 이로 인한 환자들의 불편은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지난달 하순 ‘환자의 의료서비스 접근권 확대’ 차원에서 비대면 진료를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지에 사는 환자, 중증장애인 같은 거동 불편자에게 비대면 진료를 가장 먼저 적용하고 나아가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자 등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고령화사회로 갈수록 비대면의 필요성이 높아지게 된다. 여기에 맞벌이 부부나 1인 가구 등 비대면 진료의 효용성과 편리함을 알게 된 환자들의 불만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가을 900명을 상대로 온라인 조사를 한 결과 농어촌이나 중소도시보다 대도시 환자가, 30대 후반∼40대 초반 연령층이 비대면 진료를 더 활발히 이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인터넷 맘카페 등에서 비대면 진료 이용 후기를 보면 휴일 저녁에 아이의 감기 기운이 심해져도 응급실에 갈 수 없었는데 비대면 진료를 이용하니 30분 만에 진료를 받았다는 식의 글이 적지 않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24일 국회에서 “의료법 개정이 늦어지면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 격오지 거주자, 노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시범사업을 진행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방향은 나오지 않았다.● 초·재진 아닌 ‘질환’ 중심으로 현재 갈등의 근원인 초진, 재진 문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해결의 출발점이란 지적이 나온다. 비대면 진료 허용 기준을 초·재진으로 하는 것보다는 병의 증상, 질환의 종류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정하자는 것이다. 가벼운 열과 기침이 나는 감기나 작은 부위의 피부 발진 등은 초진을 허용해 편의성을 높일 수 있다. 특히 아이들이 심야나 한밤에 아플 경우 당번 병원들이 비대면으로 상태를 확인한 뒤, 대면이 필요한지 판단해 주면 무작정 소아과 응급실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정기석 한림대 의대 호흡기내과 교수는 “초진, 재진에 얽매이지 말고 비대면을 허용할 수 있는 초진, 허용해선 안 되는 재진 등 기준을 만들면 많은 부분이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비대면 진료가 의료비의 증가로 이어져선 안 된다. 코로나19 기간엔 비대면 진료의 수가를 일반 진료의 130%로 인정해줬다. 의협은 향후 수가를 150∼200%로 올려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여기에 플랫폼도 끼어들면서 추가 비용이 나올 수 있다. 디지털화로 인한 비용 절감의 이점이 희석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건강보험 재정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비대면 진료 도입 시 오진으로 인한 법적 문제, 환자 본인 확인,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 등 다뤄야 할 사안이 적지 않다. 장기적으론 주치의 제도 도입을 통해 주치의에 의한 비대면 진료를 운영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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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검은 공무원 아니다”는 박영수의 ‘공무원 농단’[횡설수설/서정보]

    “특별검사는 공무원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사건’을 이끈 박영수 전 특검의 변호인들은 18일 박 전 특검의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의 첫 재판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 전 특검은 2020년 수산업자를 사칭한 김모 씨에게 포르셰 렌터카와 수산물 선물 등 336만 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에 청탁금지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검은 변호사 중에서 임명되지만 특검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특검법)은 특검의 보수와 대우는 고등검사장에 준한다고 했다. 또 특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검보와 특별수사관도 각각 검사장, 3∼5급 상당의 별정직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보수와 대우를 받도록 돼 있다. 2022년 특검법이 시행되기 전 특검을 요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제정된 개별 특검법에서도 같은 규정을 뒀다. 