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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1919년 7월 10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힌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서대문감옥에 투옥돼 있었다. 당시 일제 검찰의 신문을 받던 한용운은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라는 글을 하루 만에 써내며 3·1운동의 동기와 당위성을 알렸다. 옥중서간으로 한용운의 독립에 대한 사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로 평가받는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육필 원고가 처음 공개된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1일 개막하는 3·1운동 100주년 특별전 ‘자화상-나를 보다’에서 한용운의 친필 원고와 백범 김구의 친필 유묵 ‘한운야학(閑雲野鶴)’ 등 130여 점의 유물을 공개한다.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한용운의 친필 원고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이 작성한 ‘동양평화론’과 더불어 죽음을 대면하고 쓴 옥중서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4월 21일까지. 3000~5000원. 국내 대표적인 박물관에서 특색 있는 3·1운동 10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국가기록원,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과 공동으로 특별전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을 진행한다. 한국 근현대사 전문 문화기관답게 기미독립선언서, 임시정부가 펴낸 기관지 ‘독립신문’, 기독교계 대표 11명이 서명한 ‘대한국 야소교회 대표자 호소문’ 등 200여 점을 대거 공개한다. 유물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95-1호)와 박은식이 집필한 역사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임시정부 시민증이 눈에 띈다. 영웅적인 독립운동가 뿐 아니라 평범한 민초들의 삶을 주목한 점 역시 흥미롭다. 1919년 3월 5일 학생 시위를 주도한 한위건, 독립을 청원하는 ‘대일본장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한 유학자 김윤식, 남편을 잃은 제암리 주민 전동례 등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9월 15일까지. 무료. 국립고궁박물관은 기획전 ‘100년 전, 고종 황제의 국장’을 통해 3·1운동을 촉발시킨 고종의 죽음과 관련된 유물을 공개한다. 고종의 승하, 국장, 영면이라는 세 가지 소주제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는 고종 초상화, 국장 당시 제작한 각종 기록과 사진, 고종 승하 이후 존호를 올리며 만든 옥보와 옥책 등 자료 15건을 선보인다. 31일까지. 무료. 국립중앙박물관의 테마전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에서는 최근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이봉창 의사 선서문’ 진본이 공개된다. 대한제국이 1899년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문서인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대한민국 임시헌장, 대한독립여자선언서, 3·1독립운동가와 조선독립군가, 임시정부 환국 기념 선언문 등 구한말부터 광복까지의 과정을 유물을 통해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9월 15일까지. 무료.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시 뿐 아니라 1일 오후 3시 크라잉넛, 레이지본, 킹스턴 루디스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독립밴드들이 무대에 나서는 ‘독립밴드 : 독립군가 부르다’ 공연이 펼쳐진다. 또 ‘만세운동’과 ‘무궁화’를 모티브로 한 손수건과 휴대전화 케이스 등을 선보이는 ‘대한굿즈만세’ 테마상품 기획전도 진행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양승동 KBS 사장의 경영 능력 부족을 비판하는 KBS 이사회 내부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재석 천영식 황우섭 등 KBS 이사 3명은 27일 ‘처참한 경영실적, 양승동 체제에 KBS 미래를 계속 맡길 수 있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지난해 KBS의 사업 손실이 585억 원, 당기순손실은 321억 원이라고 밝혔다. 소수 이사들은 “전임 사장 시절과 비교한 수치는 더욱 참담하다. (2017년에 비해) 사업손익은 787억 원, 당기순손익은 885억 원이나 악화돼 모두 대규모의 적자로 전환됐다”고 밝혔다. 이는 KBS 매출액의 4%, 총자산의 4.7% 규모라고 전했다. 소수 이사들은 “그토록 정의롭고 능력 있는 경영진이 들어왔는데 광고 수입은 9.2%가 떨어졌고, 협찬과 캠페인 등 기타 수입도 감소했다”며 “현 경영진은 공영방송에 대한 근본주의적 시각에만 몰입된 채 균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기 어려운 무능과 편견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3·1운동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드론’이 떴다.” “3·1운동 100주년 무게에 값하는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됐다.” “1969년 동아일보가 간행한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이후 50년 만의 기념비적 성과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동아일보가 27일 공동 주최한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 참가한 역사학자들은 학술대회의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 2층에서 열린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국사편찬위가 현존하는 3·1운동 사료 대부분을 망라해 만든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등 10편이 발표됐다. 조광 국사편찬위원장은 개회사에서 “100년 전 3·1운동은 민족적 각성과 일치감을 불러일으키며 한민족을 근대 민족으로 새로 출발하도록 한 전환점”이라며 “국편은 물론이고 외부 학자들이 힘을 합쳐 만든 이번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앞으로 3·1운동 연구가 더욱 심화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는 이 DB를 2015년부터 기획했으며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해 최근 구축했다. 국편DB는 앞으로 3·1운동 연구에 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종합토론 사회를 맡은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3·1운동은 그동안 방대한 사료가 산재해 연구에 난관이 많았고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충분치 못했다”며 “국편DB 구축으로 이제 3·1운동 연구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강조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도 “개별 사례 연구에서는 불가능했던 거시적 분석이 국편DB를 통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다.조종엽 jjj@donga.com·유원모 기자}

