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 “호수는 옛날 어느 부자가 살던 곳이라 했다. 하루는 탁발승이 쌀을 구걸하러 왔는데 부자가 똥을 퍼 주었더니 살던 곳이 갑자기 푹 꺼져서 호수가 되었고, 쌓아 둔 곡식은 모두 자그마한 조개로 변했다. 흉년이 들면 조개가 많이 나고, 풍년이 들면 적게 났다. 조개 맛이 달고 향긋해 요깃거리가 되므로 이 지역 사람들은 적곡합(積穀蛤)이라 한다. 봄·여름이면 사방 먼 데서부터 남자는 등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서 조개를 주우려고 사람들이 길에 줄지어 있다. 호수 밑바닥에는 아직도 기와 조각과 그릇 따위가 있어서 자맥질하는 이들이 가끔 줍는다.” 》 이 얘기는 강원 강릉시 경포호에 얽힌 전설로 조선 후기 이중환(1690∼1752)이 쓴 택리지(擇里志)에 나온다. 인색한 부자가 스님에게 똥을 시주했다가 벌을 받아 집이 연못이 됐다는 ‘장자못’ 전설은 전국 곳곳의 호수에도 전해 내려오지만 이 전설은 조개와 관련된 점이 특별하다. 1751년 저술된 최초의 인문지리서 택리지의 문학적 성격에 주목한 논문이 처음 나왔다. 16일 서울 성균관대에서 경기도 실학박물관과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심포지엄 ‘사람과 땅, 택리지가 그리는 인문지리’에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각 지역의 전설과 설화를 적극 기록한 택리지는 구비문학과 스토리텔링의 보고(寶庫)”라고 말했다. 안 교수의 발표문 ‘택리지의 구전 지식 반영과 지역전설 서술’에 따르면 택리지에 줄거리가 조리 있고 분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전설은 약 40개다. 개중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얘기도 적지 않다. “강경에 채운산 한 개 봉우리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아 있다. 봉우리 위에는 정기를 길러주는 영천(靈泉)이 있어서 백제 때 의자왕이 연회를 베풀며 놀던 곳이라 전해 온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에 관한 서술이다. 백마강 주변 명승들에 의자왕이 연회를 열었다고 전해지는 곳이 꽤 많지만 지금 채운산에는 관련 전설이 없다. 그는 “이 지역에는 우물이 없어 땅에 독을 묻어 빗물을 침전시켰다가 마시는데, 물맛이 좋고 병이 낫는다”는 얘기도 실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이 강경에 상당 기간 머물렀던 적이 있다”며 “택리지에는 이중환이 현지에서 직접 채록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택리지에 은둔자에 관한 전설이 많다는 것도 주목된다.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말기 학자 최치원과 관련된 얘기가 여섯 군데나 나온다. 택리지는 경남 남해군을 설명하며 “섬 안에는 금산(錦山)이 있고, 그 골짜기는 바로 최고운(孤雲은 최치원의 자)이 노닐던 곳이며, 고운이 쓴 큰 글씨가 아직도 석벽에 남아 있다”고 적었다. 안 교수는 “최치원은 정치·경제적 지위를 상실한 사대부가 서울을 벗어나 살 만한 곳(士大夫可居處)을 찾을 때 참고한 가장 오래되고 전형적인 모델”이라며 “남인 간관(諫官)으로 투옥을 거듭하다 평생 금고(禁錮·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벌) 된 이중환 자신의 처지도 택리지 서술에 투영됐다”고 말했다. 최근 산책로로 사랑받는 서울 성곽에 얽힌 얘기도 흥미롭다. 택리지에는 “외성을 쌓으려고 했으나 둘레를 미처 못 정했다. 어느 밤 큰눈이 내렸는데 바깥쪽은 눈이 쌓이고 안쪽은 녹았다. 태조가 기이하게 여겨 눈을 따라 성터를 정하도록 명했다”고 나온다. 안 교수는 “이중환은 신이성(神異性)과 허구성을 경계하는 사대부 의식, 유가적 합리성에서 벗어나 사라질 뻔한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채록한 구비문학의 기여자”라고 강조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정부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에 대학교수 등 역사학자들의 집필 불참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역사학자 500여 명을 회원으로 둔 한국근현대사학회도 15일 국정 교과서 집필 불참을 결의했다. 하지만 국정 교과서에 대한 찬반을 떠나 역사학계가 학술 논쟁을 적극적으로 벌여 근현대사에서 합의된 영역을 넓혀가기보다 의견이 다른 측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도 나온다. 또 정부가 ‘좌편향’이라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한 현행 교과서를 검정한 것 역시 현 정부라는 점에서 부실 검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제 할 일을 못했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 자기 세계에 갇힌 역사학계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편향 논란이 번진 데에는 진보-보수 역사학자들 사이에 제대로 된 논쟁이나 대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재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계는 여러 시대를 종합적으로 다루는 대규모 학회를 비롯해 지역 학회까지 수십 개가 있다. 이 중 한국역사연구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등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전후해 설립된 학회 및 연구단체는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반면에 뚜렷한 보수 성향의 역사학회는 2011년 만들어진 한국현대사학회 하나뿐이다. ‘우파 역사학회’를 표방한 한국현대사학회는 기존 역사학계가 민족·민중사관에 갇혀 있어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강조하는 ‘건국사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향이 다른 양측 역사학자들이 만나 한자리에서 토론한 것은 2011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교육부가 역사 교육 과정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삽입하자 학회 단위는 아니지만 진보 측의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와 한국현대사학회가 공동 토론회를 개최했다. ‘보수와 진보가 보는 민주주의-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이론, 헌법, 역사’를 주제로 4·19혁명기념도서관 강당에서 양측의 학자들이 발제를 했는데 300명이 넘는 청중이 몰리는 등 큰 관심이 쏠렸다. 한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인 박걸순 충북대 교수는 “대한민국을 긍정적으로 보자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며 “그러나 그분들(우파 역사학자) 주장은 사실에서 너무 벗어나 있어 함께 논쟁할 학술적 가치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현대사학회장을 지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2011년 같은 토론회가 많아야 하는데 기존 역사학계는 자신들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연구자들을 학술대회 등에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현대사학회 역시 학술대회에 진보 진영 학자를 초청한 적이 없다. 본격적인 논쟁이 활성화되기에는 우파적 입장을 가진 연구진의 수가 적고 연구 성과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럴수록 자주 만나 토론해 근현대사에서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진보적 역사학자 사이에서도 정부가 ‘좌편향’이라고 지적한 한국사 교과서의 일부 대목에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던 1980년대 인식이 관성적으로 반영됐다는 의견이 있다. 한 연구자는 광복 이후 미국을 점령군, 소련을 해방군이라는 뉘앙스로 대비해 보여주는 교과서를 사례로 들며 “국정화는 반대하지만 최근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시야를 세계사적 맥락으로 넓힌 서술이 교과서에 보완돼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부실 검정’ 교육부-국사편찬위 ▼최근 벌어지고 있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결국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부실 검정이다. 교육부와 국편이 현재 고교에서 쓰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에 대해 2013년 검정을 실시하면서 오류와 편향을 바로잡지 못해 문제가 촉발됐기 때문이다. 교육부는 지난해 1월 약 1년간의 검정 과정을 거쳐 한국사 교과서 8종의 수정 및 보완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교육부는 “수정 보완한 사항은 모두 2250건이며 맞춤법 등의 단순한 오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체성, 6·25전쟁, 일제강점기 미화, 북한 문제 등의 서술도 수정했다”고 밝혔다. 이 검정 결과에 대해 교육부는 “우리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인식 형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자화자찬했다. 이후 1월 10일부터 발행사별로 인쇄에 들어갔고 학생들에게 배포됐다. 하지만 약 1년 9개월이 지난 지금 정부와 새누리당, 그리고 당시 검정을 진행한 교육부조차 이때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이 “지나치게 좌편향이며 주체사상을 여과 없이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자가당착적 비판을 하고 있다. 