특검은 공무원도 보통 공무원이 아니라 고위직 공무원이다. ▷박 전 특검 측은 지난해 기소 당시 특검이 ‘공무수행 사인(私人)’이란 주장을 한 적도 있다. 법률에 따라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민간인, 예를 들어 오지에 근무하는 별정직 우체국장이나 운행 중인 선박의 선장 같은 수준의 지위에 그친다는 것이다. 청탁금지법에선 공무원이 아닌데도 공적 역할이 막중하다는 이유로 사립학교 교원과 언론인이 처벌 대상이다. 특검이 설혹 공무원이 아니라 공무원에 준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특검까지 지낸 사람이 청탁금지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어떻게 공무원이 아니라는 항변을 할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박 전 특검은 청탁금지법 말고도 대장동 사건과 관련해 여러 의혹에 연루돼 있다. 대장동 일당이 언급한 ‘50억 클럽’에 이름이 등장한다. 박 전 특검의 딸은 대장동 아파트를 분양받아 수억 원대의 차익을 남겼고, 대여금 명목으로 11억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 전 특검 인척이 운영하는 분양대행업체와 김만배의 수상한 거래도 있다. ▷우리나라의 특검은 미국의 특검을 본떠 만들어졌다. 미국에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 특검의 워터게이트 사건 수사를 계기로 1978년 정부윤리법(Ethic in Government Act)이 제정됐다. 특검은 최고위직 공무원의 윤리 준수를 관철하기 위한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윤리적일 것이 요구된다. 특검 시절의 박 씨는 공무원이 아니었던 게 아니라 공무 의식이 없는 공무원이었을 뿐이다. 이제 보니 특검으로서의 공무 의식은 고사하고 공무 수행 사인의 윤리 의식에도 미치지 못한 듯하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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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돈 좀 그만 써”… ‘거지방’에 몰리는 젊은이들

    카카오톡 오픈채팅의 재미있는 대화 내용을 캡처한 ‘짤’ 중에서 최근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아껴 쓰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거지방’의 짤이다. 대표적인 것이 스타벅스의 5300원짜리 자몽허니블랙티를 사서 마셨다는 글. 이에 대해 ‘스타벅스, 배가 불렀군요’ ‘물을 마시세요. ○○○ 1100원’ ‘○○ 미네랄워터는 600원입니다’ 등 꾸중의 답글이 속출했다. 마지막 결정타는 ‘물을 왜 돈 주고 사 먹죠? 그냥 회사 가서 마시세요’라는 글이었다. 동의한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거지방’은 극도의 절약으로 거지처럼 산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다. 현재 오픈채팅에서 수백 개가 운영되고 있다. 방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주로 참여자끼리 소비 지출 내역을 공개하고 이를 평가한다. 일부 방에선 아예 한 달 목표 생활비를 정하고, 실제 지출액을 공유한 뒤 가장 많이 쓴 사람에게 벌칙을 내리기도 한다. 또 새로 멤버가 들어오면 “돈 좀 그만 써 ○○○야,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등의 자극적인 글을 자동으로 올리는 방도 있다. ▷주로 불필요하거나 과다한 지출을 꾸짖거나 뜯어말리는 채찍성 글이 주를 이루지만 아낀 내역을 보여주며 칭찬을 유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차 얻어 타서 택시비 아낌 +6000’ ‘학식 6900원인데 아빠 카드 씀’ 등이다. 또 돈 주고 사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절약 방법을 공유한다. 휴대전화 그립톡을 사고 싶다고 하면 종이로 대체 거치대 만드는 유튜브 링크를 보내주는 식이다. 카드나 통신사 포인트 활용법,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이벤트 등도 단골로 올라온다. ▷기성세대는 ‘내 돈 쓰는데 남들에게 알리는 것도 모자라 꾸중까지 듣는 건 무슨 경우냐’라고 의아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거지방’은 경기침체와 고물가로 지갑이 얇디얇아진 젊은이들에게 놀이방이자 쉼터 역할을 한다. 지난해 한창 재테크 열풍이 불 때는 ‘있는 돈을 최대한 아껴 나중에 투자할 목돈을 만들자’는 ‘짠테크’가 유행했지만 지금은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아낀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경기침체로 인한 경기고통지수의 경우 15∼29세 연령층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가장 높다는 통계를 보면 ‘거지방’이 뜬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은 ‘거지방’을 통해 “나만 주머니 사정이 어려운 건 아니지”라는 공감대를 갖는다. 