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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비등록 선수들이 참가하는 서울시교육청 주관 육상대회에 나간 것이 한국 마라톤의 새 역사를 쓴 그의 시작이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김도연(25·K-water)은 이 대회 400m에서 1위에 올랐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체육교사이자 고모인 김경선 씨(65)의 권유로 이듬해 서울체중으로 전학했다. 중장거리 육상선수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김도연은 육상선수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혹독한 성장통을 앓았다. 중학교 여자 중장거리 선수들이 뛰는 거리는 1500m와 3000m. 400m 이하 단거리 육상도 해보지 않은 ‘왕초보’로선 기초체력을 키우고 자신만의 주법을 만들어야 했다. 보통 엘리트 선수들이 초등학교 4학년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것에 비해 3, 4년 늦게 시작했으니 갈 길이 멀었다. 중학교 2학년의 김도연은 기초부터 충실히 다졌다. 지루하고 고된 훈련이 끝나면 매번 울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김도연은 ‘조용한 악바리’였다.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진 않지만 모진 훈련을 군말 없이 이겨낼 만큼 다부졌고 재능에 우쭐하지 않았다. 장동영 감독과 함께 김도연의 중고교 시절을 지도한 서울체중·고교 김천성 코치는 “재능도 돋보였지만 성실함과 끈기가 빛나는 선수”라고 입을 모았다. 장 감독은 “오전 5시부터 시작되는 새벽 훈련에 김도연은 한 번도 늦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며 “어린 나이에 갑자기 고된 훈련에 지쳤을 법도 한데 도연이에게는 묵묵하게 이를 견뎌낼 강인함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발목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탄력이 좋은 것이 김도연의 장점이었다. 살이 안 찌는 체질도 중장거리에선 유리했다. 기초가 탄탄해지자 곧바로 성과가 드러났다. 김도연은 선수 생활 2년째인 2008년 전국소년체전 3000m에서 9분40초82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땄다. 고교 시절 김도연은 국내 최정상급 중장거리 선수로 올라섰다. 고교 1학년 때는 제1회 한국청소년육상경기대회에서 9분39초29로 이 종목 한국 고교 선수 역대 세 번째인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에 열린 제92회 전국체육대회 5000m에서도 이 종목 역대 세 번째 기록(16분10초43)을 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계속 기록을 깨나갈 거예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이 올라갈 겁니다.” 18일 2018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9회 동아마라톤에서 여자마라톤 한국 최고기록(2시간25분41초)을 세운 그의 표정은 덤덤해 보였다. 마라톤 대회 출전은 이번이 세 번째인 그는 대회 출전 때마다 매번 5분 이상을 단축했다. 2016년 첫 풀코스에 도전해 2시간37분18초, 이듬해 두 번째 도전에서 2시간31분24초를 기록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김도연은 40km 이상의 고강도 훈련을 단 한 번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세 번째 도전인 이번 대회에서 자신의 기록을 6분 가까이 단축했다. 첫 도전 때부터 12분가량 기록을 줄이는 폭발적인 상승세다. 이날도 그는 “마지막 2km를 남겨두고 속력을 올렸는데 5km 남겨뒀을 때부터 그럴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웃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새 역사를 쓴 건 기적에 가깝다. 급성장의 원동력을 간결한 주법에서 찾는 전문가가 많다. 이날 김도연의 경기 직전까지 한국 최고기록 보유자였던 권은주 아식스코리아 마케팅팀장(41)은 “도연이를 서울체고 졸업 뒤 강원도청 시절 처음 봤는데 그때 정말 놀랐다. 팔 동작과 달리는 폼이 너무 좋았다”며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으로 달려 조만간 일을 낼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김도연은 한국 여자마라톤의 10년을 이끌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7월에는 5000m에서, 올해 2월에는 하프마라톤에서 각각 15분34초17과 1시간11분0초의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다. 이제 남은 건 1만m 한국기록. 그는 “그것도 올해 안에 갈아 치울 거예요”라고 당차게 말했다. 김도연의 다음 목표는 8월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그는 “더운 날씨에 잘 적응만 하면 25분대, 아니 그 이하도 가능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영근 K-water 감독은 “도연이는 순위가 아니라 기록과 싸우고 있다”라고 말했다. 김도연은 2녀 중 막내딸이다. 서울 관악구청 공무원인 아버지 김재훈 씨(55)는 “쉬는 날이면 매번 딸의 경기를 챙겨 보러 경기장을 찾았다”며 “몸이 아플 때도 딸이 기어이 이를 악물고 결승선을 통과하려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그런 노력이 지금의 성장세를 만든 것 같아 대견하다”고 말했다.김재형 monami@donga.com·양종구 기자}

결승선을 통과한 김재훈(29·한국전력)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을 기다리던 동갑내기 예비 신부 김성은(삼성전자·사진)을 향해 다시 달렸다. 김재훈과 11월 결혼하는 김성은은 동아마라톤대회에서 통산 5차례 우승한 한국 여자 마라톤 간판이다. 김재훈은 김성은을 얼싸안고 기쁨에 차 한참을 울었다. 김재훈은 18일 열린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9회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13분24초의 기록으로 국내 남자부 1위에 올랐다. 2011년에 세운 개인 최고 기록(2시간17분48초)을 7년 만에 다시 썼다. 생애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돼 8월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아경기에 나서는 영예도 얻었다. 그동안 숱한 부상으로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어왔던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공백이 길었다. 오늘이 잘 실감나지 않는다. 최근 3년간 꾸준히 땀 흘렸던 노력이 결실을 본 것 같아 감개무량하다.” 그는 이번 대회 준비를 위해 1월 초부터 한 달여간 제주도에서 훈련하며 기량을 끌어올렸다. 이 기간에 세계적인 육상 지도자 레나토 카노바 감독(이탈리아)의 지도 아래 지구력과 고강도 스피드 훈련을 소화했다. 고질적인 정강이 피로골절로 이전까지 시도해보지 못했던 40km 이상의 고강도 훈련도 견뎌냈다. 김재훈은 “이전에는 중후반부에서 체력이 급락했는데, 이번에는 30km 이후에 선두로 치고 나갈 수 있었다”며 “이 페이스대로 아시아경기까지 컨디션을 끌어올려 선배들이 이룬 영광을 다시 보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동안 묵묵히 응원해준 예비 신부에게 감사의 마음도 전했다. 동료 선수이기도 한 김성은은 김재훈을 응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기 뛸 때의 마음가짐을 비롯해 실질적인 조언을 주기도 했다. 김성은은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 불참했다. 김성은은 “그동안 훈련한 만큼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해 안타까웠는데 오늘 잘해줘서 고맙고 자랑스럽다”며 예비 남편을 격려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12년 전 비등록 선수들이 참가하는 서울시 남부교육청 산하 육상 대회에 나간 것이 한국 마라톤 새 역사를 쓴 그의 시작이었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었던 김도연(25·K-water)은 이 대회 400m에서 1위에 올랐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체육 교사이자 고모인 김경선 씨(65)의 권유로 이듬해 서울체중으로 전학했다. 중장거리 육상 선수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김도연은 육상 선수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혹독한 성장통을 앓았다. 중학교 여자 중장거리 선수들이 뛰는 거리는 1500m와 3000m. 400m 이하 단거리 육상도 해보지 않은 ‘왕초보’로선 기초 체력을 키우고 자신만의 주법을 만들어야 했다. 