스스로 “올바른 역사관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화자찬했던 내용이 지금에 와서는 좌편향 교과서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사실 교육부와 국편의 부실 검정 문제는 2013년부터 제기됐다. 국편 검정심의위원 구성이 다양하지 못하고, 과거보다 위원 수도 줄어 부실 검정이 우려된다는 것. 또 전문 분야 전공자는 물론이고 검정 시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유기홍 의원실이 2013년 11월 교육부와 국편에서 제출받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심의위원은 위원장 1명, 연구위원 8명, 검정위원 6명으로 총 15명이었다. 이 중 과거에 고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 경험이 있던 사람은 1명뿐이었다. 위원 수도 문제다. 2012년 진행된 중학교 역사 교과서 검정심의 위원이 총 32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민감하고 예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위원은 중학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객관적 사실 오류와 이념편향 서술을 제대로 잡아낼 리 없다. 학부모와 시민단체로부터 외부 인사를 추천받아 검정심의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는 제도도 있었지만 국편은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이런 부실 검정 우려가 꾸준히 불거지던 와중에도 2013년 9월 서남수 당시 교육부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국사편찬위원회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며 “소홀한 부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그 문제는 그때 가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2년 전 교육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검정체계 전반을 전면적으로 개선했으면 지금의 ‘국정화 폭풍’은 막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온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 정부가 2017년부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방침을 확정했지만, 이를 둘러싼 현장의 찬반 격론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이들은 정부가 불필요한 이념몰이를 통해 시대에 역행하는 반민주적 결정을 내렸다고 비판한다. 반면 국정화 찬성론자들은 검정 역사교과서의 오류를 바로잡고 국가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려면 국정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역사학을 전공한 진보와 보수 진영 두 학자로부터 현재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들어봤다.》 “국정화는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정치의 도구, 권력의 시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최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역사·역사교육 연구자 성명’을 이끈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55·한국역사연구회 회장·사진)는 13일 이렇게 말했다. 정 교수는 서울대 자신의 연구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역사교육에 관한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 기준에서 봐도 국정 교과서는 반인권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엔 보고서는 국가가 단일한 교과서 사용을 강제하면 교육받을 권리, 문화적 권리, 알 권리와 학문의 자유가 침해된다고 명기하고 있다”며 “국정화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해석과 비판적 사고를 가르쳐야 할 역사교육의 본령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 “현행 검정 교과서도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최근의 경제적 문화적 성취에 대해 충분히 자긍심을 갖도록 서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현행 검정 교과서가 이념적으로 좌편향돼 있다는 정부 여당의 주장에 대해 “맥락을 제거한 채 일부 표현만 문제 삼는 것은 억지”라며 “더구나 현 정권이 검정한 교과서들”이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학자들이 친일을 친일로, 독재를 독재로 쓰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 연구 성과이기 때문”이라며 “편향된 것은 오히려 국정화를 추진하는 세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제부터 우리가 정권이 역사에 대한 정파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역사학계 전부를 좌파로 매도하는 비상식적인 사회가 됐느냐”고 덧붙였다. 학계의 절대다수가 국정화에 반대하고 있어 집필진 구성이 어려울 것이란 전망에 대해 정 교수는 “역사교육의 발전과 무관하게 정치적 의도로 추진되는 국정 교과서의 집필에는 평소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역량 있는 집필진이 참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 편찬을 국사편찬위원회가 맡게 된 것에 대해선 “교과서 편찬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구에서 이뤄져야 한다”며 “국편은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아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그는 “검인정 시행 뒤 경쟁을 통해 교과서에 창의적 편집이 도입되는 등 발전이 있었는데 국정 체제는 근본적으로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거의 모든 대학에서 국정화 반대 의견이 나오고 있다”며 “끝내 국정 교과서가 만들어진다면 역사학계는 대안 교과서를 포함한 대안적 역사 교재를 개발해 교육 현장에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사학계 자정능력 잃어… 現시점선 불가피한 선택” ▼보수진영 강규형 명지대 교수“국정 교과서가 최선은 아니지만, 국사학계가 자정 능력을 잃은 현시점에선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51·사진)는 “현 한국사교과서가 검정제 취지와는 달리 다양성을 담아 내지 못했고 획일적으로 쓰여졌다”며 “기존 검정제에 문제가 많았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기존 한국사교과서가 반사회적 정체성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대부분의 검정제 한국사교과서를 보면 대한민국이 바른 사회가 아니라는 인식으로 서술됐다”며 “교과서만 보면 대한민국이 왜 발전했는지 알 수 없고, 오히려 망했어야 하는 국가라는 생각까지 든다”라고 말했다. 또 최근 한국사교과서도 1970, 80년대 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기조로 서술되면서, 다른 의견이 흡수될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검정제 교과서의 이념 편향 사례로, 일부 고교 한국사교과서에서 광복 이후 북한의 토지 분배 방식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점을 꼽았다. 북한의 주체사상을 다루면서 실패한 사상이라는 가치판단을 앞세우지 않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국사학계가 군사 정권 시절의 투쟁적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오늘날 한국 사회를 꿰뚫는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 강 교수는 “근현대사의 쟁점이 되는 부분에 대한 서술을 경직된 국사학계에만 맡겨 놓을 수 없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국정화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 논란 속에 집필진 구성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대해 “집필진 구성을 다양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쟁점이 되는 근현대사를 정치학, 사회학, 국문학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으로 시각을 넓혀 바라보면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한시적으로나마 국정제를 통해 컨센서스를 이뤄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에 다양성을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가 정권이 원하는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선 “친정권, 반정권을 떠나 우리가 어떻게 국력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 ‘대한민국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 집필 기준을 마련하면 큰 논란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임현석 기자 lhs@donga.com}