젊은이들은 혼자 아끼려고 하면 힘들지만 같이 하면 서로 의지가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토로한다. 여기에 ‘나도 잘하고 있다’는 안도, ‘앞으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 대화가 오가면서 나오는 깨알 재미 등을 함께 찾는 것이다. 소비를 과시하던 ‘플렉스’와 정반대인 ‘거지방’의 인기는 요즘 경제 상황을 보면 꽤 오래갈 것 같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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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 직지 50년만의 외출

    ‘번뇌가 곧 깨달음이요/무심(無心)하면 곧 경계가 없다/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욕심과 분노는 아지랑이나 그림자 같다.’ 12일부터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직지(直指)’를 공개하면서 펼쳐놓은 페이지에 담긴 내용이다. 직지의 편찬자인 백운 스님이 전하고 싶었던 선불교의 정수, 즉 선과 악이나 삶과 죽음 등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50년 만의 외출, 글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직지는 고려 말인 1377년 간행됐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성경이 1455년에 처음 인쇄된 것에 비하면 78년 앞선다. 무신정권 시대인 1234년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만들어졌다는 기록도 있으니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섰을 수도 있다. 조선에서도 태종이 금속활자를 만드는 주자소를 세웠고, 세종 때인 1434년에는 활자의 백미로 꼽히는 갑인자를 20만 개나 만들 정도였다. ▷고려∼조선이 화려한 인쇄 기술을 가졌지만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내진 못했다는 일부 시각이 있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를 높이 평가하는 건 중세의 질곡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 근대로 가는 지식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란 얘기다. 1997년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는 독일 베를린의 주요 7개국(G7) 회담에서 “금속활자는 한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사용했지만,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의 금속활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지리적 역사적 여건이 달랐던 만큼 이런 식의 비교 평가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동국대 황태연 명예교수는 ‘책의 나라, 조선의 출판혁명’이란 책에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출판된 금속활자 책이 총 1만4117종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 책들의 90%가 농업, 양잠, 어업, 의학 등 실용서였다고 한다. 조선 후기엔 왕실부터 서당까지 매년 400만 권의 책이 필요했는데 조선의 뛰어난 출판 역량이 감당했다는 것이 황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인쇄 문화가 ‘배워야 산다’는 ‘집단 DNA’를 심어 현재의 산업화, 민주화, K문화의 모태가 됐다는 것이다. ▷일부 해외 학자들은 한반도의 인쇄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를 내놓고 있다. 아직 공인된 내용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우리 민족의 인쇄 문화는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될 수준이라는 점이다. 정작 부끄러운 건 지금이다. 성인의 절반은 책을 1년에 한 권도 읽지 않는다. 2021년 1인당 평균 독서량은 4.5권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이다. 5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직지 소식을 접하며 책 안 읽는 대한민국의 세태를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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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美 기업들 “근무태도 좋은 시니어가 젊은이보다 낫다”