보통 엘리트 선수들이 초등학교 4학년부터 운동을 시작한 것에 비해 3~4년 늦게 시작했으니 갈 길이 멀었다. 중학교 2학년의 김도연은 기초부터 충실히 다졌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팔벌려뛰기 등의 PT체조와 ‘팔치기(달릴 때 팔 동작)’라 부르는 달리기 자세 교정 훈련에 매진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땀이 흥건할 정도로 몸을 단련시켜야 하는 지루하고 고된 훈련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매번 울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김도연은 ‘조용한 악바리’였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사람들 앞에 잘 나서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모진 훈련을 군말 없이 이겨낼 만큼 다부졌고, 재능에 우쭐하지 않고 이를 실력으로 끌어올릴 만큼 생각이 깊었다. 장동영 감독과 함께 김도연의 중고교 시절을 지도한 서울체중·고교 김천성 코치는 “재능도 돋보였지만 성실함과 끈기가 빛나는 선수”라고 입을 모았다. 당시 김도연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운동과 수업을 병행해야 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일과에 적응해야 했다. 장 감독은 “오전 5시부터 시작되는 새벽 훈련에 김도연은 한 번도 늦거나 불평하지 않았다”며 “어린 나이에 갑자기 고된 훈련에 지쳤을 법도 한데 도연이에게는 묵묵하게 이를 견뎌낼 강인함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도연은 소리없이 강하면서도 정이 많기도 하다. 장 감독은 “실업팀 간 이후에도 모교를 방문해 불우한 후배 선수한테 선물도 주고 상금을 타면 후배들한테 맛있는 것도 사준다. 천성이 정말 착하다”고 말했다. 발목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좋아 탄력이 좋은 것이 김도연의 장점이었다. 살이 안 찌는 체질도 중장거리에선 유리했다. 기초가 탄탄해지자 곧바로 성과로 드러났다. 김도연은 선수 생활 2년째인 2008년 전국소년체전 3000m에서 9분40초82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땄다. 고교 시절 김도연은 국내 최정상급 중장거리 선수로 올라섰다. 고교 1학년 때는 제1회 한국청소년육상경기대회에서 9분39초29로 이 종목 한국 고교 선수 역대 3번째인 기록을 세웠다. 이듬해에 열린 제92회 전국체육대회 5000m에서도 이 종목 역대 세 번째 기록(16분10초43)을 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계속 기록을 깨나갈 거에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이 올라갈 겁니다.” 18일 2018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9회 동아마라톤에서 여자마라톤 한국최고기록(2시간25분41초)을 세운 그의 표정은 덤덤해 보였다. 마라톤 대회 출전은 이번이 세 번째. 40km 이상의 고강도 훈련도 단 한 번 했을 뿐. 그런데도 그는 “마지막 2km를 남겨두고 속력을 올렸는데 5km 남겨뒀을 때부터 그럴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며 웃었다. 마라톤 선수로 치면 초보에 불과한 그가 이렇게 단기간에 새 역사를 쓴 건 기적에 가깝다. 급성장의 원동력을 간결한 주법에서 찾는 전문가들이 많다. 이날 김도연의 경기 직전까지 한국 최고 기록 보유자였던 권은주 아식스코리아 마케팅 팀장(41)은 “도연이를 서울체고 졸업한 뒤 강원도청 시절 처음 봤는데 그 때 정말 놀랐다. 팔 동작과 달리는 폼이 너무 좋았다”며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으로 달려 조만간 일을 낼 것으로 봤는데 드디어 내 기록을 깼다”고 말했다. 김도연은 한국 여자마라톤의 10년을 이끌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이미 실업팀에서 여러 번 새 기록을 썼다. 지난해 7월에는 5000m에서, 올해 2월에는 하프마라톤에서 각각 15분34초17과 1시간11분0초의 한국최고기록을 세웠다. 이제 남은 건 1만km 한국기록. 그는 “그것도 올해 안에 갈아치울 거에요”라고 당차게 말했다. 김도연의 다음 목표는 8월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그는 “더운 날씨에 잘 적응만 하면 25분대 아니 그 이하도 가능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영근 K-water 감독은 “김도연과 함께 목표를 정해 차근차근 이뤄나가고 있다. 도연이는 순위가 아니라 기록과 싸우고 있다. 아시아경기에서는 2시간24분대로 골인하는 게 목표다. 그러면 성적도 좋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장애인아이스하키 한국과 캐나다의 준결승전이 열렸던 15일 강원 강릉하키센터. 경기 직전 한국 대표팀의 이지훈(29)은 몸을 풀면서 관중석을 확인했다. 지난해 10월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황선혜 씨(31)가 있는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신혼의 애뜻함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지훈은 한눈에 뚫어져라 자신을 살피고 있는 아내를 이내 찾아냈다. 이날 한국팀은 캐나다에 0-7로 패했다. 경기가 끝난 뒤 한국 대표팀이 경기장을 돌며 관중에게 감사 인사를 하던 중이었다. 이지훈은 자신에게 손으로 하트를 그리는 아내를 발견했다. 스틱을 들어 아내에게 사인을 보냈다. 비록 금·은은 아닐지라도 메달의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17일 동메달 결정전이 남았습니다. 아내, 부모님, 그리고 장모님한테도 꼭 메달 따서 목에 걸어드리기로 했어요. 무조건 메달을 따겠습니다.” 이지훈은 군 복무 중이던 8년 전 21살에 제대를 두 달 앞두고 장갑차에 깔리는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한순간에 양쪽 대퇴(넓적다리)부 아래를 절단한 장애인이 된 것이다. 요리사를 꿈꿨던 청년은 처음에는 “내가 왜 살아났을까”라며 좌절했다. “그렇게 계속 좌절하고만 있으니 더 힘들었어요. 어느 순간 ‘어차피 살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즐겁게 살자’라는 생각을 하게되더라고요. 그때부터 일부러 웃고 더 좋은 생각만 했어요.” 3개월간의 방황을 끝내고 그렇게 일어섰다.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 이지훈 오히려 더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의 그런 밝은 에너지는 지금의 아내와 인연을 맺는 다리가 됐다. 이지훈은 아이스하키를 주 종목으로 하면서도 여름 스포츠로 조정을 배웠다. 아내 황선혜 씨는 당시 조정 코치로 이지훈을 가르쳤다. 부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고교 시절과 20살 초반까지 조정 선수로 활동했던 황선혜 씨다. 그렇게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준비를 하던 2016년 여름 일주일간의 합숙기간, 둘은 코치와 선수로 만나 운명처럼 사랑을 키워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한테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분위기가 좋았어요. 그래서 계속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마음을 표현했죠.” 당시 황선혜 씨는 이지훈을 비롯해 장애인 선수들을 처음 대해봤다. 편견도 있었다. “처음엔 장애인 선수에게 제 나름의 편견이 있었어요. ‘어떻게 대해야 할까’ 뭐 이런. 약간 겁을 먹기도 했죠.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별다를 게 없었어요. 그중에서도 남편은 더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죠.” 합숙 훈련이 끝나는 날 이지훈은 황선혜 씨에게 고백했다. “당신은 장애인이 아니라서 솔직히 장애인인 저 같은 사람을 만나기 힘들겠지만, 저는 당신이 좋습니다.” 고백을 받고 황선혜 씨가 처음 고민했던 것은 이지훈의 장애가 아니었다. “주변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다만, 연애하다가 혹시 헤어질 수 있잖아요. 만약에 그랬을 때 지훈이가 더 상처를 받을까봐. 그게 걱정이었던 거였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저 나름의 편견이었던 것 같아요.” 둘을 지켜보는 주변의 시선은 무거웠다. 황선혜 씨의 부모님은 혹여 딸이 고생하진 않을지, 속앓이를 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병환으로 몸져누워있던 기간에 딸 황선혜 씨가 생계를 책임지며 유년기를 고생스럽게 보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더 완강하게 반대했다. “밥 한 번만 먹어보라”는 딸의 간곡한 요청 끝에 이지훈과의 첫 만남이 성사됐다. 이지훈과 황선혜 씨가 만남을 시작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지훈은 당시 아내의 부모님을 처음 만나러 가던 날을 “무서웠다”고 기억한다. ‘장애인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온갖 잡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처음 밥을 먹는데 두 분의 표정이 안 좋으신 거에요. 