최근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사도’를 비롯한 대중문화 속에서 조선 영조(1694∼1776)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모습이 주로 부각된다. 내면의 갈등이 묘사돼도 그는 비정한 아버지다. 그러나 영조는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가족의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정비(正妃) 2명 중 1명, 후궁 4명 중 2명이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모두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생전에 아들 2명을 모두 잃었고, 12명의 딸 중 9명을 앞세웠다. 이는 영조가 82세까지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태어난 순서대로 떠나는 것이 아닌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육친을 잃은 슬픔을 그는 어떻게 달랬을까. 영조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손수 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 소장의 제문과 묘지문(墓誌文)을 살펴봤다. “아침에는 나를 대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깊이 숨어서는 말을 않으니, 그날 광경의 비참하고 처절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따뜻한 말과 낭랑한 음성을 어느 날에 다시 들으며, 온화한 모습과 부드러운 얼굴을 어느 때에 다시 본단 말인가.” 영조가 왕세제 시절인 27세 때(1721년) 후궁 소훈 이씨(정빈으로 추증)를 잃고 쓴 제문이다. 소훈 이씨는 영조의 첫 자식인 향염(화억옹주로 추증) 등 두 딸과 장남인 효장세자를 낳은 인물이다. 영조와 동갑내기로 8세에 궁에 들어온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영조의 ‘솔 메이트’였다. 이 제문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라는 절절한 외침으로 끝맺는다. 이에 앞서 영조는 3년 전인 1718년 돌이 안 된 향염을 잃었다. 영조가 쓴 광지(壙誌·무덤에 넣는 글)에는 “딸은 성품이 영민하고 용모가 청수하였다. 아아! 안타깝구나. 사무치는 아픔을 어이 견딜까. 무술년 8월 아비 연잉군이 눈물을 뿌리며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영조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34세 때(1728년) 장남 효장세자를, 57세 되던 해(1751년)에는 며느리 효순현빈 조씨(효장세자의 아내)를, 58세에는 첫 손자였던 세 살배기 세손(사도세자의 장남)을 잃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23년을 궁에서 지낸 며느리 조 씨와 영조는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나를 먹이려고 직접 스스로 밤을 삶고는 했는데 영영 가던 날에도 삶아놓은 것이 여전히 쟁반에 남아 있었으니…억장만 무너질 뿐이다”라고 했다. 영조는 말년에도 계속 가족을 잃고 제문과 비문을 썼다. 63세 때(1757년)는 정비 정성왕후를 잃었고, 68세에는 기대가 컸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자책과 회한이 담긴 묘지문을 남겼다. “13일의 일(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일)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이 글은 사신(詞臣·글 짓는 일을 담당하는 신하)이 대신 지은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여, 이 글을 가지고서 나에게 유감이 없을지어다.” 칠순이 넘어서는 40년 가까이 해로했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다. “오호라!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친히 빈의 묘표, 명정, 신주를 모두 썼으니 정말 뜻밖이다.” 영조의 제문, 묘지문 등을 조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책임연구원은 “영조가 쓴 묘지문은 지석을 무덤에 묻기 전 탁본해 지금도 볼 수 있다”며 “왕이 제문 등을 직접 지은 일이나 문장에 슬픔과 애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최근 관객 600만 명을 넘어선 영화 ‘사도’를 비롯한 대중문화 속에서 조선 영조(1694~1776)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는 모습이 주로 부각된다. 내면의 갈등이 묘사돼도 그는 비정한 아버지다. 그러나 영조는 아내와 자식을 비롯해 가족의 죽음을 가장 많이 지켜봐야 했던 비운의 왕이었다. 정비(正妃) 2명 중 1명, 후궁 4명 중 2명이 영조보다 먼저 사망했다. 모두 14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생전에 아들 2명을 모두 잃었고, 12명의 딸 중 9명을 앞세웠다. 이는 영조가 82세까지 조선 왕 중 가장 오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꼭 태어난 순서대로 떠나는 것이 아닌 게 세상의 이치라지만 육친을 잃은 슬픔을 그는 어떻게 달랬을까. 영조가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해 손수 지은,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이배용) 소장의 제문과 묘지문(墓誌文)을 살펴봤다. “아침에는 나를 대하여 말하더니 저녁에는 깊이 숨어서는 말을 않으니, 그날 광경의 비참하고 처절함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 따뜻한 말과 낭랑한 음성을 어느 날에 다시 들으며, 온화한 모습과 부드러운 얼굴을 어느 때에 다시 본단 말인가.” 영조가 왕세제 시절인 27세 때(1721년) 후궁 소훈 이씨(정빈으로 추증)를 잃고 쓴 제문이다. 소훈 이씨는 영조의 첫 자식인 향염(화억옹주로 추증) 등 두 딸과 장남인 효장세자를 낳은 인물이다. 영조와 동갑나기로 8세에 궁에 들어온 그는 요즘 말로 하면 영조의 ‘소울 메이트’였다. 이 제문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혼령이여 지각이 있는가? …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는 절절한 외침으로 끝맺는다. 이에 앞서 영조는 3년 전인 1718년 돌이 안 된 향염을 잃었다. 영조가 쓴 광지(壙誌·무덤에 넣는 글)에는 “딸은 성품이 영민하고 용모가 청수하였다. 아아! 안타깝구나. 사무치는 아픔을 어이 견딜까. 무술년 8월 아비 연잉군이 눈물을 뿌리며 기록한다”고 쓰여 있다. 영조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영조는 34세 때(1728년) 장남 효장세자를, 57세(1751년) 되던 해에는 며느리 효순현빈 조 씨(효장 세자의 아내)를, 58세에는 첫 손자였던 세 살배기 세손(사도세자의 장남)을 잃는다. 특히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23년을 궁에서 지낸 며느리 조 씨와 영조는 사이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묘지문에서 “나를 먹이려고 직접 스스로 밤을 삶고는 했는데 영영 가던 날에도 삶아놓은 것이 여전히 쟁반에 남아 있었으니 … 억장만 무너질 뿐이다”라고 했다. 영조는 말년에도 계속 가족을 잃고 제문과 비문을 썼다. 63세(1757년) 때는 정비 정성왕후를, 68세에는 기대가 컸던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자책과 회한이 담긴 묘지문을 남겼다. “13일의 일(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일)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내가 어찌 좋아서 했겠는가. 이글은 사신(詞臣·글 짓는 일을 담당하는 신하)이 대신 지은 것이 아니다. 사도세자여, 이글을 가지고서 나에게 유감이 없을지어다.” 칠순이 넘어서는 40년 가까이 해로했던 후궁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어머니)마저 떠나보낸다. “오호라! 여든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친히 빈의 묘표, 명정, 신주를 모두 썼으니 정말 뜻밖이다.” 영조의 제문·묘지문 등을 조사한 한국학중앙연구원 윤진영 책임연구원은 “영조가 쓴 묘지문은 지석을 무덤에 묻기 전 탁본해 지금도 볼 수 있다”며 “왕이 제문 등을 직접 지은 일이나 문장에 슬픔과 애절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문자가 없는 일부 종족은 육식이 식인 풍습을 약화시킨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사냥꾼(혹은 어부)과 사냥감 간의 관계를 친척 관계에 근거해서 생각함으로써 그 관계를 인격화한다. (…) 따라서 사냥과 고기잡이는 같은 종족 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식인 풍습으로 여겨진다.” 1996년 구조주의의 아버지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가 쓴 글 ‘미친 소 파동의 교훈’ 중 일부다. 그는 소에게 소의 뼛가루를 먹여 키우는 것은 넓은 범위의 식인 풍습에 속한다고 본다. 또 초식 동물을 동종의 동물을 먹는 동물로 변환시켜 생겨난 위험(인간 광우병)과 가축 사육의 비효율성 탓에 언젠가 육식은 식인 풍습만큼이나 혐오스럽게 여겨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책은 저자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에 기고한 글 16편 등을 모았다. 저자는 ‘발전에는 하나의 유형만이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글에서 수렵과 채집을 했던 종족들이 과연 농업을 할 줄 몰라 그런 삶에 만족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그저 생산성을 앞세운 삶 자체를 멀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종교 갈등, 광우병 파동, 여성의 지위, 인종차별주의 등 민감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주제의 심층으로 파고들어가는 필봉에서 대가의 풍모가 전해온다. 