    ‘70대 남성이 1순위 후보.’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20여 년간 물류센터를 운영해온 사장은 그동안 고교생과 대학생을 쓰던 파트타임 자리에 70대 노인을 쓰기로 했다. 젊은이보다 일 배우는 속도가 느려도 근무시간을 잘 지키고 성실하다는 이유였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에 나온 이 사례처럼 요즘 미국에선 50대 중반 이상의 시니어 직원을 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경제활동을 하는 65∼74세 연령군은 코로나 이전에 비해 각 주별로 5∼10%씩 증가했다. 다른 연령군이 감소하거나 정체인 것과 비교된다. 젊은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패스트푸드점은 물론 법률, 회계 등 전문직까지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고용주들의 시니어 고용에 대한 인식 변화는 일자리에 대한 젊은층의 가치관 변화와 맞물려 있다는 해석이다. ▷대표적인 가치관 변화가 ‘조용한 사직’ 현상이다. 코로나를 거치는 동안 “돈 받은 만큼만 일한다” “내 인생은 일의 결과물로 정의되지 않는다” 등의 가치관이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됐다. 이는 지나치게 일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종종 일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케 하는 부작용도 있다는 것이다. 지각, 조기퇴근이 잦고 몇 달 못 가 힘들다며 그만두거나 단돈 몇 달러에도 이직하는 경우가 생기면 고용주 입장에선 인력 운용이 쉽지 않다. ▷미국 고용주들이 시니어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바로 근무 태도 때문이다. 출근시간 전 회사에 나오고 맡은 일을 끝내야 마음 편히 퇴근하는 시니어 세대의 직업윤리를 반긴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냐는 미국 여론조사에서 65세 이상은 75%가 그렇다고 답했으나 18∼29세는 61%에 그쳤다. 연륜에서 묻어나는 노련함과 책임감으로 더 친절하고 끈기 있게 고객을 대응한다고 한다. 시니어를 고용함으로써 ‘나이 차별(ageism)’을 하지 않는다는 좋은 이미지도 만들 수 있다. ▷일에 대한 가치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어느 세대의 것이 더 낫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연령만으로 일할 수 있는지를 따지는 시대는 지났다. 각 세대의 장점을 어떻게 취할지는 고용주의 몫이다. 국내에서도 베이비붐 세대 은퇴가 시작되면서 고학력에 일할 체력과 의욕 등 3박자를 갖춘 ‘파워 시니어’가 등장하고 있다. 시니어 일자리는 정년 이후 부족한 수입을 보충하는 것이면서 ‘사회가 여전히 나를 필요로 한다’는 자존감을 높이는 수단이다. 시니어들의 경험과 연륜을 일자리로 풀어낼 수 있다면 연금과 복지 재원 고갈 같은 고령화의 그늘을 없애기도 쉬워진다. 일에 대한 시니어들의 의욕을 잘 활용하면 사회의 생산성을 올리는 길이 될 수 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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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대 정시 ‘N수생’ 천하… 국가경쟁력 갉아먹는 인재 쏠림[횡설수설/서정보]

    46세 22학번인 지방대 의대생. 이 늦깎이 학생의 사연이 얼마 전 유튜브 등에서 화제가 됐다. 서울 명문대 97학번인 그는 17년간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3수 끝에 의대에 합격했다. 마흔 넘어 얻은 늦둥이 딸을 위해 ‘정년 없는 전문직’이 필요하다고 여겨 의대를 선택했다고 했다. 최근 의대엔 번듯한 직장을 포기한 ‘유턴족’을 비롯해 재수 이상의 N수생이 늘어나 고령화되고 있다. ▷교육정책연구단체인 ‘교육랩공공장’ 조사에 따르면 최근 4년간 전국 의대 정시 합격자 4명 중 3명은 N수생이었다. 전체 5000여 명 중 N수생이 77.5%나 됐다. 지난해 서울 소재 대학의 N수생 비율이 34.5%인 것과 비교하면 2배 넘게 차이 난다. 유독 의대에 N수생이 쏠리는 건 늦깎이 학생의 기대처럼 ‘정년 없고 연봉이 높다’는 것 때문이다. N수로 몇 년 늦게 출발해도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다. ▷N수생은 주로 어디서 올까. 입시업계에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의 이공계와 KAIST 등 4개 과학기술원 학생들이 N수생의 상당수를 차지한다고 본다. 수시를 위해 내신을 신경 써야 하는 고3과 달리 이들은 정시 과목에만 집중할 수 있어 수능 고득점에 유리하다. 여기에 지방 의대에서 서울 지역 의대로 갈아타려는 수요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이 옮기고 간 빈자리로 인해 이공계 학과나 지방 의대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거나 다시 편입생을 뽑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한다. ▷의대 N수생에 밀린 고3 재학생들은 원치 않은 이공계로 가거나 대학 간판을 따기 위해 문과 침공을 감행한다. 