“100년 전 우리 민족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 상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1919년 3월 온 강산을 뒤흔드는 만세 소리는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우리 민족의 강렬한 열망이자 희망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주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국민이 주인 돼야 한다는, 민주공화국을 세워야 한다는 굳은 의지로 이어졌습니다.” 완연해지는 봄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27일. 조광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 개회사에서 3·1운동을 한민족이 되찾은 봄에 빗대어 설명했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의 ‘3·1운동’ 조 위원장은 3·1운동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킨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조위원장은 “3·1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내외에서 목숨을 걸고, 일제에 맞선 역사를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3·1운동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잇는 디딤돌이라고 밝혔다. 유 부총리는 인사말에서 “자유와 평화, 인권이라는 지금도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가치를 100년 전 3·1운동으로 우리 사회에 촉발시켰다”며 “이제 우리가 지나온 100년을 잘 돌아보면서 앞으로 100년은 (이 가치들을) 어떻게 확산시키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성장·발전시킬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진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장은 “정확히 100년 전인 1919년 2월 27일은 거사를 이틀 앞둔 숨 가쁘던 시간이었다”며 “서울 중앙고등학교 교정에는 3·1운동 책원비가 세워져 있는데, 100년 전 오늘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청년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학술대회 행사가 굉장히 뜻깊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회의는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최근 구축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활용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자리였다. 국편DB는 일제 사료인 ‘경성지법검사국문서’ ‘3·1운동 관련 판결문’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일관계사료집’, 외국인 선교사 보고 등 3·1운동 관련 1차 사료 8915건 가운데 관련 정보 2만1407건을 추출해 정리했다. 특히 전국적인 3·1운동 정보를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동시켜 일제강점기와 오늘날 지도 위에 구현해 누구나 쉽게 3·1운동의 양상을 각종 인포그래픽으로 볼 수 있다. 정병욱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해외에서 열린 3·1운동도 집계했고, 새롭게 발굴된 각종 판결문 등을 분석한 결과 3·1운동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3·1운동의 결과물인 동아일보 이날 학술회의가 열린 일민미술관은 1919년 3·1운동의 열망으로 이듬해 창간한 동아일보가 사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회의장 입구에는 3·1운동 민족대표 48인의 얼굴 사진과 공판 예고 기사를 파격적으로 편집한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 신문이 걸렸다.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은 환영사에서 “동아일보의 뿌리는 바로 3·1운동”이라며 “3·1운동의 주역들이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편집국과 지국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동아일보는 1926년 3월 5일자에 소련 국제농민회 본부가 조선 농민에게 보내온 3·1운동 7주년 축전을 번역해 실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터 무기정간을 당했다”며 “‘자유를 위하여 죽은 이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을지어다’라는 축전의 내용은 동아일보가 일제 압제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에게 꼭 전하고 싶던 말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사장은 “내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동아일보는 민족을 위해 온몸을 바친 3·1운동 정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3·1운동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가 1969년 동아일보의 기념사업 결과로 발간된 50주년 기념 논문집이고, 바로 3·1운동 연구의 출발”이라고 강조했다. 조 위원장은 “동아일보의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은 워낙 쟁쟁한 국내외 학자들이 대거 참여해 당시 이 논문집에 필자로 끼지 못한 사람은 지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할 정도였다”며 “동아일보는 또한 1960년대부터 국사편찬위원회와 함께 3·1운동 유적 보존과 기념비 건립 사업을 펼쳐 왔다”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그런 의미에서 동아일보는 3·1운동에 지분을 갖고 있는 언론사”라며 “3·1운동 100주년 학술대회를 공동 주최하게 돼 뜻깊다”고 밝혔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문화재청은 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 ‘황해도평산소놀음굿’ 보유자 이선비 씨(85)를 명예보유자로 인정 예고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씨는 1992년 보유자로 인정된 뒤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의 전승과 보급을 위해 헌신해왔다. 최근 건강이 좋지 않아 전승활동이 어려워짐에 따라 명예보유자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이 씨가 명예보유자가 되면, 이 종목은 보유자 없이 전수교육조교 3명만 활동한다.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은 볏짚이나 가마니로 만든 소 모양 탈을 쓰고, 춤·노래·대사를 하는 굿놀이다. 풍년과 장사의 번창과 자손 번영을 기원하는 전통 의식으로, 불교 성격이 강하고 오락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문화재청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다음 달 1일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등 4대 궁과 종묘, 조선왕릉 등을 무료로 개방한다고 25일 밝혔다. 덕수궁에서는 다음 달 1∼5일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고종 국장(國葬)을 재현하기 위해 대한문과 돌담길 주변에 하얀 천을 두른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잠든 경기 남양주시 홍릉 앞 광장에서는 3·1절 오전 10시에 연극 ‘1919년 3월 홍릉, 그날의 기억’이 펼쳐진다. 일제가 덕수궁 남서쪽 구석으로 옮긴 광명문(光明門)을 80년 만에 본래 위치인 함녕전(咸寧殿) 남쪽으로 이전한 ‘덕수궁 제자리 찾기’ 기념행사도 3·1절에 열린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920년 9월 25일. 조선총독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동아일보를 창간 후 처음으로 정간시켰다. “동아일보가 아일랜드 문제를 말하여 조선의 인심을 풍자(諷刺)하고, 영국의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反逆心)을 자극했다”는 이유였다. 1919년 3·1운동의 열망으로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아일랜드의 독립전쟁 기사를 창간호부터 특집기사로 다뤘다. 같은 해 9월 25일 1차 정간 때까지 발행한 176호의 신문에서 무려 180여 건의 아일랜드 관련 기사를 실었다.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전쟁을 펼치는 아일랜드의 활약을 조명함으로써 일제에 맞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보도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역사학계에선 3·1만세시위의 후속 운동을 추적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한승훈 고려대 독일어권문화연구소 연구교수는 ‘3·1운동 경험자가 바라본 아일랜드 독립전쟁’이라는 논문에서 당시 3·1운동의 결과물로 태어난 신생 일간지 동아일보가 주목한 아일랜드의 독립전쟁 보도를 분석했다. 이 논문은 최근 국내 대표적인 역사학회인 한국역사연구회 소속 학자 38명이 쓴 책 ‘3·1운동 100년 세트’(전 5권·휴머니스트)에 실렸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와 초대 주필 장덕수, 편집국장 이상협 등은 일본 유학생 출신인 ‘신지식인’이었다”며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되는 세계사적 흐름을 읽고 아일랜드, 이집트, 인도 등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컸는데 특히 아일랜드에 관심이 높았다”고 밝혔다.