속으로 ‘큰일 났다 어떡하지….’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래서 더 웃고 환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지훈은 “나중에 선혜가 힘들지 않겠나”라는 지금의 장인 어른에게 질문을 받았다. 머리는 멍했지만, 가슴을 더 단단하게 여몄다. “자신 있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선혜 제가 잘 보필 수 있습니다.” 결국 둘은 그 첫 만남에 “예쁘게 만나라”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지금. 이지훈의 장인 장모님은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패럴림픽 경기장을 찾아 사위 이지훈을 보며 남들에게 “가문의 영광이다”고 자랑한다. 황선혜 씨에겐 “천사같은 아들이 생겼다”며 고마워한다. 그 사이 황선혜 씨에게 우려를 표하던 지인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둘을 보며 “장애인은 아무것도 못 한다”는 주변의 편견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황선혜 씨는 결혼 이후 남편과 함께 생활하면서 또 한번 그의 강인함을 배웠다. “남편이 집안일을 정말 잘 도와줘요. 제가 자는 사이 건조대에 있던 빨래가 다 정돈 돼 있죠. 강인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입니다.” 정작 이지훈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신혼다운 생활을 못했던 것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결혼 이후 6개월이 지난는 동안 합숙훈련 등으로 집안에 있었던 시간은 채 한 달이 되질 않는다. 신혼 여행도 4월로 미뤘다. 그런 남편에게 황선혜 씨는 “남편이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뛸 수 있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지훈은 그런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17일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에 나선다. 아래는 이지훈이 아내 황선혜 씨에게 전하는 짧은 편지 내용이다. “신혼 초인데 집보다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나 때문에 많이 외롭고 힘들었지? 지금까지 잘 참고 이겨내 줘서 너무 고마워. 이제 마지막 한 경기 동메달 결정이 남았어. 자기한테 약속했잖아. 메달따서 목에 걸어주기로! 빙판 위에 전사가 되어서 모든 걸 쏟아붓고 후회 없는 경기하고 갈게! 그리고 꼭 이겨서 메달가지고 갈게.”김재형기자 monami@donga.com}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이 18일 오후 8시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리는 폐회식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49개국 570명의 참가 선수들은 열흘간의 무대를 신체의 한계와 역경을 뛰어넘는 뜨거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다.》 “빙판 위 전사가 되어서 모든 힘을 쏟아붓고 후회 없이 뛸게. 꼭 이겨서 메달을 걸어 줄 거야.” 한국 장애인아이스하키 대표팀 이지훈(29)은 17일 이탈리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을 앞두고 아내 황선혜 씨(31)에게 각오를 전했다. 둘은 지난해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미루고 이번 대회를 준비했던 이지훈은 마지막 경기를 끝낸 뒤 황 씨를 위한 ‘메달 세리머니’를 꿈꾼다. 이지훈은 장갑차 조종수로 군 복무 중이던 2010년 11월 제대를 두 달 앞두고 장갑차에 깔렸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두 다리를 잘랐다. 장애인이 된 그는 처음에는 “내가 왜 살아났을까”라며 좌절하다 3개월 방황 끝에 다시 일어섰다. “어차피 살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즐겁게 살자는 마음이었죠. 일부러 웃고 더 좋은 생각만 떠올렸습니다.” 이지훈 특유의 ‘웃는 상(얼굴)’은 그렇게 탄생했다. 지금의 아내 황 씨가 반한 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표정이다. 이지훈은 2014년 아이스하키에 입문하며 운동선수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상체 근력을 키우기 위해 여름스포츠로 조정도 배웠다. 조정은 아내와의 인연을 맺어줬다. 이지훈이 조정 훈련을 위해 일주일간 합숙을 했던 2016년 10월. 황 씨는 당시 조정 코치로 이지훈을 포함해 장애인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지훈은 황 씨의 밝은 성격에, 황 씨는 이지훈의 당당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교제를 시작했다. 황 씨에게는 이지훈의 따뜻하고 강인한 마음만 보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엔 그의 장애만 보였던 모양이다. 황 씨에게 온갖 걱정이 쏟아졌다. 황 씨 부모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딸이 고생할까 봐 둘의 만남을 완강히 반대했다. “밥 한 번만 같이 먹어보자”는 황 씨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이지훈과 첫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장인어른은 ‘나중에 선혜가 힘들지 않겠나’라고 물었죠. 저는 ‘자신 있습니다. 그때는 그때고 선혜 제가 잘 보살필 수 있습니다’라고 당차게 답했습니다.” 이지훈은 그 자리에서 “예쁘게 만나라”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약 1년이 지나 장인 장모는 이지훈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장애인이란 편견이 가시자 이지훈의 진가가 보였다. 장인 장모는 사위 이지훈의 경기장을 찾아 “가문의 영광이다”고 주변에 자랑한다. 황 씨에겐 “천사 같은 아들이 생겼다”며 고마워한다. 황 씨는 “패럴림픽을 통해 남편이 살아있음을 느끼면서 뛸 수 있고, 또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지훈은 그런 황 씨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했다. “신혼인데 집보다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나 때문에 외롭고 힘들었지? 지금까지 잘 참고 이겨내 줘서 고마워. 이제 한 경기 동메달 결정전이 남았어. 자기한테 약속한 대로 꼭 이겨서 메달 걸어줄게.” 한편 한국 휠체어컬링 대표팀(예선 1위)도 17일 오전 9시 35분 강릉 컬링센터에서 캐나다(예선 2위)와 동메달 결정전을 치른다. 노르웨이와 중국이 결승에서 맞붙는다. 한국은 16일 강릉 컬링센터에서 열린 노르웨이(예선 4위)와의 준결승에서 연장 끝에 6-8로 졌다.김재형 monami@donga.com / 강릉=정윤철 기자}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22·한국체대)이 ‘황제’ 로저 페더러(37·스위스)와 다시 맞붙게 됐다. 세계 26위 정현은 1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인디언웰스에서 열린 남자프로테니스(ATP)투어 BNP파리바오픈 단식 16강전에서 파블로 쿠에바스(우루과이·34위)를 2-0(6-1, 6-3)으로 꺾었다. 정현은 제레미 샤르디(31·프랑스·세계 100위)를 2-0(7-5, 6-4)으로 제압한 세계 1위 페더러와 8강에서 만나게 됐다. 정현은 1월 호주오픈에서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남자 단식 4강에 올라 페더러를 만났다. 하지만 정현은 우상이던 페더러와의 첫 대결을 너무 허무하게 끝냈다. 대회 기간에 발바닥에 잡힌 물집이 악화돼 이미 16강전부터 진통제를 맞고 뛰던 정현이었다. 결국 정현은 페더러를 상대하던 2세트 도중 기권을 선언했다. 제대로 붙어보지도 못한 것이다. 정현은 대회 이후 “조금 허무하게 끝나 오히려 페더러에게 죄송하다”는 소감을 남겼다. 정현과 페더러는 16일 오전 11시에 8강전을 벌인다. 이번 대회는 ATP투어 대회 등급상 호주오픈을 포함한 4대 메이저대회 다음으로 무게감이 있는 ‘마스터스 1000시리즈’ 중 하나다. 정현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이 대회에서 페더러를 꺾는다면 세계 테니스계의 ‘차세대 주자’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현은 호주오픈 4강에 오른 이후 거침없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호주오픈을 포함해 올해 열린 ATP투어 5개 대회에서 모두 8강에 올랐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나는 오뚝이다.” 이도연(46·장애인 노르딕스키)이 11일 수없이 되뇐 말이다. 험난했던 지난 삶을 이겨내며 주문처럼 외던 말이었다. 