저자는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문명사회와 그들이 원시적으로 보는 사회가 별다른 차이가 없고 심지어 심층에서는 동일한 원리, 즉 ‘구조’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일간지 기고글인 만큼 저자의 본격 연구서보다 이해가 쉽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29회 인촌상 시상식이 8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롯데호텔 크리스털볼룸에서 열렸다. 이 상은 일제강점기 암울한 시대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경성방직과 고려대를 설립한 민족 지도자 인촌 선생의 뜻을 잇기 위해 1987년 제정됐다. 인촌상은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이사장 이용훈)와 동아일보사가 제정해 운영하고, 해마다 인촌 선생의 탄생일(10월 11일)에 맞춰 시상식을 열고 있다. 이 이사장은 이날 시상식에서 △광주 살레시오여고(교육) △성곡언론문화재단(언론·문화)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인문·사회) △서영준 서울대 교수(과학·기술) 등 부문별 수상자에게 상패와 기념메달, 상금 1억 원을 각각 수여했다. 이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언론과 교육, 산업 부문에 걸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앞장섰던 인촌 선생의 발자취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며 “수상자들은 공익을 최우선 가치로 삼았던 인촌 선생의 정신을 실천한 분들”이라고 말했다. 성낙인 서울대 총장은 축사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주셨던 인촌 선생을 따라 수상자들의 지혜와 경험을 우리 사회에 더욱 확산시키고 정진하시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앞서 인촌상운영위원회(위원장 이돈희)는 외부 심사위원 16명을 위촉해 4개 부문에 걸쳐 6월부터 2∼4차례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를 선정한 뒤 수상자를 확정했다. 교육 부문에서 수상한 살레시오여고의 류경희 교장수녀는 “60년 가까운 역사 동안 인성 교육을 위해 애써온 것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한다”며 “학생들이 이 사회의 역군이 될 수 있도록 젊은이들과의 소통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언론·문화 부문 수상 단체인 성곡언론문화재단의 한종우 이사장은 “보성전문학교 교장이셨던 인촌 선생이 당시 제자였던 (재단 설립자) 성곡 김성곤 회장께 직접 상을 주시는 듯하다”며 “하늘의 성곡 선생이 ‘필요한 일을 제대로 하라고 수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듯하다”고 했다. 인문·사회 부문에서 상을 받은 김학주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중문학 연구에 함께 노력해 온 동료와 선후배 연구자들 덕에 오늘의 성취가 있었다”며 “이번 수상은 여생을 다 바쳐서 정진하라는 당부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화학적 암 예방(ChemoPrevention)’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으로 과학·기술 분야에서 수상한 서영준 서울대 교수는 “유행에 편승하지 않고 20년 동안 한 분야에 매달려 상을 받게 된 것 같다”며 “언젠가 이 분야에서 정점(頂點)을 찍으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수상자와 가족, 역대 수상자를 비롯해 각계 인사 3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현악 앙상블 ‘조이 오브 스트링스’와 바리톤 박흥우 씨, 바이올리니스트 서유민 양이 축하 공연을 펼쳤다.■ 주요 참석자 명단▽정·관·법조계=김수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 이현재 정원식 이홍구 전 국무총리,(이하 가나다순) 강인섭 전 국회의원, 김종하 전 국회부의장, 박경석 전 국회의원, 안병영 전 교육부 장관,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 이경재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종식 전 국회의원, 이진강 대법원 양형위원회 위원장, 정성진 전 법무부 장관, 조강환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조완규 전 교육부 장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 ▽학계 교육계=고형진 고려대 사범대학장, 국양 서울대 교수, 권대봉 고려대 교수, 권숙일 대한민국학술원 회장, 권순달 수원대 교수, 권영직 살레시오여중 교감, 권오상 고려사이버대 학생처장, 김규원 서울대 교수, 김규태 고려대정보전산처장, 김낙두 서울대 명예교수, 김동원 고려대 경영대학장, 김무진 살레시오여고 교감, 김병기 고려대 교수, 김병완 고려대사범대부속고 교감, 김병윤 KAIST 부총장, 김병철 전 고려대 총장, 김수원 고려대 연구부총장, 김영석 연세대 교수, 김영준 서울대 명예교수,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 김우석 인하대 교수, 김의진 가톨릭대 교수, 김인숙 국민대 명예교수, 김종필 중앙고 교장, 김준연 고려대 교수, 김중순 고려사이버대 총장, 김채겸 국민대 이사장, 김흔 전 중앙고 행정실장, 나홍석 고려사이버대 교무처장,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 노공순 살레시오수녀회 원장, 노정혜 서울대 교수, 류동춘 서강대 교수, 류시혁 고려사이버대 총괄행정실장, 류종목 서울대 교수, 마동훈 고려대 미래전략실장, 민병욱 백석대 초빙교수, 박동원 고려중앙학원 사무국장, 박명식 고려중앙학원 본부장, 박진우 고려대 공과대학장, 박찬욱 서울대 교수, 성기옥 세계화교육문화재단 회장, 송용준 서울대 교수, 송진원 고려대 연구교학처장, 송태진 고려대 연구처장, 심재철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 엄규백 양정의숙재단 이사장, 염재호 고려대 총장, 오수경 한양대 교수, 위성홍 고려사이버대 연구개발처장, 위행복 한양대 교수, 유병현 고려대 대외협력처장,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육정수 배재대 초빙교수, 윤병길 고려대사범대부속고 교장, 이기성 고려대 총무처장, 이동관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총장, 이상섭 서울대 명예교수, 이승기 서울대 명예교수, 이용균 중앙고 교감, 이은방 서울대 명예교수, 이재돈 이화여대 교수, 이재열 고려사이버대 대외협력처장, 이재훈 고려대 문과대학장, 이주현 고려대사범대부속중 교장, 이창숙 서울대 교수, 이필상 유한재단 이사장, 이홍우 상명대 석좌교수, 이후근 전 고려중앙학원 상담역, 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 장승문 중앙중 교장, 전인초 연세대 명예교수, 정구종 동서대 석좌교수,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 정종욱 고려사이버대 기획예산처장,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조성관 고려사이버대 기획행정실장, 조현진 국민대 교수, 진덕규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동훈 고려대 기획예산처장, 최용석 중앙중 교감, 최희조 세종대 석좌교수, 한금선 고려대 간호대학장, 한상복 서울대 교수, 한정호 연세대 사회과학대학 학장, 허도영 고려대사범대부속중 교감,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 ▽경제계=권영민 전 태영건설 상무, 권이상 전 경방 감사, 김도균 삼성전자 전문연구원, 김명하 김앤에이엘 회장, 김병휘 삼양염업 회장,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김선휘 삼양염업 고문,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김재억 삼양홀딩스 고문, 김정식 대덕전자 회장, 김준 경방 사장, 김진우 LIG건설 재무팀장, 안병모 비오엠 건축사사무소 대표, 양재룡 한국은행 자문역, 오윤택 회계법인 바른 대표, 유진녕 LG화학 기술연구원장,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 사장, 이중홍 경방고문, 조해형 나라홀딩스 회장, 홍성훈 삼양홀딩스 감사 ▽언론·출판·문화·체육계=고승철 나남출판 대표, 김광희 전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김기경 한국오리엔티어링연맹 명예회장, 김달수 울산김씨대종회 회장, 김동철 한국전통문화전당 원장, 김두곤 전 동아일보 총무국장, 김병건 동아꿈나무재단 이사장, 김복수 동우회 임원, 김상준 울산김씨대종회 부회장,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용범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김용해 전 동아일보 출판국 편집위원, 김은 인촌기념회 이사, 김의정 명원문화재단 이사장, 김인호 전 동아일보 광고국장, 김정일 전 동아애드넷 대표, 김종길 시인, 김종완 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상무이사, 김종태 평화의 마을 대표, 김준하 전 강원일보 사장, 김지용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김천주 한국여성소비자연합회 회장, 김학준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현제 동우회 임원, 김희숙 아욱실륨장학회 이사장, 문명호 대한언론인회 주필, 문영복 전 한국방송광고공사 이사, 박기정 이북5도위원회 함경북도지사, 박문두 동우회 총무이사, 박오학 전 동아일보 전무, 박용윤 한국박물관회 이사, 박진오 동아일보 감사, 박창래 전 문화일보 논설주간, 박충서 동아꿈나무재단 이사, 박태근 전 동아일보 건설팀장, 배권호 전 동아일보 부국장, 배인준 동아일보 고문, 서병기 한국정보통신산업연구원 원장, 성낙오 전 영남일보 사장, 송군호 고려대 교우회 운영국장, 송상현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회장, 신동호 전 조선일보 부사장, 신상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신우식 전 서울신문 사장, 양철화 동우회 임원, 어경택 화정평화재단 감사, 여영무 뉴스앤피플 대표, 오정소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이사장, 유준상 한국정보기술연구원 원장, 윤상철 성곡언론문화재단 이사, 이경숙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이규민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대훈 전 동아일보 이사, 이도형 전 한국논단 발행인, 이두환 전 동아일보 출판영업국장, 이명득 전 동아일보 시설본부 국장, 이문호 뉴스통신진흥회 이사장, 이병훈 한국영상자료원장, 이연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이영근 전 동아일보 국장, 이완승 동우회 임원,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이종세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이진숙 대전MBC 사장, 이치백 한국향토사연구전국연합회 이사장, 임연철 전 국립극장장, 전만길 전 대한매일신보 사장, 전용호 한국어문언론인협회 부회장, 전창규 동우회 임원, 정출도 전 전국문화원연합회 사무총장,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조용중 문우언론재단 이사장, 천병주 동우회 임원, 최규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최맹호 동아일보 고문, 최명우 안전신문 주필, 현재천 인촌기념회 이사, 홍재철 목사조종엽 jjj@donga.com·김상운 기자}