○ 아일랜드와 조선, 약소국이라는 공통분모 “8000명의 신페인당원은 아일랜드공화국의 제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여했다.” 동아일보의 아일랜드 독립전쟁 보도는 창간호인 1920년 4월 1일자 2면 ‘독립당 시장의 장의’라는 제목의 기사부터 시작됐다. 이 기사는 1920년 3월 3일 영국군에게 피살된 아일랜드 독립세력 신페인당 지도자 토머스 맥 커테인의 장례식을 다뤘다. 곧이어 4월 9일자 ‘독립 수령의 탈옥’이란 기사에서는 영국에 대항해 감옥에 투옥된 이들을 “감옥에 갇히어 끓는 피, 아픈 가슴으로 철장 아래에 신음했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주목한 점은 식민지 조선과 유사한 환경에 놓인 아일랜드의 현실이었다. 4월 9일부터 연재한 ‘애란(愛蘭·아일랜드) 문제의 유래’ 기사에서 아일랜드의 가톨릭 문화를 탄압하고 차별하는 영국의 역사·문화 말살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이 펼치는 식민지 경제 체제의 부조리함을 심층 보도했다. 4월 14일에는 아일랜드의 산업 억제 및 기업 침체와 영국인 지주가 소작인들에게 과도한 소작료를 부과하면서 대기근과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한 사실을 알렸다. 4월 16일에는 독립운동의 선결 과제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영국인 지주를 축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한 교수는 “7월 7일 사설 ‘애란인에게 고하노라’를 통해 ‘오인(아일랜드)의 요구는 정당하다.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요구함은 결국 그 민족의 고유한 권리의 승인’이라며 노골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옹호하기도 했다”며 “동아일보는 당시 시대정신을 ‘약자의 부활시대’로 규정하며 무력과 압박으로 약소민족을 식민통치하는 제국주의 열강 세력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고 설명했다. ○ 독립의식 고취, 식민지 철폐 요구 동아일보의 아일랜드 보도는 독자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을 뿐 아니라 당시 통치기관이던 조선총독부에는 일종의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칼라트쓰톤 재상의 계획이 성공하였으면 오늘날과 같은 참화는 있지 아니하였을지로데. (총독부가) 고정한 정책을 개혁하고 인도(人道)로 돌아가는 준비에 노력할지어다.” 동아일보는 1920년 8월 16일자 사설을 통해 1886년 영국 글래드스턴 총리가 추진했던 아일랜드 자치안을 언급했다.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지 않고, 자치안을 실행했다면 독립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3·1운동을 거울삼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일환으로 인도적인 정책을 실현할 것을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보도와 함께 ‘신문화건설론’을 내세우며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세계 흐름에 맞춰 사회 각 분야의 실력을 양성하는 문화운동을 함께 제시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의 이 같은 요구가 독립을 향한 목소리라며 1920년 9월 25일 정간을 내리는 탄압을 자행한다. 한 교수는 “동아일보는 가슴으로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던 아일랜드처럼 투쟁을 하고자 했지만 엄연한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존재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며 “이에 신문화건설론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모습을 동아일보 기사의 행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시위 퍼뜨린 ‘미디어’로서의 깃발#1. 1919년 3월 2일 밤. 황해도 곡산에서 천도교를 이끌던 김희룡은 경성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전달받는다. 천도교 지휘부 10여 명은 3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를 계획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만으로 대열을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결국 이들이 고안해 낸 방법은 ‘깃발’이었다. 4일이 되자 ‘조선독립’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깃발을 만들어 군중 수백 명과 함께 황해도 지역의 3·1만세시위를 이끈다. #2. 경남 함안군의 유생들은 3월 5일 경성에서 열린 고종의 국장에 참여한 후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다. 지역 내 서당 교사와 학생들에게 연락해 대한독립가라는 노래를 만들고, 태극기도 제작했다. 2주간 준비한 끝에 3월 19일 함안읍 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태극기를 게양하며 군중 3000여 명과 함께 나선다. 1919년 3월 1일부터 전국을 만세의 함성으로 울리게 한 3·1운동의 중심에는 태극기, 독립기와 같은 깃발과 애국가, 독립가 등 노래가 있었다. 3·1운동에 참여한 대중에게 ‘독립’이라는 메시지를 각인시켜 준 ‘미디어’인 셈이다. 최근 구축된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국편DB)를 통해 만세시위 현장의 미디어를 분석한 새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기훈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3·1운동 관련 판결문을 분석해 선언서와 깃발, 노래 등의 사용 현황을 분석한 논문 ‘3·1운동 미디어의 상징체계’다. 이 연구는 국편과 동아일보가 27일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공동 주최하고, 일민미술관이 후원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백 년 만의 귀환: 3·1운동 시위의 기록’에서 발표한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전국 각지로 뿌렸다. 목표는 선언서를 낭독하며 조선인 모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것. 대한제국에서 사용된 태극기나 학생들이 부르던 애국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 3월 1일과 5일 경성 시내에서 열린 만세시위에서는 태극기를 비롯한 깃발과 독립가 같은 노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조선의 문자 독해율은 20%에 불과했고, 지역에서는 식자층의 비율이 더 떨어졌다. 한자로 된 독립선언서 내용을 대중이 오롯이 이해할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들은 대중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깃발을 주요 방식으로 선택한다. 대표적으로 1919년 4월 5일 충남 청양군 정산면 시장에서는 만세의 함성과 함께 태극기 10장을 뿌리며 독립시위가 시작됐다. 전남 강진군에서도 4월 4일 청년학생과 기독교인들이 독립선언서와 독립가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나눠 줬다. 이 교수는 “3·1운동 흐름의 초반이었던 3월 초순(1∼10일) 발생한 사건을 다룬 55건의 판결문 가운데 25%에 이르는 14건이 선언서 중심이었지만 3월 중순(11∼20일)에는 11%, 3월 하순(21∼31일)에는 7%로 줄었다”며 “3·1운동이 소도시로 퍼져나가면서 선언서 대신 깃발이나 격문 등이 주요 수단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흥을 북돋는 노래도 대중을 이끈 주요 미디어였다. 3월 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는 악대의 연주에 맞춰 찬미가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고, 3월 19일 경남 진주군 진주면에서는 북과 나팔을 앞세우고, 만세 행진을 했다.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퍼진 4월 초순(1∼10일)에 발생한 사건을 다룬 판결문 94건에는 노래 등 음성이 주도한 시위가 절반 이상인 49건에 이른다. 이 교수는 “3·1운동을 계기로 태극기가 민족의 저항과 독립의 상징이라는 성격이 확고해졌다”며 “당시 사용된 미디어인 깃발과 선언문, 격문, 현수막, 노래가 자리 잡으면서 근대적인 정치 투쟁으로서 ‘시위’라는 방법이 대중에게 자연스레 각인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하늘과 땅의 매개자이자 중개자, 그렇게 끔찍한 것이 무당이오.” 