이날 그는 강원 평창 바이애슬론센터에서 열린 크로스컨트리 여자 12km(좌식)를 완주했다. 19명 중 공동 13위. 1위 켄들 그레치(미국)보다 7분 이상이 뒤졌다. 2위는 안드레아 에스카우(독일), 3위는 옥사나 매스터스(미국)였다. 누군가에겐 초라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도연에겐 소중한 기록이다. 그는 코너를 돌다가 넘어지기도 했지만 “완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며 기어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 핸드사이클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이도연은 첫 겨울패럴림픽 도전을 마감한 뒤 만족감을 표시했다. “실수가 있었지만 정말 죽을 각오로 달렸습니다. 13위는 최선을 다한 결과예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아 기쁩니다.” 12년 전만 해도 이도연의 이런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기간에 이도연은 오로지 ‘세 딸의 엄마’로만 살아왔다. 장애인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자기 삶은 포기한 채 살았다. 그런 이도연을 바꾼 건 어머니 김삼순 씨(70)의 응원이었다. 이도연은 1991년 추락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활기찼던 그의 일상이 매 순간 극복의 시간으로 바뀌었다. 김 씨는 그런 딸을 다독이고 말없이 품었다. 딸이 옷걸이에 옷을 거는 것조차 힘겹다며 짜증을 부려도 김 씨는 화 한번 내지 않았다. 2006년 탁구를 접하며 이도연이 사회에 나설 때 제일 기뻐했던 것도 김 씨였다. “어머니는 ‘결과는 상관없으니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며 늘 응원해 줬어요.” 그렇게 이도연의 도전 인생이 시작했다. 이도연은 2012년 장애인전국체육대회에서 창, 원반, 포환던지기 등 3관왕을 차지했다. 2년 뒤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에선 사이클 금메달을 땄다. 한국 노르딕스키의 최고령 선수인 이도연은 이번 대회 남은 5경기도 빠짐없이 완주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진다. 그것이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어머니 응원 덕에 힘든 과정을 버텼어요. 힘들어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가 표현을 못하는데 어머니 정말정말 사랑합니다.” 평창=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휠체어컬링엔 ‘손맛’ 대신 ‘스틱 맛’이 있다. 투구하는 선수들 대부분은 비장애인 경기에는 없는 ‘딜리버리 스틱’을 이용한다. 장대 모양의 투구 보조기구로 휠체어에 앉은 선수가 허리를 숙이지 않고 스톤을 던질 수 있게 돕는다. 그 끝을 스톤 손잡이에 고정시킨 뒤 스틱에 반동을 줘서 투구하는 방식이다. 비장애인 선수들의 투구 동작은 거의 다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휠체어컬링에선 스틱을 잡는 손의 수부터 다양하다. 두 손으로 스틱을 미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한 손으로 미는 선수도 있다. 또한 휠체어 왼쪽 또는 오른쪽, 정면 등 스틱을 놓고 미는 방향도 제각각이다. 어떤 방식이든 흔들림 없이 정확하게 스틱을 움직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비장애인 경기에서 브러시는 공의 궤적을 바꾸기 위해 얼음판에 빗자루질을 하는 데 쓰인다. 하지만 휠체어컬링에서 이 장비는 투구자에게 목표 지점을 알려주는 용도로만 쓰인다. 경기장에 떨어질까 봐 털도 없다. 그 대신 투구자의 눈에 더 잘 보이도록 밑부분을 형광물질로 만든다. 한편 한국 대표팀은 11일 강릉 컬링센터에서 열린 슬로바키아와의 예선 3차전에서 7-5로 이기며 3연승을 달렸다. 평창=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특수부대 복무를 마친 건장한 청년이었지만 2006년 대학 졸업식 하루 전날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어머니에게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몸부림치던 아들이었다. 3년간 방에 틀어박혀 술에만 의지했다. 세상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스포츠로 삶의 의지를 되찾은 아들이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 한국 선수단에 첫 메달을 안겼다. 신의현(38·창성건설)은 11일 강원 평창에서 열린 크로스컨트리 남자 15km(좌식)에서 42분28초9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겨울올림픽과 패럴림픽 통틀어 한국 선수가 이 종목 메달을 딴 건 처음. 한국의 역대 겨울패럴림픽 세 번째 메달이다. 신의현은 전날 바이애슬론(크로스컨트리+사격) 남자 7.5km(좌식)에서 사격 실수로 5위를 했다. 한국 패럴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목표로 했던 신의현은 어머니 이회갑 씨(68)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잘했어 우리 아들. 메달 안 따도 최고야”라고 했다. 메달을 못 딴 아쉬움에 “다음 경기에선 꼭 메달을 따겠다”고 외치기도 했던 아들은 하루 뒤 메달로 보답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신의현의 아버지 신만균 씨(71)는 관중석의 함성과 “신의현”을 외치는 소리가 커져갈 때야 아들의 선전을 바라며 힘껏 손뼉을 쳤다. 주변에 있던 친척의 귀띔을 받고서였다. 신 씨는 60세 이후 질환이 찾아와 시력을 잃었고 현재 시각장애 1급이다. 경기 후 가쁜 숨을 내쉰 신의현은 “초반에 (선두보다) 30초가 뒤진다는 코치의 사인을 보고 이를 만회하려고 계속 달렸다”며 “‘가야 된다’고 주문을 걸면서 팔을 움직였는데 경기 후반에 체력이 떨어졌다”며 경기를 되돌아봤다. 그의 고향인 충남 공주시에서 친척과 친구 30여 명이 찾아와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친구들은 “의현이가 중학교 때부터 농사일을 돕고 칡도 캐다 드리는 등 효자였다”고 전했다. 아들 딸의 손을 잡고 남편을 응원하러온 김희선 씨(30)도 남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19세에 베트남에서 시집온 그는 시댁의 밤농사를 돕고 틈틈이 한식과 중식 조리사 자격증까지 따며 남편을 살뜰히 챙겼다. 김 씨는 “그동안 훈련을 위해 해외에 나가 외롭게 생활했을 남편만 생각하면 너무 안쓰러웠다”며 “어려움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경기를 마친 남편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신의현은 “응원 소리가 커지는 구간으로 들어서면 ‘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달렸다”라면서도 “이번 메달은 시작이다. (금메달) 욕심이 난다.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마음 졸이며 경기를 지켜봤는데 메달을 따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신의현은 메달을 목에 건 뒤 “어제 왜 울었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아니라 땀이었다”며 웃었다. 최종 주자로 나섰던 막심 야로비(우크라이나·41분37초)가 1위, 대니얼 크노센(미국·42분20초7)이 2위를 했다. 평창=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장애인 아이스하키에선 썰매와 스틱 활용법도 관전 포인트다. 이 두 장비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알면 경기를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썰매는 선수들의 몸을 담고 지탱하는 ‘바스켓’과 썰매날로 이뤄졌다. 선수들은 상체는 물론이고 이 썰매를 활용해 보디체크(몸을 충돌시키는 것)를 한다. 썰매끼리 부딪쳐 상대편의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리는 것이다. 퍽을 몰아갈 때는 썰매 밑 공간을 활용한다. ‘빙판 위의 리오넬 메시’로 불리는 한국의 정승환(32)은 썰매 아래로 퍽을 요리조리 돌리며 질주하는 데 능하다. 스틱은 퍽을 치는 용도 이외에 썰매에 추진력을 주기 위해 이용된다. 스틱 위쪽에는 퍽을 치는 블레이드가 달려 있고 스틱 아래쪽에는 얼음을 찍어 썰매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픽(pick)이 달려 있다. 이 픽을 얼마나 힘차게 또 부드럽게 찍느냐에 따라 선수들의 빠르기가 결정된다. 선수들은 양손에 하나씩 두 개의 스틱을 들고 경기를 한다. 비장애인 경기에선 볼 수 없는 양손 드리블을 볼 수 있다. 정영준 대한장애인아이스하키협회 사무국장은 “장애인 아이스키는 경기를 한 번 하고 나면 몸무게가 비장애인 선수들보다 훨씬 더 빠진다. 장애인 스포츠 중 가장 과격하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다”라고 설명했다.강릉=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두 손을 꼭 잡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성화대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봤다. 30년 전보다 더 환했다. 