이들에게 밀린 문과 지망생들은 재수생이 되기 십상이다. 꼬리에 꼬리를 문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과학 인재를 육성하기 위한 영재고와 과학고의 우수 재학생들은 그동안 받았던 지원금까지 반납하면서 의대로 진로를 바꾼다. ‘공부 잘하면 의대’라는 사회적 인식 속에서 ‘의대를 정점으로 한 학력 줄 세우기’의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의대 지망생은 화수분처럼 늘지만 소아과 흉부외과 등 필수 진료 의사는 태부족이다. 한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사는 모르는 것도 죄가 되는 직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만큼 사명감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단지 공부 잘한다는 이유로, ‘정년 없고 높은 연봉의 전문직’ 지위를 얻겠다는 목표만으로 너도나도 의대 문을 두드리는 현실이 씁쓸하다. 전국 대학 의대 정원은 약 3000명. 수능 응시생 중에서 상위 1% 내의 인재들이 간다. 이런 최고급 두뇌들을 병원 말고도 반도체, 인공지능, 로봇, 우주항공 등 첨단 분야 연구실에서도 골고루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게 개인도, 국가도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길이기에….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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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팝의 ‘한국 침공’이 성공하는 길[오늘과 내일/서정보]

    하이브가 2021년 미국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이타카홀딩스 지분 100%를 인수했을 때 10억50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조1860억 원)의 인수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 세계적 팝가수들이 속해 있고 미국 최대 컨트리뮤직 레이블인 빅머신을 보유한 회사지만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얼마 전 만난 하이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자릿세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BTS가 ‘다이너마이트’로 한국 가수 최초로 미국 빌보드 핫100 1위를 차지한 뒤였는데도 음반 판매 등 각종 수수료를 이타카 소속 가수들보다 2, 3배씩 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외국, 특히 비영어권에서 좋은 가수와 노래를 가져간다고 해서 미국 음악시장의 플레이어들이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자릿세를 내서라도 끼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JYP가 ‘원더걸스’를 이끌고 미국 진출을 줄기차게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성공한 뒤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을 떠올리면 이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었다. 최근 SM엔터테인먼트(에스엠) 경영권 분쟁은 K팝의 지속가능성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이수만’으로 대표되는 1세대 K팝 프로듀서 겸 오너의 퇴장은 그들이 만든 성채가 성공적이었으나 결코 견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칼군무와 강력한 팬덤의 아이돌 그룹을 바탕으로 한 K팝 산업이 국내외에서 계속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SM YG JYP가 아시아 시장을 일궜고 하이브의 BTS가 미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했으나 더 전진할 힘이 있느냐는 것이다. 15일 관훈포럼에 참석한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K팝의 성장세가 꺾이고 있다”며 위기론에 불을 지핀 것도 같은 맥락이다. K팝 업계의 얘기를 들어보면 하이브 SM JYP YG 등 4대 기획사는 산업적으로 자본 축적의 단계로 접어들면서 ‘아이돌의 성공 방정식’을 갖는 수준까지 올라섰다고 한다. 개성 넘치는 멤버들을 모아 그룹의 분위기를 결정할 세계관을 부여하고, 유명 국내외 작곡가들이 세계관과 어울리는 노래를 만들게 한 뒤 다양한 홍보를 통해 데뷔시키는 것에 큰 리스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YG가 7년 만에 선보이는 걸그룹 ‘베이비몬스터’의 맛보기 영상은 데뷔 전인데도 이미 2억 뷰를 넘었다. K팝의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음악 시장은 유니버설 소니 워너 등 3개사가 70% 가까이 점유하고 있고 한국은 2% 남짓하다. 