영화 ‘만신’의 실제 주인공이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큰무당으로 손꼽히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2-2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 김금화 씨가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1년 황해도 연백의 가난한 집안에서 둘째로 태어난 고인은 12세 때 무병(巫病)을 앓다가 17세에 외할머니이자 만신(萬神·무녀)인 김천일 씨에게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됐다. 한평생을 무당으로 살아온 고인의 인생은 말 그대로 끔찍한 것이었다. 6·25전쟁 시기 인민군에게 핍박받고 그 뒤 빨갱이라고 괴롭힘을 당했으며, 새마을운동 시기에는 혹세무민하는 미신으로 몰려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1972년 명창 박동진 선생(1916∼2003)의 주선으로 참가한 전국민속경연대회에서 ‘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연기상을 받은 후 그에게 예인(藝人)이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특히 외국인의 반응이 뜨거웠다.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을 맞아 미국 로스앤젤레스 녹스빌 국제박람회장에서 ‘철무리굿’을 선보였다. 그는 마력 같은 힘으로 관객을 열광시켰고 예정에도 없던 연장 공연을 석 달간 했다. 이후 독일 프랑스 스페인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과 중국 일본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서구에 우리 전통문화를 알려왔다.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로 인정됐다. 고인은 생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무형문화재라고 무슨 영화가 있었겠소. 그래도 고마운 게지. 우리야 배운 가락대로 꿋꿋하니 버텼을 뿐인데, 그걸 민속이다 문화재다 연구하고 아껴주는 세상이 옵디다. 이제 떠나도 굿은 남겠구나!”라고 말했다. 고인은 사도세자, 백남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한 진혼제와 세월호 희생자 추모위령제를 지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의 굿에 매료됐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한국에서 그의 굿을 접하면서 “샤먼 김금화가 내 왼쪽 다리가 아플 거라고 알려줬는데 여기 와서 보니 오른쪽이었다. 아마 시차 때문인 듯하다”고 고인과의 만남을 술회했다. 2014년에는 고인의 일생을 담은 영화 ‘만신’이 개봉됐다. 박찬경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영화상을 받았다. 앞서 201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비단꽃길’도 고인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황훈 씨(자영업)가 있다. 조카 김혜경 씨는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이수자다. 빈소는 인천 청기와장례식장, 발인은 25일 오전 6시 40분. 032-583-4444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시작은 미미했다. 유럽 대륙 게르만족 중에서도 약 15만 명의 소수 부족이 사용하던 지역 방언에 불과했다. 반전의 계기는 499년. 로마제국의 버려진 식민지였던 잉글랜드에 게르만족이 이동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상황이 바뀐다. 게르만족은 잉글랜드 원주민인 켈트족을 노예로 만들고, 덩달아 그들이 사용하던 ‘켈트어’ 역시 매장시킨다. ‘영어’는 그렇게 퍼져 나갔다. 실은 영어도 위기가 없지 않았다. 8세기 말부터 300년간 바이킹 전사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고대 스칸디나비아어에 흡수될 뻔했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지만 11세기 들어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노르만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야 만다. 300년간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는 동안 고대 영어의 85%가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인터넷의 70%는 영어로 돼 있다.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제통화기금(IMF) 공식어들 가운데 첫 번째가 영어다. 세계에 존재하는 6000여 개 언어 가운데 약 15억 명의 사용자를 가진 막강한 언어 권력이 됐다. 이 책은 영어가 ‘세계어’로 우뚝 선 1500여 년의 여정을 소개한다. 저자는 영국 BBC에서 영어에 대한 교양 프로그램을 다수 제작한 PD.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영어의 성장 과정을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저자는 영어의 ‘다른 언어들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장 중요한 열쇠로 꼽는다. 영어는 세계 언어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어휘를 자랑한다. 그런데 절반 이상이 50여 개의 외국어에서 빌려온 차용어다. 프랑스어가 유래인 호텔(hotel), 바이킹족에게서 가져온 스마일(smile)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힘이 컸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에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등 강력한 경쟁자가 존재했다. 그러나 영국 청교도들은 다른 유럽인들과는 달리 교역이나 약탈이 아닌 정착을 위해 미국에 이주했다.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에서 청교도들은 낯선 상황과 광활한 자연 풍경 등을 새롭게 묘사하기 위한 단어들은 만들어내야 했다. 발음에 있어서도 영국과는 달리 통일성을 갖게 되면서 결국 미국이라는 가장 중요한 상속자를 발판으로 만든다. 이후 20세기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 발전과 대중문화의 발달이 영어를 세계어로 위치시켜 놓았다. 저자는 미국영어가 영국영어보다 막강해졌듯이, 미래에는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이들과 디지털 세대가 새로운 주도권을 가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독일에서는 휴대전화를 ‘mobile’이라고 하지 않고 ‘handy’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휴대전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I love you’ 대신 ‘I luv u’를 쓴다. 이처럼 새로운 영어의 탄생이 오히려 영어의 자산을 풍성하게 할 것이란 분석은 설득력 있다. 한국어 및 한국 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해 주는 책이다.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시작은 미미했다. 유럽 대륙 게르만족 중에서도 약 15만 명의 소수 부족이 사용하던 지역 방언에 불과했다. 반전의 계기는 499년. 로마제국의 버려진 식민지였던 잉글랜드에 게르만족이 이동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상황이 바뀐다. 게르만족은 잉글랜드 원주민인 켈트족을 노예로 만들고, 덩달아 그들이 사용했던 ‘켈트어’ 역시 매장시킨다. ‘영어’는 그렇게 퍼져나갔다. 실은 영어도 위기가 없지 않았다. 8세기 말부터 300년간 바이킹 전사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고대 스칸디나비아 어에 흡수될 뻔했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지만 11세기 들어서는 프랑스어를 쓰는 노르만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야 만다. 300년간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는 동안 고대 영어의 85%가 사라졌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인터넷의 70%는 영어로 돼 있다. 유엔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제통화기금(IMF) 공식어들 가운데 첫 번째가 영어다. 세계에 존재하는 6000여 개 언어 가운데 약 15억 명의 사용자를 가진 막강한 언어 권력이 됐다. 이 책은 영어가 ‘세계어’로 우뚝 선 1500여 년의 여정을 소개한다. 저자는 영국 BBC에서 영어에 대한 교양 프로그램을 다수 제작한 PD.