이 땅의 첫 번째 패럴림픽이 열렸을 땐 ‘장애인’이란 용어조차 어색했다. 하지만 이번 개회식을 장식한 장애인 문화 콘텐츠는 풍요로웠다. 밝게 타오른 성화는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약속의 ‘불꽃’이라고 생각했다.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 개회식이 열린 9일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을 찾은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회장(61)은 1988년 열린 서울 장애자올림픽(패럴림픽의 당시 명칭) 개·폐회식에 연출 작가로 참여했다. 당시 개회식에는 장애인 선수들은 등장했지만 장애인 예술인은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개회식에서는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가수 황영택과 휠체어 합창단이 애국가를 부르고 시각장애인 가수 이소정이 아이들과 함께 꿈을 타고 항해했다. 장애인이 주인공이었고, 이들의 힘찬 활동이 감동을 자아냈다. “우린 서울 장애자올림픽의 유산 위에서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그 유산이 불꽃이 되어 성화대에서 빛나고 있네요.” 그 또한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다. 전동기가 없어 손으로 휠체어를 밀어야 했던 당시, 방 회장은 “최종 점화자로 나선 육상 선수 조현희의 휠체어를 여섯 살 딸이 밀어서 점화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30년 전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개회식에 나온 한 선수가 결혼해 자녀를 두고 있다는 소개가 방송에 나오자 방 회장에게 “장애인도 결혼할 수 있나”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방 회장은 개회식에 사용될 장애인 관련 용어부터 정리했다. 이전까지 장애인을 장애자로, 청각장애인을 농아로, 시각장애인을 맹인으로 불렀다. 휠체어 등 장애인이 사용하던 물품을 두고서도 여러 용어가 혼용됐다. 방 회장은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당시 장애인 관련 용어를 정리하기 위해 국회도서관에서 수개월을 보냈다. 선진국의 장애인 정책 자료도 찾아 헤맸다. 당시 방 회장은 주변에 패럴림픽 개최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다녔다. 당시에는 장애인들조차도 “굳이 큰돈을 써서 대회를 치를 게 아니라 그 돈을 장애인 복지에 써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비판하곤 했다. 이에 방 회장은 먼저 패럴림픽을 개최한 일본의 사례를 들며 맞섰다. “1964년 패럴림픽 개최 이후 일본 사회는 장애인 제도와 시설 등에서 천지개벽을 했습니다. 그 사례를 들며 ‘패럴림픽을 개최하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나 제도를 20년 앞당길 수 있다’며 설득했죠.” 그렇게 국내 첫 패럴림픽 개최를 위해 땀 흘렸던 방 회장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평창에서 다시 패럴림픽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며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변화를 느꼈다. “그 사이 한국 사회는 횡단보도 턱과 계단투성이 공공시설물이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는 경사로로 바뀌는 등 물리적 한계를 극복했습니다. 장애인복지법 등이 마련되면서 장애인의 생활환경도 개선됐죠. 어쩌면 오늘 제가 개회식에서 본 것은 이런 변화상의 요약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는 이번 평창 겨울패럴림픽 조직위원회에서도 2015년에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그는 이번 패럴림픽이 ‘문화 패럴림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 편의 등이 확대되는 것뿐만 아니라 장애인들이 문화적으로 더 큰 역할을 하고 문화적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번 패럴림픽은 인식의 장벽을 없애는 ‘문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무장애)’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문화는 장애인을 정서적으로 포용하죠. 그렇게 한국 사회가 한 번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평창=김재형 monami@donga.com·임보미 기자}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 한 것만 세 번이다. 좌절에 빠져 죽음만을 떠올리던 그때 기적처럼 찾아온 희망은 휠체어컬링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그는 하루 6시간의 맹훈련을 참아낸 끝에 국가대표가 됐다. 죽음을 극복하게 한 컬링과 함께한 ‘제2의 인생’. 이 때문에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을 앞둔 그의 의지는 단단하다.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서 한없이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그래서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다하는 날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패럴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 중 최고령인 휠체어컬링 대표팀 서드 정승원(60)의 얘기다. 대표팀 맏형인 그는 “큰형으로서 가장 큰 목소리로 ‘아악!’이라고 기합을 불어넣으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피눈물을 흘렸던 과거를 패럴림픽을 통해 씻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정승원의 ‘제1의 인생’은 불의의 사고로 막을 내렸다. 1980년대 건설사에 취직해 10년 넘게 해외 근무를 했던 그는 개인 사업을 하기 위해 1994년 귀국했다. 그때 회사에서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잠깐 나와 일손을 보태 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2t 무게의 자재에 깔리면서 하반신이 마비됐다. 정승원은 “사람들이 제가 죽은 줄 알고 가마니로 덮어 놓은 걸 어머니가 와서 맥을 짚어보고는 살았다고 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그는 3년간 병원에 누워만 있었다.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을 거의 다 떼어냈다. 정승원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었다”고 말했다. 정승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지인의 한마디였다. “형님 인생을 왜 포기하려고 하세요. 병원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어요. 장애인이 국가대표도 될 수 있는 세상이에요.” 병원을 나온 그는 용기를 내 장애인스포츠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론볼(잔디에서 정해진 표적 공에 가깝게 공을 굴리는 경기)을 했다가 휠체어컬링으로 종목을 바꿨다. 정승원은 “컬링을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아만 있으면 장기가 밑으로 처져 오래 살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각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까지 정승원의 컬링 경력은 14년. 하지만 패럴림픽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승원은 “패럴림픽 선발전에서는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때마다 6개월 정도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 덕분에 평창 패럴림픽 대표팀에 합류했다. 정승원은 “올해 말이면 환갑이기 때문에 이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번 패럴림픽이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고 말했다. 그는 “안방에서 패럴림픽이 열린다. 우리 팀을 제외한 11개 팀은 손님이라고 생각한다. 손님에게 금메달을 내줄 순 없다”고 덧붙였다. 휠체어컬링 대표팀은 경기 전에 “아리아리”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는 ‘없는 길을 찾아가거나 길이 없을 때 길을 낸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정승원은 “내가 휠체어컬링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듯이 앞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통로에 서 있는 장애인들이 패럴림픽에서 선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계 7위 한국은 10일 강릉컬링센터에서 미국(세계 6위)과 예선 첫 경기를 치른다. 정윤철 trigger@donga.com·김재형 기자}