노래, 춤, 스타일 등 K팝의 콘텐츠 생산력이 남부럽지 않을 정도가 됐다면 이를 잘 담고 재가공해서 유통할 글로벌 기업과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 같은 ‘비빌 언덕’이 없으면 반짝 인기로 끝나거나 세계 메이저 회사의 밑으로 들어가 ‘서브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비빌 언덕’은 K팝 외에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메이저 회사들과 대등한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K팝이 마음껏 뛰어놀 마당(인프라)을 마련해줘야 한다. 영국 가수는 미국에서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뒤집고 비틀스가 미국에서 성공리에 첫 공연을 마친 때가 1964년. 이때 미국 언론들은 ‘영국 침공(British Invasion)’이란 표현을 썼다. 이후 롤링스톤스, 엘턴 존, 딥퍼플, 레드제플린, 퀸 등 수많은 밴드들이 영국의 침공에 동참했다. K팝은 아시아를 뛰어넘어 세계로 가는 ‘한국 침공(Korean Invasion)’의 첫발을 뗀 상태. K팝의 K가 프리미엄 라벨이 될지, 흘러간 추억의 이니셜이 될지는 이제부터 하이브 카카오 등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의 글로벌화에 달렸다. 방 의장의 말대로 K팝의 삼성 현대가 필요하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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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횡설수설/서정보]‘철밥통보단 공정한 보상’ 31년만의 최저 9급 공무원 경쟁률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9급 공무원 봉급에 대한 논란이 종종 일어난다. 올해 초 한 9급 초임 공무원이 실수령액 170만 원대인 월급 명세서를 올리면서 올해 월 201만 원의 최저임금에 못 미친다고 자조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팩트 체크의 결론은 수당 상여 명절휴가비 등을 모두 합산하면 월평균으로는 236만 원이어서 최저임금보다는 높다는 것이었다. 최저임금이 5년여간 크게 오른 것에 비해 공무원 월급은 올해 1.7% 등 찔끔 올랐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표출된 것이다. ▷올해 국가직 9급 공무원 경쟁률은 22.8 대 1. 1992년 이후 31년 만에 최저치다. 가장 정점에 달했던 때가 2011년 93.3 대 1이었다. 올해 5300여 명을 뽑는 데 12만 명이 지원했으니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인기도가 떨어지는 추세는 분명하다. 가장 선호하는 직업 1위가 2006년 이후 계속 공무원이었으나 2021년엔 대기업에 자리를 내준 것과 같은 흐름이다. 취업난에 시달리던 명문대생이 9급 공무원에 합격한 것이 화제였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법하다. ▷하위직이어도 공무원의 가장 큰 매력은 안정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신분의 안정성이 법으로 보장돼 명예퇴직 등의 위험이 없다. 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자신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더 중시한다. 이것을 월급으로 수치화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MZ세대가 선호하는 ‘괜찮은 일자리’ 기준에서 정년 보장 같은 안정성은 공정한 보상 등에 밀려 5위에 그쳤다. 여기에다 공무원연금이 2016년 ‘더 내고 덜 받는’ 식으로 바뀐 것도 선호도를 감소시켰다. ▷관공서의 조직 문화와 일하는 방식도 공무원에 대한 선호를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워라밸과 수평적 관계가 몸에 밴 젊은 공무원들은 과도한 의전, 수직적 의사결정, 불필요한 야근 등을 불합리한 문화 1∼3위로 꼽았다. 쓸모없는 보고서 작성, 맹목적으로 따라야 하는 윗선의 지시 등을 직접 겪은 젊은 공무원들은 공직에 대한 흥미를 잃고 이직을 고민한다. 5년 차 이하 공무원의 조기 퇴직은 2021년 1만 명을 넘어 2017년에 비해 2배 이상 늘었다. ▷취업 시 공무원 쏠림 현상이 줄어든 건 긍정적이다. 수십만 명의 인재가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몇 년씩 공무원 시험을 준비함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연간 17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곧 신설될 ‘우주항공청’에는 연봉 10억 원짜리 공무원이 나오도록 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을 보면서 젊은 공무원들은 혁신 사례가 될지 지켜볼 것 같다. 일자리에 대한 시각이 바뀐 젊은 세대들을 끌어들이려면 공직사회의 성과주의 도입과 파격적 승진, 조직문화의 개선 등 사기 진작책이 필요하다. 공직에 보람을 느끼는 공무원이 나와야 대국민 서비스가 좋아진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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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팝 ‘1인 체제’ 극복 못하면 J팝 몰락 따라간다[수요논점]