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세계사의 흐름과 함께 영어의 성장 과정을 눈앞에 펼쳐지듯 생생하게 묘사했다. 저자는 영어의 ‘다른 언어들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장 중요한 열쇠로 꼽는다. 영어는 세계 언어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어휘를 자랑한다. 그런데 절반 이상이 50여 개의 외국어에서 빌려온 차용어다. 프랑스어가 유래인 호텔(hotel), 바이킹족에게서 가져 온 스마일(smile) 등이 대표적이다. 뭣보다 미국의 힘이 컸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17세기 아메리카 대륙에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등 강력한 경쟁자가 존재했다. 그러나 영국 청교도들은 다른 유럽 인들과는 달리 교역이나 약탈이 아닌 정착을 위해 미국에 이주했다.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에서 청교도들은 낯선 상황과 광활한 자연 풍경 등을 새롭게 묘사하기 위한 단어들은 만들어내야 했다. 발음에 있어서도 영국과는 달리 통일성을 갖게 되면서 결국 미국이라는 가장 중요한 상속자를 발판으로 만든다. 이후 20세기에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발전과 대중문화의 발달은 영어를 세계어로 위치시켜 놓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저자는 미국영어가 영국영어보다 막강해졌듯이, 미래에는 영어를 제2언어로 사용하는 이들과 디지털 세대가 새로운 주도권을 가질 것이라고 예견한다. 독일에서는 휴대전화를 ‘mobile’이라고 하지 않고, ‘handy’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휴대전화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I Love You’ 대신 ‘I luv u’가 익숙하다. 이처럼 새로운 영어의 탄생이 오히려 영어의 자산을 풍성하게 할 것이란 분석은 설득력 있다. 한국어 및 한국문화의 세계화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우리 사회에 새로운 통찰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옥고까지 치렀지만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한 342명이 새롭게 확인됐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최근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등록문화재 제730호)에 등재된 4858명 가운데 3·1운동 가담 혐의로 붙잡힌 1014명을 조사한 연구 ‘서대문형무소 3·1운동 수감자 분석’에서 이 같은 사실이 밝혀졌다. 미포상자 가운데는 3·1운동 체포자 가운데 최고 형량인 12년형을 받은 홍면과 10년형을 받은 김동순 등 단순 가담자가 아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사도 대거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1919년 중국 옌지(延吉)에서 학생독립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이끈 김운종, 박춘범 등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통제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한 강학병, 안교열 등 3·1운동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어간 이들도 있다. 연구를 진행한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대다수 미포상자는 관련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해 정부에서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있던 분들”이라며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서훈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밝혔다. ○ 남녀노소 모든 직업 총망라한 거국적 시위 일제 식민지 경찰의 보조원이었던 조선인 순사보(巡査補) 정호석. 그는 1919년 3월 1일 덕수궁 대한문을 지키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경성 시내를 진동케 하는 만세 시위단의 함성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다. 3월 5일 정호석은 왼손 약지를 물어뜯어 태극기를 그려 대나무 봉에 매달고 집을 나선다. 그가 향한 곳은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 위치한 홍영학교.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 마침내 20여 명의 학생을 이끌고 마포구 공덕동까지 진출해 밤새 만세운동을 전개한다. 결국 자신이 속한 일제 경찰에 붙잡힌 그는 이듬해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1년 형을 선고받고, 그해 5월 29일 만기 출옥한다. 정호석뿐 아니라 충남 당진시 대호지면사무소의 소사(小使)였던 송재만, 경북 안동시 예안면장이던 신상면 등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의 행정조직에 참여한 인사들이 대거 3·1운동에 합류했다는 점이 이번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수형자들의 직업을 분류한 결과 무려 80여 개의 직업이 등장했다. 학생과 야소교(耶蘇敎·기독교) 목사 및 전도사, 천도교 교사, 임제종 불교 승려처럼 3·1운동을 주도한 집단만이 아니었다. 인쇄소 직원과 점원, 고물상, 잡화상, 마차꾼 등 직업과 계급을 초월해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3·1운동에 참여한 연령 역시 흥미롭다. 1014명 가운데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984명을 보면 20대가 39%로 가장 많았다. 뒤를 이어 30대(22%), 40대(15%), 10대(12%), 50대(7%), 60대 이상(2%) 순으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전체 기간 동안 서대문형무소 수감자 중에는 20대가 57%로 압도적으로 높은 것과 비교된다. 박 관장은 “3·1운동 당시 20대 젊은이들의 참여가 적은 것이 아니라 10대와 30대 이상 등 모든 연령이 고르게 참여해 상대적으로 20대 비중이 낮아졌다”며 “직업과 연령을 초월한 거국적인 만세시위였다는 점이 통계 분석을 통해 객관적으로 증명됐다”고 말했다.○ 가족과 급우들이 한꺼번에 만세시위 참여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여성 참가자들도 대거 확인됐다. 특히 서울 세브란스병원 의학전문학교의 간호사였던 노순경, 김효순, 이신도 등은 절친한 학교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1919년 12월 2일 종묘 앞에서 20여 명의 군중을 이끈 채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됐다. 인물카드에는 모두 ‘경성 남대문정 의학전문학교 부속 간호부 양성소 기숙사’라고 주소가 적혀 있다. 유관순 여사의 가족 중에는 숙부 유중무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었다. 일제는 3·1운동 가담자에게 사상범에게 적용하는 ‘보안법’을 적용했다. 이로 인해 90%에 이르는 투옥자들이 법원에서 6개월 이상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박 관장은 “현재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비교해 봤을 때도 일제가 지나치게 높은 형량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며 “지금의 우리처럼 평범한 이들이 펼친 위대한 독립운동인 3·1운동의 진면목을 한국 사회가 공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 내용은 25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리는 학술심포지엄 ‘서대문형무소 3·1운동 수감자 현황과 특징’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관련 연구 자료집은 26일 전국 도서관 등에 배포된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을 만세의 울림으로 물들게 한 3·1운동 소식을 해외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보도한 중국 영문 일간지 ‘차이나 프레스(대륙보)’의 1919년 3월 4일자 1면 지면이 처음 확인됐다. 차이나 프레스는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린 시발점이라고 여겨져 왔지만 기사 원문을 확인하지 못해 학계의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중국 상하이시립도서관 문서보관소에서 소장 중인 1919년 ‘차이나 프레스’의 원본 사진을 18일 본보에 공개했다. 