“본사에서 언문(諺文)의 자체(字體)를 이상적으로 개선코자 천하에 구하오니 만대에 필적을 서물(書物)마다에 인(印)코자 하는 인사는 천재일우의 차기(此機)를 일(逸)치 마시고 일필을 휘(揮)하소서.” 1929년 1∼8월 다섯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 사고(社告)로 실린 활자체 모집 공고다. 류현국 일본 쓰쿠바기술대 종합디자인과 교수는 광복 70주년 한글날을 맞아 근대 한글의 활자화 과정을 집대성해 펴낸 ‘한글 활자의 탄생(1820∼1945)’에서 “동아일보의 이 공모는 이후 한국의 민간 서체 공모를 이끈 효시”라고 말했다. 공모 결과 구약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고, 동아일보는 이를 4년 동안 4만여 종의 활자로 개발해 1933년 4월 1일자 신문부터 6·25전쟁 전까지 사용했다. 류 교수는 “이는 한국 신문사 최초로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진 명조체 활자 세트이고, 동아일보는 이를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고딕체 활자도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서체는 1958년까지 국내 출판물뿐 아니라 북한 노동신문, 일본 민단과 미국의 발간물에서까지 사용됐다”고 덧붙였다. 류 교수는 지난 12년 동안 40여 개국을 방문하며 한글 활자의 원형과 계보를 찾아다녔다. 그는 “1880∼1945년 일본어 활자가 약 30종류인 데 비해 한글 활자는 무려 42종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국립한글박물관(서울 용산구 서빙고로)은 개관 1주년을 맞아 2016년 1월 31일까지 특별전시 ‘디지털 세상의 새 이름-코드명 D55C AE00’을 연다. ‘D55C AE00’은 국제 문자코드(유니코드)로 ‘한글’이라는 글자를 뜻한다. 전시는 1982년 최초의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한 때부터 한글 정보화의 역사를 보여준다. 초기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사용되던 당시의 ‘삼보 트라이젬 20’ 컴퓨터, 컴퓨터에서 한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소프트웨어 ‘한글도깨비’, 1분에 1000타 이상의 속도로 입력할 수 있는 국회 속기용 키보드, 현대 한글 서체로 제작된 ‘정조 임금 손 글씨’ 등이 전시돼 있다. 박물관은 또 11일까지 문화행사를 연다. 9, 10일 박물관 야외 한글모임마당에서는 한글을 소재로 디자인된 물건을 살 수 있는 ‘한글문화장터’가, 11일에는 ‘훈민정음 시대의 역사’(도현철 연세대 교수) ‘세종의 창조리더십 이야기’(박현모 세종대왕리더십연구소장)라는 제목의 강연이 열린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기원전 108년 한(漢) 무제가 고조선(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낙랑 임둔 진번 현도 대방 등 한 군현의 위치를 둘러싼 갈등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한 군현 위치는 동북아역사재단(이하 재단)이 47억 원을 쏟아 부어 2008년부터 8년째 진행 중인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의 핵심 쟁점이다.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와 일부 재야 사학계는 4월 재단이 제작 중인 역사지도를 공개하면서 이 지도가 낙랑군을 현 평양 지역에 그리는 등 한 군현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에 위치시켜 “재단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 왔다. ○ 동북아재단, 한 군현 위치 병기 계획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재단 국정감사를 하루 앞둔 4일 역사지도 제작을 총괄하는 장석호 재단 역사연구실장은 “한 군현의 위치에 대해 학계와 재야 사학계의 의견이 통합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는 양측 입장을 지도에 병기한다는 것이 재단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역사지도 연구 용역은 다음 달 20일 마무리된다. 당초 이 지도는 올해 말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한 군현 위치 논란이 불거지면서 검수를 이유로 출판을 3년 늦췄다. 논란이 된 한 군현의 위치는 학계의 통설인 한반도 북부설을 따른 것이다. 일부 현행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낙랑군을 평양 지역에 그린 지도가 실려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평양 지역 고분들에서 한나라 계열의 유물이 출토되고, 2005년 평양에서 낙랑군 속현들의 인구가 적힌 ‘낙랑 목간’이 발견되는 등 고고학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반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등 일부 학자들은 한 군현의 위치를 중국 동북부 허베이(河北) 성 또는 요하 일대로 보고 있다. 이 소장은 올 8월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를 출간하며 “동북아역사지도는 중국이 동북공정 차원에서 그린 ‘중국 역사지도집’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며 “한반도가 외부의 식민 지배를 받아 왔다는 인식을 심기 위해 만들어진 일제 식민사학을 주류 사학계가 그대로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고조선 세력 범위에 대한 지적은 수용할 만” 이와 별개로 한과 위(魏)나라의 국경을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연장해 그린 것은 편찬위의 잘못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낙랑군이 중국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최근 학계의 연구와도 어긋난다. 지도 편찬위원장인 윤병남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문제의 지도는 작업 중인 자료였을 뿐 최종 결론이 아니다”라고 해명하면서 “후기 낙랑군은 토착적 성격이 강했다는 연구 결과 등을 반영할지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또 역사지도가 고조선의 강역을 축소했다는 비판에 대해 주류 사학계에서도 수용할 만한 부분이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소장은 “역사지도가 고조선 관련 유물이 쏟아져 나온 요하 서쪽을 고조선의 강역으로 명시하지 않고 ‘고조선 관련 문화’라고 모호하게 설명한 것은 잘못됐다”고 썼다. 고조선사를 전공한 한 대학 교수도 “랴오닝 성 서부 대릉하를 너머 현 랴오닝 성과 허베이 성의 경계지점까지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재단이 당초 동북공정과 관련돼 있어 예민한 사안임에도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지 못한 데다 뒤늦게 학계 통설과 일부의 주장을 병기하겠다는 것 역시 일시적인 봉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편 국회 동북아역사왜곡특위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지도 편찬위와 재야 사학계에 국회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편찬위가 이를 수용해 11월 중순 양측의 ‘맞짱 토론’이 벌어질 것으로 전망된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 ‘엑스맨’은 유전자 변이로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된 뮤턴트(돌연변이)들과 평범한 인간들(호모 사피엔스)의 다툼에 관한 이야기다. 손등에서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칼날이 나오는 울버린(휴 잭맨) 같은 이들이 뮤턴트다. 여기서 상상 하나. 뮤턴트들이 승리하고 인간들은 멸종했다고 치자. 3만 년 뒤 뮤턴트의 후손들은 조상에 대해 이런 논쟁을 벌일 것이다. “인간과 뮤턴트들이 같은 시기 공존했던 것은 틀림없는데, 인간들은 왜 사라졌을까? 뮤턴트와의 경쟁에서 도태했을까? 아니면 뮤턴트가 인간을 모두 잡아먹었을까?” “인간과 뮤턴트는 섹스를 하고 아기를 낳을 수 있었을까?” “인간 화석에서 DNA를 추출해보니 우리와 일부가 같군. 우리는 뮤턴트의 후손이면서 인간의 후손이기도 한 것 같아.” 사실 이는 상상이 아니라 현대 과학이 다루고 있는 주제다. 2010년 놀라운 논문이 ‘사이언스’에 발표된다. 네안데르탈인의 화석에서 핵 DNA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현대인의 유전자 안에 2만4000년 전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안팎으로 섞여 있다는 것. 