    《최근 SM엔터테인먼트(에스엠) 사태에 대해 연예계에선 ‘드라마로 만들 딱 좋은 아이템’이란 얘기가 나온다. 화려한 연예계의 스타 기업에서 최대 주주의 오너 리스크가 불거지자 최대 주주의 심복이었던 경영진이 외부 세력과 결탁해 최대 주주를 몰아내려고 시도했고, 위기에 빠진 최대 주주는 업계의 라이벌 회사에 지분을 팔아 최후의 반격을 시도하고 결국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까지 하게 된다는 스토리. 배신과 음모, 반격과 반전 등 전형적인 장르 드라마의 구성이라는 것이다. 에스엠 사태가 드라마틱한 것은 그만큼 K팝 기업의 누적된 문제가 한꺼번에 터졌음을 의미한다.》● 에스엠과 이수만 ‘핑크블러드’는 SM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단어다. 로고색이 핑크인 것에 빗대 에스엠의 독특한 노래풍과 가사, 문화를 지칭한다. 열성 팬들은 “내 몸엔 분홍 피가 흐른다”고 할 정도다. 1995년 설립된 에스엠은 ‘이수만에 의한, 이수만의’ 회사였다. 이수만 전 총괄 프로듀서는 모든 그룹마다 이름을 직접 지었고, 스토리를 입힐 세계관을 부여했으며 발표 곡의 콘셉트를 정했다. 해외 작곡가들을 영입해 곡을 만들게 해서 K팝의 다양성을 배가했다. 중국 일본 동남아 등 해외 진출에도 앞장섰다. 이 전 총괄의 행보는 한국 가요시장을 아이돌그룹 중심으로 재편시켰고, 이후 모든 K팝의 원형이 됐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이 “하이브는 (이수만) 선배님께서 개척하고 닦아 오신 길에 레드카펫을 깔아주셔서 꽃길만 걸었다”고 말한 것은 인사치레만은 아니다. 그러나 에스엠을 ‘이수만을 위한’ 회사로만 여겼던 것이 이번 사태를 불렀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 전 총괄 개인 지분 100%인 라이크기획에 매년 100억 원 이상을 프로듀싱 명목으로 지급하게 했다. 또 2092년까지 70년간 기존 음반 음원 매출액의 6%를 지급하는 계약도 맺었다. 이 문제는 지분 1%를 가진 행동주의 펀드 ‘얼라인 파트너스 자산운용’에 의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얼라인은 이를 무기로 이 전 총괄의 처조카 이성수 대표, 매니저 출신인 탁영준 대표를 압박했고, 두 대표는 이달 초 카카오에 9.05%의 지분을 주는 신주 발행 등과 함께 이 전 총괄을 배제한 ‘SM 3.0’ 계획을 발표했다. 이 전 총괄은 개인 지분 18.46% 가운데 14.8%를 하이브에 4228억 원에 매각하는 ‘깜짝 카드’로 맞대응했고, 신주 발행이 부당하다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가처분 신청이 인용돼 신주 발행이 중단되면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가 사실상 확정된다. 기각되면 하이브와 카카오는 치열한 지분 경쟁을 펼치게 되고 결과는 이달 31일 에스엠 주주총회에서 나온다.● 하이브냐, 카카오냐…엇갈리는 우려와 긍정의 시선들 하이브는 BTS 성공을 바탕으로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 세븐틴, 엔하이픈, 르세라핌, 뉴진스 등을 보유해 K팝 1위 업체가 됐다. 하이브가 에스엠 인수에 성공하면 뜻밖의 횡재를 하게 되는 셈이다. 이 전 총괄이 2020년부터 개인 지분을 매각하겠다며 CJ, 카카오와 접촉할 때 인수 대금이 9000억 원까지 제시됐는데, 하이브는 그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인수했다. 하이브 인수에 대해 에스엠 내부는 부정적이다. 이미 임직원 85%가 인수 반대를 표명했다. 에스엠이 K팝의 종갓집이란 자부심이 있는데 갑자기 신흥 부자가 안방을 차지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에스엠의 ‘핑크블러드’가 유지되기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연예기획사의 한 임원은 “이수만뿐 아니라 이성수 대표 등 현 경영진이 선곡과 제작에 깊이 관여했는데 이들이 빠지면 아무래도 음악적 색깔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이브는 에스엠의 내부 반발을 막기 위해 ‘창작물의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이브가 에스엠을 인수하면 국내 시장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절대 강자가 등장한다며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반면 시야를 글로벌 시장으로 돌리면 하이브-에스엠 연합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반론도 적지 않다. 