한 교수는 “첫 보도가 나온 1919년 3월 4일 보도를 포함해 8일자, 11일자, 15일자 등 3·1운동 소식을 보도한 차이나 프레스의 나흘 치 신문 원문을 지난해 12월 상하이시립도서관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해외 여러 언론사 가운데 중국 상하이의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소식이 처음으로 실린 배경에는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1880∼1968)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국내를 넘어 해외 곳곳에 3·1운동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현 목사의 여정을 소개한다.○ “상하이로 가 민족의 거사를 알려라” 3·1운동이 발생하기 일주일여 전인 2월 19일. 기독교 인사들은 남대문역(현 서울역) 근처에 있던 제중원의 약방주임 이갑성의 사저에 모인다.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이 시작한 2·8독립선언,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당 등에서 추진하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 “국내에서도 거국일치적 운동을 반드시 일으켜야 한다”는 결정을 이 자리에서 내렸다. 기독교 인사들은 3·1운동에 대한 조직적인 준비에 나선다. 이들은 해외 동포들에게 3·1운동 소식을 알릴 외교·통신 담당으로 현 목사를 임명한다. 이 소식을 접한 천도교 측 최린은 현 목사에게 경비 2000원을 지원하며 “만주의 봉천(펑톈·현 선양)으로 가서 최창식을 만나 동행할 것”을 주문한다. 당시 최린이 이끌던 민족대표 측은 이미 독립선언서 초안을 완성해 둔 상태였다. 2월 24일 아내에게만 작별을 고한 현 목사는 용산역에서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틀이 지난 26일이 돼서야 중국 봉천에서 천도교 인사인 최창식을 만난다. 최창식은 최린으로부터 미리 전달받은 3·1독립선언서의 초안을 필사해 소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행선지는 중국 상하이. 기나긴 시간을 철로에 몸을 실은 끝에 3월 1일이 돼서야 도착했다. 다음 날인 2일 밤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의 신규식 이광수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를 펼쳐 보였다. 중국과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합친 순간이었다. 3월 4일 드디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자신문 차이나 프레스에 3·1운동 보도가 실렸다. “서울의 소요 사태 전국에서도 확대”라는 제목과 함께 1면에 배치된 것. 현 목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신 격인 독립임시사무소를 이날 바로 설치하고, 자신이 직접 영어로 번역한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국가인 프랑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대표들에게 전보로 발송한다. 당시 한국인 신분으로는 국내 잠입이 어려운 상황임을 감안해 상대적으로 출입이 자유로운 영국의 한 기자에게 3·1운동의 현장 취재를 부탁하기도 한다.○ 외신 “품위 있는 독립선언서” 현 목사의 계획은 그대로 실현됐다. 4일자 보도 이후 8일자 차이나 프레스 1면에서도 “조직된 운동의 결과로 나타난 한국의 봉기”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북화첩보(北華捷報)와 중국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民國日報) 등 중국의 대다수 언론들이 보도 행렬에 합류했다. 11일자 차이나 프레스에는 “사태 발생 이후부터 기독교인 중심 3500명이 체포돼”라는 부제로 기사가 실려 있어 기독교 인사인 현 목사가 해외 공보활동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15일자에는 현 목사가 접촉한 영국 기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한반도를 취재하고 온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 해당 기사는 당시 우리 민족의 품격과 저력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 당국이 공식 발표했던 일반적 시위 수준을 훨씬 넘는 것으로 계급을 불문하고 거국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선언서는 한국이 모든 국제권리에 의거해 자주국이며 4000년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인들에게 일어나 독립을 위해 평화 시위를 하라고 촉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폭력을 쓰지 말라고 요청한다. 이 선언서는 위엄이 있고 힘차며, 선언서에 묘사된 한국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모는 공분을 일으킨다.” 이후 현 목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무위원, 내무차장과 구미위원부 위원으로도 활약하며 조국이 광복할 때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한 교수는 “3·1운동의 소식을 세계 각국에 알리고자 했던 민족대표들의 노력이 증명된 사료”라며 “아직까지 현 목사가 여러 나라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선언서 원문 등이 발견되지 않아 이 문서들을 찾는 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우리 학계의 과제”라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 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나라를 뺏긴 슬픔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1855∼1910)을 추모하며 이 시를 써 유족에게 전달했다. ‘매천선생(梅泉先生)’으로 불리는 이 추모시는 황현 후손이 100년 가까이 간직해 온 자료 ‘사해형제(四海兄弟)’에 실려 있다. 이 자료의 원본이 처음 공개된다. 문화재청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문화재에 깃든 100년 전 그날’(2월 19일∼4월 21일)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10, 12옥사에서 개최한다. 1910년 경술국치부터 임정의 환국까지 약 40년을 3부로 구성했다. 도입부에서는 황현의 유물을 소개한다. 사해형제, ‘절명시’가 수록된 ‘대월헌절필첩(帶月軒絶筆帖)’과 황현이 안중근 의사 관련 신문 자료를 모은 ‘수택존언(手澤存焉)’ 등을 처음 공개한다. 1부 ‘3·1운동, 독립의 꽃을 피우다’에는 최근 등록문화재가 된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가 있다. 일제가 4857명의 신상을 카드로 정리한 것으로, 안창호 윤봉길 유관순 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심훈(1901∼1936)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상록수’의 친필원고도 있다. 2부 ‘대한민국임시정부, 민족의 희망이 되다’는 조소앙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바탕으로 독립운동과 건국 방향을 정리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 초안’(등록문화재 제740호)과 이봉창 의사 관련 유물 등으로 구성했다. 3부 ‘광복, 환국’에서는 백범 김구가 1949년 쓴 유묵 ‘신기독(愼其獨)’과 1945년 초판이 발행된 ‘한중영문중국판 한국애국가 악보’(등록문화재 제576호)를 만날 수 있다. 무료.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이름 모를 괴질이 서쪽 변방에서 만연해 이 병에 걸리면 심하게 설사를 하고, 궐역(厥逆)이 생겼다. 사망자가 수십만 명이나 됐다.” 김은희 작가(47)가 좀비 사극 드라마 ‘킹덤’을 구상한 배경이라고 밝힌 조선왕조실록의 순조실록(1821년)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끔찍한 전염병에 걸렸던 당시 백성들은 실제로 좀비로 변했던 것일까. 답은 당연히 ‘아니요’다. 양종승 한국샤머니즘박물관장은 “당시 유행한 콜레라 등 질병을 표현한 대목으로 우리나라 전통문화 속에 좀비가 등장한 경우는 없었다”며 “좀비는 카리브해 아이티 등지에서 믿는 ‘부두교’의 주술 신앙에 바탕을 둔 것으로,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서야 우리나라에 소개됐다”고 말했다. 좀비는 없었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한 채 인간 삶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인 일종의 ‘언데드’들은 우리나라 전통 문화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전해진다. “호조 정랑 이두(李杜)의 집에 죽은 지 10년이나 되는 고모 귀신이 와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간섭했는데, 허리 위는 보이지 않고 하반신은 종이로 가렸지만 살은 없고 뼈뿐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1486년)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온다. 