기존 학설과 달리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와 이종교배를 했고, 우리가 그 후손이라는 얘기다. 논문의 저자인 스반테 페보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유전학분과장은 이 유전자를 ‘내적(內的) 화석’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이집트 고대사에 매료됐던 어린이가 우여곡절을 거쳐 네안데르탈인 게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1955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저자는 웁살라대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면서도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한다. 급기야 지도교수 몰래 이집트 미라에서 DNA를 추출하고 염기서열을 분석해 이를 1985년 ‘네이처’에 발표한다. 저자가 이 같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까지는 수많은 도전과 실패가 있었다. 저자는 죽은 조직에도 DNA가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송아지 간을 오븐에 구워 미라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집트의 실제 미라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는 여러 차례 실패하기도 했다. 자신의 기존 연구와 정반대의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저자는 1997년에는 모계로 유전되는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추출해 분석한 뒤 현생인류와 그들이 독자적인 종으로 이종교배를 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논문을 ‘셀’에 실었다. 책은 논문을 실을 학술지 선정이나 연구기금 확보, 과학자들의 협업과 경쟁 등 과학 연구가 어떻게 진척되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2006년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의 뼛조각을 얻기 위해 크로아티아로 가다가 방문 며칠 전 시료 채취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는다. 채취에 반대하는 누군가의 압력이 들어온 것. 그는 수많은 현지 관계자들을 이 프로젝트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뼛조각 8점을 얻는 데 성공한다. 저자는 고대의 시료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하는 작업을 “진화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이종교배는 불가능했다는 반론도 나오는 등 고인류학은 논쟁이 활발한 분야다. 그러나 공상과학 같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저자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지난해 아마존 ‘올해의 책’으로 뽑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프란치스코 교황의 국적은 아르헨티나. 그렇다면 개신교 최대 교단의 하나로 꼽히는 루터교세계연맹(LWF) 의장 국적은? 정답은 ‘어느 나라도 아니다’. 세계 98개 국가에 7200만여 명의 신도가 있는 루터교세계연맹의 무닙 유난 의장(65)은 팔레스타인 난민 출신이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예루살렘 동쪽의 한 동방정교회 수도원으로 피신한 부모 아래서 1950년 태어났다. 수도원 근처의 루터교 교회와 학교를 다니며 자라 핀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팔레스타인에서 목사로 일해 왔고, 2010년 7년 임기의 루터교세계연맹 의장에 선출됐다. 5일 열리는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에 초청받아 1일 방한한 그를 서울 중구 남대문로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나는 여전히 유엔이 발급한 난민 카드를 갖고 있는 난민입니다. 난민들은 종교, 성별, 민족, 국적,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LWF는 1947년 설립될 때부터 난민 보호에 중점을 뒀다. 현재 이라크 요르단 케냐 등에서 난민 캠프를 운영하며 31개 국가에서 스태프 2000명 이상이 난민 구호 등을 위해 일한다. 유엔난민기구(UNHCR)의 주요 협력 파트너이기도 하다. 유난 의장 역시 교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많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처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등에 들어가 총을 들지 않았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죠.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 때 어떻게 행동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시리아나 아프리카 등에서 유럽 등지로 가는 난민들에게 머물 장소와 따뜻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인간답고 정의롭게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그는 2일 판문점을 방문해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를 할 예정이다. “저는 전쟁은 평화를 가져오지 않고, 무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눈물이 났습니다. 한반도에서 통일과 인권이 존중되는 평화, 종교와 표현의 자유, 성 평등이 실현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루터교단은 현재 교회 50개에 신도 6000여 명이 있다. 1958년 미국의 루터 교회가 한국 선교를 시작할 때 교회를 많이 세우지 않기로 방향을 정했다고 한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배달 음식 주문 애플리케이션 ‘요기요’ ‘배달의 민족’ 등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심지어 직접 배달도 하지 않고 돈을 번다. 속이 출출한 소비자와 그 주변의 요식업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승객과 택시 기사를 연결하는 ‘카카오 택시’, 빈방 소유자와 여행객을 연결하는 ‘에어비앤비’를 비롯해 매개를 통해 돈을 버는 사업 모델이 쏟아진다. 구글 플레이스토어나 애플 앱스토어도 앱·콘텐츠 생산자와 사용자를 매개하는 ‘수수료 장사’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전 세계의 사람과 사물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가 진화하면서 ‘플랫폼 경제’ ‘네트워크 효과’ 같은 말이 주요 경제학 용어로 등장하고 있다.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서적들도 우후죽순으로 나온다. ‘매개하라’는 비교적 대중적으로 쓰인 책이다. 책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쪽과 저쪽을 잘 이으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저자는 매개자의 모델을 ‘코디네이터’ ‘어댑터’ ‘에이전트’ ‘매치 메이커’ ‘컴바이너’를 비롯한 8가지로 유형화한다. 책 초반은 다소 구문(舊聞)이다. 매개자의 모델 중 ‘필터’ ‘커뮤니케이터’를 설명하면서 네트워크 속 길목이 되는 허브(Hub)의 중요성이나 네이버가 사용자를 내부에 가둔다는 지적, 사용자 간 적당한 개방성과 폐쇄성을 유지하는 페이스북의 성공 비결 등을 소개한다. 책에 따르면 매개자 모델 중 ‘모빌라이저’는 ‘판을 벌이는 사람’이다. 음식 주문 앱 직원들은 서비스 출시를 준비하면서 음식 배달 식당들이 뿌리는 전단을 모으고 다녔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해당 앱으로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다수의 음식점(공급자)이 가입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판을 벌인’ 것. 가입된 음식점이 늘어나면 소비자도 늘어난다. 앱 입장에서는 음식점과 소비자 모두 자신이 매개하는 고객이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장 티롤 프랑스 툴루즈 1대학 교수의 ‘양면시장’ 이론이다. 연세대 정보산업공학과 교수인 저자는 정보통신기술과 디지털 경제가 삶과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20여 년간 연구했다고 한다. 저자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주역(周易)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고, 다시 여기서 ‘관계’의 중요성을 이끌어내는 등 웬만한 철학 연구자도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부분을 서술하는 데 거침이 없다. 새로운 개념들을 지나치게 쉽게 풀어 쓰려 했던 탓인 듯 때로 요지를 벗어나는 비유나 설명하려는 대상과 거리가 먼 예시들이 등장해 책에 집중하기 어렵게 한다. 또 플랫폼에서 왜 중용(中庸)이 중요한지, 플랫폼 기업들이 실제 시장의 룰을 어떻게 만들고 지배하는지 등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 부분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의 구조에 관심이 있는데도 ‘플랫폼’ ‘네트워크’ ‘양면시장’ 같은 말이 익숙하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읽어볼 만하겠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작고한 뒤에도 왕성하게 글이 쏟아져 나오니 진정 부지런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2013년 9월 영면한 최인호 작가가 생전에 기획한 문학적 자서전 ‘나는 나를 기억한다 1, 2’가 2주기인 25일을 맞아 출간된다. 2013년 작고 석 달 뒤 유고집 ‘눈물’이 나왔고, 지난해와 올해 역시 작가가 생전에 기획한 ‘나의 딸의 딸’ ‘꽃잎은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가 잇달아 출간되기도 했다. 