폭설을 동반한 강추위가 평창 패럴림픽 개회식의 변수로 떠올랐다. 올림픽 폐회를 기점으로 한풀 꺾였던 강원 평창의 추위는 이번 달 둘째 주부터 눈과 함께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앞서 열린 올림픽에서도 똑같은 걱정이 계속됐다. 개·폐회식 당일에는 눈비 없이 상대적으로 따뜻한 날씨에서 개·폐회식을 치러 ‘하늘이 도왔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올림픽 폐회 12일 만에 강추위가 또다시 평창을 덮쳐 ‘날씨 걱정’이 되살아났다. 기상청에 따르면 9일 개회식장 기온은 영하 7도에서 영하 5도 사이로 예상된다. 앞서 열린 평창 올림픽 개회식 때(영하 2∼영하 3도)보다 추위가 더할 것이란 전망이다. 이와 함께 초속 3∼5m의 강풍이 동반돼 체감온도는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폭설로 인한 교통 대란도 고민거리다. 7일부터 시작된 폭설로 8일 기준 개회식장 주변엔 20cm 이상의 눈이 쌓였다. 다행히 개회식 당일 오후에 눈 예보는 없지만, 평창조직위는 교통 대란을 막기 위해 대대적인 제설작업에 착수했다. 인근 군부대 등에서 1100여 명이 동원됐다. 눈은 개회식이 열리는 9일 오전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평창조직위 관계자는 “평창 올림픽 때와 마찬가지로 롱패딩과 방한화 등을 꼭 챙겨야 한다. 봄 날씨를 생각하고 왔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강릉=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9일 개막하는 2018 평창 패럴림픽 개회식 남북 공동 입장이 무산됐다. 남북이 함께 들고 입장할 예정이었던 한반도기의 ‘독도 표기’ 문제가 발단이었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8일 오후 “한국과 북측 선수단이 개회식에서 각각 태극기와 인공기를 든 채 따로 입장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가 한반도기에 독도를 표기해 달라는 북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런 결정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날 이명호 대한장애인체육회장 등 남측 대표단은 2차례에 걸쳐 김문철 북한 장애자올림픽위원회 대표단장 및 IPC 관계자와 함께 남북 공동 입장을 논의했다. 1차 회의 때부터 IPC 측은 북측과의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2차 회의에서도 결론을 바꾸진 못했다. 북측 김문철 단장은 “정치적 이유로 한반도기에 독도를 표기하지 못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다”며 “우리의 국토를 표기하지 못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평창 올림픽 공동 입장은 인민(북한 주민)들에게 큰 감동을 줬지만 (독도가 표기되지 않아) 슬픔도 줬다”는 말을 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이에 IPC 측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강력한 파트너십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올림픽에서 이미 쓰인 한반도기를 변경할 수 없다”고 맞섰다. 앞서 평창 겨울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이 공동 입장할 때 들었던 한반도기에는 독도가 표시되지 않았다. 남북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처음 공동 입장했고 한반도기를 사용했다. 그때에도 독도 표기 논란이 있었지만 IOC의 정치적 표현 금지 조항과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 등을 고려해 제주도를 제외한 섬 표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IPC 측은 북한이 주장을 굽히지 않자 “더 이상 논쟁을 원치 않으니 개별 입장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북한은 이번 패럴림픽을 위해 7일 선수단 20명과 대표단 4명 등 총 24명을 7일 한국으로 보냈다. 대한장애인체육회는 남북 공동 입장은 무산됐지만, 성화 봉송은 공동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IPC에 제안했다. 개회식이 열리는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 성화가 들어설 때 남북 선수가 나란히 나서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개최국으로서 49개 참가국 중 마지막에 입장하고 북한은 일본에 이어 입장할 것으로 알려졌다.강릉=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한 것만 세 번 이다. 좌절에 빠져 죽음만을 떠올리던 그때 기적처럼 찾아온 희망은 휠체어컬링이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그는 하루 6시간의 맹훈련을 참아낸 끝에 국가대표가 됐다. 죽음을 극복하게 한 컬링과 함께한 ‘제2의 인생’. 이 때문에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을 앞둔 그의 의지는 단단하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서 한없이 애국가를 부르고 싶다. 그래서 하늘이 정해준 운명이 다하는 날 여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패럴림픽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 중 최고령인 휠체어컬링 대표팀 서드 정승원(60)의 얘기다. 대표팀 맏형인 그는 “큰 형으로서 가장 큰 목소리로 ‘아악!’이라고 기합을 불어넣으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피눈물을 흘렸던 과거를 패럴림픽을 통해 씻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정승원의 ‘제 1의 인생’은 불의의 사고로 막을 내렸다. 1980년대 건설사에 취직해 10년 넘게 해외 근무를 했던 그는 개인 사업을 하기 위해 1994년 귀국했다. 그때 회사에서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잠깐 나와 일손을 보태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2톤 무게의 자재에 깔리면서 하반신이 마비됐다. 정승원은 “사람들이 제가 죽은 줄 알고 가마니로 덮어 놓은걸 어머니가 와서 맥을 짚어보고는 살았다고 해서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그는 3년간 병원에 누워만 있었다.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을 거의 다 떼어냈다. 정승원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었다”고 말했다. 정승원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지인의 한 마디였다. “형님 인생을 왜 포기하려고 하세요. 병원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어요. 장애인이 국가대표도 될 수 있는 세상이에요.” 병원을 나온 그는 용기를 내 장애인스포츠에 도전했다. 처음에는 론볼(잔디에서 정해진 표적공에 가깝게 공을 굴리는 경기)을 했다가 휠체어컬링으로 종목을 바꿨다. 정승원은 “컬링을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아만 있으면 장기가 밑으로 처져 오래 살지 못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운동을 꾸준히 한 덕분에 건강도 좋아졌고, 삶에 대한 긍정적 생각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까지 정승원의 컬링 경력은 14년. 하지만 패럴림픽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승원은 “패럴림픽 선발전에서는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그때마다 6개월 정도 잠을 제대로 못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체력 관리를 한 덕분에 평창 패럴림픽 대표팀에 합류했다. 정승원은 “올해 말이면 환갑이기 때문에 이제 선수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번 패럴림픽이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고 말했다. 그는 “안방에서 패럴림픽이 열린다. 우리 팀을 제외한 11개 팀은 손님이라고 생각한다. 손님에게 금메달을 내줄 순 없다”고 덧붙였다. 휠체어컬링 대표팀은 경기 전에 “아리아리”라는 구호를 외친다. 