죽은 고모가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후손을 괴롭힌다며 임금에게 이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내용이 공식 기록에 등장한 것. 정사(正史)가 아닌 숱한 신화와 설화 속에서 수배(隨陪·상급 신을 따라 다니는 귀신), 걸립(乞粒·가택신의 사자), 영산(靈山·비명횡사한 남녀의 혼령) 등 각종 귀신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처녀귀신으로 불리는 ‘손각씨’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점이 특징. 서영대 인하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귀신 문화는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남존여비 관념이 철저해진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이 귀신으로 변한 이야기가 크게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비슷한 가부장 문화를 갖고 있지만, 결혼 제도는 데릴사위제 등이 발달해 처녀 대신 유부녀 귀신이 많은 게 특징이라고 한다. 유원모 onemore@donga.com·신규진 기자}

“으악!” “깜짝이야.” 16일 서울 마포구 한 VR(가상현실) 체험관이 10여 명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VR 전용 헤드셋을 낀 이들은 연신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 주춤주춤 긴장한 몸짓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가상현실 세계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불빛 하나 없는 지하철에서 좀비들이 돌진한다. 팔, 다리가 잘려 피가 쏟아져 나오지만 좀비들은 거침이 없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좀비 때문에 생기는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방마다 직원들이 배치될 정도. 중간에 낙오자가 생기는 일도 잦다. 매주 이곳을 찾는다는 대학생 이명진 씨(26)는 “공포영화 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1인칭 슈팅 게임(FPS) ‘마니아’인데 좀비가 나오는 게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실제로 체험관에서 제공하는 5개 VR 게임 가운데 좀비 소재 게임이 가장 인기가 많다. 업체를 운영하는 이준섭 이트라이브 본부장은 “좀비라는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최근 예약이 폭주한다”고 전했다. 요즘 한국은 좀비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일부 마니아만 찾던 컬트적인 소재인 좀비가 최근 국내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어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확산되고 있다. 해외와 차별화해 “한국형 좀비”를 일컫는 ‘K좀비’라는 신조어도 생길 정도다. 본격적인 계기는 영화였다. 11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2016년)의 흥행이 컸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을 만들 때만 해도 좀비는 대중적인 소재가 아니었다”며 “거부감이 만만치 않아 좀비 대신 ‘감염자’로 홍보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원래 해외에서도 좀비 소재는 저예산 공포 영화의 B급 장르로 취급받아 왔다. 시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 작 ‘살아있는 시체의 밤’. 하지만 2010년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와 2억 달러(약 2259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좀비 블록버스터 영화 ‘월드워Z’(2013년)가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메인 장르로 발돋움했다. 지난달 25일 공개한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킹덤’은 본격적인 ‘K좀비’ 시대를 알린 작품이다. 조선시대가 배경인 이 드라마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역병에 걸려 좀비가 된다. 특히 좀비 소재에 당대 시대상을 결합한 시도가 신선했다는 의견이 많다. 곤룡포 등을 입고 빠르게 뛰는 좀비의 모습은 기존 서구의 것과 차별화됐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할리우드 좀비물이 다소 주춤한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슬리퍼히트작이 탄생했다”고 평했다. 13일 개봉한 영화 ‘기묘한 가족’은 좀비에 코미디를 결합했다. 좀비 바이러스는 회춘의 비결이고, ‘쫑비’란 애칭을 얻은 좀비는 양배추에 케첩을 뿌려먹는 채식주의자. 엉뚱한 설정이지만, “좀비물의 새 장르를 개척했다(?)”는 관객 평도 나온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속편 ‘반도’나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준비 중인 ‘여의도’ 등 당분간 좀비 소재 영화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동근 작가의 좀비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은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재규 감독을 만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좀비 ‘콜라보’도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말 걸그룹 ‘라붐’은 타이틀 곡 ‘불을 켜(Turn It On)’ 뮤직비디오에 좀비를 등장시켜 스산한 앨범 콘셉트를 강화했다. 피 칠갑을 한 대형 좀비 피규어 등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좀비테마 술집도 인기. 이사배 등 인기 유튜버의 좀비 특수효과 분장 영상이나 좀비 분장 후 타인을 놀라게 하는 몰래카메라 영상도 인기를 끌고 있다. 좀비물이 국내에서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이유는 뭘까. 지난해 발간한 ‘좀비 사회학’에서 일본 문예평론가 후지타 나오야는 “좀비를 대중의 무의식과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표상”이라고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좀비물이 B급 소재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며 “단순한 재미, 놀 거리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한동안 좀비 열풍이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유원모 기자}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등 수많은 걸작을 남긴 이탈리아의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오늘날 우리는 르네상스를 이끈 다빈치의 수많은 작품을 보며 감탄하기 바쁘지만 당시 그를 고용한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과연 다빈치가 약속한 날에 일을 마칠 것인가.” 자신만만하게 약속했다가 낙심하고 미루기를 반복하는 게 다빈치의 특징이었다. 심지어 ‘암굴의 성모’는 7개월 안에 그림을 완성하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25년이 걸렸다. 생전에 완성한 그림이 20점뿐이었던 다빈치는 임종 직전 “아무것도 끝내지 못했어”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문학, 미술, 건축, 과학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들이자 미루기의 달인이었던 거장들의 자취를 소개한다. 1838년 “모든 종은 변화한다”는 메모를 남긴 후 21년이 지난 1859년이 되어서야 ‘종의 기원’을 출간한 영국의 과학자 찰스 다윈(1809∼1882), 8개월 동안 소포 보내기를 미루다가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을 다루는 행동경제학의 대가가 된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 아서 애컬로프(79) 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저자는 역설적으로 ‘미루기’가 위대한 역사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강조한다. 