고인은 ‘나는 나를 기억한다’를 2008년 구상했다. 그해 5월 침샘암이 발병해 집필을 중단하기까지 쓴 글이 1권으로 묶였고, 2권에는 미발표 습작이 담겼다. 고인은 ‘별들의 고향’ ‘겨울 나그네’ 등으로 1970, 80년대를 풍미한 거인이었다. 책에는 가난과 외모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던 유년 시절,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등 어린 거인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작가가 문학을 업(業)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다소 어이없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또래 여자아이들이 무용대회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본다. “예쁘고 아름다웠다. 나는 순간 질투를 느꼈다.” 자신을 ‘노트르담의 꼽추’, 여학생들을 아름다운 무희 ‘에스메랄다’처럼 느낀 그는 유명한 작가가 돼 예쁜 아이들에게 인정받겠다고 마음먹는다. “오손도손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우락부락 험상궂은 우리 형님 손/….” 작가가 초등학교 졸업 전이던 1958년 동아일보에 실은 동시 ‘화롯가’다. 그는 “이 동시는 내가 태어나서 활자로 발표된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에 실린 내 이름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나는 그 문예란을 잘라 두고두고 보곤 했다”며 “아마도 동아일보 축쇄판을 뒤지면 있을 것”이라고 썼다. 작가의 기억은 손에 쥘 듯 생생하다. 그는 세상을 뜬 뒤 자신의 글이 어떻게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들지 알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했던 듯하다. “빛나는 젊은 날의 아름다움은 앞산의 우물 속에 숨어 있나니, 내가 부르는 노래는 또 언제 그 누구의 가슴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책 중에서)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염석진(이정재)과 함께 김구를 만나러 가다 일본군 기관총병을 잇달아 저격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안옥윤의 손에 들린 것은 러시아제 소총 M1891 ‘모신 나강(Mosin-Nagant)’.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독립군들이 자신의 생명처럼 다뤘을 무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무기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박환 수원대 교수의 최근 논문 ‘3·1운동 직후 만주지역 독립군과 무기’에 따르면 소총으로는 안옥윤이 썼던 ‘모신 나강’이 가장 많았다. 다만 영화에 등장한 것과 달리 대부분은 저격용 스코프(조준경)가 없는 모델로 추정된다. 박 교수는 “이 총은 총신을 짧게 만든 ‘카빈’으로도 만들어져 독립군 기병들에게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제 마우저 소총이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일본제 30식, 38식 소총도 사용됐다. 주목되는 것은 독립군의 무기에 권총이 많다는 것.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독일제 ‘루거 P08’ 권총이 많이 사용됐다고 나온다. 이 총은 참호전이 잦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했는데, 적과 근접한 상태에서 속사하기 좋다. 박 교수는 “일부 기록에는 루거 P08보다 독일제 마우저(모제르) 권총이 많다고 나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우저 권총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썼던 권총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1920년 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의 무기 보유 현황은 놀라운 수준이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그해 8월 중순 대한군정서(사령관 김좌진)가 대원 약 1200명에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소총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320∼1800정에 이른다. 같은 해 7월 일본 측 정보보고에는 “근래 포 2문(제식 미상)이 대한군정서에 도착하게 돼 있다”는 내용도 있다. 이들 무기는 주로 내전을 벌였던 러시아혁명군과 제정 러시아 측의 백군 등에서 도입됐다. “2, 3일 내로 갈 줄 알았더니 무기 매수에 실패했다는 통지가 왔다. 화폐가 개혁돼 돈이 못 쓰게 된 까닭이다. 운반대 200여 명의 식량도 문제고 같이 온 농민들의 농사와 집안일도 낭패다. … 일본군병 참소(站所)가 30여 리 전방에 있고 마적들이 후방 20여 리 산중에 있는데 … 어느 때 습격당할지 모른다.” 1920년 6월 러시아 백군으로부터 구입한 대한군정서의 무기를 가지러 왕칭 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해안까지 다녀온 경비대 분대장 이우석의 기록이다. 무기 반입도 전투만큼이나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독립군의 무기 반입 경로는 ①우수리스크→왕칭 현 오지 ②추풍(수이푼)→왕칭 현 오지 ③남부 연해주→훈춘 현 등 3가지로 추정된다.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근래 아무르 만 해안으로 향하는 대형 선박의 4할은 반드시 총기를 운반” “마차로 얼음판 위를 통과” “주정을 밀수입한 대금으로 아무르 만을 따라 수송” “썰매 8대에 실어서 홍범도 처에 반출” 등 독립군의 무기 반입 방법이 묘사돼 있다. 박 교수는 “일본 정보 기록에 북로군정서가 체코군으로부터 총기 5만 정과 기관총, 수류탄 5000개 등 대규모로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며 “무기 보유 실태가 파악돼야 독립군 전력과 전투의 면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영화 ‘암살’에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전지현)은 염석진(이정재)과 함께 김구를 만나러 가다 일본군 기관총 병을 잇달아 저격한다. 제작진에 따르면 안옥윤의 손에 들린 것은 러시아제 소총 M1891 ‘모신-나강(Mosin-Nagant)’. 실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독립군들이 자신의 생명처럼 다뤘을 무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강점기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독립군 무기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박환 수원대 교수의 최근 논문 ‘3·1운동 직후 만주지역 독립군과 무기’에서 에 따르면 소총으로는 안옥윤이 썼던 ‘모신 나강’이 가장 많았다. 다만 영화에 등장한 것과 달리 대부분은 저격용 스코프가 없는 모델로 추정된다. 박 교수는 “이 총은 총신을 짧게 만든 ‘카빈’도 만들어져 독립군 기병들에게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제 마우저 소총이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일본제 30식, 38식 소총도 사용됐다. 주목되는 것은 독립군의 무기에 권총이 많다는 것.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독일제 ‘루거 P08’ 권총이 많이 사용됐다고 나온다. 이 총은 참호전이 잦았던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했는데, 적과 근접한 상태에서 속사하기 좋다. 박 교수는 “일부 기록에는 루거 P08보다 독일제 마우저(모젤) 권총이 많다고 나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마우저 권총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썼던 권총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3·1운동 이후 1920년 북간도 지역 독립군들의 무기 보유 현황은 놀라운 수준이다. 일본 외무성 자료에는 그해 8월 중순 대한군정서(사령관 김좌진)가 대원 약 1200명에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소총은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320~1800정에 이른다. 같은 해 7월 일본 측 정보보고에는 “근래 포 2문(제식 미상)이 대한군정서에 도착하게 돼 있다”는 내용도 있다. 이들 무기는 주로 내전을 벌였던 러시아혁명군과 제정 러시아 측의 백군 등에서 도입됐다. “2, 3일 내로 갈 줄 알았더니 무기 매수에 실패했다는 통지가 왔다. 화폐가 개혁돼 돈이 못쓰게 된 까닭이다. 운반대 200여 명의 식량도 문제고 같이 온 농민들의 농사와 집안일도 낭패다. (…) 일본군병 참소(站所)가 30여리 전방에 있고 마적들이 후방 20여리 산중에 있는데 (…) 어느 때 습격당할지 모른다.” 1920년 6월 러시아 백군 백계 러시아군으로부터 구입한 대한군정서의 무기를 가지러 왕청현에서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해안까지 다녀온 경비대 분대장 이우석의 기록이다. 무기 반입도 전투만큼이나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다. 논문에 따르면 독립군의 무기 반입 경로는 ①우수리스크→왕청현 오지 ②추풍→왕청현 오지 ③남부 연해주→훈춘현 등 3가지로 추정된다. 일본 측 정보 기록에는 “근래 아무르만 해안으로 향하는 대형선박의 4할은 반드시 총기를 운반” “마차로 얼음판 위를 통과” “주정을 밀수입한 대금으로 아무르만을 따라 수송” “썰매 8대에 실어서 홍범도 처에 반출” 등 독립군의 무기 반입 방법이 묘사돼 있다. 