이는 ‘없는 길을 찾아가거나 길이 없을 때 길을 낸다’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정승원은 “내가 휠체어컬링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듯이 앞길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통로에 서 있는 장애인들이 패럴림픽에서 선전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새로운 길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계 7위 한국은 10일 강릉컬링센터에서 미국(세계 6위)과 예선 첫 경기를 치른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서보라미(32)는 병실 한구석 간이침대에 쭈그려 자고 있던 어머니 이희자 씨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여고 3학년이었던 2004년 4월. 당시 계단에 넘어져 척수를 다친 서보라미는 하반신 마비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머릿속엔 극단적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변이 온통 죽을 길로만 보였던 그를 어머니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직장 일도 그만두시고 오로지 저를 위해 살았어요. 본인의 삶을 제게 나눠준 셈입니다. 태어났을 때 한 번, 그리고 그때 또 한 번 저를 세상에 나서게 했습니다.” 한국 장애인 크로스컨트리스키 여자 1호 국가대표 서보라미가 어머니 눈앞에서 질주를 꿈꾼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을 시작으로 이번이 세 번째 패럴림픽이다. 그는 극한의 스포츠로 손꼽히는 장거리 12km를 포함해 크로스컨트리 4개 세부 종목에 출전한다. 첫 패럴림픽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나섰다. 2007년 우연히 참여한 스키캠프에서 스키와 인연을 맺은 지 3년이 채 못 된 시점이었다. “그땐 다른 장애인 선수를 보며 새로운 세상에 눈뜨던 배움의 시간이었어요.” 두 번째 대회인 소치 겨울올림픽(1km 15위·5km 14위)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의지는 넘쳤지만,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자평이다. 국내 유일의 크로스컨트리 선수로서 그를 제대로 지도해줄 훈련 환경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장비 숙련도도 높아졌고, 레이싱 노하우도 쌓였다. “어떤 자세로 스키를 탈지조차 몰랐던 과거와는 달라요. 이젠 혼자 장비를 상황에 맞게 다룰 줄도 알고요. 무엇보다 안방에서 열리다 보니 자신감도 넘칩니다.” 서보라미는 본받고 싶은 선수로 한국 여자 크로스컨트리의 간판 이채원(37)을 손꼽는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부터 평창까지 16년 동안 묵묵히 올림픽에 출전해온 그의 끈기에 감명을 받았다. “(이)채원 언니는 자신의 갈 길을 끈기 있게 걸어왔잖아요. 메달을 꼭 따지 않아도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것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누가 알아주든 말든 이채원처럼 묵묵히 자기만의 인생을 달리고 싶다. 겨울 훈련 때 하반신 마비로 아픔을 느끼지 못해 수도 없이 동상에 걸리기도 했지만, 서보라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를 보며 희망을 키우는 장애인도 늘었다. ‘1호 선수’라는 타이틀은 어느새 무거운 책임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다. “이 종목이 어려워 들어왔다가도 나가는 사람이 많은데 제가 진득하게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명맥이 유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보라미는 처음으로 패럴림픽 경기장을 찾아 딸의 경기를 직접 응원할 어머니를 생각한다. “이번만큼은 눈물로 경기를 놓치지 말고 딸이 설원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봐 달라”고 말했다. “매번 어머니는 제 경기를 보고 우셨어요. 그래서 또 눈물로 제 경기를 볼까 봐 걱정입니다. 이번엔 제가 달리는 모습을 꼭 지켜봐 줬으면 해요. 그간 어머니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제 온몸으로 증명해 보고 싶습니다.”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평창 겨울올림픽 성화가 꺼지면서 경기장 사후 활용을 둘러싼 논쟁의 불꽃이 커지고 있다. 평창에서 스켈레톤 윤성빈의 금메달과 봅슬레이 남자 4인승 은메달을 이끈 이용 봅슬레이스켈레톤 총감독은 7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올해 평창 슬라이딩센터의 운영이 불투명해졌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초 이날 행사는 봅슬레이 4인승 은메달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이 감독은 오히려 비인기 종목의 잿빛 미래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이 감독은 “최근 정부 예산 부족으로 경기장 활용이 불투명해졌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선수는 경기를 뛰어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이제 갓 싹트기 시작한 한국 봅슬레이, 스켈레톤이 죽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수천억 원을 들여 만든 경기장에서 선수들이 마음껏 훈련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메달의 기적을 썼는데 일회성으로 끝날까 봐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행사에 참석한 봅슬레이 4인승 대표팀 파일럿 원윤종은 “앞으로 월드컵 대회나 세계선수권이 있는데 다시 외국 나가서 해외 썰매장을 빌려 훈련해야 하게 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 같은 문제 제기는 예견된 일이었다. 봅슬레이와 스켈레톤, 루지 등 썰매 종목 경기가 열린 평창 슬라이딩센터는 사후 관리 주최가 정해지지 않은 3개 경기장 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연간 17억 원 정도인 유지비를 마련할 방법을 못 찾아 운영에 차질이 빚어졌다. 현재 경기장 실소유주인 강원도는 평창 올림픽 경기장 사후 활용 방안과 관련해 정부에 국비를 늘려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맞선다. 강원도나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이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강원도 측은 평창 올림픽 경기장 모두를 운영하기엔 예산이 부족하니 정부도 비용 부담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평창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조직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경기장을 존치하려면 1년 내내 누군가 상주하며 냉매 가스(암모니아)를 관리해야 해 비용도 막대하고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또 정부 지원이 줄면서 차세대 주자로 육성하려 했던 15명의 봅슬레이, 스켈레톤 고교생 및 대학생 유망주도 설 땅을 잃었다고 호소했다. 이 중엔 2022 베이징 올림픽에서 윤성빈과 함께 스켈레톤 시상대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는 정승기(19)가 포함돼 있다.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한국 휠체어컬링 대표팀 스킵(주장) 서순석(47)이 투구한 스톤이 느린 속도로 하우스를 향해 굴러간다. “웨이트!”(스톤 속도가 빨라져야 한다는 뜻)라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두 번째로 투구한 스톤의 속도가 다소 빨라 보이면 대표팀 선수들은 “워∼”(스톤 속도가 느려져야 한다는 뜻)라고 외친다. 어쩌면 허공에 외치는 소리 같다. 지시에 맞춰 스위핑을 하는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휠체어컬링에서는 휠체어를 탄 선수들의 안전을 고려해 선수들이 얼음을 문지르는 스위핑(비질)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여자 컬링 대표팀의 최고 유행어 “영미!”(주장 김은정이 리드 김영미에게 스위핑을 지시하는 말)처럼 특정 선수의 이름을 휠체어컬링 경기에서 들을 수 없는 이유다. 지시를 이행할 선수가 없음에도 선수들은 구호를 목청껏 외친다. 마음껏 큰 소리를 내기 위해 목이 쉬거나 부었을 때를 대비한 약을 잔뜩 구해 놓기도 했다.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 출전을 앞둔 대표팀 선수들은 “우리가 구호를 외치는 것은 다음 투구를 위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스톤이 나아가는 상황을 큰 소리로 전하면서 빙질의 상태나 스톤의 속도에 대한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비장애인 컬링 선수들은 투구 실수가 있어도 스위핑으로 스톤의 방향과 속도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스위핑이 없는 휠체어컬링에서는 한 번 투구할 때의 힘과 각도가 그만큼 더 중요하다. 