불안과 초조함이 창작의 연료가 되고, 꾸물거리고 빈둥거리는 시간은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것. 끊임없이 ‘더 빨리, 더 많이’를 요구받는 현대 사회에서 나만의 속도로 살아갈 힘을 주는 유쾌한 기술을 알려준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한반도 철도 역사의 출발은 1899년 인천 제물포와 서울 노량진을 잇는 33km 길이의 ‘경인선’이 개통되면서다. 이 때문에 학계는 조선 조정이 1896년 미국인 사업가 모스에게 이 철도 부설권을 준 시점을 철도사의 시작으로 보아왔다. 물론 이듬해 5월 경영난을 겪던 모스가 권리를 일본에 넘겨 실제 철도 부설은 일본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기존 통설과 달리 철도 역사를 10여 년 앞선 시점부터 연구할 가치를 지닌 사료가 새롭게 확인됐다. “우리 미국인이 회사 하나를 설립하려고 하는데 명칭은 ‘조선기계주식회사’다. 철로 및 양수기, 가스등 3건 사안이다. 미국인 딸능돈 뉴욕 법관.” 1888년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초대 2등 서기관으로 활동한 월남(月南) 이상재(1850∼1927·사진)가 남긴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선 외교관으로 미국 워싱턴에 있던 월남은 딸능돈(달링턴)이라는 미국인 사업가의 제안을 조정에 보고하기 위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문서에는 미국에서 제시한 계약서 초안인 ‘철도약장(鐵道約章)’이 함께 수록돼 있다. 문화재청은 월남의 현손(玄孫·4대 종손) 이상구 씨(74)가 월남이 남긴 외교자료 8점을 국립고궁박물관에 기증했다고 13일 밝혔다. ‘미국공사왕복수록’과 ‘미국서간(美國書簡)’ 등 문헌 5점과 공사관원 재직 시 촬영한 월남의 모습 등 사진 3점이다. ‘…왕복수록’은 지난해 5월 이 씨가 동아일보에 실물을 공개하며 일반에 처음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국가에서 보관·전시하고, 학계의 연구 사료로 쓰이도록 하는 것이 월남 선생의 뜻이라고 생각해 기증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월남은 1897년 7월 고종의 명으로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초대 외교관으로 임명됐다. ‘…왕복수록’은 월남이 1898년 1월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뒤 그해 11월 청나라의 압력으로 강제 귀국할 때까지 공사관에 재직하며 남긴 일종의 업무편람. 138쪽에 이르는 문서에는 1883년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이 루셔스 푸트 초대 주한 공사를 파견하며 고종에게 건넨 외교문서와 대한제국이 주미 공사관을 통해 추진한 사업 관련 문서, 각종 비망록 등이 담겨 있다. 그중에 미국 측과 경인선 부설을 위한 구체적인 협의 과정이 담긴 약정 문서가 눈에 띈다. “우리가 철로를 조선 경성 제물포 사이에 설치하는데, 무릇 해당 개설 도로와 역사 건축 부지의 토지는 특별히 정부에서 면세를 허용할 일”이라며 구체적 협상 조건이 등장한다. 이 사료를 분석한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경인선 완공에 10여 년 앞선 1888년에 미국에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학계에도 처음 알려진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왕복수록’과 더불어 월남이 외교관으로 재직했을 때 작성한 편지 38통을 묶은 ‘미국서간’도 이번에 기증됐다. 파견 기간 부모의 안부를 묻거나 집안 대소사를 논하는 등 개인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사적인 편지에서도 자주 독립을 향한 월남의 기상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 나라에 주재하는 각국 공사는 30여 국이다. 모두 부강한 나라이고, 오직 우리나라만 빈약하지만 각국 공사와 서로 맞서 지지 않으려고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꺾이면 이는 국가의 수치이고, 사명(使命)을 욕보이는 것이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1900∼1932)는 1931년 12월 13일 중국 상하이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집에서 이 같은 선서문을 남겼다. 이 의사는 선서문을 목에 걸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생전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남겼다. 나흘 뒤 중국을 떠나 일본으로 들어간 이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 2발을 던진다. 아쉽게도 한 발은 불발됐고, 다른 한 발은 말의 다리에서 터져 거사는 실패했다. 이 의사는 그해 10월 10일 일본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문화재청은 항일독립 문화유산인 ‘이봉창 의사 선서문 및 유물’을 등록문화재로 예고한다고 12일 밝혔다. 이 의사의 선서문을 비롯해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와 봉투’,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 등 3건이다.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와 봉투’는 이 의사가 일본에 도착한 뒤인 1931년 12월 24일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김구에게 의거 자금을 부탁하기 위해 보낸 서신 일체다. 편지에는 의거를 ‘물품’에 비유하며 “물품은 확실히 다음 달 중에 팔리니까 아무쪼록 안심하십시오. 또한 물품을 팔게 되면 미리 전보로 알려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다. 이에 김구가 이봉창에게 송금한 문서가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다. 김구는 1931년 12월 28일 요코하마 쇼킨(正金)은행 상하이 지점을 통해 100엔을 보냈다. 한편 문화재청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중 한 명으로 기미 독립선언서를 읽은 만해 한용운(1879∼1944)이 1933년 직접 지어 1944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1년간 거주한 서울 성북구 심우장(尋牛莊)을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한양도성 인근 북정마을에 있는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으로, 소는 불교 수행에서 ‘잃어버린 나’를 빗댄 말이다. 심우장은 전형적인 근대기 도시 한옥으로, 남향이 아닌 동북향으로 지은 점이 특징이다.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방향을 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지사와 문인들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배우는 사람은 날마다 12시간 동안 공부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 모름지기 하나하나 점검하여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 1880년 경북 안동의 선비 윤최식(尹最植)은 저서 ‘일용지결(日用指訣)’에서 계획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이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하루를 2시간 간격으로 나눠 시간대별로 해야 할 세부적인 일과를 제시한 일종의 ‘생활지침서’다. 최근 박동욱 한양대 교수가 완역한 일용지결(한국국학진흥원·사진)을 통해 조선시대 선비의 하루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선비들은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었다. 인시(寅時·오전 3∼5시)에 기상한 뒤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의복을 챙겨 입는 것으로 하루를 출발했다. 선비의 삶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효(孝)와 독서. 부모님께 새벽 문안을 드리고 사당에 알현한다. 집안사람들을 모아놓고 오늘 처리할 업무를 지시한 뒤 글방에 들어가 책을 읽는 본격적인 일상을 시작한다. 하루 종일 책만 읽는다면 금세 지치기 마련. “모름지기 일용하는 사이에 그림과 화초를 구경하고, 시내와 산에서 물고기가 놀고 새가 우는 것을 즐기며 늘 순조로운 경지에 있게 해야 한다”는 구절은 여유를 잊은 현재 한국사회에도 울림을 준다. 박동욱 교수는 “하루라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종의 조선시대판 ‘시(時)테크’라고 볼 수 있다”며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대하기를 권면하는 내용도 눈여겨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