박 교수는 “일본 정보 기록에 북로군정서가 체코군으로부터 총기 5만 정과 기관총, 수류탄 5000개 등 대규모로 무기를 밀반입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온다”며 “무기 보유 실태가 파악돼야 독립군 전력과 전투의 구체적인 면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세월호 참사 이후 진상규명 특별법과 피해구제 특별법이 만들어지는데 각각 7, 9개월이 걸렸습니다. 대형 해양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무엇보다 빠른 특별조사가 필요합니다.” 홍콩의 법 학술지 ‘홍콩 로 저널’ 최근호에 ‘세월호 사고와 법적 쟁점’이라는 논문을 실은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해상법연구센터장(사진)의 말이다. 해상법 전문가인 그는 한국해양대를 나온 뒤 3만톤급 화물선 선장으로 일하다 1999년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법률사무소 김앤장에서 해사자문역으로 근무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홍콩의 해양사고에 대한 대응 시스템을 모범적 사례로 꼽았다. 2012년 홍콩 페리선과 유람선이 충돌해 어린이 8명을 포함해 39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 발생 3주 뒤 독립적인 판사가 특별조사위원장으로 임명됐고, 6개월 만에 최종 조사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배가 불과 2분 만에 가라앉은 이유가 핵심이었습니다. 조사위원회는 배의 격벽이 설계대로 건조되지 않았고, 정부도 이를 제대로 검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냈습니다.” 신속한 조사가 가능했던 것은 홍콩 조사위가 관련자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조사위 증언은 민형사상 증거로 사용되지 않아 사고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도 비교적 솔직하게 증언합니다. 조사위 출석이나 진술을 거부하면 벌금이나 징역형을 내립니다.” 사고의 법적 책임은 조사위와는 별개로 법정에서 다룬다. 그는 신속한 피해자 배상과 보상의 제도화도 강조했다. “대형 해상 사고 때마다 배상과 보상이 늦어져 피해자들이 큰 고통을 받습니다. 해사안전법을 개정해 정부와 관련단체에서 기금을 마련하고, 일정액까지는 치료비와 생활비 등을 사고 직후 지급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조종엽기자 jjj@donga.com}

일제강점기에 입은 솜옷이나 무명옷의 원재료는 고려 말 문익점이 씨앗을 붓두껍에 숨겨 온 재래면이 아니라 미국산 개량종 육지면으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먹는 천일염도 전통 방식으로 만든 소금이 아니다. 1900년대 초까지 우리는 바닷물을 끓여 만든 자염(煮鹽)을 먹었다. 개량종 목화와 천일염을 우리나라에 도입한 것은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1869∼1953)라는 일본인 외교관이다. 개량종 면은 질과 양이 재래면보다 뛰어났고, 천일염은 자염보다 싼값에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한국인의 의·식문화에 많은 영향을 준 이 외교관은 규슈 지방의 시골 오이타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1896년 3월부터 서울 주재 공사관보로 약 1년간 일하다가 미국 등을 거쳐 1902년 7월 목포 영사로 조선 땅을 다시 밟은 뒤 25년간 한국에서 살았다. 1904년 기후와 풍토가 중국의 목화 산지 사스 지방과 유사한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에 육지면의 씨를 뿌렸다. 조선총독부 소속 부산 부윤(시장), 인천 쌀·콩 거래소 사장 등으로 일하다 1927년 일본 교토로 돌아간 그는 1940년대부터 재일 조선인들을 도왔다.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도항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교회당이 폐쇄돼 고통받는 조선인들을 위해 애썼다. 어쨌든 그는 조선 침탈에 나선 일본의 관료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 이에 대해 일간지 도쿄특파원 겸 지사장으로 일했던 저자는 “와카마쓰는 일본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지만 한반도의 산업과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그의 생애를 발굴한 이번 기록이 호혜(互惠)의 한일 관계를 열어가는 밀알이 되기를 바란다”고 썼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세계수도문화연구재단(이사장 김일윤)과 경주대 실크로드연구원(원장 임영애)은 18, 19일 경북 경주시 보문로 현대호텔에서 국제 학술대회 ‘실크로드 고대 수도’를 연다. 이 대회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팔미라, 장안 등 실크로드에 걸쳐 번성했던 도시들의 문화와 신라의 관계를 조명한다. 고시치비트 말리노프스키 폴란드 브로츠와프대 교수, 굴미라 무흐타로바 카자흐스탄 이시크 박물관장, 쉬웨이민 중국 시베이대 교수 등이 발표할 예정이다. 주최 측은 “학술대회의 주제는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의 경제권역으로 잇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궤를 같이한다”고 밝혔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

조선시대 어전 속기록 ‘승정원일기’“장(杖·곤장)으로 입을 치라.” “네가 더욱 독기를 부리는구나, 매우 쳐라! 매우.” “어느 곳을 지져야 되는가?” ‘막장 사극’의 대사일 듯하지만 이는 조선 숙종이 실제로 했던 말이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하는 데 반대 상소를 올린 전 파주 목사 박태보를 밤새 국문하면서 가혹한 고문을 하라는 명을 직접 내렸다. 숙종의 국문은 숙종실록 15년(1689년) 4월 25일 자에 등장한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당시 상황을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는 것은 조선의 기록문화 덕분이다. 실록과 함께 특히 국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이 왕명을 출납하며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가 압권이다. 불행하게도 숙종 시기의 이 기록은 화재 등으로 사라졌다. 승정원일기는 현재 인조∼순종 동안의 기록만 남아 있지만 2억4250만 자에 이른다.○ 정승 10명 중 9명은 승정원 출신 승정원 관리는 지근거리에서 왕을 보좌하는 만큼 출세의 엘리트 코스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승정원일기를 번역하고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이 경국대전에 근거해 관직이 운영된 조선 세조∼철종 시기를 분석한 결과 영의정 등 3정승을 지낸 298명 중 249명이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20명은 일종의 속기사인 주서(注書·정7품) 출신이었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기록하는 주서는 문관 중 ‘웅문속필(雄文速筆·문장이 빼어나고 글을 빨리 씀)’한 사람을 뽑았다. 그러나 즉석에서 한문으로 번역해야 하다 보니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이때 주상(숙종)이 매우 노하여 말이 빨랐고 대부분 상스러운 말로 하교했다. 그래서 사관들이 그 말을 글로 빨리 옮겨 쓰지 못하고 붓놀림이 지체됐다. 공(박태보)이 이를 보고 ‘몸을 꽁꽁(必자 모양으로) 묶고 무우석(無隅石·뭉우리돌)으로 입을 쳐라’라고 쓰지 못하고 지체하느냐며 혀를 차고 꾸짖었다.”(박태보 문집 ‘정재집’ 중에서) 고문을 받던 박태보가 숙종의 ‘꽁꽁’ ‘뭉우리돌’이라는 말을 한문으로 옮기기 힘들어하는 사관에게 이를 어떻게 쓸지 알려줬다는 것이다.○ 왕명을 거부하거나 이의 제기도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사후에 각종 사료를 모아 편찬되는 실록과 달리 현장에서 작성된 뒤 매달 1책씩 편찬됐기에 사관의 당파 등에 따라 사실이 달라질 여지가 적다는 장점이 있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것에 대해 실록은 “신하들이 모두 김일경(소론 강경파)과 박필몽(이인좌의 난의 주모자)의 구당(舊黨)이었으나 팔도의 적이 차례로 그 목을 바쳤으니 (…) 영조의 대략에 힘입은 것으로 훌륭하다”고 적었다. 그러나 난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던 영조 4년 3월 14일 승정원일기에는 영조가 도성 경비 강화 등을 두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침착하게 대응한 것은 당시 영의정 이광좌(1674∼1740)였다. 정만조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광좌가 난의 주모자들과 같은 소론이었기 때문에 노론 정권 당시 편찬된 실록은 그가 역모와 연관돼 있는 것처럼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다”며 “그러나 승정원일기는 당시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고전번역원에 따르면 승정원은 부당하다고 여기는 왕명 출납을 거부하는 ‘작환((격,교)還)’과 이의를 제기하는 ‘복역(覆逆)’ 전통이 있어 왕이 이들 몰래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정조도 역모에 연관됐다고 몰린 동생 은언군을 보호하기 위해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내관들을 통해 밀명을 자주 내렸다. 1994년 번역이 시작된 승정원일기는 현재 40여 명의 인력이 투입돼 있지만 양이 방대해 번역률이 16.9%에 머무르고 있다. 고전번역원 관계자는 “이 속도라면 완역에 48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