세컨드 차재관(46)은 6일 “스톤 속도에 대한 구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아이스 상태를 전달한다. 다음 투구자는 이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스톤을 놓을 때의 힘을 조절한다”고 말했다. 휠체어에 앉은 선수들이 허리를 숙이기 어렵기 때문에 대부분 투구 보조기구(딜리버리 스틱, 익스텐더 큐라고 불리는 장대)를 써 스톤을 밀어 보낸다. 서드 이동하(45)는 “휠체어컬링은 투구 한 방에 승부가 갈릴 수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스톤을 던지는 팔의 근육과 손 감각이 중요하다. 팔의 근력을 늘리기 위해 하루에 두 시간씩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작은 공을 만지면서 손가락의 미세한 근육과 감각을 기르기 위해 노력했다. 대표팀 선수들은 경기 이천훈련원에서 하루 6시간씩 훈련해왔다. 선수마다 스톤을 하루 100개씩 투구하며 맹훈련했다. 차재관은 “모두가 함께 구호를 외치면서 스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함께 기원하고, 큰 목소리로 상대 팀의 기를 죽인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경기 중에 조용하다면 크게 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며 웃었다. 백종철 감독(43)은 “이천훈련원 컬링장에 관중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붙여놓기도 했고, 비장애인 선수들의 실제 경기 육성과 응원 소리 등을 녹음해 훈련 때마다 틀면서 실전과 같은 훈련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척수 장애인 선수들로 구성된 휠체어컬링 대표팀(세계 7위)은 금메달이 목표다. 한국 휠체어컬링은 2010년 밴쿠버 패럴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것이 최고 성적이다. 대표팀은 지난달 브리티시오픈에서 전승 우승을 차지하며 상승세를 타고 있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는 “한국 휠체어컬링은 밴쿠버 겨울올림픽 은메달보다 업그레이드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드 정승원(60)은 “평창 겨울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팀이 금메달 자리를 비워 놨다. 우리가 금메달을 따서 컬링 열풍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했다. 패럴림픽 휠체어컬링은 12개 팀이 참가해 예선을 치른 뒤 상위 4개 팀이 플레이오프에 나선다. 대표팀 선수들은 자신들을 ‘오성(五姓) 어벤저스’로 불러 달라고 했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컬링 대표팀 ‘팀 킴’의 성은 모두 김씨였다. 또한 영화 ‘어벤저스’에서 따온 ‘컬벤저스(컬링+어벤저스)’로 불러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반면 휠체어컬링 선수 5명은 성이 모두 다르다고 해서 ‘오성 어벤저스’란다. 휠체어컬링 팀에는 여성 한 명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 한국팀은 스킵 서순석, 세컨드 차재관, 서드 정승원 이동하에 리드 방민자(56)가 여성 멤버로 참가한다. 정윤철 trigger@donga.com·김재형 기자}

2006년 2월 대학 졸업식 하루 전날. 꿈 많던 20대 청년 신의현(38·창성건설)은 교통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다. 삶의 의미가 사라진 듯했다. “나를 왜 살려놨느냐.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몸부림치며 자신을 살려낸 어머니와 의사를 원망했다. 술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살았지만 죽어 있던 시간이다. 삶의 의지를 되살린 건 3년 뒤 지인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은 휠체어 농구였다. 얼음장 같던 신의현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깃들었다. 2015년 8월 노르딕스키에 입문했다. 메말랐던 가슴에 불꽃 하나가 일렁였다. ‘패럴림픽 금메달.’ 부러졌던 인생의 이정표가 다시 세워졌다. 신의현은 9일 개막하는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에서 최고의 순간을 꿈꾼다. 사고 이후 죽음을 기도했던 그의 마음은 이젠 “‘죽을 각오’로 이번 대회를 위해 뛰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로 바뀌었다. 노르딕스키 대표로 출전하는 그는 ‘은메달 두 개’가 전부인 한국 패럴림픽 역사를 다시 쓸 주역으로 손꼽힌다. 한국은 1992년 티뉴-알베르빌 대회 이후 소치 대회까지 7회 연속 겨울패럴림픽에 출전했다. 메달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미국) 은메달(한상민·알파인스키)과 2010년 밴쿠버(캐나다) 은메달(휠체어컬링)이 전부. “금메달 2개를 노리고 있습니다. 크로스컨트리와 바이애슬론에서 한 개씩 금메달을 따는 게 목표예요.” 최근 패럴림픽 한국 선수단 출정식에서 신의현은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간 흘린 땀과 실력에 자신감이 충만해 있다. 신의현은 지난달 4일 핀란드에서 열린 세계장애인노르딕스키월드컵 바이애슬론 7.5km 남자 좌식 부문에서 우승하며 이 종목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노르딕스키 입문 2년여 만에 따낸 쾌거. 돌이켜 보면 신의현은 좀처럼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지으며 강한 허릿심을 길렀다. 휠체어 농구를 하면서는 순발력을 높였다. 그 순간들이 축적돼 노르딕스키를 자신의 놀이로 만들게 됐다. 그는 지난해 2월 전국장애인겨울체육대회 3관왕에 오르며 국내 최강자로 떠올랐고, 올해 1월 리비브(우크라이나) 월드컵에서 비장애인을 통틀어 한국 노르딕스키 사상 처음으로 우승(2관왕)하면서 세계 정상의 기량을 과시했다. 신의현은 이번 대회에 바이애슬론 이외에도 크로스컨트리 스프린트, 중거리, 장거리 등 6개 세부 종목 출전권을 따냈다. 포기하려 했던 신의현의 생은 그만큼 강인했고 끈질겼다. 그는 10일 바이애슬론 남자 스프린트 7.5km에 나선다. 이날 대한민국 패럴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의현은 한때 자기를 살려내 원망했던 어머니 이회갑 씨(68)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 “한때 그런 생각을 했던 아들 때문에 상처받았을 어머니가 이젠 그 아들을 보고 웃으셨으면 합니다. 주위에 ‘내 아들이다’라고 자랑도 하고…. 그때 눈물 흘리며 아들의 삶을 바랐던 그 간절함에 보답하고 싶어요. 어머니에게 애정 표현을 못하는데 이런 말을 하게 되네요(웃음).”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기성용(29·스완지시티)의 공격 본능이 살아나고 있다. 기성용은 4일 웨일스 스완지 리버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웨스트햄과의 안방경기에서 1골 1도움으로 4-1 승리를 주도했다. 지난달 11일 번리전에서의 시즌 1호 골에 이어 기성용은 카를루스 카르발(련,연) 감독 체제 아래서 공격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지난해 말 스완지시티의 지휘봉을 잡은 카르발(련,연) 감독은 기존 이탈리아식 수비 축구에서 벗어나 공격에 좀더 무게를 두는 전술을 구사한다. 이전보다 기성용의 수비 가담을 줄이는 대신 그가 볼 배급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기성용은 페널티 박스까지 자주 올라가 중거리 슛을 쏘며 직접 골까지 노리는 모습을 보인다. 기성용의 상승세와 함께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최하위에 머물던 팀 순위는 4일 현재 13위로 뛰어올라 강등권에서 벗어났다. 이탈리아 언론은 기성용의 이탈리아 AC 밀란 이적을 점치는 보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기성용과의 계약이 올여름에 만료되는 스완지시티는 상승세 유지를 위해 그의 잔류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손흥민(26·토트넘)은 허더즈필드와의 안방경기에서 두 골을 몰아치며 리그 10호(시즌 15호) 골을 달성했다. 1일 로치데일과의 잉글랜드 축구협회(FA)컵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한 손흥민은 지난 시즌보다 한 달 일찍 두 자릿수를 넘어서면서 EPL 득점 순위 ‘톱10’ 진입과 함께 차범근 전 감독이 보유한 아시아 선수 유럽 리그 한 시즌 최다골 기록(17호) 경신까지 넘볼 수 있게 됐다. 연일 맹위를 떨치는 기성용과 손흥민이 한국축구대표팀 유럽 평가전(24일 북아일랜드, 28일 폴란드)에서 기세를 이어갈지도 관심거리다. 김재형 기자 mona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