하이브는 BTS를 바탕으로 미국 유럽 등에 성공적으로 진출했고 저스틴 비버, 아리아나 그란데 등 세계적 팝 가수가 소속된 이타카홀딩스를 인수해 외연을 넓혔다. 중국 일본 동남아 등에서 강세였던 에스엠이 합류하면 전 세계를 아우르는 팬덤 망을 갖게 된다. 하이브가 에스엠 인수 후 유니버설, 소니, 워너뮤직 등 세계 3대 메이저 업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선언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카카오는 국내 1위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멜론과 20여 개의 매니지먼트사, 영화 드라마 제작사를 보유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동안 수많은 인수합병을 통해 이병헌 현빈 등 수십 명의 톱스타와 가수 아이유, 걸그룹 ‘아이브’ 등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의 웹툰·웹소설 시장에 진출해 있다. 카카오의 유일한 약점은 K팝인데 에스엠 인수로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게 된다. 에스엠 측이 카카오를 선호하는 것도 K팝 관련 주도권을 잡을 수 있어 에스엠의 색깔을 유지하기가 용이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카카오가 지나치게 돈의 논리로 콘텐츠 업계를 좌지우지한다는 비판도 있다. 카카오가 이번 사태 이전부터 에스엠 인수에 뛰어든 것은 사실 팬 플랫폼 때문이다. 팬 플랫폼은 팬들과의 소통 공간이자 굿즈 등 2차 지식재산권(IP)을 판매하는 통로로 매출과 수익이 해마다 급증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진화하고 있다. 현재 하이브가 운영하는 팬 플랫폼 ‘위버스’에 네이버는 44.5%의 지분을 갖고 있다. 블랙핑크 등 YG 소속까지 속한 위버스의 월간 이용자는 2022년 3분기(7∼9월) 기준 840만 명에 이르고 누적 매출은 2212억 원에 달했다. 카카오는 이에 대한 대항마로 에스엠 자회사 디어유가 운영하는 팬 플랫폼 ‘버블’을 원했다. 에스엠과 JYP 소속 가수들이 있는 버블은 유료 구독자 120만 명에 지난해 매출이 490억 원으로 위버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네이버를 견제할 수 있는 충분한 무기가 된다. 카카오 입장에선 하이브의 에스엠 인수로 위버스와 버블이 합쳐지면 네이버와의 경쟁에서 뒤질 수 있다. ● K팝의 전환점하이브, 카카오 누가 인수하든 ‘이수만의 SM’은 사라진다. 현 에스엠 경영진은 물론이고 하이브 박지원 최고경영자(CEO)도 “이 전 총괄의 경영 참여나 프로듀싱 참여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번 사태가 K팝 시장의 큰 변화를 불러올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에스엠 등 국내 K팝 기업들은 1명의 뛰어난 프로듀서가 모든 과정을 도맡아 키워냈다. 하지만 기업의 시가총액이 조 단위를 넘어가면서 몸집은 커졌는데 경영을 주먹구구식으로 하다 보니 1인 지배 방식의 폐해가 드러난 것이다. 에스엠의 경우 이 전 총괄을 ‘선생님’으로 부르며 거스를 수 없는 문화가 있어 라이크기획 같은 일들이 벌어져도 막을 수가 없었다. 일본 아이돌그룹을 탄생시킨 기획사 ‘자니스’도 창립자의 오랜 1인 체제 속에서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다가 자니가 세상을 뜨자 휘청이고 있는 실정이다. 경영의 투명화와 함께 프로듀싱, 즉 제작의 다양화도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JYP는 2017년부터 1인 프로듀싱 체제에서 탈피해 독자적으로 음악과 콘텐츠를 만드는 5개의 ‘멀티 레이블’ 체제를 도입했다. 이후 창립자인 박진영 이사에 대한 의존도가 줄었다는 평가와 함께 5년 만에 매출이 230%, 시총이 3배 늘었다. 하이브도 멀티 레이블 체제를 운영하고, 에스엠도 ‘SM 3.0’에서 같은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다만 형식적으로만 분리해 실질적으론 1인 체제가 되지 않도록 독립성을 보장해 줘야 한다. 무엇보다 글로벌 진출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K팝 음반 수출 규모는 2012년 2400만 달러에서 2022년 2억3000만 달러로 10배 가까이로 늘어났다. 하지만 현재 세계 시장에서 K팝의 매출 비율은 2%에 불과하다. 3대 메이저의 매출 비율이 3분의 2를 넘는 것과 비교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선진화된 경영 시스템과 제작의 다양화를 통해 기존 팬덤을 아우르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을 추구해야 K팝이 J팝처럼 반짝하다 시들지 않을 수 있다.서정보 논설위원 suhchoi@donga.com}

    • 2023-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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